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이사카 고타로] 사신 치바

일루젼 2023. 6. 29.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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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사카 고타로 / 김소영
출판 : 웅진지식하우스 
출간 : 2006년 5월 25일 


아주 즐겁게 읽었다. 

원래는 <사신의 7일>과 묶어서 한 번에 리뷰를 쓸 생각이라 미뤄두고 있었는데, 막상 쓰려고 보니 분리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아 따로 쓰기로 했다. 두 권 모두 이제 막 시작된 장마와 잘 어울리는 분위기의 글이었다. 

 

'이사카 고타로'라는 작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예전에 <골든 슬럼버>에 다소 모호한 평가를 내린 후로 한 번도 찾아 읽었던 적이 없다. <골든 슬럼버>는 결백이 얼마나 손쉽고도 집요하게 누명을 뒤집어쓸 수 있는가에 관한 끝맛이 씁쓸한 소설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다시 읽어본다면 어떨까 싶기는 한데, 근시일 내에 도전할지는 잘 모르겠다.)

 

리디셀렉트를 훑어보다가 제목이 재미있어 보여서 선택했는데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인간이 정해진 수명보다 일찍 접하게 되는 죽음에는 반드시 사신의 결정이 개입한다는 설정이다. 병사, 자연사, 자살 같은 자연스러운 -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죽음이 아닌 사고사나 타살 같은 경우, 일주일 전 그 죽음의 가부를 결정하기 위해 사신이 나타난다. 사신의 외모는 조사해야 할 인물의 상황에 맞춰 그때그때 가장 적절한 외형을 취하게 되지만, 기본적인 성별은 그대로 유지되는 것 같다. (적어도 본문 내에서는 바뀌는 경우는 없었다)

 

'인간이 아닌 존재의 시선을 빌어 관찰하는 인간'이라는 주제는 고전적이지만 흥미롭다. 너무나도 익숙해져서 감각하지 못하던 것들을 거울을 통해 발견하는 순간의 당혹감 또한 익숙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주목하게 되는 지점은 매번 조금씩 달라지므로 신선하다. 그렇게 한 번씩 주의를 환기한 다음에는 다시 익숙한 무감각으로 잠겨 들겠지만.

 

사신 치바의 시선을 통해 관찰하게 되는 6명의 이야기는 꽤 흥미롭다. 사람은 거기서 거기이지만 또 사람이니까 모두 다르다. 독자들은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그 사람의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바라보는 삶에 저도 모르게 동화된다. 그래서 치바의 결정은 때로는 당황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다른 결정이라고 뭔가가 크게 달라질까 싶기도 하다. 

가장 아름다운 결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는 것은 좋은 것, 죽는 것은 나쁜 것. 정말 그런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없는가, 혹은 그것에서 벗어난 시선에서 볼 때 삶이 더 의미 있어지지는 않는가라는 의문이다.

 

본문 내에서 치바의 결정을 밝히지 않는 이야기들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런 열린 결말이 더 무거웠다. 독자가 '아 좋은 이야기였다'라고 결말을 납득하게 된다면 이후로 어떻게 되건 상관이 없다는 의미는 아닐까 하고. 그러니까, 독자들은 '가'를 내린 것이 아닌가 하고.

 

하지만 마지막 이야기만큼은 무척 인상 깊게 읽었다. 이어지는 <사신의 7일>의 치바는 여전히 맑은 하늘과 태양을 본 적이 없다. 이 시리즈가 어떻게 이어지건 아마도 이 이야기가 치바의 가장 마지막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결말이 이미 정해져 있더라도 이야기는 충분히 계속될 수 있다는 문장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렇다. 죽음에 대한 내 생각은 니타-아사미와는 다르다. 그녀는 일단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을 겪고 있더라도 지금 살아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죽음은 '결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는, 그러니까 어떤 의미로는 이미 일어난 일이다. 어떠한 죽음을 맞느냐가 한 인생의 결말을 결정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과정 중에서 단 한순간이라도 가장 빛나는 시기가 있었는가, 지금 끝이 맺어져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 행복할 시기가 있었는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일종의 하이라이트라고나 할까. 

 

전체 책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 존재하듯이. 하지만 그 기승전결을 위해서는 전체가 필요하듯이.

한 권의 책을 덮으며 가장 마음에 남는 부분이 반드시 마지막 페이지는 아닌 것과도 같다. 

 

해서, 이미 치바의 마지막 이야기를 <사신 치바>의 '치바 vs. 노파'로 정해두고 <사신의 7일>을 읽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그래서 더 빠져들어 읽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는 <흑뢰성>에서도 느꼈던 감각이다.

 

인간의 삶 또한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어떤 순간들로 채워지고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지나치게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지금 이 순간이 만족스럽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가장 중요한 것을 잊지 않을 수만 있다면, 매일이 최고의 일주일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사람이 가까이 있습니까?

1. 음반 매장에 비정상적으로 자주 드나든다
2. 이름으로 동네나 시의 이름을 쓰고 있다
3. 대화의 포커스가 미묘하게 빗나간다
4. 맨손으로 사람과 접촉하려 하지 않는다
5. 항상 비를 몰고 다닌다

그렇다면 그는 사신(死神) 일지도 모릅니다.

 

 

- 천사들이 도서관으로 모인다면, 우리는 음반 매장으로 모인다. 나는 인간의 죽음에는 흥미가 없지만, 인간이 다 죽어 음악이 없어져버리는 것만큼은 괴롭다.

 

- 사람의 죽음에는 특별한 의미나 가치도 없다. 그래서 나는 누가 언제 죽느냐에 흥미가 없다. 하지만 나는 항상 상대를 직접 만나보고 철저히 조사한 뒤 결정한다. 

조사 기간은 일주일이다.

 

- "그런데 왜 이발소를 하는 거지?" 하고 되묻자,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일이니까."

그 대답이야말로 나의 생각과,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나의 철학과 매우 일치한다.

 

- 그러고 보니 앞서 말한 이발소 주인은 "죽는 것이 두렵다"고 말한 적도 있다. 나는 그 말에 "태어나기 전의 일을 기억하나?"라는 질문을 했다.

"태어나기 전에 무섭거나 아팠나?"

"아니."

"죽는다는 것도 그런 게 아닐까. 태어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뿐이야. 무서울 것도, 아플 것도 없어."

 

- 사람의 죽음에는 특별한 의미나 가치도 없다. 요컨대 거꾸로 생각하자면 누구의 죽음이나 같은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누가 언제 죽느냐에는 흥미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사람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굳이 걸음을 한다. 왜냐? 일이기 때문이다. 이발소 주인의 말마따나.

 

- 내가 일을 할 때면 늘 날씨가 안 좋다. '죽음을 다루는 일'인 만큼 으레 날씨도 궂은 거겠지 하고 생각도 해봤지만, 다른 동료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 걸 보면 아무래도 우연인가 싶다. 맑은 하늘을 본 적이 없다고 하면 인간은 물론이고 동료들조차 못 믿겠다는 눈초리를 보내지만, 사실이니까 도리가 없다. 

 

- 찬찬히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이번의 내 모습은 젊은 여성들이 매력적으로 느낄 만한 외모일 터였다. 패션잡지의 남성 모델이라고 해도 좋을만한 20대 초반의 청년. 그네들은 조사 때마다 가장 일하기 좋은 인물상을 이끌어내서 우리의 외모나 나이를 결정한다. 그러니 내 겉모습이 그녀에게 혐오감을 주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 

 

- "잠깐만요." 나는 엉겁결에 반사적으로 상대의 팔을 움켜쥘 뻔하다가 곧장 손을 움츠린다. 장갑 끼는 것을 깜빡했지 뭔가. 우리는 인간의 신체를 맨손으로 만져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맨손으로 만지는 순간 인간은 기절하게 되고, 이래저래 귀찮은 일이 많이 생기기 때문에 긴급사태 외에는 금하고 있다. 규칙인 것이다. 위반한 자는 일정 기간의 육체노동과 학습을 해야 한다. 

 

- 그런 사소한 규칙 위반쯤이야 인간들이 행하는 담배꽁초 투기나 신호 위반과 다를 바 없으니까 일일이 까탈을 부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입밖에 내지는 않는다. 반발심은 들지라도 지켜야 할 규칙은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비싸 보이다니, 아래위 합해서 1만 엔인걸요."

그제야 그녀가 알아들을 만한 목소리를 냈다. 

"비아냥거리는 건가요?"

"그렇게 싸 보이지는 않은데요."

사실은 충분히 그렇게 보인다.

"만약 그렇다면 더더욱 괜찮지 않잖아요. 특가 찬스로 정장을 구입하기는 힘들 테니까요."

 

- "괜찮습니다. 이까짓 얼룩." 

그녀는 어두운 목소리를 낸다. 

"흙탕물이 조금 묻었다고 해서 새삼 달라질 것도 없으니까요."

지당하신 말씀. 그대의 인생은 흙탕물이 튄 정도로는 달라지지 않아. 일주일 뒤에는 죽을 테고 말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에 꺼내지는 않았다. 

 

- 그녀가 나를 노려본다. 경계심일 테지. 인간이란 참으로 의심이 많다. 저 혼자 바보 꼴 나는 건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속기는 또 얼마나 잘 속는지, 정말 구제불능이라고 나는 늘 생각한다. 물론 구제할 생각도 없지만. 

 

- 우리가 맨손으로 만지면 인간의 수명이 일 년 단축되긴 하지만, 어차피 그녀는 오늘내일 죽게 되어 있으니까 별 상관은 없을 것이다. 

 

- 우리를 상대하는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 담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채근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죽음을 향한 두려움일 때도 그렇고 동경일 때도 그런데, 아무튼 울창한 덤불 속에서 그보다 더한 암흑을 들여다보는 듯함 얼굴로 어눌하게 말을 걸어온다. 

 

- 이는 사람들이 무의식 중에 우리의 정체를 짐작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연수를 받을 때 그렇게 배웠다. 사신은 인간에게 죽음의 예감을 준다고. 

실제로 옛날부터 우리의 정체를 어렴풋이 눈치채는 인간은 있었다. 어떤 사람은 '한기가 든다'며 불안해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가까운 시일 내에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며 죽음에 대한 예감을 명확히 적어 남기기도 한다. 우리의 존재를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점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는 자도 가끔 있다. 

 

- "다들 수명에 죽기를 기다린다면 큰일이지요."

원래대로라면 그런 것까지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이미 만취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했다. 

"균형이 깨져요."

"균형이라니 무슨 균형이요?"

"인구라든가 환경 같은 세상의 균형이요."라고 말은 하고 있지만, 사실 나도 자세한 것은 모른다. 

 

- "수명 전에 죽는 경우도 있어요. 돌발적인 사고나 예기치 못한 사건 같은 것들은 대체로 수명이 아니에요. 화재나 지진, 익사 같은 거. 그런 것들은 수명과는 별개로 나중에 정해지는 거죠."

 

- "거짓말." 그녀는 신이 나서 웃는다. "신이 있다면 왜 나를 도와주지 않는 거죠?" 

얼마간 커진 그녀의 목소리가 맑게 트여 있었기에 나는 '어라?'하고 생각했다. 한순간 무척 아름다운 목소리로 들렸던 것이다. 

 

- 예전에 기회가 생겨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천사는 도서관으로 모인다'고 묘사되어 있었다. 그때 나는 '아하, 천사들은 도서관이로군' 하며 감탄했다. 우리는 음반 매장이다. 

 

- 급기야 이 프로듀서가 얼마나 대단한 천재이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음악이 좋은 이유는 노래하는 여성의 목소리가 좋기 때문이잖아." 내가 받아쳤다. 

"맞아. 노래는 목소리가 좌우하지. 이 프로듀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어. 소질과 재능이 중요해. 그래서 하는 소리라고."

"그래서 하는 소리?"

"이 목소리를 발굴해 낸 이 프로듀서야말로 대단하다고."

"그런가" 하고 나는 알쏭달쏭하게 대답했다. 이는 순전히 넘겨짚은 것에 불과하지만, 그는 평범한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을 무대 뒤에서 힘을 발휘하는 프로듀서와 포개어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 그러고 보니 이번에 나는 제법 매력적인 외모를 하고 있는데, 이는 그다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일이며 내 일의 범주에서도 벗어나 있다. 동료들 가운데는 어차피 다음 주면 죽을 목숨이니 하다못해 그 짧은 동안만이라도 상대가 행복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며 온갖 연출을 하는 이도 있지만, 내게는 그런 취미가 없었다.

 

- 사신은 전파를 탄 음성이라면 떨어진 장소에서도 들을 수가 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오고 가는 전파 속에서 목적한 것만을 골라내는 일은 성가신 일이긴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발신 장소와 시간만 알면 비교적 간단한 일이다.

 

- "외모는?"

"시원찮아." 남자는 답을 하더니 제풀에 웃음을 터뜨렸다. 넉넉하고 따뜻한 웃음소리였다. "괜찮아. 아직 재능을 발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니까. 재능이 발휘되기만 한다면 껍질이 벗겨진 듯 외모에서도 매력이 뿜어져 나오게 되어 있어. 그런 거야."

 

- <사신의 스토커 리포트 : 치바는 정확하다> 

 

 

- "당신이 말한 대로다. 당신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당신 말이 분명 맞아."

 

- "그런데도 태연자약한 얼굴을 하고 있어. 이 방에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벽에서부터 창까지 빠짐없이 찬찬히 둘러보더군. 겁을 먹고 있었다면 그렇게 차분할 수가 없지. 아쿠츠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귓등으로도 안 듣고 말이야."

후지타가 그렇게까지 나를 냉정하게 관찰하고 있다고는 생각도 못했기에 조금 놀랐다. 오호, 하며 작은 소리를 내고 만다. 

 

- "마음대로 해." 후지타는 즉시 대답했다. 사려가 부족해서 아무 생각 없이 답을 한 것 같지는 않고 그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나는 내 일을 수행하기 위해 질문을 했다. "당신은 죽는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딱히 기대하는 대답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는 야쿠자인 만큼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다"고 큰소리칠지 모르겠다는 추측은 했다. 

"죽는 것보다 지는 게 두렵네."

흐음, 하고 나는 팔짱을 낀다. 나로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대답이었다. 

"치바 씨, 당신 재미있는 사람이군." 후지타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나는 또다시 유감천만이었다. 

 

- 내가 일 때문에 인간을 만나러 오면 언제나 날씨가 끄물끄물하다. 옆으로 세차게 내리치는 장대비일 때도 있고, 소낙비일 때도 있고, 장맛비일 때도 있고, 여름날 저녁의 갑작스런 비일 때도 있다. 그때마다 빗발의 세기에는 차이가 있지만 아무튼 활짝 갠 하늘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 "뭐야, 음악이라니. 범위가 너무 넓잖아."

실제로 나는 장르를 막론하고 음악이면 다 좋아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뿐이 아니라 사신은 모두 그렇다. 인간에 대한 동정이나 외경의 마음은 조금도 없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음악만큼은 사랑한다.

틈만 나면, 아니 무리를 해서라도 틈을 만들어 음반 매장의 청음기 앞에 서서 음악을 듣는다.

 

- "후지타는 어떤 남자지?"

"무슨 소리야 그게. 가지고 노는 거야?"

"내가 알고 있는 야쿠자와는 인상이 달라."

그러자 아쿠츠는 전혀 뜻밖이라는 듯 깜짝 놀라더니 웃는 얼굴을 했다. 그러나 곧바로 얼굴을 긴장시키고 "그야 물론이지. 후지타 형님 같은 사람은 흔치 않아. 흔치 않을 만큼 멋있는 남자라고"하며 무리하게 짜낸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 "그렇군. 후지타는 특별하군." 나는 아주 조금이지만 흥미가 솟았다.

 

-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될까." 나는 마음에 걸리던 것을 말해본다. 아쿠츠가 뒤숭숭한 표정을 짓더니 나를 봤다.

"후지타 같은 사람은 같은 편에서도 골치 아프게 여기지 않나?"

"무슨 소리야, 그게." 부정하는 아쿠츠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남과 다른 녀석이란 미움받기 십상이야. 그렇지?" 지난밤에 후지타와 통화를 했던 보스의 귀찮기 짝이 없다는 듯한 목소리를 떠올렸다. 

흥, 하고 아쿠츠는 콧방귀를 뀌더니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 "그날 구리키가 정말로 혼자 나오는지. 아니, 다 제쳐두고 당신의 보스가 그날 구리키와 정말로 만나는 것인지."

"무슨 뜻인가?" 같은 질문을 반복하고 있었지만, 후지타는 이미 내 말뜻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일부러 뜸을 들일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망설이지 않고 말한다. "당신이 배신당했을 가능성은 없나?" 

 

- 만약 그렇다면 이해하기가 쉬웠다. 모종의 이유로 후지타의 조직은 구리키와 거래를 했다. 아마도 돈이겠지. 인간은 신기할 정도로 돈에 집착한다. 음악이 훨씬 귀중한데도 불구하고 돈을 위해서라면 어지간한 건 가리지 않고 다 한다. 

후지타는 이미 팔린 것이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희생양이라는 단어가 떠올랐고, 그다음 나는 다음 주 수요일에 벌어질 일을 상상해 본다. 

 

- "구리키가 목숨을 잃는 것은 오늘이고, 후지타는 내일이다." 나는 확인하듯 그렇게 말했지만, 아쿠츠에게는 들리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 "곧 알게 될 테니까." 나는 쌀쌀맞게 대답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후지타야 어떻게 되든 내게는 별다른 흥미가 없었다. 내 일의 결과가 바뀌지도 않을뿐더러 평가가 좋아질 리도 없다. 다만 어차피 이런 상황에 휘말렸으니 마지막까지 보고 가자고 마음을 돌리기는 했다. 문을 똑바로 쳐다보며 후지타가 이 방으로 뛰어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 머릿속에는 <브라운 슈거> 혹은 <록스 오프>의 인트로가 흐르기 시작한다. 그 무사태평하면서도 의연한 로큰롤의 울림에 맞춰 후지타는 나타나리라. 어리석은 강직함을 발산하며 찾아온다. 그리고 죽지 않는다.  

 

- <사신의 하드보일드 : 치바와 후지타 형님>

 

 

- 이렇게 많은 양의 눈을 보기는 처음이다. 나는 창 너머 바깥을 바라보고 있다. 별장 주위로는 자작나무 숲이 펼쳐져 있는데 나무들의 윤곽조차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온통 흰 눈에 뒤덮여 있다. 그칠 기색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깃털처럼 혹은 솜먼지처럼 보이는 눈송이가 조용히 내리고 또 내린다. 아침 6시가 넘었지만 태양의 위치조차 알 수 없다.

 

- "어째서 정보량이 적은가?" 내가 적극적으로 질문하지 않으면 그이는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죽어야 할 인간을 골라내어 그 정보를 정리하는 것이 정보부 일이고, 그것에 기초해서 조사를 행하는 것이 우리 조사부의 일이다. 그건 그렇다 쳐도 너무 불친절한 게 아닌가. 약이 오르는 걸 넘어서서 신비하게까지 느껴졌다. 

 

- 그에게는 조금도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 "상세한 사항을 모르면 자네 일에 지장이라도 생기나?"하고 잘도 지껄인다. 

"생기지 않아." 나는 즉시 답했다.

"그렇지? 자네들 조사부는 각각 배정된 조사만 하면 되는 거야. 어차피 자네들은 전모를 파악할 수 없을 테니 정보가 있다 해도 제대로 다 활용하지도 못하지 않나. 아무튼 어서 가게. 눈이 자꾸 쌓여서 걷기 힘들어지네."

 

- '어차피 자네들은'이라는 단정적인 표현에 나는 다소 부아가 치밀었지만 반론하기도 귀찮아서 발걸음을 뗐다. 

 

- "그렇게 서둘러 보고를 해서 어쩌겠다는 건지."

나는 동료들을 향한 불만을, 아니 그보다는 의문을 입에 담았다.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고 '가'를 보고해 놓고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태도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글쎄. 우리야 조사부가 보고만 올려준다면 이르든 늦든 상관없으니까."

 

- 발이 눈 속에 묻혔다. 발을 빼내어 좀 더 앞으로 내딛는다. 눈을 밟는 소리는, 발이 눈 속에 빠질 때의 울림은 어쩐지 리드미컬한 음악 같기도 해서 기분이 좋았다. 

 

- "그럴 가능성도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저건 독극물을 마신 시체로밖에 보이지 않아."

그렇게 잘라 말하는 말투에서 경험에 기초한 자신감 같은 것이 풍기고 있어 나는 감탄했다. 

"스트리크닌." 마유코가 불현듯 중얼거렸다. 무심결에 입 밖으로 튀어나온 것 같았다.

 

- "자살이었으면 좋겠다니 정말 멋대로 지껄이는군." 에이이치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타살이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마유코는 에이이치를 향해 눈초리를 치켜뜬다. 사실 그녀는 기가 센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짐작해 본다.

 

- 사람들의 눈이 그녀에게 집중된다. 나는 그 시선에서 열기를 느꼈다. 지난밤 저녁식사 때부터 그랬지만 다른 숙박객들이 마유코를 볼 때에는 그 시선에 어떤 열기가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유코가 단 한 명의 젊은 여성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성적인 호기심 혹은 동시에 극단적인 혐오감으로도 해석되는 긴장감이 있었다. 

 

- "어제도 이 여자랑 음식을 나눠 먹었잖아."

기억을 더듬어본 뒤 "아, 그거 말입니까" 하고 나는 대답했다.

지난밤 저녁식사 때 고기 요리로 닭고기 허브구이가 나왔는데, 그 음식이 나왔을 때 마유코가 나에게 "전 허브구이를 못 먹어요. 대신 드시지 않을래요?"하고 소곤거렸던 것이다. 

말투로 봐서는 정중한 의뢰 같았지만, 그 이면에는 자신의 부탁이 거절당할 리가 없다는 확신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에 나는 탐탁히 여기지는 않았다. 그래서 "먹고 싶지 않으면 남기세요"라고 제안했지만, 그녀는 "통째로 전부 남길 수는 없잖아요"하고 말했다. 

 

- 어떻게 할까, 하고 잠깐 고민했지만 결국은 그녀의 음식까지 먹었다. 예전에 다른 일로 레스토랑에 갔을 때 옆자리의 젊은이가 "다 못 먹겠으면 내가 먹어줄게"하고 말했던 것을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그 남자는 상대 여성에게 "다정하네" 하고 칭찬을 받았기 때문에 '호감을 주는 청년'인 나도 그와 같은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나는 맛도 느끼지 못하고, 영양분을 섭취할 필요도 없다. 식사에 흥미는 없었지만 아무튼 2인분의 요리를 먹었다. 

 

- "알고 계셨군요."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되도록이면 눈에 띄지 않게 한 점씩 한 점씩 그녀의 접시에서 가져왔는데, 역시 부자연스러웠던가 보다. 

"초면의 남녀가 음식을 같이 먹겠냐고."

에이이치의 주장을 듣다 보니 혹시 그가 나에게 질투를 하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마유코가 나에게 음식을 양보했기 때문에 내게 불쾌한 감정을 안고 있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닭고기 허브구이를 어지간히도 좋아한다든가.

 

- "도대체 왜 이런 일이" 하며 그녀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세상이란 참 불합리하지요." 재치가 있는 말인듯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표현하고 있지 않은 대사를 읊어본다. 이런 공허한 말이 때때로 막간을 채워주기도 한다. 인간이 즐겨 쓰는 수법이다. 

"왜 우리만 이런 일을 당하는 걸까요?"

"우리만?" 마음에 걸렸다.

 

- 나는 이제 막 찾아온 이 남자를 보고 있었다. 잠시 뒤 남자도 고개를 갸웃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친한 척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렇군, 하고 나는 생각한다. 

그도 나의 동료다. 

 

- 조사부에도 별의별 담당자가 있다. 나처럼 대상에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차피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면 그때까지만이라도 상대를 행복하게 해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연애 감정을 이용한 접촉을 하기도 하고, 물질적인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이도 적지 않다. 

 

- "꽤 자세히 아는군."

"정보부에 문의했지" 하고 말한 뒤 그는 그 두꺼운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그 녀석들은 안 물어보면 안 가르쳐주니까."

"지당하신 말씀." 나도 그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 "정보부 놈들의 그 불친절과 뻔뻔스러움이라니, 인간하고 닮지 않았나?" 

 "그것 역시 지당하신 말씀이야." 나는 다시 한번 수긍한다. 

 

- 오늘 아침 정보부에 문의한 결과 몇 가지 사실을 간단히 알 수 있었다. 언제든 정보는 간단히 손에 넣을 수 있다. 이쪽에서 물어보면 말이다. 

 

- 내 처지에서 말하자면 살아남은 이 세 사람만 해도, 이르든 늦든 언젠가는 죽게 되어 있기 때문에 큰 차이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란 종족은 언제나 자신의 죽음은 제쳐놓는다. 

 

- 이런 이유로 다무라 미키오의 죽음은 거슬러 올라가 보면 내가 발단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가'의 결과가 나와 있었기 때문에, 내가 연루되지 않았더라도 틀림없이 다른 사인에 의해 죽었을 것이다. 

 

- 별장의 문을 열고 나는 밖으로 나왔다. 강풍은 흔적도 없이 정적만이 번져가고 있다. 하늘은 언제나처럼 구름장으로 덮여 있지만, 이미 눈발은 약해져 있다. 눈앞에 펼쳐지는 눈 쌓인 광경이 하얀 이불처럼 보였다. 지면은 마치 도자기와 같은 우아한 곡선을 그리고 있다. 바람이 불었는지 자작나무 가지에서 팔랑팔랑 눈이 흩날리며 지면으로 떨어져 녹는다. 그 설경이 서로 속삭이는 듯한 소리와 움직임을 나는 하릴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답군" 하고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말한다. 음악을 듣는 시간은 부족했지만 이 광경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 <사신의 탐정소설 : 산장 살인사건>

 

 

- 여드레째, 나는 오기와라가 피를 흘리며 무사히 죽는 것을 확인한다. 무사히 죽는다, 라니 묘한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그렇다. 

 

- "괜찮아."

"하지만 왜." 오기와라가 느닷없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영락없이 '왜 내가 죽어야만 합니까?'라는 말이 이어질 줄로만 알았다. 인간이 마지막 순간에 반드시 내뱉는 말은 늘 그 한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짐작과 달리 오기와라는 고통스러운 듯 신음하더니 "왜 그 남자가 이 맨션을 찾아왔을까요?"하고 말했다. 

 

- "그야 아무려면 어때."

오기와라는 자신의 배를 누르며 빠르게 눈을 깜박거리더니 "하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하고 말했다. 그의 눈앞에 고인 피가 그의 숨결에 흔들렸다. 

"좋았어요."

 

-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오기와라에게 드맑은 기운이 감돌고 있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그를 조사했던 어제까지의 일주일간이 머릿속에 되살아난다. 

 

- "고급 브랜드 옷을 살 기회가 좀처럼 없었던지 '지금 열심히 고민하고 있으니까, 멀리서 지켜봐 주세요' 같은 말을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다른 작업을 하면서 그녀를 힐끔힐끔 보다가, 괜찮은 분위기의 여자라고 생각했지요."

"뭐가 괜찮았는데?"

"외모는 꽤 수수했지만 그렇다고 찌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거든요. 찌들지도 않고, 스스로에 도취되지도 않은 것 같은 모습이 괜찮은 것 같았죠."

 

- 다음날 아침에도 나는 타이밍을 맞춰 맨션 1층에서 오기와라와 맞닥뜨렸다. 비가 내리고는 있지만 가랑비라 회색빛 아스팔트를 젖은 쪽빛으로 만드는 정도였다. 

 

- "저기, 이제 그만해 주세요." 후루카와 아사미는 시선을 딴 쪽에 두었지만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예?"

"전화라든가, 그런 거 그쯤 해주시지 않을래요?" 용기를 짜내고 결의를 다져 대단한 각오로 말을 꺼냈는지 그녀는 춥지도 않을 텐데 몸을 떨었다. 

 

- "협박이든 뭐든 그네들은 신경 쓰지 않아. 애당초 한 번 거절했는데 다시 전화를 하는 건 법으로 금지되어 있어. 재권유의 금지 말이야."

어째서 내가, 인간에게 법률에 대해 가르쳐줘야 하는 건가. 

"하지만 그들은 그런 일에 신경도 쓰지 않아. 법률위반인데 어쩌라고, 하는 배짱 튕기는 태도로 일을 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가장 좋은 방법은 전화를 끊고 나서 얼마간 전화선을 뽑아두는 거야."

 

- "싫다니, 뭐가?"

"전에도 말했지만 외모로 판단하는 거 말이에요."

"그 말은 자신의 외모가 꽤 괜찮다는 걸 자각하고 있다는 소리잖아."

"자각이랄까, 아니 뭐, 경험상." 오기와라가 어물어물 말을 흐린다. 그러고는 "아무튼" 하고 목소리에 힘을 줬다. "아무튼 싫습니다. 스물세 살이 되어 처음 깨달았어요. 지금까지 사귄 여자들은 모두 저의 외모가 마음에 들었을 뿐이라고."

"좋은 일 아닌가."

"하지만 그건 본질이 아니에요."

"외모도 본질이잖아." 점장은 쌀쌀맞게 대꾸한다. "그건 단순한 고집이야. 변덕이라고 할 수도 있고. 그래서 안경을 쓰는 거야? 외모를 일부러 촌스럽게 만들고 싶어서?"

 

- 같은 건물 주민들도 몰려들어서 "어머나"라든가 "무섭네요"라든가, "감시카메라를 달아야 하는 거 아닌가" 같은 억측이나 즉흥적인 생각을 한 마디씩 던졌지만 한 시간쯤 지나자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저마다 불안이나 공포를 느끼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방책이 떠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들은 항상 이렇다. 

 

- "저도 어제 손에 넣었습니다."

"어머." 후루카와 아사미가 길게 말을 끌었다. 

"그랬군요."

 

-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군." 딱히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런 것 같네요" 하며 오기와라가 배시시 웃었다. 안경을 쓰고 있기 때문에 파악할 수는 없지만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후루카와 아사미도 비슷한 표정으로 "그렇군요" 하며 웃는다. 두 사람 다 손에 넣었다니, 이 표는 정말로 구하기 힘든 것인가? 나는 그게 더 궁금했다. 

 

- 그때 내 전화가 울렸다. 업무용 전화다. 전화를 받는 것과 동시에 "어떤가?" 하고 물어왔다.

"조사는 끝났네" 하고 나는 답한다. "'가'야."

"뭐, 그럴 테지" 하고 상대가 말한다.

"제대로 조사한 결과네."

"다들 그렇게 말하지."

 

- "하지만 암으로 죽는 것보다는 이렇게 좋아하는 여자를 위해 죽는 편이 잘 된 거예요." 끊길 듯 말 듯, 그는 그렇게 말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인간은 모두 죽어."

"죽고 싶지는 않지만, 하지만 어차피 죽을 거라면." 그의 눈은 초점을 잃었다. "최선은 아니지만, 최악도 아니야."

 

- 나는 일어서서 오기와라를 바라봤다. 그는 이미 암에 걸려 있었다는 말인가. '덧칠'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그가 암으로 죽기 전에, 우리 사신이 멋대로 다른 죽음을 두 겹으로 덮어씌워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병사나 자살에는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일이기는 하다. 

 

- "아아, 이거요. 바흐의 곡이에요." 그녀는 곧바로 대답했다.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지요. 그 곡의 첫 부분을 참 좋아해요."

오호, 하고 나는 다시금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오기와라도 그렇게 말했지."

"그래요?" 그녀는 기뻐 보였다. "우아하고, 애잔하고, 신기한 느낌이 들어요."

"산들바람이라고 폭풍이라고도 할 수 없는 느낌?"

"그렇네요."

"오기와라도 그렇게 말했어."

"정말이에요?" 그녀는 그 자리에서 날아오를 기세다. 그러고는 "저" 하고 말했다. "저 자신과 다른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하거나 같은 말을 한다는 거, 무척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 <사신의 로맨스 : 연애 상담사 치바>

 

 

- "무서워" 하고 나는 거짓말을 한다. 솔직히 말하면 라디오에서 흐르는 음악이 모리오카의 목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을까 봐 더 무섭다.

 

- "이 차, 영화에서 본 적이 있어. 한 번 타보고 싶었다구." 그러고 나서 모리오카는 쑥스러운 듯 눈을 피했다.

"죽기 전에?" 나는 사신답게 질문한다.

허를 찔린 듯한 모습이긴 했지만 그도 "어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죽기 전에 한번 타보고 싶었어." 

 

- "계속 가. 당신한테도 일정이 있겠지만 운이 나빴다 생각하고 단념해."

운이 나쁜 것은 사신에게 선택당한 네 쪽이 아닐까, 하고 가르쳐주고 싶었다. 

 

- "몇 살?"

"서른." 이번에 나는 서른 살의 회사원이다. 짙은 남빛 양복을 입은 적당한 몸집에 보통 키로 지극히 평범한 회사원이라는 설정이었다. 

 

- "요 십 년 동안 뭔가 의미 있는 일이 있었어?"

나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앞으로 십 년을 살면 당신 나이가 되잖아. 뭔가 좋은 일이 있었어?"

 

- "딱히 없는데." 나도 인간이 십 년 동안 얼마만큼의 경험을 하는지는 대강 상상할 수 있었다. "군살이 늘었을 뿐이야."

"그치." 모리오카는 안심한 듯 "그럼, 변하지 않겠네."

"변하지 않아?"

"내 인생이 여기서 끝나버린다 해도."

"끝나나?" 죽음을 예감하고 있나 싶어서 나는 순간 덜컥했다.

"체포되면 끝이잖아. 1막의 끝. 그런데 십 년 연장한다고 해서 인생에 의미가 있는 건 아니잖아."

 

 

-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의 대부분은 인생이 아니라 단순한 시간이야."

"무슨 소리야 그게."

"예전에 내가 일 때문에 만난 남자가 그렇게 말했지."

그게 아마, 이천 년 전쯤에 살았던 사상가였을 것이다. 

 

- "재미있네." 모리오카는 그때 처음으로 이를 보이며 웃었다.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그렇지. 내가 찌른 그 녀석만 해도 변변찮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거지. 인생이 아니라, 그건 단순한 시간이야."

 

- "굉장한 이야기 하나 해줄까?" 교차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모리오카가 말했다. 

"그래 한번 해봐"

"저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데, 그중에 사람을 죽인 적이 있는 놈은 하나도 없다. 굉장하지?" 자신의 절망감과 고독을 그런 식으로 뻗대며 토로하는 것만 같았다.

"내가 훨씬 굉장한 사실을 가르쳐주지." 나는 말했다.

"시끄러워!"

"저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데 인간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놈은 아마 한 명도 없을걸."

"바보 아냐? 다들 고민천지라고."

"자신에 대한 고민뿐이지. 인간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게 아니야." 

 

-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될까?"

"뭘요?" 스프레이를 든 채 곧은 자세로 서 있는 그는 위압적이지는 않았지만, 드레져 보였다. 설령 내가 "사신이다" 하고 신분을 밝히더라도, "그럴 줄 알았어" 하고 대꾸할 것 같은 차분한 기운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 "왜 인간은 인간을 죽이지?"

순간 그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을 다물었다. 주차장 옆에 선 가로등이 전기를 흩뿌리며 떠는 듯한 소리를 내더니 깜빡깜빡했다. 그는 아주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왜 나한테 그런 질문을?"이라고 물었다.

"마침 자네가 거기에 서 있었기 때문이지. 다른 인간이 거기에 있었다면 그 녀석한테 물어봤겠지. 궁금한 질문이 있었는데 마침 자네가 서 있었다는 얘기야." 

 

- 청년은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나를 상대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는 "원망이나 분노, 계산, 사람을 죽이는 이유는 그런 것들이 아닐까요?" 하고 말했다. 

"계산?"

"저 놈만 없다면 내 인생이 편해질 텐데, 같은 계산요. 금전적인 면, 정신적인 면에서 이해손실을 계산하는 거죠."

"인간은 곧잘 계산 착오를 해."

"맞아요. 그 말 그대로예요" 하고 청년이 이를 보이며 웃었다. 

 

- "설마."

"거짓말이 아니야. 그 녀석은 어제 사람을 죽이고 도망치고 있는데, 기본적으로는 태연자약해. 왜 그렇지?"

"나한테 묻는다고 알까요." 청년은 스프레이 캔을 든 오른손에서 집게손가락만 펼쳐 옆머리를 매만지더니 오른쪽 벽에 시선을 줬다. 이 녀석한테 물어보라는 듯 'GOD' 낙서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 그와는 얼마간 잡담을 나눴다.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가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했고, 기묘한 모기 이야기라든가 철학자가 남긴 말 등, 화제는 끊이질 않았다. 그때 등 뒤에서 자갈을 밟는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 "글쎄요." 청년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후회할 정도라면 죽여서는 안 된다고는 생각해요." 

청년의 말에는 자신의 결의를 나타내는 듯한 뉘앙스도 있었다. 

 

- 잠시 동안 우리는 우리 외의 누군가가 발언하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잠자코 있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도, 처음에는 바람이 불었나 생각했을 정도이다. 

 

- "오이라세 계류(溪流)." 그는 조금 웃었다.

"알고 있어?"

"도와다 호수에서 시작되는 계류인데 아름다워요. 딱 한 번 보러 갔는데 무척 좋았죠. 도와다 호수와 오이라세는 안심할 수 있어요."

"안심?"

"자주 생각하는 거지만, 동물과는 다른 인간만이 가진 고통스러운 일 중 하나는 환멸이 아닐까요."

"환멸?"

"의지하던 사람이 사실은 겁쟁이였다든가, 믿고 있던 영웅이 실은 담합에 능통한 교활한 사람이었다든가, 같은 편이 적이었다든가. 그런 일들에 인간은 환멸을 느껴요. 그리고 고통스러워하죠. 동물이라면 아마 다르겠죠."

"그것과 호수가 무슨 관계가 있지?"

"그 넓은 호수라든가, 아름다운 오이라세의 계류는 절대로 나를 배신하지 않아요. 환멸을 느끼게 하지 않아요. 그렇게 확신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안심했죠."

 

-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이 녀석도 그곳에 가고 싶어 하는 건가? 안심하고 싶어서?" 하며 트렁크를 두드렸다.

"글쎄요,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어쩌면 그만의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도 모르죠. 그것을 완수하지 않으면 죽어도 죽을 수 없는, 그로서는 그런 게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 "죽어도 죽을 수 없다." 사신인 내 처지에서 보자면, 죽으면 죽게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표현은 이상했다. 

"나한테도 있어요.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나는 언제까지고 청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트렁크를 좀 열어주겠나?"하고 부탁했다.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네" 하고 청년은 웃으며 트렁크를 열었다.

 

- 교차로를 두 개 정도 지났을 무렵, "너한테 어떤 사건이 있었던 거야?" 하고 나는 물어보았다. 

 

- 어젯밤에 낙서를 하던 청년의 말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는 트렁크 안에서 떨고 있는 모리오카를 내려다본 뒤 "뭔가 끔찍한 기억이라도 있는 건가"하고 중얼거렸다. 딱 그때만 비구름이 싹 걷히더니 달이 잠깐 얼굴을 내밀고 트렁크에 빛을 비추었기 때문에, "아, 정답입니다!" 하고 알려주는 듯했다. 

 

- "이 근처가 관광지인가?"

"츄손사 같은 거겠지" 흥미 없다는 듯 모리오카가 말했다. 

"절이라. 들렀다 갈까?" 하고 묻자, 모리오카는 당장에 "뭐야, 당신. 장난치는 거야?" 하고 성을 냈다. "그럴 여유는 없다니까."

"그런가."

"아, 하지만 마에사와 소고기 먹자. 마에사와 소고기."

(리뷰자 주 : 주손지(中尊寺).)

 

- 나와 마찬가지로 그도 비에 젖어 있었는데, 젖은 옷과 맨살이 닿는 게 싫었는지 어색하게 움직이고 있다. 시트도 꽤 축축해져 있었다.

 

- "예전의 자신을 떠올렸나?"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었기 때문에 다시 엑셀러레이터를 밟는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2시가 다 됐다. 

"몰라."

"왜 인간은 자신에 대해 모르지?"

"시끄러워!" 모리오카는 귀찮다는 듯 말하더니 자신의 왼쪽에 있는 창을 가만히 보다가, 비 때문에 흐릿해진 부분을 셔츠 소매로 닦았다.  

 

- "산이 안 보이네."

"네가 가는 곳은 호수 아니었나?"

"이와테 산이 가까이 있을 거란 말이야. 그런데 비 때문에 전혀 안 보여."

"갈까?"

"어?"

"어차피 마지막이잖아. 가고 싶은 곳에는 들렀다 가는 게 좋지 않을까."

 

- 모리오카는 즉시 대답하지는 않았다. 이 시점에 다른 곳에 들렀다 갈 필요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 하지만 그는 이대로 곧장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기도 하다. 호수가 무섭든지, 후카츠와 만나는 것이 무섭든지, 아니면 여행이 끝나는 것이 무섭든지.

"어느 쪽이든 간에 두려워하고 있어."

나는 무심코 소리 내어 말했다. 

 

- <사신의 로드무비 : 살인 용의자와 동행하다>

 

 

- "일흔 살로는 안 보이세요." 진심이었다. 백발과 주름은 있지만 그리 늙어 보이지는 않았고, 머리 회전도 빠르다.

"인간은 말이죠.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크게 성장하지 않는다구요."

"동감입니다."

 

- 노파는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며 일어선 채 나를 살피듯 한동안 보고 있었다. 카메라맨이 모델을 앞에 두고 구도를 잡는 듯한 동작이다. 천천히 "당신, 그거?" 하고 말했다. "당신, 내가 죽는 걸 보러 온 거죠?"

"오호."

"난 말이죠, 무슨 이유에선지 주위 사람들을 먼저 보내는 일이 많아서 말이죠."

"오호."

"예를 들면 아버지는 내가 10대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하며 그녀는 엄지손가락을 접고, "그리고 20대 때엔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사람이 죽어버렸고..." 하며 집게손가락을 접었다.

 

- "힘들지 않았어요?"

"힘들지 않았을 리 있나요." 노파는 자신의 실패담이라도 이야기하는 듯했다. "지금이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충격이 굉장했어요."

그 경쾌한 말씨가 나에게는 신선하게 다가온다. 

 

- "충격이 너무 큰 나머지 나 자신이 죽은 것만 같았죠. 하지만 그것도 오십 년 전의 일이에요. 더 이상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주제에, 그 뒤로 오십 년이나 더 산 거죠."

노파는 무엇이 재미있는지 쿡쿡하며 웃었다.

"서른에는 결혼도 했고."

 

- "과연." 나는 조용히 끄덕였다. "확실히, 너무 치우쳤군요."

"재미있는 표현을 하네요." 그녀가 웃는다. "치우쳤다, 그렇군요. 좋은 표현일지도 모르겠어. 너무 치우쳤죠. 다들 사고 같은 걸로 내 주위에서 사라져 버리고. 나보다 젊은 아들까지."

 

- 기본적으로 인간이 사고나 사건에 휘말려 죽는 것은 사신이 그것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우리 같은 조사 담당자가 그 선택된 인간을 조사하고, 그런 다음 '가'라고 보고를 하면 그 죽음이 실행된다. 나는 사실 어떠한 조건으로 그 대상이 결정되는지는 몰랐다. 물론 알고 싶어 한 적도 없지만, 왠지 그녀 주변의 인간들은 너무 불공평하게 선택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 "낯이 익어요?"

"죽음의 예감이라고 하나? 시시한 표현이지만."

그러고는 노파가 젊은 여성처럼 웃는 바람에 나는 또 그녀의 나이가 헷갈린다. 

"아버지라든가, 남편이나 아들이 죽었을 때 느낀 공기와 당신 주위의 공기가 비슷해요. 내 주위에 사람이 죽을 때는 대부분 당신 같은 사람이 나타났던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예리하군요."

 

- 지당하신 말씀이다. 그들이 죽기 일주일 전에 내 동료들이 파견되어 조사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나죠?"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서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마음을 떠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절실함이 어린 눈빛이다.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듯한 눈동자다. 

 

- "나는 그전부터 왔어." 소년이 자랑스럽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한다. 인간이란 어째서 이렇게도 하잘것없는 것에서 차이를 찾아내고 우월감을 느끼려 하는지, 하고 나는 생각한다. 어릴 적부터 이런 지경이니 구제할 도리가 없다. 

 

- "우리 친척 중에 무척 불행한 일을 연거푸 당한 사람이 있었거든요."

"불행?"

"환갑이 지난 숙부였는데 말이죠. 운영하던 회사는 망했지, 손자는 소년원에 들어갔지, 엎친 데 덮친다고 부인은 차 사고를 일으키고. 그래서 말이죠. 전에 여기서 머리를 자를 때, '이렇게 불행한 인생, 참 싫다'고 말을 했죠. 그에 비하면 으리으리한 집에 살면서 아들 둘을 의사로 키운 다른 숙부 쪽이 행복하다고 말이죠. 그랬더니 니타 할머니가 뭐라고 말했을 것 같아요?"

"글쎄요."

"'그 사람들이 죽었나?'하고 말했어요."

 

- 듣고 있던 노파가 가위를 움직이면서 작게 웃었다.

"행복할지 불행할지는 죽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라고."

"살아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니까." 노파가 절실하게, 하지만 엄숙하지는 않게 말했다.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어. 관 뚜껑이 덮이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정말 모르니까."

 

-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고 말아요." 다케코가 개를 쓰다듬는다. "실제로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던 숙부도 지금은 부인이 신흥종교에 미쳐서 빚을 지고 있는 모양이고. 무적의 정치가가 늙자 증인으로 소환당하기도 하고. 유명한 스포츠 선수가 큰 사건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있자면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죽기 전까지는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 "그건 이런 건가." 나는 그때 무언가 적절한 대답을 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하고, 아주 오래전에 담당했던 야구선수를 떠올렸다. "'야구는 9회 말까지 해봐야 안다'는 말과 같은 건가?"

"아아, 비슷할지도." 노파가 유쾌한 듯 대답한다.

"비슷하지 않아요. 조금 달라요." 다케코가 고개를 갸웃했다.

"게임셋!"하고 소년이 의미도 없이 소리를 지르며 혼자 즐거워하고 있다. 

 

- "내기 해볼래요?"

"내기요? 무슨?"

"날씨가 갰는지 아닌지. 비가 그쳤는지 아닌지."

노파는 오른팔을 뻗어 창을 가리켰다. 아직 커튼이 닫혀 있어 밖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하지만 나는 열지 않아도 답을 알고 있다. 

"그쳤을 리가 없어요."

 

- "그럼, 내기할까요. 나는 갰을 거라고 생각해요."

"왜 그렇게 생각하죠?"

"오늘은 맑아도 좋을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근거가 없어요."

"그럼 내기해요."

 

- 그러자, 말이다.

"그것 봐요." 돌아보는 노파의 건너편으로 내가 처음 보는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다. 

 

- 나는 바다를 마주하고 앞을 바라보며 감탄의 소리를 냈다. "파랗다!" 나는 머리 위를 올려다본다. 티 하나 없는 푸른색이 온통 펼쳐져 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다. "넓어."

그녀는 내 옆에 서서 웃음을 참고 있었다. "찌를 듯이 파란 하늘이란 말은 참 좋은 표현이지요" 하며 팔짱을 낀다. "누가 제일 처음 말했을까."

 

-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내가 녹아들 것만 같아요." 나는 광활한 푸르름에 넋을 잃고 말았다. 깊게도 얕게도 보이는, 끝도 없이 펼쳐진 이 창공과 눈앞에서 흔들리는 바다가 뒤엉켜 나 자신을 삼키러 오는 듯한 힘을 느꼈다. 원근감이 없다.

"예쁘죠?"

 

- 나는 꼼짝 않고 서서 하늘을 담으려는 듯 눈을 감는다.

"당신도 그런 걸 아네요?" 노파는 비꼬는 것 같지는 않았다. 

 

- 몇십 년인가 전에 내가 조사를 했던 남자 하나가 부티크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때의 일을 기억해 냈다.

"계속 가지고 있었던 건가요?"

"마음에 들었으니까."

 

- "왜 웃는 거죠?"

그녀는 천천히 내 쪽으로 시선을 옮기더니 다소 당황한 듯, "눈부시다고요, 태양이" 하고 대답했다. 듣고 보니 햇살이 오른쪽에서 쏟아지고 잇다.

"그렇군요." 나는 하나 배웠다는 생각을 한다. "인간이란, 눈부실 때와 웃을 때 닮은 표정을 짓는군요."

 

- 노파는 한순간 멀거니 있었지만 곧바로 "그렇네요"라고 대답했다. "듣고 보니 속사정도 닮은 것 같기도..."

"속사정?"

"눈부신 거랑 기쁜 거랑 닮았는지도."

"무슨 소리예요, 그건?" 노파가 하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눈이 부시네." 노파가 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들려왔다. 

 

 

- <사신의 하트워밍 스토리 : 치바 vs. 노파>

 

    

 

 

 

 
사신 치바
2004년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한 차세대 일본 작가 이사카 코타로의 대표작. 무뚝뚝한 척하면서도 다정한 사신 치바를 주인공으로 한 이 소설을 통해 작가는 사신에 대한 고정관념과 죽음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으며, 죽음을 통해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사고사'로 결정된 사람 앞에 어느 날 갑자기 불쑥 나타나는 사신 치바. 그의 임무는 일주일 동안 그 사람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사신을 만나고 8일째 되는 날 죽음을 맞아야 하는 '가'와 자신의 수명을 다하는 '보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코믹한 웃음과 추리소설 같은 미스터리, 가슴 떨리는 로맨스, 그리고 눈물 나는 감동까지 여섯 가지 다양한 스타일의 사신 치바의 이야기가 버무려져 있다. 무뚝뚝하면서도 유머러스하고 시종일관 사람에 대한 호기심을 숨기고 있는, 그래서 왠지 정이 가고 관심이 가고, 결국에는 의지하고 싶은 사신 치바를 통해 작가는 삶이 힘들어도 왜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 때로는 사는 것보다 멋있는 죽음도 있다는 것을 재치있는 입담으로 들려주고 있다.
저자
이사카 코타로
출판
웅진지식하우스
출판일
2006.05.25

 

 

"내기 해볼래요?"

"내기요? 무슨?"

"날씨가 갰는지 아닌지. 비가 그쳤는지 아닌지."



돌아보는 노파의 건너편으로 내가 처음 보는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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