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이사카 고타로 / 김소영 / 이강훈
출판 : 웅진지식하우스
출간 : 2015.06.08
리디셀렉트에서 조금씩 나눠 읽고 있다가 주말이 지나고서야 다 읽었다. <사신 치바>와 <사신의 7일>이 마음에 들어 다른 작품들을 찾아 읽는 중인데, 아직까지는 다 마음에 든다. 이쯤 되면 <골든 슬럼버>에도 재도전을 해봐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당시에는 크게 인상 깊지는 않았는데, 다시 읽는다면 어떨지 궁금하다.
이사카 고타로(혹은 이사카 코타로)의 작품에는 인생에 달관한 듯한, 남들이 보기에는 때로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고, 사연이 있다. 그 사람에게는 그 사람만의 가치와 기준이 있는 것이 당연한데도 우리는 자주 그 당연한 사실을 잊곤 한다.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고 느끼는 것은 그 언행의 표면만을 보기 때문이다. 그 기저에는 언제나 그 사람만의 타당함이 존재한다. 그리고 개인들은 서로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경계 안에서의 타당함을 상식으로 인정하고 그에 속하는 이들과 관계를 맺고 교류하게 마련이다.
이번 책 <남은 날은 전부 휴가>는 단편집인 것 같지만 사실은 아주 긴 호흡의 장편 소설이다. 특히 마지막 장을 읽고 나면 아마 반드시 첫 번째 장을 다시 펼쳐보게 될 것이다. 당신이 '사키'라는 이름을 기억한다면.
책 전체가 하나의 타임머신 같았다. 표면적으로는 시간 순서대로 흘러가는 것 같지만, 등장인물들의 회상과 개인사는 다양한 시간대를 넘나 든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에는 항상 '오카다'와 '미조구치'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독자는 마지막 이야기를 읽으면서야 깨달을 수 있다.
저자는 하나의 이야기 안에서도 시점을 자주 바꿈으로써 누구의 이야기인지 한 번에 알아채지 못하도록, 장면들을 그저 '보여준다'. 하지만 화면 밖에서 그 장면을 바라보는 독자는 정확한 등장인물을 파악하지 못한 채 흐릿한 실루엣과 오가는 대화만을 훔쳐볼 수 있다. 한두 줄의 대사 속에 흘러가는 힌트들은 알아챌 사람만 알아채라는 듯, 혹은 몰라도 상관없다는 듯 무심하다.
첫 번째 이야기의 사키.
그리고 맛집탐방. 다나카 의원의 외도 현장을 찍으라는 쩨쩨한 지시와 영화감독이 된 동창.
두 번째 이야기의 유다이.
그리고 첫 번째 이야기에서 등장한 곤도. 제각기의 유년기와 시간여행과 타키온은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들이 연결될 것임을 보여준다.
세 번째 이야기의 여성.
그리고 다나카 의원. 완전히 독립된 이야기 같지만 -그렇게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지만- 연결지점을 깨달으면 '인과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네 번째 이야기의 초등학생.
그리고 초등생 시절의 오카다. 처음 읽을 때는 오카다의 유년기 이야기인가, 싶지만 끝에서야 이 친구가 그 영화감독이라는 걸 알게 된다. 하지만 이 인터뷰를 따는 사람이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다. '아빠'의 진짜 직업을 언제 눈치채느냐는 고길동에게 얼마나 이입이 가능한지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다섯 번째 이야기의 미조구치.
그리고 최종장.
타인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음으로써 자신이 알지 못하던 많은 것들의 연결성을 다시금 깨닫게 될 수도 있을까. 하지만 그것은 스스로에게 의무감이 아닌 즐거움이어야 하지 않을까. '날아서 8분, 걸어서 10분'은 어린 시절 오카다가 고민했던 '곤란한 모든 사람을 도울 수는 없는데, 나에게 일어난 일도 아닌데'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까. 2분이 빨라지지 않더라도 날아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이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시각에서 새롭게 바라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언제나 '바캉스'다. 숙제가 없는 여름방학이고, 앞으로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한 휴가다.
기를 쓰고 해야만 하는 일들은 끝났다.
조금쯤은 새로운 기분으로 새로 시작해도 좋지 않을까. 지금이라면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딸기맛이나 레몬맛처럼 '어떤 사람'이라고 라벨을 붙일 수는 없는 거니까.
내일이 아닌 오늘부터 인생의 남은 날들이 모두 휴가가 되기를 바라며.
즐겁게 읽었다.
"기어를 드라이브에 넣으면 제멋대로 앞으로 간다는 말.
왠지 마음이 편해지지 않아?
기를 쓰지 않아도 저절로 앞으로 가게 되는 거야."
과연 그럴까, 대답하면서도
나는 내 몸에 달려 있을,
보이지 않는 기어를 드라이브에 넣어본다.
- 평소 늘 앉는 위치이긴 한데, 그 '평소'라는 것은 앞으로 한 시간이면 끝을 맞이한다.
- 어머니는 올해 마흔다섯 살이다. 주름도 늘고 피부는 빈말로라도 곱다고 하기 힘든 데다 허리 군살도 두드러지고 멋쟁이도 아니지만 온화하고 청결한 느낌이 있는데, 그 때문인지 품위 있게 나이 든 여자로도, 천진난만한 소녀로도 보인다.
- 이혼이 결정된 뒤 어머니의 행동은 민첩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이 이사 갈 집을 결정하고 이사업체를 수배했는데 장소는 우리에게 비밀로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난 여기 빌라에서 혼자 살 거야. 언제든지 들러" 하며 손으로 쓴, 필요 이상으로 친절한 지도를 건네준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 "뭐야, 이거. 주소가 없네. 아, 전화번호로 주고받는 문자 메일이구나" 같은 소리를 웅얼거린다.
"단란한 가족 시간에 휴대전화 같은 거 만지지 말지."
"이거 휴대전화 아니거든. PHS거든."
아버지는 초등학생 수준의 항변을 하면서 메일을 읽고 있다.
"무슨 메일이야?" 물어봐주는 어머니는 상냥하구나, 하고 나는 생각한다.
- '랜덤으로 메일 보내봅니다. 우리 친구 해요. 드라이브도 하고 밥도 먹고.'
- "드라이브시켜 준다는 차, 몇 인승인지 물어봐."
"무슨 말이야, 그게." 아버지가 손가락을 멈췄다.
"그리고 밥도. 가급적 중화요리는 피했으면 좋겠는데. 사키는 기름진 음식 먹으면 아토피 올라오니까."
- 아버지가 당황하며 말한다. "다 같이 가려고?"
어머니는 당연하다는 듯 말없이 웃고 있다.
"말도 안 된다니까, 그런 거" 하고 나는 내뱉었고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내 친군데!" 하고 큰소리로 한탄했다.
- 운전자는 갑작스러운 충돌에 얼이 빠져 있었다. 40대 중반에 수염을 기른 남자였다. 어쩐지 눈꼴신 인간이네, 싶었다. 중년 남성이 멜빵을 해서 어울리는 꼴을 본 적이 없는데 이 남자는 의외로 어울렸다. 무슨 일을 하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 "어이 당신, 어딜 들이받아" 하며 미조구치 씨가 옆으로 다가왔다. 인상이 험악하긴 해도 언뜻 봐서는 마른 체형이라 어디 회사원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실은 10대 때부터 레슬링을 해온 만큼 근육이 탄탄하다. 자기보다 몸집이 큰 남자를 무자비한 관절기로 혼내주는 장면을 나는 몇 번 본 적이 있다. 얼굴은 뭐, 하여간에 눈이 날카로워 상대방을 잡아먹을 것 같은 박력이 있다.
- "일의 가치랑 보수는 딱히 일치하지 않으니까, 신경 안 쓰는 게 나아."
"그런가요?"
"잘 버는 놈들일수록 제대로 된 일 안 해. 거만한 자세로 컴퓨터 앞에 앉아 뽁뽁거리며 버튼이나 누르고 사람을 아랫사람 부리듯이 부려먹고. 그보다는 짐 나르고 물건 만드는 사람들이 훨씬 훌륭한데 말이지."
- "뭐." 미조구치 씨는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우리한테 의뢰하는 것도 쩨쩨한 일이 많았지. 얼마 전에도 그 왜, 뭐였더라, 정치인 애인 사진을 찍으라고 했었잖아. 다나카였나, 사토였나 하는 국회의원."
- "자아 찾기? 안 찾아요. 전 여기 있으니까요."
"네 말이 맞아. 자아 따위는 찾는 게 아니야. 너는 가끔 괜찮은 소릴 하더라. 뭐, 됐고, 그래서 이유가 뭔데. 왜 이 일에서 빠지려는 거야."
"이렇다 할 이유는 없지만. 제가 하는 일이라는 게, 상대방이 울상을 짓게 되는 일이잖아요."
- "상대방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그리 즐겁지가 않아요."
"즐거우면 그게 일인가?" 미조구치 씨가 한숨을 쉰다. "이상론을 펼쳐대는 아들을 상대하는 아버지 기분을 알겠네." 하고 넌더리 난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우선은 그만둬보자고 생각했습니다. 기왕이면 상대가 기뻐하는 일을 해볼까 해서."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냈다는 성취감을 맛보고 있었다.
- "그건 내가 적당한 번호를 눌러줄게. 메일 주소 말고, 전화번호로도 문자 메일 보낼 수 있잖아."
"그걸로 친구를 만든다고요?"
"만약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온다면, 넌 졸업이야."
- "만약 안 되면 어떻게 되는데요."
"당연히 일은 못 그만두는 거고, 벌로 귓불 같은 델 잘리는 거지. 그 복 귀, 복 없는 귀로 만들어줄게" 하고 말하는 미조구치 씨는 어느 모로 보나 진심이었다.
- "저,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라곤 없었어요." 나는 말한다.
"거 쓸쓸한 인생이로군."
"고만고만하게 친해진 반 친구는 있었지만. 아, 그런데 그중 한 명이 얼마 전에 신문에 실린 걸 보고 놀랐네요. 영화감독이 된 모양이더라고요."
"대단한걸. 무슨 영환데?"
나는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제목을 말했지만 미조구치 씨는 당연히 모르는지 "뭐 어쨌든,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드는 거랑 신뢰할 수 있는 의사를 발견하는 일은 인간한테는 평생의 숙원 같은 거지" 하고 말했다.
- "오카다 아저씨, 정상이 아니에요." 나는 뒷좌석 왼쪽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사선으로 운전석을 본다. 그가 20대인 것은 분명했다. 키는 180이 조금 못 될까. 가슴팍이 두툼하니 체격은 좋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까만 머리는 스포츠맨과 멋쟁이 젊은이의 중간쯤 되는 인상이었지만 아무리 봐도 질이 나빠 보였다. 쌍꺼풀진 눈매가 무서워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 "그런 메일을 보낸다고 친구가 생길 거라고 생각했어요?"
"놀라고 있어요." 오카다 씨가 대답한다. 핸들을 쥔 채 얼굴을 살짝 기울여 "설마 진짜로 답장이 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하며 조수석의 아버지를 봤다. "게다가 차로 만날 수 있는 곳에 살고 있다니."
- 친구가 되자는 수상쩍은 메일에 아버지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친구 합시다. 저는 47세의 남자입니다. 아내 45세, 딸 16세도 함께할 건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하고 답장을 쳤다. 이렇게 보내면 놀리는 거라고 생각할 거라며 아버지는 비탄에 빠졌지만 결국 그대로 보냈다. 정말로 친구를 원했던 거야? 하고 나는 혀를 내둘렀다.
- 하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가족이 해체하는 날의 추억으로 나쁘지 않잖아" 하고 말하는 게 진심으로 기뻐 보였다. "이사업체 사람들한테는 문 열어둘 테니까 알아서 해달라고 하고 외출하자."
- "정상이란 게 뭐지?" 오카다 씨가 반말로 물었다. 정중하고 초연한 분위기가 있지만, 역시 무서운 사람이다.
"정상적이라면 아무 데나 헌팅 메일 같은 거 보내지도 않고, 가족 셋이랑 드라이브도 안 해요."
- "부모님과는 사이가 좋은가요?"
"아니요." 나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답하고 있다. "우스울 정도로 전형적인, 자식 교육에 실패한 부모님이었어요. 꽉 막힌 사고방식을 강요하고 아이의 실수를 꼴사납다고 생각해 버리는."
- "되돌릴 생각이세요?"
"가능하다면."
"그런 건 생각하지 않는 게 나아요." 나는 스스로 의식하기도 전에 말하고 있었다. "과거만 돌아보고 있어 봐야 의미 없어요. 차만 해도, 계속 백미러만 보고 있으면 위험하잖아요. 사고가 난다고요. 진행 방향을 똑바로 보고 운전해야지. 지나온 길은 이따금 확인해 보는 정도가 딱 좋아요."
하야사키 씨는 '아아'도 아닌, '하아'도 아닌 소리를 냈다.
- 주위에는 수많은 구경꾼들이 있었다. 내가 무서워서 말리지 않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무책임하게 부추기며 신바람을 내는 인간들이 있는 것은 이해가 안 되었다. 그 구경꾼들처럼 이해하기 힘든 일은 거리마다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런 인간들은 뭘까. 안전지대에서 자신의 울분을 풀기 위해 한 다리 끼워 넣은 것뿐이지 않은가.
- "오카다 아저씨, 뭐 하는 사람?"
"좀 전에도 아버지가 물어봤지만, 오늘 막 일을 관둔 참이야."
"백수?"
"그래."
"그럼 못쓰지."
"못쓰지 않아. 내일부터 이제 내 인생의 남은 날은 전부 휴가 같은 거니까. 일종의 바캉스지."
"뭔 소린지 모르겠네." 사키는 어이없는 얼굴을 하더니 그제야 나를 올려다보며 "휴가 좋죠" 하고 씨익 웃었다. "나도 그렇게 할까, 남은 날은 전부 휴가."
고민 끝에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꿈 깨."
- 주문할 메뉴를 고르려니 난감했다. 어디까지 신세를 지고 어디까지 사양해야 좋을지, 그 선을 가늠하는 것도 그렇고 세상의 일반적인 상식 같은 것을 통 몰랐기 때문에 허둥거렸다. 보다 못해서 그런 건 아니겠지만 메뉴판을 탁 닫은 어머니가 "다 같이 이걸로 안 할래? 계절 한정 풀코스" 하고 테이블 위에 놓은 특별 메뉴를 가리키자 아, 그걸로 하죠, 하고 오카다 씨가 바로 찬성했다. 그렇게 되면 나와 아버지에게 반대할 힘은 없다.
- 키가 훌쩍 큰 웨이터가 다가왔다. 와인이 어쩌고 저쩌고, 전채 요리가 어쩌고 저쩌고, 고기 익히는 정도가 어쩌고 저쩌고 하며 줄줄이 확인 사항을 말해댄다. 나는 기가 팍 죽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응이 차분하고도 정확해서 와, 감탄했다.
- "20대 때였지." 어머니가 끄덕인다. "맛집 탐방 말고는 할 게 없어서."
- "맛집 탐방이라고요." 오카다 씨가 끼어들었다. "그거 재밌나요?"
"뭐, 먹는 걸 좋아한다면." 어머니는 말했다. "오카다 씨는 좋아하는 음식 있어요?"
"글쎄요.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건 생각하는 게 아닌 것 같은데." 나는 결국 한마디 한다.
오카다 씨는 어깨만 살짝 움츠릴 뿐 대꾸하지 않고 대신 "그럼 건배"하고 잔을 들었다.
"발전적인 해체니까." 어머니가 나를 봤다. "이건 끝이 아니라, 내일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내일부터는 전부 휴가." 오카다 씨는 또 그 말을 한다.
- "난 아빠보다 엄마가 더 무섭더라. 뭔가 속을 알 수 없는 기분이 드는 게."
"속을 알 수 없지 않아." 어머니는 느긋하게 말했다.
"비밀, 말해줘. 아빠도 모르는 거." 나는 완전히 술기운을 빌려 '살짝인데 어때, 좀 만져보자' 하며 호스티스에게 달라붙는,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오는 중년 아저씨와 다를 게 없었다. 몸을 옆으로 기울여 어머니에게 매달리는 동작을 한다. "가르쳐줘어. 닳는 것도 아닌데."
-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어머니를 빤히 바라보고 만다. 농담을 하는 표정도 아니었고, 애초에 어머니가 이렇게 재미도 없는 거짓말을 해서 얻는 게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농담이 아니라는 걸 깨닫자 피가 머리로 솟구쳤다. "최악이네."
- "비밀이라고는 해도 흔한 이야기지 뭐."
어머니는 역시 털털했다.
- 유다이의 아버지가 회사에 갈 때와 비슷한 양복 차림이었지만 왜 그런지 회사에 갈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뒤에는 젊은 남자가 있었다. 까만 머리에 턱은 탄탄하고 가슴의 근육이 불룩 솟아 있는 게 보였다.
"미조구치 씨, 초등학생한테 뭐 하는 짓이에요. 애 옷을 젖히고. 그럼 안 돼요."
"오카다, 난 말이야, 알아. 내가 어릴 때 아버지한테 맞았으니까. 아이 몸에 생긴 이런 시퍼런 멍은 셋 중 하나야. 놀다가 생긴 상처, 왕따, 부모의 학대. 견적이 딱 나온다고."
- "뭐, 체벌이라는 게 대부분 가하는 쪽 마음이지. 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어. 있다고 해도 이렇게 멍이 들게 할 정도로 못된 아이가 어디 있을까."
"미조구치 씨, 애들을 그렇게 좋아했던가요?"
"애들 별로 안 좋아해. 그냥 이렇게 맞는 아이들을 보면 남 일 같지가 않거든."
- 미조구치는 워낙 재미있는 농담에 웃음이 터지기라고 한 것처럼 큰 입을 벌려 숨을 토해낸다. 유쾌한 듯 "왜 도와줘야 되는데?" 하고 침을 튀기며 말한다.
"아니, 미조구치 씨도 옛날에 똑같았잖아요. 그럼 동정이라고 해야 하나, 동조라고 해야 하나. 심퍼시 sympathy 같은 게 있을 것 같은데요."
"심포니 같은 거 없어." 미조구치는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더니 "이봐 오카다, 아버지가 이렇게 폭력을 휘두르는 건 병이라고 봐야 돼. 네가 못 하게 하고 싶다고 고쳐지는 게 아니야. 우리 아버지도 그랬어. 우리 집 양반은 동네에서 유명한 학대하는 아버지라, 누가 관청에 신고를 했지. 그랬더니 공무원이 와서 아버지한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긴 했는데 반성할 리가 있나. 가정교육이라고 해버리면 그걸로 끝이고, 나랑 아버지가 어떻게 사는지 누가 내내 지켜보고 있는 것도 아니고. 혹시라도 그 자리에서는 예, 예, 앞으로 안 그러겠습니다, 해봤자 돌아서면 또 때려. 그런 거야."
"그럼 어떻게 해야 되나요, 이 아이."
"뭐, 어떻게든 견뎌서 살아남아야지."
유다이는 "저기요" 하고 말해보지만 거기서 말이 더 이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 같은 멋진 어른이 되는 거지. 그것 말고는 달아날 길이 없어." 미조구치는 자랑스레 말한다.
아무리 봐도 멋진 어른으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유다이는 생각했다.
"저기, 미조구치 씨. 죄송하지만 멋진 어른이라는 건 좀..." 하고 오카다도 말했다.
- "하지만 교수님, 저는 빛의 속도보다 빨리 움직이면 시간이 돌아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하지만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빛보다 빨리 움직이는 건 무리야."
"아, 그런가요." 젊은이는 대꾸했지만 딱히 실망한 눈치는 아니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남자는 태평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한테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현실 사회의 문제나 자신이 안고 있는 스트레스 같은 것과는 전혀 관계없는, 빛의 속도가 어떻다느니 타임머신이 어떻다느니 하는 논쟁에 대해 무슨 의미가 있냐며 달려들어 두들겨 패고 싶은 심정이었다.
- "그럼 과거로 타임슬립해서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것은 어디까지나 영화나 소설 속 이야기군요."
- "과학자들 중에는 억지소리를 해대는 자들도 있거든. 빛보다 빨리 움직이는 물질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고 있어. 타키온이라고 부르는데."
"하지만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빛보다 빨리 움직일 수 있는 건 없잖아요."
"정확히 말하면 빛보다 빠른 속도로 가속할 수 없다는 거지."
"무슨 뜻이죠?"
"가속해서 광속을 넘을 수 없다. 이게 상대성이론의 법칙이야. 하지만 과학자들은 이렇게 생각했지. '그럼 가속을 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빛보다 빠른 물질이 있다면 어떻게 되나' 하고."
- "뭐, 딱히 안 읽는다 해도 그건 그것대로 괜찮아요. 열심히 만들어준 곤도 씨한테는 안된 일이지만, 이런 건 여러 가지로 덫을 쳐놓고 어디 한 군데 걸려주기만 바라는 거니까."
- "그럴듯하거나 그럴싸한 것 투성이군."
"사람을 속이려면 진실이나 사실이 아니라 진실처럼 보이는 게 필요하죠." 오카다는 끄덕인다.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는 일을 수도 없이 해온 경험에서 얻은 확신이었다.
- 일상의 피로를 풀기 위한 휴일에 아이 행사에 가서 에너지를 소모해야 할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집에서 노상 멍하니 있는 네가 가면 되잖아, 라고 말하자 "저야 물론 가지만 당신도 와주면 유다이도 기뻐할 거예요" 하고 말대꾸를 하기에 ...
- 남녀평등이 뿌리내려 남자도 집안일을 분담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을 들으면서 살아온 세대지만 사카모토 다케오는 그것처럼 같잖은 사고방식도 없다고 늘 느껴왔다. 체벌이 금지된 교사들은 학생들한테 모욕당하고, 다정한 사람이기를 지나치게 고집한 남자는 여자에게 이용당한다. 누가 가장 강한 존재인지를 타인에게 철저히 가르쳐줌으로써 질서가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행동을 보고 배웠다.
- "교육이니까 문제없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말이야, 20년 지나 봐. 아들인 유다이도 어른이 돼. 그 당연한 사실이 내 생각에서 빠져 있었던 거야. 아들은 영원히 아이로 있지 않아. 쑥쑥 몸을 키우고 힘도 붙이지. 그래서 말이야, 이젠 날마다 그 녀석이 나한테 폭력을 휘두르고 있어. 사진을 봐."
- "그 정도로?"
"그 정도야. 그래서 이렇게 너에게 충고하러 왔어. 지금이라면 늦지 않았어. 가족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짓은 그만둬. 적어도 폭력은 자제해야 돼. 이대로 계속된다면 20년 뒤 틀림없이 넌 지금의 내가 돼."
- "수도 없이 죽으려고 했는데, 그때마다 유다이가 살려냈지. 쉽게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생각 같아. 그 녀석의 원한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고."
- "뭐랄까, 자네는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헷갈리는걸."
"아니 무슨 딸기 맛, 레몬 맛처럼 라벨이 붙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 "검문인가요. 큰일이네요."
너무도 느긋한 반응에 나는 웃음이 터질 뻔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이 타이밍에 검문을 받게 된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내게 가장 득이 될지, 어떻게 하면 불리할지 생각한다.
- 손목에 감겨 있던 테이프가 벗겨졌다. 자유로워진 손으로 코끝을 긁는다. 내내 가려웠던 것이다. 웃옷 안주머니에 넣어둔 봉투가 신경 쓰여 가슴에 손을 댔다. 차에 실릴 때 봉투가 비틀어지면서 찔리는 건 아닌가 싶어 무서웠는데 아무래도 괜찮은 것 같다.
- "어떤 일이든 인과관계라는 게 있어. 이게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됐다, 이런 거지. 네가 우리한테 납치된 데도 원인은 있어. 그렇잖아. 예를 들어 너한테 차인 남자가 분노로 미쳐서 널 납치해 어딘가에 가두려고 하는 건지도 모르고 말이야." 미조구치는 제 입으로 먼저 그렇게 답을 낸다.
"아니면..." 나는 맞장구랍시고 말한다.
"짚이는 데가 있는 거야?"
- "그것도 예를 들면 그렇다는 거지?"
"이건 실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나는 약간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 "인간이 '안 그러면' 같은 단어를 사용할 때가 오면 그걸로 끝장이야. 인생에서 그리 많지 않지, 그런 경우는."
- "뭐, 의심을 받으면 소지품 검사도 할지 모르지. 주머니 같은 데 험한 물건이 들어 있으면 의자 밑 같은 데 쑤셔 넣어놔. 뭐, 소지품 검사까지 가면 그냥 아웃이지만."
그 말에 나도 내 주머니를 걱정했다.
- 라디오 진행자는 "이런 긴급사태에는 파출소의 경찰 여러분이나 비번인 형사분들까지 모두 호출되겠죠. 힘들겠어요" 하며 대놓고 내 알 바 아니라는 감상을 주절주절 떠들고 있다.
- "그럼 테이프는 지붕에 그대로 있겠네."
"차가 출발하면 테이프가 굴러 떨어지죠. 그러니까 없어요."
미조구치는 심호흡과 흡사한 큰 한숨을 몇 번인가 내쉬었다.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것이리라. 덜떨어진 부하를 거느린 상사는 언제나 이런 스트레스와 싸우는 것일까. 잠시 뒤 "그래, 알았다" 하고 미조구치는 말했다. 애써 힘을 내 긍정적으로 생각하려는 듯 발랄한 목소리였다. 제자의 실수를 일일이 꼬집는 것에 지쳐서, 그런 데 쏟을 노력도 사태의 개선에 쏟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 알았어. 차 세운다. 그다음 트렁크에 여자를 가둬. 그럼 테이프가 없어도 되잖아."
역시 미조구치 씨, 오타가 기쁜 목소리로 대꾸한다. 그렇구나, 트렁크라고요, 하고 나도 감탄할 것만 같다.
- "요즘에는 사전에 등록만 해두면 휴대전화나 PHS로도 대부분 장소를 알아낼 수 있는 모양이니까."
"그럼 그 검문 때, 그 경찰이 몰래 가방 밑쪽에 GPS나 휴대전화를 숨겨놓진 않았을까요?"
나는 농담으로 한 말인데 미조구치와 오타는 "가능성 있어." 하고 날카롭게 외치더니 곧장 차에서 내렸다.
- 트렁크 안 골판지 상자 속의 커다란 가방, 그 구석에 손을 넣은 미조구치가 더듬더듬 스마트폰을 찾아내 꺼냈을 때는, 나도 할 말을 잃었다. 비는 제법 거세져 있었다. 우산도 없이 그냥 맞고 있다.
- "미안하게 됐는데 우리도 의뢰받은 일을 안 하면 곤란하거든. 신용 문제니까. 따라와."
그때 나는 반사적으로 "괜찮을 거예요. 분명히" 하고 말하고 있었다. 이것저것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강하게 주장했다.
"괜찮다니 무슨 소리야."
"나한테 원한을 품은 사람. 이제 없을 거예요."
- 나는 그 바람피운 상대 남자를 떠올린다. 이미 헤어질 결심을 했고 내 행동에도 각오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구나, 그 사람은 이제 없구나 싶으니 조금 가슴이 아프다. 이미 나는 그 사람의 의식을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 "뭐야, 네 바람 상대가 대단한 인간이야?"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제 모두에게 그건 문제 되지 않을 거예요."
미조구치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매서운 표정에, 내 살갗을 벗겨내는 듯한 험악한 기운이 가득하다. 얼빠진 말을 많이 하긴 했지만 이 사람은 역시 만만찮게 살아온 남자구나, 새삼 느끼고 흠칫했다.
- 하지만 그때 미조구치가 "뭐, 그렇게 된 거라면" 하고 이를 보이며 웃었다. 그러더니 "그럼" 하고 발길을 돌려 가버렸다.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리는 비가 그들의 모습을 가려주는 커튼 같았다.
- 그 누군가는 또 누군가에게 건넨다. 마지막에 받은 내가 그것을 처분한다.
- 차 안에서 미조구치가 말했듯이 작업은 하나씩 처리해 나가면 된다. 분담하는 것이다.
- 비를 잔뜩 머금은 스타킹 발로 인도를 밟는다. 쭈룩 배어 나오는 감각이 기분 나빠 우선 멈춰 서지만 바로 익숙해져 어디까지고 걸어갈 수 있다.
"싫은 일이 생기면 바캉스를 생각하기로 했어."
나는 아직 열 살이었다. 슬픔은 잊어야만 했다. 남은 시간이 아주 많았으니까.
- "'문제아'에 '대답아'라, 날카로운 의견인데" 하고 흡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한테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나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고, 가장 큰 자신감이 된다.
- "오카다 군이 하고 싶었던 건 그거랑 같은 건지도 몰라."
"응?"
"예를 들면 그 왜, 어떤 나쁜 놈이 너희 반 여자애한테 나쁜 짓을 하려고 책가방에 표시를 한 거야. 아니면 원래부터 눈에 띄는 표시가 있었는지도 모르고."
- "그래서 모든 여자애들 가방에 같은 표시를!"
- "오카다 군은 수수께끼 문제를 내주는 문제아였던 거지."
"그리고 아빠가 풀었어."
- '아빠한테서 전화 왔었어' 하고 말하면 전화비가 걱정돼서 그러는지 난처한 표정을 지을 때가 많다. 애초에 엄마는 아빠의 출장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리라.
아빠의 진짜 직업을 알게 되면 응원하고 싶어질 텐데.
- 우리 아빠가 회사원이 아니라, 아니 어쩌면 회사원일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정보를 보호하고, 정보를 훔치고, 비밀 연락을 하는 스파이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건 나밖에 모른다.
- 알게 된 게기는 수수께끼의 여자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친구와 헤어져 혼자 걷고 있는데 까만색 옷을 입은 키 큰 사람이 내 이름을 부르며 웃었다.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면 대꾸하지 말라고 학교에서 귀가 닳도록 들었지만 막상 그렇게 되니 아무래도 무시를 못 하고 "네" 대답해 버렸다.
여자는 "난 네 아빠를 알고 있단다" 하고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하더니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며 그날은 사라졌다.
- "어쨌든 끊을게."
"선생님, 조심해." 아빠가 말했다.
"엥." 또 이 소리가 나온다.
"최근에 벽에 페인트로 낙서가 된 적 없어?"
나는 놀랄 수밖에 없다. "오카다 군?"
"오카다 군이 한 거구나."
엄마가 왔기 때문에 전화를 끊어야 했다.
-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모르는 거지." 유미코 선생님은 스물여덟 살로 엄마들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늘 야무져서 믿음직하다. 화나면 무섭다. 하지만 그런 때 말고는 학생을 비난하지 않도록 단어를 골라가며 말하고 무척 상냥하다.
- "있잖아, 누굴 의심할 때는 웬만큼 확실한 이유가 있지 않으면 안 돼." 선생님은 그런 다음 오카다 군을 보며 "오카다 군도 할 말이 있으면 반론해도 돼. 아니, 이런 때는 반론을 안 하면 안 된다니까. 누명을 벗어야지" 하고 경쾌하게 말을 걸었다. 오카다 군은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더니 '안 할래'라고 말하듯 머리를 흔들었다.
- "선생님, 오카다 편만 들지 마세요." 그 애가 말했다.
"오카다 군만 편들 이유가 없잖아." 선생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애는 "오카다 군의 엄마가 무서워서 그런 거 아니에요? 엄해서 나중에 막 호통을 치니까" 하고 말했다.
우리는 그 대화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선생님은 약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쓴웃음을 짓고 있는 것 같은,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듯한 표정이었는데 잠시 뒤 더는 참지 못하겠는지 "오카다 군의 엄마도 무섭지만, 네 엄마도 무섭거든" 하고 말했다.
왜 그랬는지 나는 그때 창가 자리를 봤는데 오카다 군이 창밖을 바라보며 손을 입에 대고 있었다. 웃음을 참고 있다는 걸 알고 나는 오카다 군도 웃는구나, 싶어 깜짝 놀랐다.
- "부모님이 다니라고 하니까." 오카다 군은 작은 소리로 웅얼웅얼 말했다. "공부를 잘하면 사는 게 편해진대."
"좋네." 나는 무의식 중에 말하고 있었다. "편하게 살고 싶다."
"하지만 아마, 공부한다고 무조건 좋은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해." 오카다 군은 차가운 말투로 이야기한다. "그걸로 즐겁게 살 수 있다니,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야."
- "오카다 군은 말이야. 항상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
오카다 군은 뒤통수라도 맞은 듯 순간 입을 다물었다. 못 할 말을 해버렸나 싶어 후회하고 있는데 "나도 몰라. 내 어떤 마음이 진짜인 건지" 하며 눈썹을 찌푸렸다. 오카다 군은 불안정하다고 한 여자애의 말이 머리에 떠오른다. "왜, 이상하네."
"예를 들면 어딘가 곤란한 사람이 있을 때 도와주자는 마음과 어차피 곤란한 게 나도 아니고, 하는 마음 두 개가 있어."
- "게다가 곤란한 사람이나 힘든 사람들은 세상에 많이 있잖아. 어차피 모두 다 도울 수는 없으니까 남을 돕는다는 건 의미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아니, 남을 돕는다는 게 애초에 잘난 체하는 것도 같고."
"생각이 너무 많아, 오카다 군."
"엄마한테 그런 말을 했더니 화를 냈어. 남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면 안 되지, 하면서. 그런 시건방진 고민을 하기엔 이르다고."
- "남의 아픔이고 뭐고, 그 사람이 뭘 느끼고 있는지는 그 사람이 되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신이 아니니까."
그렇게 말을 많이 하는 오카다 군은 처음 봤기 때문에 나는 당황스러우면서도 약간 기뻤다.
- 오카다 군이 주머니에서 꺼낸 비디오테이프에는 <작은 병정>(Le Petit Soldat, 프랑스 영화감독 장 루기 고다르의 1963년 영화)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프랑스 영화래."
- "유미코 선생님, 위험해?"
"어떻게 그걸 알아?" 오카다 군의 반응은 예상외로 박력이 있었다.
- 오카다 군은 매일 아침 일찍 바깥에서 달리기를 한다고 했다. 왜? 하고 묻자 "그냥" 하고 대답했다. 육상부도 아니고 마라톤 대회 준비를 위한 것도 아니다. 그저 '그냥 몸을 단련시켜 두자는 생각에'라는 이유로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서 집을 나와 달리기와 팔굽혀펴기를 한다고 한다. 듣고 보니 몸이 탄탄한 게, 그래서 오카다 군이 힘세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 "유미코 선생님 경우는 그 왜, 예를 들어 누가 먹이를 깜박해서 금붕어를 죽게 만들었다고 쳐봐."
"예를 들어 말이지."
"그럼 유미코 선생님은 먹이를 깜박한 건 화내지만 그 애를 경멸하진 않아."
"무슨 뜻이야?"
"잘 설명은 못하겠지만." 오카다 군은 퉁명스럽다. "우리 엄마의 경우는 반대야. 실수를 하면 실수한 내용이 아니라, 실수를 한 나를 경멸해."
경멸이라는 단어가 또 어른스럽게 들렸다. 경멸하고 경멸당하는 경험은 지금껏 없었고 앞으로도 경험할 것 같지가 않았다.
- 그때 문득 생각이 나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그거네" 하고 말하자 오카다 군의 얼굴빛이 밝아졌다. "어, 좋은 말 했네. 그건지도 모르겠다. 유미코 선생님은 그거야."
아닌 게 아니라 유미코 선생님은 우리를 혼낼 때 우리한테가 아니라 우리가 한 짓에 실망해서 화를 낸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다음부터는 잘하자고 생각한다.
- "유미코 선생님은 나한테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하고 말해주잖아. 그건 말이야.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야무지게 하면 괜찮아, 하고 내 힘을 믿어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굉장히 기뻐. 우리 엄마의 경우는 반대야. 나를 믿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 "엄마 중 한 사람이야?"
오카다 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 아닐 거야. 천박한 단어였고, 그건 유미코 선생님을 좋아하는 남자라든가."
"선생님인데?" 내 입에서 순간적으로 나온 말에 오카다 군이 웃었다. "선생님도 집에 돌아가면 텔레비전도 볼 거고 맥도날드에도 가. '내일부터 또 일이네, 귀찮아' 이런 생각도 할 거고."
"하지만 유미코 선생님을 좋아하는 남자가 왜 낙서를 해."
- "멋대로 좋아하는 녀석들은 반대로 멋대로 화내고 멋대로 미워하기 마련이니까."
- 남자가 웃으며 "너희들, 아이 둘이서 멋있는 척하는 것도 좋지만 현실을 보라고. 잘 들어, 꿈만 꾼다고 뭐가 되는 건 하나도 없어. 내가 아는 사람은 조만간 전화를 들고 다니는 시대가 올 거라면서 큰소리를 치고 있는데, 그런 건 꿈이지 현실감이 없잖아. 전화를 가지고 다녀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안 그래? '여보세요, 야마다 씨 댁인가요?' 하고 물어보면 '아니요, 지금 집이 아니라 걷고 있는데요.' 뭐 이렇게 대답하라는 거야? 이상하잖아. 그렇게 급한 볼일이 어디 있어. 밖에서 전화 통화를 할 바에야 직접 만나러 가는 게 낫지. 전화를 들고 다닌다는 꿈을 꾸기보다는 자기 주위의 현실을 봐야 돼. 너희들 앞에 나타나는 건 현실이니까."
- 어떻게 해야 하나?
태어나서 지금까지 맛본 적 없는 초조감에 나는 정신이 아득해질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것도, '문제'다. 나는 순간 생각한다. '문제아'와 '대답아'.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내가 대답을 찾아야 한다.
- "오카다 씨가 전학을 간 뒤로 다시 만난 적은 없나요?" 하고 말을 이었다.
"왜 그런 걸 묻죠?" 내가 묻자 그는 얼굴을 실룩이며 티가 나도록 쩔쩔맸다. 아는 사람이 오카다 씨랑 아는 사이라 어쩌고, 행방을 몰라서 어쩌고 하며 변명 같은 말을 덧붙였다. "예, 없습니다."
- 아버지도 사라지고, 오카다 군도 사라지고, 유미코 선생님도 사라졌다.
"다 그런 거야." 어머니는 말했지만 그 '다 그런 거'가 나는 무서웠다.
그래서 종종, 그 영화를 떠올렸다.
연인을 잃은 주인공이 마지막에 내뱉은 대사다.
"슬픔은 잊어야만 했지. 나에게는 아직 남은 시간이 있었어."
그 말 그대로 나는 아직 열 살이었다. 슬픔은 잊어야만 했다. 남은 시간이 아주 많았으니까.
이따금, 바캉스를 생각했다.
- 취재기자가 돌아간 뒤 홍보 팀 여성이 "대체 어떤 기사가 될까요" 하고 말했다. 기사는 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나에게는 있었다.
날아가면 8분, 걸어가면 10분,
2분 차이밖에 안 난다면 날지 않을 거야?
나 같으면 날 거야.
8분이고 10분이고 큰 차이 없다고 말하는 건
'어차피 인간은 죽으니까 뭐든 상관없어'
하고 말하는 거랑 같잖아.
어차피 언젠가는 죽지만
사는 방식은 중요한 거야.
- 아마도 미조구치 씨는 지금껏 인생을 살아오며, 돈이라는 의미로도 경험이라는 의미로도, 저축이라는 것을 거의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에 부스지마 씨한테서 "다카다는 미조구치와는 정반대 인생을 걷고 있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동감이다.
- "눈물겹던가요?"
"아니, 웃겼어." 상무가 이를 보이며 웃었다. "막판에는 오카다의 어릴 적 같은 반 친구한테 추억담을 들으러 찾아가기까지 했지. 뭐라더라, 영화감독인가 하는 사람한테 취재를 하러 갔다나."
"취재? 무슨 말이죠? 가능한가요, 그게."
"어디서 목돈을 손에 넣었다든가, 검문할 때 주웠다든가 영문 모를 소리를 하던데, 어쨌든 그 돈으로 기자인지 작가인지한테 몰래 바꿔치기해 달라고 했다네."
"하아." 이제 아예 뭘 하고 싶은 것인지 목적을 잃어버린 게 아닌가. "좀 불쌍한 지경이네요."
"뭐, 부스지마 씨의 코털을 건드려놓고 목숨이 붙어 있는 것만 해도 미조구치한테는 행운이야."
- 미조구치 씨는 아예 스마트폰을 꺼내 평소 자주 보는 인터넷의 '맛집 탐방 일기'를 소개하고 있다. 여기, 여기, 이 블로그 괜찮다니까. 업데이트도 자주 하고.
다 같이 스마트폰의 액정 화면을 들여다보며 케이크의 재료며 크기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기 시작한다. "나도 사키 씨 의견을 참고해서 몇 군데 가봤는데 실패는 없더라" 하고 미조구치 씨가 자랑스럽게 말한다.
- 그것은 상냥한 게 아니다. 그 간호사에게 빚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어딘가에 이용할 수 있으리라 머리를 쓴 것이다.
나나 미조구치 씨 같은 사람이 세상에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는가.
'공짜보다 비싼 것은 없다.' 이것이다. 우리는 늘 우리의 행동을 통해 그 가르침을 널리 퍼뜨리고 있는 셈이다.
- 처음에는 미조구치 씨가 또 배신하지는 않을지 나를 스파이처럼 써서 조사하려는 건가 싶었지만 부스지마 씨 왈, "미조구치는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는 쓸 만해. 그런데 이상한 놈이랑 붙어 있으면 영 못쓰지. 널 파견할 테니 그럭저럭 잘 기능하게 만들어"라는 것이었다.
요컨대 하청 공장을 유지하기 위해 구제 불능의 공장장을 컨트롤할 수 있는 남자를 공장 직원으로 잠입시키는 꼴이다. 그럴 바에야 날 공장장으로 세우면 될 텐데, 하는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서는 미조구치 씨가 받아들이지 못한다.
- "뭐야, 이것도 사어死語인가? 간단히 말하자면 '돈데모 나이데스요(천만의 말씀입니다)'라고 말할 때 '돈데모 핫푼'이라고 대답하는 거야."
"그 핫푼이 뭔가요."
"그렇지?" 미조구치 씨가 기운차게 말하더니 몸을 일으키려고 한다. 다리 근육이 꼬였는지 아픈 듯 얼굴을 찌푸렸다. "나도 그걸 여태 몰랐는데 말이야 원래는 'never happen(일본식으로 읽으면 '네바 핫푼'이 된다)이라는 영어에서 왔대."
- "재미있잖아. 'never happen'이 돈데모 핫푼이라니.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날아도 8분, 걸어도 10분' 같은 소릴 했던 거지."
"뭡니까, 그게." 내가 말하자 미조구치 씨는 또 한 번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요컨대 자신이 잘 아는 단어가 아래 세대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놀라움을 곱씹고 있는 것이겠지만, 나로서는 그런 연장자의 반응 자체가 성가시기 짝이 없다.
- 창가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그쪽에도 사람이 있다는 걸 깨닫고 나는 화들짝 놀랐다. 상무였다. 장신에 어깨가 떡 벌어지고 뺨이 홀쭉한 미남으로 옛날에는 어느 잡지 모델 일을 했다는 소문도 있지만 내가 볼 때는 인정이라는 것을 갖지 않은 무서운 상사일 뿐이다.
- "뭐, 옛날에 오카다가 남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많은 걸 알게 된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서."
"오카다 씨요." 미조구치 씨는 오카다 씨의 이야기를 할 때면 반드시 울상을 짓는 어린아이 얼굴이 된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오카다 씨를 제물로 바친 죄책감 때문이겠지만, 그 이상으로 미조구치 씨에게는 오카다 씨와 함께 일하던 때가 무척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오카다는 아무 상관없는 남의 문제에 참견도 많이 했지. 난 그 귀찮은 짓을 굳이 왜 하나 싶었지만 뭐, 중요한 거지. 남과의 교류라는 거."
- "아, 맞다. 그게, 간호사들 대부분이 '어릴 때 입원한 병원의 간호사가 친절하게 대해줬기 때문에'라는 거야.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고요. 모범 답안을 병원에서 마련해 둔 건지도 모르죠."
"자신들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후계자를 견인해 가는 직업이 그리 흔한 게 아니야."
"그럴까요. 국가 대표 선수를 보면서 축구를 시작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축구 선수는 영웅이잖아. 간호사는 무명이라고. 무명의, 대단한 월급도 아닌, 딱 봐도 힘들어 보이는 직업을 어째서 선택했는가. '내가 도움을 받았으니까,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라니, 감동적이잖아."
"그런가요."
"그리 많지 않아, 그런 직종은. 의사가 되고 싶은 인간들하고는 또 다르지."
그 말은 그 말대로 의사에 대한 편견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한다.
- "기왕이면 힘든 표정을 짓지 않게 할 방법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 시작한 참이야."
"무슨 뜻입니까."
"상대의 약점을 잡거나 실수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 상대를 기쁘게 해서 빚을 만들어주자, 이거지."
나는 박장대소를 하고 싶은 걸 참았다. "그렇게 잘될까요. 사람이란 공포나 불안으로는 행동해도 고맙다는 마음으로는 쉽게 움직이지 않아요."
"뭐." 미조구치 씨는 뒷문의 작은 디딤판을 딛고 올라간다. "그래도 시험해 보는 것 정도는 괜찮잖아."
- "그런 게 의미가 있을까요." 나는 말했다. 상대가 괴로워하는 게 싫다는 둥, 남을 기쁘게 하고 싶다는 둥, 그런 미적지근한 발언이 나로서는 견디기 힘들었다. 여태까지는 미조구치 씨를 대충 단순한 남자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거기에다 어설프게 무른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거라면 실망을 안 할 수가 없다. 영양가 없는 채소나 한 가지다. '조금이나마 영양가가 있다고 해서 맛이 없는데도 꾸역꾸역 먹었더니' 하는 기분.
- "다카다, 넌 머리가 좋아. 옛날부터 공부 잘했지?"
"무슨 소리예요, 뜬금없이."
"나처럼 공부도 못하고 다 귀찮아서 내팽개친 무책임한 인간과는 다르지. 넌 매사에 빈틈없이 생각을 해."
- "글쎄. 나도 잘은 모르는데. 다만 그때 오카다가 한 건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이었어."
"그럴듯하게?"
"사람이란 그럴듯한 정보를 주면 멋대로 상상하고 인정해 버린다는 거지. 나도 말이야, 그래서 그걸 해봤어."
- "어디서 들은 거지? 나잖아. 내가 너한테 말한 것일 뿐이야."
- 나는 그 박력에 압도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껏 칠칠치 못하고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는 줄로만 알았던 미조구치 씨가 다른 사람으로 보여, 요컨대 그것은 내 주관이 모조리 빗나갔다는 증거이기에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어진 상태였다.
- "재미있고 좋은 녀석이었다고. 겨우 그것 때문에 네 인생을 날리려는 건가? 잘 들어, 여기서 그만두면 모두 없던 일로 해주지."
- "난 네가 싫지 않아. 네가 내 밑에서 빠져나가려고 했던 그때도 네가 전부 오카다 탓으로 돌리려 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런데도 널 살려뒀지. 왜인 줄 아나? 처음부터 널 인정하고 있었거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는구먼."
- "자세히는 모르지만." 부스지마 씨는 그렇게 말한 다음 살짝 웃었다. "뭘 먹는지는 알아."
- "알겠어? 그건 내가 베푼 친절이야. 오카다의 행방은 말 못 하지만 너한테도 오카다가 무사하다는 건 알리고 싶어서."
- "미조구치 씨, 그거 아닌가요?"
"그거라니 뭐."
"맛집 탐방 일기요!"
- "그 블로그를 업데이트하고 있는 건 사키 씨야." 미조구치 씨는 내뱉듯 말했다.
"어느 날 오카다가 나한테 살짝 메일을 보냈어. 덕분에 무사히 살아 달콤한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하면서. 사키란 건 어디서 알게 된 여자 이름 아닐까."
- "어이, 다카다." 미조구치 씨는 총을 든 채 나를 불렀다. "지금 당장, 그 맛집 탐방 일기 열어."
- 미조구치 씨가 빠른 어조로 말한다. "우리 친구 해요. 드라이브도 하고 밥도 먹고."
"엥, 뭡니까, 그게."
"마지막으로 오카다랑 있을 때 그런 메일을 보냈어. 기억하고 있을지도 몰라."
"잊어버렸어요, 그런 거."
"그럼 '애를 만드는 것보다 친구를 만드는 게 훨씬 어렵다'는 말도 덧붙여."
품위 없는 말이네요, 하고 나는 말하고 있었다. 그런 다음, 지금까지 인생에서 이렇게 필사적으로 조작한 적이 없다 싶을 만큼 필사적으로 스마트폰의 문자 버튼을 누른다. 이렇게 된 이상 될 대로 되라는 마음도 있었다. 이제 미조구치 씨가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 말고는 내게 길이 없는 셈이었다.
- 병실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 "3분밖에 못 기다려. 3분이 지나면 말해."
- "그렇게 곧바로 연락이 올 리는 없을 것 같은데요."
"뭐, 괜찮아." 부스지마 씨는 달관한 어조로 말했다. "거기에 운을 걸어보는 것도 재미있군."
- "만약 연락이 오면?" 나는 무의식 중에 말참견을 하고 있었다.
부스지마 씨가 손을 살짝 펼쳤다. "아까도 말했듯이 네가 쏘지 않으면 난 너희들을 자유롭게 풀어줄 거야. 좋을 대로 해. 어딘가에서 즐겁게 살면 돼."
그 말을 믿어도 좋을 것인가.
미조구치 씨가 입을 연다. "그러면, 어딘가에서 쭉 휴가를 만끽해 주겠어. 내 인생, 남은 날은 여름방학이야. 숙제도 없이."
- 시간은 흘러간다. 나는 스마트폰을 노려보며 간절히 빌고 또 빈다. 메일아, 와라.
- "움직이지 마. 나도 부스지마 씨의 그 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있어. 발뒤꿈치에 날붙이를 숨겨두고 있다가 다섯 명을 베어버렸다는 이야기."
미조구치 씨도 알고 있었나.
"그건 거짓말이야." 부스지마 씨가 팔을 살짝 벌리고 즐거운 듯 웃었다.
"다섯 명이 아니라 여섯 명이었어."
쯧, 미조구치 씨는 혀를 찬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오나" 감탄하면서 "부스지마 씨, 당신은 역시 대단하네" 하고 웃었다.
"나도 네가 싫지 않아."
- 부스지마 씨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로서는 전혀 파악이 되지 않는다.
- "날아가면 8분, 걸어가면 10분, 메일은 몇 초라고."
"한순간입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내 심장박동이 빨라져 있다. 한순간이냐, 아니면 영원이냐.
몸 안에서 채가 북을 때렸다가 튕겨 오르는 것만 같다.
- 차르랑, 하고 스마트폰이 울렸다.
숯불구이 집이면 가만 안 둔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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