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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리 티스데일]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 죽음과 죽어감에 관한 실질적 조언

일루젼 2023. 7. 2.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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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샐리 티스데일 / 박미경

원제 : Advice for Future Corpses (and Those Who Love Them): A Practical Perspective on Death and Dying 

출판 : 비잉(Being)
출간 : 2019.06.19


       

몇 달 전, 책장을 정리하다가 이 책을 발견했었다. 당시에는 표지만 힐끗 보고 '다이애나 애실의 <어떻게 늙을까>가 한 권 더 있었군'하고 알라딘에 처분했었는데,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 불현듯 이 책이 다시 떠올랐다. 이미 책을 처분한 상태에서 어떻게 두 책이 다른 책이라는 걸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이 책은 내가 읽지 않았던 책이라는 걸 알았다. 

 

그렇게 다시 구해 읽게 된 <안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는 만족스러웠다. 꼭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원제인 'Advice for Future Corpses'가 꽤 위트 있다고 생각하는데, 번역제는 그 맛을 크게 살리지 못한 것 같아 조금 아쉽다. 

 

예전에 읽었던 '케이틀린 도티'의 <좋은 시체가 되고 싶어>나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과 상당히 유사한 부분이 많았는데, 차이점이 있다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는 '아직 죽기 전'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시한부 선고를 받았거나 노환으로 인해 내일을 기약하기 어려운 이들, 그리고 그와 가까운 이들이 알고 있었다면 더 좋았을 부분들을 조심스러우면서도 유쾌하게 다루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떻게든 그것을 외면하려고 애쓴다. 살아있는 인간에게 '탄생'과 '죽음'만큼 보편적인 것은 없을 텐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이하는 죽음을 앞두고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된다. 갑작스럽게 찾아올지도 모르는 '바로 그 순간'에 대한 사전 준비에 가장 적절한 때는 바로 '지금'이다. 

 

아주 좋게 읽었지만, 사후의 신체를 다루는 부분은 케이틀린 도티의 저서와 지나치다 싶을 만큼 유사해서 기분이 좀 묘했다. 참고 도서로 소개되어 있지는 않았다. 원서 기준으로는 도티의 책이 훨씬 먼저 출간된 것으로 보이는데, 단순한 우연이고 전혀 연관성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든다. 이 책이 <뉴욕 타임즈 평론가들이 선정한 2018년 올해의 책>일 수 있었다면 도티의 책 또한 그럴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서. 

 

간호사이자 불교 수행자이자 작가이자 임상 지도사인 저자 '샐리 티스데일'과 장의사이자 시체 연구가인 '케이틀린 도티'의 방향성은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다루고 있는 내용만큼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에 관하여 - 미래의 시체들에게'로 동일하므로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케이틀린 도티의 책도 함께 읽어보시길 추천한다.  

 

끝.         


   

- 지금 당장 머릿속에 당신이 원하는 임종 장면을 떠올려보라. 장소는 침실도 좋고 호젓한 산속이나 멋진 호텔도 좋다. 뭐든 원하는 대로 상상하라. 계절이나 시간은 언제가 좋은가? 여름날 싱그러운 잔디에 누워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죽고 싶다면 그 장면을 떠올리면 된다. 안락한 침대에 누워 모차르트 또는 비욘세 음악을 들으며 죽고 싶을 수도 있겠다.

 

- 혼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가? 아니면 누군가의 손을 잡은 채 눈 감고 싶은가? 빵 굽는 냄새를 맡고 싶은가, 아니면 샤넬 No.19? 눈을 감아보라. 잔디의 파릇파릇함을, 실크 시트의 부드러움을 느껴보라. 사랑하는 사람의 손길을 느껴보라. 엄숙하게 흐르는 선율에 귀를 기울여보라. 어깨춤이라도 살짝 춰보라. 빵 냄새를 맡아보라. 뭐든 상상해 보라. 

 

- 숙련된 전기 기술자는 처음 들어간 집에서도 배선을 쉽게 파악하듯, 나 역시 새로운 상황에 선뜻 대처할 수 있다. 하지만 익숙하다고 해서 죽음과 임종의 순간이 평범한 일은 아니다. 그간의 경험에서 배운 바, 죽는 과정과 죽음은 늘 놀라움의 연속이다.

 

- 선불교 스승인 다이닌 가타기리 Dainin Katagiri 선사는 죽음을 앞두고 <침묵으로 돌아가라(원제: Returning to Silence)>라는 주목할 만한 책을 집필했다. 선사는 이 책에서 우리 인생은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설파했다. 취약하기 때문에 더 소중히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에는 우리가 결국 죽을 운명이라는 엄연한 전제가 깔려 있다.

 

- 위태로운 아름다움, 우리의 고충이 여기에 있다. 죽음은 결코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사라지기 때문에 아름답고 영원할 수 없어 고귀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늘 잊고 산다.

 

- 종교에서도 죽음을 숙고하기 위해 베커의 공포를 끌어오곤 한다. 하지만 종교적 관점에서 죽음의 공포는 일종의 해방감을 선사한다. 일본의 불화인 구상도(九相圖)는 부패해 가는 인간의 모습을 아홉 단계로 나눠 보여주는데, 죽으면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는 가르침을 전한다. 유럽 교회의 벽면은 흔히 해골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 이슬람교도는 죽음을 자주 숙고하라고 권유받는다. 부처는 여러 제자들을 납골당에 보내 시체 명상(corpse meditation)을 하게 했다. 어떤 시신 위에서 명상해야 하는지도 특정해 주었다. 아름다운 몸매를 보고 욕정을 느끼는 사람은 부풀어 오른 시신 위에서 명상해야 한다. 자신의 고운 안색에 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변색된 시신 위에서 명상해야 한다. 이러한 명상의 예를 한 가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내 몸도 참으로 이와 같다. 다 같은 종류다! 이 육신도 똑같이 역겨워질 것이다. 이러한 운명을 결코 피할 수 없다!"

 

- 이것은 오만을 물리치는 약이요, 우리가 변화를 피할 수 있다는 헛된 믿음을 물리치는 약이기도 하다. 부처 자신은 죽어가면서 주변에 둘러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개를 돌리지 마라. 너희도 이와 같을지니라."

 

- 도대체 어떻게 하면 죽을 준비가 될까? 우리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두려워한다는 사실에서 시작한다. 그 두려움을 오래, 아주 오래 검토해야 한다. 우리가 외면했던 진실, 즉 우리 모두 미래의 시신임을 인정하는 것부터 해야 한다.

 

- 사람들은 흔히 자기 몸을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상태에서 조용히 떠나는 걸 상상한다. 흠, 그야말로 상상이다. 소위 좋은 죽음에 대한 이상이 우리를 옥죄고 있다. 죽음은 성공이냐 실패냐의 문제도 아니고, 성취해야 할 대상도 아니다. 삶과 죽음은 소유물이 아니다. 죽음이 특정 방식을 띠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와 다를 땐 나쁘다고 판단할 것인가? 남들이 원하거나 계획한 방식을 함부로 왈가왈부하지 마라. 어차피 혼자서 가야 할 길이다. 죽음의 가치는 남들의 생각에 달려 있지 않다. 내 죽음은 오로지 내 소관이며, 내 죽음의 가치는 내가 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죽음이 우리 삶과 어울릴까? 우리가 살기 위해 애썼던 방식을, 살고 싶었던 방식을 죽음에도 반영할 수 있을까? 막연히 '좋은 죽음'을 바라지 말고, '적합한 죽음'을 고민해 보는 게 낫지 않을까. 

 

- 일반적으로 좋은 죽음이란 죽어가는 사람이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로 한다. 또한 다른 사람들 눈에도 그렇게 비쳐야 한다. 실제로 정부에서 제시한 정의를 살펴보면, 한 개인에게 벌어지는 사건에 으레 타인이 포함된다. 좋은 죽음에 대한 정의는 대부분 사회적 성격을 띠며, 돌보는 사람과 가족과 목격자가 그 사건의 일부로 간주된다. 그래서 당신에게 좋은 죽음이라 할지라도 당신 가족이나 간호조무사에게 탐탁지 않으면, 그 방법을 바꿔야 할 수도 있다.

 

- 죽음을 가장 많이 목격하는 보호 시설, 가령 호스피스에서는 좋은 죽음을 어떻게 규정할까? '행해질 수 있는 일이 다 행해졌다고 판단될 때 조용히 떠나는 책임감 있는 개인'이 전제된다. 죽어가는 사람이 불편해하거나 자기들 예상대로 행동하지 않거나 당연히 원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면, 돌보는 사람과 목격자는 마음이 편치 않다. 하지만 당사자가 아닌 제3자가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 가족과 돌보는 사람들이 아무리 다정한 태도와 말을 취한다 하더라도 환자의 의향을 되묻거나 특정 방식으로 행동하라고 요구하거나 진짜 의도가 뭐냐고 캐묻는다면 환자를 은연중에 압박하여 결국 자기들이 바라는 좋은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환자 본인만 빼고 다들 합의한 방식으로 말이다. 가족구성원들은 더 이상 치료와 관련해 왈가왈부하지 않고 밤늦게 복도에서 소란을 피우지도 않으며 의사와 간호사에게 따지지도 않는다. 

 

- 사람들은 죽어가면서 품위(dignity)를 잃을까 봐 몹시 두려워한다. 토머스 브라운 Thomas Browne 경은 "죽음이 두렵다기보다는 죽음으로 인한 결과가 부끄럽기 그지없다. 죽음은 우리의 본성에 수치와 불명예를 안긴다. 순식간에 외양을 흉하게 망가뜨려서 가장 가까운 친구들과 아내와 자식들마저 우리를 보고 흠칫 놀랄 정도다"라고 적었다. 브라운 경은 죽음에 수반되는 '동정의 눈물'이 너무 싫어서 차라리 아무도 안 보는 데서 익사하고 싶다고 말했다.

 

- 조력사(assisted death)를 택하는 사람들이 흔히 대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품위 유지이다. 그런 죽음에 '존엄사(death with dignity)'라는 그럴싸한 이름까지 붙여준다. 품위 있게 죽으려면 그런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자기 몸을 스스로 돌보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고통과 모욕감'을 몹시 두려워한다. 다른 이는 먹는 걸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걸 두려워하거나 뒤처리에 도움을 받아야 하는 걸 두려워한다. 막상 그런 상황이 닥치면 별 거리낌 없이 도움을 받으면서도 흔히 그런 상황이 우리의 품위를 떨어뜨린다고 여긴다.

 

- 우리는 자율성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 인권이라는 개념에는 인간은 누구나 타고난 존엄성을 지닌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난민과 전쟁 포로가 도움을 받아 마땅한 건 그들이 내재적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답게 대접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없기 때문에 '수모(indignity)'를 겪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존엄성은 우리가 가진 핵심 자질인가, 아니면 통제력 행사 여부에 따라 달라지는가?  

 

- 우리는 중병에 걸리면 당연히 도움이 필요한 상태에 처하고 사생활이 크게 침해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다른 사람을 돌봐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으며, 너무 약해서 스스로 생활하기 힘든 사람에게 도움을 주다 보면 절로 겸손해진다. 어쩌면 당신은 신체적 허약함이 품위를 훼손시키는 건 아니라고 강력히 주장할 것이다.

 

- 우리는 임종 과정의 여러 요소를 계획할 수 있다. 유언장을 작성하고, 듣고 싶은 음악과 시신 처리 방법을 미리 정해둘 수 있다. 죽어가면서 조력을 받을지 내 손으로 약물을 마실지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방법과 절차를 선택했다고 해서 내가 죽음을 선택한 건 아니다. 죽음이 나를 선택한 것이다. 우리가 죽음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은 순전히 착각이다.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그런 착각에서 벗어나는 게 점점 쉬워지는 것 같다. 또한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렇다고 해서 내 가치가 훼손됐다고 여기지 않게 되었다. 자율성은 육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난민과 전쟁포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몸이 갇힌 상태에서도 자유롭게 생각하고 그 생각을 고수할 수 있다. 그게 진정한 자기 결정권이다. 내 몸이 내 가치를 반영하는 게 아님을 받아들이기가 갈수록 쉬워진다. 하지만 전보다 쉬워졌다는 말이지, 쉽다는 말은 아니다. 이 모든 변화를 한꺼번에 받아들이는 게 나로서는 다소 벅찬 것 같다.

 

- 그 시간 동안 벌어진 일은 전혀 기억할 수 없었지만 여전히 질이었다. 직설적이고 성마르며 호기심과 재기가 넘쳤다. 정신은 살짝 나갔지만 질 하면 떠오르는 자질을 여전히 갖추고 있었다. 오늘날까지도 질은 그 워크숍에 갔던 일이나 병원에 보내졌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우리가 너무나 소중하게 여기는 본질적이고 의식적인 '나', 즉 통제력을 행사하고 결정을 내리는 자아는 사라졌지만 우리가 평소 알던 사람은 여전히 있었다. 질의 독특한 자질과 면모는 잠시도 사라지지 않았다. 워크숍 진행을 장기자랑이라고 말한 것도 실은 질 특유의 재치 있는 논평이었다. 다들 그런 기분을 한두 번은 느꼈기 때문이다. 그날은 결국 질을 빼고 워크숍을 진행했다. 도중에 누군가가 밝은 목소리로 "질이 죽음과 죽어감에 관한 워크숍을 진행하다 죽으면 멋지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잠깐이긴 하지만 진짜로 그랬다. 


- 나는 질의 실종된 하루에서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그 사건은 뇌가 맛이 가더라도 그 사람의 실체가 남아 있음을 실질적으로 보여주었다. 우리가 우리 몸을 통제할 수 없거나 스스로 돌보지 못하거나 결정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어떻게든 여전히 존재할 수 있다. 평소 태도와 사고방식(habits of mind)이 우리를 이끈다. 나는 호기심을 느끼고 기꺼운 마음으로 죽음과 대면하고 싶다. 당신은 어떤가? 헌신과 사랑과 모험심 속에서 죽음을 만나고 싶은가, 아니면 꺼져가는 불빛에 대고 분노를 표하고 싶은가?  

 

- 지금부터 그러한 자질을 기르고 익히도록 하라. 그러한 자질이 몸에 배면 정신이 나가더라도 그대로 행동할 수 있다. 습관의 힘은 그만큼 강력하다. 나는 낯선 환경에 처하거나 몹시 두려운 상황에서도 호기심을 느끼려고 노력한다. 나는 뒤에서 버스가 덮치는 상황을 떠올린다. 심장마비로 쓰러지는 상황을 떠올린다. 머리 위로 운석이 떨어지는 상황을 떠올린다. 그나저나 운석은 어떻게 생겼을까? 호기심엔 제약이 없다. 온갖 두려운 상황에서 호기심을 발휘하면, 내가 가장 필요한 순간에 호기심이 발동할 것이다.

 

- 죽음은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티베트의 불교도는 특별한 명상과 시각화(視覺化)를 통해 죽는 과정을 수련한다. 그래야 실제로 죽는 순간에 당황하지 않고 그 경험을 인식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들은 죽음을 기나긴 과정으로 생각한다. 육체가 기능을 멈추기 전부터 시작해서 며칠, 몇 주, 심지어 몇 년에 걸쳐 죽음이 진행된다고 생각한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은 직후에 바르도(Bardo)에 들어간다고 가르친다. 바르도는 사람이 죽은 후 다시 환생하기까지 머무는 중간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임상적 죽음(clinical death)' 이후에 소생한 사람들은 처음엔 자신이 죽었음을 깨닫지 못했다고 말한다. 죽음을 둘러싼 순간에 제공되는 복잡한 가르침은 당사자가 죽었음을 알려주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 죽어가는 육체가 무척 평온해 보이는 것과 달리, 실제로는 이때가 엄청난 혼돈의 시간이다. 우리는 원상태로 돌아간다. 의식은 더 이상 육체에 갇혀 있지 않다. 지각과 감각은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자아를 형성한 씨실과 날실이 황급히 풀려나간다. 지금이야말로 관점을 확 바꿔야 한다. 놀라운 일에 익숙한 사람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도 잘 대처한다. 외부 사건이든 자기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든 말이다. 달리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는 호기심이 크나큰 도움이 될 것이다. 

 - 연민은 타인의 고통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이다. 죽어가는 사람의 병상을 지킬 때는 당사자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 고통을 함께 나누게 된다. 아울러 안타까운 마음에 어떻게든 고통을 덜어주고 싶어 한다. 그래서 죽어가는 사람을 상대로 부모 노릇을 하려 든다. 큰일을 결정할 때도 그렇고("당연히 수술을 받아야죠!") 자잘한 일에서도 그렇다("입맛이 없어도 한술 떠야죠!"). 때로는 당사자의 바람을 무시하기도 하고, 당사자의 바람이 우리와 다르면 정도를 벗어났다고 간주한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 죽어가는 사람을 돌볼 때 에너지의 절반은 경청하는 데 써야 한다.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을 앞세우고 남의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도 뭐라고 말할지 궁리한다. 상대방이 말할 땐 귀를 쫑긋 세워라. 중간에 한 마디씩 던져라. 
"그건 정말 어렵게 들리네요." 
"당신이 이 문제를 얼마나 고심했는지 알 것 같아요."
딴 생각이 들려고 하면 정신을 차리고 더 자세히 말해 달라고 요청하라. 질문을 던져서 궁금한 점을 해소하라.
"흠, 그 점은 좀 더 자세히 말해주세요."

 

- 죽어가는 사람과 함께 지내는 사람은 '보호자'가 된다. 보호자는 중용과 프라이버시, 침묵과 웃음 등 일상생활에서 놓칠 수 있는 온갖 일들의 옹호자요, 죽어가는 사람의 요구를 들어줄 수호자 역할을 해야 한다. 또한 '문지기' 역할도 해야 한다. 환자도 방문자도 문지기가 필요하다! 문지기는 방문자에게 웃으면서 "이제 그만 일어나시는 게 좋겠어요!"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들러주세요!"라고 말하면서 문까지 안내할 수 있어야 한다. 

 

- 방문자 유형은 참으로 다양하다. 친구들은 흔히 잠시 들러서 차 한잔 마시며 얘기를 나눈 후 나가면서 쓰레기를 내다 버려준다. 그런 친구들은 언제 와도 반갑다. 하지만 그런 사람만 오지는 않는다. 작가인 글레넌 도일 Glennon Doyle이 '해결사'라고 부르는 사람이 올 수도 있다. 해결사는 "뭐든 말해봐. 내가 해결책을 알려줄게"라고 호언장담하면서 노상 엉덩이를 들썩이며 남의 일에 간섭하려 든다. 도일은 힘든 이혼 과정을 거치면서 '비교자'도 여럿 만났다. 비교자는 이야기를 들어줄 것처럼 찾아와선 자기 경험과 어떻게 다른지, 혹은 같은지 비교한다. 때로는 자기 조카나 이모의 남자 친구의 사촌의 경험까지 들먹이며 비교하기도 한다. 거기까지도 양반이다. 좀 더 있으면, "세상에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은 없다"라고 주장하는 방문자도 찾아올 것이다. 그런 사람은 서글픈 얼굴로 찾아와서 자기 처지가 더 괴롭고 힘들다고 호소한다.

 

- 죽어가는 사람을 방문할 때는 가능한 범위를 설정하는 것이 좋다. 방문할 때마다 "한 시간 정도 머물 수 있어"라거나 "저녁때까지 있을게"라거나 "메리가 오면 일어날 거야"라고 미리 말해둔다. 설정된 범위는 두 사람이 함께 있을 여유 공간을 제공한다.

 

-  "특별히 먹고 싶은 거 있니?"라고 묻지 말고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줄까, 아니면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줄까?"라는 식으로 구체적으로 물어보라. 그래야 대답하기 쉽다. 늘 허락을 구하되, 허락하기도 하라. 슬퍼하거나 화내도 된다고 허락하라. 졸려하거나 지겨워해도 된다고 허락하라.

 

- 죽어가는 사람을 상대할 때는 늘 솔직해야 한다. 환자에게는 물론이요, 당신 자신에게도 말이다. 정직이 최선의 정책이라는 말은 여기서도 통한다. 당신 자신에게 솔직해야 당신이 진심으로 줄 수 있는 것을 기꺼이 제공할 수 있다. 아픈 사람에게 부담 주지 않는 선에서 당신의 감정 상태를 솔직하게 드러내라. 당신도 때로는 위로가 필요하고, 상황을 부정하거나 통제하고픈 충동도 느끼기 마련이다. 하지만 환자 앞에서 그대로 표출할 수 없어서 꾹 참아버린다.

 

- 당신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 참을 수 없을 땐 잠시 벗어나 있어야 한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면, 그렇다고 인정하고 해소할 방법을 강구하라. (환자에게 당신 기분을 풀어달라고 하지는 마라.) 감정을 억누르는 것과 솔직하게 대하는 것 사이에 균형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화가 나거나 눈물이 나올 때는 어느 정도 자제하려 노력하되, 완전히 숨길 필요는 없다. 반면 질투심과 짜증과 외로움 같은 감정은 환자 앞이 아닌 다른 곳에서 해소해야 한다. "왜 나한테 먼저 연락하지 않았니? 나보다 그녀랑 더 친한 거니?"라는 말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 이것들만 알아도 반은 해결된다. 나머지 반은 실제 벌어지는 일을 지켜보면서 대처하면 된다. 

 - 아픈 사람은 특정 사안에 대한 당신의 반응을 교묘하게 유도하기도 한다. 다루기 힘든 주제의 이야기를 당신과 나눌 수 있는지 시험하는 것이다. 경청이 수용을 보여주는 데 중요하듯이 열린 자세로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환자가 이야기할 때 침대 옆에서 있거나 부산스럽게 돌아다니지 마라. 편안히 앉아서 열린 자세로 이야기를 나눠라. 어려운 주제를 회피하거나 덮으려 하지 마라. 괴로운 심정을 숨기고픈 충동이 강하게 일더라도 화제를 바꾸지 마라. 

 

- 다만 죽었다 깨어나도 논의하기 힘든 주제가 있다면, 미리 분명하게 밝혀두라. 환자로 하여금 자신을 돌보는 사람을 곤란한 상황으로 내몰게 하지 마라.  

 

- 요청받기 전에 함부로 조언하지 마라. 환자가 당신에게 조언을 구하면, 친절하고 솔직하게 조언하되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야 한다. 헛된 희망으로 기운을 북돋우려 하지 마라. "범사에 감사해야지"라고 압박하지 마라. 그들의 행동을 보고 "넌 지금 협상 단계에 들어간 거야"라는 식으로 아는 척하지 마라. 

 

- 괜한 말로 위로하려 들지 말고 일상생활의 불편을 해소하고 계획을 수립하도록 도와주라. 그것도 당사자가 도움 받는 걸 수락했을 때만 나서라. 도와주겠다고 제안한 다음엔 입을 다물라. 환자는 도움 받을 준비가 됐을 때 그 제안을 수락할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아마도 마크는 도움 받을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떠나기 직전까지도 말이다. 그런 식으로 가족과 친구들을, 그리고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 했었는지 모른다. 마크는 끝까지 치료에 매달렸다. 하지만 상태가 너무 급격히 나빠지는 바람에 손쓸 틈이 없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나는 적어도 물어보긴 할 것이다. 적어도 한 번은 물어볼 것이다. 어쩌면 두 번 정도. 그다음엔 그의 대답을 잠자코 기다릴 것이다.

 

-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마라. 상대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라. 뭐든 다 알려고 하거나 보려고 하지 마라. 궁금증에 대한 답변을 다 들으려고 하지도 마라. 당신에겐 그럴 권리가 없다. 글레넌 도일은 특정 부류의 방문자를 '리포터'라고 부른다. '부적절한 질문을 잔뜩 던지고는 눈을 반짝이면서 답변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리포터는 당연히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닌다. (그럴 권리도 자격도 없으면서 "자, 나한테 다 말해봐"라고 요구하지 마라.)

 

- 곁에서 지켜보는 게 견디기 힘들다고 절대로, 절대로 불평하지 마라. (실제로 방문자가 "이 상황은 너보다 내가 더 견디기 힘들어"라고 했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죽어가는 사람은 당신을 위해 그런 일을 해줄 의무가 없다. 당신의 한탄을 들어줄 의무도 없다. 자신의 과거 행동을 설명하거나 자신의 죽음 때문에 속상한 당신의 마음을 달래줄 의무도 없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당신은 위로받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힐 것이다. '날 떠나지 마. 날 두고 어떻게 떠날 수 있어? 난 어쩌라고? 왜 이런 일이 생긴 거야? 어떻게든 해결해 봐!'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 것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아도 죽어가는 사람은 남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칠까 봐 걱정한다. 괴롭지만, 정말로 괴롭지만, 아무도 당신을 일부러 괴롭히는 건 아니다.

 

- 죽어가는 사람이 하는 말에 함부로 반박하지 마라. 자신의 감정상태에 대해서, 천국에 대해서, 통증 우려에 대해서, 치료 확신에 대해서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라. 죽어가는 사람은 짜증을 내거나 침울하거나 위축되기 쉽다. 그렇다고 억지로 기분을 북돋우려 하지 마라. 그들은 진지한 대화를 시작했다가 금세 화제를 바꾸기도 한다. 똑같은 이야기를 자꾸 반복하기도 한다. 헤어질 때 작별인사를 거부하기도 한다. 방금까지 행복한 얼굴로 웃다가도 다음 순간 눈물을 쏟기도 한다.  

 

 


그들은 매 순간 죽어라 노력하고 있다. 당신도 그래야 한다.
  
     

  - 만성 질환은 어떤 사람에겐 엄청난 난관이고 어떤 사람에겐 그저 삶의 한 단면일 뿐이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는 정신력과 체력, 교육과 소득, 성별과 성 정체성, 나이, 직업, 종교 등 다양한 요인이 영향을 미친다. 개인의 자산 가치도 의료 서비스에 대한 접근 정도에 영향을 미친다. 소득이 높은 사람은 더 오래 살고, 아프거나 죽어갈 때도 선택지가 훨씬 더 많다. 평소에 의료 혜택을 누리지 못한 사람은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모른다. 설사 알더라도 어떻게 요구해야 하는지 모른다. 의료비 부담으로 파산을 두려워할 지경이지만 실제로 파산하는 경우도 있지만 선택지가 없다는 생각에 의료 당국을 상대로 끽소리도 못한다. 질병은 곧 청구서를 의미하고, 실직을 초래하고 결국 정체성 상실로 이어진다. 나이가 많을수록 좀 더 고분고분하지만, 요즘 들어선 그런 추세에 변화가 있기도 하다.

 

- 폴 칼라니티는 암 치료를 받을 때, 그간 자신이 맡은 줄도 몰랐던 여러 역할을 내려놔야 했다고 전했다. 의사라는 명백한 역할뿐만 아니라 강하고 적극적인 남자, 지도자, 결정권자 같은 좀 더 미묘한 역할까지 죄다 내려놔야 했다. 심지어 멋진 남자로서의 역할까지. 
"내게서 멋지다고 여겨지던 모든 부분이 하나씩 지워져 나갔습니다."

 

- 우리는 이런 상황에 저항할 수 있다. 나도 암에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면 더 이상 일을 못 하고 혼자 지낼 수도 없으며 셔츠 단추도 스스로 잠그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암보다 더한 불치병에 걸릴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나는 여전히 책을 읽고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몸이 아프다고 해서 줄곧 아픈 사람으로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배관공이기도 하고, 부모이기도 하다. 학생이나 친구나 체스 선수이기도 하다. 평소 건강했던 사람은 오랫동안 이런 역할의 시시콜콜한 측면에 매달리려 한다. (반대로 병자 역할을 수용한 사람은 기존에 맡아왔던 역할을 몽땅 회피하려 한다.) 당신 앞에 누워있는 환자가 누구인지 기억해야 한다. 그들의 여러 측면과 역사까지 다 기억해야 한다.

 

- 죽어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괴롭고 험난하다. 옛 자아가 사라지고 새로운 자아가 등장한다. 우리는 진단을 받음과 동시에 비탄에 빠져든다.  

 

- "왜 나야? 왜 하필 나야?" 
불치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면 암울한 현실 속에서 자기 성찰을 해야 한다. 어떤 모습으로 얼마 동안 할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죽어가는 사람과 돌보는 사람이 직면한 첫 번째 과제이자 가장 힘든 과제 중 하나는 만사가 예전 같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만사가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몸이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관계가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어떤 것도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 그렇지만 우리는 헛된 믿음으로 우리 자신까지 속이기도 한다. 그간의 명상수련 덕분에 나는 고통을 수월하게 넘기지 않을까? '아마 그럴 거야.' 나는 불치병 진단에 대한 불안이나 슬픔을 이겨내고 늘 평정심을 유지해 남들의 존경을 받지 않을까? '당연히 그럴 거야.' 상실감과 비통함은 누구나 느끼는 보편적 감정이다. 오만함도 거의 모두가 느끼는 감정이다. 이러한 감정은 독감처럼 미리 예방주사를 맞는 식으로 피할 수도 없다. 내게 소중한 모든 것과 내가 사랑한 모든 사람이 변한다. 그러한 변화를 넘어서는 존재가 될 방법은 전혀 없다. 아예 불가능하다! 우리는 단계를 건너뛰거나 고통을 피하지 못한다. 통증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지만 그런 속내는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다. 그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 괜찮은 병원에선 때맞춰 진통제를 투여하고, 간호사가 임종 신호를 포착해 당신이 최대한 편히 가도록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해줄 것이다. 괜찮은 병원에선 당신이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해도 늘 청결한 상태를 유지하게 해 줄 것이다. 당신이 속세의 번뇌를 다 벗어던지는 순간까지 아무도 얼굴을 찌푸리거나 듣기 싫은 말을 내뱉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영원히 깨지 않을 잠에 빠져들 때까지 간호사는 전혀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살며시 다가와 몸을 정갈하게 씻겨주고 머리를 빗겨준 뒤 조용히 물러날 것이다.

 

- 프랑수아 라블레 François Rabelais는 16세기에 프랑스에서 활동한의사이자 작가이자 인문주의자다. 사제 서품까지 받았지만 보수적인 교단에 회의를 느껴 의사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평범한 민중의 삶을 탐색하고 서술하는 데 매진했다. 라블레는 쉰아홉의 나이에 사망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나는 엄청난 '어쩌면(perhaps)'을 탐색하러 간다."

 

- 어쩌면. 어쩌면 우리는 소멸을 두려워한다. 어쩌면 우리는 공포를 다스리는 데 최선을 다한다. 어쩌면 우리는 약속된 땅이라고 공공연하게 불리는 것을 손꼽아 기다린다. 세상엔 여러 형태의 위로가 있고 여러 경로의 두려움이 있다. 우리는 죽을 준비가 되면 자신의 내밀한 믿음, 즉 신념, 선함, 죄, 후회, 응보, 초자연적 힘, 사사로운 의문 등을 찬찬히 돌아본다. 아울러 우리가 평생 바라보지 않으려 했던 주제, 즉 '다음엔 무슨 일이 벌어질까?'라는 문제를 똑바로 바라본다. 에피쿠로스는 이 질문의 답은 도저히 알아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알아볼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나'는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걸 안다. 일어나야 할 일이 결국 일어나는지 알아볼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알아낼 수 있겠는가? 

 

- <원더풀 라이프(원제: 死後)>라는 일본 영화는 사람이 죽은 뒤 잠시 머무는 곳에 관한 우화이다. 영화에서 그곳은 한적한 시골의 허름한 호텔로 그려진다. 사람들이 다소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한 명씩 들어온다. 그들에게 방이 하나씩 제공되는데, 영원히 머물고 싶은 기억을 하나씩 고를 때까지 그 방에 머물 수 있다. 기억을 고르면 직원이 그 장면을 재현해서 보여주고, 당사자는 이 영상의 기억만 간직한 채 떠난다. 어떤 사람은 즉석에서 기억을 선택해 행복한 얼굴로 사라진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일생을 다룬 부자연스러운 흑백 영화를 보면서 몇 날 며칠을 고민한다. 일부는 행복한 기억이 하나도 없어서 그냥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다. 일부는 너무 많아서 뭘 골라야 할지 모른다. (가장 좋았던 순간을 결정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벌어지는 일이 이 영화의 핵심 내용이다.)

 

-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사람들은 너나없이 살면서 가장 좋았던 순간을 고르느라 바쁘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공통적으로 고르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특정한 모험이나 경험, 성취의 순간이 아니라 그 이후였다. 뭔가를 이루고 난 뒤에 맛보는, 피곤하지만 뿌듯한 순간 말이다. 분주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갈 때, 땀에 젖고 배도 고프고 여기저기 쑤시지만 집에 돌아가 쉴 수 있다는 생각에 발걸음은 한없이 가볍다. 

 

- 한 번은 임종을 얼마 남기지 않은 노부인이 결정을 내리는 문제로 고민하는 이야기를 옆에서 들었다. 그녀의 친구가 어떻게 결정할지 묻자 노부인이 살짝 당황하며 말했다. 
"글쎄, 잘 모르겠어. 이런 걸 해본 적이 없으니까. 적어도 내 기억으로는."

 

- 환자가 잘 마시지 않으면, 가족은 정맥주사를 맞히고 싶어 한다. 상태가 괜찮을 때도 바늘을 꽂으면 성가시고 불편하다. 특히 자꾸 들썩이거나 자세를 계속 바꿔줘야 하는 환자에겐 정맥주사용 튜브가 거치적거린다. 환자에게 왜 자꾸 먹이려 하는가? 그러지 않으면 환자를 방치한다는 기분이 드는가? 하지만 그럴 필요 없다. 음식을 거부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먹이는 게 오히려 문제다. 단순히 살고 싶지 않아서 음식을 거부하는 게 아니다.

 

- 믿기 어렵겠지만, 임종을 앞둔 환자는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지 않아야 오히려 더 편안하다. 그들도 때로는 갈증을 느끼지만, 물이나 음료가 그들의 갈증을 해소해주지 못한다. 임종 환자가 일주일 이상 전혀 먹거나 마시지 않아도 갈증이나 통증을 호소하지 않고 오히려 평온하게 죽음을 맞는 모습을 간호사와 의사는 수도 없이 목격한다. 임상적으로 탈수증세를 보이는 사람이 때로는 정맥주사제를 맞은 사람보다 더 오래 산다. 

 

- 스콧 니어링 Scott Nearing은 평화주의자이자 작가이자 급진적 경제주의자인데, 자연으로 돌아가 검소하게 살면서 타락한 인간성을 회복하자고 주창했다. 평소에 아흔아홉까지 살다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그는 아내 헬렌이 음식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다 말했다. 
"난 이제 아무것도 먹지 않을 생각이오."
헬렌은 남편의 말을 듣고 이렇게 대답했다.
"알았어요. 나도 나중에 그렇게 할까 봐요. 동물은 언제 멈춰야 하는지 알고 먹이활동을 중단한 채 한적한 곳에 가서 생을 마감하잖아요."

 

- 그나저나 환자를 돌보느라 당신은 너무 지쳤다. 잠시라도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 어디 골방에라도 가서 숨을 돌리거나 근처 커피숍에서 차라도 한잔 마실 여유를 누려야 한다. 누군가를 만나 하소연을 늘어놓거나 기분을 전환할 이야기라도 나눠야 한다. 죽어가는 사람은 더 이상 얘기하고 싶어 하지 않을 수 있다. 당신이 옆에서 귀찮게 구는 게 싫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혼자 있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당신은 딱히 해주는 게 없어도 환자를 혼자 두고 나갈 수 없다. 이럴 땐 도움을 받아야 한다. 여기저기 연락해서 도움을 구하고, 호의적인 손길을 덥석 붙잡아라. 밤엔 더 두렵고 힘들다.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야심한 밤, 머릿속엔 온갖 상념이 떠오른다. 몸은 파김치처럼 늘어지지만 남의 손에 맡긴 아이들 때문에 잠을 설친다. 빨래도 쌓여 있다. 어쩌면 다음날 일찍 출근도 해야 한다. 그런데도 환자 곁을 떠날 수 없다. 환자는 당신이 거기 있길 바란다. 당신이 입 꾹 다물고 가만히 있거나 재잘재잘 떠들거나 책을 읽어주길 바란다. 반복해서 들려주는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길 바란다. 밤새 수발을 들어주길 바란다. 대기하고 있다가 뭐든 해주길 바란다. 그러니 도움을 받아라. 그래야 당신도 뭐든 해줄 수 있다. 
  

- 보건 의료에서 '무익함(futility)'이라는 말은 법률 용어로 사용된다. 의사와 일단의 사람들, 심지어 병원도 무익한 치료(Medical Futility)라는 이유로 고통만 연장시키는 치료를 거부할 수 있다. 하지만 치료의 무익성을 제기한다고 바로 효력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때로는 용어 때문에 본질이 흐려진다. 의사들은 "치료를 철회한다"거나 "보류한다"는 식으로 말한다. 간호사들은 "달리 더 할 게 없다"는 식으로 말한다. 참으로 어리석은 말이다. 환자를 계속 살아 있게 하려는 노력만 안 할 뿐, 할 게 무척 많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상심한 배우자나 자식에게 그런 말은 무력감과 죄책감을 야기한다. 무익한 치료를 중단하는 것은 실제로 올바른 돌봄 행위인데도 말이다. 

 

- 그래서 버지니아 모리스는 용어부터 바꾸자고 호소한다. 
"불치병에 걸린 환자에게서 생명 유지 장치를 떼어낼 때, 우리는 '플러그를 뽑는 것'이 아니라 환자에게 죽을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과도한 기술과 침습적 치료에서 환자를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죽을 자유를 주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돌보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그날을 가능한 한 늦추고 싶어 한다. 엄마나 아빠가 기계에 의지한 채 살아 있기를 바라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면서도 우리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다들 우리에게 얼른 결정하라고 다그치지만 우리는 결정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런 결정을 내려본 경험이 전혀 없다. 우리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런 결정을 내려야 할지도 모른다.

 

- 가장 힘든 부분은 상실감이지만, 당신 자신의 두려움과 욕구를 한쪽으로 제쳐놓는 것도 똑같이 어렵다. 의사인 셔윈 눌랜드 Sherwin Nuland는 생명유지장치와 생명 연장 치료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다들 굉장히 이기적이게 된다"고 말했다. 가족은 물론이요 의사와 간호사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게다가 각자의 이기심에 따라 말하거나 조언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의사들은 또 다른 실험용 약물을 제안할 때 그 약물이 환자에게 최선의 치료제라고 진짜로 믿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면에서 최선이다. 당신의 관점에서 최선이다. 당신이 원하는 최선이다.

 

- 타인을 위해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으려면, 상대를 이해하고 자기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당신은 두렵고 고통스러운 이별을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당신이 병상에 누운 사람의 대리인이란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환자가 원하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당신은 환자가 살기를 바란다. 당신 입장에서 환자가 '좋은' 죽음을 맞이하길 바란다. 남은 가족들이 도착할 때까지 환자가 일주일만 더 살아 있길 바란다. 당신은 가슴을 옥죄는 아픔이 가시길 바란다. 그런데도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죽게 할 치료 과정을 선택할 수 있겠는가? 당신 자신을 위해선 선택할 마음이 있으면서도 환자를 위해선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당신 자신은 결코 원하지 않을 거면서 환자를 위해선 "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당신 자신의 믿음을 한쪽에 제쳐둘 수 있겠는가? 환자는 죽음을 향해 치달리는데 당신은 환자가 살기를 바란다. 이러한 불가피한 이해 충돌 때문에 배우자나 가족이 결정을 다 내리는 건 좋지 않다. 당신의 머릿속을 꽉 채운 갈망을 무시해야 한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

 

- 일본에서는 새해 전날 자신의 장례식 추도문을 쓰는 전통이 있다. 요즘엔 장례식에 쓸 영정 사진을 찍고 시신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옷도 골라둔다고 한다. 일본어 '조오지'는 항상 존재하는 것, 혹은 변치 않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이 말을 '영원히 변치 않는 것(everlasting)'이라고 옮기고 싶다. 이 단어의 이미지는 흔히 달(moon)로 그려진다. 밤마다 달라지는 달이 어떻게 영원히 변치 않을 수 있을까? 밤마다 달라지는데도 달은 늘 달이다. 끊임없이 변하지만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찾아오는 죽음처럼.    
 
- "이젠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포터가 사무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묘사하며 말했다. "자두나무인데, 꽃잎이 꼭 장미 같아요. 하얀 장미. 예전엔 꽃잎을 바라보면서 '아, 꽃이 예쁘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 글을 쓰면서 창밖을 내다보는데, 세상에서 가장 희고 가장 탐스럽고 가장 아름다운 꽃이 보이더군요. 이제야 그게 보이더란 말입니다. 세상 만물이 전보다 더 사소하기도 하고 더 중요하기도 합니다. 사소한 것과 중요한 것의 차이는 별게 아닙니다. 다만 만물의 모습이, 순간순간 눈에 들어오는 그 모습이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포터는 그 느낌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우리더러 직접 경험해 보라고 덧붙였다.
"그 찬란함을 직접 경험해 보십시오.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아, 물론 나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데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내 처지에 무슨... 다만 현재를 눈앞에 보이는 모습을 온전히 보라는 겁니다! 감탄이 절로 나올 겁니다."

 

- "그래요, 이젠 집에 가셔도 돼요."
임종을 앞둔 사람이 작별 인사를 하면 정말로 떠날 준비가 됐다는 뜻이다. 당신도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라. 여러 번 반복할 필요는 없다. 당신의 감정적 니즈를 그에게 풀어달라고 해서는 안 된다. 뜬금없이 용서를 구하지도 마라. (어떤 사람은 환자가 기억도 못하는 일을 거론하며 용서를 구하거나 용서하기도 한다.) 굳이 꺼내지 않아도 될 일을 언급하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라. 그런 일은 죽어가는 사람이 할 일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옛날 일을 꺼내 바로잡거나 해명하려 든다. 지금은 그런 얘기를 꺼내 대화를 주도할 때가 아니다. 당신은 목격자이지 주인공이 아니다. 당신 짐은 당신이 져야 한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짊어지라고 요구하지 마라. 

 

- 임종이 다가올수록 진통제가 더 필요한 사람도 있지만 대개는 덜 필요하다. 그렇지만 의사나 간호사에게 확인하지 않고 함부로 약을 끊거나 바꾸어서는 안 된다. 모르핀은 호흡의 횟수뿐만 아니라 깊이까지 억제할 수 있으므로 호흡기에 문제가 있는 환자에게는 신중하게 투여해야 한다. 죽음이 임박한 환자에게 모르핀을 대량으로 투여하면 호흡이 억제될 가능성이 있다. '이중 효과 원리(Doctrine of Double Effect, DDE)'에 대한 대법원 결정이 이미 몇 차례 나왔다. DDE는 행위자의 의도를 판단의 중요 요소로 고려한다. 고통을 덜어줄 의도로 취해진 조치라면, 불가피한 죽음을 촉진할 가능성이 있더라도 범죄로 처벌할 수 없다. 모르핀이 특정한 죽음을 실제로 촉진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설사 그럴 가능성이 있다 해도, 고통 속에서 몇 시간 더 사는 것보단 고통 없이 죽는 게 낫다. 

 

- 심신의 고통은 자아를 온전히 지키는 데 크나큰 위협이다. 그래도 우리는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물살에 휩쓸린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물처럼 다 빠져나간다 해도, 어떤 것은 변치 않고 남아 있을 거라는 희망에 매달린다. 통증이 있어도 괴롭지 않을 수 있지만, 통증이 없어도 괴로울 수 있다.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통증을 느끼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하지만 몇 가지 증상은 고질적이어서 약물과 간호로도 도저히 다스릴 수 없다. 극심한 호흡 곤란, 섬망, 억제하기 어려운 구역질, 근육 경련, 우울증이 드물긴 하지만 전혀 없진 않다. 

- 그밖에 심리적, 정신적, 영적 형태의 고통도 있다. 환자는 죽음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캘러넌과 켈리는 이들을 붙잡힌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내내 평온하게 지내던 사람이 임박한 죽음을 앞두고 갑자기 어쩔 줄 몰라 한다. 만날 사람이 있나? 편지를 써야 하나? 아니면 털어놓을 이야기가 있을까? 붙잡힌 사람들은 "이대론 못 가겠어!"라고 우리에게 호소하는 것이다. 정말로 만나야 할 사람이 있거나 작별 인사를 나눠야 할 사람이 있는지도 모른다. 계획을 마무리 짓거나 서류에 서명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기념일이 다가오거나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거나 처벌받아야 할 문제가 있거나 갚아야 할 빚이 있는지도 모른다. 남들은 오래전에 잊거나 하찮게 여길 만한 문제가 임종을 앞둔 사람에겐 무척 중요할 수 있다. 그러니 그들의 관심사를 무시하거나 묵살하지 마라. 

 

- 의사와 간호사는 특정한 신체적 변화가 뚜렷이 나타날 때 '액티브 다잉(active dying)'이라는 표현을 쓴다. 임종이 며칠 혹은 몇 시간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의료진은 '능동적으로 죽는다'는 뜻의 이 표현을 예사로 쓰지만, 사람들은 의구심을 품는다. 죽음이 그 순간 진행되고 있다는 뜻인가? 아프진 않을까? 게다가 의식도 없이 가만히 누워 있는데 어떻게 능동적으로 죽을 수 있단 말인가? 

 

- 실제로 죽는 것은 수동적 행위가 아니다. 우리가 통제할 순 없지만 실제로 그 일에 참여한다. 멀찍이서 구경만 하거나 어떤 일이 닥쳐오길 막연히 기다리는 게 아니다. 우리는 실제로 죽어간다. 그 일을 직접 거행한다. 

 

- 익숙한 징후들이 연달아 나타나면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 수 있다. 죽음이 임박한 환자는 극심하게 약해지다가 결국 전혀 움직일 수 없게 된다. 항문 괄약근이 느슨해져서 변을 가리지 못한다. 요실금이 생기고 소변을 보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신장 기능 저하로 소변 생성이 느려지고, 소변의 색과 농도가 어둡고 진해진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소변이 끊긴다. 신장 기능이 아예 멈추고 순환이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혈액의 pH(수소 이온 농도 지수)가 변한다. 근육과 신경을 조절하는 전해액의 비율도 변해서 갑자기 팔다리가 비틀리거나 몸이 떨리거나 들썩거리기도 한다. 손발이 차가워지고 얼룩덜룩한 반점이 생기기도 한다. 순환이 잘 안 돼서 팔다리가 붓는다. 죽어가는 몸은 점점 움츠러든다. 쇼크를 일으킨 것처럼 산소와 에너지가 안쪽으로 몰린다. 정신과 의식도 안쪽으로 향한다. 죽음이 가까워 올수록 감각 중추가 둔해져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 모두 약해진다. 눈이 게슴츠레해지거나 반만 뜨여 있다. 눈이 전혀 깜빡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혼수상태인 사람은 뇌간유발반응청력 검사(Brainn-stem auditory evoked responses, BAERs)에서 정상으로 나타난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사람은 흔히 방에서 이뤄진 대화를 기억한다. 그러니 환자가 늘 당신의 말을 듣고 있다고 생각하라. 죽음이 임박하면 체온 조절 기능이 망가진다. 몸에 열이 오르고 땀을 많이 흘리기도 한다. 피부가 뜨겁고 건조하거나, 뜨겁고 축축하거나, 차갑고 축축할 수 있다. 딸꾹질을 하기도 한다. 

 

- 호흡이 가쁘거나 느려지면서 불규칙해진다. 때로는 아주 깊어지거나 아예 건너뛰기도 한다. 몇 초 동안 숨을 안 쉬어서 무호흡 상태가 되기도 한다. 호흡 속도와 깊이는 사람마다 달라서 일정하게 유지되기도 하고 종잡을 수 없기도 하다. 체인스토크스 호흡(Cheyne-Stokes respiration)은 다양한 이상 호흡이 얼마간 규칙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무호흡-얕은 호흡-깊은 호흡-과호흡-얕은 호흡-무호흡이 일정하게 반복된다. 비오 호흡(Biot's respiration)은 체인스토크스 호흡보다 더 자주 목격되는 호흡으로, 무호흡과 과호흡이 불규칙하게 반복된다. 신음소리가 이따금 날 때도 있고 숨을 내쉴 때마다 날 수도 있다. 때로는 막혔던 숨을 헉! 하고 내뱉거나 고함이라도 치는 양 어깨를 들썩이며 그르렁거리기도 한다. 뭘 씹으면서 호흡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고, 턱을 축 늘어뜨리고 입을 벌린 채 호흡하는 사람도 있다. 
 

- 지속성 흡식 호흡(持續性 吸息 呼吸, Apneustic breathing)은 뇌졸중이나 트라우마 같은 뇌 손상 때문에 야기될 수 있다. 이때는 얕은 호흡이 빠르게 반복되다가 이따금 길지만 얕은 들숨 한 번에 약하고 비효율적인 날숨이 여러 번 나타난다. 임종 직전이나 심장마비환자의 호흡은 몹시 고통스러워 보일 수 있다. 이러한 임종 호흡(agonal breathing)은 무척 약하고 거칠며, 대개 이상한 소리가 동반된다. 지속성 흡식 호흡과 임종 호흡으로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기에, 이런 호흡이 나타나면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 수 있다. 환자의 변화를 유심히 살피면서 환자가 혼자 있고 싶어 할지 모르니 병실을 잠시 비워주는 걸 고려해 보라. 환자의 발이나 손을 가만히 만져도 괜찮다. 아무 말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도 물론 괜찮다. 환자 옆에 나란히 눕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무슨 말이 필요치 않다. 환자는 문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 정상적인 죽음의 과정인데도 간병인과 가족이 특히 괴로워하는 게 있다. 바로 죽어가는 사람의 목에서 나는 가래 끓는 듯한 소리(death rattle)이다. 이런 요란한 호흡은 죽는 과정에서 정상적으로 ...

 

- "죽음은 신체의 모든 조직이 참여하는 과정으로, 그 방법과 속도는 조직마다 다르다. 여기서 핵심은 과정이라는 말에 있다. 행위, 순간, 또는 영혼이 떠나는 시간이라는 뜻의 다른 어떤 용어보다 과정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 도겐 선사는 살아서 황천에 오르겠다고 했다. 어떻게 그곳으로 도약할 수 있을까?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바닥에 땀이 배지만 나는 알고 싶다. 그 뒤에 어떻게 됐을까? 그곳에선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달리 대안이 없음을 알고서 나도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미지의 세계로 훌쩍 올라갈 수 있을까? 

- 눈발이 휘날려 대지를 하얗게 덮으니, 들쑥날쑥한 세상이 매끈한 평면처럼 보인다. 눈송이는 너무나 여려서 가벼운 입김으로 단번에 날려버릴 수 있다. 찰나의 순간이 지나가듯, 우리네 인생도 흘러가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여린 눈송이가 쌓이고 쌓여서 견고하게 대지를 덮는다. 개개인은 변화의 잔물결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는 그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는 거대한 파도이다. 우리는 무한히 깊고도 영원한 바다에서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높이 치솟았다가 초연히 스러진다. 이것은 우리가 직면한 위험한 상황의 반대쪽이다. 죽어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안전하다. 당신을 아프게 하지 않을 것이다.

 

- 다른 종교를 믿거나 종교를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이 기술한 경험과 너무나 흡사하다. 그것들을 단순히 신념 체계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건 어리석다. 죽음의 순간에 우리가 선택한 말은 우리가 관심을 둔 구체 표면에 한 낙서 또는 채색과 같다. 죽음에 다가가면 우리의 모든 근원적 믿음이 분명해진다. 인간의 삶을 둘러싼 것(인간이 세상에서 차지하는 공간과 인간의 삶을 넘어서는 더 위대하고 영원한 무언가)에 대한 자각도 명확해진다. 나는 이제 패기 넘치던 청년기의 불안과는 완전히 다른 대지에 굳건히 서 있다. 

- 나는 50년 전의 내가 아니다. 10년 전의 나도 아니고, 작년이나 어제의 나도 아니다. 나는 이 문장을 썼던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내가 죽을 것인가? 모든 것이, 그야말로 모든 것이 한꺼번에 변하는 이 순간은 그 어느 순간보다 미스터리하고 강렬하다. 

 

-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동안엔 서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눴지만 이젠 그럴 수 없다.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수 없지만 시신은 여전히 이야기의 일부다. 
"우리가 주검을 가령 쓰레기로 취급하기 시작한다면, 시신이 되기 직전 즉 아직은 살아 있지만 곧 죽을 사람을 다루는 태도 역시 바뀔지 모른다."
결국 시신은 거울이고, 우리는 거울에 비친 상(像)이다.

 

- 시신을 대하는 태도는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하지만, 뭘 하든 시신은 의식(儀式)의 대상이라는 무게를 짊어진다. 많은 사회에서 시신 처리 방법은 고인의 지위에 따라 달라진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문화에서는 시신을 어떻게, 언제, 누가 다뤄야 하는지를 정한 규칙이 있으며, 죽은 몸에 새로운 이름까지 붙여준다. 어떤 사회에서는 인육 먹는 행위를 존경의 표시로 간주한다. 인도네시아 술라웨시 섬에서는 죽은 친척의 시신을 몇 년 동안 보관하면서 미라로 만든다. 시신에 옷을 입히고, 음식을 대접한다. 때로는 담배나 술까지 대접한다. 미라를 매장한 뒤에도 이따금 관을 열고 옷을 새로 갈아입힌다. 우리는 '죽은 자들의 날(Day of the Dead)'에 가면을 쓰고 해골 모양의 사탕을 먹으면서 춤추고 노래한다. 해골 사탕을 먹고  소화해서 죽음을 통제하는 것이다. 어떤 문화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의 무덤에 헌화하고 돌에 이름까지 새겨 넣는다. 다른 문화에서는 무덤을 절대로 만들지 않는다. 또 시신을 값비싼 관에 넣고 커다란 능(陵)을 세우는가 하면, 제를 올린 뒤에 시신을 절벽 아래로 던지기도 한다. 

 

- 한 사회 안에서도 시신 처리 방법에 상반된 태도가 나타난다. 근대 서양에서, 어떤 가정은 화장 후에 남은 재를 벽난로 선반에 사진과 나란히 놓는다. 다른 가정은 장례를 치르자마자 옷장을 싹 비우고 침실을 새로 칠한다. 어떤 사람은 합성수지로 된 모형을 남기고 싶어 하는 반면, 다른 사람은 그런 모형을 끔찍하고 불경한 진열품이라고 생각한다. 

 

- 죽은 직후의 '모호한 상태'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된다. 일본의 토착 종교인 신도(神道) 신앙에서 죽은 사람은 애매한 상태에 놓여 있다. 즉 여전히 인간이긴 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과 같지는 않다. 그 사람은 중요한 방식으로 다시 아기가 된다. 죽은 직후에 가까운 친척이 시신의 입술에 젖은 천을 댄다. 이러한 의식은 그 사람을 소생시키기 위한 마지막 노력인 동시에 그가 죽었다는 증거이다.

 

- 유대교도는 전통에 따라, 고인의 눈을 감기고 입은 다물게 하며 몸은 천으로 덮는다. 창문은 활짝 열고 거울은 모두 가린다. 시신은 절대로 홀로 방치되지 않는다. 유대인의 장례식장은 소머(shomer)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소머는 장례를 거행하기 전까지 시신을 지키는 사람을 가리킨다. 소머는 시신 앞에서 먹거나 마시지 않는다. 죽으면 그런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시신 앞에서 그런 행동을 하면 조롱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 대개 시신을 서둘러 옮기지 않아도 된다. 변화가 몇 분 만에 진행되는 게 아니라 몇 시간에서 며칠에 걸쳐 서서히 진행되기 때문이다. 미국 법에선 흔히 24시간 정도는 시신을 그대로 둬도 괜찮다. 병원에선 관행상 그보다 빨리 병실을 비우라고 재촉할 것이다. 준비가 안 됐다고 말하고 간호사에게 시간을 더 달라고 요구하라. 하루치 요금을 더 납부해야 하겠지만, 종교적 절차를 거행해야 할 경우엔 서둘러 나가지 않아도 된다. 쓸데없이 시간을 끌면 안 되지만 필요한 절차를 건너뛸 정도로 서두를 필요는 없다. (해당 지역의 법규에 따라 사망 신고를 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 시신을 씻기는 일은 항복의 몸짓이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에 항복한다. 시신을 씻겨야 한다고 법으로 정해지진 않았지만 거의 어디서나 시신을 씻긴다. 애도를 표하는 본능적 방식인 것 같다. 죽은 사람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행하는 일처럼 느껴진다. 

- 천천히 하라. 시신을 옮길 때 방광과 장에서 분비물이 나올 수 있으니, 먼저 수건이나 패드를 여러 장 깔아라. 시신을 옮길 땐, 양쪽에 두세 명씩 붙어서 시트를 시신에 바짝 붙이고 들어 올린다. 시신에서 한숨 소리나 신음 소리가 나더라도 놀라지 마라. 시신을 돌릴 때 폐에 남아 있던 공기가 빠져나오는 것이다. 서두를 필요 없다. 심호흡을 하고 어떻게 처리할지 머릿속으로 찬찬히 생각하라. 우리는 아기를 안거나 서로 껴안는 방법을 알고 있다. 시신을 드는 방법도 별반 다르지 않다. 

 

- 우리는 산 사람의 피부와 닿으면 감촉과 온기를 느껴 바로 반응하게 된다. 피부는 인체에서 가장 넓은 기관이다. 우리가 누군가와 접촉할 때는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주요 기관을 접촉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신의 피부는 이와 다르다. 살아 있는 피부 아래에선 지속적인 혈액 흐름과 세포 분열이 일어나고 근육에서 전기적 신호의 파동도 일어난다. 반면 죽은 피부는 탄성도 없고 무르다. 시신에서 땀이 나와 축축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람의 몸은 죽은 후 한 시간에 약 0.8℃씩 체온이 떨어지는 사후 경직(死後 硬直)이 일어난다. 

 

- 당신의 몸에 벌어질 일을 결정할 사람은 당신의 유언 집행자나 대리인이다. 당신의 뜻을 반드시 존중해 줄 사람을 선택하고, 당신이 바라는 것을 그들에게 확실히 알리도록 하라. 당신의 몸은 당신이 책임질 수 있는 마지막 대상이며, 그 몸을 어떻게 처분할지는 당신이 내릴 가장 개인적인 결정이 될 것이다. 이러한 결정을 상실감에 빠진 가족들에게 떠넘기지 마라. 가족들 사이에 의견이 갈릴 수도 있고, 그간에 돈을 너무 많이 써서 원치 않는 선택을 해야 할 수도 있다. 혹시라도 남은 가족에게 부담을 줄까 싶어 속내를 감추거나 미안해하지 마라. 어쩌면 당신은 멋지게 다듬은 머리와 예쁘게 화장한 모습으로 관에 들어가고 싶을지 모른다. 어쩌면 그냥 독수리 먹이로 던져지고 싶을지도 모른다. 뭐가 됐든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당신의 속내를 몰라 갈팡질팡하게 하지는 마라. 

 

- 몇 번을 봐도 방부 처리는 너무나 충격적이다. 거의 모든 사례에서 방부처리는 한 가지 목적으로 이루어진다. 시신 복원 작업을 하고 며칠에 걸쳐서 장례식을 거행하기 위해 시간을 벌고자 부패를 늦추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법에서 요구하지 않는 절차이다. 장의사들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마라. 장례를 오랫동안 늦춰야 하거나, 시신을 기차 같은 일반 운송 수단으로 이송해야 하는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시행하면 된다. 주마다 법 규정은 다르지만, 장의사들이 하는 말보다 오히려 더 자유롭다. 극히 드문 사례를 제외하면 방부처리는 질병 전파를 막아 공중위생을 지켜주지 못하며, 박테리아나 바이러스를 모두 파괴하지도 못한다. 시신은 대체로 특별히 위험하지 않으며, 병자에게 적용되는 것과 같은 예방 조치만으로도 충분히 질병 전파를 막을 수 있다. 포름알데히드를 비롯해 방부 처리에 사용되는 화학물질은 유독하고 위험하다. 해마다 수십만 갤런의 유독성 화학 물질이 시신과 함께 땅에 들어간다. 

 

- 전문 직종에 특화된 어휘는 그 직종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환경 공학자들은 봄베 열량계(bomb calorimeter)를 사용한다. 그래픽 디자이너는 페이지의 가장자리까지 밀려 나온 그림을 블리드 엣지(bleed edge. 피 흘리는 가장자리라는 뜻)라고 표현한다. 낙농업자는 텃 딥(teat dip, 유선염을 예방하기 위해 유두를 살충액에 살짝 담그는 것)을 하기도 한다.

 

- 그런데 방부 처리와 관련된 표현은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어휘와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방부 처리업자는 흡인기와 분리기와 동맥관을 사용한다. 때로는 눈 대용품과 입 성형기를 사용하기도 한다. 켈코 kelco 사는 '쭈글쭈글하거나 부르트거나 상처 난 입술과 그밖에 부드러운 피부 조직을 재건하기 위해 적당한 농도에서 성형되는' 입술 왁스를 만든다. 펌프 브랜드로는 포티-보이 마크 VPorti-Boy Mark V 모델이 가장 인기 있다. 에스코 Esco 사의 '프라이머 Primer' 액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생생한 컬러'를 자랑해서 피부 표현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에스코는 그 이유를 "화학 물질이 폭넓게 침투하도록 혈관을 최대한 팽창시켜 자연스러운 색깔을 균일하게 낼 수 있는 것"이라고 회사 팸플릿에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처리하기가 어려운 케이스를 위해 '자체 개발한, 가장 강력한 혈액 액화 및 미네랄 금속이온봉쇄제 (mineral sequestering agent)'도 제공한다. 아울러 골분 청소기도 판매한다. 

 

- 방부처리와 복원술(시신을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성형 작업)'은 고인을 공경하고 긍정적인 모습으로 기억하자는 미명하에 대중에게 판매된다. 복원 전문가를 양성하는 기관에서는 이러한 기술이 가족들에게 "고인의 충격적인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워주고 평온한 이미지를 간직하도록 돕는다"고 홍보한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얘기할 때도 좀처럼 죽음 거론하지 않는다. 이런 일은 모두 산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행해진다.

"복원술 아카데미(The Restorative Arts Academy)'는 가능한 한 유족이 돌아가신 친척이나 친구를 시각적으로 용인되는 방식으로, 그리고 안전한 환경에서 접견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본 아카데미는 고인에겐 품위를 돌려드리고 유족에겐 위로와 안도감을 선사합니다." 

- 그들은 우리가 시체의 실제 모습을 보면 엄청난 충격을 받으며 시체를 시체처럼 보지 않음으로써 위로를 받는다거나, 고인이 아직 살아 있는 척해야만 위안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 시인이자 장의사인 토마스 린치 Thomas Lynch는 방부 처리가 산사람들에게 위로가 된다는 이야기를 듣거나, 사람들이 고인의 몸을 보면 사랑했던 기억을 망치기 때문에 보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화를 낸다. 어떤 사람이 린치에게 자기는 고인을 '생전 모습 그대로' 기억하고 싶어서 시신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 린치는 그에게 고인을 '지금 모습 그대로' 상대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보지 않는다고 다 해결되진 않는다. (고인이 심각한 외상으로 사망한 경우에는 시신을 전면에서 대면하지 않는 게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나는 적어도 멀리서 바라볼 필요는 있다고 본다. 그래야 그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과 남은 건 단지 그의 몸이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몸은 실제 그 사람이 아니라 '단지 껍데기일 뿐'이라고 말하는 게 전혀 유용하지 않다고 린치는 주장한다. '겁먹은 무식쟁이들'이 슬픔에 잠긴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말한다. 의도는 좋을지 모르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을뿐더러, 감당해야 할 불행을 회피하기 위한 또 다른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이 몸에서 떠나 육체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산다고 믿더라도, 시신을 보지 않는 것은 산 사람의 상실감을 전혀 덜어주지 못한다. 린치는 이렇게 주장한다. 
"나는 현시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애도 과정에서 시신을 마주하는 건 가장 어렵지만 가장 유용한 부분입니다." 

- 죽는 순간부터 몸속의 피가 중력에 의해 밑으로 가라앉기 시작한다. 아울러 적혈구가 파괴되면서 헤모글로빈, 즉 혈색소가 방출돼 피부가 얼룩진다. 이를 시체 얼룩이라는 뜻의 시반(屍班, livor mortis)이라 한다. 갓 죽은 시신은 회색으로 바뀌면서 군데군데 거무스름한 멍이나 반점이 생긴다. 얼굴은 거의 하얗거나 불그스름하거나 보라색으로 변하지만, 등은 검푸른 색으로, 가슴은 파리하게 변한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엷은 암녹색이 전체적으로 퍼진다. 이러한 변화는 죽은 직후부터 시작된다. 시반은 육안으로 확인되는 부패의 첫 번째 신호이며, 이후 수개월에 걸쳐 부패가 진행된다. 죽자마자 변하기 시작해 며칠만 지나도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다. 

 

- 반면 다른 문화권에서는 노출을 명예로운 최후로 인식하기도 한다. 티베트 전통에서는 그것을 풍장(風葬)이라고 부른다. 시체를 잘게 잘라서 산꼭대기에 던져놓으면 썩은 고기를 먹는 동물들이 와서 먹는다. 조로아스터교도는 시체를 원형으로 된 돌탑인 '침묵의 탑 Tower of Silence'에 올려놓는다. 시체가 물이나 불에 훼손되지 않도록 탑의 벽을 두껍게 높이 쌓는다. 시체가 훤히 보이도록 탑의 안쪽 테두리에 올려놓으면, 썩은 고기를 먹는 새들이 벽 바깥쪽 테두리에 앉아 시체를 뜯어먹는다. 뼈만 남으면, 수행원들이 올라가 탑 안쪽 구덩이에 던져 넣는다.

 

- 자연장(natural burial)은 시신을 방부 처리하지 않고 그대로 묻는 방식이다. 유구한 세월 동안 수백만 아니 수십억에 달하는 사람들의 몸이 그런 식으로 묻혀왔다. (네안데르탈인이 자연장을 처음 시행했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시신을 가능한 한 빨리 땅에 묻는 전통을 공유한다. 관을 사용할 때는 시신이 흙에 닿도록 구멍을 뚫는다. 하지만 땅에 그냥 묻힌다는 생각만 해도 몸서리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벌레의 먹이가 되는 끔찍한 운명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영 박물관에서 인류 박물관(Museum of Mankind)을 관장하는 인류학자 니겔 발리 Nigel Barley는 19세기 괴짜 박물학자인 찰스 워터턴 Charles Waterton에 대한 전기를 썼다. 그에 따르면, 워터턴은 자신이 죽으면 영지에 오리를 들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워터턴은 벌레가 자신을 먹고 오리가 다시 그 벌레를 잡아먹을 걸 알았다. 나중에 사람들이 그 오리를 먹을 걸 생각하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반면 사드 후작(Marquis de Sade)은 나무의 먹이가 되기 위해 숲에 묻어 달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 월마트는 '여성에게 특화된 고급스러운 관'을 판매하는데, 부드러운 연분홍 벨벳 침구가 갖춰져 있고 바닥까지 일체형으로 18 게이지 강철로 이루어졌음을 강조한다. 반면, 관을 빌려 쓰고 장례식 후에 돌려줄 수도 있다. 수의만 걸치고 묻힐 수도 있다. 책장이나 커피 테이블, 다리미대로 활용할 수 있는 관을 구입해서 실컷 쓰다가 장례식 때 사용하고 당신 친구에게 물려줄 수도 있다. 관에 페인트를 칠하고 장식하고 그림을 그려도 된다. 친구들을 초대해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할 수 있다. 관에 잎사귀와 덩굴을 채워도 된다. 버드나무나 판지, 종이, 대나무로 된 관에 담기거나 면포에 감싸인 채 묻힐 수도 있다. 
 

- 특별한 공구 없이도 조립할 수 있는 목관 조립용품 세트를 구매해도 된다. 생분해성 맞춤형 관을 구입할 수도 있다. 전화박스나 거대한 초콜릿 박스, 우주선 갑판이나 갑옷 모양도 있고, 가을에 쌓인 낙엽 더미나 골프백 모양도 있으며 호피 무늬도 가능하다. 몸뚱이를 아무 데도 넣지 않고 묻혀도 되지만, 다들 어디에든 담겨서 묻히길 원하는 것 같다. 형식상의 절차를 지키는 일, 시신을 기다란 주머니에 담는 느리고 어색하고 감정적인 작업, 흰 천에 시체를 놓고 이리저리 굴리면서 감싸는 일은 혼자선 할 수 없다. 이런 작업을 위해선 여러 사람의 손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런 관행을 깨고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 한국인 예술가 이재림은 환경을 다시 설계할 방법을 연구하고자 MIT(매사추세츠 공과대학)에 들어갔다. 그녀는 인간의 죽음을 둘러싼 폐기물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기존의 방부처리와 매장 방법을 연구한 뒤, 곰팡이로 유해 박테리아 독극물과 오염 물질을 분해하는 자연정화 기술로 환경 피해를 복구하고자 버섯을 활용하는 방안을 고안했다. 사람들이 사후 변화(postmortem change)에 익숙해지고, 시신을 되도록 보존하려는 기존 문화에서 벗어나 근본적으로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돕고자 '인피니티 베리얼 프로젝트(InfinityBurial Project)'와 '디컴피컬쳐 소사이어티(Decompiculture Society)'를 설립했다. 그녀의 인피니트 베리얼 정장(Infinity Burial Suit)과 뒤이어 나온 인피니티 베리얼 수의(Infinity Burial Shroud)는 원피스형 파자마처럼 보인다. 후드가 달린 헐렁한 파자마에 얼굴 마스크와 장갑과 양말이 딸려 있다. 줄지어 늘어선 흰 단추가 멋지게 보이지만, 실은 수의를 쉽게 입히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검정 원단에는 버섯 균사체의 성장을 본뜬 흰 줄이 여러 갈래로 수 놓여 있는데, 버섯 균사와 각종 미생물을 실에 주입했다고 한다. 이 수의를 입고 땅에 묻히면 버섯이 발아해서 분해를 촉진한다. (다른 침입종의 유입을 피하고자 전 세계에서 발견된 품종들을 사용한다.) 버섯은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독소를 정화하고 식물의 뿌리에 영양소를 제공하며 깨끗한 비료를 남긴다. 인피니티 베리얼 프로젝트는 그 과정을 계속 연구할 거라고 한다.  

 

- 영국에는 숲과 공원, 목초지는 물론이요 기존 묘지나 교회의 일부 구역에 이르기까지 수백 곳에 달하는 자연 매장지가 있다. 미국과 유럽 전역에서도 자연장이 인기를 끌면서 기존 묘지에 자연장을 위한 특별 구역이 조성되고, 자연장만 가능한 보존지도 생겨났다. 캡슐라 문디 Capsula Mundi라는 회사는 나무 밑에 묻히도록 고안된 생분해성 캡슐을 판매한다. 작은 캡슐에는 재와 뼈를 담을 수 있고, 커다란 캡슐에는 태아 자세로 접힌 몸을 통째로 담을 수 있다. (반려동물용 캡슐도 있다.) 캡슐라 문디는 단순히 친환경 매장 방식을 선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색다른 묘지 개념을 널리 알리고자 애쓴다. 새로운 자연 매장지는 기존 묘지의 한쪽에 자리 잡거나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에 있다. 동네 한가운데서 온갖 종류의 크고 작은 나무가 자라는 도시 묘지를 상상해 보라. 줄지어 늘어선 비석 묘지 대신, 고속도로를 따라 자연스럽게 조성된 숲과 산책로를 상상해 보라. 여기저기에 명판이 걸려 있거나 벤치가 한두 개 있겠지만, 캡슐 위로 자라는 나무들이 멋진 풍광을 연출할 것이다.

 

- 우리는 묘지를 영속적인 장소로 생각하기 쉽다. 묘지를 오아시스처럼 느낄지 아니면 폐기장처럼 느낄지는 각자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떤 묘지든 일시적인 장소일 뿐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손바닥만 한 땅에 여러 명이 공동으로 묻히고, 때로는 조그마한 함에 한 명 이상이 담기기도 한다. 분묘지를 다시 꾸며서 재사용하는 관행은 오랜 옛날부터 있었다.  

 

- 독일과 벨기에에서는 무료로 무덤을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20년이 지나면 친척들이 부지 사용료를 내야 한다. 사용료를 내지 않으면, 유해는 더 깊은 곳에 묻히거나 집단 무덤으로 옮겨진다. 빈무덤은 다시 사용된다. 런던에서는 현재 무덤으로 쓸 부지가 없어서 묘지에 난 좁은 길과 무덤들 사이사이에 시신을 묻고 있다. 정부와 영국 국교회는 결국 75년이 지난 무덤을 재사용할 거라고, 혹은 정부의 표현을 빌면 '충분히 사용'할 거라고 사람들에게 예고했다. 그때쯤 되면 뼛조각 외에는 남은 게 없을 거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기한이 지나면, 매장 관계자는 '무덤을 열어서 들어 올렸다가 더 깊이 파묻는(lift and deepen)' 방식을 도입해 더 많은 시신을 매장할 수 있다. 유해는 포대 자루에 담겨 새로운 관 밑에 다시 묻히게 된다. 영구히 보존되는 전사자들의 묘를 제외한 일반 무덤의 최대 보전 기간은 100년이다. 영국에서 이 법에 반대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무덤을 은신처라는 뜻의 '레어(lair)'라고 부른다. 재사용은 적어도 100년이 지나야 고려되며,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레어만 대상이다. 호주 시드니와 남아공 더반에서는 무덤 재사용을 격렬히 반대해서 결국 무산되었다. 갈수록 악화되는 문제를 미래 세대에게 그대로 떠넘긴 것이다. 

 

- 카이로 같은 도시에선 영겁의 세월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이 묻혔고, 지금도 묻히고 있다. 이집트처럼 건조한 기후에서는 무덤이 더 오래간다. 카이로 네크로폴리스 공동묘지는 6.4 킬로미터에 걸쳐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6세기부터 지금까지 수백만 명이 온갖 규모의 무덤과 능에 묻혀 있다. 그런데 온전히 남아 있는 무덤들 사이로 수십만 명이 수세대에 걸쳐 살고 있다. 무덤 벽에는 세탁물이 걸려 있고, 아이들은 능 안에서 뛰논다. 사람들은 무덤 주변에서 야채를 구입하거나 수염을 깎는다. 무덤들 사이로 난 비좁은 길에 자그마한 집들이 세워져 있다. 네크로폴리스는 여전히 활기가 넘친다. 한쪽에선 죽은 사람이 묻히고 다른 쪽에선 새 생명이 태어난다. 

 

- 홍콩의 장례업체 니르바나 아시아 Nirvana Asia Ltd.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통합적 사별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며, 여러 나라에서 웅장하고 멋진 묘지를 운영한다. 니르바나는 묘지, (냉난방 시설, '첨단 레이저 조명 시스템과 음향 효과'를 완비한) 납골당, (정해진 시간에 만트라를 틀어주는) 위패실, 아이가 자유롭게 사후 세계로 들어가도록 돕는 '아기 낙원', 풍수에 따라 신중하게 관리되는 매장지, 개와 고양이를 위한 묘지까지 통합적으로 운영한다.

 

- 홍콩은 진작부터 매장 공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가상 무덤을 방문해 조상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식으로 책임을 이행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이모티콘으로 돈이나 돼지구이를 바칠 수 있다. 이젠 공공 납골당도 대기자가 무척 많다. 그래서 '육상 납골당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멋진 풍광'과 '지속적 성장 가능성'을 제공하는 해상납골당의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 일본에서는 무덤 부지가 너무 부족하고 비싸다 보니 일부 대기업이 묘지 구역을 일괄 구매해 복지 차원에서 직원에게 하나씩 제공하기도 한다. 일본의 여러 묘지에도 웹캠이 설치되어 있어서 온라인 서비스를 신청할 수 있다. 신청자는 가상 무덤에 방문해 아이콘으로 꽃과 과일, 향, 물, 맥주 등을 바칠 수 있다. 납골당은 여러 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키 카드를 삽입하면 자동적으로 개별 유골함을 바로 앞까지 갖다 준다.

 

- 도쿄의 루리덴 Ruriden 납골당은 조용하고 어두운 보관소에 자그마한 납골 제단을 2,046개나 갖추고 있다. 제단마다 각기 다른 LED 조명이 비치는 크리스털 불상이 놓여 있다. ID 카드를 대면 해당 불상에 불이 들어와 깜빡거린다. 가격이 저렴하지는 않다. 자그마한 벽감 하나를 빌리는 데 6,000달러 이상 내야 하고, 해마다 소액의 유지비도 들어간다. 

 

- 전 세계 어디나 묘지로 쓸 공간이 부족하다. 그 때문에 묘지가 가파른 산이나 동굴로 올라가게 되었고, 심지어 하늘로까지 치솟게 되었다. 일부 국가에서는 수직 묘지가 세워졌는데, 가장 높은 것은 브라질 남부 산토스에 세워진 네크로폴레 에큐메니카 기념관 Memorial Necrópole Ecuménica이다. 총 14층 높이에 25,000개의 매장 자리를 자랑하며, 산토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로 자리 잡았다. 

- 파브르는 이렇게 썼다.
"구더기 앞에선 누구나 평등하다. 동물과 인간, 거지와 왕이 모두 똑같다. 거기서 당신은 진정한 평등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평등을 얻는다." 

 

- 인도 인구의 절반 이상이 갠지스강에서 수백 마일 이내에 거주한다. 갠지스는 힌디어로 강가(Ganga)이며 어머니이자 아름다운 여신으로 묘사된다. 바라나시에서 6킬로미터에 이르는 강둑을 따라 100여 개의 가트(Ghat), 즉 돌계단이 조성되어 있다. 널따란 계단은 모두 강으로 이어지며, 각 가트는 특색 있게 사용되면서 휴게소 역할을 톡톡히 한다. 사람들은 날마다 새벽에 갠지스강에서 목욕을 하고 기도를 드린다. 빨래를 하고 하릴없이 거닐고 공물을 바치고 추파를 던진다. 면도를 하고 머리를 자르고 과일을 사고 범죄를 저지른다. 수다를 떨고 베텔 너츠(빈랑나무 열매로 각성효과가 있다.)를 팔고 페리를 탄다. 사람들은 강가에서 사랑에 빠지고 담배를 피우고 카드놀이를 하고 친구를 만난다. 이곳은 늘 떠들썩한 사람들로 분주하다. 어슬렁거리는 소와 떠돌아다니는 개도 많다. 그 옆으로 나룻배와 페리가 유유히 지나간다. 
 
- 사람들은 죽으려고 갠지스강에 온다. 힌두교에선 숨을 거둔 뒤 화장 갠지스강에 뿌려지면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믿는다. (결혼하지 않은 소녀 등 일부는 화장하지 않고 시신을 그냥 강물에 수장한다고 한다. 이미 해탈한 존재라 화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안개 같은 연기가 주변에 맴도는 버닝 가트(Burning Ghat, 화장터) 두 곳은 화장하는 장면을 구경하려는 관광객들로 늘 붐빈다.  

- 다음날 우리 중 몇이 뼈를 수습하러 화장장에 다시 갔다. 뼈가 담긴 커다란 금속 쟁반이 분쇄기 위에 놓여 있었다. 분쇄기에 넣고 돌리면 재, 즉 유골로 알려진 거친 입자가 나온다. 유골은 흔히 작은 단지에 담겨 가족에게 인계된다. 유골 대신에 뼈로 받을 수도 있다. 뼈는 표면이 매끄럽지 않다. 여기저기 금이 가고 홈이 파여 있다. 빗금마다 삶의 한 단면이 새겨져 있다.

 

- 이 뼈가 심장과 간과 폐를 보호했다. 이 뼈가 뇌를 방어했다. 뼈는 전사(戰士)나 다름없다. 교겐의 뼈는 쉽게 부서질 만큼 약했지만 어디가 어딘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는 그림 조각을 맞추듯 뼈 몇 개를 맞춰볼 수 있었다. 척추뼈, 골반의 일부, 손가락에서 나온 작은 뼈들, 갈비뼈, 두개골의 일부, 나는 몇 조각을 상자에 담아 간직하고 있다. 메멘토 모리. 기억하라, 그대는 죽어야 할 운명임을.
 
- 재는 거의 어디에나 뿌릴 수 있지만 바람의 방향을 잘 살펴야 한 다. 땅에 묻거나 단지에 담아 선반에 둘 수도 있다. 그밖에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재를 처분할 수 있다. 당신은 어머니를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들 수 있다. 당신 자신을 친한 친구에게 우편으로 보낼 수 있다. 미국 우정국(USPS)은 유골 배송도 마다하지 않는다. 당신은 240개들이 연필 세트로 만들어질 수도 있다(평생 살아온 이야기를 꼼꼼히 기록해도 될 만큼 충분한 양이다.) 곰 인형 속에 넣어질 수도 있고, 모래시계가 될 수도 있다(유골의 밀도 때문에 시간이 정확하진 않다.) 인공산호초 조성에 쓰일 수도 있다. 압착되고 또 압착돼서 다이아몬드로 될 수도 있다. 문신용 잉크나 페인트에 혼합될 수도 있고, 납작하게 눌린 레코드판이 될 수도 있다. 당신은 아버지를 폭죽에 섞을 수 있다. 심지어 탄피 안에 밀어 넣을 수도 있다. 앨라배마주의 홀리 스모크 Holy Smoke라는 회사는 이를 '친환경' 탄환이라고 광고까지 하고 있다. 

- 내가 사는 주는 바다를 끼고 있는 탓에 이곳에선 바다에 묻히면 어떨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바이킹 장례를 선호한다. 활활 타오르는 배는 조류와 함께 서서히 바다로 흘러가다 점점 가라앉고, 불꽃에 감싸인 시신은 조류에 흔들리다 점차 가라앉는다.) 수장(水葬)은 흔히 토장(土葬)보다 복잡하고 비싸다. 시신을 공해까지 적어도 3마일(4.8km) 정도는 싣고 나가야 하고, 봉추를 달아 무겁게 해서 적어도 600피트(182m) 깊이까지 떨어뜨려야 한다. 서류 작업도 만만치 않다. 참전용사나 해군의 배우자나 연안 경비대원 출신이라면 수장이 무료지만, 이들에게도 서류 작업과 일정은 여전히 복잡하고 느리다. 배들의 위치와 작전 훈련에 따라 몇 달씩 걸리기도 한다. 

 

- 가진 게 많든 적든 유언장은 누구나 작성해야 한다. 유언장에는 반드시 서명과 작성일자와 증인을 표시해야 한다. 당신의 재산을 어떻게 처분할지 구체적으로 기술해야 한다. 당신의 몸과 소유물을 당신이 부탁한 대로 처리해 줄 믿을 만한 유언 집행자 이름도 밝혀야 한다. 당신의 개인적 소장품을 어떻게 처분할지도 기술해야 한다. 가령 사진과 미술작품, 편지, 보석과 일기장을 누구에게 남겨주고 싶은가? 폐기했으면 싶은 물건이 있는가? 예쁘게 키워서 상까지 받은 장미, 당신의 란제리, 오래된 가족 앨범은 어떻게 처리하고 싶은가? 작가들은 흔히 미완성 원고나 일기, 메모를 폐기하라고 요구한다. 소설가 테리 프래쳇 Terry Pratchett도 자신의 미완성 원고가 담긴 하드 드라이브를 증기 롤러로 박살 내라고 주문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 가족과 친구들에게 편지를 써서 한 폴더에 보관해 두는 게 좋다. 편지는 장황하거나 멋지게 쓰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그저 작별인사에 한두 마디 조언이나 격려를 덧붙이면 된다. 해가 바뀔 때마다 편지를 새로 써라. 당신의 부고를 직접 작성해도 된다. 

 

- 반려동물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외상값, 자동이체, 은행 계좌와 비밀번호는 물론이요, 당신이 죽었음을 꼭 알아야 할 사람들의 목록도 챙겨야 한다. 온라인 데이트 프로필과 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 인터넷 기반의 가상 세계)의 아바타, 브리지 클럽(the bridge club, 카드게임 모임), 체육관, 치과 예약일도 기억해야 한다. 당신의 일정표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만일 당신이 누군가의 의료 관리 대리인을 맡고 있다면 그 내용도 기록해야 한다. 그들이 다른 사람을 찾을 수 있도록 말이다. 당신의 당좌예금 계좌와 증권 계좌 안전금고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당신의 유언장이 안전 금고에 있는가? 거긴 그다지 좋은 장소가 아니다.) 

 

- 다음에 제시하는 서류는 임종을 앞둔 상황에서 당신에게 중요할 수도 있는 사항을 미리 점검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당신의 의사, 유언 집행자, 가족들, 의료관리 대리인, 변호사, 종교적 스승에게 사본을 제공하라. 

 

 


 


<임종 소망>

나는 다음과 같은 장소에서 죽고 싶다 :

내가 죽을 때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찾아오길 바란다 :

나는 다음과 같은 종교의식을 행하는 사람들이 찾아오길 바란다 :

바라건대, 다음과 같은 사람은 보고 싶지 않다 :


죽음이 임박했을 때,
 
나는 다음과 같은 형태의 지원과 위로를 받고 싶다 :
(사람, 읽을거리, 의식, 음악, 음식, 냄새, 볼거리 등)


통증을 다스리기 위해,
 
대화를 나눌 수 없을 정도로 진통제를 맞아야 한다면,

나는 약에 취하게 되더라도 통증이 완전히 통제되길 바란다 : 예 / 아니요

나는 통증을 어느 정도 견디며 깨어 있기를 바란다 : 예 / 아니요


죽음이 임박했을 때,

나는 다음과 같은 의식이나 예배가 치러지길 바란다 :


죽음의 순간,

나는 다음과 같은 의식이나 예배가 치러지길 바란다 :


죽은 후,

나는 다음과 같은 의식이나 예배가 치러지길 바란다 :


<내 몸의 처리>

죽은 후, 내 몸이 이렇게 처리되길 바란다 :

내가 선호하는 장례식장이나 화장장 :

내가 선호하는 묘지나 매장지 :

내 몸의 처리를 위해 돈을 준비해 놨다 :
예 / 아니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푸시카트 문학상을 비롯하여 여러 문학상을 수상한 에세이스트이자 10년 넘게 완화치료 간호사로 일한 샐리 티스데일이 죽음과 죽어감에 관해 실질적으로 필요한 조언을 담아낸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죽음을 늘 인지하고 살아가는 시한부 환자들은 처음에는 매우 초연하게, 현실적으로 죽음을 받아들이려고 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수용적인 태도는 고통에 의해 잠시 나타나는 엔도르핀처럼 오래가지 못한다고 이야기한다. 저자가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간호사로 일하며 겪은 환자들의 죽음의 과정과 전 세계 다양한 문화와 전통과 문학에서 찾은 죽음의 일화를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 실용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또한 이 책은 죽어가는 사람만이 아니라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랑하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겪는 죽음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어떤 말을 해야 할까. 그들이 죽은 이후에 어떤 식으로 애도를 표할 것인가. 죽음은 과연 슬프기만 한 것일까. 저자는 죽어가는 당사자가 아닌 그를 사랑하는 주변 사람으로서 어떤 태도와 관점을 가지면 좋을지 솔직하고 담백하게 제시하고, 부록 페이지에 죽음 계획서와 좋은 죽음을 위한 제도에 관한 내용을 담아 우리가 죽음을 제대로 앎으로써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저자
샐리 티스데일
출판
비잉(Being)
출판일
2019.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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