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닐 게이먼
출판 : 에프(f)
출간 : 2016.01.25
이 책은 읽기에 따라 허무맹랑한 상상의 세계를 다룬 청소년 문학으로도, 동시에 누구나 겪었던 어린 시절의 환상과 향수를 다룬 성인 문학으로도 분류할 수 있다. <그레이브야드 북>의 뉴베리 상 수상과 관련한 논란은, -작가가 닐 게이먼이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아마도 작품 자체로 보았을 때도 '주인공이 청소년이면 아동 문학인가?'라는 큰 의문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생겼을 것이다. 저자가 이와 관련해 밝힌 소견이 작가 후기와 수상 소감문에 담겨 있으니 꼭 놓치지 말고 읽어보시길.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빛나는 백미는 작가의 수상 소감문이라 생각한다.
좋은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이 존재하는가?
소설이란 누군가를 위해 쓰여지는가? 독자인가, 작가인가, 혹은 그저 태어나는가?
작품을 통해 일상이, 가치관이, 삶이 달라지고 위로와 기쁨을 얻는 이들은 작품에 감사를 표해야 하는가, 작가에게 감사를 표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그와 관련한 것들은 순수하게 작가의 몫이자 의무일까?
등의 의문에 대해 자신 만의 생각을 정리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듯하다.
<그레이브야드 북>은 갓난아기 시절부터 무덤에서 자라야 했던 '보드' -오언스 가의 유령 부부가 거두어 주어 '노바디 오언스', 애칭 '보드'- 라는 이름이 붙은 한 소년의 이야기이다. 그의 어린 시절은 그 또래 아이들이 겪어가는 것처럼 무척 평범해 보이면서도, 하나하나가 있을 법하지 않은 일들로만 채워진다. 그러나 그 세부적인 사항들이 공동묘지에서의, 죽은 이들을 위한 내용이라는 것만 다를 뿐 기본적인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독자들에게 큰 공감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듯하다.
어린이들은 자신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가정이라는 하나의 집단, 그리고 그와 관련한 다양한 집단 속에 속하게 된다. 그들이 그 안에서 통용되는 규범과 필요한 공통 지식들을 배우는 과정은 그야말로 치열하다. 이미 어린 시절을 까맣게 잊은 성인의 시선으로는 '볼 수 없는' 생존을 건 -하지만 그럼에도 때로 즐겁고 순수한- 시간들이다.
주인공 보드도 수업을 듣고, 공부를 한다. 단지 그 구성이 좀 독특할 뿐. 알파벳 책을 외운 다음엔 묘비를 더듬어 읽으며 익히는 언어 수업, 무덤의 주인이 직접 이야기해 주는 역사 수업, 또 심화 과정으로는 타인의 눈앞에서 사라지는 법이나 꿈속으로 들어가는 법 등을 배운다. 또래 친구들과는 벽을 통과하며 놀고, 후견인인 사일러스가 매일 챙겨주는 음식으로 식사를 한다. (그를 대신해 여름방학 단기 교사로 찾아온 루페스쿠가 직접 만들어주는 건강식은 영 입에 맞지 않아 죽지 않을 만큼만 먹는 반찬 투정을 하기도 했다.)
그의 집이 '공동묘지'라는 것만 제외하면, 주변 이웃과의 사회적 관계나 암묵적 규칙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 세부적인 내용들이 좀 독특할 뿐이다. 그리고 바로 이 독특함이 이 이야기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기본 구조는 충분히 일상적이고 친근해 공감대를 불러일으키지만, 그 내용들은 '경험해 본 적 없는' 것들이기에 성인 독자들 역시 현재의 자신인 상태로 그 이야기들을 즐길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그레이브야드 북>이 여타의 아동 문학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독자들이 주인공 보드의 시선을 통해 경험하는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어려질' 필요가 없다는 점일 것이다. '어른들의 사정'은 완전히 가려지지도,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도 않은 채로 그저 거기에 있다. 보드의 주 생활공간인 묘지를 벗어난 '현실 세계'는 말 그대로의 현실 세계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했던 알껍질은 충분히 성장한 존재에게는 깨트리고 떠나야 할 경계가 된다.
그리고 때때로 부모는 자식들에게 그러한 든든한 울타리이자 뛰어넘어야 할 허들이 되기도 한다.
사일러스와 보드의 마지막 대화가 무척 인상 깊었다.
"내가 항상 옳은 일을 한 건 아니야. 나도 젊었을 때는... 잭보다 더 나쁜 짓을 저지르고 다녔어. 그들 어느 누구보다 악한이었지. 그때 나는 괴물이었어, 보드. 어떤 괴물보다 더 못된 괴물이었지."
보드는 자신의 후견인이 거짓말을 하는지 농담을 하는지 궁금한 마음도 들지 않았다. 보드는 자신이 진실을 듣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사람은 변할 수 있어."
사일러스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침묵에 잠겼다.
어린아이이기에 가질 수 있는 순수함은 때로 잔혹하다. 자신의 정의에 어긋나는 것들에는 놀랄 만큼 냉혹하고 가차 없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각자에게는 각자의 사정과 입장이 있을 수 있음을 다차원적으로 헤아릴 수 있게 되면 그때서야 개인은 성인이 된다.
농담처럼 녹아든 다양한 조각들을 찾아가며 찬찬히 살펴 읽는 것 또한 닐 게이먼의 작품을 읽을 때 누릴 수 있는 큰 즐거움이라는 점을 살짝 귀띔 해드리며.
즐겁게 읽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 인생을 살았어, 보드.
비록 그 인생이 짧았다고 하더라도 말이야.
이제 네 차례야. 너도 네 인생을 살아야 해."
- 어둠 속의 손 하나에 칼이 들려 있었다.
그 칼의 손잡이는 반들반들한 검은 뼈로 되어 있었고, 칼날은 면도날보다 더 예리하고 날카로웠다. 누가 칼날에 슬쩍 베이더라도 자신이 베였는지 바로 알아차리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그 칼은 그 집에 들어온 소기의 목적을 거의 모두 달성해 칼날도 손잡이도 젖어 있었다.
- 길 쪽으로 난 현관문은 아직도 살짝 열려 있었다. 칼을 든 사내가 슬그머니 들어왔던 문틈으로 밤안개가 스멀스멀 기어 들어와 집안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잭이라는 사내는 층계참에서 잠시 멈췄다. 그는 왼손으로 검정외투의 호주머니에서 커다랗고 하얀 손수건을 꺼내, 칼과 그 칼을 쥐고 있던 오른손 장갑을 깨끗이 닦았다. 그러고는 손수건을 호주머니에 다시 찔러 넣었다. 사냥은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 오언스 부인이 여전히 실체가 없는 두 팔로 아기를 안고 어루만지고 쓰다듬고 있었기 때문에 오언스 씨는 아내에게 이렇게 덧붙였다.
"이 아긴 그냥 내버려 두시구려."
"저자는 아기 부모가 아닌 것 같은데요."
오언스 부인이 말했다.
검정 외투를 입은 사내는 정문을 덜컹덜컹 흔들기를 그만두고 이제 보다 작은 쪽문을 살펴보고 있었다. 쪽문 역시 자물쇠로 단단히 잠겨 있었다. 지난해 묘지가 훼손당하는 일이 생겼던 탓에 시의회가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 오언스 부부 본인들이 죽은 자들이고, 이제 죽은 지도 수백 년이나 된 데다 부부가 만나는 자들 역시 전부 또는 거의 다 죽은 자들일 텐데, 오언스 씨가 유령을 보고 그렇게 화들짝 놀라다니 여러분은 이상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또 그런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하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유령은 묘지의 유령들과는 달랐다. 텔레비전의 지지직거리는 회색 화면처럼 깜박거리는 생경하고 기겁할 만한 형상에 오언스 부부는 그들 자신을 송두리째 집어삼킬 듯한 대단히 극심한 공포와 충격에 휩싸였다. 그런 형상은 모두 세 개로, 두 개는 크고 하나는 좀 더 작았다. 하지만 그 가운데 하나만이 뚜렷해서 윤곽선만 보이거나 어렴풋한 빛으로 보이는 다른 두 형상보다 더 잘 보였다.
그 형상이 말했다.
"우리 아기! 바깥의 저자가 우리 아기를 해치려 해요!"
- "저자가 당신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오언스 부인은 이렇게 물으면서도 유령이 자신의 말을 들을 수 있을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최근에 죽은 불쌍한 유령 같아. 오언스 부인은 생각했다. 평온하게 죽어서 때가 되면 자신이 묻힌 곳에서 깨어나, 자신의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묘지의 동료들과 알고 지내게 되는 편이 언제나 더 쉬운 법이다. 하지만 이 유령은 자기 자식에게 그저 공포스럽고 무서운 존재일 뿐이었다. 그리고 오언스 부부에게는 낮은 비명 소리처럼 느껴지는 그녀의 극심한 공포가 이제는 주변의 시선까지 끌면서 묘지 곳곳에 있던 다른 창백한 유령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 "저를 따라오십시오."
잭은 낯선 사내의 뒤를 따라갔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칼을 빼내며 물었다.
"그럼 댁은 이 묘지의 관리인이십니까?"
"저요? 예, 말하자면 그런 셈이지요."
낯선 사내가 대답했다.
- 정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기에 잭은 아기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묘지 관리인에게 열쇠가 있었다. 어둠 속에서 칼 한 방이면 관리인을 처치할 수 있으니, 그런 다음 필요하다면 밤새도록 아기를 찾아다니면 될 것 같았다.
잭은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바로 그때 낯선 사내가 뒤돌아보지 않고 말하기 시작했다.
"아기를 봤다고 하셨지만 그 아기는 이 묘지에 없을 겁니다. 아마도 잘못 보신 거겠지요. 어쨌든 아기가 여기로 들어왔을 리가 없어요. 밤에 날아다니는 새 소리를 들었거나 어쩌면 고양이나 여우를 봤을 공산이 훨씬 큽니다.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장례식을 치렀던 무렵인 30년 전, 시에서는 이곳을 공식적인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했거든요. 자,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댁이 본 게 정말 아이가 확실합니까?"
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 "여우일지도 모르겠군요. 여우는 아주 희한한 소리를 내는데 꼭 사람 울음소리 같죠. 아무래도 댁이 착각을 하고 이 묘지로 잘못 들어오신 것 같습니다. 댁이 찾고 있는 아기가 어디에선가 댁을 기다릴지 모르겠지만, 이곳에는 분명히 없습니다."
낯선 사내는 잠시 잭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머물도록 놔뒀다가 요란하게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만나 뵈어서 반가웠습니다. 밖으로 나가시면 원하는 게 뭐든 다 찾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 "이 문 말고 다른 문이 있습니다. 제 차는 언덕 맞은편에 있으니 제 걱정은 마십시오. 저와 나눈 대화는 기억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럼요. 그럴 필요 없지요."
잭이 선뜻 동의하며 말했다. 잭은 언덕을 돌아다닌 일, 아기라고 생각했던 게 알고 보니 여우였던 일, 도움을 준 묘지 관리인이 자신을 다시 바깥 거리로 나갈 수 있도록 바래다준 일들을 기억했다. 잭은 칼을 안쪽 호주머니 속 칼집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안녕히 가세요."
잭이 묘지 관리인이라고 생각한 낯선 사내가 말했다.
- "'바-나-나'라, 전혀 들어 본 적 없는 과일이에요. 전혀요. 어떤 맛인가요?"
오언스 부인이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
"저도 전혀 모릅니다."
사일러스는 단 한 가지 음식밖에 먹지 않았는데, 그것은 바나나가 아니었다.
- 사람들이 밤의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녘 자욱한 안개를 뚫고 각자 일터로 차를 몰고 가기 시작한 무렵에도 묘지 사람들은 그들에게 오게 된 그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놓고 논의했다. 300가지 목소리가 300가지 의견을 내놓았다. 무너져 내린 묘지 북서쪽에 사는 시인 니허마이어 트롯이 시를 낭독하듯 과장되게 그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 말을 듣고 있는 어느 누구도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순 없었는데, 바로 그 순간, 어떤 일이 벌어졌다. 저마다 자기 의견을 굽히지 않는 입들을 꾹 다물게 만든 일이, 그 공동묘지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 거대한 백마 -말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정확히 '회색마'라고 불렀을 테지만- 한 마리가 언덕배기를 천천히 올라왔다. 말의 모습이 보이기도 전에 또각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언덕배기에 자란 작은 관목과 수풀, 검은딸기나무와 담쟁이덩굴, 가시금작화 덤불을 헤치는 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크고 힘센 샤이어 종 말과 비슷한 크기의 그 말은 키가 2미터는 되어 보였다. 전투에서 완전무장한 기사를 태울 법한 말이었지만, 안장도 씌우지 않은 그 말의 등에 탄사람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통 회색으로 된 옷을 걸친 여인이었다. 여인의 긴 치마와 숄은 오래된 거미줄을 자아서 만든 것 같았다.
여인의 얼굴은 차분하고 묘지 사람들은 그 여인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누구나 각자 자신의 생이 끝나는 날 '회색마를 탄 여인'을 만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 여인을 잊을 수 없기 마련이다.
- 그렇지만 그들 가운데 움직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흥분과 두려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회색마를 탄 여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죽은 자들은 대체로 미신을 믿지 않지만, 그들은 지혜와 단서를 구하려고 고대 로마의 복점관이 성스러운 까마귀들이 하늘을 빙빙 도는 모습을 지켜보듯 그 여인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그 여인이 그들에게 말했다.
"죽은 자들은 자비심을 지녀야 해요."
그 여인은 아주 작은 은종 수백 개가 울리는 것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로 그렇게만 말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 아무튼 여기까지가 그날 밤 언덕배기에 모인 묘지 사람들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일이었다.
- "너는 이 공동묘지 밖으로 나갈 수 없어. 그런데 요즘엔 '아니 돼요' 대신 '안 돼요'라고 한단다. 우리는 이 공동묘지 안에서만 너를 안전하게 지켜 줄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거야. 여기는 네가 사는 곳이고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야. 묘지 밖은 너한테 안전하지 않을 거야. 아직은 말이야."
"아저씨는 밖으로 나가잖아요. 그것도 매일 밤마다요."
"얘야, 난 너보다 나이가 엄청 많단다. 그리고 어디를 가든 나는 안전해."
"저도 그런 걸요."
"나도 네 말이 맞았으면 좋겠구나. 하지만 넌 이곳에서만 안전한 거야."
-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고? 어떤 기술은 교육을 통해, 어떤 기술은 연습을 해서, 또 어떤 기술은 시간이 가면 저절로 획득할 수 있단다. 열심히 공부하면 너도 그런 기술들을 갖게 될 거야. 머지않아 너는 '사라지는 법',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법', '꿈속으로 들어가는 법'을 익히게 될 거야. 하지만 어떤 기술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은 익힐 수 없는데, 그런 기술들을 익히려면 네가 좀 더 기다려야만 해. 그렇지만 틀림없이 때가 되면 그런 기술들도 익히게 될 거야."
- "어쨌든 너에게는 '묘지의 특권'이 주어졌어. 그래서 여기 공동묘지와 묘지 사람들이 너를 돌봐 주고 있는 거야. 네가 여기 있는 동안, 너는 어둠 속에서도 볼 수 있어. 살아 있는 사람들이 다닐 수 없는 길도 걸어 다닐 수 있단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네가 보이지 않을 거야. 나 또한 '묘지의 특권'을 얻었지만 내 경우엔 이곳에 거주할 수 있는 권한만 얻었을 뿐이야."
"저도 아저씨처럼 되고 싶어요."
보드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안 돼. 그런 소리 마."
사일러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 스칼릿은 행복했다. 사실 스칼릿은 영리하지만 외로운 아이였다. 스칼릿의 엄마는 사이버 대학의 강사로, 한 번도 직접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그 사람들이 컴퓨터로 보내온 영어 과제물의 점수를 매겨 조언이나 격려의 말을 적어서 돌려보내는 일을 했다. 스칼릿의 아빠는 소립자 물리학을 가르치는데, 스칼릿이 보드에게 말한 바에 따르면, 소립자 물리학을 가르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데 반해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서 스칼릿의 가족은 계속 다른 대학이 있는 도시로 이사를 다녀야만 했다. 그리고 새로운 도시로 이사를 갈 때마다 스칼릿의 아빠는 영구적인 교수 자리를 얻기를 바랐지만 그런 자리는 결코 나지 않았다.
- "음, 세상에는 너무 작아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라는 게 있어. 그리고 우리는 다 그런 원자로 이루어져 있지. 이 원자보다 더 작은 것들을 연구하는 게 바로 소립자 물리학이야."
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스칼릿의 아빠는 가상의 것들에 관심이 많은 사람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 보드와 스칼릿은 평일 오후마다 함께 공동묘지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손가락으로 비석에 새겨진 이름을 따라 더듬어 보고 그 이름을 옮겨 적었다. 보드는 스칼릿에게 무덤이나 가족묘나 능의 주인들에 대해 자기가 아는 건 뭐든 다 말해 주었고, 스칼릿은 보드에게 자기가 읽거나 배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때로 스칼릿은 보드에게 바깥세상과 자동차, 버스, 텔레비전, 비행기 같은 것에 대해 이야기해 주기도 했다. (보드는 비행기가 하늘 높이 날아가는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시끄러운 은빛 새라고 생각하고는 지금까지 전혀 그것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자기가 이야기할 차례가 되면 보드는 무덤 속에 있는 사람들이 살아 있던 시절에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서배스천 리더가 런던에 가서 여왕을 본 일도 이야기해 주었는데, 모피 모자를 쓴 뚱뚱한 여왕은 모두를 노려보기만 할 뿐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서배스천 리더는 그녀가 어느 여왕인지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아주 오랫동안 여왕 자리에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 그날 밤, 저녁을 먹으면서 스칼릿은 엄마 아빠에게 고대 로마인들이 오기 전에 이 땅에 살던 사람이 있었는지 물었다.
"고대 로마인들에 대해서는 어디에서 들었니?"
스칼릿의 아빠가 물었다. 그러자 스칼릿이 아주 교만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거야 상식이죠, 뭐. 그전에도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이번에는 스칼릿의 엄마가 대답했다.
"켈트족이 있었어. 켈트족이 이 땅에 제일 먼저 살았지. 켈트족은 고대 로마인들과 마주치자 도망갔단다. 켈트족은 고대 로마인들에게 정복된 민족이야."
- 낡은 예배당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아 보드도 그와 비슷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사일러스가 이렇게 말했다.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라? 보드,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는걸. 이 공동묘지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카이우스 폼페이우스야. 하지만 고대 로마인들이 오기 전에도 이곳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어. 많은 사람들이 살았지. 아주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말이야. 그나저나 글자 공부는 어떻게 돼 가고 있니?"
"잘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언제쯤이면 글자들을 합친 낱말을 배우나요?"
사일러스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아마 이곳에 묻힌 많은 유능한 사람들 중에 생전에 선생님이었던 사람들이 있을 거야. 내가 한번 알아보마."
보드는 몹시 흥분되었다. 보드는 뭐든 다 읽을 수 있어서 모든 이야기를 접하고 알게 될 자신의 미래를 그려 보았다.
- 사일러스가 볼일을 보러 묘지를 떠나자 보드는 낡은 예배당 옆에 있는 버드나무 앞으로 걸어가 카이우스 폼페이우스를 불렀다. 그러자 늙은 로마인이 하품을 하며 무덤에서 나왔다.
"아, 그래. 살아 있는 꼬마로구나. 어떻게 지내니, 살아 있는 꼬마야?"
"저는 잘 지내요."
"좋아. 그런 소리를 들으니 기쁘구나."
늙은 로마인의 머리카락은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그는 무덤에 묻힐 때의 옷차림새를 그대로 하고 있었다. 토가를 걸치고, 토가 속에는 두꺼운 모직 속옷 셔츠와 보온용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이곳이 세상 언저리에 있는 추운 땅이었기 때문이다. 이곳 보다 더 추운 유일한 곳인 북쪽의 칼레도니아에 사는 사람들은 인간이라기보다는 동물에 가까웠고, 주황색 털투성이였으며, 너무나 야만적이어서 고대 로마인들에게도 정복당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얼마 안 가 그곳 사람들은 영원히 계속되는 겨울 속에서 외부 세계와 단절되고 말았다.
- 카이우스 폼페이우스가 잠시 주저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거의 맨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단다. 이 섬나라에는 켈트족보다 앞서 다른 사람들이 살았는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이곳에 묻혀있긴 하지."
- "위가 아니라 속에 있어. 언덕 속에 말이야. 내가 맨 처음 이곳에 묻힐 때 내 벗들이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단다. 다음으로 내 벗들이 이곳에 올 차례가 되었을 때 지역 관리들과 광대들이 그들을 이곳으로 데려와 묻었고. 아무튼 나를 이곳으로 운구해 올 때 내 벗들은 카물로두넘에서 열병으로 죽은 내 아내와 갈리아 국경에서 소규모 접전을 벌이다가 돌아가신 내 아버지의 밀랍 가면을 쓰고 있었지. 내가 죽고 300년 뒤, 어떤 농부가 양에게 풀을 먹일 새로운 장소를 찾아 헤매다가 언덕 속으로 들어가는 동굴 입구를 막은 바위를 발견했어. 농부는 바위를 굴려서 치우고는 보물이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며 동굴 안으로 들어가 아래로 내려갔어. 잠시 후 농부가 밖으로 나왔는데, 새까맣던 그의 머리카락이 지금의 내 머리카락만큼이나 하얗게 세어서..."
"농부가 뭘 본 거예요?"
카이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농부는 거기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했어. 아니, 아예 다시는 동굴에 들어가지도 않으려 했지. 사람들이 입구를 다시 바위로 막았고, 얼마쯤 시간이 흐르자 다들 거기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렸지. 그런데 200년 전, 프로비셔가의 지하 납골당을 만들다가 그 동굴 입구가 다시 발견되었어. 그걸 발견한 젊은이는 그 속에 엄청난 보물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지. 젊은이는 동굴 입구를 에프라임 페이퍼의 관으로 막아 뒀다가 어느 날 밤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고, 아무튼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동굴 안으로 들어가 아래로 내려갔어."
"동굴에서 나왔을 때 그 사람도 머리가 하얗게 세었나요?"
"그 젊은이는 동굴에서 나오지도 않았어."
- "음, 저런. 그럼 대체 그곳에는 누가 묻혀 있나요?"
카이우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모른단다, 오언스 군. 하지만 먼 옛날 이곳이 비어 있을 때도 난 그자의 존재를 느꼈어. 그때도 언덕 깊숙한 곳에서 뭔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지."
"그가 뭘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내가 느낄 수 있는 거라고는 뭔가가 기다린다는 것뿐이었어."
- 스칼릿은 당황스럽고 무서운 데다 이제 짜증까지 나는 것 같았다.
"바닥에 누가 있는데? 너무 어두워. 내 눈에는 몸에 문신한 사람밖에 안 보여."
바로 그 순간 온몸이 남색인 그 남자는 마치 두 사람에게 자신이 거기 있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것처럼 고개를 뒤로 젖히더니 토해내듯 잇달아 괴성을 질러 대고 목이 터져라 포효했다. 그 소리에 스칼릿은 손톱이 보드의 살을 파고들 만큼 보드의 손을 꽉 쥐었다.
하지만 보드는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저런 괴물은 상상 속에만 존재한다고 말했던 거 사과할게. 이제는 믿어. 저런 괴물은 실제로 존재해."
스칼릿이 말했다.
남색의 남자가 머리 위로 뭔가를 치켜들었다. 날카로운 돌칼 같아 보였다.
"이곳을 침입하는 자는 모조리 다 죽여 버릴 테다!"
남색의 남자가 거친 목소리로 외쳤다. 보드는 이 방을 발견한 뒤머리가 하얗게 세어 버린 그 사람에 대해, 그 사람이 두 번 다시는 묘지를 찾지 않았고 자기가 본 것이 무엇인지 절대 말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아니,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저런 괴물은 그런 존재가 맞아."
보드가 말했다.
"그런 존재라니?"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괴물이라고."
"바보 같은 소리 마. 내 눈에도 저 괴물이 보이는데."
스칼릿이 말했다.
"바로 그거야. 너는 죽은 사람들을 볼 수 없잖아."
그러면서 보드는 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제 그만하시지. 우린 이게 실제가 아니란 걸 알아."
- "나도 정확히는 몰라. 엄마한테 물어볼게. 하지만 언젠가 기차를 타고 가다가 허수아비를 보고는 그게 뭐냐고 엄마한테 물어본 적이 있어. 까마귀들은 허수아비가 진짜 사람이라고 생각한대. 그러니까 허수아비는 그냥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어 놓은 거지, 진짜 사람은 아니야. 까마귀 같은 새들을 겁줘서 멀리 쫓아 버리기 위한 거야."
보드가 방을 둘러보고 나서 말했다.
"당신이 누구든 우리한텐 안 통해요. 우리는 겁먹지 않아요. 당신이 진짜로 존재하지 않는단 걸 우린 알아요. 그러니 이제 그만해요."
그러자 온통 남색인 남자가 동작을 멈췄다. 남자는 석판으로 걸어가더니 그 위에 누웠다. 그런 뒤에 바로 사라져 버렸다.
- 뭔가가 말했다.
"우리는 슬리어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보드는 목 뒤의 머리털이 쭈뼛 섰다. 그의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그 목소리는 뭔가 굉장히 오래된 존재가 내는 듯이 무척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였는데, 마치 죽은 나뭇가지가 예배당 창문을 긁어 대는 소리 같았다. 그리고 보드에게는 한 가지 이상의 목소리가 일제히 입을 모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저 소리 들었어?"
보드가 스칼릿에게 물었다.
"난 아무 소리도 못 들었어. 그냥 뭔가가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소리밖에 안 들리는걸. 그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이상해. 배가 몹시 따끔따끔해. 뭔가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아."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 "당신들은 누구죠?"
"우리는 슬리어다. 우리는 이곳을 지키고 보호한다."
"뭘 지킨다는 거죠?"
"주인님의 안식처. 이곳은 모든 신성한 장소 가운데서도 가장 신성한 곳이고, 우리 슬리어가 이곳을 지킨다."
"당신들은 우리를 건드릴 수 없어요. 기껏해야 겁이나 줄 수 있겠죠."
그러자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그것들의 목소리가 발끈한 것처럼 들렸다.
"두려움이야말로 우리 슬리어의 무기다."
- 보드는 벽에서 선반처럼 튀어나온 곳을 내려다보았다.
"저게 당신들 주인의 보물인가요? 낡은 브로치 하나, 잔 하나, 작은 돌칼 하나뿐인데요? 별로 대단해 보이지도 않네요."
"우리 슬리어는 그 보물들을 지켜야 한다. 브로치, 술잔, 칼. 우리는 돌아올 주인님을 위해 그것들을 지킨다. 주인님은 돌아온다. 반드시 돌아온다."
"당신들은 몇 명이에요?"
하지만 슬리어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보드는 자기 머릿속에 온통 거미줄이 쳐진 것처럼 느껴져서 그 느낌을 떨쳐 버리려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 다음 보드는 스칼릿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다.
"우리는 이제 그만 가야 해."
- "사일러스는 돌아올 거야. 그러니 그 문제로 골머리 썩이지 말거라, 보드. 그는 매번 뜻밖의 순간에 불쑥 나타나곤 하니까 말이야."
그러자 오언스 부인도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네가 이곳에서 다시 태어났을 때, 사일러스는 우리한테 약속을 했단다. 자기가 이곳을 떠나야만 하는 일이 생기면 자기를 대신해 너에게 음식을 구해 주고 너를 돌봐 줄 사람을 구해 놓고 가겠다고 말이야. 그리고 그는 그 약속을 지켰어. 그는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
- 정말로 사일러스 아저씨는 보드가 먹을 수 있도록 하루도 빠짐없이 밤마다 음식을 가져와서 예배당 지하실에 놓아 두곤 했었다. 하지만 보드 생각에 그것은 사일러스 아저씨가 자신을 위해 해 주었던 일 가운데 가장 작은 일이었다. 그는 냉철하고 분별 있고 한결같이 옳은 조언을 해 주었다. 또 그는 묘지 사람들보다 아는 것도 더 많았는데, 밤마다 바깥세상을 돌아다니기 때문에 수백 년 뒤진 세상이 아니라 지금 세상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쉽사리 동요하지 않았고 늘 믿음직했으며, 이제까지 보드의 모든 삶에서 밤 시간이면 언제나 그 작은 예배당에 있었다. 그러므로 예배당의 유일한 거주자인 사일러스 아저씨가 없는 예배당은 보드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 전혀 어두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한여름에는 수업이 없었고, 보드는 아직 잠이 오지 않을 때면 끝없이 계속되는 따스하고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놀거나 탐험을 하거나 나무를 타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 "네 후견인이 내가 너한테 이것저것 가르쳐 주면 좋을 것 같다더구나."
"제게는 이미 선생님들이 있어요. 리티샤 보로스 선생님은 쓰기와 낱말을, 페니워스 선생님은 '보충 교재를 이용한 어린 망자용 완전 교육 과정'이란 과목을 가르쳐 주세요. 지리와 다른 것들도 다 배우는걸요. 그러니 더 이상의 수업은 필요 없어요."
"꼬마야, 그럼 넌 뭐든 다 알겠네? 여섯 살밖에 안 됐는데 넌 이미 모든 걸 다 아는구나."
"그렇게 말하진 않았어요."
그러자 루페스쿠 선생님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구울에 대해 말해 봐."
보드는 수년간 사일러스 아저씨가 구울에 대해 말해 준 것을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구울은 멀리해야 해요.”
"그게 다야? 응? 왜 구울을 멀리해야 하지? 구울은 어디에서 오지? 또 어디로 가고? 왜 구울의 문 근처에 서 있지 말아야 하지? 응? 말해 봐, 꼬마야."
보드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사람들의 종류에 대해 말해 봐. 지금 당장."
- "꼬마야, 너 정말 멍청하구나. 멍청한 건 나쁜 거야. 게다가 이렇게 아는 것도 없으면서 거기에 만족하다니, 그건 더 나쁜 거야. 자, 나를 따라서 말해 봐. 사람들의 종류에는 살아 있는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 낮에만 돌아다니는 사람들과 밤에만 돌아다니는 사람들, 구울들과 안개 속을 걸어 다니는 사람들, 대사냥꾼들과 하느님의 사냥개들이 있어. 그리고 또 혼자 돌아다니는 유형의 사람들도 있지."
"선생님은 어디에 속하세요?"
보드가 물었다.
"나는 그냥 루페스쿠야."
루페스쿠 선생님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사일러스 아저씨는요?"
루페스쿠 선생님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는 혼자 돌아다니는 사람이지."
- 보드는 루페스쿠 선생님의 수업을 참고 들어야 했다. 사일러스 아저씨는 무엇이든 재미있게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보드는 사일러스 아저씨가 가르칠 때에는 대개 자신이 뭔가를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루페스쿠 선생님은 목록을 만들어 체계적으로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보드는 배운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보드의 몸은 비록 지하실에 앉아 있었지만, 그의 마음만은 바깥의 으슴푸레한 여름 달빛 속으로 향하고 있었다.
- 기분이 바닥을 칠 때쯤 수업이 끝났고 보드는 밖으로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보드는 같이 놀 친구를 찾아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곤 커다란 회색 개 한 마리밖에 없었는데, 그 개는 비석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보드와 계속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비석과 비석 사이 그림자 속으로 슬그머니 움직이며 돌아다녔다.
- 날이 갈수록 상황은 더 나빠졌다.
루페스쿠 선생님은 계속해서 자신이 직접 만든 요리를 보드에게 가져다주었다. 돼지기름투성이 만두, 신맛이 나는 사워크림 한 덩어리를 넣은 걸쭉한 적자색 수프, 다 식은 조그만 삶은 감자, 마늘을 심하게 많이 넣은 차가운 소시지, 입맛을 떨어뜨리는 잿빛 액체에 담긴 삶은 달걀 같은 것들이었다. 보드는 루페스쿠 선생님의 노여움을 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음식만 먹었다. 수업은 계속되었다. 이틀 동안 그녀는 세상의 모든 언어로 도와 달라고 구조 요청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러면서 보드가 실수를 하거나 잊어버리면 볼펜으로 보드의 손마디를 톡 치곤 했다. 사흘째 되는 날, 그녀는 보드에게 지난 이틀 동안 배운 것에 대한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 "프랑스 어로는 도와 달라는 구조 요청을 어떻게 하지?"
"오 스쿠(Au secours)."
"모스 부호로는?"
"에스-오-에스. 짧게 세 번, 길게 세 번, 또 짧게 세 번 치면 돼요."
"나이트곤트들의 언어로는?"
"이건 바보 같은 짓이에요. 나이트곤트가 대체 뭔지 기억도 안 나요."
"나이트곤트들은 털 없는 날개가 달렸고 하늘을 낮고 빠르게 날아다니지. 그들은 이 세상을 찾아오지 않지만 굴하임으로 가는 길 위의 붉은 하늘을 날아다녀."
"제가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러자 루페스쿠 선생님은 입을 꽉 다물었다. 그러고는 그저 이렇게만 말했다.
"나이트곤트들의 언어로는?"
- 바스-웰스 교구의 주교가 자기 동료들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보드를 보며 말했다.
"그럼, 우리 같은 존재가 되는 거야. 우리처럼 강하고 날랜 무적의 존재가 되는 거지."
“이가 워낙 튼튼해서 어떤 뼈도 쉽게 으깰 수 있고, 혀는 뾰족하고 길어서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골수 뼈에 둘러싸인 골수도 핥아먹을 수 있고 뚱뚱한 사람의 얼굴에서 껍질도 잘 벗겨 낼 수 있어."
중국의 황제가 옆에서 거들었다.
"그림자에서 그림자로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쥐도 새도 모르게 슬며시 이동할 수도 있어. 공기만큼 자유롭고, 생각만큼 빠르고, 서리만큼 차갑고, 못만큼 단단하고, 이렇게 우리만큼 위험한 존재가 되는 거지."
웨스트민스터 공작도 나서서 한마디 했다.
보드는 그 괴물들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내가 당신들 같은 존재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요?"
- "그러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설마! 당연히 그러고 싶어 해야지! 이 세상에서 우리보다 더 멋진 존재가 뭐가 있어? 이 우주에서 우리처럼 되고 싶어 하지 않는 영혼은 단 하나도 없다고!"
"우리한테는 최고의 도시도 있는데..."
"바로 굴하임이지."라며 미국의 33대 대통령이 끼어들어 말했다.
"최고의 삶에 최고의 음식, 그리고 또..."
"납으로 된 관에 고이는 검은 이코르가 얼마나 맛있는 음료인지 넌 아마 상상도 못 할 거야. 또 확실히 사람이 방울양배추보다 더 중요한 대접을 받는 것과 같은 식으로 자신이 왕이나 왕비, 대통령이나 수상, 영웅보다 더 중요한 존재인 것처럼 대접을 받는다면 기분이 얼마나 좋을지 상상할 수 있겠니?"
- "대체 당신들 정체가 뭐예요?"
보드가 물었다.
"구울! 이런! 내 말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군. 우리는 구울이야."
- 무덤들로 이루어진 벽이 끝나자 이제 길이 나왔는데, 그 길은 바위와 해골이 널린 사막의 황량한 평원을 가로지르는, 발자국 가득한 길에 불과했다. 길은 수십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거대한 붉은 바위 언덕 높이 자리한 도시를 향해 구불구불하게 나 있었다.
보드는 멀리 떨어진 그 도시를 올려다보자 소름이 끼쳤다. 충격이 깃든 반감과 두려움, 역겨움과 증오심 같은 감정이 한데 뒤섞인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 '나이트곤트라고? 수업 시간에 배운 그 나이트곤트? 굴하임 위의 붉은 하늘을 나는...'
보드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나서 루페스쿠 선생님이 가르쳐 준 대로 소리를 질렀다. 목구멍 안쪽에서부터 독수리의 울음소리 같은 외침 소리를 냈다.
- 날개 달린 짐승들 가운데 하나가 그들을 향해 하강하더니 좀 더 낮은 곳에서 빙빙 돌았다. 보드는 다시 한번 외침 소리를 냈는데, 급기야 거친 손에 입이 틀어 막혀 그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다.
"저것들을 불러 아래로 내려오게 만들 생각을 하다니 훌륭해. 하지만 말이야. 저것들을 먹으려면 죽은 지 적어도 두 주는 지나야 해. 게다가 저놈들은 말썽을 일으키기만 할 뿐이야. 그래서 우리는 저것들과 사이가 굉장히 안 좋단 말이지. 알아들어?"
- 낮은 곳까지 내려왔던 그 나이트곤트는 건조한 사막의 하늘로 다시 올라가 동료들과 합류했다. 보드는 모든 희망이 사라져 버리는 것만 같았다.
- 다 식어 버린 해가 지고 두 개의 달이 떠올랐다. 하나는 표면에 패인 자국이 있는 하얗고 거대한 달이었다. 그 달은 처음에 떠오를 때는 지평선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하늘 높이 올라가면서 크기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보다 크기가 작은 다른 달은 치즈에 생긴 줄무늬 곰팡이 같은 청록색이었다. 그 달이 떠오르는 건 구울에게 축하할 일이었다.
- 구울 무리 가운데 새로 보는 한 구울이 -보드 생각에는 '유명한 작가 빅토르 위고’라고 소개된 자인 것 같았다- 자루를 하나 꺼냈는데, 그 안에는 담뱃불용 쇠 라이터 하나와 함께 장작이 가득 들어있었다. 장작 가운데 몇 개는 아직도 경첩이나 황동 손잡이가 붙어있었다. 그 구울이 곧바로 모닥불을 피우자 모닥불 주위에 모든 구울족이 둘러앉아 쉬었다. 그들은 청록색 달을 올려다보다가 모닥불가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였는데, 서로 욕설을 퍼붓는가 하면 때로는 할퀴거나 물어뜯기까지 했다.
"여기서 얼른 자고 일어나서 달이 질 때 굴하임을 향해 출발할 거야. 이제 이 길을 앞으로 아홉 시간이나 열 시간만 더 달려가면 돼. 다음 달이 떠오르기 전까지는 그곳에 도착해야 해. 그런 다음 잔치를 벌일 생각이야. 알겠지? 네가 우리처럼 되는 의식을 치르는 거야!"
웨스트민스터 공작이 말했다.
"아프진 않을 거야. 넌 아마 의식을 치르는 줄도 모를걸. 의식을 치른 뒤, 네가 얼마나 행복해질지 생각해 봐."
- 그러자 그들 모두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구울이 되는 게 얼마나 근사하고 멋진 일인지 모른다면서 자신들의 강력한 이빨로 으깨어 삼켜 버린 모든 것들에 대해 얘기를 했다. 그들 가운데 하나가 자신들은 아프지도 않고 병에 걸리지도 않는다고 자랑했다. 글쎄, 자신들의 먹잇감이 무슨 병에 걸려 죽었는지 상관없이 자신들은 그 먹잇감을 그냥 우적우적 씹어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 본 장소들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는데, 대부분이 지하 묘지나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들을 집단으로 파묻은 구덩이였다. ("그런 구덩이에는 맛있는 게 정말 많지." 하고 중국의 황제가 말하자 다들 동의했다.) 그들은 보드에게 각자 자신의 이름을 갖게 된 사연을 들려주며, 보드도 차례가 되어 일단 이름 없는 구울이 되면 자기들처럼 새로 멋진 이름을 갖게 될 거라고 했다.
"그렇지만 난 당신들처럼 되고 싶지 않아요."
- "어떻게 해서든 넌 우리와 동족이 되는 게 좋을 거야. 그 외의 다른 길은 더 골치 아플걸. 누군가의 뱃속에서 소화되어 버리면 오랫동안 여기 주변에서 즐길 수도 없거든."
바스-웰스 교구의 주교가 쾌활하게 말했다.
"그런 무시무시한 얘기는 안 하는 게 좋아. 구울이 되는 게 가장 좋지. 우리 구울들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
중국의 황제가 말했다.
관에서 떼어 낸 나무로 지핀 모닥불 주위에 있던 모든 구울들이 그 말을 듣고 길게 짖는 소리를 내며 웃고,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로 환호하고, 노래를 부르다가 자기들이 얼마나 현명한지, 그리고 자기들이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지 감탄하며 외쳐 댔다.
그 순간 저 멀리 사막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 무언가가 길게 울부짖는 소리였다. 그러자 구울들은 공포에 질린 듯 횡설 ...
- 그리고 그렇게 떨어지고 있는 동안 보드는 그 회색 짐승이 있는 곳에서 분명한 어떤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루페스쿠 선생님의 목소리였다.
"오, 보드!"
보드는 이제껏 자신이 꾸었던 추락하는 모든 꿈에서처럼 허공을 가르며 아래의 땅바닥을 향해 무섭게 정신없이 떨어졌다. 그때 보드는 자기 마음이 단 하나의 생각을 품을 수 있는 크기밖에 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 커다란 개는 사실은 루페스쿠 선생님이야'하는 생각과 '내 몸은 이제 곧 바위투성이 바닥에 철퍼덕하고 떨어질 거야' 하는 생각이 자신의 머릿속을 서로 점령하려고 다투었다.
- 그 순간 뭔가가 보드와 같은 속도로 떨어지며 보드를 감쌌다. 그러고는 가죽처럼 튼튼한 날개의 요란한 날갯짓 소리가 들리더니 모든 것이 느려졌다. 바닥은 이제 더 이상 방금 전과 같은 속도로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날개가 더 세게 펄럭거리더니, 그들은 살짝 하늘로 떠올랐다. 이제 보드의 머릿속에는 '내가 날고 있어!'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그는 날고 있었다. 보드는 고개를 돌렸다. 자기 위로 완전히 벗겨진 암갈색 머리가 보였는데, 움푹 들어간 눈은 마치 반들반들 윤이 나는 검정 유리 조각 같았다.
- 보드는 나이트곤트들의 언어로 "도와주세요!"란 뜻을 지닌 새된 소리를 냈다. 그러자 나이트곤트는 싱긋 웃으며 그 대답으로 굵직하게 "우우" 하는 소리로 냈다. 나이트곤트는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 급강하한 후 서서히 속도가 늦어지더니 쿵 소리를 내며 그들은 사막 바닥에 착륙했다. 보드는 일어서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그를 배반한 발목에 비틀거리다가 모래에 처박혔다. 세찬 바람에 매서운 사막 모래가 몰아쳐 보드는 살갗이 따끔거렸다.
나이트곤트는 가죽 같은 날개를 접고 보드 옆에 웅크리고 앉았다. 보드는 묘지에서 자랐기 때문에 날개 달린 종족의 모습을 많이 보아 왔지만 비석에 있는 천사들의 모습은 나이트곤트와 완전히 달랐다.
- "보드, 나이트곤트들이 네 목숨을 구해 준 게 이번이 세 번째야. 첫 번째는 네가 도와 달라고 큰 소리로 외쳤을 때야. 나이트곤트들은 그 소리를 듣고 나한테 와서 그 소식을 전해 주며 네가 있는 곳을 알려 줬어. 두 번째는 어젯밤 모닥불 주변에서 네가 잠들어 있을 때였어. 나이트곤트들은 어둠 속에서 빙빙 날아다니다가 구울 둘이 하는 얘기를 들었대. 그 둘은 네가 자기들에게 불행을 안겨 줄 거라면서 돌로 네 머리를 내리쳐 죽인 다음 나중에 다시 찾아낼 수 있는 곳에 숨겨 놨다가 네 시체가 적당히 썩으면 먹어 치우자고 하더래. 그래서 나이트곤트들이 그 문제를 조용히 처리했어. 그리고 이번에 떨어지는 너를 받으면서 세 번째로 너를 구한 거야."
"루페스쿠 선생님 맞죠?"
개처럼 생긴 커다란 머리가 보드 쪽으로 다가왔다. 순간적으로 보드는 미칠 듯한 공포에 사로잡혀 그것이 자기를 물어뜯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혀로 보드의 뺨을 사랑스럽게 핥았다.
- "그 소리는 무슨 뜻이에요?"
"'고맙습니다.' 또는 '안녕히 가세요.'란 뜻이야. 둘 다를 뜻할 때도 있고."
보드가 최선을 다해 루페스쿠 선생님이 낸 소리와 비슷하게 꺽꺽거리며 소리를 지르자 나이트곤트는 재미있는지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런 뒤 나이트곤트는 보드와 비슷한 소리를 지르고는 가죽 같은 커다란 날개를 펼치고 힘차게 날갯짓을 하며 사막의 바람 속으로 뛰어들어,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나는 연처럼 높이 날아올랐다.
- "무덤들로 이루어진 벽으로 가는 거예요?"
"구울의 문 말이니? 아니야. 그 문은 구울들이 드나드는 곳이야. 나는 하느님의 사냥개란다. 지옥을 드나들 때는 나만이 다니는 길이 따로 있지."
- 하늘에 거대한 달과 그보다 작은 크기의 곰팡이색 달이 떴다. 심홍색의 또 다른 달이 거기에 합류했다. 회색 늑대 모습의 루페스쿠 선생님은 그 달들 아래에서 해골투성이 사막을 가로질러 계속 성큼성큼 달려갔다. 그녀는 작은 실개천 옆에 지어진 거대한 벌집처럼 생긴 부서진 진흙 건물 옆에 멈춰 섰다. 그 실개천은 사막의 바위에서 졸졸 흘러나와 작은 웅덩이로 톡톡 떨어져 들어갔다가 다시 어디론가 흘러갔다. 회색 늑대는 고개를 숙이고 물을 마셨고, 보드는 두 손으로 물을 퍼서 조금씩 여러 번에 나눠 마셨다.
"여기가 경계야."
루페스쿠 선생님인 회색 늑대가 말하자 보드는 위를 쳐다봤다. 세 개의 달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 은하수가 보였는데, 아치 모양의 하늘을 가로질러 희미하게 빛나는 장막 같은 은하수를 보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바라보았다. 하늘은 별들로 가득했다.
"참 아름답네요."
보드가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면 별들의 이름과 별자리를 가르쳐 줄게."
"좋아요."
- (주) 사람들이 '늑대인간'이라고 부르는 존재. 늑대인간 자신들은 스스로를 '하느님의 사냥개'라고 부르는데, 자신들의 몸이 늑대로 변하는 것은 자신들의 조물주인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주장하면서 불굴의 끈기로 악인을 지옥의 문까지 뒤쫓아 하느님의 선물에 보답하기 때문이다.
- 그는 그 목록의 나머지 내용도 읽어 내려가며 최대한 기억하려고 애썼다. 그런 다음 예배당으로 내려가 보니 루페스쿠 선생님이 언덕 아래쪽에 있는 피쉬앤칩스 가게에서 사 온 작은 고기 파이 하나와 커다란 감자튀김 한 봉지를 앞에 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자주색 잉크로 적은 또 다른 목록들이 쌓여 있었다.
두 사람은 감자튀김을 나눠 먹었고, 루페스쿠 선생님은 심지어 한두 번 미소를 짓기도 했다.
- "내가 없는 동안 아무 문제도 없었겠지?"
사일러스 아저씨가 물었다.
"많은 것을 배웠어요."
보드는 아직도 금문교 모형을 손에 든 채였다. 보드가 밤하늘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건 큰곰자리와 아들인 작은곰자리예요. 그들 사이에 뱀처럼 구불구불한 모양으로 있는 건 용자리고요."
"아주 훌륭한데."
사일러스 아저씨가 말했다.
"아저씨는요? 이곳을 떠나 있는 동안 배운 게 있나요?"
보드가 물었다.
"오, 그럼."
사일러스 아저씨는 그렇게만 대답하고, 자세히 말해 주려고 하지는 않았다.
- "저도요. 저도 배운 게 있어요."
루페스쿠 선생님이 새침하게 말했다.
"다행이군요."
사일러스 아저씨가 말했다. 참나무 가지에서 올빼미 한 마리가 "부엉부엉" 하며 울었다.
- "사실은 내가 떠나 있는 동안 이상한 소문을 들었는데, 몇 주 전에 두 사람이 이곳을 벗어나 내가 따라갈 수 없는 아주 먼 곳까지 나갔다는 소문이었소. 보통은 내가 조심하라고 충고를 하겠지만 다른 존재들과 달리 구울들은 기억력이 나빠서 금방 잊는다오."
"괜찮아요. 루페스쿠 선생님이 저를 잘 보살펴 주셨어요. 저는 결코 어떤 위험에도 처하지 않았어요."
보드가 이렇게 말하자 루페스쿠 선생님은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보드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사일러스 아저씨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아이가 배워야 할 게 굉장히 많아요. 내년에도 한여름에 오면 이 아이를 또 가르쳐야 할 것 같아요."
사일러스 아저씨는 루페스쿠 선생님을 향해 한쪽 눈썹을 살짝 올렸다. 그런 뒤 보드를 바라보았다.
"저도 좋아요."
보드가 말했다.
- 묘지의 끄트머리에 마녀가 한 사람 묻혀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보드는 자신이 기억할 수 있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오언스 부인에게서 그쪽으로는 절대 가까이 가지 말라는 말을 누누이 들어왔다.
"왜요?"
보드가 물었다.
오언스 부인은 "살아 있는 사람의 건강에는 좋지 않기 때문이야. 그쪽 끝은 축축해. 사실 그곳은 습지야. 그곳에 갔다가는 지독한 감기에 걸릴 거야."라고 대답했다.
오언스 씨는 아내만큼 잘 둘러대지 못하고 대충 얼버무리며 "거긴 좋은 곳이 아니야."라고만 말했다.
- 그는 비단결 같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모든 땅이 성스럽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단다. 우리가 이 땅에 오기 전에도, 그리고 온 후에도 성스럽다고 믿는 사람들 말이야. 하지만 바로 여기, 네가 사는 땅의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묻힐 교회와 땅을 따로 마련해 신의 축복을 빌어 성스럽게 만들었어. 그리고 그 성스럽게 만든 땅 주변은 신의 축복을 빌지 않은 채로 놔두고는 무연분묘로 삼아, 범죄자들, 자살한 사람들, 믿음이 없는 자들이 묻히게끔 했지."
"그럼 울타리 저편에 있는 땅에 묻힌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군요?"
사일러스는 완벽한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음? 아니, 그건 아냐. 어디 보자, 그러고 보니 그쪽으로 내려가 본 지도 꽤 됐군. 하지만 내 기억에 특별히 악한 사람은 없었던 것 같아. 옛날에는 동전 한 닢 훔쳤다고 목을 매달아 죽이기도 했어. 그리고 자신의 삶이 너무나 견딜 수가 없어서 서둘러 저세상으로 가는 게 최선이라고 믿는 사람들 역시 언제나 있어 왔단다."
"자살하는 사람들 말이죠?"
보드가 말했다. 이제 여덟 살쯤 된 보드는 천진난만하고 호기심이 많았다. 하지만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렇단다."
"그런데 그런 게 통해요? 그 사람들은 죽어서 행복해졌을까요?"
"가끔은 그런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아. 그건 마치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가서 살면 더 행복할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해 봤자 통하지 않는단 걸 깨닫게 되는 것과 같아. 사람은 어디를 가든 본래 자신의 모습을 잃지 않는 법이거든. 무슨 말인지 알겠니?"
- "마녀는요?"
보드가 물었다.
"마녀도 마찬가지야. 자살한 사람들, 범죄자들, 마녀들, 고해성사로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도 다 그곳에 묻혀 있어."
사일러스가 일어서자 어스름 속에 까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사일러스가 덧붙여 말했다.
"계속 얘기하느라 아직 아침도 못 먹었구나. 이러다 너도 수업에 늦겠다."
묘지의 어스름 속에서 까만 벨벳이 펄럭이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사일러스는 자취를 감추었다.
- 페니워스 선생님은 "쯧쯧" 하고 혀를 찼다. 지난주에 페니워스선생님은 보드에게 '요소와 기질'에 대해 가르쳤지만 보드는 뭐가 뭔지 자꾸만 잊어버렸다. 그래서 시험을 볼 거라는 보드의 예상과는 달리 페니워스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 때가 된 것 같아. 앞으로 며칠 동안은 실제로 도움이 되는 문제들을 다룰 생각이야. 어쨌든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는구나."
"그래요?"
"유감스럽지만 그래, 오언스 군. 보자, 눈앞에서 사라지는 건 잘돼?"
그 질문은 보드가 정말 받지 않기를 바란 것이었다.
"괜찮은 편이에요. 정말이에요. 선생님도 잘 아시잖아요."
"아니, 오언스 군. 난 몰라. 내 앞에서 사라지는 걸 한번 보여 주겠니?"
보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보드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눈을 가늘게 뜨고 사라지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페니워스 선생님을 감동시키지는 못했다.
"쳇! 그렇게 하는 게 아냐, 그렇게 하는 게 전혀 아니라고! 죽은 사람들이 하는 식으로 미끄러지듯 슬쩍 사라져야지. 그림자 속으로 슬쩍 미끄러지듯이 말이야. 상대가 의식하지 못하게 사라져야지. 다시 해봐!"
보드는 사라지려고 더욱 안간힘을 썼다.
"네 모습이 명명백백하게 보여. 코도 아주 확실하게 보이고. 얼굴의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야, 오언스 군. 몸도 마찬가지로 또렷이 보여. 제발 마음을 비워, 당장. 넌 텅 빈 골목길이야. 넌 비어 있는 출입구야. 넌 존재하지 않아. 어떤 눈도 너를 볼 수 없어. 어떤 마음도 너를 담을 수 없어. 네가 어디 있든 넌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아니야."
보드는 다시 시도해 보았다. 눈을 감고 자신이 그 웅장한 묘의 얼룩이 묻은 벽 속으로 사라져 밤의 그림자가 되어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상했다. 그러다가 보드는 재채기를 했다.
"형편없군."
- "그럼, 그냥 기질에 대해 복습이나 하지. 하나씩 대 봐."
"음, 다혈질, 담즙질, 점액질. 그리고 또 하나가 더 있는데... 으음, 우울질인 것 같아요."
그런 식으로 페니워스 선생님의 수업 시간은 지나갔다. 다음은 이 교구의 노처녀 리티샤 보로스(살아 평생 어떤 남자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은 사람. 이 글을 읽는 당신, 자신도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는가?)와 함께하는 문법과 작문 시간이었다. 보드는 보로스 선생님도, 그녀의 작은 무덤이 주는 아늑함도, 수업을 하다가 너무나도 쉽게 주제에서 벗어나 옆길로 새는 것도 좋았다.
- "선생님, 사람들이 그러는데, 그 뭐라더라, '성화되지 않은 땅'에 마녀가 한 사람 묻혀 있대요."
보드가 말했다.
"그렇단다. 그런데 설마 그곳에 가 보고 싶은 건 아니겠지?"
"그럼 왜 안 되죠?"
보로스 선생님은 죽은 사람들 특유의 악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거기에 묻힌 사람들은 우리와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거든."
"하지만 그곳 또한 묘지가 맞잖아요. 안 그래요? 제 말은 ... "
- 보드는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녀는 소박한 흰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칙칙한 담갈색으로 길었고 얼굴은 어딘지 좀 요귀 비슷한 데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얼굴의 나머지 부분이 무얼 하고 있던 입가에 계속 머금고 있는 삐딱한 엷은 미소 때문이었다.
"저, 혹시 자살을 한 거예요? 아니면 동전 한 닢을 훔친 거예요?"
보드가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발끈하며 말했다.
"난 결코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어. 손수건 한 장도 훔친 적 없다고. 아무튼, 자살한 사람들은 저쪽 산사나무 맞은편에 묻혀 있고, 교수형 당한 흉악범들은 둘 다 나무딸기 덤불숲에 묻혀 있어. 하나는 위조 화폐를 만든 놈이고, 다른 하나는 노상강도였던 놈이야. 아무튼 자기 말로는 노상강도라는데, 내가 볼 땐 흔한 소매치기나 밤손님 이상은 아냐."
"그렇군요."
그러다가 문득 보드는 뭔가를 알아채고 머뭇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저기, 사람들이 그러는데 여기에 마녀가 한 사람 묻혀 있대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에 빠뜨리고 불로 태운 다음 여기에 파묻었지. 묻은 곳을 표시해 줄 비석조차 하나 세워 주지 않고 말이야."
"그럼 혹시 물에 빠지고 불태워졌다는 그 사람이 당신인가요?"
- “새벽에 사람들이 내 작은 오두막으로 쳐들어와서는, 아직 잠도 다 깨지 않은 나를 마을 중앙의 잔디밭으로 질질 끌고 갔어. '넌 마녀야!' 하고 사람들이 소리쳤는데, 다들 뚱뚱하고 아침에 북북 문질러 세수해서 얼굴이 벌게져 있는 꼴이, 꼭 장날에 팔려고 깨끗이 씻겨 놓은 돼지 새끼 같았지. 그들이 한 명씩 일어나더니 자기 집 우유가 상했다는 둥, 자기 집 말이 갑자기 절름발이가 되었다는 등 허튼소리를 해 대는 거야.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저마이마'라는 여자가 일어났는데, 거기 모인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뚱뚱하고 얼굴이 제일 벌건 게 가장 열심히 북북 문질러 씻은 것 같았어. 그 여자가 하는 말이, 솔로몬 포리트가 요즘 자기를 멀리하고, 대신 꿀단지 주변을 맴도는 말벌처럼 세탁장 주변을 어슬렁거린다는 거였어. 그런데 글쎄 그가 그렇게 된 건 다 나의 마법 때문이며, 그 불쌍한 젊은이는 마법에 걸린 게 틀림없다는 거야. 그러자 사람들이 나를 징벌의자에 꽁꽁 묶더니 의자째 오리 연못 속에 빠뜨렸어. 내가 마녀라면 죽지도 상관하지도 않을 거고, 내가 마녀가 아니라면 고통을 느낄 거라면서 말이야. 그리고 저마이마의 아버지는 그들에게 은화를 한 닢씩 주며 더러운 녹색 물속에서 의자를 오랫동안 붙잡고 있는 동안 내가 숨이 막혀 죽는지 아닌지 확인하라고 했지."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폐에 가득 물이 들어찼고 난 거의 다 죽어 갔지."
"그랬군요. 그럼 당신은 결국 마녀가 아니었네요."
소녀는 구슬 같은 유령의 눈으로 보드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한쪽 입꼬리가 처지게 씩 웃었다. 그녀는 여전히 요귀처럼 보이긴 했지만 이제는 예쁜 요귀처럼 보였다. 보드는 그녀가 솔로몬 포리트의 마음을 끌기 위해 마법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미소를 지니고 있는 데 마법 따위는 필요 없을 것 같았다.
- "터무니없는 소리야. 나는 마녀였어. 그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징벌 의자에 묶인 나를 풀어서 잔디밭에 눕혔을 때였어. 난 거의 다 죽어 가는 채로 수초와 악취 나는 연못의 오물로 뒤덮여 있었어. 나는 눈을 부릅뜨고 눈알을 굴리며 그곳 마을 잔디밭에 있던 사람들 하나하나를 저주했어.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결코 무덤에서 편히 쉬지 못할 것이라면서 말이야. 내 입에서 저주가 얼마나 쉽게 술술 터져 나오던지 난 깜짝 놀랐어. 마치 춤을 추듯이 저주의 말이 쏟아져 나오는 거야. 전혀 들어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새로운 곡에 맞춰 발이 절로 움직이며 새벽까지 계속 춤을 추듯이 말이야."
그녀가 일어서더니 춤을 추듯 빙글빙글 돌며 발을 앞으로 쭉쭉 뻗자 달빛 속에서 그녀의 맨발이 하얗게 빛났다.
"그런 식으로 나는 그들을 저주했어. 연못의 물을 많이 마신 탓에 꺽꺽대며 마지막 숨을 토해 내는 순간까지 말이야. 그러고는 숨이 멈췄지. 그들은 마을 잔디밭에서 내 시신을 까만 숯덩이가 될 때까지 태웠어. 그러고는 무연분묘에 있는 구덩이에다 홱 던져 버렸어. 내 이름 적은 비석 하나 세워 주지 않고 말이야."
그녀는 여기까지만 말하고 말을 멈췄는데 한순간 애석해하는 표정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럼, 그 사람들 가운데 묘지에 묻힌 사람은 없나요?"
보드가 물었다. 그러자 소녀가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한 사람도 없어. 그들이 나를 물에 빠뜨렸다가 불태워 버린 그 주 토요일에 멀리 런던에서 포린저 씨 앞으로 양탄자가 하나 배달되었어. 튼튼한 양털을 가지고 훌륭한 솜씨로 짠 아주 멋진 양탄자였지. 그런데 나중에 밝혀지길 그 양탄자만 온 게 아니었어."
- 보드는 그렇게 말하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난 다음, 바닥에 있는 사람들과 동물들의 말라 버린 유골을 피하며 돌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화가 난 슬리어는 꿈틀거리며 온몸을 비틀어 유령처럼 흐릿한 연기의 모습으로 작은 방을 휘감았다. 그 움직임은 매우 느릿느릿했다.
"보물은 돌아온다. 언제나 돌아온다."
뒤엉킨 세 개의 목소리로 슬리어가 말했다.
- 보드는 브로치를 손에 쥐고 언덕 꼭대기의 탁 트인 곳에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브로치가 완전히 검은색이라고 생각했는데, 해가 떠오르자 검은색 쇠붙이의 한가운데에 붙은 돌이 소용돌이 모양의 빨간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보드는 꼭 울새 알 크기만 한 그것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꼭 돌 중심부에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보드가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더라면 입으로 그것을 삼켜 버렸을지도 모를 만큼 그의 눈과 마음은 진홍빛 세상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 돌은 갈고리 발톱처럼 생긴 검정 쇠붙이의 걸쇠로 고정되어 있었으며, 그 돌 주위에는 기어 다니는 듯한 뭔가가 있었다. 그 뭔가는 뱀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머리가 굉장히 많이 달려 있었다. 보드는 햇빛 속에서 보면 슬리어가 이런 모습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 ...
- "톰, 횡재했어. 최대한 빨리 이리로 와."
창고 문을 잠그는 소리를 들었을 때, 보드는 자신이 갇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드는 문을 힘껏 당겨 보았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꼬임에 넘어가 이곳으로 따라 들어온 자기가 멍청하게 느껴졌다. 떫은 표정의 사내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그에게서 멀리 달아나고 싶은 충동을 따르지 않은 자기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자신이 묘지의 모든 규칙을 깨뜨린 것도 모자라 일까지 다 꼬여 버렸다. 사일러스 아저씨가 알면 뭐라 하실까? 또 부모님은? 그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엄청 두려워지기 시작했지만 보드는 그런 걱정을 마음속 깊이 도로 꾹꾹 밀어 넣으며 두려움을 억눌렀다. 다 잘될 것이다. 보드는 분명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물론 그러려면 먼저 창고에서 빠져나가야 했다.
- 브로치는 특별했다. 카운터의 조그만 전등 아래서 브로치가 빛나는 것을 보면 볼수록, 브로치가 자신의 것이, 오직 자신만의 것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도 점점 커져만 갔다.
하지만 이 브로치를 찾은 곳에 이런 게 더 있다고 하질 않는가. 그 아이는 그곳이 어디인지 자신에게 실토하게 될 것이다. 그 아이가 그곳으로 자신을 데려갈 것이다.
- 순간 그에게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내키지 않았지만 마지못해 브로치를 내려놓고 카운터 뒤의 서랍을 열어 양철로 된 비스킷 통을 하나 꺼냈는데, 그 안에는 봉투, 카드, 쪽지가 가득했다.
그는 그 통에 손을 넣어 명함보다 아주 약간 더 큰 카드 한 장을 빼냈다. 그 카드에는 검은 테두리가 둘러져 있었다. 하지만 이름이나 주소가 찍혀 있지는 않았다. 그 카드 한가운데에는 잉크로 직접 쓴 단 한 글자만이 있었다. 본연의 색이 바래 이제는 갈색이 되어버린 그것은 바로 '잭'이라는 글자였다.
- 아바나저 볼저는 그 카드 뒷면에 연필로 아주 조그맣고 정확한 글씨로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내용을 적어 둔 바 있었다. 자신이 그 카드 사용법을, 즉 잭이라는 사내를 호출하려면 그 카드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자신이 잊어버릴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여 잊어버렸을 경우 그 방법을 상기시킬 수 있도록 적어 두었던 것이다. 아니, 호출이 아니라, 초청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잭과 같은 사람은 감히 아무나 호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바로 그때 누군가 가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보물이야. 그것도 두 가지씩이나."
그렇게 말한 아바나저 볼저는 친구를 카운터로 데려가 작은 등불 아래에서 브로치를 그에게 보여 줬다.
"오래돼 보이는데?"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 시대의 유물 같아. 정말 오래전이지. 아무래도 고대 켈트족 시대의 유물 같아 보여. 고대 로마인들이 이 땅에 들어오기 전 말이야. 이건 스네이크 스톤이라는 거야. 박물관에서 본 적 있어. 하지만 이런 금속 세공품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이렇게 정교한 세공품은 처음 봐. 틀림없이 왕의 물건이었을 거야. 이런 물건들로 가득 찬 고분을 상상해 봐."
- "아무튼 어쩌다가 이런 멍청한 짓을 저지른 거야? 묘지를 떠나선 안 된다는 규칙을 잘 알잖아. 들으라는 말은 안 듣고 문제나 일으키고."
보드는 자기 자신이 정말 초라하고 바보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보드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해명했다.
"당신한테 비석을 선물해 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러려면 비용이 더 많이 들 것 같아서, 그래서 저 사람한테 브로치를 팔러 온 거예요. 당신에게 비석을 하나 사주려고요."
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났어요?"
보드가 묻자 리자는 고개를 저었다. 예쁜 요귀 같은 미소를 엷게 머금으며 그녀가 말했다.
"지난 500년 동안 날 위해 이런 고마운 일을 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그런데 내가 왜 화를 내겠어? 넌... 사라지려고 할 때 어떻게 하니?"
"페니워스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해요. '난 텅 빈 골목길이야. 난 비어 있는 출입구야. 난 존재하지 않아. 어떤 눈도 나를 볼 수 없어. 어떤 마음도 나를 담을 수 없어. 어떤 눈길도 나를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지.'라고 속으로 되뇌죠. 하지만 전혀 잘 되지가 않아요."
그러자 리자가 콧방귀를 뀌며 이렇게 대꾸했다.
"그건 네가 살아 있기 때문이야. 그런 건 최상의 상태일 때조차 눈에 띄려면 고군분투해야 하는 나처럼 죽은 사람들은 잘 되지만 너처럼 살아 있는 사람들은 전혀 잘 되지 않을 거야."
- 리자는 두 팔로 자기 몸을 꼭 껴안고 뭔가 곰곰이 생각하듯이 몸을 앞뒤로 움직였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 때문에 이런 곤경에 처하다니... 이리 와 봐, 노바디 오언스."
보드는 조그마한 방에서 그녀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그러자 그녀는 차가운 손을 보드의 이마에 얹었다. 그녀의 손길이 닿자 보드는 마치 피부에 젖은 비단 스카프가 닿는 느낌이었다.
"이번엔 아마 내가 너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야."
그 말과 함께 그녀는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는데, 보드는 그녀가 중얼거리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큰소리로 분명하게 말했다.
구멍, 먼지, 꿈, 바람이 되어라.
밤, 어둠, 소망, 마음이 되어라.
이제 스르르, 슬며시 눈에 보이지 않게 움직여라.
위로, 아래로, 가운데로, 사이로.
- 무언가 거대한 것이 보드의 몸을 건드리며 머리부터 발까지 쓸어내렸다. 보드는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머리칼이 쭈뼛 서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자신의 몸에 뭔가 변화가 생긴 것이었다.
"뭘 한 거예요?"라고 보드가 물었다.
"그냥 좀 도와주었을 뿐이야. 내가 죽은 사람이긴 하지만 마녀잖니. 우리는 잊지 않아."
- "하지만 문이 잠겨 있는걸요. 당신이 어떻게 해 볼 수 없어요?"
보드가 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얘, 난 문이 잠긴 방에서 너를 꺼내 줄 마법은 부리지 못해."
보드는 쪼그리고 앉아 열쇠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려고 눈을 갖다 댔다. 하지만 열쇠 구멍은 막혀 있었다. 보드는 잠시 생각하다가 순간적으로 미소를 지었는데, 그 미소에 그의 얼굴이 백열전구의 불빛처럼 환해졌다. 보드는 포장 상자에서 구깃구깃한 신문지 한 장을 꺼내 최대한 반듯하게 폈다. 그런 뒤 문 밑으로 그 종이를 밀어 넣고 자신이 있는 문 안쪽에서는 신문지 끝만 살짝 보이게 놔뒀다.
"대체 뭐 하는 거야?"
리자가 조바심을 내며 물었다.
"연필 같은 게 필요해요. 연필보다 조금만 더 가늘면 될 것 같은데.... 맞아, 그게 있었지."
그러면서 보드는 책상 위에 있는 가느다란 붓을 집어서 털이 없는 쪽 끝을 열쇠 구멍에 밀어 넣고는 이리저리 움직여 가며 조금 더 밀어 넣었다.
열쇠 구멍에 꽂힌 열쇠가 앞으로 밀려 나가면서 살짝 "톡"하며 신문지 위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보드는 문 밑으로 신문지를 다시 안으로 끌어당겼고, 이제 그 위에는 열쇠가 얹혀 있었다.
리자가 아주 기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기지가 대단한데, 꼬마. 정말 지혜로워."
보드는 열쇠 구멍에 열쇠를 꽂고 돌린 다음 창고 문을 밀어서 열었다.
(리뷰자 주 : <허무에의 제물>에서도 비슷한 방식의 열쇠가 언급된다. 바깥쪽에서도 안쪽에서도 같은 열쇠를 통해 열 수 있는 형태로 짐작된다.)
- 그 사내들 옆의 바닥에 반짝거리는 은으로 된 브로치가 떨어져 있었다. 그 브로치에는 진홍색과 빨간색의 줄무늬가 뒤섞인 돌이 걸쇠로 고정되어 있었으며, 그 돌 주위에는 머리 여럿 달린 뱀 장식이 있었다. 그리고 뱀 머리들에는 승리감과 탐욕 그리고 만족이 뒤섞인 표정이 어려 있었다.
보드는 브로치를 주워 자신의 호주머니에 넣었는데, 그의 호주머니 속에는 묵직한 유리 서진, 붓, 작은 물감 병도 같이 들어 있었다.
- "이것도 가져가."
리자가 말했다.
보드는 한쪽 면에 '잭'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는 테두리가 검은색으로 둘러진 카드를 바라보았다. 그것을 보자 보드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왠지 낯익은 구석이 있었다. 그것은 오래된 기억을 뒤흔드는 뭔가 위험한 물건 같았다.
"그건 가져가지 않을래요."
"여기 놔두면 안 돼. 저자들이 이걸 이용해 너를 해치려고 했어."
"그건 가져가고 싶지 않아요. 불길해요. 그냥 불태워 버려요."
그 말에 리자가 숨이 멎을 듯 다급하게 외쳤다.
"안 돼! 그러면 안 돼, 절대로 그래선 안 돼!"
- "무슨 일이냐? 뭣 때문에 그래?"
그의 할머니가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은 커다란 무쇠솥에 든 내용물을 휘젓다가 물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뭔가... 흥미로운 일이요."
그는 혀로 입술을 핥으며 덧붙였다.
"맛있는 냄새가 나네요. 아주 맛있는 냄새가 말이죠."
번갯불이 자갈 깔린 도로를 비추었다.
- "넌 나가 있으래도 엄만 할 일이 많으니까, 네가 거치적거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런 뒤 오언스 부인은 보드가 전에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깔막한 노래를 혼자 흥얼거렸다.
[돈 많은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모두 오세요. 모두 와서 죽음의 무도를 추어요.]
"그게 무슨 노래예요?"
보드가 물었다. 하지만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은 실수였다. 오언스 부인의 표정이 먹구름처럼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보드는 그녀가 더욱 강하게 불쾌감을 드러내기 전에 서둘러 무덤 밖으로 나왔다.
- 묘지는 추웠다. 춥고 어두웠으며 별들이 벌써 나와 있었다.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이집트 풍으로 꾸며진 오솔길에서 백정 할머니 앞을 지나는데 할머니가 눈을 가늘게 뜨고 담쟁이덩굴의 푸른 잎을 바라보고 있었다.
"꼬마야, 너는 나보다 눈이 좋겠구나. 네 눈엔 꽃이 보이니?"
백정 할머니가 말했다.
"꽃이요? 이 겨울에요?"
"꼬마야, 그런 얼굴로 쳐다보지 마라. 뭐든 때가 되면 꽃을 피우지. 꽃봉오리를 맺었다가 서서히 피었다가 활짝 만개한 뒤 시든단다. 모든 것은 다 자기 때가 있단다."
망토와 보닛 모자 속으로 몸을 점점 파묻으며 백정 할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일해야 하는 시간도 있고 놀아야 하는 시간도 있지만 지금은 죽음의 무도를 출 시간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니, 얘야?"
“전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죽음의 무도'란 게 뭐예요?"
하지만 백정 할머니는 담쟁이덩굴 속으로 들어가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정말 이상해!"
보드는 큰 소리로 말했다. 그는 온기와 친구를 찾아 북적거리는 바틀비 가문의 묘로 갔다. 하지만 일곱 세대가 모여 있는 바틀비 가문 사람들도 그날 밤은 보드를 위해 내어 줄 시간이 없었다. 바틀비가문 사람들은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1831년 사망.)부터 가장 어린 사람(1690년 사망.)까지 다들 쓸고 닦고 치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 "보드, 우린 지금 너랑 놀아 줄 수 없어. 이제 곧 '내일 밤'이 찾아오니까 말이야. 내일 밤은 매일같이 찾아오는 게 아니거든."
"무슨 소리야? 내일 밤은 매일같이 찾아와."
보드가 말했다.
"이번 내일 밤은 아냐. 이번 내일 밤은 드물게, 아니 평생 가도 찾아오지 않을지 몰라."
- 사일러스는 비닐봉지에서 보드의 수의와 같은 색깔인 회색 스웨터에 이어 바지와 속옷, 연두색 운동화도 꺼냈다.
"이것들은 뭣 하려고요?"
"네 말은 이런 것들을 왜 가져왔느냐는 말이니? 음, 우선 너는 그동안 많이 자랐어. 이제 네 나이가 열 살이지, 아마? 그리고 살아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옷은 꽤 멋있어. 너도 언젠가는 이런 옷을 입어야 할 거야. 그러니 지금부터 습관을 들여놓는 게 좋잖아. 게다가 위장도 할 수 있고 말이야."
"위장이 뭔데요?"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과 아주 비슷하게 보여서 사람들이 그걸 보고도 자기가 보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없게 만드는 걸 위장이라고 해."
"그렇군요. 대충 알 것 같아요."
보드는 옷을 입어 보았다. 신발 끈을 묶느라 다소 애를 먹자 사일러스 아저씨가 신발 끈 묶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보드에게는 그게 무척 복잡한 것 같았는데, 여러 번 신발 끈을 묶고 풀기를 반복한 끝에 드디어 사일러스 아저씨가 만족할 정도로 잘 묶을 수 있게 되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보드는 사일러스 아저씨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저씨, 죽음의 무도가 뭐예요?"
사일러스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에 대해서는 어디서 들었니?"
- "그냥 춤이야."
그러자 보드는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말했다.
"모두 죽음의 무도를 춰야 한다던데요. 아저씨도 그 춤을 춰 보셨어요? 어떤 춤이에요?"
그의 후견인은 검은 웅덩이 같은 눈으로 보드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나는 모른단다, 보드, 나는 아주 오랫동안 밤마다 세상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많은 것들을 알고 있어. 하지만 죽음의 무도가 어떤 춤인지는 모르겠구나. 그 춤을 추려면 산 사람이거나 죽은 사람이어야만 하는데... 난 그 어느 쪽도 아니니까."
보드는 몸을 떨었다. 그는 자신의 후견인을 꼭 껴안고 자기는 결코 그를 버리지 않을 거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그런 행동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달빛을 껴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드는 사일러스 아저씨를 껴안을 수 없었다. 그건 자신의 후견인이 실체가 없는 존재여서가 아니라 그게 잘못된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껴안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 사일러스 아저씨처럼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 "넌 그 춤을 추게 될 거야. 그렇게 입으니 평생 묘지 밖에서 살아온 사람 같구나."
보드는 자랑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미소를 지우고 다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저씨는 언제나 여기에 계실 거죠? 그리고 저도 제가 원하지 않는다면 이곳을 떠나지 않아도 되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란다."
그 말을 한 뒤 사일러스는 그날 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이튿날 보드는 일찍 잠에서 깼다. 태양이 잿빛 겨울 하늘 높이 걸린 은화 같았다. 겨울에는 긴 밤을 보내고 나면 다음 날 해 구경도 못 하고 해가 떠 있는 시간 내내 자기 일쑤였다. 그래서 보드는 매일 밤 잠들기 전이 되면 낮 시간에 일어나 오언스 가의 아늑한 무덤에서 나가야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공기 중에서 낯선 냄새가 났다. 코를 찌르는 꽃향기였다. 보드는 그 향기를 따라 언덕을 올라 이집트 오솔길로 갔다. 그곳에는 겨울담쟁이가 푸르게 넝쿨지어 매달려 있었는데, 담쟁이덩굴은 사시사철 늘 푸르게 이집트 풍의 벽과 조각상과 상형 문자를 가리고 있었다.
-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이에요."
"그렇지만 전통이 그런 걸 어쩌겠습니까?"
뚱뚱한 남자가 말했다.
"정말 웃기는 짓거리예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캐러웨이 시장은 계속해서 하얀 꽃을 가위로 잘라 바구니에 넣었다.
- "이런 일은 늘 있어 왔어. 살아 있는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언제나 기억해..."
리자가 말을 갑자기 멈추더니 흥분해서 소리쳤다.
"저길 봐!"
그때까지 보드는 단 한 번도 말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림책에서만 봤을 뿐이었다. 그런 보드의 눈앞에 백마가 보였다. 백마가 그들을 향해 따가닥 따가닥 소리를 내며 거리를 걸어왔는데, 그것은 보드가 상상하던 말과 전혀 달랐다. 그 말은 보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으며 얼굴이 길고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안장도 씌우지 않은 그 말의 등에는 어떤 여자가 타고 있었다. 그녀는 기다란 회색 드레스 차림이었는데, 12월의 달빛 아래에 길게 드리워진 그녀의 드레스는 이슬이 맺힌 거미줄처럼 어슴푸레 빛났다.
- 그 여인은 무릎을 굽히고 몸을 살짝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러자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함께 허리를 굽히거나 몸을 살짝 숙여 답례했다. 그리고 그 춤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제 회색 옷을 입은 여인이 우리를 죽음의 무도로 이끌어 주시네."
리자 헴스톡이 이렇게 노래하며 빙글빙글 돌면서 춤추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보드에게서 멀어져 갔다. 사람들은 음악에 맞춰 발을 쿵쿵 구르다가 스텝을 밟고 빙 돌면서 발을 찼고, 회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도 열심히 스텝을 밟고 빙그르르 돌고 발을 차며 그들과 함께 춤을 추었다. 백마도 고개를 까닥까닥하며 음악에 맞춰 걷고 움직이고 했다.
- 음악이 빨라지면서 사람들도 음악에 맞춰 점점 빠르게 춤을 추었다. 보드는 숨이 막힐 듯했지만 그 춤을, 죽음의 무도를, 죽은 사람들과 살아 있는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추는 춤을, 죽음의 여신과 함께 추는 춤을 멈춘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보드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 모두가, 정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가 춤을 추고 있어! 보드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바로 보드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올드 타운 시청 옆 그림자 속에 온통 검은색으로 된 옷을 입은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춤을 추고 있지 않았다. 그는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 "아저씨도 보셨잖아요! 아저씨도 우리를 지켜보셨잖아요! 죽은 사람들과 살아 있는 사람들을요! 우리는 함께 춤을 췄어요. 그런데 왜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 얘기를 하지 않으려는 거예요?"
"세상에는 수수께끼 같은 일들이 있기 때문이지. 결코 말해선 안 되는 일들이 있기 때문이야. 또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일들도 있기 때문이란다."
- "나는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모르겠구나."
"사일러스 아저씨, 저는 그 여인과 춤을 췄다고요!"
보드가 소리치자 그의 후견인은 거의 비통해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보드는 자기 자신이 잠자는 표범을 깨운 아이처럼 겁을 집어먹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사일러스는 이렇게만 말했다.
"그 얘기는 이제 그만하자꾸나."
보드는 자신이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해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말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하고 싶었던 수백 가지 말 중에 하나를 보드가 말해 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뭔가가 주의를 흐트러뜨렸다. 부드럽고 조용하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차가운 깃털 같은 뭔가가 얼굴을 스치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춤에 관한 모든 생각이 잊히고 보드의 두려움은 기쁨과 경외감으로 바뀌었다.
보드가 그것을 본 것은 태어나서 이번이 세 번째였다.
"아저씨, 저것 좀 보세요. 눈이 오고 있어요!"
보드는 가슴도 머리도 기쁨으로 가득 차서 소리쳤다. 이제 그의 머리는 다른 것을 생각할 틈이 없었다.
- 호텔 로비에 있는 자그마한 안내판에는 그날 밤 워싱턴 룸이 사적 모임을 위해 예약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모임인지에 대한 정보는 적혀 있지 않았다. 솔직히 여러분이 그날 워싱턴 룸에 모인 사람들을 본다고 하더라도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지 못할 것이다. 흘깃 쳐다보면 그곳에 여자가 없다는 사실 쯤은 바로 알 수 있을 테지만 말이다. 그 모임의 참석자들이 모두 남자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들은 둥근 테이블 앞에 앉아서 후식을 먹고 있었다.
- 그곳에 온 사람들은 백 명 정도 되었는데, 모두 수수한 검은색 양복 차림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지닌 공통점은 검은색 양복을 입었다는 사실 그 하나였다. 그들은 하얀 머리카락, 검은 머리카락, 노란 머리, 빨간 머리 그리고 대머리에 이르기까지 머리카락 색깔도 다 달랐다. 친절해 보이는 얼굴, 불친절해 보이는 얼굴, 남을 잘 도울 것 같은 얼굴, 뚱한 얼굴, 숨기는 게 없어 보이는 얼굴, 비밀이 많아 보이는 얼굴, 난폭해 보이는 얼굴, 예민해 보이는 얼굴 등 표정도 제각각 달랐다. 그들 대다수가 피부가 하얗지만 피부가 검은 사람도 있고 갈색인 사람도 있었다. 출신 지역도 유럽, 아프리카, 인도, 중국, 남미, 필리핀, 미국으로 다 달랐다. 그들 모두 서로 얘기를 나눌 때나 웨이터에게 말할 때는 영어를 사용했지만 억양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 숫자만큼이나 다양했다. 그들은 유럽과 세계 전역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테이블 둘레에 앉아 있는 동안, 그들 가운데 마치 방금 결혼식을 마치고 온 사람처럼 예복을 차려입은, 어깨가 넓고 유쾌해 보이는 남자가 연단 위에서 그들이 베푼 선행을 발표하고 있었다. 자신들 덕분에 가난한 지역에 사는 아이들이 색다른 휴일을 보낼 수 있었으며, 자신들이 버스를 한 대 마련해 준덕분에 여행이 필요한 사람들이 여행을 갈 수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잭은 앞쪽 가운데 테이블에 앉은 은발의 말쑥한 남자 옆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은 째깍거리며 가고 있는데 우리 가운데 젊어지는 사람은 하나도 안 보이는군."
은발의 남자가 말했다.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어. 4년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있었던 그 일 때문에..."
잭이 말했다.
"그 일은 운이 없었지. 하지만 봄에 피는 꽃이 그 사건과 아무 관련 없듯, 그 일은 그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어. 잭, 자네는 실패했어. 자네는 그들 모두를 처리하기로 되어 있었지. 아기까지 포함해서 말이야. 특히 그 아기를 처리했어야지. 일을 완벽하게 처리해야지 거의 다 처리하는 건 좋지 않아."
- 하얀색 재킷을 입은 웨이터가 와서 그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커피를 따라 주었다. 연필로 그은 것처럼 얇은 콧수염을 기른 키 작은 남자, 영화배우나 모델을 해도 될 정도로 잘생긴 금발의 키 큰 남자 그리고 화난 황소처럼 창밖의 바깥세상을 노려보고 있는 머리가 크고 피부가 까만 남자. 이들은 잭과 상대방의 대화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연사의 말에 집중하면서 이따금 박수도 쳐 주고 있었다. 은발의 남자는 자기 커피에 설탕을 숟가락 가득 몇 숟갈이나 넣고 나서 힘차게 저었다.
"벌써 10년이 지났어.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지. 그 아기는 이제 곧 다 자랄 거네. 그렇게 되면 어쩔 셈이야?"
은발의 남자가 말했다.
"이봐, 댄디. 아직 시간이 있으니..."
잭이 말을 시작하려 하자 은발의 남자는 커다란 분홍빛 손가락으로 잭 쪽을 가리키며 말을 잘랐다.
"아니, 자네에겐 이미 충분한 시간을 줬네. 이제 끝을 봐야 해. 이봐, 상황 파악을 확실하게 하라고. 우리는 자네한테 더 이상 기회를 줄 수가 없네. 우리 잭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기다리는 것도 이제 넌더리가 나."
잭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뒤 잭이 말했다.
- "총무한테는 말했어."
"그러니까 뭐라던가?"
"총무는 별로 흥미를 보이지 않더군. 그는 오직 결과만을 원해. 그는 내가 시작한 일을 빨리 마무리 짓기를 원해."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라네, 친구. 그 아이는 살아 있어. 그리고 이제 시간은 더 이상 우리 편이 아니야."
은발의 남자가 말했다.
테이블 앉아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척하던 다른 사내들이 툴툴거리며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도 말했듯이 시간이 째깍거리며 가고 있네."
댄디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 "새커리, 난 도둑이 아니야. 그냥 좀 빌린 거야. 다 읽고 돌려준다고 약속할게."
보드의 소리가 들리자 새커리는 위를 올려다보았고, 보드가 오시리스의 조각상 뒤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 보드는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아직 낮인걸요."
"그가 조기 기상을 했더구나." 하고 톰이 말했는데, 보드는 ‘조기기상'이란 말의 뜻이 '일찍 일어났다'는 뜻이란 걸 알고 있었다. 톰이 계속 말했다.
"그리고 자기가 널 찾는다고 전해 달라고 했어. 혹시 우리가 너를 보게 되면 말이야."
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틀존 기념비 바로 너머의 덤불숲에 있는 개암나무에 다 익은 열매들이 많더구나."
보드가 충격받은 것처럼 보이자 톰이 마치 그의 충격을 덜어 주려는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라고 말한 보드는 사일러스 아저씨가 찾는단 소식에 다시 빗속을 뚫고 허겁지겁 달음박질로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내려가, 묘지 아래쪽 비탈로 접어든 다음 낡은 예배당까지 계속 내달렸다.
- "저 바깥에서는 네 가족을 죽인 그자가 아직도 너를 찾고 있는 것 같아. 아직도 너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서 말이야."
보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요? 고작 죽는 것일 뿐인데요, 뭘. 그러니까 제 말은, 저랑 친한 친구들도 다 죽은 거잖아요."
"그렇긴 하지."
사일러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그래, 네 친구들은 죽은 사람들이 맞아. 네 친구들 대부분은 세상과의 인연이 다했지. 하지만 넌 아냐. 넌 이렇게 생생히 살아있어, 보드. 그건 네가 무한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해. 넌 뭐든 할 수 있고, 뭐든 이룰 수 있고, 뭐든 꿈꿀 수 있어. 넌 맘만 먹으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어. 그런 게 바로 잠재력이지. 그런데 네가 죽으면 그 잠재력은 없어져. 끝나는 거야. 네가 이룬 것도 네가 꿈꾼 것도 거기서 끝나고, 이제 묘비에 네 이름이 새겨지는 거지. 넌 이곳에 묻힐 수도 있고 심지어 이곳에서 걸어 다닐 수도 있어. 하지만 그걸로 잠재력은 끝이야."
보드는 그 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거의 맞는 말인 것 같았다. 물론 부모님이 자기를 입양한 것 같은 예외가 있긴 했지만 말이다. 비록 자신이 죽은 사람들과 공감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보드는 죽은 사람과 살아 있는 사람이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 "아저씨는 어떤 종류예요?"
"어떤 종류라니?"
"음, 아저씨는 살아 있지 않잖아요. 그런데도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이런저런 일들을 하잖아요."
"정확히 지금 이 모습이 바로 나야. 더 이상은 아무것도 없어. 네 말대로 나는 살아 있지 않아. 하지만 만약 내게 마지막 순간이 찾아온다면, 나는 그냥 존재하지 않게 돼. 나와 같은 종류의 사람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해. 내 말뜻을 네가 알아들었는지 모르겠구나.”
"잘 모르겠어요."
사일러스는 한숨을 쉬었다. 어느새 비가 멈추고 구름이 걷혀 맑은 하늘에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다.
"보드, 우리가 너를 안전하게 지키는 게 중요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단다."
- "그렇다면 저는 학교에 다니고 싶어요."
보드가 논란의 소지가 다분해 꺼내기 힘든 이야기를 꺼냈다.
사일러스는 쉽게 동요하지 않았다. 세상의 종말이 온다 해도 그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가 지금 입을 벌리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한 말은 이게 다였다.
"뭐라고?"
- "저는 이 묘지에서 많은 것을 배웠어요. 눈앞에서 안 보이게 사라질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도 있어요. 구울들의 문도 열 수 있고 별자리도 알아요. 하지만 저기 밖에는 다른 세상이 있어요. 그 세상에는 바다도 있고 섬도 있고 난파선도 있고 돼지도 있죠. 그러니까 제 말은, 바깥세상은 제가 모르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는 거예요. 여기 선생님들이 제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지만 저는 더 많이 배워야 해요. 언젠가 제가 저 바깥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말이죠."
사일러스에게는 보드의 말이 별로 인상적이지 않은 듯했다.
"그건 절대로 안 될 말이야. 우린 여기에서는 너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어. 하지만 저 바깥세상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너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겠어? 바깥세상에선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어."
"맞아요. 그런데 그런 게 바로 아저씨가 말씀하신 잠재력이잖아요."
- "그렇다면 아저씨는 질문을 잘못하셨어요."
"어째서?"
사일러스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음, 제가 바깥세상으로 나간다면 누가 저를 그로부터 안전하게 지켜 주겠느냐고 물으시면 안 돼요."
"그래?"
"네, 그래요. 누가 그를 저로부터 안전하게 지켜 주겠느냐고 물으셔야죠."
잔가지가 마치 안으로 들여 달라는 듯 높은 유리창을 긁는 소리를 냈다. 사일러스가 칼날처럼 뾰족한 손톱으로 소매에 묻은 가상의 먼지 한 점을 털어 내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네가 다닐 학교를 알아봐야겠구나."
- 처음에는 어느 누구도 그 아이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 아이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아이는 교실에서 중간 뒤쪽에 앉았다. 말도 별로 하지 않았는데, 직접 질문을 받지 않는 한 먼저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질문에 답할 때도 짧고 쉽게 잊히고 재미없는 대답만 했다. 아이는 사람들의 마음과 기억 속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 "그런데 그 애가 왜요?"
"그 앤 모든 걸 다 손으로 쓰는데, 글씨체가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꼭 동판에 새긴 초서체 같다니까요."
커비 선생이 말했다.
"그런데 그게 신앙심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죠?"
"아이 말로는 자기 집에 컴퓨터가 없대요."
"그래서요?"
"전화도 없대요."
"저는 그게 신앙심 깊은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전혀 모르겠네요."
- "똑똑한 아이예요. 모르는 게 없어요. 그리고 역사 시간에는 책에도 나오지 않는 사소한 이야기를 지어내 툭툭 던지곤 하는데..."
"어떤 이야기인데요?"
커비 선생은 보드의 과제물을 채점하고 나서 과제물 더미 위로 치웠다. 그런데 바로 자기 눈앞에서 보드의 이름이 사라지자 말하고 있던 것 전체가 어렴풋해지고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여겨졌다.
커비 선생은 "뭐 그냥 시시한 것들요." 하고 대답하고 나서는 그것에 대해 잊어버렸다. 그가 출석부에 보드의 이름을 올리는 걸 잊어버린 것도, 보드의 이름을 학교 전산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된 것도 다 이런 식이었다.
- 그 아이는 잊히기 쉽고, 또 실제로도 쉽게 잊히는 모범생이었다. 그 아이는 틈이 날 때마다 대부분의 시간을 낡은 문고판 책꽂이가 있는 영어 교실의 뒤쪽과 학교 도서관에서 보냈다. 도서관의 책과 낡은 안락의자로 가득한 커다란 열람실에서 그는 몇몇 아이들이 먹는 데 열을 올리는 만큼이나 열광적으로 이야기책을 읽는 데 열을 올렸다.
다른 아이들도 그에 대해 잊었다. 그가 아이들 앞에 앉아 있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그때는 그를 기억했다. 하지만 그 오언스라는 아이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아이들은 곧바로 그 아이를 잊었다. 아이들은 그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만약 누군가가 8학년 B반의 모든 아이들에게 눈을 감고서 그 반의 스물다섯 명의 남학생과 여학생 명단을 작성해 보라고 한다면 오언스라는 아이는 아마 그 명단에 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의 존재는 거의 유령과도 같았다.
물론 그가 사람들 눈에 보일 때는 달랐다.
- "그런데 겁을 줬는데도 효과가 없으면 어떻게 할 작정이었니?"
"사실 그건 미처 생각을 못..."
보드가 말을 하는데 아마벨라가 끼어들었다.
"내 생각에 그럴 땐 그 애들의 꿈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안일 거야. 넌 꿈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물론 할 수 있겠지?"
- "그럼 아저씨는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셨어요?"
"이건 아니야. 지금은 옛날과 달라. 그자들이 너를 계속 추적하고 있을 수도 있어, 보드. 그자들이 너를 찾아낼 수 있단 말이야."
전혀 미동도 없는 사일러스 아저씨의 모습은 마치 부글부글 끓는 용암을 품고 있는 단단한 바위 표면 같았다. 보드는 사일러스 아저씨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저씨가 지금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었다. 사일러스 아저씨는 안간힘을 다해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 "안 그러면 어쩌실 건데요? 저를 여기에 가둬 두기 위해 뭘 하실 건데요? 저를 죽이기라도 하시게요?"
그런 뒤 보드는 홱 돌아서서 묘지 정문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걸어 내려가 묘지 밖으로 나갔다.
사일러스가 아이에게 돌아오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멈추고는 홀로 어둠 속에 가만히 서 있었다.
상황이 참 좋을 때조차 사일러스의 얼굴은 읽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얼굴은 오래전 잊힌 언어, 상상조차 되지 않는 문자로 쓰인 책 같았다. 사일러스는 어둠을 담요처럼 두르고 아이가 가버린 길을 눈길로 뒤쫓을 뿐, 아이를 따라가려고 움직이지는 않았다.
- 그런데 바로 뒤, 꿈속에서는 대개 그러하듯이, 그는 그 새로운 배의 검정 갑판 위에 서 있었고 누군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는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군."
닉을 내려다보듯 서 있는 그 사람이 말했다.
닉은 위를 올려다봤다. 꿈속에서 그는 정말 두려웠다. 해적 복장에 죽은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서 단검 손잡이에 손을 얹고 있는 그 사람은 정말 말도 못 하게 두려웠다.
- "넌 그 애로군, 밥 오언스."
닉이 말했다. 그러자 닉을 포획한 그 사람이 말했다.
"나는 노바디야. 그리고 넌 바뀌어야 해. 새 사람이 되어야 해. 행실을 고쳐야 해. 아무튼 싹 바뀌어야 한다고. 안 그러면 상황이 너한테 아주 안 좋게 돌아갈 거야."
"어떻게 안 좋게 되는데?"
"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될걸."
이렇게 대답한 해적왕은 이제 그냥 닉과 같은 반 아이일 뿐이었고, 어느새 그 둘은 해적선의 갑판이 아니라 학교 강당에 있었다. 하지만 폭풍우는 여전히 가라앉지 않은 채였고, 강당 바닥은 항해 중인 배처럼 상하좌우로 마구 요동쳤다.
"이건 꿈이야."
닉이 말했다.
"물론 꿈이지. 내가 무슨 괴물이 아닌 이상 현실에서는 이렇게 못 하지."
- "그래, 이제 달아나는 거야?"
여자애의 목소리가 물었다.
보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바로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차이야."
그 목소리가 말했다. 보드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리자 헴스톡이란 걸 알았지만 그 어린 마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 목소리가 계속 말했다.
"죽은 사람들은 너를 실망시키지 않아. 죽은 사람들에겐 그들만의 삶이 있고 늘 변함없이 해 왔던 행동을 하지. 우리는 변하지 않아. 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들, 그들은 늘 실망을 안겨 줘, 안 그래? 아주 용감하고 훌륭한 아이도 다 키워 놓으면 달아나 버리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소리 말아요!"
보드가 소리쳤다.
"내가 알던 노바디 오언스는 자기를 돌봐 준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묘지에서 달아날 아이가 아냐. 네가 이렇게 가 버리면 오언스 부인이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보드는 거기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다.
- "사일러스 아저씨와 다퉜어요."
"그래서?"
"아저씨는 내가 묘지로 돌아오길 원하세요. 학교를 그만두고 말이죠. 학교는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하세요."
"왜? 너의 재주와 내 마법을 합치면 애들이 네가 있는지 거의 알아차리지 못하게 할 수 있을 텐데."
"내가 애들 일에 끼어들어 버렸어요. 다른 애들을 괴롭히는 애들이 있는데, 그 애들이 그런 짓을 못하게 막고 싶었어요. 그러다가 결국 난 학교에서 주목받는 아이가 되어 버렸고..."
이제 보드는 리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흐릿한 형체가 보드와 보조를 맞춰 골목길을 걸어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자가 여기 바깥세상 어딘가에 있어. 그자는 너를 죽이고 싶어 해. 네 가족을 죽인 그자가 말이야. 묘지에 있는 우리는 네가 살아있기를 원해. 네가 우리에게 뜻밖의 기쁨을 안겨 주고, 실망도 주고, 감동도 주고, 깜짝 놀라게도 해 주기를 원해. 보드, 집으로 돌아가."
"하지만... 난 사일러스 아저씨한테 이러니 저러니 온갖 소리를 다 했는걸요. 아저씨가 많이 화나셨을 거예요."
"아저씨가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너 때문에 그렇게 속상해하지 않겠지."
리자는 그렇게만 말했다.
보드의 발밑에 깔린 가을 낙엽이 미끄러웠다. 그리고 안개가 자욱하게 낀 세상은 테두리가 흐릿했다. 몇 분 전만 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이제 윤곽이 뚜렷한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 큰 뭔가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성인 남자 크기의 그 뭔가는 마치 박쥐가 섬광처럼 번쩍하고 비행하듯이 깜박거리고 펄럭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 "오늘 밤 너무 붐비지 않는다면 술고래들이 있는 방에다 넣어 줘야겠군. 그 아저씨들은 아주 고약할지도 몰라."
'이 남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이 두 사람은 일부러 이러는 거야. 한 명은 친절하게 대하고, 다른 한 명은 거칠게 다루면서...'하고 보드는 생각했다. 브레이크를 급하게 끽 밟는 소리가 나더니 차가 멈췄고 연한 적갈색 콧수염을 기른 경찰관이 작은 소리로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그자가 갑자기 도로로 뛰어들었어! 자네도 봤지?"
그 경찰관이 말했다.
"난 제대로 못 봤어. 하지만 자네가 뭔가를 친 것 같아."
몸집이 큰 경찰관이 대꾸했다.
- "아빠? 아저씨들이 우리 아빠를 죽였어요."
보드가 경찰관들을 향해 말했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야. 참말도 아니긴 하지만.' 하고 보드는 속으로 생각했다.
- "이건 사고였어."
다른 경찰관이 말했다.
보드는 사일러스 옆에 쪼그리고 앉아 그의 싸늘한 손을 꼭 쥐었다. 경찰이 이미 구급차를 불렀다면 시간이 별로 없었다.
"이제 아저씨들 경찰 생활은 끝났어요."
보드가 말했다.
"그냥 사고였다니까. 너도 봤잖아!"
"이 사람이 툭 튀어나와서..."
경찰들이 변명을 하려 들자 보드가 말허리를 잘랐다.
"제가 본 건 조카딸의 부탁을 들어주려고 학교에서 조카딸과 싸운 아이를 겁준 경찰들이에요. 조카딸 부탁 때문에 아저씨들은 밤늦게 다닌다는 이유로 영장도 없이 저를 체포했고 그러자 우리 아빠가 도로로 달려들어 아저씨들 차를 세워서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알아보려고 했더니, 아저씨들이 의도적으로 우리 아빠를 치었어요."
- "학교에서 모랑 싸웠나 보구나?"
모의 삼촌 탬이 몰랐던 것처럼 말했지만 진짜 그런 것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우린 둘 다 올드 타운 학교 8학년 B반이에요. 그리고 아저씨는 우리 아빠를 죽였어요."
보드가 말했다.
멀리서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사이먼, 나랑 얘기 좀 하지."
몸집이 큰 경찰관이 말했다.
쓰러진 사일러스와 보드를 어둠 속에 내버려 두고, 두 사람은 차의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곧이어 두 사람이 열을 올리며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모두 자네의 그 빌어먹을 조카딸 때문이야!", "자네가 전방을 주시했더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어!" 같은 말들이 오가며, 사이먼이 탭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대고 있었다.
보드는 혼자 속삭였다.
"저 사람들이 보고 있지 않아. 바로 지금이야."
보드는 눈에 보이지 않게 사라졌다. 그러자 한결 짙은 어둠이 소용돌이치더니 땅바닥에 쓰러져 있던 사일러스가 이제 보드 옆에 서있었다.
- "집으로 데려갈 테니 팔을 내 목에 둘러."
사일러스가 말했다.
보드는 후견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단단히 잡았다. 그들은 어둠 속으로 뛰어들어 묘지로 향했다.
"죄송해요."
보드가 말했다.
"나도 미안하구나."
사일러스가 말했다.
"안 아팠어요? 차에 그렇게 치였는데요?"
"아팠지. 너는 네 어린 마녀 친구한테 고마워해야 해. 그녀가 나를 찾아와서 네가 지금 곤경에 처했으며 어떤 곤경에 처했는지 자세히 알려 줬단다."
그들은 묘지에 내려앉았다. 보드는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자신의 집인 묘지를 바라보았다.
"오늘 밤 일어난 일은 정말 바보 같았죠? 그러니까, 저 때문에 일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었어요."
보드가 말했다.
"네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이 있었지, 노바디 오언스 군. 그래, 맞아."
"아저씨가 옳았어요. 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학교로도, 그와 비슷한 어떤 곳으로도 말이에요."
- "어떤 점에서는 네가 이겼어. 난 이제 학교를 떠날 거니까 말이야. 또 어떤 점에서는 네가 졌어. 모린 퀼링, 너 혹시 유령에게 시달려 본 적 없어? 거울을 들여다볼 때 거울 속에서 너를 바라보는 두 눈이 과연 자신의 눈이 맞을까 하고 의심해 본 적 없니? 아무도 없는 빈 방에 혼자 앉아 있는데,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아 본 적 없어? 그건 유쾌한 일이 아니지."
"네가 유령처럼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히겠단 말이야?"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보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모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실험실의 저쪽 구석에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의자에 놓아두었던 모의 가방이 바닥에 떨어진 소리였다. 그리고 모가 소리 나는 쪽을 본 뒤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그녀는 실험실에 혼자 있었다. 아니, 적어도 모의 눈에 더 이상 자기와 함께 그곳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모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그녀에게 아주 멀고 어둡게 느껴질 것이다.
- "아직도 아파요?”
아이가 물었다.
"조금. 하지만 난 회복이 빠른 편이야. 금방 예전처럼 좋아질 거야."
아이의 후견인이 대답했다.
"아저씨가 그런 걸로 죽을 수도 있어요? 달리는 차에 뛰어드는 그런 걸로요?"
사일러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와 같은 존재들도 죽는 경우가 몇 가지 있지. 하지만 차에 치여서는 죽지 않아. 나는 나이가 아주 많은 만큼 아주 강하단다."
"제 생각이 틀렸던 거죠? 원래는 아무도 눈치 못 채게 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그러다가 학교에서 애들 일에 말려들고 말았어요. 그다음에 일어난 일이야 아저씨도 잘 아시죠, 경찰도 오고 온갖 일이 일어났죠. 이게 다 제가 이기적으로 굴었던 탓이에요."
사일러스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넌 이기적이지 않았어. 넌 너와 같은 살아 있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 보는 경험이 필요했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다만 저기 바깥의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상은 여기보다 더 위험하고, 또 바깥세상에서는 우리가 너를 이곳에서처럼 쉽게 보호할 수가 없어. 난 너를 전적으로 안전하게 지키고 싶었던 거야. 비록 너와 같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도 전적으로 안전한 장소가 딱 하나 있기는 하지만 너의 모든 모험이 모두 끝나고 그 어떤 모험도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 때까지 그곳에 이를 수는 없을 거야."
- "그 사람은 아직 저 바깥세상에 있어요. 나의 첫 번째 가족을 죽인 사람 말이에요. 저는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람들에 대해 배워야 해요. 제가 묘지를 떠나겠다고 하면 막으실 거예요?"
보드가 물었다.
"아니, 그건 실수였고, 우리 둘 다 그 실수로부터 교훈을 얻었지."
"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이야기와 책 그리고 세상에 대한 너의 관심을 충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지. 물론 도서관을 가는 것도 좋고, 할 수 있는 건 많아. 살아 있는 사람들 틈에서 연극이나 영화를 보는 것도 많은 방법 중에 하나겠지."
"그게 뭐죠? 축구 같은 건가요? 학교에서 아이들이 축구하는 걸 봤는데 재미있었어요."
"축구라, 흠. 축구는 대개 낮에 하니까 내가 데려가기에는 좀 일러. 하지만 다음에 루페스쿠 선생님이 오시면 너를 축구 경기에 데려가 주실 거야."
"좋아요."
보드가 말했다.
그들은 언덕을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난 몇 주 동안 우리 두 사람은 너무 많은 자취와 흔적을 남겼어. 그자들이 아직도 너를 찾아다니는데 말이야."
"그 얘기는 아까도 하셨잖아요. 아저씨는 그걸 어떻게 아세요? 그자들은 대체 누구예요? 원하는 게 뭘까요?"
하지만 사일러스는 고개만 가로저을 뿐 더 이상은 이야기하려 들지 않았다. 보드는 당분간 그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 "어떻게 생겼던가요?"
"그때 난 거의 너만 바라보고 있었는걸. 가만있자... 머리카락은 어두운 색, 그래, 아주 검은색이었어. 그 사람을 보자 얼마나 섬뜩했는지 몰라. 선이 날카로운 얼굴이었고, 굶주린 동시에 화가 나 보였어. 사일러스가 그 사람을 조용히 돌려보냈지."
"사일러스 아저씨는 왜 그 사람을 그냥 죽여 버리지 않으셨어요? 그때 그 사람을 죽이셨어야죠."
보드가 사납게 말했다. 그러자 오언스 부인이 차가운 손가락으로 보드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보드, 그는 괴물이 아니란다."
"아저씨가 그때 그 사람을 죽여 버리셨다면 제가 지금 안전할 거잖아요. 어디든지 갈 수 있고요."
"사일러스는 네가 아니 우리 가운데 어느 누가 아는 것보다 이 모든 일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어.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지.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란다."
"그 사람 이름이 뭐였죠? 우리 가족을 죽인 사람 말이에요."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았단다. 그때는 말이야."
보드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 채 먹구름만큼이나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사람의 이름을 아시는군요?"
"보드,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아니에요. 저는 배울 수 있어요. 제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뭐든 다 배울 수 있어요. 배울 수 있는 건 뭐든 다 배울 거라고요. 저는 구울들의 문에 대해서도 배웠어요. 그리고 꿈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배웠고요. 루페스쿠 선생님한테서 별자리 보는 법도 배웠어요. 사일러스 아저씨는 제게 망각을 가르쳐 주셨어요. 저는 유령처럼 나타날 수도 있어요. 안 보이게 사라질 수 있고요. 그리고 이 묘지의 구석구석을 다 알아요."
오언스 부인은 손을 뻗어 아들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언젠가..."
그녀는 말을 하려다가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언젠가 이 아이를 만질 수 없겠지', '언젠가 이 아이는 자신들을 떠나겠지', '언젠가...' 하고 속으로 생각하다가 계속 말했다.
"사일러스가 네 가족을 죽인 사람의 이름이 잭이라고 내게 말해주더구나."
보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뒤 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아저씨는 언제 돌아오실까요?"
차가운 한밤의 바람이 북쪽에서 불어왔다.
오언스 부인은 더 이상 화가 나 있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아들이 걱정되었다. 그녀는 이렇게만 말했다.
"그걸 알면 얼마나 좋을까, 내 사랑스러운 아가. 나도 그게 궁금하단다."
- 그 순간, 이제 열다섯 살이 된 스칼릿 앰버 퍼킨스는 구식 이층 버스 위층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은 격렬한 증오로 가득했다. 스칼릿은 이혼한 부모님을 증오했다. 스코틀랜드를 떠나 온 엄마도, 자기가 가 버려도 상관하지 않는 듯한 아빠도 미웠다.
- 기시감이란 분명 처음인데 예전에 와 본 느낌이 들거나 왠지 이미 꿈에서 봤거나 마음속으로 경험한 것 같은 느낌을 뜻한다. 스칼릿은 기시감을 느껴 본 적이 있었다. 어떤 선생님이 휴일에 인버넨스에 다녀왔다고 아이들에게 막 이야기하려는 순간, 스칼릿은 선생님이 그 말을 할 것 같다고 느꼈다. 또 누군가 숟가락을 떨어뜨렸는데 전에도 똑같이 그런 식으로 숟가락을 떨어뜨린 것을 본 적이 있다고 느낀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달랐다. 이건 예전에 와 본 것 같다는 단순한 느낌이 아니었다. 이건 진짜로 와 본 적이 있다는 확신이었다.
- 스칼릿은 열린 정문을 통과해 묘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서자 까치 한 마리가 높이 날아올랐다. 검정색과 하얀색 그리고 무지갯빛 초록색 깃털을 지닌 그 까치는 주목나무 가지에 앉아 그녀를 지켜보았다.
- "저녁을 직접 차려 드시나 봐요?"
스칼릿의 엄마가 물었다.
"예, 제가 차려 먹습니다. 음, 사실은 냉동식품을 녹여서 먹어요. 또 끓는 물에 넣기만 하면 되는 즉석식품도 즐겨 먹고요. 저 혼자 먹으니까요. 혼자 살거든요. 약간 무뚝뚝한 노총각이지요. 사실, 신문에서는 이렇게 사는 사람을 늘 동성애자라고 몰아가더군요. 하지만 전 동성애자가 아니고, 아직 제 짝이 될 여자를 못 만났을 뿐이에요."
그러면서 그는 잠시 슬픈 표정을 지었다.
요리하는 걸 싫어하는 스칼릿의 엄마는 자기가 주말이면 항상 음식을 너무 많이 만든다고 말했다. 스칼릿의 엄마가 프로스트 씨를 현관까지 배웅하러 갔을 때, 프로스트 씨가 기꺼이 토요일 밤에 저녁 식사를 하러 들르겠다고 대답하는 소리가 스칼릿의 귀에 들렸다.
스칼릿의 엄마가 현관에서 돌아와 스칼릿에게 한 말은 "어서 가서 숙제해"가 다였다.
- 그날 밤 스칼릿은 침대에 누워 큰길에서 덜커덩거리며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를 들으며 그날 오후에 있었던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자신은 어릴 적에 그 묘지에 가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모든 것이 그토록 친숙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상상하고 기억을 더듬어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하지만 꿈속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묘지의 오솔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밤이었지만 대낮처럼 모든 것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언덕 비탈에 있었다. 그곳에서 그녀 또래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그녀에게 등을 돌린 채 도시의 불빛들을 내려다보며 ...
- 본래는 네 사람이었지만 하론은 위쪽 동굴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와 같은 이프리트들이 모두 그러하듯 본디 지나치게 자신만만했던 하론은 번쩍번쩍 윤이 나는 청동 거울 세 개로 둘러싸인 공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청동 거울의 빛이 번쩍하더니 잡아먹히고 말았다. 잠시 후 그 이프리트는 거울 속에서만 그 모습을 볼 수 있었을 뿐 더 이상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 거울 속에서 하론은 이글이글 불타는 눈을 부릅뜨고서 뭔가를 말하듯 입을 움직이고 있었는데 마치 그들에게 당장 떠나라고, 조심하라고 외치고 있는 듯했다. 그런 뒤 바로 하론은 점점 희미해지더니 거울 속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거울 따위 앞에서는 전혀 거리낌이 없는 사일러스가 거울 가운데 하나를 자신의 외투로 감싸 그 거울 덫을 쓸모없게 만들어 버렸다.
"그럼 이제 우리 셋밖에 안 남았군."
사일러스가 말했다.
- "돼지는 왜 데려왔어?"
늑대의 이빨 사이로 혀를 보이며 루페스쿠가 물었다.
"행운의 상징이니까.”
칸다르가 말했다.
루페스쿠는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듯 으르렁거렸다.
"하론이 돼지를 가지고 있었던가?"
칸다르가 간단히 반문했다.
- 크라쿠프의 언덕 아래 깊이, '용의 굴'이라 불리는 동굴 아래 가장 깊은 곳에서, 루페스쿠가 비틀거리다가 쓰러졌다.
사일러스가 그녀 옆에 쪼그리고 앉아 그녀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그녀의 얼굴은 피투성이였는데, 그 피 가운데 일부는 그녀 자신의 피였다.
"저는 내버려 두고 그냥 가세요. 그 아이를 구해야 해요."
이제 그녀는 반쯤 뒤섞인 모습이었다. 회색 늑대와 여자가 반쯤 뒤섞인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만큼은 여자의 얼굴이었다.
"안 돼. 당신을 두고 갈 수는 없소."
사일러스가 말했다.
사일러스의 뒤에서 미라인 칸다르는 아이가 인형을 안듯 새끼 돼지를 소중히 품에 안고 있었다. 그 미라의 왼쪽 날개는 갈기갈기 찢겨 있었는데, 이제 그는 두 번 다시 하늘을 날 수 없었다. 하지만 수염이 덥수룩한 그의 얼굴은 변함없이 적개심에 불타고 있었다.
"사일러스, 놈들이 다시 올 거예요. 이제 얼마 안 있으면 해가 떠올라요."
루페스쿠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렇다면 놈들이 공격 태세를 갖추기 전에 처치해 버려야지. 일어설 수 있겠소?"
사일러스가 물었다.
"그럼요. 나는 하느님의 사냥개인걸요. 일어설 수 있어요."
루페스쿠는 그렇게 말한 뒤 얼굴을 낮춰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손가락을 풀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머리는 늑대의 머리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앞발을 바위에 올려놓고 힘들게 몸을 일으켜 서 있는 자세를 취했다. 그녀는 털과 주둥이에 유혈이 낭자한 채로 곰보다 큰 회색 늑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 루페스쿠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분노와 도전의 울부짖음을 길게 토해 냈다. 그녀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자, 이제 끝을 봐야죠."
- 일요일 오후 늦게 전화벨이 울렸다. 스칼릿은 아래층에 앉아서 자신이 보고 있던 만화책에 나오는 얼굴들을 종이쪽지에 열심히 따라 그리고 있었다. 스칼릿의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어머, 신기하기도 해라. 우린 지금 당신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비록 스칼릿이랑 그런 적은 없었지만 스칼릿의 엄마는 그렇게 거짓말을 하고 계속 이야기를 이어 갔다.
"어제저녁은 좋았어요. 정말 즐거웠는걸요. 솔직히 전혀 수고롭지 않았어요. 초콜릿이요? 완벽했어요. 진짜 완벽 그 자체였어요. 당신께 전하라고 스칼릿에게 말해 놨는데, 저녁을 드시고 싶을 땐 미리 말씀만 해 주시고 언제라도 오세요. 스칼릿이요? 예, 여기 있어요. 바꿔 드릴게요. 스칼릿! 전화받아라!"
- "그렇게 전할게요."
스칼릿은 전화기를 내려놓았는데, 작은 북을 마구 두드리는 것처럼 가슴이 두 방망이질을 쳤다.
- 보드는 계단을 다 내려간 다음 슬리어가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렸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고, 아무것도 속삭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보드는 죽은 사람처럼 볼 수 있었기에 짙은 어둠에도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고 그 방을 둘러보았다. 그는 바닥의 제단으로 다가갔다. 거기에는 잔과 브로치, 돌칼이 놓여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칼날을 만져 보았다. 생각보다 날카로워 칼날에 손가락을 베였다.
"그건 슬리어의 보물이다."
세 개로 이뤄진 목소리가 속삭였지만 보드가 기억하는 것보다 소리는 더 작았으며 더 망설이는 듯했다.
"당신은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예요. 당신과 얘기하려고 찾아왔어요. 조언을 구하고 싶어서요."
보드가 말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떤 존재도 조언을 구하러 슬리어를 찾아오지는 않는다. 슬리어는 이곳을 지킬 뿐이다. 슬리어는 기다릴 뿐이다."
"저도 알아요. 하지만 사일러스 아저씨가 여기에 안 계세요. 그래서 저는 누구와 얘기를 나눠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돌아오는 대답은 먼지와 외로움을 퍼뜨리는 침묵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보드는 솔직하게 말했다.
- 슬리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덩굴손 모양의 연기가 방 안 여기저기를 서서히 휘감았다.
"죽는 게 두려워서 못 떠나는 게 아니에요. 그냥 제가 좋아하는 수많은 사람들 때문에, 저를 안전하게 지켜 주고, 가르쳐 주고, 보호해 주느라 정말 많은 시간을 제게 쏟은 그 사람들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이 일은 저 혼자해야 해요."
보드가 말했다.
"그렇게 하도록 하라."
"그게 다예요. 귀찮게 해서 죄송해요."
- 바로 그때, 보드의 머릿속에 매끄럽고 간사하고 미끄러지는 듯한 슬리어의 속삭임이 들렸다.
"슬리어는 우리의 주인님이 돌아올 때까지 보물을 지켜야 한다. 혹시 네가 우리의 주인님인가?"
"아니에요."
그러자 기대에 부푼 애처로운 목소리로 슬리어가 다시 속삭였다.
"네가 우리의 주인님이 되어 주면 안 되겠는가?"
"죄송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요."
"우리의 주인님이 되어 준다면 우리가 영원히 똬리로 너를 꼭 감싸 주겠다. 우리의 주인님이 되어 준다면, 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너를 안전하게 지켜 주고 보호해 주고 세상의 위험을 절대 겪지 않게 해 주겠다."
"저는 당신들의 주인이 아니에요."
"그래, 아니다."
보드는 슬리어가 자신의 마음속을 꿈틀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을 느꼈다.
"그럼 네 이름을 찾아라."
그 말과 함께 보드의 마음도, 그 방도 텅 비어 보드는 이제 그 방에 혼자 남게 되었다.
- 보드는 조심스럽게 하지만 빠르게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이제 그는 결정을 내렸고, 그 결정이 여전히 머릿속에서 불타오르고 있을 때 재빨리 행동에 옮겨야 했다.
- 스칼릿은 예배당 옆 벤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할 거야?"
그녀가 물었다.
"그렇게 할 거야. 가자."
-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자, 그럼 가자."
프로스트 씨가 말했다.
보드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스칼릿에게 걱정스런 눈길을 던졌다.
"괜찮아. 난 여기서 기다릴게."
스칼릿은 이렇게 말하며 보드가 안심할 수 있도록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스칼릿은 두 사람이 그 방을 나가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을 그들의 그림자를 통해 지켜보았다. 그녀는 불안했지만 한편으로는 기대되기도 했다. 보드가 어떤 정보를 얻을지 궁금했고, 동시에 보드가 먼저 그 정보를 확인하게 되어 기뻤다. 결국 그건 보드의 이야기이니 보드에게 권리가 있었다.
- "거의 13년이 지났어. 13년이면 머리카락도 빠지고 희끗희끗하게 셌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래, 맞아. 그의 이름은 잭이야."
프로스트 씨는 일어나 똑바로 섰다. 바닥의 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그의 손에는 크고 날카로운 칼이 들려 있었다.
"자, 어린 친구. 이제 마무리할 시간이야."
잭이라는 사내가 말했다.
보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자를 빤히 쳐다봤다. 마치 프로스트 씨라는 존재는 그자가 걸치고 있던 외투나 모자였는데, 이제 그 존재를 벗어던져 버린 것만 같았다. 상냥하던 그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의 안경과 칼날이 반짝 빛났다.
- "프로스트 아저씨? 누가 현관문을 두드려요. 제가 나가 볼까요?"
잭이 한순간 휙 눈길을 돌렸다. 보드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자신이 가진 전부를 걸어야 한다는 걸 알고서 잭의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잭은 보드가 서 있던 자리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가 깜짝 놀라며 두리번거렸다. 얼굴에는 당황스러운 표정과 분노한 표정이 동시에 떠올라 있었다. 잭은 방 안쪽으로 한 걸음 더 내디디며 먹잇감의 냄새를 맡는 늙은 호랑이처럼 고개를 좌우로 돌려 댔다.
"여기 숨어 있다는 거 다 알아. 냄새가 나는걸!"
- 스칼릿은 최대한 쾌활하게 말했다. 그런 다음 밖으로 나와 현관문을 닫고, 그 사람들 옆을 빙 돌아 나와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걷기 시작했다.
"어디 가는 거니?"
콧수염을 기른 사내가 말했다.
"버스를 타야 해서요."
스칼릿이 말했다. 그녀는 버스 정류장과 묘지 쪽을 향해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면서 결단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 보드는 스칼릿 옆에서 걸어갔다. 스칼릿에게조차 그는 짙어 가는 황혼 속에서 그림자처럼 보였다. 잠깐 소년인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거의 그곳에 없는 뭔가, 아른거리는 아지랑이,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처럼 보였다.
"더 빨리 걸어. 저 사람들이 모두 너를 보고 있어. 하지만 뛰지는 마."
보드가 말했다.
"저 사람들은 누굴까?"
스칼릿이 나직이 물었다.
"나도 몰라. 하지만 저 사람들 모두 섬뜩한 느낌이 들어. 진짜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돌아가서 저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 보고 싶어."
"내 눈엔 진짜 사람들로 보이는데."
- 그 네 사람은 33번지 문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정말 맘에 안 들어."
황소처럼 목이 굵고 덩치가 큰 사내가 말했다.
"타르, 자네도 맘에 안 들지? 하긴 우리 가운데 누가 이게 맘에 들겠어? 다 엉망이야. 모든 일이 잘못돼 가고 있어."
머리가 하얀 사내가 말했다.
"크라쿠프도 끝장났어. 그들은 대답도 하지 않아. 멜버른과 밴쿠버 다음에. ... 아마 이제 우리 넷밖에 안 남았을 거야."
콧수염을 기른 사내가 말했다.
"케치, 제발 좀 조용히 해, 지금 생각 중이니까."
머리가 하얀 사내가 말했다.
"미안해."
케치는 장갑 낀 손으로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다시 언덕을 아래위로 바라보다가 휘파람을 불었다.
"내 생각에는... 아까 그 계집애를 뒤쫓아야 할 것 같아."
황소처럼 목이 굵은 타르라는 사내가 말했다.
"내 생각엔 자네들이 내 말을 좀 들어야 할 것 같은데. 내가 조용히 하라고 했지? 그럼 다들 조용히 해야 할 것 아냐."
머리가 하얀 사내가 말했다.
"미안해, 댄디."
금발의 사내가 말했다.
그들은 조용해졌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그들은 집 내부의 높은 곳에서 나오는 쿵쿵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내가 들어가 볼게. 타르, 자네는 나를 따라와, 님블과 케치는 그 계집애를 잡아서 데려와."
댄디가 말했다.
- 타르는 문에 어깨를 갖다 대고 있는 힘껏 체중을 실었다.
"보기보다 센데? 꿈쩍도 안 해."
타르가 말했다.
"잭이 해 놓은 건 다른 어떤 이도 부술 수 없지."
댄디는 그렇게 말하더니 장갑을 벗고 문에 손을 대고는 영어보다 오래된 어떤 언어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자, 이제 다시 해 봐."
댄디의 말에 타르는 문에 몸을 기대고는 끙끙거리며 힘껏 밀었다. 이번에는 자물쇠가 떨어져 나가며 문이 활짝 열렸다.
"잘했어."
- 보드는 벼락 맞은 나무로 다가갔다. 20년 전에 벼락을 맞아 새카맣게 타 버린 참나무였다. 지금은 하늘에 매달린 시커먼 가지 하나에 불과했다.
보드에게 좋은 수가 하나 있기는 했지만 아직 완벽하게 구상된 건 아니었다. 그것의 성공 여부는 루페스쿠 선생님의 수업 내용과 어릴 때 보고 들은 모든 것들을 기억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 그 무덤은 생각보다 찾기 힘들었다. 열심히 찾아다닌 끝에 그는 간신히 그 무덤을 찾아냈다. 이상한 각도로 삐뚜름하게 기울어져 있고 매우 보기 흉한 무덤이었다. 무덤의 비석 위에는 목이 떨어져 나가고 물때가 낀 천사의 조각상이 붙어 있었는데, 그 조각상은 거대한 곰팡이처럼 보였다. 조각상에 손을 대어 서늘한 기운을 느끼는 순간, 보드는 바로 그 무덤이 자신이 찾는 무덤이란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거대한 달이 하늘에 낮게 걸려 있었다. 보드는 휘파람까지 불기 시작하면 너무 지나친 행동일까 생각했다.
"저기 있다!"
- "진정해, 잭 타르, 좋아. 서로의 질문에 답하기로 하지. 우리는, 내 친구들과 나는, 비밀 결사 조직의 회원이지. 우리 조직은 '온갖 업계의 잭들 모임'이나 '만물박사', '만무방', 그 밖의 여러 다른 이름들로 알려져 있어. 우리 조직은 아주 긴 역사를 자랑하지. 우리는 알고 있...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잊어버린 것들을 기억하지. 오래된 지식을 말이야."
"마법이군요. 그러니까 마법을 어느 정도 안다는 거네요."
보드의 말에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부르고 싶다면 마법이라고 해 두지. 하지만 그것은 아주 특수한 마법이야. 죽음으로 얻는 마법이 있지. 어떤 것이 세상을 떠나면 다른 어떤 것이 세상에 들어오게 돼."
"우리 가족은 왜, 대체 왜 죽였죠? 마력을 얻기 위해서? 그건 정말 말도 안 돼요."
"아니야.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네 가족을 죽였어. 오래전, 그러니까 이건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를 건설하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얘긴데, 우리 조직의 일원이 예언을 했어. 언젠가 산자들과 죽은 자들의 경계를 넘나드는 아이가 태어날 거라고 말이야. 그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면 우리 조직과 우리가 신봉하는 모든 것이 끝장날 거라는 예언도 했지. 우리한테는 점성가들이 있었어. 런던이 마을이 되기 전부터 말이야. 점성가가 말한 아이는 바로 너였어. 그리고 우리는 뉴암스테르담이 뉴욕으로 불리기 전에 이미 너희 가족을 목표로 삼았지. 우리는 너를 살해하기 위해 모든 잭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고 날카롭고 위험한 암살자를 보냈어. 그 일만 제대로 해냈다면 나쁜 주물이란 주물은 모두 차지해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사용해서, 또 다른 5천 년 동안 모든 것을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었어. 하지만 그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거야."
보드는 세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 사람은 어디 있죠? 왜 여기 오지 않았죠?"
- 보드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방치된 무덤에서 자란 거친 잡초 속으로 두 손을 집어넣었다. 보드는 "그럼 와서 나를 잡아 봐요."라고만 말했다.
금발의 사내는 씩 웃었고 목이 두툼한 사내는 보드를 잡으려고 달려들었으며 댄디도 앞으로 몇 걸음 걸어왔다.
보드는 잡초 속으로 최대한 깊이 손을 밀어 넣고 입을 벌려 온몸이 남색인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도 이미 오래된 언어였던 옛날 말로 세 단어를 외쳤다.
"스카아! 데흐! 카바가!"
보드는 구울들의 문을 열었다.
- 보드가 잡초를 힘차게 잡아당기자 무덤이 뚜껑 문처럼 홱 열려 젖혀졌다. 보드는 그 문 아래의 깊은 구덩이 속에서 별들을, 희미한 빛들로 가득한 어둠을 볼 수 있었다.
황소처럼 목이 굵은 타르는 구덩이 앞까지 달려와서 멈추지 못하고 놀라 버둥거리다가 어둠 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님블은 두 팔을 벌리고 보드를 향해 펄쩍 뛰어올라 구덩이를 건너뛰려고 했다. 하지만 구덩이를 건너지 못하고 한순간 허공의 정점에서 멈춰 있다가 결국 구덩이 속으로, 아래로 아래로 한없이 빨려 들어갔다.
- 댄디는 구울들의 문 가장자리에 서서 입술이 돌처럼 굳은 채 발밑의 어둠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시선을 들어 보드를 쳐다보며 얇은 입술로 씩 웃었다.
"방금 네가 뭘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다만, 너는 실패했어."
댄디는 그렇게 말하더니 장갑 낀 손을 호주머니에서 꺼냈는데, 그의 손에는 권총이 들려 있었다. 그는 보드를 향해 바로 총을 겨누었다.
"13년 전에 이렇게 했어야 했어. 다른 사람을 믿어선 안 돼. 중요한 일은 자기가 직접 처리해야 하지."
열린 구울들의 문에서 모래가 뒤섞인 뜨겁고 건조한 사막 바람이 불어 올라왔다.
"저 아래에 사막이 있어요. 물을 마시고 싶으면 찾아 나서야 하죠. 열심히 찾아보면 먹을 것도 있을 거예요."
- 하마터면 구덩이의 어둠 속으로 굴러 떨어질 뻔했지만 쓰러진 비석을 간신히 붙잡아 두 팔로 비석을 꼭 끌어안았다. 그는 자기 발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몰랐다. 알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땅이 흔들리면서 비석이 그의 체중을 못 이기고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 아이가 그곳에 서서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문을 닫아야겠어요. 비석을 계속 그렇게 붙들고 있으면 문에 몸이 끼이게 돼요. 그러면 몸이 짓뭉개질지도 몰라요. 아니면 그냥 문에 흡수되어 문의 일부가 되어 버릴지도 몰라요.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당신이 제 가족에게 준 적 없는 기회를 한 번 드리죠."
땅이 다시 크게 요동쳤다. 댄디는 보드의 회색 눈을 올려다보며 욕설을 퍼붓고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결코 우리에게서 달아나지 못해. 우리는 온갖 업계의 잭들이 모인 조직이야. 우리는 어디에나 있어.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건 그쪽 생각이죠. 당신 조직의 사람들과 당신네들 모두가 끝났어요. 이집트에서 당신 조직원이 예언했듯 말이에요. 당신들은 나를 죽이지 못했어요. 당신들은 어디에나 있었죠. 하지만 이제 완전히 끝났어요."
보드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그게 바로 사일러스 아저씨가 하시는 일이죠? 당신네들을 없애는 곳에 사일러스 아저씨가 계셨던 거예요."
댄디의 표정은 보드가 생각한 모든 것이 사실임을 확인해 주었다.
하지만 댄디가 뭐라 말했을지 보드는 끝내 알지 못했다. 사내가 비석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 열린 구울들의 문 속으로 천천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웨흐 카라도스!"
보드가 소리쳤다.
구울들의 문은 이제 그냥 다시 무덤에 지나지 않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 잭은 자신의 코가 알려 주는 대로 언덕을 올라갔다. 그는 다른 사내들을 떠나 혼자 언덕으로 올라왔는데, 잭 댄디의 지독한 향수 냄새 때문에 그보다 더 미묘한 냄새를 맡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잭은 냄새로 그 남자애를 찾아낼 수는 없었다. 여기 묘지에서는 그게 불가능했다. 그 남자애한테서는 묘지의 냄새가 났다. 하지만 그 여자애한테서는 그 애 엄마의 집에서 맡은 냄새가 났다. 그날 아침 학교에 가기 전에 목에 살짝 바른 향수 냄새 같은 그런 냄새가 났다. 여자애에게서는 동시에 희생물의 냄새가 났다. 그의 희생물들이 그랬던 것처럼 여자애도 겁을 먹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것 같다고 잭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 여자애가 있는 곳에 그 남자애도 조만간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 "우리 조직은 고대 바빌론 시대보다 더 이전에 생겨났어. 그 어떤 것도 우리 조직에 해를 입힐 수 없어."
"그들이 말 안 해 줬나 보죠? 아까 그 네 사람은 잭들의 조직에서 마지막 남은 사람들이었어요. 뭐라더라, 크라쿠프, 밴쿠버, 멜버른... 당신 조직은 다 사라졌어요."
- "걱정 마."
그의 마음은 전혀 침착하지 않았지만, 보드는 스칼릿에게 침착하게 말했다. 그런 뒤 다시 잭에게 말했다.
"이제 스칼릿을 다치게 해 봤자 의미 없잖아요. 마찬가지로 나를 죽여 봤자 아무 의미 없고요. 모르겠어요? 온갖 업계의 잭들 조직 같은 건 이제 있지도 않아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요."
잭은 생각에 잠겨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내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잭이라면, 나한테는 너희 둘 다를 죽여야 할 그럴싸한 이유가 있는 셈이지."
보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자존심. 내 일에 대한 자존심. 내가 시작한 일을 마무리 짓는 자존심."
- "잭, 나의 본래 이름이 뭐죠? 우리 가족이 나를 뭐라고 불렀어요?"
"이제 와서 그게 왜 중요해?"
- "이름을 찾으라고 했어요. 내 이름이 뭐죠?"
그는 보드를 갖고 놀았다.
"그냥 말해 줘도 되잖아요. 아무튼 당신은 나를 죽일 테니까요."
보드가 이렇게 말하자 잭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마치 '그렇고말고'라고 말하는 것처럼 어둠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 잭은 어둠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저게 제단이로군, 그렇지?"
"그런 것 같아요."
"칼? 잔? 브로치?"
- 잭은 지금 어둠 속에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보드는 그의 얼굴에서 미소를 볼 수 있었다. 그런 얼굴에는 어울리지 않는 낯설고 기쁨으로 가득한 미소였고, 뭔가를 발견한 뒤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한듯한 미소였다. 스칼릿은 캄캄한 어둠 말고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가끔 번쩍하고 그녀의 눈망울에 뿜어져 나오는 눈빛으로 보아하니 스칼릿도 잭의 목소리를 듣고 그가 기뻐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아차린 것 같았다.
"이제 조직은 무너졌고 회합은 끝났어. 하지만 온갖 업계의 잭들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이 나밖에 없다 해도 그게 무슨 상관이야? 예전보다 더 힘이 센 새로운 조직을 만들면 되는데."
- 잭이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이곳은 완벽해. 우리를 봐. 우리는 지금 우리 조직원들이 수천 년 동안 찾아다닌 곳에 들어와 있는 거야. 우리를 기다리는 의식을 치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있는 곳에 말이야. 신의 섭리를 저절로 믿게 되지 않아? 조직이 거의 붕괴되어 힘든 이 시점에, 우리보다 먼저 떠난 모든 잭들의 응집된 기도 덕분에 이런 곳에 오게 되었으니 말이야."
보드는 슬리어가 잭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흥분해서 나지막이 속삭이는 소리가 방 안에서 점점 커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꼬마, 내가 한 손을 내밀 테니, 스칼릿, 칼이 아직 네 목을 겨누고 있으니까 내가 손을 뗀다고 해서 달아날 생각은 꿈도 꾸지 마. 잔과 칼과 브로치를 내 손에 올려."
"슬리어의 보물은 항상 제자리로 돌아온다. 우리는 주인님을 위해 보물을 지킨다."
뒤엉킨 세 개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보드는 허리를 굽히고 제단에 놓인 물건들을 집어 잭의 장갑 낀 손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잭은 활짝 웃었다.
- 세상에, 머리도 목도 세 개씩 달려 있었다. 얼굴은 이미 죽어서 마치 누군가 인간과 동물의 사체를 가지고 인형을 만든 것 같았다. 얼굴을 뒤덮은 자줏빛 무늬들, 그러니까 남색 소용돌이 문신들은 죽은 얼굴들을 야릇하고 표정이 풍부한 괴물의 모습으로 바꿔 놓았다.
슬리어의 얼굴들은 마치 잭을 쓰다듬고 싶은 것처럼 잭 주위의 공기를 망설이듯 킁킁거리며 들이마셨다.
"무슨 일이야? 이게 뭐지? 지금 뭐 하는 거야?"
잭이 물었다.
"슬리어예요. 이곳을 지키죠. 주인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어요."
보드가 말했다.
잭은 손에 쥔 부싯돌 칼을 치켜들며 혼잣말을 했다.
"아름답군."
- "물론 나를 기다렸겠지. 그래, 맞아. 내가 너의 새로운 주인이야."
슬리어는 방 안을 둥글게 둘러쌌다.
"주인님?"
슬리어는 너무나 오랜 세월을 참을성 있게 기다려 온 개처럼 말했다.
"주인님?"
슬리어가 그 단어를 음미하듯 다시 말했다. 그리고 그 단어가 좋은지 슬리어는 기쁨과 갈망이 가득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주인을 불렀다.
- 보드는 제단으로 돌아갔다. 그는 돌칼과 술잔, 브로치를 바닥에서 주워 들고 본래 있던 자리에 갖다 놓았다. 바닥에 떨어진 검은 칼은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슬리어는 사람들을 해칠 수 없다고 네가 말했던 것 같은데. 나는 슬리어가 할 수 있는 건 우리한테 겁을 주는 게 다인 줄 알았어."
스칼릿이 말했다.
"응, 맞아. 하지만 슬리어는 보호해 줄 주인님을 원했어. 나한테 그렇게 말했어."
보드가 말했다.
"넌 알고 있었단 뜻이구나. 넌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있었던 거야."
"응. 이런 일이 일어나길 바랐지."
그는 스칼릿을 부축해서 계단을 올라가 난장판이 된 프로비셔가의 능으로 나왔다.
"여길 다 치워야겠어."
보드는 태연하게 말했다. 스칼릿은 바닥에 뒹구는 것들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 "너는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고 있었어."
스칼릿이 다시 한번 했던 말을 느리게 반복했다.
보드는 이번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너는 알고 있었어. 슬리어가 잭을 삼켜 버릴 거라는 사실을. 그래서 나를 저 아래쪽에 숨겼어? 그런 거였니? 그러니까 나를 미끼로 삼은 거야?"
"그런 게 아냐. 우린 아직 살아 있어. 그렇지? 그리고 잭은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힐 수 없어."
보드가 말했다.
스칼릿은 화가 치밀어 오르고 분노가 솟구쳤다. 두려움은 어느덧 사라지고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마구 비난하고 고함치고 싶은 욕구였다. 그녀는 그런 충동과 싸웠다.
- "나는 어느 누구도 죽이지 않았어."
"그럼 그 사람들은 어디 있어?"
"한 사람은 발목이 부러진 채 깊은 무덤의 바닥에 있어. 나머지 세 사람은 아주 먼 곳에 있어."
"그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단 말이지?"
"물론 안 죽였어. 여기는 내 집이야. 그 사람들이 평생 이곳을 배회하는 걸 내가 좋아할 것 같아? 걱정 마. 그 사람들은 내가 다 처리했어."
스칼릿은 보드에게서 한 걸음 떨어지더니 이렇게 말했다.
"너는 사람이 아니야. 사람들은 너처럼 행동하지 않아. 너도 잭만큼이나 나빠. 넌 괴물이야."
보드는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을 느꼈다. 그날 밤, 온갖 험한 일을 겪었고 별의별 일이 다 벌어졌지만 보드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아니야, 스칼릿. 그런 게 아니란 말이야."
- 스칼릿은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한 걸음, 두 걸음 물러서다가 급기야 몸을 돌려 미친 듯이 달아났다. 달빛이 비치는 묘지에서 멀리 필사적으로 달려가던 그녀는 검은 벨벳 옷을 입은 키 큰 남자가 자신의 팔을 잡는 것을 느꼈다.
"아가씨는 보드를 오해하고 있군.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잊어버리면 확실히 더 행복해질 거야. 그러니까 나랑 같이 걸으면서 지난 며칠 동안 아가씨한테 벌어진 일에 대해 얘기를 나눠 보고, 어떤 일을 기억하고 어떤 일을 잊어버리면 좋을지 판단하기로 하지."
"사일러스 아저씨, 그러지 말아요. 스칼릿이 저를 잊어버리게 만들지 말아요."
보드가 말했다.
"그게 가장 안전할 거야. 스칼릿한테는 말이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일러스가 간단히 말했다.
- "저는, 저는 이 일에 아무런 발언권도 없는 건가요?"
스칼릿이 물었다.
사일러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드는 스칼릿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서면서 말했다.
"스칼릿, 이제 끝났어. 힘들었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우리는 해냈어. 너와 내가 함께, 우리가 그 사람들을 물리쳤단 말이야."
스칼릿은 자신이 보고 겪은 모든 일을 부인하듯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었다. 그녀는 사일러스를 올려다보며 그저 이렇게만 말했다.
"집에 가고 싶어요. 데려다주실래요?"
사일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스칼릿과 함께 묘지 밖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걸어 내려갔다. 보드는 스칼릿이 뒤를 돌아보고 미소를 짓거나 두려움이 사라진 눈빛으로 그저 자신을 바라봐 주기만을 바라며 그녀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스칼릿은 몸을 돌리지 않았다. 그냥 걸어가 버렸다.
- 어떤 남자가 스칼릿을 집에 데려다주었다. 스칼릿의 엄마는 딸을 데려다준 남자에게서 마음씨 착한 제이 프로스트 씨가 부득이하게 그 도시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듣고 실망했지만, 나중에는 그 남자가 자기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부엌에서 모녀와 그들의 삶과 꿈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고 대화가 끝나갈 즈음 스칼릿의 엄마는 어떻게든 글래스고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굳혔다고 말했다. 또한 스칼릿이 자기 아버지 가까이에서 살 수도 있고 옛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도 있으니 행복해할 거라고도 말했다.
- 사일러스는 부엌에서 얘기를 나누는 모녀를 남겨 두고 집을 나왔다. 모녀는 스코틀랜드로 돌아가는 문제를 의논하고 있었다. 스칼릿의 엄마는 스칼릿에게 휴대전화를 사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들은 사일러스가 자기네 집에 찾아왔다는 것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는데, 그게 사일러스가 선호하는 방식이었다.
- "스칼릿이 어떻게 나를 잊게 할 수 있죠?"
"사람들은 불가능한 일들은 잊어버리고 싶어 해. 그게 그들의 세상을 더 안전하게 만들어 주니까."
사일러스가 말했다.
"저는 스칼릿을 좋아했어요."
"유감이구나."
보드는 미소를 지으려 애썼지만 자기 안에서 미소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 사람들은... 크라쿠프와 멜버른 그리고 밴쿠버에서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어요. 아저씨가 그런 거죠?"
"나 혼자가 아니었어."
사일러스가 말했다.
"루페스쿠 선생님도요?"
보드는 자신의 후견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고 다시 물었다.
"선생님은 괜찮으세요?"
사일러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는 보드가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표정이 잠시 어렸다.
"그녀는 용감하게 싸웠어. 보드, 너를 위해 싸웠단다."
- "우리라면 아저씨와 루페스쿠 선생님을 말하는 건가요?"
"루페스쿠와 나 그리고 우리 같은 사람들이 또 있어."
"근위병을 말하는 거군요."
"그건 어디서 들었지? 뭐 상관없어. 아이들은 귀가 밝다는 속담이 있다더니 맞는 말이군. 맞아. 근위병이야."
사일러스는 물 잔을 집어 들었다. 그는 물 잔을 입술에 갖다 대물로 입술을 적신 다음 반들거리는 검은색 탁자에 컵을 내려놓았다.
탁자 표면은 하도 반들거려서 마치 거울 같았다. 그때 누군가 탁자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면 키 큰 남자의 모습이 탁자에 비치지 않는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 "이제 아저씨는 일을 다 마치셨잖아요... 모든 관련된 일들을요. 그래도 계속 묘지에 머무르실 건가요?"
"내가 약속한 적 있지. 네가 다 자랄 때까지 이곳에 있기로."
"저는 다 자랐어요."
"아냐. 거의 다 자랐지. 아직은 아냐."
- "그 여자애, 스칼릿 말인데요. 아저씨, 그 앤 왜 그렇게 저를 무서워했을까요?"
하지만 사일러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밝은 피자 가게에서 어두운 밤거리로 걸어 나올 때까지 사일러스는 보드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곧바로 어둠에 파묻혔다.
- 그러고는 그의 귓가에 어떤 목소리가 말했다.
"내가 보고 싶을 거라고 말해, 이 바보야."
"리자?"
그는 온갖 업계의 잭들과 싸운 그날 밤 이후 1년이 넘도록 어린 마녀를 보지도,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도 못했었다.
"그동안 어디 있었어요?"
"지켜보고 있었어. 숙녀가 자신이 하는 일을 일일이 다 말해야겠어?"
- "살아 있는 자들은 삶을 헛되이 쓴단 말이야, 노바디 오언스. 우리 둘 중 하나는 너무나 멍청해서 살아가기 힘들겠어. 물론 그건 내가 아니지만, 아무튼 내가 보고 싶을 거라고 말해."
리자의 목소리가 그의 귀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어디로 가는데요? 물론 당신이 어디로 가든 저는 당신을 보고 싶어 할 거예요."
"정말 멍청하구나."
리자 헴스톡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보드는 그녀의 손이 자신의 손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이리 멍청해서 어찌 살아갈는지."
그녀의 입술이 자신의 뺨과 입술 가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보드에게 부드럽게 입을 맞추자 보드는 너무 당황스럽고 난처해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도 네가 그리울 거야, 늘."
- 어쩌면 그녀의 손길이었을지도 모를 바람 한 점이 불어와 그의 머리카락을 헝클였다. 그리고 다시 보드는 벤치에 홀로 남겨져 있었다.
- 보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배당 문으로 걸어가서 현관 옆에 있는 돌을 들고 그 밑에 놓인 여분의 열쇠를 꺼냈다. 그건 오래전에 죽은 교회지기가 놓아둔 열쇠였다. 그는 문을 그냥 통과할 수 있는지 시도도 해 보지 않고 열쇠로 커다란 나무 문을 열었다. 문은 끼익 소리를 내며 항의하듯 힘겹게 열렸다.
예배당 내부는 어두웠다. 보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안을 살폈다.
"들어와라."
사일러스의 목소리였다.
"아무것도 안 보여요. 너무 어두워요."
"벌써 그렇게 되었니?"
사일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벨벳 옷자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성냥을 긋는 소리가 들리면서 성냥에 불이 붙었다. 사일러스는 방 뒤편에 있는 조각된 커다란 나무 촛대로 다가가 양초 두 개에 불을 붙였다. 촛불 불빛 속에서 보드는 자신의 후견인이 커다란 가죽 상자 옆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여행용 트렁크라고 부르는 종류의 그 상자는 키 큰 사람이 안에 들어가 몸을 웅크리고 자도 될 만큼 컸다. 그 옆에는 사일러스의 검은색 가죽 가방도 있었는데. 이전에도 몇 번 본 적이 있는 그 가방은 보드에게 여전히 인상적이었다.
- 여행용 트렁크에는 하얀 안감이 대어져 있었다. 보드가 트렁크에 손을 넣어 보았더니 비단으로 된 안감과 마른 흙이 만져졌다.
"여기에서 주무시는 거예요?"
보드가 물었다.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그렇단다."
보드는 깜짝 놀랐다. 사일러스 아저씨는 보드가 기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오래전부터 이 묘지에 있었다.
- "그럼 여기 이 묘지가 아저씨 집이 아닌 거예요?"
사일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집은 여기서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어. 그래서 그곳이 여전히 살 수 있을 만한 곳인지는 모르겠구나. 문제가 좀 있는 곳이었지. 내가 돌아갔을 때는 어떻게 되어 있을지 전혀 알 수가 없구나."
"돌아가시려고요?"
보드가 물었다. 절대 변하지 않았던 것들이 이제 변하고 있었다.
- "아저씨, 정말 떠나실 거예요? 아저씨는 저의 후견인이시잖아요."
"너의 후견인이었지. 하지만 넌 이제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만큼 컸어. 앞으로 나는 다른 것들을 지켜야 해."
사일러스는 갈색 가죽 트렁크의 뚜껑을 닫고 끈을 묶은 뒤 버클을 채웠다.
"저는 더 이상 여기에 머물 수 없나요? 여기 이 묘지에요?"
"그렇단다."
사일러스는 보드가 기억할 수 있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 인생을 살았어, 보드. 비록 그 인생이 짧았다고 하더라도 말이야. 이제 네 차례야. 너도 네 인생을 살아야 해."
"아저씨를 따라가면 안 돼요?"
사일러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사일러스의 목소리에는 다정함과 함께 그보다 더 많은 뭔가가 담겨 있었다.
"네가 나를 만나든 만나지 않든 나는 틀림없이 너를 지켜볼 거야."
- "따라오렴."
보드는 사일러스를 따라 지하실로 가는 작은 나선형 계단을 내려갔다.
"내 멋대로 그래서 미안하다만 너에게 주려고 가방을 하나 싸 뒀어."
사일러스가 이렇게 설명했을 때 그들은 지하실에 도착했다.
곰팡이가 슨 찬송가 책들이 들어 있는 상자 위에 가죽으로 된 작은 여행 가방이 놓여 있었다. 가방은 사일러스의 가방과 크기만 다를 뿐 모양이 똑같았다.
"네 물건들은 모두 여기에 들어 있어."
- "사일러스 아저씨, 근위병에 대해 얘기 좀 해 주세요. 아저씨는 근위병이시죠. 루페스쿠 선생님도 근위병이셨고요. 또 누가 있죠? 수가 많은가요? 어떤 일을 하죠?"
"우리는 하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아. 주로 경계 지역을 지키지. 여러 존재들의 경계를 지켜."
"어떤 종류의 경계예요?"
사일러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잭과 그 일당을 막는 것과 같은 그런 일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우리는 해야만 하는 일을 하지."
사일러스는 지친 것 같았다.
- "하지만 아저씨는 옳은 일을 하셨어요. 잭 일당을 막으셨잖아요. 그들은 정말 끔찍했어요. 그들은 괴물이었어요."
사일러스는 보드 가까이 한 걸음 다가섰다. 그러자 보드는 키가 큰 사일러스의 창백한 얼굴을 보기 위해 머리를 뒤로 젖히고 올려다보아야 했다.
"내가 항상 옳은 일을 한 건 아니야. 나도 젊었을 때는... 잭보다 더 나쁜 짓을 저지르고 다녔어. 그들 어느 누구보다 악한이었지. 그때 나는 괴물이었어, 보드. 어떤 괴물보다 더 못된 괴물이었지."
보드는 자신의 후견인이 거짓말을 하는지 농담을 하는지 궁금한 마음도 들지 않았다. 보드는 자신이 진실을 듣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 "하지만 아저씨는 더 이상 그런 짓을 하지 않잖아요, 그렇죠?"
"사람은 변할 수 있어."
사일러스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침묵에 잠겼다. 보드는 자신의 후견인이, 아니 사일러스 아저씨가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 순간 사일러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얘야, 너의 후견인이어서 영광이었다."
- 사일러스는 망토 속으로 손을 넣더니 낡고 오래된 지갑을 꺼냈다.
"선물이란다. 가져가."
보드는 지갑을 받아 들었지만 열어 보지는 않았다.
"그 안에 돈이 들어 있어. 세상에서 첫출발을 할 수 있을 만큼밖에 안 돼."
- "오늘 알론소 존스를 만나러 갔는데 없었어요. 있었는데 제가 못 봤는지도 모르죠. 저는 그 사람이 여행한 먼 곳들에 대해 얘기를 듣고 싶었어요. 섬과 돌고래, 빙하와 산들에 관한 얘기를요. 아주 이상한 옷을 입고 이상한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사는 곳 얘기도요."
보드는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망설이다가 계속 말했다.
"그런 곳들, 아직도 그런 곳들이 있겠죠? 제 말은, 저기 바깥의 세상은 아주 넓으니까요. 저도 그런 것을 볼 수 있을까요? 그런 곳에 갈 수 있을까요?"
사일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기 바깥에는 아주 넓은 세상이 펼쳐져 있어. 여행 가방의 안쪽 주머니에 네 여권이 들어 있단다. 여권은 노바디 오언스라는 이름으로 발급받았어. 발급받기가 쉽지 않더군."
- "제가 마음이 바뀌면 여기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
보드는 그렇게 물어 놓고 스스로 대답했다.
"제가 돌아온다면, 이곳은 그냥 하나의 장소이지 더 이상 제 집은 아니겠죠."
"정문까지 같이 걸어가 줄까?"
사일러스가 물어보자 보드는 고개를 저었다.
"혼자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음, 사일러스 아저씨, 혹시 어려움에 처하면 저를 부르세요. 제가 달려가서 도울게요."
"나는 어려움에 처하는 일이 없어."
"그래요. 아저씬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래도..."
지하실은 어두웠고 곰팡이와 눅눅하고 오래된 돌 냄새가 났다. 처음으로 지하실이 아주 작아 보였다.
- 보드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저는 모든 것을 다 해 보고 싶어요."
"좋아."
사일러스는 눈앞을 가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려는 듯이 한 손을 들었는데, 전혀 그 답지 않은 몸짓이었다.
"혹시라도 내가 어려움에 처하면 너를 꼭 부르마."
"아저씨가 어려움에 처하지 않더라도 저를 부르실 거죠?"
"네가 말한 대로 하마."
사일러스의 입가에 언뜻 뭔가가 보였는데, 미소였을 수도 있고, 후회였을 수도 있고, 그냥 그림자가 진 것이었을 수도 있었다.
- "사일러스 아저씨, 그럼 안녕히 가세요."
어릴 적에 그랬던 것처럼 보드가 한 손을 내밀자 사일러스는 낡은 상앗빛의 차가운 손으로 보드의 손을 잡고 엄숙하게 흔들었다.
"잘 가, 노바디 오언스."
보드는 작은 여행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는 문을 열고 지하실을 빠져나와 뒤돌아보지 않고 완만한 비탈을 걸어 올라 오솔길로 들어섰다.
- 정문이 잠긴 지 한참이나 지난 때였다. 그는 정문으로 다가가면서 정문이 쇠창살 사이로 자신을 그냥 빠져나가게 해 줄지 아니면 예배당으로 돌아가 열쇠를 가져와야 하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묘지 입구에 도착하고 보니 보행자용 작은 문이 잠기지 않은 채로, 마치 보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마치 묘지가 보드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있는 것처럼 활짝 열려 있었다.
창백하고 통통한 형상 하나가 열린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보드가 그녀를 향해 가까이 가자 그녀는 보드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는데, 달빛 속에서 그녀의 눈에 맺힌 눈물이 보였다.
- "어머니."
오언스 부인은 손가락 마디로 눈을 비비고는 앞치마로 눈물을 찍어 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앞으로 뭘 할 건지 정했니?"
그녀가 물었다.
"세상을 보고 싶어요. 어려움도 겪어 보고, 또 어려움에서 벗어나도 보고요. 밀림에도 가 보고 화산에도 가 보고 사막과 섬에도 가 볼래요. 그리고 사람들을 만날 거예요.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요."
오언스 부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보드를 빤히 올려다보고 나서 보드가 기억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보드가 갓난아기였을 때 불러 주곤 했던 노래, 보드가 어렸을 적 불러 주던 자장가를.
- 잘 자라 우리 아가
잠에서 깰 때까지 잘 자거라
잠에서 깨면 너도 세상을 보게 되겠지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 "맞아요. 어머니 생각은 틀리지 않았어요. 저는 꼭 그럴 거예요."
보드가 속삭이듯 말했다.
- 오언스 부인은 그 노래의 마지막 소절을 마침내 생각해 내고는 아들에게 불러 주었다.
- 용감하게 너의 인생을 마주하거라
인생의 고통도, 즐거움도 맛보거라
모든 길을 다 가 보거라
- "모든 길을 다 가 보거라."
보드가 마지막 가사를 따라 읊조리더니 말했다.
"어려운 도전이겠지만 최선을 다해 볼게요."
남들이 볼 때는 보드가 길에 혼자 있었기 때문에 안개를 껴안으려 하는 것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보드는 어릴 때처럼 어머니를 두 팔로 껴안으려 했다.
- 보드는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뎌 문을 통해 묘지 밖으로 나갔다.
- "아가, 나는 네가 정말 대견하단다."
보드는 그런 목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것은 그의 상상인지도 몰랐다.
- 한여름의 하늘이 이미 동쪽에서부터 밝아 오고 있었다. 보드는 그 방향으로 걷기 시작해 언덕길을 내려가 살아 있는 사람들과 도시와 여명을 향해 걸어갔다.
- 보드의 가방에는 여권이, 주머니에는 돈이 들어 있었다. 그의 입가에서 미소가 춤을 추었다. 물론 세상은 언덕에 있는 작은 묘지보다 확실히 더 넓은 곳이었기 때문에 그의 미소가 조심스럽기는 했다. 세상에는 위험도, 신비도, 새로 사귈 친구도, 다시 만날 옛 친구도, 앞으로 하게 될 실수도, 걸어 볼 길도 많을 것이다. 그 모든 일을 겪어 본 뒤 마지막으로 그는 묘지로 돌아오거나 그 여인과 함께 거대한 회색마의 넓은 등에 올라타 달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그때까지의 사이에는 바로 살아 있는 '삶'이 있었다.
보드는 두 눈을 크게 뜨고 가슴을 활짝 편 채로 그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고 영원히, 러디어드 키플링과 그의 뛰어난 두 권짜리 작품 <정글 북>에 알게 모르게 큰 신세를 졌음을 밝힌다. 나는 어린 시절 <정글 북>을 읽고 더없는 흥분과 감동을 받아 그 뒤로도 여러 번을 읽고 또 읽었다. 만약 여러분이 디즈니 만화 영화로 된 <정글북>에만 익숙하다면 책으로도 꼭 한번 읽어 보기를 바란다.
- 이 책은 나의 아들 마이클에게서 영감을 얻어 집필하게 되었다. 내 아들이 겨우 두 살이던 해의 여름, 그 아이가 작은 세발자전거를 타고 묘비 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내 머릿속에 이 책에 대한 영감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뒤 이 책을 집필하기까지는 2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 이 책을 쓰기 시작해 (4장부터 쓰기 시작했다.) 처음 두세 쪽만 써놓았을 때, 나의 딸 매디가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고 자꾸 물어보는 바람에 나는 이야기를 계속 써 나갈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딸 홀리는 명확히 어떤 일을 한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이 책의 모든 것들을 한결 좋아지게 만들었다.
- 가드너 도즈와와 잭 댄이 '마녀의 비석' 부분을 먼저 간행했고, 조지아 그릴리 교수는 내가 이 책의 주제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 켄드라 스타우트는 내가 구울의 문을 처음으로 보게 된 날 그 자리에 함께 있었으며 친절하게도 나와 함께 묘지 몇 군데를 거닐어 주기도 했다. 그녀는 이 책의 앞부분 몇 장을 들어주었는데 사일러스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굉장했다.
- 화가 겸 작가인 오드리 니페네거 또한 묘지 안내자가 되어 하이게이트 묘지 서쪽의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경이로운 장소로 나를 안내해 주었다.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의 상당 부분이 7장과 8장에 스며들어 있다. 과거에 인터넷 요정이었던 올가 누니스와 내겐 딸과도 같은, 무시무시한 헤일리 캠벨 덕택에 묘지를 둘러보는 일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으며, 이 두 사람도 함께 묘지를 걸어 주었다.
- 제가 왜 이 단상에 올라와 있는지 의아해하실 분을 위해, 사실 바로 지금 이 순간 저 또한 그게 무척 의아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적어도 둘은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이유를 말씀드리자면, 제가 쓴 <그레이브야드 북>이란 책으로 2009년 뉴베리 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 뉴베리 상을 받은 덕분에 저는 제 딸들에게 감동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뉴베리 상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주 유쾌하게 공격한 <콜베르 르포>라는 TV 프로그램의 진행자 스티븐 콜베르에게 멋지게 대응해 낸 덕분에 제 아들에게는 훨씬 더 깊은 감동을 안겨 주었습니다. 이렇게 뉴베리 상을 받은 덕분에 저는 제 아이들에게 멋진 아빠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건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입니다. 자식에게 멋진 아빠가 되기란 아주 힘든 일이니까요.
- 어렸을 적, 그러니까 여덟 살 때부터 열네 살 때까지, 저는 학교가 쉬는 날이면 마을 도서관에서 살고는 했습니다. 도서관이 저희 집에서 약 2.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어서 부모님께서 일하러 가시는 길에 저를 그곳에 내려 주시면, 저는 도서관이 문을 닫을 때까지 도서관에 있다가 집으로 걸어오곤 했습니다. 제멋대로인 데다 변덕스러우며 다루기 곤란한 아이였던 저는 우리 마을 도서관을 열광적으로 사랑했습니다. 저는 도서관의 카드 색인 목록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특히 어린이 열람실의 카드 색인 목록을 좋아했는데, 그 목록에는 책 제목과 저자뿐만이 아니라 주제 분류도 적혀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 주제 분류를 보고 마법, 유령, 마녀, 우주와 같은 제가 좋아하는 주제의 책들을 찾아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 하지만 저는 닥치는 대로, 기쁨에 겨워하며, 굶주린 듯 책을 읽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굶주린 듯이 말입니다. 가끔 저희 아버지께서 제게 샌드위치를 싸 주시고는 했지만, 저는 마지못해 샌드위치를 받아 와서는 (부모란 절대 자녀에게 멋진 존재가 아니지요. 그리고 저는 저희 아버지가 샌드위치를 받으라고 고집하는 것을 저를 난처하게 만들려는 음흉한 술수로 여겼습니다.) 심하게 배가 고플 때 도서관 주차장에서 최대한 빨리 허겁지겁 먹어 치우고는 다시 책과 책장의 세상으로 뛰어들곤 했습니다.
- 저는 도서관에서 훌륭한 작가들이 쓴 멋진 책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중에는 J. P. 마틴, 마거릿 스토리, 니컬러스 스튜어트 그레이와 같이 지금은 잊히거나 인기가 없는 작가들도 있습니다. 저는 빅토리아 시대 작가들과 에드워드 7세 시대 작가들의 책도 읽었습니다. 지금 당장에도 기쁜 마음으로 다시 읽을 수 있는 책들을 발견했으며, 지금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 읽는다면 재미가 없어서 안 읽힐 <앨프리드 히치콕과 소년 탐정단> 시리즈와 같은 책들도 집어삼킬 듯이 읽었습니다.
- 저는 책이라면 다 좋았고 좋은 책과 나쁜 책 사이에 구분을 두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제 맘에 쏙 드는 책, 내 영혼에 와닿는 책, 그저 좋은 책의 구분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저는 이야기가 어떻게 쓰였는지는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나쁜 이야기는 없었고, 모든 이야기가 새롭고 즐거웠습니다. 저는 그렇게 학교가 쉬는 날이면 도서관에 앉아 어린이 열람실의 책을 읽었습니다. 어린이 열람실의 책을 다 읽은 뒤에는 그곳에서 나와 무시무시할 정도로 방대한 양의 서적이 있는 일반 열람실로 갔습니다.
- 사서들이 저의 열정에 반응했습니다. 사서들은 저에게 책을 찾아 주었습니다. 그들은 제게 도서관 상호 대출 제도를 가르쳐 주고 저를 위해 남부 잉글랜드 각지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주었습니다. 일단 휴일이 끝나 불가피하게 제가 빌려 간 책들의 반납 기한이 지나면 그들은 한숨을 쉬며 인정사정없이 연체료를 징수하긴 했지만요.
- 사실 사서들은 제게 이런 이야기를 절대 하지 말라고, 특히 저 자신을 도서관에서 살며 참을성 있는 사서들의 손에 자란 야생아로 절대 묘사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언급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랬다간 사람들이 제 이야기를 오해해 도서관을 무료 탁아소로 이용하는 핑계로 삼을까 봐 걱정스럽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 그렇습니다. 제가 <그레이브야드 북>을 썼습니다. 2005년 12월에 쓰기 시작해, 2006년과 2007년 내내 집필에 매달렸고, 2008년 2월에 완성했습니다.
- 어린 시절, 저는 <시간의 주름>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퍼핀 출판사에서는 첫 문장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지만 말이지요. 그 작품은 뉴베리 상 수상작이었고, 저는 영국인이었지만 미국의 문학상인 뉴베리 상이 제게는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 또 기자들은 대중적인 책들과 뉴베리 수상작들에 대한 논쟁을 잘 알고 있는지 그리고 제가 그 논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묻더군요. 저는 저 또한 그 논쟁을 잘 알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 이런 논쟁을 모르는 분을 위해 말씀드리자면, 최근 어떤 종류의 책들이 뉴베리 상을 받았으며, 앞으로 어떤 종류의 책들이 뉴베리 상을 받을 것이며, 뉴베리 상 같은 상들이 과연 어린이를 위한 것인지 어른을 위한 것인지에 대한 떠들썩한 공론이 온라인상에서 벌어진 바 있습니다. 저는 뉴베리 상 같은 상들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책들을 조명하기 위해 이용되는 경향이 있으며, <그레이브야드 북>은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레이브야드 북>이 뉴베리 상을 수상하게 된 것은 제게 놀라운 일이었다고 어떤 기자에게 인정했습니다.
저는 자신도 모르게 제 자신을 대중적인 작가 쪽으로 분류해 놓고 있었던 것이지요. 물론 뒤에 그게 제가 의도했던 바가 전혀 아님을 깨달았지만요.
- 그건 마치 책이 그저 즐겁게 읽기만 해도 되는 책과 유익하기만 한 책으로 나뉜다고 믿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그 둘 중 어느 쪽인지 고르라는 요구를 받았던 것이지요. 우리는 모두 어느 쪽인지 고르라는 요구를 받곤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나누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믿었으며, 지금도 제 믿음은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여러분이 사랑하는 책들 편에 있습니다.
- 이 연설문은 두 달 전에 작성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 달 전에 저희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뜻밖의 비보였습니다. 아버지는 건강하셨고, 행복하셨으며, 저보다 더 건강 상태가 좋으셨는데, 예고 없이 심장마비가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망연자실하니 상심한 채로 대서양을 건너가 추도 연설을 하고, 십수 년간 보지 못했던 친척들에게서 제가 아버지를 얼마나 많이 닮았는지 이야기를 듣고,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저는 결코 울지 않았습니다.
일부러 울지 않으려고 했던 게 아니었습니다. 장례를 치르느라 혼란스럽고 경황이 없는 와중에 잠시 멈춰 슬픔을 어루만지며 제 안에 있는 감정을 표출할 시간이 전혀 없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 어제 아침, 어떤 친구가 제게 읽어 보라며 원고를 하나 보냈습니다. 그 원고는 허구의 인물인 어떤 사람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4분의 3쯤 읽었을 때 그 사람의 아내가 죽는 내용이 나왔습니다. 저는 소파에 앉아 얼굴이 눈물범벅이 될 정도로 아주 비통하게 흐느껴 울었습니다. 장례식에서 흘리지 않았던 아버지를 위한 눈물을 다 쏟아 내자, 저는 진이 다 빠졌습니다. 하지만 폭풍우가 지난 뒤의 세상처럼 마음이 깨끗이 씻기고 새로 시작할 준비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 이 이야기를 말씀드리는 이유는 그로 인해 제가 잊고 있었던 어떤 일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아주 날카롭고도 유익하게 떠올랐지요.
- 이제 제가 글을 쓴 지도 사반세기 째입니다.
사람들이 제게 제 소설이 아이나 부모와 같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하거나 질병이나 개인적 비극을 이겨 내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할 때, 또 사람들이 제게 제 소설을 읽고 책 읽기를 좋아하게 되었다거나 경력으로 내세울 만한 게 생기게 되었다고 말할 때, 사람들이 자신에게 아주 특별해서 어딜 가든 함께할 수 있도록 제 책에 나오는 이미지나 문구를 자신의 피부에 기념으로 새겨 놓은 문신을 저에게 보여 줄 때...
- 이런 일들이 일어날 때, 이런 일들은 되풀이해서 일어나곤 하는데요, 저는 예의 바른 태도로 감사를 표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이런 일들을 저와는 무관한 일로 치부하고 그냥 넘겨 버리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 저는 사람들이 힘든 상황과 곤란한 시기를 헤어날 수 있게 만들려고 소설을 쓴 것이 아닙니다. 저는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책을 읽도록 만들기 위해 소설을 쓴 것도 아닙니다. 그저 소설에 흥미가 있었기 때문에 소설을 쓴 것입니다.
- 제 머릿속에 벌레처럼 꿈틀대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 꿈틀대는 아이디어를 종이에 옮겨 놓고 살펴보며 어떤 생각과 느낌이 드는지 알아내려고 소설을 쓴 것이지요. 제가 만들어 낸 가상의 인물들에게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싶어서 소설을 썼습니다. 또한 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소설을 썼습니다.
- 그래서 저는 사람들에게서 감사 인사를 받는 게 멋쩍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제게 소설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지를, 도서관에서 만난 소설이 제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시절 제게 소설은 견딜 수 없는 것들로부터의 도피처였으며, 모든 일들이 규칙이 있고 이해될 수 있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세계로의 출입구였습니다. 이야기책을 통해 경험하지 않고도 인생을 배웠고, 이야기책을 통해 독약을 다루는 18세기 독살범의 삶을 체험한 덕택에 독살범이 아주 소량의 독만으로도 독약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을 살해하는 이야기도 다룰 수 있었습니다. 때로 소설은 독약과도 같은 세상을 헤치고 살아 나갈 수 있게 해 주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 그러자 저는 기억이 났습니다. 저를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준 작가들이 특별한 작가들, 현명한 작가들, 때로는 그저 저보다 먼저 이 길을 간 작가들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겁니다.
소설이 그렇게 독자들의 힘든 순간들이나 상황과 연결되어 독자들의 삶을 구하는 경우가 있으니 저와 무관하다고 치부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것은 소설이 지니는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 ... 영감을 떠올렸으며 이 책이 대단한 책이 될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저는 곧바로 이 책을 쓰려고 했지만 작가로서의 제 능력은 이 책을 쓰기에는 한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글을 계속 쓰며 글 솜씨를 키워 나갔습니다. 20년 동안 글을 쓴 뒤에서야 비로소 <그레이브야드 북>을 쓸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적어도 저의 글 솜씨가 이제 더 좋아질 수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 저는 이 책을 단편소설들로 구성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정글 북>이 단편소설들로 이루어져 있으니까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장편소설로 쓰고 싶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 머릿속에서 이 책은 이미 장편소설이었으니까요. 단편소설이나 장편소설이냐 하는 고민은 작가로서 기쁨인 동시에 골칫거리였습니다.
- 저는 제 모든 능력을 기울여 이 책을 썼습니다. 그것이 제가 알고 있는 유일한 글쓰기 방법입니다. 그런 식으로 글을 쓴다고 해서 좋은 글이 나온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저 시도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는 제가 읽고 싶은 이야기를 썼습니다.
- 이 책을 쓰기 시작하는 데도 무척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끝내는데도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래도 결국, 2월의 어느 날 밤, 저는 마지막 두 페이지를 쓰기에 이르렀습니다.
1장에서 저는 자장가로 서투른 시를 쓰고 마지막 세 줄은 미완성인 채로 남겨 두었습니다. 이제 그것을 마무리할 시간, 즉 그 시의 마지막 세 줄을 완성해야 할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그 시는 다음과 같이 끝납니다.
용감하게 너의 인생을 마주하거라
인생의 고통도 즐거움도 맛보거라
모든 길을 다 가 보거라
- 마지막 세 줄을 쓰고 나자 순간적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바로 그 순간, 오직 그 순간, 제가 쓰고 있는 책이 처음으로 명확히 보였습니다. 제가 쓰고 있는 책은 어린 시절에 대한 책이었습니다. 바로 보드의 어린 시절에 대한 책, 그것도 묘지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대한 책이었지요.
- 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또한 그 순간 저는 부모가 된다는 것과 부모 노릇을 하다 보면 겪게 되어 있는 근본적이지만 가장 기쁘고도 비극적인 일에 대해 쓰고 있었습니다. 바로 부모가 맡은 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한다면, 부모로서 아이를 잘 키워 낸다면, 아이에게 부모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부모가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해낸다면, 아이는 부모의 품을 떠나기 마련입니다. 그런 뒤 아이는 자신의 삶을 살고, 가족을 꾸리고, 미래를 펼쳐 나가겠지요.
- 정원의 가장 구석진 곳에 앉아 제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쓰면서 제가 쓴 책이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보다 더 나은 책이 되었단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저라는 사람보다 더 나은 책인 것 같았습니다.
- 그런 건 계획을 세워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최선을 다해 어떤 일을 해도 여전히 케이크는 부풀어 오르지 않기도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꿈꿨던 것보다 훨씬 근사한 케이크가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 뒤에는 그 작품이 좋건 나쁘건, 그 작품이 작가로서 자신이 바라는 대로 되었든 아니든, 작가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고는 뭐가 됐건 그다음 작품으로 나아갑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작가들이 하는 일입니다.
- 연설을 할 때는 하고자 하는 말을 한 뒤 요약하게끔 되어 있지요.
사실 저는 제가 오늘밤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무슨 말을 하고자 했는지는 알고 있는데, 그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 독서는 중요합니다.
책도 중요합니다.
사서도 중요합니다.
(또한 도서관은 보육 시설은 아니지만 가끔 야생아가 도서관의 책 더미 사이에서 스스로 자라기도 합니다.)
자신의 아이에게 멋진 부모가 되어 주는 일은 대단하지만 있을 법하지 않은 일입니다.
어린이를 위한 소설은 모든 소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소설입니다.
- 그래요. 이야기를 만드는 우리는 생계를 위해 거짓말을 지어냅니다. 하지만 그런 거짓말은 참된 것들을 말하는 선한 거짓말이며, 최선을 다해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이야말로 독자들에 대한 우리 작가들의 의무입니다. 그건 바로 세상 어딘가에 우리가 지어낸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환경에서 자라 그런 이야기가 없으면 딴 사람이 될 누군가가, 또 그런 이야기가 있으면 희망이나 지혜, 다정함이나 위안을 얻을지도 모르는 누군가가 말이지요.
-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입니다.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 > Book1'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줄리아노 다 엠폴리] 크렘린의 마법사 (0) | 2024.01.30 |
---|---|
[야마시로 아사코(오츠이치)] 엠브리오 기담 (0) | 2024.01.24 |
[브룩 보렐] 빈대는 어떻게 침대와 세상을 정복했는가 - 공포, 히스테리, 집착, 박멸의 연대기 (0) | 2024.01.12 |
[신카이 마코토] 스즈메의 문단속 (2) | 2024.01.10 |
[김경리] 요가의 언어 - 걱정과 고민을 툭, 오늘도 나마스떼 (0) | 2024.01.04 |
[키쿠치 히데유키] 뱀파이어 헌터 D 1-7 上下 (0) | 2023.1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