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요네자와 호노부 / 김선영
출판 : 리드비
출간 : 2022.09.01
마침 <흑뢰성> 리뷰를 잠시 미뤄둔 시점에 러시아 프리고진 사태가 발생해 만감이 교차 중이다. 다 읽었지만 리뷰는 쓰지 못한 책들이 네다섯 권쯤 쌓여 있는데, 가벼운 책들을 읽으며 버티는 것도 슬슬 한계가 아닐까 싶다.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었다. 집 안에서 여유롭게 즐기는 비는 싫어하지 않지만, 먹고사니즘에 연결된 비는 내가 퍽 힘들어하는 것 중 하나다. 이유는 춥기 때문이다. 젖고 축축해진 옷이 에어컨을 만나 차갑게 들러붙는 상황을 겪고 나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앓는다. 컨디션 관리가 매우 중요한 내게는 재앙 같은 일이다.
결론적으로 현재도 건강이 썩 좋은 상황은 아닌데, 집중이 힘겨운 상태에서 읽다 보니 최근 독서는 일본 소설이 주가 되고 있다. 특정 장르를 폄하할 생각은 없다. 그저 내 개인적으로 조금 가볍게 읽으면서도 즐거움을 느끼는 장르가 한국이나 일본 소설일 뿐.
각설하고, <흑뢰성>을 읽으며 저자 요네자와 호노부에 관해서 상당히 색다른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차분하게 '인간'을 관찰하고 고찰해서 써나가는 듯한 일상적 추리가 매력적인 작가라고 생각했었는데, 실존 인물들을 끌어들임으로써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시키면서도 전국시대 특유의 분위기까지 충분히 살릴 수 있는 작가였다. 조악한 비유를 들자면 매력적인 현대극을 잘 뽑는 작가가 대하사극도 -퓨전이 아니라- 맛깔나게 뽑아낼 수 있다는 걸 알고 감탄했다랄까.
다만,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실존 인물이었다는 점이 <흑뢰성> 최고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역사적 흐름을 알고 읽는다면 종장 '과(果)'는 이미 확실하게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거기까지 치닫는 과정과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진 재해석의 덧칠은 꽤나 매력적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이듬해 봄으로 넘어가는 부분이 조금 반복적인 감은 있었지만, 그 또한 인물들의 지리한 대치 상황을 함께 체감하는 듯해서 싫지 않았다.
역사 팩션은 하나의 장르로서의 특성과 매력을 가진다. 저자 한 명의 창작물을 읽었다기보다는, 감춰진 야사를 읽는 마음으로 몰입해서 읽었다. 인물마다의 디테일들을 놓치지 않는 설정이 좋았다. 저자의 이전작들과는 달리 발생한 사건을 풀어나가는 과정 자체보다는 -다소 작위적인 부분들도 있다-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인물'들의 생생함이 좋았다. 실제 행적들을 차용해 풀어갔기에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은 행간을 채워나가는 느낌이었다.
즐겁게 읽었다.
추천하고 싶다.
- 용맹한 함성이 나니와 연안을 가로지른다. 싸우자, 싸우자. 그것이야말로 구원으로 향하는 길이라고, 함성이 사람들을 고무한다. 전국시대를 연 '오닌의 대란'으로부터 어느덧 백 년, 전국 방방곡곡 전쟁이 없는 땅은 없어 수많은 집들이 생겨나고 또한 사라져 갔다. 기아와 질병, 전쟁은 서로 나쁜 인과를 초래하는 악인(惡仁)과 악과(惡果)가 되어 현세를 고통으로 채웠다.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힘차게 전진하라, 싸우다 죽으면 극락왕생이 보장된다. 전진하면 극락, 후퇴하면 지옥이다! 함성은 끝도 없이 되풀이되었다.
- 셋쓰 지방 오사카에 언제부터인가 일향종 신도들이 모여들어 염불 소리가 끊이지 않는 대가람을 세우고 이를 혼간지라 불렀다. 난세를 헤쳐 나가고자 해자와 토담을 쌓아 절인지 성인지 모를 그 요새에 무기와 병량을 실어 나르고, 오다를 무찔러 불교를 수호하려는 이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 자는 파문이라고 주지승이 호령한 뒤로 팔 년이 지났다.
- 오다는 일향종 군대를 상대로 에치젠에서 승리하고 이세에서도 승리했으나 오사카만은 아직도 제패하지 못하고 있었다. 흡사 혼간지에서 터져 나오는 염불을 막아 내려는 듯 오사카를 포위할 수많은 성과 요새를 새로 지었고, 원래 있던 성은 보다 견고하게 보강했다. 덴노지 요새도 오와다 요새도 마찬가지. 그러나 가장 모습이 많이 바뀐 것은 오사카에서 북쪽으로 도보 반나절 거리에 있는 이타미 지역의 요새였다. 마을에서 소집한 인부들은 물론이고, 무사들도 직접 바위를 운반해 쌓아 올린 새로운 성채는 원래의 성과는 기능부터 달랐다.
- 평야 지대인 호쿠세쓰에서 그 거성은 사람들이 쌓은 언덕처럼 보일 정도였다.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가 "대단히 장대하며 훌륭하다"고 평가한 대 성채, 그 새로운 이름을 아리오카성이라 한다.
- 육중한 짐을 짊어진 사람들, 말과 소가 줄지어 아리오카성으로 들어간다. 짐은 다양했다. 쌀을 실어 나른다. 소금을 실어 나른다. 된장을 실어 나른다. 장작과 숯을 나른다. 대나무를 나른다. 금, 은, 동전을 나른다. 납, 화약, 철, 가죽, 그 밖의 모든 것들이 아리오카성으로 반입되었다. 볼일을 마친 사람들은 다 함께 안도한 표정으로 총총히 성에서 떠난다. 이런 종류의 물자들이 성으로 들어가는 이유는 곧 전쟁이 벌어진다는 증거임을 다들 알기 때문이다.
- 눈치 빠른 자는 그것이 누구와 누구의 전쟁인지 의문을 품기도 한다. 아리오카성의 성주는 위대한 오다, 이 부근에서 오다의 적대 세력이라 하면 오사카 혼간지인데, 사방을 첩첩이 포위당한 스님들이 여기까지 공격해 올 리 없다.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자들도 뒤탈이 두려워 전쟁 상대가 누구인지 사람들에게 물어보지는 않고 그저 떠날 뿐이다.
- 고데라 간베에의 본명은 구로다 간베에라 한다. 주군인 고데라의 성을 받아 현재 대외적으로는 고데라라는 이름을 쓴다.
다양한 평판이 그를 따라다닌다. 창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말도 잘 다룬다. 훌륭한 부하들을 거느리고 요충지를 단단히 지켜내고 있다. 병사를 맡기면 훌륭한 전투를 치른다... 요컨대 고데라 간베에는 좋은 장수라는 평이다. 하지만 무라시게는 그런 평범한 말로는 간베에라는 인물을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 무라시게는 간베에를 저택 대청으로 들였다. 장식 단에는 노란빛이 감도는 차항아리, 명품 '도라사루'가 놓여 있다. 이 항아리 하나면 성을 살 수 있다고도 하는 명물 중의 명물이다. 이것으로 장식한 것은 무라시게가 간베에에게 보이는 성의였다.
- 간베에가 씩씩하게 대답하고 몸을 일으켰다. 나이는 서른이 넘었다 하니 이제 젊은 무사라 부를 수는 없다. 하지만 간베에는 실로 싱그러운 외모가 아름다운 무사였다. 늠름하게 다물고 있지만 어딘가 미소를 머금은 입가, 약간 마른 체구는 부드러워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무라시게는 유약한 미청년이라 해도 좋을 이 사내가 고데라 가문이 오다에 붙게 만든, 하리마에서 가장 얕잡아 볼 수 없는 상대임을 알고 있다.
- 무라시게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시바 지쿠젠노카미 히데요시는 분명 인질을 소홀히 다루지는 않겠지만 그 가신 다케나카 한베에라는 사내는 너무 수완이 좋다 보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구석이 있다. 무라시게 생각에 간베에가 다케나카 한베에를 믿는 것은 어딘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서로 통하는 면이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 역시, 무라시게는 생각했다.
간베에는 단순히 좋은 장수로 끝날 그릇이 아니다. 이 세상에는 활과 기마에 능숙한 장수도, 전쟁에 뛰어난 장수도, 훌륭한 도읍을 세울 줄 아는 장수도 많다. 하지만 간베에의 능력은 그게 다가 아니다. 간베에는 대국을 볼 줄 안다. 대국을 보고 급소를 단숨에 공격할 줄 안다. 이런 인물은 흔치 않다. 그리고 까다롭게도 간베에는 본인이 똑똑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 이제 와서 간베에 한 사람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모반은 멈출 수 없다. 핵심 계획은 이미 시작되었고 이미 무라시게 혼자만의 뜻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래도 무라시게가 간베에의 말을 들은 이유는 단 하나, 간베에가 이 모반에 해가 될지 득이 될지, 그 점을 헤아리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지금 무라시게는 결론을 내렸다.
- 무라시게는 그 판단을 훌륭하게 여겼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 "어찌하여 그런 짓을. 사자는 돌려보내는 것이 규칙, 돌려보낼 수 없다면 베어 버리는 것도 무사의 규칙이거늘. 세상의 이치에 어긋나는 짓을 하시면..."
간베에는 말을 잇지 못하고 창백한 얼굴로 쥐어짜 내듯 말했다.
"... 인과가 돌아올 겁니다."
"이 또한 전략이니라. 목숨을 살려 주려는데 불만인가?"
- 간베에는 계속 발버둥 쳤다. 평소 물처럼 온화하다는 평판과 달리 간베에는 볼썽 사나울 정도로 몸부림을 쳐 댔다. 하지만 검을 빼앗기고 팔다리마저 붙들려 이제는 달아날 수도 없었다. 무라시게는 이미 간베에에게 등을 돌렸다.
이리하여 간베에는 아리오카성에 갇혔다. 인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무라시게가 아라키 가문을 세우고 호쿠세쓰 일대를 다스릴 수 있었던 데는 사촌이자 어릴 때부터 친구이기도 한 세베에의 용맹함에 의지한 부분이 컸다. 하지만 무라시게가 셋쓰노카미라는 지위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에 비해, 세베에는 성을 하나 얻기는 했으나 어차피 무라시게의 부하에 지나지 않았다. 무라시게의 밑에서 평생을 보낼 바에야 오다의 가신으로 창을 휘두르며 다시 한번 꽃을 피우겠다, 세베에라면 그렇게 생각하고도 남으리라. 이바라키성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라시게는 세베에라는 사내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빙그레 웃었을 정도다.
- 승리의 날을 세베에와 맞이하고 싶었다. 난세가 흔히 그렇다지만 친구와 다른 길을 걷게 된 운명이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무라시게는 비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 하지만 무라시게는 그런 속내를 털어놓지 않았다. 무라시게에게 군사 회의는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는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 "...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셋쓰노카미 님, 부디 편히 처분을. 지넨은 극락으로 가고 싶습니다."
무라시게는 인질에 대한 호불호로 처분을 결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무라시게는 지넨의 말이 탐탁지 않았다. 강한 결단력은 무사에게 미덕이다. 가망도 없는데 목숨을 부지하려는 무사는 경멸당한다. 지넨의 말은 늠름하게 들린다. 하지만 사실 무라시게는 지넨의 각오가 무사의 그것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 지금 지하 감옥에 처넣은 간베에도 죽여 달라고 했다. 하지만 지넨의 말은 간베에의 그것과는 다르다. 극락에 가고 싶으니 죽여달라니, 무사가 할 말이 아니다.
- 복도 너머로 언젠가 정원이 될 평지가 보였고, 그곳에는 가스가 석등만이 놓여 있었다. 이 석등은 나카가와 세베에의 배다른 동생이자 오다의 가신인 후루타 사스케가 선물로 보낸 것이었다. 다도에 정통한 후루타는 눈썰미도 좋은지, 이 또한 흔한 가스가 석등처럼 보이지만 옥개석의 기울기 하며 동그란 보주의 매끈한 선까지, 어딘가 모르게 마음을 끌어당긴다. 오다와는 등을 돌린 무라시게였지만 이 석등은 버릴 수가 없었다. 원래 등불을 놓아야 할 화사석 안에는 아직 아무것도 없다.
- 북은 치는 방식으로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지금 울려 퍼진 북소리는 적군이 근접했다는 신호였다.
- 아리오카성에는 혼간지에서 가세한 소수의 사이카 사람들이 있었다. 사이카는 기이 지방의 땅으로, 그곳에 사는 이들의 대부분은 해적질을 생업으로 삼고 있다. 일찍이 철포가 들어온 사이카 마을 사람들은 난세 속에서 싸움에 익숙한 강한 병사가 되었다.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싸움에 익숙해 호전적이고 항해에 뛰어나며 육지에서는 철포를 능숙하게 다룬다. 하지만 무사는 아니었다.
- 무사라면 활과 말은 기본으로 다룰 줄 알아야 한다. 실력 차이는 있어도 활을 쏘지 못하는 무사, 말을 타지 못하는 무사는 없다. 하지만 사이카 사람들은 어떨까? 활은 철포와 달라 수련에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명수의 수준을 바라는 게 아니라면 철포는 하루이틀이면 쏘는 법을 익힐 수 있지만, 활은 제대로 당기는 것만으로도 일단 한 달은 잡아야 한다. 사이카 사람이라면 철포의 명사수인데 활까지 배우는 것은 소용없는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무라시게는 그렇게 생각했다.
- "목소리는 들었지만 지넨 님의 목소리라는 확신은 없었습니다."
무라시게는 내심 조금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치로자의 대답은 신중했고, 자기가 생각한 것과 귀로 들은 것을 철저하게 구분하고 있다. 이치로자가 이런 무사였나 싶어 놀라웠다.
- 아키오카는 아라키를 받드는 가문으로 시로노스케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일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시로노스케는 검술로는 가문에서 그를 이길 자가 없는 뛰어난 명수였다. 체구는 늘씬하고 눈은 매처럼 날카롭다. 검법에 뛰어난 자는 신기하게 성미가 까다로운 자가 많은데 시로노스케도 다르지 않아, 사람들과 그다지 교류하지 않는다. 사람들과 인연을 맺지 않으려는 것은 전쟁터에서 뒤를 맡길 상대가 없다는 뜻으로 무사로서 그리 좋은 경향은 아니다. 하지만 무라시게의 신변 보호가 최우선인 호위대로서는 안성맞춤인 사내라고도 할 수 있다.
- 무라시게는 스케사부로에게서 상세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포기해야만 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다른 쓸모가 있다. 힘이 세고 충직한 스케사부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유능한 무사다. 감이 둔하다면 그런 자리에 기용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 "소인은 이누이 가문에 내려오는 갑주와 머리띠를 두르고, 비젠의 도공이 만든 칼과 지창을 들고 있었습니다."
"이치로자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무사는 적과 아군의 소지품을 알아보는 안목이 중요하다. 소지품을 보면 적의 신분을 알 수 있고, 아군의 수훈을 증명할 수도 있다. 목숨을 건 전쟁터에서 잊어버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하룻밤 함께 보초를 선 동료가 무엇을 지니고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잔소리를 한바탕 하고 무라시게는 스케사부로를 돌려보냈다.
- 하지만 무라시게에게는 한 가지 방법이 남아 있었다.
이 성에 무라시게보다 더 군사 작전에 뛰어난 자는 없다. 무라시게만큼 모략에 뛰어난 자도 없다. 무라시게보다 지혜로운 자는, 이 성에는 없다.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이 성의, 지상에는 없다. 무라시게는 천천히 일어섰다.
- 천수각 지하에는 우물이 있다.
- 간베에라는 사내는 두뇌가 명석하다. 명석함 때문에 고데라 가문에서 원로들을 제치고 주군의 신의를 얻었다. 명석함 때문에 고데라는 오다에게 붙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명석함 때문에 고데라의 중신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오다에게 접근해 하시바 지쿠젠노카미 히데요시의 신하인 것처럼 굴었다. 그 정도로 명석하고, 또한 명석함을 자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이 구로다 간베에라는 사내다.
- 원래 무사란 그런 존재다. 검술이 뛰어난 자는 검술을, 산술이 뛰어난 자는 산술을, 전략이 뛰어난 자는 전략을 쓰지 않고는 못 배긴다. 한 사람의 주군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가마쿠라 시대 무사라면 또 몰라도, 이 시대의 무사는 기량을 인정받지 못할 때는 섬기는 가문을 바꾸더라도 자신의 기량을 천하에 알리려 한다. 그중에서도 간베에는 더욱 두드러진다. 난제를 던져 주면 자기가 누구보다도 명석하다는 사실을 과시하려고 그것을 풀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이 이 남자의 천성이다. 간베에는 군계일학의 재주꾼이지만 성격만 잘 파악하면 쉽게 다룰 수 있는 사내이기도 하다. 무라시게는 그렇게 판단했다.
- 문득 무라시게의 가슴속에 그늘이 드리웠다. 간베에는 예상대로 미끼를 물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예상한 대로 간베에가 지략을 과시하는 사내였기 때문일까? 이 남자를 부추기면 생각대로 움직여 주는 그저 재능 있는 젊은이라고 받아들여도 될까? 방금 전 폭소의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간베에는 말했다.
"셋쓰노카미 님. 황공하게도 소인의 무료함을 달래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대단히 아뢰기 송구스럽지만 소인, 여전히 지루하기 짝이 없습니다. 어떠십니까, 잠시 소인과 이야기나 나누지 않으시렵니까?"
- 무라시게는 침묵했다. 전쟁터에서 갈고닦은 감이 말했다. 질문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 구로다 간베에는 손바닥 위에서 굴릴 수 있는 사내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지하 감옥에 내려와서는 안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사내는 위험하다. ...감이 그렇게 속삭였다.
하지만 무라시게는 간베에를 거부할 수 없었다. 이대로 감옥을 떠나면 성은 무너진다. 그 또한 감이 알려 주는 결과였다.
- "어찌하시겠습니까?"
무라시게의 고뇌를 꿰뚫어 본 듯이 간베에가 거듭 확인했다. 어째서 그대로 그냥 묻지 않는지 무라시게는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곧바로 간베에가 허락한다는 한마디를 끌어내려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복병을 우려하듯 긴장하며 무라시게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 허락하마."
- 지넨을 누가 살해했는지 알아내야 한다는 마음도 확고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야기를 들은 것만으로 숨은 계획을 간파한 간베에에게 무라시게는 혐오와 두려움을 느꼈다. 죽이지 않으면 위험하다. 하지만 죽이기에는 아까운 사내. 그런 마음 때문에 무라시게는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주저하는 그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간베에가 또 씩 웃었다.
- 하지만 무라시게는 그 어느 방법도 선택하지 않고 간베에를 붙잡아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
수감자는 밥도 먹고 물도 마신다. 수감자를 감시하려면 인력을 나누어 간수를 두어야만 한다. 이득은 하나도 없다.
- 노부나가와 반대로 행동한다. 그것이 인질을 죽이지 않는 이유임을 꿰뚫어 보았으리라. 알면서 동시에 조소하고 있다. 어차피 반대로 따라 할 뿐, 아라키 셋쓰노카미 무라시게의 밑바닥을 보았다고 웃고 있다.
그렇다면 죽일까?
무라시게는 허리에 찬 명검, 고노 요시히로를 칼집에서 살짝 빼냈다. 이 자리에서 모리 가헤에를 베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다. 죽여서 나는 흉내쟁이가 아니라고 간베에에게 증명할까? 무엇보다 가신들은 내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저토록 보고 싶어 하지 않는가?
- 아니...
아니. 어리석은 짓이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노부나가와 반대로 행동하리라. 노부나가와 같은 길을 간다면 그것은 곧 아라키 가문의 멸망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까지는 간베에도 알지 못하리라.
- 천하에 봄이 찾아와, 저 멀리 보이는 미노와 무코의 산들에 꽃들이 어른거렸다. 아리오카성에도 매화가 피고 이윽고 시들어 떨어졌다. 아라키 셋쓰노카미 무라시게는 센 소에키 문하에서도 손꼽히던 다인이기도 했고, 물론 시가에도 조예가 있었다. 꽃에 현혹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멀리서 펄럭이는 오다의 깃발을 보면 어쩐지 흥이 깨져 시조도 읊지 않았다.
- 호위대 오본창, 이타미 이치로자에몬이 천수각으로 올라왔을 때는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보초를 서고 있었는지 이치로자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끝자락에 속하나 그래도 역시 이타미 가문의 핏줄이라, 표면이 매끈한 갑옷과 정수리에 징이 박힌 투구가 몹시 세련되었다. 홀쭉한 이치로자지만 이렇게 갑옷을 차려입은 모습은 역시나 무사답게 당당했다. 전쟁 중에 보통 그러하듯 이치로자는 투구도 벗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 "외람되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소인, 일꾼으로 분장해 진영에 숨어들 생각이온데 무운이 없어 들통나 목숨을 잃으면 투구도 쓰지 않은 소인은 결국 필부로 들판에 버려질 것이옵니다. 그리되면 너무나 억울하오니 소인이 돌아오지 않으면 이타미의 이치로자는 훌륭하게 전사했다고 여겨 주시고 제 자식을 이끌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알겠다."
"한 줄 써 주신다면."
"그러마."
- 무라시게는 사람을 불러 종이와 붓을 가져오게 했다. 목숨에 무곡(無曲)한 일이 있다면 혈육을 등용하겠노라 적고 서명을 한 뒤 이치로자에게 주었다. '무곡'이란 '기껍지 않은 일'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완곡하게 죽음을 가리킨다. 이치로자는 글귀를 찬찬히 읽은 뒤 서한을 공손히 이마에 가져다 댔다. 무라시게가 명했다.
- "주군. 저기에 다시 님께서."
스케사부로의 시선 끝에는 장옷을 쓴 여인들이 있었다. 얼굴을 보지 않더라도 의복의 질을 보면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다. 스케사부로가 발견한 것은 지요호였다. '다시'란 무라시게 세력이 아리오카성으로 들어오기 전, 지요호가 다시라 부르는 외성(外城)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 무라시게도 팔짱을 풀고 허리춤의 칼에 손을 뻗었다. 무라시게 비장의 명검, 고노 요시히로는 저택에 두고 왔다. 지금 무라시게가 차고 있는 것은 무디기로 악명 높은 나라 지방의 검이다. 날카로운 맛은 명장에게 주문해서 만든 검에 한참 모자라지만, 값이 싸서 쉽게 대량으로 구할 수 있다. 전쟁터에서 마음껏 휘두르기에는 이런 검이 좋을 것 같아 무라시게가 직접 고른 검이다. 천천히 빼 들자 이름도 없는 검이 달빛에 빛났다.
- 무사들은 수훈을 세우고 그것을 토지나 명성으로 바꿔 살아간다. 전투가 끝나면 누가 어떤 수훈을 세웠는지 신속하게 검증해야 한다. 혼마루에 흐드러지게 핀 벚꽃 아래에 성을 지키고 있던 호위대가 미리 막사를 세워 놓았다. 머리로 적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졸병은 아무리 쳐도 공이 되지 않는다. 활과 철포로 대장을 쓰러뜨려도 누구의 화살과 탄환이 맞았는지 확인할 길이 없으므로 수훈으로 인정받기 어렵다. 전투에서 수훈을 세우는 방법은 일단 첫 번째로 돌격하는 일 그리고 뭐라 해도 그 손으로 직접 투구 쓴 무사의 목을 치는 일이다. 훌륭한 투구는 신분 높은 무사의 소유물로, 투구 쓴 머리를 베는 것은 이름 있는 적을 쓰러뜨렸다는 최고의 증거가 된다.
- 머리는 일단 사화장을 하기 위해 시녀들에게 건네준다. 적이라고는 해도 싸워서 전장에서 스러진 무사의 머리를 함부로 다루는 것은 매정한 짓으로, 오물을 씻어 내고 보기 좋게 꾸미는 것을 훌륭한 행동으로 여겼다.
- 젊은 무사의 머리 두 개를 보았다. 사이카 부대가 친 머리는 눈동자가 땅바닥을 노려보고 있고 얼굴은 갸름하며 입술과 눈썹은 얇고 콧대는 높았다. 다카쓰키 부대가 친 머리는 하늘을 노려보고 있고 뺨은 투실하고 입술과 눈썹은 두텁고 코가 크며 목이 굵고 짧았다. 연령대는 둘 다 비슷해 보였다. 노부나가는 곁에 미소년을 두는 버릇이 있으니 지금 이 두 개의 머리를 비교해 보면 사이카 부대가 친 갸름한 얼굴의 머리가 볼품이 있다. 하지만 동시에 오쓰 덴주로는 군대를 이끄는 장수였다. 다카쓰키 부대가 친 머리의 굵은 목을 보면 생전에 대단히 무사다운 체격이었으리라 짐작해 볼 수 있다. 두 머리 다 죽음을 앞두고 해탈의 각오를 굳혔는지 온화하다 표현해도 좋을 표정이었다.
- 각각의 얼굴에는 수염이 희미하게 나 있어 남자의 머리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어느 쪽이 오쓰의 머리일까? 무라시게는 가만히 머리를 노려보았다.
- 나이 든 무사의 투구는 둘 다 옆 날개가 큼직하고 약간 고풍스러웠다. 젊은 무사의 투구를 보니 사이카 부대가 친 갸름한 얼굴의 무사가 썼던 투구는 복숭아 형태로 앞면에 초승달 장식이 있고, 다카쓰키 부대가 친 굵은 목의 무사가 썼던 투구는 원통형으로 앞면에 둥그런 일륜 장식이 있어 만듦새는 다르지만 둘 다 최신식이었다.
- 무라시게는 젊은 무사의 투구를 각각 손에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며 꼼꼼히 살펴보았다. 마음가짐이 훌륭한 무사는 전투에서 무운이 없어 목을 베이더라도 체면을 중시해 향을 피워 투구에 향기를 입히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어느 투구에도 향기는 남아 있지 않았다. 복숭아형 투구와 원통형 투구, 어느 쪽이 덴주로 나가마사의 소지품으로 걸맞은지는 선뜻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무라시게가 보건대 언뜻 보아 모양새가 훌륭한 것은 복숭아형 투구지만, 원통형 투구도 역작인지 참으로 든든해 보였다.
- 실내는 다다미방으로 넉 장 반 크기였다. 벽 한 면은 지금 다료가 들어온 두 짝 장지문이고, 나머지 삼면은 벽지를 바른 판자벽이었다. 벽지는 아무 그림도 없이 그저 하얗기만 했다. 바닥 일부는 낮게 파내 화덕을 설치했다. 천장에서 내려오는 사슬에 매달린 솥에서 이미 뜨거운 물이 끓고 있었다.
- 다료는 넌지시 좌우를 살폈다. 무라시게 말고는 아무도 없고 누가 나타날 기미도 없었다. 다료는 다도에는 문외한이지만 그래도 차는 별도의 다인이 끓여 준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다른 사람이 없는데 누가 차를 끓인단 말인가... 그렇게 의아해하는 다료의 앞에서 무라시게가 직접 찻잔과 차항아리를 손에 들었다.
- "무사가 신불을 의지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무가의 영달을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은 물론이고 하치만 대보살, 스와 대명신, 마리 지천, 비사문천, 모두 전쟁을 위해 받들어 모시고 기도를 드립니다. 셋쓰노카미 님도 잘 아실 터."
- 전쟁은 결국 운이다. 자기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운명으로 사람은 어이없게 죽고, 예상을 뛰어넘어 살아남는다. 수훈을 세우는 것도, 치욕에 빠지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운에 따른 것이다. 그 운명의 한복판에서 누가 신불을 믿지 않을 수 있으랴. 무라시게는 다료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무사가 두 손 모아 기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가문의 영예를 위한 일이다.
- 마리지천은 일광보살이다. 빛은 누구도 잡을 수 없고 무엇으로도 상처 입힐 수 없다. 때문에 무사는 육신이 일광처럼 상처 입지 않기를 바라며 마리지천을 숭배한다. 무라시게는 문득 철포가 없었다면 다료는 남만종에 귀의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남만에서 넘어온 철포로부터 몸을 지키려면 남만신의 가호가 ...
- 무라시게는 홀로 숯을 채워 넣었다. 손님은 만족하고 돌아갔다. 다도에서 그 이상 훌륭한 성과는 없을 터였다. 하지만 무라시게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가신단에게 보여 줄 수 없는, 거짓 없는 표정으로 무라시게는 숯을 채웠다.
- 스즈키 마고로쿠가 다실을 찾았을 때, 날은 이미 저물어 가고 있었다. 어두워지면 언제든지 불을 지필 수 있도록 방에는 촛불을 준비해 두었다. 마고로쿠는 그 촛불을 보고 아마도 이것이 쓰일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 한 차례 인사를 나누고 무라시게가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다카야마 다료와는 달리 마고로쿠는 무라시게가 직접 차를 끓여 주어도 놀라지 않았다. 센 소에키의 새로운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단순히 다도는 이런 것인가 보다 하고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다도 자리에서라면 마음을 놓아도 된다는 생각 역시 마고로쿠에게는 전혀 없었다. 성주이자 셋쓰노카미인 무라시게는 기이 지방의 호족에 지나지 않는 마고로쿠 정도야 기분 여하로 죽일 수도 있다. 그는 그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무라시게가 끓이는 차에는 독이 있을지도 모른다, 장지문 밖에는 자객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마고로쿠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무 생각도 없다는 표정으로 단정히 앉아 있었다.
- 하지만 그렇게 긴장하면서도 마고로쿠는 자신이 무심코 무라시게의 동작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동작 하나하나가 편안한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어디에 무엇이 있고, 다음에 무엇을 할지, 자기 몸은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런 요소들을 전부 파악하고 있는 동작이었다. 그런데도 두려울 정도로 공격할 만한 빈틈이 없다. 마고로쿠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훌륭하십니다."
무라시게가 동작을 멈추고 물었다.
"훌륭하다니?"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었지만 성주가 물으니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 마고로쿠는 자신의 부주의한 행동을 원망했다.
"그것은...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 찻잔을 받은 마고로쿠는 문득 선반 위의 차항아리를 바라보고 잠시 침묵했다. 무라시게가 "왜 그러는가." 하고 묻자 마고로쿠는 그제야 대답했다.
"도라사루."
무라시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호오."
- 무라시게는 수많은 명물을 가지고 있다. 이 다실의 솥은 명물 '고바타케', 솥을 건 쇠줄은 센 소에키에게 받은 사슬이고, 그림은 중국 선승 화가 목계의 '원포귀범도(遠浦帰帆図)', 그리고 차항아리는 마고로쿠가 말한 통칭 '도라사루', 하나같이 세상에 알려진 명물이다. 이 자리에 초대받기 위해서라면 천금만금도 내놓겠다는 호사가가 얼마든지 있으리라.
- "미처 알아보지 못했는데 눈썰미가 좋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고로쿠는 고개를 저었다.
"풍문으로 들었습니다. 소인처럼 전쟁터에서 사는 자는 풍문이 밥벌이가 되기도 하여. ...그렇다면 이 찻잔도 명물이겠군요."
그렇게 말하며 마고로쿠가 손 안의 찻잔을 바라보았다.
"그것 말인가."
무라시게의 목소리에 웃음이 묻어났다.
"그건 비젠에서 구운 평범한 찻잔이야. 하지만 내가 가진 도구 중에서는 최고지. 형태가 참으로 좋지 않으냐."
마고로쿠는 웃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비로소 차에 입을 댔다. 천금만금으로도 살 수 없는 명물들에 둘러싸인 곳에서 설마 습격할 리 없다, 그를 죽이고 싶다면 훨씬 손쉬운 방법이 얼마든지 있을 테니 독을 타지는 않았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 머리가 뒤바뀐 것은 동틀 녘, 해가 중천에 오르기 전에 이미 벌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소문이 제아무리 빠르다지만 지나치게 빠른 편이었다. 어쩌면 사이카 병사들이 다카쓰키 병사를 시기해서 퍼뜨린 풍문이 아닐까... 그렇게 의심하며 속을 떠보았다. 마고로쿠는 무라시게의 속셈을 눈치챘지만 모르는 척하며 작게 대답했다.
"어리석은 소문입니다. 부처님은 벌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무라시게는 말이 없었다. 마고로쿠는 다다미에 시선을 떨어뜨리며 혼잣말처럼 말을 이었다.
"아미타불은 매달리는 자를 도와주시고, 열심히 애원하는 자를 구원해 주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부처님께서 어째서 벌을 내리겠습니까. 소인, 괴이한 일에 부처님 핑계를 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 이런 전투가 아니었다면 적에게 사자를 보내 머리 주인의 신원을 확인해 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었으리라. 신분 높은 무사의 머리가 마땅한 처우를 받지 못하는 것은 공격한 쪽뿐만 아니라 패한 쪽에도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어느 것이 대장의 머리인지 물으면 회신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전투의 경우 그러기도 어렵다. 아라키는 오다를 배반하고 노부나가의 총신을 둘이나 죽였다. 노부나가의 원한은 틀림없이 깊을 테니 어느 것이 오쓰의 머리인지 모르겠으니 확인해 달라고 사자를 보내면 그자는 살아 돌아올 수 없다.
- 무라시게는 눈을 감고 머리의 형상을 떠올렸다. 둘 다 젊은 무사였다. 오쓰 덴주로는 젊다고 하지만 정말 그 정도로 젊었을까? 작년 정월, 아즈치성에서 노부나가에게 신년 인사를 했던 그때, 오쓰 덴주로도 어딘가에 있었을 터였다. 훌륭한 거성과 호화로운 의상, 질릴 정도로 차려진 산해진미, 아들의 장인인 아케치 미쓰히데... 그만 착각하고 만다. 이제는 고레토 휴가라 불러야 하는가... 그와 나누었던 소소한 이야기와 웃음소리,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하시바 지쿠젠노카미 히데요시도 있었다. 그 사내는 하리마를 공격하는 역할을 무라시게로부터 앗아 갔지만 이렇게 떠올려 봐도 이상하게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그 정월은, 그렇다, 참으로 좋은 날이었다. 오쓰는 어디에 있었나. 적어도 아즈치성에서는 그 굵은 목과 갸름한 얼굴을 보지 못했다.
- 잇큐 선사가 읊은 시조에 '정상 향하는 산기슭 갈라진 길 많고 많지만 바라보는 하늘의 달은 하나뿐이리'라는 노래가 있다. 세상에 종교는 많지만 목표로 하는 이상은 똑같다는 가르침이다. 잇큐 선사의 설법을 모르더라도 일상생활 속에서 종교의 차이를 특별히 따지는 이는 적다. 저 집은 진언종, 우리는 일향종, 옆집은 일련종, 맞은편은 선종이라도 반목하는 일은 거의 없다. 남만종이 부처를 믿지 않는다고 남의 신앙을 뭐라 비방하는 자는 오히려 유별난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평소의 이야기다.
- 숨죽이고 도움을 기다리는 나날 속에서 마음에 드리운 불안은 내부에서 적을 찾게 만든다. 저기는 가신이 아니니까, 저기는 셋쓰 사람이 아니니까, 저기는 타지에서 왔으니까, 사람들은 그런 차이를 찾아내 그들을 배신자로 몰아세우려 한다. 의심에 무너져 서로를 끝없이 의심하고 죽이며 끝내 와해한 가신들을 무라시게는 수도 없이 보아 왔다. 이케다 가문도 이타미 가문도 결국 그 때문에 망하지 않았던가.
- 정수리가 드러났다. 제아무리 무라시게라도 목구멍에서 치밀어 오르는 신음을 완전히 삼킬 수는 없었다. 간베에의 머리에는 무라시게조차 오싹할 정도로 끔찍한 흉터가 남아 있었다. 부상을 입은 자리가 곪아서 붓고 터져서, 벌레가 살을 물어뜯은 상처였다.
간베에는 고개를 들어 상처를 어둠에 숨겼다.
- "셋슈 님. 감옥 안에서 사람을 죽이는 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은 아니군요."
무라시게는 그대로 칼자루를 움켜쥐고 있었다.
"죽인 것은 나다. 자네는 나를 도구로 썼다고 말하는 건가?"
간베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 무라시게는 잠시 망설였다. 무라시게는 강인한 무사이며 지략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셋쓰의 수장에 오른 것은 누구보다 감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활과 말이 무사의 표면적인 도구라면, 이면의 도구는 감과 운이리라. 그 감이 지금 이곳에서 바로 간베에를 죽이라고 말하고 있다.
- 살펴보니 간베에는 이미 등을 구부린 채 이미 무라시게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무라시게가 자기를 죽일 리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모습이었다. 무라시게는 감의 예언을 무시했다. 언제든지 필요할 때 마음대로 죽일 수 있다. 지금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무라시게는 그렇게 자신을 타이르며 칼자루에서 손을 뗐다.
- 간베에를 찾아간 것이 옳았는지 무라시게는 알 수 없었다. 구로다 간베에가 아리오카성에서 가장 뛰어난 지혜를 가진 것은 틀림없다. 명석함을 따진다면 무라시게보다도 명석하리라. 하지만 그 남자는 정체를 알 수 없다. 간베에가 무라시게의 편을 들 이유는 아무것도 없지만 원망할 이유는 얼마든지 댈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지하 감옥에서 간베에가 입에 담은 말은 아무 의미가 없었을까? 간베에는 무엇 때문에 야습에서 대승을 거두었는지 물었다. 밤새 고민해 무라시게는 그 뜻을 거의 파악했다. 다만 그다음을 알 수가 없었다. 오쓰 덴주로를 해치운 자는 누구인가... 무라시게는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나."
- 밀려드는 열기는 생명이 있는 것들을 공격해 나이 든 자, 병든 자, 어린아이의 목숨을 뚝뚝 앗아 간다. 죽은 자의 유해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빠르게 부패한다. 물은 탁해지고 풀은 시든다. 하지만 6월, 죽음의 침묵이 셋쓰 아리오카성을 뒤덮은 것은 여름 탓만은 아니었다.
- 무라시게는 오다에게 반기를 들 때 만반의 준비를 했다. 보병을 고용했고 철포를 사들였으며 병량 창고를 몇 채나 지어 쌀과 소금을 채웠다. 그래도 아리오카성에 부족한 것이 있다면, 사람이었다. 그중에서도 사자가 부족했다. 멀리 있는 상대와 문제를 의논할 때 서한을 주고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중요한 용건은 사자가 직접 입으로 전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사자는 주군의 말을 오해 없도록 상대에게 전하고, 상대의 말을 오해 없도록 이쪽에 전달해야 한다. 때문에 아무리 발이 빨라도 어리석은 자나 예법을 모르는 자는 사자의 역할을 맡을 수 없다. 또 아무리 영리해도 산과 들판을 지날 방법을 모르고 제 한 몸과 서한을 지키지 못하는 자는 쓸모가 없다.
- 지리에 밝고 여행에 익숙하며 건강하고 다리가 튼튼하며, 영리하고 예의를 알며 상대가 믿을 만한 신분을 가진 자가 사자로서 적합하다. 하지만 그 모든 조건을 겸비한 걸출한 인물은 사자보다 오히려 장수로 쓰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실제로 무라시게는 아마가사키성에 장수인 기타가와라 요사쿠를 사자로 보냈다. 하지만 그것은 요사쿠가 말을 잘 다룰 뿐만 아니라 이 호쿠세쓰에서 태어나 근방의 지리를 잘 알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요사쿠를 먼 곳에 사자로 보낼 수는 없다.
때문에 무라시게는 사자로 수행승이나 행각승을 썼다.
- 오늘 무라시게의 뒤에는 특별히 몇 개의 나무 상자가 쌓여 있었다. 큰 것도, 작은 것도 있었는데 전부 끈이 십자로 묶여 있었다. 무헨은 그 상자를 힐끔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삿갓을 벗은 무헨의 얼굴은 다갈색으로 그을었고 이목구비는 온화하면서도 강한 심지가 엿보였다. 무라시게가 무헨을 처음 만난 것은 몇 년 전이었는데, 지금도 무라시게는 이 남자의 정체를 잘 알지 못했다. 평판으로는 고매한 행각승이라는데 세속적인 면이 있는 듯도 없는 듯도 하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 세상 풍문에도 상당히 밝지만 무헨은 그런 소문을 아득한 이국에서 생긴 일처럼 말한다. 세상을 높은 곳에서 굽어보는 듯하기도 하고, 혹은 세상이라는 귀한 공간에 자기는 들어갈 수 없다고 체념한 것 같기도 하다. 부탁을 하면 뭐든지 들어준다. 임종을 앞둔 자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해도, 죽은 자를 위해 불경을 읊어 달라고 해도, 먼 나라의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해도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는다. 무라시게는 무헨을 믿지는 않지만 무헨과 나누는 대화는 싫지 않았다.
- 사이토 구라노스케가 무헨에게 그렇게 말한 것은 무헨은 물론이고 나아가 무라시게의 속을 떠보기 위함이라고 무라시게는 짐작했다. 구라노스케는 무라시게의 서한이 어떤 계략이 아닐지 의심하는 것이다. 미쓰히데가 단바 공격으로 성을 비워 서한을 전할 수 없다는 것은 구라노스케의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부재중이라도 주군이 받을 서한을 가신이 문전박대한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서한을 되돌려 보낸 게 아닌 이상, 그것은 미쓰히데에게 전달되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리라.
즉 구라노스케는 미쓰히데를 위해 시간을 번 것이다. 하지만 무라시게는 아리오카성에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 "소승은 무인이 아니라서 셋쓰노카미 님의 말씀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아리오카성은 함락되지 않는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무라시게는 계획을 남과 이야기하길 좋아하지 않는다. 전략과 계획은 알려지면 힘을 잃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어쩔 수 없다. 무라시게는 마음을 정했다.
"분명 아리오카는 함락되지 않는다. 몇 년이든 더 버텨 주겠지."
"..."
"하지만 전쟁은 이기기 위해 벌이는 것. 내게 이 전쟁의 승리는 모리의 원군이 도착해 오다 병사들을 상대로 결전을 치르고 오다 노부나가의 목을 치는 일이다. 성을 지켜 내는 일이 아니라."
- 무라시게가 호쿠세쓰에서 모반하면 하리마의 하시바 지쿠젠노카미 히데요시가 고립된다. 오다 군은 히데요시를 버리거나 아리오카성을 공격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그리고 히데요시를 버리면 서부 규슈 지방 공격이 무효화되는 이상 오다는 싫어도 아리오카성을 공격해야만 한다. 그 시기를 맞추어 결전을 벌인다. 그것이 무라시게의 계획이었다.
전쟁은 무라시게의 생각대로 굴러갔다. 오다는 예상대로 대군을 끌고 아리오카성을 포위했고, 본인도 직접 출진했다. 남은 것은 결전뿐, 그래야 했다.
- '도라사루'는 무라시게가 가진 수많은 명물 중에서도 '효고'와 함께 세상에 널리 알려진 차항아리다. 형태는 아래쪽이 넓고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타원형으로, 색은 노란빛, 십이간지에 따라 '도라(寅)'와 '사루(申)'의 날에 시장이 서는 덴노지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 무라시게가 묻자 무헨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도라사루'를 담은 고리짝을 힐끔 보았다.
"소승은 행각승이라 야외도 힘들지 않지만... 지금은 조금 어렵겠습니다."
무라시게는 끄덕였다.
- "그렇다면 거기로 가 보겠습니다."
무헨은 까다롭게 따지지 않고 그렇게 말하고는 무라시게의 앞에서 물러나려고 엎드려 절했다. 무라시게는 무헨의 고리짝을 쳐다보고 불러 세웠다.
"법사, 잠시."
무헨이 고개를 들고 온화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어..."
무라시게는 눈을 반쯤 감았다.
"별일 아니다. 가 보거라."
무헨은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실룩이다가 흠칫 얼굴을 굳혔지만 그대로 아무 말 없이 물러났다.
- 유명한 차항아리 '효고', 차솥 '고바타케', 센 소에키에게 받은 사슬, 후지와라 데이카의 시화, 목계의 '원포귀범도'. 그밖에 요시노에서 만든 그림이 그려진 찻잔과 입구가 오목한 차솥, 비젠에서 구운 물그릇 등은 명물은 아니지만 무라시게의 눈에 든 보기 좋은 다기였다.
- 무라시게가 섬겼던 이케다 가문이나 그 숙적이었던 이타미 가문, 지금 무라시게를 섬기는 기타가와라나 가와라바야시, 무라시게를 등진 다카야마와 나카가와는 이곳 호쿠세쓰 출신이다. 따지고 보면 이케다와 이타미 지방이 호쿠세쓰에 있었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은 호족이 이케다와 이타미라는 이름을 썼다고 해야 맞으리라. 하지만 아라키라는 지방은 호쿠세쓰에 없다. 무라시게의 일족은 이방인이었다. 무라시게의 부친은 이케다 가신에서 나름대로 중요한 인물이었지만, 그것도 주군 가문을 농단할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의 아라키 가문은 무라시게 대에서 일으켜 세웠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눈앞에 있는 명물들도 전부 무라시게가 수집한 것이다.
- 무라시게는 말이 없었다. 이윽고 해가 저물고 미덥지 못한 가느다란 달이 하늘에 올랐다. 별빛이 다구를 비추어, 어느 것은 빛나고 어느 것은 빛을 삼켰다. 일본 굴지의 아름다운 명물들에 둘러싸여 무라시게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 "'도라사루'를 내주었다."
무라시게가 말했다. 지요호가 미소를 머금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쩐지 보이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저는 그것이 좋았습니다."
"그걸 원하는 자가 있어 전쟁을 위해 내주었구나."
"역시 어르신은 도량이 크십니다."
"도량이라."
표면에 수많은 돌기가 있는 '효고' 차항아리를 바라보며 무라시게가 피식 웃었다.
"나는 그런 말을 듣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구나."
- 무라시게는 자리에서 물러나던 무헨의 얼굴을 떠올렸다. 무라시게가 무심코 무헨을 불러 세웠을 때 굳어 있던 그 표정을. 그때 무헨은 무라시게의 심중을 알아차렸던 게 분명하다. 무라시게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역시 '도라사루'는 안 되겠다. 정주어야 한다면 하다못해 한 번이라도 더 보자꾸나.
우스꽝스러운 미련이다. 더욱 부끄러워해야 할 사실은 그 미련을 들킨 일이다.
- '도라사루'가 전쟁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도라사루'를 넘김으로써 미쓰히데가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예상은 빗나갈 리 없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도라사루' 같은 명물도 아낌없이 내놓는 관대한 아라키, 마쓰나가와는 그릇이 다르다고 칭송하는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나는 '도라사루'를 내놓았다. ... 그랬던 게 아닐까."
- 지금으로부터 일 년 육 개월 전, 마쓰나가 단조 히사히데는 우에스기를 믿고 노부나가를 배신했다. 하지만 우에스기는 오지 않았고, 히사히데는 대번에 진퇴양난에 빠졌다. 그때 차솥 '히라구모'를 내놓는다면 노부나가가 히사히데를 사면해 줄 거라는 소문이 있었다. 무라시게는 그 진위는 모른다. 그런 일도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결국 히사히데는 차솥을 내놓지 않고 자결했고 명물 '히라구모'는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 무사의 기개를 훌륭하게 지켜 냈다고 히사히데를 칭찬하는 자도 있었다. 하지만 무라시게는 히사히데의 죽음이 어쩐지 탐탁지 않았다. '히라구모'가 영원히 소실된 것은 아쉽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히사히데가 '히라구모'를 내놓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것이다. 무사의 기개를 지키려면 '히라구모'는 오다에게 넘겨서 후세에 전하고, 그런 다음에 할복했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 그가 '도라사루'를 내놓은 것은 나는 옹색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닐까. 전쟁을 위해서라면 명물쯤이야 아깝지 않다고 허세를 부리려고 그랬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도라사루'는 전쟁을 위해서 내놓았다고 할 수 없는 게 아닐까.
- "나는 '도라사루'가 아깝다. 천만 병사에게 목숨을 걸라고 명령해 온 내가, 내 물건은 차항아리 하나가 이토록 아쉽구나. 지요호, 그대는 나를 비웃겠나."
- 이 전쟁은 아라키 가문, 나아가 모리 가문과 혼간지의 사활을 건 대전이었다. 다른 가문을 고려할 여유는 없다. 구로다 가문의 대가 끊기든 말든 무라시게에게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한편으로 무라시게는 간베에를 붙잡아 둔다고 쇼주마루가 죽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쇼마루는 분명 열두 살이 아니었나. 만약 간베에를 죽이면 쇼마루는 살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과연 어떻게 했을 것인가?
- 무라시게는 심사숙고해 결정한 일이라면 그 결과가 어떻다 해도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생각이 미치지 못한 일이라면... 얇은, 종잇장처럼 얇은 후회가 남았다.
- "예. 분부대로."
주에몬은 되묻지 않고 무라시게의 명령을 받고 물러났다. 갑옷을 벗어 가벼워진 어깨로 무라시게는 문득 주에몬을 다시 불러들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원래 무헨에게 경호를 붙이지 않은 이유는 어설프게 병사를 붙이면 중요한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이 탄로 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결정을 바꾸어 병사를 보냈다. 생각이 짧았을까?
- 무라시게는 판단에 빈틈이 생겼다는 것을 느꼈다. 배에 힘을 단단히 넣었다. 결정을 번복한 게 아니라 오판을 정정했다고 생각해야 한다. 망설이지 마라, 죽는다. 무라시게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밤이 깊어 갔다.
- "빠르다니, 무슨 말이냐."
무라시게가 물었다.
"사실 소인의 예상으로는 셋슈 님을 만날 때까지 앞으로 열흘은 더 걸릴 줄 알았던 터라."
"어째서 네놈 같은 죄인을 만나야 하느냐."
"이거 묘한 질문을... 실제로 셋슈 님은 오시지 않았습니까?"
그 말을 끝으로 간베에는 입을 다물었다. 침묵해 버리자 감옥 안의 간베에는 하나의 그림자 같았다.
- 무라시게에게 간베에는 그림자처럼 붙잡기 힘든 남자였다. 과거 고데라 가문의 일개 가신이었던 고데라 간베에는 재치를 자랑하고 무예를 중시하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무사일 뿐이었다. 이 감옥에 갇힌 간베에는 그 지략을 천하에 떨칠 기회를 기다리는, 까다롭지만 다루기 쉬운 남자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한 달, 두 달 지나는 사이 무라시게는 간베에를 점점 알 수가 없었다. 영리한 남자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간베에가 뭔가를 바란다는 건 알겠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호해서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무라시게는 간베에의 수법을 알 것 같았다.
- 아리오카를 찾아왔을 때 간베에는 아마도 죽음을 각오했으리라. 하지만 처형당하는 게 아니라 감옥에 갇힌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몹시 당황했고 죽여라, 죽여 달라고 외쳤다. 이제야 어째서 간베에가 죽여 달라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았다. 어젯밤 혼마루에 잠입한 구리야마 젠스케의 말이 맞다. 간베에는 살아서든 죽어서든, 자기가 돌아가지 않으면 인질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 자기가 보낸 인질을 잃는다는 것은 무사에게 무거운 치욕이다. 그런 치욕을 당할 바에야 죽음을 선택하겠다... 그 11월, 간베에는 그렇게 생각했으리라. 태연히 인질을 버리고 그것도 전략이었다고 떠들어 대는 무사가 드물지 않은 이 난세에 그런 사고방식은 드물지만 딱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올곧은, 무사다운 행동이다. 무라시게는 간베에를 향해 네 속셈은 다 파악했다고 말해 주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 아니, 잠깐, 무라시게는 생각했다. 11월의 간베에가 치욕이 두려워 죽음을 바랐다고 해도, 지금 감옥 안에서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 간베에도 과연 같은 선상에 있을까?
무라시게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같은 선상이 아니다. 뭔가가 결여되었다.
- 무라시게의 얼굴에서 씻은 듯이 웃음기가 사라졌다.
무라시게는 자기가 정체 모를 열기에 들떠 있었다는 사실과 그 열기가 사그라드는 것을 동시에 깨달았다. 야심이 강한 무라시게는 전쟁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사기도 기만도 충분히 이용한다. 하지만 그는 비열한 사람은 아니었다. 감옥에 갇혀서 몸에 쇠붙이 하나 없는 남자를 말로 조롱하다니 평소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무라시게는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내가 어떻게 된 건가, 하고 아연실색했다.
- "셋쓰노카미 님 가신들 중에 셋쓰노카미 님의 명령에 목숨을 걸고 창을 휘두르는 용감한 자는 얼마든지 있겠지요. 셋쓰노카미 님께 충의를 다하고 만사 셋쓰노카미 님의 뜻을 이루려고 애쓰는 자도 있겠지요. 하지만 외람되지만 소인이 보건대 천하의 전쟁을 셋쓰노카미 님과 마음껏 논할 수 있는 자는... 글쎄요, 일단 전무해 보입니다."
무라시게는 부정할 수 없었다.
- 물론 아라키 규자에몬은 침착하고, 노무라 단고는 용맹하며, 이케다 이즈미는 충직하고 다른 장수들도 뛰어난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호쿠세쓰를 발판으로 만천하를 내다보는 시야를 가지고 무라시게가 속마음을 터놓고 미래를 논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 없었다. 굳이 손가락을 꼽아 보아도 고리 주에몬에게 장수의 자질이 보일 듯 말 듯 하는 정도일 뿐, 그것도 대성할 그릇은 아니었다. 다카야마 우콘과 함께라면 원대한 야망도 논할 수 있었을지 모르나 과거에 우콘은 조력자에 지나지 않았고, 하물며 현재 우콘은 적이다.
간베에의 말은 옳다. 무라시게는 고독했다.
- "오다 가문에 의탁했을 때 셋슈 님은 참으로 통쾌했겠지요. 하시바 지쿠젠 님, 시바타 슈리 님, 고레즈미 고로자 님, 다키가와 사콘 님, 고레토 휴가 님은 물론이고 기라성 같은 장성들 또한 셋슈 님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인물들. 군사 회의든 다도 자리든 필시 알찬 대화를 나누지 않았습니까? 셋슈 님은 오다 가문에 있었을 때만 사람답게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 터. ... 그렇지 않습니까?"
- 오다의 가신이었을 때 지금 간베에가 말한 장수들은 무라시게의 동료이자 적이기도 했다. 서로 수훈을 다투고, 발목을 붙잡고, 말을 섞으면 짜증스러울 때가 더 많았다. 하지만 분명 모두 걸출한 인물이었다. 가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도 그들은 이해했고 때로는 무라시게를 압도하는 식견을 보였다.
- 간베에의 목소리는 타이르듯 온화했다.
"어떻습니까. 어쨌거나 이 지하 감옥은 시간의 흐름이 느려서 지금이 몇 월인지도 모르겠지만, 지난 몇 달 동안 셋쓰노카미 님은 그 말이 옳다, 실로 그러하다, 하고 무릎을 친 적이 몇 번이나 있었습니까? 이자와는 말이 통하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습니까?"
"..."
"이 아리오카성에서 셋슈 님의 말씀을 진실로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소인 말고는 아무도. ... 고로 셋슈 님은 이곳에 계신 것입니다."
- 그 이상 반대 의견을 내세울 수도 없었다. 비어져 나온 말뚝은 웃음만 사고 말지만 너무 튀어나온 말뚝은 잘려나가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허황된 소문을 이유로 무헨 살해 죄를 뒤집어써도 이상하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자 평소 바람처럼 가벼운 말의 발걸음도 어딘가 무거웠다.
- 요사쿠는 결코 노토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지만이 문제에 관해서는 노토의 주장이 옳은 것 같았다.
- "애초에 손님방에서 수행을 하는 승려라니 듣도 보도 못했다. 암자에는 불당도 있었거늘. 제대로 된 승려라면 거기서 독경했겠지. 하지만 무엇보다도 일꾼은 손님방에서 들려온 게 진언일 거라고 했다. 현밀이 반대라고 생각하지 않나?"
- 무라시게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규자에몬이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요사쿠는 알 수 있었다. 요사쿠는 무헨에게 병자를 위한 염불을 부탁하러 갔다. 무헨이 평소 염불을 읊었기 때문이다. 즉 무헨의 종파는 일반적으로 개방되어 있는 현교인 일향종이나 정토종, 혹은 시종, 어쩌면 천태종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언은 밀교(密敎)의 경전, 고야산이 총본산인 진언종의 경전으로 행각승 중에서 진언을 읊는 사람은 고야 승려뿐이다. 이즈미가 규자에몬 대신 물었다.
"주군, 하지만 행각승의 생각은 알 수 없는 법. 무헨은 사람들이 원하면 염불도 진언도 읊어 주는 승려였을지 모릅니다."
무라시게는 끄덕였다.
"무헨은 부탁을 받으면 거절하지 않는 승려였지. 자네 말처럼 그런 일도 있었겠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무헨이 아니라 일꾼이다. 그 사내는 평생을 일향종 사찰에서 살았어. 배우지 않은 경전도 귀동냥으로 기억할 수야 있겠지만 그 일꾼이 어째서 무헨이 읊은 게 진언이라고 말했을까?"
- 평생 독경을 들은 남자가 손님방에서 들려온 게 진언이었던 것 같다고 말한 이유가 무엇일까? 요사쿠는 알 것만 같았다. 그래서 무심코 의견을 말했다.
"불경이 아니었다... 아니, 불경으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 아닙니까?"
- 다른 자를 내세워 이 명물을 단바에 보내면 화담은 다시 진행되리라. 단바가 함락되기 전에 어떻게든 화담을 추진해야 한다. 하지만.
다시 한번, 이것을 포기해야 하는가.
- 무라시게는 '도라사루'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단 한 번으로도 반신을 잃은 것처럼 고통스러웠는데 두 번이나 할 수 있을까?
달빛 속에서 무라시게는 스스로에게 자문했다.
- 6월 8일, 단바 야카미성의 하타노 형제, 아즈치에서 책형에 처해지다.
고레토 휴가노카미 미쓰히데는 단바 지방 대부분을 평정했다. 미쓰히데가 아리오카성을 위해 중재 역할을 했다는 역사 기록은 일절 발견되지 않았다.
- 마을에서는 쌀을 팔아서 돈으로 바꾸고, 무사는 돈을 내고 쌀을 사니 쌀가게는 이윤은 적지만 괜찮은 장사다. 하지만 최근에는 정작 중요한 돈의 회전이 좋지 않았다. 중국에서 들여오는 돈의 양이 줄어 부러진 동전이나 깨진 동전이 나돌았다. 수도 교토에 가까운 셋쓰에서도 그러니 반도 지방에서는 돈이 더욱 부족해 급기야 소작료를 쌀로 받기 시작한 가문도 있다고 한다. 이대로 계속 돈이 부족하면 조만간 우리도 그럴 수밖에 없겠군... 아라키 가문을 세운 이래로 무라시게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올해만큼은 그런 고민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벼의 작황을 확인하고, 태풍과 홍수 같은 피해를 제하고 실제 소작료를 정하는 것도 무사가 할 일이지만 그 또한 불필요했다. 거리에는 사람들의 왕래도 없고 호쿠세쓰의 마을들은 전부 오다가 차지해, 올해 아라키 가문의 창고에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는다.
- 무사뿐만 아니라 서민들도 가족을 살해당하는 것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한 명을 잃으면 한 명을 죽이고, 두 명을 잃으면 두 명을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겁쟁이라고 비난당하고 나약한 자로 간주되어 온갖 고초를 겪게 된다. 하지만 보복이 끝없이 되풀이되면 지켜야 할 집이나 마을이 오히려 약해진다. 그래서 살해한 쪽에서는 사죄의 의미로 사람을 내놓고, 그것으로 보복을 대신하는 것이 무로마치 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방법이었다. 이때 내놓는 것은 사람을 죽인 당사자가 아니라 그를 대신할 희생양으로, 이를 게시닌이라 하였다.
- 무라시게는 귀인도 아닌 남자가 병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이동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게시닌일 거라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게시닌을 보내는 이상 어디선가 사망자가 생긴 다툼이 있었다는 뜻이다. 무라시게는 그런 보고를 받지 못했다.
- 대여한 갑옷은 숫자가 맞지 않았으며 말은 야위었고 여름 잡초는 제멋대로 자랐다. 하나하나는 모반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사소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분명 배신을 뜻했다.
- 가쓰마사는 희대의 명장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어리석은 장수도 아니었다. 부족한 점을 발견하면 고치도록 명령했지만 너무 세세하게 지시하지는 않고 장수들에게 맡겨, 빈틈이 없도록 임하라고 매일 말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 이 아리오카성에서 여름 잡초가 무성히 자란 것이나 규자에몬이 다툼을 보고하지 않은 것도 분명 사소한 일이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는 그런 사소한 일이 없었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 지요호는 오사카 혼간지 승관의 딸로 본인도 경건한 일향종 신도다. 무라시게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일향종은 극락왕생을 바라지 않는 줄 알았는데."
일향종은 기도의 효험을 인정하지 않는다. 죽은 자를 구제하는 존재는 오로지 아미타여래뿐, 산 자의 기도가 본인이나 타인을 구제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지요호는 눈길을 떨어뜨렸다.
- 그 순간, 무라시게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등줄기가 오싹했다. 군사 회의에 참석한 장수들은 모두 당혹스러운 얼굴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하자면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이었다. 평소 말수가 적은 무라시게가 갑자기 부조리한 말을 한다는 듯이 어딘가 냉소적인 얼굴이 쭉 늘어서 있었던 것이다. 무라시게의 말이 옳다고 받아들이는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
- 조로즈카 요새를 지켜 낼 장수로 임명한 이래로 지금까지, 신파치로는 다루기 힘든 부대장들을 통솔해 오다가 요새에 근접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오다가 원거리 공격을 선택해 요새에 직접 쳐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는 해도 큰 탈 없이 굳게 수비한 신파치로의 역량은 결코 부족하지 않다. 하지만 장수로서의 넓은 시야는 전혀 없었다. 간베에라면 이런 얼빠진 대답은 하지 않을 것이다. 무라시게는 부질없는 분노를 느꼈다.
- "어리석은 녀석, 다키가와에게는 무엇을 보냈느냐?"
"예, 그건... 농어를 보냈습니다."
농어는 모습도 아름답고 예로부터 가장 품위가 높은 바닷물고기로 일컬어지는 여름 물고기였다.
- 무라시게는 언성을 높였다.
"이리 어리석을 데가! 신파치로, 그 농어를 어디에서 손에 넣었느냐?"
신파치로는 질문을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무라시게는 아랑곳없이 다그쳤다.
"오다가 사방을 포위한 이 아리오카에서 농어가 잡힐 리 없다. 암거래일 터!"
-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금품이 오가기 시작하는 것은 세상의 이치다. 내일은 서로 목숨을 앗아 갈 적이라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아리오카성 이상으로 철저하게 포위된 오사카 혼간지에서도 오다의 병사들이 쌀과 잡다한 도구를 팔아 몰래 돈으로 바꾸고 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물론 아리오카성 어디선가 암거래가 이루어진다 해도 이상할 건 없지만 그런 거래는 철저히 금지하고 있다. 신파치로는 머뭇머뭇 변명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부대장들이 가져온 거라 소인은 모르옵니다. 하지만 주군, 소인은 납득할 수 없습니다. 수단을 가리지 않고 식량을 구하는 것은 전쟁터에서 훌륭한 마음가짐이라고 칭찬해 주실 줄 알았건만."
- 신파치로의 말을 듣고 몇 명이 고개를 끄덕거린 것을 무라시게는 보았다. 전쟁터에서는 병량이 떨어지면 풀이라도 삶고 돌이라도 핥으며 허기를 달랜다. 농어를 손에 넣은 것은 수완이 뛰어난 것이지,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장수들의 그런 당혹감을 무라시게는 예민하게 감지했다. 무라시게는 그런 기척을 일축했다.
"식량을 구한 것을 탓하는 게 아니다. 답례로 농어를 받은 다키가와가 무슨 생각을 하겠느냐? 다키가와 사콘은 오다에서 손에 꼽히는 지장이니 육지에서 농어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할 리 없다. 반드시 아리오카에 물품을 반입하는 장사꾼이 있다고 생각할 게다. 그걸 알게 되면 왕래를 막는 것도, 장사꾼 틈으로 첩자를 보내는 것도 다키가와가 마음먹기에 달렸어. 자네는 오다에게 아리오카성에는 이러이러한 허점이 있다고 친절히 알려 준 셈이다. 그런 일이 있으니 다른 가문과 연락할 때는 중개인을 통하라는 규칙이 있다는 것을 알아 두어라. 신파치로, 네가 저지른 실수, 가벼운 죄가 아니다!"
- 군사 회의 자리가 기침 소리 하나 없이 조용해졌다.
무라시게는 마음이 초조했다. 당사자인 신파치로는 그래도 의기소침한 기색이었지만 다른 장수들은 신파치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이해하는 것 같지도 않고 어째서 견책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떨떠름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원래 군사 회의 자리에서 신파치로를 꾸짖은 것은 일벌백계가 목적이었다. 하지만 무라시게의 말은 장수들의 마음에 닿지 않았고 억지로 만들어 낸 분노는 허공을 맴돌았다.
무라시게는 생각했다. 정녕 지쿠고노카미 가쓰마사를 추방하기 직전의, 이케다 가신들의 태도와 똑같지 않은가?
- 조심스럽게 입을 연 것은 아라키 규자에몬이었다.
"지당한 노여움이십니다. 하오나."
거짓말을 하는구나. 무라시게는 그렇게 생각했다. 규자에몬의 얼굴을 보면 무라시게의 말이 옳다는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하지만 무라시게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손짓으로 다음 말을 재촉했다. 규자에몬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말했다.
"분명 신파치로의 행동은 경솔했고 군법에 비추면 무거운 벌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파치로는 평소 근면성실했습니다. 장수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르고 한 행동이겠지요. 부디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적이 사방을 포위한 지금, 섣불리 아군을 벌하는 것은 상책이 아닌 듯합니다."
- 무라시게는 다시 한 번 천수각에 앉아 있는 장수들을 보았다. 반발하는 기색은 싹 사라지고 그게 좋겠다고 말하고 싶은 듯 애매한 침묵이 깔렸다. 아라키의 장수들은 어리석지 않다. 신파치로의 행동이 얼마나 군법에 어긋나고 오다에게 허점을 보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오늘 군사 회의에서 장수들은 무라시의 지적에서 눈을 돌리고 신파치로에게 동정했다. 무라시게는 지금 어렴풋이 그 이유를 깨달았다.
- 과거에 무라시게가 오다 가문에 있었을 때, 노부나가는 무라시게를 자기와 마찬가지로 가신들을 통솔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무라시게는 오늘 새삼 깨달았다.
-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군사 회의는 호족들이 무라시게를 견제하는 자리가 아니라 무라시게가 호족들을 통솔하는 자리였다. 장수들은 무라시게의 말을 존중했고 무라시게가 옳다고 하면 대부분 옳다 하였고, 그르다고 하면 대부분 그르다고 대답했다. 약간 억지스러운 주장도 아라키 규자에몬이나 이케다 이즈미와 같은 원로 가신들을 미리 설득하면 생각대로 중의를 모아 뜻을 관철할 수 있었다.
- 하지만 오늘, 무라시게가 신파치로의 잘못을 지적해도 장수들은 그 말을 전혀 귀담아듣지 않았다. 사람은 원래 속마음을 호도하는 법이다. 속으로는 무라시게의 지적을 의심해도 겉으로는 그것을 노골적으로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데 한눈에 알 정도로 장수들이 냉담했던 것은 우려할 문제였다.
- "이 술을 어떻게 생각하나."
간베에는 손 안의 술잔을 바라보며 조용히 대답했다.
"몸속에 스며드는군요."
"다른 건?"
"이타미는 물이 좋군요."
"다른 건?"
간베에가 눈동자를 돌려 무라시게를 힐끗 쳐다보았다.
"... 이건 갓 담근 술이군요. 성안의 쌀을 최근에 술로 만든 거겠지요. 쌀을 술로 바꾸면 병량이 줄어듭니다."
- 전쟁에서 쌀을 술로 만드는 경우는 빈번했다. 배급받은 쌀을 전부 술로 만들어 마시다가 급기야 굶어 죽는 병사도 있을 정도였다. 때문에 똑똑한 장수는 쌀을 병사에게 나눠 줄 때 한꺼번에 주지 않고 조금씩 나눠 준다.
"그걸 알면서도 술을 담그다니, 셋슈 님은 백성이나 병사들이 굶어도 자신을 위해 쌀을 낭비하는 대장이거나..."
간베에는 술잔을 비웠다.
"아니면 성안의 병량이 아직 충분하거나, 둘 중 하나겠지요."
- 창고 안의 쌀로 농성을 이어 나가야 하는 이상 아리오카성에 낭비할 수 있는 병량은 없다. 하지만 술병 하나만큼의 술도 만들지 못할 정도로 절박하지는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무라시게는 잠시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가 간베에와 자기 술잔에 탁주를 따랐다.
"그뿐이냐."
"그렇다면..."
간베에의 목소리에 조롱 어린 기색이 섞였다.
"소인과 술잔을 나누려는 저의는."
술잔에 입을 대고 홀짝거리며 간베에가 말을 이었다.
"이미 달리 술잔을 나눌 이가 없는 모양이군요."
- "영리한 새는 나무를 가려서 둥지를 튼다고 하지. 자네, 고데라 가문에서는 어지간히 갑갑했겠군."
간베에는 유쾌해 보이지 않았다. 빈 술잔을 아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갑갑한 게 뭐가 문제겠습니까. 셋슈 님은 갑갑해서 가쓰마사 님을 추방하셨습니까?"
- 과연 나는 이케다 지쿠고노카미 가쓰마사 밑에서 갑갑했던가, 무라시게는 생각했다. 영리하다고는 할 수 없는 주군 밑에서 걸출하다고는 할 수 없는 동료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세월을 보내는 것이 갑갑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만천하에 자신의 역량을 드러내고 싶어 당장이라도 뭔가 행동해야 할 것 같은 초조함에 시달린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가쓰마사를 추방했느냐고 묻는다면...
"아니... 그렇지는 않았구나."
- 그랬다. 장수로서의 그릇이야 어쨌든 가쓰마사는 무라시게에게 나쁜 주군은 아니었다.
- "살기 위해서였다. 모든 것은 살아남고, 가문을 남기기 위한 것이었다."
- 무사는 죽는다. 물론 사람은 모두 죽지만 무사에게 죽음은 도구나 다름없었다. 창끝에 몸을 던지고, 자기를 겨누는 총구 앞에서 살아가는 게 무사다. 죽는 것은 상관없다... 아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받아들이고는 있지만 그래도, 오히려 그렇기에 개죽음은 당할 수 없었다.
자기가 죽어도 자식이, 자식이 죽어도 일족이 가문을 남기고, 몇 대 전의 아무개가 용감하게 죽어 지금의 집안이 있는 거라고 구전될 날을 생각하면 죽음도 받아들일 수 있다. 쇠락한 주군 가문을 따라 함께 몰락해 봤자 이름도 가문도 남지 않는다. 실로 개죽음이다. 무라시게는 언젠가 죽을 날을 위하여 가쓰마사를 추방했던 것이다.
- "간베에, 알고 있겠지만 나니까 자네를 죽이지 않은 게야. 내가 추방당하면 자네는 잘해야 참수, 아니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해서 이 지하 감옥에서 굶어 죽겠지."
간베에는 술잔을 기울여 남은 술이 없는지 살피다가 이윽고 체념한 듯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제가 조금 난처해지겠군요."
"그렇다면 이야기를 하나 들어 보아라."
- 확실히 간베에는 꿰뚫어 보았을 것이다. 노토가 죽고 나서 한 달 반, 주에몬에게 조사를 명령하지 않은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다. 주에몬이 노토를 쏘도록 명령한 모반자가 아닐까 의심했기 때문이다.
- 간베에는 아랑곳없이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누가 셋슈 님을 상대로 모략을 꾸미는지 소인은 짐작도 가지 않는군요. 자고로 모략은 사람이 하는 일, 사람의 마음을 모르면 아무것도 읽어 낼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 몸 간베에."
누구를 비웃는 건지 간베에가 피식 웃었다.
"이 성에 오고 나서 줄곧 이 지하 감옥에 있다 보니 아라키 가문의 원로들은 이름만 아는 정도입니다. 속마음을 헤아리는 건 불가능한 일."
간베에는 손에 든 술잔을 어루만지더니 둘도 없는 보물인 것처럼 품에 넣었다. 무라시게는 간베에의 대답이 불만스러웠다.
- 무라시게는 조금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 죽을 테냐, 간베에."
간베에는 기름진 앞머리 밑으로 가만히 무라시게를 쳐다보았다. 무라시게는 간베에의 얼굴도 보지 않고 그저 일렁거리는 촛불을 보고 있었다.
"그렇군요, 지금의 셋슈 님이라면."
간베에가 말했다.
"소인을 죽일 수 있겠지요."
"헛소리. 자네는 내 손아귀에 있어, 언제든지 죽일 수 있었다. 도움이 되니까 살려 둔 것뿐이야."
무라시게의 말에 간베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 자기를 살려 둘 거라는 사실을 깨달은 간베에가 당황해서 다급하게 죽이라고 애원했지만 듣는 척도 하지 않고 그를 감옥에 처넣었다. 노부나가는 죽이고, 무라시게는 죽이지 않는다... 그 평판은 천하에 퍼졌으리라. 소문을 퍼뜨리고 평판을 높여 이름을 알리고 아군을 늘린다, 모든 것이 전략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변했다. 이제는 무라시게가 누구를 죽이든 말든, 그런 이유로 아라키 가문의 편을 드는 자는 천하에 한 명도 없으리라.
이미 간베에를 살려 둘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확실히 지금의 무라시게라면 간베에를 죽일 수 있다.
- 하리마의 이름 높은 영걸, 구로다 간베에를 이 지하 감옥에서 고통받게 하는 것도 마음이 무겁다. 그렇다면 죽일까. 무라시게가 결정을 내리려던 그 순간 간베에가 입을 열었다.
- 그렇다면 이 세 사건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석가모니 불상이 미소를 짓고 있다.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으로 올려 진리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을 표현하고, 왼손은 여원인(與願印)으로 늘어뜨려 중생의 소원을 받아 준다는 뜻을 표현하고 있다. 부처는 구원하는 존재라고 승려는 말한다. 부처는 구원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벌을 내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들은 언젠가 부처가 벌을 내리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세상은 예토, 난세를 살아가는 사람은 무사든 아니든 수라의 세상에서 살아간다. 죄가 없을 리 없고, 죄가 있다면 벌을 받지 않을 리 없다. 때문에 고매한 승려가 아무리 부처의 너르고 무한한 자비를 설파해도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벌을 두려워한다. 지금 무라시게는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 불법을 설파한 석가모니불이 아무래도 자기를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 무라시게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깨끗한 눈밭처럼 아름다운 지요호가 그림자 속에 서 있었다.
- 만약 패하더라도 일본이 존재하는 한 구전될 대전투의 영웅으로 화려하게 막을 내린다면 무사로서 이보다 더 훌륭한 죽음은 없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어째서 나는 지하 감옥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가. 애가 탔다. 당장이라도 일어나려던 그때, 무라시게는 손등을 기어가는 한 마리 거미를 보았다.
- 너무나 작은 거미였다. 어둠 속에서 살아서 그런지 몸에는 색이 없고 무라시게의 손등을 제멋대로 기어 다니고 있었다.
벌레 따위가, 하고 죽이려던 손이 멎었다. 문득 가슴속에 되살아난 것은 지요호의 말이었다. 지요호는 사람 목숨이 벌레보다 가볍다고 했다. 무라시게는 이어서 무언가를 떠올리려 했다. 지요호는 그리고 뭐라고 했던가? 무엇이 세상의 이치라 했던가?
- 기적이 사람을 구원한다. 지요호는 그렇게 말했다.
아니, 그렇지 않다. 그보다 앞서 무슨 말을 했다. 그것은 무슨 말이었던가?
어째서 그런 일이 마음에 걸리는지 무라시게는 알 수 없었다. 벌레 따위 때려죽이고 이 어두운 감옥에서 나가야 한다. 전투 준비를 해야 한다. 빨리 준비해서 죽이고, 죽어야 한다.
- 꾸며 낸 기적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 또한, 이 세상의 이치.
- 어째서 그런 게 생각나는 걸까? 지금 간베에가 내놓은 책략으로 모든 것이 마무리되려는 이 순간에 약자라면 거짓을 진실한 구원으로 믿고 달려들 수도 있겠지만 이 셋쓰노카미 무라시는 그런 자들과는 다르다. 다르단 말이다.
정녕 다를까?
- "그런가. 결국 이것이 자네의 싸움이었나."
간베에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 하지만 가슴속 어딘가에 혹시나 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 사람은 자기가 파멸한다는 미래를 부정하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사소한 기적에도 매달린다. 간베에는 그 허점을 찔렀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간베에는 이런 말을 했다. 그 혀로 간수를 농락해 무라시게에게 칼을 휘두르게 했을 때.
- 동서고금 달아나는 자는 달아난다고 말하지 않는다. 반드시 그럴싸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물론 전략상 물러날 때는 있다. 오히려 물러날 방법을 몰라서야 전쟁은 할 수 없다. 하지만 도움을 불러오겠다고 전쟁터에서 떠난 자를 대체 누가 곧이곧대로 도움을 청하러 갔다고 믿으랴. 하물며 무라시게는 대장이다. 불리한 싸움에서 가신들을 이끌고 성을 버리는 것은 전쟁에서 흔한 일이지만, 아직 버티고 있는 성에서 대장이 혼자 빠져나가다니 이야기로도 들어 본 적이 없다.
- "자네의 책략을 따르면 나는 천년이 지나도록 천하에 악명을 남기겠지. 자네는 내 목을 치는 대신 내 이름을 치려 했나."
지금 간베에의 형상이 바뀌었다. 눈이 기름을 칠한 것처럼 번득거렸다. 무라시게는 간베에의 이런 눈을 본 적이 있었다. 작년 간베에를 이 감옥에 가둔 뒤 아베 지넨의 죽음을 말해 주었을 때, 간베에는 이렇게 이상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간베에가 실실 웃었다.
"설마 멈출 줄이야. 이건 다소 예상하지 못한 일이군요."
"간베에!"
"소인의 예상으로는 셋슈 님은 덥석 뛰어들었을 터인데. 소인이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 무라시게는 하늘이 도왔다고 생각했다. 앞서 사람을 현혹해 안심시키는 거짓에 대한 이야기를 지요호에게 듣지 않았다면 결코 멈추지 못했으리라. 간베에가 들려준 꿈은, 그 정도로 감미로웠다.
- 지금 살짝 몸을 흔들고 있는 간베에는 계획을 간파당했는데도 어딘가 유쾌해 보일 정도였다. 무라시게는 필살의 덫을 회피한 안도감에 젖으며 동시에 간베에의 원대한 계획을 깨닫고 아연실색했다.
"간베에, 자네의 지난 열 달은 전부 이를 위한 것이었나?”
간베에는 빙그레 웃을 뿐.
- "소인이 오다를 저버려서 쇼주마루가 처형당했다면 그것도 무가의 숙명이겠지요. 주군 가문과 오다 사이에 끼어, 울며불며 쇼주마루를 저버렸다 해도 무가의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받아들였겠지요. 그런데 쇼주마루는 어째서 죽었습니까?"
- "내가 이 아리오카성에서 머리만 남아서 돌아갔어도, 살아서 돌아갔어도, 쇼마루는 무사했을 터. 그런데 너는 나를 붙잡아 돌려보내지 않았다. 평범한 세상의 이치를 저버린 것이다.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세상의 이치를 저버리면 인과가 돌아올 거라고. 그렇다, 인과는 돌고 돌아 쇼주마루의 목숨을 앗아 갔다. 무라시게, 스스로 자비롭게 보이고자 했던 너의 허세가 바로 내 아들을 죽였다!"
- "쇼주마루는 총명한 아이였다. 강한 아이였다. 구로다의, 나의 빛이었다. 무라시게, 백번을 죽여도 부족하다. 너는 너의 허세를 전략이라고 고집해 내 아이를 죽였다. 네가 쇼마루에게서 무사의 죽음을 앗아 갔으니 나도 네놈에게서 무사의 죽음을 앗아 가기로 결심했다. 그 이름, 미래영겁 치욕 속에 나뒹굴 것이다."
- "네 책략은 실패했다. 네게 이미 다른 수단은 없다. 거기서 죽어 가거라, 머지않아 아들도 만날 수 있겠지."
"만나고 싶구려. 이 간베에의 아들이라면 볼썽사납게 죽지는 않았겠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꾸짖어 줘야 하니. 그리고 셋슈 님."
다시 간베에가 경멸 어린 미소를 머금었다.
"셋슈 님은 착각하고 계십니다. 소인은 때가 무르익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저의 책략은 이미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 울퉁불퉁한 흉터가 남은 머리를 어루만지며 간베에가 말했다.
"이 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셋슈 님이 일찍 전쟁을 포기하고 성문을 열었다면 마쓰나가 단조가 그랬던 것처럼 일단 복귀를 허락받았을 터. 그렇다면 셋슈 님은 단순한 모반자, 활약에 따라서는 설욕도 어렵지 않았겠지요. 그래서는 시시한 법, 소인이 성 안팎의 골칫거리에 참견하고, 셋슈 님이 그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에 전쟁이 길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이미 열 달이나 지났습니다. 노부나가 경은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만약 간베에가 없었더라면 아리오카성은 이미 성문을 열었다...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무라시게는 생각했다. 노부나가의 심기는 헤아리기 어렵지만 한 달이나 두 달 늦어도 봄에는 성문을 열었다면 복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라시게는 간베에의 도움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말았다. 늦어지면, 용서받지 못한다.
- 무라시게는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간베에가 들려준 꿈은 독이다. 독인 줄 알면서 삼키는 자는 없다.
- "나는 셋쓰를 통치할 명분이 없다. 내게 셋쓰는 선조로부터 내려온 땅도 아니거니와 이제는 임무를 받아 통치하는 땅도 아니다. 그렇다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 만인이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라고 자네가 그랬지. 물론 일리는 있어. 하지만 그걸 알고도 어째서 내가 오다에 등 돌렸는지 모르겠는가?"
대답은 없었다.
"노부나가도 똑같다고 생각한 적은 없나? 그자는 오와리 지방지휘관 대리 가문에서도 방계,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에치젠 출신이라는 말도 있어. 그자는 우대신까지 올라갔으면서 사임했다. 지금 천하 백성들은 오다의 힘을 인정하면서도 어째서 자기들이 오다에게 지배당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 힘으로만 나라를 빼앗는 자는 끝이 비참하다... 이 역시 자네가 한 말이야."
- "그래도 노부나가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모두 그 남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나도 오다에게 걸어 보고 싶다는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지. 하지만... 그자는 스스로 그 힘을 버렸다. 나도 많이 죽였지만, 그자는 너무 많이 죽였어."
- 그는 마귀에 씌어 있었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그리고 그 마귀는 사라지지 않고 지금도 그의 안에 있다.
- 바람이 대숲을 흔들어 쏴아아 소리를 냈다. 무라시게의 허세로 쇼주마루가 죽었고, 그 원한은 간베에에게 깃들어 돌고 돌아 아리오카성의 여인과 아이들이 창에 찔려 죽고, 불에 타 죽고, 칼날에 죽었다. 하지만 애초에 무라시게는 세상 사람들이 노부나가의 전쟁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자기는 다르다고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노부나가가 너무 많은 사람들을 죽인 게 이 모든 끔찍한 결과의 원인이냐고 묻는다면, 노부나가가 죽이고 또 죽이기 때문에 오다의 영토에는 일단 전쟁이 적다고 말할 수도 있다.
- 즉 이 난세에서는 악인이 말도 못 하게 복잡하게 얽혀 있어, 근심 많은 세상의 곳곳에서 악과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제 자식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조차 세상의 이치에 반해 악한 원인을 만들어 내는 잘못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역시 내 잘못이다... 간베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아마도 많은 무사들, 많은 백성들, 많은 승려들, 많은 사람들이 마찬가지로 죄를 짊어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견디지 못해 사람들은 염불을 외우고, 공양을 하고, 남만종으로 개종하며, 많은 무사들이 그러하듯 결국 약자가 나쁘다고 단순하게 치부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악한 원인이 악한 결과를 낳고, 악한 결과가 악한 원인을 낳게 하는 이 세상의 섭리에 사람이 저항할 수단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도 책략을 짜내 ...
- "한베에 님이 선인(善仁)을 베푸셨구나. 한베에 님은 목숨을 걸고 선인을 베푸셨어. 이것이 근심 많은 세상에 저항할 방법이라는 건가, 한베에 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은 역시 모르겠습니다!"
- 저자
- 요네자와 호노부
- 출판
- 리드비
- 출판일
- 2022.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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