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오마르 / 최진영
출판 : 놀
출간 : 2022.11.30
아주 어린 시절에는 일단 시작한 시리즈는 반드시 끝을 보곤 했었다. 애초에 손을 대지 않는다면 모를까, 한 번 읽기 시작했는데 마지막까지 읽지 않는 건 뭔가 굉장히 잘못된 일처럼 느꼈다. 그게 뭐라고.
그러다 '연중'이란 걸 알게 되면서 내가 의도치 않아도 도중에 그만둬야만 하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는 걸 배웠다. 덕분에 상당한 양의 죄책감(?)을 버릴 수 있었고, 그 대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도 도중에 그만두는데 독자에게 그 정도의 자유도 주어지지 않는 건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떳떳함을 품었다. (하지만 보통 도중에 끊어지는 이야기들은 꼭 끝까지 읽고 싶은 이야기들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나는 분노에 차 있었다)
지금은 웬만하면 완결이 난 작품을 고르고, 길게 이어지는 시리즈는 시작 전에 조금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한 정도다. 그래도 꼭 시작은 1권으로, 첫 페이지부터 읽어나가기는 한다. (어라. 딱히 나아진 게 없... 나?)
그래서 몰랐으면 모르지만 알면서 안 읽기는 마음에 걸려서. 또 제목도 마음에 들어서.
조금 꽤 늦었지만 오마르의 세 번째 에세이를 읽게 되었다. <이게 다 외로워서 그래>.
이번 책은 완전히 에세이라고 말하기는 애매하다. 저자나 편집자의 설명은 없지만, 5장 '오늘도 심야식당에 간다'는 소설과 에세이에 중간 어느 지점에 존재한다. 화자가 자주 바뀌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 사람의 이야기로 읽어나가면 약간씩 어긋나는 지점들이 생기기 때문이다.
아무려면 어떤가. 이야기라는 게 원래 그런 것 아니던가.
하지만 만약 모든 이야기가 한 사람에게 모인 이야기라면, 그렇다면 그가 토로하는 외로움은 각각의 이야기에 담긴 것들의 총량보다 조금은 더 짙을 것 같다. 그렇게 모여들어 고인 것들은 보통 더 짙어지고 깊어지게 마련이니까.
내 경우에는 사람을 찾거나 부대끼는 일을 그리 기꺼워 하지 않는 편이다. 선택지가 있다면 혼자 조용하게 있는 걸 선호하는데, 그럼에도 저자의 농담이나 철학에 동의하게 되니 꽤 놀랍다. 보편성 혹은 스타성 은 반드시 특정 색깔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걸 다시금 되새긴다.
생각을 다듬고 정리해 문장으로 만들어내는 이에게는 길고 길었을 밤이 읽는 이에게는 하룻밤이었다. 많은 문장들이 어딘가에 걸리고 또 저긴가에 남았지만, 가장 반가웠던 건 '단어의 무게'였다. 뭔가 하나에 깊게 빠져 일정 수준 이상의 이해도를 얻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해 다시 말해 덕이 되지 못하는 괴로워했던 적이 있었기에. 어쩌면 아직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기에. '나만 이런 게 아니어서' 위로를 받았다. 감사하게도.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와 <모두와 잘 지내지 맙시다>보다 3mm쯤 덜 날카롭고, 2도쯤 더 다정했다.
즐겁게 읽었다.
덧. 4컷 만화는 저자가 아닌 일러스트레이터 분께서 그린 것으로 아는데, 본문과는 다소 다른 웃음코드로 접근하니 색다른 재미를 찾아보셔도 좋겠다. 무게중심을 옮기며 가볍게 환기해 준다.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했던 충고,
나를 증명하기 위해 했던 숱한 야근,
치열했던 하루 끝에 올려다본 밤하늘.
시원한 맥주로 축이는 마음의 갈라짐.
나, 외로웠구나.
별수 있나.
잘 안고 살아낼 수밖에.
- 외로움이라고 열 번 발음해 본다. 어떤 단어든 열 번 정도 육성으로 뱉으면 다섯 번째 혹은 여섯 번째부터 단어의 의미가 희미해지고 고유의 질감이 흐려진다. 열 번째가 되면 아무 융기 없이 평평하고 입에 담아도 아무 맛이 안 나는, 그저 세상에 있다는 느낌 정도밖에 주지 못하는 단어가 된다. 그런 외로움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리 좋지도 썩 나쁘지도 않은 그것, 외로움에 관해서.
- 혼자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가만히 있기가 힘들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땐 말이건 행동이건 뭔가를 끊임없이 몸 밖으로 내놓아야 직성이 풀렸는데, 혼자 있을 땐 계속 무언가에 주로 화면 속 내용에 정신을 내어주고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 무엇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고 오롯이 혼자 존재하는 순간을 견디지 못하게 된 것 같다. 그냥 숨만 쉬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몰라도 좋을 정보나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의 시답잖은 소식들을 끝없이 눈으로 빨아들여 머릿속에 꽉꽉 채운다. 어떤 빈 공간도 남겨두지 않는다.
- 누가 스타벅스에 갔다가 한 남자가 스마트폰도, 이어폰도, 노트북도, 심지어 책도 없이 가만히 앉아 커피만 마시고 있는 모습을 봤는데 꼭 사이코패스 같았다고 한 농담을 읽었다. 그 농담 역시 가만히 있지 못해 스마트폰 화면을 보다가 읽었다. 마지막으로 가만히 앉아만 있었던 때가 언제였나 기억을 더듬어본다.
- 그날 난 정말이지 절절한 마음으로 그 식물들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있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가. 누가 봐주건 말건 나로서 있는 그대로 존재하고, 그뿐인 것은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 오래전 여러 가지로 참 힘들었던 때, 왜 그렇게 말싸움에 지기 싫었는가 하면 돈이 없어서, 그냥 돈이 없어서였다. 돈이 없어서라고 말하면 좀 씁쓸하지만 결국 오늘은 쪼들리고 내일은 불안한 상태여서 그랬다는 거다. 그러니 돈 말고 딱히 다른 이유라고 말할 것도 없다. 그 시절 나는 돈이 없어 성질이 더러웠고 말싸움에 지기 싫었다. 그땐 말싸움 좀 져주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다. 사과조차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걸 몰랐다.
- 언젠가 가장 좋은 배려란 내가 잘 사는 거라는 말을 들은 게 기억이 난다. 타인에게 뭔가를 해주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그저 무고한 남들에게 괜한 성질부릴 일 없게 내가 잘, 괜찮게 살면 그게 배려라는 말. 얼굴 화끈거리게 하는 나의 옛 시절이 떠올라 그 말이 마음을 때린다.
- 나는 뒷담화를 자주 한다. 이렇게 말하면 자긴 그런 거 전혀 안 한다는 듯이 '그것 참 최악이네요' 식의 반응을 하는 사람들을 본다. 글쎄, 나는 아직 살면서 뒷담화 안 하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물론 자기가 하는 뒷담화는 뒷담화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이라 굳게 믿고 있는 이들은 종종 만나게 되지만, 아무도 미워하지 않으면서 사는 건 엄청난 여유와 용기가 필요하다. 도대체 얼마만큼? 가늠이 잘 안 된다.
- 내가 그 사람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입이 그렇게 움직이기는 했지만 진실은 알 수 없다. 나는 좀체 나 자신에게도 솔직하게 다 털어놓고 살고 있지 못한 것 같다. 그런 자신이 한 번씩 너무 너무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 솔직하다는 게 가능은 할까. 늘 얼핏 솔직해 보이지만 실은 제일 그럴싸한 말들만 꺼내 놓으며 그런 나를 제법 담백한 인간이라고 속이고 산다. 아주 능숙하게. 남들도 그렇지 않을까? SNS를 볼 때 그 생각은 확신에 가까워지곤 한다. 'SNS가 이래서 싫다, 이게 문제다, 이제 정말 그만할 거다' 같은 말은 아이러니하게도 늘 '저 사람 SNS 없으면 대체 어떻게 살았을까?' 싶은 사람들이 한다. 저처럼 자기 자신과 잘 안 맞으신가 보군요. 극심한 의견 차를 보이고 계신 것 같습니다.
- 당연한 말이지만, 결국은 다들 보여줄 수 있는 데까지만 보여줄 수 있다. 내 안의 별로 멋지지 않은 면을 꺼내 보고자 글을 시작했으나 이 글은 사실 많은 검토를 거친 후 내놓아도 그다지 문제가 없겠다는 검증을 완료한 이야기들이다. 사랑은 언제나 애증의 왼쪽 얼굴이다. 오른쪽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 난 내가 꽤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스스로를 재밌다고 소개하는 이들이 정말로 재미있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경험치로 쌓인 편견을 갖고 있는데, 그럼에도 일단은 그렇게 말해본다. 나는 말로 남을 웃기는 재주가 있다. 말로 남을 웃길 수 있다는 것은 말을 잘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라고 생각한다. 말로 웃기는 걸 잘하면 다른 여러 장르의 말하기도 준수하게 해 낼 수 있는 거 아닌가 싶다. 결국은 내가 꽤 말을 잘한다는 이야기다. 적어도 말로 먹고살 수 있는 정도로는. 여태 나의 말재주는 랩의 가사가 되고 유튜브 콘텐츠의 대본이 되고 책이 되어 나를 먹여 살렸다. 그 시작에 무엇이 있었냐 하면은, ...
- 고학년이 되면 교실은 하나의 사회가 된다. 개개인에게 사회적 역할과 위치가 부여된다. 교실 안에 힘과 권력 구조가 생겨나고 깡패, 지식인, 정치인, 연예인, 언론인, 협잡꾼, 사업가, 광대 같은 역할들이 생겨난다. 이 시기에 한 사람이 처음으로 맡게 되는 역할은 그 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남은 삶을 그 역할로 살아갈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여기까지 살아보니 우선 내가 그런 것 같다.
- 결국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증명하고 사회의 인정을 받느냐 하는 문제인데, 공부, 운동, 외모, 싸움 실력 등이 당시 주목받는 주요 자질이었다. 나는 그 어디에서도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고, 자연스럽게 나만큼 아무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매력 자본의 하층민 친구 둘과 어울리게 되었다.
- 서로를 수도원 스타일로 검열하는 그 이상한 분위기의 출처는 어디였을까. 매력 자본의 최상위 계층 아이들을 생각해 볼 때 그 출처는 권력 없음이었던 것 같다. 당시 우리는 할 수 없었고 매력 최상층에게만 허락되어 있던 것은 남녀 간의 자유로운 대화, 어울림이었다. 이름 앞에 '야'도 성도 붙이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 그런 애들로 구성된 그룹은 반에서 유일하게 혼성이었다. 뭐든 끝내주는 걸 하나씩 가지고 있는 아이들. 그 무리는 남녀끼리 허물없이 웃고 떠들며 어울렸고 누구도 바깥에서 우리끼리 하듯 서로 야유를 보내지 않았다. 우리는 엄격히 지키고 사는 남녀 간의 경계를 전혀 지키지 않는 그들의 세련됨은 그 자체로 동경의 대상이었다.
- 그 이름이 맞을 거라고 확신한다. 20년이 훌쩍 지났지만. 나는 사람 이름을 잘 기억한다. 사람 이름을 잘 기억한다는 건 그럴 필요가 있는 삶을 살았다는 뜻이다. 드라마나 영화를 봐도 "우리가 같은 반이었나? 아, 미안. 네 이름이 뭐였지?" 같은 대사를 치는 쪽은 잘난 놈들이다. 아쉬운 쪽은 다 기억하고 산다.
- 그때 익히고 정리한 웃음의 이론은 30대가 된 지금까지도 내 유머의 중요한 자양분이다. 사람들을 관찰하고 다른 이의 말을 잘 듣는 것이 유머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선생님이 그랬듯 남을 웃기겠다고 나서서 본인이 먼저 웃으면 그 유머는 곧장 실패로 이어진다는 것, 무분별하게 개그콘서트 유행어를 따라 하는 건 웃음에 관한 가장 게으르고 질 낮은 접근이라는 것, 남자와 여자의 웃음 포인트는 비슷한 듯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 웃음꾼으로 거듭나는 길엔 웃음이 없다. 아무도 일러주지 않은 길로 떠나는 고독하고 고된 여정이다. 하지만 나는 행복했고 살아 있음을 느꼈다. 구겨진 콜라 캔 같던 자아가 하루하루 온전하게 펴짐을 느꼈다. 11년 평생 처음으로 나도 잘하는 것이 있다는 긍지에 타올랐다.
-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누군가에게 수연이였을 수 있다. 아마도 매우 높은 가능성으로 이게 뭐라고 싶을 정도로 사소한 호의가 한 사람의 인생을 새롭게 열어주기도 한다. 누나들과 스스로를 비교하며 열등감에 구겨져 있던 낙제생을 래퍼로 만들어 무대에 올려놓기도 하고, 태권도장에서 오줌을 지렸던 얼간이를 에세이 작가로 데뷔시키기도 한다. 정말로.
- 문득 지금 서른여섯 살일 수연이에게 이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면 어떤 웃음을 보여줄지 상상해 봤다. 그때처럼 듣기 좋게 시원한 웃음이라면 좋겠다.
- 문장은 가능한 한 짧고 간결하게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배웠으며 보통은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지만 요즘 들어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이 드는데 그게 어떤 생각이냐 하면 어쩐지 짧고 간결하게 쓰는 것으로 가독성을 높이고 의미를 곡해할 가능성을 줄이는 방법은 그 자체로 좋은 글을 만드는 데에는 탁월한 효과가 있겠으나 궁극적으로는 글쓴이의 필력이 상승하는 것을 저해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으로 실제 나는 본 문장과 같이 심하게 긴 문장을 만들어내며 이야기를 진행하고 오류 없이 마침표에 도착해 보고자 하는 시도야말로 진정 고리타분한 틀을 깨는 개척자적 자세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적잖이 석연찮은 점은 결국 글이라는 것이 쓴 이보다는 읽는 이에 의해 그 가치가 정해지는 것이니 만약 이쯤까지 읽었을 독자가 '이게 대체 뭔 말인가' 내지는 '이딴 걸 대체 왜 쓰는 건가' 정도의 감상이 든다면 슬프지만 본 글은 나의 성취감과는 별개로 이미 망한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 새로운 사람을 알게 된다. 첫 잔을 부딪치면서 "만나서 반갑습니다" 한다. 보통은 또래고 같이 나이 먹어가는 중이라, 비슷한 점도 발견하지만, 한편으로는 전혀 몰랐던 세계에 대한 이야기도 듣게 된다. 흥미롭다. 그가 나에게 주는 새로움이 좋다. 말이 잘 통한다고 느끼면 만족감은 두세 배로 커진다. 그러다 좀 취하면 그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어서 내가 들떠 있다는 사실, 그러니까 새로워서 새로운 거라는 당연한 사실을 놓치게 된다.
- 그는 내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과 근원적으로 뭔가 좀 다르다고, 기존 관계들과는 다른 감흥을 지속적으로 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 운이 좋으면 종종 그런 멋진 만남이 찾아오고, 나는 관계의 초반, 설렘으로 차올라 마음의 문을 힘껏 젖히고 그를 삶으로 들인다.
- 서로 성격이 아주 잘 맞지 않더라도 잘 맞는 사이처럼 시간을 조정해 자주 얼굴을 본다. 또 몇 개의 술자리들을 즐거움으로 채운다. 앞으로도 영영 우리 사이가 나쁜 일이 아무것도 없을 것 같다고 느낀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가 '누가 봐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평소 사람과 사람은 서로 잘 맞는 궁합이 있을 뿐 인격의 좋고 나쁨은 마주하는 사람에 따라 상대적이라고, 잘도 논리왕처럼 말하고 다녔으면서도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사람은 '객관적으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세상 어디에도 없는 개념을 입혀놓고 자신에게 되묻는다. 아니, 일주일에 세 번이나 만나서 이렇게 면밀히 살펴보고 있는데도 실망스러운 면이 없다면 정말 확실히 괜찮은 사람이 아니겠냐고. 그러고는 이런 좋은 사람을 찾아낸 자신을, 딱히 노력한 것도 없지만 대견해한다.
- 어느 순간부터 살짝 피로감을 느낀다. 아주 분명한 확신은 아니다. 대화하는 중에 잠깐잠깐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 피로하지 않다고, 이 사람과 충분히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자신의 감을 외면할 수 있을 만큼 잠깐씩. 하지만 잠깐일지라도 이전까지는 완결무결하게 아쉬움이 없던 터라, 그런 피로함은 새로 붙인 스마트폰 액정 보호 필름 한가운데 낀 먼지 한 톨처럼 사소해도 사소할 수가 없다. 곧 관계는 기존의 눈부심을 잃고 그제야 일상적이고 평범한 원래의 색감을 되찾는다. 그 사실은 나쁠 게 없는데도 나쁘게 다가온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자주 가까이 보라고 했나. 시키지도 않았는데 혼자 좋아서 하루가 멀다 하고 마주해 놓고는 이제 좀 질리는 것이다.
- 어차피 우리는 다 이래저래 못난 면을 품고 사는 중인데, 나는 좋아하는 사람들을 가까이서 바라보고 있으면 그들과 완전히 하나가 되고 싶다는 바보 같은 기대를 하지 않는 법을 모르겠다. 하지만 마지막 한 꺼풀까지 다 잡아 뜯어놓은 뒤에 실망하지 않을 방법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필요한 만큼만 닿고 살고자 한다. 멀리서 봐야 예쁘다, 대충 봐야 사랑스럽다. 나도 그렇다.
- 해가 뜨는 데 이유 같은 게 있을 리 없는데도 우리는 매일 '왜 또 아침이지?'라는 의문을 던진다. 피곤해 죽겠는데 왜 또 하루는 시작되는 건가. 대답해 줄 이는 없다. 그러니 별 수 있나. 밉든 곱든 또 하루 대충대충 성실히 살아내는 수밖에.
- 대충 쓰다 버릴 게 아니니 아주 가성비로 갈 수는 없는데 그렇다고 죽을 때까지 쓸 것도 아니라서 어느 선까지 고급스러워야 할지 가늠할 수가 없다. 가구란 기능도 중요하고 디자인도 중요하다. 그런데 그 디자인이라는 것도 혼자만 예뻐서 될 게 아니라 집과, 미리 배치한 다른 가구들과도 조화롭되 또 그 자체의 멋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머릿속으로 수백 번 배치를 해본다. 하지만 그래봐야 직접 들여와서 보지 않는 이상, 확신 같은 건 가질 수가 없다.
- 모든 것이 불확실한 중에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집의 모양새가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딴판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채워 나갈수록 점점 더 그렇다. 아니, 실은 이제 내가 원하던 인테리어라는 게 뭐였는지도 잘 모르겠다. 누군가가 집 꾸미기란 열정 있고 설렘 있을 때, 즉 이사 온 첫 달에 후루룩 하고 치워버려야 한다고 말했는데, 왜 그래야 하는지는 이해했으나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 삶은 늘 어수선하다. 좀체 가지런한 법이 없다. 눈, 코, 입도 가구 배치도 인간관계도 모든 게 어쩔 수 없이 난잡하다. 알고 있는데도 한번 생각이 꽂히면 이것도 신경 쓰이고 저것도 신경 쓰여 도무지 진짜 중요한 일에는 집중이 안 되는 것이다(이를테면 지금은 책 쓰기).
- 삶에 임하는 여러 지혜로운 노하우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별수 있나 정신'은 참으로 중요한 능력이라 생각한다. 뜻대로 되지 않는 삶의 잡다한 요소들을 별수 있나 하며 내버려 두고 할 일이나 제대로 하는 것. 삶의 보푸라기들을 여기저기 붙이고도 그저 무심하게 지금에 집중하는 것. 삐뚤어지면 삐뚤어진 대로,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그런 단출한 마음가짐이 참 중요한 것 같다.
- 너무 많이 말했기 때문에 상대방 말도 그만큼 들어줘야 합니다. 윤리적으로 그렇죠. 말 적게 하는 사람을 만나면 되지 않느냐고요? 말 많이 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이제 제 곁에 한 명도 없습니다. 음, 조금 슬퍼지려고 하네요. 아무튼 계속 이야기하자면 한 사람당 한 500자씩 랠리가 되면 기회가 꽤 많은데, 보통 각자 2500에서 3500자 정도씩 말하기 때문에 기회가 잘 없습니다. 무슨 기회냐고요? 당연히 싸러 가겠다고 말할 기회죠.
- 이미 한계에 도달했는데 선뜻 화장실에 가겠다고 말하지 못해요. 왜? 상대의 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화장실에 가겠다고 말하면 자신이 여태 상대방 말은 귓등으로 들으면서 내내 방광에 온 신경을 집중한 채 저 새끼 말은 언제 끝나나 그것만 기다린 인간으로 보일 게 뻔하기 때문이지요. 물론 그런 생각이 없었느냐 하면 그건 또 전혀 아니라고 말하기가 힘든 부분이 없잖아 있는데, 아무튼 우리는 대화를 즐기고 소통을 사랑하는 지성인으로 서로에게 기억되길 바라니까요. 하지만 용기를 내는 것이 좋습니다. 몇 초간의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상대가 또 새로운 화두를 꺼내 들지 모르거든요. 우리에게 기회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선생님 저 잠ㅅ
- 몇 만 명이 아는 눈, 코, 입을 가진다는 건 마치-. 래퍼 빈지노의 가사다. 들으면서 생각했다. 그 기분은 어떨까. 몇 만 명이 아는 눈, 코, 입을 가진다는 건 근사한 표현이라고 감탄했지만 그때의 나는 그게 어떤 느낌인지 알지 못했다.
- 아주 나중에야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아니, 그가 나보다 수십 배는 더 유명한 눈, 코, 입을 가졌으니 다 안다고 말하진 못하겠다. 어느 정도, 나름대로, 대강은 알게 되었다고 치자.
- "그 사람 맞죠?"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일단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야 기다 아니다 답할 수가 있는데, 그래, 아마도 그 사람이 맞겠지만, 맥락상 거진 그렇다고 봐야겠지만, 이게 또 아닐라 치면 얼마든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보통 털보에 장발이면 아무나 닮은꼴로 묶인다. 그게 내가 털보에 장발로 7년을 살면서 느낀 뭇 대중의 인식이다. 닮은꼴의 범위에는 류승범과 타이거 JK와 빽가와 버벌진트가 몽땅 들어간다. 심지어 실물 사진은 한 장도 없는 예수님도 들어가고, 여차하면 김어준도 합석하는데, 이렇게 나열해 보자니 도대체 류승범에서 김어준까지 무슨 수로 이어 붙일 수 있는가 싶다. 다시 그 장면으로 돌아가서, 내가 한 답은 "아마 맞을걸요?"였다.
- 바이바이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동안에도 그녀는 끝내 "그 맞죠? 유튜브에 나오는 팬이에요. 예전에 진짜 많이 봤는데"라고 말하는 데 그쳤을 뿐 내 이름을 불러주지는 못했다. 세상엔 유명한 사람과 안 유명한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그 사이 어디쯤에는 종종 '그 사람' 정도로 불리는 그런 애매한 유명함도 있다.
- 유명해지면 다 될 줄 알았다. 부산에서 음악을 하던 그때는 무대 아래에 관객이 열댓 명쯤 있고 그중 절반 이상이 다음 순서에 공연할 동료들이었던 때, 곡을 발표하면 음원 사이트에 달리는 몇 안 되는 댓글이 다 친구들의 것이었던 때. 유명해지자. 일단 유명해지면 모든 게 좋아질 거야. 철이 없어 그랬던가, 절박해서 그랬던가, 그땐 그런 납작한 생각을 품고 살았다. 뭔지도 모르는 그 유명함을 얻기만 하면 지금의 어려움이 다 해결될 거라는.
- 반은 들어맞았다고 해야 하나. 나름 얼굴이 알려지고 나서 그 시절의 어려움은 해결되었다. 이제 술 마실 때 병 수를 세는 습관은 사라졌다. 그러고는 다른 종류의 어려움이 찾아왔다.
- 50만 명. 유튜브 채널 구독자 수가 그쯤 되고 나서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이 일상에 함께한다. 물론 내가 여태 만들어온 콘텐츠의 성향상(삶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이야기한다) 알려진 다른 이들보다 악플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 흔히 모든 이의 사랑을 받을 수는 없다고들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겉으론 센 척하며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든지 말든지 상관없다는 듯이 굴어도, 속으로는 '아니,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이렇게 귀여운데?' 같은 서러움이 있다. 사람이 그렇다. 좋은 댓글을 백 개 읽어도 악플 두세 개가 더 마음에 남는다.
- 구독자 수가 늘기 전에도 내 주변엔 나를 싫어하는 사람, 내게 별 관심이 없는 사람,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고루 있었을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실체를 확인할 일 없이 산다. 난 이름이 좀 알려짐으로써 그 뚜껑을 열었고 그 실체를 매일 확인하며 살게 되었다.
- 나는 살면서 악플을 달아본 기억이 없기에 상상력을 발휘해 악플러의 심정을 이해해 보려 했다. 왜 싫은 것을 들여다보고 그걸 비난하는 데 시간을 쓸까. 그 대상이 천인공노할 죄를 저지른 범죄자도 아닌데 사석에서 친구들과 이야기 정도는 할 수 있다. 그런데 굳이 로그인을 해서 그가 읽을지 안 읽을지도 모르는 욕설과 비난을 서너 줄씩 적는다고? 그게 과연 그 대상을 진심으로 싫어하는 걸까? 아니지 싶다. 보통 마음이 지치거나 삶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우린 싫어할 게 필요하다. 누군가를 싫어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진통제도 잘 없으니까. 화풀이. 그만큼 저렴하고 효과 빠른 약이 없다. 그 대상으로서 유명한 사람들은 너무 적합하다.
- 그는 슈퍼한 사랑을 받고 있지만 그와 정비례하는 슈퍼한 악플을 받고 있지는 않다고 했고, 나 자신한테 물어보니까 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저런 청아하고 햇살 같은 사람에게 악플을 다는 것은 뭐랄까 많은 용기가, 다른 말로는 상당한 고약함이 필요하지 않겠나 하는. 가까이서 겪어도 해사한 사람인데 화면과 목소리로만 만나는 대중에게는 더 그렇게 느껴지겠지. 그는 내가 여태 정립해 온 유명함의 양면성에 대한 논리를 크고 새카만 눈동자로 스스럼없이 무너뜨렸다.
- 그러면 결국 내가 받는 악플은 내가 나름 유명해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나여서 겪는 거란 말인가. 그거는 진짜 너무 잔인한 거 아니냐고 따지고(어디다가?) 싶어졌다가, S와 식사를 함께한 이후로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고깃집에 들어갈 때부터 나오는 순간까지, S는 주변 모든 손님과 행인의 시선을 견뎌야 했다.
- "일상 생활 하는 거 힘들지 않아요?" 내가 물었고,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그는 아마도 그렇게 답했다. 그때 그의 달관인지 무력함인지 모를 희미한 미소를 기억한다. 그래서 뭐, 결국 유명세의 공정한 가혹함을 다시 믿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 한동안 스우파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가 이슈였다. 뒤늦게 유튜브로 하이라이트 클립을 보며 푹 빠졌는데, 풀버전을 정주행 할 자신은 들지 않았다. 보고 싶으면서도 보기가 싫은 마음이었다. 그걸 보다가 내가 제대로 놀 줄 아는 사람들, 너무 멋진 사람들이 과밀된 장면에서 공포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장면이든 편히 볼 수 있으려면, 그 속에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내가 감정이입할 수 있을 만큼은 어수룩하고 자신감이 애매하게 있는 인물이 한 명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스우파에는 그런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 이게 어떤 기분이냐 하면, 나는 화면 밖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 곧 내가 춤출 차례가 올 것 같은 기분이다. 마지못해 등 떠밀려 나가서는 팥죽댄스라도 춰야 할 것 같은 압박감. 그건 아마 대학교 축제에서 신입생이 아무도 나서지 않아 장기자랑 무대에 오른 과대표의 쓸쓸한 무브와 그에 따라 허공에 휘날리는 펄 들어간 하늘색 넥타이처럼, 보고 있자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마음이 복잡해지는 그런 춤일 테다.
- 무대가 끝나고 나면 어떨까. 차라리 모두가 조롱해 준다면 덜 수치스러울 테지만 멋과 여유가 충만한 춤꾼들이 그럴 리 없다. 격려의 차원에서 되려 더 환호해 주고 뿌이뿌이를 하겠지. 거기까지 망상이 뻗어나가니 나와 다른 차원에 사는 핵 천재 인싸들에게 뭘 공감했다는 건지 공감성 수치 같은 걸 느끼고 그 자신감 넘치는 눈빛들을 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위대한 스우파를 구간별로 짧게밖에 볼 수가 없다. 그냥 그렇다고. 슬퍼라, 예싸비여베베, 예싸비여베베.
- 20대 초반 나는 모 생산업체에서 일했고 어느 주말 회사 인근 산으로 워크숍 비슷한 걸 가게 되었다. 직원들은 여러 개의 평상에 나눠 앉아 도토리묵과 백숙에 술을 마셨다. 직함에 '장' 자가 있고 머리숱이 적을수록 신나는 자리였다. 젊은 직원들은 저들끼리 모여 앉지도 못하고 구석구석에 유배된 채 날아간 주말을 애도하며 자작으로 잔을 채웠다.
- 반장과 사람들은 실력이 정말 놀라운데요, 어쩌고 하는 기계 앞에서 마이크와 미경 씨를 붙잡고 옥신각신이었다. 누가 제발 좀 어떻게 해줬으면.
- 이제 와서 말이지만 나는 석준이 형이 나섰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미경 씨를 구해야 한다면 그건 석준이 형이어야 했다. 미경 씨가 탕비실에 있을 때마다 따라 들어가선 추파 던지고 점심때마다 옆자리에 앉고, 퇴근할 때마다 꼬물 아반떼로 태워준다 설친 게 누구였던가. 조만간 내 여자 될 거라고 허세를 떨더니 지금은 저만치 앉아 앞 접시만 내려다보고 있다. 아이고, 인간아.
- 그리고 전혀 의외의 인물이 등장한다. 조립 2반의 함정호. 너무 조용해서 있는지 없는지 티도 잘 안 나는 사람. 그는 체념이 묻은 얼굴로 뒤적뒤적 신발을 신고 내려와 기계 앞으로 걸어갔다. 에에, 반장님 일단 이거 놓으세요. 아이고, 손목이 다 빨갛네. 대신 제가 한 곡 부를게요. 됐죠? 뭐야, 저 사람 저렇게 능글맞게 말할 줄도 알았나? 다들 놀라면서도 말리던 이들은 이때다 싶어 힘을 보탰다. 그래그래, 그럼 정호 씨가 하나 불러봐요!
- 그날 함정호의 무대를 기억한다. 생전 들어본 적 없는 수준의 음치에 춤은 근본이 전혀 없는 막춤이었다. 직원들은 조롱 섞인 폭소를 터뜨리거나 심하게 놀라거나 했다. 아무튼 분위기는 좋았다. 어쩐지 그 이후로 누구도 마이크를 잡진 않았지만, 노래를 마친 함정호는 딱히 미경 씨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때 나는 그를 보며 뭐랄까, 아주 생소하지만 깊은 감동을 받았다.
- 사람이 멋지다는 건 저런 것이 아닐까. 화려하진 않지만 용기 있는 사람. 굳이 내보이지 않지만 배짱 있고 당당한 사람. 입으로 떠들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화끈한 사람. 나는 그 담백함에 반해버렸고 그 남자의 막춤은 오래도록 내 가슴에 진하게 남았다.
함정호. 그대 진정 멋드러진 사람이었다.
- 하나 더. '강한 용사 여호와'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영상이 있다. 어느 큰 교회의 무대에 오른 사람이 찬송가를 부르는 영상이다. '강한 용사 여호와'라는 구절을 거듭 고음으로 내지르며 끝나는 곡인데, 그는 긴장한 탓인지 삑사리를 내버린다. 아직 보지 않았다면 한번 보기를 추천한다. 단언컨대 당신이 살면서 들어본 그 어떤 삑사리보다 충격적일 것이다. 노래하다 삑사리 좀 날 수 있지, 그런 정도가 아니다. 당사자의 삶에 이 정도의 임팩트로 남을 사건이 다시 있을까 싶을 정도다. 물론 보는 사람에겐 충격적으로 웃기다.
- 다양한 웃음이 있다. 흐뭇한 미소도 있고 피식거림도 있고 많이 웃기진 않지만 즐겁고 싶어 일부러 소리를 키우는 웃음도 있다. 그중 최고는 폭소다. 고전적인 표현으로 포복절도나 요절복통이라 할 수 있는 웃음. 상체가 앞뒤로 휘청이고, 눈물이 고이고, 옆 사람 팔을 때리고, 나도 팔이나 등을 얻어맞고, 복통을 호소하고, 물개 박수를 치고, 빨개진 얼굴에 10여 개의 주름을 만드는, 체면 따위는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미치게 웃겨서 터뜨리는 웃음 말이다.
- 최근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너무 심하게 웃기다 싶은 일은 가만 생각해 보면 슬픈 일이더라는. 자지러지게 웃긴 흑인 청년의 유머는 뼈아픈 인종차별의 역사가 그 재료다. 역대급 삑사리가 역대급으로 웃긴 이유는 그게 역대급 굴욕이기 때문이고. 얼마나 창피할까. 가늠할 수 없을 만큼의 수치심이 그 재미의 근간이 된다. 진정 그 정도로 신나게 웃으려면 어쩔 수 없이 누구든, 어느 집단이든 상처받거나 곤란을 겪으며 제물로 바쳐져야 하는 걸까.
- 그 발견이 나름 큰 수확같이 느껴져 처음엔 신도 났다. 무슨 세계의 중요한 비밀이라도 찾아낸 것처럼. 물론 금세 뒷맛이 씁쓸해졌다. '여태 난 무엇에 즐거워하고 있었나'라는 물음으로 이어져 나 자신이 좀 징그러워졌다. 그 생각에 사로잡혀있던 나날 중 하루는 꽉 막힌 강변북로 위에 있었다. 눈앞에 줄지어 선 차 속 사람들은 어떨지 궁금했다. 나만 이렇게 남의 아픔을 보고 웃어온 건 아니었으면.
- 얼마 뒤 어딘가에서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 코미디란 없다"라는 말을 주워 읽었다. 한참 생각한 바, 어디서 주워 읽은 바, 적잖이 살아온 삶을 돌아본 바 정말 그럴지 모른다. 아니, 아마 맞는 것 같다. 너무 웃긴 일은 사실 슬픈 일이다.
- 그는 자신이 상처받았기 때문에 심사가 뒤틀렸고, 그래서 남에게 상처 주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10여 번 그랬듯 또 다정한 말로 그를 안아줘야 하나 잠시 생각했지만 그날은 그러지 않았다.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는 그의 얼굴을 뒤로하고 택시에 올랐다. 차창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다. 빠르게 흘러가는 창밖 풍경을 보며 그 상처의 연대기에 대해 생각했다. 그가 지금 만나는 여자친구의 복장과 귀가 시간을 단속하는 건 전 여친이 틈만 나면 한눈을 팔았던 상처가 있어서라고 했다.
- 그러면 그의 전 여친은 왜 그랬을까. 그녀는 학창 시절 따돌림을 당했던 경험으로 인해 사랑과 인정에 대한 갈급이 비대해졌을지 모른다. 그러면 그녀의 친구들은 왜 그녀를 따돌렸을까. 그건 선생님이 그녀만 편애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선생님은 왜 그녀만 편애했을까. 임용 2년 차 초보 선생님에게는 통제할 수 없는 학급 분위기 속에서 유독 착실한 그녀만 자기 맘을 알아주는 것 같아 예뻐 보였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또...
- 거슬러 올라가 봐야 알 일이지만, 사연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도, 내 앞의 사람도, 그 앞의 사람도 다 설명하고 싶은 이유 비슷한 것은 있다. 다만 그게 다들 지키고 사는 것을 지키지 않아도 되도록 해주는 면죄부는 아니다. 내가 어쩔 수 없어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다면 내게 상처 준 이들도 얼마든지 어쩔 수 없었다고 볼 수 있지 않나.
- 온종일 도로 위를 달리면 누구나 이렇게 되는 걸까. 아니, 그냥 운전자가 이런 사람이어서다. 상처 위에 주저앉아 나도 그 가해 사슬의 일부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상처를 딛고 일어나는 사람들도 있다. 기나긴 사슬의 굴레를 자기 앞에서 끊어내는 사람, 원망했던 사람들을 닮아가지 않고 진정한 승리로 발을 내딛는 사람들이 있다.
- 잔뜩 바라고 있음에도 나는 한 번도 그걸 실행한 적이 없다. 아무것도 시도하려 한 적 없다는 듯 달리기를 이어간다. 그래, 뭐,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지. 산뜻하고 충동적인 일을 상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재고 따지고 염려해 상식 밖으로 좀체 뛰쳐나가지 못하는 사람. 그런 나 자신을 본다. 조금, 안쓰럽다.
- 그래도 상상은 거듭된다. 그건 상상하지 않는 것보다 상상하는 쪽이 더 즐겁기 때문일 거다. 나와 이름 모를 상대방에게 그런 유쾌한 사건을 선사하고 싶다. 서로의 마음에 기분 좋은 파문을 만들고 싶다. 소심하지만 그런 것을 소망한다. 이른 아침 달리기를 하며 나는 종종 그런 음모를 떠올린다.
-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란 넋두리는 언제부터 습관이 되었을까. 실은 먹고사는 게 다가 아니란 걸 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밥을 먹으면 배는 채워지지만 그걸론 해결되지 않는 가슴의 허기가 있다. 뭘 먹는지보다는 누구와 먹는지가 더 관건인.
- 혼자 운전할 땐 듣고 싶은 음악을 듣는다. 무슨 당연한 말인가 싶겠지만 평소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올드한 음악 취향을 숨길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그 시간은 의미가 있다. 잘 보이고픈 사람이나 취향 좋은 친구가 옆에 앉지 않으면 선곡은 한두 곡 이어지던 해리 스타일스 Harry Styles, 톰미쉬 Tom Misch로 직진을 유지하지 못하고 곧 다음 차선에서 우회해 김경호나 박완규로 빠진다.
- 그냥 거기서 그나마 재밌어 보이고 오래된 우리 집 컴퓨터에서 돌아갈 법한 CD를 골라 들고 막 신나는 척을 했지. 이거 진짜 갖고 싶었다고. 근데 신나는 척을 하다 보니까 진짜로 신이 좀 나더라고. 그래서 마음이라는 건 참 이상한 거구나, 생각했어. 돌아보면 그건 좀 기특하기도 해. 그 자식 그래도 아주 엉망은 아니었구나 싶고. 그날 학교 친구들은 아무도 안 하는 그 게임 CD랑 엄마 손을 양손에 붙들고 백화점 앞에 서서 210번 버스를 기다리던 게 기억이 나. 달리는 차들이 비추는 불빛에 대고 엄마랑 같이 입김 불면서 장난치던 것도.
- 기억 안 나지? 엄마, 우리 그런 날이 있었어. 엄마는 평생 앞만 보고 달렸으니 기억 못 할 것 같더라. 쉬는 날에도 온 집을 뒤집으면서 할 일만 찾는 아줌마가 그런 걸 기억할라고. 그냥, 난 그날 참 좋았다고 생각나서 얘기해 봤어. 반찬 또 싸지 마. 나 담아 갈 가방 없어. 집에 김치 있어. 응. 아직 다 못 먹었지. 기차? 내일 9시 반. 아, 그러니까 됐다니까 좀. 이제 자자. 나 씻는다?
- 뻔히 연인이 있는데도 깊은 밤 내게 연락 오는 네가 싫은 이유는, 우리가 사귀었던 옛날에 내가 몰랐던 사실을 굳이 네가 지금 알게 하기 때문이다. 나와 만날 때는 나보다 앞서 만난 사람들에게 이렇게 연락했겠지. 자신이 원래 이런 사람은 아니라고, 이렇게까지 생각나는 건 내가 처음이라고 너는 말하지만 그럴 리가. 처음이라고 말하며 흘리는 너의 자조적인 웃음까지 습관적인 것으로 느껴지니, 나는 속고 싶어도 속을 방법이 없다. 너의 외로움은 도무지 한 사람이 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이어서, 나는 그걸 홀로 안고자 했음에도 모르는 새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 예전엔 글을 마우스로 맨 아래까지 긁어보거나 밤새 외계어 같은 영어를 한글로 하나하나 바꿔 적었지. 지금은 스토리를 캡처해 있는 대로 확대해 보거나 말이 될 때까지 초성 퀴즈를 푸는 거야. 그럴 때 어떤 초라함이 있어. 네 짓이 같잖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거기서 너에 관한 뭐라도 건져보려는 나의 짓은 얼마나 더 같잖은가. 네가 흩뿌려 놓은 단서들을 주워보겠다고 납작해져서는 바닥을 헤집는 밤들이 있어.
그러다가는 한 번씩 생각해 봐. 내 그런 밤을 네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비참한 일인지를.
- 그때의 어수룩한 나를 생각한다. 지금까지도 종종 그때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그땐 엄두도 못 냈던 입금과 출금이 무심히 반복되는 어른의 삶이 그때보다 뭐가 어떻게 더 풍족해졌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아서일지 모른다. 그때 우리가 아쉬웠던 건 겨우 몇 백원 더 올려주지 않는 시급이었는데 지금은 밥 한 끼에 몇 만 원을 써도 기분이 허할 때가 많다. 왜 자꾸 왼쪽 가슴의 문제를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물어보게 될까. 이유를 모르니 갈급은 해결이 안 된다.
- 심야식당의 핵심은 영업시간이나 가게의 구조 같은 게 아니다. 심야식당의 그런 면면에 의해 도시에서 가장 외로운 영혼들이 그리로 흘러든다는 것이지. 겪어본바 나는 심야식당이 각 동네를 위해 마련된 고독의 하수처리장 같다는 생각을 한다.
- 심야식당은 늦은 시간대라도 부담 없이 한잔 기울일 수 있다. 테이블 너머의 셰프가 말벗도 되어준다. 일반적인 술집은 혼자 가기가 어렵다. 왁자지껄 웃고 떠드는 테이블 가운데 홀로 앉아 있자면 처량하다. 그렇다고 모던 바를 찾는 건 노골적이다. 대놓고 고객 응대를 중점에 두는 곳에 가자니 내가 쓸쓸한 사람이라는 게 투명하게 드러나 버린다.
- 물리적 허기와 심리적 허기 둘 다를 창피하지 않게 효과적으로 채울 수 있다는 점에서, 주점과 모던 바 사이 심야식당이 탁월한 대피소가 되어주는 것이다. 심야식당의 셰프들은 그런 사람들의 속내를 모른 척해 주거나 알아봐 주는 수고로 밤을 보낸다. 건너들은 한 심야식당 셰프의 말에 따르면 사실 요리를 내놓는 것보다 그것이 더 큰 노동이며 수익의 원천이다.
- 고독티스트. 주로 방금 퇴근한 듯한 복장으로 가게를 찾는다. 바 한쪽에 홀로 앉아선 단출한 안주에 술을 홀짝홀짝 마신다. 한 시간 내외로 빠르게 마시고 귀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표면적으로는 별 특징 없는 혼술러라고 해도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정말 혼술이 좋다면 집에서 빤스 바람으로 편하게 즐기지 않고 왜 굳이 심야식당에 찾아올까. 딱히 말벗을 찾는 것 같지도 않다. 셰프가 가볍게 응대 멘트를 던졌을 때 기다렸다는 듯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는다면 고독티스트가 아니다. 고독티스트라면 몇 마디 대답은 하지만 본격적인 대화로 넘어가지는 않는다.
- 그 오락이 뭘까 늘 생각했는데 적확한 표현을 찾지 못하다 타블로의 에어백 Airbag 가사에서 찾을 수 있었다. '혼자 있기 싫은 걸까, 아니면 눈에 띄게 혼자이고 싶은 걸까.' 집에서 완전하게 혼자인 것과, 사람들 틈에서 혼자인 것은 분명 다른 기분이다. 혼자이고는 싶지만 또 철저히 혼자이기는 싫은 그는 사람들의 말소리와 음악 소리에 파묻혀, 자신이 복닥대는 세상의 일부라는 감각을 유지한 채 혼자 있는 것을 즐기는 듯하다. 홀로와 함께, 그 경계에 닿을 듯 말 듯 구부정하게 앉은 채로.
- 쓸쓸한 수다쟁이. 그는 혼자일 때도 있고 일행과 함께일 때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러나저러나 별 차이가 없다. 어차피 그의 일행만으로는 그의 수다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식당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이미 떠들고 있다. 사람이 아니라 글자들이 담긴 자루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쉬지 않고 말을 쏟아낸다. 심야식당은 내부가 좁은 탓인지, 따지고 보면 모두가 한 테이블에 앉아 있는 탓인지 모르겠지만 방금 들린 저 말이 어디 앉은 누구에게 건네는 말인지 모호할 때가 많다.
- 반응하지 않아도 되지만 누구든 치고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다. 누군가 경계를 허물고 그의 말을 덥석 물면 거기까지 수다의 영역이 확장된다. 그는 그런 식으로 가게 전체의 오디오를 잠식해 간다. 어쩌면 그에게 일행이란 큰 수다의 불을 피우기 위한 초반 땔감인가 싶기도 하다.
- 그런 이유로 그는, 불편해 보인다. 술과 안주에 조금도 집중을 못 하는 듯하다. 너무나 의도가 다분한데 아무 의도가 없는 척하느라 어딘가 수상해 보이는 지경에 이른다. 그런 그를 만난다면, 선택은 당신의 몫이겠지만 안일하게 연민을 발휘해 말을 거는 시도는 말리고 싶다. 5분 정도 이야기하다 혼자만의 시간 혹은 일행과의 대화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죄 없는 손님이 그에게 걸려 전혀 관심 없을 주제의 대화에 두 시간 넘게 붙잡혀 있는 광경도 본 적이 있다.
- 가짜 사장님. 그는 그 가게의 사장이 아니지만 사장처럼 행동한다. 혼자 왔건 일행과 함께 왔건 셰프를 붙잡고 끊임없이 말을 건다. 자신이 이 식당의 진정한 단골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같은 이유로 그곳의 어떤 손님보다 셰프와 막역한 사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 매 순간 자신은 평범한 손님들과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마치 매니저가 일하고 있는 가게에 친구들을 데려온 사장 같다. 실제로는 가게에 젓가락 하나도 보탠 적 없음에도 셰프의 윗사람처럼 굴고 가게를 자신과 지인의 아지트인 양 행동하니 거의 사장님인 셈이다.
- 여기까지 생각하면 그는 진상이고 빌런임이 틀림없으나 셰프의 입장에서는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다. 비위를 맞춰주고 효과적으로 구슬리기만 하면 우쭐해져서 허세를 부리며 그날 매출의 핵심을 책임져 주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 가게의 VIP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지인을 여럿 몰고 오기도 한다. 잘만 장단 맞춰주면 매출 효자가 따로 없다.
- 결국 셰프의 싸움은 이런 것이다. 가짜 사장님이 흥에 겨워 매출을 올려주는 상황은 유지하되, 그의 왕 놀이가 너무 심해져서 다른 손님들이 박탈감을 느끼며 떠나는 일은 없게 하는 것. 그 균형을 잘 맞추는 일이 요리 실력만큼 중요한 셰프의 자질이라 할 수 있다.
- 고독의 하수처리장에 앉아 사람들을 관찰하는 내가 있다. 얼핏 보면 사람들을 지켜보는 관찰자의 위치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게 내가 고독을 해소하는 방식이다. 누구나 외롭다는 사실을 되새기면서 그런 그들을 애틋하게 바라보고 동질감을 느끼는 사람.
- 오늘도 심야식당은 불을 밝힌다. 한데 모여 앉아서는 저마다 외롭다.
- 나에게는 김광석이 너에게는 다비치일 수 있겠지. 또 누군가에게는 알리샤 키스 Alicia Keys이기도 하고. 아무튼 나는 그런 이야기하기를 좋아해. 노란 조명 켜진 좁은 방에 모여 앉아 같이 그 사람에게 소중한 노래를 들으며 나누는 이야기. 왜 그 노래만 들으면 마음이 시큰한지, 왜 그때 그 노래를 하루에 백 번도 넘게 들었었는지, 뭐 그런 이야기들.
- 누구나 그런 노래 한 곡쯤은 있으니까. 그 시절, 그 순간의 냄새까지 만질 수 있게 해주는 노래 말이야. 노래 한 곡이 한 사람에게 마법이 된 사연을 듣는 것은 즐거워. 그다음부턴 그 노래를 들을 때 나도 그 사람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거든. 그러면 그 노래가 내게도 인생의 OST가 되는 거야. 난 그걸 수집하는 게 좋아.
- 내가 멋진 사람이라며 나를 좋아하는 당신이 고맙고 동시에 무섭다. 곧 잔뜩 부풀린 오해를 꺼뜨리며 내게 실망했다고 말할지 모르니까. 그러면 나는 애초에 한 번도 반짝이는 사람이었던 적 없는데 마치 정말로 반짝였다가 그 빛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처음부터 때 묻고 문제 많은 못난이였는데 어쩌면 나도 반짝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좌절감이 든다. 가져본 적도 없는 것을 상실하는 기분은 비참하다. 마음대로 기대를 걸고 또 남김없이 가져가는 당신이 나는 무섭다.
- 나도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고 예쁨도 받고 싶다. 못난 나는 그러면 안 되는 건가. 애쓰는 와중에 가끔 괜찮은 모습이 있겠지. 그러면 '저 사람 지금은 부족하지만 노력하는 사람이구나' 하고 봐주면 되는 거 아닌가. 알아주길 바랐지만 그는 끝까지 마음대로 기대하고 마음대로 실망하는 자신의 태도를 탓하지 않으며 떠났다. 나는 다시 내 옷의 냄새를 맡아보다 주저앉아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는다.
- 그거 알아? 비행기를 만들 때 테이프와 커터칼도 쓴다는 거. 아이들이 동네에서 날리는 모형 비행기가 아니라 사람들을 태우고 하늘을 나는 진짜 항공기 말이야.
- 너의 마음에는 어쩌면 테이프로 마감할 수밖에 없는 면들이 있었을 거라고. 언젠가 한 번은 내가 문을 잡아주지 않아서 너는 운 적이 있었지. 아무튼 사랑하는데 그게 왜 문제냐고 따졌던 걸 후회하고 있어. 지금은 비행기가 용접기나 전동 드릴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거든.
- 며칠 전 독립서점을 갈 일이 있었다. 사장님께 몇 권의 책들을 소개받았는데 <한국요괴도감>과 <서울 미스터리 가이드북>이 그것이었다. 책의 내용이 제목만큼이나 집요하고 깊었다. 저자가 잡지 편집장이기도 한데 그 잡지의 이름이 <THE KOOH>라고 한다.
- 내 친구 중 하나는 일본어에 능통하다. 따로 말하지 않으면 일본인들도 그가 한국인인 걸 모를 정도라 한다. 일본어를 잘하게 된 비법을 물으니 어릴 때 일본 만화를 좋아했다고, 정말 그렇게만 답했다. 만화를 얼마만큼 좋아하면 만화 속 언어를 그 나라 사람처럼 할 수 있게 되는 걸까.
- 나는 살면서 어떤 것도 미치게 좋아해 본 적이 없다. 어릴 땐 나에게 미치게 좋아하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아 몇 가지를 좋아하는 척도 해봤는데, 지금은 그런 연기조차 옛일이 되었다. 그 시절엔 나처럼 미지근한 애정밖에 가져본 적 없는 사람들이 던지는 조롱과 수모를 견디며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놓지 않았던 '덕후'들이 있었다.
- 모두가 잊었는지 잊은 척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그 시절 참 나빴다. 다수가 관심이 없는 분야에 빠져 있다고 해서 그들을 이상한 사람, 사회적으로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몰았고, 그게 취향 없는 우리들에게 제법 재미난 놀이였던 것을 기억한다.
- 한동안 아이들이 그런 걸 믿게 하는 직업도 있는 거구나. 현정은 이제 치열한 생업의 일환으로 느껴지는 남자의 햇살 같은 미소를 지켜봤다.
- 그리고 오늘, 이태원 클럽 앞에서 우연히 요정을 다시 만난다. 요정은 청재킷을 걸친 채 참이슬 후레시를 병째로 들고 비틀거리고 있다. 현정은 잠시 뜨악했다가 곧 이상한 반가움을 느낀다. 그래, 요정도 퇴근이 필요하겠지. 멀찌감치 서서 낄낄거리는 요정의 표정을 바라본다. 저게 저 남자의 진짜 웃음인가 보다, 한다. 퍼레이드에서 봤던 햇살 같은 미소가 아니라. 쫄쫄이를 입건 사원증을 목에 걸건 누구나 웃어야 해서 웃는 시간이 있는 거겠지. 현정은 남자와 그의 무리를 지나쳐 자주 가던 주점으로 향했다. 나도 퇴근했으니 오늘 치 진짜 웃음을 지어봐야지 하며.
- 밤새 반지하창가 앞에 사북사북 쌓여가던 눈. 그 시절 우리가 함께 보낸 두 번의 겨울.
어떻게 지낼까. 너는 여전히 그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을까. 여전히 하얀 손으로 또 누군가의 언 발을 주물러주고 그 사람이 감기에 걸릴까 걱정하며 선한 얼굴을 찌푸릴까. 누군가의 아빠가 되었다면, 그렇다면 정말 다정한 아빠일 테지. 나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너의 아이에게 한때는 내 것이었던 너의 다정함을 건네주었다는, 그런 주제넘은 뿌듯함에 젖는다. 그 겨울 내가 그랬듯 너의 사람과 너의 아이도 그 온기 속에 있을 것을 확신하며.
-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 술에 취해 웃고 비틀거리다 입을 맞춘 그날처럼, 첫눈이 내려 잠시 그 목도리를 생각했다. 너는 이 밤 어디에서 이 눈을 맞고 있을지.
- 이런 걸 이렇게 써보자 마음먹고 시작해도 뜻대로 쓰이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땐 내가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글이 자기 혼자 멋대로 쓰이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혹은 나 대신 누가 쓰고 있다거나. 그런 글은 다 쓰고 나서 읽어보면 대개는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다. 사람을 유심히 관찰했던 것도,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의미를 건지려 했던 것도, 이 자리 저 자리 기웃거리며 술잔을 기울였던 것도 끝에 가면 다 외로워서다. 결국 외로움이 대필해 준 글들이 꽤 모였고, 그게 이 책의 시작이 되었다.
- 모두가 외롭다. 가족, 친구, 연인이 있어도 다르지는 않다. 사실 그런 건 외로움과 별 관계없는 게 아닌가 싶다. 이만큼 살아보니 그렇다.
- 당신도 어딘가에서 외로울 거라 생각하면 마음이 놓인다. 타인이 힘든 걸 위안 삼으면 안 된다고들 하는데, 나는 여태 살면서 나만 이런 게 아니라는 사실보다 확실한 위로를 발견한 일이 없다. 외롭다는 건 힘든 일이라기보다는 그저 삶 위에 당연하게 놓인 사실이라는 생각도 들고.
- 그래, 외로움은 어쩔 도리가 없다. 다만 모두가 여기서 함께 외롭다. 그게 우리가 쥐고 살아가야 할 유일한 위안이라고 믿는다.
- 그와 비슷하게 다들 외롭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그러면 마음이 좀 괜찮다. 이 책을 읽는 당신의 마음도 괜찮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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