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야마시로 아사코(오츠이치)] 나의 사이클롭스

일루젼 2024. 1. 30.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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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야마시로 아사코 / 김선영
출판 : 엘릭시르
출간 : 2022.01.14


       

미뤄둔 리뷰들부터 쓰고 싶었지만, 아직 생각 정리가 다 되지 않았다거나 발췌 분량이 많다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단권 리뷰부터 작성하게 되었다. 

 

이 책은 얼마 전 리뷰한 <엠브리오 기담>의 후속작품이다. 등장인물들이 모두 연결되긴 하지만, 전작을 읽지 않고 읽더라도 큰 문제는 없다. 이런 기담류 대부분은 각각의 단절된 이야기가 수록되는 형태의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일부만 읽거나 순서를 바꿔 읽어도 개별적인 이야기들 각각을 즐기는 데는 지장이 없다.

 

하지만 전체적인 관점에서 관찰하고 싶다면 시리즈 전체를 읽기를 추천한다. 아무래도 각 편마다 조금씩 녹아들어 있는 등장인물들의 과거사라거나, 그들 간의 관계성에 대한 이해도가 더 깊어지게 마련이니까.

 

<항설백물어> 시리즈 리뷰에 대한 일말의 부담감 때문인지, 야마시로 아사코의 작품이란 걸 알면서도 자꾸만 교고쿠 나쓰히코를 겹쳐 읽게 된다. 주제나 분위기 등에서 묘하게 통하는 바가 있다.

 

그럼에도 확연히 다르다. 괴이함을 신묘의 영역에 남겨두느냐 아니냐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 두 작품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아마도 그로테스크를 대하는 자세일 것이다.

 

<항설백물어> 또한 잔인한 장면과 묘사가 등장하지만, 저자와 인물들이 그를 다루는 태도는 '인간적'이다. 호기심, 두려움, 그리고 역겨움. 그 모두를 쌓아 올려 벌린 거리를 두고서야 도를 논한다. 그 거리감을 잃은 이들은 말 그대로 인외의 인물들이다.

 

하지만 이즈미 로안 시리즈는 다르다. 핵심 화자는 아니지만 주요 등장인물이자 중심인물인 로안은 '인간적'인 잣대를 넘어선 시각으로 모두를 공평하게 바라본다. 그의 소소한 언행은 나름대로 따뜻하고, 충분히 인의를 담고 있지만 가만히 살피면 기묘한 것을 대할 때 또한 그러하다. 그는 어느 한쪽에 대한 호불호를 드러내지 않는다. 

 

해서 독자는 조금쯤은 더 괴이에 가까운 시선으로, 그것들을 밀어내고 배척하기 보다는 관찰하는 시선으로 살펴보게 된다. 

 

<엠브리오 기담>도, <나의 사이클롭스>도 단편에 따라 화자가 바뀐다. 그리고 그 화자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변화하는 이 거리감 -가치관이라기보다는- 을 느껴보는 것도 이 시리즈를 즐기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엠브리오 기담> 리뷰를 쓰면서 찾아보다 마침 후속작이 발표되었다는 걸 알고 조금 급히 읽게 되었지만, 좋았다. 

매화를 보러 가기 전에는 <항설백물어>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봄이 기다려진다.


   

- 주요 가도에는 관문이 있어, 허가 없이는 지날 수 없다. 예인이나 역사는 통행 증서를 보여주는 대신 재주를 보여주면 통과시켜 주는 경우도 있다지만 나 같은 보통 아가씨는 그럴 수 없다. 재주도 없거니와 여자이기 때문이다. 

- '들어오는 철포에 나가는 여자'라는 말이 있다. 도읍으로 들어오는 철포와 도읍에서 나가는 여자는 특별히 경계해 조사하라는 방침이다. 철포를 규제하는 이유는 대충 알겠다. 하지만 관리들이 도읍에서 나가는 여자를 경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 그 답은 다이묘의 참근교대라는 제도에서 찾을 수 있다. 다이묘들은 정기적으로 도읍과 영지를 오가야 한다. 그때마다 대거 행렬을 이루게 되니 비용이 만만치 않다. 그것을 위한 제도다. 지출을 강요함으로써 세력을 줄여 모반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한다. 나아가 관리들은 다이묘들이 영지로 가 있는 사이 처자식을 도읍에 남기도록 명령했다. 여기에는 인질이라는 의미가 있었다. 도읍에 처자식을 붙잡아두면 다이묘가 영지로 돌아가도 섣부른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이묘의 처자식은 인질이니 허가 없이 도읍에서 나가는 일도 금지했다. 가령 다이묘의 아내가 다른 사람으로 변장해 관문을 지나려 하면 모반의사가 있다 하여 처벌했다. 그런 이유로 도읍에서 나가는 여자를 엄중하게 조사하게 되었고 '들어오는 철포에 나가는 여자'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 내 이름은 린輪. 차륜의 륜, 윤회의 윤과 같은 한자를 쓴다. 평소에는 마을의 도매 서점에서 일한다. 

- "나는 남장 여자로 오해를 사서 옷까지 벗고 조사받은 적도 있어."
로안 선생님이 여행 보따리를 짊어지면서 말했다. 긴 머리카락을 뒤로 묶어 말총처럼 늘어뜨린 선생님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여자인 줄 알고 돌아보는 용모이다. 여행 안내서 집필이 생업이라 각지의 명승고적이나 온천을 찾아 그 정보를 책으로 쓴다. 내가 신세를 지고 있는 도매 서점 행수 어르신이 로안 선생님에게 집필을 의뢰한 터라 나도 여행에 동행해서 선생님을 돕고 있는 것이다. 

 

- "로안 선생님, 굳이 관문을 지날 것 없이 산속으로 돌아가면 되잖습니까?"
짐꾼 미미히코가 물었다.

"그야 가능하겠지. 들키면 책형에 처해질 테니 권하지는 않지만. 게다가 안내인도 없이 산속으로 가는 건 위험해. 뭐가 나올지 모르니까. 산에는 온갖 것들이 살거든. 일단 발을 들이면 거기는 우리가 아는 곳이 아니야."
달관한 듯 태연한 얼굴로 말한다. 선생님 눈에는 모든 게 보이는 듯하지만 기분 탓일지도 모른다.

 

- 무섭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까지 몇 번이나,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죽어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로, 로안 선생님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 이번 인생은 여기서 끝나는 모양이다. 자, 또 갓난아이부터 시작하려나.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눈앞이 가물가물해지고 끝내 정신을 잃었다.

 

- 그다음은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상태였다.
어떤 커다란 존재가 다가오는 기척이 났다.
바닥이 흔들리고 주위 나무들이 술렁거리더니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을 헤치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나를 들어 올려 옮겼다.
강한 팔이 나를 감싸 산속 깊숙이 데려갔다. 

 

-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사이클롭스라는 신은 대장 기술이 뛰어나지 않았던가? 외눈과 제철의 관계는 그것 말고도 또 있다. 오래된 서적에 따르면 이 나라에서는 과거에 아메노 마히토쓰노 카미나 아마쓰마라라고 하는 제철과 대장의 신이 있었다고 하데, 그 이름에 들어 있는 '마히토쓰'는 '외눈'이라는 의미인 데다가 '마라'는 '외눈'을 뜻하는 '메우라'에서 유래한 것이다.  

 

- 다이타로는 풀무로 철을 만드는 작업을 보여주었다. 며칠이나 걸리는 큰일이었다. 흙으로 아궁이를 만들고 목탄을 넣어 불을 지핀다. 풀무로 아궁이 속에 바람을 불어넣으며 목탄과 사철을 교대로 넣는다. 이윽고 사철은 붉은 점토처럼 변했다. 고루 안은 땀이 날 정도로 더웠다. 어른이 몇 사람이나 붙어서 할 작업을 다이타로는 전부 혼자서 했다. 풀무를 넣고 바람을 뿜으면 불길이 세진다. 여럿이서 겨우 집어넣을 수 있는 풀무도 한 손으로 거뜬히 밀어 넣어 바람을 불어넣었다. 
"너무 뜨거워도 안 되고, 뜨겁지 않아도 안 돼. 알맞게 해야 하지."
다이타로는 아궁이 속에 손을 넣더니 녹아서 황금색으로 변한 사철을 손가락으로 떠서 입안에 넣고 맛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

 

- 검신에 사용하는 것은 소량의 질 좋은 부분으로, 그것을 강철이라 불렀다. 그 외의 나머지는 잡철이라 부르며 농기구나 냄비 재료로 쓴다고 했다.

- 다이타로는 풀무 제철 공정이나, 철로 식칼이나 냄비를 만들 때 필요한 비법 등을 일일이 내게 보여주며 설명했다. 그리 관심은 없었지만 거인이 너무 기뻐해서 고개를 끄덕거리며 들어주려고 애썼다. 거인에게 나는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상대인 듯했다. 산속에서 혼자 살아왔으니 좋아하는 철에 대한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즐거우리라.

 

- "이걸 만드는 방법은 어떻게 배웠어?"
"처음부터 그냥 알고 있었어."

 

- 용서해 줄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죽음은 고의가 아니었다고 설명해야 한다. 빨리 오해를 풀지 않으면 마을 사람들이 보복하기 위해 이곳에 올지도 모른다. 

"돌아올 거야?"
"물론이지. 바로 돌아올 거야. 상처에 바를 약하고 해열제, 둘 다 갖고 돌아올게."
다이타로의 손가락을 어루만지고, 불을 들고 그 자리를 떠났다. 

 

- 강을 따라 수풀을 헤치고 마을로 향했다. 도중에 속으로 스스로를 탓했다.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다이타로가 마을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고 했을 때 강하게 말렸어야 했다. 거인과 마을 사람들이 교류하게 만든다니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거인은 내가 산에서 내려가면 자기도 산에서 내려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내가 타일러도 거인은 자기 의지로 마을사람들을 만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잘못되었던 것이다. 나와 다이타로가 서로 정을 품은 것이 잘못이었다. 엄마라고 불러도 끝까지 부정하고 무시했어야 했다. 이름을 지어주어서는 안 되었다. 서로 애정을 품지 않았다면 나를 쫓아 산에서 내려가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을 테고, 비록 고독하다 해도 다이타로는 눈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잘못된 선택을 했다. 

 

- "그 마을은 이제 아무도 안 살아. 몇 명이나 타 죽어서 아무도 못 살게 되었어. 실수로 누가 들어가지 않도록 길을 막아버렸지. 다이다라봇치를 죽여서 그렇다는 소문이야."
"다이다라치?"
"어라, 그리 들렸나? 내 발음이 안 좋아서. 다이타로 법사라고 말한 건데. 잇슨 법사라는 이야기 알지? 그 반대야. 모두 그렇게 불러. 몸집이 이렇게 큼직한 녀석이었다. 그 녀석을 죽이자 시체가 점점 뜨거워지더니 마을의 땅을 녹이기 시작했다더군."
그 열은 미처 피하지 못한 마을 사람들을 재로 만들고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고 한다. 아궁이의 온도를 손으로 재거나 열에 녹은 사철을 입에 넣던 다이타로의 행동을 떠올렸다. 불 주머니가 몸속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거인의 죽음으로 그때까지 쌓여 있던 열이 해방된 걸까? 진실은 알 수 없다. 

 

- 시체는 지금도 여전히 열을 내며 불타오르는 것 같다고 남자가 알려주었다. 날이 저물어 깜깜해졌을 때, 산에 올라 마을이 있던 곳을 굽어보면 어둠 속에 덩그러니 떠오르는 불빛이 보인다고 했다. 녹아내린 땅의 중심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까지고 사라지지 않는 불꽃이 있다. 그것은 뜨거운 강철처럼, 아름다운 황금색으로 빛난다는 것이다. 

 

- <나의 사이클롭스>

 

 

- 이 어촌의 어업은 한 척의 배로 후릿그물을 치는 '한 손 두르기'라고 불리는 방식이었다. 한 척의 배로 깊은 물로 향하며 투망을 던지고, 다시 해변으로 돌아오면서 반원형으로 긴 그물을 친다. 그리고 서른 명 남짓한 남자들이 모여 단숨에 그물을 잡아당긴다. 그물의 반원 안에 있던 물고기들은 일가친척 가릴 것 없이 그물에 걸려 회가 되고 구이가 되고 건어물이 되는 것이다. 
 

- "이건 뭐예요?"
린이 걸음을 멈추고 해변에 굴러다니는 지팡이 같은 물체를 굽어보았다. 우윳빛 지팡이었는데 끝이 둥글게 부풀어 있었다.
"어이, 그거 위험한 거 아니야? 어디서 그런 걸 찾아와서."
그것은 사람의 뼈였다. 정강이뼈와 흡사했다. 어째서 이런 게 해변에 굴러다니는 걸까? 이 아가씨가 도착하자마자 일을 저지르는군.

 

- 하지만 린은 흥미롭다는 듯이 몸을 숙이고 뼈를 살펴봤다.
"사람 뼈치고는 너무 큰데요."
확실히 그것은 상당히 길었다. 린의 키 절반이나 되었다. 저게 정강이뼈라면 뼈 주인의 머리는 집 지붕보다 높은 곳에 있었을 것이다. 
"그럼 분명 고래 뼈 같은 거겠네."
"아뇨, 이건 틀림없이 사람 정강이뼈예요. 고래한테는 이런 형태의 뼈가 없어요."
"네가 그리 말하니 분명 그렇겠지. 머리만큼은 좋으니, 성격하고 얼굴은 조금 그렇지만."

- 모처럼 칭찬해 줬는데 린은 불쾌하다는 듯 내게 모래를 뿌리고 이즈미 로안 곁으로 달려갔다. 팔짱을 끼고 후릿그물을 바라보고 있던 이즈미 로안을 잡아끌어 오더니 모래 위로 굴러다니는 뼈를 가리키며 이 뼈는 대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즈미 로안은 이렇게 남들은 잘 모르는 일에 해박하다. 장발의 여행서 작가는 뼈를 자세히 살펴보더니 턱을 짚고 생각에 잠겼다. 
"하유타라스에서 흘러든 뼈일지도 모르겠구나."
"하유타라스?"
"어느 지방 해안에는 때때로 거대한 인골이 흘러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이곳이 바로 그 해안일지도 모르지. 하유타라스는 바다 너머에 있다고 하는 나라의 이름이란다." 

 

- <하유타라스의 비취>

 

 

- 가장 이상한 것은 색깔이었다. 피부도 머리카락도 눈도 모든 게 하였다. 아이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았고, 가만히 있으면 나비와 새 들이 모여들었다. 아이가 앉았던 자리는 어째선지 항상 초목이 잘 자랐다고 한다. 

- 하지만 마을 축제 날, 새하얀 아이는 모습을 감추었다. 어른들은 흥행소에서 아이를 데려갔다고 설명했다. 원래 열 살이 되기 전에는 팔지 않지만 아이를 눈여겨본 사람이 있었는지 시기가 앞당겨졌다는 것이다. 소녀는 그 말을 듣고 아쉬워했다. 작별 인사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그날 밤, 마을 복판에 성대하게 불을 지폈다. 모닥불 주변에서 머리가 네모난 어른들과 평범하지 않은 체형의 아이들이 노래와 춤을 즐겼다. 피리 소리가 밤이 깊도록 들렸고 아이들은 먹음직스러운 만두를 받았다. 

- 소녀가 어떤 경위로 촌장의 집을 들여다보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어른들이 쉬쉬하며 차례대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흥미를 느꼈는지도 모른다. 소녀는 문틈으로 촌장의 집을 몰래 들여다보았다. 그곳에서 본 것은 요리를 나눠 먹는 어른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그릇에 담은 요리를 앞에 두고 두 손을 모으고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어 삼키고 있었다. 그것뿐이었다면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어른들은 소녀를 발견하고는 창백한 얼굴로 호되게 야단치며 쫓아냈던 것이다. 그 모습이 평범하지 않았다. 소녀는 붙잡으려는 어른들의 손을 피해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있었던 것은 도마 위에서 토막 나 있는 여동생의 모습이었다.

 

- "새하얀 피부와 눈,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 드물게 태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인어라고 부르는 지방도 있는데, 그 살을 먹으면 수명이 늘어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마을 어른들은 그걸 믿었던 거지요. 촌장의 지시였던 것 같습니다. 아이의 살을 잘게 썰어 요리해서 다 함께 먹었던 겁니다." 
빗소리가 여전히 지붕을 때렸다. 우리는 승려의 갈라진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 "소녀가 느낀 슬픔과 분노가 얼마나 컸을까요. 두 번째 머리가 가만히 입술을 벌리고 독경을 읊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것을 보고 재빨리 달아난 사람이 몇 명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촌장이나, 제게 이 이야기를 들려준 노인이지요. 그들은 소녀의 두 번째 머리가 독경을 읊었을 때 곰이 겁을 먹고 낙석이 부서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의 신변에 화가 미칠 것을 눈치챘던 걸까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 그 자리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 빗소리는 기세가 잦아들었다. 우리는 마루방에 누웠다. 젖은 승복을 입은 채로 승려가 옆에 드러누웠다. 몸이 비해 승복이 커서 마치 도롱이벌레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잠이 들었다. 부뚜막의 장작이 바르작거린다. 새까만 숯 안쪽에서 빨간 열기가 어른거렸다. 어둠 속의 그 모습이 아름다웠다. 
 
- 끔찍한 꿈을 꾸고 벌떡 일어났다. 꿈의 내용은 금세 잊어버렸지만 다시 잠이 오지 않아 마루방에서 몇 번이나 몸을 뒤척였다. 옆에 이즈미 로안과 승려가 누워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린이 새근새근 자고 있다. 나는 일어나서 밖을 산책하기로 했다. 바람을 쐬면 기분도 달라져 잠이 올지도 모른다. 

- 비구름이 싹 걷힌 하늘에는 보름달이 떠 있었다. 깊은 밤 마을의 모습을 비추는 새하얀 달빛에 미끄덩한 진창에 가라앉은 하얀 뼈들이 점점이 빛났다. 마을 사람들의 뼈다. 사각형 해골들이 새까만 눈구멍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측두부와 후두부의 매끈한 표면이 완벽한 각을 이루고 있었다.

 

- - "꼴사납군. 죽여버려. 이놈 발자국을 쫓아가면 다른 놈들이 있는 곳까지 갈 수 있어."

 

- 나도 뒤늦게 깨달았다. 어디선가 독경 소리가 들렸다.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말의 윤곽이 녹아서 엉겨 붙은 듯한 소리였다. 어둠 저편에서 미끄러운 바닥을 밟으며 승려가 나타났다. 아까까지 내 옆에 누워 있던 젊은 승려였다. 하지만 그의 입가는 움직이지 않았다. 굳게 다문 입술에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있는 쪽에서 독경 소리가 들려왔다.

 

- "달아나세요, 지금이라면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승려는 내게 말한 것이 아니었다. 산적들을 노려보며 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위화감이 들었다. 갈라진 목소리가 아니었다. 영롱한 그 목소리는 남자라기보다 여자 목소리 같았다. 승려가 말하는 사이에도 독경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자세히 보니 승복 앞섶이 풀려 있었다. 그 가슴께에 젖가슴이 보였다. 이제야 깨달았다. 이 사람은 여자였던 것이다. 어쩌면 여자 목소리를 감추려고 일부러 쉰 목소리를 냈던 걸지도 모른다. 큼직한 승복을 입은 것도 몸의 선을 가리기 위한 것일까?

 

- 두 개의 가슴 사이에 오싹한 것이 붙어 있었다. 그것을 깨닫고 나뿐만 아니라 산적들도 뒷걸음질을 쳤다. 승려의 가슴에 갓난아기 같은 형체가 들러붙어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 품에 안긴 갓난아이 같은 모습으로, 몸의 대부분이 승려의 몸에 동화되고 융합해, 경계는 피부로 매끄럽게 덮여 있다. 머리 반쪽은 승려의 가슴에 묻혀 있고 나머지 반쪽만 이 세상에 드러나있어 입가만 간신히 보이는 상태였다. 삭발한 둥그런 머리의 여인이 새하얀 달빛을 받으며 가슴에 들러붙어 독경을 읊는 갓난아이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어루만졌다. 그 모습이 어찌나 신성한지 몸속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 "가엾게도."
여인이 말했다.
"나는 멈출 수 없어요. 이 아이가 멋대로 하는 짓이니."
승복 옷매무새를 가다듬자 가슴에 들러붙은 갓난아이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독경은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이미 말이 아니었다. 순수한 소리였다. 

 

- "스님이 어젯밤 우리를 찾아온 건 과연 우연이었을까?"

이즈미 로안이 해골을 늘어놓으며 말했다. 

"무슨 뜻입니까?"
"어쩌면 이 마을에 찾아오는 사람을 어디서 지켜보고 있었던 걸지도 몰라. 어쩌면 저 집도 미리 준비해 둔 건지도 모르지. 부뚜막에서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연기가 났지? 불을 피우면 연기가 나는 약이라도 발라두었던 것 아닐까? 그러면 연기를 신호 삼아 누가 마을에 있다는 걸 멀리서도 알 수 있잖나."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 스님은 어째서 감시하는 겁니까? 이런 마을 폐허에 누가 온다고요?"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어. 몇몇 어른들이 살아남았다고. 동생이나 다름없던 소녀를 죽여서 그 살을 먹기로 결정한 건 분명 촌장이었다고 했지. 하지만 촌장도 피신했어. 지금도 여전히 복수할 상대를 찾고 있는 건지도 몰라."

 

- 나는 기억해 냈다. 승려가 찾아왔을 때, 집 안에 있는 우리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은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복수할 상대가 아님을 알고 긴장이 풀려서 그런 표정이 나온 게 아닐까? 복수할 상대가 그녀의 모습을 보아도 바로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성별을 숨기고 승려 행세를 했던 건지도 모른다. 

 

- 커다란 나무 주변에 해골을 모았다. 측두부와 후두부, 정수리가 편평한 해골들이 마치 상자에 들어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가지런히 늘어서 있었다. 아이들의 몸을 변형시키고 키워왔던 어른들의 최후였다. 결코 악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애정을 듬뿍 쏟아 키웠다고 하지 않던가. 때문에 그들이 기괴한 반면 동시에 경이롭기도 했다. 우리는 그들을 향해 두 손 모아 기도했다. 

 

- <네모난 두개골과 아이들>


 - "확실히 그렇기는 하지만, 로안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즈미 로안은 그릇에 담긴 국물 한 방울까지 싹 마시고 우리를 보았다.
"진짜 같기도 하고 인형 같기도 했어. 조금 더 가까이서 구경했다면 확실히 알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일단 진위는 덮어두자. 갓파의 마을로 여행 안내서에 쓰면 그만이잖아."
"안 돼요, 거짓말을 한 게 된다고요."
"갓파의 마을이라니 재미있잖아. 용케 생각해 냈어."

 

- 린은 불만스러워 보였지만 이즈미 로안은 집필에 의욕을 보였다. 이 남자는 여행 중에 기묘한 풍습이나 전설을 만나면 기쁜 표정을 짓는다. 책 소재를 손에 넣었다며 기뻐하는 것이다. 이번에도 갓파의 진위 여부에는 관심이 없다. 그보다 이것을 책으로 써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죽겠다는 태도였다. 

 

- 결국 갓파가 실존하는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가게에서 나왔다. 산간 마을은 밤이 되어도 행인들이 많았다. 갓파 덕분에 어디나 북적거렸다.
"먼저 숙소로 돌아가세요. 저는 술 한잔하고 올게요."

 

- "어느 날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어. 어쩌면 익사해서 부푼 시체를 사람들이 갓파로 착각한 게 아닐까? 갓파와 익사체는 특징이 비슷하거든. 창백한 듯 녹색빛이 도는 피부. 머리에 얹고 있는 접시는 강바닥에 부딪쳐 머리가 벗겨져서 그런 거겠지.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은 대부분 물속에서 몸이 굽어기역 자가 돼. 그 자세로 물에 빠지면 양쪽 무릎과 정수리 세 점이 먼저 강바닥에 닿거든. 그래서 정수리 머리카락이 사라지는 거야. 게다가 갓파는 항문이 세 개 있다고들 하는데 익사체가 이완되어 벌어진 항문이 그렇게 보인 걸지도 몰라. 짧은 부리가 있다는 건, 익사체의 혀는 입에서 튀어나올 정도로 팽창한다잖아. 부풀어 오른 몸이 물가에 떠 있는 모습은 등딱지가 붙은 뭔가가 헤엄치는 것처럼 보였겠지."

 

- <갓파의 마을>

 

 

- "눈가림산은 무서운 곳입니다. 산길에서 누군가를 만나도 절대 눈을 마주치거나 말을 걸어서는 안 됩니다. 말을 걸어와도 대답해서는 안 됩니다. 괴이한 일이 벌어져도 모르는 척하세요."
여관 주인은 이불속에서 콜록거리며 그런 말을 했다. 상태가 좋지 않은지 방에서 나오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 주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괴이한 일? 대체 어떤 일 말씀입니까?"
여행 안내서 작가 이즈미 로안이 살짝 열린 장지문 앞에 단정하게 앉아 있다. 

 

- "그것도 몰라? 그런 식으로 이야기해서 손님을 겁주면서 재미있어하는 거야."
"그럴까요?"
"아니, 잠깐, 알겠다. 나그네들을 겁줘서 길을 못 떠나게 하려는 것 아닐까? 손님을 며칠 붙들어뒀다가 숙박비를 잔뜩 청구하는 거지. 그쵸, 로안 선생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 이즈미 로안은 뒤로 질끈 묶은 여자처럼 긴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걷고 있다. 전체적으로 말라서 기운이 없어 보이지만 나보다 힘이 세서 아무리 걸어도 지치는 기색이 없다. 어쩌면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요괴의 피를 이어받은 게 아닐까 싶을 때도 있다.
"지어낸 이야기라면 아무 문제없지. 하지만 두 사람 다 정신은 바짝 차려. 뭐가 튀어나오고 이상한 일이 생겨도 결코 그쪽은 보지 말고 모르는 척하도록." 

 

- 얼마 지나 그늘이 지더니 갑자기 주위가 어둑해졌다.
서늘한 바람이 불자 산의 나무들이 부스럭거렸다.
쏴아 쏴아아...
길가에 죽은 벌레들이 떨어져 있다.
어디선가 불쾌한 냄새가 풍겨 왔다.

수풀 속에 너구리 같은 동물이 죽어서 썩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방금 전까지 들리던 새소리가 갑자기 사라져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땀이 옆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수풀 너머에서 뭔가 쳐다보는 기척이 났다. 산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그 기척은 강해졌다.

 

-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이상하다. 그렇다면 어째서 갑자기 그늘이 졌을까? 머리 위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이 햇빛을 가린 탓일까? 
나뭇잎이 사방에서 사람 말소리처럼 쏴아아 소리를 냈다. 고개를 넘어가는 길은 수풀 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양쪽 잡목림은 휘고 엉켜서 우리 쪽으로 가지를 뻗고 있다. 마치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도움을 청하는 모습 같았다. 


- 세 사람 다 말수가 줄었다. 입을 다문 채로 발밑만 보고 걸었다. 이즈미 로안이 앞장섰다. 이어서 린이, 마지막으로 내가 나란히 서서 걷고 있었다. 말이 없으니 서로의 옷깃 스치는 소리, 바닥을 밟는 신발 소리, 숨소리까지 들렸다. 

 

- 어느 순간 나는 그 소리를 알아차렸다.
내 앞을 가는 두 사람도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들었을 것이다. 내 뒤에서, 뭔가 따라오는 소리를. 

 

-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앞으로 나아갔다.
발밑만 보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시야 구석에 무서운 광경이 들어왔다.
몇백 개나 되는 사람 손가락이 수풀을 가르고 있었다. 그 손가락들이 지네 발처럼 꿈틀거리며 수풀을 어수선하게 흔들었다.
길가에 시커먼 덩어리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벌레들이 잔뜩 모여 뭉친 덩어리였다. 길가에 버려진 갓난아이에게 벌레가 꼬여 있었다. 아이는 아직 살아 있었는지 우리가 근처를 지나자 벌레가 들락날락하는 입에서 약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바위틈에서 기어 나온 내장이 수풀 그늘에서 꿈틀거렸다. 창자와 간, 혀와 이를 뭉쳐놓은 무언가 번들거리며 꿈틀대고 있었다. 꽃 위에서 춤추던 나비를 향해 창자를 휘둘러 떨어뜨리더니 잡아먹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못 본 척했다.

 

- 이건 틀림없이 환각이다. 의혹은 가슴속에 깊이 묻었다. 
이것이 눈앞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면 여인은 안간힘을 다해 우리에게 매달려서라도 도움을 청하려 했으리라. 사내는 그 칼로 우리에게도 위해를 가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지 않는 점으로 보건대 이 남녀 또한 눈가림산이 보여주는 괴이한 환각의 일부다. 

 

- 바로 옆을 지나갈 때 살해당한 여인이 말없이 우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어째서 모르는 척해?
왜 나를 못 봐?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 알잖아?
그런데 어째서 모르는 척 살아?
여인이 책망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우리는 어쩔 도리가 없다. 보고도 못 본 척하며 나라는 존재를 지키는 것이다. 아무리 끔찍한 일이 벌어져도 그대로 지나 산을 내려가야만 한다.

 

- 우리에게도 그것은 고문이었다. 눈을 감을 수도, 두 손으로 귀를 막을 수도 없으니까. 그런 짓을 하면 도움을 청하는 그 목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을 들키고 만다. 우리는 불행이나 죽음으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그러니 부디 이해해 다오. 원망하지 말아 다오. 두고 가는 우리를 용서해 다오.  

 

- 이 산에서 벌어지는 괴이한 일들은 산에서 죽은 이들의 정념이 분명했다. 산에 들어왔다가 나가지 못하고 죽은 이들의 아픔과 고통, 슬픔, 외로움이 쌓여 우리에게 환각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그들은 알아주길 바라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어버린 자신들의 슬픔을, 어떻게든 알리려고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눈을 마주치거나 대답을 하면 끌려간다는 소문은 분명 그들이 외로워하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자기들을 알아봐 준 사람들을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리라. 죽음의 고독을 조금이라도 치유하려고 곁에 있어달라고 바라는 것이다. 


- 발에 피가 묻어 있었다. 핏물을 밟았을 때 묻은 것이다. 환각이 아니라 진짜 피가 묻은 것처럼 보인다. 언젠가 이 자국도 사라질까?

- 야무져 보이는 아가씨.
긴 머리카락을 뒤로 질끈 묶은 단아한 생김새의 사내.
모두 내가 알지 못하는 얼굴이다. 세 사람 다 내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무시한다.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대도 결코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 두드리거나 때려보면 반응할지도 모르지만 그럴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하다못해 조금이라도 나를 알아봐 준다면 마음 놓고 만져볼 수 있었으리라. 

 

- 친구들은 도움을 청하는 내 목소리를 못 들은 척, 그대로 떠나버렸다.
"기다려! 알았다! 사실은 들리지? 보이지? 모르는 척하는 것뿐이지?"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는 세 사람을 겨우 따라잡았다. 나는 구더기를 떨쳐내며 호소했다. 

 

- 길이 평탄해졌다. 시냇물에 걸린 작은 다리를 건넜다. 새소리가 나무 사이에서 들려왔다. 햇빛이 나뭇잎 사이로 쏟아져 바닥에 얼룩을 그렸다. 산꼭대기에 모여 있던 보라색 구름도, 그 사이로 보였던 거대한 얼굴도 어느새 사라졌다. 
앞장서서 걷고 있던 머리 긴 사내가 옷주머니에서 하얀 종이를 떨어뜨렸다.

 

- "로안 선생님, 뭔가 떨어졌어요."
아가씨가 사내에게 말했다.
"필요 없어서 버린 거야. 그대로 두렴."
선생님이라 불린 사내는 그대로 걸어갔다. 다른 두 사람도그의 뒤를 따랐다.

- 편지에서 고개를 들어 정면을 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긴 머리를 질끈 묶은 사내가 뒤로 돌아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로안 선생님!"
아가씨가 소리쳤다.
"괜찮다, 산은 이미 넘었어."

-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다가갈 수 없었다. 길가에 흙더미가 있고 바위에 "눈가림산"이라고 새겨져 있다. 친구들과 함께 산에 들어올 때 같은 흙더미를 본 기억이 있었다. 나는 아무래도 저 너머로는 가지 못하는 모양이다. 산에서 나갈 수 없는 것이다. 
편지에 적힌 글씨가 눈에 익었다. 내게 글을 가르쳐준 아버지의 글씨다.
"그건 자네 아버님께 받은 거야. 산 어딘가에 두고 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본인에게 전해줄 수 있다니 잘되었군. 자네가 누군지 이야기해 줘서 편지 주인이라는 걸 알았어." 

 

- 장발의 사내가 내 눈을 보고 있다. 다른 두 사람은 계속 내게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장발의 사내가 아무렇지도 않은 것을 확인하고 마침내 쭈뼛쭈뼛 나를 돌아보았다. 

 

- 나는 세 사람의 얼굴을 정면에서 마주 보았다.
봐주는 이가 있다.
말을 걸어주는 이가 있다.
그것만으로 홀로 남은 외로움과 죽음의 고독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 흙더미를 지나 눈가림산을 빠져나오자 네 번째 사람의 발소리도,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괴이한 현상은 흙더미 저편에서만 벌어진다는 뜻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는 척하기가 이토록 힘들 줄은 몰랐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즈미 로안은 흙더미 반대편을 향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와 린도 뒤를 돌아 같은 방향을 보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눈가림산 깊은 안쪽으로 이어지는 길만 있을 뿐이다. 로안 선생님이 주머니에서 떨어뜨린 하얀 종이는 바닥에 그대로 툭 떨어져 있다.  

 

- 아까까지 우리 곁에 있던 네 번째 사람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이즈미 로안은 마치 거기에 누가 있는 것처럼 한 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린도, 이쯤에 얼굴이 있을까 싶은 위치를 바라보며 잘 보입니다, 하는 표정을 지었다. 산속에서는 눈을 마주칠 수 없어 고개 숙인 시야 구석으로 발끝만 보았다. 그자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분명 있었다. 내 뒤에서 다가와 마치 처음부터 여행에 동행한 것처럼 ... 

 

- <죽음의 산>

 

 

- "나그네들은 제 말을 믿어주었습니다. 그런 정체 모를 불빛보다 눈앞에 있는 제 말을 따르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린 거겠지요. 
갈림길에서 불빛을 내버려 두고 가던 길을 갔습니다. 우리가 떠날 때, 그 기묘한 불빛이 못내 아쉬운 기색으로 일렁이던 게 기억나요. 그렇게 무사히 나그네들을 그분 저택으로 안내할 수 있었습니다
아아, 다행이야.
그대로 다른 쪽 길로 들어갔다면 산기슭 마을에 도착했겠지요. 나그네들도 달아났을 거예요. 
그 불빛은 어쩌면 그분 저택에 끌려가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생지옥을 맛본 자들의 정념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죽은 후에 초롱불 같은 불빛이 되어 산을 헤매고 있었던 걸까요? 나그네들을 저택으로 데려가려는 저를 보고 어떻게든 말리려 했던 건지도 모르겠네요..."

 

- "엄마, 그 불빛은 유령이었던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해. 초롱불처럼 보였지만 절대 초롱불은 아니었거든. 초롱불이라면 그걸 들고 있는 사람이 보여야 하잖니? 자세히 보았지만 그런 건 보이지 않았어. 허공에 살짝 떠서 스윽 움직였단다."
"믿기 어렵지만 그런 일이 가끔 일어나지. 사람이 강한 마음을 남기고 죽은 경우에는..."
사내가 엄숙한 표정으로 아들에게 말했다.

 

- 나는 팔짱을 끼고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를 어쩌나 고민하고 있었다. 
화덕을 에워싼 세 사람은 밤길에 나타난 기묘한 불빛만 화제로 삼고 있다. 하지만 더 신경 쓰이는 점이 있지 않았나? 특히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마지막에 여인은 무서운 소리를 했다. 하지만 모두 그 점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이 세 사람은 정상이 아닌가? 아니, 아니면 내가 비정상인가?

 

- "물론 정말로 있었던 이야기지요."
그렇게 말한 여인은 앞머리 사이로 눈을 드러내고 깔깔깔깔깔 기묘한 목소리로 웃었다.
이어서 화덕을 사이에 두고 정면에 앉은 사내가 무서운 이야기를 시작했다. 옷자락 사이로 보이는 통나무처럼 굵은 팔뚝은 털로 뒤덮여 있었다. 책상다리로 앉아 있어도 천장에 머리가 닿을 만큼 몸집이 거대했다. 마치 바위산이 솟아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화덕의 불꽃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은 붉은빛으로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두 번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 "이건 내가 마을에서 술을 마셨을 때 겪은 일이야. 내가 좋아하는 국숫집이 있거든. 마을에 가는 날에는 반드시 거기서 술을 마셔. 어이, 당신, 술은 좋아하나?"
사내가 내게 물었다. 땅이 흔들릴 만큼 굵은 목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로저을쏘냐. 나는 언제 어느 때라도 술을 마시고 싶은 사람이다. 내 반응을 본 사내가 씨익 웃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이상하리만큼 길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보였다.

"그래. 하지만 과음은 조심해. 술에 취하면 지금 일어나는 일이 진짜인지, 아니면 실제로는 벌어지지 않은 일인지 가끔 분간이 안 가거든.
하지만 그날은 아직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어. 머리도 말짱했거든. 혀도 안 꼬였고 길도 똑바로 걸을 수 있었어. 그 일이 벌어졌을 때 술 탓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어. 그래서 더 무서웠지. 
나는 국숫집 의자에 앉아 술을 홀짝이고 있었어. 그런데 누가 내 오른쪽 어깨를 툭툭 치는 거야."
사내는 자기 오른쪽 어깨를 쓰다듬었다. 근육이 언덕처럼 불룩하게 솟은 어깨였다.

- "벽에 남은 손톱자국을 숨기려고 미장일 같은 것도 해. 그러면 심부름값 대신 잘린 손가락을 줘. 저택에서 토막 난 나그네들의 손가락이야. 나는 그걸 빨거나 씹으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걸 좋아해. 
그날도 저택에서 일을 열심히 도와서 손가락을 하나 받았어. 집게손가락이었어. 가늘었으니 여자 손가락이 아니었을까? 곧은 막대기처럼 굳어 있었어. 그렇게 받은 손가락을 입속에 넣고 불리듯이 핥으며 산길을 걷고 있었어. 딱딱한 손톱과 까칠한 지문을 혀로 문지르면서 거기까지는 평소처럼 아무 문제도 없었어. 
중간쯤 왔을 때 침이 묻은 손가락을 이로 살짝 씹어보았어. 물컹한 살 속에 딱딱한 뼈가 느껴졌어. 그런데 그 직후였어. 내 입 안에서 손가락이 꿈틀 움직인 거야. 
기분 탓인가 했는데 아니었어. 입에 넣은 손가락이 홱 굽어서 뺨 안쪽을 눌렀어. 그러더니 갓 잡은 물고기처럼 입안에서 날뛰는 거야.
그건 아까까지 움직이지 않던 평범한 손가락이었어. 시체에서 잘라냈는지, 산 채로 잘라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이유는 몰라도 갑자기 움직인 거야. 내가 깨문 탓에 아파서 그만 되살아난 건지도 몰라." 

 

- 얼마나 달렸을까. 언제부터인지 쫓아오는 기척이 사라졌지만 여기서 멈추는 건 위험했다. 기어서라도 전진하자. 
문득 코를 찌르는 냄새가 풍겨 왔다. 온천 냄새다. 눈앞에 대숲이 펼쳐지더니 사람이 정비해 놓은 길이 나왔다. 길을 따라가 보니 환한 석등이 늘어서 있고 그 끝에 온천 여관이 있었다. 문을 두드려 여관 주인을 깨워 울면서 매달렸다. 

 

- "일행? 로안 선생님이, 로안 선생님이 여기 묵고 계시는구나!"
"예, 머리가 길고 곱게 생긴 남자분이십니다. 어제 낮부터 묵으시면서 온천을 몇 번이나 이용하셨지요. 같이 오신 아가씨도 온천이 마음에 든 모양이에요. 그나저나 고생하셨네요."

 

- "전부 오해야. 당신한테 들려준 무서운 이야기는 전부 지어낸 이야기였어."
... 예, 그렇습니다.
그 집에서 들은 무서운 이야기는 전부 지어낸 이야기라고 남자가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 어째서 그런 짓을 했느냐고요? 세상에, 세 사람은 제 얼굴을 보고 마침내 집에 가난뱅이 신이 찾아왔다고 믿었다는 겁니다. 린, 어이, 야 왜 웃는 거야? 이건 웃을 일이 아니야, 로안 선생님, 들어보세요. 다시 말해 가난뱅이 신을 집에서 쫓아내려고 일부러 무서운 이야기를 했다고 주장하더라고요. 자기들을 무서운 존재로 꾸미면 아무리 가난뱅이 신이라도 어디로 가버릴 줄 알았다나요? 제가 길을 잃은 사정을 말할 때 그 사람들, 그런 이야기를 숙덕거렸다는 겁니다. 

-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였고, 사내가 그걸 손가락이라고 하니 누구든 나뭇가지와 손가락을 분간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 후에는 서로 오해도 풀고 곰 같은 사내와 어깨를 두드려가며 담소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새삼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소탈한 사람들이더군요. 부인은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빗어 넘겼는데, 얼굴을 자세히 보니 상당한 미인이더군요.  

 

- 산들바람인 줄 알았는데 은근히 따뜻하더라고요. 누가 한숨을 부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깜짝 놀라 시선을 집중하니 바로 눈앞에 흐릿한 불빛이 떠 있지 뭡니까? 
초롱불처럼 흐릿한 불빛이었습니다. 간밤에 여인이 말했던 '길잡이 초롱불'에 나올 듯한 신비한 불빛이었죠.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곳에서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더군요. 불빛이 흐릿하니 약해서 눈에 힘을 주지 않으면 아침 햇살 속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였어요. 비명은 지르지 않았지만 저는 넋이 빠졌습니다. 눈을 비비고 몇 번이나 껌뻑거려 보았지만 그 불빛은 사라지지 않았어요. 

 

- 아무래도 그 가족과 여관 주인이 현관 앞에서 뭔가 이야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마침 집으로 돌아가려는 참이었겠지요. 여관 주인은 그들을 배웅하러 나갔던 거고요. 이것도 인연이니 저도 인사나 할까 싶어 그쪽으로 가려는데, 길을 이끌어주던 불빛이 저를 보내지 않으려는 듯이 코끝에서 막아서더라고요. 여기서 지켜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겠죠. 저는 복도 모퉁이에서 그들을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 저쪽에서 점점 다가오고 있는 게 느껴지지요? 이제 곧 장지문을 열고 방에 들이닥칠 겁니다. 그때 과연 문 앞에 서 있는 건 인간의 형상일까요?
마치 나쁜 꿈을 꾸는 것만 같습니다.
보세요, 바로 저 앞까지 왔어요.
똑똑히 들려요.
그 웃음소리가.

 

- <폭소의 밤>

 

 

- 길이란 자고로 자연히 생겨나는 것이다. 거기에 사람이 살고 왕래하는 사이에 발길에 다져져 길이 생긴다. 강을 따라, 혹은 산등성이를 따라 길은 지형을 따라 휘었다. 
대조적으로 똑바른 길도 있다. 그것은 대개 도읍을 중심으로 계획적으로 정비된 길이었다. 작은 계곡은 메우고, 고개 부근은 깎아내 가급적 평탄한 직선이 되도록 만든다. 이런 경향은 바다 너머 이국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한다. 

- 전쟁이 잦았을 때는 각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길을 정비했다. 영지 안의 길은 정비하지만 이웃 지방과 오가는 길은 일부러 내버려 두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영지 안에서는 물자를 원활하게 수송하고 싶지만 이웃 지방과 왕래하는 길을 만들면 공격당하기 쉽기 때문이다. 전쟁의 시대가 끝나고 전국이 통일되자 이런 경향도 바뀌었다. 이번에는 중앙에서 각지로 전령을 보내기 위해 각 지방을 잇는 가도를 정비해야 했다. 

 

- 가도를 정비하자 사람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신사와 사찰을 찾고 명승고적을 구경하기 위한 여행이 사람들의 오락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 보통 사람들에게 여행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평생 자기가 태어난 마을을 떠나지 않는 사람도 흔했다. 많은 사람들이 여관에 묵는 방법도, 관문을 지나는 방법도 여행지에서 조심해야 할 점도 몰랐다. 때문에 친절하고 세세하게 여행하는 법을 알려주는 여행 안내서라 불리는 책이 팔리게 되었다. 친구 이즈미 로안이 쓴 <도중여경>도 그중 하나다.

 

- "로안 선생님, 여기는 어딥니까?"
짐을 메고 걸으면서 앞장서서 가는 이즈미 로안에게 물었다. 남자치고는 보기 드문 장발을 말총처럼 뒤로 질끈 묶고 있다. 아까부터 우리는 습지대를 걷고 있었다. 축축하니 미끄러운 땅에 발이 엉켜 제대로 걷기가 힘들었다. 
"무슨 소리야, 미미히코. 내가 알 리 없잖나."
이즈미 로안의 자신만만한 대답을 듣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 시조코의 집에 있는 우물은 굉장히 깊다. 안을 들여다보아도 수면은 보이지 않고 먹물 같은 어둠이 있을 뿐이다. 돌을 던지면 한참 아무 소리도 없다가 잊을 때쯤 겨우 첨벙하는 소리가 들린다. 두레박으로 물을 폈을 때는 고생스러웠다. 물통을 묶은 밧줄은 마을 끝에서 반대편 끝까지 연결할 수 있을 정도로 길었다. 우물에 던져 물을 길어도 물통이 무거워서 시조코의 가느다란 팔로는 한 번에 끌어올리지 못하고 중간에 몇 번이나 쉬어야 했다. 말이 쉬는 거지 밧줄을 놓을 수는 없다. 물통이 떨어지면 다시 처음부터 길어야 한다. 친척의 주선으로 도키치로와 부부가 되기 전까지 물을 긷는 고생스러운 일과가 이어졌다.  

 

- 도키치로라는 남자는 튼튼한 몸과 온후한 성격을 가진 거한으로 시조코를 한 손으로 번쩍 들어 올려 빙글빙글 돌릴 수 있었다. 도키치로가 우물물을 긷기 시작하면서 시조코는 많이 편해졌다. 도키치로가 근육으로 뒤덮인 팔로 밧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릴 때 시조코는 남편을 응원했다. 어느 날, 밭일을 마치고 돌아온 도키치로가 우물 옆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내가 죽었을 때를 생각하고 있었어. 당신, 내가 없으면 예전처럼 몇 번이나 쉬어가며 우물물을 길어야 하잖아. 가녀린 당신 팔로는 힘든 일이지. 별일 없을 때 어떻게든 대책을 마련해두고 싶어."
"당신이 죽었을 때라니, 생각도 하기 싫어."
"하지만 사람 일을 어떻게 알아? 내가 죽어도 고생하지 않게 우물물을 쉽게 길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
"그런 방법이 있으면 모두 그렇게 했겠지."
 

- 도키치로가 가족을 남기고 죽을 리 없다. 먼저 죽는 건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하고 항상 감기를 앓는 시조코이리라. 시조코는 그렇게 생각했다. 도키치로는 태어나 한 번도 병에 걸린 적이 없었다. 썩은 음식을 먹어도 배탈이 나지 않고, 개나 독충에 물려도 멀쩡하다. 이보다 튼튼한 남자는 세상에 없다. 
그랬던 도키치로가 죽었다. 낙석 때문이었다. 마을 사람 몇 명과 함께 산기슭에 있는 밭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큰 바위가 굴러 떨어져 일손을 돕던 아이들을 덮치려 했다. 도키치로는 재빨리 달려가 아이들을 품에 안아 안전한 곳으로 던졌다. 하지만 정작 도키치로는 피하지 못하고 바위에 부딪쳐 넘어졌다. 하필 그때 다른 바위가 떨어져 머리가 순식간에 박살 나고 말았다. 

 

- <물 긷는 목함의 행방>

 

 

- 혼란의 시대가 안정되기 전에는 지방을 연결하는 길을 정비하지 않았다. 다른 지방에서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각 지방이 통일된 후로는 구석구석까지 전령을 보내기 위해 가도를 정비했다. 각 지방이 연결되고 사람들이 여행하기 편한 세상이 되었다. 일생에 남을 경험을 위해 몇 달 동안 신사와 사찰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늘었다. 참배하러 가는 길에 온천 마을을 찾고 그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음식을 먹는다. 이즈미 로안의 여행서는 그런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이다. 신사와 사찰에 가는 방법이나 그곳에서 지켜야 할 행동거지 등이 적혀 있다. 

 

- "로안 선생님 책은 신불 덕분에 팔리는 거예요. 사람들은 참배를 가서 소원을 빌고 애원하죠. 그래서 도읍과 마을을 멀리 떠나 여행을 나설 결심을 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여행 안내서를 누가 사겠어요?" 
산길을 걸어가며 내 생각을 말했다. 뒤에서 걷고 있던 소녀가 대답했다. 이 녀석 이름은 린이다.
"참배는 그냥 구실일지도 몰라요. 온천이나 진귀한 음식을 즐기는 사람도 있다고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신불을 찾아 구원을 원해. 그런 사람이 읽고 싶은 이야기를 여행안내서에 쓰면 되는 거야. 안 그렇습니까, 선생님?"
앞에서 걸어가는 장발의 사내를 향해 말했다.
"그럼 다음 책에는 부처님 설법이라도 써볼까?" 

 

- 이즈미 로안은 나를 짐꾼으로 고용한 인물이다. 그는 여행 안내서를 쓰기 위해 일부러 각지를 찾아가 신사와 사찰을 보고 온천을 체험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두 가지 문제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다. 한 가지는 책이 썩 잘 팔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양한 여행 안내서가 이미 나와 있다. 여행이 서민의 오락이 되었다고는 해도 한 해에 몇 번이나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드물다. 몇 달씩 들여 멀리 떨어진 신사와 사찰을 참배하고 그 추억을 평생 간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여행 안내서는 한 권으로 충분하다. 주변에 한 권 있으면 손자들까지 걱정 없다. 빈번하게 출판한다고 다 팔리는 물건이 아니다.

 

- "시장이 포화한 것 같아. 뭐, 괜찮아. 별일 아니야."
이즈미 로안은 느긋한 태도로 그런 소리를 했다. 걱정스러워 보이는 건 여행 동료인 린이다. 이 아가씨는 그에게 여행 안내서 집필을 의뢰한 서점에서 보낸 사람이다. 

 

- "잡기판이라, 생각도 못 했네. 도박을 하는 사람들에게 여행안내서를 파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지 몰라."
"로안 선생님, 설마 진심은 아니죠?"
"진심으로 신불에게 매달리는 건 의외로 그런 사람들일지도 몰라. 도박하는 사람들이 흔히 운을 운명에 맡기지 않나?"

- 이즈미 로안이 걸음을 멈추었다. 앞쪽에 갈림길이 있었다. 한쪽은 오르막길, 다른 쪽은 내리막길이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리막길로 향했다. 주변은 수풀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다. 가지와 잎사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흐렸다. 
어느새 우리는 비탈길을 오르고 있었다. 대체 언제 비탈이 내리막에서 오르막으로 바뀌었을까? 아무도 언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른 채 그대로 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우리는 한숨을 쉬었다. 이즈미 로안의 앞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이 산에는 아무래도 오르막길밖에 없는 것 같았다. 


- 우리는 산을 넘으려는 게 아니다. 늘 그렇듯 미아가 되어 이산에 들어오고 말았을 뿐이다. 빨리 산기슭으로 내려가 목적지인 온천 마을로 향하고 싶었다. 뜨거운 탕에 몸을 담그고 발을 뻗은 다음 술을 한잔 걸치고 이불속으로 파고들고 싶었다. 하지만 이 산에 들어온 후로 오르막길만 이어지고 있다. 내리막길이 나왔다 싶어도 조금 가다 보면 어느새 위를 향하고 있다. 처음에는 되돌아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오르막길을 하염없이 왔으니 왔던 길을 돌아갈 때는 하염없이 내리막길이어야 한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실제로는 되돌아가면 또 다른 오르막길이 나오는 것이었다.  

 

- 이 세상에 있는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의 수는 똑같은 게 아니었나? 관점의 문제다. 같은 것을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리 부르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 산에는 그게 적용되지 않는다. 오르막길밖에 없으니까. 또 헛고생이 시작되었구나. 나는 그냥 포기했다. 이즈미 로안은 심각한 길치라 길을 잃고 기묘한 곳에 다다르는 것은 늘 있는 일이다. 린은 이유도 없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 "엉뚱한 데다 화풀이하지 마. 내가 뭘 했다고 그래?"
"지장보살님 공양물을 멋대로 집어먹었잖아요."
"썩어서 버리는 것보다는 낫잖아."

- 하산할 방법을 찾는 한편, 로안은 마을 사람들에게 다양한 지식을 전수했다. 점토로 질 좋은 그릇을 굽는 방법이나, 그것을 위한 가마를 제작했다. 린은 마을 한쪽에서 사철이 나는 것을 알고 그것을 녹여 철을 얻는 방법을 마을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린은 마을 남자들을 모아 흙을 굳혀 화로를 만들기 시작했다. 
"너, 그런 걸 어떻게 알아?"
"단철장에서 지낸 적이 있어요."
린은 그리운 표정으로 말했다. 단철장이란 제철소를 말한다. 이 마을에서 제철이 가능해지면 더 이상 석기를 사용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 마을 사람들은 박식한 이즈미 로안과 린에게 의지했다. 먹을 수 있는 버섯이나 산나물, 채소 재배 방법도 자주 물었다. 한편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견해도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심심해 보이는 사람을 불러 직접 만든 주사위로 도박을 했다. 돈대신 귤을 걸고 주사위놀음을 즐겼다. 광장은 즉석 노름판이 되었다.  

 

- 마을을 걷는 내 머릿속에는 온통 유스이 생각뿐이었다. 저 두 사람과 유스이를 천칭에 달면 유스이 쪽으로 기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전에는 마을에서 나갈 생각도 있었지만 냉정하게 보면 이 편이 나을 것 같다. 나는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도키치에게 했던 선언은 농담이 아니다. 명확한 이유가 있다. 일단 이 마을에는 술이 없어 고주망태가 될 일이 없으니 나는 성실한 사람이 될 것이다. 술이라는 음료는 독이다. 게다가 노름판도 없으니 빚을 질 일도 없다. 그렇다면 나라는 사람이 좋은 남편감이라는 건 확실했다. 나머지는 유스이의 허락을 받아내기만 하면 되는데, 그건 문제없으리라. 아마 그녀도 나를 좋아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게 미소를 지어줄 리 없다. 

- 여인과 아이들이 마을 광장에 모여 나뭇가지를 두드리며 큰소리로 외쳐대고 있었다. 처음에는 통일성 없는 소음이었지만 지금은 한 박자로 가지를 두드리며 소리를 내고 있어 마치 흥겨운 축제 같았다. 거기에 유스이도 있었다. 혼자만 유난히 용모가 뛰어나 다른 여인들이 마치 우엉이나 토란처럼 보였다. 팔다리가 늘씬하고 피부는 소복이 쌓인 눈처럼 하였다. 그녀에게 나와 연을 맺지 않겠느냐고 물어볼 작정이었다. 대답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 바위터 중간에 거대한 도리이가 있고, 그 너머에 구불구불한 계단이 뻗어 있었다. 과연 누가 이것을 만들었을까? 계속 비탈만 걷던 우리는 계단의 편평한 면을 밟고 미소를 지었다. 그때에는 이미 해가 저물어 하늘은 밤의 깊은 청색으로 변했다. 달이 희어서 주위가 제법 밝았다. 평소 같으면 모닥불을 피우고 쉬었겠지만 산꼭대기가 눈앞에 있으니 아무도 멈추려 하지 않았다.
 

- 계단 위에도 도리이가 있고 매끄러운 자갈길이 똑바로 뻗어있었다. 그 앞에 오래된 신사가 보였다. 본당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주변에 건물이 몇 채나 있었다. 
대숲 사이에 시냇물과 연못이 있었다. 인기척은 없었지만 여기까지 올라온 동물들이 달빛과 별빛을 받고 있었다. 참뱃길에 뱀과 거북이, 고양이, 원숭이가 모여 있었다. 그것들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우리는 자연히 본당 앞에 섰다. 
 

- 본당의 지붕은 곡선으로 길게 휘어 있었다. 나무 기둥은 말라서 돌 같은 회색을 띠었다. 새전함은 보이지 않았다. 누가 언제 무엇을 위해 만들었을까? 마을 사람 하나가 이런 말을 했다. 이 산에 오르막밖에 없었던 것은 이 신사 때문이 아닐까? 모든 생물이 이곳으로 모이는 것 아닐까? 

- 이즈미 로안은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달과 별이 무척 가까웠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할 정도로. 문득 별똥별이 반짝였다. 엄청난 속도로 꼬리를 그리며 운해 경계의 낮은 곳을 스쳐 지나갔다.
"마치 덴구 같구나."
그가 중얼거렸다.
"사실 여부는 모르겠지만 덴구는 원래 별똥별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해. 옛날 사람들은 별똥별을 보고 누군가 하늘을 가로질러 갔다고 상상했는지도 모르지."

- 우리는 경내를 둘러보았다. 이 산에 오르막밖에 없다면 산꼭대기인 이곳에는 훨씬 많은 동물이 있었을 것이다. 산기슭에서 동물들이 모여들어 포화되고 쌓여서 동물의 살로 이루어진 탑이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 연기처럼 피어오른 흙먼지는 곧 기묘하게 움직였다. 마치 뭔가에 끌리는 것처럼 거울 표면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거울을 향해 스르륵 모여든 흙먼지는 그 표면에 찰싹 달라붙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알갱이 하나하나가 탁탁 터지듯 부서져 사라지더니 마침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본당 안쪽으로 들어가면 거울 쪽으로 끌려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잡아당기는 힘도 강력해지는 것 같아. 격자 사이로 손을 넣어보면 알아."
격자 구멍이 커서 팔을 넣어볼 수 있었다. 시험 삼아 본당에 팔을 넣어보자 힘을 빼고 있어도 축 늘어지지 않고 거울 쪽으로 끌려갔다. 누가 팔을 잡아당기는 감촉과는 달랐다. 팔에 흐르는 피 한 방울까지 손끝으로 쏠려서 거울 표면을 향해 떨어지려 하는 것이다. 
"이 산에 발을 들여놓은 생물들이 이곳으로 이끌리는 건 이 거울 때문인지도 모르겠군. 본당 밖에 있으면 거울 쪽으로 끌려갈 만큼 강력하지는 않은 듯하네만."

 

- 고급스러운 종이에 먹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둘둘 구겨서 버린 것 같았다. 전부 세 장이었는데 한 장은 강과 산, 소나무를 그린 풍경화였다. 하나는 집을 그린 그림이었고, 나머지 한 장을 어떤 문양을 그린 그림이었다. 모두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이곳에 살던 사람의 정체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될지도 몰라 이즈미 로안에게 건넸다. 
그는 그림을 보더니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평소 그런 표정을 짓는 경우가 없다 보니 린이 조금 걱정스럽게 물었다. 
"로안 선생님, 왜 그러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생각 좀 하게 해 다오. 린, 옷을 발견했다는 방으로 안내해 주겠니?"
 
- 이즈미 로안은 그 방으로 가서 옷가지와 식기를 하나씩 들고 신중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장지문 밖에서 가로로 쏟아지는 햇빛이 그의 옆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상냥한 표정이었다. 밖에서 마을 사람이 우리를 찾았다. 아침 식사가 준비된 모양이다. 하지만 이즈미 로안에게는 들리지 않는지, 나와 린이 부르고 나서야 겨우 고개를 들었다. 
"먼저 가게. 나는 여기를 조금 더 조사하다 가지."
"뭔가 알아내셨어요?"
"어쩌면 여기는 내가 계속 찾던 곳일지도 몰라.”
그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와 린은 시선을 주고받았지만 지금은 그를 내버려 두기로 했다.

 

- 그때 유스이의 몸이 거울 표면으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곰도 함께 끌려갔다. 거울로 다가갈수록 끌려가는 속도는 빨라졌다. 거울 표면에 다다른 후에도 그 힘은 약해질 줄 모르고 유스이와 곰의 몸은 편평한 면에 납작하게 눌려 뼈와 살이 으스러지면서 원형을 잃었다. 결국 얄팍한 살로 변해 거울 표면에 들러붙었다가 그마저도 거울이 비쳐 보일 정도로 짓이겨지더니 이윽고 완전히 사라졌다. 

 

- 별들은 운해와 밤하늘이 만나는 경계선까지 퍼져 있었다. 태양이 구름 너머로 가라앉자 달이 빛을 더했다. 흘러가는 별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거대한 쟁반 가운데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빛이 흩어진 반구 모양의 하늘이 쟁반 위를 한 바퀴 도는 것 같다. 
 
- "누가 무슨 이유로 그런 걸 모셔두었을까요?"
가도를 걸어가며 린이 물었다. 이즈미 로안이 대답했다.
"산꼭대기에서 살던 사람이 식량이 부족하지 않도록 동물들을 유인했던 건지도 몰라. 그렇게 높은 산이었는데 식물이 잘 자라고 있었어. 동물이 모이는 장소는 흙이 비옥해지는 법이지. 덫을 쳐두면 분명 어떤 동물이든 걸려들 거야. 아니면 산꼭대기에서 살던 누군가 쓸쓸하지 않도록 동물들을 불러들였던 걸까?"
"대체 누가 그런 방법을 쓸 수 있겠어요?"
그런 짓을 한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인간이 아닐 것이다. 

 

- 이즈미 로안은 복잡한 표정으로 품에서 세 장의 종이를 꺼냈다. 그것은 산꼭대기에 있던 건물 안에서 내가 발견한 것이었다. 항아리 안에 구깃구깃하게 버려져 있었다. 거기에는 먹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나와 린이 양쪽에서 로안이 들고 있는 종이를 들여다보니 그가 가르쳐주었다. 
"이 그림은 내가 어렸을 때 살던 곳 하고 똑같아. 집 툇마루에서 바라보던 풍경이 딱 이런 모습이었지. 게다가 보렴, 이쪽 그림도 내가 살던 집하고 비슷하고, 이 문양은 우리 집 가문하고 비슷해."
아무래도 세 장의 그림은 이즈미 로안에게 인연이 깊은 물건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게 어째서 산꼭대기에 있었을까?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착각 아니에요? 제 눈에는 어린애 낙서처럼 보이는데요."

"그럴지도 모르지."
그는 살짝 웃더니 종이를 품에 도로 넣었다.

- 이즈미 로안의 어머니가 어렸을 때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몇 년 동안 행방이 묘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로안이 말하기를 그의 어머니가 어디에서 누구와 지냈는지는 마지막까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다시 홀연히 나타났을 때는 사람 말도 잊고 그간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아이를 낳은 것은 그 후 얼마 지나서였다. 행방이 묘연했을 때 누군가의 아이를 품고 있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바로 이즈미 로안이었다. 

 

-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지금도 모른다. 그의 어머니는 덴구에게 끌려가 그 아이를 낳은 게 아닌가 하는 소문이 있다는데, 그 말을 들으니 어쩐지 이해가 갔다. 
이즈미 로안의 심각한 길치 체질은 어쩌면 덴구의 피가 섞여있는 탓 아닐까? 덴구의 피가 원래 가지고 있는 영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해 도를 넘는 게 아닐까? 별똥별이 중간에 느려져서 방향을 바꿀 수 없듯이 로안은 일단 걸음을 떼면 ... 


- <별과 곰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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