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주원규
출판 : 네오픽션
출간 : 2019.02.05
그동안 쌓아두기만 했던 소장 도서들을 줄여나갈 구체적인 결심을 했다. 재정비의 시간이다. 익숙하지만 낯선 책들을 읽으며 '당시의 나는 왜 이 책을 구매했을까'를 생각해 보는 것도 나름의 재미다. (물론 그럴 일 자체를 안 만드는 게 제일 좋겠다고도 생각한다)
<메이드 인 강남>은 소설이지만 영상화를 염두에 둔 듯한 소설이다. 저자가 영상화에 익숙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한국적인데, 적당한 선에서 성공했던 2000년대 한국 영화들을 보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아수라>라거나, <돈>이라거나. 실화가 아님을 알지만 어딘가 묘하게 실화가 섞여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도 비슷하다.
개인적으로는 즐겁게 읽었다. 젠더적으로 접근하고 싶지는 않지만, 주요 등장인물인 민규와 재명 모두가 사십 대 근처의 직장인 남성이라는 점과 그들이 마주하는 세계는 최상위부터 숨겨진 지하까지 상당한 격차를 보인다는 점이 소설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강조된다고 느꼈다. 두 인물은 대척점에 서 있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거울상에 가깝다. 저자가 말하고자 한 '강남'은 실체로서의 강남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긴 시간 동안 직장 생활을 해온 이에게는 사회적 죽음 역시 죽음이다. 사느냐 죽느냐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서게 되는 순간, 동물적인 생존본능과 욕망이 뒤섞이는 그곳은 '강남'이 된다.
해서 <메이드 인 강남>을 스토리 그대로 읽는 것도 좋지만, 무엇이 투영되어 있는가를 생각하며 읽는 편이 조금 더 즐겁게 읽을 수 있다고 본다. 비슷한 현상들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느냐 아니냐와는 별개다. 각자는 자신이 조금 더 깊게 읽어낼 수 있는 욕망에 이입한다. 글은 쓰여질 때도 읽혀질 때도 자신의 내부 안에서 읽어낼 수 있었던, 혹은 외부에 읽히고 싶었던 것들을 표현한다.
아쉬웠던 점 하나는 '비역질'. 구역질의 다른 표현으로 사용한 것 같은데, 전혀 다른 의미라 이 표현을 볼 때마다 몰입이 깨졌다.
다른 하나는 인스타 관련 대화를 할 때 아내가 전화를 했었다는 점. 이때는 다른 번호를 사용했었다고도 상상해볼 수 있지만, 아무래도 극후반부의 반년 만의 통화라는 임팩트는 희석된다. 민규가 어째서 '의문'을 품게 되었는가에 관해서도 개연성이 부족했다는 느낌이라 다소 아쉽다.
반면 재미있다고 생각한 점은 '럭키스트라이크'. 소설이 발표될 시기에는 정식 판매되지는 않는 담배였을텐데 등장인물들은 죄다 '럭키스트라이크'를 피우고 있다. 만약 의도적인 표현이었다면 그들이 '평범하지 않다'는 이미지를 덧씌우고 싶었던 게 아닐까. 또 다양한 종류가 존재하므로 어떤 인물이 어떤 종을 피웠을지를 상상해 보는 재미도 있다. 개인적으로 민규와 재명은 각각 다른 필터의 럭스를 피웠을 것으로 상상했는데, 민규가 럭스를 피운다는 의미는 사무실에 준비된 아메리카노 벤티 사이즈 같은 의미라고 이해했다. 어떤 삶에도 고단함은 있다.
끝.
- 밤이 오히려 더 밝은 곳. 그렇다고 밤인 사실을 숨기려 하지 않는 곳.
- 페어글라스 창문 쪽에서 반대편으로 몸을 돌린다. 그러자 백색의 침실 벽면에 100호 크기의 표구된 액자가 민규의 눈에 들어온다. 우선은 액자 유리에 비친 자신의 벗은 몸이 들어온다.
- 사십 대 초반 남자의 몸에 아무리 규칙적인 운동을 해도 빠지지 않는 군살이 불편하게 각인된다. 자신의 몸에게 수치심이 실감되는 순간 민규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액자 속 그림에게로 옮겨간다.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를 모작한 그림인데, 원작에서는 대충 뭉개고 넘어가는 두 여자의 벗은 몸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한 화법이 인상적이다.
- 셔츠에 감색 슈트까지 차려입고 거실 소파에 앉는다. 그리고 입에 무는 럭키스트라이크 한 대. 불을 켜지 않은 거실에서 가느다란 실오라기 같은 담배 연기가 천장으로 피어오른다. 그때, 불이 켜지고 아내의 모습이 보인다. 아내는 민규의 시선에서도 너무 먼 곳에 있는 듯 보인다.
- "담배는 밖에서 피웠으면 좋겠는데."
"미안."
"그런데... 무슨 일이야?"
- 평소와 다르게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아내의 반응에 민규는 왠지 어색함을 느낀다. 아내와 오랜 시간 말을 섞어본 일이 없어서일까. 돌이켜보면 민규는 아내와 같은 아파트, 같은 공간에서 지내고는 있지만 최근 1년간 제대로 마주한 순간은 손에 꼽을 정도다. 각자 다른 침실을 쓰고 다른 시간대에 일어나 출근하고, 다른 시간대에 집에 들어와 잠든다. 민규는 최근 아내가 어떤 스타일의 남자친구를 만나는지도 무관심해졌다. 그래도 신혼 초기엔 아내의 남자친구 취향은 물어봤다. 아내에 대한 어색함은 그 역시 해명 못 할 미안함으로 이어진다.
- 잠시, 뭔가 말하려다가 민규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러고는 한마디만 남기며 현관으로 걸어간다.
"나 좀 나갔다 올게."
- 처음부터 설계자가 되고 싶어 일하는 변호사는 아무도 없다. 또한 설계자가 되고 싶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로펌 Y의 김 대표 주도하에 벌어지는 설계 업무로의 진입 조건은 극단적으로 보면 모호하지만 또 분명하리만치 확실하다. 땅에 발 딛고 사는 이유를 찾지 못하는 정신력과 조건을 가진 사람, 그런 사람이 설계자에 적합하다는 게 김 대표가 민규에게 들려준 확신에 찬 말이다.
- 도덕과 비도덕 사이, 윤리와 비윤리 사이, 정치·경제·사회·문화 사이의 복잡한 구조와 현상은 파악하되 그렇게 파악한 현상을 분석하거나 판단하지 않는 가치관을 지닌 인물. 모든 현상과 사물, 그 틈새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관계를 완벽히 유물로 간주하고 처리하는, 다시 말해 일체의 인간적 감정이 배제된 기계적 처리가 가능한 인물이 설계자의 최고 미덕이라면 민규는 그 미덕에 가장 최적화된 인물이라는 게 로펌 Y 김 대표의 생각이다.
- 그 어떤 의견이나 판단도 내놓지 않는 무색무취한 정치 성향을 보이면서도 국내외의 정치 흐름과 심지어 국제 정서의 흐름까지 짚어내는 통찰력을 잃지 않는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고, 거기에 돈을 천문학적으로 보유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초월적인 비윤리성에 대해서도 무감각할 수 있는 판단 유보의 가치관을 지닌 인물.
- 로펌 Y에서 시행되는 오전 9시 정기 회의엔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벤티 사이즈가 단골 메뉴처럼 등장한다. 거기에 500밀리 생수병과 타이레놀 두 정도 추가된다. 아침에 벤티 사이즈의 아메리카노를 전부 마시고 타이레놀까지 털고 나면 오전 내내 두 가지 생각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다. 어떻게 해서든 사건을 마무리하겠다는 워커홀릭으로서의 다짐과 섹스에 대한 공상뿐이다. 민규는 섹스의 공상에 사로잡힌다. 침실 벽에 걸어놓은 <풀밭 위의 식사>를 어쩔 수 없이 떠올리며.
- 실제 발생한 사건을 고객이 의도하는 상황과 배경에 맞춰 재구성하는 것이 민규가 하는 일이다. 고난이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업무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덥석 물어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 법이 인간 생활에 기여할 거라는 일말의 기대나 낭만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면 절대 민규와 같은 설계자가 될 수 없다. 설계자에게는 고객의 의도가 사건의 배경이자 사건 그 자체다. 사건의 진실과 실체 역시도 고객의 의도에서 벗어나선 안 된다. 민규의 설계는 그런 점에서 지금까지 오류를 보인 적이 없다. 성공률 100퍼센트를 유지하고 있다.
- 늘 겪는 일이지만 설계자인 민규는 둘로 분리된 회의 진행이 설계자인 자신을 특별 대우하는 방식이라기보다는 철저히 격리시키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외딴섬에서 그 누구도 검증하거나 알아주지 않는, 그 반대로 판단받지도 판단하지도 않는 무결정과 무의미의 고립, 그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느낌을 지우기가 어렵다. 그것이 설계자로 입문해 성공률 100퍼센트의 성과를 거 둔 민규가 느끼는 허탈감이었다.
- 구부정하게 숙인 허리에 창백한 표정을 지은 김 대표가 자리에 앉은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민규를 살피는 일이다. 민규는 김대표의 창백한 낯빛, 차가운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숙이거나 시선을 다른 곳, 빔프로젝트가 비추는 스크린으로 향한다. 하지만 김 대표의 시선은 요지부동, 민규의 상태나 심리를 헤아리는 데 할애된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집요한 눈빛. 민규 역시 어떤 오기가 발동했는지 자신을 바라보는 김 대표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는다.
- "김장원 금융감독원 과장은 테헤란로14길 차 안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걸로 처리하겠습니다."
민규의 설명에 타이레놀을 삼킨 백발의 김 대표가 묻는다.
"심근경색이 괜찮겠어? 지병이 없던 걸로 나오던데."
"심근경색만큼 돌연히 찾아올 확률이 높은 병은 없습니다. 몸에 남아 있는 필로폰 성분을 처리하고 나서 바로 국과수와 입을 맞추면 뒤탈은 없을 것 같습니다. 야근 뒤 급성으로 사망한 전형적인 산재라고 아내와 자식들에게 말해주면 보험금에 재해보상금 수령하려고 부검 시도는 안 할 거고요."
- 이번엔 우진이 묻는다.
"그런데 왜 테헤란로 14길이야?"
민규가 아이패드를 터치해 다음 화면으로 넘기며 답한다.
"거기가 최근에 공사 중이라 CCTV 사각지대라서요. 그다음은 부동산 브로커 최영민 씨인데요. 이 사람은 강원도 자신의 사업부지 쪽으로 사망 장소를 이동할 예정입니다. 팩트 재구성 방법은..."
- "연예인, 그것도 싱어송라이터의 죽음에는 신화가 필요합니다. 여론몰이에 그 정도로 임팩트 있는 것도 없고요."
- 민규는 그제야 김 대표와 시선을 마주한다. 우진이나 민규 모두 김 대표가 선문답을 즐기는 스타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어떤 예상 불허의 질문이 올지 조금은 성가신 표정이다. 우진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김 대표라는 존재 전체가 자본을 알파와 오메가로 삼으며 현인 흉내를 내는 것에 역겨워하곤 했다. 바에서 벌어진 술자리의 끝에서 우진이 남기는 고정 레퍼토리를 민규는 비교적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대단한 것도 없으면서 지가 세상에서 가장 잘난 도인인 것처럼 구는 거 난 그런 게 재수 없어. 지나 나나 뭐가 달라? 법을 이용해 거둬들이는 떼돈에 환장한 미친 아재 아님 늙은이잖아. 내 말 틀려?'
- 하지만 지금, 김 대표와 독대하는 민규는 역겨운 감정조차 남아 있지 않다. 어쨌든 김 대표의 선문답은 관례처럼 이어진다.
"김 변은 이 일들을 의뢰한 고객이 누군지 궁금하지 않나?”
김 대표의 질문에 대한 민규의 반응은 즉각적이다.
"전혀 궁금하지 않습니다. 제 고용인은 대표님이니까요."
"그래, 역시 자네다운 대답이야. 그럼 나도 일방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 한마디 해볼까?"
"말씀하십시오."
"알 필요가 없지."
"예?"
"우린 돈만 받을 뿐이야. 고객이 누군지 관심 없다고."
- "자네도 지금 날 그렇게 생각하지?"
"어떻게요?"
"결국에는 돈 챙기는 게 우선인 장사꾼이 법조인, 현인, 교주 흉내 낸다고 말이야."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믿음... 버려."
"...?"
"난 그냥 돈에 환장한 놈이야. 누가 찔려 죽든, 목매달아 죽든 관심 없어. 그냥 돈이 중요하다고."
- "그런 말씀을 지금 제게 특별히 남기시는 이유가 뭡니까?"
"칭찬이야."
"무슨 칭찬요?"
"자네의 그 멘털이 부러워. 세상 어느 것에도 가치를 두지 않고 그냥 자네가 생각하는 그대로 있잖아."
"대표님도 마찬가지십니다."
"난 돈에 약하잖아. 김 변처럼 돈에조차 무관심했으면 이 일, 맡지도 않았어."
- 실장이란 직함이 적힌, 금박의 테두리가 인상적인 명함을 건넨 삼십 대 초반의 기획사 임원은 민규를 보며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민규는 그녀의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직은 신입에 가까운 대기업 직원이 처리하기 어려운 업무를, 망설이는 이상의 감정이 섞여 들지는 않은 표정으로 대하고 있다. 실장의 얼굴 표정을 얼핏 살피던 민규는 그 무표정에 가까운, 애써 훈련받은 건조한 표정을 이곳 강남에서 지나치게 익숙히 봐온 듯한 느낌을 받는다. 강남에서는 표정 트레이닝을 별도로 받아야 하는 어떤 진입 장벽이 있다는 느낌도 함께.
- 민규가 말을 끝낸 뒤 블라인드 틈 사이로 꽤 많은 이들의 눈동자와 마주친다. 로드매니저, 스타일리스트, 스케줄 관리자, 홍보전문가 등. '몽키'라는 주식회사를 통해 월급을 수령받는 이들이다. 민규는 그들의 표정에서도 '몽키'라는 이름의 주식회사가 부도났다는 아쉬움이 읽히는 게 왠지 모르게 성가시다.
- "그럼, 경찰이 꽤 빨리 온 거네요."
"무슨 말입니까?"
"1층 숍에 강남 강력계 형사가 기다리고 있어요."
- "의뢰인에게 연락을 받고 오신 겁니까?"
민규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재명이 쓴웃음을 지으며 답한다.
"김 변호사는 참 변함이 없어요. 사람 사는 방식이 당신처럼 비인간적이면 좋겠네요. 머리, 꼬리 죄다 커트하고 몸통만 담백하게 얘기하고 일 끝나면 언제 봤느냐는 듯 모른 체하고 말이죠. 근데 말이야..."
- 재명이 럭키스트라이크를 입에 물고 민규에게도 한 개비 권한다. 민규가 고개를 저으며 주위를 둘러본다. 정오의 강남 한복판에 위치한 초대형 기획사의 1층 로비인데, 놀랍게도 사람들의 왕래를 찾아볼 수가 없다. 담배에 불을 붙이는 재명을 불쾌하게 쳐다보는 경호업체 직원들의 독기 어린 시선만이 인기척의 전부다.
- "강남에서는 그렇게 사는 게 불가능하지 않나?"
"무슨 뜻이죠?"
"강남처럼 더럽게 인간적인 곳이 또 어디 있다고 이런 식으로 나오느냐 이 말이오."
- "김변, 말해."
"선배, 자석이 붙었는데."
자신을 자석으로 지칭하는 민규를 바라보며 재명이 헛웃음을 터뜨린다. 실내에서 흡연을 계속하는 재명을 제지하려고 경비원들이 다가오는 걸 민규가 성가시게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 잿빛 슈트를 입고 타이까지 맨 재명이 거울을 보며 왁스를 바르고 머리를 올린다. 거뭇거뭇한 수염까지 오랜만에 깎고 나니 재명의 얼굴은 서른아홉, 그 나이대로 복귀한 듯 보인다. 이마에 주름은 분명 늘어났지만 자신의 외모는 아직은 삼십대로 봐줄 만하다고 재명은 스스로 자위한다. 외모에 대한 재명의 자신감은 수억 원의 빚을 지고도 아무 생각이 없는 철없는 남자의 객기와는 다른 것이다. 언론 발표를 앞두고 경찰서 화장실에서 얼굴과 옷매무새를 세심하게 다듬는 재명의 태도는 흡사 어이없게 뒤엉켜버린 현실을 향해 정면 돌파하려는 의지를 나타내는 듯하다.
'더럽게 엮였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난 빠져나갈 수 있어.'
- 민규의 시선은 내내 몽키에게 집중되어 있다. 재명은 민규가 죽은 사람을 혐오나 두려움으로 쳐다보는 게 아니라 진지한 호기심으로 바라봄을 느낀다. 그사이 연구원이 슬쩍 밖으로 나간다. 재명은 여전히 시체에서 눈을 떼지 않는 민규에게 말을 건넨다.
"더 처리할 거 남았어요?"
- "피가 너무 많이 묻었고 잡내가 섞여 있어요."
"잡내라..."
"10분만 주세요"
- 민규와 몽키, 산 자와 죽은 자가 한 공간에 침묵으로 함께한다. 민규는 수술 장갑을 낀 채로 몽키의 몸 곳곳을 소독하고, 아직 마르지 않은 경동맥에 주사를 주입해 약물 투약으로 오염된 흔적을 지우는 일을 무감각하게 계속한다. 감각이 느껴지는 게 이상할 정도로 민규는 자기 앞에 있는 몽키가 하나의 사물, 그 이상이나 이하의 감정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어떤 공포심도 엄습하지 않는다. 미신적인 공포나 두려움도 민규를 괴롭히지 않는다. 역한 비역질을 유발케 하는 피비린내만이 그를 성가시게 하는 전부다.
- 작업이 마무리되어 갈 즈음 민규가 몽키를 내려다본다. 화학약품으로 얼굴을 소독한 효과일까. 피딱지와 핏물로 엉망이 되어 있던 얼굴이 놀랄 만큼 깨끗해졌다. 하얗다는 느낌을 넘어서서 전체적으로 푸른빛을 머금은 상태다. 그것은 마치 짙푸른 직사각형의 수족관 속에 죽은 채로 표류하는 상어를 닮았다.
- 몽키의 얼굴을 한동안 응시하던 민규가 어느 순간 몽키에게서 시선을 거둔다. 그러고는 고개를 세차게 두어 번 흔든다. 민규는 이 순간 어떤 의미에서만큼은 감정의 동요를 격발시키고 싶다. 시체를 매만지고 있는 자신이 이 모든 과정을, 상상을 초월한 인건비를 벌어들이는 근로자가 아닌, 윤리적 감각을 지닌 한 인간의 감각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하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시도가 되어 부메랑처럼 민규에게 더 견고하고 딱딱한 죽은 감정으로 되돌아온다. 민규는 알고 싶다. 도대체 자신에게 어느 순간부터 이런 식의 무류한 감정과 이성 세계가 형성되었는지. 하지만 창백한 백색 불빛만이 침묵과 함께 흐르는 이 공간은 아무답도 주지 않는다.
- "이렇게 설계하고 묻히면 어떻게 되는 거요?"
"그게 왜 알고 싶은 겁니까?"
민규가 되묻자 재명은 잠시 망설이다 쓴웃음부터 짓는다. 그리고 재명은 답한다. 아니, 되묻는다.
"당신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소?"
재명이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묻자 부검실 내부에 야릇한 하울링이 퍼져 나간다. 재명은 자신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민규에게 변명하듯 덧붙여 말한다.
"시체를 닦을 때나 죽은 이의 몸에서 잡내가 난다고 말할 때 당신의 표정, 살아 있는 사람 같지가 않아서 그래요."
- "미안한데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요. 솔직하게 대답해줬으면 좋겠어."
"솔직한 대답보다는 당신에게 받은 질문에 대한 답으로써만 말할게요."
"나참..."
"설계된 그대로가 팩트로 남게 됩니다. 아이돌 가수 몽키는 자살한 거예요. 그게 공식 기록입니다."
- 민규의 말처럼 아무리 씻어내도 잔류하는 잡내란 게 정말 존재하는 걸까. 재명은 독한 진토닉을 연거푸 석 잔 입안으로 들이부으면서도 찝찝한 기분이 가시지 않는 것에 답답해한다.
- 윤이 터치펜으로 장외시장 종목 중 그래프에 나타난 종목 대부분을 크게 원으로 그리며 말을 잇는다.
"이 종목들 업체 이름만 다르지 모두 하나의 회사로 귀결되는 거죠."
- 그러고는 민규의 맞은편 자리에 앉는다. 이어폰을 꽂고 서류를 정리하던 민규가 말한다. 민규는 존대와 반말을 섞어가며 여자를 대한다. 변호사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원하든 원치 않는 자연스럽게 익힌 습관이다.
- 주민센터도 철수한 그곳은 평당 5천만 원을 호가하는 강남에 마지막 남은 상가 투자처로 부동산에 밝은 사람들의 먹잇감이 된 지 오래인 곳이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알고 있는 정부와 지자체에서는 어떻게든 장남 투기꾼의 진입을 막기 위한 규제의 끈을 놓지 않는, 그로 인해 개발하려는 쪽과 막으려는 쪽의 이해관계가 날카롭게 대립하는 이곳에는 이미 깊어진 편법의 장소들이 숙주처럼 자라나 있다.
- 5층 건물 지하에는 족히 100여 평은 넘는 화려한 인테리어를 과시하는 공간이 펼쳐져 있다. 지하 입구를 가로막으며 굳게 닫힌 녹슨 철문만 볼 때에는 전혀 내부를 예측할 수 없지만, 민규는 익숙하게 내려진 철문의 자물쇠 비밀번호를 풀고 셔터를 올리듯 철문을 올린다. 안으로 들어선 민규는 바로 옆 벽에 붙은 조광기를 최대로 높인다. 하지만 지하 공간의 어둑함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 남녀가 보이는 기괴함을 민규는 무표정으로 바라본다. 민규의 아무 감정이 섞이지 않은 표정이 오히려 상황을 더욱 기괴하게 만든다.
그런 민규의 곁으로 한 남자가 다가온다. 아래위를 검은 슈트로 차려입은 남자는 민규의 자연스럽고 태연한 등장에 긴장한 표정이 역력하다.
- "어디서 오셨습니까?"
남자가 말을 건넨다. 남자의 목소리는 정중하지만 동시에 경고의 신호탄처럼 다른 남자들의 자동 호출을 이끌어낸다. 문을 열고 들어온 그들은 사설 경호원으로 보인다. 아니, 그들은 민규를 처음 보는 것처럼 대하지만 민규는 그들을 모르지 않는다. 강남 건물 지하에 위치한 비밀 클럽을 주관하는 이들에게 설계자는 상시 필요한 목적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민규가 이곳의 비밀번호를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 그런 그녀가 민규를 한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다 이내 웃어 보인다. 한순간, 민규는 객쩍은 몽상에 사로잡힌다. 입가나 눈가의 주름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환한 웃음. 그 표정에서 민규는 여자의 무구함을 실감한다. 사람, 대상, 관계에서 어떤 조건이나 거리감도 느끼지 않는 무경계의 편안함으로 가득한 웃음, 민규는 그 웃음을 받아들이는 대상이 설계자인 자신이란 사실에 기묘한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 얼마나 더 냉정해지면 지금과 같은 닳고 닳은 환락의 끝에서 순수한 웃음을 지을 수 있을까. 구릿빛 피부에 오랜 시간 헬스로 담금질해 잔근육이 가득한 민규는, 알몸 차림의 남자가 자신을 짐승처럼 집어삼키는 순간에도 입가의 웃음을 잃지 않는 여배우의 얼굴에서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한다. 그사이 민규의 설계자로서의 위치를 알아본 경호원 중 하나가 서둘러 다른 경호원들의 무례한 경계심을 거둔다.
- "서명이 필요해요."
서명해야 한다는 말에 엄철우가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말한다.
"사인해도 별 소용없을 텐데."
"요식행위입니다. 사인은 서류 증명이 핵심이니까요."
"그래요. 당신은 변호사니까."
엄철우가 빠른 속도로 자신의 이름을 합의서에 휘갈겨 쓴다.
- "그걸 왜 묻지? 당신 일과 무슨 상관인데?"
"설계하려면 원본을 알아야 하니까. 원본을 알아야 조작이 가능하거든."
"그럼 당신 같은 인종은 비밀보장을 어떻게 하는데?"
"... 보장 같은 건 없어요."
- "목격자들 입 맞추기, 종료했어요."
"뒤탈 없겠지?"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완벽해요. 서류가 아닌 말은 법원에서 효력이 없으니까."
"하긴 그 자식들, 입이라도 뻥끗하면 그 바닥에서 돈 벌긴 다 글러먹을 텐데 그런 말도 안 되는 베팅을 할 리는 없겠지."
"제 잔금... 48시간 안에 입금하는 거 잊지 마시고요."
"응, 결제할게. 별 특이사항 없으면 지급될 거야."
"그래요."
"김변."
"..."
"수고했다."
- 6시 55분. 10분을 넘기지 않은 엄철우와의 면담을 끝낸 민규가 들른 곳은 대형 편의점이다. 그곳에서 민규는 3만 원이 넘지 않는 싸구려 양주 한 병을 구입해 편의점 파라솔에 앉아 마신다. 한 모금, 두 모금, 빠르게 입안으로 털어내던 민규는 이내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강남의 하늘과 그에 저항하기라도 하듯 시간이 갈수록 환해지는 강남의 네온사인을 번갈아 바라본다.
- "나야."
"알고 있어."
"그래. 알고 있구나."
"... 할 말 있어?"
"뭐, 당연한 건데 우리 인스타에 남겨야 할 것들이 부족해져서."
- 아내가 '인스타'란 말을 꺼내는 순간 민규는 부부의 몇 가지 의무 사항과 관련된 점검을 떠올린다.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해야만 하는 청담동에서의 저녁 식사, 자칭 로열패밀리인 동호인들과의 해외 요트여행, 분기마다 반드시 포획해야 하는 명품 신상, 이런 것들을 정기적으로 확인함으로써 부부관계에 이상이 없음을 입증해야 하는 아내의 의지. 민규는 통화 속 상대가 눈치채지 않도록 짧게 한숨을 쉰 뒤 답한다.
- 단정하고 차분히 가라앉은 아내의 목소리에서 '마스터베이션'이란 말을 듣는 순간, 민규는 갑작스러운 당혹감을 느낀다. 민규가 눈을 들어 주변을 바라본다. 순간 강남의 야경, 여전히 바쁜 걸음으로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침실 전면 유리에 비치던 자신의 알몸이 겹쳐지는 실감에 사로잡힌다. 그 느낌. 민규를 꽤 거슬리게 한다.
- "그게 편해?"
"그건 왜 묻는데?"
"아니. 뭐, 사생활이라 간섭하고 싶진 않은데... 말해도 돼?"
"말해."
"좀 가난해 보여."
- 민규는 여전히 차분히 가라앉은 무심함으로 민현태를 바라본다. 민현태가 잠시 짧은 한숨을 쉰 뒤 되묻는다.
"설계자가 알 필요가 있습니까?"
"설계자인 제가 모르면 알리바이 처리가 불가능합니다."
"이해가 잘 안 되네요. 쉽게 설명해 주시겠어요?"
"진범을 모르는 상태라면 증거 처리에 오류가 생길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다른 악취미가 있는 건 아니고요?"
민현태의 질문에 민규는 침묵으로 대응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진실, 감춰질 수 없는 것, 가공되지 않은 본연의 것. 그런 걸 묻는 게 악취미일 수 있는가.
- 민규의 말을 듣고 오랜 침묵을 지키던 민경식의 장남 만현태가 입을 연다. 오랫동안 정치인의 삶을 살아와서일까. 민현태의 답은 과하게 느껴질 정도로 중의적이다.
"아버지나 그 시건방진 핏덩이나... 그 둘, 너무 오래 살았어요. 주어진 몫보다 훨씬 더."
- 우진은 민규를 탓하지 않는다. 민규의 질문이 분명 의뢰인을 향해 지켜야 할 도리를 벗어남에도 우진은 문제 삼고 싶지 않다. 그 역시 민규가 감당해야 할 몫이기 때문이다. 대신 우진은 민규의 일상적이지 못한 상태를 우려한다. 민규가 평정심을 상실하고 매끄러운 일 처리에 차질을 빚을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요즘도 불면이 계속 돼?"
- 민규는 지하 3층 주차장에 자신의 자동차 아우디 A8을 승강기 바로 앞에 주차시켜 놓은 뒤 차에서 내린다. 승강기에 올라탄 민규가 회원카드를 바코드 접촉대에 터치하자 마흔 개 가까운 층수를 알리는 버튼에서 붉은빛이 일제히 점등된다. 곧바로 35층 버튼을 누른 민규는 승강기 공간 중 좌측 모서리에 슬며시 등을 기대고 선다. 오래된 습관처럼 민규는 CCTV가 설치된 좌측 모서리에 반듯이 허리와 머리를 펴고 서곤 했다. 대각선 방향으로 비추는 CCTV 렌즈의 특징상 바로 밑 위치는 촬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2, -1 그리고 1, 2 그리고 3. 3이란 숫자에서 갑자기 승강기가 멈춰 선다. 민규는 잠시 감았던 눈을 다시 뜬다. 35층. 펜트하우스 버튼을 누르면 중간에서 멈춰 서는 경우가 없는 걸로 이해했던 민규다. 더욱이 이곳 카르멘 호텔은 오픈 전이다.
- 상황은 순식간에 역전된다. 엄철우가 재명의 손가락들을 잡아 순식간에 비틀어 꺾자 그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억세게 목을 쥔 손에서 힘을 푼다. 타의에 의해 완력이 약해진 틈새를 뚫고 엄철우는 바로 빠져나온다. 그 순간, 재명은 자신의 눈앞에서 솟구친 짐승의 눈빛에서 무정하지만 숨 막히는 욕정을 느낀다. 그 욕정은 죽음의 욕정임에 틀림없다. 욕정, 욕망의 끝이 죽음이란 명제가 유효하다면 말이다.
- 잠시 감았던 눈을 뜨자, 재명에게 보이는 사물과 공간은 놀랄 정도로 가파르게 희미해져 간다. 하지만 재명이 자신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누군지 비교적 정확하게 알아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슬림한 부피의 서류 가방에 맥북과 서류 파일 두어 개를 손에 쥐고 있는 슈트 차림의 김민규 변호사다.
- 민규는 재명의 희미하게 감기는 시선을 지속적으로 바라보며, 그의 쓰러진 몸과 주변의 사물들을 휴대폰으로 찍고 있다. 재명은 자신이 죽음의 수렁 속으로 명백히 빠져든다는 실감을 지우기 어렵다. 죽음은 한시적이다. 자신의 살아 있는 순간들이 빠르게 접혀가는 실감이 현실로 엄습하자 그는 조급한 마음이 든다. 또한 내내 차오르는 비애의 감정을 뿌리치기 어렵다. 살아있는 마지막 순간에 보는 사람이 변호사라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재명이 다급할 만큼 빠르게 묻는다. 민규는 사진 찍기를 멈추고 벽에 등을 기대고 힘없이 앉아 있는 재명의 옆에 나란히 앉는다.
- 30억이란 말이 재명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순간 민규가 잠시 침묵한다. 하지만 그 시간은 오래가지 않는다. 민규의 판단에도 재명이 숨을 쉬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민규가 빠르게 침묵을 깨고 말을 잇는다.
"여기 오지 않아도 되지 않았나요?"
"무슨 뜻이야...?"
"민현태 소장이 나에게 말하더군. 당신은 올 수밖에 없을 거라고. 하지만 난 낭만적인 기대를 하고 있었소."
"어떤 기대를... 말하는 거요?"
"도박 빚을 갚고도 10억 이상의 돈을 챙긴 당신이 여기에 올 필요가 없을 거란 기대 말이오."
민규의 말을 듣고 있던 재명이 희미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실망시켜 미안하네."
- "담배 있소?"
짧은 질문을 끝낸 재명이 가만히 눈을 감는다. 입술이 슬며시 벌어지고 그나마 버티기 위해 가슴팍 위치까지 들어 올리던 오른팔마저 바닥으로 떨어진다. 민규가 럭키스트라이크를 꺼내 불을 붙인 뒤 재명의 입에 물려준다. 둘이 함께 피우는 마지막 담배다.
-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여긴... 강남이니까."
- 개장한 카르멘 호텔 최상층에 위치한 펜트하우스에서 벌어진 비극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조재명이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의 미니멀한 건조함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건 극단적인 화려함과 세련됨으로 무장한 인테리어다.
- "그게 중요한 게 아니면... 중요한 게 뭐죠?"
"실체가 있는 건 돈 뿐이야. 우리는 업무를 처리한 만큼 비용을 지급받아왔지.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남은 잔금을 지급받아야 하고. 그게 리얼리티야. 안 그래?"
민규는 동의를 구하는 우진의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우진이 민규를 보며 아무리 봐도 형식 이상의 느낌은 전달되지 않는 말을 계속한다.
- 잠시 민규가 로펌 Y의 대회의실을 바라본다. 자신과 우진 둘만 있는 게 아니다. 김 대표가 대회의실 정중앙에 자리를 잡고 앉아 심드렁한 표정으로 민규를 바라본다. 김 대표의 표정과 눈빛은 그 혼자만의 특징이 아니다. 열 명이 넘는 다른 변호사도 일제히 민규를 알 수 없는 무표정과 영혼을 멈춰 세운 듯한 무정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덤덤하게 있다가 갑자기 상대를 할퀼 것 같은 전의를 품은 눈빛을 가진 변호사들, 일한 만큼의 대가를 지급받는 강남 구성원들을 바라본 민규는 우진을 비롯해 모여 있는 그들, 전체에게 묻는다.
- "그 친구들은 왜 설계해야 하죠?"
민규의 질문, 그 속에 담긴 의도를 잠시 궁리하던 우진이 가볍게 답한다. 답의 무게는 한없이 가벼웠지만 그 집요한 깊이가 민규의 정신을 내내 무겁게 짓누른다. 어떤 두통약도 듣지 않을 기세다.
"꺼림칙하니까."
"..."
"몰라서 질문한 거 아니지?"
- "오빠가 찾은 거 돌려준다고 말했어요."
"다른 요구 사항은 없었어요?"
정혜주가 고개를 돌린다. 그러면서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한다.
"없어요."
민규가 약간 의아한 반응을 보인다.
"이전 사람은 이 자료로 30억을 요구했어요. 그런데, 당신 관리자는 정말 필요 없다고 말해요?"
정혜주가 바로 답한다.
"내가 전해 들은 건 딱 한 마디였어요. 돌려주라고. 그게 전부예요."
-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들의 여유를 잃어버린 조급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순간이다.
그들의 조급함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의뢰인으로부터 수령해야 할 잔금이 남았기 때문이다. 엄철우가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 그들의 마지막 행동 지침이 결정되기에 민규의 협상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 하지만 10분, 20분이 지나도 민규는 그들의 조급함에 반응하지 않는다. 벤티 사이즈 종이컵에는 검은 원액의 아메리카노가 한가득 담겨 있다. 업무처리 시간을 20분이나 초과하면서 민규의 공감각을 지배하는 것은 창궐하는 검은빛뿐이다.
- 민규의 머릿속이 온통 검은빛으로 물든다. 검은빛이 자신의 몸 곳곳으로 기습적으로 스며드는 순간, 그의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한다. 아무도 자신을 발견할 수 없고, 누구도 자신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 그러므로 어떤 일이 벌어져도 문제 될 게 없다는, 철저한 공모가 가능한 검은빛이 민규에게 더할 수 없는 아늑함을 가져다준다.
- 아늑한 감각이 민규의 전체를 지배할 때, 그의 눈이 휴대폰 액정으로 향한다. 우진과 로펌 Y, 발신자를 알 수 없는 번호들로 액정이 가득 채워지는 가운데 익숙하지만 낯선 번호 하나가 민규의 눈에 들어온다. 발신자의 이름은 '아내'다.
- 그녀가 망설인다. 그 망설임, 민규에겐 섬뜩할 정도로 낯선 느낌이다. 아내가 민규에게 휴대폰으로 전화한 것도 반년 만이지만 그녀가 지금처럼 말하기를 망설이는 것은 더더욱 오래된 일이다.
- 민규는 순간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이 자신의 몸속 깊이 파고드는 걸 외면하지 못한다. 검은빛의 아늑함, 그 베일을 찢고 가장 노골적인 망설임이 마성의 착란을 일으킨 탓이다. 극도로 세련되거나 지독히 위선적인, 서글프기까지 한 <풀밭 위의 식사>처럼 로펌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아내가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 민규는 아내가 갈구하는 극단의 속물주의가 차라리 반갑다. 법적 남편인 민규가 클래스가 다른 사건의 의뢰를 처리하기 직전 괴팍한 쿠데타를 꿈꾸고 있음을 감지하고 이를 가라앉히려는 아내의 의지 앞에서 민규는 정신이 차가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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