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앤 모로 린드버그 / 김보람
원제 : Gift from the Sea
출판 : 북포레스트
출간 : 2022.03.22
표지의 색감이 아름다워서 선택했을 뿐 다른 사전 정보는 없었는데, 완독 후 이 책을 만나게 해 준 우연에 감사하게 되었다. 그 정도로 깊은 만족감을 주는 책이다.
한 명의 인간은 수많은 정체성을 담고 살아간다. 누군가의 자녀, 누군가의 동지, 누군가의 부모. 이런 역할들은 직업과 사회라는 또 다른 조건 하에서 보다 다양하게 세분화된다. 그리고 그 모두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한 개개인은 인생의 각 단계를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저자는 그러한 삶의 단계들을 각기 다른 조개들을 들어 비유한다. 한 개인으로써의 다양한 삶의 측면 -태어나면서부터 짊어지는 모든 것들- 이 '소라고둥'이라면, 두 사람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단계는 '해돋이조개'다. 이후 아이들을 키우며 현실적인 삶에 착 달라붙는 '굴'의 시기를 지나게 되고, 그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다시금 자유로워지는 단계는 '아르고노트'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시기에는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중심이 주는 힘, '달고둥'이 있어야만 한다.
저자는 각각의 조개들이 제나름의 모양으로 아름답듯이, 언제나 그 시기에 맞는 아름다움과 기쁨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어야 한다. 안전하고 단단한 껍질은 성장한 '나'에게는 스스로를 억압하는 틀이 될 수 있다. 이전의 흔적들을 놓아주어야만 할 때를 예민하게 감각할 수 있는 힘. 그것은 자신의 내면에서 온다.
저자는 그것을 '여성적인 힘'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고요함과 수용함에서 오는 내면의 힘은 반드시 '여성'만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밀려들고 쓸려나가는 자연스러움에 스스로를 맡길 수 있는 겸손한 복종은 신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이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복잡한 일상이 쏟아내는 쉼 없는 소리침에서 한 걸음 물러나,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것들로 자신을 씻어낼 때 드러나는 것들. 저자는 그것을 '바다의 선물'이라고 불렀다.
오롯이 혼자 있을 때만이 들을 수 있는 자신만의 소리. 고독과 침묵이 초대하는 영혼의 노래.
이는 오스카 와일드가 <심연으로부터>에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말했던 '예술가가 창작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온 것들은 그것을 지닌 채 살아가는 삶의 시간 자체를 하나의 예술로 빚어낸다.
내면과 외면의 조화를 찾기 위해서는 고독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이는 남성과 여성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힘이다. 자기 자신과 함께 있을 수 없는 이는 타인과도 함께 할 수 없다. 다음과 같은 저자의 문장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자기 자신에게 낯선 존재가 되면 타인과도 멀어질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을 모르면 타인을 이해할 수도 없다."
" 자기 자신의 중심과 연결된 사람만이 다른 사람과도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야 알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내 경우에는 내 중심인 내면의 샘을 찾는 최선의 방법이 바로 고독한 시간을 갖는 것이다."
이미 출간된지 70여 년이 지난 책이 아직까지도 이렇게 깊은 울림을 준다는 것이 경이로웠다. <Gift from the Sea> 50주년 기념 에디션의 표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조금 부럽기도 하다. 혼란스럽고 정신없는 일상 속에 무게중심이 되어줄 수 있는 이런 글을 이미 50년 전부터 읽을 수 있었던 이들의 환경이.
그러다 이내 다시금 마음을 다잡는다. 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감사했다고. 그리고 머나먼 시간과 공간을 건너 전해져온 '바다의 선물'을 더 오랜 시간이 흐른 뒤까지도 전할 수 있도록 살아야겠다고. 그때는 현 세대가 발견한 선물도 함께 전하고 싶다는 작은 바람 또한 한켠에 작게 담은 채로.
앤 모로 린드버그 Anne Morrow Lindbergh
1906년 미국에서 태어났으며, 소설, 수필, 시집을 출간한 작가이다. 최초로 대서양 무착륙 단독 비행에 성공한 찰스 린드버그(Charles Lindbergh)의 아내이자, 1930년 미국 여성 최초로 비행 면허를 취득한 비행사였다. 또한 1934년, 비행 및 탐험으로 내셔널 지오그래픽협회(National Geographic Society)에서 허바드 메달(Hubbard Medal)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이기도 하다. 이때의 비행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바람아, 들어라!(Listen! The Wind)>는 1938년에 전미 도서상을 수상하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대표작 <바다의 선물>은 특유의 섬세함과 깊은 사색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출간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미국 국립부인협회의 도서상과 크리스토퍼상 등을 수상하였다.
유괴 사건으로 첫아들을 잃은 후 프랑스와 독일 등에 머물렀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코네티컷에 거처를 정하고 다섯 아이들의 양육과 집필에 전념하며 조용한 삶을 살았다. 2001년 아흔넷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Prologue
바닷가 The Beach
소라고둥 Channelled Whelk
달고둥 Moon Shell
해돋이조개 Sunset Shell
굴 Oyster
아르고노트 Argonaut
조개 몇 개
바다를 떠나며
Epilogue
- 나는 내 생활 패턴, 삶의 균형, 일과 인간관계를 돌아볼 심산으로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에 연필을 쥐고 있을 때 가장 생각이 잘 되는 터라 글쓰기의 시작은 자연스러웠다. 내 안에서만 존재하던 상념이 처음으로 종이 위에 뚜렷이 펼쳐지자 그동안의 내 경험이 다른 사람들과는 매우 달랐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이런 착각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보면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자유로웠고, 또 어떻게 보면 훨씬 자유롭지 못했다.
- 처음에는 모든 여성이 새로운 삶의 패턴을 바라거나 사색할 수 있는 자기만의 시간을 바라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현재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여성들도 많았으니까. 그리고 겉보기에 그들은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삶을 살아가는 듯했다. 잘 빚은 도자기처럼 매끄럽게, 빈틈없이 흘러가는 그들의 완벽한 나날을 나는 부러움과 경탄 어린 눈으로 관찰했다. 그들의 삶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이미 오래전에 해답을 찾아낸 것일까? 나는 이 문제가 그저 나에게만 중요하고 흥미로운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 그러나 글을 쓰면서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여성들, 취업을 희망하는 여성들, 가정주부 및 어머니로서 부지런히 일하는 여성들 그리고 비교적 여유롭게 살아가는 여성 등 다양한 모습의 여성들과 대화를 나누어 보니, 내 관점이 특별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많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들도 서로 다른 환경에서 다양한 형태로,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나와 동일한 문제로 씨름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토론과 논쟁을 통해 해결책을 찾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심지어 미소 띤 얼굴로 시곗바늘처럼 일정하고 차분한 삶을 사는 듯 보이는 사람들도 나처럼 창조적인 휴식과 개인의 욕구충족을 바라며, 타인은 물론 자신과도 새롭고 활발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애쓰는 경우가 많았다.
- 그렇게 이 책은 남녀 간의 대화와 논쟁,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로 채워졌고, 결국 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넘어서게 되었다. 이런 까닭에 내게 다양한 견해와 영감을 나누어준 수많은 이들에게 이 글을 돌려주기로 마음먹었다. 여기, 나와 같은 길을 걷는 모든 이들에게 따뜻한 감사와 우정을 담아 내가 받은 바다의 선물을 돌려드린다.
- 바닷가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사색할 만한 장소가 아니다. 바다에 처음 오는 것도 아닌데, 이쯤은 진작 알고 있었어야 했다. 정신 수양을 하거나 거창한 포부를 다지기에 바닷가는 너무 따뜻하고, 너무 촉촉하고, 너무 보드랍다. 어찌 이토록 학습이 안 되는 것일까? 우리는 꼭 몇 권의 책과 새 노트, 오랫동안 답장을 보내지 않은 편지, 방금 깎은 연필 몇 자루, 할 일 목록 그리고 멋진 다짐을 가득 담아 울룩불룩해진, 빛바랜 밀짚가방을 메고 바닷가로 향한다. 그러나 가져온 책들은 끝내 들춰보지 않은 상태로, 뾰족했던 연필심은 모두 부러진 상태로, 노트는 여전히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처럼 깨끗한 상태로 남는다. 바닷가에서는 읽거나 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사색에 잠기는 일조차 뜻대로 되지 않는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렇다.
- 처음엔 지친 몸이 축 늘어져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마치 갑판에 올라탔을 때처럼 멍한 상태에 빠져 접이식 의자에 몸을 맡긴다. 마음과 달리, 굳은 다짐과 달리, 바다의 원시적 리듬에 자꾸만 빠져든다. 파도의 너울, 솔숲을 가르는 바람, 모래언덕을 가로지르는 왜가리의 우아한 날갯짓이 도시의 바쁜 소음과 빡빡한 스케줄을 잠재운다. 아름다움에 취해 긴장이 풀리면 이내 모랫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기지개를 켠다. 파도가 다져 놓은 모래밭에 누워 그렇게 바다와 하나가 된다. 오늘의 물결로 지난날의 모든 흔적을 말끔히 지워낸 해변처럼 꾸밈없이 텅 빈 상태로.
- 그렇게 2주쯤 보내고 나면, 어느 날 아침 머리가 맑아지고 활력이 돈다. 도시의 감각이 아닌 바닷가의 양식으로 말이다. 내 정신도 바다의 잔잔한 물결처럼 느긋하게 흐르고, 일렁이고, 굽이치기 시작한다. 한가롭게 일렁이는 무념이라는 파도가 의식이라는 고운 백사장에 어떤 보물을 떠밀어다 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주 매끈한 조약돌을 가져다줄지, 해저에서 올라온 진귀한 조개껍데기를 가져다줄지. 소라고둥이나 달고둥, 어쩌면 아르고노트를 가져다줄지도.
- 그러나 이런 보물을 찾아내려 하거나 파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얼토당토않은 일이다! 바다 밑바닥을 헤집는 건 절대 안 된다. 모든 일이 허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바다는 지나치게 불안해하거나 욕심이 과하거나 너무 조급해하는 이에게는 선물을 내어주지 않는다. 보물을 캐겠다고 나서는 건 조급함과 욕심을 드러내는 행위이며, 신념의 결핍을 나타낸다. 인내, 인내, 인내야말로 바다가 주는 가르침이다. 인내와 신념. 바다처럼 꾸밈없이 모든 것을 비우고, 어떤 선택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바다의 선물을 기다려야 한다.
- 서양배처럼 가운데가 불룩하고, 거기서 시작한 나선이 뾰족한 나사탑을 향해 완만하게 올라간다. 금빛이 감도는 껍데기는 바닷물의 소금기에 씻겨 탁하고 부옇다. 각각의 나사켜, 뭉툭한 돌기, 달걀 껍질처럼 매끈한 표면에 새겨진 십자형 무늬는 이 피조물이 창조된 그날처럼 선명하다. 기쁨으로 가득 찬 내 눈길은 이 집의 전 주인이 오르내렸을 자그마한 나선형 계단의 바깥둘레를 따라가느라 분주하다.
- 내 인생을 감싸고 있는 껍데기는 이런 모습이 아닐 것이다. 사는 동안 얼마나 너저분해졌는지! 내 껍데기에는 따개비가 잔뜩 불고 이끼가 가득해 이제 형태조차 알아보기 어려울 지경이다. 한때는 아주 뚜렷한 모양을 갖추고 있었고,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그때 그 모습이 선한데. 지금 내 인생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 지금의 내 삶은 가족과 함께 시작된다. 내 곁에는 남편과 다섯 아이가 있고, 뉴욕 교외에 집이 한 채 있다. 글 쓰는 재주를 지닌 덕분에 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 물론 이 외에도 내 삶의 모습을 결정짓는 요소는 무수히 많다. 가정환경과 어린 시절, 내 지성과 교육 수준, 내 양심과 그로 인한 중압감, 내 열정과 거기서 생기는 욕망 등등. 나는 여성으로서, 예술가로서, 시민으로서 가족들과 주고받으며, 친구들 그리고 지역 사회 안에서 서로 나누며 인류와 세상에 내 의무를 다하고 싶다.
-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바라는 것은 (사실, 내 모든 열망의 목표는) 바로 나 자신의 평화다. 나는 집중력, 순수한 의도, 삶의 중심을 갖추고서 의무를 다하고 능력을 발휘하며 살고 싶다. 되도록 오랜 시간을 (성자들의 말마따나) '은총 안에서' 살고 싶다. 꼭 신학적 의미에서 하는 말은 아니다. 내가 말하는 은총이란 결국 외적 조화로 표현될 내적 조화, 그러니까 본질적으로는 정신적인 조화를 의미한다. 소크라테스가 <파이드로스>의 기도문에서 말한 것처럼 나 역시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안에 있는 모습이 하나 되기를' 바라는 것 같다. 나는 신에게 부여받은 본분을 다하면서 사람들과 나누며 살 수 있도록 내적이고 정신적인 은총의 단계에 이르길 소망한다.
- 이런 정의가 모호하긴 하지만,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상태를 표현하는 언어만 다를 뿐 '은총 안에서' 사는 시기와 '은총에서 벗어나' 있는 시기를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은총 안에서' 살고 있는 행복한 시기에는 마치 큰 파도를 타고 있는 것처럼 모든 일이 순조롭게 처리되지만, 그렇지 않은 시기에는 신발끈을 묶는 일조차 어렵게 느껴진다. 은총 안에서 살고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신발끈 매는 기술을 익히는 건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다.
-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은 이뿐만이 아니다. 심지어 은총을 찾는 데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그리고 기술이란 갈고닦는 게 가능하다. 나는 그동안의 경험과 숱한 사례들 그리고 나보다 앞선 수많은 사람들의 글을 통해 내적 조화와 외적 조화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 어떤 환경이나 삶의 방식, 행동 규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우리가 갈 수 있는 길은 몇 갈래 되지 않으며, 그중 하나가 생활의 간소화다.
- 간소하게 살 수 있도록, 나도 소라게처럼 어디든 지고 다닐 수 있는 소박한 껍데기를 고르고 싶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내 삶은 간소함과 거리가 멀다.
- 신성한 영혼과 높은 안식은 정말로 탐나지만, 너무나도 멀리 있다.
- 애처롭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 이야긴데,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니 어째서 미혼의 여성이 성인이 되는 경우가 많은지 조금 이해가 된다. 한때는 순결이나 자식과 관련된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으나, 지금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이러한 현상은 근본적으로 정신없는 일상 때문이다. 아이를 낳고, 기르고, 먹이고, 교육하는 일,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집안일, 거기에 실타래처럼 얽힌 무수한 인간관계까지.
- 일반적으로 여성이 하는 일들은 창조적이거나 사색적이거나 거룩한 삶과 맞지 않다. 여성과 직업, 여성과 가정, 여성과 독립의 차원에서 바라보고 해결할 만큼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정신없는 일상 속에서 어떻게 하면 온전할 수 있을지, 사방팔방에서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는 상황에서도 어떻게 하면 중심을 잃지 않을 수 있을지, 바큇살에 너무나 큰 충격이 가해져 바퀴통이 깨질 것 같은 상황에서도 어떻게 하면 힘을 잃지 않을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 인간관계에서의 위선을 떨쳐내는 것이다. 얼마나 마음 편한 일인가! 살면서 겪어 보니 위선 떠는 행동만큼이나 피곤한 것도 없다. 사회생활 대부분이 그토록 피로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여기서 나는 내 가면을 벗어던졌다.
- 이 글을 쓰다 보니 지금은 프랑스에 살지만 과거에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3년을 지내야 했던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크게 충격받았던 일이 생각난다. 그 친구는 수용소에서 음식을 제대로 먹기는커녕 잔혹 행위를 당할 때도 있었다고, 신체적 자유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수준의 생활을 해야 했다고 내게 일러줬다. 그러면서도 수용소 생활을 통해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질이 얼마나 적은지, 간소한 삶이 얼마나 큰 정신적 자유와 평화를 가져다주는지를 깨달았다고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미국인은 세계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도 자유롭게 복잡한 삶 또는 간소한 삶을 선택해서 살 수 있는 호사를 누린다. 그리고 소박한 삶을 선택할 수도 있는 우리는 대부분 복잡한 삶을 택한다.
- 그렇게 사는 건 좀 꼴사납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안전, 편안함, 허영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위해 물질을 소유하기도 하니까. 조가비 같은 집이라니 너무 초라하고 추하지 않느냐고? 그렇지 않다, 나의 집은 아름답다. 물론 갖춘 것 없이 휑한 건 사실이지만, 솔솔 들어오는 바람과 햇빛과 솔향이 그 텅 빈 공간을 가득 채워준다. 세련미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천장의 대들보에는 거미줄도 드레드레 늘어져 있다. 그러나 새로운 마음으로 올려다보니 거미줄도 새삼 사랑스럽다.
- 사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빈 벽을 쳐다보는 게 썩 유쾌하지 않았다. 깨끗한 도화지처럼 아무것도 없는 사면의 벽에 둘러싸여 있자니 감옥에 갇혀 있기라도 한 듯 갑갑했다. 벽에 창을 내든 그림을 걸든 어떻게든 입체감을 주고 싶었다. 결국 나는 바람과 모래에 씻겨 비단처럼 매끈해진, 바닷물에 떠밀려온 잿빛 나뭇가지를 모아다가 집으로 질질 끌고 왔다. 끝이 붉고 나풀나풀한 이파리가 달린, 초록 덩굴도 그러모았다. 하얗게 빛바랜 채 뼈대만 앙상한 소라고둥도 몇 개 주웠다. 진기하게 패인 모양이 언뜻 보면 추상 조형물 같았다. 주워 온 것들을 벽에 붙이고 모퉁이에 세워 놓으니 그럴듯했다. 이제 집 안에서도 세상을 내다볼 수 있는 잠망경이 생긴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도 세상의 입체적인 경치를 바라볼 수 있는 창이 생긴 것이다.
- 흡족한 마음으로 나는 책상 앞에, 그러니까 식탁보를 깔지 않은 식탁 앞에 앉는다. 식탁에는 압지, 잉크병, 누르개로 쓸 만한 성게 껍데기, 연필통으로 쓸 만한 조개껍데기, 손을 놀리기에 제격인 소라고둥의 분홍빛 끄트머리 조각, 내 사색을 이끌어줄 몇 개의 조개껍데기가 놓여 있다.
- 내가 돌아갈 때 가져갈 수 있는 거라고는 자그마한 소라고둥 하나 정도다. 이 소라고둥을 코네티컷으로 가져가 내 책상에 올려두면 이걸 볼 때마다 간소한 삶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다가 내게 물었던 질문을 돌이켜볼 수 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이가 아니라 얼마나 적게 소유하고도 살 수 있는가? 또다시 내 삶에 소유물을 더하고 싶은 유혹이 들 때마다, 또다시 중심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려고 들 때마다 물을 것이다. 정말로 내게 필요한 것인가?
- 물론 겉으로 드러나는 삶을 간소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건 그저 껍데기일 뿐이니까. 그래도 나는 겉에서부터 시작하려 한다. 내 삶의 겉면, 내 껍데기의 겉면을 들여다본다. 삶의 표면을 들여다본다고 해서 완벽한 해답을 찾을 수는 없다. 그저 은총의 단계에 다다르기 위한 하나의 기술일 뿐이다. 정답은 항상 안에 있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바깥에서도 단서를 얻을 수 있고, 안에 있는 정답을 찾는 데 필요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소라게처럼 우리도 자유롭게 껍데기를 바꿀 수 있다.
- 마로니에 열매처럼 둥글고 통통하고 반질반질한, 달팽이 모양의 이 껍데기가 편안함과 아늑함을 즐기는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린 채 내 손바닥에 놓여 있다. 뽀얀 껍데기는 금방이라도 비를 퍼부을 듯한 여름 저녁 하늘처럼 발그름하다. 대칭을 이루는 매끄러운 얼굴에는 정교한 나선이 꼭짓점을 향해 올라가고, 원뿔의 꼭짓점에는 눈동자를 닮은 까만 점이 박혀 있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 신비한 외눈을 나도 가만히 바라본다.
- 이것은 하늘에 외로이 떠 있는, 힘이 넘치는 둥근달이다. 한밤중 높이 자란 풀숲을 소리 없이 헤쳐 나가는 고양이의 눈이다. 끊임없이 넓게 퍼져 나가는 물결 안에서, 고요하게 존재하는 외딴섬이다.
- 섬에서는 과거와 미래가 차단되고 오로지 현재만 존재할 뿐이다. 현재에 집중하는 섬 생활은 극도로 선명하고 순수하다. 섬에서는 모두가 어린 아이나 성인처럼 현재의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시간과 공간이 빚어내는 일상의 나날, 행동 하나하나가 섬이며, 그 모든 것은 섬처럼 완전하다. 섬에 사는 사람들은 자족하고, 온전하다. 그렇게 평온한 섬을 닮아간다. 타인의 고독을 존중하여 그들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타인의 기적을 존경하여 멀찍이 떨어져 있는다. 존 던은 '인간은 누구도 섬이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나는 우리 모두가 하나의 섬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바다에 떠 있는 각기 다른 섬.
- 결국 우리는 모두 혼자다. 그리고 고독이라는 기본 상태는 우리가 어떻게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릴케는 말했다.
"인간이 선택할 수도 그것을 버릴 수도 없다. 우리는 고독하다. 그렇지 않은 듯 행동하며 자신을 속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뿐이다. 우리가 고독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정말 그렇다, 아니 그냥 그런 척이라도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현기증이 나겠지만."
- 오늘날에도 우리는 혼자 남겨지는 것이 두려워 애초에 그런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다. 가족이나 친구와 시간을 보내지 못하거나 영화관에 가지 못하더라도 지금 우리에게는 공허함을 채워줄 라디오, 텔레비전이 있다. 외로움을 호소하던 여성들은 이제 두 번 다시 홀로 남겨질 일이 없게 되었다. 이제는 연속극을 틀어둔 채 집안일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저 공상에 빠지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이보다는 더 창조적이었다. 공상에 빠진다는 것은 내면에서 무언가를 끌어내야 하는 일인 동시에 내면을 살찌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고독이라는 정원에 꿈이라는 꽃을 피우는 대신, 귀담아듣지도 않을 음악과 수다로 쉴 새 없이 공간을 가득 채우며 우리 스스로 숨통을 조인다. 그런 소리는 순전히 공백을 메우기 위한 소음일 뿐이다. 소음이 그치면 그 빈자리를 채워줄 내면의 음악은 없다. 우리는 다시 혼자되는 법을 배워야 한다.
- 이곳에서 나는 꼬박 이틀 밤을 혼자 보내고 있다. 밤이면 별이 쏟아지는 해변에 홀로 눕는다. 홀로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부두 끄트머리에서 노니는 갈매기들을 홀로 바라본다. 갈매기들은 내가 던져준 먹을거리를 찾아 물에 발을 살짝 담그며 물 위를 빙빙 돌기도 하고, 물속으로 풍덩 뛰어들기도 한다. 오전에는 책상에 앉아 할 일을 마치고, 해변으로 소풍을 나가 홀로 늦은 점심을 먹는다. 그러면 인류와 멀어지고 오히려 동물과 한층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 든다. 저기 뒤에, 거친 조수 웅덩이에 둥지를 튼 수줍은 윌리트. 저기 앞에,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반짝이는 바닷가를 향해 총총 다가가는 도요새. 머리 위로는, 날개를 유유히 펄럭이며 바람을 타고 내려오는 펠리컨들. 몸을 웅크린 채 샐쭉한 모습으로 수평선을 살피는 늙은 갈매기. 이들과 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에 기쁨이 차오른다. 땅과 바다와 바람의 아름다움이 아주 큰 의미가 되어 내게 다가온다. 나는 자연과 하나 되어 우주에 녹아들어 있었고, 그 안에 푹 빠진다.
- 그렇다, 나는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고독 속에 파묻혀 있지만, 오히려 그들과 더욱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 실제로 사람들을 떼어놓는 것은 육체적 고립이 아니라 정신적 고립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멀어진 것은 무인도나 척박한 황무지 때문이 아니다. 길 잃은 이방인이 되어 헤매는 것은 황폐한 정신 때문이고 마음속에 자리 잡은 황무지 때문이다.
- 자기 자신에게 낯선 존재가 되면 타인과도 멀어질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을 모르면 타인을 이해할 수도 없다. 대도시에서 친구들과 악수를 나눌 때 그들과 나 사이에 광활한 황무지가 펼쳐져 있다고 느낀 적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때는 친구도 나도 아주 척박한 불모지를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를 풍요롭게 할 샘물을 찾지 못해서 또는 이미 그 샘물이 말라버린 탓에. 자기 자신의 중심과 연결된 사람만이 다른 사람과도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야 알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내 경우에는 내 중심인 내면의 샘을 찾는 최선의 방법이 바로 고독한 시간을 갖는 것이다.
- 나는 파도의 리듬, 등과 다리의 맨살에 닿는 햇볕, 머리칼을 흩날리는 바람과 물보라의 위로를 받으며 해변을 따라 한참을 걷는다. 일렁이는 파도에 몸을 숨겼다 나타나길 반복하는 도요새처럼. 그러고는 흠뻑 젖은 채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온다. 하루를 온전히 홀로 보낸 자의 벅찬 마음으로. 밤의 어둠이 한입 베어 물기 전의 둥근 보름달처럼 흡족한 마음으로 서둘러 입술을 갖다 대야 할 만큼 넘치도록 가득 찬 잔처럼 충만한 마음으로. 시편에 나오는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구절처럼 귀한 충만함이다.
- 그렇다면 여성은 왜 이런 일을 겪는 것일까? 여성은 살아가는 내내 자신을 쏟아붓고 싶어 한다. 자녀와 남편과 사회의 영원한 양육자로서 모든 본능이 이들에게 베풀 것을 요구한다. 결국시간, 에너지, 창조력을 발휘할 기회나 틈이 생기더라도 여성들은 이를 타인을 위해 써버리고 만다.
- 초창기의 미국이나 전쟁을 겪은 유럽에서처럼, 힘든 상황에서 여성의 베풂은 더욱 절실했고 의미 있었다. 상대적으로 안락한 삶을 사는 오늘날에는, 대다수의 여성이 생존을 위한 원시적 경쟁에서나 가정의 중심으로서나 스스로 대체 불가능한 존재라고 느끼지 못한다. 없어서는 안 될 존재, 의미 있는 존재라고 느끼지 못하는 여성들은 점점 굶주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무엇에 굶주리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불필요한 일들과 강박에 사로잡힌 의무, 온갖 체면치레 등 일상을 끝없이 정신없게 만들어서 공허함을 채우려 한다. 당연히 이런 일은 대부분 의미가 없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면의 자원이 고갈되어 샘이 말라버린다.
- 물론 자신이 필요한 존재라고 느끼는 것만으로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의미 있는 베풂을 실천하더라도 내면의 샘을 다시 채워줄 원천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젖을 물린 뒤에는 반드시 음식을 섭취하여 영양소를 보충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베풂이 여성의 역할이라면, 베풀고 난 자리를 무엇인가로 다시 채워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어떻게?
- 고독을 통해서라고, 달고둥이 말한다. 모든 사람은, 특히 여성은 반드시 일 년에 얼마 동안, 일주일에 며칠, 하루에 몇 시간이라도 홀로 보내야 한다. 이 얼마나 혁명적이고 말이 안 되는 소리인가. 대다수 여성들에게 이러한 계획은 그저 남의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이들에게는 혼자 가는 휴가에 쓸 여윳돈이 없다. 일주일 내내 고된 집안일을 해도 단 하루 쉴 시간이 없다. 매일같이 요리하고, 청소하고, 씻고 나면, 단 한 시간의 창조적 고독을 즐길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다.
- 그렇다면 이것이 오로지 경제적인 문제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임금이 적든 많든 어쨌든 노동자들은 적어도 일주일에 하루를 쉬고, 일 년에 한 번씩 휴가를 받는다. 일반적으로 정기 휴가가 없는 노동자는 어머니와 가정주부 뿐이다. 그 수를 헤아려 보면 가히 엄청난 규모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결핍을 불평하지 않을뿐더러 때로는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는 정당한 필요성마저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 이 문제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루의 휴가 또는 한 시간의 고독을 열망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확신했더라면 여성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이를 획득할 방법을 모색했으리라. 그러나 지금 실정으로는 스스로 이러한 요구를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좀처럼 시도하지 않는 것이다. 고독을 즐길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 경제적 수단을 실제로 갖추고 있으면서도 이를 활용하지 않는 여성들을 보면, 여성이 자기만의 시간을 갖지 못하는 것이 반드시 경제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이를 실현하기 어렵게 만드는 외부의 상황과 압력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내적 확신이라는 문제가 더 큰 영향을 미친다. 고독의 추구라는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8월 한낮의 더위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불쾌하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공기 속에서 살고 있다. 오늘날 세상에서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고독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 이 얼마나 납득이 안 되는 상황인가. 많은 사람들이 그 어떤 핑계도 이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 업무 회의, 미용실 예약, 친구와의 약속, 쇼핑 때문에 시간을 낼 수 없다고 말하면 상대방도 어쩔 수 없겠거니 하고 받아들이게 마련이다. 그러나 혼자 있어야 해서 시간을 낼 수 없다고 말하면 상대방은 우리를 무례한 사람, 자기중심적인 사람,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다는 말에 의심받고 이를 사과하며 다른 핑곗거리를 찾고, 들켜서는 안 될 일인 양 숨겨야 하다니, 무슨 문명사회가 이러한가!
- 사실 혼자 있는 시간은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 인간의 내면에는 홀로 있을 때만 끌어다 쓸 수 있는 샘이 있다. 예술가는 창작을 하려면 반드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다. 작가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음악가는 작곡하기 위해, 성직자는 기도하기 위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여성들은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재발견하기 위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시간 속에서 찾아낸 본질이라는 견고한 실마리는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인간관계 속에서 반드시 필요한 중심이 된다. 찰스 모건이 '아무리 굴러도 제자리를 벗어나지 않는 바퀴의 축처럼 정신과 육체가 분주할 때에도 평정을 유지하는 영혼'이라고 표현했듯 여성은 내면의 고요를 찾아야만 한다.
- 자기만의 방, 고독한 시간, 고요, 평화로움의 이점이 한데 모여 있는 장소인 데다가 가족 및 지역 사회의 승인을 받은 장소였다. 교회 안에서는 누구도 '어머니' '아내' '애인'이라는 호칭으로 불러내어 방해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교회 안에서 여성은 갖가지 역할로 분주해할 필요 없이 온전할 수 있었다. 그 시간에 여성은 예배하고 기도하며 교회 일에 자신을 바치고 또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이처럼 온전히 주고받는 행위를 통해 여성은 회복하였고 내면의 샘을 다시금 가득 채웠다.
- 그러나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예전처럼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을 준비가 되어 있을까? 예전의 그들처럼 신의 가르침을 떠받들 준비가 되어 있을까? 우리 일상은 사색할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일주일에 한 시간씩 교회에서 보낸다고 한들 (도움은 될 수 있겠지만) 그 한 시간으로 정신없이 보내는 그 외의 모든 시간을 상쇄할 수 있겠는가? 집에서 사색하는 시간을 가졌더라면 교회에서 자신을 내어놓을 준비가 더 잘되어 있었을 테고, 그랬더라면 더욱 온전하게 회복될 수 있었으리라.
- 예나 지금이나 회복은 반드시 필요하다. 온전히 받아들여지고 싶은 욕구, 역할의 집합체가 아닌 하나의 인간으로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 의미 있는 일에 자신을 온전히 바치고 싶은 욕구는 언제나 우리를 따라다니며 여성들을 점점 더 정신없는 일상, 사랑이라는 망상, 병원이라는 피난처로 밀어 넣는다.
- 그렇다고 과거로 돌아가는 것, 여성을 집 안에 가둔 채 빗자루와 바늘을 쥐어주는 것이 해결책은 아니다. 지금 우리는 수많은 기계의 도움 덕분에 시간과 에너지를 절약한다. 그러나 거기서 번 시간과 에너지를 의미 없는 일에 낭비하고 있다. 간소화해야 할 일상에 결국 짐이 될 소유물을 더욱 늘리고, 사용하거나 감상하지도 못할 물건을 사들이고, 공허함을 채울 오락거리를 늘리는 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 그러니까 중심에서 멀어지는 활동에 매달린다고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렇게 해서는 우리가 산산조각 날 뿐이다.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오늘날 여성의 삶은 윌리엄 제임스의 말마따나 '갈기갈기 찢긴 상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이러한 상태로 살아갈 수는 없다. 그러다가 결국엔 산산이 부서지고 말 테니.
- 역으로 우리는 중심을 붙잡을 수 있는 행동을 의식적으로라도 추구해야 한다.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 사색, 기도, 음악, 독서, 공부, 업무에 집중하기 등등. 그것이 신체적, 지적, 예술적인 것이든 간에 자신의 내면에서 끌어올린 창조적 활동이라면 무엇이든 좋다. 거창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거나 훌륭한 작품을 만들 필요는 없다. 그러나 반드시 자기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 아침에 꽃꽂이하는 시간을 갖는 것으로도 분주한 하루 일과에 잠시나마 고요를 줄 수 있다. 시를 쓰거나 기도를 해도 좋다. 중요한 것은 잠시라도 자기 내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 고독이라고, 달고둥이 말한다. 삶의 중심을 찾으라고, 퀘이커 성자들이 말한다. 자신을 온전히 소유하는 것이 곧 내면으로 향하는 길이라고, 플로티노스가 말한다. 순례자가 다시 태어나야 할 마구간은 자기 인식이라는 작은 집이라고,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는 말한다. 성현들의 가르침이다. 그 시대 사람들은 실제로 이러한 덕목을 추구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지 못한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의식적으로 실천해야만 추구할 수 있다. 예전처럼 시대의 흐름에 휩쓸리지도 못한다. 그때와 달리 이제는 그렇게 하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따라 할 수도 없다. 오히려 대부분의 유행과 사회적 압박, 밖에서 들려오는 가르침이 내면에 집중하는 생활 방식에 반하는 것들이라 내면에 집중하는 삶을 하나의 혁명으로 바라볼 수 있을 정도다.
- 내면을 파고들어 강한 힘을 얻으려면 반드시 여성 스스로 선구자가 되어야 한다. 어떻게 보면 여성은 항상 선구자였다. 이전 세대까지만 해도 외부 사회로 진출하기 힘들었던 여성들은 삶의 한계에 부딪히면서 내면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해 있었다. 그렇게 내면을 들여다봄으로써 남성들이 외부 활동에서 쉬이 찾을 수 없었던 내면의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 우리가 여성 해방을 위해,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어쩌면 당연하게도 남성들과 외부 활동에서 경쟁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우리 내면에 흐르는 샘을 등한시하게 되었다. 우리는 어째서 유한한 남성의 외적인 힘에 맞서 무한한 여성의 내적인 힘을 버리겠다는 유혹에 빠진 것일까? 물론 남성이 지닌 이 외적인 힘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지만, 그들이 지닌 외적인 힘과 외면의 문제 해결 방식이 갖는 힘이 오늘날에는 점점 더 시들해지는 것 같다. 외면의 해결책뿐만 아니라 내면의 해결책을 찾으려면 남성들도 이제 내면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변화는 현대의 외향적이고 활동적이며 물질 만능주의적인 서양 남성들이 더욱 성숙해질 수 있는 새로운 단계에 이르렀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 달고둥, 누가 너에게 이런 이름을 지어주었을까? 직관이 뛰어난 어떤 여인이 지어줬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구나. 나는 네게 또 다른 이름을 지어주련다. 섬고둥. 너와 함께 이 섬에서 영원히 살 수는 없으나, 코네티컷으로 돌아갈 때 너를 데려가 그곳 내 책상에 올려둘 수는 있을 것이다.
- 상황을 상대의 탓으로 돌리고 싶은 유혹, 이해심 많은 새로운 사람이라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는 손쉬운 해결책을 믿고 싶은 유혹 때문이다.
- 그러나 여성이든 남성이든 다른 사람과 초기 단계이기 때문에 더 수월해 보이는 밀회를 나눈다고 해서 만족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한 연애를 통해서는 결코 정체성을 되찾을 수는 없다. 우리는 다양한 역할의 집합체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날 때 비로소 진정한 자기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환상을 품는다. 그러나 정말로 타인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 가능한 것일까? 타인의 사랑을 통해서 아니, 나를 위해 타인이 들어주는 거울을 통해서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일까?
- 나는 에크하르트가 말한 것처럼 진정한 정체성이란 '내면을 파고들어 자신을 알아감으로써'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정체성은 내면에서 기인하는 창조적 활동을 통해 찾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정체성은 자기 자신을 잃어야 발견할 수 있고 자기 삶을 잃어야만 찾을 수 있다. 여성이 자신을 되찾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이 됐든 자기만의 창조적인 활동을 함으로써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 안에서 여성은 그간 망각하고 있었던 힘을 되찾을 수 있고 그 힘이 있어야 그동안 간과했던 순수한 관계라는 나머지 문제의 절반을 들여다보고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이를 되찾은 사람만이 관계도 되돌릴 수 있다.
- 그러나 해돋이 조개처럼 순수했던 관계가 부옇게 흐려진 뒤에도 다시 되돌릴 수 있을까? 물론 결코 회복될 수 없는 관계도 있다. 관계 회복은 그저 나와는 다른 상대방의 필요를 이해하고 채워준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달라지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또는 다른 속도로 성장해 왔을 것이다. 해돋이조개로 비유한 이 정도의 단계가 어쩌면 이들이 성취할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그 자체가 끝맺음인 단계, 더 이상 깊은 관계로 나아갈 관계가 아니었을 수 있다. 그러나 발전하는 관계라면 초기에 경험했던 본질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삶을 방해하는 무거운 짐 아래 묻혀 있을 뿐이다. 이런 경우라면 본질이 되는 중심을 꺼내어 다시 확인하기만 하면 된다.
- 해돋이조개와 같은 관계를 재발견하는 방법 하나를 소개하자면, 그때와 비슷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는 각자, 그리고 함께 휴가를 떠나야 한다. 여성이 홀로 떠난 휴가지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면, 둘이 함께 떠난 휴가지에서는 연애 초기의 감정을 느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부부끼리 휴가를 떠났을 때 생각지도 못한 즐거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 집, 직장 등 일상의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 살다 보면 결국 지난날의 관계로 영원히 돌아가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나아가 인간관계를 더 깊고 변함없는 특정 형태로 붙잡아둘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운다. 이는 비극이 아니라 오히려 삶과 성장이 끝없이 되풀이되는 기적의 일부다. 살아 있는 모든 관계가 변화와 확장이라는 과정 속에 있으므로 우리는 늘 관계를 새로운 형태로 다져 나가야 한다. 그러나 변화하는 관계를 드러내는 단 하나의 형태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어지는 각각의 단계에 맞게 다양한 형태가 있을 것이다. 결혼생활을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 속에 저마다 다른 단계가 담겨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나도 책상 위에 서로 다른 조개껍데기들을 나란히 늘어놓아야겠다.
- 맨 앞에는 해돋이조개를 놓을 것이다. 첫 번째 단계를 상징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해서다. 하나의 경첩으로 이어진 두 쪽의 껍데기가 만나는 순간마다 완벽하게 맞물리며 서로에게 새날의 여명처럼 밝은 빛을 뿜어주는 온전한 조개껍데기. 이것은 이 자체로 하나의 세상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시인들이 항상 묘사하려고 애써 오던 것이 아닐까?
- 이제 아침이 밝았구나, 잠에서 깨어나 두려움 없이 서로 마주하는 우리의 영혼이여, 사랑을 위해, 다른 것을 향한 모든 사랑을 자제하리니, 자그마한 방 하나가 무한한 공간이 되는구나. 바다 탐험가들은 새로운 세계를 찾으러 떠나게 하고, 다른 세계가 그려진 지도는 다른 이들에게 넘겨주자. 우리가 지닌 각자의 세계가 모여 하나가 되고, 우리는 하나의 세계를 품는다.
- 그러나 존 던이 묘사한 '자그마한 방'은 너무 작은 세상이라 어쩔 수 없이 금세 좁게 느껴질 것이다. 아름다운 해돋이 조개는 연약하고 덧없지만, 그렇다고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영원하지 않다고 해서 냉소적인 함정에 빠져 이를 환영이라고 부르지는 말자. 지속성은 진위를 가리는 기준이 아니다. 잠자리와 누에나방의 생애 주기가 짧다고 해서 이들의 낮과 밤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의미가 있고 없고는 시간, 기간, 지속성과 무관하다. 이는 다른 차원에서, 다른 기준으로 판단되는 것이다. 오히려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순간이 중요하다. 그리고 현실이란 하나의 시간과 하나의 공간에 존재할 때 의미를 갖는다.
- 해돋이조개는 아름답고 덧없는 모든 것에 영원한 의미를 부여한다.
- 그럼에도 우리는 관계가 오래도록 지속되기를 바란다. 최소한 결혼생활만큼은 반드시 그러하길 갈망한다. 관계의 지속, 그것이 바로 결혼 아니겠는가?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결혼생활이 단 하나의 형태나 단계에서 지속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해돋이 조개의 단계에만 머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해돋이조개 말고도 내게 도움이 된, 책상 위에 올려둘 조개껍데기가 많이 있다. 그런 껍데기들은 귀한 것이 아니다. 해변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조가비들이지만 하나하나가 모두 특별하다. 똑같이 생긴 껍데기는 없다. 조개껍데기들은 저마다의 삶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며 주어진 환경에 맞게 자기만의 형태를 만들어간다.
- '사랑은 마주 보는 게 아니라 (완벽한 모양의 해돋이 조개는 마주 보지만!) 나란히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라는 생텍쥐페리의 말이 옳았다는 걸 깨닫는다. 사실 남자와 여자는 같은 방향을 내다볼 뿐만 아니라 같은 방향성을 가지고 함께 일한다. (바위를 끊임없이 뒤덮는 굴들을 관찰해 보라.) 그렇게 서로 결속, 뿌리, 단단한 기반을 형성해 나간다. (바위에 붙은 굴을 떼어내려고 해 보면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인류 사회라는 공동체의 일부가 되어간다.
- 그러는 동안 부부 사이에는 결혼생활의 유대가 형성된다. 결혼이라고 하면 하나의 결합이라고들 이야기하지만, 사실 이 단계가 되면 강도와 질감이 다른 수많은 실 가락들이 팽팽하고 견고하게 엮이면서 끊기지 않는 하나의 거미줄이 된다. 사랑으로 엮인 거미줄. 사랑으로 엮여 있긴 하지만 아주 다양한 사랑으로 이루어진 거미줄이다. 낭만적 사랑으로 시작하여 서서히 커지는 헌신 그리고 그 사이 끊임없이 커지는 동지애까지. 이 거미줄에는 의리, 상호의존, 함께 나눈 경험이 녹아 있으며 결합과 갈등, 승리와 좌절의 기억들로 짜여 있다. 이 거미줄은 소통의 선이자 공동의 언어인 셈이다.
- 전반적으로 우리 사회는 인생의 후반기를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는 분위기다. 그래서인지 확장하는 이 시기를 비극적인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사람들이 사십 대에서 오십대로 넘어가는 이 시기를 몹시 힘들어한다. 성장의 전조인 욕구불만, 초조, 근심, 절망, 갈망 따위는 내가 보기에 사춘기의 징후와 비슷한데, 이를 쇠퇴의 징후로 잘못 해석하려 든다. 청년기에는 이런 징후를 성장통으로 여기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이러한 징후에 귀 기울이면서 그것이 이끄는 대로 따라간다. 물론 두려운 일이다. 누구나 그렇다. 숨이 막힐 정도로 텅 빈 공간에서 활짝 열린 문을 앞에 두고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두려움을 이겨내고 방을 가로질러 그 너머로 가지 않았던가.
- 그러나 중년이 되면, 쇠퇴의 시기라는 잘못된 추정 때문에 성장의 전조를 역설적이게도 죽음이 다가오는 징조라고 오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맞서는 대신 우울, 신경 쇠약, 음주, 불륜, 의미 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과로 속으로 피해버린다. 정면으로 부딪쳐보기도 전에 이 징후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에서 도망치는 것이다. 천사의 고지일지 모르는데 마치 악령을 보기라도 한 듯 성장의 징후를 제거하려고, 쫓아내려고 애쓴다.
-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알리려는 천사란 말인가? 새로운 일상의 단계를 알리는 천사다. 우리는 물질적 투쟁, 세속의 야망, 활동적 삶이라는 물리적 부담을 떨쳐내야 그동안 방치했던 자신의 이면을 충족할 만큼 자유로워질 수 있다. 정신, 마음, 재능의 성장을 위한 해방이며 마침내 입을 앙다무는 해돋이조개를 떠나 자유로워질 수 있다. 해돋이조개는 분명 아름답지만, 이는 우리가 뚫고 나아가 성장해야 하는 닫힌 세계다. 그리고 언젠가는 굴 껍데기마저도 (아무리 편안하더라도) 좁다고 느낄 때가 올 것이다.
- 해변 세계에는 아주 희귀한 생물도 있다. '아르고노트'라는 조개낙지인데, 이 생물은 껍데기에 고정되지 않은 채 살아간다. 껍데기는 모체 조개낙지가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우는 요람인 셈이다. 알에서 부화한 새끼가 바다로 헤엄쳐 나가면, 모체 조개낙지도 껍데기를 버리고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전문가의 귀한 수집품으로만 접했던 아르고노트의 임시 거처를 마주한 나는 그 아름다운 모습에 푹 빠졌다. 투명하다시피 맑은 백수선화 빛 바탕에 그리스 기둥의 무늬처럼 섬세하게 세로 홈이 파인 이 껍데기는 미지의 바다로 떠나려는 고대의 코러클 배만큼이나 가볍다. 책에서 보니 아르고노트라는 이름은 이아손이 '황금 양털'을 찾으러 갈 때 탔던 신화 속 배에서 따온 이름이며, 선원들은 이 조개를 맑은 날씨와 순풍의 징후로 여겼다고 한다.
- 어여쁜 조개껍데기를 보고 있자니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른다. 이 조개껍데기도 관계의 또 다른 단계를 나타내는 상징이 될 수 있을까? 우리도 중년이 되어 굴 껍데기가 좁게 느껴지면, 자신의 껍데기를 버리고 드넓은 바다로 떠나는 아르고노트처럼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드넓은 바다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무턱대고 인생의 후반부에는 '맑은 날씨와 순풍’만 있으리라고 믿을 순 없는 노릇이다. 어떤 황금 양털이 중년의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 우리는 이미 아는 사실과 경험이라는 익숙한 해변을 뒤로 하고 먼바다로 떠난다. 지도에도 없는 상상의 바다로 모험을 떠나는 것이다.
- 우리를 기다리는 황금 양털이라는 게 혹시 성장을 위한 새로운 자유일까? 그렇다면 이 새로운 자유 안에는 관계가 자리 잡을 여지가 조금이라도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굴 껍데기의 단계를 벗어나면 최고의 관계를 맺을 기회가 찾아온다고 믿는다. 해돋이조개처럼 제한적이고 상호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라, 굴처럼 기능적이고 의존적인 관계가 아니라, 이 단계에서는 완숙한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질 것이다. 스코틀랜드 철학자인 맥머레이의 정의를 빌리자면, 온전한 인간관계, 즉 '하나의 개체로서 자신을 온전히 쏟아부어 맺는 관계'가 될 것이다. 맥머레이는 이렇게 말한다.
"숨겨 놓은 동기 따위는 없다. 이들의 관계는 특별한 이해를 기반으로 하지 않으며, 제한적이고 편파적인 목적을 달성하려 들지 않는다. 모든 가치는 이들의 내면에 존재하며, 그렇기 때문에 다른 모든 가치를 초월한다. 인격 대 인격으로서 맺은 관계이기 때문이다."
- 의존하지 않는 법을, 타인과 경쟁함으로써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과거에는 많은 여성이 빅토리아니즘과 페미니즘이라는 의존과 경쟁의 상반된 극 사이를 오갔다. 양극단 모두 여성을 중심에서 밀어내 균형을 잃게 한다. 어느 쪽도 온전한 여성이라는 진정한 중심이 되지 못한다. 여성은 오로지 스스로 자신의 진정한 중심을 찾아야 한다. 그리하여 온전해져야 한다. '고독한 두 사람'이라는 관계의 서막으로서, 여성은 릴케의 말마따나 '상대를 위해서라도 스스로 하나의 온전한 세계'가 되어야 한다.
- 사실 이 영웅적 위업을 남성과 여성이 함께 달성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남성도 마찬가지로 스스로 하나의 세계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남성도 그동안 소홀히 했던 내적 측면을 확장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를테면 활동적이고 외향적인 삶을 사느라 시간을 거의 할애하지 못했던 내면을 들여다보는 기술과 즐길 기회가 많지 않았던 개인적 인간관계, 너무 바삐 달리느라 온전히 개발할 수 없었던 미적, 감성적, 문화적, 정신적 소양을 포함한, 이른바 여성적 자질이라고 하는 데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 어쩌면 미국의 남성과 여성 모두가 물질지향적, 외부지향적, 활동지향적, 남성 중심적인 오늘날의 문화 속에서 마음, 정신, 영혼 등 여성적인 자질(그러나 이런 자질은 여성적인 것도 남성적인 것도 아닌 그동안 등한시했던 인간의 자질일 뿐이다)에 굶주려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길을 따라 성장할 때 우리는 온전한 하나가 되고, 개인이 스스로 하나의 세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개개인이 더욱 온전해진다는 것, '자기 세계'를 구축한다는 것은 더 큰 자기만족의 상태가 된다는 의미인데, 그렇다면 남녀 사이가 더 멀어지는 것은 아닐까? 성장에는 분화와 분리가 따르게 마련이다. 하나의 나무줄기가 성장하며 사방팔방으로 가지를 뻗고 잎을 내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밑동은 여전히 하나이고, 분화되고 분리된 부분들은 한 그루의 나무로서 서로 도우며 살아간다. 분리된 두 세계 또는 고독한 두 인간은 각자 불완전한 반쪽짜리일 때보다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게 분명 더 많을 것이다.
- 바다로 나간 우리는 해야 할 현실적인 모든 일들을 깨끗하게 잊는다. 저기 저 앞, 우리에게 들리지 않는 내면의 리듬에 맞추어 발레단처럼 움직이는 도요새 무리를 따라 우리도 말없이, 그러나 조화롭게 바닷가를 거닌다. 친밀함이 바람에 날아간다. 감정은 파도에 쏠려간다. 우리는 생각에서, 생각의 연결고리에서 자유로워진다. 희끗하게 빛바랜 표류목처럼 머릿속이 맑고 깨끗해진다. 조개껍데기처럼 텅 빈 머리는 이제 바다와 하늘과 바람으로 다시 채워질 준비가 되었다. 바깥세상이 흠뻑 배어드는 기나긴 오후다.
- 어슴푸레 땅거미가 질 무렵, 발바닥에 감기는 해초처럼 몸이 무겁고 나른해지면 우리는 따뜻하고 아늑한 오두막집으로 돌아온다. 모닥불을 피워 놓고 앉아 느긋하게 셰리주를 홀짝인다. 저녁 식사와 함께 대화를 나눈다. 저녁은 대화의 시간이다. 학교 다닐 때의 습관이 남아서일까? 아침은 정신적 노동을 위한 시간이고 오후는 육체적, 야외 활동을 위한 시간이다.
- 좋은 관계란 춤과 같아서 몇 가지 패턴과 규칙이 있다. 두 사람이 서로 단단히 붙잡을 필요는 없다. 모차르트의 무도곡처럼 복잡하면서도 활기차고, 경쾌하면서도 자유로운 리듬 속에서 두 사람 모두 자신 있게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너무 꽉 부여잡으면 몸을 얼어붙게 만들어 결국 끝없이 변화하는 전개의 아름다움을 방해한다. 자기 물건인 양 잡아채거나 팔에 매달리는 등 고압적인 손길은 불필요하다. 살짝 스치는 듯한 손길이면 충분하다. 그러면 팔짱을 끼든, 얼굴을 마주 보든, 등을 마주 대든, 무엇이든 좋다. 상대방이 자신과 같은 리듬 속에서 움직이고 함께 패턴을 만들어 나가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자양분을 얻고 있다는 것을 다 알기 때문이다.
- 이러한 패턴 속에서 우리는 창조하는 기쁨과 참여하는 기쁨을 느낀다. 이 순간을 산다는 기쁨 또한 느낄 수 있다. 가벼운 손길과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한다는 감정이 한데 어울린다. 음악과 완전히 하나 되지 않고서는 춤을 잘 출 수 없다. 스텝을 질질 끌거나 미리 밟아서는 안 되고 그때그때 제 박자에 맞게 포즈를 취해야 한다. 박자에 딱 맞는 완벽한 포즈는, 훌륭한 춤이 그러하듯 편안하고 영원 불멸한 느낌을 준다. 블레이크도 바로 이런 의미로 아래와 같이 말했을 것이다.
"기쁨에 집착하는 자는 삶의 날개를 파괴하지만, 날아다니는 기쁨에 입 맞추는 자는 영원의 아침에서 살게 되리라."
완벽한 박자에 맞추어 춤추는 사람들은 결코 자신이나 상대방의 '삶의 날개'를 파괴하지 않는다.
-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런 춤의 기술을 익힐 수 있는 것일까? 왜 이렇게 어려울까? 우리가 주저하고 넘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향수에 젖어 지나간 순간을 잊지 못하거나 다가올 순간을 탐욕스럽게 움켜쥐는 건 모두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두려움은 '삶의 날개'를 파괴한다.
- 그렇다면 무엇으로 그러한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을까? 두려움의 반대 개념인 사랑으로써 가능하다. 가슴에 사랑이 넘치면 두려움, 의심, 망설임이 끼어들 틈이 없다. 그리고 두려움이 없어야 춤을 출 수 있게 된다. 상대방을 사랑하는 만큼 나 또한 사랑받고 있는지 아닌지를 의심하지 않으며 사랑에 푹 빠져 있을 때, 그 사실과 음악에 맞추어 움직이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를 만큼 푹 빠져 있을 때, 비로소 두 사람이 같은 리듬 속에서 완벽하게 합을 맞추어 춤출 수 있게 된다.
- 그러나 두 사람이 박자에 맞추어 완벽하게 움직이는 이 패턴이 아르고노트의 관계가 의미하는 전부일까? 공유와 고독 사이에서, 본질과 추상 사이에서, 특정한 것과 보편적인 것 사이에서, 가까운 것과 먼 것 사이를 자연스럽게 오가는 시계추처럼 두 사람도 더 큰 리듬 속에 발을 맞추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양극을 오간다면 관계를 더욱 살찌울 수 있지 않겠는가? 언젠가 예이츠는 인생 최고의 경험이란 '심오한 사상을 나눈 이후 접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상의 나눔과 접촉 이 두 가지는 모두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이다.
- 첫 접촉은 (부엌일, 벽난로 앞에서 나누는 대화와 같이) 개인적이고 세부적인 것이고, 그다음 접촉은 친밀함의 표현마저 상실할 만큼 (조용히 해변을 거닐기, 머리 위로 쏟아지는 별 바라보기와 같이) 비개인적이고 추상적인 것의 흐름 속에 흠뻑 빠져드는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흡수하는 동시에 서로를 해방하고, 분리하는 동시에 결합하며 바다의 보편성에 녹아든다. 이것이 성숙한 관계, 고독한 두 사람의 만남이 의미하는 바에 더 가깝지 않을까? 해돋이조개의 단계는 그저 친밀하고 개인적이다. 굴 껍데기 단계의 관계는 한정적이고 기능적이다. 그러나 아르고노트의 단계에 이르면 세부적인 것, 한정적인 것, 기능적인 것에서 출발한 추가 반대편의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세상으로 나아갔다가 다시 개인적인 것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 그러면 양극단을 부드럽게 오고 가는 추를 바라보며, 인간관계의 문제를 통합적으로 설명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인간관계의 날개 달린 삶, 이들의 반복적인 변화, 불가피한 단속성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데 필요한 일말의 단서가 이 안에 존재하지 않을까? 생텍쥐페리가 말했다.
"정신적인 삶, 참된 삶은 단속적이며 마음으로 사는 삶만이 지속된다. 정신적 삶은 완전한 통찰과 절대적 무지 사이를 오간다. 예를 들자면, 여기 자신의 농장을 아끼는 남자가 있다. 그러나 때로는 그 농장이 그저 관련 없는 대상의 집합으로 보이는 순간이 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 그러나 때로는 그 사랑이 그저 부담, 장애, 속박으로 느껴진다. 음악을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 그러나 때로는 음악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 우리의 감정과 인간관계라는 측면에서 본 '참된 삶'도 단속적인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할 때에도 상대방을 매 순간,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랑할 수는 없다. 그건 불가능하다. 그럴 수 있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아직도 이런 사랑을 바란다. 삶도 사랑도 관계도 밀물이 있고 썰물이 있다는 것을 좀처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밀물이 들어올 때 얼른 뛰어들고 썰물 때가 되면 깜짝 놀라 어떻게든 붙잡아 보려 한다. 빠져나간 물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변하지 않길, 존속하길, 영원히 지속하기를 고집스럽게 바란다.
- 섬은 나를 대신해 사회적인 선택도 해준다. 섬의 작은 환경은 너무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없다. 이곳에서 나는 집에서라면 만나지 않았을 사람들을 만난다. 나이 또는 직업의 벽을 사이에 두고 있던 사람들. 대도시의 교외에 살다 보면, 비슷한 연령대와 비슷한 관심사를 나누는 사람들만 만나게 된다. 우리 부부도 필요와 목적이 그들과 비슷했기에 교외를 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섬은 나를 대신해 내가 만날 사람들을 선택해 준다.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 충분한 시간과 공간을 가지며 언제나 흥미롭고 풍요롭게 지내온 낯선 사람들을 만나게 해 준다.
- 수많은 인생 가운데 우연히 같은 시간과 공간에 머물게 된 우리들. 이곳이 아니었더라면 서로 이웃으로 선택할 리 없는 사람들이다. 섬이 우리를 선택한 것이다. 이 섬에 함께 내던져진 우리는 여기서 서로를 이해하려 애쓰고, 그러면서 힘을 얻는다. 대도시 생활이 어려운 건, 우리에게 선택권이 주어졌을 때 (그리고 그토록 혼잡한 환경에서 일하고 숨 쉬고 생활하기 위해 선택할 수밖에 없다면) 아주 단조로운 식단을 선택하듯이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을 선택하기 쉽다는 것이다. 누구는 고기 요리 없이 오르되브르만 고르고, 또 누구는 채소 요리 없이 디저트류만 고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식단이 아무리 제각각일지라도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하다. 우리는 보통 익숙한 것을 고르지 낯선 것을 택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당황스럽거나 실망하거나 다루기 까다로울지 모른다는 이유로 잘 모르는 것을 선택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황과 실망을 안겨주는 그 모든 것들이야말로 우리의 경험을 가장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 여러모로 이 섬은 나로 하여금 집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나은 선택을 하게 해 주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나는 또다시 곁가지 활동만이 아니라 지나친 중심 활동에 파묻히게 되고 말까? 뿌리쳐야 할 유혹만이 아니라 잡아야 할 것 같은 좋은 기회가 너무 많아서? 따분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흥미로운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세상의 다양성은 그릇된 가치로 또다시 나를 혼란에 빠뜨릴 것이다. 가치는 질이 아닌 양에 있는 거라고, 고요가 아니라 속도에 있는 거라고, 침묵이 아니라 소음에, 생각이 아니라 말속에, 아름다움이 아니라 탐욕 속에 있는 거라고 소리칠 것이다. 이러한 맹공격에 나는 어떻게 맞서야 할까? 나를 갈기갈기 찢어 놓으려는 긴장과 압박 속에서 어떻게 하면 온전히 남을 수 있을까?
- 섬이 나를 대신해서 해주었던 자연스러운 선택을 익힐 수 있도록 나도 (여기서 더 명확히 인식하게 된) 가치관에 기초하여 의식적으로 선택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된다면 나는 이것을 섬이 준 교훈이라고, 또 다른 삶의 방식을 제시해 준 이정표라고 부르고 싶다. 삶의 진정한 깨달음을 유지하기 위한 최대한의 삶의 간소화. 육체적, 지적, 정신적 생활의 균형. 압박감 없이 하는 일. 의미와 아름다움을 느낄 여유. 고독과 공유를 위한 시간. 정신적 생활, 창조적인 생활, 인간관계의 단속성에 대한 이해와 믿음을 강화하기 위한 자연과의 접촉. 그리고 조개 몇 개.
- 섬 생활은 미국 북부에서의 내 삶을 들여다보는 렌즈가 되어주었다. 집으로 돌아갈 때 반드시 이 렌즈를 가지고 가야 한다. 휴가지에서 얻은 비전은 조금씩 조금씩 흐려지기 때문이다.
- 섬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조개껍데기들이 이를 상기시켜 줄 것이다. 조개껍데기들은 내 섬의 눈이 되어줄 것이다.
- 결국 어느 정도는 타협이 필요하다. 수많은 사람을 일일이 대응할 수 없으므로 때로는 그 다수를 대중이라는 추상적 개념으로 단순화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현재의 복잡함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현재를 무시하고 미래의 단순한 꿈 속에서 살아가려 한다. 우리는 집 안에 존재하는 자신의 문제를 지금 당장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바깥에 존재하는 세상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가 스스로 짊어진, 견딜 수 없는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현실 도피가 시작된다. 그러나 대중이라고 부르는 추상적인 개념을 정말로 마음 깊이 느낄 수 있을까? 그리고 현실을 무시하고서 어떻게 더 나은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고 보장할 수 있을까? 자신의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이 과정에서 우리는 어디쯤 와 있는가? 핵심에 다가가지 못한 채 주변만 돌면서 과연 성공적이라고 할 만한 결과를 얻은 적이 있는가?
- 잠시 생각해 보자. 여기, 지금, 개인, 인간관계처럼 내가 지금껏 이야기해 온 핵심들이야말로 현대 사회의 진정한 피해자가 아닐까? 현재는 미래를 향한 경쟁에서 뒤처지고, 여기는 저기에 밀려 소외당하고, 개인은 대중이라는 횡포에 위축된다.
- 집안을 돌보느라 한참 바빴던 이십 년 전에 출간한 이 책을 바라보면 무엇보다 놀랍다는 감정이 앞선다. 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 썼던 에세이가 수많은 여성의 공감을 얻는 걸 보고 느꼈던 당시의 놀라움은 세월이 지나도 옅어지지 않는다.
- 여성이 지금과 같은 승리(요샛말로는 '해방'이지만, 내가 말한 건 '승리'였다)를 이루어낸 것은 대부분 우리 어머니 세대 페미니스트들의 노력 덕분이라고 했던 내 무지한 추측을 다시 들추어 보자니 부끄러움에 또 한 번 놀란다. 시간이 흘러 겸손한 눈으로 다시 보니, 그동안 대단한 승리가 얼마나 많이 이루어졌는지, 또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지 깨닫는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로운 발전에 어리둥절하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또 여성의 훌륭한 업적이 쌓인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 책이 읽혀야 할 것이다.
- 이십 년이라는 격동의 세월을 겪은 이후로도 새로운 세대의 여성들이 어떻게 <바다의 선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었을까? 지난날을 돌아보면 기함의 연속이었다. 이십 년 동안 우리는 대통령을 네 번 뽑았고, 그중 한 사람은 암살로 떠나보냈다. 양심을 불사르는 지난한 전쟁의 비극과 씨름했다. 인간이 달 표면을 걷는 모습을 지켜봤다. 우리는 여전히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경제적 동요에 흔들렸다. 우리 모두는 혁명적인 사회 운동에 휩쓸려 왔고, 대부분은 여전히 진행 중이라 대중적 이름으로 완전히 정의되지 않았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 운동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시민권 운동, 반체제 문화, 여성 해방, 환경 위기를 꼽겠다. (여성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는 세 가지 사회 운동에서 여성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는 사실은 굉장히 흥미롭다.)
- 이십 년 사이에 세상은 전혀 다른 곳이 되었고, 그러는 동안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삶도 물론 달라졌다. <바다의 선물>을 쓸 때 나는 식구가 늘어나고 자녀들이 성장하는 시기인 '굴' 껍데기의 단계에 있었다. 인생의 물결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아이들은 학교로, 새로운 가정으로, 직장으로 떠나자 내 굴밭은 휑뎅그렁하게 남아버렸다. 그러자 이 책에서는 전혀 다루지 않았던, 아주 불편한 단계가 이어졌다. 암울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 단계는 '버려진 껍데기'라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이 시기의 특징은 엄청난 고독이 밀려온다는 것, 그리고 그 고독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몰라 너무나도 당황스럽다는 것이다. 내 경우에는 그저 단순히 시간이나 공간을 채우는 문제가 아니었다.
- 버려진 껍데기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 모든 여성은 일찍이 행했던 내적, 외적 탐구가 결실을 맺는다. 사람은 새로운 삶의 단계뿐만 아니라 새로운 역할을 맞이할 때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맨 처음 자녀 없는 삶, 자신을 위해 사는 삶이라는 표현을 할 때에는 그저 공허한 울림만 퍼져 나간다.
- 그러나 노력과 인내가 있으면, 또 공감해 주고 지지해 주는 이가 있으면, 이내 어려움을 헤쳐내고 '아르고노트' 단계의 모험이 시작된다.
- 이제 나는 반복되는 교훈을 다시금 마주한다. 앞서 했던 말대로 "여성은 혼자 힘으로 성년이 되어야 하며, 자신의 참된 중심을 반드시 홀로 찾아야 한다." 모든 여성이 이 교훈을 이십 년 주기로 되새길 필요가 있는 것 같다.
- 그렇다면 할머니이자 과부인 내가 굴밭 단계에 있는 지금 시대의 여성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무엇보다 칭찬이다. 딸들, 며느리들, 조카들, 또 나보다 어린 친구들이 그동안 이루어낸 것을 볼 때마다 나는 깜짝깜짝 놀란다. 이들은 나보다 더 좋은 어머니들이다. 또 남편들과 동등한 지성과 자주성을 갖추었다고 인정받는 여성들이다.
- 이처럼 새롭게 인식하고 실천하는 일 대부분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불편하고 고통이 따른다. 인식이 향상하는 과정은 언제나 고통스러웠다. (자신의 사춘기를 되짚어 보거나 사춘기 자녀의 모습을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이 고통을 통해 우리는 훨씬 더 큰 독립을 얻고, 서로 협력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엄청난 문제들은 그것이 사적 영역이든 공적 영역이든 간에 여성 또는 남성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남성과 여성이 힘을 합쳐야만 극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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