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애슝] 고양이 생활 - 서로의 옆자리가 되어주는

일루젼 2023. 8. 28.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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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애슝
출판 : 휴머니스트 
출간 : 2021.06.29 


       

아, 참 좋은 날이다 싶은 하루였다.

오랜만에 중간에 깨지 않고 푹 잤고, 기분 좋게 씻고 도착한 책들을 받아왔으며, 냉장고에서 존재감을 강렬하게 뽐내던 양배추도 채 썰어 맛있게 부쳐먹었다. 선선한 바람과 풀벌레 소리와 함께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있자니 행복한 여름밤이란 이런 거지 싶을 정도다. 

 

평소라면 한두 가지 만으로도 벅차했을 일들을 매끄럽게 착착 해내는 날에는 나 자신에게 한가득 칭찬을 해주고 싶다. 그 일들이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그렇다. 나에게 약속한 일들을 해내었다거나, 약속한 건 아니었지만 스스로를 위한 뭔가를 했다는 게 무척 뿌듯하다. 그렇게 한 번 비어있는 줄도 몰랐던 내 안 어딘가가 채워지고 나면 며칠은 그 뿌듯함을 조금씩 내어 먹으며 힘을 낼 수 있다.

 

그런 몽글몽글하면서도 벅찬 기분. 

<고양이 생활>의 글과 그림은 읽는 내내 어딘가가 기분 좋은 따스함으로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해지는 에세이'는 적절한 생활감과 거리감이 있는 에세이다. 타인의 삶과 생각이 녹아든 글이라는 점에서 적절한 생활감은 반드시 필요하다. 독자가 소설이 아닌 에세이를 읽는 이유다. 하지만 너무 짙은 생활감은 읽는 이가 지고 있던 삶의 무게를 새삼 자각하게 만든다. 그런 자극을 원해서 읽는 사람도 있겠지만, 에세이를 읽는 사람들 중 다수는 '나만 이런 건 아니구나, 이렇게 살아도 되는구나, 다른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하며 사는구나,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어' 정도의 감각을 원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점에서 어떤 시기에 만나 읽게 되었느냐에 따라 같은 글, 같은 독자라도 다가오는 울림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경우에 <고양이 생활>은 참 좋은 만남이었다.

행복하게 읽었다. 

끝. 

 


   

 

 

 

- 그리도 좋아하던 고양이를 현실에서 기르게 되었을 때, 공교롭게도 고양이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서도 모르는 게 아주 많다는 것을 체감하였습니다. 

- 그저 예뻐하는 것이 사랑을 주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나 자신과도 내외하는 내가 나의 공간에 들어온 한 마리의 고양이와 살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타협점을 찾아야 했습니다.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종류의 배려심과 너그러움 같은 것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사랑을 주는 것에 서툴러서 더욱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 저는 제가 특별하다거나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책상에 앉아 세상에 맞춰 마치 보호색이라도 띠는 것마냥 살아가고 있고, 내 안에 불 밝힌 고집들이 유연해지기를 바라며 부단히도 헛된 노력을 하는 그런 사람에 가깝습니다.

 

- 고양이 한 마리로 인해 나는 나와 조금씩 친해지고 있습니다. 고양이를 만나 사랑이라는 마음에 대해 면면히 알아가고도 있지요. 뮤뮤가 가진 털의 포근함과 따스한 체온은 '사랑의 형태'라는 것을 손으로 어루만지는 듯했습니다. 사랑이 형태가 되어 내 앞에 나타났다면 그건 바로 뮤뮤일 거라고, 그렇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독한 여정 곁에 머물러주는 나의 고양이 뮤뮤에게 감사하며 나와 우리의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엮어내고자 합니다.

 

- 이사 날짜까지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대출을 못 받을지도 모른다는 전제하에 집을 보러 다녔다. 고양이가 있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고양이가 있는 세입자를 반기는 집주인과 부동산은 없다. 그래도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하는 쪽이 마음이 편했다

 

- 2주 동안 매일 다른 부동산에 가보며 하루 평균 두 개의 집을 보러 다녔다. 굳이 집 안에 들어가 보는 것도 꺼려질 정도로 더럽거나 1층인데 방범창이 없거나 현관문이 길밖으로 그대로 노출된 집을 보고 돌아온 날이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여자 혼자 살 집인 걸 알면서도 그런 집을 보여준 부동산에는 두 번 다시 방문하지 않았다. 

 

- 그러다 열두 번째에 어떤 집을 보게 되었다. 리모델링 공사가 진행 중인 아직 미완성의 집이었다. 하지만 그 집에 대한 첫인상은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몰라'였다. 아담한 거실과 채광이 잘 되는 큰 창이 있는 베란다, 그 양옆으로 큰방과 작은방이 있었다. 작업방과 침실의 경계가 거실을 기점으로 확연하게 분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한번 침대에서 나오면 다시 눕기엔 거리가 좀 있어 보이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 그림으로 참여한 책의 갈무리 식사 자리를 출판사에서 만들어주셨다. 오랫동안 삽화를 그려왔지만, 담당 편집자와 디자이너, 글을 쓴 분까지 한자리에 모이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기에 며칠 전부터 내심 기대되면서도 긴장해서 잠을 설쳤다. 

 

- 버스에서 내리니 출판단지의 네모난 건물들이 땅에 심을 박고 서 있었다. 그 안에서 모두가 책을 쌓아놓고 각자의 책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언제 생각해도 동화 같다. 산타클로스 마을에서 다 함께 선물을 포장하듯 모두가 한 마을로 이사를 와서 각자의 집에서 책을 만드는 출판단지의 존재는 그 자체로도 신비로운 이야기다. 

 

- 물건들이 집에 들어오고 다시 나가며 동시에 갖가지 경험과 감정들도 집 안으로 들어오고 나간다. 집은 사람과 사물만이 아니라 생각, 감정, 관계, 취향까지도 함께 수납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내가 좋아하고 마음에 드는 것만 집에 남기고 싶다. 사랑을 수납하기에도 공간이 부족한데, 미움은 되도록 밖에 두고 싶다. 

 

- 그림을 그리기 전에 손톱을 짧고 단정하게 다듬는다. 세면대와 싱크대의 수도꼭지를 빛이 나게 닦고 현관문 앞의 먼지를 쓸고 신발들을 가지런히 놓는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그림을 그린다. 항상 반복하는 나만의 의식이다. 혼자 집과 작업방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 자연스럽게 스스로 규칙을 만들고 루틴을 만드는 재미를 찾게 된다. 책상을 정리해야 작업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질러져 있어야 창의적으로 작업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의 루틴은 그때그때 내가 흥미로워하는 마음의 유행을 좇아 조금씩 변경되기도 한다. 그 시기에 마음에 드는 음악을 듣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 되기도 하고, 새로운 식물을 들이고는 그 식물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이 루틴이 되기도 한다. 

 

- 주변이 흐트러지고 마음의 그물이 엉성하면 일도 무너진다. 나는 '절대'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절대 떠나지 않을 사람, 절대 변하지 않을 환경 같은 것들에 이제는 들뜨지 않게 되었다. 대신 속해 있는 현실의 작은 성실함으로 마음을 정제하고 앞으로 닥쳐올 태풍에 준비한다. 둥글게 닳은 마음을 뾰족하게 깎는다.

 

- 아침에 일어나 책상 앞에서 버티는 것. 그날 해야 하는 일들을 마침내 해내는 것. 계속해서 그림 연습을 하는 것. 그런 단순한 끈기가 모여 앞으로의 모습도 만들어진다. 기질이 만들어낸 신념 같은 것이다. 나는 '오늘도 연습했습니다' 하고 동그라미 도장을 받은 연습장이 좋다. 

 

- 한때는 내가 가진 근면 성실함을 다른 사람의 입으로 전해 듣는 것이 불편했다. 답답한 모범생으로 보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린 내가 꿈꿨던 예술가는 예측 불가능하고 충동적인, 그런 멋짐이 있었기 때문에 이상향과는 거리가 너무나 먼 나의 성향이 현실의 민낯 같아서 창피했다. 연습하지 않아도 잘 그리는 사람. 그런 건 없었다. 재능은 시작의 도화선일 뿐 더 나아지기 위해선 연습과 과정만 있을 뿐이다. 

 

- 지금은 오롯이 집중해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하고 그 무엇보다도 사치스럽고 윤택하다고 느낀다. 한때 요리를 좋아해서 즐겨했는데 즐겁자고 취미로 하는 요리 때문에 칼에 손을 베이거나 피로해져서 그림을 그리는 데 지장을 주곤 했다. 그 뒤로는 요리와 멀어졌고 집안일도 최소한으로 하려 한다. 요리를 잘하느냐, 요리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스스럼없이 요리를 하지 않는다고 말하게 되었다. 손을 아끼다 보니 그렇다고 말하면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순서를 생각한다. 실제로 중요한 것을 우선 실행할 수 있다는 건 행복이다. 내 그림과 글을 좋아하고 아껴주는 사람들에게 그만큼의 예의와 태도를 갖춰 보이고 싶다. 사람과 일에 있어서는 타인에게도 응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주고 싶다. 

 

- 그림 그리는 일은 철저하게 고독한 직업이다. 게다가 이 직업은 항상 머릿속이 복잡하다. 그림만 그려서는 '일'을 해나갈 수 없다. 세금 문제도 알아야 하고 뜬구름 같은 이메일에 답변하며 반나절을 허무하게 보내기도 한다. 혹시 모를 부당한 관계에 대비해 계약서를 주의 깊게 들여다봐야 하고 견적을 낼 때도 창작의 값어치와 노동에 비례해 신중해야 한다. 이제 그만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타적인 업무에 시달리기도 하면서 몸이 쇠약해 간다. 

 

- 이 모든 일을 하는 주체는 '나'다. 내가 결정하고 내가 책임져야 한다. 예기치 못한 실수와 좋지 않은 상황을 마주하기도 한 경험이 있어 내 안에서 많은 질문과 대답을 한다. '이게 맞을까? 정말?' 그럴수록 점점 더 간결히 생각하고 쉬운 형태로 말하고 쓰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무엇이 이토록 복잡하고 얽히고설켜 있는지 그림을 그리는 시간에 집중하기 어렵고 산만해진다. 점점 매너리즘에 젖어 인생이 쓸데없이 길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인생은 오류와 실패의 반복이다. 오늘 아름답다 느꼈던 것을 내일은 혐오하게 된다. 그렇게 나는 하루를 메꿔나가며 점점 자기 객관화에 눈을 뜨는 것이다. 

 

- 일하며 내가 건조하고 말수가 적은 사람일 수는 있지만 게으르고 일 못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면 한다. 창작자가 이유 없이 상냥하고 친절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창작자는 작업물에 있어 단호한 태도를 학습하게 된다. 피드백과 평가에 익숙해지지 않지만 태연해지려고도 한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만 잘못된 결과물을 막을 수 있다. 간결하고 쉬운 형태로 전달하지만 너무 모나지 않도록 하려 한다. 

 

- 한 번에 그려졌다고 무조건 좋은 그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더 채워 넣어야 하고 마지막까지 밸런스를 신경 쓴다. 한 번에 그려진 그림은 절대 수정하지 않으면서 그게 멋있고 좋은 거라고 착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처음 그려진 선의 느낌이 가장 분명하고 제일 좋다고 생각해서, 사실은 조금만 고치면 더 괜찮은 그림이 될 수 있는데도 굳이 그러지 않았다. 이상한 고집으로 탄생한 그림을 훗날 보면서 느끼는 부끄러움은 나만의 몫이다. 

 

- 물론 단시간에 그렸는데 정말 좋은 그림도 더러 존재한다. 그때만이 가진 확고한 필력과 생각에는 화력이 있다. 정말 가볍게 그렸지만 깊은 영감을 주는 그림은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이 햇살에 반짝이고 있는 걸 보는 것마냥 찬란하면서도 순수한 기분이 들게 한다. 그런 한 장을 발견하기 위해 그리고 또 그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종이 되기 전에 되도록 다시 보는 편이다. 그래야 계속 나아갈 수 있고 그림과 창작 활동이 나에게 유익하다 말할 수 있다. 인생에서 만난 거친 면들을 결국 창작 생활로 회복해 오며 어떤 실패와 갈등은 적절히 외면하는 기술도 자연스럽게 터득했다. 그것은 삶에서 유익한 외면이라 생각한다. 좋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보면 작은 내가 단단해져 있다. 이윽고 책상 앞으로 찾아온 고독을 반기는 시간이 된다. 

 

- 잊고 싶은 기억, 창피했던 일, 싫었던 일들이 떠오를 때 생각을 떨치기 위해 소리 지르는 버릇이 생겼다.

 

- 어떤 날에는 샤워를 할 때 아주 좋은 생각이 찾아오기도 하고, 어떤 일의 해결 방법이 떠오르지 않다가 불현듯 복잡한 일, 생각이나 감정이 정리되기도 한다. 흐르는 물에 몸을 씻는 것은 피부의 찌꺼기 같은 불필요한 나쁜 것들로부터 실연하는 과정인 동시에 새로운 탄생과 조우하는 신비로운 일이다. 

 

- 초록의 향기가 짙어지고 해가 길어지는 날이 찾아오면 바람에 나풀거리는 원피스를 찾게 된다. 마음에 쏙 드는 원피스를 찾는 여정이 돌아왔다고 내 등을 노크하는 것이다. 내 키와 체형을 고려하고 생활 습관이나 자주 가는 장소도 생각해서 머릿속에 옷을 그린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면 알고 있는 모든 곳을 탐방하며 옷을 본다. 조급한 마음에 종종걸음이 되더라도 소재를 만져보고, 입어도 보고, 정말 마음에 드는 게 아니라면 내려놓고 끈기 있게 기다리는 마음도 필요하다. 

 

- 이번 해엔 그렇게 끈질긴 탐정의 나날 끝에 운 좋게 린넨과 면이 혼합된 오렌지색 원피스를 샀다. 그 원피스는 화창한 날에는 길을 따라 줄지어 서 있는 나무들의 그림자와 아주 잘 어우러졌고, 땀이 나더라도 원피스를 입기 위해 밖에 나가고 싶게 했다. 좋은 옷을 입고 걸으면 나에게서 맑고 청명한 실로폰 소리가 난다. 옷이라는 아름다운 풍치가 마음을 즐겁게 하고 기력 없는 삶을 춤추게 한다. 낡은 실로폰의 녹을 기름으로 닦아내어 다시 선명한 색을 찾아주는 것처럼. 

 

- 지금도 길을 걷다가 한 번씩 눈을 감고 멈춰 설 때가 있다. 지금 있는 곳의 소리를 잘 듣기 위해서다. 특정한 자연 공간에서 형성되어 존재하는 환경 소음을 오디오 용어로 '엠비언스(Ambiance)'라고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어느 가을 누하동의 한적한 거리를 걷고 있었다 치자. 차 지나가는 소리, 잔잔히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에 나뭇잎이 지분거리는 소리, 조근조근한 말소리 등 그 공간을 이루는 모든 소리가 만든 특정한 소음이 누하동 풍경의 환경음이다. 만약 내가 있는 곳이 숲 속이라면 풍성한 바람 소리와 새의 지저귐, 풀벌레 우는 소리, 무수히 많은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가 동시에 엠비언스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 이런 청각적인 공간감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불면의 밤에 잠드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 영상에서 청각적인 요소는 공간에 입체성을 부여하고 장면을 강조하거나 부연해 주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내 졸업 작품 애니메이션에는 배경으로 바다가 8할 정도 등장했다. 실제 자연의 소리를 채집해 넣어 풍부한 공간감을 만들고 싶어서 학교 장비를 대여해 바다 소리를 따러 강릉에 갔다. 그때 내가 강원도까지 들고 간 장비는 영화 <봄날의 간다>에서 유지태가 사용하던 녹음 장비와 비슷한 것들이었다. 막대처럼 생긴 콘덴서 마이크에 윈드 실드라고 하는 털옷을 입히는데, 윈드실드는 바람이 마이크와 마찰하면서 나는 잡음을 방지해 줘서 야외 녹음 때 꼭 필요한 존재다.

 

- 긴 스탠드봉에 털옷을 입힌 마이크를 설치한 후 바다를 향해 가만히 들고 서 있으면 마이크를 통해 들어온 선명한 소리가 헤드셋을 거쳐 디지털 녹음기에 녹음되는 동시에 내 귓속으로 흘러들어왔다. 헤드셋을 쓰고 눈을 감고 있으면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바다만 있는 듯한 착각을 주었다.

 

- 마이크를 먼바다를 향해 들기도 하고 발치에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에 가까이 대기도 하며 녹음을 했다. 먼 소리와 가까운 소리를 그림에 적절하게 맞춰 넣기 위해서였다. 

 

- 아침과 오후, 밤으로 나눠서 녹음해보기도 하며 이틀 내내 바다 옆을 서성이며 걷고 또 걸었다. 분명 바다의 소리는 시간의 틈으로 들어온 소금의 짠 내음과 눈이 시리게 시원한 푸른빛의 무게를 다르게 가지고 있었다. 무거운 장비를 먼 곳까지 들고 가느라 고생스러웠지만, 그 덕분에 내 그림 속 바다는 아주 입체적이게 되었다. 채집해 온 바다 소리를 틀어놓고 침대에 누워 있으면 내 몸이 바닷가로 옮겨져 기차를 타지 않고도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 덧붙이자면 그 작품에 들어간 소리는 대부분 직접 만들었다. 예를 들어 옷깃이 스치는 소리나 조개껍데기들이 부딪혀 잘그락거리는 소리 같은 것들을 녹음 스튜디오에서 만들어냈다. 전문용어로 이것을 폴리(Foley)라고 한다. 그때는 사운드를 디자인하는 과정에 재미를 느껴 꽤 진심으로 소리를 얻고 만들고 하는 일에 푹 빠져들었다. 미술관의 넓은 실내에서 벽에만 그림이 걸려 있고 가운데는 텅 비어 있을 때 맴도는 공허한 공간음, 반대로 물건으로 꽉 찬 누군가의 아파트 거실에 앉아 있을 때 들리는 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 바깥 놀이터에서 생긴 온갖 소리가 집 안으로 들어오는 그 느낌을 대조하며 즐거워했다. 사운드를 알고 나니 보이지 않는 세상의 귀가 열린 것 같았다. 

 

- 오늘 만들었던 추억을 접어 서랍에 넣습니다. 조우했던 순간들을 베개 위에서 다시 돌이켜봅니다. 밖에서 받았던 상처도 집 안에서 따뜻한 저녁을 맞이하며 자연스레 잊어버리기를. 한나절 나를 기다리며 부지런히 말라갔을 빨래를 개며 섬유유연제의 향기에 얼굴을 묻고 평화를 느낍니다. 이불 안에서 불현듯 고독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 또한 계절과 함께 스쳐가리라 생각합니다. 집이 가진 치유의 능력을 그 어느 때보다도 믿게 하는 날들입니다. 나는 오늘도 나의 집에서 나의 고양이와 함께 삶에서 발견했던 이름 모를 정서들을 수집하고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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