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나카이 히데오] 허무에의 제물

일루젼 2023. 6. 22.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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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나카이 히데오 / 허문순
출판 : 동서문화사 
출간 : 2009.11.01 


       

허무에의 제물.

 

이 표현이 가리키는 것은 단순히 장미의 이름이나 누군가의 죽음만이 아니다. 산다는 것, 살고 죽는 삶이라는 것 자체가 아무 의미 없는 허무에의 제물이 아닌가- 그럼에도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그 무저갱의 혼돈 속에서도 찰나의 '의미'를 꽃피우기 위해 살아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지독한 질문. 

 

가능하면 동서에서 출간된 책은 조금 피해서 읽는 편인데, <허무에의 제물>의 경우는 다른 선택지도 없었고 애초에 일본 작가가 쓴 책이니 한 번 도전해보았다. 아주 만족스러운 번역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예스러운 맛이 있었다. 무엇보다 작품 자체가 가진 흡입력이 상당하다. 후각과 시각, 청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화려함. 그것에 사로잡히면 마치 셀로판지를 덧댄 조명일지언정 그 아래에서 멍하게 앉아있는 관객들처럼 분명히 보았어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놓치게 된다. 

 

저자는 등장인물들의 추리를 통해 사건을 여러 측면에서 재조명한다. 모두가 어느 정도는 '있을 법한' 조각들을 드러내고 개중에서는 각도에 따라 빛을 달리하는 보석처럼 사실이었지만 진실은 아닌 것들도 존재한다. 작가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등장인물이 쓴 소설'이라는 장치를 활용해 어디서부터가 소설 속의 소설인지 착각하게 만드는 액자식 구성으로 독자들을 혼란시킨다. 

 

이전까지 뿌려두었던 장치나 복선들을 하나의 명쾌한 '정답'으로 회수하는 과정은 없다. 모두가 무의미하며 동시에 유의미하다. 나카이 히데오는 동서양의 유명 추리소설 작가들과 그 작품을 실명으로 거론하며 대범하게 주장한다. '그것들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누군가의 비극에 애통해하지 못하고 한낱 유흥거리로 즐기는 자들- 그런 자들이야 말로 진정한 괴물이 아니던가?

심지어 즐거움을 위해 누군가를 죽이고, 죽이려고 계획하고, 그 과정을 보다 기이하게 꾸며내기 위한 자들이여.

 

작가는 이런 메시지를 이토록이나 재미있는 소설 속에 녹여 '마실 수 밖에 없는 향긋한 독'처럼 내밀고 있다. 빨리 인정하라는 듯이. 

 

<허무에의 제물>에서 발생한 사건 중 '진짜 살인'은 과연 존재하는가? 그렇다고 한다면, 소설의 틀 안에서의 표면적인 동기는 이것이다. 

'이 모든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비극적인 상황이 그저 무의미한 우연의 결과라면, 그것을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내가 형언할 수 없는 악의를 가지고 계획하여 만든 악랄한 범죄가 되도록 하겠다.' 

누군가를 원망할 수도 없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스러져간 이들이야말로 '허무에의 제물'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그들의 허무에 나의 허무를 조금쯤 더한다 해서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아무것도 바뀌는 것은 없을지라도, 혹은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무척 만족스럽게 읽었고, 솔직하게 아주 즐겁게 읽었음을 고백한다.

 

그렇다. 사람이 죽고 증오가 오가는 이야기에서 재미를 느끼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그것이 자신 안의 어둠이며 언제고 발현될 수 있는 악의 싹이라는 것 또한 인정하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긍지이자 참회이다. 자신만은 다르다고 생각하며 태연하게 그것들을 가십으로 소모하는 것이 진정으로 '평범'이라면, 그런 것이 '인간'이라면, 그런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외치는 등장인물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호불호는 갈릴 수 있겠지만 꼭 한 번 읽어볼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번역으로 읽을 수 있게 된다면 무척 감사하겠다. 

 

추천.  


   

- 사실 말이 무대이지 가게 한 구석에 새카만 커튼을 내리쳤을 뿐, 마루에서 보이가 비쳐주고 있는 조명은 판지로 전구를 두르고 색유리를 댄 허술한 것이었다. 이때 그 절정에 다다른 시점에서 기미짱이 들여다보이는 몸매에 노란 장미 한 송이를 입술에 비스듬히 물고 있는 것 또한 어쩌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거리의 저속한 서비스 방식인지도 모른다. 그때 조명이 갑자기 샛노란 빛으로 바뀐 것은 또한 살로메답게 만월의 달밤을 나타내려는 것이리라. 현을 타는 여인이 조금 앞으로 나와 슈트라우스 왈츠조로 샤미센을 타자 기미짱은 몸을 유연하게 흔들며 입술에서 장미를 뽑아 담뱃불만 반짝이는 어두운 객석을 향해 느닷없이 내던졌다. 조화가 아닌 듯했다. 노란 꽃잎이 흩어지며 장미는 미쓰다 아리오의 발등 위로 떨어졌다.

 

- 투박한 흑백 코트와 녹색 가죽장갑을 벗으니 하얀 손과 화장기 없는 얼굴이 희미하게 드러난다. 보기에는 평범한 아가씨이지만, 나이는 아리오보다 좀 위인 듯한데 허스키한 음성이 일본에서는 드문 샹송 가수 -하지만 아직 신인이기 때문에 나나 히사오라는 예명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본인도 인기에 연연해하는 것 같지 않고, 라디오 작가 일을 본업으로 삼는 모양이다. 이따금 끌어가려는 사람이 있어도, 자기는 노래 부르는 것보다 탐정에 더욱 재능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는 실타래처럼 뒤얽힌 사건을 해결하여, 자전적인 추리소설을 써내는 것이 어울리는 일이라고 태평스럽게 지껄여대곤 한다.

 

- "고마워. 하지만 전에도 내가 말했잖아. 나는 여탐정으로 나가는 것이 성미에 맞다고. 아무튼 저만큼 예능에 소질이 있다는 것은 대단한 거야. 아까운 생각이 들 정도로."

 

- 익숙한 솜씨로 일곱 겹의 베일을 나타내는 조명이 노랑에서 빨강으로, 빨강에서 오렌지색으로 바뀌었다. 금테를 두른 타이츠로 춤을 추는 마르션과는 물론 비교도 되지 않지만, 무엇인가 그 진수를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시원스러운 느낌을 준다- 소년 티를 감출 수 없는 무대에서 기미짱의 드러낸 가슴은 아무리 보아도 여성 특유의 부드러운 젖가슴을 느낄 수가 없다. 오늘 밤 이 살로메에게는, 여자에게 가장 요긴한 유방이 없다는 것이 결점이었다.

 

- '아라비크'는 아사쿠사에 숱하게 있는 같은 업종의 가게 중에서 제법 인기 있는 게이바이다. 그 당시는 도쿄에 30여 곳이 있었는데, 10년도 되기 전에 아사쿠사와 신주쿠만 해도 300군데씩이나 늘었다. 전쟁이 끝난 뒤 새로운 유흥장으로서 일상화된 이 세계는 별반 색다른 곳으로 여겨지지도 않았다. 게이들은 화사한 모습으로 거리에 나와, 아리오처럼 평범한 샐러리맨이 진짜 여성과 함께 그들의 영역으로 들어와도 못 본 척하며 그다지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 <겐지(源氏) 이야기>에 등장하는 일본 고유의 여성들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아리오나 마찬가지로 극히 평범한 직장인들이 대부분이기에 어디로 보나 악덕을 숨긴 인종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이들은 '요정이 보이지 않는 오후'에 어두컴컴한 호숫가에 양 떼같이 모였다가 흥취가 사라지자 이제는 파장해 버린 뒤의 그런 허전한 표정들이다

- 아리오는 그 어느 쪽도 아니다. 히사오가 어떻게 보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자기는 여자를 기피하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회사의 동료들처럼 여자를 유일한 위안의 대상으로 여기지도 않는, 이른바 성(性)의 진공 지대를 맴도는 도시의 독신 청년이다. 이 세계에서 말하는 '순종'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성애를 추구하지도 않는 어중간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런 가게에 드나들면서도, 처음부터 상대를 구해 보려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 "하지만 히사오 씨, 방금 이상한 말을 하시더군요, 달은 죽은 사람을 찾는 것이라고. 그것은 우리 사정을 좀 알고 꺼낸 말이지요? 무레타 씨한테서 무슨 말을 들으셨나요?" 

 

- "수염으로 뒤덮인 흰 얼굴에 아쓰시를 입은 아이누지요. 쏜살같이 뛰어나가 나미다바시 근처까지 뒤쫓아 갔지만 놓쳐버리고..."

 

- 실제 달빛이 환한 거리를 남빛 옷으로 차려입은 아이누가 날쌔게 뛰어가는 뒤를, 역시 남색 토퍼를 입은 아이짱이 숨어서 뒤쫓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너무나 엉뚱하여, 아리오에게는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 "조금 전에 뭐라고 하였지요? 가무이라고 하였던가요?" 
"호야우 가무이는 도야호(洞爺湖)의 뱀신(蛇神)을 말하는 겁니다." 

 

- 아이짱은 몹시 괴로운 듯한 말투로 되풀이했다. 뱀신 -이것은 원래 아이누 전설로서 곰이나 늑대나 올빼미 같은 뭔가 신으로서 떠받드는 그들 특유의 자연적 동물신으로, 독사의 떼가 뒤엉켜 냄새를 풍길 정도로 꿈틀거리는 바위산이나, 뱀이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 온천 지대인 이부리(胆振)·히다카(日高) 지방의 아이누에게는, 일본 혼슈의 산인 지방에서 볼 수 있는 백사(白蛇) 신앙처럼 경애(敬)가 섞인 것이 아니고 현실적인 공포심에서 나온 것이다. 이를테면 관광 안내에는 없지만 아이누 말로 샤크 쇼모 아에프-'여름엔 입 밖에 내지 말라'는 말이 그대로 '무서운 뱀신'이라는 의미로 두루 쓰일 만큼 이 지방에서는 뱀을 대단히 두려워한다. 뱀이 나오는 유카라에서는, 여름철이 되면 부탁을 해도 절대로 노래를 불러주지 않을 정도이다. 

 

- "뱀신이라면 나도 들어서 알아요. 얼마 전 홋카이도에 갔을 때 그곳에 사는 친구가 가르쳐 주었는데, 도야호는 여름이 되면 만주 섬에서 나카(中) 섬으로 뱀이 떼를 지어 건너올 정도라지요. 뱀신이라고 하는, 그 지방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신이라던데. 그러나..." 
아무래도 뭔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설사 뱀신 전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불과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아이누들이 살짝 오현금을 울리고 무릎을 치면서 부르는, 사라져 가는 노래 속에나 남아 있을 법한 것이다. 히누마 집안과 아이누 사이에 무슨 악연이 있다고 호야우 가무이의 심부름꾼이 도심에까지 나타난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 말하기를 꺼리는 아이짱에게 억지로 말문을 열게 하여 듣게 된 사실은 1877년 말께 세이타로가 갑자기 사람이 돌변하듯이 광신적인 아이누 교화(敎化)를 보이기 시작한 사연이었다. 그 뒤에도 둔전병(屯田兵)이 아이누의 습격에 대비하여 항상 엄중한 방벽을 쌓은 것으로도 알려져 있듯이 일본인의 아이누에 대한 폭행과 그에 대한 보복은, 마쓰마에한 시대에 못지않게 무참하기 짝이 없었다. 또한 아이누 소탕이라는 잔인한 행위가 태연히 이루어지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그때의 공포는 지금까지도 -약 80년이 지난 현재에도- 무섭게 꼬리를 물고, 깊숙한 오지의 부락에서는 일본인이 모습만 나타내도 엄마들은 서둘러 아이를 불러들여 집안에 숨기는 소동이 벌어졌다. 특히 '홋카이도 토박이의 용모와 언어는 추접스러워...'라는 당시 일본인의 우월감을 배경으로 한 세이타로의 행태는 마치 이단심문을 하는 성직자처럼, 불의 신을 모시는 자는 불 속으로, 물의 신을 모시면 물속으로 가차 없이 내던졌다. 그리고 뱀신을 받드는 한 부락의 어린애들을 모조리 붙잡아서 붉은 독사의 골짜기로 태연히 내던졌다는 고발은, 세이난노에키에서 돌아온 구로다 장관도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추방 조치를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것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또 어디까지가 악질적인 날조인가는 이제 밝혀낼 방법이 없지만...

 

- "내가 생각하고 있는 건 이런 거야. 옛날 소설에 나오는 명탐정은 범인이 실컷 살인을 저질러 놓고 나서, 천천히 신처럼 놀라운 추리력을 발휘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건 벌써 20년 전의 방식이야. 나같이 양심적인 탐정은 도저히 살인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요.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관계자의 상황과 심리를 듣고 그것을 종합하여, 내버려 두면 이런이런 살인을 당할 수 있다는, 미래의 범인과 피해자, 그리고 방법과 동기까지 자세히 지적해 준다는 시도... '하얀 여왕'의 변명이 아니라, 그것으로 범인이 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면 더욱 보람 있는 일이 되겠지. 어려운 작업이지만 히누마 댁을 대상으로 그 일을 해보려고 하는 거야. 등장인물이 적기 때문에 어떻게 될 수 있을 것도 같아. 자, 그럼 보고 온 대로 말해 봐요."

 

- "게다가 또 한의사라고 하면 수염을 기르고 일본옷 정장으로 인삼 같은 한약재나 달이고 있는 줄 알지만, 버젓하게 의과대학을 나온 신사라는 말이야. 몸집이 작은 마법사 같은 인상의 인물로 이상한 점성술에 빠져서, 어떤 별과 어떤 별이 부딪쳐 이달 며칠에는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점괘만 늘어놓는다는 거야. 50세 가까운..."

 

- "그저 그렇지만 좀 다른 점은 방의 장식이더군. 2층에 있는 각자의 방을 모두 자기의 이름과 관련되는 색깔로 통일을 시켜 놓았어." 
주위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하면서 말했다.
"아마, 소지니 아이지니 하고 부르는 이름은 탄생석의 색깔에서 따온 것 같아. 처음에 할아버지인 고타로 씨가 2월에 태어난 장남을 그 탄생석인 자수정의 색깔을 따서 시지로라고 부른 데서부터 시작되었어. 소지(蒼司)는 4월 18일생이기 때문에 탄생석은 블루화이트인 다이아이고, 고지(紅司)는 7월 12일생이라 루비의 색깔을 붙인 거야. 그리고 숙부인 도지로는 지금 2층 서재를 차지하고 있는데 앞으로 탄생할 아기 이름을 료구지(綠司)라고 미리 정해 놓고 서재까지 온통 초록색으로 도배를 해놓았다니까. 하기야 12월은 터키석으로 그중에는 초록색으로 얼룩진 것도 있는 모양이니까. 이름을 료구지라고 해도 되지만 아들을 낳기로 정해진 것도 아닌데..."

 

- "아직 이런 게 있다고, 지금 히누마 집안에 살아남은 사람 중에는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는 없어. ...히누마 집안 80년의 역사를 자세히 살펴본다면 틀림없이 '히누마 댁 살인사건'에서 제일 이상한 것은 범인이 예전에 벌써 죽은 사람 가운데 있다는 점이야.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은 모두 피해자로 예정되어 있는 거라고. 죽은 사람 중의 누군가가 어떤 방법으로 살아 있는 가족의 누군가를 죽은 자들의 무리 속으로 끌어들이는가, 그것이 문제의 초점이지만, 그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아직 피해자 쪽의 리스트가 갖추어지지 않았어. 하쓰다 고기치라는 남자에 관해서도 아직 모르고, 고지하고 사귀고 있는 폭력배도 분명하지 않아. 수고스럽지만 그것을 좀 조사해 주면 좋겠어."

 

- "범인이 감옥에 들어갔다는 것은 그야말로 장난이죠. <거울나라의 앨리스>라는 유명한 동화가 있잖아요. 거기에 <수수께끼의 나라>의 '미치광이 모자장수'와 '3월 토끼'가 이번에는 헛터와 헤이어라는 왕의 심부름꾼이 되어 나오지만 그 헛터 쪽에서 죄를 짓기 전에 감옥에 들어갔잖아요. 거기에서 생각난 단순한 익살이었어요."

 

- "고백하지만요, 얼마 전 밤에, 이름도 아리오이니까 미쓰다 씨를 앨리스에 비겨 부르면서 놀리고 웃었어요. 고지 형이 <갈까마귀>라는 시를 암송해 보였던 그날 밤 말이야. 내가 '자는 체 하는 쥐' 역할을 맡고 고지 형이 '3월 토끼', '모자장수'는 소지형이 맡아서 '미치광이 차모임'을 열었던 거예요. 포도주나 드시라든가, 머리를 깎아야 되겠다든가, 갈까마귀하고 책상은 어째서 닮았냐든가, 우물 밑바닥에 3형제가 살고 있었다든가, 정해진 대사를 순번대로 지껄이고, 마지막으로 M으로 시작되는 것은 밀실, 마가도리(흉조라는 일어), 그리고 마더(살인) 따위를 우스갯소리로 끝맺음을 하기로 약속했어요. 그런데 애당초 소지형이 마지못해 끼어서 하다가 중도에서 팽개치는 바람에 엉망이 되고만 거예요. 하지만 아료샤가 아무것도 모르고 앨리스의 ..."

 

- "히루마의 호적에 입적시키고 나자 아케미 씨의 태도는 또 완전히 원점으로 돌아와서, 이렇게 된 이상은 오지도 히누마 집안의식구가 되었다. 내가 받지 못한 것 모두를 이어받을 권리가 생겼음을 인정해야 될 것이라고 큰 소리를 치고 나서 가버린 겁니다. 처음부터 보석만 노렸다는 말을 듣게 되었는데, 그것으로 메시로의 친정과는 완전히 발을 끊은 거예요.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돌아가려고 하는 아케미 씨한테 시지로 씨가 자진해서 황옥 대신 이것이나 가져가라고 하면서 내던지듯이 묘안석(猫眼石)을 건네주었대요. 뭔가 불길한 사연이 있는 돌에 얽힌 얘기지만, 내 생각으로는 무슨 흠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만한 것을 공짜로 준다는 것은, 그것이 위험과 고난이 따른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기 때문에 반대로 저주를 내포한 것이겠지요. 시지로 씨는 화풀이로 그렇게는 했어도 감쪽같이 속은 분노는 달랠 길이 없었을 거예요. 게다가 오지를 억지로 히누마 집안에 입적시키고 간 뱃속을 미루어 헤아리면 설마 몰살을 꾀할 리는 없겠지만 으스스한 느낌이 들고, 이것은 첫째로 입적을 후회하도록 만들어주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생긴 거예요. 마음이 여린 사람이기에 어린애 같은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여 시작한 연구가 바로 꽃에 3원색은 피지 않는다는 현상의 증명인 것 같아요." 

 

- "시지로 씨는 그 현상을 추구한 끝에 간신히 보편적인 하나의 법칙을 발견한 거지요. 곧 한 종류의 꽃에 통속적 의미의 3원색은 없다는 것을 눈여겨보면, 빨강과 파랑, 빨강과 노랑을 결합시켜 피는 꽃은 얼마든지 있지만 빨강을 젖혀놓고 파랑과 노랑만의 색깔로 피는 꽃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시지로 씨가 새로 발견한 성과였어요. 이 법칙은 빨강이 우성이라는 것이 간단한 게 아니다. 대체로 꽃의 색깔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하는 것은, 색소만 가지고도 파랑과 빨강을 지배하는 안토시안, 노랑과 흰색을 지배하는 플라본 등의 온갖 변화와 미묘한 결합에 의한 것으로 학자들 사이에도 정설은 없답니다. 시험관 내의 작용을 다소 안다고 해도 생체 내에서는 무엇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신만이 알 수 있을 것이지요. 그래서 발견한 것을 모처럼 증명한다고 해도 구름을 잡는 것이나 같다는 것이고, 시지로 씨의 생각으로는 먼저 소지와 고지라는 형제가 존재하는 이상, 새삼스레 오지라는 이름을 붙여도 쓸데없는 일이다, 히누마의 호적에 넣어주었지만, 애당초 너의 아들은 존재하지 않은 것이나 같다는 마음으로 꽃의 연구에 몰두하였으니까, 그것을 다루는 데도 차이가 컸던 거예요. 장사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새로운 데이터가 갖추어질 때마다 히로시마에 내용증명을 보냈던 모양인데, 이분도 어지간히 별난 성격이셨던 것 같아요."

 

- 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말로 평해도 우습지만, 도일이나 후디니도 이루지 못한 그것을, 이제 간신히 제가 성취하려고 합니다. 그때야말로 저 서기(書記)인 헤지라처럼 밀실의 공물전(供物殿)과의 사이를 사람은 맘대로 날아서 오가게 될 것입니다. 그럼요, 완전한 밀실 속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에만 사자(死者)는 이상한 날개를 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지상과 조금도 틈새가 없는 모양으로 이차원계 (異次元界)가 존재하는 것은 어려서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었습니다. 신비종교나 SF에서 가끔 얘기되고 있는 그 세계를, 이를테면 황천의 나라로 바꾼다면 현세와의 경계를 가볍게 넘어가는 것은 뜻밖에 쉽겠지요. 방법은 오직 죽은 자와 살아 있는 자가 동시에 같은 공간을 차지하는 외에는 없고, 따라서 저 자신이 저 칠흑같이 시커먼 날개를 움직일 수 있는 기괴한 갈까마귀가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하느냐고 언제나처럼 난처한 듯한 미소를 짓고 계시겠지요. 하지만 이것만이 확실하고 유일하게 어머니를 배신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할아범도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북녘의 이교의 신 따위에게 방해를 당할 우려도 없습니다. 그보다도 빨리 착한 동자와 나쁜 동자가 질풍같이 하늘에서 내려와 구제해 주리라고 하는 등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혼자는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이 변신을 도와 달라고 애인과 은밀히 연구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 "하지만 그렇게 힘들여서 꾸민 장식물들이 아깝지 않았을까?"

그런 식으로 말해 보았지만 소지는 그 문제는 별로 건드리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날씨가 좋군요, 마당으로 나가실까요?"
소지는 일어서서 밖으로 안내하며 말을 이었다.
"고지가 심은 장미를 보여드리지요. 단 한 그루지만 아무튼 히라가다(枚方) 쪽에서 분양받은 시제품의 신종이라고 하던데. 잘 피어나면 장미계에 일대 혁명이 되는 모양입니다." 

 

- 게다(일본 나막신)로 얼어붙은 땅을 차면서, 울타리로 둘러싸인 햇볕이 잘 드는 빈 땅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문제의 장미는 불과 30센티 정도의 초록색 줄기가 지면에 꽂혀 있을 뿐, 별로 신기할 것이 없어 보였다.
"이거야?"
아이짱의 말로는 <흑사관 살인사건>과는 전혀 비교도 되지 않은 집이지만 장미원 정도는 있다고 했는데, 단 한 그루밖에 없으니 너무나 쓸쓸해 보였다. 
"빛깔은 주홍색인 모양인데, 다른 특색은 그 꽃잎에서 빛을 발산한다는 겁니다. 보셔요, 벌써 싹이 트고 있지 않아요?"
빛을 내는 장미-그 말을 듣고 눈여겨보았더니 초록색 줄기의 여기저기에 마디가 생겨, 거기에서 마치 작은 종기 같은 새싹이 돋아나서 반짝이고 있다.

"이것이 피면 이름은 분명히 '오프란드 워 네안'-'허무에의 제물'로 할 거라고 고지가 말했던 겁니다. 나는 모르지만 발레리의 시에 그런 것이 있다고 했어요."

 

- '허무에의 제물'. 아리오도 그 방면에 문외한이지만, 다음에 물어보았더니 <잃어버린 미주(美酒)>라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시였다.

하루 진종일 나는 바다를 헤매었네

(어느 하늘 아래였던가 지금은 모르지만)

미주(美酒)를 조금 바다로 흘려보냈네

'허무'하도록 하기 위한 제물로서

오오 술이여, 누가 그대 사라지기를 바라던가? 

혹은 내가 점괘를 따르자고 해서였던가? 

술을 흘려보내며 혹은 또 피를 생각하니

내 가슴의 비밀을 위해서 한 짓이었던가?

그 찰나에 장밋빛 연기 피어오르고 

순식간에 여느 세상같이 되나니

맑은 데에도 바다는 남아 있으리...

이 술을 덧없다 하자? ...

파도는 취기에 젖어...

... 나는 보도다, 바닷바람 속 소용돌이

자못 깊은 그 모습을!

 

- 그러나 그 붉고 작은 싹만은-아프지도 가렵지고 않은 화농한 종기처럼 1밀리 정도의 부스럼으로 묘하게 마음에 남았다. 
"고지가 소중히 여겼던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피우도록 하려고 애써 보지만, 장미는 키우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비료를 주는 방법에 따라 빛의 발산도 달라지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꽃잎이 빛을 발한다니 어떻게 되는 거지요? 설마 형광등처럼..."
"네, 그것은요, 피어보지 않으면 모르지만 이제는 튤립에도 레드 엠퍼러라는 금속 광택이 나는 것이 만들어졌어요. 아마 그런 느낌이 들지 않겠어요?"

 

- "그러면서 극단적인 비밀주의로, 우리한테도 그런 것을 보이려고 하지 않았어요. 모종이나 구근을 나누어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더욱더 그랬지요. 이런 식으로 울타리를 곁으로 둘러서 마치 비밀의 화원처럼 관리한 겁니다. 전쟁이 점점 격렬해졌지만 채소밭으로 만들지 않고 끝까지 꽃밭으로 버티었어요. 아버지는 꽃을 바라본다든가 팔기 위해서 재배한 게 아닙니다. 기묘한 일이지만, 꽃을 피우는 것이 마치 사람을 저주하기 위해 짚으로 인형을 만드는 기분으로 재배한 것 같아요. 그 상대가 전쟁으로 죽은 뒤에는 꽃을 가꾸는 일도 뚝 끊어 버렸어요." 

 

- "그 꽃은 정말 아름다웠어..."
소지는 여전히 먼 곳을 바라보는 눈으로 말을 계속했다. 

"어째서 이렇게 아름다울까 할 정도였지요. 그 까닭을 요즘에야 겨우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아버지 혼자 인간을 계속 저주하며 그 증오를 꽃 속에 나타내려고 했기 때문이었어요. 결국 중오심만이 그렇게까지 아름다운 꽃을 피워 낼 수 있었던... 아리오 씨는 여러 번 2층의 구조 변화를 애석하다고 말했지만, 그것을 알고 나서부터 나는 색채라는 것을 몹시 싫어하게 되었어요. 할아버지 때부터 히누마의 인간은 이름까지 색채에 얽매이게 되었는데, 색채는 대단히 무서운 것입니다. 뭐라고 할까요? 생명력의 상징에는 틀림없지만 그런 만큼 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증오심에 의지하여 빛을 늘려가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런 생각이 들어서 대담하게 구조를 바꾸었는데..." 

 

- 1955년 2월 6일, 일요일. 
그래도 계절은 어김없이 봄으로 가고 있었다. 흐릿하게 잔가지를 서로 얽고 있는 겨울 잡목림 너머로는 아직 반질반질하니 맑은 물빛 하늘이 차갑게 얼어붙어 있긴 했지만, 자세히 보면 그것은 조금씩이나마 자줏빛을 띠기 시작하여, 이윽고 금빛이나 붉은빛을 녹여 흘리며 아름다운 합창곡처럼 널리 펼쳐질 것임에 틀림없다. 신문에도 이상건조니 전력위기니 하는 예년과 같은 화제가 등장하고, 오시마의 벚꽃 소식도 들리기 시작한다.

 

- 마치 초등학교 어린이가 정성 들여 쓴 것처럼 적은 글자 중에서 '흑월의 주술'이라는 귀가 번쩍 띄는 한마디 말이 연필 자국이 흐릿하게 비치면서 다른 세계의 소원을 전하는 것 같았다. 무슨 의미로든지 결국 할아범이 신앙하는 부동명왕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아리오가 말없이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온 편지를 바라보는데, 소지도 그늘진 어두운 얼굴로 말하기 시작했다.

 

- 할아범이 소리를 낮춰 열심히 외우고 있는 것은 진언비법(眞言祕法)이라는 주문이 틀림없고, 나무에 걸어 놓은 낡은 두루마리에는 빛깔이 바랜 부동명왕상이 흔들리는 불빛에 어금니를 드러낸 무서운 형상을 보이고 있다. 항복법이라면 부동명왕·항삼세명왕 등의 분노상을 나타낸 부처의 힘을 빌어, 불단도 흑색의 세모꼴로 하는 것이 본디 모습이지만 거기까지 갖출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갑자기 꾸민 호마단(護摩壇)인 듯한 것을 만든 할아범은 무서운 형상의 악귀, 사람 아닌 사람들을 굴복시키는 비밀 수법을 진지하게 행하고 있었다.

 

- 그 기도는 흑월이라고 부르는 한 달 가운데 후반, 그것도 특히 화요일을 택하여 반드시 깊은 밤에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행자(行者)는 목욕재계하고 남쪽을 향해, 자기의 오른발로 왼발을 밟고, 입에서는 분노의 불을 토하는 마음으로, 왜냐하면 행자 자신이 염마·나찰(羅刹) 같은 권속을 데리고, 대자재의 면상을 밟은 항삼세명왕의 대신으로 행하기 때문에 목표로 삼는 악인을 단 위에 올려놓고 그 악업을 태워 정결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미사 같은 의식으로서, 소지가 다음에 할아범으로부터 띄엄띄엄 들은 순서를 기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튼 되풀이해서 불을 붙이고 물을 부어 불전에 바친 꽃을 흩뿌리면서 수인(手印)을 맺고 있는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발광한 사람의 단면을 보는 것처럼 가엾은 생각이 무엇보다도 앞선다는 것이다. 이때에 맞춰 소지는 소리를 질러 불을 끄게 하고 족자를 접어들고 집으로 돌아와서 간절히 타일렀지만, 할아범은 그날 밤만은 완강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 그것은 마술쇼 같은 데서나 볼 수 있는 '공중에 뜬 미인'의 속임수인데, 그것이 관객에게 보이지 않도록 천장에서 매달은 것은 물론이지만 마술사는 마치 아무 장치도 하지 않은 것처럼 동그란 테를 손에 걸고, 그것을 공중에 떠 있는 미인의 몸에 맨다. 속임수는 거기에 있기 때문에, 그 테는 반드시 왕복 세 번 빠져나가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번 왕복하고 또 한 번. 그래야 비로소 매달은 테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데, 관객에게는 몇 번이나 공을 들여서 한 것 같이 보이는 것이다.

 

- 형사는 또 서재 가운데에 섰다. 이번에는 빙 한 번 돌아서 서고 쪽 문으로 들어왔는데, 나는 다시 조금 전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우리가 한 번 도는 사이에 이 서재가 무엇인가 다른 차원의 장소로 바뀌어 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실제로는 아무 변화도 있을 리 없고, 샹들리에나 찬장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다. 그것을 알자 나는 묘한 흥분을 느꼈다. 유감스럽게도 방금 계단 쪽의 문으로 엿볼 때에는 그것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지 못했으나, 아침에 혼자 와서 볼 때에는 틀림없이 놓여 있었고 손으로 잡아 보려고 한, 빨간 웃옷을 입힌 인형이 없어진 것이다.

 

- "아무튼 고지가 죽은 밤은 료구지에게도 최악의 날로, 천중살(天中殺)-프랑스어로 '허무'와 같은 '네앙'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해와 달, 날짜까지 다 겹쳐 밤 10시 30분이나 40분에, 아이짱이 옆에 있어 주어야만 어린애가 위험을 면한다는 생각에 큰 소리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과연 다음에는 창피했는지, 그리고 료구지 대신 고지가 죽은 데서도 믿을 수 없게 된 것이겠지요. 그것은 엉터리라고 작은 아버지도 말했지만... 점성술이라고 하는 것이 뭔지, 나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우리 집에는 노릴 만한 보석이나 유산도 없고, 도야마루 사건 후에 진지하게 한 말은 본심이기 때문에, 후지기다 님이 뭔가 탐정놀이 같은 흉내를 내는 것은 자유이지만 도지로 작은 아버님을 범인으로 취급하는 것만은 그만 두시지요. 담이 적고, 어린애 같은 사람이었는데 가엾지 않아요?"

 

- "그러나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지. '아라비크'에서의 추리시합에서는 자네의 말이 제일 진상에 가까웠어. 이것만은 틀림없다고, 언젠가는 진짜 세이다카 동자나 부동명왕을 만나게 되겠지만 꼭 안부나 전해주게. 나는 모두 다 알고 있었다고."

 

- 조수석에 앉은 아리오는 가끔 백미러를 들여다보면서 이 새로운 연상의 친구를 훔쳐보았다. 엇갈리는 차가 강렬한 헤드라이트를 비칠 때마다 거울 속으로 잠깐씩 그의 모습이 스쳐갔다. 서른 한두 살이겠지, 히사오가 전에 사진은 보여 주었지만 공항에서 통관을 마치고 로비의 계단을 올라왔을 때부터 뭔가 간지러운 느낌이 들만큼 눈부신 인상을 받았다. 저널리즘과 관계가 되는 듯한 친구들과 긴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아리오를 소개하자 웃지도 않고 '아료샤 군이지'라고 무뚝뚝하게 한마디 하고 손을 내밀었다. 열정적으로 반짝이는 눈동자와 따뜻한 손바닥에는 원래부터 그런 느낌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외국인들 사이에서도 눈에 띌 만큼 키가 큰 탓인지 어딘가 믿음직스럽게 보인다. 게다가 아료샤라는 이름을 듣고 보니 '아라비크' 얘기도 들었구나 싶어, 아리오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것 같았다. 

 

- "결국 성모동산 사건에 범인은 필요 없다는 말인가?"

"예, 적어도 없는 게 좋겠지요."

"그렇다면 히누마 집안의 사건에도 범인이 필요 없다는 말이구만."
아리오가 말을 꺼내려고 하자 무레타는 가로막고, 먼저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니까. 성모동산의 사건만큼 히누마 집안을 상징한 것은 없어. 살인인가, 아니면 무의미한 죽음인가, 그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이 히누마 집안의 문제라고. 알겠나, 아료샤는 성모동산 사건이 방화라면 너무나 끔찍한 일이라고 했지만, 그럼 100명 가까운 할머니들이 회로재의 부주의라는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사고로 불타 죽었고, 더욱이 어디선가 여분의 사체 하나가 끼어들어 설명조차 못하는 현재의 상태는 끔찍하지 않다는 말인가. 어느 쪽이 인간세계에 걸맞은 사고냐 하면, 오히려 어딘가에 흉악한 살인자가 있어 계획적인 방화나 사체 유기 같은 짓을 했다고 해석하는 쪽이 그런대로 커버가 되고, 그런 것이 그런대로 인간세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해야 되지 않을까? 나한테는 성모동산의 사건이 살인이고 방화인 쪽이 바람직해 보여. 바람직하다는 것보다 인간세계의 명예를 위하여 범죄라고 단정하고 싶을 정도야."

 

- "히누마 집안의 경우에도 의미는 마찬가지 아니겠어? 많은 사람들이 무의미하게 죽어간 것을 끔찍하게 볼 것인가, 아니면 못된 범인이 숨어서 피투성이의 범행을 계속해온 것이라면, 역시 그쪽이 낫다고 생각하는가, 그 어느 쪽이라고. 성모동산 사건에 범인이 없으면 좋겠다면 히누마 집안에도 범인의 필요가 없는 거지."

 

- "도무지 얘기가 안 되는군."
무레타는 정말 한심하다는 얼굴로 아리오를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세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의미의 살인이 아니야. 히누마 집안의 죽어간 많은 사람들이 무의미하게 죽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그런대로 피투성이가 된 살인으로 죽었다고 생각하는 쪽이 낫다는 말이야. 성모동산 사건도 그렇지만, 만일 범인이 없다면 반드시 만들어 내야지. 교활한 트릭으로 우리를 우롱하고, 숨어서 빨간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는 범인이 있어야 된다고. 당신들이 추리시합을 한 것이나, 아무나 상관없이 범인으로 내세운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닌가 생각했는데..."

"어쩐지 비아냥을 하는 것 같은데요."

 

- "아아, 그 축제 때 제물을 출납하는 것...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동쪽을 바라보게 해야 되거든. 북쪽을 향한 들창은 문제가 되지 않아. 게다가 십자가라는 것은 바추라 박사가 온 뒤부터의 것이고, 공을 가지고 노는 습관은 아이누에게는 없어. 가릿푸파시테라는 굴렁쇠 굴리기는 있지만 말이지. 글쎄 나에게는 아료샤가 처음 히누마 댁을 찾아갔을 때, 침묵의 서막이라고나 할까, 파란 달빛 아래서 전화번호표가 반짝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장면 말고는 별로 흥미가 없어. 대체 아이누의 저주니 뱀신의 앙화(殊禍)니 하는 말은, 증조할아버지인 세이타로 씨의 갑작스런 실종에서 생긴 것이지만 그것은 아이누 토벌과 관계가 없는, 야다베 료기치 씨와의 경쟁심에서 시작된 것으로, 히사오도 그렇게 증명했던 것이 아닌가. 다만 그것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 이제는 도쿄의 국번도 세 자리 수가 되고 어떤 숫자가 어디쯤에 해당되는지 어림잡기 어려울 만큼 늘기도 했지만, 이 당시는 아직 24국이라고 하면 니혼바시, 42국이라면 세다가야라고 곧 알 수 있게 되어 있을 때라 33국이라면 구단에서 진보조(神保町) 근처가 틀림없다. 무레타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자주 머리를 흔들면서 말을 이었다. 

 

- 입을 열더니 금세 장난스런 눈으로 돌아갔다. 
"보들레르가 말했잖아, 이 세상에는 루팡이나 탐정소설 말고도 바카톨레아라는 게 있다고. 도쿄대학 시험이 모레부터인데, 이런 상태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루나가 꼭 함께 치르자고, 어제 출발했는데."
아이짱은 삿포로에서 책상을 나란히 하고 공부했던 어릴 때부터의 애인 이름을 들먹이면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건에 휩싸여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도쿄대학 문과 2의 1차 시험은 3월 3일로 영어·수학·국어 세 과목, 그것을 통과해야 14일부터 사흘 동안 2차 시험을 보게 된다. 고등학생인 아이짱이 우울해진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래, 그걸 잊고 있었구만."
무레타도 좀 당황한 기색으로 대꾸했다.

 

- 그것은 아리오도 차분히 확인하였지만, 다음과 같은 뜻을 알 수 없는 평형식이었다. 

 

- "자, 이것으로 제2 밀실까지의 경과를 대충 되돌아본 셈인데, 어쩐지 고지 군의 <꽃도 요염한 윤회의 흉조> 때문인지, 모두들 인형이 움직이는 것 같군. 하긴 그란 기뇰 쪽이 어설픈 스릴러보다 훨씬 처참하니까 기뇰 같은 죽음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 그런데 히사오는 아까 뭔지, 도지로 씨를 죽인 트릭을 아는 것처럼 말하지 않았어? 괜찮나, 또 함부로 죽은 사람을 끄집어내는 것은 질색이지만."

 

- "히사오가 말하고 싶은 건 이런 거겠지. 예부터 저명한 탐정소설이라면 크로프츠나 녹스의 장편에도 가스를 사용한 밀실살인이 있지만, 트릭으로서는 훌륭하다고 할 수 없어. 그런데 나는 여태까지 유례가 없는 트릭을 발견했다..."

 

- "모조열쇠도 함께 돌아가면서 자물쇠가 걸리고, 자석은 곧 빠져나와요... 공범자가 있었다는 것은 그 대목인데, 그날 아침 소지 형이 꾹꾹 찔러서 떨어뜨린 것은 그 모조열쇠였을 것야. 그렇게 되었으니까, 아무도 그런 줄 몰랐겠지만, 재빨리 범인이 두고 간 진짜와 바꾸어 놓을 필요가 있었고, 도망친 출구의 뒤처리도 했을 거라고..."

(리뷰자 주 : 왜 자꾸 안쪽에서도 열쇠를 돌려 문을 잠근다는 표현이 나오는지 의아했는데, 아무래도 double cylinder locks, 즉 양쪽 다 열쇠가 필요한 잠금장치를 사용한 것 같다. 흑마장 맨션에서도 그렇게 묘사가 되는데, 이 방식이 당시 일본에서 보편적인 방식이었는지는 모르겠다.)

 

- 아이짱은 대답하려고 하지 않았으나, 갑자기 생각이 난 듯 장식 끈을 당겨 커튼을 조금 열고 나서 말했다. 
"봐요, 저 붉은 달을. 마치 웃고 있는 것 같잖아."

- 두 사람은 몸을 겹친 것처럼 하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봄이 가까워졌다. 따스한 밤기운이 감도는 것은 여기에서도 알 수 있는데, 서남쪽에는 사발 모양을 한, 검붉은 구릿빛 달이 떠 있다. 지금 저 달의 표면에는 검푸른 구름이 흐르고, 그것은 마치 두 눈과 입술을 나타내는 위치에 걸쳐 있다. 구름의 움직임에 따라 입 언저리가 비틀어지기도 하고 일그러져 보이기도 한다. 아이짱의 말대로 그 기형적인 붉은 달은, 그때 확실히 웃어 보인 것이다.
"루나 롯사 아니야? 진짜로."

 

- 모든 것의 종말을 고하는 것인가, 아니면 무엇인가 시작을 알리는 신호인가. 1955년 2월 28일 밤의 붉은 달은, 그들을 지켜보면서 언제까지나 웃고 있었다. 

- 작은 주방도 방마다 딸려 있는 조촐한 구조였다. 더욱이 방세가 싸기 때문에 찾아오는 사람은 많지만 집주인이 특이한 성격이라서, 너무 고지식한 월급쟁이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입주 조건이 아주 까다로워, 학생은 해식어서 안 되고, 부부는 곧 아이가 생겨 저저분해지니까 안 되고, 직업은 묻지 않지만 단정한 독신남자로 한정한다. 그리고 풍기에 관해서는 따로 각서를 받아, 여동생이 놀러 와도 그것을 트집 잡아 관리인인 할머니가 거친 사투리로 싫은 소리를 할 정도니까, 지내기 좋을 리가 없었다. 뜨내기 연예인, 트럼펫 연주자, 바텐더 같은 야간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2층에, 양복 하청, 도안사, 세일즈맨 등 낮에 근무하는 사람은 아래층이라는 식으로 방을 엄격히 할당하기 때문에 방값에 끌려 들어온 사람도, 곧 화가 나서 이사 가므로 현관에는 늘 '셋방 있음'이라는 팻말이 달려 있었다. 

 

- 그때 문득 등 뒤에 차가운 시선을 느껴, 갑자기 몸이 굳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뒤에 서 있는 것은 그 녀석이 틀림없는 것이다. 현관 바로 오른쪽 방에서 평소에는 소리도 내지 않는 것 같이 조용히 살고 있는 30세 안팎의 겉으로는 얌전해 보이지만 눈에서 묘한 안광을 발하는 사나이. 작년 10월 초순께 이사를 와서 인형화가라고 미리 퍼뜨린 대로, 가끔 도매상으로부터 골판지 상자에 채운 틀에 박힌 마스크가 도착하면, 거기에 눈코를 그려 넣어서 도로 보내곤 한다. 그런데 웬일인지 긴조에게는 그가 그다지 우아한 직업의 사나이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뭔가 말 못 할 사연이 있는 과거를 가진 사나이가 틀림없다. 그 증거로 미곡통장도, 구청에 가는 것이 귀찮다느니 하면서 아직 등록도 하지 않았고, 근처의 목욕탕에서 전혀 얼굴도 보지 못한 것은 틀림없이 온몸에 문신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자, 긴조의 가슴은 이상하게 두근거렸다. 상대방도 역시 긴조의 거동을 말없이 뚫어지게 보고 있는 만큼, 이 소심한 양복 직공은 음침하고 예리한 데가 있는 인형화가를 수상하고 거북한 상대로 생각한 것이다.

 

- 우편물을 손에 든 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고개를 숙이고 아래서부터 차근차근 위를 쳐다보았더니, 슬리퍼를 신은 빨간 양말, 밝은 빛깔의 플란넬 바지, 벽돌색의 화사한 셔츠 위에, 아니나 다를까 그 녀석의 음침한 얼굴이 차갑고 위압적인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인기척도 없는 복도에 우뚝 서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쁜데,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다물고 있는 그 모습에는, 어딘가 찡하게 살기를 띤 것이 긴조의 가슴으로 다가오자 무의식 중에 벌떡 일어섰다.

"요즘 날씨가 풀려 따뜻하군요..." 
입에 발린 말로 그렇게 붙임성 있게 중얼거리며 우편물을 창에 늘어놓고 서둘러 돌아서려고 하자, 사나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걸었다.
"좀 할 말이 있어요, 긴조 씨.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테니까, 내 방으로 오지 않겠어요?"

 

- "미안합니다. 자, 어서."
사나이는 현관 옆의 자기 방문을 열고, 빈틈없이 주변을 살피면서도 소리만은 부드러웠다. 체념한 긴조가 주뼛주뼛 허리를 구부리고 들어가려고 할 때, 비누라도 가지러 왔는지 관리인인 도요 할머니가 젖은 손으로 뒷문에서 올라와서 이상한 얼굴로 지나가려고 하다가, 곧 알아보고 말했다. 
"당신 언제 돌아왔지. 집에 없을 때 내가 신문 모아 놓았으니까 가져올까?"
"괜찮아요. 다음에 가지러 가지요."
사나이는 좀 당황한 듯이 말하면서 갑자기 뒤에서 긴조를 밀어서 억지로 (긴조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문에 꽂았던 열쇠를 뒤로 손을 돌려 찰칵 걸어 버렸다.

(리뷰자 주 : 양쪽 열쇠를 사용하는 현관문인 건지, 신발을 벗은 뒤 겹문에서 옛날 방식으로 조그만 쇠막대를 꽂아 돌리고 꺾는 잠금쇠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 조심스럽게 만져보니, 도매 시세로 한 마에 5천 엔은 갈 만한 외산 우스티드이다. 무슨 생각으로 그가 이런 얘기를 하는지, 긴조는 아직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다. 

 

- 긴조는 헤엄을 치듯이 엉겁결에 허리를 올렸다. '장난'이라는 말을 해 보려고 하지만 혀가 뒤틀려 말이 되지 않는다. 역시 녀석은 그것을 안 거야, 나흘 전에 내가 이 방으로 숨어서 들어온 것을. 하지만 맹세코 나는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어. 다만 잠깐 들어왔다가 곧 뛰어나갔다고...

 

- 그러나 그 음성에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자백시키고야 말겠다는 잔인한 결심이 배어 있는 것 같아서, 긴조는 무의식 중에 눈을 딱 감았는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몹시 조심스럽게 눈을 떠보자, 그는 주방에서 딸그락딸그락 무엇을 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앞에 있던 위스키 컵이 없어졌다. 무엇을 하나 하고 생각하는 사이에 곧 또 양손에 컵을 들고 왔는데, 거기에는 굵게 썰은 레몬이 떠 있었다. 더욱이 긴조의 컵에는 남은 레몬의 꼬리를 짜서 정성 들인 즙을 만들어, 이번에는 주전자를 가지고 와서 눈앞에서 뜨거운 물을 따랐다. 살아 있는 게 아닌 위축된 심리의 긴조 앞에서 그것을 억지로 권하며, 다시 정중한 말투로 말을 시작했다.

"그 녀석이 나쁜 짓을 했어요. 내가 없을 때 어쩐지 누가 들어온 흔적이 있기에, 나는 또 틀림없이 긴조 씨라고 생각하여, ...옛날부터 속단하는 버릇이 있어 그렇게 되었군요."

그는 입가로만 웃고 있었다. 

 

- 그렇게 대답은 하였으나 코 앞에서 김이 오르는 핫위스키를 보면서, 긴조는 멈추려고 해도 아직 몸이 떨리는 것이었다. 알고 있다, 레몬을 넣은 위스키에 청산가리를 섞는 수법은 신문이나 잡지에서 지금까지도 몇 번이나 읽었다. 눈앞에 들이대고 있는 컵에는 틀림없이 그 맹독물질이 들어 있을 것이다. 청산가리의 그 냄새를 없애려고, 저 녀석은 친절하게 레몬의 꼬리까지 짜서 내 컵에 따르지 않았는가. 녀석의 음험한 눈 속에는 어떤 잔학무도한 짓도 태연하게 해치우는 독사 같은 눈빛이기 때문에 싫어하는 입을 억지로 벌려서 악물고 있는 내 이빨 사이로 독주를 쏟아 넣는 것쯤은 안색도 변하지 않고 할 것이다. 단도나 권총도 아니다, 흉기는 바로 이 독주였다. 

 

- 하지만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했다는 거야. 하긴 분명히 들여다보기도 하고, 엿듣기도 했으며,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 그가 없을 때 방에 숨어서 들어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맹세코, 나는 티끌 하나도 손대지 않았다. 아니면 그 하얀 마스크가, 얼굴 없는 얼굴의 인형이 보아서는 안 되는 비밀이었다는 말인가?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혹시 말하지 말라고 하면, 끝까지 아무에게도 지껄이지 않을 것이다. 부탁이오, 형님. 단 한마디만 그렇게 명령해 준다면 절대로 입을 벌리지 않을 테니까. 지금까지 쓸데없는 짓을 저지른 것도, 사실은 형님의 패에 끼고 싶어서였을 뿐이라고. 제일 밑에 피라미라도 좋으니까, 피비린내 나는 비밀의 세계에서 부하로서 보람 있게 살고 싶어서, 오직 그런 마음으로 그런 거요. ... 알아주셔요, 나한테는 오로지 '타인'만이 내 인생의 보람이니까.  

 

- 안쪽으로 조금 열리려던 문이 안에서 거칠게 몸을 부딪쳐 그대로 등을 기댄 탓인지 쿵하고 닫혀졌는데, 꽂혀 있던 열쇠가 손이 떨리는 것을 그대로 전하듯이 자물쇠 구멍 속에서 찰카닥하는 소리를 내면서 돌아갔다. 문은 두 사람이 보는 앞에서 굳게 잠기고만 것이다. 

 

- 뛰어나게 잘하는 것은 미술뿐이라 소학교의 선생은 어떻게든 그 재능을 아버지에게 인정시켜, 좀 더 자신을 갖게 만들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마쓰지로는 시원찮은 새끼라고 욕만 퍼부으면서, 무엇보다도 모토하루가 그린 그림이 어두워서 참을 수가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 그 무렵 모토하루의 꿈은 24색을 갖춘 파스텔 크레용 -빨강도 크림슨 레이크라든가 카마인 마더 같은 미묘한 색조로 나누어진 아름다운 상자를 갖는 것으로, 그것만 있다면 늘 멀리 바라보면서 탄식할 수밖에 없는 저녁놀 진붉은 구름- 연한 물빛이 호수처럼 퍼져, 금빛과 오렌지와 주홍색의 구름 같은 섬이 남쪽나라의 풍경처럼 펼쳐진 그 반짝이는 순간도 그럴 수 있다. 그리고 새 잎이 돋아난 나무의 우듬지에 초록인지 자주색인지 분간이 안 되는 빛을 띤 부드러운 떡잎의 신선한, 그 모든 것을 맘대로 그려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 그 말에 비로소 아리오도 거칠어진 정원 안쪽에서 고지가 심어 유물이 된 장미 '허무에의 제물'이 붉은 새싹으로 돋아난 모양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거름도 주지 않고 가지치기도 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으니 제대로 클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고지의 집념이 들어가 있는 한 그 눈은 차츰 빛깔을 머금고 백록색으로 빛나기 시작하고 잎도 돋아나서 가는 줄기도 뻗어 꿀같이 끼어비치는 가시를 빛내면서 금세 늠름하게 자라, 마침내 드높게 핏빛의 꽃망울이 주렁주렁 달릴 것이 틀림없다. 바람에 흔들리는 그 한 송이 꽃은, 세계에서 누구도 아직 창조해 내지 못한 '번쩍이는 장미'라고 하는데, 그것이 피어 자태를 자랑하는 날이야말로 고지의 예언은 완료되어 살인 윤무(輪舞)의 종막이 내리는 게 아닐까.

 

- 그날을 위해서 뿌리는 썩은 흙 속으로 뻗어가고 줄기는 끊임없이 양분을 빨아올린다고 생각하니, 식물이 꽃을 피운다는 당연한 생리가 실은 몹시 잔인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아리오는 뭔가를 깨달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히사오는 벌써 자기가 한 말을 잊은 듯이 이렇게 말했다.

"요즘은 어디를 가나 서향(瑞香)의 향기에 발걸음을 멈추게 되잖아." 

 

- "겐지가 몹시 거칠게 문을 닫고 옷장 쪽으로 기어가서 서랍을 연 그 순간에, 긴조의 말로는 제일 마지막으로 들린 소리는 옷장 서랍을 여는 소리가 아니라, 그 바로 뒤에 뭔가 마치 풀숲을 뱀이 지나가는 것 같은, 작고 흐릿한 소리가 잠깐 확실히 들린 느낌이 든다고 했어. 하긴 그런 사건이 갑자기 일어난 때의 일이라 정확하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 "보퉁이며 어렴풋한 소리며, 긴조라는 좀 머리가 모자란 듯한 사나이가 보고 들은 말이니까, 그것만 가지고 어떻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두 가지를 빨아들일 만한 장소가, 이 방의 어딘가에 있다고 하면, 4차원의 단면이니 문이니 하는 말도 반드시 엉뚱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해."

 

- "그래서 오늘 모여 선후책을 강구하려는 것도, 그 골렘을 어떻게든지 원래의 땅으로 돌려보내는 의논을 하고 싶어서였어." 
흙으로 만든 토우 골렘. 그런 말이 아리오에게는 전혀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언젠가 변두리의 영화관 명화축제에서 듀뷔뷔에의 <거인 골렘>이라는 영화를 본 일이 있었다. 아무튼 지하의 감옥에 갇힌 토우 골렘-페르디넌트, 헐크가 분장한 전설의 거인이 난폭하게 나타나 사자를 마음대로 농락하는 줄거리였는데, 이것은 어쩌면 <킹콩>이나 <유인원 조 영(Mighty Joe Young)>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기억에 남은 것은, 최후에 알리볼의 루돌프 2세가 손을 한 번 반짝이자 골렘의 거구가 순식간에 흙덩어리가 되어 무너져 내리는 장면으로 그것만은 아직도 눈에 어른거린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얘기하고 있는 골렘과 어떻게 연관성이 있는지, 그 자라목에 가죽점퍼를 입은 고기치가, 실제로 흉포한 골렘이라도 되었다는 말인가. 그렇다 치더라도 흙으로 돌아가도록 해 본들, 누가 알리볼처럼 손을 반짝일 수 있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 소지는 아직 휴양지에 틀어박혀 있고, 아이짱도 가출을 한 채 들어오지 않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막상 하쓰다 고기치가 히누마 댁에 들어가 둥지를 틀었다는 말을 들으니 아리오는 마치 무슨 거대한 거미가 오래된 저택 안에 거미줄을 치고 그 주인이라도 된 것 같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고기치는 고기치대로 무슨 생각이 있겠지만, 무레타는 그것을 거꾸로 이용하여 배후에 숨은 자의 정체를 파헤치려고 하고 있다.  

- "고지가 죽은 지난해 1954년에, 막크레디, 콜데스, 메이얀이라는 영국·독일·프랑스의 3대 장미 재배의 대가들이 일제히 파란 장미를 발표한 것은,
히사오가 이미 추리시합을 하던 밤에 '장미의 계시'라고 이름 지어 말했지만, 지금이야말로 그 추측이 옳았다고 하는 듯이 기세를 올리며 '그래서요, 어디로 들어왔을까 해서 곧 '아사히’로 전화를 걸어 보았더니, 그게 산주쿠(三宿) 가든이라는 거예요. 고기치가 사무실을 냈다고 한 데가 같은 산주쿠 아니예요. 당신이 말한 기묘한 우연의 일치라는 게,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하고 놀랐어요."  
 
- "파란 눈 부동이라는 부동명왕 님이라오. 교학원이라는 이름의 절 말이예요." 
나는 무의식 중에 무레타 씨를 뒤돌아 보았다. 오색 부동의 하나인, 파란 눈 부동이 지금 느닷없이 고기치의 집과 함께 나타난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러나 무레타 씨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고 있다. 아까부터 고기치의 집을 모르는 것 같이 하면서 끌고 돌아다닌 것은, 나한테 이것을 발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을까. 다이시도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한 것도 아마 이것인 것 같았다.
 

- 나는 넓은 절 경내를 걸어 들어가면서 감개무량하게 말했다. 파란 장미-파란 눈 부동-그리고 방화. 뭔가 몹시 종잡을 수 없는 듯하면서, 무레타 씨가 자주 말하던 이상야릇한 암합이라는 의미를 어슴푸레하나마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추리시합을 하던 날 밤에, 오색 부동과 다섯 개의 널이라는 말을 꺼낸 것은 나였다. 장미의 계시에서 결론을 끌어낸 히사오. 열심히 살인과 방화의 달력을 만든 무레타 씨. 그 세 사람이 지금 여기에 이렇게 서 있는 것은, 단지 우연한 운명의 결합인지 모르지만 뭔가 비현실과 현실이 이중으로 비치는 것을 보는 듯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고기치가 있었다는 집은 별로 눈에 띌 것도 없는 하찮은 양옥으로, 거기도 벌써 모르는 사람이 들어와 살지만, 교학원과 그 집 사이를 몇 번 오가면서 나도 간신히 뭔가를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노란 방' -라 샹블 조느라는 것은 1892년 10월 25일, 성 주느비에브의 너도밤나무 저택에서 일어난 기괴한 밀실범죄의 무대- 라고 해도 사실은 아니다. 곧 가스통 르루라는 프랑스의 작가가 1907년에 발표한 탐정소설이기 때문에, 밀실살인이라고 하면 곧 '노란 방'이 으레 인용될 정도의 고전적 대표작이라고 한다. 듣고 보니 그 소설에 나오는 룰타뷰라는 명탐정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소설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만, 그러나 굳이 카펫이나 벽이 노란색이 아니라도 범죄에 지장을 주지는 않아, 그것을 르루가 어떻게든 노란색이라야 된다고 생각한 것은, 아마 포의 <붉은 죽음의 가면>을 의식해서 한 게 아닐까. 곧 '붉은 죽음'에 나오는 일곱 개의 방은 말이지, 파랑·초록·자주·주황·흰색·보라·검정의 일곱 색에는 없는 빛깔을 골라서, 은밀히 포에 대한 사모와 함께 도전을 나타낸 것으로도 볼 수 있어. 히누마 댁의 '노란방’도 첫째 의미는 그와 마찬가지라고 해도, 물론 그것만은 아니겠지..."

"그것만은 아니겠지, 만들도록 부추긴 것은 당신이라고 했잖아요."

 

- 미츠이사(三井寺)에 소중히 간직되어, 1930년 이래로 한 번도 공개된 일이 없는 저 '노란색 부동명왕'의 화상같이 무시무시한 데는 없지만, 아리오로서는 한결 더 감개무량하였다. '메구로(目黑)'에 사는 그가 '메시로(目白)'의 사건에 휘말려, '메아오(目靑)'의 방화와 '메아카(目赤)'의 살인에 이끌려, 지금 범인인 오지를 가리키는 '메오(黃)'의 부동명왕 앞에 서 있는 것은, 둘도 없는 기이한 인연인 것 같다. 동시에 아리오에게 미심쩍한 것은 사건과 직접 관계는 없다고 해도, 이 5색 부동이 언제부터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다섯 군데에 배치되었는가 하는 것이 의문이었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주지도 밝히려고 하지 않았다. 

 

- 두 사람은 소지의 조용히 베갯머리에 앉았다. 신비스럽던 그늘진 용모도 이제는 간데없고, 푸르스름한 얼굴에 오똑한 콧마루가 애처롭다. 입술만이 이상하게 육감적으로 윤기를 빛내고 있다. 그리고 조용히 잠든 숨소리를 내면서, 소지는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새까만 속눈썹의 그늘에 분명히 이슬이 고여, 그것은 조용한 방울이 되어 볼을 타고 떨어지려고 했다. ...세는 나이로 27세인 이 청년은 어린애처럼 자면서 울고 있었던 것이다.

 

- 오지는 그만큼 자신이 있었는데도 궁지에 몰려 도망칠 수 없는 최후의 경우를 예상하여 향기롭고 감미로운 독약을 가지고 다녔던 것일까.

 

- "모처럼 써 본 역작인데 평가가 나쁜 것 같군. 사실 이대로의 일이 일어났다고 가정하고 진상을 해명해 달라고 해도 무리인지 모르지만, 이 소설 가운데서 하쓰다 고기치 씨가 무슨 대사를 지껄인들 그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테니까, 현실의 그는 모든 면에서 범행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지."

 

- "이렇게 능숙한 독자들이 모이니까, 나도 의욕이 나는데. 히사오는 히사오대로, 지적받아야 될 모순을 빠짐없이 말해 주었고, 아료샤는 문제의 핵심을 찔러 주었으며, 트릭에 관해서는 아이짱이 말한 대로 단순한 사체 엘리베이터라면 별 의미가 없지. 물론, 그러기에 그것은 밀실트릭을 겸하고 있다고 봐야 될 거야."

 

- "이것도 몹시 이상할 정도의 암합인데, 그렇다면 적어도 <꽃도 요염한 윤회의 흉조(花亦妖輪廻凶鳥)> 역시 대본대로 마무리를 지어야 되지 않겠어. 알겠나, 우선 서막의 연출이 '아라비크'의 살로메 무대였지. 긴부스마(金襖物)를 그대로 베낀 첫 번째가, 포의 <붉은 죽음의 가면>을 모방한 그 '하얀 방'이고, 두 번째는 신문기사에도 난 겐지 살해의 생생한 이야기가 아닌가. 연극이 또 현실로 돌아와 '노란 방'이 되면, 도지로 씨의 죽음은 막간이 되는 셈이지만 그것은 달라. 그것은 도일의 <은퇴한 물감장수>에서 온 첫 번째 대사의 계속에 지나지 않는 거야. ...그러면 약속한 막간이 빠진 것 같지만, 실은 우리가 그 역할을 한 셈이니까 얄궂은 일이지. 돌이켜 생각해 봐, '아라비크'에서 추리시합을 했다는 그날 밤은 기상대의 기록으로 남을 정도는 아니라도, 확실히 '눈'이 내린 저녁이었어. 그리고 다음은 우리 집에서 이것저것 추리 비슷한 말을 나눈 것이 그루나 롯사의 밤이었지 않아? '눈'과 '달'이 있으면 다음은 '꽃'이 나란히 있어야 되지 않겠어, 그건 약속이니까. 어디든지 함께 꽃구경에 나서기만 하면 '놀라운 진상'도 원더랜드도 곧 발견될 것으로 생각하는 게 이상한 일일까."

듣고 보니 확실히 그렇다. 예상도 하지 않았던 '눈·달·꽃’이 마치 약속이나 한 일 같았다. 알지 못한 사이에 다들 '꽃 역시 요물'이라는 등장인물로 탈바꿈한 것인가. 무레타는 웬만큼 기분이 좋아져 가는 히사오에게 신경을 쓰면서 말했다. 

- 찻집의 주홍빛 양탄자도 무레타에게는 오랜만에 맛보는 일본의 풍취일 것이다. 미메구리를 지나 벚꽃 가로수의 끝자락에 있는 가게에서 즐거운 듯이 벚꽃떡을 볼이 미어지도록 먹으면서, 미지근한 엽차도 계속 나와 움직일 생각이 없다. 여담이지만, 아리오는 이날로부터 매년 이곳으로 꽃구경을 왔는데, 어느 해에 늙은 나무는 거의 베어 버리고 대신 어린나무를 심게 되자, 그 찻집의 분홍빛 양탄자도 사라져 버렸다. 그 자리에는 유리와 콘크리트로 지은 작은 건물이 세워졌고, 들여다보니 거기가 이름난 그 가게인 모양이지만, 비닐 도료를 칠한 의자 위에서 손님들은 같은 벚꽃떡을 즐기고 있었다. 

 

- 아니, '오늘'이 아니다. 원래 히누마 집안의 살인사건이라는 것이 사실은 전부 나의 망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나는 벌써 예전부터 이 병원에 있으면서 고지 살해와 흑마장과, 장미와 5색 부동명왕이라는 괴이한 꿈을 계속 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결과 오랜 혼수상태에 떨어져 있다가 겨우 오늘, 조금 제정신으로 돌아온 건 아닐까. 그러고 보면 중학생 때였던가, 친구한테서 빌려 읽은 유메노 규사쿠(夢野人作)의 <도구라 마구라> -그 소설도 이런 식으로 정신병원의 한 병실에서 잠이 깨어, 이제까지 몇 번이고 같은 짓을 되풀이한 줄도 모르고 조금씩 기괴한 범죄를 깨달아 끝내는 또 광기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줄거리였지만, 분명히 히누마 집안의 사건같이 언제까지나 해결이 나지 않는 광기 어린 이야기가 현실로 일어날 리가 없다는 것이다. 해결은 오직 한 가지, 내가 처음부터 정신이 돌았다는 것밖에 없지 않는가. 그렇지, 지금 도망치지 않는다면 그 전격요법을 당하여 짐승처럼 울부짖으면서 마루를 기어 다니지 않으면 안 된다.  

 

- "나 같으면, 저 '샬 마르란'에게 당연히 '운명'이라는 이름을 붙이겠어요. 어때요, 찬성하지 않겠습니까?" 
무레타도 점잔을 빼며 수긍했다.
"그래요. 그 나무의 호젓한 기세며, 슬플 만큼 솟아난 수많은 가시 말입니다. 흑장미가 이를 수 있는 한계의 자태라는 것이 그렇게 준엄한 것인가를 생각하면, 나는 '운명'이라는 이름을 바치지 않고는 안 되겠어요." 
이른바 범죄방정식 이래로, 아리오도 장미를 좀 자세히 알게 되어 '샬 마르란'이라는 것은 '피스'를 만들어 낸 프란시스 메이얀이, 특히 그 스승의 이름을 따서 붙인 흑장미라는 정도를 알고 있다. 실물은 아직 본 일이 없지만 이 의사의 말대로라면 대단히 빼어난 품종인 모양이다. 

(리뷰자 주 : '프란시스 메이얀'은 프랑스의 메이앙 Meilland 가의 Francis Meilland를, '샬 마르란'은 Charles Mallerin를 말하는 듯하다.)

 

- 다음에 생각해 보니 오히려 아리오가 어리석다고도 할 수 있는데, 부동명왕이라고 하면 큰 화염을 등에 지고, 오른손에는 구리가라(俱梨迦羅)의 용이 감긴 항마의 검을 가지고, 왼손에는 삼매(三昧)의 줄을 쥐고 있는 것이 대개의 모습이니까, 할아범이 고기치를 죽인 가공의 범죄를 거침없이 맞힌 것도 당연하며, 비밀다라니경 같은 데에는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견색(羅索)으로 대력의 마를 묶어 이혜(利慧)의 칼을 가지고 그 목숨을 끊는다'라고 하는 정경은, 굳이 '노란 방'을 엿볼 것까지도 없이 진언밀교의 행자에게는 쉽게 상상이 되었을 것이다.

 

- 어쨌든 그 추리시합의 밤에 단순한 착상으로 지껄인 5색 부동명왕을 기이한 인연으로, 안내와 유도에 이끌려 다다른 정신병원의 깊숙한 곳에서 아리오가 발견한 '원더랜드'는 곧 지옥으로 변한 모습의 '만다라상'이었던 것이다.  

- 진언비법의 신주에 따르면, 큰 기근(機根)의 사람만이 진정한 부동명왕의 분노상을 분명히 볼 수 있기 때문에, 중근(中根)의 사람은 고작 함께 있는 두 동자 정도까지, '하근(下根)의 행자는 두려움이 생겨 볼 수가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리오는 하근에도 미치지 못한 모양이었다. 정신병원의 분열증 환자에게서 놀랄 만한 진상을 배우기까지는 무엇 하나도 꿰뚫어 보지 못하고 진범의 이름까지 들었지만, 미묘하게 에둘러 말하는 바람에 ...

 

- "물론 처음에는 물루지의 노래였지만 또 하나, 샹송의 안내라고나 할까. 그그저께 <해저의 황금>이란 영화 시사회가 있었는데, 그 테마음악에서 번뜩 머리를 스쳐가는 게 있었다고. 언젠가 오지가 말했잖아, '붉은 벗지와 하얀 사과나무'라는 샹송을 페레스 플라드가 맘보로 바꾼 곡이라나. '셀레스 로사'라고 하지만 그것이 영화 전편에 흐르는데 그 트럼펫의 시원스런 음향은 정말 가슴을 찡하게 하던데. 나도 맘보를 다시 보게 됐다니까." 

 

- Il disait un peu plus que la vérite ...

 

- 무레타는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뭔가 쓸쓸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것은 이렇게 생각하는 게 좋아. 우리나 마찬가지로 아이짱도 그런 짓으로 원더랜드를 들여다보고... 어쩌면 거기에서 들여다본 원더랜드는 그대들이 본 어떤 것보다도 이상한 것이었겠지." 

 

- "아마 눈치채지 못하였겠지만 바라보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으니까."

 

- "어때요? 오늘 요리."
그러면서 마주 앉자, 어쩔 수 없이 꾸민 웃음으로 대답했다.
"과연 일류의 솜씨에 감탄했어요. 옛날에는 자주 불렀다지요." 
"예, 그래도 전쟁 전에는 우리도 상급 고객이었으니까요."

소지는 좀 수줍은 듯이 말했다. 오늘은 드물게 안색도 밝고, 아까 조금 마신 포도주 때문인지 볼도 붉으스름하다. 따끈한 커피잔에 입을 대면서, 아리오는 오랜만에 이 곱게 생긴 친구의 옆얼굴을 복잡한 마음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히사오가 말을 꺼내 아이짱의 변명을 듣기 전에는 섣불리 말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 "히사오가 어떻게 하려고 하는지 모르는 게 아니야. 그렇지만 히누마 집안의 비극은 비극으로서, 걸맞은 종결을 맺도록 해 주는 것이 우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히사오는 그것을 희극으로 만들지 몰라. 그런 입회는 사양하겠어."  

 

- "중대한 증거는 양날이 있는 칼이라고, 홈스 선생이 말했거든."
 
- "자, 아료샤, 뭘 하고 있어. 늦어졌지만, 이제부터 생일 선물을 전하러 가야지. 둘이서 아이짱의 고발장을 말이야. '미치광이 차모임'으로부터 시작하여 '누가 만두를 훔쳤는가'라는 법정의 장면으로 마침표를 찍으려고 하는데, 핵심이 되는 '앨리스의 증언'이 없어서야 도리가 없지 않아. 비극인지 희극인지는 입회인인 소지 씨에게 판정을 내리라고 하지."

 

- "우리는 열쇠의 번들번들 손잡이에만 정신이 팔려, 사람의 손이 아니고는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덤빈 것이 잘못이었어. 낫의 모양을 한 둔한 칼날 모양의 자물쇠에 아주 가는 끈을 걸어 타올 걸이의 쇠장식을 이용해서 벗겨지지 않도록 세탁기의 타임스위치에 연결하면, 아주 간단한 자동 밀실 구성장치가 만들어진다 말이야..."

 

-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모르겠어. 아까부터 골똘히 생각해 보았지만, 어째서 큰 아버님을 죽여야만 되었는가, 그리고 그것이 어째서 시지로 큰 아버님께 제물이 된다는 말인가, 그것을 도저히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 절반은 알아, 또 절반은 수긍도 해. 그러나 먼저 그 일부터 저질러 놓고, 어쩌자는 거야..." 

 

- "아까 괴물의 정체라는 말을 했지. 그 정체를 나밖에 모른다고. 나 역시 그것을 조금 짐작은 해. 우리를 덮쳐 누르는 이 거대한 것을 단칼로 요절을 낼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고 싶은 객기는 나도 있어. 하지만 내 손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까지 허락한다면, 역시 인간과의 약속을 깨는 것이 아닐까? 그것을 알고 싶어. 그 선을 넘어도 되는 이유를, 꼭 듣고 싶은 거야."

 

- "모두 다 도야마루가 침몰한 뒤에 일어난 일이야. 그 사건을 겪고 난 뒤, 우리의 삶은 뭔가 이 세상과는 어긋난 이상한 세계를 뒤쫓아감으로써 가까스로 숨이 붙어있는 상태로 변했어. 현실에서 견딜 수 없으니까 비현실로 도피하려는 것은 당연하지만, 홀로 나만이 그렇게도 하지 못했던 거야."

 

- "살인현장 풍경이 인간세계의 사고로, 고뇌를 겪은 끝에 도지로를 죽인 것이 미치광이 짓이란 말인가, 나는 묻고 싶어. 내 말은 모두 광인의 논리에 지나지 않고, 나는 역시 흉악한 짐승으로 ... 부를 가치조차 없는 것일까, 생각하기 바란다. 어느 쪽이 안이고 밖인가를. 무엇이 인간다운 선이라고 할 수 있는가를, 그리고 거기 두 분도 말이야!"

꼼짝 않고 듣고 있는 아리오와 히사오에게, 느닷없이 날카로운 소리가 날라왔다.

- "높은 자리에 계신 구경꾼이었어, 당신들은. 우리가 도야마루의 유족이라고 해도, 고작 가엾다고 여기는 정도밖에 더 생각하지 않았겠지.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어쩌고 하면서, 히누마 집안의 사건을 기다리면서 가슴 설레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뻔한 거지. 당신들뿐만 아니야, 육친을 잃은 사람 말고 누가 도야마루의 조난을 자기의 아픔으로 받아들였겠는가. 자기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을 누가 맛보았겠어. 그런 기특하고 따뜻한 눈물은 전쟁 중에 다 잊어버렸을 테니까, 그만하면 됐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조난사고라고 해도, 그 전쟁 중에는 더욱 엄청난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났으니까 말이야. 그러나 구경꾼인 당신들도 오지와 겐지라는 인형에게 혼을 불어넣은 역할을 내가 했다는 사실만은 잊지 말아요. 전부라고는 하지 않지만, 이 1955년,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그러겠지, 무책임한 호기심이 새로 만들어낼 즐거움만은 당신들 몫이 아니겠어. 뭔가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 하고 두리번거리고 있으면, 그럴싸하게 잔학한 사건이 얼마든지 현실로 툭 튀어나오는 것이 지금의 시대이니까. 그런 상황에서도 자기만은 안전지대에 있으면서, 구경하는 쪽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떤 처참한 광경이라도 좋아서 바라보는 것이 괴물의 정체라고. 나에게는 무서운 허무로밖에 생각되지 않아. 그 장미의 이름에서 나온 시는 뭔가 우아한 의미가 있는 모양인데, 그걸 음미해 보아도 그런 허무에의 제물을 위해서 나는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어. 내가 도지로를 죽인 것은 인간의 긍지를 위해서 한 노릇이지만, 어떻게 되었던 바다는 말이 없는 거야. 내가 한 짓도 다른 의미로 '허무에의 제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

 

- "도야마루의 공판을 보아도, 배가 부상하기를 기다려서 조사를 진행시킨다는 거야. 그럴듯한 생각이지만 이 괴물이 퍼지고 있는 한, 나는 단언할 수 있어. 도야마루가 떠오르기도 전에 반드시 다른 배가 마찬가지로 침몰할 것이라고. 그때 내가 정신병원의 쇠창살, 안인가 밖인가 그 어느 쪽에 서 있는가를 당신들에게도 알도록 하려는 거야."

 

- 어디를 그의 에덴의 동쪽, 노도의 땅으로 정하였는지, 자기 방으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더니 미리 모든 준비를 마친 듯 가뿐한 모습으로 계단을 내려가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가, 꼼짝도 않고 골똘히 생각에 잠긴 세 사람의 귀에 들려왔다. 다시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모습도 보이지 않은 채, 이 쉽게 히누마 집안은 이제 완전히 붕괴되어 사라진 것이다. 

- 5월은 상복의 계절. 화려하고 짧은 광기의 계절이 찾아왔다. 그날로부터 여름까지-소지의 생일 전야 모임에서 7월 12일, 고지의 생일까지, 86일 사이에 일어난 갖가지 사건은 유난히 히누마 집안의 종말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의미 있는 것이었다. 날씨도 변화가 몹시 심하여 4월 11일에는 30도까지 올라간 기온이 21일에는 2도까지 내려가, 열흘 사이에 여름과 겨울이 오고 갔다.

 

- 5월 11일 새벽, 시코쿠(四國) 다카마쓰(高松) 난바다에서 연락선 시운마루(紫雲丸)가 짙은 안갯속에서 제 3 시운마루에 충돌, 순식간에 뒤집혀 수학여행을 하던 초등학교 어린이들을 포함하여 168명이 바다로 사라졌다. 거기에 호응이라도 하듯이 5월 17일 석간신문들은 '도야마루 떠오르다'라는 짧은 뉴스가 보도되었다. 

- 시모오치아이(下落合)의 무레타네 집에서 히사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결혼 연기를 주장하여 양보하지 않기 때문에 도리없이 무레타는 또 혼자 파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이날은 송별을 위한 모임이 된 것이다. 히사오는 아주 얌전한 모습으로 우중충한 초록색의 트로피컬을 수수하게 입고, 아이짱은 회색 폴로셔츠, 아리오는 체크무늬 윗도리로 세 사람이 예기치 않은 회색 계통의 상복차림 비슷한 모양으로, 그림자처럼 서로 속삭이는 파티가 되었다. 

 

- 계절은 밝은 초여름이 되었지만 내려다 보이는 나무들은 청대 완두를 삶은 것 같은 색조로 무성하게 들어차 있는데, 초록빛으로 조화를 잘 이룬 이 5월에는 어쩐지 상차림과 잘 어울려 보인다.

"사실 말이지, 요즘은 입을 옷을 찾기가 제일 마뜩잖은 때거든요.” 
히사오는 변명 같은 말을 하였다.

 

- "지금의 시대에는 어쨌든, 우리들이 뭔가로 변해 가고 있는지도 몰라. 인간이 아닌 뭣인가로 말이야. 일부분씩 범죄자의 요소를 가진 생물이라고 할까..."

- "아니요, 탐정소설은 벌써 단념했어요. <히누마 집안 살인사건>에서 ... 씨는 미래의, 앞으로 있을 사건의 범인을 지원하여 사라져 버렸고, 진정한 의미에서 진범은 우리들 구경꾼이라는 것이 분명해졌으니까, 그런 의미로 말하는 게 아니예요. 다만 일부분씩의 범죄자라면 당신이 제일 실적이 있을지 몰라요. 당신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어요. 프랑스에 있을 때부터, 누가 어떤 살인계획을 세우고 있는가를 속속들이 알면서도 그것을 말리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것은 곧, 세속적으로 말하면 당신은 상을 다 차려 놓고 ... 씨를 파멸의 길로 몰아넣은 게 아닌가요? 하긴 필사적으로 사건을 무마시키려고도 하고, 우리들의 눈을 가리려고 하다가 결국 ... 씨에게 알맞은 고백의 기회를 주어 비극을 비극답게 끝내도록 한 것은 훌륭했지만, 그것도 ... 씨의 애처로운 동기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자기에게 닥쳐올 불똥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도 있지요... 묻고 싶은 것은, 사건 동안 당신이 진정으로 ... 씨를 위해서 행동했던가 하는 거예요. 어쩌면 그 이상의 사악한 의도가 없는가 하는 점이지요." 

- "그것만은 당신의 입으로 정직하게 말해 주세요. 이 사건이 계속된 동안에 당신은 한 사람의 청년을 고의로 파멸시키려고 한 것은 아닌가. 인간을 실험 재료로써 맘대로 움직이는 흥미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없는가. 진정한 의미에서 제일 잔인했던 것은 누구인가, 꼭 알고 싶어요."


- 추궁당한 무레타는 초점 잃은 눈으로 먼 산을 바라보았다. 해가 기울고 주황색의 아련한 저녁놀이 가까워지려고 하는데, 그 모습은 그림자와 빛이 여리게 녹아서 뭔지 모르는 별종으로, 먼 행성에서 온 생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였다.

-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
무레타는 가까스로 맑은 눈을 히사오에게 돌려 보면서 말했다. 

"나에게 있어 소지 군은 언제나 이상한 유혹을 느끼게 하는 존재였다고. 특히 청년기에 들어서는 과연 수재답게 해쓱한 이마를 번쩍거리게 되면서부터, 어떻게든지 그를 내가 짜 놓은 운명대로 걸어가게 해 보려고 한 결과 낭떠러지에서 떨어뜨려 버린거야. ...그렇지, 그렇게 된 거라고 하지만 떨어뜨리는 마당에서 그에게 새로운 날개를 달아 줄 생각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그는 그냥 그대로 곤두박질친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아." 
 
- "아료샤, 정말 차분히 이 사건을 잘 써야 돼요. 나도 쓰고 싶지만, 내 이름과 같은 이름의 천재가 있는 동안에는 부끄러워서 한 줄도 써질 것 같지 않아. 아료샤는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게 글솜씨가 있으니까, 합작을 한다고 해도 실제로 쓰는 것은 아료샤 아니겠어."

 

- "물론 탐정소설로 써야지. 그것도 본격적인 추리장편의 형태로 순서를 따라, 마지막만 조금 다르게 등장인물의 누구든지 좋지만, 한 사람이 갑자기 휙 뒤돌아서서 페이지 밖의 '독자’를 향하여 '당신이 범인이다'라고 가리키는 그런 소설로 하고 싶어. 저, 아까도 말한 것처럼 진범은 우리들 구경꾼이 틀림없지만, 그것은 '독자'도 마찬가지 아니야? 이 1954년부터 1955년에 걸쳐 책임 있는 일본의 성인이라면 전부 범인의 자격이 있는 게 아니겠어." 

 

-  "수수께끼를 푸는 본격적인 추리물로 생각하여 난로 옆이나 녹음에서 한가롭게 책을 읽고 있을 때, 느닷없이 범인은 독자인 바로 당신이야 라고 한다면, 그런 악취미가 어디 있어. 히사오 씨는 어때?" 
"취미의 문제가 아니야." 

 

- "글쎄, 그건 앞으로 생각하기로 하고. 탐정소설은 세밀한 데가 어려워요. 앞뒤가 모순이 안 되도록 신경을 써야 되거든."

 

 


   

 
허무에의 제물
『허무에의 제물』은 일본 안티미스터리(반추리소설)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장편소설으로 장미와 흑조를 기조로 한 나카이 히데오의 작품이다. 1964년 고단샤에서 도우아키오(塔晶夫)라는 필명으로 출간되어, 이듬해 마이니치신문과 하야가와 미스터리 매거진에서 전후 20년간 추리소설 베스트셀러 제1위 최고 작품으로 선정된다. 또 일본 추리소설의 3대기서로, 저자가 10년간 도야마루사건을 취재·집필하여, 4개의 밀실살인이 담긴 본격추리소설 ‘히누마 집안 살인사건’을 완성해낸다. 이 소설에 10년 세월을 투자한 작가는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추리게임으로서 완벽하고 순수한 작품보다는, 추리게임을 벗어난 것, 곧 안티미스터리를 창작해낸다.
저자
나카이 히데오
출판
동서문화사
출판일
2009.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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