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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엇 러너] 당신, 왜 사과하지 않나요? - 상처를 치유하고 관계를 회복시키는 사과의 기술

일루젼 2023. 7. 19.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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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해리엇 러너 / 이상원
출판 : 저스트북스 
출간 : 2017.12.11


       

리뷰가 잘 써지지 않아 잠시 미뤄두었었다.

 

심리치료사이자 사과와 용서 전문가로서 '분노'와 '사과'에 관한 책을 집필해 온 저자는 "어떤 것이 이상적인 사과인지, 그리고 어떻게 사과를 받아들이는 것이 좋은지"를 사례를 들어가며 설명한다.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사과를 해야 할 상황과 받아야 할 상황 모두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양측 모두의 경우 어떤 방식이 보다 바람직한가를 알아두는 것은 꽤 유용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출간된 시기나 배경 문화권을 고려할 때, 한국의 경우와는 조금 결이 다른 부분들이 있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한국은 사적인 관계보다 직장 같은 공적인 관계에서의 사과 에티켓을 더 필요로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바꿔 생각하면, 오히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주변인들과 건강한 사과를 주고받는 연습을 해야 하는 건 아닐까?

 

본문 중에 한국인 여자친구와의 가치관 차이를 토로하는 사례가 소개된다. 그 사례에서 여자친구는 자신은 친밀하고 가까운 사이에서는 말로 또박또박 사과하는 것이 오히려 거리감이 느껴진다며, 연인이나 가족 간에 명시적인 사과를 주고받아본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소수의 사례로 판단할 수는 없지만, 한국이나 아시아 문화권에서 생각하는 '올바른 사과'에 대해 호기심을 표한다. 

 

과연 그러한가? 판단이 어렵다. 깔끔하게 사과를 주고받는 것을 예의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굳이 말로 집어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는 꼭 말이 오가지 않아도 감정적으로 풀리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다만 나의 경우만을 놓고 보자면, 저자가 예시로 든 좋지 못한 사례 중 '가정법을 이용한 사과'를 종종 사용한다는 걸 깨닫고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나는 그런 의도는 아니었지만, 혹시 그렇게 느껴졌다면 미안해'라는 형태의 사과는 사과가 아니라고 한다. 게다가 상대의 감정이나 판단에 대해 넘겨짚으며 상대를 과민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사과는 자신의 언행에 대해 하는 것이지 타인의 감정에 대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상대의 감정에 대해서 사과하는 것은 책임 회피이자 도를 넘는 사과'라는 부분이 인상 깊다.

 

이 설명에 따르면 '혹시 그렇게 느껴졌으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이 든다면 확실하게 '생각해 보니 내 행동이 이랬던 것 같아. 미안해'라고 사과를 하거나, 그에 동의할 수 없다면 무의미한 사과는 하지 말아야 한다. 

 

흥미롭게 읽었다. 

끝.    


   

 

- 성인이 된 아들에게 아버지가 "네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함께하고 싶었다. 정말이야. 하지만 다리에 쥐가 났잖니. 가게에서 급한 일도 생기고 말이야. 너도 이해하겠지"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두 만화의 유머 포인트는 어이없는 논리에 있다. 하지만 '미안하다'는 말 다음에 자기 정당화가 나오면서 안 하느니만 못한 사과가 되고 마는 일은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다. 듣는 사람의 기분을 풀어주기는커녕 분노와 상처를 한층 더 깊게 하는 상황 말이다.

 

- 훌륭한 사과가 얼마나 큰 치료 효과를 지니는지는 즉각 확인할 수 있다. 진정한 사과를 받고 나면 기분이 풀리고 편안해진다. 어떤 분노와 억울함이 있었더라도 눈 녹듯 사라진다. 마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과를 할 때 역시 기분이 좋아진다. 실수나 잘못된 행동으로 어긋났던 관계를 복구했다는 것에 안도하고 감사한 마음이 든다.

 

- 그렇다고 내가 늘 사과의 달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남편인 스티브와의 관계에서 나는 딱 내 몫만큼만 사과하려 한다(물론 내 계산 결과에 따른 내 몫이다). 그러면서 남편도 내 계산 결과에 맞는 그쪽 몫만큼 사과하기를 기대한다. 물론 남편과 나 양쪽의 계산이 늘 일치하지는 않는다.

 

- 우리는 모두 특정 상황, 특정 상대에 대해 사과의 어려움을 경험한다. 이웃집 그릇을 제때 돌려주지 못한 일은 금방 사과할 수 있다. 하지만 남편이 바람을 피운 일은 그렇지 않다. 사소한 실수는 진심을 담은 "미안해" 한마디로 충분하지만, 모든 실수가 다 그렇게 사소한 것은 아니다.

 

- 살아 숨 쉬는 동안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은 번갈아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상황을 바로잡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최소한 상대가 어떻게 반응하든 내게 주어진 과업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위로가 아닐 수 없다.

 

- 진정한 사과라면 용서와 화해는 이후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용서를 요구한다면 상대가 압박감을 느끼면서 사과의 효과가 줄어들고 아예 안 하느니만 못하게 되기도 한다.

 

- "그렇지만"이라는 말이 사과에 따라붙으면 진정성은 사라진다. 약간이라도 이런 말이 섞여들지 않도록 조심하라. 자칫하면 사과가 변명으로 바뀌면서 본래 메시지를 망가뜨리고 만다. "그렇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과를 망친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건 "상황을 감안하면 내 잘못(무례함, 시간에 늦은 것, 비난하는 말을 한 것 등등)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잖아"라고 말하는 셈이다.

 

- 상대의 감정에 대해 사과함으로써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나쁜 사과 유형이다. "모임에서 내가 네 이야기에 끼어들었을 때 당황했다면 미안해"라는 말은 사과가 아니다. 여기에는 책임감이 전혀 없다. 어떻든 사과를 했으니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를 점했다고 느끼면서, 책임을 상대에게 전가해 버리는 것이다. "내 말은 완벽히 이성적이었는데, 네가 과민반응을 보이다니 유감이야"라고 말하는 셈이다. "내가 네 이야기에 끼어들어서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라고 사과해야 한다.

 

- '만약 ~라면'이라는 말은 상대가 자기 반응에 의문을 품도록 만든다. "내가 너무 과민했다면 미안해" 혹은 "내 말이 공격적으로 들렸다면 미안해"라고 말하지 않도록 경계하라. '~라면 미안해'라는 사과는 사과가 아니다. 대신 "내 말은 공격적이었어. 배려 없이 행동해서 미안해.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없도록 할게"라고 말하라.

 

- 아들이 맞서 발끈하면 아버지는 "내 말이 널 그렇게 성나게 만들었다니 미안하다"라고 사과했다. 이것이 그 아버지가 늘 사용하는 사과의 방식이었다. "아버지의 그런 사과가 정말 싫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를 한층 더 화나게 만들거든요." 아들이 내게 말했다. 아들은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지만, 아버지의 혼란스러운 사과가 문제라는 것은 깨닫지 못했다. 그저 그런 사과가 불편하고 부당하게 느껴졌을 뿐이다.

 

- 이 아버지의 사과 아닌 사과는 자기 방어나 책임감 회피에서 나왔다기보다 불안한 가정에서 흔히 나타나는 혼란스러운 사고가 반영된 것에 가깝다. 체계 내부의 불안정도가 크면 클수록 그 구성원들은 자기 행동(아버지가 두통에 시달리는데도 음악 볼륨을 낮추지 않은 것에 대한 사과)이 아닌 상대의 감정과 행동(아버지에게 두통을 일으킨 것에 대한 사과)에 책임을 지는 경향이 나타난다.

 

- 숀의 엄마는 맷이 한 행동이 아니라, 숀이 보인 반응에 대해 사과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맺은 장난감을 내려놓고 사과의 말없이 뒤로 물러섰다. 나는 이후 맷에게 장난감을 빼앗은 일은 사과해야 마땅하지만, 숀이 자기 머리를 내리치는 행동 때문에 사과할 필요는 없다고 말해주었다. 맷이 숀의 머리 내리치기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면 이는 도를 넘는 사과이다. 자신이 하지 않은 일에 책임을 인정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과는 숀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른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하고 관리할 책임을 회피하는 셈이니 말이다. 

 

- 사과를 망가뜨리는 또 다른 방법은 사과가 자동으로 용서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다. "미안해"가 피해자에게서 용서를 얻어내기 위한 협상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날 용서해 주겠어?" 혹은 "날 용서해 줘"는 친밀한 특정 관계에서 가능한 말이다. 상대방이 나와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상황일 때 이렇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잘못한 당사자로서 성급하게 용서를 바라거나 요구한다면 실패한 사과가 될 수밖에 없다.

 

- 실비아는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했지만 돈은 계속 용서를 요구했다. "내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은 맞지만 그만하면 충분히 화냈잖아. 내가 뭔가를 해서 당신 기분이 풀릴 수 있다면 말해줘"라고 설득하기도 했다. 실비아는 압박감을 느꼈다. 그러면서 내면으로부터 진정으로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오히려 줄어들었다. 이후 돈은 아내가 용서해주지 않는다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실비아가 보기에 이제 돈은 마치 희생자처럼 굴고 있었다. 용서할 마음은 더더욱 사라졌다.

 

- 진정한 사과라면 용서와 화해는 이후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용서를 요구한다면 상대가 압박감을 느끼면서 사과의 효과가 줄어들고 아예 안 하느니만 못하게 되기도 한다. 사과를 받아들이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 셀리니는 리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과거의 상처가 되살아났고, 애써 잊어버렸던 감정이 회오리쳤다. 리자는 두 번째로 음성 메시지를 남기면서 "내 입장을 듣는다면 아마 나를 용서할 수 있을 거야"라는 말을 덧붙였다. 셀리나가 응답을 하지 않자, 리자는 편지를 보냈다. 셀리나는 봉투도 뜯지 않고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자기 인생에 다시금 개입하려는 리자의 집요함이 셀리나에게는 폭력으로 느껴졌다. 

- 리자는 스스로를 용서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 용서의 과정에 셀리나가 포함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과의 목적은 상처받은 상대를 달래고 평화롭게 만들어주는 데 있지, 억지로 다시 만나 자기 입장을 설명하고 죄책감을 줄이는 데 있지 않다. 상처를 준 사람에게 연락해 사과하라는 조언 자체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는 상처받은 상대가 그 연락으로 또다시 상처받지 않는 상황에서만 가능하다. 물론 이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 무엇이 과도한 사과를 이끌어내는가? 확실히는 알 수 없다. 낮은 자존감, 권리의식 부족, 비판이나 거부를 피하려는 무의식적 욕구, 상대를 만족시키려는 과도한 기대, 감춰진 수치심, 예의바름의 과시 등등이 반영되었을 수 있다. 혹은 그저 오래전부터 "미안해"가 자동적으로 입에 붙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 진심 어린 사과에는 공감과 후회가 포함된다. 진정한 감정이 동반되지 않은 사과는 기계적이고 신뢰성이 떨어진다. 반면 자책이 지나친 경우도 있다. 자신이 크나큰 실수를 저질러 얼마나 괴로운지를 과도하게 표현함으로써 오히려 상처받은 상대가 기분 나빠진다면 이건 제대로 된 사과가 아니다. 내가 상담했던 사례를 살펴보자. 
 

- 레베카가 감정적 스트레스나 신체적 고통을 호소할 때면 에이미가 울음을 터뜨렸고, 결국 레베카가 엄마를 달래야 했다. 에이미는 "네가 아니라 내가 다쳤어야 했는데, 내가 대신 아플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텐데!"라고 무수히 자책했다. 자기 고통에만 초점을 맞추는 어머니를 보면서 레베카는 서서히 분노와 압박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어느 날 아침 "제발 그만하세요!"라고 외치고 말았다. "내가 아픈 건 내가 알아서 극복할 거예요. 엄마 힘든 얘기는 다른 데 가서 풀도록 하세요." 에이미는 다행히도 그 말을 알아들었다. 그리하여 나를 찾아와 죄의식과 슬픔을 털어놓았다. 레베카 앞에서 자기 감정을 토로하는 일은 자제했다.

 

- 에이미의 죄책감과 후회는 진심이었다. 레베카도 엄마의 깊은 슬픔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었다. 엄마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 레베카가 충분히 보지 못했다면 엄마의 사과는 실패했을 수도 있었다. 문제는 정도였다. 이들 감정 표현이 강도 조절 없이 지나치게 쏟아졌던 탓에 레베카는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스스로를 치유하기보다 오히려 엄마의 고통을 돌봐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던 것이다.

 

- 좋은 사과는 나에 대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사과는 상처받은 상대의 경험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내 감정을 쏟아내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에이미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내 고통에만 매달리다 보면 상처받거나 화난 상대와의 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진심 어린 사과의 기회가 사라지고 상대는 기분이 상한 채 대화를 중단해버리고 만다. 
 

- 미안하다고 말한 후 마치 상대가 내 얼굴을 구정물에 처박기라도 했다는 듯 처량하고 불쌍하게 구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안하다고 말하면서도 정말 불쌍한 것은 나 자신이라고, 그런 큰 잘못을 저지른 내 상황이 얼마나 힘들고 치욕스러우며 막막한지 모른다고, 늘 잘못을 저지르니 아예 입을 열지 말아야겠다고 한탄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 과도한 사과는 자기 방어의 표현일 수 있다. 피해자인 상대가 오히려 가해자인 당신의 기분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느끼기 시작한다면, 이는 감정의 수위를 낮추고 자기 방어를 가라앉혀야 한다는 신호이다. 진심 어린 사과는 나에 대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사과를 하고 싶다면 상대의 분노와 고통에 초점을 맞춰라. 내 감정은 다음번의 다른 대화에서 처리되게끔 하라. 

 

- 경청을 위해서는 경청이 불가능한 상황일 때 이를 알려야 한다. "지금은 아니야" 혹은 "이런 식은 아니야"라고 밝히도록 하라. 어떤 관계가 되었든 상대의 무례를 그저 참아 넘긴다면 자존감에 상처를 입을뿐더러 상대방도 더 잘 대화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게 된다. 근거 없는 비난을 그냥 방치하는 것은 공감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 자기 방어 상태에서 벗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누군가 분노 혹은 비난의 태도로 다가오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에 초점을 맞춘다. 이 자동화된 반응에서 벗어나 자신의 방어 심리를 알아차리고 자제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용기와 선의, 그리고 동기가 필요하다. 
 
- '모든 것'을 다 가져야 하는 사람은 능력을 중시할 뿐, 자신이 걸핏하면 실수를 저지르는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점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실수나 잘못을 인정하는 일은 설사 자기 혼자 있을 때라도 너무 위험하다고 느낀다. 완벽주의자들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Elizabeth Kabler-Ross의 "난 괜찮지 않아. 너도 괜찮지 않아. 그러니 다 괜찮은 거야"라는 지혜를 따라잡지 못한다.  

- 진지하게 사과하려면 자신의 부족함을 받아들이는 내적인 힘이 필요하다. 능력과 함께 한계도 생각해야 한다. 자존감이 탄탄하다면 자아상을 망가뜨리지 않고도, 남에게 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도 잘못을 인정할 수 있다.

- 상담가로 일하면서 나는 도저히 사과를 할 수 없다는 사람들의 주장을 수없이 들었다. 몇 가지만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각 주장이 조금씩 다르지만, 취약한 자존감을 드러낸다는 면에서 핵심은 다 통한다. 

 

- 치욕감과 죄의식은 완전히 다른 감정이다. 죄의식은 자신의 핵심 가치와 믿음에 반하는 방향으로 행동했을 때 받는 느낌이다. 이 느낌은 양심이 제대로 작동하는 경우에 가능하다. 죄의식은 친구의 믿음을 배신했다든지 정직하게 군답시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든지 하는 특정 행동, 자랑스럽지 못한 행동에 기인한다. 

 

- 건강한 죄의식은 비생산적인 죄의식과 구별되어야 한다. 아무 이유도 없이 "미안해요"라고 사과하도록 키워진 여성들의 죄의식은 비생산적이다. 건강한 죄의식은 좋은 죄의식, 우리가 목표로 하는 친절하고 정직하고 책임 있는 사람의 모습에서 살짝 비껴 났을 때 사과하도록 만들어주는 죄의식이다. 

 

- 건강한 죄의식과 달리 치욕감은 행동의 범위를 넘어선다. 내 친구들 중 한 명은 이를 근본적인 자아에 대한 '역겹고 유독한 감정'이라고 표현한다. 죄의식이 행동에 대한 것이라면, 치욕감은 존재에 대한 것이다. 내 안 깊이 숨겨진 사악하고 가련한 진실을 알게 된다면, 누구도 나를 사랑하거나 존중해주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 이 참기 어려운 치욕감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는 가장 어두운 구석에 파고들어 숨을 수 있다. 너무 많은 공간을 차지한다고 너무 많은 공기를 들이쉬고 있다고 허둥지둥 사과할 수도 있다. 아니면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 치욕감을 오만, 거만, 독선 등으로 표출하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사과는 마지막까지 하고 싶지 않은 일이 된다. 

- 지나치게 사과하는 유형은 여성에게 많고, 지배하는 유형은 남성에게 많다. 예외도 있지만 전체적인 경향이 그렇다. 치욕감 회피의 이 두 유형은 밤과 낮처럼 달라 보이지만, 실은 낮은 자존감의 앞뒷면에 불과하다. 우월감에 빠진 사람이 열등감에 찌든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깨닫기까지 나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현명하게 잘 사과하는 법을 익히기는 두 유형 모두에게 어렵다.

 

- 남에게 해를 끼친 자기 행동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진정 책임지려는 사람은 안정적인 자존감을 지녔다고 봐도 좋다. 이 정도 자존감이 되어야 남에게 상처를 준 후 상황을 파악하고 공감과 후회에 이를 수 있다. 그리고 진심으로 자기 행동을 반성하고 사과하게 된다. 물론 진심 어린 사과가 늘 심각한 잘못을 무마시키지는 못한다. 하지만 첫 단계가 되기에는 충분하다. 

 

- 수십 년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나는 네 딸 모두와 성교를 한 어느 목사에 대해 심리검사를 진행한 적이 있다. 그는 후회도 죄의식도 없었다. '굳건한 가족 가치'를 지닌 종교인으로서 그는 딸들이 자칫 낯선 사람에게 이용당하면서 성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주장했다. 외아들과는 성교하지 않았느냐는 내 질문에 그 목사는 격분했다. 그리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박사님, 그건 죄악입니다!" 

- 커다란 잘못을 저지르고도 전혀 반성하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사랑이나 공감 같은 감정이 결여된 사이코패스라고 여기면 될까? 일부는 그렇다. 위에 언급한 목사는 다른 면에서는 모두 정상적인 생활을 했지만, 부모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폭력을 저질렀다. 자기기만이라는 인간의 능력은 참으로 대단하다.

 

- 정체성과 자기 가치가 위협받는 상황이라면, 진정한 사과라는 신뢰 회복의 도전을 기꺼이 감당하기 어렵다. 그보다는 이성적 논리, 책임 최소화 혹은 거부로 스스로를 무장해 살아남으려고 하기 쉽다. 그런 상황에서 자기 방어는 더 이상 인식하고 피해나갈 장애물이 아니다. 자기 가치를 잃어버릴 위기 앞에서 자기 방어는 우리가 머물러야 할 곳이 된다. 

 

- 사과도 않고 후회도 없는 뻔뻔한 가해자를 만나면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모욕은 모욕으로 치욕감은 치욕감으로 말이다. 문제는 이게 잘 안 된다는 것이다.  

 

- 일단 꼬리표를 붙이고 치욕감을 주면 반성과 긍정적 변화의 가능성이 좁아진다. 심각한 범죄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는 자기 실수를 인간의 일부분으로 볼 수 있는 경우, 다층적이고 변화하는 자신을 큰 그림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꼬리표 붙이기나 백안시하기로는 범죄자의 마음을 열고 자기 방어를 무너뜨릴 수 없다. 반대 효과가 나타날 뿐이다. 

 

- <뉴요커>지의 만화가 밥 맨코프 Bob Mankoff는 증인석의 여성이 "그 사람이 어린 시절에 학대를 당해서 저한테 사기를 쳤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저도 어릴 때 학대를 당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쏘았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을 그린 적이 있다. 심리적 이유를 이렇게 설명함으로써 자기 결정과 행동의 유해한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상황을 정확히 포착한 것이다. 

 

- 자기 의도를 부정한 채 다른 핑곗거리와 심리적 정당화에 매달리는 가해자는 존엄성을 유지할 수 없다.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지 고려해야 할 필요는 분명하지만, 힘든 개인사나 현재의 어려운 환경이 나쁜 행동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 과거의 트라우마나 현재의 고통에 시달린다고 해서 누구나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애정이 넘치는 부모이자 선량한 시민이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자기 안의능력을 개발해 모두에게 유익한 존재로 거듭난 것이다. 

 

- 가장 신뢰하던 사람에게 배반당한 피해자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상담치료사로 일하다 보면 피해자가 가해자인 부모나 가족과 대면해 진심 어린 사과를 듣고 싶어 하는 경우가 있다. 상처 주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실관계를 확인시켜 주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 하지만 기다리던 만남은 피해자에게 또 다른 상처를 남기기 십상이다. 심각한 상처를 입힌 사람들 대부분은 사과와 위로는커녕 가해 행동을 인정조차 하지 않는다. 치욕감 때문에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와 자기기만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남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더 솔직한 법이니 말이다. 

 

- 그러니 가해자와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라. 원하는, 그리고 마땅히 들어야 할 대답을 얻을 가능성이 제로에 가깝다고 생각하라. 상대가 어떻게 나오든 당신은 당신 자신을 위해, 그리고 당신 입장을 정리하기 위해 진실을 말하라. 진심 어린 사과는 현재나 미래에나 나올 가능성이 거의 없다. 

 

- 책임을 지거나 진심으로 후회하는 것이 스스로의 정체성에 참기 어려운 위협이 되는 상황에서 기꺼이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잘못된 행동을 기꺼이 인정하는 태도는 당신에 대한 애정 정도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보다는 자기애와 자기 존중의 수준이 책임지고 공감하고 후회하며 사과하는 능력을 좌우한다. 이러한 능력은 자기 자신만이 발휘할 수 있을 뿐 남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과하지 않으려고 작정한 사람을 바꿀 방법은 없다. 자기 방어, 치욕감 등이 너무 커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상태인 사람은 결코 자기 책임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사과와 타협이라는 것은 여러 사람이 함께 만들어가는 도전적인 과정이다. 맥락과 상황에 따라 이 과정은 달라진다. 때로는 받고 싶고 받아야 하는 사과는 얻어내지도 못하면서 문제만 악화시킬 수도 있다. 고통과 슬픔에 사로잡힌 사람은 이런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겠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상대가 자기 방어를 풀고 사과하게 만들 수 없다. 사과하지 않는 가해자의 행동에 대해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상대가 자기 방어를 강화하는 것만은 막을 수 있다. 이를 통해서 내 말이 전달될 가능성을 최고로 높일 수도 있다. 

 

-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해야 하는지 지시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사과하라는 말도 그런 지시의 일종이다. 상대에게 사과를 끌어내려고 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요구를 받았기 때문에 하는 사과의 말에는 진정성이 없다. 당신이 기꺼이 받아들일 만한 진심 어린 사과를 어떻게 하면 이끌어낼 수 있을지 고민해 보라. 그리고 좋은 의도의 사과는 너그럽게 받아들이도록 하라. 

- 배가 출출해 견과류와 초콜릿을 꺼내 아이들에게 먹였다. 바로 옆에는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귀여운 여자아이가 어머니와 함께 역시 바닥에 앉아 있었는데, 우리 아이들이 간식 먹는 것을 부러운 듯 쳐다보기에 나는 별생각 없이 한 줌 건넸다. 아이가 그것을 받아 맛있게 먹었다. 5분쯤 지났을 때 불현듯 여자아이 어머니에게 먹을 것을 줘도 되는지 물어보지 않았다는 점이 생각났다. 그렇지만 아이 어머니가 보면서도 개입하지 않았고, 또 어차피 물어볼 시점이 지나버린 것 같아 잠자코 있었다. 조금 더 시간이 흘렀는데도 불편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 나는 사과를 하기로 했다. "좀 전에 여쭤보지도 않고 따님한테 먹을 것을 주어 죄송합니다. 미처 생각을 못했어요."

- 나는 아이 어머니가 아무 문제없다고, 혹은 괜찮다고 대답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어머니는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사과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어머니가 내 사과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정중했다. 그리고 말한 것 못지않게 중요한, 말하지 않은 내용까지 전달하고 있었다. 그 순간을 불편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 내 사과를 얼버무려 넘기지 않았다. 그 어머니는 내 감정을 충분히 존중했던 것이다.

- 또 그 어머니는 화를 내지도,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말투는 그야말로 자연스러웠다. 속마음은 아니었겠지만 나를 가르치려고 들지도 않았다. "우리 딸이 소아 당뇨나 견과류 알레르기였다면 어쩌시려고요?"라든지 "댁의 아들들이 바닥을 짚은 더러운 손을 간식 봉지에 그대로 넣지 않았나요?"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저 한마디 "사과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내가 사과해야 할 만한 행동을 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하지만 비난은 섞이지 않은 응답이었다. 나는 커다란 교훈을 얻었고, 그 뒤로는 다른 아이에게 먹을 것을 줄 때 반드시 그 부모에게 먼저 물어보게 되었다. 또한 단순하고도 정중하게 사과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인상 깊게 기억하게 되었다. 

 

- "사과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앞선 사례는 사소해 보이지만, 실제로 "사과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기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은 놀랄 정도로 많다. 

 

- 그날 늦은 오후 프랭크는 내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 식사 내내 혼자 떠든 것 같아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어이없는 행동을 했더라고. 이메일을 보낼까도 생각했지만 전화로 사과하는 게 나을 것 같았어." 친구는 곧바로 "아니, 사과할 필요 없네. 자네 여행 이야기가 아주 흥미진진하던걸"이라고 대답했다.

- 용기를 내서 해온 사과를 이런 식으로 아무것도 아니게 만드는 일은 흔히 발생한다. 불편한 순간을 가능한 한 빨리 끝내고 싶기 때문이다. 사과하는 사람에게 그건 아무 일도 아니라고, 전혀 중요하지 않으니 괜한 생각 말라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당연히 생각을 해야만 하는 일인데도 말이다. 어쩌면 그는 그 이후 정말로 사과를 하지 않게 될 수도 있다. 

 

- 상대가 쑥스러움을 이겨내고 진지하게 사과를 해온다면 우리도 불편한 마음을 억누르고 "사과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사과하는 노력을 무효로 만들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하라. 

 

- 자녀들에게 사과하는 법을 가르치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 상담치료사들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은 대답을 했다. 어른들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부모가 필요할 때 먼저 자녀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자녀에게 사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 자녀에게 기대하는 행동을 부모가 먼저 보여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자녀들은 늘 부모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권위가 떨어질까 봐, 나약해 보일까 봐 자녀들에게 사과하지 않으려는 부모들도 있다. 하지만 부모의 진솔한 모습은 자녀들에게 세상의 공정함을 인식하게 하고, 현실 감각을 심어준다. 더 나아가 열등감이나 체면을 걱정하지 않고 잘못을 인정하는 방식도 배울 수 있다. 사과하는 능력은 우리가 자녀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린이들은 무엇이 정의로운지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부모가 자기 방어를 위해 그 정의를 부정하는 경우 혼란과 고통에 빠지고 만다. 

 

- 가족 상담을 진행하면서 나는 자녀들에게 사과하는 법을 가르칠 때 어른들이 지켜야 할 또 다른 규칙을 찾아냈다. "사과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한 후 거기서 입 다무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다. 간단해 보이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운 조언이다. 사과를 발판으로 잔소리나 설교를 시작하는 것이 우리의 반사적 반응이기 때문이다. 

 

- 아이들은 사과하는 순간, 다음과 같은 말을 듣게 된다. "사과한 것은 잘했다. 하지만 동생을 놀이에 끼워주지 않았을 때 동생 마음이 어땠을지 생각해 보면 좋겠어. 진짜로 미안한 거니, 아니면 그냥 말만 그렇게 하는 거니? 다음번에는 내가 사과하라고 하기 전에 먼저 사과할 생각을 하면 좋겠다." 그런 상황에서의 기분을 열한 살짜리 남자아이는 "난 사과하는 게 싫어요. 결국은 꼭 마음 상하게 되거든요"라고 표현했다. "미안해"라고 사과하기만 하면, 그러니까 남의 입장을 생각해야 한다는 설교가 나오거나 전에도 그렇게 이기적이고 생각 없이 굴었다는 잔소리가 나오는 상황을 수없이 경험한 것이다.

 

- 어린이의 사과를 아예 거부해 버리는 어른들도 있다. 내 친구딸의 4학년 교실에서 종종 일어나는 상황이다. 한 학생이 잘못된 행동을 하면 선생님이 노려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학생이 잘못했다고 사과하면 "잘못인 줄 알면 하지 말았어야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 아이에게 사과를 가르치고 싶은가? 내가 공항에서 만났던 아이 엄마를 기억하라. 그 어머니를 본보기 삼아 자녀의 사과를 받아줘라. 물론 이후 더 긴 얘기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사과하는 아이 앞에서 당장 말을 시작할 필요는 없다. 그건 사과를 거부하는 행동이고 사과한 아이를 혼란과 후회 속에 빠뜨리고 만다. 

- 나 자신이 하는 사과를 검토하고 기준을 높이 세우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하지만 남에게도 같은 기준을 요구하는 것은 비생산적이다. 이렇게 하면 갈등의 시간이 연장되고 관계의 거리감이 생겨날 뿐이다. 

 

- 미안하다고 말하는 상대가 몇 퍼센트나 진심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걸 평가하려고 든다면 역효과만 난다. 상대는 불안과 불편을 느끼면서 기계적으로 사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불만스러워하는 상대 앞에서 정말로 미안함을 느끼려면 시간도 좀 필요하다. 

 

- 공항에서 여자아이의 어머니에게 사과했을 때 나는 정말로 미안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 신경 쓰지 마세요" 정도의 대답을 기대하며 반쯤만 진심이 담긴 사과를 했다. 그 어머니가 특별한 방식으로 내 사과를 받아들인 후에야 비로소 정말로 미안함을 느끼면서 그 어머니 입장을 돌이켜보게 되었다. 자신에게 건방지다거나 거만하다는 꼬리표가 붙어버렸음을 아는 사람이 정말로 미안함을 느끼고 상황을 분석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 로버트의 아들이 한 사과의 진정성을 확인할 유일한 방법은 다음번에 아버지의 도움을 받았을 때 어떻게 감사를 표하는지 보는 것이다. 이렇듯 사과의 진정성은 나중에 드러난다. 물론 힘에 부치더라도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고 도와주었다가 나중에는 이용당했다고 화를 내는 로버트의 성향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 나는 로버트에게 사과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거나 용서되는 것도, 추후 다시 논의할 여지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일깨워주었다. 로버트는 아들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심술궂게 전화를 끊어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다행히 그 사과는 받아들여졌다. 
 
- 사과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늘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세계 최고의 사과라고 해도 모든 관계를 복구시킬 수는 없다. 진심에서 우러나왔다고 해도 "미안해"가 늘 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한다. 관계의 토대인 신뢰가 영원히 복구되지 못하기도 한다. 상처를 준 상대를 두 번 다시 보지 않겠다고 작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과는 받아들일 수 있다. 

 

- "어떻게 답장을 해야 하죠?" 조앤이 내게 질문을 던졌다. 마샤의 사과가 진심이라고 믿지만, 함께 점심을 먹는다는 생각만으로도 거부감이 든다는 것이었다. 아예 답장을 하지 않을까도 생각했지만 마샤의 이메일을 무시한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민 끝에 조앤은 다음과 같은 이메일 답장을 보냈다. 

마샤에게 
사과의 편지 고마워. 우리에게 일어났던 일, 그리고 네 행동이 내게 미쳤던 영향에 대해 그렇게 생각을 많이 했다니 기뻐. 내 입장에서는 다시 대화를 나누거나 친구 사이로 돌아가기에는 아직도 너무 부담스럽네. 잘 지내기를 바라. 함께 보낸 시간의 좋았던 기억을 간직할게.

조앤



- 나는 조앤의 답장이 모범적이라고 칭찬했다. 짧고 진정성 있으며 핵심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조앤은 용서한다고 쓰지 않았다. 실제로 용서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마샤의 행동이 자신을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다시금 잘못을 따지지 않았다. 시간이 더 지나면 달라질지 모른다는 식으로 핵심을 흐리고 원치 않는 관계의 복구 가능성을 남겨두지도 않았다.
 
- 처음에는 '네 사과를 받아들일 수 없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조앤은 사과에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마샤의 잘못된 행동을 그대로 갚아주기보다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려는 성숙함을 보인 것이다. "사과해 주어 고맙다"는 말은 예전처럼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는 의미도, 또다시 연락을 주고받자는 의미도 아니었다. 깨져버린 관계가 모두 복구 가능하지는 않다.

 

- 때로는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도 발생한다. 사과하는 사람이 충분히 상황을 파악하고 이해하지 못했을 때, 오해나 과민반응이 문제의 이유라고 주장할 때가 있다. 식사 중에 계속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거나 자기가 맡은 집안일을 하지 않는 등의 행동을 여전히 반복하면서 말로만 사과하고 반성할 때도 그렇다. 사과해야 할 일을 또다시 저지르지 않겠다는 진지한 노력이 없다면, 그 반복적인 사과는 필요 없다는 점을 분명히 알려야 한다. 

 

- 사과가 거짓이거나 비난을 되돌리려는 시도라면 이를 분명히 지적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초등학교 반 구성에 다양성이 결핍되었다는 주제로 운동장에서 몇몇 부모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적이 있다. 한 어머니가 아들 반에 흑인 학생이 둘인데 "아주 깔끔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한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다른 아버지가 "흑인이긴 한데 깔끔하고 예의 바르다고요?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죠?"라고 되물었다. 그 어머니는 무의식적으로 인종주의가 드러날 때 누구나 그렇듯이 아주 방어적인 태도를 보였다. 

 

- 다음 날 다시 운동장에서 만났을 때, 그 어머니는 "사과할게요. 제 말을 인종주의 발언으로 들으셔서 유감이에요. 전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었거든요"라고 말했고, 다른 아버지는 "하신 말씀이 아니라 제 반응이 문제라고 생각하시는 거라면 그 사과는 받아들일 수 없겠네요"라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 어머니는 괜한 트집을 잡는다고 주장하며 정치적 올바름을 위해 늘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해야 하는 것이 지겹다고 말했고, 결국 그 아버지는 잠깐 머리를 긁적이더니 "우리 두 사람은 이 문제를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것 같군요"라는 말과 함께 그 자리를 떠났다. 

 

- 그 아버지의 대처는 참으로 훌륭했다. 더 이상 논쟁을 이어가지도 않고, 자기 생각을 강요하지도 않았다는 점이 특히 그랬다. 대신 그 어머니가 자기 말의 함의를 생각해 볼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언젠가는 그 어머니도 깨닫게 될 날이 있으리라. 

- 거리 두기는 감정의 동요를 처리하는 한 가지 방법일 뿐이다. 비난하는 이나의 방식보다 더 낫거나 못하다고 할 수 없다.

- 우리는 습관적으로 비난받아야 할 한 사람, 즉 '먼저 시작한 사람'을 찾는다. 하지만 인간관계는 그렇게 굴러가지 않는다. 부부를 지켜봐 온 두 사람의 의견은 모두 맞고 또 모두 틀렸다. 관계는 일직선이 아니라 원형으로 작동하며, 한쪽의 행동이 다른 쪽의 행동을 유발하거나 강화한다. 그러므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누가 시작했는지, 누가 비난받아야 하는지가 아니라, 양쪽이 어떻게 각자의 행동과 반응을 조정해야 하는가이다. 
 
- 내가 잘못한 부분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때, 그에 대해서 사과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내 몫을 분석하고 변화시킬 의사가 없다면, 또한 내 행동이 상대에게 마땅히 필요했고 정당화된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잘못한 부분은 사과할게"는 진정한 사과가 되지 못한다. 이나와 샘이 좋은 마음으로 진정한 책임을 인정하며 자기 몫의 잘못을 사과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사과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최소한 둘 중 한 명은 스트레스 상황에서 습관화되어 버린 행동을 바꿀 필요가 있다. 

 

- 부부싸움에서 남편이 마지막으로 해야 할 말은 "당신이 옳아. 내가 틀렸어. 미안해. 다신 안 그럴게"라고 한다. 남자들이 주고받는 농담이다. 이 농담의 의미는 분명하다. 여자들한테 잘못 걸려들면 뼈도 못 추리니 불쌍한 남편들은 그저 사과하고 평화를 유지하자는 것이다. 여자란 진지한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비이성적인 존재라는 주장이니 모욕이 아닐 수 없다. 남자들에게도 역시 모욕적이다. 어차피 자기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없는 존재라는 의미이니 말이다. 이 농담은 여성에게 하는 남성의 사과가 그저 원치 않는 지루한 대화를 피하는 방편임을 보여준다. 

- 하지만 우리는 용감하게 사과를 선택할 수 있다. 갈등이 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말이다. 진정한 대화는 최소한 한쪽이 진정해야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먼저 사과라는 평화의 올리브 가지를 내밀어 감정적 수위를 낮추는 것이다. 그래야 두 사람이 서로의 말을 들을 수 있다. 아니, 최소한 한 공간 안에 존재할 수 있다. 아직 내가 잘못한 부분이 명확하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해 생각해 보겠다는 의미로 "내가 잘못한 부분은 미안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목표는 표면적이고 성급한 평화가 아닌,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강화되는 친밀감이다. 
 
- '꾸며내기'라는 단어는 여성들에게 부정적인 함의를 갖는다. 충분히 그럴 만하다. 우리는 정당한 분노와 저항을 부정하고 자아를 희생해 남자들을 기쁘게 하고 보살피도록, 그리하여 어떻게든 가족 관계를 유지하도록 교육받았다. 안 그러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방 안의 귀중한 산소를 축내는 것에 대해 사과하도록, 죄의식과 자기 의심을 낡은 담요처럼 걸치고 살도록 교육받았다. 
 

- 진짜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가족 및 친구와의 친밀감은 서로에게 마음속 진실을 말하도록,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어야 가능하다. 흘러가는 대로 그냥 흘려보내는 방관적인 삶에는 솔직함도, 발전도 없다. 어떤 관계에서든 습관적인 행동을 바꾸려면 일단 꾸며내기를 시작해야 한다. 진정한 자아와는 아무 관련도 없어 보이는 그 행동 말이다.  

- 습관은 처음에는 비단 오라기 같다가 동아줄이 되어버린다는 옛 스페인 속담이 있다. 변화는 쉽지 않다. 적극적으로 변화를 시도하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현 상태를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될 때 놀라운 변화의 가능성이 열린다. 거리 두기를 하는 사람은 유대를 위해 노력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경청하며 질문을 던지게 된다. 비난의 말이 과도했던 사람은 간결함을 연습하고 침묵의 공백을 참아내게 된다. 나서서 일을 처리해야 속이 시원한 사람은 '내가 제일 잘해'라는 태도를 누그러뜨리고 조언과 개입을 자제하게 된다. 무뚝뚝한 사람은 풀잎처럼 굽히는 법을, 지나치게 남에게 휘둘리는 사람은 참나무처럼 꼿꼿이 서는 법을 익힐 수 있다. 
 
- 더 이상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가 될 것이다. 우리는 온전한 자신이 되어야 하고, 동시에 '새로운 자신'을 시도해야 한다. 모험심이 없다면 현재의 내 모습, 현재의 관계에서 가능한 수준에 갇혀버리고 만다. 최고의 사과는 온전한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점, 그러면서도 원하는 자신의 모습을 선택해야 한다는 점을 아는 이들에게서 나온다. 

- 사과는 30초면 충분하다. 하지만 관계의 교착상태에서 내 입장을 바꾸는 것은 장거리 달리기이다. 인내심이 필수이고, 내면과 외면의 거센 저항에 맞서 앞으로 나아가는 결단력도 필요하다. 당장 발끈해서 말하거나 행동하고 싶은 순간, 가만히 앉아 있는 자제력, 누구에게 언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아는 지혜도 있어야 한다. 

- "정말 미안해. 널 보호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우리 가족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네가 마음 놓고 내게 진실을 알려주지 못하는 상황이었던 것도 미안해"라고 말했다. 그리고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킴은 두 팔로 어머니를 감싸 안았고, 모녀는 함께 울었다. 레티가 어떻게 딸 앞에서 모든 자기 방어를 버리고 그런 열린 태도를 보일 수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레티가 미안하다고 한 것은 성폭행이 자기 잘못이기 때문도, 자신이 나쁜 엄마였다고 생각하기 때문도 아니었다. 다만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온 마음을 다해 경청하고 사랑을 주고 싶었을 뿐이다. 

 

- 레티의 눈물은 딸의 분노를 잠재우거나 대화를 자신의 고통으로 돌리기 위함이 아니었다. 킴에게 위로를 구하지도 않았다. 그 끔찍한 사건의 당사자가 된 것에 대한 레티의 사과는 진심이었고, 두 모녀에게 치료 효과를 발휘했다. 

 

- 레티의 사과에는 사족이 없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미안하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건 나도 전혀 몰랐다는 걸 알아줘"라든가, "미안하다. 하지만 오래전에 일어난 일이잖니. 이젠 잊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해"라는 식의 사과가 아니었던 것이다. 심지어 "미안하다. 네가 날 용서해 주면 좋겠다"라는 말도 없었다. 물론 레티는 킴이 자신을 용서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상대에게 무언가 요구하는 것은 진정한 사과가 아니다.  

 

- 충분히 오래 대화를 나누며 경청하고 나면 실제로는 용서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용서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님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보다는 스스로가 분노, 고통, 후회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뜻이다. 자신을 배신하거나 험담한 친구가 벌을 받기를 바라는 앙심에 찬 인간이 아닌, 선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결국 "용서하고 싶어요"라는 말은 "이 일을 떠나보내고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어요"라는 뜻이다. 

- 뻔뻔한 가해자를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용서하려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다. 이런 용서가 종교적 믿음이나 세계관을 실천하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그저 분노와 후회라는 부담을 떨쳐버리고 싶을 뿐이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용서보다는 해소, 객관화, 떠나보냄 등에 더 가깝다. 

- 떠나보냄은 쉽지 않은 일이다. 용서가 그 과정의 일부가 되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치유에는 한 가지 길만 존재하지 않는다. 용서는 하나로 정의되지 않는다.

-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 앤 라못 Anne Lamott의 책에서 우연히 발견한 구절이다. "영적 믿음의 가장 중요한 선물 중 하나가 용서이다. 오랫동안 수없이 상처를 입으며 그 선물을 내 것으로 만들고자 안간힘을 쓴 끝에 이제는 타인에 대한 공감이 거의 자동적으로 나오게 되었다." 참으로 멋진 글이다. 공감은 용서가 아니며, 용서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 용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이들은 떠나보냄과 용서를 하나로 생각한다. 용서하지 않으면 행복한 삶이 불가능하다느니, 만성적이고 비생산적인 분노와 슬픔이 건강에 나쁘다느니, 가해자에 대한 공감과 동정을 개발해야 할 덕성이라느니 하는 글들이다. 이를 반박하느라 굳이 애쓸 필요는 없다. 다만 그 어떤 행복과 건강, 덕성도 용서를 필수 요소로 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기억하면 된다. 

- 수십 년 동안 용서와 관련해 사람들을 상담치료하면서 깨닫게 된 진실 하나는, 자신을 부정적 감정의 고통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가해자를 용서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특정 행동을 용서하지 않고도 가해자를 사랑하고 동정하는 수준에까지 다다를 수 있다. 용서하지 않는다고 해서, 누군가를 다시는 보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부족하거나 차가운 사람인 것은 아니다. 분노의 잔재가 남았다 해도 나는 더 강하고 더 용감한 사람일 수 있다. 

 

- 더욱 중요한 점은 용서할지 말지를 온전히 자신이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담치료사도, 어머니도, 선생님도, 영적 지도자도, 친한 친구도 그 누구도 이를 대신 결정해 줄 수 없다. 

- 가해자가 자신의 행동에 아무 가책을 느끼지 않을수록, 가책은커녕 신나게 삶을 이어가는 듯 보일수록 피해자는 더 큰 분노와 고통, 비탄을 겪게 된다. 상처를 입힌 사람이 진심 어린 사과도, 후회도, 심지어 인정도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를 고통의 진창에 처박히게 만드는 요소는 무엇이고, 거기에서 빠져나오게 해주는 요소는 무엇일까? 

- 누구나 덜 고통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악순환에 빠져 해결책을 찾지도, 고통을 떠나보내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정의에 대한 갈망, 타인의 행동을 이해하려는 인간적인 몸부림, 나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강조하는 성향 등이 떨치고 벗어나기를 어렵게 한다. 문제가 낯선 이의 사소한 무례함이든, 중요한 관계에서 일어난 커다란 배신이든 간에 말이다. 

 

- 뉴욕 브루클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나는 어머니에게서 중요한 교훈을 배웠다. 누군가 불친절한 언행을 보이면(예를 들어 슈퍼마켓 계산대 직원이 우리를 함부로 대하면) 어머니는 "저 사람은 아주 불행하구나"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기분 상한 것을 달래기 위한 말이 아니라 차분한 관찰 결과였다. 나는 어머니의 그 말씀을 "기분 나쁠 것 없다. 불행이나 불안정감은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만든단다. 누군가 불친절하게 행동한다면 그건 그 사람의 문제일 뿐 너 때문이 아니야"라고 해석했다.

- 어머니의 그 말씀 덕분에 나는 웬만한 일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게 되었고, 인간을 행동을 넘어선 복합적 존재로 파악하며 공감을 키우고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심리치료사라는 내일에도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상담실을 벗어나서도 늘 그렇게 성숙한 태도를 유지하지는 못한다.

 

- 세 번의 만남 후 나는 카트리나에게 그 지역의 심리치료사를 소개해주었다. 감정적 트라우마를 완화시키고 안도감을 높이는 EMDR(Eye Movement Desensitization and Reprocessing, 안구운동 민감소실 및 재처리요법) 전문가였다. 몇 년 후 카트리나가 이메일을 보내왔다.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유능한 심리치료사 덕을 많이 보았고, EMDR로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고 했다. 과열된 신경체계와 강박적 사고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약물치료도 했다. 이제는 달리기도 하고, 잘 먹고 잘자며 자신을 돌보는 중이었다. 물론 시간도 약이 되었을 것이다. 

 

- 그 중요한 행사에서 그렇게 상처를 주어 미안하다고 했다. 실라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구석에 앉아 한 사람과 그렇게 시간을 보낸 것은 변명의 여지없이 잘못된 행동이었음을 인정했다. 친구에게 아주 중요했던 그 행사를 내가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속으로는 실라가 "그래. 나도 너한테 뭔가 신호를 보냈어야 했어. 그러니 나한테도 책임은 있는 거지"라고 말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 희망은 떠나보냈다. 진정한 사과는 상대의 상처받은 마음에만 초점을 맞춰야 한다. 사과하는 쪽이 무언가 얻기를, 내 경우에는 용서 혹은 일부의 책임 인정을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지나친 희생을 요구하는 터무니없는 요구에 굴복하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책임 없는 일에 대해 사과하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남들의 취약함에 대해 관대하라고 말하고 싶다. 친밀한 인간관계에서 우리는 상대가 내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대신 보듬어주기를 기대한다. 생각해 보라. 중요한 사람에게는 정말로 그렇게 기대하지 않는가? 

 

- 진심 어린 사과는 그 관계의 가치를 인정하고, 핑계나 비난 없이 우리 측의 책임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이 과정은 자기주장이나 정당화보다는 상대의 행복과 관계에 대한 투자이다. 사랑하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 그리고 상대의 감정이 과장되고 때로 자기 책임을 보지 못한다고 해도 내 쪽의 책임을 성숙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 공격 본능을 버리고 진심으로 대하라. 어렵지만 가치 있는 일이다. 사과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제대로 사과할 수 있는 지혜는 리더십, 연인 관계, 부모자녀 관계, 친구 관계, 개인의 자존감, 그리고 사랑의 성공을 위해 필수적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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