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신카이 마코토] 스즈메의 문단속

일루젼 2024. 1. 10.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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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신카이 마코토 / 민경욱
출판 : 하빌리스
출간 : 2023.02.07 


       

        

작년, 공기가 한창 뜨거울 무렵에 <스즈메의 문단속>을 보고 또 읽었었다. 

이 책에 대해서는 끝까지 리뷰를 쓰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한두 계절이 지나고 해가 바뀐 지금,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게 되었다.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애니메이션이었으니 본 이야기의 내용이나 인물에 관해서는 달리 크게 덧붙일 내용은 없을 듯하다. 그보다는 다소 개인적인 단상들을 남겨보려 한다. 

 

확인된 설정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주목했던 부분은 다이진과 요석에 관한 것이었다. 오래된 요석이 인격화 -또는 신격화- 한 것인지, 신념을 담은 인간 그 자체가 요석이 되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몇 세대에 걸쳐 변화해 가는 인간의 삶과 인식에 맞추어 요석의 위치 또한 변해왔다는 작중 묘사를 보건대, 요석이 다시 꽂히는 일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매번 같은 요석이 다시 사용되었는지, 혹은 이전의 요석을 대체해 새로운 사람 혹은 무언가가 요석이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소타의 할아버지가 사다이진을 향해 오랜만이라는 인사를 건네는 것을 보면, 이전에도 사다이진이 뽑혀져 나왔던 적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루미의 주점에서 다이진은 다른 인물들에게 인간의 모습으로 인식된다. 이는 대다수의 일상인들이 미미즈를 보지 못하는 것과도 이어지는데, 개인적으로는 언제나와 같은 평범한 일상이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고 느꼈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 쳇바퀴 같은 인상에서 지루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평온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하루 하루는 사실 결코 같지 않다. 단 한 번, 단 한순간의 유일한 찰나만이 영속되고 있을 뿐이다. 매 순간은 그 자체로 유일무이한 고유함을 가진다. 같은 것처럼 보이되 결코 같지 않다. 비슷해 보이는 것은 내가 인식할 수 있는 면만을 보고 있기 때문뿐이다. 거울의 뒷면처럼 인식의 경계 너머, 혹은 시야 한 귀퉁이의 작은 그늘 속에 평범하지 않은 것들은 언제나 숨 쉬고 있다.

 

<스즈메의 문단속>의 초반 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연결되는 것도 그 지점이다. 같아 보이는 구도와 인물이다. 하지만 결코 같지 않다. 이는 어린 스즈메와 스즈메의 관계에서도 반복된다. 그렇게 중첩되는 순환적 구도는 개인의 반복되는 일상과 삶 또한 매순간 다른 의미를 지님을 암시한다.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 속의 한 장면으로 스쳐가게 될 조각들이 누군가에게는 신념을, 관계를, 심지어 생명을 건 일들일 수 있음을- 우리의 현실적인 일상 또한 그렇게 지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무탈할 수 있었음이 기적인 것이다.

 

그런 시각으로 접하는 <스즈메의 문단속>은 단순한 성장담이나 모험담, 연애담을 넘어선 하나의 지향점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시간'의 선형적인 구조에서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듯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구성 안에서 또 하나의 개인적 구원 서사를 완성한다. 원치 않았음에도 주어진 역할을 받아들이는 숭고함,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하는 강인함, 누군가의 희생이란 결코 당연하지 않음과 그럼에도 그것이 요구되는 순간에 관한 명시적 직시. 여럿으로 나누어진 인물들은 어떤 면에서는 모두 하나의 인물이기도 하다. 

 

남주인공을 구출하는 여주인공이라는 서사가 낯설게 느껴지실지도 모른다. 그러나 <프쉬케>나 <태양의 동쪽 달의 서쪽> 같은 고전 설화에서도 나타난 바 있다.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스즈메의 문단속>에서는 소타의 의지나 선택이 아닌, 마치 문을 닫을 때의 토지시처럼 그의 목소리와 기억을 '들은' 스즈메의 의지가 훨씬 강조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더 크게 와닿았던 것은 과거의 자신을 마주하는 스즈메의 모습과, 또 그 이후 찾아올 또 다른 미래의 자신에게 스스로를 열어두는 모습이었다. 

 

더 떠들어 본들 점점 더 두서없어질 것 같으니 슬슬 이쯤에서 말을 줄일까 싶다. 

 

아. 해결되지 않은 궁금증도 하나 있다. 다이진의 인간 모습은 소타의 모습이었을까, 그 자신의 모습이었을까? 나는 다이진이 한 때 인간이었던 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역할과 의무를 받아들였더라도, 충분히 그 고독과 무게에 지칠 수 있다. 하지만 소타가 다시 되돌아오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가 요석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다이진을 인간이었던 적이 없는 신이라고 본다면 모든 것은 순리대로 돌아간 셈이지만, 그 또한 한 명의 인간이었다면... 

 

반년이 훌쩍 넘는 시간을 덮어둔 뒤에 다시 읽어보아도 여전히 많은 생각이 든다. 명료하게 정리되지 않는 단상들과 멜랑꼴리한 기분을 즐기기로 했다. 

 

좋았다. 

 

 


   

 

내게는 늘 꾸는 꿈이 있다.

 


- 대부분 꿈꾸는 동안에는 꿈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꿈에서 나는 아직 어린 아이고, 게다가 길을 헤매고 있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슬프고 불안하다. 그런데도 편안한 시트로 몸을 감싼 것처럼, 당연한 듯한 안심감도 있다. 슬픈데 마음은 편하다. 모르는 장소인데 낯익다. 있으면 안 되는 곳인데 계속 있고 싶다. 그러나 어린아이인 내게는 슬픔이 더 커서 끓어오르는 오열을 필사적으로 삼키고 있다. 내 눈꼬리에는 마른 눈물이 투명 모래처럼 들러붙어 있다.

 

- 정신을 차리면 태양이 구름에 숨어 주위는 투명한 레몬 빛으로 감싸여 있다. 머리 위에는 여전히 별들이 난폭하게 빛나고 있다. 걷는 데도, 우는 데도 지쳐 풀 속에 웅크리고 앉는다. 다운재킷이 말려 올라가 드러난 등을 통해 바람이 들어와 체온을 조금씩 훔쳐 가는 대신 무력감이 들어온다. 작은 몸이 진흙으로 바뀐 듯 무거워진다. 

 

- 하지만, 이제부터야. 
문득,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기를 관찰하는 듯한 감각으로 생각한다.
여기서부터가 이 꿈의 하이라이트야. 

내 몸은 얼어붙고 불안과 외로움의 극한 속에서 마음도 마비되어 간다.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식의 포기가 온몸에 퍼진다. 하지만...

 

- 그런 풍경처럼, 아름다운 사람.
그것은 꿈의, 언제든 갈 수 있는 곳. 

 

- 지금은 아침이고, 내 방.

이불 위에 누워 순식간에 상황을 이해했다. 딸랑딸랑, 창가 풍경이 낮게 울렸다. 바다 내음을 담은 바람이 레이스 커튼을 살랑살랑 흔들고 있다. 아, 축축해. 베개에 닿은 뺨을 통해 느꼈다. 쓸쓸함과 기쁨이 뒤섞인 저릿저릿한 감각이 손끝과 발끝에 살짝 남아 있다. 시트를 칭칭 감은 채 나른한 달콤함을 좀 더 즐기려 눈을 감았다. 

 

- 그때 아래층에서 재촉하는 목소리가 크게 울려왔다. 속으로 한숨을 쉬며 영차 몸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대답했다. 

"일어났어!"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꿈의 여운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 살그머니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퇴색해 버린 바다의 푸른색에서 눈길을 돌리고 앞을 봤다. 그때였다.
"아!"
누군가 언덕을 걸어서 오르고 있었다. 마을 외곽인 이곳을 걸어 다니는 사람은 아주 드문 탓에 조금 놀랐다.

 

- 남자 같네. 마르고 키가 크다. 긴 머리와 긴 셔츠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살짝 브레이크를 잡아 자전거 속도를 늦췄다. 점차 가까워졌다. 모르는 청년이잖아? 여행객인가? 등산객처럼 배낭을 짊어지고 있었다. 물 빠진 청바지에 넓은 보폭. 살짝 웨이브가 있는 긴 머리가 바다를 바라보는 옆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브레이크를 쥔 손에 조금 더 힘을 줬는데 갑자기 바닷바람이 강해졌다. 청년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눈가에 빛이 떨어졌다. 숨을 멈췄다.   

 

- "예쁘다..."
멋대로 입이 움직였다. 청년의 피부는 여름에서 잘라낸 듯하였고 얼굴 윤곽은 날카로우면서도 우아했다. 긴 속눈썹이, 깎아지른 듯한 뺨에 부드러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왼쪽 눈 밑에는 여기에 당연히 있어야 한다는 듯 완벽하게 작은 점이 있었다. 그런 디테일이 아주 가까이에서 본 듯한 해상도로 내 눈에 들어왔다. 거리가 줄어들자 고개를 숙였다. 내 자전거 바퀴 소리와 청년의 발소리가 섞였다. 심장 박동 소리가 커졌다. 50센티미터 거리에서 우리는 스쳤다. 나는, 우리는... 마음이 말한다. 모든 소리가 느려진다. 우리는, 이전에, 어디선가...

- "저, 학생."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 자전거를 멈추고 돌아봤다. 그 1초의 풍경이 너무나 눈부셨다. 눈앞에 청년이 서서 똑바로 내 눈을 보고 있다.

"폐허요?"
뜻밖의 질문에 단어의 뜻이 떠오르지 않았다. 폐허?
"문을 찾고 있어."
문? 폐허에 있는 문을 말하나? 자신 없는 목소리가 나왔다.

"사람이 안사는 마을이라면 저쪽 산에 있긴 한데..."

청년이 생긋 웃었다. 뭐랄까, 주위 공기마저 상냥하게 물들이는 듯한, 아주 아름다운 미소였다.

"고마워."
청년은 휙 몸을 돌리고 내가 가리킨 산을 향해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깨끗이, 잠시도 돌아보지 않고.

 

- "...어라?"
절로 한심한 목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삐, 삐로로. 소리 높여 솔개가 울었다. 어? 뭔가 좀 엉뚱하지 않아?
머리 바로 위에서 경보음이 울어댔다. 철로 건널목 차단기가 열리길 기다리는 내 심장 박동은 여전히 조금 빨랐다. 그 사람, 뭐지...? 깜빡이는 붉은 등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연예인이나 모델을 실제로 만나면 이런 느낌일까? 상식을 초월할 정도로 너무 아름다워 목격한 후에도 한동안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 ...아니야, 그건 아니야. 아마 전혀 다를 거야. 그 사람은, 일테면... 

 

- 가로등에 비친 설경이나, 정상에만 햇살을 받은 산이랄까. 손이 닿지 않는 높이에서 바람에 이끌리는 흰 구름이랄까. 꽃미남이라기보다는 그런 풍경처럼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풍경을 아주 오래전에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맞아. 꿈에서 찾아가는 초원의 그 기묘한 푸근함 같은...

 

- "저기요, 계세요!"
그런데 사람의 모습만 없었다. 어느새 온천물이 마르고 돈이 마르고 사람이 말라버렸다. 여름 햇살이 폐허를 놀이기구라도 되는 것처럼 산뜻하게 비추고 있으나 아무래도 영 스산했다. 잡초로 금이 간 돌계단을 걸으면서 필요 이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거기 있어요? 잘생긴 분!"
아니, 그것 말고는 뭐라고 부를 말을 모르겠다. 작은 돌다리를 건너 과거 이 리조트의 중심 시설이었을 버려진 호텔로 갔다.  

 

- 역시... 맞았구나. 이유도 모른 채 그렇게 생각했다. 저 문이야. 내가 연 저 문에서 그것이 나왔어. 너무나 작은 문에 불만을 폭발하듯 검붉은 탁류가 격렬하게 꿈틀대며 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 눈을 부릅떴다. 꿈틀대는 탁류 뒤에서 누군가가 문을 밀고 있었다. 문을 닫으려는 것이다. 긴 머리. 큰 체격. 하늘을 가를 듯 아름다운 얼굴. 
"그 사람이다!"
오늘 아침 지나쳤던 그 청년이 필사적으로 문을 닫으려 하고 있었다. 그 듬직한 두 팔이 서서히 문을 밀어 제자리에 돌려놓고 있다. 분출이 줄어들었다. 탁류가 서서히 멈추었다. 
 

- "뭐 해?!"
"네?"
내 모습을 발견한 그가 호통을 쳤다.
"여기서 나가!"
그 순간, 탁류가 폭발하듯 들이닥쳤다. 

- 청년은 바로 몸을 일으켰다. 아주 잠시 나를 보고 "여기서 나가!"라고 소리치고는 문을 향해 달렸다. 살펴보니 돔의 철골이 여기저기 무너져 떨어지며 물거품을 일으키고 있었다. 

 

- 청년은 우렁찬 소리와 함께 문으로 몸을 던졌다. 문을 밀어 탁류를 다시 가두려는 것이다. 멀거니 그 등을 바라만 보고 있는데 청년의 셔츠 왼쪽 팔이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고통을 참듯 청년은 오른손으로 상처를 눌렀다. 오른 어깨만으로 문을 미는 상태였다. 그러나 탁류의 기세에 청년은 문과 함께 밀리고 있었다. 

 

- 다쳤구나. 나를 철골로부터 보호하려다가...

드디어 깨달았다. <지진입니다>라는 경보가 계속 울렸다. 지면은 끊임없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내 오른손은 아까부터 교복 리본을 꼭 쥐고 있던 터라 그 손가락에 감각이 없었다. 청년의 왼팔은 이제 툭 몸 옆으로 떨어졌는데도 그는 등을 이용해 필사적으로 문을 밀고 있었다. 이 사람은 갑자기 울음이 터질듯한 기분이 들며 생각했다. 영문도 모른 채 생각했다. 이 사람은, 아무도 몰래, 누가 보지 않더라도 누군가가 꼭 해야만 하는 소중한 일을... 내 머릿속에서 뭔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모습이 내 안의 무언가를 바꿔 간다. 지진은 계속되고 있다. 굳어 있던 오른손을 펴보려 했다. 쥔 것을 놓으려 했다.

물을 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 그의 등으로 다가갔다. 달리면서 두 손을 앞으로 뻗어 그대로 전력을 다해 문을 밀었다.
"너...!"

청년은 놀란 눈으로 나를 봤다.

"왜?!"
"여기, 닫아야 하는 거죠!"
그렇게 소리치고 그와 나란히 문을 밀었다. 견딜 수 없는 불길한 느낌이 얇은 널빤지를 통해 전해졌다. 그 불쾌함을 눌러 없애버리려고 힘을 짜냈다. 청년의 힘도 늘어났음을 손바닥을 통해 느껴졌다. 문은 끼익 끼익 소리를 내며 서서히 닫혔다. 

 

- ... 노래? 문득 깨달았다. 청년이 문을 닫으면서 아주 조그맣게 무언가를 읊조렸다. 저도 모르게 청년을 올려다봤다. 신사에서 듣는 축문처럼도, 옛날 시 구절처럼도 들리는 불가사의한 말을 청년은 눈을 감고 열심히 읊어댔다. 마침내 그 목소리에 뭔가 다른 것이 섞이기 시작했다.

 

- "돌려드리옵나이다...!"
그렇게 소리치면서 청년이 열쇠를 돌렸다. 그러자 거대한 거품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탁류가 확 흩어져 버렸다. 순간 밤이 낮이 된 것처럼 눈이 부셨다. 무지개색으로 빛나는 비가 쏟아지고 수면을 후드득 두드리더니 순식간에 바람에 실려 사라졌다.

 

- 정신을 차리니, 멀리서 들리던 목소리들도 사라졌다.
뻥 뚫린 듯 파란 하늘이 다시 찾아왔고 지진도 멈췄다. 문은 조금 전의 일이 거짓말이었다는 듯 말없이 서 있었다. 이게, 내 첫 번째 문단속이었다.

 

- 너무 세게 문을 민 터라 손을 뗄 때 억지로 뜯어내는 듯한 힘이 필요했다. 두 다리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얕은 수면은 이미 잔잔해져 있고 주위에는 산새 소리가 가득했다. 청년은 나로부터 두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닫힌 문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 "요석(要石)이 봉인하고 있었을 텐데."
"네?"
청년은 드디어 문에서 눈길을 돌려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 너는 왜 여기 왔지? 어떻게 미미즈를 봤지? 요석은 어디 있지?"

노려보는 듯한 눈, 아, 지금 혼나는 거야? 왜?
"왜 그러는데요?"
갑자기 화가 나서 대들 듯 물었다. 청년은 순간 놀란 듯 눈을 끔뻑이더니 졌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한쪽 눈에 걸린 긴 머리카락을 휙 넘겼다. 그 모습이 살짝 기적처럼 멋있어서, 더 화가 났다. 그런 내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그는 다시 문으로 눈길을 돌렸다. 

 

- "도와줬으니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네. 하지만 여기서 본건 다 잊고 집으로 돌아가."
성큼성큼 멀어지는 청년의 왼팔에 검붉은 피 얼룩이 번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

나를 구하려다 생긴 상처구나.

"잠깐만요!" 소리쳤다.

 

- "아니야. 마음은 고맙지만 나는 이제..."
"그렇게 병원이 싫다면 적어도 응급처치 정도는 해야죠!"
아까부터 완강하게 치료를 거부하는 그에게 쌀쌀맞게 말했다. 의사가 싫다니 어린애 응석이야? 익숙한 우리 집 현관에 그가 서 있자 아주 좁아 보였다. 포기한 듯 그가 계단을 올라가는 발소리를 등 뒤로 들었다. 

 

- 내 방도 꽤 어질러졌겠구나. 그렇게 각오하며 2층으로 올라갔더니 이쪽은 너무나 깔끔해 오히려 놀랐다. 내가 구급상자를 찾는 동안 청년이 정리해 준 듯한데 당사자인 그는 정리한 방 한가운데 앉아 상당히 피곤했는지 잠들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방구석에 있었을 내 어린이용 의자에 앉아 있다. 노란 페인트가 칠해진 낡고 작은 목조 의자였다.

 

-  청년은 거기까지 듣고는 스마트폰 화면을 터치해 뉴스를 닫았다. 그의 찢어진 상처는 피가 흐른 정도에 비해서는 심하지 않았으나 혹시나 해서 물로 정성껏 닦고 멸균 시트를 붙였다. 의자에 앉은 청년 옆에 무릎으로 앉아 그의 왼팔에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굵고 단단한 팔이었다. 긴 셔츠의 가슴에는 문을 잠갔던 불가사의한 열쇠가 걸려 있었다. 시든 풀 색깔의 금속 열쇠로 정교한 장식이 새겨져 있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산들바람이 들어와 창가 풍경이 조그맣게 울렸다.  

 

- "잘하네?"
붕대를 다루는 내 손길을 보며 그가 말했다. 
"엄마가 간호사였어요... 그보다 질문할 게 아주 많은데요!"
"그렇겠지." 

단정한 입술이 살짝 웃었다.

- "미미즈는 일본 열도 밑에서 꿈틀대는 거대한 힘이야. 목적도 의지도 없이 뭔가 일그러진 것이 쌓이면 분출해, 그저 난동을 부리고 땅을 흔들지."
"아....?" 

전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 "해치운 거죠?"라고 물었다.
"일시적으로 가둔 것일 뿐이야. 요석으로 봉인하지 않으면 미미즈는 어디선가 또 나와."

- "괜찮아."

조심스럽게 내 말을 막고 이어 말했다.

"그걸 막는 게 내 일이야."

 

- "저기요." 굳은 목소리가 나왔다. "당신은 도대체..."

"고마워, 시간을 빼앗았네."
청년은 부드럽게 말하고 자세를 고친 다음 내 눈을 보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내 이름은 소타, 무나카타 소타라고 해."

 

- 쫓아가야 해!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바로 제정신인가 싶었다. 오늘 맛본 공포와 오한, 혼란이 내 안에서 단숨에 되살아났다. 미미즈와 지진? 말하는 고양이와 달리는 의자? 나와는 관련도 없고, 당연히 관련 없어야 한다. 내 세계는 그쪽이 아니야. 그쪽이 어딘지도 모른 채 그렇게 생각했다. 타마키 이모와 아야와 마미, 친구들의 얼굴이 머리에 떠올랐다. ...하지만. 하지만 그것은 내게만 보였단 말이야. 

바닥에 떨어진 소타 씨의 열쇠를 움켜쥐고 뛰기 시작했다. 망설인 시간은 아마도 1초쯤? 계단을 뛰어 내려갈 무렵에는 그 망설임조차 잊었다. 

 

- [나, 이런 생각은 하고 싶지 않은데.]
대답에 궁해진 내 침묵을 타마키 이모가 메운다.
[너 혹시 이상한 남자랑 사귀게 됐니?]
"아니라니까! 건전한, 아니 괜찮다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렇게 끝냈으니 더 걱정하겠네. 저 사람의 과잉보호도 더 심해지겠어. ... 하지만 그 정도의 문제는 내일의 내게 미루고 화장실을 나왔다... 

 

- 생각해 보니 한밤에 페리를 탄 것은 처음이었다. 바다는 한없이 검고 낮보다 훨씬 깊었다. 이토록 격렬하게 출렁이는 방대한 덩어리가 발밑에 있다니, 조금이라도 긴장을 놓으면 더 두려워질 것만 같았다. 상상력을 최대한 차단하고 계단을 올라 바깥 복도로 나왔다. 바람에 머리가 마구 나부낀다. 소타 씨는 복도 끝 전망 갑판으로 이어지는 바깥 계단 아래에 말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린이용 의자의 모습으로, 달빛을 조용히 받으며.

그보다 저 의자가 정말 소타 씨일까? 나는 수없이 불안에 휩싸였는데 그렇다면 소타 씨는 더 불안할 터이니 나라도 밝게 대하자고 다시금 결심했다. 

 

- 소타 씨의 목소리와 함께 의자가 쿵 소리를 내며 움직여 이쪽을 향했다.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려는 몸을 간신히 막고 밝은 목소리를 냈다. 
"나, 빵 사 왔어요!"
양손으로 품고 온 과자 빵을 소타 씨 옆에 놓고 그 옆에 앉았다. 로비 자판기에서 파는 야키소바 빵과 우유 샌드위치, 종이팩 커피 우유와 딸기 오레오. 
"고마워." 웃음기를 살짝 머금은 목소리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배가 안 고파."

 

- "그랬구나. 그럼 그 고양이가 요석인가! 자기 역할을 내던지고 도망칠 줄이야..."
"네? 무슨 소리예요?"
"네가 요석을 자유롭게 해 줬고, 나는 그 녀석의 저주를 받았어!"
"아니, 말도 안 돼..."

당황하고 말았다. 하지만 묘하게 이해가 되기도 했다. 석상에 새겨진 얼굴은 여우가 아니라 고양이였나. 돌이 손 안에서 짐승으로 변한 듯했던, 그 감촉.
"죄송해요. 저는, 그런 것도 모르고... 아, 어쩌면 좋죠?"

나를 보던 의자의 눈동자가 갑자기 바닥으로 떨어졌다. 소타 씨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 아니야. 문을 늦게 찾은 내 잘못이야. 네 탓이 아니야."

"하지만..."
"스즈메. 나는 토지시, 문 닫는 자야."

 

- "사람이 사라진 곳에는 뒷문이라 불리는 문이 열릴 때가 있어. 그런 문에서는 선하지 않은 것들이 나오지. 그래서 문을 잠그고 그 땅을 원래의 주인인 '우부스'에게 돌려줘야 해. 그 일을 하려고 나는 일본 전역을 여행해. 이것이, 원래 우리 문 닫는 자의 임무야."
뒷문, 토지시, 우부스나 전혀 모르는 말인데 어디선가 들은듯한 느낌이 들었다. 의미는 모르겠는데 머릿속 저 깊은 곳에서는 다 이해된 것 같다. 왜...?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 "고양이를 다시 요석으로 돌려놓고 미미즈를 봉인해야 해. 그러면 나도 틀림없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거야."
나를 안심시키려고 이렇게 다정하게 말하는 것이리라.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 전혀 없어. 스즈메는 내일, 집으로 돌아가."
빵과 우유 크림의 촉촉한 달콤함이 소타 씨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몸에 완전히 스며들었다. 낯익은 노란색 어린이용 의자에서 나오는 그 목소리에 더는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 그날 밤, 꿈을 꾸었다.
나는 길을 잃은 아이다. 그러나 걷고 있는 장소가 그 별하늘의 초원이 아니다. 아마도 그보다 훨씬 전. 언제나 그 꿈에는 긴 스토리가 있고 날에 따라 시작 부분이거나, 중반을 보여주거나 클라이맥스를 체험한다. 오늘 꿈은 이야기의 첫 부분 같다. 

- 시간은 밤, 겨울의 깊은 밤. 역시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을 텐데 이상하게도 낯익은 건물들은 다 사라져 내가 어딜 걷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텅 빈 거리에는 아무도 없다. 지면은 젖어 있어서 걸을 때마다 차가운 진흙이 구두를 무겁게 한다. 슬픔과 외로움과 불안은 이미 내 일부분이 되어 있어서, 가득 찬 그 감정이 걸을 때마다 찰랑찰랑 흔들린다. 춥다. 눈이 흩날려 하늘도 땅도 어두운 회색으로 온통 칠해져 있다. 그 회색을 살짝 잘라낸 듯 옅은 노란색의 보름달이 떠 있다. 그 밑에는 전파탑의 실루엣이 보인다. 이 근처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낯익은 것은 그것뿐이다. 

- "엄마, 어디 있어?"
그렇게 외치며 걸어가는 내 눈앞에 드디어 문이 나타난다. 눈으로 뒤덮인 건물 잔해 속에서 그 문만 우뚝 서 있다. 진눈깨비에 젖어 장식된 널빤지가 달빛을 흐릿하게 받고 있다. 
빨려 들어가듯 내 손은 그 손잡이로 뻗어간다. 잡는다. 금속 손잡이는 피부에 달라붙을 듯 차갑다. 손잡이를 돌리고 문을 민다. 끼익, 소리를 내면서 문이 열린다. 그 안의 풍경에 아이인 나는 놀라면서도 당연히 아는 장소인 것도 같은 마음이 든다. 처음 보는 장소인데 낯익다. 거부당하고 있는데 초대를 받은 것만 같다. 슬픈데 가슴이 뛴다. 
문 안으로, 눈부신 밤하늘의 초원으로, 발을 내디딘다.

 

- 콰당 뭔가가 쓰러지는 소리에 눈을 떴다.
"... 소타 씨?”
뒤집힌 의자가 세 다리를 위로 향한 채 넘어져 있었다.
"잠버릇이 엄청나네..."

 

- "소타 씨."
의자에 손을 대고 흔들어봤다. 대답이 없다. 하지만 여전히 따뜻한 체온이 있다. 잠들었구나. 그나마 안심하고 일어났다. 난간에서 몸을 내밀고 진행 방향을 바라봤다. 어느새 페리 주위에는 크고 작은 여러 섬이 보이고 여러 척의 배가 있었다. 우리는 우와카이, 번화한 분고스이도에 있었다. 은박지처럼 반짝이는 바다 저 너머에 여러 개의 크레인이 세워진 항구가 보였다. 바다 냄새에 석유 냄새와 식물, 물고기, 인간의 생활 냄새가 마구 뒤섞여 있다. 갑자기 몸을 내리누르는 듯한 음량으로 기적이 울렸다. 자, 이제 시작이야. 주위의 모든 것이 떠들썩하게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이 문득 들었다. 무엇이 시작될지, 여행일지 인생일지, 아니면 단순한 하루일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이제부터 시작이야.

소리와 냄새가 빛이, 체온이 그렇게 속닥속닥 속삭였다.  

"... 가슴이 막 두근거려."
아침 햇살이 그려내는 풍경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 소타 씨는 말하고 쿵쾅쿵쾅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끼익 등판을 내게 돌리고 결정 사항을 알리듯 냉정하게 말했다.
"그러면 여기서 인사하지. 스즈메, 지금까지 고마웠어. 조심해서 돌아가."

- "저기..."
손 언저리에서 속삭이는 항의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발권기에서 티켓을 꺼냈다. 옆구리에 의자를 낀 채 야와타하마역 개찰구를 통과했다.

- "못 봤겠죠?"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가 웃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에게 너무 위기감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영화 <토이스토리>처럼 이상한 사람에게 납치당하면 어쩔 셈인가. 고양이 탐색에 더해 의자 탈환 임무까지 발생하고 만다. 그래도 어린이용 의자를 줄곧 들고 다녔더니 팔이 아파서 어쩔 수 없이 인적 없는 곳에서는 혼자 걷게 했다.

 

- "어어어어, 앗!"
도로를 가득 채우고 굴러오는 귤들, 우두커니 서 있는 내 몸에서 잽싸게 소타 씨가 뛰어내렸다. 놀라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는데 도로 옆 밭의 동물 출입을 막는 그물을 다리에 걸고 유턴해 돌아온다.
"스즈메, 이쪽을 잡아!"

 

- "스즈메도 여기까지면 충분해!"
소타 씨는 갑자기 그렇게 말하고 내 몸을 차고 땅으로 뛰어내렸다. 줄에서 풀려난 개처럼 전력 질주로 내게서 멀어졌다.
"아니, 소타 씨, 잠깐만요!"
"더는 위험해! 그 아이한테 돌아가!"
"소타 씨!"
다리가 세 개 달린 짐승처럼 보이는 실루엣은 곧바로 시커먼 폐허 잔해에 섞여 사라지고 말았다. 말도 안 돼, 소타 씨! 한번 더 그렇게 소리쳤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그제야 생각난 듯 갑자기 숨이 차 그 자리에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폐가 공기를 탐해 몸이 멋대로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러자 달콤한 냄새까지 가슴 가득 들어와 심하게 기침하고 말았다. 필사적으로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냄새를 잊으려 했다. 느끼지 않으려 했다. 시간을 들여 가슴속의 탁한 냄새를 다 토해냈다. 드디어 호흡이 가라앉자 최대한 얕게 호흡하도록 유의하며 주위를 살폈다. 그대로 땅에 묻힌 지붕과 전봇대가 시커먼 덩어리로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고 그 너머에는 하늘을 향해 떨어지는 듯한 붉은 강물이 점차 밝아지고 있다. 발밑 땅에서는 그 붉은 것을 향해 일제히 뭔가가 이동하는 듯한 불길한 땅울림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 이런 데 나 혼자 있네. 외톨이처럼 우두커니 서 있어. 또 이렇게.

나는 생각한다. 누군가의 실수로 당연히 끝났어야 할 악몽을 여전히 꾸고 있는 듯한, 하릴없는 불안과 공포가 끊어 올랐다. 버려진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진흙에 묻혀 기울어진 지붕의 형태와 불가사의하게 똑바로 서 있는 담과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시커먼 창 유리에 둘러싸여 있다. 눈꼬리에 매달려 있던 눈물이 툭 떨어지자 미미즈의 붉은색이 얼룩진 채 경치 전체로 퍼져나갔다. 소타 씨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 아이에게로 돌아가라고 했다.  

- 소리를 내어 말해본다.
"규슈로 돌아가라니, 집으로 돌아가라니..."
구역질을 일으키는 달콤한 냄새는 여전히 나를 감싸고 있다. 그것은 이미 내 안에 온전히 자리를 잡고 있다. 못 본 척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완벽한 이물질로 여기에 있다. 갈비뼈 안쪽에서 문득 분노와 닮은 감정이 솟구쳤다. 왜 또 여기까지 와서. 새삼, 어떻게.
"나 보고 어쩌라고!"
온몸에서 짜내듯 소리치며 달리기 시작했다. 소타 씨가 사라진 어둠을 향해, 암운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 로퍼가 진흙을 밟고 깨진 유리를 밟고 플라스틱 같은 것을 부쉈다. 한 걸음 달릴 때마다 공포와 불안이 옅어졌다. 맞아, 이쪽이야. 소타 씨가 있는 방향으로 달리면 틀림없이 불안은 사라질 것이다. 그 반대로 달리면 틀림없이 더 큰 불안에 시달릴 것이다. 내가 달려야 할 방향은, 이쪽이야. 

 

- "열쇠를...!"
그가 문을 밀면서 말했다. 소타 씨의 시선 끝, 나와 현관 중간쯤에 미미즈의 빛을 받아 둔탁한 빛을 내는 게 있다. 소타 씨가 목에 걸고 있어야 할 낡은 열쇠다. 달려가 반쯤 진흙에 묻힌 열쇠를 오른손으로 건져 내고 그대로 소타 씨 옆으로 달려갔다. 발밑이 너무 미끄러워 진흙 속에 넘어져 구르고 말았다. 하지만 바로 몸을 일으켜 소타 씨를 덮치듯 왼손으로 알루미늄문 끝을 밀었다. 

- "스즈메는!"
소타 씨도 의자의 좌석 부분으로 문 끝을 밀면서 나를 올려다보며 호통쳤다.
"죽는 게 무섭지도 않아?!"
"무섭지 않아요!"
소타 씨는 숨을 삼켰다. 죽는 것 따위 무섭지 않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런 건 무섭지 않았다. 왼손으로 미는 알루미늄 문은, 마치 그 끝에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어떤 존재가 있고 그 존재가 무책임하게 문을 반대로 미는 듯 불길한 느낌으로 덜컹덜컹 흔들렸다. 내 오른손은 땅을 짚고 열쇠와 함께 진흙을 움켜쥐고 있었다. 

 

- "열쇠가..."

필사적으로 문을 밀며 소타 씨가 말했다.

"탁류에 휩쓸려 날아가 버렸어. 나 혼자서는 열쇠를 주울 수 없었어. ... 다행이야. 네가 와줘서..."
그는 세 개의 다리로 버티고 서서 왼팔에 온 힘을 주어 조금씩 문을 밀었다. 미미즈의 분출이 서서히 줄어든다. 조금만 더, 이제 조금 남았다. 나도 열심히 밀면서 미미즈를 올려다봤다.

 

- 미미즈가 적동색 꽃이 되어 하늘을 향해 크게 폈다. 교정을 보니 지면에서 무수한 금색 실이 생겨 상공의 미미즈를 향해 뻗어간다. 미미즈가 땅의 기운을 빨아들이고 있다. 하늘에서 커다란 꽃이 된 미미즈는 땅의 무거운 기운을 그 내부에 가득 채우더니 지면을 향해 천천히 쓰러지기 시작했다. 

 

- "이제 시간이 없어. 눈을 감고 여기서 살았던 사람들을 생각해!"
"뭐라고요?!"
"그래야 열쇠 구멍이 생겨!"
"그래도..." 소타 씨를 봤다.
"부탁해!" 그는 내 눈을 똑바로 노려보고 절절하게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이 몸으로는...! 부탁해. 눈을 감아!"

 

- "... 아뢰옵기도 송구한 히미즈의 신이시여."
소타 씨가 노래 같은 그 불가사의한 가락으로 뭔가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머나먼 선조의 고향 땅이여, 오래도록 배령받은 산과 하천이여, 경외하고 경외하오며 삼가..."
"...!"
내 오른손에 있던 열쇠에서 온도가 느껴졌다. 파랗게 빛나고 있다. 파란 다발 같은 빛이 열쇠에서 일어나 알루미늄 문으로 모여든다. 문 끝을 미는 내 왼손 바로 옆에 빛의 열쇠 구멍 같은 게 생겼다.
"... 지금이야!"
소타 씨가 소리쳤다. 그 소리에 떠밀리듯 열쇠를 빛에 꽂았다.
"돌려드리옵나이다...!"

 

- 진흙 위에 주저앉은 채 거친 호흡을 가다듬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샌가 맑아진 하늘에 별이 빛나고 밤의 벌레들이 합창하고 있다. 주위에는 여름 풀의 청아한 냄새가 가득하다. 학교 현관은 말없이 썩어가는 조용한 폐허로 돌아와 있었다.

 

- "하하... 하하하!"
웃긴 건지 즐거운 건지, 소타 씨는 큰 소리로 웃다가 우당탕, 몸을 움직여 나를 봤다.
"스즈메가 해냈어. 지진을 막은 거야!" 

 

- 뜨거운 파도 같은 감정이 배에서 솟구쳐 내 입가에 미소를 만들었다.
"... 거짓말 같아요! 해냈어, 내가 해냈어. 야호!"
소타 씨도 웃었다. 그는 온몸이 진흙투성이였다. 내 옷도, 틀림없이 얼굴도 진흙투성이일 것이다. 그런 몰골이 무슨 증거라도 되는 양, 이런 것까지도 자랑스럽고 기쁘고 즐거웠다.
"저기요. 우리 너무 굉장하지 않아요?"

 

- 문을 닫고 작은 세면대가 있는 전실'을 건너 드르륵 거실 미닫이문을 열었다. 다다미 위에 덜렁 서 있던 소타 씨가 나를 올려다봤다.
"어쩌지?"
"둘이서 먹어." 다정한 미소를 머금은 목소리로 소타 씨가 말했다. "아무래도 이 몸은 배가 고프지 않은 것 같아."
소타 씨는 대답하고 4평 정도 되는 방의 구석까지 달그락달그락 걸어가 벽을 바라봤다.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먹어."

 

- 웃으며 말하는 그 목소리에 안심하고 치카를 방으로 불렀다.
접시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큰 생선은 갈치 소금구이라고 했다. 젓가락을 넣자 바삭 껍질 갈라지는 향긋한 소리가 나고 포근한 살이 김을 냈다. 큼직하게 한 젓가락 집어 밥 위에 올리고 밥과 함께 입에 넣었다. 

 

- 회는 새끼 방어, 반찬은 이 지역 명물인 토란 찌개. 재료가 잔뜩 들어간 흰 된장국을 한 모금 넘기자 고급스러운 달콤함이 올라왔다. 내가 아는 맛과는 완전히 달라 이런 맛은 처음이라고 감동을 전하자 이 동네는 보리된장이라서 그렇다고 치카가 알려주었다. 자신이 다른 지역에 와 있음을 새삼 절감했다.  

 

- 양해의 말을 건네고 메시지를 열었다. 헉! 타마키 이모가 보낸 장문의 메시지가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 "하..."
스마트폰을 뒤집어 봉인하듯 다다미 위에 놓았다. 내일 읽자.
"아, 진짜. 이제 좀 얼른 애인이 생겼으면 좋겠네."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흘리고 말았다.
"어머, 이모가 독신이야? 몇 살인데?"
"마흔쯤 되지 않았을까...?”

두 달 전 생일잔치를 한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이모는 내가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면 매년 울어 버린다.

"정말 예쁜 사람이야. 응. 아주."
그 아련한 눈물과 타마키 이모의 길고 아름다운 속눈썹을 떠올렸다. 젓가락으로 토란을 집어 밥그릇에 놓았다.

- "하지만 어쩌면, 내가 이모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았을지도 몰라.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이 들어."
"뭐?" 치카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거 전 애인이 하는 소리 아니야?"
"어, 진짜다!"

맞다. 듣고 보니 정말 그렇다. 마음이 갑자기 확 가벼워졌다. 나도 웃으며 말했다.

"이제 좀 나를 독립시켜 달라고!"

 

- 아, 큰일이다. 소타 씨가 다 들었겠다. 내가 새삼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디저트인 귤젤리를 거의 다 먹었을 때였다.
저녁을 먹은 다음에는 치카와 같이 부엌으로 가서 재워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가족에게 전했다(치카와 아주 닮은 부모님은 이게 우리 집이 늘 하는 영업이라면서 웃으셨다). 그다음 치카를 도와 대량의 그릇을 설거지하고 목욕탕을 바닥 솔로 박박 닦았다. 청소하면서 "스즈메는 남자 친구 사귄 적 있어?"라고 치카가 물어 한 번도 없었다고 솔직히 대답하자, "그게 좋아, 그게 좋아. 제대로 된 남자는 없어"라며 치카는 신나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치카에게는 막 사귀기 시작한 남자 친구가 있는데 정작 자기는 LINE 답장도 제대로 안 하는 주제에 질투가 심하다거나, 굳이 말하자면 매일 둘만 있을 곳에 가자고 주장하는데 이 동네는 인적 없는 곳 투성이라 곤란하다는 고민을 즐겁게 떠들었다. 일이 끝나자 어머니가 만들어준 아이스 허브차를 함께 마시며 실컷 웃고 떠들다가 밤 2시가 되어서야 방에 나란히 편 이불에 들어갔다.

 

- "저기, 스즈메." 다정하면서도 단호한 결심을 담은 목소리였다.
"아까 진흙투성이가 되어 거기서 뭐 했어? 네가 들고 온 저 의자는 뭐야? ... 그리고..."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던 치카가 나를 봤다.
"너는 누구야?"

 

- "저 의자는... 엄마 유품이야. 하지만 지금은..."
뭐라고 말해야 할까. 뭐라고 할 수 있을까. 거짓말하고 싶지는 않은데.
"... 미안해. 뭐라고 할 말이 없네."
한참을 생각했으나 그런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잠자코 나를 바라보는 치카의 표정이 쓱 풀어지더니 후, 숨을 내쉬었다.
"... 스즈메는 마법사인가 봐. 비밀이 참 많다."
치카는 농담처럼 말하고 몸을 돌려 다시 똑바로 누워 눈을 감고 다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왠지 말이야... 너 굉장히 중요한 일을 하는 것 같아."

-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참을 수 없어 이불에서 일어났다.
"치카, 고마워. 응, 맞아. 틀림없이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
뒤쪽 벽에 있는 소타 씨에게 그렇게 전했다. 당신은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요. 아무도 모르지만, 아무도 봐주지 않지만 싸우고 있어요. 그 폐허에서 문을 닫으려고 고독하게 싸우던 그 모습을 떠올린다. 고작 하루 전의 일인데도 아주 먼 옛날 일 같다. 그 후 나는 바다를 건너고 당신 때문에 마법사라는 오해도 받았어요. 하지만 당신 덕분에 내게도 소중한 일이 생겼어요. 

 

- "저기요, 이제 좀 일어나요!!"
오늘 아침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깨워도 체온과 낮은 숨소리만 돌아올 뿐 소타 씨는 좀처럼 일어나지 못했다. 흔든다. 마구 흔들어댄다. 두드린다. 다다미에 놓고 손을 떼자 의자는 무기물처럼 쿵 쓰러지고 만다. 이래선 안 되겠어.
 

- 키스하면 일어나 문득 치카의 득의양양한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정말일까? 사랑 타령이 아니라 진짜 팁이 아닐까? 무지한 나만 모를 뿐 남을 잠에서 깨우기 위한 현실적인 방법이 아닐까? 양손으로 의자의 좌석 부분을 잡고 소타 씨의 얼굴에 얼굴에 해당하는 등판에 입술을 가져간다. 다가가면서 처음이구나 생각한다. 천천히 눈을 감는다. 나의 첫 키스가...
"... 아니, 입이 없잖아."
 
- "스즈메?"
갑자기 소타 씨가 말했다. 내가 얼굴을 떼자 소타 씨는 덜컹덜컹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안녕. ... 무슨 일이야?"
그의 맑은 목소리에 갑작스러운 열풍을 맞은 듯 내 뺨이 뜨거워졌다.
"... 무슨 일이라니, 지금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요!"
 

- 댓바람부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내 분노를 달래듯 소타 씨의 냉정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변덕은 신의 본질이니까..."
"신?"

 

- "스즈메, 좀 더 강한 의지를 표명해야 해. 손을 크게 흔들어."

다섯 대쯤 차가 무시하고 지나가자 가방 안의 소타 씨가 말했다.

"의자가 히치하이킹을 하면 너무 놀라 멈추지 않을까?"

이런 말도 안 되는 대화를 나누면서 말이다. 생각해 보니 아무리 봐도 십 대로 보이는 여자애에게 차를 세우는 사람이 있으면 오히려 타선 안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던 참에 하늘이 번쩍이며 호우가 쏟아지기 시작해 우리는 근처 버스 정류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 "... 스즈메."
청개구리의 합창에는 비를 반기는 듯한 또렷한 감정이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버스 정류장 벤치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소타 씨가 조용히 말했다. 빗소리마저 조심하는 듯 내밀한 목소리였다.
"왜요?"
"... 이 의자, 네 어머니 유품이야?"
"아... 응."
슈-욱, 차가 젖은 도로를 달리며 길게 끄는 소리가 매미 소리 사이로 들려왔다. 버스 정류장 앞 현도로 차는 가끔 다녔으나 걸어 다니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 "아... 어렸을 때부터 이런 상태라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오래된 기억을 더듬자 누군가의 꿈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세계가 아주 살짝 다른 규칙의 지배를 받아 제대로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옛날에, 아직 유치원에 다닐 때였던 듯한데, 이 의자를 잃어버린 적이 있었어요. 여기저기 찾아다녔는데... 분명... 찾고 보니 다리가 하나 빠져 있었어요." 

"그거..."
소타 씨의 목소리를 가로막듯 다가오는 자동차 소리가 갑자기 들렸다. 조금 전 지나간 차가 같은 차선을 후진해 돌아오는 기적적인 울림, 

 

- 차에서는 그 사람의 집 냄새가 난다. 루미라고 자신을 밝힌 이 사람의 차에는 밤의 가로등 같은 어른스러운 향수와 갓 구워낸 과자의 달콤하면서도 정겨운 냄새가 살짝 감돌았다. 갑자기 모르는 사람의 집에 들어간 듯 불안해져, 담담한 빛을 내는 비의 풍경을 바라보고, 앞 유리창을 타고 흘러 내려가는 빗방울을 쳐다보고, 핸들에 놓인 하얗고 포근한 손가락을 남몰래 살피다가 다시 유리창의 빗방울로 눈길을 돌렸다. 이제는 버스가 전혀 다니지 않는 정류장에 앉아 있으니 마음에 걸리더라. 그녀가 말했다. 

 

- "아, 그러니까, 뭐 하고 놀까?"

"요리!"

"카레 만들자!"

쌍둥이 누나 하나와 동생 소라는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바로 대답했다. 재미있는 일은 이미 다 알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순서대로 해낼 겁니다. 그런 선언을 들은 기분이었다. 우리는 낡은 아케이드 거리 구석에 있는 루미 씨의 집 2층 아이들 방에 있다. 루미 씨는 아래층 가게에서 문 열 준비를 하고 있다. 쌍둥이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플라스틱 채소를 늘어놓고 플라스틱 식칼을 든다. 준비! 하나가 말했다. 

 

- 시작! 구호와 함께 쌍둥이는 각자의 휴지 상자에서 팍팍 휴지를 뽑는다. 거대한 제설기에서 날아오는 눈발처럼 하얀 휴지가 방 안을 날아다닌다. 헉!
으윽, 신음이 절로 나왔다.
"... 어쩔 수 없겠어."
문득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놀라 올려다보니 책상에 놓인 스포츠가방이 부스럭대더니 덜컹, 어린이용 의자가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
쌍둥이가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바닥에 직립한 어린이용 의자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 아니! 잠깐, 소..."
소타 씨, 뭘 할 셈이에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동요한 내 눈앞에서 쿵쾅쿵쾅 소타 씨는 열심히 걷기 시작했다.
"얘들아... 이것 좀 봐, 대단하지! 정말 신기한 장난감이다!"
나는 자포자기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소타 씨는 하나 앞에서 멈추더니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충실한 백마처럼 말없이 다리를 구부리고 좌석을 기울였다. 빨려들 듯 하나가 의자에 앉았다. 히이잉! 말이 포효하듯 앞다리만 높이 쳐들고 나서 하나를 태운 어린이용 의자가 행진을 시작했다. 얼마 후 꺄악! 하고 쌍둥이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 이보다 더 즐거울 수 없다는 듯 둘은 계속 소리를 질러댔다. 혹시... 소타 씨는 애들을 좋아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리드미컬하게 행진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내 기분도 덩달아 좋아졌다.
"저기요, 소타 씨. 다음은 나요!"
"너는 아니야!"
"말도 했다!"

이런... 우리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멈춘 의자에서 하나가 조심스레 멀어졌다. 큰일 났네. 필사적으로 변명거리를 찾았다. 
"아, 그게 굉장하지? 최신 AI를 탑재한 의자형 로봇... 인데?"
아니다, 아무래도 이건 아닌가? 말하면서 점점 말끝이 흐려졌다.

- "이름은?"
눈을 반짝이면서 하나가 내게 물었다.
"어? 아, 소, 소타..."
"소타! 와!"
AI라면 자기도 안다는 듯 쌍둥이는 엉금엉금 기어 의자로 다가갔다.
"소타, 내일 날씨는?"

 

- 안녕, Siri 시리라도 부르듯 속속 요구 사항을 내뱉는 쌍둥이에게 당황해 말했다.
"저기, 소타는 그렇게 똑똑하지 않아."
"스즈메, 무슨 소리야?"
쿵쾅쿵쾅 소타 씨가 내게 다가오자 "또 말했다!"라며 쌍둥이가 소리쳤다.

 

- 정신을 차려보니 아이들 방 밖은 완전히 어두웠다. 몇 년 뒤 이 아이들이 크면... 오늘 이 일을 어떻게 기억할까. 방안을 굴러다니며 노는 의자와 쌍둥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 정도의 나이가 되었을 때 이 아이들은 오늘 일을 어떻게 생각할까. 어린 시절의 행복한 망상. 혹은 새삼 설명하기 힘든 기묘한 현상, 어린 시절의 기억은 어느샌가 희미하고 애매한 꿈처럼 변해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오늘의 이 일이 이 아이들에게 누군가 넷이서 놀았던 추억으로 남길 바랐다.

 

- "그보다 아저씨랑 듀엣 한 곡 안 할래?"
스킨헤드 아저씨가 갑자기 끼어들자 당신, 아직도 어린애에게 그러냐는 잔소리가 쏟아졌다. 그건 아니라고 실실 웃는 아저씨와 아줌마는 뒤로도 쭉 부부 만담처럼 떠들었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았지만 뭐라고 할지 몰라 대답을 망설이고 있는데 홀에서 검은 머리의 언니가 한 손에 잔을 들고 호쾌하게 걸어와 "어머, 좋아라. 잘 먹을게요"라며 잔을 짠, 부딪혔다.
"이런! 미키 씨, 이거 너무 맘대로잖아. 도통 못 이기겠어."

"뭐, 미키 씨랑 마시는 것도 괜찮지."
"괜찮다니 무슨 소리예요? 병을 주문할까 보다."
이 가게의 유일한 아르바이트 종업원인 미키 씨는 그렇게 말하고 웃으며 내게 윙크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그게 나를 도와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른들의 완곡한 사교예절 같은 게 내게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취해 노래하고 큰 소리로 근심을 털어내고 무신경한 척하며 누군가가 누군가를 배려하고... 아! 왠지 여기, 굉장히 좋은 곳 같다는 생각을 가만히 했다.

 

- "나리는 통도 커!" 

"역시 나리야. 잘 먹겠습니다!"
시끌벅적 흥이 오른 자리의 중심에 턱 앉아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그 다이진, 하얀 새끼 고양이었다. 선배 나리는 안 드십니까? 사장 나리는 역시 인심이 좋으십니다! 저마다 고양이에게 말을 걸고 있다. 말도 안 돼. 절로 소리 내어 말하고 말았다.
"아, 저기요, 잠깐만요." 카운터에 앉아 있는 미키 씨에게 다가가 귓속말했다.

"미키 씨, 저 자리에..." 고양이가 있다고 말하려 했다.
"응?" 미키 씨는 고개를 돌려 내 눈길 끝을 바라봤다. "있지, 처음 보는 사람인데 말이야."
"사..., 사람?"
절로 말을 따라 했다. 미키 씨는 웃으며 말했다.
"아주 조용한 사람인데도 단골과 금방 친해졌다니까. 옷도 잘 입고 고상하기도 하고."

 

- "고양이? 그래?" 미키 씨는 살짝 뺨을 붉히며 반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시큰둥한 얼굴인데 너무 멋지지 않니!"
말도 안 돼! 아무리 봐도 저 고양이, 사타구니를 핥고 있는데! 

 

- "... 다이진!"
잔뜩 목소리를 낮춰 소타 씨가 말했다. 다이진은 솟아오르는 미미즈의 격류를 커다랗게 뜬 눈동자로 황홀하게 바라보고 있다.
"스즈메." 소타 씨가 고양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나는 다이진을 잡아 요석으로 돌려놓을게. 그동안 너는..."

"알았어요!"

목에 걸고 있던 열쇠를 티셔츠에서 꺼냈다. 에히메에서의 문단속 이후 문 닫는 자의 열쇠는 계속 내가 가지고 있었다. 그때도 해냈어. 그러니 이번에도 ...

 

- 우리는 마주 보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뒤 따로 신호하지 않았는데도 동시에 뛰기 시작했다. 할 수 있어. 우리는 할 수 있어. 그런 느낌이 내 폐에 계속 공기를 보냈다. 내 발은 더 세게 땅을 박차고 달렸다.

 

- 그저께보다, 어제보다 지금이 훨씬 힘차게 달리고 있음을 소타 씨는 너무나 분명하게 깨달았다.
"움직여. 몸이 움직여!"
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자신의 마음이, 영혼이, 온몸의 신경이, 이 네모나고 작은 의자의 몸에 완벽하게 적응했음을 깨달았다. 이는 불길한 징조일지 모르겠으나 지금의 소타 씨에게는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인간의 몸무게로는 불가능한 장소를 짐승처럼 달리고 있다. 중력이 훨씬 가벼워진 듯해 소타 씨는 마음 놓고 급경사의 레일을 달려 올라갔다. 지상이 쑥쑥 멀어지고 보름달을 똑바로 볼 수 있는 곳까지 오르자 멀리 아래 레일에서 이쪽을 올려다보며 도망치는 하얀 고양이가 있었다. 

 

- "다이진! 오늘이야말로 내 원래 모습을..."

울부짖듯 소리쳤다. 잡았다! 이미 몸으로 알았다.

"되찾겠어!"

 

- 좁고 어두운 곤돌라 내부에 언뜻 반짝이는 무언가가 있다. 눈을 응시한다. 그것은 별이었다. 곤돌라 안에 밤하늘이 있다.
문득 누군가가 빛의 양을 조절하는 다이얼을 확 돌린 듯 별들의 반짝임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잘 아는 풍경이다. 초원에 별이 가득한 그 하늘이다. 자주 봐 익숙해진 감정이 잔물결처럼 내 가슴에 가득 찼다. 슬픈데 푸근하다. 모르는 장소인데 낯익다. 있어서는 안 되는 곳인데 한없이 있고 싶다.

 

- "엄마...?"
초원 저 끝에 누군가가 서 있다. 바람에 흩날리는 하얀 원피스, 부드러워 보이는 긴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그 너머에 웅크린 아이 실루엣. 나구나. 어린 내가 엄마와 마주해 있다. 맞다. 별이 뜬 하늘의 초원에서 우리는 만났다. 불현듯 깨닫는다. 지금은 그 꿈의 연속이다. 아무리 원해도 볼 수 없었던 저 깊은 기억 속에 묻혀 있던 풍경이다. 엄마가 손에 뭔가를 들고 있다. 나를 향해 내민다. 저게 뭐지? 눈에 초점을 맞춘다. 너무 멀어 잘 보이지 않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까이 문 안쪽으로 몸을 들이민다. 미미즈의 탁류 속에 몸을 넣는다. 어떤 온도도 눈부심도 저항도 없다. 그것은 그저, 투명하고 무게가 없는 흙탕물이다. 머리를 기울여 곤돌라의 작은 문을 통과한다. 오른발을 바닥에 댄다... 그러자 깊고 부드러운 초원이다. 조금 전보다 훨씬 가깝게 엄마와 아이인 내 모습이 보인다. 

 

-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 듯하다. 하지만 내 눈길은 엄마와 어린 나에게 빨려 들어간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다. 뭐지? 엄마가 내게 건네려는 것은? 저게 뭐지? 한 걸음 더. 저것은... 

- 의자다. 다리가 세 개밖에 없다. 직접 만든 조그만 어린이용 의자다. ... 의자? 내 마음이, 툭, 무엇엔가 닿는다. 뭔가 기억나려 한다.
누구지? 아까부터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는? 의자. 저 의자는...
"스즈메!"

퍼뜩 눈을 부릅떴다. 

"앗!”

- "스즈메, 이리 와!"
그 목소리에 돌아봤다. 곤돌라의 작은 출구에서 미미즈의 탁류가 밖으로 뿜어져 나가고 있다. 그 흙탕물 사이로 소타 씨가 필사적으로 앞다리를 이쪽으로 뻗고 있다. 

"소타 씨!"
구르듯 곤돌라의 바닥에 무릎을 대고 오른손으로 소타 씨의 다리를 잡는다. 강력한 힘으로 소타 씨는 나를 미미즈가 분출하는 곤돌라에서 끌어내 주었다. 관람차 프레임에 손발이 닿았다. 그곳은 이미 회전하는 관람차 정상에 가까웠다.  

 

- "안으로 들어가자." 

소타 씨의 차분한 목소리에 나는 방금 닫은 문을 다시 열고 완전히 정적을 찾은 곤돌라 안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문을 닫자 귓가에 울리던 바람 소리가 훨씬 약해졌다.
"... 정말 무서웠다."
스위치가 꺼진 듯 다리에서 힘이 빠져 곤돌라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우리는 관람차 정상에 서 있었던 것이다. 새삼스레 온몸이 떨리기 시작하더니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후... 하, 한심한 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갑자기 아주 우습다는 듯 소타 씨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스즈메, 굉장했어... 그리고 고마워."

 

- 다시금 살펴본 곤돌라 내부는 넓지도 좁지도 않았다. 누군가와 친밀하게 지낼 공간을 신중하게 계산한 듯한 크기였다. 우리는 플라스틱시트에 마주 앉아 천천히 다가오는 지상을 바라봤다. 관람차는 정전이 되더라도 안에 사람이 있으면 그 무게로 인해 천천히 회전해 지상에 내려오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소타 씨가 설명해 주었다.

 

- 다이진은 어떻게 되었냐고 묻자 소타 씨는 또 놓쳤다고 말하고 씁쓸하게 웃었다. 제트코스터에서 함께 떨어진 후 땅바닥에서 다이진을 제압했는데 움직이기 시작한 관람차에 내가 매달리는 것을 발견하고 서둘러 달려왔다고 한다. 미안하다는 내게 그는 네가 사과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며 웃고 다음에는 꼭 잡겠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 "스즈메..."

불어오는 밤바람에 슬쩍 목소리를 실어 소타 씨가 조용히 말했다.

"응?"

"아까 뒷문 안에서 뭘 봤어...?"
"아..."
꿈에서 깬 뒤처럼 기억이 급속히 옅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주 눈부신 밤하늘과 초원..."
"그거 저세상인데?" 

소타 씨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응?"

"네게는 저세상이 보이는구나..."

"저세상?"
"이 세상의 이면, 미미즈가 사는 곳. 모든 시간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

 

- 모든 시간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 순간 머릿속 저 아주 깊은 곳에서 뭔가가 딱 잡히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곳은 손이 전혀 닿지 않을 만큼 깊었다. 
"... 볼 수는 있는데 들어갈 수가 없어요."
"저세상은 죽은 자가 가는 곳이라고 해."
소타 씨는 그렇게 말하고 창밖을 봤다. 나도 그의 눈길을 좇았다. 새카만 바다 바로 앞에 별을 가득 뿌린 듯한 밤거리가 펼쳐져 있다. 한층 밝은 공장지대가 있고 빛의 탑 같은 빌딩가가 있고 서로 기대어 있는 듯한 주택가가 있다. 손을 뻗으면 저마다의 빛의 입자를 손에 담을 수 있을 듯 아주 가깝게 보였다. 

"현세를 사는 우리는 들어갈 수 없는 곳, 가면 안 되는 곳이야. 그러니까 안 가길 잘했어. 당연히 들어가서는 안되지."

소타 씨는 어쩐지 조금 서글프게 들리는 목소리로 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는 이곳에서 살아야 하니까..."

 

- 문득 돌아보니 교실 한쪽 구석에 고고하게 자리 잡은 꽃미남 선배처럼 어린이용 의자가 벽 쪽에 다소곳이 있었다. 소파에서 일어나 소타 씨에게 몸을 기울이고 속삭였다. 
"저기요. 소타 씨도 같이 놀아요."
"응?" 

소타 씨가 조그맣게 대답했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의자를 들었다. "어? 이봐, 너, 잠깐만!"이라는 속삭임을 무시하고 테이블 옆에 쿵 의자를 놓고 그 위에 앉았다.
"...!"
소타 씨가 숨을 삼켰다. 체중을 실었는데도 다리가 세 개뿐인 의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런, 이런..." 그가 조그맣게 한숨을 토하는 소리가 등 뒤로 들렸다.
"어머, 그게 뭐야?"
"아이, 귀여워라. 어린이용 의자야?"
"뭐야? 갑자기."
"아... 고베의 추억으로 삼을까 싶어서요."
내 솔직한 대답에 둘은 무슨 소리래, 도무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며 키득키득 웃었다. 마지막으로 다 같이 기념사진을 찍고 어제오늘 완전히 익숙해진 뒷정리 기술을 발휘해 설거지를 싹 해버리고 자, 내일부터는 또 학교야,라는 듯한 자연스러움으로 그 밤은 해산했다.

 

- "... 이상한 애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조금 전까지 파티를 벌였던 소파에 누웠을 때 머리맡의 소타 씨가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루미 씨의 집에서 샤워하고 담요까지 빌려와 티셔츠 차림으로 잠자리에 들려던 참이었다.
"아, 의자에 앉은 거요?"

"갑자기 사라졌다가 한밤에 다시 나타났잖아."

"그런가?"
루미 씨도 미키 씨도... 그리고 치카도, 누군가의 이상한 부분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대범함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는 자신과는 다른 세계가 존재함을 온전히 알고 있다. 고향을 떠난 지 고작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내 세계는 전보다 훨씬 다채로워졌다.

 

- "저기요. 소타 씨는 계속 이렇게 여행을 다녔어요?" 그렇다면 너무 부럽겠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계속 그렇지는 않아. 도쿄에 아파트가 있어."

"네?"
"대학을 졸업하면 교사가 될 생각이야."

"잉?" 너무 놀라 소타 씨의 얼굴을 바라봤다. "아니! 대학생이었어요?!"

 

- "어, 취직도 해요?! 그러면 토지시는?"
직업이 방랑자 아니었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지극히 평범한 생활을 얘기하는 어린이용 의자 탓에 내 머리는 지독하게 혼란스러워졌다. 소타 씨는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토지시는 대대로 이어져 온 우리 집 가업이야. 앞으로도 계속해야 해. 하지만 그것만 해서는 먹고살 수 없어."
"... 그렇구나."
그렇지. 나는 생각한다. 먹고살아야지. 생활해야 한다. 들어보니 맞는 말이다. 문을 닫고 다닌다고 해서 누가 돈을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는 생각했다.
"... 하지만 아주 중요한 일인데.”
"중요한 일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게 더 좋아."

 

- 소름이, 빠르게 등을 훑고 지나갔다. 그렇게 생각한 적도, 그런 생각을 들어본 적도 없다. 중요한 일일수록 당연히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고 많은 돈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타 씨는 내 눈을 들여다보며 위로하듯 다정하게 말했다.
"괜찮아. 얼른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 교사도, 토지시도 다 할 거야."

온화한 그 목소리에 안심하고 그만 잠에 빠지고 말았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내 머리는 그 관람차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 정상은, 우리가 서 있던 그곳은 우리 이외에는 아무도 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 정상에, 그 꼭대기의 하늘에, 우리는 다른 누구도 보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표시 같은 것을 살그머니 그려놓은 것이다. 그것이 너무나도 너무나도, 온몸이 조용히 떨릴 만큼 자랑스러웠다. 나는 그 감각을 소중히 어루만지며 잠들었다. 

 

- 내가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에 빠졌을 무렵 소타 씨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것은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소타 씨 본인조차 잠에서 깨면 기억하지 못할, 무엇과도 이어지지 않을 고독한 꿈이었다. 

 
- 소타 씨는 다리가 세 개인 어린이용 의자에 앉아 있다. 앉은 채 자신이 내뱉은 말을 반추하고 있다.

얼른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 교사도 토지시도 다 할 거야. 
...

... 하지만, 소타 씨는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벌써, 어쩌면 이미.

-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몸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문득 중력이 늘어난 듯했다. 허리가 의자 좌석에 짓눌리더니, 몸의 무게가 한 점에 집중하는 순간 폭, 거품이 터지는 듯한 느낌으로 좌석이 사라졌다.
"...!"
떨어진다. 가라앉는다. 놀라 위를 올려다보니 그곳에는 의자에 앉은 자신이 보였다. 피곤한 듯 등을 구부리고 의자에 앉은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있다. 껍데기만 남은 듯한 그 모습이 점점 멀어지더니 마침내 녹아버리듯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아, 멀어지네, 체념하듯 생각한다. 그는 이미 받아들이고 있다. 바라지는 않았으나 그런 건가 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이윽고 지평선 저 너머에 붉게 타오르는 마을이 나타난다. 마을은 아주 멀리에 있는 데도 응시하자 세부까지 극명하게 보인다. 활활 타오르는 불을 등지고 부서진 전봇대와 겹겹이 쌓인 승용차와 깨진 창에서 흔들리는 커튼과 불타면서 바람에 흩날리는 빨래 같은 것들이 정교한 미니어처처럼 또렷하게 보인다. 보이는데 그 마을도 그냥 시야를 흘러간다. 저기에도 못 가나. 그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로 갈 수 있나. 그것은 어떤 림보일까. 색도 감촉도 없는 투명한 진흙탕 속으로 한없이 떨어지며 소타 씨는 이 세계에서 떨어져 나간다. 그와 세계를 연결하는 소중한 실이 하나 또 하나, 차례대로 끊어진다. 
빛이 사라진다.

- 이어 나갈 말을 찾지 못한 채 그는 중얼거린다. 입김이 하얗다. 저 문 너머에는 속으로 생각한다. 일어나려 한다. 하지만 하반신이 움직이지 않는다. 자연스레 밑을 본 그는 놀란다. 모래밭을 밟고 있는 맨발이 얼음으로 뒤덮여 있다. 벌레가 우는 듯 잘그락잘그락 작은 소리를 내면서 두꺼운 얼음이 금방 그 범위를 넓혀간다. 얼음이 무릎을 덮고 허벅지를 얼리고 상반신으로 퍼진다. 그를 이 림보에 붙들어 두려는 듯 얼음은 의지를 품고 그의 몸을 뒤덮는다. 그런가? 그는 생각한다. 깊이 숨을 내뱉는다. 숨까지도 반짝반짝 빛나는 얼음 입자가 되어있다.  
"여기가 내가, 올 곳인가...?"

입가에 미소의 형태를 만들며 그는 고개를 떨군다. 얼음으로 뒤덮여 가는 몸은 점점 무거워진다. 그러나 차가운 냉기가 그 무게조차 마비시킨다. 공백과 같은 무감각이 묘하게 달콤하다.


-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퍼져가는 무(無)의 달콤함에 그는 깜빡 잠든다.
"...!!..."
누구지? 갑자기 초조해졌다. 왜 이대로 가게 내버려 두지 않나. 나는 이렇게 잠들기를 택했는데 드디어 지금이야말로, 모든 게 사라지려는데.
"... 소타 씨!”
그 목소리와 함께 눈앞의 문이 열렸고, 그는 너무 눈이 부셔 실눈을 떴다.


- "... 스즈메?"
소타 씨는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로? 나는 생각했다. 정말 일어났어. 치카, 의심해서 미안해. 소타 씨는 끼익, 등판의 눈을 들어서 내 얼굴을 바라봤다.
"좋은 아침."
"... 드디어 일어났다."

-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말하고 말았다. 55건. 하루 만에 이모에게서 55건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이거 큰일인데. 읽었다는 표시라도 해야 하나 아니면 계속 씹어야 할까.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모르겠다. 아니야. 무엇보다 이 숫자가 계속 늘어나는 상황을 견딜 수 있을까. 에잇! 내 손가락은 타마키 이모의 아이콘을 터치했다.

 

- "스즈메!" 가방에서 얼굴을 내민 소타 씨가 재촉하듯 말했다. "다음 편이 딱 좋아. 표를 사, 얼른!"
"어? 신칸센을 타고 가요?"
"도쿄에 가려면 그게 제일 빠르지!"

 

- 투덜대면서도 발매기에서 표를 샀다. 조금씩 모아둔 용돈 잔고의 앞자리가 달라졌다.
"도쿄까지 신칸센이라니, 저금이 바닥나겠네."
"나중에 꼭 주셔야 해요, 대학생!" 내가 그렇게 말하자, "내게 맡겨" 스포츠가방이 웃으며 대답했다.

- 신칸센은 조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고 매끄럽게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점차 속도를 올렸다. 몇 개의 터널을 통과하자 빌딩이 빼곡한 풍경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커다란 강을 몇 개 건너니 점차 밭과 논이 이어지는 풍경으로 바뀌었다. 지도 앱을 열어 보니 엄청난 속도로 지도가 왼쪽으로 흘러간다. 내가 조그만 목소리로 그 놀라움을 소타 씨에게 전하자 아이고, 예, 물론이죠, 같은 느낌으로 흘려들었다. 하지만 그 정도 반응으로는 시들해지지 않을 만큼 내 감동은 이상하게 컸다. 아까부터 창밖을 휙휙 흘러가는 풍경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 "아, 네! 당신이 소타 씨 친척인가요? 들었어요."
샌들을 딱딱 울리며 나온 사람은 백발의 버섯 모양 머리를 한 몸집이 조그만 할머니였다. 캐럴 씨와 똑같은 파란색 줄무늬 유니폼 차림으로 가슴에 '오기'라는 명찰을 달고 있다.

"자, 여기 소타 씨 방 열쇠요. 301호실이랍니다."
그렇게 말하며 내게 열쇠를 건넸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소타 씨가 말한 집주인이라는 소리다.

 

- 그 말을 들은 캐럴 씨가 환히 웃으며 나를 봤다.
"그는, 언제 여행에서 돌아와요?"
"아, 죄송해요. 그건 저도 잘 몰라서요."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네."

집주인 할머니가 너무 적적하다는 듯 말하자 캐럴 씨가 스위트나 큐트 같은 가끔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를 내뱉었고 "정말 잘 생겼지"라며 집주인 할머니가 황홀한 표정으로 말했다. 참, 인기 많으시네. 등에 멘 가방을 더 꽉 잡았다.
"저, 감사합니다!"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 열쇠를 사용해 문을 열자 방을 채우고 있던 열기가 확 얼굴에 달려들었다. 뒤이어 학교 도서관 같은 냄새가 나고 그다음 비누와 세제 같은 생활 냄새가 나더니 마지막에는 낯선 외국 마을에서나 날 법한 세련된 냄새가 슬쩍 코를 스쳤다. 어른의 향기로구나.
"들어와."
가방에서 얼굴을 내민 소타 씨가 권해 깊이가 30센티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 좁은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갔다. 바로 이어진 부엌은 방이라기보다는 넓은 복도라고 해야 할 크기였다. 그 끝에 4평 정도의 어두컴컴한 공간이 있었다.

 

- "와..."
살짝 숨을 흘렸다. 커튼 틈으로 들어오는 바깥의 빛을 통해 어슴푸레 드러난 방은 벽도 바닥도 책으로 뒤덮여 있었다. 다다미에는 두꺼운 고서가 쌓여 있어서 마치 대학 연구실 -실제로 가본 적은 없으나- 같은, 뭔가 전문가를 위한 공간 같았다. 책들 사이에 끼어 쇼와시대 문호가 사용했을 법한 낮은 책상과 동그란 찻상, 그리고 커다란 책장이 셋이나 있었다. 방 한쪽 구석에 IKEA 스타일의 철제 책상과 그와 비슷한 파이프 침대가 있고 그 주위의 책만은 대학생답게 컬러풀했다. 

- "덥지? 창문 좀 열래?"
"아, 응."
커튼을 열자 기울기 시작한 오후 햇살이 방을 눈부시게 덧칠했다. 창을 여니 기분 좋은 바람이 들어왔다. 스포츠가방을 바닥에 놓고 모자를 벗어 가방 위에 놓았다. 환해진 방을 둘러보며 어쩐지 조그만 정원 같다고 생각했다. 온통 많은 물건으로 뒤덮여 있는데 이상하게도 지저분한 인상은 없다. 식물처럼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물건들이 놓여 있다. 

 

- 책장 앞에 서서 손을 뻗었으나 너무 높아 손이 닿지 않았다. 발돋움했으나 소용없었다. 영차, 소타 씨 위에 올라섰다. 내 아래에서 다리가 세 개인 어린이용 의자가 내 몸무게를 견디려고 황급히 용을 쓰고 있었다.

손이 상자에 닿았다. 꽤 무겁다. 

문득 이 상황이 우스워져 싱글대기 시작했다. 상자를 들고 하나, 둘, 그 자리에서 제자리걸음 했다. 편의점을 나와 내가 "소타 씨, 인기인이네요"라고 하자 "그렇지도 않아"라며 새침하게 대답한 미남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하나, 둘, 하나, 둘, 발밑을 보며 웃으면서 말했다.

"소타 씨. 이렇게 밟아도 괜찮아요?"
"... 올라가기 전에 물어!"
발밑에서 의자가 아등바등 몸부림쳤다. 꺄악, 소리를 지르며 실컷 웃었다.

 

- 소타 씨가 열라고 지시한 책은 <토지시의 비전 초록>이라고 적힌 고서였다. 사진으로만 본 거칠거칠한 전통 종이를 끈으로 묶은 책이었다.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낡은 전통 종이가 찢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페이지를 펼쳤다.
펼친 페이지 양쪽 모두에 그림이 잔뜩 그려져 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확 돋았다.
분화하는 그림이었다. 마을과 산은 검은 묵으로, 산에서 ...

 

- 그 책을 펼쳤다. 낡은 지도 같은 게 그려져 있다. 지형은 녹아내린 돌을 붙인 듯 모호한 형태로, <후조쿠니의 그림>으로 읽히는 한자가 적혀 있다. 섬 같은 지형 끝과 끝에 커다란 검이 두 개 꽂혀 있다.
"그리고 요석은 시대에 따라 그 장소를 바꿔."
페이지를 넘기니 또 고지도가 나왔다. 하지만 조금 전보다 해안선의 형태가 사실적이고 두 개의 검은 아까와는 조금 다른 곳에 꽂혀 있다.

- 다시 페이지를 넘겼다. 해상도가 더 좋아진 지도가 나왔는데 상세한 길과 국경도 빼곡하게 그려져 있다. 검은 도호쿠 끝과 비와코 아래쯤에 꽂혀 있다.

 

- "맞아. 지도의 변화는 일본인의 우주관 변화와 이어져 있어. 사람의 인식이 바뀌면 토지의 형태도 바뀌고 용맥(龍脈)과 재해의 형태도 변해. 그에 따라 요석이 필요한 장소도 바뀌지. 천천히 변화하는 사람과 토지가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그 시대마다 정말 필요한 장소에 요석이 모셔진다고. 인간의 눈이 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잊힌 장소에서, 요석은 수십 년, 수백 년에 걸쳐 그 토지를 달래고 있는 거지."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소타 씨의 설명 대부분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처음 봤던 요석을 ...

 

- 갑자기 발바닥을 쓰다듬는 듯한 느낌이 들어 반사적으로 발을 들었다. 땅울림? 발밑에서 뭔가 커다란 것이... 너무 커서 시야에 제대로 담을 수 없는 무언가가 꿈틀대고 있다. 발밑에서부터 천천히 슬금슬금 소름이 돋았다. 식은땀이 났다. 정신을 차리니 새도 매미도 전부 울음을 멈추고 있었다. 기묘한 정적 속에서 메마른 전차 소리만이 이곳과 어울리지 않게 느긋하게 울렸다. 
"... 틀렸어."
너무나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소타 씨가 중얼거렸다. 내가 그를 보려는 순간.
쿵!
지면이 크게 흔들렸다. 그 힘에 몇 센티미터나 공중에 떴다가 몸의 균형을 잃고 땅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에 늘어선 가로등이 커다란 금속음을 내며 추처럼 흔들렸다. 바로 주머니 안의 스마트폰에서 엄청난 음량으로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 그런데 끼익 뒤틀리는 소리가 나더니 의자의 움직임이 갑자기 멈췄다. 콰당, 소타 씨가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소타 씨? 왜 그래요?" 

의자를 들고 들여다봤다. 후후후, 웃음처럼 들리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올려다보니 노란 눈동자가 더 커져 있다.
"지금부터 많은 사람이 죽어."

 

- "왜 그러는데?! 너, 이제 좀 요석으로 돌아가!"
"그건 무리야." 

그런 것도 모르냐고 나무라는 듯한 목소리로 고양이가 말했다.
"다이진은 이제 요석이 아니야."
"뭐라고?"
다이진이 가지에서 살포시 뛰어내려 의자 좌석에 소리도 없이 착지했다. 소타 씨는 얼굴을 가까이 대고 내게만 들릴 만한 목소리로 짧게 속삭였다.

 

- "소타 씨, 어쩌죠...!"
숨을 헐떡이면서 손에 든 의자에 물었다. 대답이 없다.
"소타 씨?"
"... 스즈메. 미안해."
소타 씨가 느릿느릿 대답했다.
"네?"
"미안해..."
소타 씨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왜 사과하지? 소타 씨는 이상하게도 아주 느리게 말했다.
"드디어 알았어. ... 지금까지 전혀 몰랐어... 알아차리지 못했어..."
"응? 자, 잠깐만요!"
차갑다. 소타 씨를 든 내 손가락 끝이 차갑다.
"지금은..."
소타 씨가 차가워지고 있다. 의자 표면에 서리가 살짝 끼기 시작했다.
"지금은... 내가 요석이야."
"뭐라고요...?"


- 의자를 덮은 서리가 점점 두꺼워진다. 얼음이 되어 간다. 소타 씨의 목소리는 온도를 잃고 평탄해졌다.
"의자로 변했을 때... 요석의 역할도... 내게 옮겨진 거야."
아, 그런 거야? 감정보다 먼저 내 머리가 그의 말을 이해했다. 하지만 내 감정은 무너졌다. 혼란스러워졌다. 소타 씨의 얼굴이, 의자의 등판이, 얼음에 묻힌다. 하, 길게 숨을 내뱉듯 그가 말했다.

"아... 이제 끝인가...? 이렇게..."

 

- 얼어붙어 간다. 가벼웠던 어린이용 의자가 돌처럼 무거워졌다.
"하지만... 나는..."
얼어붙는 의자 안에서 우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너를 만나..."
목소리가 끊겼다. 그 순간 품에 안은 그것은 의자가 아니었다.
더는 소타 씨가 아니다. 손가락 끝으로 그 사실을 깨닫는다. 몸으로 깨닫는다. 그러나 마음은 이해를 거부했다.
"소타 씨!"
나는 소리쳤다. 

 

- 싫어. 진심으로 생각한다. 의자였던 것은 완전히 얼음으로 뒤덮여 짧고 뾰족한 검의 형태로 변했다. 싫어.

이런 거 싫어. 수없이 소리쳤다.

"소타 씨, 소타 씨, 소타 씨, 소타 씨...!"
"이미 그거, 소타가 아니야."
다이진이 발랄한 걸음걸이로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다이진, 너...!"
고양이를 노려봤다. 시야가 흐려지고 흔들렸다. 나는 울고 있었다. 양쪽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그런 내 얼굴을 보며 천진난만한 아이의 목소리가 말했다.
"요석, 미미즈에 안 꽂아?"
"그런 일을..."
"그러면 말이야." 내 눈앞에 다이진이 톡 앉았다. "미미즈가 떨어지는데? 지진이 일어나는데?"

 

- 다 싫어. 이제 이런 거 다 싫어. 나는 생각했다.
내게는 보인다. 상상할 수 있다. 가능한 것이다. 어느샌가 하늘은 이미 어둡고 별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지상의 사람들은 저마다 목적지를 향해 역을 걷고 교차점을 걷고 전차를 타고 있다. 누군가와 저녁을 먹는다. 편의점에서 뭔가를 산다.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잔뜩 신이 나 반 친구들과 거리를 걷고 있다.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엄마와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여름이 끝나가는 계절의 공기를, 세상을 짓누를 악취와는 아직 무관한 상쾌한 밤공기를 가슴 가득 들이켜고 있다.  
내게는 보인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새빨갛게 익어 왕관처럼 펼쳐진 거대한 과육이 말없이 떠 있다. 그것이 떨어진다. 당장이라도 닿을 듯 육박하고 있다.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아까부터 온몸의 떨림이 멈추질 않았다. 싫어. 다 싫어. 이런 거.

 

- "다 싫어..."
목소리가 나왔다. 마음이 엉망진창이다. 눈을 꼭 감았는데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줄줄 흘렀다. 양손으로 받치고 있는 요석을 높이 들어 올린다. 눈을 뜬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그것을 본다. 그것은 이미, 그가 아니다. 앞이 뾰족한, 그것은 얼음의 창이었다. 천천히 눈을 감고 그것을 높이 쳐든다.

 

- 다음 순간 간토 전부를 뒤덮을 정도의 크기였던 미미즈의 몸이 한 점으로 압축되더니 지면에 빨려 들어가며 사라졌다. 남은 자리에는 하늘에 빨려 올라간 수증기만이 남았는데 그것도 다음 순간 팡 터져버렸다. 터진 수증기는 오로라처럼 하늘에 파문을 그리며 수십 초 동안 도쿄의 밤하늘에 밝고 선명하게 깔렸다. 무지개색으로 반짝이는 이슬비가 도쿄의 모든 지붕을 깨끗이 씻어 내렸다. 사람들은 놀라 요란을 떨며 일제히 사진을 찍고 찍은 사진을 공유했다. 불가사의한 밤의 무지개는 사람들의 마음을 한동안 즐겁게 했다. 

 

- 한편 그 시간, 밤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알아차린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정신을 잃고 축 늘어진 그 몸은 천천히 회전하며 바람을 가르며 떨어졌다. 그 바로 옆에 마찬가지로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떨어지고 있었다. 고양이는 떨어지면서 소녀의 몸에 발톱을 세워 그 몸에 달라붙더니 소녀의 머리를 보호하려는 듯 작은 몸을 안았다. 고층 빌딩 높이를 지나쳐 드디어 지표와 가까워졌을 때 새끼 고양이의 몸이 돌연 부풀었다. 사람보다 더 큰 짐승이 되어 소녀를 꼭 안고 있다. 

 

- 엄마가 웃는다. 나도 기뻐 웃는다. 우리의 웃는 소리도, 그날 정원의 빛도, 해안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도, 이따금 지저귀던 휘파람새의 울음까지 모든 게 또렷하게 여기에 있다. 계속 잊고 있었는데,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것들은 내가 생각해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선명하게, 지금도 내 안에 있었다. 
따뜻하고 진흙처럼 농밀한 깜빡 잠을 안타까워하면서 천천히, 꿈에서 깼다.

귓가에서, 낮게 바람이 불고 있다.
졸졸 흐르는 작은 물소리가 바람 소리에 섞여 있다.

 

- 주위는 캄캄했다. 머리 위쪽 아주 높은 곳에 살짝 푸른 기가 도는 옅은 빛이 있다. 하지만 그 빛은 너무나도 옅어 눈꺼풀 안에 비친 허상처럼도 보인다. 자신이 정말 눈을 뜨고 있는지조차 판단할 수 없어 불안해졌다. 몇 번이나 세게 눈을 깜빡였다. 

 

- "스즈메, 드디어 단둘이 되었네."
"다이진!"
하얀 털 뭉치에서 도망치듯 벌떡 일어났다.
"너 때문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소타 씨를 돌려줘!"
"그건 무리야."
"왜?!"
감정이 없는 눈동자와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고양이가 말했다.
"이제는 사람이 아니니까."

"...!"
몸을 숙여 양손으로 다이진을 잡았다. "와!" 기쁜 듯 소리를 높이는 다이진에게 호통을 쳤다.

"소타 씨를 내놓으라고!"

 

- 2인실의 앞쪽 침대는 비어 있고 안쪽 창가 침대에 덩치가 큰 사람이 누워 잠들어 있었다. 그가 무나카타 노인-소타 씨의 할아버지임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꼭 빼닮았다. 오뚝하고 아름다운 콧날도, 드러난 이마의 형태도, 그 밑에 숨은 긴 속눈썹도. 지금도 눈 속에 박혀 있는 소타 씨의 그 아름다운 모습과 노인의 얼굴은 판박이였다. 그러나 소타 씨가 지닌 강인한 생명력 같은 것이 저 노인에게는 쏙 빠져 있다. 얼굴 가득 깊은 주름이 새겨져 있고 낯빛은 종이로 만들어진 듯 새하였다. 머리맡에 부채처럼 펼쳐놓은 긴 머리카락도, 눈썹도 속눈썹도, 눈처럼 새하얗다. 왼손 검지에는 클립 같은 작은 기계가 끼워져 있다. 그 손등에 얇게 튀어나온 혈관에도 색깔다운 게 거의 없었다. 환자복으로 보이는 목덜미와 빗장뼈는 물을 가득 채울 수 있을 정도로 깊고 어둡게 패여 있다. 침대에 누워 조용히 잠든 저 노인은 깊은 상처를 입어 죽음의 위기에 몰린 대형 야생동물처럼 보였다.

- 갑자기, 낮고 쉰 목소리가 들렸다.
"... 소타는, 실패했나?"
너무 놀라 눈을 부릅떴다. 무나카타 노인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 "저, 저세상으로 들어갈 방법을 알고 싶어요!"
"... 왜?"
"아니..."

왜라니?

"소타 씨를 구해야 하니까요."
"쓸데없는 짓이야."

 

- "소타는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신을 품은 요석으로 지내야 해. 현세에 사는 우리 손은 이제 닿을 수 없어."
선언 같은 그 말을 듣자 내 등골이 흠칫 떨렸다.
"자네는 모르겠지만, 인간으로서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명예야. 소타는 부족한 제자였으나... 그랬나? 마지막에는 각오했나 보군..."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 마치 천장이 너무 눈부셔 견딜 수 없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 "자네는 소타의 마음을 저버릴 생각인가?"
할아버지는 색이 없는 표정으로 천천히 음미하듯 말했다. 

 

- "요석은 누가 꽂았나?"

"아, 그게..."

"자네가 소타를 꽂았나?"

"네. 그게... 하지만."

"대답하게!"

갑자기 할아버지가 큰 소리를 냈다.
"접니다!"
떠밀리듯 대답했다.
"그래? 그걸로 됐어! 자네가 꽂지 않았으면 어젯밤 백만 명이 죽었어. 자네는 그걸 막은 거야. 그것을 평생 자랑으로 가슴에 새기고 입을 다물고..."
어조가 강해졌다. 공기를 흔드는 듯한 목소리로 할아버지가 말을 뱉어냈다.
"...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가!"
강풍과 같은 위압에 저절로 뒷걸음쳤다. 할아버지는 길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하는 데 지친 듯 다시 눈을 감고 얼굴을 천장으로 향한 채 조용히 말했다.
"... 일반인은 관여하지 말아야 할 일이야. 다 잊어."
그 자리에 멀거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가슴속에서는 심장이 쿵쿵 뛰고 뺨이 활활 타는 듯 뜨거웠다. 숨을 한 번 깊이들이 쉬었다.

 

- 상반신을 일으킨 할아버지는 하아... 천천히 시간을 들여 긴 숨을 토해냈다. 눈을 감고 있는 그 얼굴에 여기저기 땀이 나있었다. 그의 오른팔이 없다는 사실 오른쪽 어깨부터 툭 떨어진 듯 환자복이 푹 꺼져 있는 것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저세상은 아름답지만 죽은 자들의 장소야."
풀무처럼 가슴을 들썩이며 할아버지가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다시 차분한 위엄이 돌아와 있었다. 눈을 뜨고 충혈된 눈으로 똑바로 나를 봤다.
"... 자네는 무섭지 않나?"
그 질문에, 언젠가 소타 씨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때 에히메에서도 고베에서도 우리는 전우였다. 무적이 된 기분이었다. 우리만 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을, 아무도 모르게 해 왔다. 하늘 꼭대기에도, 둘이서 표시를 해뒀다.
"... 무섭지 않아요." 나는 할아버지를 노려보며 말했다. "죽고 사는 건 그냥 운이라고 어려서부터 쭉 생각해 왔어요.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소타 씨가 없는 세계가 무서워요!"
두 눈의 깊은 곳이 뜨거워지더니 눈물이 또 멋대로 흘러나왔다. 하지만 더는 울고 싶지 않아서 눈을 꼭 감았다.

 

- 너무나 큰, 진심으로 기뻐하는 듯한 웃음이었다. 야위고 바싹 말라버린 듯 보이는 몸에서 이렇게 큰 소리가 나온다는 사실에 놀랐고 뭐가 그렇게 웃긴 일인지 이해할 수 없어 입을 벌리고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 아주 오랫동안 웃은 후 이제 다했다는 듯 할아버지는 입을 다물었다. 싱긋 입가에 웃음의 여운을 남긴 채 툭 내뱉었다.
"인간이 통과할 수 있는 뒷문은 평생 딱 하나뿐이야."
"네...?"
"자네는 뒷문 속 저세상을 봤겠지? 거기서 무엇을 봤나?"
"아니, 그게..."
갑자기 던져진 질문에 당황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저세상 풍경은 기억하려고 할수록 신기루처럼 멀어져 갔다. 하지만 그것은... 수없이 본 그 밤하늘의 초원은... 그곳을 걸은 것은... 그곳에서 만난 것은...
"어릴 때의 나와... 돌아가신 엄마... 요."

할아버지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저세상은 보는 사람에 따라 모습을 바꾸지. 인간 영혼의 수만큼 저세상이 있고 동시에 그 전부는 하나야."
그 말이 내게 스며들고 있음을 확인하듯 할아버지는 천천히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자네는 어릴 때 저세상에 들어가 헤맨 적이 있는 것 같군. 기억하나?"

 

- 그 질문에 번뜩 어떤 광경이 떠올랐다. 눈 내리는 밤, 차가운 진창을 혼자 걷는 모습. 눈이 쌓인 잔해 속에 문이 똑바로 서있는 모습. 어린 손으로 손잡이를 미는 모습. 그 끝에 눈부신 밤하늘이 펼쳐져 있던 것.
잠자코 내 얼굴을 탐색하듯 보던 할아버지가 소타 씨와 흡사한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문이, 자네가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뒷문이야. 그 문을 찾게."
그리고는 다시 눈을 감고 깊은 주름이 잡힌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제 가라고 노인은 말없이 얘기하고 있었다. 저 입술은 다시 열리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 입술 끝은 살며시, 정말 몇 밀리미터 정도, 미소를 남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할아버지 앞에 똑바로 서서 깊고 오래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나도 말없이 병실을 나섰다.

 

- 아파트 문을 열자 그리운 소타 씨의 냄새가 났다. 먼 외국처럼 한없이 동경하나 손에 닿지 않는, 안타까운 냄새였다. 불과 하루 전에는 이 방에 함께 있었다. 아니다. 겨우 14시간 전이었는데 아주, 정말 오래전 일인 것만 같았다.
4평 크기의 서재는 어질러져 있었다. 적당히 자유롭게 바닥에 쌓여 있던 책들은 무너져 있고 책장에 꽂혀 있던 책의 반쯤은 다다미에 흩어져 있다. 열린 창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그런 책들의 페이지를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내며 흔들고 있다. 미미즈 탓이구나. 천천히 기억해 내듯 이해했다. 요석이 빠진 순간 느꼈던 상하 진동이 이 방의 정교한 질서를 무너뜨린 것이다. 

 

- 우선 책부터 정리해야겠다. 
부엌 옆에 조그만 세면실이 있고 그 안에 욕실이 있었다. 샤워기와 아주 조그만 욕조도 달려 있다. 치카에게 받은 옷을 벗고 조심스럽게 개어 세탁기 위에 놓았다. 알몸이 되어 욕실로 들어가 샤워 헤드에서 나오는 뜨거운 물을 머리부터 뒤집어썼다. 내 머리카락은 이제까지 경험해 본 적 없을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 있고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물은 시커멓고 더러웠다. 바닥 타일을 따라 흐르는 물이 아주 투명해질 때까지 오랫동안 머리와 온몸을 씻었다. 그러고 나니 발바닥에 신경이 미쳤다. 깊은 자상 여러 개가 양쪽 발바닥에 나 있었다. 들러붙은 피를 손가락 끝으로 문질러 지우고 상처에 박힌 작은 돌들을 손톱으로 하나씩 제거했다.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어금니를 악물었으나 머릿속 심지 저 먼 곳부터 통증이 찾아왔다.

 

- 목욕 수건은 세탁기 위의 조그만 선반에 깨끗하게 개어져 수납되어 있었다. 같은 선반의 플라스틱 통에 약도 들어 있었다. 샴푸와 비누, 칫솔과 면도기, 헤어 무스 등도 모두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제대로 된 어른이었구나. 이런 모든 꼼꼼함이 너무 애달팠다. 수건 한 장을 빌려 온몸을 닦고 통에 든 밴드를 발바닥에 붙였다.

 

- 정신을 차려보니 규슈를 나온 날과 같은 옷, 머리 스타일이다. 그런데 내 몸에서는 뭔가가 결정적으로 사라졌다. 자신을 세상에 묶어둬야 하는 무게 같은 무언가가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겉모습은 전과 다름없는데 체중이 반으로 줄어든 듯한 몸이 공기로 더 채워진 듯, 허무했다.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 마음대로 주어지고 일방적으로 맡기더니 이유도 없이 빼앗아 갔다. 또 그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웃기지 마. 이 세계의 관리자나 신에게 호통을 치고 싶었다. 세면실 거울에 비친 조금 야윈 자기 얼굴을 노려보며 "웃기지 마"라고 조그맣게 소리 내어 말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자기가 듣기에도 한심할 정도로, 울음을 머금은 채 떨리고 있었다. 


- 방을 나오기 직전에 무너진 책들을 싹 치웠다. 어떤 규칙으로 책장에 꽂는지는 몰라 흩어진 책을 무릎 높이까지 나란히 바닥에 쌓았다. 그리고 창문과 커튼을 닫았다. 
"소타 씨. 신발 좀 빌릴게요."
그렇게 중얼거리고 현관에 있던 소타 씨의 검은 작업 부츠에 발을 넣었다. 내게는 너무 컸으나 신발 끈을 세게 당겨 발에 단단히 묶어 그 커다란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 아파트 문을 잠그고 역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 소타 씨와 만나고 5일째 되는 아침이었다.

 

- "어디든 가겠다고 했잖아요?"
"어머? 너, 여기는..."
타마키 이모도 화면을 들여다보며 놀랐다. 나는 둘 사이를 통과해 뒷자리로 옮겨 시트에 앉았다. 경찰을 부르게 할 수도, 규슈에 돌아갈 수도 없다. 세리자와 씨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데려다준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해달라고 하면 된다. 타마키 이모도 그토록 나를 혼자 두기 싫다면 따라오면 그만이다. 다이진은 무슨 생각인지, 이미 좌석 끝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었다.
뭐든 괜찮아. 다들 맘대로 하라고 해. 나와는 상관없어. 나는 그저 내 뒷문을 찾으러 갈 거야. 안전띠를 매고 세리자와 씨를 보며 강하게 말했다.
"부탁해요. 꼭 가야 해요."

"진짜...?"
한참 내 눈을 바라본 후 세리자와 씨는 포기한 듯 숨을 내쉬었다. 사이드브레이크를 올리면서 툭 내뱉었다.
"이거 원, 오늘 안으로는 못 돌아오겠네."

 

-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세리자와 씨는 말없이 핸들을 잡고 있었고 타마키 이모는 부루퉁한 얼굴로 거리를 노려보고 있고 다이진은 내 옆 시트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잠들었다. 오픈카에 그대로 불어오는 바람과 강력한 가속이 내 몸을 시트에 밀어붙였다. 9월 아침의 하늘은 한없이 투명하고 푸르고, 바람은 촉촉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 차가 빌딩 그늘을 드나들 때마다 눈꺼풀 안쪽에 스르륵 불가사의한 그림이 흘렀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머릿속을 가득 채운 감정의 윤곽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분노가 애매해지고 초조함이 애매해지고 외로움도 흐려졌다. 동시에 내내 긴장하고 있던 온몸의 근육에서 힘이 쏙 빠졌다.

지금만은... 녹아가는 감각 속에서 생각했다. 지금만은 눈을 감는 것을, 힘을 빼는 것을, 감정이 애매해지는 것을, 스스로 허락하기로 하자. 지금만은 모르는 누군가의 운전에, 그 가속에, 전부 맡기자. 다음에 눈을 뜨면 나는 아마도 어떤 것과 대면해야 한다. 싸워야만 한다. 불과 몇 시간 뒤에는 틀림없이 무언가와 마주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만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축축한 수렁에 끌려 들어가듯 잠에 빠졌다.

 

- 너무나 안타까워 타마키 이모는 나를, 어린 스즈메를 꼭 안고 눈물을 흘리며 "우리 집 아이가 되렴"이라고 말했다. 그때 품에 안긴 조그맣고 차가운 몸을 타마키 이모는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 ... 12년, 조그맣게 읊조렸다. ... 12년.

"... 그래. 헤아려보니 그로부터 12년이야. 규슈로 데리고 돌아와 줄곧 둘이 둘이서만 살았어. 그랬는데..."

후, 메마른 소리가 나서 타마키 이모는 고개를 돌렸다. 세리자와 씨가 무표정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 아. 연기 싫으세요?" 타마키 씨의 눈길을 느끼고 별일 아니라는 듯 그가 말했다.
"... 당신 차인데 뭘." 타마키 이모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맞아, 남이지. 이런 이야기를 해봤자 어쩌라고. 타마키 이모는 천천히 제정신을 차리며 생각했다. 이 사람이 이런 식으로 행동해서 그나마 다행이다. 상대를 신경 쓰지 않으니 상대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피차 기대하지 않으니 실망할 일도 없다. 어차피 겨우 하루 정도 어울리는 사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다른 사람 일에 관심 없는 사람이 제일 좋다. 타마키 이모는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야 비로소 호감 같은 감정을 세리자와 씨에게 품게 되었다. 세리자와 씨는 맛있게 담배를 피우면서 말했다.  

 

- "그런데요, 이제부터 그 스즈메의 본가로 돌아가는 거잖아요.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곳에 소타가 있다는 건가요?"
"글쎄... 하지만 그곳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어."
타마키 씨는 대답하고 뒷좌석을 돌아봤다. 나는 여전히 완전히 곯아떨어져 있었다.
"저기, 지금 도쿄로 돌아가 주지 않을래? 그러면 이 아이도그만 포기할지도 모르고."
"아니요. 저는 소타에게 빌려준 2만 엔을 받아야 해서요."
"뭐?" 타마키 이모는 어이가 없었다. "학생, 빚쟁이 같아."
하하하. 세리자와 씨는 칭찬이라도 받은 듯 호탕하게 웃었다.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르겠다. 타마키 이모는 그의 환한 얼굴을 흘끗 보며 생각했다. 이 애, 교사와 전혀 어울리지 않네. 

 

- 미미즈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땅울림도 이제는 사라졌다.
소타 씨가 누르고 있는 거야... 소타 씨가 요석이 되어 미미즈를 봉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쿄 뒷문에서 본 그 풍경. 검은 언덕과 그곳에 박힌 의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것은, 압도적으로 고독한 광경이었다.

 

- "요석은..." 더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조그맣게 혼잣말처럼 물었다. "토지시만이 아니라 누구든 될 수 있어...?"

 

- 타마키 이모는 서둘러 그를 말렸다. 여기까지 온 김에 본가에 갈 생각이라는 것과 그렇게 해야 틀림없이 스즈메의 마음이 풀릴 것이라고 설명했다. 통과의례 같은 것이라고 타마키 이모는 말했다. 사춘기는 원래 그런 거라고 전에 누군가에게 들은 듯한 논리를 술술 떠들었다. 그렇게 말하면서 머릿속으로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자신을 문득 발견했다. 틀림없이 완전히 틀렸을 것이다. 타마키 이모는 자기 안의 위화감을, 불길한 예감을, 이야기하면서 마침내 인정했다. 아마도 내 기대대로 모든 게 쉽게 진행되지 않을 것이다. 스즈메의 생각과 안고 있는 문제, 그것은 아마도 내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리라. 타마키 이모는 이유도 모른 채, 하지만 본능적으로 그렇게 확신했다. 

 

- "나도 있고 싶어서 같이 있었던 건 아니야." 하고 싶지 않으면서 소리치고 있다.
"규슈로 데려가 달라고 내가 부탁한 게 아니잖아! 이모가 그랬잖아. 우리 집 아이가 되라며!"
스즈메. 우리 집 아이가 되렴. 눈 온 그날 밤에 나를 꼭 안았던 온기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그런 거 나는 몰라!"
반쯤 웃으며 타마키 이모가 말했다. 팔짱을 끼고 내게 호통쳤다.
"너, 이제 우리 집에서 나가!"
타마키 이모의 입 끝이 웃고 있다.
"내 인생을 돌려줘!"
그러면서 타마키 이모는 울고 있다. 이상하네. 순간 생각했다. 이것은 타마키 이모가 아니야. 하악! 다이진이 내 옆에서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타마키 이모는, 타마키 이모의 몸은 두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입가만 웃고 가만히 서 있었다. 

 

- 아마도 나는 어떤 역할을 맡았다가 막 끝낸 것 같네. 이유도 모른 채 왠지 세리자와 씨는 그렇게 생각했다. 소타 일은 그냥 스즈메에게 맡겨두면 잘 될 듯하다. 그리고 스즈메에게는 애정 과다 이모와 두 마리의 수수께끼 같은 고양이가 있다. 응. 어떻게든 될 거야, 틀림없이. 나는 이제 슬슬 내 인생으로 돌아갈 때다. 좋은 선생이 될 거라고 확인도 받았고. 

 

- 다이진이 놀라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그로부터 깡마른 몸이 점점 부풀었다. 축 늘어졌던 귀와 꼬리가 신이 난 듯 힘껏 솟았다. 
"스즈메, 가자!"
다이후쿠처럼 통통한 새끼 고양이로 돌아온 다이진이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문의 손잡이를 잡고 열었다. 에어록이 열린 듯 푸시, 바람이 밀려오며 내 몸을 밀었다. 열린 문 안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 가득 뜬 하늘이었다.

 

- 꿈에서 계속 보아온 별밤이 지금, 눈앞에 있었다. 그저 보이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그 바람에는 낯익은 냄새가 났고 그 빛에는 만질 수 있을듯한 실존이 있었다. 들어갈 수 있어. 이상하게도 그런 확신이 들었다. 이것은 나를 위한 뒷문이야. 어느새 사다이진과 다이진도 나란히 내 옆에 서 있었다.

 

- "이모, 나, 다녀올게!"
"뭐?! 어딜?!"
"좋아하는 사람에게!"
대답하고 문으로 뛰어들었다. 고양이들도 따라왔다. 마치 프리즘에 둘러싸인 듯 형형색색의 눈부신 빛이 나를 감쌌다. 

 

- 별이 뜬 밤하늘 속으로 떨어지고 있다.
머리 위를 올려다보니 내가 통과한 문이 보였다. 문 속에 전파탑에 걸린 보름달이 조그맣게 보였다. 눈을 깜빡이자, 그곳에는 문이 아니라 커다란 보름달만 있다. 달을 통과해 이 세상에서 저세상으로 떨어지고 있구나. 눈을 뜬 채 꿈을 꾸는 듯한 기묘하면서도 또렷한 감각을 느끼며 생각했다. 
양옆에는 검은 사다이진과 하얀 다이진이 바람에 털을 날리며 나와 함께 떨어지고 있다. 눈앞에는 눈부신 은하수가 있고 눈 아래에는 검은 구름이 지평선 너머까지 덮고 있다. 구름으로 단단히 뚜껑을 닫은 듯 지표 상황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내 몸은 그 구름 속으로 떨어지고 있다. 구름이 머리 위의 별을 감추어 일시적으로 암흑에 휩싸였다. 
이윽고 눈 아래의 구름 틈으로 설핏 지표가 비쳐 보이기 시작했다. 뭔가가 번쩍번쩍 빛나고 있다.  

 

- 도와주려는 거구나. 다이진이 문 다리가 아주 조금 올라온다. 틈으로 푸르고 차가운 빛이 새어 나온다. 다이진의 몸도 서리로 뒤덮인다. 나는 숨을 내뱉고 들이쉰 다음 다시 힘껏 당긴다. 의자가 조금 빠진다. 푸른빛이 더 눈부시게 쏟아지고 우리에게 쏟아지는 냉기도 더 강해진다. 아주 먼 곳에서 사다이진의 포효가 또 들려온다. 날뛰는 미미즈의 땅울림이 아까부터 지면을 단속적으로 흔들고 있다. 의자를 빼면서 필사적으로 소리친다. 
"소타 씨, 나, 여기까지 왔어요..."

서리가 어깨에 이어 얼굴까지 올라온다. 속눈썹까지 가는 얼음이 붙는다.
"소타 씨, 대답해요. 소타 씨, 소타 씨...!"

- 내 몸에서는 아까부터 감각이 사라지고 있다. 속눈썹도 얼어붙어 눈을 뜰 수 없다. 그래도 힘을 늦추지 않는다. 소타 씨를 빼내겠다는 마음만이 내 몸에 뜨거운 열을 보내고 있다. 덜 거덕, 또 다리가 조금 올라온다. 냉기의 빛이 나를 더 얼린다. 그래도 나는...

- 저, 학생.
그때 소타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서지? 의자에서 들리는 게 아니다. 귀로 들리는 목소리가 아니다.
이 근처에 폐허 없니?
이 목소리는, 몸의 안쪽에서 울리고 있다.

- 폐허?
내 목소리가 들린다. 얼어붙은 눈꺼풀 안쪽에서 의아해하는 표정이 이쪽을 보고 있다. 내가 보인다. 자전거에 앉아 있고 그 뒤로는 아침의 푸른 바다가 있다. 이것은 4일 전, 처음 만났을 때의 소타 씨의 기억이다.

 

- 너는... 죽는 게 무섭지 않아?
그렇게 말하고 소타 씨는 나를 올려다본다. 여행에 나서고 이틀째, 폐교에서 문단속했을 때다.
무섭지 않아!
의자를 덮듯 감싸고 알루미늄 문을 미는 내가 진흙투성이 얼굴로 소리친다.

- 저기요. 우리 너무 굉장하지 않아요?
문단속을 끝낸 뒤의 득의양양한 내 얼굴.
응. 맞아. 틀림없이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
민박집 방에서 치카에게 말하는 유카타 차림의 내 등.
저기요. 소타 씨도 같이 놀아요.
억지로 소타 씨 위에 앉은 내가 장난스럽게 웃고 있다. 

참, 인기 많으시네. 소타 씨는.
질투에 토라진 얼굴을 전혀 숨기지 못한다.
소타 씨, 기다려요!
다리에서 몸을 던질 때의 나는, 홀로 남고 싶지 않아 필사적이었구나.

 

- 아... 이렇게...
소타 씨는 서글프게 중얼댄다.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들여다본다.
이제 끝인가...? 이렇게...
도쿄 상공의 미미즈 위에서 서서히 요석이 되어가는 소타 씨가 말하고 있다. 시야가 점점 얼음으로 닫힌다.
하지만 나는... 너를 만나...
내 얼굴이 울고 있다. 바보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다. 

너를 만났는데...!
내 우는 얼굴을 마지막으로 소타 씨의 시야가 검게 닫힌다.

"소타 씨!"
저도 모르게 소리친다. 하지만 당연히 그 목소리는 소타 씨에게는 닿지 않는다. 내가 듣는 소리는 과거의, 요석이 되어 버렸을 때의 소타 씨의 마음이다. 어둠에 갇힌 채 소타 씨는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필사적으로 소리치고 있다. 더는 이 세상에 닿지 않을 목소리로 절규하고 있다.
사라지고 싶지 않아.

더 살고 싶어. 살고 싶어.
죽는 게 무서워. 살고 싶어. 살고 싶어. 살고 싶어. 더...

 

"나도 그래요!"

움켜쥐고 있는 의자를 향해 소리친다.
"나도 더 살고 싶어요! 목소리를 듣고 싶어요. 혼자는 무서워 죽는 게 무서워... 소타 씨...!"
그러니까 부탁이야, 눈을 떠요. 얼어붙은 몸을 움직여 눈꺼풀이 얼음에 붙어버린 채 의자 등판에 얼굴을 댄다. 눈꺼풀 속으로 본 소타 씨의 기억을, 자애롭게 훑는다. 그렇게 봐주었구나. 늘 내 모습을 바라보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구나. 눈꺼풀 안에 차오른 눈물이 타는 듯 뜨겁다. 소타 씨, 그에게만 들리게 속삭인다.
당신이 없는 세계는, 너무 무서워 견딜 수 없어요.
그러니까 일어나요. 눈을 떠요.
진심으로 바라면서 차가운 의자에 입술을 댔다.

 

- 문이 철컥 열렸다. 너무 눈부셔 눈을 가늘게 뜬다. 그곳에 누가 있다. 이쪽으로 손을 뻗고 있다. 그의 세계로 들어오려 한다. 그도 손을 뻗으려 한다. 얼음이 깨지고 서로의 손가락 끝이 닿는다. 서로의 손을 잡는다. 열이 흘러 들어온다. 그 가녀린 손이 힘껏 그를 당긴다. 뜨거운 눈물이 그의 눈에서 흘러넘친다. 얼음이 녹고 깨진다. 
그리고 그의 몸은 드디어 의자로부터 떨어진다. 그는 문을 넘는다.

- 푸른빛이 폭발하며 의자가 빠졌다. 
나는 의자를 잡은 채 뒤로 벌렁 나가떨어져 언덕 경사면을 데굴데굴 굴러 떨어졌다. 빙빙 도는 시야 속에 의자 다리를 악문 다이진의 모습도 슬쩍 보였다. 어쩔 수 없이 굴러 떨어지면서도 몸을 얼어붙게 하던 냉기가 사라졌음을 느꼈다. 그때 등에 강한 충격이 찾아오고 문득 의식이 멀어졌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이었다. 몸이 멈추자마자 눈을 부릅떴다. 눈앞에, 그가 있다. 소타 씨가 눈을 감고 누워있다. 사람 모습의 소타 씨였다. 감긴 눈의 긴 속눈썹이 깎아지른 듯한 뺨에 옅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왼쪽 눈 아래의 완벽한 위치에 작은 점이 있다.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에는 따뜻한 혈색이 있다. 천천히 호흡하고 있다. 

우리 몸에 열이 돌아오고 있음을 나는 일출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느끼고 있다. 

그가, 살며시 눈을 뜨고 나를 봤다.

- "... 스즈메?"
"소타 씨..."
소타 씨가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켰다. 나도 일어났다.

"나는..."
막 꿈에서 깬 듯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소타 씨의 어깨너머에 누워있는 하얀 털 뭉치를 발견했다.
"다이진?!"
서둘러 달려갔다. 하얀 새끼 고양이가 진흙 속에 축 늘어져 쓰러져 있다. 그 작은 몸을 양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 몸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왜 그래? 괜찮아?!"

부들부들 가늘게 몸을 떨면서 다이진이 슬며시 눈을 떴다.
"스즈메, 다이진은 말이야... 스즈메 네 집 아이가 되진 못했네."

잠긴 목소리가 나왔다.

"뭐?"

- 우리 집 아이 할래? 별생각 없이 던졌던 말을 바로 떠올렸다. 응! 그때 다이진은 그렇게 대답했다. 일단 열렸던 다이진의 눈동자가 다시 감겼다. 가벼운 새끼 고양이의 몸이 돌처럼 무겁고 점차 차가워졌다.
"... 다이진?"
"스즈메의 손으로, 원래 자리에 돌려놓아줘."

 

- 내 손안에 석상이 있었다. 내가 규슈에서 뽑았을 때와 똑같이 끝에 짧은 지팡이 같은 게 달린 석상이었다. 다이진은 차가운 요석으로 돌아가 버렸다. 갑자기 눈물이 솟구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여행 내내 바라던 일인데... 나는 울고 있다. 
그때 고통스러운 짐승의 비명이 주변에 울려 퍼졌다. 머리 위에서였다. 올려다보니 사다이진이 미미즈에 휘감겨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저게... 두 번째 요석인가?!"
소타 씨가 목소리를 높이며 놀란 얼굴로 나를 봤다.
"네가 데려왔어?!"

이번에는 등 뒤에서 땅울림이 들려 우리는 돌아봤다. 단단하게 굳어 있던 검은 언덕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미즈의 꼬리가 자유로워졌어. 뒷문으로 온몸이 나갈 거야!"

 

- 맞다! 새삼스레 깨닫는다. 지금 미미즈에는 요석이 전혀 없다. 양손에 든 석상을 저도 모르게 가슴에 꼭 품었다. 
머리 위에서는 사다이진이 또 울부짖었다. 크게 입을 벌리고 검붉게 빛나는 미미즈의 몸통을 물어뜯는다. 상공의 미미즈의 몸통에서 피라고도 용암이라고도 할 수 없는 물질이 분출한다. 미미즈가 격렬하게 꿈틀대자 지상의 검은 언덕도 파도가 일렁이듯 움직이며 풀어진다.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발밑이 흔들린다. 

 

- 미미즈의 검은 꼬리가 빠르게 붉은 기를 되찾으면서 잔해 파편들을 털어내듯 지표를 쓸고 간다. 자동차와 집과 전봇대가 나뭇잎처럼 하늘을 난다. 그리고 그것들이 후드득 머리 위로 떨어진다. 반사적으로 머리를 감싸고 진흙 속에 웅크리고 만다.
"...?"
내 몸을 커다란 손이 훅 들어 올렸다. 소타 씨였다. 나를 두 팔로 안은 채 달리기 시작한다. 달리는 그의 바로 뒤에, 바로 옆에, 눈앞에, 거대한 잔해들이 떨어진다. 그 사이를 누비며 달린다. 진흙과 잔해의 파편이 눈앞을 정신없이 스쳐 간다. 순간 그의 듬직한 모습에 취하고 만다. 소타 씨의 본래 모습에, 동작의 정확함과 강력함에 현기증이 날 정도로 감동한다. 그때 바로 눈앞에 콘크리트 덩어리가 떨어지는 바람에 소타 씨는 몸의 균형을 잃고 땅에 구를 뻔했다. 나는 직접 그의 팔에서 뛰어내려 진흙에 한쪽 손을 대고 달리기 시작했다.  
"스즈메!" 소타 씨가 나란히 달리면서 걱정스럽게 말했다.

"난 괜찮아요!" 소리쳤다.

맞다, 우리는 전우다. 둘이라면 무적이다. 세계의 이면에서라도 우리 둘이라면 싸울 수 있다.

 

-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타오르는 잔해 속에서 진흙탕을 박차고 달리며 물었다.

"목소리를 듣고, 들려줘."

"네?"
"따라와." 

 

- "스즈메..."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서늘한 손가락 끝이 내 뺨을 살며시 쓰다듬는다. 눈을 뜨니 소타 씨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타 씨..."
수풀 속에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소타 씨가 하얀 롱 셔츠를 벗어 내 어깨에 살짝 걸쳐주었다. 교복이 너덜너덜 여기저기 찢어져 있음을 조금 뒤에야 알아차렸다.
"우리..."

"흙으로 돌아간 미미즈와 함께 땅으로 떨어졌어. 안 다쳤어?"
아픈 데도 없고 몸도 잘 움직였다. "응"이라고 대답하며 천천히 일어났다.

 

- 페트병과 빈 병, 목재와 플라스틱 장난감 등에 뒤섞여 노란 의자가 떨어져 있었다. 풀밭에 주저앉아 낯익은 의자를 들었다. 틀림없어. 엄마가 만들어준 등판에 눈동자를 새긴 나만을 위한 어린이용 의자였다. 휙 뒤집어보니 역시 다리 하나가 빠져 있다. 하지만 아주 살짝 위화감이 들었다. 새것 같네. 잠시 생각한 끝에 알아차렸다. 좌석에 생긴 흠집도, 선명한 노란색 페인트도, 기억 속 의자보다 훨씬 새로웠다. 만든 지 얼마 안 된 윤기가 막 흠집이 생긴 생생함이 그 의자에는 있었다. 

 

- "그날 쓰나미에 휩쓸려 갔던 이 의자를..."
머리에 떠오른 말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여기서 주웠어요."
다시 의자를 주운 장소를 둘러봤다. 수풀 속에 마치 파도에 밀려온 먼 나라의 잡동사니처럼 온갖 소품이 일렬로 죽 늘어서 있다. 모든 것이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보내는 오래된 편지 같았다. 

 

- 그의 눈길을 따라가니 아주 멀리 있는 언덕 능선에 하얀빛이 도는 새벽 보름달이 떠 있고 그쪽을 향해 조그만 그림자가 천천히 걷고 있다. 

 

-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도 실은 내내 알고 있었다. 

 

- 초원의 바람은 차가워 내뱉는 숨결도 하였다.
소타 씨가 걸쳐준 롱 셔츠는 내게 너무 커서 빨간 교복 리본을 풀어 허리춤에 꽉 묶었다. 그렇게 입으니까 하얀 원피스 같다. 발에는 도쿄에서 신고 나온 소타 씨의 검고 커다란 부츠가 신겨 있다. 포니테일이 풀린 머리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스트레이트였다. 내 머리는 어느새 그 무렵의 어머니와 비슷한 길이로 자라 있었다. 

 

- 눈길 끝에 풀 속에 웅크리고 있는 조그만 등이 보였다. 의자를 살짝 풀밭에 놓고 진흙투성이 다운재킷을 입은 등에게 다가가 속삭이듯 말을 걸었다. 
"스즈메."
걷다 지치고 찾다가 지쳐 절망에 잠긴 소녀는 천천히 나를 돌아봤다. 네 살의 나였다. 엄마를 찾다가 우연히 뒷문을 통과해 저세상에서 길을 잃어버린 나였다. 놀란 듯 나를 바라보는 그 눈동자에는 오랫동안 이어진 악몽의 출구를 드디어 발견한 듯한 기대와 불안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하지만 조금이라도 슬픔을 덜어주고 싶어 필사적으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 "... 엄마?"

스즈메가 물었다.
망설인다. 스즈메가 뭘 바라는지 가슴 아플 정도로 잘 알고 ... 

 

- "나,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어...!"
우리에게 그렇게 말했다.
"왜?! 엄마는 있어! 스즈메를 찾고 있다고!"
"스즈메!"
스즈메는 몸을 비틀어 나를 밀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도망치듯 내게서 멀어진다. 달리면서 별이 뜬 하늘에 대고 소리친다.
"엄마, 어딨어? 엄마!"

- 스즈메는 엄마를, 나를, 세상 전체를 책망하는 듯 격렬하게 울기 시작했다. 토할 듯 고통스럽게, 몸 전체에서 짜내듯, 스즈메는 계속 울었다. 격렬하게 몸을 흔드는 그녀 너머로 저세상의 붉은 저녁 해가 저물고 있다. 마치 그녀의 절망을 비추듯 피처럼 짙고 무거운 저녁 풍경이었다. 그 풍경이 갑자기 일그러지며 번졌다. 나도, 울고 있다. 

 

- "엄마..."
그 말을 입 밖에 내고 나니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눈앞에서 계속 울고 있는 스즈메의 고통은 내 고통이었다. 둘은 완벽하게 똑같았다. 그녀의 절망도 고독도 질식할 듯한 슬픔도 타는 듯한 분노도, 모든 게 똑같은 강도를 유지한 채 여전히 내 안에 있었다. 토해내듯 나도 울었다. 우리는 풀밭에 앉아 하염없이 울었다. 

 

- 무너져 버린 듯한 스즈메의 울음을 들으며 생각했다. 하지만.
안 돼. 이대로는 안 돼. 울음을 그쳐야 해. 스즈메와 나는 달라. 나 역시 지금도 약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후로 12년을 더 살았다. 살아온 것이다. 스즈메는 외톨이지만 이제 나는 아니다. 내가 지금 뭔가 하지 않으면 스즈메는 이대로 정말 완전히, 이 세상에 혼자 남게 된다. 살아갈 수 없게 된다.

 

-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눈 끝에 노란 게 보였다. 손등으로 두 눈을 꾹 눌러 눈물을 닦고 그 어린이용 의자를 들고는 스즈메에게 달려갔다. 

 

- "...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미소를 지으면서 할 말을 찾았다. 정신을 차리니 태양은 구름 밑으로 숨어 주변은 투명한 군청색으로 감싸여 있었다.
"있잖아, 스즈메. 지금은 정말 슬퍼도..."
나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사실뿐이다. 아주 단순한, 진실뿐이다.
"스즈메는 앞으로, 아주 잘 자랄 거야."
바람이 강하게 불어와 우리의 눈물을 뺨에서 하늘로 날렸다. 하늘은 더 캄캄해지고 별들은 더 빛났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미래 같은 거, 무섭지 않아!"
스즈메의 눈동자에 별이 비친다. 그곳까지 곧장 내 말이 닿기를 바라며 목소리에 힘을 주고 입가에 미소를 짓고 말했다.
"있잖아, 스즈메. 너는 앞으로 누군가를 아주 좋아하게 되고, 너를 아주 좋아하는 누군가와 많이 만날 거야. 지금은 캄캄하기만 할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꼭 아침이 와."
시간이 빨리 감기를 한 듯 별 가득한 하늘이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회전했다.

 

- "아침이 오고 또 밤이 오고 그것을 수없이 반복하며 너는 빛 속에서 어른이 될 거야. 틀림없이 그렇게 돼. 그렇게 되도록 다 정해져 있어. 아무도 방해할 수 없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도 스즈메를 방해할 수 없어."
유성 몇 개가 하늘에서 반짝이더니 이윽고 초원 너머 하늘이 분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아침이다. 아침 햇살을 받는 스즈메를 바라보며 다시 되풀이했다.
"너는 빛 속에서 어른이 될 거야."
그렇게 말하고 의자를 들고일어났다. 스즈메는 나를 올려다보면서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언니는 누구야?"
"나는 말이야..."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발밑의 풀과 꽃들이 바람에 휘날려 춤추듯 우리 주위를 맴돌았다. 몸을 굽혀 스즈메에게 노란 의자를 내밀며 말했다.

 

 

"나는, 스즈메의 내일이야."

 

 

 
- 소녀는 한 손으로 의자를 안고 다른 손으로 문손잡이를 쥐고 문을 열었다. 
문 너머는 잿빛 세계였다. 아직 새벽이 오기 전이라 어두컴컴하고 눈발이 날리고 있다. 새로 생긴 잔해가 여기저기에 검은 실루엣을 만들고 있다. 아직 위로받기 전 슬픔으로 가득 찬 3월의 토지가 문 너머에 펼쳐져 있었다. 


- 그곳으로 넘어가기 직전, 소녀는 딱 한 번 뒤를 돌아봤다.
멀리 언덕 위에 어른 둘의 실루엣이 보였다. 하나는 키가 큰 남자이고 다른 하나는 원피스를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여자였다. 그들은 똑바로 소녀를 바라보고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초원에서 은하수 별빛을 받는 둘의 모습은 정말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그 모습은 네 살 소녀의 눈에 영원히 각인되었다.
소녀는 다시 앞을 보고 힘차게 문을 넘어섰다. 노란색 의자를 소중히 안고 잿빛 세계로 소녀는 돌아왔다. 그리고 어린 손으로 그 문을 꼭 닫았다. 


- "... 나, 잊고 있었어요."
돌담에 세워진 문을 닫은 후 아직 손잡이를 쥔 채 그렇게 중얼거렸다.
"소중한 것은 이미 전부, 아주 오래전에 받았다는 것을."
옆에 선 소타 씨가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 끄덕였다. 하늘은 새벽이 오기 직전의 옅은 푸른색이었다

 

-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다. 잊고 싶지 않은 감정도 기억하고 싶은 일도, 대부분 다 이야기한 것 같다. 이제부터 하는 얘기는 짧은 후일담이다. 하지만 아마도 에필로그라고 부를 만하지는 않으리라. 에필로그라고 하기에는 내 앞으로의 날들이 아직 끊임없이 이어질 테니까.

- 문을 닫은 후- 
소타 씨와 함께 본가가 있던 곳까지 돌아오니 뜻밖의 인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리자와 씨였다. 타마키 이모와 나란히 수풀 속 콘크리트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그를 본 소타 씨의 표정이 조금 가관이었다. 놀라움과 성가심과 친근함이 뒤섞인 아주 복잡한 표정으로 당황해했다. 

- "소타 씨에게 빌려준 2만 엔을 받으러 왔대요."

그렇게 알려주자 "뭐?"라며 소타 씨는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 그는 결론을 내린 어조로 말했다. 아마도 나는 소타 씨가 함께 가자고 하기를 내심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가 그 말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내게는 돌아가야 할 세계가 있고 그에게는 가서 해야 할 일이 있다. 가증스러운 속도로 1량 편성의 짧은 열차가 우리 앞으로 미끄러져 들어와 문이 열렸다. 소타 씨는 말없이 열차에 올랐다. 
"저, 소타 씨!"

그가 돌아봤다. 발차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저..."
우물거리고 만다. 그때 갑자기 그가 플랫폼에 내려 나를 꼭 안았다.
"스즈메, 나를 구해줘서 고마워."
그가 내 귓가에 대고 말했다. 꼬옥, 강력한 힘으로 내 몸이 소타 씨에 감싸인다. 코끝이 찡해지더니 바보처럼 순식간에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꼭 만나러 갈게."
그는 강력한 목소리로 말하고 가볍게 내 몸에서 떨어졌다. 벨이 멈추고 문이 닫히자 새가 날카롭게 울었다. 소타 씨를 태운 열차가 멀어지는 광경을 가만히 지켜봤다. 소타 씨에게 받은 롱 셔츠가 아침 햇살을 반사해 내 몸을 눈부시게 빛나게 했다. 

- 남녀 불문하고 엄청나게 인기를 얻어, 내심 숨겨진 이모의 재능에 놀라고 말았다. 루미 씨와 미키 씨, 타마키 이모와 나까지 넷이 신나게 노래방 기계로 노래를 열창했고(이 며칠 동안, 쇼와시대 가요를 많이 알게 되었다), 치카와는 같은 방에 나란히 누워 창밖에 해가 뜰 때까지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출발할 때와 같은 항구에서 우리는 페리를 타고 미야자키로 돌아왔다. 미야자키 항구에는 미노루 씨가 나와 주었다. 타마키 이모는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왠지 기쁜 듯 보였다. 차에서도 전차에서도 페리에서도 이동 중에 스마트폰으로 본 일본 지도가 새삼 내게는 아주 특별한 것이 되었다. 

 

- 그로부터 몇 개월이 흘렀다.

- 매일 학교에 다니고 전보다 훨씬 열심히 공부하며 내년 수험을 준비했다. 타마키 이모와 말다툼이 늘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분 좋은 의견 교환 작업이기도 했고 이모가 만들어주는 도시락은 여전히 대단했다. 등하굣길에 보는 바다의 푸르름은 날마다 더 선명해졌다. 내 눈에는 말이다. 겨울이 깊어짐에 따라 바다의 푸르름도, 구름의 잿빛도, 아스팔트의 검은색도 더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세계는 빛 속에서 어느 한 점을 향해 계속 변화하는 듯했다.

- 마치 세계가 시작된 첫날처럼,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에 둘러싸인 2월 아침이었다. 불어오는 바람은 아직 단단하고 차가웠고, 투명하고 청결한 햇빛이 마을 구석구석을 비추고 있었다. 교복에 두꺼운 머플러를 둘둘 감고 해변 언덕길을 자전거로 내려가고 있었다. 교복 치마가 심호흡하듯 펄럭펄럭 부풀어 있다. 
언덕을 걸어오는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 그 사람은 롱 코트를 바람에 나부끼며 한 걸음 한 걸음 뚜벅뚜벅 내게 다가왔다. 한눈에 그라는 걸 알았다. 그날 모두가 하지 못한 이야기를, 이제부터 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가 멈췄다. 나도 자전거를 멈췄다. 바다내음을 가슴에 깊게 담고 말했다.

 

 

"잘 돌아왔어요."

 


 

- 소설 <스즈메의 문단속>은 내가 감독해 2022년에 개봉한 장편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을 소설로 엮은 것이다. 영화 제작과 동시에 소설을 쓰는 경험은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에 이어 세 번째인데 매번 쓰기 전에는 마음이 무겁지만(그렇게 일을 많이 해낼 순 없다 생각한다), 쓰기 시작하면 점점 즐거워지고 다 쓰고 나면 꼭 필요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여주인공 스즈메의 마음을 문장으로 따라가는 작업은 요컨대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더라도 내게는 꼭 해야 하는 작업이었다. 

- 이제부터 이야기의 근간을 조금 다뤄보겠다.
소설과 영화를 선입견 없이 즐기고 싶은 분은 부디 본문부터 읽으시길 (아니면 애니메이션부터 보시길) 바란다.


- 내가 38살 때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다. 내가 직접 피해자가 된 건 아니었으나 그 일은 내 40대를 관통해 일상을 지배하는 선율이 되었다.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소설을 쓰고 아이를 키우는 내내 그때 느낀 생각이 머리에 있었다.

왜, 어째서. 
왜 그 사람이.

왜 내가 아니라.

이대로 끝인가. 이대로 끝까지 도망칠 수 있을까. 계속 모르는 척하고 살 수 있나.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 한없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과,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이, 어느새 거의 같은 작업이 되어 있었다. 그 후로도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순간을 여러 번 목격했으나 내 저변에 흐르는 선율은 2011년에 고착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 지금도 그 선율을 들으면서 이 이야기를 썼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똑같은 생각을 되풀이하면서 비슷한 이야기를 (다른 이야기를 쓰려고 노력은 하겠지만) 이번에야말로 더 잘해보려고, 다음에는 더 관객과 독자가 즐길 수 있도록 하려고 계속 쓸 것 같다.

- 이번 영화도 소설도 당신에게 즐거움이 되길 바랍니다.


2022년 6월 신카이 마코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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