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캐럴린 엘리엇] 킹크 - 실존적 변태 수업

일루젼 2023. 7. 21. 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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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캐럴린 엘리엇 / 김정은

원제 : Existential Kink - Unmask Your Shadow and Embrace Your Power 

(A method for getting what you want by getting off on what you don't) 
출판 : 정신세계사
출간 : 2020.10.05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다뤄보는 일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추천을 받아 읽게 되었다. 아무래도 표지와 제목의 강렬함 때문에 매번 약간 주저하게 되었었는데, 막상 읽어보니 예상보다... 더... 는 농담이고 적절하게 변태적이었다.

 

이 지점에서 약간이라도 부끄러움이나 불편함이 느껴진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시라고 추천하고 싶다. 바로 그런 내 안의 윤리적 에고가 억압하고 있을 그림자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사실 세상에는 언제나 단 한 사람의 정상인만 존재하지 않던가.

누구? 바로 자기 자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연인, 친구, 가족을 막론하고 타인에게서 단 한 번도 이해할 수 없는 -혹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을 발견한 적이 없는가?

대다수의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만은 성인(聖人)은 아닐지 몰라도 썩 괜찮은 정상인이라고 생각하는 법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는 정반대의 순간들도 반드시 존재한다. 

남들은 다 잘 지내는 것 같은데, 왜 나에게만 이런 일/상황/고통/시련이 찾아오는 것인지 울화가 치미는 순간.

자기 자신에게 실망해서 이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고 무가치한 존재처럼 느껴지는 순간. 

 

저자는 바로 이런 순간들이 사실은 자신의 숨겨진 은밀한 욕망이 실현되는 변태 같은 순간이라고 주장한다. 항상 남들을 배려하고 친절하게 대했는데도 오히려 무례한 반응이 돌아온다면, 어쩌면 당신의 깊은 내면에는 성인/순교자에 대한 욕망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부족한 잔고로 걱정이라면, 어쩌면 청빈함/무가치에 대한 비틀린 욕망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훨씬 노골적이고 kinky한.)

 

처음에는 당황스럽기까지한 저자의 설명들을 읽어나가다 보면 결국 여타의 영성 도서들과 완전히 다른 설명을 하고 있지는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훨씬 이해하기 쉽고 감각적으로 설명했을 뿐이다.

 

'지금 이 순간을 완전히 수용하라' vs '갖고 있다는 것은 그것을 원했다는 증거다'
'범사에 감사하라' vs '감각을 쾌락으로 경험하느냐 고통으로 경험하느냐는 우리의 선택이다'
'에고로 판단하지 마라' vs '수치는 마법을 죽인다'
'모든 답은 자신 안에 있다' vs '진실은 감각적이다'  

        

가장 낯설게 느껴지는 부분이라면 개인의 욕망에 대한 솔직한 허용일 것이다. 저자는 엄격한 금욕과 절대선을 지향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빛을 추구하는 방식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는 짙어지는 법. 자신이 소개하는 EK는 상대적으로 어둠과 수용성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기존 방식의 보완적인 쌍이라는 것이다. 

 

'욕망은 부정이나 억압이 아닌 실현을 통해 진화한다'

 

얼핏 기존의 영성적 가르침과는 정반대인 것 같다. 욕망은 절대로 충족될 수 없고, 감각적인 쾌락은 허무하고 공허한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대다수의 감정 치유에서 추천하는 방식을 떠올려보자. '판단하거나 거부하지 말고 그냥 그대로 느껴줘라, 함께 있어줘라, 수용하고 인정해줘라'는 말과 '욕망은 부정이나 억압이 아닌 실현을 통해 진화한다'라는 설명은 다른 것일까?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허용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의식하는 '좋은 나' 뿐만이 아니라 그 순간 드리워져있는 '나쁜 나' 마저도 허용해야 한다. 그리고 진심으로 그것들이 '좋고 나쁜' 것이 아님을 '진정으로 감각할 수 있을 때', 그 전환을 통해 이원성은 융해되고 융합된다. 

 

개인적으로는 무척 즐겁게 읽었고, 또 몇몇 실천법은 꼭 익숙해지고 싶다고 느꼈다. 특히 강렬한 감정이 올라올 때 그것을 긍정적/부정적으로 인식하기보다, 또 상황을 해석하기보다 그 감정을 감각한다는 사실 자체에 쾌감을 느껴볼 것을 주문하는 방식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심지어 자신이 사실은 그걸 은밀히 좋아하기 때문이라니!  

 

그림자 작업이 다소 어렵고 두렵게만 느껴지셨던 분들께는 좋은 가이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꼭 영성적인 쪽에 관심이 있지 않으신 분들께도 추천하고 싶다. 이 책을 통해 조금 더 자기 자신에게 자유와 즐거움을 허락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도발적인 제목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제목이 정확히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실존적 변태 수업 (Existential Kink, EK)은 
내가 수년간 진행해온 코스를 통해 갈고닦은 
빠르고도 효과가 뛰어난 그림자 통합 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내 코칭 고객들과 강좌 수강생들이 얻은 결과는 눈부시다. 
바로 그 과정을 이 책을 통해 당신과 함께하고 싶다.

 

 

 

- 캐럴린 엘리엇 Carolyn Elliott. 작가이자 강사로서 그림자 통합 연습과 응용 오컬트 철학을 통해 사람들의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작업에 주력하고 있다. 다수의 온라인 강좌를 진행하고 있으며 온라인 잡지 <마녀 (Witch)>를 발간했다. 피츠버그 대학에서 문화비평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는 펜실베이니아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웹 사이트는 www.carolyngraceelliott.com이다.

 

- "캐럴린의 책은 빛과 사랑에만 치중하는 자기계발서와 영적 가르침의 한계를 날카롭게 지적하는 동시에 우리의 그림자가 수치심으로 둘러싸인 벽장에서 풀려나도록 부드럽게 인도함으로써 깊은 영적 안식과 축복의 마음을 선사한다. 그뿐 아니라 캐럴린은 우리의 영적 성장과 마법 수행이 아무리 지지부진한 성과를 보일 때일지라도 대단히 재미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예복이나 만트라 mantra, 구루 guru 없이도 고대의 탄트라 tantra 연금술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그녀의 노련한 가르침은 독자들에게 큰 선물이다."

알렉산드라 록소 Alexandra Roxo, <여신처럼 퍼킹하라 F*ck Like a Goddess>저자

 

- "이 도발적인 데뷔작을 통해 엘리엇은 무의식에 숨어 있는 금단의 욕망을 마음껏 탐색해 볼 것을 권한다. 그녀는 융의 그림자 개념을 바탕으로 인간의 억압되고 부정당한 면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표출됨을 지적하면서, 인간이 무의식적 차원에서 이러한 비뚤어진 느낌을 즐길 수 있고, 그림자가 야기하는 터부시되는 즐거움에 흥분할 수 있다고 주장한 그녀의 명상법(실존적 변태 명상)은 이러한 패턴을 의식화하는 급진적이고, 신체적이고, 야하고, 효과가 빠른 실용적인 방법으로서 명상과 주문 외우기 수행을 통해 우리의 무의식과 영혼 차원에 접근하여 결과적으로 부정적 패턴을 해체한다. 엘리엇의 신선한 방법은 삶에 더욱 많은 긍정성을 끌어오고자 하는 영적인 독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퍼블리셔스 위클리 Publishers Weekly


- "이것은 실용적이고 정말 이해하기 쉬운 그림자 통합 방법이다. 그 누구도 그림자 통합에 대해 이렇게 확실하게 설명해주지 않았다. 당신이 평생토록 거부해온 존재의 면면들을 인정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일 수 있다. 보는 건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정말 기쁘게도 캐럴린은 왜 그림자 통합이 그토록 중요한 일인지 시적이고 유려한 언어로 설명할 뿐더러 그 방법을 간단한 단계로 가르쳐준다!" 

아케라 운파 수테라Akhera Unpa Shepsutera

 

 

 

- 여기서 말하는 부정적 패턴이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문제들이다. 

· 아무리 노력해도 매달 쥐꼬리만한 돈밖에 벌지 못한다.
· 나를 학대한 부모와 놀라우리만치 똑같은 사람과 계속 사귀게 된다.
· 특정한 건강 문제나 체중 문제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 직관이나 창작력이 막혀 흐르지 않는다. 

 

- 솔직히 말해 우리 모두는 살면서 한 번쯤은 이런 종류의 일들로 인해 고통받는다. 그리고 완전히 까놓고 더 솔직해지자면, 즉 통상적인 인식 너머로 더 깊은 수준에까지 솔직해지자면, 우리 모두는 이러한 고통 속에서 기이하게 비틀린 가학-피학적 쾌락을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똑같은 문제를 반복해서 경험하는 것이다. 

- 이것은 전혀 새로울 게 없는 개념이다. 나는 피츠버그 Pittsburgh 대학에서 문화비평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는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심리학 이론을 접했다. 심리학 안에서 깊이 자맥질한 이 시기를 통해 나는 우리 인간이 삶의 '나쁜 일'에서 무의식적으로 쾌감을 느끼는 질긴 습관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프로이트, 융, 라캉 같은 심리학의 초석을 닦은 거장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성향을 프로이트는 심리적 피학증(psychic masochism)으로, 융은 그림자(Shadow)로, 라캉은 주이상스 jouissance, 즉 '너무나 강렬해 우리가 억압하고 마는 쾌락'이라고 불렀다. 

 

- 이 모든 심리학자에 따르면 심리 치료의 핵심은 결국 우리가 겉으로는 증오하고 견딜 수 없어 하는 일 밑바닥에 깔린, 그것에 대한 욕망과 쾌락을 알아차리게 하고 수용하게끔 만드는 과정이다. 이상해 보이지만 사실이다. 앞으로 이 책에서 몇 차례 반복하겠지만, 융은 이렇게 말했다.

"의식화되지 않은 무의식은 당신의 삶을 지배할 것이고 당신은 그것을 '운명'이라 부를 것이다." 

 

- 융의 이 말은 완벽하게 옳다. 즉, 삶의 나쁜 일에서 무의식적인 억눌린, 부정하는 인정하지 않는 즐거움을 누리는 한, 우리는 바로 그 나쁜 일을 끊임없이 추구할 것이고, 자신이 그러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이 똑같은 일을 하염없이 되풀이할 것이다.

 

- 나는 이 사실을 체험으로 배웠다. 내 '심리적 피학증'을 받아들임으로써, 내 어두운 '그림자'를 알아차리고 그 힘을 이용함으로써, 그리고 마침내 그 역겨운 것들에게서 내가 무언가 놀라운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진짜 쾌락을 얻어냄으로써 말이다. 나는 '좋은 나'와 '나쁜 나'를 완벽하게 통합하여 전인이 될 수 있었다. 치유된 것이다. 

 

- 이 통찰을 내 인생에 직접 적용하면서 나는 10년 넘게 나를 괴롭혀온 가난, 질 나쁜 관계의 패턴, 건강 및 창작력 문제가 빠른 속도로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하지만 이 통찰은 '사랑과 빛'에 초점을 맞춘(확언 반복, 심상화, 긍정성 등) 대중 심리학이나 자기계발서에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으며, '사랑과 빛의 방법'으로 효과를 보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답답함을 호소한다. 내가 깨달은 삶의 마법에 가닿을 수 있는 열쇠 -그리고 실존적 변태 수업에서 가르치는 내용- 는 스펙트럼의 정반대 끝자락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둠의 힘을 찾는 것이다. 

 

- 내 강좌 수강생 중 한 명은 이것을 다음과 같은 완벽한 비유를 통해 설명했다.
"빛과 긍정적인 사고에만 초점을 맞추는 일은 마치 태양만 올려다보느라 내가 똥 밭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어디선가 역한 냄새가 나기는 하지만, 빛을 응시하고 있는 한 모든 나쁜 것이 저절로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그리하여 당신은 똥을 치우는 대신 그 위에 향수(확언)를 가득 뿌린다. 반면 그림자 작업은 시선을 아래로 돌려 똥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제 당신은 그것을 치울 수 있고 심지어 퇴비로 만들어 멋진 정원을 일궈낼 수도 있다."

 

- 수천 년간 그리스인들에게 지하세계는 '왕'이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오로지 여왕만이 있었다. 페르세포네 서사의 원류가 된 신화의 가장 오래된 층을 파보면 그곳에 '빛을 파괴하는 여신'이 있다. 힌두 여신 칼리와 비슷하게 페르세포네는 죽음의 여신으로 숭배되었다. 플루토가 등장하기 오래전부터 페르세포네는 홀로 존재했다. 

- 페르세포네는 온전하고, 홀로 완성되고, 분리되지 않는 자라는 의미에서 처녀 여신이었다. 그녀는 처녀인 동시에 중심, 핵심을 뜻하는 코레 Kore로 불리었다. 그녀는 만물의 중심이자 핵심이자 정수로 여겨졌다. 플루토와 페르세포네의 강간 이야기는 초기의 여신 숭배를 기준으로 수천 년이나 지난 이후에 만들어진 서사이다.

 

- 코레는 위대한 이야기를 경험하고자 했고, 위대한 이야기에는 그것이 비극이든 희극이든 언제나 분투와 역경과 대립이 존재한다. 또, 분리와 재통합의 과정이 있다.  

- 이런 시각에서 보자면 페르세포네의 강간 이야기는 단독자인 신이 제 손으로 이원성을 창조하여 자신의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면을 경험한 다음 마침내 다시 통치자로, 통합된 자로 되돌아오는 이야기이다. 단, 예전과 다른 점은 무섭도록 타자 같은 자신을 경험한 뒤에만 깨달을 수 있는 자아 인식이 생겼다는 점이다. 

 

- 플루토는 우리가 타자(즉 내가 아닌, 세상의 저편에 있는 존재)라고 경험하는 모든 것을 뜻한다. 너무나 끔찍하고 광대무변하고 숭고하고 폭력적이어서 감히 우리가 자기 것이라고 동일시하지 못하는 타자 말이다. 

 

- 하지만 이 버전의 신화는 마법의 관점에서 볼 때 딱히 인상적인 면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나는 페르세포네 강간의 진짜 이야기, 엘레우시스 Eleusis 밀교(고대 그리스의 대단히 비밀스럽고 위대한 마법 학교)의 참석자들에게 알려진 진짜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버전에 훨씬 가깝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 납치, 강간, 통제 등의 고난을 겪은 페르세포네는 어느 날 밤 자신의 비참한 운명을 깊게 숙고하며 지하세계의 음식, 석류의 씨앗을 먹는다. 그녀는 씨앗을 먹음으로써 지하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문자 그대로 소화시키고), 분리된 순수한 '나'를 경험하기 위해 스스로 플루토를 창조하기로 선택했음을 기억해 낸다. 이것은 깨달음의 '아하' 모멘트다. 이 사실을 기억해 낸 페르세포네는 플루토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본다.  

 

- 잔인한 괴물로만 생각했던 그는 사실 자신이 부탁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악한 악당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준 참으로 이타적이고, 헌신적이고, 순종적인 연인이었던 것이다. 이 사실에 눈뜬 페르세포네는 플루토를 용서하고, 이들은 부드럽게 하나가 된다. 

 

- 페르세포네는 이제 더 이상 지루함과 외로움에 떠는 왕비가 아니다. 그녀는 헌신적인 연인과 함께 자신의 힘과 그에 따르는 모든 책임을 완전히 자각한 상태로 지하세계를 다스린다. 이것은 자신의 힘을 타자로서 경험한 뒤에만 깨달을 수 있는 자각이다. 

 

- 지하세계의 미스터리란 무의식의 신인 플루토가 아무리 혐오스럽게 보일지언정 그는 사실 우리가 손수 만든 창조물이고, 친절하고 헌신적인 연인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것을 기억하고, 그를 용서하고, (처음부터 진정 우리 것이었던) 그의 힘을 온전히 내 것으로 경험하고, 그를 사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플루토의 가없는 힘을 이용할 수 있다. 

 

- 만일 -정말 정말 만일- 내 인생에서 벌어진 모든 나쁜 일들이 사실은 내가 그런 걸 '좋아해서'였다면? 

 

- 페르세포네와 플루토의 이야기처럼 나는 나 자신을 속박하기 위해 그를 이용했다. 그렇게 하면 나를 들여다보거나 그가 없는 세상을 탐색해야 하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 내가 그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은 한편으로 그 사람과 그의 폭력적인 통제를 원망하는 게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나는 끔찍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끔찍한 관계밖에 맺을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끔찍한 사람이 아니게 되면 그때 그를 떠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끔찍한 사람인 한, 나는 그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나았다. 아무리 소유욕이 강하고 폭력적인 사람일지언정 그와 있는 게 외로운 것보다는 좋았으니까. 그래서 나는 끔찍한 사람이 되지 않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끔찍한 사람이 되지 않고자 노력하는 것 자체가 대개는 자신이 끔찍하다는 사실을 더욱 명확히 방증할 뿐이다. 
 

- 지금까지 말한 이 시나리오는 괴이한 유형의 결박, 즉 광대한 미지를 마주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낸 일종의 속박 장치였다. 마침내 나는 "내가 끔찍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끔찍한 관계 밖에 맺을 수가 없는 거야"라는 논리가 진실이 아님을 자각하게 되었다. 오히려 진실은 바로 다음의 깨달음이었다. 
"내가 이렇게 끔찍한 관계를 맺고 있는 건 외부의 악역에 의해 광적으로 통제되는 느낌을 내 무의식이 은밀하게 좋아하기 때문이다." 

- 나는 내 삶의 추함이 내게 필요한 것이라거나 진짜라서가 아니라 그저 내 그림자가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깨달음을 충분히 숙고했다. 그러자 내 몸 안에 거대한 공간이 열렸다. 나는 폭력적으로 통제당할 때 무의식적으로 느낀 쾌락을 의식적으로 느끼고자 했다. 실제로 통제는 무의식적으로 나를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나의 '아하' 모멘트였다. 

 

- 성적 흥분은 자석과도 같다. 이제 나는 내가 학대와 결핍과 거부를 평생 동안 자석처럼 끌어당겼다는 냉혹한 깨달음과 마주했다. 

 

- 그리하여 절박했던 20대, 곰팡내 나는 케케묵은 지하실에서 삶의 모든 고통과 슬픔과 좆같음을 전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맡기겠다고 간증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만일 하느님이 미친 변태이고, 그 모든 '영적인'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하느님의 일부라면 어쩌면 나 역시 내면 깊은 곳에서는 미친 변태일 수 있겠다. 그러니 삶의 모든 무섭고 징글징글한 것에 화를 내는 대신 그것을 좋아해보면 나의 신성한 본성에 더욱 깊게 다가갈 수 있겠다." 

 

- 이 깨달음 -내 실존적 변태성에 대한 수용- 은 의식과 신성과 창조의 본질에 대한 내 오랜 탐구의 기반이 되어주었고, 결과적으로 내가 오늘날 누리는 모든 엄청난 좋은 것들의 원천이 되었다. 

 

- 나를 잘 따라오시길. 여러분의 정의하는 '좋다'의 의미를 엄청나게 확장시켜 드리겠다. 

 

- 알다시피 내가 여러분과 함께하고 싶은 실존적 변태 수업은 지금까지 숨겨왔던 수치스러운 나의 일부를 사랑할 수 있게 해주는, 신체 반응을 기반으로 하는 급진적이고 야하며, 대단히 실용적이고 효과가 빠른 방법으로서 오래된 부정적 패턴을 해체시키는 데 탁월하다.

 

- 여기서 말하는 '숨겨왔던 수치스러운 일부'란 바로 당신의 그림자를 뜻한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당신은 자신의 그림자를 만나 그것과 어울려 춤추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 그림자 통합 작업을 하면 아름다움과 부를 수용할 수 있는 삶의 역량이 훨씬 커진다. 더 이상 우발적으로, 나도 모르게 그것을 거부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법이다. "위에서 그러하듯 아래에서도 그러하다. 안에서 그러하듯 밖에서도 그러하다"는 마법의 세계관이다.

 

 

의식과 무의식의 통합은 왜 그렇게 중요할까?

 

 

 

- 단 하나 문제가 있다면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 역시 짙어진다는 사실이다. 

- 앞에서 말한 진동수를 높이는 모든 방법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우리 존재의 빛을 밝히는 효과가 있지만 그럴수록 숨어 있는 어둠의 존재감은 더욱 강해지고 날카로워진다.

 

- 사람이 자신의 광대한 무의식을 어떻게 의식화해야 하는지 모르면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방법에 대해 전혀 감도 잡지 못한다) 대개 무의식에 끌려다닌다. 즉, 그들은 자신이 부정한 무의식적 욕망이 추동하는 완고하고 고통스러운 패턴에 지배당한다.  

 

- 생각해보라. 무의식은 우리가 밤에 꾸는 꿈만을 지배하지 않는다. 깨어 있는 낮 동안의 경험을 결정짓는 패턴, 욕망, 호기심 역시 광범위하게 지배한다. (우리가 쉽게 인정할 수 있는 정도를 훌쩍 뛰어넘는 수준으로.) 우리가 깨어 있을 때 경험하는 일상 역시 일종의 꿈이다. 밤에 꾸는 꿈보다 훨씬 밀도 있고 느리게 움직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여전히 꿈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무의식의 내용물을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다루는 법을 알게 되면 깨어 있는 삶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이 대단히 커진다. 자각몽을 꾸는 사람이 이게 자면서 꾸는 꿈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면 밤의 꿈을 내 맘대로 통제할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 내면의 신성은 더 이상 뉴에이지식의 다정하고 편안한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전기가 찌릿찌릿 오르고 실체가 있는, 직접 '느껴지는' 현실이다. 이 작업을 할 때 우리는 에메랄드 태블릿 Emerald Tablet의 유명한 연금술 금언인 "위에서 그러하듯 아래에서도 그러하다. 안에서 그러하듯 밖에서도 그러하다"를 구체적으로 실천하게 된다. 마법적 세계관의 정수인 우주적 상응을 가리키는 이 극적인 개념에 대해 말로 유려하게 썰을 푸는 건 쉽다. 하지만 이것을 실제로 살아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다. 이 '살아내는 것'이 바로 실존적 변태 수업의 핵심이다. 

 

- 이것을 숙고해보자. 우리의 의식적인 자아(통상 나라고 생각하는 부분들)는 분명 삶에서 일어나는 나쁜 일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의 의식적 자아는 실패, 모멸, 빈곤, 질병, 거절, 슬픔이 아닌 승리, 성공, 부, 건강, 사랑, 기쁨 등을 얻는 편이 훨씬 좋다고 생각한다. 

 

- 우리가 어둡고, 뒤틀리고, 불쾌한 것은 절대 바라지 않는다고 고집부리는 한 인간 호기심의 전체 스펙트럼 중 상당 부분은 잘리고, 억압되고, 부정되고, 무의식이 되어버린다. 이것은 나쁜 소식이다. 무의식의 욕망-호기심이 물질 현실에서 현실화되는 힘은 의식적이고 '선한 에고'가 허락한 욕망보다 훨씬,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 우리는 인간이 가진 호기심의 어두운 면을 내 것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깊은 차원에서 뻔뻔하게 책임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어두운 면이 발현된 고통스러운 현실을 기꺼이 즐기겠다고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내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서운 것을 계속해서 창조해내는 무의식의 사이클에 꼼짝없이 잡혀 있게 된다. 여기서 잠시 우리가 지금까지 얘기한 것이 또 다른 매우 장대한 개념인 연금술의 '위대한 작업(Great Work)'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자. 
 

- 황금새벽회(Golden Dawn)와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Aleister Crowley에 의해 20세기에 유명해진 서구의 비전 전통에서 '성 수호천사와의 대화 및 지식(Knowledge and Conversation of the Holy Guardian Angel)의 습득'은 이러한 우니오 멘탈리스에 상응하는 개념이다. 성 수호천사가 아니마/아니무스처럼 정신내면의 '타자'로, 다시 말해 뚜렷이 구별되는 자주적인 '개인'으로 경험되는 일도 종종 있긴 하다. 그러나 또한 성 수호천사가 시공을 넘어선 심오한 연결에 관한 직관적 이해로 나타나는 경우 역시 많다는 점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 이 책에서 다루는 위대한 작업의 첫 번째 단계인 우니오 멘탈리스는 결국 우리의 이상, 의도, 영감(우리의 영, 우리 존재의 남성적이거나 투사적인 면)과 수용-구현적(embodied), 감정적, 성적, 창조적 에너지(우리의 혼, 우리의 여성적이거나 수용하는 면으로써 동시성 경험을 잉태하여 외부 세계에 출산하는 면이기도 하는) 사이의 어긋남을 치유하는 과정이다.   

 

- 이것은 왜 중요한가?
우리 인간 대부분이 한없이 분열된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기 때문에 자신의 진정한 잠재력을 실현할 능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 위대한 작업을 실천할수록 세상에 실질적이고 물질적인 현실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더욱 커진다. 

- 마녀를 뜻하는 바스크어 소르지낙 sorginak은 '자기 운명을 만드는 자'를 뜻한다. 내가 이 책을 통해 여러분에게 제시하는 것은 본인의 운명을 만드는 방법이다. 깨달음으로 가는 정교하고 여성적인 이 마녀의 길은 대중적으로 보다 칭송받는 금욕, 명상, 요가 성인의 남성적인 길과는 약간 다르다. 

 

- 위대한 작업의 이 마녀적인 길은 우리 자신과 존재의 가장 어둡고 무시무시한 측면을 즐기는(그리하여 명백히 뿌리 깊게 재통합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섹슈얼하고 세속적이며 오르가즘을 안겨주는 이 황홀한 여정은 힌두교와 불교의 탄트라 전통과 매우 많이 닮아 있다. 완전히 까놓고 말하자면 이 실존적 변태 작업은 좌도이다. 좌도는 '번개의 길'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사람을 매우 빠르게(번개처럼 빠르게) 깨울 뿐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나'를 파괴하기 때문이다(번개가 떨어진 곳은 다 타버린다). 

-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믿는 '나'의 모습이 무엇인지 알고 싶거든 그저 본인의 삶, 주변 환경, 지금 맺고 있는 관계를 둘러보기만 하면 된다. 여러분의 삶은 여러분이 갖고 있는 깊은 신념을 그대로 반영한다. 

 

- 자신이 창조한 상황과 관계가 아무리 봐도 '동시적'이거나 '마법적'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때가 많은 것은 그것이 너무도 익숙한 반복이기 때문이다. 상당히 지겹고, 나를 옥죄는 것 같고, 약간 뻔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 대부분은 조건화된 정체성을 잘못된 것, 하자 있는 것, 사람들의 적의를 받아 마땅한 것,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하지 않은 것으로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우리는 그 무의식적 신념을 반영하고 확인해주는 상황을 마법처럼 계속해서 만든다. 

 

- 거듭 강조하지만 이 말은 여러분이 무의식적으로 창조하는 어려운 상황과 인간관계가 여러분 탓이라는 뜻이 아니다. 의식적이고 개인적인 선택의 영역을 넘어선 카르마 혹은 사회적 조건은 일개 개인인 여러분의 탓이거나 과실이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무의식적 조건과 정체성을 바꾸고 그것을 신성의 현실로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개인으로서의 여러분이다. 여러분은 '능력'이 있다. 죄가 있거나 과오가 있는 게 아니다. 

- 아마도 이 책에서 여러 번 반복해서 언급하게 될 개념 하나를 확실하게 설명하겠다. 이 개념이 이 작업의 핵심이다. 그러니 부디 확실히 배우길 바란다. 그 개념은 바로 이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 아니다."

- 내가 100퍼센트 확신을 갖고 얘기하는데, 당신이 자기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든 당신은 그 사람이 아니다. 이 사실을 자주 떠올리기 바란다. 그러면 이 작업이 훨씬 쉬워진다. 아침에 이를 닦을 때 이렇게 생각해보라. "나는 절대로 내가 생각하는 내가 아니다. 나는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훨씬 더 광대하고 이상한 무언가다. 음, 내가 진짜 무엇인지 나도 궁금하군."

 

- 대체로 당신이 생각하는 당신은 강박적으로 반복되는 일부 생각과 이야기들로 엮어진 사회적으로 구성된 허구로서 당신의 실제 존재와는 닮은 점이 거의 없다. 현명하고 날카로운 마법사 론 마일로 듀켓 Lon Milo DuQuette은 이렇게 말했다. "물론 마법은 모두 당신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문제는 그 머리가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미친 듯이 크다는 것이다."

 

- 즉 ' 외부' 세계 전체는 사실 의식 '안'에 존재한다. 자신의 주관적 인식 밖에 있는 '객관적' 세상을 경험한 자는 아무도 없다. 세상에서 가장 엄정한 과학적 실험조차도 주관적으로만 경험될 수 있을 뿐이다. 간단히 말해 우리의 주관적 인식 밖에 존재하는 세상은 없다.  

- 영은 한계를 모른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영은 순수한 무한성과 가능성만을 본다. 

 


 

<실존적 변태 수업의 공리 일곱 개>

 

· 갖고 있다는 것은 그것을 원했다는 증거다.

· 감각을 쾌락으로 경험하느냐 고통으로 경험하느냐는 우리의 선택이다.
· 모든 터치에 흥분할 수 있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한 번의 '터치'이다.
· '흥분'과 '닫음'의 정도는 우리가 삶을 얼마나 온전히 허용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 욕망은 부정이나 억압이 아닌 실현을 통해 진화한다.
· 수치는 마법을 죽인다.
· 진실은 감각적이다.

 


 

- "갖고 있다는 것은 그것을 원했다는 증거다" 
이 공리는 다소 충격적이고 불편하게 들릴 수 있다. 특히나 당신이 삶에서 고난을 겪었거나 겪고 있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런 고난을 내가 원했다고 생각하는 건 무척이나 거슬릴 수 있다. 그러나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어려움이나 부정적인 패턴을 원한 것은 우리의 의식적인 면이 아니다. 우리의 무의식적인 면, 악마적인 면이 원한 것이다. 우리가 평소에는 동일시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경험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그 부분이 원한 것이다. 

 

- "갖고 있다는 것은 그것을 원했다는 증거다"는 앞서 지혜로운 마법사 칼 융이 했던 예리한 인용구, "의식화되지 않은 무의식은 당신의 삶을 지배할 것이고 당신은 그것을 '운명'이라 부를 것이다"의 또 다른 버전이기도 하다. 융은 자신의 저작물을 통해 우리의 무의식은 생식력이 있고, 수용적이고, 마법에 유능한 우리의 일부임을 내내 설명했다. 무의식에 생식력이 있다는 말은 무의식 안의 감정과 상징과 태도가 우리의 경험을 만드는 동시성 또는 유의미한 우연을 창조한다는 뜻이다. 당신의 무의식에 있는 욕망은 그것이 무엇이든 '태어날 것'이고,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 욕망의 결과는 행위 주체 외부에 존재하는 불가사의한 어떤 것, 즉 운명이 당신에게 부여한 일처럼 보일 것이다.

 

-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 강력한 무의식의 욕망-호기심을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모두 받아 들여 의식화하는 작업을 불편하더라도 해내면, 무의식은 당신을 쥐고 흔드는 불길한 힘을 잃게 된다는 점이다. 

 

- 그러니 "갖고 있다는 것은 그것을 원했다는 증거다”라는 공리의 목적은 어떤 경험을 당사자 탓으로 돌리거나 그것으로 창피주려는 게 절대 아니다. "너 정말 형편없구나! 네가 이걸 원한 거야!" 수치와 비난은 통합 작업에서 정말 대단히 큰 역효과를 낼 뿐이다. (수치심을 느낄수록 그것은 더더욱 무의식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 이 공리의 목적은 '발굴 도구'이다. 이 도구를 쥐고 당신의 경험을 만든 무의식의 욕망-호기심을 흥미로운 마음으로 슬슬 파보기 시작하면 그러한 욕망이 진짜 나에게서 나왔음을 진심으로 깨달아 주체적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결국 이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 그래서 나는 여러분이 다음의 말을 숙고해주기를 바란다. 당신 삶에서 벌어지는 현재 상황, 특히 짜증 나는 패턴으로 반복해서 일어나는 것 같은 상황(가령 매달 특정 금액만큼의 돈밖에 벌지 못한다거나, 질이 안 좋은 비슷비슷한 치들만을 애인으로 끌어당기는 것 같다거나, 반복적으로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다거나 등등)은 '이미 언제나 벌어지고 있는 우발적 마법'의 결과이며,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러한 상황은 당신 무의식의 깊은 욕망이 아름답게 실현되었음을 뜻한다. 

 

- 가령, 3과에 소개하는 실존적 변태 기본 명상을 할 때 스스로에게 "내 전남편과 벌이는 이 양육권 싸움에서 금단의 사악한 쾌락을 느껴도 좋아"라고 말한다고 해보자. 이 말을 할 때 당신은 어떤 미묘하게 찌릿한 감각이 목에서 태양신경총으로 튀는 걸 느낀다. 이 찌릿한 감각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은 당신의 말에 진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오하고 감정적이고 관계적인 진실은 언제나 감각적이기 때문이다. 문자 그대로 말이다.) 

- 실존적 변태 명상을 하다 보면 다양한 감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차크라에서 차크라로 움직이는 미묘한 찌릿한 감각(앞에서 든 예와 같이), 성적 흥분, 가벼움, 웃음, 잔잔한 슬픔까지. 이 작업을 하면서 아주 다양한 느낌과 감각을 경험하는 건 흔한 일이다. 명상을 할 때 이것이 상당히 정상적인 반응임을 받아들여주길 바란다. 그리고 EK(Existential Kink) 진술(실존적 변태 기본 명상 부분에 설명돼 있다) 중 어떤 것이 가장 강렬한 감각을 불러일으키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기를 바란다. 

 

-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것은 당신이 이미 충분히 슬퍼한 상황이어야 한다. 가령 일자리를 잃고 세상이 무너진 게 얼마 전이라면 이 상황에 대해 바로 작업을 시작하는 건 권하지 않는다. 대신 충분히 시간을 들여 상실을 슬퍼하고, 잃어버린 희망과 기대를 애도하라. 해당 문제를 떠올렸을 때 잔잔한 슬픔이 모두 해소되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바로 EK를 할 때이다. 그 이전은 안 된다. 

 

- 또한 EK는 싫은 상황이 삶에서 반복적으로 끈질기게 나타나는 패턴일 때 가장 효과가 좋다. 당신이 동일한 이유로 세 직장에서 해고당했다면, 바로 그거다. 슬픔을 충분히 처리한 후 작업을 해볼 만한 주제다. 하지만 만일 실직이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라면 일단 실직에 대해 슬퍼하고 EK 작업은 삶에서 더 자주 일어나는 문제에 적용해보기 바란다. 
 

- "나의 -----에 대한 이 기이한 쾌락을 철저하게 느껴도 좋아. 수치스러워할 필요도, 후회할 필요도, 부정할 필요도 없어."
"내가 바라는 게 설령 나쁘고, 틀리고, 파괴적인 것일지라도 있는 그대로 다 원해도 좋아."

- 만일 당신이 무의식에서 고동치고 있던 금기의 쾌락에 접속할 수 있다면, 굉장하다! 바로 그것이다! 당신 정말 잘하고 있다!
아니면 내숭을 떨며 짓궂게 돌려 말하는 방식으로 의식적 마음의 경계를 풀 수도 있다.  
 

- 왜냐고? 당신의 무의식적 자아가 자신의 욕망 실현을 수치심 없이 받아들이고 경험할 수 있는 자유를 당신이 의식적으로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핍, 사랑으로부터의 거부, 자기혐오 등을 즐기는 완벽하게 합당한 욕망이 잔혹하도록 멋지고 극적으로 실현되었다는 것을 무의식이 인정하고 기뻐할 수 있게 당신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당신이 이미 (무의식적으로) 창조한 결과를 감사히 여기고, 깊이 수용하고, 환희에 떨며 즐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의식적 마음과 무의식적 마음은 성적으로(마법적으로) 합일하고, 서로에 씨를 뿌려, 마침내 긍정적 동일시라는 새로운 상승의 바람을 당신 삶에 불러올 수 있다. 

- 의식적 마음이 무의식의 욕망에 겸허히 고개 숙이는 바로 이 순간에, 당신의 의식적 마음과 무의식적 마음이 만날 수 있다. 당신의 무의식과 만나는 그 순간에 의식적 마음의 열망과 이상이 무의식에 잉태된다. 의식적 마음은 지금까지 무의식의 영역에 묻혀 있던 쾌락과 친구가 되고 당신의 무의식적 마음은 이에 보답한다.

 

- 그런데 우리는 일반적인 삶에서도 이와 똑같이 고통과 놀이하듯이 상호작용할 수 있다. 상상의 맥락을 "끔찍한 일이 내 의지에 반하여 벌어진다"에서 "내가 전적으로 동의한 변태적이고 재미난 일이 일어나고 있다"라고 바꾸기만 하면 된다. 당신이 싫어한다고 믿는 그것, 그 상황, 그 느낌에 당신의 에고가 홍분하면 된다. 그것이 주는 자유와 해방을 느끼라.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그 끔찍한 일의 찌릿한 전율과 매력에 몸을 맡기라. 

 

- 실존적 변태 명상의 이 과정이 깊어질수록 에고와의 동일시는 옅어지고 혼과 영이 있는 당신의 '전 존재'와의 일체감은 더욱 깊어진다. 이것이 바로 연금술적 결혼인 우니오 멘탈리스다. 동일시하는 대상이 변하면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이제 당신은 자신이 가장 깊은 곳에서 (무의식적으로) 즐기는 것은 언제나 단 한 번의 실패 없이 창조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 당신의 전 존재인 신성한 참자아는 좋은 것만이 아닌, 현현된 모든 경험을 궁금해하고 이를 갈구한다. 

 

- 아픔과 결핍, 죽음과 슬픔, 고통과 상실, 폭력과 나약함. 이 모든 매혹적이고 가치 있는 경험을 의식적인 에고-인격은 어떻게든 나쁜 것 또는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하려 한다. 하지만 이것들은 잘못된 것도 나쁜 것도 아니며 인생이라는 전경의 일부일 뿐이다. 우리 모두의 본질인 무의식의 신성한 참자아는 모든 것을 경험하고 싶어한다. 참자아는 진심으로 모든 것을 낱낱이 경험하고 싶어한다. 그렇지 않다면 왜 우리의 본질인 참자아가 굳이 귀찮게 이원성으로 현현했겠는가? 

-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물질세계는 양극의 세계다. 사랑과 증오, 기쁨과 슬픔, 뜨거움과 차가움, 밤과 낮, 축축함과 건조함, 탄생과 죽음, 건강과 질병. 만일 우리의 본질인 참자아가 이 아찔하게 무수한 양극의 쌍을 모두 경험하고 싶어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합일 상태의 우주적 지복 속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 하지만 놀랍게도 우리의 참자아는 그보다는 모험심이 훨씬 많다. 당신이 참자아의 전체 모습을 더욱 깊이 깨달아 참자아가 즐겁고 무서운 것 모두를 즐겁게 경험하도록 허용할 때, 당신은 고립된 에고와의 동일시에서 벗어나 신성한 참자아-전 존재와 일체감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당신 삶에서 더 많은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된다. 
 

- EK는 삶에 이미 존재하는 상황뿐 아니라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 또는 하면 좋지만 왠지 불편하거나 불쾌한 것을 대상으로도 할 수 있다. 가령 직장에서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을 하거나 민감한 문제에 대해 친구와 얘기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방법은 다음과 같다. 

 

- 참고사항 하나. 실존적 변태 과정에서 쾌락을 느끼면 동시적으로 외부세계가 실제로 변한다. 하지만 당신이 의식적으로 유발하고 싶은 변화보다 변태적인 쾌락 그 자체를 순수하게 즐기는 게 훨씬, 훨씬 더 중요하다. 

 

- 왜일까? 무언가를 없애겠다는 목적으로 흥분한다는 것은 진짜로 그 대상에 흥분한다는 뜻이 아니지 않나. 
그것은 무의식이 당신을 그만 괴롭히고 좋은 것을 내어줄 수 있도록 무의식의 장단에 맞춰 오르가즘 흉내를 내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조종이고 강요이며 그냥 안 통하는 방법이다. 당신의 무의식은 그런 것에 속기에는 당신을 너무 잘 안다. 당신은 무의식을 속일 수 없다. 그러니 결과에 대한 애착을 내려놓으라. 진짜 원하는 좋은 것을 얻으려고 실존적 변태 명상을 한다는 마음을 내려놓으라. 

 

- 모든 걸 갖고 있어도 얼마든지 비참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진짜 중요한 것은 그 자체로 순수한 즐거움이다. 
그리고 즐거움, 행복, 지복이야말로 당신이 진짜로 받기를 바라는 좋은 것들이지 않나.

 

- 그 이후 나의 만트라는 "갈구하고 싶은 게 무엇이든 너는 얼마든지 갈구해도 좋다"가 되었다

 

- 그래야 투사할 거리가 생긴다. 그래야 우리가 세상을 '본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것은 그림자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증거다. 사실 그림자는 멋있는 것이다. 필름에 인쇄된 그림자가 없다면 형태와 모양이 없는 순수한 빛만이 빛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반짝이는 순수한 빛도 물론 좋다. 하지만 이런 빛만으로는 분명 눈을 사로잡는 영화적 경험은 하지 못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영성 수련의 골자는 결국 이런 홀로그램 투사가 일어난다는 자각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 사실을 일단 깨닫고 나면 우리 개인 각자를 통과하는 식의 빛이 모든 투사의 뒤에서 빛나는 의식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상당히 쉽게 자각할 수 있다. 
이것은 대단한 출발점이다. 중요한 깨달음이다.

 

-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훨씬 까다로운 것은 애초에 필름에 조건을 새겨 넣은 예술가 역시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내가 인식하는 나의 모습과 우리가 주변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 모두 그 의식적인 예술적 기교의 결과다. 필름에 그림자를 그려 넣은 예술가가 우리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영적인 깨달음보다 조금 더 흥미진진하다. 우리가 세상을 창조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예술가임을 ... 

 

- 이것이 내가 '마법을 한다'(doing magic)가 아닌 '마법이 되어 간다'(becoming magic)고 말할 때의 의미다. 마법을 하는 것도 당연히 좋다. 하지만 '마법이 되면' 주문을 외는 노력에 힘을 덜 써도 된다. 당신이 마법 그 자체가 '되면 될수록' 마법이 당신 주변에 애씀 없이 동시적으로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 반면 그런 삶을 살게 해주는 진실이 있다. 
바로 무슨 일을 해야 할 '이유' 같은 건 없다는 것이다. 당신만의 변태적이고 열렬하고 지랄 맞은 욕망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 예를 하나 들어보자. 패셔너블한 옷에 몸을 맞춰야 하고, 대사 증후군에 걸리지 않아야 하고, 할리우드 셀럽과 똑같아져야 하기 때문에 매일 운동한다는 건 헛소리다. 그럴 필요 없다. 아무렇게나 넝마를 걸치고, 태양 아래 존재하는 생활습관병을 모조리 앓고, 이상적인 몸을 갖고 있지 않아도 당신은 여전히 우주의 무한한 사랑을 받는다. 

 

-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당신이 꿈을 좇아야 하고, 자신의 창조력을 표현해야 하고, 또는 공동체를 돕기 위해 부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사업가가 되거나 백만장자가 되어야 한다는 건 헛소리다. 그럴 필요 없다. 당신은 사업가가 되거나 부를 창조하는 일 등등은 전혀 하지 않은 채 그냥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해도 된다. 그래도 무한한 시공간의 프랙탈 홀로그램은 완벽하게 펼쳐진다. 

 

- 혹은 재수 없는 자본주의에 빅엿을 날리고 계속 파산 상태로 있어도 좋다. 그것 자체만으로 회사를 시작하지 않을 엄청나게 매력적인 '이유'다. 아니면, 당신은 당신만의 지랄 맞고 이상하고 변태적인 욕망에 따라 간지나는 사업가가 될 수도 있다. 

 

- 내가 하는 말의 요지를 아시겠는지?
 

- 어떤 일을 할 때 이유를 찾지 않는 게 큰 힘이 될 수 있다. 따지고 들면 똑같이 그럴듯한 이유 따위는 세상 모든 일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당신만의 욕망이 있고 거기에 다른 사족을 붙이지 않을 때, 당신은 자신의 모든 행동에 구심점이 되어 주고 갈등의 고르디우스 매듭을 단칼에 베어줄 그 욕망에 대해 책임감을 갖게 된다. 
 

- 그러니 삶을 정돈하는 방법에 관해 조언을 하나 하자면, 단 한 가지의 욕망을 선택해 앞으로 3개월 동안 그것에만 집중하라. 평생 동안 하라는 게 아니다. 딱 3개월만 하면 된다. 집중하고 싶은 욕망이 무엇인지는 상관없다. 아주 약간 마음이 가는 정도라도 충분하다. 새 남자친구 사귀기부터 소설 쓰기, 1억 벌기, 전 존재를 고통에서 해방시키기까지 모두 좋다. 

 

- 이 욕망을 추구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라. 일기장에 이렇게 써보라.

"나에게는 -----를 하고 싶은 변태적이고 이상하고 지랄 맞은 욕망이 있다. 난 그런 음란한 별종이니까 그냥 그것을 할 거다." 

 

- 자, 여러분은 말도 안 되게 바보 같은 이유로 이 욕망을 미친듯이 즐겁게 온 힘을 다해 추구해보겠다고 결심했다. 이것은 당신만의 이상한 욕망이니까. 
그냥 그걸 원하기 때문에 원하는 것을 원하라.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게 쉽지 않거나 큰 욕망이 대개 그러하듯 안전지대에서 멀리 벗어나게 되어 불편해진다면, 그것도 좋다. 그 모든 예리한 불편함을 음미하라.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당신의 욕망은 당신만의 가학-피학성이 새겨진 여행이다. 정말 딱 그뿐이다. 

 

- 만일 당신이 3개월간 이유 없는 욕망을 추구하는 데 계속 집중한다면 끝 무렵에는 지금보다 삶이 훨씬 더 정돈되어 있을 것이다. 그때 동일한 욕망을 이유 없이 계속 추구할 것인지, 새로운 욕망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하라. 무엇이든 정말 상관없다.

- 예를 들어 "그 돈을 멍청한 데 다 써버릴까 봐 정말 두렵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면 이것을 "그 돈을 굉장히 현명하게 써서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큰 혜택을 줄까 봐 정말 두렵기 때문입니다"라고 바꾸는 것이다. 최악의 두려움 목록을 이렇게 초긍정적으로 뒤집어보는 게 크게 효과적인 이유는 분리감과 무력함에 매몰된 에고의 두려움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 모든 나쁜 일을 끊임없이 느끼고 경험하겠다고 무한한 의지를 가지라. 어찌 됐든 이미 당신의 일부는 그런 무한한 의지를 현재 갖고 있다. 당신은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엿 같은 일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당신은 이미 그것을 열렬하게 사랑하고 있다"가 명백한 사실이다.

 

-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정직성뿐이다. 모든 나쁜 일에 대해 곱씹고 두려워하는 것에서 당신이 미묘한 에로틱한 쾌락을 얻고 있음을 솔직히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 

 

- 당신은 무조건 죽게 되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렇게 죽음으로써 당신은 에고의 활동을 지속시키는 일에 전적으로 실패하리라는 사실이 얼마나 흥분되는지를 솔직하게 인정하면 된다. 
당신은 무슨 짓을 하든 완벽한 실패자다. 처절한 실패자. 이렇게 하면 스포트라이트의 스위치가 꺼진다.
당신은 암흑 속에 있다. 스포트라이트도 그림자도 없다. 미지의 현재 속으로 들어가는 당신 앞에는 그저 빛나는 어둠뿐이다.
바로 이 미지의 현재에서 당신은 있는 그대로 존재하고, 당신의 삶도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 사랑하는 나쁜 것들로 가득하고 좋은 것들도 한 움큼 존재하는, 향상이며 발전 따위 없이 그것으로 충분한 삶. 

 

- 빛나는 어둠은 당신이 이상적인 자기 이미지 쫓기를 그만두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잠시 존재할 때, 즉 나쁜 것에 대한 욕망-두려움으로 황홀해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닐 때 찾아온다
"아 젠장, 나는 세상의 모든 고통스러운 일들을 있는 그대로 느낄 의지가 무한히 있어! 나는 그럴 의지가 무한한 미친 사람이야!"

그게 바로 당신의 솔직한 모습, 원래의 모습, 본연의 모습이다.

- 더 열심히 노력하고, '제대로' 하고, 깨달음을 얻은 뒤가 아닌 지금 당장. 당신은 '이미' 당신의 모든 그림자에 흥분하고 있다. 그것을 스스로 보지 않으려 할 뿐이다. 절대 이상적이지 않은 삶에서 절대 이상적이지 않은 사람으로 존재하겠다는 이 무한한 의지는 당신의 영이 지구에서 온전히 육화할 수 있게 해준다. (그나저나 육화는 사전적 의미로 보면 이상적인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시공간에서 현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지금 여기 바로 이 순간에 온전히 육화하게 되면 자크 데리다 acques Derrida가 절대 미래(absolute future)라고 부른 과거의 패턴에 조건화되지 않은 미래의 동이 튼다. 
마법은 바로 이 절대 미래에서 펼쳐진다. 

 

- 아무리 부의 불평등이 현재 체제에서 불가피한 사실이라 하더라도 내가 느끼는 결핍과 가망 없음이 창조되는 데에는 내 내면의 개인적인 공명이 적어도 어느 정도는 일조하는 게 틀림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이 생각에 대해 바이런 케이티의 작업 (The Work)을 해보기로 했다. '작업'은 스트레스를 주는 생각을 하나 정해 질문을 던짐으로써 생각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결국은 그 생각으로부터 해방되게 해주는 일련의 과정이다. 나는 이것을 실존적 변태 작업과 병행하는 것을 적극 추천한다. 

- 나는 판단하는 생각인 "나는 내 고객들이 코칭비로 시간당 1,000달러를 기껍게 주길 바란다"를 선택한 뒤 '작업'의 기본양식에 따라 나에게 물었다.

첫 번째 질문: "그게 진실인가?" 이 질문에 "네"라고 공명하는 감각을 몸에서 전혀 느낄 수 없었으므로 나는 "아니요"라고 답했다. 
두 번째 질문: "나는 이 생각을 믿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 나는 심장이 조이고, 공포스럽고, 결핍되고, 불안한 느낌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으으음.
세 번째 질문: "그 생각이 없는 나는 어떤 사람일까?" 고요해진 나는 만일 그 생각이 없다면 내가 가볍고, 마음이 열리고, 좀 더 정직하고, 보다 현존하는 사람이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바이런 케이티의 안내에 따라 나는 그 생각을 뒤집었고 내 첫 번째 진술만큼이나 진실인 생각을 찾았다. 

- 나의 첫 번째 '뒤집기'는 다음과 같이 주어를 '나'로 바꾼 것이었다. 
"나는 내가 코칭비로 시간당 1,000달러를 기껍게 주길 바란다."
나는 명명백백히 사실인 이 진술에 즉시 충격을 받았다. 내가 시간당 1,000달러를 받는 코치가 되고 싶다면 당연히 나도 시간당 1,000달러를 내고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코칭을 받을 수 있어야 했다. 나는 이후 이 통찰을 실행해 옮겼고, 이것은 내가 시간당 1,000달러 받는 코치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디딤돌이 되어주었다.

- 그다음으로 나는 이 판단 진술을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뒤집었다.
"나는 내 예비 고객들이 내게 코칭비로 시간당 1,000달러를 기필코, 절대 주고 싶어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런데 이때 상당히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클리토리스에서 찌릿하게 울리는 느낌과 크게 욱신하는 느낌이 느껴진 것이다. 삶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진실은 대단히 감각적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이 진술을 더 탐색해보기로 했다. 어쩌면 내가 깊은 진실의 찌릿한 울림을 느꼈던 거 아닐까? 나는 이 진술을 여러 방식으로 뒤집어가며 내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살펴봤다. 

- "나는 사람들이 나를 절대로 높이 평가해주지 않는 것이 진짜 기쁘다."
"나는 코칭 제안을 할 때 거절당하는 게 너무 좋다."
"나는 고객들이 나에게 절대 돈을 내고 싶어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각 진술을 말할 때마다 내 몸이 쾌락으로 욱신거리며 이상하게 반응했다. 다른 사람들이 나와 내 작업을 절대 높이 평가해주지 않으려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점점 더 흥분했다. 서서히 어떤 깨달음이 왔다.

"내가 시간당 1,000달러를 못 버는 게 너무 당연하네. 무시당하고 거부당하는 데서 완전 흥분하고 있잖아!" 
 

- 몸이 달아오르는 열정은 열정의 대상을 언제나 자석처럼 끌어당긴다. 나는 내가 지금까지 내 손으로 결핍과 거부를 무의식적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는 냉혹한 깨달음 속에 앉아 있었다. 나는 평가 절하되는 상황을 수년간 무의식적으로 즐기고 끌어당기고 있었으나 그전까지는 이 사실을 절대 알려고 하지 않았다. 실제 삶에서 가치 절하되고 결핍에 시달리며 흥분한다는 건 수치스럽고 변태 같고 이상한 일이기 때문이다. 

- 이후 몇 주 동안 나는 그달 월세를 걱정할 때의 불안, 경제적 결핍이 주는 금단의 스릴에서 기꺼이 변태적인 쾌락을 느꼈다. 결핍의 불안과 치욕이 얼마나 나를 흥분시키는지 깨달아가면서 나는 동시에 무척 궁금해졌다. 나는 고객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열렬히 구애받을 때의 감각을 적극적으로 피하고 있었던 걸까? 감상적인 의미에서의 좋은 평가뿐 아니라 두둑한 현금으로 보상받는 좋은 평가를? 알고 보니 그랬다. 나는 피하고 있었다. 

 

- 나는 고객이 내게 시간당 1,000달러를 지불하게 되면 강렬한 느낌을 맛보게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뺨이 붉어지고 심장 박동은 더 빨라질 것이었다. 나는 또한 그런 정도의 강렬함, 그런 정도로 신뢰받는 느낌, 그리고 기분만 좋은 높은 평가가 아닌, 경제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 걸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항상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즉, 나는 이미 익숙하게 느끼던 특정 종류의 감각(대부분은 비참하고 흥분을 식게 만드는 감각)을 어느 정도 선까지만 느끼고 싶어했던 것이다. 나는 낯선 감각을 이전까지와는 다른 낯선 강도로 경험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피했다. 코칭비로 누군가 내게 시간당 1,000달러를 낼 때의 감각 같은 것 말이다. 

 

- 항상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이 무의식적 집념이 나의 '소유(havingness)' 수준이었다.

- 소유 수준은 가족과 문화의 조건화에 기반을 둔 내면의 각인이라 할 수 있는데 당신이 기꺼이 느낄 의향이 있는 감각의 양과 종류가 이것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당신의 어떤 면은 이 수준이 "지나치게 높다"거나 "말이 안 될 정도로 좋다"고 무의식적으로 겁을 먹게 되고, 대개는 대단히 허구적인 (하지만 겉으로는 사실처럼 보이는) 이유로 투쟁, 도피 또는 경직의 순환에 빠진다.

 

- 내가 여기서 '대단히 허구적인 이유'라고 말한 것은 보통 이 소유 수준에 겁먹는 사람들은 자신이 소유 수준에 겁먹고 있음을, 즉 생생한 감각이 압도하듯 몰려오고 좋은 일들이 지나치게 쏟아지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자신이 겁먹는 이유가 "내가 구려서" 또는 "세상이 구려서" 또는 "내 파트너가 구려서" 또는 "내 고객이 구려서"라고 생각한다.  

 

- 즉, 의식적인 마음은 겁먹는 이유를 허구적으로 지어내어 겁의 실제 근본 원인(지나치게 좋은 일들을 피하고 싶어하는 무의식적 욕구)을 철저하게 숨긴다. 이렇게 내면의 각인은 원래 상태를 유지하고, 익숙한 항상성도 유지된다. 

 

- 사람들의 소유 수준 또는 '상한선' 각인은 카르마와 유년 시절 경험에 따라 가지각색이다. 가령 돈에 대해서는 높은 평가를 받는 게 당연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사랑과 관련해서는 높은 평가를 절대 느끼려 하지 않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또는 '귀한 대접을 받는' 모든 감각에 극도로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 당신의 소유 수준은 당신이 '나라고 알고 있는 나'와 밀접하게 연관 있다. 내가 '알고 있는'이라고 말한 것은 정체성 문제에 관한 한 우리 인간은 자기 스스로가 이런저런 사람이라고 의도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이 어떤 사람임을 그냥 '안다'.  

 

- 나의 경우, 나는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 마음을 여는 방법이라면서 "신념에 의문을 가져보라"고 말할 때마다 언제나 조금 웃는다. 나는 나의 '근본적인 진실'에 의문을 가지는 게 훨씬 더 해방적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가장 강력한 힘을 미치는 신념은 내가 의식적으로라도 절대 신념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에게 신념이 아닌, 그저 세상의 이치이자 나의 본질이다.

 

- 핵심은, 당신이 지금 '나라고 알고 있는 나'는 스스로에게 얼마나 많은 좋은 것들을 허용할지 규정하는 '허구이지만 정말로 진짜 같아 보이는 청사진'이라는 말이다.

- 나는 큰돈에 흥분이 식기보다는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종류의 흥분을 느끼며 나는 과거에는 전적으로 피했던 사업을 키우기 위한 평범한 행동(이메일 리스트 구축 같은)들에 기꺼이 착수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너무 무섭게 느껴지거나 겁을 집어먹었던 사업 홍보 노력들이 갑자기 간단하고 당연히 해야 할 일처럼 보였다. 나에게는 이러한 단계를 밟을 창조적 에너지가 들끓고 있었다. 나는 사업을 빠르게 성장시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고 그렇게 어렵지도 않은 일이 내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 소유 수준이 바뀌기 전까지는 그것들을 그저 볼 수조차 없었을 뿐이었다. 내 눈을 덮고 있던 베일이 벗겨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 나는 내 초라한 통장 잔고를 더 이상 개인적인 실패를 알리는 끔찍한 징조나 세상으로부터 미움받고 있다는 증거로 취급할 수 없었다. 돈이 없는 것은 나의 가장 내밀한 혼 -융이 참자아라고 부른 내면의 온전한 신- 의 의도적이고,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선택이라는 사실이 확실하게 보였다.

 

- 이렇게 몇 달이 지나면서 나는 한 달에 1,500달러가 아닌 1만달러의 수입을 올리기 시작했다. 안에서 그러하듯 밖에서도 그러하다. 나의 온 세상과 가능성의 지평선이 달라졌다. 
  

- 나는 여전히 인맥이 화려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유수준이 확장되면서 나는 강렬한 감각을 기꺼이 느끼게 되었고 예비 고객들과의 대화에서 이전에는 감히 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나를 홍보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이전과는 다른 부류의 고객들이 내게 오기 시작했다. 돈에 대한 소유 수준이 높은 성공한 사업가들이 나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결핍과 부족에 대한 그림자적 욕망을 받아들이고 수용하자 내 창조력이 훨씬 유려하게 흘렀다. 그래서 나는 이전에는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던 비즈니스 홍보 단계를 밟았고, 그 결과 내 외부의 상황은 극적으로 변했다. 

- 마법의 기본 금언(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 Hermes Trismegistus의 에메랄드 테블릿에 적힌 "위에서 그러하듯 아래에서도 그러하다. 안에서 그러하듯 밖에서도 그러하다")이 사실이었음을, 내면의 상태가 변하면 외부의 조건이 기적처럼 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처음(그리고 계속해서) 느꼈던 흥분은 말로 표현을 못 한다. 

 

- 이 사실이 나에게 극강의 흥분을 안겨주었던 건 내가 비록 아주 오래전부터 마법을 숭배하기는 했어도, 심상화와 확언만으로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다는 끌어당김의 법칙 추종자들의 주장이 주류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것을 접하며 점점 마법이 헛소리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막 느끼기 시작할 때였기 때문이다. 왜냐고? 나는 끌어당김의 법칙이 말하는 내용을 언제나 뭐랄까 -이걸 어떻게 외교적으로 말할 수 있을까- "완전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는데 정확히 왜 그런지를 딱 꼬집어서 말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나는 이제 아주 정확히 꼬집어서 말할 수 있다. 끌어당김의 법칙을 추종하는 일반 무리들이 바보 같이 느껴지는 건 그들이 반만 맞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 우리는 진심으로 욕망하는 것을 언제나 진짜로 얻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우리가 진심으로 욕망하는 것의 상당수가 대단히 불쾌하고, 고통스럽고, 은밀하고, 억압돼 있고, 엿같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결국 내면의 상태를 바꿈으로써 외부의 경험을 바꾸는 데 제대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끝없이 긍정적인 사고만 해서는 안된다. 당신의 경험과 마음속에 있는 가장 어둡고 가장 뒤틀린 것들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것에 깊은 감사를 느껴야 한다. 

 

- 하지만 완전히 상상 속의 인물은 아닌 것이 당신은 지금까지 그녀를 억압하고 분리시켜왔다. 당신이 고통을 사랑하는 우주적 변녀라는 걸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물질세계가 명확한 제약, 억압, 중력, 유한성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롤러코스터 같은 상황에 끌리지 않았더라면 이곳에 육화되었을 리 없다. 

- 자, 이제 당신이 지금까지 흥분을 느꼈던 변태적이고 근본없고 절박한 빈곤자 장면이 막 끝났다고 상상해보자. 그냥 '펑'하고 사라졌다. 
당신을 옭아매어 꼼짝 못 하게 하던 돈의 굴레도 없고, 못된 상사도 없고, 당신이 월급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임을 증명할 필요도 없다. 
사실 당신은 부자다. 돈이 썩어나는 부자. 백금으로 코팅한 제트기를 매일 사들이고 그것도 모자라 수십억 명의 가난한 사람들을 재워주고 먹이고 치료해줘도 여전히 돈이 남아나는 부자다. 
그 정도로 당신은 화수분 같은 돈을 갖고 있다. 

- 이것을 상상했을 때 어떤 감각이 올라오는지 살펴보라. 어딘가 저릿한가? 혹은 죄책감? 아니면 압도되는 느낌?
어쨌든 이제 당신은 물질적인 제약을 받고 있지 않으므로 모든 가능성에 열려 있다.

 

- 어디에서든 살 수 있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고, 어떤 것이든 창조할 수 있다. 
그리고 갑자기 부자가 된 당신의 모습에 질투하고 분해하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다.
이 모든 가능성과 변화에 압박감이 느껴지는가? 가령, 무거운 책임감 같은?
당신은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 막대한 부를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숲속 오두막에서 살겠다고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조차 당신이 책임져야 하는 큰 감각적인 결정 아닌가?

- 결핍과 풍요 모두 대단히 감각적이다. 각각에 동반되는 감각의 맛이 다소 다를 뿐이다.

- 당신은 부에 동반되는 모든 감각을 경험하겠다고 선택할 수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결핍에 동반되는 모든 감각을 당신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명료하게 인식하는 게 먼저다.

 

- 왜냐고? 만일 당신이 나는 빈털터리 상태가 너무 싫다고, 또는 공과금을 내는 것에 대한 이 불안을 어서 빨리 없애버리고 싶다고 진심으로 계속 믿는다면, 빈털터리 상태나 공과금 지불에 대한 불안에 계속 매여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당신이 여전히 게임에 완전히 빠져 있어 이것이 단순한 게임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빈털터리인 상태와 공과금에 대한 불안을 얼마나 격렬하게 좋아하는지 일단 받아들이고 나면, ...

 

- 어쩌면 당신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아니야, 난 아니야. 나는 모든 신나는 감각을 환영해! 더 많이 느꼈으면 좋겠어! 더 중요한 사람이 되고, 더 사랑받고, 더 많은 영감을..."

알겠다. 
그런데 당신 '정말로' 그러한가? 
그 모든 좋은 일들을 평생토록 바라왔는데도 아무리 손에 많은 걸 쥐어도 그토록 갈망하던 뿌듯하고 영원한 충만함은 여전히 소원하게 느껴진다는 게 약간 의심스럽지 않나? 

- 당신은 지금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면, 자기계발을 더 하면, 더 잘 알게 되면,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나면, 커리어를 더 번듯하게 쌓으면, 건강을 되찾게 되면 그 충만함을 느낄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하지만 뿌듯한 충만함이 여전히 소원하게 느껴지는 진짜 이유는 당신이 해야 할 그 일을 아직 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충만함이 소원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당신이 이미 충만함을 느끼고 있음에도 적극적으로(무의식적으로) 그것을 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 혹은 우주는 지금 이 순간 당신 삶에 존재하는 상황과 느낌으로 당신의 가장 민감하고 뜨겁고 충만한 스팟을 이미 터치하고 있다. 

- 하지만 당신은 그 뿌듯한 충만감이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느끼거나 수용하려 들지 않고 심지어 의식적으로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하면 그 모든 걱정과 의심과 불평과 분노가 완전히 어리석은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지금 당장 온전한 충만함을 경험하는 것은 굴욕적이다. 삶이 이 연약하고 쪽팔린 스팟을 정확히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터치해주는 걸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는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는) 사실을 깨닫는 건 원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하지만 우리가 부끄러워하지 않고 이 무례하리만치 갑작스런 마무리가 일어나도록 허용할 때, 좋은 것을 가질 수 있는 우리의 역량은 어마어마하게 증대된다. 지금 여기에 이미 존재하는 뿌듯한 충만함을 수용할 때, 지금 이 순간 삶이 터치하고 있는 예민하고 연약한 스팟에서 기꺼이 흥분을 느끼고자 할 때, 기분 좋은 내용물에 접근하는 게 훨씬 더 쉬워지기 때문이다. 

- 대부분 사람들의 소유 수준은 아주 낮다. 소유 수준은 스스로에게 허용하는 감각과 에너지의 양으로서 이 한계선을 넘어가면 당신은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닫아버리는데, 이렇게 닫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 걱정하고, 의심하고, 판단하고, 분노하고, 비판적이고, 불평하고, 화내기.
· 사고를 당하고, 논쟁하고, 오해하고, 사기당하고, 끔찍한 기분이나 우울에 시달리기.
· 당신이라는 존재의 익숙한 내용물, 즉 에고, 인격, 육체 등을 바탕으로 하는 작고 여유 없으며 관성적인 정체성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게 면죄부를 주는 모든 행위.

 

- 즉, 당신이 경험한 내용물이 끔찍하게 느껴진다면, 우울하다면, 기운이 쭉 빠진다면, 자기연민에 갇혀 허우적거리고 있다면, 당신이 현실의 어떤 요소를 부정하고, 억압하고, 도망치려 하는지 정말 진짜로 호기심을 갖고 찾아보기를 권한다. 

 

- 나는 당신이 앞으로 일주일 동안 기분이 어떤지, 그리고 그 기분에 동반되는 생각과 인식이 무엇인지 면밀히 관찰해보기를 바란다. 내 경험상 특정 종류의 기분은 특정 종류의 생각, 인식과 짝지어 다닌다. 기분이 바뀌면 생각과 인식 역시 극적으로 달라진다. 


- 이런 방식으로 생각과 감정은 함께 몰려다니며, 인식의 좁은 터널과 상태 의존적 기억을 형성하는데, 이것은 다시 현실을 더 안 좋은 방향으로 강하게 왜곡한다. 나는 당신이 본인의 왜곡 습관을 민감하게 알아차려 보았으면 좋겠다.
 
- 이 지인에 대해 생각할수록 마음이 울적해지고 부러운 마음이 들기 시작하는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필요한 만큼 실력 발휘를 제대로 하지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하고, 퇴직 계좌에 들어 있는 돈이 어쩐지 좀 빈약하다는 생각이 들고, 부모님이 나이가 들어 간병이 필요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드는가? 
당신은 좋은 기분을 더 이상 느낄 필요가 없게 이런 종류의 생각 패턴으로 스스로를 닫아버리는가?


- 기분이 언제 좋아지는지, 그리고 언제 스스로를 닫아버리는지, 그리고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닫는지를 잘 알아차려보라.
스스로를 닫아버리는 방법으로 당신이 가장 선호하는 것은 무엇인가? 미래에 대한 걱정인가?
아니면 본인의 가치나 능력을 의심하는 것? 과거의 실수를 후회하는 것? 파트너에게 얄미운 말을 해서 싸움을 거는 것?
정확하게 어떤 방법으로 당신은 스스로를 닫는가? 얼마나 자주 하는가?

- 당신의 임무는 이 주제에 대해 세계 최고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고 마법 다이어리에 이에 대한 생각과 숙고를 기록하는 것이다 

- 슬프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슬픔이 가진 부드러운 고양감을 음미해보라. 
자기연민에 빠진 스스로에게 짜증을 내는 대신 그 자기연민을 마치 팬이 스타를 사랑하듯 무궁히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여라. 최애 가수나 배우를 생각하듯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말이다. 


- 내 말의 요지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당신의 감정상태를 도덕적 잣대가 아닌 미학적 잣대로 바라보라."
이렇게 할 때의 당신은 삶의 심판자가 아닌 삶의 예술가가 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 시험 삼아 다음 번에 슬픈 기분이 들면 그 느낌을 판단하려 들지 말고, 그 슬픔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가 당신을 위해 제작한 가상현실 경험인 것마냥 있는 그대로 음미해보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는 사실 당신이지만 사고 시험을 위해 자기 자신으로부터 조금 거리를 두자. 그리고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멋진 설치 작품으로 상을 탄 지 얼마 안 된 여성 작가가 "나는 실패자다"의 느낌 (또는 아무거나)을 경험하게 해주는 이 가상현실을 당신을 위해 창작했다고 가정해보자. 
실패자 느낌이 주는 미묘한 맛들을 음미할 수 있는가? 톡쏘는 듯한 풀 맛이 느껴지는가? 부드럽지만 알갱이가 씹히는 듯한 질감에 감탄하고 있는가? 

 

- 반동형성의 핵심은 이것이 삶에 대한 반응이 아닌 '반동'이라는 점이다. 진짜 반응할 때 올라오는 감정에는 개방적이고, 서로 통하고, 감동적인 성질이 있다. 화나 슬픔처럼 어두운 감정조차 그것이 진짜라면 새롭고 자연스러운 느낌이 있다. 하지만 무언가를 덮으려는 반동의 감정에는 딱딱하고, 폐쇄적이고, 로봇 같고, 반복적인 성질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당신은 그 차이를 알아차리고 진짜 감정적 반응을 할 때가 아닌 강박적인 반동형성 상태일 때를 바로 느낄 수 있다. 

- 반동형성이 흥미로운 점은 이것이 우리가 신성의 불꽃임을, 즉 의식은 어떻게 해서든 배척하려는 모든 엿 같은 일마저 빠짐없이 즐기는 성스럽고 행복한 매춘부가 우리 안에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게 감쪽같이 억누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그 모든 반동형성을 사용하는 근본적인 까닭은 모든 것을 순수한 사랑의 마음으로 경험하려는 의지, 본연의 고결함을 숨기기 위해서다. 

- 당신의 무의식에서 가장 억압받고 있는 것은 당신 본연의 절대적 자비다.

 

- 치어리더 연습을 한동안 하다 보면 가슴을 싸하게 만드는 죄책감이나 비난의 타이밍이 왔을 때 자동적으로 그게 웃기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결국에는 온다. 

- 그나저나, 이것은 사실 아주 심오하고 최고로 진지한 신비주의의 가르침이다. 
왜냐고? 단테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삶을 인식하는 가장 유용한 방법은 그것을 '신의 코미디'라고 보는 것이다.

 

- 내 말은, 당신은 삶을 비극이라고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면 우느라 너무 바빠서 일을 해내거나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는 게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삶을 코미디라고 인식하면 당신에게는 태산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강한 풍요로운 에너지가 쏟아진다. 

 

- 당신은 이렇게 물을 수 있겠다. "통렌으로 진짜 사람이 치유되나? 내가 내쉬는 황금빛으로 다른 사람들이 치유된다고 상상하는 건 자기기만 아닌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통렌 수행은 '당신'을 치유한다. 그리고 당신이 치유될수록 당신은 주변 사람들이 더욱 치유되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오직 치유만이 치유를 알아볼 수 있다. 안에서 그러하듯 밖에서도 그러하다.

- 우리를 통과하는 태동을 막아버리는 가장 흔한 방법은 이런 고통과 괴로움을 겪는 게 다름 아닌 내가 끔찍하거나 저주를 받아서가 아닐까 걱정하는 것이다. (즉, 그것에 대해 죄책감을 갖거나 괴로워하는 것이다.) 

-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을 끌어당긴다"고 가르치는 끌어당김의 법칙 때문에 가끔 사람들은 자신과 동일한 불행을 가진 다른 모든 사람들의 고통과 괴로움을 영웅처럼 짊어지게 되면 그 불행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 아니냐고 걱정한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당신과 동일한 불행을 가진 다른 모든 사람의 고통과 괴로움을 영웅처럼 짊어지는 것은 이미 당신에게 존재하는 육체적, 감정적 감각을 일말의 분노나 저항 또는 주저함이나 거리낌없이 온전히 마음을 열어 느껴보는 아주 좋은 계기가 된다. 

 

- 궁극의 차원에서 당신은 필연적으로 '그 모든 다른 사람들'이다. 
우리 모두가 해방되지 않는다면 아무도 해방될 수 없다. 의식이 '나쁨'과 '잘못됨'과 '충분치 않음'을 사방에 자발적으로 투사하는 것처럼, 해방 역시 의식이 사방에 자발적으로 투사할 무엇이기 때문이다. 

- 불교의 보살은 모든 중생이 해방되기 전까지는 삼사라 samsara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로, 모든 고통이 도사리고 있는 곳)의 윤회의 수레바퀴를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하지만 이 삼사라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는 게 불가능하다는 점이 아주 재미있는 우주적 농담이다. 반야심경에 나오듯 삼사라가 열반이요, ...

 

-자비는 동정이 아니다. 자비는 사람들을 그들이 선택한 행위의 결과로부터 보호하거나 구해주려고 하지 않는다. 
자비란 당신이 느끼는 모든 것이 함께 느끼는 것임을 알면서 삶의 모든 것들을 즐겁게, 온몸으로, 감각적으로 느끼는 상태다. 
사실 '함께가 아닌' 상태로, 혼자 느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홀로 괴로워할 수 있다는 허상은 여전히 끈질긴데, 통렌은 이것을 녹여버린다.

- 결국 나는 나의 그림자적인 면이 사실상 깊이 충족되고 있었음을 인정했다. 
내 경험을 결정짓는 것은 운명(어떤 외부 주체)이 아니었다. 에고의 생각과 맞지 않아 내가 부정해버린 나의 강렬한 욕망, 즉 '내'가 만든 것이었다. 
나는 이 성취를 즐기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성취가 주는 아름다운 굴욕감을 받아들이는 수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성취는 언제나 굴욕적이다. 성취는 우리의 의식적 에고가 규정한 경계 내에서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 굴욕(humiliation)은 흥미로운 단어다. 이 단어의 어원은 땅, 흙이라는 뜻의 라틴어 후무스인데, 이 말인즉슨, 굴욕적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땅으로 끌어내려진다는 뜻이다. 하늘을 높이 나는 소위 판타지에 펑크가 났다는 말이니 땅으로 끌어내려지는 건 창피한 일이다. 나는 수없이 많은 경이로운 굴욕을 받아들인 후, 내 에고는 애초에 절대 성취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고는 분리와 결핍, 전체에서 외따로 떨어진 독립적인 존재라는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오직 내 전 존재만이 성취될 수 있고, 내 전 존재는 좋은 것만을 원하는 에고의 노골적인 욕망과 균형을 맞출 수 있는 반대되는 것을 주로 원한다. 

- 내 전 존재(변태적인 그림자적 욕망을 포함한 모든 것)는 매 순간 필연적으로 언제나 성취되고 있다. 삶이 나를 고문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모든 순간에 언제나 이미 존재했던 그 어마어마한 성취를 충분히 즐길 수 있느냐 마느냐는 쯧쯧 혀를 차는 내 ...

 

- 프로이트가 지적했듯이 인간은 자신의 의식적 마음이 수용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에 흥분을 느끼면, 불쾌감과 혐오를 전면에 내세워 그것을 자동적으로 덮어버림으로써 자신이 느낀 흥분을 자각하지 못하게 막아버린다. 내가 거부당하는 감각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기억해내고 그것을 더욱 잘 느끼도록 스스로 허락하자 그의 건방짐은 정말 섹시하게 느껴졌다. 내 남자는 여전히 건방지다. 그리고 난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다. 

 

- 자, 여기까지가 나의 이야기다. 이제 여러분의 이야기를 해보자. 당신의 애정 생활에서 부각되는 모든 이슈에 대해 탐구해보고, 최악의 두려움 목록을 작성해보고, 실존적 변태 연습을 해보라. 또한 당신뿐 아니라 당신의 파트너가 관계에서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는지를 완전히, 조금도 위축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책임져보기를 바란다. 


- 파트너가 관계에서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는지를 있는 그대로 책임진다는 말은 파트너와 영원히 함께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심지어 1분도 더 함께 있지 않아도 된다. 다만 드러나는 경험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정말 솔직해지라는 뜻이다.

 

- "하지만 캐럴린, 나는 내 쪽의 일에만 책임을 져야 하는 거 아닌가요? 다른 사람이 맡은 역할에 내가 어떻게 책임을 질 수 있나요?"
그게 가능한 것은 당신이 관계를 맺고 있는 상대가 당신의 프랙탈 홀로그램이기 때문에, 즉 오직 당신의 '주관적 인식'을 통해서만 경험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제대로 소화시키기 바란다. 가슴으로 이해될 때까지. 당신이 다른 사람을 객관적으로 경험할 방법은 없다. 

- 파트너를 바라보는 당신의 인식이 있고, 당신 친구와 가족이 당신의 파트너를 바라볼 때 가지는 인식이 있으니 이를 물어봐 두 개를 합치면 상황에 대해 보다 입체적인, 객관적인 견해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당신 친구와 가족들을 포함한 모든 다른 사람들은 오직 당신만의 주관적 인식을 통해서만 경험되는 것이고, 그 인식에는 당신의 깊고 깊은 무의식적 믿음과 욕망이 짙게 색칠된 필터가 끼워져 있다.

 

-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찍힌 사진이나 주변 사람들이 들려주는 그들과 관련된 이야기를 증거로 내놓으며 당신의 주관적인식 밖에 그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증거의 가닥 하나하나 역시 당신만의 주관적 인식으로 경험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여전하다. 나는 다른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실재하는 건 자아 뿐이라는 유아론을 주장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신성이 꿈꾸고 있는 소위 '물질적 현실'이라는, 모두가 공유하는 꿈속의 독특하고도 똑같이 사실적인 등장인물이라는 게 내 입장이다. 

 

- 사실 우리는 제약을 받는 시시한 등장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는 꿈을 꾸는 이 신성이라 할 수 있다. 밤에 꾸는 꿈에 나오는 등장인물이 사실은 모두 당신인 것처럼 말이다. 

- 그러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의 요지는, 당신이라는 꿈 캐릭터가 이 물질적 차원에서 어떤 의식을 갖고 사는가는 이 깨어 있는 삶이라는 꿈에 등장하는 다른 등장인물들이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는가와 깊게 관련돼 있다는 것이다. 옛날 말은 하나 그릇된 게 없다. "모든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거울이다." 그들은 우리가 사랑하거나 증오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 말이 상투적으로 느껴지는 까닭은 오히려 이것이 불편하고 피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이 대우주의 축소판인 소우주라는 말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모든 것, 모든 가능한 자질들이 들어 있다는 뜻이다. 

- 종류를 불문하고 당신이 일주일 이상 관계를 이어갈 만큼 끌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특히나 소름 돋을 만큼 정확한 당신의 거울이다.
이 말을 잘 숙고해보라.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의식의 별난 점이 하나 있다. 바로 우리가 어떤 성질을 '어디에선가' 인식할 때마다 우리는 결국 그것을 '사방에서' 인식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 그러니 우리가 스스로를 불행하게 인식하면 우리는 분명 '나쁘다' 또는 '잘못됐다'라는 똑같은 인식을 무의식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투사하게 될 것이고, (다시 한번 무의식적으로) 그들로 하여금 '나쁘다' 또는 '잘못됐다'라는 인식을 우리에게 똑같이 투사하도록 만들 것이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악순환이다. 우리의 인식과 믿음의 무의식적 창조력이 생성한 피드백 루프는 객관적 실재처럼 보이지만, 그 겉모습은 사실 우리의 의식수준이 만든다. 

- 이 피드백 루프를 중단하는 방법은 다른 모든 존재가 나와의 관계에서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든 그것을 온전히 내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내 안에 존재하지만 지금까지 무시해온 자질과 욕망들을 검토하고 통합할 수밖에 없게 된다. 존 디마티니 John Demartini는 이것과 궤를 같이하는 탁월한 통합 방법을 자신의 책 <돌파구 경험>(BreakthroughExperience)에서 소개하고 있는데, 당신도 꼭 해보기를 바란다. 

 

- 디마티니의 '돌파구 경험' 과정은 대단히 철저하다. 당신 삶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 한 명(가령 엄마나 남편 같은)을 정한 다음 그 사람의 좋아하는 점과 좋아하지 않는 점을 모조리 적는다. 그리고 당신에게도 바로 그러한 점이 똑같은 정도로 있다고 말해줄 사람들을 최소 몇 명 적는다. 그런 다음,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점을 가진 다른 사람이 실제로는 당신에게 득이 된 경우와 그것과 똑같은 자질을 가진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득이 된 경우를 써본다. 다 썼으면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가진 좋은 점 때문에 실제로는 당신에게 해가 된 경우와 그것과 똑같은 자질을 가진 당신이 실제로는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된 경우를 써본다. 휴. 

- 이런 작업을 하고 나면 내가 옳다는 독선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게 놀라울 정도로 불가능해진다. 내 삶에 등장한 다른 사람들이 사실은 나의 자질들을 반영하고 있음을 이렇게 검토하다 보면 우리의 인식과 믿음이 가진 무의식적 창조력을 실감하게 되고 이것을 의식화하기 시작한다.

 

- 내가 이 부분을 좀 장황하게 설명하고는 있지만, 당신의 무의식이 만들어내고 있는 세상과 관계의 양상을 온전히 자기책임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매 순간마다 당신이 얼마나 광대한 힘을 잃고 있는지를 잠시나마 꼭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 불교 우화 중에 허구를 창조하는 의식의 기능을 상당히 잘 설명한 이야기가 있다. 17세기 티베트 승려인 나왕 쿤가 텐진 Ngawang Kunga Tenzin 이 소개한 우화는 다음과 같다. 

- 궁극적으로는 오직 마음만이 존재한다. 하지만 망상과 카르마 때문에 마음은 다종다양한 모습으로 현현한다. 이것은 여섯 종류의 존재가 물을 각기 다르게 인식하는 것과 유사하다. 사실 물의 실체는 단 하나다. 하지만 여섯 종류의 존재가 함께 강둑에 모여 물을 바라본다면 물은 각기 다르게 보일 것이다. 뜨거운 지옥에서 온 존재는 그것을 불타는 강으로 볼 것이고, 차가운 지옥에서 온 존재는 그것을 눈과 얼음으로 볼 것이다. 아귀로 알려진 굶주린 망령은 물을 피와 고름으로, 물속에 사는 동물은 그것을 거주지로, 육지에 흩어져 사는 동물은 그것을 마시는 것으로 볼 것이다. 인간 역시 물을 마시는 것으로 볼 것이며 그에 따라서 물을 식수와 식수 아닌 것으로 나눌 것이다.

<마하무드라의 장엄한 인장 1권> (The Royat Sout of Mahamuchea, Volume One)


- 아수라라고 불리는 반신반인은 그것을 무기로 볼 것이고 신은 그것을 넥타르 Nectar(불로불사의 감로)로 볼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물이라고 인식하는 것을 각각의 존재는 그들만의 카르마에 따라 다르게 인식하고, 따라서 물은 여러 모습을 띠게 된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카르마적 인식이다. 궁극적으로 세상은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음의 투사에 불과하다.

- 물론 자신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자신에 대해 스스로에게 무언가를 주지 않는 사람 또는 스스로를 작아지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보는가? 
당신은 과거의 행동이나 현재의 몸 상태 또는 하는 일의 수준 등 당신의 어떤 면이 스스로를 제약하고 성취에 목매게 만든다고 생각하는가?
만일 그 인식이 완전히 날조된 것이라면? 사실 당신은 소원을 이뤄주는 보석이라서 언제든 온갖 종류의 멋진 만족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라면? 

- 이것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의 인식을 바꾸는 것이고, 당연히 인식은 우리의 습관적이라고 말하는 무의식적인 태도에 의해 결정된다.

- 인식을 바꾸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지금까지 무의식의 영역에 묻혀 있던 인식의 과정을 의식화하는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성취를 우아하게 축복함으로써 축복과 성취의 태도를 무의식에 심는 것이다. 1부에서 설명한 실존적 변태 기본 연습이 바로 그것이며, '최악의 두려움 목록'은 상태 유지에 도움이 된다. 

- 실존적 변태 수업을 통해 변성되는 굶주린 망령(앞서 말한 강둑의 굶주린 망령)이 위대한 보살의 어떤 예상치 못한 축복을 받아 자신을 온통 갉아먹던 괴로운 기갈에 대한 걱정을 잠시 내려놓고, 유유히 흘러가는 피와 고름의 끔찍한 장관을 있는 그대로 감상하고 즐기면서 이 광경이 사실은 본인의 무의식적 인식이 만들어낸 것임을 깨달았다고 상상해보자. 굶주린 망령은 강둑에 앉아 자기 마음의 역겹기 짝이 없는 힘을 기쁨과 경이에 차서 진심으로 감탄하며, 피와 고름이 흐르는 악취 나는 강을 걸리는 마음 하나 없이 있는 그대로 찬미한다. 이것이 자신의 무의식적 창조력이 이뤄낸 놀라운 성취임을 기뻐하는 것이다. 그 성취가 주는 경이로움을 즐기느라 그는 잠시 배고픔과 고통에 대한 자신의 집착을 잊어버리고 감탄만 나오는 자신의 창조에 깊은 만족감을 느낄 뿐이다. 

 

- 만일 굶주린 망령이 이렇게 한다면 그는 빨리 인간이 될 것이고 그의 인식이 바뀌어 사랑스러운, 마실 수 있는 물을 보게 될 것이다. 왜냐고? 만일 굶주린 망령의 눈에 자신이 이미 인식하고 있는 결핍만이 들어온다면 그는 '결핍만을 계속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악순환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애정 전선이 풍요롭게 흘러가지 못한다는 결핍만이 당신의 눈에 들어온다면 당신은 '결핍'만을 계속해서 인식하게 될 것'이다.

 

- 당신은 어떤 면에서 부족한 파트너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또는 자신에게는 아예 파트너가 결핍되어 있다고 인식할 것이다. 하지만 자가 확인(self-confirming)되는 성취의 메커니즘이 언제나 완벽하게 순환하며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굶주린 망령이 자각하는 순간, 그는 성취가 결핍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한다.

 

- 그는 결핍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자가 확인의 원리로 언제나 작동 중인 성취의 메커니즘이 그가 인식한 결핍을 그대로 성취해준 것뿐이다! 성취가 결핍보다 더 현실적이라는 사실을 굶주린 망령이 일단 인식하게 되면 사방에 존재하는 성취가 그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무언가를 '어디에선가' 인식한다면 결국 우리는 그것을 '사방'에서 인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게 우리 의식의 별난 점이다.

 

- 이제 굶주린 망령은 강을 자신의 갈증을 해소시켜줄 물로 인식할 수 있게 되며, 그의 의식이 가져다준 이 변성과 함께 그는 인간이 된다. 
인간이 된 이 등장인물은 심지어 운이 더 좋다. 이제 그는 현실의 성취를 인식하는 눈을 세상 모든 것으로 확장하는 연습을 의도적으로 할 수 있을 만큼 자유롭고 자각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는 수행을 통해 세상을 완전하게 완벽한 것으로 인식하는 수준까지 발전할 수 있다. 

 

- 이것이 위대한 작업, 마하무드라의 성취다. 이것이 우리가 물을 와인으로, 또는 넥타르로 바꾸는 방법이다.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 이와 유사하게 (당신에게 있을 수 있는 다른 일반적인 패턴을 말해 보자면) 파트너의 관심을 끌려고 싸움을 거는 욕망, 소셜미디어에서 사람들을 조리돌림하는 욕망, 직장에서 기선 제압을 위해 동료를 헐뜯는 욕망 모두 권력에 대한 욕망이 우회적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 이러한 권력 욕망, 주변 세상에 영향을 끼치고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이 욕망은 대단히 정상적이고, 사랑스럽고, 흔해 빠진 인간의 욕망이다. 당신에게 이러한 욕망이 있다는 사실은 당신이 그렇게 악마 같은 인간이라는 뜻이 아니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뜻이다. 

- 자신의 권력욕이 아주 멋질 뿐 아니라 진짜 놀라울 것 하나 없는 평범한 욕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겸손하지 않은 인간들은 보통 수동공격적(passive-aggressive)인 행동이 촘촘하게 수놓아진 '좋은 사람' 페르소나로 이것을 숨기거나 억누른다. 혹은 이 기본적인 욕망을 거창한 억울함과 섞어서 "모든 악의 무리들을 처단할 수 있도록 나는 권력의 정상에서야 한다! 나는 최후의 방법 (Final Solution)을 시행할 것이다!"라는 식의 아무 논리 없는 합리화를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 빛 어둠 인스티튜트(Light Dark Institute)의 타니 쏠과 레슬리 로저스가 내게 전해준 놀라운 통찰 중 하나는 사디즘이 꼭 고통을 가하고 싶은 욕망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감각'을 선사하고 싶은, 누군가에게 느끼게 해주고 싶은 욕망이다. 그러니 만일 당신이 본인 스스로와 주변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수동공격성 패턴을 해체하는 작업을 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선사하면 분명 재미있을 것 같은 바로 그 감각’을 주지 않기 위해 당신이 어떤 방식으로 몸을 사리는지 샅샅이 찾아보길 바란다. 

 

- 가령, 당신이 언제나 지각을 한다고 해보자.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불만의 감각을 선사한다.) 이것이 일종의 보상인 까닭은 본인의 섹시함이나 배꼽 빠지게 하는 엉뚱한 유머처럼, '사실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느끼게 만들면 정말 재미있고 신날 것 같은 감각'을 절대 그들에게 선사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경우 일단 당신이 지각한다는 사실을 즐기고 이에 흥분한 다음, 벌레스크 burlesque 댄스 수업이나 스탠드업 코미디 수업에 등록해라. 입이 떡 벌어지는 당신만의 활기와 스타일로 관객을 휘저어 그들의 감각을 온통 깨우는 법을 배워라.  

 

- 더 크고 더 과감한 게임을 하길 바란다. 당신이 선사하고 싶은 방식 그대로 사람들에게 감각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라. 본인과 다른 사람들 모두 즐길 수 있는 방법으로 그들이 당신의 중요성과 위대함을 느끼도록 하라.

- 그것을 순수 예술로 만들라. 최고의 예술가들과 가장 강력한 지도자들은 고문의 대가다. 그들은 우리에게 깊은 감정을 느끼게 하고, 금기를 드러내고, 우리를 기대와 놀람, 깨달음의 거의 견딜 수 없는 감각들로 인도한다는 의미에서 숙련된 고문관이다. 

 

- 당신의 문제는 당신이 사람들을 고문한다는 게 아니다. 고문을 충분히 즐겁게 하지 않는 게 문제다. 그러니 사람들을 고문한다고 수치스러워하지 말고, 당신이 이미 선사한 모든 감각에서 쾌락을 느끼고, 그들을 어떻게 하면 훨씬 더 능숙하게, 더욱 아름답게, 잘 합의하며 고문할 수 있을지를 배우라. 

 

- 갈등이 일어나거나 무의식적인 저항이 발생하면(분명 그럴 거라고 거의 확신한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원하는 결과를 진즉에 물질화했을 것이므로) 당신은 무의식적으로 그러한 행복한 것들을 바로 무효처리 해버린다. 표면적으로는 그것에 대해 아무리 심상화를 하고 확언을 해도 당신은 그것을 허튼소리로 치부하고 실제로는 딱히 믿지 않는다. 
 
- 흔히들 가르치는 '긍정적인 결과가 생기리라고 믿는 것'에는 기이한 부정의 요소가 들어 있다. 긍정을 믿는 것은 대놓고 솔직한 것만큼 효과적이지 않다. 정직이야말로 최고의 방책인데, '멋진 것'을 두려워해보면 당신은 자신이 원한다고 생각하는 행복한 결과를 사실은 경멸하는 솔직하고 무의식적인 당신의 일면을 끄집어낼 수 있게 된다. 

 

 

 

"질문은 마법사가 휘두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도구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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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이해한 바는 다음과 같다. 

플루토는 코레(페르세포네) 여신의 무의식이다. 현대 점성학에서 플루토는 무의식의 신이다. 이것은 죽음과 공포, 강간과 악마, 파괴와 부의 축적 등을 상징하는 무시무시한 힘이다. 즉, 우리가 평상시의 자아 느낌을 유지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동일시를 거부하고 개인적으로 책임지려 하지 않는 이 세상의 모든 끔찍한 일을 의미한다.  


- 플루토는 또한 연금술 그 자체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무의식의 신이 가진 힘을 깨닫고, 기억하고,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의식화했을 때 비로소 이용할 수 있는 의도적이고 기적적인 변성 말이다. 

- 내 해석은 이렇다. 어느 날 위대한 신 코레는 가없이 강력한 지하세계의 단독 통치자인 자신이 지루해졌다. 그녀는 홀로 완성된 자이자 전지전능한 신으로서 경험하는 영원한 단조로움에 싫증을 느끼고 여기에 균열을 내줄 약간의 드라마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코레는 자신을 두 개로 쪼갰다. 자애롭고 상냥하고 의식적인 모습과, 그것의 쌍둥이 격인 잔혹한 무의식의 신 플루토로.

- 그녀는 '들판에서 꽃을 따는 영원히 늙지 않는 어린 소녀'와 같이 순수하고 분리된 개별자로서의 자신을 경험하기 위해, 그리고 그 후에 변태스럽고 혼란스러운 이원성과 섹슈얼리티, 폭력에 수반되는 모든 무시무시한 흥분과 전율을 경험하려 자신을 둘로 나눈 것이다.

 

- 어릴 적 나는 내가 너무나 사랑했던 남자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이때의 경험이 너무나 초현실적이었기 때문에 급기야 마약을 하는 게 아주 좋은 선택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될 정도였다. 12단계 모임 사람들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느님에게 맡기는' 일 운운하는 것을 듣고 있을 때 한 가지 선명한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하느님은 상변태 또라이다. 하느님 -남신이든 여신이든 무성 신이든- 은 이 세계를 창조했는데, 이 세계는 전쟁과 강간과 학대, 중독과 재앙으로 가득한 미친 호러쇼다. 만일 하느님이 이 호러쇼의 제작자라면 하느님은 이런 걸 '좋아하는' 게 틀림없다!"

- 보통의 경우라면 이런 식의 사고는 끔찍한 허무주의적 신경쇠약으로 이어졌을 거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삐뚜름하게 웃었다. 마음이 가벼워지고, 들뜨고, 어떤 가능성이 느껴졌다. 다음과 같은 생각에 가닿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나도 상변태 또라이일 수 있겠다!" 만일 -정말 정말 만일- 내 인생에서 벌어진 모든 나쁜 일들이 사실은 내가 그런 걸 좋아해서'였다면?

 

- 오늘날 나는 삶에서 진짜 좋은 것들을 풍요롭게 누린다. 진심으로 사랑스럽고 섹시한 남편, 억대 매출의 사업, 세계 여행, 진실한 우정을 나누는 친구들, 점점 깊어지는 영적 연결감, 빈곤과 학대와 중독으로 점철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으로서 스스로도 가끔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부와 아름다움. (물론 지금도 나는 스스로 창조한 고통과 고난을 섭섭하지 않게 겪는다. 고통을 만드는 드라마를 여전히 즐길 때가 많기 때문이다. 단, 지금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자각할 수 있다.) 

- 내 인생은 내가 실존적 변태성이라고 명명한 것을 탐험하기 시작하면서 바뀌었다.

- 이 책은 그 탐험의 결과물이다. 나는 내가 실존적 변태성을 있는 그대로 수용했을 때 일어난 삶과 영성의 어마어마한 전환을 다른 사람들도 가능한 한 많이 경험했으면 하는 마음에 이 책을 썼다. 그리고 돈도. 돈 얘기가 빠질 수 있나? 나는 여러분이 진정한 부를 가득 갖기를 바란다. 또한 사랑, 그리고 사람들. 삶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좋은 일들 역시.

 

- 여러분에게 약속드리오니, 이 책에 기울이는 모든 주의와 관심은 삶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변성으로 충분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실존적 변태 수업은 어쩌면 여러분이 앞으로 접하게 될 그 어떤 정보보다도 여러분의 삶을 훨씬 좋은 방향으로 크게 변형시킬 수 있다. 

 

- 이것은 현실이 프랙탈 fractal 이고 홀로그램이라는 뜻이다. 당신과 외부세계는 진짜 분리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면의 작은 변화가 외부세계를 극적으로 바꿀 수 있다. 즉, 마법이 가능한 것은 현실의 본질이 프랙탈이고 홀로그램이기 때문이다. 내면이나 내 주변 환경에서 '작은' 변화를 만들어내는 순간 매우 '커다란’ 것, 즉 세계 전체가 자동적으로 변한다. 

- 이 말은 우리가 마법을 부리지 않는 순간은 한순간도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언제나 마법을 부리고 있고 언제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다만 인간은 습관적으로 평이하다 못해 지루하거나 파괴적인 (여기서 다시 한번 그림자가 등장한다) 마법을 부리고 있는 것뿐이다.

- 하지만 세상은 우리의 정신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세상과 정신은 하나의 온전한 연속체, 하나의 온전한 직조물의 일부이다. 마법을 마스터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환경이 변하면 내가 경험하는 외부세계도 그만큼 변한다는 사실을 배운다는 말이다. 

- 의식과 무의식의 통합을 빠르고 정확하게 이루어내는 실존적 변태 수업은 그만큼 변성의 힘이 강력하다.

 

- 그러니 애초에 불쾌한 상황을 창조한 무의식의 그림자 패턴, 욕망, 성질, 믿음 등을 용해하지 않는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심상화와 확언을 한들 진정한 충족감이라는 알맹이는 빠진, 겉만 달라진 쭉정이 환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내가 그러했듯 어쩌면 당신 역시 이전의 물질화 시도를 통해 이러한 얄팍함만을 경험했을 수 있다. 용해 과정을 충분히 하지 않으면 바라는 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 좌절하여 마법과 물질화에 대한 열정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나는 그랬다). 

- 실존적 변태 수업에서는 용해와 응고 공식 중 '용해' 부분을 소개한다. 당신의 변태스러운 그림자를 녹이고, 드러내고, 궁극적으로는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당신의 실존적 변태성은 무엇인가?
당신은 당신의 그림자를 만나본 적이 있는가?

- 지금까지 이러한 종류의 깨어남은 우리 인간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드문 위업이었다. 깨어나기까지 어떤 사람은 몇십 년에 걸친 정신치료를 받고, 어떤 사람은 그에 비등할 만큼 오랜시간 좌선 명상을 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제안하는 실존적 변태 수업의 방법 -무의식을 빠르게 의식화하는 방법- 은 그와 다르다. 당신의 무의식적인 욕망과 호기심은 더 이상 당신을 지배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거대한 가능성의 풍광이 삶에 펼쳐진다. 이 통합 방법은 몇 년, 몇 십 년이 아닌 며칠, 몇 주, 몇 달 만에 효과를 볼 수 있다. 왜? 실존적 변태 수업은 단순히 그림자 자아를 알아차리는 데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실존적 변태 수업은 자신의 그림자 자아를 수용하고 사랑하는 법을 알려준다. 
 
- 깨어 있는 일상이라는 꿈속에서 제대로, 그리고 요령 있게 눈을 떠 자신의 힘을 되찾는 것이 내가 이 책을 통해 여러분과 함께하고 싶은 일이다. 일단 본인의 그림자를 '타자'로 바라보며 소외감만 느끼지 않게 되어도 당신은 힘이 솟는 걸 경험하기 시작할 것이다.

- 이 책은 고착화된 삶의 고통스러운 패턴에서 우리가 취하는 무의식적인 쾌감을 어떻게 의식화하는지 알려주는 그림자 통합 방법으로서 이를 통해 삶이 뒤바뀔 수 있다. 지금까지 무의식의 영역에 억눌려 있던 '길티 플레져 guilty pleasture'를 의식적으로 즐기고 승인함으로써 우리는 고착화된 패턴을 중단하고 끝내 우리가 진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게 된다.

- 나는 실존적 변태 수업이 신선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전혀 선례가 없는 오리지널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다. 탄트라와 영지주의 계보의 학파들(힌두교, 불교, 그리고 서양의 비전 전통)은 고양된 감각에 머무르는 법을 중요하게 가르친다. 여기서 '고양된 감각'이란 고통과 쾌락 같은 강렬한 육체적 느낌뿐 아니라 분노, 두려움, 욕정 같은 강렬한 정서적 느낌 역시 의미한다. 그래서 탄트라교 신자는 전통적으로 섹스나 죽음처럼 강렬한 반응을 일으키는 주제에 대해 명상하고 감정과 본능(특히 섹스와 공격성)이 가진 날것의 에너지를 광명의 깨달음으로 전환시키는 법에 대해 집중적으로 배운다. 

- 탄트라교는 끌림과 혐오, 쾌락과 고통의 강렬한 에너지를 피하지 말고 오히려 각성을 이끌어내는 데 사용할 수 있도록 작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근본 사상으로 삼는다. 왜? 욕망과 공격성, 사회적으로 터부시되는 경험을 피하는 게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회피는 혐오와 애착의 올가미를 더욱 조일 뿐이고, 이것은 환상이라는 바퀴를 계속 돌게 만든다. 이와 마찬가지로 실존적 변태 수업에서 우리는 무의식의 금기 영역 속으로 뛰어들어 그곳의 고양된 감각 속에 머물며 지금까지 고착되었던 에너지를 광명의 깨달음으로 변화시키는 방법을 배운다. 

 

-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깨어 있는 삶이라는 꿈을 꾸면서도 이것이 꿈임을 자각하며 기적을 행할 수 있게 된다.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신의 존재감, 신 자신의 불꽃을 명명백백히 손에 잡힐 듯 인지할 수 있게 된다. 욕심 많은 에고의 시선이 아닌, 내면의 신성이 가진 호기심으로 우리의 삶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 자연의 마법과 같은 힘을 체화해가는 작업은 연금술사들이 위대한 작업이라고 부르는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에 너무 놀라지 마시길. 위대한 작업의 과정은 깨달음 -또는 개인화, 깨어남, 이니시에이션 initiation, 전일화 becoming whole 등- 이라고도 알려진 여정과 동일하다. 한마디로 말해 자신이 처량하고 고립된 개인이라는 뼛속 깊은 동일시에서 점점 벗어나 신이라는 거대한 대양의 파도임을 깨달아가는 과정이다. 여기에는 대단히 고귀한 노력이 필요하긴 하지만 이것을 추구하는 것은 많은 현실적인 보상을 가져다준다.  

 

- 위대한 작업의 수준이 깊어질수록 우리의 의식은 진화하고 통합되며, 의식이 이렇게 변성될수록 우리의 만족을 위한 멋진 세속적 기회들을 포착하고 활용할 수 있는 역량도 훨씬 커진다. 실제로 개인적으로 나는 이 과정에서 눈을 가린 베일이 들려 올려지는 동화 같은 순간을 반복적으로 경험했고, 내가 원했던 것은 내내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손을 뻗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전까지는 너무 무지하거나 둔해서 알아볼 수가 없었던 것뿐이었다. 

- 위대한 작업의 첫 번째 핵심 단계는 연금술사들이 우니오 멘탈리스 unio mentalis 라고 부르는, '통합된 마음의 창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연금술의 맥락에서 말하는 이 '마음'이 일반적인 의미의 생각하는 마음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내 존재 안의 생각, 감정, 의지의 통합을 의미한다. '통합된 정신' 또는 '통합된 태도'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통합된 마음'의 상징은 힘이 끝까지 차오른 온전한 심장이다. 

- 우니오 멘탈리스를 이룬 자는 자신과 갈등하지 않는 존재다.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대단히 강력하다. 위대한 작업의 우니오 멘탈리스 단계가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이다. 

- 우니오 멘탈리스 단계를 밟는 게 단순히 신비주의적 이유로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꼭 알아야 한다. 이것은 대단히 현실적이다. 우니오 멘탈리스는 '통합된 의지'를 갖는다는 말과 같다. 고대 그리스의 마법사들은 현실 마법이 성공하려면, 즉 긍정적인 동시성의 경험을 의도적으로 발생시키려면, '통합된 의지'가 절대적인 전제조건이라고 생각했다. 

- 위대한 작업의 두 번째 주요 단계는 '하나의 세상'을 뜻하는 우누스 문두스 unus mundus로서 '통합의 확장'을 뜻한다. 이것은 사람의 혼(soul)-영(spirit)이 완벽하게 현현하여 세상과 하나된 상태로서, 물 위를 걷거나 죽을 때 무지개로 변해 머리카락과 손톱만 남기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단계다.

- 나는 여전히 이 단계가 의미하는 바를 알고자 노력 중이다. 우니오 멘탈리스가 갑자기 거대한 무지개로 화하거나 말 그대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단계처럼 원대하지는 않아도, 이 과정을 밟는 당신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위대한 작업의 여정 위에서 훨씬 더 멀리 갈 수 있다. 또한 우니오 멘탈리스를 이루는 것은 우누스 문두스에 도달하는 방법을 찾기 위한 전 제조건인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가슴-정신이 통합되지 않으면 모든 현실의 통합된 현현에 도달하는 길을 찾기가 어렵다.

- 우리의 혼과 영 모두 우리의 본질인 더 높은 차원의 신성한 참자아(Self)를 구성하는 요소다. 우리의 본질인 상위자아를 인간 대부분은 의식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말한 것처럼 상위자아는 대개 꿈이나 사건의 현현(동시성)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건다. 

- 참자아가 전하는 말을 꿈이나 동시성을 통해서만이 아닌 깨어 있는 자각 속에서 그냥 '알게 되는 것', 이것이 서구 비전 전통에서 말하는 '성 수호천사의 지식과 대화'이고, 이 '개성화의 정점'이라고 가리켰던 '내면의 타자(아니마/아니무스)'와 의식적으로 관계 맺는 과정'이다. 

- 인간 대부분이 광대한 참자아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자신을 분리되고 소외된 에고, 잔인한 운명과 외부 상황에 휘청이며 흔들리는 고립된 작은 입자로 경험하는 것에 강한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한번 생각해보라. 만일 참자아 속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한다면, '나'를 분리된 존재로 경험하는 것은 자신을 양극성의 한쪽 면에만 동일시한 채 나머지 한쪽은 경멸하며 "이건 절대, 한사코 내가 아니야"라고 척하는 것이다. 

- 바로 이것이다! 당신이 이 창조적인 '척하기'를 하는 순간, 당신은 (일시적으로, 허구적으로 참자아에서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에고 자아를 만들어낸다.  

 

- 우리 대부분은 부를 숭상하는 사회에서 성장했고, 그 결과 양극성의 다른 면을 부정하고 부인했다. 바로 결핍에 대한 사랑이다. 그렇게 무의식이 된 결핍에 대한 사랑은 삶 속에서 동시적으로 모습을 나타낸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수치 따위는 모르는 것처럼, 환장하게 그것을 사랑하기로 할 때까지. 

 

- 위대한 작업은 결국 무의식을 의식화함으로써 행위 주체(agency)의 무게중심을 바꾸어 내 운명의 상투를 직접 틀어잡는 과정이다. 
행위 주체의 무게중심을 바꾼다는 말은 에고의 반쪽짜리 선택(에고는 자신이 '좋은 것'이라고 이름표 붙인 것만을 원하는 편이다)에 동조하는 대신, 근원의 완전한 신성이 선택하는 보다 변태적이고 훨씬 모험적인 길을 내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진짜 모든 것'을 궁금해하고 향유하는 이 이상하고 광대한 참자아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본질이다. 

 

- 이를 위해서는 모든 경험을 '좋다'(나에게 득이 될 것처럼 보이는 것)와 '나쁘다'(나에게 득이 될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라는 허구(거침없게 말하자면 망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의 잣대로 나누는 에고의 성향과 저항을 완전히 꺾어야 한다. 이 부분에 성공하면 에고는 분리라는 허상에 빠져 있던 겹겹의 층을 벗겨내고 자신이 더 높은 차원의 신성한 전체인 참자아의 구체적인(사실 재미있는 것에 더 가까운) 표현일 뿐이라는 사실을 점점 더 명확하게 보게 된다. 

- 참자아는 모든 사물과 모든 인간의 근원이 되는 자성으로서 -역설적이게도 이것은 인간 내면의 진정한 자아성이기도 하다. 참자아는 무한한 의식이기 때문이다. 우리네 인간을 전구라고 한다면 참자아는 우리에게 전력을 제공하는 전기다. 우리가 모든 이들과 공유하는 이 전체의 근원과 더 깊이 동일시할수록 우리는 역설적으로 더욱 개성 있는 인간이 되어간다. 사회적으로 규정된 기존의 역할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점점 더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분리라는 허상에서 깨어나는 순간 우리는 육체 안에 흐르는 성적이고 금기시되는 전기 에너지(샥티 shaki, 성적 흥분)를 우리의 가장 고귀한 이상과 의도에 연결시키게 된다. 우리의 이상과 의도에 지금까지 찾아볼 수 없었던 고전압의 정력이 흐르게 되는 것이다.

 

- 주문을 건다는 것은 동시성을 통해 구체적인 결과를 발생시키도록 자신의 개인 무의식 및 집단 무의식과 대화하는 것을 뜻한다. 믿거나 말거나 여러분은 매 순간 주문을 걸고 있다. 여러분의 말, 행동, 거울 속 자기를 쳐다보는 표정, 타인에게 보여주는 표정. 그리고 옷, 향수, 노래, 미소, 웃음, 반응과 분노까지. 이 모든 게 다 주문이다. 

- 당신은 자신의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과 끊임없이 대화한다. 당신은 '내가 생각하는 나'를 끊임없이 수행하고, 자신이 받아들인 사회적 정체성과 조건을 투사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수행하려면 본인의 개인 무의식 및 집단 무의식과 계속 대화를 해야 하므로 결국 이 정체성을 반영하고 확인하며 정교히하는 상황, 관계, 동시성이 끊임없이 생성된다. 

- 편집부 주 : 좌도(left-hand path). 서양 비전에서의 우도(right-hand path)와 좌도는 마법에 대한 두 가지 반대되는 접근법이다. 우도는 특정한 윤리적 규칙 및 사회적 관습을 채택한 마법 집단을 일컫는 단어인 반면, 좌도는 정반대의 사고방식, 즉 금기를 타도하고 도덕적 기준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 영(spirit)은 완전함을 인식하는 참자아의 활동적이고 투사적인 면으로서, 한없는 가능성과 완전함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영감을 방출한다. 하지만 우리의 에고-인격, 의식적인 마음은 이러한 영감을 만사가 '어때야 한다'는 다종다양한 의견으로 잘못 번역할 때가 많은데, 이것이 우리의 소외감을 지속시킨다. 이러한 의견은 대체적으로 명령조다. 가령,
"사람들은 더 친절해야 해."
"나는 몸매를 가꿔야 하고 채소를 더 많이 먹어야 해."
"세상은 공평해야 해."
"우리는 돈을 써서는 안 돼. 모든 건 선물경제(gift economy)로 돌아가야 해."
"나는 괜찮은 사람하고만 섹스를 하고 싶어해야 해."
이런 예는 한도 끝도 없이 댈 수 있다.
 
- 인간 대부분에게는 수없이 많은 부정적인 무의식의 욕망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초보 마법사들은 물질화를 시도하고도 "소용이 없네"라고 생각하기 쉽다. 의식적인 마음이 원하는 것을 받지 못하거나, 우리가 원한다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완전 별로인 것을 얻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번 크게 삐끗하고 나면 큰 혼란을 느끼게 되는데, 바로 이 때문에 가능성 있는 많은 마법사들이 그냥 포기해버리고 이런 말들을 다 헛소리라고 치부해버린다.

- 하지만 여기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다. 아마추어 티를 못 벗는 시시한 마법일지라도, 목표 달성을 위한 시도가 엉터리라 할지라도, 그것은 언제나 우리의 존재가 내면 깊은 곳에서 실제로 원하는 것, 즉 우리의 무의식이 원하는 것을 완벽하게 실현한다. 그리고 어쨌든 우리는 지금까지 모든 마법을 우발적으로 해왔으므로, 의도를 세우고 마법을 하는 것은 욕망과 결과의 과정을 보다 확실히 자각하고 이를 통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 내가 "갖고 있다는 것은 그것을 원했다는 증거다"라고 말하면 자연스레 사람들은 폐허가 된 전쟁 지역이나 학대 상황에서 꼼짝 못 하는 아이들을 대며 이렇게 말한다. "그 아이들이 그런 상황을 원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지요? 얼마나 괴물 같은 사람이면 그렇게 얘기할 수 있나요?" 


- 이런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러하다. 첫째, 삶에서 펼쳐지는 외부 상황에 개인의 무의식만 영향을 끼치는 건 아니다. 집단 무의식의 욕망도 있다.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어림 기준을 소개하겠다. 만일 짜증나는 패턴이 굳이 나에게만 반복해서 일어나는 것 같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 패턴이 없다면 아마도 그것은 당신의 개인 무의식이 구체적으로 창조한 상황일 공산이 크다. 하지만 전쟁이나 인종차별, 아동학대 같은 전 인류적 문제라면 그것은 집단 무의식의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전쟁과 학대를 비롯해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고난은 수천 년간 통합되지 않고 억압되고 부정당한 개인의 그림자 욕망이 집단적 힘으로 뭉쳐진 것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둘째, 나는 아주 용감하고 관대한 영혼들 중에는 유년 시절에 극도의 고난을 경험하고, 어쩌면 궁극적으로 그것을 의식화하고 치유하여 마침내 집단까지도 치유하겠다는 강한 개인 무의식의 욕망을 갖고 이 세상에 온 사람들도 있다는 의견이 완전히 무리수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셋째, 집단이 만들어낸 끔찍한 상황에 처한 아이나 사람일지라도 효과적인 마법의 방식을 취함으로써 자신의 상황을 향상시킬 수 있다. 자기 연민, 절망, 분노, 비통과 같은 태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가끔은 거기에 푹 빠져 있는 게 재미있고 만족스럽긴 하지만, 행복한 동시성과 결과를 창조하는 데 마법적으로 효과적이지는 않다.

- 마지막으로, 집단 그림자를 해소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리 각자의 개인 무의식 속 욕망을 자각하고 통합한 뒤 다른 사람들(진지한 관심을 표명하는 사람들) 역시 그렇게 하도록 돕는 것이다. 집단 무의식이 야기하는 잔혹한 상황은 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개인들이 만드는 것인 만큼 우리 각자가 개인으로서 더욱 명료히 자각할수록 집단 무의식에 끼치는 자기 몫의 영향력을 청소할 수 있다.

- 많은 사람들이 이 선택을 의식적으로 행사하는 데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런 선택지가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감각은 질적으로 중립적이다. 그것을 고통으로 경험하느냐 쾌락으로 경험하느냐는 감각을 해석하는 마음의 결정에 달려 있다. 시인 존 밀턴 John Milton이 <실낙원>(Paradise Lost)에서 썼듯 "마음먹기에 따라 천국이 지옥이 될 수도, 지옥이 천국이 될 수도 있다."
 

- 조금 더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출산은 누구나 아는 고통스러운 과정이고 현대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분만은 고통과 신음 소리로 가득하며 촉진을 위해 무통주사를 놓기도 한다. 하지만 쾌감 출산(Orgasmic Birth)이라 불리는 운동도 있다. 쾌감 출산을 하는 여성은 출산할 때 느끼는 강렬한 감각을 쾌감으로 경험하도록 훈련을 하는데 실제로 많은 여성들이 출산을 끔찍한 고통이 아닌 오르가즘으로 경험한다. 출산할 때의 대단히 강렬한 감각을 쾌감으로 경험하도록 훈련하는 게 쉽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저 그게 가능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그리고 그 가능하다는 사실은 인간이라는 유기체가 감각을 얼마나 자유자재로 선택해 인식할 수 있는가를 아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삶과 정신에서 경험하는 감각을 어떻게 인지할 것인지 선택하는 일은 무기력이나 잔인한 운명의 처분에 흔들리는 상태에 대한 애착을 놓아버리기 위한 중요한 걸음이다. 

 

- 나는 이것이 선택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BDSM에 참여하는 사람은 맞고 묶이는 것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는데, 바로 이 의도적 선택이라는 요소 덕분에 사람들은 고통과 결박을 일종의 놀이로, 재미있는 것으로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보통 삶에서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그것을 고통으로 경험할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자신에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이 그리 재미있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아주 맥 빠지고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 따라서 실존적 변태 수업에서 상당히 중요한 포인트는 적어도 처음에는 '척'이라도 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가령 "갖고 있다는 것은 그것을 원했다는 증거다"라는 공리를 시험 삼아 인정해보는 것.) 지금까지 무의식의 영역에 있던 당신의 어떤 면이 지금의 고통스러운 상황, 행동, 사고의 흐름, 기분 등을 즐겁고 유쾌하고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선택하고 욕망했다고 말이다.

 

- "갖고 있다는 것은 그것을 원했다는 증거다"의 가능성을 탐색하다 보면 몸이 이완된 상태가 자극에 대한 반응을 가장 솔직히 보여줄 수 있는 상태임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해당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과 느낌이 정확히 무엇인지 파악한다. EK는 상황 자체의 표면적 사실이 아닌, 그 상황에 결부된 느낌, 감정, 감각에 대해 작업할 때 가장 효과가 좋기 때문에 이 부분은 중요하다. 사실 싫은 상황 그 자체는 우리로 하여금 불쾌한 느낌과 감각을 경험하게 하기 위한 수단, 또는 부산물에 불과하다. 내 고객인 엘시의 예를 들자면 그녀는 사교 그룹의 누군가로부터 비판이나 비난을 받았다고 느낄 때마다 엄청난 불안에 떨었다. 이 주제로 실존적 변태 연습을 한 그녀는 자신이 고통스러운 불안이라고 제일 처음 인지한 바로 그 감각이 사실은 변태적 흥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프리츠 펄스의 유명한 말인 "두려움과 홍분은 호흡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 동일한 것이다"를 떠올리게 한다. 즉, 두려움과 흥분은 감각을 포용하고 승인하느냐 마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 EK 작업을 통해 엘시는 비난받을 때 수반되는 극적인 순간의 느낌과 강렬한 관심이 사실은 너무 좋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제로 그녀는 크게 흥분했다. 문자 그대로 몸이 달아올라 뺨이 붉어지고 심장박동 수가 빨라졌다 -이것은 연인과 단둘이 있을 때 경험하는 생리학적 반응과 동일하다-. 엘시가 매우 정직하게 자신과 대면하여 본인의 행동을 살펴본 결과, 그녀는 자신을 비판하고 몰아세우도록 무의식적으로 사람들을 부추기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기에서 얻는 그림자적 만족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비판받는 데서 오는 극적인 만족을 엘시가 의식적으로 수용하며 음미하고, 그것이 주는 쾌락을 즐기게 되면서 사람들을 은근히 부추기는 그녀의 충동은 점차 사라졌다.

 

- 또한 엘시는 지금껏 자기가 어울리던 사람들을 "너무 지루하네", "너무 까다롭네" 하며 본인 스스로가 속으로 비판하고 판단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비난받는 것에 불안해하며 쓰던 에너지를 자신과 훨씬 더 잘 맞는 즐거운 친구들을 찾는 쪽으로 돌렸다. 
 

- 여기서 알 수 있다시피 사교 그룹 내 사람들이 나를 비판하는 이러한 싫은 상황은 엘시의 무의식이 불안/홍분을 감정적으로 경험하고 싶어 만든 부수적 산물에 불과하다. 엘시가 비판받을 때의 감각에 저항하지 않고 그것을 흥분으로 경험하게 되자 뒤틀린 방식으로 쾌락을 얻고자 하는 욕구는 힘을 잃었고, 그녀는 이제 더 자연스레 끌리는 사람들을 만나보자는 결정을 명료하게 내릴 수 있었다.

 

- 그러니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싫은 상황이 불러일으킨 감각과 감정에서 가학-피학적 쾌락을 느껴보는 것이다. 싫어하는 상황의 표면적 사실을 좋아하도록 애쓰는 데 에너지를 쓰지 말라. 그러한 표면적 사실은 부수적 산물에 불과할 뿐이다. 당신은 당신이 너무나 소중히 여기는 그 끔찍한 느낌을 경험하기 위해 스스로를 싫어하는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당신 참 똑똑하지 않은가. 

- 실존적 변태 명상의 이번 단계는 이 싫은 상황을 즐기는 무의식적이고 변태적인 당신의 일부와 만날 수 있도록 천천히, 부드럽게 마음의 문을 여는 과정이다. 두려움/혐오와 욕망은 언제나 짝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무언가를 욕망한다면 언제나 그것을 어느 정도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고,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싫어하는데 그것을 욕망하지 않는 일은 있을 수 없다. 

- 당신의 쾌락은 가학적일 수도 피학적일 수도 있다. 당신이 본인 스스로에게 가하고 있는 이 두 개를 엄밀히 분리하는 건 솔직히 어렵다. 두 측면 모두를 실험해보길 권한다.

- "갖고 있다는 것은 그것을 원했다는 증거다"의 공리를 기억하라. 아무리 끔찍한 상황이나 느낌일지라도 그것이 당신 삶에 존재한다면 그 상황이나 느낌은 '사실'이나 '진짜'라서가 아니라 당신의 본질인 광대하고 기이하고 변태스러운 참자아의 일부가 그것을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매혹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제는 당신의 그러한 면과 금기의 쾌락을 의식적인 승인과 포용의 장으로 초대할 시간이다.  

 

- 내가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일반적인 판단 분별과 에고를 잠시만 가벼운 마음으로 내려놓으라. 여기서 자기 정직성을 높이고 싶다면 싫은 상황이 지금부터 딱 한 달 내에 마치 하느님이 손쓰신 것처럼 완벽하게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고 확고하게 믿는 게 도움이 될 수 있다. 

 

- 실존적 변태 수업에서 말하는 '즐거움'은 주로 전기가 오르는 듯한 짜릿함이나 성기에서 느껴지는 감각으로 경험된다. 혹은 감정적 에너지가 움직이는 게 느껴지기도 한다. 가끔은 마음이 가벼워지는 느낌이나 웃음으로, 살짝 안도감이 드는 것으로도 경험된다. 바로 이것이 실존적 변태 과정의 '흥분'이다. EK에서 말하는 흥분은 이전까지 무의식적이었던 쾌락의 맥을 제대로 짚어 (그리고 그것을 마음 놓고 노골적으로 즐겨서) 해방감을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 일정 시간 호기심을 갖고 재미있게 무의식적 쾌감을 찾고, 그대로 느껴도 된다고 마음을 열었는데도 그것과 연결된다는 느낌이 없을 수 있다. 그것도 괜찮다. 그냥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좋다. 손을 대기 어려운 무의식적 즐거움을 캐내는 작업은 이후에 다시 소개할 것이다. 

- "당신의 그림자(지금까지 무의식적이었던 욕망/호기심/쾌락) 편에 서서 당신의 무의식이 아주 영리하게 창조한 상황을 의도적으로, 의식적으로,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크게 감사하고 흥분을 느낀다." 
실존적 변태 과정에서 이 부분은 대단히 중요하다. 당신의 무의식적 자아로 하여금 본인이 창조한 상황과 감정(그것이 아무리 난장판이라 할지라도)을 온전히 수용하고 즐기고 기뻐하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한, 그 상황은 계속 똑같이 반복해서 나타날 것이다. 결핍, 사랑으로부터의 거부, 자기혐오는 계속 그자리에 머물 것이다. 당신의 무의식적 자아는 자신이 즐기는것을 계속 즐길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니 당신의 삶과 정신이 아무리 결함투성이 쑥대밭이라 해도 지금 이 순간 그 속에서 느껴지는 즐거움과 행복과 지복을 그대로 누려보라. 그리고 사실 '결함투성이 쑥대밭'은 이원성의 특징으로, 바로 이것을 경험하기 위해 당신은 이 차원에 왔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우주의 수프를 유영하고 있었을 것이며 굳이 번거롭게 이 한정된 물질세계로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음란한 괴짜인 당신, 주춤거리지 말고 결함투성이 쑥대밭을 사랑하도록. 

- 변태 같은 쾌락 그 자체를 보상으로 삼고 '통합을 통해 인생을 고쳐보는 것'에 대해서는 미리 생각하지 말라. 의식은 당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면, 즉 건강해지고,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때 지복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당신을 괴롭히는 의식의 유명하고 재미있는 고문 방식에 불과하다!

- 당신은 언제나 지복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진실이다. 당신이 시궁창에 누워 있든, 상사의 고함에 귀가 따갑든, 데이트 상대에게 무시를 받든 뭐든 말이다. 좋은 것을 얻기 전까지는 오롯이 행복이기만 한 즐거움을 누리지 않겠다는 당신의 주저함이야말로 가학피학적인 자기부정의 핵심이다.
이제 원리가 보이기 시작하는가? 

- 1) 실존적 변태 연습하기 
앞으로 2주간 매일, 삶에서 싫어하는 상황을 하나 정해 실존적 변태 기본 연습 단계를 15분간 적용해본다. 
매 세션이 끝나면 마법 다이어리에 그날 작업한 주제와 몸에서 느낀 감각을 기록해볼 것을 권한다. 해당 주제에 대해 어느 정도 흥분되었는지 또는 기분 좋은 해방감을 느꼈는지 기록한다. 떠오른 통찰이 있다면 그것도 적는다. 
저항이 느껴진다면 그 저항이 하는 얘기를 살펴본다. 쾌락을 온전히 느끼도록 허용하지 않는 '타당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항이 하는 얘기가 과연 진실일지 살짝 의심하는 눈초리로 명상 작업을 한다.

- 2) 죄책감 작업
아마도 실존적 변태 수업에서 흥분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장벽은 무의식적 즐거움에 대한 큰 죄책감으로서, 이때문에 우리는 몸을 움츠리게 되고 결과적으로 즐거움을 느끼거나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걸 거부하게 된다. 
특히나 죄책감같이 잘 떨어지지 않는 불쾌한 느낌의 경우 그것의 기저에 깔려 있는 순수하고 변태적인 욕망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조사해보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그 느낌을 ... 

 

- 다음 날 아침 나는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나는 상호의존적 관계를 즐기지 않는 척하는 태도를 이제 그만두겠어. 상호의존적 관계를 즐겨도 된다고 스스로에게 허락하겠어." 나는 계속해서 허용하고 허락했다. 그 상태에 오래 머물수록 내 몸에서 느껴지는 쾌감은 더욱 짙어져 나는 자위하기 시작했고 절정에 올랐을 때 이렇게 외쳤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즐겨도 돼! 나는 내가 원하는 쾌락을 모두 즐길 수 있어! 그게 어떤 형태이든!" 그러자 크나큰 안도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의 바로 그 '타자'적인 면은 자기를 드러냈고 인정받고 존중받았으며, 그곳에 머무르던 수치심은 녹아 사라졌다. 

- 그 이후 나는 강렬한 '싫은 느낌'이 올라올 때마다 자연스레 EK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흥분하여 일종의 에너지 발산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것은 웃음일 때도, 울음일 때도, 떨림일 때도 있었으나 전반적으로는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오랜 시간 나는 가족들의 희생양이 된 것 같은 느낌에 시달렸고, 여전히 그들을 바꾸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또한 나의 재정적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는데 그 변화가 아주 미묘하여 내가 알아차리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새 고객 두 명이 어디선가툭 튀어나와준 덕에 나는 얼마간 돈을 모을 수 있었다. 고객 유치와 저축은 내가 몇 달간 노력했던 것이었다.

 

-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나 지금 잘못하고 있는 것 같아. 지금까지 다 잘못했던 것 같아! 너무 쉬웠어! 뭔가 빠트린 게 틀림없어! 변화가 너무 빨라! 그러니 내가 분명뭔가 잘못한 거야!" 그리고 나는 보았다. 초라함, 박탈, 무력함, 무기력, 창피함, 외로움, 드라마, 고통, 중독, 파괴, 고통의 경험을 창조한 나의 깊고도 장대한 욕망을. 내가 사교 모임의 파트너 대행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던 시절이 생생히 떠올랐다. 용감한 고객이 자신의 가장 어두운 욕망과 가장 수치스러운 요청을 나에게 보여주며 공유하던 그 신성한 순간들. 가장 내밀한 것을 보여주는 그들의 용기에 내가 얼마나 큰 경외를 느꼈는지가 기억났다. 나는 그들의 수치를 해소하기 위해 내가 끌어올렸던 '만사 수용의 에너지'를 기억해냈고, 살면서 처음으로 그 치유의 에너지를 나에게 주었다. 나는 나의 어둡고 파괴적이고 뒤틀리고 두려운 힘을 완전히 마주 보고 경외감과 감사함에 휩싸여 깊숙이 인사했다. 

 - 욕망을 추구할 때의 고통과 아직 이루지 못한 욕망이 주는고통(즉, 아직 남자친구를 사귀지 못했고, 소설을 완성하지 못했고, 현금이 없고, 모든 중생을 해방시키지 못한 현재의 '싫은' 상황의 고통) 모두에 대해 실존적 변태 수업을 적용해보라. 두 종류의 고통 모두 똑같이 멋있는 것이므로 나는 여러분이 이 두 개를 모두 소중히 여기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연습 2] 최악의 두려움 목록 
'최악의 두려움 목록’(Deepest Fear Inventory)의 근간이 된 개념은 메리앤 윌리엄슨 Marianne Williamson의 <사랑의 기적>(A Return to Love)에 나오는 다음의 유명하고 현명한 구절이다.

"우리의 가장 큰 두려움은 자신의 무능력함이 아니다. 우리의 가장 큰 두려움은 우리에게 측량할 수 없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거대한 힘을 지녔을 때 느끼는 강렬한 감각을 피하려고 한다. 최악의 두려움 목록은 우리가 원한다고 믿는 것을 실제로 갖는 데 느끼는 저항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EK의 효과를 높이는 탁월한 보조 연습이다. 
일단 몇 주간 최악의 두려움 목록 연습을 하고 나면, 당신이 원한다고 표면적으로 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이 잔인해서, 또는 그걸 갖기에는 내가 너무 모자라서가 아니라 원한다고 말한 것을 무수한 이유로 두려워하는, 사실은 아직 그것을 원하지 않는 나의 일면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아주 명료하게 보인다. 

- 하느님/우주/위대한 베헤모스Behemoth여(부르고 싶은 신의 이름 아무거나),


나는 -----을(를) 갖는 게 싫고 화가 납니다. (당신이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빈칸에 써넣는다.)

또는

나는 -----을(를) 갖는 걸 절대적으로 거부합니다. (역시 당신이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빈칸에 써넣는다.)

왜냐하면 ----- 이(가) 너무 두렵기 때문입니다.
 
- 당신이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고 거부하는 이유와 관련해 최소 스무 개의 두려움을 빠르게 적어 내려간다. 마지막에는 이 두려움을 없애달라고 요청하는 기도를 적는다. (예시는 아래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최악의 두려움 목록을 다 쓴 후에는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큰 소리로 읽어준다. (이 작업을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하는 친구나 파트너와 하면 좋다.) 당신의 목록을 들은 상대는 "정직하게 말해줘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한다. 이에 당신은 "들어주어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한 뒤 이 빌어먹을 것을 박박 잘게 찢은 다음 쓰레기통에 버린다. 나중에 보겠다고 갖고 있으면 안 된다.

- 그냥 그 두려움을 갈가리 찢어 폐기하라. 목록을 적은 종이를 파기하는 행위는 당신의 무의식에 "이것을 삭제하시오"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상징적인 마법 행위다. 

- 참고사항 한 가지. 만일 당신의 두려움에 다른 사람의 행위에 대해 걱정하는 마음이 포함돼 있다면, 그 사람이 그 행위를 할 때 느껴지는 감각을 "내가 그것을 흥분으로 느끼려 하지 않는다"고 표현을 뒤집어야 한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나를 미워하는 게 정말 두렵기 때문이다"라고 썼다면 "다른 사람이 나를 미워할 때의 감각을 내가 '느끼지 않으려 하는 게' 정말 두렵기 때문이다"라고 뒤바꿔야한다.

 

- 당신이 흥분으로 느끼기를 꺼리는 다른 감각들에 대해 얼마든지 자유롭게 써내려가라. 단, 다른 사람들이 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표현을 '나' 위주로 바꿔야 한다. 왜냐고? 이 연습은 결국 당신 내면에 존재하는 장벽, 당신의 거리낌, 당신의 거부를 들여다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내면이야말로 당신의 통제소가 거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 최악의 두려움 목록 예시

우주여, 저는 한 달에 1만 달러의 수입이 들어오는 것을 전적으로 거부합니다. 
· 그렇게 큰돈을 버는 감각을 내가 흥분으로 느끼려 하지 않는 게 정말 두렵기 때문입니다.
· 다른 사람들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데 나만 그렇게 많은 돈을 버는 것이 정말 두렵기 때문입니다.
· 다른 사람이 질투하거나 원망하는 감각을 내가 (흥분으로) 느끼려 하지 않는 게 정말 두렵기 때문입니다.
· 그 돈을 멍청한 데에 다 써버릴까 봐 정말 두렵기 때문입니다.

· 내가 신나서 넓은 땅을 산 다음 퍼머컬처 먹거리 숲을 짓고 아이를 갖고 싶어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정말 두렵기 때문입니다.

- 편집부 주 : permaculture. permanent(영속적인)와 agriculture(농업)의 합성어로, 자연순환의 원리에 따라 의식주, 농업, 문화, 지역과 사회를 새롭게 디자인하고 이를 실천하는 철학을 말한다. 

 

- 위에서 설명한 '최악의 두려움 목록' 기본 과정은 이 연습을 막 시작한 사람에게 가장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몇 주간 매일 이 연습을 한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은 변성 연습을 해보기를 권한다. 실제로 느끼는 두려움을 적지말고 각각의 두려움을 그것의 극단에 있는 초긍정적 속성으로 바꾼 뒤 "-----이(가) 정말 두렵기 때문이다"의 빈칸에 넣어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 돈을 멍청한 데 다 써버릴까 봐 정말 두렵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면 이것을 "그 돈을 굉장히 현명하게 써서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큰 혜택을 줄까 봐 정말 두렵기 때문입니다"라고 바꾸는 것이다. 


- 최악의 두려움 목록을 이렇게 초긍정적으로 뒤집어보는 게 크게 효과적인 이유는 분리감과 무력함에 매몰된 에고의 두려움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차원의 에고는 우리가 경이로운 기분을 느끼고 훌륭한 일을 하는 것을 사실 두려워한다. 우리가 경이로운 기분을 느끼고 더욱 훌륭한 일들을 성취할수록 에고는 이질감, 분리감, 전체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소외감을 느끼는 게 더욱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 결국 약 1년간 끈질기게 인내하고, 나 자신에 대해 최대한 정직하려 노력하고, 수치와 판단을 무수히 내려놓은 다음에야 나는 지금까지 무의식적이었던 나의 일부가 진짜로 내 가난과 가난에 딸려오는 그 모든 수모를 진심으로, 정말로 사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그 깨달음을 얻게 되었는지 설명해보겠다.

- 당시 나는 연립주택의 다락방에 살며 코치로 일하고 있었는데, 시간당 100달러를 받고 한 달에 다섯 명 정도를 주 1회 코칭하며 여전히 근근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여러 다른 코치들은 내 말에 따르면 나만큼 코칭 실력이 좋지도 않으면서 시간당 1,000달러는 거뜬히 벌고 있었다. 이 사실에 나는 기가 막혔고 화가 났다.

- 젠장, 저 사람들은 코칭에 그 정도 돈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을 어디서 찾는 거지? 나는 비영리 단체에서 일하며 기껏해야 시간당 세전 25달러를 버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자랐기 때문에 시간당 1,000달러는 도저히 청구할 수가 없는 말도 안 되는 큰 액수였다. 나는 여기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세상에는 말도 안 되게 운이 좋고 부자들과의 인맥이 짱짱한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아니구나, 하고. 그렇게 말도 안 되게 운이 좋은 사람들만이 그렇게 말도 안 되는 큰 액수를 보수로 받을 수 있고 나는 그냥 안 된다고. 하지만 "안에서 그러하듯 밖에서도 그러하다"라는 마법의 기본 금언을 잘 이해하게 된 만큼 나는 나의 돈 버는 능력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내 내면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살펴보기로 했다.
 
- 코칭비로 어마어마한 돈을 받는 내 모습을 상상하면서 나는 높은 평가를 받는 감각을 적극적으로 경험하는 연습을 했다. 그러자 심지어 더욱 기이한 것을 알게 됐다. 결핍에 대한 변태적 욕망에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흥분을 느끼고 내 소유 수준을 높이는 연습을 할수록 충만함이 느껴지면서 결핍, 굴욕에 대한 변태적인 갈증이 깔끔하게 사라진 것이다. 그냥 떠나버렸다. 

- 나는 빈 통장 잔고를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는 법을 잊었다. 내 가난은 변태적 욕망으로든 슬픔으로든 더 이상 나와 조금도 관련 있는 것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코칭비로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을 받는 것에 대해 생각해도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느껴지거나 겁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흥분이 느껴졌다.

- 플라톤의 <향연>에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스승인 고급 창부 디오티마의 말을 빌려 에로스의 본질에 대해 논한다. 디오티마에 따르면 에로스는 신의 아름다움, 즉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은 미'에 대한 숭상을 상징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디오티마는 에로스를 모든 생과 아름다움이 펼쳐지는 맥락, 모든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형상 없는 맥락에 대한 사랑으로 본다


- 실존적 변태 수업에서 특정 주제에 대해 흥분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은 일반적인 아름다움(또는 아름다움의 결여)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데 성공했다는 뜻이다. 경험의 내용물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은 더 넓은 의미의 미, 맥락, 당신 자체인 근원의 사랑에 마음을 열게 됐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당신은 단순한 지적 수준이 아닌 깊고 짜릿한 몸의 방식으로 더 폭넓은 아름다움을 받아들이게 된다.

- 실존적 변태 수업의 이 기본 과정에 익숙해지면, 즉 아주 깊은 차원에서 '추함'에 흥분하여 그것이 더 이상 추하다고 느껴지지 않고 전체의 사랑스럽고 재미있는 일부분으로 인식되면, 당신이 밟아야 할 다음 단계는 당신의 삶이 이미 얼마나 멋진가를 느끼고, 받아들이고, 이 사실에 진심으로 흥분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허용하는 것이다. 

- 맞다. 지금 잘못 들은 게 아니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식상한 '감사'나 '고마움'을 말하는 게 아니다. 영혼을 뒤흔들고, 심장이 쿵쾅거리고, 성기가 욱신거리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수용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 좋은 일에 흥분하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실존적 변태 수업에서 이 다음 단계를 '연습'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 인간 대부분이 사실은 삶의 아주 강렬한 쾌락의 감각, 즉 친밀함, 창조적 영감, 시간과 돈으로 가치를 인정받기,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 등을 어떻게든 회피하려 들기 때문이다. 이 강렬하고 경이로운 감각을 어떻게든 느끼고 싶지 않은 우리는 주로 걱정, 의심, 비판, 불평, 분노, 짜증 등을 사용해 마음을 닫는다.

- <소유 수준을 확인하는 간단한 방법>
잠시 눈을 감고 현재 상태를 충분히 느껴본다. 
무언가에 분한 상태인가? 자기 자신이나 타인을 평가하고 있는가? 걱정이 있나? 세계정세를 비판하고 있나? 당신의 몸이나 일이나 삶에 대해 불평하고 있는가? 
혹시 이 평가와 불평과 비판과 분노의 유일한 이유가 당신으로 하여금 진정한 행복, 사랑받는 기분, 제대로 대접받는 느낌, 창조적인 영감 등을 느끼지 못하게 하려는 것은 아닐까? 

"아니, 아니, 아니야. 물론 나는 비판하고 비평하고 비판해. 하지만 내가 그러는 건 끔찍한 일이 나에게 일어났고, 지금 이순간에도 전 세계 모든 곳에서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있고, 더 끔찍한 일이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기 때문이야." 

물론 그렇다. 우리 모두는 큰 상처를 입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소름 끼치는 방식으로 상처받고 있고, 언제고 갑자기 상처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상처는 맥락의 일부, 오페라의 일부이다. 당신은 상처도 아니요, 감정적인 반응도 아니요, 내용물도 아니다. 그 누구도 아니다. 우리는 모두 맥락, 오페라하우스 그 자체다. 

- 물론 이것은 소화하기가 쉽지 않은 큰 깨달음이다. '위대한 작업'을 이해하고 그 깨달음을 충분히 체화하는 것은 평생을 걸어야 하는 대형 프로젝트다. 하지만 당신은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서 시작할 수 있다. 어떤 일이든 그 후방에서 벌어지는 맥락적 과정에 훨씬 더 적극적인 관심을 쏟고 겉으로 드러나는 내용물에 대해서는 신경을 덜 쓰면 된다. 
이를 위한 한 가지 방법은 눈을 감고 현재 상태를 가늠한 뒤, 앞서 한 질문처럼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다.

"혹시 이 평가와 불평, 비판, 분노는 나로 하여금 진정한 행복, 사랑받는 기분, 제대로 대접받는 느낌, 창조적인 영감 등을 회피하게 만들려는 목적밖에 없는, 무의미한 기제 아닐까?"

당신이 비참한 기분에 휩싸여 있을 때는 당신이 비참함을 느끼는 내용물이 정말 진짜 같고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거기에 고유한 의미가 전혀 없다면? 당신이 어떤 문제에 매달려 있건 그것은 그저 당신이 원래 느낄 수 있었던 충만함과 거대한 쾌락에 무감하도록 만드는 수단에 불과하다면? 

- 힌두교 신비주의에서는 궁극의 실재에 대한 주관적인 인식을 삿-칫-아난다 Sar-chit-ananda라고 부르는데, 번역하자면 '존재, 의식, 지복'을 뜻한다. (참고사항: 나는 이 세 개의 상태가 '이니시에이션 마스터'인 텔레타르크와 대응한다고 감히 생각해본다. 피스티스는 존재, 알레테이아는 의식, 에로스는 지복). 

- 지난 수천 년간 수없이 많은 요기들이 존재의 근본적인 속성은 지복(즉 에로스, 쾌락 즐거움)이라고 주장해왔는데, 만일 당신이 나처럼 이들의 경험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지복이 느껴지지 않을 때마다 당신이 현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의심해볼 만하다. 

- 즉, 당신이 경험한 내용물이 끔찍하게 느껴진다면, 우울하다면, 기운이 쭉 빠진다면, 자기연민에 갇혀 허우적거리고 있다면, 당신이 현실의 어떤 요소를 부정하고, 억압하고, 도망치려 하는지 정말 진짜로 호기심을 갖고 찾아보기를 권한다.

- [연습 9] 자기 몸에 만족하는 법 
지금 당신이 어떤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고 해보자. 혹은, 이보다 좀더 복잡한 경우로 당신이 본인의 육체와 관련해 어떤 감정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고 해보자. 당신은 몸의 생김새가 마음에 안 들 수도 있고, 노화에 좌절하고 있을 수 있다. 이 신체 관리 문제와 자기 몸에 만족을 느끼는 과제는 육화의 여러 면면들 중에서도 확실하게 짜증 나는 부분 중 하나다. 이 루프를 중단할 수 있는 방법은 고통을 개인과 관계없는 것으로 경험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고통을 개인과 관계없는 것으로 경험하는 법을 배우기 위한 아주 유용한 도구 중 하나가 통렌 Tonglen 명상이다. 
통렌은 티베트 불교의 수행법이다. 현재의 달라이 라마는 통렌이야말로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탄트라 수행법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당신은 자신과 파트너가 입에서 불을 뿜는 팔 여덟개 달린 빛나는 신이라고 상상하면서 섹스하는 게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탄트라 수행법일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아니다. 그 위대한 달라이 라마가 말씀하시길 통렌이라고 했다. 

통렌은 '받아들이고 내보낸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타인이 짊어진 고통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행복과 행운, 좋은 바람 등을 타인에게 보내는 수행법이다. 이것이 탄트라 수행법인 까닭은 탄트라의 본질이 결국 에너지 변성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탄트라는 연금술과 동일하다. 동양의 전통에서 탄트라라고 불리는 것을 서양의 비전에서는 연금술이라고 부르는 셈이다. 

통렌은 고통과 괴로움의 에너지를 연민, 연대, 그리고 사랑으로 변성시킨다. 세상에 나와 있는 통렌 수행 방법은 아주 다양하다. 샴발라 Sambhal. 교사인 페마 초드론 Penna Chedro의 아름다운 방법은 온라인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내 버전은 다음과 같다. 

- <통렌 명상>
지금 느껴지는 고통을 알아차린다. 이것은 몸 어딘가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통증일 수도 있고, 자신의 육체를 어떤 식으로든 못마땅해하는 데서 오는 감정적 고통일 수도 있다. 


잠시 시간을 갖고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느끼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것을 느끼는 전 세계 수천만 명의 사람들을 상상해보라. 
섬유근육통에 시달리는 사람, 위산 역류에 시달리는 사람, 어깨 통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수천만 명이다. 몸매와 몸무게와 관련해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이 수천만 명이다. 당신의 구체적인 고통을 공유하는 이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불러오라. 

당신이 영웅의 마음으로 이 사람들의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기꺼이 경험하겠노라고 결심하라. 가없는 의지 속에서 한 치의 주저함이나 물러남 없이 모든 감각을 그대로 다 경험하겠다고 결심하라. 

천천히 숨을 들이마신다. 숨을 마실 때, 당신과 똑같은 괴로움으로 고통받고 있는 주변 및 전 세계 수천만 명 사람들의 '이 아픔' 또는 '이 수치심'으로 가득한 차갑고 짙고 무거운 연기를 들이마신다고 상상하라. 

당신은 그들이 고통을 겪지 않도록 이들을 대신해 고통을 들이마시고 그것을 온전히 경험한다.
이 고통에 대한 모든 저항, 분노, 거부를 내려놓고 고통에 마음의 문을 활짝 연다. 


잠시 숨을 참는다. 숨을 참는 동안, 차갑고 독한 연기가 당신의 심장 주변을 감싸고 있는 연한 껍질을 녹이고 있다고 상상한다. 타인의 고통으로 껍질이 녹아버린 당신의 심장은 이제 말랑말랑하고, 속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고, 황금빛으로 빛난다. 
그 황금빛이 당신이 방금 들이마신 차갑고 시커먼 고통의 연기를 변성하고 정화한다고 상상하라. 

천천히 숨을 내뱉는다. 숨을 내뱉을 때 따스한 황금빛 치유의 빛이 심장에서 쏟아져 나와 호흡을 타고 올라와서 당신과 똑같은 육체적 고통과 괴로움을 겪는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을 어루만진다고 상상하라. 

몇 분간 평소대로 호흡하면서 이웃과 전 세계 사람들이 당신의 맨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황금빛으로 치유되고 따뜻해지고 행복해지는 모습을 심상화한다. 

몇 분간 당신과 동일한 불행을 공유하는 모든 사람들이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모습을 바라 보았다면, 다시 한번 당신이 느끼고 타인이 느끼는 고통으로 가득한 차갑고 짙은 검은 연기를 깊이 들이마신다. 

다시 한번 잠시 숨을 멈춘 다음, 당신의 말랑말랑한 맨 심장이 흘려보내는 전류에 의해 짙은 검은색 연기가 황금빛으로 데워지고 정화되고 변성되는 장면을 심상화한다.

다시 한번 숨을 내쉬면서 그 뜨거운 치유의 황금빛을 당신과 동일한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낸다.
그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심장이 기쁜 마음으로 퍼뜨리는 이 황금빛으로 더욱 치유되고, 더더욱 행복해지는 모습을 관찰하라.

씻어내고, 반복한다. 

- 통렌 한 세션에 들이마시고 내보내는 호흡을 총 열 번 하는것을 목표로 한다. '들이마시고 내보내는 호흡'부터 정상적으로 호흡하며 타인을 치유하는 상상을 하는 것까지 충분한 시간을 들이라.

- 일주일 정도 통렌 수행을 하고 나면 힘든 고통이 주의를 끌 때마다 깊고 부드러운 연결감이 느껴지기 시작한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이 깊고 부드러운 연결감 덕에 당신은 본인의 고통을 더욱 평화롭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 고통이 나만 혼자라는 소외감을 느끼게 했다면 이제 당신은 고통을 이용해 사람들과 더 깊은 연결감을 느끼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 통렌은 그림자 통합 작업을 돕는 수행 방법으로서 대단히 훌륭하고 사실 EK -이 책에서 설명하는 핵심 연습- 와도 비슷하다. 두 방법 모두 저항이나 분노나 두려움이나 수치심없이, 동일한 고통을 지닌 모든 다른 존재들을 대신해 가히 영웅처럼, 유머러스하고 친절한 태도로 모든 고통을 있는 그대로 용감하게 느낄 수 있게끔 용기를 내게 만들기 때문이다. 

- 당신은 이렇게 물을 수 있겠다. "통렌으로 진짜 사람이 치유되나? 내가 내쉬는 황금빛으로 다른 사람들이 치유된다고 상상하는 건 자기기만 아닌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통렌 수행은 '당신'을 치유한다. 그리고 당신이 치유될수록 당신은 주변 사람들이 더욱 치유되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오직 치유만이 치유를 알아볼 수 있다.  안에서 그러하듯 밖에서도 그러하다.
그러니 맞다. 통렌은 우회적으로 타인을 치유한다. 통렌을 수행할수록 고통과 괴로움은 '내가 유달리 잘못되고 나쁘고 가치 없음을 증명하는 나의 고통과 괴로움'이 아닌, 그냥 '고통과 괴로움'으로 경험된다. 고통과 괴로움을 개인적인 것이 아닌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하면, 그것은 더 이상 "이런 나라서 고통과 괴로움을 겪어도 싸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즉, 당신이라서 끔찍하거나 훌륭한 게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당신은 흔해 빠진 양배추처럼 흔해 빠진 인간에 불과하다.

 

- 이 말이 "당신은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처럼 약간 슬프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당신의 진짜 힘, 진짜 특별함,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실제 능력은 자신의 '흔해 빠짐'을 아주 깊은 차원에서 이해하고 즐길 때 나온다. 

- '개성화'라는 뜻의 individuate는 '나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의 라틴어에서 파생된 단어다(in은 부정을 뜻하는 not, dividuate는 나뉘다라는 뜻의 divided이므로 individuated는 나뉠 수 없다'는 뜻이다). 즉, 개성화란 전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의 전체? 모든 것을 포함하는 전체다. 

- 개성화가 진행될수록 당신은 나누는 것이 불가능한 통일체(모든 다른 인간과 세상만사가 하나 된)로서의 자기 자신을 점점 더 깊게 이해할 것이다. 어떤 면에서 지금까지의 생각을 뒤집는 발상이지 않나? 게다가 당신은 '개별(individual)'이 '유일'을 뜻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다. 그것은 '불가분'을 뜻한다. 그런데 기묘한 것은(이미 알아차렸을지 모르겠는데 사실 마법과 관련된 모든 것이 기묘하고, 퀴어스럽고, 비이원적이고, 다면적이다) 통일체와 '흔해 빠진' 인간성은 당신을 통해 자기 자신을 독특하게 표현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바로 그 독특함이 당신의 개성이다. 

- 위대한 현대 무용가 마사 그레이엄 Martha Graham은 이렇게 말했다. "어떤 활기, 생명력, 에너지, 태동은 당신을 통해 행동으로 옮겨진다. 그리고 당신이란 사람은 영원히 단 한 명뿐이므로 이 표현은 유일무이하다. 당신이 그것을 막아버리면 그것은 다른 매체를 통해 존재할 수 없게 되므로 영원히 사라진다."

 

- [연습 10] 사랑 낙제생에서 탈출하는 법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에 젬병이라는 사실, 적어도 조금은그렇다는 사실은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진리다.
그보다 덜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진리는 우리의 파트너(또는파트너가 없는 것)는 우리가 언제나 무의식적으로 원하는 바로 그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미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하고 있지 않았는가? 
저 우주의 창공에서 한목소리로 울려 퍼지는 코러스가 들리는 듯하다.
"아, 아니에요, 캐럴린. 이해를 못 하시네. 내 파트너(또는 내전 파트너)가 하는 이런저런 끔찍한 일을 절대 내가 어떤 식으로든 원했을 리가 없어요."

- 하지만 수많은 탐구와 숙고 끝에 나는 내가 사실은 그의 통제와 폭력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했다. 그는 나를 마치 헤로인 하는 사람이 언제나 헤로인에 손댈 수 있게 공급책을 관리하는 것마냥 다루었는데, 이때 느껴지는 내가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너무 좋았다. 우리가 미친 듯이 싸울 때 나는 숨이 막히고 어질어질한 깊은 압박의 감각을 음미할 수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을 속박하기 위해 그를 이용했다. 그렇게 하면 나를 들여다볼 필요가 없었고 그가 없는 세상을 탐색해야 하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 내가 그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은 한편으로 그 사람과 그의 폭력적인 통제를 원망하는 즐거움이 컸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끔찍한 사람이라서 이렇게 끔찍한 관계밖에 가질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에 만일 내가 끔찍한 사람이 아니게 되면 그때 그를 떠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끔찍한 사람인 한, 나는 그와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나았다. 아무리 소유욕 강하고 폭력적인 사람일지언정 그와 있는 게 외로운 것보다는 좋았으니까. 

- 그래서 나는 끔찍한 사람이 되지 않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끔찍한 사람이 되지 않고자 노력하는 것 자체가 대개는 자신이 끔찍하다는 사실을 더욱 명확히 방증할 뿐이었으므로. 

- 나는 거대한 미지의 세계를 직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질투심 많은 통제광인 남자와의 억압적인 관계를 이용해 나를 속박하는 게 너무 좋았다. 나는 그에게 묶여 있었다. 나는 내 손으로 본디지를 내 몸에 감고 있었다.

 

- 마침내 "내가 끔찍한 애이기 때문에 이런 끔찍한 관계밖에 가질 수 없는 거야"라는 논리가 진실이 아님을 자각하게 되자 다음과 같은 깨달음이 왔다. "내가 이렇게 끔찍한 관계에 매여있는 건 내 무의식이 그만큼 변태적이기 때문이고, 행위 주체 외부의 악마에 의해 광적으로 통제되는 느낌을 내 무의식이 진짜로 은밀하게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훨씬 더 진실에 가까운 말이었다. 이 진실을 깨닫게 된 순간 내 몸에 거대한 공간이 열렸다. 

 

- 나는 3과에서 설명한 실존적 변태 기본 명상을 연습했다. 나는 폭력적으로 통제당하는 것에서 느꼈던 무의식적인 쾌감을 의식적으로 느끼고자 했다. 그 쾌감이 나를 흔들고 흠뻑 적실 수 있게 깊이 호흡하며 있는 그대로 깊숙이 받아들였다. 찌릿한 전류가 파도처럼 밀려와 나를 흔들었다. 나는 '흥분'했다. 그러자 얼간이처럼 굴었던 폭력적이고 통제적이었던 그가 더 이상 증오스럽거나 밉지 않았다. 그리고 분노라는 감미로운 접착제가 없어지자 그 관계가 더 이상 재미가 없어졌다.

- 나는 그에게 작별인사를 했고, 그는 나에게 물건을 몇 개 던졌으며, 나는 인도네시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자신의 혼자됨에 관해 숙고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장소인 발리 우붓 Ubud의 아파트(엘리자베스 길버트 Elizabeth Gilbert, 팁 고마워요)에서 나는 나를 진정으로 성장시키고 변화시킬 수 있는 제대로 된 친밀한 관계를 회피하고자 하는 무의식적이고 억압된 은밀한 욕망이 내게도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 나는 내가 사랑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잔인한 운명을 타고났다고 오랫동안 생각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거부당하거나 집착이 강한 멍청이에게 상처를 입을 때마다 내 팔자가 이러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결국 나는 나의 그림자적인 면이 사실상 깊이 충족되고 있었음을 인정했다.  

- [연습 11] 나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고 척하는 것 그만두기 
"깨달음은 빛의 형상을 상상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의식화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라고 우리의 오랜 친구 융은 자주 말했다. 지금쯤이면 다 알겠지만 나는 융의 이 견해에 전심으로 동의한다. 이것이야말로 이 책 내내 우리가 연습한 내용의 핵심이다. '어둠'을 의식으로 만드는 작업은 끝이 없는 프로젝트지만 그래도 깨달음을 지금 이 순간에 즐겨보는 건 재미있는 일이다. 

당신은 궁금할 수 있겠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 나만의 경험을 창조하는 것과 깨달음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깨달음이 마법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간단하게 말하자면 모든 마법의 종착역은 결국 깨달음이다. 마법은 결국 무의식의 숨은 진실과 소통하고 이를 통합함으로써 존재의 오랜 방식을 녹이고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을 만드는 원리의 시적인 비유, "위에서 그러하듯 아래에서도 그러하다. 안에서 그러하듯 밖에서도 그러하다"의 벅찬 진실을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다. 

 

물리적 세계 전체와 그 세계에 속한 당신의 육체가 무의식의 영역이라는 말을 잠시 숙고해보자. 
그렇다. 당신은 물리적 세계를 자각하고, 감각을 통해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물리적 세계는 '의식적'이다. 

 

- 결국 당신은 수세에 몰린 작은 에고 자아와의 동일시를 점점 멈추고 모든 현실, 모든 육체, 모든 시공간에 거하는참자아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점점 더 깊게 깨닫게 된다. 이것이 깨달음의 과정이다. 그러니 한 번 씩 웃고 잘 음미해보라. 

- [연습 12] 고문의 기술을 제대로 이해하여 다른 사람 고문하는 걸 멈추기
실존적 변태 연습에서 흔히들 걸려 넘어지는 부분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습관이나 행동에 대해 연습할 때다. 어쨌든 우리는 영적이고 민감하며 성장지향적인 사람인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싶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수치나 죄책감 때문에 그러한 패턴을 즐기지 못하고 수용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그 패턴을 계속해서 반복하게 될 공산이 크다. 해당 패턴을 추동하는 그림자적 충동은 계속 억압된 채로 머물러 있을 것이 고, 욕망은 온전히 인정하고 즐길 때보다 억눌렀을 때 행동을 유발하는 힘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영적이고 성장지향적인 사람들 사이에 흔한 예가 하나 있다. 당신이 모든 약속에 언제나 30분 정도 늦는다고 해보자 .자, 당연히 지각은 당신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창피한 일이다. 지각하는 습관 때문에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고 관계가 파토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에 대해 EK를 하다 보면 당신은 언제나 늦고 싶어하는 자신의 강박 기저에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게 만들고 싶고, 다른 사람보다 자신의 욕구를 더 우선시하고 싶고, 나를 중요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그림자적 욕망이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당신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 너무 이상하잖아. 난 이런 거에 흥분 못 해. 여기서 내가 흥분하면 난 완전 반사회적이고 자기애적 인간이 되는걸."

하지만 이 말은 틀렸다. 우리 사회에서는 반사회적이고 자기애적인 행동을 가리켜 구분 없이 "부끄러움을 모른다”고 말하지만 진짜 반사회적 자기애를 가진 사람들은 신경증적 수치심에 짓눌린 나머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감정적으로 공감하지 못하고 심지어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싶다는 본인의 진짜 욕망조차 느끼지 못한다. 이렇게 공감이 결여된 것은 진짜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것은 해방적이며 가능성을 열어젖힌다)과는 '정반대'다. 오히려 공감을못하는 것은 수치심에 압도되어 자신을 닫아버리고 스스로를 마비시킨 결과다. 다른 사람을 불쾌하게 만드는 패턴에 대해 흥분한다는 것은 해당 상황에서 느껴지는 감각과 그 기저의 인간적 욕망을 진짜 부끄러움 하나 없이 온전히 있는 그대로 느껴본다는 뜻이다. 

-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게 만들고 싶다는 욕망은 '권력에 대한 욕망'이다. 
이와 유사하게 (당신에게 있을 수 있는 다른 일반적인 패턴을 말해보자면) 파트너의 관심을 끌려고 싸움을 거는 욕망, 소셜미디어에서 사람들을 조리돌림하는 욕망, 직장에서 기선 제압을 위해 동료를 헐뜯는 욕망 모두 권력에 대한 욕망이 우회적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 이러한 권력 욕망, 주변 세상에 영향을 끼치고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이 욕망은 대단히 정상적이고, 사랑스럽고, 흔해 빠진 인간의 욕망이다. 당신에게 이러한 욕망이 있다는 사실은 당신이 그렇게 악마 같은 인간이라는 뜻이 아니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뜻이다. 

- 자신의 권력욕이 아주 멋질 뿐 아니라 진짜 놀라울 것 하나 없는 평범한 욕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겸손하지 않은 인간들은 보통 수동공격적(passive-aggressive)인 행동이 촘촘하게 수놓아진 '좋은 사람' 페르소나로 이것을 숨기거나 억누른다. 혹은 이 기본적인 욕망을 거창한 억울함과 섞어서 "모든 악의 무리들을 처단할 수 있도록 나는 권력의 정상에서야 한다! 나는 최후의 방법 (Final Solution)을 시행할 것이다!"라는 식의 아무 논리 없는 합리화를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 혹은 이 두 기제를 다 사용하는 사람 중에는 평생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착한 남자'였던 자신이 잔인한 여성들의 꾐에 넘어가 이렇게 됐다며 이 여성들을 벌하기 위해서는 다 죽여야 한다는 식의 선언문을 쓰고 무차별 총기 난사를 하기도 한다. 

 

-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권력욕에 대한 모든 비인간적인 반응은 그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충동을 무감함으로 왜곡하는 결과를 가져오는데, 영웅의 진정한 권력이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사기를 고양시킨다면 이러한 마비는 사람들을 짓누르고 제압한다. 

 

- 만일 당신이 지금까지 억눌려 있던 권력 욕망을 과감하게 내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의도치 않게'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치거나 불쾌감을 주며 은밀히 즐겼던 강렬한 쾌감을 의식적으로 음미한다면, 당신은 자신에게 이런 욕망이 있다고 하여 파시스트 살인자가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오히려 이 덕분에 당신은 내 것과 완전히 똑같은 권력욕을가지고 있는 세상의 모든 다른 끔찍한 인간들이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연민하게 된다. 또한 묶여 있던 의식과 에너지가 해방되기 때문에 권력욕을 비뚤어지고 수동공격적이고 분노에 찬 방식으로 표출하는 대신, 어떻게 하면 자신의 힘을 멋지고 활력 있게 세상에 발휘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 [연습 13] 재미도 있고 돈도 딸려오는 '멋진 것을 무서워하는 법'

이 책은 마법 공식인 '용해와 응고(solve et coagula)' 중 대단히 중요하지만 사람들이 잘 모르는 '용해' 부분을 중점적으로 다루고있다. 여기서 소소한 '응고' 방법 하나를 여러분께 소개하겠다. 

현실 마법에서 말하는 대부분의 지침을 보면 노력하면 결과가 좋을 것이라고 신념이나 믿음을 가지라고 격려한다. 하지만 만일 당신이 나처럼 긍정적인 결과를 기쁜 마음으로 믿는데 영 꽝이라면? 당신의 두뇌가 냉소와 두려움에 맞춰져 있다면? 지금까지의 인생이 너무 굴곡져서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모든 게 장밋빛으로 변한다는 걸 믿기가 어렵다면? 

자, 여기 그것을 돌려놓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결과를 믿는다는 것은 결국 확실성의 감각을 갖는 것이다.
당신은 부정적인 일에 대해서는 분명 그것이 일어날 것이라는 확실함의 감각을 갖고 있는데, 이런 감각을 느끼는 데 사용하는 발달이 잘된 뇌 근육을 이제는 긍정적인 결과에 대한 확실함을 얻는 데 써보는 것이다. 

방법은 이렇다. '멋진 것을 무서워하라'.

당신이 마법으로 얻고 싶은 것이 신년을 함께 할 멋진 애인을 사귀는 것이라고 해보자. 이제 물질화를 가르치는 대부분의 평범한 교사들은 당신에게 다음과 확언을 스스로에게 되뇌라고 가르칠 것이다. 


"나는 최고의 선을 위해 영혼의 진정한 파트너를 받아들이겠다고 확언합니다. 이 놀라운 사람과 함께 할 사랑을 생각하면 행복합니다. 이제 나는 새로운 사랑을 받아들입니다."

음. 어떤가. 이런 게 통했는가?
내 경우를 한번 생각해보면... 아니, 통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신도 알다시피 그러한 긍정적인 확언을 했을 때 내면에 갈등이 일어나거나 무의식적인 저항이 발생하면(분명 그럴 거라고 거의 확신한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원하는 결과를 진즉에 물질화했을 것이므로) 당신은 무의식적으로 그러한 행복한 것들을 바로 무효처리 해버린다. 


표면적으로는 그것에 대해 아무리 심상화를 하고 확언을 해도 당신은 그것을 허튼소리로 치부하고 실제로는 딱히 믿지 않는다.
흔히들 가르치는 '긍정적인 결과가 생기리라고 믿는 것'에는 기이한 부정의 요소가 들어 있다. 긍정을 믿는 것은 대놓고 솔직한 것만큼 효과적이지 않다. 정직이야말로 최고의 방책인데, ‘멋진 것'을 두려워해보면 당신은 자신이 원한다고 생각하는 행복한 결과를 사실은 경멸하는 솔직하고 무의식적인 당신의 일면을 끄집어낼 수 있게 된다. 

구체적인 방법은 이렇다. 다음의 말을 스스로에게 해보면서 당신의 두려움을 드러내보라.
"아 세상에, 내 인생에 이렇게 멋진 새 파트너가 생길 수밖에 없는 이 필연을 막을 수만 있다면! 이거 너무 끔찍한데, 이제 내가 좋아 죽는 섹시하고 건강하고 제정신인 애인이 생긴 거잖아. 끔찍하기 짝이 없는 일이야. 내 독신 생활이 이렇게 비극적으로 단칼에 끝나다니 정말 슬퍼. 이 새로운 사랑 앞에서 나는 너무 무기력하군. 이 일이 피할 길 없이 일어나리라는 사실을 난 그냥 알아. 어휴. 사랑 속에서 완벽하게 충만함을 느끼는 이 가혹하고 무서운 운명에서 어떻게든 벗어날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네."

아아아아, 당신, 이 말에 담긴 솔직함이 느껴지는가? 
상쾌하지 않나?
멋지고 새로운 연인이라는 개념 자체를 역겨워하고 치를 떨어대는 어떤 그림자적인 면모가 당신에게 있지 않나?

그렇지 않았다면 당신은 진즉에 빛나는 사랑의 등대가 되어 만나자마자 이글이글 타오르는 상대와 사랑에 빠졌을 것이다. 당신도 바로 그 빛나는 사랑의 등대가 될 수 있다. 새로 사귄 우리 '자기'라는 생각 자체에 치를 떨며 격렬하게 증오하는 일면을 포함해 당신의 모든 부분을 포용하고 수용할 의지만 있으면 된다. 

- 물론 '멋진 것을 무서워하기' 원칙은 적용할 수 있는 대상이 무궁무진하다. 엄청나게 좋아질 수밖에 없는 건강, 휘몰아치는 창조력, 커리어와 사업의 급부상 등으로 먼저 시작해보자.


 

- 실존적 변태 수업은 나로 하여금 세상이 자존감 문제라고 진단하는 것의 뿌리에 가닿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수년간 치료사들은 내가 나를 제대로 내세우지 못하고, 너무 소심하며, 필요할 때도 내 의견을 피력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이러한 문제의 원인으로 부모님을 소환하거나 "목소리를 내는 게 너 자신을 존중하는 태도다"라고 말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 조언은 사실상 별 도움이 안 됐다. 그저 내가 나약한 사람이구나 생각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모든 것을 차치하더라도 내 부모님은 상당히 좋은 분들이셨다.) 

실존적 변태 수업을 시작했을 때 사실 나는 내 '자존감 문제'에 이것을 적용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나는 수년간 마법을 공부했지만 그것을 내 삶에 잘 적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고 의식(ritual)을 해도 삶은 시시하게 느껴졌고 어떻게 해야 달라질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EK를 시작하면서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내 모습 또는 마법 없는 삶을 사는 척하는 모습과 관련해 여러 다른 '터치’를 무수히 시도해보았으나, 사람들이 말하는 찌릿한 전율 같은 건 전혀 경험하지 못했다. 몇 주간 노력해도 별다른 성과가 없어서 나는 이 과정이 내게는 안 맞는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실마리가 풀린 건 파트너와 싸우면서였다. 다행히도 나는 EK가 머리에 박혀 있을 만큼 (매일)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좋아하지 않는 모든 순간에 EK 원리를 적용시킬 수가 있었다. 

이제는 왜 싸웠는지도 모를 말다툼(이유는 사실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끝에 나는 다시 내 의견을 굽히고, 내 욕망을 내려놓고, 파트너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내 계획은 포기해버렸다. 예전 같았으면 나 스스로에게 넌더리를 내거나 약해 빠졌다며 자기비하에 빠졌을 상황이었는데 이번에는 이완하여 그 느낌을 그대로 느꼈고, 그것을 즐겨도 된다고 스스로에게 허용했다

그리고 진짜 즐기는 데 성공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결정에 투항하는 순교자가 되는 게 좋아"라는 생각이 떠오르면서 놀라우리만치 선명한 육체적 쾌락이 나를 휩쓸고 지나갔고 머리가 맑아졌다. 

육체적, 정서적, 지적 수준에서 나는 다른 사람들의 신념과 욕망에 묶여 있는 상태를 즐겼다. 그것은 나에게 "내가 옳다"는 느낌을 주었고, 나는 그들이 나를 피해자로 만든 것에 죄책감을 느낄 때마다 어마어마한 쾌감을 느꼈다. 나는 “내 말이 맞았지?"라고 말하는 걸 솔직히 하나도 싫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의견을 내세우면 순교자의 행복을 경험할 수 없게 된다. (알겠나, 치료사들? 이건 자존감 문제가 아니다.) 

이 깨달음 이후 나는 이런 패턴이 등장할 때마다 이를 더욱더 명료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자 언제 이 패턴에 흠뻑 빠질지(그렇다, 당신은 진짜로 제대로 빠져볼 수도 있다), 언제 내려놓을지를 선택하는 게 훨씬 쉬워졌다. 

 

- 이렇게 하면 나는 자유롭게 흐름을 따라갈 필요가 없었고 마음을 열고 솔직하게, 순수하게, 그리고 가슴으로 인생을 살 필요가 없었다. 취약해질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강한 통제적인 면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이 부분을 다른 사람들에게 투사했고, 그 결과 나는 과거의 관계에서 지나치게 통제당한다고 느꼈으며, 그 강도는 연애가 반복될수록 더더욱 심해졌다. 

-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자신감이 생겼고, 흥분되고, 즐겁고, 현실감이 더욱 강해지고, 감사하고, 자비심과 자기 자비가 넘친다. 나는 언제나 무력하다고 느꼈지만 재미있는 건 나는 분명 내내 힘을 행사했다는 사실이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게 우리에게는 언제나 힘이 있다. 단, 이것이 우리의 그림자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표현될 경우 언제나 문제를 일으킬 뿐이다. 나는 감사하게도 내 그림자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감사함과 수용은 우리의 가장 어두운 자아 안에 숨어 있는 진실을 사랑하게 될 때 비로소 얻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평생을 반복해온 패턴을 깊게 탐구하고 나자 과거의 그 상황들이 마치 다른 사람의 인생인 것처럼 멀게 느껴진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그 말이 사실이다. 

 

- 그렇다면 다른 터치를 시도해봐야지. "나는 이 결혼식에 가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받아들이고 인정한다." 
그러자 따스한 붉은 화염이 가슴에서 치솟았다. 뿌듯한 만족과 안도감이 가득 번졌다. 어찌나 놀랐던지 소리가 절로 나왔다.

 

- 너무 자명했다. 우리는 언제나 마법을 부리고 있다. 몸을 휩쓸고 지나가는 강렬한 쾌감 덕에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이 좌석 부족 문제는 내가 만든 것이다. "내가 그런 거야." 홍조가 오른 뺨을 가리기 위해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었다. 교통안전청 앞에서 흥분한 티를 내는 건 좋지 않았다. 남편은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 탓이 아니야. 망할 놈의 항공사 때문이지. 고객 서비스가 이렇게 엉망이어서야..." 나는 남편 말을 무시했다. (내 순교자 콤플렉스를 깨닫게 된 후 남편 말에 신경 끄는 걸 더 잘하게 되었다.) 나는 심장 바로 아래 부근에서 열기를 뿜고 있는 따스한 불꽃에 집중했다. 

- 나에게는 주말에 보내는 시간이 너무나 소중했다. 아침에 일어나 침대에서 빈둥거리며 책을 읽는 것도 좋았고 타로 카드를 하며 내면과 대화하는 긴 오후도 사랑스러웠다. 주중에 하는 생계형 일은 다 잊어버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시간에 느긋이 하는 게 좋았다. 한밤중에 일어나 쑥차를 마시고 이후에 몽롱한 꿈을 음미하는 게 좋았다. 여행은 물 건너갔으니 이제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저절로 입술이 휘며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남편이 이런 내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고개를 돌렸다. 

- 불꽃을 크게 키웠다. 나는 이번 주말을 최고로 재밌게 보낼 참이었다. 여러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자니 아릿하게 따뜻한 기운이 가슴에서 퍼져 팔다리까지 뻗어갔다. 왜 나는 애초에 결혼식에 가겠다고 했던 걸까? 이번 주말은 나만의 시간으로 삼아 혼자 하고 싶은 일에 푹 빠져서 즐겁고 기분 좋게 보내야겠다. 잠시 짬을내어 남편과 영화를 보면서 너그러운 기분과 이용 당한다는 달콤한 느낌을 즐기는 것도 좋겠지. 그 모든 따분한 친척들을 볼 필요도 없고, 춤추기 싫다는 남편을 억지로 끌어낼 필요도 없고, 또...

 

엄마를 보지 않아도 된다. 나는 엄마를 보지 못하게 된다. 

따뜻하게 출렁이는 바다 위로 작은 얼음 하나가 떨어졌다. 불꽃이 타닥 소리 내며 튀었다. 나는 분명 결혼식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결혼식장에서 엄마를 만나는 건 기대하고 있었다. 최근 친구가 돌아가시고 친척이 투병을 하는 등 힘든 시간을 보낸 엄마였다. 내가 빠지면 그렇지 않아도 엄마의 심란한 마음이 더욱 무겁게 가라앉을 게 뻔했다. 

한숨을 쉰 나는 남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 다음 주에 약속 있어?" 남편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메건네 집들이."
"나는 안 갈래. 다음 주는 조용히 보내고 싶어."
"이해해." 남편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대신 갈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전광판을 쳐다봤다. 대기자가 40명이 넘었다. 게임판을 진짜 이렇게 촉박하게 뒤바꿀 수 있을까? 시도해본다고 손해 볼 건 없었다.

나는 내면으로 주의를 집중했다. 나는 다음 주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욕망은 충족을 통해 진화한다는데, 나는 그 욕망을 완전히 충족할 것이다. 그러니 이번 주에는 엄마를 봐야지. 나는 마음속으로 엄마를 떠올렸다. 엄마가 나를 보고 미소짓는 모습을, 나를 포옹하며 "오랜만이다"라고 인사할 때의 느낌이 어떨지를 상상했다. 

따스함이 흩어졌지만 그 중심에 있던 작은 얼음 역시 사라졌다. 얼음이 사라진 그 자리에서 나는 올이 다 풀린 어릴 적 담요 같은 부드러운 편안함을 느꼈다. 결혼식을 빼먹는 것만큼 섹시하거나 제멋대로인 느낌은 아니었지만 기분이 좋은 건 여전했다. 다음 주에 혼자 얼마든지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자 결혼식에 진심으로 가고 싶어졌다. 

이제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았으니 원하는 걸 요청할 시간이었다. 

목표 -내가 정말 정말 원하는- 에 집중하자 내면의 무언가가 달라졌다. 장난기가 느껴질 만큼 기분이 확 들뜨는 게 느껴졌다. 나는 내가 원하는 상황을 확실하게 마법으로 만들어내겠다고 결심했다. 예약이 꽉 찬 비행기에서 두 좌석을 기필코 얻어내면 기분이 정말 좋겠지. 

데스크 직원이 10분 후 내 이름을 불렀다. "한 커플이 방금 비행기를 못 탈 것 같다고 전화를 하셨네요. 손님과 남편분이 타시면 될 것 같아요." 그녀는 비상구 열에 있는 좌석 두 개의 탑승권을 건넸다. 우리가 대화를 한 이래 처음으로 직원이 웃으며 말했다.

"이 티켓은 고객님께 가야 할 운명이었나 봐요." 
"그런가 봐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나는 당근 주스, 미모사, 그럭저럭 괜찮은 시, 좋은 모녀 간의 시간으로 버무려진 주말을 보냈다. 게다가 지루한 결혼식을 내내 지키면서 가족 경조사에 끌려온 행복한 순교자로서 이용당하는 느낌도 충분히 맛보았다. 

어딘가 으스스한 아저씨 알레이스터 크로울리가 말했듯이 "마법은 내 의지에 따라 변화가 일어나게 만드는 과학이자 예술이다." 내 의지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파악해야 했을 때 길을 안내한 건 나의 깊고 어두운 욕망들이었다.



다음은 실존적 변태 연습을 처음 하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질문 몇 개를 뽑아 답한 것이다.

Q. 내가 내 삶에서 벌어지는 꼴 보기 싫은 상황을 흥분할 지경까지 즐긴다면, 나는 왜 그 꼴 보기 싫은 상황이 계속 벌어지도록 놔두지 않는 걸까요? 그렇게 좋아하는데? 

A. 당신이 그 상황을 계속 유지하겠다고 결정한다면 분명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혹은 지금까지 그 상황을 증오하고 분노하는 데 썼던 모든 에너지를 새로운 모험을 창조하는 데 투입하겠다고 결정할 수도 있겠죠. 실존적 변태 수업을 통해 삶에서 일어나는 싫은 상황을 미친 것처럼, 장난스럽게, 수치심 따위 모르는 것처럼 즐길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주체성과 의지의 회복입니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는 상황에 무력하게 붙들려 있었다면, 이제 우리는 그 상황이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창조한 변태 게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무의식적이었던 창조의 과정을 의식적으로 자각하고 크게 기뻐하며 수용할 수 있을 때(스스로를 탓하거나 수치스러워하지 않고) 우리는 꼴 보기 싫은 상황에 동일시하는 것을 그만둡니다. 그 상황이 우리를 규정짓는 것 같은 느낌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됩니다.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인간이 그 무엇보다도 더욱 극렬하게 방어하는 건 본인의 정체성이니까요.
실존적 변태 명상을 하면 이 단단한 방어의 아래쪽을 파고들어 상황을 더 나은 방향으로 돌릴 수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우리가 어떤 문제로 괴로워할 때 우리를 진짜 괴롭히는 건 문제 그 자체가 주는 직접적인 고통보다는 머릿속에서 맴도는 "나는 최악이야, 나는 완전 실패했어, 나는 이래도 싸, 내가 이래서 돈을 더 못 벌고/행복한 사랑을 하지 못하고/내 몸에 만족하지 못하고/창조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거야"와 같은 이야기들입니다. 

실존적 변태 연습을 하다 보면 "나에게는 불쾌한 상황이 벌어져도 싸다"는 머릿속 이야기가 완전히 틀린 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마땅히 겪어야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은 세상에 없습니다. 모든 일은 당신이 (어느 수준에서든) 그것을 즐기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우주는 가치의 대차대조표가 아닙니다. 우주는 예술 작품입니다. 물질화는 도덕적 기준에 맞춰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미학적 사건입니다. 

당신이 자신의 문제에 대해 어떤 활기차고 재미있고 기이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된다면 고통의 감각은 여전히 존재할지 몰라도 당신은 더 이상 "나는 그래도 싸다"는 생각으로 괴롭지 않고 그것에 매이지도 않게 됩니다.  
 

- Q. 제가 좋아하는 끌어당김의 법칙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삶에서 고통스러운 일에 초점을 맞추면 그 일이 더욱 커지고, 내가 원하는 긍정적인 일에 초점을 맞추면 그 긍정적인 일이 제게 끌려올 거라고 했습니다. 실존적 변태 수업을 하면 제 삶의 고통스러운 상황이 어떻게 더 커지지 않는다는 거죠?

A. 실존적 변태 수업은 끌어당김의 법칙의 가르침과 완벽하게 양립이 가능합니다. 사실 진심을 말하자면 실존적 변태 수업이 끌어당김의 법칙 가르침의 다음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저는 끌어당김의 법칙을 따르는 사람들이 말하는 "우리는 진동하는 존재로서 이 진동에 따라 자신의 정서적 에너지에 맞는 상황을 끌어당긴다"는 말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습관적으로 불행해하고 자기연민에 빠지는 사람이라면 불행과 자기연민을 느낄 만한 일이 점점 더 많이 눈에 띌 가능성이 아주 아주 많습니다. 반대로 당신이 열정적이고 매사 감사함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열정과 감사함을 느낄 만한 일이 점점 더 많이 눈에 띌 가능성이 상당히 많죠. 

그래서 저는 저 말에 완벽하게 동의합니다. 제 경험과 관찰을 통해 그게 정말 사실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저는 끌어당김의 법칙에서 주로 가르치는 진동수를 높이는 실천 방법들 상당수가 감정이나 심리에 영향을 끼치는 시간이 너무 짧아서 장기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데는 사실 별 도움이 안 된다고도 생각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몇 년 전 저는 불행과 자기연민에 푹 빠져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긍정적 심상화나 확언을 해도 그 효과가 1, 2주를 넘지 못했죠. 결국 저는 자기연민과 불행을 느낄 만한 일들을 계속 끌어오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거슬리는 일은 그냥 무시하라는 ("좋아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춰라!") 끌어당김의 법칙의 일반적인 조언이 제게는 언제나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습니다. 그건 진짜 이상한 부정 같이 느껴졌거든요. 통장 잔고가 마이너스 50달러인 상황에서 내가 부자라고 확언을 하라니? 렌트비로 낼 현금이 '바이브레이셔널 에스크로 vibrational escrow'에 있다는 내 주장을 집주인은 과연 받아줄 것인가? 전기 회사와 상수도 회사는 내가 두둑한 수표를 받는 모습을 기가 막히게 심상화한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신경 쓸 것인가? 아니, 당연히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끌어당김의 법칙의 이 방법이 언제나 부정직하고 불만족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실존적 변태 수업은 별난 부정 대신 심오한 자기 정직성에 기대어 감정의 진동수를 깊은 차원에서 영원히 바꿔놓습니다.

 

당신이 삶의 싫은 상황에 대해 명상을 하고 있는데 그 상황이 얼마나 끔찍하고 말도 안 되는지, 그런 상황을 겪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형편없는지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그렇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부정성에 골몰하는 것이고, 그 속에서 빠져 뒹구는 것이고, 심지어 그 불행과 자기연민의 느낌을 확장하는 것이죠. 그런 건 "노 땡큐" 입니다. 

하지만 만일 당신이 싫어하는 상황을 떠올리는 까닭이 그 상황에서 느끼는 격렬하고 추잡스럽고 찌릿한 쾌락을 스스로에게 충분히 허락하는 연습을 하기 위해서라면, 그건 상당히 다르지 않나요? 이 시나리오에서 당신은 부정성에 빠져 뒹구는 게 아닙니다. 당신은 뜨겁고 짜릿한 환희 속에서 뒹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환희는 상당히 진동수가 높은 감정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끌어당김의 법칙 용어로 말하자면 실존적 변태 수업은 사실 긍정적 물질화에 대단히 도움이 되는 정서적 상태에 몰입하기 위한 유용한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당신의 무의식적 그림자가 창조한 '애인한테 거부당하기, 직장에서 창피당하기(또는 아무거나)' 등에 대해 처음으로 뜨겁고 짜릿한 변태적 환희를 맛보게 되면 당신은 대단히 솔직한 환희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진심으로 진실하기 때문이죠. 


"그래 맞다. 내가 이걸 만들었다! 그래 맞다. 빌어먹게도 나의 어떤 면이 이걸 사랑해. 그리고 그런 나의 모습 역시 자기 자신을 즐길 자격이 있어. 나를 구성하는 모든 면모는 하나도 빠짐없이 가치 있고 멋지기 때문이지. 변태 같은 내 안의 그림자까지도 말이야!"

이런 식의 놀랍도록 솔직한 환희는 훨씬 더 영구적이고 강력한 변성을 가져옵니다. 왜일까요? 
일단 당신이 눈을 떠서 그것이 진실임을 보게 된다면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관점은 영원히 바뀌어서 스스로를 연민하던 과거의 느낌으로 절대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게임을 꿰뚫게 되었기 때문이죠. 그러니 다음번에 창피하거나 거부당했다는 느낌이 든다면 당신은 아마도 자기도 모르게 감사해하고 흥분할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그림자가 이 엿 같은 상황을 사랑하고, 당신의 그림자적 욕망이 아름답게 성취되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 영구적인 변성을 일으키는 솔직한 환희의 진동은 삶의 밝은 면에만 기대어 창조된 '높지만 짧게 유지되는' 진동보다 훨씬 강력합니다. 해맑기만 한 밝음에서 나오는 높은 진동수는 냉혹한 현실을 피하지 못하고 맞닥뜨리는 순간(집주인이 문을 두드리는 순간, 짝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데이트하는 모습을 본 순간 등) 바로 산산조각 날 수 있습니다.  

- 좋은 유머 감각과 에너지는 EK라는 불을 피우기 위해 필요한 산소 같은 존재입니다. 우울증은 어떠한 것에서도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라할 수 있습니다. 별나고 변태적인 당신의 무의식적 욕망과 현실은 말할 것도 없구요. 하지만 당신이 우울하여 EK가 지금 최고의 도구가 되지 못한다고 해서 당신이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용해(solve) 과정을 못한다는, 그래서 당신의 의지를 통합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최악의 두려움 목록'과 탐구는 왜곡된 허튼 소리의 층을 벗겨내고 기운을 북돋는 데 도움이 되는, 대단히 탁월한 용해 방법으로서 우울감에서 벗어나는 데 큰도움이 됩니다.  

제가 우울했을 때 바이런 케이티의 '작업'이 정말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믿음으로써 스스로를 우울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 질문을 던지면 무거운 기분에서 해방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 꼭 '작업'을 해보세요. 더 자세한 정보는 부록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 외에도 저는(심리학자나 의료 전문가가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서 말하건대) 우울증 치료법으로 브라마비하라 Brahmawihart 명상 수행을 추천합니다. 

- 자애 명상이라 할 수 있는 브라마비하라 명상법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나와 있는데, 이것은 강력한 선의를 타인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타인에게 선의를 보내는 게 강렬한 변성을 일으키는 명상같아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압니다만(게다가 EK 특유의 섹시한 스웩도 없죠!) 저뿐 아니라 수천 명에 달하는 제 수업 참여자들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이것은 한 사람의 감정적 에너지를 바꾸고, 분노와 냉소를 정화하고, 가슴의 거대한 힘을 일깨울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 또한 우울할 때 EFT(Emotioanl Freedom Technique, 정서자유기법)에 대해서도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경혈을 두드리며 확언을 말하는 치료법인데, 하는 방법은 유튜브에서 쉽게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 마지막으로 줄리아 로스 Julia Ross의 <기분 치료>(The Mood Cure)를 읽고 당신의 증세에 맞는 지침을 따라볼 것을 권합니다. 우울증은 호르몬의 문제인 경우가 많은데, 로스는 대부분의 기분 장애에 대해 연구에 기반한 보충제 목록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그녀의 추천 목록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 좋은 상담가를 찾아서 다 털어놓으세요. 가족이나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세요. 카모마일 차를 많이 드시고 뜨거운 목욕을 하세요. 음악을 듣겠다고 스스로와 약속을 하세요. 그리고 우세요. 많이 많이 우세요. 실존적 변태 수업의 기조는 절대 부정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온전히 느끼는 게 핵심입니다. 그러니 깊은 슬픔과 배신감이 지금 느껴지는 거라면 그 속으로 온전히 들어가시고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깊은 방법으로 애도하세요. 그것을 주제로 행위예술을 해보세요. 배신자들을 닮은 인형을 불태우세요. 하고 싶은 모든 걸 해보세요. 

- 이 애도의 기간을 보내는 중에 EK가 정말 해보고 싶다면 훨씬 순한 맛의 싫은 시나리오(짜증 나는 동료, 차를 정비소에 맡겨야 하는 것, 제일 좋아하는 스웨터가 겨우내 좀이 슬어버린 상황 등)를 주제로 EK 연습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EK를 하는 것에 능숙해져서 보다 깊은 문제에 적용할 수 있을 만큼 EK에 대한 신뢰가 차차 두터워질 겁니다. 시간이 지나 당면한 슬픔의 강도가 옅어지면 해당 상황, 당신과 당신의 남편 그리고 가장 친한 친구에 대해 바이런 케이티의 '작업'을 해볼 것을 권합니다. 그 후 다음과 같이 최악의 두려움 목록을 작성해보세요.

 

"친애하는 우주여, 저는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고 투명한 사람들을 인생에 두는 게 너무 싫고 화가 납니다. 왜냐하면 -----이(가) 너무나 두렵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애도의 시간과 탐구, 최악의 두려움 목록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되찾고 예전의 균형 감각이 돌아왔다면, 그리하여 몸 안에 다시 좋은 느낌과 유머 감각이 돌고 있다면, 그때 비로소 해당 문제를 EK로 조심히 탐색해볼 것을 권합니다.

- Q. 저는 현재 별 문제 없이 잘 살고 있습니다만 어릴 적에 그 모든 트라우마로 짓눌려 있지 않았더라면 지금 더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 유년 시절 트라우마에 대해 EK를 하는 게 좋을까요?

A. 결론만 말씀드리면, "아니요, 하지 마세요." 무의식이 고통스러운 상황을 창조한다는 사실을 일단 이해하고 나면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아팠던 상처로 돌진해 그것에 대해 흥분해보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하는 것을 전혀 권하지 않아요.  

- 아야와스카는 제가 아는 한 깊은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가장 유용하고 아름답고 빠른 방법입니다. (저 역시 엄청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치료적 맥락에서의 MDMA 역시 트라우마 해소에 상당히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고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안전한 공간에서 노련한 힐러의 지도 하에만 이러한 종류의 강력한 환각 약물을 사용해볼 것을 권장합니다. 제가 엄청난 히피라서가 아니라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트라우마는 치유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심한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일상의 과제를 수행하며 사는 데 정규 치료법이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맞습니다만, 대화 치료는 트라우마의 핵심에 가닿아 그것을 치유하는 데 여전히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환각 약물은 적절하고 현명하게만 사용한다면 좋은 치유 효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 세 가지 방법 중 가장 직접적인 탐구 유형으로서 어려운 감정을 내려놓는 데 초점을 맞춘 방법이다. 세도나 메서드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www.sedona.com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세도나 메서드에 관심이 간다면 책 <세도나 메서드>(The Sedona Method)를 사서 읽어볼 것을 권한다. 맥락과 관점이 훨씬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효과적으로 연습할 수 있다. 데이비드 호킨스의 <놓아버림>(Letting Go) 역시 세도나 메서드와 관련된 원리를 다루고 있다. 

- 어떤 종류의 탐구를 하든 일반적인 조언을 하나 하자면, 당신이 진실이라고 믿고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고 뼛속까지 열린 마음으로 그저 조사해보겠다는 의지를 갖고 연습하길 바란다. 탐구를 하다 보면 진실한 진술이나 명제는 몸에서 느껴지는 반응이 거짓된 진술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진실한 진술(혹은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답)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확장되고, 공명하고, 가슴이 열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반면 거짓된 진술(혹은 질문에 대한 부정적인 답)은 꽉 조이고, 무겁고, 힘이 빠지고, 수축되는 느낌을 준다. 

- 가령, '작업'을 할 때 판단을 적고 스스로에게 "이게 진실인가?"(작업의 첫 번째 질문)라고 물었는데 몸에서 조이고, 무겁고, 힘이 빠지고, 수축되는 느낌만이 느껴진다면 이것은 그 판단이 진실이 아니며 불행한 허구임을 알려주는 단서다. 거짓에는 결여된 어떤 부드러운 공명의 울림이 진실에는 있을 때가 많다. 

- 작업을 진행해가며 "그 생각이 없다면 나는 어떤 사람인가?" (작업의 네 번째 질문)라고 물었는데 몸에서 따뜻하고, 부드럽고, 확장되고, 가슴이 열리는 듯한 느낌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그 생각을 쥐고 있는 것보다 내려놓는 것이 더욱 진실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단서다. 

- 탐구의 일환으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했는데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도 괜찮다. 가령 나의 경우 옵션 메서드를 할 때 "만일 내가 그것에 대해 불행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이 나에 대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그냥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릴 때가 많다. 나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질문을 던지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무언가에 불행을 느끼는 건 '내가 습관적으로 행하는 미묘한 무의식적 선택'이라는 사실임이 환기가 되며, 나는 이 미묘한 선택을 의식화하고 바꾸어 결과적으로 내 운명 역시바꿀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 그러니 그저 질문을 하는 행위, 탐구를 하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언제나 가치롭다. 설령 내가 즉시 답을 찾지 못해도 상관없다. 우리의 인식과 반응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어쩌면 마법사가 휘두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도구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무의식의 영역에 있던 것을 의식화하고 관심의 빛을 비추어주는 것이 바로 질문이기 때문이다.

- 저자가 직접 녹음한 실존적 변태 명상 무료 가이드를 다운받길 원한다면 www.existentialkink.com을 방문하여 이메일 주소를 입력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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