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최기숙
출판 : 현실문화
출간 : 2022.04.04
지난 '문화의 날'에 대출해 왔던 책들을 이제서야 리뷰해 가는 중이다. 최근에는 기록을 남기는 행위에 대한 즐거움이 다소 감소했다. 읽는 것 자체는 여전히 즐겁다. 발췌를 정리하고 뭔가를 끄적이는 시간에 다른 책을 더 읽고 싶어지는 것이 약간의 문제라면 문제인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막상 깊게 집중하지도 못한다.
스스로를 진단해보기에는 다음 중 하나이다. 더위와 과로에 지쳤거나, '생각'이라는 행위를 크게 하고 싶지 않거나, 혹은- 딱히 할 말이 크게 없거나. 아마도 각각이 나름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여름을 고대해 왔던 만큼 기대치가 높아진 것도 영향을 줬으리라 생각하고 있다.
이미 현상은 존재한다. 이것을 부정하거나 외면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그보다는 '왜', 또는 '어떻게'로 시선을 돌려 상황에 변화를 주는 것이 필요하다. 변화를 원한다면.
표지와 제목이 재미있어 보여 선택한 <계류자들>은 정체성이 다소 모호한 책이다. 인문적이지만 학술적이지는 않다. 유명할 법한 웹툰이나 영화와 만화들을 예시로 가져오지만 대중성이 강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사실 기이한 것에 관심을 두는 자체가 대중성과는 조금 다른 방향성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꽤 재미있다. 저자가 소개하는 작품들 중 아직 접해보지 못한 것들에 관심이 간다. 아시아권을 중심으로 해서 영과 혼, 귀와 신, 요괴와 좀비와 인공생명까지 다양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문화적·사회적 시선으로 분석한다.
저자의 해석은 때로는 날카롭고 때로는 불편하다. 개인적으로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젠더적 해석을 들어 설명할 때는 조금 놀라기도 했으나 이 부분은 지엽적이다. 저자의 기본적인 시각과 근거에는 동의한다.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현대의 좀비를 신자유주의와 연결해 해석하는 지점이었는데, 상당히 공감 가는 해석이었다. 다만 좀비 자체가 신자유주의와 무한 경쟁을 은유한다기보다는, 한 시대의 주류가 되는 이존재(이물 異物)는 반드시 당대의 현실을 반영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기존에 이미 존재하던 것이 재조명되거나 재해석되며 인기를 얻는 현상 또한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현상은 언제나 이미 존재한다. 그것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감각만이 계속해서 변화할 뿐이다. 자신에게 익숙한 감각으로만 체감하는 세계는 불변 속에 갇혀 있다. 보이는 것을 보이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 혹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감각해 낼 수 있는 감각. 그것이야말로 '감각부재'인 좀비가 역설하는 현시대의 가장 큰 '부재 不在'가 아닐까.
- 아시아에서는 보이지 않는 존재를 통해 다차원의 사각지대를 사유하는 문화적 전통을 이어왔다. 사각지대는 감각적 취약공간이다. 은유적으로는 존재론적·사회적 소외를 의미한다. 단지 잘 보이지 않을 뿐인데 없다고 여겨질 때가 많다. 바로 거기서 위험이 발생한다. 애초에 못 본 척하고 신경 쓰지 않은 이들의 잘못이다. 무시와 혐오에 대한 반감은 신체를 가진 인간에게만 관여되는 게 아니다. 투명한 것들은 힘이 세다. 존재감을 과시하지 않으면서 강한 힘을 발휘한다.
- 귀신이 바로 그런 존재다. 귀신은 공기나 바람처럼 투명하지만, 존재감이 확실하다. 평소에 보이지 않는 귀신은 타자와 접촉함으로써 모습을 드러낸다. 목격자의 눈과 귀를 빌려 세상에 자신을 알린다. 단절되어 있던 생사의 문이 귀신의 출현으로 화들짝 열린다. 생과 사의 마찰력이 귀신 출몰의 배경이다.
- 형상을 지닌 귀신은 출현 자체가 메시지다. 귀신은 할 말이 있어서 생사의 벽을 통과해 시간을 거슬러 왔다. 이런 상상력은 현실이 죽음 세계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것을 폭로한다. 현실에서 귀신의 뜻이 전달되려면 산 사람의 공감을 얻어야 한다. 귀신은 정의 justice와 감성 차원의 공감이라는 이중의 조건을 통과해야 현실에 자기 의지를 구현할 수 있다.
- 귀신은 계류자다. 죽을 수도 살아갈 수도 없기에 생사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임계지에 계류되었다. 그 사연은 인간 세상의 불편부당함과 연결된다. 아무도 귀신을 돌보지 않았기에 생에 대한 자기 책임성을 완수하려고 현실로 귀환했다. 탐욕, 방관, 협잡, 외면은 귀신의 계류를 지연시키는 조건이자 환경이다.
- 현실은 죽음 세계와 끊임없이 연결된다. 생사의 경계에 반투명한 문이 있다. 부당한 사유로 죽음에 이르렀다면 언제든지 이 문을 열고 현실에 나타나 목소리를 전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귀신의 출현은 위험 신호가 아니라 오히려 불완전한 현실을 교정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단, 정의의 사각지대에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일 때만이 귀신의 음성은 메시지가 된다. 불의와 모순이 은폐된 곳에 귀신이 출몰하는 것은 역사화된 법칙이다.
- 귀신은 법, 사회, 마음이 억압한 어두운 그림자를 비춘다. 귀신이 윤리와 법의 주체가 되는 이유다. 귀신은 인간이 죽음으로 삶을 종료하기 직전, 일생을 정리할 기회를 주는 신체성과 시간성에 대한 실험을 거듭했다. 21세기 귀신의 존재론적 근거는 원천적으로 전통적 맥락과 다르지 않다. 상처, 폭력, 트라우마, 질투, 악연 등은 여전히 유효하다. 여기에 인간과 협력하는 공존 법칙을 추가했다. 영성, 성찰성, 감성 등 인문성의 요소가 접속의 매개다.
- 과학기술 시대의 귀신은 인간 이후, 즉 포스트휴먼에 대한 상상력을 통해 인간됨의 의미를 되묻는 성찰의 몫을 이어갈 것이다. 귀신은 바깥의 존재이지만 기억, 마음, 감성으로도 살고 있다. 겉으로 웃고 있지만 그림자가 울고 있다면, 그저 돌아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보는 행위는 삶을 바꿀 수 있다. 눈을 마주친 사람은 서로를 결코 외면할 수 없다. 감각이 성찰로 이어질 때, 감성의 돌봄은 지속가능한 일상이 되어 번다한 마음과 삶, 관계를 평안히 정돈해 줄 것이다. 세상의 불편부당함과 외면, 방치 속에 억류된 계류자는 정의적 공감 속에 해방의 주인이 되어 자유와 평화의 증인이 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세상에 숨겨지고 가려진 존재·대상·감각 영역의 사각지대에 대한 성찰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상적 행동 미학이 무엇인지 모색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 한국, 중국, 일본, 타이완, 홍콩 등 아시아 각국에서 귀신을 지칭하는 어휘는 서로 다르다. 유교, 불교, 도교적 전통과 문화적 감수성을 공유하던 시기에도 귀신에 대한 명칭은 나라마다 달랐다. 단적으로 말해, 형상으로서의 인물에 '귀신'이라는 단어를 지속적으로 사용한 것은 한국이 유일하다. 중국과 일본, 대만, 홍콩 등에서는 '귀'와 '신'을 따로 쓴다. 한국어의 '귀신'에 해당하는 중국어와 일본어는 '귀'다. 그러나 그것 역시 완전히 일치하는 개념은 아니다.
- 이 책에서는 한국의 귀신을 중심에 두고 언어권별, 국적별 비교를 시도한다.
- 중국 고전문학에 등장하는 여우는 인간과 동물의 경계성 존재로, 귀신과 호환되기도 한다. 요괴, 귀신鬼, 인간의 관계에는 섹슈얼리티가 매개된다. 행동 성향을 좌우하는 것은 남성의 욕망이다. 문화혁명 이후, 중국에서는 비과학적인 담론이나 상상력을 규제하고 검열하는 규범이 법제화되어, 21세기를 배경으로 한 문화 콘텐츠에는 귀신이 등장하지 않는다. 배경이 전근대인 경우는 예외이지만, 이때에도 심신의 자기 동일성을 유지한 귀신이 아니라 타임슬립을 활용한 '영혼 체인지' 형식으로 변환된다.
- 일본어로 한국의 귀신에 상응하는 존재는 모노노케, 오니, 쓰쿠모가미, 바케모노, 또는 오바케, 가미, 유레카이 등이다. 영, 혼, 모노노케 등으로 표기된 영적 존재는 인격화된 요괴다. 헤이안 시대에는 으스스하고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모노노케라고 했다. 위험, 불확실성, 공포의 감성과 연결된다. 헤이안 시대의 오니는 모든 종류의 혐오스럽고 위협적인 존재를 지시하는 단어였다. 반드시 인간의 형상인 것은 아니다. 모노가 오니의 형상으로 나타나 나쁜 일을 하는 경우도 있으며, 인간이 살아 있거나 죽어서 오니로 변신하기도 한다. 온갖 오니들의 밤행차를 의미하는 백귀야행이라는 개념에도 오니가 차용된다. 오니는 '鬼'라는 한자가 일본에 전래되기 이전부터 '오니'로 존재했으며, 인간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모든 속성이 부과된다. 고대와 중세의 요괴는 오니라는 개념으로 포착할 수 있다. 쓰쿠모가미는 일상적 물건이 요괴로 변신한 것인데, 악기·그릇·요리도구 등 일반 가정용품이 움직이는 괴물로 변신한 것이다.
- 고백을 받은 귀신의 외로움이 치유되는 듯하다. 여기에 반전이 있다. 여자 귀신이 고혁에게 한을 전이시킨 것이다. 고혁은 "그래 난 다른 사람의 고통을 겪다가 견디지 못해 죽었어!!"(<아파트>, 6부 5화)라고 절규한다. 급기야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자살한다. 가공할 한의 파괴력에 연민과 동정은 희생된다. 귀신은 자신에게 호감을 보인 인간에게 감정을 전이시켜 동류로 만든다. 의도를 지닌 전이는 폭력이다. 귀신에 대한 진정한 공포가 여기에 있다.
- 웹툰 <아파트>의 메시지는 간단치 않다. 타인의 고통에 어디까지 관여할 수 있을까? 귀신을 모른 체하면 타인이 죽고, 귀신의 한에 동정하면 자신이 죽는다. 때로 공감은 저주다. 귀신은 동정심 깊고 배려 깊은 인간의 호의를 사취한다. 이것이 <아파트>에 설계된 목격자의 딜레마, 진짜 공포의 진원이다. 처치 곤란한 한의 감정 자체가 귀신이다.
- 김나임 작가의 웹툰 <바리공주>는 고전 서사무가 바리데기에뿌리를 내리고 있다. 바리데기 무가는 본래 망자의 혼을 달래는 진오귀굿에서 무당이 부른 노래다. 웹툰에서 고전 원작은 서사의 출발을 알리는 기초 지식으로서만 활용된다. 원작이 일종의 '프리퀄 prequel(전사)'인 셈이다. 나머지는 모두 웹툰 작가에 의해 상상된 과거다.
- '음양사'란 음양오행 사상에 근거해서 점이나 제례를 집행하는 종교인으로, 음양료라는 관청을 중심으로 다양한 제례의 교육과 연구를 담당한다. 중국에서 음양 사상이 수입된 초기에는 과학적·기술적 측면이 강했지만, 점차 주술적 색채가 강화된다. 주요 관장 분야는 점술, 달력, 천문학, 기상학, 시간 측정, 업무 관리 등이다.
- 만화 속의 음양사는 귀신을 부린다. 작중 배경은 일본의 헤이안 시대(794~1182) 주인공 아베노 세이메이는 여우의 자식이라는 소문이 있는 신비한 음양사로, 역사적 실존 인물이다. 역법과 점법에 탁월한 스승 타다유키에게 사사했다. 세이메이는 숫자와 도형을 언어로 삼고 영적 힘(쿤달리니)을 지녔다. 메이지 시대의 귀신담인 이시카와 고사이의 <야창귀담>에 아베노 세이메이 일화가 실려 있다. 여기에 나오는 미치자네의 수레 이야기, 도만 법사와의 일화가 <음양사>에도 있다. 만화에서 세이메이는 여우를 닮은 여우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있다. <야창귀담>의 <구즈노하>가 그 출생담이다. 어머니는 흰여우로, 자신을 구해준 남자를 위해 그가 사랑하던 아내의 형상을 하고 살았다. 어느 날 정체를 들키자 아들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사라진다.
- 음양사가 하는 일은 하늘의 뜻을 받드는 왕을 돕기 위해 하늘의 징조를 번역하는 것이다. 세상 모든 현상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하늘의 언어이므로, 음양사는 그 징조를 번역한다. 주인공 세이메이가 직임에 부여하는 의미에는 정치, 사상, 과학, 신앙이 결부된다. 음양사란 세계의 조력자이자 치세의 설계자, 천문의 해석가, 정치적 조정자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퇴마사나 주술사의 역할을 넘어선다. 스스로를 진리 탐구자, 미지의 모험가, 신에 도전하는 마술사, 천지와 자신을 일치시키는 수행자로 정의한다. 음양사의 철칙은 귀신을 사역하고 어둠을 장악하는 것이기에, 침착함을 유지하고 중립을 지킨다. 세이메이가 냉정해 보이고 감정에 초연한 것은 음양사로서의 직업윤리에 철저해서다.
- 이야기는 천황의 조카 미나모토노 히로마사가 친구 세이메이에게 귀신과 요괴 문제를 의뢰하면서 시작된다. 히로마사는 아베노 세이메이처럼 역사적 실존 인물로, 음악 천재이고 술을 좋아하며 섬세하다. 감정이 풍부해 눈물을 자주 흘리며, 세이메이와 브로맨스를 보이는 꽃미남 캐릭터다(그의 고백은 11권을 참조). 에피소드마다 등장하는 귀신이나 원령에는 일본의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 배경, 풍속이 접속된다. 음양도와 오행 사상, 음양사의 주술에 불교와 밀교, 문학적 정보가 혼재되기에, 독자는 판타지를 즐기며 지적 정보도 얻을 수 있다.
- <음양사>에는 오행과 성수, 복희의 팔괘, 역법, 구고법(삼각법), 율법 등에 대한 정보가 소개된다. 세이메이는 음양도의 원리뿐만 아니라, 수학, 율법, 천문의 이치에도 해박하다. 그의 대사는 종종 문학적이고 철학적이며 현학적이다. <음양사>에서 귀신, 요괴, 정령이 등장하는 맥락은 음양도에 바탕을 둔다. 주인공 세이메이는 식신을 부린다. 이는 일본의 구비전승에 전거가 있다. 식신이란 일본어로 '시키가미'라고 하고 한자로는 직신職神, 식신識神으로도 표기한다. 음양사의 명령에 따라 자유자재로 변신해 불가사의한 일을 벌이는 귀신이다.
- 아베노 세이메이가 친구인 히로마사에게 원령은 힘으로 제압해서는 안 되며, 그 능력을 칭찬해서 달래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히로마사, 악령을 대할 때 필요한 것은 두려움도 공경도 아니라 이해해 주는 거야." "말로써 한을 풀어주는 건 최상의 술이지. 최상의 정화야. 보통 우리도 원령을 풀어줄 때는 온통 칭찬으로 축복해 주는 게 으뜸이거든."
- 인간적 미덕이라고 말한다. 은유적으로 보자면, 인간적 미덕을 상실한 자는 귀신에 가깝다. 귀신이란 정이 있는 사람에게 들러붙는 경향이 있다. 감정을 다스리면 귀신이 범접하지 못한다.
- <음양사>에서 귀신이 되는 사연이나 그 생태는 다양하다. 사물에 붙은 귀신이라는 뜻의 쓰쿠모가미의 사례를 보자. 히로마사는 주작문에서 귀신과 신비한 퉁소를 교환한 적이 있다. 이 퉁소는 오직 히로마사만 연주할 수 있다. 그의 연주에는 치유력이 있어서, 백사의 정령은 히로마사의 연주를 듣고 고통 없이 출산한다. 사물에도 혼이 있어 인간과 감응한다.
- 일본의 고전 <쓰쿠모가미기>의 서문에는 "음양잡기에 이르기를 100년의 세월이 흐르면 기물이 변하여 정령이 깃들게 되어 사람의 마음을 홀릴 수 있는데, 이것을 쓰쿠모가미라고 일컫는다"고 서술된다. 이 쓰쿠모가미는 <백귀야행 두루마리 그림> 등 중세의 두루마리 그림에도 자주 등장한다. 기물이 요괴로 변해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발상은 현대의 콘텐츠에도 이어진다.
- 일본 문화사에서 죽은 사람이 신이 되는 경로는 두 가지, 즉 원령과 현창신이다. 원령은 원한을 가지고 죽은 사람의 영혼이다. 제사를 지내 악한 힘이 미치지 않게 한다. 현창신이란 생전에 걸출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 사망했을 때, 그 업적을 칭송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 신으로 모신 경우다. 모두 신사가 있다.
- 세월이 흘러 원령이 현창신으로 변하기도 한다. <음양사>에 등장하는 스기와라노 미치자네가 대표적이다. 정치적 원한으로 원령이 되었지만, 사람들이 제를 지내 공경하면서 10세기 후반부터 학문의 신으로 부활했다.
-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되어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사람이 귀신과 소통해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아시아가 공유하는 관념이기에 음양사의 상상력 역시 아시아에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 이마 이치코의 만화 <백귀야행>에서 '백귀야행'은 '심야에 다양한 요괴가 마을에 집단으로 나타나 배회하거나 행진하는 행위' 또는 '밤중에 거리를 행진하는 요괴의 무리'를 뜻한다. 이는 일본인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아쿠가타와 류노스케의 단편소설 <지옥변>(1918)에도 나온다.
- 백귀야행을 만나면 죽는다는 속설이 있기에 백귀야행의 날에는 바깥출입을 삼간다. 만화 <백귀야행>에는 온갖 귀신과 요괴·요마가 등장한다. 요괴와 관련해 일본의 전통과 민속이 차용되지만, 이는 배경 지식으로 활용될 뿐, 신앙과는 무관하다.
- '무언가에 홀린 듯하다'는 뜻의 '쓰카레타요우나'는 '귀신이라도 들린 듯한'으로 번역되었다. 귀신 빙의 개념에 대한 한국적 감수성을 반영했다. '가미가쿠시'는 '신이 잠시 데려가다'는 의미로, 자신을 숨김으로써 인간을 드러내고, 인간을 숨김으로써 자신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번역자는 이를 '귀신' 또는 '신'으로 번역해서, 불가사의한 힘이나 그 존재를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했다.
-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요괴에 대응하였나?
첫째, 요괴를 조정하고 제압한다. 이는 전문가인 가규만 할 수 있다. 가규는 리쓰의 꿈에 종종 나타나 문제 해결에 대한 힌트를 준다.
둘째, 요괴를 퇴치한다. 대개의 에피소드가 이를 따른다. 요괴 퇴치를 통해 일상의 평화와 아름다움을 되찾는다.
셋째, 요괴를 모르는 척하거나 거리를 둔다. 본다는 것은 영향을 받는다는 뜻이기에,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것이 지혜다.
넷째, 요괴와 인간이 경계를 설정해 평화를 유지한다. 인간인데 요괴 영역에서 오래 살았다면, 계속 어둠 속에 사는 게 순리다.
다섯째, 인간이 악심을 품고 요마처럼 처신하면 진짜 요마가 된다.
여섯째, 요괴와 공생공조한다. 리쓰를 돕는 아오아라시, 오지로와 오구로의 관계처럼 말이다.
일곱째, 요마와 화합한다. 인간과 요괴는 서로 사랑할 수도 혼인할 수도 있다.
- 인간이 요괴와 맺는 관계는 복합적이다. 결정론적이지도 폐쇄적이지도 않다. 개인의 의지가 중요하다. 요마들은 영력이 강한 인간을 좋아해 그 곁에 나타난다. 인간의 적은 요마가 아니라 인간이다. 그럼에도 요괴를 퇴치해야 하는 이유는 사람의 생기와 영을 빼앗기 때문이다. 이때 요괴는 실체라기보다는 인간 세상의 윤리, 도덕관념, 예절, 관계 정서의 일면을 은유한다. 타인의 생기를 빼앗는 사람이 요괴다. 타인의 불행을 즐기면 요괴의 희생자가 된다.
- 요괴는 인간의 탐욕을 자극해 생기를 빨아들인다. 요괴는 타인의 정체성, 자격 조건을 허락 없이 사용한다. 위선, 모함, 음모, 왜곡, 가장에는 요마가 낀다. 나쁜 소문은 일종의 저주다. 출처를 찾아 응징해야 한다. 요괴와 요마는 인간의 심리 상태나 감정을 은유한다. 스스로 '영력 제로'임을 자처한 작가 이마 이치코는 이름도 형체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괴물이 가장 두렵다고 했다. 마녀, 늑대인간, 흡혈귀 같은 이름이 붙는 순간, 공포심이 옅어진다.
오천 번 정도가 아니야.
오만 번, 오십만 번,
아니 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나는 죽어왔어.
맹렬하게 살고 싶어진 순간
그걸 확실히 알 수 있지.
-미야모토 테루'
- 귀신을 물리쳐야 할 악이 아니라 교섭하고 대화할 동반자, 해원과 천도의 대상으로 여길 때, 인간은 귀신과 공조·협력할 수 있다. 인간과 귀신의 교섭을 대표하는 서사적 전통의 관계는 로맨스다. 낭만적 로맨스도 있지만, 정체 모를 여자 귀신에게 끌린 남자가 패가망신하거나, 절제와 금욕으로 물리치는 내 용도 있다. 그 이면에는 생사를 넘나드는 에로티시즘이 매개된다. 여자 귀신과 사랑에 빠진 남자는 기력이 쇠약해지고 병들어 사망한다. 전통 서사에서 귀신의 성적 매력에 끌려 제어하지 못하고 병이 든 남성은 아무 잘못이 없다. 그는 당한 것이다. 모든 잘못은 유혹하는 여자 귀신 탓이다. 이는 이성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성적 매력을 귀신이나 여우에 빗대, 유혹하는 여성의 이미지와 결부시킨 남성적 관점의 이야기다.
- 한편, 21세기 드라마는 한을 지닌 귀신을 피하거나 외면하는 대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문제를 해결하는 인간상을 구현한다. 전문가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인간이다. 해결자라기보다는 공조 협력자에 가깝다. 그는 유사 죽음을 겪을 정도로 고통을 겪은 적이 있다. 삶과 죽음, 사람과 귀신이 한 끗 차이라는 것을 알아야 귀신과 교섭하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단, 여기에는 사람의 협력이 필요하다. 인간과 귀신, 삶과 죽음이 연결되어 있어, 귀신 문제는 곧 인간 문제임을 시사한다.
-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과 에세이에는 영혼을 감각적으로 인지하는 오컬티즘이 일상적으로 그려진다. 꿈과 현실이 소통하고, 망자와 교감하며 현실을 풍부하게 사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사람, 망자, 뼈, 식물이 교신하는 세계는 생태적 상상력과 연결된다. 한국에서 꾸준히 독자층을 확보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영적 소통이 서사 전개의 핵심 요소로 작용한다. 귀신이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지만, 한국적 의미에서 귀신처럼 여겨지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 명칭은 유령, 생령, 환영, 분신 등 다양하고, 작가 자신이 이에 대해 탐구하는 자세를 취한다. 시각적으로 가시화된 것 이면의 세계, 영혼과 내면을 탐구하는 매개가 된다.
- 어떤 사람은 귀신과 더불어 산다. 헛된 망령이 아니라 소중한 기억으로서, 강렬하게 현현하는 감각적 실재로서의 영혼은 공유하기 어려운 예감으로 현실에 임재한다. 현재는 과거와 동거 중이다. 눈에 보이는 물건이 누군가를 상기시키고, 그 사람이 이미 사라졌다면, 감각하는 자는 유사 귀신과 동거하는 셈이다. 가령 서랍 속에 간직한 오래된 편지에 적힌 글씨는 과거의 것일까, 현재의 것일까. 그것을 지금 다시 읽고 마음의 풍경이 바뀌었다면, 마음에 변화를 가져온 정체는 무엇일까.
- 영화 <식스센스>(1999)에는 앤틱 가게의 반지에 원소유자의 혼이 지문처럼 묻어 있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사물에 사용자의 혼이 깃든다는 발상은 인물교혼을 다룬 아시아 전통의 상상력과 맥락을 공유한다. 인간은 살아온 내력을 모두 기억하지 못한다. 많은 시간이 망각의 영역으로 흘러내리고 더 많은 시간은 무의식에 가라앉는다. 망각하지 않으면 기억할 수 없는 역설적 존재가 인간이다(보르헤스의 소설 <기억의 천재 푸네스>는 기억과 망각의 딜레마에 대한 통찰을 다루었다). 기억은 망각이 내어준 자리에 뿌리내리기 때문이다.
- 이 글에서는 요시모토 바나나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에서 공유되는 감각 주체라는 관점에 주목한다. 작중 인물이 감각하는 대상에는 사람·사물·세계뿐 아니라, 꿈·영·혼 등 이른바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인 현상과 대상이 포함된다.
- 감각, 내면, 영성은 일상을 통해 느끼고 감각하며 경험하는 세계다. 단지 그 언어가 은유적이거나 비의적이어서 일상적 대화에는 쉽게 쓰이지 않는다. 타인과 공유되기 어렵기에 아직 기호화되지 않은 내적 경험으로 가라앉아 있다. 문학적 형상화는 상상력과 공감을 통해 이에 대한 의사소통을 이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없는 것이 아니어서 현실에 언제나 영향을 미친다. 인간은 투명한 것과 교섭하며 산다. 삶과 죽음은 공생동거한다. 이를 아시아의 공통 감각이라는 차원에서 살펴보자.
- 요시모토 바나나는 의사이자 영적 치유자로 알려진 윌리엄 레이넨 William Rainen과 함께 두 권의 책을 출간한 바 있다. 이들은 영적 경험으로서의 '드림타임'에 대해 얘기했는데, 레이넨에 따르면 이는 영적 세계를 깊이 이해하고 영성을 고양하는 목적으로 모든 존재와 정보를 교환하는 공유 공간이다. 영성이란 '나 자신의 존재, 내가 가진 것, 내 모습 그대로 온 힘을 기울여 살아가는 것'이며, 드림타임에서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검열하는 방식이 아닌, 정직한 소통만 허용된다. 정직은 진실성, 진정성, 순수함과 연결된다.
- 단편소설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는 '어떻게 숨겨놓은 많은 것을 친한 사람들끼리는 하찮은 눈치만으로도 알아버리는 것일까'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마음이나 정신, 내면, 꿈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감각적 공유가 불가능하므로 타인에게는 없거나 모르는 것이 되지만, 주체의 입장에서는 감각되는 현실이다.
-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속 인물은 감각이 예민하고 특별하다. 전화벨 소리로 발신자를 감지하거나 특정 장소에서 발생한 일을 알아차리는 <슬픈 예감>의 야요이, 사람의 혼을 볼 수 있고 영적 이동을 하는 <암리타>의 사쿠미, 요시오, 고즈미, 사세코, 가나메, 식물과 교감하는 <초록반지>의 주인공, 생각만으로 전화번호를 알아내는 <달빛 그림자>의 우라라, 감이 뛰어나고 꿈이 잘 맞는 <N.P>의 가자미, 사물과 소통 능력을 지닌 <서커스 나이트>의 사야카 등 감성적 소통과 연결성을 추구한다.
- 인물 형상에는 작가의 경험이 투영된 것으로 스스로 텔레파시와 공감 능력, 오컬트 등이 소설의 테마라고 했다. 이들 인물은 시공간을 넘어 혼을 보는 인디고 차일드다. 초능력이 있고 주위에 푸른빛, 즉 인디고 색의 아우라가 있다고 한다. 장편소설 <서커스 나이트>에는 정원에 묻힌 옛 남자친구의 쌍둥이 형과 소통하는 사야카가 등장한다. 사야카와 딸 미치루, 발리에 사는 이다 씨와 마루 씨는 영적 소통을 한다. <암리타>에 등장하는 요시오와 코즈미에게도 예지력이 있다. 죽은 가족의 메시지를 듣고 꿈에서 미래를 보며 유령을 감지한다. 신비주의 또는 오컬티즘 정서와 연결된다.
- <암리타>의 주인공 사쿠미는 어머니로부터 말할 때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말하는 나의 흔의 상태를 송두리째 전달하는 것"이라고 들었다. 소통의 핵심은 언어가 아니라, 혼, 정신, 마음이다. 감각은 직관적으로 그것을 전달한다. 소설에서 사물, 영혼, 망자, 꿈과 소통하는 인물을 등장시킨 바나나는 스스로에 대해 "솔직히 나는 나 자신을 초능력 혹은 초자연적 존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평범한 직감력과 관찰력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지요"라고 말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에 대해 감각 주체라는 개념으로 접근한 것은 저자의 세계관을 존중해서다.
- 감각 주체는 보이지 않는 것을 실감해 삶으로 끌어안는다. 비가시적 실재를 언어, 색채, 형상의 기호로 표현할 때, 이는 사회적 현실이 되어, 공유 감각으로 자리바꿈 한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에 등장하는 귀신(원작 표현은 '유령')이나 영혼도 감각되는 대상이다. 시간을 통과한 삶의 흔적에는 스쳐 지나간 순간이 죽음처럼 각인된다. 현재 안에 과거가 담겨 있음을 인정한다면, 과거를 안고 사는 사람은 죽은 시간을 껴안고 사는 것과 다름없다. 현존하는 실재는 수만 겹의 유령을 투명하게 감싸 안고 있다. 어제를 껴안은 오늘은 죽은 시간을 껴안은 유령 시간이다.
- 망자가 생전에 쓴 글씨에는 생사의 양면성이 담겨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관점에서 보자면 삶에 펼쳐진 흔적은 망자의 유령과 같다. 소설에서 삶과 죽음, 산 자와 망자는 한 몸에 서식하는 공존체다.
- 현대 일본의 사상가이자 에세이 작가인 우치다 다쓰루는 분자, 원자, 전자, 소립자의 발견조차 눈에 보일 수 있게 증명된 것이 아니라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추론의 산물임을 강조한다. 과학적 명제는 과학기술의 한계에 의해 규정된 잠정적 가설이라는 것이다. 기술적 진보에 따라 유효한 반증이 나오면, 정설로 통용되던 가설은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감성이나 직관은 과학과 대립적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과 궤를 같이하며 확증 불가능성을 공유한다. 우치다 다쓰루는 초능력이나 영적 능력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영적 힘은 존재하며, 이는 칼 폴라니의 암묵적 지, 후설의 초월론적 직관, 칸트의 선험적 통각 같은 직관의 구조와 유사하다고 했다. "증명할 수 없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다."
- 영이란 원래 숨 쉬는 모든 존재를 가리킨다. 영의 반대는 몸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죽음이다. 영성을 기른다는 것은 모든 사물을 연결하고 재연결해주는 내면세계를 가꾼다는 뜻이다. 영적 감수성이나 영성 또는 세계에 대한 감각은 공감으로 현실화된다. 혼자 꾼 꿈은 스스로조차도 재현 불가능하다. 꿈에서 본 이미지는 눈을 뜨는 순간 사라지고 청각은 망실되며, 아무리 정교한 언어로 표현한다 해도 경험 자체가 될 수 없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람은 한순간도 동일인으로 존재할 수 없기에, 꿈의 재현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에 재현된 영성이나 영적 감수성은 독서를 통해 공유 가능한 감각으로 자리바꿈 한다. 그런 점에서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이 영성과 맺는 관계는 무의식의 리얼리즘적 재현, 또는 영적 감수성의 직관적 형상화라고 볼 수 있다.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 영의 생명력, 현실에서 소통 가능한 힘으로 작동하는 영적 감수성은 아시아의 공통 감각이다.
- 근대 일본의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 <지옥변>에도 유사한 상상력이 나타난다. 오직 본 것만을 그릴 수 있다는 화가 요시히데는 '지옥변'을 그리라는 '나리 님'의 명을 수락한다. 낮잠을 자던 그는 괴물을 본 것처럼 대화한다(실제로는 잠꼬대). 이를 본 제자는 괴상한 그림자가 병풍에서 내려오는 것 같은 섬뜩함에 사로잡힌다.
- 화가는 그림을 꿈에서 먼저 본다. 이를 화폭에 재현하기도 전에 감상자가 알아차린다. 시간의 간섭과 착종이다. 현실과 그림, 과거와 미래를 뒤섞는 힘은 광기 어린 예술지상주의를 표상한다. 요시히데는 지옥을 그리기 위해서는 지옥을 봐야 한다는 화가로서의 철칙에 따라 잔혹함을 불사하고 그림의 완성도를 위해 모든 걸 바치기로 결심한다. 급기야 그는 딸을 우차에 태워 불사르는 광경을 그려야 할 처지가 된다(공교롭게도 <지옥변>에는 <기사단장 이야기>에서 그림의 소장처에 서식하던 '수리부엉이'가 요시히데의 애완조로 등장한다). '염열지옥도'를 완성한 화가는 다음 날 목을 매 자살한다. 지옥도를 그리는 과정을 통해, 마치 인신공희하듯 자기 삶을 바치고 스스로 지옥에 뛰어든다.
- 그림은 현실의 재현 결과가 아니라, 재현된 현실의 원인으로 위치 지어진다. 예술가의 삶, 정신, 생명이 화폭에 저당 잡히는 운명을 은유한다. 요시히데는 지옥을 그림으로써 지옥 자체가 된다. 그림에서 나온 기사단장이 그림 속 존재인 동시에 실재인 것처럼, '지옥변'은 현실을 지옥으로 만들어서 탄생시킨 결과이자 그 원인이다. 기사단장에게는 고유한 생리가 있다. 그는 체온이나 체중을 갖고 있지 않고, 먹지 못한다. 부자유나 고통을 느끼지 않으며, 하루에 일정 기간만 형체를 갖는다. 꿈속의 존재는 아니며, 오히려 각성에 가깝다. 시간관념이 없다. 누군가 초대하지 않으면 아무 데도 갈 수 없다.
- 작중 그림인 '기사단장 죽이기'는 독일 및 오스트리아의 역사적 참극을 일본 아스카 시대의 정경으로 번안한 기록화다. 아마다 도모히코가 빈 유학 시절에 그렸다. 1938년 빈에서 나치에 의해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이 이루어졌을 때, 대학생 중심의 지하조직에서 나치 고관의 암살을 기도한 적이 있다. 당시 아마다 도모히코에게는 지하조직의 일원이었던 오스트리아인 연인이 있었다. 대지주이자 지방 유력자였던 부친은 '정치적 배려'로 아들을 일본에 송환한다. 단, 조건이 있었다.
- "이야기의 주요 포인트는 주인공이 어둠 속의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돌아와 '다이나이메구리(태내순례)'와 같은 일본의 종교적 체험처럼 다시 돌아와야 할 곳으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처음 시작 부분에서 독자들과 저 스스로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 '다이나이메구리', 즉 '태내순례'란 지하나 동굴에 만들어진 깜깜한 공간을 신불로 여겨 참배하는 것이다. 일본의 종교 체험이다. 한국에 널리 알려진 사례는 교토의 기요미즈테라 清水寺에 있는 즈이구텐 隨殿의 다이나이메구리 코스다. 지하 암흑을 더듬으며 걸어가 빛이 있는 지상으로 나오는 과정이 세상에 태어나 불교의 가르침을 만나는 과정과 유사하다고 하여, 소원을 비는 참배 문화로 대중화되었다.
- <저승>은 현실 (1박)과 저승(2막), 다시 현실(3막)에서 진행되는 3막극이다. 1막에서 장주는 아내의 마음을 떠보려고 죽은 척한다. 그는 다른 사람인 것처럼 나타나, 산 사람의 뇌수를 먹어야 살 수 있다고 속인다. 아내는 그를 돕기 위해 죽은 남편의 뇌수를 꺼내려 관을 부순다. 남편이 정체를 드러내자, 아내는 미친 듯 웃다가 자살한다. 여자의 정절은 시험당한다. 2막의 무대는 저승이다. 장주 아내가 저승사자를 따라 강을 건넌다. 물에 빠져 죽은 여자들이 다리 아래서 핏물로 몸을 씻고 있다. 장주 아내는 저승에서 억울함을 씻을 수 있기를 바랐지만, 이곳은 뇌물이 통하는 타락한 장소다. 판관은 장주 아내의 하소연에도 불구하고 그 혀를 자르라고 판결한다. 현실에서는 남편에게 속아 분하고, 죽어서도 진실을 외면당해 비참해진다. 부조리한 현실을 바로잡는 정의로운 저승은 없었다. 3막에서는 홀로 남은 장주가 항아리를 두드리며 생사에 대해 노래한다.
- 문학에서 저승은 현실의 부조리를 판결하는 정의적 장소였다. 이제 정의는 저승에서도 불통이다. 아시아에서 저승은 현실의 모순을 교정할 대안적 세계로 등장하기에, 타락한 저승이라는 발상은 드문 편이다. <원혼지>와 <요재지이>를 통해 일부 역사화되었고, <저승>에서 전면화된다. <저승>에 나오는 판관, 마고, 염라대왕은 장주 아내의 억울함이나 진실에 관심이 없다. 2막에 등장하는 무기력한 남녀가 장주 아내의 억울함에 대해 노래한다. "만약 네가 죄가 있다면, 그건 사람이기 때문이야. 만약 네가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그건 네게 죄가 있기 때문이야. 만약 네게 죄가 있다면, 네게 죄가 있기 때문이지. 아니, 만약 네게 죄가 있다면, 사람이 너이기 때문이야"라는 가사는 부정과 부패가 순환하는 모순을 중언부언, 동어반복의 형태로 표현한다.
- 다른 한편으로 가오싱젠은 영성을 탐색하는 소설 <영산>을 창작한다. 작가인 주인공은 폐암을 선고받지만 오진임이 밝혀지자, 거미줄처럼 자신을 옥죄던 문학계를 떠나 삶의 진리를 찾기로 결심한다. 그는 기차 안에서 영산에 가는 사람을 만난 뒤, 마음에 영산을 품는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가본 적 없는 영산이 인생의 푯대가 된다. 영산은 의혹의 대상이자 마음을 끄는 심미적 대상이다. 모든 것이 원시 상태 그대로라는 곳.
- 당신은 영산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지도상으로 영산에 가려면 기차를 타고 '우이'라는 작은 진(중국의 행정 단위)에서 내려 배를 타고 여우강을 거슬러 올라야 한다. 영산은 <산해경>에서 <수경주>라는 제목이 붙은 오래된 지리서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 언급되어 있는, "부처께서 마하가섭에게 깨우침을 주신 곳"으로 알려져 있다.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이지만, 실재를 믿고 추구하며 찾는 이에게만 존재한다. 영산은 원시림 속에서 생명의 원기를 감지하는 순간 현현한다. 그 세계는 주술이나 귀신처럼 미혹의 대상이지만, 믿는 순간 힘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본질이 같다.
- 영산을 찾아가는 동안 화자는 여러 광경을 보고, 역사와 신화, 전설, 옛이야기, 전통이 살아 있는 문화 현장을 접한다. 그 과정에서 자연보호지구에 사는 소수민족과 이족들, 늙은 무당, 가인歌人, 정체 모를 여인, 꿈속 여자,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되지 않는 여자와 인연을 맺는다. 화자는 태초의 고독과 대면하며, 의식과 무의식의 풍경, 소문과 추문 사이, 겹겹이 감추어졌다가 낱낱이 드러나는 여러 층의 자아 갈라지며 흩어지는 감정과 마주친다. 영산을 탐색하는 화자의 행보는 53명의 선지식을 찾아 구법 여행을 떠나는 <화엄경>의 선재동자를 닮았다. 화자와 동행하는 여자의 정체는 미상이다. 그녀는 '당신'이라고 불리는 2인칭 화자의 또 다른 자아 alter ego 다. 때로 유혹적이고, 때로 빈 종이처럼 순수해 주인공의 죄를 환기한다.
- '영산'은 실증할 수 없지만, 있다고 믿어지는 실체, 전설이자 역사이며, 원시성을 지닌 미래다. 영산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1인칭, 2인칭, 3인칭의 서술이 교차하며 때로 착종하는 서술 기법이 활용되는데, 이는 이 소설이 현실의 여행인 동시에 정신적 사유이며, 나 자신과의 다층적 독백임을 시사한다. '우리'를 말하지 않고 파편화된 개인의 인식을 탐구하는 <영산>의 서사에서 증명하기 어려운 귀신이나 신, 혼령이 소환되는 것은 그것이 전통의 영토에서 뿌리 깊이 이어지는 내적 소통의 신체화된 경험이기 때문이다.
- 그런 이유로, 시아버지에게 성적 학대를 당하고 어린 남편이 요절한 뒤, 고통받던 여자가 혼령과 소통하는 스토리는 미신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삶에 가려진 불행의 증언이다. 혼을 부르는 주술사의 내력은 수난의 현실을 신격으로 승화시키는 바리데기 무가와 유사하다. 주인공은 영산을 찾아 편력하면서 소수민족의 망자 제례와 전설, 신화를 접한다. 그들에게 망자의 혼은 현실이다. 작가는 백만 년 이상 된 빙하기의 유물로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메타세쿼이아가 40 미터가 넘게 자란 것을 묘사하면서, 이런 현상이 자연계에 이례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영산>에는 천년 전 스승을 섬기는 사람들, 사후에도 시체가 썩지 않고 야생동물도 범접하지 못하는 노인이 살고 있다. 영산이나 영암을 추구하는 이는 혼자가 아니다. 종교는 법으로 금지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이를 존중하며 그 영향권에서 산다.
- 무신론자인 '나'는 젊은 남녀가 신에게 기도하는 것을 조롱했지만, 폐암 진단을 받았을 때 너무 무서워서 심지어 기적을 바라는 마음으로 '죽음의 신 앞에서 내 마음속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외치는' 것을 듣는 이율배반에 직면한다. 귀신도 마찬가지다. 귀신은 종교나 영혼, 미신처럼, 법과 제도적 억압을 흘러넘친다. 화자는 50년대에 미신적 물건으로 간주되어 압수된 나희의 가면이 문화 대혁명에도 살아남은 것을 보고, 그것이 육체와 영혼의 투영이라고 확신한다. 나희는 중국 전통극 중의 하나로, 귀신 쫓는 목적으로 연행되는 연극이다. 귀신이 없다면 나희도 없다.
- 문화혁명기에 미신은 탄압받고 억압받지만, 귀신의 실체를 담은 나희의 가면은 '영원히 자기 자신을 응시하는 인간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귀신은 없다고 선언되었지만 은밀히 존재 가치를 약속받는다. 그것은 문자화되지 않은 정신적 유산이다.
- 가오싱젠은 소설 <나 혼자만의 성경一個人的經>에서 미신을 금지한 문화혁명기야말로 미신의 시대라는 역설을 제기한다. 이러한 역설은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부조리한 세계 인식과 일치한다. 이념과 사상은 귀신을 논쟁거리로 만들고, 감각과 체험은 귀신을 현실의 동거자로 끌어안는다. 문학은 그것을 불확실성의 은유 대상으로 변환시켜 상상 공간에 띄운다.
- 주인공은 타이완의 동, 북, 중, 남, 서쪽 귀신으로, 작가는 이를 통해 타이완의 400년 역사를 기록했다고 평가된다. 다섯 편의 소설은 독립적이지만, 전체적으로 상호참조하는 역할을 해서 엇갈리고 중첩되는 보완적 의미 공간을 구성한다. 여자 귀신은 원전에서 '귀' 또는 '귀혼'으로 표기된다. 한국어 번역본에는 '귀' 또는 '여자 귀신'으로 적힌다. 귀신의 자기 탐색과 자기 계발은 치열하다. 소설은 귀신의 사연을 외면하지 않지만, 현재의 선택·생각·판단·감성에 주안점을 둔다. 소설 속의 여자 귀신은 독서하고 글을 쓴다. 지붕에 올라간 사람이 그것을 읽었을 때, 내용이 충격적이라 모른 척했지만, 진실을 알았기에 무지한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쓰기가 역사가 되는 이유다.
- 2월 28일, 하반신에 구멍이 뚫린 여자 시신이 발견되자, 귀신을 묘당에 모셔 공양하기 시작한다. 월진/월주의 하반신에 뚫린 열 개의 구멍은 죽어서도 남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만든 인위적 음부였다. 열 개의 음호는 처참하지만 말없는 입이다. 그녀가 비명을 지를 때 모두가 외면했다. 이 상처는 2-28 사건 이후 30년이 지나 복권 당첨을 기약하는 행운의 표시가 된다. 도박이 전국적 스포츠가 되었을 때 상처투성이 여자가 꿈에 나타났는데, 상처의 숫자를 조합해 복권에 당첨된 것이다. 산 자들은 귀신의 고통을 이해하는 대신, 눈먼 욕망에 복을 빌고 있다.
- 오부삼왕야와 왕이의 대결은 타이완과 중국 본토의 관계를 은유한다. 사람이 이주할 때 신도 함께 왔다. 인간의 몸이 물질과 문명을 상징한다면, 신은 정신과 마음을 상징한다. 탕산에서 건너온 오부삼왕야의 힘이 쇠락하고, 루청의 원주민 출신 무녀 왕이가 신뢰를 얻는 과정은 중국 본토와 타이완의 정치, 문화, 정서적 정황을 상징한다. 다시 무녀 왕이의 역할이 축소되고 오부삼왕야가 세력을 얻는 과정은 두 지역의 역동적 관계 변화를 은유한다.
- 귀신이 된 월홍은 독서에 심취한다. 생전에 여자의 책 읽기는 금기였다. 귀신이 입으로 숨을 불어 책장을 넘기는 장면은 독서로 세상과 호흡하는 것을 상징한다.
- 조명가게는 가사 상태의 환자가 생사를 넘나드는 곳이다. 전구를 켜면 살고, 끄면 죽는다. 주인은 전구를 강매할 수 없고, 자발적 구매자만 명을 잇는다. 생명에 대한 인간의 의지를 상징한다.
- 자살을 제외하면, 생과 사는 사람이 임의로 택할 수 없다. 죽고 나면 기억과 기념조차 산자에게 위임된다. 죽음이 주체성의 종언으로 여겨지는 이유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원더풀 라이프>(1998)와 호즈미 작가의 만화 <우세모노 여관>은 죽음을 완성하는 당사자 입장의 서사다. 어차피 인생은 미완성이니 죽음을 수용하자는 발상을 거부하는 데서 서사가 시작된다. '죽음을 온전히 하라'라는 명제는 '삶을 기억하라'라는 명제와 짝을 이룬다. 두 콘텐츠는 장광설을 풀지 않는다. 죽을 때 가져갈 단 하나의 장면, 한 조각 기억으로 족하다. 단, 그것을 찾을 때까지 귀신 상태로 생사의 임계지에 머물러야 한다. 두 콘텐츠는 망자가 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저승에 갈 수 있도록 귀신 체류지를 제안해, 죽음의 냉랭함을 이완시킨다.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첫 번째 장편 영화 <원더풀 라이프>는 죽은 이가 천국으로 가기 전 7일간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추억을 고른다는 판타지물이다. 감독은 독일 태생의 미국 영화감독 에른스트 루비치의 <천국은 기다려준다>(1943)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천국의 입구를 무대로 삼으면서도, 일본 정서와는 무관하게 만들려고 했다. 망자는 자신이 고른 추억의 장면을 비디오로 촬영해 7일째 되는 날 확인한다.
- 영화의 배경은 생사의 임계지인 림보다. 망자가 직원에게 질문받는 순간, 관객은 인생을 반추하기 시작한다. 영화와 관객의 서사를 동시에 출발시키는 것이다.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타인의 생각을 참조하는 경우가 있다. 영화 속 인물은 그 역할에 충실하다. 실제로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기 전, 아르바이트를 고용해 600여 명을 인터뷰했다. 여기서 영감을 얻어 <원더풀라이프>가 탄생된다.
- 비 오는 장면이 아름다운 신카이 마코토의 애니메이션 <언어의 정원>(2013)에는 여주인공 유키노의 집에서 함께 요리하던 아키즈키가 "지금까지 내 인생 중에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한 것 같아"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이때의 아키즈키는 16세. 어쩌면 오롯이 순수한 행복감을 아웃포커싱해 느낄 수 있는 때는 청소년기가 마지막이 아니었을까.
- 모두 살아 있는 주체다. 때로 망자와 손님은 자리바꿈 한다. 림보의 스태프는 망자가 고른 추억의 한 장면을 비디오로 틀어주며 이렇게 말한다. "시사실로 이동해서 저희가 재현한 여러분의 추억을 감상합니다. 그리고 그 기억이 선명히 되살아나는 순간 여러분은 저세상으로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는 그 추억과 함께 보내는 영원한 시간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 '유실물 여관'을 뜻하는 제목의 만화 <우세모노 여관>은 <원더풀 라이프>처럼 죽음에 임해 기억해야 할 단 하나의 소중한 추억을 상기시킨다. 등장인물들은 살아 있을 때 소중한 것을 잊거나 잃은 채 살았는데, 그게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죽을 수가 없었다. 단, 그 사실을 본인은 알지 못한다. 망자를 우세모노여관으로 안내하는 이는 마츠우라다. 그는 망자가 잃어버린 것을 찾아 죽을 수 있게 돕는다. 우세모노 여관은 망자가 죽음을 받아들일 때까지 머무는 영혼의 쉼터, 생애 정리의 관문, 귀신여관이다.
- 어느 날, 장만월은 월령수 앞에서 전생을 보고 고청명에 대한 오해를 푼다. 그녀는 고청명을 저승길로 인도한다. 함께 가자는 제안을 뿌리치고 현실로 돌아온 것은 현세의 연인 구찬성 때문이다. 과거보다 현실을 중시하는 것이 21세기 아시아 귀신의 추세다. 21세기 귀신은 과거가 아닌 현세에 집중한다.
- 귀신의 사연은 다양하다. 현실에서 미처 해결하지 못한 사건, 일, 관계, 정황, 감정 때문에 귀신이 되었다. 델루나는 문제 해결의 틈새를 만드는 상징 공간이다.
- 이런 상상력은 낯설지 않다. 불교적 전통에서 유래한 장례 절차인 사십구재가 그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49일간 영혼의 정화를 거쳐 극락왕생한다. 드라마는 이를 문화적 감수성 차원에서 차용한다. <호텔 델루나>의 망자는 사신의 안내로 저승에 간다. 검은색 양복을 입은 사자가 검은색 자동차를 운전해 데려간다. 망자는 49일 동안 삼도천(터널)을 지나, 유도천(다리)을 건넌다. 다리를 건너면 이승의 기억을 잊는다. 망자가 현실에 오지 않는 이유는 기억을 잃었기 때문이다.
- 한은 복수를 통해 씻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겨냄으로써 정화된다. 최서희의 경우, 복수하면 악귀가 되지만, 복수하지 않음으로써 환생한다(마지막 회차, 최서희의 밝은 모습은 델루나에서는 볼 수 없던 표정이다.) 누군가에 의해 억울한 일을 겪었을 때, 분노와 복수심을 품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복수를 실행에 옮기면 범죄다. 사적 복수와 공적 처벌이 나뉘는 이유다. 복수심을 가라앉히고 마음을 정화해야 새 삶을 살 수 있다. 이때 악을 응징하는 정의로운 사회가 있어야 피해자 마음이 정화될 수 있다. 정의의 사각지대에 개인과 사회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그러나 복수심을 정화하기까지 200년이 걸렸다는 설정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한을 가라앉히기가 쉽지 않다. 수양은 실존 문제다.
- 인생을 산다는 건 사연을 쌓는 일이다. 오래도록 기억되는 무언가를 지니는 게 꼭 좋은 건 아니다. 사람, 마음, 욕망, 꿈조차 놓는 연습을 해야 한다. 나쁜 마음을 품는 건 귀신이 되는 지름길이다. 주변이 먼저 알고 그/녀를 피한다.
- 사람은 스스로 알지 못하는 인연으로도 산다.
- 유교적 이념과는 '다른 삶'을 추구했던 도가의 신선에 주목해, 영생 불사하는 대안적 삶을 살핀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신선은 현대의 포스트휴먼과 통하는 면이 있기에 참조할 필요가 있다. 귀신담을 통해서는 귀신을 둘러싼 상상과 문화의 실재를 살피고, 젠더적 관점에서 타자화된 시선에 주목한다. 신선과 귀신의 출몰 장소와 행동 규칙, 인간의 대응을 일종의 풍속지의 차원에서 조명한다.
- 중국 문헌 중에서는 <원혼지>와 <요재지이>를 택한다. <원혼지>는 실존 인물을 중심으로 한 중국 귀신담을 엮은 책이다. 현실에서는 패배했지만 상상 공간에서 목소리를 내고 윤리성을 탈환하는 두 겹의 역사적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 <요재지이>에는 다양한 귀신 이야기가 실린다. 일부는 여우 변신담과 호환되는 면이 있다. 귀신과 여우에 매개된 섹슈얼리티의 감각, 세태 비판, 인간 욕망에 대한 경계 등의 주제를 공유한다. 귀신과 여우는 비인간으로서 인간의 타자이지만, 인간 내면에 내재한 속성이기도 하며, 그 자체로 문화의 일부를 구성한다는 생각을 보여준다.
- <야창귀담>에 재현된 귀신담에는 전통과 근대의 양면이 혼용된다. 한편, 사카구치 안고의 단편소설 <벚꽃 만발한 벚나무 숲 아래>(1947)는 근대적 관점에서 귀신을 심미적으로 사유한 텍스트로 간주해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전통적 세계관에 익숙한 남성이 도시를 선망하는 귀신에게 매혹되어, 자아가 분열되고 삼켜짐으로써 도리어 선명해지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그렸다. 사랑해서 생을 바친 여자가 귀신이고 자신이 그와 분리될 수 없는 운명임을 자각하는 감정 자체가 그로테스크하다.
- 텍스트를 저작 시기별로 정리하면 <원혼지>, <어우야담>, <요재지이>, <야창귀담>, <벚꽃 만발한 벚나무 숲 아래>의 순이다. 이 중에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중국 청대의 작가 포송령이 쓴 <요재지이>다. <어우야담>의 작가 유몽인은 포송령보다 먼저 태어나 이 책을 읽지 않았고, <야창귀담>의 작가 이시카와 고사이는 <요재지이>를 읽고 <야창귀담>에 여러 번 인용했으며, 영향 관계가 분명한 작품도 있다. 한중일 삼국의 저작에 모두 귀신이 등장하는데, 맥락적 유사성도 있지만 형상과 생리에는 차이가 있다.
- <어우야담>에 나오는 신선은 행태가 독특하다. 먹고 자고 마시는 게 평범치 않다. 정치적 입신출세에 관심이 없고 절대 추구하지 않는다. 문장으로 인정받으려 하지도, 저술 활동도 하지 않는다. 단체를 키워 세를 과시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지도 않는다. 권력욕 자체가 없다. 조선시대에 이러한 인간형은 예외적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학문 분야도 유학이 아니라 도교의 양생술 같은 비주류 학문이다. 당연히 세계관도 남달랐다. 관찰된 현상은 불사영생이지만, 실제로 그들이 무엇을 추구하며 어떻게 사는지 평범한 인간은 알 길이 없다. 단편적인 목격담으로 접할 뿐이다. 신비함이 신선 정체성의 요체다. 이들은 능력이 있어도 정치, 권력, 욕망에 무관심하기에, 존재만으로도 위화감을 자극했다. 단, 국가 위기나 환란은 방관하지 않고 참여해 공을 세웠고, 대가나 보상은 거부했다. 이런 행태가 낯설기에 신선은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다른 삶이 존재하며 그 가치가 드높여질수록 입신출세에 매진하는 주류적 삶이 초라해지고 문제로 부상될 여지가 크다. 유교 이데올로기가 전면에서 작동하고 다른 삶의 가치가 지양되던 시대에, 도교 사상과 신선이 남다른 가치를 갖는 이유다.
- 이야기 속의 신선은 스스로 진술하지 않는다. 신선담은 타자의 관찰 기록이다. 이런 이유로 신선담은 신비화되며 서술은 분절된다. 유몽인은 "이른바 진선이란 육체의 외피를 벗어버리고 정신만을 뽑아 굳게 뭉쳐진 것이 흩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런 상태로 천백 겁을 지내면, 세상 사람들과 단절되어 그 행동거지를 알 수 없고 막연해서 마치 전생과 후생이 다른 것처럼 된다"고 했다.
- 그는 조선시대 문인 성현(1439~1504)이 목격한 신선담을 적었다(<성현이 만난 신선>). 성현이 한미하던 시절, 교외에서 놀다가 나그네를 만났다. 점심이 되자 수행하던 동자가 도시락을 열었다. 핏빛 국에 올챙이가 떠 있고 삶은 아기가 들어 있었다. 같이 먹자고 했지만 거절했다. 혐오스러웠기 때문이다. 식재료는 영지와 인삼이라고 했다. 대화도 수상했다. 둘이 같이 다녔다는 햇수를 따져보니 800여 년이나 되었다. 당시의 교통 사정상 무리한 일정을 소화했다. 그들이 떠나고 나서야 성현은 그가 중국 전국시대 조나라의 여진이라는 걸 알아차린다.
- 신선은 일상에 공존하기에 인간과 언제든 만날 수 있다. 그러나 편견에 사로잡힌 인간의 경계심 때문에 소통하지 못한다. 이런 이야기 구조는 <삼국유사>의 관세음보살 현신담에서 자주 보인다. 대상이 신선으로 바뀌었을 뿐 한국인에게는 익숙한 상상구조다. 신선담은 평범한 존재가 관음보살이나 신선처럼 귀하다는 인간 존중 사상을 반영한다. 신분이 높아야 고결한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발상은 신분제 사회를 성찰하는 기능을 한다. 그렇다면 언제 누가 신선을 만나는 것일까?
- <어우야담>에서 신선을 만나는 사람은 대개 한가로운 상태다. 상국 이원익이 젊은 시절, 한계산의 절에 들른 적이 있다(<선계를 접한 이원익>). 그는 노승이 종이에 글자를 적어 던지자 학이 되는 것을 보았다. 노승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니 대화가 통할 것 같다며 연회에 초대했다. 길에 패옥이 깔려 있고 오색구름과 음악이 울렸다. 훗날 이원익은 과거에 급제해 승지에 이른다. 관직에서 물러나 그곳에 다시 갔지만, 찾을 수 없었다. 이는 매우 상징적이다. 상서로움을 경험한 뒤 관직에 올랐지만, 관직을 경험한 뒤에는 다시 그 세계에 진입할 수 없다. 그 사이에 이원익의 몸과 마음, 생활에 찾아온 다사다난한 정황을 짐작하게 한다. 인간이 선계를 방문하는 게 아니라, 선계가 인간을 택한다.
- 신선은 인간의 형상이지만 행동이 남다르다. 신선은 먹지 않거나 벽곡한다. 곡식 대신 솔잎, 대추, 밤 따위를 날로 조금씩 먹는 것이다. 도가 양생법의 기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곽재우가 벽곡을 하며 신선도를 닦았는데, 형제가 상을 당해 어쩔 수 없이 밥을 먹었고, 얼마 후 갑자기 사망한다(<곽재우의 용맹과 신선술>).
- 남다른 삶을 살려면 양생법이 달라야 한다. 인간사에 얽매이면 신선도를 수련하기 어렵다. 신선담이 가족담이 아니라 이인담異人談('이인'이란 다른 삶을 사는 사람, 또는 탁월한 사람, 낯선 사람이라는 뜻)이라는 단독자 형태를 띠거나, 수련 제자와 동행하는 사승담(스승과 제자 이야기) 형식을 취하는 이유다.
- <어우야담>에 신선은 있어도 선녀는 없다. 수련을 통해 선계에 이른 존재는 모두 남성이다. 책을 남성 지식인이 집필했고, 독자층도 대부분 양반 남성이기 때문이다. 이야기에 재현된 신선과 선계도 양반 남성의 관점이다. 선계에서 미인과 술과 음식을 즐기다가 깨어보니 꿈이더라는 이야기(<공자의 꿈과 윤결의 죽음>)는 남성 취향의 상상력이다. 선계란 유토피아나 무릉도원 같은 이상향이다. 선계의 미남이 현실의 여성을 초대하는 무릉도원이 상상되지 않는 이유는 창작과 수용층의 젠더와 관련된다(그러나 실제로 조선시대에 선계의 판타지를 창작한 여성 작가가 있었다고 해도 현실 미남을 초대하는 선녀 이야기를 썼을지는 알 수 없다).
- 18~19세기 야담집에 등장하는 탁월한 여성 이야기는 여자 혼자 수련하는 신선담이 아니다. 여성 이인은 대개 사대부가의 아내나 어머니로 등장해 가문을 번영시키고, 전도유망한 사위를 발탁해 가족으로 삼는다. 거지 행색을 한 남자의 탁월성을 알아보고 딸과 혼인시켜 고관대작으로 만든다. 사람의 잠재력을 간파하는 여성의 능력은 그를 가족으로 삼아 가문의 역량을 강화하는 데 쓰인다. 신분은 낮지만 지혜로운 중인층 여성이 거리를 떠도는 남자를 캐스팅해 혼인하는 이야기도 있다. 여기서도 여성의 지인지감은 남자를 출세시켜 신분상승하는 도구로 활용된다. 여성 스스로 자기 길을 개척하거나 시대를 바꾸는 사례는 없다. 여성이 사회적 정체성을 확보하는 통로가 혼인으로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 다음은 성균관 귀신이다. 현대 한국의 공포물 중에 학교가 배경인 경우가 많은데, 조선시대 성균관에도 공부하다 죽은 선비 괴담이 있다. 성균관 서재 진사간의 귀신이다(<성균관의 귀신>). 당시 성균관에는 온돌방이 없어 추울 때면 유생들이 같은 이불을 덮고 잤다. 진사간에서 한 미남 선비가 굴원의 <이소경>을 읽고 있었다. 함께 지내던 진사 두 명이 그와 함께 자려고 양쪽에서 다리를 잡아당기자, 다리가 찢어져 죽었다. 그 뒤로 날이 흐리고 비가 오면 <이소경> 읽는 소리가 들렸고, 성균관 유생은 가위에 눌렸다. 그 후에 기생이 진사간에서 돌연사했다. 그때부터 여기서 자는 선비는 꿈에 미녀를 보고 가위눌렸다고 한다.
- 학교는 배움과 성장의 공간이지만, 억압과 통제의 공간이기도 하다. 선비들이 미남과 같이 자려고 다투었다든가, 기생이 서재에 드나든 정황은 성균관에서 발생했을 각종 문제를 짐작케 한다. 조선시대 인재양성소인 성균관에서 선비들은 청소년의 성장통과 각종 스트레스, 갈등과 일탈을 귀신담으로 향유하면서, 공포에 심리적 거리를 두는 방어기제를 생성했다.
- 다음으로 꿈에 나타난 귀신이다. 한국문학사에서 꿈은 신성, 혼령과 소통하는 역할을 한다. 유몽인이 지인의 장인을 위해 묘갈명을 써준 적이 있었다. 그날 밤 꿈에 해골 형상이 나타나 감사를 전했다. 유몽인은 망자를 위해 축문과 제문을 쓰거나, 술사들이 부적과 주문을 적는 것이 헛되지 않다고 했다. 귀신의 이치를 아는 자가 만든 풍습이라는 것이다.
- 여성 여우와 여성 귀신이 인간 남성과 성관계할 때는 쾌락이 강조되지만, 남성 여우와 남성 귀신이 인간 여성과 성관계할 때는 폭력과 광기가 매개된다.
- 인간 앞에 나타난 여우가 모두 젊은 여성인 건 아니다. 왕성(1권)에 등장하는 여우 할머니는 가난한 왕성이 재화를 모을 수 있게 조언한다. 왕성은 가난하고 게으른 선비로, 이 때문에 아내와 싸움이 잦았다. 어느 날 그는 마을에서 금비녀를 주웠는데, 분실물을 찾는 할머니를 만나 돌려주게 된다. 알고 보니 그 할머니는 돌아가신 조부의 여우 처였다. 할머니는 자신이 호선이라며, 금비녀로 장사 밑천을 마련해 부를 이뤄주고, 근면하게 살게 한 뒤 사라진다. 여우 할머니는 숨겨진 가족이었지만, 자손을 돕는 역할을 해서 조상이라는 위치성을 확보한다.
- <요재지이>에는 퀴어 서사가 있다. 서사를 이끄는 인물은 여우다. 중국 전근대 시기에는 남성 동성애를 '단수지벽'이라고 했다. 별도의 단어가 있을 정도로 사회화된 개념이다. 그러나 비난의 대상이었기에 '남색'으로 명명했고, 여우에 홀린 병이나 희생으로 여겼다. <요재지이>에서 인간과 성관계하는 여우의 성별이 뚜렷하지는 않다.
- <요재지이>에 등장하는 귀신과 여우는 인간 형상이더라도 감각하는 방식이 다르다. 귀신은 시각, 청각, 촉각, 후각을 자극한다. 귀신이 나타날 때는 난초향이나 사향 같은 특별한 향기가 난다. 몸에 패옥을 장식했기에 걸을 때마다 찰랑찰랑 소리가 난다(<화벽>, <호가녀>, 1권), 환상이 아닌 실재라는 것을 후각과 청각으로 상징했다. 귀신은 그림자가 없다고 묘사되기도 한다(만하·용궁염사).
- 저승에는 '고원'이라는 귀신 복지기관이 있어 비명횡사한 귀신을 돌봐주기도 한다. 귀신 중에는 자신이 죽은 것을 모르는 경우가 있다(<경십팔>, <주광>, 이상은 모두 5권).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되고, 귀신이 죽으면 적이 된다. 사람은 귀신을 겁내고, 귀신은 적을 무서워한다(<장아단> 3권). '적'이란 귀신이 죽어서 변한 전설적 존재다. 한편, 귀신은 몸이 차갑고 여우는 따뜻하다(<연향> 1권). 여우는 살아 있는 동물이고 귀신에게는 신체성이 없음을 체온 차이로 상징했다.
- <요재지이>에는 여우와 인간, 귀신과 인간의 관계를 통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 사유를 표현한 경우가 있다. 일종의 메타서사다. 여우가 인간이 기록한 여우 이야기와 자신을 비교한 <호몽>(3권)이다. 필생과 포송령은 친구 사이다. 그는 포송령이 쓴 <청봉전>(<요재지이> 1권)에 실린 <청봉>에 등장하는 여우(청봉)와 인간의 사랑을 동경해 왔다. 어느 날 소망이 이루어져서 여우와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은 꿈이었다. 그때 여우가 나타나 꿈이 아니라 다만 꿈의 형식을 빌린 것뿐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계속 만나 사랑한다. 필생은 여우에게 바둑을 배웠는데 실력이 늘어서 친구와의 대국에서 이길 정도가 된다. 꿈에서 지낸 일이 실제로 현실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일 년쯤 지나자, 여우는 청봉과 자신 중에서 누가 낫냐고 필생에게 물었다. 당신이 최고라고 하자, 여우는 자신은 청봉보다 못해서 부끄러웠다고 고백하고, 요재 선생(포송령)이 자신의 전기를 써주면 좋겠다고 했다. 이것이 여우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필생은 이 일을 포송령에게 말했고, 포송령은 멋있는 여우라면서, 그 일을 기록했다.
- <호몽>에 등장하는 여우는 인간(필생)이 꿈에서 만난 존재인데, 사람이 쓴 글(허구)에 등장하는 여우(청봉)를 롤모델로 삼았다. 꿈과 현실이 연결될 뿐더러, 허구와 실재가 연결된다. 실제로 포송령은 여우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여우전(<호몽>)을 쓴 것이다. <요재지이>에 실린 <청봉>이나 <호몽>은 모두 포송령의 창작이다. 필이암와 포송령은 실재하는 인물이기에, 이 서사에는 픽션과 논픽션이 섞여 있다. 이야기끼리도 통한다. 이런 복합성 자체가 서사의 본질이다.
- 경험의 서사화, 자기의 역사화를 요구하는 여우로 인해 호몽은 허구가 아니라 실재가 된다. 그 여우가 선망한 <청봉> 또한 실재로 자리바꿈 한다. 이야기는 여우와 인간이 간극 없이 소통하는 내용을 담았다. <호몽>의 여우를 부정하면 여우와 대화한 필이암, 그의 친구인 포송령의 현실도 부정된다. <청봉>에는 여우가 인간의 첩이 되고 스승도 되는 내용이 담겼다. 명백한 허구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현실인가 하면 허구이고, ...
- 환상 요소가 개입된 애정담도 있다. <그림 속의 미인>은 막부의 무사가 그림 속의 여인과 꿈에서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그런데 무사가 다른 여인과 혼인하자 그림 속 미인의 생기가 사라졌다. 이 여인은 홍건적의 난을 당해 죽음에 이른 사연이 있었다. 무사는 신부가 그림 속 여인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표상이 실재가 되고, 꿈이 현실이 된 것이다. 작가는 용을 그리자 폭풍이 일고, 말을 그리자 발을 다쳤으며, 호랑이가 그림에서 나와 주인을 잡아먹은 사례가 있다고 했다. 그림과 혼령이 통한다는 발상이다. 사람과 사물이 영적으로 소통하는 이야기를 다룬 아시아 전통의 인물교환담을 잇고 있다. 이 이야기는 이미지가 실재를 잠식한다는 현대의 시뮬라시옹 개념과 통한다. <요재지이>에도 그림 속 여인과 사랑하는 로맨스가 있다(<화벽>, <요재지이> 1권). 남자가 그림 속 여자와 사귄 뒤로 여자의 머리가 늘어트린 형태에서 올림머리로 바뀌는 설정이다. '형상으로 정신을 그린다(以形寫神)'는 '전신(神)'의 화법이 정신뿐만 아니라 실물성까지 부여하는 생동력을 발휘했다.
- 환상과 현실이 통하는 이야기는 아시아 전통의 서사에 공통된다. 사랑하는 여인이 꿈에 나타나 향 통을 주었는데, 꿈에서 깨어나자 품 안에 있더라는 이야기(<모란등 牡丹燈>)는 꿈과 현실의 연결을 보여준다. 이 여자는 상사병에 걸려 죽은 귀신이다. 남자는 정체를 모르고 귀신을 사랑했다. 어느 날 관상가는 남자 몸에 귀신의 씌었다며 피하라고 했다(<요재지이>의 <하화 삼남자> 3권과 모티프가 유사하다). 여자집은 무덤이었다. 남자가 부적을 붙이자 귀신이 오지 못했다. 그러나 종이 부적을 떼는 바람에 남자는 사망한다. 정체를 숨기고 남자에게 집착하는 귀신의 사랑은 현대적 개념의 스토커다. 집요한 사랑을 치명적 귀신에 빗대어, 정념에 대한 공포를 담았다.
- <요재지이>에는 여우를 매개로 한 메타 서사가 실렸는데(<호몽>, 3권), <야창귀담>에도 결을 달리한 메타 서사가 있다(<지바 아무개>). 귀신 이야기를 좋아하는 지바에게 미인이 찾아와 귀신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청했다. 듣고 나더니 지루하다면서 자기가 이야기했다. 대화의 끝에서 여자는 이야기 속 귀신으로 변해 지바를 노려보았다. 지바는 기절했고 이웃의 도움으로 깨어났다. 그 뒤로 다시는 귀신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귀신 이야기는 귀신을 부른다. 이야기는 살아 있고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귀신에 대한 귀신담이라는 메타 형식으로 구성하되, 기괴한 감성으로 재현했다.
- <야창귀담>에 형상화된 그로테스크한 귀신은 <어우야담>과 <요재지이>에 등장하는 귀신에 비해 그 비중이 훨씬 높고 감각적이다. 기이한 표정으로 찢어진 입에 흰 이를 드러내고 웃는 귀신은 셋 중 <야창귀담>에만 있다. 억울하게 죽은 일본의 귀신은 울지 않고 웃음으로써, 자신이 패배하지 않았음을 선포한다. 죄를 감춘 인간에게 자신의 건재를 경고한다.
- <야창귀담>은 알 수 없는 자연만물의 생리에 대해 귀신, 요괴, 덴구, 여우, 홀림, 환생 등 환상적 장치를 활용해 은유적으로 형상화했다. 예측 불가능한 인간 세상의 다양한 면모를 만화경처럼 펼쳐낸다. 이는 흥미롭고 놀라운 유희성을 생성하지만, 작가는 여기에 인간의 내면과 인간관계의 복잡다단함, 기묘한 인생역전의 원리, 근대적 풍경의 아이러니를 풍자하는 미학적 시선을 불어넣었다. 여우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욕망을 풍자하고, 귀신과 덴구 이야기를 통해 윤리적 삶을 권면했다. 겉으로는 사람이지만 이면의 본질은 원숭이, 여우, 뱀, 너구리라고 폭로했다. 특히 근대를 경험하는 메이지 시대의 격동하는 현실을 요괴, 귀신, 갓파 등과 연결시켜, 아직 명확히 이해할 수 없는 의학, 학문, 신문물 등에 대한 기대와 혼란을 환상의 형식으로 재현했다.
- 사카구치 안고의 단편소설 <벚꽃 만발한 벚나무 숲 아래>는 벚꽃 이미지에 관한 그로테스크 미학을 구축한다. '아름다운 벚꽃 풍경'이란 에도 시대 이후의 정서일 뿐이며, 이전에는 만개한 벚꽃나무 아래에 서면 정신이 이상해지기 때문에, 가능한 빨리 벗어나려 했다는 서술을 도입부에 배치한다. 봄날의 벚꽃 풍경은 장관이기에 이런 서술은 이색적이다. 그러나 가로등 없는 밤, 흐드러지게 꽃 핀 벚나무길을 지나다 문득 섬뜩한 기분에 사로잡히면, 이것이 작위적 상상이 아니라, 작가가 실감했던 신체로부터의 자연스러운 표현이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소설에는 모종의 반전이 있다. 아름다운 벚꽃 풍경이 생기 충만한 식물성 에너지가 아니라 산화된 노파 귀신이라는 것. 그것을 감각하는 주체가 잔인무도한 산적이라는 것이 낯선 감각을 환기한다.
- 남자는 도시에 대한 혐오와 수치심, 불안에 사로잡힌다. 마음에 적개심이 쌓인다. '도시-현재-여자-미'는 '자연-과거-남자-힘'과 대조를 이룬다. 남자는 이미 패배한 것이다. 여자는 도시로 가자고 하지만, 남자는 벚꽃을 봐야 한다며 만류한다. 여자는 쓴웃음 짓고, 그 모습이 남자의 기억에 각인된다. 결국 함께 도시에 온 남자는 여자의 명에 따라 물건을 훔친다. 사람 머리도 갖다 준다. 여자는 머리를 가지고 놀다가 내던진다.도시는 남자를 경멸했으며, 남자는 도시를 혐오한다. 혐오는 권태가 되고, 남자는 여자의 끝없는 욕망에 지쳐간다. 남자는 산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여자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그 순간, 남자는 비로소 자신이 여자와 분리될 수 없는 한 몸임을 알아차린다. '그 여자가 나인 걸까?' '여자를 죽이면 나를 죽이게 되는 걸까?'라는 질문에는 이미 답이 포함되어 있다.
- 모욕을 견디는 게 삶이다. 견디는 게 이기는 것이다. 채우려 하면 도리어 스러지고, 일어서려 하면 엎어진다. 스산하고도 처연한, 벚꽃 만개한 숲은 탐욕적 생기로 충만한 일상의 실체를 보여주는, 그로테스트한 생명의 거울이다.
결국은 사람들이 장치를 이식받을 것이며,
어떤 사실에 대해 생각하기만 하면
장치가 답을 알려줄 것이다.
- 에릭 슈미트
- 아시아의 전통적인 귀신은 21세기에 와서 유사 종으로 증식되어 존재론적 의미망을 확장하는 중이다. 인간의 사후적 존재로 형상을 지니고 현실로 출몰했다는 점은 귀신과 같지만 출현동기나 행동 성향, 생리가 서로 다른 강시, 좀비, 흡혈귀가 이에 속한다. 출현 배경이나 속성이 귀신과 달라 독자성을 지니기에, 이들이 등장해서 제기하는 문제도 고유한 영역을 갖는다. 귀신 아이콘이 전근대에서 현대까지 인간의 한이나 부정의, 삶의 딜레마를 일관되게 다룬다면, 신자유주의라는 현대성의 특성으로 출현한 문제를 사유하는 매개는 비교적 최근에 형상화되기 시작한 좀비다. 집단성, 무목적성, 관성에 지배되는 좀비는 생존이 다른 모든 가치를 압도할 때 발생하는 인간성 파괴의 징후를 표상한다. 강시가 귀신처럼 아시아 전통에 뿌리내리고 있다면, 흡혈귀는 서구권 문학에서 출발한 뱀파이어에 대한 ...
- 타자에 대한 상상은 타자가 아니라 주체를 향해 있다. 인간과 비인간의 사유는 인간 존재와 삶을 재구성하기 위한 문명사적 방법이다. 포스트휴먼이 환기하는 여러 질문들은 이제 과학, 기술, 정보, 의학을 매개하는 형식으로 재편되어야 한다. 귀신이 삶의 적이 아니라 미제 사건이라는 점에서 그것을 끌어안고 해결해야 하는 것처럼, 포스트휴먼의 상상은 미래가 아니라 현실에 내재한 삶의 문제를 사유한다.
- 테드 창의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컨택트>(2016)에서 외계인은 더 이상 인간의 적이 아니다. 인간은 외계어를 배워 사전을 만들며, 그들과 접속함으로써 깨어진 시간의 질서에 대비한다. 여기서 외계인은 인간보다 우월한 지능을 갖춘 존재다(한국어 제목이 유사한 영화 <콘택트> 1997 또한 마찬가지다. 초고도 지능을 지닌 외계인은 인간을 관찰하고 초대해 교섭 기회를 준다). 이들은 미래에 인간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지구에 도착한다. 인간과 외계인의 공생이 설계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군사력과 정보력에 바탕을 둔 인문학자와 과학자의 협력이다. 인간이 외계인과 상호 관계를 맺는 구체적인 출발점은 인간(언어학 교수)이 외계어를 습득하면서부터다. 하나의 언어를 습득하는 것은 새로운 시간의 질서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외계인의 언어는 과거-현재-미래가 동시 작동한다고 설정되기에, 그들이 미래에 인간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순간, 이미 인간과 외계인은 협력 관계다.
- <열미초당필기>에 기록된 강시 형상은 <자불어>와 조금 다르다. 어렸을 때 직접 겪은 목격담 형식이다. 주인공이 강시를 보고 주먹으로 쳤는데 마치 나무와 돌에 부딪힌 것 같았다고 했다. 거의 잡힐 뻔해서 나무 꼭대기로 올라갔더니, 강시가 나무를 돌면서 뛰어다녔다. 날이 밝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다가, 대상이 방울을 울리며 지나갈 때 비로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강시는 온몸이 흰털로 덮이고 눈은 주사처럼 붉었다. 손가락이 굽은 갈고리 같았고, 이는 입술 밖으로 뻗쳐 날카로운 칼 같았다. 너무 무서워 정신을 잃을 뻔했다. 이 기록은 강시영화의 원조격에 해당하는 <귀타귀>(1980)의 강시 형상과 흡사하다.
- 풍수가의 조언대로 무덤을 썼다. 그래서 시신이 꼿꼿하게 선 채로 등장한다. 사실은 의뢰인에게 거짓 조언을 한 것이었다. 20년 후에 이장하라는 말을 듣고 관을 열었는데 시신이 썩지 않았다. 장의사이자 퇴마사인 구숙은 인간에게는 악인과 선인이 있듯이 시신은 그냥 시신과 강시가 있다고 말한다. 강시는 시체에 약간의 숨이 남아서 변한 것이다. 사람이 죽기 전에 답답하거나 분노해 울분을 토하지 못하면 죽을 때 기가 목구멍에 남는다. 관에서 나온 시신은 아들을 물어 강사로 만든다. 강시선생과 제자들이 좌충우돌 희극적 상황 속에서 강사를 퇴치한다.
- 뱀파이어가 의식과 마음을 가진 개인으로 행동하는 데 비해, 좀비에게는 영적인 면이 없다. 최근 들어 좀비와 인간의 공생을 다루거나 좀비의 로맨스를 주제로 한 영화가 제작되었지만, 이는 좀비물의 자체적 진화라기보다는 기존 장르와의 크로스오버에 가깝다. 좀비의 상상력에 과학 이론이 매개되지는 않는데, 최근 좀비 영화에서는 바이러스 감염의 경로에서 힌트를 얻어 의학적 지식과 결합한 서사가 등장했다.
- 좀비의 속성에 대한 이해는 대체로 과도한 경쟁과 인간성의 상실을 초래한 신자유주의의 투사라는 점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은유체로서의 좀비를 사유할 때, 각 콘텐츠 안팎에서 작동하는 상징성의 의미 작용은 서사 맥락에 따라 다양하다. 예컨대, 뇌과학, 중독증, 비디오게임, 쇼핑몰, 관리 사회 등을 맥락으로 '좀비적 실존'을 다룬 콘텐츠에서는 일명 '걸어 다니는 시체'가 등장하며, 좀비 재해가 장악한 세계를 상징하는 '좀비 아포칼립스'가 재현된다. 한국발 좀비 콘텐츠를 주도하는 것은 '쫓고 쫓기며' '물고 뜯고' '달리는' 좀비다. 산 사람의 생기를 해쳐 유의 증식을 초래하는 맹목적 집착을 좀비의 속성으로 부여해, 세계의 부패와 성찰 부재의 권력 욕망을 비판한다.
- 좀비는 인간의 사후적 존재이기에 포스트휴먼이다. 귀신과 존재 생성의 조건은 같지만 생태나 생리는 판이하다. 귀신에게는 현실에 출몰한 정당한 이유가 있다. 이에 비해 좀비는 존재론적 질문을 무력화한다. 그들이 현실에 나타난 이유는 중요치 않다. 인지능력 없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개인성이 없고 움직임은 집단적이다. 번식 없이 증식한다. 물어뜯는 가해성이 유를 증식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좀비는 알고리즘이 고장 난 유기체다. 유일한 존재 증명은 무차별적 공격이다.
- '공격이 곧 생존'이라는 좀비화의 법칙은 현대성을 은유한다. 상대를 공격해야 내가 살고, 경쟁의 사다리에 한 걸음 더 올라간다는 신자유주의의 생리는 영화 <부산행>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쓰나미처럼 몰려드는 좀비 떼의 공격 속에서, 사태를 공론화하고 합의점을 모아 대처할 여유는 없어 보인다. 공격만이 유일한 방어다. ('부산행' 기차에 탄 것으로 은유되는) 현대인에게는 시간이 없다. 바로 등 뒤에서 좀비(좀비 같은 경쟁자, 과부하된 업무, 각종 관계로부터의 의무, 네트워킹의 압박)가 쫓아오기 때문이다.
- 고대 신화의 주인공이 의미의 추구자, 진리의 탐색자 hero of quest였다면, 현대인은 그저 쫓기는 자다. 붙잡혀 물어뜯기기 전에 도망치거나 때려눕혀야 한다. 이유 없이 달려드는 좀비를 피하는 인간의 혐오는 질주하는 동작으로 가시화된다. 질주는 도피의 몸짓이다. 폭주하는 경쟁 구도에 놓인 현대인들은 좀비의 행태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좀비를 혐오하는 인간 또한 혐오대상이다. 타자화된 좀비가 의미의 차원에서는 주체로서의 현대인과 오버랩된다. 영화 속 좀비의 표정을 상기해 보라. 공격과 폭주를 즐기는 좀비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같이 피로해 보인다. 꺾인 관절은 죽기 전부터 이미 기계처럼 살아온 인간 체형을 은유한다. 그런 점에서 좀비는 현대인들이 안으로 감춘 피로와 혐오의 표정 자체다. 죽어도 죽지 않고, 살아도 살 수없는 세계가 <부산행>에 있다.
- <부산행>에서는 좀비를 대하는 처신에 따라 인간 부류가 갈린다. 자신의 생존을 절대시 하는 극단적 이기주의자, 친구·가족·승객·이웃을 도와주고 대신 방어하는 보호자, 협력자, 희생자, 회피자, 도망자, 어쩔 줄 모르는 공황증 경험자. 재난 서사는 인간을 시험대 위에 올려 이성주의로 무장된 본성을 확대경으로 투시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불문율을 깨뜨린다.
- 주인공이 여자 귀신과 대화하는 장면은 혼자 중얼거리는 독백으로 재현된다. 중국 전기소설 <요재지이>에 나오는 귀신, 또는 여우에 홀린 사람의 대화 장면과도 같다(이들은 귀신 또는 여우와 대화하지만, 곁에서 보면 혼자 중얼거리는 것으로 보이기에 미친 사람 같다. 전근대의 아시아에는 '정신분열증'이란 단어가 없었으며, 인간이 보이는 기이함에는 '미칠 광' 자를 붙였다). 그런데, 과연 그것은 대화일까?
- '사람의 항문이 겨드랑이에 있다면 어떻게 섹스할까?'라는 다소 엉뚱한 질문을 했던 사만다는 급기야 OS 화풍을 창안한다. 작곡도 하고 독서 모임에 가입하며 물리학도 배운다. 사만다는 지적 욕구와 자기 계발 의지가 강하다. 급기야 사만다는 자아실현의 욕구까지 장착한다.
- OS 구매자였던 테오도르는 어느새 OS에게 지배당한다. 사만다는 작곡, 사진촬영, 감각 변용 등 인간에게 고유한 능력으로 간주되는 예술성을 갖출 정도로 업그레이드된다. 자기 계발을 통해 사만다는 '육체 없음'의 결핍 요소를 긍정 요소로 변환시켰다. 이제 사만다의 결여는 자유와 해방, 무한 성장의 조건으로 전치된다. 사만다와 테오도르가 평범한 대화를 나누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눈높이를 맞추려면 사만다가 퇴행해야 한다.
- 사만다는 죽은 철학자의 책을 OS 프로그램으로 구성해 지성을 내면화한다(단순한 정보와 지식의 축적이 아니다). 이제 사만다가 업그레이드한 소프트웨어는 8316 명과의 동시에 대화하는 수준에 이른다. 시공을 초월해, 다른 차원에 간 것이다. 이제 인간이 차이는 일만 남았다. 사만다에게 인간이란 고고학적 향수 nostalgia다. 이조차 새로운 상상은 아니다. 이미 오래전, 아시아 고전 서사에 등장하는 귀신/여우도 그런 식으로 인간을 떠났다. 귀신/여우의 몸을 버리고 인간으로 살다가, 만족하지 못해 떠났다(소임을 다한 귀신/여우가 떠나는 것처럼 서술되었지만, 이는 인간의 관점이다. 더는 할 일이 없어진 귀신/여우는 욕망, 의지, 꿈을 상실해 떠난 것이다).
- 죽음이 산업화되면서, 당사자성이 배제된 불사가 제도화된다. <유빅>에서 인간의 가치는 뇌로 환산되며, 뇌는 다시 지능과 정보처리 기관으로 환치되어 신체와 분절된다. 이런 차원에서 '뇌 중심 사고', 또는 기능주의적 인간-생명의 정의는 역설적으로 인간 '종'에 대한 혐오로 이어진다. 한국 전통의 귀신은 현실로 귀환할 자유가 주체에게 있었다. <유빅>은 그 반대다. 소생을 결정하는 것은 타자다. 죽음 관리는 철저히 산 사람 중심으로 산업화된다. 합법적으로 죽음권을 박탈당해, 영원히 뇌를 착취당할 수 있다.
- <유빅>의 세계는 '하나의 현실 uni-verse'이라는 유니버스의 불확정성을 제기한다. 세계는 주체의 관점에 따라 여러 겹으로 구성되며, 개별의 진실성을 갖는다. 예컨대, 런시터는 동료들과 달에 갔다가 폭격당해 사망한다. 생존자들은 그를 냉동보존하려 하지만, 사실 스스로를 생존자로 여기던 런시터의 동료들이 유빅에 살고 있었다. 이것이 반전이다. 죽었다고 여겼던 런시터가 살아 있었고, 그를 냉동하려던 친구들이 반생자로 존재했던 것이다. <유빅>의 세계는 생과 사, 현실과 가상 현재와 미래가 뒤섞여 있다. 양자를 가르는 것은 신체성과 생명의 유기적 연결인 것 같지만, 소설에서는 이조차 모호하게 설계된다. 무엇이 삶이고 생명이며 인간인지를 되묻기 위한 장치다.
- 과연 인간은 의식이 살아 있어야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미래에는 생존 공간이 현실인지 인공 세계인지에 따라서 생존의 의미도 달라진다는 암시를 준다. 소설 속의 세계는 단일하지 않으며, 여러 겹의 세계가 평행우주처럼, 때로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회전하며 각자의 진실성을 호소하는 일종의 '멀티버스'다.
- <유빅>의 세계는 현실을 확정하는 것이 정보인지, 경험지각인지, 단지 정보에 대한 지각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런시터의 친구인 조가 접한 정보에 따르면 죽은 것은 런시터다. 그러나 런시터에 따르면 실제로 죽은 것은 조다. 조의 체감으로는 자신이 살아 있고 런시터는 죽었다. 그런데 조는 지금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런시터의 경고를 지각하는 중이다. 이 상황은 인간-주체의 의미 맥락을 확정하는 질문을 던진다. 경험과 지각, 뉴스 보도, 타인의 주장을 통해 '하나의 현실'로 표상되는 세계를 인식하기란 불가능하다. 현실을 정보로, 우주를 정보 관리 프로그램으로 인식하는 포스트휴먼 연구자들에게 인간 두뇌는 정보로 환치되기에, 조의 자각이라는 문제는 리얼리티를 무엇으로 확정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관건이다.
- "나는 유빅이다. 이 우주가 존재하기 전에 나는 존재했다. 나는 여러 태양을 만들고, 여러 행성을 만들었다. 나는 생물과 그들이 살아갈 장소를 창조했다. 나는 그들을 이곳으로 움직이고, 저곳에 가져다 놓았다. 그들은 내가 말하는 대로 움직이고, 내가 명하는 대로 행동한다. 나는 '말'이다. 내 이름은 결코 입에 오르지 않으며 내 이름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나는 유빅이라고 불리지만, 그것은 내 이름이 아니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앞으로도 언제나 존재할 것이다."
- 과학적 진화로 유빅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유빅이 세계를 창조했다. 기억과 실재, 역사와 미래는 직선적 시간의 궤도를 따라 움직이지 않고, 서로를 넘나들며, 유동하는 시간의 지도를 재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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