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키쿠치 히데유키] 뱀파이어 헌터 D 1-7 上下

일루젼 2023. 12. 28. 05:55
728x90
반응형

저자 : 키쿠치 히데유키 / 안종두
출판 : 시공사 
출간 : 1998.12.31 


저자 : 키쿠치 히데유키 / 안종두
출판 : 시공사 
출간 : 1998.12.31 


저자 : 키쿠치 히데유키 / 안종두
출판 : 시공사 
출간 : 1998.12.31 


저자 : 키쿠치 히데유키 / 안종두
출판 : 시공사
출간 : 1998.12.31 


저자 : 키쿠치 히데유키 / 안종두
출판 : 시공사
출간 : 1998.12.31


저자 : 키쿠치 히데유키 / 안종두
출판 : 시공사
출간 : 1999.12.31 


저자 : 키쿠치 히데유키 / 안종두
출판 : 시공사
출간 : 1999.12.31 


 

 

 

어린 나날의 기억을 더듬다 보면 마주하게 되는 기묘함이 있다. 

한 올 한 올 조각한 것처럼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 순간의 공기까지도 느껴지는 듯한 순간이 있는가 하면 어딘지 모르게 희붐하게 흐려져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자신하기 어려운 순간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건져낸 조각들을 시간의 흐름대로 나열하려고 늘어놓으면-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조각들이 나타난다.

 

내게 <뱀파이어 헌터 D>는 그런 조각 중 하나다.

 

서점에서 책을 구매했던 순간의 감각이 이토록 선명한데도- 막상 책을 읽고 있는 순간은 몇 년이나 전- 혹은 후의 기억이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손에 들고 있는 책을 자세히 들여다볼라치면 그 책은 <창룡전>이었다가, <마계도시 블루스>였다가, <로도스 도전기>였다가 하는 것이다. 

 

<뱀파이어 헌터 D> 1권이 번역 출간된 지 20년이 넘었다는 사실도 믿기 어렵지만, 40여 권이 넘어가는 분량이 아직도 연재되고 있다는 사실도 믿기 어렵다. 아직도 칭찬할 거리가 남았단 말인가... 누군가를 낯간지러워질 만큼 예찬하고 싶다면 키쿠치 히데유키가 D에게 쏟아내는 헌정사들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물론 D는 무척 매력적이고 신비로운 캐릭터지만 -추억 보정을 감안하더라도 미남 먼치킨은 정통파니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문득 이런 고전 라이트 노벨도 끝까지 번역 출간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또한 이어서 드는 것이다. 

 

얼마 전 <창룡전>이 드디어! 감사한 소미미디어에서 완결까지 출간되었다. 아마노 요시타카의 일러스트는 빠졌지만 정식 출간만으로도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이다.

그래서 말인데... 40권과 미완이라는 부담감이 있긴 하지만... <뱀파이어 헌터 D> 재출간에 관심이 있으신 출판사는 없으신지...? 

일어보다 영어가 편하신 분들이라면 킨들에서 영문판을 제공하니 그쪽으로 알아보시는 것도 한 방법이다. 물론 분위기가 조금 달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뱀파이어 헌터 D>는 꽤나 성공적인 애니화로도 유명하지만, 원작에서 주인공의 외모와 분위기에 대해 워낙 극찬을 해놓아 어떤 작화로도 D 특유의 분위기를 모두 담아내지는 못했다는 비판을 받곤 한다. 작가의 사심이 가득 담긴 미모의 주인공과 위험하면서도 기괴한 여행을 떠나보고 싶으신 분들은 꼭 소설로 접해보시길. 여성 캐릭터의 소비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지만, 충분히 매력 있는 작품이다. 또 <마계도시 블루스>나 <요마록>, <퇴마침>에서 두드러지는 키쿠치 히데유키 특유의 농밀한 묘사가 거의 없다는 점도 특징이다. 

 

결론.

 

<뱀파이어 헌터 D> 뒷권을 한글판으로 읽고 싶다.

어린 시절 좋아했던 추억의 책인데 20년이 지나서 읽어도 여전히 나름의 재미가 있다.

취향은 변하지 않는 걸까?

나는 무엇에 '호'를 느끼는가.

24년 되기 전에 정리해서 기쁘다. 

 

-라는 생각의 흐름으로 마무리 지어볼까 싶다.

 

다들 행복한 연말 되세요. 

 

 


   


제1권 저주받은 신부
출판 이후 85쇄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며 수많은 파란과 화제를 가져왔던 <뱀파이어 헌터 D> 시리즈의 첫 편으로 뱀파이어의 희생양이 된 남매를 구하기 위한 헌터 D의 처절한 싸움과 사랑이 숨 가쁘게 전개된다.

제2권 사자死者의 왕국
세계를 떠도는 이동 마을에 발길을 들이게 된 헌터 D. 전염병처럼 퍼지는 귀족들의 습격!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마을로 시시각각 다가오는 거대한 공중 도시 도시로 뛰어든 D와 일행을 맞는 것은 도시 전체에 흩어진 시체들 뿐... 이동 마을과 D를 향하여 공격해 오는 어둠 속의 실체는 과연 누구인가?

제3권 살인게임
귀족과 인간 소녀 사이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피어난다. 그들은 사랑을 위하여 운명을 건 도주를 시도하고, 가장 냉혹한 헌터들이 그들의 뒤를 쫓는다. 사냥감이 되어버린 한 쌍의 연인, 숨 돌릴 틈도 없이 몰아치는 5인의 헌터들, 마지막 선택의 기로에 선 D는 과연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제4권 어둠의 목소리
사라졌던 아이들이 돌아온 지 십 년이 지난 어느 날, 새로운 악몽은 시작된다. 태양빛 아래에서도 다가오는 뱀파이어들. 온 마을을 덮쳐오는 공포의 순간들... 아름다운 소녀 리나를 밤마다 괴롭히는 양아버지의 음흉한 손길... 이 마을을 구하기 위하여 D는 또다시 목숨을 걸고 귀족이 지배하는 어둠 속으로 뛰어드는데...

제5권 꿈의 자객
밤마다 마을 사람들의 꿈에 똑같이 나타나는 검은 그림자, D의 꿈속에서도 그들의 모습이 보이는데... 자신의 목을 조여오는 꿈속의 환영을 해치우기 위해 헌터 D는 꿈속에서 또 다른 꿈속으로 빠져든다. 그는 한없이 깊은 어둠의 나락 속에서 깨어날 수 있을 것인가...?

제6권 살아 있는 사막
한 소녀의 목숨을 지켜야 한다. 소녀의 뒤를 쫓는 정체 모를 살인마들, 그리고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뜨거운 사막의 습격으로부터 소녀를 지켜내기 위한 헌터 D의 목숨을 건 사투.긴박하게 펼쳐지는 그 추적극이 작가특유의 문체에 힘입어 장엄한 서사시로 펼쳐진다.

제7권 피의 축제 
모든 이들이 소유하기 위해 목숨도 불사하는 구슬의 정체는 무엇일까? 바닷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기나긴 혈투! 던필의 약점은 물. 과연 헌터 D는 깊고 차가운 바닷속의 대결에서 살아 나올 수 있을 것인가! 뱃사람들의 혈전, 여름마다 돌아오는 잔인한 귀족... 마침내 밝혀진 구슬의 뒤에는 무서운 비밀이...

 


 

  

- 석양이 평원의 끝을 물들이며 붉다 못해 핏빛에 가까운 색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허공을 맴도는 거친 바람은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댔다. 발목까지 덮이는 끝없는 초원 위를 가로지른 좁은 길 위에 지금 막 한 마리의 말과 기수가 바람의 위세를 이기지 못한 듯 걸음을 멈추고 서 있었다.

 

- 그런데 그 길의 완만한 경사가 시작되는 곳에 한 소녀가 서 있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말은 바람 때문이 아니라 그 소녀의 모습에 놀라 멈춰 선 것 같기도 했다. 타는 듯한 눈동자를 가진 그녀는 약간 풍만한 몸매에 햇볕에 그을린 거무스름한 피부를 가졌으며 새카만 머리카락을 뒤로 땋아 내리고 있었다. 

 

- 그녀의 온몸으로부터 황야에서 살아가는 사람 특유의 거친 야성의 기운이 발산되고 있었다. 소녀는 한여름 빛과 같이 생기가 넘쳐흘렀다. 그런 그녀를 처음 대하는 사람이라면 첫눈에 그녀의 목 아래쪽으로 이어지는 풍만한 곡선에 시선이 이끌릴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목은 닳아빠진 파란 스카프에 가려져 있었고, 그 아래 발목까지는 온통 잿빛 방수 외투에 둘러싸여 있었다. 

 

- "당신은 떠돌이 헌터지?"

매우 난폭한 시비조의 음성이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초췌한 느낌이 풍겨져 나왔다. 말 위의 기수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챙 넓은 여행자 모자를 눈 아래까지 깊숙이 눌러쓴 채, 바람을 피하기 위해 스카프로 코와 얼굴 아래를 감싸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얼굴은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딱 벌어진 체격과 색 바랜 흑색 롱코트 그리고 살짝 밖으로 드러나 있는 전투용 만능벨트 등이 그가 결코 이곳 마을 사람들을 상대하는 평범한 상인이나 철새 노동자는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의 스카프 조금 아래로 축 늘어져 매달려 있는 파란 펜던트가 소녀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 소녀는 커다란 눈동자로 기수의 등에 메어져 있는 긴 검을 주목했다. 대부분의 헌터가 애용하는 직선형의 검과는 달리 우미(優美)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그 검은, 주인이 광활한 대지 위를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떠돌아다녔는가 하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었다.  

 

- "그 검은 장식품인가? 그렇다면 그 검은 놔두고 가는 게 좋겠군. 내가 시내로 가져가 좋은 값에 팔아줄 테니까!"

이번에도 응답이 없다면 어쩔 수 없다는 듯, 소녀는 오른쪽 발을 뒤로 한 걸음 당겨 자세를 반쯤 낮추었다. 그리고 채찍을 들고 있던 손을 천천히 옆으로 올렸다. 그때서야 비로소 기수가 응답했다.   
"뭘 원하지?"
매우 짧고 메마른 대답이었다. 소녀의 표정이 질린 듯 굳어졌다.
낮은 목소리에 바람소리까지 더해져 잘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분명 십칠팔 세밖에 안 된 청년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 청년의 말이 멈추어 섰다.

"당신과 농담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청년이 말했다.
"잘 알고 있어요. 뱀파이어 헌터가 헌터들 중에서 가장 명인이라는 것을요. 그리고 당신들이 상대하는 뱀파이어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도 말이에요... 저는 뱀파이어 헌터가 될 수 있는 것이 천 명에 한 명 정도라는 것, 그리고 그들과 싸워 이길 확률이 반 정도밖에 안 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어요. 저희 아버지도 헌터였기에..."
그 말을 들은 청년의 눈에 순간 감정의 동요가 보였다. 그는 한쪽 손으로 모자를 밀어 올렸다. 눈초리가 가늘게 찢어져 차가워 보이긴 하였으나, 맑고 투명한 눈동자였다.
"무슨 헌터였나?"

 

- 청년은 얼굴을 가린 스카프를 끌어내렸다.

"그 상처를 보니 활동이 무척이나 왕성한 거물급의 뱀파이어가 틀림없군."
마지막 한마디는 소녀를 치켜세우는 말이었다.
피를 빨린 인간의 반응은 뱀파이어의 수준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의 경우, 영혼을 빼앗긴 정신 나간 인형과 같이 되어버렸다. 피부는 백랍처럼 빛깔을 잃어버리고, 하루 종일 얼빠진 눈으로 음지에 누워서 뱀파이어의 방문을, 그리고 또 한 번의 입맞춤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 꼴이 되지 않으려면 보통 사람보다 월등한 체력과 정신력을 필요로 했다. 이 소녀는 그 예외 중의 한 사람인 것이었다. 

 

- 하지만 소녀는 좀 전에 보여준 강인한 정신력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몽유병 환자 같은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스카프를 벗은 청년의 미모에 그만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 남자다운 굵고 짙은 눈썹, 쭉 내려온 정돈된 콧마루, 강인한 의지를 나타내는 꼭 다문 입술, 수많은 전투를 헤치고 나온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는 엄숙한 표정 속에 슬픔을 머금은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그의 미모에 한동안 정신을 놓고 있던 소녀가 문득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의 눈빛 속에 숨어 있던 불길한 무엇인가가 그녀의 등줄기를 오싹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 "저, 그리고..."
소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일이 끝난 뒤에, 저를 마음대로 하셔도 좋아요."

청년의 입가가 살짝 벌어지며 웃었다. 마치 조롱이라도 하듯이.
"나한테 안기는 것보다 귀족의 입맞춤이 나을걸."
"그런 게 아니에요!"
갑자기 소녀의 눈에 눈물이 빛났다.
"전 이제 뱀파이어가 되든 누구의 여자가 되든 그런 건 상관하지 않아요. 이미 저에게 있어 그런 것은 가치가 없어졌으니까요. 어찌 됐건 좋아요... 어때요? 일을 맡아주실 건가요?"

분노와 슬픔이 교차하는 소녀의 얼굴을 잠시 동안 지켜본 청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 대신에 하나 알아둘 게 있어."

"뭐죠? 뭐든 말씀하세요."
"난... '던필'이다."
소녀의 얼굴이 갑자기 얼어붙었다.

'설마. 이렇게 아름다운 남자가... 그러고 보면 너무 지나치게 아름다워...'
"어떤가? 좀더 기다려보면 다른 헌터가 지나갈지도 몰라. 무리는 하지 않는 게 좋아." 

 

- "당신은...! 문 건너편 소리까지 들을 수 있어요?"

"황야를 떠도는 바람 소리나 어두운 숲을 방황하고 있는 영흔들이 원망 어린 시를 읊조리는 소리까지도..."
D는 중얼거리듯 말하고 나서 미끄러지는 듯한 움직임으로 도리스의 옆으로 다가섰다. 그 단정하고도 차가운 얼굴이 목줄기를 거쳐 천천히 내려오고 있음을 느낀 도리스는 몸을 굳히며 무심코 소리치고 말았다.
"그만!"

분명한 혐오감이 담긴 그 목소리에 D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목의 상처를 볼 뿐이야. 적의 신분을 대충 알 수가 있어."

D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리스의 마음은 금세 후회로 가득 찼다.

 

- "귀족의 힘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비대해지지. 까다로운 상대군."
하지만 그다지 까다롭게 여기지 않는 말투였다.

 

- 뱀파이어는 희생자를 두 가지로 취급했다. 온몸의 피를 한 번에 다 빨아먹고 시체로 만들어버리든지, 아니면 수 차례 피를 빨면서 자신들과 같은 무리로 만들어버리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피를 빠는 횟수와는 관계가 없었다. 좀 전에 D가 지적한 것처럼 뱀파이어가 희생자를 얼마만큼 마음에 들어 하느냐가 관건이었다. 단 한 번의 흡혈로 뱀파이어가 되기도 하고, 몇 개월에 걸친 흡혈로도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 그리고 일단 뱀파이어가 된 자는, 밤마다 인간의 살아 있는 피를 찾아 방황하는 악마의 숙명을 짊어진 채 영겁의 어둠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도리스에게 있어 아니, 이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 실로 공포의 대상이었던 것이었다. 

 

- "어떻게 싸울 건가요?"
도리스가 D에게 물었다. 그녀의 몸속을 흐르고 있는 헌터의 피가 느껴지는 질문이었다. 뱀파이어 헌터의 전투는 비참하고 처절하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 실체를 끝까지 지켜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도리스도 풍문으로만 전해 들어 실제 어떻게 전투가 벌어질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또한 지금 그녀 앞에 있는 청년의 모습이 이야기를 듣고 상상했던 거칠기 짝이 없는 헌터와는 너무도 달랐기에 그녀로서는 과연 그가 이 싸움을 어떻게 풀어갈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지켜보고 있으면 알게 되겠지. 하지만..."
청년이 말꼬리를 늘였다.
"당신은 그냥 조용히 잠을 자주는 편이 낫겠어."

 

- 갑자기 청년의 왼손이 탄탄하면서도 여성스러움을 잃지 않은 도리스의 오른쪽 어깨를 향해 뻗어왔다. 어떤 내공의 힘을 발휘한 것일까? 순간 오싹한 기운이 온몸으로 전해져 오면서, 도리스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그 직전에 그녀는 발견할 수 있었다. D의 왼쪽 손바닥에 있던 그것을 도리스의 눈에는 분명히 보였다. 작아서 색깔이나 형태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하게 눈과 코와 입을 가진 기이한 얼굴 같은 것을... 

 

- D가 굳이 도리스를 잠재운 것은 그녀가 지금부터 일어날 전투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뱀파이어의 입맞춤을 받은 자는 아무리 의지가 강하더라도 결국에는 뱀파이어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보호하고 있던 여자들에게 등뒤로 공격을 받아 심장을 찔린 헌터가 적지 않았다. 베테랑 헌터는 그것을 경계하여 사전에 희생자에게 수면제를 먹이거나 휴대용 철창에 가두어 두곤 했다. 

  
- 바람을 타듯 우아한 발놀림으로 농원 입구를 빠져나온 D는 3미터 정도 더 전진한 뒤에 갑자기 멈추어 섰다. 
이윽고 어둠의 평원 저편에서 말발굽과 차바퀴 소리가 들려왔다. 이 청년은 소녀와 이야기를 하던 도중에도 멀리서 달려오던 이 소리를 놓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어둠 그 자체의 빛깔을 띤 흑마 네 마리가 끄는 마차 한 대가 달빛을 받으며 나타났다. 

 

- 행성 여행도 더 이상 이룰 수 없는 꿈이 아니었다. 광활한 우주공항에는 질량 변환 로봇과 어마어마한 은하에너지 추진선이 창공을 향해 곧 날아오르기라도 할 듯이 대기하고 있었다. 견우성과 처녀성을 비롯한 몇 개의 행성계에 탐사대를 왕래시키고도 남을 정도의 장비였다. 

 

-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 
거대한 '수도'의 모습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그 사실을 즉각 알 수 있었다. 투명 금속으로 구성된 건물과 첨탑 벽면에는 뿌옇게 먼지가 쌓여 있었고, 도시 곳곳에는 폭발물과 초고열에 의해 생긴 크고 작은 파괴의 흔적이 생생했다. 자동 도로나 자기(磁氣) 고속도로도 거의가 무너져 반밖에 남지 않은 모습이었으며 도시를 왕래하는 자동차를 찾는다는 것은 마치 유성을 보는 것처럼 힘든 일이었다. 

 

- 하지만 사람들은 있었다. 그것도 엄청날 정도로. 길가를 행진하는 끝없는 사람들은 웃고, 분노하고, 울음을 터뜨려댔다. 추잡하기까지 한 그 광경은 여전히 '수도'가 살아 있는 생명의 도가니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인간들의 모습은 아무리 잘 봐주어도 이 관제도시의 지배자라고 할 수가 없었다. 먼 옛날 중세를 연상시키는 초라한 상의와 바지, 닳아빠진 긴 코트, 화려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거칠고 빛바랜 여자들의 원피스... 

 

- 한때 지구를 정복했던 인류의 역사는 1999년의 어느 날을 기점으로 종결되었다. 인류가 그렇게 경계해 왔던 전면 핵전쟁의 미사일 버튼을 누군가가 누른 것이었다. 수없이 쏘아대었던 수천 발의 ICBM, MIRV는 차례차례로 대도시를 균열지옥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치사량을 훨씬 웃도는 방사능은 인류의 대참살을 가져왔다. 
'한정핵전쟁' 내지, 뒤에 다가올 부흥과 자신의 지배를 고려한 '양심 있는 전쟁' 따위 식의 낙관론은 수억 도의 불꽃과 함께 한 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 살아남은 인간들은 간신히 연명해 갈 뿐이었다. 하지만 그 수는 결코 적지 않았다. 인간들은 독성물질로 오염된 지상을 피해 몇 년에 걸쳐서 방공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겨우 땅 위로 나왔어도 기계문명은 거의 파멸 상태에 처해 있어 다른 국가들의 생존자와 연락을 취해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고립된 사람들의 힘만으로 파괴 이전의 상태, 아니 문명이라 칭할 수 있는 단계로 복귀한다는 것은 절망을 뛰어넘은 꿈속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로부터 인류의 후퇴가 시작되었다.

 

- 합성음이 안내한 곳은 호화스러운 큰 문이 있는 곳이었다. 문 밑 쪽에 고양이가 왕래할 만한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또다시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D는 더욱더 짙어진 어둠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았다. 


- 들어서는 순간, 그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초췌한 기색이 문득 사라졌다. 신경과 근육, 그리고 피의 흐름이 갑작스레 변해버린 시간을 느끼고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넓직한 방 전체에 가득 차 있는 농후한 향을 맡은 순간, D는 자신의 몸이 변화한 원인을 깨달았다. 바로 '시간을 잃어버리게 하는 향' 때문이었다. 그도 그것에 대해선 이미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넓은 문 끝에 오도카니 매달린 불꽃이 어슴푸레한 두 개의 그림자를 비추고 있었다. 그가 그림자를 발견했을 때, 이미 그것은 뚜렷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무슨 일에도 끄덕하지 않던 D를 긴장시키는 괴이한 기운이 두 개의 그림자 중 하나로부터 발산되고 있었다. 한눈에 여자임을 짐작할 수 있는 날씬한 몸매의 그림자 바로 옆에 서 있는 장대한 검은 옷의 그림자가 바로 그것이었다. 

 

- 인간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자료와 각종 문건에 기록된 마인(魔人)들의 생리에 관한 정보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거의 모두가 사실이었다. 널리 알려진, 뱀파이어가 박쥐나 구름으로 변하여 날아다닌다는 이야기 역시 그랬다. 단지 그것이 가능한 뱀파이어와 그렇지 못한 뱀파이어가 있을 뿐이었다. 인간 사회에 있어서도 개개인의 자질에 따라 그 재능을 발휘하는 분야가 다르듯이 뱀파이어 중에서도 모든 것을 자유자재로 조작하는 마인이 있는가 하면 저급한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요괴도 있는 것이었다.  


-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들 생리현상의 가장 중요한 것들은 대부분 수수께끼에 싸여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밤에는 눈을 뜨고 있고, 낮에는 잠을 잔다고 하는 것이었다. 모든 빛을 차단한 밀실의 그늘에 있어도 그들은 새벽의 방문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시간이 되면 어쩔 수 없이 몸이 굳어지고 호흡이 사라지며, 심장의 고동만이 남게 되었다. 눈으로 햇볕을 보고 안 보고는 상관없이 그 시간이 되면 죽음의 잠자리를 청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들 또한 이 생리현상의 원인을 밝히고자 했다. 생태학, 생리학, 대뇌생리학, 그리고 심리학 및 초심리학... 모든 학문의 정수를 투입해 가며 몇천 년에 걸쳐서 해명의 노력을 해온 것이다.  

 

- '시간을 잃어버리게 하는 향'은 그런 악전고투의 탐구가 낳은 일종의 한계 극복법인 것이었다. 그 향기가 자욱해지면 시간은 밤이 되었다. 아니, 시간 그 자체가 지금은 밤이라는 착각을 하게 하는 것이다. 

 

- "어느 쪽으로 봐서도 배신자다. 우리들 동료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넌 인간이냐, 뱀파이어냐?" 

 

- "어때? 결례를 범했던 것을 아버님께 사과드리고 이 성의 일원이 되지 않겠어? 무엇 때문에 우리들을 그렇게 노리는 거지? 그런 초라한 모습으로 황야를 떠돌아다니는 헌터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도 값어치가 있는 일이야? 아니, 당신은 당신이 지켜준 인간들, 바로 당신에게 감사해야 할 그들에게서 어떤 대접을 받아왔지? 그들의 동료로 받아 주던가?" 

 

- 던필, 뱀파이어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어떤 의미에서 이처럼 고독한 존재는 없을 것이다. 여느 때에는 인간과 다름없이 태양빛 아래에서도 비교적 자유롭게 행동을 하지만, 일단 한번 화가 나게 되면 뱀파이어의 마력에 사로잡혀 사람들을 살상한다. 무엇보다도 흉칙스러운 것은 부모의 어느 한쪽에서 이어받은 흡혈의 습성인 것이다. 

- 태어날 때부터 뱀파이어의 장점과 약점 모두를 잘 알고 있었기에 인간 사회에서는 생계의 방편으로 뱀파이어 헌터로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다른 인간 헌터들과 비교할 수 없는 상당한 실력을 발휘하고 있었지만, 그 이외에는 거의 인간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소외당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때로는 던필 자신도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뱀파이어의 본성 때문에 오히려 의뢰자의 피를 빠는 경우도 있었다.

그가 임무를 완수하는 동안은 간신히 참고 그를 지켜보던 사람들도 일단 일이 완료되면 증오와 경멸의 눈길로 돌을 던지면서까지 그를 쫓아버리려 했다. 고귀하고 냉혹한 귀족의 피와 저질스럽고 잔악한 인간의 피... 음양, 그 두 가지의 숙명을 짊어지고 한쪽에서는 배신자라 불리워지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나쁜 악마로 비난받는 자! 실로 던필은 일곱 개의 바다를 영원히 ...

 

- "인간들과 의리를 지켜 도대체 뭘 어쩌자는 거야? 지상에서 살아가는 자신들 이외의 생명체를 소중히 여길 줄 모르고, 그 때문에 결국 우리들까지도 파멸의 늪 속으로 밀어 넣은 저주받을 것들이야. 우리들의 깊은 배려로 근근이 삶을 영위하다가도 틈을 주기만 하면 금방이라도 반기를 드는 반역자들.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이 별과 우주에서 소멸되어야 할 생물체인 거야!" 

 

- 그 순간, 백작의 귀에 어떤 말 한마디가 들려와 백작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그것은 눈앞의 젊은이가 중얼거린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먼 기억 저편에서 지금과 똑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성은 그것을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어. 이것은 분명히 그분한테서 들은 말이야. 그 위대한 분, 우리들 종족의 신조(神祖). 이 터무니없는 자가 그것을 알고 있을 리가 없어.'
잠깐 생각에 잠긴 그의 귀에 D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할 말은 그뿐인가?"

 

- 조금 전에 청년이 흘린 중얼거림이 스치며 지나갔다. 그분으로부터 들은 말씀. 그것을 떠올릴 때마다 모든 귀족은 근심 어린 표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분의 그 한마디! 그걸 어떻게 저 어리석은 놈이? 
[우리들은 지나가는 객(客)인 것이다...]

 

- 도리스는 무심코 오른손을 자신의 하얀 목줄기로 가져갔다. D가 밖으로 나가기 바로 직전에 목의 이빨자국에 '주술'과 같은 것을 가했었다. 그것은 왼쪽 손바닥으로 가볍게 누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D는 그것이 어떤 효과가 있는지 말도 않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도리스를 지탱하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 도리스의 뇌리 속에 또 다른 얼굴 하나가 스쳐갔다. 그녀에겐 은인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좀 전의 미청년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 여은성을 떠올리자 도리스는 왠지 불길한 예감이 가슴을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자의 품에 안겨 정신을 차리며 눈앞에 있던 그의 미모를 대한 순간 그녀의 머릿속이 아연해졌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자의 아름다운 얼굴에서는 쉰 과일이 썩는 것 같은 냄새가 묻어났다. 

 

- "언제라도 너의 뼈는 꺾여질 수 있어."
장녀가 반짝이는 붉은 눈으로 D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두 눈의 불꽃은 욕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하지만 넌 너무 아름다운 남자야. 너무나도 근사해."
그녀의 혀가 D의 볼을 핥았다.
"정말로 근 삼백 년 동안 보지 못했던 미남자야."

 

- "그냥 죽이기에는 아까워... 우리 셋이 이 세상에서 맛보지 못한 가장 뜨거운 희열을 듬뿍 가져다 주지. 그런 다음에 골수까지 모조리 다 먹으면 돼."

막내의 목소리는 거의 헐떡임에 가까웠다. 

- 뱀녀들에게 있어 생명력의 원천은 반드시 유기체를 섭취하여 얻어지는 에너지만이 아니었다. 요괴만이 갖는 비장의 기술로 관능에 이기지 못한 튼튼한 젊은이, 또는 팔팔한 새끼은어 같은 미소녀를 절정의 순간에 이르게 하고, 그 순간 그들이 내뿜는 환희의 정열을 흡수하는 것. 이것이 바로 뱀파이어 이전, 즉 인류가 군림해 온 태고적부터 '세 자매'를 영생시켜 온 불사(不死)의 비밀이었다.

- 물론 아무것이나 가리지 않고 흡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들은 나름대로 '미식가'였다. 백작의 손에 의해 지하로 보내지든가 아니면 다른 출입구로부터 길을 잃고 들어온 인간의 수는 많았지만, 몇 백 년 동안은 오로지 육체의 식욕만을 탐하여 쾌락을 맛보는 즐거움은 전혀 모르고 지내왔던 세 자매였다. 

그런 그녀들에게 오랜만에 쾌락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 "쾌락의 덫이라... 그러나 그것에 걸려든 건 과연 어느 쪽일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D는 손에 쥔 머리카락을 내던졌다. 그리고는 양손에 힘을 주어 세 개의 긴 목을 끌어안았다.
"이렇게 하고 싶진 않지만, 출구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이것밖에 없어. 게다가 내겐 기다리는 사람이 있지."
그의 말과 동시에 D의 눈과 눈썹이 한꺼번에 치켜 올라갔다. 입술이 크게 벌어지며 하얀 이빨 두 개가 번뜩였다. 잔인하고도 사악해 보이는 그것은 바로 뱀파이어의 얼굴이었다. 

 

- 이미 D는 본래의 차갑고 아름다운 무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윽고 그는 고매한 목소리로 '세 자매'에게 출구까지 안내하라는 명령을 했다. 
살아 움직이는 세 개의 목이 입은 열지도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그들이 어둠의 저편으로 안내를 시작하자 D도 그들의 뒤를 쫓아 어두운 그림자를 남기며 사라졌다. 그 순간 D의 왼쪽 허리 주변에서 조소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아무리 싫어해도 피는 속일 수가 없는 거야. 너의 운명은 스스로가 잘 알고 있겠지?"
크게 화난 목소리가 대꾸했다.
"시끄러워! 나오라고 한 적 없어! 들어가 있어!"
두 번째 목소리는 틀림없는 D였다. 그렇다면 처음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리고 항상 냉철함을 잃지 않던 D의 감정이 순식간에 분노로 치밀어 오른 까닭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 "정확하게는 '선택적 자동 기억 소거 조작'이라고나 할까? 말하자면, 어떤 종류의 기억만을 자동적으로 없어지도록 정신 조작을 한다는 게야."
"귀족들의 약점. 바로 놈들을 쫓아버릴 수 있는 그것에 대한 기억을?"

 

- "만 년이란 세월에 걸쳐 이 세계를 지배해 온 놈들이야. 그들에 대한 기억을 선택적으로 없애기 위해 사람들의 DNA나 뇌수에 뭔가를 건 것이 틀림이 없어. 이러한 얘기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주장되어 온 것이란다. 그래서 결국 나 역시 이 연구결과에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그렇게 정해버리고 나니까 이야기는 더욱 간단했단다." 
"그 말씀은?"
"그래, 바로 기억을 되살리면 돼."
 

- "지금 상황에서 네가 이런 말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난 평소에 '귀족'과 인간과의 관계,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귀족'이 우리 인간들을 대하는 태도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해 왔단다. 그들이 어쩌면 우리 인간들에게 일종의 친애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 "이봐요. 할머니! 정신 차려요!"
도리스는 당황해하며 달려가 노파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노파는 이미 눈을 희게 까뒤집은 채 거품을 물고 비참한 모습으로 숨을 거둔 상태였다. 이마에 '오망성(五芒星)'이란 도장이 찍혀 있었다. 그것은 요술사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럴 작정은 아니었는데..."

 

- "그럼 그자는 벌써?"
점점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변하는 딸의 얼굴을 외면하며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놓쳤다. 그런데... 그놈은 우리처럼 그 세 자매의 목을 물어 자신의 뜻에 따르게 했어. 그렇다면... 그놈은 단순한 '던필'이 아닐런지도..."

자제심이 부족한 '던필'이 때때로 사람의 피를 빨긴 하였지만, 그 희생자가 귀족의 희생자처럼 꼭두각시가 되는 예는 없었다. 물론 절반이 뱀파이어의 몸인 '던필'이긴 하였으나, 그들이 가진 절반의 힘만으로 그 단계까지 이르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 "그럼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아이를...?"
"음. 그 미모와 체격, 그리고 하얀 목은 수천 년 동안 만나보지 못했던 보기 드문 조건의 아이였어."
여기서 백작은 약간 어조를 바꾸어 말했다.
"나를 상대로 한 발도 물러서지 않던 어젯밤의 그 전투 모습이 더욱 그녀를 포기할 수 없게 만들었다... 만 년 전, 우리의 '신조(神祖)'가 빠졌던 한 여자 인간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결국 이루어질 수는 없었지만..."
백작은 이렇게 말하며 등뒤의 벽면을 차지한 거대한 초상화 쪽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한동안 존경과 경이로움이 담긴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신조가 마음을 빼앗긴 사람은 일찍이 영국이란 나라에 살았던 미나란 이름의 여성이었다. 그 투명한 피부 밑을 흐르는 피는, 그녀를 만나기 전에 몇 천 명이나 되는 미녀의 생명선에 입을 맞추어 온 '신조'의 혀에도 일찍이 없었을 만큼 달콤하고 향기롭게 느껴졌다고 한다." 
"그 여자 때문에 우리의 '신조'는 바로 재가 되셨습니다."

냉랭했던 라미카의 어조가 어느 사이엔가 조금씩 부드럽게 바뀌고 있었다.
"아버지, 제발 생각을 고치실 수는 없나요?"

 

- 선혈이 떨어지는 상처 부위를 누르며 여은성은 말했다. 

"기껏 인간 여자에게 의리를 지키기 위해 귀족의 생명을 노리고, 또 귀족을 욕보였다고 해서 인간인 날 죽이다니. 저주받... 은 자, 너의 이름은 '던필'... 귀족의 밤과 인간의 낮을 공유하지만 어느 쪽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자. 넌 평생 어둠 속에 묻힐 운명이야!"
"난 뱀파이어 헌터다."

 

- "사사건건 날 거역하고 천재일우의 기회까지 망쳐버린 멍청한 것 같으니. 넌 이제 내 자식으로 생각하지 않겠다. 햇빛에 쬐여 뼈 구석구석까지 썩어버려라!" 
도저히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없는 잔혹한 백작의 말이었다.
애초부터 뱀파이어라는 종족은 '애정'이나 '따뜻한 배려' 같은 인간들의 관념을 구비하고 있질 않았다. 어쩌면 이것이 번영의 정점까지 이르렀던 그들의 문명을 또다시 지는 해와 같이 파국으로 치닫게 만든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 그 순간 남매는 분명히 볼 수 있었다. D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하지만 그들은 아직 깨닫지 못했다. 그들이 이 위기를 벗어난 후 몇십 년을 살아가면서 종종 이 순간 D의 얼굴을 떠올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덧붙여 D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한 그들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될 것이라는 점도. 

그것은 그만큼 의미 있는 미소였다.

 

- 합성 단백질을 상자에 담아 정원 구석에 쌓아둔 다음 방수 비닐 텐트로 그 위를 덮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순회 무역상들에게 팔 것들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돈이나 생활필수품으로 교환하곤 했다. 도리스와 던이 재배한 단백질은 고밀도로 정평이 나 있어 무역상들도 늘 파격적인 가격으로 사주었다. 

- 소를 돌보는 일과 우유 짜는 일도 거의 방치해 둔 상태였다. 하지만 이것은 런실버 마을이 가장 많이 거래하는 주요 상품이었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개점휴업 상태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백작과의 싸움만이 도리스의 생활은 아니었던 것이다.

- 낡은 로봇 한 대와 던의 힘을 빌려도 꼬박 삼일은 걸리는 이 일들을 D는 반나절 만에 다 해치워버렸다.
거대한 둥근 그릇에 담긴 횐 단백질 엑기스를 말끔하게 플라스틱 팩에 넣고, 일정한 양이 차면 작업장에서 정원으로 옮기는 일을 D는 시작했다. 그는 놀랍게도 30킬로그램이 훨씬 넘는 상자를 한 번에 세 개씩이나 짊어지고 옮겼다. 처음엔 "굉장하다!"며 눈이 휘둥그래졌던 던도 이 초인적인 왕복이 세 시간이나 이어지자 입을 딱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게다가 우유를 짜는 속도는 거의 신기에 가까웠다. 도리스가 한 마리를 끝내는 동안에 그는 세 마리를 해치웠던 것이다. 그것도 왼손 하나밖에 사용하지 않은 상태로 나머지 오른손은 바로 검에 가 있었다. 그것은 항상 방심할 수 없는 헌터의 마음가짐에서 우러나온 자세였다. 

- 너무나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이었다.
도리스는 새삼 그에게 감동했다. 처음부터 그의 그러한 일면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지만, 매일매일 이어지는 전투의 시간들이 그것을 생각하게 해 줄 여유조차 내주지 않았던 것이다. 
묵묵히 한 손만을 움직여 알루미늄통에 하얀 액체를 넣고 있는 D의 옆얼굴을 도리스는 멀찌감치에서 바라보았다.

 

- 그러나 D는 도리스를 밀어내며 빠른 걸음으로 안채 쪽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그가 축사의 모퉁이를 돌아선 직후였다.
"왜 빨지 않았어?"

그의 허리 주변에서 야유하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닥쳐."
평소답지 않게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D의 목소리였다.

"그 아인 알고 있었어. 네가 자기를 갖고 싶어했던걸. 오오, 오오, 그런 얼굴을 해도 소용없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네 혈관 구석구석에는 '귀족'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여자에게 욕정을 느끼면 그녀를 안는 것보다도 하얀 목을 덥썩 물고 싶어지는 것이 바로 그 증거지."

- 그것은 사실이었다. 도리스의 고백을 들은 후, 가슴을 파고드는 그녀의 뜨거운 몸을 느낀 순간, D는 암흑 속 뱀녀들의 피를 빨았던 무서운 뱀파이어의 형상으로 변한 것이다. 그러나 그 무서운 유혹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억눌렀다. 실로 강인하고도 무서운 그의 정신력 덕택이었다.
계속 걷고 있는 D에게 목소리가 또다시 말했다.
"저 아이는 분명 너의 또 하나의 얼굴을 보았어. 아니 자기의 목덜미를 향한 네 숨결의 냄새를 맡았던 거야. 바로 저주받은 피의 냄새를. 그런데도 그녀는 괜찮다고 말했어. 그만큼 널 원하는 거지. 이봐, 잘난 척도 적당히 해.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며 여자의 바람을 저버리는 게 잘생긴 '던필'이 할 일인가...? 넌 항상 도망 다니고 있어. 자신의 핏줄로부터, 또 널 원하는 인간으로부터. 어차피 헤어질 운명이란 말 따위는 잘난 변명에 지나지 않아 잘 들어둬. 너의 아버진..."

"닥쳐."
이 말은 좀 전에도 한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 한마디에는 단순한 분노를 넘어선 혼기(氣)가 들어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목소리'는 재깍 침묵했다.

- 현관의 계단을 올라서는 순간, D가 초원의 저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난 가야만 해. 놈을 찾으러."

 

- 그대로 몇 초가 흘렀다. 갑자기 D가 몸을 일으켰다.

 

- "가만히 있어도 '귀족'은 멸망한다. 멸망할 수밖에 없는 자를 위해 도대체 언제까지 자신들의 동료를 희생시킬 작정인가? '인간'의 심적 수준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면 난 결코 이 여자를 당신들에게 넘길 수가 없다. 손녀를 빼앗기고도 우는 것밖에 할 수 없는 노인이나, 자신의 처가 당했다고 그 대신에 다른 여자로 복수하려는 남편이나, 아니 이 마을도, 마을 사람들도 차라리 전부 지옥에 떨어지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난 인간, 귀족 둘 다를 상대로 남매를 지킬 것이다. 이래도 나와 맞설 것인가?" 

 

- 도대체 어디에 저장된 것인가?
손 그 자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공기와 흙은 이미 몸에서 잘려나갔던 팔 부분에 모두 흡수되어 있었다.
밑을 향한 손바닥에서 작게 트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물과 불이 없어서 약간 시간이 걸릴 것 같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 흔히 땅, 물, 불, 바람을 만물의 4대 원소라고 부른다. '얼굴'은 그중의 두 가지인 땅과 바람만을 빨아들여 열에너지로 바꾼 다음 그것을 생명에너지, 아니 생명 그 자체로 바꾸어 D의 체내로 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어느새 바람은 끊기고 달빛만이 우아하게 비치는 조용한 농원 한편에서 기이한 기적은 계속하여 실현되고 있었다.
바로 뱀파이어의 피를 이은 자에게 있어 절대적인 치명상이라고 하는 흰 나무말뚝 자국이 점점 메워져가고 있는 것이었다.

 

-  D는 자신의 목에 걸린 파란 펜던트를 끌러서 소년의 목에 걸어 주었다.
"로봇을 피하게 하는 물건이야.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 동시에 백작의 귓가에서 일찍이 두 번밖에 듣지 못했던 그 말이 맴돌았다. 그 말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나가는 객(客)..."
그것은 영광스럽고도 자랑스러운 '귀족'의 역사 속에서, 오직 단 한 번 의혹과 부정적인 눈길을 받았던 그들 '신조(祖)'의 말씀이었다. '운명'에 대한 수학적 분석이 가능했던 귀족 과학원은 모든 문명의 역사적 관계를 맞추어본 뒤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들이 막상 연구 결과를 공표하려 하자 갑자기 연구성과의 발표를 모두 중지하라는 비난을 맞이하게 되었다. 바로 그때, 실로 천년 만에 그들 '신조(神祖)'가 모습을 드러내어 사태를 수습했다는 것이다. '지나가는 객'이란 그 말은 그때 나타났던 그들의 '신조'가 갑자기 흘린 말이었다. 

- 유유히 흐르고 있는 역사의 큰 강물과 그 평온한 흐름 위에 잠시 머무는 물거품 같은 문명, '신조(神祖)'는 그것을 '지나가는 객(客)'이라고 불렀다. 과연 그것은 '귀족'이 될 것인가? '인간'이 될 것인가? 

 

- 한때 '귀족'의 상층부에서 소근거리던 이상한 소문이 백작의 귀에도 들려왔다.
[신조께서 인간의 딸과 인연을 맺으셨어. 아이를 만들어서는 죽이고, 죽인 다음에 또 낳으셨다는 거야.]

 

- "설마..."
갑자기 백작의 머릿속이 낭패감과 곤혹스러움으로 가득 찼다.
"설마, 이자가!"
'신조께서는 인간과 귀족의 피의 결합을 원하셨단 말인가!'

사실 여부를 알 수가 없어 백작은 혼자 괴로워하며 앞으로 나왔다.

 

- "저 계단을 올라가면 던이 있어. 둘이서 농원으로 돌아가."
"당신도, 당신도 함께..."
"당신의 일은 끝났지만 내 일은 아직 남아 있어. 빨리 가. 그리고 던에게 전해줘. 나와의 약속을 잊지 말라고."

 

- "남을 건가. 이곳에?"
D의 말에 라미키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물었다.
"하나만 말씀해 주세요. 당신의 이름을...? D는... D는 드라큘라의 D인 것입니까?"
D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러나 그때 우뚝 서 있는 두 사람 위로 돌가루가 엄습해 와 D의 대답은 결국 들을 수가 없었다.

- 뱀파이어 성은 영주와 함께 먼지로 변하여 사라졌다. 엄청난 먼지의 장막이 시야를 하얗게 덮었다. 도리스와 던은 몇 분 동안 계속 기침을 해댔다. 그곳은 성에서 백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언덕 위였다.

 

- D는 약속을 지켰다.
다음은 소년이 지킬 차례였다.

 

(리뷰자 주 : 하지만 파란 펜던트는 어느새인가 다시 D에게 돌아와 있다.) 

 

<1권 저주받은 신부>


- 근경에서는 밤에 여행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행위였다
일찍이 귀족들은 자신들의 세계를 '밤'으로 규정짓고, 전설의 요괴 야수와 괴기 악마를 세상에 퍼뜨려 그들로 하여금 암흑을 모조리 지배하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밤의 어둠이야말로 진리이며, 세상을 총괄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있어서 밤은 위협으로 가득 찬 세계라 할 수 있었다. 

 

- 바람소리에는 꿈속을 떠도는 악마의 신음이 섞여 있었고, 어두운 나무 그늘 아래에는 야수들이 도사리고 앉아 녹색의 눈을 빛내며 나지막한 울음을 토해냈다. 
'수도'의 황폐한 구역을 순찰하는 무장 병사들조차도 이 소름 끼치는 밤의 어둠이 지나고 나면 안도한 나머지 땅바닥에 주저앉아버리곤 했다. 

 

- 그렇기 때문에, 어두운 밤의 여행을 스스럼없이 떠날 수 있는 자는 두 가지 존재뿐이었다. 바로 '귀족'과 '던필', 즉 흡혈귀 헌터였다. 

 

- 부서지는 달빛을 한 몸에 받으며, 황폐한 언덕의 꼭대기에 막 올라서는 인마(人馬)의 그림자가 있었다. 
말은 평범한 사이보그 말이었지만, 고삐를 쥔 기수의 모습은 어둠 속의 달처럼 요기에 젖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스쳐가는 바람조차도 기수의 몸에 닿을 때마다 새삼스레 몸을 떠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챙 넓은 여행자의 모자, 어둠보다도 깊은 칠흑 같은 외투와 스카프 등을 장식하고 있는 우미(優美)한 곡선의 장검 칼집...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해지고 색 바랜 것이 이 여행자가 지내온 가혹한 날들을 상기시키기에 충분했다. 

- 바람이 몰고 오는 먼지를 피하기 위함인지 젊은 여행자는 눈을 감고 있었다.
천상의 세공사가 정교함과 치밀함을 자랑이라도 하듯 만들어낸 그의 수려한 얼굴 옆모습은 피곤에 지쳐 고독한 수면에라도 빠진 것처럼 보였다. 

 

- 그러나 그의 수면조차도 평온한 마음과는 거리가 먼, 수라의 휴식으로 보였다. 
 
- 문득, 바람소리에 무언가가 섞여 들려왔다. 
여행자의 눈이 떠졌다. 
그 눈에 처절한 빛이 흐르는가 싶더니 곧 사라졌다
그는 말을 멈춰 세우지 않았다. 

 

- 언덕 정상까지는 불과 십여 걸음 정도의 거리만이 남아 있었다.
마침내 정상에 올라서자, 좀 전에 바람소리에 섞여 있던 그 소리가 확실히 들려왔다.
바로 총성과 야수의 울음 소리였다.
여행자는 눈 아래의 평원을 내려다보았다.
중형 이동가옥이 습격당하고 있었다.

 

- 운전석 창과 거주구역 천정에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곳에 화룡이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가옥 바로 앞에 연기를 뿜으며 이리저리 마구 흩어져 있는 나무 조각과 침낭, 그리고 이미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먹혀버린 두 개의 인체... 이것들만으로도 사태파악은 충분했다. 아마도 동력 문제 같은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차 안에 있어야 할 가족이 야영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던 것임에 틀림없었다. 작은 모닥불 하나로 다가오는 밤의 악마를 경계하려 했던 무지함을 뭐라 비난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침낭의 수는 세 개였다. 그런데 사체는 두 개뿐이었다. 

 

- 어쩐지 이상한 일이었다. 이 위험한 곳에서 대책 없이 야영을 하는 무지한 자치고는 매우 뛰어난 솜씨와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남쪽에 서식하는 화룡의 급소가 미간이라는 사실을 북쪽에 사는 사람이 알고 있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에 대한 답은 곧 나왔다. 

 

- 언덕 아래의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던 여행자가 갑자기 고삐를 잡아당겼다.
전신에 받은 눈부신 달빛을 어지럽게 날리며 사이보그 말은 언덕을 단숨에 내려갔다.
마치 평지를 달리듯 급경사를 내려온 말은 바람처럼 화룡에게로 다가갔다. 

- 뒤쪽에 있던 화룡 한 마리가 새로운 적의 질주를 눈치채고 돌아보는 순간, 인마(人馬)는 검은 바람으로 변하여 그 옆을 스쳐 지나갔다.
화룡의 미간에서 선혈이 내뿜어진 것과, 말을 급정지시킨 여행자가 외투를 펄럭이며 땅으로 내려선 것은 거의 동시였다. 

 

- "도와준 건 고맙지만, 그렇게 잽싸게 등을 돌려야겠나? 이리 좀 와보라니까."

"생존자는 하나다. 어린애니까 그쪽 혼자로 충분할 텐데."

남자의 얼굴에 놀란 빛이 역력했다.
"어렵죠? 그걸 어떻게... 아하, 침낭을 보셨구만. 정말 재수도 더럽게 없지. 원자로 가열기가 갈라져서 저 안은 방사능이 가득 찼어. 이 사람들이 밖으로 나온 것도 그 때문인가 봐. 생존자도 벌써 방사능을 쐬버렸고..."

 

- 젊은이를 바라보는 소녀의 눈에 잠시 이상한 빛이 떠올랐다. 졸지에 가족을 잃고, 어쩌면 얼마 뒤에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잃게 될지 모를 참담함조차도 잊어버리게 만들 만한 그 무엇인가를, 소녀는 이 아름다운 젊은이의 얼굴에서 발견했던 것이다. 

 

- "어이, 이것 봐. 지금 이러고 있을 여유가 없다구. 중상이라니까! 새벽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 당신 도움이 필요하단 말이야!"
젊은이는 말머리를 돌렸다.
"누가 옮길까?"
"물론 내가 해야지. 흥! 계속 내키지도 않다가 요런 기회가 생기니까 마음이 바뀐 거냐? 뻔뻔스럽기는...!"
남자는 모터바이크에 달린 가죽 벨트를 떼어낸 다음 소녀에게 다시 돌아왔다. 소녀를 등에 업고는 가죽 벨트로 조심스럽게 자신의 몸에 묶었다. 

 

- "이제 저 산기슭에 가면 번화가가 나올 거야... 그런데, 당신은 무슨 용무지?"
D가 대답을 하지 않자, 사투리 섞인 그의 말투가 갑자기 거칠어졌다.
"개자식, 온갖 폼은 혼자서 다 잡는구만. 그러고 있으면 여자들이 홀랑 넘어오니까 맛을 들인 모양인데, 그 솜씨는 인정을 해주지. 하지만 그따위 수법이 계속 통할 거라고 생각하진 말라구. 언젠가 모든 이의 태양이 되는 건 나같이 정직한 사람이니까!"

D는 여전히 말없이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플루토 8세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 "제기랄, 모래 살무사!"
그렇다. 바로 모래 살무사였다. 그것은 땅 속 깊이 숨어 있는 거대한 뱀과 같은 존재를 일컫는 것으로, 아무도 본 적이 없긴 하지만 길이가 수십 킬로미터에 이르렀다. 놀랍게도 모래 살무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1밀리미터도 움직이지 않은 채, 고속진동과 같은 신기한 수단으로 땅 위에 무너지기 쉬운 토사층 몇 군데나 만들어 놓고는 불운한 사냥감을 포식하는 것이었다.

 

- 멧돼지처럼 고함을 질러대던 플루토 8세의 눈이 다음 순간 확 벌어졌다. 
D는 로프를 던지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손에 든 채, 유유히 모래바다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것이었다.
또 한 번 소리치기 위해 크게 벌어졌던 플루토 8세의 입이 둥그렇게 열린 채로 그대로 굳어버린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어떤 생물이건 구별하지 않고 먹어치워 버리는 죽음의 턱 위를 검은 옷의 젊은이가 전혀 거리낌 없이 걷고 있었던 것이다. 검은 옷은 바람에 날리고 달빛은 모래바다를 은색으로 비추고 있었다.

 

- "아무리 사이보그 말이라고 해도... 트럭으로도 빠져나올 수 없는 모래 살무사한테서... 이렇게 간단히... 쓸데없이 너무 잘생긴 것도 그렇고... 넌 절대로 평범한 인간이 아니지...?"
더듬더듬 말하던 그가 갑자기 탁 하고 양 손바닥을 쳤다.
"음, 알겠어. 넌 바로 던필이야! 그렇지?"
D는 움직이지 않았다. 안전한 통로라도 찾고 있는 듯 한없이 차가운 그의 두 눈은 달빛과 어둠 속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 마음 놓으라구. 이래 봬도 난 마음이 바다처럼 넓은 게 장점이니까! 같이 있는 놈이 빨간색이든 초록색이든 차별은 안 해! 단 나한테 불리한 짓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지. 그건 던필도 마찬가지야."
사투리 억양이 강한 플루토 8세의 목소리에는 틀림없는 진지함이 배어 있었다. 갑자기 진솔하게 나오는 플루토 8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D는 조용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준비는 됐겠지?"

"뭐...?"

담담한 목소리에 뭔가를 느꼈는지, 플루토 8세의 눈도 D와 같은 방향을 향했다. 그것과 동시에 그들은 전후좌우로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를 내며 경사면에 접어들자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오는 그 구조물은, 분명 하나의 작은 마을이었다. 이런 것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실제 눈앞에 두고도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굉장한 존재였다. 
면적은 3평방 킬로미터 정도 되어 보였으며, 십 미터 높이의거대한 타원형 받침대 위에 목조 플라스틱, 철제 건축물이 서로자리를 다투며 서 있었다. 건물이 밀집된 끝에는 작은 공원과 묘지들도 보였다. 

 

- "무슨 말을 하더라도 들여보낼 순 없다."
목소리는 차갑게 거절했다.
"이건 촌장님의 지시다. 게다가 그 아인 나이트 가(家)의 롤리라는 아이다. 2개월 전 우리 마을에서 제 발로 걸어 나간 사람이다. 그런 자를 다시 받아들일 수는 없다." 

 

- 다음 순간, 그 목소리가 잠깐 머뭇거리며 물어왔다.
"거기 젊은이... 혹시 넌 D라고 하는 자가 아닌가?"
청년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 오! 그렇다면 처음부터 말을 했더라면 좋았을걸. 널 부른 건 나다. 촌장인 밍이라고 한다. 당장 들어오게."

기계음이 울리며 철문이 위로 열리고, 승강 계단이 앞으로 나왔다.
D가 조용히 말했다.
"식구가 있다."
"식구?"
밍 촌장의 목소리가 떨렸다.
"넌 하늘 아래 둘도 없는 천상의 고아 헌터라고 들었다. 언제 식구를 만들었나?"
"조금 전이다."
"조금 전? ... 그 두 사람을 말하는 건가?"

"또 다른 사람이 보이나?"

"그건... 좀..."
"난 그들과 함께 싸웠다. 이유는 그뿐이다. 내게 일이 없다면 이만 실례하겠다."
"자, 잠깐!"
목소리는 동요의 빛을 보이다가 마침내 결심한 듯 말했다.

"네가 없으면 곤란하다. 특례로 인정하지... 올라오도록 해라."

 

- D는 뒤돌아보았다. 
"2백 년 전 그 남자를 태웠을 때,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네... 평생의 실수였어."

흩어진 머리카락을 D는 왼손으로 끌어올렸다.
"그자는 북방대산맥 기슭에 홀로 서 있었어. 서치라이트의 불빛 속에 들어온 그 모습은 마치 어둠이 응고한 것처럼 보였지. 우연히 길을 지나치는 자는 태우지 않는다는 이 마을의 규칙을 깨버린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 그자는 깊고 어두운 눈빛을 가지고 있었어. 그래, 그러고 보니 자네와 많이 닮았네 그려."
잠깐 끊어진 말의 틈을 바람이 메웠고, 촌장은 다시 말을 이었다. 
"마을에 올라탄 뒤 그는 곧 이 갑판으로 올라와, 오랫동안 밤의 황야와 우뚝 치솟은 산맥에 눈을 돌리고 있었지. 그리고 나서 서서히 날 향해 이렇게 선언하지 않았겠나. 이 마을 사람 중에 지력(知力)과 체력(体力)이 뛰어난 남녀 다섯 명씩을 뽑으라고 말야. ... 물론, 난 웃고 무시해 버렸지. 그러자, 그자는 큰소리로 말했어. 자신의 말에 따르면 마을 전체가 천년의 영광을 누릴 것이며, 거부한다면 이 마을은 영겁의 저주를 받고 죽음의 황야를 떠돌 것이라고 말야." 
촌장은 말을 끊었다. 이상하게도 주름이 없는 그 팽팽한 얼굴에는 검은 피로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 "조사는 해보았나?" 

"다섯 번... 그것도 철저히. 마을 사람들 전원이 햇빛 아래를 걸을 수 있었어."
햇빛에 노출되도록 하는 것이 지금에 와서는 결코 귀족 판별의 결정적인 수단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D는 알고 있었다.
"그건 나중에 재조사하기로 하고, 오늘 밤은 내가 있어 보도록 하지."

 

- "실례인 줄 압니다만, 의견을 말해도 될까요?"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와 두 사람에게 또 다른 동석자의 존재를 알렸다.
그것은 문 옆에 팔짱을 끼고 선 젊은 의사였다. 그는 시큰둥하게 부어 있는 표정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고 D를 노려보고 있었다. 
"오, 내가 실례했군, 쯔루기 닥터. 뭔가 다른 거라도?"
촌장은 젊은 의사에게 가벼운 목례를 했다. D를 이 방으로 데려왔을 때, 벌써 소개는 마친 상태였다. 그는 근경의 마을을 돌고 있는 젊은 순회 의사였다. D와 같은 흑발과 검은 눈동자에, 나이도 비슷해 보였다. 물론 던필인 D의 연령은 분명치 않았기 때문에 겉보기만으로 비교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긴 했지만.

 

- 그것은 귀족의 구속력과 그것에 대한 저항력 간의 싸움이 발생했을 때 생겨나는 초(超) 현상이었다. 헌터라면 빈번하게 목격할 기회가 있었기에 D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아니 이 젊은이의 얼굴에 놀람과 두려움의 감정이 떠오르는 일이란 영원히 없을 것이다.

"이제 그만하지."   

 

- 손을 떼자, 라울러는 다시 침대로 떨어졌다. 물처럼 푸른빛이 창 밖에서 흘러 들어오기까지 기다리다 D는 방을 나왔다 

 

- "뭔가를 좀 알아냈나?"

살릴 수 있겠냐고 묻지 않는 것은 촌장이 근경을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가짐을 잊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희생자의 피에 저주를 불어넣은 흡혈귀는 그 몸에 헌터의 손이 뻗쳤을 경우, 그다지 미련이 남아 있는 상대가 아니라면 아예 모습을 감추어 버리기도 했다.

그다음에 남는 문제는 시간뿐이었다. 흡혈의 깊이와 횟수에 따라 희생자의 미래는 달라졌다. 다섯 번의 침실 방문이 있었다 하더라도 남들이 자신을 멀리하는 것 이외에는 평생 동안 남들과 똑같은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단 한 번의 입맞춤으로 백랍 같은 피부가 되어 귀족이 다시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며 늙지도 않고 평생을 침대 속에서 지내는 사람도 있었다.  

 

- 어느 날 갑자기 희생자의 몸이 바짝 마르며 미이라처럼 변하게 되면, 희생자의 늙은 손자나 증손자들은 가증스러운 귀족이 어딘가에서 죽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세월을 필요로 하는가?
또 언젠가는 가족과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먼지와 폐허만이 남은 폐가 구석에서 달빛만을 양식으로 삼으며 시체와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자들은 과연 몇 명이나 될 것인가? 
때는 이미 햇빛 아래를 거니는 자의 편에 서 있지 않았던 것이다.

- "내가 지낼 곳은 어디지?" 
"안내해 주도록 하지."
"필요 없어."
"공원 근처에 있는 한 채의 집이야. 오래되었지만 나무로 지어진 거라네."
말을 전하고 나서 촌장은 양손으로 지팡이를 누르며 중얼거렸다.
"오늘 밤 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면 좋겠네."

 

- 바람은 불지 않는데, 소리만이 울리고 있었다. 아마도 마을 어딘가에 차폐 장치가 되어 있는 것이리라. 자연의 맹위로부터의 보호는 거의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길을 걷는 헌터를 푸른빛이 차갑게 비추고 있었다.
땅에 내린 그림자는 매우 옅었다. 그것은 던필의 숙명이었다. 전방에 작은 불빛이 보였다. 병원이었다. 
D는 조용히 그 앞을 지나갔다. 표시판을 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으며, 발걸음은 바람을 닮아 있었다.

 

- 판자 같은 허술한 것이 아닌 봉을 사용한 점에 사람들의 공포가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자물쇠는 다섯 개가 채워져 있었다. 모두가 전자자물쇠였다. 
D가 자물쇠 있는 곳으로 손을 뻗었다.
가슴의 파란 펜던트가 푸른빛을 발하고, 하얀 손끝이 닿는 것만으로도 자물쇠는 모조리 그의 발아래로 떨어졌다. 곧 D의 손은 열십자로 박혀 있는 봉을 잡았다. 그것은 직경 20센티미터를 넘는 둥근 자연목 봉을 리벳으로 박아 놓은 것이었다. D의 손은 절반도 돌아가지 않았다. 힘이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 다음 순간, 손가락 끝이 나무 위로 박혀 들어갔다.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왼손이 그것을 한 번 당기자, 봉은 두 개나 떨어져 나갔다.
봉의 흔적만큼 벗겨져 나간 페인트 칠이 된 문을 밀며 D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 "그건 두려움만으로 끝날 겁니다... 이분은 귀족 상대로는 더 없는 사람이에요."
"하. 하지만 선생님."
어린아이를 안은 중년 여자가 말했다.

"던필은 굶주리면 의뢰인의 피를 빨잖아요..."

"그렇고말고.”
거한이 소리쳤다.
"우린 근거도 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냐. 마을이 이렇게 공중에서 떠돌고 있긴 하지만, 정보는 다 들어오게 돼 있어. 피몽드 사건을 잘 알고 있겠지?"

 

- 그것은 하룻밤 사이에 마을 사람 절반이 피를 잃고 죽어버린 마을의 이름이었다.
귀족의 피를 이은 던필은 나름대로 철의 의지를 가지긴 하였지만, 때때로 피의 유혹에 무너지는 정신의 소유자도 있었다. 피몽드 마을에 고용된 그 남자는 촌장 딸의 아름다움을 보고, 참고 참아왔던 검은 피가 역류하여 결국엔 헌터인 자신이 그 무서운 귀족의 일원으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 "그건 지극히 드문 예외다!" 
쯔루기 의사의 말에 흔들림은 없었다.

"내게는 최근의 통계가 있다. 던필이 취급한 일 중에, 그런 비극이 발생한 비율은 이만 분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이자가 그렇지 않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어!" 

 

- 롤리의 갑작스런 광란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D의 눈빛은 한없이 차가웠다. 
길에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D는 무리 없이 지나갈 수가 있었다. 
사람들 모두가 그의 앞에서 양 옆으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그것은 D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경계심에서 나온 정신적, 미신적 증오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 젊은이의 미모와 분위기 탓이었다.
D를 바라보는 눈동자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술에 취한 듯했다.
공포는 젖혀두고 전율마저 느끼게 하는 그 미모는 여자뿐만이 아니라 남자들까지도 일종의 성적 매력을 느끼게 하는 점이 있었다.

 

-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절반 이상은 농기구와 작업복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대지를 경작하지 않는 이 이동 마을에서도 나름대로의 생산활동은 행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공원 저편에 농원과 밭, 그리고 공장 지대 등이 펼쳐져있는지도 몰랐다. 

 

- "어때, 네 검보다도 빠르지 않냐?"
햇빛조차 퇴색시켜 버릴 듯한 자신만만한 소리에 D는 어둠의 침묵으로 답했다.
"자, 이제부터 난 그 소녀의 병문안을 가야겠어. 너도 갈 테냐?"
D는 답하지 않고 뒤돌아섰다.
"잘난 척만 하는 제비긴 해도 그렇게 눈치 없는 놈은 아니로군. 요즘 여자들은 확실히 남자의 속마음을 먼저 본다구! 큭큭큭."
자화자찬하는 목소리가 멀어져 가는 검은 옷의 등에 닿았는지 어땠는지, 플루토 8세는 자신이 없었다. 

 

- 몇 분 뒤, 밍 촌장은 검은 옷을 입은 손님을 맞이했다.

"그 집에 관한 걸 왜 말해주지 않았지...?"

담담한 목소리에는 촌장을 주저하게 만드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 "이상한 약병과, 그가 만들어낸 것 같은 장치가 두세 개 있었지. 그것만큼은 너무도 불길해 보여서 바로 파괴해 버렸네만, 나머지 약품류나 기계는 모두 그걸 이용할 수 있는 실험실이나 공장으로 보냈어. 별달리 이상한 점은 아무것도 없었다네." 
"그 작업은 누가 했지...?"
"그야 마을 사람들이 했지. 이름은 조사하면 찾아낼 수도 있네만..."

"당신은 하지 않았나?"

"난 마을의 리더네. 솔선해서 그 집에 못을 박았어."

D는 잠자코 촌장을 바라보았다. 한없이 어두우면서도 맑은 눈동자였다. 
"작업에 동참한 자의 명단을 만들어 줘. 묻고 싶은 사항이 있으니까."
"내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건가?"
"누구든 거짓말은 할 수 있지..."

D는 말했다.

"그도 그렇군... 기다리게. 지금 카피해 줄 테니."

 

- D는 말없이 일어섰다.
D를 움켜쥐려던 침입자의 움직임이 갑자기 경직되었다. 그리고 그자의 창백한 얼굴이 더욱 색을 잃어갔다.
바로 D의 분위기를 느낀 것이었다. 움직이면 자신이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다.
"너 이외에 다른 동료가 있나? 아니, 그전에 네 이름을 먼저 말해보지."
D는 조용히 명령했다.
그러나 그 온화함 속에는 반항을 용서치 않는 강인함이 깃들어 있었다.

 

- "정기 건강 진단은 언제 했나?"
"일주일 전입니다. 감기나 가벼운 특수병 환자 외에 수상한 환자는 없었습니다. 건강 진단에 결석한 자도 없었구요. 제가 보증합니다."
"당신 딸이 마지막으로 습격당한 것은 3일 전이다. 그 이후엔...?"
촌장은 크게 숨을 내쉬며, 주먹을 미간으로 가져다 댔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하나가 지나가면 또 하나가... 외부의 적이라곤 침입한 적이 없던 우리 마을에 불결한 귀신이 두 놈이나 올라타다니."
"두 놈으로 끝나면 다행이지."

D는 단호하게 말했다.
쯔루기 의사의 표정은 이미 변해 있었다.

 

- 뼈 마디마디마다 귀족의 공포를 느끼면서도 그것의 일원으로 변한 육친에 대한 사랑은 전율보다 강한 것이었다. 그래서 밤마다 창백해지고 야위어 가는 자식이 마을에서 추방당하는 것을 보기보다는 집 안 깊숙이 몰래 숨겨두는 가족들 또한 많았던 것이다. 
일가족이 모조리 흡혈귀의 부하로 변하는 경우는 거의 모두가 바로 이런 원인에 의한 것이었다. 

 

- 사랑은 가끔씩 이렇게 매우 손쉽게 죽음을 불러들였다. 목숨을 걸고 지킨 자식의 이빨이 차갑게 경동맥으로 침투해 들어올 때 부모의 가슴을 스치는 것은 후회였을까? 만족이었을까? 

 

- "이상한 얘기 같습니다만 라울러를 집 밖으로 나가게 해서는 안 될 겁니다. 마을 사람들에겐 아직 사건이 해결되지 않은 걸로 해둘 테니까요. 뭐 사실이 그렇습니다만... D와 제가 수색을 해보겠습니다."
D의 얼굴에 기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 의사는 정말 일방적인 남자였다. 이상한 것은 그가 아무래도 원래 억지가 센 타입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마치 D가 있으니까 그렇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들이 이제부터 뭔가를 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아. 모든 건 내게 맡겨 주길 바란다. 이 선생도 그걸 알아줬으면 하는데."

 

- 플루토 8세는 친한 친구와 같은 표정으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분명 그 시체가 살아날 줄 알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 자넨 정말 저런 귀신을 상대로 잘도 싸우는구만. 정말 감동했다니까."
"뭐가 목적이지?"
D는 조용히 물었다.
"아무것도 없어."
플루토 8세는 고개를 저으며 익살스럽게 말했다. 그는 아무리 가혹한 고문을 받더라도 평생 그런 식일 것 같았다.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방해는 하지 마."
"예, 예, 그럽지요."
넉살 좋게 말하며 플루토는 갑자기 뭔가를 생각해 냈는지 탁탁하고 박수를 쳤다.
"그런데, 너 이놈을 데려가서 입을 열게 할 작정이지?"

"무슨 뜻이지?"
"당연한 거 아냐? 누가 이자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조사할 게 뻔하잖아. 무엇보다 말이야, 피가 모조리 빠져나갔는데도 상처자국 하나 없다는 건 정말 기분 나쁜 일이니까. 그래, 원인은 꼭 규명해야 한다구."
"자네 말이 옳아."
이빨을 드러낸 남자와 실신한 여자를 양 어깨에 가볍게 멘 다음, D는 뒤돌아섰다.
"어이 이봐, 잠깐 기다려 보라니까."
플루토 8세가 서둘러 그를 뒤따랐다.
"그 여자는 내가 안아줄 테니까... 하유, 이 동네 여자들은 이상하게도 잘 안 넘어간단 말야. 아무리 꼬셔도 상대를 해주지 않지 뭐야. 그러니까 이럴 때라도 못다한 꿈을 이뤄야지 뭐." 
그의 넉살에 질려서인지 가만히 서 있는 D에게서 절반은 강제로 여자를 빼앗은 다음, 플루토 8세는 양팔로 그녀를 들어 안았다.
"그런데 너 말야, 그놈이 순순히 입을 열 것 같나? 아무리 뭐라 해도 그놈은 흡혈귀인데."

"..."

"좋은 걸 하나 선물해 줄까? 내가 그자의 입을 열게 해 주지! 그자의 입을 통해 네가 묻고 싶은 걸 전부 듣게 해 줄 테니까 대신에 나도 질문할 수 있게 해 줘." 
D의 발이 멈추었다. 천천히 돌아보는 그 얼굴에서 플루토는 뭔가를 느꼈는지 신음 비슷한 것을 흘렸다.
"오오오..."
플루토는 3미터나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제발 그런 심각한 얼굴로 쳐다보지 좀 말라구. 네 얼굴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뛴단 말이야. 그러다가 널 사랑하게 되면 어쩔 거야?"
"뭘 노리는 거지?"
"아무것도..."

 

- "어이, 뭐 해? 그런 무서운 얼굴 하지 말고 어서 결정이나 해."
"좋아."
D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어때, 굉장하지? 방이 세 개나 있고, 모두 취사가 가능하게 돼 있지."
플루토 8세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리고 너 혹시 말이야. 여길 다른 놈에게 일러줘도 소용없어. 난 5분 만에 다른 아지트로 옮겨버릴 테니까. 난 말이야, 흡혈귀 이상으로 신출귀몰하다구."
"본심이 뭐야?"
D가 물었다.
"글쎄... 그게 뭐랄까?"
플루토 8세는 말하고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D에게도 권했지만 그는 앉지 않았다.

 

- "바쁘시겠지만 저와 함께 가 주시겠습니까?"
D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이었으니까, 가지."
두 사람은 병원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조용한 마을이군."
D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치안관이나 촌장에게는 더없이 좋은 마을이겠죠? 외부로부터 수상한 자는 들어올 수도 없고, 또 마을 주민은 온순하기 이를 데 없죠. 한마디로 규칙을 잘 지키는 우등생들뿐이죠. 사실 가끔 미쳐 날뛰는 건 치안관 말고는 없지 않습니까?"
D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자네도 만만치 않아."
쯔루기 의사는 씨익 하고 웃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다시 D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마을에는 언제까지 계실 겁니까?"
"일이 끝나면 내일이라도 나가지."
그러고 나서 이 젊은 헌터는 신기하게도 의사를 향해 물었다.

"자네는?"
"계약 기간은 일 년입니다만 그전에 내리게 될 겁니다."
"의사가 없으면 곤란하지 않나?"
"또 다른 의사를 찾으면 됩니다."
"진력이 났나...?"
"당치도 않아요. 이래 봬도 난 심리학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 견지에서 본다면 이렇게 흥미 있는 곳도 없습니다. 근경의 마을은 그 습성상 외적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 아주 강건한 관리체제를 펼치고 있습니다만, 여긴 그것이 정점에 달한 곳 중의 하나입니다. 이 마을이 어디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이들은 아무 목적도 없이 이 세계의 끝에서 끝까지 떠돌고 있는 겁니다."
"목적이 없는 것은 지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간과 귀족, 우주만상이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마을이란 곳은 들어오는 자와 나가는 자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여기선 그것이 그 어느 쪽도 불가능하단 겁니다. 근친상간의 악영향을 없애기 위해 얼마만큼의 에너지가 소비되고 있는지 아십니까? 전 그래도 이 마을 주민 중에서 제대로 된 사람들은 그 나이트 가(家)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에 대해서 자넨 아무것도 모르나?"
"안타깝게도..."
"자네에게 맞지 않는 마을일지도 모르지. 여행을 좋아하나?"

젊은 의사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검은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습니다. 전 여행이 좋아서 의사가 된 거나 다름없지요. 근경도 아직은 그리 나쁘지 않아요. 그것이 어떤 세계든 모두가 열심히 살아가고 있거든요. 아마 살아남은 귀족이 있다면 그들도 그럴 겁니다... 전 그저 그런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것뿐입니다." 
D는 말없이 걷고 있었다. 
그런데 그 눈빛에 놀랍게도 따스한 기운이 떠오르고 있었다.
자신의 말이 기적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젊은 의사는 모르고 있었다.

 

- "던필... 이라 그러셨죠. 여행을 시작한 지는 오래되셨습니까?" 
"자네보다는 약간."
"저도 곧 당신처럼 될 겁니다."
의사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처럼 많은 경험을 쌓게 되겠지요? 그 사이에 말과 장검 기술도 배우겠습니다."
도전해 오는 듯한 목소리에 D는 말이 없었다.

 

- 두 사람은 곧 병원에 도착했다. 
간호사가 앞으로 나와 병실까지 안내했다. 그런데 불과 몇 미터를 가는 동안 간호사는 테이블에 부딪힐 뻔하기도 하고, 유리에 손이 찔릴 뻔하기도 했다. 결국 간호사는 바닥에 발이 걸려 넘어지며 의사에게 안기고 말았다. 이 모든 실수들은 그녀가 D만을 쳐다보며 걷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롤리의 피부엔 핑크빛 얼룩만이 약간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미 방사성 동위 원소 제거제는 필요 없게 됐는지 모두 철거되어 소녀는 파란색 잠옷을 입고 침대 위에 상반신을 일으키고 앉아있었다. 

 

- "잠깐만요!" 
의사가 받아치며 말했다.
"이 소녀는 아직 완치되지 않은 환자입니다. 그런 걸 시키기 위해 당신을 부른 게 아니에요. 위로를 부탁하고 싶었습니다. 환자에게는 격려가 무엇보다도 특효약입니다. 특히 이 나이 때의 소녀에게는요."
"난 물어볼 게 있어 왔다."
"정말 너무하군요. 데려오는 게 아니었어..."
"위로와 격려 따윈 언제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일은 시간을 다투고 있어."
의사는 입을 다물었다. D는 계속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귀족의 동료가 하나 생겨났다. 그것이 백 명으로 늘어나도 손을 쓸 수 없다는 게 지금의 현실이야. 물론 그렇게 되면 없애는 것은 내 역할이겠지. 하지만 마을 사람들을 그렇게 만든다는 건 내게도 좀 무거운 짐이야." 
"그런 당치도 않은 말을..."
의사는 탄식했다.
D는 다시 롤리를 향했다. 말없이 회답을 기다렸다.

 

- 롤리의 가슴속에서 기억이 흔들렸다. 그것은 지난밤, 그림자가 던진 질문이었다. 
아무도 그녀를 생각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양친의 실험만이 관심거리였다.
목까지 치밀어 오른 분노를 터뜨리기 위해 롤리는 얼굴을 들었다.
아름다운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그것은 차갑고 혼기가 떠도는... 그러면서도 매우 슬프고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서서히 롤리의 가슴속에서 분노가 사라져 갔다. 
오른 손등의 상처 자국이 보이지 않도록 왼손으로 종이를 누르고 롤리는 천천히 펜을 써 내려갔다.

 

- 로켓 론처를 한 손에 들고 치안관이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나머지 두 사람도 산탄총을 들고 있었다. 그것들의 총구가 자신의 심장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보고, D는 귀찮다는 듯이 물었다.
"뭐야?"
그의 목소리는 어쩐지 나른했다.
D는 햇빛을 온몸에 받고 있는 것이었다. 절반은 귀족의 피를 이은 던필에게 있어, 지금이 전투를 하기에는 가장 좋지 못한 때였다.
"뭐냐고? 쳇, 우리가 술이라도 함께 마시자고 그럴 줄 알았어?”
조수 한 사람이 말했다.
"이방인인 주제에 잘난 척하긴 네가 던필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필요 이상으로 잘난 척하면 안 되지. 이 마을에서 치안관을 위협하면 어떻게 되는지 우리가 친절하게 가르쳐 주지."
"기한은 내일까지다. 그때까지 기다리는 게 어때?"
"그건 말도 안 되지. 너 같은 놈이 마을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면 우리의 존재 가치가 위협받는걸."
키튼 치안관의 눈은 불을 뿜고 있었다. 로켓 론처의 발사 선택 장치는 단 한 번에 끝났다. 방아쇠 버튼을 누르면 일곱 발의 펜슬 미사일이 아름다운 흡혈귀 헌터를 흔적도 없이 날려버리는 것이었다. 
더 이상 전투는 피할 수 없다고 여겼는지, D는 조용히 물었다.
"여기서 할 텐가?"

- "흥!"
콧방귀를 뀌며 방아쇠 버튼을 누르는 남자의 손가락은 환희로 가득 차 있었다.
무거운 소리를 내며 한쪽에서 36발씩 모두 72발의 산탄이 D의 가슴 위를 불꽃으로 감쌌다.
아니, 그 바로 직전에 옆으로 후려치듯 번뜩이는 녹색빛을 그들은 볼 수 있었을까?
둥근 펜슬탄은 소리를 내며 길바닥 위로 떨어졌고, 두 명의 조수는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검의 차가움을 맛보았다.

조금 전의 나뭇가지와 잎으로 D는 날아오는 산탄을 받아쳐 떨어뜨린 것이었다. 참으로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기술이었다.
피 묻은 칼을 손에 든 채, D는 로켓 론처를 든 거한을 향해 말했다.
"덤벼!"

 

- 산탄을 나뭇가지로 튕겨내는 남자가 미사일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겠는가?
강렬한 은빛 섬광 속에 고깃덩이로 변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치안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왜 그러지? 이건 자네가 먼저 시작한 싸움이야."
치안관은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어떤 무기를 사용하더라도 이 남자의 검을 막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치안관은 자신의 목줄기 부근에서 사신이 손짓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 바로 그때, 옆길에서 황급히 달려오는 자가 있었다. 쯔루기 의사였다.
그는 한순간에 사태를 파악하고,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와 D를 향해 말했다.
"그만둬, 제발. 피를 보는 건 이제 진력이 났어. 치안관을 죽인다면 당신은 그때야말로 이곳을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됩니다. 촌장이라 할지라도 말릴 순 없습니다."
D의 손이 움직였다. 그것을 본 쯔루기 의사는 주저 없이 물러났다.

벌써 싸움은 시작되었고, 이미 D는 검을 뽑아버린 것이었다. D의 검은 적의 피를 묻히지 않으면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치안관의 목줄기가 움직였다. 이제서야 그는 자신이 상대하는 자의 정체를 깨달은 것이다.

- 갑자기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마을의 공기를 물들였다. 뭔가가 벌어진 것 같았다.
"치안관, 치안관!"
부르는 소리와 발소리가 들려왔다.
"운이 좋은 자군."
오른손을 가볍게 저으며 칼에 붙은 혈흔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땅바닥으로 모조리 털어 낸 다음, D는 우뚝 서 있는 치안관 옆을 스쳐 지나갔다.
D가 사라진 자리에 조수 한 사람이 달려왔다. 그는 참상을 보고는 제자리에 멈춰 섰다.

 

- "무서워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사실, 무섭긴 하지만... 역시 제가 지금 다쳐선 안 될 것 같아서..."
D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를 한 다음 의사가 발길을 되돌렸다.
그 머리 위로 은빛이 한 번 번뜩였다.
의사의 머리 위를 공격한 번개를 D의 검이 양단해 버린 것이다.
의사는 아무것도 모르고 달려갔다.
마을이 또 한 번 흔들렸다.

 

- 마을의 항로가 바뀐 것을 D는 알고 있었다. 
복합 컴퓨터에 의해 관리되는 항해 장치가 자기 폭풍의 한가운데로 진로를 설정할 리가 없었다. 누군가가 외부로부터 손을 댄 것이 분명했다.
무엇 때문에?
마을을 어디로 향하게 하려 한 것인가?
촌장에게 물어봐야 할 사항이었다.
D의 발이 멈추었다.
어느 집 옆길에서 한 명의 남자가 비틀거리며 나왔다. 그는 자신의 목을 쥐어뜯고 있었다. 전기 충격의 희생자는 아니었다. 이상하게 창백한 피부가 D의 눈을 반짝이게 했다. D는 몸을 한 바퀴 돌리며 길을 건너가려 하였다. 

 

- "제1원자로만 가동을 행하라. 순항 속도는 40킬로미터로 증대."
"그건 당치도 않습니다. 외부의 전압이 한꺼번에 세 배로 증가하여 원자로가 터져버리고 맙니다."
"그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자기 폭풍을 돌파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알겠습니다.”
두 개의 원자로가 에너지 흡수를 정지한 순간, 미쳐 날뛰던 에너지들은 한꺼번에 제1원자로로 모여들었다.

 

- 이윽고, 마을의 밑바닥으로부터 새파란 빛이 외판을 뚫고 들어와 공중으로 치솟았다. 
엄청난 진동에 롤리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 매달렸다. 
쯔루기 의사가 달려왔다. 그는 롤리의 이름을 부르며 넘어질 듯이 달려와 그녀를 끌어안았다.

뜨거운 가슴에 롤리는 꼭 껴안겨 있었다. 의사의 가슴은 쉴 새 없이 고동치고 있었다.
'아, 이 남자도 나와 똑같아.'

롤리는 생각했다.
비로소 소녀는 젊은 의사에게 호감 이상의 것을 느꼈다.

- 마을의 전방에 유달리 맹렬한 기세로 빛을 발하는 뱀떼가 꿈틀대고 있었다. 
그곳에서 금이 가득 번개가 치자, 양 옆의 바위벽이 유리 파편처럼 부서지며 마을 위로 쏟아졌다.
바윗덩이가 어느 집의 지붕을 뚫고 들어갔다. 그곳에서 여자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공장의 압축기도 직격을 받아 압축 공기가 고밀도의 강철선로 변하여 작업원들의 몸을 뚫었다. 그것은 그들의 얼굴을 부글부글 끓게 했다.
흰빛이 마을을 휘감았다.
실리콘 폴리머 지붕이 날아갔고, 수목이 뿌리째 공중으로 들어 올려졌다. 사람들은 앞다투어 지하실로 숨어들었다.

 

- "조사가 끝나면 절 도와주십시오."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손발만 멀쩡하면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시간이 있으면."
의외로 선선히 대답을 하고 D는 문으로 들어갔다.
자신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 그 등을, 롤리의 슬픈 시선이 따라갔다.

 

- 새파란 불꽃이 안쪽에서 타올랐다. 구석에 있는 수술대에 누워있는 남자의 몸에 파랗게 윤기가 흘렀다.
수돗물을 튀기며 D는 자신의 왼손을 향해 물었다.
"흙도 준비했는데, 어느 쪽을 먼저 할래?"
"속 편한 질문은 하지 마."
당장에 대답이 돌아왔다.
동시에, 하얀 손바닥 표면에 눈과 코가 붙은 사람 얼굴이 쑤욱하고 올라왔다.
그것이 퉁퉁 부은 표정으로 말했다.
"불을 먼저 하든, 물을 먼저 하든, 맘대로 해. 요즘엔 입맛이 없어. 칫, 먹는 건 내가 먹는데... 와, 오늘은 원자로야? 맛있겠는걸? 알콜 램프나 늑대 인간의 마른 똥 같은 건 안 돼. 그건 최악이야."
D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한 움큼의 흙을 꺼내 램프 옆에 놓았다.
"빨리 해. 이제 슬슬 죽은 자가 눈을 뜰 시각이야."

"흥, 그럼 한 번 더 재우면 되잖아. 매일같이 혹사나 시키는 주제에."
"불이야, 물이야?"
"흥, 흙이 먼저잖아."
시커먼 덩어리 위에 D는 왼손을 댔다.

 

- 힘껏 공기를 빨아 당기는 강렬한 소리가 나더니, 흙덩이는 비스켓처럼 간단하게 손바닥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으, 맛없어."
깨끗이, 그야말로 알갱이 하나 남김없이 다 빨아먹고 나서 목소리가 말했다.
"이건 영양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윤회전생을 거치지 않은 흙이잖아. 지구에서 생명을 얻은 게 아냐. 강철 위를 덮고 있는 장식품과 똑같아. 이런 걸 먹인다면 만족한 결과는 얻을 수 없어."
D는 말없이 왼손을 원자 불꽃에 댔다.
"으아악, 이 바보, 다음은 물이잖아."
'박정한 놈' 하고 매도하는 목소리도 이내 그치고, 원자 불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순식간에 한 줄기의 빛으로 변하여 D의 손 안으로 사라져 갔다. 정확하게는 손바닥에 열린 작은 입술 속으로. 
그 입은 얼마나 욕심이 많았던지, 초소형 핵난로를 십 년간은 유지할 수 있는 원자 불꽃을 2분도 지나지 않는 동안에 모두 삼켜버렸다.
이 괴이한 일에도 D는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고, 이번에는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여 전기 불꽃이 빛나는 물줄기 속으로 ...

 

- 바닥에 떨어진 피를 바라보는 소녀의 두 눈에 어두운 색이 비쳤다. 
D가 복도로 다시 돌아오자, 롤리는 벌써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원래는 마음이 굳센 소녀였던 것 같았다.
"내게 볼일이라도 있나?"
D가 물었다.
롤리는 그 입술의 움직임을 읽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를 썼다. 간신히 읽어낸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용무 따윈 없었던 것이다. 단지 그를 만나고 싶었다. 그것뿐이었다.
"잃어버린 것은 되돌릴 수 없지만, 새로운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은 가능하지."
D는 남들과 얘기할 때와 똑같은 어조로 말했다. 롤리의 몸 상태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이번에야말로 놓치지 않겠다며 굳게 입을 다문 소녀에게, D는 말했다.
"이리 와. 시간이 별로 없을지도 몰라."
그가 걸어가자, 롤리도 뒤를 따랐다. 소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 있었다. D의 차가운 얼굴을 옆에서 보고만 있었지만, 롤리는 그의 말뜻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 전원의 눈이 D를 향했다.
D의 왼손이 부서진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전도 코드를 통째로 잡고 끌어당겼다. 손목에서 어깨까지 시퍼런 전자파가 거미집처럼 어지럽게 달리고 있었다.
그의 몸 어딘가에서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름다운 얼굴에 아무런 고통의 빛도 없는 것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오른손도 움직여 분리한 코드 끝을 밖으로 끌어냈다. 전자파는 D의 전신을 엄습했다.
이 젊은이가 검정 이외의 색을 띤 것은 처음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의 몸을 전도 매체로 하여 핵난로 에너지는 단숨에 장벽 발생 장치로 전달되었다.
미사일과 장벽이 충돌하는 순간, 마을 주위에 극도로 화려한 색채가 번졌다.
1억 도에 달하는 불꽃과 치사량의 전자파, 그리고 방사능이 대기를 교란시키며 갑자기 출현한 전자벽을 파괴하기 위해 광분했다.
D의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달리는 전자파의 흐름이 역전하는 것을 사람들은 보았다.
D의 눈이 가늘어졌다.

 

- 세 개의 미사일이 공중에 흩어질 때까지 장벽은 사라지지 않았다.
D의 몸이 뒤로 물러난 뒤에도 조정실 안에서는 환희의 함성이 터져 나오지 않았다.
너무나 놀라운 광경에 정신이 나간 데다가, 위기를 모면한 안도감까지 겹쳐 그들은 모두 잠시 멍한 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그들 눈앞에 서 있는 은인은 아무리 보아도 인간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토록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가볍게 머리를 흔들고, D는 솟아오르는 흰 연기를 손으로 휘저었다.

 

- "그럼, 우리 세 명인가?"
쯔루기 의사는 곤혹스런 표정을 떠올렸다.
"세 명?"
그는 중얼거린 다음, 순식간에 얼굴이 새파래졌다.
"도대체가 모를 사람이군요. 롤리도 우리와 함께 생각한 겁니까? 이 소녀는..."
"이제 혼자다. 앞으로도 줄곧 혼자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돼."
D의 말에 바람과 같은 강인함이 있었다.
잠시 주저한 끝에, 쯔루기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말입니다. 근경에서 살아간다는 게 그런 거지요... 하지만."
그때였다. 무서운 충격이 세 사람의 몸을 흔들어 놓았다.
적선이 부딪쳐 온 것이었다.
D는 코트 안에서 메모지를 꺼냈다. 롤리가 병원에 두었던 것이었다.
그것을 D가 왜 가지고 있었을까? 쯔루기 의사는 내심 놀랐다. D는 자신의 두 번째 손가락 끝을 입에 대고 깨문 다음, 메모지 위에 썼다.
[싸우지 않으면 진다. 당신도 함께 싸우길 바란다.]
롤리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도대체 이 소녀에게 뭘 시킬 겁니까?"

 

- 의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 나서 D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겁니까?"
그는 물었다.
"이런 참담한 것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군요. 어떻게 하면 그 아름다운 얼굴을 일그러뜨릴 수 있는 겁니까? 어떻게 하면 울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웃을 수 있습니까?"
"난 너무나 많은 것들을 봐왔다."
D는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말을 꺼내던 의사의 눈에 이상한 빛이 떠올랐다.
"미사일 건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부딪히고 나서 다리를 던진 건 어떻게 된 겁니까? 그것도 컴퓨터에 입력되어 있었던 겁니까?"
"몰라."
"하지만..."
"가지." 
D는 등을 돌렸다.
기다려 달라고 말을 하려던 순간, 의사의 발 밑에서 희미한 소리가 전해져 왔다.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건..."
"또 다른 여행을 떠나는 거야. 새로운 약탈의 여로에 나서는 거지."
D의 목소리는 멀어져 갔다.
두 사람은 뒤를 따랐다.

- D의 왼손 위에 올려져 있었다.
"분석해."
D가 명령했다.
"쳇, 사람 한번 고약하게 부려먹는다니까."
커다란 입이 불만을 터뜨렸다.
D는 그 불만을 무시하고 손바닥에 놓인 얇은 판을 짓눌렀다.

- 1초...  2초... 3초...
"그만 됐어."
억눌려진 듯한 목소리가 판과 손바닥 사이에서 새어 나왔다. D는 손을 뗐다.
손바닥의 얼굴에서 입술만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곳에서 붉은 혀가 나와 있었다.
아무래도 핥으며 분석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 증거로 판의 표면이 젖어 있었던 것이다.

"성분의 원자 배열이 한 개의 글자와 식을 구성하고 있어... 아주 맛있는 은닉 장소였어. 성분이 어느 것 하나 진하지도 연하지도 않고 말야. 그런데 글자는 소실되고 없어." 
"역시, 그렇다면..."
뒤돌아보는 D의 가슴에 자그마한 흰 손이 쐐기를 박았다.
소리도 없이 D는 비틀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 "이백 년 전 이곳에 올라탄 남자로부터 난 인간을 흡혈귀로 만들 수 있는 방정식과, 어떤 약품의 화학 성분표를 받았지. 하지만, 그것을 완성하기에는 난 역부족이었어. 그 자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나이트 부부라고 하는 천재가 태어나기까지 이백 년이란 세월을 기다려야만 했네. 한데 그걸 눈앞에 두고 나이트는 도망을 쳤어. 이 마을의 주인에게만 그 성과를 응용하라는 내 명령을 어기고 말야. 그 남자는 세상을 위해 그걸 사용하고 싶어 했어... 바보 같으니라구. 진정 평화를 생각하는 인간은 극소수에 불과한데 말야. 만약 그걸 세속적인 자들에게 사용한다면 금방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세상이 되고 말아. 평화를 탄생시키기 위한 연구가 죽음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거지. 그들과는 따로 나도 독자적으로 연구를 했다네. 개중에 두 개 정도는 지극히 성공적이었지만, 내 힘으로는 아무리 해도 체내에 싹트는 흡혈귀의 잔학성만은 지울 수가 없었네. 그런 데다가 운이 나쁘게도 그 둘은 탈주를 해버렸어. 하나는 복수심으로 내 딸아이를 습격했다가 다행히 헌터에게 당했지. 그리고 또 하나는... 아직 활동을 계속하며 체내의 흡혈 바이러스를 가는 곳마다 뿌리고 있어." 

 

- "당신이 바라는 대로 돼가고 있는 거잖아. 근데 그 잘 왜 죽여달라는 거야?"
"귀족의 잔혹성은 그들을 미치게 만들지. 놈들이 동료들끼리 얼마나 가혹한 전쟁을 해왔는지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는가. 난 귀족의 생명력을 원해. 하지만, 동시에 영원한 평화를 갖고 싶은 거야."
"캭, 정말 지독한 욕심쟁이 늙은이구만."
"뭐라고 해도 좋다. 지금의 귀족화 따위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불완전해 막아야 해. 놈이 마을 사람 모두를 가짜 귀족으로 만들어버리기 전에 빨리 처분해야 해. 자네가 그걸 맡아줘야겠네. 만약 그게 싫다면 모든 거래는 백지화다."
"아, 알았어, 알았다니까." 

 

- D의 혼기가 잠시 흐트러지는 순간, 플루토 8세는 어둠 속으로 모습을 숨겼다. 
"이제 늦었어, D. 늦어버렸다고. 방금 그놈들은 촌장이 만든 실패작이 전염시켜 놓은 것들이야. 이젠 그것들의 동료가 계속 늘어나겠지? 마을은 이제 끝장난 거야. 아니지, 이게 촌장이 원했던 결과인 거야. 인간이 완벽한 귀족이 된다는 건 처음부터 무리한 얘기였지."


- 그 말이 옳은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이백 년 전의 의문의 방문자와 촌장, 그리고 나이트 부부...
그 모두가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마을은 꿈을 태웠고, 꿈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꿈은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그것도 최악의 결과로.

- "너하고는 정말 싸우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게 되었구만. 자, 인연이 있다면 지옥에서나 만나자고."
어둠에 녹아든 흉기가 날아올 때, D는 눈을 감고 있었다.
장검이 움직였다.
원형칼은 매우 쉽게 절단되며 공중으로 흩어졌다.
다음 순간, D는 돌진했다. 그의 주위에서 바람이 일었다.

- 롤리의 몸은 얼룩진 그림자로 변해 있었다.

- "한 가지 말해 둘 게 있는데..."
천천히 땅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플루토 8세는 신음했다.
"이 여자 몸에는 내가 억지로 들어간 거였어. 텔레파시로 동요시켜 놓긴 했지만, 이 여잔 끝까지 안 된다고 거부했었지."

"알고 있다."
D는 고개를 끄덕였다.

 

- D는 신음하는 두 사람 곁으로 다가갔다. 맥박은 뛰고 있었다. 그는 벌써 출혈 부분에 응급처치를 하고 있었다.
플루토 8세가 입힌 상처였을까? 그는 참으로 이상한 남자였다.
멀리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주민이 또 다른 주민을 습격하는 것이었다.
D는 의사의 이마에 오른손을 댔다.
의사는 곧 눈을 떴다. 멍하게 양옆을 돌아보는 그의 두 눈에 의지의 빛이 서려 있었다. 그는 D를 쳐다보며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절 구해 준 겁니까?"
"내가 아냐. 저 남자다."
쓰러져 있는 플루토 8세의 몸에 슬픈 눈길이 꽂혔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마을은 어떻습니까?"

"이 마을은 벌써 옛날에 죽어 있었다. 이제 진정한 죽음을 맞이하려 하고 있지. 하지만 자네들은 무사히 데리고 나갈 테니 안심해도 돼."

 

- "역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군요... 그 사람의 마음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무슨 말이야?"

의사는 어떤 마을의 이름을 말했다.
D의 표정이 움직였다. 그것은 한창 더운 여름날에 갑자기 불어온 산들바람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몇 년 전, 바로 그 마을 끝에 있는 농장의 남매를 지키기 위해 D는 어느 흡혈귀와 처절한 사투를 벌여야만 했었다.
"그 두 사람은 잘 있나?"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내요. 남동생이 마치 다 큰 어른처럼 누나를 돕고 있습니다. 농장은 더 커졌지요. 저도 떠나지 않고 계속 그녀를 돕고 싶었습니다만, 그녀에겐 따로 마음에 둔 남자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의사는 롤리를 검사한 다음,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어딜 가려고?”
"당신 혼자선 출구를 여는 방법도 모르잖습니까? 저도 돕게 해 주십시오."
"자넨 환자야."
"전 그녀의 마음을 훔치는 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그녀가 기뻐할 일이라도 하게 해 주십시오."
묘한 감정을 담고 있는 그의 눈을 D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넨 그 마을에 몇 년 있었지?"
"짧았어요. 6개월입니다."
"그 두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군."
"... 고맙습니다."
의사의 눈은 자랑스런 빛으로 반짝거렸다.

- "상승해!" 
외벽을 넘어 창백한 그림자가 갑자기 밀어닥쳤을 때, 마을은 대지의 포박에서 벗어났다.
마을은 날아올랐다. 마치 그것만이 유일한 목적인 것처럼...



 

<2권 사자의 왕국>

 


 

 

- 작은 마을은 아낌없이 내리쬐는 태양빛의 은혜를 마치 완강히 거부하고 있는 것 같았다. 

 

- 따가운 햇살이 강화 플라스틱과 코팅 목재로 만들어진 집들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주변의 나무들도 기지개를 켜는 듯 눈부신 초록빛을 피어 올리며 햇살을 한껏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 햇살도 길고 길었던 겨울의 여운을 한꺼번에 녹이기에는 힘이 부친 듯, 정작 들뜨기 시작해야 할 마을은 여전히 안개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이미 계절은 바뀌고 있었다. 마지막 잔설도 검은 땅 속으로 스며들어가고 있는, 바야흐로 봄이 멀지 않은 때였다. 

 

- 해질 무렵이 가까워지자 흰 태양빛이 엷게 푸른색을 띠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산한 거리를 누비던 바람도 점점 세력을 넓혀왔다. 마치 햇빛을 피해 그늘에 숨어 있던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기지개를 켜는 듯, 마을은 정적 속에서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마을 저편으로는 황혼이 불타고 있었다. 마을 문을 막 접어드는 여행자를 노려보는 어둠의 눈처럼 섬뜩함이 느껴지는 황혼이었다.

 

- 그것 말고도, 심산유곡에만 서식하는 요괴 야수, '기안수(綺眼獸)'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마을의 출입구 쪽에 서서 마을 안쪽의 한 곳을 가만히 응시하기만 하면 되었다. 거대한 눈 하나가 붉은 기를 띠다가 진홍빛을 발하기 시작하면 마을 사람들이 차례차례로 그것의 무시무시한 턱을 향해 다가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 괴물의 경우에는 한 가지 약점이 있었다. 기안수가 발하는 눈 기운에 의식을 잃은 사람들은 가끔 그것을 향해 가기 전에 다른 이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그 인사가 문제였다. 가족들은 그 인사말로 인해 기안수의 존재를 눈치챌 수가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하여 그것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어이없게도 기안수에게 당하기 직전의 인사말이 항상 똑같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알려진 약점으로 인해 마을사람들이 총출동하여 기안수를 퇴치시키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 그러나 마을에서 주민들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원인 중에서 이보다 더 은밀하고도 무서운 것이 있었다. 
이 괴이한 현상에 대한 소식이 그 마을을 지나던 여행자에 의해 알려지기라도 할 때면 사람들은, 이미 과거에 사라졌다고 여기고 있던 암흑세계의 주인들이 또다시 자신들의 주위를 배회하는 듯한 발소리를 느끼게 되는 것이었다. 바로 어둠의 주인인 뱀파이어들의 발소리를...

 

- 남자들은 눈알을 굴리며 혼기의 발현점을 찾기 위해 애썼다. 날카로운 소리가 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니, 그것은 목소리였다. 마치 환자가 발작을 일으켰을 때와 같이 괴로워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들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신음 소리였다. 낮고 길게 이어지는 그 소리에 남자들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 또각또각... 말발굽 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달빛 아래로 한 젊은이가 홀연히 나타났다. 어둠 그 자체가 결정(結晶)을 이루어 사람의 형상을 빚어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검은 코트 가슴 부분에서 빛나는 파란 펜던트의 신비스런 눈부심도 여행자 모자 아래의 미모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말 위에서 고삐를 쥐고 있는 그 모습에는 우연히 이곳을 지나는 여행자와 같은 태연함이 감돌고 있었지만, 물론 그는 단순한 여행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 "뭐 하는 놈이야, 넌?”
검은 복장의 남자가 매끄럽지 못한 목소리로 물었다. 남자인 자신조차 놀라게 하는 그의 미모와 자신이 행한 필살의 일격을 한 번에 막아냈다는 인식이 서로 교차되면서 자신도 알 수 없는 열등감이 우스꽝스런 목소리를 내뱉고 있었던 것이다.
그림자는 대답하지 않고 그들을 훌쩍 지나치려 했다.
"기다려."
육각봉의 남자가 그를 불러 세웠다.
"당신도 영감이 불러서 온 헌터지? 우리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시비를 건 것에 대해서는 미안하지만 서로 이름 정도는 주고받는 게 좋지 않을까? 우린 마커스 남매, 난 차남인 놀트다."
그림자가 걸음을 멈추었다.

 

- "마커스 남매... 이름은 듣고 있었지."
비로소 여행자가 입을 열었다. 억양이 없는 쇠 같은 목소리에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묻어 나오지 않았다. 미모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또한 더없이 잘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우리 이름을 알고 있다니...?'
그들은 그들의 이름을 알고 있으면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그의 목소리가 도저히 믿기질 않았다.
마커스 남매는 근경에서 실력 있는 유일한 그룹 흡혈귀 헌터였다.

 

- 그들이 지금까지 해치운 귀족은 어림잡아 백 명이 넘었으며, 남매 중 누구 하나 희생되지 않은 기적은 근경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들의 냉혹함과 비정함도 함께.

- 뱀파이어에게 물린 사건이 발생했을 때, 반드시 한 사람, 혹은 한 그룹의 뱀파이어 헌터를 고용해야만 한다는 법은 없었다. 오히려 일이 실패로 돌아갈 경우를 대비해서 몇 명, 혹은 몇 그룹을 동시에 고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마커스 남매들도 여러 다른 헌터, 혹은 헌터 그룹과 함께 고용되어 일을 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자는 항상 마커스 남매뿐이었다. 그들과 함께 고용됐던 나머지 헌터들 중 살아남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시체로도 발견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때문에 귀족에게 살해되었다는 마커스 남매의 증언을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지만, 그러한 일이 계속되면서 소문이 소문을 낳아 이제는 이 남매들에게도 무시무시한 의혹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의혹만 빼놓으면 그들의 헌터로서의 실력은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 그들 그룹 단독으로 해치운 귀족 또한 방대한 수를 자랑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프로 헌터들이 마커스라는 이름을 듣거나 그들을 직접 입에 담을 때는 항상 격렬한 증오와 공포심이 뒤따랐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실력과, 그들의 몸에 밴 비장한 기술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아마 이 무시무시한 남매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또박또박 밝힌 것은 이 청년 앞에서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 "넌..."

갑자기 거한 볼곱이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당신은... 그 얼굴, 파란 펜던트... 그래, 들어본 적이 있어. 십 년 전, 어느 마을 장로가 이 근경에서, 우리에게 필적할 만한 헌터는 단 한 명뿐이라고 말한 적이 있어. 어쩌면 그 혼자만의 실력이 우리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강할지도 모른다며 말이야... 당신, 설마..."
대답도 하지 않고 젊은이가 등을 돌렸다.
마치 그 흉물스런 사람들을 더 이상 상대하지 않겠다는 듯.  

- "던필... 저자가 바로..."
자신의 맏형이 이런 목소리를 내는 것을 동생들은 처음 들었다.
그리고 그는 어떤 이상한 이름을 입에 올렸다.
"내 몸을 꼼짝 못 하게 사로잡은 자는 처음이야... D..."

 

- 불과 이틀 새 대참극과 살육이 계속 이어진 비슈느 마을에서 북쪽으로 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한 대의 검은 마차가 힘차게 달리고 있었다. 그 마차는 마치 어둠에서 생겨난 듯 선두에 선 여섯 마리의 말을 비롯하여, 마차와 마부까지 모두 검은 빛깔 일색이었다. 바람을 가르듯 달리는 마차 앞으로 좁은 숲길이 계속 펼쳐지고 있었다. 말들에게 가차 없는 채찍질을 퍼부으며 마부는 이따금씩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듯 별들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하지만 마부의 눈동자에 비친 그 영상은 점점 그 빛을 잃어가고 있는 듯했다.
마부의 수려한 얼굴이 갑자기 흐려졌다.
"별이 움직였어. 날 뒤쫓고 있어. 그것도 여섯 명씩이나."
어둠 속에서 그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 "한밤중에 말을 몰게 하다니 하여튼 형도 성가신 데가 있어. 소란 피우는 데는 어쩔 수가 없다니까."
검은 복장의 남자가 오른손을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어둠보다 깊은 그의 모습은 발밑의 파란 풀마저도 공포에 떨게 했다.
파랗게 숨 쉬는 새벽녘 어둠인데도 이 남자만큼은 검은 밤의 여운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검은 셔츠에 검은 바지, 바로 마커스 남매의 넷째, 카일이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형도 말했잖아. 그 젊은 놈은 평범한 헌터가 아냐. 너도 소문을 들어 알고 있잖아."
저속하고 난폭한 남동생을 달래듯 옆의 남자가 말했다. 그의 등뒤에는 검은 봉이 차가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바로 차남인 놀트였다.
"흥, 뭐 그자가 던필이라는  말야?"
카일은 침을 뱉으며 말했다.
"귀족과 인간의 혼혈아라... 흡혈귀 헌터로서는 최고지. 하지만 벌써 잊었어? 지금까지 우린 진짜 귀족을 물리쳐왔어."

"그건 그래."
"혼혈이라면 귀족보다도 우리 쪽에 더 가까워. 뭐가 두려워? 그리고 봄을 앞서기 위해 이렇게 밤을 마다하지 않고 달렸는데 형도 이제 늙었나 봐. 우리들 외에 근경 숲을 이렇게 밤새도록 달릴 수 있는 자가 또 있을 것 같애?"


- 근경 숲의 밤은 마귀와 야수의 독무대였다.
귀족의 쇠퇴와 함께 비록 그 수가 적어졌다고는 하지만, 해뜨기 전에 숲 속을 거닌다는 것은 완전히 목숨을 내놓는 일과 다름없었다. 혹, 밤의 숲 속을 지나는 자가 있다면 이미 제정신이 아니거나, 요괴들을 물리칠 담력과 실력을 겸비한 자들 뿐이었다. 바로 그들처럼. 
마을에서 만난 청년에게 뒤지지 않도록 밤의 질주를 명령한 맏형에게 카일이 반발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 누가 이 밤길을 자신들만큼 달릴 수 있다는 것인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그 역시 수많은 야간생물들의 눈을 피해 해뜨기 전에 이 언덕에 도착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전에 보아두었던 숲의 지름길을 통하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숲 속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 주위에서 바람이 몰아쳤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그것은 마치 여행자 모자의 넓은 챙에 먹물이 흐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름다운 이마와 수려한 콧마루에서 은가루 같은 것이 꿈처럼 부서지고 있었다. 달빛이었다.

공기는 이미 푸른빛을 머금고 있었지만, 이 청년을 비추는 달빛은 여전히 어두운 밤처럼 밝았다.
성능이 뛰어난 사이보그 말이었다면 평균 시속 오백 킬로미터의 질주도 가능했겠지만, 그가 타고 있는 것은 평범한 기마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기마의 속도도 그에 못지않았다. 아름다운 이 청년 기수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종류의 말에도 마력을 불어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 무엇보다도 이 '피난소'를 완벽하게 했던 것은...
"입구가 없군."
D가 말 위에서 중얼거렸다. 말 그대로였다.
햇빛을 받아 흰 광채를 발하는 검은 벽면에는 머리카락 하나 들어갈 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 하늘을 올려다본 다음, D는 조용히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쾌청한 봄의 온도와 아낌없이 내리쬐는 햇빛이 던필인 D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듯했다.
분명 한밤중에 눈을 뜬 귀족들과 싸우는 던필이었지만, 흡혈귀 헌터로서의 명칭을 얻기 위해서는 한낮에 작열하는 햇빛의 지옥에서도 태연하게 견딜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만 했다. 
D가 다가감에 따라 어쩐지 주위의 공기가 조금씩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곧 태양빛에 부서지고 말았다.

 

- D의 가슴 부근에서 펜던트가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주위에 설치된 귀족의 전자 병기를 모두 작동 불능으로 만드는 신비의 색이었다.
우뚝 솟은 검은 벽이 바로 그의 앞에 있었다. D는 천천히 말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강철에 왼손을 대었다.
싸늘한 느낌이 전해왔다. 특수 강철 자체가 가지는 온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외부로부터의 모든 열기와 전자기(電磁氣)를 통과시키지 않는 구조는 분자가 원자를 겸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D의 손이 천천히 부드러운 표면 위에 미끄러졌다.
그는 눈앞의 벽을 빈틈없이 쓸어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다시 오른쪽 면. 그는 구조물의 모든 벽면을 차근차근 더듬고 있었다. 이미 시간은 삼십 분이 지나고 있었다.

 

- 그곳에 도대체 무엇이 있었던 것일까?
뒤로 당긴 칼끝과 강철 사이에 희고 처절한 살기가 응집되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하얀빛이 검은 벽을 향해 파고들었다.
D의 검에서 불꽃이 일었다. 아무리 날카로운 그의 검이라 할지라도 특수 강철을 뚫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우미한 곡선을 그리는 그의 검은 부동의 강철벽에 절반이나 꽂혀있었다. 
그곳이 입구였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문과 벽의 경계선은 분명히 있었다. D의 왼손의 신비한 힘이 그것을 찾아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경계선이라고도 할 수 없는, 거의 제로에 가까운 틈새였다. D의 검이 한칼에 그것을 뚫은 것은 정말 놀라운 실력이었다. 

 

- "으엑!"
갑작스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벽 내부 쪽이 아닌 D의 왼손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깜짝 놀랐잖아. 저 안쪽엔 인간도 있다니까!"
D의 표정에 약간의 움직임이 있었다.

 

- "시간을 잃어버리게 하는 향인가?"
D가 물었다. 귀족들이 고안해 낸 낮과 밤을 착각하게 하는 향료였다.

"잘 알 순 없지만, 나머지 하난 움직이지 않아. 시체군. 비록 낮 동안만이긴 하지만."
"그렇다면 여자는 무사하다는 얘기군."
D가 중얼거렸다. 적어도 한 번 정도 흡혈을 당했겠지만, 그 정도라면 피를 빤 장본인만 쓰러뜨리면 다시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D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살짝 드리워졌다. 
칼을 쥐고 있던 그의 팔 근육이 조용히 부풀어 올랐다.
어떤 신기가 발휘된 건지 수평으로 꽂혀 있던 D의 칼이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강철 표면에 가느다란 빛줄기가 생겨났다.
어딘가에서 푸른빛이 스며들어왔다.
갑자기 D의 움직임이 멈추어졌다.
그는 조용히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의 차가운 눈동자에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담겨 있지 않았다.
"생각보다는 빠르군. 한데, 뜻밖의 인간이 나타나셨는걸?"

목소리가 야유하듯 말했다.
숲 속 저편에서 희미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을 향하는 듯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 "저렇게 안주할 수 있는 곳이 파괴된 피난소밖에 없었던 것은 사냥감으로 봐선 불운이었고 당신에게 있어선 행운이었겠지만, 이제 그 행운을 내게 넘겨야겠어. 목숨이 아깝다면 이쯤에서 순순히 물러나."
"아깝지 않다면?"
D의 조용한 목소리가 레일러의 얼굴에 그녀의 옷 색깔에 뒤지지 않는 홍조를 떠올리게 했다.
"뭐라고...? 레일러 마커스의 전투카를 상대해 보겠다는 거야?"
"내 목숨은 두 개가 있지. 어느 쪽이든 하나를 가져갈 수만 있다면..."
전혀 동요하지 않는 분명한 D의 목소리에 레일러가 침묵했다. 남자 못지않은 담대함을 가진 소녀가 한숨을 지었다.

 

- 전방의 검은 적에게서 그녀는 몸이 오싹할 정도의 황홀함을 느꼈다. 그것은 불가사의한 마약이 뼈의 구석까지 침투하는 듯한 위험한 느낌이었다. 그런 마음의 동요를 씻어내기라도 하듯 레일러는 힘껏 고글 안경을 다시 끌어당겼다. 
"안 됐군. 이것이 마커스 남매의 방식이야."

 

- 이윽고 브레이크를 밟은 레일러를 아름다운 검은 그림자가 맞이했다.
"뛰어난 솜씨군."
담담한 어조로 D가 말했다.
레일러는 등줄기로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이상한 감각이 지나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내색을 않고, 적의를 담은 어조로 D를 위협했다. 
"아직 있었어? 어서 가지 않으면 정말 치어 죽일 거야."

D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조용히 다시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먼저 상처를 돌보는 건 어떤가?"
"쓸데없는 상관 마."
힘들게 내뱉는 레일러의 말꼬리에 고통이 묻어났다. 곧 그녀는 오른쪽 가슴을 누르며 조종석 위에서 앞으로 풀썩 고꾸라지고 말았다.
전투카의 바닥판을 뚫고 나온 금속 조각 하나가 그녀의 가슴을 찌른 것이었다.
D는 신속한 걸음으로 다가가 레일러를 가볍게 안아 올렸다. 그리고는 그녀를 가까운 나무 그늘에 눕혔다.

 

- D는 넓은 하늘과 피난소를 잠깐 쳐다보고는 레일러가 처음 나타났던 지점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아직이군."
D의 왼손바닥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여자의 동료는 아직 훨씬 뒤쪽에 있어. 도대체 어쩔 작정인 게야?"
"이대로 내버려 둘 순 없지 않나?"
"다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는 짓 따위는 나중에 해. 목표물이 지금, 몸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강철 상자 속에 있어. 어서 빨리 처치한 다음 여잘 구해내야지. 저 정도라면 피를 빨렸다고 하더라도 귀족을 쓰러뜨리기만 하면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어. 본인도 얼마나 기뻐하겠어?"
요기(妖氣)가 떠돌던 아름다운 얼굴이 순식간에 흐려졌다. 

"기뻐한다고? 인간으로 되돌아온 것을 말인가? 아니면..."
"뭣 때문에 이상한 말들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는 거야? 날씨가 점점 따뜻해지니까 머리의 나사라도 풀린 거야? 지금이라면 힘들이지 않고 놈을 단 한칼에 쓰러뜨릴 수 있어. 곧 해도 저물어. 그리고 이 여잔 네 직업적인 라이벌이야. 그냥 내버려 둬."

'목소리'가 초조해하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하늘은 벌써부터 푸른빛을 띠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 계절이라면 일몰은 밤 500시경, 이제 두 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 '목소리'의 다그침과,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D는 말없이 레일러의 웃옷을 열어젖혔다.
옷 밖에서도 확실히 알 수 있었던 하얀 기복이 나타났다. 왼편 가슴 위쪽 몇 군데의 살이 밖으로 벌어져 있었다.
피로 물든 상처 부위가 벌써 검푸르게 부어올라 있었다. D는 말안장에서 구급약을 가지고 다시 돌아왔다. 약통의 뚜껑을 연 D의 눈이 머뭇거리고 있었다. 
"킥킥킥."
목소리가 조소를 보냈다.
"그걸 구입한 게 언젠지 기억이나 하고 있어?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방치해 뒀으니... 약 성분은 이미 옛날에 변해버렸을 거야. '죽지도 않는 자'는 이런 게 곤란하다니까."
"할 말 없군."
여전히 무뚝뚝한 말투로 중얼거리며 D는 레일러의 전투카를 뒤져 약상자를 꺼냈다. 그는 만약을 대비하여 바로 그 자리에서 상자를 열어보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뚜껑을 닫았다.
"왜 그래?"
"약품이 거의 없어."
"보충을 해놓지 않았단 말야? 만사태평한 헌터도 다 있군 그래."
부상이 직업병이라고 할 수 있는 헌터에게 있어서 의약품의 보충은 무기 조달과 같은 중요 사항이었다. 마을이나 시내에 도착하게 되면 식료품 가게나 술집보다 무기 상점이나 약국으로 먼저 달려가는 것이 헌터의 습성이었다. 
그런데 베테랑 헌터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마커스 남매의 여동생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게야? 말해두지만, 난 너의 전용이야.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알고 있어. 인간에게 인간의 방식대로 해야겠지."
D는 허리의 전투 벨트에서 한 개의 침을 꺼냈다.
자신의 왼손을 그 끝으로 가져갔다.
"뭐 하는 거야?"
"이 여자가 죽는다면 너와는 인연을 끊을 테야."
"제기랄. 이젠 협박까지 하는구만."
목소리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새파란 불꽃이 침 끝을 감싸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끝이 작열하며 진홍빛으로 변하자, D는 왼손을 레일러의 이마 가까이로 가져갔다.
다음 순간, 그녀가 눈을 떴다.
"뭐 하는 짓이야?"
"상처를 태워 씻어내는 거야. 고통이 없도록 할 테니 안심해."

 

- 그는 눈을 떴다.
세포 하나하나를 가두고 있던 저주받은 포박이 바닷물처럼 밀려나가는 듯한 둘도 없는 쾌감.
그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었다.
두 눈이 황급히 옆을 향했다.
조금 떨어진 침대 위에 소녀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 긴장한 목소리의 저변에는 부동의 자신감이 깔려 있었다. 제 아무리 뛰어난 흡혈귀 헌터라 할지라도 어둠을 지키고 있는 귀족의 적수는 될 수 없었다. 
강철 바닥으로 가볍게 내려서며 문 쪽을 바라본 그의 눈이 갑자기 확 붉어졌다.
실낱 같은 은빛 줄기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문위 끝부분에 생겨난 틈새로부터 들어오는 달빛이었다. 그는 소녀를 돌아보았다.
"낮에 누군가가 검으로 연 것이에요. 필시 아버지가 의뢰한 헌터들..."
무릎을 덮은 소녀의 파란 원피스 위에서 무엇인가 발견한 듯 그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것은 은으로 만든 산뜻한 단검이었다. 그가 허리에 차고 있던 것이었다. 
소녀는 그것을 어디에 사용하려 했던 것일까?
그는 잠시 동안 그 칼에 주목했다. 그리고 나서 밖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벽면의 TV 모니터로 다가갔다.

 

- "슬슬 놈이 나타날 시각이야."
"냉정한 사람이군."
목소리는 분개하듯 말했다.
"시간이 되니까 치료도 끝인 거야. 악덕 의사와 같은 흉내는 내지 않는 게 좋아..."
그런데 그 목소리가 갑자기 끊어졌다.
D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푸른빛이 고여 있는 듯한 피난소의 문이 소리도 없이 안쪽으로 밀려들어가고 있었다.

 

- "물러서."
그가 말했다. 이상하게 조용한 목소리였다.
"사람의 생명을 돈으로 바꾸는 비열한 놈들, 헛되이 생명을 교환하는 짓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아."
D의 눈에 묘한 색이 흐르는가 싶더니 금방 사라졌다.
"여자를 돌려주지."
살기나 패기가 느껴지지 않는 담담한 목소리로 D가 말했다. 남자의 눈이 서서히 붉게 물들어 갔다.
"난 내가 원했기에 그녀를 빼앗았다. 너도 그렇게 하면 돼. 낮이 아닌 이 밤에 귀족을 상대로 해서 그게 가능하다면 말야."

어둠이 응결되었다. 색도 빛도 그대로였다. 그러나 두 사람을 둘러싼 공간은 얼어붙고 있었다.

 

- "그 얼굴과 그 기술... 음,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지. 모든 귀족을 공포에 떨게 하는 그 이름을 말야. 바로 네가 D라고 하는 잔가?"

"나도 들어본 적이 있지."
전율과 감탄이 교차하는 마이엘링크의 목소리를 듣고 D가 조용히 응했다.
"귀족 중에서 오직 단 한 명, 지배받고 있는 민중이 그 덕을 칭송하는 영주가 있다고... 아마 그 이름이 마이엘링크였다지?"
"한 번쯤은 만나보고 싶었다. 어떤 식으로든."
"지금 여기서 만났다."
"보내주지 않겠나? 난 인간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그건 딸을 빼앗기고 너와 같이 되어버린 여자의 아버지에게나 전해."
마이엘링크의 표정에 고뇌가 가득 찼다.

 

- D는 바람과 같이 질주했다.
마차의 속도는 D와 같았다.
언덕 정상에서 D는 마차 바로 옆으로 접근했다. 오른손을 문손잡이 쪽으로 뻗었다.
그러나 황금으로 된 손잡이가 갑자기 멀어져 갔다.
순식간에 점점 작아지는 마차의 뒷모습을 지켜본 다음, D는 몸을 뒤로 젖혀 한 바퀴 돌며 나무 그늘가로 다가갔다. 레일러를 눕혀 놓은 장소였다.

 

- D는 몸을 웅크리며 레일러의 이마에 손을 댔다.
불처럼 뜨거웠다. 땀범벅이 된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몸속에 박힌 파편의 독기운 때문이었다. 이번엔 어김없이 한기가 엄습해 왔다.

 

- "오오."
D의 왼손에서 놀라는 투로 '목소리'가 말했다.
"이 여자도 누구 못지않게 힘든 인생을 살아왔나 보군."
푹신한 가슴과 대퇴부, 그리고 등에 이르기까지 레일러의 피부는 수많은 칼자국과 또 그것을 기운 흔적으로 가득했던 것이다. 이 소녀도 근경의 수라와 다름없는 생활을 해왔던 것이다. 
역시 감정의 동요 따위는 없이 D는, 레일러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덮었다.

레일러는 작은 신음 소리를 내며, 그의 넓은 가슴에 딱 달라붙었다. 열 탓으로 부어오른 그녀의 입술이 와들와들 떨리며 작게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것도 몇 번씩이나. 
그러나 그것은 D의 행동을 멈추게 한 말이었다.

 

- "D의 얼굴을 봐둔 것이 행운이었어."
그는 중얼거리며 천 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직경 5센티미터 정도 되는 은쟁반이었다.
그는 그것을 운전석의 계기판에 조심스럽게 고정시켰다. 잠시 후 볼곱의 강털투성이 얼굴은 차창을 통해 하늘에 떠 있는 달을 우러러보았다.
보름달에 가까운 둥근 달이 여기저기 벌레에 침식당한 듯 보였다. 구름 때문이었다.
그는 커다란 몸을 의자에 기댔다. 운전석이 삐걱거리며 기울었다.
볼곱은 양손을 가슴 앞에서 교차시키며, 빨려들 듯한 눈으로 세워놓은 은쟁반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 은쟁반의 표면에서, 안개라도 낀 것처럼 연기가 솟아올랐다. 다음 순간, 그곳에 홀연히 검은 옷을 입은 젊은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D였다.
그는 이쪽을 향해 뭔가를 말하는 듯하더니, 곧 말고삐를 당기며 말과 함께 나무들 사이로 사라져 갔다.
이것은 지난밤, 흡혈귀로 변한 마을 사람들과 싸운 다음 그들과 상대한 D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었다.
그 스타일과 풍모가 약간 달랐던 것은, 이것 자체가 실사가 아닌 볼곱의 기억 속의 광경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볼곱은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것을 은쟁반에 비춰낼 수 있는 남자였던 것이다.

 

- 달도 구름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보인 것도 잠시, 구름 내부에서 갑자기 희미하게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가 한번 심호흡을 하는 동안, 빛 속에 사람 형체 같은 그림자가 꿈틀대기 시작하였고, 다시 한번 호흡을 할 때에는 그것이 명확한 모습으로 떠올랐다. 
누군가가 말을 타고 암흑 속의 길을 가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과거에 본 D의 기억을 근거로 은쟁반과 달을 영사기로 하여 구름덩이에 현재의 D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
먼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그 뒷모습은 이곳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전방의 길을 달리고 있는 D의 그것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었다. 

 

- 월광초를 연상시키는 소녀는 가죽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바닥에는 융단이 깔려 있었으며, 벽과 천정은 아름다운 실크쿠션으로 덮여 있었다. 벽에서 떼어낸 듯한 조립식 금테이블에는 좋은 술과 맛있는 음식들이 놓여져 있었다. 바로 이것은 수십 킬로미터나 되는 별빛 속에서, 귀족의 대야회(大夜會)를 위해 길을 달리던 마차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옛날의 일이었다. 바닥의 융단은 더럽혀져 있었고, 실크도 군데군데 찢겨나가 있었으며 나사가 풀려 기울어진 테이블 위에는 은컵 하나 없었다. 

 

- 이 소녀의 밝은 미소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였던가?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애썼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모든 과거의 일들이 꿈일지도 몰랐다. 
"괜찮아요. 당신이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저도 그렇게 되고 싶어요."
"당신한텐 태양빛이 어울려. 난 아직 본 적이 없지만."

그는 소녀와 마주 보는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도달할 수 있을까요?"

갑자기 소녀가 툭 하고 말을 던졌다.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해?"

"아니요."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마을을 떠난 뒤 처음으로 보는 그녀의 주체적인 동작이었다.
"전 어디라도 상관없어요. 당신과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거친 산의 동굴이라도, 평생 빛을 볼 수 없는 지하세계라 할지라도..."
"하지만 어디를 가든 헌터는 찾아오겠지."
영롱한 얼굴에 체념하듯 그는 말했다.

 

- "지상에는 이제 우리가 편히 쉴 수 있는 곳이 없어. 그래서 이렇게 별들이 있는 저 끝을 향해 긴 여행을 떠나게 된 거야. 힘들게 느껴져?"
"아뇨."
"그래. 어쩌면 당신에겐 처음부터 무리였는지도 모르지. 온실에서 자란 화초는 거친 환경에서 견딜 수 없는 법이야. 당신은 지금까지 내가 하자는 대로 잘 따라와 줬어. 하지만, 아직 다른 길을 택할 방법은 남아 있어."
창백한 그의 손 위로 소녀의 하얀 손이 다가왔다. 가냘픈 얼굴이 살포시 그의 얼굴 양 옆을 비볐다.
"전 가보고 싶어요. 별들이 있는 곳으로 말이에요."

 

- 그랬다. 이 두 사람은 일방적인 유괴가 아닌 지극한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과연 어느 누가 그 사실을 알 수 있었을까?
젊은 흡혈 귀족과 인간의 딸, 이 두 사람을 이어주고 있는 것은 모멸과 공포가 아닌 허무할 정도로 강한 사랑의 힘이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마을 사람을 흡혈귀로 만들면서까지 데려온 이 소녀가 아직 인간의 몸으로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 귀족에게 있어서 인간을 자신들의 동료로 끌어들이는 것은, 아름다운 자의 생명을 흡수한다고 하는 미의식에 사로잡힌 식사임과 동시에, 자신들을 싫어하는 자를 범하는 쾌락, 그리고 미천한 자를 자신과 같은 존재로 끌어올려준다는 잘못된 우월감으로 가득 찬 행위였다. 

- 그들의 사랑은 두 세계를 이어주는 매개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을 영원히 쫓기는 신세로 만들어버렸다.
귀족은 사라져 가는 빛에 흔들리고 있었으며, 소녀는 돌아갈 세계를 잃어버렸다.

이 두 사람은 지금 어디를 향해 가려는 것일까?
별들이 있는 끝의 세계란 어디를 두고 하는 말일까?  

 

- 매우 짧은 순간의 결투였지만, 머리 위에서 날아온 장검의 충격과 날카로움은 지금도 왼손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왼손의 저림도 이제서야 겨우 가라앉는 참이었다. 그리고 D의 일격은 레이저 빔도 튕겨내는 강철 손가리개를 절반이나 찢어놓지 않았던가? 그 사실을 확인하던 그 순간의 그 공포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흡혈귀 헌터 D... 그는 결코 가볍게 여길 상대가 아니었다.

 

- "괜찮아. 앞으로 이틀 후면 우리가 가고자 하는 세계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좀 쉬어. 모든 건 내게 맡기고 당신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 안으로 사라지자, 마이엘링크는 하늘에 걸려 있는 달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이제 이틀 남았다. 하지만, 또다시 낮은 찾아온다. 그 사이에 새로운 적과 만나게 되는 건 아닌지..."

- 바위를 깎아낼 듯한 기세로 흐르던 강물도 지금은 그 맹렬한 기세를 잃었는지, 더 이상 암벽에 부딪혀도 이를 드러내지 않았다. 강의 폭은 하류로 갈수록 더욱 넓어지고 있었다. 수면 위에는, 달빛을 받으며 뛰어오르는 물고기들의 은빛 비늘이 여기저기서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따금씩 바닥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물 위로 거대한 뱀 같은 그림자가 상류 쪽으로 헤엄쳐가고 있었다. 뭔가 불길해 보이는 것이었다. 
강 옆으로 나 있는 좁은 길 위로, 말을 타고 누군가가 오고 있었다.
"여기쯤 될 텐데..."
혼자 중얼거리는 남자의 등뒤에는 육각봉이 빛나고 있었다. 마커스 남매의 차남, 놀트였다.
그는 탁류 속에 빠진 D의 뒤처리를 하라는 볼곱의 명령에 따라 이곳으로 급히 달려왔던 것이다.

 

- 동쪽으로 이어져 있는 능선 뒤에는 파르스름하게 새벽의 징조가 보이고 있었지만, 세계를 덮은 어둠은 아직 짙고 어두웠다.
잠시 주위를 돌아보던 놀트의 오른손이 육각봉으로 뻗어갔다. 

"적어도 더 아래쪽은 아니야. 혹시 놈이 물에 빠지지 않고 밖으로 나온 것은 아닐까? 하지만 던필이 어떻게 그런 어처구니없는..."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결론에 놀트는 당황하고 있었다. 물속의 익사체로 있어야 할 D의 존재를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D가 가진 존재의 특성에도 벗어나고 있었다. 


- 귀족 흡혈귀와 인간의 중간적 존재인 그들은 당연히 양쪽의 육체적 조건을 동시에 이어받았다.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그들에게는, 인간에게는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육체적 손상을 짧게는 수 시간, 길어도 며칠 만에 쾌유하는 회복 능력이 있었다. 이것은 물론 귀족에게서 이어받은 장점이었다.
하지만 단점도 많았다. 예를 들면 햇빛 아래에서는 70퍼센트나 저하되는 그들의 체력, 공복 시에 느끼는 산자의 혈액에 대한 끝없는 욕망 등등... 인간세계에서 살아가는 그들로서는 감당키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신기한 것은, 그들이 한결같이 물 위에 뜰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귀족들의 육체적 조건 중 가장 기이한 현상이었다. 때문에 인간들의 반란 초창기에는 귀족을 박멸시킬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 중의 하나로서 인정받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익사시켜 그들을 없앤다는 것이 말뚝이나 햇빛에 비해 효과가 미흡하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그 이후로는 그들에 대한 대항책으로서의 중요성이 크게 약화되었다. 

 

- 그런데 왜 햇빛이나 말뚝에 비해 효과가 미흡했을까? 그것은 일단 물속에서 익사한 귀족이라도 밤이 다시 도래하고, 신선한 혈액보충만 이루어진다면 다시 되살아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그 두 가지 조건 중 하나라도 채워지지 않는다면, 익사 상태에서의 부활은 없었다. 다시 말해 가사(假死) 상태의 귀족을 그대로 불태워버린다든가, 영원히 땅 속에 가둬두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런 강물도 인간들에게는 충분히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볼곱이 완전히 숨통을 끊어놓으라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였다.

 

- "넌... 평범한 던필이 아니지?"
놀트가 간신히 말을 던졌다.
"난 던필이다."
파란 눈의 D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 잔잔하게 흐르던 물줄기에 갑자기 광기가 깃든 것 같았다.
도랑을 따라 강물이 맹렬한 속도로 안쪽으로 흘러들어왔다. 그 물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도랑 양쪽의 흙을 파헤쳐 올리며 마주 선 두 사람 사이로 쇄도해 들어왔다.
D와 놀트의 발목이 순식간에 잠겨버렸다.

"어떤가, 던필 움직일 수 있겠나?"
놀트가 웃으면서 물었다. 승리를 점치는 웃음이었다.
"전에 네 동료와 결투를 벌인 적이 있었지. 그때, 바로 이 방법을 사용했지. 던필이란  말야, 물이 닿으면 그 부분이 경직되어 버린다고 하질 않나?"
D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던 게 아닐까?

"뒈져버려!"

 

- 그러나 내려치는 봉보다도 빠르고 높게, 밑에서부터 검은 번개가 솟구쳤다. 그것은 놀트의 머리 위를 통과해 버렸다.
놀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상대의 검은 부츠에 식육 짐승처럼 달라붙어 있는 끈적한 물이었다.

 

- 쓰러진 상대는 쳐다보지도 않고 D는 처음 서 있었던 바위 뒤로 걸어갔다.
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코트를 휘감고 D는 말에 올라탔다. 강 상류 쪽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한없이 차가우면서도 비애에 젖어 있었다.
"어서 도망가! 하지만 난 쫓을 테다..."
누구를 향해서 한 말일까?
그의 중얼거림이 공중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말은 물가로 내려갔다.
말은 주저함도 없이 수면 위로 발을 올려놓았다. 결코 얕은 강이 아니었다. D의 허리 정도에 이르는 깊이였다.
누군가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면 말이 물 위를 뛰고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크게 도약한 말이 발목만을 물속에 담그면서 사뿐히 비상하여 넓은 강물을 건너가는 것이었다.

- 레일러가 흥분되는지 창백한 얼굴에 홍조까지 띠며 말했다.

"발바로이 마을이라... 오천 년 동안 마인들의 피와 피가 섞이면서 탄생한 이상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잖아. 어둠 속에서는 기이한 요술(妖術)들이 도사리고 있고... 꼭 한 번은 응수해보고 싶었어."

 

- 마커스 남매가 괴이한 그림자와 여자를 만난 지점에서 약 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눈에 띄게 높은 바위산이 하나 있었다.
아무 지식도 없는 여행자의 눈에는 그저 불모의 검은 대지에 크고 작은 무수한 바위들이 쌓여 이루어진, 단순한 자연의 창조물로만 보였을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눈을 집중시켜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제 맘대로 놓여져 있는 것 같은 바위들이 실로 정연한 역학적 배치를 가지고 늘어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과 동시에 하늘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높은 봉우리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과 구름의 요상한 기운으로 무시무시한 전율을 자아내고 있었다. 
손쉽게 등정을 허락할 것 같은 이 바위산은 아무리 씩씩한 인간이 도전해 오더라도 반드시 중도 포기하게 만드는 복잡 미묘한 배치로 만들어져 있었다. 설사 이곳을 돌파하게 되더라도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지대가 있어, 혹 그곳에 있는 돌 하나라도 건드리게 되면 몇 톤이나 되는 바위더미에 깔리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 그래도 기적적으로 바위산 중턱까지 다다르면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 속에서 동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승에서 불어오는 듯한 으스스한 바람을 맞으며 그곳을 빠져나가면 곧바로 거대한 바위와 나무로 구성된 요새 같은 성채와 마주하게 되었다.

 

- 또 하나의 절망으로 가슴을 치며 레일러는 필사적인 얼굴로 그쪽을 돌아보았다.
전투카를 어떻게 넘어올 수 있었는지 소리 하나 내지 않고 검은 옷의 청년은 표연히 광장에서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 고통조차 잊고 레일러는 취해버렸다.
자신을 괴롭히던 그 존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상태를 살피는 듯 말 위에서 잠시 시간을 보낸 D는 조용히 레일러 곁으로 말을 몰았다.
"상대는 이제 없어. 일어설 수 있겠나?"

 

- 도대체 무엇이 정녕 얼음 같은 청년의 다리를 멈추게 한 것일까?
청년은 침실로 돌아왔다. 레일러는 조용히 침대에 누웠다. 청년은 등을 벽에 기대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왜 날 도와준 거야, 그것도 두 번씩이나?"
"여유가 있었어."
"귀족을 쫓고 있지 않아?"
"행선지는 알고 있어."
"그럼, 가르쳐주는 게 어때? 오빠들이 기뻐할 텐데."
"저 침대에 있는 자가 몸이 좋지 않다는 오빠인가?"
청년이 조용히 물었다. 그러나 글로브 쪽은 쳐다보지 않았다.
"응.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걷질 못해."
"대신에 다른 능력이 있지 않나?"
레일러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이내 원래의 얼굴로 돌아오며 말했다.
"참 엉뚱하군, 당신은. 직업적인 라이벌을 왜 두 번씩이나 도와줬지? 그 오빠를 태연하게 죽인 주제에 말이야. ...여자를 베는 건 재수가 없어서야?"
"상대해 오면 베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D의 말에 레일러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가 진심에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실로 아름다운 얼굴에 칼날의 날카로움이 비장되어 있는 청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을 가만히 마주 보고 있는 동안에는 자꾸만 해서는 안 되는 생각들이 그녀의 가슴속으로 번졌다. 이 남자라면 죽임을 당해도 좋아... 아니, 오히려 그녀 스스로 죽여달라고 애원하고픈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한 상념에 그녀의 심장과 머릿속이 계속 부대끼고 있었다. 
이것이 던필, 즉 귀족의 피가 흐르는 자의 힘이란 것일까? 

"이상한 사람이군."
머릿속의 상념을 떨치며 레일러가 말했다.

 

- "언제부터 헌터 일을 했나?"
급작스런 D의 물음에 레일러가 당황했다.
"언제부터? 철들 무렵부터지 뭐. 다른 생활은 생각할 수도 없었어."
"여자들이 할 일이 못 돼. 목표물을 쫓는 일이 즐거워지면 벌써 여자가 아니라는 증거야."
"흥, 쓸데없는 참견이야."
레일러는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다른 남자였더라면 손이나 칼이 벌써 날아갔을 것이다.
그는 타이르는 것도 야유하는 것도 아닌 덤덤한 어조로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청년의 말에는 레일러를 동요시키는 무언가가 분명 있었다.
"이제 와서 생활 방식을 바꿀 수는 없어. 손에 피가 너무 많이 묻었어."
"씻으면 없어져."
"왜 내게 그런 말을 자꾸 하는 거지? 날 실직시키고 싶은 거야?"

 

- D가 문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다음번에 날 보게 되면, 가차 없이 공격해. 나도 용서치 않을 거니까."
"나도 바라는 바야."
그 순간, 레일러의 눈에 슬픈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여동생이 하나쯤 사라져도 오빠들은 시끄럽게 굴지 않겠지?"
햇빛 속으로 사라져 가는 그림자가 말했다.
"죽음을 앞두고 엄마를 찾는 소녀에게 헌터란 직업은 어울리지 않아."
그리고 청년은 사라졌다.
하지만 그가 남긴 말만은 레일러의 귓속에 남아 있었다.
닫혀진 문을 파고 들어갈 듯 바라보는 소녀의 눈에 조용히 무언가가 고이고 있었다. 눈물이었다.

 

- "잊어서는 안 돼... 레일러.. 넌 우리들 모두의 것이라는 걸..."

 

- "여긴 내가 망을 보고 있겠다. 카일, 글로브에게 발작을 일으키게 한 다음 곧장 돌아와."
"알았어."
선선히 대답하는 카일의 얼굴에 왠지 음탕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바위 위에서 몸을 한번 뒤집고는 검은 가죽옷을 햇빛에 번쩍이며 마수처럼 신속한 걸음으로 바위산을 내려갔다.

 

- 나무와 돌을 끈으로 연결한 위에 짐승가죽을 붙인 것 같은 기이한 문 앞 5미터 정도에서 D는 말을 멈춰 세웠다.
그는 눈앞에 솟아 있는 성채를 말없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의 서늘한 눈매가 젊은 철학자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시인의 정취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슈욱! 하고 공기가 움직였다.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사람은커녕 그 낌새조차 없던 나무 그늘과 바위 사이에서 몇 명의 남자들이 나타나 D를 둘러쌌다.
그들은 하나같이 검고 사나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 몇 명은 투명할 정도로 창백했고, 특이하게, 기분 나쁜 비늘로 둘러싸인 자도 있었다. 만약 그런 풍경을 처음 대한 여행자라면, 그 불길함과 요상한 기운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먼 곳에서 D를 둘러싸고만 있을 뿐, 왠지 가까이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 "난 흡혈귀 헌터 D다. 일이 있어 이곳까지 왔다. 문을 열 것을 희망한다."
목소리와 동시에 불가사의한 문은 소리도 없이 열렸다.

 

- 입고 있는 옷은 어느 마을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평상복이나 작업복이었지만, 옷 밖으로 나와 있는 손, 발, 얼굴 등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자가 지극히 드물었던 것이다.
어떤 자는 뱀과 흡사한 비늘로 덮인 얼굴로 붉은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고, 또 어떤 자는 늑대처럼 온몸이 강털로 덮여 있었다. 마을 안쪽의 풀에서 물을 튀기고 있는 어린 소년 또한 아래쪽이 악어의 몸이었다. 
아직도 세상 어느 한 곳에서는 요괴들과의 결혼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성의 짐승과 인간과의 혼인...
이곳 발바로이 마을에 사는 자는 모두가 그 끔찍한 관계의 결과로 태어난 자손들이었던 것이다.
평범한 인간이 본다면 아마 실신하고도 남을 모습들이었다. 하지만 D는 묵묵히 그 마인들 사이를 헤치며 나아갔다. 이윽고 광장으로 보이는 장소가 나왔다.
그 중앙에 검은 마차와 백발노인이 서 있었다.

 

- 노인이 땅에 닿을 듯한 백발을 만지며 말했다.
"말에서 내리기까지? 노인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한 것인 게로군. 그런데 도저히 알 수가 없네그려. 도대체 저 바위산을 어떻게 말을 타고 올라왔는지..."
땅을 기는 듯한 노인의 목소리를 D가 들었던 것일까?
그는 말고삐를 쥐고 천천히 노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2미터 정도 앞에서 다시 멈추며 오른손으로 검은 마차를 가리켰다.
"저 마차의 승객 두 명을 내게 넘겨줘."
D의 말을 듣고, 노인은 얼굴 전체의 주름을 늘리며 크게 웃었다. 끊기지 않는 그의 웃음소리에는 분명 조롱 섞인 울림이 있었다.
"허허허.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 마을을 찾아주신 젊은이! 나도 선뜻 그렇게 해주고 싶지만, 늦었어. 암, 늦었구말구. 우린 벌써 저 마차 쪽과 행동을 같이 하기로 했거든 이미 계약을 끝내고 돈도 받았지. 만 달라스의 금화를 열개씩이나 말이야. 자네가 그만큼의 돈을 지불할 수 있겠어?"
"지불하면 의뢰인을 팔 텐가?"
조용한 D의 말에 노인의 얼굴에서 갑자기 미소가 사라졌다.
굳어버린 그의 얼굴로 보아, 금방이라도 손에 든 지팡이를 휘두를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그는 굽은 허리가 펴질 정도로, 거만한 기세를 보이며 웃기 시작했다.
"허허허. 이곳이 발바로이 마을이라는 것을 알고도 잘도 지껄이는구나. 아니, 흐뭇하다. 흐뭇해. 내게 그런 식으로 떠든 자는 정확히 320년 전 옛날..."
갑자기 기묘한 표정이 노인의 얼굴을 스쳤다.

- 노인은 안개 저편에 잠자고 있는 막막한 기억을 감각 둔한 손가락으로 더듬거리고 있는 듯, 안타깝게 눈을 감고 있었다. 갑자기 그의 눈이 확 떠졌다. 노인의 눈에 놀라운 빛이 역력했다.
"그 얼굴은 넌, 혹시..."
"난 흡혈귀 헌터다."
D는 조용히 말했다.
"여자를 빼앗긴 부모에게 부탁받고 그 장본인을 쫓고 있다. 그 때문에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고. 그렇지만, 당신들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다. 그를 이곳에서 나가게 한다면 나 역시 그를 조용히 뒤따르겠다."
"호오, 제법 논리 정연한 자로군."

 

- 공격을 받았을 때와 거의 변함없는 위치와 자세로, D가 조용히 노인을 향해 말했다.
"날 죽이는 것은 상관없지만, 마을 사람 몇 명도 목숨을 잃을 것이다. 잠자코 밤까지 날 이곳에 있게 해주지 않겠나? 마차가 나가면 나도 곧 뒤따르겠다. 그것뿐이다. 너희들이 그를 돕기로 계약한 이상, 난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
노인이 조금 전 D를 위협하던 말이 진실이었다면, D의 말 또한 진실이었다. 

 

- "잘 들어둬, 그분은 어떤 원대한 목적을 가지고 여행을 하시고 계셨어. 그런데 우리들 소문을 듣고는 가장 먼저 달려오셨던 게야.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마을에서 가장 강하고 씩씩한 남자 다섯 명을 당신의 여행에 동행시키라고. 그렇게 한다면 우리 마을에 내린 재앙을 당신이 떠나는 순간에 없애주겠다고, 그러면 모든 것이 우리가 원하는 바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면서."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 듣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갑작스런 옛날 이야기에 당황해하며 곤혹스러워하던 그들은, 바로 그 순간 발생한 두 가지의 일에 대해서는 깜쪽같이 모르고 있었다. 
하나는, 이야기 도중 어딘가에 신경이 곤두서기라도 한 건지 D의 눈이 활활 타오르며 빛을 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굳게 닫혀 있던 정문 주위를 통과한 한 청년이 아무도 없는 마을길을 지나 광장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광장 가득히 아니, 마을 전체가 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신음 소리로 가득했다. 그런 사람들이 그분의 부름 소리를 듣는 순간, 거짓말처럼 고통이 사라졌다. 그리고 저쪽 조각상 뒤에서 한 사람, 또 말라비틀어진 나무 뒤에서 한 사람, 몇몇 사람들이 마치 초대받아 끌려가는 것처럼 그분이 계신 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의 수가 바로 다섯이었다. 모두가 인정하는 실력자들이었지." 

 

- "다섯 명을 데리고 그분이 사라지자, 이내 마을의 대지가 순식간에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그게 바로 오늘날의 이 위치인 게야. 그리고 우리가 숨을 세 번 내쉬는 동안에 나무에 싹이 트고, 꽃이 열매를 맺더구나. 땅 속의 독소가 거의 무해할 정도로 엷어진 것도 나중에 알게 됐지. 그때 우리 모두는 그저 그분의 이름만을 부르며 땅에 얼굴을 비벼댔다... 다시 말한다, 잘 들어둬!"
노인의 목소리는 전원에게 지시하는 장로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젊은 너희들이 아직 모르고 있는 규칙을 말하겠다. 그분 자신이나 혈족분이 나타난 경우에 한해서는, 마을 사람들은 모든 것을 접고 그분의 요구에 따른다는 것이다!"
늠름하게 역설하고 있는 그 말은 바로 명령이었다.
세 명의 반역자도 아무 말이 없었다.
바람에 흑발이 날리는 아름다운 헌터에게 노인은 크게 예의를 갖추었다.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원하시는 모든 요구를 들어드리지요. 저 마차를 파괴하는 것, 아니 저대로 불태워 없애버리는 것도 명령만 하신다면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공포를 뛰어넘어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귀에 D의 대답이 들려왔다.
"말은 고맙지만, 사람을 잘못 봤어. 그 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마차를 지키게 하면 돼. 나도 곧 뒤를 따를 테니."

 

- 마을 사람들은 숨거나, 혹은 땅바닥에 엎드린 채, 약 십 미터의 거리를 두고 대치한 두 개의 그림자를 보았다.
천사 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청년과 달과 같이 빼어난 미모를 지닌 헌터!
과연 검은 그림자의 질주가 빨랐을까? 천사의 미소에서 나오는 흰빛의 급류가 빨랐을까?

 

- D가 빛을 향하여 왼손을 내밀었다. 
두 줄기의 빛은 그 손 앞에서 방향을 바꾸어 하나가 되더니, 손바닥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청년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미소는 여전히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 레일러는 눈물의 흔적이 선명한 얼굴로 오빠를 노려보며 잽싸게 벗겨진 옷을 걸쳤다.
강하게 빨아 당긴 입술 흔적과 깨물어서 생긴 보라색 이빨 자국을 쳐다보며 카일은 혀를 찼다.
"거봐, 다른 때처럼 얌전히 있었으면 됐잖아. 오늘따라 왜 그렇게 반항이 심해?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나도 너 때문에 그렇게 한 거니까 어쩔 수 없어. 헤헤, 하기야 뭐, 덕분에 글로브가 흥분하기는 더 쉬웠겠지만 말야."
"그만해."

 

- 갑자기 우웩! 하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모포 밑에서 나온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 위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카일의 목소리였다. 카일의 숨통을 모포 밑에서 나온 창백한 손이 붙잡았던 것이다. 
"듣고 싶어, 카일? 너 혼자서 레일러를 독점하고... 나에게만 괴로운 고통을 주다니... 그래도 듣고 싶어?"
"아아... 아아... 그래 듣고 싶어."
카일의 필사적인 대답이었다. 
쓰윽, 글로브의 손이 내려갔다. 가녀린 목소리가 흐느껴 우는 것처럼 말했다. 

"목표물의 행선지는... 클레이본 스틱스!"

 

- "내가 이곳에 있는 한 너도 여기 있겠다고 했던가?"
D가 담담하게 말했다. 처절한 공격을 주고받은 내색도 없었다.
"이제 알아냈다. 네 기술을..."
"뭐라고!?"
놀라움과 분노를 감추기라도 하듯 단검 두 개가 날아왔다. 하나는 바로 앞에서, 또 하나는 훨씬 떨어진 뒤쪽에서. 그것들은 거의 동시에 날아오고 있었다. 적은 한 명이 아니었던 것일까? 
재빨리 단검을 받아친 D는 몸을 굽혔다. 그의 머리 위로 적의 백광이 후려쳤다. 동시에 D는 자신의 왼손을 뒤로 가져갔다. 그 순간, 백목침이 살을 파고드는 감촉이 느껴졌다. 

윽! 하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연이어 D는 가볍게 앞으로 한 발을 옮기고는 기묘한 행동을 했다.
뭔가를 찌른 쪽으로 돌아보는 동시에 또 하나의 침을 발밑 땅바닥으로 찔러 넣는 것이다.
그가 말했다.
"왜 그러나? 바늘을 통과시키지 못하면 그림자 속으로는 들어오지 못해."
어딘가에서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땅바닥으로 뭔가가 떨어졌다. 피로 물든 백목침이었다.

- 그랬다. 뱅거는 그림자 속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 "드시겠습니까?"
"됐어."
"아참, 귀족에게는 고기 따위가 필요 없으시죠?"

그는 그때서야 알아차렸다는 듯이 말했지만, 그것은 거짓이었다. 목소리 어딘가에 악의가 담겨 있었다.
머쉰은 잘 익은 고기를 한 점 찢어서 입에 넣었다. 누런 이가 상스러운 소리를 내며 질근질근 씹었다.
그런 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캐롤린은 마이엘링크의 옆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랑하는 것과는 다른 뜨거운 욕정이 엿보이는 눈이었다.
"그가 실패했다면 적은 곧 추격해 올 것이다. 이대로라면 추격당해. 당장 출발하는 게 낫겠어."
머쉴의 무례한 행동에 화가 났는지 마이엘링크는 깜짝 놀랄 정도의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하고는 발길을 돌렸다.
"안심하세요. 적이 당장에 우리를 따라잡지는 못할 겁니다. 지금쯤 다른 마차의 뒤를 따르고 있을 테니까요."

 

- 살피는 듯한 시선으로 말하는 머쉴의 목소리에, 캐롤린의 눈은 점점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가슴속의 갈등을 조속히 매듭지은 그것은 바로 변절자의 눈이었다. 
"그래, 그렇구말구. 너 정도의 미녀에게 저자가 눈길도 주지 않는 것은 그 작은 소녀가 있기 때문이야. 솔직히 말해 난 그 소녀가 마음에 들어. 내 여자로 만들고 싶어...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이해관계는 일치하는 거 아냐?"
"..."
"낮 동안 놈은 잠을 자야 해. 아마 그 소녀도 그렇겠지? 그 사이에 내가 여잘 데리고 도망가버리면 높은 낮 동안 너를 의지할 수밖에 없잖아. 쳇, 기껏 인간의 딸이야? 귀족이 진정으로 인간에게 흉금을 터놓을 리가 없어. 벌써 심경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 거야. 없어지더라도 여잘 찾는 짓 따위는 하지 않을 거야. 만약 찾는다고 하더라도 내 여자가 되었다는 증거를 보여주면... 후후, 백 년의 사랑도 식어버릴 것이 틀림없어."

 

- 캐롤린의 흰 얼굴에 이상한 불꽃이 음영을 그렸다. 
"하지만, 내가 저분의 몸과 마음을 뺏기 위해선 저분을 쫓고 있는 헌터들을 남김없이 처치하지 않으면 안 돼. 그렇지 않으면 저분과 함께 할 수 있더라도 항상 마음이 편치 않을 거야. 만약 네 제안에 내가 협력한다면, 그들을 처치하기까지는 절대 어느 쪽도 손을 대지 않고 끝까지 임무를 완수하기로 해. 어때?" 
머쉰이 고개를 끄덕였다.

 

- 작은 새 울음소리가 숲 속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며 길을 메우고 있었다.
D는 봄 햇빛 속을 계속 질주하고 있었다.
그림자 마차를 따라잡을 때와 비교하여 속도가 약간 떨어져 있었지만, D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때까지 D는 사이보그말의 능력을 훨씬 웃도는 질주를 계속해 왔던 것이다. 이미 말은 무릎 관절이나 신체 기능에서 이상 현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D가 아무리 숙달된 주행을 하더라도, 앞으로 보름 이상은 견디기 힘들어 보였다. 
시각은 아침 809시.
낮에도 달릴 수 있게 된 마이엘링크의 마차를 과연 뒤쫓을 수 있을까?
전망은 매우 비관적이었다.
그래도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냥꾼의 운명은 오로지 목표물을 쫓는 것이다.

 

- 순간, 기묘한 감정이 그녀의 가슴에 솟았다.
죽어도 좋아. 이 아름다운 남자의 칼을 가슴에 받고 싶어.
죽음의 황홀함이 캐롤린을 감쌌다.
그런데 갑자기 D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낮은 신음 소리를 내며 검은 옷의 그림자가 무릎을 꿇었다.
무엇 때문일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도 모른 채, 캐롤린의 본능은, 죽음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다시 움직일 것을 명했다.
기계팔이 반회전을 하며 두 사람을 공중으로 떨어뜨렸다.
D는 사뿐히 착지하면서 바닥에 무릎을 댔다. 
그 위로 기계팔이 덮쳐왔다. 피할 틈이 없었다.

 

- 순간, D의 오른손이 희미한 빛의 여명을 끌고 있었다. 일시에 떨어지는 손가락과 교차하며 은빛이 번뜩였다.
무거운 소리를 내며 직경 5미터나 되는 가운데 손가락이 D의 등뒤로 떨어졌다. 손목 끝은 뒤로 젖혀져 있었다. 
손가락이 잘려나간 곳에서 기계기름이 사방으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길을 사이에 두고 D와 마주한 캐롤린도 오른쪽 손가락을 누른 채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붉은 선이 흐르고 있었다.
D가 도약했다.
그 아래로 사이보그 말이 달려왔다. D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질주했다.
"놓치지 않을 테다, 헌터!"

 

- 길을 벗어나 천천히 숲 속으로 들어갔다.
엄청난 피로가 밀려왔다. 수면을 취하고 싶었다.
던필 특유의 '햇빛증후군'이었다.

- 한낮에도 평범하게 행동할 수 있는 던필이었지만, 귀족의 피가 흐르고 있는 이상, 그 부작용을 피할 수는 없었다.
맘껏 내려 붓는 햇빛은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동안, 육체에 씻어내기 힘든 피로를 축적해 가는 것이다.
그로 인해 갑자기 나타나는 무력감과 피로는, 헌터인 던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만약 목숨을 내놓는 사투 중에 이러한 경우가 발생하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간발의 차이로 탈출했지만, 완벽한 도주라고도, 승리의 질주라고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비호와 같이 말에 옮겨 탈 수 있었던 것도 초인적인 체력을 갖춘 D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숲 속의 일각, 말에서 내린 D의 발걸음은 이미 뒤틀리고 있었다.
그는 각양각색의 식물과 곤충들로 뒤덮인 바닥 한구석에 무릎을 대고 전투벨트에서 꺼낸 나이프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맹렬한 기세로 흙과 이끼가 파헤쳐졌다. 채 3분이 지나지 않아 한 사람 정도가 누울 수 있는 크기의 구멍이 완성되었다.
D는 유연하게 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주위의 흙을 손으로 몸에 덮은 다음, 그대로 누웠다.

 

- 옛 전설에, 흡혈귀는 관 속에 고향의 흙을 넣어 운반하곤 했다. 그것은 단순히 원래 묘지의 흙이 가장 안락한 수면을 가능하게 해 준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었다. 활동에 의해 체내에 축적된 피로를 어머니인 대지가 모두 빨아들이고는, 새로운 불사의 에너지를 주입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 D도 위급해진 이 순간, 그 관습을 따르고 있었다.
"큭큭큭, 미안하게 됐군. 나도 햇빛증후군이 언제 일어나는지는 예견할 수가 없어. 게다가 자네의 행동은 남들과 달리 너무 거칠어... 그럭저럭 해서 벌써 5년이나 됐군."
5년이라는 것은 이전 발작이 일어났던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대개 귀족의 자질을 가장 많이 이어받은 던필이 증상을 일으키는 간격은 약 반 년이었다. 그들은 먼저 일어났던 일시를 기준으로 하여, 다음에 발생하게 될 예정일을 미리 예견하곤 했다. 그리고 예정일의 한 달 전후는 되도록이면 싸움을 피하고 몸을 숨겼다. 자신들이 쫓는 목표물의 역습이 두려운 탓도 있었지만, 라이벌 헌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함도 있었다. 
이 세계를 독점하고픈 헌터들 중에는 동업자의 발작 일시를 몰래 메모해 두었다가, 다음 예정일 전에 상대가 있는 곳을 알아내어 말살을 도모하는 비겁자들이 많았던 것이다. 
D의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이 캐롤린 일파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럼, 잠시 동안의 휴식이군. 내가 행운을 빌어주지." 
한가로운 목소리가 왼손에서 들려왔을 때, D의 눈은 이미 닫혀져 있었다.

 

- 대답을 하는 볼곱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자신들이 노린 목표물은 물론이고, 경쟁 상대인 헌터들까지 없애버리곤 했던 그들 남매의 상황이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예전의 잔악무도하고 패배를 모르던 헌터의 기세 또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이미 둘째인 놀트는 죽어버렸으며, 레일러는 나가서 영 소식이 없었고, 게다가 앓고 있던 글로브도 상태가 심해져 거의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레일러를 죽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지만, 그들 앞에 있는 적의 실력을 생각하면 결코 안심할 상황이 아니었다.

 

- 게다가 이 막내는 볼곱에게 한 가지 걱정을 더 얹어주고 있었다.
바로 그녀가 D에게 마음이 끌리고 있었던 것이다.
귀족과의 첫 싸움에서 부상당한 레일러를 발견했을 때, 몸에 박힌 파편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고, 그녀는 편안하게 수면을 취하고 있었다.
치료를 누가 해주었는지 물었지만 그녀는 기억에 없다고만 말을 했다.
귀족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D였다. 실제 레일러 주위에는 그녀가 아닌 또 다른 결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 사실을 레일러는 그에게 털어놓지 않았다. 물론 이 여동생의 기질로 본다면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D 또한 자신들이 처치해야 할 적이었다. 그런 자에게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졌다는 것은 굴욕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당사자인 레일러가 그것에 대해 전혀 분개해하질 않았다. 

- 갑자기 그의 생각이 주춤했다.
D가 잔인하면서도 예민한 흡혈귀 헌터인 만큼, 볼곱의 가슴속에는 떨쳐버릴 수 없는 또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던 것이다.
정말로 D가 레일러를 구한 것일까? 하는 점이었다. 그 시점에서, D는 이미 자신들이 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소문을 종합하면, D는 무기를 가진 적이라면 여자라고 해서 용서하는 그런 후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 실력과 전력, 그리고 그에게 당한 상대들로 보아, 소문의 절반만을 믿는다 치더라도 볼곱의 간담은 서늘해졌다. 
그런 그가 레일러를 도왔다고?
볼곱에게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 근처에는 말이 나뭇가지에 매어져 있었고, 그 아래로 D가 반쯤 묻힌 채 수면을 취하고 있었다.
환희의 외침이 터져 나오려 했다. 아니 그녀의 가슴이 터지려 했다. 레일러는 어렵게 자신을 진정시킨 후, 이끼를 헤치며 그를 향해 달려갔다.
이상은 없었다.
먼발치에서 보더라도 온몸이 곤두설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는 영리하고 엄숙하게, 깊은 생각에라도 빠진 것처럼 두 눈을 감고 있었다.

- 씩씩하게 눈물을 닦으며, 레일러는 흙으로 덮인 D의 몸 위로 가만히 자신의 몸을 기대었다.
차가웠다.
그것은 흙의 냉기가 아니었다. D의 체온이었다. 귀족과의 싸움에서 부상당한 자신의 몸을 나중에 뒤쫓아온 카일이 발견했을 때, 그는 몸을 데울 수 없었더라면 그녀가 죽었을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때 당시 그녀에게 보온장치 따위는 없었다.
바로 D가 몸을 데워줬던 것이다.

 

- 그녀 또한 남자에 대해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예전에 몇 번인가 구혼을 받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누구나 그녀의 신분을 알고 나면 그녀에게서 떠나갔다.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 하지만 그는 레일러가 버렸다. 
그날 밤, 레일러는 오빠들에게 범행을 당하고 말았다.
"널 딴 놈에게 주지 않을 테야."
볼곱이 말했다. 전부터 안고 싶었다며 놀트가 속삭였다. 카일은 말없이 행위에 몰두하고 있었다. 세 사람이 그녀에게서 떨어지자, 곧 미이라 같은 글로브의 몸이 다시 덤벼들었다. 바로 그때, 레일러의 마음속에서는 영원히 되찾을 수 없는 뭔가가 사라졌다. 

 

- "당신은 날 도와주었어." 
움직이지 않는 아름다운 사람에게 레일러가 속삭이듯 말했다.
"이번엔 내가 지켜줄게. 목숨을 걸고 반드시."

 

- 그는 녹색으로 깔린 언덕 위에 누워 있었다.
거의 밖으로 나올 일이 없는 그에게 있어서는 짧지만, 지극히 행복한 한때였다.

 

- "네가 먼저 온 것을 알고, 이 근처 나무들의 수액(樹液)을 모두 마셔두었지. 수액은 나무의 생명줄이야. 그걸 마심으로 인해 난 모든 나뭇가지, 다시 말해 수천 개의 손과 발을 가지게 된 거야."
"너, 넌 설마..."
무서운 예감에 시달리며 레일러가 발버둥 쳤지만, 나뭇가지의 포박은 풀리지 않았다.
"호호호, 미안하지만, 난 귀족은 아냐."
캐롤린은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능력만큼은 약간 물려받았지. 내 어머니가 근경 제7지구를 담당했던 귀족의 유모였거든. 지금은 이미 사라져 버렸지만..."

 

- 아아, 설마 이 미녀가 D와 같은 던필이라니...
인간을 초월한 미모, 식사를 하지 않는 불가사의. 마이엘링크를 바라보는 뜨거운 시선... 그 모든 것은 이 여자의 정체를 말해 주고 있었다.
낮 동안 태연하게 걸을 수 있었던 것도 이제야 수긍이 갔다.
던필인 동시에 기이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 능력으로 인하여 그녀는 발바로이 마을로 편입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기계팔과 같은 무기물이든, 레일러를 포박하고 있는 식물과 같은 유기생명체, 모든 사물을 귀족에게 피를 빨린 인간처럼 그녀의 의지대로 움직이게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던필이 흡혈은 했지만, 증식성은 가지지 못하였다. 그에 비하면 이 여자는 놀랄 만한 증식성을 보이고 있었다.

 

- "아까부터 보고 있었는데 너, 이 던필에게 반한 것 같더구나. 재미있게 됐어. 널 곧바로 요리할 작정이었는데 마음이 바뀌었어. 거기서 사랑하는 남자가 심장을 찔리는 광경을 보고 있어. 그다음에 너도 똑같은 방법으로 저 세상으로 보내주마." 

 

- "그분이 곧 나타날 거예요. 그럼 서로 죽이려 들 텐데 난 당신이나 그분 둘 다 살인자로 만들고 싶지 않아요."
레일러는 주위를 가득 메우기 시작한 푸른 어둠을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 밤은 귀족의 세계니까..."
자신이 뱉은 '귀족'이라는 단어에 레일러의 얼굴이 잠시 고통스럽고도 증오에 가득 찬 얼굴로 변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소녀를 바라보던 그녀는 크게 놀란 듯 외쳤다.
"당신... 아직 인간으로 남아 있는 거야?"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에게 강제로 끌려간 게 아니었어? 그럼 설마... 당신은 그 귀족을... 그런 거야!?"
"네."
소녀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미모가 레일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강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떤 것에도 꺾이지 않겠다는... 그 눈빛이 있는 사람이라면 웬만한 모든 일은 견뎌낼 수 있는 것이다. 

- "그랬었군..."
갑자기 레일러의 가슴에 부러움과 슬픔이 젖어들었다. 그녀의 말투도 부드러워져 있었다.
"당신, 그 남자를 좋아하는군... 귀족을."
소녀는 답이 없었다. 
아니, 그것이 답이었다.
그녀의 빛나는 눈이 그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레일러는 옆에 서 있던 거목에 몸을 기댔다. 몸에서 갑자기 뜨거운 열기가 뻗쳐왔던 것이다. 그것은 바람을 타는 안개처럼 온몸에 번져왔다.
피로였다.
20년간의 피로가 한꺼번에 몸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 같았다.
레일러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인간의 몸을 포기하면서까지 귀족과 함께하려는, 자신감과 신뢰로 가득 찬 소녀의 모습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흡혈귀 헌터라고 불리우는 무참한 운명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쫓는 것보다 쫓기는 편이 더 행복한 것일까?

"힘들지 않아?"
"네?"
"괴롭지는 않냐구? 도망 다니는 생활이. 그에게는 이제 돌아갈 곳도 미래도 없는데."
"이미 나에게도 없어요."

 

- "어서 도망가요. 곧 그분이 오실 거예요."

"됐어."
레일러는 말했다.
"난 이제 지쳤어. 여기서 당신의 소중한 사람이나 같이 기다리겠어... 그보다 우리 얘기나 좀 더 하지."
그때였다. 등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이야기, 내게도 좀 들려주지."
소녀가 비명을 질렀다.
레일러는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하나로 모인 그곳에 죽었으나 죽지 않은 자! 바로 사냥꾼이 서 있었다.

 

- "이번 일도 이제 끝을 보게 되었어. 그런데 아무래도 네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이번이 마지막이야... 하지만 저번 발작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는 너에게 당장은 무리겠지?"
여기서 볼곱은 또 한 번 훌쩍였다.
"그래서 말인데 미안하지만, 내 쪽에서 그것이 일어나도록 해줘 네 발작도 이제 한 번밖에는 남지 않은 것 같애. 만약 그게 일어난다면 넌 아마... 어차피 그럴 거라면 그 생명을 내게 줘."

 

- 그는 모포를 또 한 번 젖히며, 갈비뼈가 드러난 글로브의 가슴 심장부에 시한신관을 테이프로 붙였다. 
그것은 10센티미터 정도의 가는 비닐관이었지만, 밀착되어 폭발할 경우 갈비뼈를 날려버리고 내장의 일부를 파괴할 만한 위력적인 것이었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글로브의 가슴에서 설마 그는 그런 짓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
미안하다.
생명을 줘.
볼곱의 얼굴에서 한없이 눈물이 흘렀다.
미끄러져 내려갈 염려였더라면 한 장으로 끝날 테이프를 그는 세 겹, 네 겹으로 붙이고 있었다. 만에 하나, 글로브가 그것을 벗길 경우를 대비하는 것이었다. 

- "야, 이건 정말 놀랍군."
D의 허리 부근에서 낮은 목소리가 말했다.
"나와 같은 부류 중에 저렇게 하늘을 나는 자가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했는걸? 야, 이건 정말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어."
검을 칼집에 조용히 넣고, D는 말없이 레일러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 소녀의 대리석 같은 매끄러운 배의 한가운데에 사악한 인간의 얼굴이 나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조금 전 사냥꾼의 배에 붙어 있던 것과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것들 동료는 모두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 게다가 공생기억을 갖고 있지. 그래서 한 사람의 생각이 다른 놈들에게도 전해지는 거야. 정말 성가신 타입이야."
"왜 이 여자에게 쓴 거지?"
"음탕한 마음에서였지. 놈들도 미의식을 가진 생물이야. 그뿐이 아냐. 놈들은 자신이 머물고 있는 인간의 오감을 사용해 섹스도 영위하는걸? 그러니까 놈은 이 소녀의 몸속에서 그짓을 하고 싶었던 거지."
D의 오른손에서 흰 칼이 빛나고 있었다.
"!?" 
D의 의도를 알았는지 얼굴은 요상한 모습으로 가라앉으려 했다.
그전에 미간을 향해 날린 D의 칼이 정확하게 얼굴상의 입을 관통했다.
"케엑!"

 

- "D, 그 왼손은?"
"여자에게 물렸다고?"
레일러의 말을 무시하며 D가 물었다. 레일러는 암담한 표정을 지었다.
"한 사람 더 처리해야 할 자가 있어."
"응?"
"빚은 갚겠다."
그의 한마디는 매우 짧았다. 레일러의 사투를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 "당신은 알고 있나? 클레이본 스틱스는..."
D가 말했다.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가는 것도 상관없겠군. 하지만 그다음은 어떡할 텐가?"
"모르겠어요."
D의 물음에 소녀는 대답했다.
"그곳에 가면 저희들의 여행은 끝이 납니다. 어떤 형식으로든."
D는 침묵했다.
나무들 사이에서 바람이 구슬프게 노래하고 있었다.

- "잘된 일인데..."
레일러가 중얼거렸다.
"너무 잘된 일인데... 왜 좋지 않은 일로 되어버리는 거지?"
오랫동안 세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D가 달빛을 흔들리게 했다.
"모시러 온 모양이군."
그는 숲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소녀의 눈에 눈물이 빛났다.
"안 돼요, 부탁이에요. 절 보내주세요. 이대로라면 내일 밤에는 클레이본 스틱스에 도착할 겁니다. 모든 것은 그곳에서 끝이날 거예요. 그다음은..."
D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 "움직이지 마."
레일러가 말했다.
D가 돌아보았다.
단침총의 총구가 그의 가슴을 향하고 있었다. 

"보내줘... 최후의 매듭은 클레이본 스틱스에서 지으면 돼."
D는 움직이지 않았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두 사람 모두."
숲의 일각에 긴 사람의 그림자가 서 있었다.
소녀는 그곳으로 달려갔다.
잠시 주저하다가 두 개의 그림자는 꼭 껴안고 나무들 사이로 사라졌다.
레일러는 단침총을 내렸다.
"미안해, D."
"사과하는 건가? 난 자네에게 한 번 더 고맙단 인사를 해야 하는데."
"설마."
"이제 그만 자. 내일 아침에 차가 세워져 있는 곳까지 함께 가지. 거기서부턴 날 따라오든, 오빠들한테 돌아가든 맘대로 해. 여자 던필은 반드시 내가 처치할 테니까."

 

- "난..."
함께 가고 싶다는 말을 레일러는 삼켜버렸다.
발 밑에 모포가 던져졌다.
D는 또 다른 한 장을 가지고, 가까이에 나무줄기가 있는 곳으로 갔다.
바닥에 모포를 깔고, 나무줄기에 기대어 그는 팔짱을 꼈다.
검은 오른쪽 옆에 두었다.
잠시 생각한 다음, 레일러는 D 옆으로 가 앉았다.
D가 힐끔하고 바라보았다.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깊은 눈동자였다. 돌연히 취하는 것을 꾹 참고, 레일러는 말했다. 

"성가셔? 피를 빨린 여자는?"
"아냐."
"고마워."
가슴까지 모포를 덮고, 레일러는 팔을 베고 바닥에 누웠다. 바람에는 향기가 있었다.
밤에 피는 쟈스민, 월광초, 마이요버튼, 문샤인 등... 그것도 감미롭고... 애달프게...

 

- 마이엘링크의 머릿속에서는 공항이 보잘것없긴 하지만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는 소문이 분명한 현실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제자리에 우뚝 서 있는 그의 어깨로 부드러운 손이 조용히 다가왔다.
그는 소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너무나 맑은 표정이었다.
"괜찮아요. 또 다른 곳으로 가요. 난 당신과 함께라면 어디라도 갈 수 있어요. 언제까지나... 죽을 때까지 함께 있을 수 있잖아요..."
"난... 죽을 수 없어."
"그렇다면..."
소녀는 뭔가를 결심한 듯 말했다.
매달리는 듯한 눈동자 속에 눈물이 넘쳐흘렀다.
"나도 당신과 같이..."
"그건 안 돼."
"괜찮아요."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하세요. 난 처음부터 그렇게 할 생각이었어요..."

 

- 젊은 두 사람의 얼굴을 푸른빛이 물들이고 있었다. 마이엘링크의 얼굴이 천천히 소녀의 목줄기로 다가갔다. 소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가련한 소녀의 속눈썹이 떨렸다. 소중한 사람의 입술이 목줄기에 느껴지자, 그녀는 갑자기 눈을 확 떴다.
순간, 그녀의 절규가 로비에 메아리쳤다.
비명을 지르며 몸을 뿌리친 소녀를, 그는 망연히 바라보았다.
소녀의 흥분된 마음은 곧 가라앉았다.
후회로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소녀는 말했다. 입술이 떨렸다.
"내가... 내가... 어처구니없는 짓을..."
마이엘링크는 미소 지었다.
하지만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남자의 미소였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
그는 다정하게 말했다.
"괜찮아. 당신이 먼저 죽게 된다면, 나도 뒤를 따르지."

- "자, 그만 갈까? 별로 가는 길은 막혀버렸지만, 이 세계라면 또 다른 여행이 가능하겠지."
 
- 검은 코트의 모습이 표연히 서 있었다.
가슴 부근의 파란 펜던트와 함께 무서울 정도의 미모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조용히 소녀를 밀어젖혔다.
"여행은 끝났어."
D는 말했다.
"여자를 돌려줘."
"데려가. 네게 목숨이 붙어 있다면."

- "이봐, D."
마이엘링크는 한숨처럼 말을 내뱉었다.
"별로 가는 길은 없었다. 넌 알고 있었나?"
D는 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았다.
미움도, 분노도, 슬픔도 모두 버리고...

 

- 마이엘링크의 빈틈을 계산한 다음 날린 D의 장검은, 훌륭하게 그의 배를 관통하고 말았다.
피바람을 일으키며 쓰러지는 귀족의 옆으로 소녀가 바람을 몰고 달려갔다.
괴로운 숨을 몰아 쉬며 마이엘링크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D가 다가왔다.
사냥감과 사냥꾼, 두 사람은 마주 보았다.
둘 다 묘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잘도 피했군."
D가 조용히 말했다.
배로 날아간 일격이 아무리 깊은 상처라 할지라도 귀족은 죽지 않았다. 칼을 빼면, 설령 D가 전해준 상처일지라도 언젠가는 재생했다.
"왜 비껴 찔렀지?"

- D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몸을 굽혀 소녀의 긴 머리카락을 몇 가닥 잡았다.
그는 단검을 뽑아, 그것을 20센티미터 정도 잘라 자신의 코트주머니 속에 넣었다.
"머리카락만 있으면, 치안관 사무소에서 신원을 확인할 수가 있어."
그는 말했다.
"남작과 인간인 연인은 죽었다. 두 번 다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D의 덤덤한 말에 소녀의 눈에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빛이 솟구쳐 올라왔다.
D가 마이엘링크의 몸에서 칼을 빼자, 장검은 순식간에 칼집 속으로 들어갔다.
"이것으로 천만 달라스라. 너무 간단한 일이군."

 

- "D!"
뒤쫓아가려는 레일러의 귓가에서 바람소리가 스쳤다.
뭔가 살을 뚫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D가 돌아섰다. 강철화살이 마이엘링크의 가슴을 관통하고 있었다.
화살의 각도를 보고 날아온 방향을 찾아낸 D의 오른손에서 은백색 빛이 날아갔다.

 

- 소녀의 가슴을 찌르고 있는 것은 마이엘링크의 손톱이었다. 소녀는 그것을 쥐고 자신의 가슴을 찌른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편안해 보이는 그들의 얼굴을 D는 지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레일러의 목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너무나 잘된 일인데 왜 좋지 않은 결과를 맞이해야 하는 걸까...?]

그들은 인간과 귀족... 양쪽 다 본래의 상태대로 죽었다. 사람은 사람, 귀족은 귀족...

 

- D는 코트주머니에서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꺼냈다.
소녀가 남긴 것이었다.
잠시 후, 검은 옷의 미청년으로부터 많은 금화를 받고 매장을 부탁받은 부랑자가, 로비로 발을 들여놓았을 때,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소녀의 어깨에 놓여있던 머리카락을 어지럽게 흩어놓았다.

 

- 공항 입구에서 레일러는 D의 말에서 내렸다.
D의 아름다운 얼굴이 그녀를 향했다.
"난 북쪽 마을로 갈게."
레일러가 말했다.
"항상 눈에 덮여 있는 아주 작은 마을이지만, 그곳 푸줏간 젊은 주인에게 프로포즈를 받은 적이 있어. 내 신분을 알고도 상관없다고 말해준 유일한 남자였지. 어쩌면 지금 처자식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땐 언제까지나 날 기다리겠다고 했어. 그 말에 기대를 걸어봐야지 뭐." 
D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 지내."
"당신도."

D는 말을 타고 앞으로 나아갔다.
파란 어둠이 등뒤에 서 있는 레일러의 모습을 완전히 덮어버렸을 즈음, D의 입가에 덤덤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만약 레일러가 보았더라면, 그 미소를 떠올리게 한 자신의 작별의 말을 언제까지나 자랑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것은, 그런 미소였다.


 

<3권 살인게임> 


 

 

 

- 빛이 어둠을 몰아내려 하고 있었다. 


- 핵전쟁 후 인류의 머리 위에 군림해 온 '귀족' 흡혈귀는 원인 불명의 종족 쇠퇴기를 맞아 황혼의 저편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일부는 자신들이 만들어낸 인공 요괴와 함께 근경일각에 머물며 여전히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있었다. 화룡, 안개악마, 악귀... 속수무책으로 그들에게 유린당하는 인간들의 현실은, 요괴를 처치하는 전문가 '헌터'의 탄생을 서두르게 만들었고, 그중에서도 귀족과 인간의 혼혈아인 '던필'이 가장 이상적인 흡혈귀 헌터가 되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유달리 아름다운 어느 젊은이의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 낡은 외투소매로 얼굴을 가린 여자의 입가에서 흐느껴 우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회색 머리카락을 한 이 여자는 옆에 있는 사십 대 여자에게 어깨를 기대고 있었다. 두 여자는 서로 이웃사람인 듯했다. 일행의 분위기를 말해주고 있는 것은 분명 이들 두 사람이었지만, 그 슬픔은 남자들에게까지는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기묘한 무늬와 주문을 그려 넣은 긴 옷을 입고 선두에 서 있는 노인의 얼굴에는 공포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 뒤를 따르는 남자들 중 여섯 명은 노인과 마찬가지로 공포가 드러난 얼굴 위에, 육체적 고통의 표정까지 내비치고 있었다.
 

- "관을 내려, 어서 밑으로 내려!"
그러나 남자들은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이미 머릿속과 신경, 그리고 근육조차도 딱딱하게 굳어진 그들은 철저히 공포에 유린당하고 있었다. 
이런 의식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어깨 위에서 일어난 현상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은 바로 한낮이었던 것이다. 

 

- 아무리 다가서도 거리가 줄어들지 않았다. 
다리는 분명 경사길을 밟고 있었고, 몸도 착실하게 올라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전방에 보이는 경사나 폐허는 도무지 가까워지지 않았던 것이다.

 

-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도달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육체적 한계까지 끌어내려 버린 것이었다. 폐허에 도착하게 되더라도 놈의 침소를 찾아다닐 만큼의 체력이 과연 그들에게 남아 있을까?

 

- 그나마 단 하나의 희망은 이곳을 내려갈 때에 한해서만은 언덕의 마력이 효과를 상실한다는 사실이었다. 뛰어내려 가면 언덕 아래까지 이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 폐허에서 유일하게 남은 석조 건물 중앙의 정원에 접해 있는 동굴 같은 입구 그늘에서 한 명의 소녀가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살짝 앞으로 나왔다. 방한코트의 어깨 위에 검은 머리카락이 흔들렸고, 노출된 허벅지는 추워 보인다기보다 요염했다.  

 

- "무슨 짓을 할 작정들이야? 바보 같은 짓은 그만두는 게 좋아."
소녀 리나는 헤이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굳세지만 결코 위험하게 느껴지지 않는 천진난만함을 가진 그녀의 얼굴에 총명함과 성숙한 여자의 요염함이 엿보였다. 소녀는 봄을 기다리는 꽃봉오리의 청초함과, 한참 꽃을 피우며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성숙기의 꽃과 같은 느낌을 동시에 풍겨, 묘한 언밸런스를 이루고 있었다.

 

- 한없이 깊은 암흑 저편에서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그것은 천지를 덮은 어둠보다도 더욱 어두워 보였다. 쇳물을 끓이는 듯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하나의 문명이 멸망한 장소다. 사라져 가는 것을 멈춰 세울 수는 없겠지만, 잃어버린 것에 대한 경의 정도는 표하는 게 어떤가?" 

- 리나가 벌떡 일어나 그 그림자 뒤로 숨었으나 남자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이십 년 이상 자연과 싸워온 그들 속에 내재된 야생의 본능이 그 그림자의 정체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이곳에서 만나게 될 것이라 여기고 있던 것을 훨씬 능가하는 존재였다. 

 

- "내려가라. 여긴 너희들이 있을 장소가 아니다."
목소리에 끌려가는 것처럼 남자들은 일어서서 뒷걸음질로 후퇴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뒤로 돌아서지 않고 계속 적을 향하고 있었던 것은, 적에게 등을 보이지 않겠다는 기백에서가 아니라 등을 보이면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 때문이었다. 

 

- 어둠에 익숙해진 그녀의 눈이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한 것이었다. 그는 조용한 겨울밤조차도 얼어붙게 할 만한 얼굴이었다.

"왜 그러지?"
그의 목소리에 이끌려 리나는 뇌리 속에 떠오른 말을 그대로 입 밖에 내뱉었다. 그녀는 솔직한 소녀였던 것이다.
"당신은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멋진 남자예요!"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차갑다기보다는 아예 감정이 실려 있지 않은 목소리였다.
"어서 돌아가. 여긴 네가 있을 곳이 못 돼."

- 나이는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챙 넓은 여행자 모자와 검은 롱코트 뒤에 맨 우미(優美)한 긴 칼이 단순한 여행자가 아닌 청년의 신분을 나타내고 있었다. 가슴 부분에 파란 펜던트가 흔들리고 있었다. 의식이 빨려들 것 같은 깊은 파란색은 이 청년에게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 "그런 말을 하실 거라면 바깥에까지 데려다주세요."

의외의 대답에 청년은 아무 말 없이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 "해지기 전에 돌아가. 내려가는 길은 보통의 길이야."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하는 그의 말에 리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걸 어떻게 알고 있죠? 그러고 보니... 당신, 언제 이곳에 왔죠? 설마 당신도 힘들이지 않고 이곳을 평범하게 오를 수 있는 거예요?"
입구 바로 앞에서 청년의 걸음이 멈추어졌다. 소녀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그는 물었다.
"그럼 당신도 그렇게 오를 수 있나?"

 

- 그녀의 강인한 고집이 그에게 먹힌 것인지 입구의 어둠에 동화된 그림자로부터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 한 마디였다.

"D."

 

- 그날 밤늦게 촌장의 집에 한 사람의 흡혈귀 헌터가 찾아왔다. 잠옷 위에 가운을 걸치고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얼굴로 내려온 촌장은 벽을 뒤로 하고 거실 구석 쪽에 서 있는 헌터의 미모를 보고 깜짝 놀랐다. 
"호, 이건 저승사자가 혼을 빼앗길 정도로구먼. 도저히 내 집에서 머물 순 없겠네그려. 내겐 딸아이가 하나 있고 또 여긴 마을 부인들의 출입도 많아서 말야." 
"벌써 말과 짐을 내려놓았어."
D는 조용히 말했다.
"우선 얘기라도 들어보지. 그전에 좀 앉는 건 어떤가? 긴 여행을 마친 것 아닌가?"
D는 움직이려고도 하지 않았다. 의자를 가리켰던 손을 겸연쩍게 내리며 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난로에 장작과 연료를 채워 넣고 다음 지시를 기다리는 하인에게 나가라고 명령했다.
"적에게 등을 보이지 않는다는 헌터의 마음가짐 때문인 건가? 과연... 내가 자네와 같은 편이라는 보증은 없지."
"내가 오기 전에 게슬린이란 자가 고용됐을 거야."
D가 물었다. 그는 이미 촌장의 말은 듣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 자존심이 강해 보이는 촌장이 그런 그의 태도에 불쾌한 표정 하나 보이지 않았던 것은 이 초A급 헌터의 실력에 관한 소문을 듣고 있었던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옆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다른 세계의 사람이란 것이 충분히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빼어난 미모는 물론이고 사방에 흩어져 있는 그의 혼기가 인간들의 가장 깊은 부분에 숨겨져 있는 기억을 끌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미지의 어둠 속에 대한 공포였다.

 

- "아주 기묘한 상황이었다고...?"
촌장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벌써 거기까지 알고 있었나? 과연 '던필'이군. 지옥의 바람소리까지 읽어낸다는 소문은 거짓말이 아닌가 보군."

"..."

 

- "그런데 모든 일이 대낮에 일어난 게야. 보아하니 당신은 내가 칠십 평생 동안 본 것보다 더 많은 걸 봐온 것 같은데 태양빛 아래 걸어 다니는 귀족의 희생자들도 본 적이 있나?"
D는 침묵했다. 그것 자체가 대답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귀족과 희생자가 밤뿐만이 아니라 태양빛 아래의 세계를 공유한다는 것은...

 

- "내가 왜 당신을 불렀는지 이제 알겠나? 입에 담기도 싫은 귀족과 그 종자들이 밤뿐만이 아니라 아침 햇살 아래에서도 자유자재로 활보하기 시작한다면 이 세계가 어떤 사태를 맞을지는 불을 보듯 뻔한 게야." 
방 안의 냉기와 어둠이 급속도로 증가한 것 같았다. 발전기의 소모를 줄이기 위해 야간 조명은 짐승의 기름을 연료로 하는 램프에 의존하는 것이 근경의 상식이었다. 노인은 난로의 온기를 쬐고 있는 자신의 양손을 타는 듯한 눈으로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D는 마치 조각한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 촌장은 자신이 기선을 제압했다고 생각하며 내심 흐뭇해했다. 상대에게 전해줄 정신적 효과를 계산하고 던진 그의 말이 이 아름다운 혼혈 헌터에게도 충분한 타격을 전해주었을 것이라 여긴 것이다. 이것으로 내일부터는 그를 부리기가 조금은 쉬울 것이라고 촌장은 짐작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어긋나고 말았다.

- "사건의 내력을 들어볼까?"
두려움이나 공포의 빛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D의 말에 촌장은 순간적으로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피에 굶주린 흡혈귀들이 낮의 세계를 유린한다는 공포도 이 '던필'에게만큼은 마치 남의 일 같았다. 놀라움이 얼굴에 드러나기 직전에 숨을 삼키며 촌장은 필요 이상으로 억누른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발단은 그 폐허와 네 명의 어린아이들이었다.

 

- "아이들을 살펴봤나?"
D가 시선을 문 쪽으로 향한 채 물었다.
침입해 오는 적에 대한 경계였을까? 헌터끼리도 그 명성과 실력을 둘러싼 적의와 투쟁심에는 무시무시한 면이 있다고 들었다. D의 눈은 반쯤 감겨 있었다. 촌장은 문득 이 아름다운 청년이 벽을 통해서 밤바람과 얘기를 나누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물론이지. 최면법, 정신 심층 토로제, 사이코 증언처리 등 생각해 볼 수 있는 방법은 모두 시험해 보았어. 가엾게도 가혹하긴 하지만 옛날 식의 처치도 해 보았지. 지금도 울며 소리치는 아이들의 모습이 꿈에 나올 것 같아. 그러나 모두가 헛수고였어. 행방불명되었던 기간만큼은 그들의 기억과 정신이 완전한 공백으로 채워져 있었어. 그것이 외적 강제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아이들 자신의 잠재의식 속에 있는 나름대로의 자기 방어였는지는 모를 일이야. 만약 후자라고 한다면 한스의 아들에 한해서는 불행한 결과로 끝났어. 크오레는 아직도 제정신이 아니거든. 따라서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고, 그들이 뭘 본 건지는 아직 수수께끼에 싸여 있어.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 아이들이 귀족의 입맞춤을 받지 않은 일이야. 크오레를 제외한 나머지 두 명은 지극히 잘 자라 각자 학교 선생과 마을에서 제일 착실한 학생이 되어 있지."

 

- "한 잔 어떤가?"
술잔을 내밀던 촌장의 손이 도중에 멈췄다. 던필의 식사와 음료를 떠올린 것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D는 조용히 답했다.
"술은 마시지 않아."
그리고 D는 창 밖의 어둠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희생자의 수와 습격당한 상태는?" 

 

- "햇빛 속을 방황하는 귀족이나 희생자가 있다고 생각하나?"

조용한 그의 질문에 촌장은 할 말을 잃었다. 그것은 좀 전에 자신이 D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갑자기 촌장은 미심쩍은 얼굴로 D의 허리 주변을 바라보았다. 얼핏 이상한 웃음소리를 들은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내일 중으로 내게 희생자와 습격당했을 때의 상황, 그리고 그 후의 경과와 처치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가져와."
D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것은 지금부터 행해질 일에 있어 불필요한 감정은 개입시키지 않겠다는 비정한 목소리였다. 햇빛 아래를 걸어 다니는 요괴, 전대미문의 적을 앞에 두고 이 흡혈귀 헌터는 두려움도 없었다. 촌장은 귀족과는 다른 공포심을 느끼며 젊은이의 엄숙하고도 아름다운 얼굴에 시선을 쏟고 있었다.

 

- "이봐요, 괜찮은 거예요?"
다음 날, 두 마리의 말이 이끄는 마차 위에서 말고삐를 쥔 리나가 물었다.
"뭘 말하는 거지?"
"아침 일찍부터 밖으로 나와서 말이에요. '던필'은 햇빛을 꺼리지 않나요? 귀족의 피가 섞여 있잖아요."
"이상한 것에 관심이 많군."
여섯 개의 다리를 가진 변형 말의 등에 시선을 두며 D가 중얼거렸다. 만약 그녀가 D와 텔레파시가 통하는 정신감응자였더라면, 아마 차갑게 닫힌 의식의 내면 속에서 쓴웃음을 짓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 인간과 흡혈귀 양쪽으로부터 특이체질을 물려받은 '던필’은, 그 생리적 측면에 있어서도 양자의 영향을 농도 짙게 물려받았다.
인간은 밤에 잠을 자고 낮에는 눈을 뜨고 있는데 반해 귀족들은 그 반대였다. 두 종류의 유전자가 서로 경쟁할 경우에는, 기본적인 생리현상에 있어서는 귀족, 다시 말해 흡혈귀의 그것이 우선했다.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는 눈을 뜨도록 던필의 육체가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왼손잡이 인간이 훈련에 의해 좌우를 똑같이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던필도 인간과 똑같은 생활을 하는 것이 사실상 가능했다. 그리고 근력, 시력, 청력 등 모든 생리적 힘이 거의 흡혈귀의 절반 정도에까지 이른다는 것은 바로 그들의 최대 이점이었다. 비록 절반이라고는 하지만 그들 '던필'은 인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낮밤 모두를 귀족과 싸울 수 있는 것이었다. 

 

- 그렇지만 기본적 생리의 요구를 거부하는 이상 햇빛 아래에서의 행동이 '던필'의 몸 상태를 분명히 저해시킨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생체리듬 곡선은 심야를 기점으로 점점 떨어져 정오가 되면 최저 수준에 도달했다. 피부가 햇빛에 타들어가 바람이 불 때마다 세포 하나하나가 바늘에 찔리는 것처럼 격심한 고통에 빠지는 것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화상을 입어 물집까지 생기는 경우도 있었다.
생체리듬 저하에 의한 이들의 권태감, 구토감, 갈증 등은 햇빛 아래에서 약간만 움직여도 나타날 수 있는 피로의 증세였다. 그러므로 가차 없는 한낮의 공격에도 견딜 수 있는 '던필'의 수는 거의 전체의 1퍼센트에도 미치지 않았다.

"근데 당신은 너무 멀쩡하군요. 시시해."

 

- D의 눈이 약간 붉은 기운을 띠었다. 농후한 피의 냄새가 그의 후각을 자극한 것이다.  

 

- 청년들 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D는 크오레에게 다가가 몸을 낮추며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난 D라고 한다. 무슨 일이 있었지?"

 

- "옛날 그 성에서 뭘 봤지?"
주위의 처참한 상황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D의 목소리였다. 참극의 범인이 누구인지도 묻지 않았다.
D의 왼손은 과연 미친 사람의 정신까지 읽어낼 수 있을까? 종잡을 수 없는 크오레의 표정에 하나의 의지 같은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 "드디어 뭔가가 씌었군."
D는 혼자 중얼거리며 남자들의 발 부근을 훑어보았다. 그들의 부츠 바닥부터 뻗어있는 가늘고 긴 그림자는 분명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몸에 털이 없는 유충과 같은 몸체에 바늘처럼 가느다란 손발을 가진 징그러운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야수였다. 

 

- 사육되고 있던 악귀 야수 한 마리가 도망을 가 공장 근처에 숨어 있었던 것일까? 귀족들이 마구 뿌린 인공 짐승 중의 하나인 이 요물은 예외적으로 우호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 많았다. 그러나 핵전쟁 이전의 고대 문명기에 존재하고 있었던 고블린, 포키, 임프를 모방한 종류들은 그 잔혹함이 근경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도 남았다. 포키의 일종인 레드 캡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손도끼로 여행자의 머리를 베는 등 이름 그대로 지나가는 자의 모자를 빨갛게 물들였다. 빈사 상태의 인간을 지배하여 조작하는 능력을 가진 요물은 그 숫자가 매우 드물었다. 그러나 힘들어도 잘만 길들이면 외뿔소를 광대한 토지를 개간하는 데 유용하게 써먹을 수도 있고, 우라늄 개량 닭을 이용하면 삼일에 하나씩 얻던 알을 하루에 세 개씩 얻을 수 있었기에 가난한 근경 마을에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것들을 사육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의식을 차릴 수 없는 피투성이 남자들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들 중에서도 가장 흉폭한 종족의 하나였던 것이다.

 

- D는 크오레를 한번 쳐다보고는 곧바로 발길을 돌려 벽의 구멍 쪽으로 향했다.
"뭐야, 질문을 계속하지 않는 거야? 치안관과 실랑이를 벌이는 것을 두려워하면 진실은 영원히 밝힐 수 없는 거야."
어딘가에서 야유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지만, 여느 때와 다름없이 D는 아침 햇살 속으로 사라졌다.

- 마이어 교사는 앞에 놓인 아주 낡은 원자력 스토브에 손을 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서 갑자기 심각한 눈빛과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자신의 맡은 바를 잊어서는 안 돼. 넌 마을의 희망이야. 겨울이 지나면 이 마을을 떠나야 한다. 우리 모두가 너의 미래에 희망을 걸고 있어." 
한결같은 그 목소리의 울림이 리나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예."
"그럼 시험 성적은 문제없을 것이라 보고, '수도'의 학원에서 뭘 배울 건지는 정한 거지?"
마이어 교사의 어조가 약간은 바뀌었다. 교사는 어떤 대답이 나올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으며, 그가 원하는 것 역시 다름 아닌 바로 그 대답이었다. 그의 말투가 바로 그런 심정을 말해주고 있었다. 리나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 "무슨 일이야?"
달려온 소녀의 볼이 붉게 물들어 있었고, 눈동자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이 리나에게 어떤 느낌을 전해 주었다. 마이어 교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손님이 오셨어요. 저, 아주... 대단히 멋진 분..."

"...?"
잠시 동안 눈썹을 찡그리며 영문을 몰라하던 마이어 교사는 이윽고 손님을 들여보내라고 말했다. 그리고 리나 쪽을 돌아보았다.
"그럼, 조심해서 돌아가. 뭐 해?"
"아, 아니에요. 저, 오늘은 날씨가 너무 좋은 것 같아요."
소녀는 햇빛 반사용 페인트를 칠한 창가에 서서, 어떻게든 이 방에 남아 있을 궁리를 하고 있었다.

 

- 문턱이 낮은 입구 쪽에서 몸을 구부리며 키가 큰 그림자가 들어왔다.
'오' 하고 감탄의 소리가 나오는 것을 마이어는 교사의 체면상 간신히 목 안으로 밀어 넣었다. 마이어 교사는 이제야 리나의 수상한 행동의 원인과 남아 있으려는 그녀의 속셈을 알 수 있었다.

 

- 마이어 교사는 문 입구에 멍하니 서 있는 헤르나를 돌려보내고 리나에게 손님과 아는 사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녀의 집에 신세를 지고 있지."
여학생을 맡고 있는 교사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환영하고 싶지 않은 방문자가 벽 쪽으로 서며 말을 했다.
"난 D. 흡혈귀 헌터다. 이렇게 되면 용무가 뭔지 알 것 같은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이어의 따뜻하고 지적인 얼굴이 얼어붙었다. 마치 오랫동안 가슴속에 묻어 둔 금단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파견된 사자(使者)를 대하는 듯한 눈으로 D를 쳐다보며, 그는 상대에게 의자를 권했다.
"됐어."
D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것은 분명 매우 정 떨어지는 말이었지만, 결코 불쾌한 투는 아니었다. 

 

- "한 가지 구경할 게 있어."
비로소 위치를 바꾸며 D가 말했다. 그는 크고 둥근 책상으로 다가가 필통에서 펜을 집어 들었다. 옆에 있는 재생 메모지도 한 장 찢었다.
"뭡니까?"
"나도 여기에는 약한 사람이야."
D는 무표정한 얼굴로 재빠르게 펜을 두 번 움직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뻣뻣한 재생용지를 교사의 눈앞에 들이댔다.

 

- "이것이... 무슨?"
의아한 표정으로 교사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냐. 실례했어."
크게 십자를 그린 메모지를 D는 꼬깃꼬깃 접어 휴지통에 버렸다.

 

- "한 가지 더. 크오레는 저능아처럼 되어버렸더군. 자네에겐 다른 이상한 점이 없나?"
마이어 교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 학생들에게 물어보시는 게 더 안심이 되지 않을까요? 스스로는 정상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솔직히 말씀드려 지금까지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제가 현장에 없었다는 건 사실 증명할 수가 없습니다. 전 혼자 살고 있고, 또 어쩌면 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집을 빠져나가 범행을 마친 뒤 모든 증거를 인멸한 다음 평범한 교사로 돌아와 침대 위에서 아침을 맞이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햇빛 속을 걸어 다니는 귀족이 존재한다는 가정하에서요. 아마도 귀족의 희생자는 가해자와 동등한 생리적 특성을 갖게 되죠?"
D는 고개를 끄덕였다.

 

- 흡혈귀에게 물린 인간이 밤의 마귀로 변모할 때, 그 귀족적 특징을 상당 부분 물려받고 재생되는 것은 일반상식화 되어 있었다. 늑대로 변신하는 능력을 가진 귀족의 희생자는 스스로의 의사에 의해 네발짐승으로 변신했고, 특정한 짐승들을 부릴 수 있는 귀족의 희생자들은 자기 나름의 사육물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었다. 
단, 막 태어난 아기가 바로 부모 그 자체가 될 수 없듯이 귀족의 유전적 능력에 의해 차이는 있었다. 대개 변신 시간은 주인보다 짧았으며 변신을 했을 때의 육체적 특성, 즉 속도나 근력, 그리고 재생능력 등도 몇 단계 떨어졌다. 귀족 아닌 귀족은 역시 모조품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 그러나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바로 귀족 비슷한 그 희생자들을 잡아내어 귀족의 능력을 거의 완벽하게 판별해 내는 것이었다. 백오십 년 전, 근경순회사였던 써머스 몬태규는 수백 개의 예를 들어 귀족의 희생자를 분류하여 그들 주인의 능력에 관한 정밀한 통계를 남겼으며, 귀족 연구가인 T 피셔는 '희생자에 따른 귀족 수준 식별법과 방어책'을 만들었다. 이것은 수도의 혁명 행정청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긴 하였지만 근경 사람들에게는 한층 더 폭넓게 읽혀지고 있었다.


- 그런데 이 작은 겨울촌을 습격한 귀족의 위협은 그러한 상식을 벗어난 새로운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아니, 그것은 귀족과 관련된 가장 기본적인 개념과, 또 그것이 가져다주는 안도감으로 그나마 지탱할 수 있었던 인간의 생활을 밑바닥부터 뒤집어엎은 일대 사건이었던 것이었다. 바로 귀족이 대낮에 걸어 다닐 수도 있다는 그 사실이...!

 

- "뭐지? 청소가 끝났으면 어서 돌아가지 않고."
마이어 교사가 의아한 투로 묻는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 소녀는 테이블 위에 컵을 내려놓았다.
D를 향한 소녀의 옆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손님을 접대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니지만 왜 이렇게 술의 양이 다르지? 이 학교용 술은 어차피 내가 지불하게 되어 있는 건데..."
마이어 교사가 다소 불만족스럽다는 듯 얘기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교사용 술은 D의 것에 비해 삼분의 일에도 못 미쳤기 때문이었다.
겨울철에 영하 십 도가 표준 기온인 이곳 마을에서는 학교에서의 음주를 금기사항으로 보지 않았다.
"이제 이, 이것밖에 남지 않아서..."
여학생은 D 쪽을 힐끗힐끗 옆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저, 저, 선생님은 술을 좋아하셔서 몰래 저희들 것까지 드시잖아요. 그리고 손님이라고 해서 자주 오시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저희들끼리 의논을 한 끝에 제가 당첨되어 이렇게... 아, 정말 너무 멋진 분이신 것 같아요."

 

- "바보 같은 소리들 이제 그만하고 어서 돌아가!"
쭉 냉정하고 침착했던 마이어 교사 역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 역시 아직은 젊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시 한번 정중하게 소녀들에게 나가라고 말했다. D에게 싸인이라도 받고 싶다며 항의하는 소녀들의 코앞에서 그는 냉정하게 문을 닫았다.
그러나 '휴' 하고 땀을 닦으며 다시 자리로 되돌아온 교사의 얼굴은 다시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흉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말았군요. 불쾌하셨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신기하게도 D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D가 좀처럼 구경하기 힘든 자신의 의사표현을 한 것이다. 게다가 온몸에서 발산하던 '던필' 특유의 혼기조차 조금씩 엷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마이어 교사의 어조가 친근하게 바뀐 것도 D의 그런 모습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 "이 마을은 한창때인 소녀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곳이에요."
"이곳뿐만이 아냐. 작은 마을은 모두가 그래. 게다가 이제 봄도 다가오니 마음이 더욱 들뜨지."
창 밖에 펼쳐진 파란 하늘과 하얀 봉우리들을 바라보며 D가 조용히 말했다.
"봄이 와도 학생들은 마을을 떠날 수가 없어요."
D는 비로소 이 젊은 교사가 어두운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근경의 마을들은 모두가 작고 가난했다. 그래서 아무리 적은 인구의 이동이라도 마을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지극히 작물을 키우기가 어려운 땅에서 겨우 먹을 것을 구해 생활하는 동시에, 호시탐탐 노리는 야수들의 굶주린 눈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린아이의 힘까지도 필요로 했던 것이었다. 근경 개척을 가장 큰 과제로 삼고 있는 '수도'의 혁명 정부가 허락하기 전에는 지구와 마을 단위로 인구가 이동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근경의 겨울 마을은 눈 이외에도 보이지 않는 벽에 의해 갇혀 있었던 것이었다. 

 

- 교사의 이동도 좀처럼 허락되지 않아 미래에 대한 절망과 현실의 추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술이나 환각제에 빠져드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가운데 그래도 그는 나은 편에 속했다. 

 

- "리나만큼은 내버려 둬 주십시오."
"그 아이도 돌아온 아이 중의 한 명이다."
"그녀는 마을을 떠나갈 단 한 명의 유일한 아이입니다."
D의 눈썹이 약간 움직였다. 이것 또한 드문 일이었다. 그의 시선에 빨려들 듯 교사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정부가 한 해에 한 명씩 근경지구 마을에서 가장 우수한 아이를 선발하여 '수도'의 교육기관에서 학습하게 하는 시스템은 잘 알고 계시겠지요? 올해는 우리 마을이 선택되어졌습니다. 아마 두 번 다시 기회는 없을 것입니다. 마을은 축제 분위기가 되었고, 몇 개월에 걸친 능력검사 끝에 만장일치로 리나가 결정되었습니다." 

 

- "봄과 여름에 잠깐 태양빛을 보는 것을 제외하곤 일 년의 반을 어둡고 긴 겨울 속에 갇혀 지내던 마을의 한 소녀가 별 사이를 왕래한다는 것이 저희들에겐 얼마만큼 자랑스럽고 힘이 나는 일인지 아마 당신은 모르실 겁니다."
"선발된 아이가 나름대로의 업적을 올리게 되면 마을에도 뭔가 돌아오는 것이 있겠지. 난 그것밖에 몰라."
D는 이렇게 말하며 마이어 교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 그의 두 다리가 얼어붙었다.
신경을 때리는 처참한 혼기가 그의 세포 하나하나에 원초적인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그의 의식은 앞으로 나가라고 명령하고 있었지만 몸이 반항하는 것이었다. 본래부터 인간은 몸과 영혼이 일치하는 생물 따위가 아니었다.

 

- D는 이미 장검을 뽑고 있었다. 칼의 손잡이 끝이 오른발 끝에 닿을 정도로 낮게 구부린 그의 자세는 적을 향한 대비 태세 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부자연스러웠지만, 그만큼 처절해 보였다. 

 

- D 역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것은 엄숙한 냉기로 새겨진 수려한 매와 같은 모습이었다.
교사가 본 것은 단지 은빛의 섬광뿐이었다. 
순간 공간이 흔들리는 듯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 D는 여자의 옆에 무릎을 대고 맥을 짚어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은 무언가가 도망가버린 쪽을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검도 어느새 칼집 속에 도로 들어가 있었다. 교사는 또 다른 별종의 생물을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남자인 자신조차 빠져버릴 것 같은 아름다운 이 젊은이가 방금 전의 그 흉악한 기운보다도 더 두렵게 여겨졌다. 

- D만이 현장에 남아 있었다. 전원이 사라진 뒤 그는 자신의 왼편 손바닥을 향해 말을 걸었다. 
"상태는 어때?"
"좋을 리가 없지."
지칠 대로 지친 목소리가 말을 했다.
"정신 에너지를 그렇게 마구 쓰면 사오 일 동안은 회복할 수 없어. 돌아온 세 명 모두의 마음을 말하도록 하는 건 대단히 무리야. 잠재의식은커녕 표면에도 지렁이 미치지 않아. 알아?"

"그건 곤란하지."
"그렇지 않아도 매일같이 혹사시키는 주제에... 오늘내일 중에 반드시 식사나 시켜줘."
"지금은 어때? 그 때문에 남았는데."
"음, 우선은 한숨 자야겠어."
"좋아."

 

- 이상한 대화를 마치고 D는 참극의 현장을 떠났다. 겨울의 태양은 아직 높게 떠 있었다. D는 그늘을 택해 걸었다. 그의 모습에서 초췌한 기운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은 과연 놀랄 만한 일이었다. 날씨와는 상관없이 흡혈귀의 피가 섞인 자에게는, 육체적인 생리가 낮에는 휴식을 요구했다. 의식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여덟 시간이 한도였는데 그것도 햇빛이 없는 장소에 한해서였다. 그런데 만약 햇빛 아래를 걸어 다닌다거나 그와 비슷한 일을 하게 되면 거의 네 시간 만에 반죽음 상태에 이르게 되어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 철야를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일이었다. 

- "수도에 간다고?"
"앗, 알고 계셨군요. 기뻐해주실 건가요?"
똑바로 바라보는 빛나는 검은 눈동자에게 D는 약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유별나군. 왜 그런 걸 내게 묻는 거지?"
"저도 그 이유는 모르겠는걸요?"
"...?"
"훗, 거짓말이에요."
리나는 궁금해하는 남동생에게 마술의 비밀을 밝힌 누나와 같은 어조로 말했다.
D는 아무 말이 없었다. 모든 흡혈귀족을 공포에 떨게 하는 전사가 불과 십칠 세 소녀의 페이스에 완전히 말려든 것이었다.

"왜 웃질 않죠? 웃으면 손해라도 보게 되나요?"
상대방을 생각해 주는 것 같은 이 질문에 D는 또 한 번 궁지에 몰렸다. 아무래도 이 소녀를 상대하기에 그는 역부족인 것 같았다.
"그래도 운 적은 있죠? 그리고 괴로운 일도 많이 있었겠죠? 전 다 알아요."
"호오...?"
그는 겨우 이 한마디만을 말할 수 있었다.

- "귀족의 피를 이어받는다는 건 무척 힘든 일이네요. 당신 옆에는 작은 새 한 마리조차 쉽게 접근하지도 못하고, 또 남들처럼 같이 걷고 있는데도 눈 위의 발자국은 제 것 삼분의 일에도 못 미치잖아요. 게다가 그 폐허에서..."
"폐허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차갑게 빛나는 눈동자를 보고 리나는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눈앞의 청년이 온몸을 긴장시킬 만큼 아름다운 남자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 "처음 봤을 땐 당신이 너무 무서웠지만, 당신이 하는 말을 들었을 때 그런 마음이 완전히 사라졌어요. 사라져 가는 것을 멈추게 할 순 없지만, 잃어버린 것에 대한 예의 정도는 갖추는 게 어떠냐는 바로 그 말이요. 그때의 당신은 매우 슬퍼 보였어요." 
이 소녀는 남들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만의 소리를 과연 들을 수 있었단 말인가?
"기억력과 귀가 좋은 모양이군."
D는 담담하게 대답하며 마을 입구로 이어지는 길가 쪽을 바라보았다.
"이제 슬슬 가지 않으면 곧 해가 저물어. 좀 전의 그 여자를 찾아 요괴가 움직일 시기야."

"저기요."
리나가 약간은 색다른 목소리로 목에 힘을 주며 D를 팔꿈치로 쿡쿡 찔렀다.
"5일 안에 일을 끝내고 저와 함께 이 마을을 떠나지 않겠어요? 앞으론 다 잘 될 거예요."
"그럴지도 모르지. 어서 타." 
두 사람은 다시 마차에 타고 D가 말고삐를 잡았다.

 

- "아무래도 당신의 그 무서운 얼굴은 어쩔 수 없나 봐요. 제가 한 가지 예언해 드릴게요."
"예언?" 
D의 눈동자가 살짝 반짝이는 것을 그녀는 보았을까? 리나는 일부러 눈을 감으며 공기 냄새라도 맡는 것처럼 코를 움직였다.
"제 예감은 잘 맞아요. 음... 앗, 이제 나왔어요. 당신은 반드시 웃으면서 이 마을을 떠나게 될 거예요."
소녀는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옆에 앉아 있는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 "이제 방문자가 올 시간이다. 모두 옆방으로 가 있어."
D의 말에 다른 사람들은 일어섰지만 경찰단원 세 명은 불쾌한 얼굴로 딴청을 부렸다. 그러나 D가 차가운 시선을 보내자 눈을 맞추기도 전에 등줄기가 얼어붙었는지 그들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두 사람은 우리가 책임지고 지키겠다. 근데 당신은 혼자서 괜찮겠나?"
치안관의 말은 만에 하나 D가 쓰러지면 저주받은 그것이 카이저의 아내를 습격하는 것은 물론이고 또 다른 희생자가 생겨날 것을 염려한 것이었다.

 

- 사실 카이저 부인은 이제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었다. 그리고 흡혈귀 희생자에 대한 처벌은 마을마다 달랐지만, 이곳은 마을에서 바로 즉시 추방시켜 그들의 운명에 맡겼다. 옆 마을로 외출한 그녀의 남편이 돌아오더라도 규칙에 따를 수밖에 없는 이상, 치안관이 지탄받을 염려는 없었다. 그런데 이 새로운 흡혈귀 헌터가 요구한 것은 부인을 미끼로 요괴를 불러들인다는 책략이었다. 게다가 경찰단원 세 명을 같은 방에는 넣지 말고 가까이 있게 하라는 것이었다.

 

- "한번 맡겨둬 봐, 치안관, 내가 부른 사람이니 틀림없을 게야."

촌장이 치안관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치안관은 '이전의 헌터도 당신이 불렀어.' 하며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치안관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모두를 서둘러 옆방으로 가게 했다.

 

- 사람들이 사라지자 곧 D는 오른손 주먹을 입에 대고 침대 사이드 테이블 위의 램프를 겨냥했다. 주먹을 통해 가볍게 입김을 불자 불이 꺼지며 순식간에 방은 어둠의 지배에 들어갔다.  

어두운 구름이 달을 가리고 있었고, 나뭇가지가 창가에서 흔들리는 기분 나쁜 밤이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은 물론 카이저 부인이었다. 발견 당시부터 그랬지만 해질 무렵에는 아예 피부가 본래의 색을 잃어버렸고 지금은 창백한 빛을 띠고 있는 것이 이상한 점이었다. 한 올의 빛도 통과하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D는 여자의 얼굴 위를 달리고 있는 파란 혈관까지 볼 수 있었다. 

 

- 그는 문득 창 쪽을 향했다.
쉴 새 없이 문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D는 다른 어떤 소리라도 들은 것일까?
다시 그의 시선이 침대로 돌아왔다.
순간 여자의 목줄기에 나 있는 귀족의 입맞춤 흔적에서 두 개의 붉은 선이 주르르 하고 흐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방 주위에 긴장의 기운이 퍼졌다.

- 갑자기 나타난 잿빛 그림자가 여자를 꽉 껴안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온몸에 어두운 천을 두른 괴이한 인물이었다. 
꺼칠꺼칠한 머플러로 가린 얼굴 속에서 핏빛을 한 눈이 D를 노려보고 있었다. 여자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림자는 백랍 같은 얼굴에 별세계의 쾌락을 느낀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크게 벌린 여자의 가슴을 자신의 가슴으로 짓누르고 있었다. 또한 그것은 살아 있는 여자의 미끈한 대퇴부를 자신의 다리에 칭칭 동여매고 있기까지 했다. 
마치 음탕한 그림 같은 광경이었다.
괴이한 그림자가 징그러운 입술 사이로 두 개의 이를 드러내며 여자의 목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빨고 있는 것을 본 순간, D의 오른손이 흰 빛을 발산했다. 
다섯 개의 횐 나무바늘이 벽에 박히는 소리가 났다. 그림자는 웃고 있었다. 여자를 안고 있는 자세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 괴인은 몸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이동하며 D가 던진 바늘의 방향을 바꾸어놓은 것이다.

- D가 바닥을 차며 뛰어올랐다.
하얀 여체(女體)가 D를 향해 날아왔다. 비록 몇백 분의 일초이긴 했지만, 그 여체를 피하느라고 D의 공격이 멈칫거렸다. 은빛이 잿빛 망토의 소매를 찢으며 그림자와 D는 서로 그 위치를 바꾸었다. 
방 안에는 처참한 기운이 가득했다.
처음 만나는 강적이었다. 전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 번째가 속력, 그리고 그다음이 힘이었다. 적어도 그림자의 속력은 D와 필적할 만한 것이었다. 

 

- "적어도 이것으로 저와 리나의 누명은 벗겨진 셈이군요."
교사는 이렇게 말한 다음 크오레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경찰단원 셋이 그쪽으로 걸어갔다. 이윽고 한바탕 큰일을 치른 방 안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중얼거리는 D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 겨우 시작이군."

 

- 완만한 언덕의 능선은 벌써 초록으로 물들어 있었다. 지나가는 바람에 코트 소맷자락을 날리며 그 위를 걷고 있는 미청년의 모습을 푸른 하늘이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한 폭의 풍경화 같은 광경이었다. 
언덕 중턱에서 D는 발을 멈추었다.
마을 쪽에서 마차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것은 리나였다. D가 자신을 알아차렸다고 여긴 그녀는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D는 당연히 손을 흔드는 답례 따위는 하지 않았지만, 마차를 멈춘 리나가 파란 롱스커트를 걷어올리고 언덕을 올라올 때까지 기다려 준 것만으로도 놀라운 변화였다.

 

- 그녀는 이 미청년과 함께 있으면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지만 즐거웠다. 아니, 재미있었다. 그의 존재감이라고 할 수 있는 혼기는 무서웠지만, 익숙해지면 실로 흥미진진한 젊은이였던 것이다. 그것은 근경의 남자들이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움츠러드는 헌터의 실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리나는 D를 자신과 같은 나이 또래의 남자로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불노불사(不老死)하는 귀족의 피가 섞인 이 흡혈귀 헌터를 과연 몇 살이라고 하면 좋을까?

"기다린 게 아냐. 돌아가라고 말할 작정이었어. 어서 돌아가." 

D가 냉정하게 말했다.
"싫어요. 마을에 있는 것보다 당신과 있는 편이 절대적으로 안전한 걸요, 뭐."  

리나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맘대로 해."

 

- 참상이 도대체 언제 누구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는지 리나도 물론 모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어두운 역사의 베일에 가려진 채 인간들에게는 오로지 미지의 공포감만을 줄 뿐이었다. 

 

- 그중에서도 이 폐허만큼은 이상했다. 폐허에 대해 무엇 하나 알고 있는 사실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근경지구에도 수많은 성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모두가 인간들을 통치할 목적으로 지어졌고, 그곳에 사는 '귀족'들은 인간 위에 군림하는 것이 통상이었다. 따라서 어떤 형식으로든 그 존재나 거주자에 대한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유포되어 전승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곳에는 그것이 없었다. 눈과 어둠으로 둘러싸인 골짜기에서 얼마나 고되게 살아왔던지, 마을 사람들은 애써 그것에 대해선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 “마음에 드는 그림이라도 있나요?"
리나가 말을 걸며 그에게 다가갔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 한 번 하지 않던 D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그제서야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앉았다.
"아, 당신은 이곳을 힘들이지 않고 올라올 수 있었지. 자주 오나, 이곳엔?"
"네. 그래도 이 성에 한해서만큼은 마을에서 제가 제일 많이 알고 있을 걸요? 당신이 이곳에 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같이 그림 감상이나 하는 건 어때요?"
D는 잠시 동안 악의 없이 웃고 있는 소녀의 얼굴을 바라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벽면을 장식한 거대한 그림들을 한 장 한 장 바라보며 지나갔다.

-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할 정도인 이 그림들을 보고 있는 동안, 리나는 처음 이것과 대면했을 때의 감동이 뜨겁게 가슴을 적셔오는 것을 느꼈다. 
반투명한 날개 같은 것을 달고 달빛이 내려앉은 숲 그늘을 날아가는 연인.
안개가 짙게 깔린 호숫가에서 구슬을 쫓아가며 웃고 있는 달처럼 빛나는 하얀 귀부인.
어두운 구름이 휘감고 있는 하늘에 전광(光) 빛을 받으며 기이한 생물이 끄는 마차를 몰고 있는 검은 귀족.
바닷속에서 탄생한 진주 비너스, 그림자와 빛, 빛과 그림자의 교향곡...


- "이것들 모두가 귀족이 그린 거겠죠?”
리나는 자신이 노래를 부르듯 말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무대는 모두가 어둠과 암흑, 달빛과 안개인데 왜 이다지도 아름답게 보이는 걸까? 마을에서 단 한 발만 나가도 무서워서 꼼짝할 수 없는 그런 세계를 이 사람들은 어쩌면 이렇게 부드러운 환상의 세계처럼 그릴 수 있었을까? 귀족들의 밤은 우리의 밤과 다른 것일까요?"
D는 말없이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순수함의 베일 위에 지적 호기심을 가득 담고 그 큰 눈동자를 반짝이고 있었다. 바로 그녀는 '수도'에서 미래를 공부할 십칠 세의 소녀였던 것이다.  
 

- "우린 어릴 때부터 귀족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듣고 커왔어요. 문명이라는 건 그것을 만든 자에게 어울리는 것만 만들어낸대요. 그래서 사악한 귀족은 멸망하게 되었다더군요. 그런데도 전 이 그림을 보고 가슴이 설레었어요. 처음 보았을 때, 이런 것을 그릴 수 있다면 귀족이 되어도 좋다고까지 생각했어요. 그 후로 전 혼자서 몰래 공부했어요. 저와 함께 행방불명이 되었던 마이어 선생님도 귀족에게 흥미를 가지고 계셔서 여러 가지 문헌을 가지고 계셨어요. 요즘엔 수학 공부만 하라며 잘 빌려주지도 않지만... 전 몇 권씩이나 빌렸었어요. 대개는 인간이 귀족에 대해서 기록한 것들뿐이어서 보는 시각이 마을 사람들과 똑같았어요. 그렇지만 그중에 한 권은 귀족의 역사에 대해 쓴 책이 있었어요. 음, 분명히..."
"... J 셍스타의 <귀족의 새벽>이지. 출판과 동시에 금서로 지정되어 저자는 근경으로 추방되었고..."
"와! 잘 알고 있네요. 바로 그거예요!"
떠돌아다니는 헌터가 가진 의외의 지식에 놀라기보다도 이야기의 맥이 끊어지지 않게 된 것에 크게 기뻐하며 리나는 요란하게 맞장구쳤다.
"확실히 귀족이 남긴 그림이나 홀로그래피 영상, 그리고 입체음악들을 연구해 보면 그들 문명의 장점이 잘 살아나 있어요. 전 책이 낡을 때까지 읽었어요. 그리고 또 하나의 세계인 밤의 문명, 전 귀족에 대한 것을 공부하고 싶었어요. 그들이 가진 지식과 미학(美學)의 세계를 말이에요. 그래서..."
여기서 소녀는 자신의 현실로 돌아온 듯 말을 멈추고 D를 향해 돌아섰다.
"수도에서 전 수학을 공부하게 되어 있지만, 사실은 귀족의 역사를 배우고 싶어요."
잠시 동안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응시한 채 어둠의 중압감을 맛보고 있었다.

 

- "훗, 농담이에요. '수도'에서 온 심사관 앞에서 공부하고 싶은 많은 것들 중에 가장 배우고 싶은 한 가지를 확실히 말해야만 해요. 수학, 물리학, 미술 등등... 그리고 체조 정도까지도 괜찮겠지만 귀족의 역사 같은 걸 말하면..."
그것은 리나의 미래가 영원히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공포의 중압감과 함께 피로 물들여진 학대받은 자의 역사는 학대한 자의 존재를 용서하려 하지 않았다.

 

- "그러나 '수도'의 방침도 서서히 바뀌고 있다고 들었어. 교육담당 장관은 귀족의 유산에 관심이 있는 남자라지 아마?"

D가 말문을 열었다.

 

- 원형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잔혹하리만큼 심하게 그림을 망쳐버린 사람의 의도가 느껴지는 파괴행위였다.
"여행을 하는 동안 몇 번인가 본 적이 있지. 몇만 개의 그림과 몇십만 개의 미술품 속에 가끔 이런 이상한 그림이 섞여 있었어. 어떤 것은 철저히 파괴되었고, 또 어떤 것은 불에 타버렸지. 그런 와중에 단 한 장의 복구된 그림이 있었어."
이 젊은이가 자신의 경험담을 얘기하는 것은 거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는 리나가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가르쳐주세요. 어떤 그림이었어요?"
"관에서 일어난 귀족들이 태양을 향해 손을 뻗치고 있는 것이었어."

 

- 그것은 전혀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리나는 '누가 그렸을까?' 하고 생각했다.
도대체 누가 그렸고, 누가 파괴시켰으며 또 누가 복구한 것일까? 이 눈앞의 그림도 그것들 중의 한 장일까? 귀족은 과연 우리들과 같은 인간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어느샌가 리나의 스커트 자락이 펄럭이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온 것이다.
"그런 말을 왜 하는 거죠, D?"
리나는 조용하게 물었다.
"당신은 제가 유별나다고 했지만 과연 당신은 어떨까요? 제가 뭘 묻든 답해주지 않겠지만 괜찮으시다면 한 가지만 들려주세요. 흡혈귀 헌터 아저씨! 당신은 절 처음 만났을 때도 여기서 그림을 보고 있었죠? 그리고 당신의 진심은 귀족을 미워하고 있는 것이 아니죠, 그렇죠?”
D는 등뒤의 소녀를 달랬다.

"예정 밖의 시간을 보내버렸군. 이제 본업으로 돌아가야지. 당신은 밖에서 기다려."

 

- "무슨 일이 생겨도 도와주지 않을 테야."
"아니에요. 당신은 꼭 도와주실 거예요. 전 당신의 조수니까요."
"이봐, 함부로 정하지 마."
놀랍게도 D는 당황해하고 있었다. 리나는 기적을 일으키는데 명수였다.
"우선 이곳 폐허에는 왜 오신 겁니까? 이유를 가르쳐 주십시오, 보스"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는 말했다. D가 한숨을 쉬었다. 또다시 소녀의 페이스에 말려드는 것 같았다.

"십 년 전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다."

"역시..."

 

- 숲에는 생명력이 넘쳤다. 잎이 떨어진 나무들도 태양빛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그것들이 베스 펜의 마음과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고 있었다.

작은 길에서 약간 떨어져 조금 더 가니 공기가 갑자기 축축해졌다. 아직은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은 이상하리만치 따뜻했다. 차가운 냉기는 전혀 없이 나무들의 표피도 청록색을 띠고 있었으며 또 보라색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의 색채를 띤 이끼나 곰팡이류가 들러붙어 있었다.

 

- 근경 마을에 있어서 귀중한 대용식인 이 이끼는 스테이크나 스프 잼 등 거의 모든 음식에 쓸 수 있었으며, 또 양지에 말려서 두면 육 개월에서 일 년은 끄떡없이 저장할 수가 있었다. 게다가 원심분리기를 사용하여 채집한 이것의 엑기스를 바르면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고, 야수의 독을 빼는 데도 한몫하기 때문에 여행자나 순회사에게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었다.   

 

- 그는 딸의 이름을 부르며 계속 달려갔다. 달리는 와중에 양쪽 허리에 매단 바구니의 뚜껑에 손을 가져다 대며 '그것'을 묶고 있던 끈을 풀었다. 바구니 속의 '그것'이 격심하게 움직이며 오른쪽 바구니 틈새로 낮고 흉폭한 신음 소리를 흘렸다. 갑자기 왼쪽 바구니 입구에서 보라색 불꽃이 새어 나왔다. 펜은 황급히 손을 뗐다. 이것은 아무리 익숙해졌다 하더라도 도무지 취급하기가 힘들었다. 왼손에 낀 비전도 장갑 끝이 타면서 파란 연기를 피워 올렸다. 

 

- 사육주와 함께 분노하며 잿빛 그림자를 노려보고 있는 '그것'은 땅을 밟고 있는 여덟 개의 다리 길이가 놀랍게도 3미터가 넘는 거대한 거미였으며, 또 하나는 보랏빛이 나는 구름이었다. 

- 펜의 직업을 알고 나면 누구든 그의 딸에게 손을 댄 것을 후회하게 되어 있었다. 길을 떠나는 자가 도중에 만나게 될 귀족들이 만들어낸 인공 요괴나 잔악무도한 도적들로부터 몸을 지켜야 하듯이, 인간이 그것들과 동등한 힘을 가진 생물체, 즉 보위(保衛) 야수 같은 것을 구입하는 일은 거의 반쯤 상식화되어 있었다. 경찰단장은 그 판매인 겸 조교사였던 것이다. 원래 이것들의 선조는 귀족이 만들어낸 요괴 야수였지만, 세대교체가 진행됨에 따라 신종, 기종(奇種)이 다수 발생하여 약 2천 년 전부터는 극히 드물긴 하지만 인간에게도 사육 가능한 것이 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들의 사육과 조교 방법은 어떤 종류의 음파와 주문을 사용한다는 것 외에 엄중하게 비밀로 부쳐져 있어 일반인들은 그 방법에 있어 짐작조차 불가능했다. 

- 펜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바로 '그것'들에게 공격을 명하는 질타였다.
이윽고 거미가 그 체형으로 봐서는 믿기 어려운 속도로 전진하였고, 빛을 발하는 구름은 공중으로 떠올랐다.

 

- 그곳은 거대한 실험실 같아 보였지만, 이렇게 불균형한 진리 탐구의 장은 아마 없을 것이다. 
복도와 마찬가지로 거대한 돌로 거의 십 미터 높이까지 쌓아 올려진 벽면과, 마루에 놓여져 있는 투박스런 목제 책상, 그리고 책상 위를 장식하고 있는 실험용 유리병과 유리그릇, 기이한 색을 띤 액체가 들어 있는 약병들...
이것들은 마치 중세시대의 실험실 그 자체였으며 요상한 기운들이 여기저기에서 느껴졌다. 게다가 푸른빛이 함께 섞여 있는 것이 뭐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고풍스런 기구들 사이에 단정하게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것은, 양전자(陽電子) 두뇌와 전기 애널라이저, 물질 변환장치와 같은 초과학 기술의 결정(結晶)이었다. 귀족들을 귀족스럽게 하고 있는 이율배반의 세계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 "여긴 무슨 연구소였던 것 같아요. D, 뭘 연구한 건지 알고 있어요?"
대답이 없어 뒤를 돌아보니 D는 가까이 있는 실험대의 앞에서 그 위를 빽빽하게 채운 실험용 유리병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곧 옆의 컴퓨터 조작 패널로 다가가 엄청난 수의 키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당신은 컴퓨터도..."
리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기가 울리며 방의 여기저기에서 기계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컴퓨터의 화면에 리나가 본 적도 없는 난해한 기호와 수식, 그리고 괴상망측한 도형 같은 것이 떠올랐다. D는 약 몇 초 동안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곧 스위치를 껐다. 그러고 나서 리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잽싸게 넓은 방을 가로질러 나가기 시작했다.

 

- 바닥에 떨어진 액체들끼리 서로 섞여 그 접촉면에서 안개도 연기도 아닌 알 수 없는 색깔이 벽을 타고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아니, 믿기 어렵지만 그 연기 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치 원망하듯이 그리고 마치 저주하듯이... 

 

- 그녀는 연기와 같은 색으로 변하며 액화되는 그것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이에 D가 팔을 잡아 그녀를 가볍게 일으켜 세웠다.
"번개와 에테르가 합쳐져 만들어진 인조생명이야."
"왜, 왜 저런 것이 있는 거예요? 여긴 도대체 뭘..."
"어서 와, 이 정도로 놀란다면 돌아가는 편이 나아.... 그것도 이미 늦긴 했지만." 

 

- "마을로 돌아오자마자 우린 부모님들한테서 떨어져 수용소엘 들어가게 됐어요. 일주일 내내 치안관과 자치경찰단에게 조사를 받았어요. 약, 최면술, 그래도 소용이 없자 우릴 발가벗겨 놓고 바늘로 찔렀어요. 이 마을 특유의 귀족 발견법이었죠. 유두와 엉덩이에 은바늘을 찔러 넣어 그때 나오는 피를 보고 귀족의 동료인지 어떤지를 점치는 거였어요."

"..."

"대개 여자의 경우는 경찰단의 부인들이 하지만 절 조사한 것은 남자들이었어요. 바늘을 넣고 뺄 때마다 사람이 바뀌었어요. 물레방앗간의 가스톤 아저씨도 있었고, 도살장집 아이도 그리고 촌장님도 있었어요. 그분이 절 양녀로 삼은 건 아마 죄책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죠."

 

- 갑자기 리나는 빙그레 웃으며 D의 아름다운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싫어요. 그런 무서운 얼굴 하지 마세요. 전 뭐든지 잘 잊어버려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하지만 당신 얼굴을 보고 있으면 원망스럽고 괴로운 일들을 떠올리게 돼요. 가끔씩은 웃어봐요."
"이건 천성이야."
"앗, 처음으로 자기 얘길 하네요. 후후, 절 동정하세요? 당신답지 않군요."
"너에겐 졌어."
D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던 푸른빛이 쉬익하고 사라졌다.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할 여유도 없이 리나는 등뒤에서 뻗어온 강한 힘에 끌려 벽 쪽으로 당겨졌다.

"D!"

 

- "크오레가 도망쳤어."
"난 분명히 그 아일 지키라고 부탁했는데?"
D의 시선에서 치안관은 눈을 떼며 말했다.
"경찰단원 한 명이 조는 틈을 타서 그만... 어쩔 수 없는 게 아닌가. 인간이니까 실수도 할 수 있는 거야."
"귀족에게 습격받을 때 그렇게 말하면 귀족이 겁내서 도망을 가겠군."
D의 호된 비난에 치안관은 침묵했다.

 

- 아무 말 없이 D는 말머리를 돌렸다. 마을의 지리는 어제 촌장에게서 받은 지도를 한 번 쳐다본 것만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어서 돌아가. 넌 '수도'에 가지 않으면 안 돼."
그곳을 떠나기 직전 우뚝 서 있는 리나를 향해 D가 말했다.
깜짝 놀라며 소녀가 얼굴을 든 순간, 벌써 D는 바람과 햇볕 사이를 가르며 달리고 있었다.

 

- 치안관은 그를 뒤따르며 놀람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계속 D와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D가 타고 있는 말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직업적인 성격이긴 하지만 다른 지방 사람들의 말을 보게 되면 바로 눈이 가곤 했다. 말의 성능을 머릿속에 주입시켜 놓으면 상대방을 뒤쫓을 때 작전을 세우기가 쉬웠던 것이다. D의 말은 어느 마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일반형이었다. 튠냅이라 하더라도 치안관의 카스텀 그레이드에 비해 속도로 3킬로미터, 지구력으로는 20퍼센트 정도가 떨어졌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말은 그와의 간격을 점점 더 벌리며 질주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자는 마법이라도 사용하고 있는 건가? '던필'이란 건 이미 알고 있지만...' 
치안관은 드디어 소문으로만 듣던 흡혈귀 헌터의 기이한 실력을 몸소 느끼기 시작하였다.

- 치안관을 훨씬 뒤에 떨어뜨려 놓고 D는 남쪽 숲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그는 말을 멈추며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오른쪽에 서있는 나무를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바람이 전하는 말소리라도 들은 것일까? 아니면 주위를 메우고 있는 공기의 기운이라도 읽은 것일까? 

- "왜 그 작자와 함께 있으려고 했지? 그잔 앞장서서 자신을 학대한 자인데도 불구하고 말야. ...아무래도 자넨 뭔가 눈치챈 것 같은데?"

"그 아인 진정으로 그자와 함께 있고 싶어 했어."
신기하게도 D는 야유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엔 자네가 내 속마음을 한번 읽어 봐. 아니 그보다 자네의 몸 상태가 제대로 돌아왔다면 날 좀 도와줘야겠는데?"
"이봐, 이봐, 아직 완치되려면 멀었어. 이삼일 더 천천히 쉬어야 해. 그때가 되면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말해주지." 

"오! 벌써 그때가 기다려지는군."
갑자기 D는 발을 멈추며 동시에 말도 멈추었다. 기이하게도 그곳은 펜의 딸이 잿빛 그림자에게 습격당한 지점이었다.


- D는 발밑의 땅바닥을 쳐다보았다.
각양각색의 균류가 이미 전투의 흔적을 감춰 덮고 있었다. 그런데 균류의 생장이 이상하게도 빨랐다.
그것을 지켜보는 D의 눈이 서서히 붉은빛을 발하고 있었다. 점점 독기를 머금고 올라오는 습기가 주위를 에워싸며 아름다운 그의 얼굴은 흡혈귀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진홍빛을 한 그의 눈이 땅의 한 곳에서 정지했다. D는 허리벨트에 매단 주머니에서 작은 손가락만 한 크기의 투명한 원형통을 꺼내며 땅 위에 무릎을 댔다. 
흡혈귀로 변해서까지 그는 무얼 찾으려는 걸까? D는 땅 위의 흙을 약간 퍼내 통에 담은 후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불길한 눈빛에 이끌리기라도 한 것처럼 먼 하늘에서 검은 구름이 몰려왔다. 

 

- 의외의 광경에 그녀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D가 '던필'이란 것은 촌장에게서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던필'의 성질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지식은 있었다.
그래서 리나는 D가 정신없이 잠을 자던가 식사라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D는 오랫동안 방치해 둔 낡은 나무책상과 의자를 꺼내 그 앞에서 작은 유리병을 흔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안이 벙벙한 채로 다가가 책상 위에 놓여진 도구를 보고 리나는 다시 한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상한 색의 약품을 넣은 약병과 몇 개의 은색 원형통은 그렇다 치고, 흰 연기가 올라오는 책상 위 유리병 옆에서 낮은 소리와 새파란 빛을 뿜어내고 있는 것은 바로 마이크로 컴퓨터였던 것이다. 
"놀랐어요. 흡혈귀 헌터는 화학분석도 해요?"
이미 방문자의 낌새를 알아차린 듯 D는 뒤를 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 양 어깨에 힘을 주며 말을 거는 순간, D가 대답했다.
"조수직은 이미 해임된 걸로 알고 있는데."
"야, 해냈어!"
리나는 별안간 손바닥을 치며 기뻐했다.
"뭘 해냈다는 거지?"
"다시 조수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쪽이 아닌 것처럼 말해도 소용없어요. 전 방금 당신의 말투에서 확신을 가지게 된걸요? 전 사람의 마음을 읽어낼 수가 있어요. 당신 정도는 누워서 떡먹기예요. 알고도 남음이 있죠." 
D는 리나 쪽을 향하며 말했다. 

"다른 말로 하면 나갈 텐가?"
조용한 D의 말소리에 리나는 섬뜩했지만 애써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 "귀족은 비를 꺼려한다지요. 왜 그렇죠?"
오랫동안을 참아왔던 의문을 리나는 입에 담았다. 리나가 어렸을 때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귀족이 출현했다는 소문이 돈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녀는 비 오는 날만 밖에 나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나도 몰라."
대답하는 D의 얼굴에서 약간 이상한 색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이 소녀의 질문에 일일이 답을 해주고 있는 자신에 대해 의문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생물학적으로 보더라도 그들의 대사에 대해서는 기능에 아직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게 많아. 밤에만 나타난다는 것, 총탄이나 그보다 더한 과학병기에 당해도 재생가능한 육체가, 단 하나의 보잘것없는 흰 나무말뚝에 사라져 버리는 이유, 그리고 비 오는 날의 외출을 꺼려하는 것도 마찬가지지. 좀 우습기도 해. 불사(不死)라고 하는 실질적인 생물 진화의 극한점에 달한 자들에게 이 정도의 결함이 있다는 건 말야." 

 

- "내가 아는 한 아냐. 생물학적인 약점은 바로 종(種)적 결함으로 이어지지. 그들이 해명의 실마리를 잡았다면 인간이 지구의 정복자가 될 수 없었어. 그들은 자신들의 멸망의 원인도 모른 채 역사에서 사라져 갔어. 그건 그들 나름대로의 깨끗한 항복의 태도였는지도 몰라." 
D의 마지막 말속에 감정이 섞여 있는 것을 느끼며 리나는 말했다.
"귀족은 사라지고 인간은 남았어요. 하지만 우린 지금도 사라진 자들의 환영에 사로잡혀 두려움에 떨고 있어요. 지구의 정복자치고는 좀 한심하지 않나요?"
D는 말없이 문 입구로 다가가 지붕에서 떨어지는 물줄기에 손을 댔다. 리나도 고개를 숙이며 그를 따라갔다.

 

- "지금 밖으로 나가면 내 체온은 2도가 떨어져. 달리는 속도도 3할이 줄어들 뿐만 아니라 대사 기능 자체가 수준 이하로 떨어지지. 하지만 너희들은..."
D는 팔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을 지켜보며 말했다.
처음 보는 D의 흐릿한 눈길에 리나는 이 아름다운 젊은이가 짊어진 숙명을 가슴 시리도록 느낄 수 있었다. 귀족과 인간의 피를 동시에 잇는다는 건 과연 어떤 것일까? 그 한쪽을 사냥할 때, 과연 그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 리나는 갑자기 D의 젖은 팔을 잡았다.
"이봐?"
멈칫하는 D를 무색하게 하며 리나는 D의 손끝에서 손목까지를 양손으로 감싸고 조용히 자신의 볼에 댔다. 그의 손은 차가왔다. 하지만 이것으로 그가 조금은 따뜻해질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또 이것으로 자신은 이 남자와 몸의 체온이 같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리나는 눈을 감고 빗소리만을 듣고 있었다. 


- 느닷없이 처절한 혼기가 얼굴을 때렸다. 온몸이 곤두서며 리나는 무심코 손을 놓았다. 그들을 둘러싼 주위에 다른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소녀 앞에 있는 이 남자는 더 이상 아름답고 고독한 젊은이가 아니었다.
"여길 떠나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마."
D의 말속에는 항거할 수 없는 위압감이 내포되어 있었다. 흡혈귀 헌터는 쏟아지는 빗속을 돌진해 갔다.

 

- "이제 움직일 수도 없어. 촌장의 헛간으로 옮겨둬. 만지는 게 싫다면 치안관을 불러."
D가 '그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 당신이 하면 되잖아. 이건 당신 일이잖아."
좀 전의 남자가 반항했다.
"이런 귀신같은 자를 만지면 손이 썩어버릴 거야. 귀신은 귀신끼리 서로 치워줘야지."
대담하게 쏘아붙이던 목소리가 갑자기 비명소리로 바뀌며 농부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D는 단지 일어선 것뿐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거세지는 폭풍우 속에서 남자들은 활활 타오르는 듯한 붉은빛을 보았다. 
바로 D의 눈이었다.
"어서 옮겨."
D의 목소리는 전과 다름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평온했다. 그러나 남자들은 찍소리 없이 '그것'을 향해 달려들었다.
다음 순간 D는 또 무엇인가를 감지한 듯, 남자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다시 무서운 속도로 촌장의 헛간으로 되돌아왔다.

 

- "무슨 일이야, 도대체?"
주름살투성이의 눈에 광기 어린 빛이 있었다.
D는 모른다고만 답하고 잽싸게 구석 쪽으로 들어가 차림새를 정돈했다. 그는 코트를 입고, 여행자 모자를 머리에 썼다. 마치 D의 주위만큼은 시간이 다르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촌장과 리나의 눈에는 옷이나 모자가 D의 몸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돌아오고 나서 십 초도 걸리지 않아 그는 다시 두 사람 앞을 통과해 밖으로 나갔다. 

 

- "냄새가 사라졌어. 자네 차례야."
D는 자신의 왼손을 향해 말했다. 그의 손바닥에서 우물우물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말할 필요도 없는 기이한 남자 얼굴상이었다. 그것은 불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야, 좋은 꿈을 꾸고 있었는데. 오... 비가 오는군."

말과 동시에 그는 작은 입을 열고 퍼붓는 빗물에 목을 적셨다.

"냄새는?"
D가 재촉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분노가 섞여 있었다.

"서두르지 마. 잠을 자더라도 배는 고픈 거야... 여기서 동쪽이야. 음, 사백 미터쯤 앞이군."

 

- D는 일어났다. 그리고 밖으로 나갔다. 단정한 그의 옆얼굴에 또 한 번 폭풍우가 덮쳐왔다.
"흡혈귀 이외에는 내가 나설 것이 못 되지만, 하지만 아까 그잔..."
말에 올라타기 위해 발을 걸치는 순간 갑자기 D는 경직되었다.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D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건지, 움직일 수가 없는 건지 알 수조차 없었다.

 

D.
그것은 D를 불렀다. 목소리가 아닌 낌새 그 자체였다.
역시 왔군.
"여기 있었군."
D의 목소리는 마치 기계 같았다.
등뒤에 있는 느낌의 주인공은 D와 아는 자란 말인가?
"오랫동안 찾았지."
실패였는지도 몰라.
그 느낌은 무겁게 중얼거렸다.
한 번 더 계산국(計算局)으로 와. 언제라도... 그곳에 있겠다.

 

- "언제쯤 일어날까?" 
"시시한 질문은 그만둬. 옛날부터 악마와 재회하는 건 아침 300시로 정해져 있잖아. 그보다 졸면서 들었는데 마이어라는 교사가 사라졌다고? 이놈들에게 당한 게 아냐?"
이 얼굴상은 손바닥 안에 있으면서도 외부 세계의 이야기를 전부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음, 하지만 이번 사건에는 한 가지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이 있어..."
D가 말했다.
"아마도 열쇠를 쥐고 있는 건 역시 그 폐허일 테지? 한 번 더 혼자서 그곳으로 가 조사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아냐 아냐, 그 소녀를 데려가더라도 안전할걸? 거긴 그분이 있으니까..."
얼굴상이 D를 놀리듯이 말했다.
그런데 갑자기 얼굴상의 상태가 좋지 않은 듯 말을 멈췄다. D가 왼손으로 주먹을 꾹 쥔 것이었다. 그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 얼굴상의 윤기 나던 피부가 부르르 떨며, 이윽고 고통의 신음 소리를 냄과 동시에 D의 구부러진 손가락 사이에서 붉은 선혈이 실처럼 흘러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분...? 모든 것들이 그자로부터 시작된 거였어. 꿈도, 비극도 함께."
열려진 문 입구를 바라보며 D가 중얼거렸다.
세찬 바람이 불어 들어와 천장의 램프를 흔들리게 했다. 그 속에서 D의 얼굴은 마성(魔性), 그것으로 물들어 있었다.

 

- "그 헌터 때문인 게야? 하기야 무리도 아니지. 남자인 내가 봐도 가슴 떨릴 정도의 잘 생긴 남자니까. 그래, 그것도 나쁠 건 없지. 하지만 가끔씩은 싫겠지만 나 같은 사람에게 안기는 것도 괜찮을걸?" 

 

- 비와 바람이 요란하게 소리를 내는 가운데 D는 외롭게 그림자를 내리고 서 있었다.
언제나처럼 아무도 없었다.
D의 볼에 난 상처도 사라지고 없었다. 모든 것은 그의 마음속에서의 전투였던 것이다.

 

- "으유, 정말 항상 혼자 잘난 척만 한다니까."
이미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와 주위의 기운을 살피고 있는 D에게, 질렸다는 식의 볼멘소리로 왼손의 얼굴상이 말했다.
"그나저나 그 괴물이 동료와 합류하는 장소를 알아내려는 참이었는데 쓸데없는 방해자가 들어왔어. 이건 과연 우연이었을까?"
"우연이라면 그 괴물과 어젯밤의 범인과는 관계가 없어. 그러나 의도적이었다면 모든 수수께끼는 한곳에 집중될 수밖에 없어."
D는 헛간 입구에서 어깨의 물방울을 털며 말했다. 투명한 피부 위에 착 달라붙은 검은 머리, 게다가 전투의 여운이 남긴 처참한 혼기까지 더하여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 청년의 앞에서는 아무리 아름다운 미녀도 색을 잃을 것만 같았다.
왼손의 목소리도 넋을 잃은 것처럼 말했다.
"호오, 그러고 보면 자넨 정말 지금까지 쫓아다니는 남녀 모두에게 한 번도 이빨을 갖다 대지 않았군. 자네가 한마디만 하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주라도 그 하얀 목을 내밀며 쫓아올 텐데. 음, 자네의 그 강건한 의지를 내가 꼭 기억해 두지... 그런데 도대체 어쩔 작정인 게야?"
"내가 걱정되나?"
D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흥! 바보 같은 소리를 하고 있구만. 그 성에 갈 건지를 묻고 있는 게야.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희미하게 알 것 같기도 한데 말야. 그 괴물 생명체는 아마도 그곳에서..."
"알고 있어."
D가 쉰 목소리의 말을 끊어버렸다.

- "가지 않으면 안 될걸? 그분도 계실 거고 말야."
손바닥에서 얼굴상이 불길한 웃음을 보이며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 바로 그때였다.
"그건 내가 할 일이야."
쇠가 끓는 듯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전해왔다.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우리 속의 남자 또한 상처의 고통도 잊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은 곳에 검은 옷의 젊은이가 말 위에 걸터앉아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 구름 사이에서 비춰지는 태양빛을 등뒤로 진 그는, 세상에서 보기 드문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그 미모를 처음 대할 때, 남자들은 질투의 불꽃을 태우고, 여자들은 욕정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런 감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할 수 없는 공포가 정신의 어두운 부분을 차갑게 메워왔다. 그것은 바로 흡혈 귀족의 혼기 때문일 것이다. 
유유히 전진하는 말에게 사람들은 서로 앞을 다투어 길을 비켜주었다. D는 한순간도 지체 없이 받침대 앞으로 다가갔다. 

- "뭘 하고 있는 거야, 이런 곳에서?"
리나는 잠시 주저하다가 바로 대답을 했다.
"저... 당신을 찾아왔어요. 오늘밤, 저를 좀 재워주시면 안 될까요?"

"...?"
촌장과 싸우고 집을 나왔다고 리나는 말했다. D는 싸운 이유나 그 외 자세한 것은 묻지 않고 말없이 손을 내밀며 리나를 말등으로 끌어올려 주었다. 말이 출발하기 직전, 리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저..."
"뭐지?"

"제가 당신 허리를 감싸도 돼요?"

"감싸지 않으면 떨어지지 않나?"

"고마워요."
리나는 그의 등에 자신의 볼을 붙였다. D의 등은 넓고 딱딱했다. 늠름한 그의 촉감이 코트를 통해 전해 왔다. '던필'의 몸은 인간보다 훨씬 차갑다고 들었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그의 몸은 따뜻했다. 
순식간에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울고 있는 건가?"
D가 물었다. 단순히 길을 물어보는 듯한 태도였다.
"상관없잖아요. 누구라도 슬퍼질 때는 있는 법이니까. 몇 번씩이나 같은 질문은 하지 말아요."
리나는 이 청년이 남의 신상에 대하여 질문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기적에 가까운 일인지 모르고 있었다.
D는 침묵했다.

- 이상한 표정으로 등뒤에서 지켜보는 리나에게 D가 물었다.

"흐르는 물을 건너는 것이 이상한가?"
"아... 네. 당신은 바로 '던필'이잖아요. 어머, 제가 실례의 말을 해버렸군요."
"확실히 물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허리 정도의 깊이에서 허우적대는 귀족도 있으니까."
"왜일까요? 정말 이상해요. 귀족의 생리는..."
단순한 천진난만함과는 거리가 먼 질문이었다. 왠지 그녀는 알고 싶어 했다. 
D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조용히 말에서 가져온 안장과 짐을 오두막 구석에 내려놓고 손바닥만 한 검은 보퉁이를 꺼냈다. 보퉁이에 달려 있는 끈을 당기자 그것은 점점 넓어지며 부드러운 촉감의 침낭이 되었다.

- "여기서 자면 돼. 보온장치도 되어 있어. 감기는 걸리지 않을 거야."
"그럼 당신은 어떡해요?"

"난 밖에서 자면 돼. 흙 위에서 자는 게 오히려 나아. 괜찮아, 그건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리나는 말을 하며 D가 지금 바깥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밖에서 당신을 마중 나온 것 같군."
"싫어요. 난 절대로 돌아가지 않을 테니까."

 

- 밤의 어둠이 나무들 사이에 내려앉고, 하얀 달이 얼굴을 내밀었다.
여행용 작은 전자램프 위에서 리나는 커피를 끓이고 있었다. 커피는 마차에 늘 싣고 다니던 것이었다. 램프는 D의 것이었다. 그것은 직경 5센티미터, 높이 15센티미터 정도의 은색 원통이었지만, 조명 외에도 스토브와 보온기, 냉동장치의 역할까지 해냈다. 여행자에게 있어 부피가 커지는 물품은 금물인 것이다. 

 

- "다 됐어요."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안 돼요. 드세요. 몸이 따뜻해질 거예요. 와! 저 달빛 좀 봐."

리나는 D의 옆으로 가 억지로 그에게 컵을 쥐어 주었다.

 

- "D. 특이한 이름이군요. 근데 무슨 D예요? 악마(Demon), 죽음(Death), 위험(Danger)... 뭐 그 어느 것도 다 잘 어울리긴 하지만, 당신에게는..."
"내일 돌아가. 리나!"

D가 가늘게 말했다.

"싫어요."
"내 신분은 잘 알고 있겠지? 누군가가 심사관에게 그걸 전한다면 넌 '수도'의 꿈이 사라질지도 몰라."
"상관없어요."
리나는 킥킥대며 웃었다. 그리고는 D의 왼팔을 잡았다.
"그럼 당신과 함께 이 마을을 떠나면 되죠 뭐. 헌터의 아내가 되면 스릴 만점 아닌가요?"
질린 얼굴로 돌아본 D에게 리나는 얼른 대답했다.

"농담이에요, 농담. '수도'로 데려다주는 것만으로 됐어요."

"적당히 하고 그만 자. 난 아침 일찍 나가야 해."

"점심 준비해서 기다릴게요."
리나는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그리곤 윙크를 했다. 

"힘내요. D."
D는 한숨을 쉬었다. 흉악한 짐승이나 귀족을 상대로도 내뱉어본 적이 없는 긴 한숨이었다. 전신이 얼음으로 만들어진 듯한 이 청년의 마음도 누그러질 때가 있는 것일까? 

- "D. 당신은 어디서 왔어요?"
리나가 해맑은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거예요? 귀족은? 그리고 인간은?"

D는 돌아보며 리나를 쳐다보았다. 소녀의 말속에 있는 미세한 불안감을 알아챈 것일까?
"어려운 질문이군."
"두 곳의 세계를 다 알고 있는 당신도 그걸 몰라요? 낮과 밤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 어떤 건지, 인간이란 어떤 건지, 또 귀족이란 어떤 건지 그런 거 말예요. 정말 몰라요?"
"왜 그런 걸 묻지?"
"알고 싶어서요. 가르쳐 주세요."

- 두 사람 주위를 월광초 냄새가 감싸왔다.
D는 말없이 문 쪽으로 옮겨가며 한쪽 벽에 몸을 기댔다. 리나는 30센티미터 정도 튀어올라 있는 문턱 같은 곳에 앉았다.
밤의 세계가 두 사람의 눈앞에 있었다.

- "귀족이란 건 밤에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해."
오른손엔 장검, 왼손엔 따뜻한 김이 솟는 커피가 들어 있는 컵을 든 채, D는 조용히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현재 아니, 귀족들의 과학이 최고로 발달했었을 때조차도 밤의 어둠이 갖는 잠재적인 힘이나 귀족에 대한 소립자 단계에서의 영향력은 해명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했어. 귀족들의 육체가 불사신인 이유, 태양빛과 말뚝만 피한다면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불노불사의 비밀, 또 그것들의 공격이 심장에 한해서만 효과를 갖는 수수께끼 같은 것들 말야. 지구 역사상 생명의 연장선이란 측면에서 보면 진정 궁극의 도달점에 달한 그들이 실은 누구보다도 그 능력의 신비를 찾기 위해 번민하고 있었다는 것은 정말 웃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야." 
"유전자 공학 분야에서도 실마리를 찾지 못했을까요? 귀족들의 컴퓨터에는 모든 유전자에 대한 정보가 정리되어 있다고 하던데?" 

"유전자가 갖는 개개의 정보 해독은 이미 오천 년 이상 전에 마쳤어. 그러나 문제는 그게 아냐. 세포의 노화를 막는 유전자가 발견되더라도 그들은 '이런 유전자가 왜 생겨났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할 수가 없었어."  


- "인간에게 있어서나 귀족에게 있어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의문은 영원히 풀 수 없는 명제인가 봐요. 근데 조금 아까 말한 어둠의 힘과 그것과는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거예요?" 
D는 고개를 끄덕이며 컵을 입에 댔다. 순간 리나가 웃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 그는 인상을 약간 찌푸리며 한 모금을 마셨다.
"맛있어요?"

리나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응."

"아, 다행이야."

기침을 한 번 하고 D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귀족의 생체기능이 어둠 그것을 중심으로 성립한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야. 그것으로부터 하나의 가설이 생겨났어. 밤의 어둠, 즉 빛이 가려지면 태어난다는 그 단순 명쾌한 존재에 귀족들의 능력, 다시 말해 유전자를 결정짓는 요인이 구비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야. 결국 귀족들은 어둠 그것이 갖는 오묘한 정보를 유전자가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게 된 게 아닐까?" 

 

- "그럼 그건 어둠의 유전자겠군요.”
"그렇겠지, 아마."
"그 구조만 해명할 수 있다면 귀족의 수수께끼는 밝혀지는 거군요. 혹시 이런 가설은 생겨나지 않았어요, D? 인간에게는 빛의 유전자가 구비되어 있다구요."
단정한 그의 옆얼굴을 달빛이 하얗게 비춰주었다.
"바로 그거야. 인간이란 건 빛 속에 살아가는 것이야. 개개의 생명선으로만 본다면 인간은 귀족에 훨씬 못 미치지. 생물학적으로 보더라도 너무나 취약하지. 그러나 인간 전체의 에너지로 보자면..."
"빛은 어둠보다 낫다."
리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것은 일종의 운명이었다.

- "하지만 이번 귀족들은..."
리나는 말을 하다 멈칫거렸다.
가슴속에서 누군가가 외치고 있었다. '그것'을 입에 담아선 안된다고. 그 어두운 목소리는 분명 어딘가에서 자신의 운명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태양빛 아래를 걷는 귀족 말인가?"
D는 다시 한번 컵을 자신의 입으로 옮기며 리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왠지 그녀에게 격려라도 하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 리나의 눈동자에 갑자기 예고도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이 흘러내리기 전에 리나는 D의 허리에 달라붙었다. 그녀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오열을 토했다.
그녀는 자신을 그렇게 슬프게 하는 것이 뭔지 몰랐다. 또 뭐가 무서운 건지도 몰랐다.
단지 영원히 걷히지 않을 밤에 오직 혼자 길을 걷고 있는 것만 같은 외로움이 밀려온 것이다. 
D가 컵을 바닥에 놓으며 가만히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 '마을을 떠나고 싶어. 이 남자와 함께 수도에 가고 싶어. 언제까지, 어디라도 둘만이 있고 싶어.' 

- 두 사람은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갑자기 D의 몸에 긴장감이 질주했다. 다음 순간 리나는 바닥에 엎드려 넘어져 있었다. D는 시냇물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주위의 광경에 변화는 없었다. D의 감각만이 변한 것 같았다.
바람의 노래가 들려왔다.

어떻게 된 거야, 아직 오지 않는 거야?
그 비 오는 밤의 '느낌'이었다.

난 기다리고 있어. 그곳에서.
그곳은 어딜 말하는 거야? 폐허가 갖는 의미는?
D는 입 밖으로 소리도 내지 않고 물었다.
그것만이 유일한 대화였다.

- 실패였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모두를 말소해버리지 않으면 안 돼. 시간은 그다지 없어. 난 기다리고 있는 거야.

무엇을, 누구를? 또 기다린다는 건 무슨 뜻이야?

대답은 없었다. 

빨리 와. 난 가지 않으면 안 돼. 지금까지도 길었지만 이제부터는 더욱더 길 거야. 더... 더...
D의 몸 어딘가에서 '느낌'이 갑자기 사라졌다.
'역시 폐헌가?'
D는 오두막 쪽을 돌아보았다.

 

- 주위는 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것들의 빈틈을 채우고 있는 것은 배고픔과 메마름이었다. 그것은 아우성치며 하나의 '의지'를 유혹하고 있었다.
의지는 반항을 시험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축적해 온 사랑, 희망, 꿈, 슬픔, 그리고 분노에 대하여 바로 인생이 키워 온 '인격'이라는 의지였다. 유혹에 대한 대답은 언제나 부정적이었다. 때는 가까워지고 있었다.
진흥으로 둘러쳐진 주위는 집요하게 의지를 침식시켜 강인한 이성의 벽을 본능의 애무로 회유하려고만 하였다. 이성의 벽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무너진 파편은 순식간에 굶주림과 메마름으로 동화되어 버렸다. 깎여져 나가는 의지는 달콤한 것을 느꼈다. 본래 소속해 있어야 할 세계를 바라보고 환희에 가까운 것을 느낀 것이다. 
그러나 의지의 핵은 끝까지 저항했다.

표독스러운 기운이 단번에 의지를 잠식시켜 버릴 것처럼 덤벼들었다.
처절한 싸움이 계속되었다.

 

- "춥진 않았나?"
D의 말에 리나는 자신이 블라우스 하나밖에 입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제법 바람은 차가운데도 전혀 추위는 느낄 수 없었다.
"오늘 날씨가 따뜻한 거 아니에요? 난 원래 추위를 잘 타는데..."
대답에 만족을 한 건지 못한 건지는 몰라도, 알아들었다는 듯이 D는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리나가 말을 이었다. 

"또 폐허에 갈 거예요? 아마 아무것도 없을 거예요."
D는 말없이 안장을 얹었다.

 

- 리나는 재빠르게 머릿속으로 계산을 한 다음 자신의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틀 뒤면 이 마을을 떠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제 이틀 뒤의 미래. 리나는 생각했다.
'진정 그 미래가 내게 찾아와도 되는 걸까?'

 

- "맘대로 해."
거절할 거라 생각했던 D가 허락했다.
"넌 네 맘대로 날 따라오는 것뿐이야. 일절 사정은 봐줄 수가 없어."
"좋아요. 마음 내킬 때 언제라도 날 내버려 두고 가버리세요."
리나는 기뻐하며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잊은 게 있어."
D가 오두막 입구에서 턱을 치켜세웠다.
"?"
"내가 자고 있는 동안 누군가 와서 두고 간 모양이군. 내 수중엔 이런 게 없어. 제법 멋도 부릴 줄 아는 자 같군."
의아해하던 소녀의 얼굴이 별안간 아침 햇살과 같이 빛났다. 문턱 위에 놓여진 작고 흰 꽃 한 송이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리나는 그것을 살짝 집어 들며 블라우스 주머니에 넣었다. 보이지 않는 배달자는 언제나 리나를 지켜주고 있는 것 같았다.

 

- "너는 혼자가 아닌 것 같군."
변함없이 솔직한 D의 말이 그녀에게는 마치 자신을 축복해 주고 있는 것 같이 들렸다.
"너에게 불행이 있다면 슬퍼하는 자가 있지."
이때 D는 이미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리나의 생각은 복잡하게 흐트러졌다.
"학교가 끝나면 또 여기로 와도 괜찮아요?"
"좋으실 대로. 하지만 내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다고 단정 지을 순 없어."
리나는 침묵했다. 조용히 대답하는 그의 내면에는 소녀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라의 세계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몇 번씩이나 필사적으로 내저었다.
"괜찮아요. 당신은 반드시 돌아올 거예요. 난 계속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것은 자신을 향한 말이었다.
D는 아무 말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 "역시 공간을 닫아버렸군. 이대로라면 앞으로 영원히 한 길만을 계속 달리지 않으면 안 돼."
D가 중얼거렸다.
어떤 두 장소를 선택하여 그 양끝을 결합시켜 버리면 그곳 안에 들어가 있는 자는 영원히 갇혀진 공간 안에서만 계속 이동을 하는 것이었다. 적은 언제 그런 기술을 터득한 것인가?
"이제 어떡할 거지?"
목소리가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나가는 수밖에 없지."
"호오, 어떻게? 밖에서는 물론이고 폐쇄공간을 안쪽에서 뚫고 나간 예는 귀족의 역사를 통틀어도 본 적이 없어."
"그 폐허의 실험실에 폐쇄용 자기(磁氣) 필드가 있었어."

D는 말에서 내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건 평범한 인간들을 위한 것이었어. 결국 내가 돌파할 수 있는 확률은 절반 정도야."
목소리는 침묵했다. 그것은 동요와 위협이 혼합된 침묵이었다.
"내 주인이긴 하지만 가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한단 말야? 공간을 부술 때 난 떨어져 있을게."
"좋을 대로 해. 하지만 그전까진 날 좀 도와줘야겠어."

- 가까운 나무에 말을 묶고, D는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걸으면서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 작게 반으로 꺾은 다음 그것을 어깨에 멨다.
십분 정도가 지나 다시 길로 돌아왔을 때 D의 양쪽 어깨에는 더 이상 짊어질 수 없을 만큼 많은 가지들이 얹혀 있었다.
이것으로 모닥불이라도 피우려는 것이었을까? 그것을 땅바닥 위에 쌓고, 계속해서 D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흙을 파기 시작했다. 검이나 바늘 등은 사용하지 않았다. 오른손의 다섯 손가락을 벌리며 땅바닥 위를 마구 찔러대는 것이었다. 그 다섯 손가락이 마치 삽과 같이 흙덩이를 파고 들어가자 나뭇가지 옆으로는 흙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흙이 아니었다. 대단한 무게로 땅을 고르게 눌러놓은 검고 딱딱한 흙이었다. 그런데도 쉽게 쉽게 손목까지 파고 들어갈 수 있는 그 강인한 손의 힘을 과연 무엇에 형용할 수 있을까? 
순식간에 그곳에는 어른 한 사람이 들어가 누울 정도의 구멍이 뚫렸으며 또 옆에는 그만큼의 흙이 쌓여 있었다.

- "준비는 끝났어."
손의 흙을 털며 D가 말했다.
"아직이잖아."
왼손이 항의했다.
"흙, 물, 불, 바람 중에 아직 물이 부족하잖아. 널 부활시키는 건 물론이고 폐쇄공간을 깨부수는 덴 더더욱이나 어느 것 하나라도 빠지면 성공을 장담 못 해."
"노력하면 돼."
D는 흙덩이 위에 서서 코트와 셔츠 소매를 걷고 왼쪽 팔뚝을 꺼냈다. 그리고 손목 조금 위, 동맥이 달리고 있는 부분에 자신의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주인과도 잘 어울리는 우아한 손톱과 손가락이었다. 손톱이 스윽 하고 옆으로 지나치기만 했을 뿐인데 하얀 피부에 굵직한 붉은 선이 달리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검붉은 선혈이 솟아났다. 그리고 마치 폭포처럼 검은 흙덩이 위에 세차게 떨어졌다.
흙덩이에 선혈이 스며들어가는 것을 약 십 분 동안 지켜본 다음, D는 또다시 같은 손가락으로 상처 자국을 닦았다.
그러자 피가 멈추고 상처 자국도 사라졌다.
과연 D의 얼굴색이 약간 창백해져 있었다. 자신의 피가 묻어있는 손가락 끝을 쓰윽 하고 입으로 핥으며 너무나 불미스럽게 영양을 보충했다.

- "생명을 깎아 생명을 낳는 게로군... 너무나 비참한 작업이었어. 하지만 난 그걸 태연하게 할 수 있는 자네가 무엇보다 무서워. 역시 자넨..."
왼손이 신음하듯 말했다.
"그만해."
D가 말했다. 방금 그의 입으로 들어간 자신의 핏방울 탓인지 그의 말은 평소보다 파랗고 선명했다. 목소리는 침묵했다.

- 옆에 있는 장작더미에서 나뭇가지 두 개를 양손에 집어 들며 D는 한쪽 끝을 다른 한쪽의 중간쯤에 대고는 쉬익 하고 서로를 비벼댔다. 엄청난 힘이 들어가는 동작이었다. 드디어 양쪽에 불이 점화되었고, D는 그것을 장작더미에 던졌다. 순식간에 무서운 검은 연기와 불꽃이 일어나며 공기를 뒤흔들었다.
흙, 물, 불, 바람... 모두가 갖춰졌다.

"이젠 자네 차례야."

 

- 왼손이 불꽃 있는 데로 뻗어 가며 불꽃 속으로 들어갔다.
순간 바람이 소리쳤고, 말조차도 무언가를 목격한 듯이 울부짖었다.
바로 천지를 불태워버릴 것만 같은 불기둥이 하나의 가는 선이 되어 D의 손바닥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었다!
"불과 바람인가...? 다음은 흙과 물이군."

창백한 피부에 다시 생기를 떠올리며 아름다운 목소리가 말했다.

- 그것은 공간의 파괴 부위와 다른 지점 공간과의 사차원적 접합에 노력했다.
D의 몸은 공중에 뜨며 아무것도 없는 공간으로 날아올랐다. 동시에 한쪽 켠에서 사이보그 말이 소립자(素粒子) 단계로 분해되는 모습을 D는 보았다. 

- 1945년.

버뮤다 해협과 접속한 폐쇄공간 내에 다섯 대의 어벤저 뇌격기가 비행 중이었던 것은 진정 불운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1872년과 1888년. 
이탈리아 제노바를 향해 항해 중이던 대형선박 '마리 세레스트'에 탔던 사람들과, 안개 낀 런던 빈민굴 이스트 앤드를 배회중이던 유명한 킬러인 '잭'은 동시에 폐쇄공간에 휩싸이게 되어 역사에서 사라졌다. 적어도 후자에 대해서는 수리회로의 행동을 찬성해야 할 것 같다.


3046년. 
태양계에서 2억 7천만 킬로미터에 가까운 지점을 초속 2천 킬로미터로 이동 중이던 알파형 블랙홀은 명왕성을 삼켜버린 다음 갑자기 사라졌다. 다른 천체 탈출용 로켓을 만들고 있던 귀족과학원은 이것을 근거로 비난의 벽에 부딪히게 되어 대원장 이하 상층부 전원의 교체가 이루어졌다. 이것은 접합이 실질시간 제로에서 행해진 경우였다. 


4018년. 
화가인 바농 베리는 집에서 식사를 하던 도중, 우연히 1878년의 런던에서 미녀의 침실을 습격하는 어느 귀족의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그는 약 삼 개월에 걸쳐 한 장의 초상화를 완성해 냈다. 이것의 탄생으로 그는 그로부터 6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신조(神祖)'의 모습을 그린 그림 중에서는 최고 걸작품을 그린 화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 가장 효과적인 단거리 지점끼리의 접합이 이루어졌다.

 

- 갑자기 생겨난 맹렬한 돌풍이 리나를 포함한 세 사람을 땅바닥에 쓰러뜨렸다. 필사적으로 일어선 리나는 자신과 펜 부녀와의 사이에 마치 자신을 비호하듯 서 있는 아름다운 그림자 하나를 보았다.

"D!"

- 흡혈귀 부녀의 체내에서 아니, 두 사람이 차지하는 공간 위에 발생한 생명 에너지는 한 지점에 두 개의 물질이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물리법칙에 따라 그들을 사라지게 한 것이었다. D는 이것이 이미 세 번이나 만난 적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역시, 적이었군. 하지만 이건 다른 누군가의 생각에 의해 태어난 것이야. 그리고 그자도 이걸 완전히 제어할 수가 없는 거야.'
그것이 누구인지는 짐작이 갔다.
보이지 않는 존재가 말을 했다.

 

- "역시 볼일이 생긴 것 같군. 자, 함께 가주실까?"

 

- 폐허의 내부까지 샅샅이 찾아보고 D는 중앙 정원으로 돌아왔다. 지하의 실험실로 이어지는 통로는 수천 톤의 돌더미로 막혀있었으며 다른 출입구는 찾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D가 이 폐허에 집착하는 것은 왜일까? 흡혈귀 헌터로서의 계약은 이미 끝나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 이 마을에 머물고 있는 것은 의뢰받은 것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프로의 직업의식 때문이었을까? 그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기쁨, 슬픔, 분노와 같은 모든 인간다운 감정을 이미 승화시켜 버린 얼음 같은 이 남자의 아름다운 얼굴에 무서운 집념을 불러일으키게 한 것은, 역시 실험실 구석에서 영위되었던 몇백 년에 걸친 작업의 성과였던 것이다. 

 

- "여간해선 찾기가 힘들겠는걸?"
왼손이 조소를 보냈다.
"한데, 그걸 찾게 되더라도 어떻게 할 작정인 게야? 십 년 전의 실험 성과를 확인해서 그걸 뭘 어쩌겠다는 거냐구? 또 어두운 밤이 늘어나기만 할 뿐이잖아. 그 네 아이들의 운명은 십 년 전에 이미 정해진 거야. 누구라도 그것에는 관여할 수가 없어.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다면, 뭐야?"

"그분을 만나기 위해?"
순간 D의 얼굴이 얼어붙었으나 곧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그럴지도 모르지."

"호오, 이제 점점 사람이 되어가는구만. 긴 여행이 헛된 것이 아니었어."
이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다. 바람소리도 멈추었다. D의 오른손이 등 뒤의 검으로 옮겨갔다. D가 서 있는 마당은 더 이상 마당이 아니었다. D는 '그것'이 서서히 일어서고 있다는 것을 자신의 온몸에서 느끼고 있었다.

 

- 주위는 암흑이었다. 빛조차 투과를 허락하지 않는 이 꽉 찬 느낌은 블랙홀에 비교할 만한 것이었다. '그것'은 극도에 달한 이 꽉 찬 밀도를 훨씬 능가하는 긴밀성을 가지고 D의 앞을 가로막았다.

D는 이 꽉 찬 밀도를 '느낌'으로 바꾸어놓았다.

과연 잘 견뎌냈군.

'느낌'이 불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분명 칭찬의 말이 아니었다.

다른 자였더라면 정신이 물리적으로 짓이겨져 폐인이 되고 말았을 거야. 넌 역시 성공을 거뒀군.

"입 닥쳐."-
D는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은 D의 의식에도 없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었다. 이것도 일종의 대화였다.
"여기서 무슨 짓을 했지? 십 년 전의 실험 결과는?"

빛과 어둠의 유전자말인가?  

 

- 한 사람의 유전자가 아니 하나의 유전자가 종자 전체의 발전 구조를 결정지어 버린다는 건 너무 잔혹한 처사야. 더구나 생물로서 비할 데 없는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된 종자는 도저히 깨끗하게 그 운명을 받아들이질 않아. 그런 의미에서 귀족은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귀족이 잠자코 자신들의 멸망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나? 그렇다면 흡혈귀 헌터 따위는 필요치 않을 텐데."
D는 조소를 보냈다.
원인제공은 귀족이 한 게 아니야. 인간이야. 인간들이 멸망하는 시기 정도는 그들이 바란다면 알려줘도 무방하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얘긴 집어 쳐. 여기서 뭘 하고 있었는지 그것만 말해."
대답 대신에 어떤 영상이 떠올랐다.
암흑 속에 빛이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D의 뇌리 속이나 정신에 비춰진 모습도 분명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의 심상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 하나가 아니었다.
수없이 많은, 하얀 나체가 단 하나의 영상 속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 위에 검은 그림자가 그것들을 누르고 있었다.

- 여자는 절정을 맞이하고 있었다. 마치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절정 같았다. 여자는 그림자의 등에 손톱을 세우고, 그림자의 어깨살을 물었다. 옆으로 얼굴을 돌린 여자의 촉촉하게 젖은 입술에서 황홀함이 소리가 되어 흘러나왔다.
어떤 얼굴들은 죽음의 색을 내비치며 영상에서 사라져 갔다. 몇 개나 계속해서...
D가 헤아린 것만도 수천만 개였다. 

기억에 없나?

'느낌'이 물었다.
너라면 기억하고 있을 거야.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넌 단지 하나의 성공사례에 지나지 않아.

"넌 역시 여기서 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었군."
D는 비로소 입 밖으로 말을 꺼냈다. 그의 말은 분노로 불타고 있었다.
그렇다. 여긴 그것을 위한 계산국이었기 때문이지. 3500년 동안 막대한 실험이 행해졌지만 모두가 실패로 끝나버렸어. 그 결과도 모두 말소되었지.

 

- D는 그것들이 겉모습과는 달리 상상도 할 수 없는 능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들의 능력이 D에게는 보였다. 그들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낮과 밤을 잠도 자지 않고 행동할 수 있었다. 진공 속에서 호흡을 하는 것도 가능했다. 물속을 자유자재로 헤엄쳐 돌아다닐 수도 있었으며 죽음에 이르는 치명상조차 세포가 회복시켜 주었다. 
바로 생물진화의 최정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지탱하는 유일한 결점이 그들의 운명을 달리하게 했다.
바로 저주받은 흡혈의 습관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말소의 이유였다. 수십만의 생명이 저항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태어나자마자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 "왜 그런 짓을 하지?"
분노에 불타는 D의 질문 속에 슬픔이 고여 있었다.
가능성의 추구야. 십 년 전에도 있었지. 하지만 그건 모두 실패로 끝났어.
"말소시킬 작정인가, 저 어린 생명들처럼?"
실패작을 남겨둘 순 없어.
'느낌'은 단정 지어 말했다. 조용한 어조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 '느낌'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D는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무한대에 가까운 어둠의 밀도를 가진 존재를 맞이하여 D는 그것과 같은 형체로 변형하는 수밖에 없었다. D는 점점 변형하고 있었다.
그것만이 그를 이길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다.
물론 상대방의 존재 그 자체와는 관계가 없었다. D의 몸 어딘가에서 장대한 거인의 그림자가 완성되고 있었다.
검은 망토를 걸치고 창백한 피부에 조각한 듯한 붉은 입술에서 두 개의 이를 드러내고 있는 그것은 바로 '신조(神祖)'의 모습이었다.
그것이 완성되는 순간, D는 혼신의 힘과 정신력을 한 줄기의 섬광에 의지하여 날려 보냈다.

- 이윽고, 빛이 어둠을 가르고 나타났다.
오후에 가까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 햇살 아래, D는 바닥에 박혀 있는 칼에 의지한 채 서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에 피로의 색이 짙었다.

- "놈은 가버렸지?" 
숨소리도 거칠었다. 떨림을 감출 수 없는 목소리가 대답했다.
"... 정말 넌 무서운 놈이야. 그분에게 상처를 입히면서까지... 자신의..."

답하지 않고 D는 말이 묶여 있는 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딜 가는 거야?"

"네 사람이 생각하는 저의는 알 수 없지만, 이제 그 운명만큼은 알았어."

"그렇다면 이제 마을을 떠나. 내버려 둬, 너랑은 상관이 없는 자들이잖아."
"한 명은 내일이면 수도로 가는 것이 결정돼. 그 때문에 오랜 겨울을 참아왔지. 십 년 간이나 계속되었던 겨울이야."
"마지막까지 진상을 모르게 하기 위해 그녀를 지켜줄 거란 말인가? 언제부터 그렇게 감상주의자가 됐어?"

D는 말없이 채찍을 휘둘렀다.

- 왜 그러지? 그 남자가 갖고 싶지 않나?
이때 리나는 그림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신상에 닥친 위험보다도 강렬한 욕망에 몸을 태웠다.
'D, 이 아름다운 남자의 팔에 안기고 싶어.'
그건 네 마음의 투영상이야. 그러니 네가 원하는 걸 결코 거부하지 않을 거야. 원하는 대로 사랑을 해버려.
낮은 목소리는 기대에 차 있었다. 그것이 심리공격이란 것을 알면서도 리나의 손은 D의 늠름하고 씩씩한 가슴에 닿았다. 그녀의 입술이 떨려왔다.

 

- 필사적으로 몸을 떼는 순간 D는 마이어 교사로 변했다. 그의 양손에 쥐어진 유리 용기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 그 색과 냄새에 이끌려 다가가면서 리나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목소리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마셔, 마시는 거야. 이것으로 넌 자유의 몸이 돼. 내게 돌아오는 거야.

 

- 의식을 집중시켰다. 알 수가 없었다. 비 오는 날 밤의 공격 실패에 넌더리가 났는지 적은 몇 개의 층에 달하는 교사(校舍)에서 그 위치를 은폐하고 있었다. 정신집중으로 찾아낼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막대한 시간과 정신력의 소모를 요구했다.
"수업 참관을 하시겠습니까?"
분필을 든 리나가 물었다.
D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수많은 리나가 다가왔다. 오른손에 흰 나무말뚝을 쥐고 있었다. 그들은 D를 에워싸고 일제히 그것을 내리찍었다. 도약하려는 D의 발은 바닥에 달라붙었으며 몇 개의 말뚝이 피를 뿌리며 가슴과 등을 통과했다.
격렬한 통증이 엄습했지만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D는 교실의 한쪽 구석으로 날았다. 지금의 일격을 D가 견뎌냈기에 적의 포박이 크게 그 효력을 잃은 것이었다.

- 실질적으로 D의 몸을 말뚝이 뚫은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것은 D의 정신 내부에 있는 사투였던 것이다. 그곳에서 육체, 즉 정신적인 힘이 굴복하면 현실 속의 D는 상처 하나 없이 사망하는 것이다. 거꾸로 그것을 잘 견뎌내면 그 결과는 날카롭고 영리한 칼이 되어 공격자를 습격했다.
조용한 전쟁이었다.

- D는 칼을 바라보았다. 평범한 나뭇가지였다. 표면의식은 살육을 명하고 있었지만, 바로 그의 잠재의식이 리나를 구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 D는 갑자기 바람만이 불고 있는 빙원 위에 서 있었던 것이다. 상처 하나 없었다. 오른손의 검은 본래의 무기로 돌아와 있었다.
D는 오히려 정신세계의 감옥을 굳게 닫았다.
적은 이 심상에 승부를 건 것이다. 사력을 다한 다음, 적은 바람과 얼음의 벌판에서 아름답게 전사하려 하고 있었다. 칠흑 같은 공간을 유성이 날아갔다.

 

- 일 미터인지 천 킬로미터인지 측정하기 어려운 전방에 한 사람의 여자가 서 있었다.
새하얀 원피스는 드레스가 아닌 수의였다. 긴 흑발에 가려져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D와 비슷한 투명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D.

그것은 여자가 내는 목소리 같기도 했고, 바람의 노랫소리 같기도 했다.
D는 응고된 것처럼 제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적은 D의 어디에서 이런 심상을 끌어낸 것일까? 진정 망망대해와 같은 허무의 평원이야말로 이 젊은이에게는 잘 어울리는 세계였다.

D, 겨우 만났군요.
얼음 평원을 건너는 바람과 같은 목소리였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한 가지만 묻고 싶어서.
D의 온몸이 긴장했다.
튀어나오는 질문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의 요구를 들어주게 되면, 정신의 죽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었다. 적의 계략은 완벽했다.

- 당신 아버님의 이름을 알고 싶어요.
질문은 던져졌다. 그러나 해답은 누구보다 그 여자가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D의 수려한 외모에 비로소 어두운 그림자가 머물렀다. 바람은 더욱 기세를 더했고, 얼음 평원은 더욱 차가워져 D의 얼굴의 그림자를 더욱 어둡게 물들였다. 
대답해 주세요, D. 아버님의 이름은?

이름은? 
그 이름은?

 

- D의 입술이 약간 열렸다. 그의 볼이 작게 떨렸다. 그것은 지금 그가 치루고 있는 정신전이 얼마나 처절한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었다.

 

- "그 이름은... 드... 라..."

 

- "리나를 보지 못했나?"
학생들에게 눈을 옮기며 D가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여자 아이들은 고개를 숙이지도 못하고 D의 얼굴을 쳐다보았으며, 남학생들조차 수치심으로 볼이 붉어져 있었다.

"그 아이는 위험에 처해 있다. 생명이 아니라 혼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알고 있으면 말하라."

마침내, 바싹 마른 그림자 하나가 창 끝쪽에서 일어섰다.

- 그는 은색 컵과 캡슐이 든 작은 병을 꺼냈다. 맑은 물을 컵에 떠 와 그곳에 캡슐 하나를 떨어뜨렸다.
순식간에 물은 피색으로 변했다. D는 단숨에 그것을 다 들이키고 가볍게 숨을 쉬었다.
건조 혈장과 자양분을 포함한 캡슐이 '던필'의 식사였다.
평범한 '던필'이라면 한 개씩 하루에 세 번을 먹었다. 그러나 D는 이 마을에 온 이후로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는 단순한 '던 필'의 범주를 훨씬 초월하는 체력이었다.

- 하늘은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이 어둠이 지나가고 난 뒤, 과연 한 소녀의 '내일'은 올 것인가?
D는 컵을 창가에 놓고 말에게 다가갔다. 헛수고라고 하더라도 포기할 수 없었다.
D는 말에 올라타며 다시 폐허로 향했다.

 

- 계략인 것인가?
D는 주저하지도 않고 몸을 날렸다.
이상한 감각이 그의 전신을 자극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공간이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두 지점 간의 '거리'라고 하는 공간이 서로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그 두 지점은 아마 이 구멍과 폐허였을 것이다. D의 발 밑은 흙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3센티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돌바닥이 펼쳐져 있었다. 이곳이 탈출구 중의 하나일까? D에 의해 폐쇄공간이 부서질 때 파손되었던 회로가 벌써 복구되었든지 아니면 이곳만큼은 처음부터 유지시켜 두었든지 둘 중 하나였다.  

D는 발 밑 근처에서 작은 돌 하나를 주워 앞쪽으로 던졌다. 흙바닥과 돌바닥의 경계선상에서 그것은 새파란 불꽃을 일으키며 반대편에 떨어졌다. 모습만큼은 그대로였지만 그건 다른 물질이 되었다. 

 

- "죽었군. 튜닝을 해야 하겠어."

이곳에도 든든한 수비꾼이 있었던 것이다.

공간 단층의 물리적 특성에 적합하지 않은 존재는 경계를 통과하는 순간, 소리도 없이 물질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생각할 여유도 없이 D는 말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다음 순간 D의 전 세포가 보석 같은 빛을 발하며 환한 불꽃이 그의 얼굴을 채색했다.
D가 돌바닥을 밟는 것과 동시에 그것들은 흔들리며 사라졌다.
D는 가볍게 고개만 흔들 뿐, 지체 없이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 D는 잠자코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달리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는 과연 이 마을에서 무엇을 위해 싸웠던 것인가?
"자네도 마찬가진가?"
등뒤에 있는 자에게 물어보는 D의 목소리는 다시 언제나처럼 차가웠다.
"예."
파란 불빛 속에 크오레가 잠시 멈춰 서 있었다. 그러나 하얀 이를 드러낸 그의 표정은 전과 달리 이지적인 느낌을 풍겼다.

"그는 마지막까지 날 지켜줬어요. 자신의 운명을 알고 난 뒤 나만큼은 자신들과 같은 동료로 만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어요. ..." 

 

- "난 크오레에게도 안길 거예요. 어떻게 하겠어요? D. 날 한번 베어보겠어요...? 당신은 헌터잖아요."
"보수가 없는 일은 하지 않아. 게다가 내 역할은 이미 끝났어."
그것은 바람과 시냇물의 노랫소리를 함께 들었던 소녀에게 보내는 작별인사였다.
파란 불빛 속에서 D는 발길을 돌렸다.

- "이것이 우리의 운명인가요?"
D는 말이 없었다.
D의 마음속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공한 것은 너뿐이야.

 

- "당신이 부러워요."
리나의 말을 과연 D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얄미울 정도로 부럽군요. 우리가 언제 이렇게 될지 혹시 알고 있나요?"
"몰라."

- "너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거야."
청년은 비틀거리며 어둠의 구석으로 사라졌다. 그에게도 때가 온 것이었다.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 같은 파란 불빛 속에서 아름다운 헌터와 소녀는 가혹한 운명을 조용히 응시하며 어둠의 저편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 다음날 오후, 마을을 방문한 세 명의 심사관들은 약간은 창백해진 표정을 한 촌장으로부터 이상한 요청을 받았다.
바로 귀족의 폐허에서 심사를 받겠다는 것이었다.
사라진 자들의 유적에서 지금부터의 미래를 구축해갈 인간을 선발한다는 것, 이것은 진정 통쾌한 일이었다.
그 제안은 받아들여져 그날 해가 질 무렵, 의자로 가득 찬 지하광장은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 용도도 알 수 없는 장치류 앞에 선 흰 옷을 입은 리나의 모습에 심사관들은 눈썹을 찌푸렸지만, 태연한 척 살짝 미소를 지으며 불만 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 뒤쪽에는 마을 관리원들과 학생들이 있었다. 
단 한 사람 촌장만이 무표정하게 있었던 것은 이번 일을 D와 리나에게 강요받았기 때문이었다. 양녀와의 관계를 심사관 앞에서 공표해 버리면 아무리 강한 권력자라 할지라도 마을에서 추방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촌장은 자신을 응시하는 D의 혼기에 몸을 떤 것이다.
그 D는 리나의 등뒤, 아무도 보이지 않는 어둠의 구석에 몰래 서 있었다.

-"귀족에게 지지 않는 생물이라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요? 가장 훌륭한 생체리듬이 생물의 가치라고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요? 귀족에게 지지 않는 야성과 잔혹함, 그리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철저한 파괴 충동.... 전 인간들의 이러한 면을 잘 알고 있습니다."
 
- 또다시 영상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암흑 속의 태양과 반짝이는 별들을 보았다. 또 저편에는 더욱 많은 천억 개의 별들이 빛나고 있었으며 웅장한 거대성운이 수많은 생명을 품어 키우고 있었다. 수소 원자의 바다가 존재 그 자체를 계속 만들어내고 있었다. 
"네 명의 아이들은 이곳에 가고 싶어 했습니다."
리나의 목소리는 늘어서 있는 사람들의 귀에 멀리 들렸다.
"인간과 귀족이 가지는 검은 숙명의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한 개의 완전한 지적 생명체로서 대우주의 의지에 참가하려고 했습니다. 그건 이제 또다시 꿈으로밖에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만, 아니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억울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갑자기 광경이 바뀌었다.
암흑은 갑자기 사라지고 밝은 빛이 회장을 가득 메웠다. 솟아나는 하얀 빛은 황혼을 쫓아내며 피곤에 찌든 듯한 사람들의 얼굴과 전신을 편안한 색으로 바꾸어놓았다. 
"이것이 새로운 인류의 가능성입니다."
전신을 아름답게 빛내며 리나는 조용히 D 쪽을 본 다음, 빛을 내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이 가능성을 발견한 사람들, 그리고 인간을 보다 고차원인 것으로 이끌어준 존재, 그들은 진정 저주받은 것일까요?"


- 갑자기 소녀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녀 역시 때가 온 것이다. 그러나 그 목소리만큼은 매우 자랑스러웠다.
"저는 귀족의 역사를 공부하고 싶습니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리나는 맥없이 쓰러졌다.
"와서는 안 돼! 보지 말아요...! D."
사람들은 그 자리에 멈춰 섰고, 아름다운 그림자가 리나의 옆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얼굴만 가려줘요..."
검은 스카프가 소녀의 얼굴에 떨어졌다.
"... 고마워요... 옆에 있어줘요. 너무 무서워요."
"계속 함께 있을 거야."
"... 그 물레방앗 ... 오두막에서... "

리나는 고통 속에서도 목소리를 짜냈다.
"그곳에서... 아침에 발견한 하얀 꽃... 그건... 당신 맞죠...? 누군가가 두고 갔는데 당신이 몰랐을 리가... 없..."
"너의 말이 맞아."
"기뻤어요... 너무... 기뻤어요... 날 좋아하는 사람이 둘이나 있었어요... 만나고 싶어요, 또 한 사람을..."

"얘기하지 마."
리나의 손이 올라갔다. 쓰러져 녹아내리기 바로 직전의 그것을 D는 살짝 잡았다. 처음이었다. 그에게는 두 번 다시없는 일이었다.

 

- "안녕... D. 우리들의 가능성을..."
목소리와 동시에 D의 손 안에서 무거운 것이 사라졌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 머리 위에 쏟아진 눈부신 빛이 그들의 긴 그림자를 바닥에 드리우고 있었다.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 속에 서 있던 한 가녀린 소년이 젖은 눈을 들었다. 아름다운 흡혈귀 헌터의 모습은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 며칠 뒤, 어린 풀이 돋아나 있는 길 위를 아름다운 사람과 말이 지나가고 있었다.
새벽은 밝아왔지만 회색 구름이 동쪽 하늘을 두껍게 덮고 있어 아침 햇살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불어온 슬픈 바람이 검은 코트 깃을 흔들며 풀잎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 "나, '수도'에 가요. 귀족의 역사를 공부할 겁니다."

버스 뒤를 쫓듯 한바탕 바람이 불었다.
D는 떠올렸다.
소녀의 마지막 말에 귀 기울이고 있던 한 소년의 얼굴을... 그 소년은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듯이 그렇게 리나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D는 오랫동안 소녀에게 흰 꽃을 보냈던 소년이 바로 그 소녀의 꿈을 이어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어느새 구름은 사라지고 따사로운 은혜를 머금은 햇살이 저편으로 사라져 가는 작은 버스를 전송해주고 있었다.

D의 입가에 따뜻한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만약 소년이 그 미소를 보았다면 그것을 떠올리게 한 것은 자신이라며 언제까지나 그 얘기를 했을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 자랑스러워해도 좋을 만큼 아름다운 미소였던 것이다.

 

 

<4권 어둠의 목소리>


 

 

- 달이 높이 떠 있었다.
변경의 밤이 제아무리 위험하더라도, 밤 그 자체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요수(妖獸) 마인(魔人)이건 그들도 꿈만은 평화로울 것이다.

- 여기에도 꿈꾸는 사람이 하나 있다.
울창한  속이었다. 변경의 밤에 진정한 정적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잿빛 오니에리시다 나무 밑동에서, 그리고 무성하게 우거져 있는 시퍼런 마리오캄바 덤불 속에서, 무언가가 울어대거나 꿈틀대며 끊임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꿈이야 평온하겠지만, 숲 속의 밤은 굶주림과 불길함이 소용돌이치는 세계이다.

 

- 어둠 속에도 색깔은 존재한다.
바람소리에 실려 온 어떤 이상한 소리에 홀리기라도 한 듯, 달빛을 받아 찬란하게 핀 새하얀 꽃잎이 가늘게 몸을 떨고는 엷은 보랏빛 안개를 내뿜었다. 그러자 그와 동시에 자그마한, 하얀 사람 그림자들이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저마다 손에 작은 독침을 지니고 있는 그들이 꽃즙을 피로 삼고 꽃잎의 피막을 살로 삼는, 꽃 속에 사는 사악한 요정이란 사실은 이 숲에서 용케 살아나간 사람 이외에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 밖에도, 칠흑 같은 어둠 한가운데의 곳곳에서 번뜩이고 있는 핏빛 눈동자는 관찰자 따위는 단 하나도, 단 한 마리도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단순히 변경을 지나가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곳에 사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밤에는 숲 속에서 쉬거나 잠을 청하지 않는다.

- 그런데 지금 이 요물들한테 둘러싸여 있는 나그네는 현재 자신이 처한 위험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렇게나 만들어 놓은 풀더미에 누워 있는 그 모습을 달빛이 외로이 비추고 있다. 챙이 넓은 검정 여행 모자를 덮어쓰고 있어서 얼굴 모습은 분명치 않았지만, 가슴까지 늘어진 흑청색 펜던트, 검은색 롱코트 은색 박차로 멋을 낸 가죽 롱부츠 그리고 무엇보다도 왼쪽 어깨에 차고 있는 우아하고 멋진 장검이 뭔지 모를 어떤 강렬한 인상을 불러일으켜 주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아름다운 자의 몸을 꾸며 주는 장식품들이었다.

 

- "이름을 밝힐 용의는 없는가?"
지금까지 입을 연 적이 없었던 D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감정이 실렸다.
다음 순간, 코트 자락이 공중에 휘날렸다. 은빛 뱀처럼 날름거리는 한 자루의 칼에 천이 찢기는 듯한 감촉만을 남긴 채, 검은 사내는 펄쩍 뛰어 5미터나 뒤쪽으로 물러났다.
공중에서 씽! 하는 활시위 소리가 났다.
D는 반사적으로 대지를 박차고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소리를 지르며 늘씬한 몸을 싱싱한 은어처럼 공중으로 솟구쳐 올렸다.
 
- 왼쪽 어깨에 꽂힌 화살도 뽑지 않은 채 D는 정신없이 쫓아갔다.

 

- 사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춤추기 위해 청동으로 만든, 단순한 파트너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D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파란 불빛을 받으며 사내의 등뒤로 가서 섰다. 그리고는 왼손을 뻗어 그의 어깨에 갖다 댔다.
그러자 사내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순간, D의 눈동자에 소녀의 표정이 들어왔다. 그것은 전율이라고도 할 수 없는, 그렇다고 환희라고도 할 수 없는 이루 형용할 수 없이 불가사의한 표정이었다.

- D는 눈을 떴다.
주위에는 파란빛이 쏟아져 내렸다. 동트기 전에 나타나는 어슴푸레한 빛이었다.
D는 베고 누웠던 수풀 더미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이 모든 것이 꿈이었을까.
왼쪽 어깨를 보니 상처 하나 없었다. 장소도 처음에 잠이 들었던 곳 그대로였다. 꿈속에서는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사이보그 말이, 고삐를 매어 두었던 나무 옆에서 원래 그 모습 그대로 서성대고 있었다.
왼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검을 어깨에 메려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아니야."
쉰 듯 하면서도 아주 진지하게 들리는 묘한 목소리였다.
"그냥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생생해. 난 정말 아팠단 말야."

 

- 길 가던 마을 사람들이 모두 멈춰 서서, 곤혹과 공포와 친밀감이 뒤섞인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여자들은 대부분 이내 황홀한 시선으로 바뀌면서 그의 몸에서 눈을 뗄 줄 몰랐다.

제 아무리 잘난 사내를 만나더라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게 변경의 여자들이다. 외적 아름다움이 곧 정신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게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외적 아름다움이란 어찌 보면 자기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신기루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상대가 최면 능력이나 환각 실체 기능을 가진 새빨간 독거미가 아니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단 말인가.
또 마을을 죄다 불태우고 금품과 여자들을 강탈해 가기 위해 산적들이 보낸 사람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굳은 표정을 풀게 하기 위해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그리고 이 세상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D가 기묘하고도 황홀한 시선을 받으며, 거리를 반 정도 지나왔을 때였다.

 

- D는 문 옆에 있는 안내 카운터로 다가갔다.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간호사는 이미 황홀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하기야 넓은 로비에 있던 여성 환자들이나 다른 간호사들도 모두 마찬가지였지만... 하지만 그들은 단순히 황홀하고 뜨거운 시선만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혼까지 빠져나간 것 같은 그런 표정이었다.
"원장님을 만나고 싶은데."
D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곧 오실 겁니다."
카운터 아래에 있는 스위치를 누르면서 그녀가 신음하듯 말했다. 끈적끈적한 목소리에는 욕정마저 배어 있는 것 같았다.
"직접 오시게 할 수야 없지. 내가 가겠소."
"아닙니다."
간호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이었다.
"오시면 곧바로 연락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나를 알고 있었단 말이오?"
"네. 저, 저도."
또다시 아까와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 "어떻게 내가 올 줄 알았습니까?"
원장은 뭔가 각오한 듯 비장한 어조로 대답했다.
"어젯밤 당신 꿈을 꾸었소."
그는 말을 할 때마다 필요 이상으로 힘을 주었다. 아마도 이 젊은이와 처음 만났을 때 받은 정신적 충격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D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나뿐만이 아니오. 구체적으로 조사해 본 건 아니지만, 온 마을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일 거요. 꿈을 꾼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일이니까."

 

- "그건 벌써 다 잊어버렸소. 하지만 당신이 찾아오리라는 것만큼은 알고 있었소."

 

- "난 당신을 처음 본 게 아니에요. 벌써 몇 번이나 봤어요. 꿈속에서 말예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보단 당신을 훨씬 전부터 아는 셈이지요. 틀림없이 이리로 오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뒤를 밟아 왔던 거예요." 
D는 말 위에서 소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기가 불가능한 일을 해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소녀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고마워요. 제 말을 들어주셔서. 두 번째 만남이긴 하지만 그래도 처음 뵙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난 랜더라고 해요."
"D라고 불러다오."

 

- "당신은 어째서 도코후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죠?"

난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D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죽인 상대방의 이름도, 직업도, 심지어 가족이 있는지조차도 묻지 않으셨어요. 아무래도 상관없단 말씀인가요? 어차피 죽어버렸으니 그만이란 건가요? 왜 당신을 공격했는지 궁금하지도 않으세요? 당신이란 분, 통 알 수가 없군요."
"다른 일이나 생각하지 그래?"
D가 말했다. 그나마 이런 대답이라도 해 준 것은, 자기에 대한 비난이라기보다 자신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 변경에서는 여행자에 대한 관심이나 배려가 터부시되어 왔다. 상대방에 대한 예의라기보다는, 쓸데없이 상대방의 비밀을 끄집어 냄으로써 초래될지도 모를 범죄를 막아 보자는, 실리적인 필요에서 생긴 관습이었다. 

 

- 왼쪽에 자리 잡고 있던 부녀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D를 향해 날아왔다. 그 눈길은 예사롭지 않게 뜨거우면서도 공포에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젊은이는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 난은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끼며, D와 마주 보고 앉았다.
그녀는 카운터 너머에 멍하니 앉아 있는 바텐더한테 패러다임 칵테일을 주문했다. 그리고는 D 쪽을 쳐다보았다.
"샹그리라 와인."
D가 주문을 하자, 바텐더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섰다.
"당신은 어딘가 좀 색다른 데가 있어요."
난이 말했다. 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사람을 죽여 놓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가 하면, 저를 호텔로 데려가지 않고, 이런 곳으로 데리고 와서 이렇게 성인용 좌석을 잡아 주시니 말이에요. 흡혈귀 헌터는 모두 다 당신 같나요?"
"꿈속에서 내 직업도 봤는가?"
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말씀해 주지는 않았지만 그냥 느낌으로 알 수 있었어요. 그리고 분명히 이리로 올 것이라는 것도요. 하지만 그 시기까지는 정확히 몰랐어요."
"어째서 그런 꿈을 꾸었는지 아는가?"
난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어째서 꿈을 꾸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 "그 사내를 가까이해선 안 된다."
보안관이 말했다. 하지만 난에게는 그 소리가 꿈결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그는 위험한 사내야. 그를 가까이하는 사람은 다 불행해진단다. 물론 여자라고 예외일 수는 없지."
"그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말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고 했지요?"
난이 가까스로 질문을 던졌다.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간 듯한 공허한 목소리였다.
"모두들 그에 대해 어떤 식으로 말하던가요?"
보안관은 고개를 흔들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흔들었다.
"아니야. 모두들 잠자코 있었지. 그저 멍하니 문 쪽으로 눈을 돌리거나, 아니면 길 저편만 바라볼 뿐이었단다. 그가 그곳으로 지나간 모양이지? 아마 이 마을을 떠날 때도 역시 마찬가지일 거야." 
"이 마을을... 떠날 때..."
난의 눈동자가 갑자기 태양빛으로 물들었다.
"떠나가려면 반드시 와야만 해요. 이 마을로..."

난이 얼빠진 사람처럼 내뱉었다. 보안관은 이 말의 의미를 한참 동안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 D는 우선 호텔 마구간으로 가서 사이보그 말의 수리와 조정을 부탁해 두었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와 먼저 커튼부터 내렸다.
빛이 차단된 방 안에는 엷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러자 몸에 서려 있던 피곤이 서서히 빠져나갔다.
귀족의 피가 만들어 내는 작용이었다.

- 귀족의 피를 이어받고 태어나는 던필 중에서, D는 특히 귀족의 강인한 체력과 빛에 대한 인간의 내성(耐性)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흐린 날에도 한나절 정도 걸으면 숨이 가빠진다. 그러므로 체내에 쌓인 피로를 없애려면 캄캄한 어둠 속에서 몇 시간 동안 있어야만 한다. 더군다나 따가운 태양 아래서 3시간 정도 걷고 나면 한나절 정도는 잠을 자야 피로가 풀린다. 
하지만 이 청년은 그저 평범한 던필이 아니었다. 


- D는 가죽 가방 안에 들어 있는 작은 케이스에서 건조시킨 혈장을 두 알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한참 동안 들여다보더니 이내 삼켜버렸다. 

 

- 흡혈 귀족의 피를 이어받은 던필들은 사람처럼 일반 음식물에 의지하기보다는 주로 자양분을 섭취하며 살아간다. 
그렇다고 건조 혈장을 아무 데서나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암시장을 찾거나 뒷거래하는 의사를 찾아내야 겨우 손에 넣을 수 있다. 하지만 1000정짜리 한 병만 있으면 1년 정도는 식사를 하지 않고도 거뜬히 살 수가 있다. D의 신체 조건이라면 짧으면 일주일, 길면 반 달 정도는 이 두 알의 캡슐로 거뜬히 버텨낼 수가 있을 것이다. 

 

- 장검을 한쪽으로 치우고 막 코트를 벗으려는데 노크 소리가 났다.
"들어오시오." 
나지막한 목소리였지만 거기에는 상대방을 압도할 만한 위엄이 배어 있었다. 만일 누군가가 실수로 문을 두드렸다 하더라도 들어오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의 힘이 느껴졌다.

 

- D는 묵묵히 그것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지배인은 여전히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정말 놀랐습니다. 꿈속에서라면 모르지만, 이 세상에 진짜로 이렇게 근사한 사내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지요. 정말이지 손님의 머리카락이라도 한 올 얻고 싶은 심정입니다." 
"왜 나를 묵게 했는가?"
D가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장검이 들려있었는데, 지배인은 그것을 보고 놀란 듯싶었다.
"아니, 왜라니요? 손님께서 여기에 묵고 싶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장사하는 사람이 손님을 마다할 이유야 없지 않겠습니까? 아아, 당신이 던필이라서요? 하지만, 안심하세요. 우리 호텔 주인은 그렇게 속 좁은 사람이 아니랍니다." 

 

-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간 이야기 내용인즉 주인이 동의하지 않았으면 자신은 이 호텔에서 결코 묵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이유는 말할 필요도 없이 명확했다.
던필을 일반인과 한 지붕 아래에 묵게 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상응하는 안전장치를 확보한 이후에나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렇게 철두철미한 경영 방침 덕분에, 호텔 주인은 이런 변경에서도 굴지의 재산가로 분류될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 그러므로 수면은 역시 낮에 취해야 했다.
경험 많은 베테랑 헌터라면 이 시간에 적의 숨통을 끊어 놓을 방법을 강구한다. 때문에 대개의 경우 준비를 빈틈없이 마무리해 놓은 이후부터 대충 해 질 녘까지가 수면 시간이었다. 만약 실패했을 경우, 이쪽의 절대 우위는 해가 질 때까지, 즉 어둠이 깔리기 전까지로 한정된다. 그 이후는 승산 없는 싸움을 벌이거나 아니면 어딘가에 숨어 있으면서 해가 뜨기만 기다리든지 둘 중 하나이다. 하지만 어느 쪽을 택하건 헌터가 쉴 수 있는 시간은 전혀 없다. 때문에 사람들은 늘 능력 있는 인재를 찾았으며 그들의 바람에 부응하는 인물만이 흡혈귀 헌터라는 이름을 달 자격이 있었다.  

 

- 시각은 오후 1시를 조금 넘고 있었다.
던필의 수면 시간으로서는 아주 적당한 시각이었다.

 

- 또 무슨 꿈을 꾸게 될까?
꿈속에서는 어떤 세계, 어떤 사람들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까?
잠시 후 조용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인간의 가청 영역을 벗어난 그 숨소리를 오직 벽만이 홀로 듣고 있었다.

- 발 밑에 안개가 흐르고 있었다.
나무들은 엷은 그림자를 드리운 채 D를 둘러싸고 있었고, 적당한 바람이 불어오면서 안개가 가볍게 춤을 추었다.
D는 옅은 안갯속을 헤치며 하염없이 앞을 향해 걷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홀연히 눈앞에 철문이 서 있었고, 자기는 그 앞에 멈춰 서 있었다.  

 

- 하얀 드레스를 입은 소녀와 온몸을 검은 옷으로 감싼 헌터는 말없이 마주 보고 있었다.
매우 가까운 거리였다.
하지만, 몇 미터도 채 안 되는 그 거리가 마치 무한히 먼 공간처럼 느껴졌다.
"내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
D의 입가에서 푸른빛이 환영처럼 흔들렸다.
상대방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 편이 오히려 이 소녀의 분위기에 더 잘 어울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 두 눈동자에는 신비스런 빛이 담겨 있었다.
기쁜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한 눈빛이었다.
기쁨과 슬픔은 어쩌면 같은 빛깔을 띠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 "불러들였으면 말이 있어야지. 아무 말도 않으면서 돌아가지도 못하게 하겠단 말인가?"

D가 중얼거렸다. 
"난 언제까지나 여기에 머물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 너의 꿈은 깨어날 수 없는 것인지는 몰라도 내 꿈은..."

- "당신이 헌터라는 건 잘 알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를 위해 한 가지 해주실 수 있는 일이 있어요. 그 사내를 파멸시켜 주세요." 
죽여 달라고는 하지 않았다.
단지 파멸시켜 달라고 하는 것을 보면, 이 소녀도 자신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을 그렇게 만든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녀가 가리켰던 그 사내라면 단 한 사람밖에 없다.
"여기는 꿈의 나라다. 녀석을 만날 수 있을지 어떨지도 모르는 일이며, 또한 만난다고 하더라도 파멸시킬 수 있을지 장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 D가 두 사람이라니?!
게다가 지금 공중에 떠 있는 두 사람은 모두 오른손에는 장검을 들고, 왼손을 가슴 앞으로 내밀면서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는데, 그 모습조차도 완전히 똑같은 게 아닌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두 명의 흡혈귀 헌터 사이에는 마치 거대한 거울이 한 장 놓여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동시에 땅을 박차고 오른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두 명의 D가 서로 대칭으로, 오른쪽 어깨에서부터 상대방의 좌경부 쪽으로 칼끝을 대고 베어 내려는 순간, 서로 부딪친 검 주위로 시퍼런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어 두 사람의 D는 다시 위치를 바꾸며, 서로 지면으로 내려왔다.

 

- 허와 실이 서로 싸움을 벌일 경우 인간은 거기에 함부로 껴들지 못한다. 

 

- 샐든 노파네 집은 과수원 서쪽 끝에 있었다.
사철 푸른 풀이 일제히 바람에 흔들리고, 그럴 때마다 대지와 언덕은 자신들의 형태를 바꾸곤 했다.
노파는 빨간 지붕에 풍향계가 달려 있는, 거의 쓰러져 가는 집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고독한 여생을 보내고 있는 120살이나 된 할머니에게는 아주 잘 어울리는 분위기였다. 


- 샐든 노파는 현관 앞 포치에 내놓은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마지막 손님이 이 집을 찾았던 게 벌써 몇 해 전이었더라? 노파의 머릿속에는 그네들이 학생들이었다는 기억만 남아 있을 뿐이다. 가끔씩 어떤 백발노인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왜 그 노인이 그렇게 정겹게 느껴지는지 그 이유도 알 수 없었다. 심지어는 집 뒤쪽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 서있는 비석의 주인이 그 노인이라는 사실도 벌써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노파가 사이보그 수술을 받은 지도 벌써 백 년이 넘었다. 그 수술 덕분에 30년에 한 번씩 영양소가 섞여 있는 혈액만 교환하면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빈번하게 찾아오지 않는 것은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 그날 오후, 노파가 흔들의자에 앉아서 왕복 운동을 2천여 번쯤 했을 무렵이었다. 실로 얼마 만인지조차 알 수 없는 방문자가 노파를 찾아왔던 것이다.
D는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노파를 바라보며, 말에서 내린 다음 가까이 다가갔다. 그 의자는 제법 튼튼해 보이기는 했지만 상당히 낡고 닳아 있었다. 

 

- "멀리서 왔다는 걸 어찌 아셨습니까?"
D는 주름살투성이인 갈색 손으로 컵을 내려놓는 노파의 주름진 얼굴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마치 주름으로만 빚어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자네 같은 눈매를 가진 사내가 한 마을에 오래 머물러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

 

- "인간이라는 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그러면서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쇠사슬을 끌면서 살아가지. 그 쇠사슬의 끝은 지면에 못 박혀 있거든. 그러니 거기서 2, 3킬로미터 정도야 벗어날 수 있겠지만 더 이상은 나아갈 수 없지. 쇠사슬은 '가정'이 될 수도 있고, '재산'이 될 수도 있고, 또 어떤 때는 '사랑하는 사람'이나 '추억'이 되는 경우도 있지. 젊을 때는 그 어떤 쇠사슬이든 땅에서 뽑아내려고 발버둥 치지만, 10년, 20년 세월이 흐르면 쇠사슬은 점점 더 굵어지고 많아지기 마련이거든. 그러면 결국 적당한 쇠사슬을 하나 택해 안주할 수밖에 없지. 일단 그렇게 되고 나면, 인간의 눈에는 자신이 택한 그 쇠사슬이 황금처럼 귀중하게 보이기 시작하지. 그게 진짜 황금이 아니라, 금박을 입힌 것에 불과하다는 걸 모른 채 말이야. 신은 인간의 눈에 그 어떤 실체라도 사실적으로 보이지 않게 하려고 손을 쓰거든. 어때? 무슨 말인지 알겠나? 그렇지 않은 인간, 즉 맑은 눈을 갖고 쇠사슬을 하나도 감고 있지 않은 인간은 어쩌면, 신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가 만들었다는 얘기야.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만든 걸까?" 

 

- D는 말이 없었다.
"... 나라면 말일세, 설사 백만 번쯤 자넬 만난 적이 있다 하더라도 꿈속에서까지 자넬 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걸세. 막판엔 반드시 울게 될 테니까 말일세. 변경의 여자들이야 다들 눈물 흘리는 데는 익숙해져 있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우는 건 괴로운 일이고 또 그걸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 D는 주저 없이 일어섰다.
"잠깐!"
노파가 제지했다.
"한 잔 더 마시고 가게나. 모처럼 만난 이야기 상대가 이렇게 금방 가버리면 내가 섭섭하지 않은가? 다음에 또 누군가 찾아오려면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알 수 없으니 말이야. 평화스런 마을이긴 하지만 난 너무 외롭고 지쳐 있다네."

D는 마다할 수가 없어서 결국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라 마음씨도 곱군. 자네도 언젠가는 한 곳에 정착해서 살게 될 걸세. 좋은 아내를 만나서 말이지."

그 말을 남기고 노파는 다시 주방으로 갔다.

- "평화스런 마을이라?"
D가 중얼거렸다.
"맞아, 평화스런 마을이야."
무릎 위에 올려놓은 왼손 부근에서 쉰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은 마을 같아?"
"그야 모르지."
"너도 모른단 말야?"
"평화로운 마을이 곧 좋은 마을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니까. 게다가 이 세상에 항상 좋은 건 존재하지 않아, 귀족에게도 인간에게도... 그리고 너한테도."

- D는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내다보았다.
초원은 시시각각 그 모습을 바꾸고 있었으며, 파란 잎마다 아침의 생명이 충만해 있었다.
쏟아지는 하얀 햇살 속에서 D만이 겨울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 이윽고 산뜻한 향내를 풍기면서 노파가 돌아오더니 컵을 내려놓았다.
"자, 마시게."
컵 안에는 조금 옅은 호박색 액체가 담겨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는 파란 꽃잎이 한 장 떠 있었다.

자그마한 파란 바다.
D는 그것을 입가로 가져갔다. 왼손이었다. 오른손을 항상 비워 두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혹시 어디선가 있을지 모를 불시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컵을 입으로 가져가던 손길이 멎었다. 하지만 너무나 자연스런 동작이었기에 움직임이 멎은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 "자 이제 독을 넣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지? 의심 많은 헌터로구만.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면 마시지 말게나. 모처럼 베푸는 남의 호의를 그런 식으로 받다니."
D는 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노파는 D의 목젖이 움직이는 것을 즐거운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 D는 컵을 내려놓으며 일어서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노파를 돌아보았다.
"할머니도 저에 대한 꿈을 꾸셨습니까?"
노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의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망설임 때문이었을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난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했네."
"위험하다구요?"
"자네는 위험한 사내라고, 꿈속에서 그렇게 말하며 걷고 있었어.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우리 모두는 그걸 잘 알고 있었지."
그것은 어쩌면 가장 적절한 표현일지도 몰랐다.

- "잘 마셨습니다."
그 한 마디를 남기고 D는 방을 나갔다.
"행운을 비네."

 

-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나? 그 차를 마시다니. 거긴 독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구."
"성분이 뭔지 모르겠어?"
"응, 무슨 차인지는 알겠는데, 분명 알 수 없는 물질이 들어 있었어."
"어떻게 되겠지 뭐."
D는 마치 남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는, 혼자 중얼거렸다.
"위험한 사내라..."
"누가 듣더라도 맞는 말일 거야. 하지만 그 노파 말로는 마을 사람들이 다 그렇게 말했다던데."
저희들한테 위험한 사내라고 했겠다?
"그러니까 마을 사람들은 네가 위험인물이란 걸 알면서도 불러들인 셈이 되는군. 불러들여서 죽이려고 했던 걸까? 그렇다면 그 농부의 행동도 이해가 되는군... 하지만 꼭 그렇다고 장담할 수도 없지. 노파는 그렇게 말했지만, 실제로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느꼈다고는 생각할 수 없어. 그들이 다 너에게 적대감을 갖고 있지 않았던 건 분명해. 게다가 이 마을은 평화스런 마을이라구."
"평화스런 마을이라..."
D의 중얼거림은 바람에 실려갔다. 경치도 좌우로 날아갔다.

"너는 이 마을을 떠날 생각이었지?"
그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누군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오싹한 그런 광경이었다.

 

- 말이 언덕 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던 샐든 노파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섹시한 윙크를 보냈다. 그리고는 포치에서 내려와 뒤뜰로 갔다. 울타리로 둘러싸인 100평방미터 정도 되는 뜰에는 갖가지 색깔의 꽃들이 자기가 더 아름답다고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노파는 그중에서 가냘픈 파란 꽃잎이 달려 있는 한 무더기의 꽃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위험한 사내긴 하지만, 그래도 그와 함께라면 위험한 일도 한 번쯤은 당해보고 싶구나. 이 꽃잎이 효과를 내주었으면 하는 마음과 그렇지 않은 마음 중에서, 어느 것이 내 진심인지 나도 모르겠구나. 오랜만에 소녀처럼 마음이 두근두근 해지는 걸."
노파는 연신 발 밑의 파란 꽃들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분명 그 차는 여기서 딴 것이긴 해... 그런데 대체 언제부터 여기에 나 있었던 걸까? 이건 처음 보는 건데."

 

- "좋은 꿈이란 어떤 꿈을 말합니까?"
아이린은 잠시 생각하더니 멀리 창공을 쳐다보았다. 마치 그곳에서 무슨 중요한 것을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순정 만화 같은 거죠, 뭐."
D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길을 걸을 때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손을 잡는 꿈, 자기가 읽고 싶은 책이 도서관에 가득 진열되어 있는 꿈,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모두가 남을 배려하며 그 사람을 위해 도움이 될 만한 걸 먼저 하려는 꿈, 최신 패션 잡지가 이 마을에 들어오는 꿈, 열에 들떠 고생하는 아이를 위해 모든 약을 빠짐없이 갖춰 놓은 약국에 관한 꿈, 별로 일하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는 꿈, 친한 사람들하고 달밤에 연못가로 반딧불 잡으러 다니는 꿈, 그리고..."
아이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러자 그녀가 아닌, 다른 목소리가 말을 덧붙였다.
"인간과 귀족이 나란히 거리를 걸어 다닐 수 있는 꿈?"
아이린은 멍한 얼굴을 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신의 방문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당신은 마법사인가요?"

- "시빌을 물은 귀족은 상대를 선택합니다."
아이린이 당황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의도적으로 시빌을 선택했단 말입니까?"
"낡은 저택과 파란빛, 하얀 이브닝드레스와 검은 야회복, 그리고 무도회, 뭔가 기억나는 거 없습니까?"
아이린이 놀란 듯 반짝이는 눈망울로 말했다.
"우리들만 당신 꿈을 꾸었다고 생각했는데 당신도 시빌 꿈을 꾸었군요?"

-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건 그녀의 소원이었어요. 하얀 드레스를 입고 연미복을 입은 사내와 오래된 저택의 홀에서 밤새도록 춤을 추는 것이. 파란 불빛에 싸여서 말이죠."
"소원은 분명히 이루어졌을 겁니다."
"꿈속에서는 영원히 아침이 찾아오지 않는 건가요?"

"그건 모릅니다."
"시빌이 행복하다고 생각하세요?"
"..."

 

- 아이린은 이마까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날 그냥 내버려 두세요. 난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있어요. 욕심만 부리지 않으면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고, 내가 진정 살아 있다는 실감이 들기도 하지요. 물론 시빌처럼 근사한 꿈은 못 꾸지만."
"근사한 꿈일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좋은 꿈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D는 살며시 모자 끝을 만졌다.
그것은 그의 작별 인사였다.

 

- 붉은 방울들이 일제히 위로 솟아올랐다.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혈포들이 균일하게 퍼지더니, 곧 둥근 천장과 같은 모양으로 포진했다.
D는 죽음의 안개가 형성한 천장 아래에 놓이게 된 셈이었다. 천장까지의 거리는 10미터 정도였다. D가 도약할 수 있는 높이와 그의 검술 능력을 감안한다 해도 손이 미치기에는 좀 거리가 멀었다.

 

- D의 왼손이 올라갔다.
혈포에 눈이 있다면 자신들을 향해 떠오르고 있는 인간의 얼굴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작은 대나무 잎을 연상시키는 눈은 무섭게 이글거리고 있었으며, 얇은 입술은 휘파람이라도 부르려는 듯 밖으로 툭 튀어나와 있었다.
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공기가 한 방향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의 작은 입술이 있는 방향이었다.
그 강력한 흡인력에 의해, 혈포들은 하나의 선을 긋듯 모조리 D의 손바닥으로 내려왔다.

- "내 꿈을 꾸었다고 했지요?"
"네."
"어떻게 생각하시오?"
아이린은 입을 열지 않았다.
벌써 흰머리가 듬성듬성 섞여 있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 꼭 말해야 되나요?"
"좋을 대로 하시오."
"... 미웠어요. 죽이고 싶을 정도로."

 

- 어떤 사람은 위험한 사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밉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의 생각은 반드시 그 두 가지 중 어느 하나에 속할 것이다.
꿈속에서도 D는 여전히 불안한, 그래서 기피해야 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 "이유는 모르겠어요. 그냥 정말로 미웠어요. 우리들이 필사적으로 지켜온 생활을 당신이 모두 파괴시킨 것만 같아서. 하지만 꿈에서 깨어나면..."
말이 중단되었다. 잠시 후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는 즐겁다고 했지만... 사실 난 시빌이 부러워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나이를 먹지 않고 꿈만 꿀 수 있으니까요..."
"그게 꼭 즐거운 꿈이라고 할 수만은 없지 않겠소?"
"모두들 그렇게 말하죠. 하지만 평생 깨지 않고 있을 수 있다면, 그게 어떤 꿈이더라도 현실보다는 행복할 거예요. 설령 남을 미워하는 꿈이라도 말예요. 눈을 뜨고 나면 그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건..."
목소리엔 피로한 기색이 서려 있었지만, 아이린은 처음으로 격한 어조로 말했다. 그것을 들으며 D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말 위에 올라앉아 있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차갑기만 했다. 

 

- 아이린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보안관은 D에게 의자를 권했다.
"괜찮습니다."
D는 가볍게 사양하고는 벽 쪽으로 걸어가 그곳에 기대 서 있었다. 그의 그런 모습을 보안관은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등뒤에도 허점을 만들지 않는 게 헌터의 철칙인가?"
"이 소녀는 당신 애인이오?"
D는 보안관의 질문에는 대답도 않고 되물었다.
보안관은 침대 위의 소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30년 전의 이야기다."
"부인한테는 지금도 마찬가지요. 매일 아침 당신이 옛 애인을 만나러 가는데, 그걸 보는 부인의 마음이 오죽하겠소?"
"그 이야기는 그만두지. 자네가 뭘 안다구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

"나는 여기 누워 있는 이 소녀한테 이 마을로 와달라는 초대를 받았소. 물론 꿈속에서요. 그런데 떠나려 하자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져 사람이 죽었지요. 그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열쇠는 잠들어 있는 당신의 옛 애인이 쥐고 있소. 날 이곳으로 불러들인 이유와 내가 지금 이 마을을 떠날 수 없는 이유는 아마 같을 겁니다. 내가 아는 건 그것뿐이오." 
"내 가정의 사정에는 관심이 없다는 얘기로군. 그럼 잘 됐네. 이 이상 더 골칫거리가 생기기 전에 이 마을을 떠나게."
"난 상관없지만 날 못 떠나게 하는 사람이 있소."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게. 내가 마을 끝까지 데려다주겠네. 그러니 두 번 다시는 돌아오지 말게나."

 

- "뇌에 직접 자극을 준다고 하셨는데 위험은 없습니까?"
"벌레에 물려서 간단한 약을 바를 경우에도 만에 하나 정도의 위험은 따를 수 있소."
"이건 인간의 생명에 관계된 문제입니다."
보안관은 정면으로 의사를 쳐다보며 말했다.
"만에 하나 있을 수 있는 위험 가능성조차도 전 용납할 수없습니다. 게다가 시발이 눈을 뜨면 지금 현재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지도 궁금하구요."
"무슨 말인가?"

"그녀의 목에 난 상처가 사라지지 않는 한 영원히 눈을 뜰 수 없다는 건 생각하지 말기로 합시다. 그렇지만 저 상처 때문에 시빌은 여전히 소녀입니다. 틀림없이 꿈도 소녀다운 꿈을 꾸겠지요. 하지만 눈을 떴을 때, 꿈도 육체도 현실로 돌아와 버린다면... 전 그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원장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면 할 수 없는 일이오. 보안관, 당신은 어느 쪽을 두려워하는 거요?"
보안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스스로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자신의 졸렬한 사고에, 갑자기 한 줄기 서광이 비치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 "귀족의 주술이 풀렸을 때, 육체는 젊음을 잃을 것이고, 또 꿈도 뺏기게 되지. 무엇인가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건 마찬가지 아니겠소? 무얼 두려워하는 거요, 보안관?" 
원장의 말은 비수처럼 날카로왔다.
침묵은 모두의 몸을 찌르듯 파고들었고, 원장과 함께 들어왔던 간호사는 자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나도 모르겠어요."
보안관은 낮게 신음했다.
처연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는 병실에서 시빌만이 평온한 얼굴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갑자기 난이 물었다.
"어떻게 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니? 내가 마을 끝까지 따라가서 배웅하고 올 거다. 그다음은 그가 알아서 할 거구."
"그가 떠날 수 있을까요?"
그것과 비슷한 말을 조금 전 헌터에게서도 들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보안관은 말 옆구리를 차는 것도 잊어버렸다. 

"그에게 들었니?"
"아녜요. 아무 말도 못 들었어요."

 

-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또 시빌은 어떻게 되는 거구요? 보안관, 당신은요? 그리고 우리들은 또 어떻게 되나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 D를 찾아내는 데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대로로 통하는 길은 단 하나뿐이었다.
D는 병원에서 3분의 1도 못 간 지점에 있었다.
보안관은 문득 자신에게 D에 대한 피해 의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 D는 자기가 있는 쪽을 바라보며 멈춰 서 있었다.
보안관은 일단 말을 세웠다가 단숨에 거리를 좁혀 갔다.
문득 무슨 함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이내 그런 생각을 떨쳐버렸다. 그런 비겁한 짓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적어도 남으로 하여금 그렇게 믿게 만드는 어떤 힘 같은 것이 있었다.
보안관은 뽀얀 흙먼지를 사방으로 흩날리며, 헌터와 말머리를 나란히 했다.
상대는 그저 덤덤한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 "날 기다린 건 아닌 것 같군."
보안관이 말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따라왔소?"
D가 물었다.
"무슨 말인가?"
"병원에서 곧장 왔는데도 5분이나 걸렸단 말이오?"

"그렇네."
보안관은 조금 당황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헌터의 표정에서도, 주변 환경에서도 이상한 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묻는 목소리도 평범했다.
하지만 그가 서 있는 방향만은 달랐다.
"그렇다면 이게 정상의 한계일까?"
"그게 무슨 말이지? 잠꼬대라도 하는 건가?"
마지막 질문은 지금 D가 품고 있는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한 일종의 엄포였는데, 헌터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말했다.

"난 곧장 왔소."
대로 쪽에서 돌아왔다면 당연히 그렇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다음 순간,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보안관은 상대방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이 녀석이 병원에서 곧장 대로 쪽으로 향했다는 얘기는 아니겠지.
그걸 물어보기도 전에 D는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고는 따라오라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은 채 걷기 시작했다.

 

-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소?"
예기치 않은 당돌한 질문에 보안관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D를 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직 스무 살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젊은이였다. 당신 어쩌고 하는 것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지만 왠지 반발심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게 되고 싶었지."
보안관은 가슴에 달린 배지를 가리켰다.
"시빌에게도 얘기했었소?"
"왜 그런 걸 묻는 거지?"
"그건 시빌의 꿈이었을지도 모르겠군. 그녀의 꿈이 곧 당신의 꿈이었을 테니까."
"얘기한 적이 없네. 난 잡화상이 될 뻔했지."
D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곧장 앞으로 나아가시오. 난 좀 기다리겠소."
길은 15미터 정도 전방에서 좌우로 나뉘어 있었다. 그 앞은 푸르른 숲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헌터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한 번 던지고 보안관은 전방을 향해 계속 말을 몰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천천히 숲을 돌았다.
보안관은 눈을 의심했다.
앞쪽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과 말이 홀연히 나타났던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 아름다운 얼굴은 D가 분명했다. 하지만 보안관은 그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 "공간 왜곡인가?"
"그거라면 나도 경험이 있소. 하지만 그것과는 다르지요."
"자네를 이 마을에서 못 나가게 한다는 그 무엇이란 게 바로 이건가?"
D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앞만 바라보았다.

 

- 보안관의 가정 사정과 연관이 있는 공적인 일이라고 설명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일단은 대체로 안심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자기들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실은 왜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그의 꿈을 꾸었는지, 그 이유를 조사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것으로 이야기는 끝났다.
D는 그 커다란 체구를 작고 좁은 침대 위에 눕힌 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얼핏 보기에도 참으로 옹색한 모습이었다.
"역시 어울리지 않는군."
보안관이 말을 걸었다.
하지만 D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그대로 입을 다물기도 뭣했는지 계속 말문을 이었다.
"귀하신 분을 누추한 방에 모신 것 같아 왠지 영 마음이 불편한 걸. 저기 좀 보게나. 창문 밖에 온 마을 여자들이 모조리 몰려나와서 이쪽을 보고 있군. 문 밖에는 자네에게 전해 달라는 사식 따위의 물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말이야."

 

- "당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평화로운 마을이라고 했었죠?"

"그랬지."
"큰 사고나 사건이 일어났던 적은 없었소?"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 평화롭긴 했지만 아무래도 여긴 변경 마을이니까."
"당신이 죽을 뻔했던 적은 지금까지 몇 번이나 됩니까?"
거듭되는 질문에 보안관은 미간을 찡그렸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질문은 오히려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공수가 뒤바뀌어 있는 데도, 자신으로서는 그것을 바로잡을 수가 없었다.
뜻밖의 질문이었다. 속에서 서서히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보안관은 꾹꾹 참았다.
"왜 그런 걸 묻는 거지? 어쨌든 난 지금 자네와 이렇게 얘기까지 하고 있으니 그럼 된 거 아닌가?"
"살아 있다는 사실 그 자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요."

D가 조용히 말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하는 점이오."

 

- D는 낯익은 숲 속을 걷고 있었다.
야밤이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얇게 깔려 있는 밤안개의 숨소리까지도 들려올 듯한 정적이었다.
풀 밟는 소리조차 울려 퍼지지 않는 것은 듣지 않으려는 자기 의지 때문인지 아니면 꿈의 세계이기 때문인지, D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 "날 들여보내지 않을 셈인가?"
D가 조용히 물었다.
"여기선 싸워봤자 쓸데없는 짓거리일 뿐이야. 꿈속에서 결말을 내봐야 어차피 깨고 나면 그만일 테니까."
상대는 대답도 할 줄 모르는 조형물처럼 그냥 우뚝 서 있었다.
"너도 그 저택과 마찬가지로 소녀가 만들어 낸 것. 그녀는 나를 초대하고 또 나를 구해 주었다. 썩 비키지 못할까!"

"돌아가게."

 

- "저택 안에 다른 손님이라도 있나? 아니면 이제부터 올 예정인가? 그 화살 말인데, 섣불리 쏘다간 뒷일을 감당할 수 없을걸."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달빛이 얼어붙고 안개의 흐름조차 멎었다. 살기가 넘치는 세상 속에 젊은 헌터의 아름다움만이 돋보였다. 
강철 화살이 날아왔다.
D는 왼손을 뻗어 그것을 맨손으로 붙잡았다.
화살에 닿자마자, 그 손은 새하얗게 변했다.

 

- 화살에는 아무런 혈흔도 없었다.
꿈의 세계에 살고 있는 생물에게 애당초 피와 살이 있을 리 있겠는가?
아니, 이곳은 언제까지나 깨지 않는 소녀의 꿈 속이다.
 꿈속에 무단 침입한 자가 있으니, 두 사람이 그 정체를 파악하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사내가 앞으로 달려 나갔다.
D도 그에 못지않은 속도로 수풀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가 속해 있는 세계에서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D는 그것을 뽑아 올리려고 힘을 주었다. 하지만 곧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꿈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물리 법칙이 적용되었는지, 그것은 새까만 지면과 일체화되어 있었다.
D는 벨트에서 가는 단검을 꺼내 천 조각을 찢어낸 다음 수풀 속을 빠져나왔다.


- 두 사람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 자기가 모르는 미지의 세계에서 아직도 끝없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것일까? 생각해야 할 일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는 굳이 깊이 생각하려 하지 않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흑의의 사내는 어쩌면 침입자가 있을 것을 미리 예견하고 D를 돌려보내려고 왔던 것 같다. 적어도 오늘 밤만은 적의를 갖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저택은 여전히 파란 불빛 속에 우뚝 서 있다.

 

- D는 기척도 없이 뒤쪽을 향해 달렸다.
가슴 부근까지 다가왔던 안개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분하다는 표시였다. D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느낄 수 없었다.
다만 앞쪽에서 안개가 다가오고 있었는데, 자기를 노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 현실 세계의 법칙에는 역행하는 것.
도망갈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안개가 노리는 것이 저택과 D를 갈라놓으려는 것이라면, 언제까지나 마냥 후퇴만 할 수는 없지 않는가.
"꿈의 비명 소리를 듣고 안개가 생겨난 걸까?"
D가 중얼거렸다.
안개는 점점 거리를 좁혀 왔다.
D는 움직이지 않았다.
은백색 세계가 시야를 온통 뒤덮었다.
과연 덤빌까?
하지만 안개는 하얀 꼬리를 끌며 그냥 흘러가 버렸다. D는 그 뒤에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저택에는 아무런 변화의 조짐도 보이지 않았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저택은 파란 불빛을 받으며 우뚝 서 있을 따름이다.

 

-"꿈속에서 또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꿈이 이 꿈속으로 침입한 걸까? 어느 쪽이건 귀찮기는 마찬가지겠지. 자, 어떻게 빠져나가면 좋을까?" 
그 목소리의 말뜻은 무엇일까? 그 안개가 꿈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조차 미치게 하는 환영이란 뜻인가?
"꿈은 꿈인 상태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는 걸까?"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집처럼 흔들리고 있는 저택도 알아들을 수 없으리만치 작은 목소리로 D는 중얼거렸다. 어딘지 모르게 지친 듯한 목소리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파괴시키고, 아름답다는 이유로 파괴시키고, 또 파괴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파괴시키는 인간들. 그들은 이렇게 해서 무엇을 남기지?"
그것은 눈앞에 서 있는 소녀에게 한 말은 아닐 것이다.

- 소녀의 목소리는 이미 완전히 변해 있었다. 더 이상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소녀는 하얀 구름처럼 생긴 조각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조각들은 소녀가 입을 놀릴 때마다 소녀의 입 속에서 튀어나왔다.
여기는 역시 꿈의 세계인가? 목소리가 구름으로 변하다니...

 

- 하지만 반 토막짜리 장검은 꽉 붙잡고 있는 D의 손가락 사이에서 점점 길어지더니, 마침내 D의 가슴을 깊이 꿰뚫었다. 칼끝이 D의 등 밖으로 비집고 나와 있었다.
시빌이 생긋 웃었다.
그러나 D가 왼손으로 가슴에 박힌 칼을 천천히 뽑아내는 모습을 보자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 젊은이는 심지어 타인의 꿈속에서도 그들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일까? D는 자신의 가슴을 깊숙이 관통하고 등 밖으로 비집고 나온 장검을 뽑아냈다. 그리고는 즉각 시빌로 분장한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 굳이 커다란 비명 소리를 들을 필요도 없었다. 통증은 현실이었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피 또한 현실이었다. 그것은 꿈속에서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꿈속에서 죽으면 현실에서도 실제로 죽게 되는 것일까? 

 

- D는 혼신의 힘을 다해 격자 모양으로 얽혀진 덩굴을 향해 칼을 내리쳤다. 하지만 칼은 표면에서 불꽃을 일으키며 튕겨 나왔다.
"진퇴양난이군."
왼손이 신음하는 듯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한번 먹어보겠나? 천장이나 벽을?"
D도 조용히 묻는다. 이런 판국에 한가로이 먹는 타령이나 하고 있다니, 너무 여유작작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물론 생과 사를 가르는 중요한 대화였다.
"농담하지 말게. 꿈을 어떻게 먹겠어? 그거야말로 진짜 꿈같은 얘기야."
"그럼?"
"어떻게 할까?"
"꿈에서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죽어본 사람이 없으니까 그야 모르지. 뭣하면 이 모든 것들을 만들어 낸 장본인한테 물어보는 게 어떨까? 그 녀석에게 말이야."
D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잠자코 오른손을 코트 안으로 집어넣었다.
"꿈속에서 죽는다구? 재미있는 실험이 되긴 하겠지만, 섣불리 그럴 수는 없지."

 

- 종이 조각 같은 것 하나가 허공에서 너풀너풀 춤을 추었다. 바로 그것을 D의 단검이 꿰뚫고 지나갔다.
그리고 종이와 칼은 한 덩어리가 되어 위로 솟아오르는 바닥 한 귀퉁이에 명중했고, 부드러운 마찰음을 내면서 부풀어 오르는 연한 진흙 바닥에 깊숙이 내리 꽂혔다.
갑자기 주변이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였다.
D는 눈을 떴다.
그는 시빌의 저택으로 가는 길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꿈속의 꿈에서 깨어난 그가 다시 본래의 꿈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말없이 왼손이 있는 곳으로 눈길을 준다. 손등에도 손바닥에도 상처 하나 없다. 장검은 여느 때처럼 칼집에 그대로 들어 있었다.

- 칼끝에는 갈색 천 조각이 달려 있었다.
수풀 속에서 만난 자객이 남긴 것이다.
녹아서 무너져 내린 저택이 자객이나 그 패거리가 만들어 낸 악몽이라면, 시빌의 꿈과 연결된 그 천 조각에 가한 일격은 꿈속의 꿈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으리라.

 

- 꿈에서 깨어났는데 아직도 꿈의 세계라니.

 

- "어떻게 할 건가?"
예의 목소리가 다시 물었다.
D는 걷기 시작했다.
그것이 꿈이든 현실이든, 이 젊은이에게는 아무런 차이도 없었던 것이다.

 

- "자네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사정을 설명해 주겠네. 사실 이런 얘긴 정말 하고 싶지 않네. 아마 자네도 듣고 나면 차라리 안 들은 게 나았을 거란 생각이 들걸. 하지만 어차피 결론은 이미 나 있으니까. 불행한 쪽으로 말일세." 

 

- "그 방 밖에서 자네와 헌터를 만나기 두 시간 전의 일이었지. 나는 막 진찰을 마치고 돌아와, 잠시 동안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네. 담배를 한 대 피우면서 쉬고 있었지. 그런데 우연히 책상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이게 있더라구."
"..."
"그렇지만 그때는 재료뿐이었네. 설계도조차 없었어. 하지만 슬쩍 보기만 했는데도 단번에 제작 방법을 알 수 있었지.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말게. 머리가 돈 건 아니니까. 내가 그런 인간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도 자네가 잘 알고 있지 않나? 나는 언제나 사실이 아니면 말하지 않는 사람이야." 

 

- 원장의 눈에 처연한 빛이 감돌았다. 가슴속에서 너무나도 귀중한 것이 사라지고, 그 빈자리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것 같은 빛이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군. 학교가 끝난 후, 함께 손을 잡고 귀가하던 자네와 시빌의 모습이 말일세. 그리고 꽃밭에서 자네에게 줄 목걸이를 만들고 있던 시빌의 모습이 말일세. 그건 아마 흰색과 파란색의 세이레인 꽃이었을 거야. 시빌이 그 꽃목걸이를 목에 걸어 주자 자네는 부끄러워하며 금새 벗어버렸지. 자넨 참 바보 같았어. 하지만 시빌이 강에 빠졌을 때에는, 어른조차 뛰어들기 어려운 급류에 자네가 제일 먼저 뛰어들었지. 또한 시빌이 포도를 따러 친구들과 함께 나갔다가 혼자만 돌아오지 않자, 자넨 낡은 구식 라이플을 집어 들고 요괴들이 득실대는 숲 속을 찾아 헤매기도 했지. 그렇지 않나?" 
보안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앞에 있는, 영원한 영겁을 응시하는 듯한 표정으로. 
"시빌의 손은 따뜻했나? 첫 키스를 했을 때 그녀의 입술은 부드러웠나? 그녀의 금발은 비단처럼 감촉이 좋았나? 어땠나? 어땠었나? 그녀는 자네 가슴에 뜨거운 볼을 대며, 무쇠 같다고 하지 않던가? 자네의 심장에서 고동소리가 들려온다고 하지 않던가?"
"그랬을지도 모르겠군."

 

- "그런데 그것이... 모조리... 거짓이었다면?"
잠깐 동안 보안관은 추억 속을 헤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천천히 노의사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이야기해 주지."
원장은 시빌의 뺨을 살짝 어루만지며 조그맣게, 아주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듣지 않는 것이 좋을 텐데. 모르고 있는 게 좋을 텐데."

 

- "베이츠 얘기로는 좀 잤다던데. 시빌 꿈을 꾸었나?"
"꾸긴 했는데 방해자가 나타나서."
"방해자라구?"
"내가 그 소녀의 초대에 응하는 걸 원치 않는 무리들이 있는 모양이오."
"꿈속에 나타난 적이라..."
보안관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걸 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생각하시오?"

"꿈도 꿈을 꿀 수 있겠지."
D는 조용히 보안관을 바라보았다.
"여기 있는 건 상관없지만, 당신들은 지금 이 상태에 만족하는가?"
"무슨 의미지?"
보안관도 D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처음으로 무시무시한 살기가 감돌았다.

 

- "함께 가겠는가?"
보안관이 묻자, D는 두말없이 따라 일어섰다. 그뿐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장검은 보안관이 들고 나왔다. D도 그 사실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 "요만한 크기였는데, 정말 너무나 아름다운 파란색이었어.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어릴 때부터 얘기로만 들어왔던 그 바다라는 게, 바로 그런 색이 아닐까 싶네." 
바다, 파란 꽃잎.
D는 몸을 돌렸다.
누구보다도 엄격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가 더 이상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했다.

 

- D가 말의 옆구리를 걷어차자, 길고 가느다란 그림자가 흔들렸다.
D는 보안관한테서 장검을 받아 든 다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멋대가리 없는 사내로구먼."
매기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사내는 원래 저래야 돼. 아무리 냉대를 받더라도, 저런 사내를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이든 감수하고 싶어질걸. 그것이 설사 이룰 수 없는 사랑일지라도 말이야."
"D에 대해 알고 있나?"
보안관이 멀어져 가는 D의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야 누구든 알고 있지. 본인이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주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사내라는 걸. 나는 이미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곧 이 마을을 떠날 거니까 상관없지만."
매기는 어딘가 고통스러운 듯한 눈길로 보안관을 쳐다보더니, 노파의 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신도 참, 어지간히 골치깨나 썩겠군. 차라리 마을에 들여놓지 않는 게 낫지 않았을까?"

 

- 공터에 도착했을 때, 태양빛이 나른한 파란색을 띠고 있었다. D는 나무에 말을 묶어놓고 난 뒤, 누렇게 바랜 풀들을 밟아보았다.
주변 광경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광대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넓은 공터였다. 파란 불빛에 묻혀 있던 저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풀만 뒤덮여 있는 초원 위를 바람만이 한가로이 휘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D는 말없이 공터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저택이 남아 있었다면 홀 중앙 부분에 해당되는 곳이다. 

 

- "꿈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바람에게 묻기라도 하듯, D가 말했다.
"모르겠어."
무뚝뚝한 대답이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그럼 해볼 수밖에 없을까?"
"그럴 수밖에."

 

- "그래도 부러워요. 요즈음엔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난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D의 시선에 겁을 먹은 듯,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이제부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전율을 동반한 쾌감에 그녀는 온몸의 모공이 확 열렸다.
하지만 D의 반응은 의외로 간단했다.
"요즈음이란 게, 언제를 말하는 거지?"
금방 답변이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그녀는 쉰 듯한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당신의... 당신의 꿈을 꾸고 난 다음부터요."

 

- "나는 이 마을에서 태어났네. 좋은 마을이었지. 어릴 때부터 이렇게 근사한 세계는 그 어느 곳에도 없을 거라고 생각해 왔네. 아이들은 누구나 언젠가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떠나 여기저기를 여행하고 싶어 하는 법이지. 하지만 난 그런 걸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네. 평생을 여기서 보내고, 이 마을에서 늙어가고 싶었지. 참으로 그러고 싶었다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노의사의 눈에 처음으로, 이제 그만 눈을 감고 싶다는 피로와 절망의 빛이 떠올랐다.
"그 모든 것이 가짜였을 줄이야."
"그만하게나."
보안관이 신음하듯 외쳤다.
방아쇠에 걸고 있는 손가락이 하얗게 물들었다.
"증거는 요전에 이미 보여 주었다고 생각하네. 이 세계는 모두, 시빌의..."
그게 원장의 마지막 말이었다.

 

- "이제 그만 단념하고 우리들의 운명에 따르도록 해요.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보안관은 신음소리를 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 있었다. 공포라기보다는 분노가 초래한 현상이었다.
"어떤 운명이건 그것이 남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면, 나는 절대로 복종하지 않겠어. 나는 나야. 내 생각대로 살아간다구."

"그래요. 살아야 해요."
아이린이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설사 우리들이 또 한 명의 시빌의 꿈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도 살 권리는 있어요. 이 세계에서도 마찬가지구요. 부탁이에요. 제발 도와주세요."
보안관은 눈을 감았다.
아내의 부탁에는 진지한 갈망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비록 그것이 그녀 자신의 의지가 아닐지라도.

- 그는 유치장으로 D를 만나러 가기 전에 원장이 털어놓았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 마을도, 이 세계도, 또 우리들 자신도 꿈인 것이다.
시빌이 꾸는 꿈. 한번 깨어나면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는 존재, 그것이 우리들이다.
이 세계에 잠들어 있는 시빌조차도.

 

- "하지만 저 시발을 쏘면 우리들도 사라져 버린다구요."

"꿈에서 깨어나는 걸 시빌이 바란다면, 그것도 상관없겠지."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예요?!"
"모든 감정이 남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고 했었지. 그렇다면, 나는 정말로 시빌을 사랑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잖아? 만일 이 시빌이 꿈이라면, 꿈속에서 또 잠자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그 꿈을 없애버리면 시빌이 눈을 뜰지도 몰라..."

 

-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면, 이 세계가 시빌의 꿈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의지를 갖는 것이겠지.
원장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되살아났다.
세계는 멸망을 바라지 않아. 나는 세계를 위해 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네.
보안관은 무기를 내려놓았다.
헌터의 싸늘한 미모가 떠올랐다.

 

- 어둠이 세계를 지배하면, 사람들은 과거로 돌아간다. 1만 년에 걸쳐 살아온 검은 생물들의 기억은 모두 유전자를 통해 이어져 내려오고, 밤에 우는 흉악한 짐승들의 울부짖음 소리가 이미 존재하고 있던 공포를 더욱 증폭시킨다.
밤은 여전히 인간들의 것이 아니다.
단 하나, 이 작은 마을은 빼고.
나무 사이로 등불이 반짝거리고, 작은 길에서는 연인들의 행렬이 긴 그림자가 되어 흔들리며,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술렁거림이 언제까지나 끝없이 이어졌다.
그렇지만 오늘 밤만은 달랐다. 달빛이 대낮같이 밝았지만 길에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집집마다 하나같이 문을 굳게 걸어 잠궜으며, 사람들은 난로가에 모여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생명은 어디 가고 형체만 남아 있는 것처럼.
온 마을 사람들이 한 사내의 움직임에 온갖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온몸에 달빛을 받으며, D는 잠자고 있었다.

 

- D는 안주머니에서 단검을 꺼내, 천천히 땅을 파내기 시작했다.
"소녀는 깨워 달라고 하지 않을지도 몰라."
당황해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잠시 후, 매우 들뜬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할 나위 없이 잘생긴 사내가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말을 하는군. 그럴 경우, 어떻게 할 생각이지?"
목소리는 목에 무언가 걸린 것 같은 여운을 남기며 멎었다. D가 땅에서 파낸 검은 흙더미 위에 왼손을 찔러 넣었던 것이다.

- 그때였다. 누가 들어도 의심할 여지없는, 음식물 씹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변에 쌓여 있던 흙더미가 순식간에 작아져 갔다.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흙과 물과 불과 바람, 즉 만물의 4대 원소를 에너지로 삼는 사람 얼굴처럼 생긴 그것이 영양을 섭취하고 있는 것이다.

- "대책은 세웠는가? 이 세계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다면, 그 소녀의 소원을 듣는 것도 불가능하지."
장난기 서린 목소리가 심술궂게 말했다.
"원장은 쓸데없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시빌의 뇌에 손을 댔어. 자네의 꿈이 그 소녀가 꾸고 있는 꿈과 같은 것이라면, 이제 다시는 그녀를 만날 수 없을지도 몰라."
그리고는 어울리지도 않게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모든 게 나름대로 원만하게 수습되는 게 아닐까. 꿈은 꿈으로 머물고 싶지 않을 테니까. 소녀한테도 이 세계가 그다지 나쁜 꿈은 아닐 거구."
"꿈꾸고 있는 건 네가 아니야. 물론 나도 아니지."
D는 잠자코 일어섰다.
달빛에 비친 옆얼굴이 어떤 꿈이라도 놀랄 정도로 차갑고 아름다왔다.

 

- "모르겠소.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요. 제발 그렇게 되지 않도록 비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소. 하긴 그것도 우리들에게 빌 권리가 있을 경우에만 해당되는 얘기지만." 
"적어도 살 권리 정도는 있었으면 좋겠는데."
창문가에서 자신의 애용품인 흔들의자에 앉아 있던 샐든 노파가 말했다.
"나야 머지않아 잠들 테니까 어떻게 되건 무슨 상관이겠나? 하긴 이 세계의 사정상 몇 번씩이나 다시 살아나게 되면 마음 놓고 잠도 못 자겠지만... 대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가? 누가 우리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거지? 이 세계인가? 당신들이 말하는 그 또 한 명의 시빌인가?"

 

- D는 묘지에 있었다. 거기에 묻혀 있는 사람들의 생전 심성을 반영이라도 하는 듯, 하얀 비석이 질서 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중에는 이끼가 끼지 않은 대리석 묘도 몇 개 있었는데, 황혼 녘이 되자 아이들이 찾아와 그 주인의 이름을 불렀다. 
좀 더 시간이 흘러, 해가 아쉬운 듯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서산으로 넘어가자, 묘비 아래에서 푸른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림자들은 아이들과 손을 잡거나 혹은 둥글게 둘러앉아서, 귀족 세계에 관계된 이야기를 하면서 흥겨워하거나, 또는 마을 사람들의 댄스와는 전혀 다른 우아한 스텝과 사과 파이 만드는 법 등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때때로 그들 가운데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으면, 마을 사람들은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자신들의 손목을 베어, 새빨간 피를 밀크병에 담아 비지땀을 흘리면서 직접 전달해 주기도 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과 공동체 의식, 그리고 서로를 위해 주고받는 격려의 말들. 정말이지, 하나의 이상적인 사회가 실제로 거기에 있었다.

- 그것이 꿈이라면.
깨어서는 안 될 꿈이었다.

- 희미한 목소리가 D의 귀에 들려왔다.
희미한 목소리는 언제나 비애를 의미했다.
왜 왔지?
그것이 물었다. 목소리가 아니었다. 단지 물음이었다.
네가 이곳엔 웬일이지? 이곳은 평화스런 마을이야. 네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곳이 아니냐?
D는 대답하지 않는다.

 

- 이곳에 머물러 있어라.
하나같이 그들은 말하고 있었다.
여기서 평화롭게 지내는 것이 좋아. 아무도 너를 피하지 않아. 여기는 놈이 만든 세계다.
"네 말이 맞아."
처음으로 D가 대답했다.
"한 소녀의 피를 빨아서 말야. 그 소녀는 어떡하지?"
어쩔 수 없지. 여기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그것이 그녀의 꿈이야.
"놈의 꿈일지도 모르지. 그 소녀는 나를 초대했어. 의뢰하고자 하는 내용은, 아직 물어보지 못했어."
받아들일 생각인가?
"아직 모르겠어."
너는 흡혈귀 헌터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아

D의 눈에 불가사의한 광채가 서렸다. -
"그래. 네 말대로야."
그는 대답했다. 그 말에 어떤 감정이 내포되어 있기라도 했는지, 호소하듯 그를 바라보고 있던 시선이 갑자기 얼어붙었다.
번쩍! 하고 빛을 발한다.
다음 순간, 사방이 암흑으로 뒤덮었다.

- "D, 이 마을에서 제발 나가 주세요. 그러면 모든 게 원만하게 수습될 거예요."
"너는 어느 시빌이냐?"
"나는 나예요. 제발 부탁이에요. 당신이 뭔가 일을 벌이면 이 세계의 나도 사라져 버려요. 아무 말 말고 그냥 가주세요."

D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D."
시빌의 형상이 변해 있었다.
D는 걷기 시작했다.

 

- 주위가 하얗게 흐려 있었다. 안개이다. 짙은 수증기가 피부에 남아 끈적거린다.
"조심하게."
왼손이 말한다.
"이 성분은 전혀 분석할 수가 없어. 꿈 효소가 섞여 있기 때문에..."
D는 뒤를 돌아본다. 복도도 안개 속에 묻혀 있다. 방향 감각을 찾을 수가 없다.
D는 문이 있던 쪽으로 걸어간다.
들릴 듯 말듯하게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소리이다. 그 소리의 정체는 곧 알 수 있었다.
흔들의자 위에서 샐든 노파가 몸을 흔들고 있다.
회색 테이블 위의 쟁반에 놓인 찻잔과 포트에선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그 김이 허공에서 하늘색으로 변하는 것을 D는 보았다. 이것도 환영이겠지.
D의 왼손이 희미해진다.
노파의 왼쪽 가슴에 하얀 나무 침이 꽂혀 있다. D가 던진 것이다.
그것은 작은 소리를 내며 가늘게 떨리더니, 흔들의자 위로 떨어진다. 노파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꿈꾸는 자의 힘처럼 강한 것도 없을 것 같군."

 

-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야. 우리들은 한번 사라지면 다시는 나타날 수 없으니까. 자 또 온다!"

 

- 촉수는 D의 가슴과 배와 얼굴 등을 닥치는 대로 갉아먹는다. D는 머리 부분을 떼어 낸다. 그리고는 몸속을 들여다본다. 그러자 거미 같기도 하고 전갈 같기도 한 괴생물체의 얼굴 윤곽이 보인다.
D의 왼손이 놈의 목을 잡는다.
참으로 지옥과 같은 광경이었다.
D는 왼손 하나로 몸속에 들어 있던 괴생물체를 밖으로 끌어내버렸던 것이다.
살이 터지고, 뼈가 문드러진다.
살며시 지면으로 착지한 그놈의 뇌를, 장검이 완전히 두 조각으로 쪼갠다. D는 태연하게 서 있다.
"오늘만큼은 정말이지, 네 능력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군."
예의 목소리가 감탄한 듯 말한다.
"이 세계를 어디까지나 꿈이라고 인식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목이 열 개라도 남아나지 않았을 거야."
D가 뒤를 돌아본다. 샐든 노파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이 젊은이에겐 보이지 않는 방향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모양이다.
그는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걷기 시작한다. 안개 속을 걸어도 폼이 나는 근사한 젊은이였다.

 

- 비통한 외침이었다. 그렇게 말해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일 것이다. 자기 친구를 사랑했던 남편과 함께 살면서, 게다가 남편이 아직도 그 친구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묵묵히 가정을 지켜온 이 여자의 진정한 모습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 D는 그 공격을 보기 좋게 받아쳤다. 하지만 이내 무릎을 꿇고 말았다. 가슴에서 선혈이 흘러내려 바닥을 물들였다.
"이 세계에서의 죽음은 진짜 죽음으로 이어진다."
어디선가 원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D의 모습이 일그러졌다.

 

- "달리 손쓸 방법을 빨리 생각하는 게 어떤가? 나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무책임한 것 같기도 하고 태평스러운 것 같기도 한 그녀의 말에, 원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방법은 남아 있어. 하지만 조금 기다려보는 게 좋을 것 같군. 아무리 꿈이라지만, 세계라는 게 그렇게 간단히 망하지는 않을 테니까."

 

- D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기가 있는 곳은 공터였다. 바로 그 공터다. 그 자리를 떠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풀들은 달빛 속에서 빛을 내며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미리 말해 두지만 내 힘이 아니야."
왼손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D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이나 한숨 잘까?"
그뿐이었다.
그 병원에서 이곳으로 자신을 옮겨 온 것이, 시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꿈을 방해하던 기계는 D가 모습을 감추기 직전에 던진 해럴드의 단검에 의해 파괴되었다. 가슴에 빨간 얼룩이 번지고 있었다.
"그것도 좋겠지. 이 세계는 두 개의 세력이 다투고 있어. 양쪽 다 만만치 않지. 이런 상태에서는 적대 세력도 그만큼 강해질 거야. 그건 그렇고 잘 곳을 찾아야 하지 않겠어? 자고 있을 때 공격해 오면 그야말로 큰일이니까." 

 

- "재미있군. 이런 곳에서 잘 생각인가? 자네의 두둑한 배짱은 알겠지만, 대번에 놈들 눈에 띌 걸세."
예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들떠 있었다.
D가 당하는 것이 재미있어서 못 견디겠다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D의 입장에서 보면, 어디서 잠이 들건 결국 마찬가지일 것이다.
온 세계가 전부 자기의 적인 것이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적이 단번에 생각해 낼 수 있는 이 공터에서 다시 잠을 칭하겠다는 것을 보면, 그는 역시 보통 젊은이가 아니었다.

- 자리에 눕기가 무섭게 얇은 입술 사이로 가벼운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슴의 상처에서 통증이 왔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남들은 알 리가 없다.
고통도, 기쁨도, 슬픔도... 이 젊은이에게는 그 모든 것들을 오로지 홀로 감당해야 했던 것이다.

- 그는 곧 파란 불빛에 감싸였다.
홀이다.
애수를 띤 곡조가 D의 주위를 맴돌다가 사라져 갔다.
경쾌하면서도 슬픔이 흠씬 묻어나는 이 음악을, 시빌은 왜 선택한 것일까?
사람 그림자가 여럿 D의 주위를 지나갔다.

어느 사이엔가, 홀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그림자가 넘실거리듯 흔들리고 있었다. 우아한,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스텝.
웃고 떠드는 소리.
D는 그림자 같은 남녀 사이를 누비며 홀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그러자 모든 움직임이 멎었다.
춤추고 있던 사람들은 손을 마주 잡은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사람들은 샴페인 잔을 손에 쥔 채, 영원한 정지의 세계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그중에서 단 한 명.

시빌.

 

- 시빌의 새까만 눈동자 속에 D의 얼굴이 비쳤다.
차갑고 아름답고, 그 어떤 감정과도 무관해 보이는 얼굴이...
"이대로 그냥 계속 춤이나 추고 있는 게 어떠냐? 밤은 영원히 끝나지 않아. 그건 네가 바랐던 거잖아? 놈은 그걸 알고 네 피를 빨았어."

 

- "죽여주세요."
시빌은 다시 한번 말했다.
진지한 말투였다.
분노도 슬픔도 지친 기색도 없이, 그녀는 마음속 깊숙이 그것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네가 죽으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이 세계도. 이곳을 만들어 내는 자도. 또 이곳을 꿈꾸었던 자도."
그것은 확신에 가득 찬 말이었다.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소녀는 죽기를 원하는 것일까?

- "죽여주지 않으면 죽이겠단 말인가?"
D가 중얼거렸다.
그토록 죽고 싶은 것일까? 그토록 고대하고 고대하던 그 꿈을 차지했는 데도...

 

- "죽여주지 않으면... 전, 당신을..."
"죽이겠나?"
D가 말했다.
멸망하기 위해 죽인다.
멸망시키지 않기 위해 죽인다.

 

- "그러니까 인간이 아닐까?"
다른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한 순간, 철책에서 불꽃이 튀어 올랐다.
D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철책을 쥐고 있는 왼손에서 보라색 연기와 희미한 신음 소리가 피어올랐다.

 

- 갑자기 바람이 불어왔다.
달빛이 조각나고, 나무들이 포효한다.
찢어진 나뭇잎이 회오리바람처럼 D의 주변을 맴돌았다. D의 하얀 뺨에 가느다랗게 빨간 선이 생겼다. 나뭇잎들이 예리한 쇳조각으로 변하여 그의 피부를 벤 것이다.
D의 코트 자락이 검은 날개처럼 펼쳐지더니, 공중에서 펄럭였다.
그러자 나뭇잎들이 전부 흩어지며 지면으로 내리 꽂혔다.
"위협하는 거라면 그만두시지. 그리고 남의 손에 죽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너도 죽이겠다는 마음으로 달려드는 게 낫지 않을까."

 

- "어디로 가려는 거예요?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한 절대로 여기서 나갈 수 없어요. 당신이 갈 곳은 아무 데도 없다구요."

목소리는 계속해서 따라왔다.
어차피 갈 곳은 없다. D에게 있어서, 그것은 이곳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었다.

 

- 파란 달빛이 내리비치고 있었다.
달빛이 너무 환해서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가 않다.
케인과 싸움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곳으로 나온 건 그것 때문이 아니라는 걸 자신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자 그 헌터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려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가슴속에 파란 달이 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머리를 식히러 밖으로 나왔다.
마당에서 바람을 쐬고 있노라니 산책이 하고 싶어 졌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공터로 통하는 작은 길에 서 있었다. 왜 그곳으로 가는지는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 걱정하지 말라고 하려다가, 난은 고개를 흔들었다.
언제나 오만하고 냉정하기만 했던 이 미청년이 갑자기 너무나 고독하고 피곤해 보였기 때문이다.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모자도, 장화도, 코트도, 그 모든 게 흠집 하나 없었지만, 그런 만큼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편히 쉴 곳 하나 없이 살고 있는 그의 현실이 너무도 사무치게 가슴 아팠기 때문이었다.
평화로운 밤을 이 청년은 한 번도 맞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한창때의 감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난의 눈에는 눈물이 넘쳐흘렀다.

 

- "너만이 내 꿈을 세 번이나 꾸었지. 왜 그런지 짐작되는 게 없니?"

- 자신에게 상처가 될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틀림없이 엄청난 자기혐오에 빠질 것이다. 

- 자신은 그 어떤 마을 사람보다도 그를 더 많이 만났으니까. 일단 마음속 깊은 곳에서 생겨 난 감정의 불길은, 이성으로서 억제할 수 있는 한도를 가볍게 뛰어넘는 법이다. 문득, 난이 손을 움직였다. 

 

- "이젠 만날 수 없을지도 몰라요."
그것은 근거도 없는, 그러나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이었다. 늠름한 근육질을 느끼게 하는 어깨에, 난은 살며시 자신의 뺨을 갖다 댔다.
그 정도밖에는 할 수가 없다.
다른 사람들보다 세 번 더 그의 얼굴을 꿈에서 본 것뿐이니까.
D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도 아직 죽을 수는 없으니까."
그 말만이 밤의 정적 속에 남아 있었다.

- D는 마을 끝을 향해 달렸다. 왼손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깨우려는 자와 그것을 막으려는 자. 양쪽 다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어. 게다가 양쪽 다 네 목숨을 노리고 있구. 한쪽은 멸망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또 다른 한쪽은 멸망시키기 위해서 말이야. 이 불운한 사내야. 넌 도대체 무슨 팔자를 갖고 태어났길래 그렇게 지지리도 복이 없냐?"
"마을을 떠나겠어."
D는 앞쪽의 파란 어둠 속을 투시하면서 말했다.

"쓸데없는 짓이야. 여기는 꿈의 세계라구. 이 꿈을 지배하는 자가 원하지 않는 한,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바람이나 빨아들여."
찬바람이 쌩쌩 도는 말투였다.

 

- "당신을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겠어요."
시빌의 목소리에는 한없는 원망과 슬픔이 담겨 있었다.
"당신은 나를 죽여야 하니까요."
하얀 손이 D를 가리켰다.

 

- 화살이 튕겨나가며 대지에 박혔다. 그러나 그 중 몇 대는 D의 어깨와 복부를 관통했다.
"어때요?”
격렬한 통증으로 무릎을 꿇고 있는 D에게, 시빌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이래도 날 죽일 마음이 들지 않나요? 자신에게 이빨을 들이대는 적에게 죽음을 선사하는 게 D라는 사람일 텐데요. 부탁이에요. 제발 날 죽이세요." 
전신에 화살이 여러 대 꽂혀 있었지만, D의 표정은 평상시와 다름없었다.
D가 단호히 거부하자, 시빌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흑의의 사내가 다시 활시위를 당기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D가 상체를 일으켰다.
"그만해."
그는 그 말만 했다. 다음의 일격에 심장을 관통당하면 치명상이 된다.
활시위 당기는 소리가 났다.

 

- "꿈은 하나의 가능성이다."
 
- 정말이지 조용한 밤이었다.
D는 눈을 떴다.
여명의 빛이 세계를 하얗게 물들이고 있다. 숲 속이었다. 빛의 밝기와 간밤의 취침 시간을 고려해 볼 때 겨우 2시간 정도밖에 경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묘한 꿈의 구석구석까지 D는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 이 장소는 저택의 정원이다.
문득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위치가 이동하고 있다.
몸을 기댔던 나무는 10미터 정도 왼쪽에 우뚝 서 있었다. 사이보그 말도 거기에 있다.
"이상한 꿈인데."
야유하는 것 같은 목소리도 어딘가 지친 듯한 모습이었다.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발 밑에 시체가 하나 누워 있었다.
벌써 오랜 세월이 지났다는 것을 시체는 확실히 보여 주었다. 시체는 높이 자란 풀 속에 묻혀 있었다.

- "30년이나 됐으니까."
목소리가 말했다.
"가슴에 있는 찔린 상처. 이걸 보고 알았다."

- 30년 동안이나 비를 맞고 바람에 흔들리며, 귀족과 인간의 이상적인 공동체를 꿈꾸는 동안, 자신의 평온을 바라는 마음이 생겨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 D는 말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늘 중으로 초대받은 마을에 도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D가 침구를 안장에 얹은 뒤, 막 말에 올라타려는데, 갑자기 위세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게, 잠깐만! 이 근처에 혹시 마을이 없던가?"
말 위에 탄 여자는 황홀한 눈빛으로 D의 용모를 보면서 말했다.
"기분 탓인지 모르지만 어젯밤 꿈이 너무나 생생해서 그러네. 그런데 뭘 그렇게 보고 있나?"
"아무것도 아니오."
D는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다면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말게. 이래 봬도 '만물상' 매기 하면 이 근방에선 꽤 알려진 이름이네. 그런데... 잠깐!"

뚱뚱한 여자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자네... 어디선가 만난 적 있지 않나?"

"아니오. 초면이오."


 <5권 꿈의 자객>

 





- 그 마을은 여로의 끝이기도 하며, 시작이라고도 말할 수 있었다.

 

- 남쪽 끝자락에서부터 하염없이 펼쳐져 있는 황금색 모래 바다를 열풍이 휩쓸어 가며 강철 대문을 두드릴 때, 어린아이의 손톱만큼이나 작은 모래알은 높고도 낮게 애처롭고 구슬픈 듯한 소리를 냈다. 
그것은 마치 먼 모래사장 저편으로 누군가가 여로에 오르는 것을 만류라도 하듯 부르는 애절한 노래 소리와도 흡사했다.
특히 바람이 세차게 불 때면, 거리 여기저기에서는 모래 먼지가 마치 이슬비처럼 흩날리며, 판자로 된 보도나 술집 창틀에 마른 얼룩을 짙게 물들이는 것이었다.

 

- 극히 드문 일이긴 하지만 모래에는 작은 벌레들이 섞여 있었다. 티타늄 합금보다도 강하며 바이스보다도 강력한 턱을 지닌 이 벌레들은 나무나 플라스틱 문 등을 마치 종이 쪼가리처럼 갈기갈기 찢어 먹어 버린다. 또한 이 벌레들은 흩날리는 모래 먼지가 거칠게 스쳐간 후에 마치 준비된 시나리오처럼 으레 날아드는 연분홍빛 꽃잎에 닿으면 즉사해 버린다는 센티멘털하고 우아한 자태마저 지니고 있었다. 

양자의 방문 순서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이 작은 살인자의 광적인 위세를 불과 3분 동안만 참아내면 되는 것이었다. 

 

- 벌레들의 수가 유난히 눈에 띄게 많은 밤. 그래도 마을 전체는 누군가가 거문고를 켜는 것처럼 부드럽고 아름다운 선율에 휩싸인다. 인간에게는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을 정도로 벌레들의 턱이 내는 음색은 점차 꿈 속인 듯한 색채를 띠면서 눈을 뜨자마자 사라져 간다. 그것이 마치 이별 노래로 이어지는 애달픈 장송곡처럼 느껴져 마을 사람들은 그저 말없이 난롯불만을 망연히 쳐다볼 뿐이었다. 

- 연분홍색 꽃잎이 어디에서 날아드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밤마저 불태울 듯한 사막으로 떠난 자들은 수없이 많았지만, 되돌아온 여행자는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목적지에 간신히 다다랐는지, 아니면 모래 먼지에 파묻혀 죽어 버렸는지 소식조차 없다. 다만, 특이한 능력을 지닌 몇 사람들만이 어느 날 흐릿한 기억의 조각들을 더듬으며, 마을 모퉁이를 겁 없이 스쳐가는 모래 바람에 눈을 돌릴 뿐이었다. 

 - 그날 마을은 의외로 벌레들의 노래소리가 높고, 춤추듯 날아드는 연분홍빛 꽃잎 바람도 조금 늦게 불어오는 듯하여 마을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예감에 사로잡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거리를 바라보았다. 

 

- 장송곡이 끊임없이 흐르고, 연주하는 자도 죽어야 하는 시각.

그렇다. 그 젊은이는 그런 시각에 찾아온 것이었다.

 

- 벌레 소리가 한층 더 거세지고, 테이블이나 카운터를 둘러싼 사내들의 사나운 시선이 문 쪽으로 쏠렸다.
모래 알갱이가 가는 실처럼 변하여 세차게 불어닥치더니, 순식간에 마룻바닥 위를 휩쓸며 덧없는 무늬를 그렸다. 문이 닫혔다.
곤혹스런 시선들이 새로운 손님을 붙들었다.
방문자의 존재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거부해야만 하는가?

- 순간 갑작스럽게 등장한 방문자를 꺼리는 듯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마룻바닥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아마도 방문자가 방향을 정하기 위해서 머뭇거렸기 때문일 것이다.
결정됐다.
피아노 소리가 멈췄다.  

 

- 경첩이 모래를 잘게 으깨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문은 벽 쪽으로 열린 어둠의 영토를 침범하고 있었다.
그 사람 그림자는 어둠이 낳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손님들은 두려움에 뒷걸음질을 쳤다.
너무나도 하얗고 아름다운 그 얼굴 아래로 걸친 검은 의상이 마치 모래 안개처럼 휘몰아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자신에게 향해진 엄청난 시선의 의미 따윈 상관없다는 듯 그 아름다운 젊은이는 조용히 문을 닫고 카운터 쪽으로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 "그만둬라."
형의 명령은 절대적인 것인지, 동생은 불평 한마디 없이 건장한 신체에서 내뿜던 노기를 급속히 잠재웠다.
"이제 곧 나는 잠에서 깨어난다. 인사는 다시 한번 수면 중일 때 받도록 하지."
무수한 눈동자 속에서 노파의 눈만이 유난히 빛났다.

 

- 안쪽 방문이 열리더니, 사람 형태의 어둠을 삼키고는 다시 닫혔다. 
좁은 실내는 음탕하고 문란한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둥근 테이블 위에 놓인 금속 항아리 속에서 가늘고 긴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냄새를 맡은 자라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욕정의 괴물로 탈바꿈시켜 버리는 국경 구역 특유의 묘약이었다. 

 

- 순간 검은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젊다고도 중년이라고도 할 수 없는 얼굴 생김새의 사내였다. D의 노크에 응한 것은 아마도 이 사내일 것이다.  

 

- D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 무엇보다도 견디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이 젊은이의 아름답고 황홀한 얼굴을 잠시 동안이라도 쳐다보고 있으면 남녀를 불문하고 그 깊은 눈동자 속으로 빨려들 것 같은 환각에 사로잡힐 듯했다. 
몸집이 작은 사내에게 내버려진 여자들은 그에게 불만 섞인 투정을 하려다 말고, D의 아름다움에 도취된 듯 입을 딱 벌린 채 경직되어 있었다.
"자, 다들 나가 있어! 팁은 배로 줄 테니까."
몸집이 작은 사내인 송톤에게 떼밀려 나가면서도 여자들은 마지막까지 공허한 시선을 D에게서 떼지 못했다.
"마시겠나?"
송톤은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을 들어 올리며 어깨를 움츠렸다.
"참! 술은 안 한다는 게 던필의 입버릇이었지. 미안하지만 난 변호사라도 보통 인간일 뿐이야. 한잔 마시겠네."
송톤은 호박색 액체를 글라스에 넘칠 듯 가득히 따르고는 천천히 입술에 갖다 댔다. 목젖이 계속해서 아래위로 움직이고, 거친 숨소리와 함께 빈 글라스가 테이블 위에 놓여졌다. 신경질적인 움직임으로 입술을 닦으면서 송톤은 서서히 말을 꺼냈다.
"편지를 보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자네가 사막을 건너가 줬으면 해서지. 되돌아온 자도 없는 '돌아올 수 없는 사막'을 건너서 머나먼 버나바스 마을까지 말이야."
그 말에 드디어 D가 입을 열었다.
"이유가 뭐냐? 편지에는 내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 어떤 인물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적혀 있었는데."
"그렇다."
송톤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왜냐면, 자네를 사막으로 보내는 것도 바로 그 인물의 의뢰니까 말일세."

- 밤이 깊어 갈수록 벌레들의 소리는 한층 더 애절한 듯한 화려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몇 분 후, 마을 전체가 꽃잎으로 뒤덮이면 그 소리는 쥐 죽은 듯 멈추고, 다시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다가 또 사라진다.
밤하늘의 어둠이 끝없이 이어지는 칠흑 같은 밤, 이별 노래 또한 끝이 없는 듯 애달프게 울려 퍼졌다.
마을 변두리에 있는 호텔의 어느 방문을 주름살투성이의 손이 두드린 것은 바로 그런 때였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그다지 기다리지도 않고 주름살투성이의 손은 문을 살그머니 밀었다. 의외로 문은 간단히 열렸다. 방 안은 밖의 어둠을 동반한 검은색으로 짙게 깔려 있었다.

 

- "잠깐 실례 좀 하겠네."
쉰 목소리로 건넨 노파의 인사에도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노파의 눈에는 침대 위에 길게 누워 있는 장신의 그림자가 뚜렷이 보였다.
"여기저기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이런 국경지대에서 조심성이 좀 없는 것 같군. 그렇지만 흡혈귀 헌터 D라면 열쇠가 있는 없는 마찬가지겠지. 불순한 목적으로 당신 앞에 나타나면 제아무리 날쌘 녀석이라도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말이야." 
몹시 들떠 있는 듯한 노파의 그 목소리 저편에는 찬사의 의미가 배어 있었다.
대답이 없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파는 주름살투성이의 입을 계속해서 움직였다.

"글쎄, 이름만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지만 당사자가 이렇게 굉장한 사내일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는 걸. 물론 사내답고 멋지게 생기기도 했지만 뷰로 형제를 눈썹 하나 까딱 않고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난 못 믿겠더라구. 더 볼 것도 없이 그것으로 난 이미 결정했지. 처음엔 그 두 사내한테 부탁할 생각이었는데 이젠 필요 없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들 따윈 일 없다구. 내가 찾던 사내는 바로 당신이야. 당신으로 결정했어."

노파는 잠깐 한숨을 돌리고 상대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나 무반응. 흡혈귀 헌터 D라는 존재는 어쩌면 사람 형체를 쏙 빼닮은 정체 모를 그림자일지도 모른다. 유심히 귀를 기울여도 심장 소리는커녕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 그 여자아이는 몹시 겁에 질린 듯, 자신의 두 어깨를 에워싸듯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소리도 없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귀기에는 용서도 배려도, 그 무엇도 없는 모양이다. 
"그만두라잖아, 제발!"
문 뒤쪽에서 노파가 외쳤다.
"이 여자애는 '타에'... '숨겨진 아이'라구! 게다가 상대는 귀족이란 말이다!"

 

- "얘야, 잠깐 방으로 들어갈까? 자, 천천히 일어나서..."
'타에'라는 이름의 여자아이를 재촉하듯이 일으켜 세우자, 노파는 재빨리 방 안으로 다시 침입해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뿐만 아니라 손수 의자를 끌어당기며 떨고 있는 여자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말한다.
"자, 여기 앉아라."
노파는 여자아이를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히고, 자신도 다른 의자에 걸터앉았다. 노파의 행동은 뻔뻔스러움을 넘어서서 통쾌하기까지 했다.
D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없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런 D를 향해 무례하다고 불만 섞인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것은 아직도 귀기가 노파의 몸 깊숙이 스며들어가 있기 때문일까? 

 

- "귀족이라고 했던가?"
어둠 속에서 나지막하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렇고 말고."
노파는 D의 뜻밖의 반응에 기쁨을 억누르며 말했다.
"이 여자애는 귀족의 숨겨진 아이라구. 글라디니아 성에서 내가 죽음을 무릅쓰고 구해낸 불쌍한 아이란 말이야."

- '숨겨진 아이'가 지닌 의미는 모든 현상을 초월하는 혼잡한 국경지대에서도 전율할 만한 것이었다.
단순한 영리 목적의 유괴와는 차원이 다르다. 수많은 눈이 도사리고 있는 가운데서도, 혹은 행방불명 따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홀연히 사라져 가곤 하는데, 그 대상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특히, 그것이 아직 앳된 여자아이들을 가리킬 경우에는 십중팔구 어떤 가공할 만한 운명이 연상되는 바람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눈물조차 흘리지 못한 채 공포에 몸을 떨 뿐이다.
행방불명의 원인은 대부분 예고 없이 발생하는 사차원적 소용돌이나 미지의 생물에 의한 것이라 추정되지만, 여기에 '귀족'이라는 이름의 요인이 덧붙여질 경우, 그 공포는 '실종'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결과'에 수렴된다. 
과연 젊고 앳된 여자아이들에게 어떠한 운명이 주어지게 될 것인가?
피의 기호를 충족시키는 희생물이라면 아직은 구원받을 수 있다.
다행히 귀족이 변덕을 부려 여자아이를 하녀로 받아들여 준다면 한층 더 다행이다. 그렇게 하여 구원받는 여자아이들도 간혹 있다. 다만... 

 

- "이 아이 이름은 타에라고 하지. 물론 안심해도 돼. 내가 이것저것 테스트해 봤는데 이 아이한테는 아무런 이상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발광 바로 직전까지 심층 수면도 걸어 봤다구. 역시 이 아이는 아무 이상이 없었어. 물론 태양빛 아래에서도 거뜬히 걸을 수 있고 말이야." 

"아이를 어떻게 찾아냈지?"
D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정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별로 대단한 건 아니야. 지하로 내려갔더니 인간 전용 감옥이 있더라구. 거기에 갇혀 있었지. 내가 이것저것 물어봐도 입을 꼭 다물고 있긴 했지만, 아마 하녀로 무차별하게 혹사당했던 모양이야. 당신이라면 그 이상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겠지."

 

- 온도는 급상승하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 사는 세계와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당신을 보는 순간, 의지가 약한 '에세' 귀족은 아니라는 걸 난단번에 꿰뚫어 봤지.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만만치 않다구. 저놈들 말이야, 몹시 열받아서 미쳐 날뛰는 거라구. 모든 걸 당신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마을 사람들을 부추겨서 데모를 일으킬 속셈이었지.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말이야. 그건 그렇고, 피를 빨아먹었다는 것도 새빨간 거짓말인지 몰라. 그런 상처 자국은 그 근방의 돌팔이 의사라도 간단히 위장해 버릴 수 있을 테니까. 농장주 딸에게 마취약 한 병만 주입해 놓으면, 마치 귀족한테 피를 뽑힌 것과 똑같은 증상으로 4, 5일쯤은 꼼짝없이 드러누워서 물도 입에 대지 못하게 되지. 범인은 바로 저 형제놈들이라구." 

 

- D의 입술이 살며시 움직이는 것을 보고 노파는 회심의 미소를 떠올렸다.

"왜, 날 내쫓으려 하는 거지?"

흥미가 있는지 없는지 확실히 알 수 없는 미묘한 어조로 D가 입을 열었다.

마치 바람소리처럼, 차가운 돌처럼. 이 젊은이라면 필경 바람소리를 닮은 목소리일 것이다.

"그런 걸 난들 어찌 알겠나?"

노파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 어느새인가 노파의 호위병이 되어 버렸지만, D의 표정에 성난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조용히 한마디 내뱉었다.

"이제 곧 시작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노파는 몸을 파르르 떨었다. 
"뭐, 뭐라구?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건가? 당신, 이 사막을 건넌 적이 있는 건가?"
"흠... 옛날 이 사막을 건너간 행인의 메모를 읽은 적은 있다."
D는 여전히 앞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도 불지 않는다. 잿빛 하늘과 황금 모래가 끝없이 펼쳐져있을 뿐이다. 온도는 섭씨 40도를 넘나들고 있었다. 노파는 그야말로 땀투성이였다.
"내용이 확실하다면 그 메모의 주인은 사막 중간까지는 무사히 건너갔다."
"그렇다면 사막 한복판에서 당했단 말인가? 원인이 뭐지?"
"내가 발견했을 때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손만이 메모지를 쥔 채 바위 사이로 비집고 나와 있었다."
노파는 두 눈을 부릅뜨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 그러니까 당신도 거기까지는 갔었단 말이지?"
"내가 발견한 그 자리에는 미슈걸트 석탑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 "정말 재미있는 사막이군. 그렇다면 우린 어떡하면 좋지?"
"그건 스스로 생각해라."

- 그러나 바로 그때, 사막 저편에서 엄청난 숫자의 둥근 물체들이 소리도 없이 날아와 말과 마차를 삽시간에 에워싸기 시작했다.

"이건 또 뭐지?"
"모른다."
D는 딱 잘라 말했다.
"뭐라구? 모른다구? 조금 전에 당신 입으로 이제 곧 시작된다고 내뱉어 놓고 이제 와서 모른다니? 그 말은 이것들이 습격해 온다는 뜻이 아니었나?"
"메모에는 이것들에 대해서는 적혀 있지 않았다."

- 모자 윗부분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크레이는 그 구멍 속으로 손가락 끝을 쑥 내밀고 까딱거렸다. 그것은 틀림없이 총알이 관통한 자리였다. 만약 크레이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더라면 총알은 여지없이 그의 이마에 명중했을 것이다.
어린아이라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려 버릴 것만 같은 증오의 눈빛 앞에 노파는 태연하게 빙긋이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것도 그 어떤 애교 많은 여자라도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상냥하고 착한 여자인 듯이.
"운이 좋았군."
기가 막히다는 듯 쳐다보고 있는 크레이를 향해 노파는 제법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도 쏘라고 시킨 건 내가 아냐. 이쪽 핸섬한 사내지. 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그렇게 하지 않았다가는 이 모가지가 싹뚝 잘려 나갈 것 같아서 말이지." 
그 말은 노파의 진실된 심정이었다.

 

- "정말 대단한 외톨이군, 저 녀석... 자기 스스로 세상에 등을 돌린 거라구.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말리지 않는다는 경지에 도달해 버렸어. 그래도 어떤 상대라도 저 녀석을 보면 몸을 피해 버릴걸. 지독한 냄새를 풍기고 다니니까 말이야."
"냄새 말이군..."
노파도 크레이의 시선을 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피 냄새... 고독한 냄새... 하지만 말이야, 당신은 아직 모르는군."
"내가 뭘?"
크레이는 눈을 부라렸다.
"맞는 말이다."
말 아래로 기다랗게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가 말했다.

"정말 형까지 왜 그래? 동생은 제쳐놓고 왜 이 할망구 편만 들어주는 거야?"
크레이의 불평이 끝나기도 전에 모래 언덕 쪽에서 갑자기 D가 소리도 없이 몸을 일으켰다. 몸을 바짝 기대고 있었던 경사에서 모래 알갱이가 마치 파도처럼 흘러내렸다.
D는 두 눈을 꼭 감고 똑바로 선 채로 마치 딱딱하게 굳어 버린 조각상처럼 그 자리에 빳빳하게 서 있었다.  

 

- 바로 그때, D의 그림자가 사르르 무너져 내렸다. 일어설 때와 마찬가지로 D는 돌처럼 차가운 동작으로 본래의 위치에 허리를 기댔다. 

- "이 사막이... 지식이라는 건 정말 믿을 게 못 되는군."

"다... 당신, 뭔가 느낀 건가?"
"지금부터는 훨씬 위험하다. 넌 쓸데없이 간섭하지 마라!"
"그... 그래... 알았어. 그럼, 당신한테 다 맡기지."
노파는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았다. 흡혈귀 헌터 D에게 맡겨두면 틀림없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신뢰보다도 합리성에 가까운 D의 직감을... 사막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노파로서는 그것만이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 "안에 들어가 있지 못해! 밖은 몹시 추워!"
갑자기 노파가 소리쳤다. 그 목소리에는 어딘지 모르게 증오가 서려 있었다. 숨겨진 아이를 찾아내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는 하지만, 찾아낸 상대에게 어떤 감정을 갖느냐는 자유라고 말하는 듯했다.

 

- "와, 정말 대단한 미인인걸. 이봐, 저 아이 이름이 뭐지?"
신바람이 나서 들뜬 목소리로 묻는 크레이의 말에, 노파는 독기 어린 눈빛으로 그를 매섭게 쏘아보며 말했다.
"미리 말해 두겠지만 말이야."
그 목소리는 마치 독한 매연과도 같았다.
"저 아이는 내 물건이야. 내 소중한 상품이란 말이다. 이상한 짓을 했다간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 네 놈 얼굴에 칼집을 내주겠다."
"그 짜증난 할망구 낯짝을 보고 있자니 속이 울렁거려서 말이야. 어떤 사내라도 주름살투성이 얼굴보다 저 아이 쪽을 훨씬 좋아할걸. 크크크..."
크레이는 태연하게 노파의 비위를 건드려댔다.
그러나 노파는 어이없다는 듯 입 언저리를 비틀면서 말했다.
"비싼 물건임엔 틀림없지만, 반드시 좋은 물건이라고는 할 수 없지. 집으로 돌아가는 '숨겨진 아이들'을 어떤 것들이 기다리고 있는지 상상이나 해보라구. 저 아이도 그중 하나라는 걸 마음속 깊이 명심해야 될걸."
"쓸데없는 참견 따윈 집어치워!"
그러나 노파는 조소하듯 계속 말을 이었다.
"내 임무는 집에까지 무사히 되돌려 보내는 거지. 뒷일은 내가 알 바 아냐. 그 대신 거기까지는 죽어도 책임을 진다. 누구라도 허튼짓을 했다간 가만두지 않아."

 

- 그때 D가 몇 걸음 나아갔다.
"기다려! 공동작전을 써야지."
노파가 소리쳤다.
"너희들 멋대로 따라왔을 텐데, 내가 알 바 아니다."
"자기 차례가 아니라고 말한 건 우리 몸은 우리 스스로 해결하라는 의미였나? 정말이지, 징그럽게 박정한 사내로군."
어느새 D는 노파의 원망 어린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만큼 말을 타고 나아가고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다가오는 기미, 말하자면 극도로 희미한 그 묘한 느낌을 유일하게 포착할 수 있는 것은 던필의 초감각적인 내력이란 말인가? 

 

- 이윽고 주위에서 이상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무수한 깃털이 일으키는 공기의 흐름.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가볍게만 다가왔다.
엄청났다. 수천, 아니 수만 마리를 훨씬 능가하는 나비 떼들이 마치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듯 그들의 눈앞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 "이봐, 당신도 함께 가겠지."
대답은 물론 마찬가지였다.
"따라오는 건 자유다."
동쪽 하늘 끝자락을 하얗게 물들이며 사라지는 어둠과 함께 희미한 빛줄기가 새어 흘러나왔다. 동이 트기 시작한 것이다. 새벽이다.

 

- "아무 일도 없었던 아이도 있다."
이윽고 D가 입을 열었다.
"만 명에 한 명쯤... 말이지?"
목소리는 여지없이 D의 말을 되받아쳤다.
"하지만 행방불명된 여자아이들이 모두... 그놈에게 끌려간 아이라고는 할 수 없지. 그 아이들이 이 세계에서 어떤 일을 겪다가 어떤 말로를 맞이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라구."
만약 그 질문을 받은 것이 D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머리에 떠오르는 대답을 필사적으로 부인하려고 새파랗게 질리든가, 아니면 전율한 나머지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꼼짝없이 얼어붙었을 것이다. 


- '숨겨진 아이'의 비극이란 오히려 발견되어서 인간 세계로 되돌아온 뒤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부모와 만난 그날부터 갑자기 노골적으로 이빨을 드러내며 숨통을 물어뜯는 여자아이들. 
얼마 동안은 아무 일도 없이 지내다가 몇 개월, 혹은 몇 년 후, 아무런 예고도 없이 발광하는 소년들.
수십 년 전의 기록에 따르면, 그런 아이들이 다시 부모 곁을 떠나서 깊은 산속에 둥지를 틀고 살면서, 그곳에서도 미친 피의 노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참히 서로를 물어뜯는 사투를 벌인 끝에 결국 전원이 사망했다고 한다.
어쩌면 숨겨진 아이의 비극이란 아이들이 납치당하는 그 순간에 시작되어 이미 끝나 버렸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어떤가? 생각 좀 해 봤나? 그 아이들이 부모 곁으로 무사히 돌아갔다고 해서 무엇 하나 좋을 것은 없겠지? 처음에는 부모들도 부둥켜안고 울면서 기뻐하지. 아이가 어디론가 숨어 버려도 다른 곳으로 떠나 버려도 부모들은 어떻게든 함께 살려고 하겠지.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자기 딸의 눈이 조금도 반짝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거라구. 눈에 초점이 없다는 것을 말이야. 하긴 그것도 무리는 아니지. 저쪽 어둠 속을 들여다보며 살아왔던 그 눈동자에는 이 세계 따윈 허상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지옥의 광경 이상으로 아이들의 감정을 움직이는 것이 또 어디 있겠나? 아마 없을 거야, 영원히...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지. 부모들은 만날 수만 있다면 여한이 없다고 염원했던 아이의 얼굴에서 차츰 눈을 돌리게 되지. 그리고 아이 방에 열쇠를 채워놓고 부모 둘이서만 마차를 타고 도망치다시피 떠나 버리지.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집에는 아이 혼자만 달랑 남게 되는 거고..."
D는 눈을 감은 채 왼손을 움켜쥐고 있었다. 손마디가 삐걱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D는 몹시 괴로운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남겨진 아이는 그래도 행복할는지 모른다. 훨씬... 철저한 부모도 있다. ...전재산을 버리면서까지 찾아낸 아이를... 어느 날부턴가 부모는 나무 끝을 칼날처럼 뾰족하게 깎아서..." 
D의 손가락 사이에서 빨간 것이 번져 흘러내리고 있었다. 
"으으윽... 어느 쪽이... 아이와 부모와... 어느 쪽이 괴로운지는... 아무도 모른다. 으윽... 단 하나... 저 아이만... 되돌아가지 않으면... 그 누구도 고통은... 없을 거야..."
D는 조용하게 발길을 돌렸다. 

 

- D는 사이보그 말에 올라타자마자 마차와 크레이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회오리바람이 다가오고 있다. 난 출발한다."

- 눈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공포에 질린 듯 신음소리를 내었다. 그의 눈에 비친 타에의 눈동자는 인간이 결코 보아서는 안 될 것이었다.
슬픔, 증오, 고뇌, 공포, 그 모든 것으로 꽉 채워진, 게다가 싸늘한 얼음 동굴로 완전히 뒤덮인 듯한 그 눈동자.
"이것이 네가 겪은 세월이었나..."
크레이는 넋이 나간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 그러나 웅크리고 앉아서 울고 싶지는 않았다. 울면 왜 안 되는지 그것도 알지 못했다. 자신이 어디로 가려는지도 모른다. 그저 아무도 없는 곳으로 무작정 가고 싶을 뿐이었다.
무수한 환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의식 속으로 선명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그저 어둠 속에서 빛나는 새빨간 눈동자.
서서히 다가온다.
어디로?
나는 무엇을?

새빨간 눈동자가 뚫어지게 바라본다...


- 뻘겋게 빛나는 어둠 속에서 하얀 얼굴이 떠올랐다.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게, 그리고 웅장하게.
그러나 그 얼굴은 슬픔으로 짙게 물들어 있었다.
맑은 물과 같은 야릇한 감정의 물결이 여자아이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그 얼굴에 비하면... 그 얼굴을, 그 눈빛을 만든 운명에 비하면 나의 고통 따윈 아무것도 아니다.
새빨간 눈빛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타에는 자신도 모르게 멈춰 섰다. 

되돌아가야 한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진 모르지만, 아무튼 되돌아가야 될 것만 같았다.

- "잘난 흡혈귀 헌터 D라면 알고 있겠지? 어서 말해!"
"흠... 사막한테는 우리를 죽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긴 거다. 그 랭스라는 사내가 감시당했다고 말했듯, 이번에는 우리들이 그렇게 될 차례다."
"잠깐!"
노파가 끼어들었다.
"당신... 방금 '사막한테는'이라고 말했는데, 그게 무슨 뜻이지? 우리를 습격한 놈들은 모두 이 사막의 지령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건가?"

"그렇게 놀랄 것 없다. 움직이는 숲 얘기를 했을 텐데? 국경 북서쪽 근방에 살아 있는 산이 있다는 얘긴 들어 봤겠지?"

-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복잡한 생물도 있는 법이니까..."

그렇게 말하고, D는 반론할 여지도 없이 단정 짓듯 다시 말을 꺼냈다.
"광물 형태의 생물은 그 신진대사가 중량에 의해서 대폭적으로 제한당하기 때문에 그 이상의 발달은 기대할 수 없지. 하지만 사막은 다를지도 모른다."

- D는 동굴 입구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동굴 속보다 약간 밝을 뿐, 하늘을 온통 뒤덮고 있는 구름은 여전했다.
어두웠다.
그 어둠 속에서 D의 검은 롱코트가 한층 더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 D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은빛 하늘 저편에서 그 무엇을 쳐다보고 있는 것일까?
녹색으로 물들여진 초원도, 빛으로 넘쳐흐르는 남쪽 나라도, 이 젊은이에게는 공기와 색채와 대지의 집합체로밖에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럼, 삶은?
죽음은?
운명은?
한없이 어둡고 차갑게 펼쳐진 사막의 세계.
그러나 너무나도 맑고 투명한 그 눈동자만이 바위산 모퉁이를 뿌옇게 물들이며 나타나는 모래 먼지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 어둠 속에 그녀는 있었다.
오로지 밀도만 느낄 수 있는 암흑 저편에서 두 개의 빨간 것이 다가왔다.
그것은 두 개의 눈동자였다.
"어떤 눈을 하고 있었지?"
D는 '어떤 사내였지'라고는 묻지 않았다.

 

- "새빨갛고... 날카로운... 저의 몸도 마음도 삼켜 버릴 것 같은 눈이에요... 한 번 쳐다보면...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는... 그러고 보니..."
타에는 느긋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그러고 보니... 어딘지 모르게... 당신과 닮은 것 같은... 왜일까요? 그래요... 몹시... 너무나도 슬픈 듯한..."
"놈이 너에게 무슨 짓을 했나?"
갑자기 D가 질문을 바꿨다.
타에는 알 수 없는 그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 동요하고 있었다.

"아무 짓도... 아무 짓도... 당하지 않았어요. 단지 만났을 뿐이에요... 왜 그런 걸 묻는 거예요? 당신은 헌터죠? 쓸데없는 건 묻지 말아 주세요."

"빨간 눈동자의 주인은 군림하는 것이다."

그림자는 미동도 없이 바위를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귀족의 위세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이 세계에 있어도, 그 검은 날개는 수많은 운명에게 불가사의한 바람을 보낸다. 너도 그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놈이 무슨 짓을 했지?"
"그만둬요!"
타에는 얼굴을 감싸며 일어섰다.
"아무 짓도 당하지 않았어요. 무슨 짓을 당했다 하더라도 기억나지 않아요. 심한 말은 하지 말아 주세요! 제발‥."

 

- "이봐, D, 거기 있나?"
"여기다."
"당신... 저 아이에게 무슨 말을 했나? 마차로 달려와서 엉엉 울고 있다구."
노파는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되나?"
"조금은... 어쨌든 내게는 소중한 상품이니까."
"저 아이와 함께 여행을 해 왔겠지. 뭔가 눈치챈 건 없나?"
"그게 무슨 말이지?"
순간 노파는 긴장했다.
"몸의 이상은? 정신상태의 변화는 어떤가?"
"그 나름대로의 것은 있지."
노파는 어느새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말이야, 시집갈 나이가 된 여자아이가 귀족과 오랫동안 지냈고, 게다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긴긴 여행을 하는 거라구. 어쩌면 이상이 없다는 게 오히려 이상하겠지."

 

- "옷감은 거기 들어 있어. 다만 못 쓰게 만들면 너의 오빠한테 보상받을 거야. 알겠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노파는 등을 돌렸다. 
노파는 마차 문 앞까지 가다가 다시 돌아보며 말을 건넸다.
"그 흡혈귀 헌터 말이야, 너한테 좀 심한 말을 한 모양인데, 신경 쓸 것 없어. 항상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남을 괴롭히는 타입은 아니라구. 다만 자신의 생활방식에 충실하기 위해서 그렇게 심한 말도 태연하게 내뱉는 거야. 그것도 늘 차갑게 말이야. 자신에게 엄한 인간이란 정말 골치 아픈 존재라구. 흡혈귀 헌터는 그것이 월등하게 강한 편이지. 그래도 그 사내의 가슴을 열고 들여다보면, 나도 너도 애처로워서 차마 눈 뜨고 못 볼걸." 
"..."

"그건 그렇고, 아까 랭스란 사내가 마차를 기웃거리는 것 같던데... 그놈이 여기까지 와서 대체 무슨 소릴 하더냐?"

"아무것도... 그저 격려만 해줬을 뿐이에요."
"홍, 미인은 참 좋겠다. 하지만 한마디 해 둬야겠어. 그런 송충이 같은 놈들이 달라붙으면 곤란하니까."


- 그렇게 말하고 노파는 마차 밖으로 행하니 나갔다. 바로 밖에 검은 의상의 그림자가 서 있었다.
"당신, 듣고 있었나?"
D는 대답도 하지 않고 모자에 손을 대고 약간 물러났다.
"얼음 같은 사내라고 생각했는데... 물론 마차 뒤쪽은 어두컴컴하긴 하지. 그래도 일부러 햇볕 아래로 나오다니 정말 뜻밖이군. 당신한테 이런 멋진 면이 있었다니 말이야. 그렇게도 저 아이가 맘에 드나?"
"사막에 이상이 발생했다."
D는 짧게 말했다.
노파의 얼굴빛이 변했다.

"뭐, 뭐라구? 그게 뭐지...?"
"모른다. 이상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확실히는 알 수 없다."

 

- "재봉틀 소리다."
"겨우 기분전환할 만한 것을 찾아냈지."
노파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사막을 무사히 빠져나가면, 내가 바라는 건 당신이 우리 곁을 떠나 줬으면 하는 것뿐이지."
"내가?"
"당신, 내 말을 못 알아들을 정도로 벽창호는 아니겠지. 저 아이뿐만 아니라 그 어떤 여자에게 있어서도 당신은 몹시 위험한 사내라구. 이봐, 그런 말 들어본 적 없나? 그렇다면 모두 당신의 얼굴을 보는 순간 너무나 아름다워서 넋이 나가 버린 모양이군."
노파는 D의 얼굴을 지그시 들여다보며 반응을 살폈다.
햇빛 아래에 있어도 마치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수정처럼 그 아름다움은 빛을 더했다.
순간 야릇한 감각이 하반신에서 솟구치는 듯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노파는 몸을 떨었다.
아마도 이 젊은이의 눈부신 용모를 격찬할 수 있는 것은 인간 외의 사자뿐일 것이다.
"마음을 기댈 곳은 고향의 내 집뿐이로다."
D는 마치 시 구절을 읊조리는 듯 조용하게 말했다.
"이건 국경을 여행하는 자의 격언이지.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글쎄...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 하지만 그럴 수만 있다면 꼭 집으로 돌아가야겠지. 당신, 혹시 저 아이를 두고 한 말인가? 고향에 반드시 데려다주겠다고?"
"집에 돌아가서 아무 일 없이 고향에 머물렀던 '숨겨진 아이'가 있었나?"
"그래도 말이야..."
노파는 입 언저리를 찡그리며 말했다.
"저 아이를 데리고 돌아갈 때까지는 난 책임을 지겠어. 하지만 그다음 일은 다른 사람들의 문제라구. 내 일은 애프터서비스까지 해주는 자상한 직업이 아니라서 말이야." 

-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어둠 속에서 새어 나오는 말이 햇볕에 녹아들어 갔다.
노파는 망연하게 아름다운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참을 수 없는 호기심과 흥분이 주름살투성이의 두 눈을 물들여 간다.
이 젊은이가 과거의 추억을 말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남서쪽 어느 마을이었지. 아마도 마을에서 쫓겨난 모양이더군. 여덟 살 정도로 보이는 사내아이가 강 근처에 꽁꽁 얼어 있었지. 내가 사정을 묻자 그 애는 곧 죽어 버렸다."
"마을에서 무슨 몹쓸 짓이라도 한 모양이지?"
"모르겠나?"

"글쎄, 모르겠는걸."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래? 그런데 왜?"
노파는 약간 정색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내아이는 3개월 동안 귀족 곁에 있었지. 그뿐이다. 의사도 그 아이에게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장담했지. 아이러니컬하게도 진짜 아무 일도 없었지. 양친과 함께 살아온 반년 동안, 무엇 하나 이상한 징후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
"하지만 어느 날 어떤 여자가 지레 겁을 집어먹고 마을 촌장과 경찰에게 피를 뽑혔다고 호소했던 것이다. 상처를 보면 누가 봐도 한눈에 거짓이라는 걸 알 수 있었지만, 두 사내가 다른 의견을 내놓았지."
노파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 "하지만 죽음을 눈앞에 둔 사내아이가 용케도 그런 얘길 들려줄 여유가 있었던 모양이군."
"사정 이야기를 한 건 뒤따라왔던 모친이었다."
"그래도 다행이군. 어머니 품 안에서 죽을 수 있어서 말이야. 그런대로 위안은 받았겠군. 억울하긴 하지만..."

"촌장에게 밀고한 여자가 바로 그 사내아이의 모친이다."
따사로운 햇살이 두 사람을 감싸고 있었다. 세계는 끝없이 평화로웠다.

- 갑자기 노파가 어색한 몸짓으로 마차 문 쪽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출발 준비만은 미리미리 해 두는 게 무난하겠지? 이봐, 그 이상한 기미가 곧 닥칠 것 같나?"
"모른다."
D는 마차 뒤쪽 어두컴컴한 곳에서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러자 노파가 느닷없이
"던필이라고 하는 건 햇볕 아래에 있으면 몹시 고통스럽다면서? 당신을 죽이려면 역시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대낮이 제격일 테지. 역시 피는 숨길래야 숨길 수 없거든."
그렇게 말하고 노파는 한쪽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나 그 주름살투성이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그것은 왠지 모를 사악한 웃음이었다.
그러나 D는 신경 쓰는 기색도 없이 끝없이 펼쳐진 사막 저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 랭스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물었다.
"당신이 바로 그 D라는 인물이지? 국경 근방에서 단 한 사람, 너무나도 핸섬하고 솜씨가 뛰어난 흡혈귀 헌터가 있다고 마을 사람들이 얘기했다구. 당신이 맞지? 바로 당신이지? 그렇다면 저 아이와 할머니도 그쪽 사람들인가? 난 뭐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어. 한쪽은 너무나도 어둡고, 또 한쪽은 지나치게 무뚝뚝하고 말이야. 이봐, 저 아이 혹시 숨겨진 아이 아냐?"
"만약 그렇다면 어떡할 건가?"
걸으면서 D가 물었다.
"내가 뭘 어떻게 한다고 그래... 난 아무 힘도 없다구. 그건 그렇고, 당신이 가서 저 아이를 좀 위로해 주라구. 지금까지 지독한 일을 당해 온 이상, 어딜 가봤자 정체도 알 수 없는 하얀 눈에게 감시당할 뿐이라구. 이봐... 하다못해 도착할 때까지만이라도 저 아이에게 좀 상냥하게 대해 주면 좋잖아."
D는 발을 멈추고 랭스를 바라보았다.
"왜,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랭스는 눈을 피했다. 어느새 그의 볼은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흡혈귀 헌터 D가 바라보자 사내인 그도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이다. 랭스는 헛기침을 하고 나서 다시 말했다. 
"그건 당신밖에 없기 때문이라구. 나이 찬 여자들은 모두 멋진 사내에게는 약하게 돼 있거든. 내가 장담하지. 솔직히 여기 있는 사내 셋 중에서 당신이 제일 낫잖아. 이봐, 저 아이한테 한 번 가봐. 아까부터 울고 있더라구. 당신처럼 슬프면 안 되는 아가씨라구. 그건..."
D는 말없이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곧 사막 저편을 바라보았다. 망망한 사막의 바다이다.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마라."

D는 명령하듯 낮게 말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랭스를 남기고 D는 스무 걸음 정도 앞을 향해 나아갔다.  

 

- 그 순간 암흑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D의 검은 코트가 나부낀 것이다.

돌아본 D의 눈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만이 하얀빛 아래에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랭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노파의 마차도 온데간데없다. 바위산마저 사라져 버렸다.

그때 D의 왼손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흠... 산뜻한 놈이군. 우린 심리 공격에 말려 들었다구."
 
- "정말 무지막지한 사막이군."
"그렇다니까."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양쪽 모두 그 대담한 태도로 볼 때 인간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다른 세계의 인물 같았다. 바람소리가 멈췄다.
D는 발 밑을 내려다보았다.
파도가 밀려오고 있다. 그의 시야에 가득히 펼쳐져 있는 것은 검푸른 바다였다.

- 저항할 틈도 없이 허리까지 바닷물이 차 올랐다.
파도는 일종의 센서에 불과하며, 파도의 움직임 그 자체가 테스트의 결과에 대한 전달 처리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크크큭... 재미있군! 사막이 바다라니 말이야. 널 놀라게 할 작정인 모양인걸. 글쎄, 놀라는 건 어느 쪽일까?"
목소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것을 증명해 보이기라도 하는 듯 D를 둘러싼 모래 바다는 경악할 만한 무서운 힘을 싣고 고요하게 멈춰 있었다.
침묵이 온 세계를 에워싸고 있었다.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망설이고 있군."
목소리는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말했다.
"크크큭, 요런 재미가 없다면 네게 붙어 있을 의미가 없겠지. 자, 이 사막은 이제 어떻게 나올까?" 

- "방심은 금물이야. 적은 어디까지나 환상이니까. 너의 정신력으로 이겨내지 않으면 끝장이라구. 저놈은 설령 칼로 내리친다 해도 절대로 죽지 않으니까 말이야."

- "적도 얕잡아볼 순 없겠는걸."
D의 왼손에서 울리는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섞여 있다.
"만약 너의 강한 정신력으로 적을 단 한 번에 굴복시켜 버렸다면, 저놈을 칼로 내리친 순간 우린 환영 속에서 벗어나 다시 모래 위에 서 있게 됐을 거다. 그러나 넌 실패했어. 상황이 완전히 뒤바뀐 거라구. 이거 참, 귀찮아지겠는걸. 죽여도 죽여도 적은 끝없이 몰려올 거야, 두고 봐."
그러나 D는 전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언젠가는 죽는다. 환상일지라도 말이다."
"큭큭큭... 꿈도 죽여 버리겠다는 건가? 너라면 할 수 있겠지. 이봐, 또 온다구!"

 

- 제아무리 신출귀몰한 D의 칼 솜씨라고 할지라도 물속에서는 그 위력은 물론 스피드까지 반감되는 법이다. 환상처럼 느껴지던 물이 이번에는 진짜 바닷물로 변해 있었다. 
D는 몸을 바닷물 속에 던졌다. 칼집을 왼쪽 허리로 돌리고 칼을 빼어 찌를 자세를 취했다.
물의 흔들림이 적의 거리와 속도를 알리듯 잔잔하게 물결치고 있었다. 순간 D의 눈앞을 오렌지빛 광채가 스쳐갔다.
그것은 파란 하늘에 뭔가 호소하는 듯 한없이 허공 속을 맴돌고 있었다. 갑자기 물속의 적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이 느껴졌다.

다음 찰나, 세계는 완전히 돌변했다. 
하얀 모래 위에 아름다운 그림자 하나가 길다랗게 드리워져 있었다.

- 그곳은 사막의 한가운데였다. 세 개의 그림자만이 은빛 모래 위에 길게 드리워졌다.
불현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D와 노파의 머리 속에서 웅웅거리듯 목소리가 울렸다.
나이도, 성별도 불투명한 정체 모를 조종자, 유기물인지 무기물인지도 모른다.
"너희들 같은 인간은 처음이다. 나의 세계 밖에는 여러 종류의 것들이 있는 모양이군."

 

- "너는 사막 그 자체냐?"
D는 전방을 주시한 채로 물었다.
노파와는 달리 D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너무나도 담담한 그 목소리에 노파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흡혈귀 헌터 D는 일단 판단이 서면 온몸이 철강으로 만들어진 용수철처럼 돌변한다는 사실을 노파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대답은 약간 늦게 들려왔다.
"언제부터 자신의 의지를 갖게 됐나?"
"모른다. 짚이는 점이라도 있다면 나도 알고 싶을 정도다."

 

- "괴, 괴물이다!"
놀란 목소리가 노파와 랭스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왔다.
D에게 매달린 채 그 얼굴을 올려다본 타에는 다시 한번 비명을 질러댔다.
"눈을 감아라!"
광란하는 암흑 사이를 강철 같은 목소리가 가로질렀다.
낮은 목소리지만 모두를 따르게 하는 카리스마적인 힘이 담겨 있었다.
"심리 조종 때문에 서로가 괴물로 보일 뿐이다. 내가 괜찮다고 말할 때까지 눈을 뜨지 마라."

 

- "그러나 단순한 꿈은 아닐 거다. 자, 봐라."
'퓨웅' 하고 하늘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순간적으로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정신없이 방어 태세를 취하고 있는 주름살투성이의 노파 얼굴에 검푸른 두 개의 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것은 검붉은 진짜 피였다.
"그 피는 네 몸에 흐르고 있는 피다. 꿈같은 환상의 세계일지라도 죽음은 다가온다. 여기서는 현실조차도 꿈에 불과하다. 상처가 났다고 생각하고, 피가 나온다고 생각하면 여지없이 진짜 피가 흐르게 되니까 말이다. 이 두 그림자는 지금 너희 둘에 관한 확실한 데이터로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체력으로 보나 종합적인 강인한 의지로 보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너희와 100퍼센트 똑같은 것이다. 즉, 어느 쪽도 영원히 이기지도 죽지도 않는다는 매우 심각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것이 어떤 싸움이 될지 잘 감상하겠다." 

 

- D의 하체에 힘이 들어갔다. 이 젊은이의 몸속을 흐르는 귀족의 피는 보통 사람과 다른 기괴한 힘을 갖고 있는지, 칼이 심장을 관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서서히, 서서히 일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적은 D의 심장에 꽂혀 있는 칼을 빼려고 몸부림쳤다. 더욱 정확하게 심장을 찔러대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칼을 빼내려 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D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또 하나, 두 개의 어금니가 입술 밖으로 드러났다.

- 이마에서 주르르 흘러내리는 검붉은 피가 입술 언저리 쪽으로 유유히 사라지고 있었다. 목석같은 얼굴로 태연하게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적은 재빠른 동작으로 칼에서 손을 뗐다. 아마도 코너에 몰린 자신을 발견하고 도망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은 상태였다. D는 기다란 칼을 치켜들어 정면에서 적의 머리를 무섭게 내리쳤다. 그 순간 다시 칼날은 섬뜩한 빛을 발하며 공중으로 튀어 오르기가 무섭게 적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고 지나갔다.
여지없이 적은 그 자리에서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뿌연 먼지로 변해 버린 그 얼굴이 마지막 순간까지 공포스러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D는 무척 만족스러워하는 듯 보였다.

 

- 암흑의 중압감이 갑자기 사라졌다.
D는 기다랗게 드리워져 있는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환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의 눈앞에는 은빛 모래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 "이봐, 할망구, 도대체 뭘 한 거지? 그 모래 알갱이들은 대체 뭐였냐구?"
크레이의 물음에 노파는 뒤돌아보며 씩 웃으며 말했다. 

"일급비밀이지."
"장난치지 말고 어서 털어놔 봐."
"네가 사용하는 마술하고 비슷한 거지."

그 말은 전투의 한 수단을 의미하는 것이다. 흡기와 냉혹함으로 꽉 메워진 두 쌍의 눈동자가 허공 속으로 보이지 않는 불꽃을 보내고 있었다.
D는 타에를 안아 일으켰다. 타에가 갑자기 쓰러진 이유는 노파의 마술에 의한 것일 테지만, 그 마술의 구체적인 내용까지는 D조차도 알 수 없었다. 

 

- D는 말없이 칼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너무나도 청량하면서도 차가운 시선이었다. 삶도 죽음도, 기쁨도 슬픔도 이 젊은이는 같은 시선으로 지켜봐 왔을 것이다.

 

- 크레이가 D를 매섭게 째려보며 입을 열었다.
"이 잘난 놈이 안 마시는데 나만 목을 축일 수는 없지. 나중에 자기 혼자만 좋은 짓을 했다면서 떠벌리고 다니면, 내 일생일대의 치욕이다."
"아하... 날 울리는 대사로군."
노파는 감격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꽤 오랜 세월 동안 살아왔지만, 이렇게 멋진 대사는 들어본 적이 없어. 사내란 역시 대단해. 암, 좋고 말구. 대환영이야. 네 몫은 모두 타에에게 주겠어." 

 

- 모두가 타에 쪽으로 눈을 돌렸다.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시선과 마주쳤다. 타에는 조금 전에 도망쳤던 방향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타에를 강하게 잡아끄는 그 뭔가가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뭐지?"
노파가 D 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다시 데려올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르겠군."
말 위에서 흡혈귀 헌터 D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도 피곤에 지친 듯한 그늘이 희미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귀족의 피를 이어받은 자에게는 작열하는 사막과 한낮의 태양빛이 최대의 적인 것이다. 아무리 사차원의 초능력을 지닌 던필이라 할지라도 체력 소모는 인간 이상으로 심하다. 
느닷없이 타에가 마차에서 모래 위로 뛰어내렸다. 노파가 손을 뻗어 막으려는 것을 D가 제지했다.
"사막이 저 아이를 부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물탱크를 부숴버린 이상,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들도 가야겠지."
"도대체 이제부터 어쩔 셈인가?"
"가 볼 수밖에."

- "위험하지는 않겠지?"
"어딜 가든 위험하다."
"알았어. 내 소중한 상품을 내버려 둘 수는 없지. 나도 따라가겠어. 당신 뒤를 말이야. 혹시 나 몰라라 하고 딴 데로 새 버리진 않겠지?"
"그러지 뭐."
그렇게 중얼거리며 D는 말고삐를 당겼다.

 

- 랭스 옆에서 노파는 금방이라도 '말세다'라고 내뱉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떤 식물을 심을 생각이었나?"

D가 물었다.
"뭐든지... 공기와 물과 태양빛으로 자라는 것이라면 뭐든지 말이야."
"그럼, 그것을 해라."
"옳거니, 맞는 말이다! 역시 그게 너한테는 제격이라구."
크레이가 비꼬는 듯이 말했다.
"그건 우리들이 할 수 없는 일이다."
D의 단호한 그 목소리에 크레이는 불끈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제하는 듯 입을 다물어 버렸다.
"칼을 휘두를 수는 있지만, 씨앗을 뿌리는 방법은 모르지. 귀족을 죽일 수는 있지만, 야채 하나 키울 수 없다. 헌터는 없어도 곤란하지 않지만 식량이 없으면 사람은 살아갈 수 없다."
"이론적으로는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헌터라는 것은 상대를 없애 주면 고마워하잖아? 우리들은 아무리 토지를 비옥하게 만들어도 누구 하나 고마워하는 사람이 없다구. 아, 나도 약간만이라도 던필 정도로 칼을 쓸 수 있다면 좋겠는데..."
랭스의 부러워하는 목소리를 옆에서 듣고 있던 노파가 느닷없이 폭소를 터뜨렸다.

- "호호호... 이게 어찌 웃지 않을 수 있는 얘기냐? 던필이 되고 싶다는 인간은 생전 처음 만났거든. 과연 농사꾼이라는 건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게로군. 역시 당신은 평생 씨 뿌리는 일이 어울리겠어."
"던필이 부럽다는데, 뭐가 그렇게도 우습다는 거지? 꽤 괜찮잖아? 안 그래?"
"저 젊은이를 보라구."
노파는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D를 쳐다보았다. 증오심까지 서려있는 노파의 눈빛에 랭스뿐만 아니라 크레이조차도 놀라고 있었다.
"다들 하나같이 비슷비슷하지. 나무랄 데라고는 하나도 없고 말이야. 어떤 여자라도... 아니, 어떤 사내라도 한 번 바라보기만 하면 멍하니 넋을 잃고 말지. 그렇지만 저 녀석은 지금 죽음을 각오하고 이 사막을 걷고 있는 거야."
"...?"
"당신, 강가에서 물고기를 잡아본 적 있나? 재미있었지? 꽃을 꺾은 적도, 바람이 빛나는 것도 본 적이 있겠지? 그건 누구나 다하는 것이지. 하지만 저 사내는 그걸 못 하는 거야. 태양빛은 마치 가스 버너처럼 피부를 태워 버린다구. 흐르는 물에 떨어지면 제대로 손도 움직일 수 없게 되지. 장미꽃을 만지면 장미꽃이 비명을 지르며 시들어 죽어 버린다구. 빛나는 바람? 그런 바람에 맞으면 피부도 몸도 잘려나가 버려. 사람들이 던필에게 고마워한다고? 천만에, 던필을 고용하는 마을이 결국 어떻게 되는지 알고서 하는 말이냐? 던필이 마을에 있는 동안에는 여자아이는 집에서 나가지도 못한다구. 심한 곳에서는 한 곳에 감금해 놓고 있다가 던필이 일을 다 끝내고 떠난 다음에야 비로소 밖으로 나올 수 있게 하지. 던필에게 잡힌 손발은 껍질이 벗겨질 정도로 소독해서 깨끗이 닦아내야 하고, 가축이라면 바로 그 자리에서 쏴 죽여 버린다구. 그 정도라면 그래도 참을 만하지. 하지만 한 마을에 있는 동안 아무도 정면으로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려 하지 않는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괴로운 일일 거야."
불을 내뿜는 듯한 목소리를 D는 아무 말 없이 듣고 있었다.
랭스도 크레이도 당돌한 규탄처럼 들리는 그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주름살투성이의 노파 얼굴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주위의 반응을 느꼈는지, 노파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핫핫핫...!"
마치 농담인 듯이 요란하게 웃어넘기며 한쪽 손으로 입을 가렸다.
"에그, 내 정신 좀 봐. 이런 결례를 하다니... 내가 벌써 망령이 들었나 봐. 이봐, 지금 일은 없었던 걸로 하자구. 알았지, 모두들? 괜찮지, D...? 그렇게 무서운 얼굴은 하지 말고 말이야. 맞아, 그게 평소의 얼굴이었지. 에이, 나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지. 하여간에 신경 쓰지 않겠다고 말해 주라구." 

- D와 크레이만이 푸르른 나무들을 비추고 있는 검푸른 폭포수 수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지?"
조금 지난 후 크레이는 안심한 듯한 얼굴로 D에게 물었다. 그러나 D는 말없이 폭포수 가장자리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타에와 나머지 두 사람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D는 왼손 검지손가락을 살며시 입에 갖다 댔다. 그러자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손가락 안쪽 부위에는 빨간 구슬처럼 생긴 조그만 혹이 생겨나 있었다. D는 그 손가락을 아래쪽으로 향한 채, 엄지손가락으로 빨간 혹 바로 아래쪽을 지그시 눌렀다. 
그 순간 빨간 핏방울이 바위에 부딪히며 유유히 흐르고 있는 잔물결 사이로 떨어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갔다. 잠시 동안 평온한 수면을 바라보던 D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헤엄칠 수 있을 것 같군."

 

- 타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 D한테는 전혀 관심 없는 이야기란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함께 여행 중인 동료들이 어떻게 되든 그에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인 것이다.

"차가운 사람..."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온 소리였다.
자기는 지금 어떤 표정으로 D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애써 온화한 마음을 되찾으려 했지만, 밖으로 표출된 감정은 계속해서 말이 되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당신은... 다른 사람의 일 따윈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이거죠? 마음속까지 얼음과 어둠으로 되어 있는 사람... 상대방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바람처럼 무시해 버리는 사람이에요, 당신은... 던필에게는 귀족의 피 말고 인간의 피도 섞여 있다고 하는데,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에요. 당신에게는 차갑고 어두운 귀족의 피밖에 흐르고 있지 않단 말이에요!"
타에는 절규했다. 절규하면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고, 얼어붙어 가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공포였다. 어떤 형태로든 이 젊은이에게 맞서면 머리가 날아간다. 처음으로 타에는 흡혈귀 헌터 D의 정체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 그런데...!
전율과 함께 솟구쳐 오르는 또 하나의 감정이 타에를 극도로 자극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느새 오열로 변했다. 타에는 몸을 돌렸다. 눈물만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나무에 몸을 기댄 채 타에는 흐느껴 울었다.
"글라디니아 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도 없이 D가 물었다.
"오지 마세요! 돌아가세요. 제발... 나 혼자 내버려 두란 말이에요."
"여기는 위험한 땅이다. 조금 전 그 녀석들도 아직 포기하진 않았을 거고, 마음이 풀릴 때까지 실컷 울었으면 함께 돌아가자."

 

- 타에가 뒤돌아보았다.
눈앞에 검고 건장한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바보, 바보, 바보!"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타에는 두 손으로 D의 가슴을 마구 때렸다. 마치 돌을 때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그게 당신이었으면 하고 생각했는데... 당신 같은 사내가 던필이었다면 하고... 난 기뻐했는데..."
"뱃속의 아이는 어떤 귀족의 아이지?"
순간 타에의 움직임이 멎었다.
마치 피가 얼어붙고 심장조차 멎은 것만 같았다.

 

- 타에는 눈을 감으려고 했다. 그러나 눈꺼풀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만 목소리만은 이상할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흘러나왔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너는 임신하고 있다. 어느 귀족의 아이지?"

 

- "놈이냐?"
그 말만으로도 무슨 뜻인지 타에는 알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시뻘건 불꽃으로 꽉 찬 눈이 다가온다.

"놈이냐?"
D가 다시 한번 물었다.
"어쩔 수가 없었어요."
자기 목소리가 마치 노파의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 "저기... 아이가 태어날 날을 알 수 있어요? 보통은 열 달하고 열흘이면 낳는다고 하지만."
"보통은 그렇지. 하지만 그 아이의 경우는 징후를 느끼고 나서 약 반년 후다."
"이 아이의 경우라니...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에요?"
"놈의 아이라면 그 아이는 보통 던필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된다는 뜻이죠?"

"그만 돌아가자."
"싫어요! 가르쳐 줘요. 대체 어떻게 된다는 거예요? 설마, 설마..."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타에는 공포에 떨고 있었다. 무언가가 부풀어 올라왔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타에는 그 느낌에 완전히 사로잡혀 버렸다.
그것은 슬프면서도 야릇한 환희였다.
"설마... 당신과 똑같은..."
이마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D의 왼손이라고 느끼기도 전에 타에의 의식은 암흑 속으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 "재미있지만 잔혹한 얘기로군."
쓰러진 타에의 몸을 받쳐 들면서 D의 왼손이 중얼거렸다.
"흠... 이 아이가 앞으로 어떤 길을 걷게 될까...? 그건 그렇고, 조금 전에 나타났던 그 거미 인간들 말이야. 물가에 있을 때부터 쭉 네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구. 그러니까 여기까지 불러냈겠지만 말이야.”
"아마 날 테스트하려는 거겠지."
"능력 테스트? 뭣 때문에?"
"모르나?"
"아니..."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살기가 섞여 있는 웃음이었다.
"그러는 너도 알고 있으면서 뭘 그래. 왠지 모르게 이 사막에서는 옛날의 그리운 향기가 나는 것 같군."
D는 타에를 왼쪽 어깨에 둘러맸다. 그러자 D의 왼손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흠,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전에 만난 여자가 말했었지. 어째서 굉장히 좋은 일이 오히려 나쁘게 되어 버리는 거냐고."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나?"
"모르겠다."
D는 걷기 시작했다.
왼손은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 타에를 어깨에 둘러메고 D가 돌아와 보니, 사내들의 싸움은 끝나 있었다. 폭포수 옆에 랭스가 길게 뻗어 있었다. 얼굴은 두 배 정도로 부풀어올라 있고 코는 약간 삐뚤어져 있었다. 
랭스의 열을 식히기 위해 수건을 빨고 있던 노파가 사람 기척을 느끼고 달려왔다.
"괜찮아. 내가 잠재웠어. 아마 조금 있으면 눈을 뜰 거야."

검은 어깨가 가볍게 아래위로 움직이며 타에를 내려놓으려고 하자 노파가 놀라며 다가와 거들었다. D는 힐끔 랭스 쪽을 쳐다보며 말을 던졌다.

"이겼군."
"잘 알아맞췄어."
노파는 씩 웃었다.
"바보 같은 크레이 놈은 저쪽 수풀 속에 뻗어 있어. 이 농사꾼, 꽤 잘하던데. 그래도 크레이 놈 말이야, 좋은 구석이 있더라구. 마지막까지 무기에는 손도 대지 않고 맨손으로 상대했거든."
"모두 마차 안으로 들어가 있어라. 여긴 내가 지키겠다."

D는 엄청난 기세로 떨어지는 폭포수에 눈을 던진 채로 말했다.

"아니, 이놈들도 말인가?"

"싫으면 밖에서 자게 해라."

- "자신을 위해 얼굴이 퉁퉁 붓도록 싸워 주는 사내가 어디 그리 흔한가? 아마 저 아이도 그런 사내는 처음 만날 거다. 저 아이한테 얘기해 줘라."
"그러지 마... 애초부터 그럴 생각은 없었단 말야."
랭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랭스 앞에 D가 검은 손을 쏙 내밀었다. 농사꾼 젊은이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손목을 붙잡고 랭스는 천천히 일어섰다.

- "철저히 때려눕혔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포기하지 못하겠다면 어쩔 수 없지. 이봐, 내가 이기면 저 여자애한테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겠다고 다시 한번 맹세해라."
"그래, 좋다! 여기 있는 흡혈귀 헌터 D가 증인이다."

D가 뒤로 물러섰다.

 

- "이봐... 그렇게 차갑게 굴지 말라구."
노파는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 안고 끊임없이 잔잔하게 물결치는 수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고 있나, 당신?"
한참 후 노파가 입을 떼었다.
"저 아이 말이야... 임신했다. 아마도 귀족의 애일 거야. 어떻게든 매듭을 져야 할 텐데. 조만간에 애를 낳지 않으면 정말 곤란하게 생겼어."
D는 말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을 어떤 생각들이 스쳐가는지 노파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어쩔 텐가?"

D가 한마디 툭 내뱉었다.

"아니, 당신이 그런 말을...? 전혀 남의 운명 따윈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물론 데리고 가야지. 그게 내 직업이니까 말이야."  
"그렇다면, 일부러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겠지."
"누구든 가끔은 색다른 짓을 하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지. 나도 인간이라구. 아마 당신도 마음껏 햇빛을 쬐고 싶어질 때가 있을걸."
"고향에 돌아가더라도 환영받지는 못할 거다."

D는 다시 화제를 타에 쪽으로 바꿨다. 
"하물며 귀족의 아이를 낳게 되면 숨겨 두지도 못한다. 저 아이가 강하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아니, 그럼 ... 데려가지 말라는 거냐?"

노파의 목소리에는 반발심이 가득 차 있었다.

 

- "이봐, 아기는 어떻게 될까? 역시 던필일까?"
"귀족의 아이라면 그렇겠지."
"차라리 당신이 뒤를 봐주면 어떤가? 같은 던필이기도 하고 말이야. 하나부터 세세하게 가르쳐줄 수 있잖나? 당신은 뭐니 뭐니 해도 흡혈귀 헌터 D라구. 여자 하나에 아기 하나쯤은 거뜬히 먹여 살릴 수 있을 거야. 이봐, 당신 정도면 헌터가 되지 않고서도 던필로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을 법도 한데..."
"그렇게 생각하나?"
"그렇다니까."
"그럼, 난 어째서 헌터를 하고 있나?"
노파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점잖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요령이 없을 뿐이야. 평범한 사람들 속에 섞여서 느긋하게 산다는 것을 자존심이 용납 못하는 거지. 어떻게 보면 귀족의 피 따윈 걸리적거리기만 할 뿐이야. 아무리 혈통을 무시하고 세상과 결탁하며 살아가려 해도 당신 자신이 그걸 용납하지 못하는 거라구. 자신을 잊고 평범한 삶을 찾으려면 아마 앞으로도 백 년 정도는 걸릴걸."
"어째서 백 년이 걸리나?"
"그 정도 고생하고 나면 제아무리 귀족이라도 모난 구석 없이 두리뭉실해진다는 얘기지, 뭐... 하긴, 당신의 경우는 보장할 수 없지만 말이야."
"왜 그렇게 생각하나?"
노파는 가만히 D를 쳐다보았다.
"당신, 뭔가를 찾고 있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내뱉은 그 말속에는 강철 같은 힘이 서려 있었다.

- "사람들은 헌터, 헌터, 하면서 추켜세워 주지만, 내가 보기엔 헌터의 실체는 단지 팔뚝 힘이 좀 센 성격 파탄자일 뿐이야. 그들은 어떻게 잘 죽일 것인지, 오로지 그것에만 혈안이 돼 있지. 심해지면 죽이는 것만이 목적이 되어, 건실한 인간들한테도 손을 대지. 그 때문에 다른 헌터에게 당하는 녀석까지 있다구. 그런 녀석들의 꿈을 한번 들여다보라구. 모두 시커멓거나 시뻘겋지. 그런 녀석들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단어가 빠져 있지. 그게 뭐라고 생각하나?"

"뭔가?"
"내일..."
노파는 조용하지만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그게 있어.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지만 말이야. 반드시 '내일'이라는 단어가 아니어도 상관없어. '꿈', '희망', '무지개' 그리고... '사랑'. 내 말이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지. 하지만 애초부터 인연이 없는 녀석과 그것을 찾고 있는 자와는 굉장한 차이가 있는 법이야. 단지 당신의 경우는 좀 더 다른 그 무엇을 찾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뭐라고 생각하나?"
D가 물었다.
"모르겠어. 난 상상도 못 하겠는걸. 하지만 뭔가 찾아 헤매고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어. 이래 봬도 내 눈은 못 속이지. 그것을 타에의 아기에게 가르쳐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
"그렇게 해 줘. 저 아이를 고향으로 무사히 데려다주고 나면 더 이상 나와는 상관없어. 그 자리에서 저 아이를 데리고 도망쳐 버리면 되잖아. 타에라면 계속해서 이곳저곳 떠도는 여행 생활도 거뜬히 견뎌낼 수 있을 거야. 아기가 커서 혼자 있고 싶어지면 그때 훌쩍 혼자 떠나면 되잖아? 물론 확실하게 교육은 끝마치고 말이지."
"유감이지만 나보다 훨씬 나은 적임자가 있다."
"뭐?"
눈살을 찌푸리며 노파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두 사람에게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랭스는 모포를 덮은 채 머리만 살짝 내밀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관둬라. 일개 농사꾼이 던필을 다룰 수 있겠어? 오히려 자기가 당해서 야반도주할 게 불 보듯 뻔한데... 설령 친부모라 해도 귀족의 피는 당해낼 수 없다구."
노파가 들으라는 듯이 내뱉은 그 모욕적인 말을 들었는지, 랭스는 모포를 걷어차고 느릿느릿 모닥불 옆으로 걸어왔다.

 

- "쳇, 세상은 그렇게 만만치 않을걸."
노파는 단언하듯 말했다.
"던필이라는 건 말이지, 사내는 여자든 미남미녀가 많아. 갓난아기 때는 그야말로 천사지. 던필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가까이 다가오는 녀석들도 수두룩하고 말이야. 하지만 일단 귀족의 피가 깨어나 버리면, 아주 달콤한 말로 유혹해 오던 녀석들부터 제일 먼저 도망쳐 버린다구. 그럼, 느닷없이 외톨이가 돼 버린 던필은 뭐가 되는 거지? 두고 보라구,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네놈도 그런 꼬락서니를 당하고 싶지 않거든 이렇게 호들갑 떨고 있을 때가 아닐걸.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 전투사는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그의 오른손이 허리를 스치자 우아한 음률이 흘러나왔다.
무기는 생긴 그대로 악기로도 사용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이건 말이지, 귀족 놈 하나를 죽이고 그놈의 음악당에서 슬쩍한 거야, 봐라, 현은 은으로 돼 있고 본체는 진짜 황금으로 되어있다구. 이건 너희들이 들어본 적도 없는 천상의 음악을 연주할 수도 있어." 
"호, 그래? 그럼, 어디 한 곡 연주해 볼 텐가?"

"엉?"
"뭐, 그런 싱거운 표정을 짓고 그러나? 모처럼 모두들 눈이 말똥말똥한 것 같은데. 이런 때 가슴이 찡해지는 음악 한 곡쯤 들려주면 좋잖아. 안 그래? 연주하는 방법을 모른다면 자장가라도 괜찮고..."
크레이가 콧방귀를 뀌었다.

"홍! 안 됐지만, 이건 그렇게 쓸데없는 용도로 쓰기 위한 무기가 아냐. 나란 놈의 목숨을 지켜주는 보물을 어떻게 너희들을 위해 쓸 수 있겠냐!"

"그럼, 저 아이를 위해서도 안 되겠나?"
그것은 뜻밖에도 D의 목소리였다.

- 타에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피하듯 살그머니 고개를 떨구었다.

"이봐! 너도 한 곡조 듣고 싶은 모양이지?"

노파의 목소리에 하얀 얼굴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쩌겠나?"
D가 물었다. 놀랍게도 그 목소리에는 조소하는 듯한 기색이 엿보였다. 크레이는 아직도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허어, 연주는 절대로 안 하겠단 말이지? 국경에서 제일가는 전투사가 여자애 부탁 하나도 거절한단 말이군. 옳거니, 사람은 죽일 수 있어도 여자애 하나쯤은 기쁘게 해 줄 수 없다는 얘기로군, 요즘 사내들은 매너도 땅에 떨어졌단 말야." 

"제기랄! 멋대로 지껄이지 마라!"
크레이가 이를 갈았다. 분해서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하프로 공포의 초음파를 날린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기세였다.
"썩어 문드러진 너희들 귀엔 아깝지만, 아껴둔 곡 하나를 연주해 주겠다. 너무나 아름다운 음색에 감동하여 폭포 속으로 뛰어들지나 마라."

 

- 크레이의 거친 손가락이 하프 현에 걸린다.
마치 하얀 어둠이 소리를 창조해 낸 것 같았다.

 

- 그것은 국경에서 살아가고 있는 남녀의 노래였다. 사내가 여행을 떠나 돌아오지 않자 여자가 그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사내도 여자도 모두 지쳐 버려 결국 만나지도 못하고 서로의 생활 속에 몰두해 간다. 긴 평온한 나날들, 그러나 어느 날, 여자는 문득 옛 애인이 생각나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사내를 찾아 나선다.  
크레이의 노랫소리는 높고 낮게 땅 위를 흘렀고,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 지쳐 버린 여자를 차가운 흙 속에 파묻고, 마지막으로 기도하는 대사를 읊조리고 나서 크레이는 하프 위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박수는 가장 먼 곳에서 가장 먼저 터져 나왔다.  
손뼉 치는 가늘고 흰 그 두 손을 사내들은 말없이 바라보았다. 타에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크레이는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주위를 한 번 흘겨보고는 타에를 향해 자신의 두툼한 가슴을 내밀며 말을 건넸다.
"어때? 꽤 쓸 만하지? 괜찮은 데라곤 얼굴밖에 없는 헌터란 녀석과는 격이 다르다구. 이봐, 사내를 보는 눈이 있다면 어떤 녀석이 제일 괜찮은지 첫눈에 알아볼 수 있단 말이야. 어떠냐? 고향 같은 데는 가지 말고 나하고... 앗 참, 이 농사꾼 녀석이 살아있는 한 널 차지할 순 없지. 아무튼, 날 나쁘게만 보지 말라구."

크레이는 자기 할 말만 하고 왔던 자리로 다시 돌아가 모포를 뒤집어쓰고 누웠다. 
노파와 랭스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타에도 웃고 있었다.
인간이란 누구나 의외의 면이 있는 모양이다.
잠시 동안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 "인간과 던필... 앞날에 대해선 아무도 모른다."
랭스가 깜짝 놀라 D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차마 하지 못한 말을 D의 말을 통해 깨달은 것이다. 

함께 살고 싶다.
소박하며 건장한 그 얼굴은 안타까울 정도로 결의에 차 있었다.
 
- D의 두 눈이 빛났다.
수면과 작은 일렁임.
검은 어둠으로 변하여 헌터는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 그것을 직접 만든 D의 표정 변화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고통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D의 얼굴을. 손바닥에는 파이프 자국이 시퍼런 멍으로 변해 있었다.

"이런 모양은 처음 보는군." 
노파는 눈을 가늘게 뜨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했다.

"아냐, 어디선가 본 듯한... 훨씬 먼 나라에서... 아주아주 옛날에 본 적이 있는 것도 같고... 뭔가, 도대체? 귀족의 무덤인가?"

D는 확실하게 목을 옆으로 저었다.

 

- "그럼, 누가 기도를 할 건가?"

 

- 그러자 노파의 눈은 D에게로 향했다.
"던필이 장례식 기도를 알고 있을 리도 만무하고... 이것 참, 난감하군."
"제가..."
선뜻 나선 것은 바로 타에였다.

- 이제 우리 사랑하는 이를 보낸다.
그대가 나라의 평온한 전당에,
그대가 부드러운 팔의 꿈에...

 

- 시구는 끊어졌다. 타에는 기억해 내려고 눈을 가늘게 떴다. 타에의 가는 몸이 떨렸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타에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잊어버렸어요."
"이상해요. 귀족의 성에 있었을 때는 매일 아침 기도를 잊지 않고 했었는데... 어째서 지금은 생각나지 않을까요...?"

반짝이는 것이 뺨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 우리 큰 인물이 되지는 못하였으나
소인배는 되지 말라고

멀리 떠나서는 다시 태어난다.

그러니 불러라 아득한 자라고.

- 타에는 시선을 돌려 그렁그렁한 눈으로 흡혈귀 헌터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바람과 달빛만이 주위를 맴돌고, 모래산의 표면을 잔잔히 흩날리고 있었다. 소리를 내며 모래가 떨어진다.
그 흐름이 급속하게 빨라지며, 완만한 표면 위에 원추형이 떠올랐다.

- 땅을 헤집으며 나 그대를 찾아도

대답이 없고,

부드러운 세상에서

그림자만 바라본다.  

- 멈춰 서 있는 그림자들의 등 뒤에서 또 다른 그림자가 움직였다.
마치 강바닥을 걷는 유령처럼 흔들흔들 가까이 다가온다.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D는 움직이지 않고, 크레이도 노파도 진혼을 위한 자리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가까이 다가오는 자들의 어깨에서 바람이 모래를 날렸다. D의 목소리는 한없이 조용했다

- 그러나 나 두려움을 모르고
침묵의 말을 알아,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까닭에 

우리는 그대이고 그대는 우리이다. 

아득한 자 지금 이곳으로 보낸다.

- 어색하게 걸어오는 모래 인간들의 코앞에서 물방울은 부서졌다. 잠깐 사이, 모래 인간들의 모습에 변화는 없었지만 몇 초 후 그들의 몸이 몽롱하게 희미해진 듯하더니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기괴한 감각이 이때 D를 사로잡았다.
뭔가 꿈에서 깨어난 순간 같은...

- 동생이 부르는 소리에도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말 위에서 흔들거리더니 빙고는 갑자기 휙 하고 얼굴을 들었다.
산뜻한 표정과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도 함께 있냐?"
그리고 날카롭게 D 쪽을 쳐다본 눈초리는 또다시 잠자는 사내의 기괴한 정체를 나타내고 있었다.
함께 있냐는 그 말은 '죽이지 않았는가?'라는 물음일 것이다. 크레이가 새파랗게 질린 것을 보면 추궁당했는지도 모른다. 허무한 눈초리가 D에게로 향했다.
"동생이 신세를 진 것 같군."
D는 잠자코 있었다. 장검은 칼집에 들어 있었다. 더 이상 적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모든 것을 빙고가 없앴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 "그런데 저 모래 폭풍 속에 대체 뭐가 있다는 건가?"

"모른다."
"모르는데 가겠단 말이지? 하여간에 던필의 꿍꿍이속은 보통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니까."
"우리들이 모래 폭풍을 돌파하려고 했을 때 타에가 숲으로 인도했었다."
D는 모래 폭풍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그랬었지."
"아마 사막은 우릴 그 속으로 가지 못하게 하려고 그랬던 것 같다."
"왜지?"
"그걸 확인하러 갔다 오겠다."
헤어짐의 인사도 없이 D는 모래 폭풍 속으로 말을 재촉했다.

- D가 5, 6미터쯤 가자 뒤에서 빙고가 쫓아와서 왼쪽에 나란히 섰다. 크레이는 두고 온 모양이다.
D가 왼손잡이인 것을 감안하면 손쉽게 베어 버릴 수 있는 위치였다. 경계심이 부족한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그런 운명 따위는 문제 삼지 않을 자신이 있는 것인지 D는 태연하게 앞을 향해 나아갔다.
어제저녁, 이 사내가 보여준 기괴한 소멸의 마술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빙고는 동행하겠다고도 말하지 않고, D를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1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으면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는 듯 싶었다.

 

- "동생에게서 들었다."
빙고가 졸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번 목숨을 구해 줬다고 하더군, 고맙다."

"..."
"우리들을 노린 건 사막이군."
"그렇다. 그걸 어떻게 알았나?"
"꿈속에서 봤다."

빙고의 목소리는 세차게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 속에서도 확실하게 들렸다.

"내 꿈속에서 사막이 보는 꿈을 꿨지. 꿈에는 본심이 나오는 법이거든."
"내 꿈은 어떤가?"
"당신 것만은 사양하겠네. 이 나이에 미쳐 버리고 싶진 않으니까 말이야."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

 

- "애써 그 멀리까지 갔다가 왜 다시 여길 찾아온 거지? 마음이라도 바뀌었나? 아니면, 이 앞에 뭐가 기다리고 있는지 뒤늦게 알기라도 했나?"
빙고의 목소리는 웅웅거리는 바람 소리에 모조리 지워져 버렸다.
그렇게만 말하고는 아무 말 없이 요란한 바람에 옷자락을 흩날리면서 두 마리의 말은 누런 먼지 속을 향해 나아갔다.

언제부터인가?
전방에 모래 색깔보다도 진한 어떤 그림자가 떠올라 있었다. 그것을 불안한 기색도 없이 바라보며 두 사람은 묵묵히 나아갔다.

- 너무나도 길었다. 오랜 세월 동안 기다렸다. 이렇게 될 날을 기다렸다. 너희들을 습격한 것도 너희들이 날 잠들게 해 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D는 움직임을 멈췄다. 그 머리 쪽으로 일곱 색의 구슬이 천천히 다가왔다.
"왜 스스로 잠들지 않는가?"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하고 싶어도 말이다... 날아오른다는 것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나뿐만 아닐 거다. 그런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니까.
D는 상체를 반대쪽으로 휘었다. 구슬은 흔적도 없이 튕겨나갔다.
가르쳐 줘. 누구나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 거 아닌가? 그것이 엄청난 피곤과 괴로움을 수반한다는 것을 알고 있더라도 말이야.  

- "이야기를 듣겠다."
D가 조용히 말했다.
지정된 기한 내에 즉, 오늘 아침까지 사막을 지나 이 장소에 도착하는 것이 송톤의 조건이었던 것이다.
그 보상은 과연 무엇일까?
"어떻게 내가 여길 먼저 왔는지 묻지 않는가?"
"비행 물체를 조종할 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텐데..."
변호사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중 한 명이네. 그건 그렇고, 여행은 어땠는가?"
"녀석과는 어디서 만났나?"

"그건 그 사람한테서 듣게."
D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의 빛이 감돌았다.
"... 지금 어디에 있나?"
"이 마을 남쪽 끝에 있는 폐가에 있지. 옛날에는 귀족의 저택이었는데, 지금은 풀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다네. 겉보다는 과거의 영광이 숙소를 정할 때의 조건인 모양이야. 지금이라면 아마 자고 있을 걸세." 

- 홀 안쪽 옅은 어둠이 깔린 저편으로 돌아서자 큰 계단의 중앙에 마치 유령 같은 그림자가 웅크리고 있었다.
그 사막을 건넌다는 건 네게 있어서 하나의 시련이었다. 싸울 수도 없는 네가 본 것은 하나의 말로(末路)인 것이다.
D의 오른손이 번쩍이고, 세 줄기의 하얀빛이 검은 그림자를 꿰뚫었다.
백목으로 된 바늘을 등뒤의 어둠으로 빨아들이며 그림자는 소리도 없이 웃었다.
무엇을 보았나? 무엇을 생각했나? 너 자신의 미래? 아직도 잔혹한 나날들을 보낼 생각이 남아 있나? 편안히 안주할 것을 바라지는 않는가?
D는 소리도 없이 달렸다.
썩은 마룻바닥은 작은 돌멩이가 주는 충격도 견디지 못할 정도였지만, 그러나 D의 질주는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았다.

 

- 머리 위에서 일직선으로 휘두르는 칼을 그림자는 피하려고도 하지 않고, 그대로 맞고도 아무 반응도 남기지 않고 통과시켰다.
그것이 답인가? 알았다. 암... 그래야지. 넌 나의 유일한 성공 사례다. 그러나 네가 너의 숙명을 버리지 않는 한, 죽음은 항상 너의 그림자가 될 것이다.
또다시 D의 칼은 아래쪽에서 튀어 오르며 구리로 된 손잡이를 여지없이 내리쳤다.
"소용없어."
D의 왼손에서 목소리가 말했다.
"저건 과거 이미지의 잔류 부분이라구. 그만둬."
유유히 그림자는 계단 위쪽으로 후퇴했다.

- 쫓으려던 D를 이상한 감각이 사로잡아 버렸다. 마치 꿈에서 깨어날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단숨에 계단 아래쪽으로 몸을 날렸다.
지금 D는 꿈속에 있었다.
꿈을 꾸는 자가 눈을 뜨면 없어진다.
꿈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 자는...

 

- 검은 선이 문을 향해 내달린다. 사각형의 공간도 일그러지고 있었다.
허공의 중심에서 그것이 튕겨나간 찰나, 문은 현실을 되찾았다.
풀에 잠식된 정원으로 뛰쳐나가 D는 돌아보았다.
등뒤에 있던 집은 홀연히 사라져 버렸고, 무지개 빛을 띤 구슬 여러 개가 D 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꿈이었다. 꿈 그 자체였다. 그것에 닿은 자도 꿈으로 변하여 없어진다.

- "꿈을 꾸는 나 자신도 꿈이다."
빙고는 자면서 웃었다.
현실의 D는 꿈은 자를 수 없다. 지금의 빙고는 불사신에 가까웠다.

 

- "너의 꿈을 잘랐다."
D는 조용히 말했다.

- "바보 같은 계집애..."
노파는 혼잣말로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단 하루도 참지 못하다니. 던필의 아기와 함께 혼자 살아가는 것에 비하면 그런 욕설쯤이야 자장가에 불과한데...
"다시 한번 찾아봐야겠어."
그 말을 남기고 노파는 떠났다.

- "D..."
나무들 사이에서 나타난 하얀 그림자는 D의 앞에서 타에로 바뀌었다.
"할머니한테서 들었다."
"전... 참으려고 했어요. 무슨 말을 들어도. 하지만... 뱃속의 아기까지 흡혈귀라고 해서... 그만..."
"던필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똑같은 거예요."

 

- 8년 동안 귀족에게 납치되어 있다가 겨우 찾아온 집에서 하루도 못 있고 이렇게 도망쳐 나온 것이다.
"어쩔 셈인가?"
"오늘밤만 여기 있게 해 줘요."
처음으로 타에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한결같은 눈이 D의 눈과 마주쳤다.
"내일이 되면 혼자서 어떻게든 해 보겠어요. 오늘밤만이라도 함께 있게 해 주세요." 
"마음대로 해라."
타에는 D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의 배 위에 D가 살며시 모포를 덮어 주었다.
"이건... 당신의..."
"널 위해서가 아니다."
타에는 모포와 D를 쳐다보았다. 모포의 끝을 쥔 손등에 별안간 눈물이 떨어졌다. 슬퍼서 흘리는 눈물은 이미 말라 있었다.

- "혼자서 어떻게든 해 보겠다고 했던가?"

D는 전방을 바라본 채 물었다.

"넌 혼자가 아니다. 곧 두 사람이 된다."

"..."

"던필의 아이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다고 한다. 예외도 있지만..."
냉기를 결집시킨 듯한 그 젊은이의 입가에 쓴웃음 같은 그늘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타에는 믿을 수 없는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머뭇거리며 하얀 손이 움직여 D의 가슴에 닿았다. 그러나 D는 움직이지 않았다.

"저어... 아주 조금 용기를 내겠어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타에는 D의 겨드랑이 부근에 이마를 댔다. 그렇게 잠시 있다가 타에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 그렇게 말하고 곧 노파는 스스로 D의 손을 잡았다.
"어서... 아아... 생각했던 대로 차가운 손이군. 괜찮아, 이게 던필의 손이야. 어쩔 수 없지. 이게 몇십 년 만이지..."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는 새파란 얼굴을 D는 내려다보았다.
"어린애가 있었지. 엄마가 던필이니까 아이도 그럴 수밖에 없었지. 어느 날... 뛰쳐나가 버렸어. 남들의 열 배는 더 고생해서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던필이라면, 던필답게 살아 주겠다면서...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결혼 전날 밤... 너무나 좋아서 결혼할 아가씨의 목에 이빨을 세우고 말았으니 말이지.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지..."
노파는 타에 쪽으로 눈을 돌렸다.
"... 참 평온한 얼굴로 자고 있네. 저것도 오늘 밤뿐일지도 모르지. 난 언제나 남들에게 듣곤 했어. 당신처럼... 괴로운 듯, 화난 듯이 잠자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고 말이지. 그럴 만도 하겠지. 저 아이한테는 그런 고통스런 경험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아. 조금 전 내가 한 짓이 잘못됐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그래, 그렇지. 당신처럼 살고 있는 던필도 있는데, 이거 역시 내가 잘못했나..."

- "아아... 그럼, 잘 있게... 이제야 편해질 수 있을 것 같군... 아아..."
갑자기 노파의 목이 툭! 하고 옆으로 떨어졌다. D가 들여다본다.

- "당신한테 마지막 한 마디를 해 달라는 걸 잊었어. 사랑해... 라는 말 따윈 요구하지 않을 테니까, 뭐든 한마디 해줘..."

"저 아이의 아기는 도망가지는 않을 것이다."
"아, 그런가...!"

순간 노파의 얼굴이 확 펴졌다.

"그거 다행이군... 당신이 보장만 해 준다면 난 이제 괜찮아..."

 

- "내일의 결투는 어떻게 하겠나?"

빙고가 물었다.
"점심때로 연기한다. 장례식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될 테니 말이다."
"날짜를 연기해서 같은 시간으로 하면 된다."
"너희들의 고용주가 그걸 좋아할까?"
D는 빙고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빙고는 크레이를 쳐다보았다.
크레이는 눈을 돌렸다.

"낮시간이 지나서 만나러 가겠다고 전해라."

섬뜩한 어투로 말하고 D는 타에 쪽을 향했다. 내일부터 새롭게 살아가야 하는 그녀는 지금 새근거리며 조용히 자고 있었다.

 

- 이튿날, 정오가 조금 지났을 무렵.
마을에서 떨어진 장의사에서 한 대의 검은 마차가 출발했다.
관을 실은 채로 마을의 번화가를 돌면 그 죽음을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른다. 가족, 친척, 연고자, 친구. 여기서는 사람들의 숫자 그 자체가 죽은 자에 대한 무언의 영접이 되는 것이다.

 

- 그러나 오늘의 망자는 조용히 눈을 감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마차를 조종하고 있는 것은 아직 어린 타에였으며, 그 뒤를 따르는 단 한 명의 장례식 참석자는 온통 검은 것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젊은이였다.
게다가 강한 빛이 내리쬐는 오후여서 거리에는 사람들도 적었다. 사람들은 쓸쓸한 장례 일행을 수상쩍은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평소 같으면 마을 사람들이 나와 보내는 자의 행렬을 함께 한다. 그것이 의지할 데 없이 죽은 자에 대한 국경 근처에서의 예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어젯밤 사이에 죽은 자와 장례식에 참석할 자의 내력이 바람처럼 마을을 스쳐 지나며 낱낱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 바람을 일으킨 여자는 남편과 함께 이른 아침에 이 마을을 떠나 버렸다.

 

- 새하얀 빛 속에서 삐걱거리는 마차 소리만을 울리며 검은 마차와 남녀가 지나간다. 여자는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렸으며, 젊은이는 차양 넓은 모자를 벗어 가슴에 대고 있었다. 
미세한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흩날리며 스쳐간다.

 

- "흠... 과연 효과 만점이로군. 역시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군. 나의 심리 판단에 대한 직감도 떨어지지는 않았군. 그건 그렇고... 저 헌터가 일부러 이 시간에 함께 움직이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걸. 게다가 모자까지 벗을 줄이야. 아니, 냉혹하고 비정하다는 사람들의 소문 따윈 새빨간 거짓말이었군."
뷰로 형제는 말없이 지나가는 마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해치울 수 있다. 가라!"
송톤의 목소리에는 반항은 용서치 않겠다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 두 사람은 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D에게서 2미터 정도의 거리에서 속도를 떨어뜨린다.
그러나 D도 타에도 뒤돌아보려고 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모자를 벗었다. 가슴에 살짝 갖다 대고 D의 뒤를 따른다.
장례식 참석자는 세 명이 되었다. 

- 무덤을 판 D와 기도문을 읊을 타에가 구덩이 옆에 서 있었다. 일행이 그 구멍을 둘러싸고 관이 아래로 내려지자 기도가 흘러나왔다.
아주 짧은 기도였다.
타에는 입 속으로 그 말만을 되풀이했다.
의식은 끝났다.
D는 삽으로 흙을 덮기 시작했다.

 

- "자, 이제..."
크레이가 독촉했다.
"요 앞에 공터가 있다. 그곳에서 결말을 짓자구."
"나도 이해가 안 가는군."
빙고가 졸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 만났던 그날 밤에 없애 버릴 작정이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아."
맨 처음에 앞장서서 D가 걷기 시작했다.
타에의 목소리가 들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쭉 늘어서 있는 무덤들을 지나 거의 원형인 풀숲에서 세 사내는 서로 대치했다.

 

- "먼저 감사하다는 말을 하겠다."
D가 말했다.
"뭘... 그걸 가지고 사내가 쫀쫀하게..."
크레이가 씩 웃었다.

갑자기 크레이가 멀리 튀어 오르면서 오른손을 하프에 걸었다. D는 단숨에 뛰었다.

 

- 바싹 다가오는 물방울을 피하면서 D의 왼손은 빙고를 향해 피로 된 실을 날렸다. 새로운 꿈이 태양빛을 반사하며 맞받아친다. 실은 모조리 물방울의 표면을 튕기며 차단되었다. 
물방울이 다 없어졌을 때 처음으로 빙고의 표정에서 동요하는 빛이 떠올랐다. 그 얼굴은 싫고 좋음도 없이 생기가 철철 넘쳐흐르고 있었다. 
모든 꿈을 내뱉고 났을 때 비로소 꿈꾸는 자는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한순간 높이 도약한 마법의 새와 같은 검은 그림자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멜로디가 먼지로 바꾸자마자 절규하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 바람이 불고 지나갔다.
D는 한참 동안 뷰로 형제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D가 몸을 낮췄다. 
뜨거운 것이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고, 이어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공동묘지 방향이었다.
몸을 낮추고 달리려는 D의 귓가에 희미한 선율이 흘렀다. 묘지 쪽에서 고통과 놀라움의 목소리가 일었다. 뒤돌아보는 D의 눈 아래에서 크레이가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길게 뻗은 오른손 끝에서 하프가 사르르 떨고 있었다. 

"... 이걸로... 빚은 다 갚은 거겠지...?"
목소리와 함께 이마에서 피가 실처럼 뿜어져 나왔다. 

"충분하다."

 

- "무섭나?"
D가 물었다.
"네에..."

"헌터로는 만들지 마라."
"결정은 아기한테 맡기겠어요..."
떨리는 타에의 목소리에는 강한 힘이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헌터가 되지 않더라도 내가 본 흡혈귀 헌터와 같은 어른이 되도록 키우겠어요."
"이제 곧 합승 마차가 떠날 시간이다."
D는 태양빛 쪽으로 흘낏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돈도 주고... 마차표까지... 저는... 은혜도 갚지 못하고..."
"언젠가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지."

- "나는 아직 마을에 일이 남아 있다. 아무쪼록 잘 지내라."

D는 타에의 얼굴을 쳐다본 채 말했다.
"당신도... 건강하세요."
타에는 발길을 돌리는 검은 뒷모습을 하얀빛 속으로 떠나보냈다. 작은 생명의 움직임과 뭔가 따뜻한 것이 뱃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가 떠나기 바로 직전, 그녀는 D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기나긴 세월 동안,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나날들 속에서 타에는 그 미소를 떠오르게 한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작은 긍지를 담아 단 하나뿐인 아기에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런 미소였다.

 

<6권 살아 있는 사막>

 

 




 

 

- 한밤중부터 바람이 거세졌다.
구름이 소리를 내며 흘러간다. 구름 속에 숨어 있는 달이 아른 거릴 때마다 어둠은 하얗게 빛났다간 다시 암흑 속으로 묻힌다. 어디선가 뭐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그렇게 무서워할 것 없어."
방 모퉁이에서 싸구려 술을 하염없이 들이키고 있던 여관 주인이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사제 술답게 라벨도 붙어 있지 않은 술병은 거의 비어 있었지만, 대신 끔찍하게 생긴 것이 검푸르게 뒤얽혀 있었다. 개구리였다. 이 지방에서 흔히 술의 감칠맛을 내는 데 쓰이는 개구리의 일종인데, 아무리 국경 지대 최북단에 가까운 작은 마을이라고는 하지만 여행자로서는 눈에 거슬리는 관습이었다."저건 짐승풀 꽃잎 벌어지는 소리야. 이 근방에는 소란 피우는 녀석들이 별로 없다구."

 

- 소녀는 마음이 놓이는지 창가에서 뒤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초라한 여관에 어울리는 쓸쓸한 웃음이었다. 하지만 16, 7세쯤 되어 보이는 소녀의 온몸에 넘쳐흐르는 아름다움이 침울한 인상을 가려 주었다.
짐승 기름을 칠한 방수용 셔츠와 슬랙스 차림이 주는 살벌한 느낌도, 빨강 머리에 꽂은 은빛 빗이 주는 정감 어린 분위기에는 압도당하는 것 같았다. 

 

-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여자 몸으로 용케도 이런 길을 택했는걸. 중앙 가도로 가면 훨씬 빨리 갈 수 있을 텐데 말이야." 
"그 대신 위험도 많잖아요."
소녀는 허리 벨트에 동여맨 가죽 파우치를 손바닥으로 가렸다."특히, 벨히스턴 지방에서 클로넨베르크까지 가는 길은 악마의 소굴이에요. 기계 짐승이니 미로 인간이니 하는 것들하고 부딪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혐오감을 띠긴 했어도 어조에 두려움은 없었다.

 

- 피에 굶주린 야수의 외침이 갑자기 끊기더니 이어서 무거운 것이 길 위로 나가떨어지는 울림이 이어지고... 정적이 흐른다. 아니, 작게 따각거리는 소리만이 조용히 멀어져 간다. 말발굽 소리가...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입도 열지 않았다.

- 여관 주인의 목소리는 약간 쉬어 있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로서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우지끈! 하고 문이 열렸다.
미지근한 밤공기에는 향기로운 풀내음이 자욱했다. 바람이 토토의 눈을 스치며 발목을 잡는다. 그는 밤의...  또 다른 냄새를 맡았다. 달이 구름 사이로 나와 있었다. 길 위의 광경은 흑백으로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었다. 검은색이 훨씬 짙게 깔려 있는 것 같았다. 냄새가 풍겨져 나오는 곳은 몇 군데나 괴어 있는 웅덩이였다. 청동 가죽으로 뒤덮인 들개들의 목과 몸통은 이미 움직임이 멈춰 있었다.

 

- "이 녀석이라면..."
어둠 속에 갇힌 길 끝자락을 향한 토토의 목소리를 남녀가 문 앞에 서서 듣고 있었다.
"밤에도 여행할 수 있어. 혼자서 말이야."

 

- 유린은 이른 새벽에 여관을 나섰다. 식사도 하지 않았다. 여관주인도 다른 손님들도 잠들어 있을 시각이었다. 동쪽 하늘이 물처럼 맑게 빛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 울타리 너머에는 세 아름 정도는 되는 거대한 삼나무들이 파란 하늘을 찌를 듯 뻗어 있었다. 
마을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도로 양쪽 가에는 거대한 나무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이것은 이 지방의 풍습이었다. 나무의 신비한 생명력을 마을에도 불어넣는다는 의미였다. 거목 저쪽에도 삼나무 가로수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 "아마 어젯밤 그 녀석들보다는 많이 알걸."교수는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진짜 값어치는 아직 자세히 몰라.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내게 건네주지 않겠나?" 
"유감이네요. 여행은 역시 혼자서 하는 게 제일이죠."

농담으로 돌려버리듯이 그렇게 말하고, 소녀는 교수와 똑같은 제스처로 가볍게 인사를 하자마자 바람을 휘몰며 달렸다.
순식간에 작아져 가는 뒷모습을 교수는 굳이 쫓으려 하지 않았다.

- "약삭빠른 아이로군." 교수는 중얼거리고 나서 양손을 망토 안쪽으로 집어넣더니 희한한 물건을 꺼냈다.
오른손에는 깃털 펜, 왼손에는 갈색 종이쪽지. 아니, 그것은 바싹 말린 동물 가죽이었다.
그는 나무 옆으로 다가가서 등을 기대고 오른손을 치켜올렸다. 그다지 비장한 모습도 없이 태연하게 날카로운 펜 끝으로 왼쪽 손목을 가차 없이 찔렀다. 펜을 뽑아내자 교수는 피부 위로 번져가는 피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선혈이 흐르는 펜으로 얇은 가죽 표면에 뭔가... 인간의 얼굴 같은 것을 그리기 시작했다.

- 펜의 움직임은 10초쯤 지나서 멈췄다. 차분하게 그것을 훑어보고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교수는 더욱더 기괴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사랑스러운 듯이 얇은 가죽에 얼굴을 가까이 대더니, 검붉은 색으로 변해 가고 있는 어떤 인간의 얼굴 그림을 향해서 낮은 목소리로 뭔가를 속삭이기 시작한 것이다. 

 

- 동시에 웃는 소리도 뚝 멈췄다. 왜 모두들 나무 뒤에서만 나타나는 것일까, 하고 유린은 생각했다.

- 아름다운 그림자였다.
차양 넓은 여행용 모자와 훤칠한 키를 엄숙하게 에워싼 검은 롱 코트. 등에는 한 자루의 기다란 칼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선을 자아내고 있다.

 

- 문득 유린은 지금이 대낮이 아니라 달 밝은 밤인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녀뿐만 아니라 등뒤의 사내들까지 얼어붙은 것은 그 아름다운 그림자의 전신에서 극히 위험한 뭔가가 감돌고 있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 자신도 모르게 유린은 두 눈을 비볐다. 처참하다는 느낌은 조금도 없었다. 빛 속의 참극은 마치 움직이는 그림자놀이 같았다.
이 사람 때문이다. 유린은 어렴풋이 그렇게 생각했다. 너무나도 아름답기 때문에 죽음까지 아름다와 보인다.

- 그림자가 다가왔다. 발소리도 나지 않는다. 설령 물 위를 걷는다 하더라도 잔물결마저 일지 않을 것이다. 젊은이였다.
그것밖에 알 수가 없다. 검은색 옷으로 에워싸인 전신에서 자아내는 맑고 찬 분위기가 그녀의 의식을 일깨운 것은 젊은이가 조금 떨어진 나무에 매놓은 사이보그 말 등에 안장을 얹고 있을 때였다.
유린은 엉겁결에 달려가서 머리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목숨을 구했어요." 
젊은이는 침낭 같은 것을 안장 뒤쪽에 실으면서 물었다."걸어가나?"
이 젊은이에게 있어서 사투의 원인이나 사정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일까? 습격해 왔기 때문에 쳤다. 국경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그리고 역시 처절한 생활 방식이었다.
"네."
"놈들의 말을 타라."
"저어..."
유린이 뭔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검은 옷의 그림자는 이미 말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함께..."
간신히 나온 목소리는 몇 걸음 앞서가는 폭넓은 등에 닿았다. "난 지금 잠자리를 찾는다."
대답의 의미를 유린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세상은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다못해 이름만이라도 가르쳐 주세요. 저는 유린이라고 해요!"
소녀의 외침을 나무숲이 가로막았고, 그리고 그 나무숲이 대답을 전해왔다.
"D."

 

- '도시'의 규모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인구 3만의 지방 소도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국경 각지에서 보내오는 물자 집산지였고, 도로도 정비되어 있으며 계절에 상관없이 나름대로 활기를 띠고 있는 도시였다. 
해안 지방에서 우송되어 오는 어패류를 보관하기 위한 냉동 시설, 평원 지대에서 방목한 식용 짐승들을 가두기 위한 광대한 울타리와 도축장 시설, 곡물이나 야채 건조 창고... 그리고 이런 것들을 도적이나 짐승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경비원들과 운반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하기 위한 술집이나 호텔, ...

 

- 지금 움직이면 필살의 일격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절망적인 눈으로 그는 발 밑의 혈흔을 바라보았다. 서로 뒤얽혀 있는 두 개의 링은 그 속에 파묻혀 있었다.
또다시 휘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끊어지는 순간, 토토는 최후의 운명을 맞게 될 것이 분명했다.
아름다운 선율의 흐름...

- 사라졌다.
토토의 전신에서 핏기가 솟았다.
토토는 적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적은 토토를 보고 있지 않았다.
또 하나의 골목길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 시선을 쫓으며 토토는 이번에야말로 두 눈을 부릅떴다. 지옥의 고통 속에서도 넋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운 사내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어둠보다도 짙은 어둠을 그는 보았다.
골목길 입구에 떠오른 사람 형태의 어둠을.
아름다운 사람 그림자.
도저히 달리 생각할 수가 없었다.

- 여행용 모자 아래로 짙게 드리워져 있는 그 얼굴은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 보이지 않았지만, 만약 그것을 보게 된다면 너무나도 선망한 나머지 숨이 멎어버릴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이 비좁은 골목길에 두 개의 아름다움을 출현시킨 것은 밤의 마력이었을까.
두 번째로 나타난 그림자가 몸을 구부려 구슬을 집어 들었다. 어린아이라도 넘어뜨릴 수 있을 만큼 허점투성이인 모습이다. 그림자는 손에 집어 든 것을 바라보았다. 

- "네 것인가?"
그림자가 물었다.
"유감이로군."
토토가 말했다.
그러면서 토토는 길 위에 쏟아져 나온 창자를 손으로 집어서 뱃속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거저 받은 물건이지. 이봐... 미안하지만 당신한테 부탁이 있다. 난 이쯤 해서 실례해야겠는데, 그 구슬의 주인을 구해 주지 않겠나? 대가는 그거다. 대단히 값진 물건인 모양이더군. 미리 말해 두지만, 반드시 나중에 가지러 갈 테니까 말이야. 장소는 기리건이라는 악당의 가게 지하실이다. ... 부탁한다."
그렇게 내뱉자마자 토토의 모습은 뒤쪽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어떤 신체 구조로 되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참으로 믿기 어려운 체력이었다.

- 휘파람의 그림자는 쫓아가지 않았다. "어떡할 건가?"
휘파람 그림자가 물었다. 마치 달빛이 묻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대답은 없다.

"갈 작정인가?"

"글쎄."
처음으로 짙은 그림자가 응했다.
"나보다 아름다운 사내는... 처음 만났다. 그리고 그 이름도 익히 알고 있지. 흡혈귀 헌터 D... 내친김에 내 이름도 밝혀두지. 난 글렌... 수행자다."
대답은 없다.
"다시 한번 묻지만 갈 작정인가?"
D의 윤곽이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글렌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이 달빛을 가리고 있었다.

- 다음 순간, D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 유린은 자신이 처한 운명을 깨닫고 있었다.
골동품 가게 주인이 알려 준 호텔에 투숙한 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던 것이다.
보통 때라면 의식적으로라도 그런 여관은 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나도 지쳐 있었고, 일단 구슬을 다른 사람손에 맡겼다는 안도감도 있었다.

- 그녀는 제일 싼 방을 택해서 들어가자마자 곧 샤워를 하고 거울 앞에 섰다.
지금까지 예쁘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었다. 스스로도 평범한 얼굴과 몸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화장도 그다지 하지 않았다. 북쪽 해변 생활이 그것을 허락지 않는 것이었다.
얼굴을 만져보았다. 피부가 거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닷바람은 몹시 차갑고, 게다가 소금 알갱이까지 묻어 있었다. 그것이 날카로운 유리 조각처럼 피부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다. 

 

- "난 기리건이다. 이 마을을 도맡아서 돌보고 있지. 좀 물어볼 게 있어서 오라고 했다."
"여기서 내보내 줘요. 이 쇠사슬을 풀어 달란 말이에요!"
"으음, 얘기하면 당장 풀어 주지. 왜 아가씨 같은 귀여운 여자애한테 이런 심한 대접을 하느냐 하면 말이야. 이런 방법을 써야 빠르고 고분고분하게 대답해 주기 때문이지."
"뭘 묻고 싶은 거예요?"
"우선... 네가 골동품 가게로 가져간 그 구슬 말인데, 어디서 어떻게 손에 넣었지?"
유린은 눈을 부릅떴다. 자신의 처참한 운명보다도 훨씬 깊은 절망에 빠져서 유린은 쇠사슬에 전신을 맡겼다.
"그 가게 주인도..."
"그래, 그래, 알고 있어. 내가 미리 귀띔해 뒀지. 1년에 한두 번은 반드시 뭔지도 모르고 값나가는 물건을 들고 오는 녀석들이 있어서 말이야. 가게 주인이 나한테 알려 주면 내가 적당한 가격으로 사들이는 것이지."
"돌려... 돌려줘요!"
"그것이 지금 나한테도 없다구. 도둑맞아 버려서 말이지." 

 

- 미친 듯이 얼굴을 흔들어대는 유린의 부드럽고 폭신한 유방 쪽으로... 깨끗한 블라우스 앞자락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하얗고 불룩한 곳으로 그것은 환희에 몸을 떨면서 잠입해 들어갔다. 

 

- 양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무참하게 두 팔을 위로 올린 자세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로 축 늘어져 있는 소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끔찍한 일을..."
감정도 섞여 있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놈들이 우쭐대면서 얘기하는 여자의 겉모습이 이 아이랑 쏙 빼닮아서, 혹시나 하고 와봤더니 역시... '이야기꾼'한테 찔렸나 보군. 하지만 오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것 같군. 자, 그렇다면 편안하게 잠들게 해 줄까나."

 

- 보통 팬이지만 끝은 아주 뾰족하다.
910년에 한 번... 평생 동안 세 번밖에 울지 않는 그 울음소리를 들은 자는 반드시 불행해진다고 하는 요사스런 새 '메사이아'의 깃털이었다. 

 

- 교수는 마치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꼼짝 못 하고 서 있었다.
눈앞에 서 있는 장신의 그림자를 노인은 망연히 바라보았다.
오른손에 드리워져 있는 피 묻은 칼이 아니라, 수려하다고 밖에는 달리 형용할 수 없는 미모를.
"너... 언제부터 거기에?"
교수의 목소리에는 감탄의 울림이 배어 있었다.

 

- "그런가. 어차피 네 상대는 아니었던 모양이군. 그런데 여긴 뭐 하러 왔나? 이 여자애의 연고자인가? 미리 말해 두겠지만, 난 최후의 순간을 지켜봐 줬을 뿐이야.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구."
그림자는 말없이 유린의 사체 쪽으로 다가가 멈춰 서서는 왼손을 뻗쳐 그녀의 이마에 내려와 있는 머리카락을 뒤쪽으로 쓸어 올렸다.
그것이 이 젊은이 나름의 명복을 비는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었던 것일까. D였다.

 

- 한 지역의 유력자쯤 되면 이름 있는 전투사나 경호원, 헌터들을 식객으로 데리고 있으면서 숙식 제공은 물론이요, 술값이나 물건값 등의 비용 일체를 책임지고 시중까지 들어줘야 한다. 왜냐하면 막상 어떤 문제에 휘말렸을 경우, 유력자가 얼마나 실력 있는 자들을 소집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자신의 권력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며, 생명과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특히, 손님들의 실력이 세상이 인정하는 수준일수록 과격한 기질 또한 그에 비례하기 때문에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주로 그들에게 의뢰하는 일은 위험하기 그지없는, 마치 시한폭탄을 안고 불속에 뛰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엄청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사건들이다. 

 

- 기리건은 기쁜 듯이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흡혈귀 헌터 D다."
그와 동시에 사방이 쥐 죽은 듯 잠잠해졌다. 모든 것이 죽은 자로 변해버린 듯이.

- "드디어 내 소원이 이루어진다. 이런 구질구질한 일이나 인간들하고는 영원히 안녕이다. 너와 함께 말이야."옆 테이블에 술병과 글라스가 놓여 있었다.
하염없이 병과 글라스를 기울이면서 기리건의 째진 눈은 거대한 자신의 몸뚱어리와 천장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 어렴풋이 좀도둑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기리건은 넋이 나간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림자로 보였던 것은 검은 옷 때문이었다. 게다가 눈부시게 빛나는 영롱한 미모.
"넌..."
그는 할 말도 잊은 채 그렇게 중얼거렸다.
"... D씨 아닌가?"
"유린이라는 여자애를 마귀 벌레한테 물리도록 만든 것이 바로 너냐?"
목소리는 얼굴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웠다. 그런데도 기리건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전신을 에워싼 공포 때문에. 오로지 혀만 움직였다. 

 

- 그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한쪽 벽 모퉁이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장신의 젊은이였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사색에 잠긴 그 모습과 전율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사내 다루는 솜씨 하나만은 어느 누구 못지않은, 산전수전 다 겪은 능구렁이 같은 여자들도 황홀하게 바라보기만 할 뿐 감히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아니, 감히 말도 걸지 못했다. 그 아름다움이 자아내는 위험한 향기가 인간의 생사까지 좌우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런 그를 고의적으로 모른 체하려고 아이들을 동반한 농부들은 장사꾼들과 어우러져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전투사들은 술잔을 주고받는다. 어느새 오두막집 안은 그 나름대로 떠들썩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 "... 아까 그 3인조 말이에요, 위세는 그럴싸했지만... 당신이 딱 한 번 노려보니까 찍소리도 못하고 움츠러들더군. 젊은데도 정말 대단한걸. 어지간히 지독한 수라장을 체험해 온 모양이야. 그 칼과 함께..."
여자는 늠름한 팔 속에 끼워져 있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칼을 향해 뜨거운 눈빛을 보냈다.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아. 저놈들은 아직 당신한테 이를 갈고 있을 거라구. 이 안이라도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지. 되도록 밖에는 나가지 않는 게 상책이야."
여자의 목소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봐요, 당신... 이름이 뭐야? 배에서 내려 같은 방향이라면 우리랑 같이..."
여자의 손이 살그머니 젊은이의 손에 닿았다.
"한 가지 부탁이 있다."
느닷없는 목소리에 여자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조... 좋아."

 

-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는데, 배 뒤쪽에 신경 쓰이는 녀석이 하나 있다. 출항 바로 직전에 배로 뛰어든 놈이다. 어떤 사내인지 확인해 주지 않겠나?"
여자는 눈을 가늘게 떴다.
"당신, 쫓기고 있는 거야?"
여자가 물었다.
그 블라우스 앞자락으로 금빛이 빨려 들어갔다.
"그걸로 충분한가? ...부탁한다."
황급히 금화를 꺼내 망연히 바라보고 나서, 여자는 환희에 찬 웃음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고 배 뒤쪽으로 사라졌다.

 

- "해치웠다, 해치웠다, 해치웠다!"
공포 따윈 완전히 잊어버린 듯이 환호성을 지르며 소년이 등뒤에서 달려왔다.
볼을 주홍빛으로 물들이며 소년은 젊은이의 등을 향해 뛰어든다.
바로 그 찰나, 두 줄기의 빛이 교차했다.
젊은이는 소년이 매달리려는 순간 등을 피해버렸고, 소년은 그만 바닥으로 뒹굴며 쓰러지고 말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쓰러진 소년의 팔이 어깻죽지부터 싹뚝 잘려 나가 있다니!

 

- 뜻밖에도 소년은 벌떡 일어났다. 피가 뿜어져 나오는 어깻죽지를 누르며 삽시간에 핏기를 잃어 가는 그 얼굴에 천진난만한 표정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노인처럼 음습한 독기로 가득 찬 그 눈에는 젊은이의 발 밑에 떨어진 자신의 오른손이 비쳐지고 있었다. 날카로운 바늘을 쥐고 있는 오동통한 아이의 손이. 

 

- 소년의 외침은 여자 쪽을 향한 것이 아니라, 느닷없이 나타난 아름다운 그림자에게로 향한 것이었다.
"난 글렌이라고 하지."
젊은이가 태연하게 말했다.
"저쪽이 내가 노리는 사내다. 나 같은 건 발 밑에도 못 가는 아름다운 사내지 원한다면 그의 칼날에 저 세상으로 가는 게 어때?"

 

- "소란 피우고 싶지 않아서 나 혼자 한가롭게 왔는데, 선착장에서 너무나도 잘생긴 사내를 보고 내가 그만 D라고 착각해 버린 모양이야. 그건 그렇고, 여기까지 온 이상 목적지는 같겠지, D?"
그 누가 봐도 황홀해질 것 같은 아름다운 입술이 움직였다. 

"기리건의 부하인가?"

 

- 여자는 피곤에 지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요, 아직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했고... 고마워요. 저는 샤인이라고 해요."
"D다."
"멋진 이름이네요. 슬픈 듯한 바람과 닮았어요."
샤인은 활짝 웃었다.
뜻밖의 반응이었다. D의 미모와 요기를 접한 자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일종의 욕정 섞인 악마적 감정에 흔들리게 된다.
귀족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여자만큼은 예외인 모양이었다. 어둠의 사냥꾼을 바라보는 그 눈빛은 한없이 그리운 것에 빨려 들고 있는 것 같았다.
바람 소리가 울렸다.

- 모든 육지에 설치된 '기후 제어장치'도 아무런 정비 없이 1만 년이란 긴 세월을 견딜 수는 없었으며, 인간들의 파괴는 난공불락이라고 여겨진 장치 자체에도 손을 뻗치고 말았다. 그 결과, 어떤 지역에서는 자연의 이치를 무시한 괴이한 사계절의 운항이 계속되었다.
예를 들면, 지금 지나가고 있는 폭 10킬로미터의 이 물길만 하더라도 그 중간 지점에서 갑자기 기온과 수온이 내려간다. 그리고 선착장에서는 보이지 않던 얼음 덩어리가 물길 중간에서 급속히 증가하는 것이다. 이 근방에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자명한 이치로 받아들이지만, 처음으로 찾아오는 여행자나 상인들은 십중팔구 배 안에서 감기에 걸려 곤혹을 치르게 되는 것이다. 

- "이 물길을 지나갈 때마다 두 번 다시 여름이 안 오는 게 아닐까 하고 걱정이 돼요."
샤인은 한숨을 내쉬듯이 말했다. 그 입김은 하얗게 얼어붙었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D가 말했다.
"뭐든지 말씀하세요."
"그 무술, 어디서 배웠나?"
창잡이와의 싸움을 D는 관찰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샤인은 거리낌 없이 말했다.
"어렸을 때 마을에서 전투사를 고용했어요. 무시무시한 일들이 자주 일어났으니까요. 여자애들 중에서는 제가 제일 빨리 배웠던 모양이에요."
"사내라도 그렇게는 안 되지."
"그러지 마세요. 쑥스럽잖아요."
샤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미소에는 여자 특유의 애교가 들어 있지 않았다. 맑게 갠 하늘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 이 여자의 매력인 것 같았다. 

 

- "당신을 보고 있으면 한마디를 하더라도 철학적인 화제를 찾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좀 소탈해지는 게 어때요?"

"원래 천성이 그래."
샤인은 깜짝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시치미를 떼는 듯한 그 대답이 도저히 눈앞의 젊은이의 음성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쉰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아연실색하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D에게 멈춘 그 눈빛은 의아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 당신이 말한 거예요?"
"그렇다... 크으윽..."
재미있어하는 듯한 목소리가 갑자기 괴로운 듯한 목소리로 변하더니 끊겼다.
이번에야말로 샤인은 D의 왼쪽 허리 쪽으로 눈을 돌리며, 단단하게 주먹을 쥔 왼손에 시선을 떨구고 나서 다시 아름다운 얼굴을 쳐다보았다.

"복화술을 하나요?"
샤인이 물었다.
"글쎄..."
"정말 다재다능하네요."
감탄해 마지않는 표정이었다.
D는 다시 한번 태연하게 주먹을 꼭 쥐고 육지 쪽을 바라보았다.
"이제 곧 도착하겠군."

 

- 오후에 처음 도착하는 배지만, 하늘은 여전히 어둡고 음침하다. 일몰도 그다지 멀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암벽에 드리워져 있는 사람들의 그림자도 엷게 보인다. 
도로 맞은편에 밝은 색채의 지붕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모두 돌로 만든 집이었다. 냉풍이 휘몰아치면 뼛속까지 얼어붙는 국경에서는 돌이야말로 최고의 보온 재료라 할 수 있다. 그 뒤쪽으로는 암울한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검은 산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침울하고 어두워 보인다. 

 

- "해가 진 후에는 가면 안 돼요."
담당자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충고하듯 말했다.
"그 마을 근처는 원래 귀족의 소굴이었죠. 지금도 밤만 되면 별의별 이상한 일이 다 일어난다구요." 

 

- "당신... 혹시 흡혈귀 헌터... 그러고 보니 국경을 떠돌아다니는 단 한 사람, 오싹할 정도로 아름답고 색다른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하는..."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얘기하겠다."
샤인의 말을 D는 싸늘하게 잘라버렸다.

 

- D가 모든 사실을 이야기했을 때, 샤인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오열은 새어 나오지 않았지만 양쪽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백발노인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지며 두 무릎을 적셨다. 
"그런데... 동생은 편안하게 갔나요?"
샤인은 흐린 목소리로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
"그래도 당신에게 구슬을 부탁할 시간은 있었군요."
"말없이 죽은 것이 나았겠나?"
"그건..."
"그 여자애는 그렇게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시체는 돌아오지 않는 거군요."

"죽은 얼굴은 예뻤다."

"고마워요."

"내 용무는 끝났다. 커피, 고맙군."

D가 일어서려고 했다.

 

- "이대로 떠나버리는 거예요?"
"볼일은 끝났다."
"이 구슬을 노리고 무서운 무리들이 마을로 찾아올 거예요. 아니, 벌써 와 있을 거예요. 부탁이에요, 제발 도와줘요."
"구슬을 건네줘라. 그 어떤 가치가 있다 해도 생명과는 바꿀 수 없을 것이다."
"그럴 순 없어요. 여동생이 목숨을 대가로 당신에게 맡긴 물건이라구요."
"내 상대는 귀족뿐이다."
만약 D가 진정으로 이곳을 떠나기 위한 구실로써 그 한마디를 내뱉었다고 한다면, 그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한 것이다.
순간, 샤인의 눈동자가 빛났다. 그 눈빛은 '감쪽같이 속이다니'라고 말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순수한 희망에 가득 찬 것일까?

 

- "이 마을에도 귀족은 있어요."
샤인은 D의 얼굴을 주시하며 말했다.
"금시초문이다."
"마을의 비밀이에요. 밖으로는 절대로 누설하지 않죠. 귀족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은 물고기를 사주지 않을 테니까요."
북쪽의 국경 지대는 특히 귀족을 금기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귀족의 유적이 발견되었다는 이유만으로도 마을 전체가 이동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하물며 실제로 저주받은 존재가 마을을 배회하고 있다면...
"어떤 귀족이냐?"
"그건 지금부터 얘기할게요. 잠깐 기다려요. 그 앞에 있는 구슬부터 치우고 나서요."

 

- "전... 이제 혼자가 돼버렸어요."
샤인은 툭 한마디 내뱉고 걸으려고 하다가 비틀거렸다.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난 것이다. 보통 여자는 말할 것도 없고, 간이 큰 사내라도 혼비백산해 버릴 것 같은 기괴한 일과 비극이 연속해서 일어났으니 무리도 아니다.
그녀의 어깨를 차갑고 힘센 손이 지그시 눌렀다.
"구슬을 가져와라."
D가 조용하게 말했다.
"놈들은 모두 이 집을 알고 있다."
샤인은 마치 냉혹한 교사에게 격려받는 낙제생 같은 눈빛으로 D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 속에 순식간에 눈물과... 그리고 희망이 솟구쳐 올랐다.
"이곳에 있어 주는 거예요?"
"나를 고용하겠나?"
"네..."
샤인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울고 있지는 않았다.

"고용 대가는 그 구슬이다."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샤인은 그 말에도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맡기겠어요. 당신에게 맡기면 전 안전해요. 고마워요."

샤인은 안쪽 방으로 들어가서 구슬을 가져다가 D에게 건네주었다.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새벽빛은 늠름한 아침 햇살로 그 모습을 바꾸고 있었다.

 

- 어디인지도 알 수 없는 황량한, 그러나 이상하게 넓은 공간 여기저기에 마치 별천지와 같은 호화스런 잔영이 남아 있는 장소였다.
밖에는 이미 아침의 생명이 빛을 자아내며 넘쳐흐르고 있는데, 아직도 엷은 어둠이 감도는 그곳으로 하나의 그림자가 들어왔다.

"피 냄새가 나네."
어둠 속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났다. 눈을 집중하면 어렴풋이 사람 그림자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도, 그리고 분명히 그것이 걸터앉아 있는 소파나 테이블은 얼마나 정교하고 치밀하게 만들어져 있는 것까지도 분간할 수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림자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틀림없이 그 소리는 기리건 별채에 있던 문에서 울렸던 여자의 목소리였다.

 

- 스무 살이나 된 나이 찬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요기가 감도는 미모의 젊은이가 단순히 노동자로서 들어왔다는 말은 아무리 시골 사람들이라도 곧이곧대로 믿을 리 만무하다. 샤인은 다소의 험담이나 악평은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시체는 헛간으로 옮겨졌고, 급히 달려온 의사의 진단도 받았다. 염과 입관은 오늘 밤에 하고, 장례식은 내일 치른다.
겨울 추위와 얼음 덩어리를 삼켜버린 것 같은 여자의 가슴에 문득문득 가느다란 햇살 같은 안도감과 따스한 온기를 느끼게 한 것은 말없이 짐차를 몰고 있는 D의 존재였다.

-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신비감.
하늘의 세공사가 조각해 낸 것 같은 미모, 신변에 감도는 처참하면서도 영롱한 분위기, 그리고 귀족을 연상케 하는 기품...
할아버지의 시체를 가지러 가는 도중에 D가 던필이라고 털어놓았을 때, 샤인은 과연 짐작했던 대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온통 검정으로 뒤덮인 그 수려한 젊은이에게는 보통의 던필을 훨씬 능가하는 그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어딘가 다르다.
모습은 보통 인간이나 다름없지만, 그러나 그녀뿐만 아니라 그 어떤 인간이라도 상상할 수 없는 야릇한 신비감이 감돌고 있다는 것만큼은 그저 곁에서 바라보기만 해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 타인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대부분의 던필이 지닌 특징이라고 한다.
자신의 무술을 팔고 다니는 전투사나 보디가드들도 마찬가지이다. 예전에 마을을 찾아왔던 그들의 잔인한 행동들, 그리고 냉엄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타인을 무시하는 태도를 샤인은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이 젊은이는 그런 그들조차도 도저히 다가설 수 없는 엄청난 존재라고 확신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샤인은 그가 곁에 있다고 하는 것만으로도 광명의 빛을 얻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좀 더 분발해 보려는 마음이 용솟음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 "좀 진정됐나?"
갑작스런 D의 물음에 샤인은 당황하며 마음을 추스렸다.
"네. 그런대로."
"고용된 이상... 구슬의 유래를 들어야겠다."

- “대부분은 할아버지한테 들은 거예요. 이 근방 일대에 귀족들의 사냥터가 있었다는 건 이미 얘기했었죠. 벌써 1천 년 이상이나 지난 일이지만 말이에요. 그 시대에는 북쪽 국경에서도 기후 제어장치'의 힘으로 얼마든지 따뜻하게도 시원하게도 할 수 있었던 모양이에요. 귀족들이 사는 집은 별장이었는데, 어젯밤 지나온 숲뿐만 아니라 이 근방 일대에도 퍼져 있었대요. 어젯밤 그 길에서 마을 쪽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냥 똑바로 가면 가장 화려했었다는 장소가 나오죠. 지금은 옛 자취를 전혀 찾아볼 수 없지만, 호화로웠던 그 무렵의 모습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어요. 지하 공장은 아직도 움직이고 있다는 소문도 있고 말이에요. 귀족의 '물놀이'라고 하는 것이 뭔지 아세요? 광과 요트나 풍력 요트를 사용해서 바다로 나아가는 거죠. 그리고 잠수 구슬이라는 것을 타고 바닷속을 산책하구요... 곶을 돌아가면 물속에 있는 관찰 시설의 흔적도 볼 수 있어요. 그래도 가장 처참하고 미치광이 짓이었던 건 바닷속 생물의 이상 변태와 대중식이죠. 무려 몇천 해리에 걸쳐서 DNA의 변화를 유도하는 약품이나 이상한 먹이를 여기저기에 흩뿌려 놓은 거예요. 귀족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간단한 일이죠. 지금이라도 사원 안에 있는 도서 기록실에 가면, 그 당시 귀족이 남긴 잔인한 자료를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삼차원 홀로그램을 들여다보는 것은 엄격하게 금기시하고 있어요. 몇 사람인가 그걸 보고 발광한 사람이 있었나 봐요. 저는 사진으로밖에 본 적은 없지만, 그것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엄청난 것이었어요. 그 바닷속에 그런 것이 있었다니, 믿어지지 않을 정도예요. 가로세로가 10킬로미터씩이나 되는 거대한 가오리, 큰 고래를 세 마리 정도는 통째로 꿀꺽 삼켜버릴 만큼 큰 삼치... 그 사진도 있어요. 플랑크톤이라고 하면 물고기의 먹이밖에 되지 않지만, 그것마저도 귀족의 손에 걸리면 2미터나 되는 엄청난 연어 떼를 뼈로 만들어버리는 대식 괴물로 변해버리는 거죠. 어떤 사진을 보면 바닷속... 수평선 저쪽까지 그것들로 가득 차 있어요. 귀족들은 그 어떤 송곳니라도 감히 뚫을 수 없는 투명 구슬을 타고 시커먼 와인을 들이키면서 바닷속의 것들이 서로 처참하게 먹고 먹히는 광경을 관찰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 와인의 재료가 어떤 것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하겠죠?"

"그 시대부터 인간이 정착하고 있었던 건가?"
지금의 이 처참한 이야기도 D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자극도 주지 못했다. 조용한 목소리다.
"귀족의 리조트 개발과 동시에 노예로 끌려왔던 모양이에요. 노동은 모두 기계가 하지만, 세밀한 부분은 아무래도 인간 노예보다는 못했던 모양이죠. 순종하는 인간들을 몇 명이나 부리고 있느냐가 이 근방 귀족들의 신분의 상징이었던 거예요. 그 외에도 인간들은 여러 가지 용도로 이용됐어요. 그것에 대해서도 알고 있겠죠. 그러는 사이에 귀족들은 어느 날... 소수의 노예들만 남겨 놓고 나머지 사람들을 모두 한 곳으로 집합하게 했어요. 그리고 거의 먹을 것도 주지 않고 밤마다 그들을 덮치기 시작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귀족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즐거움은 저항하는 인간의 피를 빨아먹는 데 있죠. 지하 감옥에 사육해 두고, 괴상한 요술을 걸고, 또 이상한 가슴 수술까지 해서 인간들을 자기네들 맘대로 할 수 있는 로봇 같은 노예로 만들어버렸어요. 그야말로 그들이 시키는 대로 복종하는 노예로 변해버린 거죠. 그런 인간들의 목에 달려들어 물어뜯고 피를 빨아먹어 봤자 귀족들은 지루하고 따분할 뿐이라고 느낀 거예요. 그들 지역에서 빠져나가려고 하는 인간들을 밥 먹듯 덮친 것이 그들의 일상이었던 거죠. 그리고 피를 빨아먹고 나서 그 사람들을 그대로 내버려 뒀어요. 당연히 희생자들은 마을 사람들을 덮치게 되고, 마을은 난리가 나는 거죠. 그래도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서 그들을 찾아내어 심장에 말뚝을 박고... 그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을 들으면서 즐기는 것이 귀족으로서는 최고의 오락이었다는 설도 있을 정도예요. 인구가 감소하면 '도시'에서 얼마든지 끌고 왔죠. 기록에 의하면 10년 사이에 다섯 번이나 폐허로 변한 곳도 있었던 모양이에요. 당신도 귀족이 남긴 훌륭한 문명과 아름다움을 본 적이 있겠죠. 달빛 아래서 빛나는 아름다운 정원, 꿈처럼 타오르는 향료 섞인 횃불, 수정과 자작나무로 만들어진 로지... 그리고 벽돌이 예쁘게 깔린 길을 그림자도, 소리도 없이 우아하게 걷는 하얀 드레스와 검은 망토 차림의 사람들... 그렇게 아름다웠던 생명체가, 그토록 아름답게 살 수 있었던 종족이 어째서 인간의 생피를 빨아먹어야 하는 거죠? 별장 색깔을 다시 칠할 때 어째서 인간의 생피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괴상한 물고기를 불러 모으기 위해서 왜 몇천 명이 넘는 인간의 목을 잘라 바닷속에 내던져야만 하는 거냐구요? '문명'의 아름다움은 그것을 구축한 종족의 덕성과는 무관한 것일까요? 그러던 어느 날, 너무나도 잔혹하고 아름다운 나날에 최후의 날이 찾아든 거예요. 눈 깜짝할 사이에... 전설에 의하면 하룻밤 사이에 귀족들은 모두 자취를 감춰버렸대요. 아무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말이에요. 어떤 학자는 '기후 제어장치'의 고장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트러블을 일으키게 된 것은 훨씬 후의 일이라는 게 증명되었죠. 적어도 이 지방 일대가 극한의 한복판에 놓이고, 바다에서 이상한 종류의 물체들이 사라지고, 빙산투성이가 되어도 인간이 자력으로 살아가기 시작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에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없나?"
D는 문득 바다 쪽을 바라보았다.
몇 척이나 되는 동력선들이 하얀 파도를 가르며, 가느다란 수맥을 끌면서 수평선 저편으로 나아간다.
그 건너편에 뭔가 생물의 등 같은 검은 그림자가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저건 귀족의 유산... 범고래예요. 전체 길이가 2백 미터나 되기 때문에 한 마리만 잡아도 마을 전체가 반년 동안은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어요. 살코기는 식용으로 쓰고, 지방은 등유나 자동차 연료, 그리고 백랍금 세공이나 보온 코팅제로 쓰여요. 게다가 뼈는 공예품이나 천식, 괴혈병의 특효약이 되니까요. 그 창자 속에 고여 있는 바닷속 동식물의 엑기스... 용설란 향이 나는 그것은 '도시[]'의 귀부인들이 향수로 애용하고 있죠. 물론 그보다는 귀족 전용의 향수로 더 잘 어울리겠지만 말이에요. 이제부터 여름 축제가 끝날 때까지는 마을은 몹시 바쁠 거예요. 저도 힘을 내야겠죠. D... 안전하게 보호해 줘야 해요."

(리뷰자 주 : 바닷속을 묘사하는 장면은 란포의 <파노라마 섬 기담>에서 영향을 받은 듯하다. 포경에 관해서는 8-90년대 작품이라는 걸 감안해서...)

 

- "그래요, 전해 내려오는 얘기가 있어요. 어느 날, 귀족 이상의 힘을 지닌 어떤 여행자가 배를 타고 나타나서, 귀족들을 광장에 모아 놓고 그 잔학한 행위를 문책했대요. 화가 난 귀족들이 전투마차를 타고 우르르 몰려오자, 그는 검은 망토를 휘둘러서 전투마차뿐만 아니라 별장까지 송두리째 날려버렸죠. 잔뜩 겁을 집어먹은 귀족들은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 모두들 이 땅을 떠나버렸다고 해요." 
"한 사람만 제외하고?"
"네. 그 사람의 이름은 마인스터 남작... 이 지방 관리 책임자로서 최고로 흉악하고, 최고로 악질인 귀족 두목쯤 되죠. 귀족의 피가 낳은 가장 거무칙칙한 암세포.... 사실은 바다 생물의 거대화나 인간들을 한 곳에 모아 놓고 생피를 빨아먹는 그 잔인 무도한 '놀이'도 모두 그 사내의 기막힌 제안이었다고 기록에 나와 있어요. 정말로 흉측하게 생긴 그놈의 초상화도 남아 있구요. 동료인 귀족들까지도 그놈의 별장에 들어가면, 살아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불러도 가지 않았대요."

 

- "너무나도 소름 끼치는 상상을 불러오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이런 얘기를 입에 올리지 않아요. 하지만 그곳에서 무슨 일이 행해졌었는지 대충은 짐작이 가요. 그 잔학한 모든 것도 전설의 여행자 덕분에 두 번 다시 발생하지 않게 되었죠. 그는 그 후에, 인간이 해변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바닷속의 괴상한 생물들을 거의 없애버리고, 귀족의 조종 장치도 파괴하고 떠나갔다고 그러더군요. 어디에 사는 누군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은 채 전설 속의 인물로 묻혀버렸죠. 이봐요, D, 혹시... 그 여행자가 당신의 먼 친척쯤 되지 않을까요?"
마치 어린아이처럼 장난꾸러기 같은 눈빛으로 샤인은 D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강철같이 냉담한 표정이다. 왠지 엉뚱한 소리를 입에 올려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샤인은 곧 앞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D는 별로 신경 쓰는 기색이 없었다.
"그러나 귀족은 있다."
D가 말했다.

 

- 아까 거짓 증언을 했던 사내들의 모습은 어느 틈에 보이지 않았다.
"모두들 이의가 없다는군. ...어이, 의사가 왔어. 빨리 병원으로 데려가라."
몇 사람인가가 몸부림치면서 뒹굴고 있는 사내들에게 달려가서, 어깨를 부축이며 일으켜 세웠다.
"정당방위라고 인정한다. 운이 좋았군."
보안관은 권총을 도로 집어넣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 머리를 흔들며 떠나려고 하는 도와이트의 넓은 등에 대고 강철 같은 목소리가 말했다.
"빚을 졌군."
"잘난 척하긴."
도와이트는 돌아보며 D를 노려보았다.
"난 뭐든지 정직하게 하고 싶을 뿐이야. 고기잡이도 싸움도 말이지. 그렇지 않으면 평범한 젊은이나 쓸모없는 깡패가 돼버리니까. 하지만 말이야, 이것으로 내가 두 손 든 건 아니란 걸 명심해. 어부의 매듭은 바다 위에서 짓는 거야. 그때까지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기나 하라구."
"그렇게 하지."

 

- "이상하군... 샤인이 없어."
"뭐라구?"
도와이트가 뛰었다.
"으윽... 그놈은 어딨나?"
두 쌍의 눈이 D가 있던 자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돌벽은 말이 없었다.
푸르스름한 빛 속에서 D의 모습 또한 홀연히 사라지고 없었다.

 

- 엉겁결에 튀어나오려는 놀란 소리를 샤인은 목구멍 속으로 삼켜버렸다. 유린...!
외딴 마을에서 죽음을 당한 여동생은 살아 있을 때와 조금도 다름없는 귀여운 얼굴로 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미 샤인의 머릿속은 벅차오르는 기쁨과 그리움에 사무치고 있었다.
유린이 뒷문 쪽으로 이동하며 손짓을 했을 때,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뒤를 따라간 것도 당연했다.

 

- 이윽고 산속에 있는 절 입구로 보이는 장소가 나왔다.
주위에 무성하게 우거져 있는 수목들이 밤의 어둠을 더욱 짙게 물들이고 있고, 여러 겹으로 겹쳐진 나무 그림자 사이사이로 묘비 같은 덩어리와 멀리 보이는 사원의 첨탑이 아른거린다.
나뭇잎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빛은 파란색에 가깝다. 청록색의 녹을 부어 만든 청동문을 등뒤로 한 채 유린은 멈춰 섰다.
"여기까지 오면 이제 훼방꾼은 없겠지."
귀여운 그 입술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요염한 여자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소리를 듣고도 여전히 샤인의 눈은 흐릿해 있고, 감격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 죽었지만 사랑하는 사람... 그것은 아마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그리운 존재일 것이다. 그것을 이용하여 저항할 수 없는 환영에 사로잡히게 할 뿐만 아니라 사고는 물론 이성까지도 잃어버린 그녀의 행동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요술이었을 것이다.

 

- "그건 그렇고 그 보디가드, 확실히 무시무시한 놈이야. 도저히 정면에서 맞대결할 마음이 생기지 않아.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통쾌하게도 자리를 썩 비켜 주더군. 후훗... 고맙단 말을 해야겠어. 그럼, 어디 한번 들어볼까? 구슬은 어딨나?"
샤인의 머릿속에서 그 소리는 여동생의 목소리로 변하여 이렇게 울려 퍼진 것이다.
"구슬은 어디에 있어요? 언니, 가르쳐 줘요."
여동생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라는 이성적 판단 따윈 이미 샤인에게는 없었다.
"D에게 맡겼어."
샤인이 대답했다.
"쓸데없는 짓을!"
여자는 험상궂은 형상으로 그렇게 내뱉었지만 곧 미소로 바뀌었다.
"하지만 아무리 감당 못할 적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생을 누리고 있는 이상, 마음속에는 싸우고 싶지 않은 사랑하는 그 누군가를 숨겨 두고 있을 거야. 크크크, 그것이 있는 이상 이 '추억의 사몬'의 마술에 꼼짝없이 걸려들 수밖에 없지. 실제로 이 여자도... 크크, 사내를 불러냈군. 이봐, 그 구슬의 정체는 뭐냐?"

 

- 그녀에게는 여동생의 모습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마술을 건 여자... 즉 사몬은 말했다. 샤인이 사내를 불렀다고. 샤인의 대답에 사몬은 고개를 갸웃했다.
"유린이라고?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분명히 내 눈에는 사내를 불러낸 걸로 보이는데, 유린이라니. 흠... 분명히 뭔가 있군. 그래도 확실히 내 마술에 걸려든 건 분명해. 걸려든 이상, 거짓말을 할 리가 없지. 그렇군, 모르는군. 다른 구슬은 없나?" 

 

- "너, 그 무술을 어디서...?"
이를 갈며 소리쳤을 때, 사몬의 귓속으로 침착한 학자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떠나거라. 그리고 어디든 낭떠러지에 몸을 던지고 아름답게 죽도록 해라. 깊고 푸른 바닷속 밑바닥이야말로 네 무덤으로 안성맞춤이다. 가거라."
'뭐가 어째? 닥쳐라!' 하고 생각하며 덤벼들려 했지만, 사몬의 마음속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공격적인 생각도, 전투심도 급속도로 약해져 갔다. 

 

- 사몬의 힘을 깔볼 수 없다고 느낀 것도 있지만, 그녀가 등을 돌리는 그 순간 샤인의 가슴속에서도 깊은 울림이 퍼져 갔기 때문이다.
"그대로 움직이지 마시오. 그리고 잘 듣는 겁니다. 구슬은 누가 가지고 있습니까?"
"D예요."
샤인 역시 가슴속으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나도 듣고 있었습니다. 당신 집의 소중한 구슬은 D라는 사내가 가지고 있습니다. 과연 그래도 괜찮을까요? 그 자는 어디서 굴러먹던 말 뼈다귄지도 모르는 떠돌이 던필... 귀족과 한 패거리입니다. 그런 사내에게 소중한 것을 맡겨도 과연 안전할까요?"
"그 사내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샤인은 온몸으로 부정했다.
갑자기 허공 어딘가에서 무서운 기미가 감돌았다.
"이거, 강하군요.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보여지는데요. 하지만 젊은 날에는 모든 것이 빛나 보이는 법이죠. 설령 암흑세계에서 찾아온 그림자라고 할지라도... 알겠습니까? 잘 들으시오. 이렇게 생각해 보는 겁니다. 내 말이 옳은지, 혹시 자신의 생각은 선입관이 아닌지 하고..."
샤인의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여 방금 전 그 말이 들리기까지는 사실 불과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말은 응축된 정보 덩어리의 형태로 다가온 것이다. 

 

- 그로부터 몇 초가 흘렀을 때, 돌계단을 검고 아름다운 그림자가 뛰어 올라왔다.
"D...!"
넋을 잃고 늠름한 가슴으로 달려들며 안기자마자, 샤인은 튕겨져 나가듯 떨어졌다.
"무사한가?"
D는 짧게 물었다.

 

- "뭘까요, 그 목소리는? 당신한테서 구슬을 돌려받으라고 설득하고 있었는데... 혹시 그 여자도 머릿속에서 울리는 그 목소리 때문에 도망친 걸까요?"
"아마 그럴걸."
"무서워요..."
"구슬을 내놓는 게 어떤가?"
"누가요! ... 이번에는 제발 이렇게 좀 말해 줘요. 놈의 양쪽 따귀를 갈겨 주겠다고 말이에요."
D는 잠자코 여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여기에 있다는 걸 알았죠?"

"모르는 것이 좋을 거다."

 

- "그 구슬, 어지간히 가치가 있나 봐요."
"그런 모양이다."
"그렇다면 더욱더 내놓을 수 없어요."
샤인이 히죽 웃었다. 겁 없는 웃음이었다. 사내에게나 어울릴 것 같은 그 웃음이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 가끔은 이런 여자도 있는 모양이다.
두 사람은 돌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 그 모습이 모퉁이를 돌아서 사라지자, 사몬이 나타난 곳과 반대쪽 기둥 뒤에서 웬 노인이 나타났다. 노인의 얼굴은 온통 새하얀 눈 같은 백발에 뒤덮여 있었다. 
두꺼운 책이라도 펼쳐 놓고 읽고 있으면 딱 어울릴 것 같은 풍채를 지닌 백발노인이지만, 보통 학자에게는 있을 수 없는 위험한 분위기가 온몸을 감싼 망토 주위를 감돌고 있었다. 

 

- 손이 거침없이 움직인다.
조잡한 선으로 그려진 얼굴은 이전 유린의 그것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거친 스케치에 지나지 않지만, 즉석에서 그려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 특징은 명확하게 엿볼 수 있었다. 
"처음의 그 여자애는 대충 그려서 마술을 걸었지만, 그런대로 효과는 있었지. 하지만 조금 전 여자 쪽 얼굴은 약간 손을 봐야 될 것 같군. 그리고 D... 너의 몫은 이미 내 손에 있다. 던필의 피가 내 마술에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조만간 테스트해 보겠어."

 

- D는 헛간에 있었다. 
할아버지의 시체는 관과 함께 그곳에 안치되어 있었다. 혼이 나가버린 육체로 잠입하려고 애쓰는 요괴나 마귀들은 수없이 많다. 그들의 잠입을 막기 위해 시체를 소금물로 깨끗이 씻겨 주고, 혈관에는 맑은 물을 주입하여 흐르게 한다. 마무리 작업은 마귀를 물리치는 부적을 열여섯 군데 방향으로 붙인 헛간 안에서 하룻밤을 지새는 일이다. 


- 발견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소금물 의식을 행하고, 의사가 혈관에 맑은 물을 주입한다. 그리고 승려는 헛간 주위에 마귀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둥그런 선을 그린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의식을 행할 승려는 이웃 마을에서 대규모 집단 조난이 발생했기 때문에 부재중이었다. 다행히 마을 여관에 묵고 있는 여행자 승려가 있었기 때문에 그를 부르게 되었다.
그토록 철저한 의식을 행하는데도 D가 시체를 지키고 있었다. 최대한의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하더라도, 어느 틈엔가 번개같이 시체로 잠입해 버리는 날쌘 놈들이 서성이고 있기 때문이다. 

 

- 그것은 부드러운 모래 위에 아무렇게나 꽂아 놓은 듯한 나무토막과 돌멩이며, 손가락으로 여기저기 파놓은 것처럼 생긴 길고 가느다란 흠이었다. 
"이상한가?"
에그베르트가 쇠몽둥이를 어깨에 메며 물었다.
수염투성이 사내의 가벼운 언행이나 분위기와는 너무나도 다른 그 장중한 목소리에 어설픈 인간이라면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 왕국이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지. 이보다 더 크게도 할 수 있지만 통솔하는 데 좀 시간이 걸려서 말이야. 아무튼 이 정도가 적당하겠지. 하지만 그전에..."
에그베르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열 걸음 정도 걸어가자 타원형 선 밖으로 나갔다.
"어디 한번 붙어볼까. 일단은 내 왕국 밖에서 해보자구."

 

- 칼집에서 검은 빛줄기를 끌어내며 D도 맞섰다.
칼끝은 아래쪽, 즉 모래를 거의 스칠 정도로 아슬아슬한 위치에서 멈췄다. 거기서 튀어 오르는 칼날로 상대를 자르려면, 칼자루를 쥔 당사자도 극도의 기술이 요구되지만 상대방 역시 공격하기 어렵다.

 

- D의 두 눈이 이상한 형태의 빛을 띠고 있었다.
에그베르트와 자신, 두 사람에게 생긴 믿기 어려운 변화를 깨달은 것이다.
에그베르트는 배나 부풀어 오른 것처럼 보였다.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그 온몸에서 넘치는 자신감과 힘 때문이었다.
그것이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는 증거로...

 

- 칼이 무겁다. 몸도 무겁다. 온몸이 마치 납덩어리로 변해버린 것 같은, 아니 타원형의 선 안쪽의 중력 그 자체가 변화를 일으킨 것 같은 기괴한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어떤가, 흡혈귀 헌터?"
목소리만은 여전히 중후하다.
공격 태세를 취한 채 움직이지 않는 쇠몽둥이 끝에서 솟구치는 무시무시한 살기는 아까 D와 대적한 에그베르트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 무섭게 공기를 가르며 날아온 쇠몽둥이를 D는 왼쪽 손목으로 가차 없이 막아내며, 적이 깜짝 놀란 틈을 타서 에그베르트의 왼쪽 가슴을 꿰뚫은 것이었다.

D가 소리도 없이 몸을 뒤로 젖히며 칼을 빼자 선혈이 하염없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심장을 관통했어야 할 칼날이 급소를 약간 스쳤다는 것을 눈치채고, 다시 돌진하려고 하는 D의 발 밑이 갑자기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다음 순간, 온몸은 무릎까지 모래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일 뿐, D의 몸은 코트 자락을 마치 날개처럼 나부끼면서 공중에 떠 있었다. 
마치 그의 뒤를 쫓는 기괴한 손처럼, D의 발목과 무릎을 휘감고 있는 기다란 실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있었다. 그것은 갑자기 모래 위에 떨어지며 물보라를 쳤다. 땅은 순식간에 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D의 무릎과 발목을 휘감고 있었던 것도 물의 촉수였던 것이다. 
착지한 발 밑의 모래도 날카롭게 튕겨져 오르고 있다. D는 다시 한번 공중으로 뛰어올라 평탄한 모래 위로 내려왔다.

"떨어질 거라 생각했는데... 과연 대단하군."

 

- 새까맣게 D의 시야를 가득 메운 그 요상한 형체는 10개가 넘었다.
그것들은 목구멍으로 쿨럭거리는 소리를 내자마자 검은 덩어리를 토해냈다. 파도 위로 튕겨져 오른 것은 모래 덩어리였다. 그리고 나서 그 검은 얼굴들이 허공을 향하자,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잇따라 이어지며 정적을 깼다.
기관지에 막혀 있던 모래를 분출시키고 공기를 들이마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호위병'들은 '생명(生命)'을 얻는 모양이다.
"필요하다면 산도 만들지. 강도... 아니, 흡혈귀도 말이야."

선혈이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가슴을 누르면서 에그베르트의 목소리는 자화자찬에 취해 있었다.
아마 그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래 위에 그린 원 안쪽, 다시 말해서 마술을 건 그 공간 안에서는 절대적으로 군림하는 군주처럼 그는 무적의 대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지시 하나만으로 순식간에 나무 막대기는 나무가 되고, 물웅덩이는 바다로 변하고, 숨겨둔 흙 인형은 최강의 병사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적어도 그의 '왕국' 안에서만큼은...

 

-  칼을 오른손에 쥐고 D가 요사스럽게 다가온다.
승부는 죽음으로써 종결되는 것이다. 그것은 싸움을 업으로 하는 자의 철칙이었다.

 

- "넌 죽이지 않겠다. 네 동료한테 전해라. 구슬은 내 품에 있다. 원한다면 나를 노리라고 말이다."
두 개의 시선이 뒤얽히고, 불꽃이 흩어졌다.

 

- 달은 없다. 별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D만은 보았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그 끝자락에서 5미터도 채 떨어져 있지 않은 바닷속에서 허리까지 몸을 담그고 서 있는 망토 모습을.
파도가 일으키는 바람을 타고 형용할 수 없는 귀기가 D의 뺨을 후려쳤다.
"마인스터 남작... 바다에서 돌아왔나?"

D의 목소리는 빛을 잃어버린 어둠을 타고 저편으로 흘러갔다. 

 

- 그림자의 등뒤로 펼쳐져 있는 해면이 갑자기 부풀어 올랐다고 생각하는 찰나, 한층 더 거대한 파도가 D의 시야를 메웠다. 그 파도가 핥고 지나간 바다에는 그 어떤 생물의 모습도 발견할 수 없었다.
어딘가에서 바다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바다 물결 소리만이 요란하게 울려 퍼진다.
D는 칼을 칼집에 집어넣고 뒤를 돌아보았다. 에그베르트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핏자국도, 그 주위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온해 보일 뿐이다. 

 

- "봤나?"
왼손이 물었다.
"음."
"무시무시한 놈이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저런 놈에 대해서는 나도 들은 적이 없어. 저놈에게 걸려들면 너라 할지라도 위험하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쉰 목소리는 감개 무량한 듯이 말했다.
"잘은 모르지만, 저놈은 흔히 말하는 귀족은 아닌 것 같군. 귀족 같으면서도 귀족이 아냐. 그러고 보니... 누군가와 닮은 것 같은데. 똑같은 냄새가 났다구. 게다가..."
D는 바다 물결 소리가 들려오는 저편으로 눈을 돌렸다. 마치 그곳에 잃어버린 물건이 있기라도 하듯이.

목소리는 말했다.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구. 피에 미쳐 있는 주제에... 그래도 참으로 슬픈 눈이었어. 그것도 누군가와 꼭 닮았더군."
D의 머리카락이 저편으로 나부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뀐 것 같았다. 빙해를 넘나드는 바람은 몹시 차가웠다.
"북쪽 바람이라..."
쉰 목소리가 말했다.
"북쪽 바다와 너, 그리고 저놈... 지금 이 마을을 뜬다면, 잊지 않으면 안 될 일이 하나 줄어들지도 모르겠군."
D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아름다운 그림자는 끝없이 펼쳐져 있는 바다 소리를 뒤로 한 채 멀어져 갔다.

 

- "범인이 누군지 알았다."
그 말을 들은 샤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해서?
"그건 모른다."
D는 딱 잘라 말했다.
좀 무책임한 응답이지만, 이 젊은이가 입을 열면 뭔가 중대한 진리라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샤인은 불만을 털어놓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걸 모르는데, 어떻게 범인을 알 수 있죠?"
"이건 오늘 아침 할아버지로 둔갑한 놈의 피부와 똑같은 것이다. 모양은 다르지만, 근원을 밝힌다면 단 하나다."
"그렇다면... 할아버지로 둔갑했던 그놈이 구슬을 훔치러 침입했단 말인가요?"
"목적은 틀림없을 것이다."

 

- "상상했던 대로인가?" 

왼손이 물었다.
"모른다."
"요즘은 시시한 날치기꾼도 그 수법이 지능적이어서 말이야. 아무튼 네가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면 하찮은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어떡할 건가, 이제부터?"
"너도 봤다."
"어휴... 짧은 여름이라는데 운 나쁜 일만 잇따라서 생겨나고 있군. 피 비가 내릴 거야. 점괘에 그렇게 나와 있다구."

"점괘?"
"그래. 최근 내가 배운 바람 점이지. 바람의 방향, 강약, 윤기에 의해서 길흉을 점치는 거야."
"어디서 배웠나?"

과연 D가 물었다.
"물론 여기서지. 너의 꾀죄죄한 손 안에서..."

"언제?"
"너한테 혹사당하는 틈을 타서 말이야."
왼손은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 "노동 후에 세상 대부분의 인간은 아주 녹초가 되지. 피곤하다는 등 지껄이면서 수면을 취하는 거야. 그러나 뜻이 있는 자는 무거운 눈꺼풀에 채찍을 가하며 극기심을 기르지. 그리하여 인간들이 사는 이 세상에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지혜로운 자가 탄생하는 거다. 바람이 내게 가르쳐 줬지. 이 땅은 여름이 끝날 때까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닥치고, 그 바람은 붉은빛을 띠고 있을 거라고... 아무튼 내일부터는 더욱더 지독한 나날이 계속될 거야." 

 

- "무시무시한 놈..."
패배감과 억울함도 말하지 않은 채, 한숨을 내쉬며 말한 것은 에그베르트였다. 그 목소리에 고통스러워하는 기미는 없지만, 몹시 지쳐 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하긴, 그를 둘러싸고 있는, 말하자면 적대시하는 동료들이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상대방을 의심과 무서움 속에 빠뜨리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생존 방법이라고 믿고 있는 전투사들이기 때문이다.
"그놈은 틀림없이 평범한 헌터는 아닐 거다."
에그베르트가 말했다.

"던필이다."
말한 것은 틴이다. 목소리는 검은 문 옆에서 들려왔다.
"그저 단순한 던필도 아니지."
"던필에도 계급이 있나?"
"모르겠어. 아무튼 우리들 중 누군가가 그놈하고 맞서서 이길 수 있을지..."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나. 보통 놈이 아니라구."

 

- 마치 한 장의 판자를 높이 세워 놓은 것 같은, 거의 요철이 없는 검은 절벽이다. 녹색 빛이 단 한 줄기도 보이지 않는다.
"귀족의 별장 지대까지 쭉 이런 식으로 돼 있어요. 그놈들이 손을 댄 거죠. 소문에 의하면, 스스로 만든 바다 속의 괴상한 것들이 자신들이 사는 곳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라던데..."
사방을 강화 파이버 유리로 철저하게 차단한 조타실에서 얼굴을 내밀고 샤인이 말했다.

- 흔들림은 거의 없다.
바람은 서쪽에서 불어오는 느낌이지만, 파도 머리를 세차게 부숴 올리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다.
"아래를 보세요."
뱃머리에 우뚝 서 있는 아름다운 그림자에게 말했다.

D는 절벽에서 눈을 돌렸다.
검푸른 바다 속을 30센티미터 정도쯤 되어 보이는 검은 그림자가 우아하게 헤엄치며 지나갔다.
"이 근방은 물고기의 보고(寶庫)죠. 특히 여름 1주일 동안은 해류의 방향까지 바뀌는 덕분에 셀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종류의 물고기들이 떼 지어 몰려들어요. 그중에는 무시무시한 것도 있지만 말이에요. ... 왜 그래요?" 
D의 옆얼굴에서 뭔가 느꼈는지, 샤인은 심장 박동이 급속도로 고동치는 것을 느꼈다.
D는 대답하지 않고 바닷속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이윽고 얼굴을 들고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됐어... 다만 가끔 이상한 놈이 깊은 바닷속 밑바닥에서 습격해 와요. 그런 놈과 부딪히면 이 따위 배쯤은 잠시도 버티지 못하는 걸요. 그런데... 던필도 수영할 수 있나요?"

"어떻게 생각하나?"
"모르겠어요. 들은 얘기로는 귀족의 피가 짙으면 짙을수록 수영을 전혀 못한다고 하던데... 그치만, 왠지 당신은 예외일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샤인은 바람결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 절벽이 이어져 있는 저편에 안개로 휩싸인 이상한 모양의 땅이 윤곽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 눈에는 아마 하얀 베일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매끄러운 초록빛 경사로 비칠 것이다.
그러나 거리를 좁혀 가며, 바닷바람에 시야가 흐려지지 않는다면 그 초록빛의 정체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는 수목이며, 그 사이에 우뚝 서 있는 하얀 것은 거대한 건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우아하고 정교하게 조각을 새겨 넣은 원기둥, 내부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얀 실크 베일에 싸인 것처럼 비치는 불투명 유리가 끼워진 근사한 창문들, 고대와 초근대를 결합시켜 설계한 듯한 건물 주위는 하얀 계단이 마치 유성의 궤도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 그것이 인간들의 피로 도배한 어둠의 생물들의 유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바라보는 자의 가슴에는 스산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다. 
그리고 옛날의 영광과 멸망을 전해 오는 바람의 노래에 한없이 공감하며 귀 기울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경악을 금치 못하는 것이었다. 

 

- 정연하게 떠올라 있는 보트와 스쿠너, 잠수선 무리.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곤 그 안에 둥지를 튼 바다새의 이상한 몸짓뿐이요, 울려 퍼지는 것이라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뿐이었다. 
샤인은 노련한 솜씨로 배를 조종하며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는 하얀 돛단배와 보트 사이를 누비며 나아갔다.
선착장까지 앞으로 5미터쯤 남았을 때 D가 뒤돌아보았다.
무의식 중에 샤인도 뒤를 본다.
아무것도 없다.
안개가 자욱한 해면에는 두 사람을 태운 배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물살이 잔잔하게 물결치며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 등뒤에서 물소리가 났다. 물거품이 부서지는 소리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D가 바라보고 있었다.
공포의 전율이 샤인을 경직시켰다.
무섭다. 너무나도 무섭다.
아름다운 '죽음의 신'과 함께 있다는 것을 샤인은 떠올렸다.
그 순간 두려움이 갑자기 사라졌다.
동시에 샤인은 배를 멈췄다. 선착장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 춥다. 공기 탓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 그 자체가 냉각되어 버린 것 같은 추위였다.
이것이 귀족의 피가 만들어낼 수 있는 사차원의 공포란 말인가.

"왜 그래요?"
두려움을 애써 억누르며 샤인이 물었다.

"물속에 뭔가 있나요?"
"돌아갈 때는 육로가 나을지도 모르겠군."
"안 돼요. 이 배가 없으면... 제 생계가 걸려 있다구요!"
"내가 타고 가지."
"초보자한테 맡길 수 있는 물건인가요? 바보 같은 소리는 하지도 마세요. 역시 뭔가 본 거죠?"
D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확신이 없으면 입 밖에 내지 않는 사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샤인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 가파르고 폭넓은 돌계단이 높게 이어져 있었다.
"와본 적 있나?"
D가 물었다. 가슴에 늘어뜨린 펜던트가 파란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 몇 번..."
"배짱이 좋군."
그것은 D와는 전혀 다른 뜻밖의 쉰 목소리였기 때문에 샤인은 소리가 났던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갈까?"
D는 왼손 주먹을 꼭 쥔 채로 걷기 시작했다.
자세히 관찰하면 D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떠오른 쓴 미소의 그늘이 어렴풋이 보였을지도 모른다.

 

- 미친 듯이 뒤얽힌 채 뻗어 있는 나무들 사이사이로 그 돌계단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은 샛길이 종횡으로 교차하고 있다. 그 비탈진 땅 중간쯤에 멈춰 있는 케이블카도 수목 사이로 살며시 엿보인다. 
상하뿐만 아니라 좌우로도 수없이 뻗어 있는 그 많은 길들은 별장 주인들을 바닷가로 실어 나르고, 혹은 피로 물들은 밤의 파티로 인도했던 것일까. 
어딘지 모르게 천국의 배를 연상케 하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케이블카도 지금은 녹색 담쟁이덩굴에 휘감겨 낙엽으로 뒤덮인 채 새벽녘 공기 속에 파묻혀 있었다. 

 

- 샤인이 문득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봐요, 정말로 재미있는 돌계단이죠. 아무리 올라가도 피곤하지 않잖아요."
"중력 제어장치가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천 년이나 지난...?"
그렇게 묻고 나서 샤인은 곧 이 젊은이의 말이라면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굉장하네요. 귀족이라는 자들은..."
샤인은 자그마한 감탄사를 내뿜었다.
"가끔 알 수 없게 될 때가 있어요. 이 근방에 올 때마다 느꼈던 거예요. 이런 굉장한... 우리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문명을 이루고 있던 사람들이 다른 인간의 피를 빨아먹고, 인간을 노예 취급했다니 말이에요. 그것이 사실이었다는 것은 알지만, 저는 가끔씩...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들이 구축한 것을 언젠가 우리들이 이룩하게 되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에요. 인간과 귀족은 약간 다를 뿐 어차피 같은 동물이고, 한쪽이 약간 앞서갔지만 언젠가 다른 한쪽도 그것에 못지않은 문명을 이룩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봐요. D... 언젠가 우리도 그렇게 될 거예요. 그렇죠? 우리 세대라면 무리일지도 모르지만, 그래요, 손자나 증손자 시대쯤 되면..."
샤인은 D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뭔가가, 이 젊은이에게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 아름다운 입가를 스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봐요?"
샤인은 엉겁결에 큰소리로 불렀다. D가 그녀 쪽을 돌아보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샤인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D는 곧 걷기 시작했다.

 

- ... D, 지금 웃지 않았나요?

- "샤인."
D가 불렀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자신의 마음속을 들켜버렸다는 생각에 당황한 것은 아니다. D가 그녀의 이름을 불러 준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D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 준다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의식도 하지 않고 훨씬 전부터 체념하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치명상을 입지 않은 것만으로도 D의 칼은 신기(神技)의 명성을 지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발 밑에서 뚝뚝 소리를 내며 불길한 빨간 꽃처럼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혈흔이었다. D의 몸은 십여 군데가 잘려져 나갔다. 과연 이런 상태에서 두 번째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까.
지금 한 줄기... 오른쪽 관자놀이 언저리에서 선명한 붉은 선이 미끄러져 내리면서 뺨을 따라 흘러내린다. 

 

- "... D..."
목소리도 쉬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귀에마저 들리지 않는 무의식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D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빛을 띤 두 눈동자를, 그리고 입술 사이로 비집고 나와 있는 두 개의 송곳니를.
본 적도 없는 '귀족'이 거기에 있었다.
무섭다. 두렵다.
그러나 이 사람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면서까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워 준 것이다.
걱정하는 마음과... 알 수 없는 또 다른 감정이 심장까지 얼어붙게 하는 것 같은 공포를 극복하게 했다.
샤인은 나무 뒤에서 나왔다.
동시에 D도 긴 칼을 한 번 휘두르고 등뒤의 칼집에 쑤셔 넣었다. 바닥 위에서 검은 오일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D..."

 

- 샤인이 불렀을 때, D는 손으로 입 언저리를 닦아냈다. 다시 전율이 샤인을 스치자, 한쪽 다리를 돌계단에 걸쳐놓은 채 그녀는 빳빳하게 굳어져버리고 말았다. 
"좀 기다려라."
고통을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D가 말했다. 상처로 인한 통증 때문에 생긴 고통이 아니었다.
서서히, 서서히... 두 눈의 핏빛이 엷어져 갔다. 샤인이 눈을 깜박였을 때 입술 사이로 나와 있던 송곳니도 이미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D..."
주위의 공기가 맑아졌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갑자기 샤인은 온몸의 힘이 빠졌다. 그것을 견디며 샤인은 D 쪽으로 걸어갔다.
"상처가 심해요 그래도 대단했어요. 저는... 꼼짝도 할 수 없었는걸요."
"피는 곧 멎는다."
D는 태연하게 말했다.

 

- "파도 소리가 난다."
D가 불쑥 내뱉었다.
샤인은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려가 보자."
D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적의 유무를 확인한 것이다.

"어떻게...? 몇백 미터를 내려가야 될지도 모른다구요."

"깨끗하게 깎아 놓지는 않은 것 같다."
D는 거대한 동굴 가장자리에 손을 짚고 나락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설마... 맨손으로요?"
"여기서 기다려라."

 

- "가겠어요."

샤인이 말했다.

"떨어지면 건질 수 없다."

"당신과 함께라면 걱정 없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말투에는 전혀 억양이 없었다.

"저를 업으세요."
D는 잠자코 등을 내밀었다. 샤인의 단호한 결단과 의욕에 꺾였다고 하기보다, 그녀 혼자 남겨 두면 이상한 놈에게 습격당하지 않을까 걱정돼서 데려가는 것일까.
샤인은 늠름한 등에 온몸을 맡겼다.
두툼한 코트 너머로 강철 같은 근육의 감촉이 전해져 왔다. 두 다리로 D의 허리를 꽉 붙들었다. 그러자 자신의 허리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스치며 짜릿한 느낌이 들었다.
D가 몸을 굽혔다.


- 사뿐히 온몸이 떠올랐다. 칠흑 같은 암흑이 머리를 덮쳐 눌렀다. 샤인은 두 눈을 꼭 감았다.
다음 순간, 소름이 오싹 끼쳤다.
바람이 볼을 스쳤다. D는 머리를 아래로 향한 채 동굴을 내려가고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주위 상황을 확인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샤인은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설사 눈을 떴다 하더라도 믿어지지 않았을 것이며, 그전에 너무나도 상식에서 벗어난 주변 상황에 기절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언뜻 보기에 매끈매끈할 것 같은 나락의 벽에도 몇 밀리미터의 요철이 있었다. D는 하얗고 긴, 가냘픈 여자의 손 같은 길다란 손가락 끝을 그 움푹 팬 요철 구멍에 넣어 몸을 지탱하면서, 마치한 마리의 파충류처럼 벽면을 수직으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등으로 짓눌러 오는 수십 킬로그램의 중량을 감당하면서 의외의 스피드로. 

 

- 축제를 노리고 한몫 챙기는 장사꾼들과는 달리, 이 백발노인은 단순히 그림을 팔아 생활비를 버는 떠돌이 화가인 모양이다. 요란한 장사꾼들 일행이 철수했음에도 불구하고, 백발노인의 주위를 둘러싸고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학자처럼 보이는 그 풍모를 어촌에서는 극히 보기 드물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욱 마을 사람들을 몰려들게 했던 것은 그 백발노인이 사용하고 있는 붓과 캔버스와 물감이 예전에 마을을 찾아왔던 다른 떠돌이 화가들과는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이었다. 
붓은 뾰족한 깃털 펜이며, 캔버스는 뭔가의 얇은 가죽이다. 게다가 깃털 펜 끝에 묻히는 물감과 팔레트는 마을 사람들을 경악케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백발노인은 자신의 왼쪽 손목 혈관에 펜을 찔러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빨아들여서 캔버스로 옮긴다. 너무나도 오싹한 그 광경에 처음에는 눈살을 찌푸렸던 마을 사람들도 어쩐지 이전부터 제작 중인 것 같은 노인의 그림을 보자마자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황홀해한다. 특히 여자들은 넋을 잃고 눈이 벌개서 달려들었다. 

 

- 백발노인이 그리고 있는 그림은 얼굴만 그려져 있는 젊은이의 초상화였다. 그런데도 여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 한 장의 그림을 탐내며, 완성될 때까지도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콧김을 뿜어낸다. 여자들의 눈에는 어느새 핏발이 서려 있었다. 

 

- "어떤가? 나부터 걸어도 괜찮겠나?"
순간 동요하는 빛이 요사스런 여자의 미모를 일그러뜨렸다. 그녀의 요사스런 마술이 벌써 효과를 나타내고 있어야 마땅한데 어쩐 일인지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이었다.
사몬의 마술은 인간이 지니는 그리움, 노스탤지어를 자극하고, 증폭시키고, 구상화하여 정신력의 모든 것을 끈적끈적하게 녹여버리는 효과를 발휘한다. 너무나도 사랑했던 아이의 생전과 다름없는 모습이 눈앞에 나타나 더듬거리며 애원하는데, 자식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설사 그것이 도리에 맞지 않는 억지소원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사몬의 힘 앞에서 그 사고력은 달콤한 꿀물 같은 추억에 사로잡히게 되며, 요구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설마 그것이 통하지 않는 인간이 존재할 줄이야...

"유감이군."

- 교수는 사몬에게 소리친 게 아니었다. 눈앞에서 오른손을 치켜올리고 있는 시몬에게 내린 게 아니다. 그의 날카로운 명령은 자신의 오른손에 펼쳐진 얇은 가죽 그림 속에 있는, 정밀하게 그려진 사몬의 얼굴한테 내린 것이었다. 
어떤 때는 노래하듯이 속삭이고, 어떤 때는 노호하는 것처럼 외친다.
그 대상이 자신의 피를 묻혀 그린 쏙 빼닮은 인물의 재현 그림으로 향해질 때, 그의 명령과 외침은 마술의 주문으로 그 모델의 실제 인물을 꼼짝 못 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났는지는 모르지만, 이번에는 빠져나갈 수 없다. 요절하는 게 아까운 미모이긴 하지만, 내가 그것에 반할 정도의 나이가 아닌 것을 불행으로 생각해야 될 거야. 알겠나? 요 아래 바닷가로 내려가서..."
바로 그 순간, 죽음의 명령을 지시하는 교수의 등뒤로 은빛이 튀어 올랐다.

 

- 교수는 빨갛게 달아오른 칼날에 베인 격심한 통증을 느꼈지만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그는 뒤를 돌아보면서 몇 걸음 물러났다. 통증을 호소하는 그의 두 눈에 들어온 것은 피 묻은 칼을 손에 들고 있는 아름다운 젊은이의 모습이었다. 

 

- 어젯밤 샤인의 침실을 돌풍처럼 휩쓸고 간 바다의 침입자일까? 그것은 천천히 물 위로 올라왔다.
그것이 이동함에 따라서 뚝뚝 떨어지는 물은 앞가슴으로, 허리로, 허벅지로 작은 물보라가 튀었다.

5미터 거리를 두고 D와 마주 보고 있는 것은 벌거벗은, 혈기 왕성한 사내의 몸이었다.
어젯밤의 침입자는 아니다. 그것은 곧 알 수 있었다.
단정하고 우아한... 남쪽 나라의 어느 귀공자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 용모는 잘 다듬어진 콧수염 때문에 더욱 강렬한 인상을 풍겼다.
그 나름의 복장을 갖춰 입으면 아마 귀족처럼 보일 것도 같은 훌륭한 용모의 사내였다.
"예의에 벗어난 모습을 하고 있어서 미안하군."
콧수염을 매만지면서 사내가 말했다.
"워낙 그리운 장소여서 나도 모르게 그만 헤엄치고 싶어졌지."

"바다가 그리운 장소인가."
D는 조용하게 말했다. 질문은 아니다. 상대방의 의견을 묻는 듯한 말투도 아니다.
"모든 것은 바다에서 태어난다. 때문에 여기에도 바다가 필요했다 이거군."
"그런 셈이지."
사내는 D의 말에 동의하며 몇 걸음 앞쪽으로 이동한다. 어둠 속에서 옷을 집어 들었다. 바지 속으로 다리를 넣으면서 사내가 말했다.
"자네가 D로군?"
"그렇다."
"초면이군. 내 이름부터 말하지. 난 교우키다. 자네와 한바탕싸움을 치렀던 싱과 틴의 동료지. 과연, 그 두 사내가 꼼짝없이 물러났을 만도 하군. 정말로 걸어 다니는 죽음의 신이로군."

"여기서 태어났나?"
"그렇다."

 

- "마인스터 남작의 소중한 사생아인 셈이지. 하긴, 난 도망쳤지만 말이야."
그렇다면 이 사내는 1천 년 이상이나 살아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사내는 힐끗 어둠 속으로 눈을 흘기며 말했다.
"저쪽에 있는 것이 미스 샤인이냐? 친절하게도 여기까지 구슬을 가져와 주다니..."
"구슬은 내가 보관하고 있다."
D는 왼손을 내밀었다.
손바닥 위에 떠올라 있는 것을 보고, 교우키도 그 의미를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저 여자애한테는 손대지 않겠다."
"에그베르트인가 뭔가 하는 자와는 접촉하지 않나?"
"어제부터 개별 행동하기로 결정 났지. 난 그놈들만큼 조급하게 굴지 않는다. 고향의 추억에 잠겨 있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그 구슬, 순순히 내놓지는 않겠지?"
"고용주가 싫어해서 말이다."

 

- 아름다운 어둠 쪽으로 감탄과 증오로 이글거리는 시선을 던졌다.
D가 응집된 어둠이었다.
D도 막 일어서려는 중이었다.
오른손에 장검이 느슨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모래땅에 떨어진 것을 집어든 것이다.
아니, D 스스로 떨어뜨린 것이다.

 

- "누가 나를 만들었는지 알고 싶어 했었지.... 만들어낸 건 마인스터 남작이지만, 완성한 것은 그분이다."
그 말만 남기고 교우키는 물속 깊이 수직으로 가라앉았다. 곧 멀리서 물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뿐이었다. 2천 미터 바다 밑바닥으로 헤엄쳐 간 것일까.  

- D가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건만, 샤인처럼 꿋꿋한 성격의 소유자가 닥쳐오는 운명을 잠자코 받아들이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이상했다. 이왕 움직이는 거라면 그녀의 운명을 결정할 D의 상황이야말로 당연히 확인하러 와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녀가 있는 곳은 전혀 반대쪽 방향이며, 의외의 행동이었다.
D의 발걸음은 속도를 더했다.
샤인은 커다란 물탱크 앞에 서 있었다.
다른 물탱크와는 달리, 희뿌연 용액 속에서 떠올라 있는 그림자는 하나뿐이었다. 전라의 젊은이였다.
이쪽을 향한 몸 여기저기에 검푸른 상처 흔적이 보였다. 인위적인 상처가 아니라 돌발적으로 생긴 상처라는 것쯤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 닿은 것을 얼어붙게 하지만
여름의 왈츠가 끝날 때까지
그대는 우리의 친구
그대가 떠날 때는
그대를 위해서 기도하리
함께 떠나는 여름의 빛이여

- 음정은 고르지 못하지만 열정 어린 그 노랫소리를 D는 나른해지는 빛 속에서 경청하고 있었다.
발 밑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아름답고 그 누구보다도 엷었다.
멀리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시작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노랫소리는 예고도 없이 끊어졌다.

 

- 아이들 모두가 울상을 지었다. 진심으로 열중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재빨리 다른 놀이를 하러 어디론가 달려갔을 것이다.
피리를 들고 있는 사내아이는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눈이 구원을 요청하는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이윽고 아름다운 그림자에게서 멈췄다.
열 살 정도밖에 되지 않은 아이에게 그가 어떻게 비추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 주위의 아이들을 밀어젖히듯 벌떡 일어나서 소년은 D의 곁으로 달려왔다.
1미터 정도 앞에 멈춰 서서 눈을 치켜뜨고 올려다보는 그 표정에는 두려움과 기대가 뒤얽혀 있었다.
허리 높이에 있는 거무스름한 얼굴을 D는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 몸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소년과 같은 높이에서, 흡혈귀 헌터가 물었다.
"왜 그러지?"
그 눈앞으로 작은 손과 나무 피리가 내밀어졌다.
단단해 보이고, 그러면서도 너무나도 섬세한 손가락이 나무 피리를 부드럽게 뽑아 들었다.
3개가 뚫린 공기구멍 중에 아래쪽 두 개에 가느다란 실처럼 금이 가 있었다.
그 틈새를 메운다 하더라도 본래의 소리는 되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았다.

- D는 발 밑을 둘러보다가 곧 코트 안쪽에서 백목침을 꺼냈다. 두 개였다. 굵기는 3 밀리미터도 되지 않지만, 길이는 20센티미터가 넘는다.
흰 나무 침을 손에 쥔 채, 엄지손가락을 그 한쪽 끝으로 살며시 내밀었다.
그러자 아름다운 손톱 끝이 드러났다.
그것이 작은 호를 그리자, 나무침 끄트머리 5센티미터 정도가 둥근 원 모양으로 잘리며 땅에 떨어졌다.
소년은 마치 요술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나무 침을 바꿔 쥐더니 반대쪽 끝도 손톱으로 가볍게 자른다. 그리고 D는 또 한 개의 나무침 끝을 둥글게 잘린 자리에 정확히 갖다 댔다. 
힘을 가한 것 같지도 않은데, 나무 침은 다른 침 속으로 부드럽게 들어갔다.
경탄에 가득 찬 감탄사가 주위를 가득 메웠다. 어느 틈인지 베란다에 있던 아이들이 두 사람을 에워싸고 있었다.
아이들 눈으로 봐도 분명히 나무 침의 굵기는 똑같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뚫린 쪽도 쪼개지지 않고, 꿰뚫은 침도 막힘 없이 그 속으로 자연스럽게 빨려 들어간 것이다.


- 이윽고 백목침이 다른 쪽 끝을 뚫고 나왔다.
D는 그 나무침 끝을 입에 살짝 물고 잡아당겼다. 그러자 속으로 빨려 들어갔던 나무침이 완전히 빠져나왔다.
D는 그 상태에서 손에 쥔 나무 침에 오른손을 살며시 갖다 댔다. 길고 가느다란 작은 칼이 번쩍이는 것을 아이들은 똑똑히 보았다.
세 개의 작은 구멍을 뚫는 데는 2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구멍은 놀랍게도 모두 아주 동그랗다.

단숨에 안쪽의 톱밥을 빼내고 D는 그것을 입술에 물었다.
볼이 약간 패어 들어가자, 맑고 아름다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피리 소리에 귀엽고 작은 얼굴들이 환하게 웃었다.
D는 말없이 그것을 눈앞에 있는 소년의 손에 쥐어 주고 일어섰다.

- 어느새 D의 눈동자는 베란다 쪽으로 향해 있었다. 스님 형상을 한 그림자가 서 있었다. 바로 반교우였다.
그는 큰소리로 웃어대면서 머리카락 하나 없는 머리를 톡톡 치며 다가왔다.
D의 바로 앞쪽까지 오자, 그는 두 손을 등뒤로 돌려서 뒷짐을 졌다.
"이거 참. 승려라고 하는 것도 불경을 뵐 때 말고는 한가해서 말이야. 아침부터 애들하고 놀기만 했지. 그런데 그대들은 뭘 하고 있었나? 아까 부엌 창으로 엿본 바로는, 이 집 여주인하고 배를 타고 돌아온 것 같던데. 조심하라구. 남녀가 처신을 함부로 하면 색정에 빠진단 말씀이야."
반교우는 뭐라고 중얼중얼 종파의 주문을 외우고 나서, 꾸짖는듯한 눈빛으로 D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주름살투성이의 얼굴이 몸을 뒤로 젖히며 웃어댔다.
"하지만 내가 만나 본 바, 자네는 꽤 좋은 데가 있어. 그 정도 핸섬하면 여자는커녕 자신 이외의 모든 사람들에게 차갑게 굴기 십상인데 말이야. 아무래도... 혈관은 얼음으로 돼 있어도, 그 속에 흐르고 있는 피는 약간은 빨간색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군. 어떤가, 경호원인지 전투사인지 모르지만, 위험한 일은 일체 그만두고 여기서 아이들 상대로 평생을 바쳐보는 것이? 핫핫핫... 이거 농담이야, 농담."
말이 끝나는 순간, 아름다운 곡조가 발 밑에서 울려 퍼졌다. 소년이 피리를 불고 있는 것이다.

 

- "애석하게도 음색에 흐트러짐이 있군. ... 얘야, 이걸 불어봐라."
코끝에 들이댄 것은 소년을 곤혹스럽게 한 것 같았다.
반교우가 소년에게 건넨 것도 작은 구멍이 뚫린 나무 피리였다. D가 만든 피리보다 5센티미터 정도 짧고 10배는 두꺼웠다.
"아무리 재주 있는 솜씨라도 그 연주는 어색해. 피리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지. 그 피리는 아이의 목과 폐를 약간 고통스럽게 하지. 자... 한번 불어봐라."
아이는 순수하다.
소년은 D의 피리를 D의 가슴 앞으로 내밀더니, 재빨리 반교우의 작품을 입에 물었다.
피리에서 흘러나오는 음색은 D의 것보다 굵고 부드러웠다.

"껄껄껄!"
보통 승려에게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자만으로 철철 넘치는 목소리로 반교우는 웃어댔다.
D는 잠자코 손에 든 피리를 바라보고 나서, 소년이 입에 물고 있는 피리와 승려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허, 어허, 그러면 안 되지. 자네..."
반교우는 한쪽 손을 올리며 뒷걸음질 쳤다.
"자신의 서투른 솜씨를 박력으로 커버하려고 애쓰는 건 좋지 않아. 핸섬은 만능이 아냐. 이봐, 어리석은 승려보다 아이들의 마음을 끌고 싶으면 앞으로 5년 동안 그 칼을 버리고 이 마을에서 지내보라구. 아마 자네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훌륭한 촌장이 될 수 있겠지."
그리고 반교우는 '으하하하' 웃으면서 집 쪽으로 걸어갔다.
아이들도 이미 베란다로 돌아가 있었다.
하얀빛 속에는 D와 피리만이 남아 있었다.

- "저 승려라는 놈, 어쩐지 너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 것 같군."
늘어뜨린 왼손 언저리에서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개성 있는 놈인 만큼 말하는 것도 재미있어. 어때, 이 마을에 정착해서 어부의 두목이라도 돼볼 텐가? 동물성 단백질은 그 엄청 큰 고래로 충분히 보충할 수 있겠지."
쉰 목소리는 큰소리로 껄껄대며 웃었다.
그리고 잠시 있다가 왼손은 이상하다는 투로 물었다.
"어이, 입 다물라고 말하지 않는 건가?"
D는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기묘한 표정이 D의 입가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어부의 보스라... 그것도 좋을지 모르지."
"잠깐."
쉰 목소리에는 두려운 동요의 빛이 서려 있었다.
"너, 설마..."
손바닥이 위쪽으로 돌아서더니 D를 올려다보았다.
곧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을.
"안심했어. 여기서 그만두면 당해내지 못한다구. 네가 가는 곳은 항상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으면 안 돼. 여행은 계속 계속하는 거야."
D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다의 소리를 찢어대는 듯이 아이의 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왜 그렇게 기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어요?"
명랑한 목소리가 다가왔다. 할아버지의 관을 매장했을 때 쓰러져 통곡하던 표정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무덤에 마지막 흙을 덮은 것은 이미 1시간 전의 일이다. 앞으로 살아갈 미래를 생각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저녁까지는 일이 다 끝날 거예요. 저... 바다에 나가요."

샤인은 먼 눈으로 바다 쪽을 바라다보았다. 그 엄숙한 표정은 오늘 아침에 배를 청소하고 있었을 때와 비슷하다.
"지금부터?"
"여름도 다가오잖아요. 조금이라도 벌어 두지 않으면..."

"나도 가지."
샤인은 놀란 눈빛을 아름다운 얼굴로 향했다.
"하지만 당신은..."

- 귀족의 핏줄을 이어받은 자가 흐르는 물을 꺼린다는 것은 상식이다.
때문에 이웃 마을에서는 몇백 가구가 넘는 그 많은 집들의 주위에 수로가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 익사할 만큼 넓고 깊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지금도 국경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개천을 만드는 데 정성을 쏟아붓고 있었다. 물론 비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것에 비하면 바다는 말할 필요도 없이 효과 만점의 장소일 것이다. 그러나 던필인 D에게 있어서는...
"무리하면 안 돼요. 아무리 그놈들이라 해도 바다 위까지는 쫓아올 수 없을 거예요. 걱정 마세요."
"한 녀석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사라졌다."

"하지만..."
"걸리적거리지는 않겠다."
샤인은 입술을 꼭 다물고 D를 쏘아보며 코로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알았어요. 그 대신 한쪽 구석에서 꼼짝 말고 있어야 해요."

 

- 눈앞에 끝없이 펼쳐져 있는 바다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왼쪽 저 멀리서 유연하게 대열을 지어서 돌진하고 있는 대형동력선들의 무리... 선미에서 수면으로 길게 드리워 놓은 검은 그물을 이용하여 그들은 정기적으로 떼를 지어 회유하는 물고기들을 잡아 올리고 있었다. 
정면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바다 위에서는 거대한 그림자를 에워싸면서 자유자재로 작살을 내던지는 소형 동력선들이 떼 지어 몰려 있었다. 그들은 지금 거대한 고래 사냥을 목표로 집단 공격...

 

- 바로 그 순간, 공포와 절망으로 메워진 샤인의 눈동자 속으로 들어온 것은 덮쳐오는 거대한 물고기의 입을 자르는 은빛이었다. 목덜미가 맹렬한 힘으로 당겨진 그녀의 눈앞으로 거대한 몸뚱이가 곤두박질치는 찰나, 선체가 거칠게 울리며 흔들렸다.
두툼한 앞가슴에 매달리면서 샤인은 범고래의 머리와 몸통이 틀림없이 바로 그 경계선에서 두 토막으로 갈라지는 것을 목격하고 온몸에 소름이 꽉 끼쳤다. 몸속을 싸늘하고 뜨거운 것이 관통하는 것 같았다. 약간 떨어진 갑판 위에서 한 아름이나 되는 물고기 머리가 마치 쇳덩어리를 칠 때 울리는 듯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빨이 맞물리는 소리였다. 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쓸데없는 짓을 했군."
별로 미안한 기색도 없이 D가 말했다.

 

- "만약 네가 진다면... 그렇지, 당장 샤인의 집에서 나가 줘야겠어. 어때?"
대답 대신 D는 샤인의 손에서 작살을 빼 들었다.
"당신... 잠깐만요. 바보 같은 짓 하지 말아요."
작살을 움켜쥐고 샤인은 황급히 도와이트에게 소리쳤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내가 고용하고 있는 사람에게 허튼수작했다가는 용서하지 않겠어!"
"너하고는 관계없어. 나와 그놈... 사내끼리 하는 얘기다. 끼어들지 마라."

 

- 곧 두 개째의 작살을 치켜든 도와이트는 의기양양한 소리로 외쳤다.
"어때, 핸섬맨? 날 때려눕힐 수야 있겠지만, 엄청난 고기라면 손도 발도...!"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멈췄다.
D의 오른손에서 샤인의 작살이 사라지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뱃전 너머로 내민 늠름한 팔에 샤인이 매달려 있었다.
그녀의 등뒤로 검은 덩어리가 떠올랐다. 그 목을 관통하고 있는 작살은 틀림없이 도와이트의 것이다. 회심의 일격이었다.
"실패했나, 핸섬맨?"
도와이트는 한쪽 손을 입에 갖다 대며 비웃었다.

- 목소리는 또 거기서 멈췄다.
자신의 사냥감 바로 옆에 다른 검은 덩어리가 둥둥 떠올라 있는 것이 아닌가!
도와이트는 두 눈을 부릅떴다.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그것은 두 마리의 범고래였던 것이다.
범고래의 목을 관통한 한 개의 작살이 바로 샤인의 것이라는 사실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건만 그로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제아무리 힘센 장사가 혼신의 힘을 다해 던진다 하더라도, 작살이 관통할 수 있는 것은 한 마리뿐이다. 그다음은 정확도를 기울여서 싸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저 작살은 두 마리의 머리를 합쳐서, 게다가 함께 급소를 관통하다니... 어떠한 마력을 지닌 소유자란 말인가.

 

- 또다시 나타난 검은 바다짐승의 공격에 배가 거칠게 흔들렸다. 갑판에 손을 기대면서 도와이트는 샤인 대신에 배의 키를 잡고 있는 D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바닷가를 향해 달려가는 아름다운 옆얼굴을 넋이 나간 듯 바라보고 있는 그 눈에 서서히 서서히 웃음 같은 것이 번져갔다.

바로 그때...

 

- 시야를 가득 메우며 이리저리 둥둥 떠 있는 그것들에는, 마치 예리한 날붙이로 잘린 것 같은 선명한 흔적이 뚜렷이 보였다. 하지만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자는 없었다. 
바다에 살고 바다에 죽는 사나이들의 가슴속에서 과거의 어떤 전설이 새까맣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것이 미래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 서쪽 수평선이 마치 선혈을 흩뿌려 놓은 듯한 빛으로 물들어갈 무렵, 마을에서 단 한 채밖에 없는 여관 침대 위에서 여자가 몸을 일으켰다.
전라의 살결은 그때까지의 시간과 행위를 말해 주듯이 엷은 장밋빛으로 물들어 있어, 요염한 미모를 한층 더 요염하게 비추고 있었다.
'추억의 사몬'이었다.

 

- "갈까?"
바로 곁에서 나른한 듯이 굵직한 목소리가 물었다.
시트 위에서 얼굴을 뒤로 젖힌 채 위를 보고 있는 그 육체는 여전투사 사몬과는 대조적인 빛깔을 띠었고 탄력 있어 보였다.
사몬과 마찬가지로 육체도 정신도 이완 상태에 있으면서도, 만일의 사태가 발생하면 그 오른손은 머리맡에 세워 놓은 칼을 향해 빛처럼 빠른 스피드로 뻗어 갈 것이다.
"이제는 내게 볼일이 없겠지."

 

- "본다, 듣는다, 맡는다, 만진다... 내 눈은 어디에도 있으며, 내 손은 몇 개나 된다. 문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창으로 내비치는 달빛이 바로 나였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어쩔 테냐? 당신도 불만을 늘어놓고 싶나?"
"아니. 그놈 하고 싶은 대로 해주는 게 좋아.”
사몬이 눈살을 찌푸렸다. 리더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렇게까지 놀랄 건 없을 텐데. 우리의 움직임을 알려 줘서, 놈이 원하는 대로 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하는 거다. 그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우리 역할을 그 사내에게?"

"그렇다."

 

- "원조를 싫어하는 타입이라면, 그 기회를 우리가 제공했다는 것을 모르게 하면 된다. 사몬, 이제부터 너의 역할은 우리의 정보를 그에게 주고, 그의 움직임을 우리에게 알리는 거다."
"그딴 짓을 내가 할 것 같아?"
"글쎄... 모르겠는데. 너 하기 나름이겠지. 아니지, 그보다 그 사내 하기 나름이겠군. 글렌이라 했던가. 그놈이 얼마나 사내다운 매력을 지녔느냐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겠지."

 

- "너에게 난 보이지 않는다. 바꿔 말하자면 내가 보이지 않는 이상 네 마술은 효과가 없다는 얘기지."
등뒤 쪽이 아니라, 바로 귓전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손해 보는 얘긴 아닐 거다. 네가 놈을 좋아하는 미워하든, 아무튼 네 감정을 만족시키는 결과는 나올 테니까. 아니면... 배신자로서 죽을 텐가? 그때는 그놈도 죽이겠지만."
사몬은 밤의 일부로 변해버린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 벽돌색 액체를 글라스에 따라 앞으로 내밀자 D가 받아 들며 난간에 기대어 섰다.
"던필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참 사교성이 좋네요.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괜찮아요. 기분 문제죠, 뭐."
꿀꺽 한 모금 들이키고 나서 샤인은 D의 장검에 눈을 돌렸다.
글라스는 왼손에 들고 있었다. 그리고 장검은 난간에 세워 놓았다.
"오른손은 언제나 비워 둔다... 그것이 검객의 상식인가요? 마을에 온 그들도 모두 그런 식이었죠. ... 근데, 참 색다른 칼이네요."

D는 대답하지 않는다. 샤인은 상관하지 않고 계속 말을 한다.
"그런 곡선으로 돼 있는 칼은 처음 봐요. 어느 나라의 제작품이죠? 역시 당신도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고 있는 거군요. 외톨이로..."
손에 든 글라스가 또 올라가고, 하얀 목젖이 움직였다.
D는 문득 시선을 떨구었다.
"내일도 일해야 한다."
D가 말했다.
샤인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입술에서 글라스를 떼며 힘껏 숨을 내쉬었다.
"놀래키지 마세요. 당신 같은 사람이 남의 일을 걱정하다니. 이봐요... 설사 그렇게 생각하고 있더라도 입에 올리면 안 돼요. 당신 이미지에 손상이 가잖아요. 아니면... 내가 술에 취해버리면 당신의 일이 힘들어질까 봐요?"
"그렇다."
샤인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털목도리가 붙어 있는 코트 앞자락을 추스르며 말했다.
"너무하네요... 오늘 밤은 특히 그렇게 느껴져요. 하지만 알아요. 당신에게 응석부리면 안 된다는 걸 말예요. 언젠가는 떠날 사람인 걸요."
눈빛이 위로 올라가며 D에게 머물렀다. 마당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별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 "그래도... 유린보다는 나아요. 그 아이에게는... 무덤도 만들어 줄 수가 없잖아요."

샤인의 눈에 빛나는 물방울이 맺혔다.

그렇게 하자고 한 것은 D와 상의하기는 했지만, 그녀 자신이 정한 것이다. 그 모든 것은 구슬을 노리는 자들을 깨끗이 매듭짓고 나서, 혹은 구슬의 수수께끼를 풀고 나서 마을에 밝히기로 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 "집에는 그림이 없던데."
"모두 불태워버렸어요. 아버지와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 오늘까지 어떻게든 버텨올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 "할아버지는 최면술로 사람들을 도와줬다고 들었다."
"뭐, 대단한 것도 아녜요."
샤인은 일언지하에 부정했다.
"겨울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그저 눈을 좀 본 것뿐이에요. 그러니 이러니 저러니 입에 올릴 만한 것도 아니죠. 단지, 할아버지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남아 있는 자들의 슬픔을 달래 주는 것뿐이었어요."
"그만하면 충분하다. 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슬퍼하는 것보다는 낫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 "많은 사람들이 할아버지 힘으로 우는 것을 잊어버렸죠. 그래도 반년쯤 지나면, 제발 생각나게 해줘요 하면서 울며 찾아오곤 했어요. 그 이유는 몰라요. 하지만, 어렴풋이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인간은 슬픈 일이라면 얼마든지 잊을 수 있죠. 하지만 너무나도, 너무나도 슬픈 일은 생각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거예요."

- "어째서 그런 눈으로 저를 보는 거예요?"
"할아버지는 계속 그 최면술을 사용하고 있었나?"

샤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일이 몇 번인가 있고 난 다음에는 절대로 쓰지 않으셨어요."
애매모호한 표정이 둥그런 얼굴에 스쳐갔다. 기억이 되살아난 것이다. 그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샤인으로서도 알 수 없었던 모양이다.

- "딱 한 번... 반 년쯤 전에 제가 할아버지께, '할아버지, 벌써 5년 동안이나 최면술을 쓰지 않네요'라고 했더니... '그렇지 않아... 3년쯤 전에 한 번 건 적이 있지'라고..."
"누구에게 걸었다고 했나?"
"잠깐만요... 분명히... 물어봤어요. 그래요. 하지만... 대답해 주지 않았어요. 그 후로, 그게 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혹시 짚이는 데는 있나?"
"아뇨."
"이제 가서 자라."
D는 난간에서 몸을 뗐다.
"역시 마시지 않는군요."
샤인은 원망스러운 듯이 그렇게 말하고,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도중에서 멈췄다.  

 

 

- <7권 上 피의 축제>









- 유난히 얼굴이 흰 건장한 사내가 샤인의 집으로 찾아온 것은 아직도 어둠의 빛이 어렴풋이 흐르고 있는 이른 아침 무렵이었다.

- 해변 마을의 아침은 일찍 시작된다. 배 청소, 물고기 말리는 작업, 그리고 해초에서 요오드를 제거하기 위한 끓는 물 준비 등... 어촌 마을 사람들은 이른 아침부터 몹시 바삐 움직인다.

파자마 위에 겨울 코트를 걸친 모습으로 아침 체조를 하러 앞마당으로 나온 샤인의 귀에는 이웃집에서 부산하게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소리가 생생하게 전해왔다. 마당으로 끌어들인 배를 수리하는 망치질 울림 속에 닭 우는 소리가 뒤섞여 들려온다.


- 어젯밤의 슬픔도 취기도 떨쳐버리고, 오늘의 일과를 떠올리며 성실한 마음 자세를 가다듬었을 때, 샤인은 또 하나의 소리를 들었다.
파도를 가르는 듯한 애달픈 소리.

그것이 휘파람 소리란 것을 알았을 때, 이미 그녀의 시선은 집 출입구를 지나 서서히 다가오는 망토 모습의 젊은이에게 멈춰져 있었다.

 

- "오랜만이군."
5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수행자 글렌'이 인사를 했다.
'도시' 축제 때 흔히 쓰는 싸늘한 은 가면이 내뱉는 듯한 의례적인 목소리였다.
"내가 왜 찾아왔는지는 알고 있을 거다. 놈을 불러라."

"무슨 일이죠?"
샤인의 목소리에서도 친근한 감정이 사라졌다.

"너한테는 볼일 없어. D는... 헛간에 있나?"

"아직 자고 있어요."
"그렇다면 깨워라."
그렇게 말하는 찰나, 글렌의 몸은 커다랗게 호를 그렸다. 샤인의 등뒤로 우뚝 치솟아 있는 안채 모퉁이에 아름다운 그림자가 서 있었다.
어젯밤 손에 쥐고 있던 칼은 이미 등뒤에 드리워져 있다. 한쪽 손으로 샤인에게 물러나라고 손짓하고, D는 침착한 발걸음을 글렌 쪽으로 옮겨왔다.

 

- 샤인을 비호하듯이 멈춰 선다. 글렌과의 거리는 약 3미터. 두 사람 모두 한 걸음을 내딛지 않으면 칼은 아무런 효과도 없다.
"참을 수 없어..."
글렌은 마치 감동이 절정에 달한 듯이 신음했다. 사실 그는 성적 클라이맥스라고도 말할 수 있는 쾌감의 극치에 사로잡혀, 영혼의 깊숙한 곳까지 떨림으로 물결치고 있었다.
"이유도, 그 무엇도 묻지 않고 싸울 자세가 돼 있다니... 과연 단 한 사람, 나를 겁나게 했던 사내... 더 이상 얘기할 필요도 없겠군."
목소리는 샤인의 귀에도 들려왔다. 그 의미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믿을 수가 없었다. 온몸이 흉기 덩어리로 변하여 D에게 도전하는 사내와 그 이유도 묻지 않고 대적하려는 D... 도대체 그들은 어떤 인간이란 말인가.

 

- "그만둬요."
샤인이 외쳤다. 아니, 그럴 생각이었다. 그러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글렌의 살기와 D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귀기(鬼氣)가 바다 여인의 온몸을 꼼짝 못 하게 휘감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방해한다면 가차 없이 칼에 베일 것 같았다. D에게까지도.

거기에 서 있는 형체는 그녀의 눈에 낯익었건만... 그러나 전혀 다른 생물이었다.

 

- "원한 같은 건 없다. 맞붙는 이유는 알고 있나?"
글렌의 질문에도 D는 대답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이 두 개의 눈동자는 온갖 감정을 배제하고, 여전히 어둡고 맑았다.
"하나만 말해 두지."
글렌이 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너희들 주위를 얼쩡거리는 이상한 놈들과는 일체 관계가 없다. 난... 나만의 의지로 여기에 왔을 뿐이다."

처음으로 D의 입술이 움직였다.
"알고 있다."
글렌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스쳤다. 아이처럼 악의 없는 웃음이었다. 그러나 생사를 건 순간 이외에는, 이 사내 자신도 떠올릴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웃음이었다.


- 두 사람의 얼굴을 작은 그림자가 기분 좋게 스쳐갔다. 하늘 높이 날아가는 새였다.
빛이 얼어붙는 것을 샤인은 느꼈다.
파도 소리가 허공 속에 묻혀 딱딱하게 굳어져버린다.

 

- 다음 순간 일어난 움직임은 샤인의 눈에는 어슴푸레한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어떤 종류의 경지에 달한 광경은 모두 이처럼 비치는 것일까? 

- 왼쪽 허리춤에 찬 칼집에서 칼날이 솟구치더니 아침 햇살을 반사해 은빛을 발하며, D의 허리 쪽으로 흘러간다. 그러나 글렌보다 약간 늦게 등 위쪽으로 호를 그리며 나타난 D의 칼은 공중에서 은빛 칼을 위쪽으로 튕겨 보내며, 보석 같은 불꽃을 튀겨냈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은 서로 위치를 바꿨다. 
글렌은 오른쪽으로, D는 왼쪽으로.
그것만은 샤인에게도 보였다.
"제법이군."

 

-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제아무리 까다로운 음악가라도 넋을 잃고 도취되어 경청할 것 같은 아름다운 선율이 글렌의 입술을 타고, 맑고 깨끗한 아침 공기 속으로 흐르고 있었다. 

 

- 글렌의 칼은 상대방의 눈을 겨누고 있었다.
칼끝이 튀어 올랐다.
위쪽을 향해, 그리고 그 움직임에 유혹당하는 듯이 D의 장검 역시 머리 위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검술이라 부르기에는 좀 이상한 이름이긴 하지만, 난 맘에 들어. '로렐라이'다."

- 그 옛날 어느 나라의 큰 강 중류의 강기슭에 있는 큰 바위 위에 앉아 그 요사스런 노래를 불러 수많은 뱃사람을 매료시켜 바위에 부딪히게 하여 물속으로 꾀어 들인다는 물의 요정 로렐라이. 
노래와 휘파람이란 차이는 있지만, 그것이 초래하는 전율할 만한 결말을 상상해 볼 때, 이 기이한 필살기에 물의 요정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참으로 절묘하다 할 수 있었다. 


- 로렐라이... 글렌의 휘파람 선율을 듣고 그의 칼을 본 자는 눈 깜짝할 사이에 깊은 최면 상태에 빠져든다. 마치 부모를 따르는 아이처럼, 스승을 흉내 내는 제자처럼 그야말로 똑같은 동작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그 의미는 항상 상대방이 늦게 행동을 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절묘한 타이밍과 혼신의 힘으로 후려친 적의 칼날이 닿기 바로 직전, 글렌의 칼날은 그 목표 지점에 깊숙이 파고 들어가는 것이다.

 

- "나를 떨게 했던 사내... 아니, 나보다 아름다운 사내. 용서할 수 없다!"

 

- 다시 칼끝을 이쪽으로 겨눈 자세를 취하며 글렌은 우뚝 서 있는 D에게 말했다.
"이상한 방해꾼 놈들이 끼어들기 전에 해치우려고 찾아왔더니 역시 한 수위군. 또 만나자."
"난 상관없다."
이미 D의 상체 왼쪽 부위는 주홍빛으로 짙게 물들어 있었다. D는 오른손에 쥔 칼을 우측으로 당겨 수직으로 치켜올린 자세로대답했다.
그 의미가 '그만두겠다'는 자신의 의견에 동의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글렌의 미모에 처음으로 공포의 빛이 스쳤다.

 

- 로렐라이의 비술은 어디까지나 적보다 한 순간 빠르게 공격하여 상대의 몸을 자르는 데 있다. 한 순간이다. 만일 박자가 어긋나면... 1만 분의 1의 우연으로 이 타이밍이 늦어지면, 똑같은 자세로 습격해 오는 적의 칼날에 여지없이 당하게 되는 것이다. 여유 만만한 검술이 아니다. 말 그대로 필사의 비술이라 할 수 있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대담무쌍한 이 '수행자' 글렌이 핏덩어리를 토하면서 몸에 익힌 보람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지금 그는 패배를 맛봤다. D의 기량은 로렐리아의 핸디캡을 극복하고 글렌보다 한 순간 빨리 그의 어깨를 가른 것이었다.
글렌이 반격의 일격을 가할 수 있었던 것은 D의 일격이 너무나 얇고 둔했기 때문이다.

 

- 두 사람 모두 중상을 입었다. 이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한다고 글렌은 판단했던 것이다. 그리고 D도 물러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직 이 아름다운 미모 속에 도사리고 있는 악마의 정체까지는 꿰뚫어 보지 못한 것이다.
글렌은 또 다른 검술을 유도해 낼 휘파람을 불 정신적 여유는 없었다.
막 내딛으려고 하던 D의 발이 마당에 돋아난 푸른 풀을 밟고 갑자기 멈춰 섰다.
천진난만한 목소리와 귀여운 발자국 소리들이 아래쪽 길을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 D는 이미 안방 뒤쪽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그림자를 쫓을 생각인 것이다.
칼은 여전히 오른손에 들고 있었다. 아마 아이들에게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샤인이 의식적으로 집중해서 관찰했다면, 그 칼 중간쯤에서 끝부분까지 희미하게 부착된 반투명의 점액 덩어리를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글렌에게 가한 일격이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던 것은 그 순간적인 찰나에 그림자가 던진 그 물질 때문이었다. 

 

- 아이들의 미소가 태양 빛을 더욱 맑게 물들였다.
빛의 세계에는 그것에 어울리는 주인공이 있는 것이다.

 

- D는 안장 위에 앉아서 목의 상처 부위에 지혈대를 대고 있었다. 온몸이 온통 검은색이었기 때문에 살갗을 제외하면 출혈은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상처는요?"
샤인의 목소리는 예민해져 있었다. 
구명조끼가 들어 있는 큰 상자를 밀어놓고, 샤인은 D의 곁에 무릎 꿇고 앉았다.
D의 걸어가는 뒷모습이 너무나도 태연했기 때문에 대단한 상처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 "대단한 건 아니다."
D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휴우... 다행이네요."
샤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D와는 조금도 닮지 않은 쉰 목소리라는 것을 알고 샤인은 두 눈을 부릅떴다.
"목구멍을 좀 다쳐서 말이야."
D가 변명 섞인 말을 입에 올린 것 또한 놀라웠다.
그 때문에 D가 앞가슴에 얹고 있던 왼손을 무심코 내린 동작이 부자연스럽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하물며 손가락 사이에서 선혈이 아닌 흙덩어리가 흘러내리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 샤인은 반강제적으로 D의 지혈대를 떼어내고 눈을 깜박거렸다. 오싹할 정도로 희고 단단해 보이는 목덜미에는 실 같은 상처 자국 하나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럴 수가... 믿을 수가 없어요."
"아이들이 눈치챘나?"
D가 물었다.
마당에 떨어진 핏방울이 마음에 걸려서 하는 말이었다.

"네. 하지만 제가 간신히 얼버무렸어요. 당신도, 그 사람도 침착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아이들도 자세히는 몰랐을 거예요."

 

- "역시 집을 옮기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군."

샤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곳에 있으면 적에게 절호의 표적이 된다. D가 늘 곁에 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틈이 생기게 마련이다. 어젯밤에 넘치던 그 자신감은 눈앞에 펼쳐진 처참한 사투 앞에 이슬처럼 사라져 갔다. 더구나 D로서도 그 점액 덩어리를 던진 그림자를 포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근처에 기괴한 적들이 도사리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적은 내가 구슬을 갖고 있다는 걸 안다. 너만 인질로 이용당하지 않으면 어떻게든 된다."

- "몇 시부터인가?"
"앞으로 30분 남았어요."
"낙성식에 참석하고 나서 해라."
샤인은 활짝 웃었다. 아이처럼 웃는 그 얼굴은 글렌과도 닮아있지만 분위기 자체가 다르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성실한 인간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다행이야... 이봐요, 우리 같이 가요."
"학교 근처까지는 바래다 주지."
"안에 이상한 자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샤인의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D가 몹시 곤혹스러워하는 것을 느낀 것이다. 흡혈귀 헌터와 학교... 이토록 어울리지 않는 배합도 없을 것이다.

- "농담이에요. 학교 근처까지라도 좋아요. 파티도 해요."
"핫핫핫, 으익."
샤인은 뭐라고도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은 야릇한 얼굴로 D의 허리 언저리를 내려다보았다. 왼손이 꼭 쥐어져 있다. 어지간히 힘을 넣고 있는 모양인지, 관절이 하얗게 솟구쳐 올라와 있었다.

 

- "이상한 목소리를 내는 버릇이 있나 봐요."
"..."
"이봐요, 이명이라든가 갑자기 푹 빠진 듯한 느낌이 든다거나 하지는 않아요?"
"안심해라."
"솔직히 말해봐요."
샤인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거짓말은 안 한다."
"혼자가 괴로우면, 밤에 얘기 상대가 돼줄게요."
"필요 없다."
D는 주먹을 단단히 쥔 채로 일어섰다.
"준비해라. 난 피 냄새를 지워야겠다."

 

- 예정 시각 5분 전에 마차는 교정에 도착했다.
하얀 페인트 냄새가 샤인의 콧구멍을 가득 메우고, 볼을 장밋빛으로 물들였다.
지붕도, 기둥도, 유리창도... 그 모든 것이 아침 햇살로 반짝이고 있었다.

 

- 교문에 서서 기다리고 있던 촌장과 보안관... 그리고 아이들의 해맑은 미소가 다가온다.
한쪽 발만 땅에 내딛고, 샤인은 힘껏 심호흡을 했다.
"참 이상하네요. 여기 올 때까지 계속 꽃향기가 났어요. 아직 겨울인데..."
"나다."
쉰 목소리가 말했다. 샤인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뒤돌아보았다. D는 눈을 치켜뜨고 태연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인지 또 왼손을 꽉 쥐면서 겸연쩍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냄새 제거제를 너무 많이 사용한 모양이군."
수려한 그 옆얼굴을 잠시 망연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샤인은 마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내려서도 멍해 있었다.

갑자기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기다리고 있었어."

 

- "그런 데서 혼자 있으면 얼어버린다구. 어서 들어와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 샤인도 안전할 테고 말이야."
"맞는 말이다."
갑자기 그의 어깨너머로 반교우의 얼굴이 나타났다.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그는 곧 마을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지금, 마을에는 승려가 나 혼자뿐이라는 이유로 초대를 받았지. 비린내 나는 사이비 승려도 오케이라는데, 설마 샤인의 보디가드가 버림받으라는 법은 없겠지. 화려하게 차려입은 고용주의 모습 정도는 봐줘야 하지 않겠나." 
"어서 들어오라구."
도와이트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범고래를 두 마리씩이나 싸잡아서 숨통을 끊어놓은 사나이에게 누구도 불만 따위를 늘어놓지는 못할 거야. 우린 대환영이라구."
아름다운 그림자는 아주 조금 머뭇거리다가, 곧 문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 도와이트는 몹시 못마땅한 듯이 그렇게 쏘아붙이고, D 쪽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흠... 넋을 빼앗길 만큼 미남이긴 하지만, 붙임성은 없는 것 같군. 전혀 선생 타입이 아냐."
"그럴까..."
반교우가 히죽히죽 웃으면서 반론을 내세웠다.
"이 사내, 알고 보면 꽤 괜찮은 사람이라구. 별로 아이들을 좋아하지는 않아도, 애들이 싫어할 타입도 아닐 거라 보여지는데... 아니, 아니지... 이런 사내는 아이들 쪽을 더 좋아할걸. 애들의 눈은 쓸데없는 것은 보지 않으니까 말이야."
"어때, 우리끼리 얘기지만... 뱃사람이 돼보지 않겠어?"
느닷없는 도와이트의 제의에 샤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말은 어젯밤 그녀 자신도 D에게 꺼내려다 그만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D는 무표정이다. 마치 귀에 들려오지 않은 것처럼.
"당신 정도의 솜씨라면 당장이라도 마을 최고의 어부가 되고도 남을 거야. 아니, 다른 마을에도 그런 놀라운 솜씨는 없다구. 맹세코 말하지만, 반년도 지나기 전에 당신은 국경 제일의 작살 일인자가 될 수 있어. 어때?"


- 도와이트의 권유에는 예의상 하는 말이나 겉치레로 하는 말 따윈 털끝만큼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는 진심으로 D를 동료로서 받아들이려고 무척이나 애쓰고 있는 것이었다. 그 열의에 힘을 얻었는지, 어젯밤은 체념하고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던 샤인까지도 뜨거운 눈빛으로 마치 매달리듯이 검은 귀공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 "제아무리 솜씨가 뛰어나다 해도 경호원이나 전투사 따윈 보나 마나 뻔하잖아. 나이를 먹으면 너 말이야... 근육도 제대로 못쓰게 되고 심줄도 굳어져버린다구. 게다가 줄줄이 쏟아져 나오는 젊은 놈들한테 결국은 추월당하게 될 테고... 정신을 차려보면 이미 때는 늦지. 틀림없이 외톨이로 객사하고 말 거라구. 이 마을이라면 작긴 하지만 정착하고 살 수 있는 집도 있다. 땅도 있지. 보름쯤 지나면 든든한 동료들도 생길 거야. 출생이 어떻고, 지금까지 어떤 생활을 해왔는지는 모르지만, 어차피 대단한 인물은 아닐 테지, 뭐. 슬슬 앞날을 생각하는 게 어때?"
겉모습과는 전혀 달리, 그렇게 청산유수로 일장연설을 늘어놓고 나서 도와이트는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D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나 대답은 빠르고 짧았다.
"난 사람을 찾고 있다."
누구보다도 먼저 샤인은 어깨를 떨구며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 는 아니겠지? 그런 타입이 아냐, 넌."
도와이트가 피곤에 지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들었어. 이렇게 말하고는 있지만, 당신이 우리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어. 하지만, 왠지 모르게 혹시... 하는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 내 기분을 언짢게 듣지 말라구."
"어부가 되라는 권유를 받은 건 처음이다."
D는 도와이트를 보며 말했다. 뭔가가 바다 사나이에게 자랑스러운 기분이 들게 했다.
바로 그때, D의 발 밑으로 작은 그림자가 달려왔다.

 

- "저기요, 아저씨... 그때 만들어 준 피리, 아직도 가지고 있나요?"
"피리?"
샤인과 도와이트가 얼굴을 마주 보았다. 피리라고 하는 단어보다 만들어 줬다고 하는 말에 그들은 몹시 놀란 것이다. 새까만 어둠과 얼음덩어리로만 되어 있을 것 같은 이 젊은이가 아이에게 피리를 만들어 주었다니.
D는 몸을 구부리며 코트 안쪽에서 피리를 꺼내더니 소년에게 내밀었다.

 

- "승려가 만들어 준 것은 어떻게 됐나?"
D가 문득 물었다. 소년은 주름살투성이의 얼굴을 힐긋 노려보더니 입을 열었다.
"아, 그거요. 소리는 좋지만 금방 고장나 버렸는걸요."
"승려가 이 마을에 있는 동안에 부탁해 둬라. 틀림없이 많이 만들어 줄 거야."
"예."

 

- 쫓아온 목소리에게 샤인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일부터 여름의 빛을 맞이하게 될 마을은 그 뒤편에서 처참하기 그지없는 잔혹한 어둠의 사투가 펼쳐지고 있었다. 자진해서 죽음의 소용돌이 속으로 몸을 내던진 그녀에게 있어서 귀엽고 사랑스런 아이들의 목소리는 결코 닿아서는 안 될 빛의 나라의 울림이었다.

 

- 학교를 나올 때 문득 그는 코를 실룩거리며 반교우 쪽을 쳐다보았다.
노승도 기묘한 표정으로 거칠게 공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거 참 이상하네."
"그래, 이상하군... 아까부터 느꼈던 건데 말이야, 꽃향기가 난다구."
"글쎄, 여자 향수 같지는 않고..."
"요즘은 사내 것도 나왔다고 하던데. 잡화상 주인이거나, 아니면 보안관이겠지. 에잇, 정말 상종 못할 놈들이군. 나중에 때려눕혀 주겠어."
"나다."
갑자기 쉰 목소리가 뽐내는 듯이 울리더니, '윽' 하고 신음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노승과 바다 사나이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목소리가 들려온 D 쪽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모두 말이 없었다.
D는 묵묵히 마차 쪽으로 다가가 먼저 마부석으로 올라탄 다음, 샤인의 손을 잡아 올렸다.
교문 근처에 우두커니 서 있는 두 사람을 보려고도 하지 않고, D는 마차의 방향을 돌려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나무숲 사이로 멀리 사라지자, 도와이트와 반교우는 얼굴을 마주 보며 배를 움켜잡고 웃기 시작했다.

 

- 온통 피투성이인 바닷물에 적셔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소름 끼치는 주홍빛 눈동자는 해변의 사람들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몸은 물론 물속에 잠겨 있을 것이다.
귀족의 하녀일까, 아니면 바다의 요물일까?
정체도 알지 못한 채, 또 다른 것이 마을 사람들을 경악케 했다.
여자의 머리 뒤쪽에서 뭔가가 물을 튀기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믿기 어려운 것이지만, 바다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낯익은 물체였다.
꼬리다. 비늘에 온통 뒤덮인 채 두 개로 갈라진 물고기의 꼬리였다.
설마... 이 여자는?

- 물이 솟구쳐 올랐다가 찢어지듯 갈라졌다. 여자를 잉태하기 위해서.
바닷물이야말로 만물의 생명을 품고 기르는 양수라고는 하지만, 이토록 아름다운 태아를 낳다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번쩍이는 물줄기를 끌면서 공중으로 뻗쳐 오른 몸은 그야말로 형용할 수 없는 미의 극치 그 자체였다.
입에 물고 있는 물고기조차 그 아름다움을 한층 더해 주고 있었다.
허리까지 드리워져 있는 황금빛 머리카락 밑으로 풍만하게 부풀어 오른 유방은 인간과 똑같았다. 그 아래로... 잘록한 허리 라인이 아찔할 정도로 관능을 과시하며 그려내는 하체는 바다 사내들의 눈을 여지없이 휘감고 있었다.
꼬리 끝에서 두 개로 갈라진 그것은 마치 수천 개의 거울을 붙여 놓은 듯이 화톳불을 비췄다.
파도가 흩날렸다. 여자는 몸을 거꾸로 한 채로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 D 혼자만이 파도치는 곳으로 다가갔다. 순식간에 무릎까지 물이 차 오르고, 그는 앞쪽을 바라보았다.
어딘가에서 물이 튀겨 오르고, 그러나 그뿐... 바다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잠잠해졌다.
문득 D는 볼에 스치는 온기를 느꼈다.
차가운 공기가 잠시 여름에게 관용을 베풀고 있는 것일까.
기후 제어장치가 북쪽 바다에 여름을 명한 것이다.
어쩌면, 기이한 형체의 방문도.

 

- 그것은 언제나 너무나도 갑작스레 찾아오기 때문에,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까지 믿기 어려운 기분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었다.
기다림을 참지 못한 아이들이 문을 박차고 달려 나오는 소리가 들려도, 마을 사람들은 불어오는 바람의 온기에 잠시 동안 몸과 정신을 길들이고 나서야, 간신히 하얀빛 속으로 살그머니 발을 내딛는 것이었다.
그것이 잠깐 동안의 짧은 꿈이며,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깨어나 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두려워하면서.
그러나... 귀를 기울이면 푸른 하늘에 울려 퍼지는 멜로디가 숲 속 높이 솟아오르고, 공기에는 여름 풀 내음과 달콤한 과자 향기, 포도주 향기가 금방이라도 넘쳐흐를 듯이 감돈다. 그러면 그제서야 비로소 그들은 눈앞에 성큼 다가온 계절의 이름을 꿈속이 아닌 입술에 떠올리는 것이었다.
여름이다.

 

- 일주일 동안의 여름... 틀림없는 여름. 축제와 축하연의 나날이 이제부터 시작된다.

- D 혼자 지내는 샤인의 집으로 보안관이 찾아온 것은 그날 아침이었다.
"이 집주인은 축제 때 방범 위원이어서 말이야. 하지만 샤인이 부재중이라면 어쩔 수 없겠군. 교대해 줄 사람도 없고. ... 당신이 이 집 고용인이라면 대신 나와 주지 않겠나?"
D는 승낙했다. 샤인으로부터 사정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나가 달라는 부탁도 있었다.

- 그곳이 여름의 중심이었다.
마술사, 곡예사가 뒤섞인 유랑 연예인들. 그들이 여기저기에 설치해 놓은 가설무대를 떼 지어 몰려다니는 아이들과 라인 댄스에 흥겨워하는 젊은이들.
D가 그 속을 비집고 걸어가자 여기저기서 요란하게 울려 퍼지던 소리와 목소리들이 갑자기 끊기면서 뜨거운 시선이 전신에 집중되었다.
이 젊은이를 보면 결코 환호성은 지를 수 없다. 다만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숨을 죽여버리는 것이다.

 

- 그 바로 정면에 D가 서 있었다.
"호오...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이런 마을에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분이. 게다가 이건..."
수리검 도사는 말문이 막혔다. 얼굴이 창백해졌다. 적어도 눈앞에 있는 상대의 역량을 꿰뚫어 볼 수 있을 만큼의 실력은 될 것 같았다.
"좀 격에 맞지도 않는 힘을 발휘해 버렸습니다. 당분간은 다음 손님도 대결해 주지 않겠죠. 자... 심심풀이로 어떻습니까? 요금은 무료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목소리는커녕 박수 소리 하나 나오지 않았다. 이 아름다운 청년이 나서게 되면 단순한 심심풀이 차원이 아니라 유희로도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 모두가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무슨 생각을 했는지, D는 앞으로 나왔다.
수리검 도사의 의도는 물론 가벼운 도전에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 젊은이가 단순한 유희에 가담할 리도 없다.
그러나 그는 나아갔다.
"순순히 협력해 주셔서 송구스럽습니다."
수리검 도사는 가볍게 인사를 했다.
"무기는 그걸 쓰시겠습니까? 내 수리검을 피할 수 있다면 금화를 드리겠습니다... 그럼."
거리는 5미터.
그러나 수리검 도사의 기량으로 보면 그 정도의 거리쯤은 아무런 장해도 되지 않을 것이다.

- 그 목소리는 발성 장소가 불분명한, 마치 하늘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땅에서 울려 퍼지는 것 같기도 했다.
"덤비지 않을 셈인가?"
D가 조용하게 물었다. 만약 D가 누군가에게 차라도 마시러 가자고 권유한다면 역시 같은 목소리로 말했을 것이다. 휴식으로의 권유도, 죽음으로의 물음도 그에게 있어서는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보라, 그 어깻살은 마치 폭탄을 맞은 듯이 쩍쩍 벌어져서 선혈이 뿜어져 나오고 있고, 등에도, 가슴에도 수양버들 이파리처럼 상처가 처참하게 찢어져 있었다. 수십 명의 적을 단숨에 무찌르고, 그것도 10배나 되는 중력을 짊어진 채로 해치운 것에 비하면, 이 정도의 상처를 입은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만두겠다."
에그베르트는 단호하게 말했다. 어딘지 모르게 개운한 것 같은 상쾌한 말투였다.
"난 애초부터 공동작전으로 계략을 짜서 공격하는 것 따윈 반대였어. 너와 맞붙어서 중상을 입고 난 후로, 제아무리 공동작전을 펼쳐봤자 별 수 없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역시, 난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구. ... 다음엔 일 대 일로 하겠다. 킹 에그베르트로서 말이야. 또 만나자구."
목소리가 사라짐과 동시에, D는 지체 없이 나무침을 날린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짓밟힌 풀잎 위로 빨간 점이 흩뿌려진다.

 

- 이미 노점상도, 떠돌이 장사꾼들의 모습도 온데간데없었다. 이 모든 것은 풀 속에 도사리고 있던 장치에 의한 것이다. 그윽한 향기를 뿜어내는 수목마저도 사라지고, D를 에워싸고 있는 것은 비틀린 해변의 관목뿐이었다. 
보안관이 알려 준 광장으로 향하는 도중에 에그베르트 왕국으로 유인당한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초능력을 능가하는 흡혈귀 헌터 D의 거리 감각과 시간, 게다가 방향 감각까지 흩트려 놓다니, 이 얼마나 엄청난 요술인가! 

- D의 발 밑에서 노인의 시체는 어느새 나무침에 꿰뚫린 인형으로 변해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말이야, 오늘은 네놈의 왼손만 앗아갈 수 있다면 좋다고 생각했었지. 에그베르트의 입을 통해서 들은 얘기가 있다. 그 녀석의 왕국을 파괴한 것이 바로 '말하는 손'이었다는 걸 말이야. 하지만, 난 갑자기 욕심이 끓어올랐다. 제아무리 흡혈귀 헌터 D라 할지라도,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뿜어내는 무기를 피할 수는 없을 테지. 또한 심장을 뽑아내 버리면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싫다면, 대답해라. ... 구슬은 어디 있나?" 
D는 말이 없었다.
어깨나 몸 여기저기서 뿜어져 나오던 출혈은 과연 던필인 덕분에 벌써 멎어 있지만, 손이 잘려 나간 왼쪽 손목에서는 빨간 줄기가 마치 뱀처럼 꿈틀거리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D는 그것을 멎게 만들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손도... 얼굴도 옴짝달싹하지 마라."

- "피를 핥으면 어떻게 되는지, 그것도 에그베르트한테 들어서 익히 알고 있지. 그 녀석, 내가 당했다고 판단하고 도망쳤겠지만, 쓸데없는 친절을 적에게 베푸는 놈이야. 그 모양이니까, 크크... 구슬의 수수께끼를 알아내지도 못했지."
D의 눈썹이 움직였다.
"알고 있나, 그것을?"
D가 물었다.
싱은 피 냄새를 날려버리듯이 콧망울을 실룩거렸다.
"다른 놈이 알고 있었지. 자칭 교수라고 하는 늙어빠진 녀석이 말이야. 그렇게 교수라고 칭하는 만큼 지식 하나만큼은 과연 엄청나더군. 그건 그렇고, 싸움에 이기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긴 하지만, 자신의 피까지 빨아먹어야만 하다니, 무슨 빌어먹을 업보냐... 넌 지독히 저주받은 놈이야. 하지만 난 달라. 네놈처럼 잡종이 아닌, 진짜 귀족이 되고 말겠어. ... 구슬은 어딨나?
우쭐대던 모습도 사라지고, 마지막 그 한마디는 천박한 욕망만으로 똘똘 뭉친 외침이었다.
주위를 가득 메운 뜨거운 공기와 냄새가 흔들렸다.

 "거기다."
D는 얼굴만을 약간 오른쪽 땅으로 향하며 말했다.
"말하는 손이 가지고 있다."
싱은 잠깐 동안 멍하니 있었지만, 곧 추악한 늙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과연.... 이 정도로 안전하고 확실한 장소 또한 없을 것이다. 그럼, 받아 가지. 움직이지 마라. 아니, 좋을 대로 해라. 이제 너한테는 볼일이 없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 폭발음 같은 엄청난 소리를 내면서 5그램이나 되는 납 총알이 D의 머리 쪽으로 빨려 들어왔다.

- D가 사투를 펼친 환각의 숲 속에서 몇백 미터 내륙으로 들어간, 그곳 역시 숲 속이었다.
파도소리도 여기까지는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어제까지 감돌고 있던 냉기가 꿈처럼 사라져 버린 찌는듯한 무더위 속에서 울어대는 벌레들의 요란한 소리뿐이었다.
벌레소리가 갑자기 끊겼다.

 

- "이게 놈의 왼손이라구. 구슬은 이 속에 있어."
국경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게 여겨질 것이 없었고 그곳 사람들 또한 그러한 것에 개의치 않았다. 

"어떻게 할 텐가? 이제부터?"
교수의 물음에 싱은 잘려진 왼쪽 손목을 가슴에 끌어안으면서 몸을 바르르 떨었다. 억제할 수 없이 끓어오르는 환희 때문이었다.
"말할 필요도 없다. 한시도 지체 없이 이 마을을 떠나는 거야. 구슬은 빼앗았지만 놈은 아직 버젓이 살아 있단 말야. 빼앗을 수 있었던 것이 요행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무시무시한 놈이다. 다음에 혹시라도 부딪친다면 내 생명도 끝장일 거야. 핏빛에 이글거리는 그 눈... 나의 진짜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도, 마치 골수까지 투시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니까. 후훗... 하긴, 다음에 만날 때는 이 몸은... 놈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존재가 돼 있겠지만 말이야."

 

- "찾겠어. 무슨 짓을 해서라도 기필코 찾아내고 말겠어. 인간과 귀족의 피에 얽힌 비밀을 파헤쳐 줄 유일한 보석을... 흠흠...내게로 와라."
그리고 그는 상처 입은 한쪽 손을 누르면서, 구슬이 사라진 방향으로 또다시 걷기 시작했다.
파도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낭떠러지 위였다.

 

- '수행자'는 그 길의 끝을 언젠가는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입에 올려서는 안 될 운명의 마지막 대사였다.
분노와 절망이 마치 만화경처럼 흔들리는 수려한 얼굴을, 사몬은 어찌 보면 비웃음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동정 같기도 한 이상야릇한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동료들이 선수를 칠 것 같다면서 글렌을 재촉하여 D에게 도전하도록 부추긴 것은 그녀였다.
그 결과 글렌은 무참히 패배했고,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부상당한 그를 절에 몰래 숨겨 주고, 상처를 치료해 준 것도 바로 그녀 자신이었던 것이다. 

- 마치 불어오는 바람결에 날려 보내듯이 글렌이 말했다.
"확실히 이길 수 없어. 땅을 기어 다니는 나방이 제아무리 수행을 쌓는다 해도 거대한 용에게는 어쩔 수 없지. 그러나 하나 있다. 있다구. 이런 내가 흡혈귀 헌터 D를 무릎 꿇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사몬은 눈을 가늘게 떴다.
느닷없이 강풍이 덮친 것이다.
눈을 뜨기가 무섭게 글렌은 그녀 쪽으로 돌아섰다.

 

- 터널 속에 있었던 그 사내... 어젯밤에도 꿈속에 나타났다. 분명히 낯선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무겁고 어두운 것이 가슴을 메워 왔다. 
누구일까?
도저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지만, 어쩐지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두려움을 동반하고 솟구쳐 오르는 질문은...
나에게 있어서 무엇일까?


- 머리를 흔들면서 샤인은 다른 얼굴을 생각해내려고 했다.
훨씬 아름답고, 차갑고, 엄숙한 젊은이의 얼굴을.
무엇을 묻지 않아도, 자신 따윈 상상도 할 수 없는 처절하고 냉엄한 길을 거슬러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샤인은 가슴이 맑아지고 평온해지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 그러나 언젠가는 떠날 사내다. 그것만큼은 그 무엇보다도 확실한 것이었다.
어쩌면, 그 사내와 헤어지고 싶지 않기 때문에 구슬을 지켜 달라고 부탁했는지도 모른다. D를 향해 가고 있는 자신의 마음이 샤인은 몹시 두려웠다.
멍하니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갑자기 눈에 초점을 모았다.
얼음 덩어리 가까이에서 그물을 끌어올리고 있던 동력배 한 척이 갑자기 기울었던 것이다.

 

- "이제부터 고기잡이하러 나오면 네놈들 모두가 같은 운명을 걷게 될 줄 알아라. 이제 바다는 네놈들의 적이다. 그것이 두렵다면, 네놈들 마을에 있는 샤인이라고 하는 이름의 여자... 그 녀석 손에 있는 구슬을... 언제라도 좋다. 사흘 이내에 바다로 흘려보내라. 그때야 비로소 바다는 네놈들 곁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구조선은 전속력으로 마을로 돌아가서 조난자를 병원으로 옮기는 한편, 몇 사람은 촌장에게로 급히 뛰어가 그 사건을 알렸다.

- 촌장의 부름을 받고 D가 검은 바람처럼 마을 회관 사무실에 나타나자,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위원들의 얼굴에 갑자기 황홀함과 전율이 교차했다. 
촌장이 벌어진 사태를 대략 이야기하고 구슬에 대한 것과 그것을 즉각 건네주라고 요구하는 사이, D는 말없이 벽에 기대고 있다가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입을 열었다. 
"구슬은 없다."
"...?"
촌장은 말문이 막혔다. 함께 있던 그들 모두가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러나 D에게 덤벼들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을 위협하는 바닷속의 괴물이 바로 눈앞에 나타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흘 여유가 있다고 했나..."
D는 늘 그렇듯이 강철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이에 구슬을 찾거나, 아니면 바닷속의 그것을 처리하겠다. 그렇게 하면 되겠나?"
다시 한번 위원들은 얼굴을 마주 보았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그 구슬은 대체 뭐지?"
촌장은 이것만큼은 알아야겠다는 어조로 말했다.
"나도 모른다."

"왜 그걸 샤인이 갖고 있나?"
"모른다."
"물속에 있는 놈은 누구지?"
"모른다."
"샤인은 어디 있나?"

위원 중에서 한 사람이 기세 당당하게 물었다. 

"살 물건이 있다고 클라우스 마을로 떠났다. 언제 돌아올지는 모른다."

 

- "동료의 죄니 뭐니 하는 것은 모두 내가 짊어져 주겠다. 그 괴물, 내가 해치우면 불만들 없으시겠지."
"그런 말이 아냐!"
"시끄러워! 발뺌하지 마!"
덤벼들려고 하는 도와이트의 앞가슴으로 검은 손이 쏙 뻗쳤다. 순식간에 겨울 속으로 내던져진 듯한 표정으로 변해버린 젊은이 쪽은 보지도 않고, D는 침을 삼키며 숨을 죽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귀족이라고 했던가..."
D는 아름다운 그림자처럼 말했다.
"바다에서 왔다고 들었다. 바닷속의 협박자와 함께 그 귀족도 제거하면 샤인도, 구슬에 대해서도 불문에 부쳐라. 후환은 남기지 않겠다."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울림소리가 실내를 가득 메웠다. 당치도 않은 잠꼬대라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이 아름다운 젊은이라면 가능할 것이라고 모두가 직감한 것이다.
"귀족을... 더구나 있을 리도 없는 바다에서 온다는 귀족을... 어떻게 죽일 작정이지?"
보안관의 목소리에는 공포와 기대가 뒤섞여 있었다.
"난 흡혈귀 헌터다."
이번에야말로 모두가 놀라 눈을 부릅떴다.

 

- "그건...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의 간절한 염원이지. 그러나 아무리 흡혈귀 헌터라곤 하지만 적은 보통 귀족이 아니라구."
"물론 끄떡없고 말고."
열려진 창문 밖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코웃음 치듯이 말했다.
"그 녀석은 던필... 귀족의 동료라구."
모두가 소름 끼치는 듯이 파르르 떨었다. 도와이트까지 눈을 부릅뜨고 입을 열지 못한다.
D가 흘끗 밖으로 눈을 돌렸지만, 목소리는커녕 기미조차도 사라진 모양이다.
"할 말은 다 했다. 사흘 동안 방해는 하지 말아 줬으면 한다."
D는 곧바로 모든 참석자를 향해서 아주 담담하게 말하고는 발소리도 내지 않고 사무실을 나갔다.
모두가 멍해져서 마치 실신해 버린 것처럼 의자에 기대 있었다. 이윽고 도와이트의 고뇌에 찬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아, 샤인... 이 일을..."

 

- D가 떠나기 조금 전, 마을 회관에서 재빨리 사라진 교수는 마을 중심가로 이어져 있는 좁은 길을 걸으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것으로, D의 움직임도 충분히 견제할 수 있어. 이제부터는 한시라도 빨리 구슬을 찾아내는 것만 남았는데 말이야. 어디로 갔지? ... 다시 한번 그 부근을 찾아볼까..."
교수는 구슬을 찾고 있는 도중에 마을 회관으로 급히 가는 D를 목격하고, 충분한 거리를 두면서 미행했던 것인데, 뜻밖의 수확을 얻은 것이었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고도 하지 않고, 교수는 왈츠가 흘러나오는 숲 속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 D는 파도치는 곳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넓다.
별빛 하나 없는 새까만 어둠 속에서는 아무리 D라고 할지라도 물체를 볼 수는 없다. 파도소리와 공기의 흐름... 그리고 던필의 초감각에 의지할 뿐이다.
아니면... 지난번에 샤인과 함께 왔을 때 밝힌 불빛 속에서 그는 이미 목적했던 것을 확인했던 것일까.

- 5분쯤 지나 걸음을 멈춘 D의 눈앞에는 돌을 쌓아 올린 암벽이 있었다.
그 중앙은 네모진 어항 모양으로 도려내져 있고,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의 움직임에 리듬을 맞추는 듯이 직경 3미터쯤 되는 둥그런 물체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D의 오른손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둥그런 물체의 윤곽을 퍼렇게 물들이며, 그 한가운데 고정시켜진 좌석과, 아래쪽으로 펼쳐진 기묘한 기계 장치를 적나라하게 비춰 주었다.
좌석을 에워싸는 듯 둘러쳐진 배전반은 조종 장치라고 하기보다 새의 깃털을 본떠 만든 우아한 진열장을 연상케 했다.
둥근 물체의 뒤쪽 부위를 둘러싸고 있는 둥근 고리 모양은 아마도 자세 제어장치일 것이다.
배수구 같은 것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잠수나 항해할 때 물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 옛날 귀족들이 '물놀이'에 이용했다고 하는 둥그런 잠수 구슬이 바로 이것이었다.

 

- '샤인, 기다려!'
가슴속으로 외쳤다.
바닷속의 괴물이니, 던필이니, 귀찮은 것 투성이로 뒤얽혀 있지만, 뭐, 그까짓 거 내가 깡그리 없애 주겠다. 우선 괴물의 숨통을 끊어버리고 나서, 그 미남을 내쫓아버리면... 그다음은 너의 인품과 마을에서의 너의 실적, 게다가 내가 밀어붙이면 어떻게든 되겠지. 침몰한 배도 내 적금을 털어서 변상할 수 있어. 하지만 그 미남 말이야, 왠지 모르게 나도 맘에 들어버려서 말이지. 그 녀석을 고용한 네 마음... 어렴풋이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구. 어쩌면 그 녀석을 내쫓는 것이 가장 힘들지도 모르겠는걸.

이 대범한 젊은이와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우울한 눈빛으로, 그는 육지 쪽을 바라보았다.

 

- 오른쪽 뱃전으로 청초한 여자 얼굴이 빠끔히 나와 있었다. 금발도, 하얗고 윤기 있는 우윳빛 피부도 물에 젖어 빛나고 있었다.
조난 사고일까, 도와이트는 순간적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곧 어떤 기억이 되살아났다.
어젯밤 귀족이 사라진 해변에서 그 흡혈귀 헌터와 동료들이 보았다고 하는 인어.

 

- 언제부터...? 하지만 그 목소리는 분명히 사내다.
"뭘 그렇게 두리번거리고 있나?"
그 목소리는 석양에 물든 조개같이 생긴 빨간 입술이 토해낸 것이었다.
"뭘 하러 왔는지는 모르지만, 마침 잘 왔다. 어제 저녁부터 헤엄치러 나왔지만, 물고기는 이제 신물이 났어. 옛날처럼 사람 고기가 필요하다구."

 

- 조난 사고의 자초지종은 D로부터 전해 들었다. 그의 정체가 마을에 낱낱이 드러났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어쩌면, 마을에 더 이상 있을 수 없게 될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좋겠지,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자신의 발목을 잡을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은 북쪽 마을이었다.

여기서 살아왔다면, 그 어디에 가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D의 수려한 미모가 가슴속에 떠올랐다.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도 괜찮을지 몰라. 함께 갈 수 있을 리는 없겠지만, 여행에서 여행으로 이어지는 생활도 의외로 자신에게 어울릴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함께...
샤인은 어딘가에서 D의 미소를 본 듯한 기억을 떠올렸다.
함께 있으면 언젠가 다시 한번, 그 미소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찔렸다면서 어째서 죽지 않고 버젓이 살아 있는 거지?"
"그때 난 시체로 둔갑해 있었으니까. 시체를 아무리 찔러봤자 두 번은 죽지 않는 법이지. 나를 죽이려면 살아 있을 때 죽여야 효과가 있다는 말씀이야."
그것이 이 사내의 전투사로서의 능력인 모양이다.

- 어느새 칼을 뽑아 든 D는 기리건과 그의 새로운 육체라고도 할 수 있을 검은 메커니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D가 입을 열었다.
"너... '피의 탐구자'로구나."
"호오, 역시 알고 있었나?"
기리건은 소리도 없이 웃었다.
"흡혈귀 헌터 D... 그저 평범한 헌터도, 던필도 아니지. 어때, 네놈과 나... 어느 쪽이 귀족에 가까운지 시험해보지 않겠나?"

- '피의 탐구자'... 그것은 귀족을 한없이 증오하고 공포로 느끼는 이 세상에서, 그들의 불길하고 저주받은 피를 두려워하면서도 연구하고 신앙하는 집단이다.

- 인간은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한다. 이 자연의 대원칙을 생각할 때, 인간의 정신은 얼어붙을 수밖에 없다. 그 순간... 정말로 그 순간, 인간은 무의식 중에 그 어떤 것을 선망하게 마련이다. 영원히 삶을 유지하는 귀족의 피의 비밀을. 
'피의 탐구자'란 존재는 그것을 밝혀내기 위해서 그 어떤 불가사의한 의식도 불사한다. 그뿐만 아니라, 귀족에게 자신의 피를 빨아먹게 하는 행위까지도 서슴지 않는 광신자들을 일컫는 단체인 것이었다. 귀족 피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 그들은 온갖 장소를 찾아 헤매며 귀족의 모든 것을 밝혀내려고 피나는 연구를 한다. 황량한 산골짜기의 오래된 성, 외딴섬의 거대한 공장지대, 평원에 우뚝 치솟아 있는 엄청난 유적... 그리고 귀족 지식의 유산을 비축해 둔 지하의 거대한 궁전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국경 마을의 보스 이외에도, 기리건은 '피의 탐구자'의 한 사람으로서 귀족의 고문서를 읽고 비술과 제작품을 입수하고 탐구하는 데 몰입해 왔던 것이다. 심지어는 자신의 몸을 실험대에 올려놓고, 귀족으로 변모하려고 몸부림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 귀족은 물살을 건널 수 없으며, 헤엄도 칠 수 없다. 이 불멸의 대원칙 때문에 기리건은 바닷속으로 잠수해 들어가 D를 대기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땅 위에서의 싸움은 D에게 있어서 가벼운 준비운동에 지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을 협박하여 구슬을 요구하면, D가 바다로 나오리라는 것도 계산했을 것이다. 

 

- "D, 알고 싶지 않나?"
기리건이 물었다.
대답은 물론 없다. D의 뇌리 속에는 눈앞에 있는 검은 살인 기계를 죽일 방법만이 번뜩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 삶도 죽음도 허무란 이름 아래 통괄할 수 있도록, 어쩌면 그것마저 초월한 젊은이의 정신세계는 이 세상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어둠으로 색칠해져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 미모에는 긴장은커녕 피곤한 기색조차도 없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황량한 얼음 벌판 위에서, 이 아름다운 젊은이는 더욱 맑게 빛나고 있다는 것에 도와이트는 전율했다.

생사를 초월하는 것은 아름다움일지도 모른다.


- "일단은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지."
"내가 저 가방을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보였나요?"
토토는 대답하지 않았다.
"구슬의 소재를 내가 알고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할래요?"

"알고 있나?"
"상대가 하는 말을 하나하나 다 믿어버리면 어떡해요? 정말 바보 같은 도둑이네요."
"그렇군."
토토는 히쭉 웃었다. 그 근방 여자아이들이라면 교성을 지르고도 남을 만큼 사내 냄새를 물씬 풍기는 웃음이다. 자신감에 넘쳐있었다. 샤인은 모르지만, '거꾸로 토토'라고 말할 것 같으면, 국경 최고의 도적이었던 것이다.

- "하지만 말이야, 바보인 대신에 사람을 꿰뚫어 보는 눈은 있는 셈이지. 네가 구슬의 소재를 아는지 모르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죽어도 털어놓지 않는다는 것만큼은 확실해. 그렇다고 한다면, 교환 조건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얘기겠지."
"죽을 때까지 고문이라도 해보는 게 어때요?”
"쓸데없는 시간 낭비 따윈 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 철칙이다. 그걸 하는 쪽도 피곤한 거라서 말이야."
갑자기 토토는 마치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것처럼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말이야, 너무 사람을 놀려대면..."
샤인은 어깨를 움츠리고 가방 쪽으로 눈을 돌렸다. 

 

- 토토는 자못 두려운 듯이 고개를 저었다.
순수한 공포가 표정을 굳게 했다.
"그 보디가드... 그렇게 쉽게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내가 아냐. 그런 마음... 친해지고 싶어 하는 마음까지도 훤히 꿰뚫어 보는  같더라구. 사실, 난 진심으로 너희들과 사이좋게 지냈었어." 
그것은 일종의 심리 작전일 것이다. 
뛰어난 사기꾼의 조건은 마지막 한순간까지도 상대방의 기분을 이해하고, 같은 동료로서 행동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토토는 훨씬 자연스럽게, 훨씬 교묘하게 속임수를 커버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도둑맞은 피해자는 마지막까지 그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그렇게 하면 되잖아요?"

 

- 토토의 투지는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물론 엄청난 부자가 되어 평생 동안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황홀경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그를 흥분시킨 것은 또 다른 이유 때문이다. 그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가공할 만한 멤버 모두를 따돌리고, 비밀의 구슬을 자기 손에 넣는다는 것에 도적으로서의 명예와 자부심을 느낀 것이다. 
그러나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춘 그런 토토 앞에 놓여진 현실은 엄했다. 구슬 옆에는 흡혈귀 헌터 D가 늘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토토가 본 바로는 그 누구보다도 만만치 않은 상대다. ... 게다가 토토로서는 어림도 없는 거물이다.
교묘하게 변장하여 샤인의 집에까지 드나들면서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 증거일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가만히 D의 모습을 엿보고 있으면 이상한 기분에 젖어드는 것이었다.
무한한 윤회 속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확률로 태어난 듯한 눈부신 미모에, 야성의 그늘과 잔잔한 애수가 드리워져 있고, 어느새인가 여자들 속에 섞여서 넋을 잃고 그를 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던 것이다.
토토가 그 집을 부랴부랴 떠난 것도 언젠가 자신의 정체를 꿰뚫어 볼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며, 그리고 갈수록 이상해지는 자신의 야릇한 심리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 D는 헛간 안에 있었다.
바닥에 모포를 깔고, 상체만을 구명조끼가 들어 있는 나무 상자에 기대고 앉아 다리를 뻗고 있었다.
긴 칼은, 끌어안듯이 왼쪽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인간과 귀족의 핏줄을 동시에 이어받은 던필은 밤낮을 불문하고 활동이 가능하지만, 수면 시간은 대체적으로 낮을 택한다.
밤의 악귀를 상대로 하는 직업상의 이유보다도, 귀족의 피가 인간의 본능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다.

 

- 그 목에 있는 손자국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D는 수색을 중단한 채 헛간에 들어가서 잠을 청한 것이다.
숨을 쉬고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그 미모의 어디에도, 그때까지의 치열한 사투에 지친 듯한 흔적이 드리워져 있지 않다는 것은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고통도, 죽음마저도 이 젊은이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그 존재를 허락받고 있는 것이었다. 

 

- 해안으로 이어져 있는 비탈길을 잠깐 동안 내려다보고 나서 그는 곧장 안방 쪽으로 향한다. 왼손은 자연스럽게 드리워져 있었다.
문에 쇠 화살이 꽂혀 있었다. 화살 중간쯤에 하얀 종이가 둘둘 말려 있었다. 편지인 모양이다.
왼손을 들어 올리려다 D는 살짝 쓴웃음을 짓고, 오른손으로 화살을 뽑았다.
종이 가장자리를 입에 물고, 간단히 매듭을 푼 후 화살을 버렸다.

- D는 힐끗 왼손을 보고 고지식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
그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놈은 간신히 빛이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는 바닥 위에서 몸을 바스락거리고 있었다.
하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토토가 밖으로 나간 뒤였지만, 그때까지는 일부러 죽은 체하고 있었다.

- 처음에는 꼬챙이에 꽂혔던 쥐가 되살아난 것처럼 보였다.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옴에 따라서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알았다.
길이 30센티미터쯤 되는 쐐기에 꽂힌 채로 바닥에 찰싹 붙어서, 마치 쥐처럼 처참하게 몸부림치고 있는 그것은 아무리 봐도 인간의 왼쪽 손목이었다.
소름 끼치는 공포로 인해 가슴속이 얼음처럼 꽁꽁 얼어붙었다. 그러나 갑자기 샤인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날, 그녀 곁을 찾아온 D는 왼손을 코트 포켓에 깊이 쑤셔 넣고 있었던 것이다. 감히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혹시...
저 왼쪽 손목은 그의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이!"

 

- "손목이 말하면 어디가 덧나냐?"
"그런 건 아니지만... 당신은 D의 왼손?"
"잽싸게 이사 가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
"역시... 그런데 어째서 이런 곳에 있죠?"
"무사태평하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구. 남의 고마움도 모르는 꼬맹이 주제에. 뻔하잖아. 네가 걱정돼서 따라온 거지. 하지만 말이야, 난 양심적이어서 이사 가는 것은 뒤로 미루기로 했다구. 일단은 내 보금자리 주인의 입장과 희망만 생각해 주기로 했지."

 

- 그가 물 표면에 닿는 찰나 그 몸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마치 물의 촉수가 잡아 늘어뜨리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왔다.
피부는 부드러운 우윳빛 살결로 바뀌고, 두꺼운 가슴은 풍만한 열매를 맺고 있었다.
그리고 바지를 입은 하체에 엄청난 비늘이 돋아나고, 심지어는 그 끝자락이 두 개로 갈라지며 격렬하게 물을 후려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살을 무섭게 가르며 D에게 헤엄쳐 가는 것은 영락없는 여자... 인어였다.
 
- 여자는 엄청난 힘으로 물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부드러운 여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추진력이었다.
D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폐 속의 산소는 한계에 달해 있었다.
"이제 곧 놔주겠다."
물 밑바닥을 향해 돌진하면서 교우키는 비웃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는 이 세상 공기를 빨아들일 수 없을 거다. 물을 마셔라. 실컷! 그 폐가 터지도록 말이야. 그 낯짝을 물 위로 내밀기 전에 다시 물속으로 집어넣어 주겠다."
그럴 필요는 없었다.
교우키의 손이 떨어지기 전에 D의 입은 벌어졌다. 목구멍이 움직였다. 물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몇 초 동안 목구멍을 쥐어뜯었다. 전신에 경련이 일어났다. 급격하게 그것이 멈추고... 잠시 후 교우키가 D의 몸에서 손을 떼자마자, D의 신체는 천천히 물 속으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3분 30초... 이게 던필의 수준이군."
 
- 작은 사람 그림자가 D의 시야에서 사라지기 바로 직전, 이쪽을 향해 번쩍였던 손안에 있는 것에 신경 쓰고 있었다.
반짝이는 햇살에 눈부시게 빛났던 윤곽은 분명히 그 구슬이었던 것이다.

 

- 맹스피드로 숲 속 샛길을 빠져나가면서 토토는 냉정하게 상대가 다음에 어떻게 나올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구슬은 손에 넣었다.
지금 틀림없이 오른쪽 포켓에 있다.
당연히 권위자에게 보여서 그 가치를 감정받아야 한다.
여러 명의 이름과 얼굴이 떠올랐지만, 용돈 벌이 정도라면 몰라도 큰 물건이 되면 액면 그대로 신용할 수는 없다.
역시 도시까지 가서 신뢰할 수 있는 감정사를 소개받아야 한다. 다행히 연줄은 얼마든지 있다.
그건 그렇고, 지금 샤인은 어떻게 됐을까.
물욕에 물든 표정이 문득 우울해졌다.
그대로 내버려 둬도 한밤중쯤 되면 약 기운이 떨어질 것이다. 그때까지 그 사원에 둥지를 틀고 있는 요괴가 덮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것은 그 여자의 운이다.
자신을 떠돌이 승려로 믿고 장례식 일체를 의지했던 신뢰의 눈빛이 가슴을 찔렀다. 도둑 세계에서 손을 떼고 이 마을에 정착하라고 순수한 마음으로 타이르던, 어젯밤 그녀의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는 그 어느 쪽도 꿈일 뿐이다.

 

- D와 에그베르트... 그 두 사람마저 자신이 연못 속으로 몰래 잠수해 들어가 작은 섬으로 간 뒤 나무 뒤에 떨어져 있던 여자의 옷에서 구슬을 빼내 지금 막 헤엄쳐 돌아왔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너무나도 순조롭게 일이 풀렸던 탓에 약간 방심하여 물 위로 올라올 때 그만 물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러나 천하제일의 흡혈귀 헌터 D마저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했던 도적의 감쪽같은 솜씨야말로, 적어도 앞으로 30년 동안은 현역으로 활약할 수 있게 하는 데 충분할 것이다. 

- 발목, 무릎, 허리의 힘이 빠지며 맥없이 쓰러진 도적을 교수는 냉혹하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숲 속으로 얼굴을 휙 돌리며 중얼거렸다. 
"어젯밤부터 D를 감시했던 보람이 있군. 이걸로 누구를 귀족으로 만드느냐 마느냐는 모두 내 뜻대로 할 수 있지. 이 구슬이 갖는 진짜 의미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은 죽든 죽이든 멋대로 하라지. 난 마지막 마무리에 착수한다."

 

- 잠시 후, 농밀한 피 냄새가 한쪽 모퉁이에 자욱하게 번지기 시작했다. 그것에 유혹당한 듯이 우거진 숲 속 여기저기서 으스스한 울음소리와 술렁이는 기미가 일기 시작했다. 
여름의 숲은 생명에 넘쳐흐르고 있었다.
위험한 생명일지라도.
무성하게 나뭇잎이 우거진 어둠 속에서 엄청난 빛이 깜박였다. 그것들은 추악한 얼굴에 박혀 있는 살기 도는 눈빛으로 변하며, 푸르른 풀잎 사이로 미끄러져 나왔다.
잿빛 머리에 두 눈이 박힌 거대한 암나비.
황토빛 피부에 검은 반점이 있는 육식 지렁이.
수십 개의 작은 송곳니를 드러내 놓고 있는, 털이 수북하게 돋은 둥그런 형체들.
그것들은 작은 다리를 괴상하게 꿈틀거리면서 쓰러져 있는 토토에게로 서서히 다가간다.  

 

- 그것이 쓰러졌을 때야 비로소 샤인은 글렌과 사몬의 피부색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당신... 당신들도..."
"바보 같은 계집애들."
사몬은 목 없는 시체를 냉혹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우리와 만날 때까지 참고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나머지 둘도 너한테 당한 거냐? 그들에게 다른 세계를 심어 준 것은 바로 우리야."
샤인은 전신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 칼을 손에 번쩍 치켜든 채 처음으로 글렌이 입을 열었다. 한없이 공허한 목소리다. 밤의 목소리.
"풀 속에 숨던데, 저건 네가 기르는 거냐?"
두 개의 눈동자가 뚫어지게 쳐다보자 샤인은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꼼짝하지 못했다.
"그런 셈이지."
풀숲 어딘가에서 쉰 목소리가 대답했다. 볼이 미어지도록 뭔가를 입에 가득 넣고 있는 것처럼.

- 대답하지 않고 D는 왼쪽으로 눈을 돌렸다.
사이보그 말과 D는 언덕 중턱에서 바다를 바라다보고 있었다. 숲은 없다.
어둠으로 물들어 있는 세계에 하얀 파도가 부서지고, 바다는 끊임없이 북쪽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르고 있었다.
반짝이며 떠다니는 얼음 저 끝자락에서 여름은 찾아온 것이었다.
파란 귀족 차림으로.
그리고 지금 주홍빛을 물들이며, 최후의 한 글자를 쓰기 위해 붓을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것을 휘두를 자는 D도, 수행자도 아닐 것이었다.

- "왜 여기로 왔지?"
왼손이 물었다.
"혹시... 기리건 지하실에서 살해된 여자아이... 그 애가 마지막으로 네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냐? 호호, 정말 근성이 무른 녀석이군. 죽은 자와의 약속은 깰 수 없다는 건가? 산 자는 화를 내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니까..."
D는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왼손이 말하는 자가 마음의 움직임도 나 몰라라 하는 듯이.
'마음'이란 영원히 그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윽고 D는 말 배에 채찍을 한 번 가하고, 좁고 가파른 비탈길을 불길한 검은 바람처럼 달려가고 있었다.

 

- 샤인은 처마 밑에 쓰러져 있었다. 그곳은 글렌과 사몬의 새로운 아지트인 바닷가 근처 오두막집이다. 묶여 있지도 않은데 그녀의 온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일어설 수도, 달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전혀 일지 않는 것이었다.
의욕, 투지, 오기... 그런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약간의 '플러스' 요소도 낱낱이 파헤쳐버릴 뿐만 아니라, 적의 눈을 보는 순간 자신의 눈동자까지도 통째로 꿰뚫어버릴 것만 같았다.


- "넌 한 번, 내 마술에 걸렸었지. 보안관 사무실 뒤쪽 산속에서 말이야. 그때 넌 어떤 사내를 나에게 보였어. 이 세상에서 가장 잊기 힘들고, 단 한 번만이라도 만나보고 싶은 사내를 말이야."
"사내?"

 

- "그 분과 어떤 관계지? 바다에서 온 귀족과 어떤 관계냔 말이야?"
몽롱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엄청난 쇼크에 샤인의 온몸이 굳어졌다.
단순히 자신이 귀족과 관계가 있다고 하는, 당치도 않은 지적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몇 겹이나 교차하는 얇은 천 저편에서 한순간, 그 대답이 얼굴을 내밀었던 것이다. 기하학적, 광물적인 정교함으로.

 

- 그것은 분명히 유린은 아니었다. 아직 분명하지 않은... 그러나 틀림없는 사내의 모습이었다.
샤인은 눈을 꼭 감았다. 그 눈꺼풀을 사몬의 손가락이 비틀어 올렸다.
"잘 보라구.  마음속을...  자신이 저지른 짓을."

 

- "그만둬라."
"무슨 짓이야? 난 그저 이 계집애한테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 주려는 것뿐이라구. 그것이 왜 안 된다는 거야?"
글렌은 몹시 거칠게 왼손을 저었다.

 

- 공포 섞인 신음 소리를 낸 것은 자신의 생명과 영혼을 걸고 구해 준 젊은이가 어느새 손이 미치지 않는 엄청난 존재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 무예를 겸비한 떠돌이 장사꾼들은 공중에서 세 번째 괴물이나 로봇을 만들어내며, 꽃밭이나 호수로 공터를 에워싸고, 마을 사람들은 흥겨운 음악에 맞춰 어설픈 왈츠를 추었다. 
행방불명된 세 명의 젊은이들의 시체는 마을에서 떨어진 언덕빼기의 절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촌장의 명령으로 관계자 일동은 입을 다물고, 해변의 경비는 한층 더 강화되었다. 
일주일 동안의 여름은 무엇보다도 우아하게, 비밀리에 치러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 앞으로 나흘이다,라고 모두가 생각하고 있었다.
여름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그것은 빛이 넘쳐흐르는 희망의 계절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계절이라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있었다. 밤은 반드시 찾아오는 것이었다.

- D는 눈을 떴다.
샤인의 집 헛간이다. 일어나 밖으로 나가 토토의 사이보그 말을 탔다. 움직임에 한순간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메커니즘의 정확함, 자연의 우아한 아름다움, 은하수에 짜 맞춘듯한 움직임. 

- "집으로 돌아가라. 샤인은 돌려보낸다."
잠시 동안 D와 나란히 바이크를 몰고 달리다가 도와이트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믿어."
그리고 나서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
"이봐, 너도 살아서 돌아와라. 귀족의 피가 흐르고 있든 말든, 그딴 건 난 상관 안 해. 살아 있으면 좋은 일도 있는 거야."
그때까지 앞을 향해 있던 D가 조용하게 도와이트를 바라보았다.
"맞는 말이다. 살아 있으면 말이다. 샤인도 그렇게 될 거다."
"부탁한다구."
도와이트는 한쪽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곧 거두었다. 헌터가 오른팔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와이트는 멈췄다.
D만이 앞을 향해 나아간다. 달빛을 받으면서.

 

- 흙을 덮어놓은 여기저기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어렴풋이 보였다. '귀족의 길'이었다. 덮였던 흙은 완전히 건조되어, 긴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본래의 표면이 드러난 것이다. 
그곳을 30분쯤 나아가자 별장지대가 나왔다.
땅 위에 말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D의 그림자만 엷다. 그것은 귀족의 핏줄을 이어받은 자의 숙명이었다.
D의 옆을 검은 마차가 지나갔다. 파란 불빛 아래서 야회복을 입은 남녀가 유쾌한 듯이 큰소리로 웃고 있었다.
어느 집에도 불이 켜져 있었다.
정원 잔디에는 불꽃이 높이 솟아오르며, 대리석 분수에서 날개처럼 펼쳐지며 흩어지는 맑은 물을 반짝이게 했다. 오늘밤은 무도회가 열리는 것일까. 
D의 머리 위를 은빛 뼈와 수정 날개를 가진 밤의 새가 날아간다.
부리에 물고 있는 편지는 신사가 숙녀에게 보내는 사랑의 메시지일지 모른다.
거리를 바람이 지나갔다.
집들의 정원에서 하얀 불꽃이 흩어지며 D의 얼굴을 스쳤다.
그 한 조각을 손에 쥔다.
약간 더러워진 벽지의 일부였다.
거리에 움직임의 기미는 없었다.
집들은 어둠 속에 울창하게 가라앉아 있고, 부식토와 잡초가 뒤덮인 정원은 불어오는 바람에 맞춰 파멸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모든 것은 꿈이다.
D는 묵연하게 하얀 길을 나아갔다. 이윽고 바다 소리가 가깝게 들려왔다.

 

- 그렇게 말하고 글렌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떠 있었다.
지상의 모든 것이 보일 듯이 맑고 투명한 달이었다.
글렌이 쓴웃음을 지었다.
"예쁜 달이군. 이런 때 싸워야 하다니."
그는 가볍게 머리를 흔들고 D와 마주 보았다.
"하지만  자신의 피가 기다려 주지 않지. 귀족의 지배를 받고 있어도 이것만큼은 변하지 않는 내 피가 말이야. 하물며... 너도 지금의 나를 살려 둘 수는 없겠지."
"승부를 겨루는 것은 혼자인가?"
사몬 쪽은 보지도 않고 D가 물었다. 그러나 시몬의 전신은 공포로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두 사람이라면 한꺼번에 죽이겠다고 D는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 이때, D가 희한한 것을 말했다.
"또 두 사람 있는데, 사용하지 않나?"
에그베르트는 묘한 표정을 떠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몇 초 후...
달빛 아래서 D의 주위를 기괴한 병사들이 둘러쌌다.
그 발 밑에서 마치 연기가 뒤얽히는 것처럼 정체 모를 수목이 뻗어 나온다.
힘껏 흙탕물을 토해내고 병사들이 돌진하듯 다가왔다. 손에 움켜쥔 창이, 칼이, 아름다운 꽃처럼 번쩍였다.
고중력 아래에서도 병사들은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 그 눈앞으로 질풍처럼 날아와 정지한 사이보그 말에서 검은 그림자가 소리도 없이 땅으로 내려섰다.
어둠의 빛만을 응고시킨 듯한 눈동자가 싸늘하게 새로 태어난 귀족을 비추었다.
"이것만은 몰랐는걸." 
교수는 왼손을 호주머니에 쑤셔 넣으면서 말했다.
"어떻게 날 뒤쫓아왔지?"
"샤인은 안에 있나?"
D가 물었다.
고요한 밤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목소리에서 묻어 나오는 그 뭔가가 교수의 입을 벌린 것일까.
"암, 여기 있지."
그렇게 말하고 교수는 자신만만한 웃음을 얼굴 가득 띠었다. 

"하지만 넌 안에까지는 들어갈 수 없어. 여기서 죽어야 해. 어떤 사내와 마찬가지로."
품 안에서 꺼낸 얇은 가죽을 펼치는 교수를 D는 말없이 지켜보았다.

 

- 교수는 한쪽 손으로 그 위를 만졌다.
피부에도, 망토에도 상처는 없었다. 그는 손바닥에 묻은 피를 소리를 내면서 핥았다.
"자, 어떤 방법으로 죽고 싶나?"
피투성이 입이 물었다.
"아까 그 사내처럼 목구멍을 찌르고 심장을 도려내 주랴? 아니, 너에게는 훨씬 고통스런 죽음을 맛보게 해 주지. 내 포식을 방해한 죄로 말이야. 자... 그 칼을 목에 대라. 천천히 문질러 자르는 거다. 뼈에 닿아도 멈춰서는 안 된다. 스스로 자기 목을 잘라서 땅에 떨어질 때까지 계속해라."

 

- 괴이한 캔버스를 그는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피로 그려진 D의 얼굴이 그곳에 영롱하게 떠올라 있었다.
"아름다워. 이 얼마나 아름다운 얼굴이냐... 그래서 그리는데, 꼬박 오늘 아침까지 걸렸지. 다른 그림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내 모든 심혈을 쏟아부은 걸작. 이제 도망칠 수 없다. 잘라라. 떨어진 목은 소금에 절여서 영원히 내 곁에 보존해 두겠다."
아아, D의 칼은 움직였다.
교수의 지시대로 자신의 목덜미로.
은빛이 새하얗고 투명한 살 위로 다가가는 것을 보았을 때 교수의 전신은 파르르 떨렸다.
그 접촉 부위에서 빨간 것이 뿜어져 올라왔다.

 

- "이제 막 밤이 시작됐다구. ... 이봐, 구슬이 없어졌다는데, 왜들 그렇게 혈안이 돼 있지?"
"없어진 것이 되돌아올 거라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그렇다면, 애초부터 없어질 물건이라면 아예 가지고 있지 않으면 되잖아. 하긴... 그렇게 하기도 쉽진 않겠지. 인간이란 말이야, 아무래도 태어날 때부터 바보인가 봐..."
"귀족도 마찬가지일는지도 모르지."
"그 녀석들은 바보는 아니지만 괴물이야. 어느 쪽이 낫다고 생각하나?"
D는 말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 "아직 시간은 그다지 지나지 않았군."
왼손이 말했다.
바람이 웅웅거렸다.
D의 왼손바닥 위에서.
그러나 그 바람의 흐름을 피부로 느낀 자가 있다면 틀림없이 눈이 뒤집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풍속 60미터를 초월하는 맹렬한 바람은 손바닥 위에서 벌리고 있는 작은 입... 그러나 틀림없는 인간의 입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 "벌써 눈치채고 있겠지만, 묘하게 공기가 차가워. 희한한 여름이 될 것 같군."
D는 말의 배를 찼다.
바람을 거칠게 말아 올리며 D가 1분쯤 달려가자, 앞쪽에 은빛을 띤 폭넓은 띠 같은 것이 눈에 들어오고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 "내일...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구슬도 이제 없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샤인을 받아들여라."
"약속은 지키고 말고, 그 여자는 좋은 애야. 모두가 그 앨 좋아하지. 이 얘기... 도와이트에게는 비밀로 해두는 게 좋겠지?"

"좋을 대로 해라."
표연히 문 쪽으로 향하는 D의 등에 피곤에 지친 목소리가 부딪혔다.
"금년 여름은 이제 끝난 것 같군. 그런 기분이 들어. 이봐, 그렇게 생각지 않는가?"
D는 대답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 그날, 해안을 지나가는 자들은 파도치는 곳에 서 있는 검은 그림자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밤의 어둠을 연상케 하는 롱 코트 자락을 바닷바람에 나부끼며, 하얀 모래와 푸른 바다의 경계선에 짙게 새겨진 뒷모습의 아름다움, 사람들은 고동치는 가슴을 안고 넋을 잃고 바라보지만, 그러면서도 차마 멈춰 서지는 못하고 걸음을 재촉하며 그 자리를 떠나가는 것이었다. 
불가사의하게도, 조금 가다가 돌아보자 흑색을 띤 사람 그림자는 이미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어른들은 꿈이라도 꾸고 있었다는 듯이 눈을 비빈다. 그리고 아이들은 언젠가 저렇게 늠름하고, 애달프고, 아름다운 등을 가진 어른이 되어 바다를 바라보겠다고 마음속으로 맹세하는 것이었다.
여름 축제는 계속되고 있었다.

- 마을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은 여느 때처럼 그대로인데,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체념한 듯한 분위기가 공기 속에 묻어 있었다.
앞으로 나흘, 이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그 사이, 여름은 끝나지 않는다.
그러나 촌장의 명령으로 불꽃을 실은 배가 얼음덩어리를 향해서 출항한 것은 왜일까.
불꽃은 반드시 최후의 밤을 여름 꽃으로 장식할 것이었다. 어둠이 내려왔다.
다른 세계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D의 얼굴이 움직였다. 언제부터 바다의 한 곳만을 바라다보고 있었던 것일까.
달은 오늘밤도 중천에 떠 있었다. 그 달빛 속에서 접근해 오는 작은 배 위에 사몬과 샤인의 모습을 D는 또렷이 보고 있었다.
파도치는 곳에서 약 15, 6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배는 낭떠러지와 나란히 한 채, 엔진 소리를 멈췄다.
배 뒤쪽 조타실에서 절반쯤 몸을 앞으로 내밀고 사몬은 한쪽 손을 입가에 모으고 외쳤다.
"잘 왔군, 헌터! 샤인은 여기 있다."

 

- "그 비상 거리와 속도가 한계인 모양이로군. ... 여기라면 제아무리 뛰어올라 봤자 닿지 못할 거야."
그 방향으로 몸을 비튼 D의 앞가슴으로 두 마리의 백사가 넘실거리면서 날아올랐다.
그 순간, 은빛이 번뜩이며 한 마리는 절단했지만, 또 한 마리는 D의 왼쪽 가슴을 뚫고 등으로 빠져나가며 공중에서 피투성이의 물기둥처럼 변하더니 바닷속으로 떨어졌다. 
"물의 창(槍)."
뱀이 덮쳐왔던 방향에서 목소리와 함께 물이 솟아오르며 순식간에 귀족으로 바뀌었다.
"엄청난 사내긴 하지만, 물속에서는 내 쪽이 훨씬 유리하지. 이유는 모르지만, 그 여자... 내가 받아 가야겠어."
귀족 앞에서 다시 물방아가 돌았다.
다음 순간, 물이 꾸불꾸불 비틀어지며 튀어 올랐다.
강철처럼 강력한 무기로 변한 세 갈래 물줄기는 백사처럼 날렵하게 파도를 뚫고 습격해 왔다. 그러나 한 줄기는 D의 칼날에 의해 무너지며 흩어졌지만, 나머지 두 개의 물줄기는 가차 없이 D의 복부를 빠져나갔다.
아무리 D라 할지라도 견딜 리가 없을 것이다.
그 위태위태한 상황 속에서도 샤인을 움켜잡은 검은 옷의 모습은 가슴까지 물속에 잠겨 있었다.
새까만 먹물 같은 것이 자욱하게 D의 주위에서 뿜어져 올랐다. D는 그래도 전방을 바라보았다.
적의 위치까지는 5미터.

 

- "토토라고 합니다. 클로넨베르크 거리에서 유린 씨를 만나서 말이죠. 학교 수업을 좀 거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교사 경험을 쌓는 것은 물론이고, 그 외에 뭐든지 하겠습니다. 자... 이건 그녀가 내게 의뢰한 편지입니다." 
틀림없는 유린의 필체로 보이는 의뢰장을 접어서 다시 사내에게 건네주며 도와이트는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야, 살았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라구. 그런데 당신, 어딘가에서 꼭 만난 것 같은데?"
"당치도 않습니다."
토토는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쪽이군."
늘어선 복도를 걸으면서 토토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왜 그런가?"
"아뇨... 말소리가 들려서요."
"말?"
"허어, 혹시 나한테 좋을 치라고 알려 준 젊은 사람일지도..."
도와이트 토토의 시선을 따라서 그쪽을 바라보았지만, 하얗게 뒤덮인 세상에 움직이는 모습은 아무것도 없다.
"젊다고, 어떤...?"
"온통 새까맣고, 하야... 정말이지 오싹할 정도로 아름다운... 사내... 어떻게든 말을 걸어볼까 하고 교문 옆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더니, 마침 가까이 다가오지 뭡니까. 아! 그래, 그래, 떠날 즈음에 저 유리창 너머로 교실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죠. 아이들이 들어가고 나서 조금 있다가 말없이 가버렸어요. 웃으면서 말이죠." 
"웃으면서?"
"그렇고 말구요."
토토는 자신감 있게 말했다.
"그렇게 멋지게 웃는 얼굴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겁니다. 누가 그런 미소를 떠올리게 한 걸까... 정말 부럽네요. 평생 자랑으로 삼게 될 겁니다."
도와이트는 잠시 동안 말없이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가..."

- "떠나버리는 거로군, 역시... 외톨이로."

- 그 짧은 말속에 자신 이상으로 깊고 감개무량한 의미가 담겨있다는 느낌을 받고, 도와이트는 새로 온 직원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곧 생각을 추스르면서 말했다. 
"저 문 맞은편이 교실이다. 먼저 가 있으라구. 난 급한 일이 생각나서. 고맙단 말을 꼭 해야만 한다구."

- 귀족의 길을 몇 미터 눈앞에 둔 언덕 꼭대기에서 D는 말을 세웠다.
흰 눈이 엷게 뒤덮여 있는 내리막길 건너편에 청색과 붉은색으로 아로새겨진 사람 그림자가 서 있었다.

- "고마워하라구. 사랑하는 이와 함께 죽어 줘야겠어. 나와라!"
목소리와 동시에 D의 눈앞에 눈과는 다른 하얀 것이 뿌옇게 에워싸기 시작했다.
'추억의 사몬'의 요술... 노스탤지어.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어버린 사랑하는 이가 나타나 죽음을 요구하면, 그녀의 요술 속에 빠진 상대는 따르지 않을 수 없다.
D는 누구를 불러올 것인가.

- 까만 머리카락이 수줍은 듯이 흔들렸다.
아름다운 눈을 살며시 내리깔고, 하얀 드레스를 걸친 부인은 D의 앞에 서 있었다.
사몬의 입술이 움직였다.
부인의 입술도 함께.
요사스런 여자의 목소리가 D에게는 어떻게 들렸을까.
"죽어라, D." 
 

- 그때,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편안한 얼굴로 죽어 있군, 이 여자."
"하지만... 추억은 인간밖에 가지고 있지 않지. 그것마저 태연하게 잘라버리다니... 넌 아주 업이 많은 사내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D는 말에 올라탔다.
"최후의 최후까지 마을을 피로 물들이고, 배웅해 주는 자마저 없고. 나마저 가끔 으스스해진다. 다음은 어디로 가나?"

물론 대답은 없다.


- 몇 걸음 내딛으려 했을 때, 마을 방향에서 맑은 소리가 쫓아왔다.

 

"학교 종소리로군."

목소리가 말했다.
D는 돌아보았다.
눈은 그쳐 있었다.
엷은 빛이 눈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마을을 비추고 있었다. 구름 사이로 비치는 겨울 햇살이었다.

- 또 종소리가 울렸다.
이별을 고하는 듯이.
D는 앞쪽을 향했다.
길 위에 잿빛 구름이 무겁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것이 이제부터 나아갈 길일 것이다.
그러나 조용한 얼굴에는 두려움도 슬픔도 없고, 차가운 눈빛을 전방에 고정시킨 채, 검은 옷의 젊은이는 아름다운 환영처럼 유연하게 언덕 너머로 사라져 갔다.

  

- <7권 下 피의 축제>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