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고이케 마리코 / 오근영
출판 : 알에이치코리아
출간 : 2017.09.12
똑같이 대수롭잖은 일이라고 생각하는데도 마음의 품이 다르게 들어가는 일들이 있다. 어떤 것은 큰 부담감 없이 곧바로 손을 댈 수 있는데, 또 어떤 것은 애쓰는 마음을 먹어야만 시작할 수 있다. 언뜻 보기에는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은 평이한 일들이다.
무엇이 다른 걸까?
정말 차이가 존재한다면 그건 그것들을 바라보는 내 안에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누군가에게는 정말 싫은 일이 나에게는 의식조차 없이 평이하게 해낼 수 있는 일이듯이, 그저 그런 다름이 있을 뿐이라고.
고이케 마리코의 <괴담>은 그렇게 조금씩 '다른'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다름에 대한 시각과 감정은 읽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누군가는 이 이야기들에서 섬뜩함을, 또 누군가는 그리움과 위안을 얻을지도 모른다.
저자의 후기에서 가볍게 언급된 것처럼 일본의 환상괴기소설에서 흔히 보이는 '이치에 맞는 설명'이나 괴이 현상이 시작되게 된 '원인' 같은 것은 뚜렷하지 않다. 그것이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저자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거나, 그게 중요하지는 않기 때문이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당신의 일상이 평소처럼 흘러가는 것처럼, 괴이 또한 그저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 것일지도.
연이 닿는 이들에게만 살짝 엿보이고 마는, 그런 것일지도.
저자의 섬세한 묘사가 무척 마음에 든다.
눈 앞에서 보고 있는 듯한 전경과 나 또한 느껴본 적 있는 감정들이 주는 친숙함. 그리고 그 위로 살며시 덮이는 베일 같은 섬뜩함.
내가 느끼는 고이케 마리코의 공포는 아래가 아닌 위에서 온다.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으면서도 지나치게 현실적인 기이함.
그래서 마치 나나 내 주변에서 일어났을지도 모른다는, 한 다리 정도 건넌 지인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느끼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호'다. 목적과 위협이 가시화되지 않는 모호한 기이를 좋아하시는 분들께는 '호'일 거라 생각한다.
다른 취향이신 분들께는 '불호'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한 번쯤 읽어보시길 추천하고 싶다.
즐거웠다.
끝.
- 5월의 빗소리가 고즈넉하게 들린다.
비는 아파트의 작은 베란다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녹슨 물뿌리개를 조용히 두드리고 있다. 어제는 벌써 여름인가 싶게 맑은 날씨였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서늘한 기온이 되어 방안 공기가 쌀쌀하다.
- 나는 방금 아침인지 점심인지 모를 간단한 식사를 하고 나서 계속 멍하니 앉아 있다.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반복해서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은 여전히 나에게 일어난 일, 일어나고 있는 어떤 것에 고정되어 있다.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고, 실제로 회사 업무에도 지장이 생기기 시작했다.
- 하지만 단언컨대 나는 정신만은 멀쩡하다. 이성적으로 사물을 생각할 수 있고 어떤 사태에 대해 냉정하게 분석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공포나 두려움으로 나 스스로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없다. 신기할 정도다.
- 모든 기억은 지극히 선명하다. 빠뜨린 것, 깜빡 잊고 놓쳐버렸구나 싶은 건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나는 자신의 신상에 일어난 일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말이다.
- 축적된 피로나 며칠을 계속된 수면 부족이나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 그런 흔해빠진 이유에 매달려보려고 한 적도 없지는 않다. 피로나 스트레스 때문에 내 정신 상태가 조금이지만 평소와 달랐기 때문에 이상한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냈구나, 이렇게 치부해 버리면 모든 게 간단히 정리된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건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 내 시선은 지치지도 않고 이 검은 카디건으로 빨려 들어간다. 지극히 평범한 디자인으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얇은 여성용 카디건, 단추 네 개를 다 채우면 가슴이 브이 자로 벌어지는 스웨터처럼 되기도 한다.
양쪽 앞자락에 각각 주머니가 붙어 있다. 너무 길지도 않고 너무 짧지도 않다. 회사에 다니는 여성이 냉방 때문에 느껴지는 한기로부터 몸을 지키고 싶을 때나, 날씨가 약간 쌀쌀해졌을 때 걸치기 위해 둘둘 말아 가방 안에 넣어 가지고 다니는 정말 흔해 빠진, 여성이라면 누구나 하나쯤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런 카디건이다.
짐작컨대 비싼 것도 아니고 물론 유명 브랜드의 물건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뒷덜미에 붙어 있었을 상표는 가위로 잘라냈다. 품질 표시에는 폴리에스테르 백 퍼센트라고 되어 있고 손세탁을 하거나 드라이클리닝을 하라는 표시가 있다. 다리미질은 금지다.
- 등나무 칸막이는 예전에 동거하던 남자가 두고 간 물건이다. 그는 나를 만나기 전에 어느 공원에서 열린 일요 골동품시장에서 그것을 샀다고 했다.
나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골동품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여행을 즐기는 숙모에게 들은 이야기가 소녀 시절의 내게 공포감을 심어준 탓이다.
- 숙모가 아직 젊었을 때였다. 숙모는 독일의 시골 벽지에 있는 골동품 가게에서 샀다는 오래된 항아리를 도쿄의 자기 집 현관에 장식했다. 그날부터 밤이면 밤마다 묘하게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 시작되었고 몇 가지 원인 불명의 증세가 잇따라 나타나 1년 넘게 고생을 했다고 한다.
숙모는 우리 집에 올 때마다 음산한 표정으로 외국인 여자 유령이 때때로 발치에 서서 자기를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는 숙모가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병들기 시작한 게 아닌가 걱정이 되어 말도 꺼내지 못하고 마음을 졸였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고 나서 숙모는 여태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활달한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아무래도 독일에서 사 온 오래된 항아리가 자기 몸에 나타난 이상한 증세의 원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과감하게 처분해 버렸더니 순식간에 몸과 마음의 이상 증세가 사라지고 컨디션이 좋아졌다고 했다.
- 숙모는 역시 어떤 인연 같은 게 있었던 거라고, 솔직히 말해서 일본에 돌아와 항아리를 현관에 장식한 순간 왠지 모르게 섬뜩한 느낌이 들긴 했다고 말했다. 그 우아하고 오래된,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생명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괴이한 항아리의 원래 주인이 때때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서 있던 바로 그 백인 여성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내게 말했다.
- 그런 일이 있었던 탓에 나는 일찍부터 골동품에 편견을 가지게 되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물건이라도 거기에 얽힌 전 주인의 사연을 상상하면 무섭기만 했다.
- 스스로도 무서워서 비명을 지를 것 같은 상황에서도 상대의 공포를 더욱 부추기고 싶어 진다. 공포를 앞에 둔 사람은 그런 심리가 작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 "요코 씨, 그거 얼른 처분해 버리는 게 낫겠어요."
"처분? 어떻게요?"
"그런 물건을 쓰레기로 버릴 수도 없을 테니까... 그래요. 가까운 절에 갖고 가서 시주를 하던가."
"주인이 있는 물건인데요?"
그냥 농담으로 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한 순간, 나는 문득 스스로 내뱉은 말에 포박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 "걱정하지 말아요. 주인에게 잘 전해줄 테니까."
마치 만화에 나오는 그림처럼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어이없어하는 미나코 씨를 안심시키려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해하지 말아요. 이상한 의미로 하는 말 아니니까. 이 카디건 주인의 가족이라도 받아줄 거라는 생각을 했을 뿐이에요. 뭐, 적어도 이 명함에 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해보면 이런저런 사연을 알게 되겠지요. 안 그래요?"
카디건 주인은 그걸 전하고 싶어서 명함을 미나코 씨에게 전하고, 이것을 남기고 갔을 것이다... 이렇게 덧붙이려고 했지만 왠지 미나코 씨 앞에서 그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뭔가 서늘한 것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해 봐도 왜 그런 식으로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애초에, 상상한 대로 여자가 죽은 사람이라고 해도 죽은 여자의 카디건을 전해주러 왔다고 찾아온 사람을 가족이 쉽게 믿어줄 리도 없을 것이다.
- 하지만 나는 그야말로 어떤 충동에 떠밀리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애가 타는 듯한,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을 듯한, 호기심과 흥미를 이기지 못하고 마음만 급해져서 자신을 제어할 수 없게 되었을 때의 기분과 비슷했다.
-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마당을 둘러보지 않을래요? 부끄러울 정도로 작아서 문자 그대로 손바닥 정도밖에 안 되지만 이게 저희가 자랑하는 마당이랍니다."
사나에의 어머니는 '저희'라고 말했다. 사나에는 어디 있는 걸까. 이미 여기에 없는 걸까. 죽은 걸까. 살아 있는 걸까. 실존 인물이 아니라 어머니의 공상 속에 사는 사람일까. 그것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이내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 넓이로 따지면 8평 남짓이나 될까 싶은 작은 마당이었다. 그야말로 손바닥만 한 크기였지만 옆집 땅과의 경계가 확실하지 않고 무성하게 자란 키 큰 다년초와 꽃을 피우고 있는 관목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어서 실제 부지보다 넓어 보였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화창한 4월 오후, 온갖 정성을 들여 가꾼 마당에는 여기저기 햇살이 빛나고 있었고 다채로운 색깔로 흐드러지게 핀 꽃들 사이를 누비듯 엉덩이가 검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말벌들이 여기저기 날아다니고 있었다. 나뭇가지와 풀잎에 걸린 거미줄은 아름다운 레이스 같았다. 주위에서는 흙냄새, 풀 냄새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넋을 잃은 듯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건 데이지, 옆에 있는 건 황매화 그리고 개나리, 이쪽이 제비꽃, 수선, 아, 그건 떡쑥이에요. 그쪽에 있는 작은 분홍색 꽃은 앵초예요. 그 옆에 있는 게 은방울꽃, 저기 응달에 있는 건 범부채꽃. 그리고 그건 탱자예요. 예쁘긴 한데 가시가 있어서 조심해야 해요."
빼곡하게 피어 있는 봄꽃들을 에워싸듯이 꽃을 피운 관목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석남화, 으름덩굴, 라일락...
- "멋지네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화원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해주니 기쁘네요. 여긴 아마 흙이 좋은 것 같아요. 힘들게 보살피지 않아도 모두들 쑥쑥 자라주거든요. 아, 그건 장미예요. 물론 아시겠지만, 이제 곧 꽃이 필 거예요. 그러면 마당 가득 장미 향이 감돌아서 정말 멋지겠지요. 그때 다시 보여드리고 싶네요. 또 와주세요."
"예. 꼭 올게요."
내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자 사나에의 어머니는 빙그레 웃었다.
- 다실에는 적갈색의 오래된 다구와 구식 텔레비전, 전화기, 겨울이 되어 이불을 씌우면 고타쓰로 변신할 것 같은 직사각형 모양의 가구식 고타쓰, 장지문이 열려 있는 옆 다다미방에는 오동나무 가구 기둥에 걸어놓은 작은 꽃병에는 마당에서 꺾어왔음직한 으름나무 꽃이 예쁘게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방들은 하나같이 말끔하게 청소되어 있고 열어놓은 툇마루창으로는 이따금씩 마당의 라일락 향기가 흘러들었다.
- 나는 사나에의 어머니와 마주 앉아 홍차를 마시고 케이크를 먹었다. 사나에의 어머니가 유리그릇에 담아 내놓은 커다란 비파로 손을 뻗었다. 우리는 많이 웃고, 많은 이야기를 했다.
- 나는 그곳에 갈 때마다 생기를 되찾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행복에 취했다.
- 그리고 나는 지금 끝내 어떤 욕망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다.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건 알고 있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두려움 같은 것도 분명 있다. 그러나 왜 해서는 안 되는 건지, 왜 두려움이 생기는 건지는 스스로 생각해도 분명치가 않다.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 아닌가? 이제 그것밖에 방법이 없는 것 아닌가. 특히 오늘처럼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일요일 오후, 사나에의 집에는 가지 않고 내 방에서 지내고 있으면 욕망이 점점 부풀어 올라 폭발할 것 같은 지경이 된다.
- 나는 등나무 칸막이에 걸어놓은 카디건을 보고 있다. 무심코 그쪽으로 손을 뻗는다. 소매를 잡고 코를 대본다.
장미 향이 난다. 그 집에 감도는 향기와 같은 달착지근한...
나는 무엇에 홀린 듯 황홀한 향기를 맡는다. 카디건을 옷걸이에서 벗겨낸다. 안 돼, 안 돼,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꾸로 이제 괜찮을 거야,라는 생각도 한다. 모든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 ... 나는 검은 카디건의 소매에 천천히 팔을 꿰었다.
- <카디건>
- 이런 외딴 숲 속에서, 혼자 무섭지 않으세요?
조금 전에 만났던 오십 줄의 여자에게 들은 말이다. 그녀는 전기회사 검침원으로 한 달에 한 번 검침을 하러 온다.
- 사흘 전에 30센티미터 정도 눈이 내렸다. 관리사무소의 제설차가 와서 우리 집 앞길에 쌓인 눈을 쓸어주긴 했지만, 낮에도 영하의 날씨가 계속되니 미끄러운 길이 좀처럼 녹지 않는다. 직업이라고는 하지만 미끄럽게 얼어버린 험한 길을 핸들을 꽉 붙잡고 운전해서 오는 것도 힘든 일이겠다 싶어서, 문득 격려의 말이라도 한마디 건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수고하시네요."
내가 부엌 창문을 열고 인사를 건네자, 그녀는 몹시 놀란 듯 몸을 흠칫 떨었다. 그 표정이 너무도 겁에 질린 듯 보여서 나는 얼른 사과했다.
"아, 제가 놀라게 했군요. 정말 죄송해요. 그렇겠네요. 이런 데서 갑자기 말을 걸었으니 놀라는 것도 당연하겠죠."
"아니요, 괜찮습니다."
- 동그란 비둘기 같은 눈을 깜빡거리면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는 "아아, 냄새가 참 좋네요. 그럼 잘 마시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딱히 이야기할 거리도 없었기에 날씨 이야기를 잠깐 한 다음, 옛날 사람들은 검침원을 '미터기 직원'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 "무섭지 않으냐고요? 왜요?" 나는 웃으면서 되물었다.
"그냥, 이 부근은 누가 봐도 아름답고 조용하긴 하지만 주변에 아무도 살지 않는 동네가 되어 놔서..." 하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괜한 소리를 해서. 하지만 저는 어릴 때부터 사람들이 북적이는 데서 자랐거든요. 지금도 식구가 아홉이나 되는걸요. 딸이 일찌감치 결혼을 해서 얼마 안 있으면 첫 손주도 태어날 거고요. 그렇게 되면 열 식구가 되는 거죠. 주변에 항상 누군가가 있는 곳에서 살다 보니 혼자 살아본 경험도 없어서, 이런 데서 혼자 사시는 걸 보고 전부터 참 대단하시다고 생각했어요. 용기가 대단하시구나 하고..."
- "나 정도 할머니가 되고 나면 이 세상에 무서울 게 없어진답니다."
"할머니라니요. 선생님은 훌륭한 화가신데 할머니라니요. 무슨 말씀을."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화가든 뭐든 할머니는 할머니지요. 그래서 무서울 게 없어요."
"그런가요."
"그럼요. 내 나이 올해 팔십이니까. 언제 쓰러져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노인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된다고 해도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어요? 죽는다는 생각을 해도 이제는 별로 무섭지도 않은 노인네니까."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부릅떴다.
"선생님은 죽는 게 무섭지 않으세요?"
"무섭긴,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이미 충분히 오래 살았는걸요."
"저는 이 세상에서 뭐가 제일 무서우냐고 하면 죽는 거예요. 죽는 건 정말 무서워요."
"저런, 그런가요?"
- "가까이에 불빛 하나 보이지 않겠어요."
"그럼요, 아무것도 없죠."
"그야말로 쥐 죽은 듯 조용하겠네요?"
"마른 잎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리는걸요."
"그게 무섭다니까요. 선생님."
그녀는 입을 앞으로 쭉 내밀며 말했다.
나는 다시 웃었다.
- "완전히 캄캄하니까 별은 더 많이 보여요. 달빛도 얼마나 부드럽고 예쁜지 몰라요. 그 정도로 조용한 숲 속이니 도둑이나 강도도 웬만해서는 올 생각도 못할 거예요. 찾아오는 사람이라고는, 그래요, 댁 같은 사람하고 우체국 집배원, 아니면 숲의 동물들 정도랍니다."
"어머머, 그렇겠네요."
"가끔 도와주러 와주는 사람도 있어요. 택배 직원도 오고, 하지만 정기적으로 오는 사람을 꼽으라면 그야말로 당신하고 집배원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아무튼 무서워해야 할 상대라고는 아무도 오지 않아요."
"그렇겠네요. 듣고 보니 정말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어요."
여자는 볼을 붉히면서 웃었다. 나도 상냥하게 마주 웃어주었다.
- 여자는 유자차를 다 마시고는 이마가 무릎에 닿도록 깊이 허리를 굽혀 몇 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나는 여자를 보낸 뒤 현관문을 닫고 잠금장치를 걸었다. 그런 다음 여자가 마신 컵을 씻어 행주로 닦아 찬장에 다시 넣었다.
그러고 나서 내가 마실 유자차를 끓여 겨울 햇살이 비쳐 드는 거실로 갔다. 갈색 천이 덮인 오래된 소파에 앉아 향긋하고 달착지근한 유자차를 마셨다.
- 남편이 살아 있을 때는 남편의 병원 진료 때문에라도 외출할 때는 반드시 택시를 이용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사치는 누릴 수가 없다.
개인전 준비나 어쩔 수 없는 볼일 때문에 도쿄에 가는 것도 기껏해야 일 년에 서너 번. 그때는 아무래도 집에서 역까지 택시를 이용하는데 요금이 만만치 않다. 그래서 상경 횟수도 조금씩 줄여가려고 생각하고 있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나이를 먹었지만, 나는 타고나기를 낙천적인 성격이다. 몸이 성할 동안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다행히 이 나이가 되어서도 간병을 모르고 건강하다. 해마다 봄이 되면 마당의 흙을 일궈 채소를 심는다. 다 먹지 못하고 남는 무는 햇볕에 말려 무말랭이를 만든다. 그 맛이 기가 막히다.
아직 두시 반이다. 자, 지금부터 뭘 할까. 오늘도 하고 싶은 일은 많다.
- 죽은 남편이 애용하던 낡은 스웨터를 풀어서 그 실로 내가 입을 털 조끼를 뜨고 있다. 여성잡지에 실려 있는 요리를 메모하여 나만의 요리 노트를 만든다. 읽다 만, 나와 비슷한 세대의 여성 작가가 쓴 신간 소설을 이것저것 찾아 읽는다. 늘 잠만 자는 늙어빠진 고양이의 발톱을 깎아준다. 토란을 새콤달콤하게 졸인다. 2, 3일 전에 예약 녹화해 놓고 아직 보지 않은 여행 프로그램을 본다. 그렇지. 어제 관리사무소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배달해 놓은 장작을 난로 옆으로 조금 갖다 놓아야 한다.
- 서쪽으로 난 들창의 추녀 끝에 크고 작은 고드름이 길고 날카롭게 몇 개나 매달려 있다. 그중에는 1미터가 넘게 자란 것도 있다. 마치 얼음 기둥으로 만든 거대한 우리 안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 부드러운 햇살이 엄청난 수의 고드름을 비추자 여기저기 덧없는 꿈처럼 빛의 구슬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다. 작고 동그란, 투명한 물방울이 고드름 끝에 맺혔다가 이윽고 각각 조용히 소리도 없이 얼어붙은 눈 위로 떨어진다. 그 모습은 바로 자연이 만들어낸 예술 그 자체다. 나는 명색이 화가지만 이보다 아름다운 그림은 그려내지 못한다.
- 그 너머로 펼쳐지는 것은 눈에 덮인, 인기척이라고는 없는 정적에 싸인 숲이다. 설원에는 여기저기 동물들의 발자국이 나있다. 아마 야생 토끼일 것이다. 담비나 여우의 발자국도 섞여 있는 것 같다. 이따금 가지에서 가지로 날아가는 어치의 소란스러운 지저귐이 들리는 것 외에 소리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 나는 유자차를 한 모금 마신다. 철제 난로 안에서는 장작이 붉게 타고 있다.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본다. 미터기를 검침하러 왔던 여자가 한 말이 떠오른다.
뭐가 무섭다는 건가. 이렇게 풍요로운 숲, 온갖 생물들의 기척으로 가득 차 있는 숲에서 혼자 지내는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세상사람들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 관리사무소에도 사정을 설명했다. 서로 절친한 사이가 된 소장은 내 이야기를 듣고 즉시 표정을 환하게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아무 걱정 하실 필요 없습니다. 장작은 수시로 갖다 드릴 것이고 난방에 필요한 등유도 정기적으로 배달해 드리겠습니다. 눈이 쌓였을 때는 제일 먼저 그 댁 근처부터 제설하러 가지요. 무엇보다 두 분보다 훨씬 나이 먹은 이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더 추운 겨울도 몇 번이나 넘기고 아직도 팔팔하게 살아계시니까요."
별장에서 처음 보내게 될 엄동설한이었지만 나는 이렇다 할 불안은 없었다. 좋아하는 지역의 좋아하는 집에서 지낼 수 있으니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당황하지 않고 대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 화장실이나 세면실에는 전기스토브와 패널 히터를 설치하여, 세면대 앞에 서 있어도 춥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부엌에도 작은 등유 난로를 놓았다.
집은 방마다 따뜻하고 쾌적했다. 바깥 기온이 아무리 영하로 떨어져도, 눈이 내려 얼어붙어도, 휘잉휘잉 신음 소리 같은 바람이 부는 밤에도, 나는 아무런 불안도 느끼지 않았다. 내가 가진 불안은 단 하나, 남편의 병세뿐이었다.
- "뻔하다니, 뭐가요?"
"자시키와라시(座敷童子, 주로 이와테현에서 전해지는 정령 같은 존재로, 다다미방 또는 창고에 사는 신으로 여겨진다.)지, 뭐."
나는 눈이 휘둥그레지도록 놀랐다. 유령이라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기 때문이다. 유령과는 비슷하지도 않은, 어딘가 투박한 온기마저 느껴는 자시키와라시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반면에 그런 말을 이처럼 진지한 얼굴로 내뱉는 남편에 대한 불안은 더욱 증폭되었다.
"자시키와라시라니, 당신 그건..."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삼키는 척하면서 말했다.
"오래된 민화나 민속학에서나 나오는 거 아니에요? 지금 세상에, 이렇게 작은 집에 자시키와라시가 있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걸요. 아, 하나다 씨에게 물어보면 되겠네. 자시키와라시라는 거 알아요? 하고, 그게 뭡니까, 그럴걸요."
"아무튼."
남편은 슬픈 얼굴로 말하고 눈을 살짝 치켜뜨면서 나를 쳐다봤다.
"자시키와라시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남자아이가 있었고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뛰어다니면서 장난을 치고 그랬다니까. 정말이야."
- 그러나 솔직하게 털어놔 봤자, 결국 나도 치매가 시작되었다고 여길 게 뻔하다. 잘못했다가는 강제로 병원이나 요양 시설로 보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이 별장은 문을 닫고 불쌍한 히로는 갈 곳이 없어질 것이다.
누군가에게 히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참을 수 없을 때면 나는 남편의 위패 앞에 향을 피우고 남편에게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여기서 지내는 생활이 얼마나 쾌적한지, 왜 하나도 쏠쏠하지 않은지, 모든 것이 잘 되어가고 있고 불안한 일은 단 한 가지도 없고, 젊은 시절에는 내게 이토록 평온한 노년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으며, 이 모든 것이 히로가 함께 있어준 덕분이다... 등의 이야기를 남편의 위패를 향해 중얼중얼 속삭이곤 한다.
- 그리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남편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용서를 구한다. 당신 말을 믿어주지 않아서 미안하다고, 히로는 정말 여기에 있다고.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우리와 줄곧 함께 살고 있었다고.
- 그런데 고백을 하고 나자 최근에는 불과 보름 정도 전부터지만, 도저히 뭐라고 해석하기 어려운 사태에 맞닥뜨리고 있다.
- 나로서는 히로의 존재조차도 해석하거나 분석할 수 없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 이상의 사태를 해석해보려고 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것만은 정말이지 도저히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어서, 조금은 난감해하고 있다.
- 보름 전 밤에 내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였다. 미리 따뜻하게 해 놓은 탈의실에서 젖은 몸을 닦고 새 속옷을 입고 기모 소재의 두툼한 잠옷을 입었다. 아직 몸이 따뜻해서 털이 복슬복슬한 모직 가운을 들고 복도로 나왔다.
- 복도 한복판, 마침 내가 선 자리에서 비스듬히 오른쪽에 한 여자가 이쪽을 향해 앉아 있었다. 정좌한 모습이었다. 여자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양쪽 귀 뒤로 검은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것처럼 보였다.
- <동거인>
- 20년 전 내가 스물여덟 살이었을 때 나보다 한 살 위였던 다쓰히코는 키우던 개와 함께 이 펜션에 묵은 이튿날, 개를 잘 부탁한다는 짧은 유서를 남기고 S곳 절벽에서 몸을 던졌다.
다쓰히코는 나의 좋은 친구였다. 친구...라고밖에 할 수 없는 사람. 다쓰히코는 나와 연인 사이가 되고 싶어 했지만 내가 마지막까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 남자와 여자라는 의미로 보면, 나는 그를 별로 사랑하지 않았다. 왜 사랑할 수 없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생리적으로 내가 싫어하는 면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만나면 유쾌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에 빠지기도 했다. 나와는 가치관이 비슷했다. 무엇보다 그는 내게 무척 잘해주었다. 그를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상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사랑할 수 없었다. 그와 만나 술을 마시거나 이야기에 열중하는 시간은 좋았지만 그를 만지고 싶다고 생각하거나, 그도 나를 만지고 싶어 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설마 그가 죽음을 선택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 ...
- 휘이잉 소리를 내며 바람이 거칠게 불었다. 음악도 무엇도 없는 방에서 묵은 때가 덕지덕지 묻은 유리창이 폐허의 그것처럼 덜컹덜컹 음산한 소리를 냈다.
- 이른 아침 S곶에서 몸을 던진 다쓰히코는 그날 저녁, 부근의 바다 위에 떠다니는 시체로 발견되었다. 시마바라 부부에게 개를 남기고 간다는 것을 사죄하는 메모 말고는 유서라고 할 만한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도쿄에 있는 그의 집에도 이렇다 할 기록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고, 물론 나한테도 마지막 편지라 칭할 만한 어떤 것도 보내오지 않았다.
소식을 듣고 나는 문자 그대로 정신을 잃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며칠 동안 음식이 목을 넘어가지 않았다.
내 탓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다쓰히코에게 상처를 주고 결국 죽음으로 몰아넣은 거라고.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 버렸다고 생각했다.
- 그러나 한편으로는 애써 냉정을 찾으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가 죽음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나였다고 해서 내가 평생 책임을 져야만 하는 걸까. 그는 그것과는 관계없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세상에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남자의 열렬한 구애를 받고 그런 남자가 불쌍하다며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여자도 있겠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뿐 아닌가.
- 다쓰히코를 처음 만난 건 내가 혼자 힘으로 작은 편집 프로덕션 사무실을 열고 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게 되었을 즈음이었다. 자유기고가로 일을 꽤 잘하는 남자가 있다고 어떤 사람이 소개해주었다. 그것이 다쓰히코였다.
다쓰히코는 발로 뛰는 일을 무척 잘했고, 직관력이 뛰어난 데다가 글도 잘 썼다.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원고를 써왔다. 아이디어와 지식, 교양의 보고 같은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가까이에 있어준다는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나는 그와 자주 일을 같이 하게 되었다.
원래 죽이 잘 맞는 상대였던지라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해지는 데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딱 한 번이지만 다쓰히코와 술을 진탕 마시고 술김에 호텔에 들어간 적이 있다. 그와 어떻게 관계를 했는지, 한 침대에 누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이 뚜렷하지 않다. 끔찍한 숙취로 속이 메슥거리는 바람에 그가 나를 간호하는 지경이 되었지만, 그런 일이 있어서인지 그와 깊이 이어졌던 기억의 윤곽은 이내 애매한 것이 되어갔다.
그와 관계를 가진 건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키스를 한 것도 껴안은 것도 그의 앞에서 알몸을 보인 것도 그날 한 번으로 끝이었다.
한편으론 그가 한 남자로서 여자인 나를 진지하게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모르는 척했다. 내게 있어서 그는 최고의 친구이자 좋은 이해자였지만 연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 일반적인 상식으로 말하자면 나는 그를 적당히 갖고 놀았다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가 죽은 뒤, 그 점을 신랄하게 지적한 친구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반론의 여지는 없었다. 그녀의 지적이 그대로 적중했다고 생각한 탓인지 그 후로 나와 그녀의 사이는 소원해졌다.
- 그러나 나는 단연코 그를 가지고 논 것이 아니다. 내가 그렇게 자유분방하게 행동할 수 있는 여자였다면 훨씬 오래전에 자극으로 가득 찬 인생의 대양을 향해 의기양양하게 출항했을 것이다. 여태껏 남자로부터 열렬한 구애를 받아본 적도 없었던 내가 어떻게 그런 희롱을 즐길 여유가 있었단 말인가.
다쓰히코와는 그가 나에게 남자로서의 욕구를 드러내는 관계가 아닌 상태를 오래 유지하고 싶었다. 계속 친구로 있고 싶었다. 그게 다였다.
- 그가 죽은 뒤 나에게도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서른두 살 때 일 때문에 알게 된 두 살 연상의 회사원과 결혼했고 연거푸 두 번 유산을 했다.
남편은 밖에다 여자를 만들어놓고 점점 집에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합의 끝에 이혼했다. 나는 마흔이 되어 있었다.
그 후 부모님이 잇따라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너무 이른 죽음이었다. 결혼해서 세 자녀를 가진 네 살 위의 언니와 내가 그 뒤처리를 하게 되었다.
아무도 살지 않게 된 친정집은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돈과 사람의 손길이 필요할 테니 빨리 처분하는 게 좋겠다는 친척들의 조언이 있었고 언니도 그 말에 동조했다. 친정집은 즉시 철거되었고 땅도 매물로 내놓았다.
- 그 일로 언니는 날이면 날마다 나에게 전화를 걸어댔다. 콧소리가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우리도 애들 아빠 월급이 변변치 않은 데다가 주택 융자며 교육비가 만만치 않아. 너도 알지?"라고 말했다. 그러니 자기가 상속받을 몫이 조금 더 많았으면 하는데, 너라면 그렇게 해줄 수 있지 않느냐며.
나는 바닥 모를 허탈함을 느꼈다. 언니가 다 가져,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스스로가 비참했다.
나와 언니는 그때부터 사이가 험악해졌다. 법률에 따르는 형태로 상속을 마친 이후로 언니와는 일체 연락을 주고받지 않고 있다.
- 지극히 가벼운 마음으로 회사 명의로 대출받은 돈을 변제할 수 없게 되어 궁지에 몰린 적도 있었다. 그때 궁지에서 구해준 연상의 남자가 있었다. 외로운 심정과 감사의 마음에서 나는 그와 몇 번 관계를 가졌다.
그것이 남자의 아내에게 발각되었다. 나는 그 아내로부터 협박의 의미가 담긴 문자메시지와 편지를 받는 입장이 되었다. 남자에게 하소연했지만, 그는 아내가 앙갚음으로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고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며 어린애처럼 겁에 질려 있었다.
그런 문제로 겁에 질려 있는 남자는 꼴불견이었다.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 내가 더 이상 만나지 말자고 하자 남자는 무슨 이유에선지 불같이 화를 냈다. 그리고 그다음 주부터 인터넷상에서 있는 일 없는 일로 온갖 중상과 비방을 당하기 시작했다.
그 일로 인해 편집 프로덕션 일은 격감했고, 일 잘하는 스태프 한 명도 그만두고 말았다.
남자의 소행인지 그 아내와 공모하여 하는 짓인지, 혹은 아내 혼자 하고 있는 짓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날 밤, 피곤에 지친 나는 자주 쓰던 수면유도제를 평소보다 조금 많이 먹고 침대에 누웠다.
- 이튿날 사무실에도 얼굴을 내밀지 않고 연락이 두절된 나를 걱정한 스태프가 집을 찾아왔다가 의식이 몽롱한 채 잠들어 있는 나를 발견했다. 물론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회복 후에 내가 자살 기도를 했다는 소문이 퍼졌고, 그 소문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 그러던 중 나는 문득 생각했다. 다쓰히코가 죽은 뒤 20년 나는 똑같은 곳을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 그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묵었다는 펜션에 가보고 싶어졌다. 꼭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 같은 곳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던 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다쓰히코의 영혼을 위로하고 나면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딜 수 있지 않을까,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 그러나 결심을 하고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내 기분은 마냥 나락으로 가라앉기만 했다. 정리되지 않은 무언가가 내 안으로 밀려와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차가운 모래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듯한, 불쾌한 피로감에 시달리고 있다.
- 시마바라 부부는 내가 전혀 손을 대지 않는 초콜릿과 과일을 쉴 새 없이 먹으면서, 번갈아 일어나 커피며 홍차를 다시 내오거나 봉지에 든 과자를 가져오면서, 다쓰히코에 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이어갔다. 나는 이렇다 할 질문도 하지 않고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 "음료는 주방 냉장고에 있으니 자유롭게 꺼내 드시면 됩니다. 와인과 맥주도 있어요."
"오늘 숙박하는 손님은 저 하나뿐인가요?"
궁금해져 물어보자 부인은 "아니요."라고 답했다. "밤늦게 도착하실 분이 계십니다."
"밤늦게요?"
"네. 단골이신데... 하지만 절대 방해가 되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 걱정 마시고 마음껏 편안하게 지내시면 됩니다."
부인은 갑자기 실눈을 뜨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럼, 편히 쉬십시오." 하고 방을 나갔다.
- 탁자에 올려두었던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니 열 시 반이 되어 있었다. 다섯 시간 이상을 잔 셈이다.
좁은 욕실로 들어가 이를 닦았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목이 말라 양치 컵에 수돗물을 받아 마셨다. 물은 이상하게 미지근하고 녹슨 쇳물 같은 맛이 났다.
공복감은 없었다. 뭐든 알코올을 마시고 싶었다. 냉장고에 와인과 맥주가 있다는 시마바라 부인의 말을 떠올렸다. 벌컥벌컥 소리를 내가며 시원한 맥주를 들이켤 상상을 하자 메스꺼움이 잠깐 가라앉은 듯했다.
- "죽은 사람의 손가락을 갖고 있다니." 내가 말했다. 차분하고 단호한 투로 말하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왜 저한테 그런 거짓말을..."
"거짓말이라니요. 지금도 갖고 있는데, 상자에 넣어서 간직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말이죠. 한 번 보실래요? 세월이 지나서 색깔은 좀 변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녀의 손가락이라고 생각하면 그냥 사랑스럽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진 건 하나뿐입니다. 왼손 새끼손가락이지요. 새끼손가락이 가장 아름답거든요. 어라, 안색이 많이 안 좋으시네요. 괜찮습니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남자는 후후후, 하고 짧게 웃었다.
"그거 아십니까? 남자의 깊은 사랑을 깨닫지 못하거나 혹은 알면서도 무시하는 행동을 하거나 하면 그 여자는요, 언젠가 반드시 불행해지는 겁니다. 제가 갖고 있는 손가락의 주인인 그녀도 나를 무시하지만 않았으면 그렇게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세상에, 설마!" 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당신 도대체 누굽니까? 점술사? 아니면 가짜 심령술사?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나한테 뭘 원하는 거예요?"
"난감한 노릇이군." 남자는 다시 후후후, 하고 웃었다. "나는 그저 내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오."
- "그런 게 아니에요. 그보다 당신, 사람이 죽을 때 숨을 내쉰다고 착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무슨 소리예요?"
"그러니까 죽을 때 말입니다. 대개 사람은 후우, 하고 마지막 숨을 다 뱉어냈을 때 죽는다고 착각하고 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지가 않아요. 사람이 죽으려고 할 때는 숨을 들이마시는 겁니다. 들이마시지만 공기가 더 이상 들어가지 않게 되면 그게 죽음입니다. 숨을 거둔다는 건 바로 그런 의미지요."
- "작작하세요!"
나는 다시 소리를 질렀다. 세상이 뒤집히는 것 같은 지독한 현기증이 엄습했다. 앉은 자세 그대로 판자로 된 테이블을 붙잡았다. 그리고 눈을 꼭 감았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정신을 잃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흘렀다.
눈을 뜨자 내 정면에 앉아 있는 남자가 안쓰럽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컴퓨터의 파란빛이 조금 강해진 것 같았다. 남자의 얼굴은 나이 들고 쇠약해진 원숭이의 그것이었다.
"달이..." 남자는 손으로 창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달이 떴어요. 봐요, 저기."
- <곶으로>
- 거무튀튀한 색의 거대한 대문이 비를 맞아 젖어 있다. 살며시 손으로 밀어 열자 끼익 하는 축축한 소리를 낸다.
바로 옆에서 큰 새가 날아가는 기척이 났다. 까마귀 같았다. 마른 날갯짓 소리만이 귓가에 남았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웅장한 정자식 전통 저택이다. 손질이 잘된 일본식 정원의 나무들이 여기저기 무성하게 잎을 드리우고 있다. 지나칠 정도로 반듯하게 정리된 탓인지 현실감이 희박해서 잘 그려진 연극의 무대 장식처럼 보일 뿐이었다.
-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긴 복도를 돌자 마당에 면해 있는 넓은 툇마루가 나타났다. 오랜 세월이 흐른 목재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여기저기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현관에 피워놓은 백단향이 어딜 가도 계속 따라붙어, 검게 변한 나뭇결여기저기에 깊숙이 배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툇마루 한쪽 옆으로 다다미방이 줄지어 배치되어 있었다. 방마다 장지문이 굳게 닫혀 있어서 내부가 어떤 모습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인기척도 없었다.
"시부모님과 고용인들은 모두 이 본채에서 지내지만 우리 가족은 저쪽에 있는 별채에서 지내."
손가락이 가리킨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비에 젖은 조용한 정원 너머로 또 한 채 집이 보였다. 별채라고 부르기에는 현대적인 느낌이 나는, 그러나 흔히 볼 수 있는 동서양의 양식을 절충한 작은 주택이었다.
- "집이 참 예쁘다. 별채에서 따로 지내게 된 건 잘된 일이잖아. 이 본채는 너무 넓어서 왠지 황송한 느낌이야. 길을 잃을 것 같아. 방이 도대체 몇 개야?"
"글쎄, 몇 개더라. 세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 지금은 별로 사용하지도 않지만 관혼상제용으로 쓰는 큰 방도 있어."
나는 감탄하는 소리를 냈지만 문득 우울한 상상을 했다. 히로시의 장례식도 틀림없이 그 방에서 이루어졌겠구나, 하고.
- "저기, 남편이 나중에 가즈요랑 인사하고 싶다고 했어. 괜찮지?"
"괜찮고 말고가 어디 있어. 당연한 거 아냐? 왜 그런 걸 물어보고 그래."
"아니, 그냥 너한테는 친구의 두 번째 남편이라서 아무래도 어색하지 않을까 싶어서."
"마유미 남편이라면 두 번째든 세 번째든 인사하는 거야 당연하잖아. 남편은 남편이니까. 인사하는데 왜 어색한 느낌이 들어야 해?"
마유미는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희미하게 미소만 지었다. 마유미는 나와 같은 도쿄의 사립대학에서 소속되어 있던 양궁부의 2년 선배인 고다 히로시에게 열렬한 구애를 받았다. 마유미를 두고 평생의 이상형이라고 거침없이 표현하며 저돌적으로 다가오던 히로시의 모습은 진지하고 조심스러운 그의 인품과 함께 마유미의 마음을 움직였다.
- 그 뒤 양가 부모에게 소개를 한 것이 계기가 되어 결혼 이야기까지 나왔다. 혼담은 일사천리로 마무리되어 예스럽고 우아한 결혼식 준비가 착착 진행되었고, 마유미는 졸업 후 3년 뒤에 이 지방 굴지의 대지주인 고다 가(家)로 시집을 왔다.
- 뜻밖의 비극이 일어났다. 비 오는 날 밤에 히로시가 운전하던 차가 고속도로에서 대형 트럭과 접촉 사고를 일으켰고, 히로시의 차는 트럭에 밀려 전복된 끝에 벽에 충돌했다. 즉사였다.
마유미가 받은 충격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호쿠리쿠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곱게만 자라온 참한 규수 같은 여자였다. 순풍에 돛 단 듯한 인생을 살면서 큰 상실이라고는 무엇하나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마유미는 갑자기 찾아온 불행으로 한때 실어증 비슷한 증세를 보였고 오랫동안 고쳐지지 않았다고 들었다. 믿고 의지했던 장남을 불행한 사고로 잃은 시부모 역시 각각 지병이 악화되어 입원을 해야 할 정도였다.
- 그런 가운데 마유미를 음으로 양으로 지지해 준 사람이 고다 가의 차남인 시동생 도요지로였다. 도요지로는 아버지의 일을 거들면서 고다 가의 본채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당시 아직 독신이었던 그는 평소부터 형수인 마유미를 은근히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마유미가 보내준 편지를 통해 그녀가 히로시의 죽음 후에도 고다 가를 떠날 생각이 없어졌다는 것, 그 이유 중 하나가 도요지로의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
- 두 사람이 집안끼리나마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것은 히로시가 죽은 지 4년이 지나서였다. 그게 지금으로부터 약 2년 전의 일이다. 미노루는 도요지로를 잘 따랐고,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아빠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미노루의 장래를 위해서도 도요지로와 마유미를 짝지어 주는 것이 최선이라며 주위에서도 둘의 결혼을 축복해 주었다... 그런 내용이 마유미의 편지에 적혀 있었다.
- "영전에 향이라도 올렸으면 하는데, 괜찮지?"
마유미는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로 나를 마주 보며 아주 잠깐 어떤 생각에 골몰한 표정을 하다가 이내 말했다.
"아니! 괜찮아.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 마유미는 예리한 눈길로 나를 노려보았다. 뭔가 거슬리는 말이라도 한 걸까 싶어서 순간 당황했다.
재혼한 남편, 도요지로를 배려해서 그러는 걸까. 그렇다 하더라도 도요지로가 집에 없는 사이에 히로시의 영전에 분향 정도는 해도 되는 것 아닌가. 무엇보다 죽은 히로시는 도요지로의 친형이 아닌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마유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해. 이상한 반응을 해서."
- "그러니까..."
마유미가 무언가 말하려고 할 때였다. 마치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는 듯이 툇마루 쪽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사토 씨가 방으로 들어왔다. 큰 사각 쟁반에 홍차 포트와 함께 과자며 과일 등이 담겨 있었다. 마유미도 나도 입을 다물었다.
개인 접시와 포크, 컵, 컵 받침, 물수건 등이 탁자에 차려지자 그 큰 탁자가 순식간에 가득 차서 마치 연회장의 식탁이 된 것 같았다.
- 사토 씨가 물러가기를 마유미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얼른 물수건을 집어 손을 닦고 홍차컵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다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한 그녀의 말을 끈기 있게 기다렸다.
중요한 이야기라도 있는 건가 싶었다. 히로시에 관한 이야기일까? 아니면 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일까?
그러나 사토 씨가 방에서 나갔는데도 마유미는 문제가 될만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둘만 남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 입에서 나온 말은 히로시의 죽음에서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에 대해서였다.
- 지금까지 참고 참았던 것을 한꺼번에 토해내듯이 열을 내며 이야기하던 마유미는 도중에 갑자기 어색해졌는지 내게 질문을 던졌다. 연애, 결혼, 매일의 생활... 여자들끼리 꼭 알고 싶어 할 법한 평범한 질문들이 형식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서른여섯 살이나 먹도록 아직 독신인 데다 업무를 벗어나면 마시고 떠들며 즐길 동료는 있어도 연인이라 부를 남자조차 없는 내 근황 따위, 새삼 이야기할 만한 것도 없었다. 나는 건강한 체질이라 신체적으로 문제도 없으니 마유미와 서로 병세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공감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근무하는 보험 회사의 사무적인 일에 대해 이야기한들 재미있을 리 없으니 나에 관한 화제는 금방 끝이 났다.
- 학생 시절 마유미를 통해 히로시를 여러 번 만났던 터라 그를 잘 기억하고 있다. 갸름한 얼굴에 눈매와 콧날이 반듯한, 누구나 인정하는 미남이었다. 조금 지나치게 점잖아서 어딘가 그늘진 듯한 고요함이 감도는 면이 젊은이답지 않은 인상을 주기도 했지만, 정직하고 성실한 인품은 누가 봐도 마유미와 잘 어울렸다.
- "미노루도 새아버지를 잘 따르는 것 같고, 더 이상 바랄 게 없잖아?"
"그러게 말이야. 정말 그래." 하고 마유미는 반복해서 말했다. "부족한 거라곤 없어. 정말이지 불만 같은 거 하나도 없어. 남편도 아들도 시부모님도 정말 잘해주시고, 나는 행복한 사람이야. 그건 나도 잘 알아."
말투가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나는 마유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마유미가 천천히 주위에 신경질적인 시선을 보내는가 싶더니 결심한 듯 탁자 너머로 상반신을 내밀며 다가왔다.
"사실은 가즈요한테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우리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없는데 마유미의 속삭이는 목소리는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작았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 믿기 힘들지도 몰라. 믿어주지 않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도 하기는 했어.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가즈요, 너밖에 없어. 내 머리가 이상해졌다고 생각해도 상관없어. 하지만 듣기만 해 줘도 좋아. 부탁이야."
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긴데?"
마유미는 온몸을 긴장시키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 나는 분명 그 부릅뜬 눈 속에 공포 비슷한 무언가가 담겨 있는 것을 보았다.
- "... 그 사람이 있어."
"뭐?"
"그 사람... 히로시 씨 말이야. 늘 이 집 어딘가에서 나를 보고 있어. 내가 뭘 하는지 누구랑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남편이랑 아들과는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항상 가까이에서 보고 있다니까."
갑자기 방 안의 온도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 나는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도 있어." 마유미는 슬픈 얼굴을 하고 말했다. "아까부터 줄곧 보고 있어. 섬뜩한 이야기지만 정말이야. 가즈요 눈에는 보이지 않을 뿐이야. 하지만 나는 보여 봐, 저기. 네 등 뒤로 비스듬히 옆에. 도코노마 바로 옆쪽."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 끝으로 내 등 뒤를 가리키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온몸의 털이 곤두섰지만 애써 돌아보지 않고 참을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내가 느낀 공포를 간신히 억누르는 데 성공했다.
- 마유미가 안쓰러웠다. 남편이 급사한 뒤 오래도록 맛보았을 슬픔의 지옥 속에서 서서히 정신의 톱니바퀴가 어긋나 버렸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환상을 보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도요지로도 어렴풋이 알고 있을 거라고, 나는 애써 냉정해지려고 노력하며 생각했다. 설사 마유미가 도요지로에게 말하지 않았어도 아내의 상태가 심상치 않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남편이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다.
- "그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나기 시작한 건 내가 도요지로 씨랑 정식으로 재혼하고 나서부터야. 그전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어. 정말이야. 아무 조짐도 없었다니까. 유령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좀 나타나 달라고 소리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도 나타나 주지 않았어. 정말 얄궂은 사람이야. 그럴 때는 기척조차 보여주지 않더니 이제 와서, 내가 재혼을 하자마자 이런 식으로 나타나다니."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필사적으로 무시하면서 되물었다.
"다른 사람한테는 안 보인다고? 마유미 너한테만 보인다는 거야?"
"그런가 봐. 남편은 물론 시부모님도 고용인들도 그런 이야기는 한 번도 안 했어. 무슨 일이 있었다면 서로 수군거렸을 거야.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내 귀에도 들어왔을 텐데.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안 하는 걸 보면 나만 보이는 거겠지. 항상 보이는 건 아니지만... 그런데 보이지 않을 때도 느낄 수 있어. 아, 옆에 있구나 하는 걸 느껴. 분명하게 느낀다고. 가족끼리 밥을 먹을 때도 내가 몸이 아파 누워 있을 때도, 마당을 산책할 때도, 미노루랑 같이 놀고 있을 때도, 늘 있어. 어두운 눈을 하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어."
밖이 저물어 실내가 어두워지자 아무리 참으려 해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마유미에게 양해도 구하지 않고 벌떡 일어나 탁자 위의 전등을 켰다. 노란 불빛이 다다미방을 비춰 오히려 구석구석 어슴푸레한 부분이 도드라지는 것 같았다.
- "나 어쩌면 임신했는지도 몰라."
나는 숨을 삼켰다. 상대는 누구냐고 되물을 뻔한 자신이 무서워졌다.
"도요지로 씨와의 사이에 아이가 생겼다는 걸 알면 그 사람은 과연 어떻게 할까. 분하고 억울해서 나랑 도요지로 씨, 그리고 태어나는 아기에게 저주를 내려서 죽이려고 하지 않을까."
저주를 내려서 죽이려고 하지 않을까... 하고 말하는 마유미의 목소리는 유리병 속에 대고 섬뜩할 정도로 느릿느릿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 지금 나는 잠들지 못한 채 넓은 다다미방에 누워 있다. 열 평은 될 것 같은 방이다. 마유미의 말에 의하면 이 집에서 가장 좋은 방이며, 지금까지도 가장 귀한 손님밖에 묵은 적이 없다고 한다.
나를 위해 마련된 침구는 금실은실을 넣어 짠 얇은 여름용 깃털이불이다. 머리맡에 놓인 물병은 이탈리아제, 야식으로 먹으라는 것인지 고급 품종 포도인 작은 머스캣 한 송이가 유리 접시에 담겨 있다.
- 나는 이불 위에 서서 손을 뻗어 천장에 매달린 전등의 끈을 잡아당겼다. 주위가 밝아지자 방 안의 네 귀퉁이에 어둠이 생기더니 그것이 갑자기 짙어진 듯했다.
정체 모를 어떤 것이 나를 조금씩 충동하고 있었다. 점점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심정이 되고 있었다. 눕거나 잠들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용감한 듯한, 늠름한 듯한 또는 맹렬한 듯한,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경험한 적 없는 어떤 충동에 강하게 떠밀리는 듯한 느낌이 마음속에서 넘쳐났다.
- 절대 이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도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초조함 같은 것이 나를 부추긴다.
- 바로 앞에 장지문이 있다. 옆방으로 이어지는 장지문이다. 그 문을 열면 안 된다고 내면의 무언가가 크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무언가는 이 문을 열어야 한다. 지금 당장 열어야 한다고 내게 명령하고 있다.
- 흰색의 중후한 장지문이다. 아래쪽에 하얀 국화가 그려져 있다. 그 국화는 얇게 금빛으로 채색되어 있다.
나는 발끝을 세우고 장지문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바스락, 다다미 스치는 소리가 났다. 장지문은 모두 여섯 개. 똑같이 생긴 문짝들에 동그란 손잡이가 있어서 어디를 열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내민 손이 중앙의 장지문에 달린 동그란 손잡이에 닿았다.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장지문을 힘껏 열어젖혔다.
문이 열린 그 방은 내가 묵는 방보다 훨씬 넓었다. 가구는 물론 가재도구 하나 없다. 그저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살풍경한 방이다.
어렴풋이 향냄새가 감돌고 있다. 가까이에 불단이 있는 걸까 짐작해 본다.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듯한 공포에 사로잡힌다.
- 그런 반면, 눈에 보이지 않는 뭔가가 내 등을 밀고 있다. 발길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내 발걸음은 앞으로만 나아갈 뿐이다. 나는 한껏 겁에 질려 있으면서도 다다미방을 가로질러 다시 다음 방으로, 다음 어둠을 향해 내달렸다.
다다미를 밟는 발바닥에 한기를 느끼고 있다. 축축한 물을 머금은 듯한 차가운 느낌.
- 어둠이 짙어진다. 호흡이 거칠어진다. 다음 장지문도, 또 다음 장지문도 열어젖히면서 나는 계속 달린다. 빨리 가야 해, 하고 생각한다. 자신이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 건지 무엇을 위해 그렇게 어두운 다다미방을 달리고 있는지, 이제는 아무것도 종잡을 수 없다.
다다미방은 계속될 뿐이다. 달리고 또 달려도 장지문을 계속 열어젖혀도 또 다음 다다미방이 시작되어 끝이 나질 않는다.
공포가 치밀어 올라 울고 싶어 졌지만 그런데도 나는 계속 장지문을 열어젖히고 있다. 울고 있는 것도 아닌데 눈물이 넘쳐 볼을 타고 흘러 떨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에 오열이 더해진다. 그러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 향냄새가 강해진다. 때로 그것은 백단향 같은 느낌이기도 하다.
몇 번째인가 장지문을 잡고 힘껏 열어젖혔을 때였다.
- 셀 수 없을 정도로 달려온 다다미방 저 너머, 조금 전까지 내가 자고 있었던 방의 불빛이 발밑에 길고 가늘게 닿아 있다. 그 흐릿한 빛줄기 끝에서 나는 보았다.
남자가 내게 등을 돌린 채 다다미방 중앙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 희끄무레한 일본식 옷을 입은 야윈 남자다.
그가 누구인지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알고 있기 때문에 남자가 내 쪽을 돌아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 그러나 나의 간절함도 덧없이, 남자는 천천히 내 쪽을 돌아보았다. 몽롱하게 보이는 그 입가에 어두운 미소가 담겨 있다. 보는 사람을 얼어붙게 만들 정도로 그 미소는 쓸쓸해 보였다.
나는 온몸이 경직되어 움직일 수가 없다.
- 나는 천천히 손목시계를 집어 들고 숫자판을 응시했다. 새벽 2시 42분이었다.
조금 전 물을 마셨을 때가 두 시 반이었다. 그렇다면 고작 12분밖에 잠을 자지 않았다는 건가. 고작 12분 동안 잤는데 그렇게 끔찍한 악몽을 꾸었다는 소리란 말인가.
- 뱃속 깊은 곳에 납덩이같은 두려움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것이 내 몸을 얼어붙게 하고 있다. 드디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을 인정해야 할 때가 온 것일지 모른다. 등줄기가 얼어붙는 것 같다.
- 불길한 기척을 느꼈다. 나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하는 고개를 조금 움직였다.
내가 누워 있는 다다미방 장지문 앞, 바로 내가 누웠던 이부자리 오른쪽 옆에 커다란 그림자가 보인다. 정좌한 자세로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림자 주위에는 흐릿하게 검은 연기 같은 것이 감돌고 있다.
그곳에 감돌고 있는 것은 깊은 사랑, 집착, 억울함, 그리움, 슬픔, 통곡, 질투, 그 모든 것들을 뭉뚱그려 하나로 정리해도 부족할 정도로 거대한 감정의 소용돌이다. 그것이 내게 바싹 바싹 조금씩 전해져 온다.
- 히로시가 안쓰럽다.
그런 생각을 한 순간, 눈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검은 그림자는 느릿느릿 움직여 텅 빈 듯한 두 개의 큰 구멍 같은 눈으로 나를 향해 쓸쓸한 미소를 보냈다.
- <손님방>
- 그건 그렇고, 젊은 분이라 회복이 빨라 참 부럽습니다. 당신이 맹장 수술을 하고 이 병실에 온 건 바로 얼마 전이지요. 순식간에 건강을 회복하는 걸 보고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내 일처럼 가슴이 벅찼습니다.
체력이나 자연 치유력이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지만, 나 정도 나이가 되면 그런 것도 생각대로 되지 않지요.
- 나 말인가요? 올해 5월이면 만 73세가 된답니다. 나이에 대해서는 항상 남의 일처럼 생각해 온 데다, 원래부터 만사태평이라고나 할까요. 뭐든 대충대충 넘어가는 성격인지라 웬만큼 어려운 상황에서도 심각하게 고민하는 체질이 아니었는데, 이렇게 입원하고 보니 아무래도 마음이 약해지는군요.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따위를 생각하는 일도 많아졌어요. 언젠가는 반드시 맞이하게 될 생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하면 쓸쓸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안도감이 드는 묘한 기분입니다.
- 이 세상에 태어나 나이를 먹고 죽는 건 모든 생물이 짊어지고 가는 공통적인 숙명이고 이 세상 어느 것 하나 예외가 없는 법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참 이상합니다. 그렇잖아요. 두 손바닥으로 감싸 안을 정도로 작은 아기였던 내가 무럭무럭 자라서 말을 배우고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중학생이 되고 성인이 되는 동안, 어지러울 정도로 여러 가지 일이 있었구나 싶은데, 자꾸만 몸도 얼굴도 머리도 시들어가잖습니까. 어라, 벌써 끝이라고? 이런 식이지요.
- 몇 년생이냐고요? 쇼와 16년(1941년)생입니다. 당신은? 어머, 그렇군요. 쇼와가 아니고 헤이세이 출생이시군요. 헤이세이 원년(1989년)이시라고요? 아이고, 놀랍습니다.
여성의 평균 수명이 몇 살이었더라? 86, 7? 그렇다면 당신은 앞으로도 60년 이상의 인생이 남아 있다는 계산이 되는군요. 간지로 따지면 환갑의 세월이 남은 거지요. 아, 간지로 따진다는 말을 아시나?
- 환갑이라는 표현은 아시지요? 자신이 태어난 해의 간지가 한 바퀴 돌아온다는 의미인데 사람은 한 번 태어나서 똑같은 간지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기까지 60년이 걸리지요. 당신에게는 앞으로 그 이상으로 긴 인생이 남아 있다는 의미이니, 그건 하고 싶은 많은 일들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바람에 날아가듯 지나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요, 뭐 이 나이까지 살았으니 여러 가지 일을 경험했지요. 그야 물론 좋은 일도 있었고, 슬픈 일도 많았지요.
벌써 수십 년이나 지난 일인데도,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지금도 눈물이 글썽해지는 일도 있습니다. 어떻게 이 나이가 되어서도 그럴까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가슴을 쥐어뜯고 싶어질 정도로 답답하고 슬퍼서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일도 있고요.
- 하지만 말입니다. 그런 일들을 모두 모아서 바람이 어딘가로 쓸어가 버립니다. 시간이라는 이름의 바람은 언제나 아무도 모르는 우리 마음속으로 불고 있는 겁니다.
- 그런 일이 되풀이되다 보면 어느새 눈에 보이지 않게 조금씩 쇠약해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육신이 사라지는 것이 사람의 인생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요. 육신이 사라지면 그 육신에 깃들어 있던 의식은 어떻게 되는 걸까 하고.
- 살아 있는 동안 감정이 정지하는 일은 하루도 아니, 한 시간, 일 분도 없을 거예요. 사람의 감정은 한순간도 쉬지 않고 계속 움직입니다. 괴로워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고 고민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질투도 하고 반성도 하고 감동도 하지요. 그런 복잡한 사람의 감정이, 육체가 없어졌다고 해서 곧바로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다니, 나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 사랑을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하고,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하고, 울거나 웃기도 하지요. 영혼이라고 해도 되겠죠. 한순간의 휴식도 없이 우물을 파 내려가듯이 자신의 의식 밑바닥을 계속 파 내려가던 사람 마음이 그렇게 간단히 사라져 버리는 것이라니요. 도저히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나잇살이나 먹은 사람이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 같나요?
-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상한 버릇이 있었습니다. 내가 죽어서 시체가 되었을 때를 상상해 보는 겁니다. 장례 전문가들의 손에 들린 내 관이 지지배배, 지지배배, 종다리가 울고 있는 평온하고 넓은 들판의 오솔길을 지나서 관에 담긴 그대로 땅에 묻히고 위에서는 부드러운 흙을 잔뜩 부어주고...
묘지 파는 사람들은 형식적으로 잠깐 두 손 모아 기도해 줄 뿐, 이내 돌아가 버립니다. 남겨진 나는 편안한 기분으로 무덤 안에서 바깥 경치를 바라보고 있는 겁니다. 그때 보이는 건 어떤 풍경일까, 어떤 냄새가 나고 무슨 소리가 들릴까, 상상만 해도 즐겁습니다.
예를 들면 말이죠. 내 무덤은 조용한 숲에서 떨어진 전망이 좋은 작은 들판에 있는 겁니다. 공원묘지가 아니고, 나와 내가 평생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들이 나보다 먼저 죽어서 몇 명만이 고이 잠들어 있는 그런 곳.
- 그곳은 정말 넋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고 있고, 주위에는 작고 가냘픈 들꽃들이 잔뜩 피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새빨간 상사화도 무리를 지어 피어 있지만 하루 종일 아무도 오지 않아요. 아무도 그 곁을 지나가지도 않습니다. 차 소리도 비행기 소리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숲을 빠져나가는 바람 소리만 들립니다.
아무도 무덤을 찾아오지 않고, 향도 피워주지 않을뿐더러, 경문을 읽어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묘비도 묘석도 없고 봉분 위에 작고 동그란 돌을 얹은 쓸쓸한 무덤이지만, 그래도 전혀 외롭지 않습니다. 맑게 갠 하늘 높이 솔개 두 마리가 날개를 펼치고 둥글게 돌면서 날고 있는 것이 보이고, 가까운 풀숲에서는 벌레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낮부터 울고 있습니다.
- 같은 장소에 내 무덤 말고도 서너 개의 무덤이 있고, 그 무덤의 주인은 모두 살아 있을 때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입니다. 다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뿐이라 조용하기 그지없지만 마음과 마음은 얼마든지 통하고 있지요. 봄이 오면 어디선가 아름다운 나비가 날아오고 그것을 다 같이 바라보며 참 예쁘구나, 생각하는 마음은 이내 하나가 되고, 여름에는 숲에서 들리는 몇 종류의 매미 소리를 들으면서 다 같이 깜빡깜빡 잠에서 깨어납니다. 가을에는 춤추듯 떨어지는 알록달록 단풍이 든 나뭇잎이 무덤을 덮어주면서 다 같이 옛날 일들을 차분히 떠올리고, 겨울이 되면 투명한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올려다보면서 가슴 떨리는 마음으로 조용한 행복에 젖어듭니다.
- 그런 상상을 하다 보면 죽어서 땅에 묻혀 완전히 흙으로 돌아간 뒤에도 우리에게는 분명 이 세상이 보일 것 같고, 소리가 들릴 것 같고, 뭔가를 느낄 수 있을 것 같고, 그런 일들을 믿을 수 있게 됩니다.
-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고 죽으면 사람은 완전히 무로 돌아간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주장은 틀리지 않습니다. 합리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으로 사물을 생각하려는 자세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하지만 말이죠.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죽으면 무가 된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계기가 있었어요.
단순히 죽는 게 무서워서 억지로 그렇게 생각해 보려는 게 아닙니다. 사후 세계가 있으면 좋겠다는 희망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솔직히 말하자면 말이지요, 사람은 죽어도 결코 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현실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요, 분명히 내 눈으로 봤습니다.
유령? 아, 뭐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기는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 옛날부터 상상해 온 유령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릅니다. 있잖아요, 왜, 버드나무 아래에서 두 손을 도깨비 모양으로 하고 억울해, 억울해하면서 무섭게 등장하는 소복 차림에 머리가 긴 유령 같은, 그런 전통적인 모습은 결코 아니고요. 유령이라는 한 단어로 묶어버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 하지만 정말로 엄청난 체험을 한 건 딱 한 번이었습니다. 단 한 번뿐인 체험 말입니다.
- 이래 봬도 나는 어엿한 현대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어릴 때 전쟁을 경험하고 전후의 폐허와 혼란기를 극복하고 일본이 고도성장을 이룩하기 시작했던 시대에 사춘기를 맞이했으니까요.
- 살아가기 위한 합리적인 사고방식,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일찍부터 배워왔습니다. 그래서 덮어놓고 비과학적인 것을 믿은 나머지 겁에 질리거나, 자신의 불행을 저주받은 항아리나 원한 있는 영혼이 깃든 땅 때문이라며 액막이를 하느라 열을 내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지요. 기본적으로는 그렇습니다.
-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돌이켜 생각하면 참으로 이상한 사건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일, 합리적으로 해석하려고 해도 도저히 풀 수 없었던 일,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일... 하지만 그런 건 말이죠, 지나고 보면 어느새 잊어버리기 마련입니다. 그 순간은 말할 수 없이 불가사의해서 괜히 무섭기도 하고 등줄기가 오싹해지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다 보면요. 일상생활 안에서 흐르는 시간 속으로 사라집니다. 그야말로 신기할 정도로 금세 잊어버리지요.
- 남편의 회사 동료가 소개해줘서 남편이 선택한 업체였습니다. 도편수 외에 목수 몇 명이 전부인 매우 작은 규모의 업체였는데, 그곳 도편수는 정말 일을 열심히 하는 솜씨 좋은 분이었습니다.
나이는 저보다 조금 위였던 것 같아요. 인품이 좋고 이야기도 재미있게 해서 공사를 하는 내내 점심시간이면 차를 대접하거나 간식을 내가거나 커피를 갖다 주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음이 끊이지 않았지요. 정말 즐거웠습니다.
- 어수선한 세상이라 상대를 확인한 다음에 문을 열라고 남편이 항상 주의를 줬거든요.
문 밖에는 증축공사를 해준 업체의 도편수가 서 있었어요. 말쑥한 검은 양복 차림이었지요. 그를 본 지 몇 년이 지나 있었고 그런 차림을 한 도편수를 본 것도 처음이었지만 그 사람이라는 건 금방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어머, 어쩐 일이세요? 반갑네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서둘러 문을 열었습니다. 거기에 도편수가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서 있었습니다. 조금 야윈 듯했지만 크게 달라진 것도 없었고 실눈을 하고 웃는 모습이 예전 그대로였지요.
"오늘은 사모님께 이걸 전해드리려고 들렀습니다."
그는 웃음을 띤 채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밀며 말했어요. 들여다보니 백화점 쇼핑백에 들어 있는 선물은 그 유명한 '히요코(팥 앙금이 들어간 생과자로 병아리 모양의 크고 작은 상품들로 유명하다)'라는 브랜드의 생과자였습니다.
"언젠가 이 댁 공사를 했을 때, 직업적인 일이었지만 정말 즐거운 나날이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했어요.
"그때 감사했다는 인사를 해야겠다고 항상 생각은 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이제야 찾아뵙게 되었네요."
"어머나!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나는 그렇게 말하고 그가 내민 생과자가 든 쇼핑백을 받아 들었습니다.
- " 아, 맞다! 도편수님은 커피를 좋아하셨지요. 지금 바로..."
도편수는 이렇게 말했어요.
"아닙니다. 죄송하지만 좀 바쁜 일이 있어서요.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사모님 얼굴을 뵙고 이렇게 인사드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면서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며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하고는 그대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어요.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게 되었지요.
그 후 차를 우려서 금방 받은 생과자 하나를 꺼내서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었습니다. 밤이 되어 집에 돌아온 아들이 히요코 상자를 보고 뭐냐고 묻기에 낮에 도편수가 찾아와 두고 갔다는 이야기를 했지요. 그리고 다시 차를 내려 아들과 같이 하나씩 먹었습니다.
- 남편은 그날 밤 오사카 출장이 있어서 집을 비웠기 때문에 이튿날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습니다. 목욕을 마치고 나온 남편에게 어제 도편수가 찾아왔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왠지 모르지만 나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다면서 일부러 이 생과자를 사 들고 왔었다고.
남편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나를 빤히 보더니 말했어요. "당신도 참, 실없는 소리 좀 하지 마." 화가 난 것 같은 어조였습니다.
- 죽은 사람은 분명 그 도편수였고, 그 당사자가 올해 11월에 생과자를 들고 양복 차림으로 나를 찾아올 리는 없다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나도 아들도 분명히 '히요코'를 먹었는걸요. 병아리 모양의 익숙한 달콤한 맛,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그 맛 그대로의 생과자였습니다. 포장지나 상자, 쇼핑백에 새겨진 상표도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습니다.
- 그건 뭐였을까, 지금 생각해 봐도 신기하기 짝이 없습니다. 도편수가 죽고 나서 나를 만나러 와주었다는 건데, 실제로 누구나 평범하게 먹을 수 있는 생과자를 갖고 왔다는 사실을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죽은 사람이 과연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 이 일을 포함해서 그와 비슷한 신기한 일을 많이 겪어왔습니다. 일일이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도처에 있을 테니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것이고 끊임없이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들어주는 사람도 지겨울 테지요. 그래서 이쯤에서 그만하려고 합니다.
- 아까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미리 한 마디 언급했던 걸 기억하시는지요? 정말 엄청난 체험을 한 것은 딱 한 번뿐이라고, 그때의 체험에 비하면 다른 사건들 따위는 그야말로 어린애 속임수 같은 것이지요.
- 어째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 피로연장에서 나는 한 남자에게 자꾸 신경이 쓰였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양복을 입은... 그래요, 4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습니다.
특별히 미남이었거나 유명한 배우이기라도 했다면 눈길을 끄는 게 당연했겠지만, 그 사람은 전혀 다른 타입이었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아무 특징도 없는 수수한 느낌에 키도 크지도 작지도 않은 남자였습니다. 시종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 조심스러운 몸가짐이라든지 조용한 미소 같은 것이 묘하게 인상에 깊이 남았던 겁니다.
몇 번 눈이 마주친 건 내가 무심코 그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봤기 때문일 겁니다. 아마 신랑 신부의 상사나 업무 관련 회사의 하객이겠지 싶어서 그런 사람과 몇 번씩 눈을 마주치는 것도 이상하고 상대도 이상하다고 여길 테니까 얼른 눈길을 돌렸지요.
하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건 금방 잊어버렸습니다.
- 그로부터 두 달 정도 지나서였을까요. 무슨 용무였는지는 잊었지만 쇼핑이나 뭐 그런 일 때문에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한낮의 밝은 시간대였는데, 시부야역의 플랫폼에서 또다시 그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그 사람은 플랫폼 중앙 부근에 서 있었습니다. 더운 날 오후가 조금 지나서 땀을 흘리면서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나는 그 사람의 옆모습을 보고 어라, 어딘가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누구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조금 더 앞으로 가서 전철을 탈 생각이었지만 그 남자가 누구였는지 생각해 내기 위해서 그 사람 가까이에서 전철을 기다리기로 했지요.
- 하지만 망설이는 동안 전철이 도착해 문이 열리면서 우르르 다른 승객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간 순간, 그 사람의 모습은 인파에 섞여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 그래서 무심코 앞을 봤는데 '그 남자'가 꽉 찬 엘리베이터 안에 있었습니다. 중앙에서 약간 문쪽에 가까운 곳에...
언제 탔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8층이나 7층에서 탔을 리는 없으니 6층 단체 손님에 섞여 탄 게 분명했지만 모두 문쪽을 향해 서 있는데 왠지 그 사람만은 반대 방향..., 그러니까 안쪽 벽을 향해 서 있었어요.
- 그러는 동안에도 '그 남자'는 나를 빤히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요, 며느리가 아니고 나를 보고 있었다니까요.
온화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의 눈은 어딘가 코끼리 눈을 닮아서 그렇게 빤히 바라보고 있는데도 전혀 불안하거나 언짢은 기분은 들지 않았습니다. 아, 나를 보고 있구나 싶을 뿐이었죠. 조금 쑥스러운 느낌이기는 했지만 노골적으로 시선을 피하거나 무시하고 싶은 그런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40대인지 50대인지, 자세히 보면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머리숱은 많지도 적지도 않고 백발이 섞여있는지 아닌지도 확실치는 않지만, 그 특징 없는 얼굴에 단 한 가지 구체적으로 인상에 남는 것이 있다면, 그건 장난기가 담긴 소년 같은 표정이었습니다. 표정 자체에 어린 티가 났고 그것이 그를 상냥하고 온화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것 같았지요.
- 그래도 그런 관찰과는 별도로 왜 이 사람과 몇 번씩이나 마주쳤을까 하는 신기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연 치고는 빈도가 너무 잦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 뭔가 이상하다고, 참 희한한 일이라고 느끼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습니다.
그렇다고 계속 그 생각만 하고 있었던 건 아닙니다.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나는 비과학적인 일을 믿거나, 덮어놓고 그런 것에 마음을 쏟은 나머지 있지도 않은 망상을 부풀리며 살아가는 데는 오히려 저항을 느끼는 축이거든요.
그래서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아직 그 시점에서는 아들 부부의 결혼식 피로연장에서 봤던 그 남자와 몇 번씩이나 우연히 마주치는 것이 희한한 일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 분명 10월 중순쯤이었을 겁니다. 일요일이었는데 아들이 전화하더니 드라이브도 할 겸 며느리와 함께 오겠다고 했습니다. 정년을 맞아 퇴직하고 집에서 한가하게 뒹굴고 있는 남편도 지루해하던 터라 그럼 오래간만에 다 같이 저녁이라도 먹자고 했지요. 차를 끌고 오는 아들 부부를 기다렸다가 나와 아들만 아들의 차로 역 앞 슈퍼마켓에 장을 보러 갔습니다. 이런 기회도 흔치 않으니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비싼 재료를 사다가 맛있는 전골을 마련해보자 싶었지요.
- 남편과 둘이서 연금만으로 생활을 꾸려가다 보니 사고 싶은 재료를 마음껏 담을 수는 없었습니다. 오늘은 좀 특별한 전골을 만들자 생각하면서도 쇠고기 말고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소박한 장보기를 마치고 계산대에 줄을 섰습니다.
- 그 탓인지 그 주부 앞에 있던 남자를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요. 그러다 남자아이의 장난이 최고조에 달해 아이 엄마가 "이 녀석! 조용히 못해!” 하고 낮게 소리쳤을 때, 우연히 제 시선이 '그 남자'의 옆얼굴에 못 박힌 듯 멈췄습니다.
-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제가 먼저 알아봤을 거예요. 결혼식에 초대한 건 아주 친한 사람들뿐이었고요. 이렇게 코앞에 있었으면 당연히 제가 알아봤겠죠. 잘못 보셨을 거예요."
그때 나는 가슴속으로 서늘한 바람이 휘잉 지나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방금 그 남자가 내게 보인 미소. 그 미소가 정말 쓸쓸해 보였거든요.
왜 그런 미소를 지었는지 궁금했습니다. 오래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다는 듯한 미소. 나를 알고 있고 나에게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그런 미소였습니다. 도대체 그 사람은 누굴까, 왜 내 앞에 자꾸 나타나는 걸까.
- 그로부터 열흘도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아침, 문 옆에 있는 우편함에 신문을 가지러 나갔을 때였어요. 현관 바로 옆에 남자가 서 있는 게 보였습니다. 그 사람이었습니다.
마침 가랑비가 오고 있는 날이라 추웠을 텐데, 그 사람은 하얀 와이셔츠에 검은 바지 차림으로 멍하게, 우두커니 거기에 서 있었습니다.
아니, 서 있었다기보다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안개가 낀 날도 아닌데 발밑 쪽이 또렷하게 보이지 않았지요.
현관문 밖은 도로고, 그 시간이면 평소에는 등교하는 초등학생들이 지나가기도 하는데 그때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차도 오토바이도 자전거도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바람도 불지 않고 주위가 조용했습니다.
- 남자는 그저 우두커니 거기 서서, 다시금 나를 보고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눈만은 역시 장난기가 가득했지요.
아아, 이게 무슨 일이지, 하고 나는 멈춰 선 채 생각했습니다. 그 눈빛을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분명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구인지는 생각이 나지 않았지요. 목구멍까지 나오려는 이름을 떠올리지 못할 때처럼 안간힘을 썼습니다.
- "괜찮으시다면 이 우산 가져가세요. 옷이 젖잖아요."
깊어가는 가을 냄새가 주위에 감돌고 있었습니다. 손바닥만 한 작은 마당에서 내가 정성 들여 가꾼 베고니아 꽃이 비에 젖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아무 말도 없이 절 빤히 보며 실눈을 하고 웃었습니다. 가늘게 뜬 눈에 뭔가 반가운 듯한 빛이 깃들었습니다. 나는 용기를 내서 그 보일까 말까 하는 빛을 응시하며 기억을 떠올리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때 뒤에서 거실의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게 신호가 된 것처럼 눈앞의 하얀 셔츠 차림의 남자는 스르륵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 이 세상 사람이 아닌가 보구나 하고 막연하게 납득했기 때문인지 말을 거는 게 무섭지는 않았지만 아무 대답도 없는 상대였던지라, 무엇 하나 사정을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가려운 곳에 손이 닿지 않는 것 같은 느낌, 그런 석연치 않은 기분인 채로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금까지처럼 생활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 무섭냐고요? 아뇨, 전혀.
왜일까요. 스스로도 알 수 없지만 그 사람은 무슨 해를 가하는 것도 아니고, 무서운 모습을 하고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뭐랄까, 나와 뭔가 관계가 있는 사람으로 내 눈에만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나는구나 하고 이해했어요. 나는 그런 것만 알고 나면 공포심은 갖지 않아도 되는 사람인가 봅니다. 하지만 그런 체험을 한 게 처음인지라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그때 비로소 알았던 거지만요.
- 남편은 고타쓰에 들어앉아 텔레비전만 보면서 따끈한 일본주를 조금 마시고는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나는 왠지 잠이 오지 않아서 고타쓰에서 잡지 따위를 뒤적거리고 있다가 그것도 싫증이 나서 간단히 뒷정리만 하고 욕실로 갔었습니다.
-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직해서 아사쿠사에 있던 큰 철물점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집과 회사만 오가는 생활이었지만 그런 내게도 스무 살 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지요. 가게에 드나드는 사람이었는데, 아내도 자식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도 아직 소녀티가 남아 있었을 나와 사귀는 게 신선했을 겁니다. 퇴근 후에 맛있는 걸 먹으러 데리고 가곤 했고, 그러는 사이에 점점 깊이 빠져들었지요.
내가 그 사람에게 빠지지 않고 줄곧 그랬던 것처럼 곧장 집으로 돌아가서 남동생을 보살펴주었더라면, 그런 생각을 합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남동생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하고.
- 그해 여름, 아무리 봐도 불결해 보이는 아이스캔디를 팔러 다니는 남자가 집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지금과 달리 위생 상태가 좋지 않았던 시대였으니까요. 저런 걸 먹으면 배탈이 나니까 절대로 먹으면 안 된다고 평소에 늘 남동생에게 말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남동생은 제가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아지면서... 아니, 그보다 다른 데 정신이 나가 있는 누나가 어린 마음에도 서운했겠지요. 다른 아이들은 부모가 엄하게 타일러 정체가 불확실한 장사꾼에게 절대 음식을 사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켰지만, 남동생은 어느 날 내가 없는 동안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하고 용돈을 받아 그 아이스캔디를 사 먹었습니다. 그리고 티푸스에 걸린 겁니다.
아이스캔디 막대에서 많은 티푸스균이 검출되어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지만 지금과 달리 모든 게 철저하지 못했던 시대였지요. 아이스캔디 장사꾼은 도망가 버려서 결국 잡지도 못했고, 경찰도 그대로 손을 놓아버렸지요. 신문 3면 기사 밑에 작게 보도된 게 다였습니다. 남동생은 병원에 격리된 채 치료한 보람도 없이 차가운 시신이 되고 말았습니다.
- 나는 자책감에 빠졌습니다. 스스로를 마구 욕했습니다. 내가 해서는 안 되는 사랑에 빠지지만 않았다면 남동생은 죽지 않았을 거라고.
자책하고 또 했지만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갈 수밖에 없었지요...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남동생의 모습은 퇴색하고, 스스로 기억에 새겨놓은 귀여운 얼굴과 남동생은 죽었다는 사실만이 남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실도 어느새 먼지처럼 작아져서 바람에 날려가고 보이지 않게 되었지요.
그리고 결국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겁니다.
- 죽었지만, 역시 마음은 아직 살아 있는 거구나. 그 마음에 옷을 입히고 점토로 공예하듯 얼굴이며 모습이며 만들어서, 죽은 자는 그렇게 저세상에서 돌아오는 거구나. 그쪽 세상과 이쪽 세상은 늘 눈에 보이지 않는 인연으로 이어져 있고,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만이 돌아온 사람과 재회할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 <돌아오다>
- [깊고 어두운 밤 꿈에 보는 당신을 밤이 밝아 낮이 되면 멀리 떨어져 사는 처지에 만나지 못하니 지금은 그것이 안타까울 뿐 -<만엽집>에서]
- 병으로 세상을 떠난 아내가 요즘 들어 자주 나타난다. 그렇다고 특별히 난감할 건 아무것도 없다. 새삼스레 무섭다고 느끼는 것도 아니다.
- 원래 나의 제자였던 아내는 나보다 열세 살 연하였다.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고풍스러운 구석이 있는 아가씨였는데, 스물두 살에 나와 결혼하고 나서는 집에만 있으면서 얌전하게 집안일에 정성을 쏟았고, 사치라고는 모르고 늘 생글생글 밝게 지냈다.
몸이 약했던 것도 아닌데 달거리를 할 때면 유난히 몸이 무겁다고 했고, 그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우리 사이에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 정도 지속되었던 아내와의 생활은 얼마나 즐겁고 행복했는지 모른다.
- 아내는 매사에 조심스러웠고 요즘 젊은 여자들처럼 거침없고 솔직한 언동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렇다고 옛날 여자처럼 모든 것을 참고 있었던 건 결코 아니었다. 그녀를 감싸는 공기는 항상 소녀처럼 천진난만했다. 어떤 일에 대해서나 솔직하게 의견을 말했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꺼리지 않고 남편인 내게 질문 공세를 펼쳤으며 내 답변에 솔직하게 귀를 기울였다.
애교가 많아 내 팔에 매달려 응석을 부리기도 하고 내 귓불을 가볍게 깨물거나 내 볼에 자기 볼을 대고 비비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누이처럼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요모조모 세심하게 내 뒷바라지를 했다.
- 귀여운 여자였다. 작고 동그란 얼굴이 귀여운 수달을 닮았다. 몸집이 작고 균형이 잘 잡힌 체격에다가 살집이 좋았다. 윤기 있는 깨끗한 피부는 탄력이 있었지만 내면은 꿀처럼 말랑말랑해서 안고 있으면 늘 내 품 안에서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가 즐겨 썼던 화장품은 달착지근하고 청결한 향기가 나는 제품들이었다. 남자인 나는 그녀가 쓰는 화장품의 이름까지는 알 수 없지만 거기에는 늘 햇빛을 띤 마른풀 같은 단내, 우유 같은 냄새도 섞여 있었다.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아내만의 냄새였다.
- 그런 아내였기에 그녀가 죽고 나서 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 너무도 반갑고 고맙고 기뻤다. 아, 또 와주었구나 하는 마음에 눈물이 났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내가 나타날 때마다 뭔가 서늘한 기운이 내 안을 소리도 없이 빠져나가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 맹세컨대 그것은 공포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섬뜩하다든가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기분이 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스르륵 깊고 차가운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 된다.
- 바닥 모를 고독을 느낀다고 해야 할까. 허무의 바닥을 들여다보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고 할까. 뭐라고 딱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아내가 나타날 때마다 내 안에 있는 어둠이 점점 짙어져 가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것이 조금 두렵다.
- 아내의 투병을 지켜보고 있을 때는 활발하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런대로 마음을 다잡고 있을 수가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까지 했던 그대로 생활을 꾸려나가지 않으면 불안과 절망에 짓눌려버릴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 그런 식으로 아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애써 활기를 가장했고,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도 기운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아내가 죽고 나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기운이 빠져버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끔찍한 권태감에 시달릴 뿐,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건강한 욕망은 깡그리 잃어버렸다.
- 하지만 달리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직업을 포기해 버리면 결국에는 집에 틀어박혀 지낼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40대 중반에 접어든 내 자신이 급격하게 늙어 추레해지는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보고 싶은 사람도 없고 집을 나서도 갈 데라고는 없다. 마지못해 유지하고 있는 대학 강의를 마치면 터덜터덜 어깨를 늘어뜨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주말이나 공휴일은 아침부터 밤까지 아내와 지냈던 작은 셋방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서 두서없는 생각에 골몰하게 되었다.
- 걸려오는 전화도 거의 받지 않는 생활을 계속하다 보면 의식이 기묘한 방향으로 뒤틀려버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 세계라는 것이 안개처럼 덧없는 느낌으로 다가올 뿐, 희로애락의 감정조차 아득히 멀어지는 것처럼 무력감에 사로잡히곤 한다.
- 아주 가끔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 때면 누군가의 호의를 받아들여 술을 마시러 가거나 지루한 모임에 얼굴을 내밀기도 해 보았다. 그럴 때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상식적이고 쾌활한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것이 이상하다면 이상했다. 여태까지 모르고 있었지만 나는 자기 연출의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라서 설사 죽을 것 같은 상황일지라도 남들이 나를 이런 사람으로 여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연출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 붙임성 있게 웃고 기탄없이 맞장구를 치고 의견을 개진하고, 시답지 않은 농담도 던진다. 자리를 같이한 사람들이 다들 웃어준다. 개중에는 "사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혼자 지내시는 게 무척 괴로우실 것 같아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좋아 보여 참 다행입니다." 하고 진지한 얼굴로 말해주는 사람도 있다. 나는 미소를 잃지 않고 "걱정해 주시니 감사합니다만, 그런대로 괜찮습니다."라고 대꾸한다.
무슨 무슨 이벤트에 참가해 달라는 제의를 받으면 죽어도 가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그럼요, 꼭 가죠." 하고 눈을 빛내며 대답할 수 있었고,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을 상대하면서 짐짓 공감한다는 표정을 만들어 고개를 끄덕이고 적당히 의견을 피력할 수도 있었다. "중장년을 대상으로 한 소개팅에 참가해보지 않겠나. 기분전환이 될 거야."라고 말해주는 친구에게는 "조만간 한 번 갈게." 하고 웃는 얼굴로 대꾸한다.
- 더구나 아무 거리낌 없이 상대가 의아하게 여기지 않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걸 보면 스스로도 참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내게 있어서 그런 인간관계는 모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것'이라는 구별에 불과한 것이었다.
- 집에 돌아와 혼자가 되면, 그 순간부터 작고 추한 벌레가 되어 등을 잔뜩 웅크리고 하루 온종일 허공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생활로 돌아간다. 휴대전화의 전원은 아예 꺼놓고 집 전화가 울려도 무시하기로 작정하고 있다. 집에서는 컴퓨터도 켜지 않는다. 신문에도 텔레비전에도 흥미를 잃었다.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며 우울 속에 빠지는 것 말고는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기 때문이지만, 그런 기분은 때로 감미로움으로 다가와 내 가슴을 짜릿하게 했다. 견딜 수 없는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그러한 심정 안에는 한편으로 기쁨에 가까운 뭔가도 있었다.
-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모님을 그만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따위의 낯간지러운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그건 터무니없는 착각이다.
물론 나는 아내를 사랑했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내를 잃고 이렇게 견디기 어려운 슬픔을 느끼는 건 단순히 아내를 사랑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 내 존재 자체가... 나 자신이 이미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 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죽은 아내를 이렇게 그리워하며 애를 태우고,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내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나 자신이 이미 현세의 존재가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으며, 어서 어둠의 세계와 동화되고 싶다는 마음에 애를 태우고 있는 것이다.
- 저세상을 떠돌고 있는 죽은 자를, 나는 보고 싶다.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어서 만났을 때의 기쁨을 생각하면 그 느낌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손을 마주 잡고 함께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싶어 진다.
- 밤샘 예절 참석자들을 위한 자리가 따로 마련되어 있어서 분향을 마친 참석자들은 곧장 안쪽에 있는 다다미방으로 가도록 안내를 맡은 사람이 손짓으로 방향을 표시했다. 그러나 나는 눈을 내리뜬 채로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고 나서 자리를 뒤로 했다.
절의 어둑한 복도를 지나 현관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동료 N이 서 있었다.
N은 프랑스 문학을 전공하는 교수로 미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이따금 나처럼 미술잡지 등에 프랑스 회화에 대한 해설을 쓰기도 했다. 나이는 나와 동갑이었지만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건지 혹은 관심이 있어도 인연을 만나지 못한 건지 결혼경력이 없는 독신이었다.
- "나도 그만 가려던 참이야. 역까지 같이 가자고."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가까운 역까지는 걸어도 10분 정도, 그 정도 거리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것조차 꺼려질 정도로 싫어하는 상대는 아니었고, 나는 오히려 이렇게 우연히 마주친 사람이 N이라서 다행이다 싶었다. 내가 아는 바로는 동료 중에서도 가장 점잖고 말수가 적으면서 배려가 있는 사람이었다.
-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던 중이었을 것이다. 질문이 갑작스러워 나는 어리둥절해서 "으응?"하고 되물었다.
"시원한 일본주 말일세. 싫어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아아, 싫어하지는 않지."
"여기 역 뒤에 있는 집인데, 분위기가 좀 칙칙하긴 하지만 메밀국수를 맛있게 하는 데가 있네. 잠깐 들러서 튀김을 안주로 시원한 일본주라도 한잔하고 메밀국수도 먹고 가지 않을래? 시간도 그렇게 많이 잡아먹지 않을 테니까."
"이 부근을 잘 아는 모양이군."
"좀 알지. 학생 때 이 근처에 사는 중학생 여자아이 가정교사를 한 적이 있거든."
"오호, 그랬었군."
"젊었을 때는 24시간 내내 배가 고팠잖은가? 공부를 마치고 나면 간식이라고 내준 모양만 그럴싸한 비스킷이며 홍차 따위만으로는 허기가 가시질 않았어. 그래서 돌아올 때는 늘 그 집에 들러 메밀국수를 한 그릇 먹었지. 맛은 내가 보증하네."
- 천둥소리가 가까워졌다. 바람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그러다 잠시 후에는 입구의 포럼이 뒤집어질 정도로 거센 돌풍이 불어 축축하고 서늘한 바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 칸막이 안쪽에 있는 무리가 계속 소곤소곤 뭔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젊은 사람들 같은데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게 아니고 뭔가 한 가지 화제에 전원이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을 때처럼 들리는 말투였다. 이따금 들려오는 대화 속에 여자의 작은 웃음소리가 섞여 있었다.
언제 튀겼는지 살짝 식은 새우튀김과 시원한 술이 나왔다. 나와 N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의 잔에 술을 따라 마시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왠지 말이 많았던 N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나도 말할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N과 마주 앉은 채로 묵묵히 튀김을 먹고 술을 마셨다.
- 점점 가까워지는 천둥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강렬한 파란 번갯불이 주위를 비추고 지나갔다. 그런 직후, 마치 그것을 신호로 하늘이 둘로 딱 쪼개진 듯 거센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가게 안에는 전등이 켜져 있기는 했지만 빛이 약해서인지 구석구석까지 닿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가게 전체가 그을음으로 검게 변한 것처럼 보였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다. 길바닥을 찰싹찰싹 두드리는 빗소리가 마치 발밑에서 들려오는 것 같아서 앉은자리가 불안했다.
안쪽 자리의 손님들은 여전히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식당 주인 부부는 어디로 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종잡을 수 없는 느낌에 짓눌려 나는 묘하게 가슴이 답답해졌다.
- 마당을 보려면 유리창 너머로도 볼 수 있으니까 굳이 나가지 않아도 되잖아, 하고 타일렀지만 듣지 않았다. 그런 아내가 무척이나 안쓰럽고 가련했다. 나는 아내의 어깨에 숄을 둘러주고 두 팔로 안아 들고 마당으로 데리고 나갔다.
밖에는 거실의 노란 불빛이 어둠을 타고 흐르는 벌꿀처럼 네모난 유리창 모양 그대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몇 발자국만 걸으면 끝나는 작은 마당이었지만 아내는 내 품에 안긴 채 내 목에 두 팔을 두르고 예쁘게 피어 있는 다채로운 빛깔의 풀꽃들을 하나씩 어루만졌다.
"가꾸지도 않았는데 용케도 이렇게 피었구나."라던가 "어머, 이파리를 벌레가 조금 파먹었네." "비료를 더 줘야 하는데." 하면서 손을 뻗어 꽃잎과 이파리 끝을 어루만졌다.
"어때? 춥지 않아?" "아니, 괜찮아요." "이제 안으로 들어갈까?" "싫어요, 이대로 조금 더 있을래요." 그런 대화가 낮고 짧게 오가곤 했다.
- 휴강할 때가 많아졌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떻게 할 수도 없다.
어느 날 내가 걱정스러웠는지 N이 나를 복도 끝으로 끌고 가더니 물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컨디션이 좋지 않은 건가?"
나는 부정하지 않고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다.
"사실은 아내가 죽고 나서 왠지 몸이 좋지 않아. 내 짐작이 맞는 건지 모르지만 점점 더 나빠지고 있는 것 같아. 올해 들어서는 온몸이 나른해서 도무지 의욕이 솟지를 않네."
N은 안 됐다는 얼굴로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런 것 같더라니까." 하고 말했다.
- 이대로는 아무 일도 해결되지 않을 테니 학부장에게 이야기해서 휴가를 내는 게 어떤가, 하고 N은 말하기가 자못 불편한 듯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이렇게 계속 휴강을 하다 보면 아무래도 평판이 나빠질 걸세. 적절한 병원을 찾아가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지 않겠나?"
N이 이렇게 말해줄 정도라면 이미 자신의 평판은 땅에 떨어졌을 테지만, 그 또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그래야겠다고 대답하고는 조언해 준 N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정신적인 피로가 누적되어 몸이 망가진 것 같아 치료를 받고 싶다, 학교를 얼마간 쉬었으면 좋겠다고 학부장에게 요청했더니 의외로 흔쾌히 받아들여 주었다. 일단 여름방학이 끝나고 나서 복귀하겠다고 말은 해두었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 치료를 받겠다는 건 거짓말이었고 나는 어떤 병원도 찾아가지 않았다. 6월에 접어들고부터는 학교도 나가지 않고 그저 멍하니 집 안에 틀어박혀 있을 뿐이다.
사흘 전이었던가. N이 근처에 온 김에 얼굴이나 잠깐 보겠다며 우리 집에 들렀다. 귀찮고 번거롭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마음을 써주는 것만은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며 그를 거실로 맞아 정말 잠깐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N은 엉망으로 어질러진 집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죽은 아내의 영정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내 이럴 줄 알았네,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았다니까, 하고 농담하듯 말하면서 편의점에서 사 온 캔 커피를 꺼내 마시더니 크게 기지개를 켰다.
"가끔 이렇게 들여다보러 올게.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게 사다 줄 테니까."
호의는 고맙게 여기면서도 나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미안하지만 누가 됐든 학교 관계자와는 얼마간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네, 만나다 보면 쉬는 것 같지도 않을 테고 말이야. 모쪼록 기분 상하지 말았으면 하네."
내가 그렇게 말하자 N은 "아니야, 조금도 신경 쓰지 말게."하고 말했다.
- 이런 이야기 지금까지 아무한테도 한 적이 없지만... 하고 운을 떼놓고 N은 자신도 예전에 나와 비슷한 상태가 된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정신과에서 처방해 준 몇 종류의 약을 복용하면서 다행히 휴강을 하지 않고 넘어갔지만 그때는 정말 많이 힘들었고, 솔직히 말하면 죽을 생각까지 했었다고. 약이 효과가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럴 때는 차라리 쉬어야 했던 게 아닐까 싶고, 그때는 주위 사람들에게 병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며 동정 가득한 얼굴로 말하며 이해를 표시했다.
- 그때 나는 하마터면 N이 데리고 갔던 메밀국숫집에서 죽은 아내를 봤다는 것과 그 후 아내가 자주 눈앞에 나타난다는 이야기를 할 뻔했다. 그뿐 아니라 그 메밀국숫집이 아직 있는지, 있다면 다시 가보고 싶다, 가면 아내가 있을지도 모르니까,라고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아무리 답답해도 그런 이야기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N은 마음의 병에 걸린 경험이 있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지만 내가 죽은 사람과 교류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꺼내면 ...
- <칠흑의 밤>
- 화창한 날씨에 가을의 메마른 공기가 향기롭게 감도는 기분 좋은 날이었다. 날이 갈수록 일몰이 빨라지고 있다. 산책을 하려면 해가 기울기 전이 낫겠다는 생각에 나는 조금 일찍 집을 나섰다.
- 산책 코스는 정해져 있다. 집을 나와 골목을 오른쪽으로 돌아 첫 번째 모퉁이를 지나 다시 긴 골목으로 들어간다.
그 긴 골목 주변은 예전부터 내가 좋아하던 곳이다. 늘어선 집들은 모두 작고 오래되었지만 소박하고 성실하게, 부지런하게 살아온 사람들의 숨소리로 넘치고 있다. 정성을 쏟아 가꾸고 있는 마당도 보기 좋다. 마당마다 청초하고 맑은 빛깔의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코스모스, 싸리, 여뀌, 쑥부쟁이, 마타리...
- 어디에서랄 것도 없이 달착지근한 향기가 사방에서 전해져 온다. 올해도 금목서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내 가슴은 설렜다. 달콤한 향기를 뿌리는 그 아름다운 나무는 어디에 있을까.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본다.
방금 지나온 오솔길 너머에, 단층집의 문 안쪽으로 금목서 한 그루가 보인다. 잎 사이로 오렌지색의 아름답고 작은 꽃들이 촘촘하게 피어 있다.
그러고 보니, 하고 나는 떠올린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네 살 아래 여동생 에미를 데리고 금목서 찾기를 즐기곤 했다.
- 축하 파티를 어떻게 할지에 대해 어머니와 의논하고 있다.
어머니는 특별히 맛있는 초밥을 만들 것이다. 어머니가 만드는 초밥은 기가 막히게 맛있다. 아버지는 손님이 올 때마다 어머니에게 초밥을 만들게 했다. 그리고 한입 먹은 손님의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그 맛을 칭찬하는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곤 한다.
- 아버지는 어머니와 띠동갑에 연상으로, 붉은 얼굴에 체격은 뚱뚱한 편이다. 이른바 돼지 목이라고 할 수 있는 용모다. 성격은 온화하고 보기 드문 로맨티스트이지만 아무리 호의적으로 보아도 잘생긴 얼굴이라고는 할 수 없다. 우리 동네아이들은 저희들끼리 아버지를 '붉은 돼지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반면, 어머니는 호리호리한 체구에 얼굴도 예쁘다. 피부는 희고 투명해서 마치 도자기 같다. 여배우가 되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고 이웃에서도 소문난 미인이다.
오래전에 지인으로부터 어머니를 소개받은 아버지는 한눈에 반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끈질긴 구혼에 겁을 냈지만,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고 어머니를 연모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마음을 얻기까지는 여러 해가 걸렸다고 하는데, 그 웃지 못할 전말은 친척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다.
- 나와 에미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맥주를 마시던 아버지가 자못 진지하게 말한 적이 있다.
"너희 엄마는 말이다. 아버지의 첫 번째 보물이란다. 그리고 두 번째 보물은 사요코와 에미다. 그러니까 아버지한테는 소중한 보물이 셋이나 있다는 말이지."
아직 어린아이였던 나는 볼을 내밀며 불만스럽게 물었다.
"왜 나랑 에미가 두 번째야? 왜 첫 번째가 아닌데?"
"두 번째인지 첫 번째인지는 상관없어."
아버지는 붉은 얼굴을 더욱 붉히며 웃고는 말했다.
"아빠가 갖게 된 순서가 다를 뿐, 세 사람은 모두 아버지의 보물이야.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소중하기는 마찬가지란다."
- 여름밤이었다. 툇마루 끝에 놓인 돼지 모양의 모기향 그릇에서 연기가 부드럽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추녀 끝의 풍경이 딸랑딸랑 소리를 냈다. 어둠에 싸인 마당에는 방안 불빛이 쏟아져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여름 꽃들 위로 벌꿀색의 빛을 던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실눈을 하고 웃으면서 사랑스럽게 나와 동생을 번갈아 바라본다. 그때까지 부엌에 있던 어머니가 쟁반을 들고 방으로 들어온다. 쟁반 위에는 오이와 가지장아찌가 담긴 접시가 놓여 있다.
- "좀 오래된 것 같기는 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말하면서 쌀겨에 푹 절여진 장아찌를 식탁에 놓는다.
"괜찮아. 괜찮아. 곰삭은 것도 그런대로 맛있어." 아버지는 기분 좋게 어머니의 컵에도 맥주를 따른다.
"많이 못 마시니까 조금만 주세요."라며 웃는 어머니는 그러면서도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한다. "아아, 시원해서 좋다."
"사요코도 마실래?"라고 아버지가 묻는다. "자, 조금만 마셔봐."
"네. 맛만 조금 볼게요." 하고 내가 상체를 내밀자 어머니가 "안 돼, 못써" 하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리려 든다.
"의사라는 사람이, 너희 아버지 안 되겠다. 이렇게 어린애한테 술을 권하다니. 학교 선생님이 들으면 기가 막히겠네."
- 아버지는 의원에서의 통상적인 진료 외에 지역 초등학교의 전담 의사도 맡고 있었다. 그래서 낮 동안에는 꽤 바쁜 것 같지만 해가 저물 무렵에는 반드시 귀가했다. 밤이 되어 외출할 일이 있을 때도 저녁 식사만은 1년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집에서 가족과 함께 했다.
어머니가 만든 저녁상에 둘러앉은 가족끼리의 단란한 식사 시간 가장 많이 떠드는 건 나였고 다음이 아버지, 그다음이 어머니, 에미는 가끔 말을 더듬기 때문에 ...
- 그 표정 없는 옆얼굴에 가을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주름과 얼룩이 드러난 살집이라고는 없는 얼굴이었다. 작은 눈을 감싸고 있는 속눈썹만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길었다. 나는 뭔가 신기한 물건이라도 보듯이 그 속눈썹을 바라보고 있었다.
- 그때였다. 나는 그에게서 강한 고독을 느꼈다. 그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인한 고독이었다. 그는 온몸으로 견디기 힘든 고독을 표현하고 있었다.
어디 사는 누구인지, 뭘 하는 사람인지, 어떤 사정이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그가 안고 있는 고뇌를 들여다본 것 같아서 남의 일 같지 않게 가슴이 아팠다.
"매일 여기 오세요?"
나는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걸면서 그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벤치에 살며시 앉았다. 분명히 귀찮게 여길 것 같았다. 그뿐 아니라 이상한 여자라고 의심하며 노인이 자리를 박차고 떠나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가 내뿜고 있는 외로움이 진동하는 소리굽쇠가 된 것처럼 내 안에 울려 퍼졌다. 그를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 노인은 아무 말이 없었다. 말없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내 쪽을 향했다. 빛을 잃은 듯한 작은 두 눈이 나를 보았다.
"완연한 가을이네요." 나는 그에게서 눈을 돌려 정면을 보면서 짐짓 밝게 말했다.
"햇살은 강하지만 가을 기운이 느껴지네요. 점점 해가 짧아지고 있어서겠죠."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느린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오늘 아침에는요, 직박구리가 우리 집 마당에 왔어요. 직박구리는 원래 여름에는 지저귀는 소리만 들리고 모습을 보이지 않잖아요. 그런데 가을이 되면 자주 눈에 띄게 되니 신기하죠. 해마다 그래요. 직박구리가 올 무렵이 되면 아, 이제 가을이구나 하고 어릴 때부터 생각했으니까요."
- 잠깐 침묵이 흘렀다. 조금 있다가 노인은 내 쪽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직박구리라고요?"
여리고 가늘면서도 높은 목소리였다.
나는 반색을 하면서 얼른 노인 쪽을 향해 답했다. "예, 직박구리요. 직박구리, 댁으로는 오지 않던가요?"
"가끔" 그가 말했다. 목이 잠겼는지 가볍게 기침을 했다. "가끔 보기는 하는데."
"직박구리는 참 큰 소리로 울지요.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어요."
"아, 예에." 그는 별 관심도 없다는 듯 대꾸한 뒤 말을 이었다. "그런데... 콩새는 오지 않던가요?"
"콩새요?"
"참새보다 조금 작은 새지요. 엷은 갈색에 검은색이 섞인 날개를 가지고 있는데, 어울리지 않게 얼굴만은 용맹해 보이는 새랍니다. 눈이 검고 또렷해서, 그래요, 밀화부리랑 조금 비슷하지요."
"죄송해요. 저는 밀화부리라는 새가 있는 줄도 몰라서. 아마 콩새도 밀화부리도 본 적이 없을 거예요."
"주의해서 보면 이 주변에서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것도 겨울 한때뿐이지만."
"겨울새군요."
"그래요. 콩새도 마찬가지지요. 밀화부리는 무리를 지어 다니지만 콩새는 단독 행동을 합니다. 거의 무리를 짓지 않지요. 그래서 괜히 뭐랄까..."
- 뭔가 말을 하려던 그가 갑자기 말끝을 흐렸다. 나는 그를 들여다보듯이 바라보았다.
"콩새라는 새가 어떻다는 말씀이세요?"
"아니, 뭐 이런 이야기를 젊은 여성에게 해봐야 우습다고 할 테니까요."
"무슨 말씀을요." 나는 말했다.
- "여기 담배가 들어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말이오. 역시 집에 두고 왔군. 하루에 딱 한 개비만 피기로 해서."
"딱 한 개비라고요? 우리 아버지도 담배를 피우지만 하루 한 갑 정도는 피우시는 것 같던데요. 어머니가 건강을 염려해서 그렇게 끊으라고 하는데도 아버지는 도무지 끊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에요."
"나는 딱히 건강을 위해서 그러는 건 아니오. 이런 시시한 거라도 말이오. 뭐라도 좋으니 뭔가 결정해놓지 않으면 살아있는 것도 잊어버릴 것 같아서 그러는 거지요. 젊은 분에게 이런 말 해봐야 알아듣지도 못하겠지만."
나는 웃는 얼굴을 만들며 말했다.
"젊은 분, 젊은 분, 너무 그러시니까 어쩐지 빨리 나이를 먹고 싶어 지는데요."
그는 다시 나를 쳐다봤다. 그 시선 안에는 희미한 의심과 ...
- "유리창을요? 어떻게요?"
"부리로 두드리더라고요. 콩콩, 콩콩, 이렇게 콩새의 부리는 납빛이라고 할지, 아무튼 칙칙한 색깔인 데다 꽤나 단단해 보였어요. 콩콩 두드리는 소리도 꽤 크고 시끄러워서 쫓아버리려고 했지만 아무리 쫓아도 다시 날아오곤 했습니다. 그러곤 또 두드리는 거예요."
"새가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요?"
"모르겠어요. 정말 모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들새는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많아서 길들이기도 힘들다고 하니, 처음에는 귀여운 녀석이구나 싶어서 보고만 있었어요. 그런데 매일 아침 그러는 겁니다. 아침 6시 반 무렵 시작해서 8시 반 정도까지 말이죠. 계속 부리로 두드렸습니다. 두드리면서 방 안을 엿보는 것 같기도 했어요. 아내는 재미있어했지만 나는 차츰 뭔가 섬뜩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어요. 이 녀석이 왜, 무엇 때문에 이러지 싶었습니다. 창문 너머로 녀석의 얼굴이 보이는 겁니다. 요기랑 요기. 이렇게 아주 가까이에서 말입니다. 들새니까 인간의 얼굴이 그렇게 가까이 오면 무서워하는 게 당연한데 도무지 무서워하는 기색도 없는 거예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가 없고, 새까만 눈으로 내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바로 코앞에 있는데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콩콩, 콩콩, 정신 나간 놈처럼 부리로 계속 유리창을 두드리는 거예요."
그는 거기서 잠시 침묵했다. 내가 잠자코 있자, 그는 짧게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콩새가 오고 나서 사흘 후에... 아내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 "그렇습니다. 그전까지는 건강상태도 꽤 좋아지고 있었는데 그놈의 콩새가 나타난 뒤부터 점점 약해지는 것 같았어요."
"콩새는... 그 후로도?"
"아니요, 전혀 아내가 죽은 이튿날부터 오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나도 콩새에 대한 일은 잊고 있었는데 녀석이 다시 찾아왔어요."
"예에?"
"올해 2월이었지요."
"또 똑같은 행동을 하던가요?"
"그래요. 똑같았습니다. 창고 위에 앉아 유리창을 두드리는 겁니다. 콩콩, 콩콩, 이렇게 끝도 없이 집요하게도 두드렸어요. 난 말이오. 기분이 나쁘다 못해 불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누군가가 죽는 게 아닐까 싶어서요. 아무 근거도 없지만 아내 일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정말 섬뜩한 이야기입니다. 이번에는 기르던 고양이가 죽어버렸어요."
나는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어떻게 그런..."
- "그거야 뭐." 그는 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냥 우연입니다. 그건 나도 압니다. 유리창도 그래요, 겨울 아침 햇살을 받으면 반짝거리니까 그게 뭔가 싶어서 재미로 쪼아댄 것뿐일 겁니다. 새에게는 그런 습성이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고양이만 해도 말이지요. 18년이나 살았던 녀석이었고 간과 장이 나빠져서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늙은 고양이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우연이 겹치니까 뭔가 이렇게, 기분이 좋지는 않지요."
- "콩새가 뭔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려주려는 건가 싶어서요. 혹은 저승사자가 보낸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고. 나잇살이나 먹은 사람이 실없는 생각을 하는 거겠지요."
그는 힘없이 웃고 나서 말을 이었다.
"전에는 콩새가 우리 집에 온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그래서 이상한 겁니다. 그건 도대체 뭐였을까 싶어서 말이지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힐끗 내 쪽을 보더니 말했다.
"아이고, 미안합니다. 처음 만난 분한테 실없는 소리나 늘어놓고. 직박구리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니 불현듯 옛날 생각이 나서 그만..."
- 괜찮아요, 계속해요 하며 다음 이야기를 재촉하며 기다려준다.
그 말이 반가워서 나는 또 봇물이 터진 듯 신나게 이야기를 쏟아낸다. 우리 가족의 행복한 나날을 그에게 지치지도 않고 계속 들려준다.
- 별로 넓지는 않지만 울창한 나무들이 빼곡한 마당 이야기. 그곳에 있는 나무들 이야기. 수유나무, 동백, 목련... 부모님 침실 옆 다다미방에는 어머니 전용 화장대가 있고 거울에는 늘 마당의 푸른 잎이 비친다. 그 화장대 앞에 앉아 화장을 하거나 머리를 빗는 어머니의 얼굴은 싱싱한 푸름 속에 있어 한층 더 아름답다.
허약한 여동생이 아침에 일어나 식욕이 없다고 하면 어김없이 차가운 칼피스가 식탁에 나온다. 그게 너무나도 맛있어서 여동생이 "먹고 싶지 않아."라고 말해주기를 은근히 기다리곤 한다.
아버지는 내 마음을 꿰뚫어 보고 "에미 핑계 대고 덩달아 아침부터 칼피스만 너무 마시면 못쓴다." 하며 웃는다. "사요코는 밥 잘 먹고 더 많이 커야 한다."
알고 있으면서도 빨대를 꽂아 조금씩 마시는 얼음 띄운 칼피스는 멈출 수 없는 맛이다. 아무튼 나는 지극히 건강한 아이였다.
- 이야기를 했더니 꼭 초대하라고 하셨어요. 사정이 되는 날 언제라도 좋으니까 꼭 한번 오시라고. 그렇게 말해봐야지.
아니다. 그런 방식은 오히려 부담이 돼서 사양할지도 모른다고 즉시 생각을 고쳐먹었다. 좀 더 넌지시 초대하는 것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
쓸데없는 친절이나 잠깐의 우정을 빌미로 치근거리는 사람으로 여겨지고 싶지 않았다. 애당초 내게는 그런 마음은 없었다. 나는 단지 노쇠한 우메즈 씨에게 우리 가족의 온기를 잠깐이나마 나누어주고 싶었을 뿐이다.
- 구름이 잔뜩 끼어 있는 약간 쌀쌀한 날이었다. 우메즈 노인은 추워서인지 몸을 웅크리면서 나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지금까지는 없었던 일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지쳐 보였다.
- "안 됩니다. 그것만은 정말..."
"혹시 이렇게 일방적으로 초대해서 불쾌하신 건가요? 그렇다면 우메즈 씨에게 제가 무례한 짓을..."
"아뇨, 그렇지 않아요. 오해하지 말아요. 절대 그런 건 아니니까. 하지만 나는 댁에 갈 수가 없습니다. 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어요. 그것만은 이해를 해주셔야..."
평소 우메즈 노인의 어조와 어딘가 다른 것 같았다. 나는 초조와 불안과 슬픔이 교차되는 듯한, 왠지 모르게 불안한 기분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나는 말했다. "우메즈 씨가 저희 가족 이야기를 즐겁게 들어주시기에 제가 초대하면 와주실 줄 알았거든요. 뭔가 신경에 거슬리는 거라도 있으세요? 혹시 그랬다면 뭔지 가르쳐주세요."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우메즈 노인은 신음하듯 말하고 나서 나를 보던 시선을 다시 거두었다. "그런 의미는 전혀 아닙니다. 모르겠어요?"
"모르겠어요." 나는 숨이 막힐 듯한 심정으로 말했다. 정말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깊은 슬픔이 나를 엄습했다.
- 습기를 머금은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나뭇가지에서 이미 퇴색하여 마르기 시작한 잎들이 부스럭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하늘에는 구름이 무겁게 드리워져 있었다.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날씨였다.
- "왜 그걸 모르는 걸까..." 우메즈는 몸을 잔뜩 앞으로 굽히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며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말했다. "아직 모르고 있군요. 어째서일까요. 언제쯤 알게 될까."
-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우메즈 씨를 쳐다보았다. 그는 얼른 얼굴에서 손을 떼고 숙이고 있던 자세를 바로잡으며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얼굴에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두려움이 스치고 있었다.
- "사요코 씨, 당신은..." 그가 말했다. 병상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마지막 힘을 짜내 무언가 말하려고 애를 쓰는 것처럼 조용한 처절함이 느껴졌다. "내가 당신에게 이런 걸 가르쳐주게 될 거라고는 정말 생각도 하지 못했소. 언젠가 반드시 당신이 깨달을 줄 알았지."
"무슨 말씀이세요?" 나는 그렇게 물었지만 목소리로 나오지 않은 것 같았다.
"당신은 말이오, 사요코 씨." 우메즈 노인이 말했다.
- "도대체 무슨 말을..."
그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불길한 검은 거품 같은 것이 무수하게 일어나 순식간에 내 내장을 침범해 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우메즈 노인이 말을 이었다. 튀어나오는 딸꾹질을 참으면서 간신히 토해내는 듯한 말투였다.
"1970년, 지금으로부터 42년이나 전에 일어났던 일이에요. 1번지 고다 의원의 원장인 고다 선생이 자택에서 부인과 두 딸에게 수면제가 든 포도 주스를 마시게 하고 세 사람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목을 졸라 살해했지. 그 뒤 세 사람의 몸을 깨끗하게 하고 옷을 갈아입혀 이불 속에 눕혀놓고 선생은 자택 창고 문에 목을 매달았소. 안타까운 가족 동반자살 사건으로 전국에서 뉴스가 되기도 했지요.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렀고, 이 마을도 도시개발로 여러 모로 바뀌어서 그 사건에 대해 기억하는 사람도 아마 거의 없을 거요. 이제는 고다라는 이름을 들어도 그 사건과 관련짓는 사람도 손으로 꼽을 정도밖에 없지요. 하지만 나는... 나는 기억하고 있어요. 아마 내 아내도 살아 있었으면 기억하고 있을 거요."
- 나는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느낌. 영혼이 세밀한 세포분열을 반복하다가 이윽고 작은 조각이 되어 바람을 타고 날아가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 ... 마을에 퍼지기 시작했고 고다 의원을 찾아오는 환자의 수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아버지는 술에 절어 울적해하는 날이 많아졌고 어머니는 점점 야위어갔다. 집은 청소를 하지 않아 여기저기 지저분해졌고, 식사도 각자 알아서 하게 되었다. 에미는 평소 이상으로 몸 상태가 악화되어 누워 지내는 날이 많아졌다.
- "얘들아, 나와봐라, 내가 좋은 걸 사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아버지의 밝은 목소리가 현관에 울려 퍼졌다. 어머니와 함께 조심조심 현관으로 나가보니 싱글싱글 웃는, 예전과 똑같은 붉은 얼굴의 아버지가 있었다.
- 아버지의 손에는 고급 나무 상자에 담긴 비싸 보이는 수입 포도 주스가 든 봉투가 들려 있었다. 봉투에는 유명한 백화점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가을 저녁 무렵이었다. 밖은 이미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조금 추웠다. 아버지는 콧노래를 부르며 손수 빗자루를 들고 거실을 쓸고 전등을 몽땅 켜 집 안을 휘황하게 밝혀놓고 나와 에미를 불러 식탁에 앉혔다.
- 그런 식으로 밝고 활달하게 움직이는 아버지를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나는 너무 기뻐서 울고 싶을 만큼 가슴이 벅찼다.
어머니는 처음엔 조금 의아한 표정을 했지만 예전의 아버지가 돌아온 것을 보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다. "저녁 식사 전이기는 하지만 이런 고급 주스를 마시는 거니 과자도 같이 내놓을까요." 하며 서둘러 과자 깡통에서 쿠키를 꺼내 접시에 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부엌으로 가서 냉동실에서 얼음을 꺼내고, 컵에 포도 주스를 따라 식탁으로 가지고 왔다. 아버지는 시종 온화하고도 침착한,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우리는 다 같이 식탁을 둘러싸고 포도 주스를 마시고 쿠키를 먹었다. 주스는 진하고 낯선 맛이 났다. 쿠키는 축축했다.
- 그때 어딘가에서 콩새라는 이름의 새가 유리창을 두드렸을까. 콩콩, 콩콩, 하고 남빛의 딱딱한 부리로 우리 집에서 흘러나오는 노란 불빛을 보며 어두운 마당 한구석에서 거실을 들여다보며 유리창을 두드리고 있었을까.
- 아니다, 그런 일은 없었다. 어디에서도 새는 날아오지 않았다.
-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끊임없이 행복한 시간이 흐르던 우리 집, 그리고 거기 모인 우리 가족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아버지의 호탕한 웃음소리와 어머니의 아름다운 발이 다다미를 스치면서 내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에미가 두 손으로 감싸 쥔 컵으로 포도 주스를 마시면서 내는 꿀꺽꿀꺽하는 부드러운 소리뿐이었다.
후기를 대신하여
어릴 때부터 곧잘 '죽음'을 강하게 의식해 왔다.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냐는 나의 질문에 대부분의 어른들은 약간 귀찮다는 듯 이렇게 대답했다.
"자고 있을 때랑 똑같아지는 거야."
그렇다면 "잠자는 것과 죽는 건 똑같아?"하고 다시 물으면 "비슷하지만 조금 달라."라고 답했다.
"죽은 뒤의 잠은 영원히 깨지 않으니까."
영원히 깨지 않는 잠을 상상해 보았다. 그것은 잠이 아니고 무한히 넓어지는 암흑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친구들, 그리고 귀여워하며 키우던 개나 금붕어, 작은 새의 죽음을 상상할 때도 늘 그랬다. 의미도 목적도 아무것도 없는 그저 어리고 순진한 상상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나는 그럴 때마다 진지해졌고 상실의 공포에 떨었다.
'죽음'에 대한 어린아이의 그런 다감한 정서는 어른이 되어도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강해졌다. 수많은 현실의 죽음(개인적인 죽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키우던 동물들이 죽었고, 친구가 죽었다. 선배가 죽고 직업적인 동료들이 죽고,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도 죽었다.
거기에는 늘 몸부림치는 듯한 슬픔과 허무가 있었다. 미칠듯한 깊은 상실감, 절망. 그러나 그것 역시 언젠가 반드시 부드러운 온기를 띤 것으로 변해갔다. 그렇게 만든 것은 다름 아난 죽은 이들이라는 것을 매번 느끼고 깨달았다.
내가 지금까지 거의 취미처럼 환상기괴소설이라 불리는 장르의 작품을 여러 편 써온 것엔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그러나 무섭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고 싶어서 나의 작품을 집어든 독자들 중에는 실망한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무섭고 재미있는 이야기는 반드시 이 세상의 조리에 따라 쓰여지고 있다. 이해하기 쉬운 이론이 보였다 사라졌다 하기 때문에 안심하고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장르에 있어서 나의 작품에는 아마 그런 건 없을 것이다. 단지 막연하게 죽은 자와 산자가 이어지고 있을 뿐, 왜 이어지고 있는 건지도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공포에 명확한 인과관계를 요구하는 독자는 '왜?'라는 질문으로 설명을 요구한다. 그러나 작자 자신이 그 '왜?'에 대답할 수 없고, 바로 그 대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쓰고 싶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이 책에 일곱 편의 단편소설을 수록했다. 그중 몇 편에는 내 자신이, 혹은 나의 주변 사람들이 실제로 체험했던 작은 에피소드들이 들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딱히 소름이 돋는 공포체험은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문득 느낀, 뭔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기척’이었던데 불과하다.
<소설 스바루>에서 이 작품을 연재할 때 아름다운 삽화를 그려준 사람은 오랫동안 문예지에서 콤비를 이루어온 화가 가도사카 류 씨다. 그는 이 책이 단행본이 되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병으로 쓰러져 벚꽃이 피는 계절에 유명을 달리하셨다. 그가 나와 함께 한 마지막 작업이 이 책에 수록된 <돌아오다>였다.
그 그림을 독자 여러분께 보이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그는 작가의 머릿속에서 태어난 세계를 무서울 정도로 그대로 그려주셨다. 정말 무서울 정도였다.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 > Book1'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카이 마코토] 스즈메의 문단속 (2) | 2024.01.10 |
---|---|
[김경리] 요가의 언어 - 걱정과 고민을 툭, 오늘도 나마스떼 (0) | 2024.01.04 |
[키쿠치 히데유키] 뱀파이어 헌터 D 1-7 上下 (0) | 2023.12.28 |
[사무엘 비외르크] 나는 혼자 여행 중입니다 (0) | 2023.12.07 |
[브루스 배게밀] 생물학적 풍요 - 성적 다양성과 섹슈얼리티의 과학 (0) | 2023.12.06 |
[퍼트리샤 윌트셔] 꽃은 알고 있다 - 꽃가루로 진실을 밝히는 여성 식물학자의 사건 일지 (1) | 2023.1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