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이랑] 오리 이름 정하기 - 이랑 이야기책

일루젼 2023. 6. 5. 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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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랑
출판 : 위즈덤하우스
출간 : 2019.10.11


     

별생각 없이 스르륵 읽히는 것 같았는데,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의외로 강하게 남는 장면들이 있었다. 좋은 의미로 뒤끝이 있다고나 할까. 

 

문득 생각이 '좋은 책이란 읽는 동안 강렬한 감상을 남기는 책일까, 다 읽은 후 진한 잔향이 남는 책일까'로 튀었다. 꼭 뭔가가 있어야만 한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그래도 어느 쪽이 더 취향인지 가만히 골라보고 싶어졌다. 

 

내 경우에 답은 명확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동시에 둘 모두를 감각하게 하는 책이다. 읽는 동안은 다음 페이지를 펼치는 게 떨려서 덜덜덜 앞뒤를 오가며 읽다가, 다 읽고 나서는 혼자 여운에 잠겨 쉰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감상을 쏟아내게 만드는 책. 

 

하지만 반드시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후자를 선택하겠다. 읽은 후의 시점에서 '좋은 책'은 '좋은 기억'으로 남는 책일 것이므로. 아무리 강렬할지라도 아직 다 읽지 않은 책은 그런 평가를 내리기에는 너무 이른 상태에 머물러 있으므로.

 

<오리 이름 정하기>는 귀여운 제목과 표지에 홀려서, 그리고 작가를 확인하고 절대 '그런(?)' 이야기일리 없다는 기분 좋은 불신감으로 선택한 책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했다 1, 2, 3부로 나뉜 단편들은 모두 조금씩은 작가를 닮아 있다. 가장 먼 거리감의 1부와 경험을 비틀어 녹인 듯한 2부, 그리고 점점 자전적인 느낌이 짙어지는 3부였다.

 

어쩐지 이번 책만큼은 읽는 동안 이랑 작가와 이길보라 작가가 동시에 떠올랐는데, 이유는 잘 모르겠다. 두 사람을 결이 비슷하다고 생각한 적은 있어도 닮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자꾸만 그렇게 되었다. 

 

겁내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정말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는 완고함은 강함과는 조금 다르다. 그것은 처음부터 상대가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짐작하면서도 공격의 자세를 취하는 날카로움에 가깝다. 나는 진정한 강함은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순수하게 궁금해할 수 있는 자신감과 당당함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부정적인 반응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솔직한 자신을 내보일 수 있는 용기. 그리고 그에 대한 반응에 귀 기울일 수 있는 다정함. 진솔함에 진솔함으로 답하지 못하는 이들과는 내가 편안하게 느낄 수 있을 만큼의 거리를 두면 된다.

 

그래서 나는, <작가의 말>에서 고백한 이랑의 말과는 다르게, 그녀가 용기 있고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발표한 것만 보아도 그렇다. 

감사히 읽었다.  

 

        

 


   

 

    

 

- 창문으로 아침 햇살이 비껴 들어온다. 둘이 자기엔 비좁은 싱글 침대에서 여자가 먼저 몸을 일으킨다. 여자가 일어나자 눈치껏 따라 일어난 고양이가 밥을 달라고 야옹야옹 시끄럽게 울기 시작한다. 여자는 부스스 방을 나서 고양이 사료를 그릇에 담아주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온다. 

 

- 남자는 일본인이다. 도쿄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다가 대지진을 겪은 뒤 인생을 바꿀 결심으로 한국에 온 지 4년째다. 언제 죽을지 모르니 평소 존경하던 한국의 판화 작가에게 평생소원인 판화를 배워보기로 한 것이다.

 

- 여자 왜 웃어?

남자 재미있어서. 아, 미안해요. 지금 재미있는 거 아닌데.

여자 재밌을 수도 있지. 원래 모든 코미디는 비극에서 시작되는 거니까.

 

- 여자 만약 우리 중에 한 명이 밖에 나갔다가 물리면 꼭 집으로 돌아오기로 하자.

남자 돌아와서?

여자 돌아와서 나머지 한 명도 물어주기.

남자 그리고?

여자 그리고 고양이도 물어주기.

남자 에에?

여자 아니다, 그러지 말고 우리 지금 같이 밖에 나가서 물릴까? 고양이도 안고 나가서.

남자 에? 지금요?

 

- 여자 좀비 영화 보면, 주인공이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잖아. 나는 그런 게 이해가 안 됐거든? 만약에 온 세상 인구의 99퍼센트가 좀비가 되어버렸다면, 빨리 좀비가 돼서 편하게 아무 걱정 없이 으어어 하면서 돌아다니는 게 낫지 않아? 계속 사람으로 있으려고 하니까 힘든 거 아니야?

 

- 남자 좀비가 되고 싶어요? 좀비가 돼서 뭐 하게?

여자 그럼 사람으로 있어서 뭐 하게?

남자 ...

 

- <하나, 둘, 셋>

 

- 주님: 유일신. 다혈질에 괴팍한 성격이다.

사탄: 천사. 평소 입바른 소리를 잘해서 주위의 미움을 사는 편이다.

예수: 천사. 주님의 장남이라는 걸 무기로 아무렇게나 산다.

가브리엘: 천사. 스스로 우두머리를 자처하나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라파엘: 천사. 눈치가 빠르고 사바사바에 능하지만 막말도 곧잘 한다. 

 

- 예수 저기...

사탄 예?

예수 제가 죽여드릴까요?

사탄 무슨 말씀이세요?

예수 아버지요. 제가 죽여드릴까요?

 

- 예수 죽일까요?

사탄 (고개를 내저으며) 아니, 안 죽죠. 유일신이신데요.

예수 한번 해보는 거죠, 뭐.

사탄 어떻게...

예수 (눈을 반짝거리며) 어떻게 하면 죽으실까요?

 

- 예수 아버지를 엄청 화나게 한 다음에 신도 죽일 수 있는 걸 창조하시게 하는 거예요.

사탄 오오.

예수의 기발한 아이디어에 몹시 감탄하는 사탄. 역시 첫째 아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싶다. 사탄의 반응이 마음에 드는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예수.

사탄 근데 그러다가 저나 예수님이 죽을 수도 있잖아요.

예수 저는 사실 죽어도 괜찮아요.

사탄 아, 그래요? 저는 죽기 싫어요.

 

- <오리 이름 정하기>

 

 

- "이 사람만 왜 이래? 이거 사고 아니야?"

"그러게. 이 정도면 의도한 거 아닐까. 만드는 사람들이 이걸 모를 수가 있나."

"몰랐을 리가 있겠냐. 우리가 찾을 정도면 진작 알았겠지."

 

- "일단 애들한테 보여주자. 우리도 어디서 받은 것처럼 해서. 이건 인간적으로 공유해야 해."

"너 천재지?"

둘은 동시에 몸을 일으켜 책상 앞에 나란히 앉았다. 남자가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을 켜면서 동시에 인터넷 창을 열었다. 그러곤 회원 수가 수십만에 이르는 커뮤니티의 유머 게시판에 들어갔다.

"너무 잘 만들면 안 돼. 대충대충 막 올린 것처럼. 알지?"

"너 진짜 이쪽으로만 머리가 잘 돌아가는구나?"

남자는 한 게시글의 양식을 그대로 베껴 레이아웃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아까 저장한 영화 장면을 불러와 한가운데에 넣고 제목을 써넣었다.

지금 상영 중 좀비 영화 이스터 에그 발견.

완성된 페이지를 이미지로 저장하니, 완벽하게 인터넷 유머 게시판에 올라온 글을 캡처한 화면 이미지가 완성되었다.

"이걸로 공유하면 우리도 어디서 퍼온 것처럼 되는 거지."

 

- "아까 제작사에서 전화 왔어. 거기서는 차라리 잘 됐다고 하더라."

"잘돼요? 뭐가요?"

"이거 쫄딱 말아먹었잖아. 기자 시사 때부터 폭망이라고 입소문 나서 안 좋은 얘기 더 퍼지기 전에 얼른 IPTV로 넘기자고 하던 타이밍에 네 덕분에 기사회생하게 생겼다니까. 지금 아예 B급 콘셉트로 밀어 보자느니, 컬트 영화로 SNS 마케팅을 해보자느니 난리야. 그래서 우선 너부터 만나게 해달라고 하더라고."

"예? 저를 왜요?"

"아주 대놓고 가자는 거지. 네 얘기를 팔아가지고 예능으로 풀어가겠다는 거야."

"저는 할 얘기가 없는데..."

"그건 알아서 만들어주겠지. 그쪽으로 빠삭한 분들인데, 안 그러냐?"

 

- "저 자식, 어리바리해가지고 뒤로 걷다가 소 때려잡게 생겼네. 아무튼 이 바닥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 "아니, 선생님. 저기 밖에 앉아 계시는 분들이 들으면 그야말로 좀비 떼처럼 달려와서 물어뜯겠습니다."

"네? 왜요?"

"막말로 보출이 선생님 자리까지 올라가기가 어디 쉽답니까. 로또나 다름없이 한 방에 뜬 분이 이런 자리까지 노리시면 어쩐답니까. 사람마다 다 자기 밥그릇이 있는 건데 상도덕이 부족하시네."

"근데 저는 올라가고 싶은 게 아니라서요."

"저희야 선생님이 나와주시면 좋죠. 재밌죠. 근데 이번 역할이 어떤 건지 알고 오신 거죠? 이게 말이 좋아 조연이지, 실어증에 걸린 역할이라서 대사 한 줄 없습니다."

"그런 건 상관없습니다."

 

- "조감독님. 연기야 도긴개긴인데 그냥 가시죠. 똥손 좀비의 색다른 변신 어쩌고 하면서 기사 좀 받으면 제작비 지원도 더 받을 수 있을 테고."

"네 생각도 그러냐. 근데 밖에 있는 사람들이 신경 쓰여가지고... 바로 끝내기는 뭐 하니까 네가 대충 찍는 척하면서 짧게 짧게 쳐내. 난 먼저 들어가서 감독님한테 보고 올릴게."

"그럼 한 명만 더 붙여주세요. 혼자서는 다 못 해요."

"알았어. 제작부 아무나 불러다 앉혀."

 

- "왜 꼭 주인공이어야 해요?"

진기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야, 가만히 있으면 뭐 현상 유지라도 되는 줄 알아? 다른 놈들이 다 앞으로 치고 나가는데 가만있으면 결국 너만 뒤처지는 거야!"

진기가 목소리를 높이자 용훈도 격앙된 음성으로 대꾸했다.

"형은 앞으로 가세요. 저는 거꾸로 가도 괜찮다고요. 보출이 얼마나 중요한지 형도 아시잖아요. 영화에 주인공만 나오면 그게 어디 진짜 같나요? 뒤에서 작은 역할들이 움직여줘야 진짜가 되죠. 저는 그게 진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용훈이 부들부들 열변을 토하자 실장이 폭소를 터뜨렸다.

"용훈이 이 새끼 알고 보니까 아주 고상한 새끼네. 안 그래?"

 

- "당장 예능 잡힌 거 하나는 일단 해. 무조건 해라, 이거는."

"그다음은요? 다시 보출 나가도 되나요?"

"이거 하고 다시 얘기해. 너 지금 이렇게 얼굴 팔려서 어디 가도 보출은 못 해. 알아?"

용훈은 가슴이 답답한지 손바닥으로 연신 명치를 쓸어내렸다.

"너 우리랑 5년 계약인 거 알지? 햇수가 아니라 일수로. 지금 너 설득하려는 게 아니라 계약 얘기하는 거야.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그게 무슨 말슴이세요?"

용훈이 당황한 얼굴로 묻자 실장은 매서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계약 불이행으로 뒤집어쓰기 싫으면 알아서 까라고."

 

- "강기남 씨, 이제 거짓말 그만하세요."

노인이 끙 소리를 내며 용훈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나를 어떻게 알고 왔어. 방송국에서 알려줬나?"

"아니요. 제가 찾았어요. 영화에 나오셨던데요."
"영화?"

"네. 새벽에 케이블 채널에서 하더라고요. <부모의 모든 것>이라고."

"아휴, 뭐에 나왔는지 기억도 안 나. 나이가 드니까..."

용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자 노인이 힐끗 눈치를 살피며 덧붙였다.

"젊어서 그런지 눈썰미도 좋아 그래."

 

- "따지려면 방송국 놈들한테 따져! 나는 돈도 얼마 못 받았어! 안 그래도 얼굴이 팔려서 당분간은 일도 못 해. 이렇게 시끄러울 줄 알았으면 그 일 안 했지. 아휴."

"그럼 왜 하셨어요, 그런 거짓말을."

"거짓말이라니, 알 만한 사람이 뭘 그런 말을 해? 나야 그냥 일한 거지. 촬영장 가서 그 할멈이랑 내랑 짝꿍이라고 하면 그런가 보다 하고. 이 나이에 먹고살자고 아이고 참."

 

- "지금 벌 수 있는 만큼 벌어놔. 그래야 이렇게 나이 먹고 거짓말이나 한다고 미움 안 받고 살아."

용훈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콜라 캔을 받아 들었다. 

 

- <똥손 좀비>

 

 

- "식탁 위에 있는 거 뭐야?"

늦은 밤 학원 알바를 마치고 정현의 집에 들른 남자 친구가 방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그거? 정의 구현."

침대에 길게 누워 있던 정현이 남자 친구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식탁 위에는 날카롭게 썰린 세탁기 호스 두 줄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 <이따 오세요>

 

 

- "심지어 촉감도 좋다."

'심지어'라는 말을 자꾸 하는 걸 보니 은비에게도 기구 구입의 가능성이 슬슬 열리고 있는 듯했다.

 

- "너무 비싸다. 나는 절대 무리야."

은비는 가격을 확인하더니 바로 선택의 문을 닫았지만, 시오는 여전히 망설였다. 큰 결심을 하고 왔는데 단지 가격 때문에 물러설 수는 없었다. 

"30대를 이 친구와 함께한다고 생각하면 이 정도는 내야겠지?"

"근데 이 친구가 네 30대를 전부 커버해 줄까? 갑자기 죽으면 어떡해?"

"그러게. 이렇게 비싸게 모셨는데 한철 보내고 죽으면 곤란하지."

"대표님한테 가서 한번 물어봐."

 

- 시오는 기구를 고를 땐 대범했지만 그런 질문을 할 자신은 없었다. 교환이나 환불, 애프터서비스나 컴플레인은 시오의 소비생활에서 빠져 있는 단어들이었다. 

 

- "작가님은 좀..."

"네?"

"작가님처럼 보이지는 않네요."

"그게 무슨..."

"굉장히 스타일도 좋으시고 마르셔서요. 밥을 잘 안 드시죠?"

"아니요. 그렇지도 않은데요."

"밥을 많이 드셔야 할 것 같아요."

뜬금없는 얘기에 시오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나름대로 아이스 브레이킹인 것 같긴 한데,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 "제가 이렇게 젊고 날씬한 여자분이랑 일해본 적이 없어서 아직 작가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인간관계라는 게 서로서로 맞춰가는 거니까요. 우리 한번 잘해봅시다."

 

- "그림체 때문이 아니라면 더더욱 궁금한데요? 대표님께선 이게 영화화된다면 주인공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보셨을 것 같은데요. 그 주인공이 야설 작가가 아니라 시나리오 작가고, 지금 이 자리에 제가 아니라 주인공이 앉아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럼 이 장면은 섹스 코미디가 되나요?"

"우리 주인공은 작가님처럼 이렇게 화를 안 낼 것 같은데요."

"여전히 외모와 태도의 문제라는 말씀으로 들리네요. 그리고 저는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제작될 영화에 대한 의견을 말씀드리고 있어요. 아까 여자들이 판을 쳐야 한다고 하셨는데, 제 의견 좀 냈다고 화를 낸 걸로 읽히면 곤란한데요."

 

- <섹스와 코미디>

 

 

- 몇 년 전부터 가르치는 학생들이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에 이런 얘기를 해요.

"저는 젠더퀴어예요. 저는 바이섹슈얼이에요. 저는 폴리아모리예요. 젠더플루이드예요. 에이섹슈얼이에요. 퀘스처너리예요."

처음엔 '그래, 그렇구나'하고 넘겼어요. 요즘 청소년들 사이에서 자기 성 정체성, 성적 지향을 이야기하는 게 어떤 일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제 수업에 오는 학생들은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기에 그냥 '그런가 보다' 했죠. 그 얘기를 40대 게이 친구에게 했더니 그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면서 놀라더라고요.

"그런 얘기를 해? 사람들 앞에서? 나는 평생 숨기느라 애를 썼는데? 그런데도 애들이 어떻게든 알아내서 막 때렸는데?"

 

- 학생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제가 그들이 하는 말의 정확한 의미를 모른다는 것 때문에 대화가 점점 힘들어졌어요. 처음엔 '단어 몇 개 모른다고 이 세상 살아가는 데 문제없지' 하고 넘겼는데, 점점 안 되겠다 싶어서 모르는 단어를 학생들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따로 적어와 친구들에게 물어보기도 했어요.

 

- 그런데 공부를 하다 보니 점점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는 정말 시스젠더 헤테로 여성인가? 정말 그런가?

 

- 어느 여성 아티스트가 인터뷰에서 '나는 여성도, 남성도 아니다. 나는 중성이다'라고 말한 걸 가지고 제 주변 성 소수자 친구들이 굉장히 웃었던 적이 있어요. 그냥 웃은 게 아니라 비웃었죠. 성 정체성 때문에 평생 투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하는데, '중성'이라는 말을 저렇게 느낌만 가져와 쓸 수 있냐는 거죠. 그 지적을 들으면서 속으로 뜨끔했어요.

 

- 저는 어릴 때부터 제가 남성이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어요. 그런데 어떻게 봐도 여성으로 보이는 몸을 가지고 있으니까 '자, 그렇다면 스스로 중성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보자'라고 결심했거든요. 

 

- 아까 중성 얘기로 돌아가볼게요. 저는 남성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스스로 중성이라고 속이며 살아온 여성이에요. 결과적으로 제가 살아온 방식은 '명예 남성'이라는 지칭에 걸맞을 것 같네요. 저는 스스로 중성이라고 암시를 걸면서 여러 남성 집단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 되려고 애를 썼어요. 그 안에서 유일한 여성이었죠. 그 사실을 저도 알고, 그 집단의 남성들도 알았고요. 그렇지만 저는 전형적인 여성 역할을 맡고 싶지 않았고, 돈독한 남성 집단의 유대를 깨고 싶지도 않았어요. 혹시라도 저 때문에 변화가 생길 것을 두려워해서 '나는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여성들과는 다르다'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죠. 

 

- 그 결과가 어땠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제 노력과는 무관하게 남성들은 저를 여전히 여성으로 인식했죠. 그것도 '애인으로 삼기에는 부담스럽지만 잘만 구슬리면 나랑 한번 자줄 것 같은 여자'로 말이에요. 저는 남성들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하면서 그 안에 섞여 있으려고 노력한 것뿐인데,... 

 

- 성경에는 여성화된 신은 하나도 안 나오는 것 같은데, 그럼 사람을 만들 때 굳이 凹은 왜 만들었을까요? 그런 창조법을 '크리에이티브' 하다고 생각해야 할까요? 제가 이 모든 창조를 심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면, 저는 하느님의 창조 과제에 F를 주고 싶네요.

그러니까 하느님, 당신의 능력을 다시 보여주세요.

가능하면 다음 주까지 보여주시면 좋겠어요. 저는 주말에도 출근을 하니까 주일에 보내주셔도 검토할 수 있습니다.

 

-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 "야, 한국말 너무 많이 들려서 짜증 난다."

한국말이 듣기 싫다고 한국말로 불평하고 있는 이 친구가 당시 수요회에 빠졌던 나를 가장 많이 비난했었다. 수요회 해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는 런던으로 유학을 갔다. 그러곤 런던에서 몇 년 공부하나 싶더니, 지금은 뉴욕에 있는 대학원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 미국 애들이 그렇게 멍청하다면, 친구는 왜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걸까? 나는 친구가 영화를 공부하고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학부에서 나는 영화 연출을 전공했고, 친구는 예술 이론을 공부했기 때문이다. 나는 실기과, 친구는 이론과여서 당시 내 작품에 대한 비평을 듣는 일이 잦았다. 친구가 생각보다 신랄하게 작품을 평가해주어서 때때로 작품을 보여주는 것이 두렵고 싫기도 했다. 하지만 작품을 만드는 작가로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비평은 이론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이해시키려 노력했다.

 

- "엄마 돈으로 공부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돈 주는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해야지. 그걸 뭐라고 하지? Remote control? 원격 조종당하는 거나 다름없어. 그리고 엄마가 자주 와, 뉴욕에."

"와서 뭐 하시는데?"

"뭐 하긴, 나 감시하지."

 

- "지켜봐 준다니 고맙네. 누가 봐도 나쁠 거 없는 영화보다는 네가 봐서 기분 나쁜 영화라도 만들고 싶은데."

"만들기만 해! 너 그 영화 만들기만 해!"

 

- 친구는 녹음 중인 화면을 내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명예 미국인이라더니 대응 방식도 미국식으로 바뀐 모양이었다. 차라리 예전처럼 뭐라도 날아왔다면 조금 친근감이 들었을 텐데.

"오늘 이 자리에서 나온 얘기 한마디라도 영화에 나오면 너 고소할 거야. 난 분명히 말했어."

"그래. 그때까지 꼭 정식 미국인 돼라." 

 

- <한국 사람의 한국 이야기>

 

 

- 은퇴한 정신과 의사라는 이야기는 전해 들었지만 그 꾸밈새에 놀랐고, 의심을 했고, 이내 빠져들었다. 상담은 선생님의 지인이 마련해 주신 곳에서 했는데, 어느 날은 문 닫은 재즈 바였고 또 어느 날은 문 닫은 갤러리였다. 

 

- "말. 우리는 말을 하고 살잖아. 근데 이러한 단어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는가. 그 순간 환영이 보였지. 흰 눈 내린 데에 '태, 초, 부, 터, 있, 었, 다' 하고 글씨가 박혀 있는 거야. 그게 나한테 각인이 된 거지. 소리가 들리진 않았어. 속으로 그렇게 질문했더니 답을 얻은 거지. 근데 그때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쓰인 걸 봤다고 믿은 거야. 진짜는 내 마음에서 그런 답을 얻은 건데, 그때는 그렇게 생각 못 했어. 신이 적은 거라고 생각하면서 '아, 신이 있구나' 그랬지. 그러니까 내가 나를 몰랐던 거야. 무슨 얘긴지 들리냐?"   

 

- 나는 오랫동안 신과의 대화를 꿈꿨다. 신을 만나면 물어볼 말을 생각해두기도 했다. 

왜 이 불행한 세상을 만들었습니까?

나는 왜 살아있습니까?

그리고 이것은 언제까지 계속됩니까?

 

- "어라? 이게 서울대를 헛 다니는 거야. 왜냐하면 내가 질문을 해도 얘가 논리적으로 답을 못 하니까. 그래서 내가 그 언니한테 성경 공부를 안 하겠다고 했어. 논리로 얘기를 해줘야지, 성경도 분명히 논리적인 건데. 이제 하지 말자고 했어. 그러고는 나 혼자서 공부하다가 모순을 너무 발견하기에 덮었어. 그리고 불교 철학을 공부했어. 그러니까 난 너무 바쁘게 지냈어."

 

- 선생님은 나와 마찬가지로 신을 찾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보다는 신과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보라색이나 붉은색, 대로는 파란색으로 물든 머리카락과 주름진 목에 걸린 술 장식의 스카프, 작은 나무 귀걸이가 그런 이미지를 만드는 데 한몫했다. 

 

- "내가 흘러 흘러 대전에 정착했잖아. 근데 거긴 너무 촌이라 어떻게 감당이 안 돼. 그때부터 주역, 명리학, 사주팔자를 공부한 거야. 그러면서 상담할 때 사주를 풀어주니까 이해를 너무 잘하는 거지. 자기 이야기를 다 쏟아내는 거야. 이 사주팔자를 점쟁이 식이 아니라 상담 도구로 사용한 거지. 이게 먹힌 거야. 사람들이 마음 놓고 다 털어놔. 그렇게 무료로 치료를 계속해줬어." 

 

- "명리학. 이게 묘하다? 내가 이 공부를 재작년까지 했어. 10년 넘게 한 거야. 솔직히 말해서 도통, 경지지. 그다음부터는 내담자를 보면 딱 보여. 사주가 이렇겠구나, 이게 직관으로 보인다니까. 어떨 땐 생년월일시를 물어보고 집에 가면서 확인해 볼 때가 있어. 다 그렇게 하진 않아. 내가 관심 가는 사람한테만 그러지. 근데 확인해 보면 다 맞아. 그걸 보면서 '아, 마음은 하나구나' 하고 깨우친 거지. 그래서 내가 아까 마음은 하나라고 한 거야. 내가 깨우친 게 그래. 여태껏 살아오면서 한 공부가 모두 내 마음 하나 깨닫기 위한 거였구나. 이걸 깨달으면서 지식이니 뭐니 하는 걸 다 버렸어. 그저 마음 수행만 하면 되는구나. 그렇다고 절에 가서 스님들과 만나거나 친해지려고는 안 해. 오히려 외면하지. 괜히 찌꺼분한 말이나 들을까 봐. 마음공부는 혼자 알아서 해야지."

그럼 선생님은 혼자 뭐 하세요?

"수행. 내 마음 들여다보는 거. 자, 이제 선생님 얘기를 어떻게 들었는지 느낌을 얘기해 봐."

일단 신기해요. 엄청 신기하고... 영화를 보는 것 같아요. 그렇게 살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 버리면 살아. 그리고 마음 수행하다 보면 네가 지금 너라고 믿는 거, 그게 네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돼. 그런 재미가 있어. 자꾸 떠오르는 실타래를 딱 끊고 보면, 마음을 의식으로 확장하다 보면 다른 것들이 자꾸 보여. 선생님 말이 가짜 같아?"

아니요.

"그러면."

진짜를 얘기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 지금 내 삶을 골자만 딱딱 짧게 얘기해 준 거야. 선생님은 직접 체험하고 체득한 것만 얘기해. 수행이 그런 거야. 선생님이 너한테 얘기하잖아. 내 눈은 여기를 바라보지만 마음은 여기를 안 봐. 붓다의 마음만 봐. 저 안쪽에 있는 빛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만 봐. 나는 얘기할 때 과장 안 해. 포장도 안 해. 그런 게 수행이야."

 

- 수행이라는 게, 저는 뭘 이렇게 닦고 있어야 하나 그랬는데 그냥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한테 나를 그대로 이야기하고 보여주는 거구나.

"그런데 사람들이 마음 수행을 안 해서 말썽이 생겨. 실타래가 내 생각이라고 믿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 이 얘기야. 거기까지 알겠어?"

네.

"최고야. 이제 너도 수행해. 너는 그런 길로 가야 빛나. 알아들었어? '나는 오늘 들었다'라고 여기다 써."

나는 오늘 들었다.

"'마음 수행하는 법을'이라고 써."

마음 수행하는 법을.

 

- "오늘 선생님이 화두를 준 거야. 이게 인생의 처음이자 끝이야. 글자로 그치는 게 아니라고. 마음으로 느껴라. 그러니까 너는 이제 수행하는 사람이야."

선생님은 마녀 같아요.

"마녀? 그래, 네가 잘 봤다. 가서 사람들한테 그렇게 말해. 우리 선생님은 마녀라고."

 

- 선생님은 신을 찾는 사람이었다. 선생님은 신을 찾아 떠돌다가 마녀가 되어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신과의 대화를 꿈꾼 사람이었다. 나는 신에 대한 믿음을 시험받으면서 살고 싶지 않았고, 그런 내 존재라도 무의미하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신과 대화를 나누진 못했지만 마녀와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다가 내가 마녀가 된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 삼청동 언덕길을 걸어 내려오다 제자리에 멈춰 서서 고개를 휘휘 돌려봤다. 가게 앞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나는 거기에 있었다. 

 

- <나는 오늘 들었다>

 

 

  - 정성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가 자신이 진정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 곰곰이 되짚어보았다. 저 쩌렁쩌렁한 목소리 때문에? 성경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저 말 때문에? 아니면 저 여자의 촌스러운 윗도리나 훌렁훌렁한 아랫도리 때문에? 거듭 생각할수록 자신이 왜 눈살을 찌푸리는 것으로 저 여성에 대한 불편함과 경계심을 표시해야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 '나는 예술가인데, 어쩌면 저 여자의 말과 행동 속에서 진주를 얻을지도 모를 일인데 왜 이유 없이 경계했을까?'

정성은 이내 반성했다.

 

- '불행히도 나는 신을 담는 그릇이 아니기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신은 그대로 내 몸을 통과해 점집의 무당에게로 가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서글펐다. 세상에 신이 이렇게나 많고, 또 신을 믿으라고 거리에서 외치는 사람들도 있는데 왜 나는 신을 느껴본 적이 없는 걸까. 정성은 연이어 담배에 불을 붙이며 생각을 이어나갔다.

'왜 누구는 느끼는데 나는 못 느끼는 거지?'

 

- 서글픔이 억울함으로 번졌다. 예술가로서 영감을 찾듯이 정성은 갑자기 신을 찾기 시작했다.

'어디에 있을까?'

어디서 신을 느낄 수 있을까. 베란다에서 말라가기 시작한 화초 잎을 무심코 어루만지던 정성은 문득 '보살피다'라는 활동이 바로 신의 영역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렇게 따지면 이 집은 자신이 보살피는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 <깃발>

 

 

- "연애를 왜 '하고 싶다'고 말하느냐고요?"

준지도 대화를 되도록 좋은 방향으로 이어나가고 싶은 눈치였다. 그는 세나에게 반감이나 공격적인 뉘앙스로 느껴지지 않도록 말하려고 애를 썼다.

 

- "이 세상에 연애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땠을 것 같아?"

"네?"

"네가 지금까지 살면서 연애라는 걸 단 한 번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면, 그래도 너는 연애를 하고 싶었을까?"

"아, 무슨 말인지 알겠다! 누나는 말이 있으니까 행위가 뒤따라온다는 얘길 하는 거죠? 그럼 누나는 왜 춤을 추는 거예요?" 

"춤... 아까 내가 한 걸 말하는 거지? 그걸 춤이라고 말하는 게 맞을지 모르겠네."

 

- "춤이 아니면 뭐예요?"

"나는 다만 내 몸과 정신의 상태를 정확히 인지하고, 아까 그 공간에서 한동안 움직였을 뿐이야. 물론 지금도 그러고 있고."
"그럼 누나는 지금 우리랑 빙수를 먹고 있는 상태와 아까 춤인지 움직임인지를 했던 상태가 같다는 말?"

"그렇지. 나에게는 어떤 순간만이 특별하지 않아. 다만 내가 매 순간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집중할 뿐이지. 그 집중이 깨지는 순간이 오히려 힘들다고 할까? 차라리 특별하다면 그 순간이 특별하달까?"

 

- "가끔 그럴 때가 있어. 일테면 죽음에 대해 생각하거나 그 공포를 떠올리거나 할 때. 죽음도 하나의 상태이고, 그 상태를 거친 뒤에도 내가 사라지는 게 아닌데 어리석은 상상이나 망상을 하면서 나를 놓아버리는 거지. 내가 살아 움직이는 이 순간에 집중하지 않고."

 

- "착각이요?"

"적어도 나는 그래. 내 삶의 목표랄까? 일단 목표라고 할게. 그게 내가 나를 제대로 인지하는 거거든. 내 몸의 움직임, 정신의 움직임... 그리고 그것들이 또렷하길 바라고. 착각에 빠져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고."

"그 착각이라는 게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김석이 빙숫집에서 처음으로 입을 뗐다. 세나는 김석의 질문을 듣더니 싱긋 웃으며 턱을 괴고 김석의 얼굴 앞에 자기 얼굴을 바짝 갖다 댔다.

"내가 하는 착각과 네가 하는 착각은 다르니까. 그건 한번 스스로 생각해 봐."

 

- 내 삶에 존재하던 동그라미들이 모두 사라진다면 나는 어떻게 변할까? 

 

- 이제 김석은 약속과 착각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다시 태어난 아이처럼 모든 것에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답은 하나가 아니고, 줄곧 움직일 터였다. 김석은 모든 것이 새로워진 이 순간을, 이 감각을 영원히 기억하기로 마음먹었다. 

"누나, 저는 최선을 다해 제 삶을 살아갈 거예요."

세나는 김석이 그날 본 어떤 것들보다 빛나게 미소 짓고 있었다.

 

- <너의 모든 움직임을 인지하라>

 

 

- 차가 있다면, 당장 어디로든 갈 수 있을 텐데.

이럴 땐 면허도 차도 없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대학 동기들이 하나둘 차를 몰기 시작한 뒤 '운전을 해야 비로소 자유라는 말의 의미를 알게 된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 

나는 왜 여전히 자유도 없이 살고 있을까. 

 

- 대학의 글쓰기 수업에서 '이상하다'는 말로 묘사를 뭉뚱그리지 말라던 강사의 말이 떠올랐다. 이상하다는 말이 아니라면 이 집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윙윙거리는 드라이어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몇 가지 표현을 머릿속으로 굴려보았다.

폭탄 맞은 집.

막 이사 온 것 같은 집.

한 시간에 1미터씩 깊어지는 우물 같은 집.

어떤 표현을 떠올려도 한시바삐 이 집에서 나가야겠다는 생각만 강해졌다. 

 

- "이건 무늬 있는 스타킹인데."

"어?"

"무늬 있는 스타킹이라고."

무늬가 있어서 좋다는 건지 나쁘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일단 스타킹을 신어보았다. 무늬 있는 스타킹은 그녀에게 잘 맞았다. 그녀는 요란해진 다리를 쓰다듬으며 자매에게 물었다.

"이런 건 언제 신는 거야?"

 

- 발목에는 여전히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그걸 내려다보고 있자니 자매의 요란한 웃음소리가 떠올랐다. 앞으로 계절이 두 번 이상 바뀌기 전에는 집에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었다. 다만 감정 기복이 심한 자매가 갑자기 스타킹을 돌려달라고 하지나 않을지 새삼 걱정이 되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고, 아무것도 신세 지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녀는 자매에게 스타킹을 빌리는 실수를 한 자신을 책망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결국 차가운 공기가 들이치는 전철역 벤치에 앉아 무늬 있는 스타킹을 벗었다. 순식간에 맨다리에 으스스 소름이 돋았다. 첫차는 20분 후 도착 예정이었다.

 

- <증여론>

 

 

 

- 이 책을 쓰면서 엄마를 자주 떠올렸습니다.

 

- 수십 권의 '김경형 이야기책'이 전부 사라졌다는 사실에 황망해하니 다 힘들고 우울하단 얘기뿐이었다며 오히려 제가 왜 그 공책들을 보고 싶어 하는지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엄마 말대로라면 제가 쓰고 있는 '이랑 이야기책'도 힘들고 우울한 얘기뿐인데 어째서 나는 이 책을 끝까지 쓰고 있는 걸까 생각했습니다.  

 

- 저는 이랑이라는 한 사람의 인생을 살고 있을 뿐이지만 종종 제 인생의 어느 부분을 기록하고 남기는 일을 하고 그것을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기도 합니다. 일을 하면서 제가 하는 말과 행동에 의미가 있다고 확신해 본 적이 없습니다. 무대를 보러 와주시는, 작품을 사주시는 분들이 있을 때마다 '왜 그럴까?' 의심하고 혹 그분들의 마음에 거슬리는 행동을 할까 봐 전전긍긍합니다. 제 노래와 이야기를 좋아하고 응원한다고 말씀해 주시는 분들이 제 부족함와 미숙함에 실망하고 돌아서는 모습을 자주 상상합니다. 저는 왜 이렇게 겁에 질려서 일을 할까요.

 

- 최근 제가 영화음악을 맡은 한 여성감독의 사적 다큐멘터리가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되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이기도 한 감독은 자신의 생활 모습을 가감 없이 담아냈고, 관객은 영화를 통해 한 사람의 모순도 부족함도 혼란도 모두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음악 작업을 위해 영화를 반복해 보면서도 감독의 어떤 모습들은 정말 이해할 수 없었기에 몇 차례 전화를 걸어 당신의 삶의 태도에 대해 물었습니다. 감독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동시에 기록하고 영화로 만들어가는 혼란한 과정 속에서도 매 순간 '지금 제 생각은요' 하고 또렷하게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 겁에 질려 있지 않은 그 모습이 머릿속에서 한참 동안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 겁에 질리지 않고 일하고 싶습니다. 엄마는 제게 '나서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그 말은 엄마 김경형이 얼마나 겁에 질려 살아왔는지,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자란 딸 이랑도 얼마나 겁에 질려 살고 있는지 말해주는 것 같아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안타깝고 슬펐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겁에 질리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면 엄마에게는 수십 권의 '김경형 이야기책'이 남아 있었을 것이고 제 첫 번째 '이랑 이야기책'의 완성을 매우 칭찬해 주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에서 제가 엄마에게 또 하나의 걱정을, 두려움을 안겨주는 것 같아 이 책의 완성이 조금 슬프기도 합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발표합니다. 

 

- 여러분들께서 각자의 삶을 꿋꿋이 살아내고 계신 덕분에 저도 오늘의 무기력을 이겨내고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을 만드는 동안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이해할 수는 없어도 존중할 수는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저와 제 글을 존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더 많은 사람들이 겁에 질리지 않고 자기 기록을 남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경형 이야기책'의 집필이 다시 사작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19년 9월

이랑

 

  

 

 
오리 이름 정하기(양장본 HardCover)
《이랑 네컷 만화》, 《내가 30代가 됐다》, 《대체 뭐하자는 인간이지 싶었다》의 저자이자 영화감독, 음악가, 페미니스트, 선생님, 만화가, 준이치 엄마, 그래서 결국 이야기 생산자인 이랑의 첫 소설집 『오리 이름 정하기』. 사회에서 끄트머리로 밀려나 보이지 않게 된 사람들의 삶을 주연으로 끌어와 이야기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보편적 인식에 균열을 만든다. 이 책에는 극본부터 스탠딩 대본, 단편소설까지 형식부터 다양한 12편의 이야기가 담겼다. 그 속에는 식인 바이러스가 창궐한 세상에서 계속 사람으로 있으려고 하니까 힘든 것임을 깨닫게 되는 남녀가 등장하는 《하나, 둘, 셋》, 천지창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신들의 세계가 웃픈 직장생활처럼 그려지는 《오리 이름 정하기》 등의 이야기와 함께 하루 종일 잘못 배달된 택배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성부터 여자들이 판을 쳐야 하는 시대니까 판을 깔아주겠다는 남성 제작자와 당혹스런 대화를 나누게 되는 여성 시나리오 작가 등 여성의 시선에서 처음부터 다시 쓰이는 이야기들을 만나볼 수 있다.
저자
이랑
출판
위즈덤하우스
출판일
2019.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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