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전건우 / 전혜진 / 정명섭 / 황모과 / 김선민 / 사마란
출판 : 괴이학회 / 들녘
출간 : 2021.08.30
오래 전 위시리스트에 넣어두고 잊고 있던 책이었는데, 리디셀렉트를 뒤적거리다 발견하고 읽어보았다.
어떤 의미로는 기대 이상이었고, 어떤 의미로는 기대 이하였다. 만약 이 책을 선택하신 이유가 '코스믹 호러'라면 안타깝지만 실망하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앤솔러지는 아무리 좋게 보아도 코스믹 호러와는 거리가 멀다. 압도적인 거대함에 짓눌리는 절망보다는 제주 설화와 연결된 기담 혹은 괴담의 느낌에 가깝다.
그래서 재미가 없느냐 하면, 그것 또한 아니다. 나는 무척 즐겁게 읽었다. 각각의 단편이 제각각의 관점으로 제주를 배경으로 삼았기에, 같은 설화나 존재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접근하는 점 또한 매력적이었다.
조금 아쉬운 점이라면 오히려 '코스믹 호러'적인 느낌을 내기 위한 노력이, 기담 특유의 애매하게 남는 끝맛을 다소 옅어지게 한 것 같다는 점. 단편이기에 가질 수 있는 몰입감이나 속도감보다는 회수되지 못한 복선에 의아함을 느끼게 되는 부분들이 조금씩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체적인 분위기나 매력을 해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광기의 정원>은 말그대로 바리공주와 자청비 등의 '서천꽃밭'을 핵심 배경으로 끌어왔다. 혀가 없는 해골이 어떻게 소리를 낼 수 있었는가에 관해서는 성대 부분이 좀 남아있었던 것으로 추정해 보도록 하자. 도입부의 묘한 분위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결말에 약간의 아쉬움이 든다. 새벽의 통화 부분은 아마도 당시 유행했던 영상에서, 결말 부분은 노란 표지의 3부작에서 조금씩 차용해 오신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단지>는 '단지'가 가진 고독(蠱毒)의 이미지를 끌어와 4.3 사건과 연결한 매력적인 단편이다. <외계신장>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정리하는 지금 시점에는 무녀들 중에 유독 '소화'라는 이름을 가진 경우가 많은 것 같다는 잡생각이 강하게 든다.
<수산진의 비밀>은 현대적이지 않은 분위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유일하게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데, 어느 시점부터 결정되었던 것인가에 대해 개인적으로 해석해보는 재미가 있었다. 어떻게도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겠지만, 이 결말이 정해진 건 그가 소리를 들은 시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딱 한 번의 삶>은 탱화 속에서 돌고 도는 보살들의 이미지가 강렬했다. 수록된 단편들 중 가장 이미지가 선명했던 단편이었는데, 문장들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본문 중의 '욕지기'는 임부의 새벽 헛구역질로 사용된 것이라고 읽었다.
<뱀무덤>은 조금 미묘하다. 렙틸리언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 아닌가 싶은데, 동양과 서양에서 뱀-용을 바라보는 꽤 큰 시각차가 바로 보행과 관련된 부분이라고 생각해서... 하지만 수록작품 중에서는 가장 코스믹 호러에 근접했던 단편이라고 본다.
<영등>은 <망량의 상자>가 많이 떠오르던 단편이었다. 작가가 묘사하는 이상적인 '공동체'는 많은 종교적 단체들을 표상하고 있다. 신천지나 아미시 같은 다양한 단체들이 떠오르는데, 그들이 가지는 배타성과 특수성이 어떤 식으로 발현될 수 있는가를 현실적인 공포와 함께 잘 녹여냈다고 생각한다. 다만 '영등'의 대한 해석에 대해서는- 영등할멈의 이름을 그대로 해석해 '그림자'를 통해 빙의하는 존재로 풀어낸 것 같아서, 고양이가 등장하는 장면과의 개연성이 조금 약하지 않았나 싶다.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시신을 뛰어넘게 하면 안 된다는 설화와 함께 묶었더라면 싶기도 하다. <영등>의 마지막 문장은 해당 작품보다는 전체의 완결성에 더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하이볼이 어울리는 날씨가 되었다.
레몬과 라임을 자르며 즐겁게 읽었다.
一 광기의 정원 전건우
二 단지 전혜진
三 수산진의 비밀 정명섭
四 딱 한 번의 삶 황모과
五 뱀무덤 김선민
六 영등 影燈 사마란
- 새벽에 걸려오는 전화는 받지 마.
어머니는 늘 그런 말씀을 하셨다. 그것도 치매에 걸린 이후로 줄곧. 한 번은 왜 그렇게 말씀하시느냐고 물었더니 새벽 전화는 귀신이 건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셨다.
귀신이 꼬드겨서 데려가려는 거야. 그러니 받지 마!
- "여보세요?"
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가 흘러나올 뿐이었다. 지하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끓어 넘치는 듯한 소리였다. 계속 듣고 있자니 기분이 나빠져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 후로는 애써 신경을 쓰지 않았다.
- 그 전화가 걸려온 것도 새벽이었다.
- 뭐라고 해야 할까, 이 전화를 꼭 받아야 한다는 날 선 예감과 그냥 무시해 버리라는 이성의 외침 사이에서 나는 그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었다. 그저 전화를 건 이가 제풀에 지쳐 끊기를 바랄 뿐.
- 내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핸드폰의 떨림은 기이할 정도로 오래 계속되었다. 나는 결국 굴복했다. 미지의 부름에 응한 것이다.
- 김 교수, 그러니까 김동호는 학계에서는 기인으로 통했다. 대중성과는 거리가 먼 민속학이라는 학문, 그중에서도 비주류인 설화만을 전문으로 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학부생 시절부터 광적인 면이 있었다. 하나에 몰두하면 끝을 보지 않고서는 물러서지 않았는데 그의 그런 기질이 종종 문제를 일으켰다. 자신만의 생각에 갇혀 지나칠 정도로 과감한 주장을 한다거나, 자기와 다른 의견을 제시하면 맹렬히 비난한다거나 해서 온갖 사람과 마찰을 빚었다.
- "국내에 있었으면서 여태 연락 한 번 없었다니, 너무하잖아. 나는 혹시라도 잘못됐을까 봐..."
"미안하네. 내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속세를 떠날 필요가 있었다네. 후후."
- "가설이라면, 그걸 말하는 건가? 제주 설화가 실재했던 사건을 바탕으로 했다는 거?"
"역시 자네라면 기억해 주리라 생각했네. 맞아. 나는 줄곧 제주에서 내 논문을 뒷받침해 줄 증거들을 찾고 있었지."
- 영등할망, 자청비, 선문대할망, 가믄장아기 등 제주만의 독특한 설화는 그 자체로 연구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력적인 이야기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설화들이 사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믿는 사람은 여태껏 없었다. 김동호를 제외하고는.
- "전제가 다르잖아. 거인이 실존했다는 주장 자체도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에서..."
"현실 세계와 이계異界가 맞닿아 있다면 어떻겠나? 즉, 설화나 신화 속에 등장하는 존재들은 이계에서 우리의 세계로 넘어온 거지."
나는 할 말을 잃고 친구를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의 논문이나 연구 자료를 보면서도 이치에 맞는지, 인과 관계가 똑바른지를 따지던 그 옛날의 김동호 교수는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에 신비주의에 빠진 괴팍하고 늙은 사내가 있을 뿐이었다.
- "서천꽃밭은 설화에 여러 번 등장하네. 바리공주, 한락궁이 설화는 물론이고 자청비 이야기와 여산부인 이야기의 주된 배경도 서천꽃밭이지. 하나의 배경을 공유하는 각기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이겠나? 단순한 우연, 아니면 비슷한 시기에 퍼진 설화라서? 물론 그렇게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은 다르네. 서천꽃밭은 이계로 통하는 입구인 거지."
- "심마니들은 꽃향기가 자신을 저승길로 인도한다고 믿지. 더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심마니들이 말하는 저승길이 바로 서천꽃밭이네. 심마니들은 그곳에 발을 들이면 안 된다는 걸 경험으로 아는 거야. 하지만 그 경고를 무시하거나 미처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황에서 이계, 즉 서천꽃밭으로 들어가 영영 사라진 사람도 있지."
- "심마니 말로는 너무 이상하게 생긴 꽃이라 호기심에 꺾어 왔다더군. 그도 그럴 것이 꽃은 줄기부터 잎 한 장까지 모두 검은색이었지. 노련한 심마니 한 명이 그 꽃을 보고 예사롭지 않다는 걸 알고는 내게 연락해 왔네. 일 년 전부터 밥과 술을 사 먹인 보람이 있었던 거지."
"환생꽃 중에 검은색이라면... 뼈오를꽃인가?"
- "현장에서는 제 판단이 우선입니다. 아시겠습니까?"
- "자네 혹시 레이 라인 Ley Line이라고 들어봤나? 아마 들어본 적 없겠지. 우리나라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론이니까. 레이 라인은 한 마디로 고대의 신비한 에너지가 흐르는 길을 뜻한다네. 우리가 많이 들어본 용어로 바꿔서 설명하자면 용맥龍脈과 비슷하겠군. 용맥 역시 산의 정기가 흐르는 자리를 뜻하니까."
- 용맥이라면 당연히 들어봤다. 일제가 우리나라 곳곳의 용맥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이야기 역시 들어봤다. 용맥은 풍수지리에서 사용하는 용어였다. 내 짐작으로는 레이 라인 역시 해외의 신비주의 마니아들 사이에서 떠도는 개념인 것 같았다.
- "이 레이 라인은 엄청난 에너지를 내뿜고 있다네. 그러다 보니 레이 라인이 두 개 이상 겹치는 지점에서는 각종 신기한 현상이 벌어지지. 유령이 나온다거나, 물이 거꾸로 흐른다거나, 초능력을 타고난 아이가 태어난다거나 하는 일들. 그리고 또 하나, 레이 라인이 겹치는 지점은 곧잘 이계의 통로가 된다네. 즉, 다른 차원의 문이 열리는 거지."
-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흐르는 속도가 꽤 빨랐고 무엇보다 강물 색깔이 나뉘어 있었다. 맨 앞은 뽀얗고, 가운데는 노랬으며 맨 뒤는 붉었다.
"삼색물이야! 삼색물이라고. 자네라면 알겠지? 이걸 건너면 서천꽃밭이 나오잖아!"
- 나는 식물학자도 아니고, 굳이 따지자면 집에 들여놓는 화분은 족족 죽이고 마는 쪽의 사람이었지만 이 꽃과 나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선명한 빛깔을 뽐내는 꽃은 예쁘다 못해 소름이 돋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완벽한 아름다움 속에는 치명적인 공포가 공존한다던 옛 학자의 격언이 떠올랐다.
- 또 믿음인가?
학문의 기본이 어째 주관적인 믿음으로 굳혀지는 것 같아 난감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 "오! 김 교수는 사람 보는 눈이 신중하고 꼼꼼한데 바로 선택받으신 걸 보면 실력이 워낙 출중하셨나 봅니다."
- 꽃감관의 목소리는 묵직하면서도 우렁찼다. 부드러운 듯 날카로웠으며 목소리만으로는 어떤 감정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그 목소리 속에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힘.
- "하긴, 이곳은 본디 저승보다 이승과 조금 더 가깝지. 먼 옛날에는 훨씬 많은 교류가 있었고. 이승의 꽃과 나무 중 대부분은 이곳에서 씨나 묘목을 얻어 간 인간들이 가꾸고 돌보면서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알고 있었느냐?"
- "이것 보게, 최 교수. 광기라고 했나? 연구에 몰두하다가 끝내 미친 거라고? 후후후. 한 가지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우리는 연구에만 집중하다가 제정신을 잃은 게 아니야. 애초에 광증이 있었기에 운명처럼 이 연구를 시작하게 된 거라네. 최고의 순간은 오직 미친 자만이 엿볼 수 있다네."
- <광기의 정원>
- 물론 정말로 섬에서 나갈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염병으로 공항이 폐쇄되고, 입도가 금지되었다. 섬에 더 들어오지 말라는 말이지, 나가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하린은 그것만으로도 갑갑하고 조바심이 났다.
-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일을 못 해? 편집자 미팅도 요즘은 다들 화상회의로 하잖아. 말도 마라. 나 여기 오기 얼마 전에, 아는 언니 하나가 결혼을 했거든. 근데 그 결혼식이 아주 신식이었어. 일요일에 낮잠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자기가 내일 혼인신고를 할 거라면서. 배달주문 쿠폰 2만 원짜리랑 화상회의 링크를 쫙 뿌리는 거야."
- 하린은 뒹굴거리는 주연의 옆에 가서 앉았다. 몇 달 전, 주연은 다니던 회사를 용감하게 박차고 나왔다. 전부터 무슨 소설을 끄적거리더니, 작년에 썼던 웹소설이 대박이 났다나. 자기 필명은 절대 안 가르쳐주면서, 회사 때려치웠다고 제주도에 가서 한 달 지내다 오겠다고 하는 게, 정말 대박이 난 건지, 아니면 몰래 로또라도 당첨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중간중간 일어나서 키보드를 두드리는데, 저게 지금 트위터를 하는 건지 소설을 쓰는 건지도 모르겠고.
- "무엇보다도 세빈이가 학교 선생이잖아. 우리가 세빈이 친구인 거 다들 아시는데, 우리가 조심을 해야 세빈이가 욕을 안 먹지."
- "봤지? 우리는 이 동네 분들께 대체로 무해한 상태라고. 오히려 육지 사람들이 와서 과자라도 사 먹으면 동네에 보탬이 되면 되었지. 응? 나가자. 응?"
- 역시, 로또에라도 당첨된 게 틀림없어.
명색이 작가라면 좀 더 음침하고, 맨날 마감하느라 낮밤이 바뀌어 있고, 피부도 푸석푸석한 게 정석이지. 어디 방송에라도 나오는 게 아닌 이상 글 쓴다는 애가 이렇게까지 인싸일 리가 있나.
- "말도 마. 내가 마감 끝나고 좀 한가할 때 밑반찬 같은 거 바리바리 해놓으면, 언니는 그래도 고맙다는 소리라고 하는데 형부새끼는 그거 갖고 반찬투정을 하는 거야. 지 새끼도 안 하는 반찬투정을 그 나이 먹고서 하고 있더라니까?"
과연 분노는 나의 힘이라더니. 형부 험담을 하다 보니 어느새 숲길이었다. 아, 진짜. 이런 식으로 어영부영 산에 끌려올 생각은 없었는데.
- "속박과 굴레를 벗어던졌지 이상한 걸 벗어던진 게 아니야. 저기 봐."
- 그곳에는 정말로 작은, 하지만 제법 모습을 갖춘 계곡이 있었다. 멀리 깊이 우거진 숲길을 배경으로, 길 아래 지반에서 불쑥 튀어나온 바위들 사이 물이 졸졸 흘러내려 작은 연못을 이루고 있었다. 사방이 큼직큼직한 바위로 둘러싸인 가운데, 작지만 거울처럼 하늘의 풍경을 비추어내는 연못은 무척 아기자기하게 예뻤다. 말간 거울 같은 연못 위로 불쑥불쑥 튀어나온 둥그런 돌들이, 마치 새 둥지 속의 알처럼 보였다.
- 그저 아무렇지도 않은, 한가롭고 평화로운 풍경. 산속에서 문득 발견한 작은 도원경 같은 풍경. 그런데 왜, 이렇게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걸까.
- "뭔지 모르지만, 안 건드리는 게 좋아 보이는데..."
하린이 중얼거렸다.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산에 누가 흘리고 간 물건을 함부로 가져오면 안 된다고. 특히 돈이나 쌀 같은 것은 무속인들이 재앙이나 액운을 흘려버리기 위해 일부러 두는 것이라, 손을 대면 그 재앙이 묻어온다고.
- "그럴 걸 수도 있겠다. 제주도에 전해지는, 신라시대부터 내려온 전설의 고추장이라든가."
"고추는 임진왜란 지나서 들어왔어."
"아..."
"그리고 제주도는 신라 땅 아니야. 탐라국이었지."
"아, 넌 좀. 그 고증."
"학습만화 작가를 우습게 보지 마라. 내가 이래 봬도 역사만화도 그렸잖아."
- 어떻게 집까지 돌아왔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저 정신이 들었을 때는, 하린도 주연도 집 툇마루에 무너지듯 앉아 있었다. 그뿐이었다.
- "집에 돌아왔을 때 온 동네 지네들이 파티하는 거 보고 싶으면 꺼내놓고 가든가. 치킨 먹을 때는 좋았겠지만, 여기 지네들이 얼마나 치킨이며 닭 뼈 같은 걸 좋아하는지는 모르지? 내가 그래서 순살은 국산닭 아니라는 거 알면서도 순살로만 사 오는 거야. 닭 뼈 굴러다니면 지네 꼬이니까."
- "어디서 이런 모자란 것들이."
"... 죄송해요."
두 사람은 마치 야단맞는 어린애가 된 심정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할머니는 단지를 두 손으로 받쳐 들어 큰방으로 들어가시고, 세 사람 보고도 따라 들어오라 하셨다. 그러고는 옷 위에 흰 두루마기를 걸치고, 그 위에 빛바랜 남빛 쾌자를 걸쳤다. 가슴에는 폭이 한 뼘 가가이 되는 붉은 띠를 두르더니, 머리에는 마치 승무를 추는 사람이 쓰는 것 같은 흰 고깔을, 그것도 종이로 된 고깔을 쓰셨다. 부채와 방울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할머니는 조금 전까지 그들이 보았던 꼬부랑 할머니가 아니었다. 등을 쭉 펴며 일어나는 그 모습은 마치 아주 다른 사람 같았다. 아니, 할머니가 그대로 50년 전으로 돌아가면 이런 모습일까 싶었다.
- 그 손자국들이 벽을 가득 채우고 천장까지 타고 올라가는 동안, 할머니는 쉬지 않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셨다.
몇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할머니는 길고 하얀 베를 꺼내 하린과 주연에게 붙잡게 하고, 그대로 칼날로 가르셨다. 하지만 칼날은 베에 걸려 나아가지 못하고, 할머니는 주저앉으며 피를 토하셨다가, 흰 수건으로 핏자국을 닦고 다시 노래를 부르며 굿을 했다. 이번에는 작은 소반을 꺼내 쌀알을 뿌리고, 다시 노래를 부르며 단지에게 빌고, 또 비셨다. 조금이라도 꾸벅거린다 싶으면 세빈이 흔들어 깨웠다. 잠들면 안 된다고. 잠들면 큰일이 난다고.
- 자리를 잡고 앉은 할머니는 작은 청귤에 차를 채워 넣어 말린 것을 손끝으로 부수어 다관에 넣었다. 거의 10년 가가이 된 낡은 전기포트에서 물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모자란 것들이 그런 일을 당했으니 얼마나 놀랐겠느냐."
- "원래 덜 떨어진 놈들끼리 힘을 합치면, 더욱 한심스런 짓을 하는 법이다."
할머니는 빙긋 웃으며 다관에 물을 따랐다. 향긋한 귤 냄새가 사방으로 번졌다.
- "소화는 정말 대단하지."
언니들은 다들, 이제 스무 살이 된 소화를 두고 소곤거렸다.
"저 애는 진짜 어떻게 된 아이인지 모르겠어. 여기 처음 왔을 때에도, 쟤는 어머니가 하나를 가르치면 다음 날에는 혼자서 그걸로 굿을 하고 있었다니까."
"소화야 몸주님이 다 가르쳐주셨으니 그렇지. 아, 부럽다. 우리 각시님은 나한테 뭘 제대로 일러주시는 게 없어. 전부 어머니가 가르쳐주시는 걸 보고 배워야 하잖아."
- 소화는 송자의 제자가 된 순서로는 네 번째인가 다섯 번째였다. 하지만 가장 뛰어난 제자여서 장차 송자의 뒤를 잇는 큰 무당이 될 거라는 말을 듣곤 했다.
- "그럼 굿을 왜 하는 거래. 나라에서 굿은 미신이라고 그렇게 뭐라 할 때는 언제고, 경비사령부 놈들이 왜."
"서울에서 경무부장이 미군정청 장관을 모시고 온다잖아. 그 미국 사람이, 동양의 풍습에 그렇게 관심이 많다고. 그 코쟁이에게 잘 보이려고 그러는 거야."
"이놈들이, 탐라에서 제일 가는 큰 만신을 무슨 광대나 창기인 줄 알고..."
- 순희는 문득 생각한다. 큰 만신인 송자라면, 어쩌면 그런 굿으로 생때같은 아들을 해친 원수에게 복수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한편으로 순희는 믿고 있었다. 어머니는 남을 해치고 방자하는 일에 신의 힘을 쓰시는 분이 아니라고. 억울하고 가슴이 찢어져도, 신을 모시는 사람에게는 지켜야 할 것이 있는 법이라고. 사실이 그랬다. 송자는 신을 달래는 것이 아닌 군정청 장관을 위한 그 굿판을, 아주 공을 들여 준비했다.
- 이런 일이라도 거들게 하면 목숨은 부지시킬 수 있을 것 같아, 송자는 그동안 가르친 제자들을 전부 불러들였다. 마치 커다란 어미닭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품듯이, 송자는 그 혼란스러운 때에 제자들을 전부 다 품어 보듬고 있었다.
- 어디선가 갑자기 차오른 물이 돌웅덩이를 가득 채웠다. 하늘 끝까지 닿은 저 파도 끝에서 새하얀 가치노을이 부서져 내렸다. 제주가, 이대로 파도에 뒤덮이고 말 것 같았다.
- 겨우 바위 위로 기어올라온 송자는 죽은 신딸을 끌어안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길게 영등굿의 소리를 부르기 시작했다.
저승할망이 불러일으킨 파도였다. 그 파도를 영등할망이 가라앉히도록, 그리하여 저 바닷물로 여기 제주의 눈물을 씻어내려, 산 자와 죽은 자의 세상이, 이승과 저승이 뒤섞이지 않도록. 죽은 자들은 죽은 자의 길로 떠나고, 산 자들은 다시 산 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 그 전날까지 큰 굿판을 벌였던 큰 만신은, 굿상도 북소리도 오색 무복도 없이, 그저 피를 토하는 듯한 목소리로 하늘을 우러러보며 낮과 밤을 꼬박 새워 노래를 불렀다. 소화가 억울히 죽은 이들의 원한과, 제 목숨을 다 바쳐 걸었던 이 방자를 깨뜨리고, 온 제주를 물로 뒤덮을 저 파도가 가라앉도록.
- "어머니."
순희는, 이제 그 신어미와 소화 형님의 나이를 합친 것보다도 더 나이를 먹은 노만신은 문득 중얼거렸다.
"별 무녀리 같은 것들이 그걸 다 건져왔소. 뭍에서 온 아이들이."
- "그래, 그래서겠지. 이제는 나랏님도 그 일은 잘못되었다 말하는 세상에, 그 아이들이 왜 그 단지를 건져 왔겠소. 우리 세빈이 친구들이니까, 그 애들이 건지면, 세빈이가 그 단지를 내게 가져올 테니까. 그래서 건진 거겠지. 그 애들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그 역시도 내 일이었겠지. 어머니, 이제 와서 그 단지를 열고 피를 씻는 일은, 나밖에는 할 수 없는 것이었지요? 그런 것이었지요?"
- 찻잔 다섯 개는 이제 텅 비어 있었다. 꼭 하나, 산 사람이 입을 대지 않았던 찻잔에서, 희미하게 그 옛날의 코티분 향기가 났다.
- 어떤 땅은 아무 연고가 없는데도 자꾸만 이야기를 불러들이기도 한다. 내게는 제주도가 그렇다. 제주도는 여성의 섬이고, 근현대사와 함께 사라진 많은 우리 신화의 원형을 찾을 수 있는 곳이며, 거대한 할망의 창세신화가 남아 있는 곳이다. 단편 혹은 긴 만화의 에피소드에서 나는 제주도의 이야기를 하려다가, 몇 번이나 다시 제주도의 역사적 비극, 국가폭력과 그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마치 자꾸만 나를 끌어들이는 것처럼.
- <단지>
- 사공들이 돛의 활대에 연결된 아딧줄을 풀었다.
- "유배에서 풀리거나 임기를 마치면 저곳에서 북쪽을 바라보면서 육지로 태워다 줄 배들을 기다리지요. 그래서 이름이 북쪽을 그리워한다고 해서 연북정 아니겠습니까?"
박시혁의 처지를 비웃는 것인지 그냥 웃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웃음을 남긴 도사공이 돌아섰다. 연북정을 말없이 바라보던 박시혁은 갓의 양태에 눈이 떨어지는 걸 느꼈다. 잠시 후, 하늘에서 잔뜩 눈이 쏟아졌다. 사공들 몇 명이 소의 털로 만든 벙거지인 털벌립이라는 걸 쓰는 가운데, 박시혁은 그 눈이 자신의 억울함을 위해 하늘이 흘린 눈물이라고 생각했다.
- "그곳은 괴이한 곳입니다."
"어떠한 의미에서 말인가?"
"수많은 신들이 있고, 아침에 달이 뜨고, 저녁때 해를 볼 수 있답니다."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뿐만이 아닙니다. 바다에는 사람의 얼굴을 한 물고기가 헤엄을 치고, 사람의 팔다리가 나온 뱀들이 살고 있습니다. 길거리의 거렁뱅이 노파에게 신이 깃들고, 돌담과 나무가 살아 움직이는 곳이죠. 그곳에서는 이상한 일이 밥 먹듯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마른침을 삼킨 금부도사가 퀭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곳에 가면 눈 감고 지내십시오. 살고 싶으시다면 말입니다."
농이 지나치다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금부도사의 표정에서 설명하기 힘든 두려움을 읽은 박시혁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 "바지 위에 이상한 걸 껴입었군요."
"말테우리라고 부르는 목자들이오. 조천진에 속한 자들인데 저들이 입는 건 가죽발레라고 하는 덧바지 같은 거요. 말을 타거나 쫓아서 가시덤불 같은 데 들어가는 경우가 많아서 꼭 껴 입는다오. 거기에 오소리 가죽으로 만든 감티라는 모자를 쓰고 소가죽으로 만든 버선을 신고 다닌다오."
- "한 명은 잠자다가 눈을 뜨지 못했고, 다른 한 명은 고향에 돌아간다고 무작정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사라졌다오. 다른 한 명은."
한숨을 쉰 김유양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소이다. 이 섬이 사람을 미치게 만든 것이지. 그러니 부디 조심하시구려. 이 섬에서는 조심하는 걸로는 부족하지만 말이오. 특히 여자를 조심하시구려."
"왜요?"
"예쁘거든."
- 복잡한 의미가 담긴 미소를 지은 김유양을 본 박시혁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 "그건 노루가죽을 실처럼 잘라서 만든 짚신이외다. 이곳 말로 갑실신이라고 부른답니다."
"설피도 따로 부르는 말이 있는가?"
"태왈이라고 부릅니다. 어서 신으십시오."
- "그래도 수산진은 말이 좀 통할 겁니다. 예전부터 유배 온 사람들에게 말을 좀 배운 편이라서요."
"다행이네 그려."
박시혁의 얘기를 들은 아전이 뭔가 말을 하려다가 얼굴을 찌푸린 채 입을 닫았다. 머쓱해진 박시혁은 시선을 돌려 길옆의 오름을 바라봤다. 오름 중턱에는 무덤들이 있었는데 주변에 돌을 담장처럼 쌓아놨다. 그걸 본 박시혁이 혀를 찼다.
"봉분을 쓰지 않고 담장을 둘렀구만."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아전이 대답했다.
"산담이라고 부릅니다. 말이나 소가 접근하는 걸 막고 바람에 흙이 날아가는 걸 피하기 위해서 쌓은 것이지요."
- "정낭 세 개가 모두 수평으로 걸려 있으면 멀리 간다는 뜻이고, 저렇게 하나만 수평으로 걸려 있으면 금방 온다는 뜻이죠. 두 개가 걸려 있으면 저녁때쯤 온다는 얘기고, 세 개가 비스듬히 있으면 안에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 "뭘 담아 오는 거지?"
"물이요. 이걸 물허벅이라고 불러요. 여긴 물이 귀한 편이라 가장 먼저 하는 게 물을 퍼 오는 거지요. 그래서 물이 안 흘러 나가게 주둥이가 작잖아요."
- "아마 평생 들릴 거야. 그러니까 바람 소리라고 생각하게. 안 그러면 못 살지."
- <수산진의 비밀>
- 내게 허락된 밥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밥을 먹은 게 나라는 걸 보고 비난할 사람이 있을까. 그러자 허락받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하얀 쌀밥을 입안에 밀어 넣었다.
- 나는 고통스러운 삶을 타인에게 설명하는 일에 질려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언제나 일반화 속에 나를 감추었다.
"사는 건 누구에게나 다 힘든 일이지요."
그러면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화할 수 있으면 좋다. 드라마틱한 전개와 감동적인 결론이 있으면 더욱 좋다. 상대에게 적당한 동조를 불러일으킬 적절한 묘사는 중요하다. 지나치게 솔직해질 필요는 없다. 어느 순간, 상대는 정말이냐고 물을 것이고, 어떻게 그렇게 살아왔냐고 의아해할 것이다. 거짓말을 한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말도 안 된다고 부정할 수도 있다.
- 그러므로 딱 적절한 수준의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중요하다. 당신이 조금만 손을 내밀면 가여운 내가 갑자기 고난을 극복하는 것이 좋다. 당신 덕에 내가 의연히 일어섰다고 당신이 느낄 수 있다면 더욱 좋다. 나는 당신의 연대를 칭송하고 당신은 선한 삶을 뿌듯하게 이어갈 것이다. 나는 당신에게 확신을 심어줘야 한다. 나의 고난 따위 가뿐히 극복될 수 있다고.
- 그러니 반드시 일반론으로 설명해야 한다.
저는 한때 불우했지만 이미 극복했습니다. 나는 당신의 관심과 선의가 필요하지만 당신이 선의를 보이지 않더라도 당신을 물어뜯을 이빨도 의지도 없습니다. 이미 세상에 항복했음을 나는 당신 앞에서 선언하겠습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저를 동정해 주십시오.
나는 거울을 보며 평범해 보일 미소를 짓는다. 매일 연습했다. 무구해 보이고 아름다워 보일 미소를. 양심적인 당신을 불편하고 불안하게 만들지 않을 미소를.
- 그러다 나는 당신에게 분노가 치솟고 만다. 그렇게 적당함을 유지할 수 있는 당신이 부럽다. 꿈속의 나는 당신을 높은 곳에서 밀었다. 당신은 조금 떠밀렸지만 아무런 해를 입지 않는다. 마치 번지점프를 하듯 안전하게 가상 추락을 즐길 뿐이다. 반면 나는 당신을 함부로 밀었던 바람에 제힘에 이끌려 추락하고 만다. 당신과 달리 내겐 아무런 보호 장치가 없다. 바닥에 처박혀 냉혹하고 검푸른 괴물의 먹이가 될 뿐이다.
내가 세상에 악의를 보일 때 최종적으로 그게 누구에게 더 위험한 것일지 나는 잘 알고 있다.
- 죽으려는 마당에 섬에 도착한 순서 따위를 주장할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 치도 공존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과 마지막 여정을 동행하려니 맥이 빠졌다. 비바람과 햇빛을 피할 수 있는 섬의 유일한 공간을 그녀 같은 사람과 나눠 쓰는 일은 괴로웠다.
- 사당의 밥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밥은 예측 불가능한 시간에 나타났다. 결국 밥을 먼저 발견하는 사람이 먹었다. 우리는 뜬눈으로 아침을 기다렸다. 내게는 규칙이 있었다. 내가 밥을 먹은 다음 날에는 늦게까지 잤다. 그녀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래서 그녀도 다음 날에는 내게 기회를 넘겨주길 기다렸다. 암묵적인 약속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양보한 밥을 먹고 난 다음 날에도 여자는 눈을 부릅떴다. 임신한 몸으로 온종일 꾸벅꾸벅 졸면서도 항상 제단을 끌어안고 잠들었다. '네가 허락한 내 몫은 가져가겠지만 나는 절대로 내 몫을 나누지 않겠다'는 의지가 분명했다. 나는 그녀가 어리고 임신 중이고 남편을 잃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그녀를 이해하려 애썼다.
- 사당에 아예 밥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함께 죽어가며 그녀와 나는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을까? 처지가 같아 동지가 될 수 있었을까? 나는 한숨을 쉬었다.
- 어쩌면 그녀도 나도 이미 죽어서 이곳에 온 것은 아닐까? 겨우 밥 한 공기를 두고 영원히 긴장하며 사는 지옥에 떨어진 것은 아닐까? 그러자 쌀밥이 희망인지 절망인지 헷갈리고 말았다. 눈물이 뚝 떨어졌다.
- "주위 사람들이 모두 당신을 험하게 대했다는 말도 하지 않는 게 좋아요. 솔직하게 말할수록 사람들은 당신을 더욱 불편해할 거예요. 이야기를 듣는 사람까지 당신의 불행을 완성시킨 가해자로 몰린 기분이 들 테니까요. 그러니 앞으론 이렇게 말하세요. 그동안 고생하면서 살았지만 앞으로는 착실히 아이 키우면서 궂은일 마다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겠다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복순이 소리쳤다.
"야! 네가 뭘 알아!"
- 나는 그녀를 끌고 사당 안으로 들어섰다.
"널 도와주겠다는 사람을 향해 무기를 보이지 말란 말이야! 미친년아!"
- 유전적 이유인지 후천적 이유인지 아이도 구분할 수 없었다. 아이는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하고 공부를 즐겼지만 진학할 수 없었다. 보호 처분이 끝난 직후 곧바로 독립해야 했다. 생존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일찌감치 일을 시작했다. 비료조차 없는 척박한 땅에서 갑자기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식의 비과학적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노력한 시간과 보상은 비례하지 않았다. 비효율적인 인생이었다. 열심히 벌어서 모은 돈은 이상한 곳으로 샜고 누군가에게 뺏겼다.
- 아이는 숙식을 제공하는 일자리를 찾았다. 다른 이들이 차마 선택하지 않는 일들, 남들이 회피해야 할 이유가 있는 일들을 골라서 했다. 매 순간 필사적이었고 필사적일 수밖에 없는 아이의 사정을 아는 사람에게 번번이 이용당했다.
- 주위엔 늘 비슷한 사람들이 있었다. 열심히 살아왔지만 도통 운이 따르지 않는 사람들, 들인 노력과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보상받지 못하는 사람들, 그저 남들 같은 평범한 일은 항상 제 삶을 비껴가던 사람들, 자기 삶이 늘 그 모양인 이유를 죽도록 알고 싶은 사람들, 자신을 경멸하다 타인을 증오하게 된 사람들, 타인이 동정하기엔 지나치게 폭력적인 사람들, 살아갈 힘이 있다면 그 힘으로 죽고 싶단 사람들...
- 막다른 골목 안에 머무는 사람들 속에서 아이는 어쩐지 낯익은 늙은 여자를 발견했다. 그녀는 자신이 불행했다는 이유로 타인의 불행을 동정하지 않았다.
- 지옥의 윤회가 반복되고 있었다. 생이 반복되는 것을 깨닫자 나는 각오를 다졌다.
'이번에는 반드시 다른 결말을 만들어내겠어!'
내 세계를 바꿔낼 새로운 기회를 하늘이 허락했다고 여겼다.
- 내가 갇힌 곳은 작은 방 안이 아니라 이 세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했다.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죽지 못하는 삶에 끝없는 고통뿐임을 깨닫고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조금씩 선택을 바꿨다. 비록 미온이었지만 몸 안에 남아 있던 생의 기운을 느낄 때면 벼랑 끝인 줄 알고도 달렸다. 여러 번, 수십 번, 세는 것을 포기하고 말 정도로 반복했다.
- "네가 빚어낸 저주라고!"
"나도 힘들어. 사는 건 누구나 다 힘들어."
지독하게도, 고집스럽게도, 그녀는 매번 파국 속에 머물렀다. 내가 하느님이 되어도 그녀만은 구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유일한 피붙이. 세상과 이어지게 한 끈. 늘 엄마가 그리웠던 내게 그녀 같은 사람과 이어져 있다는 사실은 절망스러웠다.
복순을 연민했고 모든 것을 끝내고 싶었다.
- 나는 영겁처럼 계속되는 삶에 지치고 말았다. 끝나지 않는 삶은 지옥이다. 모두가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 앞에선 그저 입을 닫았다.
- <딱 한 번의 삶>은 각별한 애착을 갖고 써 내려간 작품이다. 전혀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아득한 고통의 바다를 헤엄치는 마음으로 썼다.
- <딱 한 번의 삶>
- 세상은 불가해不可解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들은 조잡하고 빈약한 지성으로 마치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자신들이 지배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빠져 있다. 당장이라도 지구라는 행성의 궤도에서 벗어나 우주의 비밀을 풀 수 있을 것 같다는 오만함을 보이지만 실상은 우리 발밑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모르는, 이를 탐사할 수 있는 기술조차 가지지 못한 저열한 영장류일 뿐이다.
-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인간들이 가진 맹목적인 낙관주의와 오로지 인간만이 가치 있고, 이 세상의 지배자인 양 행동하는 안일함에 지쳐버렸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그렇게 위대하며 우주에서 가장 힘이 있는 존재라면 내가 이렇게 두려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 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 나는 끝없이 펼쳐진,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의 바다 위에 내던져진 조난자나 다름없었다.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약하디 약한 현실이라는 조각배 위에서, 언제 저 바다에 내던져질지 모르는 불안정함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 기괴한 공포와 숨 막힘을 다른 이들에게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안쪽이 비춰지지 않는 불가해의 바닷속에 무엇이 숨어 있고,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지 나는 여태껏 단 한 번도 입 밖에 내어본 적이 없었다. 그것에 대해 말하는 순간 내가 겪었던 끔찍한 순간들이 다시 한 번 현실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날 것 같은 섬뜩한 위험을 내 유리잔 같은 나약한 영혼이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 학과의 특성상 출장을 가는 목적은 대부분 이야기가 기록된 고문서나 비석을 찾거나, 혹은 오래된 전설과 떠내려오는 이야기를 채록하는 일이었다. 나는 안 교수의 지시에 따라 완전 시골 깡촌으로 들어가 90세가 넘어가는 노인들의 얘기를 채록하거나, 산속에 쓰러진 폐가 혹은 오래된 건물 터를 살피고 사진으로 기록으로 남기는 등의 일을 주로 맡았다. 제주도 역시 자주 오는 출장지 중 하나였는데 안 교수는 이곳에 잊히거나 본토에서 추방된 옛 신들이 많다고 했다. 나는 그때만 해도 단순히 비유적인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 그는 나에게 고문서 하나를 주더니 내용을 알고 있냐고 물었다. 내용을 쭉 살펴보니 이전에 내가 채록했던 내용과 연관 있는 '뱀신' 전설에 관한 내용이었다. 뱀신은 악신이기도 하고 풍요의 신이기도 하다. 제주도에도 뱀신과 관련된 전설이 있는 동굴들이 몇 군데 있었다. 그 전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내용은 두 가지 전도였는데 하나는 뱀신이 핏빛 안개를 몰고 온다는 것, 다른 하나는 인신공양 제물을 원한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뱀신에게 처녀를 제물로 바쳐서 농사가 잘되도록 기원했다.
- 지금도 그 끔찍한 존재들의 생김새가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뇌 속에 파편처럼 박힌 그 기억을 떠올릴 때면 현기증에 몸을 가누기가 힘들다. 그 종의 생김새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내 영혼이 마모되는 것 같다. 아득히 먼 오래된 권능의 주인을 따르는 그 생명체들은 직립보행을 하는 것은 인간과 같았지만 생김새는 흉측하기 짝이 없었다. 온몸의 피부가 소름 끼치는 축축한 비늘로 덮여 있었고, 팔다리가 길고 가늘었으며 마치 뼈가 없는 듯 유연하게 움직였다. 눈은 파충류의 그것처럼 길게 갈라져 있었고, 입에서는 검붉은 혀를 쉴 새 없이 날름거렸다. 그 안에서 불길한 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 말이 안 되는 내용이었지만 그렇게 결론이 났다.
- 며칠 동안 쉬고 다시 연구실로 돌아가자 놀랍게도 안 교수는 학교에 없었다. 다시 미스토캐닉 대학으로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내 계좌로 거액의 돈이 입금됐다. 평생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을 법한 돈이었다. 누가 이런 거금을 보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돈이 왜 나에게 왔는지는 알 것 같았다. 내가 겪었던 일들에 대해 밝히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 오래된 신들이 섬에 내려오시니 - 제주도에는 천지왕본풀이부터 설문대할망, 가믄장 아기 등 굉장히 많은 신화들이 존재한다. 모두 흥미롭고 현대적인 시각으로 재해석할 만한 소재들로 구성되어 있다. 내가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관심 있게 본 신화는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위에서 언급한 '가믄장 아기'와 '감녕사굴'이었다.
- 가믄장 아기는 처음에는 복을 불러왔다가 후에 아이를 쫓아내고 결국에는 저주를 받게 되는 가족의 이야기다. 이를 호러적으로 해석하여 초자연적인 아이를 잉태한 뒤 벌어질 내용으로 한국식 오멘을 만들어보는 것도 재밌겠다 싶었다. 하지만 결국 이번 프로젝트의 소재가 코스믹 호러였기에 좀 더 근원적인 공포를 다루는 것이 어울리겠다 생각하여 가믄장 아기보다는 감녕사굴의 뱀신을 선택하게 됐다. 감녕사굴의 뱀신 설화는 굴에 살고 있는 큰 뱀을 새로 부임한 판관이 퇴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감녕사굴과 같은 뱀신 설화에서는 크게 두 가지의 특징이 있는데 바로 인신공양과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금기 사항이다.
- 금기 사항은 코스믹호러에서 아주 중요한 지점이다. 인간은 호기심과 어리석음으로 발을 들여서는 안 되는 영역에 들어감으로써 감당할 수 없는 공포와 마주하게 된다.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근원적인 공포 속에서 개체가 소멸되는 것이 바로 코스믹 호러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감녕사굴 설화를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인 '광기의 산맥'을 오마주해 재구성해보고 싶었다.
- <뱀무덤>
- 방에는 1인용 침대와 책상, 자그마한 옷장 하나가 전부였다. 작지만 세미에게는 처음 허락된 혼자만의 공간이었다.
- 일단은 씻어야겠다 싶어 화장실 문을 열었다. 변기 하나 세면대 하나 샤워기 하나가 있는 작은 공간이었다. 그래도 이제 누군가 화장실이 급하다고 문을 두드릴까 걱정이 되어 후다닥 씻을 필요가 없었다. 따듯한 물을 틀고 오래 샤워를 했다. 충분히 뜨거운 물에 씻고 나니 온몸이 나른해졌다.
- 새로운 시작. 어제의 나와는 다른 내가 될 것이다.
- 효승은 크지 않은 키에 왜소한 체격을 가졌지만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 "하다 보면 금방 잘하게 돼. 우리 마을에서는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일을 해야 해. 다 같이 벌어서 다 같이 먹고사는 거야.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먹여 살리지. 그러니까 늙었는데 부양할 사람이 없어 쓸쓸히 지낼 일도, 병들었는데 치료비 없어서 죽을 일도, 부모가 갑자기 죽는다고 고아가 되어 천덕꾸러기가 될 일도 없어. 모두가 이웃이고 모두가 가족이야. 아이를 낳으면 온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키워. 그러니 여자들도 아이를 낳고 육아휴직을 할 일이 없어."
- "얼마나 사랑받고 올바르게 자라는지 몰라. 그렇게 잘 자란 아이들이 성공해서 돈을 벌면 마을로 보내오지. 우리 마을 출신 판사, 검사, 의사, 기자 등등 없는 줄이 없다시피 해. 모두가 돈 걱정 없이 열심히 일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어. 아주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마을은 그렇게 평화롭게 살아왔어."
- 신기한 이야기였다. 효승에게 마지막 남은 지상 낙원 같은 곳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일하고 있는 모두의 표정이 평온하고 행복해 보였다.
- "저기, 윗동네에서요."
"영등마을 말이우까? 메께라, 어렁 거기서 여까지 내려완?"
"네?"
세미는 무슨 말인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저씨는 눈이 둥그레졌다.
"메시께라, 웃동네서 왔다 하멍 제주 사람이양 알안신데 뭍사람이맨?"
- 빡빡하게 짜인 일정대로 하루를 보내다 보면 별다른 잡생각 없이 밤이 되었다. 현지는 늘 세미의 옆에 붙어 다니며 이 마을에서 지켜야 할 것들을 알려주었다. 산나물을 캘 때는 발로 땅을 두 번 쾅쾅 밟은 후 수풀을 뒤져야 그림자 없는 들개가 멀리 도망을 가고, 달이 비친 물을 마시면 음기가 넘쳐 큰 병에 걸리며, 밥 먹기 전에 젓가락을 식탁이나 상에 찍고 먹으면 조왕신이 노하여 배탈이 난다 등의 주로 미신 같은 이야기들이었는데 그중에서도 몇 번이나 신신당부한 것은 이 마을에 절대 그림자가 있는 길짐승을 들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 날짐승이야 하늘에 속한 것이라 괜찮지만 그림자가 있는 길짐승은 흉물 중에 대흉물이라 손톱만큼이라도 마을에 발을 들였다간 큰 재앙이 닥친다고 몇 번이나 침을 튀겨가며 말했다. 그래선지 마을에는 그 흔한 개 한 마리 키우는 집이 없었다.
- "이건 뭐야?"
세미가 세면대 위에 놓인 거을 자세히 보며 물었다. 팥알만큼 아주 작은 잿빛의 둥그런 금속이었다. 오래 입에 물고 있었는지 여기저기 닳았다. 지수는 입안의 치약 거품을 세면대에 뱉더니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납이요."
"납? 그걸 왜 입에 넣고 다녀?"
지수는 그런 걸 왜 묻냐는 듯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아파야 하니까요."
- "언니도 하나 줄까요?"
"아... 냐. 괜찮아."
"이제 언니도 필요할 텐데."
- 주말이 되자 마을은 온통 정신이 없었다. 영등신을 모시는 영등마을에선 매달 마지막 주말에 영등굿을 한다고 했다. 굿은 처음이라 궁금하기도 긴장되기도 했다.
- "반가워요. 고원석이라고 해요."
원장의 큰 손이 세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손바닥으로 전기라도 오는 것처럼 따끔한 것이 몸속으로 들어오는 느낌에 자기도 모르게 손을 잡아 뺐다. 장로님과 악수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무언가 몸 안으로 들어와 또아리를 틀어버린 거 같은, 설명하기 힘들지만 불쾌하고 찝찝한 느낌이었다.
- 힘들게 쓴 만큼 읽는 이들에게 재미를 줄 수 있다면 참 좋겠다.
- <영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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