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이사카 고타로 / 김소영
출판 : 웅진지식하우스
출간 : 2014.07.28
줄거리 자체는 어둡다고 볼 수 있지만, 주요 등장인물인 치바가 구사하는 독특한 화법 덕에 무척 즐겁게 읽었다.
<사신의 7일>은 치바와 야마노베 부부가 함께 한 일주일을 각자의 시선에서 보여준다. 치바의 시선으로만 전개되었던 <사신 치바>와는 조금 다른 방식이었는데, 관점을 옮김으로써 새롭게 나타나는 부분들도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호였다.
저자는 본문 중에 등장하는 다양한 가치관들 중 어느 한쪽의 손도 들지 않는다. 그저 매번 달라지는 시점을 따라 보여주기만 할 뿐이다. 독자는 저도 모르게 이 편과 저 편 모두에 감정을 이입하기도 하고, 혹은 모두에 분개하기도 한다. 이해가 되는 즐거움, 이해가 되지 않는 즐거움 모두가 존재한다.
결국 모든 것은 한바탕 꿈일 뿐이라면 가장 '자기답게'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게 공동체를 해칠 정도라면 모두를 위해 '제거'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그 기준과 규칙은 누가, 어떻게 정하는가.
'관용'은, '불관용'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정신없이 펼쳐지는 상황을 통해 주어지는 질문들. 등장인물들은 저마다의 답을 가지고 그 상황에 대처한다. 그 답들은 일관적일 때도 있고 모순적일 때도 있다. 심지어 치바조차 자가당착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완벽은 없다.
하지만 잠시 잠깐 찾아오는 '평화'를 통해 '불일치'가 없는 찰나를 감각할 수는 있다.
끝없이 반복되는 허무인가, 방향성을 가진 진동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어떠한가"가 아닐까.
옳은 것, 마땅한 것, 인간이라면 그래야 하는 것 같은 통념에서 잠시 벗어나 '지금 내가 느끼는 바'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타인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으로부터도 벗어날 필요가 있다.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나' 뿐이다.
카르페디엠.
즐겁게 읽었다.
인간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 파스칼 -
- 여태가지 내가 직업상 친분을 다져온 사람들은 문예편집자든 방송국 사람이든, 열정에 강약은 있을지언정 어떤 식으로든 소설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사건기자들은 전혀 딴판이었다.
- '사건을 쫓는 언론'에 포함되는 사람들 중에도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 당연한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이를테면 취재를 요청했던 사람들 중에는 하나뿐인 딸을 잃은 부모를 취재한다는 사실에 전혀 거리낌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 또한 각양각색이었다. '슬픔에 젖은 부모한테서 무리하게 말을 쥐어 짜내는 일'에도 의미가 있어 사건 해결에 보탬이 될 것이라는 신념으로 취재하는 자도 있는가 하면, 가증스러운 범인을 향한 분노가 너무 큰 나머지 피해자를 배려하는 마음이 소홀해졌을 뿐인 자도 있었다. 사건이야 뭐 어떻게 돌아가건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내는 것이 선이라고 확신하는 자도 있고, 타사를 앞질러 실적을 올리려고 안달인 자도 있었다. 그들은 타인의 비통한 표정에 동요하는 법도 없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직업이 작가인 데다 방송에도 자주 나오셨으니 엄연한 공인입니다. 그러니 어느 정도는 취재 대상이 될 수밖에 없어요. 알 권리가 있으니까요. 야마노베 씨의 발언이 사건 해결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 악의는 없다. 그들은 그들의 생각대로 행동하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그들에겐 이런 일은 처음도 아니다. '슬픔에 젖은 공인한테서 억지로 말을 끌어내는 일' 정도야 밥 먹듯 하는 일이다.
- 반면 아내 미키와 나는 초보였다. 딸을 잃는 지독한 아픔을 맛보고 제 피부 안쪽이 바깥으로 까뒤집히는 듯한 상실감에 고통받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 우리는 그저 방어에만 급급해서 죽을 둥 살 둥 수비태세만 갖출 뿐이었다.
- "공인이라지만 가해자라면 또 모를까, 피해자잖아요"라며 마음 아프다는 얼굴로 돌아가는 자도 있는가 하면, 내 아내를 위로해 주고 다른 기자들에게 "취재는 이쯤 해둡시다"라며 호소해 준 자도 있었다. '언론'이라고 한데 싸잡아버리면 채플린이 말했듯 그들은 '군중이라는 이름의, 머리를 잃은 괴물'이었지만, 한 명씩 따로 떼어놓고 보면 성격도 방침도 집착하는 것도 마음이 흔들리는 방식도 다 달랐다.
- 요컨대 그들이 우리에게 집착한 첫 번째 이유는 '실은 작가인 아버지가 범인이 아닐까?' 하는 점에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야 그걸 깨달았다.
- 나는 이해한다고 했다. "아마, 정말로 부모가 범인인 경우가 제법 있기 때문이겠지."
- "미국 사람 스물다섯 명 중 한 명은 양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 들어본 적 있어?"
- 그들은 겉으로 볼 때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고 지극히 평범한 부모이며, 동물을 키우거나 훌륭한 지위를 갖고 생활한다. 성공한 경우도 많다. 그런데 타인에 공감하는 일은 없으며 사회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도 희박하다. 양심이란 걸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이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한다.
- 재미도 없는 중상모략을 퍼붓거나 부재중 음성메시지에 악의로 칠갑한 말을 남기는 자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공격들에 가슴 아파하고 정신이 좀먹어 들어가는 걸 느끼면서도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 우리에게는, 그들 구경꿈들은 꿈에도 감지하지 못할 길이 똑똑히 보였다. 우리는 그들이 북 치고 장구 치며 구경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던지는 악의를 용서할 수 있었다.
- "있잖아." 어느새 거실 창가로 이동한 미키는 커튼을 쥐고 있다. "우리, 감당할 수 있을까."
감당할 수 있을지, 나도 궁금했다. 미키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래도 뭐." 그러더니 이 문제는 이미 다 해결 봤다는 듯 발랄하게 말했다.
"만만하지 뭐."
- 무슨 뜻인지 나는 이해할 수 있다. 딸이 살해됐다는 분노에 비하면 세상 대부분의 일들은 사소하게 느껴진다.
- 내 머리에는 다른 말이 스친다. '관용은' 하고 입을 열고 싶어 진다. '관용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불관용에 불관용해야 하는가.' 문학자 와타나베 가즈오, '와타나베 선생'의 문장이다.
- 그 자체는 그리 이상할 게 없지만 타고 있는 사람이 삼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양복 입은 남자인 데다 등을 예의 바른 어린이처럼 똑바로 펴고 있는 게 좀 희한하게 보였다. 자전거를 이제 막 배웠거나, 교과서대로 모범 연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 그는 결국 거래 직후에 폭발로 사망했는데 살아 있을 때 곧잘 "무기를 안 팔면 전쟁이 사라질지도 모르는데" 하고 자조하듯 말했다.
"무기가 없어도 사람들은 싸울걸." 내 말에 그가 조금 안도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 "넌 충치가 생긴 환자가 올 때마다 안 됐다고 생각하나?"
으음, 하고 그녀는 약간 고민했다. "환자분의 충치를 보면 '큰일이네'라곤 생각하지만 안 됐다는 생각은 안 해본 것 같은데. 물론 엄청난 충치를 보고 '좋았어, 해보자!' 하면서 의욕에 넘치는 경우도 없지만요. 이건 어디까지나 일이에요. 필요한 건 기술과 지식이죠."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나도 비슷하다. 인간의 죽음과 마주칠 때마다 큰일이라는 생각은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동정심이 든다거나 섭섭한 마음이 생기지는 않는다. 치과의사가 긁어낸 충치에 대해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내가 담당한 인간을 조사하고 죽을 때가 됐는지 아닌지를 보고한다.
왜냐.
일이기 때문이다.
- "그건 또 무슨 지시야. 어째서 그 인간을 살려줘야 하지? 특별한 인간인가?" 그렇게 묻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특별한 인간' 같은 건 본 적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특별한 인간 같은 건 없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 "그 인간이 뭐가 어떻다는 건 아니야. 그냥 원한다면 오래오래 살게 해 줘도 된다는 거지."
"원한다면? 누가 원해. 그 인간이? 아니면 내가?"
"누구든."
- 대체 이게 다 무슨 소리야? 당황한 나는 강한 어조로 따지듯 말했다. 그러자 상대는 이야기할 대상을 잘못 골랐다는 듯 포기한 말투로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잊어버려. 치바는 본인 일만 하면 돼."
- 지금까지 내 경험에 따르면 인간의 본질은 다섯 살 무렵에서 거의 변화가 없다.
- 야마노베의 아내, 미키가 차를 내왔다. 그녀는 검은색 니트에 검은색 바지를 입고 있다. 작년에 죽은 딸을 위해 아직까지 상복을 입고 있는 것이리라. 사람의 죽음과 옷 색깔 사이에 특별한 관계는 없다. 검은색 옷을 입는다고 슬픔이 완화되는 것도 아니고, 화려한 의상을 입는다고 죽은 자가 상처를 입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걸 안다. 하지만 인간들의 그런 습성을 헐뜯을 생각은 없다. 그들은'과학'이나 '정보'를 중요시하는 반면 운수를 따지고 징크스에 집착하기도 하니까. 길일에 퇴원하려고 목매는 환자들이 넘쳐나는 바람에 빈 병실이 나지 않아 북새통인 현장을 보며 혀를 차는 데도 익숙해져 있다. 손(損) 없는 방위를 따지고 영험하다는 것을 중시하던 시절도 있었다. 꽤 오래전 이야기다.
- 눈의 흰자위가 심하게 충혈되어 있다. 수면 부족이든지, 흥분한 것이든지, 알레르기로 인한 염증이든지, 뭐 그런 것들 중 하나가 원인이리라.
- "거의 쉬는 날도 없이 연구와 실험을 하는지 낮이고 밤이고 회사에서 살다시피 한 사람이었거든요. 옛날 말로 일벌레인 사람이었는데."
"벌레라는 건지, 사람이라는 건지."
내 말에 야마노베는 한순간 얼어붙었다가 잠시 뒤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사람이군."
- "고대 로마의 시인이 한 말이에요. 그날을 잡아라. 아버지는 그 말에 따르고 있었어요."
(리뷰자 주 : 카르페디엠. Carpe diem.)
- 그날 야마노베는 세타가야의 고즈넉한 동네에 있는 자신의 단독주택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다음 날 미술사와 관련된 텔레비전 프로그램 녹화가 있어서 벼락치기 비슷한 지식 주입을 하고 있었다." 사건 후 야마노베가 유일하기 기고한 수기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딸의 인생이 어이없이 끝나려 하던 그때 나는 초보자를 위한 미학 책을 읽고 있었다."
- "지금이랑 같이 도시로 한번 나오게 되면 그 자극에 물들게 되니까."
- "무직이라고 했던가." 나는 정보부에서 들은 정보를 머릿속으로 더듬었다.
"무직." 야마노베는 감정을 억누르듯 중얼거렸다. "일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유복한 남자."
혼조 다카시가 십 대였던 때 집에 불이 나 관료였던 아버지와 투자회사를 운영하던 어머니가 사망했다. 그는 부모의 예금과 주식, 외화들을 물려받았고 그 뒤 하는 일 없이 우아하게 살고 있다. 정보부의 정보로는 그랬다.
- "야마노베 씨, 정의감에 불타는 사람이네요." 악의는 보이지 않았지만 어딘가 평범한 대화와는 다른 온도가 느껴져서 야마노베는 그저 무던한 인사나 하고 얼른 그 자리를 뜨려고 했다.
- "도스도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라는 작품 있잖아요." 혼조가 불쑥 말했다.
"아. 응, 있지."
"그걸 모티브로 해서 만든 영화 있잖아요? 흑백영화 <소매치기(1969년 프랑스의 로베르 브레송 감독 영화-옮긴이)>라고."
"모르겠는데."
"거기서 남자 주인공이 경찰한테 그러죠. '재능이 있는 우수한 사람이 불우한 경우, 범죄를 저지를 자유도 있습니다'라고."
"<죄와 벌>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이네. 우수한 사람은 범죄를 저질러도 되지 않느냐는 거."
"그래서 경찰이 '우수한 사람인지는 누가 결정하느냐?' 이렇게 물어요."
"난 그 영화를 몰라."
"주인공은 '본인입니다'라고 대답해요."
"본인이 정한다라. 인간은 자신한테 관대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영화 속에서도 경찰이 그렇게 말해요. 우수한 사람이냐 아니냐를 본인이 결정하다니, 하면서 어이없어하죠. 주인공은 이렇게 대답해요. '관대한 건 처음뿐입니다. 자중하겠습니다.'"
"대체 그게."
"멋지지 않나요? 그게 제가 꿈꾸는 이상이에요."
- "비정함 말이에요. 그 감독 영화는 전부 부조리한 비극이에요. 게다가 배우들은 모두 인형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그 부조리를 받아들이죠. 야마노베 씨, 왜 그렇다고 생각하세요?"
"왜 그럴까? 난 그 영화감독을 몰라서."
"분명 세상을 뒤덮고 있는 것, 인생의 본질이란 것은, 부조리한 불행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등장인물들이 그걸 담담히 받아들이는 게 아닐까요. 야마노베 씨가 10년 전에 발표한 단편 <식물>의 주인공도 그렇잖아요."
"그런 작품을 용케도 알고 있네."
"아주 좋아합니다. 은방울꽃에 독이 있다는 것도 제대로 적혀 있고."
"은방울꽃은 뿌리뿐만 아니라 꽃에도 맹독이 있지."
"그 주인공 화가한테 감정이입을 해버렸지 뭐예요. 식물을 소묘하는 일상을 보낸 뒤에 그 식물한테서 독을 채취하는 것을 묘사한 부분이 아주 통쾌했어요."
"통쾌하다는 감상이 맞는 건지 틀린 건지는 모르겠네만."
"그런가요."
- "독과 약은."
"종이 한 장 차이예요." 혼조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이야기했다. "해열제를 대량으로 섭취하면 체온이 내려가서 혈액순환에 심한 장애가 생겨요. 단순한 감기약도 부작용이 생기면 온몸이 화상을 입은 것 같은 상태가 돼서 실명 가능성도 전혀 없지 않죠. 게다가 야마노베 씨의 <식물>에도 적혀있는 것처럼 어느 원주민의 독화살 성분은 근육이완제 역할을 하기도 해요. 독이나 약이나 마찬가지예요."
- 그때 야마노베는 혼조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젊은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잡학다식에 연연하고 괜히 삐딱선 타는 스타일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았을까.
- "그걸 학교에."
"제출했어. <신(新) 딱딱산>이라는 이름으로. 독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 그림을 어설프게 잘 그린 바람에 약간 문제가 됐지. 그야말로 문제작이야." 야마노베는 쓴웃음을 지었다. "담임선생님은 아버지인 내가 작가라서 그런지 나쓰미의 창작물을 비평하는 데 좀 우유부단한 구석이 있었는데, 그래도 그때만큼은 '나쓰미한테 그런 무서운 내면이 있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된다'면서 상담전화를 했더라고."
"딸은 뭐라고 하던가요?"
"아주 태연하던데. '아빠 방에 독 책이 있는데 무섭고 재밌었단 말이야' 이러더군. 뭐, 아이들이 그렇지."
- 혼조는 그때 처음으로 흡족한 듯 이를 보였다. "하지만 댐에 독을 풀어도 나중에 정수장 같은 데서 다 제거가 되니까 괜찮았을지도 몰라요."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야마노베는 쓰게 웃었다. "내용이 거기까지 갔으면 더 난리 났을걸."
- 어느 대답이든 나로서는 '정보부가 가르쳐줬다'라는 대답밖에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화제를 돌리려고 "자식의 원수를 무찌르는 건 허락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나?"하고 되물었다.
"원수를 무찌르다니, 대체 어느 시대 표현이에요?" 미키가 말했다.
"부모나 큰아버지, 형이나 주군을 위한 것이라면 원수를 무찌르는 게 인정이 됐지. 하지만 자식이나 배우자를 위해 원수를 무찌르는 건 원수를 갚는 것으로 인정되지 못했어. 다시 말해서 단순한 살인죄였지."
"주군이라니. 치바 , 그거 에도시대나 그 비슷한 때 이야기죠?"
"그렇지."
- "어째서 자식을 위해 원수를 무찌르면 안 됐던 걸까." 미키가 말했다.
"필요 이상의 유혈사태는 피하고 싶었던 거겠지." 나는 그런 이야기를 주군이라 불리는 남자한테서 들은 적이 있다. "가능하면 원수를 무찌르는 일을 줄이는 게 성가신 일도 줄이는 거야."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죠." 야마노베가 말했다. "재판은 어디까지나 국가나 사회를 위한 거예요. 쓸데없는 유혈사태를 피하기 위한. 가족이 살해당한 사람이라면 누구도 재판 따위 원치 않아요. 그건 피해자 가족을 위한 게 아니에요."
- 내가 전에 담당했던 남자 중에 혼자서 원수를 무찌른 인간이 있었다. 부친이 살해됐는데, 에도시대이던 그 시절에는 그 절차가 아주 번거로웠다. 먼저 주군한테 원수를 무찔러도 된다는 면허장을 받고, 그다음 관청에 신고해서 장부에 기재를 해야 했다. 거기다 당사자인 원수를 발견한다 하더라도 관청에서 장부를 확인한 대음 허가를 해야만 겨우 무찌를 수 있었다. 그 남자의 경우 우연히 머물렀던 여관에서 원수와 딱 마주쳐 발작적으로 칼을 뽑아 살해했다. 긴급한 경우 사후에 장부 절차를 밟을 수도 있는 모양이었지만, 어쨌든 절차가 굉장히 복잡하고 까다로웠다. "이렇게 번거로워서야 원수고 뭐고 다 때려치울까 보다"라고 그 남자가 투덜댔던 걸 기억하고 있다.
- "무가제법도(일본어로 '부케쇼핫토'라 읽음-옮긴이), 처음 딱 들었을 때 모자라고 오해하진 않았어?" 나는 물었다. "난 그랬는데."
"예?" 야마노베 료가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실크해트(일본어로 '시루쿠 핫토'라 읽음-옮긴이) 같은 모자랑 비슷한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야마노베가 미키가 그렇게 말하더니 웃었다.
"그래." 당시에는 실크해트라고 부르는 모자는 없었지만.
"무가제 해트?"
"그래."
두 사람은 나를 동정하는 듯한 표정으로 웃는다. 항상, 이렇다.
- "비가 좀체 그칠 생각을 안 하네."
"그건 말 안 해줘도 알아." 내가 일을 할 때면 언제나 비가 내린다. 가랑비, 장맛비, 종류도 다양하다. 드물게 흐린 날씨로 끝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맑은 날씨에 눈부신 태양을 마주한 적은 없다. "기자들은 아직 있나?"
- "그런데 이틀 전에 지퍼에 씹혔을 때, 다음부터는 지퍼를 급하게 올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나?" 내 질문에 야마노베가 웃었다.
"치바 씨 말이 옳아요. 바로 그거죠. 인간에게는 학습능력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설마 똑같은 실수를 똑같은 장소에서 했을 줄이야. 저도 생각지도 못해서."
- "그러다 보니 저도 '여태 못 고치신 거예요?'라고 물어본 거예요. '이틀 전부터 여기 계시네요. 아직도 지퍼에 옷이 씹힌 상탠가요?'"
- "그건 아마, 미노와 씨가 기권한 걸걸.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서는 무해무익한 작품만 줄줄 써대는 작가한테 실망해서."
"말이 너무 심하다." 야마노베가 얼굴을 찌푸렸다. "하긴 미노와가 한번 포기한 것 같은 조로 말한 적은 있지."
"오."
"'건성건성 날림으로 쓴 원고 읽고 시력이 나빠져도 산재 처리는 안 해주겠죠'라고 했던가."
야마노베의 말에 미키가 눈웃음을 지었다. "미노와 씨도 그런 말을 다 할 줄 아네."
"어지간히 용납이 안 됐나 보지."
- "글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아이들이란 늘 끊임없이 친구와 자신의 차이에 신경 쓰면서 우위에 서려고 하는 존재인지도 몰라. 온순하고 맞받아칠 줄 모르는 아이는 표적이 되고."
- "그렇다고 맞받아치면 괜찮은가 하면 그렇지도 않아요. 왕따 당하지 않으려고 격투기를 배운다면 경계 대상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해도 어느 날 '쟤는 건방져' 하면서 우르르 덮칠 수도 있어요. 모난 돌이 정 맞는다잖아요."
- "미키의 계획은 좀 더 본격적인데 말이야. 왕따를 시킨 아이들이 절대 행복한 인생을 살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래."
"절대라는 말에서 왠지 박력이 느껴지는데요."
"그렇지. 멀쩡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 뭐 이런 거지. 왕따 시킨 애가 커서 연애를 하고 진학을 하고 또 취직을 하는 그런 때."
"어떻게 하는데요?"
"확실하게, 적확하게, 훼방을 놓는다." 나는 말해놓고는 제풀에 웃었다.
- "자식이 이미 이 세상에 없다면, 표현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미련 없이 복수에 전념할 수 있어."
- 최종적으로는 호흡이 멈춰 사망한다. 독으로 분류되지만 그 작용을 이용해 수술에 쓴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환자의 움직임을 억제하기 때문이다. "그런 독을 쓰면 상대가 움직이지 못해서 차분히 복수할 수 있겠네. 몸은 마비돼도 통증은 느낀다는 모양이니까."
- "복수는 나의 것. 아세요?"
"그 영화 나쁘지 않지."
"영화가 아니라 글귀예요. 그게 원래 성서 어디엔가 나오는 말이거든요."
"그랬어?"
"복수하지 말라. 복수는 신에게 맡겨라. 복수는 나의 것에서 '나'란 바로 신을 말하는 거예요."
그때의 나는 신기하게도 바로 수긍했다. "커다란 힘에 맡기라는 뜻인가. 그런데 그렇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있을 수 있을지. '관용은 불관용에 불관용해야 하는가'라고 한 와타나베 선생의 말과 연결은 되는데."
- "그런데 막상 제가 그 처지가 돼보니 알겠더군요."
"수수께끼가 풀렸나?"
"증오와 분노는 당연히 있어요. 그야말로 생각만 해도 머릿속 혈관이 터지고 몸의 수분이란 수분은 다 끓어오르는 느낌. 하지만 그걸 행동으로 옮길 에너지가 좀체 없어요."
"에너지 문제라고들 하는 그거네."
치바 씨의 표정이 진지해서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판단이 안 된다.
- 나는 그렇게 입을 놀리면서도 심호흡을 하고 싶어 진다. 긴장을 늦추면 나스미의 기억이 또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고, 그 나쓰미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나에게 '그것'이 덮쳐와 이내 '그것'으로 충만하게 된다.
그렇게 이야기하니 치바 씨가 묻는다. "그것이 뭐지?"
"억지로 가까운 단어를 찾는다면 허무감이나 절망 같은 걸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네가 품고 있는 감정은 허무감이군'이라고 누가 알은척 결론지으면, 그건 전혀 다른 게 되어버려요."
- 나는 감정을 설명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추상화를 말로 표현하는 것과 비슷했다. "그냥 '무서운 그것'이라고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는 감각이에요. 어쨌든 그 감정을 품고 행동하는 건 무리예요. 평범한 인간한테는 가혹해요."
- 지칠 대로 지치고 숨도 차올랐다. 어쨌거나 빨리 이 상황이 진정되기만을 바랐다. 평온한 상태를 욕망하고, 우리를 가만 내버려 두길, 그 누구와도 엮이지 않기를 기도했다. 복수할 여유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딸의 죽음을 슬퍼할 여유를 원할 정도였다.
"마음을 안전지대로 피난시키는 것만으로 벅찼어요."
- 아니, 혹시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가정 따위 아무 의미도 없다. 그렇게 따지면 더 근원적인 후회, 즉 '태어나지 않았어야 했다'는 고통으로 이어지게 된다.
- "사람은 원래 도덕적이고 평등한 소박한 상태로 있지만, 그냥 내버려 두면 자연스럽게 사악해져서 타인에게 해를 끼치면서까지 자신의 이익을 얻으려는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고 해요.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사회의 진보에 필요한 것이라고."
"사악해지는 게 필요하다고?"
"평화롭고 목가적인, 에덴동산인 채로는 진보는 없다는 말이겠죠."
"무섭네."
"무섭다는 것도 주관일 뿐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무슨 말이지?"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도 큰 시야로 본다면 진화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어요."
- 그때 나는 혼조의 그 발언 역시 젊은이 특유의 과격한 극단론이라고 생각했다. "그것 참"이라고 대꾸하긴 했지만 거기서 더 이을 말이 없었다.
"어떤 진화가 있든, 어떤 도태가 있든, 전 끝까지 살아남는 강자가 되고 싶어요."
- 그 이야기를 진실로 받아들일 만큼 우리는 순진하지 않았다. 요 1년을 겪으면서 악의를 가진 사람이나 꿍꿍이를 품고 있는 사람들한테도 익숙해졌다. 하지만 나와 미키는 치바 씨를 믿기로 했다.
- 그리고 설령 치바 씨가 거짓말을 한 것이라 해도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이미 1년 전 우리의 마음과 인생은 썩어 문드러졌다. 그 최악의 사건을 생각하면 다른 것들은 모두 자질구레한 일일 뿐이었다. 부러진 다리에 모기 물리는 것이나 다를 게 없었다.
- 최근 우리는 우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감정은 갑옷으로 무장하고 머릿속은 막으로 뒤덮여 있어 분노도 슬픔도, 다 남의 것으로만 느꼈었다. 감정이 메말라버렸다고 생각했다.
- 쉬는 날이면 아버지는 혼자서 훌쩍 여행을 떠나 버렸기 때문에 내가 볼 때 아버지란 '자유로운 존재'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
- 나중에 아버지가 종양이 발견돼 입원했을 때, 대화 중에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아버지는 본인 좋으실 대로 살아왔으니 엄청 행복했겠어요?" 심술처럼 들렸겠지만 실은 어디까지나 순수하게 궁금해서 한 질문이었다.
아버지는 "난 죽는 게 그렇게 무서웠어"라고 대답했다. 중병을 앓고 있었으니 죽는 게 무섭다고 고백하는 것도 당연하다 싶었지만, 그때 아버지는 '무서웠어'라고 과거 시점으로 이야기한 데다 어딘가 쑥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 "치바 씨, 그건 압니다. 생물은 모두 죽죠."
"그렇군. 알고 있었군." 치바 씨는 내 대답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사실을 정말로 알고 있는 인간은 그다지 없거든."
"그야 그렇죠." 나는 즉답한다. "'우리는 절벽이 보이지 않도록 무너가 눈을 가릴 것을 앞에 둔 다음 안심하고 절벽을 향해 뛰어가고 있는 것이다.'"
"뭐야, 그게."
"파스칼이 한 말이에요. 인간은 진지하게 죽음을 생각하면 견디지 못해요. 그의 메모를 정리한 <팡세>에 실려 있죠."
- "인간은 언젠가 죽어." 치바 씨는 또 담담히 말했다. 중요하긴 하지만 하도 많이 들어 진부해진 대사를 자랑스럽게 내뱉으니 조금 불쾌해지기는 했다. 우리가 딸을 잃었다는 사실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대립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나는 계속 말했다. "'인간은 죽음과 불행과 무지를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행복해지기 위해 그것들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라고 해요." 이것도 파스칼이 한 말이었다. "행복해지려면 죽음은 생각하면 안 돼요."
- "이제 다 울었나?" 치바 씨가 묻기에 손으로 뺨을 만져봤다. "아직 흐르지만, 괜찮아요."
"눈에 와이퍼라도 달아." 치바 씨가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해서 나와 미키는 또 얼굴을 마주 보았다. 치바 씨의 언동 하나하나가 다 희한해서, 그 희한함 덕분에 나와 미키는 어두운 기분에 깊이 침전되지 않고 있다.
- 사람은 누가 뭘 물어보면 내심 반드시 대답을 해야 한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는지도 모른다. 타인과 의사소통을 하는 생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세요?' '현재 심경이 어떠십니까?' 같은 애매모호한 질문에 억지로 대답할 필요는 없다. 나는 그것을 요 1년을 통해 배웠다.
- 온화해 보이는 겉모습 뒤로 산전수전을 다 겪어온 관록도 느껴진다. 사냥하는 쪽이다, 하고 나는 바로 이해한다. 그는 여유가 있었다.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과거에 일어난 온갖 사건이나 그 관계자들의 고뇌를 '자신이 관여했던 공적'이랍시고 떠들고, 써낸 기사를 훈장처럼 과시하는 신경을 지닌 사람이 분명하다.
- 카메라와 마이크는 취재하는 자들의 오만한, 전지전능의 상징이다. 폭력과 똑같은 경제력이 있다.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마이크 세례를 받으면 발언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히고, 카메라에 잡히면 부주의한 행동을 할 수 없게 된다. 반면에 들이대는 쪽 인간들은 안전지대에서 사적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과도 닮은, 여유작작한 태도를 보인다. 위허하지 않은 장소에서 사람의 마음을 바라보며 주물럭댄다.
- 그들은 자신들이 우위에 서는 기술을 알고 있다. 정면으로 부딪쳐봐야 승산이 없다.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우리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 설명하세요, 설명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고 몰아세운다. 하지만 '설명할 의무'를 지닌 사람이 대체 있기나 하단 말인가. 더 말하자면, '설명을 강요할 권리'는 대체 누구에게 있는가.
- 사람에게는 겉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분이나 들키고 싶지 않은 것,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을 억지로 끌어내 드러내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만약 이 자리에서 치바 씨의 손에 큰 화상 흉터가 있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장갑을 끼고 있었다는 게 밝혀질 경우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무리하게 강요해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한다면 그나마 양반이다. '상태가 그랬으면 진작 말을 해줬어야지' 하고 책임 떠넘기는 소리를 할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본인들은 공격하는 쪽이므로 반론이나 반격은 인정하지 않는다. 과실이 있었더라도 책임을 전가한다. 우리가 범인으로 의심받던 때도 끔찍했다. '말해, 설명해'라고 달달 볶다가 막상 설명을 하면 '앞뒤가 안 맞다'며 화를 냈다. '범인 맞잖아!' 버럭 호통을 쳐놓고는 범인이 아니란 게 밝혀지자 '죄가 없으면 없다고 진작부터 확실히 설명을 해줬어야지'라며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 "전 독 자체에는 관심 없어요. 흥미 있는 건 독이나 약으로 손쉽게, 몸과 정신을 지배당하는 인간의 나약함이죠."
- "옛날부터 그런 소문 있었잖아. 죽은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인간한테 져서, 어떤 담당자가 다시 살려주려고 했다가."
"그거?" 정말로 있었던 일인지 그냥 재미로 만들어낸 이야기인지 확실하지는 않았다. "산송장 비슷한 상태로 돌아왔다는 얘기? 그 짓을 한 게 조사부야?"
"우리한테 그런 권한은 없을 텐데. 무슨 이야기 중이었더라."
"익숙하지 않은 제도를 갑자기 강행하면 차질이 빚어진다는 이야기."
- 야마노베는 자신의 딸이 살해된 사건을 '그거'라고 표현했다. 혼조 다카시의 이름도 가능하면 언급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내가 볼 때 유익하다고는 하기 힘든 쓸데없는 노력으로 보였다. 호칭을 바꿔봐야 사실이나 진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 "빨간색이 동맥, 파란색이 정맥, 흰색이 붕대를 의미한다던데."
- "외과의와 이발사 조합이 분리될 때 이발사한테는 파란색도 더하게 됐다고 해요. 그래서 의료 쪽은 흰색이랑 빨간색을 그대로 쓰죠."
"노란색이 합쳐진 게 신호등인가."
"그건 이 조합이랑은 상관없을걸요."
- 인간은 한번 스스로 결정한 시나리오가 완성되고 나면 그에 맞지 않는 조언이나 충고는 밀어내는 경향이 있다.
- "한 천문학자가 혜성의 꼬리에는 시안 화합물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어"라고 말했다. 시안화합물이 맹독성 물질이란 것은 알았다. 그 남자뿐 아니라 여기저기서 인간들이 혼돈에 빠지고 소란을 피웠다. 산소 실린더 사재기가 시작됐고, 교황이라는 인물이 그 난리를 가라앉히려 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그사이 천문학자가 혹시 핼리혜성이 통과한다 해도 시안 화합물의 농도가 미미하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발표했다.
- 그렇군, 그럼 안심해도 되겠네. 나는 단순하게 생각했지만 그 남자는 조금도 안심하지 않았다. 다른 인간들도 마찬가지라 전 세계에서 자살자들이 나왔다. '독에 죽느니'라며 결단했다는 것이다. 자살은 우리 담당 밖의 일이기 때문에 관계는 없었지만, '죽음이 두려운 나머지' 죽는다니 참 희한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 나는 상대에게 소박한 의문을 던졌다. "시안 화합물이 포함되어 있다고 발표한 것도 천문학자이고 안전하다고 발표한 것도 천문학자야. 전자는 믿으면서 후자는 왜 믿지 않지?"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최초 발견은 분명 진실이야.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런데 그 때문에 온 세상에 소동이 벌어지니까 당황한 거야."
- 인간의 정신은 '위험해!' 쪽으로 기울어버리면 똑바로는 좀체 돌아오지 않는다. 그때 나는 남이 아무리 열심히 설명해줘 봐야 상대 인간한테는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 우리가 조사하는 중에 조사대상인 인간이 죽는 일은 없다. 그러니 여기서 야마노베가 폭발로 사망할 가능성은 없다. 만약 죽는다면 그건 조사를 마치고 내가 '가'를 보고한 후다. 당연히 지금 이 순간 야마노베가 폭발로 죽는 일도 없다. 그렇다면 내가 여기서 그를 제지하는 건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결정사항이라는 건가.
- "경의란, 귀찮은 일을 해준다는 걸 의미한다." 야마노베가 표어라도 읊듯 말했다.
"뭐야, 그게?"
"파스칼이 그랬어."
"또 파스칼." 미키의 어이없다는 말투가 차 안으로 사르르 녹아들었다.
"무슨 뜻이지?"
"저도 잘은 몰라요. 말로야 경의를 표한다고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상대방을 위해 열심히 귀찮은 일을 해줘야만 비로소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게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은 해봤죠."
- 그 뒤 물이 담긴 유리잔을 바라보던 가가와가 문득 물에 떠 있는 얼음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이렇게 얼음이 떠 있는 거 왜 그런지 알아? 부력 작용 때문이라는데."
"오호." 듣고 보니 과거에 그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사물에는 물속에서 뜨는 부력이라는 게 있어. 엄밀히 말하면 물의 누르는 힘이 위로 작용하는 거라는데. 그런데 재미있는 게, 부력의 강도는 사물의 무게와는 상관이 없대."
"무슨 뜻이지?"
"떠오른다는 현상을 생각해 보면 무게와 관련이 있을 것 같잖아. 그런데 무게가 아니라 부피가 뜨는 힘을 정한대. 커다란 물건일수록 뜨는 힘이 강하다는 거지."
"그게 어쨌다는 거야?"
"물을 가득 채우고 거기에 얼음을 띄웠다고 쳐."
"난 안 할 건데."
"얼음이 녹으면 그만큼 물의 양이 늘 테고 잔에서 넘칠 것 같지?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 수위에는 변함이 없어. 왜냐하면 방금 말한 부력 덕분에."
"부력이 일을 하고 있는 거네."
"그래. 얼음의 모습은 사라지지만 전체 양은 변하지 않아. 인간의 죽음과 닮지 않았어?"
- "한 명의 인간이 죽어서 모습이 사라진다고 해도 그만큼 전체적으로 뭔가가 줄어드는 건 아니니까."
"그렇군." 한 인간의 죽음은 사회로 볼 때는 딱히 주목할 일도 아니고 총체적으로는 아무 영향이 없다는 건가. 그렇다면 나도 동감이었다.
- "그렇게 받아들여도 되고, 다르게 보면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잖아."
"그거 말하는 건가? 인간들이 의지하는 귀신이나 혼? 죽어도 혼은 남으니까 언제까지고 함께다 뭐 그런 거."
가가와가 웃었다. "아니, 죽은 사람을 기억해 주잖아, 인간들은. 그러니까 그런 형태로 남아 있는 건가 싶어서."
"얼음이 녹아서 물에 섞이는 것처럼?"
"응. 타인의 기억에 녹아드니까, 줄지 않는 거지."
"그건 좀 와닿지 않는데." 나는 솔직하게 대꾸했다. "그래도 그 뜨는 힘한테는 호감이 가는군."
"호감? 부력한테?"
"걔도 일을 하잖아. 난 소박하게 성실하게 일하는 것들한테는 호감이 가."
부력이 밀어 올리는 일을 열심히 하긴 하지,라고 가가와가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 "충동적으로 죽고 싶어 졌을 때, 바로 곁에 있는 총으로 자신을 쏠 가능성도 훨씬 높아져."
"그렇다고 그걸 총 탓이라고만은 할 수 없죠. 총이 없어도 다른 방법으로 죽을 수도 있고."
"하지만 총은 미수로 끝나기 힘들어."
- "자동차 사고는 노상 일어나고 있지. 놀라울 만큼 빈번하게 말이야. 그에 비해 비행기의 경우 사망사고는 거의 일어나지 않아. 그런데도 인간은 비행기보다 자신이 운전하는 차가 더 안전하다고 느끼지. 왜 그런지 아나?"
"스스로 통제할 수 있으니까."
나는 끄덕였다. "너무 믿는 거지."
"너무 믿다니, 누굴 말이에요?"
"자신을 말이야."
- 이 시대의 인간들에게는 비교적 친근한 담배나 약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사용빈도를 조절할 수 있다고 과신한 나머지 결국 통제하지 못하게 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통제할 수 없다는 핑계를 생각해 내는 것과 목표를 변경하는 것이다.
- 무엇 때문에? 가능성은 두 가지다.
미노와가 잘못된 정보를 얻었기 때문이던가. 아니면 고의로 거짓말을 한 것이던가.
전자는 흔한 일이다. 인간은 곧잘 실수를 한다. 물론 후자도 흔한 일이다. 인간은 곧잘 거짓말을 한다.
- "여기 진짜 넓다. 원래 도쿠가와 집안의 정원이었다고 했나?"
"매사냥 같은 걸 하지 않았을까. 도쿄 돔 다섯 개만 한 넓이라고 하던데"
- 야마노베의 목소리가 맞긴한데 본래 야마노베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동물이 울부짖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 뒤에 선 남자가 내 옆구리에 물체를 갖다 댔다. 이건 또 무엇이려나. 내려다보니 이번에도 스턴 건이었다.
이봐, 야마노베. 나는 말하고 싶었다. 스턴 건, 유행하는 거 맞잖아.
- "왜 그래?" 그렇게 되물었다가 곧바로 나는 내가 아파하지 않아 그 남자가 스턴 건 고장을 의심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부랴부랴 "크헉!" 하는 소리를 내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조금 더 생동감 넘치게 해야 하나 싶어 "살려줘"를 덧붙였다.
좀 과하진 않았는지 반성했다. 이런 걸 균형 있게 조절하는 게 참 어렵단 말이지.
- 그러고 보니 치바 씨가 보이지 않았다. 문득 어쩌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치바 씨는 처음부터 환영이었구나. 그래서 그렇게 기묘했구나. 같은 장소에 있는데도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치바 씨는 어제 찾아간 시오도메의 거대한 정원 풍경과 닮았다. 빌딩들이 늘어서 있고 고속도로가 뻗어 있는 한쪽 편에 수목이 초록으로 물든 광대한 정원이 펼쳐져 있는 곳. 있어서는 안 될 것, 있어서는 안 될 존재가 그곳에 있는 것 같은. 치바 씨에게는 그런 막연한 이상함, 겉도는 느낌이 있었다.
- 믿을 수 없다. 부조리한 고통을 견뎌온 우리가 또다시 학대받을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공평함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내내 수비만 하고 공격할 차례는 전혀 돌아오지 않는 야구 같지 않느냔 말이다.
- "앞으로의 인생에서 앞이 전혀 안 보이게 된다는 건 무서운 일입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아니, 그건 아니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치바 씨가 대꾸했다.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굉장히 안정된 말투였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은 천지 차이야. 눈이 안 보이게 된다고 해도 그건 죽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
그 말이 눈에 보이지 않는 손가락이 되어 활등처럼 휘어졌다가 속된 말로 '딱밤'처럼 내 이마를 세차게 때렸다.
- 빨간색 비옷이 "어떻게 한 거예요?"라고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그 테이프를 어떻게."
대체 뭘 말하는 거냐며 이상하다는 듯 치바 씨가 내 쪽을 보았다. 본인의 실언을 깨닫지 못한 채 비서에게 '어? 내가 방금 뭐 말실수라도 했나?' 하고 확인하는 대물 정치가 같았다.
- "테이프, 어떻게 끊었어요?" 나도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아." 치바 씨는 그제야 주위 사람들의 당혹감을 이해했는지 "그건" 하고 입을 열었다. 뭐라고 둘러댈지 핑계를 찾는 꼬마처럼 보였다. "텔레비전에서 봤어. 끊는 방법."
뒤에서 작은 숨소리가 경쾌하게 터져 나왔다. 미키가 쿡 하고 웃은 것이다. 그제야 나도 겨우 마음의 평정을 찾았다. 달아날 곳 없는 처형장에 갇힌 것 같았던 폐쇄감이 해소됐다. 확신했다. 내 인생이 끝나는 장소가 여기여서는 안 된다.
- 지배게임에서 늘 이겨온 그 남자에겐, 시비를 거는 우리가 주제파악도 못 하고 설치는 무례한 초심자같이 보였던 게 아닐까. 무례한 초심자한테는 어떻게 해줘야 하나. 호된 고통을 줘 힘의 차이를 보여주고, 항복하게 하려 했던 게 아닐까.
- "뭐 하는 짓이에요!" 빨간색 비옷이 놀라 뒤집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쳐다보니 바로 옆에 선 치바 씨가 빨간색 비옷 위로 남자의 몸을 만지고 있었다. 치바 씨는 남자의 가랑이 사이를 더듬거리며 몸을 수색했다. "족쇄 열쇠는 어디 있지? 저걸 안 빼면 나가기 불편하잖아."
- "아무 생각도." 그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내가 아픈 것도 아니고, 뭐 이런 생각?"
"그런 것도 있고요."
화는 나지 않았다. 그런 논리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누구나 품고 있는 생각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끔찍한 사건이나 먼 나라의 가뭄, 나와는 상관없는 곳의 공해는 물론이고 같은 동네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도 자신에게 영향이 없다는 걸 알게 되면 그때부터 여유가 생긴다. 바꿔 말하면 자신에게 영향이 있느냐 없느냐, 그것이 인간의 가장 큰 관심사다.
- 문득 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난 내가 하고 싶은 걸 하자고 결심한 거야."
한 번뿐인 인생인데 하고 싶은 것을 참으며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버지는 어느 날 그것을 깨달았다.
- 아버지는 산더미 같은 회사 업무에 시달려 힘들어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신기술을 개발하는 게 즐거워 일에 푹 빠져 있었다. 연구에는 시간이 무한히 필요했다. 아버지는 가정보다는 그쪽을 선택했다. 왜? 일에서 성공하기 위해? 가족을 위해 돈을 벌려고? 둘 다 아니었다. 그냥 일에 몰두했을 뿐이다. 그게 바로 하고 싶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 "인간은 그날을 잡는 것, 하루하루를 즐기는 것밖에는 못해. 아니, 그것밖에 없어. 왜냐하면."
왜냐하면 인간은 언젠가는 죽으니까.
- "부채인 척하면서 칼이 나오는 게 아니라 그 반대 경우면 칭찬해 주겠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그렇게 말했대."
"반대?"
"칼인 척하면서 부채가 나오는 게 낫다는 거야. 가뜩이나 살벌한 시대에 굳이 또 살벌한 짓을 할 필요가 있냐면서."
- "그게 아니에요. 그냥 태평하고 평화로운 이야기만큼이나 암울한 이야기도 안일하죠. 게다가 암울한 작품이 정말 나쁜 건, 뭔가 대단한 것 같다는 착각을 준다는 거예요." 창작에서는 마음이 어두워지는 이야기들이 과대평가를 받는 경향이 있다고.
"하지만 세상의 걸작들 중에는 암울한 이야기들이 많아." 오히려 그 편이 더 많지 않을까, 내가 받아쳤다.
"정말로 재능 있는 사람이 쓰면 걸작이 되죠. 하지만 대부분은 흉내만 낸 것들이에요. 기왕 흉내를 낼 거면 검은 바탕에 검은색 말고 다른 색으로 그림을 그리는 게 낫죠."
- 내 이야기를 들은 미키가 "검은 바탕에 검은색으로 그린다는 게 절망 위에 절망을 덧칠한다는 소리야?"하고 확인했다.
"원래도 검은데 검은색을 칠하면 어쩌자는 거냐 하는 게 미노와의 주장이었어."
"그게 어쨌다는 거지?" 치바 씨가 물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던 미노와가 사람을 배신하는 절망적인 짓을 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것이야말로 검은 바탕인 사회 위에 검은색 물감을 덕지덕지 바르는 것 아닌다.
"그거와 이건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미노와는 생각했을지도 몰라."
"치바 씨, 그런 암울한 이야기는 마세요."
- "아아, 이게 그건가." 치바 씨가 목청을 조금 높였다. "이거 본 적 있어. 재해가 일어났을 때 여기서 살아남기 위한."
아마도 핵대피소 같은 걸 연상한 모양이었다.
나는 "맞지는 않지만 틀린 것도 아니에요"라고 말했지만, 미키는 "비슷하지만 전혀 틀려요"라고 표현했다.
"여긴 살아남는 게 목적인 방이 아니니까."
"무슨 말이지?"
"죽어가기 위한 방이에요."
- "그렇게 따지자면 인간한테는 어느 방이든 다 죽어가기 위한 방인데."
"뭐, 그렇긴 하지만." 나는 쓰게 웃는다.
- "우리가 사무치도록 분한 건, 한 번밖에 없다는 거예요."
"한 번밖에 없어? 인생 말인가?"
"비슷하네요. 죽는 것 말이에요."
"오호."
"죽음은 돌이킬 수가 없죠. 그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짓을 저지른 상대 역시 한 번밖에 죽일 수 없어요."
"두 배로 돌려줄 수가 없어."
- 하지만 그것이 정말 현실에 있었던 장면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다. 현실과 분간되지 않는 악몽을 수없이 꿔왔기 때문이다.
- "너한테 난 어떻게 보였니? 어떤 인간으로."
"그건 살아온 인생에 자신 있는 사람이 할 소리라고 생각해요." 나는 절로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자신도 없으면서 '내 배팅 자세 어때?'라고 묻는 사람은 없어요."
- "작가는 역시 비유가 다르네." 아버지는 눈웃음을 지었다. 비꼬는 소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는지 흐뭇해 보였다.
- 사실 자기중심적으로 사물을 보고 감정적으로 폭언을 내뱉는 인간에 비하면 낫다고 할 수도 있었다. 아니면 내가 텔레비전에 나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저 녀석 아마 이 정도 돈은 벌겠지'하고 속물적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며 기뻐한 사람보다는. 이건 숙부 이야기인데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내 일에 특별한 의식을 품지 않는 아버지는 고마운 존재였다.
- "무서웠다."
"무서웠다고요?"
"죽는 게 무서웠어."
- "그렇지.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생각한 거야. 어차피 죽을 거라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성에 찰 때까지 해야 하지 않겠나 하고. 남들한테 칭찬받는 사람이 돼봤자 매일매일, 매초마다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것에는 변함이 없어. 내일 죽을지도 몰라. 하고 싶은 일을 참는다고 뭘 얻을 수 있을까."
"보통은 그런 생각이라면 회사 일은 적당히 하고 자기 맘대로,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지 않나."
"내 경우엔 회사 일이 하고 싶은 일이었어."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아니라 일하는 시간이 더 소중했던 거네요." 내가 조금씩 감정적이 되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버지는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 무언이 바로 긍정의 표시였다.
- "난 그 사실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았어. 사랑하는 자식도 언젠가는 죽는다니, 그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부모는 아마 거의 없을 거야."
- '우리는 살아 있으니 언젠가 죽게 되어 있습니다'라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와타나베 선생의 그 부드러운 글에서 나는 간신히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
- 페이지를 넘겨 쭉 훑어보니 온화한 어투로 비관적인지 낙관적인지 헷갈리는 글이 적혀 있었다.
'우리는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시시각각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습니다. 먼저 그 불행을 범인(凡人)은 범인 나름대로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런 다음 와타나베 선생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말을 인용했다." 아버지는 책에서 얼굴을 든 나를 보았다. "현재를 즐겨라."
"현재를?"
"그래. 원래는 '오늘을 잡아라'라고 번역하는 모양이던데."
"무슨 뜻인데요."
"어차피 죽을 테니,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고."
나는 그제야 아버지의 인생이 그 말에 충실히 따른 것임을 알았다. 아버지도 내 생각을 읽은 모양이었다.
"어차피 죽을 텐데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기로 마음먹었다."
- "치바 씨, 어떻게 생각하세요?"
치바 씨는 "글쎄"라고만 대답했다. 그런 다음 아주 부자연스럽게 "만만치 않은데"라고 소감을 덧붙였다.
- "그쪽이야 날 봐도 모르겠지." 외모는 일을 할 때마다 바뀐다. "나도 인간들을 일일이 기억하지는 않으니까."
그렇지 뭐, 하고 가가와가 말했다.
- 그 뒤 내가 말했다. "그나저나 집 안에 틀어박힌 혼조와 접촉할 기회가 통 없을 테니 조사도 힘들겠네." 수고가 많다는 뜻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어차피 제대로 조사도 안 하잖아? 그러고도 일합네 하고 있는 거야?'라는 조롱의 뜻이었다. 다시 말해 인간들이 자주 하는 '말에 뼈가 있는' 수법을 쓴 것인데 가가와한테는 그 '인간적인 면박'이 통하지 않았는지 -그것부터가 가가와가 얼마나 인간을 모르는지,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지의 증거다- 가가와는 "다정한 위로 고마워"라고 내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리뷰자 주 : <사신의 7일>에서는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하는 듯한 대사가 종종 등장한다.)
- "그럼 불쑥 2층으로 침입해 볼까. 그런 거 인간들 약하잖아. 로맨틱하다는 둥 하면서."
"불법침입으로 취급받을 수도 있어."
"몬테키오였나."
가가와가 그 담당자 이름을 꺼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나도 안다. 우리 동료 중에 16세기 무렵 인간 여자한테 연애 감정을 품은 자가 있었다. 신화와도 합쳐지고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제목의 소설로 탄생하기도 했는데, 한마디로 근원을 밝히자면 우리 동료인 조사부 친구가 일으킨 소동이 그 계기였다.
- 그 희곡에 따르면 남자의 이름은 로미오 몬테그나 로미오 몬테크로 알려져 있는 모양인데, 우리의 이름은 도시 이름에서 따오는 경우가 많고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공동체의 지명이 쓰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몬테키오다. 몬테키오는 일에 열심이었는지 인간 여자의 집으로 들어가 조사를 했다. 그러다 그 여성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바람에 먼저 '가'라고 보고했던 것을 뒤집으려고 근무 규칙을 위반하고 대상 인간의 목숨을 구했다.
- 그 일 때문에 몬테키오는 다른 부서로 배치됐고, 나는 거의 얼굴도 보지 못했지만 지금까지도 그의 이야기는 이따금 '인간과 지나치게 친하게 지낸 조사원의 일화'로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 "그래도 그 말 하면 곤란하겠지?"
나는 눈썹을 찌푸린다. "곤란할 게 뭐 있어. 내가 곤란해지나?"
- "실패하면 하는 거지. 딱히 문제 될 것도 없는데." 나는 대답했다. "게다가 혼조든 야마노베든 오늘은 죽을 일 없어."
- 우리의 조사기간, 7일간의 시간이 끝나기 전에는 대상 인간은 죽지 않는다. 다시 말해 오늘 하루가 어떤 하루가 되건 그들의 목숨은 무사한 것이다. 어쩌다 다칠 수는 있어도 죽지는 않는다.
- "'보류'로 하란 말이 하고 싶은 건가?"
"그게 아니야." 상대는 죽어도 자신들의 약점을 보여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무리는 안 해도 돼."
"무리?"
"대상 인간을 죽일 필요가 없다면 수명을 20년 정도 보장해 줘도 좋다는 얘기야."
"꼭 그렇게밖에 부탁을 못 하나?" 나는 불끈 화가 치밀어 올라 전화를 끊으려다가, 궁금했던 것이나 물어보기로 했다.
- 우리는 길에 세워둔 차 안에 있다. 차 앞 유리에는 빗방울이 떨어져 파문을 만들고 있다. 변함없는 리듬으로 유리의 표면 무늬를 물방울로 일그러뜨려간다.
- 가로로 '키친박스'라고 적힌 간판에는 '고령자 전용 식사배달 서비스'라든가 '균형 잡힌 영양 식사'라든가 '일 인분도 OK' 같은 몇 가지 단문들이 적혀 있는데,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아 점포 외관은 수수한 사무실처럼 보였다.
"무슨 장사를 하는 건지 확실해 보이지도 않는데 저래 갖고 도시락이 팔리나?" 내가 소박한 의문을 입 밖에 내자 야마노베가 "배달 서비스라 이곳에 손님이 직접 사러 오지는 않는 모양이에요"라고 설명해 준다.
- 너무도 조심성 없고, 부주의하다. 하지만 야마노베도 좋아서 그랬을 리 없다. 전에 일 때문에 방문한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알게 된 남자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부주의 실수에는 관대하게. 규칙 위반은 엄벌로.'
- 그의 이야기는 아주 흥미로웠는데 그중에서도 '부주의한 실수는 막을 수 없다'고 했던 말이 신선했다. '주의 깊게 하라'는 명령을 받는다고 부주의한 게 고쳐지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이었다. '제대로 주의했다면 절대 이럴 리가 없다'며 기막혀할 만한 실수를 많은 인간들이 하고 있다. 그건 나도 안다. '주의 깊게!'라고 호소하는 표지물이 위치해 있는 장소 자체가 '부주의로' 잘못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부주의한 실수는 막을 수가 없다. 인간만 그런 게 아니다. 우리 역시 실수를 해서 환원 세일을 하자고 하는 판국이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부주의한 실수를 막으려는 방책이 아니라 실수가 일어났을 때 큰 사고로 악화되지 않도록 하려는 노력입니다"라고 했던 그의 설명에 나는 동의할 수 있었다.
- 사람의 죽음이 많이 겹치는 장소에는 자연스럽게 동료들이 모이게 된다. 그런데 어떤 타이밍에 어떤 장소에서 인간의 죽음을 지켜보는가는 담당자들마다 취향이 있기 때문에, 사코에게 담당자가 있다고 해도 어디서 우연히 마주치게 될지는 예상할 수 없다.
- "인간이 태어나서 살아가려면 대부분이 호자서는 힘들잖아요. 어른이 될 때까지 부모님이 보살펴줘야 하고. 그런데 동물 중엔 그런 경우가 별로 없잖아요. 사람은 먹을 걸 확보할 때도, 살 곳을 확보할 때도, 서로서로 도와야 해요. 아, 그리고 물건을 교환하거나 고마움을 표시하거나 그런 것도 독특한 부분이죠."
- "협력이란 말, 듣기엔 좋지만 인간이 그렇게 아름다운 행동만 하며 사는 건 아니야." 야마노베의 목소리가 작고 묵직해졌다.
"아, 그 말도 했어요. 인간이 서로 협력하는 건 집단에서 배제되고 싶지 않다는 의식 때문인 것도 있다고. 인간은 평판에 신경을 쓰기 때문이래요. 함께 나누지 않는 사람에게는 나쁜 평판이 생기고, 서로 도우면 동료로 인정을 받고."
"그렇구나." 야마노베가 말했다.
"그래서 집단 속에 위반자가 있으면 그 사람에게 다구리를 놓는 부분도 있다고 했어요."
"NHK가 그런 상스러운 표현을?"
"다구리라고는 안 했지만. 징벌? 처벌? 어쨌든 협력하는 성질만큼이나 협력하지 않는 자에게는 엄격하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해가 갔는데, 우리도 뉴스에서 범인을 찾아내면 저놈한테 맛 좀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잖아요. 범인이 아니더라도 규칙을 지키지 않는 자는 용서하지 않으려 한다고 해야 하나."
"최근에는 그게 가속화되고 있는 것 같은데." 야마노베는 얼굴을 찌푸렸다. "사람들이 다 심판자가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그런데 그게 원래 인간의 성질인지도 몰라요. 집단을 유지시키기 위한."
(리뷰자 주 : <사신의 7일>에서는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하는 듯한 대사가 종종 등장한다.)
- "인간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도 크게 영향을 주겠지." 미키가 말했다. "평판이란 게 말로 전달되는 것이기도 하고. 그래, 표정도 있고."
"아, 맞아요. 그것도 중요하대요. 상대가 웃는 얼굴을 하면 인간은 조금 마음을 놓게 된다고."
- "그런데 NHK한테 반항할 생각은 없지만, 인간이 항상 협력한다고 생각하진 않아. 전쟁이며 폭력 같은 건 뭐냔 말이지. 그것도 협력인가?"
"그건 협력이 아니고, 이면 같은 거예요."
"이면?"
"인간이란 타인의 존재에 신경을 쓰고 돕기도 하지만 그 때문에 타인을 질투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한다고."
"타인과 자신의 관계를 신경 쓴다는 의미에서는 확실히 같은 걸지도."
"그렇죠. 동물은 기본적으로 다른 동료들한테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데요. 자기만, 그리고 지금만."
"지금만?"
"시간의 개념이 없으니까요. 미래를 위해, 밤을 위해 같은 생각을 안 해요. 지금의 자신만 생각하고 살아가죠."
- "인간은 폭력 면에서도 대단한 모양이에요. 같은 종류의 동물끼리는 상대가 죽을 때까지 폭력을 휘두르는 일은 드물다고 하거든요. 그리고 인간은 집단 안에서는 온순하지만 다른 집단에 대해서는 잔혹해지는 게 특징이라고."
"아아." 야마노베는 이해가 간다는 목소리를 냈다. "그건 알 것 같아. 그래서 전쟁이며 학살이 일어나는 거지. 자신들의 집단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필사적이 되는 거야."
- "인간은 가만 내버려 두면 자연스럽게 전쟁을 일으킨다." 야마노베가 입을 열었다.
"파스칼?" 미키가 넘겨짚듯 되물었다.
"이건 칸트."
- "있어, 그런 철학자. 인간은 전쟁을 일으키며 진화해 왔다. 그래서 전쟁은 비교적 편하다. 가만 내버려 두면 일어나니까. 그런데 평화는 힘들다. 전쟁으로 자연스레 흐르는 것을 계속 참아야 하니까. '평화는 고통스럽고 전란은 속 편하다.'"
"그건 파스칼?"
"와타나베 선생." 야마노베가 웃었다.
- 나오는 말이라고는 죄 남의 말이라는 사실이 기묘하게 느껴졌다. "어떤 인간이든 각자 나름대로 뭔가 말을 남긴 거네." 나는 말했다. 어떤 인간의 발언이 명언으로 불리는지 나로서는 판단이 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한 남자의 발언이 그 당시에는 전혀 먹히지 않고 주위에서 오히려 백안시했는데, 2백 년이나 지난 다음 갑자기 평가를 받아 '옛날 사람들은 좋은 말을 많이 했다'며 수많은 인간들이 감명을 받는 경우도 봤다.
- "전쟁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까요." 오기누마는 강 건너 불구경이라도 하듯 말했다.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전란을 다들 열심히 억제하고 있는 거지. 그 노력이 승리하고 있는 상태를 평화라고 부르는 것뿐이니까. '평화 불감증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걸 유지하고 있는 건 많은 사람들이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와타나베 선생은 그렇게 말했어. 불감증에만 걸려 있어서는 결코 평화는 지킬 수 없다는 말도."
- "전쟁이 일어나고 수습되고. 얼마 있다 보면 또 전쟁이 일어나고. 그 반복이야."
- "전란을 갈구해 사회의 평화가 깨지면 다시 평화를 갈구하지. 평화가 계속되면 전란을 갈구해. 반복이야. 그 한복판 딱 좋은 지점에서 정지하는 경우는 지금껏 있어본 적이 없어." 나는 말했다. 혹시 질문이라도 할까 봐 "이건 순수한 내 말이야"라고 덧붙였다. 야마노베 부부가 공기를 살짝 흔들었다. 아무래도 내가 웃음을 산 모양이다.
- "그 남자는 머리가 꽤 좋아. 냉정하고 차분하게 판단을 하는 데다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경우도 드물 테지. 그런데 이번 일과 관련해서는 하는 짓이 어설프다는 생각 안 드나?"
- "가능성은 있지. 바둑이나 체스란 건 그 앞의 앞까지 미리 생각해둬야 하는 거잖아."
"이건 바둑이나 체스가 아니에요."
"너희들한테는 그렇겠지. 하지만 혼조한테는 바둑이나 체스 같은 건지도 몰라."
- "요컨대 죽는다는 걸 안다는 거야." 내가 말하자 야마노베가 옆구리라도 찔린 듯한 반응을 보였다. "인간은 죽을 걸 알아. 요 전에 너도 말했다시피 그 사실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는 쓰지만."
- "서로 돕는 거나 잔인해지는 거나, 다 그 때문인지도 몰라."
"인간은 동물 중에서 유일하게 죽음을 아는 존재다."
- 그래도 사코를 도와주려 할까. 동정하며 구해야만 할 목숨이라고 판단할까. 인간의 가치판단은 언제나 모순되고, 일관적이지 않다.
- "아마 '가'가 되겠지." 나답지 않게 조사기간 중에 의중을 말한 것은 상대를 실망시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저쪽에서는 인간의 수명을 늘려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렇군. 하지만 혹시 원한다면." 감사부가 또 나를 유도하듯, 마치 그게 나를 위한 것이라도 되는 양 말을 이었기 때문에 내 화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저쪽에서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고 '우리 실수를 만회해야 하니 인간의 수명을 늘려주지 않겠나?'라고 부탁한다면, 그 부탁을 들어줄지 말지는 둘째치고 이해라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끝끝내 도도한 말투라니,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다.
- "그러고 보니 가가와는 오늘이 조사 마지막 날이었군. 보나 마나 '가'겠지." 내가 말하자 전화기 너머에서 마치 승리라도 한 듯한 감정이 퍼져 나오는 게 느껴졌다. "아니야?"
- 유흥가가 늘어선 좁은 길에 호객행위를 하는 남자들이 주르르 서서 "좋은 애 있습니다" "어떤 스타일 좋아하세요?" 하며 나를 불러 세웠다. "나쁜 애는 없나?" 내 말에 남자가 놀란 토끼 눈을 하더니 요란스럽게 웃었다. "나마하게도 아니고."
(역자 주 : 섣달 그믐날 아키타 현에서 열리는 전통 민속행사. 섣달 그믐날 밤이 되면 도깨비 형상의 나마하게가 산신의 심부름꾼 자격으로 마을에 찾아와, '나쁜 아이는 없나?' '우는 아이는 없나?' 하며 집집마다 돌아다닌다는 데서 유래함.)
- "그 사실, 혼조도 알아?" 나는 이렇게 물었지만 '그럴 리가 없지' 하고 생각했다. 우리 일의 제도나 형편을 인간에게 말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으니, 가가와가 설명해 줬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내가 그렇게 물어본 건 혼조한테는 우리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 힘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혼조에게 어떤 특별함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예상 가능한 것들을 여러모로 생각하고 준비하는 인간이지. 시야가 넓다 해야 하나 좁다 해야 하나. 머리는 좋은데 집념이 너무 강해."
"게임에 이기는 데 집착하고 있겠지."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과거에도 그런 인간들이 적잖이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병졸들을 이끄는 지능 높은 남자가 적군을 잇달아 격파해 나가는 데에 몇 번인가 동행한 적이 있었다. 그런 때 상대를 패배하게 한 쪽은 성취감에 만족하기보다는 훨씬 원시적으로 황홀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 "전에 담당했던 의사 하나가 생각나더라. 우수한 외과의사였어. 어떤 수술이든 냉정하고 침착하게 해냈지. 솜씨도 훌륭했고. 요컨대 인간들의 기준에서 말하자면 냉혹한 성격이었어. 병원에서 지위를 쌓기 위해서라면 누구를 배신하든 누구를 이용하든 전혀 거리낌이 없었지. 다른 사람들은 그 남자를 두려워했어."
"혼조가 외과의사가 되면 아마 그런 길을 가게 될지도 몰라."
"그럴지도. 그 의사는 천재 취급을 받았지. 범죄자도 아니었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했지만."
- "재밌는 게, 냉정하고 남의 기분에 신경 쓰지 않는 성공한 사람들은 '그런 짓까지 하면 상대가 화를 내지 않을까?' 하는 것도 못 깨닫는 것 같아. 그게 함정이지."
- 눈을 가늘게 뜨고 어영부영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러면 안 된다며 자신을 질타했다. 이기기 위해서는 상대의 수를 끝까지 지켜봐야 한다. 눈을 감고 있으면 상대의 펀치를 피할 수 없다. 주눅 들어 있으면 뜻대로 맞설 수도 없다.
- "의미라. 산킨 교대의 다이묘 행렬에는 요컨대 군사 퍼레이드의 의미가 있었겠지. 저마다 인원을 확보해서 강대함을 과시했어. 전에도 말했지만 통치하는 쪽에서 보면 막부에 대항하는 힘을 비축시키지 못하도록 하려는 목적이 있었고. 뭐,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도 나는 상당히 괜찮은 제도라고 생각했어."
"그런가요?"
"인간이 집단을 만들면 확실히 본인들의 힘을 확인하고 싶어 해. 그렇지 않더라도 집단이 안정기에 접어들면 필연적으로 그게 시작되지."
"그것?"
"따분함이야."
- "온화한 시간이 길게 이어지면 인간은 못 견뎌. 집단은 그러다 '뭐 재미있는 일 없을까?'라고 한탄하기 시작해."
나는 같은 이야기를 '와타나베 선생'도 했었다는 걸 떠올렸다. 인간은 평화와 안정, 정상이라 불리는 상태를 바람직한 것으로 보면서도 그것이 길게 이어지면 질려서 우울이나 권태를 느낀다고 했다. 평화가 좋다는 걸 알면서도 평화에 질린다는 것이었다.
- "온화한 일상은 따분함을 낳아. 그 따분함이 불안을 낳고. '이대로 괜찮은가?' 하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집단은 겁을 먹기 시작해. 아니면 따분해하거나. 어쨌든 이런 때 일어나는 건 항쟁이나 전쟁이야."
"그리고 그게 끝나면 또 온화하게."
"그렇지. 역시 인간은 흔들리면서 반복할 뿐이야."
"치바 가 하는 말은 블랙유머인지 뭔지 헷갈려요."
- "하지만 산킨 교대는 그 대체제가 될 수 있지. 전쟁을 의식으로 만든 거니까. 폭력성을 의식으로 발산하는 건 옳은 전략이야."
"스포츠라든가?"
"축제 같은 것도 그렇지. 인간의 역사를 보면 대부분 그래."
- 지난주부터 우리는 치바 씨와 지내며 요 1년 동안은 생각도 할 수 없었을 만큼 많이 웃고 있다. 치바 씨에게는 그럴 의도가 눈곱만치도 없었겠지만, 무뚝뚝하고 고지식한 치바 씨의 언동이 우리를 완전히 가라앉아 있던 늪에서 몇 번인가 끌어올려주고 있다.
과거의 견뎌내기 힘든 비극이며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를 고민하지 않고, 우리는 하루하루를 잡고 있다.
- 하마리 궁 온시 정원에서 치바 씨가 알려준 도쿠가와 장군의 말이 떠오른다. '원수를 무찌르는 것은 용맹함의 증명도 무사의 영예도 아니다.' 신화인지는 모르지만, 체면 따위 신경 쓰지 말고 원수를 무찌르라는 그 메시지가 참 든든하게 다가온다.
(리뷰자 주 : 내게는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원수를 무찌를 수 있는 수단이 아니라, 그 행위 자체에 대한 이야기로 읽혔다. 그 행위는, 그 어떤 자랑도 되지 못하리라는.)
- "재주가 있어."
"예?"
"그 남자는 그런 데 재주가 있어. 타인을 화나게 하거나 흥미를 갖게 하는 데. 상대가 원하는 것을 잘도 찾아내지. 흥정에도 재주가 있고."
- "어쩔 수 없는 거야. 그쪽은 분명 이런 일에는 천재니까."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 남자는 게임에서 이기는데 천재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는 심정이었다. 말하자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장기를 둔 사람과 핸디캡 적용도 없이 맞장기로 싸우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승산이 거의 없었다.
- 절로 이누이트 족 이야기가 떠올랐다.
사이코패스와 관련된 책을 읽다 보면 대부분 반드시 인용되는 에피소드, '쿤란게타' 이야기다.
- 한 인류학자가 이누이트 족에게서 '쿤란게타'라는 단어를 듣는다. '쿤란게타'는 '태연히 거짓말을 하고, 물건을 훔치고, 많은 여자와 자며 혼이 나도 반성하지 않아 늘 장로에게 벌을 받는 자'를 말한다.
- 자전거가 달리기 시작했다.
치바 씨의 등은 똑바로 뻗어 있었는데 겉보기와 달리 근육이 발달해 있는지 두툼한 기둥 같았다. 힘이 꽉 찬 육체였다.
- 그때 자전거가 속도를 올렸다. 여기서 더 빨라질 수 있단 말인가. 치바 씨의 다리는 엔진의 피스톤처럼 율동적이며 빨랐다. 최소한으로만 몸이 흔들리는 것도 믿기 힘들었다.
- 전방에 또다시 흰 차가 보였다. 그때 나는 길이 경사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방이 오르막이라 나조차도 뒤쪽으로 무게를 느끼고 있었다.
오르막 언덕길에서 이렇게까지 빨리 달릴 수 있다니. 현실감이 없었다. 치바 씨는 여전했다. 다리의 움직임도 아까까지와 같았다. 아니, 다리는 뒤쪽으로 당기려는 중력을 떼어내듯 더 격렬하게 움직였다. 속도도 더 올라갔다.
- 여기서 죽는 건가.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우리는 아직 살아 있었다.
치바 씨의 자전거는 예각으로 돌면서도 속도를 올려 차와 닿을 듯 말 듯 스쳐 지나갔다. 등 뒤쪽은 경적으로 아비규환이 되어 있었다.
나는 치바 씨한테 딱 달라붙어 중얼거렸다. "죽는 줄 알았네."
"야마노베, 죽는 건 무섭지 않다고 했었지."
"죽는 건 무섭지 않아요." 나는 대답했다. 제대로 말이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무섭지만, 무섭지 않아요."
- "약이 있으니까 통증은 그리 지독하진 않아. 그런데 잠이 와." 아버지는 하루의 대부분을 잔다고 말하더니, 마침 지금 깨어 있으니 행운이라며 내게 고마운 줄 알라는 듯 말했다. 눈에는 힘이 없고 이불 바깥으로 보이는 발목은 깜짝 놀랄 만큼 가늘어서 나는 흠칫 놀랐다. 이 사람은 여기서 이제 죽음만 기다리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 깊은 곳이 끈으로 단단히 조이듯 아파왔다. 그때 아버지가 말했다. "뭐, 팔팔해서야 죽질 못하니까." 허세나 사람 썰렁하게 만드는 농담이 아니라 조용히 '옳은 것'을 확인하는 듯한 중얼거림이라 나도 자연스럽게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 잠시 잡담을 나눈 뒤 내가 물었다. "뭐 하고 싶은 거 없어요? 한계가 있겠지만, 먹고 싶은 거라든가 보고 싶은 거라든가."
"잘 아시는 대로, 저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아버지는 짐짓 정중하게 말했다. "하고 싶은 건 이제 없습니다. 아버지로서 제대로 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건." 나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지만 그 말마따나 가정을 돌보지 않고 살아온 아버지를 향한 화는 품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긴 하지만"이라고 말해버렸다. 그나마 나이를 먹고도 멋대로 방탕하게 살며 주위에 폐를 끼치는 아버지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이 아버지로서 얼마나 제대로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문제기도 하고요."
- "그게 왜요?" 내가 묻자 아버지는 다정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거랑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같다고요? 놀이공원이랑 뭐가요?"
"무섭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네가 무서워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어. 그러니까." 아버지는 계속했다. "먼저 가서 무섭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 오마."
- 아버지는 그로부터 보름 정도 더 살았다. 내가 보러 가면 대부분 잠들어 있었지만 의식이 확실한 때도 그럭저럭 있었다. 대화는 나날이 힘들어졌지만 내가 말을 걸면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끔은 대답도 해줬다.
- 아버지가 집에서 아주 평범하게 지내면서 조금씩 약해져 간 모습을 돌이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어머니에게 "왠지 죽는 게 안 무서워졌어"라고 말하고 있었다.
- "무섭지만, 언젠가 나도 죽을 텐데 그게 그렇게 특별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 무서운 일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로 느껴져."
어머니는 "어머나" 하고 감탄과 어이없음이 뒤섞인 한숨을 토해냈다. "네 아버지, 대단하네."
"뭐가?"
"부모란, 자식의 인생이 무사하기만을 바라는 법이야." 작은 체구의 어머니가 그때는 키가 쑥 늘어나 나를 내려다보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내가 아이 때로 돌아갔는지도 모르겠다. "자식이 힘든 일이나 무서운 일을 겪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주기를 바라지. 네가 유명 작가건 말건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
- "평화롭게 산다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그러게. 살아간다는 건 힘든 일이나 무서운 일이 계속되는 거니까. 죽는다는 건 그중 가장 큰 거잖아."
"가장 큰 거?"
"죽음이 가장 무서운 거 아닐까. 게다가 무섭게도 그 가장 무서운 죽음은 누구에게든 반드시 찾아와."
- 언젠가 우리는 죽는다. 그건 결코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법칙이다. 다시 말해 어떤 인간이든, 어떤 아이든 반드시, 죽음을 맞이할 때가 온다. 어떠한 인생을 살건, 성공했건 실패했건 반드시 '가장 무서운 일'이 찾아온다.
"그래서 네 아버지, 그것 때문에 애썼어."
"무엇 때문에?"
"언젠가 죽는 때가 찾아오지만, 그건 결코 무서운 게 아니라는 걸 가르쳐주기 위해서."
- 치바 씨의 마지막 말도 날아들었다.
"오늘의 너라면 괜찮아."
- 이누이트 족의 '쿤란게타' 이야기가 또다시 머리를 스친다.
집단을 어지럽히는 자, 장로에게 꾸중을 들어도 죄를 저지르는 자. 쿤란게타라고 불리는 자.
학자가 '이런 사람과는 대체 어떤 식으로 어울리는가' 하고 묻자 이누이트 족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아무도 안 볼 때, 누가 그 녀석을 빙하 아래로 떨어뜨린다."
- 사이코패스 한 명이 공동체를 어지럽힌다. 그 녀석을 떨어뜨려 해결한다. 간결하면서도 무서운 구조다.
그것이 옳다고만은 할 수 없다. 하지만 24대 1인 구도가 10대 15가 되고, 까딱 잘못하면 5대 20이 되어 평화가 깨진다면 그런 대처도 현명한 지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 다른 말도 머릿속에 떠오른다. 와타나베 선생의 문장이다. 관용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불관용에 불관용해야 하는가.
불관용해져서는 안 된다.
와타나베 선생의 결론은 그렇다.
- 그것은 정의는 이긴다, 사람은 아름답다, 하는 이상론적인 몽상에서 온 것이 아니다. 더 비관적이고 현실적이다. 와타나베 선생은 '관용'은 '불관용'에 의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했다. '관용'에게 무기는 '설득'과 '자기반성' 밖에 없다는 힘 빠지는 말도 했다. 하지만 '관용'에 의해 '불관용'은 조금씩 약해져 간다. '불관용'이 멸망하는 일은 없다 해도 힘은 약해질 것이다, 하고 기도하는 듯한 심정이 적혀 있었다.
- 나는 그 강요하지 않는, 희망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헷갈리는 이상론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왔다.
하지만 그건 역시 무리라고 지금은 생각한다.
- '인간의 경우 맹수를 상대하는 것과는 달리 설득할 기회가 있다.'
와타나베 선생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설득이 통하지 않으며 결코 반성하지 않는 남자가 지금, 내 앞에 있다.
- 호수는 엄청나게 컸다. 비 탓에 수면에 파문을 수없이 만들어가면서도 조용한 모습이었다. 하늘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 같기도 했다.
소리라는 소리, 욕망이라는 욕망, 우리의 모든 감정을 빨아들일 만한 관용을 갖춘, 말은 없지만 위엄으로 가득한 생물을 목격한 기분이었다. 순간 내가 아주 작게 느껴졌다.
- 호수 맞은편으로는 산이 펼쳐져 있다. 비인지 안개인지가 희부옇게 아물거려 산의 윤곽을 아련하게 만들고 있었다.
- 그 커다란 호수가 차의 이동에 따라 천천히 각도를 바꾸어간다. 산의 방향이 변한다. 길 왼편에 있던 주차장이 곧바로 뒤쪽으로 물러난다. 그대로 넋을 잃고 바라만 보게 될 것 같아 정신을 차린다.
- 여기 있는 것은 나뿐이지만, 미키나 나쓰미, 미키의 부모님과 그 조부모님, 내 어머니를 비롯한 많은 가족들의 힘이 나를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의 협력 덕분에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필요 이상으로 겁먹지 말자.
- 그 뒤에 일어난 수면의 거친 물보라는 생생했다.
말이 나오지 않는다. 기다시피 몸을 일으켰다. 호수는 표면을 크게 파열시키며 차와 자전거, 그리고 치바 씨를 집어삼키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잠잠해졌다.
- 이제 모든 게 끝이다. 아무런 감정 없이 나는 그저 그렇게 생각한다.
쥐 죽은 듯 고요한 호수만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잠시 뒤 나는 자신에게 말한다. "아무것도 무섭지 않아." 그런 다음 몸의 심지에 점화되는 생각을, 내 안의 팔로 감쌌다. 가녀린 불씨를 닮은 그 기분이 부풀어 오르며 언어로 바뀌기 시작했다.
- 호수의 물이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뒤엉킨 천 같은 주름이 수면에 보였다.
돌아오라.
내 감정을 언어로 변화하면 그랬다.
돌아와 줘. 다시 한번 강하게 마음속으로 왼다.
돌아와 줬으면 좋겠어.
수면이 촤르르 튀었다. 요란하지는 않지만 작은 파열이 일어났다.
물이 튀면서 치바 씨의 머리가 수면 밖으로 나왔다.
아아. 나는 신음했다.
- "용케 돌아오셨네요." 그러자 그는 당연한 소리를 왜 하냐는 듯 뜬금없다는 표정을 보였다. 진지해 보이는 한편으로 성가신 듯도 보였다. "난 딱히 아무것도 안 했어."
"아니요. 아무것도 안 했을 리가 없죠. 어떻게 올라왔어요?"
"뭐라더라. 내 부피만큼 가벼워져서. 무게가 아니라." 치바 씨가 웅얼웅얼 또 수수께끼 같은 소리를 했다.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가 곧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부력 말하는 거예요?"
"어어, 그거. 내가 아니라 부력이 일한 것뿐이야."
- 나는 웃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얼른 이 이야기를 아내 미키에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몸뚱이에 묶여 있던 묵직한 돌덩이가 떨어져 나가 부웅 떠오를 것처럼 가벼워졌다.
- 라디오는 어디 있나. 치바 씨가 말했다.
- "그렇지. 아, 그런데."
"뭐 딴 거 한 거 있으세요?"
"자전거를 훔쳐버렸네." 야마노베가 뒤에 있는 나를 살짝 신경 쓰는 듯 몸을 기울였다.
미노와가 어이가 없다는 듯 하 소리를 낸 이유를 난 모르겠다. 안도한 것인지 경계한 것인지.
"우선 자전거 건은 확실히 사과합시다. 독극물을 뿌릴 남자를 막기 위한 거였으니까요."
"아." 그때 야마노베가 목청을 높였다. 이번에는 내 쪽을 확실하게 돌아보았다. 부모에게 혼날까 겁먹은 아이가 저런 표정을 짓던데.
- "경찰에 가면 한동안 귀찮아져요. 죄는 없다지만 언론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거고요. 그러니까."
"잠시 쉬라고? 그런데 그것도 꼭 도망 다니는 느낌이라 피곤해."
그래놓고 야마노베는 거기서 백 미터도 못 가서 "오늘은 이만 쉴까"라며 자신의 주장을 뒤집었다. 이유는 복잡하지 않았다. 운전하는 미키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마에 손을 대보더니 야마노베가 뜨겁다고 말했다.
- "내일까지 여론이 야마노베 씨를 보는 이미지를 확 바꿔놓을 테니 두고 보세요. 확실한 이미지 상승을."
"그걸 왜."
"예?"
"그 좋은 수완을 왜, 내 담당 편집자일 때는 발휘하지 않은 거야?"
야마노베의 말에 미노와가 기뻐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프런트에 워크맨이 함부로 놓여 있는 걸 보고 내가 누구 거냐고 물었더니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아주 오래된 분실물입니다" 하고 대답하기에 빌리기로 했다. 그 시점에 이 숙소는 내게 일류 시설로 분류됐다.
- 거의 절체절명의, 대부분의 인간이라면 이제 끝이라고 포기할 만한 상황이었는데도 여전히 살아남으려 애쓰는 강한 의지, 곤란을 극복하기 위한 판단력에 나는 감탄했다.
- "살아 있어." 방이 1층이었는데 창밖에서 유리를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기에 문을 열어보니, 가가와가 비를 흠뻑 맞으며 서 있었다.
- "20년 동안. 그렇게 정해져 버렸으니."
"통증은 어떻고?"
"그야 있겠지."
"있겠지?" 당연하다는 듯 말하기에 나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 "앞으로 20년은 더 살 수 있다고 한 거지, 딱히 부상이나 통증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는 안 적혀있지 않았나."
- "아마 곧 중단될 거야. 위쪽에서 캠페인은 이제 그만한다고 말할 게 분명해. 규칙이나 제도를 제멋대로 변경했다가는 또 제자리에 돌려놓는다니까."
- "발견 안 될 것 같은데."
"어떻게 단언하지?"
"악어도 발견 안 되고 있으니까."
- "그게 가능해?"
"상부의 위신을 걸고." 가가와가 웃었다. "본인들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뭔들 못 할까."
"인간이랑 똑같아, 그런 건." 나는 한숨을 쉬었다.
- "언제가 됐건 마찬가지야."
흐음. 가가와가 나를 존중하는 것도 같고 비웃는 것도 같은 대꾸를 했다.
- "게다가, 이래저래 즐거웠어."
"온통 엄청난 일투성이인 일주일이었는데?" 미키가 농담조로 말했다.
"너무 엄청나서 머리가 몽롱했던 탓도 있겠지만, 치바 씨 덕분에 좀 즐거웠다는 생각은 들어."
"치바 씨는 어때요? 즐거웠어요?" 미키가 나를 보았다.
- 요 일주일간의 행동은 나에게는 일이었기 때문에 즐거웠냐고 물어봐도 대답할 길이 없었다. "글쎄, 어땠는지." 나는 아리송하게 대답했다.
- 나는 전날 일을 떠올렸다. 자전거는 우연히 거기에 있었을 뿐, 야마노베를 태우고 혼조를 추격한 것도 얼른 결판을 내고 라디오로 음악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좀 귀찮긴 했지." 일이란 게 그런 거지,라고 말하려 했다.
- 그런데 그때 미키가 아 하고 입술을 벌리더니 "그거" 하며 나를 가리켰다. "파스칼이 한 말 아니었어?" 미키가 야마노베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야마노베가 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뭐랬더라.
야마노베를 보니 그가 눈으로 웃고 있었다.
"왜 웃지?"
"치바 씨는 우리를 위해 귀찮은 일을 해줬어요." 야마노베는 살짝 고개를 끄덕했다.
"그걸로 충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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