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미쓰다 신조 / 민경욱
출판 : 김영사
출간 : 2023.04.11
오랜만에 읽는 미쓰다 신조다. <검은 얼굴의 여우>에도 등장했던 모토로이 하야타가 주인공인데, 전작을 읽지 않았더라도 큰 무리 없이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배경도, 등장인물의 상황도 달라져 깊게 연결되는 부분은 없다.
개인적으로 미쓰다 신조의 작품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사관장>과 <백사당>이다. 그때 느꼈던 강렬한 섬뜩함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특히 마지막에 덧붙여진 결말이 아주 인상적이었는데 이후 작품들에서는 그 정도의 강렬함은 없는 것 같아 조금 아쉽다.
<하얀 마물의 탑>은 바다와 산 양쪽에 나타나는 흰 마물과 그에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완전히 설명되지는 않는 기이함을 남기므로 기담이나 괴담이라고 분류할 수 있겠으나, 시간을 두고 되풀이되는 사건 자체는 일본 특유의 문화와 더 관련이 깊다. <검은 얼굴의 여우>와 같은 주인공을 내세운 것은 아마 이 소설도 환상소설의 형태를 빌려 일본의 시대적 사회문화상을 재조명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조금 의아한 점은 숲에서의 장면이다. 물론 작품 마지막 장면에서 이에 관해 설명을 해주고 있으나, 내가 궁금했던 건 그 점이 아니다. 내가 느끼기에 이 설정과 묘사는 '장산범'과 거의 일치한다. 저자가 의도적으로 차용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작중 부산항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참고는 한 것으로 보인다.
제목과 분위기에서 바다에서의 마물을 기대하셨던 분들께는, 그보다는 산과 숲에서의 마물의 모습이 중심이 된다는 점을 살짝 알려드리며.
하지만 -일본의- 해상과 등대에 관해서는 기대 이상으로 상세히 알게 되실 것이라는 점도.
잘 읽었다.
- 고분에서 출토된 창과 검을 거대하게 만들어 놓은 듯한 예리하고 가늘고 긴 기암이 바다에서 뾰족뾰족 솟아 있다. 고깃배의 앞길을 막으려고 일부러 파도 사이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손가락처럼 보였다.
- 도호쿠 지방에 속한 간세이 지역의 고가사키 바다에는 '구지암'이라는 기암괴석이 있다. 바위가 아홉 개라는 소리는 아니다. 이 경우 '구'는 '많다'라는 것을 나타냄과 동시에 배가 다니기 '고되다'라는(아홉 구九와 괴로울 고苦가 모두 일본어에서는 구로 읽히는 것에서 비롯된 말) 뜻이다. 원래는 '꼬치암'이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꼬챙이처럼 부러뜨리기 쉬워 보여 그랬다는데 어떤 바위를 봐도 그런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배를 잘못 댔다가는 선체가 바로 산산조각이 날 듯한 두려움이 드는 풍경이었다.
- ... 거부당하고 있어.
모토로이 하야타가 자연스레 그리 느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만큼 눈앞의 풍경은 장엄하기 그지없었다. 어깨를 맞대고 선 바위 사이를 거친 파도가 소용돌이치는 데다 뿌연 안개까지 끼기 시작했으니 당연하다.
- 정말 저기에 도착할 수 있을까.
그는 해가 기울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따가운 여름 석양을 온몸으로 받으면서, 불안하게 크게 흔들리는 고깃배 위에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불안함을 느꼈다.
- "벌써 해님은 가라앉았으니까..."
어딘가 초월한 듯한 중얼거림을 듣고 하야타는 흠칫 두려움을 느꼈다.
소녀의 말에 살짝 사투리가 섞여 있었으나 금방 알아들을 수 있었다. 다만 촌스러워 보이는 교복으로 미루어 보아 아무래도 시골 여학생인 듯하다. 단정한 이목구비도 젖은 머리카락 탓에 잘 보이지 않았다. '우엉 같은 애네.' 그 아이의 첫인상이었다. 하얀 옷과는 대조적으로 까무잡잡한 피부 탓에 더 그런 생각이 들었을지 모른다. 착 달라붙은 블라우스가 몸의 선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는데 풍만한 여성의 성숙미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 소녀에게서 여성이 느껴지는 듯해, 그런 취향이 전혀 없었던 하야타는 매우 당황했다. 그런 자신의 반응에 혐오감을 느낀 탓인지 그녀 앞에서 살짝 오한을 느꼈다. 실은 그 소녀에게 어이없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이 상황은 피차 어쩔 수 없을지 모르겠다.
- "요즘 젊은 애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지만, 그래도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게 보일 태도는 아니지." 등대장은 그를 위로하고는 바로 쓴웃음을 짓고 말했다. "젊다면 자네도 아직 젊지만."
"아닙니다. 그 아이는 열둘이나 열셋일 테니까 저랑은 사고방식이 완전히 다르겠죠."
"나도 그 정도로 봤는데 실제로는 열다섯이라더군. 또래 도시 아이들보다 역시 시골 아이들은 앳되지." 그렇게 말해놓고 간자키는 소녀에게 미안했는지 덧붙였다. "그래도 여자아이는 1, 2년만 지나면 확 변하더라. 우리 딸을 보면서도 늘 놀란다니까. 그 아이도 곧 달라질지 모르지."
"그렇죠."
하야타가 건성으로 맞장구를 친 것은 그녀의 말로 받은 충격 탓이었는데 간자키는 자신이 내뱉은 '요즘 젊은 애'라는 말이 원인이라고 착각한 듯했다.
- 아프레란 아프레겔의 줄임말로, 원래는 '전후파'라는 뜻의 프랑스어이다. 그것이 패전 후 일본에서 전쟁 전의 도덕관을 잃고 비상식적으로 행동하는 젊은이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들이 일으키는 사건을 '아프레겔 범죄'라고 불렀다.
- 그러다가 흘러간 곳이 기타큐슈 야코야마 지방의 게쓰네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아이자토 미노루라는 청년과 만나 누쿠이 탄광의 하나인 넨네 개의 광부가 되었다. 나쓰메 소세키가 <갱부>에서 '세상에 노동자 종류는 많지만, 그중 가장 괴롭고 가장 하등한 것'이라고 썼던 것이 광산 노동자인데 그중 하나인 탄炭 갱부도 마찬가지다. '가장 괴로운'이라는 말은 맞지만, '가장 하등한 것'이라는 표현은 말할 것도 없이 편견이다. 분명 석탄 캐기는 바닥 인생의 직업이라 예전부터 멸시를 당한 역사가 있다. 하지만 지금의 일본 산업과 경제를 훌륭하게 지탱해 온 것이 바로 그들이다.
- 도대체 무엇이, 저기서 날 기다리고 있을까. 하야타가 품은 커다란 동요에 호응이라도 하듯, 후루미야항에서 고깃배를 내어준 단자와라는 어부가 낮고 어두운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 그런데 하야타가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이자마자 단자와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오르는 듯 보였다. 정말 한순간이었으나 성가신 일에서 해방된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 거짓말에 당했나.
순간 하야타는 의심을 했다. 그러고 보니 단자와는 구지암 앞바다가 아니라 그 너머 등대를 보지 않았나? 본인에게 직접 물을 정도로 그에게 확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령 물어봐도 얼버무리면 그만이다. 그건 그렇고 단자와는 뭔가 본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 여관으로 돌아와서는 바람이 잘 통하는 1층 객실에서 오사카 게이키치의 <죽음의 쾌속선> 가운데 <등대 귀신>과 <인간 등대>의 표제작을 읽었다. 둘 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등대가 무대이다. 전자가 본격 탐정소설인 데 비해 후자는 서스펜스 장르의 작품인데 둘 다 등대 특유의 구조를 훌륭하게 이용한 작품이다. 하야타는 두 작품 모두 다시 읽는 거라 작품의 트릭을 알고 있었는데도 전과 다른 부분에서 크게 감탄했다. 전에는 등대에 관한 지식이 거의 없었으나 요코하마의 등대관리양성소를 졸업하고 등대지기가 된 지금은 달랐다. 그런 그가 읽어도 두 작품에 그려진 등대묘사에 전혀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없었다. 등대에 관한 저자의 기초조사에 빈틈이 없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 만약 살아 있었다면...
더 멋진 탐정소설을 썼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오사카 게이키치는 1943년에 징집되었고 2년 뒤에 필리핀 루손섬에서 병사했다. 전쟁 때 목숨을 잃은 작가는 그 이외도 많고 그 사람들이 '살았다면 어떤 걸작을 썼을까?'라며 안타깝게 여겨졌겠으나 오사카의 애독자는 특히 그런 느낌이 강했다. 왜냐하면 전쟁 전 탐정소설계에서는 드물 정도로 본격파 작가였기 때문이다.
- 만약 살아서, 장편 본격 탐정소설을 썼다면...
그렇게 바라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오사카 게이키치가 남긴 단편 탐정소설은 모두 완성도가 높았다. 탄광이 무대인 <갱귀>도 걸작이었는데.
- 그가 <등대 귀신>과 <갱귀>라는 제목의 유사성을 새삼 깨달았을 때였다. 누쿠이 탄광의 넨네 갱에서 친절하게 대해줬던 광부 난게쓰 나오마사와 <갱귀> 얘기를 했던 게 떠올라 순식간에 배 속이 차갑게 식는 듯한 한기를 느꼈다.
- "그건 모르겠는데 나중에 '백 백' 자를 두 개 붙여서 도도가사키가 되었다고 해요. 이건 시로고무라가 생겼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녀는 한자를 설명한 다음 계속 말했다. "예전에 시라뵤시 일행이 도도가사키까지 흘러 들어와 지금의 마을을 일궜대요. 시라뵤시란 헤이안시대 794년~1192년에 유행했던 남장 유녀들이 노래하고 춤추는 전통 예술이죠. 예전에 그 일행이 남쪽에서 왔다고 하더군요."
- "어디까지나 전해지는 말이니까 진짜인지는 모르죠." 여주인은 일단 그렇게 전제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도도가사키에 '백'이라는 한자가 붙은 것은 시로고무라의 '흰 백'에 '한 일'을 더해 '일백 백'이 된 거라고 전쟁 전에 묵었던 민속학자 아이자와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그게 어떻게 고가사키로 바꿔 불리게 된 거죠?"
"아이자와 선생님에게 들은 바로는, 시로고무라에 신내림 받은 집이 생겨서... 랍니다. 그 집이 마을 사람을 상대로 가지기도를 하기 시작했다죠 가지기도란 신불의 힘을 빌려 병이나 재난, 부정을 막아주는 기도예요. 게다가 하얀 신이라는 뜻의 시라가미 모시기 시작했죠. 하지만 시로코무라의 마을 신사도 시라가미를 모시는지라 둘이 대립하게 되었답니다. 안 그래도 아이자와 선생님이 시로고 신사에도 비밀이 많다며 고개를 갸웃하셨습니다. 모시는 시라가미가 도대체 뭔지 정확하지가 않대요. 게다가 시라가미가 수십 년마다 새로운 신으로 변한다고 했던가."
- "끝으로 선생님은 아직도 불명확한 부분이 많아서 더 자세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얼마 있다가 전쟁이 터졌죠. 전쟁이 끝난 뒤에 계속 기다렸는데 아직 선생님을 뵙지 못했네요."
"그거, 걱정이네요."
하야타는 패전 후 입학한 대학에서 '민속학'을 배웠다. 그런데 다른 대학을 둘러봐도 '아이자와'라는 선생은 기억에 없다. 민간 민속학자일지 모르겠다. 탄광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 이보다 좋은 민속 채집 현장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일 틈틈이 광부들의 이야기를 듣고 필기하면 대학에 가지 않더라도 생생한 학문을 할 수 있겠구나. 건국대학에서 했던 실습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민속학이란 수집한 전승을 분석하고 연구해 일본인의 역사와 문화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 하야타는 발소리를 죽이고 왼쪽 비탈길을 올라가, 뒤를 따르는 그것이 갈림길에 도달하기를 기다렸다가 오른쪽 길 쪽으로 시든 나뭇가지를 던졌다.
툭.
나뭇가지가 떨어지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울린 다음 그것이 오른쪽으로 나아가는 기척이 나자 그는 한숨을 후 토해냈다.
...살았다.
- 그렇게 안심하자마자 호기심이 뭉게뭉게 머리를 채웠다.
도대체 그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빨리 갈 길을 서둘러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한편으로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졌다. 하야타는 산비탈을 더 올라가 나무 틈 사이로 아래쪽을 살폈다. 잘만 하면 수풀을 헤치고 나아가는 그것의 모습을 볼 수도 있겠다.
- 그때 빽빽하게 치솟은 굵은 나무 사이로, 휙휙 움직이는 허연 게 보였다. 그것은 동그란 머리처럼 보였는데 오목하고 볼록한 요철 형태를 하고 있었다. 인간보다 두 배는 크고 머리 부분이 없는 것치고는 아주 커 보였다. 그런 허연 것이 휙휙 숲 속을 나아간다. 우습게 보이는 움직임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물론 조금도 웃기지 않았다. 오히려 불온하다. 도무지 인간이라 생각할 수 없는 움직임에 공포마저 느껴졌다.
- 하야타는 전쟁 때 무장선의 지휘를 맡았다. 그래서 등대마다 등질이 정해져 있음을 안다. 지금 문득 그 사실이 뇌리에 떠올랐다. 등질이란 그 등대만의 조명 방식을 가리킨다. 등대 상부의 등실에 설치된 기기의 회전으로 만들어지는 섬광과 하양과 빨강, 초록으로 이루어진 등의 색깔을 조합해 등질이 결정된다. 일반인들이 '등대 불빛'으로 인식하는 빛의 깜박임이 등대마다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유감스럽게도 매우 적지 않을까. 사람들에게 등대 불빛은 다 똑같아 보일 것이다.
- 이 등질을 표시 삼아서 모든 배가 해상을 운항한다. 배를 운항할 때는 모든 배가 해상보안청이 간행하는 <등대표>를 반드시 휴대한다. 이 책과 해도에는 등대의 둥질이 기호로 표기되어 있고 그것을 읽어 배의 현재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이른바 배의 비상연락망이다.
- 그렇다고 밤의 장막이 내려진 미지의 산속에서 일단 불빛을 본 이상 쉽게 그 불빛에서 멀어질 수 없었다. 그 빛에 불온함이 느껴져도 아무래도 끌려들게 된다. 아무리 저항해도 불 쪽으로 가고 싶어 진다.
불에 날아드는 나방처럼...
자연스럽게 떠오른 비유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야말로 오두막 안에서는 화롯불이 타오르고 있고 그곳으로 그가 들어가려 하고 있다. 정말 비유와 같은 상황이 아닐까.
- 여기에 집이 있으니 오늘 밤 재워달라고 부탁해야 할 것이다. 그게 가장 정확한 판단이다. 누가 생각해도 같은 결론을 내릴 것이다. 하야타는 오두막 입구로 여겨지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세 걸음을 나아가다 자연스레 그 자리에 멈춰 섰다.
... 이 집은, 도대체 뭐지?
아무래도 걸린다. 사냥 오두막도 아니고 집도 아니라면 이 집의 정체는 무엇인가. 왜 이런 곳에 지어졌나. 그리고 누가 사나. 외부인이 이런 곳을 방문하는 게 과연 허락된 것일까.
- 나는 왜 이토록 우유부단할까. 하야타는 어이가 없었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한 자리에 서서 돌아가지도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했다.
- 무서우니까...
문득 자기 마음의 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 계속 집을 방문하는 것도, 노숙하는 것도 다 무섭다. 다 큰 남자가 망설일 만큼의 무언가가 이 산에도, 눈앞의 집에도 깃들어 있지 않을까.
- "하쿠호입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흰 백白에 돛 범帆 자를 떠올렸는데 한자를 들으니 같은 발음이라도 '이삭 수穗'를 쓴 게 더 어울리는 듯했다. 그런 생각을 전하자 하쿠호는 부끄러워했는데 마침 그때 그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서 하얀 얼굴이 바로 붉어졌다.
- 신문지를 벗기니 타원형 나무 도시락이 나타났다. 그 뚜껑 위에 반으로 접은 종잇조각이 있어서 뭐지 하고 열어봤다.
만약 길을 잃더라도 하얀 집에는 가지 마세요. 거기서 묵으면 안 됩니다.
그런 글이 적혀 있었다. 이것은 여주인의 필체일까. 적어도 기리에는 아닌 듯하다. 더 나이 든 사람이 쓴 글자 같다.
- 그때였다. 무표정이어야 할 가면이 씨익 하고, 무시무시하게 웃었다.
- 도대체 뭘 하는 걸까.
그런 의문이 생김과 동시에 지금 살짝 바깥을 보면 그걸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하야타는 몸을 떨었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고 싶다.
모순된 심리에 흔들리던 그가 호기심에 져서 문을 살짝 열려고 할 때였다. 하쿠호가 그의 왼쪽 팔을 확 잡아채며 귓가에 속삭였다.
"시라몬코에게 들키면, 그걸 제대로 보면 그냥 끝이에요."
- 그 계곡 같은 장소에서 추격당했을 때도, 암벽 위에서 내려다봤을 때도, 그것과 정면으로 대치한 일은 없다. 어디까지나 기척을 느꼈을 뿐이고 정수리 같은 부분만 본 데 지나지 않았다. 덕분에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야타는 아연했다.
- 그녀의 반응은 상당히 차가웠다. 하쿠호는 바로 시라쿠모의 분노를 대변하듯 말했다.
"할머니는 자신의 뒤를 이어야 할 딸 시라쓰유, 그러니까 하얀 이슬이란 이름의 제 어머니예요. 딸을 빼앗아간 아버지를 절대 용서하지 않고 있죠. 할머니는 할머니의 어머니로부터 무녀가 되는 수업을 받았대요. 그걸 딸에게 물려주려고 수행 중이었는데 아버지가 다 망쳐버렸어요. 그 아버지를 따라간 어머니도 역시 같은 죄고요. 할머니는 그래서 둘에게 저주를 내렸다고 종종 말해요."
- 하쿠호는 어마어마한 얘기를 털어놓았다. 시라쿠모가 평범한 노부인이라면 '저주'라는 말도 일종의 비유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시라가미 님을 모시는 무녀라고 했다. 시라가미 님이 어떤 신이고 무녀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모르나 민간신앙의 종교인임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저주'도 진짜일지 모른다.
- 하야타는 속으로 고개를 젓고 있었다.
"앞에도 닦아드릴까요?"
바가지로 등에 물을 끼얹던 하쿠호가 물었다.
"아니, 제가 하겠습니다."
- 보통은 유혹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몸짓이나 당사자의 해맑은 모습을 보니 그건 절대 아닌 듯했다. 열심히 등을 닦아준 결과 그런 상태가 되었으리라. 외모는 어엿한 성인 여성이 되고 있으나 속은 아직 소녀인 채 성장하지 않았다. 그런 격차가 오히려 요염함으로 느껴진다는 점을 정작 본인은 모를 것이다.
- 무난한 화제를 골랐는데 왠지 그녀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등을 돌리고 있어서 표정이 어떤지까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열여섯부터 전반기 무녀 수행에 들어가요." 갑자기 하쿠호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열여덟이면 하얀 가면을 쓰고 완전한 무녀가 되기 위한 후반기 수행을 시작하고 성인이 되면 끝나죠."
- 그는 문득 어떤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하얀 게 너무 많네.
- 예전에 시라뵤시 일행이 흘러 들어와 정착해서 시로고무라가 생겼다. 마을 신사에서는 시라가미 님을 모셨다. 얼마 후 신내림 받은 집이 생겼고 그곳에서도 시라가미님을 모시기 시작한다. 둘 다 같은 시라가미님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한쪽은 시라가미님을 모시는 백녀가 된다. 그리고 그 백녀가 사는 집이 아무래도 하얀 집인 듯하다. 현재 백녀의 이름은 시라쿠모이고 그녀의 딸은 시라쓰유였고 손녀는 하쿠호이다. 게다가 마을 주위의 숲에는 시라몬코라는 괴물이 나온다. 여기 등장하는 시라나 시로, 하쿠, 백은 모두 하얀색을 뜻하는 백자를 쓴다. 온통 하얀 것뿐이다.
- 고가사키 등대 회랑에 있었던 것은 기묘한 하얀 사람 그림자였다. '하얀 사람'이라고 표현해야 할 모습이었다. 게다가 어부 단자와는 "허연 게 춤을 춰서 말이야"라며 배를 고가사키에 대지 않았다.
등대 위에서 몸을 꿈틀대면서 하얀 사람이 춤추고 있다.
혹시 단자와는 그런 무시무시한 모습을 본 게 아닐까. 그래서 고깃배의 접안을 포기하고 하야타를 아지키항으로 보낸 게 아닐까.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지나친 생각이야.
무엇보다 고가사키는 '하얀 것'과 전혀 상관이 없잖아.
- 원래는 '도도가사키'라 부르던 땅의 표기에 일백 백자를 쓰게 된 것은 시로고무라의 '흰 백'에 '한 일'을 더해 '일백 백'으로 만들어, 원래의 '도도'와 같은 발음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럼 왜 '흰 백’에 '한 일'을 더했을까.
시로고무라에서 한 집을 배제했으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해석이 문득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그 하나의 집이란 물론 시라쿠모의 가계이다.
- 보통은 '흰 백白'에서 '한 일一'을 빼면 '날 일日'이 될 것 같은데 거꾸로 '흰 백白'에 '한 일一'을 더해 '일백 백百'으로 했다. 백 자를 두 개 연달아 붙이면 도도라는 발음이 되기 때문인데 그보다 시로고무라에서 가계 하나가 줄었다는 뜻이 아니라 성가신 혈통이 하나 늘어났다고 봤기 때문이 아닐까.
- 그게 사실이면 '시로고무라'에서 한 집을 배제했기 때문에 이전의 '도도가사키'라는 호칭에서 흰 백에 한 일을 붙여 같은 발음의 다른 한자인 도도가사키로 바뀌었다는 설은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 그때는 아직 죄인 취급을 받는 혈통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 순간 암시장 사건으로 알게 된 괴담을 좋아하던 잘생긴 청년이 떠올랐는데 그럼 무서운 이야기가 되고 만다. 그건 정말 안 될 일이다. 더 곤란해진 그는 고향 와카야마에 대해, 가업인 화물 운반 거룻배에 관한 재미있고 웃긴 이야기를 꺼냈다. 그 내용이 희한했는지, 하쿠호는 관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동력으로 달리는 프로펠러 배가 등장해 거룻배 수요가 점차 줄어 하야타의 아버지가 뒤를 이를 무렵에는 집안 살림이 어려워졌다는 어두운 이야기로 나아가자 그는 이것도 실패했다 싶었다. 멍청하게 그토록 솔직히 말할 필요는 없지 않았나 하고 뒤늦게 후회했다.
- 하야타는 학교 성적이 좋았던 터라 교사가 유명 대학 몇 군데를 권했다. 그러나 집안 형편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진학은 무리였다. 대학에 가더라도 일도 병행해야 했다. 임시직이 아니라 급료를 받는 일자리를 잡지 못하는 한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하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때 교사가 '재학 중 학비는 국가가 내준다'라는 규칙이 있는 만주국의 건국대학을 알려주었다. 상당히 들어가기 힘든 학교였으나 그는 시험에 합격한다. 그 탓에 모토로이 하야타의 운명이 크게 달라졌으나 당연히 거기까지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 여기서 부임 인사를 하면 이상하겠지.
그런 생각이 들어, 양손에 짐을 든 채 관사 안으로 들어간 다음 손을 뒤로 돌려 현관문을 닫았다. 그런데 여기서부터가 곤란했다. 일곱 개의 문 가운데 어디에 대고 방문 사실을 알리면 좋을까.
- "이번에 고가사키등대에 부임한 모토로이 하야타입니다!" 하야타는 일단 목소리를 높여 인사했다. "원래 그저께 도착했어야 했는데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판단은 늘 빠른 편이다. 우물쭈물하다가 등대장이나 다른 직원과 만나면 피차 어색해진다. 그렇다면 지금 큰 소리로 인사하는 편이 더 무난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 "그런 가혹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교관님이 말씀하신 수많은 일화가 탄생했다고 생각합니다. 동료끼리의 도움이나 마을 사람들과의 교류 같은 얘기는 국가의 지원이 충분했다면 생기지 않았을 이야기가 많으니까요."
그렇게 덧붙인 것은 요코야마의 비위를 맞추려던 게 결코 아니었다. 그가 들려준 일화에서 등대지기만의 귀중한 경험을 뼈저리게 느낀 탓이다.
- 그런데 요코야마의 반응이 이상했다. 평소라면 "이런 일이 어디 등대에서 언제쯤 있었어"라고 이야기를 시작했을 텐데 여전히 뭔가 주저하는 표정이었다.
"왜 그러세요?" 하야타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등대에 관한 이야기 가운데 소문이 돌아도 이상할 게 없는, 오히려 당연히 그래야 하는데 전혀 전해지지 않는 그런 이야기가 있는데 자네는 모르나?"
- "... 괴담, 인가요?"
그러자 요코야마는 바로 파안대소했다. "역시 모토로이 군이야! 바로 알아차렸네." 그러더니 다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게 하나 더 있는데, 어때? 알겠나?"
"더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등대에서의 인간관계와 관련된 얘기 정도인데요."
- 요코야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매우 한정된 좁은 공간에서 짧아도 2, 3년에서 길면 5년 이상이나 똑같은 사람들과 일뿐만 아니라 일상생활도 같이 해야 하지. 그동안 전근이 생겨 얼굴이 바뀔 때도 있겠지만 말이야. 이런 생활은 아주 힘들어."
"직원이 독신이거나 기혼자이거나, 기혼자라도 아이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 같은데요."
"거기에는 반드시 갈등이 생겨. 그게 인간이니까."
"하지만 그런 종류의 이야기는 그다지 없다... 아니, 있는데 소문이 돌지 않는 거군요."
"돌았다고 하더라도 일부 관계자만 듣고 거의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지."
"그런 얘기가 퍼지면 특히 신임 등대지기들의 사기가 떨어질 테니까..."
- 요코야마가 다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등대지기니까 다들 등대정신은 있겠지. 하지만 그 정도는 사람마다 달라. 이게 정답이라는 기준도 전혀 없어. 등대정신이 지나치게 강한 등대장이 있으면, 그 밑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 끼치는 영향도 커져 일이 정신론으로만 치우치면 힘들어지지. 그렇다고 일과 관련되어 있으니 무시할 수도 없고."
- "그래서 과거 사건이 일어났나요?"
그런 일이 있었다면 알고 싶은 게 하야타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요코야마는 잠시 뜸을 들이고 말했다. "자네라면 말해줘도 괜찮겠지. ... 아냐, 역시 하면 안 되겠어."
"괴담이야 어디든 있잖아요."
"게다가 완전히 전해지지 않는 것도 아니지."
요코야마의 의미심장한 대답에 하야타는 조금 기대했다. 그렇다고 억지로 캐묻는 것은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 바다가 보이는 정면 유리판과 거대한 등명기 사이에 서자, 그는 오랜만에 다이코자키등대에서도 종종 느꼈던 기이한 흥분에 사로잡혔다.
등대의 생명인 빛을 발하는 등명기 앞에 선다는 것. 너무나 큰 렌즈에 압도된다는 것. 그 렌즈가 눈동자처럼 느껴지는 것. 거대한 안구가 자신의 모든 내면을 꿰뚫어 보는 듯한 두려움에 떠는 일.
- 흥분의 이유라면 그 정도일 것이다. 등명기를 한 바퀴 돌아 반대편 차단판 부분까지 확인했으나 역시 아무도 없었다. 바로 밑에서 올려다봤을 때부터 이미 알았던 사실이지만 막상 닥치니 뭐라 표현할 길 없는 기분이었다. 하야타는 철제 계단을 내려와 문을 열고 회랑으로 나왔다.
- 그 광경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이리로 올라올 때까지 아무도 등대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가 등실에 있는 동안, 만약 회랑에서 안으로 들어왔다면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기척은 없었다. 그러므로 그 하얀 사람은 여전히 이 회랑에 있다는 소리다. 하야타는 발소리를 죽이면서 살금살금 회랑을 걷기 시작했다. 우회전해 바다 쪽에서 반대편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이제까지는 자신이 먼저 말을 걸었으나 지금은 침묵했다. 등대 직원에 대한 태도로는 영 아니었지만 그럴 수 없는 자신이 있다.
- 완전히 반대편에 해당하는 차단판을 더 지나쳤는데도 역시 아무도 없었다. 마침내 그는 한 바퀴 이상을 돌고 말았다. 그래도 만난 사람은 없었다.
- 상대도 똑같이 돌고 있다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악몽과는 반대이다. 꿈에서는 하야타가 쫓겼는데 이번에는 상대가 도망치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꿈이 더 무서웠다. 그런데도 그는 소름 끼쳤다.
이쪽 움직임에 맞춰 상대는 들키지 않으려 이동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무서운 상황 아닌가. 상대의 정체도 의도도 모르는 것이다. 언제 거꾸로 쫓기는 신세가 될지 모른다.
- 하야타는 회랑에서 도망치고 싶어졌다. 이리로 나온 문을 통해 안으로 돌아가 그대로 단숨에 나선 계단을 뛰어 내려가 밖으로 뛰쳐나간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 하야타는 아직도 희망을 품고 있는 자신에게 놀랐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아일린모어 섬의 등대처럼 그냥 직원들이 사라졌다고 하기에는...
- 무적실은 하얀 직사각형 건물이었다. 바다 반대쪽에 거대한 나팔이 설치되어 있고, 안개가 발생하면 불어야 하는 게 규칙이다. 무적은 안개 신호라고도 하며 등대마다 주기가 있다. 소리를 울리는 시간과 멈추는 시간을 조합한 주기로 선박은 등대를 특정할 수 있다. 이 장치는 등질과 마찬가지이다. 다만 무적은 그때 불어오는 바람과 주위 소음에 영향을 받는다는 결점이 있다. 그럴 때 어떤 방향으로 부는 게 가장 정확한지를 판단하는 게 매우 어렵다.
- 무엇보다 새로 도입된 장비이다. 현지 어부들에게는 "뿌우 뿌우 시끄럽게 불어대니 고기들이 도망가잖아!"라는 민원의 표적이 될 위험도 따랐다. 실제로 조류 때문에 고기잡이가 안 됐는데 그걸 무적 탓으로 돌린다. 관습에 따라 일하는 사람은 새로운 문물이 도입되면 조금만 불편해도 모든 책임을 그리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짙은 안개가 꼈을 때 무적 덕분에 해안가로 돌아오는 경험이라도 하지 않는 한 어부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적실에는 그런 고난의 역사가 있었다.
- "용케 무사히 왔구먼."
그 말투에 불안과 안도가 반반씩 섞여 있음을 느끼고 큰 걱정을 끼쳤음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원래는 그저께..."
"아니, 아니야. 그건 됐네. 이렇게 무사히 왔으면 그걸로 충분해..." 그렇게 말하고 남자는 반쯤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웃었다. "등대장인 이사카야. 다른 한 명, 자네 선배인 하마치라는 직원이 있지. 마침 지금, 등대에 갔네."
- "자네는 모르는 것 같은데 지금 얼굴이 그래."
순간 하야타는 할 말을 잃었다. 그때 부엌문이 열리고 하얀 피부의 아름다운 여성이 들어왔다. 양손에 세 개의 찻잔을 올려놓은 쟁반을 들고 있었다.
등대장의 딸인가?
너무 젊게 보여 그렇게 생각했는데 미리 들었던 가족 구성에 딸은 없었던 터라 고개를 갸웃했다.
"아내인 미치코네."
- 이사카의 소개에 놀랐다. 하지만 다가온 그녀를 자세히 보니 서른 전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젊게 보이나 사실은 마흔 전후일 수도 있겠다.
- 이사카가 더 놀라운 발언을 했다. "아내는 시로고무라 출신이야."
이런 미인이, 이런 변경의 땅에...
무의식적이라고는 해도 차별적인 시선으로 시로고무라를 봤던 자신을 깨닫고 하야타는 크게 반성했다.
- 등대지기의 아내는 미인이 많다. 자주 듣는 소리였는데 이는 미치코에게 해당하는 얘기였다.
- 세상이 '등대지기'에 상당한 오해를 가진 데 반해 등대가 있는 지역의 사람들은 존경의 마음을 품는 예가 예전부터 많았다. 일의 어려움을 이해한 탓도 있겠으나 무엇보다 그들이 공무원이기 때문이다. 또 등대를 비롯해 부속 관사도 서양식이라 젊은 사람일수록 동경했다. 특히 여성이 그랬다. 게다가 등대에서 일하는 것이 등대정신에 넘치는 젊은 남성이므로 거기에서 연애 감정이 싹트는 것도 자연스러울 것이다.
- 등대지기와 결혼하면 몇 년 후에는 고향을 떠난다. 게다가 전국각지를 전전하는 생활이 기다린다. 부임지에 따라서는 상당한 시련을 겪는다. 그런데도 그런 점이 장애 요소가 되지 않는 것은 변경의 땅에서 나가고 싶다는 본인의 바람, 또 내보내고 싶다는 부모의 바람도 있기 때문이리라.
- 참고로 '등대지기의 아내는 미인이 많다'라는 말속에는 '등대지기 본인은 특별히 미남이 아닌데'라는 뜻이 숨어 있다. 그래도 미인 아내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앞에서 말한 이유 때문이다. 이 점을 등대지기들이 자랑스럽게 여기거나 비하하는 일은 당연히 절대 없다. 그런 현실을 인정할 뿐이다. 다만 이사카 고조는 이런 속뜻에 해당하지 않았다. 그다지 미남은 아니었으나 매우 남자다운 기백의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 다만 하야타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등대장에게 묘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맞장구를 쳤는데 그러다가 곧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그러다 갑자기 물었다. "얘기를 끊어서 미안하네만, 어제와 그저께는 어디서 잤나?"
절대 묻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 없이 물을 수밖에 없다는 듯한, 매우 모순된 모습이었다.
"아지키항에 도착한 밤에는 고지야에 묵었습니다."
- "언제 돌아오냐?"며 성화를 부렸다. 부모 모두 아들의 상경에 맹렬히 반대했으면서 이웃들에게는 "아들이 월급이 많은 자리를 얻을 거야"라고 큰소리쳤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기에 그는 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취업이 되면(실제로는 백수였으나) 다음은 결혼 얘기가 나올 게 뻔했고 그는 그게 싫었다. 문제는 후보가 벌써 여러 명 있다는 점이다. 어릴 때 자주 어울려 놀았던 이웃의 소꿉동무, 어려서부터 집에 자주 놀러 왔던 어머니의 먼 친척 딸, 중매를 삶의 보람으로 삼고 있는 백모가 물어온 혼담이다. 소꿉동무는 여전히 친구일 뿐이고 먼 친척의 딸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리고 가장 문제가 백모의 혼담이다.
- 형님은 자신이 중매한 숫자를 늘리고 싶을 뿐이야,라는 게 어머니의 주장인데 그도 거기에는 찬성했다. 다만 아버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자신의 누나가 호의로 조카의 신붓감을 알아봐 준다.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으니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여하튼 지금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게 좋겠다고 고조는 생각했다.
- 사람들이 끝없이 찾아온다. 그러면 그냥 놔둘 수 없다. 그럼 누군가는 관리를 해야 하는데 자연스럽게 신임의 몫이 된다. 비번인 선배가 도와줄 때도 많았으나 아까운 휴일을 쓰게 하는 건 미안한 일이다. 고조는 되도록 먼저 나서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안내했다. 그렇다고 불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 이곳은 관광지이기 전에 등대야.
어디까지나 등대지기의 업무가 우선이고, 여유가 있으면 사람들을 챙겨야 한다. 그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등대장의 얘기를 듣고는 놀랐다.
- "관광객들에게 등대를 안내하고 등대지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이해시키는 것도 훌륭한 업무야. 유감스럽게도 일반인은 등대지기에 관해 잘못된 인식을 지닌 경우가 많다. 그것을 개선하는 일은 나아가 지방에서 일하는 동료들을 지원하는 일이기도 하다. 하나씩 공들여 쌓아 가는 수밖에 없는 일이지. 그리고 이는 관광지인 우리 다이코자키 등대만 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사명이야."
-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등대를 보러 오기 위해 찾아온 관광객들을 안내하는 일이 그대로 '등대지기'의 이해와 이어진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자기 생각이 얼마나 얄팍했는지 깨달았다.
- 등대지기들을 위해.
항상 그는 자신을 다독이면서 관광객을 돌봤다. 때로는 정말 무례하게 구는 사람도 있었지만, 체신성 항로표식간수 훈련소에서 함께 고생했던 동기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것도 동료를 위한 일이야'라며 참고 견뎠다.
- 등대 참관을 원하는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개인부터 단체까지 다양했다. 아침에 문을 여는 순간부터 닫을 때까지 쉴 새 없이 찾아왔다. 거기에는 초중고생 소풍이나 수학여행도 포함되었다. 학생들이 먹다 버린 도시락을 치우면서 "학교에서는 지식만이 아니라 공중도덕도 가르쳤으면 좋겠어!"라며 동료들과 투덜대기도 했다. 그래도 소풍이나 수학여행은 인솔 교사가 있는 만큼 그래도 괜찮았다. 가장 어려운 상대는 개인적으로 오는 나이 많은 꼰대였다.
- 등대 문을 지나면서나 구경을 끝내고 나갈 때 지갑을 꺼내며 "어이, 참관 요금은 얼마야?"라며 거만하게 묻는 시골 신사가 꽤 있다. "그런 사람은 지금은 사라진 아사쿠사 12층 1890년 도쿄 아사쿠사 공원에 세워진 12층짜리 전망대로, 1923년 간토 대지진으로 파괴되어 철거비라도 올랐나 보네"라며 역시 동료들과 쓴웃음을 짓고는 했다. 대체로 사람들은 "무료입니다" "돈은 필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면 "그래?"라고 말하고는 돌아간다. 다만 그 가운데 "받아둬"라며 가끔 억지로 주려는 사람도 있어 난감했다.
- 어느 날 선배가 그런 사람에게 냉정하게 "등대는 볼거리가 아닙니다. 이렇게 참관을 용인하는 것은 국민에게 바다를 생각하는 정신을 보급하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자 상대방은 "... 아, 그거 큰 실례를 범했군"이라며 고개를 숙이더니 쑥스러워하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고조는 날마다 쌓였던 마음의 응어리가 쑥 풀리는 듯한 쾌감을 느꼈다. 등대지기에 대한 세상의 이해를 위한다는 대의명분은 잘 알겠다. 그래도 역시 관광객 뒤치다꺼리에는 엄청난 정신적 긴장이 요구되었다.
- 이 일이 있은 다음부터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불손한 태도를 보이는 상대가 나타나면 종종 선배의 말을 따라 했다. 대부분은 머쓱한 반응을 보이니까 이 정도는 말할 필요가 있겠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이는 사람들이 등대지기란 일을 얼마나 모르는지 알 수 있는 증거였다. 다이코자키 등대를 찾는 사람들을 안내하는 일이 너무나 먼 여정처럼 느껴졌다.
- 등대장이 촌장과 열심히 대화하는 모습을 한동안 살피던 다스케는 괜찮다는 판단이 섰는지 뻔뻔하게 고조에게 말을 걸었다. 게다가 마을의 젊은 여자 대다수가 기도바시와 고조를 놓고 수다를 떨었는데 고조가 더 인기가 있었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스스럼없이 했다.
- 그런데도 다스케는 변함없이 싱글대며 이렇게 설명했다. 전에 도쿄에서 한 학자가 마을을 조사하러 왔다. 그때 학자는 신사에서 신주와 얘기를 나누고 같이 사진을 찍은 다음 등대까지 갔다. 나중에 학자는 감사의 표시로 사진을 보내줬는데 거기에 등대장과 가족, 그리고 기도바시와 고조의 사진이 섞여 있었다. 그것을 보고 마을 여자들이 놀라며 몇 명은 남몰래 등대까지 보러 갔다.
- 이 얘기에 고조도 놀랐다. 확실히 반년 전쯤, '아이자와'라는 도쿄의 민속학자가 등대를 찾아와 등대장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듣고 사진을 몇 장 찍은 적 있다. 그게 마을 여자들 사이에서 돌아다닐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다스케의 말로는 신주의 딸 미치코가 특히 고조에게 반했다고 한다. 게다가 그녀가 몇 년 전부터 시로가구라에서 무녀로 춤을 춘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고조는 안절부절못했다. 등대장과 고조에게 준비된 관람석이 바로 무대 앞이었기 때문이다.
- 이윽고 와곤(일본 고유의 현금) 소리가 울리고 탁탁 샤쿠뵤시(양손에 들고 맞부딪쳐 소리를 내는 타악기) 소리가 남과 동시에 가구라와 히치리키(중국에서 전래된 피리의 일종) 소리가 섞인 연주가 시작되자 무녀 옷을 입은 젊은 세 여성이 무대 위에서 춤을 추었다.
- 미치코를 보고 싶었는데.
가면 탓에 원래 얼굴을 볼 수 없게 되니 오히려 더 보고 싶어 진다. 남자니까 어쩔 수 없지. 아니, 가령 남녀 성별이 바뀌었다고 해도 마찬가지 아닐까.
- 셋의 춤을 똑같이 보려고 했으나 아무래도 미치코로 보이는 가운데 무녀에게 시선이 갔다. 왜 가운데 무녀가 그녀인지 알았느냐면 다른 둘보다 자주 시선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가면 너머라 알기 힘들었을 텐데도 서로의 시선이 여러 번 얽혔다.
- 그때마다 오싹했다. 목덜미와 등줄기가 아니다. 두 팔도 아니었다. 가슴이나 배도 아닌 듯했다.
뇌인가 아니면 아랫배인가.
- 어딘지 알 수 없으나 오싹오싹 몸이 반응해 버린다. 절대 두려워서가 아니다. 흠칫하는 게 아니라 오싹하는 쾌감에 가까운 듯하다. 거기에는 부도덕한 미묘한 감정도 있었다. 그녀가 무녀의 옷차림을 하고 있기 때문일까. 피부가 드러난 곳은 양손 정도이고 가끔 소매가 올라가도 팔꿈치조차 보이지 않는데 이상하게 요염하게 보였다. 우아한 춤 때문일까, 슬쩍슬쩍 보이는 하얀 목덜미 때문일까. 그에게 날아오는 시선 때문일까.
- 한동안 홀린 듯 바라보던 고조는 문득 정신을 차렸고 그러자마자 무서워졌다. 왠지 알 수 없어 자신도 놀랐고 무녀들의 춤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 그런데 그 갈림길을 지나친 시점에서 등대장이 엉뚱한 얘기를 시작했다.
"이 지역 아가씨가 등대지기에게 시집오는 일이 종종 있지."
정말 느닷없이 나온 화제였으나 그런 얘기 자체는 고조도 익숙했던 터라 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런 얘기는 자주 들었습니다."
"등대지기의 아내는 전근을 함께 경험해야 하지. 하지만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변경의 땅일수록 대체로 잘 견디니까."
"전근 지역의 등대가 비슷한 환경이라서 그렇죠?"
등대장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래도 역시 등대지기의 아내는 나름의 각오와 이해가 필요해. 이게 충분치 않으면 아주 힘들지."
"그렇겠죠."
- 고조는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고 등대장이 암암리에 자신과 미치코에 관해 얘기하나 싶어 상당히 겸연쩍으면서도 그래도 너무 이야기가 빠르지 않나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본인들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데 다른 사람들만 요란을 떨어서 어쩌자는 걸까.
- "고조 씨에게 보인 것은 이전 하얀 집에서 묵었을 때 상대가 당신에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일 거예요."
말도 안 되는 해석을 듣고는 두려움과 놀라움을 동시에 느꼈다. "그러니까 그런 걸 부려서..."
"아마도 무의식이겠죠. 그런 경우, 시라몬코는 그 사람의 생령으로 여겨집니다."
생령이란 소위 살아 있는 영혼이라고들 한다. 고조는 오싹했다. 시라몬코의 정체에 대해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었다.
- "시로고 신사도 하얀 집도 다 시라가미 님을 모셔요. 하지만 굳이 구별하자면 시로고신사는 표면적인 신이고 하얀 집의 백녀가 불러내는 시라몬코는 이면의 신이에요. 일반적인 마을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사의 신이지만, 거기서 벗어난 이상한 일에는 시라몬코가 필요하죠. 신사에는 누구나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지만, 하얀 집에는 몰래 숨어서 가요. 아무리 대단한 위치의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죠."
- 여름은 초원 가득 붉은 해당화가 화려하게 피어 아름다운 풍경을 그려냈다. 이따금 하얀 꽃이 섞여 있는 소박함에 자연의 불가사의함을 느꼈다. 게다가 눈만 즐겁게 하는 게 아니라 마음마저 흔쾌하게 만드는 향까지 감돌았다. 밤톨 크기의 붉은 열매에는 단맛과 신맛이 있어서 바닷물에 씻어 먹으면 포도와 비슷한 맛이 났다. 제대로 과일을 구하기 힘든 북쪽 땅에서 이 해당화 열매는 매우 소중했다. 그러므로 인근 마을에서 사람들이 수확하러 왔다. 그 사람들과의 대화도 매우 즐거웠다.
- 해안에서는 믿기 힘들겠지만, 해수욕도 즐길 수 있었다. 고가사키는 날씨로는 가능했으나 지형적으로 무리였다. 여기서는 양쪽 모두 지장이 없었다. 파도가 거칠었던 밤이 지나고 다음 날이 오면 다시마, 미역, 가리비, 북방조개 등을 대량으로 캘 수 있어 단숨에 식탁이 호화로워졌다.
- 이곳에 오기 전 '아무것도 없는 적적한 땅'일 것이라며 각오했던 게 거짓말 같았다. 이렇게 쾌적하게 지낼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이를 기르기에도 좋은 환경이야"라며 고조도 미치코도 기뻐했다.
- 반면 겨울은 정말 가혹했다. 아주 빨리 가을이 시작되므로 식량과 장작, 음료수를 사들여야 했다. 보존식품으로 대량의 절임 반찬도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중요한 게 음료수 확보였다. 벽지 등대에서 생활용수가 얼마나 중요한지, 물론 고조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땅의 겨울철에는 더 중요했다. 여름에는 해조와 조개를 공짜로 얻을 수 있었으나 물에는 돈이 들었다.
- 등대의 수만큼 가혹한 현실이 있다.
이 교훈을 새삼 되새긴 것은 등대 구내에 설치된 흙으로 만든 커다란 탱크에 가득 물을 채우고, 창고에 절임 통과 장작을 충분히 쌓아두는 것으로, 겨울철 준비가 완전히 끝났을 무렵이었다.
- 하야타는 목에서 하얀 천을 풀어 이사카에게 내밀었다.
"하쿠호 씨가 준 부적 덕분에 고가사키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알 수 없는 일까지 모두 괴이 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뇨, 그렇게 받아들여선 안 된다고 생각하죠."
"사고 정지가 되니까?"
"그렇습니다. 인간이 아닌 무언가를 상대한다고 나까지 인간이길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만의 사고로 맞서야겠죠."
- "만약 인간의 이성이 전혀 통하지 않는 상대라면..." 하야타는 진지한 표정을 훅 풀고 씩 웃더니 대답했다. "그럴 때는 전속력으로 도망쳐야죠"
- 이사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그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의 임기응변은 등대지기에 아주 적합하겠어. 등대정신도 중요하나 그게 불가능한 자연의 위협 앞에서는 소용없는 일이니까. 그럴 때는 목숨을 버린다고 해서 등을 지킬 수 없지. 그렇다면 살아서 다음 방법을 생각해야 하지. 그게 진정한 등대정신이라고 나는 생각해. 모토로이 군이라면 등대지기로서 어디 가서나 잘 해낼 걸세."
- 하야타가 일어나 상대의 어깨에 오른손을 얹으려 할 때였다.
"고조 씨가 책임을 지고 저와 도망쳤듯이 모토로이 씨도 하나미를 데리고 여기서 도망쳐주실 수 없나요?"
갑자기 뒤에서 말소리가 나, 그는 뛸 듯이 놀랐다.
- "그 아이는 당신에게 호감이 있어요."
"가령 그렇다 해도 역시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아뇨, 무엇보다 그런 개인의 감정은 그리 쉽게 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부정하는 하야타를 보며 미치코는 우월감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머, 다 알아요."
- "그건 상관없어요. 어쨌든 백녀의 수행을 한 덕분이죠." 전혀 대꾸하지 않는 하야타를 보고 미치코는 미소를 지은 채 계속 말을 이었다. "고조 씨와 모토로이 씨가 등대 회랑에서 본 하얀 사람은 저와 하나미의 생령입니다."
- 하야타는 식당 겸 거실을 뛰쳐나와 복도를 달려 현관문을 통해거의 구르듯 밖으로 도망쳐 나왔다. 그리고 부속 관사 측면으로 돌아가 두 번째 바위로 이어지는 돌계단을 가려다가 등대가 두 개 서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말도 안 되는 광경에 경악했다.
- 하지만 바로 잘못 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만 진짜 광경을 이해하지 못한 게 이때 하야타에게는 오히려 다행이었을지 모른다.
- 고가사키 등대 옆에 거의 등대와 같은 크기의 하얀 사람이 있었다. 거대한 하얀 마물의 탑 같은 그 사람 그림자는 하야타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듯했다.
- 4일째 아침, 하야타는 대부분의 기억을 되찾았으나 도통 입을 열지 않았다. 말을 하면 오히려 더 혼란을 일으키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날은 경찰의 엄중한 조사를 받았는데 그는 처음 증언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 하야타는 퇴원하고 다시 경찰의 사정 청취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진술은 변함없고, 일관되어 마침내 무죄 방면되었다.
- 하야타는 도쿄로 돌아와 건국대학 동기생이었던 구마가이 신이치의 집에 얹혀살았다. 그는 등대지기로 계속 일할 생각이었으나 해상보안청 등대부의 판단으로 한동안 등대 부임은 보류되었다. 고가사키등대에서의 기억 대부분을 잃었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불리하게 작용한 듯하다. 어정쩡한 것을 싫어하는 하야타는 해상보안청 직원을 그만두기로 했다.
"애써 천직을 찾았다고 좋아했으면서."
신이치가 자기 일처럼 걱정했다.
"또 그런 일을 찾지 뭐."
- 정작 본인인 하야타는 산뜻했다. 일단 시작하면 무슨 일이든 진지하게 임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할 수 없게 되면 질질 끌지 않고 깨끗하게 포기하고 다시 다음 목표를 찾는다. 너무나도 그다운 태도라고 할 수 있다.
- 구마가이 신이치를 비롯한 건국대학 동기생 대다수는 관공서나 이름난 기업에서 중요한 직책에 있었다. 게다가 전원이 하야타의 앞날을 걱정하던 터라 그의 직장이라면 누구나 기꺼이 도와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모두 하야타의 올곧은 성격을 알고 있다. 그래서 잠자코 지켜보는 방법밖에 없었다. 신이치도 마찬가지였다.
- 다만 하야타는 더 마음에 걸리는 문제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물론 친구인 신이치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후루미야 병원에 누워 있을 때는 불가사의하게도 전혀 생각나지 않았는데 도쿄로 돌아온 날부터 점점 커져만 가는 불안을...
- 물론 그전에 하야타는 도쿄를 떠날 생각이다. 하지만 그는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패전한 일본의 부홍을 바닥에서 뒷받침하려면 어떤 일을 해야 바람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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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라니 뮐, 디아나 폰 코프] 음식의 심리학 - 심리학자가 들려주는 음식에 담긴 42가지 비밀 (0) | 2023.07.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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