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들개이빨, 김유경, 김현진, 서한나, 이랑, 이다혜] 나는야 질투왕

일루젼 2023. 8. 9. 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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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들개이빨 / 김유경 / 김현진 / 서한나 / 이랑 / 이다혜
출판 : 어스라이크
출간 : 2022.08.05 


 

최근 '책'에 대한 정의가 바뀌고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예전에는 ISBN이 발급되고, 정식 유통 절차를 거쳐 배본되는 정식 제본물들이 '책'이었는데 이제는 독립출판물이나 펀딩, 전자책 플랫폼 등을 통해 훨씬 다양한 형태의 '책'들이 소개되고 있다. 다양성과 자유로운 창작의 증진이라는 점에서는 쌍수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때때로 내가 찾는 책의 '존재여부'조차 확인할 수가 없다는 점에선 다소 골치가 아프기도 하다.

 

<나의 먹이>를 읽고 저자 '들개이빨'에 관심이 가 다른 저작들을 찾아보고 있었다. 대다수의 온라인 서점에서는 종이책뿐 아니라 전자책도 포함한 검색 결과를 보여준다. 해서 책의 존재 여부를 확인할 때 주로 국립중앙도서관이나 온라인 서점에서 검색해 보는 나로서는 절대 발견하지 못할 (뻔한) 책이 <나는야 질투왕>이다. 

 

혹시나 <먹는 존재>가 이북으로 있을까 싶어 리디에서 저자명으로 검색했다가 발견한 <나는야 질투왕>은 내게는 반가운 이름들이 과반을 넘기는 (그러므로 취향일 확률이 높은) 글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책이 있는 줄도 몰랐다... 네이버 도서 검색이 쇼핑 카테고리 안으로 들어간 뒤로는 더더욱 험난한 책사냥 생활이다. (물론 이미 소장한 책들부터 어떻게 하라고 날카롭게 뚝배기를 후려치신다면... 하.)

 

<나는야 질투왕>에는 '질투'라는 주제로 자신만의 생각과 경험들을 풀어낸 6개의 글들이 모여 있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해 사뭇 묵직한 기분을 느끼실 수 있을 것이다. 얼핏 보면 저자명 순으로 실린 것 같지만, 읽어 보면 굉장히 세심하게 계산된 순서라는 느낌을 받았다. (가만히 살펴보면 ㄱㄴㄷ 순도 아니다)

 

'질투는 DNA에 새겨진 광기'라는 임팩트 있는 시작 후 과연 질투란 부정적이기만 한 것인가에 대해 숙고한 다음 타인이 아닌 과거의 자기 자신을 질투한다. 하지만 결국 삶의 아름다움이란 질투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데서 시작됨을 깨닫고, 다시금 핀포인트를 조정해 '그렇다면 애정적 의미의 질투란 이성 간의 사랑만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성애와 사랑에 대해 고찰한다. 마지막은 건강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질투다. 질투가 날만한 이들로 주변을 채워 스스로를 고양하고, 개인의 능력에는 질투하되 사람에게는 축복을 전한다. 질투를 통한 자기 성장, 아름다운 대통합이다. 

 

"지금의 내가 내 마음에 흡족하지 않은 면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의 내 문제일 뿐,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타인의 문제는 아니다."    

 

아. 단짠맵느의 향연. 익스트림한 놀이기구를 타고 내릴 때와 같은 기분 좋은 탈력감이 전신에 스민다. 

좋았다. 

 


   

들개이빨

 

- 충고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쓰레기이기 때문입니다. 어려울 때 진짜로 도움이 되는 충고를 몇 개나 들어봤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 세상사 늘 그러하듯, 현명한 이들은 조용히 뒤로 빠지고 남의 일에 훈수 두고 싶어 근질근질한 참견쟁이들만 앞다투어 충고를 생산해대는 탓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일찌감치 굳게 다짐했습니다. 상대방이 먼저 청하지 않는 한, 절대로 충고하지 않겠다고. 나라도 공해를 줄이겠노라고. 네. 이미 눈치채셨겠지요. 이 새끼 지금부터 겁나 충고하겠구나. 

 

- "글 좀 쓰네?" 제 글을 본 국어 선생님의 한 마디. 주류에서 밀려난 사춘기 관종에겐 그야말로 눈이 번쩍 뜨일 모먼트. 네. 글을 잘 쓰면 단순한 성적 우수자와는 결이 다른, '쫌 생각 있는 애'로 대우해 주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특별대우에 굶주렸던 저는 그때부터 작문 숙제, 교내 행사, 인터넷 게시판 등, 허용된 모든 지면에 필사적으로 글을 썼습니다. 

 

- 그러다 큰 시련을 만납니다. 논술. 논리적 서술로 독자를 설득해야 하는 미션. 근데 저 논리 없거든요. 설득도 하기 싫어요. 사소한 감정과 신변잡기에 잡스러운 수식어를 덕지덕지 붙이고 노는 것이 제 스타일이란 말입니다. 

 

- 그리고 저를 등진 국어 선생님의 한 마디. "배동욱(가명), 글 좀 쓰네?" 오오우오으으. 급우들의 낮은 감탄사. 태연히 안경을 치켜올리는 논리왕 배동욱. 속이 뒤집혔습니다. 저 영광이 내 것이어야 하는데! 하교 후, 저는 집 앞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갔습니다. 병명은 질투로 인한 급성 십이지장궤양.

 

- 절망의 장수생 시절 친구의 사법고시 합격 축하 파티에 가서 술 처먹고 신세 한탄하고 대성통곡하여 개망신당하고 잠수를 탄 건... 말하자면 끝이 없지만 이만 하겠습니다. 질투왕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부족한가요? 큰 건 하나가 남아 있습니다. 

 

- 만화가만 되면 만사가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대학만 가면, 고시만 붙으면 행복 인생 펼쳐질 줄 알았던 애송이의 정신연령에서 한 발짝도 못 벗어난 셈이지요. 하지만 곧 깨달았습니다. 제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바닥에 들어왔는지를. 어중간한 재주에 애매하게 성격 나쁜 애들이 뛰어들었다간 질투에 빠져 죽기 딱 좋은 바다. 예쁘고 똑똑하고 웃기고 돈 많은 능력자들이 쉴 새 없이 수면을 박차고 튀어 오르는 레드오션. 대중예술계.

 

- 내 팬이라던 독자가 다른 작가로 갈아탄 듯. 이해해. 그럴 수 있어. 근데 속상해.

담당 편집자가 나를 퇴물 작가로 분류한 듯. 탁월한 판단. 근데 야속해.

 

- 추하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잘 때만 좀 살 것 같았죠. 꿈 한 점 없는 칠흑 같은 잠에 빠져든 날에는, 영영 눈을 뜨고 싶지 않았습니다.

 

- 세심한 관리의 필요성을 느낀 저는, 현존하는 최고의 행동 관리 프로그램인 이익과 손해를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이익에 달려들고 손해를 피하려는 인간의 습성은 때로 죽음보다 질기거든요.

 

- [타인은 이익이다]

  "너는 그럼 네가 최고로 잘난 사람인 세상에서 살고 싶니? 안 끔찍해?"

질투심에 부들부들 떠는 저를 어이없게 바라보던 아버지의 말. 그러게요. 세계 최고의 농부 요리사 의사 변호사 과학자 회계사 미화원 군인 정치인 운동선수 건축설계사 = 나, 천하제일 재밌는 만화 = 내 만화, 빌보드차트 600주간 1위 = 내 고성방가. 생지옥이죠. 인류가 십 분의 일로 줄어들 겁니다. 보다 흥미롭고 안전하고 편리한 삶은 전적으로 나보다 우월한 타인 덕분이라는 사실을 아침저녁으로 되새기기로 했습니다. 아무렴 무인도에 혼자 쪼그리고 앉아서 부싯돌 치고 있는 것보다야 적당량의 질투를 지불하고 잘난 남들과 어울려 사는 쪽이 훨씬 남는 장사죠. 

 

- 약육강식 각자도생 능력-금전 만능주의 사회에서 가장 호된 응징이 뭡니까. 손해입니다. 질투는 손해를 끌어당기는 초강력 자석입니다. 몸과 마음과 시간만 축나고, 그릇된 판단으로 이상한데 돈을 써버리게 됩니다. 인간관계도 파탄 나고요. 미친 짓이죠. 

 

- 그리하여 질투 = 손해 = 파멸. 저는 이 공식을 달달 외웠습니다. 자다가도 툭 치면 바로 입에서 튀어나오도록. 질손파. 질손파.

 

- 어쨌거나 저도 일단은 작가고, 감사하게도 이렇게 귀한 지면을 차지하는 호사를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복된 일이지요. 복은 화를 부르고요. 저를 질투하는 자가 나타나더군요. 불편하고 당황스럽고 나 그런 사람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고 무엇보다, 두려웠습니다. 혹시 질투의 한자를 찾아본 적 있으신가요. 장난 아닙니다. 시기할 질(嫉) 샘낼 투(妬). 

 

- 세상에. 시기하고 샘내는 건 여자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계집 녀(女) 인증마크를 두 번이나 꽝꽝 찍어준 조상님의 박살난 젠더 감수성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계집의 상태입니다. 병든(病) 몸으로 짱돌(石)을 들었단 말입니다. 존나 무섭죠. 무슨 짓을 할지 모르죠. 어떡합니까. 튀어야죠. 제가 질투했던 이들이 왜 저만 보면 서둘러 사라졌는지 알겠더군요. 돌 맞을까 봐 얼른 도망친 거죠. 그 왜 맨날 인복 없다고 투덜대는 남루한 양반들 있잖아요. 모르긴 몰라도 상당수가 질투쟁이 아닐까요?

 

- 마침 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양자역학에 따르면 원자는 관찰에 따라 입자일 수도, 파동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세상사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즉 네가 질투하는 사람의 존재 여부는 너에게 달렸다. 네가 관찰하는 순간 그는 100% 존재하고, 신경 끄면 0이 된다. 정신 승리나 관념 놀음이 아니다. 지극히 합리적인 얘기다. 우주의 모든 물질을 동시에 실존하게 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데이터 낭비다. 조물주도 그쯤 되면 서버비가 부담되고 저장공간 부족에 시달릴 거다. 현관의 센서등처럼, 인식하면 존재하고 외면하면 사라지는 절약형 시스템으로 세상을 설계했음이 틀림없다. 명심해라. 보고 듣고 생각하지 않으면, 없는 것이다. 그 시스템을 잘 활용해라."

 

- 무릎을 쳤습니다. 데이터 절약의 측면에서 세상을 해석한 부분이 귀에 쏙 들어왔어요. 

 

- 그런데 파인만이 그랬다면서요. "양자역학을 이해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새빨간 거짓말이다." 네. 저도 아버지도 분명히 잘못 이해했을 겁니다. 

 

- 하지만 어떤 오답은 정답보다 매력 있죠. 질투의 대상을 외면함으로써 그 존재를 꺼버릴 수 있다니, 완전 편하잖아요!

 

- 뭔가 대단한 현자 같지 않습니까, 울아무지? 허허. 전혀 아닙니다. 말씀만 번지르르하지 실은 제 질투심, 다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겁니다. 잘되는 맛집이라도 다녀온 날이면 "온 동네 돈을 아주 갈퀴로 긁어가는 구만! 에잇! 망할 놈의 새끼들!" 늘 이렇게 배 아파하는 아버지. 보고 있자면 심란해집니다. 언행일치가 전혀 안 되고 있잖아. 암담하네. 더 늙으면 나도 아빠처럼 원색적인 질투심을 터뜨리고 다니는 광인 할매 되겠구나.

 

- 질투를 참는 게 이렇게나 힘듭니다. 무리지어 생활하는 고등동물의 DNA에 새겨진 숙명이 아닐까 합니다. 최첨단 과학 세상을 지배하는 신종 사주팔자 DNA. 체념하고 순응하기로 했습니다. 질투가 나면 아이고 또 유전자가 지랄하는구나, 하고 드러누웠습니다. 지극히 수동적이고 무지성적인 이 방법, 의외로 괜찮더군요. 매사 유전자 탓을 하니 자학을 덜 하게 됐고요. 

 

 

 

김유경

 

- 나는 이제껏 내가 많이 참아준 것이라고, 타인이 바라는 바를 내가 들어주고 있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이들 관계에서 애쓰는 사람은 나뿐이라고 여겼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쳐야 화를 내는 데 명분이 설 것 같았다.

 

- 뭐가 그렇게 화가 났던 걸까. 씩씩거리며 한 해를 보낸 다음 몇 달간 구청 보건소에서 진행하는 무료 심리상담을 받았다. 

 

- 속내란 꺼내놓고 보면 별것이 아니다. 나는 감정을 표현하는 게 어렵고 감정을 직접적으로 말해본 적이 그다지 없으며, 그렇게 표현되거나 말해지지 못한 감정이 일제히 화를 내는 것으로 터뜨려졌다. 나는 많은 감정을 수치스러워했다. 타인을 좋아하는 감정도 미워하는 감정도 수치스러워서 그 감정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굴었다. 

 

- 질투는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유치한 감정이었다. 나는 친구 관계와 연인 관계를 이분법적으로 생각했는데, 그 경계가 흐릿하긴 했어도 하나는 확실했다. 친구에겐 바닥을 보여선 안 되고 연인에겐 바닥을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 나의 바닥이라 함은 수치스러운 감정을 뜻했다. 

 

- 어쩌면 나는 이상적인 사랑의 형태를 우정이라 여겨온 거 같고, 연인 관계에서도 궁극적으로는 우정을 나누길 희망했다. 그러니 순도 높은 우정에 부정적인 감정이 끼어들어서는 안 됐다. 

 

- 대부분의 사람은 질투라는 감정을 알고 있다. 그리고 어떤 감정을 안다는 건 그 감정을 경험해 보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 그러니 새삼 의아해진다. 이렇게 보편적인 감정이 왜 내겐 그토록 금기시됐을까. 

 

- 여자들의 우정을 질투심만으로 설명하려는 건 낡은 "여적여" 프레임을 가지고 여성을 비하하려는 불순한 의도의 산물이다. 하지만 나는 여자들의 우정을 명예 회복시키기 위해 질투를 삭제하는 행위에는 반대한다. 이제는 반대하게 됐다. 왜냐하면 질투를 금기시하고 도려내려 했던 노력이 여성에 대한, 여성인 친구에 대한 그리고 나에 대한 또 다른 억압이었다는 걸 이제는 절감하기 때문이다. 

 

- 우정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무해한' 감정들로만 구성되지 않는다. 

 

- 너무도 당연한 이 사실을 인정하려고 그 오랜 시간 머리를 싸맸다는 것이 나로서도 납득이 안 간다. 

 

- 질투라 부를 수도 있을, 친구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소설들이 있다. 우선 떠오르는 것은 <데미안>과 <토니오 크뢰거>, <금각사>인데, 공교롭게도 세 소설 모두 성숙하지 않은 남자들이 주인공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 주인공은 생각이 많고 불안정하며 행동은 머뭇거린다. 그런 이들 앞에 어쩐지 자신감에 차 있고 당돌하기 그지없는 데다 거칠 게 없어 보이는 상대가 나타난다. 언뜻 상반된 듯한 서로에게 호기심을 느끼면서 그 둘은 친구가 된다. 주인공 눈에 비친 친구는 특별한 존재다. 그런데 마음은 내내 불편하다. 친구가 속한 세계가 거부할 수 없이 매력적이어서 자기 역시 그 세계의 일부가 되고 싶다가도, 결국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까 두렵다. 그런 주인공의 갈등과 불안이 표면적으로는 친구에 대한 질투의 형상을 띤다. 

 

- 눈여겨볼 점은 이런 이야기의 주인공은 질투를 받는 쪽이 아니라 질투를 하는 쪽이라는 사실이다. 주인공이 되기 위한 한 가지 조건이 고난이라면, 질투는 이들이 겪는 고난이다. 흔히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고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나의 초점이 내가 아닌 타인에게 맞춰지는 순간, 말하자면 내 무대 위 핀 조명이 타인에게로 옮겨 가고 무대 분위기를 장악하는 것이 그인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 이런 당혹감 속에서 우리의 주인공은 역설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자의식을 발동시킨다. 마치 나는 질투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읊조리듯이. 

 

- 이렇게 볼 때 타인에 비춰 자기를 인식하며 나아가 세계를 이해하는 길로 한 걸음 내딛는다는 변증법적인 성장 서사에서, 어린 혹은 젊은 남자 주인공의 질투란 자기 인식에 도달하는 장치로 기능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같은 얘기를 이른바 여성 서사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 상담을 받기 시작할 무렵 한동네에 사는 외삼촌을 만난 적이 있다. 오랫동안 도서관 사서로 일했던 그는 은퇴한 뒤에도 책을 끼고 산다고 했다. 아니, 은퇴하고서 책을 더 가까이하게 됐다고 했던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아무튼. 내가 이 만남을 두고두고 기억하는 이유는 따로 있는데, 그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책이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요즘 어떤 책을 읽으시냐는 물음에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이라는 답변이 돌아온 것이다. 

 

- 이전까지는 선뜻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분량도 분량이거니와, 서로 용기를 북돋워주고 힘들 때 늘 곁에 있어주고 좋은 영향만 주고받는 그런 여자들의 우정을 다룬 책일 거라 지레짐작했던 탓이다. 그런 건 읽고 싶지 않았다. '이상화하는 건 지긋지긋해.' 

 

- 이후 나는 순전히 호기심 때문에, 도대체 외삼촌이 어떤 포인트에서 여자들의 우정에 감명을 받았는지가 궁금해 책을 읽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나의 예상은 하나도 들어맞는 것이 없었다. 

 

- 모범생인 레누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릴라. 노력파인 레누와 탁월함을 타고난 릴라. 평범해 보이는 레누(사실 이렇게 집요하게 자기와 타인을 의식하는 주인공들이야말로 평범과는 거리가 멀지만)와 어디서나 눈에 띄는 릴라. 레누는 자신이 애써서 간신히 이뤄내는 것들을 릴라가 아무렇지 않은 듯 쉽게 해내는 모습을 보며 번번이 좌절감을 느낀다. 공부를 할 때도 글을 쓸 때도 남자를 사귈 때도 레누는 릴라를 따라잡을 수 없다. 소설이 끝날 때까지 독자는 레누가 끊임없이 릴라를 의식하고 선망하고 질투하고 경탄하고 미워하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때로 레누는 릴라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두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서로에 대한 마음을 털어놓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아마 그럴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면 장장 2000페이지가 넘는 소설의 주인공이 되지 않았겠지. 

 

- 그런데 재미있는 건 릴라의 행동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화자가 레누이기에 릴라의 속내는 암시적으로만 드러나지만, 릴라 역시 레누를 크게 의식하고 레누를 앞지르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운다. 4부작 첫 권의 제목이기도 한 '나의 눈부신 친구'라는 말이 (나의 예상을 깨고) 릴라가 레누에게 하는 말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레누와 릴라의 관계에서 인정투쟁은 상호적이고, 질투 역시 상호적이다. 나는 이것이 레누의 이야기가 싱클레어, 토니오, 미조구치의 이야기와 극명하게 보여주는 차이라고 생각한다. 언뜻 비슷하게 질투심 어린 친구 관계를 담고 있는 서사임에도 여성 주인공을 내세운 서사와 남성 주인공을 내세운 서사가 달라질 수 있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고 말이다. 

 

- 싱클레어, 토니오, 미조구치의 투쟁은 대체로 관념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이들이 친구를 생각할 때, 그에 대한 질투심을 내비칠 때 세상에는 오로지 저 둘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레누와 릴라가 의식에만 몰두하기엔 물리적 현실 세계가 너무나 가까이에 있다. 레누와 릴라의 관계는 이들이 속한 찢어지게 가난하며 폭력이 난무하고 여성이 물건 취급되는 전후 나폴리 세계의 조건과 촘촘히 얽혀있다.

 

- 내가 외면하고 싶어 한 감정들을 생각했어요. 이를테면 질투심 같은 거요. 대강 이런 소릴한 것 같다. 상담가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이후에도 간간이 '그 책'에 관해 물었다. 여기 오게 된 것이 그 책에서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냐는 식으로. 사실 그건 아니었지만, 우연인지 본능적인 이끌림인지 내가 당시 하고 싶었던 많은 말을 책에서 발견했고 책이 나로 하여금 말을 뱉게 해주기도 했다. 

 

- 나는 나의 친구들을 좋아하고 질투했다. 어쩌면 나는 그 친구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지 모르겠다. 나는 친구들의 생각과 행동, 말투, 문체, 웃음소리, 제스처를 때론 의식적으로 때론 무의식적으로 흉내 냈으며 그중 일부는 여전히 내게 남아 있다. 

 

 

 

김현진

 

- 우리가 사랑하는 어느 시인은 질투가 나의 힘이라 읊었으나 질투가 내게 힘이 되어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질투, 부러움.    

 

- 늦게나마 국어사전의 힘을 빌리자. 첫 번째로 질투란, 명사로서 부부 사이나 사랑하는 사이에서 상대되는 이성(시대에 맞게 국어사전도 업데이트가 시급하겠다)이 다른 이성을 좋아할 경우에 지나치게 시기하는 것을 말한다. 두 번째 뜻 역시 명사로, 다른 사람이 잘되거나 좋은 처지에 있는 것 따위를 공연히 미워하고 깎아내리려 하는 것이다. 세 번째 뜻 역시 명사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일곱 가지 대죄에 포함되는 것으로, 우월한 사람을 시기하는 일을 이른다. 

 

- 그렇다면 부러움이란? '부럽다' 역시 국어사전의 힘에 기대어 이것은 형용사라는 답을 얻었다. 남의 좋은 일이나 물건을 보고 자기도 그런 일을 이루거나 그런 물건을 갖고 싶어 하는 마음을 부러움이라고 한다.  

 

- 첫 번째 의미에 해당하는 감정적인 이유로 질투를 느낀 적은 거의 없는데, 그것은 내가 뭔가를 초월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지독한 겁쟁이인 주제에 성정이 격하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그런 상황을 피하여 살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비겁하게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보다 누군가를 지나치게 사랑하지 않는 것에 훨씬 정성을 기울이며 살아왔다. 

 

- 소포모어 징크스를 뛰어넘기 위해 수없이 질과 양 모두로 승부해보려 했지만 이게 영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내가 뭘 얼마나 썼는지 알게 된 건 바로 지난주에 어느 작가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그분이 인터넷 서점에서 내가 출간한 책 목록을 캡처해서 보여주시는 바람에 나는 내가 뭘 하고 살아왔는지 어쩔 수 없이 보고 말았다. 앤솔러지, 대담집, 인터뷰집, 서신집 등 공저를 포함하면 36권, 혼자서 뭘 끄적끄적 쓴 게 16권. 넌 무슨 레이저 프린터냐. 번아웃이 올 만도 하지. 너무 늦게 왔어.

 

- 그 목록을 보면서, 첫 책을 내던 나를 질투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낭창한 얼굴을 하고, 다가올 세상이 호의를 베풀어줄 것이라 믿고 있던 멍청한 계집애. 미성년자라서 세금도 안 떼였지.

 

- 조지 버나드 쇼가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젊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것이 젊은 애새끼들에게 낭비되고 있다는 것은 실로 비극이다!" 젊음이란 게 그걸 제대로 쓸 줄도 모르는 저 반편이에게 가 있다니. 정신 좀 차려. 이제 곧, 너한테서 돈 떼먹으려고 안달이 난 사람들, 네가 스무 살도 안 됐다는 사실에 오히려 더 군침을 흘리면서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번호표 나눠줘야 할 만큼 줄을 설 거야.

 

- 그 목록에서 17살의 나, 22살의 나, 24살의 나, 25살의 나... 수없이 많은 나를 보며 나는 그들을 죄다 질투했다. 남보다 훨씬 부러운 게 나였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바꿀 기회가 있었던 나.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던 나. 그 길로 가지 않을 수 있었던 나. 불행으로 가지 않을 여지가 아직 남아 있었던, 불행에 발을 담그기 직전의 기회가 아직 있었던 순간의 나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부러운, 힘껏 때려주고 싶을 만큼 증오스럽고 질투 나는 존재였다.

 

- 작년에 낸 장편소설 <녹즙 배달원 강정민>도 원래는 어느 출판사의 문학상 응모작이었다. 문학상을 타고 말겠다는 큰 꿈을 품고 독한 마음으로 칼을 갈며 고치고 고쳐서 쓴 소설이었는데, 역시 본심에도 들지 못하고 탈락한 후 출판사 편집자에게 이거 따로 소설로 펴내자는 연락이 왔다. 저 이거 다른 문학상에 낼 거예요, 하자 편집자가 이렇게 대답했다. "작가님, 작가님은 심사위원의 눈만 눈이라고 생각하시고 편집자의 눈은 눈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 그간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면 '편집자는 제1의 독자'라며 저자와 편집자 사이에 이견이 생길 때마다 90퍼센트는 편집자의 말이 맞다, 지나 놓고 보면 나머지 10퍼센트도 거의 다 편집자가 맞다,라고 늘 말하던 내가 그냥 듣고 넘길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결국 그와 작업했는데 슬프게도 그는 회사를 옮겼고, 더 슬픈 것은 자신이 저런 말을 하였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원래 쓴다는 건 고독한 일이다...

 

- 사람들은 늘 오늘이 우리 남은 인생의 가장 젊은 날이라며 힘을 내라고 한다. 그러나 오늘이 힘겨운 것은 우리가 살아온 나날 중 오늘이 가장 늙고 노쇠한 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일의 나는 틀림없이 하루 더 젊었던 오늘의 나를 시샘할 것이다. 내가 언제나 어제의 나를 질투하듯. 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소맥에 섞어 삼키고 아직 희망이 있다고 믿었던, 치열하게 행복했던 나날들을 향한 뜨거운 그리움까지 얹어서. 

 

 

 

서한나

 

- 삶을 가지고 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는 일을 냉소하는 대신 아름다운 것을 찾아내고 싶고, 무언가를 질투하는 대신 함께 즐기고 싶다.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된 바, 나는 그러지 못하거나 그렇게 되는 데 아주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 나는 시간을 보내는 방법 하나를 터득했다. 그것은 글쓰기다. 쓸 수 있다면 모든 게 가능할 것이다. 

 

- 겨우 컵에 담긴 얼음이 빛에 반사되는 걸 찍으면서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가능하다면 나는 세상사에 관심을 두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나의 진실한 마음과는 다르게 정치 문화 경제 사회 이슈에 말을 얹게 되고는 한다. 차분함을 잃지 말자, 어차피 이 자리에서 결단이 나는 것은 아니니까... 라고 되뇌지만 이야기가 돌아가는 꼴을 보며 나는 내가 바라는 세상에 대해 말해버리고 만다. 외투와 소지품을 챙겨 나오는 길에 할 말을 했다고 생각하면 뿌듯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생각한다. 이젠 정말로 말하지 않겠다고...

 

- 시간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어떤 것에도 애걸하거나 절실해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그보다는 아름다운 것에 둘러싸여 내 몸을 가꾸는 일에 헌신하고 싶다. 운동과 먹는 일을 반복하며 바스락거리는 셔츠 안에서 살이 단단하게 차오르는 느낌을 즐기고만 싶다. 

 

- 나는 댄디즘을 지향하는 이들을 증오하면서도 내 삶 가운데서는 한가롭고 정신적인 일을 즐겨왔다. 하지만 나는 그들처럼 되고 싶지 않다. 우산으로 아내를 때리거나 남이 밥을 해줄 때까지 기다리면서 세상과 거리를 둔 자신에게 취하고 싶지도 않다. 그저 이대로 생활에 무능하고 정신적 영역에 탐닉하는 삶을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을 부를 단어가 필요하다. 

 

- 그는 학과의 전통에 따라 교환학생 한 명에게 짝꿍 노릇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전부터 민규봉의 입을 통해 전해 듣곤 하던 그의 존재감이 거슬리곤 하였다. 걔는 잘 안 웃고, 가끔 엄청 웃긴 말을 해. 얼마 후 우리 대화에 그가 정식으로 데뷔했다. 올 것이 왔다는 느낌으로 나는 민규봉의 표정을 살피었다.  

 

- 보다 보니 민규봉의 그에게는 시선을 끄는 면이 있는 것도 같았다. 그것이 민규봉이 그에게 보내는 시선 때문이었다고 해도. 

 

- 교수진에 아는 이름이 없는 것은 아무래도 괜찮았으나 모두 남교수라는 것이 또다시 냉소하게 하였다. 나는 블로그를 켜서 이 사실이 믿기는 게 믿기지 않는다고 적었다. 상을 받는 것도 여자, 낭독회에 오는 사람도 책 사는 데 돈을 쓰는 사람도 대개 여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미술계도 마찬가지라는 말도...

 

- 친구가 댓글을 달았다. 화 그만 내고 카페나 와. 그래서 내일은 카페에 갈 것이다. 아이스라떼를 사 먹으며 책을 읽거나 글을 쓸 것이다. 

 

- 친구는 시인이 되고 싶은 사람들과 모여서 시 얘길 한다. 내가 물었다. 넌 타고나길 잘 쓰는 애한테 질투 나, 아니면 점점 더 느는 애한테 질투 나? 그 애는 후자를 골랐다.

 

- 기대가 없어서 그런가? 타고난 애, 매번 잘 쓰는 애한테는 질투가 안 나고 그냥 좋아.

 

- 질투는 나와 대상 간의 경계가 확실할 때 강력해진다. 그럴 때 잘 생기고, 참을 수 없이 커진다. 음악대학에 다니는 학생의 삶이 부러우면 피아노 교습소에 다니는 게 낫다. 대문호의 삶이 부러우면 국어 교실에 다니는 게 좋다. 그러면 우리는 대상에서 나로 돌아오게 된다. 그다지 재미없는 피아노와 글쓰기를 지나. 

 

- 질투의 끝은 허무하다는 데 다다르면 질투는 힘을 잃는다. 오랜 충만함을 주는 것. 그것은 질투가 못하는 것이다. 

 

- 나는 X를 만나기 위해 사는 것 같다. 마음을 끄는 어떤 것. 모두가 좋아하고, 취향과 무관하게 인정하게 되는 것. 그것을 갖춘다면 글쓰기에 테크닉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글은 마이너스가 계속되다가 플러스로 끝나는 글이다. 처음에는 좋은 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다가, 며칠 뒤 다시 보고 그것을 좋아하게 된다. 그것은 얼마간의 이상함을 지닌다. 필자를 꼭 닮은. 말하자면 그가 그 자신으로 있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것이다. 

 

- 어린 시절 우리가 질투할 때마다 칭찬받았다면 오늘날의 질투에서 배덕감과 쾌락을 느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서 남을 질투하렴. 대놓고, 격렬하게, 집중해서, 함부로, 애틋하게... 질투를 장려하는 곳에서 질투는 온순한 얼굴을 한 채 손아귀에서 주물러질 것이다. 사람들은 질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것의 효능을 십분 활용하리라. 질투의 표정은 점차 복잡해지다가 이내 혼란스러움에 질식해 흘러내릴지도 모른다. 

 

- 다른 많은 이들처럼 나도 하지 않는 것에서 자유를 느낀다. 출근하지 않는 것, 대화하지 않는 것, 설득하지 않는 것, 열 내지 않는 것. 나를 잃지 않는 것. 인간적이게도 나는 이 모든 것을 아직 하고 있다.  

미래의 내가 질투할 것을 알고 있다.

 

- 내가 원하는 것은 아는 사람만 아는 책을 만드는 것이다. 구할 수 없으면 더 좋다. 소문으로 존재하는 절판된 책, 그것만큼 끌리는 것도 없다. 돈은 못 벌겠지만...

 

- 현대사회는 누가 먼저 질투에서 빨리 벗어나느냐 하는 게임에 돌입했다. 누가 먼저 SNS를 끊느냐, 누가 먼저 러너스하이를 맛보느냐, 누가 먼저 자신과 만나느냐. 

 

- 나는 가끔 비슷한 생각에 빠진다. 이 정도면 인생을 다 아는 것 같다고. 어느 워크샵에서 하미나 작가가 동료들에게 물었다. "같은 경험을 완전히 다르게 해석한 경험이 있나요?" 나는 정곡을 찔린 것처럼 할 말이 없었다. 과연 좋은 질문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 이제 조금 세상과의 접점을 찾았다고 느낀다. 할 일이 아주 많다. 이제야 조금 마음을 열었을 뿐인데 사람들은 통로를 여는 질문을 한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느낀다. 모든 것을 알고 있거나, 곧 알게 된다. 그것이 얼마나 큰 위안을 주는지 모른다.

 

- 천재의 재능을 질투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천재가 등장하니까. 천재가 몰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니까. 범재와 천재 이야기는 질투로 포장되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몰입에 관한 것일지도 모른다. 피아노를 모르면서 피아노 연주 영상을 보고 결코 기타 학원에 등록하지 않을 텐데 밴드 공연을 보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거다. 

- 자신을 잃어버리는 몰입은 역설적으로 합일을 경험하게 한다. 몰입이 안 될 때 나는 남이 몰입하는 걸 본다. 예술가가 어떤 태도로 예술을 하는지 알기 위해 인터뷰를 읽는다. 천재는 질투하지 않음으로 천재가 되고 범재는 질투함으로 범재가 된다. 

 

- 질투는 내가 웃을 수도 있었던 환한 웃음을 가리고, 내가 즐길 수도 있었던 음악과 커피 맛에서 나를 멀어지게 하며, 아름다움으로부터 나를 내쫓는다. 질투는 나를 사랑이나 여름 같은 것에 머물지 못하게 한다. 삶에 대하여 못내 원하는 것이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읽기, 천재의 몸을 갖기, 공놀이하고 낮잠 자기, 나는 아직도 그런 것을 원한다.

 

 

이랑

 

- 시스젠더 헤테로 섹슈얼인 내 연인에게는 그가 무척 아끼고 애정을 쏟는 이성 친구가 있다. 그에게 생긴 하루하루의 크고 작은 일상의 이야기는 그의 연인인 나와 그의 친구에게 똑같이 분배된다. 그들은 둘만의 여행을 다니고, 같은 취미 생활을 즐기고, 함께 일하고, 한 공간에서 잠을 자기도 하지만 섹슈얼한 관계는 없다고 말한다.

 

- 나는 그 두 사람이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둘의 관계를 뭐라고 해야 할까. '에이 섹슈얼 헤테로 로맨틱 관계'라고 불러야 할까. 

 

- 나를 만나기 이전에 성립된 관계이고 나는 나의 등장을 이유로 그 형태를 바꾸고 싶은 생각이 없기에(미래의 마음은 어떨지 알 수 없다) 두 사람이 공유하는 사랑의 형태를 지금은 온전히 바라보려 하고 있다. 

 

- 위에 언급한 상황과 같은지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매력과 끌림을 느끼는 누군가를 만났을 때, 상대방과의 섹슈얼한 관계를 그려보기도 하는 동시에 좀 더 안정적이고 긴 호흡의 만남을 추구하며 '우정'의 형태로 관계를 정립하는 것은 꽤 흔한 일인 것 같다. 그런 관계 선택은 상대의 성별에 관계없이 나에게도 여러 번 있었던 일이다. 그리고 그런 선택을 해온 데에는 내가 폴리아모리(비독점적 다자연애) 관계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이유가 크다.

 

- 하지만 그런 '말/언어'를 알지 못했던 시간 속에서도, 표현할 수 있는 정확한 '말/언어'만 없을 뿐 상대를 향한 다양한 끌림과 유사 연애를 경험해 왔다. 

 

- 한계가 많이 보이는 '여성 어른'의 삶은 내게 그리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한 사람의 성향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여전히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린이였던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고 싫어했던 것은 '한계'와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미리 정해져 있는 시스템'이었다. 그 때문에 매사에 쓸데없이 질문이 많고 반항적이라는 평가를 들어왔다.

 

- 현재의 상태와 감정, 상대와의 관계를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아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어릴 때부터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관한 다양한 언어를 접할 수 있었더라면 분명 나의 유년기와 청소년기가 덜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우정과 사랑, 남자 친구와 여자 친구, 질투와 이해, 순종과 반항 등 단순하게 분류된 언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하고 다양한 상황과 관계 속에서 자라 성인이 된 지 벌써 20년 가까이 지났다.

 

- 내가 더 풍부한 언어와 표현 속에서 자랐다면 얼마나 더 많은 사랑을 할 수 있었을까. 질투, 분노, 미움을 느끼는 나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숨기고 수치스러워하는 게 아니라, 이 마음이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드는 감정이라는 걸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 누군가를 아끼고 배려하는 마음에 한도가 정해져 있지 않듯이, 사랑의 마음과 형태 그리고 그것을 나누는 상대도 정해져 있지 않다는 생각에 점점 확신이 든다. 그럼에도 나와 내 연인은 독점 연애 정상성에 길들여진 습관적인 질투를 하고, 그런 마음을 때로 농담에 섞어 드러낼 때가 있다. 물론 상대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고 확인받고자 하는 의도겠지만 그런 농담을 지양하기 위해 지속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몰랐던 새로운 관계 혹은 사랑의 형태가 눈앞에 나타나더라도 당황하지 않도록 말이다. 

 

- 새로운 언어를 배워나가는 동시에 나는 지금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자주 사랑을 말하고 표현하려고 한다. '연인'이라고 명명한 상대뿐 아니라 내 연인이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내 곁에 가까이 머무는 소중한 사람들에게도 말이다. 소중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귀한 마음을, 독점 관계를 '정상'으로 보는 기준에 휘말려 잃고 싶지 않다. 

 

 

이다혜

 

- 건강한 마음이란 무엇일까. 오로지 햇살뿐으로, 그림자도 없고 격랑도 일지 않는 것일까. 하지만 영원히 떠 있는 태양은 없을뿐더러, 햇살이 가득한데 그림자가 지지 않을 방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질투에 대한 나의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한다.

 

- 삶에서 욕심내는 것이 많을 때 우리의 시야는 좁아지곤 한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질투'를 이렇게 정의했다. "다른 사람이 잘되거나 좋은 처지에 있는 것 따위를 공연히 미워하고 깎아내리려 함." 여기에는 긍정적으로 해석할 틈이 전혀 없다.

 

- '공연히' 타인을 미워하는 사람의 얼굴을 본 적 있는가. 얼굴의 본 생김과는 관계없이, 마음 어딘가로부터 어두운 마음이 어쩔 줄 모르고 비집고 나오는 인상이 되고 만다. 타인의 불행에 기뻐하는 얼굴, 걱정하는 척하면서 신난 얼굴. 아마도 그게 평범한 질투의 얼굴이리라. 

 

- 그런데 '질투'라는 것은 사랑하는 대상이 (내가 아닌) 다른 이를 좋아할 때 생겨나는 마음이기도 하며, 내게 이 감정은 타인의 얼굴을 한 가장 이상적인 나와 현실의 내가 부딪칠 때 생겨나는 정동(情動)이다.

 

- 나는 좋아하는 사람들만을 질투의 대상으로 삼는다. 내가 가질 수 없는 장점을 가진 사람 곁에 있고 싶어 한다. 다만 나의 질투가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와 다른 점이 하나 있는데, 나는 다른 사람이 잘되거나 좋은 처지에 있는 것이 좋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다 잘된다고 이야기하곤 하는데, 친구들에게 다가온 좋은 기회를 붙잡으라고 적극적으로 권유하는 사람이 나다. 

 

- 내가 질투하는 대상이 주변에 많다는 것은 나의 오랜 자랑이다. 늘,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다. 지금도 그렇다. 인간이란 무척 복합적이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로 그를 평가할 수는 없어서, 심지어는 내가 인간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마저도 어떤 부분은 나보다 뛰어날 때가 있다. 

 

- 네트워킹을 잘하는 사람은 자기가 네트워킹을 한다고 의식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런 사람을 나는 영원히 부러워할 것 같다. 그냥 좋아서 사람을 만나 어울릴 뿐인데 결과적으로는 엄청난 관계와 기회로 이어지는 식이다. "소개해줄까?"라는 말을 듣고 받아들이는 일이 절반, 피하는 ㅇ리이 절반이 내게 사교적인 친구들은 질투와 부러움의 대상이지만 그들의 장점을 흔쾌히 인정하고 가능하면 그런 자질을 배우고 싶다고 생각한다. 

 

- 사교의 제왕들과 있을 때는 이런 식이 된다. 같이 식사를 하러 갔다. 누군가가 와서 인사를 건네고, 나도 소개를 받고, 어느새 일행이 늘어나 있다. 문제는 내가 이럴 때 굉장히 삐걱거리기 때문에, 나를 잘 아는 사람일수록 낯선 사람과의 동석을 피하게 해 준다. (그게 좋은 일인지는 수수께끼로 남을 듯하다.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내게 익숙하지 않은 방향으로 삶을 꾸려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해가 갈수록 안주하기는 쉽고 모험할 기회는 줄어든다. 그래서 안전망 밖에 존재하기 위해서 더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고 실제의 나는 점점 더 안전지대에 머무르고 싶어 한다.) 

 

- 사람의 삶은 삼인칭으로 볼 때는 알 수 없는 국면들로 가득하다. 아무리 오랫동안 함께 일한 동료라 해도 그가 일하면서 겪는 어려움을 내가 다 알 수 없고, 때로는 내가 그의 '어려움'의 근원일 때도 있다. 가장 친한 친구도 마찬가지다. 서로 일상을 시시콜콜하게 주고받으며 지내도, 상대가 마음먹고 이야기하기 전에는 진짜 고민이 무엇인지 모른 채 긴 시간을 보내는 일이 적지 않다.

 

- 그러니 타인의 삶에 대해서라면, 그가 말로 다 하지 않아 겉으로 보이지 않는 고충이 있다고 생각하면 질투가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을 피할 수 있다. 나는 내가 가지 않은 길을 씩씩하게 가는 모든 사람을 질투의 눈으로 바라본다. 동시에, 그가 말하지 않은 어려움을 내가 모른다는 이유로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 때로는 내가 질투하는 대상을 따라가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성장하기도 한다. 나는 일할 때 속도를 중시하지만, 속도를 신경 쓰지 않고 완성도를 높이려고 노력하는 이들을 존경한다. 특히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집요함은 큰 장점이 된다. 적당한 선에서 일을 마무리하고 안주하려는 마음을 누르는 자질 말이다. 

 

-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하면 좋다는 조언이 세상에는 넘쳐나지만, 타인에게 잘 맞는 방법이 내게도 잘 맞으리란 보장은 없다. 타인의 경험은 참고가 되기는 하지만, 내가 직접 시행착오를 거쳐보기 전에는 그 답을 알 수 없다.

 

-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질투는 상처가 되지 않을 수 있고 나 역시 성장할 수 있다. 질투하는 마음은 (의식적이든 아니든) 비교하는 마음에서 생겨나는데, 비교하지 않는다면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보다 나아지기 어렵다. 하지만 질투하는 마음에 사로잡히면 타인의 장점을 있는 그대로 보는 대신 깎아내리려는 비겁한 마음으로 가득해진다. 그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도록 노력할 뿐이다. 

 

- 내가 타인을 질투하는 부분들은 내가 되고 싶은 가장 이상적인 나와 현실의 나 사이에 존재하는 공백이라고 받아들인다. 사교성과 더불어 내게 없는 능력은 무모함이다. 무모함은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부정적인 방향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지만, 결과와 무관하게 지르지 않으면 도약하기 어려운 순간들도 있다. 

 

- 누구나 '신뢰의 도약'이 필요한 시기를 겪는다. 나를 믿든 남을 믿든 눈 딱 감고 한발 크게 내딛어야 하는 순간 말이다. 길이 보이지 않았는데, 분명 허공이었는데, 발을 디딘 순간 그곳에 흔들리지 않는 다리가 있을 때가 있다. (물론 허공일 때도 있다.)

 

- 허공만 보면 왔던 길을 돌아가거나 그 자리에서 맴도는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의 나를 믿고, 손을 내민 사람이 보여주는 기회를 믿고, 때로 가까운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더라도 도전하는 일이 내게는 거의 없다. 

 

- 그래서 도전하는 사람을 응원하게 된다. 내가 하지 못한다 해도, 내가 잡지 못한다 해도 응원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 나는 언젠가 좋아 보이는 제안을 거절한 적이 있다. (한 번도 아니고 몇 번 있다.) 언젠가는 십 년쯤 전에 내가 거절한 기회를 잡아 지금까지 그 포지션에서 일하는 사람을 만났다. 

 

- 그래서 그분을 질투했느냐 하면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나는 그 자리가 나보다는 그분에게 더 잘 어울린다고 (그때도 생각했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분은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일했고, 나는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일했다.

 

- 지금의 내가 내 마음에 흡족하지 않은 면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의 내 문제일 뿐,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타인의 문제는 아니다. 

 

- 재미있는 소설을 읽을 때, 나는 질투한다. 이야기를 만들어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재능이 부럽다.

 

- 딱 맞는 순간에 좋은 투자를 잘하는 사람을, 나는 질투한다. 시간이든 돈이든 과감하게 투자하는 사람은, 신중한 사고의 결과일 때도 있지만 무모해 보일 정도의 과감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물건이 적고 청결한 공간에 있을 때, 나는 질투한다. 미니멀리스트를 지향하지만 맥시멀리스트로 살고 있는 내 눈에는, 필요한 만큼의 물건만으로 청결하고 시원한 공간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존경스럽다. 

 

- 이 목록을 얼마든 이어갈 수 있다. 체계적으로 일하는 사람, 계획을 어기지 않는 사람, 생활 습관이 규칙적이거나 꾸준히 운동하는 사람도 부럽다. 

 

- 내가 '되고' 싶은 자질을 가진 이들을 질투의 눈으로 바라보고, 존경하고, 나 자신을 바꾸고자 노력한다. 노력해도 정신 차려보면 제자리로 돌아와 있곤 하지만, 시도하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나는 조금씩 변화를 겪는다. 

 

- 오늘의 내가 만난 내일의 나는 질투할 만한 사람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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