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 아폴로의 눈

일루젼 2023. 8. 8. 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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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 / 최재경
출판 : 바다출판사
출간 : 2010.12.15


               

 

 

 

<사랑에 빠진 악마>를 읽은 뒤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 전집을 이어서 읽으려고 구매했던 책이다. 아마 21년쯤이었을 텐데, 2년 정도면 꽤 양호하다고 생각한다.

 

여담이지만 얼마전 구독하고 있는 채널인 <겨울서점>에서 김겨울 작가가 지인의 책장을 둘러보는 영상이 업로드 되었었다. 그때 오간 대화가 남일 같지 않아 아주 인상 깊었는데, "이 책 한 10년 전에도 있었던 거 같은데 지금은 읽었어?"라고 물으니 지인이 "아니. 읽을 거였으면 벌써 10년 전에 읽었지."라고 단호하게 대답하는 대화였다. 하지만 소장은 하고 있게 된단 말이지. 나 또한 그런 책들이 꽤 아주 너무 많이 있기에 2년이면 진심으로 선방했다고 본다. 

 

이 책은 강렬한 표지가 인상적인데, 여기에 등장하는 큰 눈은 표제작 <아폴로의 눈>에 등장하는 바로 그 간판 이미지로 보인다.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는 전시안이나 메이슨적 요소가 소설 속에서도 신흥종교의 형태로 등장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꽤 흥미롭게 읽었다. 다만 마지막까지도 그가 어떻게 태양을 직시할 수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설명되지 않는다.

 

체스터튼 / 체스터턴을 처음 만났던 건 펭귄클래식의 <목요일이었던 남자>인데,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 완독은 못했던 것 같다. 위트 있지만 크게 인상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아폴로의 눈>을 읽으며 호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작가는 다양한 상황을 풍자적으로 묘사하지만 무척 세련된 문장들을 구사한다. 그 점을 의식한 것인지 정작 주요 등장인물로는 수더분하고 땅딸막한 '브라운 신부'라는 성직자를 앞세우는데, '플랑보'와의 앙상블이 훌륭하다. 처음에는 좋지 못한 상황에서 마주치게 된 그들이 어떻게 친구로 연을 이어가게 되는지에 관해 더 읽어보고 싶어 '브라운 신부' 시리즈를 이어 읽을 생각이다. 이렇게 읽을 거리는 무한에 가깝게 증식하고 만다  

 

보르헤스의 평에 이렇게 공감하게 될 줄이야. 

체스터턴의 글은 읽는 동안 독자를 행복하게 만든다. 

조금 익살맞고, 그러면서도 어딘가 신비로운 구석이 있는- 인간적인 체온이 느껴지는 글들이었다. 

 

행복하게 읽었다. 


   

- 체스터턴의 비평 작품, 예를 들어 디킨스, 브라우닝, 스티븐슨, 블레이크, 화가 왓츠에 대한 책들은 매력적이면서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 준다. 20세기 초에 쓰인 그의 소설들은 신기하고도 환상적이다.

 

- 언젠가 포의 창작품인 추리소설이 사라지는 시대를 예상해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추리소설은 모든 문학 장르들 가운데 가장 인위적이며 놀이에 가장 가까운 장르이기 때문이다. 체스터턴 자신이 직접 소설은 얼굴 놀이이며 추리소설은 가면 놀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주장이 있고 추리소설 장르가 쇠퇴할 가능성이 있다 해도 체스터턴의 소설들은 꾸준히 읽힐 것이다. 왜냐하면 불가능하고 초자연적인 사실을 암시하는 미스터리한 신비는 마지막 몇 줄이 우리에게 주는 논리적 해결만큼이나 흥미롭기 때문이다.

 

- 문학작품을 쓰기 전에 체스터턴은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그의 모든 소설들은 인상적일 만큼 시각적이다. 체스터턴의 비서이며 훌륭한 전기 작가인 메이지 워드는 체스터턴이 자신의 말을 받아 적게 하기 전에 시가로 재빨리 성호를 그리곤 했었다고 귀여운 실언을 했다. 몸집이 뚱뚱하고 거대했던 체스터턴이 신의 도움에 의지하는 걸 잊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 이 책에는 내가 체스터턴의 가장 훌륭한 소설로 생각하는 작품이 담겨 있다. 벼랑 위의 기다란 길, 흰색 군복의 기병과 백마, 체스게임 등으로 멋지게 장식한 작품이다. 바로 <계시록의 세 기병>을 두고 하는 소리다. <이상한 발소리>에서는 변신의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 냈다. <이스라엘 가우의 명예>에서 스코틀랜드의 어두운 성은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미스터리의 중요한 부분이다. <아폴로의 눈>에서 고대 신에 대한 숭배가 범죄를 저지르는 데 사용된다. 내용을 너무 노출시키고 싶지는 않지만 <이르슈 박사의 결투>는 탄원서가 결투의 발단이 된다. 스티븐슨과 도스토옙스키의 유명한 작품들에서 영향받은 이중성이라는 오래된 테마가 이 작품에서 아주 독창적으로 선보였다. 독자가 예상하지 못하는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의심을 갖고 있던 독자는 그 이중성을 발견하면서 그 신선함에 탄성을 자아내게 된다. 

 

- 문학은 행복의 형태들 가운데 하나이다. 아마 체스터턴만큼 내게 행복한 시간을 많이 안겨 준 작가는 없을 것이다. 난 그의 신학을 함께 나누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신곡>에서 영향받은 그의 신학도 함께 나누지 못한다. 하지만 둘 다 체스터턴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떼려야 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라는 걸 안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The Three Horsemen of Apocalypse
계시록의 세 기병

 

- 이 소설의 제목은 신약성서의 마지막 권인 <요한계시록> 6장 1~8절에 나오는 네 기수의 이야기에서 따왔다. 그 내용은 신의 오른손에 일곱 개의 봉인이 붙은 두루마리가 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일곱 봉인 중 네 개의 봉인을 뜯자 흰 말, 붉은 말, 검은 말, 청황색 말을 탄 기수가 나타났다. 이 기수들은 차례대로 정복, 전쟁, 기근, 죽음을 의미하는데 최후의 심판의 전조로 해석된다.  

 

- 폰드 씨는 날씬한 몸매에 단정한 옷매무새, 평범하기 짝이 없는 정중한 태도를 지닌 사람이었지만, 그를 떠올릴 때마다 왠지 모를 기이하고 으스스한 느낌이 드는 건, 아마 그가 내 유년 시절의 몇 가지 기억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폰드라는 그의 이름이 연못을 뜻하는 폰드 pond와 발음이 같은 것과도 상관이 있었다. 

 

- 그는 평소에는 몹시 조용하고 깔끔하며 단정한 사람으로, 말하자면 땅과 하늘과 넘쳐 나는 햇빛을 있는 그대로 평범하게 되비추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 정원의 연못에 뭔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백번에 한 번씩, 혹은 일 년에 하루 이틀 정도, 그 연못은 전혀 다른 모양으로 보였던 것이다. 아니면, 평소와 같이 고요하던 연못에 불현듯 어떤 물체의 그림자나 섬광 같은 것이 비치곤 했다. 그와 동시에 물고기나 개구리, 혹은 다른 좀 더 괴상하게 생긴 생물이 하늘을 향해 얼굴을 내밀었다. 그처럼 나는 폰드 씨의 내부에도 괴물들이 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의 내면에 숨은 괴물들은 오직 잠시 동안만 표면에 떠올랐다가 곧 가라앉았다. 거의 언제나 온화하고 이성적인 관점을 견지하던 그가 갑자기 예상치 못한 기묘한 이야기를 꺼낼 때가 바로 그런 때였다.

 

- 이 바보 같은 공상 역시 나의 유년기와 연결되어 어린 나의 눈에는 어느 순간 폰드 씨가 한 마리 물고기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예의가 발랐을 뿐만 아니라 꽤나 틀에 박힌 행동을 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그의 손짓들은 대체로 진부했지만, 한 가지 예외는 있었다. 즉, 자신이 무심코 던진 이상한 발언으로 인해 주위의 분위기가 딱딱해진 것을 깨달을 때에만 튀어나오는 습관이었는데, 뾰족하게 기른 자신의 턱수염을 잡아당기는 행동이었다. 곤란해진 그는 부엉이처럼 앞만 빤히 쳐다보면서 턱수염을 잡아당겼고, 그럴 때마다 우습게도 아랫입술이 따라서 열렸다가 닫혔다. 그럴 때면 그는 마치 입술이 철사로 조종되는 턱수염 달린 꼭두각시 인형처럼 보였던 것이다. 말없이 열렸다 닫혔다 하는 이 우발적이고 기묘한 입술 동작은 놀라우리만치 물고기가 느리게 입을 뻐끔거리는 것과 닮았다. 그러나 그 동작은 결코 몇 초 이상 지속되는 법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러는 동안 그는 자신이 그런 말을 하게 된 의도를 설명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별반 달가워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하고픈 말을 꾹 삼키고 있었던 것 같다. 
 

- "제가 말씀드린 건 특별히 이 이야기에만 해당되는, 좀 이례적인 것입니다. 그로크 장군이 실패한 이유는 분명히 그의 병사들이 그에게 충성했기 때문이었어요. 물론, 그 부하들 중 한 명만 그에게 충성했더라면, 결과는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그의 병사들 중 두 명이 그에게 충성했을 때... 정말로 그 불쌍한 늙은 악마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이고 말았죠."  

 

- "그로크 장군의 실패는 군대 역사상 실제 있었던 일인데, 그 이유는 그의 부하 두 명이 그의 명령을 끝까지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가 성공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는 것도 군사적인 사실입니다. 그 부하들 중 한 명이라도 그의 명령을 어겼더라면 말이죠. 외교관님이 그 사실만 인정하신다면, 그다음부터는 무슨 이론을 세우셔도 상관없습니다."

 

- "거듭거듭 반복해서, 이 나라 왕조의 역사 속에서, 군인들은 왕들의 목숨을 구했지." 그로크 사령관의 일방적인 연설이 이어졌다. "적어도 바깥세상으로부터는 아무것도 보상받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지만 군인들은 그것을 이겨 냈지. 세상이라는 건 으레 성공적이고 강한 사람들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며 하찮은 감상주의나 늘어놓는 법이니까.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그 성공적이고 강한 사람들에 속해 있어. 사람들은 비스마르크가 템즈강 전보의 내용을 조작하여 왕까지도 속인 일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지만, 사실상 그 덕분에 왕은 프랑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을 통합한 대제국의 황제가 될 수 있었지."  

 

- "그런 사람을 처형하자고 말하는 것은 미친 짓이지." 왕자가 검은 헬멧을 쓴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그는 그저 그런 폴란드인이 아니야. 그는 유럽의 명물이지. 그가 죽는다면 우리의 친구들인 연합국들은, 심지어 같은 독일인들조차 그가 위험에 빠진 사실을 비탄하고 그를 신성시할 거야. 자네는 오르페우스를 살해한 그 미친 여자들이 되고 싶은가?" 

(주 : 자기들을 무시하는 오르페우스에게 원한을 품은 트라키아의 마이나스들이 그를 갈갈이 찢어 죽였다.)

 

- "전하, 그가 갇힌 일은 비탄의 대상이 될 만합니다. 하지만 그가 죽은 후에야 가능한 일입니다. 신성시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죽은 후니까 그렇겠지요. 그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든,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겁니다. 그가 죽을 거라는 사실이야말로 그 모든 가능성들을 지배하는 확실한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저는 사실을 좋아합니다." 

 

- "자네는 세상을 전혀 모르나?" 왕자가 반문했다.
"저는 세상이 뭐라 하든 전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로크 사령관이 대답했다. "내 조국의 국경선 너머에 있는 세상에 대해서라면요." 

 

- 왕자는 성난 검은 독수리처럼 벌떡 일어났다. 거대하게 물결치는 그의 망토는 강력하게 퍼덕이는 독수리의 날개 같았다. 단순히 말로 표현해서는 풀리지 않을 분노가 그를 갑자기 행동가로 돌변시킨 것이다. 그는 심지어 그로크 사령관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목소리를 최대한으로 높여서, 사령관 다음 서열인 포글렌 장군을 불렀다. 

 

- "제가 그를 따라잡는 건 거의 불가능할 듯합니다, 사령관님." 슈바르츠 하사관이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은 우리 연대에서 최고로 빠른 말이고, 그는 최고의 기병입니다."
"난 자네더러 그를 따라잡으라고 말하지 않았네. 그를 중단시키라고 했지." 그로크 사령관이 말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보다 천천히 힘을 주어 말했다. "종종 사람은 다양한 신호에 의해서 하던 일을 중단하거나 취소하게 되지. 고함 소리 아니면 총소리." 그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끝날 듯 끝날 듯 계속 이어졌다. "카빈 소총을 발사하면 그의 주의를 끌 수 있을 거야." 

 

- 그러자 검은 피부의 하사관이 세 번째로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도 그의 험상궂은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세상이 바뀌었어." 그로 사령관이 푸념했다. "세상은 말이나 비난이나 칭찬으로 바뀌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바뀌었지. 세상은 이미 행동으로 바뀐 것을 뒤집지 못해. 지금 이 순간 한 남자를 죽이는 일은 반드시 행동에 옮겨야 할 일이지." 그는 갑자기 상대를 보며 강철같이 눈빛을 번득이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내 말은, 당연히, 페트로프스키를 말하는 거야." 

 

- 가파른 둑길을 따라 말을 달리는 동안, 사방에 펼쳐진 늪지는 무한대로 확장되어 바다보다 몇 만 배는 더 비정해 보였다. 그 속에서는 헤엄칠 수도 없고, 그 위에 배를 띄울 수도 없고, 다른 어떤 인간적인 행동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가능한 행동이라고는 오로지 그 속으로 가라앉는 것뿐이고, 가라앉지 않으려고 발버둥 쳐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 곳이었다. 하사관은 모호하게나마 태곳적부터 존재해 온 원시적인 점액질과 같은 존재를 느꼈다. 그것은 단단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액체도 아니고, 어떠한 형태를 띠는 것도 아닌 몹시 기분 나쁜 존재였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형태들 뒤에서 그것의 존재를 느꼈다.

 

- 독일 북부 지역에 사는 수천 명의 멍청하고 영리한 남자들처럼 그 또한 무신론자였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 진보함에 따라 지구도 자연스럽게 번영할 거라고 믿는 식의 행복한 무신론자는 될 수 없었다. 그의 눈앞에 놓인 세상은 초록색 풀들이나 살아있는 생명체들이 진화하고 발전해서 열매를 맺는 식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 모든 세상은 오로지 깊은 심연으로, 모든 생물들이 바닥 모를 구덩이 속으로 영원히 꺼져 들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이토록 혐오스러운 세상에서 그가 해야 하는 그 모든 이상한 임무들에도 불구하고 그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지도를 보듯이 둑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 평평하게 펼쳐진 초목들 속에 점점이 존재하는 회녹색 웅덩이들은 발전의 소산이라기보다는 질병의 근원지처럼 보였다. 즉, 육지로 둘러싸인 웅덩이들은 아마도 물이 아닌 독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 말과 사람이 한꺼번에 곤두박질치더니, 길 아래의 어두운 늪지 속으로 하얀 포말을 튕기며 잠겨 들었다. 

 

- 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하사관은 자신이 임무를 완성한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와 같은 종류의 빈틈없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이 하는 일에 있어 매우 정확하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그토록 자주 실수를 범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그게 여기입니까, 사령관님?" 하사관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는 그게 더 먼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그 지긋지긋한 길은 악몽처럼 더 길게만 보였던 게 사실입니다."

 

- 늪지 위로 솟아오른 달이, 어두운 물과 초록빛 덤불들을 비추며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비탈의 기슭, 반짝이는 폐허처럼 우거진 갈대밭 속에, 가장 뛰어난 백마와 연대의 것이 분명한 흰 군복을 입은 시체가 누워 있었다. 그들을 식별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달빛이 젊디젊은 아르놀트 샤르트의 황금빛 곱슬머리에 후광 같은 것을 씌워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기병이자 집행정지 명령장을 들고 가던 사람. 신비로운 달빛은 칼집과 제복의 단추들, 그의 자랑이었던 무공훈장들과 직위를 알려 주는 계급장까지 비추어 주었다. 아래에 떨어져 누운 우아한 젊은이의 모습과 절벽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바위같이 거대하고 기괴한 인물이 이루는 대조보다 더 끔찍한 것은 없었으리라.

 

- 그로크 사령관은 다시 자신의 군모를 벗었다. 그가 비록 모호하게나마 죽은 사람 앞에서 조의를 표하는 행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외관상으로는 그의 괴상한 대머리와 목 때문에, 달빛 속에서 돌처럼 반짝이는 하마나 석기시대의 괴물을 보는 듯했다. 저 유명한 판화가 롭스나 검고환상적인 동판화를 만들던 17세기의 독일파 화가들이라면 아마 이러한 그림을 그렸을지도 모른다. 딱정벌레처럼 생긴 냉혹하고 거대한 괴물이 싸움에 진 천사의 부러진 흰 날개와 황금빛 갑옷을 내려다보고 있는 장면으로 말이다. 

 

- 그는 황량한 밤하늘과 자신을 내려다보는 달빛을 향해 말했다.
"그런 행동이 있기 전이나 후나 독일인의 의지는 변함이 없다. 독일인의 의지란 후회가 많은 다른 민족들의 종교처럼, 변화나 시간에 의해 부서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초월하여 언제나 똑같은 얼굴로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는, 바위처럼 견고한 정신이니까." 

 

- “잘 아시겠지만, 저는 그 사건에 관한 소식이 우리 부서에 도착했을 때 그 일이 불러올 반향에 대해 혼자 우려를 많이 했어요. 그건 정말로 프로이센 군대의 충성심이 지나쳐서 일어난 일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그건 또한 프로이센 군대의 약점 때문에 벌어진 일이기도 했지요. 그 약점은 바로 남을 경멸하는 버릇이었죠. 사람들을 눈멀게 하고, 미치게 하고, 자신을 속이게 만드는 모든 열정 가운데서 최악의 것은 바로 경멸이라고 할 수 있어요."

 

- "그로크 사령관에게는 두 명의 충성스러운 부하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런 충성스러운 부하는 한 명만 있어도 충분했을 거라는 말에 아직도 반대하시는지요?" 

 

 

The Queer Feet
이상한 발소리

 

 

- '열두 명의 진정한 어부들' 클럽의 연례 만찬이 있는 날이었다. 이날 저녁 만찬에 참석하기 위해 버논 호텔로 들어가는 회원을 누군가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았다면, 그가 외투를 벗었을 때 속에 입은 연미복이 검은색이 아니라 초록색이라는 점을 발견했을 것이다. 이 클럽은 입회 조건이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당신이 이런 고귀한 분들에게 감히 말을 걸 수 있을 정도로 대담무쌍하다는 가정하에서 그에게 초록색 연미복을 입은 이유를 물어본다면, 그는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호텔 종업원으로 오인당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당신은 더 이상 물어볼 용기가 없어서 그쯤에서 물러설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서 멈춘다면 당신은 그 초록색 연미복의 비밀과 그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놓치는 셈이다. 

 

- 그러나 당신이 '열두 명의 진정한 어부들' 클럽을 만날 정도로 높은 지위에 오르는 일은 어마어마하게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혹은 브라운 신부와 마주칠 정도로 낮고 천한 빈민굴에 살게 되거나 범죄자의 소굴로 굴러 떨어지기도 어렵기 때문에, 내가 아니면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 

 

- '열두 명의 진정한 어부들'이 연례 만찬 행사를 열었던 버논 호텔은 고대 귀족 사회에서나 존재했을 법한 장소로, 훌륭한 매너와 양식을 광적으로 추구했다. 이 호텔은 혼란스러운 상류사회의 산물인 배타적인 회원제 방식의 사업체라 할 수 있었다. 즉,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배척함으로써 돈을 버는 곳이었다. 금권주의 정치가한창이던 무렵이라 사업가들이 고객들보다 더 까다롭게 고객을 가림으로써 돈을 벌 정도로 교활해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제한 조건들을 만들어 냈고, 권태로워하던 부자 고객들은 그 조건들을 충당하기 위해 돈과 외교적인 수완을 발휘하며 재미를 느꼈다. 만약 런던에 있는 어느 고급 호텔이 키 180센티미터 이하인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했다면, 사교계는 그 호텔에서 식사를 하기 위해 순순히 키 180센티미터인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었다. 또 어떤 값비싼 레스토랑이 순전히 주인의 변덕에 의해서 오로지 목요일 오후에만 영업을 한다고 선언하면, 그곳은 목요일 오후에 넘쳐나는 손님들로 앉을 자리가 없었다.  

- 버논 호텔은 마침 상류층이 선호하는 화려한 벨그라비아 광장의 모퉁이에 있었다. 규모가 작은 데다 매우 좁고 불편하기까지 한 호텔이었지만, 오히려 이런 불편함이 특정 계층의 사람들을 보호해 주는 방패막이로 간주되었다. 특히 이 장소에서 한꺼번에 식사를 할 수 있는 인원이 스물네 명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최상류층 귀족들의 흥미를 끌었다. 이 호텔의 명물은 런던에서 가장 오래되고 화려한 정원 중 하나를 내려다보며 식사를 할 수 있는 베란다로, 이곳에는 유일무이한 대형 만찬용 식탁이 놓여 있었다. 따라서 이 식탁에 놓인 스물네 개의 좌석에 앉을 수 있는 사람들만이 따뜻한 날씨에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멋진 야외 식사를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특권을 누리는 일이 더 힘들면 힘들수록, 사람들은 그것을 더욱 갈망하는 법이다.  

 

- 이 호텔의 현재 소유자는 레버라는 이름의 유대인이었는데, 이처럼 호텔에 들어오는 조건을 까다롭게 정한 것만으로 엄청난 재산을 거머쥐었다. 물론 이런 제한적인 조건들을 신중하고 고급스러운 사업 수완과 결합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곳의 와인과 요리는 정말로 유럽 최고라 할 만한 수준이었고, 종업원들의 태도는 영국 최상류층의 분위기를 정확히 반영했다. 호텔의 경영자는 종업원들 하나하나를 자기 손의 손가락들처럼 잘 파악하고 있었다. 종업원들은 모두 합해 열다섯 명밖에 되지 않았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그 호텔의 종업원으로 취직하기가 영국 의회 의원이 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소문이 있었다. 각각의 종업원들은 놀라우리만치 조용하고 부드럽게 시중을 들도록 훈련이 되어 있어서, 그들의 대접을 받으면 마치 최고의 충복을 지닌 귀족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식사하는 귀족들에게는 정말로 일 인당 한 명 이상의 종업원들이 따라붙었다. 

 

- '열두 명의 진정한 어부들' 클럽은 그들만의 독특하고 사치스러운 방식을 주장한 만큼, 이 호텔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찬을 갖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자신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같은 건물에서 식사를 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 특히 그 사교 클럽만의 표식이라 할 수 있는 유명한 은제 생선 나이프와 포크 세트가 등장했는데, 이들은 각각 물고기 모양으로 정교하게 세공이 되어 있었고, 각각의 손잡이 부분에는 커다란 진주가 한 알씩 박혀 있었다. 이들은 생선 요리 코스가 나올 때마다 자연스럽게 함께 차려졌고, 생선 요리 코스는 그 훌륭한 만찬의 진수라 할 수 있었다. 이 클럽의 모임에는 지나칠 정도로 다양한 의례들과 규칙들이 있었지만, 그것들 모두에 특별한 역사나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마디로 귀족들만의 지극히 자기만족적인 의례들일 뿐이었다.  

 

- 당신이 열두 명의 어부에 낄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라면 당신은 그 클럽에 가입하기 위해 특별히 어떤 행동을 취하지 않아도 벌써 회원으로 영입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당신이 이미 그런 인물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면, 당신은 그런 모임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것이다.  

 

- 호텔 경영자 레버는 갈등에 사로잡혔다. 그는 상냥한 사람이긴 했지만 조금이라도 어렵거나 힘든 상황은 회피하려고 단지 친절한 태도를 취하는 가식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 버논 호텔에는 절대로 빈방이나 곁방이 있을 수 없었다. 홀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도 안 되고, 우연히 들어오는 손님도 절대 사절이었다. 그날 그곳에는 오로지 열다섯 명의 종업원과 열두 명의 손님만 있어야 했다. 그날 밤 호텔에서 그 외에 새로운 손님을 발견한다는 것은, 가족들만이 사는 집에서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새로운 형제라며 아침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고 있는 것을 보는 것만큼이나 놀라운 일에 해당했다. 게다가 신부의 외모는 보잘것없었고, 입고 있는 옷은 진흙투성이였다. 회원 중 한 명이 멀리서 그를 흘긋 보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 클럽의 만찬에 위기가 닥칠지도 모른다. 레버는 이 망신스러운 일을 완전히피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어떻게든 그것을 가릴 수 있는 묘안을 생각해 냈다. 

 

- 이와 같은 과두정치 시대에 낮은 계층의 사람들은 어느 정도 술이 취할 때는 가끔씩 비틀거리며 걷는 게 정상이겠지만, 만일 그들이 이렇게 예외적으로 훌륭한 장소에 오게 된다면, 잔뜩 주눅이 들어서 긴장된 태도로 서 있거나 가만히 앉아 있는 게 보통일 것이다. 그러니 낮은 계급의 사람은 절대 아닐 것이다. 저 무거우면서도 탄력 있는 걸음은, 조심성이라곤 없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시끄럽지는 않지만, 걸을 때 나는 소음에 대해서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을 보면, 이 걸음은 지구상의 동물들 중 오직 한 종류의 존재들에게만 속한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서유럽의 귀족들로, 한 번도 먹고살기 위해 일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 걸음은 분명히 그들의 것이다. 

 

- 그러나 그 소리는 뭔가 다른 어떤 것, 비밀은 아니지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떤 이미지와 연관되어 있었다. 기억날 듯 말 듯하면서 완전히 떠오르는 법이 없는 반쪽짜리 기억을 붙들고서 그는 한참이나 멍한 상태에 빠졌다. 분명히 그는 그 이상하고 재빠른 걸음 소리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불현듯 뭔가 새로운 것이 생각난 그는 벌떡 일어나 문을 향해 다가갔다.   

- 창문 너머에는 뇌우를 머금은 자줏빛 구름들이 석양을 덮으며 서서히 검푸른 하늘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눈치 빠른 개처럼 불길하고 사악한 낌새를 감지했다. 

 

- 그게 꼭 더 현명한 일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그의 내면에서 이성이 다시 감성을 누르고 우위를 되찾았다. 

 

- 그는 매우 평범한 파티복을 입은 우아한 남자였다. 키는 컸지만, 날씬한 몸에 비해 옷이 다소 헐렁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키가 작고 뚱뚱한 남자들이라면 대번 눈에 띌 뿐만 아니라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는 좁은 장소에서도, 그는 그림자처럼 미끄럽게 피해 갈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이제 램프 불빛을 받아 환하게 드러난 그의 얼굴은 거무스름하고 생기가 넘쳤다. 훌륭한 몸매에 성격도 원만해 보였으며, 온몸에서 자신감이 풍겼다. 트집 잡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다만 그의 검은 코트가 그의 몸매와 태도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을 것이다. 심지어 그 코트는 기묘한 방식으로 늘어지고 튀어나와 보였다. 석양을 등진 브라운 신부의 검은 실루엣을 알아챈 그는, 작은 번호표를 건네면서 상냥하지만 권위적인 태도로 말했다. 
"내 모자와 코트를 찾아 주겠나? 난 지금 당장 가봐야 해서."

 

- 브라운 신부의 얼굴은 여전히 꽤 어두웠고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사실 그 순간 그는 몹시 당황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당혹감에 사로잡히자 머리가 더욱 활발히 움직였다. 이런 순간들마다, 그의 머리는 작은 단서 한두 개만으로 전체 사건을 직관해 내는 놀라운 기계처럼 움직였다. 비록 상식에 매달리는 가톨릭교회는 종종 이러한 영적인 능력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지만 말이다. 사실 브라운 신부 스스로도 가끔은 그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영감이었고, 위기에 빠졌을 때 중요한 작용을 해서 사람들을 구하기도 했다. 

 

- "왜냐하면 은이 때로는 금보다 더 비싸니까요." 신부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도, 특히 엄청난 양일 때는 더 그렇죠."

 

- '열두 명의 진정한 어부들'을 위해 마련된 정찬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코스는 차분한 분위기 속에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나는 그 메뉴의 사본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혹시 내가 그걸 가져와서 보여 준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다. 메뉴판은 일종의 최고급 프랑스어로 적혀 있었는데, 일급 요리사들만이 아는 용어여서 보통의 프랑스인들조차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클럽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전채 요리를 다양하게 구색을 갖춰 준비하는 전통이 있었다. 전체 정찬이나 전체 클럽과 마찬가지로, 이런 전통들은 누가 봐도 별 쓸모없는 허례허식인 게 분명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이 클럽에서는 더욱 소중하게 받아들여졌다. 이 중에서 수프 코스를 가볍고 소박하게 마련하는 것도 이들의 전통 중 하나였는데, 다음에 나올 생선 요리의 향연을 위해 일시적으로 배를 비우는 과정이랄 수 있었다. 

 

- 그들은 대영제국 전체에 비밀스럽게 유행하는 괴상하고도 시시한 정치 이야기들을 나누었는데, 보통의 영국인이 그 말을 엿들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뜻을 이해하기는 힘든 종류였다. 양당 의원들의 이름들이 지루할 정도로 자세하게, 그것도 기독교식 이름으로 거론되었다. 보수적인 토리당원들이었다면, 직권남용으로 부당한 이득을 챙기고 있다고 비난을 했을 만한 인물인 급진파 재무부 장관이 여기서는 시를 잘 쓴다거나, 사냥터에서 타던 말의 안장이 멋졌다는 식으로 찬사를 받았다. 토리당의 지도자는, 모든 자유주의자들이었다면 독재자라고 미워했을 만한데도, 이 자리에서는 만장일치로 훌륭한 자유주의자라 일컬어지며 찬사를 받았다. 정치인들에 관한 이야기가 대화의 주요 메뉴이긴 했지만, 정작 그들의 정치 활동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만 중시하는 것 같았다.  

 

- 클럽 회장인 오들리는 붙임성 있는 초로의 신사로, 여전히 구식의 뻣뻣하고 높은 깃이 달린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이제 퇴물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세력을 발휘하는 기성세대의 사회를 대변하는 존재였다. 이 클럽에서 그는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덕분에 특별히 잘못된 행동을 하는 법도 없었다. 그는 믿음직스럽지도 않고, 특별히 부유하지도 않았다. 그는 단지 유행을 잘 탔고, 한때의 유행은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떤 당도 그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가 만약 의회에 머물기를 바랐다면 그는 틀림없이 그곳에서 자리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부회장인 체스터 공작은 젊고 촉망받는 신흥정치인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유쾌한 젊은이로, 평범하지만 아름다운 머릿결에 주근깨가 박힌 얼굴, 적당한 지성과 막대한 재산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공적인 자리에서 그는 언제나 환영받았고, 사람을 사귀는 기준이 복잡하지 않았다.  

 

- "제가 훔쳤다고 칩시다." 신부가 유쾌하게 말했다. "그래도 저는 보물들을 이렇게 돌려주고 있잖아요."
"당신이 훔친 건 아니군요." 파운드 대령이 여전히 깨진 창문을 골똘히 쳐다보며 말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저는 아닙니다." 신부가 유머러스하게 말하고는, 등받이 없는 의자에 꽤 엄숙하게 앉았다. 

 

- "저도 그 사람의 진짜 이름은 모릅니다." 신부가 침착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가 싸울 때의 완력과 그의 정신적인 고통들에 관해서는 상당히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제 목을 조를 때 그의 육체적인 힘을 가늠할 수 있었고, 그가 지은 죄를 회개할 때 그의 양심을 재어 볼 수 있었지요." 

 

- "정말 이상한 일 아닙니까? 그렇게 많은 부유하고, 먹고살 걱정이라곤 없는 사람들이 냉혹하고 천박한 삶을 유지하면서도 하느님이나 타인들에게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는 마당에, 도둑과 부랑자들만 죄를 뉘우쳐야 한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당신이 제 영역을 약간 침범하고 있군요."

 

- "보이지 않는 낚싯바늘과 낚싯줄로 그를 붙잡았지요. 그에게 세상 끝까지 방황하며 돌아다닐 자유를 허용할 수도 있지만, 언제든지 다시 홱 하니 잡아당길 수도 있는 길고 긴 낚싯줄이죠." 

 

- "<햄릿>에서, 무덤 파는 사람의 괴상망측함이나, 미친 소녀의 꽃들, 오즈릭이 입고 나온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옷이라든가, 창백한 얼굴의 유령과 해골의 미소들은 검은 옷을 입은 한 평범한 남자의 비극적인 모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효과 장치들에 불과하다는 거죠. 이들이 한데 어우러져 그의 주변을 둘러싼 분위기가 얼마나 불길하고 기괴한가를 보여 주려는 거죠. 그러니까, 이번 사건 또한..."  

 

 

 

The Honour of Israel Gow
이스라엘 가우의 명예

 

 

- 올리브와 은빛이 섞여 든 저녁 하늘은 폭풍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예고하고 있었다. 회색 스코틀랜드식 체크무늬 외투로 몸을 감싼 브라운 신부는 스카치 계곡의 끝에 이르러, 기묘한 외형을 한 글렌가일 성을 올려다보았다. 성은 계곡의 끝자락에 막다른 길처럼 서 있어서, 마치 세상의 끝에 위태롭게 내몰린 듯했다. 프랑스와 스코틀랜드 양식이 혼합된 가파른 지붕들과 초록 바다 빛 점판암을 붙인 첨탑들은 요정 이야기에 종종 등장하는 뾰족 모자를 쓴 불길한 마녀를 떠올리게 했다. 그에 비해, 초록빛 탑을 달래듯 성을 둥글게 에워싼 소나무들은 수많은 갈가마귀 떼가 내려앉은 것처럼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 이제 시작될 악몽처럼 으스스하고 몽롱한 이야기는 그곳의 풍경 때문에 떠올린 단순한 공상만은 아니다. 바로 그 자리에 자존심과 광기와 모호한 슬픔의 분위기를 지닌 한 사람이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기질은 특히 스코틀랜드의 귀족 집안들에 보다 깊이 서려 있었다. 그들의 피에는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두 가지 독약이 흐르고 있었으니, 한 가지는 귀족들의 혈통주의였고, 또 하나는 칼뱅주의자들 특유의 비관주의였다. 

 

- 브라운 신부는 글래스고에서 업무를 처리하던 중 친구 플랑보를 만나기 위해 단 하루 틈을 내었다. 플랑보는 아마추어 탐정으로, 고故 글렌가일 백작의 삶과 죽음을 정식으로 조사하러 나온 공식 관리와 함께 글렌가일 성에 머무르고 있었다. 신비의 베일에 싸인 글렌가일 백작은, 16세기에 악명을 떨치던 귀족들 가운데에서도 용맹과 광기와 폭력적인 술수로 더욱 위세를 떨치던 오길비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였다. 그 악덕은 거짓과 음모, 복잡한 야망으로 가득 찬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 시대에는 매우 흔한 것이었다. 

 

- 그 지역에 전해 오는 오래된 시구에 그들이 지녔던 음모의 동기와 결과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봄의 나무에는 연둣빛 수액이 흐르고

오길비 가문에는 황금의 피가 흐른다네 

- 신부는 스코틀랜드 농부들이 공식적인 업무를 위해서는 반드시 예의를 갖추어 '검정색 옷'을 입는 관습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검소하고 부지런한 하인은 이런 옷을 차려입었다는 이유로 땅파기를 게을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신부가 곁을 지나가자 깜짝 놀라며 수상한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는데, 이런 행동 역시 이런 종류의 사람이 가질 만한 조심성과 질투심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이었다. 

 

- "지금 말입니까? 왜 하필 지금이죠?" 놀란 경감이 반문했다. 
"이건 아주 중대한 사건이니까요. 코담배가 여기저기 널려있고 세팅되지 않은 보석들이 굴러다니는 게 제각각 다른 이유 때문은 아닐 겁니다. 내가 알기로는 이 모든 일이 일어난 이유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세상의 근원까지 맞닿아 있어요. 이 성화들이 아이들이나 프로테스탄트들의 편협한 신앙 때문에 더럽혀지거나 찢어진 건 아닙니다. 이것들은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졌습니다. 그것도 아주 기묘한 방법으로 이 경본에 담긴 오래된 채색화에는 신의 이름이 멋지게 장식되어 있었을 텐데, 그 부분만 정교하게 잘려 나가 있어요. 신의 이름 말고 유일하게 잘려 나간 부분은 아기 예수의 머리를 둘러싼 후광입니다. 그러니까 영장과 삽, 손도끼를 들고 올라가서 관을 열어보자고요." 

 

- "그러니까 제 말은..." 키 작은 신부는 사나운 바람의 포효 때문에 약간 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이 순간에 우주의 거대한 악마가 이 성의 탑 꼭대기에 앉아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거죠. 코끼리 수백 마리를 합친 것만큼이나 큰 덩치로,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악마처럼 무시무시하게 울부짖고 있을지도 모르죠. 이 사건의 바닥에는 어딘가 사악한 마법 같은 점이 있어요." 
"마법이라..." 플랑보가 낮은 목소리로 되뇌었다. 그는 이 방면에 대해서는 너무나 환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여기 있는 나머지 물건들은 다 무엇일까요?" 
"내 추측으로는 뭔가 저주물인 것 같은데..." 브라운 신부가 다급하게 대답했다. "내가 어떻게 알겠나? 이 물건들의 배후에 놓인 비밀들을 내가 어떻게 전부 다 짐작할 수 있겠나? 아마도 자네라면 코담배와 대나무를 고문 도구로 쓸 수도 있겠지. 성도착자들이라면 양초와 강철 더미를 보고 정욕을 느낄지도 모르고, 어쩌면 연필로 만들어진 마약 같은 게 있었을지도 모르지! 이 미스터리를 풀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은 바로 저 언덕 위에 있는 무덤에 있어!" 

 

- 두 남자는 정신없이 브라운 신부가 이끄는 데로 따라 나갔다. 그들은 차가운 밤바람이 얼굴을 후려칠 때에서야 자신들이 정원에 나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브라운 신부가 시키는 대로 자동인형처럼 따랐다. 크레이븐 경감은 자기도 모르는 새 손에 도끼를 들고, 영장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플랑보는 그 이상한 정원사의 무거운 삽을 어느새 어깨에 둘러메고 있었다. 브라운 신부는 신의 이름이 잘려 나간 작은 미사경본을 손에 들고 있었다. 

 

- 언덕길을 오르면 오를수록,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끝없는 바다처럼 펼쳐져 있는 소나무 숲뿐이었다. 모진 바람에 휩쓸려 나무들은 모두 한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나무들의 절대적인 몸짓은 광대한 만큼이나 무의미해 보였고, 인적도 없고 목적도 없이 떠도는 행성에 소리 내어 부는 바람만큼이나 공허해 보였다. 저 잿빛의 소나무 숲을 무한히 키워 냄으로써, 숲은 모든 이교도적인 것들의 중심에 깃든 고대의 슬픔을 높고 날카로운 소리로 노래 부르고 있었다. 두께를 잴 수 없는 잎사귀 층 아래에서 들리는 소리는, 지하세계의 망자들과 방황하는 이방 신들의 울부짖음을 떠올리게 했다. 저 무분별한 숲에서 길을 잃고 배회하느라, 결국 천국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낼 수 없었던 그런 신들 말이다. 

 

- "당신도 알듯이, 스코틀랜드가 존재하기 이전의 스코틀랜드 민족들은 아주 이상한 사람들이었죠." 브라운 신부가 낮고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사실, 그들은 아직도 여전히 특이하긴 해요. 하지만 선사시대에는 정말로 악마를 숭배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는 친절하게 덧붙였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청교도 신학으로 뛰어든 이유이지요."  

 

- "이보게나, 모든 순수 종교가 지닌 한 가지 특징이 있지." 브라운 신부가 똑같이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바로 물질주의야. 그런데, 악마 숭배는 전적으로 순수 종교거든." 

 

- "계속하지." 신부가 온화한 목소리로 달래듯 속삭였다. "우리는 다만 진실을 찾아내려는 것뿐이야. 뭐가 그렇게 두려운가?"

"그 진실을 찾기가 두려워서요." 플랑보가 대답했다. 

 

- "신부님, 이젠 뭘 해야 하는 거죠?" 플랑보는 평소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던 순진하고 무거운 음성으로 물었다.
신부의 대답은 총알이 발사되듯 갑작스럽게 튀어나왔다. 

- "잠이나 자야지!" 브라운 신부가 외쳤다. "잠을 자도록 해. 우리는 막다른 길에 도달했어. 자네는 잠이 무엇인지 아는가? 잠을 자는 모든 사람은 신을 믿는다는 거 아는가? 그것은 신성한 성찬 의식과도 같은 것이지. 잠을 자는 행위는 믿음의 행동이자 영혼의 양식을 보충하는 일이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신성한 의식이야,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기만 하다면. 지금 우리에게 닥친 상황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이지. 아마도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것이 아닐까."

 

- "그게 무슨 뜻이죠?"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크레이븐 경감이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말을 꺼냈다. 
"우리는 진실을 찾아냈어요. 하지만 결국 그 진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얘기지요." 신부는 이렇게 대답한 후 고개를 돌려 성을 바라보았다. 그는 앞장서서 돌진하듯이, 대범한 걸음걸이로 언덕길을 내려갔다. 평소의 그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다시 성에 도착한 후, 그는 아무 걱정도 없는 사람처럼 단순하게 자리에 눕자마자 곧장 잠에 빠져들었다. 

 

- 정원사는 브라운 신부와 대화를 나누는 듯했으나, 플랑보와 클레이븐 경감이 나타나자 무뚝뚝하게 화단에 삽을 꽂으며 자신의 아침 식사에 관해 중얼거리더니, 가지런히 자라난 양배추 밭을 따라 부엌으로 들어간 후 문을 닫았다. 

 

- "그는 참 유능한 일꾼이군요." 브라운 신부가 말했다. "그가 감자를 캐는 실력은 놀라울 정도였어요." 그는 감정이 섞이지 않은 자비로운 말투로 덧붙였다. "비록 그도 결점은 있지만 말이죠. 우리도 그렇고, 세상에 결점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는 이쪽 둑의 감자는 그다지 규칙적으로 파지 못했군요. 이를테면 저쪽을 보세요." 그는 갑자기 그 자리를 발로 쾅쾅 구르면서 말했다. "저쪽에 있을 감자들은 정말로 의심스럽기까지 하군요." 

 

- "신부님, 저한테 조심스러워서 말씀하지 못하는 게 있으신가 봐요. 하지만 제가 한때 범죄자였다는 거 기억하시잖아요. 범죄자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점은 언제나 스스로 가능한 시나리오를 구상한 다음에, 자신이 선택한 속도로 그걸 실행에 옮길 수 있다는 점이죠. 여기서 탐정이랍시고 기다리는 일은 저 같은 다혈질의 프랑스인에게는 지나치다 싶어요."

 

- "친구 분들, 우리는 지옥에서의 하룻밤을 무사히 통과했어요. 이제 어둠이 끝나고 태양이 높이 솟아, 새들은 즐겁게 노래하고, 치과 의사가 내뿜는 광채가 온 세상을 위로하는구나."   
"어서 설명해 주시지 않으면, 종교재판 때 쓰던 방법으로 신부님을 고문할지도 몰라요." 플랑보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며 말했다.

 

- 브라운 신부는 이제 햇빛이 내리쬐는 잔디 위에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을 잠시 억누르는 듯하더니, 어린아이처럼 가련한 목소리로 외쳤다. "오, 조금만 더 바보짓할 수 있도록 날 좀 가만히 내버려 두게나. 자네는 내가 그동안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몰라. 하지만 이젠 이번 일에서 중대한 죄악이라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단 말이야. 약간의 광기라면 모를까... 하지만 그 정도야 그냥 넘어가 줄 수 있지." 

 

- "이건 범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차라리 기이하고 왜곡된 정직성에 관한 이야기라 할 수 있지요. 우리는 세상에서 유일무이하게 자기의 몫이 아닌 것에는 절대로 욕심을 부리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요. 이러한 사람들의 종교가 되어온 야생의 논리에 대한 연구이기도 하고요."

 

 

The Eye of Apollo
아폴로의 

 

  

- 자욱한 새벽안개를 피워 올리던 템스 강의 은회색 수면은 태양이 웨스트민스터 위로 떠오르자 눈부시게 찬란한 빛을 반사하기 시작했다. 그 빛을 헤치고 두 남자가 웨스트민스터 다리를 건너왔다. 한쪽은 키가 아주 컸고, 다른 쪽은 정반대였다. 게다가 작은 쪽은 신부복을 입고 있었으므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서 걷는 두 사람의 모습은 매우 대조적이었다. 국회의사당의 오만하게 솟은 시계탑 옆에 웨스트민스터 성당의 나지막하고 소박한 건물이 붙어 있는 격이었다. 훤칠한 키의 남자는 사설탐정 에르컬 플랑보로, 성당 맞은편에 새로 들어선 아파트 건물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로 가는 길이었다. 키 작은 남자는 캠버웰의 성 프란시스 사비에르 수도회의 브라운 신부였는데, 캠버웰 교회에서 막 장례식을 마친 후 친구의 새 사무실을 보러 오는 길이었다.  

- 그러나 이 높은 아파트 건물은 한번 보기만 하면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아직도 공사용 발판들이 여러 개 남아 있긴 했지만, 그것보다는 눈부시게 빛나는 어떤 물체가 플랑보의 사무실 바로 위쪽 사무실 앞에 매달려 있어서였다. 그것은 표면에 금박이 입혀진, 황금빛 광선으로 둘러싸인 인간의 눈이었다. 이 장식물은 어찌나 거대한지 사무실의 창문 두세 개 정도는 거뜬히 덮고 있었다. 

 

- "아 저거요? 새로운 종교라더군요." 플랑보가 웃으며 대답했다. "저 신흥종교는 저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한 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었다'고 말하며 인간의 죄를 사해 준답니다. 제 생각엔, 크리스천 사이언스와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중요한 건 자기 스스로를 칼론이라고 칭하는 친구가 제 사무실 바로 위층 사무실에 산다는 점이지요. 그의 본명이 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게 칼론일 리 없다는 것 말고는. 칼론이란 지고지순한 존재를 칭하는 그리스 어니까요. 아래층 사무실에는 두 명의 여자 타이피스트가 들어와 있어요. 바로 위층에 광적인 협잡꾼이 살고 있는 것과는 꽤나 대조적이죠. 그 녀석은 자기 자신을 아폴로의 새로운 사제라고 부르면서 태양을 숭배하는 의식을 치르더군요." 

(주 : 그리스천 사이언스. 1866년 미국 보스턴에서 창시된 종교, 인간 정신, 신, 그리스도는 일체라고 본다.)


- "한번 바깥을 내다보라고 해주게나. 태양은 모든 신들 중 가장 잔인한 존재이지. 그런데 저 괴물 같은 눈동자는 뭘 의미하는 거지?" 
"제가 이해하기로는 인간이 정말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면 무엇이든지 인내할 수 있다는 게 저들의 이론입니다. 그들의 종교를 대변하는 두 가지 상징이 있는데, 하나가 태양이고, 나머지 하나가 태양을 바라보는 눈이죠. 사람이 정말로 건강하다면 태양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니까요."
"사람이 정말로 건강하다면, 굳이 태양을 바라보려는 수고 따위는 하지 않을 텐데."
"글쎄요, 여기까지가 제가 이 종교에 대해 말씀드릴 수 있는 전부입니다."  

- "물론, 믿음으로 육체적인 질병들을 치료할 수 있다는 주장도 하더군요." 
"그게 유일한 영혼의 질병도 치료할 수 있다는 건가?" 브라운 신부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유일한 영혼의 질병이라는 게 뭐죠?" 플랑보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말하자면, 자기가 꽤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브라운신부가 대답했다.

- 플랑보는 자기 사무실 위층의 화려한 사원보다는 아래층에 자리 잡은 조용하고 작은 사무실이 더 흥미로웠다. 그는 분명한 것을 좋아하는 남쪽 나라 사람답게, 멋지게 보이지만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 신흥종교 따위에는 전혀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에 대해서라면 언제나 관심이 있었다. 특히 그 사람이 아름답기까지 하다면. 

 

- 그 사무실은 두 명의 자매들이 운영했는데, 둘 다 마른 몸매에 피부색이 가무잡잡했다. 둘 중 하나는 키가 크고 늘씬한 데다 두드러지게 아름다웠다. 어두운 열정을 지닌, 독수리같이 날카로운 인상의 여자였는데, 독특한 옆모습은 언제나 말끔하게 날이 서 있는 무기를 연상시켰다. 그녀는 평생 동안 남에게 동요되는 법 없이 자기만의 목표를 향해 꾸준히 나아갈 사람처럼 보였다.  
 

- 그러나 이 송골매처럼 시원스러운 눈매를 가진 여자는 엘리베이터 보이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엘리베이터를 움직이는 방법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으므로 엘리베이터 보이나 다른 남자들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녀의 아파트는 겨우 3층에 있었지만, 엘리베이터에 탄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엘리베이터 작동법을 가르쳐 주며, 현대적인 기계에 대한 자신의 기본적인 관점들을 늘어놓았다.  

 

- 그녀의 기질은 확실히 성급하고 실용적인 데가 있었다. 그녀의 가늘고 우아한 손놀림들은 매우 빠른 것은 물론이고, 가끔은 파괴적이기까지 했다.

 

- "눈을 깜박거리지 않고는 태양을 응시할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아요. 우주의 그 수많은 별들 중에서 왜 단 하나의 별만 내 눈으로 쳐다볼 수 없다는 거죠? 태양은 나의 주인이 아니에요. 그러니 나는 눈을 크게 뜨고서 아무 때나 태양을 직시할 수 있는 거죠."

 

- "당신의 눈빛에 오히려 태양이 눈부셔 할 겁니다." 플랑보는 프랑스식으로 무릎을 굽혀 경의를 표했다. 그는 이 특이한 고집불통 미녀를 칭찬하는 일이 재미있었다. 그럴 때면 그녀도 잠시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었다.

 

- 그는 곧 위층과 아래층 사이의 영적인 결합이 매우 돈독하며 그것도 갈수록 강화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스스로를 칼론이라 부르는 그 사나이는 잘생긴 인물로, 체격에 있어서는 아폴로의 제사장이 되고도 남을 만했다. 키는 거의 플랑보만큼이나 컸으며, 얼굴은 훨씬 더 수려했다. 강렬한 빛을 뿜어내는 푸른 눈과 황금색 턱수염, 사자의 갈기처럼 펄럭이는 머리칼에 단단한 골격까지, 니체가 말한 황금빛 야수를 눈앞에서 보는 듯했다. 그는 이 모든 육체적인 아름다움에 더하여 진정한 지성과 숭고한 정신까지 갖추어, 온몸에서 밝고 부드러운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만약 그가 위대한 색슨족 왕들과 닮았다면, 그는 또한 덕이 높았던 왕들 중 한 명에 가까웠을 것이다.

 

- 그러나 그를 둘러싼 환경은 런던 특유의 모순과 부조화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사무실은 성과 속이 교차하는 빅토리아 거리에 세워진 최신식고층 건물의 중간층에 있었고, 방 바깥에서는 커프스와 칼라가 달린 정장 차림의 평범한 청년이 책상에 앉아 잡무를 처리하고 있었으며, 길가 쪽 창문에는 그의 이름이 새겨진 동판과 금박을 입힌 상징물이 안과의사의 광고판처럼 내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 이러한 환경들이 아무리 천박해 보이더라도, 저 칼론이라 불리는 사내의 영혼과 몸에서 배어 나오는 생생한 카리스마와 영감을 가릴 수는 없었다. 어느 모로 보나, 이런 사기꾼을 직접 접한 사람들은 위대한 성인 앞에 선 것처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가 사무실에서 작업복으로 헐렁한 리넨 재킷을 걸치고 있을 때조차 그는 매혹적이기 짝이 없었다. 특히 그가 날마다 태양을 경배하는 의식을 치르기 위해 흰 예복을 입고 황금 장식이 달린 왕관을 쓰고 발코니에 나타날 때면, 그 모습이 얼마나 근사한지, 거리에서 그를 비웃으며 지나가던 사람들조차도 가끔씩은 얼굴에서 웃음이 가셨다.

 

- 하루에 세 번 그 태양 숭배자는 자신의 작은 발코니로 나와 모든 웨스트민스터 사람들의 면전에서, 그의 찬란한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일출에 한 번, 일몰에 한 번, 그리고 정확히 정오를 알리는 종이 울릴 무렵에 한 번. 플랑보의 친구인 브라운 신부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흰옷을 입은 아폴로의 사제를 본 것은, 국회의사당과 교구 교회의 종탑에서 울려 나온 정오의 종소리가 채 사라지기 전이었다.     

 

- 그러나 브라운 신부는 종교의식에 관한 직업적인 흥미에서인지 아니면 광대짓에 관한 강한 개인적인 흥미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걸음을 멈춘 채 태양 숭배자의 발코니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마치 광대인형극을 구경하는 사람처럼. 은빛 예복을 차려입은 예언자 칼론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서서 손을 높이 들고 태양을 향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가 독특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기도문을 중얼거릴 때, 그 소리는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의 기도 의식은 이미 중반에 다다랐다. 그의 눈은 이글거리는 태양에 고정되어 있었다. 

 

- 이 두 사람 사이의 가장 놀라운 차이점은, 브라운 신부는 눈을 깜박거리지 않고는 눈이 부셔 아무것도 쳐다볼 수 없는데, 아폴로의 사제는 눈꺼풀 하나 떨리지 않고서 정오의 이글거리는 태양을 쳐다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 그 충돌로 인한 소란이 가라앉은 후 오로지 두 사람만 정적을 지키며 원래의 자리에 서 있었다. 높은 발코니에는 잘생긴 아폴로의 사제가, 낮은 땅 위에는 못생긴 기독교 신부가. 

 

- "제가 물어보고 싶은 건 이런 겁니다." 브라운 신부가 솔직하게 의심을 드러내며 말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정말 나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틀림없이 부분적으로 그 사람의 잘못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두 부류의 사람을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어요. 양심은 꽤나 깨끗하지만 그것을 알고도 모욕하는 사람과 양심 자체가 궤변론들로 인해 애매모호해진 사람을 말입니다. 자, 당신은 정말로 살인이 전적으로 나쁘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를 고발하시려는 겁니까?" 칼론이 매우 조용하고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아니요." 브라운 신부가 칼론과 같은 어조로 부드럽게 대답했다. "자기 변호를 할 기회를 드리는 거죠." 

- 브라운 신부의 도전에 모두 놀라서 말이 없었다. 한참 후에 아폴로의 사제가 느린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그 움직임은 정말로 태양이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는 온 방안을 자신의 빛과 생명으로 채웠는데, 광대한 솔즈베리 평원이라도 쉽게 채울 수 있을 것 같은 자부심이 엿보였다. 화려한 예복을 입은 모습과 우아한 몸짓은 방 전체에 고전적인 광휘와 웅장한 색채를 더했다. 거기에 비해 투박한 검은 옷을 입은 짜리몽땅한 신부의 모습은 그리스인의 장엄한 옷자락에 묻은 먼지나 난데없이 생겨난 둥글고 검은 얼룩 같았다. 

- "우리가 마침내 만났군요. 가야바 님." 사제가 말했다. "당신의 교회와 나의 사원만이 이 지상에서 유일한 현실이죠. 나는 태양을 숭배하고, 당신은 태양의 빛을 어둡게 가리죠. 당신은 죽어 가는 신의 성직자이고 나는 살아 있는 신의 성직자요. 현재 나에 대한 당신의 의심과 중상모략은 당신이 입은 옷과 신념만큼이나 무가치한 것이지요. 당신이 다니는 모든 교회는 검은 옷을 입은 경찰들과 다를 바 없어요. 그들은 기만이나 고문을 통해서 사람들로부터 죄를 고백하게 만들 방법을 찾는 스파이이자 탐정일 뿐이죠. 당신은 사람들의 죄를 파헤치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무고함을 밝히려 하지요. 당신은 그들을 죄인이라 단정하지만, 나는 그들에게서 미덕을 찾아냅니다. 악마의 성서를 탐독하는 이여, 내가 당신의 근거 없는 악몽을 영원히 날려 버리기 전에 한마디만 더 하겠소. 당신이 나를 고발하든 말든 난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을 당신이 어떻게 알겠소." 

 

- "역사상 어떤 특별한 수련자들과 도인들이 공중부양의 능력에 도달했다는 사실은 고귀한 진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는 일이오. 즉, 이것은 아무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공중에 몸을 띄울 수 있는 능력을 말해요. 그것은 우리 같은 종교가 지닌 초자연적인 지혜의 주요한 요소를 이루는, 물질을 의지대로 다루려는 노력에 지나지 않소. 불쌍한 폴린은 기질상 추진력과 야심이 강한 여인이었소.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녀는 자신이 실제보다 더 많은 초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소."

 

- "나는 진심으로, 고귀한 사상가들이 말하는 어떤 황홀경의 측면에서 그녀가 기적을 시도했던 거라고 믿소. 그러나 그 결정적인 순간에, 그녀의 의지, 혹은 그녀의 신념이 그녀의 몸을 배반했던 게 틀림없소. 그녀가 고귀한 자신감을 잃는 순간 그보다 더 저급한 물질의 법칙이 끔찍한 보복을 감행했던 거요. 당신들이 생각하듯이 전체 사건을 두고 보면, 거기엔 뭔가 매우 슬프고 끔찍하고 사악한 요소들이 있을 것 같지만,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는 내 관점에서 바라보건대 이건 절대로 타살이 아니고, 더구나 나와도 아무 관계가 없소. "

 

- "그녀는 그 운명의 먹구름이 몰려오는 걸 인정하지 않으려 했어. 뿐만 아니라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그것을 이겨 보려고 온갖 시도를 다 했어."

 

- "오, 만약 이런 이단 종교의 교주들이 고대의 이교도들만큼만 현명했어도! 고대의 이교도들은 단순히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숭배하는 일에는 잔인한 측면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들은 아폴로의 눈을 바라보면 안구가 파괴되어 눈이 먼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  

 

 

 

 The Duel of Dr. Hirsch
이르슈 박사의 결투
  

   

- 브링은 흔한 표현인 '아듀'가 모든 프랑스 고전에서 삭제되어야 하며, 개인의 생활에서 그 말을 사용할 경우 약간의 벌금을 부과해야 한다는 논문을 써서 유명해졌다. '그렇게 하면, 당신이 상상으로 만들어 낸 신의 이름이 사람의 귀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 그에 비해 아르마냑은 군국주의에 대한 저항을 전문적으로 다루었다. 그는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의 후렴이 '무기를 들어라, 시민들이여'에서 '파업을 하라, 시민들이여'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반군국주의는 매우 유별나고 프랑스적 색채가 강했다. 전 세계의 무장해제를 실현하기 위한 세부 예정을 협의하고자 그를 찾아왔던 어느 저명하고 부유한 영국 퀘이커교도는, 무장해제의 첫 단계로 군인들이 자기 상관들부터 총살해야 한다는 아르마냑의 주장에 몹시 실망을 하고 돌아간 적이 있다. 

- 그리고 사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두 제자는 그들의 철학적인 지도자이자 아버지인 이르슈 박사와 달랐다. 이르슈 박사는 비록 프랑스에서 나고 가장 훌륭한 프랑스식 교육을 받으며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기질적으로는 프랑스인들과는 전혀 다른 유형이었다. 즉 매우 온화하고, 몽상가적이고, 인간적이었다. 게다가 무신론적인 세계관을 신봉하면서도, 어느 정도 신을 인정하는 칸트주의적인 초월론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는 프랑스인이라기보다는 독일인과 더 비슷했다.  

 

- 한마디로 그는 톨스토이와 다원을 섞어 놓은 듯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정부주의자도 반애국주의자도 아니었다. 특히, 무장해제에 대한 그의 관점은 온건하고 점진적인 것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다양한 화학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그에게 상당히 의지하고 있었다. 그는 최근에 소리 없는 폭약을 개발하기도 했는데, 이는 정부의 세심한 보안 조치 아래에서 비밀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 만약 자네들이 나를 사랑한다면, 그 카페에 가서 내 방이 보이도록, 바깥쪽에 놓인 식탁에 앉아 기다려 주게나. 내가 그를 자네들에게 보내도록 노력해 볼 테니. 난 자네들이 그의 질문에 적당히 대답해 주고 잘 달래 주길 바라네. 나는 직접 그를 만날 수가 없는 입장이라네. 만날 수도 없거니와, 그럴 생각도 없으니까. 또 하나의 드레퓌스 사건이 벌어질지도 모르지.

P. 이르슈 


- 둘은 의기투합하여 활기차게 길을 건넜다. 그리고 이르슈 박사가 지시한 대로 카페의 밤나무 그늘 아래, 서재를 바라볼 수 있는 작은 탁자를 하나 골라 앉았다. 그들은 기다란 유리잔에 담긴 진녹색의 압생트 두 잔을 시켜두었는데, 그 술은 그들이 아무 때나 어떤 날씨에든 마실 수 있는 술이었다. 카페는 손님이 적어 한산했다.    

 

- "하지만 그가 이런 글을 직접 썼을 리는 없어요!" 플랑보가 흥분해서 외쳤다. "그 문서의 기록은 사실과 완전히 달랐으니까요. 그가 무죄든 유죄든 간에 이르슈 박사는 그 정보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고 있었잖아요." 

 

- "그 글을 쓴 사람도 기밀 정보에 관해 훤히 알고 있었지." 신부가 냉정하게 말했다. "그 정보에 대해 모조리 알고 있지 않다면 그토록 철저하게 모든 것을 틀리게 쓸 수는 없는 법이야. 어떤 주제에 대해 완전히 틀리게 말하려면 그 이상으로 엄청나게 많이 알고 있어야만 해... 마치 악마처럼 말이야." 

"지금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내 말은, 우연히 거짓말을 꾸며 낸 사람이라면 일부는 사실로 말했을 거라는 거지." 신부가 이번에도 단호하게 말했다.

 

- "문서에 적힌 대로 붉은 잉크로 기록되어 있었다면, 나도 자네 말대로 누군가 다른 사람이 문서를 위조하다가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을 거야. 그러나 3이라는 숫자는 신비로운 숫자야. 그것은 완결적이지. 그 숫자가 이 사건을 종결지어 주네. 서랍의 방향, 잉크 색깔, 봉투의 색깔이라는 세 가지 요소, 그들 중 어느 하나도 사실과 일치하는 게 없다는 것, 그건 우연의 일치일 수 없지. 그건 절대 우연이 아니었어."

 

-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는... 뭐랄까, 난 사실 한 번도 드레퓌스 사건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어. 나는 항상 다른 종류의 증거들보다는 도덕적인 증거에 강한 편이거든. 나는 사람의 눈빛과 목소리를 통해 많은 것을 판단해. 그 사람의 가족들이 행복해 보이는지, 그가 어떤 이야기 주제를 선택하는지, 혹은 어떤 주제를 회피하는지를 유심히 보는 거지."

 

-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드레퓌스 사건을 보고 많이 당황했어. 양쪽 다 서로 상대편에게 죄를 전가한 일들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말하는 게 현대인답지 못하긴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가장 고매한 인격을 지닌 자도 극악무도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걸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었어. 내가 놀란 진짜 이유는 양쪽 정당이 보여 준 정직성 때문이었어. 내가 말하는 건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정당들이 아니야. 실제로 정당을 구성하는 평의원들을 따로 떼어 놓고 보면 대개 다 정직한 사람들이고, 그래서 오히려 자주 기만당하지. 내 말은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처럼 연기한 사람들을 말하는 거야. 즉, 군대가 정말 공모자들이었다면, 드레퓌스가 매국노라는 식으로 음모를 꾸미고 그것을 진실처럼 밀고 나간 군대를 말하는 거야. 반대로 드레퓌스가 정말 매국노였다면, 매국노로서 반역 행동을 하고도 무고한 척 행동한 드레퓌스를 말하는 거야. 내 말은 진실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정반대로 행동했을 사람들을 말하지."

 

- "그들 행동의 잘잘못을 판단하자는 게 아니야. 내 말은, 그들이 마치 자신들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처럼 행동했다는 뜻이지. 나도 이 일들을 제대로 설명할 방법을 모르겠어. 하지만 난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알고 있어."

 

- "모든 사람의 선망과 신임을 받는 자리에 오른 사람이 있어. 그런데 그가 언젠가부터 적에게 정보를 주기 시작했다고 가정해 봐.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것이 거짓 정보이기 때문이지. 즉, 애국자인 그는 자신이 외국인들에게 거짓 정보를 흘림으로써 자기 나라를 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러나 이로 인해 점차 국제적인 스파이 단체에 발을 들이게 되고, 거기서 약간의 빚을 지게 되고, 빚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협박을 당하게 되는 거지. 궁지에 몰린 그는 외국의 스파이들에게 절대로 진실을 말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점점 더 쉽게 추측할 수 있도록 변형된 정보를 제공하는 거야. 이렇게 고도로 분열되고 혼란스러운 방식을 이용하면 어떻게든 자신의 자리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 테니까. 그의 양심적인 반면은 그에게 이렇게 속삭이겠지. '내가 적을 도운 건 아니야. 난 그게 오른쪽 서랍이라고 말했으니까'라고. 한편 그의 비열한 반면은 벌써부터 이렇게 주장하고 있을 거야. '하지만 그들은 그게 사실상 왼쪽을 의미한다는 걸 간파했을지도 모르지'라고. 나는 그게 심리학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해. 자네도 알겠지만, 지금같이 문명화되고 분열된 시대에는 말이야." 

 

- "그들에 대해 너무 냉혹하게 판단해서는 안 되네." 브라운 신부가 부드럽게 타일렀다. "그건 전적으로 그들의 잘못만은 아니니까. 그들은 참된 직관이 없었던 거지. 그러니까 내 말은, 여자들이 어떤 남자와는 춤추기를 거부하거나 남자들이 특정한 투자에 손대는 것을 망설이는 식의 직관을 말하지. 그들은 그게 모두 정도의 문제라고 배워 왔어. 한마디로 적당한 선에서 멈출 줄 아는 능력이지." 

 

- "이보게 친구." 키 작은 신부는 냉정하게 절망감을 드러내며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았다. "사실 난 모든 것이 다 의심스러워. 내가 말하는 모든 것이란, 오늘 일어난 모든 것을 뜻해."

 

- "틀림없이 뭔가 있어요! 유대인들과 프리메이슨들의 음모일 수도 있고, 그렇게 해서 이르슈 박사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려는 것이거나..." 발로뉴 공작도 호통을 치며 맞불을 질렀다.

- 브라운 신부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뭔가 만족한 빛이 떠올랐다. 그는 뭔가를 알아냈을 때나, 모르고 있을 때나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그 바보 같은 가면이 떨어질 때면 항상 섬광과 같은 번득임과 함께 현자의 얼굴이 본모습을 드러냈다. 신부가 어떤 인물인지를 잘 알고 있는 플랑보는 자기 친구가 이 순간 뭔가 단서를 잡았다는 것을 눈치챘다. 브라운 신부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묵묵히 생선 접시만 깨끗이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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