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메트릭] 맹인의 거울

일루젼 2023. 8. 11.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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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메트릭
출판 : 메트릭
출간 : 2023.05.26


 

   맹인의 거울

 

1. 즉 아무 쓸모가 없는 것

2. -1 자신은 볼 수 없는 것들을 적나라하게 비추는 거울 

2. -2 적나라하지만 본인만은 못 보는 거울

3. 볼 수 없는 자신을 대신해 외부를 비춰보는 거울

4. 눈먼 자들의 놀이터, 블라인드. 

 

 

하이퍼리얼리즘 소설과 적절히 각색된 일기 그 어디쯤에 위치한 소설. 극도의 리얼리즘은 더 이상 내 이야기도 네 이야기도 아닌 보편적 익명성을 획득한다.

 

익명성을 통해 접하는 소식들은 어딘가 한 겹의 완충재가 감싸고 있는 듯하다. 기쁨으로부터도 슬픔으로부터도 조금은 거리를 둔 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내 세계 안에 실존하는 인물들의 소식은 조금 다르다. 어제까지 얼굴을 마주했던 이의 부고, 혹은 성공은 조금은 다른 색깔을 띠는 것 같다.

 

허구를 통한 인정으로 목마름을 채울 수 있을까? 차폐를 위한 혼란과 거짓말의 경계가 나뉘는 지점은 어디인가? 

 

익명성에 숨어 거짓된 모습을 보이는 것도 보기 괴롭지만, 특정 기준을 정해두고 그에 못 미치는 스스로를 자학하는 것도 보기 괴롭다. 때로 이미 그에 도달했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해맑음이 공격이 될 수 있는 것은, 초연함에 이르지 못한 이들은 그것을 집어 스스로를 찌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건 하나만 해줬으면 싶지만 상대성은 언제나 양측 입장 모두를 제공한다. 주변을 둘러보면 다 비슷비슷하게 살고 있다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따라서 누군가에게는 기득권으로 보이고, 누군가에게는 비기득권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타자는 나의 거울이자 맹인의 거울이다.

 


   

- 하지만 그 소소한 자부심조차 제 생각 이상으로 빠르게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학벌 말고도 직장, 자산, 외모, 심지어 자신의 배우자를 점수로 매기는 매운맛을 봤기 때문입니다. 저명한 회사에 다니거나 전문직 종사자라는 인증은 어떤 말이든 납득이 되는 면죄부가 되었고, 영세한 회사에 다닌다는 타이틀은 그 사람의 아킬레스건처럼 붙어 다녔습니다.

 

- 그 매운맛이 익숙해질 때쯤, 학벌에서 직장으로, 성적표에서 납세증으로, 애인에서 배우자로, 이름만 바뀐 똑같은 구조가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인증'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의 부러움을 주워 담고, 다른 사람의 성과를 가져와 자기 것인 것처럼 조작하는 모습도 똑같이 반복되었습니다. 수능 성적표를 포토샵으로 위조해 커뮤니티에 인증하는 고등학생의 모습 그대로.  

 

- 우리는 실제 모습이 아닌, 되고 싶었던 금 조각을 뭉쳐 소득 상위 5%의 '남들처럼'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남들처럼'과 스스로를 비교하고, 그 '남들'에 소속되어야만 정상적인 삶이라 여깁니다. 이 집단에 소속되지 못한 사람은 박탈감을, 소속된 사람은 언제 탈락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남들'에 소속된 사람들을 다시 일렬로 줄 세우며, 탈락자 선별을 시작합니다. 

 

- 0.5평 남짓한 작은 우주, 이 화장실 칸에서 저들은 씻지 못한 번뇌까지 모두 씻어낸다. 하지만 번뇌는 머리카락처럼 자라나는 것이라고 했던가, 근심이 없어진다는 건 또 다른 근심이 자라날 거라는 서막이다. 복통이 사라지자 줄을 기다리던 시간 내내 용돈을 벌었을 저들의 노련함에 다시 배가 아프다. 

 

- 화장실에서 일을 보는 시간은 길어도 10분, 급등주식 단타로 벌었을 용돈을 5만 원이라 생각해도, 저들은 시급 30만 원의 삶을 살았다. 사무실 한 칸에서 한 달간 참아내면 들어오는 돈은 300만 원 남짓, 반면 저들은 매일 아침 0.5평 화장실 칸에서 내 월급을 한 번 더 복사하고 있었다. 

 

- "'가치'. 들어봤죠? 동주 페어 암호화폐도 하잖아요?"

"이 사람 당연히 알죠. 유명하잖아요. '가난 치료사'. 당신도 가난에서 탈출할 '가치'가 있다."

"평생 일할 수 없잖아요. 경제적 자유를 얻어야지. 요즘 같은 시대에 정신 개조만 하면 가난을 탈출할 수 있다고 하는데, 볼만한 것 같아요."

 

- 다른 동료들이 모니터를 가림막 삼아 시든 나무처럼 고개를 떨구고 있다. 그들의 앞에 놓은 까만 모니터 화면 속에 붉은색, 파란색 차트가 희미하게 비친다. 동료들의 선명한 두 눈에 광채가 난다. 그래, 다 똑같구나. 다들 동물원에서 탈출한 동물처럼 회사에서 탈출한 회사원이 되고 싶구나. 

 

- "먼저 '가치'님이 무료로 주는 정보 메신저 채널에 들어가야 해요."

"그리고요?"

"기다려봐요, 초대해 줄게요. 누가 추천해줘야만 들어갈 수 있어요. 인원 제한도 있고요."

나는 운이 정말 좋다. 좋은 회사, 좋은 동료, 그리고 경제적 자유까지... 돈을 많이 벌면 나같이 힘들었던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줄 것이다.

 

- 초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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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입장 절대 불가능) 

 

- "팝시다." 

"이 사기꾼아. 이런 식으로 해먹은 게 얼마냐?"

A님이 강제 퇴장당하였습니다.

"떠먹여 줘도 아무것도 못 하는 이 사람은 평생 가난의 늪에 빠져서 허우적댈 겁니다."

 

-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는다. 모니터에는 화가 잔뜩 난 회사 동료들이 나를 딸깍딸깍 찌르고 있다. 예... 죄송합니다. 회신이 늦었습니다. 5분 동안 5만 원을 잃고 온 시급 -12만 원 소프트웨어 개발자 복귀하였습니다. 

 

- "대리님은 퇴근하시고 주로 뭐하셔요?"

웬일로 정우가 먼저 말을 걸어온다.

"아 네, 저는 그냥 쉬어요. 동영상 보고. 정우 씨는요?"

"뭐 이것저것 스터디하고... 임장 다녀요."

"김장이요?"

"아뇨, 임장이요. 부동산 임장."

정우는 분명히 웃었다.

 

- "정우 씨, 벌써 부동산 임장을 다니세요?"

"얼른 준비해야죠. 전세 끼고 다음 상급지 가야죠. 어차피 저도 '부린이'예요."

 

- 읽어도 알 수 없는 내용이지만 확실히 기분이 나쁜 글이다. 아래로 내린 댓글 창에는 역시나 회사명만 덩그러니 보이는 사람들이 서로 인신공격을 주고받는다. 

 

- "어머, 얘 내가 괜한 소리 한 거 아니니. 어차피 네가 결정하는 거니까 너무 마음 담아두지 말아. 다 너를 위해서 한 말이야. 오해하지 말고."

 

- 그래 남들이 그랬다. 결혼은 현실이라고. 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 결혼식장, 신혼여행. 적게 잡아도 7천만 원은 쓰고 시작해야지. 급을 맞춰서 결혼해야 행복하다고. 남들이 그랬다. 결혼은 집안의 결합이라고. 노후 대비는 되어 있는지. 부모님 직업은 무엇인지. 모은 돈은 얼마나 있는지 확인하는 게 순서이지. 

 

- '스크린'을 켠다. 서울 아파트에 자식 둘, 포르쉐를 몰고 다니는 것이 행복이라고 알려준 '스크린'을 켠다. 내 행복을 다수결 투표에 부친다.

 

- 나를 가장 잘 아는 것은 나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 모두의 반대가 있다면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하지 않은가? 심란하다. 지금쯤 다수결 표결은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혔을 것이다. '스크린'에 상주하는 유권자들의 투표 결과를 기다린다. 침을 꿀꺽 삼킨다. 엄지로 밀어 올리며 쏟아지는 댓글을 바라본다. 

"미쳤어요?" 

"당장 도망쳐. 급이 안 맞잖아."

"혹시 누가 칼로 협박했어요?"

"가스라이팅 당했네."

부모님 피눈물 쏟으실 듯."

"또 스크린에서 한 커플 박살 내네ㅋㅋ"

 

- 반드시 서울에 있는 대기업에 취직해서 호강시켜 주겠다던 저 남자는 몇 점인가? 육아휴직을 내서 내 커리어를 살리겠다 하였던 저 남자의 점수는 몇 점인가? 새벽에 나를 업고 응급실까지 뛰었던 저 남자의 점수는 몇 점인가? 

 

- 줄자를 대본다. 그래, 내가 더 아깝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나의 삶이 더 낫다고 속삭여주고 있다. 평균에 속하는 수많은 유권자가 내 가치가 월등히 높다고 거리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잠이 오지 않는다. 휴대전화를 들어 올린다.

 

- "무슨 일 있어?"

수년의 세월이 먼저 내게 속삭여준다. 눈빛만으로도 대화의 절반을 마친다. 손에 땀이 난다. 정윤이 네가 무슨 말을 할지 안다. 아니, 무슨 말을 할지 전혀 모르겠다.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

 

- "야... 너 이 사람 아냐? '가난 치료사'?"

퇴사한 정 과장님이 번들번들한 얼굴로 동영상을 찍고 있다. 

"... 그 사람 우리 회사 사람이었어."

"진짜? '가치' 님이 너희 회사였다고?"

"응 그 사람 뭐 퇴사한다고 와인까지 돌렸는데. 근데 가치?"

 

- '이렇게 고도 성장한 나라에서 가난한 건 죄예요. 최고 학벌을 쥔 자만 기회의 문턱을 넘을 수 있나요? 이젠 아니잖아요? 그런데 가난하다? 그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보시면 돼요. 이 시대는 어마어마하게 돈 벌기 쉬운 시대란 말이에요. 저도 어렸을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세요? 뭐 운이 좋을 수는 있었겠죠. 하지만 저처럼 꾸준히 노력해야 다가오는 운을 잡을 수 있다니까요? 여러분, 가난은 충분히 치료할 수 있는 병입니다.'   
 "나도 이분 말 듣고 정신 개조 많이 하는 중이야."

"어... 그렇구나."

 

- "서른두 살이면 보통 얼마나 모아야 하냐?"

"..."

뼈만 남은 치킨 조각이 침묵을 기다린다.

"갑자기 그건 왜 묻냐?"
"네가 나 왜 헤어졌냐고 물었잖아."

 

- "이동주, 너 만약 '스크린'에 있으면 얼마라고 대답했을 거 같냐?"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나도 너한테 얼마 모았냐고 물었잖아."

"다들 자산 10억에 자기 집 하나씩 있는 거 같아서..."

"너 취했냐? 야 '스크린'이었으면 그냥 10억 있다고 해야지."

"그치?"

"그래서 넌 얼마 모았냐니까?"

 

-  보랏빛 황혼이 내리는 퇴근길 저녁, 찬 공기에 쏟아지던 잠이 씻겨 나간다. 분주한 사람들, 쓸쓸한 가로등, 휴대전화 밖 세상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이어폰 바깥에는 노래하는 세계가 있었다. 

 

- 어두워진 버스 창가 넘어, 전광판의 천사들은 이제 사이렌처럼 노래를 부른다. 여기를 봐요, 남들은 가졌지만, 당신은 가지지 못한 것을 당신에게 줄게요. 그리고 당신이 가진 것을 저에게 주세요. 당신이 가진 것을 기꺼이 지불한다면, 너도 나처럼 구름 위의 천사가 될 수 있어.

 

- 집 현관문 앞에 붙은 광고 전단을 뗀다. 오늘 아침 인사를 나누지 못한 도어락이 삑 소리를 낸다. 포도색 무지개가 내려앉은 방 안, 물속에서 숨을 쉬는 것처럼 답답하다. 방안의 침묵에 가라앉는다. 

 

- 밤이 늦었다. 내일도 멀겋게 고개를 내밀 태양을 받아 올리려면 이 밤이 더 깊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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