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홍칼리
출판 : 위즈덤하우스
출간 : 2021.08.28
최근의 나는 자기소화(apoptosis) 중인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외부로의 성장이 필요한 시기가 있고, 내부로의 응축이 필요한 시기가 있다. 더 이상 '내'가 아닌 것들을 덜어내는 시기.
하지만 어디까지가 자신인가를 재정의하는 일은 유의미하면서도 무의미하다. 그 진동의 진폭, 그 자체가 '나'인 것 같기도 하다. 인식하고 있는 주체만이 참이고 인식당하는 대상은 언제나 변화한다. 대상이 사라지고 주체만이 남는 상태를 해탈이라고들 부른다.
그리고 그 길을 걷는 방법은 백인백색이다.
이 책은 괴로움을 덜어내기 위해 수많은 길을 헤매다 자신만의 빛을 찾은 이의 글이다.
저자 자신이 전통이라는 틀에 구속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인지 저자의 공수 스타일은 신점보다는 복술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꼭 점사가 아니더라도 이미 모든 것에는 의미가 있으며 그것을 살필 줄 아는 예민함이 필요할 뿐이라고 말하는 저자의 삶의 태도가 보기 좋았다.
너와 내가 다르지 않더라도 각자의 단계에서 '지각'의 중심점은 필요하다. 그렇기에 스스로를 아끼고 보살펴 줄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이가 타인에게도 사랑을 전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쪼록 앞으로도 세계의 샤먼들을 만나고 한국의 샤먼을 소개하며 전지구적 공감을 지속해주시기를.
즐겁게 읽었다.
- 진갈색 천장에 검은색 소파가 있는 카페에 앉아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 출근 시간을 넘긴 카페는 한산하다. 카페에서는 재즈 음악이 잔잔하게 흘러나온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일할 준비를 한다. 아이패드 배터리는 충분히 남았고, 이어폰은 배터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유선 이어폰으로 챙겨 왔다. 커피는 미리 준비해 간 텀블러에 담겨 나왔다. 아메리카노 향을 맡으면서 아이패드를 열고 이어폰을 끼면 손님에게서 카톡이 온다. 오늘은 30분 전화 상담이 있는 날이다.
- 나는 신당 대신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점사를 보고 색색의 한복 대신 편안한 무색 면바지를 입고 다닌다.
- 여전히 나는 그런 표정이 낯설다. 많은 무당이 비극적인 일들을 치르며 무당의 길을 가기도 하지만, 무당이 된 것 자체가 비극적인 일로 보이는 건 이상하다.
- "스님은 왜 스님이 되셨어요?"
스님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평범한 직장인이었어요. 제가 종교인이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고요. 어느 날 우연히 절에 머물게 되었어요. 절에서 명상하고 청소하고 밥해 먹는 일상이 너무 행복한 거예요.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그 순간이 잊히지 않았어요. 마치 처음 달콤한 케이크를 맛본 사람처럼요. 그 달콤한 케이크를 계속 먹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스님이 되었어요."
- 나도 그런 케이크를 발견할 수 있을까?
- 무당이 된 후 가장 좋은 점은 누군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할 수 있다는 점이다. 모든 존재를 끌어안을 수 있고 정화할 수 있는 이 직업이 좋다.
- 나는 동시성으로 점을 본다. 동시성이란 어떤 사건들이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뜻한다. 나의 컨디션에 따라 찾아오는 손님들의 컨디션이 달라지고, 매일매일의 날씨에 따라 찾아오는 손님들의 얼굴도 달라진다. 내 몸의 상태나 내가 처한 상황에 따라 오시는 손님들의 기운도 달라진다.
- 손님들이 나를 발견하게 되는 행위 자체가 이미 점을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할 수 있는 수많은 일들 중에, 핸드폰을 켜서 유튜브로 들어오고, 유 튜브의 수많은 채널 중에 내 채널로 들어와서 하필 주간 운세를 이 시점에 보게 된 행위 자체가 점을 보는 것과 같다. 마치 여러 장의 타로 카드 중에 한 장을 뽑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우연은 없다. 나는 이런 우연의 조각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오늘도 내가 느끼는 진실을 운세로 풀어서 유튜브에 공유한다. 그러면 동시성이 통하는 사람들이 내 유튜브 채널로 찾아와 운세를 보게 된다.
- 매일매일이 기적의 연속이고 신기한 일들의 반복이라는 걸 느낀다. 건조하게 보면 한없이 무의미해 보이는 일상의 조각들이 사실은 동시성으로 긴밀하게 연결된 에너지체다. 무당은 이런 동시성을 예민하게 감각하고 알아채는 걸 훈련한 사람이라고 느낀다. 신령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옆에 와 앉아서 이야기해 주는 존재라기보다는, 동시성으로 매 순간 함께 존재하는 에너지의 작용에 가깝다. 나는 그것을 예민하게 알아차리고 전달하는 사람이다.
- 나는 처음부터 무당이 되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예술 작업을 하던 나는 좀 더 직접적으로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직업, 죽음과 사후 세계를 탐구할 수 있는 직업, 모두를 위해 기도하고 행동할 수 있는 직업옷을 입고 수행하고 싶었다. 그래서 종교인이 되고 싶었다.
- 그러다가 불교 수행을 하는 것은 어떨까 생각하게 되었다. 수행 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방식, 글과 그림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스님들을 많이 봐오기도 했고, 내가 원하는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몇 년 동안 세상과 단절되는 수행이 필요하다면 그것도 할 수 있다고 느꼈다. 마침 삭발도 했으니, 이대로 절에 들어가서 수행 생활을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안녕하세요. 저, 스님이 되고 싶어서 전화드렸는데요."
- 스님은 자세한 생활 방식과 스님이 되는 절차들을 안내해 주었다. 스님의 목소리가 다정해서 안심하고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2년여의 수행 생활을 마친 후 어디로 갈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했다.
- 고작 타투 때문에 스님이 되지 못하는 것이 허무한 게 아니라, 타투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수행처가 허무했다. 만물의 상생을 이야기하는 종교에서도 타투한 몸은 세속적으로 보인다는 이유로 밀려난다.
- 정서적으로 극한에 몰리면서 나는 사주 명리와 주역, 점성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찾아온 이런 고통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게 기존 언어에는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 나는 인도에 가기로 했다. 꿈속의 노라가 알려준 출구가 인도에 있을 것 같았다. 인도는 옛날부터 서천서역국으로 불리던 곳이라서 끌렸다. 한국 무속신앙의 조상인 바리데기 이야기에도 서천서역국이 나온다.
- 반수면 상태로 거의 잠만 자면서 지내던 어느 날, 잠에서 깨면서 문장을 봤다.
'몸을 움직여라.'
- 몸을 일으켜 산책하러 나갔다. 산책을 하다가 '부토스쿨'이라는 곳의 홍보 포스터를 보게 되었다. 부토는 일본에서 시작된 춤으로, 영혼의 춤이라고도 불린다. 전쟁이 끝난 후 폐허가 된 땅에서 예술가들이 추기 시작한 몸짓이었다.
- 눈물이 흐르고 입이 벌어졌다. 깊은 설움을 느꼈다. 나는 춤을 추다가 말고 바닥에 옆으로 누워서 울고 있었다. 그때, 공간 뒤편으로 밀려났다. 내가 누구였는지 기억이 안 났다. 한 발짝만 더 걸어가면 내가 소멸한다고 느꼈다. 발 디딜 땅이 없는 느낌에 아찔해졌다. 이것은 트랜스 상태였다.
- 포도와 나는 종종 샤머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였는데, 그런 포도가 내 상태를 알아채고 사람들에게 방울을 가져오라고 말했다. 곧이어 누군가가 방울을 가져왔고, 포도가 내 귀에 대고 방울을 흔들어주었다. '딸랑딸랑' 맑은 방울 소리가 울렸다. 방울 소리가 들리자 안개가 걷힌 것처럼 주변이 깨끗해졌다.
- 신 선생님은 하얀 버선과 연보라색 한복 치마를 건네주셨다. 한복을 입고 보라색 신당에 들어가 옥수를 올리고 신령님께 인사를 드렸다.
- 나는 샤먼이나 무당이나 같은 말인데 그것을 바꾸라고 하는 아빠의 말이 웃겨서 깔깔 웃었다. 이상했다. 왜 무당을 무당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샤먼이라고 불러야 할까.
- 샤먼의 어원은 '보는 자'다. 모든 것을 보는 자. 무당의 어원은 '묻는 자'다. 모든 걸 보는 위치의 샤먼이라는 단어도 좋지만, 묻는 사람을 뜻하는 무당도 나는 좋다.
- 무당이 되기 전과 후, 내가 듣는 말은 이렇게 달라졌다. 왜 이렇게 다른 말을 듣게 되는 걸까. 나는 예술가와 무당이 다르지 않은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한과 흥을 표현하는 직업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 내가 좋아하는 무당 고 김금화 선생님은 이런 말을 했다.
"굿은 종합예술이에요. 편견을 내려놓고 허심탄회하게 즐기는 종합예술로 바라봐줬으면 좋겠어요."
'무당도 결국 됨됨이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던 그녀는 길 위에서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추모굿을 하기도 했다.
- "어머, 등 뒤에 십자가가 떡하니 있네!"
내림굿을 할 때 신 선생님이 방방 뛰고 있던 나에게 말했다.
"십자가요? 아, 나 교회 다녔었지."
- 모임을 마치고 우리는 근처 먹자골목의 맛집에 찾아갔다. 가게 담벼락에는 커다란 그라피티가 그려져 있었다. '신들도 반한 그 맛'이라고 적힌 문구 위에 유대교의 랍비, 부처님, 외계인, 예수님, 힌두교의 시바신이 둘러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가운데에 떡하니 자리한 외계인은 후광을 품은 채 면발을 먹는다. 그림을 보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 들꽃도 나처럼 질문이 많아서 교회를 나오게 되었다. 관습을 의심한다는 이유로 '미신'에 현혹되었다는 오명을 쓰고, 질문한다는 이유로 믿음이 부족하다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교회를 나온 우리였다.
- 7시 기상, 꿈 일기 쓰기, 기지개, 양치, 물 마시기, 비트 주소 마시기, 커리 산책, 커리 발 닦기, 커리 눈곱 떼고 털 빗기, 기도와 명상, 기도문 쓰기, 걸레질하고 빨래하기. 나의 아침 일과다.
- "나는 책을 보면 하품이 나와. 그래서 책을 안 봐."
책을 읽고 있는 내 옆으로 살며시 다가온 신 선생님이 말했다.
- 책 읽는 내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던 선생님은 하품은 신이 들어오거나 나가는 신호라며, 어떻게 책을 읽고 쓰기까지 하냐고 말했다. 처음 신 선생님에게 내 책을 선물했을 때도 그랬다. "야야, 너는 진짜 신기한 짬뽕이다."
- 무당의 종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강신무와 학습무. 강신무가 내림굿을 통해 무당이 된 거라면, 학습무는 말 그대로 공부해서 무당이 되는 경우를 말한다. 그러니까 선생님의 말은 나는 학습무와 강신무가 짬뽕된 무당이라는 표현이다. 선생님뿐 아니라, 다른 많은 무당이 특별한 학습무가 아닌 이상 책을 가까이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 답장을 보낸 뒤 생각이 많아졌다. 무당은 책을 읽지 않는 편이 좋다고 말하는 것을 나도 자주 들었다. 신령님과의 소통을 방해하고, 신령님과 소통해서 점을 보는 능력을 방해한다는 이유였다. 어떤 점에서는 일리가 있는 말이다. 나의 직관과 마음을 믿지 못하게 하는 책들이 이미 많기 때문이다. 백인 남성 저자가 쓴 철학적 권위를 얻은 책들, 비장애인 남성 중심의 서사 구조로 이루어진 많은 문학과 비문학이 그렇다. 그런 책을 읽는 동안 나도 모르게 학습하게 되는 편견이 있다.
- "좌절하고, 불안해하며, 삶의 한계 상황에 봉착한 여성이 신병을 앓는다는 것은 소극적으로 자신의 삶의 질곡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 혹은 요구 그 자체만은 아니다. 절망의 극한 상황에서 창조적 기능을 하는 사람의 자리를 적극적으로 찾아내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이다. 이것이 기존의 남성적 서사구조를 잘게 부수고자 하는 변주에 대한 욕망이다."
- 김혜순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 동물과 식물, 사물에도 존재가 깃들어 있다. 바로 '정령'이다. 정령은 만물에 녹아 존재한다. 땅과 바람, 음식물쓰레기, 책상, 쌀알에도 정령이 숨 쉰다. 그래서 무당은 쌀알을 뿌린 후 '아무렇게나' 배열된 쌀알로 점을 본다. 정령의 기운을 읽고 소통하는 것이다.
- 오랫동안 궁금했다. 산업이 성장하고 경제가 성장하려면 누군가의 희생이 정말 필요한 걸까. 나는 땅의 신 파차마마에게 기도드리며 질문했다.
"정말 희생이 있을 수밖에 없나요? 희생 없이 공존할 방법은 없나요?"
곧이어 파차마마의 응답이 들렸다.
"그래서 사물을 준 거야. 물, 불, 공기, 흙. 다른 말로 나무, 불, 흙, 금, 물. 그러니까 의자 하나도 소중히 다루고 쓰레기 하나에도 신성이 깃들어 있다는 걸 알면 돼. 물건 함부로 대하면 다 되돌아오는 거야. ... 그 사물 같은 존재들에게도 무의식과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걸 잊지 마. 우린 (땅은) 너네가 무엇이든 아끼는 마음으로 쓰길 바랄 뿐이야."
- 지난 5월,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앞에서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지구를 위한 소풍'이 열렸다. 네 명씩 돗자리를 깔고 앉아 차를 마시거나 그림을 그리고, 바자회를 열었다. 나는 붉은색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붉은 정령' 퍼포먼스를 함께했다. '붉은 정령'은 영국에서 시작된 기후위기 퍼포먼스 그룹으로,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멸종에 저항하는 이름으로 연대하고 있다. 나는 함께한 세 명의 동료들과 4원소를 명상하며 기도를 드린 뒤 붉은 옷을 입고 거리를 행진했다. 아스팔트 바닥에 손바닥을 대고 땅의 진동을 느껴보기도 하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기도 했다. 붉은 천들이 바람에 나부낄 때마다 몸이 함께 떨렸다. 함께 울고 웃는 만물의 정령이 느껴졌다.
(리뷰자 주 : 'Red Rebel Brigade'를 말하는 듯하다. 90년대의 'Invisible Circus'에서 시작된 저항 퍼포먼스로, 이들의 경우 흰 얼굴과 붉은 옷을 조금 다른 상징으로 쓰고 있다.)
- 하지만 지금도 돼지 머리를 올리는 게 효험이 있는 일일까?
- 모든 제물에는 대가가 따른다. 제물을 바친 사람은 그보다 배로 다른 이들에게 베풀어야 온전히 자신에게 복으로 돌아올 수 있다. 덕을 쌓으면 복을 받는다는 당연한 말처럼, 굿에도 그런 이치가 작동한다.
- 사육장에서는 그들의 비명이 끊이지 않고, 그들의 고통은 한이 되어 몸에 저장된다. 우리는 식탁 앞에 놓인 그들의 한을 먹는다. 돌고 도는 한의 수레바퀴를 끊어내는 게 무당의 역할이라면, 나는 어떻게 이 광경을 마주해야 할까. 신령이 정말 억울하게 죽은 생명의 한을 먹고 싶어 할까? 억울한 죽임을 당하는 그들에게 공감하고, 그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비거니즘을 결단하고 실행하는 게 신령의 힘 아닐까?
- 비건은 단순히 고기를 안 먹는 생활 방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모르는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 그 상태로 살아가겠다는 지향이다. 들리지 않는 고통에 귀 기울이고, 내가 등진 아픔은 없는지 살피는 태도다.
- 물론, 옛날에도 일대일 도제식 교육을 받지 않고 바로 점사를 보고 굿을 보는 무당들은 존재해 왔다. 그래서 어떤 무당은 꼭 신 선생님에게 교육을 받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다. 영이 눈을 뜨면 알아서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니까 일상적으로 기도하게 되고, 굿의 절차를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춤사위가 나오고, 점을 보는 방법을 익히지 않아도 저절로 입에서 공수가 나오는 경우다. (어떤 무당은 이런 무당이 영험한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어떤 무당은 교육을 제대로 받아야 좋은 무당이 된다고 이야기한다.)
- "제가 굳이 살을 치지 않아도 손님이 살을 치고 있어요.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면, 미움받는 상대방은 물론 손님에게도 살이 돌아오거든요."
내가 손님들에게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 마음과 용서를 강조하는 이유다.
- 안은영의 신당은 학교 보건실 사물함 안에 있다. 사물함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이집트에서 온 앙크 십자가, 일본의 고양이와 한국의 하회탈, 아메리카 원주민의 드림캐처, 무속신앙의 색색 부적, 오색 방울, 명두와 구슬, 불교의 연꽃과 부처님상 등 거의 모든 종교의 신물들이 모여 있다.
- 스튜디오로 향하는 길에는 내 목소리로 녹음된 인터뷰 내용을 들으면서 답변할 내용을 되새겼다. 말은 한번 뱉으면 주워 담을 수 없다. 나는 나의 말이 무섭다. 내가 무심코 하는 말에서 누군가가 소외감을 느낄까 봐, 누군가를 배제하는 언어를 쓸까 봐 내 언어를 점검하고 수정한다. 나의 말은 퇴고를 거듭하는 글쓰기 과정과 비슷하다. 마음을 표현하는 편지를 쓰듯이 미리 그 사람과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 생각하고 적어놓는다. 즉흥적으로 모든 걸 할 수 있는 초능력자가 아닌 나는 연습하고 준비하는 무당이다.
- 조금 일찍 도착한 스튜디오 안에서 향을 피웠다. 사람들을 만나기 전, 마지막으로 마음을 비우는 과정이다. 샌달우드 향이 스튜디오 안을 흠뻑 채웠다.
- 운명을 다룬다는 사람들이 기존 세계의 고정관념과 인식 틀을 가지고 타인의 삶을 편향적으로 해석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한 사람의 운명을 좁은 식견에 가두고 자기 인식의 한계를 타인의 삶의 한계라고 착각하는 거다.
- 운명, 흔히 팔자라고 하는 게 정말 정해진 걸까. 사주 명리는 기호라서 무한하게 해석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운명의 여덟 글자(팔자)는 바뀌진 않지만 무한한 변주곡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운명이란 명을 운전한다는 뜻이다. 같은 사주팔자라 하더라도 그 사람이 어떻게 변주할 것인가는 그 자신의 의지, 그를 둘러싼 편견과 고정관념을 생산하는 교육, 그와 주변 환경의 일상적 상호작용에 따라 달라진다. 당연하게도 나를 둘러싼 환경과 세상이 나아져야 운명도 나아지는 거다.
- 운명학은 개개인의 삶을 신화로 만드는 미신이 아니라 고정된 언어를 해체하고 삶을 다르게 해석해 보자는 실천에 가깝다. 고정된 관념을 자꾸 버려야 하는 이유는 삶의 무한성을 파괴하지 않기 위해서다. 운명은 하나의 좁은 직선 도로가 아니다. 뻔한 관념은 있어도 뻔한 인생은 없다.
- "손님 같은 경우엔 가까운 정신과에 찾아가서 약을 타는 것도 도움이 될 거예요.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엑스터시, 황홀경을 경험해요. 그런 것처럼 가슴 뛰게 만드는 음악을 자주 들으세요. 스스로가 즐거워하는 걸 자주 해주세요. 또 한 가지 좋은 방법은 글을 쓰는 거예요. 글을 쓰면서 의식화되지 못한 나의 무의식을 볼 수 있어요. 그게 나의 신명과 소통하는 과정이기도 해요. 이렇게만 하셔도 마음이 안정되고 운이 좋아질 거예요. 너무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원래 진실은 단순하니까요."
- 어떻게 해도 안 되고, 다른 길이 없다고 느낄 때 내림굿을 받게 된다. 내림굿을 받은 입문자는 자기 아픔의 주인이 되어 살아온 지난날을 적극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게 된다. 내가 힘들었던 이유가 내가 잘못해서,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신의 뜻이자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게 되면 내가 겪은 고통을 다르게 해석하고 재구성할 수 있다. 자신만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 무엇에든 기대게 되는 것은 의지가 박약하거나 우스운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누구나 무언가에 대한 간절함이 생기면 본능적으로 더 나은 답을 찾으려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타로 카드를 펼쳐볼 수도 있고, 여기저기 고민을 들고 다니면서 조언을 구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순간은 선택의 연속이다. 선택이 아닌 것이 없다.
- 선택을 잘하고 싶은 마음은 인생에 정답이 있을 거라는, 더 나은 선택이 있을 거라는 믿음에서 온다. 나는 이런 손님들에겐 오히려 '운명'이 있고, 모든 건 운명대로 가기 마련이니 흐르는 대로 선택하고 후회하지 말라고 말하는 편이다.
-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느낌으로 건반과 손가락이 친해지고 있는 요즘이다. 피아노 선생님이 내 옆에 앉아서 메이저와 마이너의 원리와 건반을 설명해 줄 때 나는 전에 느껴보지 못한 경이로움을 느꼈다. 양과 음의 원리처럼 희고 검으며, 주역의 팔괘처럼 8도의 옥타브가 생기는 피아노의 건반이 신비롭고 낯설게 다가왔다.
- 나는 동녀를 위해 가끔 과자를 먹는다. 동녀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맛있는 과자를 먹을 때다. 따뜻한 목욕도 좋아해서, 목욕을 할 때 어린아이의 몸을 닦아주듯 정성스럽게 내 몸을 닦게 된다. 동녀와 함께하는 일상은 달콤하고 즐겁다. 함께 과자를 먹고, 다 배우지 못한 피아노 건반을 치고, 따뜻한 목욕을 시켜주게 한 동녀가 곁에 있어서 하루가 다채로워졌다. 동녀를 만난 후 나를 돌보는 일을 부차적인 일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 어쩌면 동녀가 나를 돌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동녀에게 묻는다. '다음엔 뭘 하고 싶어? 아직 다 배우지 못한 자전거 타기? 여전히 무서워하는 공놀이?'
- 누구에게나 함께하는 동녀, 동자가 있을지 모른다. 그들은 심리학에서 '내면의 어린아이'라고도 불린다. 그래서 한껏 상처받은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 꼭 내 안의 동녀, 동자를 인식하지 않더라도, 나를 돌보는 마음으로 하루에 30분쯤 자신을 아껴주는 시간을 마련하는 일은 내 안의 신령에게 기도하는 일과 같다.
-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공부하는 시기는 영적으로 기도하는 시기와 기운이 같다. 혼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을 탐구하고, 외부 자극이 최소화된 상태에서 자신에게 집중하고, 몰입하는 시간을 갖는 공부는 기도나 명상과 비슷하다. 그러니 시험에 불합격했다고 해서 흉괘로 보기 어렵다. 불합격했다 하더라도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공부로 덕을 쌓아온 것이기 때문이다.
- 나는 점을 보러 오는 손님들에게 '믿게 되는 만큼만 믿으라'고 말한다.
- 흉한 점괘를 듣고 계속 찝찝함이 남고, 점사를 다시 보기도 어려운 상황이라면 점괘에 대한 내 생각을 글로 정리하는 것을 추천한다. 글로 생각을 정리하는 일은 공부처럼 기도나 명상과 비슷하니 액운을 모면하는 비방이 된다.
- 손님을 위해서 흉괘를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 사실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흉괘를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당인 내가 만나는 모든 인연과 장면들은 나의 거울이고, 손님의 점괘는 나의 점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잊고 무책임하게 흉괘만 말해주고 상담을 끝낸다면 손님의 액운은 고스란히 나의 액운으로 되돌아온다. 내가 한 말에 내가 베이는 것이다.
- 그날 이후 나는 연애 운을 보는 손님들에게 '남자친구', '여자친구'라는 말 대신 '애인'이라는 말을 쓴다.
- "근사한 꿈이네요. 앞으로는 손님이 꾸는 꿈을 모두 기록해 주세요. 영혼의 어두운 밤을 건너는 동안 꿈에서 중요한 메시지를 많이 받으실 거예요. 단편소설처럼 써보셔도 좋겠어요."
이야기를 건네자 손님은 꿈 일기를 적어야겠다며 하고 싶은 일이 생긴 것 같아 우울감이 덜해졌다고 말했다.
- "어두운 영혼의 밤을 건너고 나면 스스로가 알게 돼요. 다시 아침 해를 맞이할 때, 작은 것들을 느리게 보게 되는 순간이 곧 올 거예요. 저도 함께 기도해 드릴게요."
- "손님,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약도 계속 드시면서 하루하루 작은 것들에 집중해 보세요. 빨래도 천천히 개고, 냉장고 청소도 천천히 구석구석 해주세요. 천천히 하는 게 중요해요. 느긋하게 나와 내 주변을 돌보는 데 집중해 주세요. 그 안에서 새로운 메시지를 받을 수 있을 거예요."
- 우울증은 정직하게 세상을 느끼는 감각이다. 나무보다는 숲을 보는 때라 직관이 어느 때보다 열려 있는 시기다. 마음의 문이 열려 있어 그림자도 쉽게 포착할 수 있고, 몸의 문이 열려 있어 여러 기운의 영향을 받아 몸도 쉽게 무거워지지만, 그만큼 영적으로 깊어지고 영감을 많이 받는 시기이기도 하다.
- 나 역시 우울증을 앓았다. 아침에 눈뜨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 꿈속으로 이사한 사람처럼 온종일 잠만 잤다. 꿈에서는 내가 원하는 장면들이 펼쳐졌다. 그 꿈이 너무 좋아서, 이대로라면 죽는 것도 달콤하지 않을까 느꼈다. 영원한 잠을 잘 수 있으면 그것도 좋은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잠만 자던 어느 날, 생생한 자각몽을 꾸었다. 자각몽이란 꿈을 꾸면서 이것이 꿈인 것을 각성한 상태의 꿈이다. 자각몽 속에서 나는 하늘을 날아다니며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신났다. 잠에서 깬 후 어느 쪽이 꿈인지 헷갈렸다. 자각몽을 꾸는 것처럼 지금을 바라보니, 생 전체가 꿈 이야기로 보였다. 그렇게 보기 시작하자 무거웠던 몸이 가벼워졌다. 삶은 지금이라는 순간만 있는 아름다운 꿈이 아닌가!
- 악몽 같은 일도 다가오지만 결국 이 꿈에서도 이야기를 만들어갈 힘은 나에게 있다. 이 꿈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희미한 확신이 나를 다시 일으켜줬다. 자각몽을 꾸는 것처럼, 내가 지금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 내리면 작은 순간들이 눈에 보이고 일상의 장면이 생기를 얻게 된다.
- 휘황찬란하게 꾸며진 금색 가마 위에는 여섯 살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녀 쿠마리가 앉아 있었다.
- 일 년 전, 페루에 갔을 때였다. 페루의 샤먼을 만나기 위해 나는 아마존 이키토스로 향했다. 다른 지역에도 샤먼이 있지만, 흑마법(누군가를 저주하는 주술을 쓰거나, 개인의 권력을 위해 주술을 이용하는 것)을 쓰는 샤먼들도 있으니 좋은 샤먼이 많은 이키토스로 가라는 조언을 들었기 때문이다.
- 미카엘은 의식을 하기 전 하지 말아야 할 목록을 나에게 적어주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을 것, 술을 마시지 않을 것, 성적 행위를 하지 않을 것, 고기를 먹지 않을 것. 이렇게 네 가지를 꼭 지킨 후에 의식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 쓰디쓴 약초를 마시고 한참 후, 검은 뱀이 눈앞에 보였다. 죽음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 거대한 생명의 나무도 보였다. '너는 나무야. 생명의 나무.' 누군가 내게 속삭였다. 그리고 이어서 질문했다. '그런데 너 정말 죽음이 두렵지 않니?' 나는 캄캄한 죽음 앞에서 아찔해졌다. 내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 의식을 잃기 일보 직전, 미카엘이 옆에서 노래를 더욱 크게 불러주었다. 샤먼의 노래는 나를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해 주었다.
- 새벽 4시. 매일 같은 시간 눈을 뜬다. 아직 봄이 오기 전이라 방 안이 깜깜하다. 핸드폰을 들고 꿈 일기를 쓴다.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꿈에서 만난 사람, 사물, 이야기와 느낌을 적는다.
- 밤새 세탁된 마음은 텅 비어 있어서 고요하다. 내가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 글을 쓰는 동안 촛불의 심지가 꽃폈다. 내 소원이 이루어질 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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