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매튜 폭스 / 황종열
원제 : Original Blessing
출판 : 분도출판사
출간 : 2001.07.01
타니스 헬리웰의 <몸의 정령 헨리>에서 언급된 '네 가지 길'이 궁금해져서 찾아 읽었다.
이 책은 진정한 구원과 종교적 길에 대해 네 가지 길을 제시한다. 비아 포지티바, 비아 네가티바, 비아 크레아티바, 그리고 비아 트란스포르마티바. 각각은 긍정의 길, 부정의 길, 창조의 길, 그리고 변화의 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저자는 이 네 가지의 양식이 하나로 통합되어 유기적으로 이루어질 때만이 진정한 주님의 뜻대로 창조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현재 사회 곳곳에 일어나는 부조리와 종교의 침체는 비아 네가티바 및 다른 세 길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삶의 기쁨과 슬픔, 긍정과 부정 같은 밝고 어두운 면은 어느 하나만을 선택할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따라서 이전까지의 타락-속량주의나 금욕주의처럼 자연스러움을 억압하는 방식은 잘못된 대립구도 -이원론적인- 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또한 융과 다른 이들의 저서 및 발언을 통해 오히려 동양적인 '무'나 '놓아버림' 같은 수용적인 태도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그에 따르면 비아 네가티바는 능동적인 길이 아닌 수동적인 길에 가깝다. '얻음'을 기뻐하고 감사하되 '잃음'을 허용하고 돌려주는 것, '고통'을 거부하지 않고 수용하는 것이다. 이는 그 모든 것을 일어나게 하는 근원에 대한 깊은 신뢰를 필요로 한다. 즉, 애초에 모든 것은 축복과도 같은 자비에서 시작되었으며 그렇기에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누리며 허용하는 두 가지 삶의 방식적 조화가 '자연스러운' 상태라는 것이다.
그 통합이 이루어진 위에 개개인을 통해 흐르는 새로운 창조, '비아 크레아티바'가 나타난다. 개인의 표현은 그 자신을 통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의 안에 내재된 신성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자신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을 억제하는 것이 오히려 죄라고 말한다. 창조란 자유로움 속에서 있는 그대로를 흐르게 하는 일이며, 존재의 이유이자 의무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제껏 우리가 '악'이라고 믿어왔던 것들이 사실은 '잘못된 창조'였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그 '잘못됨'이란 단죄 받아야 할 죄가 아니라 원치 않은 방향성을 의미한다. 인간의 상상력과 창조성이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것들마저도 허용하고 실현되게 해 주심을 깨닫고 그 방향성을 재조정해야 한다. 이런 것들이 가능했다면, 반대로 훨씬 더 놀라운 것들도 가능할 것이라는 것.
밝음과 어두움, 생육과 사멸의 네 흐름은 거대한 자연의 주기와도 일치한다. 이러한 자연스러움에 스스로를 열고, 이제껏 인간의 오만으로 인해 소외되었언 아나윔들을 재조명할 것을 권유한다.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자연과 진정한 신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을 수 있다고. 우리는 새로운 -그러나 이미 예전부터 존재해 온 가장 오래된 - 지혜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를 위해 가장 먼저 집중해야 할 것은 비아 네가티바와 비아 포지티바의 균형이다.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빠져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게 되어야 한다. 욕망은 잘라내야 할 부정한 것도 참회해야 할 죄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목표한 방향을 위해 달려 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하나의 동력일 뿐이며, 그것에게 부드럽게 방향을 일러주는 것은 사랑의 고삐여야 한다.
두 권 모두 번역서로 읽은 것이기는 하지만, <몸의 요정 헨리>를 통해 내가 이해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내용이라 처음에는 무척 당황했다. 타니스 헬리웰의 설명에서는 네 가지 길 중 어느 한 가지 길을 선택해서 지복을 향해 수련해나갈 수 있는 것처럼 적혀 있었는데, <원복>을 읽어본 바 각각의 길은 어느 하나가 두드러지는 시기가 올 수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모두 함께 이루어져야 할 유기적인 흐름이었다. 예수께서 축복으로 탄생하여, 고난과 죽음을 허용하시고, 새로이 부활하시어 오른편으로 올라가심처럼.
출간된지 오래된 책이라 문체나 편집이 읽기에 조금 버거울 수 있는데, 그래도 한 번 정도 읽어보는 게 좋겠다 싶은 책이었다.
끝.
- 창조중심 영성전통이 그런 패러다임을 제공하는가? 독자는 짐작하려니와, 이 두 물음에 대한 나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지혜"라는 말을 쓸 때면 아메리카 원주민의 정의가 생각난다. 지혜란 사람들이 살기 위한 것이라고. 나에게는 이 지혜관이 매우 친숙하다. 이것이 우주와 인간의 차원에서 삶의 넓이와 깊이를 아우르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또 이것이 창조주 하느님이 당신 자녀 모두를 위해 바라시는 바로서, 귀중한 이 땅의 모든 사람이 살기 위한 것이라고 믿는다.
- 사람들이 살기 위한 것이 지혜다. 지혜는 사람들이 살기를 바란다. 무슨 뜻인가? 물론 때 이르게 죽지 않는다는 뜻이 있다. 나아가 다른 뜻도 더 있는가? 그렇다. 살아남는 것만이 사는 것은 아니다. 산다는 것은 아름다움, 선택의 자유, 생명을 낳음, 훈련, 경축을 내포한다. 산다는 것은 장 보러 또는 뭘 사러 나간다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요, 서로 고통을 피하려고 둥지를 틀고 들어앉는다는 것과 같은 것도 아니다. 산다는 것은 생명의 사랑인 에로스와 관계가 있다. 다른 사람들의 삶을, 에로스와 존엄성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사랑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지혜인즉 사람들이 살기 위한 것이라는 까닭이 여기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어디서 찾는가?
- 알프레드 화이트헤드가 썼듯이 "종교는 안락한 삶을 장식하는 고상한 양식으로 퇴락하는 경향이 있다. 과학과 같은 정신으로 변화에 대처할 수 있기까지는 옛 힘을 되찾지 못할 것이다." 더 고래의 종교전통에 잠재하는 지혜를 되찾기 위해 우리는 더 근래의 종교전통을 떨쳐버려야 한다. 마이스터 에카르트가 충고하듯이 "떨쳐버리기를 감행하는 자만이 되어가기를 감행할 수 있다".
- 특히 서양 종교가 떨쳐버려야 할 것인즉 배타적인 타락/속량 fall/redemption 영성 모델이다. 신학과 성서 연구, 신학교와 수도자 수련, 성인전과 심리학을 여러 세기 지배한 이 이원론적·가부장적 모델의 신학은 죄와 탓과 원죄로 시작되고 일반적으로 속량에서 끝난다. 타락/속량 영성은 믿는 이들에게 새 창조계나 창조성, 정의 구현과 사회 개혁, 에로스나 놀이나 기쁨을 가르치지 않으며 기뻐하시는 하느님을 알아 뵙지 못하고 만다. 땅을 사랑하거나 우주를 돌보기를 가르칠 줄 모르며, 열정을 하도 겁내는 나머지 인간 역사상 보잘것없는 사람들인 아나윔의 열정적 호소에 귀 기울이지 못한다. 열정을 이처럼 겁내는 터에 연인들의 체험을 영성적이고 신비적인 일로 경축하도록 도와줄 길이 있을 리 없다. 이 전통은 예술가나 예언자,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여자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주지 못했다.
- 영성전통에서 타락/속량 영성은 창조중심 영성만큼 오래된 것이 아니다. 타락/속량 영성이 되찾아 올라가는 이는 주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354~430)이요, "창조계 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하느님으로부터 물러납니다"라고 했던 토마스 아 켐피스이며, 보쑤에 추기경, 코튼 수녀원장, 탄쿼리 신부 들이다. 창조중심 전통은 그 뿌리가 기원전 9세기까지, 바로 첫 성경저자인 야휘스트의 J자료라는 원전에 미치고, 성경의 시편들과 지혜서들과 많은 예언자들로, 예수와 신약성서의 여러 책으로, 그리고 서양의 바로 첫 그리스도인 신학자인 이레네우스 성인(약 130~200)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전통에 속하는 다른 이들도 이 책에 담겨 있거니와, 손쉬운 일람은 <부록 1> "창조중심 영성의 계보”에서 볼 수 있다. 두 전통의 차이를 개관하려면 <부록 2> "타락/속량 영성과 창조중심 영성의 비교"를 참조하라.
- 이 옛 전통을 종교의 패러다임으로 여기는 것은 서양과 세계에서 종교만이 아니라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도 정작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이다. 타락/속량 전통은 모든 자연을 "타락한 것"으로 여기고 하느님을 자연이 아니라 개인 영혼 안에서 찾기 때문에 과학을 묵살할 뿐 아니라 적대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과학이 "구원의 추구에 아무 기여도 못했다"는 이유로 "온 유럽에서 천 년 동안 과학에 대한 관심을 파괴했다"고 마이클 폴라니 교수는 썼다. 창조계와 그 연구가 관심사인 영성전통을 회복하는 데서 문화와 그 제도와 인간을 위한 패러다임들을 꼴 지을 새 가능성이 영성과 과학 사이에서 시동될 것이다. 이 패러다임들은 변혁하는 능력이 힘찰 것이다. 지혜는 슈마허가 가르치는 대로 자연과 종교 전통에서 올진대, 과학과 종교 전통이 서로 무시하거나 싸우거나 배척하는 대신 함께 태어났음에 동의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창조중심 영성의 회복이야말로 지혜의 두 원천을, 과학을 통한 자연의 지혜와 종교전통을 통한 자연의 지혜를 한꺼번에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중심 전통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의 지혜 추구에서 두 세계의 최선을 결합한다고 본다.
- 비아 포지티바는 우리와 만유를 의미하는 창조계의 아름다움과 우주적 깊이를 맛보는 여행이다. 이 창조계의 힘들이라는 확고한 토대가 없을 때 우리는 권태로운 사람, 폭력적인 사람들이 된다. 죽음의 세력들과 죽음의 원리들을 사랑하는, 죽음의 연인들이 된다. 비아 포지티바로 모든 창조계가 새 출발을 한다.
- 비아 포지티비를 따라 걸으며 머물 열 마당은 다음과 같다.
1. 다바르: 하느님의 창조력 (말씀)
2. 축복인 창조와 기쁨 맛보기의 회복
3. 땅스러움인 겸손: 열정과 단순과 더불어
4. 우주적 보편성: 조화 · 아름다움 · 정의
5. 신뢰: 신뢰와 확장의 심리학, 축복인 우리의 땅스러움
6. 만유내재신론: 모호하고 투명한 하느님 체험
7. 우리의 왕다운 인격 존엄과 하느님 나라 건설 책임, 하느님 나라 신학인 창조 신학
8. 실현된 종말론: 때의 새로운 인식
9. 우주적 환대인 거룩함: 창조계 황홀 체험을 나눔이 이루는 감사와 찬양의 거룩한 기도
10. 비아 포지티바에서 보는 죄 · 구원 ·그리스도.
- 생각건대 그리스도교가 사회 변화를 위한 책략이 별로 없는 것은 서양이 축복 신학을 무시한 대가다. 우리가 기쁨을 관상하지 않았고, 기쁨에 푹 잠기지 않았으며, 충분히 깊게 기쁨을 맛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할 때, 단순한 삶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게 되리라.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인 것들을 규제하려는 세속적 혹은 종교적 선전가들의 노력에 힘차게 저항할 수 있으리라. 다시금 창조계 자체와 연결되어- 곧, 치유되고 따라서 구원되어-, 그 안에서 합당하되 오만하게 우월하지 않은 자리를 잡고, 그 은혜와 신비를 경탄하리라.
- 자크쿠스토는 예컨대 고래와 함께 머물며 관상했다. 삶과 죽음의 주기는 이 심해의 거구들에 체현될 때 특히 인상적이다. 십오 미터에 사오십 톤이나 되는 이 짐승들은 몸집이 인간과 비교도 안되지만, 그런데도 우리가 그러듯이 숨 쉬고 사랑하고 괴로워한다. 우리의 삶과 그들의 삶은 비록 다를지언정 궁극적으로 구별되지는 않는다.
- 생명 자체는 맑고도 흙탕인 샘들에서 흘러나온다. 그러므로 과도한 "순수"는 생명력이 없다. 맑음과 다름을 위해 끊임없이 애쓴다는 것은 흙탕 요소가 배제되는 바로 그 때문에 그만큼 강렬한 생명력의 상실을 뜻한다. 생명이 새로워질 때마다 맑은 것뿐 아니라 흙탕인 것도 필요하다. 이것을 위대한 상대론자인 마이스터 에카르트는 분명히 지각했다.
- 융은 이 운동을 창조성과 에로스에 "강렬한 생명력"에, 여성론 영성들의 "땅어머니"에 매우 적절히 연결 짓는다. 하느님을 "큰 지하 강"이라고, 그리고 이 지하 강이 진흙을 통과하여 인류가 사는 곳으로 솟아오른다고 말하는 에카르트는 이 "땅 어머니" 영성에 깊이 잠겨 들었다.
- 이스라엘의 믿음도 폰 라트 같은 성서신학자들에게서 그 "놀라운 땅스러움"으로 하여 칭송받았다. 예수의 본원인 유대교 영성은 하도 비이원론적이라서 히브리어에는 몸이나 혼에 해당하는 말이 따로 없을 정도다. 죽은 사람 혹은 영이 나간 사람 대 산 사람이 히브리어에서 중요한 어구인데, 흔히 이것을 우리는 "육 대 영", 혹은 "몸 대 혼"으로 오역하고 있다. 유대인에게는 육적인 것이 영적인 것에 대립되어 있지 않다. "이원론자가 아니므로 '몸'이라는 개념이 없는 히브리인이 육적인 것에 대한 감각과 사랑이 있는 것은 영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 있고 육적인 것 안에 영적인 것이 현존함을 지각하기 때문이다."
- 지혜문학, 예컨대 아가에서 포도나무와 포도주, 포도밭과 풍요, 입맞춤과 성애들을 기리는 것은 우리의 진정한 겸손에 대한 피상적 칭송이 아니다. 이원론적 신학자들이 이스라엘 성문서들의 에로티시즘을 고상화하려고 오랜 세월 애쓰면서 그 저자들이 실제로 찬양한 것인즉 그리스도에 대한 영혼의, 혹은 교회에 대한 하느님의 관계라고 말한 것은 나쁜 주석일 뿐 아니라 나쁜 심리학이다. 유대교 전통에다가 거기는 있지도 않은 혼과 몸의 이원론과 동떨어진 원죄설을 읽어 들이는 것이야말로 최악의 주석이다. 아가에서 "포도주를 마심"은 "사랑함"을 뜻한다(5,1: 8,2). 연인들의 입맞춤을 가장 좋은 포도주 같다고(7.10), 여자의 가슴을 "포도송이" 같다고(7.9) 기린다. 꽃이 만발한 포도밭(2,15)은 글자 그대로 일정한 봄철만이 아니라 사랑 행위의 자극과 그 충족 욕구도 가리킬 수 있다. 여자가 말하는 자기 자신의 "포도밭"이란 실은 자신의 성기 부위를 가리킬 개연성이 매우 높다. 폰 라트는 지혜 문학에 몰두한 다음 지혜 자체를 "거의 관능적"이라고 일컫기에 이른다(43.168). 참된 겸손은 -특히 오늘날처럼 폭력적이고 피상적으로 성을 추구하는 분위기에서야말로- 땅에 사는 우리 삶의 선물들을 맛보는 성애적이고 참으로 감각적인 생활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이리라.
- 그리스도인들에게 육화 신비는 하느님이 온전히 육을 얻게 되셨다는, 우리 자신처럼 철저히 동물화 하셨다는 계시에 있다. 자주 타락/속량 그리스도론에서 교묘하게 가르쳐지는 도체티즘 이단이 부인하려는 것은 예수의 인성과 땅스러움과 감성과 성, 요컨대 그분의 참된 겸손이다. 즉, 땅과 땅의 단순한 민중에 대한 그분의 관계를 부인한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에 관해 확실히 아는 것이 있다면, 그분이 공중의 새, 들판의 백합, 물고기, 양, 태양, 비, 겨자씨, 무화과 나무들을 사랑했다는 것이다. 예수는 이들에게 기도를 할 만큼, 다시 말해 이들 안으로 들어가 이들에 의해 변모될 만큼 이들을 사랑했다. 바로 이 때문에 예수의 비유 가르침들은 창조계 형제자매들과의 관계에 그토록 깊이 몰입해 있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은 결코 열정에 의해 심란해지지 않는다"고 말하기를 좋아했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하느님보다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실제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서전인 <고백록>에서 사춘기에 아버지하고 대중탕에 갔다가 처음 느낀 성적 흥분 때문에 창피했던 일을 이야기한다. 열정 때문에 심란해지는 일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일생에 빈발했고, 불행히도 그의 타락/속량 신학을 복음으로 삼아온 서양 교회도 그랬다.
- 켈트인(실은 아일랜드인) 신학자 존 스코트는 "내가 말하는 우주란 하느님과 창조계다"라고 쓴다. 중세 소우주/대우주 전통에서 코스모스는 추상이 아니고 피해 달아날 적도 아니며, 오히려 예컨대 성서 지혜문학에서처럼 주어진 은혜, 우리 모두가 노는 모태다. 셔뉘는 우주가 우리의 중세 선조들에게 의미하는 바를 이렇게 설명한다. "전체가 그 부분마다 관통한다. 그것은 하나인 우주다. 하느님이 그것을 독특하게 살아 있는 존재로 인식하셨으니, 그 인식 모델은 자체가 전체다. 우니베르시타스는 코스모스다. 그 관상은 즐거움의 원천이다." 상상해 보라, "즐거움의 원천"을! 우주가 "유일회적으로 독자적이며 살아 있는 존재"요, 이것이 기쁨이다. 우주 자체가 성사적이요, "하느님으로 충만해 있다". 다바르가 실제로 창조성을 띠고 있고, 우주를 계속되는 예술작품으로서 말하고 있다. 우주를 탐구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1125년경에 아우툰의 호노리우스는 썼다.
"창조계의 만물이 바라보는 누구에게나 큰 즐거움을 준다. 혹은 꽃처럼 아름다움이, 혹은 약초처럼 치유력이, 혹은 작물처럼 식량이, 혹은 뱀이나 새처럼 의미가 있다. ... 최고의 기능장이 우주를 갖가지 소리 줄이 달린 큰 현악기같이 만드셨다. 영과 몸, 천사와 악마, 하늘과 지옥, 불과 물, 공기와 땅, 단 것과 쓴 것, 부드러운 것과 딱딱한 것 ... 모든 것이 화음을 낸다..."
- 여기서 다시 우리는 우주적 의식을 지닌 영성이 가르치는 즐거움과 기쁨에 대한 확신을 느낀다. 창조주는 심판자가 아니라 우주를 큰 현악기처럼 만드신 기능장이라는 신선한 하느님상이다. 그러면 이 모든 우주적 음악의 결과는? 물론 조화요 조화를 이루어감이다.
- 코스모스라는 말에는 균형의, 조화의 의미, 따라서 정의의 의미가 담겨 있다. 코스모스는 그리스어로 "질서"에 해당하는 말이다. 우주적 영성은 정의의 영성이다. 조화와 균형과 정의를 진정으로 배려한다. 실상 불의는 우주 질서의 파열, 창조계 자체의 파열이다. 히브리 백성은 온 우주가 두 기둥, 곧 정의의 기둥과 내면화한 정의인 올바름의 기둥 위에 서 있다고 믿었다. "정의와 바름이 당신 어좌의 기둥입니다" (시편 89,15). 이 두 기둥 가운데 하나에 균열이나 일탈이 나타나면 온 우주가 중심을 잃고 균형을 잃는다. 그러므로 불의는 우주적 문제다. 시편과 예언서의 많은 탄원이 인간의 불의가 실제로 우주 자체를 위태롭게 할세라 두려움을 토로한다.
- 야훼는 창조계를 균형 잡힌 또는 질서 있는 우주로 만드셨다고 찬양받으신다. "주님은 당신 지혜의 놀라운 업적들을 질서 있게 배치하셨다. 그분은 영원에서 영원까지 계시다" (집회 42,21). 우리의 문화권에서는 정의를 저울로 상상하는 데 익숙해 있지만, 생각건대 정의인 우주의 더 유용한 이미지는 천장에 매단 모빌작품일 것이다. 다양하게 상호의존하면서 경이롭게 움직이는 모빌은 우주가 참으로 조화를 이루며 결합해 있음을 나타내는 훌륭한 은유라 하겠다. "모든 것이 그분 말씀에 의해 결합해 있다" (집회 43,26). 건축가 루이스 칸은 정의인 우주질서에 대한 깊은 체험을 표현한다.
"나는 질서가 무엇인지 찾아내고자 했다. 질서가 무엇인지 하고많은 글을 썼고, 쓸 때마다 모자람을 느꼈다. 말로만 질서가 무엇인지는 2천 쪽을 썼더라도 만족하지 못했으리라. 그러다가 무엇이 "질서다"라고 말만 하기를 멈추었다. 어쩐지 그래도 미심쩍어 마침내 누군가에게 물었는데, 그는 말했다. "당장 멈추어야 한다. 그것은 경이로운 것이다. 당장 무엇이 '질서다'라고 말하기를 멈추라.""
- 힐데가르드는 우주 모빌의 요소들이 인간의 불의로 잘못 다루어질 때 일어나는 일을 묘사한다. "요소들 자체가 인류의 죄들로 왜곡되었기 때문에 창조주를 향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이를테면 드리마일 섬 주변의 땅을 위해, 피시비와 다이옥신으로 오염된 미시간의 물과 땅을 위해 힘차게 발언하고 있다. "요소들을 인간들이 잘못 다루어 손상할 때마다, 하느님은 인류의 고통과 고난을 통해 정화하신다." 하느님이 아니라 우주가 장부를 기록해 나가고 있다. 우주 질서가 그 아름다움과 그 균형과 조화의 법칙들에 대한 인간의 무관심과 탐욕이나 불의를 필경은 용인할 리 없다.
- 우주를 말함은 매우 큰 "저 바깥"을 말함이 아니다. 실은 인간마다에게 가능한 인식의 방식, 생활과 의식의 방식을 일깨움이다. 그 자체가 심리학이요, 세계에 대한 소우주/대우주적 안목이다. 폴 리쾨르는 이 진리를 말한다. "'거룩한 것'을 우주 위에 드러냄과 정신 안에 드러냄은 같은 일이다. '우주'와 '정신'은 같은 '표현성'의 두 극이다. 나는 세계를 표현함에서 나 자신을 표현한다. 세계의 거룩함을 판독함에서 나 자신의 거룩함을 탐구한다." 여기서는 우리와 우주, 안과 밖, 받음과 줌의 이원론이 철저히 깨어진다. 여기서는 일치를 기린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전통에서 이해되어 온 다바르에 내포된 우주질서와 중국전통에서 볼 수 있는 도의 의미 사이의 연결을 보게 된다. 리처드 빌헬름은 중국 철학의 토대를 이렇게 말한다....
- 중국 철학은 우주와 인간이 종국적으로 동일한 법칙에 따른다는 전제 위에 있다. 인간은 소우주이며 어떤 장애물로도 대우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동일한 법칙이 우주도 인간도 다스린다. 정신과 우주는 서로에게 내부세계와 외부 세계처럼 존재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본성적으로 모든 우주 사건에 참여하며,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그 사건들과 한데 얽힌다.
- 확실히 현인의 참 역할은 결합하는 조화로 이끄는 역할이다. 주로 그리스인만이 아니라 중국 고전의 노자도 상기할 때 놀라운 빛 속에 드러나는 점인즉, 현인은 참으로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문장들이 어김없이 계시적이다. 삶에 확립되어야 할 질서가 개인의 질서든 도시나 제국의 질서든 결코 우주 질서에서 분리되어 있지 않다.
- 우주 없이는 인류가 현명하거나 건전하거나 온유하게 살 수 없다. 우주 없이는 인류 자체와 그 방식들에 대한 우상숭배에 사로잡혀 오만하게 조작적이 된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거니와, 앎과 삶의 참 목표는 우주 질서에 통합되는 것이지, 세계를 인간 의지나 욕구에 종속시켜서 변혁하는 것이 아니다.
- 마르셀이 말하는 동양 종교뿐 아니라 위크 전통과 아메리카 원주민 전통을 포함하여 가부장 전 서양 종교도 우주적 자각과 우주적 축제와 우주적 치유에 잠겨 들어 있었다. 실로 모든 의례가 우주적 치유와 축제로 마련되어 있었다. 예컨대 모계 종교들에서는 소우주의 힘이 "우주를 둘러싸는 여신"으로 경축된다.
-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여신을 믿지 않는다 -여신과 연결되어 있다. 달과 별, 바다와 땅, 나무와 동물, 다른 인간과 우리 자신을 통해 여신은 여기 계시다. 우리 모두의 안에 계시다. 완전한 원이시다. 땅 · 공기 · 불 · 물 그리고 본질, 몸 · 정신 · 영 · 감정 · 변화이시다.
- 그러므로 위크 전통의 의례는 곡선이기도 한 우주를 반영하기 위해 으레 원과 나선 속에서 이루어진다. 아메리카 원주민이 예배하러 모일 때도 원을 이루며 ...
(리뷰자 주 : 위카.)
- 하느님을 죽이고 인간 혼을 상실하는 이 사태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유신론에서 만유내재신론 panentheism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만유내재신론은 범신론 pantheism이 아니다. 범신론은 하느님에게서 초월성을 앗아 버리기 때문에 이단이라고 선언되었는데 "모든 것이 하느님이고 하느님은 모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만유내재신론은 전적으로 정통 교리에 부합한다. 정통 실천에도 잘 맞는다. "안에"를 뜻하는 엔이라는 그리스어가 끼여 있어 "하느님은 모든 것 안에 있고, 모든 것은 하느님 안에 있다"는 뜻이다. 우리의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삶의 모든 축복과 고난 속에서 다바르를 체험하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신비적 이해에 가닿는다. 만유내재신론은 오늘날 개인과 종교기관에게 절실히 필요하다. 이것은 창조중심 영성전통이 하느님을 체험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하느님을 주체나 객체로 삼아 그런 주객관계 속에서 하느님과 관계를 이루지 않으므로 유신론이 아니고 범신론도 아니다. 만유내재신론은 세계를 성사적으로 바라본다. 앞에서 본 것처럼 창조중심 전통에서는 모든 인격과 살아 있는 만유를 포함하는 창조계 자체가 제1의 성사다. 이 제1의 성사에서 다른 성사들의 풍부한 창조력이 나온다.
- 어디서나 존재하는 축복으로 시작해서 (첫째 길), 하느님이 현존으로서보다는 감싸는 부재로서 체험되는 어둠을 통과하고(둘째 길),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는 다바르가 참으로 출산을 하는 창조성을 거쳐서(셋째 길), 자비에 이르러, 하느님 안에 우리가 집단적으로 잠겨듦을 경축하는 한편 하느님의 창조물들 가운데서 정의를 위해 투쟁한다(넷째 길). 넷째 길에서 만유내재신론이 바른 결론에 이른다. 예수께서 마태오 복음서에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은 바로 당신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라 하시고 몸소 그렇게 하신 것과 같다. 투명한 의식은 서로 섬기고 더불어 경축하며 서로 고통을 덜어주는 데서 절정에 달한다. 그러므로 떼이야르 드 샤르댕이 투명함을 "우리 해방의 기적"이라고 불릴 수 있는 "상호 관통"이라고 일컬은 것은 옳다(40.130).
- 만유내재신론은 하느님의 현존, 하느님과 깊이 함께 있음에 관한 성숙한 가르침이다. 유대인 학자 로널드 밀러는 히브리 백성들에게 "하느님이란 궁극적으로 함께 계심"이라고 말한다. 출애굽기 3,14에서 이름이 밝혀지듯이 야훼는 "거기 계시는 분"이다. 우리는 야훼를 함께 계심에서 알게 된다. 하느님의 함께 계심은 문헌상으로도 특히 의미심장하다. 그리스인은 명사에 초점을 두는 반면에, 유대인은 "함께" "거슬러" "로부터" 전치사에 초점을 두기 때문이다. 실상 계약은 하느님의 함께 계심의 표지다. 유대 신앙인에게는 계약 없는 실존이란 견딜 수 없는 일이다. 유대인에게 하느님은 일종의 전치사 같은, 앞에 위치하는 분이다. 그리고 이 전치는 근본적으로 현존의, 함께 계심의 전치다. 임마누엘(하느님이 우리와 함께)이라는 예수의 칭호가 마태오 복음서의 유년 이야기에 명시된다.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부르리라.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다" (마태 1.23 : 참조: 이사 7,4),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시며 그분은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라고 바울로는 말한다(골로 3,11). 일종의 그리스도 만유내재신론인 셈이다. 예수께서 인간으로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이 땅에서 떠난 뒤에 오시는 당신 영으로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현존을 말한다.
- 융의 두드러지게 도발적인 말 가운데 하나로, 로욜라의 이냐시우스와 마이스터 에카르트를 비교하는 데서 두 사람의 차이를 밝히는 "이냐시우스는 비아 네가티바가 없다"라는 말이 있다. 이냐시우스가 살던 당대인 16세기 이래 서양 영성에 대한 작지 않은 비판이다. 가톨릭 대사학자 셔뉘가 말하듯이 "교회는 300년 동안 예수회가 주도해 왔기" 때문이다. 융과 셔뉘가 옳다면, 가톨릭교회는 300년 동안 비아 네가티바가 없었던 셈이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의 주류는 영성에 가톨릭보다 깊이 몰두했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서양 그리스도교 일반의 종교적 태도가 현대까지도 비아 네가티바가 없었던 셈이다(퀘이커파, 메노파, 모라비아 형제단 같은 진보적인 개신교 그룹이나 아마도 가톨릭 노동자 운동 같은 천주교 소수자 그룹은 예외라고 해야 할 것이다).
- 종교가 비아 네가티바를 무언가로 대체했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가톨릭 영성에서는 대개 금욕주의다. 감정을 통제하기 위해 의지력을 사용하는 노력이비아 네가티바를 대치했다. 고행이 명상을 대치했다. 명상이 장려되는 곳에서는 그것이 하도 능동적인 것이어서 관상에 잠기고자 하는 유혹을 쉽사리 몰아낼 수 있었다. 마이스터 에카르트는 지금부터 8세기 전에 금욕을 비판했다. "금욕은 중요하지 않다. 더 작은 자의식 대신 더 큰 자의식을 낳고 더 작은 에고보다 더 큰 에고를 드러낸다." 자본주의가 일어나고 산업이 태어나고 근대전에서 대군이 민간인을 겨냥하던 역사상 시기에 "더 큰 자의식"과 더 큰 에고에 대한 종교적 묵인 또는 동조에 대해 기존체제의 세속 옹호자들의 보답이 없지 않았다. 비아 네가티바가 무시될 때 예언자적 목소리는 불가피하게 묵살된다.
- 삶은 피상적이 되고 쉽게 조작되며 필경 폭력 못지않게 지겨워진다. 또 무엇보다도 값싸진다. 비아 포지티비는 별과 원자, 왕다운 인격과 축복받은 육체와 거룩한 관계를 이루는 우리 삶의 우주적 넓이를 가르치는 한편, 비아 네가티바는 신적 깊이를 열어준다. 깊은 고통을 겪었을 때, 그리고 고통을 고통이도록 허용했을 때, 우리는 그랜드 캐년을 찾아가서 수십억 년 고통의 흐름이 훨씬 깊이 강력하게 새겨진 인간 인격에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배울 수 있다.
- 예컨대 게르만 신학 Theologica Germanica의 신비전통을 프로테스탄티즘에서 상실했을 때, 비아 네가티바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죄에 몰두하는 과장된 타락/속량론이었고, 그래서 인간의 죄스러움이 명상의 고유한 대상이 되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이 묵상한 그늘과 어둠의 또 다른 표현은 가톨릭 교회였고, 그리하여 이 교회를 떨쳐버리는 것이 더러 프로테스탄트 신자에게 떨쳐버림의 거의 전적인 표현이었다. 우리 시대의 일치운동과 더불어 프로테스탄트 전통의 많은 이가 더 깊은 비아 네가티바를 추구하기 시작했지만 흔히 이것을 발견하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가운데 마이스터 에카르트의 창조 영성에서 볼 수 있는 그런 건강한 비아 네가티바 전통을 이해하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 비아 포지티바와 기쁨과 환대의 영성이 그토록 오래 심각하게 침묵을 강요당했다는 사실로 인해, 서양의 비아 네가티바 상실은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비아 포지티바 없이 비아 네가티바는 없다. 사랑에 빠지지 않은 것을 어떻게 떨쳐버릴 수 있으랴? 무의 깊이는 만유의 체험과 직결된다. 공은 우주의 곡면의 볼록면이다. 우리는 기쁨과 황홀만이 아니라 고통과 슬픔에서도 우리가 우주적 존재임을 배운다. 에로스의 구원적 재탄생은 확실히 깊은 어둠의 시대에도 선도적 역할을 할 것이다.
- 근대 서양 문명에서 어둠으로부터의 도피가 사멸성으로부터의 도피와 이승의 삶을 떠나보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별로 의심할 나위가 없다. 오토 랑크는 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부장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동물, 땅, 삶에 대한 혐오와 실제로 큰 관계가 있다. 이 두려움은 에로스 또는 생명 사랑을 몰아낸다. 어둠이 무엇인가? 스타호크는 어둠의 거룩함에 관한 훌륭한 저서 (Dreaming the Dark)에서 어둠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모든 것, 우리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모든 것, 곧 두려움, 분노, 성, 슬픔, 죽음, 미지의 것이다"라고 말한다(38.xiv). 무의식적 정신 또는 "우뇌의 길은 어둠의 길"이다. "우리 존재의 깊은 곳이 모두 밝은 빛을 받지는 않는다. 이점을 분명히 보기 위해 우리는 어둠 속으로, 내적 심연 속으로 기꺼이 잠겨 들어, 거기서 발견할 수 있는 조물들을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 어둠을 발견하고 벗하는 법을 어떻게 배울까? 또 한 백성이 이것을 어떻게 배울까? 먼저, 어떤 비상한 조작도 수행함이 없이 우리 삶이 실제로 어떻게 이미 어둠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가를 성찰하는 것이 건전하다. 예컨대 우리 모두가 어둠 속에서 시작한다. 사랑하는 우리 부모들은 필경 사랑을 나누는 어두운 밤에 우리를 배었을 것이다. 우리는 결혼의 가장 친밀한 순간들의 어두운 성사를 훨씬 더 감각적으로 정직하게 경축해야 한다. 나아가, 우리는 어둠 속에서 만 아홉 달 동안 분명히 만족한 삶을 살았다. 자궁은 어두웠고 두렵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의 기원이다. 우리의 원존재, 우리 원복의 더없이 거룩한 기원이다. 우리의 영적 깊이에 닿자면, 침묵 속에 어두운 우리의 기원들에 대한명상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 태양이 온 우주를 비추지는 않는다. 우주 공간의 대부분은 어둡다. 우주 자체의 탄생 대부분이 어둠 속에서 이루어졌고, 태양이 언제나 존재한 것은 아니다. 땅 속의 씨앗은 자궁 속의 태아 못지않게 어둠 속에서 자란다. 모든 어둠이 신비와 연관되어 있다. 계몽주의는 우리가 땅과 동물들과 우리의 감정들을 정복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고 마찬가지로 신비 자체도 정복해야 한다는 치명적 관념을 남겨주었다. 우리는 신비와 그 어둠을 맛보는 것을 탈취당했다. 신비에 대한 우리의 권리를 회복해야 한다. 이 신비가 그토록 흔히 잠겨 들어 있는 어둠에 대한 우리의 권리도 회복할 필요가 있다.
- 우리가 접촉해 온 것은 우리의 기원과 전기원의, 우리의 탄생과 신비의 심연에서 영위하는 삶 전체의 어두운 신비이지 빛이나 지식이나 문제해결만이 아니다. 우리는 고통과 고난이 우리 삶의 여정에 끼어들 때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나 관계의 단절이나 우리 자신의 죽음에 직면할 때도 신비와 어둠에 싸인다. 죽어가는 현상에는 직업이나 삶의 자리, 혹은 친구나 관계가 변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런 일들은 언제나 어둠과 신비와 더불어 발생한다. 오늘날 우리는 조나단 셀이 "소멸"이라고 일컫는 전례 없는 새 차원의 어둠에 직면해 있다 - 탄생의 죽음 자체, 모든 인간의 삶과 실존의 종말, 핵소멸이 야기할 수 있는 마지막이다. 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어둠을 정면으로 대면하여 벗 삼지 않는다면, 이것은 적이 되고 분명히 우리는 그늘을 억누르는 모두가 치르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되돌아와 거듭 괴롭히며 대낮의 현기증에, 지구 자체의 진짜 어둠에서 절정에 달할 수 있는 팽배한 전쟁 기계를 맹목적으로 살찌우고 있는 우리의 행태에 파고들 것이다.
- 지금까지 어둠과 어둠을 늘 따라다니는 신비에 대한 우리 자신의 실제 관계에 관해 성찰한 바에 더하여, 우리는 모든 명상, 모든 이미지, 모든 모상, 모든 기획, 모든 명칭, 모든 존재와의 접촉을 떨쳐버릴 필요도 있다. 선 불교와 지혜문학, 마이스터 에카르트와 토마스 머튼이 칭송하고 촉구하는 침묵의 필요성은 단순히 입의 침묵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침묵은 모든 이미지를 떨쳐버림을 의미한다.
- 오히려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내쉼으로써, 자기 몸의 음악 속에 들어감으로써 떨쳐버린다. 그 숨이나 심장박동 등 가장 직접 현존하는 것에 집중함으로써, 좌선이나 요가가 더러에게 이 떨쳐버리기를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더러는 그저 있기만 앉아 있기만 할 수도 있다. 또 더러는 자연이나 음악이나 성의 나눔이나 시에서 황홀 체험에 따르는 순간들이 떨쳐버림과 깊디깊은 침묵의 올바른 배경이 될 수 있다. 더러에게는 퀘이커 모임이나 수도회 묵상 시기처럼 그룹 묵상이 그런 떨쳐버림의 좋은 기회다. 우리 모두가 상황이 우리를 가두어 대낮의 계획들을 떨쳐버릴 수밖에 없게 만들 때 침묵이 의미하는 것을 새삼 배운다. 교통사고나 병으로 병원에 있거나 감옥에 있는 동안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랑 관계를 잃고 깊은 슬픔에 잠기게 된 순간들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머리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성서를 통해 기도할 때도, 우주와 그 자녀들(발이 둘이든 넷이든, 물고기든 날짐승이든)의 깊은 침묵과 통교하는 동안에도 떨쳐버리고 침묵을 놓아두는 위의 방식들을 결합하면 거의 모두가 우리 대부분에게 삶의 여러 시기에 결실을 맺으리라고 기대될 수 있다.
- 서양 종교가 이미지를 떨쳐버리는 비아 네가티바를 완전히 오해한 예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성상 파괴 운동이다. 독일어로 "형상 금지" keine Bilder라는 말이 "예술을 파괴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이미지와 외적 형상의 이 결합은 서양 문화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예컨대 게르만 신학에서 "형상금지"의 실질적 의미는 에카르트가 주장하는 의미다. 곧, 우리의 삶과 일과 기도와 예술을 통해 진정한 이미지를 낳고자 한다면, 때때로 모든 이미지를 떨쳐버릴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 심리학자 융은 떨쳐버림의 이 값진 기술, 동양 신비주의가 무시하지 않는 기술을 창조중심 신비가에게 배웠음을 인정한다. 도교의 <황금꽃의 비밀>을 설명하면서 그는 말한다. "이 사람들이 자신을 해방시킨 발전을 성취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내가 알 수 있는 한,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일들이 일어나도록 놓아두었을 뿐이다."
- 마이스터 에카르트가 가르쳤듯이, 일들이 일어나도록 놓아둠, 무위를 통한 행위, 자신을 떨쳐버림의 기술은 나에게 그 길에 이르는 문을 여는 열쇠가 되었다. 우리는 정신 속에서 일들이 일어나도록 놓아둘 수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실제로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한 기술이다. 의식은 줄곧 간섭하고 돕고 바로잡고 부정하며, 결코 심리 과정의 단순한 성장을 평화로이 놓아두지 않는다.
- 떨쳐버림은 과연 기술이다. 비아 네가티바의 가장 확실한 명상 기술이다. 융이 서양 가부장 문화와 종교에 이것이 드물다고 탄식한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 영혼의 바탕이 어두운 것이 사실이라면, 인류는 어둠에서 도망치며 어둡게 함 Endarkenment을 내포하지 않는 밝게 함 Enlightenment(계몽)을 끌어안기를 계속할 수 없다.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안구를 모두 사로잡는 텔레비전이라는 광기계를 발명할 수 있었다면, 사람들이 방으로 들어오자 신비로 빨아들이는 암기계를 발명하지 못할 이유가 있는가? 수잔 그리핀이 조언하듯이 (20.168,122), "밤을 허락하고" "어둠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한다면, 영성은 스스로 길을 이끌며 건강한 비아 네가티바의 실천과 진리를 선포해야 한다. 그런 여행은 제조되는 종교관행이 아니라 떨쳐버리고 놓아둠, 깊이 숨 쉼, 빈 공간과 침묵을 신뢰함이다. 잠겨듦이며 따라서 기어오름이 아니다.
- 잠겨듦이라는 영성여행 이미지는 창조중심 영성전통에서는 친숙하다. 9세기에 존 스코트는 "지순화한 영혼들이 하느님 당신 안에 초자연적으로 잠겨듦"이라 했다. 막데부륵의 메히틸드는 "잠겨 들며 식음"이라 썼다. 에카르트는 "떨쳐버림에서 하느님 안으로 떨쳐버림으로 영원히 잠겨 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깊은 곳으로 잠겨 들고 이 깊은 곳에서 깊고 어두운 곳에 특별히 거처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한다.
- 고통과 고난을 겪음이 우리의 무 체험을 상처 깊고 충격적이며 심지어 폭력적인 것이 되게 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 흔히 우리에게서 가장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왜 나인가? 왜 지금인가?" 하는 분노일 것이다. 어떤 경우든, 무체험이 어떤 식으로 다가오든, 우리는 무가 얼마나 거룩한가를, 얼마나 우리 의존중과 관심을 받을 만하며 우리의 삶에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하는가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무의 현존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이 놀랍게 우리를 변화시킬 것이다. 모든 것이 무로부터 창조되는 것과 같이 우리는 재창조될 것이다.
- 무 체험은 우리의 깊은 삶에, 참으로 우리의 영성과 관련된 에로스의 회복에 필수적이다. 서양에서 우리는 여러 세기 동안 무에 대한 건강한 이해를 탈취당해 왔다.
- 참된 개체성은 스스로를 영이 되게 하는 데 있다. 삶의 비의는 무사무욕한 섬김이다. 우리의 최고 이상은 집착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22.93).
- "공포"의 느낌을 이름 그대로 부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물에 잠김에는 공포가 따르게 마련이다. 무엇보다 깊은 잠김을 요청하는 비아 네가티바야말로 예외가 아니다. 여기서 죄는 부력에 대한 신뢰의 거부다. 어둠과 고통, 무, 무의 하느님, 우리 자신의 몸, 숨, 허파, 자신감의 부력에 대한 신뢰의 거부,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영성 성장을 억누르므로 죄스러운 것이다. 산고에 관한 이 묘사에서 도움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조언은 "이완"이다. 강박적 경쟁에 중독된 우리네 문화는 이완이라는 보상을 받지 못했다. 거룩한 이완 기술에 필수적인 명상과 고요와 고독의 기법을 개발하지 못했다. 자기나 다른 사람을 교육하는데서 이 기술을 거부하거나 억누르는 것이 비아 네가티바를 거스르는 죄다.
- 집착이 비아 네가티바에서 죄다. 에고에 집착하여 더 깊고 더 초월적인 체험을 위해 에고를 떨쳐버리기를 거부하는 것, 통제에 의지력에, 심지어 종교적 통제에, 영성의 이름으로 금욕하는 통제에 집착하는 것, 거룩한 자아상에 집착하는 것 - 이 모든 집착이 어둠과 잠겨듦의 정신을 거스르는 죄일 수 있다. 떨쳐버림과 받아들임의 이 길에는 소비사회가 당연한 듯이 토대로 삼는 탐닉의 죄들에 관한 건전하고 깊은 통찰이 있다. 전자오락 게임, 돈 늘리기, 물건 사기, 더 큰 텔레비전 구하기, 발표회 참석, 술이나 약물 복용, 부모나 다른 사람들에게 화내기 등, 탐닉하는 것이 어떤 것이든 우리의 정신은 자유로워지기를 원한다. 떨쳐버리기를 원한다. 참으로 요긴한 것은 중요한 사물을 떨쳐버림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태도를 떨쳐버림임을 깨닫는 것이다. "사물에 대한 집착이 끝나는 데서 하느님이 존재하시기 시작한다"고 마이스터 에카르트는 지적한다. 타락/속량 영성전통은 물질을 평가절하하여 사물을 떨쳐버림에 깊은 영성이 있다고 믿도록 이끌었다. 영성적 전환은 이보다 훨씬 철저한 행위를, 탐닉하는 태도를 떨쳐버림을 요청한다. 바로 이 길에 자유가 있다. 이 자유가 수용력과 더불어 비아 네가티바의 목표를 특징짓는다.
- 비아 네가티바를 거스르는 또 다른 죄는 투사의 죄다. 투사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의 거부다. 타자가 다름을, 놀랍게도 그 자신임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자신과 함께 있기를, 이 요긴한 영성적 선물을 고독에서 배우기를 내적으로 거부하는 데서 온다. 자신과 함께 있기에 하도 불만이어서 깊은 자아와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 우리의 길, 우리의 태도, 우리의 두려움과 좌절을 으레 타자에게 투사한다. 이것은 깊이 의도된 태도이며, 모든 진정한 기쁨, 모든 진정한 소통, 모든 진정한 관계를 방해하므로 중대한 죄다. 그 배후에는 이원론을 떨쳐버림으로써 창조물 사이와 창조물 내면에서 실제로 창조계의 영광을 이루고 있는 차이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태도가 있다. 투사의 역설인즉, 오로지 투사를 멈출 때라야 우리가 충분히 이완해서 "잠겨 들어 떠다닐" (리치) 공간과 공기를 확보할 만큼 깊이 숨 쉬게 된다는 데 있다. 더 깊이 어둠 속에 잠겨 들면서 투사를 덜할수록, 그만큼 더 실제로 만물들의 일치를, 릴케가 "모든 것 안에서 끌어당기는 능력" 때문에 찬양하는 그런 어둠을 체험하게 된다. 배리 로페즈가 투사를 그만두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지적한다. 그 말은 늑대를 죽이는 것을 겨누었지만, 그 통찰은 분명히 인류가 그토록 창조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전쟁을 포함한 모든 살해 유혹에 적용될 수 있다.
- "늑대를 죽이는 것은 살해다. 역사상 죽임의 지나침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가시적 동기는 일종의 야수공포증이다. 비이성적이고 폭력적이며 탐욕스런 조물로서의 짐승에 대한 두려움, 자기 자신 안에 투사된 짐승에 대한 두려움이다. 야수공포증의 중심에는 자기 본성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것이 가장 강렬하게 표출될 때 한 동물에 투사되며, 이 동물이 희생양이 되고 말살된다(24. 140). ... "
- 우리는 이를 통해서 얼마나 많은 다른 두려움이 하나같이 투사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죄인가를 성찰하는 계기를 얻게 된다. 이를테면 자신과 다른 성의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도, 성생활 방식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도, 다른 인종이나 다른 정치체제나 다른 언어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도 모두 그런 것들이다.
- 여자에게도 남자에게도 일방적 시민관계를 조성하며 폭력적 생활과 폭력적 관계에서 절정에 달하는 가부장제를 떨쳐버림이다. 가난한 이, 집 없는 이들, 굶주리는 이, 무지한 이, 앓는 이들의 사정에, 아니, 지나친 부자, 지나친 권력자, 지나친 식자들의 사정에 만족하기를 떨쳐버림이다. 확실히 비아 네가티바에서 해방으로서 구원이 내포하는 정치적 의미는 막대하다. <넷째 길> 비아 트란스포르마티바에서 더 깊이 이런 통찰들을 탐색하려니와, 여기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구원과 해방이란 떨쳐버림과 관계가 있고말고라는 것이다.
- 예수는 말한다. "자기 목숨을 구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고,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입니다." 깊은 떨쳐버림, 어둠과 의혹과 불확실과 위험에로 들어감인 비아 네가티바 없이 충만하게 사는 비아 포지티바란 없다. 간디와 마틴 루터 킹도 그랬듯이 예수는 철저히 떨쳐버림이 충만하게 사는 유일한 길임을 알았다. 놀런이 말하듯이 자기 생명을 구한다는 것은 그 생명에 매달린다는 것을, 그것을 사랑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에 집착한다는 것을,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의 생명을 잃는다는 것은 그 생명을 떠나가게 하는 것을, 그것으로부터 초연한 것을, 그러므로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인 반면에, 죽음을 두려워하기를 그친 사람은 그 순간에 살기 시작했다는 것은 역설이다. 참되고 가치 있는 삶은 일단 기꺼이 죽을 것을 받아들일 때만이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 예수는 죽음의 두려움에 정면으로 맞선다. 그리고 우리도 똑같이 하도록 초대한다. 우리를 십자가에 투사하는 묵상이나 사실 속에서 자신의 십자가를 창출하는 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 기쁜 소식의 삶으로써 그렇게 하라고. 죽음의 두려움을 떨쳐버림이 없이 살아갈 수 없다면, 결혼 실패의 두려움을 떨쳐버림이 없이 결혼할 수 있을까? 사제직을 떠남의 두려움을 떨쳐버림이 없이 사제일 수 있을까? 남성 상실의 두려움을 떨쳐버림이 없이 남자일 수 있을까? 아메리카를 떨쳐버림이 없이 아메리카인일 수 있을까? 여기에 우리 모두가 역사를 자신과 인류의 구원사로 체험하는 과정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다주는 구원은 일차적으로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이다.
- 그러므로 신적 다바르가 강렬하고 민감하게 솟구쳐 흐르는 지혜의 원천, 왕다운 인격, 예언자가 된다. 예수를 통하여 지하의 강인 하느님이 지상 인간의 삶, 인간의 역사로 분출된다. 그러나 이것은 오로지 예수 자신이 그토록 충만히 땅에 속하여 신적 지하 원천과 충만히 닿아 있는 빈 수로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리고 우리도 이와 동일한 비워진 하느님의 모습을 본받도록 초대받고 있다..
- 이를 위해서는 예수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지속적인 떨쳐버림, 지속적인 가지치기(요한 15.1-6)가 필요할 것이다. 가지치기는 일시적으로 상처를 내고 의혹과 두려움을 일으키지만 힘과 풍부함과 깊이를 창출한다. 현명한 정원사는 아름다운 장미를 언제 어떻게 얼마나 가지 칠 것인가를 안다. 현명한 부모는 자녀에게 필요에 따라 끊을 것을 끊어줄 줄 안다. 그렇게 현명한 각자는 자신에게 독특한 필요와 시간에 따라 자신을 가지 칠 줄 안다. 이 떨쳐버림으로 우리는 훨씬 풍부하고 강한 사람이 된다. 우리 삶의 과정에 일어나는 사건들이 우리를 가지 쳐 주거나 스스로 가지 치도록 촉구한다. 이미 예수가 말했듯이 그분의 말씀, 다바르의 늘 흘러넘치는 힘이 이 가지치기를 강력하게 요청한다(요한 15.3).
- 그러나 복음서 이야기는, 적어도 창조중심 영성전통에서는, 결코 십자가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의 여행들도 비아 네가티바로 끝나지 않는다. 십자가라는 비움과 떨쳐버림은 더 큰 탄생의 서곡이었다. 우리의 떨쳐버림 뒤에도 창조성이 따라온다. 우리의 여행은 비아 네가티바에서 <셋째 길> 비아 크레아티바로 들어선다. 우리는 떨쳐버림조차 떨쳐버림에서 기쁨을 얻게 된다.
- 100년쯤 전 화가이자 시인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산업사회의 점증하는 폭력을 탄식하여 "예술의 퇴락, 상상의 거부, 전쟁의 지배"라고 했다. 전쟁사고, 전쟁예산, 우리 안팎의 전쟁, 전자오락 게임과 프로 축구경기라는 전쟁, 전쟁이 판을 친다. 이 모두가 상상을 거부하고 예술을 퇴락시킨 우리네 서양에서 치러온 대가다. 서양에서 조직된 종교가 상상을 거부한 것도 비난받아야 한다. 늦게나마 명상을 가르치더라도, 예술을 명상으로서 가르치는 일은 드물다. 너무나 자주 명상이 내성적內的 형태를 띤다. 어떤 다른 상징이나 이미지(예컨대 성 이냐시우스의 이미지)를 취하여 "예수와 함께 배에 타기"를 상상하거나 십자가상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리며 앉아 있도록 가르친다. 심리학자 클라우디오 나란호가 "내향적 명상"이라고 일컫는 이런 명상들은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사람들의 삶에서 특정한 자리를 차지한다. 이런 것들이 지금 유일한 명상 형태는 아니다. 개인이나 사회를 위해 가장 성취적인 명상 형태도 아니다. 이들은 새로운 출산과 새로운 창조로 이끌 차비가 별로 되어 있지 않다.
- 고통도 기쁨도 더 깊이 영성적으로 기리고 더 충만하게 살도록 이끄는 것은 어떤 명상인가? 명상인 예술이다.
- 여기에 일찍이 서양이 낳은 주목할 만한 인물의 주목할 만한 증언이 있다. 극작가이자 화가, 음악가이자 신비가 박사이자 치유자, 물리학자이자 식물학자, 정치가이자 예언자인 인물이 명상인 예술의 힘을 증언한 것이다. 바로 "글 쓰는 일에 손을 대는" 그녀의 투신으로 그녀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건강이 회복되는 구원이 일어났다. 명상인 예술에 들어서는 결단에 이은 저술과 그림을 통해 하고 많은 다른 이들이 치유되었고 오늘도 치유되고 있다. 내가 이 사실을 아는 까닭은 나 자신이 최근까지도 힐데가르드 저술의 여러 대목과 놀라운 만다라 그림 슬라이드를 사용하여 많은 교육 모임을 가졌고 이어서 나타나는 깊디깊은 치유를 다른 이들과 함께 체험했기 때문이다.
- 힐데가르드의 경우에 나타나는 예술에 의한 치유 효과는 우리 시대에도 큰 중요성을 띤다. 영성은 오늘날 우리 세계가 우주 · 정치 · 종교 · 생태를 막론하고 모든 실존 단계에서 부르짖고 있는 지구 문명을 위한 예술을 회복하는 데 불가결한 구실을 한다. 잉마르 베리만은 서양에서 예술과 영성의 파경이 예술에 미친 결과를 보며 탄식한다. "예술이 예배에서 분리된 순간 그 기본적 창조력을 상실했다는 것이 나의 견해다. 탯줄이 잘려 이제는 그 자체를 낳고 퇴화하면서 그 자체의 메마른 삶을 살고 있다." 예술 없는 종교적 신앙이 메말라질 뿐 아니라, 예술도 영성에서 소박 당할 때 메말라진다. 블레이크의 말대로, 영성 없이는 모든 사람, 특히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예술의 회복이 엘리트주의의 문제를 해소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문제의 일부를 이루면서 예술 자체가 계속 퇴화한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예술이 영성적 명상에서 충분히 합당한 위치를 부여받지 못하는 한, 명상 자체도 엘리트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윌리엄 캘러핸이 "다국적 수도회"라고 부르는 것의 구성원은 아니기 일쑤인 소수엘리트 전문 기도자 집단을 위한 복잡한 의식 수행에 머문다.
- 오늘날 우리는 자기표현이나 예술을 통해 우뇌와 신비생활의 무의식영역을 개발하기 위해 의식적 노력을 해야 한다.
- 명상인 예술의 지혜와 힘을 두고 보면, 막데부륵의 메히틸드와 빙엔의 힐데가르드와 마이스터 에카르트 같은 창조중심 신비가/예언자가 영성여행의 실체 자체를 형성하기 위해 창조할 필요를 발견했다는 것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는 힐데가르드의 저술과 그림이 글자 그대로 그녀를 병상에서 움직이게 했다는 것을 보았다. 메히틸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책을 출판하는 것은 허영이라고 충고했는지를 증언한다. 그녀는 대답한다. "나는 이 말들을 쓰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허영이 두렵다면 기꺼이 침묵을 지켰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하느님의 작은 조물로서 침묵을 지키는 데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더 두려워할 줄 알게 되었다." 침묵을 지키는 것, 우리의 이미지와 재능을 묻어두는 것이 창조주 하느님의 바라시는 바가 아니다. 바로 이 점을 예수는 거듭 가르쳤다. 에카르트는 침묵을 지키지 않을 필요를 메히틸드와 똑같이 느꼈다. 예술가/신비가마다가 이것을 느낀다.
-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선물을 전달하고 나누어야 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나누지 않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면 좋지 않다. 영성적인 것과 그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어주지 않는 사람은 실상 영성적이지 않은 사람이다. 자신만을 위해 선물을 받고 간직해서는 안된다. 자기 자신을 함께 나누고, 몸에서건 혼에서건 가진 모든 것을 되도록 많이 쏟아내야 한다.
- 그러나 그 선물들을 꼴 짓고 출산하는 노력 속에 침묵의 시간이 없다면 어떻게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그런 선물과 기쁨을 나눌 수 있겠는가? 명상인 예술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영성적일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일단 그렇게 한다면, 인간 사회의 재구성과 공동체의 기쁨은 어떠할까?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 예술을 출산할 때만 예술이 명상일 뿐 아니라(물론 이것이 서양에서 흔히 간과된 명상인 예술의 일차적 의미이지만) 자신이나 다른 이들이 출산한 것을 참으로 함께 나눌 때도 예술이 명상이라는 점이 지적되어야겠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이것을 "경탄" 또는 "경이"라고 일컫는다.
- 신뢰가 그녀와 사회의 두려움과 죄악과 길들여짐과 안락의 유혹들을 압도했다. 상처받을 수 있음이 창조하지 않음의 구실일 수는 없다. 두려움이 용기 없음의 구실일 수 없고, 좌절이 희망 없음의 구실일 수 없다. 두려움은 용기를 낳는다. 두려움 한가운데서 용기가 생겨난다. 좌절은 희망을 낳는다. 좌절의 깊은 구렁에서 희망이 태어난다. 상처받을 가능성은 창조력을 낳는다. 창조력은 근본적으로 고통의 능력을 요청한다. 우리의 이미지는 과연 우리를 해칠 수 있다. 그러나 일시적으로만이다. 우리의 이미지를 죽이거나 잊어버리거나 등한히 하는 것이 훨씬 치명적이다. 이것은 빙엔의 힐데가르드가 경고하듯이 살아 있으면서도 말라죽어 가는 길이다. 이미지의 신뢰가 가져오는 고통은 새롭게 하는 고통일 수 있다. 새로운 출산과 새로운 창조의 고통, 우리를 남들과의, 시간과 공간, 심지어 초월을 가져오는 장소들과의 깊고 경이로운 관계로 이끌어들이는 구원적이고 치유적인 고통일 수 있다.
- 우리는 거대한 독수리처럼 우리의 이미지를 타고 그것이 우리를 데려가는 어디든지 날아 오르내릴 필요가 있다. 알고 보니 잘못된 이미지이고 그 때문에 나가떨어져 상처를 입는다 하더라도 좋다. 우리의 창조성은 언제나 옳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잘못되고 불완전한 것도 포함하여 우리의 모든 체험을 거룩한 전체가 되게 하는 데 있다. 예수는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기 이미지를 타고 가셨다. 이 분명한 실패를 넘어 빈 무덤과 부활에 이르셨다. 우리의 이미지를 땅속의 씨앗처럼 깊은 어둠 속까지 타고 갈 만큼 충분히 신뢰하기 전에, 그 누가 그 배후와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랴? 아마도 그 다른 쪽까지 가기 전에는 우리의 이미지인 그 선물을 모를 것이고, 오로지 그 전망으로부터 처음으로 그것들이 보일 것이다.
- 우리의 이미지를 신뢰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이 신뢰받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이고, 하느님이 신적 상상력으로 우리를 신뢰하신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상상하고 출산하는 능력을 믿고 맡기셨다. 바울로의 말대로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의 예술작품"이라면, 참으로 하느님의 외향 명상이라면, 우리 안에 있는 창조력을 신뢰하지 못할 핑계란 없다. 불완전은 핑계가 아니다. 실패는 핑계가 아니다. 죄는 핑계가 아니다. 고통은 핑계가 아니다. 누가 핑계를 대어 우주를 위한 신적 계획에서 빠져나갈 권리가 있는가? 언제 하느님이 누구에게 당신의 능동적이고 정력적인 모상이기를 면제해 주셨는가?
- 내가 이미지화 과정을 말하며 사용하는 이미지는 강냉이 튀기기다. 강냉이 한 알이 튀겨지기 시작하면, 다른 것들도 모두 곧 튀겨진다. 생각건대 한 이미지만 신뢰하여 제구실을 하게 하면 다른 모든 이미지도 제구실을 하게 된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경이와 기쁨의 큰 느낌이 덮쳐온다. 그러나 이때 어느 이미지를 다른 것보다 우위에 둘지 어려운 선택이 따른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한 이미지를 우선적으로 선택하지 못해서 창조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 선택이 없이는 아무것도 태어나지 않는다. 한 어머니는 모든 아이가 아니라 특정한 자기 아이를 낳고, 이 아이는 모든 아이와 연관된다. 어느 이미지가 가장 필요한지를 선택하는 것이 이미지를 신뢰하며 타고 살아가는 일의 일부다. 이미지 신뢰 뒤에는 자기 신뢰가 있다. 그것이 어느 이미지를 자신과 운명을 같이할 것으로 삼을지 합당한 결단을 내릴 수 있다. 셋째 길이 첫째와 둘째보다 더 결단의 때다. 특정한 이미지를 택하여 투신을 할 때다. 떨쳐버림을 떨쳐버릴 때다. 선 예술가인 미야자와 겐지는 이 과정을 이렇게 묘사했다.
"무언가를 깊이 체험한다. 그 후 자신의 마음속에 그것을 그린다. 관념화한다. 냉철하고 예리하게 분석한다. 모든 열정과 힘을 쏟아 넣는다. 그러고는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용해시킨다. 이것을 자의식 없이 한다면, 창조의 깊이와 힘은 훨씬 클 것이다."
- 우리의 이미지는 우리의 자식이다. 자식처럼 분명히 우리와 우리의 시간을 요청하고, 자식처럼 신뢰받기를 요청하는, 자식이지만 유일하거나 최선은 아닌, 그런 우리의 자식이다.
- 미야자와는 "자의식 없이 행할 필요를 예찬하면서 창조 영성과 타락/속량 영성의 중요한 차이 가운데 하나를 강조한다. 전자는 심미적 영성으로서,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표출하는 수련을 요청한다. 후자는 금욕적 영성으로서, 고행 mortification(글자 그대로 "죽음"을 뜻한다)을 요구한다. 전자는 더 자발적이고 아이스러우며 비자의식적이다. 후자는 의지지향적이고 따라서 자의식적이며 자의식적으로 어른스럽다. 창조전통은 금욕을 하느님의 다바르(창조력)를 수행하는 바른 길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하느님 당신이 금욕적이라는 무슨 증거가 있는가? 오히려 우리가 창조계의 아름다움과 풍부함으로 보아 우리의 하느님은 아름다움을, 기쁨을 사랑하고 나누시는 그런 하느님이라는 증거는 있다." 혹은 에카르트가 말하듯이 "하느님은 쾌락을 즐기시는 분이다". 막데부륵의 메히틸드는 이번 마당 서두의 인용에서 드러나듯이, 금욕주의를 유머와 기쁨이 없다는 이유로 비판한다. 에카르트는 비자의식성이 없다는 이유로 비판한다.
- 금욕은 중요하지 않다. 큰 에고를 드러내며 자의식을 줄이기는커녕 더욱 키우는 행위들을 쌓기보다 열정을 더 잘 다루는 길이 있다. 사랑의 고삐를 씌우는 것이다. 이렇게 한 사람은 온 세상 모든 고행을 모은 것보다 훨씬 큰 여행을 할 것이다.
- 무엇이 "사랑의 고삐" 인가? 고삐는 조종 도구다. 에카르트에 따르면 열정은 통제하거나 남용할 것이 아니라 조종해야 한다. 우리를 위해 일하도록, 우리를 갈 필요가 있는 곳에 데려다주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날뛰는 말에 고삐를 씌우듯이. 고삐는 그 자체가 사랑의 고삐임을 주목하라. 훈련의 방법은 위협이나 통제가 아니라 사랑이다. 창조중심 영성의 길은 금욕의 길이 아니라 수련의 길이다.
- 무엇이 수련인가? "수련" discipline은 제자 disciple에서 온 말이다. 제자는 다른 사람에게 매혹된 사람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분을 만났고 그분이 다른 사람들과 사귀는 것을 보았고 그분이 말하는 것을 들었으며 그래서 그분에게 끌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분에게 매혹되어, 자신들이 직관한 아름다움을 더 크게 배우려고 그분과의 동행에 투신했다. 다른 예술가도 이와 마찬가지다.
- 그것은 이원론적 관계들에 의해 통제될 수 없다. 아름다움은 삶의 고통과 그 불일치가 삶의 사랑과 그 조화하고 짝짓는 데서 태어난다.
- 창조 영성 신비가인 막데부륵의 메히틸드는 영성의 변증법적 토대를 놀라운 방식으로 표상한다. 창조주는 우리가 마실 두 가지 포도주, 곧 열락과 조화와 황홀의 흰 포도주와 고통과 고난과 상실의 붉은 포도주를 주셨다고. 그러므로 충만하게 사는 것, 영성적으로 사는 것은 우리의 생애에서 두 포도주 모두를 마시는 것이라고. 20세기 예술가 필립 거스튼은 자기 작품 속에서 서정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이 싸우고 있음을 말한다. "여러 해가 지나서야 나는 그런 갈등이 서로 반기며 하나가 다른 하나에 불을 붙여주고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 타락/속량 전통은 아우구스티누스식 내성심리학적 삼위일체론을 펼쳤다. 오늘날 필요한 것은 우리 안과 밖에서 확장하는 우주에 토대를 두는 창조력 중심적 삼위일체 이해다. 이 마당 서두에 인용된 로마 공의회 교의 선언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은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음을 자랑한다. 삼위일체는 신앙조항이다. 확실히 그리스도인 신앙고백의 가장 기본적인 조항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이 신앙이 너무도 흔히 머리와 입술로만 외는 교의에 그치고 있다. 삼위일체 정식 속의 참으로 힘찬 무엇이 믿는 이들의 마음과 우뇌에 들어가기 시작했는가? 여기서 경축되는 것이 궁극적 우주력은 변증법적이고 따라서 창조적이라는 사실이 부인될 수 있는가? 이원론과 분리는 원죄, 곧 죄 배후의 죄다. 창조주의 신적 다바르인 우주발생의 나선형 과정을 수행하기를 거부하므로 출산하기를 거부한다. 삼위일체 교리에서 경축되는 것은 우주도 창조주도 정적이 아니라는 진리다. 우주도 창조주도 고동치고 열정적이고 사랑하고 창조하고 숨 쉬며 나선형으로 전개된다. 창조하는 삼위일체 하느님이라는 인류의 이미지는 또한 발생과 창조력의 이미지여야 한다. 에카르트는 이 교리의 절박성을 포착한다. "태어나야 한다가 우리의 이름이고, 낳으신다가 창조주의 이름이다." 하느님이 하느님을 계속 낳고 계시듯이 (전통 교리대로,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흘러나오신다), 우리 인간도 우리 자신, 우리 삶, 우리 사회, 우리 우주를 낳는 과정 속에 있어야 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성령이 성부 혼자나 성자 혼자로부터가 아니라 두 분 다로부터 나오신다고 가르친다. 변증법적이고 따라서 창조적인 의식만이 신적 모방을 이룰 수 있음을 이론의 여지없이 일깨운다.
- 이 마당 서두에서 본 대로, 신학자 칼 라너는 삼위일체적 신비주의가 서양에서 발전하지 못한 상태임을 탄식한다. 이렇게 된 이유는 일차적으로 뉴턴식 과학과 가부장적 특권과 타락/속량 신학의 이원론적 의식이 변증법적 의식의 진리를 폄하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비슷하게 이 이원론적 의식이 모든 사람 내면과 주변에 예술가의 영성적 길이 있다는 진리도 폄하했다. 좌뇌주의가 교육이나 종교를 주도할 때, 신적 신비의 출산과 확장이란 없다. "우뇌주의", 곧 확고한 지적 생활과 짝짓지 못한 미신이나 감상주의가 지배할 때도 동일한 무기력이 발생한다. 신학과 교육 모두에서 좌뇌와 우뇌가 혼인을 할 때, 우리 모두 삼위일체 같은 신적 신비들을 다시 체험할 것이다.
- 삼위일체 자체는 다른 삼위일체들을 통찰하는 형식이 되고, 이들이 다시 생명과 신성을 우주에 낳는다. 예컨대 혼 대 몸의 이원론 대신 혼/몸의 변증법을 살 수 있고, 이로써 영을 낳을 수 있다. 혼과 몸이 영과 생명을 낳는다. 혼만이나 몸만이 아니다. 예술은 우뇌만의 것이 아니라 좌뇌와 우뇌의 혼인이다. 참 예술가는 함께 나눌 이상을 가진 지성인이다. 마찬가지로 참 지성인은 인류를 위한 이상의 경이와 결과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예술가다. 삼위일체 모델이 다시금 예술가와 사상가 안에서 결합된다면 이 이상의 짝짓기 모험이 우리 모두를 일깨울 것이다. 일과 예술과 놀이에 대한 이원론적이기보다 삼위일체적인 접근을 통해 우리는 이 셋이 인간의 표현에서 그리고 우주와 인간사회의 지속적 성장에서 얼마나 본질적인가를 인식할 것이다. 실업 자체가 근원적 차원에서 규명될 것이다. 우리 문화의 다른 자리에서는 일이 너무도 좁게 정의되어 있다. 마치 광대나 음악가나 명상가가 행하는 것은 일이 아닌 양, 혹은 우리가 일이라고 일컫는 것은 놀이와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양. 일과 예술과 놀이의 거룩한 삼위일체를 회복함은 일하고 창조하며 놀이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은 인류의 존엄을 회복함이 될 것이다. 사회정의와 예술과 영성의 삼위일체를 삶에 구현될 수 있도록 다시 포착할 필요가 있다. 영성이 사회정의를 혹은 무엇이 삶의 예술인가? 요컨대 땅과 그 산물들을 통한 사람들과 그 활동들을 통한, 우리 자신의 개성을 통한 우주적 느낌의 표현이다. 그리고 우리가 창조하는 방식인즉, 우리의 감정과 직관을 활용하여 언제나 삶의 체험을 높고 깊게 하면서 언제나 실제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 서양에서는 우주가 상실되었을 때 아름다움이 상실되었고, 그래서 랑크가 말하듯이 우리 모두 신경증에 걸렸다. 또한 우리는 예컨대 사치생활의 완벽주의로 대용적 아름다움을 팔려는 소비사회의 제물이 되고 있다. 아름다움은 모든 삶을 축복으로 바라보고 축복을 축복으로 되돌려주며 고통과 고난과 비극과 상실에서 축복을 가꾸는 일과 연관되어 있다. 아름다움은 만들어지고 다시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 이것이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예술가의 막중한 일이다. 아름다움은 우리 안에서건 둘레에서건 싸우는 당사자들 사이에서 가꾸어질 필요가 있다. "검은 것은 아름답다" 혹은 간디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나의 목표다"라는 구호처럼, 억압받는 민중의 운동과 연관된 것은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인식하여 출산하는 왕다운 인격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의 삶과 연관되어 있다. 성서에서 독사(영광)라고 일컫는 것은 옳게 "아름다움"으로 번역될 수 있다. 하느님과 하느님의 아들은 아름다움으로 해서 궁극적으로 매력적이고 매혹적이다. 화이트헤드가 지적하듯이, 참 아름다움, 진실한 아름다움은 반복이 아니라 발견이다. 서양에서 우리는 변증법적 출산 과정, 예술적 에너지를 상실한 그만큼 신학 교육 범주로서의 아름다움을 상실했다. 아름다움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출산되는 것이다. 여기에 그 놀라움이 있다. 아름다움의 모든 체험은 우주적 온전함, 조화의 체험이다. 아름다움은 대우주적 실재의 소우주적 직관이다. 축복이 편만해 있고, 삶과 죽음, 고통과 기쁨, 어둠과 빛, 갈등과 갈등의 해소, 투신과 떨쳐버림이 모두 상관되어 있다.
- 은총이 혼 안에 모든 아름다움을 쏟아 넣는다면, 변증법적 또는 창조적인 사람이란 때때로 아름다움에 잠겨 들고 압도당하며 그 힘과 눈부심을 용납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다.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예술가에 접할 때, 우리는 이 빈 통로에, 영이 통하는 열린 도관에 접한다. 우리 자신이 사랑하도록 배운 우주처럼 투명해진다. 베토벤은 베티나 폰 아르님과의 대화 중에 이런 체험을 묘사했다.
- 모든 진정한 예술의 창조는 독립적이고 예술가 자신보다 힘차며 자체의 현시를 통하여 신성으로 되돌아간다. 이것이 사람 안에 있는 신성에 대한 명상에 관해 증거 하는 것은 오로지 그 현시 안에서 그와 더불어 하나가 되는 것이다.
- 우리는 신적 은총과 아름다움의 도구가 된다면, 이로써 성령이 우리를 통해 아름다움을 세계 속에 돌아들게 하는 데 충분하다. 아름다움을 낳는 이들의 친교인 성인들의 친교에 가장 크게 접하게 하는 것은 특정한 예술작품보다 바로 우리의 삶이다. 우리가 우주에 조화를 되돌려주고 있다면, 우리는 참으로 우주창조주와 더불은 공동창조자다.
- 아름다움은 명사보다 형용사로서 더 잘 이해된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 보다는 어떤 것이 아름다운 체험인가가 더 유용한 물음이다. 우리는 이 행성을 공유하는 데서 어떻게 하면 더 큰 아름다움을 가꿀 수 있는가? 그런 물음에서 필연적으로 나오는 결론인즉 아름다움은 단순하며 공유될 수 있다는 진리다. 최근에 나 자신이 겪은 아름다운 체험은 이 책을 쓰다가 쉬면서 쏟아지는 첫눈 속을 거닐던 일이었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뭇가지마다 눈을 뒤집어쓰고 온누리가 함께 따뜻한 하얀 담요를 덮었다. 우주가 200억 년 동안 이 아름다운 강설의 하루를 보여주기를 열망했음을 생각해 보라! 한 지역적 강설의 아름다움이라는 이 소우주적 체험에는 온 우주의 노력이 예로부터 줄곧 우주적 아름다움과 조화의 노력이라는 암시가 있다. 이것이 불화를 쇄신시키고 우주를 계속 아름답게 만드는 데 기여하고자 소망하는 믿음으로 돌아간다. 냉소가 죽는다. 아름다움이 가능하기에 희망이 지배한다. 아름다움은 있기 때문이다.
- 오래전부터 나는 타락/속량 전통이 설교하는 죄의 지배적 정의, 곧 죄란 "선의 결핍"이라는 정의가 불만스럽다. 아우슈비츠 가스실이나 예수의 십자가형이나 아메리카 인디언 대학살이 나에게 말해주는 것은 죄가 "선의 결핍"보다 크다는 것이었다. 나 자신이 죄라는 주제를 돌파하며 비아 크레아티바의 회복에 수반하는 죄에 대해 힘찬 통찰을 얻게 된 것은 몇 해 전 겨울,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은 두 사건이 동시에 발생하자 우리는 "뉴스를 보기만 할 것이 아니라 뉴스에 기도해야 한다"는 빌 캘러헌 신부의 충고를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 그러나 참으로 문득 죄는 선의 결핍이 아니라 오히려 선의 오용, 우주에서 가장 좋은 것, 인류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 상상력의 오용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동물 가운데 다른 종들은 먹이를 얻거나 새끼와 영역을 보호하기 위해 죽이지만, 우리가 아는 종 가운데 인류만이 가학적으로 죽이는, 죽임에서 기쁨을 얻기 위해 죽이는 유일한 종이다. 가학과 그 짝인 피학은 제자리에 놓이지 못한 상상력에서 태어난다. 타락/속량 전통이 이런 죄의 더 깊은 이해를 이름한 적이 없는 까닭은 인간의 창조력이 지속적 우주력에 그만큼 본질적인 것이라고 여긴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것은 인간의 상상력이 힘(신력과 마력)일 수 있음을 잊었다. 비아 크레아티바는 인류의 바로 신력인 상상력에 얽혀 있는 막강한 마력을 발가벗겨 놓는다. 신력과 마력은 매우 근접해 있다. 얇은 선 하나가 그들을/우리를 갈라놓고 있다. 과연 신력이 있는 우리가 마력도 있다. 그리고 모든 악마적 활동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우리의 신적 상상력을 사용하여 파괴를 고안하는 것이다. 파괴 이상으로 우리는 이제 조나단 셸이 지적하듯이 핵전쟁을 고안하여 인류뿐 아니라 하나인 사랑스런 우리 행성에 사는 다른 생물도 멸종시킬 수 있다. 이것은 가학 · 피학의 극치다. 악이다. 오펜하이머가 말했듯이, 일본에 원자탄이 떨어진 다음 "이제 우리 과학자는 죄를 알고 있다".
- 가부장 사회는 근본적 영성가치요 문화가치인 창조력과 모성을 외면하는 것과 동시에 의료 · 교육 · 종교 · 정치 · 군사 · 스포츠 · 사업 등의 모든 제도에서 가학 · 피학을 영광스런 위치로 끌어올렸다. 이제 미국에서는 가학 · 피학 문화의 제도화인 포르노가 연간 50억 달러 규모의 사업이 되었고, 가학 · 피학적 잡지들이 거의 모든 가판점에 나돌고 있다. 대중매체에서 암시되고 있고, 물론유선 텔레비전에서 팔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 문화 속에서 그토록 잘 팔리는 성 또는 침실의 가학·피학은 회의실의 가학 · 피학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 지금까지 우리는 비아 포지티바와 비아 네가티바의 영성여행이 거기 충분히 들어서면 어떻게 비아 크레아티바에서 절정에 이르는가를 보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모든 창조가 아름다운 것만은 아님도 안다. 창조력 자체는 비판과 방향이 필요하다. <넷째 길> 비아 트란스포르마티바는 그런 판단과 방향의 근거를 제시한다. 또한 이것은 우리 영성여행의 처음으로 되돌아가게도 한다. 비아트란스포르티바의 새 창조계는 쇄신된, 새로운 눈으로 죄스럽거나 불의한 관계가 바로잡힌 창조계다. 고쳐지고 다시 온전해진 우주다. 지혜의 그리고 경축과 놀이의 귀환이다. 이 모두가 자비에 이른다. 자비가 창조중심 영성전통에서 인간/신적 혼인의 목표요 가장 충만한 에너지다. 모든 경우에 우리의 창조력이 자비를 사용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인종차별과 성차별, 군국주의, 거대한 자본주의가 사람들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흡수해 버리고, 축복을 통해 축복을 되돌아오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주하고 파괴하기 위해 창조력을 사용할 것이다. 많은 창조력이 아우슈비츠에서 효과적으로 인간을 몰살하기 위한 히틀러의 불가마로 흘러들었고, 엄청난 양의 창조력과 기술이 오늘날 핵잠수함 계획과 건설에 투여되고 있다. 이것도 창조이지만 새 창조는 아니다. 잠재적으로 인류가 알고 공유하는 모든 창조의 끝이다. 우리의 창조력이 노예화하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고 해방하는 것이어야 한다면, 분명히 어떤 길잡이와 방향이 필요하다.
- 창조중심 영성전통은 관상 contemplation보다 자비 compassion를 쇄신된 방식으로 기원에 돌아가는 영성여행의 성취라고 여긴다. 정의가 영성여행에 절대로 불가결하다고 여긴다. 우리는 <첫째 길>에서 정의가 우주와 그 질서와 조화에 불가결함을 보았다. <넷째 길>에서는 정의와 정의의 창출과 불의의 대항이 이 영성도정의 바로 생명인 피다. 에카르트는 "내가 정의에 대해 말하는 바를 이해하는 사람은 내가 말해야 하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했다. 창조중심 영성의 길을 걷는 모든 나그네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창조전통은 정의 없는 영성 또는 정의를 주말 나들이쯤으로 여기는 영성을 상상할 수 없다. 정의는 자신을 낳을 필요의 성취로서 존재한다. 모두가 영의 행업을 위한 정의의 도구로 출산되어야 한다. <넷째 길>은 창조중심 전통이 예언자들의 길임을 밝혀 놓는다. 아나윔(사회에서 잊혀지고 억눌리는 사람들)은, 앞으로 보려니와, 창조중심적이다. 이 말이 참이라는 증거는 내가 제시할 것 외에도 다음과 같은 점이 있다. 창조중심 영성전통은 그 자체가 서양 그리스도교에서 거듭 다시 억압받았다. 이레네우스, 힐데가르드, 프란치스코, 아퀴나스와 같은 많은 성인이 그 가운데 포함되며, 동시에 많은 이른바 이단자(몇 이름만 들면 펠라지우스, 존 스코트, 마이스터 에카르트, 조르다노 브루노, 떼이야르 드 샤르댕)가 불필요한 폭력적 대우를 겪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창조중심 신비가(힐데가르드, 메히틸드, 에카르트, 노리치의 줄리안, 쿠사의 니콜라우스, 이레네우스등)가 삶의 방식이 타락/속량 이데올로기의 종교적 세계관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쉽사리 무시당했다. 4세기 이래 줄곧 제국과 교회의 결혼과 가부장제를 섬긴 이 이데올로기가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다. 이것이 창조전통을 단죄하거나 무시하기를 선택했고, 토마스 아퀴나스마저 시성하기 전에 세 차례 단죄했다. 이 기이한 사실을 마이스터 에카르트는 재판받게 되었을 때 심문관들이 간과하게 놓아두지 않았다. 이렇게 창조전통은 이론적 의미로 억압받는 이들의 영성일 뿐 아니라, 이를 옹호한 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억압받는 이들의 무력한 처지로 전락했다. 창조 영성은 그런 무력한 처지에서 가장 큰 지혜를 긷고 사회와 교회 변혁에 가장 큰 공헌을 한다. 우리는 창조 영성이 언제나 소수 남은 자들의 교회이기를, 그 성공으로 인해 아나윔과의 일치가 이론에만 귀착해 버리지 않기를 기도할 수 있을 따름이다.
- 데이빗 큐브런도 이 주장을 지지하여 비유신론 영성의 정치적 함의를 지적한다.
"세계가 본디부터 능동적이고 신들로 가득 차 있으며 지속적으로 요청을 제기한다는 관념은 사람들의 자신감을 발전시키는 데 일조했거니와, 아마도 더 나은 용기를 주어 영국을 휩쓸던 큰 사회 변혁 앞에서 수동적으로 머물기보다는 한걸음 더 나아가 세계를 변혁하게 할 것이다."
- 아메리카 원주민, 제3세계, 여성론자, 흑인, 동성애자, 장애인의 영성들은 창조중심 영성이다. 나는 다년간 강연이나 피정이나 연구회에서 각계각층 사람들과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이것이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예컨대 이번 여름에 1,500명의 아메리카 원주민이 모였던 워싱턴 소포케인의 테케퀴타 회의가 기억난다. 이 아름다운 모임에서 나는 "원주민의 길과 창조중심 그리스도교의 길"에 관한 연구를 이끌었다. 나와 아메리카 원주민 출신 사제인 에드 사빌라신부의 대화에 이어, 한 나바호 출신 인디언 여자가 일어나 이렇게 밝혔다. "이 한 시간이 나의 40년 생애를 치유했어요. 나는 늘 원주민 길과 그리스도교길 사이의 틈새를 안고 살아왔는데, 이제 알고 보니 그건 원주민 길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길 사이에 있네요." 다른 많은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맞장구를 쳤다. 창조중심 영성을 동성애자들에게 제시했을 때도 깊은 공감을 발견했다. 나는 특별히 이 네 길이 동성애자들의 여행을 이름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쓴 바 있다. 서양 예술가들은 여러 세기 동안 아나윔이었다가 창조 영성에서 고향을, 그리고 고향보다 더한, 자신들의 일을 위한 새로운 힘과 거룩한 소명을 발견하고 있다. 여성론자들도 물론 여기서 고향을 발견할 뿐 아니라 오늘날창조중심 영성전통을 회복하고 재창조하는 가장 주요한 집단이다.
- 창조전통이 서양에서 여성론 전통과 상합된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여성론은 본디부터 가부장 역사 동안 예언자적이었다. 흔히 권력자들은 여성론자를 예언자처럼 대했다. 창조 영성의 계보(부록 1 참조)에서 얼마나 많은 인물이 여자인가. 에카르트처럼 얼마나 많은 인물이 여자들에 의해 영성적으로 교육받았으며 이들의 운명이 어떠했는가. 이들 가운데 극소수만이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예컨대 힐데가르드 성인은 베네딕도회 사람들조차 별로 모른다. 메히틸드와 노리치의 줄리안은 우리의 종교에서 철저히 잊혔고, 에카르트나 존 스코트는 아퀴나스도 단죄 받았다. 스타호크의 작품들에서 회복시키는 그런 여자들의 종교는 가부장제 전의 종교다. 이런 종교는 오늘날 지구를 지배하는 가부장 종교보다 수만 년씩이나 먼저 있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영성은 이와 동일한 시기에 비롯했다. 12세기 독일에서 빙엔의 힐데가르드가 표현한 이미지들이 놀랍게도 참으로 심오하게 아메리카 원주민적이다. 그것들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것이 바로 고대의 창조중심 전통이다.
- 에이드리엔 리치, 수잔 그리핀, 로즈매리 류터, 스타호크, 캐롤 크라이스트, 비벌리 해리슨 같은 여성론자 사상가나 시인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나는 우리가 지금까지 이 책에서 다룬 창조중심 영성의 모든 주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들의 작품에서도 영성 여행의 네 길을 이름하고 경축한다. 나는 영성신학자이고 오늘날 여성론이 창조전통으로 이끌어가고 있음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아나윔의 소리가 마침내 들리고 있다. 이것이 너무 늦지 않기를 희망하고들 있다. 종교와 사회에서, 도처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 속에서 지배 세력들이 우리 한가운데 있는 이 지혜의 회복에 귀 기울이기에 충분할 만큼 오만을 떨쳐버리기를. 모든 사람이 우리 가운데 있는 예언자들을 반기기를.
- 나는 제3세계 사람들, 아프리카인 · 라틴아메리카인 · 아시아인 · 아일랜드인들을 가르쳤다. 이들 가운데서 모두가 창조중심 영성전통을 배우면서 자기네의 깊은 문화적 유산을 확인하는 것을 발견했다. 오늘날 만발한 라틴아메리카의 신학은 정의를 지향하는 영성을 모색하고 있다. 이것은 창조중심 영성을 통해 상호의존에 대한, 그리고 공동의 것인 우주적 자궁의 은총에 찬 국솥을 함께 나눔에 대한 첫 응답이 경축이라면, 둘째 응답은 치유다. 상호의존 대신 의존이 지배하는 곳마다 치유가 제격이다. 비인격적 독립이 지배하는 곳마다 치유가 제격이다. 그릇된 의존과 그릇된 독립의 바탕은 불의이므로 정의를 이룸이 치유의 첫째다. 자비는 축제 거행도 정의 구현도 포함한다. 그러나 둘 다 한 인격의 동일한 뿌리 깊은 속내에서 나오므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서양에 사실 비아 트란스포르마티바가 별로 없는 이유는 비아 포지티바를 충분히 깊이 있게 실천하지 않은 데 있다.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필경 다른 어떤 수단보다 기쁨이다.
- "불의해진 자들은 대개가 기쁨을 미워하는 자였다"라는 오든의 통찰이 옳다면, 에로틱 경축을 촉진하는 문명만이 정의의 새 시대를 선도할 수 있다."남들에게 일어나는 것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나에게 일어난다"는 바로 이 때문에 자비는 경축뿐 아니라 정의와 연관된다. 남들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고, 나의 고통은 남들의 고통이다. 남들의 고통을 덜어줌은 자신의 고통을 덮이고, 우주 고통을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고통을 덜어드림이다. 정의 개념의 회복은 볼테르 같은 계몽주의자와 더불어 시작했고, 우리는 그의 이바지에 깊이 힘입고 있다. 자비의 축제 면은 우리 세계의 상호 관련에 대한 우뇌의 반응이라면, 자비의 정의 면은 우리 세계의 상호 관련에 대한 좌뇌의 반응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가부장제와 계몽주의가 정의를 규정하면서 놓친 것이 있다. 그들의 정의는 너무 추상적이고 너무 멀고 역설적으로 너무 주관적이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을 움직일 수 없었다. 공산주의 국가들은 추상화한 정의를 내세우면서 사람들을 움직이는 데 강제력을, 자본주의 국가들은 소비주의를 동원했다. 그러나 분명히 어떤 이데올로기도 자체 안에 움직이는 정의를 발견하지 못했다.
- 여성론자들이 마르크스주의나 자본주의에나 사회 창출 노력에 예언자적으로 이바지한 것은 에로스의 회복이다. 거대 자본주의도 국가 관료 사회주의도 에로스의 결여로, 땅 · 물 · 공기 · 식물 · 동물 · 몸과 실업자 · 취업자에 대한 돌봄과 친밀감의 결여로 고통을 겪는다. 로드가 말하듯이 에로스가 사실 특별히 "여자들의 힘"이라면, 여성론은 우리가 창출하도록 부름 받는 새 문명에 힘찬 ...
- 빙엔의 힐데가르드는 촉촉함과 푸르름의 힘을 잃고 "돌볼 줄 모르는 메마름"을 경고한다. 돌볼 줄 모름, 무심함, 무감동, 차가운 마음, 열정의 상실, 이 모두가 참으로 깊이 죄다. 성서에서 사랑에 반대되는 것은 미움이 아니라 차가움이다. 단테가 지옥 밑바닥을 불이 아니라 얼음으로 만든 것은 이 때문이다. 돌봄이 없고 열정을 잃은 여기서 자비에 이를 길은 없다. 죄에 이르는 길이 있을 뿐이다. 차가운 마음은 <넷째 길>에서 태만의 큰 죄, 우리 삶에서 축제이자 정의의 투신인 자비를 소홀히 하는 태도가 태어나는 자리다. 창조주 하느님은 삶과 축제를 향한 것이든 정의를 향한 것이든 열정 없이 존재하시지 않는다. 남들의 갖가지 고난에 냉담한 마음에 머물은 창조주를 본받기를 거부함이다. 우리 삶에서 이 하느님 거부가 냉소의 시작이고 따라서 좌절의 시작이다. 변혁하기 위해 창조력을 사용하기를 거부하거나 상상력과 예술적 재능을 피상적으로 사용하기에 머무는 것은 <넷째 길>을 거스르는 죄다. 우리에게 주어진 예언자 소명을 거부하거나 회피함은 <넷째 길>의 "이정표를 놓치는" 죄다. 에로스를, 그 결속과 자각과 경축의 힘을 잊거나 누르는 것도 "이정표를 놓치는" 죄다.
- <넷째 길>에 비추어 성찰할 때 죄는 사소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불의는 사소한 것이 아니다. 대학살 불가마를 만들 수도, 종족과 문화를 몰살할 수도 있다. 또 사실 그랬다. 불의는 정의가 없음만이 아니다. 창조력을 사용하여 남들 위에 군림하고 죽이고 학대하며 경축을 거부함이다. 나아가 <첫째 길>에서 보았듯이 불의는 질서와 조화와 균형과 우주 자체의 생존에서 파탄을 초래한다. 시편 시인은 인간의 죄가 실제로 우주 질서를 혼란에 빠뜨림을 탄식한다.
- 그리스도교 성서학자들도 바로 이런 싸움을 벌여야 했다. 예컨대 크리스터 스탕달은 "의로움과 정의는 하나요 유일한 유스티치 justitia다"라고 말한다(39.101). 너무나 오래 서양 성서들은 유스티치아를 "의로움" righteousness이나 "의화" justification로 옮기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의 의미를 놓쳤다. 존 요더가 말하듯이 바울로의 갈라디아서와 에페소서에 나타나는 "의화"란 "평화를 이룸" 또는 사람들 사이의 "벽을 헐어 내림"을 뜻한다. 이것은 오순절 사건, 사람들 속의 혼동과 이원론의 바벨탑을 허무는 성령의 행업을 상기시킨다.
- 성서학자 마르쿠스 바르트는 이렇게 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의회는 이 사람이나 저 사람에게 일어나는, 각자가 혼자서 추구하거나 소유할 수 있는 개인적 기적이 아니다. 오히려 은총에 의한 의회는 이 사람과 저 사람을, 가까운 이들과 먼 이들을 결합시키는 ... 사회적 사건이다." 다른 많은 학자처럼 스탕달은 아우구스티누스를 서양 개인 구원 몰두의 개시자로 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자신의 안으로 들어가서, 하느님이 구원 역사에 언제 해방의 손길을 보내실 것인가가 아니라 하느님이 개인의 내밀한 영혼 안에 어떻게 작용하시는가라는 물음에 넋을 잃은 채 골몰했다" (39.17).
- <넷째 길>은 모든 사람을 새 창조의 도구로서, 정의와 자비의 쇄신과 재출산의 구원 역사에서 정의와 변혁의 행위자로서 역할을 회복하도록 초대한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기쁜 소식이다. 그러나 또한 우주를 위한 우리의 막대한 책임을 일깨우는 큰 자극이다. 이 사실이 셀의 말을 쓰자면 "핵무기에 의한 소멸로부터의 구원"이 요청되는(33.197) 우리 시대보다 더 분명히 드러난 적은 없다. 인류가 미성숙한 전쟁에서 차이들의 성숙한 안정으로 넘어가는 그런 과정이라면 참으로 깊은 구원을 이룰 것이다.
- <넷째 길>에서 밝혀지는 구원의 통찰은 에로스가 가져오는 구원과 치유를 포함한다. "더 크고 더 강한 생명 충동"이 사람들을 의식의 새 단계로 움직여 그 들의 문제가 달리 보이고 그래서 치유된다면서 융이 말하는 것인즉 경축을, 에로스를 통한 구원이다. 스타호크가 역설하듯이 이 길은 힘의 부여에 있다. 자신과 남들의 변혁을 위한 힘이 되도록 의도된 내부로부터의 힘을 풀어놓는 데 있다. 비아 트란스포르마티바는 모든 사람에게 변혁의 도구가 될 힘을 이미 받았음을 일깨운다. 이것은 치유의 다른 형태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에로스와 경축의 체험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 에카르트는 자비가 구원을 가져온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인즉 구원은 언제나 어느 모로 우리의 근원에 돌아감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땅의 근원이요 우리 출생의 근원인 우리의 근원은 언제나 자비였으므로, 자비와 접촉함이 우리의 가장 깊은 과거와 접촉함이다. 이것이 구원적이다. 이것이 치유한다. 일치시킨다. 과거가 현존하는 것처럼 깊이 미래를 현존하게 할 힘을 준다. 그러므로 자비로운 미래를 열어줌으로써 구원을 가져다준다.
- 실존마다 깊이 현존하는 예언자를 풀어놓음은 변혁되고 변혁할 새 가능성인 영의 새 창조 활동을 풀어놓음이다. 에로스와 경축 감각을 잃은 문화 속에 참예언자들이 와서 경축할 것이다. 감성과 땅스러움을, 열정과 자비를, 실패와 불완전을, 공간과 시간을, 존재와 어리석음을, 웃고 떨쳐버리고 다시 젊어지는 우리의 능력을 경축할 것이다. 놀이 자체가 구원 행위, 유일하게 깊은 변혁을 낳는 창조력의 필수요소다. 아이와 어른의 치유도 부자와 빈자, 흑인과 백인, 남자와 여자, 제3세계와 제1세계의 치유에 못지않게 중요한 구원적 치유다.
- 예수는 참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자비로운 분의 아들이요. 예수의 삶과 일과 죽음과 가르침 모두가 비아 트란스포르마티바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리스도의 이 측면을 이 <넷째 길>에서 몇 가지 짚어 보자. 첫째, 예수의 탄생은 보통 아버지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 일어난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이로써 예수의 탄생은 창조계의 원탄생처럼 우주적 사건이 된다. 이로써 예수는 새 창조계의 예언자만이 아니라 새 창조 자체가 된다. 신약학자 레이먼드 브라운이 말하듯이, "마리아는 남자를 모른 동정녀이고, 따라서 아기는 완전히 하느님의 작품 10-- 새 창조다".
- 말하자면 너무 추상화하고, 에로스의 배려가 너무 없고, 불의에 대해 너무 무비판적이며 못 가진 자를 너무 돌볼 줄 모르던 당대 신학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 지금 우리에게는 사회체제만이 아니라 확실히 종교체제도 변혁할 것을 강력히 요청하고 있다.
- 이 책 전체의 창조중심 영성여행 또한 타락/속량 신학의 체제와 영성에 바탕한 종교 형태들을 떨쳐버림에 이른다. 그것은 변혁으로 부름이다. 종교는 이원론 전통을 떨쳐버릴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예수 자신이 살고 선포한 더 오래되고 더 축제적이며 더 정의 중심적인 전통과 더 가까운 전통으로 변혁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여기서 참으로 새 성령강림, 새 창조, 세계 만민과 모든 종교가 함께하는 영성적 자각이 일어날 것이다. 성서를 읽고 번역하는 새 방법, 읽고 경축하는 새 신비가 죄 · 속량 · 그리스도에 관한 옛 교리를 새로 활성화하고 영성지도 · 서원 · 생활양식 · 성 · 경제 · 노동 · 정치 · 예술 · 예배 · 의례를 새로 바라보는, 실은 대부분 더 옛 길인 새 길들이 나타날 것이다. 세계는 한가롭게 이 변혁을 기다릴 시간이 없다. 다만 이것이 이미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기쁜 소식이다. 이미 교회 안팎 우리 주변의 곳곳에서 사람들이 영의 부름에 응답하며 자비로운 삶에 남아도는 잉여물을 떨쳐버리는 더 단순한 생활양식에 투신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예수 자신을 통해서도 이 일이 일어났고 그 예수가 지금도 우리와 함께 있다.
- 간디는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를 탄식했다. 이 책에서 다룬 네 길과 스물여섯 마당을 회복함은 예수 자신이 살았던 영성전통을 회복함이요 그 고향에 있음이리라. 그것이 예수가 위하여 살고 죽은 복음을 사는 기본 단계이리라. 그것이 참으로 일치운동 시대를 출발시켜, 지구 종교들과 인류 발달의 네 단계 모두가 지구 문제들을 말할 수 있게 하리라. 우리 모두가 창조계를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창조계를 책임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가 공동창조로 부름 받았다. 그리고 나는 이 공동창조를 함께 시작할 자리로서 종교 자체보다 더 좋은 자리를 생각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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