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퍼트리샤 윌트셔] 꽃은 알고 있다 - 꽃가루로 진실을 밝히는 여성 식물학자의 사건 일지

일루젼 2023. 11. 24. 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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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퍼트리샤 윌트셔 / 김아림
출판 : 웅진지식하우스
출간 : 2019.12.18 


       

 

법의학자라고 하면 조명이 집중된 차가운 금속 테이블과 흰 천으로 덮인 시체를 떠올리기가 쉽다. 하지막 법의학에는 의학 외에도 다양한 분야가 존재한다. 법의-화분학, 생태학, 지리학 등등. 

 

<꽃은 알고 있다>의 저자 퍼트리샤 윌트셔는 화분학을 주전공으로 하는 식물학자이자 법의생태학자이다. 그녀가 여왕의 정원인 왕립식물원 큐가든 출신이라는 것만으로도 저자의 커리어가 화려할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는데, 특히 꽃가루 분석을 통한 고고학 연구에 매진하던 중 법의학 분석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녀는 현장과 사체에서 채취된 꽃가루를 분석해 사건 발생 시기와 장소, 환경을 추정한다. 분석 결과는 때로는 서로 엇갈리는 진술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핵심 증거로 사용되기도 한다. 

 

저자는 모든 것이 그저 자연스럽게 흘러갔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그녀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독자로서는 하나의 단계를 위한 기초 단계들이 착착 맞아떨어져 가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처음 이 책을 선택했을 때는 어떤 형식으로 구성된 책일지 궁금했다. 각각의 사건들을 중심으로 한 구성일까? 그렇다면 서술은 소설과 유사하지 않을까? 아니면 저자의 삶을 시간대 순으로 따라가며 경험담들을 풀어갔을까?

 

결론은 모두 아니었다. 딱히 어떤 순서를 염두에 두고 쓴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 내 감상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의식의 흐름대로 쓴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구성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데,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이 잘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조각들은 저자의 일부이고 생생한 경험이지만, 그것을 이차적으로 경험하는 독자에게 보다 생생하고 이해하기 쉽게 드러내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미리 밝혀두자면, 책의 내용에는 매우 만족한다. 추천하고 싶은 책이라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구성에 대해 잠시만 투덜거려보자면, 솔직히 꽤 산만하다. 저자는 자신의 삶에 대해 불쑥불쑥 떠오르는 대로 서술하며 그때 당시 맡았던 사건을 연결 짓는데, 한 챕터 안에서도 개인적인 영역과 직업적인 영역의 전환이 너무 급작스럽고 단락적이다. 심지어 저자의 '남편'에 대한 설명이 일치하지 않아서 몇 차례 당황하고 나서야 -중반부쯤 읽고서야- 전 남편과 현 남편이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글의 전개 순서가 식물학적 지식을 쌓아가기 위한 단계적 배열도 아니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좀 아쉽다. 원서의 편집자가 조금만 더 신경 써서 편집했더라면 훨씬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 되지 않았까 하는, 독자로서는 조금 과한 욕심을 부려본다. (물론 좋은 책을, 그것도 번역서로 읽을 수 있다는 현실에 깊이 감사하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산만한 것은 내 리뷰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면, 저자의 죽음과 환원에 대한 견해에 깊이 공감하며 읽었다. 먼저 '공감'에 대해 짚고 가야겠는데, 나는 '공감'이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상대가 처한 상황과 생각과 감각을 이해해 그 사람이 어떠한 감정일지 '상상할 수 있는 힘'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만약 나라면 어떨까'가 아니라 '상대는 지금 어떨까'하고 상대의 입장에서 상상해볼 수 있는 힘. 상대의 상황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채 섣불리 자신만의 감정에 빠져버리거나, 무턱대고 상대의 기분에 동조하는 것만이 공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안타깝게도 최근에는 감정적 동조만이 '공감'이라고 표현되는 것 같아 개인적으로는 꽤나 아쉽다. (물론 나는 사고형이다.)

 

다시 본래 하고 싶었던 이야기로 돌아와서. 스마트폰이 하나 있다고 가정해 보자. 화면에 표현되는 색들의 변화를 통해 우리는 글이나 그림, 동영상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표현되건 사실 패널 자체는 변화가 없다. 매순간 그 고정된 위치에서 픽셀들이 어떤 색을 발광하느냐만 변화할 뿐이다. 즉, 표현형의 변화는 사실 허상이라는 것. 

 

저자가 바라보는 죽음 또한 이와 닮아 있다. 죽음이 아니라, 변화와 환원일 뿐이다. 그것이 인간과는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식물들의 세계에서 살아온 그녀가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이전에 섭취했던 음식에서 비롯해 육체를 구성하던 분자들로 분해된다. 그 사람은 다른 유기체들이 가졌던 분자를 자신의 분자로 전환시켰고, 이제 그것은 다시 한번 방출된 다음 다른 사람들에게 흡수되어 생명의 순환 주기를 영속시킬 것이다."

 

"이때 이 재를 숲 속에 흩날린다면 그 사람은 말 그대로 환생하는 셈이다. 재 안의 원소들은 세균, 균류, 무척추동물, 식물 뿌리에 흡수된다. 한 사람의 개인이 숲 전체로 퍼져 다수의 존재가 된다. 블루벨, 참나무 그리고 멋진 딱정벌레로 동시에 환생할 수 있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당신이 이런 생각을 좋아하든, 싫어하는 이 일은 분명히 일어난다." 

 

"나는 이런 생각이 무척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남편을 이루던 분자와 나의 분자도 섞일 것이다. 우리의 재가 같은 곳에 뿌려지면, 우리는 심지어 같은 그루의 나무나 블루벨이 될지도 모른다. 정말 멋지다! 나무와 블루벨이 죽고 그 사체가 부패하면, 우리의 분자는 다시 방출되어 다른 생물에게 흡수될 것이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소들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한 계속 존재한다."   

 

그렇다면 '나'라는 고유성에 집착하지 말고, 현재 '나'라고 인식되는 '구성'을 세심하게 관찰하는 것이 보다 현명한 길일지도 모른다. '구성'은 매 순간 변화한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의 혼합이 '나'라는 개체로 존재할 수 있었던 한계인지- 그것을 체험하는 한 주기가 현재 '나'의 일생이라고 생각하면 기쁘면서도 묘한 감정이 샘솟는다. 진정한 공감이라면 이 감정 또한 헤아려 함께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나라면 어떨까'가 아니라 '저 사람은 이렇겠구나'라면, 가능할 것이다. 

 

약간의 장벽은 있지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좋았다. 


   

 

- 퍼트리샤 윌트셔 Patricia Wiltshire. 
영국의 식물학자, 화분학자이자 고고학자. 무엇보다 지난 25년간 300건 이상의 까다로운 범죄 사건을 해결해 온, 법의생태학의 선구자로서 잘 알려져 있다. 
유년 시절 기관지염과 폐렴을 앓아 병약했던 그녀는 주로 백과사전 전집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때 접한 지식들은 어린 그녀가 세상을 폭넓은 시선과 왕성한 호기심으로 대하게 이끌어주었다. 의학 연구실과 건축 회사를 거쳐 킹스칼리지 런던에서 식물학을 공부한 그녀는 미생물과 일반생태학을 강의하다 런던대학교 고고학연구소에 부임, 환경고고학자로서 영국 전역을 누비며 과거의 환경을 재구성하는 일을 했다. 어느 범죄 사건의 증거 분석을 위해 도움을 요청하는 한 통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그녀는 살인, 강간, 납치, 은닉 등의 다양한 강력 사건에 수십 년간 쌓아온 과학 전문 지식을 동원, 현장의 이미지를 명징하게 그려내고 무고한 사람의 누명을 벗겨주며 가해자를 법정에 세우는 데 기여해 왔다.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의 실마리를 찾아내는 놀라운 정확성과 호기심, 겸손, 그리고 진실에 대한 열정 덕에 이제는 '법의학의 여왕'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현재 영국 동남부 지역인 서리(Surrey)에 거주하며, 세계법의학협회·영국왕립생물학협회·린네협회 회원으로서 일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전 세계를 누비며 왕성한 연구와 강연 활동을 펼치고 있다. 

 


 

- 지금 겨울 숲을 걷고 있다고 잠시 상상해 보자. 발밑으로 느껴지는 폭신한 땅, 그런데 무언가 눈에 들어온다. 사람들이 발로 밟아 다져진 길 바로 옆, 움푹 들어간 땅에 자연스럽지 않은 뜻밖의 무언가가 있다. 당신은 개를 산책시키는 중이다(많은 이야기가 이런 식으로 시작된다). 덤불 속으로 돌진해 낑낑거리는 개를 따라 그 안으로 들어가려고 애쓰던 찰나, 머릿속에 불길한 예감이 스친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개가 미친 듯이 파놓은 흙 속에 이미 생명이 다한 시체의 손이 보인다. 검은색 부엽토를 배경으로 그 창백함이 두드러진다. 

 

- 증인들의 증언이나 용의자의 자백만으로 이런 범죄의 범인을 단정한 시절이 그리 오래 전은 아니다. 희생자의 신원을 파악할 만한 실마리나 잠재적인 용의자와 연결 지을 단서들이 없다면, 겨울숲에 어설프게 파묻힌 이 시체는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을 터였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법의학 탐사의 세계가 도약하고 있으니.

 

- 우리 모두가 익히 아는 지문은 선사시대 토기에서도 발견된다. 고대 중국인과 아시리아인은 지문으로 점토 공예품의 소유권을 주장했고, 나중에는 문서에도 활용했다. 윌리엄 허셜(William Herschel) 경은 인도에서 영국 행정관으로 근무하던 1858년, 민사 계약서에 서명뿐 아니라 지문도 찍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개념을 처음으로 주장했다. 지문 분석법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완전히 확립되었다. 1882년에는 프랑스 인류학자 알퐁스 베르티용(Alphonse Bertillon)이 사람의 변이에 관해 연구하는 과정에서 관례적으로 지문을 기록했으며, 1891년 아르헨티나에서는 경찰이 범죄자의 지문을 채취하기 시작했다. 이 분야는 이후 빠르게 발전을 거듭, 1911년에는 미국 법원이 개인을 식별하는 신뢰할 만한 방법으로 지문 감식법을 채택하기에 이르렀으며 1980년에는 최초의 지문 전산 데이터베이스인 NAFIS가 영국과 미국에 구축되었다.

 

- 1990년대에 들어서는 DNA 프로파일링이 발달하면서 법의학탐사가 또 한 번 비약적으로 도약했다. 이전의 지문 채취와 마찬가지로 혈액, 정액, 체세포, 머리카락 뿌리에서 표본을 채취해 개인의 고유한 흔적을 포착하게 되었다. 이는 법의학의 세계를 완전히 뒤바꾸었다. 앞서 이야기한 겨울 숲 속에서 발견한 시체 같은 미지의 희생자를 확인하거나 범죄 현장을 보고 특정 개인을 찾아내 연결 짓는 일이 훨씬 쉬워진 것이다. 단언컨대 법의학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들이었다. 자칫 자유로이 풀려났을지도 모를 살인범들이 교도소에 들어갔고, 강간범들 역시 다시 죄를 저지르는 대신 붙잡혀 감옥에 갇혔다. 또한 무고하게 고발당했던 사람들은 무죄가 입증되었다. 경찰들은 여러 번 헛발질을 하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 진실에 가까이 다가갔다. 

 

- 범죄 현장에서 항상 지문이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법의학지식을 갖춘 범인이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장갑을 끼고 범죄를 저질렀다면 특히 더 그렇다. DNA 증거 역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전지전능하지는 않다. 범죄 현장에 남겨진 범죄자의 흔적이 전혀 없을 수도 있다. 머리카락이든, 혈액이나 정액을 비롯한 체액이든, 신체 조직이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 가해자의 유전적 프로파일을 만드는 일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 하지만 만약 사람과 장소를 연결하고, 무고한 사람을 무죄로 돌리고 진범을 밝혀낼 다른 방법이 있다면 어떨까? 지문이나 DNA 증거 외에도 어떤 사건에 대한 여러 시나리오 중 하나를 입증할 흔적이 남아 있다면? 그것이 아무도 모르게 스며드는 흔적이라, 아무리 법의학에 빠삭한 범죄자라 한들 결코 완전히 지울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떨까? 

- 다시 한번 겨울 숲 속으로 들어간다고 상상해 보자. 검은나무딸기 덤불을 밀고 들어가면서 늘어진 나뭇가지가 몸에 닿는다. 코트 소매가 떡갈나무와 마찰하면서 나무껍질 틈에 박혀 있던,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을 만한 작은 포자와 꽃가루가 옷에 묻는다. 비탈길을 내려갈 때는 부츠에 흙탕물과 흙 부스러기가 묻는데, 여기에는 몇 달 사이 비가 내리던 날 떨어진 포자와 꽃가루가 포함되어 있다. 흙에는 토양을 서식지로 삼는 수많은 생물들과 이전에 그곳에 살았던 죽은 생물의 일부도 들어 있을 테다. 

- 이곳을 조사하려고 몸을 웅크리면, 당신의 머리카락에는 몸 위로 드리운 잔가지와 잎을 스치면서 떨어진 꽃가루, 포자를 비롯한 미세한 성분이 묻는다. 당신이 풍경 속에 남긴 흔적, 즉 발자국을 비롯해 흘려버린 머리카락과 섬유질 등은 간과되기 쉽다. 하지만 그 풍경이 당신에게 남긴 각인은 어떨까? 만약 누군가가 당신의 몸과 옷에 남은 각인에서 그 미세한 흔적들을 찾아내고 식별하며 그 장소 혹은 더 멀리 떨어진 다른 곳을 시각화한다면?

- 당신이 살인자라고 상상해 보자. 희생자를 남기고 온 장소에서 언제인지 모르게 딸려 와 당신이 어디를 가든 지니고 다니는 흔적이 있다면 무엇일까?

 

바로 여기서,
법의학적 수사의 역사와 맞물리는 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 내가 식물의 세계를 정식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지는 45년이 넘었지만, 자연에 대한 나의 사랑은 훨씬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린 시절 나는 자연에 관해 아무리 많이 읽어도 항상 더 알고 싶었다. 알아야 할 지식은 언제나 차고 넘쳤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결코 정상에 오를 수 없는 여건은 내게 일종의 좌절감을 안긴다. 힘들게 지식의 산을 오르고 또 올라도 길은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 종의 생명이 지속하는 데 필수적인 이 작고 아름다운 알갱이를 보고 경탄하는 이들도 있을 테다. 어쩌면 어떤 낭만적인 환상에 사로잡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척 낭만적인 남편에 비해 유감스럽게도 나는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편이다. 나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고 자부하며, 직접 본 바를 해석할 때도 인지적 편향을 없애고자 부단히 애쓴다. 내 연구 분야에서 이 알갱이들은 식물이나 곰팡이 생활사의 어느 한 단계에 그치지 않고 훨씬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이 알갱이들은 경찰에게 풀어놓는 이야기의 기초가 된다. 이들은 누군가가 자신이 당시에 있었다고 말했던 곳에 없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 알갱이들은 그가 거짓말을 하거나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속삭인다. 증거들을 한데 모아 실처럼 자아내면 누가, 무엇을, 어디에서,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얻을 수 있다. 범죄가 발생했을 때 꽃가루, 곰팡이, 지의류, 미생물의 작은 알갱이를 통해 가능성을 읽고 제시하며 자연 세계에서 온 사실들을 수집하는 것이 내 임무다. 

 

- 예전에 나는 스스로를 가리켜 수수께끼를 푸는 전문가라고 표현하곤 했는데 이 비유는 실제와 꽤 가깝다. 내 일에서는 정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꽃가루나 포자를 하나하나 확인하는 작업은 무척 고되다. 그렇기에 언제나 정확하려고 애쓰며,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면 꼭 올바른 동정(同定, 생물의 분류학상 소속과 명칭을 정하는 일)을 거친 식물을 참고 자료로 활용한다. 자칫 실수라도 했다가는 누군가가 혐의를 억울하게 뒤집어쓰거나 범죄자가법망을 벗어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미세 입자를 연구하며 알갱이 하나하나를 구별하려고 오랜 시간 동안 애써온 이유다.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다. 

- 장미과처럼 고대에서부터 존재했던 과의 꽃가루는 모두 겉면에 세 개의 고랑과 세 개의 구멍, 소용돌이 줄무늬가 있다. 비슷한 무리에 속한 종은 패턴이 비슷할 수 있기 때문에 검은딸기나무, 장미, 산사나무를 구별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소용돌이무늬가 한결 두드러지며 쉽게 관찰되는 가시자두, 자두, 체리를 포함한 다른 무리와는 꽤 쉽게 구별할 수 있다.

 

- 가능성이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복잡한 세계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우리는 헤쳐나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 아마 여러분은 나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을 테다. 적어도 40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여전히 그렇다.

 

- 많은 사람들은 죽음이 우리의 영원한 영혼이 거쳐 가는 긴 여정의 또 다른 기착지에 불과하다는 터무니없는 가정을 하는 듯하다. 나는 이를 믿지 않는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절만 해도, 사람들이 자신의 몸이 단지 무기물, 에너지, 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가장 위대한 진실을 마주하는 데는 일종의 믿음이 필요했다. 세상만물은 끝에 다다르면 에너지와 생명력이 더 이상 흐르지 않으며, 우리의 마음과 우리 자신에 관한 모든 기억을 담은 몸은 요소들로 분해되고 모든 생명체가 출현하는 자연 원소의 거대한 그릇 안에 무너져 섞이리라는 진실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몸과 마음을 구성하는 요소들,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근본적인 것들이 한때는 다른 무언가에 속했으며 우리가 사라진 뒤에는 다르게 쓰이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어쩌면 생각조차 못 해봤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생각에 우울해지거나 불안해지지 않는다. 그 과정이야말로 궁극적인 의미의 재활용이며 따라서 윤회이고, 종교를 갖든 그러지 않든 우리 모두에게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이는 단지 자연의 일부다. 누군가는 그 냉혹함과 무자비함에 몸서리칠지도 모르나, 공상적이고 입증할 수 없는 어떤 동화보다도 더 아름다운 이야기다. 

- 죽음 이후의 유일한 삶이 있다면 우리 몸의 구성 요소가 죽음을 통해 세상에 방출되어 여러 번 반복해서 사용되는 과정이다. 당신의 몸이 저수지에서 물을 끌어오는 분수라고 생각해 보라. 그리고 분수 노즐의 압력과 형태에 따라 특정한 패턴으로 물이 뿜어져 나온다고 상상해 보자. 이때 분수라는 틀은 여러분의 몸과 생명 그 자체를 나타낸다. 작동을 멈추면 물줄기가 그치고 물은 저장소로 돌아간다. 분수의 물은 에너지를 공급하는, 몸이 형체를 갖추기 위해 소비하는 음식이나 액체와도 같다. 물의 형체는 일시적이며, 잠시 몇 분 동안 화려하게 쏟아져 내린 뒤에는 빙빙 소용돌이쳐 흐르거나 그저 흘러내릴 테다. 어쨌거나 물은 결국 저장소로 돌아가고, 이는 필연적인 수순이다. 노즐이 바뀌면 또 다른 형체가 만들어진다. 다시 말해 다른 '생명체'가 형성되는 것이다. 우리 몸은 마치 분수가 만들어내는 물줄기의 모양과 같고, 에너지와 물질은 몸에 들어왔다 흘러 나간다. 

 

- 죽음 이후에 삶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죽음 안에는 언제나 삶이 있다.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 당신의 몸은 멋지게 균형 잡힌 생태계가 이루는 하나의 집합체이며 그리하여 그것은 죽음 속에 있다. 당신이 죽으면 몸은 활력 넘치는 풍부한 미생물의 천국이자 죽은 고기를 먹는 곤충과 새, 설치류들의 보물 창고가 된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당신의 유해를 축제처럼 즐기러 올 테고, ...

 

- 내 마음을 흔들었던 또 다른 사건이 있다. 스칸디나비아 출신 열다섯 살 소녀가 살해당한 사건이다. 영안실의 냉혹한 전등 아래 알몸으로 누워 있는 소녀의 모습은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웠다. 소녀가 날씨 좋은 여름날 숲 속에서 살해된 이유는 소녀의 몸을 훔쳐보며 풀밭에 무릎을 꿇고 자위를 하려 했던 한 남자의 광적인 욕정과 집착 때문이었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소녀의 몸을 본 나는 깊은 참담함에 빠졌다. 소녀가 누려야 할 삶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기에. 

 

- 나는 자주 죽음을 대면했다. 그 가운데에는 죽음에 얽힌 사연을 조각조각 맞춰야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모두가 언젠가는 그렇게 될 테지만 부모님을 잃었고, 그보다 앞서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거의 나를 키워주시다시피 한 할머니를 잃었다. 게다가 젊은 시절, 두 살도 채 되지 않은 딸이 숨을 거뒀을 때도 나는 그 자리에 있었다. 내 상상 속에서 딸은 여전히 마거릿 태런트(Margaret Tarrant)가 쓴 그림책 속 어린 여자아이다. 그림책에서는 모든 인생이 환하고 완벽하다. 하지만 내 안의 현실적인 자아는 이것이 환상임을 안다. 나는 그동안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 그것이 무엇인지 지켜봤다. 망각과 냉정함 속에서 죽음은 자연의 여러 과정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다른 모든 것이 그렇듯 심원하기만 하다. 

 

- 그저, 이 책을 자연과 죽음이 얽힌 매혹적인 가장자리로 여러분을 안내할 여행 가이드로 여기라. 그 여정에서 나는 식물에 범죄 수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잠재력이 있음을 처음 깨닫게 된, 하트퍼드셔의 산울타리로 당신을 데려갈 것이다. 자연 세계를 대하는 나의 학문적 관점을 바꾸고 그 안에 담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그 순간 말이다. 

 

- 나는 범죄 현장에서 구더기가 끓는 시체를 한동안 살폈고, 우리가 뭔가를 배울 수 있도록 시체를 썩게 내버려 두는 미국 테네시주의 '시체 농장'에도 가봤다. 나는 여러분을 피에 흠뻑 젖은 카펫과 쿠션이 있고 회색과 갈색 곰팡이가 잔뜩 자라 희생자가 살해된 순간을 밝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던, 던디의 한 아파트로 데려갈 것이다. 그리고 나무들이 무성한 숲과 외딴 황야에 버려진 시체들, 영국 남부 한복판에서 환각을 일으키는 독성 식물과 함께 벌어지는 샤머니즘 의식, 실종된 수많은 소녀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는 만나지 못한 채 얕게 파묻힌 현장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여정에서 또한 여러분이 내 이야기 속으로 들어오도록 이끌고자 한다. 거기에는 나의 사랑과 상실 그리고 어린 내가 자연 세계의 드넓은 경이에 눈떴던 웨일스의 작고 좁다란 골짜기가 있다. 그 끝에 지금껏 내가 식물과 동물, 미생물을 관찰하면서 발견한 경이로움을, 어떻게 우리 인간이 자연과 분리되지 않은 채 그 속에서 작동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여러분에게 줄 수 있다면, 이 작업은 성공인 셈이다. 

 

- 피부와 옷에 자라는 균류, 머리카락과 옷, 신발에 묻은 꽃가루와 포자를 조사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를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에게 말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체를 옮기고 파묻는 과정에서 용의자의 부츠에 박힌 꽃가루를 통해 누가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았는지를 알려줄 수도 있다. 콧속 작은 알갱이를 통해 그 사람이 산 채로 묻혔는지, 아니면 목이 졸리는 동안 땅 위에서 어떤 입자를 들이마셨는지도 알 수 있다. 이처럼 자연은 우리의 온몸에 몸의 안과 밖에 흔적과 단서를 남긴다. 우리가 환경에 흔적을 남기기도 하지만, 환경 또한 우리에게 흔적을 남기는 셈이다. 가끔은 단서를 얻어내기 위해 자연을 잘 구슬려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에게 자연은 언제나 비밀을 풀어놓을 것이다. 

 

- 경찰들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자연의 흔적을 포착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혹은 추측되는지 개연성 있는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 하지만 당신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이런 것들로 무엇을 알아낸다는 거죠?" 많은 경찰관들도 여전히 그렇게 묻는다. 어떤 면에서 보면, 답은 간단하다. 프랑스의 범죄학자이자 법의학의 선구자인 에드몽 로카르(Edmond Locard, 1877~1966)는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는 격언을 남겼다. 이 말은 '로카르의 교환법칙'이라는 절대 명제로 법의학 지식의 전당에 영원히 새겨졌다. 리옹에서 로카르를 만났던 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 경은이 원리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로카르는 범죄자가 현장에 들어설 때는 언제나 자기가 가지고 온 무언가를 남기는 동시에, 현장에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간다고 가정했다. 이 두 가지는 우리가 '흔적 증거'라고 부르는 것들로 DNA, 지문, 머리카락, 섬유를 비롯해 내가 중점적으로 활용하는 꽃가루나 포자 등을 포함한다. 이 증거들은 우리가 사람과 사물, 장소 사이에 어떤 접촉이 일어났는지 이해하도록 돕고, 당시의 시간적 전후 사정을 알려주기도 한다. 

 

-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조앤 넬슨 사건은 법의생태학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보여준다. 법의생태학자는 여타 법의학 분야가 하는 DNA 분석 같은 일과는 다른 일을 한다. 나는 경찰이 제공한 증거품에서 흔적 증거를 찾을 수도 있지만, 이것은 주요한 작업을 하는 데 필요한 전초전일 뿐이다. 내가 진정으로 찾는 것은 하나의 이미지다. 그 이미지는 반쯤은 상상이고 반쯤은 실재한다. 얻을 수 있는 모든 정보를 흡수한 다음, 이 정보를 활용해 마음속에서 내가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으며 아마 결코 방문하지 않을 어떤 장소를 그림으로 그리는 것이다. 나는 그 이미지를 '장소 그림'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비록 상상의 산물이지만 어딘가를 묘사한다. 그림은 증거품으로부터 얻은 꽃가루, 포자, 미세 입자를 주의 깊게 조사한 결과 불러낸 어떤 생생한 공간을 표현한다. 눈을 감으면 눈꺼풀을 배경으로 보이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미지의 어느 부분은 선명하지만, 어느 부분은 흐릿해 현미경으로 아무리 더 많은 정보를 얻어도 아메바처럼 미끄러진다. 그곳은 용의자가 연인의 시체를 묻은 곳, 희생양이 꼼짝 못 하고 강간당했다고 말하는 곳, 그리고 용의자가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다고 증언하는 그런 곳이다. 또한 용의자가 언젠가는 사건의 진상을 드러낼 단서들을 가져온 곳이자, 자연이 다른 어느 것도 전할 수 없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곳이다. 

 

내가 하는 일은 답을 주는 것이다. 
또는 해답으로 이끌 정보를.

 

 

 

- 가문비나무로 가득한 숲 한가운데 또는 근처에서 가문비나무 꽃가루를 그렇게 적게 발견했다는 점은 수수께끼지만, 초보적인 수준에서 해답은 분명하다. 수목 관리원들은 나무의 생식기관이 막 성숙할 무렵인 40살 정도의 나무를 베길 선호한다. 한창때 잘려 나가는 나무들은 그 풍경 속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꽃가루를 거의 남기지 않는다. 만약 표본에서 가문비나무 꽃가루를 발견한다면 해당 지역 어딘가에 성숙한 나무들이 존재했다는 말이다. 

 

- 다이슨의 신발에서는 이미 다량의 자작나무 꽃가루가 검출되었고, 이 신발에서 조수석 매트로 꽃가루가 옮겨졌다. 하지만 정원용 갈퀴에서 얻은 샘플을 살핀 나는 충격을 받았다. 자루는 손잡이 부분까지 자작나무 꽃가루가 잔뜩 묻어 있었지만, 정작 갈퀴의 살 부분에서는 전형적인 정원 식물 꽃가루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거의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 어떤 장소에 대한 이미지가 순식간에 떠올랐다. 이 과정이 여러분의 생각만큼 마법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몇 년 동안 기초 학문을 열심히 공부하고, 두 발로 현장을 누비고,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 세계에 관한 지식을 끊임없이 축적한, 오랜 세월에 바탕을 둔 직관에 가깝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뇌라는 놀라운 슈퍼컴퓨터 안에서 저장되고 처리된다.

 

- 나는 분명히 보았다. 어떻게 다이슨이 건조한 모래가 깔린 산림위원회의 길을 따라 조앤의 복스홀 스테이션왜건을 몰았는지, 어떻게 그가 상업용 침엽수들이 삭막하게 솟아오른 곳을 지나 나무가 그다지 울창하지 않은 적당한 장소를 찾았으며 마침내 자작나무가 서 있는 곳에 도달했는지 말이다. 완벽한 장소로 보였을 테다. 하지만 땅을 파는 작업은 고된 일이었고, 정원용 갈퀴로는 불가능했다.

 

- 어떤 사건에서는 이 지질학자가 나와 동일한 장소를 지목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80킬로미터가 넘는 횡단 선을 따라 1,000개 이상의 표본을 분석하며 막대한 비용을 지출했고, 나는 달랑 삽과 현장 관찰을 통해 얻은 표본 네 개로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식물 생태를 알고 있다면, 그 식물이 어떤 종류의 토양에서 자랄지 예측할 수 있고 그에 따른 지질학적 특성도 자연히 알 수 있을 터였다. 

 

- 세상에는 미신이 너무 많다. 하지만 나는 마법을 부리지 않는다. 이것은 과학이다. 20년 전이었다면 조앤의 사체는 백골이 흩어진 채 일꾼이나 혼자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이 우연히 찾아내기 전까지는 결코 발견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개척한 과학을 활용해, 우리는 자연이 살인범에게 남긴 미세한 흔적으로 그가 방문한 장소를 알아낸다. 살인자이든 아니든 우리는 흔적을 남기며, 지리적 풍경과 꽃가루를 비롯한 화분 화석, 균류, 토양에 관한 지식을 갖추면 흔적을 따라갈 수 있다.   

 

- 나중에 나와 결혼한 당시 남자 친구는 내가 대소변과 혈액을 분석하고 쥐를 다루는 일보다는 더 '여자다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자다운'이란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사무직과 비서직을 위한 강의를 소개하는 광고를 보고 내게 필요한 것이라고 여긴 나는 강의를 신청했고 돈을 받는 상근직 일자리를 얻었다. 강의는 꽤 버거웠다. 새로 하는 일인 데다가 대학은 법학, 경제학, 심리학, 영문학 같은 핵심 과목을 담당하는 전문가들을 시간제로 고용하고 있었다. 게다가 타이핑과 피트먼식 속기법(지금까지 내가 접한 것들 가운데 가장 논리적이면서도 유연하고 멋진 체계)을 능숙하게 익혀야 한다는 압박감이 컸다. 우리는 사무실을 효율성 높게 운영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배워야 했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 살면서 했던 모든 공부 가운데서도 이 과정은 정말로 훌륭했다. 나는 이 도전을 즐겼고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했다.  

 

- 킹스칼리지에서 보낸 나날을 되돌아보면, 내 일정에 맞춰 수많은 학문적인 주제를 탐구할 수 있던 마법 같은 시간이었다. 나는 식물학을 전공했지만, 생태학, 지질학, 미생물학, 동물학, 기생충학, 생물지리학을 비롯해 자연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모든 분야를 배우는 기회를 누렸다. 대부분 전자기기에 의존하는 오늘날의 학생들이 결코 접하지 못할 책과 글에 파묻혀 놀라워하며 도서관에서 몇 시간을 보내는 일은 무척 즐거웠다. 소규모 강의에 참석하고 필기를 하며 과제를 하고 도서관을 둘러보고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다양한 여러 서식지를 견학했던, 그야말로 전통적인 교육이었다. 나는 도마뱀 생태계에서 잔디의 구조에 이르기까지 자연 세계의 수많은 면면이 품은 비밀을 배웠다. 그 지식이 나를 만들었고, 나는 그게 좋았다.  

 

- 결국 나는 킹스칼리지에서 미생물 생태학을 가르치는 강사가 되었다. 처음에는 이 '역할 바꾸기’를 완벽하게 즐겼다. 학생들이 자연 세계에 관한 지식을 통해 스스로 풍요로워지도록 돕는 일은 보람이 있었다. 나는 내가 학생들에게 아주 특별하며 사라져서는 안 될 지식을 전달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과중한 강의 부담을 비롯해 강의안을 작성하고 그 내용을 학생들에게 전달하며 에세이와 시험지를 채점하고 회의에 참여하는 일상은 결국 나를 우울하게 했다. 나는 운 좋게 일할 수 있었던 행복한 직장에 18년 동안 몸담은 끝에 런던 대학교 고고학 연구소에 지원했다. 강의보다는 연구에 시간을 쏟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 킹스칼리지 식물학과는 소규모였고 직원들은 쾌활했으며 구성원들은 아주 즐겁게 지냈다. 수시로 파티가 열린다는 쪽지가 붙었고 그러면 1학년 학부생부터 교수진까지 누구든 참가했다. 하지만 런던 대학교는 정반대였다.

 

- 어느 한쪽의 관점을 간과해 중요한 무언가를 빠뜨리는 일이 없도록 한다. 나는 고대의 환경을 재구성하는 작업에 매료되었으며, 다른 종류의 증거들을 다루는 동료들과 함께 일한다는 점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과거의 풍경을 묘사하는 우리의 작업 결과는 최종 보고서 속에 합쳐진다. 스스로 하는 일이 꽤 마음에 들었기에, 그날 전화벨이 울렸을 때 그것이 내 삶의 새로운 장을 열어주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 글래스고 억양이 진한, 수화기 저편 목소리의 주인공은 하트퍼드셔 경찰대의 한 형사였다. 
"팻 윌트셔 씨인가요?" 그가 물었다. "큐 왕립 식물원에서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더군요. 그곳 담당자는 우리를 도와주지 못했죠." 마치 뭔가가 가라앉는 듯한 침묵이 잠깐 이어졌다. "하지만 당신이라면 할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 화분학(Palynology)은 어원 그대로라면 '먼지에 관한 연구'라는 뜻이다. 우리 생활에 더 유용한 방식으로 얘기하자면 이 분야는 공기, 물, 퇴적물, 토양, 식생에서 수집할 수 있는 꽃가루, 포자를 비롯하여 현미경으로 관찰할 수 있는 크기의 화분 화석과 미립자에 관한 연구다. 화분학자가 되는 것이 나의 장기적인 계획은 아니었다. 하지만 살다 보니 물 흐르듯 자연스레 이 길을 걷게 되었고 나는 꽤 만족했다. 학생들을 책임지고 가르쳐야 할 때보다는 훨씬 자유로웠다. 

 

- 이따금 나는 이때의 통화가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고 추억한다. 중요한 점은 '살인'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할 때부터 내가 무척 호기심을 느꼈다는 사실이었다. 매일같이 실험실 생활을 하다 보면 외부에서 온 방문자가 무척 반갑다. 나는 킹스칼리지에서 생물이 죽은 뒤 사체가 부패하고 분해되는 과정을 가르친 바 있지만, 가족을 제외한 다른 사람의 사체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죽은 새든, 나무든 죽은 생물의 부패 과정을 이해하려면 미생물, 세균, 균류가 하는 일을 알아야 했다. 인간의 죽은 몸은 크게 다를까? 학문적인 의미에서는 별다를 바 없을지 모르지만, 다른 모든 면에서 그것은 미지의 세계였고 나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 내가 귀를 기울이자 형사는 내가 알아야 할 모든 배경을 간단히 설명했다. 하트퍼드셔주 시골의 한 배수로 도랑에서 시체가 하나 발견되었는데, 경찰은 우발적인 살인이라 보고 있었다.
"우리는 중국 삼합회가 저지른 범죄를 뒤쫓고 있죠."
셜록 홈스가 등장하는 텔레비전에서나 듣던 말이었다. 실제로 존재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살인 사건 피해자는 삼합회가 심각한 결과를 불러일으키는 악랄한 집단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삼합회는 처음부터 희생자를 죽일 의도는 아니었으며 결혼식 날 그를 납치했지만 납치 장소는 아내의 침대가 아니라 성매매 여성의 침대였다. 그 특정한 약간의 정보를 듣고 나는 무척 놀랐다. 이런 사건을 처음 접했기 때문이었다.

 

- 형사의 상관은 지금껏 내가 만났던 사람 가운데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은 폴 도클리로, 젊고 총명한 경찰 차장이었다. 나는 그전까지만 해도 아는 경찰이 없었지만 벌써 빌과 폴이라는 멋진 친구를 만나게 되었고 두 사람은 지금까지도 나와 가까이 지낸다. 이 둘은 언제나 내 분야인 법의생태학에 굳은 믿음과 지원을 보내준다. 

 

- "범인들이 도랑에 사체를 놓아두려면 차를 몰고 밭에 들어가야 했죠. 농부들의 말에 따르면 그곳에는 보통 옥수수를 심는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들은 내 상관은 범인들이 밭을 가로질러 나아갔다면 옥수수 꽃가루가 차에 남았으리라 생각했어요. 이제 당신이 필요한 지점이죠. 우리는 이 가정을 확실하게 증명해 줄 사람이 필요해요. 그 차가 밭에 들어갔는지, 아닌지 말이죠."

- 빌에 따르면 이것은 새로운 발상이었다. 그동안 경찰이 이런 식으로 일한 적은 없었다. 처음에는 막연하기만 했다. 대중잡지의 별난 기사에서 접할 수는 있어도 내가 이런 사건에 직접 뛰어들다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빌의 상관이 왜 하필 옥수수 꽃가루에 주목했을까? 빌도 그 이유를 확실히 몰랐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이것이 성공할 확률이 아주 낮을 거라는 사실을 자동차를 직접 살피기 전 이미 알고 있었다. 벽에 걸린 달력에 따르면 지금은 5월인데, 그 말인즉 영국 남부에서 옥수수 꽃이 피는 시기에서 적어도 6주 이상 벗어났다는 의미였다. 그뿐만 아니라 농부들은 이즈음 경작 가능한 밭을 갈아 비료를 뿌려 양분이 풍부하고 공기가 잘 통하는 토양을 만드는데, 이런 조건은 미생물의 활동을 촉진한다. 특히 영국 남부에 있는 농장들은 균류, 세균을 비롯한 여러 미생물들의 천국과도 같아서 유기물이 쉽게 분해되는 편이다. 나는 이 지역에서 평범한 방식으로 관리되는 밭이라면 꽃가루와 포자가 보존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 "누가 알겠어요?" 나는 말을 이었다. "어쩌면 깊숙한 구석에 아직 뭔가가 남아 있는 아주 작은 구역이 있을지도 모르죠."
"그 말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당신이 뭔가 할 수 있다는 건가요?"
"음, 시도는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미리 해야겠네요."

나는 경작지의 토양에 잠재하는 문제점을 설명했다.

 

- 나는 곰곰히 생각했다. 이 일을 왜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다. 하 지만 반대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넌 지금 왜라는 질문만 던지고 있어. 그보다는 안 될 게 뭐 있어,라고 믿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전에도 해 본 일이잖아. 실험실과 병원에서 일했고, 건축계에서는 이름을 날리는 비서가 되었으며, 다시 미생물학자로, 화분학자로 변신했잖아. 이것도 과학 아니야? 지금까지 한 번도 인생을 미리 계획한 적이 없는데, 이 기회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는 또 뭐람? 

 

- 이 일은 마치 흥미로운 연습 과제처럼 느껴졌고 실제로도 그랬다. 이 일이 내 인생 후반의 방향을 좌우하리라고는 그때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 나를 그곳으로 안내한 차고 직원은 차량을 환하게 밝히려고 머리 위로 전등을 비추면서도 특별한 감정 없이 덤덤해 보였다. "그 사람들이 당신을 왜 여기까지 데려왔는지 잘 모르겠네요." 차고 직원은 비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반응 때문에 이 일을 하던 초반에는 사람들이 보내는 경멸 섞인 비꼬기에도 익숙해졌다.

"차량에 전체적으로 꽃가루가 덮였을 거예요. 지나가면서 위아래 여기저기로 흔들렸겠죠. 차량 상태를 좀 볼게요."

 

- 현장 토양에서 유기체 잔해가 완전히 부패했으리라 여겼던 내 예측은 정확했다. 지면에 닿는 타이어 트레드에 남은 흙 흔적, 타이어 휠에 검고 미끌거리는 퇴적물이 쌓인 자국, 바닥 매트에 찍힌 희미한 발자국들을 보니 내가 여기서 과연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지 회의가 들었다. 하지만 내가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리라 여기며 눈을 가늘게 뜨고 옆에 서 있는 차고직원을 보니 갑자기 자극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진저리가 났다. 결국 나는 가장 좋은 결과를 낼 듯한 차량 부품들만 고른 다음 이것들을 내 실험실로 보내라고 경찰관들에게 전했다. 

 

- 나는 그동안 많은 것을 빠르게 배웠다. 예컨대 다양한 종류의 차량 섀시 가운데서도 의미 있는 증거를 수집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구석과 틈새가 어디인지 이제는 안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무것도 몰랐다. 모터 달린 탈것 깊숙이 자리한, 다양한 기름 묻은 금속성 관과 버팀대를 얼굴 5센티미터 앞에 두고 직접 본 것도 처음이었다. 나는 곧 내가 최선을 다해야 하며 시행착오를 거쳐 이런 환경에서 표본을 수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적에 묻은 흙먼지를 닦아내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아보는 데에 익숙했으니, 이 일도 내가 하던 일과 비슷하지 않을까? 나는 내 상식대로 했다. 가장 쉽게 얻을 수 있는 물건부터 시작해 발밑 매트, 페달, 범퍼, 공기 필터, 라디에이터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자동차 바퀴는 조사하지 않았는데, 바퀴에는 여러 곳에서 온 물질이 묻어 있기 때문이었다. 반면 차 내부에는 사람의 발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운반한 물체에서 옮겨진 물질이 남아있을 것이다. 단순한 논리가 나를 인도해 주었다. 혹시 내가 틀렸다 해도 차의 나머지 부품은 여전히 차고에 있을 테고 거기서 다시 표본을 얻으면 될 일이었다.  

 

- 이번 사례에서는 확실히 아니었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표지가 존재하는 풍요롭고 다채로운 장소를 만났더라도, 만약 내가 이전에 고대의 경작지 도랑들을 분석해 본 경험이 없었다면 둘 사이가 얼마나 유사한지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 나는 평소에 산울타리를 많이 살펴봤다. 고고학 분야에서 나는 산울타리에서 나온 꽃가루를 발견하고 그 결과를 해석해 다른 고고학자들에게 그 땅이 과거에 경작지였음을 알려준다. 이런 방식으로 그곳의 풍경이 한때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 이미지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 이 현장에 서 있자니 또 다른 생각이 불쑥 튀어나왔다. 이 산울타리가 다른 산울타리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영국에는 수천 년 된 산울타리들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켈트족이 활동하던 철기시대와 로마인이 떠나고 난 뒤의 암흑시대, 옛 여왕과 왕 들의 시대를 거쳐 수천 년 전으로 그 역사가 거슬러 올라간다. 산울타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조성되었지만, 고대의 몇몇 울타리는 청동기시대의 조상들이 어느 땅이 자신의 농경지라고 주장하면서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남은 숲의 잔재들이다. 이들은 오늘날 도랑이나 둑과 함께 존재하는 경우가 많고, 토지 구역 사이에서 장벽을 이루며 소유권이나 땅의 경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먼 옛날에는 부족 영토의 경계를 나타내는 표시였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산울타리에 관해 제대로 모르지만 여기저기에 그 흔적이 여전히 뚜렷하게 남아 있다. 

 

- 반면에 가시자두와 검은가지속 식물, 광대수염의 꽃가루는 왜 그렇게 많았을까? 문 옆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산울타리는 하나가 아니라 작은 것들 여럿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각각은 이웃한 것과 뚜렷이 구분되지만 그럼에도 서로 합쳐져 있었다. 지금은 당연한 듯 아주 분명해 보여도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시나리오에서 꽃가루가 떨어지는 패턴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바로 여기일 거예요."
형사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경찰국장의 얼굴에 활짝 웃음꽃이 피었다.

"어떻게 알았죠, 팻?"
"이미 전부 봤거든요. 머릿속에서 말이죠."

- 나는 가시자두와 들단풍나무의 수관이 서로 얽혀 있고, 산사나무와 꽃이 핀 담쟁이덩굴이 서서히 위쪽 가지를 덮는 모습을 머릿속에 이미 그려놓았다. 잔디, 흰광대수염, 검은가지속 식물, 석잠풀, 소리쟁이, 명아주 그리고 약간의 쐐기풀이 밭의 맨땅과 도랑 사이 둑에 울창하게 자랐다. 이 식물들 모두는 약초를 비롯한 풀이 풍부하게 자라는 둑에 꽃가루를 흘렸고, 그 위를 밟고 지나간 범인들은 꽃가루를 차량 안에 옮겼다. 산울타리와 둑은 이들이 사체를 불태우고 도망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사건 당시 상황을 알려주고 있었다. 

 

- 나는 여름 햇볕이 내리쬐고 수풀에 야생 자두가 부풀어 오른 그곳에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정확히 여기가 그 현장이라는 사실을 나는 어떻게 알았을까? 다른 곳들은 아무 곳도 후보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 지금 생각하면 무척 바보 같지만, 당시 지면에 있던 꽃가루가 범인들이 차를 세웠던 곳과 아주 가까운 데서 자라는 식물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에 나는 무척 놀랐다. 중요한 예외가 있다면 곡물의 꽃가루였다. 넓은 도로를 가로지르는 반대편 밭에서 나온 꽃가루는 해당 곡물로부터 적어도 400미터는 이동했을 것이다. 나에게는 그 자체로 하나의 계시와도 같았다. 그리고 정작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자라는 몇몇 식물에서 받은 영향은 미미했다. 지금 나는 적어도 몇몇 사항에 대해서는 화분학 교과서와 논문에서 얻은 지식을 상당 부분 수정해야 할지 모른다고 거의 확신한다.  

 

- 즉 재킷 뒷면에서 채취한 표본은, 앞면에서 관찰된 꽃가루 프로파일이 화단에서 비롯했다는 가설이 사실인지 시험하는 데 좋은 대조군이 된다. 만약 재킷 앞면의 프로파일이 화단과 비슷하고 뒷면과는 최소한으로만 유사하다면, 이것은 용의자가 화단에 접촉했다는 좋은 증거일 것이다. 나는 결과를 섣불리 예측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단지 결과를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연구실로 돌아가 재킷의 각 부분이 서로 닿지 않도록 한 상태에서 소매를 자르고, 이어 뒷면을 잘라냈다. 그러자 하나의 표본에 합칠 수 있는 재킷 앞면 두 조각이 남았다. 내가 법의학 탐사의 세계에 한 발만 어설프게 걸쳤던 초기에는 법의학 분야의 프로토콜과 내부 규정에 관해 거의 알지 못했다. 그 규정과 규칙은 누구도 증거를 조작하지 못하게 하고, 증거가 오염되거나 경찰이 처리하는 도중에서 불충분한 증거가 되지 않도록 하고자 고안되었다. 나는 법의학 실험실에 들어가 보지는 않았어도 실험실에서 지켜야 할 절차에 관해서는 당연히 제대로 교육받았다. 또 미생물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부패나 오염을 막는 기술과 기본 원리를 확실하게 이해했다. 나에게는 단지 상식이었고 따로 누가 가르쳐줄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 하지만 잔인한 진실이 하나 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일부 경찰관들은 유감스럽게도 몇몇 종류의 증거를 다룰 때 준비가 덜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경찰들은 DNA 표본을 채취하는 방법과 교차 오염(세균이나 오염 물질이 부주의하게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전달되는 것 옮긴이)을 방지하는 법을 배운다. 이들은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라는 로카르의 말을 잊지 않고, 두 증거물이 서로 접촉하면 법정에서 완전히 쓸모없는 물건이 될지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수업을 받았음에도 경찰들은 여전히 환경 시료 채취에 따르는 제약과 요구 조건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 많은 사람들은 '법의학'에 대해 잘못된 개념을 갖고 있으며 때로 이 분야의 용어는 매우 엉성하고 부정확하게 사용된다. '법의학'이 단지 '아주 주의 깊게 무언가를 수행하다'라는 뜻이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 단어의 진정한 의미는 사실 훨씬 더 구체적이다. 고대 로마시대에는 재판이 광장(forum)에서 열렸으며, 오늘날 '법의학적(forensic)'이라는 단어 역시 공개된 법원이나 대중을 뜻하는 라틴어 'forensis'에서 유래했다. 즉 우리가 '법의학'에 관해 말할 때 실제로 의미하는 바는 이 분야에서 생산된 증거가 재판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재판을 염두에 두고 수행된 작업이 아니라면 그것은 전혀 법의학적 작업이 아닌 셈이다. 그리고 이런 점 때문에 나는 소년의 재킷을 주의 깊게 다뤄야만 했다. 내가 발견한 결과는 오염되거나 변질되지 않아야 했고, 오랜 세월에 걸쳐 실험실에서 훈련과 경험을 쌓은 내게는 이 개념이 깊이 뿌리 박혀 있었다. 

 

- 꽃가루나 포자는 섬유나 광물 입자와는 달리 직물에 깊이 박혀 쉽게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후속 작업을 통해 꽃가루나 포자가 여러 해에 걸쳐 온갖 종류의 직물에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것은 범죄가 발생하고 나서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분석이 이루어질지도 모르는 이른바 '미해결 사건' 조사에서 화분이 훌륭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배경이기도 하다. 

 

- 관련 문헌을 뒤지고 나서야 비로소 꽃가루가 춤을 추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모두 전기 현상이었다. 꽃가루는 음전하를 띠며, 그에 따라 모든 양전하에 끌린다. 반면에 벌은 양전하를 띠며(놀라운 사실이다), 그에 따라 가장 강한 음전하를 지닌 꽃에 끌린다. 예전에 나는 줄곧 꽃가루가 벌에 달라붙는 이유는 벌의 몸에 털이 많고 꽃가루가 끈적이기 때문이라고만 추측했다. 물론 이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겠지만 꽃가루가 꽃에서 수분 매개자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정전기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은 이제 분명하다. 음전하를 띤 꽃가루는 전기적 끌림을 통해 양전하를 띤 벌의 몸으로 펄쩍 튀어 오른다. 

 

- 또한 겉보기에 깨끗한 증거물이라 해도 맨눈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 꽃가루가 잔뜩 묻어 있을 수 있다. 나는 이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는 만큼 범죄 사건에서 어떤 물건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다. 한 번은 살인범이 피해자의 시신을 묻을 때 사용한 손전등에서 포자를 발견했다. 손전등에서 나온 꽃가루와 포자는 단 몇 개에 불과했지만, 살인범이 시신을 내려놓은 장소가 한동안 경작하지 않고 놀리고 있는 휴한지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고 영리한 수사관은 이 증거를 토대로 결국 범인을 체포했다. 화분학의 위력은 이처럼 강력하다. 

 

- 사실 내가 한 일은 너무나 단순했다. 흙과 먼지, 약간의 샴푸, 창의적인 아이디어 몇 가지와 건전한 배경지식이 있어야 했고, 물론 여러 해에 걸친 연구와 어렵게 얻은 지식과 경험이 필요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여기에 미래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 하지만 내가 식물학이 법의학에서 유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최초의 인물은 아니다. 1932년 리처드 하트만(Richard Hauptmann)이 유명한 비행사 찰스 린드버그(Charles Lindbergh)의 아들을 납치해 살해했을 때, 가정집에서 만든 사다리에 사용된 목재를 확인함으로써 하웁트만의 유죄 판결을 확보했다. 하웁트만의 재판은 언론이 흥미를 위해 경쟁적으로 보도했던 최초의 사례이자 '세기의 재판'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하트만의 유죄를 판결한 근거는 위스콘신주 출신 목재 해부학자 아서 쾰러(Arthur Koehler)의 목재 분석에 따른 것이었다. 쾰러는 나무가 분류학상 포함되는 속과 목재를 잘라낸 패턴, 나무의 성장 방향을 파악해 납치범이 아기방에 몰래 들어오는 데 사용한 사다리의 목재가 하웁트만의 집 다락방에서 가져온 것임을 증명했다. 결국 하트만은 1936년 4월 전기의자에 묶여 사형당했다. 이 모든 과정이 하나의 나무토막에 남은 증거를 토대로 이뤄졌다.  

 

- 살인이나 실종 사건을 해결하려는 수사 과정에서 꽃가루 알갱이의 쓸모를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 역시 내가 아니었다. 경찰 수사에서 화분학을 활용한 첫 번째 기록은 195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스트리아 다뉴브강을 따라 하류로 배를 몰던 한 남자가 실종된 사건이었다. 하지만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경찰은 거의 수사를 실시하지 않았다. 결국 조사의 키는 빈 대학교의 저명한 화분학자인 빌헬름 클라우스(Wilhelm Klaus)에게 돌아갔다. 클라우스는 실종된 남자의 친한 친구가 신던 장화를 건네받아 현미경으로 분석했다. 친구의 장화에서는 잘 보존된 데다가 만들어진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가문비나무, 버드나무, 오리나무의 꽃가루가 발견되었으며 화석화된 히코리의 꽃가루도 눈에 띄었다. 이러한 퇴적물은 특정한 장소에 분포했는데 빈에서 북쪽으로 20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구역이었다. 클라우스는 경찰에게 어디를 수색해야 하는지 말했고, 이 증거에 큰 충격을 받은 용의자는 결국 자백하며 수사관들을 사체가 있는 장소로 인도했다. 클라우스는 이 지역의 식물학과 지질학 관련 지식을 활용해 현장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상상했던 것이다. 

 

- 이들은 나보다 앞서 법의학적 생태학이라는 분야에 진출하려 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하트퍼드셔 사건 이전에는 범죄 수사에 식물학의 잠재력을 거의 활용하지 않았으며,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은 이 분야에서 그동안 어떤 성취가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 도전 과제는 여러 해에 걸쳐 법의생태학의 근본적인 원칙을 확립하며 내가 할 수 있는 한 포괄적으로 이 지식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 내가 이런 모호한 단계를 처음으로 거칠 무렵에도 화분학은 이미 잘 확립된 분야였다. 하지만 학문적인 지식을 경찰 업무의 세계로 옮기는 것은 일련의 특별한 도전 과제였다. 사실 이 도전은 오늘날까지 멈추지 않았고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여러 환경이 지닌 변수들의 범위가 너무 넓다는 점은, 새로운 살인 사건이나 실종 사건, 잔인한 폭행이나 강간 사건이 각각 독특한 일련의 상황에 놓여 있다는 사실로 이어진다. 이 분야는 점진적으로 발전해 왔다. 자연 세계는 서로 다른 상호작용 체계의 복잡한 집합이며, 법의생태학자는 최선의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서 좋은 생태학적 훈련을 받아야 하고 물리적 환경과 생물학적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이들은 대개 식물학, 화분학, 토양 과학 등 한두 분야에서 상당히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으며 곤충학, 세균학, 미생물학, 기생충학, 동물학, 화학, 통계학에 어느 정도의 조예가 있다.  

 

- 나는 지난 25년 동안 시행착오를 거치며 오늘날 이 분야에서 정립된 프로토콜을 개발해 왔다. 그러는 동안 알게 된 단순한 진실은 모든 상황은 전부 다르며,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고정된 규칙이나 약속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나는 범죄 현장이나 영안실에 머물며 다양한 물건과 직물에서 화분 화석을 추출하는 방법을 고안하는 과정에서 종종 직감에 의존한다. 결국 나는 그동안 갈고닦은 순전한 경험을 통해 법의화분학의 프로토콜을 만들어 발표했다. 여기에는 어떤 공상적인 것도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나의 연구 결과는 현실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고전적인 화분학 연구를 통해 알려진 지혜를 희생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증명해 왔다.

 

- 언뜻 듣기에는 단순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작은 단서들을 결합해 상상 속의 풍경과 연결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다. 실제로는 우리가 누군가의 옷에서 건져내는 잔해는 서로 다른 미세한 알갱이로 이뤄진 혼돈일 뿐이며, 그중 상당수는 마음속 풍경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식별도 불가능하고 따라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 예컨대 차이가 극히 미미한 화분 화석 집합체들을 서로 구분해야 하고 화분 화석의 집합체가 우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유인하는 방식도 알아야 한다. 또한 꽃가루와 포자가 원래식물과 균류에서 퍼져나가는 방식이나 식물에 꽃이 피는 시기, 식물이 가장 잘 번식하는 토양이나 조건, 그리고 동일한 조건에서 서로 이득을 얻으면서 자라는 다른 식물이나 균류에 관해서도 반드시 알아야 한다. 

 

-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는 식물은 비슷한 서식지에서 발견된다. 그런 식물들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군락을 형성하므로 여기서부터 많은 것을 추정할 수 있다. 만약 나에게 큰잎부들, 갈대, 사초, 쉽싸리, 보라색 부처꽃으로 이루어진 화분 화석의 집합체를 준다면, 나는 그것이 연못이나 호수 가장자리, 도랑에서 왔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심지어 큰잎부들이라는 좋은 자신이 자라는 곳에서 물이 얼마나 빨리 흐르는지도 알려준다. 참나무, 개암나무, 물푸레나무, 블루벨, 숲바람꽃의 집합은 영국서만 볼 수 있는 특징적인 풍경인 멋진 블루벨 숲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요점은 식물은 아무 데서나 자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나나 나무가 노르웨이의 야생에서 자라지 않는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비슷하게 북극에서 선인장을 찾거나 정글에서 북극곰을 찾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런 동식물이 서식하려면 특정한 조건이 필요하므로, 아무 곳에서나 자연적으로 잘 자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법정에서 마주한 변호사들은 이런 실수를 꽤 흔하게 저지른다. 변호사들은 식물학이나 생태학에 거의 무지하기 때문이다. 나는 종종 "민들레는 어디서나 발견되지 않나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물론 그렇지 않다. 민들레의 꽃가루는 우리에게 꽤나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 어떤 종의 특징을 알면, 토양 표본에서 채취한 꽃가루 집합체를 서식지와 생태계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그 꽃가루와 포자가 가리키는 장소를 상상할 수 있으며, 집합체 안에 많은 종이 포함될수록 장소의 이미지는 더욱 선명해진다. 결코 간단한 과정이 아니다. 정리되지 않은 미가공 데이터에서 절대적인 답을 얻기까지, 정확히 밟아야 할 절차란 존재하지 않는다. 법의생태학자는 여러 가지를 알아야 하지만, 훌륭한 학자가 되려면 직관에 따르되 그것이 사실과 정보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 나는 운 좋게도 이 사건을 해결하느라 고생하는 동안 킹스칼리지에서 나를 가르쳐준 식물학 선생님이었던 저명한 학자 프랜시스 로즈(Francis Rose)의 추도식에서 이 사랑스러운 남자를 우연히 만났다. 추도식은 큐 왕립 식물원에 속한 국가시설인 웨이크허스트 플레이스에서 열렸다. 추모에 따르는 의례적인 나무 심기가 끝나자 나는 격식을 제대로 갖춰 입은 이 남자와 함께 빛이 어른거리는 숲을 지나 차와 케이크가 마련된 곳으로 걸어갔다. 그러던 중 나는 머리 부분이 붉은색인 냄새무당버섯(Russula emetica)으로 보이는 버섯을 나무 사이에서 발견했다. 
"아, 버섯이 있군요." 옆에서 걷던 남자가 말했다. "루라이기는 해도 냄새무당버섯은 아닌 듯하네요."
"오, 균류를 좀 아시나요?" 내가 물었다. 
"네, 조금요." 그가 겸손한 투로 대답했다.
그 대답은 즉각 내 관심을 끌었다. 동정하기 까다로운 균류 포자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이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당신 이름이 뭔가요?"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
"데이비드 호크스워스라고 합니다."

- 대답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 유명한 데이비드 호크스워스라고요?"

 

- 나는 충격을 받았다. 호크스워스는 아흔 살은 되었으리라 줄곧 상상했기 때문이었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이 균류학자의 논문은 여러 해에 걸쳐 학술지에 실렸고, 킹스칼리지에서 내가 학생들을 위해 작성한 참고문헌 목록에도 올라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저술한 책 가운데 적어도 두 권이 내 책꽂이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무척 재미있는 이 남자는 내 또래였고 반짝이는 눈빛에 소년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돌아와 친구 주디에게 이 우연한 만남을 말해주자 주디는 흥분했다.

"세상에, 팻." 주디가 말했다. "그 사람과 친해져야 해. 우리에게 쓸모가 많을 거야."

그다음은 당신이 예상하는 대로다. 3년 뒤에 나는 이 영리하고 박식한 남자와 결혼했다. 

 

- 오소리 굴에서 나온 이상한 포자가, 참나무 뿌리에서 자라는 상당히 희귀한 송로버섯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도 데이비드를 통해서였다. 나는 이번 사건으로 오소리들 역시 개나 돼지처럼 송로버섯을 좋아함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오소리는 약 100미터 떨어진 참나무 뿌리에서 송로버섯을 찾아내 자기 굴로 가져왔...

 

- 그에 따라 뚜렷하게 구별되는 두 가지 농촌 유형이 생겨났다. 하나는 에식스, 서식스, 서퍽주와 같이 숲과 초원이 공존하는 전원 풍경이다. 영국의 고전적이고 아름다우며 경작이 가능한 목가적인 시골로, 여러 종으로 구성된 산울타리와 흔한 몇몇 나무들이 작은 받을 둘러싼다. 또 다른 유형은 석회질 평야로, 역사적으로는 단순히 넓고 탁 트인 들판 풍경을 말한다. 여기서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을 분할하는 모습이 보이며 링컨셔, 레스터셔 윌트셔주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 회의실에서 내 질문에 대담하게 대답했던 사람들은 다들 잘못 알고 있었다. 이들은 정답이 삼림지대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 표본은 전원 풍경에서 온 것이었고, 단지 들판을 둘러싼 산울타리로부터 '삼림의' 꽃가루와 포자가 왔을 뿐이었다. 이곳의 식물들은 풀을 뜯는 동물로부터 살아남았거나, 산울타리 경계선이라는 안식처에서 자라난 생존자들이다. 이것은 내가 경찰과 함께 일했던 첫 번째 사건에서 배운 교훈이었는데, 배경에 깔린 가정은 계속해서 복잡해졌다. 어쨌든 회의실에 있던 화분학자들은 자기들의 해석이 완전히 빗나가자 무척 당황했다. 환경을 해석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인지적 편견이 존재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 회의실에 앉아 있던 화분학자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범죄 피해자나 피의자에게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는 잘못된 결론을 섣불리 내렸다. 법의학처럼 사람들의 삶과 자유를 좌우하는 분야에서는 그릇된 판단에 따르는 위험이 무척 크다. 옷이나 신발에 파묻힌 화분 화석을 통해 현장의 이미지를 재창조하는 일은 단지 특정 종의 꽃가루와 포자, 다른 미세 입자의 수를 빠짐없이 세는 일처럼 간단하지 않다. 기존의 화분학 문헌을 읽는 것만으로 입자들의 특정한 집합체가 특정 풍경을 나타낸다고 가정할 수는 없다. 다른 학자들이 이미 발표한 해석을 활용해 매번 로봇처럼 기계적으로 해석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런 경우 꽃가루와 포자를 통한 해석은 단순한 숫자 세기를 통해 '형식을 맞춰 그린' 작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거시적이면서 동시에 미시적인 척도로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 세계를 알아야만 비로소 우리는 자신 있게 진실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 이러한 종류의 지식에는 지름길이 없다. 이것은 여러 해 동안 어렵게 얻은 성과다. 이 작업은 주의 지속 시간이 길지 않거나 쉽게 산만해지는 사람들에게는 적당하지 않다. 앞서 나는 옷이나 도구에서 화분 화석을 전부 추출한 다음 수를 세고 분류하는 힘든 작업이 몇 시간은 물론이고 며칠, 심지어 몇 주까지 이어지기도 한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이런 발견을 해내고 가장 개연성이 높은 경우의 수를 찾으며, 사건이 어떤 순서로 일어났는지를 파악하는 감각을 갖추려면 광범위한 다학제적 지식이 필요하고, 이러한 지식을 습득하려면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야말로 평생에 걸친 노력이다. 하지만 조각이 맞아떨어져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되었을 때, 퍼즐이 풀리거나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쾌감은 엄청난 것이다. 

 

- 과학 수사대 대원 하나가 웃는 얼굴로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당신이 오신다기에 풀과 관목을 전부 다 베어놓았어요, 팻!"

그가 말했다. 나는 타이벡 작업복에 몸을 넣으려 애쓰며 웃음을 터뜨렸다.
"재밌는 분이시네요."


- 하지만 그가 한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내 말을 듣자마자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면서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수사관은 전체 범죄 현장의 식물을 잘라내고 모든 것을 오염시켰으며, 내가 사체가 있는 장소에서 발견했을지도 모를 증거를 전부 없애버렸다. 식물들은 전부 베어졌을 뿐 아니라 완전히 뒤죽박죽으로 버려졌다. 범인이 도망가는 데 택했을지도 모르는 하나뿐인 경로였는데 말이다. 나중에 도착한 선임 수사관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입을 굳게 다물었다. 나처럼 눈앞에 벌어진 사태를 도저히 믿지 못하는 듯했다. 

 

- 날씨가 무척 더워 비 오듯 땀이 흘렀고, 일은 놀라우리만큼 지루했다. 하지만 법의학적 작업은 대부분 그렇다. 나는 깜박 잊고 넘어간 사항이 없는지 집중하면서 확인해야 한다. 법정에서는 간과했거나 무시되었던 것이 도드라져 드러나고, 낱낱이 해부되며, 해결해야 할 성가신 과제 취급을 받을 수 있다. 

 

- 모든 표본은 제때 실험실에 전달되었고, 의복과 대조용 표본에서 꽃가루를 추출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때 수산화나트륨, 아세트산무수물, 빙초산, 염산, 황산, 플루오린화수소산을 포함한 매우 강한 염기와 산으로 표본을 처리해야 하므로 추출 작업은 꽤 위험하다. 특히 플루오린화수소산 기체는 폐를 녹일 수도 있고 액체는 피부를 통과해 뼈를 녹일 수도 있기 때문에 끔찍할 만큼 위험하다. 유리 에칭에 사용되는 이 물질은 우리 작업에서는 흙에서 석영을 용해하는 데 쓰인다. 플루오린화수소산은 유리와 금속을 부식시킬 수 있다. 그 모습은 흡사 영화 <에일리언>에서 존 허트의 가슴에서 튀어나온 괴물이 우주선 선체를 관통하며 흘렸던 부식성 점액질을 떠오르게 한다. 플루오린화수소산을 잘못 사용했다가는 눈앞에서 공포 영화를 볼 수 있다. 이 물질을 다루려면 높은 단계의 보호복과 마스크가 필요하며, 유독 가스 배출 장치가 달린 곳에서 작업해야 한다. 근처에는 샤워 시설과 특수 연고가 구비되어야 하고, 가까운 병원 응급실 직통 전화번호를 알아야 한다.

 

- 이런 종류의 일을 하려면 꽤 강인해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나는 전통적인 식물학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트위드 스커트 차림에 확대경을 들고 튼튼한 신발을 신은 부드럽고 온화한 성정의 학자라는 선입견 말이다. 영화 <쥬라기 공원>에서도 '연애 상대'였던 사람은 고식물학자였고, 조그만 ET는 우주에서 온 식물학자로 꾀가 많고 부드러운 성품으로 묘사되었다. 물론 나는 온순하고 부드러우며 도전적이지 않고 조심스러운 사람으로 여겨지고 싶다. 하지만 조심스러운 것을 빼면 모두 나에게 해당하지 않는 것들이다. 온순하고 부드러우며 도전적이지 않은 성격이라면 친구는 많겠지만, 상대방에게 항상 잔인한 나쁜 사람처럼 취급당하는 법정에서는 제 몫을 해내기 어렵다. 

- 이 두 사람이 지목한 장소들의 프로파일이 그러할 가능성을 따져볼 필요가 있을까? 소녀의 옷에서 나온 꽃가루와 균류 포자 프로파일은 소년의 옷과 신발 전부에서 나온 것과 흡사했다. 두 사람의 옷에서 나온 결과는 공원보다는 삼림지대의 프로파일과 훨씬 더 비슷했다. 그에 따라 두 사람이 숲이 우거진 곳의 지면에 같이 누워 있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고, 잠정적인 범죄 현장은 실제 현장이 되었다. 

- 이런 발견에 자신감을 갖기 위해 꼭 완벽할 필요는 없다. 자연은 우리에게 깔끔하지 못하고 불완전한 세계를 주었으며, 그 때문에 무언가가 정확히 일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에서 밝힌 강한 상관관계를 부인할 수는 없다. 용의자의 옷과 피해자의 옷의 프로파일은 서로 무척 닮았고 이것은 우리가 숲에서 채취한 표본들, 즉 소녀가 강간당했다고 주장했던 장소에서 나온 프로파일과 아주 흡사했다.

- 다른 시대라면 이것은 이미 결과가 확정된 '남자 용의자 대 여자 피해자' 사건에 그쳤을 것이며 피해자는 법정에서 몹시 중요하게 여기는 '입증 책임'을 지는 데 거의 실패했을 테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꽃가루와 포자로 만들어낸 현장 이미지가 있었다. 그것은 두 사람이 어디에 있었는지, 이들의 옷과 몸이 문질러 접촉한 눈에 보이지 않는 미묘한 주변 환경이 어떠한 곳인지를 보여주는 이미지였다. 자연은 두 사람에게 각인을 남겼고, 이것은 법의 눈으로 볼 때 합리적 의심을 넘어 증언을 입증하고 피해자의 오명을 씻으며, 용의자를 강간범이라고 폭로하기에 충분했다. 

 

- 한 가지 언급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러한 사건을 다룰 때 무엇보다 두 사람의 생식기를 면봉으로 닦아내어 분석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분석 결과 소년에게서는 꽃가루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소녀의 질에서는 참나무 꽃가루 두 개와 잔디 꽃가루한 개가 나왔다. 소년의 손에 묻은 꽃가루가 페니스로 옮겨졌다가 다시 소녀에게 갔으리라고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물론 소년의 페니스가 땅에 닿았다가 직접 소녀의 몸에 들어갔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범행이 일어났던 장소가 바로 참나무 아래였는데 이런 방식이 아니라면 참나무와 잔디의 꽃가루가 소녀의 몸속 깊숙한 곳에 과연 어떻게 도달했겠는가? 

 

- 소년의 변호사가 이런 증거가 뜻하는 바를 이해하고 나자 소년은 재빨리 자백했다. 법정 소송에는 많은 돈이 드는 만큼 국가를 위해 비용을 아낀 셈이다. 우리가 여러 사건을 맡아 조사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실들이 밝혀진 바 용의자들이 자백함으로써 세금이 절약되었다는 점은 기쁜 일이다. 강요나 다른 불법적인 수단이 따르지 않았는지 용의자의 자백에 주의를 기울이는 과정은 중요하지만, 이 다툼은 마침내 실제 강간사건으로 기록되었고 범인은 자기가 저지른 악행에 상응하는 구류형을 받았다. 

 

- 노란색 시카모어 잎 또한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가 있었다. 사실 그 잎 한 장을 통해, 나는 집 근처 정원의 주요 특징들과 남자의 죽음을 둘러싼 가능한 상황을 머릿속에 그림으로 그릴 수 있었다. 만약 잎이 초록색일 때 나무에서 뽑혔다면 잎은 계속 초록색을 유지했을 것이다. 식물에서 일찍 잎을 떼어내면 엽록소가 쉽게 분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을에 이미 노랗게 물든 잎이 자연스럽게 나무에서 정원에 떨어져 뒷마당으로 날아갔을 수도 있다. 즉 시체를 비닐로 싼 것은 아마 봄이나 여름보다는 그해 후반일 것이라는 암시였다. 하지만 시카모어 잎은 상당히 빨리 분해되는 만큼 늦가을이나 초겨울이라면 콘크리트 위의 유기물질에 더해졌을지도 모른다. 사체의 몸에서 발견된 것은 초가을에 떨어진 잎으로, 발을 제외한 신체 부위에서는 균류가 자라지 않은 덕분에 잎은 분해되지 않고 보호되었다. 사체를 단단히 감싼 비닐 랩 때문에 산소가 부족해서 분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 한 장의 잎이 중요한 증거가 되어 우리에게 당시 벌어졌던 일을 이야기해 주는 정원의 이미지를 보존해 놓은 셈이었다. 하지만 그 밖에도 희생자의 아들과 손자가 범행에 연루되었음을 뒷받침하는 다른 많은 중거들이 있었다. 

 

- 우리는 걸프 전쟁 동안 예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시체에 엔진 오일을 끼얹은 뒤 모래에 파묻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요크셔의 전통은 분명 아니었으며, 아들과 손자를 오랫동안 취조한 경찰에 따르면 두 사람은 걸프 전쟁에서 목격한 바를 그대로 따라 했다. 이들의 아버지이자 할아버지는 지배적이고 잔인한 노인이었다. 노인은 손자가 사소한 잘못을 저지르자 벌을 주겠다는 명목으로 쿠크리 칼(네팔 구르카족 고유의 단검-옮긴이)을 불 속에 집어넣은 다음 손자의 다리를 칼날로 지졌다. 더 이상 노인을 참을 수 없었던 두 사람은 분노가 폭발해 극단적인 행동을 저지르고 말았다. 노인에게서 칼을 빼앗아 그를 찌른 것이다. 

 

- 그때 깨달음의 순간이 왔다. 사람들이 여전히 말과 수레를 사용했던 어린 시절이 기억난 것이다. 이런 테라스하우스 거리에도 한때 말과 수레가 활보했을 테고, 석탄 배달부가 지하실에 석탄을 퍼 넣는 동안 말은 휴식을 취했을 것이다. 나는 웨일스에서 보낸 어린 시절, 여러 상인들이 말을 끌고 지나가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배설물 덩어리가 거리에 드문드문 남았던 풍경을 뚜렷하게 기억한다. 말똥은 귀중한 자원이었기 때문에 부지런한 정원사들은 얼른 양동이에 주워 담으려고 급히 뛰쳐나가곤 했다. 배설물 비료는 지하실에 쌓인 건초를 생산하는데 쓰였다. 

- 바싹 마른 말똥은 아주 쉽게 부서진다. 부서지면 그 가루는 하수구라든지 이곳저곳 틈새로 날아간다. 꽃가루가 들어 있는 배설물 가루는 석탄 갱도로 흘러들었으며, 석탄 분진에는 산성인 유황성분이 섞여 있어 모든 미생물의 활동을 막아 꽃가루를 훌륭하게 보존했다. 이 꽃가루는 말의 내장이라는 극한의 화학적 환경에서 살아남았고 아마도 빅토리아 시대부터, 적어도 1940년대나 1950년대 초반부터는 확실히 갱도에 있었을 것이다. 

 

- 이러한 발견은 이후로 이상한 꽃가루 프로파일을 더 잘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나는 과거와 현재의 현장 모습을 상상하는 법을 배웠다. 예컨대 농경지에서 멀리 떨어진 삼림지대의 깊숙한 곳에서 건초 초원의 꽃가루를 발견했다면, 이것은 마른 말똥이 말과 사람이 다니는 좁은 길에서 날려 온 결과였다. 그렇다면 약 1만 년 전에 지구를 돌아다녔다고 알려진 매머드의 똥이라든가 5,000년 전 알프스를 배회했던 신석기시대 사냥꾼의 내장에서 선사시대의 꽃가루가 추출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91년에 얼음 속에서 발견된 이 사냥꾼의 유해는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화살이 어깨뼈에 박힌 채였다. 내장에서 나온 이러한 꽃가루와 포자는 무척 잘 보존된 경우가 꽤 있다. 

 

- 이렇게 꽃가루는 수천 년 동안이나 훌륭히 보존되기 때문에, 노스웨식스 강간 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자의 옷은 그렇게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었다. 법의학 지식이 있는 누군가 자기 옷을 없애거나 다른 사람의 옷과 바꾼다 해도, 흔적 증거가 전부 사라지지는 않는다. 죽었든 살았든, 우리 대부분은 화분 화석을 자기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몸에 묻힌다. 머리카락이 없는 내 남편은 예외지만 말이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 머리카락이 함께 따라다니기 때문에, 헤어스프레이나 젤을 비롯한 어떤 제품을 사용하든 정전기 때문에 꽃가루와 포자가 끈질기게 머리카락에 달라붙는다. 이 증거는 나를 완전히 다른 한 사건으로 이끌었다. 

 

- 사체를 발견한 장소에 도착하자 경찰관 몇몇과 복장을 갖춰 입은 몇몇 과학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지만 현장은 몹시 조용했다. 법의학자가 시체가 묻힌 근처를 보존하는 데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이미 깊이 땅을 파 들어간 모습을 보니 실망스러웠다. 내가 지표면의 표본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장소들이 오염되고 파괴되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가능한 시체가 파묻힌 곳 가까이에서 오염되지 않은 표본을 채취하고, 근처의 식생과 범인의 잠정적인 접근 경로를 조사하느라 바빴다. 그리고 경찰이 범인을 체포할 수 있으리라는 가정 아래, 포괄적인 종 목록을 작성해 이곳 삼림지대의 식물학적 프로파일을 범인의 소지품에서 얻은 프로파일과 비교할 수 있도록 했다. 

 

- 그래도 이 음침하고 황량한 풍경에도 한 가닥 희망이 있었다. 이 가엾은 소녀의 시체는 이불과 비닐에 단단히 싸여 있었기 때문에 근처 흙이나 식생에 노출되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사체에서 얻을 수 있는 흔적 증거는 전부 이곳 삼림지대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소녀가 '바깥세상'과 마지막으로 접촉한 장소의 것이다. 그 증거는 우리를 범인으로 직접 인도할 수 있다.  

 

- 머리카락은 털이나 깃털과 마찬가지로 놀라운 재료다. 머리카락은 손톱, 발굽, 발톱을 이루는 내성이 강한 단백질인 케라틴으로 만들어진다. 그래서 튼튼하고 내구성이 있다. 케라틴에 비견될 만큼 질긴 생물학적 성분은 게 껍데기의 주성분이자 곤충의 외골격과 균류의 세포벽을 이루는 키틴 정도다. 천연섬유는 머리카락에 비해서는 훨씬 내성이 덜하기 때문에 표면에 달라붙은 미립자를 조사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장점으로 작용한다. 나는 머리카락이 꽃가루나 포자, 심지어 미네랄 등으로 뒤덮인 표면에 접촉한다면 이들 미립자가 빠르게 그 머리카락으로 옮겨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각각의 머리카락은 여러 층으로 나뉜다. 하나는 가장 안쪽의 수질로 아주 굵은 머리카락에만 존재하며, 그다음으로 피질과 가장 바깥의 큐티클 층이 있다. 큐티클 층은 비늘이 겹쳐져 이뤄지는데 이것은 머리카락이 자란 지 오래될수록 점차 깎여나간다. 머리카락은 정전기를 일으키기 때문에 미세한 입자들을 활발하게 끌어당긴다. 이것은 머리카락이 적절한 상황에서 마치 거미줄처럼 화분 화석들을 끌어들인다는 의미다. 그러면 우리는 이 화분 화석을 복원해 분석할 수 있다. 꽃가루와 포자는 머리카락과 모피 위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오랫동안 보관된다. 고고학 분야에서 이 입자들은 수천 년이 지난 뒤에 복원되어 우리가 선사시대의 풍경을 다시 그릴 수 있도록 돕는다. 법의학의 맥락에서 꽃가루와 포자는 머리카락에 거의 영원히 보존된다. 우리는 희생자가 죽기 전, 죽어가는 동안 그리고 죽은 뒤의 머리카락에서 화분 화석을 추출해 증거를 얻을 수 있다. 나는 피해자의 머리카락을 보고 사체가 놓였던 곳을 상상한 경우가 많았다. 사체가 어딘가로 옮겨지는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 살인 피해자의 머리카락은 깨끗하고 깔끔하게 손질된 상태인 경우도 있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다. 그래서 나는 종종 혈액을 비롯한 체액, 사체가 부패한 곤죽과 엉킨 머리카락을 분석해야 한다. 머리카락은 먼지나 흙, 다른 물질로 덮였을 수도 있다. 사망 후 1주일 정도가 지나면 두개골에서 두피가 분리되기 쉽고, 머리카락보다 피부 조직이 더 빨리 부패하기 때문에 피해자의 머리카락이 사체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는 일도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실제로 시신이 땅에 묻히지 않고 드러난 현장에서는 머리카락이 주변 지표면에 흩어지기도 한다.  

 

- 2008년 이전의 영국과 웨일스 법에 따르면 '합리적인 의심을 넘어서' 그 이상으로 유죄가 입증되기까지 피고인은 무죄로 간주되어야 했다. 유죄를 입증할 책임은 전적으로 검찰에게 있었다. 이 요건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이제는 판사가 '피고가 유죄라고 만족스럽게 확신하도록' 배심원들에게 지시해야 한다. '합리적인 의심을 넘어서'라는 개념은 다른 해석에 열려 있으며, 내가 제공하는 흔적 증거에 대해 피고 측 변호사는 현장이 아닌 어딘가 다른 곳에서 화분 화석의 프로파일을 얻을 수도 있다고 쉽게 반박할 수 있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내가 어떤 심각한 사건에서 증거를 제시할 때마다 변호사가 과학을 거의 모르고 식물학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노골적으로 명백해진다는 것이다. 몇몇 변호사들은 보조 변호사들에게 밤새 나를 꼼짝 못 하게 할 질문을 생각해 내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이들은 자기가 던지는 질문에 함축되어 있는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질문에 답하기는 언제나 간단하다. 

 

- 나는 내가 제공하는 증거를 탄약이라고 여긴다. 나는 변호사에게 총알을 제공한다. 그러면 그는 스스로 무기가 되어 상대편을 겨냥하고 총알을 전달한다. 만약 변호사가 잘 쏘지 못하면 의뢰인은 법정에서 패배한다. 그런데 내 경험상 법조계 사람들은 총을 잘 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검찰 측에서 일할 때 나를 정말 힘들게 했던 한 피고 측 변호사가 있었다. 우리는 당시 이스트 앵글리아에서 세간의 이목을 끌던 예쁘고 작은 소녀 두 명이 관련된 아주 유명한 살인 사건을 함께 다뤘다. 나는 오랫동안 회의실에서 그에게 생물학적인 증거의 장단점을 가르쳤다. 중앙 형사 법원에서의 공판이 끝난 후, 그를 입스위치에서 벌어진 한 여성 살인 사건에서 다시 만났다. 그날 나는 내 분야에 이 예리한 사람을 들여놓은 일을 깊이 후회했다. 지금은 그 변호사, 카림 칼릴과 사이가 좋지만 그와의 만남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다. 나는 그를 존경하며(나에게 고난을 주어 미워할 때에도 그랬다), 그가 중앙 형사법원 판사로 임명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 토끼장 하나가 자리했는데 그 안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예쁘고 조그만 흰담비가 새끼 고양이 같은 얼굴을 그물망에 대고 나를 쳐다보았다. 이제 내 관심사는 조사 과정 내내 우리에 갇혀 방치되었던 이 작고 불쌍한, 죄 없는 동물의 복지였다. 흰담비를 제대로 보살피겠다는 약속을 확실히 받고 나서야 나는 다른 일에 돌입했다.

(리뷰자 주 : 개인적으로는 이런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언행을 이해할 수 없다. 질 하이너스 또한 <인투 더 플래닛>에서 동료의 부인이 울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단상에 오르기 직전 컨퍼런스 발표를 취소했다고 밝힌 바 있다. 두 경우 모두 심각하게 자신의 전문성을 의심케 하는 언행이 아닌가 싶지만... 이런 감수성이 있기에 달성한 업적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내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 그리고 곧 토끼장 안의 밀짚에 주목했다. 여기서 곡물 꽃가루가 나왔을까? 사실 정원 주위에는 꽤 많은 밀짚이 흩어져 있었다. 남성은 개를 길렀고, 정원 왼쪽으로 벽돌로 지은 개집이 연이어 있었다. 지금은 관리하지 않아 황폐해졌지만 안에는 여전히 낡은 짚이 흩어진 채였다. 조금 더 가면 모닥불을 피운 잔해가 있고 더 가면 이 정원의 경계선 가장자리였다. 여기에는 뒤죽박죽 자라는 거대한 쥐똥나무 울타리가 있어 이곳과 이웃의 땅을 분리했다. 울타리에는 포플러나무의 아래쪽 가지가 걸려 있고, 딱총나무 덤불이 틈새로 비집고 나왔다. 근처에는 돌보지 않아 지저분한 화단이 있었는데 한때는 다양한 정원용 꽃이 자랐을 것이다. 어쩌면 여기에 있던 식물이 당장 동정할 수 없었던 꽃가루를 떨어뜨렸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예전에 정원 식물이 재배되었다는 증거를 얻은 것으로 충분했다. 

 

- 아무도 그 점을 의심하지 않는 듯했다.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가고 못되게 살면 지옥에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살면서 다양한 색채의 경험을 쌓으며 이런 단순한 흑백논리에 대한 거부감이 점차 커졌다. 삶은 어렵고 복잡하며 확실히 불공정하다는 사실을 시나브로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사후세계를 믿어야 할 합리적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유전자를 자손에게 물려주는 것이 논리적으로 유일한 사후세계다. 물론 글이나 예술, 음악을 남겨 불멸을 얻는 방법도 있다. 나는 영원한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되었다. 비록 개종의 단계가 점진적이고 모호했지만, 아마 나는 내가 죽을 때까지 헌신적이고 심지어는 근본주의적인 무신론자이리라 생각한다. 또한 인간은 화학과 물리학의 원리에 따라 존재하며 우리의 물리적인 존재는 언제나 그랬듯이 재활용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 당신의 몸은 단지 짧은 기간 동안 당신의 것이다. 몸을 이루는 원소는 바깥세상에서 빌린 것일 뿐이며, 결국에는 돌려주어야 한다. 당신이 자기 자신으로 인식하는 실체는 사실 여러 미생물들의 집인 생태계의 집합체다. 당신이 사망해 뇌와 순환계가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작동을 멈춘다 해도, 몸속 세균이나 균류, 심지어 모공 속의 진드기와 위장 안의 기생충은(만약 있다면) 한동안 죽지 않을 것이다. 

 

- 당신의 피가 흐르기를 멈춘 직후, 체온은 당신이 사망한 장소의 온도까지 떨어진다. 이러한 환경 조건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심장 박동이 더 이상 모세혈관과 정맥의 피를 퍼 올리지 못하기 때문에 피는 가라앉고 고인다. 피부는 처음으로 변색을 일으켜 시반이 나타나고, 이어서 근육의 섬유가 결합하기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얼굴이, 다음에는 몸 전체가 굳는다. 사후 강직이라 불리는 단계다.  
 

- 당신의 몸이 한꺼번에 죽지는 않는다. 뇌에 공급되는 산소가 부족해지면 뇌는 3분에서 7분 이내에 기능을 멈추지만, 몸의 나머지 부분이 기능을 멈추는 데는 몇 시간이 걸린다. 그동안 피부를 실험실에서 배양해 뇌가 멈춘 후에도 24시간은 더 강제로 자라게 할 수 있다. 가장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곳은 당신 몸속 깊은 곳이다. 당신의 신체 내부를, 특히 위장 속을 점유하고 있으며 몸이 제대로 기능하도록 돕는 수많은 미생물들이 이제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당신의 심장은 뛰지 않고 폐는 숨을 쉬지 못하며 몸 전체의 모든 세포로 산소를 퍼뜨린다. 그러면 산소에 의존하는 몸속 미생물은 남아 있는 산소를 빠르게 소모할 것이다. 몸속은 이산화탄소를 비롯한 다른 기체들로 채워질 것이고, 세포를 해치기 시작한다. 이제 당신 몸속의 세포는 자기 소화, 또는 '자기 분해'를 통해 조직을 분해하는 효소를 방출할 것이다. 

- 그러는 동안 산소 없이 살아갈 뿐 아니라 오히려 산소가 독이 되는 혐기성 미생물들이 점점 더 많이 증식한다. 세포가 분해되면 이 혐기성 미생물들이 얻는 보상은 엄청나다. 그에 따라 이 미생물은 걷잡을 수 없이 번식하며, 이렇게 성장하면서 커진 덩어리가 그동안 모든 조직과 장기 곳곳에 편리한 운송 체계 역할을 했던 혈관을 따라 거침없이 밀어닥친다. 이 미생물은 당신을 양분으로 활용하며, 단백질과 탄수화물을 비롯한 신체의 모든 복합 화합물로부터 에너지와 영양분을 섭취하고, 그 과정에서 유해한 산과 기체를 비롯하여 신진대사에 따르는 여러 부산물을 생산한다. 황화수소처럼 지독한 냄새가 나는 기체가 말초 혈관을 검게 하고 죽음의 악취를 풍긴다. 부패 과정을 통해 세포 사이의 응집력이 없어지고 몸 내부를 잇고 지탱했던 실이 사라지며 조직과 기관은 곤죽이 된다. 

- 부패가 언제나 일정하게 이뤄지지는 않는다. 부패 과정을 좌우하는 변수들은 많고 다양하며, 사실 많은 부분이 아직 어둠에 잠겨 있다. 내가 연구한 결과 거듭 밝힌 바에 따르면 살아가면서 우리가 다들 다르듯 죽을 때도 아주 다르다. 어떤 사람의 몸은 다른 사람에 비해 부패하는 속도가 느리다. 예컨대 사망할 때 항생제를 복용한 상태라면 부패하는 데 상대적으로 오랜 시간이 걸릴 가능성이 있다. 당신이 흉부 감염을 치료하기 위해 복용했던 항생제가 가슴뿐만 아니라 위장에서도 세균과 미생물 들을 죽이고 억제해 왔다. 만약 당신 위장 속 세균을 비롯한 다른 거주자들이 약으로 제거되었다면 몸을 부패하게 할 세균이 없는 셈이다.

 

- 당신이 사망했거나 썩을 때까지 내버려진 장소의 온도, 대기에 포함된 습기, 몸이 썩을 때까지 옷이 얼마나 단단하게 몸을 조이고 있었는지, 흙에 얕게 묻혔는지 아니면 진흙이 빽빽하게 채워진 깊은 곳에 묻혔는지, 혹은 건조하고 모래가 많은 흙에 묻혔는지, 이 모든 것들이 당신의 몸이 썩어 사라지는 속도와 관련이 있다. 우리는 무엇이 부패 속도를 빠르게 하거나 늦추는지 항상 확인하려 하지만, 그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많기 때문에 당시 우세했던 조건을 잘 알지 못한 채 지나치게 많이 추론하는 것은 위험하다. 가끔 같은 묘지에 매장된 사체도 서로 다른 속도로 부패하는데, 왜 그런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다.  

 

- 1998년 맨체스터 인근 하이드에서 일하는 의사 해럴드 시프먼(Harold Shipman)이 환자들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었을 때, 그 안에 무시무시하고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숨겨져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몰랐다. 시프먼은 결국 열다섯 건의 살인을 저지른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조사가 계속되면서 218명의 개별 희생자가 더 밝혀졌고, 직업적인 경력 전반에 걸쳐 250명 이상의 불법적인 살인에 책임이 있으리라 여겨졌다. 조사 결과 여러 시프먼의 희생자들을 매장지에서 발굴해 정밀 검사를 해야 했는데, 내가 봤던 사체 사진들은 놀라웠다. 

 

- 특히 방부처리된 한 남성의 유해 사진은 기억에 남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여전히 야회복과 나비넥타이 차림이었던 그 남성의 사체는 몇 년 동안 땅속에 있었지만 아직 온전했고 누구인지도 알아볼 수 있었다. 영안실에서 사후 처리를 하며 혈관에 주입한 방부액으로 사체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보존된 것인지, 그렇다면 이집트 미라처럼 수천 년까지도 버틸 수 있을지 궁금했다. 발굴된 다른 관의 내용물은 다양했다. 묻힌 지 오래 지났어도 희생자가 잘 보존되어 있는 관도 있었지만, 유해가 거의 남지 않은 관도 있었다. 그 결과는 매혹적이면서도 곤혹스러웠다.  

- 인간 사체가 부패하는 과정과 시지는 일부 대학에서 무척 유행하는 연구 분야다. 특히 인류학 수업을 수강하며 경찰을 상대하는 상담 전문가로 일하겠다는 꿈을 가진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다. 부패 단계를 조사하는 것만으로 사람이 언제 죽었는지 예측할 수 있다면 분명 유용할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복잡다단하기 때문에 보편적이고 예측 가능한 모형을 만들기란 불가능할 수 있다. 

-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이 시작된 것은 1970년대 미국의 인류학자 윌리엄 배스(William Bass)가 경찰로부터 사체가 죽은 지 얼마나 되었는지 밝히기 위해 범죄 현장에 와달라는 부탁을 받으면서부터였다. 배스는 결국 그 문제에 대한 답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제각각이며, 자연적인 환경에서 썩고 있는 시체를 실제로 관찰할 수 있어야 훨씬 쉽고 정확한 예측이 가능하다고 얘기했다. 배스는 지역의 침례교도들을 비롯한 다른 시위자들과 논쟁을 벌인 끝에, 녹스빌의 테네시 대학과 인접한 삼림지대에 부지를 받았고, 여기에 '시설'을 세웠다. 이곳은 '시체 농장'으로 유명하다. 여기서는 환경이 시체가 부패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하기 위해 시체들을 비바람에 그대로 노출한다. 배스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시체를 뜯어먹으러 오는 동물을 막기 위해 높은 울타리와 철조망으로 둘러싼 이곳을 "죽음의 땅"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작가 퍼트리샤 콘웰(Patricia Cornwell)이 <시체 농장>이라는 동명의 소설을 출간하고 난 뒤에 이곳은 무척 유명해졌다. 나는 퍼트리샤의 초기 소설을 열독했기 때문에 그곳을 방문하기 위해서라면 내 뒤쪽 치아도 내주었을 테다. 하지만 다행히도 어금니를 희생할 필요 없이 자연스레 이곳을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 배스 박사는 연구에 활용하기 위해 시체를 기증해 달라고 사람들에게 요청했다. 기증받은 시체들은 시설 전체에 걸쳐 각기 다른 조건에 노출되어 있을 것이고, 배스는 학생들과 함께 세심한 관찰을 거쳐 시체의 부패에 대한 지식을 다듬어갈 터였다. 사체가 한 구 발견되어 경찰이 출동한 상황을 상상해 보라. 현실 세계에서 시체는 분명 외관이 깔끔하지 않을 테고 누군가 수습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묻혀 있을 가능성이 높다. 식물 안에 감춰지거나 물에 잠겼을 수 있다. 옷을 입었을 수도, 벌거벗었을 수도, 묶이거나 재갈이 물리거나, 심지어는 여러 곳에 버려졌을 수도 있다. 시설에 기증된 시신은 수많은 종류의 버려진 시체를 시뮬레이션하는 데 사용된다. 시신들은 다양한 상황에서, 때로는 특이하고 기괴한 상태에 방치되며 그 부패 과정이 상세히 기록된다. 이런 과정이 충분히 자주 반복되면 특정 조건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수 있다. 이 시설이 유명해지자 수많은 박사 과정 학생들이 사체나 그 주변 토양 그리고 그곳에 대량 서식하는 곤충들에 관해 다양한 연구를 수행했다.  

 

- 내가 듣기로는 각 경찰력 사이의 합동 작업이나 교류가 거의 없는 편이다. 하지만 윌리엄 배스는 그 경계를 넘나들도록 도왔고, 1981년에 세워진 이 시설은 배스의 가장 큰 업적이다. 

 

- 시설에 가까이 다가가는 동안 나는 크리스마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아이처럼 마음속에 기대가 가득했다. 경비가 삼엄한 문을 통과하고 나서 나는 나무가 많이 자라는 시원하고 그늘진 곳으로 향했다. 발밑으로 드문드문 풀이 자라고 오솔길이 여러 방향으로 갈라졌다. 한쪽 가장자리는 숨이 막힐 듯 끈질기게 자란 칡덩굴이 땅을 완전히 덮고 있었다. 동남아시아에서 도입된 이 식물은 지금 미국 남부 주에서 가장 유해한 잡초로 간주된다. 칡덩굴은 그것이 지나는 길마다 온통 퍼지고, 기어오르고, 구부러지며 엉켜서 앞에 어떤 장애물이 있더라도 녹색 유령처럼 되고 만다. 

- 하지만 그것은 내가 문을 통과하면서 맞이했던 매혹적인 것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들어가자마자 내 눈앞에는 사체들이 여기저기 놓인 탁 트인 장소가 펼쳐졌고 그것들은 다들 제각각의 부패 단계를 보였다. 오솔길을 따라 나타나는 다양한 자세의 사체들은 흥미를 일으켰다. 어떤 것은 부분적으로 매장된 반면 어떤 것은 완전히 매장되어 있었고, 어떤 사체는 벌거벗은 채였다. 연달아 마주치는 사체를 내가 얼마나 무심하게 보아 넘기는지 깨닫자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어느 공포 영화에서 나오는 장면보다도 심한 광경이었지만 전혀 무섭지는 않았다. 내가 그나마 놀랐던 유일한 점은 이전에 사건 현장에서 보았던 시체에 비하면 이곳 시신은 색이 옅다는 점이었다. 시신에는 혈액이 없었고 피부, 머리카락, 손톱과 함께 분해되어 전부 갈색을 띠었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체들만이 진짜 사람 몸 같았다. 

 

- 그동안 시신의 부패 단계는 '사후 변화 단계'를 결정하는 데 활용되어 왔다. 즉 인체의 수명이 다한 뒤 경과한 시간을 알아내는데 쓰였다. 물론 이런 부패 연구에 기증된 사체는 거의 항상 중년이나 노년의 백인 남성에게 한정되기 때문에 여기에는 관찰 대상에 내재한 편향이 있다. 노인은 약물 치료를 많이 받는 편이라 이점이 부패 속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편 흑인이나 히스패닉계 시신은 여성과 마찬가지로 드물며, 아이의 시체는 아마 한 번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흑인이나 히스패닉계, 여성은 외부에 노출되고 연구의 대상이 되는 데 덜 적극적인 듯하다. 정말로 쓸모 있는 결과를 얻으려면 시체를 고를 때 편향이 없어야 하지만, 때로는 어쩔 수 없이 당장 얻을 수 있는 것을 활용해야 한다. 내가 이곳을 방문할 때 흑인 시체라고는 숲에 놓였던 한 구가 전부였는데, 이 사람의 사연은 조금 슬펐다. 가족이 장례 비용을 지불하기를 원치 않았기에 시신을 윌리엄 배스에게 기부하는 것을 유용한 해결책으로 여긴 것이다. 또 다른 시신은 생전에 너무나 못된 성격이어서 가족이 죽은 뒤에 이런 방법으로 '벌'을 주고자 했다. 내가 그 시신에 얽힌 사연을 자세히 들었을 당시에는 으스스해도 재미있게 여겼지만, 실제로는 관련한 모든 사람들에게 슬픈 일이었다. 

 

- 우리가 조용히 걸어가는 동안 경력 많은 어느 여성 학자가 이렇게 말했다. "아, 덩굴은 피하세요. 코퍼헤드가 잔뜩 돌아다니거든요." 나는 그 이름을 듣고 나비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틀렸다. 코퍼헤드는 독사의 일종인데, 물렸을 경우 성인이라면 죽음에 이르는 경우는 드물지만 무척 고약한 결과를 초래한다. 이 독사에 관해 알게 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다면 암컷은 짝짓기를 하지 않고도 정자 없이 새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이다. 난자는 두 번 분열해서 네 개의 세포를 이루며 그 가운데 두 개가 연합해서 배아가 된다. 다시 말해 무척추동물뿐만 아니라 척추동물에도 처녀생식이 존재하는 셈이다! 녹스빌을 방문하지 않았다면 결코 이를 몰랐을 테지만, 덕분에 이곳 죽음의 땅에 사는 위험한 야생동물에 관해 알게 되었다. 

 

- 나는 대학에서 온 연구자들 전부가 긴 막대기를 들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나중에 보니 갈색은둔거미가 쳐놓은 거미줄을 치우는 용도였다. 이 거미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을 겁줄 만큼 독성이 있으며, 물리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교과서에서는 이 거미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위험하지는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갈색은둔거미에게 둘러싸여 일해야 하는 사람에게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높은 곳, 거미, 뱀 세 가지를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두려워한다. 그런데 그 세 가지 가운데 두 가지가 나와 가까이 있었다.  

 

- 다음 날 우리는 다시 시설에 가서 박사 과정 마지막 학년인 한 학생과 촬영하고 학생이 연구하는 시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 아침 우리가 관심을 가졌던 사체는 사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생기가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고, 사체의 살을 먹으러 오는 동물들에 이어 일찍 찾아오는 파리들에게 무척 인기가 많았다. 이 학생은 부패한 사체의 살을 맛보러 나타나는 순서를 목록으로 정리하고자 연이어 찾아오는 파리 군집을 연구하고 있었다. 보통은 검정파리(Calliphora vomitoria)에 이어 구리금파리(Lucilia sericata)가 나타난다. 물론 서로 다른 여러 종들이 세계 여러 곳에 서식하지만, 아주 많은 장소에서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체를 공격하는 흔한 개척자는 이들이다. 이 파리들은 얼마 안 되는 시간 안에 시체를 발견해 겉으로 드러난 구멍에 즉각 알을 낳는다. 알은 어두운 장소로 들어가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는데 때로는 더 높이 올라가 비강에 바로 들어가기도 한다. 

 

- 하지만 단지 특정한 사건의 이미 알려진 토양과 온도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일들을 재현하기 위해 그렇게 했을 뿐이다. 이런 작업은 여러 가지를 알려주었으며 다음의 한 가지 사례에서는 분명히 가치가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산성도가 높은 삼림지대의 점토질 토양에 묻힌 피해자라면, 웬만하면 4월까지 개나 여우에게 발견되지 않고 온전히 누워 있으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처음에 이 사건을 의뢰받은 곤충학자는 시체에서 가장 큰 구더기를 찾아내는 통상적인 기법을 통해 피해자가 2월에 죽었다고 주장했지만, 경찰 정보요원들은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던 상황이었다. 나는 그 결과가 맞는지 확인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 나는 여기서 토양이 어떤 효과를 보였는지에 관한 이론을 제안하고 킹스칼리지의 곤충학자와 공동으로 그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그 논문은 이제 고전이 되어 자주 인용되는 듯하다. 내 생각에는 돼지를 파묻어서 진행한 연구들 가운데 상당수는 사실 거의 쓸모가 없다.  

 

- 어떤 균류는 식물과 친밀하고 상호 유익한 관계를 형성한다. 식물은 그들에게 당분을 주고 균류는 식물에 인산염, 물을 비롯한 다른 영양분을 준다. 그리고 균사체가 흙으로 퍼져나가면서 식물의 뿌리 체계가 효과적으로 확장된다. 균류 하나가 여러 식물과 동시에 이러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양분이 뿌리 체계 전체를 통과한다는 점은 경이롭기만 하다. 이것은 식물이 서로 연결될 수 있음을 의미하며, 균류를 통해 한 식물이 다른 식물을 먹여 살리는 것도 가능함을 뜻한다. 즉 삼림지대 가장자리에서 어떤 나무가 무척 잘 자라고 있지만 안쪽에서 다른 나무 한 그루가 잘 자라지 못한다면, 가장자리에 있는 나무는 굶주린 나무에 양분을 전달할 수 있다. 각 식물이 이런 상리공생을 하는 균류의 여러 종과 관계를 형성한다면, 우리는 식물이 하나의 개체라기보다는 전부 연결되어 있다고 간주할 수 있다. 오늘날 생태학자들은 이런 '나무 연결망'에 관해 점점 더 많이 논의하고 있다. 세상은 너무나 복잡하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멋지다! 

 

- 하지만 모든 균류가 무해하지는 않으며 그 가운데 상당수가 숙주에게는 극단적인 살해자들이다. 이들은 숙주와 조화를 이루며 사는 대신, 공중에서 포자가 날아와 잎과 줄기에 착지하거나 흙을 통해 기어들어 뿌리를 공격한다. 동물들 역시 균류 감염으로 이득을 보거나 고통을 겪기도 한다. 예컨대 동물의 내장에 사는 균류는 숙주가 소화할 수 없는 양분을 적극적으로 소화해 숙주가 소화할 수 있는 단순한 분자로 바꾼다. 

 

- 현장 조사관들은 그것을 발견한 지점을 조심스럽게 표시했다. 나는 이미 트럭 운전사가 살짝 거짓말을 했고 호기심에 못 이겨 꾸러미의 위치를 바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식물의 상태를 보면 며칠 이상 그곳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고, 다른 사건에서 보았던 경우에 비하면 비닐 조각이 묻힌 양은 꽤 적었다. 경찰 수사 결과는 날이 갈수록 으스스해지는 중이었다. 외진 곳에서 여러 신체 부위가 더 발견되었다. 데이비드와 나는 이미 레스터셔에서 발견된 머리, 하트퍼드셔에서 발견된 팔과 다른 쪽 다리를 검사하기 위해 현장에 다녀왔다. 경찰은 이미 용의자들을 체포했고, 이들을 심문한 결과 살인 사건은 마지막 다리가 발견되기 2주 전에 발생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즉 모든 신체 부위가 약 2주 전 동시에 버려졌다는 가정이었다. 

 

- 내가 현장에서 무릎을 꿇은 채 비닐봉지에 영향을 받은 식물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을 때, 데이비드가 뒤에서 내 등을 쿡쿡 찌르며 가방이 원래 놓여 있던 자리의 식물에 달린 나뭇가지 하나를 가리켰다.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옮기니 잔가지 위로 크산토리아 파리에티나(Xanthoria parietina)의 커다란 군락이 보였다. 이 밝은 노란색 지의류는 환한 곳에서 보면 포자를 생산하는 주황색 몸통이 드러나지만, 가지 아래쪽 같은 그늘에서는 회색과 주황색을 띤 것처럼 보였다. 이 지의류는 영국 남부, 특히 자동차가 일으키는 질소 오염 때문에 성장이 촉진되는 도로 근처에서 놀랄 만큼 흔하다. 하지만 우리의 흥미를 끈 사실은 이것이 아니었다. 잔가지 위의 지의류 군락은 노란색이었지만, 데이비드가 현장을 관찰한바 알아낸 사실에 따르면 그것이 무언가에 덮이면 얼마나 걸리는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초록색으로 변한다. 우리는 이 사실이 중요하다고는 느꼈지만 얼마나 유용할지 당시에는 거의 알지 못했다. 이어서 지면에 떨어진 잔가지를 줍고 근처 나뭇가지를 몇 개 꺾었으며 경찰관이 그것을 가지고 나갔다. 

 

- 이것은 우리의 가설을 시험하기 위한 간단한 실험을 하는 데도 유용했으며 우리는 여기서 실험을 하기로 했다. 데이비드는 이 지의류가 햇빛을 온전히 받는 곳에서는 노란색과 오렌지색을 띠지만, 나뭇가지 같은 뭔가에 뒤덮이면 초록색으로 변하며 결국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햇빛을 받지 못할 때 이 특정한 지의류가 초록색으로 변하는 속도를 알아내면, 잘린 다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삼림지대에 놓여 있었는지 알아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었다. 

- 우리는 외부의 우발적인 소란을 막기 위해 구멍이 육각형 철조망으로 작은 우리를 설치했고, 죽은 참나무 잎을 두껍게 깔아, 다리가 버려졌던 잎이 흩어진 삼림지대 바닥을 재연했다. 잎 위에는 각각 괜찮은 지의류 표본이 자라는 잔가지 세 개를 가져다가 올려놓았다. 첫 번째 나뭇가지는 빛에 완전히 노출되었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잔가지는 잘린 다리의 무게를 재연하기 위해 모래가 가득 담긴 파란 비닐봉지로 덮었다.

 

- 이제 남은 일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이틀 후 우리는 두 번째 잔가지에서 모래 봉지를 제거했지만 세 번째 잔가지는 5일이 다될 때까지 그대로 두었다. 결과는 흥미로웠다. 계속 빛에 노출되어 있던 첫 번째 지의류는 노란색을 띠었는데, 예전보다 살짝 더 노래졌다. 사건 현장보다 더 많은 햇빛을 받았기 때문에 그 빛에 반응해 더 노란색을 띤 것이다. 두 번째 지의류는 초록빛이 도는 노란색을 띠었으며, 5일 동안 빛을 받지 못한 세 번째 지의류는 완전히 초록색이 되었다. 실험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이 지의류는 5일 이상 무언가에 덮이면 초록색으로 변하는데 사건 현장에서는 주로 노란빛을 띠었다. 즉 잘린 다리가 그곳에 버려진 지 5일이 지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 데이비드와 내가 우리가 발견한 바를 말하자, 경찰은 그 내용을 거의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다리가 2주 동안 현장에 놓여있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기간이 짧아 결과가 왜곡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자연의 많은 것들이 그렇듯이 지의류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사건 수사는 경찰이 예상했던 것만큼 깔끔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 데이비드와 나는 '직소퍼즐 사건'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 사건의 수사를 계속해서 도왔다. 마침내 몸통이 발견되었다. 싸구려 여행 가방이 우리가 이미 조사했던 큰 나뭇가지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개울에 버려져 있었고, 가방 속에서는 푸른 수건에 싸인 희생자의 몸통이 발견되었다. 우리는 몸통을 회수하는 동안 얼어붙은 개울가를 서성거렸지만 이것을 조사하기에 가장 좋은 곳은 영안실이었다. 이것은 데이비드가 지금껏 법의학적 경험을 하면서 마주한 세 번째 시체였으며 영안실에서 시체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당시 너무 신경을 써주지 못한 점은 아쉽다. 데이비드는 여러 방면에서 나와 비슷하기 때문에 나는 그가 영안실의 분위기와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에 심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으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내가 시체 몸통의 균류 군락을 측정하는 게 좋겠는지, 아니면 구더기를 뜨거운 물에 죽여 법의학곤충학자들을 돕는 작업을 하는 게 좋겠는지 물어볼 때까지도 데이비드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고 계속해서 말을 더듬었다. 데이비드는 구더기 죽이기를 택했고, 주전자와 병을 가져다 스테인리스 스틸 의자 구석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작업을 했다. 나중에 고백한 바에 따르면 데이비드는 꿈틀대는 그 작은 벌레를 죽이는 게 싫었고, 우연히 여행 가방 안에 모여든 예쁜 딱정벌레를 죽이는 일이 특히 내키지 않았다고 한다.   

 

- 길가에서 발견된 잘린 다리에서 시작된 이 사건은 결국 상상력이 풍부한 범죄 소설가가 힘들여 지어냈을 법한 사연이 밝혀지면서 막을 내렸다. 자기 집에서 하숙하라는 친구의 초청을 받은 살인범은 집주인의 재정 상태가 부러워졌고, 여자 친구와 함께 그를 죽일 음모를 꾸몄다. 여자 친구는 그보다 무척 젊은 성매매 여성이었고 두 딸을 둔 어머니이기도 했다. 원래 정육점을 운영했고 런던 외곽의 범죄 조직에서 시체 토막 내기 전문으로 이름을 날렸던 이 살인범은 옛 친구가 잠든 사이 친구의 등을 찌르고는 시신을 조각내 여기저기 멀리 흩뜨려놓았다. 아마도 이들은 자신들이 결코 잡히지 않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동안 몇 번이고 지켜봤듯이, 정의를 실현할 수 있도록 우리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했던 건 언제나 자연의 아주 작은 실마리였다. 

 

- 우리 몸은 역동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한다. 왜냐하면 몸은 생물학적 과정에 따라 만들어졌다가 분해되기를 거듭하기 때문이다. 숨을 쉬고 음식을 먹을 때마다 우리는 외부 세계를 스스로의 '내부 성소(聖所)'로 들여놓는다. 간단히 바꿔 말하면, 우리는 필요한 것을 가져가고 원하지 않는 것은 땀, 소변, 대변의 형태로 배출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음식과 물에 아주 적은 양의 방사능이 존재하며 그것이 몸의 부드러운 조직, 뼈, 머리카락, 손톱에 쌓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세계 각지에는 방사성동위원소 형태로 자체적인 방사능 서명이 있고, 이것 덕분에 우리는 당신이 태어난 이후의 지리적인 움직임을 추적할 수 있다. 치아는 당신의 출생지를 알려주고, 대퇴골은 10년마다 뼈의 성분이 뒤바뀌기 때문에 지난 10년 안에 당신이 어디를 돌아다녔는지 알려준다. 머리카락과 손톱에는 당신이 최근에 방문한 장소에 관한 지리적인 정보가 담겨 있다. 약 한 달이 지나면 손톱의 6분의 1, 발톱의 12분의 1이 자라고 두피 옆 머리털은 1.3센티미터 정도 자란다. 이것은 당신의 행방에 관한 정보를 매달 추적할 수 있음을 뜻한다. 

- 공기는 우리가 음식에서 에너지를 얻는 과정에 필요한 산소를 공급한다. 그런데 우리가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 우리의 몸은 공기를 마신 위치의 지리적 흔적을 간직한다. 방사성동위원소뿐만 아니라 공기에는 온갖 입자와 작은 잔해들이 가득하다. 만약 이 사실이 조금이라도 의심스럽다면 건조한 날 눈물과 콧물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이렇게 고초열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우리가 숨 쉬는 공기에 꽃가루, 식물과 균류의 포자를 비롯해 다른 알려지지 않은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가득함을 증명한다.

 

- 창문으로 흘러드는 햇살을 보고 있자면 그 안에 작은 입자들이 떠다니며, 조금씩 흔들리면서 소용돌이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들이마시는 공기에 이른바 '비산포자'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결국 우리 콧속에 점막이 존재하는 주요 목적은 이런 조그만 이물질을 가두어 부비강이나 폐 속으로 깊이 침투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 이전에도 고고학적 발견 과정에서 꽃가루를 활용한 예가 있지만, 두개골 비갑개에서 꽃가루를 찾아내고자 한 시도는 시보르가 최초였다. 그는 이 방법으로 봄과 여름의 차이를 증명했다고 확신했고, 나는 여기에 무척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BBC의 출연자 대기실에서 시보르의 기법을 소개하는 영상을 봤을 때, 확실히 우려되는 점이 있었다. 비록 내가 인기 프로그램인 <내일의 세계(Tomorrow's world)>에서 이 기법을 칭찬하는 역할로 방송국에 초대받기는 했지만 말이다. 영상을 보고 나니 시보르가 주장했던 완벽한 결론이 회의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보르는 식물학자가 아니었고, 그래서 오염과 꽃가루의 잔류 현상 전부를 무시한 듯했다. 어느 해 어느 계절의 꽃가루가 마그데부르크의 토양에 40년 넘게 보존되어 있었다면, 다른 모든 계절의 꽃가루도 그랬을 가능성이 있었다. 토양 화분 분석학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내 경험에 따르면, 일부 토양에서는 보존 상태가 정말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토양에는 1년 내내 다른 계절의 꽃가루와 이전 해에 생성된 꽃가루까지도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지렁이를 비롯한 여러 작은 절지동물들처럼 흙에서 사는 동물들이 여러 계절의 꽃가루가 섞이도록 아주 많은 흙을 뒤섞는다. 다시 말해 나는 어떻게 시보르가 40년 전 흙 속에 묻혔던 시신의 비갑개에서 하나의 계절에 해당하는 꽃가루 발견했는지 의심이 들었다. 시보르는 그 계절의 것만 두드러진다고 주장했지만 그 발견은 우연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 하지만 이렇듯 회의적으로 여기면서도 여전히 나는 그의 아이디어가 기발하다고 생각했다. 우선 비갑개에서 두개골의 다른 부분으로부터 온 오염을 제거해야 하며, 꽃가루의 양에 대한 제대로 된 그림을 얻을 수 있도록 토양 비교 표본을 철저히 균질화할 필요가 있지만 말이다. 나는 그 이후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른 시체의 비갑개를 세척해 그 안에서 유용한 증거를 얻을 수 있는지 살폈다. 몇 번의 조사 결과 그 점은 확실히 증명되었다. 법의학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지 6년 만인 2000년에 나는 이 기법을 활용해 햄프셔 삼림지대에서 교살당한 한 젊은 남성에게 얽힌 수수께끼를 푸는 데 도움을 얻었다. 

 

- 사체가 묻힌 곳에는 커다란 통나무가 놓여 있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살인자들은 이렇게 시체를 묻은 곳을 어떤 식으로든 표시해 놓는 경우가 많다. 아마 쉽게 찾기 위해서일 테다. 또한 살인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희생자를 묻은 곳을 다시 찾는데, 시신이 제대로 숨겨졌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인 듯하다. 하지만 살인자들이 실제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사실 아무도 모른다. 

 

- 나는 걸어가면서 각 구역에서 산출될 식물학 프로파일이 어떨지 상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동안 배웠던 한 가지는 초심자들은 파악하지 못하는 점으로, 이 분야에서는 어떤 사실이 밝혀질지 결코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저 개괄적으로 예측할 뿐이었다. 다시 말해 주차장 근처에는 소나무와 자작나무 꽃가루가 많을 테고, 밤나무는 꽃가루를 비교적 적게 생산하기 때문에 거의 나타나지 않을 것이며 비록 자작나무가 수적으로는 많지만 자작나무보다는 참나무 꽃가루가 더 많이 보이리라는 사실 정도였다. 하지만 정확한 양과 패턴은 어떨까? 이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분석이 필요하며, 어떤 모델링 작업을 하더라도 법정에서 고려될 만한 결과를 제공하지 못할 것이다. 모든 사건들은 독특하며 또 그렇게 취급되어야 한다.  

 

- 고고학과 고대 풍경의 재구성 영역에서 수없이 훈련하고 또 수많은 경험을 하면서도 여전히 나를 놀라게 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내가 지표면의 토양에서 채취한 모든 표본은 바로 옆의 표본과 다를 것이며 한층 멀리 떨어진 표본을 추출할수록 그 차이는 더 벌어진다는 점이다. 사실 어느 곳이든 꽃가루는 군데군데 다르게 떨어지기 때문에 대략적인 예측만이 가능하다. 꽃가루 표본이 보이는 양상은 일종의 스펙트럼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식생이 변화함에 따라 하나의 스펙트럼이 다른 스펙트럼과 합쳐진다. 내가 앞서 여러 번 언급했듯이, 물체와 장소를 비교할 때는 '장소 이미지'가 생성될 수 있을 만큼 대조용 표본을 충분히 수집해야 한다. 이때 몇몇 흔치 않은 흔적 증거들이 그 장소를 특별히 두드러지게 한다면 엄청난 도움이 된다. 법정에서 확실한 성과를 올리기 위해서는 어떤 것도 단지 운에 맡겨서는 안 된다. 확실한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설익은 예측을 하다가 유능한 상대편 변호사를 만나기라도 하면 머지않아 형편없이 당하고 말 것이다. 또한 나는 원하는 결과에 대한 경찰관들의 순진한 열정에 감염되지 않도록 스스로에게 엄격해져야 했다. 즉 항상 인지적 편견과 싸워나갔다.  

 

- 어떤 화분학적 분석으로도 접촉이 일어났음을 뒷받침할 절대적인 증거를 제시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은 개연성의 관점에서 보아야 하며, 그렇기에 나는 경찰에 무언가를 추천하거나 보고할 때마다 적절한 주의 사항을 조심스레 덧붙인다.  

 

- 이제 나는 확신할 수 있다. 그 젊은 남자는 누군가에게 목이 졸리면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흙 속에 코를 박고 있으면 콧구멍 훨씬 위쪽 비강까지 입자를 들이마실 수밖에 없다. 꽃가루와 포자가 숲 속을 돌아다니다가 그곳에 닿았을 리 없고, 또 남자가 만약 포츠머스로 돌아가 그곳에서 목이 졸렸다면 그 정도 양의 입자를 흡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비강 속의 꽃가루와 포자는 지표면의 흙에서 볼 수 있는 것과 흡사했다. 나는 이제 거의 확신을 가졌다. 희생자는 숲 속에서 살해되었다. 경찰이 범죄 현장으로 고려할 만한 다른 후보는 없다. 

- 얼마 후 두 살인자가 유죄 판결을 받았고 감형을 받고자 자백을 시작했다. 둘은 각자 상대편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끈이 희생자의 목을 휘감고 마지막 숨소리가 간신히 나오는 동안 자신은 옆에서 겁에 질린 채 서 있었다고 말했다. 살인범은 외딴 장소로 밴을 가져가 불에 태울만큼의 법의학적 지식을 가졌을지는 모르지만, 자기들이 희생자를 삼림지대로 끌고 들어가는 동안 스스로의 몸에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는 사실은 몰랐다. 그리고 불쌍한 희생자가 목에 줄을 두르고 얼굴이 흙에 박힌 채 그곳에 누워 있는 동안 현장에 있던 꽃가루와 포자를 들이마셨고, 바로 그것이 자기들이 종신형을 선고받게 할 증거가 되리라고는 결코 알지 못했다.  

 

- 이 사건은 내가 런던 대학교 고고학적 법의학 석사 과정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동안 벌어졌다. 이 과정은 이 대학에서 제안해서 설치되었으며 사실은 고고학 연구소에 속해 있었다. 법의학 고고학은 한동안 인기를 끌었으며 본머스 대학교에서도 범죄 수사에 참여하고자 애쓰는 수많은 젊은 고고학자들과 함께 이 분야의 석사 과정을 개설했다. 

 

 

"모든 강하고 독립적인 여성들의 뒤에는
다시 일어서는 법과
누군가에게 지나치게 의지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배워야 했던,
상처받은 소녀가 있다."

정확히 누가 했는지 모르는, 
단지 인터넷에서 보았을 뿐인 문장이지만 
적어도 내 경우에 있어 정말 맞는 말이다.

 

 

 

- 시간이 지날수록 이 가족의 생활은 겉으로 보이는 대로가 아니었음이 조금씩 드러났다. 남편은 아버지와 거의 사이가 좋지 않았고, 자기를 귀여워하는 어머니와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사실 나는 시아버지와 꽤 잘 지냈고 가끔은 거드름 피우는 태도를 폭로하기도 했다. 나의 어머니가 시부모님을 산비탈에 자리한 집으로 초대해 휴일을 보냈던 기억도 있는데 시아버지는 이곳 계곡이 얼마나 깨끗한지, 경치가 얼마나 아름답고 사람들이 얼마나 너그럽고 재미있는지를 알고 놀랐다. 여느 때처럼 약간 무시하는 듯한 말투로 들렸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봤을 때 시아버지는 이곳이 석탄가루에 뒤덮이지 않았다는 사실에 정말로 놀란 듯했다. 한 번은 남편이 나에게 입을 삐죽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내 아버지가 항상 바라던 모습의 딸이야. 학구적인 면모가 그렇지." 아버지의 애정을 갈구하는 아이 같은 질투였다. 

- 시아버지는 깔끔한 잠옷을 입고 머리카락과 콧수염이 언제나처럼 말끔히 정돈된 채로 침대에서 임종을 맞이했고 나는 그 옆에 앉아 있었다. 나는 손을 잡고 멍하니 손가락으로 맥박을 짚었다. 맥박의 리듬과 세기가 불규칙해졌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시아버지는 마지막으로 급격히 몸을 떨면서 숨을 한 번 헐떡이더니 나를 응시했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 생명의 활기가 전부 떠나갔다. 

- 나는 그 변화에 매료되었다. 한때 그는 아버지였지만 지금은 한 구의 시체다. 변화는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이런 식으로 죽음을 목격한 것이 처음이었다. 나는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떠나가고 텅 빈 그릇을 남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여러 해 전에, 나는 환원론자가 되었다. 인간의 영혼, 정신, 존재는 단지 복잡한 일련의 물리 화학 반응일 뿐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뇌의 화학 작용과 개인적인 경험의 산물이다. 당신이 본성적으로 성인인지 사이코패스인지는 대체로 당신의 통제에서 벗어난다. 단지 스스로의 행동을 절제할 수 있을 뿐이다. 당신의 생각은 당신 자신의 것이고 당신에게 특유하다. 삶의 마지막을 가까이에서 목격한 경험은 나에게 위안이 되었다. 나는 이제 시아버지가 더 이상 고통을 받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고통을 일으키는 것에 반응할 무언가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리고 약 30년 뒤인 2005년, 전남편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어머니도 내 곁에서 돌아가셨다. 삶에서 죽음으로의 급작스러운 전환은 똑같은 극적 변화였지만 나는 두 노인의 죽음에 대해 비교적 거리를 둔 채, 호기심 많은 과학자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시에 다른 두 사람 그리고 내가 운 좋게도 소중히 보살필 수 있었던 고양이들의 죽음을 맞이하며 극도로 비통함을 겪었다. 

 

- 나는 42년의 결혼 생활 끝에 전남편과 이혼했다. 놀랍게도 전남편이 5년에 걸쳐 매우 격식 있고 조심스러운 구애를 했던 그때에 비해, 이혼할 무렵 나는 전남편에 대해 별로 잘 알지 못했다. 수십 년 동안 우리는 서로의 주위를 도는 한 쌍의 위성이었지만 닿는 일은 없었다. 전남편은 취미가 많았으며 뛰어난 사진작가였고 스쿠버 다이버이자 고정익 항공기와 헬리콥터 조종사, 훌륭한 승마인이기도 했다. 나중에는 컴퓨터에 취미를 붙여 꽤 실력을 쌓았다. 그는 이런 취미를 즐기기 위해 항상 좋은 장비를 갖춰야 했고 아무도 만지지 못하게 했다. 우리는 꽤 돈이 많아서 한때는 포르쉐와 페라리 스포츠카를 소유했고 운전을 즐겼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우리에게는 쌍발 엔진이 달린 비행기, 8인승 세스나경비행기, 말 두 마리가 있었고 컴퓨터를 비롯한 다양한 전자기기는 셀 수도 없이 많았다. 나는 비행기 조종법을 배웠다. 우리는 마음 내키는 대로 유럽 이곳저곳을 날아다녔고 멋진 호텔에서 묵었다. 가장 마음에 드는 휴양지는 칸이었다. 친구들은 우리 부부가 당연히 부유하다고 여겼다.  

 

- 하지만 그렇게 예순이 되어 편안하고 보람 있는 은퇴를 고대하던 나이가 되자 추악한 진실이 내 앞에 닥쳤다. 나는 상실감을 느끼고 당황했다. 나는 몇 해 동안 내가 한 여자로서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다고 우리는 말싸움을 했던 것은 아니었고, 심지어 의견이 엇갈린 적도 없었다. 우리는 그럴 정도로 충분히 친하지 않았다.  

 

- 하지만 나쁜 일은 세 번 연달아 온다고 하듯 그때도 확실히 그랬다. 어느 날 아침, 시안은 무척 까다롭게 굴었고 조금 혼을 내자 몹시 슬퍼 격렬하게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나는 깜짝 놀랐다. 아이를 의사에게 데려갔지만 그는 내가 경험이 없어 전전긍긍하는 엄마라고 치부했다. 정말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명백한 시점에서도 나는 의사에게 성가신 존재로 취급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의 등은 아주 작은 보라색 반점으로 덮였는데 이것은 피하출혈로 생긴 결과로 아이는 자색반이었다. 당시에는 인터넷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뭔가를 물어볼 수도 없었고, 나는 지역 보건의에게만 의지해야 했다. 시안은 급히 소아과 고문 의사에게 보내졌다. 이후 몇 달 동안의 자세한 진행 경과는 생각하기도 싫지만 결국 아이는 호지킨 림프종, 즉 혈액암 진단을 받았다. 지역에서 일하는 고문 의사들은 이런 아이를 다룰 만큼 전문성이 없었고, 이후 우리는 몇 달 동안 런던의 세인트 토마스 병원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결국 처음 진단은 오진이었고 아이가 걸린 병은 무척 드문 자가 면역 질환인 레터러-시웨 병으로 판명되었다. 그다음 열 달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아이가 누워 있는 요람에 갈 때마다 마치 각오하듯 아이가 죽었을까 가슴을 졸였다. 아이의 핏속에는 적혈구가 너무 적었고 Rh - O형이라 누구에게든 수혈할 수 있었던 나는 아이에게 피를 주었다. 무시무시한 외과적인 처치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의사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것 같다.  

 

- 이제 와 유일하게 후회하는 것이 있다면 아이를 더 빨리 죽게 내버려두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랬다면 아이는 그렇게 많은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는 무척 아파했고 고생했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나는 때때로 무덤에 찾아가 슬퍼하며, 매일 아이를 생각한다. 아이는 커서 어떻게 되었을까? 내 손주들을 낳았을까? 아이는 나를 더 닮았을까, 아버지를 더 닮았을까?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이후로 더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었을지 아니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나는 항상 모두가 최선을 다하기를 기대하며 노력한 분야에서 뛰어나기를 바란다. 나는 비판적인 사람이기에 아마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어머니가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시안은 내가 나의 어머니를 싫어했던 것만큼이나 나를 싫어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항상 아이를 무엇보다 우선시했을 것이다. 아이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기쁘게 여겼으니까. 어쨌든 필사적으로 아이를 지키려고 애썼지만 결국 시안은 1월의 어느 추운 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나는 믿을 수 없어 멍해졌다. 감전된 듯한 충격을 느낀 뒤로 몸속의 모든 것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나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무엇도 채울 수 없고 만족시킬 수 없는 엄청난 공허함이 나를 억눌렀다.  

 

- 간호사들이 조심스레 나를 다른 곳으로 이끌었을 때, 나는 최악의 일이 벌어졌음을 깨달았다. 어떤 재난이나 불행도 나에게 이 일과 같은 영향을 미치거나 상처를 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랬던 만큼 그날 이후 나는 누구에게도 상처를 받지 않았다. 시안만큼 나에게 중요한 사람은 없었고, 나는 나에게 딸이 있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 이렇게 상처를 받지 않는 태도는 일종의 뻔뻔함으로 이어질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나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상관하지 않으며, 그러면서 솔직하고 직설적인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 무엇도, 어느 누구도 두렵지 않다. 아마도 이것이 내가 법의학 자문을 맡아 일하는 동안 여러 흉측하고 충격적인 광경과 사건들에 대처할 수 있었던 이유였을 것이다. 물론 나 역시 내가 학대당하고 방치된 아이나 동물들을 상당히 신경 쓰는 이유가 내 딸이 겪었던 고통이나 죽음과 무관하지 않음을 안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냉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나의 불안정한 겉모습 아래는 마시멜로처럼 부드럽다. 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나에게 겁먹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때때로 겉모습만으로도 다른 사람의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을 멈추게 만든다. 

 

- 원래 디기탈리스라는 식물에서 추출한 강심제가 한 예다. 이 속은 심장에 치명적인 다양한 스테로이드성 글리코시드를 만들어낸다. 용량이 적절하면 이 디기탈린(디곡신)이란 성분은 심장 박동을 조절하지만, 과량을 사용하면 심장 박동이 치명적으로 느려지거나 빨라지고 혼란, 메스꺼움을 비롯해 심지어는 환각을 유발한다. 의학이 비교적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그리고 독성학이 등장하기 전에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디기탈리스라는 식물이 살인 사건에 이용되었던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당시 피해자는 단지 심장마비로 진단받았을 것이다. 지중해 전역에서 볼 수 있는 예쁜 분홍색과 흰색의 협죽도 역시 비슷한 화합물을 가지고 있어 잎을 한 장이라도 먹으면 심장마비를 일으킬 수 있다. 

- 디기탈리스와 협죽도에 함유된 독소는 식물의 어느 부분에서나 발견되지만, 다른 독소는 특정 부분에 집중되거나 1년 중 특정 기간에만 만들어지기도 한다. 예컨대 붉은색 주목 열매의 과육에는 독이 없지만 가운데에 있는 검은색 씨앗은 치명적이다. 대황의 잎꼭지는 익히면 맛이 좋지만 잎 자체에는 유독성이 강한 옥살산이 가득하다. 어머니는 오래된 냄비에 다시 광택을 주고자 할 때 냄비 안에 이 잎을 넣고 끓이곤 했다.

- 많은 식물 독소는 동물에 대한 방어 기제로 진화한 듯 보인다. 특히 지구 위를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여러 곤충 무리로부터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인데, 이것은 테르펜이 맡은 역할 가운데 하나다. 내가 시체 농장을 방문해 덩굴옻나무에 다리를 스쳤을 때 고름이 나는 상처를 일으킨 지독한 기름 성분인 우루시올 역시 테르펜이며 이 성분은 옻나무에도 들어 있다. 또한 테르페노이드 독소인 투존은 벨 에포크 시대에 파리 사람들이 탐닉한 압생트에 든 향정신성 성분으로, 쓴쑥의 조직에 함유되어 있다. 비록 압생트는 황시증과 광기를 유발할 수 있지만 반 고흐, 고갱, 제임스 조이스, 툴루즈-로트렉, 피카소, 오스카 와일드, 프루스트, 에드거 앨런 포, 바이런 경,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좋아하는 술이었으며 가장 인상적인 사례는 살바도르 달리였다. 이 예술가들의 창의력과 표현력에 투존이라는 성분이 한몫을 했는지 여부는 궁금한 일이다. 확실히 예술가들이 창조한 아이디어와 이미지 일부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꽤 정신 나간 듯해 보인다.

 

- 몇몇 예술가들의 작품은 그것이 시각 예술이든, 글이든, 음악이든 종종 정상성의 영역에서는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 닿기 위해서는 이성적인 자아에 의해 억압되는, 깊이 감춰진 시야와 생각을 품어야 한다. 인간 역사를 통틀어 창조적 지식인들은 아마 식물 독소에 탐닉해 내면을 자유롭게 했으며 그 과정에서 우리 같은 절제되고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 내면을 엿볼 수 있게 했다. 테르펜은 다른 방식으로도 생명을 증진한다. 예컨대 우리는 유칼립투스오일, 장뇌, 테레빈유, 생강, 계피에 익숙하며, 초기 치매나 정신분열증과 관련된 독소인 카나비노이드에 관해서도 잘 알고 있다. 그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대마초를 간절히 찾고 있으며 창의적인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자기들이 대마초의 유혹에 굴복했음을 인정해 왔다.   

 

- 하지만 자연적으로 생성된 독소 가운데 강력한 위력을 가진 독은 알칼로이드다. 세균, 균류, 식물이 생성하는 것으로, 독개구리나 두꺼비 같은 몇몇 동물에게도 존재한다. 비록 이런 양서류들은 자기들이 잡아먹는 개미를 통해 독성을 얻고, 이 개미들은 자기들이 모은 식물성 성분에서 독성을 얻었을 테지만 말이다. 식물 성분이 이 개구리에게 주는 진화적 이점은 실로 놀랍다. 

 

- 알칼로이드는 단백질의 구성 요소로부터 만들어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아트로핀, 니코틴, 모르핀, 메스칼린, 아드레날린, 에페드린, 퀴닌 등의 이름에 친숙하다. 그동안 다양한 알칼로이드 성분이 의약품에 사용되었는데, 이때 독과 치료제 사이의 경계는 단순히 용량과 농도의 문제다. 토마토, 감자, 가지, 후추, 고추는 모두 귀중한 식재료지만 이들은 전부 치명적인 식물인 까마중이나 유혹적인 검은 열매와 아름다운 흰 꽃을 가진 다투라(흰독말풀)와 같은 과에 속한다. 실제로 이들 식물은 전부 솔라닌이라는 알칼로이드를 함유하며, 몇몇 슈퍼마켓 관리자들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감자 껍질이 초록색으로 변하는 현상은 이 독소가 만들어지고 있음을 알리는 전조다. 솔라닌은 강력한 살충제로서 식물이 병원체에 공격받지 않도록 보호하지만, 곤충이나 벌레, 균류에게 독성을 띠는 성분은 불가피하게 우리에게도 독성을 띤다. 

- 한편 스트리키닌은 스트리크노스 속 나무와 관목을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알칼로이드 독소로 이 식물들은 인도 남부가 원 ...

 

- 오늘날 식물의 독은 확실히 살인자들이 가장 많이 선택하는 무기는 아니다. 하지만 독성학적 분석이 성공적이지 않은 경우, 법의생태학자가 식물이나 균류의 잔해를 조사하도록 요청받을 수 있는 몇몇 상황들이 존재한다어떤 독소들은 신체를 파괴하지만 어떤 독소들은 향정신성 효과를 불러일으키며 심지어 오락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식물과 균류는 오랜 옛날부터 정신 기능에 영향을 미치는 물질로 여겨졌다.

- 흰 반점이 있는 붉은 균류인 광대버섯은 이보텐산과 무시몰을 생산하는데 이 화학물은 LSD와 비슷한 효과를 낸다. 순록들도 이 예쁜 버섯을 찾아 나서는데, 아마도 예전에 그것을 먹고 얻은 즐거운 경험 때문일 것이다. 또한 툰드라 지대를 점령한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의식을 진행할 때 이 버섯을 사용해 왔다. 이러한 환각성 화합물의 영향 가운데 하나는 그 영향력 아래 있을 때 마치 하늘을 날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이 균류를 즐겨 사용했던 사람들이 건물 옥상에서 팔을 뻗고 몸을 던져 사망한 사건들은 더 조사가 필요하다. 심지어 빨간색과 하얀색이 섞인 옷을 입고 순록과 함께 날아다니는 산타클로스 역시 원래는 이 균류의 숭배자들이 들려준 이야기와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이 균류를 즐겨 사용하던 사람들이 많았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며, 이들 가운데 몇몇은 단순한 즐거움 때문에 그렇게 하지만 몇몇은 종교적인 경험과 관련을 짓는다. 몇몇 종교라든지 문화적인 행동의 기초는 이 버섯이나 다른 성분을 섭취한 뒤에 경험하는 환각에서 비롯한 듯하다. 그리고 이 버섯에 대한 상징과 묘사는 고대의 상형문자에서 흔히 볼 수 있다. 

 

- 인기 있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오는 법의학 수사관들은 오류를 저지르지 않으며 언제나 신비스러운 화합물을 확인해 이야기의 중심으로 끌어들이곤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독성학 분야는 분석자가 의심스러운 대상을 이미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면, 독물을 식별하는 데 완전히 무력한 경우가 많다. 정교한 분석 기법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수천 가지의 알려지지 않은 물질의 화학 구조를 비교하려면 필요한 참조 표본의 개수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많을 것이다. 식물이나 균류의 조직이나 포자가 관련되었다면 현미경으로 직접 관찰해 독소의 원천이 무엇인지 이름을 알아내는 데 성공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작업을 하려면 경험이 풍부한 식물학자나 균류학자가 필요한데 그런 전문가들은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 고대 문명 그리고 오늘날까지 열대우림에서 살아가는 원주민 부족들은 그들 삶의 터전을 둘러싼 식물과 균류에 조예가 깊었으며 오늘날까지 풍부한 지식을 갖추고 있다. 많은 균류와 식물들이 찌는 듯이 더운 숲에 모여들었고, 향정신성 성분을 가진 이것들은 원주민 부족의 일상 속 일부가 되고 있다. 그리고 부족의 구조와 응집력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독성을 가진 식물들은 꽤 많지만 오랜 세월 동안 노인들, 병을 고치는 마녀, 무당들에 의해 적절한 농도와 조합이 무엇인지 알려졌고, 그에 따라 인체에 가하는 나쁜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열대 식물의 잎과 줄기, 심지어 뿌리까지 다양한 조합으로 끓여내면 고양감과 함께 행복감, 희열, 더 나아가 종교적인 경험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런 만큼 몇몇 원주민들은 복용량을 안전하게 맞추고 특정한 종류의 경험을 일으키려면 어떤 종들을 어떻게 혼합해야 하는지에 관해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요크셔 출신의 목수라든가 길드코드 출신의 자동차 판매원이 무당이 되기에 충분한 능력을 갖추었다고 상상할 수 있을까? 놀랍게도 일부 영국인들은(다른 나라들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향정신성 물질들을 적당히 혼합해 생각이 비슷한 다른 개인들에게 팔아서 부수입을 챙긴다.  

- 어느 날 오후, 나는 상당히 흥분한 경찰관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2008년 어느 여름날 저녁에 이 경찰관은 열여섯 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무속 의식을 열고 이국적인 음료를 나눠 마신 한 남자를 구금했다. 이 집단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완전히 예측 가능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중 한 젊은이가 불안해하더니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같은 음료를 마셨던 나머지 열다섯 명에게서는 이런 부작용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으며 다만 약속받은 행복하고 환각적인 경험을 겪었을 뿐이었다. 

- 이 무당이 내놓은 음료는 '아야와스카'였는데,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수 세기 동안 치유, 환각, 유체이탈 경험을 유도하기 위해 사용해 왔던 마실 거리였다. 아야와스키는 보통 열대 우림에서 자라는 두 종류의 덩굴 식물을 물에 담가 부드럽게 해서 만드는데, 열대 우림에서 자라는 식물들이 그렇듯 두 식물은 서로 가까운 친척이 아니라도 꽤 비슷해 보인다. 이 음료에는 꼭 바니스테리오포시스 카피라는 식물이 들어가며 무당들이 음료로 어떤 효과를 일으키고자 하는지에 따라 출라차쿠이 카스피를 비롯한 여러 식물도 들어간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 음료에 들어가는 파트너는 사이코트리아 비리디스다. 이 사건에서 무당이 골랐던 것도 이것이었다. 

- 바니스테리오포시스 카피는 알칼로이드를 함유하며, 이 알칼로이드는 세로토닌(행복 호르몬)을 분해하는 위장 속 효소를 억제할 수 있다. 이러한 억제제를 하말라 알칼로이드라고 부르며 하르민, 하르말린, 테트라하이드로하르민이라고도 한다. 세로토닌은 우리의 기분을 좋게 한다. 행복감과 식욕, 기억력, 수면에 기여하는 호르몬이다. 우리가 임상적인 우울증에 걸렸을 때 우리 자신의 몸이 세로토닌을 과다하게 제거한 것이 문제를 일으켰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몇몇 항우울제는 자연적으로 생성된 세로토닌이 제거되는 것을 방지해, 결국 뇌의 활성중심에 도달할 수 있도록 작용한다. 

- 아야와스카에 들어가는 두 번째 식물인 사이코트리아 비리디스는 활발한 향정신성 성분인 디메틸트립타민(DMT)을 제공하며, 이 화합물은 유체이탈을 비롯한 여러 특별한 경험을 안겨준다. 음료에 들어 있는 첫 번째 식물은 이 성분을 우리 몸의 분해 효소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한다. 효소 저해제는 어떤 혼합물에든 존재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다른 식물의 활성 성분이 위장에서 살아남아 혈류로 들어가 혈액-뇌 장벽을 통과하기 어렵다. 비록 전통적인 무당들은 더욱 환상적으로 들리게 설명할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비현실적인 환각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DMT가 뇌에 미치는 영향이다. 그리고 갑자기 활성화되는 세로토닌은 참가자들이 경험하는 행복감에 크게 기여한다. 

- 이 향정신성 물질 DMT는 누군가에게서 살 수도 있지만 LSD나 환각 버섯보다 강력한 효과가 있는 A급 환각제다. 그렇기에 실제로 이것을 소지하거나 개인적으로 누군가에게 주거나 파는 것은 불법이며, 소지에 따르는 최대 형량은 징역 7년이다. 이것은 나무가 무성한 시골 마을에서 활동하는 이 무당에게는 심각한 결과였다.

- 2008년의 그 운명적인 여름, 이 젊은이에게 무언가 끔찍하게 잘못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자신과 친구들을 위해 아야와스카를 준비했던 이 무당은 전부터 따랐던 제조법을 그대로 지켰다. 하지만 한 추종자가 보이는 환각은 다른 사람과는 결이 다른 듯했다. 그는 울부짖고 날뛰었으며, 친구들이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의식이 이뤄지는 장소에서 떼어놓자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는 4일 밤낮을 꼬박 그런 상태로 보냈다. 그래도 이 기간 내내 그의 몸은 여전히 기능하는 듯 보였다. 비록 불규칙하고 거칠었지만 말이다. 근육을 움직일 수 없게 되자 그는 대소변도 가리지 못했고 친구들은 기저귀를 채운 채 가능한 안락하고 깨끗한 상태를 유지해 주었다. 

- 원주민 사회에서는 아야와스카 의식에 따르는 구토와 설사를 필수적이고 환영할 만한 것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무당들은 환각이라는 경험을 통해 사악한 마음을 정화한다는 특정한 목적으로 음료를 사람들에게 나눠줄 테지만, 이 혼합물은 위장 내부를 정화하고 장내 기생충을 제거한다. 원주민 사회에서는 구성원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장을 씻어내고 구토를 유발하지만, 친구들에게 보살핌을 받다가 죽은 이 젊은이는 그 경험을 통해 아무런 이득도 보지 못했다. 친구들은 젊은이가 죽자 경찰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 나는 경찰관과 통화를 하면서 아야와스카에 대해 처음 들었다. 이런 사건들은 일상적으로 벌어지지 않는 데다 무당을 범인으로 체포했다는 사실이 이 경찰관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듯했다. 그는 이미 DMT가 관여했는지 분석하기 위해 표본을 보냈고 결과는 양성이었다. 하지만 젊은이의 사인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확립되지 못했다. 경찰은 사체에 DMT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날 저녁 나머지 열다섯 명은 똑같은 아야와스카 음료를 마셨고 뚜렷한 부작용을 겪지 않았다. 경찰이 이들에 대해 조사를 했다면 분명히 이들의 몸에서도 DMT가 발견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직면한 질문도 바로 이것이었다. 왜 하필 그 사람만 죽었을까? 다른 사람들은 목숨에 문제가 없었는데 왜 그 사람만 숨진 걸까? 무언가 무척 부정적인 화학반응이 일어났던 걸까? 

 

- 나는 이 질문들에 해답을 제공하는 임무를 맡았다. 남편 데이비드는 그 균류를 보자마자 이 퍼즐을 함께 짜 맞추는 일에 뛰어들었다. 데이비드가 동정한 바에 따르면 그 버섯은 프실로시베 세밀란세아타였으며 포자를 현미경으로 살펴 그 종이 맞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것은 가장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환각을 일으키는 환각 버섯이고, 가끔씩 우리 집 뒷마당에 불쑥 돋아나는 버섯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든 종이다(비록 이 버섯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은 잘 파악하는 듯하지만). 

 

- 피해자의 방에서 발견된 용기에 무엇이 들어있었는지 알아낼 방법이 있었다. 내가 환경 고고학자로 일하면서 가장 큰 성공을 거뒀던 사례가 약 2,000년 전 콜체스터의 무덤에 드루이드 치유사와 함께 묻힌 '와인 체'에 황무지에서 자라는 흔한 잡초인 쑥(아르테미시아 불가리스)으로 만들어진 혼합물이 함유되어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던 경우였다. 약쑥의 친척인 쑥은 오랫동안 약초로 이용되었다. 약쑥과 쑥은 다양한 알칼로이드, 모노테르펜을 비롯한 여러 화합물을 포함하며 그래서 과거에는 잡다한 의료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사람이나 가축이 쑥차를 마시면 장내 기생충이 마비되어 쉽게 위장에서 빠져나갔다. 기생충 감염은 불행히도 고대인에게 일상적으로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고, 고대의 화장실 유적에서 선충의 알이 자주 발견된다는 점이 그 근거였다. 마치 이런 현장 데이터와 실험실 분석 결과를 알기라도 하듯 이 철기시대 콜체스터의 의사는 환자들에게 쑥을 달여 마시게 해서 기생충과 세균감염증을 치료했다. 이 식물에서는 쓴맛이 났기 때문에 꿀이 첨가되었다. 비록 가끔은 곡물, 풀, 잡초의 꽃가루가 섞여 있는 데다 체에는 쑥 꽃가루의 커다란 덩어리가 남아 있었지만, 나머지 성분은 밀원 식물(벌이 꽃꿀을 찾아 날아드는 식물-옮긴이)의 흔적을 보여주었기에, 꿀을 넣었다는 사실은 매우 개연성이 높았다. 밀원 식물의 꽃가루는 공기에 섞여들지도 않고 모체 식물에서 멀리 이동하지도 않기 때문에, 이것들이 우연히 포함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리고 벌들이 풍부한 꽃꿀을 찾아 이끌리는 식물의 꽃가루들이 꿀에는 풍부하게 남아 있었다.  

 

- 아야와스카를 즐겨 마시던 이 젊은이가 자기 방의 용기에 무엇을 보관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나는 드루이드 치료사의 체를 가지고 했던 것과 동일한 일련의 작업을 수행했다. 빈 플라스크 목 주위에 어떤 물질이 남아 말라붙어 있었다. 나는 이것을 씻어낸 다음, 다른 물건을 씻어내고 나서 했던 방식과 동일하게 처리했다. 

 

- 하지만 현미경으로 결과가 드러나기 시작하자 나는 얼어붙고 말았다. 한 플라스크에는 대마초와 민트의 꽃가루가 빽빽하게 들어있었다. 대마초와 민트가 음료의 주원료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또 다른 플라스크에는 환각 버섯의 포자가 촘촘하게 매달려 있었다. 이 균류를 어떤 식으로든 사용하려고 준비한 듯 보였다. 서랍에는 프실로시베 속의 포자가 덩어리째 들어 있었는데, 프로파일에 따르면 이 균류는 삼림지대 근처 풀밭에서 채취되었으리라 짐작되었기 때문에 무척 흥미로웠다. 

- 내 분석 결과를 보면 이 젊은이는 아야와스카 의식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대마초와 환각 버섯에 탐닉하는 버릇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것들이 어떻게 그의 죽음에 기여했을까? 우리가 특정 약물을 조합해서 복용할 때 인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기껏해야 담배와 대마초를 함께 피우면 특정 개인에게 정신질환을 유발하며, DMT를 복용했을 때 술을 마시면 DMT가 혈류를 통해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뇌로 들어가도록 돕는다는 것 정도다. 다른 수많은 약품에 관해서는, 그것이 자연에서 왔든 합성 약물이든 함께 작용했을 때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에 관해 단편적인 지식만이 알려져 있다. 

 

- 눈앞에 그대로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의식에 참여하기 전에 대마초와 민트를 섞은 차를 만들어 마신 다음, 환각 버섯 현탁액을 마셨다. 하지만 아직 만족하지 않은 그는 양귀비 씨앗 덩어리를 먹고 나서 무당이 거행하는 의식에 참여해 아야와스카를 즐겼다. 아마 음료가 담긴 컵을 입술에 갖다 대는 동안은 몰랐겠지만, 이미 그의 몸속에는 이 아야와스카의 맛이 생애 마지막으로 즐기는 풍미가 될 만큼 엄청난 양과 치명적인 조합의 독소가 들어 있었다. 

 

- 몇몇 북유럽 출신 법의학 독성학자 동료들은 이 사건 이후로 양귀비 씨앗 덩어리를 먹는 관습이 유럽 곳곳에 퍼지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어쩌면 나는 지나치게 바쁜 삶을 살고 있어서 일부 사람들이 원하는 유체이탈 경험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그것을 욕망조차 할 수 없는지 모른다. 게다가 그것을 시도하기에는 아마도 나는 겁도 너무 많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나는 몇몇 사람들이 화학적 유인 없이는 불가능할 마음의 상태를 경험하는 방식에 당황하고 있다. 나로선 사람들이 알칼로이드(카페인, 니코틴, 코카인, 헤로인, 모르핀 등)를 비롯한 많은 독성 물질에 기꺼이 빠져들어서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점이 흥미로우며 불가해하게 느껴진다. 나 역시 두통이 나면 코데인 몇 알을 털어 넣기는 하지만 말이다. 

 - DMT는 사람들을 강력한 대안적 현실로 빠르게 인도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 경험에서 회복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으며 만약 여러분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었다면 증상이 악화하기도 한다. 이 약물에 탐닉하는 몇몇 사람들은 그 경험에 대한 회상이 계속 이어진다고 말하는데, 그런 만큼 이 강력한 물질이 때때로 오랫동안 정신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신의 얼굴을 보았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외계를 방문해 외계 생명체들과 이야기했다고도 말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올빼미에게 이상한 언어로 얘기했다고도 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지옥에 가는 듯한 느낌이라고 보고했다.  

 

- 죽음 이후의 처벌, 즉 평생 저지른 악행에 대한 처벌은 종교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개념이며 역사상 예술가들은 지옥을 영원한 고통의 장소로 묘사했다.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와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hel)의 환상적인 예술적 이미지는 충분히 지옥일 수 있는 혼란스러운 풍경을 묘사한다. 이들의 상상력이 어떤 화학물질의 영향 아래서 생겨난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후기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그린 비슷하게 기괴한 작품들 가운데 일부 또한 압생트를 비롯한 향정신성 물질에서 영감을 받았을지 모른다.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지옥과 지옥살이에 대한 개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지옥은 개인적인 것이며 각자를 불편하게 하는 공포로 이뤄졌다는 것이 내 견해다. 아야와스카 의식에서 흥분감이나 고양, 환상을 추구하다가 목숨을 잃은 이 젊은이는 불안하게 날뛰는 동안 자신의 지옥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 고고학자와 생물학자는 토양을 다른 관점에서 본다. 고고학자들은 땅을 파면서 토양의 색깔과 질감의 변화를 맥락에 따라 기술한다. 각각은 인간의 활동을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기록한 사건이나 에피소드를 나타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생물학자는 토양의 프로파일을 자연적 과정에 따라 형성된 지면이라는 측면에서 고려할 것이다. 둘 다 교란과 발전에 대한 우리 각자의 결론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유효한 개념이다. 최근에 발굴한 매장지에서는 팠다가 다시 메운 모습이 엉망진창이기는 했지만, 그 속에 포함된 것들과 그것이 저변에 깔린 자연과의 차이를 보여주는 증거를 수집할 수 있었다. 고고학자와 과학자들은 법의학 작업을 위해 미리 준비되어 있다. 모든 항목과 행동이 벌어지는 시점을 꼼꼼하게 맞추고, 위치를 정하고 측정하며 기록하는 것은 이들의 천성에 가깝다. 하지만 그 가운데 부럽지 않은 일이 있다면 지저분하게 진흙이 묻은 공책에 갈겨쓴 기록을 해독하는 것이다. 현장에서는 무슨 뜻인지 분명해 보이지만 사무실에 돌아오면 절대 이해할 수 없을 듯했다. 

 

- 사체가 더 많이 드러나면서 우리는 다들 놀라 헉 소리를 냈다. 진흙탕에서 튀어나온 두개골과 발은 구더기와 새, 설치류에게 깨끗하게 먹혀 이 기묘하게 노출된 매장지에서 희생자의 사체가 오랫동안 있었다는 인상을 주었다. 사체를 뜯어먹는 더 큰 동물들이 관심을 보였다는 증거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아마 완전한 골격을 얻게 되리라 예상되었다. 

 

- "세상에!" 피터가 외쳤다.
피터는 끈적이고 창백하며 잘 보존된 살을 모종삽으로 발굴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다른 유물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아주 오래된 뼈를 보는 데만 익숙할 뿐이었다. 하지만 루크는 전몰자의 묘를 발굴한 경험 덕분에 더 느긋했다. 사체에서 악취가 강렬하게 풍기자 우리는 불쌍한 피터를 동정하며 마스크 너머로 눈길을 마주쳤다. 

- 나는 이미 묘지 주변의 이것저것 섞인 토양과 지표면의 표본을 채취했다. 사체를 여기 유기한 사람은 분명 이 흙을 어딘가에 묻혔을 것이다. 흙에는 흔적 증거가 아마 충분할 것이다. 몇 시간 동안 격렬한 강도로 작업한 끝에 사체를 모두 발굴했고, 나머지 법의학 팀이 자기들에게 필요한 증거를 수집하러 저지선을 넘어 들어왔다. 그리고 마침내 병리학자는 희생자의 사망을 선언할 수 있었다. 

- 장의사들이 도착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놀라겠지만 장의사들은 희생자의 유해를 영안실로 옮기기 위해 장소를 불문하고 범죄 현장에도 종종 모습을 나타낸다. 격식을 차린 검은색 정장과 흰 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맨 채 반짝이는 구두를 신은 남자 세 명이 둑 아래로 미끄러지듯 내려가는 모습은, 그들이 자신의 품위를 지키고 공손함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태도와는 조금 어울리지 않았다. 
사체는 검은 옷을 입고 아무 말 하지 않는 남자들에게 포장되어 가파른 둑 위로 간신히 옮겨졌다. 사체가 옮겨지자 개울 건너편에 있는 대부분의 경찰들과 다른 사람들은 임무에서 벗어났고, 일부는 따뜻한 영안실로 가게 되어 기뻐했다. 

 

- 이들은 자기의 아들이자 형, 삼촌이 감옥에 가긴 했어도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때 이 집의 가장이 뭔가 질문하고 싶다고 하면서 약간 어색한 침묵이 생겼다. 나는 나를 향한 표정과 몸짓으로 미루어보아 내가 문제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들 관습으로는 안방에서 다른 여성과 같이 앉아 얘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없으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무엇이 필요한지 아무도 몰랐다. 그런 상황이 가족에게 알려지자 그들은 손님으로 온 내가 일종의 명예로운 남성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했다. 명예 남성이라니,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 곧바로 알바니아 경찰관 한 사람과 통역사, 아버지 사이에 이야기가 오갔다. 우리는 서로 말은 통하지 않아도 활발한 몸짓을 많이 섞었으며 조금씩 분노가 차오르는 분위기였다. 통역사가 비난하는 어조의 말을 옮기는 동안 내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남자들의 머리가 내 쪽으로 홱 돌아갔다. 지켜보던 여자들은 놀라워하는 듯했다.

- "나는 진실을 찾고자 여기에 왔을 뿐입니다. 만약 당신의 아들이 무죄라면, 나는 그가 유죄 판결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할 겁니다. 나는 경찰의 편이 아닙니다. 중립이죠."

물론 그 말은 절대적으로 사실이었고, 뒤돌아보면 그날 나의 진실성만이 그 자리에서 모든 사람들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러자 그 집의 아버지는 나를 쳐다보았는데 내가 한 말이 분명 심금을 울렸던 것 같았다. 그러고는 '자기 아들의 결백함을 증명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돕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그날 내내 마음속 한구석이 턱 막히는 듯했다. 

 

- 나는 보통 사건 업무와 관련해 누군가의 가족과 상호작용하는 일이 거의 없다. 동정심이나 심지어는 공감하는 마음이 일어 용의자를 호의적으로 대하게 될 위험이 있고, 이것은 인지적 편향을 초래할 것이다. 무의식적으로라도 내심 나는 그 용의자가 결백하 ...

 

- 하지만 뭔가 잘못된 점이 있었다. 나는 법정을 빠져나온 뒤에야 비로소 그 찜찜함의 이유에 생각이 미쳤다. 내 증거는 검토를 받았지만 반대 심문을 받지 않았다. 피고 측에는 변호인이 없는 듯했다. 나중에 듣기로는 남자 판사 가운데 한 명이 피고를 변호하는 역을 맡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초현실적이었다. 알바니아계 불법 체류자의 유죄를 증명하는 화분학적인 증거는 강력했지만, 재판 과정은 확실히 불편했다. 유죄 판결이 너무 쉽게 난 것 같았다. 내가 제출한 증거는 그동안 법정에서 마구 공격당하고 멍들었으며, 나는 숙련된 변호사들의 전술에 대항하고자 지적인 곡예를 하면서 단련되었다. 영국에서라면 사법적 결정이 이번만큼 쉽게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 나는 조용한 삼림지대를 흐르는 개울 속 작은 섬을 다시 떠올렸다. 그 살인자는 미리 보복할 계획을 세운 것이지 홧김에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 사체를 묻을 곳을 나중에 다시 찾기 쉽도록 신중하게 골라 여러 달 전에 미리 파놓았으며, 범행을 위해 그 모든 과정을 특별히 준비했다. 살인범은 그 현장이 외딴곳이라 안전하다고 여겼을 테지만, 영국에서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은 어디든 돌아다닌다는 사실은 고려하지 못했다. 

- 어떤 분야든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생태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정보의 저장고는 현장이다. 나에게는 종달새가 수직으로 솟아올랐다가 노래를 부르고는 다시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모습을 보면서, 헤더와 잔디가 길게 자란 풀밭에 누워있던 신나는 기억들이 있다. 자주색으로 물든 헤더의 바다가 산들바람과 함께 넘실대는 풍경, 햇볕이 잘 드는 덤불의 따뜻함을 느끼며, 내 주위로 먹이를 찾는 벌레들이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때로는 방수 장비 안에서 땀으로 범벅이 되고, 수평 방향으로 빗물이 날려 옷 틈으로 스며들며, 머리카락이 두피에 달라붙고, 흠뻑 젖은 양말이 장화 속에서 쩍쩍 소리를 내며 질척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방법 말고 현실을 직시하는 다른 방법이 존재할까? 
 

- 나는 어쩌다가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 뒤돌아봐도 기억이 잘나지 않는다. 나는 내 인생의 어떤 측면도 미리 계획하지 않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아마 믿지 않겠지만, 나는 야망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우연히 나에게 일어난 일이다. 나는 상황을 앞서서 주도하기보다는 뭔가가 닥치면 반응하는 성격이었다. 단지 이미 법의생태학자가 되기 위한 준비를 마쳤고 실험실, 현장, 문헌을 통해 나에게 필요한 기술과 지식을 갖춘 상태였다. 학계에 있는 동안 대학교수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진부한 표현이지만 학생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지난 6년 동안 나는 런던 대학교에서 정규직으로 일하며 법의학적 고고학에 관한 이학 석사 과정을 운영했다. 이론적으로도 엄격하게 교육했을 뿐 아니라 실용적 지식을 가르쳤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당번 표를 작성했다. 학생들은 둘이서 짝을 지어 돌아가면서 사건 현장이나 영안실을 방문해 내 조수 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실제 현장을 직접 경험했고, 현장 실습을 하며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과 '할 수 없는' 사람으로 확실히 나뉘었다. 

- 내가 과연 관 속에 있는 사체를 얼마나 신경 쓰는지를 나 자신에게 종종 묻곤 했다. 고인에 관한 기억이라든지 우리의 예전 관계나 함께 보냈던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육체에 대해서는 어떨까?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예외도 있었다. 다소 비이성적이지만 나는 내 아이와 할머니, 내가 키웠던 애완 고양이가 죽었을 때 그 사체는 필사적으로 신경을 썼다. 왜였을까? 나는 그들의 몸과 냄새, 그들이 주는 느낌을 친밀하게 알고 있었고 그것들은 전부 소중했다. 비합리적인 감정이지만 결코 부인할 수 없다. 

-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이전에 섭취했던 음식에서 비롯해 육체를 구성하던 분자들로 분해된다. 그 사람은 다른 유기체들이 가졌던 분자를 자신의 분자로 전환시켰고, 이제 그것은 다시 한번 방출된 다음 다른 사람들에게 흡수되어 생명의 순환 주기를 영속시킬 것이다. 지표면에 남겨진 사체는 땅에 매장된 사체보다 훨씬 더 빨리 분해될 테고, 화장된 사체는 불과 몇 분 안에 무기질의 재로 환원된다. 이때 이 재를 숲 속에 흩날린다면 그 사람은 말 그대로 환생하는 셈이다. 재 안의 원소들은 세균, 균류, 무척추동물, 식물 뿌리에 흡수된다. 한 사람의 개인이 숲 전체로 퍼져 다수의 존재가 된다. 블루벨, 참나무 그리고 멋진 딱정벌레로 동시에 환생할 수 있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당신이 이런 생각을 좋아하든, 싫어하는 이 일은 분명히 일어난다. 

- 나는 이런 생각이 무척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남편을 이루던 분자와 나의 분자도 섞일 것이다. 우리의 재가 같은 곳에 뿌려지면, 우리는 심지어 같은 그루의 나무나 블루벨이 될지도 모른다. 정말 멋지다! 나무와 블루벨이 죽고 그 사체가 부패하면, 우리의 분자는 다시 방출되어 다른 생물에게 흡수될 것이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소들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한 계속 존재한다. 

- 슬픈 사실은 내가 더 이상 여기에 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내 존재는 멈출 것이다. 나는 묘비 같은 물리적인 기념물을 세우지 않을 것이며, 나를 가장 아끼던 가장 가까운 사람이 모두 떠나면 나를 기억할 사람도 없으리라 여길 정도로 허영심이 없다. 교회 묘지나 심지어는 시립 묘지에서 묵념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나는 토머스 그레이(Thomas Gray)의 <시골 교회 묘지에서 쓴 비가>가 꽤 감성적이라고 생각했던 것 말고는 시를 대체로 좋아하지 않으며, 묘비 자체가 없을 테니 누군가 그 위에 감동적인 어떤 글을 쓰지도 못할 것이다. 그보다 나의 기념비는 작업물이나 출판물일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계속 유지될 것이고, 무덤이 그렇듯 어떤 감성적인 증거를 만들기보다는 어딘가 먼지 쌓인 낡은 도서관에서 내 존재의 증거를 남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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