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야마시로 아사코(오츠이치)] 엠브리오 기담

일루젼 2024. 1. 24. 06:10
728x90
반응형

저자 : 야마시로 아사코 / 김선영

원제 : Fairy of Embryo

출판 : 엘릭시르

출간 : 2014.03.20 


       

이야기, 이야기, 이야기.

이야기들에 둘러싸여 시간을 보내고 있다.

 

기담 류를 좋아하기 때문인지, 혹은 그래서 기담을 좋아하는 것인지 선후관계는 명확지 않지만 나는 좋아하는 이야기를 기반으로 공상하기를 즐긴다. 때로는 인물, 때로는 설정을 빌려와 마음대로 덧칠하며 노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썩 마음에 들게 또 다른 이야기가 완결되는 경우도 있고, 이도저도 아닌 채로 그저 그런 망상만 흩어지는 경우도 있다. 딱히 목적이라곤 없는 상상들은 나를 꽤나 행복하게 만들어주곤 한다.  

 

교고쿠 나츠히코의 <항설백물어> 시리즈를 다시 읽다가, 문득 케루빔을 연상케 하는 일본풍 일러스트 표지의 기담을 읽은 적이 있었다는 기억이 났다. 저자도, 제목도 제대로 떠오르지 않아 약간 고생했지만 결국 찾아낸 <엠브리오 기담>. 혹시나 싶어 구매 기록을 확인해 보니 18년쯤에 읽었던 듯하다. 이렇게 실제 있었던 일인지 아닌지 어렴풋한 기억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순간의 느낌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기묘한 느낌이다.  

 

잡설은 이쯤 하고, 이 책의 저자 '야마시로 아사코'는 '오츠이치'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저자와 동일 인물이다. 그 '오츠이치'가 맞다. 이외에도 다양한 필명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유명 작가가 새로운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하는 것은 이미 유구한 전통을 자랑한다.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의 경우만 보아도 그렇다.

 

유명세는 작가로서는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동시에 가장 강력한 족쇄가 되기도 한다. 기존 작품을 답습하지 않으면서도 어느 정도 비슷한 결을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 특히 주된 독자층의 취향과 경향성이 뚜렷할수록 이런 부담감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필명을 바꿔 완전히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다는 저자의 욕망도 납득이 간다.  

 

놀라운 점은 '원 히트 원더'가 넘쳐나는 예술계에서 본 활동명이 아닌 가명으로도 성공하고야 마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 이름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는 듯이 충분히 놀라운 작품을 발표하곤 한다는 것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의도와는 달리 가명 뒤에 숨겨진 정체를 들켜버리는 경우도 왕왕 있다. 낙관을 찍은 것처럼 정체성이 드러나 버리면 어쩔 수 없는 노릇.) 

 

<엠브리오 기담> 같은 경우는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의도된 섬뜩함이나 끈적한 호러를 즐기는 분들께는 다소 밋밋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딱 떨어지게 설명하기 어려운 기이-기묘한 이야기나 인간 군상 자체의 민낯 훔쳐보기를 즐기시는 분들이라면 즐겁게 읽으실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기이한 건 인간일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즐거웠다.  

        

 


   

 

- 서민들이 소원을 빌기 위해 신사와 사찰을 찾거나 치료를 목적으로 온천을 찾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전까지는 여행을 위한 가도라는 게 있지도 않았고, 군데군데 끊긴 비좁은 길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큰 전쟁이 연이어 일어나고, 맞붙은 지방끼리 자주 다툼을 벌였던 탓이다. 그런 상황에서 길을 정비하는 짓은 제 목을 조르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도로 정비는 적군의 침입을 거들기 때문이다. 

 

- 차츰 사람들의 왕래가 활발해졌다. 공문서를 든 관리들만 가도를 이용하는 건 아니었다. 세상이 안정되고 농민과 백성들의 생활이 향상되자 가도를 이용해 멀리 떠나는 사람들이 늘었다. 그들은 유명한 신궁을 참배하는 것을 평생의 유일한 낙으로 삼았다. 참배하는 김에 각지의 명소와 연극을 구경하고, 온천에서 몸을 치유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몇 개월에 걸쳐 도보로 각지를 돌고, 입소문으로만 들었던 대해와 신사, 사찰을 보고 진귀한 음식을 즐기게 되었다. 

 

- 그러면서 인기를 얻은 것이 <도중기>나 <순람기>, <명소기>와 같은 서적이었다. 이런 책에는 여로의 역참과 거리, 짐삯, 관문, 명승고적 등에 대한 설명이 기록되어 있었으며 심지어는 여관 주인을 구슬려 삶는 방법까지 있었다. 그 책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가 여행을 해 본 적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친절하고 꼼꼼히 적어 놓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 기록들은 작은 책자나 접지로 제작되어 들고 다니기 편했다. 사람들은 그 책들을 주머니에 넣어 길을 가면서 펼쳐 보는 것이었다.

 

- 나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어째서 이전 짐꾼이 달아났는지, 그 이유를 좀 더 자세히 캐물었어야 했다. 

 

- 보수에는 문제가 없었다. 이즈미 로안의 성격에도 불만은 없다. 오히려 나는 그의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여행길에 문화 차이 때문에 아무리 부당한 취급을 받아도 아무리 맛없는 요리가 나와도 그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와 함께 하는 여행은 즐겁지 않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여행의 목적지가 대부분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장소였기 때문이다.

- 그의 여행 목적은 신사나 사찰 참배도, 온천 휴양도 아니었다. 길 안내서를 쓰기 위한 취재였다. 하지만 유명한 온천이나 명승고적은 대개 이미 책에 나와 있었다. 그래서 이즈미 로안과 의뢰처는 어떤 책에도 없는 관광지를 찾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 이름은 없지만 훌륭한 효능을 가진 온천이나 한 번쯤 볼만한 사찰을 소개할 수 있다면 분명 책이 잘 팔릴 거라 예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름 없는 온천에 대한 입소문을 들으면 직접 가서 확인하고 온다. 저 산하고 저 산 너머에 거대한 사원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일단 한번 가 본다. 그것이 이즈미 로안의 여행이었다. 

 

- 하지만 실제로 그런 비경이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적어도 내가 함께 갔던 여행에서는, 사전에 들었던 그런 온천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목적한 장소에는 여관조차 없는 쇠락한 촌락뿐이라, 지푸라기를 둘둘 감고 추위를 견디며 밤을 보내야 했다. 이래서야 여행을 할 때마다 마음이 피폐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 내가 로안의 여행에 동행하지 않게 된 이유는 한 가지가 더 있다. 이즈미 로안은 길치였다. 그는 확실히 여행에 익숙했다. 지치지 않게 걸을 줄도 아는지 하루 종일 걸어도 기운이 넘쳤다. 하지만 백이면 백, 길을 잃는다. 어린애도 똑바로 갈 수 있는 외길에서, 어째선지 로안이 앞장을 서면 아침에 출발한 마을로 돌아오고 마는 것이다. 아니, 그가 뒤에 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즈미 로안의 끔찍한 방향 감각은 동행한 사람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는 듯했다. 덕분에 반나절이면 도착할 곳을 찾아가는 데 일주일이나 걸린 적도 있다. 자고로 그런 사람은 여행을 말아야 하는데, 이즈미 로안 스스로는 신경 쓰는 기색도 없어 길을 잃어 예상치 못한 절벽이 튀어나왔을 때도 "요상하구나, 요상해!" 하고 재미있다는 듯이 웃기만 했다. 덕분에 매번, 기묘한 곳에 끌려갔다.   

 

- "자네는 모르나? 그건 엠브리오라는 거라네."
새벽녘에 눈을 뜬 이즈미 로안은 내 손바닥에 얹힌 허여멀건 것을 보며 말했다.
"엠브리오?"
"인간의 태아지. 모른단 말인가? 인간은 갓난아이가 되기 전에 모친의 배 속에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네. 어제 개울가에 나카조 산이 있었던 걸 기억하는가? 나카조는 예로부터 낙태를 전문으로 하는 곳이지. 분명 그곳 의사가 여자 배 속에서 빼낸 태아를 근처에 버린 게야."
로안도 실물은 처음 본다고 했지만 남방에서 건너온 책에 태아에 대한 정보가 삽화와 함께 실려 있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어젯밤 광경을 떠올리자 왠지 으스스했다. 
"그건 땅에 고이 묻어 주는 게 낫겠네."
여장을 꾸리며 이즈미 로안이 말했다. 나는 태아를 손바닥으로 감싼 채 밖으로 나갔다. 여관 뜰 앞에 구덩이를 파서 그 안에 고이 누이고 위에 흙을 덮으려 할 때였다. 태아가 꿈틀꿈틀, 배를 실룩거렸다.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있었던 모양이다. 
꿈틀거리는 태아를 묻기는 거북했다. 애벌레처럼 생기긴 했지만 분명 사람이다. 산 채로 묻었다간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나 다름없다. 

 

- 주머니에 넣거나 손으로 감싸고 있으면 태아와 맞닿은 부분이 따뜻했다. 이 주나 함께 지내다 보니 점점 이 녀석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가족이라 부를 만한 존재가 생긴 건 처음이었다. 철이 들었을 때 이미 부모님은 타계한 뒤였고 형제도 없었다. 지금까지 속 편하게 혼자 살았고, 앞으로 누군가와 함께 살 거란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었다. 가족이라는 게 생기면 대체 어떤 기분일까 상상한 적은 있지만, 태아를 손끝으로 어루만지며 꾸벅꾸벅 졸 때면 그때까지 몰랐던 온기가 자꾸만 가슴속에 솟아나는 것이었다. 

 

- 로안이 나를 염려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낙심하지 말게. 자네한테는 내가 있잖나."
"태아가 천 배 만 배는 더 낫습니다."
"그런 말 말고 또 함께 여행을 가세. 진귀한 온천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어. 글쎄, 거목의 나이테 안에서 뜨거운 물이 솟아난다지 뭔가. 당장 조사하러 가세, 여행 자금은 의뢰처가 내준다고 하니."
나는 로안의 말을 무시하고 멀어져 가는 부부의 뒷모습을 언제까지고 바라보았다.

- 풍문에 의하면 그 후 부부는 의사의 도움으로 태아를 배 속에 넣었다고 한다. 이즈미 로안이 예전에 태아가 성장하려면 여인의 배가 필요하다는 말을 했었다. 그 태아가 정말 갓난아이가 되어 나올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즈미 로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도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나는 그저 열심히 일만 했다. 
부부는 태아를 맡을 때 내 빚을 대신 갚아 주겠노라 약속해 주었다. 덕분에 노름꾼 우두머리와 똘마니들이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태아를 구경거리로 삼아 돈을 벌었던 게 아득히 먼 옛날 일만 같았다. 

 

- 아이들 목소리가 멀어지자 나는 그만 졸음이 쏟아져 눈을 감으려 했다. 그때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내 쪽을 바라보며 서있는 소녀가 보였다. 방금 전에 지나갔던 아이들 중 하나였다. 
"왜 그러니? 다들 먼저 가 버렸는데."
내가 말을 걸자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논물에 비친 태양이 소녀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다.
"아저씨, 오랜만이야."
소녀가 혀짤배기소리로 말했다.
"너하고 어디서 만난 적이 있었나?"
"있어, 난 기억하는걸."

 

- 그 아이가 말하길, 예전에 소녀는 나와 함께 살았다고 한다. 내 손바닥 위에서 잠들고, 밥그릇에 받은 미지근한 물로 목욕도 하고, 내 가슴에 딱 달라붙어 잠들면 마음이 놓였다고 했다. 소녀는 이제 갓 트인 말로 열심히 설명했다.
"아저씨 냄새는 지독했지만, 잠깐이라도 아저씨가 안 보이면 슬퍼서 막 눈물이 났어."
 

- <엠브리오 기담>

 

 

- 린은 도매 서점에서 기거하면서 일하고 있다. 평소에는 집안일을 돕지만 일손이 부족할 때는 손님 상대로 책을 팔았다. 장인을 찾아가 목판 인쇄용 판목을 주문한 적도 있다. 자고로 책은 목판 인쇄가 최고다. 나무판에 글자와 그림을 새기고 먹을 발라 종이에 찍어 내는 인쇄 방법이다.

 

- 활판 인쇄라는 방식도 있지만 린은 활판 인쇄가 싫었다. 그리스도 판이라고 했던가. 행수 어르신이 보여 주었는데 이국에서 들어온 종교 서적이 활판으로 인쇄되어 있었다. 활자마다 따로 주조한 판을 배열해 인쇄하는 방식이다. 어리석다. 이국의 글자는 수십 종류밖에 없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히라가나나 한자마다 판을 만들려면 엄청난 수를 주조해야 한다. 게다가 어느 글자나 똑같은 모양이 되니 재미가 없다. 목판 인쇄는 글자를 파는 장인들마다 특유의 맵시가 있다. 히라가나, 한자, 삽화가 한 덩어리로 녹아 종이에 담긴다. 책은 역시 목판 인쇄가 으뜸이다. 
 

- 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연애 소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행수 어르신이 방에서 불렀다.
"린, 이리 좀 오너라."
"예."
장지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행수 어르신과 젊은 사내가 마주 앉아 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늘어져, 무릎을 꿇고 앉아 있으니 다다미에 터럭 끝이 닿을락 말락 했다. 이목구비가 단정해 마치 수련처럼 단아한 모습이었다. 린은 그 사람에게 매료되어 방 입구에서 넋을 놓고 말았다.

 

- <도중여경>의 작가이기도 한 이즈미 로안을 만난 것은 린이 열여섯 살 때였다. 화재 연기에 휩싸여 죽은 것이 스물일곱 살 때니 그 십일 년 전의 일이었다. 

 

- 아직 어린 소년이 민가의 방 한쪽에 누워 있었다. 눈을 감은얼굴이 마치 죽은 사람 같았다. 숨소리도 약했다. 의사가 없는 마을이다. 사람들은 괴로워하는 소년을 그저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죽을 때가 가까웠다. 가족들이 이부자리 옆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작고 하얀 나비가 사람들 머리 위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집 안에 들어가 어디에 내려앉지도 않고 살랑살랑 날아다니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 눈에는 나비가 안 보이는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린만 눈으로 나비를 좇으며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의 아침을 떠올렸다. 린은 노파의 집으로 돌아가 짐 속에서 주머니를 꺼내 들고 소년이 있는 집으로 갔다.  

 

- "이걸 쓰세요."
주머니를 노파에게 건넸다. 그것을 남에게 주려니 용기가 필요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린에게 남긴 유품이었다. 노파는 주머니를 들여다보고 안에 들어 있던 작은 알갱이를 주름이 자잘한 손바닥에 쏟았다. 마지막 한 알이었지만 분명 지금이 그것을 쓸 때다. 노파가 증손자의 입에 약을 넣고 물을 먹였다.

- 이즈미 로안과 미미히코는 냉큼 이부자리로 들어갔지만 린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툇마루에서 바람을 쐬고 있었다. 휘황한 달이 소나무를 비췄고, 벌레가 조용히 울고 있었다. 원래는 아침에 떠날 예정이었지만 소년의 상태가 걱정되어 하루만 더 마을에 머무르기로 했다.
약이 들었는지 소년은 눈에 띄게 회복되었다. 일어나지는 못했지만 열도 내려 이름을 부르면 눈을 뜰 정도라고 했다.
인기척이 나서 뒤를 돌아보니 노파가 린 뒤에 서 있었다. 노파는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린이 어쩔 줄 모르고 있자 노파는 잠옷 소매에서 곱게 접은 수건을 꺼냈다.
"이 돌을 가지고 가시게."
노파가 헝겊을 펼쳤다. 새끼손가락 끝마디만 한 파란 돌이 수건에 싸여 있었다. 하늘을 한 곳에 모아 굳힌 것처럼 짙은 파란색이었다.

- "나는 이걸 벌써 오백 년도 더 지니고 있었다네."
"네?"
"오백 년."
노파의 표정은 진지했다.
"이 돌을 한시도 곁에서 떼지 마시게. 그러면 언젠가 내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게야."
이 얼마나 아름다운 푸른빛인가? 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달빛밖에 없는 어둠 속에서도 똑똑히 보인다. 안쪽에서 빛을 발하는 것만 같았다.

 

- "나는 이 돌을 여행자에게 받았다네. 오늘 아가씨처럼 목숨을 구해 준 보답으로, 이걸. 평생, 죽을 때까지 지니고 있게. 하지만 딱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게 있어. 자살만은 해서는 안 돼. 만약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지옥에 떨어질 게야."
노파는 약이 들어 있던 주머니를 꺼내 그 안에 돌을 넣어 린의 손에 쥐여 주었다. 분명 그 돌은 값진 물건이리라. 린은 처음에는 받기를 거부했지만 노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린에게 주고 싶은 듯했다. 결국 설득에 넘어가 린은 돌을 받았다. 

- 처음에는 죽었다가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줄 알았다. 하지만 자신을 굽어보는 얼굴은 기억 속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아버지의 품에 안겨 산책할 때 보는 것도 익히 아는 풍경이었다.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게 아니었다. 나는 린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나는 바로 나였다. 다시 린으로 태어나고 만 것이다. 린은 생후 한 달 만에 그 사실을 깨달았다.  

- 갓난아이 린은 주위의 대화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의 말을 듣고 태어났을 때 파란 돌을 쥐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틀림없이 라피스라줄리다.
이전 인생에서는 태어났을 때 파란 돌을 쥐고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이 신비한 상황은 돌 때문이지 않을까?
화재로 죽었을 때도 돌을 품고 있었다. 노파가 말한 대로 죽는 그날까지 품에서 떼지 않았다. 노파는 그렇게 하면 언젠가 자기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거라고 했다. 


- 주머니를 목에 건 린은 두 번째 인생을 살았다. 아버지가 챙겨 두었던 라피스라줄리는 과거에 노파에게 받은 돌이 분명했다. 크기와 형태, 색채까지 완전히 똑같았다. 군청색 표면에 점점이 금색 가루가 빛나고 있다. '밤'이 동물이 된다면 분명 이돌 같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겠지. 이 돌이 자그마한 자신의 몸과 함께 어머니의 배 속에서 나온 것이다. 

- 오랜 옛날에 죽어, 이젠 만나지 못할 줄 알았던 아버지가 다시 살아서 눈앞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처음에는 경이로운 사실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그것에도 익숙해졌다. 첫 번째 인생이야말로 꿈이고, 사실은 전부 없었던 일이 아닐까 싶을 때도 있었다. 
 

- 그래도 가끔 남편이나 자기가 낳은 아이들이 생각나면 쓸쓸했다. 다들 어떻게 되었을까? 살아 있다면 언젠가 또 만날 수 있을까? 
 
- 린은 표지 그림이 있는 연애 소설을 손에 들고 종이를 넘겼다.
"이거 기억나, 재미있었는데."
"꼬마 아가씨. 그 책은 나온 지 얼마 안 된 거야."
"기억하는 걸 어쩌라고."
책 장수는 린이 농담을 하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오랜만에 만지는 목판 인쇄 책의 감촉이 좋았다. 돗자리 위에 깔린 책을 한 권씩 살펴보다가 <도중여경>이라는 책을 찾았다. 지은이는 이즈미 로안. 린은 그리운 마음에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 사람도 이 세상 어딘가에 있는 것이다. 

 

- 린의 아버지는 이따금 옆 마을에 사는 제와장의 집에 갔다. 기왓장을 가마로 구워 이웃 도시에 납품하는 작업을 도왔다. 받은 돈은 생활에 보탰고, 덕분에 배를 곯을 일은 없었다. 
약을 준 것도 제와장이었다. 기왓장을 짐수레에 실어 도읍으로 옮겨다 준 데 대한 보답이었다. 말린 웅담에 몇십 종류의 식물을 섞어 만든 약은 주머니에 다섯 알가량 들어 있었다. 린이 병에 걸리면 아버지가 그것을 한 알씩 먹여 주었다.

- 린이 일곱 살 때였다. 아버지가 기와 굽는 일을 도우러 가겠다고 해서 린은 빈집을 지키게 되었다. 아버지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집 안에 나비가 날아들었다. 처음에는 예쁘구나 하며 멍하니 바라보았지만 곧 기억해 내고 집에서 뛰쳐나갔다. 이웃 마을 경계에서 아버지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가면 안 돼. 오늘은 나쁜 일이 생겨."
린이 필사적으로 말려서 아버지는 그날 일을 도우러 가지 않았다. 제와장 집에서 헛간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이튿날이었다. 기둥이 썩어 있었다고 한다. 쌓아 두었던 기와도 산산조각 났다고 한다.


- "린이 말리지 않았다면 청소만 돕다 올 뻔했구나."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지만 린은 무서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날 헛간에서 기와에 깔려 죽을 운명이었다. 고아가 된 린을 가엾게 여겨 도와준 것이 제와장 부부였다. 그들은 잘 아는 도매 서점에 부탁해 린이 먹고 자며 일할 수 있도록 선처해 주었다. 그것이 린이 기억하는 인생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앞으로도 계속 살아 있다. 그녀 곁에 있는 것이다. 이다음부터는 린이 모르는 인생이었다. 

-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어?"
"네 신통력으로도 어머니 모습까지는 모르니?"
아버지는 짐수레를 끌고 있었다. 기왓장을 도읍으로 나르는 중이었다. 린은 기와와 함께 짐수레에 타고 있었다. 열세 살이 되었지만 몸은 작고 가벼웠다.
"내 능력은 신통력이 아니야."
그저 이런저런 일들을 두 번 겪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얼굴을 알 방법이 없었다.  

 

- 여럿이 다닥다닥 모여 살았던 목조 가옥이 아니라 훌륭한 집에서 아이를 낳았다. 첫 출산이지만 린이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자 주위 사람들이 더 놀랐다. 아이를 어르는 손길이 젊은 어머니치고는 너무 능숙해 시어머니가 잔소리를 할 구석이 없었다. 

 

- 첫 번째 인생에서 첫 아이는 아들이었는데 이번에는 처음에 딸이 태어났다. 아버지가 달라서 그렇겠지. 그렇다면 목조 가옥에서 등에 업고 젖을 먹여 길렀던 아이들은 어디로 가 버렸을까? 언젠가 또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아무래도 그 아이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듯했다. 아이들의 인생을 통째로 지운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새로 낳은 아이를 키우는 사이 전에 낳은 아이들을 점차 잊어 갔다. 그것이 또 괜히 서러웠다. 

 

- 아이들 중 한 명에게 이 라피스 라줄리를 줘야지. 린은 언제나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이제 충분히 살았다. 다음에는 아이에게 삶의 기회를 줘야지. 하지만 하룻밤이 지나면 무서워서 목에 건 주머니를 풀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났다. 
 

- 라피스 라줄리를 노파에게 받은 게 머나먼 옛일이 되었다. 노파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내게 라피스라줄리를 건네주었을까? 파란 돌은 생명 그 자체였다. 이것을 남에게 맡길 때 그 마음은 어땠을까? 
거기에 비해 자신의 마음은 얼마나 천박한지 경악스러웠다. 이만큼 살았으면 이제 족한데 라피스 라줄리를 떼어 놓기가 무서웠다. 지금까지 면제받았기 때문인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전보다 더 커졌다. 적어도 죽음 저편에 죽은 이들이 행복하게 사는 다른 세계가 있다면 좋을 텐데. 린은 종교 서적을 읽어 보았다. 활판 인쇄로 찍은 이국의 책도 훑어보았다. 하지만 어느 것도 공포를 씻어 주지는 않았다. 

 

- 언젠가 이 공포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날이 올까? 그렇지 않으면 나는 영원히 살아가야 한다. 하다못해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이 라피스라줄리를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 어머니의 배 속은 미지근한 온천 같았다. 산파가 어머니의 배를 가르고 린을 꺼냈다. 린은 눈을 뜨고 주위를 보았다. 양수와 피의 감촉. 공기가 온몸에 닿았다. 촛불 같은 빛이 보였다. 하지만 갓난아이의 눈은 금방 사물을 볼 수는 없는 모양이다. 모든 것이 어렴풋했다. 결국 어머니의 얼굴은 보지 못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린은 자그마한 손가락으로 파란색이란 파란색은 모두 응축해 놓은 듯한 돌멩이를 움켜쥐고 있었다고 한다. 

 

- 린의 세 번째 인생이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품에 안겨, 고향의 전원 풍경을 바라보았다. 뒤뜰꽃밭에 나비가 날아다닌다. 또다시 여기로 돌아왔구나. 감회가 치밀었다. 신통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위에서 꺼리지 않도록 이번에는 평범한 아이 행세를 했다. 말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누가 말을 걸어도 못 알아듣는 척했다. 저번에는 신동이라고 칭송받았던 대신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같은 또래의 친구들이 많이 생기고 마을 사람들도 가볍게 말을 걸어 주었다. 

 

- 그 대신 마을에 홍수가 나는 해에 조심하라고 외쳐도 린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저번에는 마을 사람들이 린에게 신통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피해 규모는 지난번과 비교할 수도 없었다.

 

-  린은 그 남자와 행복한 생활을 보냈다. 화가 나서 싸우는 일도 적었고, 남편이 바람을 피우지도 않았으며, 집 안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 사람과 린 사이에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시자 남편과 단둘이 되었다. 뜰에 앉아 말라죽은 감나무를 바라보며 오랜 시간 부부끼리 대화를 나누었다. 저녁노을에 구름이 발갛게 물들면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아이나 손자가 있었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이런 저녁이면 아이들이 뛰놀곤 했지. 넘어져서 무릎이 까져 울면서 돌아왔었지. 

 

- 죽어서 다시 태어나길 반복해, 여태 살아온 세월이 백 년을 넘었다. 그동안 만난 사람들은 헤아릴 수도 없다. 그래도 제 손으로 키운 아이들의 얼굴과 이름은 기억했다. 어느 아이가 어떤 성격이었는지도 잊지 않았다. 천 년이 넘게 산다 해도 품에 안았던 아이의 무게를 기억할 것이다. 

 

- 린의 어머니는 그것을 느껴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다시 태어나면 태어날수록 어머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린이 갓난아이로 태어날 때마다 어머니는 피와 양수를 흘리며 죽는다. 마치 린이 되풀이해서 어머니를 죽이는 것만 같았다. 

 

- 세 번째 인생이 끝나고, 린은 라피스 라줄리를 움켜쥐고 네 번째로 어머니의 배 속으로 돌아갔다. 린이 태어나는 동시에 어머니는 죽었다. 발달이 덜 된 눈으로는 그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원한다면 영원히 생각할 수도 있다. 무한히 추억을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어머니의 얼굴만은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 린은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인생을 공부에 쏟아부었다. 죽어서 갓난아이로 돌아갈 때, 남편과 아이들은 데려갈 수 없지만 보고 들은 것은 남는다. 그렇다면 많이 배우고, 지식을 쌓아 세상에 도움이 되고자 했다. 린은 이국의 언어를 배워 의학서를 머릿속에 담았다. 약에도 박식해져 약초나 독약에 대해 삽화가 든 책을 썼다. 튼튼한 다리나 화재에 강한 목조 가옥 설계도 해 보았다. 죽어서 또다시 갓난아이로 돌아가면, 린의 업적은 백지로 돌아갔다. 그래도 다시 처음부터 책을 썼다.

 

- 아버지의 죽음, 남편의 죽음, 그리고 아이의 죽음을 몇 번이나 체험했다. 눈물이 흘렀다. 익숙해질 수는 없었다. 어째서 이렇게 슬픈 것일까? 함께 있던 사람이, 어느 날을 경계로 사라진다. 그 사람과 보냈던 날들이 언제까지나 가슴에 남는다.  

 

- <라피스 라줄리 환상>

 

 

- 날이 밝기 전에 여관 마을을 떠나 고개를 넘었다. 주위가 밝아 오자 초롱불을 꺼서 양초를 아꼈다. 가도 주변에는 여행객이 많아 쓸쓸할 일이 없다. 등에 멘 가죽 보따리에는 여행을 위한 짐이 들어 있었다. 반짇고리, 빗, 부싯돌, 삼베망, 도장. 걸을 때마다 물건들이 주머니 속에서 달그락거렸다. 이즈미 로안이라는 사내의 짐꾼으로 여행에 따라나선 길이었다. 그때까지도 몇 번 그와 여러 지방의 온천 마을을 순례했다. 

 

- 이즈미 로안은 여행 안내서를 출판해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다. 가도가 정비되어 여행이 쉬워졌다고는 하지만 나고 자란 곳에서 한 번도 떠나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여전히 많았다. 그들은 여행길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모르고, 온천에서 어떻게 입욕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런 사람들에게 여행 안내서는 필수 불가결한 물건이다. 특히 온천에 대한 기사가 있는 책은 인기다. 좋은 온천은 병을 고친다. 고통을 지워 준다. 요양 목적으로 온천 마을에 오래 머무르는 사람도 드물지 않다.  

 

- 의뢰처는 어느 안내서에도 적혀 있지 않은 온천에 대한 소문을 들으면 이즈미 로안에게 돈을 주어 온천 마을로 여행을 보낸다. 돌아오면 책을 쓰게 해서 출판한다. 나는 그런 로안의 여행을 돕고 거기에서 떨어지는 떡고물을 받아먹는 것이다. 

- 이즈미 로안은 계집처럼 머리가 검고 길었다. 말 꼬리처럼 묶고 다닌다. 그리고 심각한 길치다. 여행 안내서 작가이고, 여행이라면 질릴 정도로 해 봤을 텐데도 어김없이 길을 잃는다. 도읍을 떠나 며칠이나 여행을 했는데도 어째선지 정신을 차리고 보면 도읍의 반대편에 도착해 처음으로 돌아간 경험도 있다. 그런 영양가 없는 반복에 질려 이제 그만 따라다니고 싶었지만 그만둘 수 없는 사정이 있다.

 

- 어째서 빚을 지고 말았을까?
나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며칠 전에 한 노름이 잘못인지도 모르지만 과연 그럴까? 잠깐 주사위 노름을 했을 뿐인데 그렇게 큰 빚을 질 수 있나?  

 

- "그런데 이 마을에 온천이 있습니까?"
"뒷길로 올라가면 있습니다. 하지만 밤에는 안 가시는 게 나을 겁니다."
"어째서?"
"못 돌아오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길을 잃는다는 뜻입니까?"
"아니요. 온천에서 나온 흔적이 없다는 겁니다. 다음 날, 벗어 놓은 옷만 온천 옆에서 나오죠. 다들 어디로 가 버린 건지..."
여관 주인은 그렇게 말하더니 우리를 방에 남겨 두고 나가려 했다. 불러 세웠지만 못 들은 척하는 건지 냉큼 나가 버렸다. 어둠 속으로 뒷모습이 사라지고 주인이 걸을 때 마룻바닥이 끼익 끼익 삐걱거리는 소리만 잠시 동안 들려왔다.

 

- 달빛이 어둠 속에서 푸르른 대숲을 비추고 있었다. 온천으로 통하는 좁은 길이 대숲 안쪽으로 이어졌다. 뭔가가 썩은 듯한 온천 특유의 냄새가 풍겨 왔다. 
"그럼, 주인도 저리 말하니..."
이즈미 로안도 내 옆의 찢어진 장지 구멍으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네요. 오늘은..."
그만 잡시다. 나는 그렇게 말하려 했지만 이즈미 로안은 다른 소리를 했다.
"자네가 얼른 온천에 들어가 봐야겠어."

 

- 이즈미 로안이 말하길, 온천에 어떤 위험이 있으면 책에 쓸 수 없으니 내가 그것을 조사해 보라는 것이었다. 확실히 여관주인이 한 이야기는 신경 쓰였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듣고 냉큼 한밤중에 온천에 찾아갈 마음은 들지 않았다. 나는 이즈미 로안의 제안을 못 들은 척하고 방구석에 개여 있던 이불을 뒤집어쓰고 얼른 자 버렸다. 

- 이튿날 아침, 장딴지가 가려워 잠에서 깼다. 거기만 가려운 게 아니라 팔과 목, 발등, 손끝까지 근질거렸다. 어스름한 아침햇살이 방에 비쳐 들어 그 빛 속에서 유심히 살펴보니 온몸에 붉은 발진이 돋아 있었다. 내가 사용한 이불에 빈대가 수두룩했던 모양이다.  

 

- 돌아온다는 이야기가 사실인지. 과거에 그런 일이 정말 있었는지. 하지만 여관 주인은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낮에 들어가면 괜찮습니다."
이 말뿐이다.

 

- 달리 할 일도 없어 나와 이즈미 로안은 온천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주인 이야기야 그렇다 치고 일단 온천에 들어가 피로를 풀고 싶었다. 온천 냄새가 옆에서 솔솔 풍겨 오는데 들어가지 않고 마을을 나갈 수야 없지. 

- 우리는 수건을 들고 여관 뒤편의 오솔길을 걸었다. 대나무들이 길 양옆에 빼곡하게 우거져 있었다. 길은 산비탈에 정면으로 도전할 기세로 깎아지른 오르막이었다. 한참 걸어가자 뒤에 보였던 여관이 대숲 너머로 사라지고, 그 대신 앞쪽에 김이 솟아오르는 벼랑이 보였다. 바위가 가득한 벼랑 앞에서 대숲은 끝났고 주변에는 김이 서려 하얀 안개가 자욱했다.

 

- 바위를 기어오르자 벼랑 중간에 선반처럼 튀어나온 자리가 있고 그곳에 뜨거운 물이 괴어 있었다. 누가 바위를 파내서 만든 게 아니라 오목한 바위 속에 뜨거운 물이 고인 자연 온천이다. 어른 다섯이 들어가면 꽉 찰 만한 크기였다. 물은 허여멀겠고 침전물이 뭉친 탕화가 떠다니고 있었다. 발을 담가 보니 뜨뜻한 게 딱 좋은 온도였다. 
이즈미 로안은 온천에 들어갈 때 자기만의 미의식에 따라 행동하는 듯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옷을 벗고 첨벙 뛰어들었다. 눈 밑에 펼쳐진 대숲이 절경이었다. 뒤에는 절벽이 솟아 있어 바위의 거친 느낌이 또한 일품이었다. 

- 우리는 아무 문제 없이 온천을 즐기고 여관으로 돌아갔다. 온몸의 가려움도 싹 가셨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이즈미 로안은 일기장을 펼치고 온천에 대해 기록했다. 온천물의 색과 냄새, 깊이와 면적, 여관에서 온천까지 걸리는 거리, 예상되는 효능등을 술술 써 내려갔다. 여행 안내서를 쓸 때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즈미 로안은 도중에 붓을 멈추더니 뭐라 말하고 싶은 눈치로 나를 쳐다보았다.
"알겠습니다. 가면 될 것 아닙니까, 밤에..."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방금 실제로 들어가 보니 어디에나 있는 온천으로 보였으므로 딱히 별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 대신 고삼을 주세요. 빈대는 이제 딱 질색입니다."

- 저녁 식사는 밥과 된장국과 죽순조림이었다. 여관 주인의 아내가 마련해 준 식사다. 한 입 먹은 순간, 나와 이즈미 로안은 눈짓을 주고받고 더 이상 입에 대지 않았다.

- 밤이 깊어 달이 떴다. 대나무가 어둠 속에 나란히 서 있다. 
나는 초롱불로 발밑을 비추며 걸어갔다. 낮에 걸었던 그 길이다. 하지만 고작 해 하나 졌다고 인상이 꽤 달랐다. 온천까지 가는 길이 이렇게 멀었던가? 아무리 걸어도 대숲만 계속 이어지는 것 같았다. 이윽고 하얀 안개가 나오고 대숲이 끝났다. 이제 눈앞을 우뚝 가로막은 벼랑 중간에 암반이 튀어나올 터였다. 하지만 낮보다 수증기가 짙게 깔려 발밑을 거의 분간할 수없었다.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바위 사이를 올라 겨우 온천에 도착했다. 

- 유난히 고요했다. 벌레 울음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옷을 벗고 탕에 발을 담갔다.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조차 똑똑하게 들렸다. 수증기가 밤하늘까지 자욱하게 뒤덮고 있었다. 온천 바깥쪽의 산자락은 하얀 수증기 속에 녹아들어 눈 밑에 있어야 할 대숲도, 등 뒤의 절벽도 보이지 않았다. 달빛이 있어 그런지 초롱을 내려놓은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수증기 전체가 아스라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 처음에는 여관 주인의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지만 탕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온천물이 피부를 매끄럽게 보듬어 주는 게 기분 좋다. 발끝부터 목 뒷덜미까지 몸 안쪽부터 따끈따끈하게 데워 준다. 이걸 즐기지 않으면 손해지, 암. 한참 온천에 들어가 있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바위에 걸터앉아 몸을 식힌 뒤에 다시 들어가 보았다. 
여관 식사가 얼마나 맛없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무렵 인기척을 느꼈다. 온천에 혼자 몸을 담그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귀를 기울이니 참방참방, 누가 온천 안을 걸어 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 사람 그림자가 늘었다. 온천에 있는 것은 나와 다른 한 명뿐만이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탕에 서너 명은 들어와 있었다. 가만히 탕에 몸을 담그고 있는 사람도 있거니와 일어서서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다. 다들 말이 없었다. 이따금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 이상한 사실을 깨달았다. 가장 멀리 보이는 그림자는 분명 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는데, 내가 있는 곳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낮에 본 온천의 크기를 감안하면 그 그림자가 있는 자리는 절벽 바깥쪽이어야 했다. 하지만 내 몸이 일으킨 물결은 끝도 없이 퍼져 나갔다. 온천 가장자리가 수증기 속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옷을 벗어 둔 바위도 보이지 않았다. 초롱 불빛도 없다. 전후좌우 사방에 농밀한 하얀 수증기만 자욱하고, 발밑에는 뜨뜻한 온천물이 있을 뿐이다.
무섭다. 하지만 여전히 안락했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내가 일단 취한 행동은 어깨까지 물에 담그고 아아, 하고 한숨을 토하는 일이었다.

 

- 콧노래가 들려왔다. 그림자 중 하나가 부르는 듯했다. 들릴락 말락 가냘픈 소리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아아, 어머니도 계시구나. 나는 탕에 몸을 담그며 생각했다. 저 콧노래는 오래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즐겨 불렀던 곡이다. 
그쯤 되니 공포나 불안은 말끔히 사라졌다.
그보다 그림자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치솟았다.

 

- 나는 말을 걸며 다가가려 했다. 그때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돼, 미미히코."
소녀의 목소리였다. 그림자 하나가 참방참방 물소리를 내며 내게 다가왔다. 키는 내 가슴께보다 낮았다. 아직 자그마한 어린아이였다.
"누구야?"
"벌써 잊었어?"
얼굴을 보려 했지만 수증기가 훼방을 놓았다. 어렴풋한 그림자밖에 보이지 않는다.

- "좋은 이름이로군. 온천에서 나는 냄새도 '온천향'이라고 쓰고 '유노카'라고 읽잖나?"
"아무거나 온천에 갖다 붙이지 마세요."
어젯밤 내가 온천에서 본 그림자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부모님도 한 팔이 없는 친구도 저세상 사람이다. 그들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고 그대로 다가갔다면 어찌 되었을까? 유노카가 불러 세우지 않았다면 나는 그들의 얼굴이 궁금해 수증기 너머로 갔을 것이다. 여관 주인이 말한 것처럼 다시 이쪽으로 돌아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뒤늦게 한기가 들었다. 

- "그런데 유노카라는 자네 친구는 어쩌다 죽었나?"
이즈미 로안이 곧게 뻗은 대나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그림자가 어릴 때 죽었다고 했다면서?"
유노카는 죽었다.
역시, 죽었던 것이다.
"그때는 산신이 잡아갔다고들 했었죠."

- 어느 날 유노카는 홀연히 사라졌다.
내가 일곱 살 때쯤이었을까?
덴구가 잡아갔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발을 헛디뎌 강에 떠내려갔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며칠을 기다렸지만 유노카는 돌아오지 않았다. 동네 어른들이 유노카를 찾아 산속을 돌아다녔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유노카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르는 채 세월은 흘러갔다. 

 

- 이제는 기억을 더듬는 일도 드물었다. 유노카의 얼굴도 잊었다. 소녀가 어떤 눈매를 가지고 있었는지, 코는 어떻게 생겼는지, 입술은 어떤 색이었는지, 조금만 더하면 생각이 날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았다. 
사라진 사람의 얼굴을 언제까지나 기억하는 게 가능할까? 하루하루 무언가를 새로이 보고 듣는 나날 속에서 옛날 일은 윤곽을 잃고 어렴풋해진다. 머릿속에 수증기가 끼는 것처럼 사라진 사람의 얼굴이 흐려진다. 


- 유노카가 사라진 것은 아주 오래전이다. 내가 아는 사실은 슬펐다는 기억뿐이다. 불합리하다. 그 모습이나, 우리가 어떻게 밭이랑을 뛰놀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울었던 기억만은 남아 있다. 

 

- 내일부터 다시 시작될 여행에 대비해 이즈미 로안은 낮에 온천에 몸을 담그러 갔다. 나는 동행할 생각이 없었다. 낮에는 안전하다고 해도 아직 어젯밤의 공포가 남아 있었다. 
나는 혼자서 마을을 거닐어 보기로 했다. 산이 바로 지척에 있는 이 마을을 보면 내 고향 마을이 떠올랐다. 비탈에 계단식 논이 있고, 밭을 일구는 사람이 있다. 군데군데 우거진 대숲을 피해 비좁은 길이 구불구불 휘어 있었다.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 나는 거닐면서 여행을 마치고 어떻게 처신할지 고민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래서는 안 된다. 두 번 다시 노름은 안 할 테다. 주먹을 움켜쥐었다. 지난번 여행을 마친 뒤에도 똑같은 결심을 했었다. 그런데 나는 주사위의 유혹에 지고 말았다. 달그락달그락 주사위를 흔드는 소리를 들으면 겁이 사라지고 갑자기 강한 남자가 되었다는 착각이 든다. 그리고 결국 번 돈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 여관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번에는 한 무리의 아이들을 만났다. 아이들은 나를 보자마자 수풀 속으로 뛰어들어 저희끼리 뭐라고 속닥거렸다. 수풀 사이로 내 쪽을 훔쳐보는 듯했다. 귀를 기울이자 저런 어른이 되면... 이라느니, 어쩌다 이런 곳에... 라느니 하는 연민 어린 속삭임이 들려왔다. 나는 괜히 분한 마음에 수풀을 헤치고 아이들을 야단치려 했다. 아이들이 도망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내가 눈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도 아이들은 바위처럼 무표정하게 눈도 하나 깜빡이지 않고 나를 되쏘아볼 뿐이었다. 

 

- 숙소 앞에서 갓난아이를 품에 안은 여인을 만났다. 이제 이 마을 사람들하고는 엮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푹 숙이고 말없이 지나치려 했는데 그 아기 엄마는 일부러 내 눈앞에 다가왔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면서 당신 아버님도 어머님도 분명 아쉬웠을 거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냥 내버려 두라고 대답하자 여인은 갑자기 귀신같은 형상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자세히 보니 여인이 품고 있던 갓난아이까지 화가 잔뜩 나서 ... 
 

- 차라리 저 수증기 건너편으로 넘어가 볼까? 그러면 이렇게 짜증스러운 장소와 헤어질 수 있다. 건너편에서는 옛날에 알고 지냈던 사람들과, 부모님과, 유노카가 나를 반겨 주겠지. 이즈미 로안을 깨우지 않도록 이부자리에서 빠져나와 초롱도 들지 않고 온천으로 향했다. 

 

-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대숲 속 오솔길을 지났다. 대나무가 감옥 창살처럼 빽빽했다. 나를 이곳에 가둘 셈인가? 온천냄새가 짙어지면서 이윽고 수증기가 주위를 하얗게 덮었다. 바위를 넘어 온천물이 고여 있는 곳에 도착했다. 
옷을 벗고 탕에 발끝부터 담갔다. 미끌미끌한 감촉이 기분 좋았다. 주위는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수증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 밑에 있어야 할 대숲도, 뒤편의 절벽도, 하얀 수증기 저편으로 사라졌다. 온천에 몸을 쏙 담그니 눈에 보이는 것은 내 몸뚱이와 탕의 수면뿐이다.

- 언제부터인지 어둠이 느껴지지 않았다. 달빛이 수증기를 비추고 있다기보다 수증기 자체가 하얗게 빛나는 것처럼 밝았다. 온몸이 따스해지더니 머릿속이 마비된 것처럼 행복한 기분에 감싸였다.
 

- "왜 돌아온 거야?"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는지, 내게서 약간 떨어진 자리에 아이만 한 크기의 그림자가 있다. 수증기가 가로막아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그곳에 있었다. 그 아이의 그림자가 움직이면 수증기 너머에서 일렁거리는 탕의 물결이 내가 있는 곳까지 퍼져 왔다.
"나도 너희가 있는 곳으로 가려고."
내가 소녀의 그림자에 다가가자 그림자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나와 소녀 사이에 있는 수증기는 여전히 짙었다.
"안 돼. 미미히코는 아직 이쪽에 오면 안 돼."
"하지만 난 너희를 만나고 싶어. 그리운 얼굴을 보고 싶단 말이야."

 

- <수증기 사변>

 

 

- 나는 끈으로 엮은 책자를 짐 보따리에서 꺼내 쳐다보고 있는 여행자가 있으면 그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만다. 친구인 이즈미 로안이 쓴 여행 안내서가 아닐까 궁금한 것이다.

 

- 여행의 동반자로 짐을 짊어지고 온천 마을을 순례해도 나는 좀처럼 여행에 익숙해질 수 없었다. 벌레에 쏘여 가려운 것도 영 참을 수 없었고, 먹을 수 있는 풀의 모양과 이름도 외우지 못했으며, 사투리는 아무리 들어도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나는 본디 언제 어떠한 상황에서도 방에 드러누워 술이나 마시고 싶은 나태한 남자다. 불이야, 하고 누가 외쳐도 열기를 느끼기 전까지는 귀찮아서 그 자리에서 움직이기 싫은 남자다.

 

- 닭은 우리 옆에 나란히 서서 함께 여행을 했다. 인파가 많은 곳을 가로지를 땐 사람들 발에 밟힐 뻔하기도 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하얀 날개에 감싸인 그 몸을 들어 올려 품에 안고 걸었다.   

 

- 나는 닭에게 아즈키(팥)라는 이름을 붙였다. 두 가지 이유였다. 하나는 내가 환장하는 음식인 양갱의 재료가 단팥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그 닭이 농민이 운반하는 짐수레에서 떨어진 팥을 보더니 쪼아 댔기 때문이다. 그때 닭은 팥을 부리로 쪼면서 따라오고 있었는데, 그러는 사이 우리하고는 다른 모퉁이를 돌았는지 어느새 눈앞에서 사라졌다. 우리가 허망한 이별이었구나 하고 웃고 있었더니 뒤에서 당황스러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쩔 수 없이 길을 되돌아가니 모퉁이에서 닭이 뱅글뱅글 맴을 돌고 있었다. 우리 모습을 보더니 날개를 열심히 퍼덕거리며 달려왔다. 얼룩 한 점 없는 하얀 날개, 외견은 우아하고 기품마저 느껴지는데도 그 닭은 어딘가 좀 모자랐다. 
  

- 아즈키와 함께 걷는 우리의 여행은 어느 때보다 순조로웠다. 이즈미 로안이 길치라 낯선 곳이 나올 때도 있었지만 다치는 일도 병에 걸리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여행에 고생은 필수 항목이다.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우리는 기묘한 어촌에 도착해 그곳에 며칠 발이 묶였다.

 

- 그런 우연이 있을까? 이즈미 로안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그는 지나친 망상이라며 상대도 해 주지 않고 구석에 굴러다니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들어 버렸다. 아즈키도 불씨가 남아 있는 부뚜막 옆에서 몸을 말고 긴 목을 깃털 사이에 조용히 파묻었다. 그날 밤 나는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부뚜막의 불씨에 비쳐 그림자가 일렁거리는 벽과 천장의 얼굴을 밤늦게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집의 나뭇결로 그치지 않았다.  

 

- 똑같은 채소라도 지방에 따라 맛과 모양이 다른 법이다. 파를 예로 들어 보자. 어느 지방에서 파라고 하면 파란 잎사귀를 요리에 쓰는 채소이다. 하지만 또 다른 지방에서는 똑같은 파를 키우려 해도 파란 잎사귀 부분은 서리에 얼어 버린다. 대신 그 지방에서 나는 파는 하얀 뿌리 부분이 길다. 그 지방에서는 파라고 하면 하얀 뿌리 부분을 먹는 채소인 것이다. 

 

- 식재료의 모양이 평소와 다르다고 해서 여행지에서 나오는 밥상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 상대에게도 실례고 그런 태도로는 견문을 넓힐 수 없다. 머리로는 그렇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어촌에서는 이런 생선을 요리해 먹고 있으니 나도 똑같은 음식을 먹어야 한다. 마을 사람들이 호의로 가져온 말린 생선을 앞에 두고 나는 당황했다.

- 날이 밝자 비는 그쳤지만 구름은 남아 있었다. 바다는 여전히 어두침침한 잿빛으로 파도치고 있었고, 어촌은 전체적으로 적적한 인상이었다. 출발 준비를 하는데 마을 사람들이 찾아왔다. 바다에서 잡아 말린 생선으로 아침상을 차려 주기에 고맙다고 인사를 했는데, 생선의 생김새가 문제였다. 
햇볕에 잘 말린 생선은 짭조름하니 고소한 냄새가 났다. 그 생선의 머리가 어딘지 모르게 사람 얼굴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이마에서 코에 걸친 모양이나, 눈꺼풀, 입술처럼 보이는 부분. 뼈의 형태도 사람하고 똑같았다. 자세히 보니 머리에는 말라붙은 머리카락 같은 털까지 붙어 있었다. 두 마리를 받았다. 한 마리는 아무리 봐도 남자 얼굴이고 또 한 마리는 여자 얼굴이었다. 바짝 말라 있어 둘 다 노인 얼굴로 보였다. 그렇게 큰 생선이 아니라 얼굴은 손바닥만큼 작았는데 그게 또 기이했다. 

 

- 그 아이들은 아즈키가 신기해서 껌뻑 죽었다. 아즈키를 구경하려고 집 근처에서 버티고 있다가 감기가 옮는다고 어른들에게 야단을 맞곤 했다. 이 어촌에는 닭이나 돼지, 소, 말 같은 동물이 없었다. 아이들은 닭이라는 동물을 난생처음 보는 것이다. 

 

- 이 어촌에서 사는 아이들은 내내 먹어 온 생선이 이상하게 생긴 줄도 모를 것이다. 나는 이불속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이 마을에서는 저게 생선이다. 먹는 데 죄책감은 느끼지 않으리라. 죽이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지도 않으리라. 나는 도저히 그 생선을 먹을 수가 없었다. 이즈미 로안처럼 저건 그냥 생선이라고 간단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냥 채소다, 그냥 곡식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 어촌에서는 모든 사물에 뭔가가 깃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을 입에 넣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 이 마을에 있는 물고기와 쌀은, 사람이 환생한 것이거나 사람으로 태어나야 했던 것이 분명했다. 그것들을 죽여서 먹는 행위는 사람을 먹는 짓이나 다름없다. 내가 마음속 깊이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에 죄의식을 느끼는 것이리라. 

- 이즈미 로안은 나의 그런 생각을 어떠한 종교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한편 그는 지방마다 채소 모양이 다른 것처럼 저건 사람이 아니라 그냥 식재료라고 주장했다. 나는 누구 말이 옳은지 판단할 수 없었다.

- 감기에 걸린 지 닷새가 지났지만 여전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이런 허기는 난생처음 겪어 본다. 손끝까지 저렸다. 날이 갈수록 몸은 나빠지기만 했다. 이즈미 로안이 아무것도 먹지 않는 나를 꾸짖었다. 하지만 몽롱한 머리로 들은 말이라 정말 나를 야단치는 것인지, 아니면 꿈속에서 있었던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눈을 뜨고 있기도 버거운 상태였다.

 

- 잠든 사이에 누가 입속에 죽을 넣어 주었다. 마을 사람이 내 머리를 받치고 이즈미 로안이 죽 그릇을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남은 기력을 쥐어짜 그들의 손을 뿌리쳤다. 입속에 손을 집어넣어 삼킨 것까지 죄다 토해 냈다. 이즈미 로안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뭐라고 중얼거렸다. 아마도 얼굴이 반쪽이라느니, 뭘 좀 먹어야 한다는 소리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귓속 머릿속까지 다 마비되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이즈미 로안마저 이 어촌의 사람이 되어 내가 못 알아듣는 말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 이불속에서 천장과 벽을 바라보니 허기 때문인지 나뭇결의 무늬가 일렁거렸다. 나뭇결 속의 얼굴과 몇 번 눈이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꽤 오랫동안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이대로 죽는 걸까?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니 무서웠다. 그때, 내 허기를 달랠 음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요컨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 것이다. 

- 이불에서 일어난 나는 마당에서 노는 하얀 닭을 불렀다. 아즈키, 아즈키, 이리 오렴. 피리처럼 가냘프게 울며 아름다운 닭이 다가왔다. 이불에서 일어난 나를 걱정이 가득한 검은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내 상태가 나쁜 것을 이 닭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하얀 날개에 뒤덮인 몸을 두 손으로 가만히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아즈키는 내가 왜 그러는지도 모르고 당혹스러운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전까지 밖에서 놀고 있어서 그런지 하얀 날개에서 햇살 냄새가 났다. 

 

- 싫어, 싫단 말이야! 저항하며 도망치려 한다.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그런 의지가 느껴졌다. 

- 그 마을은 이즈미 로안이 길을 잃은 끝에 다다른 곳으로, 길을 잃지 않으면 분명 찾을 수 없는 곳이리라.

- 그 후로도 우리의 여행은 계속되었다. 시간이 흐르자 우리는 완전히 예전처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여관 마을에서 숙소를 잡고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보따리 속에서 하얀 깃털이 나왔다. 보따리를 뒤집어 보니 다다미 위에 무수히 많은 깃털이 팔락 팔락 떨어졌다. 나는 깃털 하나를 주워 거기 묻은 진흙을 털어냈다. 빗속에서 보따리에 넣어 데리고 다닐 때 빠진 깃털이리라. 떨어진 깃털을 그러모으는 사이, 손가락이 덜덜 떨리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들고 눈물이 솟구쳤다. 오열하면서 울고 있노라니 이즈미 로안이 작은 주머니를 내밀었다. 안에는 그가 주워 담은 아즈키의 뼈가 들어 있었다. 주머니를 받아 가슴에 꼭 품었다. 내가 저지른 짓에 대한 공포는 한없이 커져만 갔다. 


- <끝맺음>

 

 

- "구름다리가 뭡니까?"
나는 이즈미 로안에게 물어보았다.
"저렇게 만든 다리를 말하는 거야."
낭떠러지에 잔뜩 박힌 나무 기둥이 다리를 지탱하는 듯했다. 교각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평범한 강이었다면 강에 기둥을 세우고 다리를 얹으면 되겠지만, 이곳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 위다. 교각으로 쓸 만한 높은 나무 기둥을 세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낭떠러지에 박힌 기둥들이 교각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다. 
"낭떠러지에 박은 저 나무가 침목일세. 공중에 떠 있는 이런 다리를 구름다리라고 부르는 거야."
이즈미 로안이 설명해 주었다.

 

- 침목은 낭떠러지에 구멍을 뚫고 비스듬히 박은 것이었다. 아래쪽 침목이 위쪽 침목을 받치고, 위쪽 침목은 또 그 위의 침목을 받치고 있다. 그것이 몇 번 반복되고 맨 위에 다리가 놓여 있었다.
"위에 올리는 침목은 아래쪽 침목보다 조금 길지. 밑에서 받쳐 주니까 그만큼 멀리 뻗을 수 있는 거야. 밑에서부터 차곡차곡 반복하면 보다 멀리 침목을 깔 수 있지. 그나저나 이렇게 훌륭한 구름다리는 처음 보는군. 보통은 침목이라고 해도 몇 개가 고작이거든. 그런데 이 다리는 쉰 개도 넘어."
이즈미 로안은 낭떠러지를 들여다보며 감탄했다. 저 밑까지 침목이 박혀 있었다. 다리 폭도 넓다. 나는 이렇게 큰 다리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가끔은 길을 잃는 것도 좋군. 책에 쓸 일이 생겼어."

 

- 이즈미 로안이라는 사내는 여행 안내서를 써서 입에 풀칠을 한다. 여행 안내서란 앞으로 여행을 떠날 사람들을 위해 길과 온천, 관문의 위치, 여관에는 어떻게 묵고 명승고적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소개한 책이다. 길이 정비되어 여행을 떠나기 쉬운 세상이 되었다지만 아직은 여행이 낯선 사람이 많다. 난생처음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여행 안내서는 큰 도움이 된다. 이렇게 훌륭한 다리는 명소로 기록할 가치가 있다. 다른 여행 안내서에 소개되지 않은 명소가 적혀 있다면 책이 더 많이 팔릴지도 모른다. 

 

- "하지만 로안 선생님, 이 다리를 책에 쓰려면 먼저 여기가 어딘지를 알아야죠." 
훌륭한 다리가 있다. 하지만 그 위치는 모른다. 그래서야 여행 안내서를 읽은 사람들에게 역정만 사리라. 우리는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모른다. 예정대로라면 벌써 여관 마을에 도착했을 터인데 여관 불빛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 온 것은 우연이었다.

- 이즈미 로안은 길을 잃는 고약한 버릇이 있었다. 산을 오르는가 하면 어느새 바다가 나오고, 마을에서 계단을 내려가면 어째선지 섬이 나온다. 목적지에 좀처럼 도착하지 못하고 엉뚱한 길만 돈다. 이 낭떠러지를 만나기 전에도 우리는 지도를 보며 평야를 걷고 있었다. 지도에는 낭떠러지 표시 같은 건 없었는데. 애초에 우리가 언제 이렇게 높은 곳까지 기어 올라왔지? 

- "그거 이상하구려."
"뭐가 이상하단 말인가?"
"있을 수 없는 다리니까요."
나와 이즈미 로안은 곤혹스러워 얼굴을 마주 보았다. 있을 수없는 다리라고 해도 방금 전에 우리는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가끔 여행자들이 밤에 본다고 하지요. 모르고 건너가는 분도 많답디다. 하지만 모르고 건너간 사람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아요."

- 사방등의 불빛은 초롱불에 쓰는 양초만큼 밝지 않았다. 침침한 어둠 속에서 노파는 거칠게 깎아 만든 목상처럼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기름 타는 냄새가 주위에 넘실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그 구름다리는 대체 어떤 다리입니까?"
내가 물어보았다. 노파는 이렇게 말했다.
"그 구름다리는 벌써 사십 년도 전에 무너진 다리입니다. 그런데 밤이 되면 낭떠러지 위에 나타날 때가 있습죠."

- 이즈미 로안이 사방등 바로 옆에서 바늘과 실을 사용해서 찢어진 내 옷을 기워 주려 했다. 하지만 도저히 바느질이 능숙한 사람의 손놀림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끝을 묶지도 않고 깁고 있으니 결국 전부 풀릴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계속 기워 나가던 그는 어느새 자기가 입고 있는 옷에 바늘을 꽂고 있었다. 아무래도 바느질을 할 때도 바늘이 길을 잃는 모양이다. 
"그런 건 그냥 내버려 두세요. 로안 선생님."
"하지만 아깝잖나."
"어차피 싸구려인데요, 뭐."

 

- 촌장에게 사정을 설명해 마을 사람들 모두가 노파의 일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나를 탓하는 일은 없었다. 그들은 나 역시 괴이한 현상의 불행한 피해자로 여겼다. 

- 마을을 떠나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소년이 보여 준 귀신같은 형상,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한 증오였다. 모자의 애정까지도 지워 버릴 만한 분노였다. 살아 있는 사람이 부러워서 얄밉다는 표정. 혼자만 죽는 게 외롭고 무섭다는 표정. 과거에 가지고 있었던 모든 감정과 사랑은 죽음과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노파도 다리 위로 끌려가는 게 싫어 내게 매달렸고, 나 역시 노파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차내려 했다. 모든 것이 역겨웠다. 나라는 존재 또한 역겨웠다.

- "잊어버려."
이즈미 로안이 걸어가면서 말했다.
"이 세상엔 잊어버리는 게 좋은 일도 있는 법이라네."

뒤꿈치에 물컹한 살의 감촉이 남아 있었다. 노파를 걷어찼을 때 느낀 감촉이다. 나 혼자만이라도 살아남고 싶었다. 남을 밀어내서라도.

 

- <있을 수 없는 다리>

 

 

- 가도가 정비되어 유람이 성행하면서 사람들은 진기한 풍경이나 음식, 공예품을 찾아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여행 목적은 사람마다 달랐지만 특히 인기 높은 것이 온천 여행이었다. 
온천에는 다양한 효능이 있어, 관절통을 완화시켜 주는 온천이나 딱딱하게 굳어 버린 근육을 풀어 주는 온천, 더 나아가 과거에는 탕에 들어가면 회춘하는 온천도 있었다고 한다. 피부가 탱탱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몇 번 들어가다 보면 빠졌던 치아나 머리카락이 다시 난다는 것이다.

- "딱 한 번, 산속에서 그런 온천 여관을 발견한 적이 있어. 어떤 여자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갓난아이 하고 함께 온천에 들어갔는데 탕에 담근 아이가 점점 작아지더니 결국에는 사라졌다지 뭔가."
친구이자 여행 안내서 작가이기도 한 이즈미 로안이 그런 말을 했다.
"온천이 있는 곳을 기록해 놨는데, 똑같은 길을 가도 다시는 찾아갈 수 없었어. 경치는 똑같은데 온천이 있던 여관만 보이질 않는 거야. 어찌나 아깝던지. 여행 안내서에 소개할 수 있다면 명소가 되었을 텐데. 내 책도 날개 돋친 듯 팔렸을 테고."

- 나는 이즈미 로안에게 돈을 받고 몇 번 여행을 따라다녔다. 그와 함께 하는 여행은 가혹하기 짝이 없다. 사실 여행 같은 건 관두고 마을에서 아무 일이나 하고 싶었다. 목수 일을 해본 적도 있다. 하지만 나란 인간은 못 하나도 박을 줄 모른다. 실수로 망치로 손가락을 때릴까 무서워 일을 나가지 않고 집에서 술만 마시는 사이 잘리고 말았다. 국숫집에 제자로 들어간 적도 있다. 하지만 반죽을 해서 면을 뽑는 게 꽤나 고된 데다가 야단도 많이 맞는 일이라, 역시 국수는 만드는 게 아니라 먹는 게 좋다는 생각을 하며 집에서 술만 마시는 사이 잘리고 말았다. 언제나 그런 식이라 마을에서 여자한테 말을 걸어도 아무도 나를 상대해 주지 않는다. 심할 때는 돌멩이를 집어던지며 쫓아낼 때도 있다.  

 

- "그럼 대조해 볼까?"
야에가 그린 등의 특징을 보아도 별생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내 등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것으로 야에의 오해도 깨끗이 풀리겠지. 소매에서 팔을 빼서 웃통만 벗고 그 자리에 있는 세 사람 쪽으로 등을 돌렸다.
"어때? 이제 내게 모키치가 아니라는 걸 알겠지?"
세 사람은 말이 없었다. 기척이 이상해 뒤를 돌아보니 눈썹을 찌푸리고 있는 이즈미 로안의 얼굴이 보였다. 여관 주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야에는 코끝을 발갛게 물들이고 훌쩍거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가와서 등에 매달렸다. 야에의 젖은 뺨이 등에 닿았다. 
"두 손 두 발 다 들었네."
이즈미 로안이 곤혹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 "모키치란 남자가 목수였어? 이것 봐, 난 모키치가 아니라는 걸 이걸로 잘 알겠어. 나는 목수 일은 요만큼도 못 해. 배운 적은 있지만 못 하나 제대로 박을 줄 몰라서 그만뒀지."
"저하고 부부가 되기 전에는 그랬죠. 당신은 일도 제대로 하지 않고 노름에 술밖에 몰랐어요. 덕분에 빚더미에 앉아 얼마나 고생했는지. 동네 아이들을 모아 풀피리를 가르쳐 준 적도 있었죠? 제가 처음 당신한테 말을 걸었을 때 아이들한테 둘러싸여 풀피리를 불고 있었잖아요."
"모르는 일이야."
"시치미 그만 떼요."
야에는 그렇게 말하더니 저녁상을 차리면서 모키치와의 추억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 야에가 기억하는 모키치라는 남자는 참으로 시시한 남자였다. 누굴 닮은 것 같다 했더니 바로 나를 쏙 닮은 것 아닌가? 모키치가 저지른 실수들, 끈기가 없어 금세 포기하는 근성 없는 성격. "몰라! 그 녀석은 내가 아니야!”하고 부정해 보았지만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야에가 한 이야기 중에 절반은 찔리는 구석이 있는 이야기였다.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어딘가 비슷했다. 그 상황에 처하면 나도 그랬을 행동과 언동을 모키치라는 남자도 그대로 택하고 있었다. 야에의 추억 속에 있는 남자가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점점 고개를 들었다.    

 

- "그러고 보니 국숫집에 제자로 들어가려고 한 적도 있었죠. 그때 국수 반죽은 고되고 야단만 맞아서 그만뒀다고 했는데."
그러는 사이 내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조차 귀찮아졌다. 나는 한숨을 쉬면서 야에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아아, 맞아. 역시 국수는 만드는 게 아니라 먹는 게 좋지."

내가 그렇게 투덜거렸더니 야에가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 모키치는 나하고 똑같이 시시한 남자였지만 야에를 만나 아이를 얻은 후로는 목수 일을 계속했다고 한다. 못을 박으려고 하면 망치로 손가락을 때린다. 톱질을 하려고 하면 톱이 나무에 걸려 꼼짝도 못 한다. 동료들에게 얼간이 취급을 받아 울면서 집에 돌아온다. 노름과 술로 달아나려 한 적도 있다. 그래도 모키치라는 남자는 야에와 하나타로를 먹여 살리기 위해 목수일을 그만두지 않았다고 한다. 
 

-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야에의 하얀 이마와 뺨에 내려앉았다. 두 눈동자에는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미안해. 나는 저 사람하고 여행하는 게 즐거워. 그냥 있으면 보지 못할 것들을 잔뜩 볼 수 있어. 무서운 꼴도 당하지만 온천은 정말 좋아. 호수 밑에 지은 저택을 본 적도 있어. 원숭이들이 차지한 성도 봤어. 노래를 부르며 화형을 당하는 죄인도 봤지. 아직 저 사람한테는 나 대신 내 준 빚도 다 갚지 못했어. 하지만 언젠가 여기로 돌아올게. 그때는 꼭 인사하러 찾아갈게." 
야에는 눈을 가늘게 뜨고 기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야에와 하나타로가 마을 변두리까지 배웅하러 따라왔다. 나와 이즈미 로안은 얼굴 없는 산마루로 이어지는 길로 걸음을 옮겼다.
대낮부터 구름이 심상치 않더니 끝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지장보살이 있는 바위 그늘에서 비를 피하면서 잠시 쉬었다. 비가 그칠 기미가 없어 우리는 비를 맞으며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 <얼굴 없는 산마루>

 

 

- 가도가 정비되어 각지를 오갈 수 있게 되면 지역마다 다양한 특산품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지역에서만 나는 생선, 그 지역에서만 나는 채소를 먹는 것도 여행의 묘미다. 사람들은 유람을 떠나 처음으로 만나는 향토 요리에 조심스레 입을 대어 본다. 이전에 다섯 명쯤 무리를 지어 여행하던 사람들이 매미 튀김을 앞에 두고 먹을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서로 팔꿈치로 쿡쿡 찔러 대며 눈치를 보는 것이다. 결국 다 함께 동시에 집어삼키고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차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절로 웃음이 나는 광경이었다. 

 

- 내 경우 다소 괴상하게 생긴 음식이 나와도 가급적 무표정을 가장하고 먹는다. 겉보기로 지레 겁을 내 먹어 보지 않는다니 말도 안 된다. 그것은 친구인 이즈미 로안이 하는 말이었다. 어떤 음식이든 용기를 내서 눈 딱 감고 먹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음식을 만든 사람에게 실례다. 내주는 음식은 감사히 먹을 것. 친구의 책에는 그 한 문장이 반드시 들어가 있다.
 
- 하지만 어느 지방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는 생선찌개를 받은 적이 있었다. 나와 이즈미 로안은 냄비에서 풍겨 오는 김만 마셨을 뿐인데도 숨이 막혀 콜록거렸다. 김이 눈에 들어가자 가렵고 아파서 눈물이 탁류처럼 뺨을 타고 쏟아졌다. 우리는 옷소매로 입을 틀어막고 눈짓을 주고받은 뒤 이걸 먹으면 목숨이 위험하다는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다.

- "자네, 배가 고프다고 했지? 마음껏 먹게."
이즈미 로안은 숨을 멈추고 냄비를 내 쪽으로 밀었다.
"선생님! 책에 뭐라고 쓰셨는지 벌써 잊으셨습니까?!"

"무슨 말인가?"
"내주는 음식은 반드시 먹을 것. 항상 책에 그렇게 쓰셨잖아요!”
"경우에 따라 다르지. 미미히코 군, 이건 분명 실수일 거야. 이건 음식이라기보다 심술에 가깝잖아."
"음식을 만들어 준 분께 실례예요!"

 

- "어머, 온천을 찾고 계세요?"
여자가 말했다. 이즈미 로안이 여행 안내서를 쓴다고 설명하고 책을 쓰기 위해 온천을 찾고 있다고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여행에 대해 하나부터 열까지 알려 주는 여행 안내서가 세상에는 몇 종류나 팔리고 있지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각지의 온천에 대해 자세히 써 놓은 책이다. 이즈미 로안은 의뢰처의 부탁을 받아 아직 어느 안내서에도 기록되지 않은 온천의 소문을 모아, 그것이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 장소를 찾아가는 일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 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좋은 온천을 알아요."
여자가 말하기를 그 온천에 들어가면 피부가 매끄러워지고 피로도 싹 풀려 잠도 잘 온다고 했다. 요 앞에서 옆길로 들어가 산을 향해 조금 걸어가면 있다고 했다. 민가가 있으니 그곳 사람에게 물으면 정확한 위치를 알려 줄 거라고 했다.
여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우리는 온천을 찾아보기로 했다. 이즈미 로안조차도 이런 지방에 그런 온천이 있다는 소문은 들어 본 적이 없는 듯했다. 만일 사실이라면 행운이다. 아직 도읍 사람들이 모르는 온천을 발견할 수 있으니까.

- 나무껍질처럼 보였지만 정체는 말린 고기인 듯했다. 여자가 얼굴을 거두려고 하기에 황급히 불러 세웠다.
"어이! 잠깐! 당신, 거짓말이었어?!"
저 너머에 온천이 있다는 말로 나와 이즈미 로안을 한 패거리가 있는 곳으로 보낸 건가?
"미안해. 모처럼 친절하게 대해 줬는데."
여자는 조금도 반성하지 않는 얼굴로 익살스럽게 말했다. 나는 분해서 이를 악물었다.
"그나저나 그 연고 정말 잘 듣더라. 여행자를 속이려고 일부러 빨갛게 붓도록 다리를 비틀거나 돌로 찧는데, 통증이 싹 사라졌어."
"로안 선생님은? 나하고 같이 있던 남자는 어떻게 됐어?!"

제발, 무사하기를.
여자는 옷소매로 입을 가리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쯤 죽지 않았을까? 우리 양반 말로는 당신을 내버려 두고 쏜살같이 튀었다던데. 당신이 죽은 줄 알았겠지. 하지만 그 후에 벼랑에서 발을 헛디뎌 밑으로 굴러 떨어졌어. 그래서야 살아 있지 못할 거야."

 

- 요이치라는 남자는 사라졌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고기를 뜯어먹는, 뭔가 다른 생물이었다. 늠름한 모습은 흔적조차 없다. 귀신이라고 해도 믿겠다. 우리 사이에는 대화가 사라졌다. 낮에 소녀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살려 달라고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등을 맞대고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부끄러웠다. 고기를 뜯으며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 여자가 던져 준 고기는 아마 멧돼지고기일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먹었다. 하지만 오래전에 먹어 보았던 멧돼지와는 맛이 상당히 달랐다. 그렇지만 소도 아니고, 돼지도 아니고, 닭도 아니다. 아니, 그 이상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이건 멧돼지고기다. 산적 일가는 고기가 썩지 않도록 훈제나 육포로 만들었다. 그들이 던져 주는 딱딱한 고깃덩어리의 맛을 곱씹으며, 조금씩, 조금씩, 악취가 감도는 진흙바닥은 진정한 지옥으로 다가섰다. 축축하고 미끄러운 구덩이 밑에서 우리는 질척거리는 소리를 내며 구더기에 뒤덮여 고기를 씹어 먹었다. 

 

- 과거에 길을 잃어 물고기 얼굴이 자꾸만 사람으로 보이는 마을에 갔을 때, 나는 그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멧돼지고기라고 믿으며 살덩어리를 씹고 있다. 깨닫지 못한 사이에 선을 넘고 말았다. 아직 이곳에 셋이 있었을 때, 무슨 고기인지도 모르고 오래도록 그 고기를 먹었다. 지키고 있었던 규범들을 이미 잃었다는 것을 알고 자포자기했는지도 모른다.  

- 그렇다 해도 요이치라는 남자는 정상이 아니었다. 그 역시 산적 일가가 던져 주는 고기의 정체를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을 터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속여 가며 먹고 있는 걸까? 아니, 그렇다 해도 일말의 의혹이 머릿속을 스칠 테니 먹는다는 행위를 망설일 법도 한데. 요이치 역시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사실 그렇게 보였다. 하루에 몇 번이나 동물처럼 포효를 하고, 머리를 싸매고 몸부림쳤다. 벽에 주먹질을 하고, 진흙을 입속에 쑤셔 넣고, 눈물을 흘리며 신음했다. 어둠 속에서 달빛은 구덩이 밑까지 비춰 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요이치의 흰자는 눈구멍 안쪽에서 형형히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 <지옥>

 

 

- "아니, 그게, 여행지에서 조금 이상한 일을 겪어서."

"선생님하고 여행할 때 이상한 일이 없을 때가 있었던가요?"
나는 그 친구를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 "짐꾼으로 고용한 사내가... 그것도 곱게 죽은 게 아니었다네..."
친구는 그렇게 말하더니 여자로 착각할 만큼 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 친구가 고용한 사내는 피부가 하얗고 늘씬한 청년이었다고 한다. 여행에 동행해 줄 사람이 없는지 평소 신세를 지는 서점에 물어보았더니 그곳에서 청년을 소개해 주었다. 청년은 의욕이 넘쳤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내 친구가 쓴 책을 오래전부터 읽어 왔는지 말도 잘 통했다고 한다. 

 

- "저도 언젠가 선생님처럼 책을 써 보고 싶습니다."
여행길에 청년은 짐을 끌어안고 걸으면서 말했다.
"호오, 어떤 책을?"
"무서운 이야기를 모은 책을 만들어 보고 싶어요."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하나?"
"네, 돌아가신 어머니가 무서운 얘기를 자주 들려주셨거든요. 분명 그걸 언제까지고 못 잊고 있는 거겠지요. 해가 저물어도 잘 생각이 없는 저를 보다 못해 어린 제게 무서운 게 쫓아온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어요. 무서운 게 뭐냐고 물으면 어머니는 유령이나 도깨비 이야기를 해 주시는 거예요. 어둠을 무서워하게 만들어 저를 빨리 재우려는 속셈이었죠. 저는 무서운 이야기를 해 주는 어머니가 너무 좋았어요. 그런데 요전에 감기에 걸려 돌아가시고 말았지요. 어머니의 시신은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아, 맞다, 선생님, '백 가지 이야기'나 할까요? 백가지 이야기가 뭔지 알고 계신가요?" 
"알다마다. 순서대로 괴담을 말하고 호롱불 심지에 붙은 불을 하나씩 끄는 것이지?"
"백 번째 이야기가 끝나고 마침내 모든 불이 꺼질 때, 유령이 나타난다고들 하죠. 여관 마을에 도착해 숙소를 잡으면 우리도 해 봐요."
"그렇지만 여긴 우리 둘밖에 없는데, 그럼 오십 개나 이야기해야 하잖나. 난 아는 괴담이 오십 가지나 되지 않아."

- 이윽고 두 사람은 목적지인 온천 마을에 도착했다. 그곳은 경치도 아름답고 기후도 좋았다. 산비탈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가 하늘로 뻗어 올라갔다. 주변에는 유황 냄새가 자욱했고 마을에서는 온천물로 찐 계란을 광주리에 담아 팔고 있었다.
그 온천 여관에서 한 노파를 만났다. 노파는 요통을 치료할 목적으로 온천에 왔다고 했다. 여관 복도에서 몇 번 마주치는 사이 친해져서 말을 나누게 되었다.
"그 할머니, 소중한 빗을 이 여관에서 잃어버렸다지 뭡니까."
노천탕에 어깨까지 몸을 담그고 있을 때 청년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 저녁 무렵 친구가 산책을 나갔을 때, 청년은 할 일이 없어 노파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때 빗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어머니도 사용하셨던 소중한 빗이라고 하더군요. 분명 여관 어디에 흘렸을 거라고 하던데."
여자처럼 긴 친구의 머리카락이 탕 표면에 넓게 퍼졌다. 사람들에게 눈총을 살 때는 땋아서 돌돌 말고 탕에 들어가지만 그때는 청년하고 친구 둘 뿐이라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 "자네, 혹시나 떨어진 빗을 발견하면 바로 주워서는 아니 되네."
친구는 청년에게 말했다.
"예? 어째서요?"
"빗이라는 이름은 원래 기이함을 뜻하는 글자에서 온 것이야. 머리에 쓰는 도구라 주인의 영혼이 깃든다고 보았던 것이지. 빗은 고래로 주술 도구로 쓰였다네. 게다가 빗은 '고사 苦死(くし) ', 고통과 죽음을 뜻하는 글자와 발음이 같아. 떨어진 빗을 줍는 건 고통과 죽음을 줍는 거라고들 하지. 옛날 사람들은 빗을 빌려 쓰지도 않았다고 하네." 
"그럼 빗을 떨어뜨렸을 때 어떻게 하죠? 주우면 안 된다니, 온 사방에 빗 천지게요?"
"꼭 빗을 주워야 할 때는 발로 한 번 밟은 뒤에 주웠다고들 하더군."
"흐음... 빗은 '고통스러운 죽음'."
청년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탕 표면에 넘실거리는 고용주의 긴 머리를 바라보았다고 한다. 

 

- 친구는 청년을 구슬려 일단 온천에나 들어가 화해하자고 제안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옷을 챙겨 올게요."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서 나갔다. 친구는 한숨을 쉬면서 방금 전까지 청년이 앉아 있던 자리를 보았다. 다다미 위에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었다. 조심스레 주워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의 머리카락과 흡사했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특징이 있었다. 친구의 머리카락은 윤기가 좌르르 흘러 지나가던 여인들도 돌아볼 정도로 훌륭했다. 하지만 다다미 위에 떨어진 머리카락은 마치 죽은 사람 머리카락처럼 윤기가 없었다. 

 

- "자네, 그건..."
친구는 친구의 눈에 매달려 있는 검은 실을 발견했다.

"가만히 있게."
실을 잡아당기자 청년의 눈동자와 눈구멍 사이에서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술술 빠져나왔다. 이렇게 긴 머리카락이 용케도 들어갔구나 싶었다. 눈꼬리에서 뻗어 나온 검은 머리카락은 노을에 비쳐 청년의 뺨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끝까지 빼낸 머리카락은 물기를 머금고 수직으로 축 늘어졌다. 청년은 겁에 질린 얼굴로 그것을 보더니 벌떡 일어나서 가게 옆으로 달려가 먹은 것을 다 토해 냈다고 한다.

 

- "복도를 걷다가 떨어져 있는 빗을 발견했습니다. 반달 모양 빗이었는데 낡아 보였지만 장식이 아름다웠죠."
"하지만 자네, 그런 말은 한마디도 안 했잖은가."
"줍고 보니 빗 사이에 머리카락이 엉켜 있었습니다."
"밟지 않고 그냥 주운 게로군?"

- 빗은 '고통스러운 죽음'.
떨어진 빗을 줍는다는 것은 고통과 죽음을 줍는다는 뜻이다. 옛날 사람들은 빗을 주울 때, 한 번 발로 밟은 뒤에 주웠다고 한다.

 

- "빗 장식이 훌륭해 무심코 그 빗을 훔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겁니다."
친구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선생님, 분명 그 머리카락은 제가 훔친 빗 하고 관계가 있을 겁니다. 저를 탓하고 있는 걸까요?"
바람이 불기 시작했는지 툇마루 쪽 장지문이 바르르 떨며 소리를 냈다.
친구는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날이 밝으면 노파가 묵고 있던 여관으로 돌아가 사정을 해명하자. 빗을 돌려줘야만 한다. 아직 거기에 묵고 있어야 할 텐데...

 

- "선생님, 전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했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잘 생각을 않는 저를 보다 못해 귓가에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거예요. 귓가에 얼굴을 딱 붙이고 계셔서 숨결 때문에 간지러웠던 기억이 나네요. 아아, 언젠가 괴담을 모아 책으로 쓸 수 있다면 좋겠어요. 어머니는 저를 누구보다 사랑하셨습니다. 머리맡에서 저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가슴을 톡톡 두드려 주셨지요. 이따금 어머니의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제 코를 간질였습니다." 
청년은 불을 지핀 뒤에 툇마루에 걸터앉아 어둠을 바라보며 그런 이야기를 했다.

- 여관 주인에게 실컷 야단을 맞고 그다음 날 나가기로 했다.
방에서 가져온 호롱불이 주위를 어렴풋이 밝혔다.
툇마루 건너편은 새까만 천을 발라 놓은 것처럼 캄캄했다. 나방이 날아와 두 사람 주위를 맴돌다가 다시 어둠 속에 숨었다.
"선생님,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꼭 들려주십시오."

"이 이야기라니?”
"제게 들러붙는 머리카락 이야기 말이에요. 이것도 훌륭한 괴담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아, 확실히 어엿한 괴담이야."
 

- <빗을 주워서는 아니 된다>

 

 

- 시댁은 소작농에게 땅을 빌려 주어 농사를 짓게 하고 쌀이나 보리, 그 밖의 농작물을 땅값으로 거둬들이고 있었다. 일을 하지 않아도 하루하루 끼니를 먹을 수 있는 신분이었다. 남편은 낮에 시아버지, 시동생과 나란히 외출하는 일이 잦았다. 유력 가문에 초대를 받아 인사하러 다니는 것이다. 그 때문에 나는 시어머니와 시누이와 얼굴을 자주 맞댔는데 내가 시집온 것을 계기로 두 사람은 집안일에서 손을 딱 뗐다. 툇마루에서 수다만 떨 뿐이면서 내가 잠깐이라도 쉬고 있으면 온갖 잔소리를 퍼부었다. 

- 시아버지와 시동생도 내게 험하게 굴었다. 내가 지은 식사를 집어던지고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내게 먹였다. 하지만 바닥에 떨어진 음식이라도 입에 넣을 게 있는 날은 그나마 운이 좋았다. 시댁 식구들이 밥을 먹고 있을 때 나는 앓아누운 시할아버지 옆에 붙어 죽을 떠먹여야 했다. 그 일이 끝나야 나도 겨우 뭘 좀 먹을 수 있는데, 대개는 냄비도 가마솥도 텅텅 비어 있다. 하는 수 없이 냄비 바닥에 남은 국물을 모으고 가마솥에 들러붙은 밥알을 긁어내 한 끼 식사를 때웠다. 

 

- 남편 역시 처음의 다정한 모습을 잃고 사사건건 나를 괴롭혔다. 남편이 역정을 내는 이유는 다 사소한 일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밥그릇을 잘못 놓았다느니 옷을 잘못 넣어 두었다느니 하며 트집을 잡는데, 급기야는 내가 그냥 거기 있는 게 걸리적거린다며 욕설을 퍼부었다. "너 같은 소작농의 딸을 거둬 줬으니 고맙게 여겨!"라는 게 남편의 말버릇이었다. 말대답을 하면 뺨이 벌겋게 부어오를 정도로 맞았다. 

- 마음대로 외출할 수도 없어, 부모님이 병석에 드러누웠을 때도 제대로 간병하러 가지 못했다. 먼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듬해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위독하다고 이웃 사람들이 전해 주었을 때 바로 달려갔다면 임종을 지켰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어머니가 "네가 없으면 누가 아버님 대소변을 받아 낸단 말이냐?"라면서 좀처럼 집에 보내 주질 않았다.
 

- 부모님을 떠나보낸 뒤 친정에 남은 얼마 안 되는 물건을 정리하는데 어머니가 소중하게 아끼던 기모노 띠가 나왔다. 그것은 어머니가 특별할 때만 둘렀던 것이었는데 언젠가 내게 주겠노라 말씀하시곤 했다. 띠를 손바닥으로 어루만지며 다정했던 부모님을 떠올리자 눈물이 북받쳤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자마자 내가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는 띠를 본 시어머니가 그게 뭐냐며 빼앗았다. 시누이도 다가와 띠를 보자마자 내게는 아까우니 자기가 가지겠다며 가져가 버렸다. 울면서 남편에게 이야기했더니 갑자기 주먹이 날아왔다. 두 번, 세 번 얻어맞고 벽에 부딪히기까지 했다. 남편이 말했다.

"네 주제에 우리 어머니하고 동생한테 말대답을 하려 들어?" 

 

- 집에서 좀처럼 나가지 못하는 내게는 말 상대도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 놀던 친구가 근처에 살아 산울타리 너머로 몇 마디 주고받곤 했지만, 그 광경을 본 시동생과 시아버지가 집안일을 소홀히 한다며 꾸짖더니 친구까지 나쁘게 말하기 시작해 결국 인연이 끊겼다. 친구 역시 소작농의 딸이라 지주 일가에게 밉보이면 안 되기 때문에 내게서 멀어진 것이다. 누구와도 말을 나누지 못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집에서도 있을 자리가 없는 나는 틈만 나면 뒤뜰의 곳간에 들어가 혼자 가만히 숨을 돌리곤 했다. 

 

- 그 곳간은 내가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건물보다도 컸다.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작은 집은 안에 쏙 들어가고도 남을 것이다. 벽에 새하얀 회반죽을 발라 저택에 불이 나도 이곳만은 타지 않고 남을 만큼 튼튼해 보였다. 내부는 어둑했고, 먼지를 뒤집어쓴 서랍장과 나무 상자가 그득했다. 보자기에 싸인 낡은 옷이 잔뜩 쌓여 있어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정리한다는 명분으로 안에 들어가 구석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시어머니나 시누이도 거의 오지 않는 곳이라 마음이 편했다. 

 

- 나는 간 떨어지게 놀라고 말았다.
"아 죄송해요..."
소년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괜찮아. 하지만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니?"
"그야, 누나네 남편이 착한 사람이라면 그런 말을 하기 전에 글을 가르쳐서 책을 읽을 수 있게 도와줬을 테니까요. 누나가 자신의 무지를 부끄러워하게 만들진 않을 거예요. 그러지 않고 그냥 바보로만 여기는 건 나쁜 사람이라 그런 거예요."
"말은 그래도 글은 아무나 읽고 쓸 수 있는 게 아닌걸."

"어, 누나, 몰라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이 마을에는 글을 가르쳐 주는 선생님이 없었나요?"
"절의 스님이 가르쳐 줬었던 것 같은데 난 집안일을 돕느라 바빠서 배우지 못했어."
"흐음, 그럼 제가 가르쳐 줄까요?"

- 나는 망설였다. 내가 글자를 이해하고 책을 읽을 수 있게 된다니, 그때까지는 생각도 못 해 봤기 때문이다. 책이라는 것은 내게 수수께끼 상자나 다름없었다. 다발로 묶인 종이 뭉치에 어떤 지식이 담겨 있는지 모른다. 책을 펼치고 들여다보아도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꼬불꼬불한 글자들이 적혀 있어 수상하게만 보였다.
"누나가 책을 읽을 수 있을 때까지 여기에 올게요. 다행히 여기에는 서당에서 쓰는 책도 다 있으니까."
불현듯 생각했다. 비록 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 해도 좋다. 이 소년과 또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남편이나 시댁 식구는 내게 짜증밖에 안 내지만 이 소년은 달랐다. 이야기를 하면 따스한 온기가 느껴진다.
"나, 너한테 글을 배우고 싶어."
결심을 굳히고 그렇게 말하자 소년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이 띠 어때? 난 별로지만."
시누이가 허리에 두르고 있는 건 친정어머니의 유품이었다. 하지만 항의할 수는 없었다. 남편과 시댁 식구들 앞에서 나는 항상 겁에 질려 있었다. 대답도 하지 못하고 난처해하자 시누이는 엎드려서 걸레질을 하고 있던 내 허리를 걷어차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띠가 어울리는지 묻고 있잖아!"

 

- 옛날에 어떤 스님이 쓴 책이라는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른다고 했다. 왕복 서간이라 불리는 편지들이 실려 있다고 했다. 
“이렇게 편지 형식으로 만든 책을 왕래물이라고 해요. 이것 말고도 상매왕래나 <백성왕래>라는 책이 유명하죠. 이 <정훈왕래>에는 스물다섯 통의 편지가 실려 있는데, 꽃구경을 준비하는 이야기나, 사법 제도에 관한 소문이나, 질병은 어떻게 예방해야 하는지, 편지로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아요. 그걸 읽다 보면 자연히 지식이 쌓여 가령 이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자연히 알게 되는 거예요. 많은 단어와 예문을 배울 수 있어서 이것도 서당에서 자주 쓰는 책이에요. 이 책은 특히 삽화가 들어 있어서 재미있어요." 
소년이 책을 펼쳐 보여 주었다. 호롱불에 비친 종이를 들여다보니 글자가 없는 공백에 작은 그림이 있었다. 적혀 있는 내용을 설명하는 그림 같았다. 이건 재미있겠다. 

 

- 소년에게 도움을 받아 <정훈왕래>를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역시 낯설었다. 여전히 글자가 꼬불꼬불해서 뭐가 뭔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디서 본 듯한 한자가 몇 개 있어, <천자문>에서 배운 글자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전에는 모든 글자가 똑같이 영문 모를 낙서로 보였는데 지금은 의미를 아는 한자가 있으면 거기만 환하게 보였다. 잘 아는 친구 같은 표정으로 종이 위에 흩어져 있다. 삽화 덕분에 이해하기도 쉬웠다. 더듬더듬 소년에게 물어 가며 글자를 눈으로 좋았다.  

 

- "알겠어! 나, 지금 책을 읽고 있는 거야!"
지금까지는 책 속에 담겨 있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자욱했던 안개가 걷힌 것처럼 책 저편의 경치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 그날 이후로 곳간에서 <정훈왕래>를 가지고 나와 집안일을 하는 틈틈이 숨어서 책을 펼쳤다. 모르는 문장은 다음에 소년을 만났을 때 물어보았다. 소년을 만나기 위해 시작한 공부였지만 차츰 글자를 읽는 게 즐거워졌다.
여기에는 내가 있을 자리가 없다. 말 상대도 없다. 자유롭게 밖에 나가지도 못한다.
남편에게는 무식하다고 바보 취급을 당하고, 시댁 식구들은 나를 험하게 대한다.

하지만 책만은 다정했다. 

- "아버지 얼굴도 어머니 얼굴도 본 적이 없어요. 전 할아버지 하고 할머니 하고 함께 살고 있어요."
소년은 망설이면서도 가르쳐 주었다.
소년의 집도 지주라 그럭저럭 유복하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소년을 낳을 때 돌아가시고 말았단다. 나는 소년이 가없어서 끌어안아 주고 싶었다. 아이를 원했지만 좀처럼 생기질 않아서 그렇게 생각한 것이리라.
"아버지도 네가 어렸을 때 돌아가신 거야?"
"그렇지 않아요. 살아 계시는지 돌아가셨는지도 잘 몰라요. 아무도 제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거든요."
소년의 어머니는 미혼의 몸으로 아이를 임신했다고 한다. 보통은 같은 마을의 누군가가 아버지인 게 틀림없다고 생각할 텐데 아무래도 사정이 좀 다른 듯했다.
"제가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는 산신한테 잡혀간 것처럼 행방불명된 적이 있어요."
"산신? 행방불명?"
"네. 덴구가 잡아갔다고도 하죠."
 
- "덴구가 아이를 잡아가서 몇 달 몇 년이 지난 다음에 마을로 돌려보내는 거예요. 잡혀간 사이 아이들은 덴구하고 함께 하늘을 날며 온갖 세상을 구경하죠. 마을로 돌아온 아이들은 실제로 그 장소에 가 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까지 세세히 알고 있다고 해요. 제 어머니도 행방불명되었을 때는 아직 어린 나이였대요. 축제 날 친구하고 함께 손을 잡고 신사에 갔는데, 그 친구가 갈림길에서 어머니가 사라진 걸 알아차렸대요. 잡고 있던 손에서 어느새 어머니의 손은 사라지고 그 대신 도토리하고 돌멩이, 새의 깃털을 쥐고 있었다는 거예요." 
마을 사람이 모두 나서서 근처 일대를 찾았다고 한다. 축제 날이었으니 밖에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사라진 장소에서 어느 쪽으로 갔든 반드시 누군가를 지나갔을 터였다. 하지만소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 소녀는 삼 년 후에 돌아왔다. 장지문이 꼭꼭 닫혀 있는 저택의 방에 홀연히 나타나 울고 있었다고 한다. 소녀가 저택에 들어가는 모습도 저택까지 걸어간 모습도,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아무도 못 알아듣는 말로 떠들었대요. 하지만 조금씩 원래 말을 기억해 내서 사람들하고 이야기하게 되었죠. 하지만 어머니는 행방불명되었던 삼 년 동안 있었던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어요. 원래 알던 말을 기억해 내면서 아무도 모르는 말은 잊어버린 거죠. 동시에 보고 들었던 것까지 머리에서 쏙 빠졌나 봐요. 심한 일을 당하진 않았을 거예요.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부모한테 버림받은 아이처럼 울었다고 하니까요." 
소녀는 원래의 날들을 되찾았고, 처음에는 모두 그렇게 마무리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소녀의 배가 부풀어 올라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주위 사람들은 아비가 누구냐고 물었지만 소녀도 전혀 알지 못했다. 이윽고 아이가 태어났고 출혈 때문에 소녀는 목숨을 잃었다. 

- "갓난아이인 저를 할아버지, 할머니가 키워 주셨어요. 하지만 전 미아가 되는 버릇이 있거든요. 어렸을 때도 종종 벌거벗은 저를 이불에 뉘어 놓으면 이불 주름에 파묻혀 시야에서 사라지는데, 문득 살펴보면 방구석에서 울고 있더라는 거예요. 아직 몸도 못 뒤집을 나이였는데." 
"그걸 미아라고 하나...?"
"어쩌면 행방불명되었던 어머니의 피를 이어받은 건지도 모르죠. 아니면 어머니를 잡아간 덴구가 제 아버지였을까요? 전 고등어 잘 먹는데."
"고등어? 그게 무슨 말이야?"
"덴구는 고등어를 싫어하거든요. 그래서 아이가 밤길을 갈 때 고등어를 먹었다고 말하면서 걸으면 잡혀가지 않는다고 해요."
"그럼 넌 덴구의 아이라는 거니?"
"얼굴도 빨갛지 않고 코도 길지 않으니 전 분명 길을 잃고 어머니 배 속에 들어갔던 걸 거예요. 길을 잃는 버릇 때문에 어느새 어머니 배 속에 들어가 버린 거겠죠."
소년의 말이 어디까지 진실인지 알 수가 없었다.

 

- "난 네가 길치라 너무 고마워. 네가 길을 잃어 여기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나는 언제까지고 글을 깨우치지 못했을 거야. 책에 뭐가 적혀 있는지 언제까지고 몰랐을 거야. 애초에 내가 책을 읽게 될 거란 생각도 못 해 봤어. 그래서 고마워."
내가 그렇게 말하자 소년은 쑥스러워했다.
"전 마을에 친구가 하나도 없어요. 다들 무섭다고 말을 안 하거든요. 그래서 누나를 만나러 여기 오는 게 즐거워요."
"네게도 언젠가 친구가 생길 거야. 그래, 함께 길을 잃어 주는 친구 정도는."
"그럴까요?"
"분명 그럴 거야."
소년은 동틀 녘이 다가오자 이야기를 멈추고 곳간 안쪽으로 사라졌다.

 

- 소년과의 그런 교류는 어느 날 갑자기 끝났다.
병상에만 누워 있던 시할아버지가 이불속에서 내가 아침마다 일어나 어디론가 나가는 기척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밖에 나가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는 나를 미심쩍게 여긴 모양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시할아버지는 그 사실을 남편에게 알렸고, 남편은 곧바로 내 부정을 의심했다.  

 

- 달아났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마음이 놓여 눈물을 흘린 게 마지막이었다. 그 후로 아무리 험한 꼴을 당해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얻어맞을 때도 아프고 슬플 터인데 그런 내 모습을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모든 게 아무래도 좋았다. 이가 몇 개나 부러지고, 피를 흘리고, 시동생과 시아버지가 옷을 벗겨 내도 나는 그런 내 모습을 조용히 바라볼 수 있었다. 

- "역시 소작농의 딸을 데려오는 게 아니었어. 집 안에 냄새가 나서 못 참겠네. 다음엔 양갓집 아가씨를 데려와야지. 넌 그때가 되면 걸리적거리니 내 체면을 봐서 감기라도 걸려 죽었다고 하고 묻어 주마." 
남편이 내 귓가에 속삭였지만 어딘가 멀리서 나는 소리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그렇다고 마음이 죽은 건 아니었다. 곳간에 있는 책을 떠올리면 너무 읽고 싶어서 가슴이 찢어졌다. 시댁식구들이 열쇠를 숨겨 버려 이제는 곳간에 들어갈 수 없었다. 정훈왕래는 다 읽지도 못하고 빼앗기고 말았다. 이대로는 모처럼 배운 글을 잊어버릴 것만 같아 두려웠다.
 

- 설거지나 빨래를 할 때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눈을 피해 손끝에 물을 묻혀 마른자리에 글자를 썼다. 배운 한자를 기억해 두려 했다. 그럴 때면 소년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나는 소년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글자 쓰는 연습은 안 해도 돼. 읽을 줄만 알면 돼. 책만 읽을 줄 알면 충분해. 내가 글자를 쓸 줄 알아봤자 뭐에 써먹겠어?"
소년이 대답했다.
"안 돼요, 누나. 언젠가 누나가 누군가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을 때 곤란하잖아요. 글을 쓴다는 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걸 누군가에게 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글도 쓸 줄 알아야죠."

-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걸 누군가에게 전한다?
하지만 내게는 생각을 전할 상대도 없다.
그래도 나는 시댁 식구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손끝으로 글자 쓰는 연습을 했다.

- 나는 분명 이대로 착취당하다가 죽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배운 것은 기억하고 싶었다. 그러면 소년을 보고 느꼈던 다정함을 저세상까지 가져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죽음도 두렵지 않았다.

- 날이 갈수록 몸이 약해졌다. 아직 그런 나이도 아닌데 머리카락이 하얘졌다. 밥도 변변히 얻어먹지 못해 뼈와 가죽만 남았다. 허기와 폭력에 따른 고통으로 잠을 못 이루고, 어둠 속에서 글자를 떠올리는 사이 겨우 잠들곤 했다. 

 

- "자, 가요."
소년의 말을 듣고 나서야 이 집에서 달아난다는 선택지도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바보다. 어째서 좀 더 빨리, 내 의지로 달아나지 않았을까? 이 집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안일한 생각이 마음속 어딘가에 있었던 걸까? 아니면 반복된 폭력에 마음이 굴복해, 그들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더 험한 꼴을 당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생각도 못 했던 걸까?

 

- <정훈왕래>로 아이에게 글을 가르치고 있으려니 남편이 목수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남편의 얼굴을 본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뛰어갔다.
오늘 글공부는 여기서 마쳐야겠다.

-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했다.
쌀을 씻어 가마에 얹는데 남편과 아이가 노는 소리가 들려와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 지금 남편은 다정하고 목수 일이 무엇보다 즐겁다고 하는 사람이다. 술을 마시지 않아 남는 돈으로 내게 책을 사 주었다. 우리 같은 서민이 책처럼 비싼 물건을 살 수 있다니 거짓말 같았다. 무슨 책이 좋냐고 묻기에 나는 <정훈왕래>를 골랐다. 그전에도 서당에 부탁해 몇 번 읽긴 했지만 내 소유물로 책을 가져 보기는 그게 처음이었다.

- 마치 꿈만 같다. 어쩌면 지금도 여전히 옛날 남편 집에서, 창문이 없는 창고에 잠들어 있는 게 아닐까? 이러다가 곧 미닫이문이 벌컥 열리고 시댁 식구들이 나타나 꿈에서 깨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 후로 십 년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이 행복이 끝날 기미는 없었다.

 

- "부인, 그 책을 빌리시려고요?"
나보다 조금 젊었지만 눈빛이 탁하고 건강이 나빠 보이는 남자였다. 수염도 다듬지 않아 너저분했고 술 냄새가 풀풀 났다.
"아뇨, 그냥 살펴본 것뿐이에요."
여행 안내서를 제자리에 돌려놓으려는데 남자가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아니, 죄송합니다. 궁금해서 그만 말을 걸었네요. 그 책을 만들 때 저도 조금 거들었거든요."
"어머나, 어떻게요?"
"전 그 책을 쓴 작가의 짐꾼이랍니다. 그 책을 쓴 작가는 실제로 온천 마을에 가서 효능과 그 지역의 특산품을 책에 기록하는데, 전 언제나 그 여행을 따라가지요. 사실은 지금도 여행을 하는 중인데 모처럼의 기회라 이곳 책방에도 로안 선생님의 책이 있는지 보러 온 거랍니다."
나는 작가의 이름을 확인했다.
이즈미 로안?"
"그건 가명이라더군요. 본명은 따로 있다나. 로안 선생님은 말입니다, 귀찮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여행에 따라나서는 사람이 좀처럼 없어요. 그래서 저를 부르는 거지요."

 

- 중얼거리는 남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귀를 의심했다.
길치, 이 남자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길을 잃는 데 천재랍니다. 지도를 꼼꼼히 보고 길을 확인하면서 가는데 어째선지 정신을 차리고 보면 강 모래톱에 갇혀 있는 거예요. 곧은길을 한없이 걷고 있는데 어느새 처음 왔던 곳으로 돌아가 버리기도 하죠. 저는 로안 선생님을 따라 길을 잃고 여러 곳에 가 보았습니다. 모든 게 사람 얼굴로 보이는 마을, 죽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온천 마을, 귀신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있는 마을, 거긴 벚꽃이 참 예뻤는데, 그리고 화산 분화구 주변을 걸은 적도 있었고, 거대한 동물의 몸속럼 부드러운 고기 벽에 에워싸인 곳도 지나갔었죠. ... 부인, 왜 그러십니까?"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 길치가 또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도 해 보았지만 나는 확신했다. 손에 든 여행 안내서를 쳐다보고, 작가의 이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 "이분을 만나 볼 수는 없을까요?"
"하아, 저, 무슨 이유로...?"
"그분에게 쓴 편지가 있어요. 그걸 직접 전해 드리고 싶어요. 수상한 사람은 아니에요. 그래요, 오래전에 어쩌면 그 분과 저는 친구였을지도 몰라요."
남자는 여우에 홀린 표정이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나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 하고 싶은 말이 가슴속에 흘러넘쳤다.
그것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건 마음이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 살아 있으니까. 말이 흘러넘친다.
나는 살아 있다.

- "그럼 여기 계시면 곧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로안 선생님하고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했으니까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가게 밖으로 나가 길 저편을 살펴보았다.
"아, 보세요.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선생님이 오셨네요. 저기 머리 긴 사람이 그분입니다."
나도 밖으로 나가 남자가 가리키는 쪽을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 저편에 머리가 긴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아직 멀어서 생김새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여자로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 "로안 선생님!"
남자가 손을 흔들었다. 목소리를 들었는지 로안 선생님이라는 사람이 멈춰 서서 이쪽을 향해 한 손을 우아하게 들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위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잘 정비된 가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앞으로 여행을 떠날 사람들.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귀에서 마을의 소란스러운 소음들이 멀어지면서 그 사람의 윤곽만 뚜렷이 보였다. 분명 그 소년이다. 내게 "자, 가요"라고 말해 주었던 소년이 틀림없다. 그런데 그때였다. 오른쪽에서 나온 사람과, 왼쪽에서 나온 사람이 스쳐 지나가면서 그의 모습을 가렸다.

 

- "아..."
내 옆에서 남자가 신음을 흘렸다.
로안 선생님이라는 사람의 모습이 사라진 것이다.
마치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남자가 한숨을 쉬었다.

"또 저러네. 선생님의 나쁜 버릇이 도졌나 봅니다. 지금쯤 산속에 있을지 들판에 있을지... 별수 없죠. 여기에서 잠깐 기다립시다. 길을 헤매다 돌아오면 훌쩍 나타나겠지요. 이번에는 어디에 다녀왔는지 나중에 그 얘기나 천천히 들어 보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가 사라진 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 <"자, 가요." 소년이 말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