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이사카 고타로] 피시 스토리

일루젼 2023. 7. 6. 01:11
728x90
반응형

 


저자 : 이사카 고타로 / 김소영
출판 : 웅진지식하우스
출간 : 2018.02.05 


 

이 책을 읽는 동안 요네즈 켄시의 'Lemon'을 줄곧 반복 재생해서 들었다. 작가가 넌지시 알려준 곡은 전혀 다른 곡이지만, 개인적으로는 퍽 잘 어울렸다고 생각한다. (소설과는 별개로 곡 자체도 무척 마음에 들어 추천하고 싶다)

 

얼마 전 읽은 <사신 치바>와 <사신의 7일>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해서 동저자가 쓴 책들을 조금씩 찾아 읽는 중이다. 내가 느낀 저자의 이미지는 음악을 좋아하고, 사람을 관찰하는 것을 즐기며, '왜?'라는 질문을 자주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저자의 글 속에서는 그런 인물상이 거의 반드시 한 명씩 등장한다. 이전 작품에서 그런 캐릭터가 '치바'였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구로사와'인 것 같다. 

 

<피시 스토리>는 저자의 초기작들을 모아서 펴낸 책이라고 하는데, 내가 느끼기에는 각 작품들이 모두 연결되어 있었다.

 


첫 작품 <동물의 엔진>에서는 자신이 보는 것과 실제상 사이의 괴리,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미래와의 괴리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들은 개인의 관점에서 괴리일 뿐 조금 떨어져서 보면 충분히 상상이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조금 다른 글씨체로 읊조려지는 독백이 '누구'의 것인지를 생각하며 읽으면 또 다른 울림이 있다. 


 

읽어 나가는 동안에는 <새크리파이스>가 가장 인상적이라고 생각했다. '공동체'를 위한다는 미명 하에 얼마나 많은 개인의 삶들이 스러져 갔는가. 92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 많은 것들을 보며 버텨온 이 안에는 어떤 것들이 쌓여져 있을까.  

 

자신이 믿는 신념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 는 것은 일본의 히어로 물들이 자주 그리는 내용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면서도 매번 울림을 느끼는 것을 보면 '자기희생'이란 그 나름의 강력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모양이다.

 

요이치로 반이라는 인물을 통해 가둔 자 또한 가둬진 자와 다르지 않은 희생양임을 보이고 싶었던 것일까. 저자의 의도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자신의 안위 만을 위해 커다란 바위를 밀어 제치는 군중과는 또 다른 서늘함을 보여주는 데는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만족스러웠다. 

 


 

그다음이 <피시 스토리>. 표제작이었지만 중반까지는 임팩트가 크지 않았다. 불현듯 강렬한 떨림이 느껴졌던 건 ["꼬치구이 알겠습니다. 주문접수!" 하고 점원이 씩씩하게 대답했다.]라는 한 문장이었다. 

 

20년 전의 어느 날, 친구를 통해 알게 된 한 밴드의 음악. 자신들이 학창 시절 암송하던 소설의 한 문구가 가사로 등장하는, 1분의 공백이 존재하는 기묘한 음악. 그 음악을 들으며 운전을 하던 중 만나게 된 여성과 등장인물은 결혼까지 이르게 된다. 그 결혼을 통해 낳은 아이에게 자신이 실천하지 못했던 '정의'를 실천하는 삶을 살게 하고 싶어 어릴 때부터 선 수행과 신체 단련을 게을리하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그 아이가 20 여년이 흐른 지금, 어느 한 비행기에서 바로 그 소설의 문장을 되뇌던 옆자리의 여성을 구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이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정의'는 구현되었을 뿐이다. 그 후 또다른 어느 날. 그때 살아남은 여성은 자신의 직무를 다하던 끝에 전 세계를 위기에서 구해내게 된다. 아무도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아는 이들은 아는, 구해졌기에 알려지지 않는 사건이었다.  

 

"인사는 우리 아버지께."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이 노래가 전해지고 있는가'라는 고로의 침묵 속의 외침에서부터 시작된다. 오키자키 씨는 미래를 예견했던 것이다. 혹은, 그런 미래를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지금의 이 실패가 미래의 어떤 일로 돌아올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저,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다 읽는 순간 '아 역시 표제작은 표제작이다'라는 울림이 있었다. 오히려 책을 다 읽은 후에 오랜 여운이 남는 단편이었다. 

 


 

<포테이토 칩>은 좋은 느낌이지만, 약간의 미묘한 느낌이 있다. 콕 찝어 말할 수 없는 미묘함. 등장인물의 말처럼 '칩스'는 과자 봉지 안에 담긴 여러 개의 과자를 지칭하는 말이니, 내 손 끝의 하나의 칩은 '칩'이 맞다. 

 

흔하게 느껴지는 수많은 일상 중의 단 한 순간. 

혹은 길거리에 흩뿌려진 인파들 속의 단 한 사람, 바로 당신.

통속적인 드라마 속의 단 한 순간, 단 한 사람.

 

공 하나가 멀리 날아가는 게 무슨 대수인가. 

하지만, 기껏해야 공 주제에, 그 하나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그 아무것도 아닌 순간이 눈물을 핑 돌게 만들고 만다.

 

행복하게 읽었다.    


 

- "기운으로 느껴지네." 벤치 옆 자리에 앉은 가와라자키 선배가 불쑥 그렇게 중얼거렸다. 
동물들 말이다. 우짖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아니고 발소리가 울리는 것도 아니었지만 같은 공간에 그들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호흡하는 소리, 고동 소리, 혹은 털을 다듬거나 자세를 바꾸거나 날개를 접는 소리 같은 것들 중 딱히 어느 하나라고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우리의 살갗을 일렁이게 하는 기운이 사위에 가득했다. 

 

- 그때 가와라자키 선배의 나이가 아마 마흔 전후였을 텐데 월급쟁이가 아니라서 그런지 젊어 보였다. 철부지에 세상 편한 팔자로 보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선배에 대한 판단은 다만 내가 둔감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 무렵의 선배는 학원을 경영하다가 막다른 골목에 부딪힌 바꿔 말하자면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부딪힌 상태였던 모양이다. 그 후 선배가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했을 때야 비로소 그 사실을 알았다. 대학 시절부터 인연을 쌓아온 선후배 사이면서도 서로 그 정도밖에 알지 못했다는 소리다.

 

- 돌아보자 온다가 서 있었다. 온다도 같은 대학 출신으로 나와는 동갑내기였다. 지금은 공무원이다. 까만 테 안경이 잘 어울리는 달걀형 얼굴에 착실하고 꼼꼼한 성격이었다.

 

- "그래서, 전 동물원 직원의 고독을 보듬어주려고 한밤중에도 동물원을 개방한다는 거야?"
내 비아냥거리는 말투를 듣고도 온다는 발끈하는 티 한 번 내지 않고 오히려 즐거운 듯이, "아니, 동물들의 고독을 보듬어주려고" 하고 대답했다.
"엥?"
"아무도 안 믿지만, 나가사와 씨가 직원이었을 때부터 동물들의 분위기가 말이야, 뭔지 달라. 이렇게 캄캄하기만 한 동물원 안이지만, 나가사와 씨가 야근하는 날이면 확실히 뭔지 달랐어."

"다르다니 뭐가?"

"뭐라고 잘 표현은 못 하겠지만, 동물들의 활기라고 해야 하나 ...

 

- 온다를 앞세우고 순회로를 나아갔다. 동물원의 엔진을 멀찍이 피해 가면서, 결코 나가사와 씨를 밟거나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해 가며 나아갔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 잠을 자면서 그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싸늘하게 식은 땅바닥에 몸을 붙이고 눈꺼풀을 꼭 닫고 있었다. 시끄러워서 화딱지가 났지만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흥미가 일었다. 그날 밤의 일이 화제로 나올 줄이야 짐작도 못 했다. 저들은 그때 일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그는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사라져 버린, 그 팀버늑대를 떠올린다. 

 

- "엔진이란 게 무슨 뜻이야?" 나는 그렇게 물으며 온다의 얼굴을 봤다.
"나가사와 씨가 없어지면 분위기가 바뀌어." 
"한번 보고 싶은데." 가와라자키 선배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저 남자가 나갈 때까지 기다려보자" 하고 제안했다. 나는 가와라자키 선배의 그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온다는 그저 단순한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 나가사와 씨가 서 있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우리는 그의 뒤를 쫓았다. 키는 그리 크지 않았고, 비쩍 말라 있었다. 바지 호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구부정한 자세로 걷는다. 주위를 경계하는 눈치는 전혀 없다. 
몇십 미터인지 걸어갔을 즈음, 그가 길에서 벗어났다. 동물원을 둘러싼 울타리가 보였다.

- 그 순간을 또렷이 기억한다.
나가사와 씨가 찢어진 울타리 틈새에 손을 걸치고 억지로 몸을 구겨 넣더니 밖으로 나갔다. 그의 발이 동물원의 터에서 떨어진다. 그 순간이다. 주위가 컴컴해졌다. 있을 리 없는 조명의 밝기 조절 버튼을 누가 왼쪽으로 홱 돌려버린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주위의 소리에 볼륨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 역시 확 죽었다. 물론 기분 탓에 착각한 것이 분명하겠지만, 재미있게도 가와라자키 선배 역시 입을 떡 벌린 채 "엔진이 꺼졌다" 하며 내 얼굴을 봤다. 

 

- "탐정이란 건 말이야. 먼저 선언부터 해놓고 이론을 만들어가는 법이야. 요리사도 그렇잖아?" 
"요리사?"
"메뉴부터 정해놓은 다음 재료를 사 모으는 것과 뭐가 달라."

"다를 거라고 생각해요."

- 바닥에 누운 채 늑대 우리를 바라보던 그는 남자들이 쑥덕대는 소리를 들으며 조금 초조해졌다. 자세히 알아듣기는 힘들었지만 그중 한 명이 숲에 대해 뭔지 지껄이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그 숲에 묻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또 다른 한 명이 지금 파보러 가자고 말하는 소리도 들렸다.  

자신이 숨기고 있던 것을 들키게 되다니 낯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어쨌든 두 번 다시 제 손으로 그것을 파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누가 발견해 준다면 그것은 또 그것대로 속이 후련해지는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를 바라본 다음 눈꺼풀을 닫는다.  

 

- <동물원의 엔진>

 

 

- 차를 세우고 운전석에서 내려 밖으로 나갔다. 사방은 온통 빽빽하게 나무가 에워싸고 있었다. 12월인 지금, 이파리 한 장 안 달린 여윈 나뭇가지를 뻗은 나무들의 모습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남녀의 앙상한 육체를 연상시켰다. 잘못해서 산길로 접어든 모양이다. 고구레 마을에 가려면 다른 길로 들었어야 했다는 소리다. "잘못 든 걸로 치자면 30대 중반을 넘어선 주제에 버젓한 직장 하나 없이 본업은 빈집털이요, 부업은 탐정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떠벌리며 사는 네 놈이야말로 길을 잘못 든 거 아니냐" 하며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야유를 퍼붓는다. 그런 느낌을 받았다. 

 

- 구로사와는 재킷을 고쳐 입은 뒤 차 문을 힘차게 닫았다. 그러자 그때,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흙이 깎여나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바닥의 자갈밭이 폭삭 무너져 버린 것이다. 차체가 왼편 풀숲을 향해 기울었다. 다행히 훌러덩 뒤집히지는 않았지만 비딱하게 쓰러져서 오른쪽 타이어 두 짝이 다 허공에 뜨고 말았다. 
그리고 문을 닫았더니, 차가 쓰러졌다. "문을 닫으면 차가 옆으로 자빠질 염려가 있습니다" 하는 취급주의서가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 잠시 걷다 보니 왼쪽으로 50미터쯤 앞에 거대한 암벽이 보였다. 산사태라도 났던 모양인지 산의 일부가 뭉텅 잘려나간 상태였다. 딱딱한 타일을 연상시키는, 돌로 된 성벽과도 닮은 거대한 암맥이 달리고 있다. 마치 산의 두개골이 노출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제법 장관이라고 감탄했다. 한번 가까이 가볼까 하여 발을 내딛는다. 그와 동시에 앞에서 사람을 발견했다. 허옇게 센 머리에 검정 운동복을 입은 남자였다. 그는 허리를 숙인 채 바닥에 손을 뻗어 나무토막을 줍고 있었다. 

 

- 그때만 해도 구로사와는 설마 자신이 산 제물이라든가 희생이 어쩌고 하는 요상한 풍습에 말려들 줄이야 꿈도 꾸지 못했다. 

 

- 그 의뢰를 받은 다음 구로사와는 본업에서 쓰는 기술을 발휘해 야마다가 사는 아파트로 숨어 들어갔다. 험상궂은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들 몇 명이 아파트 주위에 쫙 깔려 있었지만 들키지는 않았다. 예상대로 방은 엉망으로 뒤진 흔적이 남아 있었고,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나마 방 모퉁이에 낡은 컴퓨터가 있는 것은 발견할 수 있었다. 전원을 넣고 남아 있는 정보를 닥치는 대로 살펴봤다. 데이터를 다 지운 모양이었지만 구로사와는 포기하지 않고 가방에서 시디롬을 꺼내어 컴퓨터에 삽입했다. 단순히 삭제만 해서는 하드디스크에 있는 내용이다 지워지지 않는다. 그 내용을 부활시키려고 소프트웨어를 가동했다. 다시 한번 내용을 확인했다. 그리고 입맛 당기는 내용 몇 가지를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그중 하나가 인터넷을 돌아다닌 이력이었는데 약 보름 전에 '고구레 마을'이라는 이름을 검색한 흔적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 "슈조한테 부탁하면 이리저리 손을 좀 써줄 텐데 말이야."

"누구죠, 그 사람은?" 구로사와는 물었다. "촌장인가요?"

"아니, 촌장은 요이치로라는 남자야. 반 요이치로."

 

- "어떤 꿈이었는데요?"
"간단히 말하자면 산 제물. 누구를 제물로 바치면 재난을 피해 갈 수 있다는 거지."
산 제물이라는 단어를 들을 줄이야 짐작도 못했던 터라 구로사와는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억울한 재앙 앞에서 신께 공물을 바친다는 발상 자체는 터무니없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있을 법한 이야기로군요." 
"실제로 있었다니까." 가키모토는 그쯤에서 입을 닫았다. 주변의 적막감이 새삼 사무쳤다. "이쪽이야" 하며 그가 손짓을 했다. 왼쪽에 좁다란 길이 뻗어 있었다. 차를 타고 통과할 때는 못 보고 놓친 길이다. 

- "그래서, 촌장이 그 산 제물을 바치라는 꿈 이야기를 하면서 제안을 했다 이거지." 가키모토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느 틈에 그의 손에는 죽도를 작달막하게 자른 것처럼 생긴 나무토막이 쥐여 있었다. 어디에서 주운 모양이었다. 
"제물을 바치자는 제안이라 그런 제안이 사람들한테 통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렇지? 그런데 그게 말이야, 마을 사람들이 찬성했다는 거야. 여느 때 같으면 씨도 안 먹힐 소리라도 말이야, 상황이 힘들다 보면 다들 이성이 마비되어 버리는 것 같아. 산적 때문에 피해가 커서 속병을 앓던 차였으니까 뭐에든 매달려 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 과격한 일이기는 하지만 아니 그게 아니지, 과격할수록 다들 찬성하게 되는 게 아닐까." 
"하기는..." 울분을 토해내기에는 그 편이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과격하면서 손쉬운 방법이 사람을 끌어당기는 법이겠죠."

 

- "여자는 마을 사람들에게 설득당했겠지. 울면서 머리를 조아리기도 하고, 협박하기도 하고, 어쩌면 두들겨 팼을지도 모르지. 치켜세워 줬을 가능성도 있고." 가키모토의 머릿속에서는 오만가지 상상이 날개를 펼치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그 여자는 동굴에 들어가게 된 거야."
"동굴?"
"촌장이 꾼 꿈이 그랬다는 거야. 산 제물을 동굴에 가두어둬야 한다고. 한번 정해진 이상 강제로라도 실행에 옮겼겠지. 동굴 바깥을 바위로 틀어막고, 가둔 거야. 마을 사람들은 도망치듯 그 자리에서 떠났고, 한동안은 그 암벽에 접근하지 않았지." 
"여자는?"
"그야 죽었지. 혀를 물었다고도 하고, 굶어 죽었다고도 하고, 동굴에 숨어 살던 독벌레한테 쏘여서 죽었다고도 하고 뭐 여러 설이 있는 모양이지만, 어떻게 죽었든, 여자는 제물로서 제 몫을 완수했다는 소리지." 가키모토는 '응, 응' 하면서 깊은 감동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온 마을에 잔치가 벌어졌고, 여자는 매장됐다지." 
"잔치라..."
"잔치라는 걸 할 때는 말이야, 둘 중 하나야. 어지간히도 좋아죽겠을 때, 아니면 어지간히도 무서워 죽겠을 때. 틀림없이 다들 죄책감을 털어버리고 싶었던 거야. 분명히 그럴 거야."

 

- 순 날조된 이야기라고 구로사와는 생각했다. "산적이 어디로 사라진 거죠?"
"글쎄." 가키모토는 그까짓 거야 어찌 되었든 무슨 상관이냐는 태도였다. "어쨌든 말이야, 그때부터는 무슨 힘든 일이 있으면 제물을 틀어박히게 했다는 거지." 
"동굴에 틀어박혀 있으니까, 고모리사마란 말이네요."
"이제 척하면 척이네! 이 지역에는 산업이라 할 만한 게 없어. 입으로 들어갈 쌀 정도는 논에서 나오지만 말이야. 날씨가 안 좋으면 그마저도 엉망이 되지. 그래서 가뭄이 계속되다 보면 곧바로 보릿고개야." 
"있을 법하군요."
"있었다니까. 그래서 그런 때면 또다시 희생양을 뽑는 거지."

 

- "동굴에 갇힌 제물이 고분고분하게 죽어갈 거라고 생각하나? 재갈 같은 걸 물렸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신음 소리든 무슨 소리든 냈을 거 아니야." 그제야 좀 심각해진 가키모토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마을 사람들은 동굴에 가까이 가면 안 되도록 정해놓은 게 아닐까 싶어.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이지. 이렇게 해서, 고모리사마 기간에는 외출을 엄금하게 되었다, 이 말이야."  
"그렇군요."
"풍습이란 건 다 그런 거 아니겠어. 무엇을 숨기려고 그럴싸한 이유를 갖다 붙이는 거지."
"무엇이라는 건 뭐죠?"
"공포나 죄책감 같은 거 말이야, 그리고 욕망 같은 거. 그런 거야. 그런 것들을 어영부영 얼버무리려고 풍습이라든가 설화라든가, 그런 게 생기는 거 아닐까."
"그럴듯한데요." 가키모토의 머리에서 그런 생각이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구로사와는 감탄했다.

 

- "난 말이야, 쓰치노코(일본 설화에 등장하는 가상의 동물인지 뭔지 하는 놈도 비슷한 거라고 생각해." 
"그 환상의 동물 말이에요?" 
"그래 그거야, 뱀 비슷한 거. 그 그림을 볼 때마다 늘 생각하는 건데, 언뜻 보면 남자의 그놈하고 닮지 않았나?"
구로사와는 쓰치노코의 형상을 머리에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남자의 성기와 닮은 것 같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그게 말이야, 옛날에 어디에 사는 어떤 남자가 컴컴한 밤중에 그놈을 내어놓았다가 아이한테 들켜버렸다든가 뭐 그런 게 아닐까? 여자를 품으려고 했는지, 아니면 아이한테 짓궂은 장난을 치려고 했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곤란한 상황에서 장면을 들킨 거야. 그랬는데 이튿날 아침 아이가 와서는 그게 뭐였느냐고 물어본 거지." 
"그래서 쓰치노코라고 사기를 쳤다는 말인가요?"
"그렇지, 그래." 가키모토가 어린아이처럼 크게 웃는다. "집안에서가 아니라 풀숲에서 들켰는지도 모르잖아. '아, 네가 본 건 쓰치노코야' 하면서 속여 넘긴 거지. 아이는 친구들한테 그 이야기를 했고, 그러다가 방방곡곡에 소문이 퍼지면서 있지도 않은 쓰치노코가 있는 것처럼 된 거지." 
"그렇군요." 구로사와는 얼토당토않은 추측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곤란한 상황을 얼버무리려고 적당히 다른 것으로 위장하는 수법은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그것이 성에 대한 것이거나 죽음에 대한 것, 공공연히 밝히기 힘든 것일 경우에는 그런 식으로 은폐할 가능성이 높다. 

 

- "억측일지도 모르지만요." 하나에가 가냘픈 소리로 웃었다. 표정을 보니 엷게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 있어 아직도 마음속에 걸리는 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구로사와는 더 캐물어보고 싶었지만 굳이 억지로 사정을 캐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애당초 구로사와의 목적은 야마다가 어디 있는지만 찾아내면 되는 것이지, 손바닥만 한 마을의 인간관계를 파헤치는 것은 아니었다. 혹시나 하나에가 가슴속에 숨기는 것이 있다 해도,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말인가. 그렇게 생각했다.

 

- "도저히 아흔으로는 안 보여요. 등도 꼿꼿하고, 얼마 전 지진이 났을 때만 해도 마을 사람들 중 제일 먼저 집 밖으로 튀어나가서는 배낭을 끌어안고 마을 입구에 서 있었다니까요." 아침에 하나에가 설명했을 때만 해도 각색된 삽화 비슷한 이야기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막상 우타코 본인과 마주하고 보니 꼭 허풍이라고는 할 수 없겠다고 구로사와도 느꼈다. 아흔 살이라는 나이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야무진 모습이었다. 
"하이고, 손님이 찾아왔다 해서 별일이 다 있다 했드만 어데서 이래 잘생긴 남자가 왔노."
쪼글쪼글한 주름이 온 얼굴에 가득하고 살갗에 윤기라고는 없었지만 표정만큼은 생기발랄하다. 치아도 하나 빠진 것 없이 가지런하다. "우떤 사나 하나가 우리 마을에 왔다고 이웃 사람이 그라드이 그기 니가?"
"정보가 빠르군요." 구로사와는 쓰게 웃었다.
"이 촌구석까지 도적놈이 찾아오다이, 야아, 취미가 엉뚱하구마는 우찌 됐든 고생했소."
"예?" 구로사와는 간이 철렁해서 되물었다. 까딱하면 내가 도둑인 줄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어볼 뻔했다.
"아이가? 고마 딱 도적놈이라고 생각했는데."
"도둑놈이 현관에서 인사하고 들어옵니까?" 아무래도 그저 즉흥적으로 말한 모양이라 가슴을 쓸어내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예리한 육감에 경탄했다. "이야기를 좀 듣고 싶어서요. 사람을 찾고 있거든요" 하며 호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어 우타코에게 보여줬다. 

 

- "니 그래, 고모리사마에 대해 우예 생각하노. 그런 얄궂은 풍습은 타지 사람인 니가 보기에도 역시 이상하나." 
"뭐" 하고 아리송한 대답을 했다. "확실히, 신선하긴 하죠."
"뭐, 확실히, 신선하긴 하죠." 우타코가 구로사와의 말투를 흉내 냈다. "니 멋지구나야. 말투가 참해가 인기 많겠는데. 비록 도적놈이라고는 해도." 
"전 도둑놈이 아닙니다." 구로사와는 마음의 동요를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대답했다.
"아, 그랬재. 그 누고, 슈조가 말이다, 곧잘 그래 말 안 했다. '도적놈은 도적놈처럼 안 입는다'라고. 나쁜 사나아는 보통 멀쩡하이 채리 입고 찾아온다고 말이다. 구질구질한 꼴을 하고 있는 놈들은 보나 마나 빤하다는 기라. 그라이 척 봤을 때 매끈하게 빠진 니를 보이 요놈, 딱 도적놈이구나 싶었지." 
"그건 그거죠? 악마의 목소리는 아름답다는 거."

"그 머고, 슈조가 하는 얘기로는 아마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일본도 그랬을 기라 안 하나. '전쟁 시작합니다' 하고 말하면 우떤 사람이든, 그기 내라도 반대를 했을 기라. 그란데 자고 일어나보이 시부저기 전쟁이 시작되어 있었단 말이재. 처음에는 우째우째 듣기 좋구로 말을 해가 사람들을 끌어들였던 기라. 우리가 위험하이 싸웁시더, 이대로 잠자코 있다 체면이 말이 아입니더, 요래 해 싸면서 싸울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는 거재. 백번 맞는 말 아이가."

- 지옥으로 가는 길은 아름답게 포장되어 있다는 속담도 구로사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동시에, 이야기가 샛길로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슈조라는 남자는 인망이 두터운 모양이던데요."
"그래, 독수공방하미 벌써 쉰이나 됐지만 은근하고 다정한 남자라. 붙임성도 좋고."
"요이치로라는 남자와는 사이가 안 좋나요?"
"그런 거까지 가키모토 씨가 말하디나? 하기사 사실이기는 하재."

"요이치로에 대한 평판은 어떻습니까?"
"웃자리에 있는 인간한테는 본시 말이 많게 마련 아이가. 우습게 보았다 하면 끝장이기도 하고. 하기사 머, 요이치로 씨가 정나미 떨어지게 행실 하는 거는 사실이재." 슈조와는 정반대라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 찻길을 지나가는 사람도 차도 없었기 때문에 길 한복판에서 우리 둘은 옆으로 나란히 서서 걸었다. 하늘에는 마치 연기라도 낀 것처럼 하얀 구름이 흐르고 있었지만 그것 말고는 투명한 느낌을 주는 파란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참 고즈넉하구나 하며 구로사와는 풍경에 취했다. 구두가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메아리쳤다. 그것 말고는 아무런 잡음이 없다. 이 상쾌한 파란 하늘 아래를, 자신보다 50년 이상이나 길게 살아가는 여성과 함께 느긋하게 걷고 있다는 사실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대단한 사치처럼 느껴졌다. 아니 그보다 정말 이 여자가 아흔 살일까? 

 

- "그란데 니는 우예 생각하노?" 몇 미터 걸어갔을 즈음 우타코가 물었다. 
"뭘요?" 
"고모리사마에 대해서. 우째 생각하노?"
아까도 물었잖느냐고 구로사와는 대꾸할까 했지만, 이번 질문은 보아 하니 그녀 자신이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유도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래서 구로사와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하고 되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타코가 "실은 말이대이, 내는 쪼매 생각하는 게 있거든" 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맨 처음 이 고모리사마라는 거를 시작했을 때는, 이래저래 음모가 있었던 기 아인가 하고." 
그녀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맑고 또렷해서 알아듣기 쉬웠다. 게다가 이따금 더듬더듬하기는 했지만 막힘없이 말이 나온다. "당신, 정말 아흔이에요?" 
"아이다" 하고 그녀가 대답했다.
"역시 그렇구나."
"아흔이 아이라, 아흔둘이다."
"아아." 구로사와는 순간 말이 딱 막혔다. 잠시 뒤에 "그럴 줄 알았어요" 하고 받아쳤다. 

- "처음에는 말이대이, 이 고모리사마라는 기 그 무렵의 촌장이 꾸민 음모였을 거라는 생각이 안 드나?" 우타코는 다시 한번 그렇게 말했다.
음모? 구로사와는 고개를 비딱하게 꼬았다. "촌장이 고모리사마의 꿈을 꾼 거라고, 나는 그렇게 들었는데요." 
"그렇게 마침맞게 꿈을 꿀 수 있다고 생각하나, 니는?"
아닌 게 아니라 듣고 보니 그렇다는 생각도 든다.
"내는 모든 일에는 내막이라는 기 있다고 생각하는 성격이거든. 그래서 그런 일도 의심을 해봐야 직성이 풀린다. 산 제물을 바치니 산적이 사라졌다이 이런 거짓말 같은 소리가 어데 있노."
"하지만 실제로 그랬잖아요."
"내는 이래 생각한다. 그 제물이라는 거는 처음부터 촌장이 골라놨던 기 아일까 하고."

 

- "필시 그 여자는 그 와, 촌장이 바람 피우던 상대였든가, 우든 그런 골치 아픈 존재였던 기 틀림없다."
심상찮은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구로사와는 군침을 삼킨다.
"그래가 그 입을 막아버릴라고 고모리사마로 만들어버렸다. 어이, 그래 된 거 안 같나?"
"죽이려고 했다는 건가요?"
"처음에는 죽일 생각까지는 안 했는지도 모르지마는, 분명히 산적들하고 뒷거래를 했을 기다. 여자를 내줄 테이 더는 우리 마을을 건드리지 말아달라고 말이대이, 거랜지 수작인지 그런 기 있었을 거 같지 않나?"
"여자를 내준다." 구로사와는 자신이 되뇐 그 말에서 현실감을 동반한 불쾌한 감촉을 느꼈다.
"그렇지, 그렇지. '산에 있는 동굴에 여자를 가둬 놓았습니대이 구워 먹든가 삶아 먹든가 마음대로 하시고, 대신에 다시는 우리 마을을 괴롭히지 말아 주소' 하믄서. 구역질 나는 일이지만 있을 것 같지 않나, 잉?" 
"구역질 나지만 있을 것 같아요.” 구로사와도 인정한다. "하지만 고모리사마의 동굴은 바위로 막잖아요? 산적이 어디로 들어가죠?" 
"그거야 다수가 있지 머. 촌장이 지 손으로 문을 열어줬을 수도 있고, 아이 동굴 자체에 은밀한 통로가 있는지 또 누가 아노, 이거는 옛날부터 돌던 말이기도 하재." 

 

- 구로사와는 산의 암벽에 뚫린 동굴에 내동댕이쳐진 여자의 모습을 상상해 봤다. 여자도 처음에는 진짜 의식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동굴에 들어가 다리를 덜덜 떨면서 웅그리고 앉는다. 바위가 입구를 막는 소리를 어떤 심정으로 듣고 있었을까. 빛이 차단되고 주위의 벽이며 자신의 피부가 시커먼 어둠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하릴없이 바라보고만 있었을까. 

 

- 그것이 촌장의 음모라는 것을, 그러니까 복수였는지 질투였는지, 아니면 은폐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의도적으로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여자는 언제 깨달았을까. 
밤이 가는지 아침이 오는지도 모른 채 주린 배를 움켜쥐고 그녀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어느 순간 입구가 열렸나 싶었더니 산적들이 나타났다. 그녀는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까. 깊은 절망의 나락이었을까 들끓는 분노였을까. 내가 어찌 알겠느냐고, 구로사와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냐는 심정이었다. 

 

- "누가 알겠나 마는 반가네 집안사람들은 머리가 좋지 시프다. 내는 말이대이, 요이치로하고 그 아버지였던 고이치로, 그 아버지, 그리고 또 그 아버지까지 네 명의 반가네 도련님들을 다 안다. 다들 똑똑했다. 성격이야 무서운 성격도 있었고 사람이 도없이 물렁하기만 한 성격도 있었고 천차만별이었지만, 똑똑한 거 하나는 다 똑같았다." 
"그 말은 혹시 똑똑하다는 게 아니라 교활하다는 소리 아닌가요?"
"그 집안사람들 말이다. 틀림없이 날씨가 바뀔 조짐이나 곰이 나타날 징조 같은 거를 미리 알 수 있는 지식이 있었을 기라."

"육감이 아니라 지식?"
"그 머꼬, 조만간에 그럴 조짐이 보인다 싶은 때에 고모리사마 이야기를 꺼내는 기라. 그래 되믄 천상 고모리사마 덕분이라는 소리가 안 나오겠나."
구로사와는 우타코를 말똥말똥 바라본다. 초등학생으로 착각할 정도로 자그마한 몸집에, 손등이며 목덜미는 주름살투성이지만 움직이는 모양새도 발랄하고 생각하는 것도 예리하다. "90세의 혜안이라고 해야 하나" 하고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내가 머라 하드나, 아흔이 아이라 아흔둘이라고 했재. 요 2년만 해도 얼매나 소중한 시간이었는데, 생략하지 말거래" 하며 그녀가 웃었다. 

- "당신 생각을 마을 사람들에게 말해봤어요?" 그 이야기는 촌장 계획설이라고 이름 붙여도 좋을 것 같은 제법 설득력을 가진 이야기로 들렸다.
"아무한테도 안 하지, 그런 이야기는."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라며 우타코가 웃었다. "옛날에 우리 바깥양반한테 함 말해본 적이 있는데, 우리 죽은 남편 말이다. 대번에 길길이 날뛰면서 야단을 치는 기라. 바보 같은 소리 한다고. 우리 마을을 헐뜯지 말라고." 
과연 이 노파는 젊은 시절에 어떤 여자였을까. 구로사와는 이리저리 상상해보려 했지만 몇십 년을 거슬러 올라간 그녀의 모습 ...

 

- 촌장인 요이치로도 타지 사람인 구로사와가 가키모토의 집에 하루 묵었다는 소문을 벌써 들었는지 구로사와를 봐도 "웬 낯선 놈!" 하며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화가 난 것 같지도 않았다. 다만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여기까지 무슨 볼일이 있어서 왔지?" 하고 물었다. 
"차가 저 지경이 되는 바람에" 하고 구로사와는 왼쪽 전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렌터카는 왼쪽으로 기우뚱 쏠려 있다. 동정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대담한 몰골이다. "돌아갈 수가 없어서 애가 타는 중이야." 
그럴 만도 하겠다는 표정으로 요이치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도와주지" 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50대 치고는 젊어 보였고 날쌔면서도 대담할 것 같은 인상을 줬다. 

 

- "밥은 우야노." 우타코가 음식을 담은 용기를 앞으로 내밀었다. "내가 맡아두지. 이따가 넣어줄 테니."
우타코는 영 미덥지 않다는 뭔지 꺼림칙하다는 불쾌감을 드러냈지만 최종적으로는 "그라까, 그라믄 욕봐라" 하며 용기를 내밀었다. "니도 갈끼라?" 하고 그녀가 말을 걸었다. 
"전 차를 빼야죠."
우타코가 사라져 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럼, 차를 이동시켜 볼까" 하고 차가운 손으로 남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것만 같은 억양 없는 목소리로 요이치로가 말했다. 

 

- 요이치로는 어깨가 좁고 마른 체형으로 보였지만 알고 보니 근력 깨나 있는 남자였다. 세단 밑에 손을 넣는 모습이 안정되어 있다. 가키모토와는 달리 요이치로는 아낌없이 힘을 빌려줬다. 물론 그렇다고 차체를 들어 올릴 수야 없는 노릇이라 구로사와와 함께 둘이서 풀숲 쪽으로 잡아끌기로 했다. 

 

- "사람을 찾으러 왔는데" 하며 구로사와는 사진을 내밀었다. 
그러면서 상대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봤다. 사람을 관찰하는 것은 구로사와가 자부하는 분야였다. 빈집털이는 표적으로 삼은 상대의 생활을 파악하고 행동 양식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런 사전 준비나 절차를 생략하고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도둑질을 하는 자들도 있지만 구로사와는 어느 정도의 세련미는 유지하고 싶었다. 그러니 사람 관찰을 빼먹을 수 없다. 

- 요이치로는 가면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무표정했다. 쌍꺼풀 없는 눈에 입술은 얇고 옆으로 길고, 피부는 하얗다. 눈썹이 선명했지만 착 달라붙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사진을 보았을 때 한순간 요이치로의 눈이 흔들렸다.

 

- "아는 남잔가?" 
"아니, 처음 보는 얼굴이야."
"방금 눈동자가 흔들렸는데." 이런 상대에게는 손에 든 카드를 거드름 피울 것 없이 바로바로 보여줘야 한다고 구로사와는 판단했다.
"이 사진 속의 남자 이름은?" 요이치로에게 동요하는 빛은 없다. "야마다라는 사람이야."
"이 야마다 씨는 척 보니 건달 같은 인상이군. 평탄한 인생을 살 관상이 아니야" 하며 사진을 가리켰다. "이런 사람이 우리 마을에 있으면 곤란하지. 동요했다면 그 걱정 때문일 거야"라고 변명인지 진심인지 모를 말투로 이야기했다. "자네 이름은?" 
"구로사와." 
"구로사와 씨, 볼일 끝났으면 돌아가는 게 좋을걸. 우리 마을은 따분한 곳이니까."

"동굴 구경을 하고 싶은데."
"들었단 말인가?" 요이치로가 처음으로 표정을 움직였다. 심심하기만 하던 표정을 혐오감과 씁쓸함이 허물어뜨렸다.

 

- "시골 촌구석, 미개한 땅의 풍습, 그렇게 생각하나?"
"나쁘지 않은 풍습이야." 구로사와는 어깨를 으쓱했다. 세대를 뛰어넘어 전승되는 관습이 존재한다는 것은 결코 안 좋은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일본에는 대대로 계승되는 사상이라고는 거의 없다. 사상이나 상식조차도 내다 버리고, 지혜나 지식을 축적하려는 의식이 희박하다. "지금 갇혀 있는 사람은 슈조라는 남자지?" 
"갇혀 있는 게 아니야. 두문불출하는 거야." 강조하는 말투였다. 구로사와는 이야기를 바꿨다. "분키치 사건이라는 게 정말 있었나?" 
요이치로는 주민들의 입방정에 어이가 없다는 기색을 비쳤다. "그건 말짱 헛소문이야."
"사실이 아니라고?"

 

- "그건 불가사의한 죽음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기보다는 슈조의 인품 때문인 게 아닐까?"
"인품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요이치로의 얼굴은 품위 있는 얼굴로 볼 수 없었다.

- "고모리사마의 동굴에는 접근하면 안 되나?" 구로사와는 다시 한번 부탁해 봤다.
"삼가 주면 대단히 고맙겠군. 작은 마을에는 작은 마을 나름대로 우주의 질서가 있어. 그걸 깨지 말아 줬으면 좋겠는데."
"알았어." 스스로 생각해도 뜻밖일 만큼 깔끔하게, 구로사와는 그렇게 대답했다. 물론 포기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요이치로가 말한 "우주가 있다"라는 설명이 퍽 참신해서, '그렇구나, 어디에나 우주는 있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었다. 

- '내 일은 야마다를 찾는 것이지, 이 마을 일에 참견하는 게 아닐 텐데.' 자신을 비웃으며 훈계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일이 그렇게 중요하면..." 하고 구로사와는 자신에게 말했다. "회사원이 되는 편이 나았지. 안 그래?"
가령 이게 자신의 일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치자. 그것이 어쨌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했다. 딱히 난처한 일이 벌어질 것도 아닌데. 

 

- 이 약발이 즉각 먹혀들었다.
"오오, 그래? 그래?" 가키모토는 목청을 높이며 "좋지 좋아, 요이치로를 불러내 줄게" 하고 승낙했다. "내 작품을 우리 마을 특산품으로 만들면 어떨까 하고 말하면서 의논하고 싶다고 하면 되겠지?"
하나에는 끝까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 구로사와는 바닥이 울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1층을 살피고 다녔다. 복도 끝에 넓은 거실이 있었다. 큼직한 다다미방이다. 어제 오늘 만들어진 물건과는 명백하게 분위기가 다른 오래된 가구며 목조 장식물이 늘어서 있다. 단아하게 발린 장지가 아름답다. 냄새에 색깔이 있지는 않겠지만 냄새를 깊숙이 들이마시자 다다미의 푸른 냄새가 콧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다. 어디에서 시곗바늘 소리가 들려왔다. 

- 또다시 넓은 실내를 둘러본다. 청결하고 호화로운 분위기는 감돌지만 사람 사는 냄새는 나지 않는다. 황량했다. 옆방으로 이동한다. 방 모퉁이에 장식단과 불단이 있다. 불단에는 흑백사진 여럿이 놓여 있다. 그중 유독 새로운, 폴라로이드 사진 비슷한 것에 젊은 여성이 찍혀 있었는데 아마도 요이치로의 죽은 아내인 것 같다.

- 방의 동쪽 벽에는 검고 튼튼한 책장이 있었다. 책의 양이 많아 구로사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을의 자치에 관한 자료며 연구서 같은 딱딱한 내용의 책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정치가나 역사에 대한 책도 많았다. 책장 옆에는 앉은뱅이 책상이 있었다. 좌식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책상 위를 꼼꼼하게 살핀다. 필기도구와 편지지만 얹혀 있을 뿐 색다른 물건은 없다. 읽다만 것으로 보이는 책 한 권이 놓여 있다. 탁상시계 옆에는 작은 달력이 있다. 손을 뻗어 넘겨봤지만 메모 한 줄 적혀 있지 않았다. 

- 정리 정돈이 깔끔하게 되어 있다. 아니 그보다는 차라리 너무도 살풍경해서 구로사와는 요이치로의 결벽증과 신경질을 감지했다. 이 작은 마을의 이토록 살풍경한 방에 홀로 앉아 요이치로는 대체 무엇을 생각하는 것일지 구로사와는 궁금했다.

- 그 정도쯤이야 추측할 수 있었다. 제물이 될 사람을 결정하는 의식이 구체적으로 어떤 순서로 진행되는지는 모르지만 요이치로는 원형으로 둘러앉은 마을 주민들의 위치를 확인하고, 그런 다음 주사위를 고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노래를 부르는 속도나 앉는 위치에 따라 약간씩 빗나갈 때도 있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의도한 대로 고모리사마를 뽑을 수 있다는 소리다.

- 주사위는 상당히 낡아 있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최초에 고모리사마 의식을 할 때부터 사용되던 것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구로사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만큼 위엄이 서려 있었다. 산적들에게 여자를 내줄 때부터 사용된 유서 깊은 속임수 주사위인 것이다

 

- 노트를 치우다가 구로사와는 손을 멈췄다. 노트 사이에 끼워져 있는 사진을 발견했다. 갸우뚱했다. 자신의 추측이 맞는다고 칠 경우, 아무리 생각해도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그 사진을 한동안 가만히 바라봤다. 퍼즐 맞추기를 예로 들자면 다 끝나고도 한 장이 남아 있는 것만 같은 그런 찜찜한 예감이 들었다.  

 

- "그렇다면..." 구로사와는 생각한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는 거로군. 

 

- "내가 뭐, 귀찮게 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찾아온 줄 알아?" 
"그럼 왜 안 돌아가지?" 

 

-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망설였다. 해야 할 말은 정해져 있지만 단도직입적으로 할 것인가 완곡하게 할 것인가, 결론부터냐 과정부터냐 하며 잠시 고민했다. 슈조를 힐끔 쳐다봤다. 이 남자가 여기에 있다는 말은 구로사와가 가정해 두었던 제1안, 즉 요이치로의 슈조 살해 계획설은 물 건너갔다는 것을 뜻한다. 이제는 나머지 하나의 가능성밖에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 "나는..." 하고 입을 열었다. 동굴을 가리켰다. "저 안에 있는 ... 한테 볼일이 있어.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았거든. 즉, 이건 내 일이야."

 

- 슈조는 이미 나무를 들고 있지 않았다. 이제는 다만 건실하고 온후한 표정으로 서 있다. 

 

- "무슨 일에든 오차는 생기는 법이니까."
요이치로의 목소리가 숲 속의 헐벗은 나무들을 뒤흔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사위의 오차였어, 아니면 앉은 순서의 오차였어?" 하고 물어봤지만 요이치로는 굳은 표정만 조금 풀 뿐 대답이 없다. 

 

- 동굴 내부는 생각보다 넓었다. 어른이 서도 머리가 부딪치지 않을 정도의 높이였고, 폭도 좁지 않았다. 안쪽 길이도 10미터 이상은 되어 보였다. 그리고 바람이 통하지 않아서 그런지 따뜻했다. 
"들어가 봐야 아무도 없어."
안쪽으로 들어가려 하는 구로사와를 요이치로가 불러 세웠다. 오전인데도 벌써 햇살이 동굴 안쪽까지 들이치고 있었다. 깊숙한 안쪽의 가로막힌 부분까지 바닥이 훤히 보인다. 야마다가 쿨쿨 자고 있거나, 묶여서 누워 있는 모습 따위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확실히 없네."
"그 이상은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는 편이 좋을 걸." 슈조는 충고라도 하듯 말했다.
"비밀 통로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
"그건 딱히 상관없어. 저거 봐, 저쪽 구석에 돌이 쌓여 있지? 저걸 치우면 기어 나갈 수 있는 구멍이 나와 비밀 통로지." 

뜻밖에도 슈조가 순순히 알려줬다. 손가락으로 가리킨 쪽을 보니 작은 돌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알고 있는 자가 아니면 저 돌멩이들을 치울 생각은 못할지도 모르겠다. "옛날에 고모리사마를 하던 누가 죽을 힘을 다해 판 구멍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저 구멍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던 거야" 하고 말했다.

- "왜 안쪽까지 들어가면 안 되지?"
"지금은 아니라지만 예전에는 진짜 산 제물이었어." 요이치로의 목소리는 차갑게 동굴 안으로 울려 퍼졌다.

 

- 구로사와는 꾸벅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깨달았다. 
제물이 된 자들의 흔적이 동굴 안쪽에 남아 있는 것이다. 목숨이 붙은 채로 갇혀버린 자들의 흔적, 가령 벽을 손톱으로 긁은 자국이라든가 피로 쓴 저주의 말, 혹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원한이나 증오의 덩어리 같은 것이 체류하는 묵중한 공기가 동굴 안쪽에 분명하게 존재할 것이다. 벽에 찬 습기나 부서진 돌멩이의 틈새기마다 숱한 영혼들의 음울한 집념들이 서려 있을지도 모른다. 
구로사와는 아까 자신이 구멍에 귀를 대고 들었던 신음 소리를 기억해 냈다. 그것은 착각이었을까, 아니면 동굴 안에 축적된 시커먼 원한의 용틀임이었을까. 한기가 든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한기다. 구로사와는 걸음을 돌렸다.

- "당신들은 대체 무엇을 위해." 바깥으로 나와 눈 부신 햇살에 미간을 찌푸리면서 구로사와는 요이치로와 슈조를 번갈아 바라봤다. 

 

- "단지 그것 때문에?" 

 

-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닐 거야." 요이치로는 이 마당까지 와서도 가정법을 써서 말했다. "공동체를 이끌어가려면 권위만으로는 부족해. 나는 그렇게 생각해. 통치하는 사람은 미움을 받고 두려움의 대상도 되면서, 사람들을 견인해 나가야만 해. 그 대신 개개인의 공포나 불안, 불만을 받아줄 사람도 필요하지. 내 아버지는 엄격했어. 할아버지는 사람이 좋고 너그러웠지. 두 분 다 마을 사람들의 불만을 샀어. 엄격하면 굴욕이, 만만하면 경멸이 생겨나지. 제대로 거느리려면 그 양쪽의 균형이 필요해. 요컨대 두 사람이 있는 편이 낫다는 거지. 엄격한 사람과 그 불만을 받아줄 사람 말이야."

 

- 구로사와는 믿을 수 없는 기분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극단적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요이치로는 진지하기는 하지만, 어딘지 극단적이다.
"이 친구는 머리가 좋아." 슈조가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누구보다 이 마을을 위하고 있어. 그래서 마을을 위해 우리는 그만뒀어."
"그만둬?"
"친구이기를 그만뒀지." 

- 구로사와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방법이 유효한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그렇게까지 해서 이 마을을 유지할 필요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애당초 우정을 30년 이상이나 봉인할 필요가, 다시 말해서 마을이나 촌락을 위한 제물로 바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늘 그랬어." 슈조의 눈에는 험악한 빛이 사라지고 없다. "어릴 때부터 늘, 요이치로는 마을 생각만 했어. 그리고 고모리사마를 이용하자는 아이디어를 어느 날 나에게 말했지."
감쪽같이 해내려면 우리는 반목하는 게 낫겠다고, 요이치로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 "그게 아니야." 요이치로가 조용히 부정한다. 그런 짓을 할 리 가 있냐고, 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사고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일을 계기로 하자고 내가 제안했어. 슬픔에 빠져있는 친구 앞에서 나는 냉정하게 계산기를 두들기고 있었다는 거지." 자조하듯이 요이치로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 슈조는 짧은 말로 부정했다. 그렇지 않았다고 되풀이했다.
"그 여자를 덮치도록 사주한 것이 요이치로 당신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믿고 있던데."
요이치로가 웃었다. "원래부터 사람들은 나를 따르지 않았으니까. 그런 소문을 흘렸더니 다들 좋아서 들러붙었지. 정보라는 건 진실의 정도나 증거보다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수요에 반응하는 거야."

- "그건 사실이야." 슈조의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온 순간, 숲 속에 두둥실 떠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꽉 움켜쥔 주먹처럼 슈조의 상념이 한데 꾹꾹 뭉쳐지며 단단해졌다. 

- 슈조가 반사적으로 입을 벌렸다.
요이치로는 동요하지 않고 입술을 딱 붙이고 있다.

 

- "나는" 슈조가 씁쓸하게 웃었다. "고모리사마 노릇을 하고 있으면 따분해서 말이야. 가끔씩 바깥에 나올 때도 있어."
그 대답이 사실일 것이라는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았지만 구로사와도 더는 질문하지 않았다.

 

- 금고 안에서 발견한 물건을 떠올렸다. 노트 사이에 꽂혀 있던 누렇게 바랜 사진을 그나마 흑백사진은 아니었지만 색깔이 상당히 옅어진 상태였다. 10대 소년 두 명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스냅사진이었다. 두 사람 모두 같은 헤어스타일을 하고 치아를 훤히 드러낸 채 행복해 보이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사진은 의심할 것도 없이 어린 시절의 요이치로와 슈조의 사진일 것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은 상당히 늙어버렸고, 웃음 따위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사진 속 인물들과 무척이나 닮았다. 

- 구로사와는 한숨을 내쉬었다. "옳은 일인지 아닌지는 제쳐두고, 당신 대단해" 하고 요이치로에게 말했다.
"내가 대단해?" 설마 그런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는지 그는 처음으로 동요하는 빛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나라를 생각하는 정치가는 없어." 구로사와는 하나에가 하던 말을 떠올린다.

- 요이치로는 마을의 미래에 대해 자신의 신념과 비전에 근거하여 자신이 믿는 것을 실행하고 있다. 친구라는 존재를 떠나보내고,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무미건조하게 만드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올바른 방식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구로사와는 그 결단력과 의지에 감동했다. 
요이치로는 당황스럽다는 웃음을 띠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국민이 아니라 이 마을,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이 촌락 사람들일 뿐이야. 대단할 것도 없어." 
"그런가" 하고 구로사와는 대답한 다음 그 자리를 떴다.

 

- 자동차까지 돌아오는 도중에 걸음을 멈추고 딱 한 번, 암벽을 돌아봤다. 
이제 동굴 앞에서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는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서둘러 서둘러!" "닫아버리면 그뿐이야!" 하는 흥분된 목소리가 귓전에서 울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바람과 뒤얽히며 소용돌이치는 듯한, 혹은 지축이 흔들리는 듯한 박력을 지닌 흥분된 소리였다.

 

- <새크리파이스>

 

 

- 20여 년 전

"내 고독이 물고기라면 그 지독한 거대함과 맹렬함 앞에 고래마저도 달아날 것이 틀림없다." 

핸들을 쥐면서 옛날에 읽은 적이 있는 소설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상당히 옛날 작가다. 만년에는 폐가에 틀어박혀 벽마다 문장을 써 내려가다 20년 전에 죽었다고 하는 일본인 작가의 유작. 그 첫머리에 나오는 구절이었다. 

(리뷰자 주 : 원 소설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는데, 현재까지 찾아본 바로는 발견하지 못했다.)

 

- 장마철에 들어섰다더니 며칠 동안 비 구경 한 번 못 했다. 양친이 사는 분지 지역은 못 견디도록 덥기 때문에 가능하면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 "자꾸 발전해서 나쁠 게 뭐가 있어." 아버지는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자꾸 발전하다 보면 소박하고 번거로운 것들을 버리고 가게 되잖아."
"어려운 말을 하네." 아버지는 내뱉듯이 말했다. "뭔데, 소박하다는 게?"
"예의라든가 도덕이라든가."
"마사시, 네가 노상 그렇게 깐깐하게 따지고 드니까 결혼을 못 하는 게 아닐까." 옆에서 듣고 있던 어머니가 노골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옛날부터 정의감이 있는 착한 아이였는데" 하며 측은해한다.

- "정의감 좋지" 하고 나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반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친구가 있으면 분노하기도 하고."
"덕분에 내가 따돌림을 당했는데." 
"아, 그랬어?"하고 어머니는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10년도 더 된 옛날 일이라서 그러는지 곧바로 굳은 표정을 풀었다.

- "애초에 말이야, 정의라는 건 주관적인 거잖아. 사람들이 그런 걸 내세우면 무서워."

 

- "넌 항상 그렇게 어려운 말을 하는구나" 하며 아버지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결혼을 못 하나?" 어머니가 또 그 소리를 했다. 다람쥐 쳇바퀴 돌기다. 스물일곱을 넘겼을 무렵부터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혼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이웃에 사는 사람들까지 나서서 맞선 자리를 마련해 주었지만, 들어오는 족족 거절만 해댔더니 이제 그것도 소식이 뜸하다. 아닌 게 아니라 주위의 친구들도 살림을 차리기 시작해서 나는 내가 독신이라는 사실에 자랑스러움과 초조감이 뒤엉킨 묘한 기분을 맛보고 있다. 

 

- "너, 이상적인 여자를 찾지? 꿈꾸는 거야." 며칠 전 만난 대학 동기는 지탄이라도 하듯이 나에게 말했다. 그는 진작 결혼을 해 벌써 1남 1녀의 아버지다. 초등학교 교사다. 
"그런 게 아니야. 대학에서 한밤중까지 연구를 하는 조교에게 좀처럼 여성을 만날 기회가 없단 말이다."
"핑계야, 그건 만남이라는 건 말이야, 숨죽이고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다고 생기는 게 아니야. 누구든 좋잖아. 어쨌든 내일 당장 직장에 가면 맨 처음 만난 독신 여성에게 프러포즈하고 와." 얼큰하게 취한 친구가 억지를 썼다.

- "그렇게 되면 아주 높은 확률이 강의동 창구에 있는 쉰 살의 아줌마야."
"독신이야?"
"이혼했어."
"그럼 됐네."
"됐다니,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제 딴에는 내 생각을 해주느라 우스갯소리를 한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왠지 다 귀찮았다. 그래서 그랬는지 문득 아까 그 소설의 첫 구절, "내 고독이 물고기라면"이 떠올랐다. 낭송해서 친구에게 들려줬다. 우리는 둘 다 문학부 출신이라 학창 시절에 과제로 그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반갑네." 

 

- "그러고 보니 그 소설을 인용한 록밴드가 있었는데, 기억해?" 친구가 그렇게 말한 것은 잠시 뒤였다.
"록밴드?"
"한 10년 전, 우리가 대학 들어가기 전에" 하며 밴드 이름을 말했다. "그게 딱, 론 우드가 롤링 스톤스 멤버가 됐던 무렵이던가 아니, 그전인가."

 

- "음이?" 불량품을 산 거 아닌가 하고 나는 먼저 의심했다. 지나가는 남자 점원에게 맥주를 추가 주문했다. "맥주, 알겠습니다. 주문 접수!" 하는 점원의 씩씩한 대답이 돌아왔다. 

 

- "간주 부분 있잖아, 거기서 느닷없이 뚝 끊어지는 거야. 음이 사라졌다가 1분 정도 지난 뒤에 다시 곡이 시작돼."
"그거, 카세트테이프의 녹음 방지 탭이 안 잘려 있어서, 그 위에 무엇을 중복 녹음하는 바람에 사라진 거 아니야?"
"레코드 단계에서부터 그렇다니까."
"비틀스한테 그런 거 없었던가?"
"앨범 전곡의 트랙과 트랙 사이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있는 건 있지."
"왜 간주를 중단했는데? 사실은 음이 안 들린다고 생각하지만 강아지만 감지할 수 있는 주파수로 된 음이 들어 있나?"
"그것도 비틀스가 했어."
"뭐든지 비틀스가 앞질렀군."
"그 밴드의 레코드 재킷에 주의 사항이 적혀 있었어. '곡 중간에 무음으로 처리된 부분이 있으나 제작자의 의도에 따른 것입니다. 양해 바랍니다' 뭐 이런 식으로."
"화제를 만들고 싶었나."
"그랬다면 실패로 끝났어. 화제 삼은 건 일부 숨은 팬들뿐이었으니까. 내가 짐작하기에는 틀림없는 녹음 실수야." 친구는 맥주잔에 입을 대더니 고개를 젖혀 천장을 올려다보며 맥주를 들이켰다. "재녹음하는 게 귀찮았다든지 돈이 든다든지 어쨌든 그대로 발매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 "그렇게 얼렁뚱땅하니까 해산했나 보네." 나는 그렇게 말한 다음 테이블 위의 빈 접시를 포개었다.
"그렇게 바지런을 떨면서 술집 그릇을 정돈해 주는 녀석은 평생 결혼 못 한다!"
'귀 따가워 죽겠네' 하고 생각하면서 나는 문득 괜한 바람이 들어서 "그 레코드, 사볼까?" 하고 말했다.

 

- "내가 테이프 빌려줄까? 방을 뒤져보면 있을지도 몰라." 그는 우선 그렇게 말을 시작했다가 곧바로 "아니다, 네가 직접 사러가. 틀림없이 레코드 가게에서 근사한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하며 책임지지 못할 소리를 했다.
"대체 어떤 만남이 기다린다는 거야?"
"너, 정의감으로 똘똘 뭉쳐 있잖아."
"그래?" 그러고 보니 어머니에게서도 그런 말을 들었다.
"그래. 그러니까 레코드 가게에서 레코드를 슬쩍하는 녀석을 발견하고 그 녀석을 제압하는 거지.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온 여성 점원과 좋은 사이가 될지도 모르잖아."

 

- "나는 남들만큼은 정의감이 있지만, 소심한 성격이 더 강해." 나는 쓰게 웃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종종 자신의 겁 많은 모습에 환멸을 느낀다. 

 

- 며칠 뒤 휴식 시간에 대학을 빠져나와 레코드 가게를 찾아갔고, 친구가 말한 밴드의 앨범을 구입했다. 기하학적 무늬가 중첩되어 있는 재킷이 추상화 같아서 색다른 느낌을 줬다. 계산대에 들고 가자 점원이 내가 내민 레코드를 쳐다보더니 동지라도 만난 것처럼 웃으며 "이 밴드, 좋아하세요?" 하고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예, 뭐." 나는 알쏭달쏭하게 대꾸했다. 속으로는 이런 식으로 누구와 친해지는 경우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 놀랐다. 원통한 것은 그 점원이 나와 동년배인 남자였다는 사실이다.

 

- 한숨을 쉬며 핸들을 꺾는다. 부모님 댁에서 센다이 시내까지 돌아가려면 고갯길을 두 개 정도 넘어가야 한다. 오른쪽 왼쪽으로 정신 사납게 구부러진 산길에는 경사가 급한 곳도 몇 군데 있는 데다 가로등도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아서 운전하는 데 신경이 많이 쓰인다. 

- 헤드라이트를 멀리까지 비춰보지만 시야의 대부분이 컴컴한 어둠이다. 숲에 우거진 나무들의 윤곽이 흐리터분하기만 해서 그냥 시커먼 장벽처럼 느껴진다.

 

- 현재 

"내 용기가 물고기라면 그 지독한 거대함과 젊음으로 햇빛을 반사하는 수면을 한층 빛나게 할 것이다." 

공중 납치 사건이 일어나기 10분 전, 나는 들고 있는 문고본에 눈을 대고 그 문장을 읽고 있었다. 집을 나올 때 아버지의 서재에서 허락도 없이 뽑아온 책이었다. 이름만 알고 있는 작가였는데 책 말미의 해설을 읽고 만년을 폐가에서 지낸 기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 "그 작가, 좋아하세요?" 하고 옆에서 말을 걸었을 때 처음 나는 그것이 나를 향해 던진 말이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해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 이코노미클래스의 중앙 4인용 좌석 중에 왼쪽 끝에 앉아 있다. 말을 건 것은 오른쪽 옆 자리의 남자였다.
얼굴을 들자 그곳에 머리를 뒤로 동여맨 체격 좋은 남성의 얼굴이 있었다. "갑자기 말을 걸어서 미안합니다." 입술이 얇고 눈매는 가늘고 눈초리에는 웃음 주름이 잡힌 온화한 분위기의 남자다. 콧대가 오뚝한 것이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그는 나보다 머리 하나 정도 위쪽에서 내려다보면서 "그 책, 나도 좋아해요" 하고 말했다. 
"아아." 나는 문고본의 표지를 그에게 보여준다. "딱히 좋아하는 건..."

- 경계심이 일었다. 어쩌면 여행 중인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여성과 일을 만들어보자는 흑심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순간 넘겨짚은 것이다. 자신감 과잉, 아니면 괜한 오해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정신을 바짝 차린다. 도쿄에서 나를 기다릴 애인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의 말이 머리를 스쳤다. 
"아사미는 남자를 끄는 타입이라니까. 접근하는 남자가 있으면 못되게 굴어. 남자란 말이야, 상냥하게 대해주면 호감을 갖고 있다고 착각하니까."
그 경계심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는지 옆 자리의 남자는 곧바로 무안하다는 듯이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아니, 아직 도착하려면 몇 시간이나 남았으니까 잠시 이야기나 나눌까 했던 것뿐이에요" 하며 팔을 벌린다. 무기가 없다는 것을 확인시키려는 듯한 몸짓이다.
 

 

- 나는 대답할 말이 없어서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제 와서 사과하는 것도 어색할 것 같았다. 
잠시 무언의 시간이 흐른다. 그때 '펑' 하고 소리가 나더니 안전띠 착용을 지시하는 표시등이 켜졌다. 기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류가 불안정해서 비행기가 흔들리겠지만 문제는 없습니다." 이 비슷한 취지의, 안심시키고 싶은 것인지 예방을 치고 싶은 것인지 헷갈리는 대사를 내뱉었다. 

 

- 맞는 말이라고 나는 대답한다. 과장한 것도 뽐낸 것도 아니었다. 각양각색의 업종 가운데서도 프로그램이나 네트워크 구축 기술은 국경을 뛰어넘은 공통된 사항이 아주 많다. 속을 뒤집어보자면 온 세상을 말려들게 할 문제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소리가 된다. 
"참가한 보람이 있던가요?"
"뭐, 그럭저럭요." 내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답하자 남자는 "정말요?" 하며 내 속마음이 훤히 보인다는 듯이 말했다.

- "아니요" 하며 나는 웃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전 낯을 가리는 데다 영어도 서툴러서. 너무 긴장하는 바람에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더라고요." 휴가가 끝나는 대로 회사에 출근해서 동료들에게 보고해야 할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울적해질 지경이었다. 

- "아아, 결혼하세요, 축하드립니다." 남자의 그 반응이 겉치레나 과장이 아닌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기에 딱히 나를 꼬드기려는 게 아니구나 싶어서 안심했다. 그는 이름이 세가와라고 했다. 고등학교 선생님이 된 지 2년째라고 한다. 나보다 어렸구나 하며 깜짝 놀란다. 아닌 게 아니라 체격은 떡 벌어졌지만 찬찬히 뜯어보니 확실히 어려 보이는 구석이 있다. 

- "무슨 과목을 가르치세요?" 체육이냐고 덧붙이자 그는 이번에도 눈초리에 주름을 잡으며 웃었다. "몸이 워낙 좋다 보니까요. 다들 그런 오해를 하시죠' 하며 시원스럽게 말한다. "실은 수학이에요." 

- "실은 말이에요." 그러자 그는 표정을 부드럽게 풀었다. 무슨 말을 하려나 했더니 "전 정의의 사도가 되고 싶었거든요" 하고 말했다.
"정의의 사도?" 
"야아, 역시 놀라시는군요."
놀라기는 했다. 하지만 세가와 씨 자신이 꽤나 쑥스러워하는 데다 씁쓸한 말투였기 때문에 미심쩍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 "부모님께서 말이에요. 그렇게 키우셨거든요." 
"정의의 사도가 되도록 말이에요?"
"별나죠. 우습지 않나요?"
"부모님께서 기대가 너무 크신 거예요." 실례라고는 생각했지만 마냥 웃음이 흘러나왔다.
"너무 크시죠" 하며 그가 이번에도 주름살을 만들며 웃었다. "나카지마 아쓰시의 제자라는 소설 아세요?"
"호랑이로 변하는 그거 말이에요?" 내가 가물가물한 기억을 건져 올려 대답하자 그는 아쉽지만 아니라는 듯 웃더니 "그 책에 이런 글이 있어요" 하고 말했다.

- "큰 문제가 있다. 사악한 것이 번창하고 올바른 것은 짓밟힌다는 흔해빠진 사실이다. 악은 응징된다고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언젠가는 파멸한다는 일반적인 경우의 일례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선한 자가 승리를 얻었다는 예는 최근 듣기 힘들지 않은가."
"그런 문장이 있나요?"
"요약한 건데 대강 그런 내용이에요." 제 입으로 말해놓고 겸연쩍은지 그의 얼굴은 괜한 소리를 했다고 후회하는 표정을 짓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주신 책인데요, 그 말이 옛날부터 마음에 남더라고요."
"그 말이?"
"그 소설의 무대는 공자 시대예요. 그런 먼 옛날부터 '왜 악이 번창하고 정의가 짓밟히는 것일까' 하며 한탄했다니 등골이 오싹하지 않나요? 정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악에 필적하지 못했던 거예요. 이 사실이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고 분통 터져요."

- 세가와 씨는 나를 보고 있다기보다는 아득히 먼 어느 곳, 그야말로 전혀 다른 시대를 사는 누구를 동정하는 듯한 눈길을 하고 있었는데 그 탓인지 갑자기 아주 어른스럽게 보였다.

 

- "아버지는 정의감이 강한 분이셨나요?"
"딱히 그렇지도" 하며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매우 평범한, 상식 있는 분이에요. 하지만 어머니를 만나게 된 계기는 아버지의 정의감이 이유였던 모양이에요."

 

- "그렇겠죠"하며 맞장구를 친다. "하지만 정의의 사도가 되라니, 축구 선수나 변호사 같은 거랑 달라서 아주 막연하잖아요."
"여느 사람들 같았으면 정의의 사도라고 하면 변호사나 경찰, 소방관 같은 직업을 떠올리겠지만 아버지는 달랐어요." 그는 지친 목소리로 자조하듯 말한다. "아버지 말씀이 중요한 것은 직업이나 직함이 아니라 준비라는 거예요."
"준비?"
"강한 육체와 흔들림 없는 마음. 그것들을 익히는 준비야말로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요." 세가와 씨는 민망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다. 벌써 흔들리고 있잖느냐고 내가 지적하자 한바탕 파안대소를 했다. "그렇군요" 하며, "게다가 애당초 정의라는 게 무엇인지도 알 수 없고" 하고 세가와 씨가 말한다. 
"그쪽에서 보면 정의지만 이쪽에서 보면 악인 경우도 많으니까요."
"모든 분쟁은 정의 때문에 일어나요."

 

- 객실 승무원 여성이 옆을 지나가다가 '읽으시겠어요? 하는 얼굴로 손에 든 잡지를 나한테 내밀었다. 여느 때 같았으면 비행기 안에서는 반드시 잡지나 신문을 붙잡고 있었겠지만 이번에는 사양했다. 옆 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의 이야기가 훨씬 흥미로웠다. "그런데 세가와 씨는 체격이 정말 좋으신데요." 
"어릴 때부터 자나 깨나 근력 트레이닝을 했거든요" 하며 그는 두꺼운 두 팔을 제 손으로 두드리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팔굽혀펴기나 복근 훈련 같은 거요. 격투기도 시키더라고요. 유도, 검도, 킥복싱, 호신술."
"정말이에요?" 이쯤 되자 나도 슬슬 의심이 가려고 한다. 그건 뭐, 한참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버린 스파르타식 교육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때부터 단련을 받아서 그런지 원래 그쪽에 취미가 있었는지 덕분에 나도 그럭저럭 격투기를 소화하게 됐어요. 싸움에는 안 졌거든요."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그는 또다시 싱글벙글 웃는다.

 

- "공부는?"
"공부는 고만고만했고" 하며 그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공부보다는 선(禪)을 수행했어요."
"선을 수행해요?"
"평온하게 흔들리는 강물의 흐름처럼 막힘도 없으며 그렇다고 큰 물결이 일지도 않는 그런 마음을 얻으려고."
"얻었나요?"
"글쎄요." 세가와 씨는 그야말로 평온한 강물이 속삭이는 것처럼 웃었다.

- "왜 이런 짓을 해야 하느냐고 반항하거나 반발한 적은 없나요?"
꼬리를 물고 의문이며 흥미가 솟아올랐다. 나는 이야기하던 도중에 이런 식으로, 무료한 시간을 보내려고 그가 일부러 엉뚱한 소리를 지어내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참이었다.
"그야 물론 반항심도 있었지요. 어릴 때는 골이 나서는 툭하면 짜증을 냈죠. 하지만 말이에요, 육체를 단련하고 자신감을 갖게 되는 것은 뿌듯하더라고요. 그건 확실해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도 즐거웠고, 선을 수행하면서 반발하는 마음도 사라져 버렸죠."
"세뇌잖아요."
그러자 그는 입을 함지박만 하게 벌린 채 즐거운 듯이 끄덕였다. "종이 한 장 차이죠." 말과는 반대로 후회나 원망 같은 감정은 요만치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약간 날카로운 눈빛을 띠더니 "정의라는 말은 위험하기도 하고요" 하고 또 한 번 되풀이했다. "결국 나는 수학 선생이 됐지만요."

 

- "그래요. 돈이 조금 모였기에 이승의 추억으로..." 하고 말하는 노부인의 목소리가 낭랑해서 내가 있는 곳까지 시원하게 도착한다.
"나쁜 짓을 해서 모은 돈이기는 하지만." 노인이 농담 삼아 한 말인지 웃었다.
"결혼한 지 50년이나 됐지만 이 사람과 해외여행을 하는 건 처음이에요."
"50년..." 나는 그 막막할 정도로 긴 세월에 감동을 받아 앵무새처럼 그대로 읊고 말았다.
"대단하죠? 한 남자와 50년이라니, 이건 수행 아니면 형벌이에요, 틀림없이.”
노인은 부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주의인지 "충실한 인생이에요" 하고 주름살을 깊게 패며 웃는다.

(리뷰자 주 : 나는 이 부부가 이마무라 부부라고 생각한다.)

- "어쨌든 부부끼리 섬 여행이라니 우아하고 좋은데요."
"우아라, 뭐, 대충 그러려나."
"지금까지 성실하게 살아온 것에 대한 포상이라고나 할까." 노인이 말한다.


- "그나저나 방금 세가와 씨가 하는 이야기 들어보니 어떠세요?" 나는 앞의 화장실 쪽을 보며 아직 그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다음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몸을 오른쪽으로 기울여 그들에게 얼굴을 가까이 댔다. 앞 좌석 사람들에게는 이야기가 다 들리겠다 싶었지만 상관없다.
"정의의 사도, 좋지요." 노인은 유쾌한 표정이었고 옆 자리의 노부인도 "젊은 사람들은 좋겠어요" 하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정말일까요. 좀 미심쩍긴 한데요."

 

- "아가씨, 제법 귀여우니까 젊은 친구들이 제 자랑이며 허풍을 잔뜩 마련해서 접근할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말이에요." 노부인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남자란 좌우지간 잘난 체를 해서 자신을 포장하는 걸 좋아하니까."
"그런 사람들이 있죠." 나는 대뜸 대답했다. 남성들과 어울릴 기회가 많지 않은 나에게도 몇 명쯤 남자들이 꼬인 적이 있다. 노부인의 말처럼 "난 고급차를 몰고 다녀", "고교 축구로 국립대에 갔지", "난 치한은 결코 용서 못 해" 하며 자신의 장점을 큰소리로 내세우는 이들도 많았다.

 

-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사실과 전혀 다른 경우가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그들은 그 차는 사업을 위해 팔았다는 둥, 우리 고등학교는 축구 명문이었기 때문에 벤치에 앉아만 있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는 둥, 그 치한에게 대들었다가 우리에게 불똥이 튀다니 그보다 바보 같은 일이 어디 있냐는 둥 횡설수설 핑계를 둘러대어 나를 놀라게 했다.

- '아무런 목적도 없는 공중 납치라니' 하고 나는 생각했다. 깨닫고 보니 무릎 위에 얹어두었던 문고본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내 용기가 물고기라면 그 지독한 거대함과 젊음으로 햇빛을 반사하는 수면을 한층 빛나게 할 것이다."

 

- 그 한 문장이 머릿속을 지나간다.
'내 용기' 하며 마음속으로 외워본다. 도쿄에 있는 남자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고 죽고 싶지 않다는 강렬한 욕망이 솟구쳤다. 굴욕적이기는 하지만, 죽이지 말아 달라고 범인에게 하소연하고 싶은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세가와 씨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때였다. 

 

- 범인들 뒤쪽에 위치한 화장실 문에서 그 커다란 몸집을 느릿하게 내밀었다. '아, 하필 이런 때에' 하고 나는 생각했지만 그다음부터는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  세가와 씨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4인용 좌석을 가로질렀다.

공중을 날듯이 말이다. 
저 커다란 몸집으로 어쩌면 저렇게까지 사뿐하게 움직일 수 있을까 싶어 나는 눈을 의심했다.  

- "설마 실전에서 발휘할 때가 올 줄이야." 세가와 씨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이없다는 표정이기는 했지만 눈초리에는 주름이 잡혀 있다. 
내 오른쪽에 앉아 있던 노부부가 손뼉을 치는 시늉을 했다. "오! 정의의 사도" 하며 작은 목소리로 치켜세웠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세가와 씨는 나에게 등을 보인 채 앞을 향해 간다.
"아, 고맙습니다." 나는 잠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세가와 씨는 고개만 돌려 나를 보더니 "인사는 우리 아버지께"하며 이를 보였다.

 

- 그리고 비즈니스클래스를 향해 모습을 감춘다.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그러는지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로, 어디 하나 경솔한 구석 없이, 마치 훈련 성과를 발휘하는 군인 같은 착실한 모습으로 나아갔다. 

 

- "아아, 살았다." 노부인이 등을 등받이에 기댔다. '아직 안심하긴 일러요'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오른쪽에 있던 노인이 "분명히 잘 처치할 거야" 하며 흐뭇한 듯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보자 "그럼요" 하고 나도 대답하고 있었다. 동감입니다. 납치범이 계획을 세우기 훨씬 전부터 세가와 씨의 준비는 끝나 있었으니까요.  

 

- "몰라." 나는 뚱하게, 하지만 솔직하게 대답했다. "오카자키 씨는 먹힐 거라고 보고 있어."
"오카자키 씨는 좋은 사람이고, 은인인 데다가 우리와 음악 취향도 똑같지만." 고로는 그렇게 말해놓고 뺨을 실룩거리며 "하지만 잘 나가는 밴드 만들기와는 인연이 없어" 하고 쌀쌀맞은 투로 말했다.

"확실히" 하고 나는 인정했다.
옆에서 걷고 있던 데쓰오도 "확실히" 하고 속삭였다.

 

- 카바레에서 연주하던 아마추어 밴드인 우리를 불러 프로로 데뷔시켜 준 오카자키 씨는 기운이 넘치고 정에는 약하며 열정을 가지고 사람을 설득시키는 데 능란한 사람이지만, 그가 키우는 밴드는 하나같이 안 팔리기만 해서 전에 근무하던 사무실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 처음 우리를 만나러 왔을 때, 오카자키 씨는 명함을 내밀자마자 대뜸 "비틀스도 해산했고 벨벳 언더그라운드도 상태가 이상해져서 록이 위험해" 하며 한탄했다. 그러더니 잭 크리스핀의 레코드를 입수할 수가 없다는 둥 현란한 말을 늘어놓았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우리는 "오오!" 하며 희색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가 경애해 마지않는 뮤지션이었기 때문이다. 비틀스나 밥 딜런에 비하자면 잭 크리스핀은 지명도가 낮아 한 손에 사전을 들고 해외 음악 잡지를 뒤적이며 근황을 알아내거나, 열심히 발품을 팔아가며 어렵사리 손에 넣은 수입 레코드를 몇 번이고 줄기차게 듣는 것이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이름이 오카자키 씨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 "글램록도 내 취향은 아니고, 자네들 음악이 훨씬 새롭다고 생각해, 난. 다만 이해를 받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오카자키 씨는 그렇게 말했다. "멀게 보고 도와줄 테니 프로가 되지 않겠나?"

 

- "오카자키 씨도 말이야, 엉성하기 짝이 없어." 료지의 분노는 계속되었다. "우리가 틀린 게 아니라고 말한 주제에 다니 같은 인간을 불러오다니. 그건 바로 지금까지 해온 게 틀렸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잖아."
"뭐..." 하고 말해놓고는 그 뒤에 이을 말이 떠오르지 않아 나는 입을 다물었다. 

 

- 하지만 우리 밴드를 매니지먼트해주려고 일하던 회사까지 때려치우고 독립을 했건만, 제대로 돈 한번 만져보지 못하고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 한 돈으로 먹고사는 오카자키 씨를 단순히매사에 엉성한 대장이라고 몰아붙일 수만은 없다는 것쯤은 료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 나는 어깨에 늘어뜨린 베이스를 내려다보며 프렛을 만지작기린다. 준비운동이라도 하는 것처럼 오른손의 손가락을 툭투다닥 움직이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료지가 기타를 안고 다리를 벌리는 것이 보였다. 고로가 마이크 스탠드에서 마이크를 빼더니 양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나는 전원의 표정을 차례대로 둘러본 다음 고개를 끄덕인다. 데쓰오가 스틱을 두드리며 숫자를 세는 소리가 들린다. 료지의 기타 소리가 울리는 것과 동시에 나는 오른손 손가락으로 현을 두드린다. 

 

- 연주를 하면서 나는 속으로 '침착해' 하고 나 자신에게 말한다. 평소와 달리 자신이 몰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베이스에서 꿈틀대며 나온 저음이 내 주위에 소용돌이를 만들고, 나는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음이 꼬리를 물며 튕겨 나와 소용돌이는 끊이질 않는다. 그 소용돌이가 무척이나 기분 좋게 느껴져서 냉정을 잃을 것만 같다. 

- 코드를 울리는 료지의 기타가 질주에 탄력을 붙이자 그 소리 위로 시원스러운 고로의 목소리가 올라탄다. 결코 절규하는 법도 없고 그렇다고 혀 짧은 소리를 내는 법도 없이 담담하기만 한 낮은 목소리가 내 베이스와 뒤얽힌다. 커팅하는 기타 소리가 스튜디오 안의 공기를 아름답게 조각한다. 이렇게 날카로운 커팅을 해내는 기타리스트는 정말 귀한데, 참 아깝다고 멍하니 생각한다. 

"내 고독이 물고기였다면 그 거대함과 맹렬함 앞에 고래마저도 달아날 거야. 틀림없이 그럴 거야."

 

- "오카자키 씨, 이 노래가 누구에게 가서 닿을까." 고로는 노래하는 것도 한탄하는 것도 아닌 태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말이야, 누가, 듣고 있냐고. 지금 이 앨범을 듣고 있는 녀석이 있다면 가르쳐 줘. 닿고 있는 거야?" 
내 위치에서는 마이크를 쥔 고로의 뒷모습, 그것도 간신히 왼쪽 귀만 보일 뿐이었기 때문에 어떤 표정으로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여느 때와 다름없는 온화한 말투이기는 했다. 
"이거, 좋은 노랜데, 아무한테도 닿지 않는 거야? 거짓말이지. 오카자키 씨, 누구에게든 닿게 해. 우리는 다했어. 하고 싶은 걸 했고 즐거웠지만 여기까지였어. 닿게 해, 누구에게든." 고로는 그렇게 말하더니 시원한 목소리로 웃었다. "부탁이야." 

 

- "야, 그 혼잣말은 뭐야. 너무 갑작스러워서 어찌나 놀랐는지 연주고 자시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네." 료지가 고로의 어깨를 찔렀다. "웬 낯간지러운 소리냐고 하며 야단스럽게 닭살을 문지르는 시늉을 했다. 
"아아." 고로가 수줍어했다. "뭔지 말이야, 이렇게 좋은 곡인데, 아무에게도 닿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만 넋두리가 나오더라고." 
"넋두리였어?" 료지가 웃었다.
순진해 빠졌다며 다니가 중얼댔다.

 

- 나는 잠자코 고로의 표정을 보고 있었다. 괴짜 같은 녀석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어쨌든 말이야." 그때 다니가 벽시계를 보며 입을 열었다."방금 간주 부분, 새로 녹음할 테니까 잠깐 쉬고 바로 시작하자." 
"이쯤 되니까 역시 새로 녹음해도 되는구나." 료지가 목청을 높였다. 
"당연하지, 그런 대사를 넣은 채 발매할 수는 없잖아." 
"아니, 재녹음은 없어." 그러자 오카자키 씨가 당당한 말투로 끼어들었다. 모두 오카자키 씨를 쳐다봤다. 고로도 멀뚱한 얼굴을 하고 있다.
"아까 말했듯이 이 곡은 이걸로 끝이야. 나쁘지 않아, 아니 그게 아니라 무척이나 좋았어. 그보다 더 좋게는 안 될 거야."

 

- "그럼, 지우자." 오카자키 씨는 단박에 대답했다. 가슴팍이 두꺼워서 그런지 자신만만하게 나오니까 가뜩이나 큰 덩치가 더커 보였다. "거기만 자르자." 
"자른다고요? 전부?" 나는 무슨 뜻인지 감이 안 잡혀서 물었다. "간주를 없애자. 뭐 어때."

- "아니." 오카자키 씨는 고민하는 시늉도 한 번 안 하고 잘라 말했다. "고로의 외침을 누구에게 전해주고 싶잖아. 그 소리 없는 부분에서, 누가 무엇을 느낄지도 몰라. 안 그래?" 

 

- 료지가 또 품위 없는 소리를 했다. "아무것도 모른다니까. 우리가 싫기도 했겠지만 그렇다고 제 생각만 밀어붙이고 말이야." 
그러자 오카자키 씨가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잠깐 머뭇거리더니 "다니 군은 자네들의 음악을 좋아해" 하며 웃음 지었다.
"예?" 우리는 입을 모아 소리 냈다.
"정말이야. 내가, 자네들 노래를 좋아하지도 않는 인간한테 프로듀서를 맡길 거라고 생각해?" 오카자키 씨가 그렇게 말했고, 우리는 "영락없이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하고 대답했다. 
"전에, 전철에서 다니 군을 만난 적이 있어. 자네들 앨범을 끌어안고 있더라. 내가 자네들과 아는 사이인 줄이야 상상도 못 했던지, '오카자키 씨, 이 밴드 멋져요' 하면서 소개까지 해줬을 정도야."
"거짓말이겠지." 료지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 말이 진실인지, 아니면 오카자키 씨가 지어낸 이야기인지 나도 알 길이 없다.

 

-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멍하니 있었다. 맥주를 마시고, 깍지콩을 벗겼다.

 

- "뭐든 좋아요. 물고기 이야기니까 <물고기의 노래>라고 해버릴까. <피시(fish)>도 좋고."  
"영어로 피시 스토리(fish story)라고 하면, 허풍이라는 뜻이야."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데쓰오가 깍지콩 접시에 손을 뻗으며 말했다.
"오오" 하며 우리가 감탄하자 이런 영어 정도는 배워두는 게 좋다고 말하고 데쓰오가 웃었다.

 

- "그거 봐." 오카자키 씨는 호쾌하게 웃었다. "그거 보라니까. 즉, 자네들 노래도 쓸모가 있단 말이지."
"그건 음악의 효과와는 전혀 무관한 거잖아." 료지의 말이 전적으로 옳다.
"잔소리가 많네, 어때서 그래. 그래서 말이야. 그 결혼한 두 사람에게도 아이가 생겼단 말이지."
"아직도 안 끝났어요?" 하고 고로가 머리를 쓸어 올리더니 점원에게 꼬치구이를 추가 주문했다. "꼬치구이 알겠습니다. 주문접수!" 하고 점원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암, 안 끝났고말고. 그래서 그 아이가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거야. 어때, 굉장하지?" 
"훌륭한 사람이라니, 어떤?" 내가 묻는다.
"노벨상을 받는다거나, 있잖아."
노벨상이라니, 발상 자체가 촌스럽다며 우리는 오카자키 씨를 구박했다.

 

- "시끄럽네 진짜. 어쨌든, 자네들의 곡이 돌고 돌면서 세계를 유익하게 한다. 그런 일도 있을 수 있다는 거야." 

 

- 나는 그때, 다다미에 앉아 있는 멤버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본 다음, 불쾌하게 취한 오카자키 씨를 봤다. 그리고 "실패한 거라고 생각해요?" 하고 물었다. "우리 때문에 말이죠. 회사까지 그만두고 매니지먼트해줬는데, 실패했어요?" 
취한 오카자키 씨는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지만 "실패했지" 하고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그 순간 나와 료지가 투덜댔다.

 

- "하지만 별수 없잖아." 오카자키 씨가 말을 이었다. "너희 밴드, 나, 미치게 좋아했으니까." 

- 쑥스러웠던 것은 아닌데, 나는 "건배나 할까" 하며 컵을 들어 올렸다.
무엇을 위해 건배하는 거냐며 쓸데도 없는 일에 전원이 목을 매기에 "다니 씨를 위해서, 뭐 이 정도면 되겠지?" 하고 적당히 갖다 붙였다.

 

- 10년 후 

네트워크 전문가라는 직함과 그녀의 성과, 그리고 사진으로 본 반듯한 이목구비에서 다치바나 아사미는 논리 정연하고 다가서기 힘든 여성일 것이라고 넘겨짚고 있었기에, 만났을 때는 의외였다. 나는 회사 응접실에서 그녀를 취재하고 있다. 요 몇 개월간 주야장천 같은 내용의 취재만 받고 있어 틀림없이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이었을 텐데도 그녀는 온화하게 응대해 주었다. "결과적으로 다치바나 씨가 세상을 구한 것이나 마찬가지네요"하고 말하자 그녀는 "과찬입니다" 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다치바나 씨가 그, 네트워크의 결함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세상이 발칵 뒤집혔을 거예요. 예전에 상정했던 2000년 문제의 결과 같은, 그런 문제가 생겼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하지만 그건 네트워크의 결함이라기보다는 인위적인..."

"예, 누가 심어놓은 것이었지요. 그러니까 더 위험했지요."


- 인터넷이 널리 보급된 현재, 모든 기업과 국가는 각종 통신 네트워크의 보안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를 위한 전문가도 늘어났다. 하지만 제아무리 삼엄한 감시의 눈을 번득이고 있어도 틈새를 노리는 자들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주체하지 못할 만큼 시간이 남아돌고, 호기심은 넘치고, 도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요 몇 개국의 교통기관과 발전소 시스템에 동시에 침입하여 오작동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 "신날 것 같아서." 특별한 사상이나 신앙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고, 유럽에서 체포된 그들은 동기를 밝혔다. 요즘 세상은 거의 대부분을 시스템에 맡기고 인간을 배제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시스템을 조금만 파괴하면, 가령 변수에 일부 오버플로만 발생시키면 대참사가 일어난다. 집에서 컴퓨터만 조작하면 세계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니 신나지 않냐고 한다. 

- 용케도 눈치챘다면서 전문가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했다. 신속한 대처에 많은 엔지니어들이 경탄했지만 그보다는 다치바나 아사미의 겸허하고 예의 바른 성격에 감동을 받았다. 만약 자신의 영웅담을 떠벌리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자신의 발밑에 두고 보는 태도를 보였다면 다른 이들도 선뜻 협력할 마음이 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 "일반인들에게는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다치바나 씨가 없었다면 정말 지금쯤 세상이 어떻게 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하고 나는 겉치레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민망하다는 듯 웃다가 "그 말을 받을 사람은" 하며 말을 이었다. "저, 10년쯤 전에 비행기 공중 납치를 당한 적이 있어요."
나는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게?"
반사적으로 녹취기의 스위치가 제대로 켜져 있는지 눈으로 확인했다.
"농담이 아니라, 우리 전부 그때 죽었을지도 몰라요. 자포자기해 버린 아무 목적도 없는 범인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때 우리를 구해준 사람이 있었어요."
 

- "인사는 그 사람의 아버지께..."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 하지만 나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우선은 의례적인 웃음을 지으며 아리송한 맞장구를 쳐줬다. "아, 그렇습니까" 하고.

 

- <피시 스토리 Fish Story>


- "괜찮다니까. 아직 경기 중이잖아."
1년 전부터 동거하는 오니시가 보기에 그 '당당한 느긋함'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 반응이 무척이나 이마무라답기는 했지만 그래도 역시 울화통이 터진다. 한숨을 쉰 다음 "맘대로 해, 난 저쪽 방에 갈 테니까" 하고 거실에서 침실로 이어지는 문을 가리켰다. 

- "나도 곧 갈게." 이마무라는 다시 만화의 세계로 돌아가려고 한다. 
"처음 읽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야." 오니시는 빈정대는 기분을 잔뜩 실어서 말했다. 이마무라가 읽고 있는 그, 쌍둥이 형제와 소꿉친구의 연애를 그린 고교 야구 만화는 아주 유명한 작품이었다. 

(리뷰자 주 : 아마도 아다치 미츠루의 <터치>.)

 

- "엥, 이거 유명한 거야?"
"엥, 설마 처음인 거야?"
"금시초문이야."
"거짓말" 오니시는 잠깐 놀랐다가 곧장 좋은 생각을 떠올리고는 "아, 미리 말해두겠는데 그 쌍둥이 동생, 조만간 사고로 죽을 거야" 하고 심술을 부리느라 중요한 줄거리를 말해버렸다. 
"그럴 리가 있나, 재미도 없는 농담을 하고 그래" 하며 이마무라는 책장을 넘긴다. "이렇게 기운이 철철 넘치는데 죽을 리가 없잖아" 하며.

 

- "이런 작자들은 '이런 걸 가지고 사기라니 연애도 못 하겠네' 따위 소리를 하면서 딴소리하게 되어 있어. 법으로 심판하기 어려울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우리가 법을 대신해서 벌을 준다는 건가요?" 
"그렇지. 이건 단순히 돈을 노린 빈집털이가 아니라, 악인을 응징하려는 빈집털이라고." 나카무라가 흡족한 듯이 그렇게 말한다.
"역시 나카무라 전무님!" 이마무라는 가슴이 설레어오는 것을 느꼈다. 단순히 빈집털이를 한다는 말보다는 법을 대신해서 벌을 주러 왔다고 말하는 편이 훨씬 듣기에 좋다. "아, 그런데 통장 같은 거라도 찾아내셨어요?"

 

- "뭐 하는 거야, 저 애." 오니시는 분통이 터져 견딜 수가 없었다. "모처럼 사람이 도와주려고 마음먹었더니." 

 

- "아아, 그 뭐더라 우연히 친구랑 딱 마주치는 바람에."
그저 친구라고 말하기에는 그 남자와 몹시도 친해서, 밤에 함께 호텔에서 묵은 일까지 있을 정도였기 때문에 오니시는 대강 말을 얼버무리고 넘어갔다. 그래서 "아, 그러고 보니" 하고 이마무라가 말에 힘을 주었을 때는 눈치챘나 싶어서 잠깐 뜨끔했다.

 

- "오자키는 나와는 백팔십도로 다른 인생을 살아왔지만."
"그야 그렇겠지." 한쪽은 장래에 크게 활약할 것으로 기대되는 야구 소년이었을 것이고, 또 다른 한쪽은 수업 시간에 배운 피타고라스의 정리도 까맣게 잊어버리는 장래의 빈집털이였으니 하고 생각하며 오니시는 웃는다.  
"저기요, 구로사와 씨. 아까 오자키 집에 있다가 생각난 건데, 옛날에 우리 엄마가 고시엔 중계방송을 텔레비전으로 보고 있다가 나한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뭐라고?"
"'저거 좀 봐, 너랑 동갑내기 친구가 홈런을 쳐서 남들을 기쁘게 하고 있어'라고. '같은 나이의 고등학생인데 어쩜 이렇게 다를 수가' 이런 말도..."
그렇게 말한 뒤 이마무라는 살짝 웃었는데, 그 쓸쓸함이 밴 표정은 오니시로서는 눈에 익지 않은 표정이었다. '이마무라도 저렇게 웃을 때가 있네' 하고 생각한다. 
  

- "그랬군" 하며 구로사와가 나지막하게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대꾸를 했다. 

 

- "뭐, 나는 허구한 날 학교도 땡땡이치고 밤만 되면 흥청망청해지는 거리에서 죽으나 사나 여자 애들을 꼬드기고 있었으니까, 그 말마따나 같은 고등학생이라도 천지차이긴 했지만요." 
"여자 애를 꼬드겨서 집에 데리고 가고 그랬구나?" 하고 오니시는 말한 다음 스스로 생각해도 재미없는 줄 잘 알면서 "또 다른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었다는 거네?" 하고 도깨비한테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무의식 중에 품위 없는 농담을 입에 올렸다. 
한순간 차 안에 냉기류가 흘렀다.
"와카바 씨, 그건 좀 심해."
"심하다니 뭐가."
"저질 농담이야." 이마무라가 동정하는 빛을 띤다. "중년 남자들이나 할 법한 진부한 농담이잖아."
혹시 경멸하는 게 아닐까 하면서 슬그머니 백미러를 봤지만 구로사와는 무표정했다.

 

- "그럼 난 줄이 꽉 들어간 죄수복 비슷한 옷을 입고 갈게. 키는 150센티미터쯤에 오동통한 느낌이야."
"죄수복에 몸은 오동통이라."
"아가씨는 어떤 스타일이야?"
"스테인드글라스 앞에 아, 근사하다 하는 느낌이 팍 오는 여자가 있으면 그게 저예요."
"그쪽도 상당한 괴짜구나." 이마무라의 어머니가 기막히다는 듯이 말하기에, "만만치 않으시잖아요" 하고 오니시는 강하게 받아쳤다.

- "어머나, 아가씨, 정말 예쁜 처녀잖아." 만나자마자 이마무라 어머니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가 그것이었다. 그래서 오니시는, '어머님 은근히 좋은 사람이잖아' 하고 생각했다.
"어머니도 상당히 죄수 같으세요."

 

- 한 번도 불편한 마음을 느껴본 적 없지만, 계산대에서 돈을 내고 있는 이마무라 어머니의 등을 바라보고 있자니 송구스럽기 짝이 없었다.
아무 무늬 없는 흰색 바탕에 브랜드 이름만 들어가 있는 종이가방을 가게 밖에서 건네받고 "고맙습니다" 하며 오니시는 꾸벅 절을 했다. 

 

- "그 정도는 전혀 아무것도 아니니까 말이지."
"말이지?" 뭔가 그 뒤에 골치 아픈 교환 조건이 따라올 것 같은 예감을 오니시는 느꼈다.
"이번에는 내 쇼핑에 따라다녀 줘."
"옷이에요?"
"카메라. 뭐더라, 요즘에는 사진관에 안 가도 사진 볼 수 있는 거 있잖아. 그런 게 갖고 싶거든." 
"어디에 쓰시려고요?"

"도촬(도둑 촬영)에. 도촬 하려고."
"뭘 도촬 하시려고요?"
"나무라든가 까마귀라든가."
따지고 보면 걔네들한테 허락도 받지 않고 찍는다는 의미에서는 도촬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굳이 그런 이름으로 부를 필요는 없지 않나 하고 오니시는 생각했다.

 

- 오늘 최고로 운 없는 자리가 '처녀자리'로 소개되었다. 독선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경향이 있으니까 남에게 양보하는 미덕을 보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처녀자리인 이마무라는 울상을 지었고, 불난 데 부채질한다고 아나운서가 "행운의 아이템은 그리스 토산품"이라고 덧붙이자 "대체 어쩌라는 거야" 하며 한탄했다.

 

- "이름이랑 주소랑 모조리. 무서운 세상이야. 주변에는 있잖아, 업자들만 잔뜩 있더라고." 이마무라는 거의 엎드린 자세로 팔을 뻗더니 바닥에 아무렇게나 뒹구는 가방에서 종이를 끄집어냈다. "차량등록증이라나 뭐라나. 그래서 소유자의 이름은, 오치아이 슈스케."

 

- "세상 쉽게 보는군."
"역시 그래?" 순식간에 불안한 표정을 짓는 이마무라가 사랑스럽다.

 

- 웅크린 자세로 팔짱을 끼고 바닥에 놓인 차량등록증을 째려보며 궁리를 하는 이마무라를 내버려 두고 오니시는 몸단장을 하기 시작한다. 세수를 하고 화장실에 갔다가 나와서는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렸다. 화장을 하고 있자니 전날 밤에 이마무라의 어머니가 "여자들은 보통 남자들보다 해야 할 게 너무 많아 그치? 화장도 해야 하고 화장을 지우기도 해야 하고, 그런 점에서 남자들은 엉성하잖아. 조잡하고 제 몸 편할 궁리밖에 안 하고" 하며 재잘대던 모습이 떠올랐다. '정말 그래. 귀찮아' 하는 실감을 하며 오니시는 거품 묻은 손으로 머리를 매만진다. 

 

- "알았어, 와카바 씨." 이마무라는 어느새 벌떡 일어나서는 마치 숙제를 끝낸 아이처럼 드높은 소리로 말했다.
"알다니. 뭘?"
"공포야" 하고 이마무라는 담담하게 말했다. "건들건들한 젊은이를 얌전하게 만들려면, 공포야, 역시."

"협박은 안 통할 것 같은데." 이 말은 좀 전에도 했다.
"협박이 아니라 좀 더 영적인 것."

 

- 손잡이를 비틀어 문을 연 순간, 왜 그런지 자신의 주거지가 다른 사람의 집인 것만 같은 야릇한 위화감을 느낀다. 수상쩍어하면서 신을 벗고 안으로 들어선다. 낯선 냄새를 느낀다. 있을 리 없는 타인의 호흡을 느낀다. 심장이 방망이질을 하기 시작하여 아프다. 설마 하며 어두운 실내를 노려본다. 벽으로 손을 뻗어 전깃불을 켠다. 그러자, 벽장 문짝에서 본 적 없는 무늬를 발견한다. 새빨간 글씨다. "그 여자 건드리지 마" 하고 마구 휘갈긴 글씨가 보인다. 순간 한줄기 차가운 기운이 등을 타고 쓱 지나가면서 옴짝달싹도 못하게 된다. 

 

- "미인계라는 게 21세기에도 통한단 말이에요?" 오니시는 엉겁결에 되묻고 만다. 낡아빠진 수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여자가 유혹하면 대부분의 남자는 무방비 상태가 되는 법이야" 하고 말하는 구로사와는 결코 무방비 상태가 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기는 그 애, 남자가 물고 빨고 할 얼굴로 보이기는 하더라." 오니시는 괜히 화가 난다.
"구로사와 씨는 꼭 본 것처럼 말해."
"거짓말은 도둑질의 시작이니까." 구로사와는 운전석에 기대어 가만히 앞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하는 말은 믿지 마."

- 오니시는 손목시계를 본다. 해는 많이도 기울어 주위가 어둠해졌고 밤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오른쪽 창에 얼굴을 붙이고 편의점을 보고 있자니 문득, 눈 깜짝할 사이에 하루가 끝났구나 하는 허탈한 마음이 들어 "왠지 허무해" 하며 푸념을 했다. '내 하루는 이런 식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리고, 그 하루가 쌓인 1년도 결국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리겠지' 하고 생각했다. 

- "뭐랄까... 이마무라의 응석을 다 받게 해서, 죄송합니다" 하고 오니시는 우선 사과를 했다. "요전에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역시 구로사와 씨와 대화를 하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모양이에요." 
"나도 전혀 관계없는 건 아니니까."
"무슨 관계요?" '도둑지간이니까?' 하고 생각하며 오니시는 고개를 갸웃한다.
"애초에 내가 쓸데없는 짓을."

- "아아, 처음에 오자키의 집을 가르쳐준 게 구로사와 씨였죠." 오니시가 기억해 낸다. "하지만 그런 데까지 마음을 쓰시다니 구로사와 씨 역시 좋은 분이네요." 
"아니." 구로사와는 쑥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오해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난 좋은 사람이 아니야."
"도둑이라서?"
"뭐, 그렇지." 구로사와가 말한다. "도둑질을 한다는 것은, 그 때문에 해를 입는 누가 있다는 소리야. 아무리 변명을 해봤자 피해자를 만들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지. 될 수 있으면 상대의 고통을 줄이려고 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최종적으로는..."
"최종적으로는?"
"상대야 어찌 되든 딱히 신경 쓰지 않아."

- "정말이에요?"

이마무라에게서 들은 이야기만 생각한다면, 구로사와는 타인의 감정을 무시하지 않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렇게 말하자 구로사와는 자조하듯 웃었다. "난 타인을 무시해" 하며 냉정하게 말했다.

"이모저모 신경은 쓰지만 최종적으로는 '그래서?'라는 느낌밖에 못 가져. 그래서 어쩌라고? 타인을 향한 내 관심은 그 정도 선이야." 

- 그 뒤 구로사와는 입을 꾹 다물어버렸고 차 안은 절간처럼 조용해졌다. 정적이 계속되니 긴장감이 느껴져 얼른 이마무라가 돌아오기를 바라며 오니시는 창밖을 바라본다. 뭘 꾸물대는가 하는 조바심까지 난다.

- "너는 왜 저 녀석이랑 사귀지?" 문득 구로사와가 그렇게 말을 걸었다. 
"난감한 질문이네요." 오니시는 움찔했다. 그리고 그 질문을 다시 자신에게 던져본다. 질문과 맞닥뜨린 자신이 안간힘을 다해 대답을 찾는다. "그냥..." 머리보다 입이 빨랐다. "...일까요. 그냥 함께 지냅니다."
'기린을 보여줄 때까지는 함께 있고 싶어요'라는 말도 하고 싶었다.

- "그냥이라." 구로사와의 말투는 지극히 담담했지만 그럴수록 부정(不貞)한 자신의 죄를 추궁당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부랴부랴 "아, 하지만 좋아해요. 물론" 하고 변명과도 닮은 말을 저도 모르게 덧붙인다.
"아니, 딱히 염탐을 하고 있는 게 아니야." 구로사와가 웃었다. "그냥, 녀석은 신기한 남자니까 가까이에서 지내는 네가 어떤 감각을 가지고 함께 있는 것인지 알고 싶었을 뿐이야."
"신기하다고요?" 오니시는 의문형으로 발음한 뒤에 "뭐, 신기하죠" 하고 고쳐 말한다. "영리한 건지 멍청한 건지."
"영리한 건지 멍청한 건지." 구로사와도 같은 말을 읊조리듯이 되풀이했다.
"구김살 없는 강한 힘 같은 건 가지고 있지만요."
"그렇지, 녀석은 강해."

"푸념이라든가 험담 같은 것도 안 하고요."

- "아, 이거 콩소메 맛이 아니잖아." 한 움큼 입에 던져 넣고 씹어 삼킨 뒤에야 오니시는 깨달았다. 봉지를 들어 보니 커다란 글씨로 '소금 맛!'이라고 적혀 있다. 꼬랑지에 느낌표는 대체 왜 찍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콩소메 맛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콩소메와 소금 맛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단 말이야?" 하며 운전석의 구로사와가 웃는다.

 

- "미안, 미안" 하며 이마무라는 서둘러 봉지를 내민다.
"그렇게 넋 놓고 다닐래, 날려버릴 테다!" 하고 한바탕 나무란 뒤 오니시는 자신이 들고 있던 봉지를 내밀었다. 하지만 이마무라가 그 봉지를 받으려고 손을 뻗었을 때 "아무래도 관둘래" 하고 오니시는 손을 거두어간다.
"관둔다고?"
"소금 맛도 먹어보니까 은근히 맛있다." 오니시는 본심에서 그렇게 말한 것인데 믿을 수 없다는 것인지 이마무라는 한순간 행동을 멈추고 오니시를 말똥말똥 바라봤다.
"거짓말 아니라니까." 오니시는 목청을 높인 다음 소금 맛 봉지를 잡아당겼다. "콩소메 먹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소금도 먹어보니까 나름대로 괜찮네. 착각해 줘서 고마워해야 하나."

- 그래도 이마무라는 더 뚫어지게 오니시를 바라보았고, 입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뭐야?"
"아니."
"뭐, 문제 있어?"
"아니, 그건 아닌데." 그렇게 말하는 이마무라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오니시는 깜짝 놀라서 "엉?" 하며 눈썹을 찌푸렸다.
신경이 쓰였는지 구로사와도 백미러로 이마무라를 살핀다.
그러는 와중에도 이마무라의 눈동자에서는 눈물방울들이 또록또록 흘러내렸다.

- "잠깐 왜 우는 거야? 그렇게 소금 맛이 먹고 싶었어? 알았어, 줄게." 그렇다고 우냐고 오니시는 생각한다.
이마무라는 아무 말도 없이 흐느껴 울면서 손에 든 봉지에 손을 넣더니 포테이토칩을 입에 집어넣었다. 질질 울면서 먹는 과자가 퍽도 맛있겠다.
"저기요, 구로사와 씨, 얘 이상해요."

 

- "구로사와 씨." 오니시 옆의 이마무라가 중간에 입을 열었다. 너무 갑작스럽고 몽롱한 말투였기 때문에 꼭 잠꼬대를 하는 것만 같았다. 실제로 이마무라는 창에 이마를 붙이고 눈을 감고 있다. "구로사와 씨, 나,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무슨 소리야." 구로사와의 목소리는 다정하다고 할 것도 퉁명스럽다고 할 것도 없었다.
"사는 게 괴로워요."

- 오니시는 그 말을 들으며 1년 전 건물 옥상에서 투신자살하려고 했던 자신을 기억해 냈다. 그때 "기린 타고 갈 테니까" 하고 허풍을 떨며 자신을 구하러 왔던 이마무라의 그 든든하던 힘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그래, 괴롭구나." 구로사와가 말한다. 이런 장면에서 "다들 괴로워" 같은 소리를 하지 않으니 참 근사하다고 오니시는 생각한다.

- "나, 괴로워요."
"너는 훌륭해."
"훌륭하지 않아요."
"대체 무슨 소리들을 하는 거예요?"
"이제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아무것도 안 해도 좋지 않을까."
구로사와가 그렇게 대답하는 것을 들으며 오니시는 자신의 눈꺼풀이 천근만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잠이 와' 하고 생각했는데 벌써 자고 있었다.

- 오니시는 또다시 깍지콩을 집어 든다. 딱히 먹고 싶다기보다 는 타성 같은 것이었다. 타성 때문에 먹히고 있는 깍지콩의 처지도 참 딱하다는 생각이 든다.

 

- "고등학생 때는 천하무적처럼 보였는데." 이마무라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그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오자키는 "그때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만능이라고 착각했던 거죠" 하며 자조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고 한다.
지난날의 영광에만 젖어 사는구나 하며 오니시는 가벼운 혐오감을 느낀다.

 

- "그나저나 다다시가 아는 사람 중에 이렇게 근사한 사람이 있을 줄이야." 이마무라의 어머니가 고개를 돌려 구로사와를 보며 감탄하고 있다. 찾아오는 동안 차 안에서 본 구로사와의 언동에 감동한 모양이다.
"전 근사하지 않아요.” 구로사와가 괴롭다는 듯이 입술을 일그러뜨린다.

- "엄마, 구로사와 씨는 못하는 게 없다." 소년이 제 친구 자랑을 하는 것처럼 이마무라는 자랑을 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신세 지고 있는 분이 있어서 실은 그분도 만나게 해주고 싶었는데 말이야" 하는 말도 덧붙였다.
"나카무라 씨?" 오니시가 작은 소리로 물어보자 "응, 맞아, 나카무라 전무님" 하며 웃었다. 두목님이라고 부르기에는 아무래도 눈치가 보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카무라 씨는 안 만나게 한 것이 옳은 판단이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꿀꺽 집어삼켰다. 

 

- 오니시는 두 사람 옆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게 느껴졌다. 그리고 "스타의 엄마가 되고 싶었어?"하고 이마무라가 물었을 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뚫어져라 이마무라를 응시하고 말았다. 이마무라는 상념에 잠긴 표정도 아니었고 얼굴이 굳어 있지도 않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태평하고도 순진한 얼굴이었다. 오니시는 자신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려고 크게 숨을 빨아들였다. 공기가 코 안쪽에서 살랑살랑 흔들렸다. 
"스타의 엄마라..." 이마무라의 어머니는 흥미가 없는지 심드렁하게 대답할 따름이었다.

 

- "진짜요?"
"단순한 내 감이지만."
"구로사와 씨의 감은 백발백중이에요."

백발백중이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짜놓은 것임을 오니시는 알고 있었다. 

 

- "그, 오치아이 슈스케의 여자 말이야" 하고 그는 말했다. "내키는 대로 무작정 행동하는 젊은 친구들은 위협하면서 넌지시 미끼를 던지면 의외로 말을 잘 들어. 너희들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 남녀는 그런, 이용하기 쉬운 녀석들이라고 생각했지."

- "내 생각이 짧았어." 구로사와가 말했다. 오니시는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기에 무언중에 되묻는 꼴이 되었다. 
"나는 사람들이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며 사는지, 느낄 줄을 몰라." 딱히 자신을 냉소하는 것도 아닌 듯한 구로사와는 튀긴 감자 칩을 집으며 말을 잇는다. "그 녀석과 오자키가 뒤바뀐 인생을 살아왔다는 사실을 안 순간, 물론 놀라기야 했지만 별반 중대한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그래서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있는 사실을 그대로 보고했지. 녀석이라면 녀석답게 '예, 진짜요? 그런 놀라운 일이'라는 말로 끝날 거라고 생각했어."

 

-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나요?"
"그래." 구로사와는 끄덕인다.
"하지만 그 녀석은 사실을 알고는 충격을 받았어."


- "무엇에 그렇게 충격을 받은 거라고 생각해?" 구로사와는 그 답지 않게 자신 없는 표정을 지었다. "난 모르겠어" 하고 말했다. "그 녀석은 대체 뭐에 충격을 받은 거지?" 
구로사와가 남의 의견을 묻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오니시는 약간 당황했다. 구로사와 자신도 당황하고 있다.
"아마도..." 하고 오니시는 대답한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또 어떨지 잘 모르지만, 게다가 동거라고 해봐야 고작 1년 남짓이지만, 이마무라의 성격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 자신의 어머니와 핏줄이 다르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친어머니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아닐 거예요."
"그럼 대체 무엇에 그렇게 충격을 받은 거야?"
"어머니가 가엾다는 생각이 든 게 아닐까요? '우리 엄마, 원래는 훨씬 훌륭한 아들을 볼 수 있었던 건데' 하면서." 
"아아" 하고 이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이 구로사와가 한숨을 내쉰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 팽팽한 긴장감으로 넘치는 투수전이 줄곧 이어지다가 7회 말에 변화가 생겼다. 원아웃 상태부터이기는 했지만 상대 팀의 신인투수가 지치기 시작해 연달아 두 번의 볼넷이 나온 것이다. 그때 타석이 하위 타선으로 넘어가자 상대 팀은 내친김에 만루책을 쓰기로 했다. 헌칠하게 생긴 7번 유격수가 타석에 나와 관객들의 기대와 성원을 한 몸에 받았지만 제1구째에 플라이 볼로 ...

 

- "어어" 하며 구로사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왔군."
전전날 밤에 이야기를 들었을 때 오니시는 "이마무라를 격려하거나 달래주려고 오자키를 타석에 세우려는 거예요?" 하고 구로사와의 뜻을 물어봤다. 
구로사와는 별말 없이 "그런 게 아니야"라고만 대답했다.

- "혹시 구로사와 씨, 그 자리에서 오자키가 극적인 홈런이라도 날릴 거라고 기대하는 거예요?" 오니시는 그런 질문도 해봤다. 설마 그것으로 의기소침한 이마무라의 기운을 북돋아줄 수 있을 거라는 꿈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 거라면서.
"아니." 구로사와는 쓴웃음을 지었다. "생각해 봐. 홈런이 나온다고 해서 그걸로 무엇이 변해?" 하며 빈정대듯 말한다. "그까짓 홈런 하나로 사람을 구할 수 있어?"
듣고 보니 옳은 말이라고 오니시도 생각했다. "그저 공 하나가 멀리 날아가는 것일 뿐이니까요."

- 그 직후, 투수가 세트포지션으로 던진 공을 오자키의 방망이가 때렸다. 

- "아" 하고 오니시가 내뱉었고 옆 자리의 이마무라도 "아" 하고 말했으며 아마도 관중석에 있는 사람들 전부가 "아!"하고 작게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 경기장의 잔디와 맨땅의 색깔이 조명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외야석의 오니시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을 마구 흔든다. 머리가 텅 비고 한순간이기는 했지만 온 세상이 무음 상태가 되었다. 
환희의 물결이 관중석의 사람들을 뒤덮었고, 이마무라가 마구 흘러넘치는 눈물을 훔치지도 않고 포효하는 가운데 타구는 1루석의 상공을 날았다. 그 뒤쪽으로 조명도 닿지 않는 깊은 밤하늘이 펼쳐져 있다. 오자키는 방망이를 내던지고 자신의 타구가 그리는 포물선을 바라보며 하늘 높이 주먹을 내지른 다음 외야석을 향해 집게손가락을 내밀었다. 구로사와가 "왜들 그래?" 하고 살짝 웃으며 묻는다. 

 

- 오니시는 눈초리를 연방 닦아내며 "하지만..." 하고 어렵사리 대답했다.
"하지만, 기껏해야 공 주제에, 저렇게 멀리까지..."

- 이마무라는 "어어이!" 하며 팔을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오자키는 1루를 향해,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 <포테이토칩> 

 

 


 

 

<새크리파이스>를 쓸 때 센다이 시에 있는 후타쿠치 계곡을 취재하면서 니헤이 히사시 씨께 마을과 촌락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게 되어 이야기에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또한 취재에 동행해 주셨으며 작품 속에 사용된 방언에 대한 충고도 해주신 <별책 도호쿠학>의 편집부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또, 미타니 류지 씨의 작품을 보고 난 뒤, 긴 시간과 장소를 넘나드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 「피시 스토리」를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끝으로 <포테이토칩>의 한 장면에 대해서는 MO'SOME TONEBENDER의 명곡(이 곡을 이미 알고 계신 분들은 소설의 전개를 예측하실지도 모르므로 곡명은 밝히지 않겠습니다)에서 힌트를 얻었음을 밝힙니다.


 

 

 

 

 

 

 

 
피시 스토리(ISAKA KOTARO COLLECTION)
《골든 슬럼버》, 《사신 치바》, 《마왕》 등으로 한국 독자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는 작가 이사카 고타로의 첫 단편집 『피시 스토리』. 표제작 「피시 스토리」는 한 의문의 작가가 남긴 소설이 남긴 문장이 시공간을 넘어 변주되면서, 각각의 등장인물들의 인생에 개입한다. 만년에 폐가에 칩거했다는 한 소설가의 문장이, 무명의 록 밴드가 남긴 마지막 노래의 가사가 되고, 그 연결고리들의 숨겨진 관계성 안에서 사람들의 꿈과 희망이 아름답게 그려진 수작으로, 일본에서 동명의 영화로도 개봉된 바 있다. 이 밖에 매일 밤 동물원 바닥에 누워서 자는 수수께끼의 남자를 추적하는 「동물원의 엔진」, 행방불명된 남자를 찾는 사이 오래된 마을의 기묘한 풍습을 알게 되는 도둑의 이야기 「새크리파이스」, 빈집털이 남자와 그의 친구들이 한 야구선수를 구제하기 위해 분투하는 「포테이토칩」까지 작가 특유의 감각적인 대화와 장난기 많고 천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단편들을 만나볼 수 있는 이 책은 미스터리에서 휴먼드라마까지 이사카 고타로 특유의 색채를 맛볼 수 있는 일종의 베스트앨범이다.
저자
이사카 고타로
출판
웅진지식하우스
출판일
2018.02.05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