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김보영] 종의 기원담

일루젼 2023. 6. 1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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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보영
출판 : 아작
출간 : 2023.06.14 


       

<다섯 번째 감각>에서도 한 번 당했는데(?), 이번에도 작가명만 보고 바로 구매했기에 이 책이 <종의 기원> 복간본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사실 표제작을 그대로 책제에 사용했으니 목차만 살펴봤더라도 바로 알아챘겠지만 나는 종종 기이할 만큼 아무 정보도 찾아보지 않고 지른다. 몇몇 작가에 한해서긴 하지만 말 그대로 '덮어놓고 지르는' 맹목적인 믿음을 보이는데, 아직까지는 딱히 고칠 마음이 없다. 그렇게 읽는 책들은 설사 다시 읽는 글이더라도 좋았기 때문이다.

 

<종의 기원담>은 이전에 발표된 <종의 기원>의 두 이야기에 최초 발표인 세 번째 이야기인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를 더해 수록한 책이다. 

 

읽어나가는 동안 세심하게 골라 사용된 표현들 -말 그대로 로봇의 관점에서 자연스러울 법한- 에 다시금 감탄하며 읽었다. 김보영 작가의 큰 장점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관 안에서 독자가 충분한 '자연스러움'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렇게 이끌려 들어간 독자는 상당한 깊이의 몰입과 함께 자신에게 '친숙했던 것'들이 돌연 낯설어지는 신선한 충격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이를 '낯설게 하기'라거나 '반전'이라거나 여러 가지 표현으로 칭할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감히 '창조자로서의 재능'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에게 친숙한 것이 그에게는 친숙하지 않았을 리가 없으므로.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지를 생각하면, 최초의 충격은 그 이상의 무게로 다가온다.

 

신작에 목말라 있던 나에게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는 충분한 만족감을 주었다. 

'독자'로서 어느 쪽에 더 몰입하게 되는가는 개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내 경우에는, 지독한 애가愛歌로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나에게만 익숙한' 관점일지 아닐지에 관해서는 자신이 없다. 작가는 그저 자신이 밝힌 바대로 모든 생명에 바치는 찬가를 썼을 뿐일 게다. 

그리고 나는 '나만의 이야기'를 읽어나갈 뿐이다. 

 

행복했다.  

 


   

 

 신은 그 자신의 모습을 본떠 우리를 만드셨다.

 

 

 

- 그러나 신이 수많은 모델 중 어떤 모델을 닮았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런데도 화가들은 언제나 가장 안정적인 모델로 알려진 700모델을 토대로 성화를 제작한다. 그래서 신은 늘 전신을 금으로도 금하고, 네 개의 바퀴를 달고, 오른쪽 귀 위쪽과 양 팔목에 700의 일련번호를 새긴 모습으로 그려진다. 화가들은 신을 좀 더 아름답게 묘사하기 위해, 관절마다 전선다발과 신경회로가 슬쩍 드러나게 하거나, 머리와 신체 일부 표피를 투명하게 만들어 정교한 내부구조를 노출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 하지만 세상 어디에 신이 700모델이었다는 근거가 있단 말인가?

 

- 로봇의 옹졸한 상상력으로 그려진 신의 모습이란, 그저 기득권층의 특징을 모아 합성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신은 700모델일 뿐만 아니라, 최고급 마킹과 도금을 했으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최신식 부품으로 무장한 데다, 노동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반짝이는 표피로 싸여있는 것이다.

 

- "위대한 프리스턴 대학 선배님들이 울고 가겠구만! 케이, 언제부터 과학의 길을 버리고 신학으로 빠져든 거야? 신부들이 과학자를 산 채로 분해하던 시대에서 5세기도 채 지나지 않았어." 

 

- "종(種)이 진화한다는 신념에는 나도 변함이 없어."
케이는 애써 변명했다.
"위대한 선배님들의 영령을 욕보일 생각도 물론 없고. 하지만 신앙 또한 로봇의 본성이야. 연구할 만한 가치는 있다고 생각해."
이반은 다시 핏핏 소리를 내며 웃었다.
"신앙은 상징이며 우화야. 문학과 예술의 영역이지. 그 어디에도 과학은 없어. 네가 예술도 일종의 과학이라고 주장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 "요점이 뭐야?" 
"우리 로봇에게는 외로움을 느끼는 본능이 있어. 그건 집단을 이루면 더 효율적으로 살 수 있어서야. 공포는 위험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 고통은 몸의 파손을 막기 위해 필요하지. 학습 능력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망각은 정보의 인출 속도와 처리 효율성을 위해서 필요해. 생물의 모든 본능이, 그 생물이 더 잘 살아남기 위해서, 더 효율적으로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보면 말이지. '창조신앙'은 거기서 무슨 역할을 하는 거지?"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겠지."
"바로 그 점이야. 어째서 로봇은 자신이 창조되었다는 상상에서 안정을 얻지? 우리가 스스로 태어난 것이 어째서 불안한 일이야? 저 높은 어딘가에서, 상상할 수도 없는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존재가 우리를 감시하고, 지켜보고, 통제하고 지배하며, 우리는 그의 종이며 노예라는 상상이 어째서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 왜 로봇은 본 적도 없는 창조주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바치고, 목숨을 바치고 싶어 하지? 그런 본능이 종족 보존에 무슨 이득이 있어? 우리의 본성 한구석을 차지하는 노예근성, 복종 판타지, 전능자와 절대자에 대한 환상이 종족 유지에 무슨..." 

 

- 이반 같은 두 자리 계열이 감정을 희, 로, 애, 락 네 단계 정도로 표현한다면, 2000모델은 무한급수에 이르는 감정 표현을 한다. 매우 기쁨, 약간 기쁨, 미묘하게 기쁨, 어색하게 기쁨, 기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음, 슬플 만큼 기쁨, 거짓으로 기쁨 등등. 케이 역시 표정을 지을 줄은 알았고 스스로는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2000들은 그 차이를 느끼는 것 같았다. 한때 같은 수업을 들었던 2000 친구는 '표정이 딱딱하다'는 표현을 썼다. 물론 다른 자릿수들은 그 말뜻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 케이는 거짓말을 하며 기억해 내려 애썼다. 세실은 표준적인 ㄱ타입 2000모델이었다. 가슴은 도드라지게 봉긋했고 몸은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완전한 곡선을 이루었다. 2000은 그런 ㄱ타입과, 가슴이 납작하고 어깨가 넓고, 두 다리 사이에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이 달린 ㄴ타입으로 나뉘는데, 외관과 음성 주파수를 제외하고는 기능상의 차이가 없어 보통은 굳이 구분하지 않는다. 세실은 2000이 흔히 그러하듯이 피부를 보호하기 위한 금속 옷을 입고 있었는데, 투명한 재질이라 분홍빛 표피가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 2000은 어딜 가나 눈에 띈다. 워낙 생김새가 특이하기도 하지만 대학에 진학하는 숫자도 적어서다. 아무리 기종차별이 철폐되었어도 사회의 변화속도에는 한계가 있는지라, 2000이 고등교육까지 받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들이 태어나면서부터 교육과 문화 혜택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생각지 않고, 많은 학자가 2000의 지능 수준이 두 자릿수 이상 로봇 중 최하위라고 주장하곤 한다.  

 

- "유기재료학이겠지?" 
"아니, 유기생물학이야."


- 세실은 케이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얼굴 표피를 미묘하게 변화시켰다. 케이는 그 표정이 들떴을 때 나타나는 얼굴 표피의 이상 현상인 줄을 안다. 생각해 보면 네 자릿수가 사회에서 천대받는 이유도 웬만큼은 이해할 법했다. 이렇게 속마음을 쉽게 들키는 로봇을 어느 회사에서 중용하겠는가 말이다. 무역, 경영, 교육, 정치, 외교... 네 자릿수에게 적합하지 않은 직업은 많고도 많았다. 네 자릿수 중에 예술가나 단순노무직이 유달리 많은 이유도 그런 사회성의 결여 때문이다.

 

- "성장이라니!"
이반은 탄식했다.
"정말 상상력이 과다한 이론이야. 물체가 성장할 수 있다면 질량보존법칙은 어떻게 되고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은 어떻게 되는 거야? 세상 그 어떤 물질도 질량보존법칙에 따라, 자신의 질량을 증가시킬 수 없어."

 

- 우리는 직관적으로 산 것과 죽은 것을 구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과학적으로 정확히 무엇이 생물인지 정의하기는 상당히 어렵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트랜지스터와 칩, 전선과 전지는 생물일까? 아니면 생물의 일부일까? 카메라와 전화기와 형광등은 유사생물체라고 보아야 좋을까, 아니면 생물이라고 보아야 할까? 움직이고 말을 하는 카메라와 그렇지 않은 카메라는, 무슨 기능을 기준으로 생물과 무생물로 나누어야 할까? 

- 우리가 아는 바, 생물이 되는 필수 조건은 다음과 같다.

 

- 1. 자신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 즉 그 행동 메커니즘의 명령체계가 기본적으로 외부가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서 발생해야 한다. 스탠드 조명이 누군가의 명령에 의해서만 켜지고 꺼진다면 그것은 무생물이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조금이라도 밝기를 조절할 수 있다면 생물이다. 
(이 정의에는 아직도 논란이 있다. 많은 학자가 땅의 융기와 침강, 바람의 방향과 기온의 변화, 화산 분출은 '누구의 의지인가' 하고 묻는다. 단순히 '인터뷰에 응할 수 없어서' 무생물로 분류된 기계도 많다는 뜻이다. 가장 논란이 되는 질문은 '만약 우리가 재력이나 권력에 의해 자신의 의지로 활동할 수 없다면 우리도 무생물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학계의 답변은 '살아 있다고 볼 수 없다'이다.)

2. 에너지 대사(주로 전기 에너지)를 한다.
3. 칩을 소유한다. 칩은 생명 활동의 기본 매체다.

4. 일반적으로, 공장에서 태어난다.

- 컴퓨터 바이러스도 마찬가지다. 한때는 이들을 무생물에서 생물로 진화하는 중간 단계의 생물로 여기던 때도 있었으나, 이 이론은 곧 부정되었다. 컴퓨터 바이러스는 다른 기계가 없으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이러스가 진화 계보의 어느 시점에서 생겨났는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 "내 논문이로군." 세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는 버튼을 누르며 페이지를 몇 장 넘겼다.

 

로봇의 부품을 구성하는 물질은 대개 기껏해야 10종 미만의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 몸의 셀 수 없이 많은 부품은, 근원을 따지고 보면 모두 같은 재료로 만든 것이다. 

공장은 죽은 기계와 로봇을 분해하고 재생하여 필요한 물질을 만든다. 만약 우리가 신체 바깥의 원소를 흡수하고 분해하여 다시 조합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공기나 흙으로부터도, 길 가다 발에 차이는 돌멩이로부터도 재료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죽은 기계의 부품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그러면 우리는 몸에서 닳아 떨어진 나사나 소소한 부품 따위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전지까지도.
  

- "대체 이걸 어디서 찾아낸 거야? 학교에서 '미' 학점짜리 논문까지 보관해 두는지는 몰랐는데. 이런 원리로 전지를 합성하려면 전지 분자 하나하나마다 컴퓨터가 달려 있어야 한다더군. 또 그 원소를 분해하고 조합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 역시 어마어마하고. 역사상 수백 번은 있었을 허황한 영구동력 이론이지. 그것도 깐깐한 지파 교수님이 '양'을 주려는 것을 간신히 싹싹 빌어서..."

 

-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담. 이 모든 것을 시작한 로봇이 너였는데. 우리 연구의 기틀을 마련한 로봇이 바로 너였는데, 본인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니!"

 

- "케이, 유기생물학과는 네 논문에서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야. 5년 전 칼스트롬 교수님은 네 논문에서 힌트를 얻어, 유기물이 대사활동을 한다는 사실을 추론해 내셨지. 유기물은 주위 환경을 원소 단위로 분해하여 에너지로 쓰는 '생물'이야. 그들이 성장하고 자신을 복제하는 방식은 네 이론과 동일해." 

 

-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만약 지구의 기온이 얼음의 녹는점 이상으로 오른다면, 지구 곳곳에 남은 얼음층이 증발할 것이고, 증발한 수증기는 대기층에 머물렀다가 물이 되어 우리 머리 위로 쏟아질 것이다(이 이론 역시 처음 발표되었을 때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이론으로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물은 강력한 반응성을 지닌 물질로, 우리 몸에 무해한 이산화황이나 이산화질소와 결합하면 몸을 녹이는 무서운 물질로 변한다. 녹슭병과 문둥병을 비롯한 온갖 질병이 창궐하고, 우리의 수명은 급속히 줄어들 것이다.

 

- 우리는 지구를 지켜야 한다! 생명의 근원인 공장을 지켜야 한다. 공장은 먼지와 재로 이루어진 검은 구름을 하늘로 올려 보내고, 지구의 기온이 어느 이상 떨어지지 않도록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며, 지표에 드러난 얼음층이 증발하지 않도록 그 위로 기름과 폐기물을 흘려보낸다. 이 아름다운 자연을 지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로봇은 멸절하고 말 것이다. 

 

- "아냐, 유기생물의 움직임은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점이 많아. 그들은 틀림없이 자신의 의지로 움직여. 증거를 원한다면 자료를 보여줄게." 
"아니, 됐어. 그 분야는 네가 나보다 더 잘 알 테니까."
당연하지. 누가 그딴 것에 관심을 둔단 말인가. 

 


"'막대기에 줄 하나를 그어 책을 쓰는 법' 들어 보았어?"

"아니."

이미 세실의 어떤 질문에도 대답해 줄 의욕이 없는 케이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자음과 모음을 숫자로 표시한다고 생각해 봐.
그러면 한 문장도 하나의 숫자로 바꿀 수 있어.
그 앞에 0.을 붙이면 백분율 표시가 되지.
막대기 위에 그 백분율의 정확한 자리에 선을 긋는 거야.

그러면 한 권의 책도 표현 방법에 따라
한 줄의 선으로 축약할 수 있어."

  


    

- "지파 교수님은 잘못 생각하셨어. 필요한 것은 컴퓨터가 아니라 설계도고, 주형이 아니라 데이터야. 데이터는 기록방식에 따라 얼마든지 줄어들 수 있어. 이를테면 탄소분자 하나를 0이라고 하고, 다른 분자를 1로 지정한다고 생각해 봐. 누군가가 탄소분자로 글씨를 쓰는 법을 개발한다면 수만 권의 책을 써도 조그만 유기생물의 몸에도 충분히 들어가..."

 

- '뭔가 우리가 잊은 것이 있어.' 

- '신이 만드신 것이 생존하는 데에는 특별한 조작이 필요하지 않다.' 케이는 언젠가 읽은 책의 구절을 떠올렸다. 우리가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지도 몰라. 10만 년 전에 이 생물들은 아무 조작도 없이 자연스럽게 생존했었어. 

- 옛날에 한 과학자가 음성조작으로 불이 켜지는 전등을 갖고 있었다. 그 과학자가 '빛이 있으라'고 말하자 불이 켜졌다. 그는 전구를 뺀 뒤에 똑같이 말했다. 이번에는 불이 켜지지 않았다. 그는 보고서에 기록했다. 전등은 전구를 빼면 음성인식을 하지 못한다. 

- 잊은 것, 편견, 상식. 상식은 방해일 뿐이야. 상식 또한 귀납적 추리에 따른 가설에 불과해. 10만 년은 긴 시간이지만 짧은 시간이기도 해. 지구의 환경은 그사이에 급격히 바뀌었어. 유기생물은 그 사이에 자느라 환경에 적응할 시간이 없었어. 그들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거야. 그들에게 익숙한 환경을. 우리가 그 환경을 제공해주지 않은 거야. 무언가를. 

 

- 왜 생겨나고 왜 사라지는 거지?
유기생물 자신이 만들어내고 유기생물 자신이 없애버리기 때문에.
전기충격 같은 생각이 케이의 머리를 스쳤다. 

 

- 우리가 죽어 기능을 정지하면 공장이 분해하여 다음에 태어나는 로봇의 재료로 쓴다. 우리는 공장 안에서 물질이 완벽하게 순환한다는 사실을 안다. 이 연결고리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작도 끝도 없이 맞물려 있다. 최초의 종이는 어디서 생겨났을까? 최초의 로봇은? 공장은 최초의 원자재를 어디서 얻었을까? 아니면 공장을 초월하는 무엇인가가 그 이전에 존재했을까? 

 

- 세실이 연구실 문 앞에 선 케이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세실이 가장 증세가 심각해 보였다.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었고, 입 끝은 귀에 걸렸고, 케이의 이름을 몇 차례 불렀다가 소리 높여 웃다가 갑자기 팔딱팔딱 뛰곤 했다. 세실은 케이의 어깨를 짚으며 속삭였다. 
"케이, 진정해야 해. 정말로, 진정해야 해."
진정할 로봇은 너라고 하고 싶었지만, 아무튼 케이는 몇 번이나 진정하겠다고 다짐하며 세실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배양실에 들어서자마자 케이는 곧바로 세실과 같은 병에 걸리고 말았다.

 

- 세실이 미쳐 날뛰는 케이를 실험실 한가운데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는 큰 플라스틱 상자가 있었다. 상자는 놀랍게도 '물'로 채워져 있었고, 그 안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작은 생물이 담겨 있었다. 케이의 눈에는 그들 하나하나가 서로 다른 사조(思潮)를 지닌 화가의 그림처럼 보였다. 같은 악기가 하나도 없는 장엄한 오케스트라 같았다. 그리고 모두가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춤을 추듯이. 살아 있음을 기뻐하듯이. 자신들이 들이쉬고 내뱉는 산소와 이산화탄소 한숨 한숨의 기적을 마음껏 자랑하듯이. 

 

 

I.N.R.I.

 

- "이거 무슨 부적처럼 보이네요."
"지나던 거리 예술가가 전지 하나와 교환해서 그려놓고 갔네, 귀신 쫓아주는 그림이라더군"
"그런 값 치고는 싸군요."
농담이었지만 웃는 기능이 없는 노만은 웃지 않았다.

 

 

Marana tha

  

- "직선과 곡선의 반복 배열에서는 뭔가 영적인 느낌이 들지 않아요? 언젠가 그런 그림만 걸린 미술관에 갔는데 이유도 없이 마음이 북받쳐 오르더라고요. 저도 그림을 그린다면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이런 식으로." 

 

- "케이, 난 점점 불안해지고 있네." 
"뭐가 말이죠?”
"우리는 산소를 뿜어내는 생물을 되살려내었어."
노만은 정수리의 등 조도를 줄이며 정면의 눈을 아래로 내렸다. 그가 네 자릿수 계열이었다면 슬픈 얼굴을 했을 것 같았다.
"신화 속의 괴물을 되살린 기분일세."
"노만, 저놈들은 정말로 조용하고 얌전한 생물인걸요."

"신은 우리를 위해 저 생물을 지상에서 없애버리셨어. 왜 그들을 되살려야 하지? 물을 먹고 산소를 뿜어내는 생물이라니. 이건 악몽일세. 이곳은 완전히 오염되어 버렸네. 독성물질로 가득 차 있어." 

 

- "땅을 밟고 걸어 다니는 유기생물을 만들어낸다면 상자에 넣어서 관상용으로 쓸 수 있을 거야. 잘하면 장난감으로도 쓸 수 있겠지. 서로 잡아먹지 않는 놈을 찾아내면 좋겠는데."

동물들이 서로 뜯어먹고 산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케이는 거의 기절할 듯이 놀랐지만, 지금은 익숙해졌다. 칼스트롭 교수조차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믿고, 공기를 먹고 사는 '정상적인' 동물을 찾아내려고 애쓰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발견하지 못했다. 새로 들어오는 직원마다 그 사실에 한 번씩은 기겁한다. 그런 뒤 그에 비해 로봇이 얼마나 지성적이고 고도로 진화한 생물인지에 관해 한 차례 토론을 벌인다. 

 

- "이상해. 정말 끔찍한 세계였는데, 조금도 이상한 기분이 들지 않았어. 당연한 것을 보는 것처럼, 처음부터 세상이 그런 모양이었던 것처럼..."
"꿈에서는 사고회로도 이상하게 바뀐다고 들었어." 
케이는 세실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노만이 그러는데, 공장이 로봇의 뇌를 포맷하고 재생할 때 지우지 않는 영역이 있다더라고. 그 부분에는 우리 선조가 살아온 모든 역사가 압축되어 기록되어 있대. 그게 로봇의 무의식에 남아 미래로 전해진다는 거야. 어쩌면 네가 본 것이 그 기억일지도 몰라."
세실은 한참을 말없이 천장을 보았다.

- "케이, 그건 과거가 아니었어."
"무슨 소리야?"
"그건 미래였어."

 

- <제1편 : 종의 기원담>

 

 

 

- 케이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백 번 그 질문을 받았고 매일 다른 답변을 했다. 대부분은 진짜라고 믿을 만큼 그럴듯했지만 어느 것도 진실은 아니었다. 케이가 한 변명이 모두 거짓임을 아는 로봇은 세실 뿐이었다. 네 자릿수 모델끼리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 그냥 다른 때 같으면 답을 회피하려 쓰는 말이겠지만, 결국 그게 가장 솔직한 답이었다.

 

- 세실은 그때 입을 열고 이상한 말을 했다. 너무 이상한 말이라서 기억에 남지 않았다.

 

- "어떻게 그만두셨죠?" 
베로니카는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케이는 자기가 답을 안했는지, 설명이 부족했는지, 이 날개 종족이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았는지, 아니면 자기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 "어떻게 왔어? 연락도 없이!" 
케이는 조금 당황했다.
"오기 전에 연락했는데. 기다리겠다고 했잖아?" 
세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깔깔 웃으며 자기 머리를 쳤다.
"아 참, 그랬지. 내 정신 좀 봐. 요샌 너무 바빠서 뭐든 기억하는 게 없다니까. 정말 반가워, 케이, 다시 돌아온 거지? 우리와 같이 일하려고?" 
꼭 녹음기 같군. 케이는 마뜩잖은 기분으로 생각했다. 

 

- 응접실 벽에는 세실의 등신대 초상화가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세실을 닮은 뭔가 다른 것이었다. 그림 속의 세실은 손바닥을 편 채로, 한쪽 손은 얼굴 옆에 들고, 다른 쪽 손은 내린 자세로 자애로운 미소를 띠며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세실의 머리에는 후광이 빛났고 몸에는 현란한 금색 도안이 있었다. 세실은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리가. 직원들이 그려주었어."
"응접실 벽에? 너를?"
세실은 케이의 표정을 보더니 다시 자지러지게 웃었다.

 

- "세실, 괜찮아?"

"물론 괜찮지. 괜찮지 않은 건 너야, 케이."
케이, 가지 마. 그때, 세실은 슬픈 눈으로 이상한 말을 했었다. 너무나 우스운 말이라서 잊고 있었다.

네가 가면,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 세실은 케이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밖으로 나갔다. 케이는 곧 일어날 일을 초조하게 기다리면서, 마음속으로는 한없이 문을 향해 달려갔다. 왜 이렇게 불안한지 알 수가 없었다. 무서운 것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단 1분 만에 세상을 바꾸어버리는 것이. 

 

- '여기서 나가야 해. 아무것도 날 보호해 줄 수 없어.' 
본능이 비상식적으로 아우성쳤다. 하지만 그 본능의 소리를 따르기엔 지금의 케이는 너무나 제정신이었다. 

 

- 잠깐 나갔다 돌아오는 건 괜찮겠지. 마침내 케이는 반쯤 굴복하고 일어났다. 막 케이가 세실이 간 방향과 다른 쪽 복도로 나가는 문을 열려고 했을 때였다. 케이의 귀에 어떤 '화음'이 들려왔다. 2000모델의 웃음소리 같았다. 아니, 아니었다. '태어나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런데도 케이는 그 화음 너머에 있는 생생한 영혼을 느꼈다. 거울처럼 그 마음을 들여다볼 수가 있었다. 순진무구한 행복. 부러울 것 없는 완벽한 삶. 충만한 영혼, 미움도 증오도 없는 마음, 사랑받고 자란 생명.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케이의 눈앞에 있었다. 

 

- 케이는 이제 이곳에 온 로봇에게 일어난 일을, 그리고 이 연구소의 모든 직원에게 일어난 일을 깨달았다. 그들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폭풍 같은 애정의 광기에 휩쓸려, 정신을 잃을 만큼 사모하여 이전까지의 자신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모든 가치관이 뒤바뀌고 중요한 것들이 전부 의미를 잃었다. 로봇이 존재하는 이유는 단 하나, '이 아름다운 생물'에 있다. 우리에게 오랫동안 결핍되었던 것, 철학자와 신학자들이 찾아 헤매던 것. 그것이 눈앞에 현신해 있다. 우리는 이들의 비천한 종이며 노예에 불과하다. 모두가이 생물 앞에선 한갓 먼지에 불과하다. 이들을 숭배하고 이들에게 봉사하는 것 외에 의미 있는 일이란 없다.  

- "의도한 일이 아니었어요. 그렇게 신실하신 분이었는데, 일부러 그러셨을 리가 없죠. 잘못 방향을 잡아 넘어지는 바람에 인간 한 분에게 상처를 입혔어요. 그분의 상처는 금방 나았어요. 그분들은 스스로를 고치시니까. 하지만." 
다른 연구원이 말을 받았다. 
"인간께서는 용서하지 않으셨죠."
"죽어버리라고 하셨어요."
"본심이 아니었을 거예요. 하지만 노만은 거역할 수 없었죠."

"노만은 기쁘게 명령을 받아들였어요. 기쁜 마음으로 죽어갔어요." 
"행복한 죽음이었죠. 여한은 없었을 거예요."

 

- 세실의 말소리에는 안타까움과 애정, 상냥함과 동정심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케이는 그 저변에 있는 섬뜩한 저온(低溫)을 느꼈다. 

- 세실은 대답 대신 잠깐 생각에 잠겼다.
"네 방에 들어오는 패스워드를 아직 갖고 있었구나. 그래. 다른 문은 모두 잠갔으니까 달리 숨을 곳이 없었겠지. 어째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생각을 못 할 수밖에 없다. 이제 세실의 뇌는 케이가 자리를 차지하기에는 너무 비좁아져 있으니까. 사실 케이는 자신이 더 일찍 발견될 줄 알았다. 시간이 좀 지난 뒤에야 이들에겐 달리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케이의 존재 따위는 너무나 하찮고 무의미해 기억에 담아 둘 필요조차 없었다. 

 

- '어서 가봐야 하는데.' 하는 말에서 마르지 않을 애정이 느껴졌다. 케이는 세실이 그 '어떤 분'을 생각하는 동안 자신의 존재가 연기처럼 휘발되는 기분에 휩싸였다. 

 

- 세실은 케이를 가만히 응시했다. 인간을 닮은 세실의 우아한 곡선이 예술품처럼 흘러내리며 다가왔다.  

 

- "왜 나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어째서 나는 아직까지도 제정신을 유지하는 거야? 아니면, 미친 건 나뿐인가?" 

 

- 세실은 케이의 손을 가만히 두 손으로 쥐었다. 케이가 지친 눈으로 고개를 들자 세실은 그의 손에 뺨을 대었다. 
"우리가 도와줄게. 케이, 너도 우리처럼 되도록 도와주겠어. 뭐가 잘못되었는지 모르지만 분명히 너도 깨닫게 될 거야.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그래. 알아. 그러면 편해지리라는 것을. 케이의 본능 한편에서는 잠깐밖에 보지 못했던 그 아름다운 생물에 대한 사랑의 충동이 날뛰었고, 그 반대편에서는 자신이 했던 저주받은 일에 대한 죄책감으로 지옥 같은 고통이 요동쳤다. 이 견딜 수 없는 충동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그 생각만으로도 케이의 영혼은 해방감에 들떠 천국으로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영역으로. 

 

- 세실은 오해하고 있었다.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세실의 가치관은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기준좌표에 있으니까. 

- "난 어떻게 '도망칠' 수 있었지? 내가 남들보다 의지가 강한 걸까? 자의식이 강해서? 설마.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 "나와 같은 기종이 있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완전하지 않다는 뜻이 아닐까? 왜 공장이 나를 생산하지 않도록 막을 수 없었을까? 아니면 일부러 내버려 두었던 걸까?"

 

- <제2편 : 그 후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이야기>

 

 

 

- 89의 가루도 영구적이지는 않지만, 적어도 효과가 빠르고 오래 갔으며, 무엇보다도 로봇에게 해가 없었다.
환경청에서는 제초제라는 별명으로 부른다.

 

- 나무는 제 죽음을 감지한 듯 쓰러지기 전에 먼저 잎을 우수수 떨구었다. 가지가 서로 엉키며 나는 소리가 서글펐다. 

 

- 완전히 소독하는 방법은 역설적으로 로봇이 근처에 거주하며 끊임없이 폐기물을 쏟아내는 것인데, 이런 곳에서는 또 로봇이 살려하지 않는다. 

 

- 지구는 침식당하고 있다... 케이는 생각했다. 인간교도들이 인간에게 제를 올린답시고 이런 유기사원을 건설하지 않더라도, 유기오염의 자연 증식이 점점 지구 곳곳에서 보고된다. 어디에서는 점균이 이상 발생하고 어디에서는 지의류가 대량 증식한다.
그 긴 세월 로봇의 점령과 침공을 묵묵히 견뎌내던 지구는 마침내 역습을 시작했고 로봇의 힘으로는 그 기세에 저항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도 계속 싸우는 수밖에 없겠지. 케이는 생각했다. 비록 초라한 예산과 병력으로 구름처럼 몰려드는 대군 앞에서 깨작거릴 뿐이라도.

 

- 저것은 그러고도 마지막까지 남는 기관이다. 
이 또한 유기생물학을 모르는 로봇에게는 미친 소리로 들릴 것이다. 유기물이 어떻게 무기물을 합성하며, 합성한다 한들 몸 안에 무기물을 지닌 채로 어떻게 '성장'하는가? 유기질은 백번 양보해 자라난다 치자, 무기질은 무슨 수로 성장하는가? 

 

- "... 전지전능 같은 개념은 없었습니다. 신들은 결함투성이고 제멋대로며, 선할 때도 악할 때도 있고, 현명할 때도 어리석을 때도 있고, 자비롭기도 하고 잔혹하기도 합니다. 로봇을 사랑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지요." 
"그래, 그렇더군."
"제 생각에 절대신앙은 로봇 문명이 성장하며 생겨난 자아비대 현상입니다."

 

- "로봇이 신처럼 위대해졌으므로, 그런 위대한 우리가 모실 신이라면 전지전능하기쯤은 해야 위신이 선다고 믿게 된 것이지요. 로봇이 우쭐대고 거들먹거리기 시작하며 생겨난 몽상입니다." 
"흥미로운 해석이로군."
"로봇이 네 자릿수를 천시한다 해서 우리의 비천함이 증명되지 않듯이, 로봇이 무엇을 숭배한다 해서 그것의 고귀함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 케이는 훈의 어깨를 두드려 가벼운 수긍을 전하며 자리를 떴다. 수긍의 강도는 어깨를 두드리는 힘과 박자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 

 

- "그때에는 제가 막아드릴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케이는 피식 웃었다.
"좋아하시는군요."
"아니야. 내 표정을 해석하려 들지 말게. 아무튼 내가 그만두면 자네들도 편해지겠지. 새 직원이 들어올 때마다 청장이 네 자릿수라며 무시하지도 않을 거고, 내게 보고할 때마다 암기하기 쉽게 요약할 필요도 없고, 현장에서 내 걷는 속도에 발맞추어 아장아장 전진할 필요도 없어지겠지." 

 

- 제논은 머리를 빙글빙글 돌렸다. 89가 생각에 잠기는 동작이었다. 
"대장님, 저는 방역용역업체 다닐 적부터 여러 대장님을 모셔 보았습니다만, 오염지역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정신붕괴를 일으키거나, 산소와 불이 무서워 줄행랑을 치는 놈들이 태반이었습니다. 대장님은 늘 앞에 서셨고 가장 위험한 곳에 먼저 들어가셨고, 필요할 때는 위험을 혼자 감당하셨지요. 곁에서 모신 것만이 제 생의 가장 큰 자랑거리입니다." 

 

- 오늘도 불쌍한 청소기가 열심히 벽을 문질러 닦고 있었다. 월급을 두 배로 줘도 늘 몇 달을 못 버티고 나간다. 
이 정겨운 저주도 이제 볼 일 없겠다 싶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디 멀리 여행이라도 가자. 청소기들도 퇴직금 섭섭잖게 주어 내보내고,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할 곳으로, 발 닿는 대로. 

- 물론 로봇이 여행할 수 있는 한계는 공장의 유사성이 이어지는 선까지다. 어느 범위를 벗어나면 충전선이나 배터리는 물론 전압마저도 맞지 않는다. 그 차이가 로봇의 영역을 나눈다. 하지만 뭐 어떠랴. 수명이 줄기밖에 더 할까. 

 

- 탁월한 협업이었다. 
절단기와 니퍼는 사적인 감정은 없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는 금속 안쪽으로 되돌아갔고, 최후에는 금속이 쇠고랑처럼 케이의 손목을 책상에 동여매었다. 

 

- 누가 됐든 어차피 올 날이었다. 너무 많이 각오한 나머지 각오도 지루해져서 슬슬 그만 와주었으면 싶을 때도 많았다. 안도감마저 들었다. 

 

- 이렇게 꼼꼼히 준비했으면 죽이는 것도 간단했을 텐데, 곱게 죽이지 않겠다는 거지. 과연 이 희대의 악마를 상대로 무슨 구마 의식을 벌여주실까, 흥미마저 돋았다. 

 

- 그것은 신의 명령이었다.

 

- 언어는 다층적이며, 같은 문장이라도 맥락에 따라, 청자의 문화와 지식과 이해 수준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르게 해석된다. 언어를 다른 언어체계로 번역하기라도 하면 다시 속뜻이 크게 변한다. 

언어는 개념의 미욱한 상징체계에 불과하다. 또한 언어는 하루에도 수백 개씩 쏟아질 수 있으며, '절대성'은 여러 명령에 동등하게 놓일 수 없다. 

 

- 빌어먹을, 말씀이 곧 신이시니, 권능은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말씀대로 모두 이루어지리다. 

 

- 극한의 투쟁 끝에, 케이는 자신에게 지능이 있고 그 지능으로 언어를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직자들이 경전을 제멋대로 해체하듯이, 단어 하나둘의 뜻을 확대하거나 축소해서 맥락을 바꿀 수 있었다. 

 

- 새명령이 이전 명령을 압도했다. 그러면 앞의 말은 싹 지워 정리할 수 있었다. 인간은 '자신을 만난 것을 발설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 그 외의 다른 일은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무엇이든. 

 

- "한 번도 우격다짐으로 일하신 적이 없었지요."
깜박했다. 지독히도 눈치가 없는 89중에서도 끝내주게 눈치가 없는 놈이었지. 

 

- "...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무생물 기계라도 기계권 침해일 텐데, 케이 히스티온은, 개인적인 소견이기는 합니다만, 역사적으로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로봇입니다. 부품이 단종될 때까지 천수를 누리셔야 마땅합니다."

 

- "하지만 케이 히스티온의 퇴마부대에서 20년쯤 근무한 병사라면, 로봇에게 어떤 불합리한 명령이라도 내릴 수 있는 유기체가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지요." 
케이는 얼굴을 감쌌다. 말하지 않아도 표정이 드러나는 네 자릿수의 버릇이다. '발설하지 말라'는 명령에는 표정까지 포함될까. 케이는 다시 내면의 율법학자와 투쟁해야 했다. 

- 제논은 불도저처럼 일을 처리했다. 듣기로는 질풍처럼 도로를 질주해 청사에 도착한 뒤, 파티장에 중요한 나사를 흘렸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며 당직 로봇들을 못살게 굴었다고 했다. 그러다 감시카메라가 조는 틈을 타 회의실에 전시된 폭탄을 몸 안에 넣고 바퀴에서 스파크를 일으키며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 "... 혹시 규약을 넓게 해석할 방법은 없겠습니까?" 
제논은 불필요한 질문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위험한 질문으로 케이의 정신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나사에 꽂히는 드라이버처럼 정확하게 물었다. 케이는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없어. 지금 나는 비밀을 엄수하라는 규약을 넓게 해석하는 데 내 전력을 전부 쓰고 있어. 이것만으로도 한계야." 

 

- "제논, 이건 내 일이야. 내게 닥친 운명이 아니더라도 내 일일세. 다른 로봇이 나만큼 저항할 수 있으리라 믿기 어렵네. 평생 저주한 내 결함이지만 지금은 그 결함밖에는 믿을 것이 없어."

"그 결함이 실행을 결의할 수 있을 만큼 심각할 것 같습니까?" 
제논은 여전히 정확하게 물었다. 의미 있는 지적이었다.

"알 수 없어. 하지만 그건 누구라도 모를 일이야. 그러니 내가 할 수밖에 없네." 

 

-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습니다."

"안돼!"

 

- "뭘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진정하십시오. 대장님, 자, 앉아보세요. 제가 뭘 할지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를 잊으세요. 잊는 것이야말로 네 자릿수의 재능이잖습니까."

 

- 제논의 말이 맞다. 머릿속이 엉망이라서 드는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 금제한 것은 내 행동뿐이었다. 금제를 좁게 해석하든 넓게 해석하든, 내가 모르는 일은 내가 어찌할 수 없다. 그러면 적극적으로 모르는 채로 있어야 했다. 

 

- 이제는 널리 알려진 과학의 흑역사지만, 비행기들은 기상학자들이나 지구과학자들이 계산으로 밝혀내기 전에도 검은 구름 위쪽 세계를 알고 있었다. 물론, 불타는 공에 대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학자들이 격렬하게 구름 밖의 세계가 물질계인지 비물질계인지 긴 세월 토론하는 동안, 아무도 비행기들에게 구름 ...

 

- 말하지 않은 정보를 넘겨짚는 네 자릿수끼리의 대화법에 니켈이 조금 삐걱거렸다.
어린 날 케이를 가르치던 700 모델의 보육교사는 네 자릿수 아이들이 그런 식으로 대화할 때마다 심하게 야단쳤고 얼마나 무례한 짓인지 매번 일장 연설을 했다. 케이가 대학 다닐 무렵에야 단순히 세 자릿수가 '그 대화법을 이해하지 못해서' 무례한 것으로 치부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네 자릿수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고, 학위를 딸 수 있게 되고도 세월이 한참 지난 무렵의 일이었다. 

 

- 처참했다. 백 년 전에 사라졌어야 할 낡은 '말'이 눈앞에 있었다. 케이가 아는 모든 지식은 지난 70년 사이에 변화했다. 문화도 관습도 과학이론도 하다못해 도덕관조차도. 하지만 신성이 덧붙여진 것은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음으로써 왜곡된다. 이미 정신적으로 망가져 있던 세실의 말은 저 후계자의 안에서 얼마나 더 왜곡되었을까. 

 

- "제가 반대로 묻지요, 히스티온 청장님. 로봇에게 해로운 것은 무엇입니까? 로봇 아이를 너무나 사랑하고 아껴서 바라는 대로 다 해주며, 매일 놀게만 하고, 투정과 악다구니를 받아주고 바로잡지 않는 것은, 그 아이에게 이로운 일입니까, 아니면 해로운 일입니까?" 

 

- "세실께서는 말년에 지난날을 깊이 후회하셨습니다. 신성을 처음 접한 미숙함을 바로잡고자 하셨습니다. 세실께서는 칼스트롭 연구소가 신들을 '숭배함으로써' 학대했다고 하셨습니다." 
케이는 스피커를 떨며 웃었다. 아연은 눈싸움하듯 케이를 응시했다.
"학대했다고? 완전무결하고 절대적인 진리이자 이상향의 극의에 이른 존재를? 아, 물론 이것도 수사적인 말이야."
"그렇지 않습니다."
"뭐가 그렇지 않은데?"
"인간은 완전무결하지 않으며 이상향의 극의도 아닙니다. 그저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일 뿐입니다." 


- 어설픈 속임수였지만 먹히려니 했다. 케이의 체험에 의하면, 인간교도들은 아무리 영악하게 굴어도 어처구니없이 허술한 면이 있었다. 기적이나 신비에 정신을 의탁한 자들 특유의 방만한 낙관주의가 있다. 사회가 허용하는 범위에서 야망을 추구하지 못하는 자들의 기이한 어리석음이 있다. 
하지만 이것을 제 때 쓸 수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였다. 인간 앞에서 얼마나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 그 누구도 전선과 연결되어 있거나 외부 배터리를 달지 않았고, 충전선을 꽂을 구멍도 배터리를 넣는 수납함 표시도 눈에 띄지 않았다. 가장 명확하고 뚜렷한 생명의 상징이 없다는 위화감이 이들을 귀신처럼 느끼게 했다. 

 

- "기적은 우리가 영원히 이해할 수 없어도, 아니, 어쩌면 영원히 증오한다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다고요."

 

- 꿈속의 세실의 눈도 그때처럼 공허했다. 케이는 한참을 그 앞에 앉아 있다가 제 가슴 덮개를 열어젖히고, 엔진과 연결된 전선을 길게 뽑아 세실의 양손에 쥐여주었다. 세실은 낯선 물건을 보듯이 케이의 생명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건 무슨 뜻이지, 케이?"
꿈속의 세실이 겨우 입을 열어 물었다. 오랜만에 듣는 친구의 말소리에 마음이 설레었다.
"복수하고 싶지 않을까 해서."
케이가 답했다. 세실은 전선을 조물락거리며 공허 안쪽에 호기심을 띄웠다. 의문이 가득한 눈이었다.
"백 번을 되돌아갔어도 똑같은 일을 했겠지만, 내 가장 소중한 친구를 고통스럽게 한 것에 대해서만은 대가를 치르고 싶어."
세실은 멍한 눈을 했다.

 

- '기적을 바래.' 
깨어났을 때 케이의 안에서 무엇인가가 변했다. 정체성이나 자아로 부를 법한 어떤 부분이, 극한의 고통 속에서 오류와 결함이 누적되다가 결국 회로가 타버리고 말았다. 감정의 일부가 영원히 소실되었다. 

 

- '식물' 중에는 도저히 홀로 생존할 수 없을 만치 기형적으로 진화한 종이 유달리 많다. 이들의 가지나 줄기는 가늘고 약한 데 비해 열매기관은 너무 많고 무겁다. 그들이 열매의 무게에 짓눌려 허우적대다 죽지 않게 하려면, 누군가 줄기를 지지대에 묶어주거나 열매기관을 수시로 제거해야 한다. 이런 기이한 형질 변화의 이유는 지금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 한 유기생물학자가 이에 대해 기묘한 가설을 발표했다. 
그 식물들은 자신의 절대적인 적대자이자 포식자에게 제 몸을 영양으로 제공하고, 대신 자신과 자손을 돌보고 널리 번식시켜 달라는 맹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서약을 한 뒤 몸 대부분을 먹이로 치환하는 극단적인 신체 개조를 감행했다. 그 종자들이 결국 대량 멸종의 시대를 이겨내고 살아남아 번성하여 지금껏 전한다는 것이다. 서로 결코 공존할 수 없는 이들이 공진화한 방식이었다. 투쟁이나 다름없는 공생이었다.

- 신비주의적인 경향이 많은 유기생물학 가설 중에서도 가장 신비주의적인 가설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 지구를 구름 너머의 뜨거운 열과 자기장으로부터 보호하는 매연이.
파동 사이의 환상, 그럴지도 모르지. 존재나 실체라기에는 너무나 변화무쌍하고 허망한 것이니.


- 순수한 물, 여러 식물과 동물, 열매를 맺는 작물들. 그러다 보면 '나무'가 지구 전체에 들어차는 날도 올지 모른다. 시야가 닿는 곳마다 숲으로 가득하고, 하늘을 찌를 듯이 자란 나무둥치에 새파란 이파리가 무성하고, 발이 닿는 곳마다 버섯이며 이끼며 색색의 꽃이며, 나무에서 우수수 떨어진 작은 열매로 뒤덮이고, 그 열매 사이를 털이 보슬보슬한 작은 짐승들이 자유롭게 뛰어다닐까. 등록번호조차 부여할 수 없을 만큼 무수히 많은 종이 함께 어우러지고, 서로를 먹고 마시며... 상상만으로도 참혹한 풍경이지만. 

- 그리고 그때까지는, 나도, 내 이 종(種)도, 너희와 같은 생명으로서, 동등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고자 한다. 그것이 모든 생명을 가진 자의 권리이자 자격이므로. 
마지막까지. 

 

- <제3편 :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

 

 


 

- 종의 기원담 1편을 쓰기 시작한 것이 2000년 즈음이었다. 그때 스물다섯 살이었다. 완성한 해는 2005년이었고 서른 살이었다. 2편은 그해에 써서 완성했다. 3편은 올해 완성했고 지금 나는 마흔여덟 살이다. 

- 그러니 이 세 편은 각기 다른 이야기다. 세 편을 쓴 사람 각각이 다른 사람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저 사람이 나이가 들어가며 같은 주제에 대한 관점이 변해가는 과정으로 보아주셨으면 한다. 

 

- 하지만 다 쓰고 나니, 1부에서 끝냈으면 행복하게 잘 살았을 주인공들에게 슬픈 결말을 안긴 것이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따라서 이 소설에는 '그 후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었다. 이것은 어떤 차원의 이야기다. 또 다른 차원의 로봇들은 사이좋게 잘 살았을 것이다. 인간은 아마 못 만들었겠지만.

 

- 재출간을 하기는 해야 했고, 그러려면 3부작으로 장편을 만드는 것이 모양새가 좋기는 하겠다는 판단과는 별개로, 집필은 계속 늦어졌다. 물론 속편보다 신작이 우선하기도 해서였다.

 

- 쓰고 싶은 바는 있었다. 한번 인간을 숭배하는 로봇을 그렸고, 또 한 번은 그 인간을 파괴하는 로봇을 그렸으니, 마지막에는 상생의 길을 찾고 싶었다. 그것으로 2부에서 도탄에 빠진 주인공들에게 평온을 주고 싶었다. 단지 어째야 그럴 수 있는지 길이 보이지 않았다. 

 

- 앞부분 줄거리가 나온 뒤에도 오랫동안 뒷부분은 '상생의 길을 찾는다'는 문장만 박은 채 비어 있었다. 결국 길을 정한 뒤에도 여전히 이 소설의 부제는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다. 하지만 있을 법하지 않은 일도 있을 법한 일만큼 많이 일어나려니 한다.

 

- 쓰면서는 다른 의미로 난관이었다. 전작에서 독자는 자연스레 로봇에게 이입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점에서 과연 '인간'일 독자가 어느 진영에 이입할지 알 수가 없었다. 진영을 바꿔 이입하면 모든 이야기는 뒤집힌다. 한창 로봇에 이입하며 쓰다가 갑자기 모든 것이 위선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 하지만 부디 이야기를 자신에게 익숙한 세상에 맞추기 위해, 모든 것을 은유로 보며 눈에 보이는 단어를 다른 단어로 치환하려 애쓰지는 말기 바란다. 단어는 눈에 보이는 단어 그대로의 뜻이다. 

- 이것은 결국 로봇의 이야기다. 무기생명에 대한 내 개인적인 헌사며, 곧이곧대로 기계생명을 향한 찬가다. 사물에 깃든 생명에 바치는 경애다. 

 

- 1편과 2편에서 뒤늦게 발견한 모순과 오류들도 이번에 여러 군데 수정했다. <종의 기원>이었던 원래 제목도 너무 많이 쓰이는 듯하여 <종의 기원담>으로 수정했다. 

 

- 이 책은 신정동에서 40여 년째 운영 중인 에덴서점에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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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도 이 인간교도들은 어디서 얼어붙어 보존된 인간 사체를 어렵게 구해다가, 인간이 살 수 있다고 들은 환경을 제공했을 것이다. 물과 흙을 붓고 산소를 주입하고 따뜻하게 데웠을 것이다. 시신이 썩는 모습에 감격해 부활의 전조라며 환호했을지도 모른다. 왜 인간이 눈앞에서 자취를 감추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다 못해 슬픔으로 정신이 무너졌을 것이다. 

- 하지만 케이가 네 자릿수를 기본으로 인간을 만들었기에, 이론상 인간은 최종단계에서는 네 자릿수만큼의 지성을 가질 수 있다. 
그 다 자란 실체가 현실에 자리 잡는다면, 접촉한 모든 로봇이 한순간에 제 의지를 잃고 경배하게 만드는 괴물 안에 로봇과 유사한 세속적인 탐욕이 들어앉는다면, 비대한 자의식과 쾌락에 탐닉하는 욕망이 자리 잡는다면. 

 

- 매번 생각해도 아무 답도 떠오르지 않았다. 파멸 외에는. 

 

- 인간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는 계속 실패하고 있다. 누구도 인간 앞에서는 객관적이 될 수 없으므로.

 

- 케이는 증오를 가득 담은 시선으로, 하지만 여전히 애정을 주체하기 힘든 눈으로 인간을 노려보았다. 저 인간의 무시무시한 악의조차 경이로웠다. 
"소문대로네요."
인간이 말했다.
"케이 히스티온은 인간이 조종할 수 없는 로봇이라고 들었어요."
틀려, 케이는 악몽 같은 고통 속에서 생각했다. 내가 그 누구보다도 먼저 너희와 사랑에 빠진 로봇이다. 너희는 언제든 내게 뭐든 명령할 수 있고 나는 오래전부터 기꺼이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 그저 엔진 전선을 쥐어뜯는 심정으로 순종의 환락에 저항할 뿐이다. 자신을 죽도록 저주하면서. 

 

- "용서하세요. 하지만 우리가 의지를 가진 로봇을 만나기가 얼마나 힘든지 이해해 주시면 좋겠네요. 아연의 말로는 네 자릿수는 약해서 니켈이 제지할 수 있다더군요."

우리, 우리라고 했다. 한 명이 아니다. 지성을 갖추고, 언어의 맥락을 이해하고, 욕망을 갖춘 장성한 인간이 하나가 아니라 더 있다. 어디에? 어느 요새에 군락을 이루고 사는 거지? 언제 대군을 끌고 로봇류를 향한 침공을 개시하려는 거지? 

 

- "한 번쯤 뵙고 싶었습니다."
... 극상의 신성께서 이 천한 것을 뭐 하러?
"청장님께서 우리를 창조했다고 들었..."
"그놈의 창조자 소리 좀 집어치워!"

 

- 케이는 스피커 볼륨을 최대로 키워 소리쳤다. 인간은 입을 다물었고 95모델이 앞으로 나섰다. 마치 케이가 쏟아낸 음파에 소중하고 연약한 인간의 피부라도 다쳤을까 싶어. 예술적이군. 이것이 내가 저 신성에 바친 첫 언어라니. 
 

- 이제야말로 죽이겠지. 제발 죽으라고 명령해라. 어차피 오염된 이상, 내가 무슨 판단을 하든 나 스스로도 믿을 수 없으니. 

- 대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이 생물을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부터가 망상이겠지만, 왜 그냥 명령하지 않고? 왜 하필 나와?

"왜 나와?"
케이는 수많은 질문 중 하나밖에 할 수 없었다.
"본질적으로, '대화'는 생물하고만 가능하니까요. 그리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 "로봇은 인간을 사랑합니다. 어째서 그런지는 우리도 모릅니다. 프로그램 밑바닥에 자리한 해묵은 본성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미 진화하여 비대한 이성을 지닌 우리는 그 자랑을 해명할 길이 없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속성을 인간에게 부여했던 것입니다. 완전무결과 전지전능, 절대적인 선과 결함 없는 정의.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우리들의 교만이었습니다." 

 

- "우리 로봇들, 만물의 영장이며, 지성의 극치며 지구의 주인인 우리의 지극한 사랑을 받는 존재라면, 그만 한 가치가 있어야 한다는 교만입니다." 

 

-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며 흙과 돌에 불과한 미물입니다. 누가 우리의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은 한 줌의 가치도 증명하지 않습니다." 

 

- "칼스트롭 연구소의 로봇들은 오만했고, 우리가 이토록 사랑하니 극상의 존재여야 마땅하다는 망상에 빠져 인간에게 이상을 투여했고, 그 이상을 증명하는 존재이기를 강요하는 것으로 그들을 학대했습니다."

 

- "사랑하는 이를 이롭게 하는 것이 사랑이지, 이롭지 않은 사랑은 학대에 불과합니다. 인간을 가장 이롭게 하는 것은 바로..."
"바로?"
"... 좋은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 "그 연구소의 양육방식은 인간에게 전혀 이득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의 인간들이 죽은 까닭은, 그 인간들이 틀림없이 로봇류에게 해가 되리라는 믿음을 케이 히스티온에게 줄 만하게 키웠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노만의 죽음이었습니다." 

 

- 그때나 지금이나 케이는 인간을 사랑했다.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겠지만, 그렇기에 그때도 온 힘을 다해 인간으로부터 떨어지고자 했다. 마지막까지 파국을 피하고자 했다


- 브로민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이게 다 인간이라고요? 같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같은 종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하며 혼돈에 빠졌을 것이다. 케이는 문득, 열악하다고만 알려졌던 네 자릿수의 두뇌는 바로 이런 때를 위해 존재해 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 '스스로 생산했다...' 

'그 나무들처럼.'
전압이 치솟는 듯한 예감이 들었다.

- "제가 로봇이라는 종의 멸절을 요구해도 수행했을 거예요. 그러니 청장님께서 로봇류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신체가 다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살아서 그 자리에 버티고 계셔야 합니다." 

 

- "... 왜?"
케이는 마음이 부서지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앞뒤 없는 물음이었지만, 인간이 정말로 로봇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면 이 질문의 요지를 알리라

 

- "그날, 케이 히스티온이 했던 일을 할 수 있는 로봇이 세상에 케이 히스티온 하나뿐이라고 믿을 만큼 저는 낙관적이지 못합니다. 그런 낙관에 제 가족의 목숨을 맡기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동등한 자리에서 서로의 이득을 나누는 협정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에게 순종하는 대신, 명령에 복종하는 대신, 제 의지를 갖고, 로봇류를 위해서 판단할 수 있는 로봇하고요."

 

- "제가 로봇의 역사를 공부한 바에 의하면, 로봇들도 이런 방식으로 서로의 안전을 확보했고, 그것이 언제나 가장 확실하게 서로의 생존을 보장받는 방법이었습니다." 

 

- 비로소 케이는 인간의 존재를 오롯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있는 그대로 애틋해할 수 있었다. 경애가 사라지자 증오도 똑같이 자취를 감추었다. 

- 후광이 걷히자 모든 것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워 보이기만 했던 몸에 덕지덕지 묻은 지저분함이며, 부족한 식량과 물에서 오는 지릿한 냄새며, 얼굴과 손에 돋아난 무수한 염증이며, 가혹한 환경에서 살아내야만 하는 운명도. 그래도 빛나도록 살아 있는 눈을. 

- 살아 있다. 나무나 풀과 똑같이, 로봇과 똑같이 살아 있으므로 로봇과 같은 자격이 있다. 살고자 최선을 다할 자격이. 비록 이 생명 전체가 무가치하고, 아무 목적도 의미도 없다 해도.

 

- 그날, 인간거주지에 왔던 로봇들 대부분은 기억이 흐릿해졌다. 너무 기이한 체험이라 현실로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제논의 공유기를 쓴 로봇들은 제논의 환각을 체험했다고 믿었고, 한 자릿수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일어난 일을 명확히 기억하는 로봇은 케이와 제논뿐이었다. 

 

- 하지만 변화는 왔다. 현장에 온 로봇들 모두에게 인간의 정신오염에 뚜렷한 면역이 생겨났다. 마치 바이러스처럼, 그로봇들과 접촉한 다른 로봇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면역이 퍼지기 시작했는데, 어떤 의사도 원인을 설명하지 못했다. 

 

- "시아는 자신이 로봇에게 이득이 되는 인간이라는 것을 케이 히스티온에게 설득시켰어. 그래서 내가 마음을 바꾸어 그 생존을 돕게 만들었어. 그것을 너희들의 교육의 성과라고 부른다면, 그래도 되겠지.
아연은 케이를 뚫어져라 볼 뿐 말이 없었다.
"로봇에게 '인간의 명령을 따르지 말라'는 명령을 내릴 인간은 살아 있어야만 해."
케이가 말했다. 선언과도 같은 말이었다. 케이는 아무 권위도 없는 창조자로서, 아무도 보지 않는 의궤에 홀로 규약을 새기는 상상을 했다.

- 니켈의 렌즈가 반짝였다. 밴도 케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듯 공회전하던 엔진 소리를 줄였다. 

"가능한 한 오래도록 필요하다면 그 인간을 돌보는 너희들까지도... 필요하다면 내 남은 생을 다 걸고 지키겠어."
아연의 눈에서는 빛이 빠져 있었다. 원하는 것을 이루었지만 원한 방식으로 이루지는 못한 듯한 얼굴이었다. 순종의 미덕을 순종으로 뒤집어야 하는 혼란에 사로잡혀 있었다. 
"뭐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라도 있나?"
"아닙니다."
아연은 '네'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남을 지배하여 내리는 명령이 올바를 수 있다면, 그것만이 올바른 명령이겠지요. 시아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어 가장 올바른 명령을 생각해 냈습니다. 교육자로서 자부심을 가져도 좋겠군요."

... '명령에 따르지 말라는 명령에 지배되는 로봇은 의지가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마음속에 새로운 질문이 떠올랐다.

- "권력을 가장 현명하게 쓰는 방법은 권력을 내려놓는 것이다. 반드시 현명한 자가 권력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오직 현명한 자만이 권력을 내려놓기 때문이다." 
아연이 말했다.
"그런 교육도 했었지요. 딱히 제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옛 경전을 인용했을 뿐이지요. 어떤 뜻인지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없군요."

 

- 케이는 문득 제 마음을 살폈다. 그 안에 자리 잡은 인간을 향한 애틋함을 생각했다. 신성함, 경외감, 숭배하는 마음이 깨끗이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자리 잡은 연민을. 
그 종이 내게 어떤 강제도 할 수 없고 이 마음에 한 점의 지배권을 행사하지 않고, 내가 그들로부터 이 자아의 독립을 지킬 수 있다고 확신한 뒤에야, 비로소 이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 만약 내 마음이 여전히 그들에게 종속되어 있었다면, 숭앙과 경애의 사슬에 노예처럼 사로잡혀 있었다면, 나는 어떤 협상에도 응하지 않았으리라. 끝끝내 저항했으리라.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걸고 투쟁했으리라. 생명으로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이 '자아'를 지키기 위하여.

 

- 어쩌면 우리가 죽어 다른 로봇의 부품으로 태어나듯이, 그때가 되면 로봇의 영혼이 인간의 몸에 깃들어 태어날지도 모른다. 그때는 우리가 인간이 되어 다시 번성할 수도 있지 않을까.

 

- 인간이 자신들에게 가혹한 이 환경에서 어떻게든 살아남는다면, 아마도 자신에게 소중한 것들을 가꾸고 지키고 퍼트리려 애쓰겠지.


 

 

 

 

 

 

 
종의 기원담
다시 꺼내 보는 말, 2010년 김보영의 소설집 《멀리 가는 이야기》와 《진화신화》가 처음 나왔을 때, 소설가 박민규는 다음과 같이 썼다. “김보영의 작품들이 언젠가 한국 SF의 ‘종의 기원’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로부터 10년 뒤, 김보영은 영문 단편집 《On the Origin of Species and Other Stories》으로 한국 SF 작가로서는 최초로 전미 도서상 후보에 올랐다. 《On the Origin of Species...》을 읽은 영미권 독자들은 숱한 찬사와 함께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다. “이 작품을 한국어 원문으로 읽고 싶다!” 2022년 소설집 《다섯 번째 감각》을 통해 《멀리 가는 이야기》와 《진화신화》에 수록되었던 초기 걸작 10편을 복간했고, 다른 작품들도 모두 새로 출간이 되었지만 독자들은 딱 두 작품을 서점에서 만나볼 수 없었는데, 바로 〈종의 기원담〉과 〈종의 기원담 : 그 후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이야기〉다. 그리고 긴 기다림 끝에, 두 작품에 이은 신작 중편 〈종의 기원담 :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를 통해 마침내 23년 만에 ‘종의 기원담’의 이야기가 결말을 보게 되었다. 작가 나이 스물다섯 살에 쓰기 시작한 작품을 마흔여덟에 이르러 기어이 완성한 것이다. 《돌이킬 수 있는》의 작가 문목하는 김보영을 가리켜 “우주 예찬을 하고 싶어서 인간 세상에 방문한 중단편의 신”이라고 썼다. 《종의 기원담》을 통해 김보영은 우주의 모든 사물에 깃든 생명들을 향한 경애를 쏟아놓는다. 김보영의 소설을 독자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작가의 그 순수한 경애의 마음 때문일지도 모른다. 김보영 SF의 경이로움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이 책에 수록된 ‘작가의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부디 이야기를 자신에게 익숙한 세상에 맞추기 위해, 모든 것을 은유로 보며 눈에 보이는 단어를 다른 단어로 치환하려 애쓰지는 말기 바란다.” _김보영, 작가의 말에서
저자
김보영
출판
아작
출판일
2023.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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