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루리
출판 : 문학동네
출간 : 2021.02.03
한 번 읽어봐야지 봐야지 하다 이제야 읽게 되었다. 친구네 딸에게 선물할까 싶어 잠시 알아보다 말았던 터라 평이 좋다는 정도 외에 다른 사전 정보는 없었는데, 색감이 예쁜 표지를 보고 혹시 만화가 아닐까도 생각했다.
그리고 펼친 첫 장. 밤하늘 위에 하얀 글씨로 새겨진 첫 문장이 눈부시다.
"나에게는 이름이 없다. 하지만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긴긴밤>은 한 권의 아름다운 이야기다. 누군가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고, 각자의 '나'를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심사평에서 언급되었던 바처럼 "이 이야기를 '동화'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아이가 있다면 꼭 선물해주고 싶은 책이었다. 노든이 앙가부에게, 치쿠가 노든에게, 그리고 다시 노든이 이야기해 주며 전해진 것들을 들려주고 싶었다.
그저 살아가는 이야기.
지금 이 곳에 내가 존재하기 위해 이어져 온 수많은 이야기들을 이어가기 위해.
혹은, 그저 내가 살고 싶기 때문에.
그 삶의 순간 속에서 내 자신에게 '나'가 되어가는 이야기.
어른들에게도, 아이들에게도 함께 살아가는 법과 삶에 설레는 법을 속삭여주는,
선물하고 싶은 아름다운 책.
나에게는 이름이 없다.
하지만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나에게 이름을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준 것은
아버지들이었다.
나는 아버지들이 많았다.
나의 아버지들은 모두 이름이 있었다.
이 이야기는 나의 아버지들,
작은 알 하나에
치쿠와 윔보,
그리고 노든의 이야기이다.
- 코뿔소 노든의 말년은 극진한 대우를 받는 왕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건 사람들 생각이고, 노든 자신은 한시도 쉬지 않고 붙어 있는 인간들과 그의 몸을 찔러 대는 바늘들, 그리고 그렇게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노든을 보러 왔다. 그들은 노든을 졸졸 쫓아다니며 노든이 언제 무엇을 먹는지를 확인했고, 노든의 기분이 어때 보이는지 살피고, 노든이 기운이 없을 때에는 다시 기운이 나도록 약을 주었다.
- 그들은 노든이 얼마나 먹고 얼마만큼 잠을 자는지를 알았고, 너무 춥거나 덥지 않도록 하는 방법도 알았다. 사람들은 노든에 대해 뭐든지 다 아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사실 그들이 노든에 대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 노든의 마지막에 대해서는 모르는 이가 없었다. 온 세상이 노든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노든의 처음에 대해서는 아무도 몰랐다. 슬픈 것은 노든 자신도 그의 처음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노든이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코끼리 코였다. 노든이 눈을 떴을 때 긴 코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노든은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부모가 누구인지, 다른 식구들이 있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그 긴 코들이 노든의 첫 가족이 되어 주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 노든은 그저 자신이 어리기 때문에 코와 귀가 덜 자란 줄로만 알았다. 코끼리들이 늘 그렇게 얘기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너만 했을 땐 그랬어. 조급해하지 마. 마음을 급하게 먹는다고 빨리 나이를 먹는 건 아니니까."
-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노든의 코와 귀는 자라지 않았다. 대신 뿔이 있을 뿐이었다. 노든은 어렴풋이 자신이 코끼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코끼리들은 노든의 코나 귀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 "눈이 멀어 이곳에 오는 애도 있고, 절뚝거리며 이곳에 오는 애도 있고, 귀 한쪽이 잘린 채 이곳으로 오는 애도 있어. 눈이 보이지 않으면 눈이 보이는 코끼리와 살을 맞대고 걸으면 되고, 다리가 불편하면 다리가 튼튼한 코끼리에게 기대서 걸으면 돼. 같이 있으면 그런 건 큰 문제가 아니야. 코가 자라지 않는 것도 별 문제는 아니지. 코가 긴 코끼리는 많으니까. 우리 옆에 있으면 돼. 그게 순리야."
- 그곳에서 보낸 시간은 노든의 삶에서 가장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노든은 허기질 일도 없었고, 위험과 마주칠 일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언제나 코끼리들이 함께 있었다. 코끼리들은 긴 코가 없는 노든에게 코로 흙이나 물을 뿌려 주고, 높이 자란 나뭇가지를 꺾어 주기도 했다. 노든은 코끼리들과 함께 사람들이 주는 먹이를 먹고, 강에서 목욕을 하고, 날이 저물면 서로 등을 맞댄 채 잠들었다.
- 노든은 자신이 코뿔소의 겉모습을 가진 코끼리라고 생각했다. 코끼리는 강했다. 마음만 먹으면 바람보다 빨리 달려서 상대를 받아 버릴 수도 있었고, 물소 열 마리보다 무거운 몸통으로 상대를 깔아뭉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코끼리는 무모하지 않았다. 그래서 쉽게 화를 내지 않았다. 화를 내면 그것은 곧 싸움으로 번졌고, 싸움은 죽음을 부르는 일이었다. 코끼리는 스스로의 목숨도, 남의 목숨도 함부로 여기지 않았다. 그것이 코끼리들의 지혜였다. 노든은 현명한 코끼리들이 좋았다.
- 사람들은 어린 코끼리가 어느 정도 자라거나 부상에서 회복하면 사방이 철망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데려가 탕! 탕! 탕! 큰 소리를 내면서 찌릿찌릿한 막대기로 찌르고 무섭게 굴었다. 그러다가 다시 상냥하게 돌아와 방금 전까지 괴롭히던 코끼리에게 먹이를 건넸다. 그러면 바깥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코끼리는 겁을 먹고 도망가는 연기를 했고, 고아원에 남고 싶은 코끼리는 망설이지 않고 사람들에게 다가가 먹이를 먹었다.
- 사람들은 겉에 드러난 것만을 보고 믿는다. 하지만 코끼리들은 바보가 아니다. 사람들은 이런 테스트로 코끼리를 시험했지만, 코끼리는 언제나 심사숙고 끝에 스스로의 앞날을 직접 선택했다.
- 노든에게도 선택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노든은 늘 선택의 날이 오면 고아원에 남는 쪽을 택하리라고 생각해 왔다. 여생을 이곳에서 보낸다면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새로 들어오는 어린 코끼리들을 도와주면서 의미 있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런데 자꾸만 머뭇거리게 되었다. 그 이유를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 그는 코끼리답게, 지혜롭고 현명하게 생각하려고 했다. 무모한 선택을 해서는 안 된다. 더 멀리 보고 더 많은 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렇게 되뇌었다. 마음을 다잡은 노든은 할머니 코끼리에게 고아원에 남겠다고 말했다. 할머니 코끼리가 기뻐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기대와 다른 대답이 돌아왔다.
- "하지만 너에게는 궁금한 것들이 있잖아. 네 눈을 보면 알아. 지금 가지 않으면 영영 못 가. 직접 가서 그 답을 찾아내지 않으면 영영 모를 거야. 더 넓은 세상으로 가. 네가 떠나는 건 슬픈 일이지만 우리는 괜찮을 거야. 우리가 너를 만나서 다행이었던 것처럼, 바깥세상에 있을 또 다른 누군가도 너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여기게 될 거야."
- "여기, 우리 앞에 훌륭한 한 마리의 코끼리가 있네. 하지만 그는 코뿔소이기도 하지. 훌륭한 코끼리가 되었으니, 이제 훌륭한 코뿔소가 되는 일만 남았군그래."
- "기분 좋은 얘기를 하다가 잠들면 무서운 꿈을 꾸지 않아. 정말이야. 못 믿겠으면 시험 삼아 오늘 나한테 바깥세상 얘기나 들려줘 봐."
- 노든은 그 말을 무시하려고 했다. 그 무렵 그는 숨을 쉬는 매 순간 화가 나 있었고 다 부수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앙가부에게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고 한다. 코끼리들에 대해서, 아내에 대해서, 딸에 대해서. 그리고 그날 저녁은 정말로 악몽을 꾸지 않았다.
- 동물원은 충격에 휩싸였고 노든은 또 마취 주사를 맞아야 했다. 동물원 사람들이 노든의 뿔을 자르기로 했기 때문이다. 코뿔소 뿔은 적당히 잘라 내기만 하면 다시 자란다. 그러니까 뿔 사냥꾼의 표적이 되어 죽임을 당하느니, 차라리 뿔을 잘라 버리기로 한 것이다.
- 다시 눈을 떴을 때 노든의 하얀 뿔은 반쯤 잘려 나간 채였고, 그의 곁에는 더 이상 앙가부도 없었다. 그리고 며칠 뒤 철조망 앞에는 다음과 같은 푯말이 걸렸다.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흰바위코뿔소, 노든을 소개합니다!'
- 원래 펭귄들은 호기심이 많아서 처음 보는 것에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 주인이 없는 알을 품기도 했다. 하지만 이 알은 무엇인가 불길한 구석이 있었다. 펭귄들이 익숙하게 보아 온 알은 깨끗한 하얀색이었지만 버려진 알에는 검은 반점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펭귄들은 알 주변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 모두가 알을 포기할 즈음, 치쿠와 윔보가 나섰다. 왜 치쿠와 윔보가 버려진 알을 품기로 마음먹었는지는 정확히 들은 바가 없다. 동물원에 새로운 펭귄이 들어올 때마다 펭귄 우리를 안내해 온 치쿠와 윔보가 새 식구를 맞이하듯 반갑게 알에 다가갔다는 얘기도 있고, 유난히 쌀쌀했던 어느 날 밤 둘이 알을 품기 시작했다는 얘기도 있다.
- 어쨌든 두 젊은 아빠는 걱정도 많았지만, 걱정보다는 알에 대한 사랑이 더 컸다. 쉬지 않고 알에게 말을 걸었고, 알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호들갑을 떨면서 자랑을 하고 다녔다. 아침에는 치쿠가, 점심에는 윔보가, 저녁에는 다시 치쿠가 알을 품었고, 가끔은 먹는 것도 잊고 알을 품었다.
- 치쿠와 윔보에 대해서 조금 더 얘기하자면, 둘 다 동물원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어려서부터 둘은 단짝이었고, 커서도 늘 붙어 다녔다. 둘은 펭귄들 무리에서 각별한 사이로 유명했다.
- 노든은 인간들에게, 그리고 이 세상에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콧김을 내뿜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발을 굴러 보았지만 화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노든은 매 순간 어떻게 복수할지를 상상했고, 상상을 하면 할수록 더 화가 나서 가슴이 쿵쾅거렸고, 심장 쿵쾅거리는 소리가 귀에 울려서 잠을 자지 못했다. 노든은 앙가부가 없는 철조망 안에서, 무얼 해야 할지 몰랐다.
- 해가 지고 있었다. 노든은 하늘이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고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의 윤곽이 점점 더 선명해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자신과 비슷한 검은 형체는 보지 못할 것을 알았다. 아내도, 딸도, 앙가부도, 노든에게 소중했던 코뿔소는 모두 떠나 버렸다. 혼자인 것은 무서웠다. 너무 무서워서 다 잊어버리고 싶었다.
- "조심흐."
다시 한번 새가 노든에게 주의를 주었다. 새는 찌그러진 작은 양동이를 입에 물고 있었는데 그 속에는 하얀 바탕에 검은 반점이 있는 작은 알이 담겨 있었다. 새는 조심스럽게 양동이를 내려놓더니 노든을 째려보며 말했다.
"만약 내 알에 흠집 하나라도 생겼다면, 그 멍청한 눈알을 다 쪼아 버렸을 거야."
- 새의 눈에서는 정말로 살기가 느껴졌다. 노든은 자기만큼 성질이 더러운 새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살아 있는 누군가를 만나서 노든은 반가웠다. 노든과 새와 알은 그곳에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어느덧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 "원래 여기 있어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윔보야. 엊저녁은 내가 알을 품을 차례였어. 윔보는 내 왼편에서 자고 있었고. 그런데 윔보가 자리를 바꾸자고 했어. 윔보는 언제나 내 오른쪽에 있어야 마음을 놓았거든. 내가 오른쪽 눈을 다쳐서 말이야. 그래서 윔보가 나랑 자리를 바꿔서, 나 대신 알을 품었어. 평소랑 달랐던 건 그것뿐이었단 말이야. 그런데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렸어. 정말 눈 깜짝할 사이였어. 오른쪽을 돌아보니까, 윔보가, 윔보가... 피투성이였어. 윔보는... 커다란 철봉에 깔려 있었어. 알은 윔보가 몸으로 감싸고 있었던 덕에 무사했어. 나는 윔보의 품속에서 알을 꺼내서, 거기서 도망쳐 나왔어. 윔보는 아직 죽지 않았는데, 우리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어. 윔보랑 눈을 마주쳤는데, 그게 다였어."
그날 밤, 노든과 치쿠는 잠들지 못했다.
- 노든은 악몽을 꿀까 봐 무서워서 잠들지 못하는 날은 밤이 더 길어진다고 말하곤 했다. 이후로도 그들에게는 긴긴밤이 계속되었다.
- 치쿠는 정말 불만이 많았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투덜거렸다. 하지만 노든은 성질 더러운 펭귄 치쿠가 좋았다. 치쿠는 말끝마다 노든을 '정어리 눈곱만 한 코뿔소'라고 불렀고, 정어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노든은 코뿔소만 한 눈을 가진 물고기라니, 얼마나 클지 상상도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노든은 치쿠를 '코끼리 코딱지만 한 펭귄'이라고 불렀다. 치쿠는 생전 코끼리는 본 적도 없으면서 길길이 날뛰며 화를 내었다. 노든은 치쿠의 화내는 모습이 재밌었다. 치쿠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걷고 있으면, 이 모든 하루하루가 평범한 날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 치쿠는 악몽을 꾸지 않게 해 주는 최고의 길동무였다. 앙가부의 말대로 치쿠와 얘기를 하다가 잠드는 밤이면, 악몽을 꾸지 않고 깊이 잘 수 있었다. 그런 날엔 노든은 늦잠을 자서 치쿠가 부리로 엉덩이를 쪼아 대야 겨우 눈을 떴다.
"이 정어리 눈곱만 한 코뿔소야, 일어나! 지금이 어느 때라고 아직까지 잠을 자는 거야? 어서 먹을 걸 찾아 나서야지. 여긴 이제 먹을 게 없어. 우린 알을 위해서라도 잘 먹어야 되잖아. 야, 일어나라고!"
- 어느 순간부터인가 치쿠는 '우리'라는 말을 많이 썼다. 노든은 알에 대해 딱히 별 관심은 없었지만 '우리'라고 불리는 것이 어쩐지 기분 좋았다.
- 노든은 목소리만으로 치쿠가 배가 고픈지 아닌지를 알 수 있게 되었고, 발소리만으로 치쿠가 더 빨리 걷고 싶어 하는지 쉬고 싶어 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우리'라고 불리는 것이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 그리하여 나의 가장 첫 번째 기억은 새까만 밤하늘과 빛나는 별들과, 별들만큼이나 반짝이던 코가 뭉툭한 코뿔소의 눈이었다.
- 나는 태어나자마자 노든에게 살아남는 법에 대해 배웠다. 노든은 엄격했다. 알 바깥의 세상에서는 살기보다 죽기가 더 쉽다고 했다. 살아남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데도 내가 끝까지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는 치쿠와 윔보 때문이라고 했다.
- "네가 어떤 기분일지 알아. 내가 그렇게 살아왔거든. 나는 항상 남겨지는 쪽이었지. 내가 바보 같지만 않았어도 ... 이런 생각들이 항상 나를 괴롭게 해. 차라리 살아남은 게 내가 아니었으면, 하고 말이야."
노든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이라도 하는 듯이 눈을 감고 긴 숨을 내쉬었다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포기할 수가 없어. 왜냐면 그들 덕분에 살아남은 거잖아. 그들의 몫까지 살아야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안간힘을 써서, 죽을힘을 다해서 살아남아야 해."
- 노든의 말대로 살아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노든은 어린 코끼리나 어린 코뿔소에 대해서는 잘 알았지만, 펭귄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노든이 펭귄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치쿠에게 들은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노든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게 주었다.
- 하지만 나는 내가 본 적도 없는 치쿠와 윔보의 몫까지 살기 위해 살아 냈다기보다는 나 스스로가 살고 싶어서 악착같이 살아냈다. 그들의 몫까지 산다는 노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 것은 그 후로도 꽤 시간이 지나고 나서의 일이다.
- "너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오늘은 바다를 찾을 수 있을지, 다른 펭귄들을 만날 수 있을지 기대가 되겠지만 나는 그런 기대 없이 매일 아침 눈을 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노든이 나와 같이 바다에 가고 싶어 한다고, 나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한다고만 생각해 왔지, 절망을 품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한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말없이 긴긴밤을 넘기고 있었다.
- 겨우 설명을 덧붙이더니 노든은 참지 못하고 계속 웃었다. 한바탕 웃음이 멈추고 나서야 노든은 나머지 설명을 계속해 나갔다.
"그때도 나는 복수에 대한 생각밖에 없었어. 그런데 웬 이상한 펭귄이 들러붙어서, 나에 대한 배려라고는 코끼리 눈곱만큼도 없이, 한참을 말 한마디 않고 걷다가, 느닷없이 자기 사정만 늘어놓는 거야. 정말 제멋대로였어. 내 생각은 한 번도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 맘대로 나랑 같이 바다를 찾아야 한다고 했지."
- 노든과 목욕을 즐겼던 물웅덩이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발을 살짝 담가 보았다. 발을 담갔던 자리에 떠 있던 구름이 사방으로 부서졌다. 호수는 엄청나게 깊어서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무서웠다. 하지만 약한 모습을 보여서 노든을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니, 연습은 필요 없겠어요. 나는 펭귄이니까 수영은 바다에 가자마자 바로 할 수 있어요. 이러지 말고 어서 바다를 찾으러 가요!"
- 하지만 노든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여기서 목욕이나 하고 가야겠다."라고 말하더니 호수 속으로 풍덩,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호숫가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노든을 노려보다가 결국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사실 나 못 할 것 같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너는 펭귄인데 못 할 리가 없어. 정 겁이 나면 내 뿔을 잡고 물속에 들어오는 것부터 해 보자."
- "조금만 더 참아 봐요!"
나는 노든을 다그쳤다.
"미안하지만 이게 내 최선이야."
노든은 무안해하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
"나는 코뿔소지 펭귄이 아니라고."
- 나는 물속에서 느낀 것을 노든에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 그리고 노든과 내가 다르다는 것이 너무 서운했다.
"그치만 나한테는 노든밖에 없단 말이에요."
"나도 그래."
- 그때 노든의 대답이 얼마나 기적적인 것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다른 우리가 서로밖에 없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때는 몰랐었다.
-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기적이었다.
- 나는 노든의 뿔을 붙잡고 세 번 심호흡을 하면서 내 앞에 펼쳐진 물속 세상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결심을 굳혀 날개를 들고 물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 처음에는 호수 가장자리에서 천천히 헤엄쳤다. 몸이 이렇게 가볍게 움직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또 한 번 알을 깨고 나온 것만 같았다. 물살을 가르는 기분은 지금까지 느껴 보지 못한 기쁨이었다. 물속에서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로움과 만족감에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다른 펭귄들이 나를 좋아해 줄까요?"
"물론이지."
"노든, 나는 누구예요?"
"너는 너지."
- "날 믿어. 이름을 가져서 좋을 거 하나도 없어. 나도 이름이 없었을 때가 훨씬 행복했어. 게다가 코뿔소가 키운 펭귄인데, 내가 너를 찾아내지 못할 리가 없지. 이름이 없어도 네 냄새, 말투, 걸음걸이만으로도 너를 충분히 알 수 있으니까 걱정 마."
- "다른 펭귄들도 노든처럼 나를 알아봐 줄까요?"
"누구든 너를 좋아하게 되면, 네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어. 아마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너를 관찰하겠지. 하지만 점점 너를 좋아하게 되어서 너를 눈여겨보게 되고, 네가 가까이 있을 때는 어떤 냄새가 나는지 알게 될 거고, 네가 걸을 때는 어떤 소리가 나는지에도 귀 기울이게 될 거야. 그게 바로 너야."
-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불운한 알에서 태어났지만 무척 사랑받는 행복한 펭귄이었다.
- 나에게 밤이 가장 길었던 날을 기억한다. 그날은 가장 많은 비가 내렸던 날이었다. 나는 노든의 다리에 바짝 붙어 걸었다. 그날의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 생생하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세게 비가 쏟아져 내렸고, 빗소리에 묻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냄새는 비바람 속에서 더 강해졌다.
- 나는 노든이 지켜봐 주던 그 모습 그대로 쉬지 않고 걷고, 달려서 다시 모래언덕을 찾았고, 모래언덕 너머로 무섭게 버티고서 있는 절벽을 올랐다. 절벽에 내가 올라설 수 있는 틈이 작게라도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틈새조차 없을 때는 부리로 절벽을 쪼아서 내가 올라설 수 있는 틈을 만들었다. 부리가 아팠지만 멈추지 않았다.
- 나는 절벽 위에서 한참 동안 파란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바다는 너무나 거대했지만, 우리는 너무나 작았다. 바다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지만, 우리는 엉망진창이었다.
- 나는 세상에 마지막 하나 남은 흰바위코뿔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뛰어나간 노든의 아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직 죽지 않은 연인을 뒤로 하고 알을 데리고 도망쳐 나오던 치쿠의 심정을, 그리고 치쿠와 눈을 마주쳤던 윔보의 마음을, 혼자 탈출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던 앙가부의 마음을, 코끼리들과 작별을 결심하던 노든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축축한 모래를 밟으며 나는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내 앞의 바다는 수도 없이 부서지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 두려웠다. 하지만 나는 내가 저 바닷물 속으로 곧 들어갈 것을, 모험을 떠나게 될 것을 홀로 수많은 긴긴밤을 견뎌 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긴긴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빛나는 무언가를 찾을 것이다.
- 나는 노든을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코와 부리를 맞대고 다시 인사할 것이다.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 > Book1'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릭 라르센] 헬위크 - 당신의 인생을 바꿀 강렬한 일주일 (0) | 2023.08.07 |
---|---|
[김유겸, 최승홍] 내 몸이 예전 같지 않을 때 읽는 책 - 서울대 체대, 의대 교수가 말하는 최강의 컨디션 회복법 (0) | 2023.08.05 |
[김솔] 모든 곳에 존재하는 로마니의 황제 퀴에크 (0) | 2023.08.04 |
[솜숨씀] 솔직한 척 무례했던 너에게 안녕 - 칠 건 치고 둘 건 두는 본격 관계 손절 에세이 (0) | 2023.08.02 |
[아리스가와 아리스] 이리하여 아무도 없었다 (0) | 2023.08.01 |
[김려령] 트렁크 (0) | 2023.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