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출판 : 현대문학
출간 : 2012.07.31
<인격전이의 살인>에서 '매스커레이드'라는 단어를, <외사랑>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를 연결시켰던 모양이다. 불현듯 이 시리즈가 끌려서 지난주 <매스커레이드 호텔>, <매스커레이드 이브>, <매스커레이드 나이트>, 그리고 <매스커레이드 게임>까지 한 번에 달렸다. 이런 식으로 하나의 시리즈를 연이어 읽으면 이전작에서 다음작으로 연결된 곳들이 선명하게 보여서 좋다.
<매스커레이드> 시리즈의 경우 실제 발표는 상당히 긴 시간에 걸쳐 이루어졌지만, 캐릭터들의 변화가 유기적이면서도 충분한 설득력이 있어서 좋았다. 물론 언제나 한결같은 캐릭터라서 매력적일 때도 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가는 '호텔'이라는 곳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였기에 등장인물들 역시 시간과 경험에 따라 변화 -또는 성장-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쪽이 더 적절했다고 본다.
<매스커레이드 호텔>은 시리즈의 주인공들인 닛타 고스케와 야마시기 나오미, 그리고 노세가 등장하는 첫 이야기이자 작중 시간 순으로는 두 번째 이야기이다. 연쇄살인을 수사하던 경찰은 이 사건이 '예고 살인'이라는 단서를 발견하고, 그 단서를 통해 다음 살인의 장소가 코르테시아도쿄라는 고급호텔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범인도, 피해자도 특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수사관들은 직접 호텔에서 근무하며 잠복 수사를 진행하기로 결정하는데...
유능한 호텔리어로서의 자부심과 가치관, 엘리트 수사관로서의 자부심과 가치관이 선명하게 대립되는 순간이 잘 그려져 있다. 그러면서도 서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협조하고 또 설득하는 장면들이 아주 매력적이었다.
이 시리즈는 '본격'이나 '전형적' 추리 소설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사전에 제공된 단서로는 사건이 완벽히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매스커레이드 호텔>은 가장 처음에 발표되었던 만큼 어느 정도는 본격의 형태를 보이지만, 이후 발표되는 작품들, 특히 <매스커레이드 게임>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범인이나 사건에 관한 추리보다는 사회적(보편적), 개인적 윤리관에 관한 내용이 핵심이다. 해서 추리소설적인 재미를 원하시는 경우에는 잘 맞지 않으실 수도 있겠다.
내 경우에는 '닛타 고스케'라는 인물의 변화와 '야마가시 나오미'라는 인물의 신념이 상당히 매력적이라 상당히 즐겁게 읽었다.
(몰아서 읽을 때는 좋았는데, 발췌를 정리하고 리뷰를 써야하는 시점에서는 네 권이라는 분량이 조금 버겁기는 하다. 각각의 이야기들이 기본적으로는 완전히 독립된 이야기들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럼, '호텔'은 여기까지.
- 전화가 울렸다. 내선 전화였다. 16층 엘리베이터 홀에 설치된 관내 전화에서 걸려온 것이었다.
- 야마기시 나오미는 뭔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조금 전에 한 남자 손님이 체크인 수속을 마치고 올라갔다. 그 손님에게 내준 객실이 16층 싱글룸이었다. 벨보이 마치다가 손님의 짐을 들고 방을 안내하러 올라간 게 불과 오륙 분 전이다. 마치다는 입사 1년 차 새내기 직원이었다. 혹시 무슨 실수라도 했나 하고 걱정이 되었다.
- "담배 냄새가 난대요. 금연실이라더니 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나오미는 곁에 있는 단말기를 검색해 보았다. 화면에 1615호실의 데이터가 표시되었다. 분명 금연실이고 청소도 틀림없이 마쳤다. 지금까지 그 방에서 담배 냄새가 났다는 기록은 없었다.
"알았어요. 손님은?"
"1615호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라고 했어요."
"그럼 마치다 씨도 그 방에 가서 함께 기다려요. 내가 바로 갈 테니까."
- 전화를 끊은 뒤에 나오미는 다시 단말기를 두드렸다. 이번에는 투숙객의 데이터를 확인했다. 오사카에서 온 회사원이었다. 일주일 전에 예약이 들어왔다. 금연실, 창문이 큰길 쪽으로 나지 않은 곳, 되도록이면 모퉁이 방 등의 요구 내용이 적혀 있었다. 체크인 때 응대에 나선 건 나오미 자신이었지만 딱히 성격이 비뚤어져 보이는 인상은 아니었다.
- "아무래도 이상해요. 처음 방에 안내해 드렸을 때는 분명 냄새 같은 건 없었어요. 근데 엘리베이터 홀에서 전화하고 돌아왔더니..."
"그랬더니 담배 냄새가?"
예에, 라면서 영 미심쩍다는 얼굴로 마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가와모토 씨가 지금 다른 방을 찾고 있으니까 마치다 씨는 프런트에 가봐요."
"네, 알겠습니다."
- 나오미는 우선 머리부터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방에서 냄새가 난다고 하셨습니까?"
중년 남자는 턱을 쓱 내밀며 방 안을 가리켰다.
"뭐, 들어와서 맡아보시든지."
- 실례합니다,라고 말하고 나오미는 방 안에 발을 들였다. 일부러 후각을 작동할 것도 없이 곧바로 이변을 깨달았다. 분명 담배 냄새였다. 단, 방 안에 밴 담뱃진 냄새는 아니었다. 불을 붙인 담배 끝에서 피어오른 연기, 이른바 부류연 냄새였다. 아마도 마치다의 의심이 맞을 것이다. 그가 프런트에 전화하는 사이에 이 남자 손님은 몰래 숨겨 온 담배에 불을 붙인 것이다.
- 나오미는 다시금 머리를 숙였다.
"불쾌하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즉시 다른 방을 준비하겠습니다. 잠깐 전화 좀 해도 괜찮을까요?"
"그래요, 빨리 좀 해주쇼."
- "객실 상황, 어때요?" 나오미가 물었다.
"같은 층이라면 1610호실, 1612호실이 비어 있어요. 둘 다 금연실이고 다른 조건들도 맞습니다."
나오미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거긴 둘 다 싱글룸이다. 일부러 클레임을 걸어올 정도의 손님인데 그런 방으로 안내해 봤자 별 의미가 없다.
- "이 방이면 될까요? 아마 냄새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남자는 냄새를 맡아보는 척하더니 나오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방을 써도 되겠어요? 미리 말하지만, 추가 요금은 못 내요."
나오미는 손을 내저었다. "물론 요금은 원래대로 내시면 됩니다. 저희의 불찰로 불쾌하셨던 점, 깊이 사과드립니다."
"뭐, 앞으로는 조심하면 되죠." 남자는 눈썹 옆을 긁적이고 있었다. 어쩐지 뒤가 켕기는 눈치였다.
- "진짜 화가 나네요. 감쪽같이 저 사람 작전에 걸려든 꼴이잖아요." 엘리베이터 홀로 향하는 중에 마치다가 말했다. "틀림없이 손님이 담뱃불을 붙인 거예요. 괜히 시비를 걸어서 좀 더 좋은 방에 묵으려는 속셈이에요."
"증거도 없이 함부로 그런 말 하는 거 아냐. 손님은 항상 옳다. 마치다 씨도 배웠죠?"
"하지만 스위트룸은 너무해요." 마치다가 입술을 툭 내밀었다. "트윈이나 디럭스 트윈이라도 괜찮다고 했을 텐데."
"만일 괜찮다고 하지 않으면? 자꾸 트집을 잡아서 결국 이 방 저 방 다 보여주고 다니게 되면 그게 더 번거롭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예전에 선배에게 배운 게 있어요. 손님하고 쓸데없는 힘겨루기는 하지 말 것."
"네에..." 마치다는 여전히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런 말도 안 되는..." 나오미는 저절로 피식 웃음이 터졌다. 섣부른 농담처럼 나온 제안이 틀림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타오카와 후지키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을 보고 그녀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경찰이 정말로 그렇게 하겠다는 건가요?"
"정말로 하려는 것 같아." 가타오카가 대답했다.
- "우선 좀 여쭤볼 게 있어요." 그녀는 가타오카에게 시선을 돌렸다. "잠입 수사관은 호텔 근무 경험이 있는 사람이에요?"
가타오카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경험이 있을 리 없지. 완전 초짜야."
"잠입할 수사관은 몇 명이죠?"
"우선은 다섯 명, 상황에 따라 늘어날 가능성도 있어. 프런트에 한 명, 벨 데스크에 한 명, 하우스키핑팀에 세 명이야."
옆에서 벨 캡틴 스기시타가 등을 바짝 세우며 긴장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쪽의 담당 분야가 언급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만큼 말했으니 이제 어떤 상황인지 알겠지?"
-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런 구도에 이미 익숙해져 있어. 그것이 현실이지. 그러니 그걸 역이용해서 이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든 극복하자는 거야. 다른 것도 아니고 우리 호텔을 이용하는 고객들을 위한 일이야. 우리 호텔 유니폼만 걸쳤을 뿐 호텔 업무는 전혀 모르는 형사가 로열 스위트룸 안내를 혼자 떠맡고 나선다면 자네는 아무렇지도 않겠나?"
- 나오미는 스기시타를 비롯한 다른 직원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이미 포기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들로서도 갑작스럽게 초짜를 받아들인다는 게 힘겨운 일이겠지만 그래도 프런트 오피스만큼 심한 것은 아니다. 나오미는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는 사람이 자기 자신임을 깨달았다.
- 상사 둘이 나서서 이렇게까지 말해주니 더 이상의 불평은 할 수 없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하지 말고 자기 선에서 최선을 다해 일을 처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이나가키 씨, 조금 전에 말씀드린 우리 직원들입니다. 사정은 대략 설명했어요. 세 사람 모두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이것 참 고맙네요 라고 이나가키 계장은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
"무리한 제안을 받아줘서 고맙습니다. 여러분께 적잖이 부담이 되겠습니다만 흉악한 범죄를 방지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니 부디 협조 부탁드립니다."
나지막하지만 또렷한 목소리였다. 말투는 공손해도 가타부타할 수 없게 만드는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있었다. 나오미 일행은 아무 말 없이 고개 숙여 인사만 건넸다.
- 탈의실에서 누군가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닛타 고스케가 프런트 직원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나타났다.
"기본적으로 정장과 똑같아서 다행이네. 벨보이라고 했나, 그 장난감 병정 같은 유니폼이라면 나한테는 도저히 무리였을 텐데."
친한 척하는 말투였다.
"와이셔츠 첫 단추." 나오미는 그의 목깃을 가리켰다. "확실하게 채워주세요. 넥타이는 느슨해지지 않도록 하시고요. 머리 모양도 단정하게 다듬으셔야 해요. 지하 1층에 이발소가 있어요. 직원 헤어스타일이라고 말하면 알 겁니다."
닛타는 바지 호주머니에 양손을 찌르고 어깨를 한 차례 으쓱했다. "머리 긴 호텔리어도 있잖아요?”
나오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우리 호텔에 그런 직원은 없어요. 호주머니에 양손을 찌른 채로 이야기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닛타 씨도 이제부터는 우리 규칙에 따라주세요."
닛타는 고개를 쓱 돌리며 콧등에 주름을 잡았다.
"와이셔츠 첫 단추, 얼른 채우세요."
"아, 네네."
그가 부루퉁한 얼굴로 단추를 채우는 것을 보며 나오미는 한차례 심호흡을 했다.
- "자세가 좋지 않아요. 우선 그것부터 고치세요. 그리고 걸음걸이도."
"아, 미안한데요, 나는 원래 태어나면서부터 이렇게 걸었어요. 오른쪽 다리, 왼쪽 다리, 번갈아 내미는 이 방식으로.”
"트레이닝을 받으셔야겠네요. 복도로 나오세요." 나오미는 문으로 향하려고 했다. 하지만 닛타가 따라오지 않는 것을 깨닫고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왜 그러시죠?"
닛타가 머리를 긁적이며 다가왔다.
"야마기시 씨라고 했던가? 당신, 뭔가 오해하고 있는 거 같은데요."
"내가 뭘 오해하고 있죠?"
"내가 이 호텔에 온 건 살인 사건을 막기 위해서지 호텔리어 교육을 받는 게 목적이 아니라고요."
"네, 알고 있어요."
"그럼 내 헤어스타일이나 걸음걸이 따위는 상관없잖아요? 어차피 실제 업무는 당신들이 할 텐데. 난 그냥 프런트에서 투숙객을 눈 반짝이며 지켜보는 걸로 충분해요. 나를 진짜 호텔리어로 만들어달라고 아무도 부탁한 적 없다고요."
나오미는 큰소리가 터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침을 꿀꺽 삼키고 한 호흡 쉬었다가 상대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지금 그 상태로 프런트에 나가면 저희 호텔뿐만 아니라 경시청에도 별로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올 텐데요."
"왜요?"
"어디를 보건 닛타 씨는 호텔리어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에요. 옷차림이 단정하지 못한 데다 시건방진 태도를 보이는 호텔리어는 저희 같은 일류 호텔에는 없으니까요. 나는 경찰 수사에 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만일 내가 범죄자여서 경찰이라는 존재에 누구보다 예민해져 있다면 가장 먼저 당신부터 의심할 거예요. 그리고 범죄자가 아니고 일반 투숙객이라고 해도 당신 같은 직원이 프런트에서 있는 호텔 따위, 절대로 이용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걸요?"
닛타가 눈을 부릅떴다. 나아가 이를 드러내며 반격할 듯한 기척을 보였다. 하지만 그전에 나오미는 말을 이었다.
"범인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면 내 지시에 따라주세요. 그것도 못하시겠다면 부디 이번의 별난 수사는 단념하시고요. 자, 어떻게 하실래요?"
- "너무 시시콜콜하게 지적하면 나도 힘들다고요. 어차피 난 호텔리어가 아니라 형사잖아요."
"네, 굳이 말씀하시지 않아도 지금의 닛타 씨는 어디를 보건 형사로밖에는 보이지 않아요. 어디를 보건 호텔리어로 보이게 하려면 시시콜콜한 지적이 중요하죠. 자, 저를 따라오세요."
나오미가 다시 문으로 향하자 닛타는 머리를 긁적이며 따라왔다.
- "첫인사 하자마자 맨 먼저 뭘 시켰는지 알아? 서 있는 자세와 걸음걸이 레슨이야. 자세가 좋지 않다느니 몸이 한쪽으로 삐딱하다느니, 아무튼 잔소리가 보통이 아니야. 그게 끝나니까 이번에는 인사하는 방법과 말투를 교정하래. 유치원이야, 여기? 게다가 이발소에 다녀오라는 거야. 자기가 무슨 대단한 선생님인 줄 아는 모양이야."
세키네는 입가를 슬쩍 가렸지만 눈은 웃고 있었다.
"야마기시 씨는 프런트 직원 중에서도 꽤 우수한 직원이라던데요. 그런 만큼 신입 사원 교육도 엄격하게 한대요."
"그 여자, 분명 독신일 거야. 틀림없어." 닛타는 단언했다. "어리게 꾸미고 있지만 아마 서른 넘었을걸. 사귀는 남자가 없으니 얼굴 표정에도 마음속에도 윤기가 없지. 그런 여자하고 앞으로 계속 함께 있어야 하다니, 진짜 우울해진다."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지나가던 샐러리맨인 듯한 남자가 흘끔 시선을 던졌다.
"그래요? 미녀와 한팀이어서 나는 엄청 부러웠는데."
"세키네, 그런 여자 좋아하는구나. 뭐, 언제든지 바꿔줄게. 근데 나는 장난감 병정 노릇만은 절대 못하겠다."
"장난감 병정이라뇨?"
"아, 아무것도 아냐. 근데 왜 나를 찾았어?"
- 주말인 탓인지 커플이며 가족 동반 손님이 주로 눈에 띄었지만 역시 비즈니스맨 풍의 남자가 많았다. 국제공항을 왕복하는 리무진 버스 터미널이 바로 근처라서 외국인 손님도 심심찮게 눈에 들어왔다. 바로 옆에서 영어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전하네,라는 뜻이었다. 금발에 키가 큰 남자가 서 있었다. 짐 가방을 끌고 있었다.
"여전하다고요?" 닛타가 영어로 물었다. 금발의 남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항상 똑같은 항공편을 이용하는데, 이 시간에 도착해서 곧바로 체크인할 수 있었던 적이 없어요. 특히 금요일은 언제나 이 모양이죠."
"그렇습니까?"
금발의 남자는 의아하다는 듯 닛타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그런 줄 몰랐어요?"
"죄송합니다. 아직 신입 사원이라서요. 오늘은 견학을 하는 중입니다."
"그랬군요. 좋은 호텔에 취직한 거, 축하해요. 내가 이용하는 호텔 중에서도 이곳은 베스트 파이브에 들거든요."
"고맙습니다."
"그럼 열심히 해봐요. 나도 열심히 줄을 설 테니까요."
그러면서 남자는 짐 가방을 끌고 사람들이 서 있는 줄 끝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외국인 손님의 뒷모습을 배웅하면서 닛타는 저절로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베스트 파이브에 드는 호텔,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지만 아무튼 기분 나쁜 말은 아니었다.
- "내가 지금 몹시 급하다고 6시에 여기 일식 레스토랑에서 거래처 사람을 만나기로 약속했어. 그러니 그전에 체크인을 해야 할 거 아냐."
닛타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6시 오 분 전이었다.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다가는 약속한 6시에 맞출 수 없을 것이다. "식사하신 다음에 체크인 수속을 하시면 어떨까요?" 닛타는 은근슬쩍 말해보았다.
"먼저 체크인을 하지 않으면 식사 대금을 숙박비에 포함시킬 수가 없잖아. 나도 이래저래 사정이 있다고. 빨리 좀 처리해 줘."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다른 손님들도 지금 줄을 서 계시잖습니까."
"내가 이 호텔을 얼마나 자주 이용하는지 알아?" 남자의 목소리에 위압감이 담겼다. "이번에도 이그제큐티브룸을 예약했어."
"아뇨, 그런 건 관계없습니다. 댁만, 아니, 손님만 특별 대우를 해드릴 수는 없어요 나이도 지긋하신 분이니 그 정도는 아실 텐데요?"
뚱뚱한 남자는 눈을 부릅뜨며 닛타를 올려다보았다.
"뭐야, 그 말투는 지금 손님을 뭘로 보는 거야?"
"아무리 손님이라도 규칙을 무시해도 괜찮은 건 아니..."
손님이라는 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가 닛타 왼편에서 쓰윽 나타났다. 다음 순간, 닛타의 눈앞을 가로막은 야마기시 나오미의 등이 보였다.
"무슨 일이신지요?"
- "그 손님은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서둘러 체크인을 하고 싶은데 그렇게 안 되니까 어떻게든 해결해 달라고 요구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래도 다른 손님들은 얌전히 줄을 서서 기다렸잖아요. 불평하는 손님만 특별 대우를 해주는 건 문제가 있죠. 아무리 손님이라도 옳지 않은 건 옳지 않다고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 "닛타 씨에게 좀 물어볼게요. 경찰관이 하는 일은 나쁜 사람을 단속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어떤 행위가 옳은지 나쁜지는 어떻게 결정해요?"
닛타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슨 뜻으로 하는 질문인지 모르겠네. 옳은 것과 나쁜 것은 정상적으로 자란 사람이라면 상식적으로 다 알죠."
야마기시 나오미는 새침하게 턱을 치켜들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럼 다시 물어볼까요? 전에는 운전 중에 핸드폰을 사용해도 단속하지 않았는데 요즘에는 달라요. 뒷좌석 안전벨트도 그렇죠, 전에는 매지 않아도 괜찮았어요. 나쁘지 않았던 일이 어느새 나쁜 일로 바뀌었죠. 그거 이상하지 않은가요?"
"그건 궤변이죠. 바뀐 것은 법률입니다. 규칙이 바뀐 거라고요. 그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 나쁜 일이라는 얘기예요."
"그러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네요. 경찰관은 규칙이 지켜지느냐 마느냐로 옳은지 나쁜지를 판단한다? 어때요, 맞아요?"
"뭐, 그렇겠죠." 닛타는 콧잔등 옆을 긁적였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우리 호텔리어도 규칙이 무엇보다 소중해요."
"그럼 왜 조금 전 그 손님은 규칙을 지키지 않은 거죠? 늦게 온 사람이 잘못한 거니까 자기 차례가 될 때까지 줄을 서는 게 규칙이잖아요."
하지만 야마기시 나오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호텔에 그런 규칙은 없어요."
"뭐요?"
"규칙은 손님이 정해요. 예전에 프로야구에서 자신이 '룰북'이라고 공언한 심판이 있었다는데, 그런 거예요. 손님이 곧 룰북이죠. 그러니까 손님이 룰을 위반하는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우리는 손님의 룰에 따라야 해요. 반드시."
- "손님은 왕이다, 절대로 뜻을 거스르면 안 된다. 하지만 손님들의 이기적인 요구까지 다 들어주면 한이 없어요. 너도나도 자기 편한 대로 해달라고 덤비면 수습할 수가 없겠죠."
"그걸 어떻게든 해결해 드리는 게 우리 일이에요. 모든 손님들이 기품 있고 이성적이고 인내심 강한 분들이라면 호텔리어처럼 편한 일도 없겠죠."
닛타는 다시 말문이 막혔다.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참으로 훌륭한 마음가짐이기는 한데,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닛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게 바로 호텔입니다."
- "닛타 씨, 호텔리어로 위장한다고 해도 딱히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구가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기본은 고객의 기분을 쾌적하게 해 드린다는 거예요. 호텔리어가 옷차림이나 말투에 신경을 쓰는 것도 그 때문이죠. 자신이 한 말에 누군가 반론을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쾌하게 생각해요. 그래서 호텔리어는 고객에게 반론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무엇이든 손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건 아니에요."
- "방금도 말했듯이 고객의 기분을 쾌적하게 해 드리는 게 첫 번째예요. 거꾸로 말해 그것만 충족되면 반드시 손님이 시키는 대로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죠."
"그게 뭐죠? 마치 선문답 같군요."
"야마기시와 함께 일하다 보면 곧 알게 될 겁니다. 그녀는 아주 우수한 호텔리어니까요."
- 그나저나 정말 별별 손님들이 다 있다고 닛타는 느꼈다. 같은 비즈니스맨이라고 해도 저마다 분위기는 천차만별이었다. 명품 옷과 액세서리로 한껏 멋을 낸 사람이 있는가 하면 후줄근한 양복과 가방처럼 얼굴 표정까지 녹초가 된 사람도 있었다. 호텔리어를 건방진 말투로 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묘하게 쩔쩔매며 비굴하게 구는 사람도 있었다.
- 남자가 숙박부에 서명하는 동안에 가와모토는 작은 소리로 야마기시 나오미에게 디포짓, 즉 보증금을 요구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야마기시 나오미는 필요 없다고 그 자리에서 짧게 답했다.
- 손님의 발길이 뜸해졌을 때, 디포짓을 받지 않은 것에 대해 야마기시 나오미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이유는 간단해요. 틀림없이 거절할 것 같아서." 그녀는 시원스레 대답했다.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그때 다른 손님들도 체크인 수속 중이셨어요. 공연히 말이 길어지면 그분들이 불쾌하시겠죠. 뒤에서 기다리는 손님들께도 폐를 끼칠 거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대응하는 것도 호텔리어가 갖춰야 할 덕목이에요."
"물론 그 남자라면 디포짓은 못 내겠다고 했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절차를 무시하는 건 좀 그렇잖아요? 아무리 손님이 룰북이라도 받아야 할 돈을 받지 않는 건 이상하죠. 손님이 떼를 쓰는 대로 다 들어주다가 혹시 숙박비를 못 내겠다고 하면 어쩔 겁니까?"
이 물음에 대한 그녀의 대답은 명쾌했다.
"요금을 내지 않는 분은 손님이 아니에요. 따라서 그분의 룰에 따를 필요도 없어요. 우리는 절차에 따라 대응합니다. 먼저 요금을 지불하시도록 설득하고 그게 여의치 않을 때는 경찰에 신고해요."
"그렇다면 디포짓도?"
"디포짓은 단순한 보증금이에요. 미리 받지 않아도 다른 형태로 지불이 보장되면 문제는 없어요."
"다른 형태라는 건 뭔데요?"
"경험에 의한 감이죠." 야마기시 나오미는 가슴을 당당하게 내밀었다. "닛타 씨도 형사로서 감이 작동하는 일이 있죠? 그거 하고 똑같아요. 나는 아까 그 손님이 스키퍼는 아니라고 판단했어요."
- "숙박비를 내지 않고 사라지는 사람을 스키퍼라고 해요."
"아하, 그렇군. 그나저나 자신만만하시네요. 근거는요?"
"유난히 눈에 띄는 분이었거든요." 그녀는 딱 잘라 대답했다. "자신의 존재를 주위에 어필하고 있었어요. 그런 분은 스키퍼 짓은 못해요."
- "지금까지의 범행 수법으로 보면 범인은 상당히 대담한 놈이에요. 목격자가 여러 명 나올 만한 위험한 곳에서 범행을 해치웠어요. 이번에도 범인은 그런 자신의 강한 운에 모험을 걸어볼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나가키가 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 오자키의 날카로운 눈빛이 닛타와 세키네에게로 날아왔다. "우리도 자네들에게 모험을 걸어보는 수밖에 없어."
- "닛타 씨 말인가요?"
"물론 그렇지. 솔직하게 대답해 봐."
나오미는 일단 시선을 떨어뜨린 뒤에 다시 고개를 들어 후지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분을 호텔리어로 만들어내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손님에 대한 서비스를 그분에게 맡기는 건 위험합니다."
- "그건 닛타 형사라서 그런가? 아니면 형사들에게는 애초에 무리한 일이라는 건가?"
나오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건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형사들 중에도 적임자가 있을 수 있겠지요. 다만 닛타 씨와 함께 움직이면서, 이 사람들과 우리는 가치관이나 인간관이 전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건 어떤 점에서?"
"모든 점에서 그렇습니다. 저는 호텔 업계에 처음 들어왔을 때, 항상 감사의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배웠어요. 고객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있으면 정확한 응대나 대화, 예의 웃음 등은 따로 훈련받지 않더라도 몸에서 배어 나오기 때문이죠."
- "근데 그분은... 아뇨, 아마 형사라는 분들은 일단 남을 의심하고 보는 것 같아요.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짓을 하려는 게 아닌가, 무슨 딴 속셈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식으로 항상 눈을 번득이고 있어요. 하긴 당연한 일이죠. 그게 직업이니까요. 하지만 모든 사람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분께 고객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해봤자 소용없는 일이겠지요."
"그도 그렇군. 맞는 말이야." 후지키는 다쿠라와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벨 캡틴 스기시타에게도 어떠냐고 물어봤어." 다쿠라가 나오미에게 말했다. "벨보이 역할을 맡은 형사, 세키네 씨라고 했나, 아무튼 그 사람은 어떠냐고 물어봤지. 스기시타의 말로는, 부지런하고 싹싹해서 나쁘지 않은데 눈초리가 영 좋지 않다는 거야. 특히 고객의 얼굴이나 옷차림을 흘끔흘끔 쳐다보는 버릇이 있다더군. 일종의 직업병이겠지."
- "경찰 쪽 설명으로는 수사관 중에서 그나마 기품 있는 인재를 선정했다고 하던데, 흠."
"그건 맞는 얘기일 겁니다." 다쿠라가 말했다. "아까 오후부터 수사관 몇 명이 로비와 라운지에서 잠복근무를 시작했는데, 정말 하나같이 무섭고 강한 인상이어서 닛타 씨와 세키네 씨는 그나마 나은 편이더군요."
- "맞아, 그걸 자네에게 말해줄 수는 없어. 그건 자네를 위한 일이기도 해."
"저를 위한 일요?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자세한 얘기는 할 수 없지만 이번 연쇄살인범은 현장에 기묘한 메시지를 남겼다는 거야. 처음에는 경찰에서도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는데 결국 해독해 냈어. 그 결과, 다음 범행 현장이 우리 호텔이라는 게 판명된 거야. 이건 기밀 사항이라서 언론에도 발표되지 않았어. 만일 이 일이 외부로 새어나가 범인이 눈치를 채면 어떻게 되는가. 아마도 범인은 이 호텔에서 계획한 범행을 중지하겠지. 그렇게 되면 경찰은 범인을 체포할 길이 없게 돼 현재 경찰이 갖고 있는 단서는 그 메시지뿐이니까 말이야."
"그럼 범인을 유인하기 위해 그 메시지를 해독해 냈다는 사실을 비밀로 하는 건가요?"
"그렇지. 하지만 여기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그런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실제로 살인 사건이 발생해 버렸을 경우야, 우리 호텔은 피해자 유족은 물론이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큰 비난을 받겠지. 우리 호텔을 노린다는 것을 다 알면서 왜 그것을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았느냐고 말이야. 솔직히 말하면 처음 경찰에서 이 문제를 상의해 왔을 때, 모두 발표해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었어. 물론 그렇게 되면 당분간 고객의 발길이 끊길 거라는 점도 각오했지. 하지만 방금도 말했듯이 우리가 그걸 발표해 버리면 경찰이 범인을 체포할 기회를 잃게 돼. 나아가 범인은 또 다른 곳에서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어. 우리 호텔 손님이 무사하다고 그걸로 끝날 일이 아니더란 말이야. 그래서 나도 고민이 많았네."
- 후지키의 말이 나오미의 가슴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가 자신의 이익만을 우선하는 사람이 아니라 항상 사회적 책임을 의식하는 인물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고민을 거듭한 결과, 수사에 협조하는 길을 택하신 거군요."
"그렇지. 손님의 안전은 반드시 지켜주겠다는 경찰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어. 하지만 우리로서는 최악의 사태도 고려할 필요가 있어. 만일 살인 사건이 터져버린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 세상사람들이나 여론은 우리가 어디서 어디까지 파악하고 있었는지 추궁할 거야. 그럴 경우 자세한 내용을 알고 있었던 건 극히 일부 관계자뿐이라는 게 밝혀지면 호텔이 입을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어. 그리고 그 일부 관계자들만 책임을 지면 되는 거야."
나오미는 흠칫해서 후지키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다쿠라에게 시선을 옮겼다. 두 사람 모두 온화한 표정이었지만 눈에는 굳은 결의의 빛이 서려 있었다.
- "잘 알겠습니다. 더 이상 이 일에 관한 질문은 하지 않겠습니다. 총지배인님의 깊은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나오미는 고개를 숙였다.
"아니, 사과할 일은 아니지. 자, 내일도 힘들 텐데 오늘은 돌아가서 푹 쉬도록 해요."
- 총지배인실을 뒤로하고 쥐 죽은 듯 고요한 복도를 걸으면서 나오미는 먼 옛날 일을 떠올렸다. 대학 입시를 위해 도쿄에 올라와 이 호텔에 머물렀을 때다. 그때까지 고급 호텔을 이용해 본 일이라고는 한 번도 없었다. 기왕이면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보려고 이 호텔로 정했던 것이다.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 눈부시게 화려한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이호텔은 최상류 층들이 모이는 곳이고 자신 같은 여학생이 찾아올 곳은 아니라고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 무엇보다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호텔 직원들의 경쾌한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당황하지 않고 능숙하게 문제를 처리해 나가는 모습은 프로페셔널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는 것 같았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외국인 손님을 대하는 프런트 직원의 모습이었다. 어떤 트러블이 있었던 모양인데, 그는 결코 당황하는 일 없이 유창한 영어로 끈기 있게 설명을 계속하고 있었다. 뭔가 못마땅한 기색이던 외국인 손님은 어느새 웃음을 보였고, 마지막에는 감사의 말을 건네며 그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그 프런트 직원은 딱히 안도하는 표정을 짓는 일도 없이 담담하게 다음 손님을 맞이했다. 자신감이 뒷받침된 평정이라고 느꼈다.
- 그때 나오미는 이 호텔에서 이틀 밤을 묵었다. 이틀 연달아 시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험 첫날, 그녀는 시험장에 도착한 뒤에야 작은 물건 하나를 깜빡 잊고 온 것을 알았다. 어머니가 건네준 합격 기원 부적을 호텔 방 탁자에 놓아둔 채 오고 만 것이다. 뭐, 괜찮아,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딱히 간절한 정성이 담긴 물건도 아니고 애초에 신에게 매달릴 마음도 없었다.
- 그런데 시험이 시작되기 직전에 시험장 담당자가 다가와 나오미에게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호텔 직원이 가져다준 것이라고 했다. 안에는 부적과 메모지가 들어 있었다. 메모지에는 '소중한 물건인 것 같아 전해드립니다. 시험 잘 치르시기를 빕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 큰 감동과 함께 의아한 마음도 들었다. 어느 대학에서 시험을 치르는지, 호텔 사람에게 말한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대학에 문의했더라도 가르쳐주지 않았을 터였다.
- 시험이 끝나고 호텔로 돌아왔다. 그러자 프런트 직원이 웃음을 지으며 "어서 오십시오. 잊으신 물건은 무사히 받아보셨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녀는 당황하면서 네,라고 대답했다. 다행이라고 프런트 직원은 하얀 이를 내보이며 웃었다.
- 방은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다. 침대 시트는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하고 욕실에는 물방울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수건도 새것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반면 나오미가 두고 간 옷이며 책 등에는 최대한 손을 대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그런데도 그 호텔 직원이 말하길, 부적을 잊고 간 것 때문에 혹시라도 따님이 불길하다고 느낀다면 너무 딱하다는 거야.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아서 시험 장소와 수험번호를 알려줬어. 얘, 호텔에 돌아와서 인사는 했니?"
아차, 하고 수화기를 든 채 가만히 부르짖었다. "깜빡했네."
엄마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 네가 아직 어린애라는 소리를 듣는 거야. 지금이라도 가서 꼭 고맙다고 인사해. 얘, 그나저나 시험은 잘 치렀어?"
- 우두커니 서버렸다. 누구에게 인사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부적을 발견한 사람은 방을 청소한 직원일 것이다. 하지만 집에 전화한 사람은 아마 다른 직원일 터였다. 그리고 또 다른 직원이대학 시험장에까지 그걸 들고 왔을 것이다. 멍하니 서 있는데 검은 유니폼을 입은 남자가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 하지만 남자는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마음만으로도 충분해요. 저희는 직원 모두가 손님들께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노력합니다. 이른바 팀플레이지요. 손님께서 흡족해하신 건 누구 한 사람의 공적이 아니에요. 거꾸로 불손한 직원이 있어서 손님께 폐를 끼쳤을 경우에도 그 한 사람만이 아닌 호텔 전체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지요."
어린 십 대 여학생에게 그야말로 공손한 말투로 설명해 주었다. 그 말에는 자신의 일과 직장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 나아가 책임감까지 담겨 있었다. 온화한 말투였지만 나오미는 그 말에 압도되었다.
"그렇습니까." 나오미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겨우 그렇게 대답했을 뿐이다.
"이번 일로 손님께서 흡족하셨다면 다음에 도쿄에 오실 때에도 꼭 저희 호텔을 이용해 주세요." 남자는 단정한 자세로 말하고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물론 그것이 대학 입학을 위해 올라오시는 것이라면 저희로서도 더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 나오미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남자의 화술은 마법 같았다.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속에 행복이 가득 찼다. 이런 게 바로 그들의 일인 것이다. 이 얼마나 멋진 직업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의 마지막 예언은 결과적으로 보기 좋게 실현되었다. 무사히 대학에 합격한 나오미는 입학 전에 다시 이 호텔에서 묵었다. 그때 그 사람을 찾아보려고 호텔 안을 돌아다녔지만 결국 찾아낼 수 없었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그녀가 대학을 졸업하고 이 호텔에 취직한 다음이었다.
- 시간이 참 빠르기도 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 사람 밑에서 일한 지도 벌써 10년이 되어간다. 지금까지도 숱한 일이 있었지만 이번처럼 큰 위기는 처음이다. 하지만 그의 자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호텔 서비스는 팀플레이이기 때문에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호텔 전체가 책임을 진다. 즉 총책임자인 자신이 먼저...
- "목욕 가운? 그 손님이 가져갔어요? 참 쩨쩨한 짓거리를 하는 놈이군." 닛타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웃을 일이 아니에요. 우리 호텔 목욕 가운은 한 벌에 2만 엔이나 하는 고급품이에요. 숙박할 때마다 가져가면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어요."
-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거 없어요. 수사를 하는 것도 사건을 방지하는 것도 우리 경찰입니다. 당신들은 그냥 우리 요구대로 협조만 해주시면 돼요. 그렇게 하면 총지배인님과 윗분들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고요."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야마기시 나오미는 등을 꼿꼿이 세우고 말했다. "조금 전에 닛타 씨가 손님의 속셈을 간파해 내는 것을 보고 역시 경찰은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사람들을 지켜보죠. 우리로서는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일이에요."
칭찬을 받고 보니 그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닛타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고맙군요. 하지만 그건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닌데."
"그리고 동시에 깨달은 게 있어요. 아직도 나는 한참 순진하다는 거. 전에 목욕 가운을 훔쳤다고 이번에도 똑같은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한 것 자체가 너무도 단순하죠. 좀 더 깊이 생각했어야 하는데.”
전혀 웃음기 없이 말하는 야마기시 나오미의 얼굴을 바라보며 참 착실한 여자라고 닛타는 생각했다. 아니, 착실하다 못해 고지식하다. 함께 산다면 그 고지식함에 어깨가 결릴 것 같다.
- "의심하는 것과 상대의 마음을 읽는 건 달라요. 그건 원래 호텔리어에게 요구되는 일이기도 해요. 닛타 씨는 지금 이 방식으로 정말 괜찮다고 생각해요? 살인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고 범인을 체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 경찰이 일하는 방식에 무슨 불만 있어요?"
"수사에 참견하려는 건 아니에요. 나는 닛타 씨를 도와주라는 지시를 받았고, 처음에는 조금 못마땅한 마음도 있었지만 지금은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해볼 생각이에요. 하지만 지금 이대로는 내 역할을 충분히 해내지 못할 것 같아요. 다음에는 이 호텔에서 사건이 일어날 거라는 막연한 설명만으로는 어떤 것에 역점을 두고 어떤 것을 주의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솔직히 이 호텔에서 정말로 사건이 일어날지 의심스럽기까지 해요."
- "당신은 형사가 아니에요.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게다가 당신은 나를 충분히 도와주고 있어요. 날 좀 그냥 내버려 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꼬는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야마기시 나오미가 험악한 표정으로 닛타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평소보다 눈을 둥그렇게 뜬 그 얼굴이 상당히 예뻐 보여서 닛타는 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 "정말로 알려주시면 안 되는 거예요?" 그녀가 거듭 물었다.
"안 됩니다. 여기서 입을 열면 나는 형사 자격이 없어요."
낙담한 듯 시선을 떨군 야마기시 나오미를 남겨두고 닛타는 출입구로 향했다. 급히 걸음을 옮기면서, 이래서 문외한은 곤란하다고 마음속으로 투덜거렸다. 경찰 일에 관여한다는 것만으로도 필요 이상으로 흥분해서 수사에 참견을 하고 형사 흉내를 내려고 든다. 야마기시 나오미는 그런 타입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만큼 더욱 뜻밖이었다.
다만 그 표정만은 나쁘지 않았어. 닛타는 야마기시 나오미의 마지막 표정을 머릿속에 그려보고 있었다.
- 닛타가 데시마 마사키를 주목하게 된 것은 피해자 오카베 데쓰하루가 사는 모습에서 뭔가 이상한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거실에 놓인 60인치 액정 텔레비전, 선반에 줄줄이 세워둔 바카라 유리잔, 프랭크뮬러 손목시계, 옷장에 걸린 수십 벌의 아르마니 정장 모두 평범한 회사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이었다. 조사해 보니 그런 사치품은 모조리 최근 1년 동안 구입한 것들이었다. 하나같이 현금으로 지불했지만 오카베의 예금계좌에는 그런 큰돈이 들어온 흔적은 없었다.
- 회사원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의 체크인 수속을 끝내고 나오미는 현관 정문으로 시선을 던졌다. 도어맨이 한 여자를 안내하며 들어오는 참이었다. 여자는 선글라스를 쓰고 오른손에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그 신중한 동작은 시각장애인 특유의 것이었다. 나오미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벨보이가 하필 위장한 가짜 벨보이 세키네 형사였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여자의 손에서 여행 가방을 빼앗듯이 받아 들더니 도와준답시고 등을 떠밀고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등을 떠밀리면 얼마나 불안한지 전혀 모르는 것이다.
- 상황을 눈치채고 벨 캡틴 스기시타가 달려왔다. 스기시타는 가짜 벨보이에게 몇 마디 건네고 가방을 받아 들더니 직접 여자의 손을 잡아 자신의 두 팔을 잡게 한 다음에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여자의 입술에 안도의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 나오미도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 가와모토가 당황한 표정으로 동작을 멈췄다. 나오미도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아, 미안해요. 당신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건 아니에요." 노부인은 온화한 어조로 가와모토를 향해 사과했다. "나는 상성相性이나 직감을 소중하게 생각한답니다. 부디 노인네의 어리광을 받아주었으면 좋겠는데."
- 장애인을 마주하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마음속을 의심하지 않는다. 몸이 부자유한 만큼 영혼은 깨끗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 형사는 달랐다. 장애인이라고 반드시 교활하지 않다는 보장은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니 애초에 장애인이라는 것 자체를 의심하고 있었다.
- 마음이 꼬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않는 공정한 눈을 갖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건 어쩌면 경찰관으로서 꼭 필요한 자질이고 이 사람의 장점인지도 모른다고 나오미는 생각했다.
-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 아니에요. 그나저나 지금 경찰에서 추적하는 그 사건 말인데요, 범인이 여성일 가능성도 있어요?"
"제로는 아니죠." 대답해 버린 뒤에야 닛타는 후회하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범인이 여자일 가능성은 낮다고 인정해 버린 셈이기 때문일 것이다.
- "미안해요. 이 방은 나한테는 조금 맞지 않아요. 다른 방을 보여줄 수 없을까요?"
"어떤 점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그건 말로 하기가 무척 어려운 것인데요, 뭔가 지나치게 북적북적해요. 약간이라면 참을 수도 있는데 이 방은 좀..."
"북적북적하다... 소리가 시끄럽다는 말씀이신가요?" 나오미는 귀를 기울였다. 방음은 문제없었다. 바로 앞에 도로가 있지만 자동차 소음 따위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 "미안해요. 이상한 소리는 하지 말걸 그랬어. 하룻밤만 꾹 참으면 될 일인데."
"천만의 말씀이세요. 손님께서 참으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우선 어떤 방을 원하시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최대한 빨리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가타기리 요코는 다시 고개를 들고 망설이듯이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그럼 솔직히 말하지요. 부디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영업을 방해할 생각 따위는 전혀 없고, 직원 여러분들을 힘들게 하려는 것도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라면 이 방에 묵어도 분명 아무 문제도 없을 거예요. 그저 나 같은 사람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뿐이니까요."
나오미는 스기시타와 서로 마주 본 뒤 다시 노부인에게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이 방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요. 나쁜 사람들은 아니에요. 그래서 투숙객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지요. 하지만 그들의 수많은 생각이 내게는 너무도 무겁게 느껴져요. 그게 좀 힘이 드는군요."
가타기리 요코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제야 나오미도 알아들었다. 닛타도 무슨 말인지 감을 잡은 모양이었다.
- "유령이라니, 정말 뜻밖이네. 호텔에 그런 소문이 끊이지 않는다는 얘기는 가끔 들었지만, 저런 식으로 이상한 불평을 하는 사람이 다 있다니."
"불평이라는 말은 실례예요. 저 손님한테는 심각한 문제일 텐데."
"그럼 저런 말을 믿는다는 거예요?"
나오미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뒤 닛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감각이라는 건 사람마다 다른 거예요. 유령인지 아닌지는 둘째 치고, 손님의 감각에 방이 맞지 않다면 다른 방을 준비해 드리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런가? 하긴 저 여자분이 좀 더 고급스러운 방을 노린 게 아니라는 건 밝혀졌죠."
"형사의 감이 빗나가서 억울한 모양이네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안에 아무도 없었다.
"내 감이 틀렸는지 맞았는지, 아직 모르는 일이에요."
- "경찰에는 정말 머리 좋은 분이 계시네요. 이런 암호, 보통 사람은 절대로 해독할 수 없을 텐데, 이 수수께끼를 풀어낸 분은 마침내 해냈다고 환호성을 질렀겠어요."
"네, 해독한 순간에는 그랬죠." 닛타가 귓구멍을 후비며 말했다. "그때는 설마 호텔리어 노릇을 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으니까."
나오미는 눈을 깜빡거리며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럼 닛타 씨가 이걸 풀었단 말이에요?"
그는 아랫입술을 쑥 내밀며 어깨를 슬쩍 으쓱했다. "하지만 자랑도 못했어요. 어쩌면 범인은 이 수수께끼가 풀릴 것을 상정했을지도 모르니까. 그렇다면 눈속임일 가능성도 있어요."
- "게다가 야마기시 씨의 프로 의식도 높이 평가합니다." 닛타는 말했다. "야마기시 씨는 상대에 대해 의심을 품으면서도 그것을 완벽하게 감추고 항상 최상의 응대를 하는 사람이죠. 가타기리 요코를 대하는 것을 보고 그렇게 확신했어요."
"그러니까, " 그녀는 닛타를 노려보았다. "동료를 의심하는 마음이 있더라도 그걸 상대에게 눈치채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말을 하시려는 건가요?"
닛타는 조금 답답한 듯 고개를 저었다.
"어려운 일을 요구할 생각은 없어요. 야마기시 씨 주위에 있는 사람들만이라도 괜찮습니다. 뭔가 부자연스러운 일이 있거나 평소와는 다른 기색을 보일 경우에 곧바로 알려주기만 하면 돼요."
"동료들을 감시하라고요?"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달라는 겁니다. 자꾸 똑같은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이건 사람 목숨이 걸린 일이에요."
"거절하겠어요. 나는 동료들을 믿어요. 그들을 그런 눈으로 보고 싶지도 않고, 만일 그런 식으로 바라봤다는 것을 나중에 그들이 알게 되면 나를 절대로 동료라고 인정해주지 않을 거예요."
실례할게요,라고 머리 숙여 인사하고 나오미는 발길을 돌렸다. 이번에는 말을 걸어와도 발을 멈추지 않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닛타는 그녀를 불러 세우지 않았다.
- "손님이 자신이 묵고 있다는 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가르쳐주지 않아요. 설령 가르쳐주더라도 일단 손님에게 그래도 괜찮은지 전화로 확인부터 하죠. 지금은 대부분의 손님들이 핸드폰을 갖고 계세요. 친한 분이라면 번호를 알고 있을 테니까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는 거예요. 그걸 하지 않거나 혹은 못한다면 뭔가 사정이 있다고 생각해야겠지요. 물론 손님께 문의할 때는 상대가 눈치채지 않도록 조심합니다."
"상대가, 방 번호를 알려줄 때까지 여기서 꼼짝도 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나오면?"
"그럴 때는 계속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 만일 그분이 폭력적인 언동으로 나올 경우에는 경비 담당자를 부르게 되지만요."
야마기시 나오미의 대답에는 막힘이 없었다. 단순히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 경험을 통해 몸으로 익혀왔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호텔 측의 대응 방식이 원래 그렇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뭔가 다른 수단을 선택할 텐데요.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뭔가 적당한 수단을."
닛타가 물어보자 야마기시 나오미의 시선이 잠시 먼 곳으로 향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이런저런 궁리를 해서 찾아오는 분도 있어요.
"뭔가 인상에 남는 경험이 있었어요?"
- "그렇죠. 저로서도 괴로웠던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 여자분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묘한 기운이 있었어요."
"그건 무슨 말이죠?"
"이 일을 오래 하다 보면 퍼뜩 감지되는 게 있어요. 그 여자분을 대하는 순간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더라고요."
- "장난꾸러기는 무시를 당하면 도리어 기를 쓰고 덤빈다. 대충 상대해 주는 편이 좋다,라는 것이군요."
모토미야의 적절한 표현에 이나가키는 만족스러운 듯 피식 웃었다. "음, 그런 얘기지."
"알겠습니다. 아무튼 그 손님은 특히 조심하겠습니다." 닛타가 대답했다.
"그나저나 별별 손님이 다 있군." 지금까지 별다른 말 없이 대화를 듣고 있던 오자키가 말했다. "이나가키에게서 지금까지의 얘기를 들었어. 이상한 사람들을 상대로 한다는 점에서는 경찰하고 전혀 다를 게 없네."
"예, 그야 뭐."
그보다 더 심하죠,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닛타는 참았다.
- "시끄러워!" 구리하라는 탁자를 내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당신 혼자서 하라고 말했지! 책임감을 느낀다면 내가 하라는 대로 해! 알겠어?"
완전히 개인적인 공격이었다. 호텔이 아니라 닛타 개인을 골탕 먹이는 것이 목적인 모양이었다. 왜 이런 짓을 하는가. 이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 "당신, 핸드폰 있지?"
"핸드폰요? 네, 있습니다만."
구리하라는 탁자 위에 있던 자신의 핸드폰을 집어 닛타 쪽에 내밀었다.
"이 전화로 당신 핸드폰에 걸어."
닛타는 어쩔 수 없이 그가 하라는 대로 했다.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의 진동음이 울렸다. 좋아,라고 하더니 구리하라는 자신의 핸드폰을 다시 가져갔다.
"내 핸드폰 번호를 확인해 둬. 밖에서 간간이 당신 핸드폰으로 연락할 테니까 단 즉시 끊을 테니 내 전화는 받지 않아도 돼. 당신이 삼십 초 이내에 이 방 전화로 내 핸드폰에 다시 연락해. 똑똑히 기억해 둬, 이 호텔 방 전화로 걸어야 해."
- 쾅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뒤에도 닛타는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었다. 하지만 그다음에는 맹렬하게 화가 솟구쳤다. 왜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가. 나는 수사를 위해 잠입했을 뿐이다.
-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당장 구리하라가 전화질을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야마기시 나오미에게서 온 것이었다. 시간이 지체되자 걱정스러웠던 것이리라. 어떻게 되었느냐고 그녀가 물었다.
- "소리 내어 읽는 것도 중요해. 언어를 공부하는 거니까."
"언어라고 해도 이런 영어는 평소에 쓰지도 않는 단어들이잖아요? 영어 회화에 도움이 된다면 그나마 괜찮겠지만."
"도움이 돼. 발음 연습이야."
"발음? 지금 진심으로 말씀하시는 거예요?" 왜 그런지 니시와키가 닛타 쪽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 "그럼 선생님이 한번 읽어보시든지요. 모범적인 발음을 좀 들려달라고요."
"내가?"
"그래요, 선생님은 전문가이시잖아요." 어서 읽어보라는 듯 니시와키는 손을 까불었다.
교생 선생은 미간을 찌푸리며 교과서로 시선을 떨구었다. 크게 숨을 들이쉬는가 싶더니 혀가 매끈하게 굴러가는 영어 발음이 흘러나왔다.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 왔다는 게 느껴졌다. 유창한 낭독이었다. 하지만 외국인에게까지 통할 만한 발음은 아니었다.
"오케이, 오케이! 거기까지." 니시와키가 다시 닛타를 쳐다보았다. "야, 닛타. 어때, 방금 그 영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냐?"
그제야 닛타는 친구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참 시시한 짓거리를 하는구나 싶었다.
- 어쩔 수 없이 닛타는 자리에 앉은 채로 첫 두 줄 정도를 작은 소리로 읽어보았다.
니시와키가 휘파람을 날렸다. "역시 네이티브는 확 다르구나."
그 말에 덩달아 박수를 쳐대는 촐랑이까지 있었다.
- 닛타는 교생 선생을 쳐다보았다. '늙은 애'는 온몸으로 진땀을 흘리는 모습으로 연못의 잉어처럼 입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닛타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그 뒤로 일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그 교생 선생이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지도 교사가 그쯤에서 아이들을 나무랐던 것 같은데 어쩌면 기억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니시와키와는 요즘도 간간이 연락을 주고받지만 그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을 돌아보기 위한 추억이라면 그 밖에도 얼마든지 즐거운 이야깃거리가 많았다. 닛타는 그 이야기를 야마기시 나오미에게 들려주었다.
- "닛타 씨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군요. 그런 어린애 같은 장난을 치던 시절이."
"내가 앞장서서 했던 게 아니에요. 옆에서 부추기는 바람에 나도 물러설 수가 없었죠. 당신도 알잖아요? 혼자서만 착한 척할 수는 없는 거라고요."
"하지만 그런 봉변을 당했으니 교생 선생님은 큰 충격을 받았겠죠. 어쩌면 그런 일 때문에 좌절해서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그 학생들을 평생 잊지 못하고 미워하는 일도 있을 거고요."
그녀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듣고 닛타는 짐짓 몸을 뒤로 젖혀 보였다.
- "그건 니시와키라는 친구가 시작한 일이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묻어갔던 것뿐이에요."
"그야 그렇지만 구리하라 씨 본인이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아직 모르잖아요. 닛타 씨가 친구와 둘이 짜고서 한 짓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어요."
말도 안 돼,라고 닛타는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어느새 다리를 달달 떨고 있었다. 친구의 농담에 잠시 합세해 준 것 때문에 완전히 나쁜 놈으로 찍혀버렸다는 건가. 하지만 이제는 그런 일 따위, 이래저래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 "물론이죠. 앙갚음을 하려거든 정정당당하게 하라고 말해줄 겁니다. 이런 쩨쩨한 짓거리는 하지 말라고 해야죠."
야마기시 나오미는 강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안 돼요."
"대체 왜요?"
"닛타 씨는 호텔리어이기 때문이에요. 호텔리어는 잘 아는 손님을 만났을 경우에라도 그쪽에서 먼저 아는 척하지 않는 한,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돼요. 손님마다 나름대로 사정이 있는 거예요."
"아, 잠깐만요, 그러면 항의도 못하잖아요."
"그래요. 항의를 해서는 안 돼요." 야마기시 나오미가 정면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 닛타는 머리를 저으며 수화기를 내려놓고 야마기시 나오미를 돌아보았다.
"정말 잘 참으셨어요." 그녀는 머리를 숙였다.
"어떤 경우에라도 손님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합니까? 그 사람은 명백히 나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어요. 거기에 대항하는 것도 필요하죠. 야마기시 씨까지 지금 피해를 입고 있잖아요."
"대항이 아니라 대응하는 거예요. 감정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저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자판을 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능력 있는 여성 호텔리어는 어디까지나 냉정했다. 닛타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방안을 오락가락하다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이런 경험이 있어요? 예전에 알던 사람이 손님으로 찾아왔는데 그 사람이 나한테 원한까지 품고 있었던 일이?"
야마기시 나오미는 자판을 치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는 사람이 찾아온 적은 있지만 나한테 원한을 품은 일은 없었던 것 같아요. 적어도 나를 골탕 먹이려는 사람은 없었어요. 하지만 세상에는 별별 사람이 다 있는 거니까 그런 일도 있을 수 있죠. 조금 전에 닛타 씨는 형사란 언제 어디서 원한을 살지 모르는 직업이라고 하셨지만 호텔리어도 마찬가지예요. 저희 쪽에서는 서비스를 해드릴 마음으로 했던 일이 거꾸로 고객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경우도 전혀 없는 건 아니에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일인 것이다. 그런 경우도 충분히 있을 터였다.
- 이번 대응은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일순 구리하라가 허를 찔린 듯 어리벙벙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고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런 짓 할 시간 없어. 나도 바쁜 사람이란 말이야."
"하지만 손님..."
"사과해!" 구리하라가 닛타의 발밑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사과하면 용서해 주겠어. 사과해. 무릎을 꿇어. 그래, 그게 좋겠군. 여기서 바닥에 손을 짚고 사과해!"
완전히 떼쓰는 아이였다. 닛타는 그 둥글넓적한 코를 실컷 쥐어 패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자신은 우수한 호텔리어를 연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수하다고 하면... 역시 야마기시 나오미다. 그녀라면 이런 때 어떻게 했을까. 무릎을 꿇었을까. 아니, 그녀에게 그건 어울리지 않는다.
- "손님." 닛타는 똑바로 그를 응시했다. 구리하라가 흠칫 놀란 듯 뒷걸음질을 쳤다. 자칫하면 한 대 맞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무릎을 꿇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저희로서는 어떻게든 고객분께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선 데이터 복원부터 할 수 있게 해 주시겠습니까?"
구리하라는 짤막한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럴 시간이 없어."
"그러니까 우선 전문가에게 보여주도록 하시지요. 금방 복원할 수 있습니다."
"그건 됐다고 내가 말했잖아! 당신이 사과하면 끝나. 어서 무릎을 꿇으라고!"
"무릎을 꿇는 건, 만일 복원이 되지 않았을 경우에 몇 번이라도 꿇겠습니다. 그러니까 일단 전문가를..."
"닥쳐! 지금 당장 무릎 꿇어! 당신이 머리를 숙이란 말이야!"
- 돌연 구리하라가 닛타에게 덤벼들었다. 순간적으로 몸을 피하려다가 닛타는 가까스로 동작을 멈추고 그대로 꼿꼿이 선 자세를 유지했다. 구리하라는 닛타의 멱살을 움켜쥐고 앞뒤로 흔들어댔다.
"제기랄, 대체 뭐야! 왜 그러느냔 말이야!"
"손님, 이러지 마십시오. 진정하세요." 닛타는 구리하라의 손을 조용히 잡았다. 하지만 상대의 얼굴을 본 순간,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구리하라가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고, 왜 화를 내지 않는 거야. 왜 치고 덤비지 않느냔 말이야..." 목소리가 작아져갔다.
- "여러분, 소란스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별로 큰 문제는 아니니까 부디 그대로 환담을 나누어주십시오."
조용히 인사를 건네고 그 자리를 떠났다. 응접실로 향하는 도중, 야마기시 나오미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닛타 쪽을 보며 작게 브이사인을 날려주었다.
- "... 그런 거였습니까."
그런 사소한 일로,라고 닛타는 생각했지만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어떤 일로 인간이 상처를 입는지, 타인으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 "학원 측 말이야. 유감스럽지만 당신이 가르치는 방식은 우리의 방침과 맞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얘기하더라고. 항상 1년여 만에 계약이 끊겼어. 빠를 때는 3개월 만에."
학원 측으로서는 완곡하게 돌려서 말하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당신은 학생들에게 인기가 없다, 사실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을 터였다.
- "놀랍기도 했지만 동시에 엄청나게 화가 나더군. 나는 백수건달신세인데 왜 이 녀석은 고급 호텔 유니폼을 입고 태연한 얼굴로 서 있는가 하고 말이지. 영어를 잘하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니까 더더욱 화가 났어. 어떻게든 이 녀석을 괴롭혀주자, 태연한 저 얼굴의 가면을 벗겨주자고 생각했어. 어제 내 손을 밀쳐냈을 때는 내심 잘됐다고 득의의 미소를 지었지. 잘하면 폭력으로 걸고 넘어가 해고시킬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구리하라는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더니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하지만 너는 끝까지 냉정했어. 그다음부터는 내가 아무리 시비를 걸어도 말려들지 않더라고. 조금 전에도 실로 침착하게 대응했지. 참 대단해. 그걸 보고 이런 생각이 들더라. 프로라는 건 이런 것이구나. 학생들에게 놀림을 당한 것 정도로 교생 실습을 포기해 버리는 인간은 어차피 프로가 될 수 없어."
- "아뇨, 그만 고개를 드세요, 구리하라 선생님. 저야말로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때는 정말로 실례되는 짓을 했어요.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구리하라는 몸을 숙인 채 흔들흔들 고개를 저었다.
"너는 별로 잘못한 거 없어.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지? 내 잘못이야. 나는 무슨 일이든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인간이야."
전형적인 패배자의 말에 닛타는 속이 타서 고함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꿈을 포기하실 건 없잖습니까. 이제부터라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공부해서 교생 실습도 하고 교사의 꿈을 향해 달려가시면 되잖아요? 아르바이트가 아닌 프로 교사가 되셔야죠."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 "바로 그거야. 오자키 관리관이 말한 대로 x4에 관한 단서는 아무것도 없어. 당연하지. 아직 아무 짓도 안 했으니까. x4가 이대로 계획을 포기해 버리면 우리는 영원히 x4를 찾아낼 수 없어. 아니, 설령 x4가 제 이름을 대고 나선다고 해도 과연 기소할 수 있을지 없을지 애매하다고 노구치를 비롯한 다른 세 사람과 주고받은 메일은 단순히 장난 삼아 한 짓이라고 주장해 버리면 우리로서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어.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지. 이번 사건의 주모자는 바로 x4 야. 그자가 이상한 선동만 하지 않았다면 노구치나 데시마는 살인까지는 저지르지 않았을 거야. 피해자가 나오지 않았을 거란 말이야. 우리는 어떻게든 x4를 체포해서 교도소에 처넣어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 x4에게도 명백히 살인할 의사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 x4를 살인미수 혹은 살인 예비죄로 체포하여 기소한다.
상사들은 그런 식으로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군요, 하고 닛타는 중얼거렸다.
- "그러니까 호텔 측을 속이자는..."
"속이는 게 아니야. 내가 몇 번이나 말하잖아.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겠다는 것뿐이야."
"정말 괜찮겠어요? 혹시라도 일이 터지면 큰 문제가 될 텐데."
"나중에 항의가 들어오는 것쯤은 각오하고 있어. 하지만 문제 될 거 없어. x4의 살인은 우리가 사전에 틀림없이 막을 테니까." 이나가키가 닛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럴 거지?"
"물론 틀림없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면 됐잖아? 자네, 그 호텔리어 하고 의기투합한 모양인데 그녀를 위해서도 이 일은 입을 다물어야 해. 쓸데없는 걸 알게 되면 책임감 때문에 정말 힘들어할 거라고."
짓궂은 미소를 날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이나가키 계장을 지켜보며, 그런 거였구나 하고 닛타는 새삼 깨달았다. 상사들이 수사상황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것은, 그가 시나가와 경찰서의 수사팀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생각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가 야마기시 나오미에게 이런 말을 흘릴지 모른다고 의심하기도 했던 것이다.
- "지금 담당자가 자리에 없으니 돌아오는 대로 연락드리겠다면서 전화번호를 물어봤어. 그걸 알면 정말로 신부 오빠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잖아. 근데 그 남자가 하는 말이, 업무 중에 전화가 걸려오면 곤란하니까 자기 쪽에서 다시 걸겠다, 그러면서 전화를 끊어버리는 거야. 어때, 이상하지?"
"그 뒤에 또 전화가 왔어?"
리에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걸로 끝이었어."
나오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예식팀에서는 이런 일이 자주 있는 모양이었다.
- 원래 결혼식은 행복을 상징하는 의식이지만 신랑 신부에게나 행복한 것일 뿐, 세상 모두가 진심으로 축복해 주는 것만은 아니다. 평생의 반려자로 단 한 명의 이성을 선택한 이상, 당연히 다른 누군가는 그 선택에서 제외된다. 그중에 왜 내가 아닌가,라는 불만을 품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불만을 품는 정도에서 그친다면 괜찮지만 그것이 무서운 증오로 바뀔 경우에는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어떻게든 결혼식을 망쳐보려고 온갖 못된 꾀를 내는 것이다. 그래서 예식팀에서는 상대의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 한, 결혼식이나 피로연에 관한 문의에는 일절 대답하지 않는 것이 규칙이었다.
- "물론 경찰이 나선다는 말을 양가 사람들이 들으면 무척 고마워하겠지. 정말로 찾아올지, 혹은 애초에 존재하는지 어떤지도 확실치 않은 스토커를 막아주겠다고 경찰이 특별 경비를 서준다니 말이야. 그래서 무사히 결혼식과 피로연이 끝나면 아마 여기저기 떠들어댈 거야. 그리고 그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겠지. 이다음에 내 주위에서 그 비슷한 일이 생기면 곧바로 경찰에 신고해서 경비를 서 달라고 하자. 하지만 우리는 실제로 그런 신고에 일일이 대응할 수가 없어. 이번은 특별한 케이스야. 잘 기억해 둬. 사람들이란 한번 맛있는 음식을 내놓으면 언제든지 또 내줄 거라고 믿어버려. 그러다가 그 기대가 어긋나면 불만을 털어놓는 거라고."
옆에서 듣고 있던 닛타는 참으로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했다. 질문한 젊은 형사는 고개를 움츠렸다.
- "그럼 당일의 경비에 대해 설명하겠다. 미리 말해두지만 그 스토커가 x4라는 것을 전제로 우리는 준비를 진행한다. 거꾸로 말하면 그 자가 x4가 아니었을 경우, 우리는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 잘 들어라, 착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목적은 스토커의 결혼식 방해를 막으려는 것이 아니다. 그자가 만일 x4가 아니라면 설령 결혼식장에 연막탄을 던지건 피로연장에 발가벗고 뛰어들건 일절 나서지 않는다. 그럴 경우에는 호텔 경비에게 맡기면 된다. 이건 이미 호텔 측에도 전달한 내용이다."
이나가키의 말은 냉담하게 들렸지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x4를 체포할 때까지 잠입 수사 중이라는 사실은 절대 언론에 발설할 수 없는 것이다.
- "그걸 외부인이 알 리가 없죠."
"아니, 그렇지 않아. 이번 스토커가 x4일 경우, 당연히 몇 번에 걸쳐 사전 조사를 했을 거야. 프런트 앞을 지나면서 자네 얼굴을 봤을지도 모른단 말이야. 그런데 프런트 직원이 갑작스럽게 연회부일을 하고 있으면 수상하게 생각하지."
"설마 그렇게까지 눈치가 빠를 리는..."
"실제로 그렇게 눈치가 빠르면 어쩔 거야?" 오자키가 쏘아보며 말했다. "자네 때문에 x4가 범행을 포기할 경우, 우리는 영원히 그 자를 체포하지 못할 수 있어. 자네, 그걸 어떻게 책임지겠나?"
- 게다가,라고 오자키는 문득 온화한 표정이 되어 말을 이었다. "이번 스토커가 반드시 4라고 결론이 난 게 아니야. 잘못 짚었을 경우에는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잠입 수사를 계속할 필요가 있어.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이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진짜 x4가 프런트에 찾아올지도 몰라. 닛타 자네에게는 자네의 일, 자네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역할이 있어. 부디 그쪽에 집중하도록 해." 명백하게 위로하는 어조였다.
- 가슴속에서는 불만이 점점 커져갔다. 이번 잠입 수사에 누구보다 자신의 공로가 크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단기간의 교육으로 익숙지 않은 호텔 업무를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최전선에서 살인사건과 대치한다는 보람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기개가 완전히 무시되고 있었다. 사건의 실상에 대해 꽤 오랫동안 자신에게만 비밀로 했던 것도 섭섭한 일인데, 이번에는 학수고대하던 용의자가 드디어 나타날지도 모르는 상황에 가장 중요한 경비 역할에서 배제되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인가. 자신은 대체 뭐란 말인가. 단순한 장기말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장기말 역시 나름대로 프라이드라는 게 있는 법이다.
- "무엇 때문에요? 왜 일부러 그런 위험한 짓을 하죠?"
"바로 그거야. 왜 그런 위험한 짓을 했는가. 나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는 게 x4에게 뭔가 더 유리했던 거 아니겠어?"
닛타는 미간을 찡그리고 바닥에 시선을 떨구었다. 어딘가 엉뚱한 얘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역발상이 퍼즐을 푸는 열쇠가 된다는 건 분명했다.
"어때?" 노세가 닛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닛타 씨의 뇌세포, 지금 엄청나게 자극받았지?"
닛타는 흥하고 코웃음을 쳤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그래도 벌써 촉각을 곤두세우고 추리를 시작하고 있는데? 얼굴에 다 쓰여 있어."
"천만의 말씀이에요. 재미있는 얘기라고는 생각했지만요."
노세는 눈이 실처럼 가늘어지더니 빙긋이 웃었다.
- "생각하는 거야, 닛타 씨의 그 훌륭한 두뇌로. 닛타 씨라면 틀림없이 답을 찾아낼 수 있어."
별 시답잖은 공치사를, 이라고 닛타는 내뱉으려고 했다. 하지만 노세의 얼굴을 보고 그 말을 꿀꺽 삼켰다. 그의 입가는 웃고 있지만 가느다란 눈에는 진지한 빛이 깃들어 있었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닛타의 침묵에 자신의 목적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는지 노세는 은근한 인사를 건네고 에스컬레이터로 향했다.
- "그러니까 이런 말씀인가요? 수사는 진전되었지만 그건 닛타 씨가 호텔리어로 위장한 것과는 관계가 없었다, 이대로 가면 사건이 해결된다 해도 닛타 씨의 수훈은 아니다, 그리고 그게 마음에 안 들어서 닛타 씨는 토라졌다..."
"아니, 아니, 아니, 토라진 건 아니고. 기대에 어긋났다고 할까, 자기 일에 의문을 품고 있다고 할까..."
"그게 뭐예요? 어이가 없네요. 닛타 씨, 바보 아니에요?" 저도 모르게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 나오미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뭡니까?"
노세는 숱 적은 머리를 슬슬 쓰다듬으며 온화한 웃음을 지었다. "닛타 씨는 우수한 형사예요. 젊은 나이에 경시청 수사 1과 형사가 되고 게다가 중책까지 떠맡은 걸 보면 지금까지 상당히 눈에 띄는 성과를 거뒀다는 얘기지요. 조금쯤 프라이드가 높아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에요."
"그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 내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세요. 다만 그 프라이드가 닛타 씨의 결점인 것도 사실이지요. 그 뛰어난 능력을 그런 것 때문에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어요. 그런 경우에는 주위 사람의 뒷받침이 필요해요. 상사나 동료들의 뒷받침 말이죠. 그런데 지금 그 사람들은 각자 자기 업무가 벅차서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어요."
- "야마기시 씨가 그 역할을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제가요?" 나오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왜요?"
"야마기시 씨는 지금 닛타 씨의 동료이자 상사 같은 존재잖아요. 부하나 동료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것도 호텔리어 업무 중의 하나 아닙니까?"
나오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저희 쪽 상사의 지시에 따라 경찰을 도와주고 있을 뿐이에요. 닛타 씨 개인에게 신경 써줄 생각은 없어요."
"그런가요? 그렇다면 왜 닛타 씨 일을 걱정했지요?"
"그건..."
- "당신 역시 누구보다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짧은 기간 동안 함께 일했을 뿐인데도 닛타 씨의 심경 변화를 민감하게 알아봤겠지요. 그저 알아본 것뿐만 아니라 어떻게든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아무쪼록 그 의무감에 따라 행동해 주세요."
노세는 머리를 숙였다. 나오미는 변변찮은 풍채의 중년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노세 씨는 정말 좋은 분이군요."
그는 고개를 들고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이, 무슨. 그렇지도 않아요."
"하지만 다들 그렇게까지 남을 걱정해주지는 않잖아요. 노세 씨는 닛타 씨와 만난 지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라면서요?"
"예, 이번 사건으로 처음 만났지요."
- "원래 오지랖이 넓은 성격인가 봐요, 쑥쑥 커나가야 할 사람이 시시한 일로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 걸 보면 그냥 놔두지 못하는 성격이에요. 게다가 그 사람은 어떻게든 손을 내밀어주고 싶은 신비한 매력이 있어요. 그렇잖습니까?"
동감이었다. 나오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제 도움을 닛타 씨가 그리 달가워하지 않을 것 같네요. 호텔 업무에 대한 것만 도와주면 된다고 어젯밤에도 그러던데요."
- 그럴 만도 하다는 듯이 노세는 고개를 크게 위아래로 끄덕였다.
"예, 바로 그런 점을 고쳐주고 싶은 거예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고 가는 정을 알면 닛타 씨는 좀 더 훌륭한 형사가 될 겁니다. 당신에게는 큰 폐가 되는 얘기일지 모르지만 이것도 인연이라고 생각하시고 부디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봐 주세요."
"제가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보면 닛타 씨가 바뀔까요?"
"바뀌지요. 아니, 이미 바뀌고 있어요." 노세는 단호하게 말했다. "프라이드가 높은 탓에 깜빡 놓쳐버리는 것도 많지만, 닛타 씨에게는 사물의 이면을 간파하는 능력이 있어요. 그를 걱정해 주는 당신의 마음을 머지않아 깨달을 겁니다. 프라이드는 상당히 높지만 그만큼 머리도 좋으니까요."
그것 또한 동감이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라고 나오미는 대답했다.
- 야마기시 나오미의 대답은 닛타가 예상한 대로였다. 역시 이 여자는 머리가 좋다고 새삼 생각했다. 사건의 구조를 알고 큰 충격을 받았을 텐데도 호텔리어로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신속하고 냉정하게 분석하고 있었다.
- "설령 이 호텔에서의 범행을 단념하더라도 x4가 무죄인 건 아니기 때문이에요. x1, x2, x3를 사주해서 세 건의 살인을 유발한 행위는 아주 무거운 죄예요."
"그렇다면 x4를 체포하면 해결될 일이에요. 하지만 그건 네 번째 살인을 단념하게 한 뒤에 해도 늦지 않잖아요?"
닛타는 입안에 씁쓸한 맛이 퍼지는 것을 느꼈다. "그게 안 된다니까요."
- "x4를 체포하기 위해 일부러 우리 호텔에서... 살인을 저지르게 하겠다는 건가요?"
닛타는 고개를 저었다. "저지르게 하지 않아요. 범행은 반드시 막을 겁니다."
- "닛타 씨, 미연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고 있어요? 아직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근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x4를 체포할 수 없다면서요? 체포하기 위해서는 뭔가 저지르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렇죠?"
닛타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예, 그래요. 맞는 말입니다."
- "하지만 피해자가 생기게 하지는 않아요" 얼굴을 들고 다시 한번 똑바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범행은 미수에 그치도록 할 겁니다."
"살인미수라는 거요?"
"살인 예비죄라는 것도 있어요. 흉기를 소지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체포할 수 있어요."
야마기시 나오미는 작게 입을 벌리고 올려다보았다. 잠시 그 자세를 유지하다가 한숨을 내쉬며 이번에는 깊숙이 고개를 떨구었다.
- "이번 토요일!" 닛타는 외쳤다. "그때까지만 기다려주면 안 되겠어요? 최소한 이번 토요일까지만."
- "설령 그자가 x4여서 무사히 체포된다고 해도 그게 내 공적이 될 일은 없어요. 나는 그 경비 계획에는 참여하지 못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 계획이 실패하면 좋겠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손으로 범인을 잡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지만, 그게 되지 않는다면 어떻든 다른 누구라도 꼭 잡아주기를 바라고 있어요."
야마기시 나오미는 몇 초 동안 침묵한 뒤, 돌아보았다.
"닛타 씨는 숨은 공로자로 만족할 만한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건 싫죠, 본심을 말하자면. 하지만 악한 자를 놓치는 건 훨씬 더 싫습니다."
"그건 닛타 씨가 형사이기 때문인가요?"
"아뇨, 나는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이라서 형사가 되었죠." 닛타는 머리를 숙였다. "부탁합니다. 토요일까지 기다려줘요. 다카야마 씨의 스토커가 x4가 아니었을 경우에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요. 하지만 그때까지는 기밀을 지켜주세요. 부탁합니다."
닛타는 깊숙이 머리를 숙인 상태로 가만히 서 있었다. 야마기시 나오미가 부디 뜻을 굽혀주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그의 귀에 들려온 것은 "미안해요"라는 말이었다.
닛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주방을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그는 조리대로 다가가 수도꼭지를 틀었다. 힘차게 쏟아지는 물로 얼굴을 씻었다.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물기를 훔쳤다. 그래도 기운이 되살아나는 기척조차 없었다. 무거운 걸음으로 주방을 나섰다. 연회장을 들여다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 불을 켰다. 둥근 테이블이 여기저기 불규칙하게 놓여 있었다. 그는 한가운데까지 들어가 옆에 있던 의자에 앉았다.
- 야마기시 나오미에게서 이번 사건의 진상을 듣는다면 총지배인이 경찰에 항의할지도 모르겠다고 닛타는 생각했다. 범인 체포보다 새로운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선 아니냐고 할 것이다. 그것도 물론 옳은 얘기다. 그러나 경찰 쪽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건 결코 이쪽의 편의만 앞세우려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총지배인이 그런 사정을 받아들여줄 것 같지 않았다. 야마기시 나오미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발표하자고 주장할 것이다. 그 주장을 가로막는 건 경찰로서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언론에 발표되어 버리면 아마도 4는 범행을 단념할 것이다. 지금이라면 그자 쪽에서 x4라고 이름을 밝히고 나선다 해도 합당한 죄목을 들이댈 수 있는 가능성이 지극히 낮은 것이다.
- 목이 날아가겠구나, 하고 닛타는 각오했다. 물론 경찰 옷을 벗는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경시청의 이 자리에 붙어 있기는 힘들다. 한직으로 내몰리거나 관할서로 쫓겨나거나, 둘 중 하나다. 동료들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영원히 x4를 체포할 수 없게 만들어버렸으니 그 정도의 벌을 받는 것도 당연하다.
-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야마기시 나오미가 나간 뒤로 몇 분이나 지났을까. 그녀는 벌써 모든 사실을 총지배인에게 말해버렸을까. 총지배인이 항의할지 어떨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보다 먼저 이 일을 이나가키에게 전해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 "기다려달라고 한 건 닛타 씨 아니었어요? 그래서 기다리기로 했어요. 이번 토요일까지."
닛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마음이 바뀌었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건 묻지 않는 것이 좋다.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딱 한마디, 고마워요,라고만 말했다.
"하지만 이건 잊지 마세요. 만일 그때까지 뭔가 일이 터진다면 나는 호텔에 사표를 낼 거예요. 이 호텔뿐만 아니라 호텔리어로 일하는 것 자체를 그만둬야죠. 그럴 각오로 결정한 일이에요."
"나도... 형사를 경찰을 사직하겠습니다."
야마기시 나오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눈을 깜빡였다. 가슴을 내밀고 턱을 당기며 닛타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그녀가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닛타 씨, 우리 일터로 돌아가야죠?"
- 앞으로 다시는 호텔리어로서 일하지 못할 거라고 각오하고 있었다. 그런 절박한 심리가 사소한 일에도 과민하게 반응하면서 판단을 그르치게 한 것이다. 조금 전 총지배인실에서 닛타와의 약속 따위는 휴지 조각처럼 내던지고 당장 모든 것을 털어놓자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결국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숨은 공로자도 싫지만 악한 자를 놓치는 건 더 싫다던 닛타의 말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그의 그런 강한 의지를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 하지만 정말 이래도 괜찮은 걸까. 나는 인간으로서 올바른 일을 하고 있는 걸까. 쉽게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나오미는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 "힘들죠?"
갑자기 뒤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흠칫해서 돌아보니 닛타가 서 있었다.
"깜짝 놀랐잖아요."
아, 죄송, 하고 말하며 닛타가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
"얘기 들었어요. 꼭 필요한 때 자리에 없어서 미안해요."
나오미는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닛타 씨라면 어떻게 대처했을까요?"
닛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라면... 글쎄요, 우선 니트 모자 쓴 남자에게 말을 건네봤겠지요. 무슨 난처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라는 식으로. 그럴 틈이 없었다면 아예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을 거예요."
- "그러면 됐겠네요. 나도 그렇게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건 평소의 당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죠?"
"네, 그런 거 같아요. 호텔리어는 변명을 해서는 안 되지만."
닛타는 겸연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한번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일정 부분은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새삼 실감하는 건데 호텔이라는 곳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에요. 이제는 다들 뭔가 딴 속셈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예요."
그의 말에 나오미는 얼굴이 빙긋이 풀어졌다.
"예전에 선배에게서 들은 말이 있어요. 호텔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손님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다. 그걸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라고요."
- "호텔리어는 손님의 맨얼굴이 훤히 보여도 그 가면을 존중해드려야 해요. 결코 그걸 벗기려고 해서는 안 되죠. 어떤 의미에서 손님들은 가면무도회를 즐기기 위해 호텔을 찾으시는 거니까요."
"가면무도회라. 그것 참 복잡하네요. 그 정치 평론가도 호텔리어에게 자신의 맨얼굴을 순순히 보여줬다면 묘한 소동으로 발전하지 않았을 텐데."
"그분은 그저 단순한 케이스예요. 이름난 분들이 사랑의 불장난을 할 때는 좀 더 복잡한 방법이 동원되거든요."
닛타의 눈에 호기심의 빛이 서렸다. "이를테면 어떤 방법이?"
"글쎄요, 지금 얼른 생각나는 것은 남자들만의 여행으로 위장하는 거예요."
"그렇지. 남자들끼리 온 것처럼 하면서 실은 여자가 섞여 오는군요."
-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아요. 실제로 남자들끼리만 체크인을 해요. 유명한 분과 그 일행이라는 식으로. 그리고 그들과는 완전히 별도로 여자 혼자 체크인을 하죠. 겉으로 보면 그 여자는 남자들과 아무 관계도 없는 것처럼 행동해요. 하지만 실제로는..."
"밤이 되면 그 여자는 유명 인사의 방으로 가는군요."
"네, 그거예요." 나오미는 턱을 끄덕였다. "자주 쓰이는 방법이죠."
"그렇군. 옆에서 거들어주는 측근이 있으면 얼마든지 써먹을 만한 방법이네."
- "닛타 씨, 대체 무슨 말이에요?"
그제야 닛타의 시선이 나오미에게로 향했다.
"고마워요. 당신 덕분에 큰 수수께끼가 풀릴 것 같아요. 그렇게 되면 당신이 오늘 저녁에 한 실수는 쓸데없는 일이 아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렇게 말하고 닛타는 발길을 돌려 계단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 "그건 닛타 씨만의 추론, 즉 가설이지?"
"네, 아직은 가설에 지나지 않아요. 뒷받침할 만한 증거도 없고 그저 얼핏 떠오른 생각이라고 한다면 그것도 맞는 말입니다."
닛타의 말 중간에 노세가 크게 손을 저었다.
"아니, 아니, 아니야. 그런 식의 생각을 해낸다는 게 닛타 씨의 대단한 점이야. 뭔가 단서가 있어서 거기서부터 추리해 나가는 것이라면 그런 형사는 내 주위에도 몇 명이나 있어. 하지만 닛타 씨는 달라. 아무 재료도 없이 스스로 범인이 되었다고 치고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해서 어느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한 가설을 만들어내거든. 게다가 그 가설이 실로 설득력이 있어. 난 정말 깜짝 놀랐어. 이건 x4에게서 직접 얘기를 듣고 왔는가 싶을 만큼 훌륭해."
과장스러운 칭찬에 닛타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 "에이, 그런 공치사는 됐고요."
"공치사가 아니야. 솔직한 느낌이야. 닛타 씨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이상, 그 기대에 응하지 않을 수 없지. 당장 내일부터, 아니, 오늘 밤부터 뛰어보겠네. 그 가설이 맞다면 x는 별도의 살해 계획을 갖고 있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그 범행이 이미 실행되었을 가능성도 높아요."
- "손님, 냉장고는 이용하셨습니까?" 말도 술술 나온다.
"응? 아, 맥주. 그리고 우롱차 그 정도야. 이봐요, 빨리 좀 해달라니까."
손님의 혀 차는 소리는 한 귀로 흘려들었다. 명세서를 인쇄해 서명을 받으면 영수증 작성에 들어간다. 손님 이름 앞으로 되었는지 확인한 뒤에 기입하고 수입 인지를 붙이면 끝이다. 자신이 봐도 참으로 유연한 동작이었다. 말하는 방식이며 거동도 정말 호텔리어다워졌다고 스스로 실감한 적도 있었다. 게다가 그게 결코 싫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쯤 자랑스럽게 생각되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렇게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응, 됐어요." 남자는 가로채듯이 영수증을 받아 들더니 부루퉁한 표정 그대로 빙글 돌아섰다.
"감사합니다. 또 찾아주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 그 등에 대고 인사를 하면서 내가 많이 변했구나,라고 닛타는 생각했다.
- "당신에게는 정말 미안해요."
"갑자기 왜 그런 말을?"
"당신이 어제 왜 편히 못 잤는지 생각해 봤거든요. 답이 금방 나오더라고요. 어제, 당신답지 않은 실수를 했던 것과 똑같은 원인일 겁니다. 나하고 했던 약속이 마음에 걸려서 그렇죠?"
야마기시 나오미는 시선을 떨구었다.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았다.
"네 번째 범행을, 아니, 최소한 이 호텔에서 일어날 범행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을 뻔히 알면서도 그 말을 못 하는 건 무척 힘들 거예요. 혹시 누군가 피해를 입기라도 하면.... 그 생각을 하면 잠이 안 오는 것도 당연하죠. 당신의 지친 표정을 보고 있으면 나는 정말 더 괴로워요. 그래서 한 가지 제안하려고요. 야마기시 씨, 잠시 일을 쉬는 건 어때요?"
멈칫하며 그녀가 얼굴을 들었다. 그 눈을 조용히 바라보며 닛타는 말을 이었다.
"내일 결혼식 피로연이 끝날 때까지만 좀 쉬세요. 그게 끝나면 나하고 한 약속은 지킨 셈이잖아요? 그때 총지배인에게 모든 걸 얘기하면 돼요. 그러면 당신도 마음의 부담을 덜 수 있을 겁니다."
- 야마기시 나오미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가슴을 쭉 폈다. 슬쩍 턱을 치켜들더니 닛타를 똑바로 응시했다.
"중요한 비밀을 떠안은 채 집에 틀어박혀 있으라고요? 그게 더 마음 편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야마기시 씨를 위해 그게 좋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 아니에요." 단호하게 내뱉었다. "닛타 씨 말이 맞아요. 범행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을 뻔히 알면서도 침묵하고 있으려니까 정말 큰 죄책감이 들어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어딘가로 도망칠 수는 없어요. 다른 누구보다 내가 나서서 범행을 막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해야죠. 이런 때 일을 쉬다니,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행동이에요."
마지막 말에서는 절박함이 느껴졌다.
- 대단한 여자다,라고 닛타는 새삼 감탄했다. 슬며시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예, 알았어요. 그 일은 더 이상 말하지 않기로 하죠. 나도 단단히 각오할게요."
야마기시 나오미는 입을 한일자로 꾹 다물어 보인 뒤에 대답했다. "꼭 그렇게 해주세요."
- 무슨 일이냐고 나오미가 물었다. 닛타는 주위에 듣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오미의 귓가에 얼굴을 바짝 댔다.
"감식에서 중간보고가 들어왔답니다. 그 와인, 폭발물은 아니었어요." 낮지만 정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근데 병뚜껑에 씌워진 커버에 바늘로 찌른 듯한 구멍이 있었대요. 안의 코르크 마개를 조사해 보니 역시 바늘로 관통한 자국이 있었고, 두 개의 구멍의 위치가 완전히 일치해서 누군가 주삿바늘을 꽂았을 가능성이 높다는군요."
- 나오미는 갑자기 입안이 바짝 마르는 느낌이었다. 오싹 한기가 들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살인 사건의 수사에 참여하고 있다는 자각은 지금까지도 갖고 있었다. 닛타에게서 수사상의 극비 사항까지 들었고 자신에게 엄청난 책임이 있다는 것도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도 머리 한 귀퉁이에서는 미처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그런 큰 사건은 자주 일어나는 게 아니다. 한참 떠들썩하다가 결국 무사히 넘어갈 것이다. 이런 낙관적인 생각이 아직도 어딘가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마침내 절감했다. 이건 현실이다.
- "마쓰오카 씨가 왜 코르테시아도쿄 호텔에 숙박하게 되었는지도 알아봐야 하고 어떤 인물이었는지도 확인해야겠어. 아까 우리서 과장에게도 연락했어. 나 같은 경우에는 자비로 활동하는 일에 대해서는 별로 잔소리를 안 하거든."
그건 아마 노세 씨가 상사에게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닛타도 그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이쪽은 이쪽대로 내일 큰 고비를 앞두고 있으니까요."
- 하지만 대체 왜 그녀를?
- 악몽을 꾸는 것 같다,라는 표현과는 약간 다르다. 여우에 흘린 것 같다는 게 정확한 표현인지도 모른다. 엄청나게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너무도 뜻밖의 일이라 오히려 공포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건 뭔가 착오가 아닐까, 못된 장난에 억지로 끌려든 건 아닐까 하는 마음이 조금이지만 남아 있었다.
- "부탁을 받았다면 그걸 함부로 발설하는 건 좋지 않다는 뜻이야. 설령 그것이 호텔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야. 그런 의미에서 자네의 판단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었어. 조금 전에 자네는 처음 찾아온 고객이 스스럼없이 마음을 열게 하는 방법을 앞으로 자네의 숙제로 생각하겠다고 말했지? '이 사람이라면 비밀을 털어놓아도 괜찮겠다'라는 믿음 역시 호텔리어에게는 소중한 것이야."
나오미는 후지키의 온화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총지배인의 눈에는 부드러우면서도 진지한 빛이 서려 있었다. 옆에서는 다쿠라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리고 또 한 가지." 후지키는 윗몸을 앞으로 내밀며 책상 위에서 손가락을 꼈다. 나오미를 올려다보는 그 얼굴에 의미심장한 웃음이 번졌다. "사건의 구조를 알고 있었던 건 자네만이 아니야 우리도 알고 있었어. 경시청의 오자키 관리관이 말을 해줬거든."
"예?" 나오미는 두 상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정말이십니까?"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은 나와 다쿠라, 둘 뿐이었지만."
"하지만 그걸 공개적으로 발표하지 않은 건 역시 경찰 측의 함구령 때문이었습니까?"
"그것도 물론 있었지.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우리가 내린 판단이야. 발표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
"어째서요?"
- "발표를 하면 분명 네 번째 사건의 범인은 범행을 단념할 수도 있어.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확인할까? 범행을 포기했습니다,하고 범인이 알려줄 리는 없잖아. 결국 계속해서 똑같은 경비 태세를 유지해야 할 것이고, 고객들은 이런 불안한 호텔은 이용하지 않겠지. 발표를 해서 우리가 얻을 건 아무것도 없었어. 그래서 오자키 관리관에게 이렇게 부탁했지. 이 이야기는 우리 두 사람 모두 듣지 않은 것으로 해달라고 말이야."
나오미는 눈을 깜빡이며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항상 성실함 그 자체라고 생각해 온 후지키의 눈에 일순 교활함이 엿보였다.
"저 혼자서만 별것도 아닌 일로 고민했던 것 같네요." 신음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음, 이것도 공부야. 매사가 다 공부지." 그렇게 말한 것은 다쿠라였다.
나오미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한번 상사들을 바라보았다.
호텔 안에서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은 손님들뿐만이 아니다. 새삼 생각했다.
(리뷰자 주 : "하지만 방금도 말했듯이 우리가 그걸 발표해 버리면 경찰이 범인을 체포할 기회를 잃게 돼. 나아가 범인은 또 다른 곳에서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어. 우리 호텔 손님이 무사하다고 그걸로 끝날 일이 아니더란 말이야. 그래서 나도 고민이 많았네."라는 대사를 이미 첫날 후지키가 나오미에게 말한다. 개인적으로는 동어 반복이라고 생각하지만, 변주라면 변주로도 볼 수 있겠다.)
- "그 정도로 치밀한 계획을 짜냈으니 머리는 좋은 사람이겠죠." 닛타는 말했다. "아니, 오히려 지나치게 머리가 좋았어요."
- "나도 같은 생각이야. 누군가 사소한 일로 원한을 품는 일은 있어도 그 원한을 받는 쪽에서는 별로 마음에 담아두지도 않고 더구나 기록해 두는 일 따위는 없다는 점을 냉정하게 계산했더라면 이번 사건처럼 번거롭기 짝이 없는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을 거야. 실제로 야마기시 씨는 나가쿠라 마키가 작년에 찍은 사진을 보여줬어도 얼른 기억해내지 못했다잖아."
"아, 그 얘기." 닛타는 집게손가락을 입에 댔다. "그 얘기는 야마기시 씨 앞에서는 말하지 마세요. 나가쿠라 마키의 변장을 미리 눈치채지 못한 데다 맨얼굴을 보고서도 누군지 기억하지 못한 것에 실은 상당히 우울해하고 있거든요. 고객의 얼굴을 잊어버린다는 건 야마기시 수준의 호텔리어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일이라네요."
"거참, 호텔리어도 쉽지 않군." 노세는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 두 사람은 코르테시아도쿄 호텔의 로비에 와 있었다. 닛타는 이제 프런트 직원 유니폼 차림이 아니었다. 그래서 왠지 들썽들썽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지만 그런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닛타의 뒤쪽을 바라보는 노세의 표정이 환해졌다. 돌아보니 야마기시 나오미가 다가오는 참이었다.
"오늘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닛타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천만에요. 저야말로 그날은 정말 고마웠어요. 오늘 저녁은 부디 마음껏 즐겨주세요."
야마기시 나오미의 목소리가 닛타의 귀에 다정하게 울렸다. 겨우 일주일쯤 못 봤을 뿐인데 왠지 무척 반가웠다. 상쾌한 그 웃음이 눈부셨다.
- 아마도...
눈치껏 빠져준 것이리라. 닛타는 깨달았다. 후지키가 오지 않고 세 사람만 함께하는 자리라는 것을 안 순간, 노세 씨는 냉큼 자리를 뜨자고 생각한 것이다. 아무튼 눈치 하나는 빠른 형사다.
"우선 건배나 할까요?" 닛타가 잔을 들었다.
야마기시 나오미도 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쨍하고 마주친 유리잔에 도쿄의 밤 풍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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