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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프 도벨리] 불행 피하기 기술 - 영리하게 인생을 움직이는 52가지 비밀

일루젼 2023. 8. 10. 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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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롤프 도벨리 / 엘 보초 / 유영미

원제 : Die Kunst des guten Lebens 
출판 : 인플루엔셜 
출간 : 2018.01.20 


       

지난 7월 문화의 날에 대출해 왔던 책인데, 대출 기간을 꽉 채워서야 읽게 되었다. 도서관에서는 퍽 읽어보고 싶었는데 막상 집에서는 영 손이 가지 않았다. 시간과 장소에 따라 선호도와 집중도가 변한다는 것은 사실 꽤나 무서운 일이다. 내가 생각하는 나 자신의 생산성이란 '재현되지 않는 신기루'일 확률이 높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자기 계발서보다는 인문철학서를 더 많이 쓸 것 같은 이미지의 저자는, 보다 행복한 일상과 삶을 위해 무언가를 '더하기'보다는 '덜어내기'를 권한다. 일주일에 하나씩 연재되었던 칼럼을 기반으로 정리한 52가지 <불행 피하기 기술>은 얼핏 모순되어 보이지만 찬찬히 생각해 보면 일관성 있는 조언을 전한다. 그것은 '행복에 대해서는 명확히 말할 수 없지만, 불행은 당신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외부에 지나치게 많은 힘과 주의력을 넘겨주고 있지는 않은지, 매순간 변화하는 감정이나 내적 충동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가 충분히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라는 환상에 지나치게 빠져있지는 않은지 등을 유쾌하면서도 적절히 신랄하게 되묻는다. 끝까지 읽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뇌리에 새겨졌을 '찰리 멍거'와 '빌 게이츠', '워런 버핏', 그리고 '스토아 철학'. 이들의 공통점을 꼽자면 인간의 심리와 사회 현상에 관해 절대적으로 외부적인 시각에서 관찰하고자 했다는 점일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그것을 예측-예방하지 못했다면 지금 할 수 있는 대응을 하거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가능하다면 최대한 합리적으로.' 

 

개인적으로 가장 와닿았던 부분은 앞으로 자신이 읽을 수 있는 책의 권수를 제한하는 '독서카드' 개념이었다. 아... 물론 양서를 골라내어 읽는 것은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보다 가치있게 사용하는 훌륭한 방식이지만, 나는 아직 과거의 내가 저질러놓은 진창에서 뒹구는 게 재미있단 말이다... (그러므로 책탑에 대해 자주 불평하지만 사실 나는 '그런 상태를 좋아한다'고 봐야 한다) 

 

자신의 범위와 그 경계에 관해 생각해보라는 조언도 인상 깊다.  

즐겁게 읽었다. 

끝. 

 


 

- 2500년 전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어쩌면 더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좋은 삶을 살 수 있을지 자문해 왔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해야 바람직하게 살 수 있을까? 운명은 어떤 역할을 할까? 돈은 어떤 역할을 할까? 좋은 삶은 사고방식이나 개인적인 태도의 문제일까, 아니면 목표했던 일들을 너끈히 이루는 것일까?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나을까, 불행을 피해 가는 것이 나을까?

 

- 모든 세대는 새롭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그에 대한 답은 기본적으로 언제나 실망스럽다. 왜 그럴까? 한 가지 원칙, 한 가지 법칙, 한 가지 규칙만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좋은 삶에 도달하기 위한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원칙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 그간의 경험으로는 그렇게 해봤자 나만 웃음거리가 될 뿐이었다. 그렇게 기분이 상하면 괜히 그날 밤 단잠까지 망칠 수 있다. 

- 과태료 고지서가 날아오면 예전에는 무척이나 화가 났다. 하지만 지금은 기꺼운 마음으로 그런 돈을 납부한다. 그 금액을 내 기부 계좌에서 차감한다. 기부 계좌란 내가 좋은 목적에 쓰려고 1년에 일정 금액을 떼어놓은 계좌를 말한다. 범칙금이나 과태료도 그런 용도에 포함된다. 이런 단순한 트릭을 심리학에서는 '심리 계좌(mental accounting)'라고 부른다.

 

- 당신이 가난한 지역을 여행하다가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해보자. 지갑은 금방 찾았지만 현금은 사라진 상태다. 이 돈을 도난당한 돈이라고 해석할 것인가, 아니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부한 돈이라고 해석할 것인가? 

 

- 좋은 삶을 원한다면 일에 대한 건설적인 해석이 중요하다. 상점이나 레스토랑에서 물건이나 음식값을 지불할 때 나는 그 가격에서 50퍼센트를 덧붙여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그 가격이 (소득세를 포함하지 않은 가격이다) 구두 한 켤레를 사거나 생선구이 한 접시를 먹고 지불하는 원래의 가격이다. 

 

- 여행할 때 나는 늘 호텔비를 사전에 지불한다. 그렇게 하면 낭만적인 파리 여행의 마지막에 호텔비를 계산하느라 기분을 망치지 않아도 된다. 노벨상 수상자 대니얼 카너먼의 '정점과 종점 규칙(peak-end rule)'에 따르면, 여행을 다녀오면 그 여행의 클라이맥스와 마지막만 기억날 뿐 나머지는 다 잊힌다.  

 

- 선 지불 후 소비, 이것이 더 마음 편하게 지출할 수 있는 심리 계좌의 또 하나의 작용 방식이다. 

 

- 돈이 사람의 행복을 좌우하지 않는다는 말은 상투어 쯤으로 들릴 때가 많다. 그러나 나 역시 몇천 원에 그렇게 전전긍긍하거나 시시콜콜 따지지 말라고 진심으로 충고하고 싶다. 맥주가 평균보다 2천 원 비싸든 싸든, 별로 개의치 않는다. 그 대신 흥분하고 신경 쓰는 에너지를 아낀다. 내 주식 포트폴리오의 수익률은 1분에도 2천 원 이상을 왔다 갔다 하기 때문이다.

 

- 당신도 그렇게 잃어도 개의치 않을 만한 액수를 정해보라. 돈으로 보지 않고, 그냥 백색 소음(white noise)으로 볼 수 있는 정도를 말이다. 이런 태도로 살아도 별로 잃는 것이 없고, 절대로 마음의 균형을 잃지 않을 것이다.

 

- 너그러운 베네딕트회 수사들이 받아들여주어 수도원에 여러 주 동안 머물렀다. 세상일에서 멀리 떨어져 지내며 참으로 여유롭고 고즈넉했던 시간들이었다. 텔레비전도, 인터넷도, 핸드폰 신호도 육중한 수도원 벽을 뚫고 들어오지 못했다. 말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에 식사 중에도 고요를 누릴 수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신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대신 심리 계좌 트릭을 하나 발견했다. 이번에는 돈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시간에 관한 것이었다.   

 

- 수도원의 식당에는 식사도구가 약 20센티미터 길이의 검은색 나무상자에 담겨 있었는데, 이 나무상자는 영락없이 시신을 안치하는 관의 축소판처럼 보였다. 식사 때가 되면 사람들은 자신의 관 뚜껑을 열어 그 안에 들어 있는 포크와 나이프와 숟가락을 꺼냈다. '사실 넌 이미 죽어야 했던 몸이야. 이제부터 주어지는 모든 시간은 선물이야'라는 의미였다. 최고의 심리 계좌였다. 그렇게 해서 나는 화를 내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주어진 시간을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 신경질이 나서 진땀이 나면 혈압도 치솟고, 스트레스 호르몬 분비된다. 그러므로 짜증 내고 흥분하는 대신, 불필요한 짜증과 흥분으로 심신을 갉아먹지 않으면 적어도 1년은 더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라. 이렇게 선물 받은 1년은 계산대 앞에서 대기해야 했던 시간들을 만회하고도 남는다. 그러므로 결론을 내려보자. 당신은 시간이나 돈의 손실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새롭게 해석할 수는 있다. 

 

- 보조날개는 항로를 끊임없이 수정하기 위해 존재한다. 자동조종장치는 '현 상태'가 되어야 할 상태에서 얼마나 이탈해 있는지를 계산해서 초당 1천 번 정도 꼬리날개에 수정 명령을 전달한다. 

 

- 우리의 삶도 비행기나 자동차와 비슷하다. 삶이 계획대로 예상대로, 방해 없이 진행될 수 있다면, 우리는 최적의 출발 상태, 즉 설정 (set-up)에만 신경 쓰면 된다. 교육, 커리어, 사랑, 가정생활 등 모든 것을 처음에 완벽하게 설정해 놓으면 계획대로 목표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삶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계속해서 난기류를 겪고, 갖가지 바람과 예기치 않은 날씨 변화와 싸워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좋은 날씨만 예상하는 순진한 파일럿처럼 행동한다. 설정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하고, 수정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한다. 

 

- 그런데 우리는 왜 고치고 수정하는 걸 내키지 않아 할까? 그 이유는 우리가 각각의 수정을 계획상의 실수라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군'이라고 탄식한다. 매우 유감스러워하면서 스스로를 실패자로 여긴다. 그러나 계획은 완벽할 수 없다. 어쩌다 수정 없이 실현된다면, 그것은 순전히 우연이다.  

 

- 코르테스와 디저트를 먹지 않는 CEO와 크리스텐슨 이 세 사람은 공통적으로 불굴의 의지를 통해, 융통성 있는 태도로는 도달하지 못했을 장기적인 목표를 이루었다. 어떻게 그렇게 된 것일까?  

 

-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람은 의지력이 상당히 소진된다는 것이다. 이를 학문적인 용어로는 '의사결정의 피로감(decision fatigue)'이라 한다. 너무 많은 결정을 내리다가 피곤해진 두뇌는 나중에는 가장 편안한 버전으로 결정해 버리는데, 그 결정은 대부분 최악일 때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서약은 아주 중요하다. 한 번 서약을 해놓으면, 매번 장단점을 고려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결정은 이미 내려져 있으니 공연히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다. 

- 한 번 서약한 것을 그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그로 인해 얻게 되는 평판과 관계있다. 어떤 일에서 일관성을 유지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표현하고, 이런 입장은 타협할 수 없다고 알려주는 것이다. 그 부분에서 당신은 주체성 있어 보이며, 어느 정도는 함부로 공격할 수 없는 인상을 자아낸다.  

 

- 국가 사이에 적용되는 것은 당신에게도 적용된다. 당신이 서약한 것이 무엇이든지 그 서약을 일관적으로 지키면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당신을 조용히 내버려 두고 인정하게 된다. 

 

- 융통성을 찬양하는 현재의 분위기에 거리를 두라. 융통성은 당신을 불행하고 피곤하게 만들며, 그로 인해 당신은 목표에서 이탈할 수 있다. 서약을 하고 그 서약을 지켜라. 타협하지 말라. 서약을 100퍼센트 이행하는 것이 99퍼센트 이행하는 것보다 쉽다. 

 

- 항공 산업만큼 실수를 중대하게 받아들이는 분야는 없을 것이다. 영화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의 실제 주인공 체슬리 슐렌버거 기장은 허드슨강에 불시착한 뒤 "항공 분야의 모든 지식, 모든 규칙, 모든 절차는 누군가 어디선가 추락했기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썼다. 모든 추락은 미래의 비행을 더 안전하게 만들어준다.   

 

- 버트런드 러셀은 "자기기만에서 벗어나는 것은 안정되고 지속적인 행복의 꼭 필요한 전제 조건이다"라고 썼다. 물론 약간 과장된 말일 것이다. 안정되고 지속적인 행복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기만이 좋은 삶과는 부합될 수 없다는 점에서 러셀의 말은 옳다. 현실이 바람직할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다. 하지만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이라도 받아들여야 한다. 탐탁지 않은 현실일 때는 특히나 말이다. 러셀은 한 가지 예를 든다. "계속해서 성공하지 못하는 극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쓸데없지는 않은지 생각해봐야 한다." 

 

- 우리는 종종 자신보다 타인을 훨씬 더 명확하게 본다. 그래서 자신에게 실망하는 경우보다 다른 사람에게 실망하는 경우가 월등히 많다. 그러므로 당신에게 거짓 없는 진실을 말해줄 수 있는 배우자나 친구가 있다면 좋을 것이다. 진실을 들으면 당신의 뇌는 어느 정도 미화시키려고 하겠지만,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사람의 판단을 진지하게 여길 줄 알게 될 것이다. 

 

- 이렇게 철저하게 수용하는 것 말고도 이미 말했듯이 우리는 블랙박스가 필요하다. 당신 자신의 블랙박스를 만들어라. 당신이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순간에 머릿속을 스치는 모든 가정, 생각, 결론을 기록해 보라. 당신의 결정이 잘못된 것으로 드러난다면 블랙박스를 찾아보고(물론 이 블랙박스는 추락에서 안전하므로, 수첩이나 공책이면 충분하다) 어떤 생각이 실수로 이어졌는지 정확히 분석해 보라. 실수의 원인을 하나씩 밝혀가다 보면 삶은 더 바람직해진다. 실수한 원인을 설명할 수 없으면 세상이나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 달리말해, 추락을 설명하지 못하면 다시금 추락하게 된다. 따라서 집요한 분석이 유익하다. 

 

- 워런 버핏의 사업 파트너 찰리 멍거는 이렇게 말했다. "문제에 대처하지 않고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없는 상태가 될 때까지 기다린다면, 당신은 그런 문제로 골머리를 앓아도 쌀만큼 멍청한 사람이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된다. 

 

- 일리치는 이런 효과를 생산성(counterproductivity)이라 칭했다. 이 개념은 많은 신기술들이 시간과 돈을 아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원가를 계산해 보면 이런 절약 효과는 물거품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생산성은 가능하면 피해 가면 좋은 의사결정의 함정이다. 
 

- 다운사이드를 제거하면, 업사이드는 저절로 오게 되어 있다. 

 

- 그리스, 로마, 중세의 사상가들은 이런 방법을 부정신학(negativetheology)이라 불렀다. 바로 부정의 길, 포기의 길, 내려놓음의 길이다. 다시 말하면 신이 어떠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어떠하지 않다고는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좋은 삶을 보장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말할 수 없지만, 좋은 삶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 반면 행복을 저해하는 것이나 좋은 삶의 위험 요소를 꼽으라고 한다면 우리는 상당히 정확하고 자신 있게 열거할 수 있다. 술, 마약, 만성 스트레스, 소음, 긴 통근시간 하기 싫은 업무, 실직, 불행한 결혼생활, 지나치게 높은 기대, 가난, 빛, 재정적 종속, 외로움, 불평쟁이와 어울리기, 외적 평가에 연연하기, 타인과 끊임없이 비교하기, 희생적인 행동, 자학과 자책, 만성 수면 부족, 우울, 짜증, 분노, 질투. 이런 요소들을 언급하는 데는 학문도 필요 없다.
 

- 그중 가장 우선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다운사이드를 피하는 것이다. 버핏과 멍거는 투자에서 업사이드를 주시하기 전에, 우선 무엇을 피해야 할지, 즉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에 주의한다. 버핏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사업에서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는 걸 배우지 않았다. 우리가 배운 건 그런 문제들을 피하는 것이다."  

 

- 좋은 삶은 대단한 행복을 추구하는 데 있지 않고, 멍청함이나 어리석음, 유행 따르기를 피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무언가를 더 많이 하는 것이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 것', 절제하는 것이 삶을 풍성하게 만든다. 유머 감각이 뛰어났던 멍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무엇보다 내가 어디서 죽을지 알고 싶다. 그러면 그 장소에 결코 가지 않으면 되니까."

 

- 성공에는 운도 작용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노력하는 자가 성공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한번 결산해 보자. 당신의 삶은 지금까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가?    

 

- 그 성공의 얼마만큼 이 당신 혼자서 애써서 된 것인지, 즉 그 성공이 당신 개인의 성취인지 한번 평가해 보자. 어느 정도가 당신 개인의 업적이고, 어느 정도가 우연이나 당신이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요인에 의한 것인가? 두 요인의 퍼센티지를 적어보라. 아마도 당신은 약 60퍼센트가량이 자신의 노력이고, 40퍼센트가량이 우연이나 운이 좋아서였다고 평가할 것이다.  

 

- 자, 이제 작은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을 해보자. 이것은 워런 버핏이 제안한 실험이다. "엄마 배 속에 일란성 쌍둥이가 자라고 있다. 둘 다 동일한 지능에 동일한 힘과 열정을 지니고 있다고 하자. 갑자기 요정이 날아와서는 이렇게 말한다. '둘 중 한 명은 미국에서 성장하게 될 것이고, 다른 한 명은 방글라데시에서 성장하게 될 거야. 방글라데시에서 성장하는 사람은 나중에 세금을 낼 필요가 없어'. 자, 당신이 쌍둥이 중 한 명이라고 할 때 미국에서 태어나서 자라기 위해 미래의 수입 중 얼마만큼을 내어놓을 의향이 있는가?"   

 

- 버핏은 얼마나 좋은 조건에서 태어났는지를 두고 난소권(ovarian lottery)이라 불렀다. 물론 미국을 독일이나 스위스, 다른 잘 사는 나라들로 대치해도 무방하다. 자, 당신은 이런 나라들에서 태어나 자라기 위해 미래 소득의 얼마만큼을 포기하겠는가?

 

- 난소 복권은 어느 나라에서 태어나느냐로 끝나지 않는다. 어떤 지역, 어떤 가정에서 태어날지에도 당신은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 태어나보니 자신의 잠재력을 펼치기에 유리한 가치관과 태도, 원칙들로 둘러싸여 있을 수도 있고, 잠재력을 펼치기에 불리한 환경일 수도 있다. 이런 환경 역시 당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다.

 

- 처음 만나는 학교와 선생님도 당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었고, 몸이 약하거나, 질병이 있거나, 운명적 사건을 겪었거나 상대적으로 무난히 지내온 것 역시 당신의 책임과는 무관하다. 직업과 같은 사회적 역들은 당신이 선택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과연 어떤 기준으로 선택했는가? 당신은 당신의 삶을 변화시킨 책을 읽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책을 어떻게 접하게 되었는가? 당신은 당신의 앞길을 열어준 누군가를 만났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런 만남은 누구 덕분이었는가?  

 

- 운명이 원망스러운 사람이라 해도 사실은 엄청나게 운이 좋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 순간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동안 지구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단 6퍼센트에 불과하다.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한 이래 지난 30만 년 동안 태어났던 사람 중 6퍼센트가 현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다른 시대에 태어났을 수도 있었고 그럴 확률은 94퍼센트에 이른다. 로마제국의 노예나 명나라 기생이었을 수도 있고 고대 이집트에서 물장수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환경에서 타고난 능력이 그렇게 중요했을까? 

 

- 그러므로 당신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당신의 유전자와 그 유전자의 설계도가 실행되는 당신의 환경이다. 당신의 지능 역시 대부분 유전적으로 결정된 것이며, 내성적인지 외향적인지, 솔직한지 소심한지, 성실한지 게으른지 등의 성격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당신이 이렇게 성공한 건 이를 악물고 일을 했기 때문이라고, 야근도 마다하지 않고 쉼 없이 앞으로 전진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면, (물론 그 말도 틀리지는 않지만) 당신이 그렇게도 자랑스러워하는 그 의지력 역시도 유전자와 환경의 협연 덕분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 따라서 이런 사실 앞에서 다시 한번 그 질문을 해보자. 당신이 이룬 성공의 몇 퍼센트가 당신의 노력에 기인한 걸까? 논리적 대답은 0퍼센트다. 당신의 성공은 기본적으로 당신이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는 것들에 근거한다. 당신의 성공에 당신이 기여한 바는 없다. 

 

- 여기서 두 가지 결론이 나온다. 첫째는 성공이 올 때 당신은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공이 크면 클수록, 떠벌리고 다니지 말아야 한다. 

 

- 둘째, 자원해서 너그럽게 성공의 일부를 열악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과 나누어보라. 그것은 고귀한 일일 뿐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기부하고 세금을 내는 것은 재정적인 사안이 아니라 도덕적인 사안으로,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해야 한다. 

 

- 정확히 어떤 기분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화나고, 실망하고, 불쾌하고, 우울하고, 씁쓸한가? 그렇다면 이유는 무엇인가? 반대로 지금 당신이 기분이 좋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현재 특별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가? 아니면 기분이 어떠냐는 질문에 비로소 감정이 느껴지는가? 

- 현재의 감정을 묘사하는 것이 힘들더라도 화내지는 말라. 당신의 언어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독일어에는 감정을 묘사하는 형용사가 150개나 되고, 영어에는 그 두 배가 있다. 색깔을 묘사하는 단어보다 감정을 묘사하는 단어가 더 많다. 하지만 우리는 감정을 정확히 묘사하지 못한다. 

 

- 사실 우리는 이런 무능력한 상태로 지낸다고 해서 큰 문제는 없다. 온 세계가 우리에게 '당신의 느낌을 따르라! 당신의 감정을 따르라! 당신의 속마음을 따르라!'라고 요구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조언하고 싶다.  

 

- 좋은 삶은 자기 관찰로 얻어지지 않는다. 심리학자들은 이렇게 자신의 내면을 살펴봄으로써 자신의 성향과 삶의 목표, 삶의 의미, 행복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을 '자기 관찰의 착각(introspection illusion)'이라고 부른다. 많은 시인들이 우리의 감정세계를 깊은 숲에 비유했듯이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깊은 숲에서처럼 길을 잃고 여러 가지 감정과 생각, 감정적 자극들로 가득한 수렁에 빠지게 될 뿐이다. 

 

- 사실 당연한 소리다. 30분간 후딱 대화를 나누어보는 것과 30년간의 인생의 발자취를 훑어보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신빙성이 있겠는가? 자기 관찰은 자기 자신과의 면접과 다를 게 없다. 극도로 신뢰할 수 없다. 대신 당신이 관찰해야 하는 것은 당신의 과거다. 어떤 주제가 당신의 삶을 관통해 왔는가? 덧붙인 해석을 보지 말고, 증거를 보라.

 

- 그렇다면 자신의 감정 상태를 관찰하는 것은 왜 신뢰성이 없을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은 더 자주, 더 깊게 내면에 귀를 기울인다 하더라도, 차세대에 유전자를 더 많이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화적 관점에서 보면 자기 자신의 감정보다 타인의 감정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훨씬 더 중요하다.     

 

-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렇게 부정적인 감정을 멀리하는 능력을 아타락시아(ataraxia)라 부른다. 영혼의 평화, 정서적 고요, 평정, 안정, 냉정 등으로 바꾸어 쓸 수 있는 표현이다. 아타락시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은 운명이 닥쳐도 평정을 유지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 바로 아파테이아(apatheia)이다. 이것은 감정을 완전히 꺼버린 상태다(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렇게 하고자 했다). 아타락시아와 아파테이아는 상당히 도달하기 힘든 이상적인 상태이지만, 너무 걱정하지 말라. 이 경지에 오르는 것보다 오히려 내면과 약간 거리를 둔 채, 내 감정과 회의적이면서도 유희적인 새로운 관계를 가꾸어나가야 한다.

 

- 예를 들면, 나는 감정을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대하려 한다. 어디에선가 나를 찾아왔다가 다시 사라지는 것들로 말이다. 구체적으로 비유하자면, 나는 종종 그것을 시장통에서 각종 새들이 날아다니는 것으로 상상한다. 때로는 새들이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시장통을 통과하기도 하고, 어떤 새들은 오래 머무르기도 한다. 어떤 새들은 뭔가를 떨어뜨린다. 하지만 결국 모두 날아가 버린다. 내가 더 좋아하는 새들도 있고, 덜 좋아하는 새들도 있다. 시장 이미지를 상상한 후부터, 감정들은 더 이상 나를 차지하지 못한다. 또한 내가 감정의 주인이라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 어떤 감정은 별로 달갑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시장통의 새들처럼 말이다. 나는 그것들을 무시하거나, 거리를 두고 관찰한다. 이렇게 하면 이점이 또 하나 있다. 좀 더 장난스럽게 감정을 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시기심은 짹짹거리는 작은 초록 참새로 생각한다. 긴장과 초조는 나무를 쪼는 딱따구리고, 분노는 사나운 매이며, 두려움은 날개를 푸드덕거리는 지빠귀다. 다른 감정들도 각각 그렇게 대응시킬 수 있다.  

 

- 부정적인 감정을 의지력으로 억누르려고 하면, 도리어 강해지는 것을 경험해 봤을 것이다. 반면 편안하고 가볍게 대하면, 완전한 마음의 평화에 도달하지는 못해도(그런 수준에는 아무도 이르지 못한다), 어느 정도 침착할 수는 있다. 

 

- 당신은 솔직한 사람을 좋아하는가? 물론 그럴 것이다. 솔직하고 진실한 사람은 그들이 어떤 사람이고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무엇에 몰두하고, 무엇을 의도하는지 알 수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꾸밈없는 사람들은 비밀이 없고 마음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그런 사람들을 대하면 친밀감이 느껴지고, 유쾌하고, 일도 빨리 진척된다.  

- 하지만 당신은 어느 정도로 솔직해지고 싶은가? 사고실험을 하나 해보자. 당신은 굉장히 솔직하다는 평판이 있는 리자와 점심 약속을 했다. 약속 시간보다 20분쯤 늦게 리자가 나타난다. 머리칼은 고양이가 헤집어놓은 것처럼 헝클어져 있다. 그녀는 늦어서 미안하다고 하더니, 온 식당에 다 들릴 정도로 사실은 점심 먹으러 올 기분이 아니었고, 이런 유행이 지난 프랜차이즈 음식점에서는 더더구나 먹고 싶지 않았다고 떠든다. 옆자리의 손님들은 어안이 벙벙한 나머지 포크를 내려놓는다. 

 

- 물론 윌리엄 다윈의 이런 행동은 가상의 인물 리자만큼 나쁘지는 않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너무 심하게 솔직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상대에게서 어느 정도의 예의범절과 매너, 자기 통제를 기대한다. 문명화된 자기 조절이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상황에서는 최소한 그렇다.  

 

- 앞 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의 내면은 그리 신뢰할 수 있는 나침반이 못 되며, 오히려 모순적인 감정들로 혼란스러운 상태다. 우리는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솔직함으로 정확히 무엇을 노출시켜야 한단 말인가? 솔직함은 파트너나 가까운 친구 관계에서는 꼭 지켜야 하는 중요한 특성이지만, 일시적인 만남이나 공적인 관계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 사람은 약속을 지키기 때문에 존경받는 것이지, 내면의 독백에 우리를 참여시키기 때문에 존경받는 것이 아니다. 

 

- 생물에게 외적 경계가 없다면 생물은 곧장 죽을 것이다. 과도한 솔직함은 심리적 영역에서의 경계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로써 다른 사람들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당신을 이용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며, 스스로를 우습게 만들 뿐 아니라, 공격받기 쉽게 만드는 것이다. 

 

- 단 하나의 '진정한 자아'밖에 없다는 오늘날의 믿음에 자못 배치되지만, 이런 제2의 자아는 억지로 꾸며낸 부자연스러운 태도가 아니라, 외부에 대해 프로답고 일관성 있게 신뢰감을 주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다. 의심, 좌절, 낙심은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일기장이나, 배우자나, 베개를 상대로나 보일 수 있는 것이다.  

 

- 나는 당신에게 아이젠하워처럼 제2의 자아를 가지라고 조언하고 싶다. 솔직함은 자신이 약속한 것을 지키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원칙에 따라 행동하기 위해 아껴두라. 아무도 그 이상의 솔직함을 원하지 않는다. 

 

- 껍질은 외부의 나쁜 영향들로부터 당신을 보호하고, 겉과 속을 구분함으로써 내적 안정감을 만든다. 그러므로 이 사회와 동료들, 그리고 소위친구라는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겉과 속이 같아지라고 종용하더라도, 함정에 빠지지 말라. 강아지는 겉과 속이 똑같다. 그러나 당신은 인간이다. 

 

- 당신은 작은 부탁을 받았을 때 즉석에서 승낙하는 경우가 많은가? 얼마나 자주 거절하는가? 얼마나 자주 승낙한 걸 후회하는가? 얼마나 자주 거절한 걸 후회하는가? 

 

- 이런 즉흥적인 승낙이 유전적으로 내려오는 생물학적 반사작용이라는 것을 깨닫고 난 후, 나는 반대 전략으로 찰리 멍거의 5초 생각하고 거절하기를 적용했다. 멍거는 "탁월한 것은 발견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그러므로 90퍼센트의 경우는 거절해도 그리 손해 볼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어떤 부탁을 받으면 나는 5초간 생각하고 나서 결정한다. 그리고 대부분은 거절한다. 모두에게서 사랑받지 못할 위험을 감수하고 부탁을 거절하는 것이 그 반대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당신도 그렇게 해보라.  

 

- 이에 대한 연구 결과는 꽤 분명한 대답을 제시해 준다. 아주 가난한 경우에 돈은 행복에 큰 역할을 한다. 소득이 너무 적으면 정말 힘들다. 연봉이 약 7천만 원 정도면 돈은 어느 정도 역할을 하고, 가구당 1억 3천만 원 정도의 연봉을 넘어서면(취리히에서는 그보다 조금 더 많이, 예나에서는 그보다 약간 적은 수준에서) 추가적인 소득이 행복에 미치는 효과는 거의 제로에 가까워진다.

 

- 백만장자의 삶을 한번 상상해 보라. 해가 떠서 해가 질 때까지 모든 순간순간을 그 사람도 역시 이를 닦아야 하고,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몸이 찌뿌둥할 수도 있으며, 기분이 엿 같을 때가 있을 것이다. 

 

- 학자들은 이를 '이스털린의 역설(Easterlin's paradox)'이라 부른다. 기본적인 욕구가 채워지면, 물질적으로 더 풍요로워져도 행복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 그렇다면 우리가 학문적 인식을 거슬러, 끊임없이 돈을 더 벌려고 애쓰는 이유가 무엇일까? 주된 이유는 부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 투자가 워런 버핏은 '능력의 범위(circle of competence)'라는 놀라운 개념을 이야기한다. 능력 안에 놓인 것은 훌륭하게 해낼 수 있다. 그러나 능력의 범위 밖의 것은 잘 모르거나, 일부분밖에 모른다. 버핏의 삶의 모토는 다음과 같다. "능력의 범위를 알고, 그 안에 머물러라. 범위의 크기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범위의 경계를 아는 것이다."

 

- 버핏의 사업 파트너 찰리 멍거는 이렇게 첨언한다. "당신의 재능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 능력의 범위 밖에서 행복을 추구하면 성공할 수 없다."

 

- IBM을 설립한 톰 왓슨이 이 말의 살아 있는 증거다. 그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천재가 아니다. 똑똑한 부분이 있고, 일관성 있게 그 주변에만 머무를 따름이다."  

 

- 직업에 관해서도 이렇게 생각하라. 자신의 능력의 범위에 집중하면 금전적인 열매를 맺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감정적인 열매도 얻을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신이 꽤 뛰어나다는, 돈 주고는 살 수 없는 기분 좋은 감정이 밀려온다. 게다가 매번 뭔가를 받아들일 것인지 거절할 것인지 결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시간도 아낄 수 있다. 능력의 범위를 명확히 그어놓으면, 매력적이긴 하지만 자신에게 적합하지 않은 제안을 거르기가 쉬워진다. 중요한 것은 능력의 범위를 결코 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능력의 범위를 어떻게 만들까? 당연히 위키피디아를 몇 번 클릭한다고 되지 않는다. 그 분야를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하고,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미국의 디자이너 데비 밀먼은 "가치 있는 모든 일에는 시간이 든다"는 말을 자신의 모토로 삼았다. 

 

- 또 하나 필요한 것은 심취하는 것이다. 어떤 것에 빠지는 것은 일종의 중독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 대해 대부분 좋지 않게 말한다. 컴퓨터 게임이나 드라마, 모형비행기 날리기에 중독된 청년 이야기를 꽤 듣게 되지만, 이런 '덕질'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시점이다. 어떤 것에 빠지면, 수천수만 시간을 한 가지 분야에 투자하게 된다. 빌 게이츠는 젊은 시절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빠졌고, 스티브 잡스는 캘리그래피와 디자인에 심취했다. 워런 버핏은 12세 때 처음 용돈으로 주식투자를 한 뒤부터 거의 투자에 중독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아무도 게이츠, 잡스, 또는 버핏이 젊은 시절을 허비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무언가에 심취했기에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기까지 필요한 수천 시간을 투자할 수 있었다. 한 분야에 빠지는 것이 바로 능력의 엔진이다. 이렇게 심취하는 것의 반대는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다지 흥미가 없는 것'이다. 

 

- 그런데 능력의 범위가 왜 그리 강력한 개념일까? 최고의 프로그래머가 그저 잘하는 프로그래머보다 두 배로 일을 잘하는 것이 아니다. 세 배도, 열 배도 아니다. 같은 문제라도 최고 수준의 프로그래머는 '괜찮은' 프로그래머보다 천 배는 더 빠르게 문제를 해결한다. 변호사, 외과의사, 디자이너, 학자, 영업사원 모두 마찬가지다. 능력의 범위 안과 밖은 하늘과 땅 차이다. 

 

- 능력의 범위 안에서 들이는 매 시간은 범위를 벗어나서 들이는 시간보다 천 배는 더 가치가 있다.

 

- 나의 능력의 범위를 알 때 비로소 기존의 것에서 탈피할 수 있다. 그래야 착각하지 않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정확히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소명이 정말로 존재한다고 해도, 무턱대고 따르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해커나 테러리스트들도 자신의 소명을 찾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일로 성취감을 느낀다. 히틀러도 나라를 구하는 사명을 받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폴레옹, 스탈린, 오사마 빈 라덴도 마찬가지다. 소명은 도덕적 나침반으로도 쓸모가 없는 듯하다. 

 

-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면의 음성을 듣지 말라. 소명은 직업적 소망에 불과하다. 낭만적인 의미의 소명은 존재하지 않고, 당신의 재능과 열정만이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객관적인 능력에 입각해서 생각하라. 다행히 잘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이 일치할 경우도 있다. 또한 당신의 재능이 다른 사람에게도 먹혀야 한다는 점도 중요하다. 그 일로 먹고살려면 그래야 한다. 영국 철학자 존 그레이의 말을 빌리자면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재능을 가진 사람만큼 불행한 사람은 없다." 
 
- 버핏은 여기서 좋은 삶의 가장 중요한 인식 중 하나를 이야기하고 있다. 바로 '내부의 점수표'와 '외부의 점수표'를 구분하는 것이다. 당신이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하는지가 더 중요한가, 외부 세계가 당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가 더 중요한가 하는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가 외적 평판을 중시하는 데에는 진화적으로 십 분 이해할 만한 이유들이 있다. 그렇다고 외적 평판에 얽매이는 것이 오늘날에도 중요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반대로 당신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든,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평판, 소문, 명성에 대한 당신의 감정적 반응은 굉장히 '치우쳐 있다'. 

 

- 사람들이 당신을 추켜세우든, 험담을 하든, 그것이 당신 삶에 미치는 실제적인 효과는 당신의 생각보다 훨씬 적다. 그러므로 그로부터 자유로워져라.

 

- 그러면 여러 가지 이익이 있다. 첫째, 감정적 롤러코스터를 타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장기적으로는 자신에 대한 평판을 일부러 좋게 끌어올릴 수는 없다. 피아트 그룹 회장이었던 지아니 아그넬리는 "노년이 되면 합당한 평판을 얻게 된다"라고 말했다. 그 말은 단기적으로는 꾸미고 위장할 수 있지만 평생은 그렇게 못한다는 말이다. 둘째, 평판이나 명성에 과도하게 신경을 쓰다 보면 우리를 진정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게 된다. 셋째, 그렇게 외적 평가에 신경을 쓰는 것은 상당한 스트레스가 되어, 우리를 좋은 삶에서 멀어지게 한다. 

 

- 브룩스는 우리 모두 조심하지 않으면 '인정을 갈구하는 기계(approval-seeking machine)'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페이스북의 좋아요 수, 팔로워 수 등이 합쳐져서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사회적 지위가 아니다. 이런 그물에 한번 걸려들면 박차고 나와 좋은 삶을 살기가 힘들어진다.

 

- 그러므로 결론은 세상이 당신에 대해 쓰고 트윗하고 포스팅하는 것은 모두 그들 마음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험담과 밀담을 하고, 때로는 추켜세우고, 때로는 저격하고 '디스'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당신이 억지로 조절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이 정치인이나 유명인사가 아니고, 광고를 찍어서 돈을 벌지 않는다면, 평판에 너무 신경 쓰지 말라.

 

- 워런 버핏은 이렇게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못마땅해하지만 정작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할 때, 행복하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은 나를 칭찬하지만 나는 내가 하는 일에 만족감이 없을 때, 불행하다." 

 

- 하버드대학의 심리학자 대니얼 길버트는 이를 '역사의 종언 환상(end of history illusion)'이라 부른다. 사실인즉슨 우리는 앞으로도 과거에 우리가 변해온 정도로 변한다는 것이다. 어느 방향으로 변할지는 모르지만, 당신이 미래에 지금과는 다른 가치관, 다른 인성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확실하다. 연구 결과는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 나쁜 소식은 이것이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 배우자나 자녀도 그렇게 할 수 없다. 성격을 변화시키는 동인은 내부에서 나와야지, 외부의 압력이나 이성적 설득은 통하지 않는다. 

 

- 그러므로 좋은 삶을 위한 나의 가장 중요한 규칙 중 하나는 '사람을 변화시켜야 하는 상황을 피하라'는 것이다. 이런 단순한 전략은 내게 많은 실망과 불쾌한 상황을 피하게 해 주었고, 힘과 에너지를 아끼게 해 주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는 내가 성격을 고쳐주어야 하는 사람들을 고용하지 않는다. 내가 고칠 수 없기 때문이다. 물질적으로 큰 이익을 볼 수 있다 해도, 기질이 맞지 않는 사람과는 일하지 않는다.  
  
- 이와 비슷한 삶의 규칙이 있다. "좋아하고 신뢰가 가는 사람들하고만 같이 일해라." 찰리 멍거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만 상대하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상관하지 않는 것이 좋다. ... 지혜로운 사람은 쥐약 같은 사람들을 멀리한다. 쥐약 같은 사람들은 꽤 많다"라고 했다.

 

- 어떻게 하면 이런 해로운 사람들을 삶에서 떨쳐버릴 수 있을까? 추천할 만한 방법이 하나 있다. 매년 12월 31일이면 나와 아내는 우리와 잘 맞지 않았던 사람들, 더 이상 상관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을 각각 작은 쪽지에 적어서, 차례로 불태워버린다. 상당히 유익하고 도움이 되는 의식이다. 

 

- 우리의 삶은 무한히 많은 측면으로 구성되기에 한 줄의 말로는 적절히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언제나 우리를 단순화시킨다. 게리에게 전화할 때뿐 아니라, 재미있게도 우리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것은 캐리커처처럼 단순하고, 허무맹랑하고, 일목요연한, 매우 긍정적인 이미지다. 우리는 <당신의 인생은 인과적이지 않다>에서 우리 모두가 자신의 삶의 역사를 어떻게 꾸며내는지 보게 될 것이다.  

 

- 당신에게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당신과 가장 친하지만, 아직 이름은 모르는 두 사람, 바로 당신의 '경험하는 자아'와 '기억하는 자아'이다. 

- 경험하는 자아는 당신의 의식 중에서 현재의 순간들을 체험하는 자아이다. 당신의 경우 경험하는 자아는 지금 이 문장을 읽고 있다. 잠시 후면 책을 덮고 옆으로 치운 뒤, 어쩌면 일어나서 커피를 내리게 될 것이다. 경험하는 자아는 지금 당신의 행동뿐 아니라, 당신의 생각과 감정을 경험한다. 피곤하다든지, 이가 아프다든지, 긴장하고 있다든지 하는 신체적인 상태도 지각한다. 이 모든 것이 경험의 순간에 녹아들어 있다.

 

- 한순간은 어느 정도 길이일까? 심리학자들은 약 3초 정도를 한순간으로 본다. 그것은 우리가 현재로 느끼는 시간이다. 즉 '지금'이라는 말로 결집되는 경험이 바로 한순간이다. 이보다 더 긴 시간은 이미 여러 순간이 이어지는 것으로 경험된다. 자는 시간을 빼면 하루는 대략 2만 개의 순간으로 구성되고, 평균 수명을 산다고 가정할 때 일생은 5억 개 정도의 순간으로 이루어진다. 

 

- 두 번째로 소개하고 싶은 이는 당신의 '기억하는 자아'이다. 기억하는 자아는 경험하는 자아가 내버리지 않은 아주 적은 것들을 모아서, 평가하고, 정리하는 당신의 의식이다. 24시간, 10분, 3초 전에 당신이 지금까지 먹었던 초콜릿 중 가장 맛있는 초콜릿을 입 속에 넣었던 경우 기억하는 자아는 그것을 아직 알고 있을 것이다. 

 

-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 두 자아의 대답은 대부분 일치하지 않는다.

 

- 시간의 길이는 중요하지 않다. 실험 시간이 60초건, 90초건 대학생들의 평가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휴가가 1주든 3주든 기억에는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감옥살이를 1개월 하거나 1년 하거나 기억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옥살이의 경험은 비슷한 강도로 기억에 남는다. 

 

- 기억하는 자아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우리는 짧고 강도 높은 즐거움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고요히 오래 지속되는 소소한 즐거움을 과소평가한다. 장시간 산책보다 번지점프를 더 멋지다고 생각하고, 배우자와의 일상적인 섹스보다 원나잇 스탠드를 더 짜릿하게 느끼며, 좋은 책보다 유튜브 비디오를 더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 한 번 사는 인생, 지지부진하게 살아서는 안된다고 설교한다. 모험적으로 살아야 살맛이 나고, 평온하고 소소한 삶은 실패한 인생이라고 한다. 이런 저자들과 독자들은 기억하는 자아의 함정에 걸려든 것이다. 맨발로 미국을 횡단하고, 기록적인 속도로 에베레스트산을 정복하는 것은 나중에 돌아볼 때만 멋진 체험으로 다가온다. 실행하는 순간에는 힘들기만 하다. 익스트림 스포츠는 현재의 행복을 희생하여 기억을 살찌우는 활동이다. 

 

- 그렇다면 경험하는 자아와 기억하는 자아 둘 중에 어느 것이 중요할까? 물론 둘 다 중요하다. 아름다운 기억을 포기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일반적으로 기억하는 자아를 더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현재에 충실하기보다는 추억을 모으는 데 집중한다. 이 두 자아를 비교해 보라. 당신에게 무엇이 더 중요한지 결정하라. 현재의 충만한 삶이 더 좋은가, 꽉 찬 사진첩이 더 좋은가? 

 

- 1960년대에 들어 '지금, 여기(Be Here Now)' 의식이 주목받으면서, 이런 경향에 처음으로 필요한 수정이 이루어진 적이 있다. 당시 젊은이들은 환각제, 자유연애, 해프닝을 통해 이런 가치관을 실험했다. 1971년 해고당한 하버드대학 교수 리처드 앨퍼트(인도의 구루 '람 다스'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는 베스트셀러 <지금 여기에 살라>를 썼다. 한창 떠오르는 생의 감정을 위해 이보다 더 좋은 모토는 없을 텐데, 람다스가 설파했던 대부분의 가르침은 오랜 불교적 가르침들로, 그는 그것을 서구사회에 적절히 접목시켰다. 오늘날에는 '마음 챙김(mindfulness)'이라는 개념으로 60년대의 현재에 충실한 삶이 다시 유행하고 있다. 도시의 힙스터, 요가 스승, 라이프스타일 코치들이 마음 챙김 명상에 심취해 있다. 

 

- 마음 챙김이 때로 '앞날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혼동되는 것만 제외하면 상당히 좋은 현상이다.  

 

- 미래를 준비하고 위험한 함정들을 제때 알아채고 멀찌감치 돌아가는 것도 좋은 삶에 속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우리의 두뇌는 자동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 이 세 가지 시간적 차원에 몰두한다. 문제는 그중 어떤 것에 가장 집중해야 하는지다. 그러므로 나의 조언은 이것이다. 때로는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라. 그리고 그 계획이 세워지면 현재에 집중하라. 미래의 기억 대신에 현재의 경험을 극대화하라. 아름다운 일몰을 보면 사진 찍는 대신 그 순간을 즐겨라. 환상적인 순간들로 이루어진 삶은 기억이 없다 해도 환상적인 삶이다. 경험을 기억의 계좌에 넣는 납입금으로 여기는 걸 멈춰라. 그래 봤자 세상을 떠나는 날에는 기억의 계좌도 모두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 멋진 기억이 많다고 행복하거나 좋은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행복이나 만족은 현재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체험하는 것에 집중하자. 

 

- 하지만 최근 100년 사이에 우리는 수천 년간 인류의 사상적 장비로 자리매김해 왔던 운명, 혹은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에 대한 생각을 뇌리에서 거의 지워버렸다. 그래서 사고나 질병, 전쟁, 죽음 등 갑자기 안 좋은 일이 닥치면 너무나 충격을 받는다. 지난 세기만 해도 이런 불행들은 기꺼이 용인되었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운명의 여신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대비하고 있었다. 오늘날 운명은 '시스템의 고장' 정도로 여겨지지만, 운명의 여신에게 다시 필요한 장비를 주고 역할을 하게 한다면 좋은 삶이 될 것이다. 

 

- 우리는 스스로를 실제보다 더 선하고, 더 멋지고, 더 성공적이고, 더 똑똑하다고 여긴다. 이런 '자기 위주 편향(self-servingbias)'은 현실적으로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위험을 더 많이 감수하게 한다. 스스로를 너무 중요하게 여기게 한다. 

 

- 우리는 잘못된 자아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면적이고 모순적이고 불합리한 존재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당신을 잘못 평가해도 놀라지 말라. 당신도 그렇게 하고 있으니 말이다. 자신에 대한 현실적인 상을 알고 싶다면, 배우자나 오랜 친구처럼, 오래전부터 당신을 잘 아는 사람, 그리고 솔직하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라. 일기를 써보는 것도 좋다. 몇 년 전 일기를 간혹 다시 읽어보라. 놀라게 될 것이다. 모순과 결점, 어두운 면까지 포함하여 스스로를 가능하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좋은 삶의 모습에 속한다. 스스로를 아는 사람은 앞으로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될 확률이 더 많다.   

 

- 역사를 배우는 것은 세상일의 대부분이 우연적이고 혹은 운명적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다. 세상은 꼭 어떤 이유와 결과로 움직이지 않는다. 특히 이런 태도는 불행을 대할 때 특히 도움이 된다. 나쁜 일은 그냥 벌어지는 것일 뿐이다. 

 

- 투자가 찰리 멍거는 늘 인쇄된 카드를 한 묶음 가지고 다니는 친구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친구는 누군가 조금이라도 자기 연민의 빛을 띠는 사람을 만나면, 카드 묶음의 맨 위 장을 꺼내어 상대의 손에 쥐어준다. 그 카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당신의 이야기는 너무나 내 마음을 울리네요. 나는 당신보다 더 비참하게 지내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약간 인정머리 없는 방법이긴 하지만, 상대에게 자신이 얼마나 자기 연민적인 태도를 구사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신선하고 위트 있는 방법임에 틀림없다. 멍거의 말이 옳다. 자기 연민은 치명적으로 잘못된 사고다. 

 

- 첫째, 다른 사람, 특히 자기 부모의 잘못에도 유효기간이 있다는 것이다. 마흔이 넘었는데 아직도 부모의 탓을 하는 사람은 미성숙한 사람으로, 어려움을 겪어도 싸다. 

 

- 둘째, 연구에 따르면 유년기의 트라우마(부모의 죽음, 이별, 방치, 성적 학대)와 성인이 되었을 때의 행복감이나 성공 여부는 별로 상관관계가 없다고 한다.  

 

- 결론을 내려보자. 자기 연민의 진창을 뒹굴지 않는 것은 정신건강의 중요한 규칙에 속한다. 삶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라. 당신의 인생이나 다른 사람의 인생이나 마찬가지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운명이 내던져져 당신을 강타할 것이다. 삶은 쉽지 않다"라고 했다. 한 번 불행했다고, 계속 불행하게 살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지금 삶이 힘들다면 뭔가 조치를 취하라.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면, 그 상황을 견뎌라. 한탄하는 것은 시간낭비다.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 동안에는 불행을 극복하는 데 도움 되는 일을 전혀 하지 못한다. 그리고 자기 연민은 원래의 불행에 더하여 스스로를 갉아먹는 불행을 추가하는 행위다. 

 

- 자기 연민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 속에서 오래 허우적거릴수록 더 나빠지기만 한다. 그러니 자기 연민의 기미가 조금이라도 감지되면, 곧장 이 위험한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라. 

 

- 몇백 년 뒤 가톨릭 교회는 이 네 가지 개념을 흔쾌히 받아들여, 가톨릭의 사대 덕목으로 현대화시켰다. 바로 절제, 용기, 정의, 지혜가 그것이다.

 

- 하지만 이런 논리를 따른다면, 이상한 결론에 도달한다. 하버드대학의 심리학자 대니얼 길버트가 지적한 것처럼 "아르헨티나 해변에서 일광욕을 하는 나치 전법은 사실은 행복한 것이 아닌 반면, 식인종에게 산 채로 먹히고 있는 경건한 선교사는 행복한 형국"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 런던 경제 대학 심리학자 폴 돌런은 이 난국을 해결하고자 했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모든 음에 두 가지 특성(음 높이와 소리 크기)이 있듯이 모든 경험의 순간도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 즉 쾌락의 요소와 의미의 요소 말이다. 쾌락의 요소는 직접적인 즐거움이다. 반면 의미의 요소는 각각의 순간이 주는 의미를 느끼는 것이다. 가령 초콜릿을 먹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쾌락적 요소는 높고 의미적 요소는 낮게 경험된다. 그리고 몸 불편한 노인을 돕는 일은 쾌락적 요소는 낮지만, 의미적 요소는 높게 경험된다.

 

- 이때 한 영국 장교가 런던으로 무전을 쳤다. 내용은 단지 세 단어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But if not)." 이 말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 성경에 밝은 사람이라면 바로 알 것이다. 이 말은 구약성서(다니엘서 3장 18절)에 나온다.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세 청년에게 "너희들이 나의 신을 섬기지 않고, 그 황금 상에 절하지 않으면, 너희를 타오르는 불가마 속에 던지겠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세 청년에게 생각할 시간을 준다. 하지만 그 청년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느부갓네살 왕이시여, 이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논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이 우리를 불가마와 임금님의 손에서 우리를 구해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절대로 임금님의 신을 섬기거나, 그것을 새긴 황금 상에 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 그러므로 1940년 5월 런던으로 보낸 무전은 이런 뜻이었다. 이곳 덩케르크의 상황은 어둡다. 우리는 포위되었다. 기적이 아니면 살아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투항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라는 짧은 말에 그 모든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것은 완전한 맹세의 표현이었다. 

 

- 이런 태도는 삶에서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영역을 가리킨다. 이유가 필요 없는 우선순위와 원칙들을 포함하는 영역이다. 나는 제시된 금액의 1/10을 받고도 할 마음이 있는 일이 아니면 그 어떤 일도 돈만 보고는 하지 않는다. 돈이 내게 결정적인 요인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뜻이다.

 

- 능력의 범위처럼 품위의 범위도 그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경계가 어디인지를 정확히 아는 것은 중요하다. 품위의 범위를 확정하는 것은 계몽의 정신과는 상관이 없다. 품위의 범위는 평소 내가 대변하던 명확한 사고, 이성, '더 나은 논지'의 승리 등에 배치된다. 그래도 될까? 진보란 모든 것을 의문시하고 잘못된 것을 고쳐나가는 데 있지 않은가? 그렇다. 하지만 좋은 삶을 위해서는 불가침성을 띠는 품위의 범위가 필요하다.  

 

- 그러면 어떻게 품위의 범위에 이르게 될까? 머리로 생각하는 것으로는 안 된다. 아마도 세월이 흐르면서 그런 범위가 생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년 즈음이면 그렇게 된다.

 

- 품위의 범위가 생겨나는 것은 인격적 성숙의 중요한 단계다. 그때까지는 약간의 경험을 해야 한다. 잘못된 결정도 내려보고, 실망도 해보고, 실패도 해보고, 위기도 겪어보고... 어떤 원칙을 고수하고 어떤 원칙을 포기할 것인지 충분히 숙고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품위의 범위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기초가 없다 보니 밖에서 밀려드는 영리한 논지들에 늘 끌려다닌다.  

 

- 그러나 한 가지는 각오해야 한다. 타협할 수 없는 원칙을 붙잡고 나가면, 분명 몇몇 사람들은 실망시킬 수밖에 없다. 특히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킬 수 있다.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상처를 주게 될 것이다. 반대로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모욕과 상처를 받게 될 것이다. 당신은 이 모든 감정들을 견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이 품위의 범위를 위해 지불해야 하는 값이다. 꼭두각시만이 갈등 없는 삶을 살 수 있는 법이다. 능력의 범위는 1만 시간이다. 품위의 범위, 그것은 1만 개의 상처다. 

 

- 값을 지불할 수 있겠는가? 아니, 질문이 잘못되었다. 지불할 수 없을 만큼 귀한 것에는 가격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마틴 루터 킹은 "뭔가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삶을 살 만큼 성숙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했다.

- 자신에게 품위의 범위가 생기는 것은 인격적으로 성숙했다는 신호다. 그것이 크거나 작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나 자신이 그런 범위를 갖고 있는 사람인지가 중요하다. 

 

- 내적 확신을 외적으로도 변호하지 않으면, 당신은 점점 더 꼭두각시가 된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의 목적을 위해 당신을 이용할 것이고, 늦든 빠르든 당신은 자포자기하게 될 것이다. 더 이상 싸우지 않고, 힘든 일을 견디지 못하며, 의지력이 위축될 것이다. 겉으로 무너지는 사람은 언젠가는 속으로도 무너지기 마련이다. 

 

- 수용소 문학이라는 장르가 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에서, 엘리 비젤의 <나이트>,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를 거쳐,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까지를 아우르는 장르다. 이런 문학은 종종 잘못 읽힌다. 거기서 끔찍한 상황에 대한 생존 비결을 읽어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살아남는 것은 대부분 운이 결정한다. 

 

-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원칙을 읽어낸다. 그것은 바로 하루를 견딜 힘을 낸 사람, 그렇게 하루 또 하루를 견디는 사람은 조금씩 조금씩 생존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사실이다. 어느 순간 아우슈비츠는 해방되고, 전쟁 포로 생활도 언젠가는 끝나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한, 충분히 오래 견디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행동반경이 매우 적다 할지라도, 내적으로 외적으로 무너지지 않은 사람만이, 포기하지 않고 의지를 간직하는 사람만이 그렇게 견딜 수 있다.   

 

- 이미 말했듯이 이 모든 것은 우연 혹은 하늘이 돕는다는 커다란 가정에서만 가능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극한 상황을 겪어낸 사람들의 수기는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중요하다. 우리는 다행히 고문을 당하거나, 독방에 수감되거나, 영원한 얼음에서 참고 견딜 필요는 없다. 하지만 우리 역시 날마다 우리의 의지와 원칙과 취향에 대해 공격을 당한다. 품위의 범위를 공격당하는 것이다. 이런 공격들은 고문처럼 거칠지는 않다. 알아채지도 못할 정도로 미묘한 경우도 많다. 광고, 사회적 압력, 묻지도 않은 조언들, 부드러운 선동, 유행, 대중매체, 법. 날마다 품위의 범위를 향해 많은 화살이 날아온다.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자존감에 상처를 입히고 감정적 면역력을 약화시키기에 충분하다. 

- 사회는 주류 사회의 분위기에 맞추어 비슷비슷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잠잠히 내버려 둔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런 화살을 맞을 각오를 하고, 품위의 범위를 지켜나가야 한다. 

 

- 당신의 서약을 감싸는 품위의 범위라는 보호벽은 공격당할 때 비로소 능력을 발휘한다. 당신은 높은 이상을 대변할 수도 있고, 고귀한 원칙을 내세울 수도 있고, 정말 독특한 취향을 추구할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을 방어해야만 비로소, 스톡데일의 말을 빌자면 "행복감에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 경험으로 알다시피, 가장 혐오스러운 공격은 대부분 신체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적인 것이다. 이에 대한 방어 전략을 하나 소개한다. 당신이 가령 회의 같은 곳에서 악의적인 말로 공격을 받았다면, 공격자에게 그의 말을 한마디 한마디 반복해 달라고 요청하라. 그러면 대부분 공격자의 기가 꺾이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그로써 우리는 품위의 범위를 다루는 마지막 장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런 범위를 다음 세 종류의 공격에서 보호해야 한다. A) 더 나은 논지, B) 생명의 위협, C) 악마의 계약. 이번 장은 악마의 계약, 바로 거래에 대한 것이다. 품위의 범위를 명확하게 설정하지 않은 사람은 유혹적인 거래 제안이 올 때마다 새롭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시간낭비가 심하게 될 뿐 아니라, 자아존중감과 명성에도 금이 간다. 그리고 장차 있을 미래의 제안에 취약해지게 만든다. 악순환인 것이다. 

 

- 스토아학파라 불리는 그리스로마 철학자들은 걱정거리들을 날려버리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추천했다. 즉, 당신이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라는 것이다.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조치를 취하면 된다. 반면 영향을 끼칠 수 없는 일은 더 이상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트 니부어는 2천 년 뒤 그것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정리했다. "주여, 제게 바꿀 수 없는 일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과 바꿀 수 있는 일들을 바꾸는 용기를 주소서. 그리고 이 둘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간단하게 들린다. 그렇지만 간단하지 않다. '평온'은 단추를 누른다고 얻어지지 않는다. 

 

- 첫째, 공책 한 권을 준비하여 '나의 커다란 걱정 책'이라고 제목을 붙여라. 그리고 날마다 걱정에 할애하고 싶은 시간을 정하라. 가령 하루 10분을 확보하여, 지금 신경이 쓰이는 모든 것을 기록하라. 합당한 걱정이건, 멍청한 것이건, 부풀려진 것이건 상관없다. 그 일을 마치면 그날의 나머지 시간들은 어느 정도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두뇌가 이제 당신이 걱정거리들을 불러오고 있고, 간단히 무시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날마다 이런 의식을 행하여, 새로운 페이지에 적는다. 며칠 하다 보면 늘 비슷비슷한 걱정거리 몇 개가 당신을 괴롭히고 있음이 눈에 띌 것이다. 

 

- 그러고 나서 주말이 되면 그 주에 메모했던 내용들을 훑어보며, 수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지시를 따르라. "뭔가에 대해 이리저리 궁리하고 싶은 생각이 들자마자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본능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병적인 매력이 저절로 사그라질 때까지 말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가능하면 최악의 결과들을 상상하고, 심지어 그 이상으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대부분의 걱정들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제 진짜 걱정만 남고, 그에 대해 조치를 취하면 된다.

 

- 둘째, 보험을 들라. 보험은 대단한 발명품이다. 우아한 걱정 킬러가 아닐 수 없다. 보험의 진정한 서비스는 만일의 경우 금전적인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보험 계약 기간 동안 걱정을 덜 수 있다는 것이다. 

- 셋째, 집중해서 일하라. 잡념에 대항하는 최상의 치료법이다. 집중할 수 있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방법으로는 명상보다 낫다. 

 

- 모든 것에 대해 의견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은 해방감을 선사해 준다. 의견이 없다고 지적으로 떨어지는 사람은 아니다. 의견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말라. 의견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유이자 권리다. 오늘날 진짜 문제는 정보의 과부하가 아니라 의견의 과부하다. 

 

- 그러나 정말로 의견을 개진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시간을 가져라. 그리고 조용히 그에 대해 글을 써보라. 글을 쓰는 것은 생각을 정리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모호한 생각도 그것을 문장으로 표현하다 보면 분명해진다. 외부의 견해도 구하라. 가능하면 당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물어보라. 그렇게 당신의 의견을 확립하고 난 다음에는 그것을 다시금 캐물어라. 그 논지를 무력화시켜라. 그래야 그 논지가 탄탄한 것인지 알 수 있다.

 

- 성급한 의견을 표하지 않을수록 삶은 더 좋아진다. 나는 당신 의견의 99퍼센트가 쓸데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1퍼센트만이 사생활이나 직업 활동에 중요하다. 그리고 작은 범위의 주제에 속한다 해도, 당신의 첫 의견을 무턱대고 취하지는 말라. 당신이 모두가 당신에 대해 반대 입장을 피력하는 텔레비전 토크쇼에 초대받았다고 상상하라. 반대 입장을 자신의 입장처럼 유려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자신의 의견을 대변할 자격이 있다. 

 

- <철학의 위안>은 종교 서적도 아니면서 중세에 가장 많이 읽힌 책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책에 무슨 내용이 담겼을까? 사형을 선고받은 보에티우스가 절망적으로 감옥에 앉아 있을 때 그에게 나이 들고 우아한 여인의 모습으로 '철학'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에게 세상에 대해 설명해 주며, 이런 출구 없는 상황 속에서 견뎌 나갈 수 있게끔 정신적인 도구들을 알려준다. 여기서 '철학'이 추천하는 것, 물론 보에티우스가 추천하는 것을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 첫째, 운명을 받아들여라. 보에티우스의 시대에 운명은 곧잘 포르투나 여신의 모습으로 의인화되었다. 이 여신은 계속해서 행복의 바퀴(포르투나의 수레바퀴)를 돌린다. 바퀴가 돌아가다 보면 가장 아랫부분이 가장 윗부분이 되기도 하면서 자리를 교대하게 된다. 올라가고자 하는 사람은 나중에 다시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따라서 지금 위에 있건, 아래에 있건 너무 개의치 말라. 모든 것은 다시 돌아갈 수 있다.  

 

- 둘째, 당신이 가진 것, 귀중하게 생각하는 것, 사랑하는 것은 모두 유한하다. 당신의 건강, 배우자, 자녀, 친구, 집, 재산, 고향, 명성, 지위, 이런 것들은 모두 덧없는 것. 이를 악물고 이것들을 추구하지 말라. 여유 있는 마음으로 운명이 당신에게 그것들을 허락하면 기뻐하라. 이런 것들은 늘 지나가고 깨지기 쉽고, 일시적인 것임을 명심하라. 이 모든 것은 단지 빌린 것이고, 언제든지, 늦어도 죽을 때는 다시 반납해야 함을 의식하며 살면 가장 좋을 것이다. 

 

- 셋째, 당신이 보에티우스처럼 많은 것 혹은 모든 것을 잃었다면, 당신의 삶에 좋은 것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는 점(그렇지 않으면 탄식하지도 않을 테니까, 그리고 모든 달콤한 것에는 쓴 것이 섞여 있다)을 상기하라. 탄식은 타당치 않다. 

- 넷째, 당신의 생각과 사고의 도구, 불행과 상실과 실패를 스스로 해석하는 방식은 아무도 당신에게서 앗아갈 수 없다. 그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이런 자유를 '정신적 요새'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 놀랍게도 스토아 철학은 지금까지도 일상적인 삶의 질문에 대해 실질적인 답변을 하는 유일한 철학으로 남아 있다. 다른 철학적 조류들은 지적으로는 상당히 흥미롭지만, 실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신랄한 언변을 구사하는 미국 작가 고어 비달은 과거 인터뷰에서 "친구가 성공할 때마다, 내 안의 무언가가 죽는다"라고 말했다. 모든 사람이 때때로 느끼는 그러나 아무도 드러내놓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 것이다. 정말 쓸데없고 무의미하며 독성이 있는 감정, 바로 질투다.

 

- 노벨상 수상자 버트런드 러셀 역시 질투를 불행으로 몰고 가는 가장 주된 원인으로 보았다. 시기와 질투는 신체적 불편이나 재정적 곤궁보다 더 심하게 삶의 행복감을 해친다. 그러므로 이런 감정을 관리하는 능력은 좋은 삶에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능력이다. 이런 버릇을 제어하면, 삶에서 많은 유익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감정은 기본적으로 진화적 프로그램이어서 쉽게 제압할 수가 없다. 

- 그로써 우리는 이미 질투 문제의 해결책을 찾았다. 아무와도 비교하지 말라. 그러면 질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모든 비교를 엄격히 금하라. 

 

- 페이스북이 많은 유저들을 좌절시키고 피곤하게 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훔볼트대학 연구자들이 이와 관련해서 원인을 조사해 본 결과, 으뜸가는 원인은 역시나 질투심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페이스북은 애초부터 비슷비슷한 사람들이 서로를 비교하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질투심이 유발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러므로 나는 독자들에게 소셜미디어는 멀찌감치 피해 다니라고 권하고 싶다. 

 

- 엄청난 전문지식을 갖고 있으면서 능력의 범위 안에 있는 사람도 지혜롭다고 하기는 어렵다. 지혜는 지식의 축적과 동일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혜는 실용적인 능력이다.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능란하게 인생을 항해하느냐 하는 척도다.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보다는 피하는 편이 더 간단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예방하는 것이 바로 지혜'라는 단순한 정의가 마음에 들 것이다. 

 

- 사실, 삶은 쉽지 않다. 온갖 곳에서 문제들이 당신에게 밀어닥친다. 우연은 당신 앞에 구덩이를 파놓고 당신의 인생길에 바리케이드를 친다. 이것 자체는 어찌할 수 없다. 하지만 당신이 어느 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예상한다면, 장애물을 멀찌감치 피해 갈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영리한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문제를 피해 간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 B가 더 실력 있는 선장임에도 A가 더 환호를 받는 것이다. 이유는 예방을 통한 성공실패를 피해 가는 것은 외부 세계에는 잘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 우리는 지혜롭게 일을 해결한 군 장성, 정치인, 응급외과 의사, 치료사들을 굉장히 과대평가하는 반면, 사회나 개인이 재난을 당하지 않도록 미리 조치를 취하는 사람들의 역할은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실력 있는 가정의(家庭醫), 좋은 교사, 똑똑한 입법자, 재치 있는 외교관 등 안 보이는 곳에서 예방하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들이자 진정한 현자들이다. 

 

- 당신이 이 지구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면, 돈을 기부하라. 오로지 돈을! 시간이 아니라 돈을 말이다. 당신의 직업이 응급의사거나 폭탄처리 전문가거나, 외교관이 아닌 이상 전쟁 지역으로 여행하지 말라. 많은 사람들이 자원봉사자의 함정(volunteer's fallacy)에 빠진다. 자신의 봉사 활동이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자원봉사 활동은 가치를 파괴하는 활동이다. 당신의 시간은 능력의 범위 안에 투자해야 가장 의미가 있다. 그곳에서 하루에 가장 많은 가치를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물론 봉사 활동을 하면 기분이 좋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런 선한 사마리아인이 된 듯한 기분은 생각의 함정이다. 당신 스스로 하는 것보다 당신의 돈을 현지의 탁월한 전문가들(국경 없는 의사회, 적십자, 유니세프 등)에게 맡기면 그들이 당신의 돈을 훨씬 더 효율적으로 활용할 것이다. 그러므로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고, 그 돈을 전문가에게 줘라. 

 

- 뉴스 소비를 대폭 제한하라. 특히나 기아, 전쟁, 테러 등을 다루는 뉴스 소비는 가급적 줄여라. 위기의 장면을 마주 대하며 텔레비전 앞에서 희생자들에 대해 마음 아파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다. 희생자들에게도, 당신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장면을 보고 또 보는 것은 일종의 관음증이다. '아는 것'이 박애적인 감정을 선사해 주는 듯하지만 사실은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희생자들을 속이는 것이다. 분쟁, 전쟁, 재앙을 정말로 이해하고 싶으면 그 분야의 책을 읽는 것이 가장 좋다. 물론 책은 1년 정도 뒤쳐져서 발간되지만, 어차피 실시간으로 참혹한 모습을 본다 해도 기부금을 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 당신은 레스토랑에 앉아 메뉴판을 훑어본다. 짜여진 코스인 데귀스타시옹 메뉴(menu degustation, 셰프 특선 코스 메뉴)
를 선택하든지, 아니면 당신 스스로 음식을 선택해 코스를 구성하는 알라카르트(a la carte, 각 코스가 분리되어 단품으로 가격을 지불하는 방식)를 고를 수 있다. 일일이 선택해서 코스를 구성하는 경우 추천 코스보다 가격이 더 비싸진다는 것을 당신은 금방 눈치챈다. 게다가 추천메뉴에는 와인까지 제공되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당신은 추천 코스를 주문하고, 웨이터는 미소를 지으며 "좋은 선택입니다. 보통 다들 그걸 주문하지요"라고 말한다. 

- 이제 코스 요리가 하나씩 서빙이 된다. 애피타이저, 네 종류의 푸아그라, 시금치를 곁들인 연어절임, 딸기를 곁들인 코코아 사바랭(원통 모양의 프랑스식 생과자-옮긴이), 노루고기, 무화과 겨자를 곁들인 다양한 치즈, 산마늘 리코타 라비올리, 그 중간에 레몬셔벗이 나오고, 다시 오리가슴살, 가지 뇨키, 스위트브레드...  

 

- 이제 정말로 있었던 만찬의 한 장면을 살펴보자. 음식은 오히려 전통의 소박한 음식에 가깝지만, 손님들은 상당히 엄선된 사람들이다. 그중에 워런 버핏과 빌 게이츠도 끼어 있다. 게이츠가 좌중을 둘러보며 묻는다. "삶에서 당신들이 이룬 것을 가능케 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러자 버핏은 "포커스"라고 대답한다. 게이츠도 맞장구를 친다. '주목' 혹은 '주의력'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포커스'가 중요한 것이 틀림없다. 우리의 삶에서도 어디에 주의를 기울이느냐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므로 (주의력을 집중해 알라카르트 식으로 신중하게 접근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구성해 준 '인포메이션 메뉴'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의 머리를 터질 듯이 혹사시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닐 수 없다. 
 

- 공항에서든, 역에서든, 전철에서든 눈만 들면 정보들이 한가득 제시된다. 모두가 우리의 주의력을 끌고자 애쓴다. 사람들은 쉼 없이 부분적으로는 진부한 부분적으로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공급해 주고, 좋은 것들을 제안하며, 우리에게 구애하고, 우리의 비위를 맞춘다. 그렇게 우리는 무슨 왕이 된 듯한 기분이 된다. 하지만 사실 좀 더 깊이 살펴보면 우리는 왕이 아니라 조종되는 노예이자 꼭두각시다. 

- 이 모든 제안들은 선물이 아니라 약탈 행위이고, 이윤을 주는 것이 아니라 손실을 야기하며, 주는 것이 아니라 가져가는 것이다. 제아무리 아름답게 포장된 인스타그램 포스트라 해도 그것은 약탈 행위다. 속보도 약탈 행위이며, 문자도 (대부분의 경우는) 약탈 행위다. 그것에 부응하는 순간에 우리는 주의력과 시간, 돈을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 주의력과 시간과 돈은 우리에게 있는 가장 중요한 자원 세 가지다. 시간과 돈에 대해서는 모두가 민감하게 의식한다. 시간과 돈을 다루는, 바꿔 말해 '자본'과 '노동'을 다루는 학문도 있으니 말이다. 반면 주의력은 그리 민감하게 의식하지 못한다. 오늘날에는 이것이 세 자원 중 가장 소중한 자원인데도 말이다. 성공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이며, 행복에서도 가장 중요한 자원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이 자원을 관리하면서 체계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그리하여 이런 실수를 피하기 위한 몇 가지 조언을 하고자 한다. 

- 첫째, 새로운 것과 중요한 것을 혼동하지 말라. 상품이든, 의견이든, 뉴스든, 새로운 것은 주목을 끌고자 한다. 세계가 시끄러울수록, 새로운 것들은 당신의 귀에 들려지기 위해 더 시끄럽게 소리를 지른다. 이런 소음을 중요시 여기지 말라. 혁명적으로 추앙되는 대부분의 것들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다. 시끄러운 현재 이슈들은 무조건 진실로 여기기 쉽지만, 알고 보면 그렇지 않다. 

- 두 번째, '무료로 주어지는' 내용이나 기술을 피하라. 이것들은 십중팔구 광고를 통해 돈을 벌고자 하는 주의력의 함정들이다. 왜 자원해서 그런 함정으로 걸어 들어가고자 하는가?

- 셋째로, 멀티미디어라는 이름을 단 모든 것을 멀찍이 우회하라. 영상, 동영상, 나아가 가상현실은 당신의 감정을 안전 속도 이상으로 가속하기에, 이런 것들을 자주 접하다 보면, 당신이 내리는 결정의 질은 현저히 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정보는 문서로 소비하는 것이 가장 좋다. 가능하면 하이퍼링크가 별로 없는 문서로, 따라서 책으로 소비하는 것이 가장 좋다. 

- 넷째, 주의력은 분산될 수 없음을 명심하라. 이것이 주의력이 시간과 돈과는 다른 점이다. 핸드폰으로 페이스북을 보는 데 주의력을 할애하면 자동적으로 마주 앉은 사람에게는 소홀하게 될 수밖에 없다.

 

- 다섯째, 약자의 입장이 아니라, 강자의 입장에서 행동하라. 여러 가지 것들이 묻지도 않고 당신에게 가까이 오게끔 한다면, 당신은 자동적으로 약자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 또 하나의 측면은 주의력과 행복이다. 주의력이 행복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심리학자 폴 돌런은 "당신이 주의력을 활용하는 방식이 당신의 행복을 결정한다"고 말한다.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같은 일이라도 거기에 얼마나 많은 주의력을 할애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행복에 전혀 영향을 못 미칠 수도 있고, 조금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강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 당신의 몸이 어디에 있든 당신이 집중하고 있는 곳에 당신이 살고 있다. 모든 순간은 단 한 번 온다. 자신의 집중력을 의식적으로 투입하는 사람은 삶에서 더 많은 것을 누린다. 정보의 습득에 관한 한 비판적이고 엄격하고 신중하게 행동하라. 식사나 약을 먹는 것만큼이나 비판적이고 엄격하고 신중해야 한다. 

 

- 주의력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나의 자원이다. 시간과 돈보다도 더 중요하다. 그런데 주의력은 시간과 돈에 비해 그리 민감하게 의식하지 못한다. 성공한 이들은 자신의 주의력을 제대로 대접했을 뿐이다. 

 

- 나는 개인적으로 3천여 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 그중 약 1/3은 읽었고, 나머지 1/3은 대략 훑어보았고, 나머지 1/3은 읽지 않았다. 정기적으로 새 책들이 추가되고, 1년 단위로 책들을 추려서 버리고 있다. 움베르트 에코가 생전에 3만 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었다고 하니 그에 비하면 3천 권쯤은 아주 보잘것없다. 하지만 그나마 읽은 책들도 내용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서가에 꽂힌 책들의 제목을 죽 훑어가노라면, 성긴 구름처럼 그 내용이 듬성듬성 떠오르며, 단편적인 장면들이 불쑥 떠오르고, 문장들이 표류하는 배처럼 조용한 안갯속에서 부유한다. 읽었는지조차 확실히 말할 수 없는 책들도 있다. 책을 펴보고 구겨진 페이지나 여백에 메모한 것, 문장에 줄을 그어놓은 것을 발견하면, 그 순간 나는 상당히 부끄럽다. 나의 구멍 난 기억이 부끄럽고, 많은 책들이 어쩌면 그렇게 깡그리 다 잊혔는지 놀랍다. 위로가 되는 것은 많은 친구들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책뿐 아니라, 에세이, 르포르타주, 기사 등 모든 종류의 텍스트가 마찬가지다. 전에 아주 만족스럽게 읽었어도 남은 것이 별로 없다. 

 

- 내용이 이렇듯 송두리째 빠져나가 버린다면, 읽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물론, 독서가 주는 현재적 즐거움도 중요하다.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크렘 브륄레(크림 커스터드 위에 바삭한 캐러멜 토핑을 얹은 프랑스식 디저트 - 옮긴이)가 주는 현재적 즐거움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그리고 크렘 브륄레에는 애초에 사람의 인격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기대가 없다. 우리의 독서 내용이 그렇게도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 우리가 잘못 읽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 선별하지 않고, 또 너무 대충 읽는다. 주의력을 뛰어다니는 강아지라고 한다면, 우리는 독서를 할 때 강아지가 맛난 먹이를 먹는 훈련을 하게 하지 않고, 그냥 아무렇게나 배회하게 놔둔다. 그렇게 우리의 가장 소중한 자원을 가치 없는 것에 쏟아버리는 것이다.

- 이제 나는 몇 년 전과는 다르게 독서한다. 전처럼 많은 책을 읽지 않고, 적은 책을 읽는다. 대신에 더 좋은 책을, 두 번씩 읽는다. 나는 굉장히 까다롭게 책을 고르게 되었다. 어떤 책을 손에 들고 10분 정도를 할애해서 살피고는, 판결을 내린다. 읽을 것이냐, 읽지 않을 것이냐. 철도 승차권의 이미지는 이런 까다로운 선별에 도움을 준다. 내가 손에 든 책이 나의 독서카드 한 칸을 내줄 만큼 괜찮은 책인가? 그런 책들은 굉장히 적다. 그리고 괜찮은 책이라고 판단한 경우 나는 그 책을 두 번 읽는다. 연속으로 두 번 읽는다. 그것이 원칙이다.
 
- 책을 두 번 읽는다고? 왜 안 되겠는가. 음악의 경우 우리는 트랙들을 여러 번 듣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은 초견으로 악보를 연주해 본 뒤, 그냥 그렇게 미숙한 상태로 끝내지 않고, 여러 번 집중 반복해서 연습을 하고 꽤 숙달된 다음에야 다음 작품으로 넘어간다. 따라서 독서도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 다시 한번 천천히 집중해서 읽는 중에 얼마나 많은 내용을 흡수할 수 있는지, 첫 번째 읽을 때 눈에 띄지 않았던 새로운 것들을 얼마나 많이 발견하는지, 세심한 읽기를 통해 이해의 범위가 얼마나 확대되는지 나는 놀라곤 한다.  

 

- 그렇다. 잠기는 것! 서핑하는 것이 아니라 잠수하는 것이다. 

 

- 몇 가지를 정확히 짚고 넘어가자. 우선, 여기서 자꾸 효력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너무 건조한(기술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가? 책에 대해 그런 식으로 판단해도 될까? 그렇다. 이런 식의 독서는 유용성을 지향하고, 낭만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낭만은 다른 활동을 위해 남겨두라. 나는 책이 (나쁜 책이든지, 나쁘게 읽었든지 해서) 두뇌에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면 책을 읽은 시간은 그냥 낭비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 개인적인 독서카드에 몇 칸을 만들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나는 다음 10년간 100권으로 제한했다. 1년에 평균 10권 정도인 셈이다. 이 정도면 작가로서는 상당히 적은 양이다. 하지만 이미 이야기했듯이 나는 훌륭한 책들을 두 번 읽는다. 때로는 세 번도 읽는다. 이것은 상당히 만족스러우며, 열 배의 효력을 낸다. 

 

- 당신이 아직 젊다면, 독서 인생을 3등분했을 때 아직 첫 1/3의 단계에 있다면, 가능하면 많은 책들을 먹어치우는 것이 좋다. 소설, 단편소설, 시, 실용서, 교양서 등 갖가지 책을 닥치는 대로 읽어라. 

 

- 이렇게 마구잡이 독서를 통해, (또는 통계적으로 말하자면) 독서 인생의 첫 1/3의 많은 임의의 책들을 통해 당신은 책들의 기본적인 분포에 대한 표본을 대략 머릿속에 만들 수 있고, 그렇게 판단력을 연마해서, 훗날 굉장히 선별적으로 책을 고를 수 있다. 40세쯤 되면 개인적인 독서카드를 마련하라. 그러고 나서는 엄격하게 그것을 준수하라. 40세가 넘은 사람은 나쁜 책을 읽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기 때문이다. 

 

- 지퍼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아는가? 당신의 지식을 0점(전혀 모른다)에서 10점(정확히 안다)까지로 점수를 매겨보고 여백에 적어보라. 이제 종이 한 장을 꺼내 지퍼가 정말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스케치를 해보라. 그러고는 아직 지퍼를 보지 못한 사람에게 정확한 작동방식을 설명할 수 있게 핵심어들을 적어보라. 2분간 시간을 주겠다. 완성했는가? 그렇다면 이제 당신의 지퍼 지식을 다시 한번 0점에서 10점까지로 평가해 보라. 

 

- 우리는 설명하기 전까지는 뭔가를 상당히 잘 안다고 믿는다. 설명해 보라고 하면, 그제야 우리의 지식이 얼마나 구멍이 뚫린 것인지를 깨닫는다. 당신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이해하는 것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식의 환상(illusion of knowledge)'이다. 

- 지퍼나 변기 같은 단순한 것들도 이렇게 따지고 들어가면 잘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정말로 커다란 질문에서는 얼마나 무지할까? 가령 어느 정도의 이민자를 받는 것이 한 사회에 장기적으로 유익할까? 유전자 치료를 허용해야 할까? 또는 무기소지의 자유는 사회를 더 안전하게 만들까? 등등.

 

- 이런 커다란 문제에서는 (흥미롭게도 하필 이런 거시적 질문에서는) 우리의 대답이 오히려 속사포처럼 나온다. 하지만 솔직히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해보자. 우리는 이런 것들에 대해 자세히 생각해보지 않았다. 자세히 생각하기는커녕 초보적으로라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사회적 문제들은 지퍼나, 변기, 배터리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사회 구조에 대한 개입은 단순히 변기의 물을 내리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결과들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첫 영향들을 고려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영향의 영향의 영향도 평가해야 한다. 이런 연쇄적 영향을 진지하게 생각하려면 며칠, 몇 주, 아니 몇 개월이 걸릴 것이다. 누가 그럴 만한 시간과 의욕이 있겠는가? 

 

- 따라서 우리는 편하게 생략해 버린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그 주제에 대한 책을 읽거나 전문가들과 상의하는 대신, 우리는 그냥 우리의 준거집단의 의견을 취하는 것이다. 준거집단은 정당일 수도 있고, 같은 직업군일 수도 있고, 사회계층일 수도 있고, 스포츠클럽 혹은 패거리 집단일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의 지식은 우리가 바라는 것과는 달리 전혀 객관적이지 않다.

 

- 우리는 유감스럽게도 우리 생각과는 달리 절대로 독립적으로 사고하지 않는다. 옷을 고르는 것처럼 의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유행하는 옷을 입는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준거집단이 입고 다니는 옷을 입는다. 

 

- 그런 '파당적 의견'이 단순한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전체의 세계상을 구성하면 상당히 끔찍해진다. 이런 경우를 이데올로기라 부른다. 이데올로기는 파당적 의견의 10제곱이라 할 수 있다. 소위 뭉텅이로 견해들을 공급해 준다. 이데올로기는 상당히 위험하다. 두뇌에 쇼트를 일으키고, 퓨즈를 연소시키는 고압전류처럼 작용한다. 예를 들면 젊은 유럽 청년들이 학교를 졸업한 뒤 IS를 추종하고, 중세의 이슬람 교리를 다시금 도입하고자 투쟁한다. 

 

- 무슨 일이 있어도 이데올로기와 도그마는 피하고 보라. 그것들이 당신에게 좋게 보여도 말이다. 이데올로기는 보장하건대 잘못된 것이다. 그것들은 세계에 대한 시야를 좁게 만들고, 분별없는 결정을 하도록 오도한다. 

 

- 독립적으로 사고하라. 파당적 견해를 고스란히 신봉하는 독선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도그마는 멀리 피해 다녀라. 세계는 이해할 수 없다는 걸 빨리 받아들일수록, 세계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 

 

-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주변에 많다면 더욱 더 그 생각을 경계하고 의심하라. 

 

- 마음의 뺄셈은 인생의 좋은 측면들을 소중히 여기게 하는 보증된 전략이다.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전략이므로 당연히 그것을 넘어 좋은 삶을 사는 데도 도움이 된다. 예를 들면 역사적으로 평균 기대수명이 30년 정도밖에 안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라. 당신이 서른이 넘은 경우 기뻐하라. 이제 하루하루 추가로 얻는 날들은 선물이 된다. 서른이 안 되었다면 아직 선물 받은 것은 없지만, 나중에 받을 길고 큰 선물에 기뻐해도 된다. 

 

- 상대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는 것은 그렇게 하려고 애써보지만 잘 안 될 때가 많다. 필요한 사고의 비약이 너무 크고, 흥미롭지도 않다. 누군가를 실제로 이해하려면 그의 입장이 되어야 한다. 생각만이 아니라 실제로 말이다.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고, 상대의 상황을 몸소 체험해봐야 한다. 

 

- 비슷한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회사들은 많다. 사업 보고서 같은데 보면 흔히 기업 수뇌부들이 컨베이어벨트 앞에서 포즈를 취한 사진이 실려 있다. 100개의 사업 보고서 중 단 하나 정도만 사진이 다르다. 그곳에는 작업복에 헬멧을 쓰고 '실제로' 컨베이어벨트에서 일을 하는 최고 경영자들 사진이 있다. 이들이야말로 최소한 사진을 찍을 때만이라도 머리를 헝클어지는 걸 감수하는 이들이다. 나는 이런 회사의 주식을 자주 산다. 

-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세상을 이해하는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방식이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과 행동을 혼동한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는 것은 경영학 교수직을 얻기에는 이상적 일지 몰라도, 기업가가 되기에는 이상적이지 않다. 문학 교수가 되려고 하면 문학을 전공하는 것이 지름길이다. 하지만 문학을 전공했다고 해서 좋은 작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그것이 늘 가능한 것은 아니기에 또 한 가지 방법을 추천한다면, 소설을 읽어라. 좋은 소설을 가능하면 많이 읽어라. 좋은 소설에 몰입해서 주인공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것이 생각과 행동 사이의 효율적인 절충안이라 하겠다. 

 

- 누군가를 이해하려면 그의 입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맞다. 그러려면 그 입장에서 생각하는 정도가 매우 강해야 한다. 생각만이 아니라 실제로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 오늘날 지구인들은 아주 다르다. 우리는 스스로를 세계 시민으로 볼뿐 아니라, 세계 대장장이로 본다. 스타트업, 크라우드펀딩, 자선 프로젝트로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확신에 사로잡혀 있다. 실리콘밸리에 회사를 세워 엄청나게 성공한 사람들이나 세계사를 바꾼 천부적인 사람들이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는 환상 탓이다. 우리의 삶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세계를 바꾸고자 한다. 우리는 이런 목표를 표방하는 조직을 위해 일을 하고, (이런 '의미 부여'에 감사해서) 절반의 임금을 받고도 기꺼이 노동력을 제공한다. 

- 각 개인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세기의 커다란 이데올로기 중 하나이며, 동시에 엄청난 착각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사고의 오류가 엮여 있다. 하나는 초점의 오류다. 이에 대해 대니얼 카너먼은 "삶의 그 무엇도 당신이 그것에만 골똘히 초점을 맞출 때 상상하게 되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확대경을 지도에 대면, 확대경을 댄 부분이 확대된다. 우리의 주의력은 확대경처럼 작용한다. 우리가 세상을 바꾸는 프로젝트에 심취해 있으면, 그 일의 의미는 실제보다 더 커 보인다. 우리는 체계적으로 자신이 하는 일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 두 번째 생각의 오류는 미국의 철학자 대니얼 데닛이 '지향적 태도(intentional stance)'라고 일컬은 것으로, 사람들은 흔히 모든 변화 뒤에 의도가 있다고 본다는 뜻이다. 정말로 의도가 있었건 없었건 상관없이 말이다. 우리는 1989년 철의 장막이 무너진 것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것을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남아프리카에서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 정책)가 철폐된 것은 넬슨 만델라 같은 투사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고, 인도의 독립은 마하트마 간디 덕분이었다.

 

- 우리는 세상의 모든 변화 배후에 세상에 이런 변화를 가져다주고자 했던 누군가가 있다고 추측한다. 

- 하지만 정말로 넬슨 만델라가 아니었다면 아파르트헤이트가 붕괴되지 않았을까? 스티브 잡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 아이폰 같은 걸 만들 수는 없었을까?

- 자꾸 의도를 보려는 경향은 세계사를 위인(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주로 남자들이다)의 역사로 해석하게 한다. 하지만 영국의 과학저술가이자 정치가인 매트 리들리는 <모든 것의 진화>에서 위인 이론을 급진적으로 부정한다. "우리는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장소에 있었던 영리한 사람들에 대해 너무 많은 칭찬을 쏟아내는 경향이 있다"고 말이다. 계몽주의자들도 그런 경향을 알고 있었다. 몽테스키외는 이렇게 썼다. "마틴 루터를 종교개혁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본다. (……) 그러나 그 일은 어차피 일어났을 것이다. 루터가 아니었어도 다른 사람이 그것을 주도했을 것이다." 

 

- 역사적 기록을 충분히 연구하면 당신은 모든 커다란 변화들이 우연한 것이었으며, 제아무리 세계사의 걸출한 인물이라 해도 시대적 사건의 꼭두각시였을 뿐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위인을 떠받들지 않는 것, 그리고 스스로 위인이라는 착각을 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좋은 삶이다. 

 

- 당신은 여기까지 읽고 '그럴 수도 있어. 하지만 그래도 예외는 있어'라며, 구텐베르크가 없이는 책이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고, 에디슨이 없었다면 전구가 없었을 것이며, 라이트형제가 없었다면 비행기를 타고 휴가가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 생각 역시 맞지 않는다. 이들 역시 순전히 시대의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구텐베르크가 하지 못했다면 다른 사람이 인쇄술을 개발했을 것이다.  

- 엘리샤 그레이와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같은 날 전화기에 대한 특허를 신청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이들 중 한 명이 특허청에 가는 중에 말에 밟혀 저세상으로 갔다 해도, 오늘날 세계의 모습은 동일했을 것이다. 라이트형제 역시 세계적으로 글라이더와 동력장치를 결합시켜 동력비행기를 만들고자 열심히 실험했던 많은 팀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라이트형제가 없었다고 하여, 우리가 마요르카섬(지중해의 큰 섬으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휴양지 -옮긴이)에 배를 타고 놀러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른 누군가가 동력비행기를 개발했을 테니 말이다. 거의 모든 발견과 발명이 마찬가지다. 리들리의 말마따나 "기술이 발명가를 찾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 학문적 돌파구 역시 사람에게 달린 것은 아니다. 측정 장비가 필요할 정도의 정확성에 도달하면, 발견들은 늦든 빠르든 저절로 이루어진다. 학자들에게는 좀 미안한 말이지만, 각각의 연구자는 기본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발견되어야 하는 것은 언젠가 누군가가 발견하게 되어 있다. 

 

- 김나지움(인문계 중고교 과정 - 옮긴이) 시절 선생님 한 분이 기억난다. 그는 학생들의 성취와는 조금도 상관없이, 성적을 그냥 무작위로 주었다. 그렇게 준 즉흥적이고 임의적인 점수가 고스란히 성적표에 올랐으므로, 우리 학생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거칠게 따졌다. 그래도 통하지 않자, 교장선생님에게까지 찾아갔다. 하지만 교장선생님은 박사학위를 가진 이 선생님을 존중하여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건 너무나 불공평한 게 아니냐고 우리가 항의하자 그 선생님은 조용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불공평한 거야. 너희가 그 사실을 빨리 배울수록 더 좋단다!" 당시 우리는 그 선생님에게 정말로 화가 났다. 하지만 나중에 돌아보니, 그것이 7년간의 김나지움 시절에 터득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었다. 

 

- 군비경쟁을 하고 있는 사람은 스스로가 그 사실을 잘 깨닫지 못한다. 난감한 것은 모든 걸음, 모든 투자가 그 자체로 볼 때는 의미 있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의 총계를 내보면 0 혹은 마이너스로 나온다. 그러므로 정확히 보아야 한다. 뜻밖에 스스로 군비경쟁에 휘말려 들었음을 깨달았다면 하차하라. 군비경쟁을 하면서는 좋은 삶을 살지 못할 것이 뻔하니까 말이다. 

- 그런데 어떻게 하차할까? 군비경쟁이 없는 분야를 찾아라. 내가 친구들과 함께 겟앱스트랙트(getAbstract)라는 회사를 창립했을 때 우리의 기본 기준 중의 하나는 바로 군비경쟁의 메커니즘을 피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해 경쟁이 없는 틈새를 찾는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10년 넘게 도서요약 서비스를 제공하는 유일한 공급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상당히 환상적인 상황이었다. 

 

- 지난 장에서 특화의 중요성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특화로만은 충분하지 않다. 아무리 작은 틈새라도 그 안에서 종종 숨은 군비경쟁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이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틈새가 필요하지만, 그 틈새는 동시에 군비경쟁의 역학에서 자유로운 곳이어야 한다. 

- 오늘날 우리는 그런 파문에 대해 쓴웃음을 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련한 스피노자에게는 정말로 장난이 아니었을 것이다. 공무원들이 일간지, 플래카드, 모든 소셜미디어 채널을 동원해 당신을 저주하고, 곳곳에 에이전트들이 배치되어 아무도 당신에게 접근하거나 말을 걸지 못하도록 규제한다고 상상해 보라. 당시 스피노자에게는 정말로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 우리는 그곳에서 편안하게 있으면서 대우받는다고 느낀다. 하지만 어떤 모임이든 겉도는 사람들이 있다. 자원해서 그럴 수도 있고, 사람들이 그를 받아주지 않거나 스피노자처럼 내쳐서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다. 이런 아웃사이더 중 대부분은 괴짜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간혹 그들 중에 (혼자서) 세상을 변혁시키는 사람들이 나온다. 학계, 경제계, 문화계의 빛나는 업적 중 입이 벌어질 정도로 많은 수가 아웃사이더들의 공이다.  

 

- 아웃사이더들은 전략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다. 그들은 조직을 위해 형식적인 문서를 작성하느라 시간을 뺏기지 않아도 된다. 친목도모 활동 같은 것도 할 필요가 없으며, 세련된 그래픽의 쓸데없는 파워포인트를 만드느라 아까운 지력을 허비하지 않아도 된다. 신물 나는 회의에 참석하여 신경줄을 마모시키는 파워게임을 할 필요도 없다. 번거로운 초대에 응하지 않아도 되며, '체면을 살리기 위해' 무슨 이벤트 같은 곳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초대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형식 같은 건 너끈히 날려버릴 수 있고, 내침당할 것을 우려해 정치적인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신경을 쓸 필요도 없다. 어차피 바깥에 있으니 말이다. 

 

- 또 하나의 장점은 아웃사이더의 위치에 있어 보면 인사이더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기득권층의 결점이나 모순이 훤하게 들여다보인다는 점이다. 그래서 아웃사이더들은 더 예리하고 깊게 보며, 현 상태에 대한 그들의 비판은 피상적이지 않고 근본적이다. 

- 이쯤 되면 아웃사이더로 사는 것이 꽤 낭만적으로 상상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아웃사이더가 되지는 말라. 말이 쉽지 힘 있는 사회와 반목하는 것은 쉽지 않다. 날카로운 역풍이 거세게 당신을 때릴 것이다. 거의 모든 아웃사이더들이 그들에게 전력으로 맞서는 세상에 부딪혀 만신창이가 된다. 그 와중에 혜성처럼 빛을 내는 사람들은 아주 소수다. 그렇다. 아웃사이더로 사는 것은 영화플롯으로는 좋을지 몰라도, 좋은 삶에는 부적합하다. 

 

- 그러면 어떻게 할까? 한 발은 기존의 질서에 굳게 담그고 있으라. 그로써 당신은 이너서클이 주는 온갖 유익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발은 거기서 빼고 있으라. 물론 굉장히 불가능한 시도처럼 들린다. 하지만 실제로 해보면 꽤 잘 통한다. 아웃사이더들과 친구로 지내라. 물론 이 부분은 말보다는 실제가 더 어렵다.  

 

- 반 고흐가 되기보다는 반 고흐를 알고 지내는 편이 좋다. 살아 있는 반 고흐 같은 사람들을 가능하면 여러 명 곁에 두라. 그들의 신선한 통찰이 당신을 물들이고, 좋은 삶에 기여할 것이다. 

 

- 수학자들은 이런 질문을 (정치적 올바름에 위배되는 것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비서 문제(secretary problem)'라고 부른다. 그리고 놀랍게도 비서 문제에는 최적의 해답이 나와 있다. 우선 37명의 지원자들을 면접하고, 이들 중에서는 아무도 채용하지 말라. 하지만 37명의 지원자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지원자가 어떤 정도 수준인지는 기억해 두라. 그런 다음 계속해서 면접을 보면서, 앞선 37명 중 최고였던 지원자를 능가하는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그를 채용하라. 그렇게 하면 100명의 지원자 중 최고의 지원자를 채용하지는 못할지 몰라도, 틀림없이 꽤 좋은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이외의 모든 방법들은 통계적으로 이보다 더 나쁜 결과를 도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 왜 37일까? 수학적으로 계산하면 37은 100을 상수 (2.718)로 나누었을 때의 값이다. 그러므로 만약 지원자가 50명이라면, 50을 e로 나눈 값인 18명을 우선 면접해 본 다음, 첫 18명 중에서 최고였던 사람을 능가하는 첫 번째 사람을 채용하면 된다. 

 

- 비서 문제는 원래는 '약혼자 문제'라고 불렸다. 내가 한 명의 파트너와 결혼하기 위해 몇 명의 파트너 후보들을 시도해봐야 할까 하는 문제였다. 하지만 후보 파트너의 수가 애초에 알려져 있지 않아 위에 서술한 전략이 통하지 않을 것이기에 수학자들은 이 문제를 '비서 문제'로 이름을 바꿨다. 
 

- 즉, 비서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너무 빠르게 하나의 후보로 결정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준다. 몸담고 싶은 분야, 커리어, 직업, 거주지, 좋아하는 작가, 악기, 좋아하는 운동, 좋아하는 여행지 등 처음에는 짧은 시간을 두고 많은 다양한 선택지를 시험해 보고 (내키는 것보다 더 많은 옵션을 시험해 보고) 그런 다음에 확실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좋다. 가능성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전에 확정해 버리는 것은 비이성적이다. 

 

- 그런데 왜 우리는 일찍 결정하는 경향이 있을까? 왜 그리도 조급한 걸까? 우선 표본을 만드는 게 힘들기 때문이다. 5명만 면접하고 끝낼 수도 있는데 100명을 면접한다고? 하나의 직업을 선택하기 위해 10군데 지원한다고? 너무 힘들기도 하고, 내키지도 않는다. 둘째, 표본들은 굉장히 흡인력 있다. 젊은 시절에 약간 기웃거리다가 그 분야에 평생 몸담고 있기가 십상이다. 물론 그 분야에서 커리어를 쌓고 잘 지낼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실험정신이 있었다면, 다른 분야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며, 더 많은 성공과 기쁨을 누렸을지도 모른다. 세 번째 이유는 얼른 머릿속을 말끔하게 정리해 버리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를 얼른 종결하고 다음으로 넘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중요하지 않은 결정에 있어서는 좋은 경향이다. 하지만 중요한 결정에서는 역효과를 낸다. 
 

- 우리 아이들을 돌봐주는 20세의 베이비시터가 몇 개월 전 상당히 절망한 상태로 우리 집 문을 두드렸다. 그러더니 처음 사귄 남자친구가 그녀를 떠났다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우리는 애써 담담하고 이성적으로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넌 아직 젊어, 아직 굉장히 시간이 많아! 우선 열 명에서 스무 명 정도의 남자들을 만나도록 시도해 봐. 그러면 시장이 대략 어떤 파트너를 제공해 주는지를 알게 될 거야. 그러면 장기적으로 어떤 사람이 네게 맞고, 네가 어떤 사람에게 맞을지 알 수 있어."  

 

- 유감스럽게도 우리 모두 종종 베이비시터와 비슷하게 행동한다. 우리의 표본은 너무 작고 결정은 너무나 성급하다. 통계학자들의 언어로 말하자면 대표성이 없다. 우리는 현실에 대한 잘못된 상을 가지고 있으며, 우주에서 단 두세 명을 잠깐씩 사귀어본 뒤, 생애의 남자 혹은 여자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이상적인 직장, 거주지 등도 마찬가지다. 두세 개의 표본을 시도해 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수도 있다. 잘 될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잘 살고 있다면, 진심으로 축하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운이 따라줘야지 가능하고, 당연한 것처럼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크고, 풍요롭고, 다채롭다. 젊은 시절에는 가능하면 많은 표본들을 채집해 보라. 젊을 때는 돈을 많이 벌거나 커리어를 쌓는 것이 아직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시절에는 삶의 모집단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굉장히 열린 태도로 나가라. 무엇보다 우연이 당신에게 제공해 주는 것을 시험해 보라. 책을 많이 읽어라. 소설을 통해 삶을 시뮬레이션해 보라.

 

- 더 나이가 들면 모드를 전환하여 굉장히 선별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 이제 당신은 자신에게 뭐가 맞고, 뭐가 맞지 않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기대감을 어떻게 하면 잘 조절할 수 있을까? 내가 추천하는 방법은 생각을 응급 환자분류체계처럼 확실히 분류하라는 것이다. 즉 사안을 늘 '그래야만 해', '그랬으면 좋겠어', '그렇게 되기를 기대해' 이 세 가지로 분류하라. 첫 문장은 필연성. 두 번째는 소망(선호와 목표). 세 번째는 기대를 피력한다. 

 

- 선호와 목표 없이 사는 삶은 앙꼬 없는 찐빵이지만 그것에 너무 연연해서는 안 된다. 때로는 소망을 이룰 수 없음을 의식하라. 많은 것들이 당신의 통제 밖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 우리는 기대를 헬륨풍선처럼 취급한다. 헬륨풍선은 위로 올라가다가 결국 터져서 볼품없는 조각이 되어 땅으로 내려앉는다. 그러므로 필요와 소망과 기대를 한 통 속에 던져 넣는 버릇을 중단하라. 그것들을 뚜렷이 구분하라. 기대를 의식적으로 조절하는 것은 좋은 삶의 도구다. 

 

- 필요, 소망, 그다음으로 기대가 온다. 많은 불행은 기대를 잘못 관리했기 때문에 생겨난다. 특히나 다른 사람에게 걸었던 기대 때문에 말이다. 그것을 허락하지 말라. 

 

- 시어도어 스터전은 1950년대와 1960년대 미국의 가장 생산적인 SF 작가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작품 활동을 하면서 계속 문학평론가들의 비아냥거림을 감내해야 했다. SF의 소설의 90퍼센트는 쓰레기라는 둥 하는 말들이었다. 그에 대해 스터전은 이렇게 대답했다. "네, 맞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장르를 막론하고 발표되는 모든 것의 90퍼센트가 다 쓰레기지요." 그의 이런 대답은 스터전의 법칙이라는 명칭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 언뜻 볼 때 스터전의 평가는 좀 가혹해 보인다. 하지만 그건 언뜻 볼 때 만이다. 당신이 끝까지 정말 만족스럽게 읽었던 책들이 얼마나 적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라. 얼마나 많은 책들을 몇 페이지 읽다가 실망한 채 옆으로 치워버렸는지, 텔레비전에서 방영해 주는 영화 중 끝까지 본 것이 얼마나 적었는지, 보다가 신경질 나서 채널을 돌려버린 영화가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해 보라. 이런 비율은 스터전의 법칙에 부응할 것이다. 

 

- 스터전의 법칙을 염두에 두고 살면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다. 스터전의 법칙은 탁월한 생각 도구이다. 이 법칙으로 당신이 보고 듣고 읽는 대부분의 것을 양심의 가책 없이 '패스' 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는 헛소리 공장이다. 그러니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 쓰레기 같은 것들로부터 세상을 정화하고자 노력하지도 말라. 그럴 수도 없다. 세상은 이성적인 당신보다 훨씬 더 오래 비이성적으로 남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소수의 가치 있는 것들을 선별하는 데만 신경을 쓰고, 다른 건 모두 제쳐버려라. 

 

- 투자가들은 스터전보다 이미 몇십 년 전에 이를 터득했다. 그래서 벤자민 그레이엄(워런 버핏의 스승이자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투자의 방법을 제시한 금융사상가 - 옮긴이)은 1949년에 나온 유명한 저서 <현명한 투자자>에서 증시를 '미스터 마켓(Mr. Market)'이라는 변덕스런 사람에 비유한다. 미스터 마켓은 조울증 환자로, 때로는 굉장히 낙관적이고, 때로는 어마어마하게 비관적이다. 그의 기분은 요요처럼 오르락내리락한다. 좋은 것은 투자자로서 당신은 미스터 마켓의 제공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냥 기다리면서 미스터 마켓이 정말로 놓치지 말아야 할 좋은 제안을 해줄 때까지 시장의 외침을 그냥 넘겨버릴 수 있다.  

- 시장의 외침은 물론 주식시장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시장도 당신에게 날마다 영화, 게임, 라이프스타일, 뉴스, 인맥, 여가활동, 여행상품, 스포츠경기, 레스토랑, 텔레비전 프로그램, 재미있는 유튜브 동영상, 정치적 견해, 자기 계발 상품, 각종 도구 및 부속품을 제공한다. 이 중 대부분을 과일가게의 썩은 사과처럼 그냥 못 본척하라. 그중 90퍼센트는 수준 이하의 것들이다. 시장의 외침에 귀를 막거나, 너무 시끄러우면 그냥 떠나버려라. 시장은 이것들의 중요성, 품질, 가치를 판가름하는 측정기가 아니다.
 
- 자, 솔직해보자. 100퍼센트 내면의 성공만 추구하고 외적인 성공은 깡그리 무시해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매일의 연습을 통해 아타락시아라는 이상에 가까이 갈 수 있다. 하루를 마치면서 어디서부터 잘못된 항로로 가고 있었는지를 자신의 마음을 점검해 보라. 어떤 부분에서 넘어졌는가? 무엇 때문에 하루를 또 씁쓸하게 보냈는가? 통제 밖에 있는 어떤 일이 당신의 마음을 뒤흔들었는가? 앞으로 그런 일을 피하기 위해 어떤 심리 도구를 꺼내야 할까? 묘비에 당신이 억만장자였다고 기록되는 것보다, 지금 여기에서 내적으로 대단히 성공한 사람이 되는 편이 백번 좋을 것이다. 우든의 선수들은 "하루하루를 당신의 걸작으로 만들라"라는 조언을 귀가 따갑게 들었다. 당신도 그렇게 하라. 내적인 성공에 완벽하게 도달할 수는 없어도, 평생 그것을 연습하라. 당신을 대신해 이런 연습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이야기하면서 확실한 정의를 내리지 않아서 마음이 개운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든 다짜고짜 정의부터 내리는 것이 꼭 중요한 것은 아니다. 노벨상 수상자 리처드 파인만은 이렇게 말했다. "어떤 새의 이름을 세상의 온갖 언어로 알고 있다고 해도, 당신은 그 새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 그러므로 그 새를 우리에게 정확히 보여주고, 그 새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관찰하게 하라. 그것이 진짜 중요한 문제다. 젊은 시절에 나는 '무엇의 이름을 아는 것'과 '무엇을 아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배웠다." 
 
- 이 책에 소개한 52개의 심리 도구는 크게 다음 세 가지를 근거로 한다. 첫 번째는 최근까지 40여 년간의 심리 연구다. 생리심리학, 사회심리학, 행복에 관한 연구, 휴리스틱 연구(휴리스틱과 편향), 행동경제학, 임상심리학, 무엇보다 인지행동치료가 여기에 속한다. 

- 두 번째는 스토아 철학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어 2세기 로마제국에서 전성기를 맞았던 굉장히 실용적인 철학으로, 대표적인 스토아 철학자로는 제논(스토아학파의 창시자), 크리시포스 (고대 그리스 철학자로 스토아학파의 대표적 인물), 세네카(내게는 고대 로마의 찰리 멍거처럼 보이는 인물), 무소니우스 루푸스(스토아 철학을 가르쳤고, 한때 네로 황제에게 추방당하기도 했던 사람), 에픽테토스(루푸스의 제자로 노예 출신의 철학자), 로마 황제 아우렐리우스가 있다. 유감스러운 것은 로마제국의 몰락과 더불어 스토아 철학도 잊혀버렸고, 지금까지도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토아 철학의 지혜는 지난 1800년 동안 생활철학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비밀스러운 팁으로 활용되어 왔다. 

- 내가 부분적으로 이 책에서 소개한 것처럼 스토아 철학자들은 실제적인 연습과 원칙을 중요시했다. 원칙은 중요하다. 기억하기 쉽고, 안전테이프처럼 생각 없이 내딛는 걸음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순하게 보일 위험을 무릅쓰고 나는 이 책에서 다른 사람들의 원칙들을 인용하는 외에 내 자신의 원칙도 소개했다.
 

- 세 번째는 오랜 전통의 투자 관련 경구들이다. 워런 버핏의 오랜 동업자인 찰리 멍거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가치투자가의 한 사람이자 (내게 뿐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우리 세기의 위대한 사상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런 이유로 나는 그의 말을 인용했다. 투자가들은 불투명한 세계를 꿰뚫어 보아야 할 특별한 필요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미래를 신빙성 있게 예측하고자 애쓴다. 생각의 결과물이 투자의 이익과 손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투자가들은 벤저민 그레이엄을 필두로 하여 세계를 가능하면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충동적인 결정을 막아주는 마음가짐을 가지고자 노력해 왔고, 지난 100년간 그 과정에서 매우 유용한 심리 도구들을 개발했다. 이런 심리 도구들은 결코 투자의 세계에만 국한되어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가치투자가들의 원칙과 마음가짐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삶의 지혜를 이끌어낼 수 있는지 정말로 놀라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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