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앙투안 로랭] 익명 소설

일루젼 2023. 6. 24.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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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앙투안 로랭 / 김정은

원제 : Le service des manuscrits 
출판 : 하빌리스
출간 : 2023.04.27 


       

이것을 무슨 소설이라고 불러야 할까?

 

<Le service des manuscrits 원고검토부>라는 원제의 <익명 소설>은, 본문 내에 등장하는 평가 방식을 빌자면 압도적인 '해' 표시를 받을 만한 도입부로 시작한다. 프랑스의 출판 현실을 그대로 옮긴 듯한 -적어도 작가의 경험이 어느 정도는 녹아 있는 듯한- 작가 지망생들과 출판사들에 관한 날카로운 촌평도 매력적이지만, 첫 페이지부터 등장하는 마르셀 프루스트, 미셸 우엘벡, 그리고 파트릭 모디아노와 버지니아 울프라니. 

 

결말부에 관해서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지만, 초중반부까지는 빨려 들어갈 것처럼 읽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는 점에 대부분의 독자들이 동의하시리라 생각한다. 환각과 환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가 싶으면 극현실적인 이야기가 등장하고, 그러다 갑자기 비행기가 추락하고 사람이 살해된다. 이게 무슨 전개인가 싶으면서도 각 장면마다 눈을 뗄 수 없게 독자를 끌어들이는데, 마치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듯 세밀한 분위기가 아주 매력적이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은 '아나크림 888'의 등장이다. 그 장면을 기점으로 다소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생각하는데, 제각기의 목적을 가지고 <설탕 꽃들>의 저자를 탐색해 가던 긴장감의 색깔이 달라졌다고 느꼈다. 마무리나 결론은- 나쁘지는 않았지만- 앞부분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기에 솔직히 조금 아쉬웠다. 

 

그러나 삶이란 언제나 불가해한 것들로 -혹은 불가해한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는 법. 어떤 일이 우연히 일어날 수 있다면 모든 일은 우연히 일어날 수 있는 법이다. 반대로 어디에도 우연이란 없다면, 마찬가지로 어떤 일도 우연하지 않게 일어날 수 있는 법이다. 그저 그것들의 인과관계를 이해하는 자와 하지 못하는 자로 나뉠 뿐. 모든 것이 투명하고 선명하게 설명되지는 않는다는 점이 설탕 공예품과 평범한 인간의 차이일 것이다. 

 

비올렌 르파주는 무척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그녀와 피에르 스탱의 미묘함 또한 마음에 든다.  

 

아주 집중해서 읽었다. 

행복했다.      

 


   

 

이 책은 저를 떠나 스스로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리고 죽어야 할 이들은 죽을 것입니다.
모든 빚은 돌려받게 될 것입니다.

 

 

- 마르셀 프루스트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그녀가 여기 있는 이유를 다 안다는 듯 은근히 빈정대는 기색이었다. 비올렌은 그 유명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작가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거무스름한 눈자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반듯하게 정리된 콧수염, 흑단 같은 머리카락. 수달 모피가 달린 코트를 입은 프루스트는 침대 옆에 놓인 원목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상아와 은으로 된 둥근 지팡이 손잡이에 오른손을 얹고, 왼손으로는 코트에 붙은 모피를 가만히 쓸면서 안 그래도 윤기가 절로 흐르는 털을 더욱 반들거리게 했다. 비올렌은 베개 위에서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정적이고 조용한 방문객들로 가득한 자신이 누워 있는 방의 광경을 지켜보았다.

 

- 코듀로이 바지와 연한 데님 셔츠 차림의 미셸 우엘벡은 창문 앞에 서서 지평선 어딘가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느릿느릿 담배를 꺼냈다. 그러고는 빛이 비치는 가운데 파란 우윳빛 구름 같은 소용돌이 모양의 연기를 만들어 냈다. 목덜미까지 자란 삼실 같은 머리카락과 얇은 입술은 늙은 마녀를 연상시켰다.

 

- 최근 몇 년간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자신이 집필한 책의 출간을 꿈꾸는 프랑스인이 2백만 명이라고 한다. 이 중 대부분은 영영 집필하지도 않을 책을 내고 싶어 한다. 휴가철마다 품는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 계획은 평생 머릿속에만 머무를 것이다. 어스름이 깔린 집에서 책상에 앉아 컴퓨터의 모니터가 뿜어내는 빛에 의지해 전날 쓴 원고를 이어 가기보다, 수영장 물속에 들어가 있거나 바비큐 온도를 점검할 생각뿐이라면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머릿속'에다 써 놓은 책에 대해 수시로 떠들고 다닌다. 처음에 주변인들은 이들의 생각을 대단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다 몇 년이 지나도록 이렇다 할 결과물이 나오지 않으면 이 미래의 작가가 "올여름부터 다시 글쓰기를 시작할 거야."라며 한껏 결연한 표정으로 집필 중인 책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자기들끼리 알 만하다는 눈빛을 주고받는다. 실제로 나오는 건 없으며 다음 여름에도 딱히 다르지 않을 탓이다. 겨울에는 말할 것도 없고. 이렇게 생겨난 이른바 책 유령들은 가스로 된 물질 같은 것을 형성해 마치 오존층이 지구를 감싸듯 문학을 둘러싼다. 

- 원고 세 페이지 이상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목차조차 쓸 수 없는 이들은 간단히 말해 해를 끼칠 일이 없다. 이들 중 누구도 우체국에 가서 투고를 보내는 데까지 이르지 못할 것이므로. 또 다른 부류의 작가 지망생들은 진심으로 시작을 결심하는 이들이다. 인생에서 3개월이나 5년, 아니면 다른 무엇을 할애하더라도 그들은 글자가 빼곡히 들어찬 하얀 종이를 스프링 제본한 사각형의 결과물을 눈으로 보고 또 양손에 쥐고 싶어 한다. 25포인트, '타임스 뉴 로만체' 제목, 자신의 이름, 소설이라는 짧은 단어가 적힌 표지와 함께. 그리고 이것이 그들의 원고다. 마침내 프린터에서 나온 원고 사본은 표지부터 마지막 문장에 이르기까지, 잠 못 이루던 밤과 꼭두새벽의 기상, 지하철이나 공항에서 황급히 쓴 메모, 샤워를 하다가 혹은 비즈니스 오찬 중에 말벌 떼의 공격 세례와도 같이 급작스럽게 떠오른 아이디어의 결실이다. 이 습격을 물리치려면 가능한 한 빨리 적는 수밖에 없다. 빨간 몰스킨 수첩이나 스마트폰의 '메모 앱'에 대충이라도 기록을 남겨서. 아마도 이 아이디어들이 소설을 결정지을 터다. 아닐 수도 있고.

 

- '끝'이라고 적는 데까지 도달했으나 딱히 출판사에 연줄이 없는 이들에게는 우편 발송의 날이 온다. 어느 아침 또는 저녁에 전문 복사집에서 원고 사본을 열 부 내지는 스무 부 주문하고, 제목이 있는 첫 장에는 투명 커버를, 맨 뒷장에는 검정색이나 흰색 판지를 댄다. 제본을 철하는 플라스틱 스프링도 검정색이나 흰색이다. 색은 두 가지밖에 없다. 죽은 새끼 당나귀 무게 정도가 나갈 법한 비닐봉지를 가지고 집에 돌아오면, 이제 사본마다 '자기소개서'를 끼워 넣을 시간이다. 이 자기소개서는 왕자님, 남작님이란 단어만 없을 뿐 일단 원고를 읽을 사람의 관심부터 끌고 보자는 궁정 서한 같은 것이다.

 

- 비올렌은 괴상하고 우습고 비장한 자기소개서들을 파일 하나에 따로 모아서 원고 검토부 자료실에 보관했다. 파일명은 '벌레들'로, 누가 보면 딱정벌레에 대한 문서철인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올렌을 아는 사람이라면 일상 언어에서는 그저 한없이 평범하기만 한 '벌레'라는 단어가 비올렌이 입에 올리는 최상급 욕임을 알 수 있었다.

 

- 한번 벌레로 찍힌 사람은 평생 벌레로 남으며, 이런 변태를 되돌릴 해독제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회귀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벌레라는 지위가 영원무궁토록 부여되었노라. 이는 20년도 더 전부터 본인의 영역인 원고 검토부에 군림하며 원고를 보는 검토자에서 시작해 차근차근 권력의 계단을 밟아 올라온 비올렌만의 방식이었다.

 

- 집필을 마치지 못한 작가는 벌레도 아니고, 심지어 그냥 남자나 여자조차 되지 못한다. 나이도 직업도 얼굴도 없고 자기 '원고'표지 위 쪽에 적힌 성과 이름만 가졌을 뿐이다. 게다가 이마저도 본인의 것이 아닐 수 있다. 

 

- 원고를 보내는 예비 작가는 다른 날보다 더 예민해서 다른 사람이 어깨너머로 이 묵직한 크라프트지 봉투에 적힌 출판사들의 이름과 ‘원고검토부 담당자 귀하'라는 무능함을 고백하는 것 같은 단어들을 보지 않았으면 싶다. 원고를 우편으로 보내는 이들은 인맥이 충분히 넓지 않아서 원고 좀 한번 읽어 달라고 부탁할 만한 다른 방도가 없다. 저울이 해당 '우편물'에 맞는 규격상의 무게 및 배송지에 따른 가격을 표시하면 그다음으로 '소포 개수' 버튼을 누른다. 그러고 나서 그 개수만큼의 출판사에 작가의 간이자 쓸개, 작가의 자식, 작가가 보낸 밤의 기쁨과 아침의 현기증, 그러니까 작가의 작품을 발송한다. 

 

- 원고를 평가하는 편집자들은 두세 명을 제외하고는 죄다 파리에 적을 두고 있다. 컴컴한 우편물 집합소 바닥으로 낙하하는 둔탁한 소리에 갑자기 자신이 쓴 소설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싶은 불편한 감정이 생길 수도 있다. 누가 재미있게 읽겠어? 누가 회신이나 주겠어? 그래서 어둠이 깔릴 때를 틈타 숲에 시체를 유기하듯 서둘러 우편함에 넣어 버린다. 

- 집에 돌아와서는 와인이나 위스키를 한 잔 가득 따라 마신다. 울고 싶은 심정이지만 실제로 울지는 않는다. 또한 우체국에서의 괴로운 순간을 가까운 이들에게조차 공유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심판받고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심판받는 게 두려워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범죄 행위라도 되는 양, 작가는 투고 사실에 대해 절대 발설하지 않는다. 

 

- "난 숨은 천재가 있다고 믿지 않아." 이 말을 만트라 주문처럼 중얼거리며, 비올렌은 아침마다 출판사 기준으로 하루에 열에서 열다섯 개씩 들어와 책상 위 여기저기에 놓이는 묵직한 봉투들을 향해 초록색 눈동자를 움직였다가, 책장에 칸칸이 쌓여 대기 중인 원고를 훑어보았다. 원고마다 인생이, 그리고 소망이 하나씩 들어 있다. 원고들이 선반에서 하루하루를 보낼 때마다 작가들의 근심도 하루씩 더 늘어 간다. 아침만 되면 그들은 우편함에 답장이 있지는 않을까, 메일이나 전화를 받지는 않을까 기대한다. 문학이 자신의 재능을 너무 오랫동안 외면해 왔으니 가능한 한 빨리 만회해야 할 거라고 으름장을 놓는 상상을 하면서.

 

- 모든 출판사를 통틀어 한 해 동안 쏟아지는 거절 원고는 자그마치 50만 편에 이른다. 이 이야기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 예비 작가들이 꿈꾸는 환상은 대충 이런 식이다. 출판사의 문을 밀고 들어간다. 따뜻한 환대와 호기심 어린 관심을 받으며 널찍한 안락의자에 자리를 잡는다. 커피 한 잔 하시겠느냐는 말에 "네." 하고 답한다. 자신의 신변에 대해서는 조금만 언급하고 책 이야기로 넘어가 긴 대화를 나눈다. 최종적으로 고급 만년필을 빼 들어 생애 첫 출판 계약서에 사인한다. 이 계약서가 새로운 인생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리라는 일견 타당한 생각을 하면서, 그러니 출판사의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 안내 데스크에 탈락한 원고를 가져다 달라고 요청하는 일, 심지어 한 여자 인턴이 원고를 찾아와서 사무적인 미소를 날리며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는 한마디와 함께 원고를 돌려주는 일은, 그들의 멘털이 견딜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리라.

 

- "편집자님, 이런 멋진 원고가 편집자님과 출판사의 관심을 끌어내지 못하다니 참담합니다. 대체 나라 꼴이 어떻게 돼 가는 건지 한 나라의 문학계 풍토라는 게 한숨만 나오는 수준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 주는 행태가 아닌가 싶군요. 하기야 저도 국내 소설을 읽지 않은 지 오래입니다만..."

"정직하게 글 쓴 사람은 탈락시키고 아는 사람 글을 출판해 주니까 재미 좋으신가. 편집자쓰레기, 국민의 적 같으니!"

"반송 우편으로 제 원고를 받았습니다. 357쪽에 머리카락 한 올을 놓아뒀는데 그대로 있더군요. 제 글을 읽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겠죠. 출판사들이 투고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

발신자 미상 : "원고 검토부 보시오. 엿이나 먹어라!"


"삶을 끝내기로 했어요. 원고 출간만이 내 목숨 줄을 붙들어주고 있었거든요."

- 이런 생동감 넘치는 편지가 드문 것이기는 했다. 이 편지들은 '벌레들' 서류철 안에 별도로 둔 파일로 분류되었다. 제목은 '가끔 대꾸도 함!'이었다.

 

- 원고 검토부는 새로운 저자를 발굴해서 작품을 출간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 목표는 1년에 두세 번가량 달성된다. 이 두세 번은 익명 작가의 글을 읽느라 보낸 시간 수천 번 뜯어본 봉투, 수백 번 작성한 원고 검토서, 전국 방방곡곡으로, 때로는 세계 곳곳으로 보낸 동일한 양식의 편지 수천 통이 정당한 노력이었음을 증명한다.    

- 그렇다. 1년에 두세 번, 원고 검토부는 흥분으로 끓어오른다. 대개는 "뭔가 건진 것 같아."라고 간신히 중얼거리는 소리가 첫 신호다. 

 

- 베아트리스는 원고 검토부에서 이른바 제4의 검토자였다. 75세로 가장 연장자이며, 그녀의 나이와 현대 문학에 대한 식견은 비올렌에게 귀중한 성공 열쇠였다. 4년 전 베아트리스 역시 우편을 통해 원고 검토부까지 한 차례 도달한 적이 있었다. 다만 봉투에는 무거운 종이 묶음이 아니라 아주 우아하고 감동적인 짧은 편지가 들어 있었다. 자신이 일주일에 평균 네 권의 책을 읽고 있으며 그 책들의 검토서를 작성하는 일을 즐겨한다는 내용이었다. 혹시 출판사에 원고 검토자가 필요하다면, 그래서 오래전부터 일과 시간이 여유로웠던 자신이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큰 기쁨이 될 거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출판사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살고 있다고도 했다. 비올렌은 그녀에게 연락을 취해 점심때가 지나고 나서 집으로 방문하겠다고 전했다. "건물 호출 번호와 층수 좀 알려 주세요." 비올렌이 베아트리스에게 말했다. "호출할 번호는 따로 없어요. 그냥 벨을 누르시면 돼요."

 

- 비올렌이 명패 없이 달랑 하나뿐인 인터폰 버튼을 누르고 도착을 알리자 육중한 문이 열리며 저택의 첫 번째 방이 곧바로 나타났다. 바닥에는 페르시아산 카펫 여러 장과 루이 15세식 안락의자들이 있었고, 벽에는-모조품이 아니라면 - 카날레토의 작품이 분명해 보이는 그림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비올렌은 그림 이 가짜일 수 있다는 의심을 풀지 않았다.

 

- 길거리에서 고급스러운 실내로 이동하는 흐름이 너무나 급격해서 비올렌은 약간 당황했다. 대기실격인 방을 지나자 오래된 토메트 타일이 깔린 방이 나왔다. 그 방은 햇빛이 비치는 넓은 정원으로 이어져 있었고, 정원 끝에는 꽃으로 뒤덮인 정자와 벤치형 그네 의자가 보였다. 비올렌은 원고검토부에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이토록 비현실적인 장소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널찍한 목재 계단을 올라 거대한 응접실에 도착했다. 캐시미어 휘장이 둘러진 그곳에는 금도금한 청동이나 유리로 만든 세련된 장식품들로 꾸며진 여러 개의 서랍장과 조그만 외발 탁자들이 있었다. 짧은 백발의 한 부인이 까만 안경을 쓰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곁에 버뮤다팬츠에 티셔츠를 입은 젊은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그는 놀라우리만치 근육질이었고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고 있었다.  


- 비올렌은 커피를, 베아트리스는 유리잔에 담긴 오렌지주스를 마셨다. 베아트리스는 최근 읽은 책들과 이전에 읽은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미셸 우엘벡이 쓴 <투쟁 영역의 확장>이 출간된 1994년에 그 책을 읽었던 일을 생생히 기억했고, 책을 읽자마자 단박에 그 젊은이의 성공을 직감했다고 말했다. 마르크는 비올렌에게 여러 신간 소설에 대한 검토서 몇 장을 내밀었다. 베아트리스는 글을 종합하는 감각이 단연 뛰어났고 단점을 찾는 만큼 장점을 끌어낼 줄도 알았다. "저희 원고를 읽어 봐 주시는 데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 같네요. 저희와 함께 일하는 게 괜찮으시다면 오늘처럼 이런 식으로 뵙는 게 어떨까요? 보수도 드려야 하고요." 

 

- "당치 않아요." 베아트리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뇨. 그래야 해요." 비올렌이 고집했다.
"이 거리 전체가 다 내 거예요..." 베아트리스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네?" 
"몇 세기에 걸쳐 선조들의 유산을 지켜 낸 파리의 오랜 가문 몇몇이 아직 남아 있거든요. 거리 규모가 그리 크진 않지만요."
"그러니까, 이 거리에 있는 모든 건물이 선생님의 소유라는 말씀이세요?" 
"네. 모든 주민이 내 세입자예요. 덕분에 난 일을 할 필요가 없었고 그 시간에 수천 권의 책을 읽을 수 있었어요."

 

- 긴 침묵이 흘렀다. 
"그럼... 책은 어떻게 읽으세요?"
"마르크요. 마르크가 읽어 줘요. 그전에는 파트릭이 10년 남짓 읽어 줬고, 파트릭 전에는 파브리스가... 여담이지만 난 책을 낭독해 줄 사람으로 남자만 고용해요."

 

- 비올렌은 다가서서 눈을 감고 베아트리스의 따뜻하고 건조한 두 손이 볼, 이마, 광대뼈 위를 부드럽게 움직일 수 있도록 내맡겼다. "당신은 정말 아름답군요." 베아트리스가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겔랑의 임페리얼 오 드 코롱을 뿌렸고요." "맞아요." 비올렌은 베아트리스의 추측을 확인해 주며, 뜻밖의 비밀스러운 만남이 가득한 면에 있어서는 자신의 직업만 한 것도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 "피보 씨가 우리가 뭘 숨긴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스테판이 비올렌의 말을 받았다. "파스칼 사장에게 새로운 에밀 아자르는 원치 않는다고 경고하더라니까." 

 

- 소설은 말할 것도 없고 에세이를 쓸 만한 아이디어도 딱히 없었다. 그저 책을 읽고 싶었다. 그래서 원고 검토부에서 일해 보지 않겠냐는 제안에 뛸 듯이 기뻐했다. <문학적 도피>와 전 세계 37개 언어 번역판에 대한 저작권으로부터 끊임없이 발생하는 인세는 이제 막 쉰셋이 된 스테판에게 일정한 수입을 안겨 주었다.

 

- 그녀는 인테리어 전문가를 부르기로 했고, 라부르와 사지에 인테리어 사무소의 에두아르 라부르가 낙점되었다. 파리 시내의 인테리어 사무소 중 유일하게 기꺼이 출장을 와서 아홉 평짜리 사무실을 꾸며 주기로 한 곳이었다. 에두아르는 "그 앞을 지나다닌 게 한두 번이 아니지만 제게는 늘 신비로운 곳입니다. 유명 출판사의 문턱을 넘게 돼 기쁩니다."라고 답했었다. 비올렌은 에두아르의 반응에 매우 흡족해했다. 그리하여 약속이 정해졌다. 스테판은 에두아르가 도착하던 순간을 마치 일주일 전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는 그 순간을 일명 '계단 신(scene)'이라고 불렀다.

 

- 에두아르는 건물에 도착해 안내 데스크에 알림을 요청했다. 비올렌의 전화가 울렸다. 비올렌은 자신의 방에서 나와 부서원들에게 알렸다.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왔대요!" 원고 검토부 전원이 한 몸이 된 것마냥 일어나 계단 위에서 대기했다. 짧은 갈색 머리를 한 에두아르의 나이는 확실히 서른다섯보다는 적어 보였다. 계단을 오르는 속도가 차츰 느려지더니 층계참으로부터 계단이 몇 개 남지 않은 지점부터는 눈에 띄게 걸음이 느려졌다. 비올렌에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그의 눈길은 자신에게 고정된 초록색 시선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비올렌 르파주입니다." 비올렌이 손을 내밀자 그가 기계적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돌처럼 굳어져 탄식과 동시에 말을 내뱉었다. "당신이 이런 모습일 거라고 상상조차 못 했습니다." 비올렌이 웃었다. "그래요? 절 어떻게 상상하셨는데요?" 인테리어 디자이너는 적절한 대거리를 찾지 못했는지 체념한 듯 말했다. "이런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이 세 마디 말속에는 비올렌이 눈치채지 못한 극적인 뭔가가 담겨 있었다. 현장에서 둘의 만남을 목격한 스테판은 그 몇 초의 시간은 아주 희귀한 장면이었다고, 소설에서도 정확히 묘사된 바를 본 적이 없다고, 아마도 종이에 글로 적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스테판은 남자가 처음 본 여자와 그토록 광적으로 사랑에 빠지는 장면을 여태껏 본 적이 없었다.

 

- '뱀파이어는 신선한 피가 필요해.' 비올렌이 생각했다. 그건 샤를 사장의 표현이었다. 문학은 스스로를 재생시키기 위해서 주기적으로 신인들의 피가 필요하다. 젊은 남녀들이 그들의 첫 번째 저서가 나오자마자 돌연 스포트라이트 불빛 아래 나타난다. 그들은 뱀파이어에 물리고도 살아남는지 아니면 영원히 힘을 잃는다. 첫 소설을 쓴 작가 셋 중 둘은 영영 차기작을 들고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려해 보면 말이다. 편집자에게서 신작을 거절당하거나, 성공 이후에 성공이 있었다면 심리적 문제로 머리가 꽉 막히거나, '할 말을 다 했다'는 느낌을 받거나 등 이유는 다양하고도 알쏭달쏭하다. 카미유 데장크르의 문제는 뱀파이어가 그토록 세게 물었는데 희생자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조명 아래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이는 범상치 않은 일이었고 기자들의 궁금증과 관심을 유발할 만했으나 상황을 그 상태로 질질 끌 순 없었다.

 

- "에두아르?" 
"옷 입는 거 도와줄까?" 에두아르가 문을 열며 말했다. 비올렌은 옷 더미의 맨 아래에 있던 주황색 원피스를 끄집어내서 몸에 대 보았다.
"내가 이 주황색 원피스 입은 거 본 적 있어?"
"그럼, 수십 번은 봤지. 왜?"
"아니. 그냥."

 

- "안내 데스크죠? 비올렌이에요. 마갈리가 주술서같이 생긴 걸펑크족 여자한테 갖다 주러 내려가는 중이에요. 셋 다 다시 올려 보내 주세요. 네... 셋 다. 마갈리, 주술서, 펑크족. 고마워요."

 

- "그 비밀은 복수를 품고 있지만 여왕은 비껴가요. 어떤 요소들은 망각된 것 같군요. 혹시 기억 상실증에 걸린 사람을 아세요?" 
비올렌은 다시 한번 카린을 쳐다보았다.
"출간합시다." 비올렌이 말했다. "예술 서적으로요. 깃펜으로 쓴 주술서의 사본을 뜰 거예요. 아주 아름답겠죠? 계속하세요." 
"농담이시죠? 정말 제 원고를 책으로 내주신다고요?" 카린의 눈이 차오르는 눈물로 빛났다.
"계속하세요. 집중력 흩트리지 마시고요."
"카드를 보지 말고 가져가서 패가 안 보이게 덮으세요." 카린이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비올렌은 카드 열에서 열세 장의 카드를 한 장씩 빼서 덮었다. 카린이 그 카드들을 뒤집으면서 먼저 있던 카드 열 위에 올려놓자 두 번째 열이 만들어졌다. 비올렌은 여왕 위에 왕의 카드가 놓이는 것을 보았다. 

 

- "우연히 놓은 건데..." 비올렌이 작게 중얼거렸다.
"우연이란 건 없어요. 패는 확실하답니다. 셋, 넷, 다섯, 연금술사, 여섯, 일곱, 사서, 아홉... 여왕, 골치 아픈 책이 있나요?" 비올렌은 눈을 감아 보았지만 대답할 거리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 "남자들의 비밀 집회와 죽음. 어떤 사람들이 죽게 될 것 같아요. 정해진 운명처럼요."
"고마워요, 카린." 비올렌이 심호흡과 함께 말을 뱉었다. "계약서를 준비할게요."

 

- 비올렌은 이 경찰 앞에서 보모어를 부어 단숨에 마셔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크게 심호흡을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녀는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오는 물 두 잔을 가져왔다. 경찰은 자기 몫의 컵에 담긴 물을 한 번에 다 마셨다. 비올렌은 컵에 손도 대지 않은 채 대화 상대를 응시했다. 그녀는 작가를 처음 만날 때마다 사용하는 분석표를 탕슈 경위에게 적용해 보았다.

 

첫인상 : 겸손하고 친절한가, 건방지고 상대하기 거북한가? 몇 달 내에 가까워질 것인가, 몇 년 걸릴 것인가? 똑똑한가? 어디 출신인가? 어떤 계층에 속하는가? 특정 부분에서 거짓말을 하는가? 내성적인가, 아니면 내성적인 척하는가? 믿을 수 있는가? 후속작을 쓸 것인가? 

 

- 결론적으로 탕슈 경위의 첫인상은 다음과 같았다. 지나치게 친절한 척한다. 속은 내성적이다. 사회의 상류층을 불편하게 여긴다.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엄청나게 고생했다. 굉장히 똑똑하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한다. 내면은 행복하지 않다. 

- 두 사람은 기포가 올라오는 값비싼 액체를 맛보았다. "정말 맛있네." 비올렌이 말했다.
"그럼, 샹파뉴 살롱 2007인데." 피에르가 당연하다는 듯 입을 삐죽이며 대꾸했다. "한 병에 자그마치 500유로나 한다고."
"격 떨어지게 너무 그러지 마. 우리 출판사에서 나가는 저작권료 정도만 마실게." 비올렌이 받아쳤다.
피에르는 조용히 웃기만 하며 한동안 시간을 흘려보냈다. 

- "아, 그 입 좀 다물어. 또 이상한 점은 내 옷의 4분의 1 가량에 대해서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거야. 액세서리도 마찬가지고"
피에르가 샴페인을 한 모금 마셨다.
"예를 들면?"
"주황색 원피스가 있는데 엄청 예뻐. 문제는 난 그걸 산 기억이 없다는 거야. 근데 에두아르는 내가 그 원피스를 입은 모습을 여러 번 봤대." 
피에르가 노트북을 열었다. "계속해 봐." 그가 부추겼다.

 

- "그 주황색 원피스, 혹시 보테가 베네타 거야?" 
"응. 어떻게 알아?" 비올렌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옷들에 대해 아무런 기억이 없다'라." 피에르가 담배 연기를 뿜으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액세서리에 대해서도? 담배도 기억이 안 나고. 담배를 하루에 한 갑 이상 피우던 사람이... 이거 좀 매력적인걸."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가 매력적이라는 거야?" 
"뇌 말이야, 비올렌, 그 미로가 매력적이라고..." 피에르는 속삭이며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를 우아하게 이리저리 굴리다가 재떨이에 올려놓았다. 담배 연기가 천장을 향해 수직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가 책상 서랍 하나를 열어서 뭔가를 꺼냈다. 그러고는 비올렌에게 돌아와 침상 옆에 있는 안락의자에 앉았다. "이건?" 그가 물으며 손바닥에 반지를 한 움큼 올려놓았다. 대부분 준보석이나 보석 장식이 있는 금반지와 은반지 들이었다.

 

- 비올렌은 그의 손바닥 오목한 곳에서 빛나는 반지들을 바라보았다. "그게 뭔데?" 그녀가 조금 두려운 듯 물었다.
"어떤 건지 몰라?"
"몰라. 그 보석들은 다 어디서 난 건데?" 
피에르는 다시 한번 미소를 지었다. 그는 "매력적이야."라고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 한가운데에 선 채로 샴페인 잔을 단숨에 비웠다. 

- "원고 검토부에도, 파리에도 더는 머무를 수 없게 됐어요. 루앙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어느 날 아침 비올렌이 샤를에게 선언했다. 
"어림없는 소리." 조금의 동요도 없이 단호한 샤를의 대답이었다. "후원자를 잃었나?" 그가 콧수염을 쓸며 물었다.
"그런 셈이죠." 비올렌이 에둘러 말했다. "근데 다른 것보다 이 도시에서 사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요. 여기서 살 방법이 없어요, 사장님, 일할 데를 찾지 않는 이상..." 
"여기서 얻었잖아." 그가 그녀의 말을 자르며 대꾸했다.
"이걸론 먹고살 수 없어요. 잘 아시잖아요. 집세 내는 건 더더욱 못해요."
"내 집에 와서 살아." 샤를이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러고 나서 다시 편지 쓰는 일에 몰두했다.
"네?"
"75평." 그가 고개도 들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복층 구조에 센 강과 학사원이 보여, 마음에 들려나? 혼자 살기엔 너무 넓어. 4분의 1 정도 되는 공간을 너한테 줄게. 오후에 시간 내서 미용실 좀 가. 어깨 정도 오는 단발머리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으니." 
 
- 비올렌은 말문이 막혀서 그저 샤를을 쳐다보기만 했다. 반론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한 말보다 그가 그런 말을 내뱉으면서 보인 평온함이 더 경악스러웠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 대화를 준비해 온 것 같았다. 그는 편지를 마무리하며 굽이치는 서명을 하기 위해 종이 위에서 오른손을 몇 차례 이리저리 우아하게 움직였다. 그러고는 비올렌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네가 뭔가를 해 줄 때가 왔어, 비올렌." 

 

- 샤를은 작가를 선택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딸 하나를 고른 셈이었다. 그는 이런 식으로 경쟁 출판사의 작가들도 빼내 왔다. 이 방식은 대체로 잘 먹혔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가끔 있었다. 작가가 기존에 거래하던 출판사와 그곳의 담당 여성 편집자를 떠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릴 때는 샤를의 수표첩으로도, 도서 소개 카탈로그의 원하는 위치에 책을 노출해 주고 홍보를 확실히 해 주겠다는 약속으로도 충분하지 않았다. 오찬을 마무리하면서 다들 사이좋게 악수를 나누며 조만간 또 보자고 약속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영입 제안을 거절한 작가들 몇몇은 몇 년 후에 '알겠다'는 답을 보내오기도 했다. 이렇듯 계획은 유동적이고 모든 일은 언젠간 가능해진다. 샤를은 운명의 바람이 몰아쳐 들어오도록 모든 문을 약간씩 열어 두는 미묘한 예술에 능했다.   

 

- 비올렌은 반나절씩 아르바이트를 하며 머무르던 루앙의 서점에서 출판계의 심장부로 파고들었다. 게다가 샤를의 아파트라니. 이건 문학의 흐름을 좌우하는 요지에 사는 셈이었다. 그리하자고 딱히 정한 적도 없지만 둘은 당황스러우리만치 자연스럽게 아파트에서의 생활 방식을 정착시켜 갔다. 아파트 아래층의 절반은 비올렌의 공간이었고, 나머지는 샤를의 것이었다. 더불어 위층과 테라스로 통하는 전용 계단도 샤를이 차지했다. 

- 둘 중 누구도 상대방의 수수께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평온한 현재를 위해 상대방의 비밀의 정원이라든가 과거의 유령을 존중하는 생활 방식은 그들의 독특한 연대를 더욱 끈끈하게 해 주었다. 비올렌은 한 번도 노르망디를 생각하지 않았고 그곳에 가는 일도 없었으며 샤를은 이에 대해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았다. 또 샤를도 딸이나 부인에 관해서는 그와 비슷한 언급조차 하지 않았고, 아주 어쩌다가 한 번씩 '에르베' 이야기를 할 뿐이었다.

- 그렇게 은둔하면서, 또 문학계를 드나들면서 8년의 시간이 흘렀다. "네가 누구와 자든 상관없지만 출판사 작가들은 여기 데려오지 마. 여긴 우리가 사는 곳이니까." 샤를이 경고해 둔 말이었다. 비올렌은 정부(情夫)가 여럿이었고 개중엔 비교적 오래가는 사이도 있긴 했으나 샤를의 말은 반드시 지켰다. 몇몇은 비올렌을 유혹하기 위해 진땀을 뺐으며, 그 8년 동안 그녀를 거쳐 간 어떤 작가도 그녀를 깊이 안다고 거들먹거릴 수 없었다.  

 

- 그는 문학계를 그가 가진 거대한 수족관에 비유하곤 했다. 위층 서재에는 길이 3미터, 높이 1.5미터짜리 수족관이 있었는데, 60마리는 족히 되는 물고기들이 무중력 공간에 있는 것마냥 물속을 떠다녔다. 비올렌과 샤를은 가끔 저녁 식사 후에 느릿느릿 움직이는 생물체들이 만들어 내는 고요한 정경 앞에서 녹색 빛 샤르트뢰즈를 마셨다. "저것들을 잘 봐. 다 같은 높이에서 헤엄치는 게 아니야. 한 높이에서 수평으로만 헤엄치는 종은 20센티미터 위나 아래에서 헤엄치는 종과는 결코 마주칠 수 없어. 얘네들은 꼭 우리 작가들 같아." 샤를이 설명했다.

 

- "작가들은 판매량과 명성의 높이에 따라 헤엄치지." 그는 어떤 물고기들에게 출판사 소속 작가들의 이름을 붙여 주기도 했다. 이들보다 더 작고 몸이 파란색으로 반짝이며 배가 빨간 형광 물고기들은 서로 텔레파시를 주고받으며 고안해 낸 듯한 짜임새 있는 안무에 따라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왼쪽과 오른쪽으로, 위와 아래로 구름처럼 선회했다. "이놈들은 원고 검토부의 작가 지망생들이라고 할 수 있지." 샤를이 씩 웃으며 말했다. "다 비슷하게 생겼지만 분명히 튀는 놈이 하나 있어. 근데 그놈을 어떻게 찾아낼까? 군중 속에서 그 한 명을 알아보는 게 출판 사업 기술의 전부야. 안 그러니, 비올렌?" 비올렌은 그의 말에 동의했다. 어떤 물고기들은 해초와 수풀 사이에 때로는 몇 시간, 심지어는 며칠씩 숨기도 했다. "얘네들은 집필 중인 거야. 세상으로부터 숨어서 일을 하니까 당최 볼 수가 없어." "우리 작가들처럼요." 비올렌이 또박또박 응수했다. 샤를은 자신이 만든 게임에 들어와 한마디 던지는 비올렌을 보니 왠지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 샤를의 물고기들처럼 고요하지만 탐욕스럽기도 한 다른 편집자들은 비올렌의 편집자 임명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였다. 환영파들은 세대교체라 평가했고, 극도의 신중파들은 사장이 헛발질을 한 게 아닌가 해서 기다렸다. 그러나 번복은 없었다. 비올렌은 좁고 창문 하나 없는 사무실이나마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게 된 것이 기뻤지만 한편으론 검토자 자리를 떠나기가 못내 아쉬웠다. 실은, 자유롭게 정한 근무 시간 동안 봉투에서 막 꺼낸 원고의 처음 몇 페이지를 넘기며 저자의 문체, 재능, 마력을 가늠하던 독서 시간이 그리웠다. 처음 출간한 소설 두 편은 대중의 반응을 크게 이끌어 내진 못했지만 전문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편집자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나자 비올렌은 출판사로 보내오는 원고들을 직접 받았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은 네모에 그쳤고 드문드문 초승달이 나타날 뿐이었다. 원고에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해는 초여름 하늘 높은 곳에 걸린 채 머물러 있었다. 

 

- 짧지만 화면에 작가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뜨는 그 몇 초 동안 히스테리에 가까운 기쁨이 가득 차올랐다. 그는 전화를 끊은 즉시 그 번호를 지우고 새로운 번호를 입력했다. 언젠가 '또 다른 모파상'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서였다. 같이 생활한 지 여러 해가 지나자 샤를은 이 기행을 비올렌에게도 넌지시 알려 주었고 비올렌은 열광적인 관심을 보였다. 1년에 몇 번씩 둘은 이것을 '친구들 목록'이라고 부르며 놀았다. 저녁 식사 중에, 혹은 택시에 둘만 타고 있을 때 샤를이 갑자기 비올렌을 향해 "친구 하나 부를까?" 하고 물으면 비올렌은 "좋아요." 하고 대답했다. "골라 봐." 샤를이 근엄하게 명했다. "랭보에게 걸어요." 그녀가 제안했다. 샤를은 연락처 목록을 쭉 넘기며 시인의 이름을 찾아 06으로 시작하는 번호를 찾아 눌렀다. 그 순간 그의 눈빛은 부모가 금지한 장난을 치려는, 또 그 사실을 알고서 한껏 즐기는 아이처럼 반짝였다. 비올렌은 불행하게도 무작위로 누른 번호의 주인공이자 성가신 일을 겪을 사람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샤를의 곁에 바짝 붙었다. 통화는 언제나 짧거나, 아니면 샤를이 긴 음성 메시지를 남기는 것으로 끝이 났다. 물론 두 번 다시 그 번호로 전화를 거는 일은 없었다. 

 

- 여러 번의 신호음 끝에 이윽고 "여보세요?" 소리가 들렸다. 
"마르셀?" 비올렌이 물었다. 
"네. 접니다." 감미로운 목소리가 답했다.

 

- 비올렌은 순식간에 전화를 끊어 버렸다. 며칠 후 샤를의 변호사가 그녀를 불러 담당 공증인에게 가 보라고 했다. 운명의 장난처럼, 뤽상부르 공원의 테니스장이 창밖으로 보이는 파리 6구의 한 사무실에서 비올렌은 자신이 샤를의 상속인임을 알게 되었다. 그의 아파트와 재산은 2년 전 그가 직접 손으로 쓴 마지막 조항에 따라 비올렌에게 귀속되었다. 샤를의 전 부인이 소송을 걸었지만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자 샤를의 형제 하나가 나서서 합의를 해 주었다. 샤를과 친족 관계가 아니었던 비올렌은 꽤 많은 상속세를 내야 했으나 이제 막 서른이 된 그녀가 남은 인생을 살아가기에 충분한 안전망을 얻은 셈이었다. 8년 전 여행 가방을 내려놓았던 그 아파트가 이제는 그녀의 소유가 되었다. 

 

- 그로부터 몇 달 후 원고 검토부의 서가를 바꾸기로 한 비올렌을 만난 에두아르가 그녀와 악수를 하며 넋이 나간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이런 모습일 거라고 상상조차 못 했습니다." 

- 범죄 현장에서 뇌의 경계를 최대치로 올리다 보면 탕슈 경위는 자기도 모르게 의미 없는 세부사항들에 집중하면서 현실 사건으로부터 저만치 멀어지는 현상을 겪었다. 대개는 지극히 일상적인 일에 지배당하는데 이번에는 주유와 와이퍼였다.


- 소피는 그녀의 이름이 발레리였는지, 아니면 비르지니, 그것도 아니면 나탈리였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동료들이 혈흔을 채취하는 동안 범죄 현장을 영상으로 남기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녀가 만든 영상은 언제나 매우 아름다웠다. 느린 움직임으로 현장을 정확하고도 끔찍하게 담아냈다. 사람들이 말하기로 그녀는 영상 사본을 따로 담아 두고,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나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주제곡으로 쓰인 안젤로 바달라멘티의 음악처럼 최면에 빠질 듯한 배경음을 삽입한단다. 

 

-  "남자일까, 여자일까? 작가이면서 남자 살인범, 혹은 여자 살인범일 수도 있어. 뭔진 모르지만 이 모든 일은 어떤 이상한 장소에서부터 시작된 거야. 바로 아직 존재하지 않는 책들을 읽으며 보수를 받는 사람들이 있는 아홉 평짜리 방이지.
"그게 대체 어딘데?"
소피는 푸른 연기를 뿜어냈다.
"원고 검토부."
 
- 작가와의 오찬은 출판업계의 필수적인 관례다. 저자 한 명당 1년에 네 번에서 다섯 번 정도 식사 초대를 한다. 한 출판사에는 수많은 작가가 소속되어 있기 마련이므로 이와 같은 점심 식사 자리도 그만큼 많다. 편집자들은 인간을 싫어하는 거대한 고양이에게 호감과 가르랑거리는 소리를 얻어 내려는 심산으로 작가들에게 밥을 먹인다. 오찬의 대외적인 목적은 작가와의 친분 유지다. 그렇지만 실상은 계약금이 집행된 원고 집필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원고에 진전이 있는지를 알아보는 데 더 큰 목적이 있다. 너무 많이 쓰는 사람과 시원찮게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또 젖소마냥 성실하게 잉크를 짜내며 1년에 두 차례씩 책을 내고 싶어 하는 작가와 주말마다 신나게 놀고 생각나면 딸랑 한 줄씩 써내는 작가 사이에서, 계약서와 선금을 적절히 계산해 들이밀어야 한다. 물론 식사도 같이 하면서 말이다. 어떤 작가들은 쓴 글을 정기적으로 담당 편집자에게 보내 피드백을 들은 후에야 다음 이야기를 이어 간다. 또 어떤 작가들은 수개월씩 잠수를 타서 담당 편집자의 애를 태운다. 파스칼은 이런 작가들을 특히 경계하는 편이라 3개월에 한 번 그들이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하는지 점검하는 엑셀 표까지 만들어 관리했다. 수백만 유로의 매출을 일으키고 상당한 수의 피고용인들을 필요로 하는 문학 편집부의 예산은 오로지 작가들의 영감과 상상력에, 다시 말해 아주 불안정한 지표에 달려 있다. 파스칼은 이 지표에 대해 한 문장으로 요약해 모두에게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이 머저리들이 어느 날 아이디어가 떨어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대꾸하는 사람은 없었다.  

- 이런 말이 나오기 수년 전 출판사의 주요 작가 중 한 명이 생존 신호를 보내오지 않는 일이 있었다. 그는 꽤 큰 액수의 선금 절반을 가지고 인도로 떠났다. 그를 추적하기 위해 사립 탐정까지 고용해 확인한 바로는 엄밀히 말해 책을 하나도 쓰지 않았으며 인도에 간 것 같지도 않았다. 헛수고로 끝난 여행으로부터 작가는 <사라진 남자>라는 짧은 소설 하나를 창작해 냈다. 선금을 가지고 사라진 작가를 찾는 사립 탐정의 이야기였다. 프랑스에 돌아와서 석 달 만에 쓴 그 소설은 평단의 극찬을 받으며 베스트셀러 1위에 등극했다. 심지어 영화화되어 주연을 맡은 뱅상 랭동이 세자르 남우주연상까지 거머쥐었다. 냉정하게 결과만 따지자면 출판사를 속이고 선금과 함께 지구 반대편으로 튄 작가가 옳았다. 그러지 않았다면 오늘까지도 서점가 최고의 성공작으로 남아있는 <사라진 남자>는 절대 쓰이지 않았을 터다. 어쩌면 기획부터 인쇄에 이르기까지 소설은 작가도 어찌할 수 없는 저마다의 고유한 생애가 있는지 모른다. 

- "진지하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이웃 걱정 좀 그만하세요. 작가들은 이기적인 존재예요. 자기와 자기 책, 자기 작품 생각만 하죠. 이런 작가들은 고약하고 과대망상에 빠져 사는 데다 통제 불능이에요. 하지만 적어도 발전은 한다고요. 그게 그들의 역량이에요. 가야 할 길을 가는 거죠. 애정이 필요해요? 만나는 여자를 바꾸고 고양이나 개를 기르세요. 아니면 새를 키우든가."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작가가 차갑게 대꾸했다.
"왜요? 전 제 일을 하는 거뿐인데요."
"곰보버섯을 곁들인 소고기 스테이크와 바질 버터에 구운 두루미냉이입니다." 종업원이 알려 주었다.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돕는 게 잘못이란 말인가?" 프랑수아가 비올렌에게 와인을 따라 주며 말했다.
"잘못이에요."
"비올렌..." 그는 한숨을 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 "네. 잘못이에요." 비올렌이 곰보버섯을 곁들인 스테이크를 먹으며 되풀이했다. "작가가 될 수 있다고 믿게 만들잖아요. 작가님은 그 사람들을 환상 속에 붙들어 두고 있어요. 재능을 타고났다면 작가가 되는 데 작가님의 도움은 필요 없어요. 숨어 있는 천재는 없고, 존재하지도 않아요. 작가가 될 수 없다는 불행, 결코 회복할 수 없을 불행을 당신이 심어 주고 있는 거예요.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내버려 뒀으니까. 당신은 환멸에 찬 사람들을 만들어 낸다고요, 프랑수아 작가님 작가님은 해로운 일을 벌이는 거예요. 그 사람들을 그냥 두세요. 작가님은 본인 책에나 신경 쓰시고요. 그들이 산전수전을 겪으며 걸작을 써내면 작가님 말고 원고 검토부에 보내라고 하세요. 그건 제가 잘하는 일이지 작가님이 할 일은 아니니까." 
"제기랄!" 그가 느닷없이 포크와 나이프를 접시에 내려놓으며 소리를 치는 바람에 옆 테이블의 여자 둘이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글쓰기 교실 출신 작가들도 있어."
"거의 없죠..." 비올렌이 버섯을 씹으며 대꾸했다. "그리고 작가님 강의를 듣고 작가가 된 사람도 없고요. 어쨌든."
"너무 냉정한데, 비올렌. 당신은 언제나 냉정했어."
"네. 하지만 작가님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제가 옳다는 걸 알고 계시죠. 머리 좋으시잖아요."
프랑수아 메일페르는 대답은 하지 않고 곰보버섯 소고기 스테이크에만 집중했다.
"맛있죠?" 비올렌이 경쾌하게 물었다.

 

- "나에겐 지켜야 할 시민들이 있어요. 이 사실이 밝혀지면 시 전체가 공포에 휩싸일 겁니다. 부르크빌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에요. 우리는 피가 아니라 사과주와 리바로 치즈로 먹고삽니다. 부르크빌 시민들은 선량하고 근면하고 정직한 사람들입니다..." 

 

- 알랭은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문으로 다가갔다. 거기에는 30 센티미터 높이의 조각 꽃 세 개가 있었다. 꽃이 놓인 받침대도 설탕으로 만든 것이었다. 꽃잎이 빙 둘러진 섬세한 꽃부리는 마치 아침에 얼어붙은 장미를 따다 놓은 듯 수천 개의 수정처럼 반짝였다. 각각의 조각 모두가 상상 속에서나 그릴 수 있을 법한 완벽한 형태였다. 동화 속에서 막 꺼낸 것 같은 꽃이라 할까. 

- 때로 직감과 사실은 정반대인 것처럼 보인다. 미제 사건은 직감과 사실이 일치될 수 없었기에 해결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수사를 하며 고려되었던 수십, 수백 개의 가설 중에 반드시 옳은 것이 있다. 20년, 혹은 30년, 50년 후에 해결된 미제 사건 중 이전에 한 번도 고려되지 않은 범행 경위는 단 한 건도 없었다. 

 

- 노인은 계속해서 알랭을 쳐다보기만 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를 쳐다보며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알랭은 이런 시골 사람들의 습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가족의 비밀이나 의심스러운 죽음에 관해 절대로 입을 열지 않으며 사소한 정보조차 밝히기를 거부했다. 설령 그들에게 중세 시대의 온갖 고문을 가할지라도 그들은 알고 있는 사실을 발설하지 않을 것이었다. 
"제과사 르파주의 설탕 꽃들 말입니다. 그게 실마리인 것 같습니다. 이름이 르파주 맞죠?"

 

- "난 괴물이야..."
"아니야. 당신은 그저 복합적인 인격을 지녔을 뿐이야." 스탱이 반박하며 전자 담배를 피웠다.
상담실은 희미한 빛에 잠겨 있었고 평소처럼 커튼이 쳐져 있었다. 그런데 비올렌에게는 보조 조명들의 불빛이 더 어두워진 것처럼 보였다. 스탱은 새로 장만한 전자 담배의 두터운 연기 뒤에 가려 실루엣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난 에두아르를 사랑해. 오직 그 사람만을 사랑한다고. 그런 내가 그이를 배신했어. 왜 그랬을까?"
전자 담배 용액이 지글지글 끓는 소리만 대답처럼 들려왔다. "넌 왜 아무 말도 안 해. 짜증 나, 피에르, 치사한 놈..."

- 스탱은 비올렌에게 그녀가 예전에 털어놓았던 연인 관계를 적어 둔 목록을 알려 준 참이었다. 단, 이름을 알려 주는 건 거부했다. "이름은 당신의 무의식 속에서 떠오를 거야. 아닐 수도 있고."

- "반항이라..." 스탱은 흥미로운 눈으로 비올렌을 좇으며 속마음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럴지도." 비올렌이 말했다. 그녀는 항아리, 단지, 도기 접시 따위가 잔뜩 진열된 선반으로 다가갔다. "왜 이런 도기를 수집하는 거야? 시골 근처에도 안 가 봤으면서, 평생 소란 걸 본 적은 있나 몰라."
피에르가 웃었다.
"수집이란 세 번째 것을 구하려는 순간 갖고 있던 두 개에서 시작하는 거지." 그가 말했다.
"내가 애인을 수집했던 것처럼?" 
대답 대신 다시 연기와 함께 전자 담배가 끓는 소리만이 상담실을 채웠다.

 

- "침묵도 대답일 수 있지."  

 

- "그것도 대답이 될 순 있지..." 스탱이 부드럽게 말했다. 비올렌은 벽난로로 다가가 거울을 보았다.

 

- 문인들의 작은 세계가 드루앙으로 운집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건물 입구에서부터 꼼꼼하게 신원을 확인받고 통과해 1층에 모였다. 인도에서는 이탈리아의 텔레비전 방송국 촬영팀이 오가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져 댔다. 소설 취향이며 수상작 구입 의사를 묻는 것일 터였다. 취재증을 꺼내는 기자들의 행렬이 꾸준히 이어졌다. 얼굴이 신분증이나 다름없는 유명 편집자들도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에게는 출입 허가를 뜻하는 '공쿠르상'이라고 찍힌 직물 팔찌가 채워졌다. 따로 마련된 테라스에는 소규모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그 외 다른 이들은 서로 악수를 하거나 포옹을 했다. 권력자들로 이루어진 비밀스러운 미시 세계가 서스펜스 넘치는 기념식을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 혐의를 벗은 용의자들이 그렇게까지 악감정을 품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상을 벗어난 어떤 사건에 휘말렸고, 평생 갈 이야깃거리 하나가 생겼다는 정도였다.

 

- 비올렌의 사무실은 여자 비서와 커다란 소파가 있는 넓은 전실 너머에 있었다. 거기에는 세르주 갱스부르의 상징인 청바지 대신 검은 정장을 입은 것만 빼면 그 가수를 묘하게 닮은 한 남자가 반쯤 누워 안락함을 즐기고 있었다. 소피가 그 앞에 멈추어서자 남자가 눈을 들어 그녀를 보았다. 

 

- "소피 탕슈입니다." 
"아, 당신이... 이번에는 반지 잃어버리지 마세요." 그가 덧붙였다. "비올렌이 말해 줬어요. 전 비올렌의 정신 분석 상담사이자 친구입니다. 비올렌은 저에게 거의 모든 것을 털어놓죠. 그러니까 제 말은, 다는 아니고." 
스탱은 상냥함과 불편함이 섞인 이상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공기 중에 떠도는 이 긴장감이 느껴지세요? 지금 결과를 기다리는 중인데, 이 사람들은 수상에 실패할까 두려워하면서도 상을 탈 경우를 더 겁내고 있어요. 모든 게 터져 버리기 직전에 나는 가스냄새 같달까?"
소피는 그에게서 나뭇가지에 앉아 평온하고 심술궂은 미소를 짓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체셔 고양이를 떠올렸다.  

  

 

책은 스스로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모든 소설은 흑마술이 걸린 계약서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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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이번에도 입술을 열고 나오는 말은 없었다. 그런데도 모디아노는 비올렌 쪽으로 천천히 몸을 돌리고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유심히 살폈다. 그는 미소를 띨 듯 말 듯한 얼굴로 검지를 세워 입술에 댔다. 

 

- "플라비에 교수님 좀 불러와요. 괜찮아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같은 목소리가 이어서 말했다. 비올렌은 그렇다고 혼자가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마르셀 프루스트, 미셸 우엘벡, 조르주 페렉, 버지니아 울프, 파트릭 모디아노가 그녀와 함께였기 때문이다. 

 

- 한편 교정 일을 전업으로 했던 뮈리엘은 철자법 오류나 오탈자를 사냥하는 일을 9월의 버섯 따기만큼이나 즐겨했다. 뮈리엘은 오르가슴과 다름없는 쾌락을 느끼며 오류들을 추격했고, 과거분사의 불일치나 'ils avait' 같은 것을 기습공격할 때면 행복감으로 온몸이 떨렸다. 뮈리엘은 대형 제약 회사와 대기업 자동차 회사에서 근무한 적도 있었다. 그때 그녀는 홍보 책자, 보고서 등 소통의 일환으로서 오가는 모든 것들을 교정했다. 출판사에 이름을 알린 건 두 권의 신간 도서에서 잡아낸 오자에 대한 장문의 편지를 보내면서였다. 출판사의 소유자로서 4대째 이어진 거대한 배를 이끌던 샤를 사장은 즉시 뮈리엘을 불러들였다.

 

- 에두아르는 오후 내내 원고 검토부의 공간과 서가를 재정비하기 위해 상상한 것을 스케치로 옮겼다. 흡사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재건하는 것과 같은 열정이었다. 그런데 기실 그는 어떻게 해야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지 몰라 시간을 벌고 있었다. 그 사이 -스테판이 똑똑히 기억하길- 비올렌이 와서 문에 팔꿈치를 기댄 채 서 있었고, 솔랑주라는 직원이 인테리어 디자이너에게 말을 걸었다. "아홉 평 공간에 책장을 짜러 출장 나오는 일이 자주 있으신가요?" 에두아르는 지금 한번 해 볼 참이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하고 싶다는 마음만 먹는 데 그쳤을 것이다. 실은 선택지가 없었다, 하고 속으로 답했다. 그는 비올렌을 향해 시선을 들어 최대한 멋진 미소를 지어 보려 했다. "편집자님께서 비올렌 르파주 씨처럼 예쁠 때는 그렇죠." 원고 검토부 사무실에 정적이 흘렀다. 그를 응시하는 비올렌의 얼굴에 정의할 수 없는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에두아르는 그리 대답하길 잘했다는 것을 알았다. 
 

- 그들은 공포와 스릴러 문학의 대부를 신비로운 그의 자택에서 만나고 왔다. 붉은색과 흰색으로 된 그 집은 검은 철책이 둘러져 있었으며 철책의 출입구에는 섬세하게 제작된 철제 박쥐상들이 솟아 있었다. 3주 전 비올렌은 미국 지사로부터 스티븐 킹이 상상력에 대한 글 하나를 막 완성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자유 형식에 분량이 150쪽가량 되는 일종의 수필로, 창작자의 상상계에서 일어나는 뇌의 메커니즘과 이것이 창작물을 읽는 독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 글은 허구와 실재 사이의 모호한 경계에서 반짝반짝 빛났다. 정보통에 의하면 그 새 글을 읽은 사람은 거의 없었고 전 세계 번역권도 아직 협상 전이었다. 비올렌은 서둘러 계산기를 두드렸다. '나에겐 이 원고가 반드시 필요해. 아니, 출판사를 위해 반드시 필요해.' 비올렌은 휴대전화를 꺼내 'K'가 나올 때까지 연락처 목록을 넘겼다. 비올렌은 스티븐 킹의 휴대전화 번호를 아는 편집자는 프랑스에서 자신이 유일할 거라고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 아직 기밀 상태에 있는 그 원고를 위해 비올렌은 출판 에이전트들과 편집자들, 그리고 취임 선서를 거친 출판계 실력자들이 취하는 전통적 경로를 무시하기로 했다. 이는 분명히 출판사의 해외 저작권과 번역권 구입을 담당하는 편집자 파브리스 갈랑의 기분을 상하게 할 일이었다. 비올렌이 직접 스티븐 킹에게 연락을 취했다는 사실을 알면 파브리스는 당장 파스칼 사장에게 달려가 ... 

 

- 듀퐁 둘, 까르띠에 하나. 전부 스테인리스나 금으로 된 것들이었다. 이 물건들을 보니 '데자뷔'처럼 어렴풋하게 어떤 인상이 떠올랐지만 혀끝에서만 맴돌고 기억나지 않는 이름처럼 사라져 버렸다. 라이터 하나를 열어서 부싯돌을 돌렸다. 스테인리스 재질로 된 듀퐁 라이터 뚜껑의 날카로운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푸른색과 노란색의 작은 불꽃. 그녀는 라이터의 뚜껑을 닫았다. 다시 쨍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에 들어 본 적 있는 소리가 분명한데 그 이상은 기억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담뱃갑을 휙 집어 들었다. 벤슨 앤 헤지스 골드 100's. 꿀 향이 나는 하얀 궐련의 냄새를 들이마셨다. 그중 한 개비를 뽑아 입술로 필터를 물고 금장 던힐 라이터를 가볍게 잡았다. 치이익 소리와 함께 담배 끝이 빛났다. 연기를 한 모금 내뿜자 마치 물속에 부은 푸른 우유 같은 구름이 방 안을 채웠다. 순간 비올렌은 병실 창문 앞에서 담배를 피우던 미셸 우엘벡이 떠올라 혹시 안락의자에 프루스트가 앉아 있진 않은지, 페렉이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진 않은지, 울프가 혼잣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디아노가 정체불명의 금발 아가씨의 귓가에 무슨 말을 속삭이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목구멍으로부터 콧속을 지나는 담배 냄새는 불쾌하면서도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두 번째 모금을 빨고 연기를 삼켰다. 숨이 막힌 비올렌이 허리를 접으며 심하게 기침을 하자 비서인 마갈리가 괜찮냐고 물으며 문을 두드렸다. 

 

- 비올렌은 종이에 '담배, 옷, 액세서리'라고 끼적여 보았다. 욕실에서 신경 발작이 있고 나서였다. 그녀는 옷장을 열어 옷을 찾으려고 했다. 회색 치마에 검은색과 빨간색이 섞인 상의를 생각 중이었다. 그러다 주황색 실크 원피스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무늬가 들어간 푸른색 원피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옷이 걸린 옷걸이를 하나씩 넘기며 이 옷들이 다 어디서 난 건지 떠올려 보았다. 벨트가 달린 연보라색 원피스는 에두아르와 로마에 갔을 때 샀고, 미색 바지는 런던에서, 검은 깃이 달린 회색 코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어깨끈이 달린 짧은 베이지색 상의는 파리 20구 물물 교환 상점에서 샀다. 그녀의 옷장은 여행, 혹은 출장차 전 세계를 돌아다녔던 그녀의 살아 있는 기억과도 같았다.  

 

- 주황색 실크 원피스와 무늬가 있는 푸른 원피스가 소파 위에 놓여졌다. 그 위로 스무 벌은 족히 되어 보이는 옷들이 옷걸이에 걸린 채 소복하게 쌓였다. 비올렌은 옷 더미를 응시했다. 마치 스무 명의 여자들이 소파에 층층이 앉아 있다가 갑자기 연기처럼 사라지고 입었던 옷만 남은 듯했다. 그녀는 이 스무 벌의 옷에 대해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다. 입었던 기억은 물론이고, 옷을 샀을 법한 프랑스나 다른 곳들의 매장에 대한 기억도, 그럼에도 그녀는 불안한 만큼이나 당황스럽기도 한 이 상황에서 우스운 상상을 했다. 장난치기 좋아하는 어떤 악마나 산타 할아버지가 옷장에 사이즈와 취향이 완벽하게 딱 맞는 옷들을 두고 간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액세서리 상자를 열었을 때도 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몇몇 반지나 목걸이는 완벽히 기억하지만 나머지는 모르는 것들이었다. 옷장에 정체불명의 원피스를 걸어 둔 손이 액세서리 상자에도 장신구를 한 줌 더해 둔 것 같았다. 산호 귀걸이, 금과 자개로 된 반지, 특히 사파이어가 박힌 은반지는 더더욱 초면이었다. 

 

- 비올렌의 시선은 인쇄된 종이들을 지나 모니터 속 작가의 마지막 메일로 향했다. 도서 판매량 탭을 열고 순위를 확인했다. 18위에서 15위가 되어 있었다. 벌써 3쇄를 찍었다. 언론도 떠들썩했다. 라디오며 텔레비전이며 카미유 데장크르 없이는 방송이 돌아가지 않을 정도였다. 프랑수아 뷔스넬이 방송에서 그를 '라 그랑드 리브래리'에 초대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을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해 둘러댔어야 했는데, 작가가 매우 기뻐하고 있다, 그러나 당장은 텔레비전에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한다, 하고 내뱉어 버렸다. 출판사가 확보한 최후의 방어선은 다음과 같았다. 작가님께서 매우 내성적이라 노출을 꺼리세요. 아니요. 출판사 전속 작가가 익명으로 쓴 건 아니에요. 네. 작가님은 곧 얼굴을 드러내실 거예요. 그러고 나면 궁극의 질문이 뒤따랐다. 작가님이 남자인가요, 여자인가요? 그럼 이렇게 대답했다. 곧 알게 되실 거예요. 

 

- <설탕 꽃들>
부모를 여읜 젊은 여자가 부모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실은 조부모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친어머니는 그녀를 낳고 떠났다. 사실 그녀는 집단 강간의 산물이었다. 어머니를 찾아 떠난 그녀는 어머니를 강간한 네 남자를 색출해 한 명씩 살해한다.

이야기는 남성 또는 여성 화자에 의해 기술되나 화자가 주인공 여자인지 또는 사건들의 목격자인지 알 수 없다. 사실 남성인지 여성인지조차 알 수 없다. 책 전체가 하나의 긴 독백이다. 모든 범행에는 전쟁 때의 낡은 권총이 사용되었다. 피해자들을 환상에 시달리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신비한 힘을 지닌 총이다. 추리 소설의 구조를 빌렸지만 추리 소설이라 할 만한 점은 없다. 종종 찬송가 가사와 유사한 문장이 등장한다. 뭐랄까, 소설 전체가 어떤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 운명을 향해 던지는 탄원서 같다. 

- 이 원고는 살면서 읽었던 가장 독특한 글 중 하나입니다. 충격적이며 계속 머릿속을 맴돕니다. 제 편에서도 '해' 표시를 드립니다. 그러니까 저 역시 마리 씨의 첫 번째 평가에 동의합니다. 마리 씨 말이 나와서 말인데, 아직 그분을 만난 적이 없네요. 조만간 저를 보러 와 준다면 좋겠습니다.

추신 : 제목이 아주 훌륭합니다. 과거 제과 장인들이 만들었던 설탕 공예품이 연상됩니다. 

 

- "알아요. 여기 있어요." 비올렌은 원고 검토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검은색이나 흰색 스프링을 끼운 하얀 종이 뭉치가 아니라 양피지에 가까운 종이에 쓴 100여 장의 원고에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심지어 그 원고는 대마 실로 철해져 있었다. 이 흥미로운 물건은 비행기 사고가 발생하기 얼마 전 비올렌에게 전해졌다. 전체가 깃펜과 먹으로 쓰인 이 글은 우리에게서 잊힌 타로와, 오늘날 보통 사람들은 잘 모르는 유명한 옛 타로술사들의 역사를 뒤쫓는 내용이었다. 작가는 카린 비잘리라는 여성으로, 깃펜과 색색의 잉크로 본인이 직접 타로 패와 해석을 그렸다. 완성까지 몇 달은 걸렸다는 독특한 원고였지만 소설가를 찾는 원고 검토부 입장에서는 완전히 관심 밖의 주제였다. 

 

- "이건 죽음이죠?" 비올렌이 긴 붉은색 수도복을 입은 해골이 그려진 카드를 가리키며 물었다. 
"맞아요. 근데 피했어요. 당신이 겪은 사고 같아요."

- 비올렌이 작가와 커피를 마시곤 하던 사무실의 낮은 탁자 위에 10분 전부터 카드가 일렬로 놓여 있었다. 그 가운데 몇 장은 뒤집혀 있었다. '펑크족 여자'는 모든 게 과했다. 그도 그럴 것이 카린 비잘리는 머리 왼쪽을 삭발했고, 오른쪽을 실로 묶어 늘어뜨리고 진주 장식을 꽂았다. 다만 닭 볏처럼 세운 머리, 옷핀 장식에 징이 박힌 가죽점퍼 같은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빛바랜 데님 멜빵바지를 입고 원석 팔찌를 겹겹이 차고 깃털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비올렌은 그녀가 갓 서른쯤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손톱을 물어뜯은 흔적이 있는 손으로 탁자에 놓인 카드를 세는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넷, 다섯... 카린이 카드를 한 장 뒤집자 18세기 의복을 입은 남자가 침상에 누워 있는 그림이 나왔다. 손에는 가지가 많이 달리고 불이 켜진 커다란 촛대 ... 

 

- "여왕 주변을 맴돌고 있어요. 여왕은 당신이죠. 과거와 기억에 문제가 있어요. 다섯, 여섯, 일곱..." 

 

- "눈동자가 뭐랄까 굉장한 초록색이네요. 그런 말 많이 들으시죠?" 소피 탕슈가 말했다.

"네."

두 사람의 침묵이 길게 이어지는 가운데 유리컵 안에서 보글거리는 기포 소리만이 조용한 사무실을 채웠다. 

 

- "자." 경위가 말을 이어 갔다. "실크 얘기, 눈 얘기, 비행기 얘기도 했으니 지금부터는 제 방문 목적을 얘기하겠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크로스 백 쪽으로 몸을 숙여 <설탕 꽃들>을 꺼냈다. 
"이 책 아시죠?" 
"그럼요, 제가 출간한 건데요."
"제가 그걸 읽었고요." 경위가 비올렌의 말을 받았다. "담배 피우세요?"
"아니요."
"사무실에서 담배 냄새가 나길래."
"피우세요, 경위님." 
"고맙습니다..." 소피 탕슈가 숨을 크게 내쉬며 말했다. 그러고는 말보로 레드와 빅(Bic) 라이터를 꺼내더니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녀는 자신이 내뿜은 담배 연기 속에서 이야기를 이어 갔다.

 

- "이른 아침 첫 햇살에 무지개색으로 빛나는 접시꽃에 안개가 피어날 때 그곳에 그들이 있을 것이다. 기도하는 모습의 점토 조각상처럼 육신이 이미 뻣뻣하게 굳은 그 둘은 숲 속의 공터에 있을 것이다. 나의 첫 번째 제물은 자신의 죄 앞에 무릎을 꿇고 있을 것이다. 이마 정중앙에 박힌 한 발의 총알로 그의 영혼은 악마에게 보내질 것이다. 악마만이 세세토록 그 영혼을 부리리라. 나의 두 번째 재물은 구원의 약속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하늘을 쳐다볼 것이다. 바펜 SS의 두 개의 'S'자가 음각된 총알이 장전된 루거 P08은 이번 임무를 수행하기에 제격이었다. 비열한 놈들을 죽이기 위한 비열한 놈들의 무기, 더러운 놈들을 죽이기 위한 더러운 놈들의 무기. 이 상스러운 무기가 영광의 길을 가려는 내게 주어졌도다."

"아름다운 구절이네요." 비올렌의 평이었다.
"그렇죠." 경위가 대꾸하고 다시 가방 쪽으로 몸을 숙이더니 파일철을 꺼내 인쇄용지 한 장 크기의 컬러 사진 하나를 빼냈다.

"삽화도 멋집니다." 소피가 비올렌 앞의 낮은 탁자 위로 사진을 들이밀며 말했다. 사진 속에는 50대 가량 되어 보이는 갈색 머리 남성이 있었다. 조깅 복장으로 낙엽 더미 위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가 앞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두 눈 사이에 시커먼 구멍이 뚫려 있었다.

 

- "발라르와 페르쇼드는 바펜 SS를 뜻하는 'S' 자 두 개가 새겨진 루거 P08 권총을 맞고 사망했습니다. 문제는 이 부분이 언론에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귀 출판사 소속 작가인 카미유 데장크르의 연락 정보를 넘겨줄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 "얼굴 보니 좋네." 피에르 스탱이 비올렌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회백색 머리에 사흘 동안 고상하게 기른 턱수염이 더해지니 세르주 갱스부르와 점점 더 닮아 가는 것 같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어렴풋한 인상만 있을 뿐이었는데 이제는 묘하게 그를 따라 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고, 희미하게 조절해 둔 상담실의 불빛이 그런 느낌을 더욱 확고히 해 주었다. 비올렌은 상담용 침상에 몸을 쭉 뻗고 기대어 누웠다. 침상 역시 상담실 인테리어의 테마 컬러라 할 수 있는 빨간색 캐시미어가 씌워져 있었다. 피에르가 샴페인 한 병과 잔 두 개를 꺼내 왔다. "내 와인 바에 온 걸 환영해." 그가 말했다. "생존자로 귀환한 걸 위해 건배하자고." 샹파뉴 살롱 2007이었다. 병마개를 날려 보낸 그가 잔을 채워 비올렌에게 건넨 다음 그녀의 잔에 쨍 소리를 내며 자기 잔을 부딪혔다. 그러고는 다시 안락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 "비올렌." 그가 말했다. "당신은 병적 도벽 환자야. 몇 년 전부터 당신이 나한테 보석을 가져왔어. 난 그걸 내 책상 서랍에 모아 놨어. 당신은 계속 도둑질을 했어. 원피스도 훔친 거고. 상담 시간에 당신이 말해 준 거야. 당신이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 줬어. 난 빠짐없이 기록해 뒀고, 까르띠에랑 던힐에서 물건을 훔쳤을 때는 당신을 찾으러 경찰서까지 갔어. 당신이 고소당하지 않도록 편지도 수십 장 썼어. 당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에두아르에게 도벽을 들키는 거야. 근데 당신은, 그러니까... 그 모든 일이 기억나지 않는구나."
"거짓말 마!" 비올렌이 소리쳤다.

 

- "거짓말 절대 아니야!" 흥분한 피에르 스탱이 다시 책상으로 가서 아예 서랍을 빼 왔다. 그리고 서랍째로 비올렌의 무릎에 올려놓았다. 그 안에는 조잡한 물건부터 비싸 보이는 정교한 물건까지 수십 가지 장신구가 있었다.
"당신이 나한테 가져온 것들을 좀 보라고. 당신은 한 달에 두 번 가까이 나에게 '선물'을 했어." 
비올렌은 손가락으로 보석들 사이를 훑다가 눈을 들어 피에르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미안한데 전혀 기억나지 않아. 모든 게 지워졌어, 피에르." 
"그게 매력적이란 거야!" 그가 서랍을 가져가며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특이한 연구대상이야."

 

- "그래서, 설마 내가 이걸 다 훔친 건 아니지?" 
"아니, 맞아." 피에르가 간결하게 대답했다. "섹스는?" 그가 한치의 망설임 없이 잇따라 물었다. 
"'섹스'가 뭐?"
"성적으로 말이야. 어느 쪽이야? 기억나?" 그가 질문하며 담배를 들었다.
"좀, 피에르, 에두아르와의 생활이 어떤지 당신한테 절대 말 안 할 거야.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내가 지금 관계를 가질 정신이 있다고 생각해? 내 꼴 안 보여?"
"그런 말이 아니야... 됐다. 이건 다음번 상담 주제로 하고." 피에르가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뗐다. "과오."
"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비올렌, 당신 뇌가 말이야. 과거의 나쁜 버릇과 과오를 망각해 버렸어. 액세서리, 옷, 담배." 
비올렌은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반사적으로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어 손가락 끝으로 둥근 보석이 박힌 금속 반지를 더듬었다. 탕슈 경위의 반지였다. 그녀는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샤를이 출판사 내 집무실에서 비올렌을 맞으며 내뱉은 첫마디였다. 20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샤를은 말끝마다 습관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비올렌에게 소파 자리를 권하고 자신도 자리에 앉았다. 은발이 군데군데 섞인 금빛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넘기자 한 타래의 머리칼이 다시 이마 위로 떨어졌다. 그가 짧은 콧수염을 무심하게 쓰다듬었다. 수염 때문에 영국인 대령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의 샤를은 선대에 설립된 출판사의 4대 경영인이었다. 출판 가문에서 태어나 그 세계의 모든 출입문과 철책, 여타 회전문을 열 수 있는 각종 열쇠며 통행증이며 비밀번호가 죄다 그의 것이었다. 등 위로 긴 머리를 내려뜨린 비올렌은 갓 스물을 넘긴 나이였음에도 언행이 제법 섬세했고 초록색 눈동자는 앞으로의 길을 가는 데 있어 분명히 장점이 될 터였다. "제가 아는 바가 맞는다면, 베르나르가 노르망디에서 당신을 데려왔다고요? 그러게 루앙 출장을 가길 얼마나 잘했습니까! 저는 소속 작가들이 서점의 초청 행사에 응하도록 항상 장려하고 있답니다." 샤를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 당시 비올렌은 루앙의 한 대형 서점에서 평일에는 반나절, 주말에는 종일 아르바이트를 했다. 때로는 일하는 시간과 대학 현대 문학 강의 시간을 이리저리 겹쳐 잡아야 했다. 대학의 맹점 한 가지는 또 그게 특권이랄 수도 있겠지만 학생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출석부에 적힌 이름들이 계단식 강의실에 오든 말든 어느 누구도 비난하지 않고, 부모에게 연락이 가지 않으며, 아무도 찾지 않으니 말이다. 제재가 들어가는 경우는 학년이 끝날 때가 되어 기말고사에서 일정 점수를 얻지 못하거나 몇 번 없는 시험에 나타나지 않을 때뿐이었다. 

대학은 레이더망을 벗어나기에 이상적인 장소였다. 몰래 빠져나가서 사라지기에.

 

- '판매 직원 모집. 안내에 문의 바람' 비올렌은 유리문에 테이프로 붙여진 공고를 보고 서점에 들어갔다. 간단한 면접을 보고 나서 채용이 결정되었고 그 다음 주부터 일을 시작했다. 월급과 이런저런 수당을 합치면 궁색하나마 루앙 구 시가지에 있는 한 건물의 지붕 밑 협소한 방에서 살 수 있었다. 머지않아 비올렌에게 '작가와의 만남' 업무가 맡겨졌다. 그녀는 책 읽는 속도가 빠르고 작가들과의 대화를 좋아했다. 작가들 역시 대부분은 서점 측 초빙으로 참석한 저녁 행사에서 예쁘고 어린 아가씨가 생글거리며 의전해 주는 것을 좋아했다.

 

- 베르나르 바이에는 역사 소설로 성공을 거둔 작가였다. 그는 역사 사건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을 묘사하는 장면들도 치밀한 조사를 거쳐 집필했다. 덕분에 독자들은 앙리 4세 시대의 파리, 뮈라 시대의 나폴리 등을 배경으로 한 줄거리를 따라가며 그 시대에 관한 교양을 덤으로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가 명성을 떨치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다만 이 명성은 부당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비밀 유지를 대가로 학부생들에게는 푼돈을, 역사 자문가들에게는 거액의 보수를 주고 아예 팀을 만들어 일을 대신하게 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영원히 알지 못할 이러한 작업 비밀을 이 작가와 거래하는 유일한 출판사는 용인하고 있었다. 친절하고 거만한 여자 낚시꾼 베르나르 바이예는 저녁 시간에 열린 책 증정 행사의 방점을 찍기 위한 한마디를 날렸다. "저녁 같이할래요?" 비올렌을 향한 말이었다. 비올렌은 제의를 받아들였다. 둘은 라 쿠론 레스토랑에서 저녁 시간을 보낸 후 루앙의 길거리를 걷다가 마치 우연인 듯 호텔 앞으로 이끌렸다. 작가가 묵고 있던 호텔이었다. 

 

- 2시간 후 커다란 침대의 베개 더미에 털썩 누운 바이예가 담배를 피웠다. "넌 이상한 여자야. 모든 점에서 꽤 특별해. 파리에 살지 않다니 안타깝다. 본격적으로 만나 볼 수도 있었는데." 
"절 데려가세요." 비올렌이 욕실로 향하며 말했다.
"공부는 어쩌고? 일은?"
"대학 국문과요? 그까짓 국문과가 절 어디로 데려가 줄 수 있겠어요? 그렇다고 교수는 되기 싫고요. 서점이요? 평생 거기서 일하진 않을 거예요. 절 데려가고 싶지 않으세요? 샤워하고 옷 입으면 준비 끝. 떠나는 거예요." 될 수 있는 한 침착하게 말했지만 눈빛 저 깊은 곳에서는 분명한 도발이 느껴졌다. 
"월급이 얼마야? 사는 곳은 어디지?" 새로 생긴 애인을 다음날 가지고 갈 짐 가방에 넣어 갈 생각에 현혹되어 게임판에 뛰어들고만 바이예가 받아쳤다. 

- 비올렌은 얼마 되지 않는 월급을 밝히며 본인이 사는 곳을 '쥐구멍만 한 아파트'라고 표현했다.
"쥐구멍만 한 아파트라. 살 만한 다른 데를 알아보지. 돈이라면 나한테 다 생각이 있어." 그러고는 담배를 한 모금 빨고 시간을 보내다가 물었다. "혹시 원고 검토부가 뭐 하는 덴지 아니?" 

- 샤를은 줄곧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비올렌을 응시하고 있었다. "베르나르가 당신을 원고 검토부에 취직시켜 주라고 하더군요. 한 자리가 비어 있긴 해요. 원고를 읽어 본 적이 있나요?"

비올렌은 없다는 의미의 사인을 보냈다.  
"원고 검토부의 목적은 좋은 글을 찾는 거지만... 그게 다는 아니에요." 그가 다시 한번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면요?" 비올렌이 물었다.
"그러니까..." 샤를이 서두르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다른 경쟁 출판사들이 베스트셀러 목록을 차지하고 있는 꼴을 보는 건 매우 거북스러운 일이에요. 게다가 우리 출판사에도 접촉을 했었던 원고인 걸 알면 더욱 그렇죠..." 
"... 여기서는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고 여겨서 계약하지 않았다는 말씀이시죠?"
"이해가 빠르군. 좋습니다. 최근 들어 그런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났어요." 그가 부루퉁하게 말했다. "문학적 품질과 상업적 잠재력 사이를 저울질하는 일종의 탐지기를 장착하고 있어야 하죠. 설정 값이 명확하지 않다는 건 저도 인정합니다. 서점에서 일해 보셨으니 아마 무슨 말인지 다른 분들보다 더 잘 이해하시겠지요."
"무슨 말인지 잘 알겠어요."

 

- "그렇다면."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을 내게 보낸 베르나르가 옳았군요." 그러고는 비올렌의 두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낚시를 나가야 진주를 캐는 법." 그가 얼굴에 웃음기를 띠며 말했다. 긴 침묵이 이어지다가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죠. 당신같이 예쁜 아가씨가 뭐가 아쉬워서 베르나르 바이예에게...?"

비올렌은 천장을 보며 대답할 말을 찾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샤를 사장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이는 절 파리로 데려올 수 있었어요. 돈도 있었고요."
"이렇게 솔직할 데가! 마음에 드는군!" 그는 탄성을 연발했다. "그 사람이랑 잔 것도 단지 그 이유 때문인가요?"
"네." 비올렌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원하시면 당신과도 잘 수 있어요."
샤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을 매우 사랑하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르파주 양. 육체적으로는 말고." 그가 덧붙여 말했다. "비밀을 하나 말해 주죠. 대단한 비밀은 아니지만." 그는 비올렌 쪽으로 몸을 숙이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난 남자를 좋아해요."
"아쉽네요. 당신이 베르나르보다 훨씬 잘생겼는데."
"고마워요, 예쁜 아가씨." 만족스러워진 샤를이 화답하며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바로 했다.

- 원고 검토부의 평가 표식 작업은 빠르게 비올렌의 일상이 되어갔다. 수없이 많은 네모와 초승달을 표시하는 가운데 해가 하나씩 나타났다. 이 해는 출간이 되고 나서도 찬란하게 빛이 났고, 샤를을 아주 기쁘게 했으며, 동시에 출판사의 통장 잔고를 두둑하게 해 주었다. 당시 비올렌이 원고 검토부에 온 것을 두고 반감을 드러내는 부서원은 한 명도 없었다. 비올렌은 베르나르 소유의 원룸에 거주했다. 그곳은 그가 가끔씩 부인, 자식들과 떨어져 글을 쓰러 오는 공식적인 장소였다. 비올렌이 파리에 온 이후로 그가 조용히 일을 하고 오겠다고 하는 때가 훨씬 잦아졌다. 이런 생활이 1년 정도 지속되었을 무렵 베르나르와 비올렌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베르나르는 비올렌이 빌붙어 먹고살면서 주야 장천 돈타령만 한다며 비올렌을 비난했고, 비올렌은 자기를 재미보기용으로 수도원에 가두었다며 베르나르를 힐난했다. 결국 둘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베르나르가 비올렌더러 두 달 내로 집을 나가라고 한 것이었다. 

 

- 샤를은 결혼을 했었고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딸 샤를로트를 낳았다. 그때의 삶은 이미 끝장난 지 오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출판사의 유일한 후계자였던 샤를은 새로 얻은 지위에 기대어 자신의 삶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먼저 그는 남자를 좋아한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곧바로 이혼을 통보받았고, 전 부인은 매달 가져다주던 풍족한 돈보다 훨씬 큰 액수의 양육비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두 번 다시 보지 않았으며, 딸을 그로부터 멀리 떼어놓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 그의 전 부인은 원하던 것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다. 사춘기 딸이 부모와 프랑스를 벗어나 독립된 삶을 살고자 엄마와도 점점 멀어져 갔던 것이다. 샤를로트는 발리에서 남미를 거쳐 베트남까지 배낭여행을 하면서, 부모와 멀리 떨어진 위도의 땅에서 파티에 드나들고 불법 판자촌에서 아무나 만나는 삶을 이어 갔다. 또 레이브 파티의 전자 음악에 맞추어 새벽까지 춤을 추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시간은 각양각색의 마약을 투약하며 흘려보냈다. 파리에는 1년에 두세 번 정도 들러 부모와 - 물론 각각 돌아가며 한 번씩 - 점심을 함께했다. 주된 목적은 돈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양쪽 부모는 딸에게 돈을 어디에 쓸 건지 묻기를 포기해 버렸다. 그러다 이와 같은 존재방식이 마침내 그녀의 육신을 제압했다. 어느 날 아침 세상 끝의 한 해변에서 맥주 캔과 주사기가 널브러진 가운데 샤를로트는 의식 불명인 채 발견되었다.  

 -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화려한 물고기들은 고요하고 이기적으로 살아갔다. 각자 자기 공간에서 자기 역할만 수행하며 동족들과는 거의 마주치는 법 없이 두꺼운 유리 벽 뒤에서 곧게 나아가거나 선회하는 궤적을 하루에도 수천 번씩 그렸다. 모든 물고기가 뭐 그리 바쁜지 종일 움직여도 부족한 것처럼 보였다. 어떤 물고기들은 이따금씩 미스터리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병들었거나 경계를 늦추는 바람에 밤사이 다른 물고기에게 잡아먹힌 것이었다. 샤를은 수족관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물고기를 사러 1년에 두세 번 전문 상점에 갔다. 한 번도 키워 본 적 없는 종에 대해서 누군가 말하는 것을 듣고서 사 보기도 했다. 물과 공기를 빵빵하게 채운 투명한 비닐봉지를 들고 돌아온 그는 새로 사 온 물고기들을 수조에 풀어 주며 팔딱대는 첫 몸짓을, 아니, 실은 이 녀석들이 새로운 환경에 얼마나 잘 적응하는지를 홀린 듯 바라보곤 했다. 

 

- 그 수족관은 이제 텅 비어 있었다. 대신 비올렌이 여행지나 골동품점에서 가져다 채워 놓은 조개껍데기들이 형광등에 반사된 자개 빛을 아롱거리고 있었다. 그것을 오래 응시하고 있노라면 물속 한가득 이리저리 다양한 속도로 헤엄치는 물고기들이 보였다. 자신이 샤를에게 묻는 소리도 들렸다. "저는요? 저는 수족관 어디쯤 있어요?" 샤를은 항상 이렇게 대답했다. "머지않아 알게 될 거야." 
  

- 우리가 사랑을 나눌 때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마취된 듯 무방비한 상태로 놓아 버리는 부분은 어디이며, 예민하게 깨어 있으면서 숨결에, 피부에 움직임에 민감하고 다른 이의 몸을 간섭하는 기쁨을 황홀히 지켜보는 부분은 어디인가? 이 두 부분은 더듬거리며 풀어 가던 방정식의 답이 갑자기 환히 떠오르듯이 애무, 입맞춤, 깨물기, 체위, 속삭임의 힘으로 도래한 쾌락의 순간에 합쳐진다. 사랑에 빠진 상태에서 나오는 호르몬을 룰리베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두 사람이 첫눈에 반할 때 뇌는 예고도 없이 이 호르몬을 분비한다. 덕분에 사랑의 대상이 되는 이는 모든 기쁨과 가능성의 원천이 되는 데 필요한 자질을 획득하게 된다. 생물학자 장 디디에 뱅상은 400여 쪽에 이르는 에세이 <열정의 생물학>에서 이러한 상태에 대해 깊이 있게 연구했다. 몇 년 후에는 그의 부인이 대중에게 좀 더 다가가기 쉽게 쓴 <어떻게 사랑하게 되는가?>를 펴냈다. 과학자들 말에 의하면 룰리베린이 만들어 낸 사랑에 빠진 상태는 90일 동안만 지속된단다. 비올렌은 작년에 '르 피가로 리테레르'에서 뤼시 뱅상의 논문을 인용해 문학을 향한 사랑에 관해서 쓴 기사를 읽었다. 그녀는 기사의 급진적인 결론을 에두아르에게 읽어 주었다. <AD 매거진>을 읽고 있던 에두아르는 자신이 진행한 어느 스코틀랜드 부호가 소유한 성의 인테리어 작업에 관한 기사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그래? 그럼 그 박사한테는 내가 흥미로운 사례겠다. 나를 연구해 봐야 할 거야." 그가 무심하게 말했다. "왜냐하면 나는 원고 검토부의 서가 인테리어 작업 이후로 그런 상태가 쭉 지속되고 있거든." 

 

- 애피타이저와 메인 요리 사이에 다음 소설의 진도나 진행 상황을 은근슬쩍 묻는 건 기본이다. 또 디저트를 먹을 때쯤에 정말로 소설의 결말이 나왔는지 묻는 고도의 작전을 쓰는 건 일종의 비틀기 기술이다. 작가에게 약간의 자극을 가할 수도 있다. 그건 바로 비올렌이 잘 구사하는 기술이자 그녀가 담당하는 작가 프랑수아 메일페르에게 잘 통하는 방법이었다. 이 작가는 여러 편의 소설을 성공시킨 이력이 있으나 최근에는 비올렌이 만족할 만한 작품 활동이 거의 없었다. 뤽상부르 공원이 보이는 로스탕이라는 레스토랑의 홀에 포크와 나이프가 부딪히는 소리며 대화 소리, 유리잔이 쨍그랑거리는 소리가 뒤섞인, 레스토랑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익숙한 소음이 울렸다.  

"3년 전부터 글을 안 쓰셨어요." 비올렌이 선공을 날렸다. "드라마 찍는 중이겠다, 열 개국 언어로 번역본도 나왔겠다, 성공의 단꿈에만 빠져 계시는군요. 새 소설을 내자는 게 지나친 주문인가요, 프랑수아 작가님...?" 
"글쓰기 교실에서 할 일이 많습니다만."
"글쓰기 교실에 시간을 쓰신다. 뵐 때마다 수강생들 얘기만 하시네요. 그럼 학생 돕는 일을 그만둬야죠, 프랑수아 씨, 정 남을 돕고 싶다면 비영리 단체로 가시든가." 
프랑수아 메일페르는 키르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비올렌의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 지구(地區) 전체가 깨어나는 중이었다. 그곳은 도시 속의 신도시라 할 수 있었다. 소피는 즐비하게 늘어선 미래 지향적 형태의 건물들을 따라 걸었다. 준공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사람이 드나들지 않지만 계획 단계 때부터 이미 분양이 끝났다고 했다. 시가지가 확장되며 모든 것들이 새로 지어진 파리 바티뇰 지구에는 새 지방 법원 건물도 있었다. 소피는 멀리서부터 육면체 세 개가 포개진, 높이가 에펠 탑의 절반에 이르는 그 건물을 알아보았다. 파리 사법 경찰 본부도 전설적인 센강변의 오르페브르 36번지를 떠나 새 지방 법원을 이웃하고 있는 현대식 건물로 옮겨 갔다. 오르페브르 36번지는 영광스러운 과거를 기리기 위해 여기서도 36번지에 세워졌는데 그 거리에 다른 번지는 없었다. "개나 소나 다 36 번지야." 소피의 경찰학교 동기이자 경위 생활을 하다가 몇 년 전 파리에 온 제롬 보드리에가 농담을 던졌다.  

 

- 소피는 루앙에 도착해서야 반지가 손에도 없고 주머니에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녀는 바로 차를 돌렸다가 갑자기 의구심이 들었다. '파리에 갈 때는 갖고 있었나?' 그러고는 온 집안과 모든 옷의 주머니를 1시간이나 뒤지다가 흐느끼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렇게 영영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반지가 비올렌의 손에서 다시 나타나다니. 소피는 마음 같아서는 그 여자를 와락 껴안고 싶었지만 자신의 방문 목적을 고려해 "정말 감사합니다."라는 짧은 인사만 건넸다. 

 

- 제롬은 소피에게 태블릿 위에 손을 얹도록 했다. 
'네 지문을 인식시켜야 해."
소피가 손을 얹었고 둘은 잠시 대기했다.
"안녕하세요, 소피 경위님." 부드러운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소피는 놀라서 동료를 바라보았다. "저는 아나크림 888입니다." 목소리가 계속해서 말했다. "저는 인공지능이며, 당신은 저와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감탄이 절로 나오지 않아?" 제롬이 외쳤다. "너만 알고 있어, 소피, 공식적으론 이 방과 프로그램은 존재하지 않아. 내무부가국방부에서 시험 삼아 여기에 설치한 거야. 그러니까. 우린 이 자리에 없는 거야. 있었던 적도 없고." 


- "이 사건과 유사한 범죄들을 묘사한 소설이 있어. 누가 이 책을 썼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심지어 이 책의 편집자조차도 몰라. 모든 일의 시작점은 원고 검토부라는 곳인데 이쪽을 파헤쳐 볼 생각이야. 해당 부서의 모든 직원과 책임 편집자의 행적 조사는 이미 마쳤어. 세상에, 내가 기계에게 말을 하고 있다니." 소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제롬 보드리에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만해. 아나크림 기분 나쁘겠다."

 

- "실망했구나." 보드리에가 그녀를 살피며 말했다. 소피는 눈을 감았다. 
"누가 <설탕 꽃들>을 썼지?" 그녀가 물었다.
"카미유 데장크르입니다." 목소리가 대답했다.
"내 사건과 이 책 사이에 연결 고리가 있나?"
"한 가지가 있는 것 같지만 탐색할 수 없습니다. 사건 파일에서 검색이 불가능합니다. 도움을 드릴 수 없어 죄송합니다, 경위님."

- 돌연 우리가 살던 아파트 창밖으로 몸을 던져 버렸습니다. 한마디 말도, 편지도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전원이 켜진 컴퓨터 모니터에는 '설탕 꽃들'이라는 제목만 적혀 있었습니다. 그녀를 땅에 묻던 날 그녀가 책 속에서 죽이고 싶어 했던 남자들이 신문 1면에 나왔습니다. 토르 사장과 공증인 아들이 무릎을 꿇어앉은 채로 머리에 총을 맞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파비엔이 상상했던 대로의 죽음이었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게 1년 전입니다. 

- 파비엔이 저승에서 저에게 보낸 신호라 해야 할는지도 모릅니다. 현실은 그녀가 쓰고자 했던 대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을 집필하기로 했습니다. 파비엔이 저와 함께 있어 주기를 바라면서. 이대로 그녀의 꿈과 일치하는 현실이 이어진다면 그녀가 비올렌에게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 "보아하니 이제는 서로 익명이 아닌 알코올 중독자들인데, 한 잔 할래요? 괜찮은 위스키가 있어요." 
우리는 텅 빈 사무실에서 위스키를 마셨습니다. 어느 순간엔 그녀가 저를 유혹하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그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스핑크스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초록색 눈으로 저를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비현실적인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여정이 끝에 다다랐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비올렌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뿜어내며 물었습니다. "원고 검토부가 뭔지 알아요?"

- 그녀는 자신의 정신분석 상담사인 피에르 스탱의 명함도 주었습니다. 여자친구를 잃은 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면서. 그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친절했습니다. 모두가 그녀를 어렵고 계산적이라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는 제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섬세한 여성입니다. 저는 그녀를 좋아합니다. 그녀가 제 언니이고, 친구이고, 애인이고, 어머니이면 좋겠습니다. 다음 날 비올렌은 저를 불러 원고 몇 편을 맡겼고, 그리하여 저는 원고 검토부의 플뢰르를 대신하는 자리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 피에르 스탱은 <설탕 꽃들>을 맨 처음 읽은 사람입니다. 저는 그에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그는 비올렌이 이 글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지해 주었습니다.  

 

 

      

 

 

 
익명 소설
어느 날 파리의 한 출판사로 소설 투고 하나가 들어왔다. 그렇고 그런 원고 사이에서 모처럼 ‘될 것’ 같은 작품이었다. 예상대로 소설은 출간되고 나서 권위 있는 상의 후보에까지 오르며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 잘나가는 신작에는 말 못할 비밀이 있었다. 바로 소설을 쓴 작가가 누군지 모른다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작품의 내용과 현실의 살인 사건이 정확히 일치한다고 주장하는 형사까지 나타나는데……. 《익명 소설》은 프랑스 현대 문학계에서 주목받는 작가이자, 우리나라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베르나르 베르베르, 기욤 뮈소 등의 뒤를 이을 프랑스 작가로 평가받는 앙투안 로랭의 스릴러 소설이다. 그는 이 소설을 두고 ‘단순한 탐정 소설을 넘어서는 신비한 작품’이라며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국내에 오랜만에 소개되는 앙투안 로랭의 신작을 통해 문학성을 겸비한 미스터리 스릴러의 세계로 빠져들어 보자.
저자
앙투안 로랭
출판
하빌리스
출판일
2023.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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