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줄리아노 다 엠폴리] 크렘린의 마법사

일루젼 2024. 1. 30. 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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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줄리아노 다 엠폴리 / 성귀수
출판 : 책세상
출간 :  2023.08.18


       

        

상당히 흥미롭게 읽었던 팩션 소설.

 

<크렘린의 마법사>의 어디까지가 허구인지를 밝혀내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회고록조차도 기억의 일부는 유실되고 왜곡된다. 그러므로 얼마나 '사실인가' 보다는 얼마나 '사실적인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충분한 개연성과 신뢰성을 주는 바딤 바라노프의 분석과 단상들에 빠져들어보자. 

 

저자는 작중 인물이자 거의 유일한 허구의 인물인 바딤 바라노프의 입을 빌려 다양한 가치관과 선택들을 펼쳐낸다. 절대적으로 옳은 결정이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결과론적으로 옳을 수도 없다. 개개인마다 수많은 다른 선택들을 할 것이고, 선택의 결과는 다른 선택들과 맞물려 매 순간 그리고 매 시대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재평가될 것이다. 그렇기에 <크렘린의 마법사>에서는 누가 어떠한 행동을 했는가 자체보다, 그 선택을 위해 어떤 비전을 보고 어떤 그림을 그렸느냐를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주요 화자인 바딤 - 바쟈는 진정으로 한 국가 전체를 그려내던 한 시대의 책사이자 '크렘린의 마법사'였다. 그가 보여주고자 한 이미지가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그가 가리고자 한 것들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실체를 잃었다. 

 

그가 설파하는 주장들 중에는 궤변들도 존재한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독자를 더욱 전율케 한다. 그가 '창조해 낸' 이미지는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가 의도한 바를 전하고, 믿게 하기 위해서- 즉 그의 필요를 위해서 설계된 것이다. 그의 궤변 또한 마찬가지다. 바딤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는 역설적으로 궤변을 통해 더욱 선명하게 전해진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가장 마지막의 그의 기계-신론이었다. 이미 모든 것은 숫자로 변했고, 인간이 창조한 기계는 인간이 부여할 수 있는 모든 이상적임을 부여받았다. 그의 시선은 이제 무엇을 보고 있는가?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끝.  

 


   

 

이 소설은 실제 사실과 실존 인물을 기반으로
저자가 각자의 삶과 발언을 상상해서 기술한 이야기다.
그럼에도 그 내용은 러시아의 진정한 역사로 이루어졌다.

 

 

인생은 연극이다.
진지하게 연기해야 한다.

- 알렉상드르 코제브

 

 

- 그에 관해서는 오래전부터 여러 얘기가 나돌았다. 아토스산 수도원에 처박힌 채 돌벽과 도마뱀들 틈에서 기도에 정진하고 있음이 분명하다느니, 코카인에 찌든 모델들에 둘러싸여 몸부림치는 것을 소토그란데 별장에서 직접 목격했다느니 그런가 하면 샤르자공항 활주로와 돈바스 민병대 사령부 또는 모가디슈의 폐허 속에서 그의 족적을 발견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 바딤 바라노프가 차르의 고문직을 내려놓은 후부터, 그와 관련한 이야기들이 잦아들기는커녕 폭증했다. 가끔 있는 현상이긴 하다. 힘 있는 사람 대부분은 현재 머무는 직위로부터 자신의 아우라를 끌어낸다. 그러다가 직위를 잃으면, 그건 마치 붙잡고 있어야 할 무언가를 놓치는 것과 같다. 그때부터 그들은 놀이공원 입구에 서 있는 인형들처럼 바람이 빠져나간다. 어쩌다 길에서 마주치면, 어떻게 저런 사람이 그토록 대단하게 보일 수 있었는지가 의아할 정도다.   
 

- 바라노프는 다른 부류에 속했다. 어떤 부류인지는 솔직히 나도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사진 속 그의 모습은 단단하기보단 육중해 보이는 체격에, 거의 항상 어두운 색조의 약간은 넉넉한 정장 차림이었다. 얼굴은 평범하면서 살짝 어린애 같은 인상이고, 창백한 안색에 검고 뻣뻣한 머리는 마치 첫 영성체에 임하는 아이처럼 가지런한 모양이었다. 사적인 자리에서 촬영한 동영상이 그의 웃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해맑은 웃음이 어리석음의 표시로 받아들여지는 러시아에서 그건 매우 희귀한 일이었다. 사실 그는 외모에 대해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듯했다. 정확하게 그의 직업이 거울을 원형으로 배치해 불티 하나를 마법으로 변화시키는 일임을 생각할 때, 흥미로운 점이 아닐 수 없다.

 

- 바라노프는 수수께끼로 둘러싸인 인생을 헤쳐 왔다. 거기서 어느 정도 확실하다 할 것은 차르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했다는 사실뿐이다. 차르를 보필해 온 지난 15년, 그는 권력을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 사람들은 그를 ‘크렘린의 마법사', '제2의 라스푸틴'이라 불렀다. 

 

- 당시 그의 역할은 명확하지 않았다. 온갖 현안이 신속하게 처리될 때면 대통령 집무실에 늘 그 모습이 보이곤 했다. 비서관들이 따로 연락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마 차르 본인이 직통라인으로 그를 호출하는 모양이었다. 혹은 무엇이 문제인지 똑 부러지게 짚어내지 못하면서 다들 입만 나불거릴 때를 그가 놀라운 재능을 발휘해 정확히 포착해 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 이따금 누군가 그 자리에 동석하기도 했다. 잘 나가는 장관이라든지 공기업 대표 같은 이. 하지만 모스크바에서는 누구도 알맹이 있는 발언을 하지 않는 것이 수 세기를 이어온 원칙이다 보니, 어쩌다 증인이 되어줄 사람이 나타나도 차르와 그 조언자가 벌이는 야간작업의 전모를 밝히기엔 역부족이었다. 다만 작업의 결과가 공개되는 일은 간혹 있었다. 어느 아침, 새로운 자본주의 시스템의 상징으로 통할 만큼 누구보다 유명하고 부유한 기업가를 검거했다는 소식에 러시아 전체가 화들짝 깨어난 것도 바로 그래서였다. 한 번은 인민에 의해 선출된 연방의 모든 공화국 대통령들이 일거에 해직된 적이 있었다. 잠이 덜 깬 시민들에게 그날 아침 첫 방송은, 앞으로 다른 누구도 아닌 차르가 대통령을 임명할 것이라고 알렸다. 대부분 이런 밤샘 작업의 결과물은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사실상 치밀한 공정의 산물임에도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이는 일련의 변화가 수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감지될 뿐이었다.   
 

- 당시 바라노프는 아주 과묵한 편이어서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았고, 그 자신 역시 인터뷰 따위에 응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다만 그에게는 어떤 독특함이 있었고 이따금 글을 썼다. 짧은 에세이를 써 이름 없는 독립잡지에 게재하는가 하면, 군수뇌부에 보내는 군사전략 연구논문을 작성하고, 가끔은 러시아 최고의 전통을 살려 역설적인 재능이 발휘된 이야기를 집필하기도 했다. 그런 글들에 본명을 기입하는 대신, 그는 크렘린에서의 밤샘 작업이 낳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해석의 열쇠를 여기저기 암시적 표현들로 심어놓았다. 바라노프의 숨은 전략을 어떻게든 먼저 해독하려고 기를 쓰는 모스크바 관료집단이랄지 외국 대사관들은 어쨌든 그렇게들 믿고 있었다. 

 

- 이때 그가 뒤에 숨은 니콜라스 브랜다이스라는 필명이 훗날 혼란의 요인으로 가세했다. 더없이 열심인 사람들이 그 이름으로부터 요제프 로트의 별로 중요하지 않은 소설 속 그다지 비중도 크지 않은 인물의 존재를 끄집어낸 것이다. 타타르인, 이야기의 결정적인 순간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데우스엑스마키나 같은 존재인 그가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다.

'무엇이든 쟁취하려고 애쓸 필요 없다. 모든 게 썩었고 알아서 긴다. 그러니 버려라.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하거늘, 중요한 건 그것이다.' 

 

- 언제부터인가 그와 조우할 기회를 가진 소수의 사람들로부터 갈수록 음울해지는 그의 성향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왠지 초조하고 지쳐 보이더라는 둥, 뭔가 엉뚱한 데 정신이 팔렸더라는 둥. 너무 일찍 발동이 걸렸던 사람이라 이제는 지겨워하더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차르에게도. 반대로 이쪽은 전혀 지겹지 않을뿐더러 다 이해해주고 있는데. 나아가 슬슬 얄밉기 시작하고 있는데 말이다. 이런 식이다. 뭐가 어째? 우리가 너를 여기까지 이끌어주었건만 감히 지겹다고? 요컨대 정치적 관계의 감정적 본질을 과소평가하면 안 되는 법이다. 

 

- 그래서 그는 <우리들>이라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는, 과학자들이 평행우주의 존재에 관한 가설을 거론할 때, 과연 그것이 무슨 이야기인지를 우리에게 깨우쳐줄 경이로운 현상의 발현을 의미했다.

 

- 1922년에 자먀찐은 단순한 작가이기를 그만두고 시대의 동력이 되어 있었다. 건설 중인 소비에트 체제에 대하여 극렬한 비판의 글을 쓰고 있다 스스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를 검열하는 자들도 그렇게 읽었고, 때문에 책의 출판을 금지했다. 그러나 사실 자먀찐의 발언은 그들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는 한 세기를 뛰어넘어 지금 우리 시대를 직격 했던 것이다.

 

- <우리들>이라는 논리가 통치하는 사회를 그리고 있었다. 거기선 모든 것이 숫자로 전환되는 가운데 개인의 삶은 최대치의 효율을 위하여 극미한 부분까지 일일이 조정되었다. 무자비하지만 안정을 가져다주는 독재체제가 작동하면서 누구라도 버튼 하나만 누르면 시간당 소나타 세 곡을 만들어낼 수 있었고, 이성 간 관계는 자동제어장치로 통제되어 가장 적합한 상대가 결정되고 그들 사이의 짝짓기가 가능했다. 자먀찐의 세계에선 모든 것이 투명하다 못해, 예술작품처럼 장식된 진동막이 거리를 오가는 보행자들의 대화를 녹음했다. 투표가 공개된 행위여야 함은 물론이다. 

 

- 중요 인물인 D-503이 한 번은 이런 말을 한다. 

'옛사람들은 투표를 비밀리에 신속히 해치웠다고 하더군, 마치 도둑질처럼 말이야. 그렇게 몰래 해서 무얼 어쩌겠다고. 비밀이란 게 말 그대로 지켜진 적이 없잖아. ... 우린 말이야, 아무것도 숨기지 않아. 부끄러울게 전혀 없거든. 우리는 백주에 모든 걸 드러내놓고 정직하게 선거를 치르지. 그래서 모두가 후원자에게 투표한다는 것을 나는 알아. 내가 후원자에게 투표한다는 것을 모두가 알지.' 

 

- 자먀찐이란 존재를 발견하고부터 나는 그를 강박적으로 읽었다. 그의 작품은 우리 시대의 모든 문제를 집약해 놓은 것처럼 보였다. <우리들>이 묘사하는 세상은 다름 아닌 소비에트 연방. 무엇보다 모난 데 없이 매끈한 세상과 그 알고리듬, 건설 중인 총체적 매트릭스와 더불어 이를 마주하는 우리네 원시적인 두뇌의 치유 불가능한 궁핍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먀찐은 한마디로 오라클이었다. 그는 단지 스탈린을 겨냥해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중국 일당체제의 고위 관료들, 실리콘밸리를 주무르는 소수의 지배자들, 미래의 모든 독재자가 그의 표적이었다. 그의 책은 지구를 뒤덮기 시작한 디지털 벌통에 대항할 최종 병기이며, 그 지구를 끄집어내 올바른 방향을 지향케 하는 것이 나의 의무였다.

 

- 당시 나는 신문 읽기를 그만둔 상태였는데, 사회 관계망 서비스는 그런 나의 정보에 대한 일정한 욕구를 풍부하게 채워주었다. 내가 팔로잉한 러시아인 프로필 중에는 니콜라스 브랜다이스라는 인물이 특히 주의를 끌었다. 크렘린의 마법사라기보다는 카잔의 원룸에 처박힌 대학생 느낌이었으나, 나는 의혹의 눈으로 그를 읽어나갔다. 

 

- '낙원에서는 모든 게 허용된다, 호기심만 빼고.'
'친구가 죽으면 땅에 묻지 마라. 조금 물러나 지켜보라. 독수리들이 날아들 것이고 너는 새로운 친구들을 얻게 되리라.’
'건강한 가정이 진부함을 이기지 못해 어떻게 지리멸렬하는지를 지켜보는 것보다 세상에 더 서글픈 일은 없다.' 

 

- 거의 자동으로 나는 브랜다이스의 트윗에 <우리들>에서 끌어온 다음 문장을 댓글로 올렸다.

'나아가, 이는 관리자들의 고귀하면서도 고된 노고를 덜어준다. 그렇지 않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는가.' 

- 다시 책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방을 가로질러 태블릿을 던졌다. 다음 날 아침, 복수하듯이 쿠션 밑을 뒤져 녀석을 회수하려는데, 그 지긋지긋한 물건이 새 메시지의 수신을 내게 알려왔다. 

'프랑스에서 아직도 Z가 읽히는 줄은 몰랐는걸.'

브랜다이스가 이 글을 쓴 건 새벽 3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답글을 달았다.

'Z는 우리 시대 비밀의 왕이지.'

그러자 질문이 올라왔다.

'모스크바에는 얼마간 머무시나요?'

- 잠깐 망설였다. 이 어린 학생이 어떻게 내 이동 경로를 알았을까? 하긴 지난 몇 주에 걸친 내 트윗으로부터 유추해 냈을 법하다. 아마 행간을 읽다가 내가 이곳에 있음을 간파했겠지. 아직 정확히는 모르겠다 답하고는, 고독한 존재의 일상을 이어가기 위해 나는 도심의 차가운 공기 속을 파고들었다.   

 

- 가령 파리에서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참사라고 해봐야 과대 평가된 레스토랑을 만나든가, 어여쁜 아가씨의 무시하는 눈빛 아니면 벌금을 물어야 할 경우에 직면하는 것이 고작이다. 반면 모스크바에서 각오해야 할 불쾌한 경험의 스펙트럼은 어마어마하게 넓다.

 

- 황홀함과 동시에 약간은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통은 사람을 방심하게 만들 호사스러운 분위기가, 이곳에선 힘과 안정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무얼 기대하셨나요, 황금 수도꼭지라도?"
바라노프가 미소를 지었다. 빈정대는 투는 아니었고, 타인의 사고를 제어하는 데 익숙한 사람으로서 침착하기만 했다. 그는 아무 예고 없이, 아마도 옆문으로 불쑥 나타났다. 고가로 보이는 어두운 색의 부드러운 실내복 차림이었다. 더듬대며 대꾸하려 했으나, 러시아인은 그런 나를 안중에 두지 않았다. 

 

- "제 하루 일정표를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습관이 잘못 들었는데,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여기서 혼자만 그런 것도 아닌데요."
활기 넘치는 모스크바의 밤을 생각하며 던진 말이었으나, 순간 나는 그 말이 차르의 습관을 암시하는 소리로도 들릴 수 있음을 자각했다.
스치는 생각 하나가 그의 무거운 눈빛을 가로지르는 듯했다.

 

- 말을 마치기 무섭게 내게로 와 꽂히는 바라노프의 시선을 새삼 느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보통 사람들처럼 따분한 말이나 늘어놓으려고 예까지 온 건가?'     

 

- 우리가 건너간 방은 벽면 가득 방대한 서가로 빼곡했는데, 베네딕투스 수도원이라 해도 어울릴 만했다. 육중한 벽난로 속 이글거리는 불꽃이 수많은 고서를 비추는 가운데, 서가 전체가 번쩍번쩍했다. 
"고서 수집이 취미인 줄은 몰랐습니다."
명백해 보이는 사실은 일단 입에 올리고 본다.
"수집하는 게 아닙니다. 읽지요. 둘은 아주 다른 문제랍니다."
러시아인은 살짝 짜증 난 듯했다. 자고로 수집가들이란 치졸한 자들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통제력에 대한 강박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바라노프는 자신이 그런 사람 중 하나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사실 전부 제 손때가 묻은 책이라곤 할 수 없지요. 상당수는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으니까."

 

- "문제라면, 그가 모든 걸 너무 빨리 이해해서, 일찌감치 글로 써버리는 경솔함을 저지른다는 점이죠."
최근까지 빈번하게 작가의 글을 조회해 온 나는 이쯤에서 끼어들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나는 예술과 권력 사이의 어쩔 수 없는 긴장 관계랄지, 자먀찐의 떠돌이 기질, 아무리 혁명적이라도 이념의 승리란 자동으로 세속화의 길을 걷기 마련이라는 그의 신념을 뻔한 수사에 실어 두서없이 입에 올렸다. 바라노프는 학년말 발표회를 빠지지 않고 참관해 주는 가족 친구의 자상한 태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내 이야기 소재가 바닥을 드러내는가 싶자, 다시 입을 열었다. 

 

- "그래요, 맞습니다. 그런데 저는 뭔가 더 있다고 생각해요. 자먀찐은 스탈린을 멈춰 세우고자 했던 겁니다. 그는 이 자가 정치인이 아닌 예술가임을 익히 알고 있었어요. 미래가 두 가지 정치적 비전의 경쟁이 아닌, 두 가지 예술적 프로젝트에 따라 작동한다는 사실을 말이죠. 1920년대 자먀찐과 스탈린은 주도권을 놓고 서로 경쟁하는 전위 예술가였습니다. 당연히 서로 가용한 힘에서 상대가 되지 않죠. 스탈린이 인간의 피와 살로 이루어진 물감을 사용해, 거대한 국가라는 화폭에 그림을 그리면, 관객인 전 지구인이 경외심에 가득 차 수많은 언어로 그의 이름을 읊어대니 말입니다. 시인이 상상 속에서나 이루어보는 것을 데미우르고스는 역사의 무대에 그대로 구현하자 주장합니다. 이 싸움에서 거의 완벽하게 고립된 자먀찐은 그럼에도 새로운 질서에 저항할 것을 모색합니다. 그는 스탈린의 예술이 결국에는 집단 수용소로 귀결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신 인간의 삶'을 통제할 계획 속에 이단을 위한 자리는 없으니까요. 엔지니어임에도 자먀찐이 문학과 연극과 음악을 무기로 투쟁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습니다. 그는 권력이 강제로 불협화음을 압살할 경우, 사회 전체가 굴라크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문제임을 알고 있습니다. 비정상적인 화음이 억압당한다면 머잖아 세상은 박자 맞춘 행진을 위한 공간밖에 남지 않겠지요. 새로운 사회의 이념에 부합하지 않는 단조의 음정은 계급의 적이 될 것입니다. 장조! 오로지 장조입니다! 모든 길은 장조로 통합니다! 원래 가사가 없는 음악조차 가사에 철저히 종속되는 음악이 될 것이며, 마르크스레닌주의 영광을 기리지 않는 교향곡은 단 하나도 작곡되지 않을 겁니다."   

 

- "3막이 끝난 뒤 화난 스탈린은 자리를 박차고 볼쇼이 극장 밖으로 나갔습니다. 작곡가와 등장인물의 자유가 자신의 권력, 자신의 예술가적 세계 전략에 대한 정면 도전임을 알기 때문이었죠. 그는 곧바로 <프라우다>에 저 유명한 기사를 게재토록 지시했습니다. 등장인물들에게 너무 많은 여지를 허용해, 결국 '야수 같은' 행태를 보이도록 만들었다며 작곡가를 비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스탈린의 작품에서 야수 본능을 위한 공간은 오로지 1인에게만 허용됩니다. '꿈을 꾸어야 한다'라는 레닌의 지령을 문자 그대로 실행하되, 유일하게 허용되는 꿈은 스탈린의 꿈인 것이죠. 다른 모든 꿈은 제거되어야 합니다." 

 

- "생각해 보면, 20세기 초반은 스탈린, 히틀러, 처칠 같은 ‘예술가들의 거대한 격돌'이라고밖에 정의할 수 없겠어요. 그다음으로 도래하는 것이 관료의 시대입니다. 세상이 쉬어가고자 했던 것이죠. 그런데 이제 예술가들이 돌아온 겁니다. 주위를 둘러보세요. 당신이 어디에 있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지 말고 창조하라 떠들어대는 전위예술가들 천지입니다. 변한 것이 있다면, 그건 스타일일 뿐이에요. 옛날 예술가들 대신 이제는 리얼리티쇼의 등장인물들이 설칩니다. 단, 원리는 그대로죠."

 

- "사람들이 저런 걸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어떻게 받아들였기를 바라나요? 물론 좋지 않게 받아들였겠죠. 수족관('크렘린'을 빗댄 표현)에서는 도둑질, 살인, 반역 모두 용서됩니다만, 이탈은 그렇지 않습니다. 맙소사! 설마 하니 우리 입장에 살인도 불사할 무언가를 기대하는 건 아니겠죠? 크렘린의 아첨꾼들이 그런 당신을 용인할 리가 없어요." 
"차르는 어떨까요?"
"차르는, 또 다른 차원입니다. 그분은 사안별로 살펴서 용인하지요."
빈정거리는 빛이 러시아인의 어두운 눈동자를 가로질렀다.

 

- "맞는 말씀입니다. 그럼 문장을 이렇게 수정하죠. '내가 쓴 그 어떤 책도 권력의 진짜 게임을 담아내지 못할 것이다.'" 

 

- "당신에게 권력이란 무엇입니까?"
"질문이 너무 직설적이군요. 권력이란 태양과도 같고, 죽음과도 같은 것입니다. 정면으로 마주 볼 수가 없는 대상이에요. 특히 러시아에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여기까지 오셨으니, 시간 여유가 좀 있다면, 제가 이야기를 하나 해드리지요" 

바라노프는 몸을 일으켜 크리스탈 병에서 위스키 두 잔을 따랐다. 그중 한 잔을 내게 건넨 뒤, 그는 가죽 안락의자에 다시 앉았다. 잠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의 눈길이 자기 잔 위로 내려앉았다. 

 

- "어쨌든 나는 아르타반처럼 자신만만했지. 모두가 나를 칭찬했어. 콜랴, 차르의 친위대에 들어가다니 엄청나게 출세한 거다. 너의 부모는 참 좋겠어, 등등. 그런 어느 날, 오전 훈련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고관절에 금이 갔지 뭐니.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어. 친구들이 모두 한 마디씩 하더군. 콜랴, 참 안 됐다. 이제 막 무도회 시즌인데 말이야. 난 죽을 맛이었지. 동료들은 화려한 제복을 다려 입고 무도회장을 누비는데, 나는 침대에 누워 카드놀이나 하고 앉았으니. 그런데 갑자기 전쟁이 터진 거야. 동료들이 일제히 전선으로 떠나더군. 그러고는 첫 교전에서 독일군 기관총에 모조리 당했지. 딱한 녀석들, 내가 아직 회복 중이라 집에서 쉬고 있는 동안에 말이다. 물론 죄책감이 없진 않았어. 하지만 페테르부르크의 어여쁜 아가씨들이 앞다퉈 돌봐주는 맛도 무시할 수 없었단다." 
(역자 주 : 아르타반. 구세주의 탄생을 찾아 나선 동방박사 3인 외에 네 번째 동방박사로 전해지는 전설 속의 페르시아 현자.) 

 

- "혁명은 전례 없는 재앙이었어. 하지만 혁명이 없었다면 나는 평생 공무원으로 살든지, 잘해야 궁에서 눈칫밥이나 먹는 신세였을 거다. 내 입으로 공산주의가 좋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너도 알겠지만, 솔직히 어떤 체제에서도 사람은 행복할 수 있어... 왜 아니겠니, 바쟈? 그건 모르는 일이란다. 세상 일은 마음대로 통제가 안 되는 법이야. 게다가 어떤 일이 네게 닥칠 때 그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너는 알 수가 없어. 네가 살면서 무얼 기대하고, 애써 무언가를 갈망한다 치자. 마침내 그게 이루어져. 한데 얼마 지나지 않아 너는 깨닫지. 인생을 그로 인해 망쳤다는 걸.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해. 가령 네 머리 위로 하늘이 무너져. 근데 얼마 지나지 않아 너는 그나마 땅이 꺼지는 최악의 사태를 면한 걸 깨닫게 된다. 잘 들어, 네가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세상 일을 해석하는 너만의 방법이야. 괴로운 것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닌 현실에 대한 우리의 판단임을 자각할 때 비로소 너는 인생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희망할 수 있게 돼. 그렇지 않으면 계속 파리 떼를 겨냥해 대포를 쏘아대는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겠지." 

 

- "나는 그 모든 이야기를 하던 할아버지의 표정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는 진지하게 말하면서도, 늙은 꼰대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좀 걸리는지, 때때로 자조적인 말투를 섞었어요. 하지만 열심이었습니다. 그 세대 사람들은 자기들이 인생에서 깨친 걸 전수하는 일에 열심이에요. 중요하다는 걸 느끼는 거죠. 그런 식으로 사고하는 마지막 세대일 겁니다. 내 아버지 세대부터는 어떤 교훈이든 후대에 애써 전수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는 너나없이 지나치게 쿨하고, 지나치게 현대적입니다. 웃음거리가 되는 걸 무서워하며 살아요. 아무도 꼰대 노릇을 하려 들지 않습니다."  

 

- "나는 그에게 늘 감사하며 살 겁니다. 그때 이후 우리가 어둠 속을 더듬으며 살아간다는 생각이 나의 뇌리에 깊이 박혔거든요. 우리에게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우리 자신은 알지 못한다는 생각. 대신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부여할 의미를 놓고는 얼마든지 자유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것이, 결국엔 우리가 가진 유일하고 독보적인 힘이니까요."

 

- "이따금 그는 책 한 권을 손에 쥔 채 다락방을 나서곤 했습니다. '자, 이게 바로 <카사노바 회고록>이다. 네 아빠한테는 말하지 마.' 처음에는 그럭저럭 아이들을 위한 책들이었습니다. 라퐁텐의 우화집이랄지 세귀르 백작부인의 소설들. 그러더니 슬슬 인내심을 상실하더군요. 상대가 아이일지라도, 누군가와 어떻게든 책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색다른 것들을 하나둘 들고 내려오기 시작했어요. 그가 레츠 추기경의 회고록을 읽어보라 한 것이 내 나이 열 살이 넘지 않았을 때라고 기억합니다. 나에게 그 책은 일종의 무협 소설이나 마찬가지였어요. 당시 콩데 대공과 롱그빌 공작부인은 미키마우스와 아기곰 미샤보다 내게 더 친근했답니다." 
바라노프가 씩 웃더니, 서가의 넓은 구간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 책들 상당수가 그의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거의 전부가 프랑스 책이에요. 할아버지 표현으론, 문명의 최고봉이라고나 할까. 더구나 그가 아는 세계는 파리를 바라보며 형성된 것이었으니까. 구체적인 행동거지와 패션, 사소한 버릇까지 어처구니없게 따라 했었죠. 빈 회의의 유명한 러시아 협상가 네셀로드가 러시아 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걸 당신은 압니까? 제국의 대외정책을 40년간 이끌어왔으면서 자국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어요. 자기 자신 말고 타자가 되고자 하는 이 열정, 이 애정이란 대체 무얼까요? 그 애정의 대가는 어떤 식으로 지불받았죠? 한마디로 경멸. 언제나, 모든 시대에 걸쳐, 한결같은 경멸이에요!"

 

- "만약 당이 당신에게 다차를 하사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본인 돈으로 그것을 직접 구입했다면, 이는 당신 자신이 그걸 거저 받아낼 만큼 중요한 인물이 못 된다고 판단했다는 뜻이에요. 중요한 건 신분이지 현찰이 아닙니다. 물론 함정이죠. 특권이란 자유의 반대이며, 노예화의 한 형태이니까. 혹시 베르투슈카가 뭔지 압니까?” 
"모릅니다."
"교환기예요. 공산주의 체제에서 그건 가장 탐나는 물건이었죠. 왜냐면 보통 교환기와는 다르거든요. 그건 모든 거물급과 직통으로 연결이 가능한 특수 교환기였습니다. 베르투슈카의 번호는 네 자릿수에 불과했어요. 만약 당신 사무실에 그 교환기를 설치한다면, 당신은 성공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 기기를 소유한 사람들 이름을 수록한 총람이 매년 붉은 가죽양장을 갖춘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습니다. 명의자는 직접 번호를 조합하고 누구에게든 스스로 응답해야 합니다. 권력자들은 집과 다차, 자동차에 제각각 기기를 비치했지요. 베르투슈카 소지자들은 오직 자기 기기만을 통해 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일반 교환기를 사용하면 그건 거짓 검소함의 소치일뿐더러 애써 베푼 특혜를 경시한다는 표시로 받아들여졌어요. 잠재적 전복 세력인 자유사상가의 속임수라고나 할까." 

바라노프는 잠시 말을 중단하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모든 대화가 KGB에 의해 도청되었지만, 누구도 개의치 않았어요. 차르의 신료들이 어떻게 그런 굴종의 도구에 목을 매게 되었는지가 참 재밌습니다. 어느 밤 우연한 기회에 나는 그걸 이해하게 되었어요."

 

- "한 번은 내게 말하기를, 코냑을 한 상자 손에 넣은 적이 있다고 했어요. 그걸 병당 50달러에 팔려고 하자, 잘 안 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예 500달러로 단가를 정하니까, 사려는 사람들이 떼로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그 시절 모스크바가 그랬어요. 미하일은 물 만난 고기 같았을 겁니다. 소비에트 상점의 맵시 없는 저고리를 입고 다니던 친구가 얼마 지나지 않아 휴고보스의 짙은 자색 수트를 걸치는가 싶더니, 나중에는 새빌로의 맞춤 정장 차림으로 나타나더군요. 안경 낀 선량한 청년이던 그가 잘 나가는 엘리트를 위한 신간 잡지들에 하나둘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어요."

 

- "우리는 당시 딱 하나 있는 고급 호텔인 래디슨의 바에서 가끔 만났습니다. 내가 그의 무용담을 듣고 싶었던 이유는, 그와 같은 사람들을 소재로 구상 중인 희곡작품에 언젠가 써먹어볼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있어서였습니다. 하루는 저녁에 크세니야가 바람이나 쐬자며 찾아왔습니다. 바로 그날 크세니야는 미하일을 처음 만났습니다.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뒤, 한동안 말없이 그를 쳐다보더군요. 흡족해하는 용모에 세련된 티타늄 안경 너머 예리한 눈빛, 지저분한 내 스웨터와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스리피스 정장 차림을 말입니다."

 

- "크세니야가 다짜고짜 물었어요.
'그 끔찍한 넥타이는 어디서 난 거예요?'
그때 알아봤어야 했습니다, 이 첫 대면에서 이미 내 운명은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크세니야가 미하일을, 그의 저속함과 그의 에너지, 복잡하게 생긴 그의 시계와 영국제 구두를 선택하리라는 사실을 말이죠. 당사자인 그는 즉시 알아차렸습니다. 삐딱하게 웃으며 대답해 주는데, 나폴리의 어느 상점 이름이 끼어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내 여자가 되면 데리고 갈게라는 눈빛이었어요. 
그때 모든 걸 깨달았습니다. 그 즉시 깨친 거예요. 다만 오랫동안 그 모든 걸 스스로 믿지 않으려 했던 것이죠. 크세니야는 변덕스럽고 앙칼진 나의 여신이었으니까.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그 막돼먹은 성질을 감내해 오면서도, 악어가죽 가방과 크리용 특급 호텔 스위트룸이면 그녀를 고분고분한 여자로 만들기에 충분하다는 걸 상상조차 못 한 겁니다. 나의 고난에 찬시적 노고로부터 한 알 한 알 뽑아낸 진주를 나날이 그녀 발 앞에 바치면서도, 다이아몬드 팔찌 하나면 그보다 훨씬 더 오래가는 효과를 거둔다는 걸 몰랐어요. 우리 자신으로부터 진실을 감추기 위해 이따금 우리의 두뇌가 기를 쓰는 걸 보면 참기분이 묘해요. 온갖 단서가 눈앞에 빤히 드러나 보이는데도, 우리의 정신은 그것들을 주워 담으려 하질 않습니다.

그렇게 처음 대면한 후, 미하일은 뻔질나게 우리 집을 드나들기 시작했어요. 혼자 몸으로, 또는 제국 구석구석을 뒤져 피부 광택과 몸매 비율을 기준으로 고른 아가씨들을 동반한 채로 말이죠. 그러고는 자신의 벤틀리나 재규어 또는 거대한 메르세데스에 우리를 태워, 도심에 있는 조지아식 최고급 레스토랑으로 직행하곤 했습니다. 때로는 아예 하인 두 명을 데리고 와 우리의 작은 아파트 테이블 위에 값비싼 굴 요리와 캐비아를 차려놓곤 하는 것이었어요. 하루는 일본에서 직접 초빙해 온 스시 전문가를 집으로 데려와, 3 제곱미터에 불과한 주방의 보잘것없는 조리대 위에서 저녁 내내 참치와 방어를 조각조각 썰게 한 적도 있습니다. 
미하일이 이 모든 기적 같은 일을 우리 눈앞에 펼쳐 보일 때마다, 그의 태도 어딘가에는 성당의 초 한 자루에 불을 붙이는 장사꾼의 죄 많은 기색이 어른거리곤 했습니다. 그런 태도야말로 크세니야와 내가 일생을 헌신하기로 결정한 예술을,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그 나름 존중해서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어요..."

 

- "예측 불가능성이란 언제나 러시아적 삶의 중요한 속성 중하나였습니다. 다만 그 시대 유독 그런 현상이 극에 달했다는 것이죠. 상상해 보세요. 한창 피 끓는 시절, 대부분 명석하고 때로는 천재적이지만 늘 삭막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던 모든 남녀의 눈앞에, 불현듯 세계로 향하는 길이 활짝 열리는 겁니다. 이제 원하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떼돈을 벌 수도 있으며, 지구를 두루 여행할 수도, 모델들과 잘 수도 있게 되었어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세상에 존재한다고 짐작조차 하지 못한 모든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해진 겁니다. 머리가 돌만도 하게 생겼죠. 실제로 많은 사람이 이성을 잃었습니다. 폭력의 수준이 어마어마하게 급등했어요. 유치원생들에게 돌아갈 학용품에 반자동 소총을 무더기로 섞어 나눠준 격이라고나 할까. 터무니없는 이유로 너나없이 사방에서 총을 쏴댔습니다. 일반인을 보호해야 할 민병대가 오히려 날뛰는 경우를 보기도 했습니다. 폭탄을 터뜨리질 않나, 칼라시니코프(AK-47)를 난사하질 않나, 모스크바의 방사성 기포를 키우는 데 모두가 기여하고 있었어요. 수십 년 노화한 공산주의의 무력증에 허덕여온 온 나라의 축적된 열망이 바로 여기에 수렴하고 있었습니다. 패권을 이어받는다고 믿었으나 실은 아무것도 상속하지 못한 지식인들이 생각하듯, 중심에는 문화가 존재하지 않았어요. 중심, 거기엔 텔레비전이 있었습니다. 그건 마법의 추를 놀려 시간을 왜곡하고 욕망의 반사광을 사방에 투사하는 새로운 세계의 신경중추였어요." 

- "연극 무대의 경험을 텔레비전 프로듀서의 경력으로 전환하는 일은 증기자동차에서 람보르기니로 갈아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필터 없는 담배 연기 자욱한 주방 테이블에 앉아 뜨거운 차를 마시며 마야콥스키를 논하던 내가, 다음날엔 네덜란드 건축가들이 설계한 탁 트인 공간에서 카푸치노를 홀짝이며 파워포인트 프레젠테이션을 편집하다 말고 마라케시로 떠날 휴가 생각에 마냥 즐거워하는 것이었어요. 당시 막 민영화한 러시아 텔레비전 제1채널 ORT 스튜디오에서는 단순히 방송하는 게 아니라, 훗날 새로운 러시아인들에 의해 채택될 삶의 형태를 실험하고 있었습니다. '맙소사!'와 '맘대로!'로 점철된 나날을 지나, 이제는 와인 바에서 사시카이아와 샤토 마르고의 효능을 비교하며 논쟁을 벌이고 있었어요. 여자들은 저마다 <섹스앤더시티> 분위기를 풍겼고 남자는 죄다 조니 뎁이었습니다. 러시아인 특유의 모방 능력은 '버즈 buzz’를 퍼뜨리고 '하이프 hype'를 유발함으로써 '쿨 cool'한 것으로 간주될 모든 언행에 동원되었죠. 결과는 명백하게 우스꽝스러웠습니다. 그래도 현 단계에서 국가의 집단적 상상력을 재건한 건 우리였어요. 모든 기관이 붕괴한 상황에서 길을 가르쳐주는 건 텔레비전이었습니다. 낡은 체제의 잔해를, 변두리 지역의 임대 아파트를, 스탈린이 세운 고층 빌딩의 첨탑들을 챙겨, 그것들로 우리만의 리얼리티쇼를 꾸려나간 겁니다. 우리는 술주정뱅이 가장이랄지, 시골 할머니, 야심 많은 창녀, 니힐리스트 대학생 등 러시아 인민의 특징이 가장 뚜렷한 전형들을 선별하여 그들 각자에게 새로운 세계로 동참할 최선의 길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 "첫째가는 룰은 '지루해선 안 된다'였어요. 나머지는 다 부수적인 문제였고, 소비에트의 권력자들은 나라 전체를 답답한 권태의 장막으로 뒤덮어 질식시키지 못해 안달이었죠. 지금은 단조로움만 아니면 무엇이든 허용되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거의 매일, 이전보다 조금은 더 엉뚱한 아이디어를 새롭게 선보여온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어요. 가령 지방 어느 소도시의 주도권을 놓고 서로 다투는 두 갱단에 관한 리얼리티쇼는 어떤가요? 그럴듯합니다! 아가씨들을 대상으로 벼락부자 후리는 방법을 가르치는 학교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는요? 나쁘지 않아요! 주가의 흐름을 내다보는 점성가는? 마리앙투아네트 스타일 전문의 실내 장식가는 괜찮을까요? 그 역시 방송을 탔었죠! 
우리는 미디어의 본질에 부합하게끔 되도록 야만적이고 통속적인 텔레비전 방송을 추구해 왔습니다. 그 점에서 미국인들은 더 이상 우리에게 가르칠 것이 없었어요. 요컨대 '트래시 trash'의 경계를 넓힌 건 우리란 말이죠. 다만 아득한 시대, 러시아의 영혼이 심연으로부터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한때 우리는 애국적 내용의 대규모 쇼를 기획한 적이 있어요. 먼저 대중에게 각자의 영웅들 즉, 어머니 나라 러시아의 긍지를 일으켜 세운 인물들을 적시해 주길 요구했지요. 우리가 기대한 건 톨스토이, 푸시킨, 안드레이 루블레프 같은 위대한 인간이랄지 가수나 배우 등 얼른 떠오르는 유명인들의 이름이었어요. 한데 구부정한 자세로 눈을 내리까는 데 익숙한 무정형의 방관자들인 인민은 우리에게 무엇을 제출했을까요? 수많은 독재자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들의 영웅, 나라의 기틀을 다진 주인공들은 폭군 이반, 표트르대제, 레닌, 스탈린 등 피비린내 나는 권위주의 정치인들의 목록과 다르지 않았어요. 적어도 학살자가 아닌 전사로 평가받는 알렉산더 넵스키를 낙점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목록을 조작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제일 많은 득표수를 기록한 건 스탈린이었어요. 스탈린 말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때 비로소 나는 러시아가 결코 평범한 정상국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진정 회의적이라 할 정도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 "한 번은 노보쿠즈네츠카야역 쪽에 있는 오래된 궁전을 매입한 적이 있습니다. 성 클레멘트 성당에 인접한 긴 형태의 낮은 흰색 건물이었죠. 원래는 회사가 들어설 자리인데, 베레좁스키는 뭔가 더 특별한 것, 일종의 클럽이랄까, 자기 말로는 로고바자 그룹을 만들어 사업 파트너는 물론 이런저런 이유로 자주 만나야 할 모든 이에게 개방된 공간으로 꾸몄어요. 누구든 그곳에서 온종일 시간 때우며 고급 시가를 즐기고, 벨라루스 출신 기업가라든가 함께 작당하여 세계를 개조할 카자크 장군과 조우할 수도 있게 말이죠. 벽을 따라 거대한 수족관이 들어서는가 하면, 바이에른의 어느 성채에서 직접 뜯어온 벽난로와 닥치는 대로 끌어모은 이콘들, 상아 조각품들, 쪽매붙임 탁자들이 즐비하고요. 카펫 바닥에 놓인 골동품들 하나하나는 미학적 안목에서보다 금전적 가치를 따져 선별되었음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매력이 없지 않았어요. 성공적인 모험의 산물이랄까, 무장 강도의 은행 털기랄지 대박난 하룻저녁 블랙잭 테이블을 연상시키는 분위기였거든. 바냐 아저씨가 사는 집을 제임스 본드가 리모델링하면 그럴까. 그리 좋은 취향이 돋보인 건 아닐지 몰라도, 거기 드나드는 사람 대부분이 단 하나 욕망을 가졌던 건 사실이지요. 가능한 오랜 시간 머물고 싶다는.

 

- "그의 주변에선 일군의 정치꾼과 거간꾼들이 뒷거래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권력과 가깝게 지냄으로써 엄청난 이득을 누리다가, 바로 그 권력이 한순간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에 벌벌 떨기 시작하는 자들이지요. 재능이라곤 우두머리의 사소한 약점과 허영을 부추기는 게 전부인 그저 그런 자들이라, 보리스를 일종의 메시아로 보았던 겁니다. 그의 지성과 야망, 열정은 대통령의 딸에게 곧바로 호감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통해 늙은 곰의 호감까지 사버렸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베레좁스키는 하늘에서 떨어진 만나와도 같은 존재였어요. 아주 망한 건 아니라고, 비록 타격은 있었지만 대통령은 아직 해결할 힘이 있다고 설득에 나선 자가 바로 그였어요. 노인네 귀에 대고 속삭이는 그의 모습이 지금도 보이는 듯합니다. '선배, 러시아는 아직도 선배가 필요해. 선배의 용기, 그 진정성이 필요하다고... 설마 공산주의자들 손에 조국을 넘겨줄 생각은 아니겠지?'" 

 

- "그런 논거를 통해서, 베레스키는 우선 국영 텔레비전을 장악했고 대선 캠페인을 기획했습니다. 그리고 두 달 안에 옐친을 부활시키는 데 성공했어요. 만약 상대 진영이 선거에서 이길 경우 그 즉시 시베리아 집단 수용소가 다시 가동될 것이며 빵을 사기 위한 줄이 또다시 길게 이어질 거라는 암시를 퍼뜨림으로써, 경쟁자들을 모조리 퇴출시켰다고 하는 게 맞겠군요. 단 하나 문제는, 선거를 2주 남겨놓은 시점에 노인네가 또 심근경색을 일으켰다는 사실입니다. 그날 일정상으로는 국민을 향한 최종 연설의 녹화가 있는 날이었어요. 결국 녹화는 취소되었지만, 며칠이 지나 별의별 괴소문이 퍼지면서 대통령의 출현이 불가피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옐친 본인이 집무실로 출퇴근하기 어려운 상태라, 보리스는 크렘린의 집기들을 대통령 관저로 옮기라는 지시를 내렸어요. 그렇게 해서라도 현재 대통령의 정상적 직무수행이 가능하다는 느낌을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녹화가 이루어지던 날, 옐친은 의자에 똑바로 앉아있기 어려울 정도로 상태가 최악이었죠. 하는 수 없이 그의 등 뒤로 판자를 밀어 넣어 몸을 지탱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고도 연설 자체는 여전히 무리였어요. 대통령 입에서 나오는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있는 데까지 입술을 움직여 달라고만 요청했습니다. 모든 연설은 편집실에서, 이전에 했던 연설을 이리저리 짜깁기해서 만들어내고요."   

 

- "베레좁스키의 카메라들이 현장을 촬영했으나, 흰옷 입은 의사 두 명이 대통령을 부축하는 장면은 추후에 편집되어 사라졌지요. 물론 러시아에서 뭔가 필요한 해결책을 동원할 때는 늘 그렇듯 터무니없는 조작이 먹혀들었고, 옐친은 큰 표 차로 재선에 성공하게 돼요. 이후 늙은 곰은 완전히 무력한 상태에 빠졌고 베레좁스키가 러시아의 진정한 주인이 됩니다. 바로 그 시점에 그자가 내 앞에 나타난 거예요. '러시아 정치는 러시안룰렛과도 같아. 자넨 목숨 걸 준비가 돼 있나, 안돼 있나?'"  

 

- "'그야 그렇지, 자넨 제법 잘 나가고 있잖아. 내가 제안하는 건, 더 높은 차원으로 넘어가자는 거지.' 베레좁스키는 안경 너머 최대한 강렬한 시선으로 내 얼굴을 쏘아보고 있었습니다. '자네 이제 허구를 만드는 일은 그만두고 현실을 창조해 보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그때만 해도 그가 하는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곁에는 조지아 인이 고향 친구 같은 푸근한 표정으로 웃고 있더군요. 

- "지금 필요한 건 무엇보다 정당이네. 이 문제는 타티아나와 이미 얘기해 두었어. 우린 통합당을 창당할 거야. 그게 제일 시급해. 우익도, 좌익도, 공산주의자도, 자유주의자도 이젠 됐어. 사람들이 원하는 건 통합의 감정을 되찾는 거라고. 그들은 공산주의 그 자체가 아닌 하나의 질서, 말하자면 공동체 의식이랄지, 진정 거대한 무엇에 속해 있다는 자부심을 그리워하는 거야. 러시아인은 미국인과 다르고, 앞으로도 다를 것이네. 그들에겐 돈 열심히 모아 식기세척기나 구입하는 삶은 충분치 않아. 그들이 바라는 건 다 같이 하나 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지. 그를 위해 자기를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라고. 차량 구매 할부금 내는 문제를 넘어서는 비전을 그들에게 되찾아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말일세. 중요한 건 통합의 이상이야. 사람들의 권위를 회복시켜 주는 운동. 나는 벌써 그래픽 디자이너들을 고용해 일련의 상징작업을 의뢰한 상태라네. 자, 보라고, 바쟈. 어떻게 생각하나?"  
 

- "베레좁스키가 종이를 한 장 내밀었는데, 거대한 갈색곰의 옆모습이 고도로 양식화되어 있었어요. '자유주의자들이 여우, 공산주의자들이 매머드라면 우리에겐 곰이 있네. 곰이야말로 고귀하면서도 야성적이고 강력한 러시아의 영혼을 상징하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게 바로 이런 존재라고, 바쟈. 사람들이 더 이상 정치에 관심이 없다면, 우린 그들에게 신화를 제공하면 되는 거야!'" 

  

- "90년대 초 고르바초프와 옐친이 혁명을 일으켰지만, 다음날 대다수 러시아인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세상에서 눈을 떠야만 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던 거죠. 아메리칸드림과 유럽의 꿈이 무너지기에 앞서 소비에트의 꿈이 허물어진 겁니다. 당신들 세상에선 전혀 알아채지 못했을 거예요. 꿈이라는 것이 그처럼 초라하고 칙칙한 재료로 만들어졌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을 테니까. 가령 교수나 공무원 같은 선망의 직업에 앙증맞은 지굴리 차량, 감자밭이 있는 다차, 소치라든가 가끔은 바르나로도 떠나는 휴가, 흑해에서 다리를 첨벙 대고 난 뒤 친구들과 즐기는 바비큐 파티 따위, 그래도 그 세계엔 힘과 긍지라는 게 있었습니다. 군인과 초등학교 여교사, 트럭 운전기사와 지치지 않는 노동자라는 영웅들이 존재했어요. 거리와 지하철역의 수많은 포스터는 바로 그들에게 바쳐진 것이었습니다. 그런 것이 몇 달 지나지 않아 모두 쓸려 내려간 거죠. 이제 새로운 영웅인 은행가와 슈퍼모델들이 지배권을 주장하고 나섭니다. USSR의 3억에 이르는 주민들 생존을 떠받쳐온 원칙들이 일거에 전복되고 마는 거예요. 조국의 땅을 밟으며 성장했건만, 어느 날 갑자기 슈퍼마켓에 들어와 있는 겁니다. 당시 돈에 눈을 뜨는 일은 가장 당혹스러운 사건이었습니다. 아울러 주식시장 붕괴와 3천 퍼센트에 이르는 인플레이션으로 그 돈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사실 역시 깨달아야 했죠. 베레좁스키의 직관은 정확했습니다. 기후가 변하고 있었고, 피로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질서를 되찾고자 했어요. 문제는 이런 요구에 어서 답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누가 같은 생각을 하기 전에 말이죠." 

 

- "나로 말하자면 완전히 다른 행성에 살고 있었어요. 당시 나는 우리가 그 세상을 한참 지나왔다고 생각했거든. 정작 지나가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로 말이죠. 나는 일종의 눈도장을 찍는 차원에서 그곳을 방문하는 줄 알았습니다. 러시아에서 보안 요원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건 언제나 바람직한 아이디어니까요. 그런데 창문 하나 없는 4층 기나긴 복도를 걷는 동안, 보리스는 나의 그런 예상을 여지없이 깨트렸습니다. 그 태도로 보아, 이번 만남은전날 저녁 우리의 대화와 관련이 있었어요. 'FSB 국장이 참 좋은 재목인 것 같더군. 완전 무명인데, 노인네가 신뢰하는 사람이라네. 결정적인 순간에 능력을 증명해 왔다는 거야. 젊고, 능력 있고, 현대적이고 정확히 러시아가 필요로 하는 사람인 거지. 게다가, 이따 보겠지만, 겸손한 타입이라더군. 전임자들의 집무실을 자기가 차지하기보단 모두 박물관으로 개조했대. 시대가 바뀌었다고 말하듯이 말이야.'" 

 

- "비서실을 빠르게 통과한 뒤, 우리는 우체국장이 일하는 곳이라 해도 될 작은 사무실로 안내되었습니다. 방주인은 연한금발에 창백한 인상으로, 아크릴베이지 수트 차림에 회사원 같은 자세였어요. 아주 미세하게 냉소적인 느낌인데, 악수를 청하면서 '블라디미르 푸틴'이라 하더군요."

- "당시만 해도 차르는 아직 차르가 아니었어요. 오늘날 그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금속과 같은 날카로움이 애써 자제함에도 어렴풋이 드러나긴 했으나, 나중에 체득할 결연한 권위가 아직 동작 하나하나에서 우러나는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존재 자체가 어떤 안정감을 전파하고 있었어요."

 

- "'그건 알겠는데, 보리스, 그 주인이 하필 저라는 생각을 하게 된 이유가 대체 뭡니까? 저는 일개 공무원입니다. 평생 남의 지시를 따르고 의무를 이행하는 것 말고는 다른 일을 하지 않았어요. 대중을 상대로 연설을 한 것도 서너 차례에 불과할뿐더러, 모두 평범한 내용들입니다. 그동안 대통령의 일하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아왔는데, 일단 방에 들어가면 공기부터 킁킁 냄새 맡고, 그러고 나면 순식간에 모든 사람을 정복해 버립니다. 모두를 웃기고, 모두를 울리며, 마치 그 하나하나와 주방 테이블에 편히 마주 앉는 것처럼 소통하시더군요. 오늘도 마찬가집니다. 본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데도 그리하세요. 그걸 바라보는 사람들은 모두 감동합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제가 감히 말씀드리자면, 바로 그 점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푸틴의 차가운 시선이 그때 처음 내게로 향했습니다. 동시에 베레좁스키의 표정은 나더러 어서 말해보라는 투였어요."

- "'대통령은 두말할 필요 없이 독특한 개성을 가지신 분입니다. 우리나라가 낡은 소비에트 연방을 벗어나 오늘의 러시아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그의 인간적 자질은 핵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하지만 8년의 통치기가 끝나가는 지금 그의 몸 상태만 감안해도, 한물간 프로필이지요. 여론조사에 따르면, 현재 러시아인은 자신이 계속 사랑은 하나 더는 존경하지 않는 한 남자에게서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지니고 있습니다.' 
민감한 주제였어요. 하지만 FSB 국장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속성을 가지면서도 과거로부터 단절이 가능한, 무언가 다른 인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당신이 이 나라 총리가 되면 자연스럽게 합법적인 권위를 갖게 됩니다. 이는 지금 무엇보다 안정을 갈망하는 러시아인에게는 핵심적인 가치를 확보한다는 의미지요. 그런가 하면, 당신이 가진 이미지는 현재 대통령으로 있는 사람의 이미지와 매우 대조적인 메시지를 만들어낼 겁니다. 당신은 젊고, 활동적이며, 에너지가 넘쳐요. 당신은 국가 경영을 책임질 수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보안국에서 일했다는 경력은 당신에 대한 신뢰를 보장하는 기능을 할 겁니다. 말수가 적다는 것 역시 장점으로 작용할 거고요. 러시아인은 말만 앞세우는 떠버리들에게 질린 상태예요. 거리에 질서를 바로 세우고 국가의 도덕적 권위를 회복해 줄 든든한 일꾼이 자신을 이끌어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 "알다시피 러시아인은 자기의 지도자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답니다. 정치가 그렇게 비방의 대상이 될 때, 경험은 이점이라기보다 약점이 되고 말아요. 정치적 경험 부족이 오히려 당신의 강점인 이유가 바로 거기 있어요.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당신은 신선합니다. 러시아인은 당신이란 사람을 몰라요. 지난 시절 자기를 다스린 자들과 관련한 그 어떤 오류와 스캔들도 당신과 연계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물론 보리스가 말한 대로, 여론은 단시간에 형성되죠. 따라서 당신이야말로 현 상황에 적임자임을 러시아인에게 설득하는 데엔 몇 달밖에 시간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 당신에겐 그에 필요한 자질이 충분하다는 겁니다." 

 

- "'바로 그거요, 볼로자. 우린 확신하오. 그러니 당신이 결코 혼자가 아님을 잊지 말아요. 항상 당신 곁에는 내가 있을 것이고, 필요할 때면 언제든 지원과 조언을 아끼지 않을 테니까.'   
어쩌면 나의 착각인지 모르겠으나, 베레좁스키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푸틴의 눈동자에 뭔가 스쳐 지나가는 빛을 본듯했어요. 대화가 시작된 이래 요지부동이던 그 눈이 냉소의 빛으로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어쨌든 그날 밤 보리스는 아주 흡족한 기분에 취해 클럽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사람을 붙잡고 같은 말을 반복했어요.
'드디어 호주머니 안으로 들어왔어. 우승마를 찾았다고. 노벨 과학상 수상은 아니지만, 실로 대단한 일을 할 사람이라네. 배역에 딱 맞는 용모야. 이제 우리가 가진 홍보력에 맡기기만 하면 돼. 졸지에 알렉산더 넵스키의 재림으로 탈바꿈할 거라고. 그레타 가르보든지, 안 그런가, 바쟈?'
그는 어린애처럼 웃어댔어요. 아무래도 내가 전직 KGB 국장에게 미국의 늙은 여배우를 모범 사례로 추천한 것이 그에게는 너무 웃겼던 모양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같이 웃어주었죠. 하지만 솔직히 말해, 차르와의 첫 만남은 내 입안에 뭔가 묘한 맛을 남겼습니다. 정확히 짚어 말할 순 없지만, 베레좁스키가 떠들어대는 것보다는 훨씬 복잡한 문제라는 느낌이었어요."

 

- "우리가 매번 만나는 동안, 푸틴은 보리스에 대하여 늘 깍듯하게 예의를 지켰습니다. 특히 사업가로서의 조언을 접할 땐, 거의 공손하기까지 했어요. 그런데 베레좁스키 특유의 친한 척하는 태도가 앞선 채로 말을 걸어오면, 일순 짜증 섞인 그림자가 공무원의 눈빛을 흐리는 것이었어요. 급기야 앞으로는 한 발 한 발 자신이 가르쳐주는 대로 나아가면 된다는 말에 그만의 냉소가 섬광처럼 번득였습니다. 이런 자가 FSB 국장을 이끌 수도 있다는 생각이 엄청난 코미디로 느껴지는 모양이었어요. 베레좁스키는 분명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만, 나의 추측이 사실로 확인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며칠 뒤 편집실에 있는데 갑자기 내 핸드폰이 격하게 진동하는 것이었어요. '바딤 알렉세예비치? 저는 이고리 세친이라고 합니다, 블라디미르 푸틴의 비서지요. 국장님이 다음 화요일 점심 식사를 같이 하셨으면 합니다.' 예를 갖춘 초대이긴 했으나, 상대방의 목소리는 분명 거절을 염두에 두지 않는 투였습니다. 이 남자 비서, 베레좁스키와는 달리, 나는 그가 구소련 노멘클라투라의 기품을 갖추었다는 걸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 "안으로 들어가니 혼자 있는 푸틴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다른 테이블에 비해 약간 구석진 큰 테이블에 앉아 있더군요. 긴장을 푼 표정에 편안한 자세였습니다. 지난번엔 분명 의도적으로 드러내지 않은 게 분명한 권력자의 차가운 인상이 지금은 자연스레 배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앉은 채로 악수했고, 아까부터 방울뱀에게 흘려 옴짝달싹 못하는 생쥐처럼 그만 주시하고 있는 급사장에게 말했습니다.

'추천해 보시게, 파벨 이바노비치.' 
'수산물을 좋아하시면 슈플뢰르 무슬린 소스를 가미한 생자크 또는 불에 그을린 가재를 곁들인 솔카르디날을 권해드립니다. 육류를 더 좋아하시면...'
'카샤 한 그릇 주시오.'
'저도요.'
급사장은 떨리는 것을 겨우 참으며 신속히 물러났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푸틴이 요리에 대해서 전적으로 무관심하다는 것을 알았고, 나중에는 인생을 말랑말랑하게 해 줄 다른 즐거움들에 대해서도 차르가 아예 무감각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하긴 파우스트의 말처럼, '남에게 지시하는 자는 지시 자체를 행복으로 여기는 법'이니까요."

 

- "'나는 다섯 번의 심근경색을 거친 68세 노인이 아닙니다. 내가 그런 모험에 뛰어들기로 한다면, 어디까지나 나 자신의 힘을 믿어서지 다른 누구의 힘에 기대서가 아니에요. 나는 지시를 이행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긴 합니다. 어떤 면에서 그건 일하는 처지로 볼 때 더없이 마음 편한 조건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러시아 대통령은 그 누구에게도 머리를 조아릴 수 없거니와, 조아려서도 안 됩니다. 그의 의사가 어떤 식으로든 사적인 이해관계를 조건으로 결정된다는 것은 나로선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날 푸틴의 눈빛은 베레좁스키와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날카로웠습니다. 자기가 하는 말이 내게 불러일으킬 효과를 가늠하기 위해 집요하게 내 눈을 응시하고 있었어요.
'바딤 알렉세예비치, 당신이 성장한 배경을 고려한다면, 내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맞는 말이었습니다. 국가가 개인에 대하여 도덕적 우월성을 갖는다는 건 내 안에 깊이 뿌리내린 생각이었어요. 보리스와 그 수하들이 회전 경보등까지 켠 채 버스전용차선을 전속력으로 내달릴 때마다 내 기분은 몹시 불쾌할뿐더러, 모스크바 시민 대다수도 같은 감정이리라 생각하니까요." 

 

- "푸틴은 계속 말을 이었습니다.
'그날 당신의 분석이 참 신선했어요. 당신 경력을 조사해 봤습니다. 그 정도 능력이면, 지금이든 나중이든, 어떤 종류의 일이든, 내가 하는 일에 소중한 도움이 되어줄 수 있을 거라 믿어요. 대신 우리 사이에 하나는 명확히 해두어야 합니다. 비록 베레좁스키를 존경하긴 하나, 나는 그의 손 안에서 놀아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서 말인데, 바딤 알렉세예비치, 당신이 나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앞으로 나를 위해서만 일해야 합니다. 행정부에서 봉급이 책정되어 나갈 겁니다. 유감스럽지만 액수는 지금 받는 것보다 적어요. 그걸로 충분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보리스는 물론 다른 누구에게서도 이익을 취하든가 보너스를 탐한다면 나는 결코 용인하지 않을 겁니다. 돈에 관심이 있으면 민간 분야에서 계속 일하십시오. 국가에 이바지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포함한 그 무엇보다도 공공의 이익을 우선해야 합니다. 당신이 이 계약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앞으로 그 준수 여부를 확인할 방법은 내게 얼마든지 있다는 말씀은 굳이 드릴 필요 없겠지요.'"

 
- "시간을 낭비하는 중이었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텔레비전 프로듀서의 짧은 경력 중에도 내 눈치 봐가며 아첨하는 사람들에 익숙하다 보니, FSB 국장의 무뚝뚝한 제안 정도는 언제라도 제안자에게 반려할 참이었어요. 문제는 그의 분석이 정확하다는 점이었습니다. 내가 돈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 특히 푸틴이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한 그 과업에 참여하는 것에 비하면 돈 따위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어요. 두루뭉술 에둘러 말하지 않고 단번에 정곡을 찔렀던 겁니다. 이후, 차르가 항상 그런 식으로 일한다는 걸 알게 되었죠. 그는 남들보다 빨리 문제의 핵심을 파악했고, 주저 없이 목표로 돌진했습니다. 자잘한 예법과 형식을 챙기는 일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어요."  

 

- "'그 정치인 중 누구도 강력하게 맞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전쟁 아닌 전쟁을 원했어요. 인간적이랄까, 아메리칸스타일의 전쟁. 결과가 어떤지는 당신이 아는 그대로입니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손에 학살당하고 말았죠. 나는 당신에게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어요. 나는 분리주의자들을 패퇴시켜, 러시아 연방의 결속을 저해하는 저들의 위협을 영구히 분쇄하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저는 지정학적 문제를 논하자는 게 아닙니다,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사실 그쪽으로는 아는 게 없어요. 대신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그게 정치적으로 자살행위라는 겁니다.'
'바로 거기서 당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어요, 바딤 알렉세예비치. 당신은 선거 캠페인이 마치 파워포인트로 작성된 서류 하나를 놓고 두 경제 전문가 집단이 서로 다투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서구인들의 요설에 현혹된 시각일 뿐입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러시아에서 권력은 전혀 다른 무엇입니다.'
그날 나는 푸틴의 암시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이거 하나는 확실히 깨달았어요. 베레좁스키가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 내가 식사를 같이한 남자는 세상 그 누구의 가르침이 자신을 일방적으로 이끄는 걸 결단코 용인하지 않을 사람이었습니다. 함께 갈 수는 있겠죠. 적어도 내 의도는 그렇게 하자는 것이었고요, 일방적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보리스는 이런 실상을 최대한 빨리 깨달을수록 좋았어요."  

 

- "크렘린에 사는 자는 시간을 소유합니다. 성곽을 에워싸고 모든 것이 변하는 가운데, 스파스카야 탑의 장중한 시계 종소리와 대통령궁 경비대 소속 보초들의 순찰만 아니면 내부의 삶은 멈춰 선 것처럼 보입니다. 수 세기에 걸쳐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 누구든, 이반 뇌제가 모스크바 중심에 두려고 한 거대한 화석의 문턱을 넘는 순간, 갓난아기의 머리를 어루만지듯 여차하면 인간의 운명을 손쉽게 으스러뜨릴 제한 없는 권력의 손아귀를 느끼기 마련이지요. 그 힘이 동심원을 그리며 끝없이 퍼져나가는 가운데, 모스크바라는 도시의 마력이라 할 공포의 아우라가 거리 구석구석을 파고듭니다. 육중하고 흉물스러운 루반카, 중앙 도로를 에워싼 일곱 개의 탑과 모스크바 시티의 현대적 고층 건물들 그리고 루블카의 로코코 양식 ..."

 

- "총리의 집무실이 있는 층에는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위해 스무 개 정도의 방이 할당되었습니다. 푸틴 본인과 비서실, 경제와 군사 분야 참모들, 공보실 등. 우리 팀은 바로 그곳에 자리를 잡았죠. 다들 밤낮 가리지 않고 일했습니다. 그 살균 처리된 공간이 우리가 가진 야망의 격렬한 기운을 잠재우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이었어요. 대신 불과 몇 미터 밖에선, 평범한 사무원의 삶이 평온하게 흘러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랏일이라는 것이 결국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소수의 인원이 작은 방에 모여 미친 듯이 일하고, 그 밖의 모든 사람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것. 서로 교류는 거의 없습니다. 가끔 냉소의 빛과 더불어 선망의 시선을 느낄 때가 있긴 하죠. 그렇게 되기까진 숱한 인구 이동을 거쳐 풀이 다시 돋아나길 기다려야겠지만 말입니다." 

 

- "마침 그때, 다행히도 국가 수뇌부에 해답을 가진 누군가가 있었어요. 과거를 돌이켜, 사람들은 보통 차르에게 초자연적인 능력을 기대하기 마련이나, 사실상 뜻밖의 상황을 장악하는 능력이야말로 힘 있는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자질이지요. 상황을 이끌어간다고 떠벌리는 게 아니라, 강력한 손으로 장악하는 것 말입니다." 

- "푸틴은 대중 앞에서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대중은 분명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했어요. 당시 우리는 카자흐스탄을 국빈 방문 중이었습니다. 차라리 잘된 거죠, 크렘린 황금돔이라면 전혀 안 어울렸을 테니까. 더 단출한 장소, 즉석에서 군사 회의를 열 만큼 긴박한 분위기가 필요했거든요. 기자회견은 몇 가지 기술적인 질문들로 시작했습니다. 구조 기한이랄지 조사 현황에 관한 문제들. 총리는 특유의 침착하고 정확한 태도로, 추호의 감정 없이 답변에 임했습니다. 그 금욕적인 공무원의 자세에 러시아인도 이제 서서히 마음을 열어가는 중이었지요. 그런데 어느 기자가 다소 논쟁적인 질문 하나를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테러에 대한 응답으로 당신이 그로즈니 공항에 대한 폭격을 지시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조처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위험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나요?'"

- "순간, 오늘에 와서도 내가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푸틴은 잠시 침묵했어요. 그런데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존재는 마치 액체 질소 탱크 속에 몸을 담갔다 나온 것처럼, 유난히 강고하게 응집되어 있는 겁니다. 금욕적인 공무원이 갑자기 죽음의 천사로 변신해 있었어요. 나로선 난생처음 직면한 상황이었습니다. 결코, 최고의 연극 무대에서조차, 나는 그와 같은 변모의 현장을 목격한 적이 없었어요. 
그는 질문한 기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내뱉었습니다.
'그런 질문에 일일이 대답하기도 지겹네요. 우리는 테러리스트들이 어디 숨든 그들을 박살낼 겁니다. 그들이 공항에 있으면 공항을 박살 낼 것이고, 만약 뒷일을 보고 있다면, 표현이 좀 그렇습니다만, 화장실까지 쫓아가 죽여버릴 겁니다.'"

 
- "말하고 보니, 왠지 진부하고 약간은 저속하게 느껴질 만도 한데, 그때 그 말들이 대중에게 어떤 충격을 주었는지는 상상도 못 할 겁니다. 러시아인은 오랫동안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주목하게 된 겁니다. 그들의 아버지, 할아버지들에게 아주 익숙한 태도와 말투였거든. 거대한 안도의 한숨이 모스크바의 거리와 벌벌 떠는 외곽 지대, 시베리아의 끝없는 평야와 숲을 단번에 휩쓸어버렸습니다. 그 정상에 질서를 보장할 수 있는 누군가가 다시 나타난 거예요."

 
- "그날부로 푸틴은 명실상부한 차르가 되었습니다. 문득 할아버지의 가르침이 떠오르더군요. '뭐가 문제인지 알겠니?' 하루는 시골집 근방의 숲 속을 함께 산책하면서 그가 내게 물었어요. '인간의 눈은 숲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만들어졌단다. 그래서 움직임에 민감한 거지. 우리 시야의 끄트머리에서 살짝 움찔하는 것조차, 그게 무엇이든 눈은 즉각 포착해 정보를 뇌로 전달한다. 반대로 보지 못하는 것도 있는데, 그게 뭔지 알겠니?'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어요. '움직이지 않는 거란다, 바쟈. 세상의 온갖 변화 가운데 변하지 않고 똑같은 것을 식별하는 훈련은 되어 있지 않은 거야. 그게 큰 문제지. 생각해 봐, 변하지 않는 것들은 거의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들이거든.'
나는 그 가르침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 세대 누구도 그런 생각을 해본 사람이 없어요. 차르가 정치를 얘기할 때 절대로 숫자를 동원하지 않는 건 그런 이유에서 입니다. 그는 삶의 언어, 죽음의 언어, 명예와 조국의 언어로 말합니다. 사람을 통치하는 일은 돈을 벌기엔 너무 게으르고, 록 스타가 되기엔 너무 소심한 비겁자 무리에게 맡길 만한 활동이 아니에요. 그들은 명망을 쫓는 회계원, 아파트 한 채의 관리 차원에서 정치를 바라보는 미숙아들일 뿐입니다. 결코 그래선 안 되죠. 정치는 오직 하나의 목표를 추구합니다. 인간의 공포심에 응답하는 것. 국가가 두려움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지 못할 때 그 존재의 근거 자체를 문제 삼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될 때조차 일어나지 않던 원초적 공포가 모두의 의식을 파고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권력의 수직성만이 만족스러운 해답이었어요. 험난한 세상, 무방비로 노출된 인간의 불안을 잠재울 유일한 방책 말입니다. 그렇기에 폭발물 사태 이후, 무엇보다 이를 복원하는 것이 차르의 당면 과제였죠. 묘책에 관한 서구적 논리, 인간의 근본욕구를 충족시킬 시스템 구축을 두고 서로 통계 곡선을 들이대는 관료들의 논쟁을 탈피하는 일 말입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그 사명 하나에 매달리게 됩니다. 밤낮으로 간단없는 심연의 정치에."  

- "나로선 전혀 예상치 못한 연설이었어요. 그렇게 하기로 미리 결정했을 것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어쨌든 거기 모인 사람들은 얼음물을 한 바가지 머리에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그 순간 차르와 군인들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전란의 한복판에서 우애와 긍지로 똘똘 뭉친 한 가족과도 같았어요. 잠시 후 차르는 장교들이 호위하는 가운데, 메달과 사냥칼을 병사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지금 여러분은 단지 나라의 명예와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러시아의 해체를 중단시키기 위해 이곳에 있는 거예요.' 
그날 저녁 뉴스에서 러시아 시청자들은 지난 수년간 구경해 본 적이 없는, 아주 강인하고 결연한 병사들의 표정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다들 눈가가 촉촉했어요. 이유는 모처럼 자기들을 이끄는 지도자의 존재를 실감했기 때문이지요."

 

- "그때부터 나는 막연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스타니슬랍스키가 말하는 위대한 배우의 종족이란 바로 푸틴 같은 인간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알다시피 연기자는 세 가지 유형이 존재하지요. 첫째는 본능적 재능을 가진 연기자로, 정상 컨디션일 때는 대중을 휘어잡지만 어쩌다 일진 시원찮은 날엔 어색하고 과장된 연기로 대중을 실망시킵니다. 그런 유형의 배우는 혼자서 작품 전체를 망쳐버릴 수도 있어요. 둘째는 체계적인 배우로, 늘 연구하고 호흡을 연습하며, 밤새워 동작과 억양을 반복합니다. 한마디로 전자와는 반대의 경우인데, 그런 배우의 연기를 보면서 열광에 휩싸이는 일까진 없겠지만, 적어도 실망은 하지 않을 거예요. 언제나 자기가 해야 할 몫은 해낼 것이고, 어떤 상황에서든 정해진 수준의 연기는 모두에게 예측이 가능할 테니까. 이상 두 유형 중 푸틴은 어느 쪽도 아닙니다. 위대한 정치가가 거의 그렇듯, 그는 세 번째 부류에 속해요. 여기서 배우는 스스로를 연출해내기에 굳이 연기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배역에 완전히 몰입하다 보니 극의 줄거리는 자신의 사연이 되고, 혈관 속에 그 모두가 녹아 흐르지요. 이런 류의 현상에 맞닥뜨린 연출가는 아무 할 일이 없습니다. 그저 무대 밖에서 지켜보기만 하면 돼요. 배우의 삶이 펼쳐지는 것을 괜히 끼어들어 방해하지 말고요. 그저 가끔, 가볍게 응원하는 것으로 족합니다. 이번 선거운동은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내가 그 모든 걸 총괄하는 연출가였겠죠. 스스로 그러기를 자처하는 보리스의 표현대로라면, 전략가가 맞겠고요. 한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미 푸틴이 있어 모든 게 일사불란 움직였어요. 그 혼자 힘으로."   

    

- "베레좁스키는 전갈에 물린 것처럼 움찔했어요. 짧은 순간, 나는 그가 사람을 잘못 봤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나의 착각이었어요. 보리스는 너무 멀리 가 있었어요. 백전백승의 내기 경험과 무한 권력의 세월이 도살장을 코앞에 둔 송아지처럼 그를 뒤룩뒤룩 살만 찌게 만들어놓은 겁니다. 더 이상 힘의 상관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할 능력이 없었어요. 눈앞에 펼쳐지는 객관적인 역학 관계를 냉철히 분석하기보다, 개인적인 인간관계로 모든 걸 판단하는 버릇에 더 매달렸습니다. 그의 지원이 차르가 부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건 사실이에요. 덧붙여 말하자면, 푸틴은 결코 배은망덕한 사람이 아닙니다. 권좌에 오르고 나서 자기를 도운 사람을 소금 광산으로 중노동 보내 은혜를 되갚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점에서 베레좁스키는 정확히 봤어요. 차르는 감사의 의미를 알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다만 권력자라는 점이 문제죠. 그는 권력에 대한 취향과 감각, 욕구를 지니고 있습니다. 보리스 입장에서, 일단 권좌에 오른 차르가 자기와 기꺼이 권력을 나눌 거라고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었는지 나는 당최 모르겠어요." 

 

- "이삭 바벨의 전선 이야기 중 <나의 첫 번째 거위>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습니다. 1920년의 원정 중 붉은 군대에 입대한 어느 유대인 젊은이의 첫째 날을 이야기하고 있지요. 전선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문맹의 카자크 기병들로 이루어진 연대 동료들에게 찍혀 괴롭힘을 당하기 시작합니다. 이유는 그의 안경과 같잖게도 지적인 분위기 때문이었어요. 한 명이 말없이 일어나 그의 가방을 거리 한복판에 내던지고는, 돌아보며 다짜고짜 야유를 퍼붓는 식입니다. 젊은이는 어떻게 했을까요? 그는 울지도 따지지도 않았어요. 다만 얌전히 지나가는 거위 한 마리를 재빨리 낚아채 구둣발로 대가리를 으깬 다음, 몸통을 검에 꽂아 그에게 저녁 줄 생각이 전혀 없는 주방장 앞에 들이밀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걸 요리해 주시오.' 그때부터 카자크 연대는 그를 동료로 받아들입니다. 비록 안경 쓴 애송이 유대인일지 모르나, 자신을 존중하게 만들 줄 아는 제법 강단 있는 친구였던 것이죠. 
자, 그렇다면 베레스키는 나의 첫 번째 거위인 셈입니다. 나는 무대 출신이고 아버지는 지식인이었으니, 내가 아무 쓸모없는 종자가 아님을 카자크들에게 납득시켜야 했어요. 그에게서 텔레비전 방송국을 빼앗는 것이 가장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베레좁스키 세력은 다수파가 아니었어요. 기껏해야 49퍼센트에 불과했죠. 나머지는 국가 소유였습니다. ORT 사장 앞으로 전화를 걸어 앞으로는 로고바자그룹 명의가 아닌 크렘린의 지시를 받으라 통보하는 것으로 충분했어요."

"좀 잔인하군요."
"천만에요, 이런 말이 있죠, 망나니의 동정심은 그 칼질의 정확도로 가늠할 수 있다. 정말입니다, 한데 보리스는 그걸 좋게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텔레비전 연출자들의 전화받는 태도가 하루가 다르게 썰렁해졌습니다. 그가 아끼던 기자는 즉시 해고당했고요."

 

- "버림받은 권력의 현장보다 더 서글퍼 보이는 것은 없습니다. 그곳엔 살과 피를 가진 채 여전히 집착하는 사람보다 과거의 망령이 더 강력한 잔영으로 남거든요." 

 

- "정치란 참 희한한 직업입니다. 이 바닥에서 경력을 쌓으려면 지역 기반부터 단단히 다져야 합니다. 가정주부, 철도원, 소상인의 바람은 무엇인가를 헤아리고 있어야 해요. 그러다가 정상에 오르면, 세계 무대로 내던져집니다. 난데없이 이 세상 거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죠. 한데 그들은 상당 기간 그 위치를 점해오면서 서로 안면 익힐 시간을 가졌고, 기본 코드까지 익힌 터라 저들만의 울타리를 갖추고 있습니다. 반면 당신은 깜짝 공연을 위해 무대 위로 올려진 신인 배우에 불과하거든요. 당신 나라에서 당신은 존경이나 두려움의 대상일 수 있겠죠. 하지만 이곳에선 막내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로에서 다시 시작해야 해요. 걷는 법, 인사하는 방법부터 모든 걸 다시 배워야 하는 겁니다. G8 회의, 유엔총회, 다보스 포럼 각각의 고유한 관례가 있어요. 당신의 새로운 친구들이 친절하게 다가오면서 저마다 도움의 손길을 내밀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착각하면 안 돼요. 그들 모두 당신 엿 먹일 궁리를 하고 있을 테니까." 

 

- "월도아스토리아에 도착했을 때, 우리 말고도 몇몇 다른 대표단이 같은 호텔에 투숙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크렘린 의전팀이 객실 이십여 개를 예약한 상태였는데, 우리 머리 위로 최고급 호화객실 세 개 층 전체를 사우디아라비아 대표단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유엔총회가 열리는 주간은 권력의 향연이자 굴욕에 흠뻑 젖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곳은 욕망의 즉각적 만족에 익숙한 사람들이 기다림의 미덕을 다시 배우는 곳이었어요. 방탄차량과 경호대의 행렬이 2번가 전체에 끝없는 병목현상을 만들어냅니다. 유리건물의 붐벼 터지는 복도들에선 테스토스테론으로 무장한 각국 대표단이 정신없이 서로 부딪치고요. 황금빛 회의실에 익숙한 정부 수반들은 중요 협상을 위해 임시 가림막 뒤에 바짝 붙어 앉아 대기합니다. 그 한복판에서 미국인들은 기필코 자기들의 우위를 입증할 방법들을 찾아내는 것이었어요. 하루는 CNN으로 가기 위해 호텔을 나서는데, 우리 대표단에 배정된 보안요원이 잠시 멈출 것을 요구합니다. 그의 해명인즉, '일시 정지입니다. 미합중국 대통령이 움직이면 다른 누구도 걸음을 뗄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 일행이 다시 움직여도 좋다는 허락을 받기까지 인도에 서서 기다리던 차르의 표정을 지금도 나는 기억합니다." 

 

- "'첩보원은 어떤 일들을 하나요?' 생방송에서 그가 던진 질문에 차르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기자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정보를 수집하고 그걸 종합해서, 결정권자가 제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보고하지요.'
'그 일이 맘에 들던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첩보 기관에서 일하다 보면 시야가 넓어지고, 사람 다루는 기술과 관련한 특정 자질을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게 배운 것 중 하나가 덜 중요한 것과 더 중요한 것을 가리는 기술이죠. 그런 점에서 첩보 활동은 내게 매우 유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잘 들었습니다! 잠시 광고를 보고 <래리 킹 라이브> 푸틴과의 대담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채널 고정!'
당시만 해도 우리는 모든 걸 너무 심각하게 다루는 경향이 있었어요. 한데 뉴욕에 가보니 각자 알아서 즐기는 장터 축제인 겁니다. 어쨌든 나는 맨해튼이 하나의 거대한 보드게임 판 같다고 생각했어요. 참가자들이 각자 위치에 따라 지하철과 노란 택시 또는 검정 타운카를 이용해 이리저리 오고 가는 세상. 심오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끝없는 반복이 일상이지만 에너지로 가득 찬 도시. 우리 행렬은 모스크바 특유의 위엄까진 아니더라도 의연한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하루 일정은 전시회 베르니사주에서 갈라 디너쇼로 이어지곤 했어요. 모든 곳에서 미국 특유의 개방적인 환대를 받았습니다. 단, 그 이면에는 거의 언제나 상대를 낮춰보기에 가능한 호의가 깔려 있었죠."  

 

- "클린턴과의 정상회담 역시 그럭저럭 같은 양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대통령이 친히 우리가 묵은 월도프아스토리아로 찾아오는 성의를 보였으니까요. 그는 노련한 티를 내면서 자신을 소개했어요. 두 손으로 상대의 한 손을 마치 보아뱀처럼 틀어쥐는 식의 그 유명한 악수와 더불어, 해 저물 무렵이면 난롯가에 앉아 인생 이야기를 들려줄 것 같은 중서부 토박이의 선량한 미소와 약간 쉰 듯한 목소리.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었어요, 소탈해 보이는 이면에 냉혹하고 치밀한 메커니즘이 숨어있다는 것을. 예일과 옥스퍼드를 나온 수재 클린턴, 미국 최연소 주지사 클린턴, 온갖 스캔들에도 살아남아 항상 정적을 무찌르고 마는 정치동물 클린턴 말입니다. 무엇보다 소비에트제국의 붕괴를 가차 없이 밀어붙이고 유럽의 절반을 탈취하면서 거의 우리 국경으로까지 나토를 확대하여, 독수리들이 그나마 남은 우리의 생산 시스템을 조각조각 나눠 먹게 만든 대통령 클린턴. 한데 그런 그가 웬일인지 첫 대화부터 실수를 저지르더군요. 다짜고짜 차르에게 옛 친구 보리스 옐친의 안부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질문이 우리 중 누구도 소화해내지 못할 굴욕의 기억을 되살리는 짓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거죠. 앞서 얘기했지만, 러시아인은 희생에 익숙한 만큼 존중받는 데도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역사를 통틀어 러시아의 지도자들은 언제나 세계적으로 중요한 거물이었고, 그들보다 우월함을 강변하는 존재는 있을 수 없었어요. 루스벨트가 스탈린을 만났을 때는 물론이고, 가령 닉슨 대 브레즈네프라든가 레이건 대 고르바초프와 같이,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양국 두 정상의 만남은 항상 두 거대 권력의 맞대결이었지 다른 경우를 생각할 수는 없었습니다. 장벽이 무너진 뒤, 그 모두가 우리에게 조금은 어려워진 게 사실이에요. 그렇지만 형식이라도, 형식의 존중만이라도 있었다면 우리 처지가 지금 같지는 않았을 겁니다. 옐친은 클린턴식 온정의 덫에 걸려 완전히 거꾸러졌습니다. 딴에는 좋은 친구를 만났거나 러시아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데 도움 줄 꽤 능력 있는 동맹을 찾았다고 믿었겠지만 말이죠. 옐친은 경계를 풀었어요. 그러자 악수에서 시작해 등 두드리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러시아인의 망막에 치욕의 징표로 각인될 일련의 끔찍한 장면들이 일사천리 펼쳐졌습니다." 
 

- "리모노프는 최근 일부 유럽 국가가 도입한 '아빠출산휴가'를 인간이 어디까지 비참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철저히 길든 짐승의 처량함을 상징하는 제도로 보고 있었어요.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자동차를 주차하고, 별로 힘들지 않은 지루하기만 한 일을 반복하면서도 휴가는 바닷가에서... 그렇게 삶을 낭비했음을, 그것만이 진정 씻을 수 없는 죄임을 깨닫기 전에 목숨이 다하는 거지.'
나는 그동안 에두아르트가 나름의 논리를 펴면서 책과 인터뷰, 혁명전위대를 향한 연설로 줄기차게 되풀이해 온 주장을 수없이 들어온 몸입니다. 하지만 그날 그는 신문에서 봤다며, 우리가 뉴욕에 다녀온 일을 궁금해하는 것이었어요.
'소풍은 어땠어?'
나는 화제를 돌리고 싶었습니다. 에두아르트를 상대로 국제정치를 논할 생각은 없었거든요. 

'뻔하죠! 거기가 어떤지 당신도 잘 알잖아요. 그냥 재밌었습니다.'
'뉴욕, 재밌지. 미국 놈들만 안 마주치면.'
나는 웃음을 터뜨렸는데, 그는 늘 그렇듯 심각했습니다. 역설에 역설을 거듭할지언정, 리모노프는 농담하는 성격이 아니었어요."

 

- "차르의 얼굴이, 나중에 배워 알게 된 무기질의 강도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나는 어떤 코멘트도 삼갈 때임을 직감했습니다.
'자네 같은 지성인들은 사람들이 잊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겠지. 대숙청과 학살을 더는 기억하지 않는다고 말이야. 그러니까 1937년에 대하여, 굴라크와 스탈린주의의 희생자들에 관하여 허구한 날 논문이다 책이다 써 재끼는 것 아니겠어. 자네들은 스탈린이 학살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인기가 높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그건 착각이야. 그는 바로 학살을 저질렀기 때문에 인기가 높은 거라고. 그는 적어도 도둑과 반역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는 거지.' 
잠시 숨을 고르더니 차르가 말을 이었습니다.
'자네 소비에트 열차에 연달아 사고가 나기 시작할 때 스탈린이 어떻게 조처한 줄 아나?'
'모릅니다.'
'철도국장 폰 메크를 붙잡아 태업 혐의로 총살형에 처했지. 그걸로 철도 문제가 해결되는 건 물론 아니었어. 오히려 악화한다면 모를까. 하지만 그는 분노의 배출구를 만들어주고 있었던 거야. 시스템이 제 몫을 다하지 못할 때마다 같은 일이 반복되었지. 육류가 바닥나자 스탈린은 농업인민위원 체르노프를 검거해 재판에 회부했네. 그러자 이 자는 신기하게도 체제를 뒤흔들기 위해 소와 돼지 수천 마리를 도살하고 반란을 책동한 게 자기 자신이라며 고백하는 거야. 얼마 후엔 달걀과 버터가 동이 났지. 이번에는 국가정책위원장인 젤렌스키를 검거하는데, 이 자 역시 얼마 못 버티고 못과 유리 조각을 섞어 버터저장고에 살포했다는 둥, 트럭 50대 분량의 달걀을 깨트렸다는 둥, 줄줄이 털어놓았어. 분노의 파도가 약간의 위안과 뒤섞여 온 나라를 휩쓸었네. 모든 게 설명되었으니까! 태업은 무능함보다 훨씬 설득력 있는 해명이거든, 바쟈. 혐의가 발견되면 죄인은 처벌받기 마련이네. 정의가 이루어지고, 누군가는 대가를 치르며, 질서는 바로잡히지. 그게 곧 문제의 핵심이라네.'
차르가 다시 숨을 고르는데, 다른 상황이었으면 마치 연극에서처럼 나도 서슴없이 얘기를 거들었을 겁니다. 잠시 후, 그의 어조는 한층 가라앉아 있었어요.

'내일 새벽 자네 친구 호도르콥스키에 대한 체포를 지시했네. 방송에도 내보내기로 했어. 러시아 민중의 신성불가침한 분노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걸 모두가 보아야 하니까.'
그 순간 나는 망연자실했습니다. 지난 몇 년 사이 미하일은 특별히 깨끗하진 못할지언정 이 나라 최고의 부자 경영인으로 우뚝 선 인물이었습니다. 자신을 실리콘밸리 출신 너드로 소개하면서 선량해 보이는 얼굴과 안경, 티셔츠 차림을 내세우는 그는 각종 자선재단과 고상한 아이디어로 가득한 명연설 덕분에 유명했지요. 신문, 방송 모두 그를 찬양하면서 러시아의 신개념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일종의 아이콘으로 내세우기 바빴어요. 그런 그를 갑자기 일개 범법자로 감옥에 처넣는다는 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차르가 늘 생각할 수 있는 영역에 머물지만은 않는 존재인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나는 이런 조치일수록 불가역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점을 한순간도 의심해 본 적이 없습니다. 책상 건너에서 나를 응시하는 사람은 의견을 묻고 있지 않았어요. 자신의 결정을 통보할 뿐이었습니다. 내가 할 일은 후속 사태를 관리하는 거였죠. 아무리 러시아 언론이지만, 모든 매체가 초유의 사태 운운하며 떠들썩할 겁니다. 우리야 최대한 파장을 축소하면서 일종의 행정조치가 시행된 것으로 알리겠으나, 그렇다고 크게 바뀔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 정도 선에서 전력을 다할 뿐이죠. 만약 미하일이 러시아 민중의 분노 배출구가 될 운명이라면, 아마 완전한 굴욕을 감내해야 할 겁니다. 금융가의 골든보이, 고아와 과부를 위해 은혜를 베푸는 자선가로서 그를 담은 사진은 이제 그만. 지금부터 나는 죄수복을 입고 철창신세를 진 호도르콥스키의 이미지만으로 세상을 채워나가야 할 거예요. 메시지는 선명해야겠죠. <포브스>의 표지 모델이 감옥의 죄수로 전락하기까지, 차르가 결심할 경우, 한 걸음이면 족하다! 공인으로서 미하일이 치러야 할 몰락의 장면은 다른 올리가르히에게 경고로 받아들여질 것이며, 선량한 러시아 민중의 허기를 채워줄 분노의 먹거리가 되어줄 거예요."

 

- "어쩌면 당신은 내가 그 작업에 기를 쓰고 달려들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라이벌 친구 욕보이는 일을 즐겼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아니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옛날 당한 일을 되갚겠다고 생각하면 결국 그 일에 볼모로 잡혀 살게 됩니다. 나는 미하일과 크세니야를 생각에서 지운 지 오래예요. 둘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도 그저 덤덤할 뿐이었어요. 그들을 다시 떠올려야 한다는 건 분명 즐거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저항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습니다. 결정하기가 가장 어렵지, 한번 결정하면 목적을 달성하는 것 말고는 일절 마음에 두지 말아야죠." 
   

- " 즉각적인 반응은 '돈이 모든 걸 해결해주진 못하는구나'였습니다. 당신들 서구인이 보기엔 절대적 금기를 건드린 셈이죠. 정치인이 수갑 차는 거야 별것 아니겠으나, 억만장자라면 얘기가 다르지 않습니까. 서구사회는 돈보다 중요한 건 세상에 없다는 원칙에 기반할 테니까. 재밌는 건 당신들이 우리 자본가들을 계속해서 '올리가르히'라 부른다는 사실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올리가르히는 오직 서구세계에만 존재하는데 말이죠. 유럽의 억만장자쯤 되어야 모든 걸 굽어보면서 정치도 법도 좌지우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세상에서 빌 게이츠라든가 머독, 저커버그 같은 이의 수갑 찬 모습이란 상상 초월 그 자체죠. 그런데 러시아에서는 억만장자가 자기 돈을 얼마든지 자유롭게 사용할지언정, 그 돈을 통해 정치권력보다 우위에 설 수는 없습니다. 러시아 민중의 의지, 나아가 그를 체현하는 차르의 의지는 어떤 사적 이해관계보다 우선하거든요."  

 

- "미하일의 몰락을 잘 만든 텔레비전 포맷으로 다듬어내는 걸로 내 본분은 다하는 셈입니다. 어렵지는 않았어요. 힘 있는 자의 머리통이 땅바닥을 구르는 광경은 언제나 대중의 가려움을 긁어주는 명장면이 되어왔으니까. 이유야 어떻든, 거물의 처단은 다수의 평범한 인간들 마음을 위로해 줍니다. 저잣거리 보통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테니까요. '내가 저만큼 잘 나가보진 못했지만 적어도 쇠고랑 차는 신세는 아니지...' 어느 시대에나 공개처형은 각광받는 오락거리였습니다. 처음 기요틴이 도입되었을 당시 혁명언론지를 보면, 파리 시민들 왈 '목 잘리는 순간이 잘 보이지 않으니, 차라리 우리의 쇠스랑을 돌려달라'며 불만을 토로하더라는 겁니다. 머잖아 그 장치가 얼마나 효율적이고 사형수에게 어떤 부수적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지를 깨닫자 비로소 신기술의 묘미를 즐기게 되었다는군요. 우리 솔직히 한번 말해봅시다. 세상에 민중보다 더 피를 좋아하는 독재자가 있을까요? 오직 단호하면서도 정의를 표방한 대표자의 무력 행사만이 그들의 분노를 누그러뜨릴 수 있지요."  

 

- "결국 10월 초 선거는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 다음날 차르는 텔레비전에 나와 밤새 한숨도 못 잤음을 고백했어요. 결과를 지켜보느라 그런 게 아니고, 처음 분만하는 애견 래브라도 코니를 돌보느라 그랬다는 겁니다. 기르는 개가 없는 나야 선거 당일 집에 틀어박혀 보드카 한 병과 역사책을 수북이 쌓아놓고 홀로 밤을 지새웠지만 말이죠. 지난번 차르와 마지막으로 면담한 후, 나는 내가 맡은 역할을 다른 관점에서 재고하기 시작했습니다. 30년대를 관통한 스탈린식 소송에 관한 기록물을 파고들던 나는 할리우드 메가프로덕션의 중요성을 간파하게 되었어요. 쇼비즈니스를 지향하는 소비에트 노선이라고 할까. 검사와 판사가 수개월에 걸쳐 시나리오를 작업하면, 피의자는 제작자가 행사하는 다양한 압력에 고무되어 그 결과물을 연기합니다. 누구는 지켜야 할 가족이 있고, 누구는 감춰야 할 비밀이 있으며, 누구는 단지 정신적 협박과 육체적 고통에 민감하니까요. 결국 모두가 맡은 역할에 충실하기로 하면, 그때부터 기대하던 공연이 펼쳐집니다."

 

- "어떤 세부 사항도 제작자의 감식안을 벗어날 수 없어요. 현실과 허구를 뒤섞는 건 비난받을 일이 아닙니다. 방청이 허용된 대중, 특히 그중에서도 집에 처박혀 라디오와 <프라우다>로 정보를 접하는 이들은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의 영화를 볼 때와 같은 감정 상태를 거쳐갑니다. 악에 직면한 걱정과 불안, 공포의 감정을 말이죠. 그러고 나면 선의 승리, 갈등의 해소에서 비롯하는 깊은 안정감을 누리게 돼요. 이야기 구성의 근본적인 룰만 존중한다면, 결단력 있게 행동할 줄 아는 권력의 창의적 능력에 한계란 없습니다. 한계라는 것 자체가 진실에 대한 존중이 아닌, 허구에 대한 존중에서 오거든요. 우리가 중요하게 여길 동력은 여전히 인간의 분노입니다. 당신네 보수적인 서구인들은 인간의 분노가 해소될 수 있다고 생각하죠. 경제성장과 기술 발전, 신속한 택배 시스템과 보편화된 관광 및 레저가 민중의 분노를 잠재운다고 믿고 있어요. 인간성의 근원에 뿌리를 둔 신성불가침의 소리 없는 분노를 말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어느 시대, 어느 체제에서든 좌절하고 실패하고 파산한 자는 있기 마련입니다. 스탈린은 분노가 구조적 상수라는 사실을 이해했어요. 때에 따라 그 상수가 늘거나 줄 수는 있어도, 결코 사라지진 않습니다. 그건 사회를 지배하는 심연의 흐름 같은 거예요. 그것에 저항하기보다 잘 관리하는 것이 항상 중요합니다. 모든 걸 파괴하면서 한꺼번에 터져 나오지 않게 하려면, 원만한 흐름이 가능한 통로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필요가 있어요. 체제 자체를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분노가 표출될 수 있는 적절한 상황들을 조성하는 겁니다. 분란을 강제로 진압하는 건 투박한 짓입니다. 분노가 쌓이지 않게끔 통로를 열어주는 것이야말로 더 복잡하면서 훨씬 효율적인 조치죠. 오랜 세월에 걸쳐 내가 하는 일이 다름 아닌 그런 거였어요."   
 

- "기회가 닿으면 동물원에 가서 사자와 원숭이를 한번 관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 같이 어울려 잘 놀면, 서열이 명확하고 우두머리가 모든 걸 통제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는 각자 자기 구석에 처박혀, 불안하고 겁에 질린 모습들일 거예요. 권력의 수직축을 복구함으로써 푸틴은 궁정 무도회를 조율할 하나의 '기준'을 제시한 셈입니다. 유구한 세월을 이어 내려온 규칙에 참가자들의 오르내리는 기세로 결정되는 리듬이 하나의 현란한 군무로 펼쳐지는 것이죠. 차르의 집무실에 이웃한 사무실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와 직통라인으로 전화를 주고받으며 일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외국 나갈 때 수행하는 인원이 있는가 하면, 소치 휴가를 동행하는 인력이 있습니다. 정부에 작은 자리 하나 차지하는 이들이 있고, 공기업 임원으로 눌러앉는 자들이 있어요. 어떤 사소한 징후도 허투루 넘길 것이 없습니다. 만찬 테이블 좌석 배치라든지, 대통령 접견실에서의 대기시간, 경호 인력의 머릿수 등등. 권력은 미세구조로 세밀하게 구축됩니다. 궁정인의 강박적 주의력을 따돌릴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어요. 서열의 결정은 디테일에 있다는 것, 아무리 작은 실수도 건물의 균열을 넓힐 수 있다는 사실에 누구보다 정통하기 때문이죠. 오직 아마추어만이 그런 요소들을 홀대합니다. 주의할 만한 점들이 아니라고 보는 거죠. 프로는 어떤 디테일도 주의를 소홀히 할 만큼 사소하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 "그러니까 시스템이 부패한 것 아니냐고요? 자기는 3백 달러짜리 진을 입으면서 우리가 소유한 고급주택, 요트, 전용 제트기를 집요하게 고발하는 모스크바의 블로거들처럼, 장관이 기업 수장까지 겸임하는 제도를 문제 삼는 겁니까? 그러고 보니 윈스턴 처칠에 대한 소문이 떠오르는군요, 해군성 장관이던 시절 '앙샹트레스'라는 이름의 고급요트를 소유했다는 이야기. 스위스인가 코트다쥐르에서의 환대에 보답하는 의미로 그 요트에서 여러 억만장자 친구들을 초대해 선상 파티까지 열었다고 하죠. 1차 세계대전 중에 웨스트민스터 공작이 자기 롤스로이스를 쓰도록 공짜로 빌려줬다질 않나, 미국 여행에서는 사업가 친구들이 자기들 전용 기차 객실을 마음껏 사용하도록 배려해 주었다고요. 캘리포니아에 갔을 땐, 산시메온에 있는 윌리엄 랜돌프 허트의 집에 머물거나, 숙박료를 누가 지불한지 모를 빌트모어의 스위트룸에서 지냈다는 거 아닙니까. 이런 모든 일 때문에 그가 20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국가 지도자라는 사실이 방해받나요? 아니죠,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국가적 인물은 왜 꼭 우체국 직원처럼 살아야 합니까?

공인이면 반드시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아주 비윤리적인 발상입니다. 국가는 그 나름의 격조를 갖춰야 해요. 국가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사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별 볼 일 없는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나랏일을 한다면서 어딜 가나 자선을 구걸하느라 손 벌리는 사람이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권력의 최대치와 부의 최대치를 하나로 집약한 신개념 엘리트층을 만들어냈습니다. 누더기를 걸친 당신네 정치꾼들과 무기력한 사업가들이나 가질 법한 콤플렉스 없이 세계 어느 테이블이든 당당하게 착석할 수 있는 강한 사람들이에요. 현실 세계에 강력한 임팩트를 줄 수 있는 수단들, 요컨대 권력이면 권력, 돈이면 돈, 불가피한 경우 폭력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도구 사용이 가능한 완벽한 인간형 말입니다. 전성기 고대 로마의 귀족층이나 역대 모든 세계제국의 창설자들이 활약하던 시대에서 곧장 날아온 듯한, 이런 종류의 엘리트층을 맞상대할 역량이 당신네 사이비 지도자들에겐 없어요."

 

- "권력이 필연적으로 부패하는 것은 아닙니다. 잘 다룰 줄만 알면, 권력은 인간을 좀 더 나은 존재로 만들 수 있어요. 모든 우두머리는 무엇보다 충성을 요구하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대부분 나약하고 평범한 자들에게서 그것을 구한다는 점이에요. 이는 참으로 중대한 우를 범하는 것인데, 그런 자들이 가장 먼저 사람을 배신하기 때문입니다. 나약한 사람은 성실함이라는 사치를 누릴 여유가 없습니다. 신뢰성도 마찬가지예요. 충성심이란 그것을 스스로 음미하며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의 특성임을 차르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마음으로부터 충성심을 키워낼 수 있을 만큼 자신감 넘치는 강한 사람들. 그렇기에, 다른 어느 곳보다 러시아에서의 권력 투쟁은 특히나 거칠고 종잡을 수 없는 과정을 거쳐 이루어집니다. 언제 어느 때 무슨 일이 닥칠지 몰라요. 게임 자체가 혹독한 만큼 가차 없는 룰이 적용되는 것이죠."

 

- "서둘러 그리로 손을 뻗는데, 식당 쪽에 하나로 모인 엄청난 에너지가 마치 방사선파처럼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꼈어요. 얼른 돌아보자, 진원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대형 유리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린 가운데, 다른 별에서 온 듯한 완벽한 여인의 자태가 서 있는 거예요. 살짝 그을린 피부에 무릎을 드러낸 새하얀 아마포 튜닉이 아름다운 몸매를 감싸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회색빛 눈이 아무 감정 없이 나를 바라보았어요. 다름 아닌 크세니야였습니다. 눈부신 매력은 전혀 퇴색하지 않고, 세월과 더불어 더 강렬해졌더군요. 그 가운데 일종의 여전사 같은 위엄이 내가 익히 알던 변덕스러운 치기를 대체하고 있었습니다. 베레스키의 식당 안에서 크세니야의 미모는 전투 대형을 펼치는 군대의 아름다움을 연상시켰어요. 우리는 미소 하나 없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과거나 현재나 모든 상황이 서로를 적인 것처럼 행동하게 만들고 있는데, 막상 나는 그녀에게 어떤 적의도 반감도 품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보다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부적을 되찾은 기분이었어요. 세월이 흘렀으나 그 마력을 조금도 잃지 않은 부적 말이죠." 

 

- "그들이 보기에 당면 과제는 무엇보다 상시 대응책을 마련하고, 서구 침투 세력을 몰아내며, 선동자들을 무력화하고, 미디어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는 것이었어요. 물론 이런 조치들도 쓸모는 있겠으나, 개인적으로 나는 그 효율성에 회의적이었습니다. 이런 경우 덮어놓고 강제력을 동원하는 것은 사안을 너무 쉽게 다루는 태도일 수 있으며, 이는 곧 상상력의 부족을 드러내면서 지속적인 문제 해결을 어렵게 하는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내 접근법은 달랐어요. 마침 그 무렵 나는 리모노프와 자주 만나면서 한두 번 마주친 흥미로운 인물이 떠올랐습니다. 알렉산더 잘도스타노프라는 자인데, 키가 거의 2미터에 달하는 거구에 항상 검은 가죽옷을 입고 어깨에 닿는 장발을 휘날리는 사내였어요. 겉보기엔 그저 모터사이클 폭주족으로, 에두아르트가 데리고 다니기 좋아하는 건달 중 한 명일 뿐인데, 특별히 내 관심을 끈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리모노프와 그의 '인민위원'들과 동석한 저녁 식사 자리였어요. 다들 돼지고기 넓적다리 튀김을 배가 터지도록 먹어대는 가운데, 그만 혼자서 자그마한 크기의 삶은 새우와 강낭콩 샐러드 그리고 석류를 깨지락거리고 있는 거예요."

 

- "그 둘은 결코 모순되는 게 아니니까. 오히려 그 반대지. 
'사실상, 혁명을 불가능하게 만들자는 거군요.'
이 친구, 들뜬 것처럼 보여도, 처음부터 내가 탐색하고 있던 멀쩡한 정신을 전혀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
'혁명할 필요가 없게 만들자는 거지, 알렉산더. 체제가 혁명을 품어 안으면, 혁명할 이유가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 "그렇게 해서 나는 조금씩 조금씩 그 모두를 우리 편으로 포섭했던 것이죠. 모터사이클 폭주족과 훌리건, 아나키스트와 스킨헤드족, 공산주의자와 사이비 광신도들, 극우와 극좌 그리고 중도를 표방하는 거의 모든 이들. 이 모두는 젊은 러시아인의 감각적 요구에 열렬히 반응할 수 있는 능력들을 갖추고 있었어요. 우크라이나에서 일이 터지고 난 뒤, 우리는 분노의 힘을 아무 감시 없이 방관할 수가 더는 없었습니다. 진정 강한 체제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권력을 독점하는 것만으론 부족했어요. 권력에 대한 전복의 가능성까지 독점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요컨대 또다시 현실을 재료로 활용하여, 보다 차원 높은 게임의 형식을 구축하는 일이 관건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살면서 내가 한 일이라곤, 세상의 탄력성이랄까, 역설과 모순으로 치닫는 그 무궁무진한 성향을 조절하는 게 전부였어요. 그리고 이제 서서히, 내가 연출해 온 정치극이 틀을 잡아가면서 하나의 여정이 필연적으로 마무리되는 장면을 선보이고 있었습니다.  
각자 맡은 역할을 기꺼이 연기했다고 해야겠네요. 그중 상당수가 재능을 가진 것도 사실입니다. 내가 끌어들이지 않은 유일한 부류는 대학교수들, 90년대의 파탄에 책임 있는 테크노크라트들, PC운동의 기수들, 트랜스젠더 전용 화장실 설치를 놓고 갑론을박 서로 다투는 진보주의자들이에요. 그런 자들은 차라리 상대편이 가져가도록 놔두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사실 딱 그런 사람들로 상대 진영이 구성될 필요가 있었어요.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내가 캐스팅하지 않았어도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최고의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들이었습니다. 제3 외곽 순환도로만 지나도 낯선 땅에 들어선 것처럼 긴장하는 모스크바 소시민들, 안락의자 하나 갈아치울 배포도 없을 그들- 하물며 러시아를 경영하는 일이라니... 입만 열면 그들은 우리의 인기를 공고히 다져주었어요. 박사 학위의 거만함이 묻어나는 경제학자들, 90년대를 살아남은 올리가르히, 인권 전문가들과 과격한 여성 페미니스트들, 환경운동가들, 완고한 채식주의자들, 게이 활동가들... 우리를 위해 하늘이 내리신 만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 그룹에 속한 젊은 여자들이 푸틴과 총주교에 대해 온갖 상말을 내질러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을 발칵 뒤집어놓은 덕에 우리의 여론조사 지지도가 5포인트 상승했다죠."  

 

- "그날 저녁 내가 파티 장소로 들어서자, 그는 세계적 명성에 한껏 매료된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비단 그 명성은 체스플레이어의 그것만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누군가 내가 온 것을 그에게 귀띔한 듯했습니다. 
'아, 바라노프 당신이군요! 크렘린의 마법사, 푸틴의 라스푸틴! 당신의 그 주권민주주의를 사람들이 뭐라 하는지 아십니까? 전기의자도 의자인 것처럼, 주권민주주의도 민주주의인가 보다, 라고들 하더이다.'
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말을 받았어요. 

'적어도 러시아인이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군요! 카스파로프, 진지하게 묻는데, 그렇다면 당신은 주권민주주의가 무얼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내가 정치학자는 아니나 체스 플레이어로서 말하자면, 적어도 체스 경기와는 상반되는 어떤 것이 아닐까 싶군요. 체스에선 규칙은 그대로고 승자만 바뀌는 데 반해, 당신의 주권민주주의는 규칙이 바뀌고 승자는 늘 똑같아요.' 
챔피언의 받아치는 솜씨는 인정할 만하더군요. 우리를 에워싼 속물들이 마치 콘서트장의 그루피처럼 일제히 몸을 들썩여댔습니다."

 

- "조롱을 간파한 카스파로프는, 깐깐하기로 유명한 캅카스의 아들답게, 입술을 비죽여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아는지 모르지만, 체스 경기만큼 격렬한 승부가 없어요.'
'교수님은 지금 무슨 얘기 중인지 이해 못 하시는군요. 정치는 그보다 무한히 더 격렬합니다.'
'하지만 그건 게임이 아니지요.'
'아마추어에겐 게임이 아니겠죠. 근데 프로에겐 진정 해볼만한 유일한 게임입니다.'
카스파로프는 미친 사람 대하듯 나를 빤히 쳐다보았어요. 소름 돋는 걸 억지로 참는 모습이었습니다."

 

- "'전 세계 어느 시대에나 남자와 여자는 사랑과는 아무 상관없는 이유로 결혼이란 것을 해왔어. 그런 결혼에서 계약을 통해 행복을 누린다는 얼토당토않은 기대를 온전히 가꿔나가기는 무리지. 사람들은 그저 결혼을 통해서 안정을 찾고 가족을 만들 뿐이야. 나머지 문제는 이리저리 맞춰 꾸려가는 거라고... 18세기 프랑스인들이 저녁 만찬 자리에 남편과 아내를 동시 초대하지 않았다는 거 알고 있어?'
'듣던 중 반가울 소릴세! 이제 보니 우리 만남의 여파가 있긴 하네 그려.'
실은 반갑긴커녕, 크세니야가 빨리 화제를 바꾸길 바라는 마음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어요.
'재밌는 건, 그 나라 커플은 남의 배우자와 사랑에 빠지는 일이 종종 있었다는 거야. 당대의 조금은 불편한 진실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랬대...'
'맙소사!'
'대부분은 그런 일이 없었다고 말하는 게 옳겠지. 결혼은 안정된 토대를 전제로 작동해 왔어. 사랑은 밖에서 찾았던 거고.'
'하긴 남편은...'
'아내도 마찬가지야, 아주 진보적인 사회에서는. 설마 소련시절 세상이 어떻게 굴러갔는지를 잊은 건 아니겠지? 남편과 아내가 서로 다른 시기에 휴가를 갔지. 공공연하게 벌어진 일이라고, 남편용 휴가 시설과 아내용 휴가 시설이 따로 있을 정도였어. 각자 그때를 기회로 삼았던 거야... 사랑해서 결혼한다는 기괴한 생각, 그건 말이야, 19세기 소설하고 할리우드 영화가 만들어낸 어처구니없는 망상이라고. 사랑은 오래가지 않거니와 아예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것, 또는 살다 보면 더 나은 사랑을 만나기도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 경우까지 포함해서 말이지.'
크세니아의 순발력 있는 냉소주의는 언제나 나를 매료시켜 왔어요. 한데 이번에는 날이 좀 무디더군요.
'넌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때 날 버렸던 거야.'
'내가 달리 어쩔 수 있었겠어, 바쟈? 너는 응석받이 청년이었고, 자칭 예술가입네 하면서 너 자신을 감추기 일쑤였어. 그런 넌 내 출신 성분을 알고 있지, 바쟈. 이미 밝혔다시피 떠돌이 집시 계집. 내가 원한 건 아니었어. 그건 자유가 아니었거든, 끝없는 방황일 뿐. 엄마는 자신을 반항아로 생각했지. 무조건 자유롭길 원하셨어.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천하에 둘도 없는 루저에게 의존하기 시작한 거야. 당신을 지켜주겠다고 했다나. 그때 난 깨달았지, 진정한 자유는 순응주의에서 나온다는 걸. 너도 잘 알아둬, 일단 체면을 유지해야 정작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거라고. 당시 나는 안정이 필요했어. 물론 경제적 안정이지. 그러나 단지 그것만은 아니야.'"

 

- "급속도로 진행된 이 과정은 길 위의 모든 걸 깨끗이 쓸어버렸어요. 그들만의 정서와 소싯적 기질 그 무엇도 쏟아져 내리는 돈벼락에 남아나지 못했습니다. 차르의 친구들 각자가 가장 깊은 속내까지 환골탈태한 겁니다. 그런데 푸틴과 맺은 암묵적 계약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굴라는, 옛날처럼 순박한 마음으로 만나자는 거였어요. 어차피 차르가 그들 배를 불려준 건 과거의 인연 때문이지, 그들로선 언감생심인 특출난 재능을 가져서가 아니거든요. 푸틴의 등극을 정당화해 줄 여러 남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들의 장점은 그때그때 그가 가는 길에 얼굴을 내밀었다는 정도. 그의 연민, 나아가 신뢰를 얻어낼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만나를 자기 바구니에 계속 담아 넣으려면 차르의 온정에 꾸준히 기대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단지 아침만으로는 그게 녹록지 않다는 것이 문제죠. 그들은 푸틴 입장에서 일정 정도의 진실성을 기대할 만한, 적어도 기대하는 척이라도 할 만한 친지들이었습니다. 그 진실성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과도하게 부푸는 차르의 자의식과 함께 한계가 드러나리라는 걸 다들 알았지만 말입니다. 실제로는 옛 친구 특유의 투박한 진실성을 보여가며 그냥저냥 좋은 소리만 해주면 되는 거였어요. 실없는 농담과 장난을 일삼으면서도 중요한 문제를 놓고는 절대로 차르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 없는, 그가 자기 생각을 표명할 땐 누구보다 든든한 지지자 노릇을 다하는 친구들의 모습. 페테르부르크에서 내가 종종 목격한 우스꽝스러운 장면들은 바로 그런 고도의 곡예술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 "그 와중에 내가 알게 된 사람이 예브게니 프리고진이에요. 거울과 램프들이 과도하게 배치된 어느 레스토랑 객실에서 네다섯 명이 모였을 때입니다. 푸틴은 가게 주인이라며 그를 내게 소개해주었는데, 대머리에 수더분한 미소를 띤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었어요. 실제로 식사 내내 그는 요리가 나올 때마다 친절한 설명을 붙이고 프랑스산 특급 와인을 따라가며 맡은 역할에만 전념했습니다. 그 어떤 미식 욕구도 만족시킬 준비가 된 철두철미한 자세로 차르를 모셨어요. 결혼식에나 맞을 은빛 넥타이 차림으로 우리에겐 무척 세심한 자세, 종업원에게는 쌀쌀한 말투였습니다. 식사가 끝날 때쯤 돼서야 푸틴은 그에게 합석을 권했어요. 술기운이 슬슬 오른 대화는 유럽의 쓸 만한 몇몇 에스코트 알선 업소에 관한 주제로 깊이 빠져든 상태였습니다. 그런 서비스를 이용해 봤을 리 없는 차르는 토론에 참여하지 않고 즐거운 표정으로 관망만 하고 있었어요. 물론 친구들은 그 표정이 조금이라도 변할 눈치면 재빨리 주제를 바꿀 준비가 단단히 되어 있었죠. 프리고진은 자연스럽게 어울렸습니다. 지배인다운 침착함은 어디 가고 오랜 친구들로 이루어진 마법의 동아리에 딱 어울릴, 설마 하면서도 재밌어하는 태도였습니다. 처음에 그는 발레아레스 제도에서 밤에 호기 부렸던 감칠맛 나는 일화를 풀어내 약간의 성공을 거두었어요. 그러다가 대뜸, 최근 큰맘 먹고 벌인 사업 이야기로 방향을 트는 것이었습니다. 대규모 루콜라 농장을 만들 요량으로 흑해 연안에 광활한 농지를 구매했다고요.

'도대체 러시아에선 괜찮은 루콜라를 찾아볼 수가 없다니까.'

그는 친구들을 둘러보며 반은 진지하게 반은 농담조로 계속 구시렁댔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차르가 말을 자르더니 나를 돌아보며 이러는 겁니다. 
'보라고, 예브게니는 늘 앞서간다니까. 국제문제에 관해서도 관심이 많은 친구지. 내 생각엔 요즘 우리가 논의 중인 사안들에서도 뭔가 도움이 되어줄 것 같아. 안 그런가, 제냐?' 
그 말에 레스토랑 업자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습니다. 푸틴의 말이 이어졌어요. 

'둘이 한번 이야기해 보는 게 좋겠네, 바쟈.'
당신이 하나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차르는 결코 명확하게 무언가를 말하지도 않지만, 즉흥적으로 무얼 말하는 법도 없다는 사실. 만약 그가 굳이 누군가에게 어떤 제안을 한다면, 예컨대 자신의 정무 보좌관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레스토랑주인을 만나 러시아의 국제정치 문제를 논의하는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여야 할 경우조차, 그 아이디어는 진지하게 고려되었고 빈틈없이 실행에 옮겨져야 할 거란 얘깁니다." 

 

- "그날 밤 프리고진은 아주 흡족해하며 다음날 나와 만날 약속을 정했습니다. 저녁 내내 유지하던 갱스터 요식업자의 인상에는 변함이 없었고요. 그런데 아침에 픽업하러 호텔로 찾아왔을 때 비로소 나는 그가 단순한 요식업자 이상의 인물임을 간파했습니다. 차로 잠깐 가다 멈춘 곳은 어느 부두였는데, 비록 잠깐이나마 나는 대개 그런 곳에 있기 마련인, 어설픈 파리 분위기의 가짜 바토무슈 중 하나를 타라 할까 봐 꽤 조마조마했습니다. 프리고진이란 사람, 이 분야에도 상당히 관심 있다는 소문을 들었거든요. 한데 다행히 우린 함께 헬리콥터에 올랐습니다. 
'바딤 알렉세예비치, 내 집이 그리 멀진 않지만, 당신 시간이 많지 않을 테니까. 자, 이렇게 하면 좀 빠를 겁니다.'
그 시각, 높이서 내려다보니, 운하를 향한 화려한 건물들의 파사드와 돔 지붕들, 네바강 여기저기 흩어진 작은 섬들 하며, 유서 깊은 도시 하나가 금강석과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데스마스크처럼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그런 장관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는지, 프리고진은 차르와 자신의 친분을 무용담처럼 풀어내기 시작했어요. 90년대 초 푸틴이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 보좌관으로 있을 당시, 프리고진은 그의 힘을 등에 업고 도시 제일의 카지노 영업권을 따낼 수 있었습니다. 시기로 보나 업무 유형으로 보나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나, 여러 면에서 프리고진이 최선을 다한 결과로 여겨졌지요. 그때부터 차르가 확실하게 뒤를 봐주는 성공 가도가 시작되었다는 겁니다. 
비행시간이 짧아 더 깊이 얘기를 파고들 시간이 없었습니다. 불과 5분 뒤에 카메니제도에 착륙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으니까요. 소문이 파다한 곳이죠. 페테르부르크에서 차르의 일부 지인들이 섬 하나를 통째로 사들여, 제정 시대 귀족처럼 떵떵거리며 산다는 얘기를 접했을 땐 지나친 과장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화장 회반죽과 금장을 싸 바른 으리으리한 대저택에서 알렉산더 3세의 궁정인들로 분장한 자들이 화려한 가장무도회를 즐긴다는 풍문 말입니다. 거기 누구는 백합과 사자를 그려 넣은 자기만의 귀족 휘장을 만들어 가지기도 했고요. 꼼꼼하게 복원한 구시대 제국 관료들의 별장, 스포츠 시설, 거대한 차고, 섬 전체를 감싸는 외호와 초소들, 수많은 SUV와 헬리콥터 등등. 그 모두를 위에서 내려다보니 우리 세계에서 얼마나 자주 현실이 허구를 초월해 왔는지 알겠더라고요." 

- "'알다시피 난 당신처럼 지식인이 아니올시다, 바딤 알렉세예비치. 하지만 인생에서 두세 가지는 똑 부러지게 배워 알고 있죠.'
프리고진은 금빛 팔걸이를 갖춘 소위 루이 16세 풍 안락의자에 느긋한 자세로 앉아 있었습니다. 주위엔 스칸디나비아양식의 가구들, 성난 사자상과 무라노 샹들리에들이 하얀 대리석 바닥과 네바강을 향한 거대한 유리창에 그 위용을 반사하고 있었습니다. 우즈베키스탄 장식가의 솜씨라고 하더군요. 
'카지노가 어떤 곳인지 압니까? 인간 비합리성의 금자탑이라오. 만약 인간이 합리적인 동물이었다면 카지노는 존재하지 않았을 거외다. 도대체 모든 가능성이 자신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돌아가는 곳에서 어느 미친 인간이 가진 돈을 탈탈 털어 넣겠소? 인간이 합리적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요,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이 모든 걸 소유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러면서 프리고진은 바스키아 스타일의 그림들과 흰색 스타인웨이 쪽을 슬쩍 가리켰습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에 투자하는 것보다 더 현명한 행동은 없다...'
'내 말이 그 말이오, 바딤 알렉세예비치. 많은 사람이 카지노에서 파산하는 이유를 압니까? 결코 빠져나오지 못할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드는 이유 말이오. 물론 성격 탓일 수 있겠지. 모든 이가 다 그런 건 아니니까. 하지만 그런 자들이 완전히 별종만은 아니거든. 그저 자제하지 못할 뿐이지. 한데 그런 결함을 우리 모두 뇌 속에 가지고 태어난답니다.
프리고진은 잠깐 멈추더니,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5000루블짜리 지폐를 빼 들고는 말을 이었습니다.
'자, 이걸 보시오. 거리에 나가 지나가는 아무나 붙잡고 실험을 한다 쳐봅시다. 당장 이 돈을 받든지, 아니면 그 두 배를 받을 가능성 50퍼센트에 운을 걸든지 선택을 맡기는 거요. 그가 어떤 선택을 할까? 장담하건대, 5000루블짜리 지폐를 냉큼 낚아챌 거외다. 그럼 그 반대를 한번 실험해 보자고요. 이번에는 지나가는 행인이 당신에게 5000루블을 주는 겁니다. 아니면 동전 던지기를 해서 그 두 배를 내놓든지, 한 푼도 내놓지 않고 넘어가든지 둘 중 하나를 고르라는 거요. 이젠 그쪽에서 어떻게 나올까? 당장 5000루블을 내놓느니, 그자는 분명 그 두 배를 내놓게 될지도 모를 위험을 택할 거요. 웃기지 않소? 이론적으로는, 뭔가 얻을 가능성이 있는 자가 잃을 가능성이 큰 자에 비해 위험을 감수하기가 더 쉬운 법입니다. 한데 현실은 달라요, 그 정반대로 행동한다 이겁니다. 따는 자가 더 신중한 선택을 하고, 잃는 자는 이판사판 모든 걸 걸어요.' 
나는 의기양양해하는 프리고진을 찬찬히 살펴보았습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더군요.
'인간의 두뇌는 그런 식의 작은 흠결로 가득합니다. 그걸 잘 파악하고 이용하는 게 카지노 운영자가 힐 일이에요. 정치도 그렇게 작동하는 것 아니겠소? 안정된 일자리에 먹고살 만하고, 가족 모두 건강하며, 시골에 전원주택 한 채쯤 보유, 바닷가에서의 여름휴가, 여기에 노후대책까지 확실하다면 사람들은 얌전해집니다. 늘 안전한 선택에 머물고 위험을 무릅쓰지 않아요. 익히 아는 길만 선택합니다. 그런데 사정이 조금 삐걱대는 경우를 가정해 보자고요. 상황이 바뀌어서, 직업도 잃고 집도 잃고 앞날이 캄캄해집니다. 그땐 어떤 선택을 할까? 과연 신중함이 먹힐까요? 천만의 말씀, 아마 미친 듯이 내기에 나설 거외다! 현재 상황을 유지하느니, 터무니없는 위험을 감수할 거예요. 모든 게 뒤바뀌어, 혼돈이 질서보다 훨씬 더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적어도 혼란은 뭔가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해요. 그렇지 않소? 예기치 않은 어떤 것... 이제 점점 세상은 재미있어집니다. 1917년 혁명, 나치즘이 그렇게 해서 태어난 거예요, 내 말이 틀렸습니까? 지금 같은 삶을 연명하느니, 미지의 세계로 뛰어들겠다는 사람이 다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 "'말했다시피, 나는 지식인도 아니고 국제관계 전문가도 아니오. 다만 내가 느끼기에 지금 상황이 딱 그와 같다는 겁니다. 서구인들은 자기 자식들이 앞으로 자기들보다 못한 삶을 살거라 생각하고 있어요. 그들이 보기에 중국, 인도 그리고 다행히 러시아가 큰 걸음을 내딛는 가운데, 그들은 보잘것없는 행보에 머물고 있다고. 날이 갈수록 그들의 힘은 줄고, 상황은 그들의 통제력을 벗어나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습니다. 더 이상 미래는 그들의 것이 아니에요.' 
'따라서 여차하면 무리수를 둘 것이다. 우리는 그런 그들을 부추기고 거들기만 하면 된다?'
'바로 그거요, 바딤 알렉세예비치. 그들과 부딪치고 강요할 것이 아니라, 이미 진행 중인 흐름에 편승하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바로 그 점을 차르는 잘 이해하고 있어요. 그도 나처럼 유도광이라 유도의 기본 법칙에 능통합니다,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라!'
프리고진의 논리는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현실에 적용할 기회만 주어지면 됐어요. 그 일이라면 내게 이미 괜찮은 아이디어가 있긴 했습니다."

 

- "몇 주 지나 우린 페테르부르크 근교의 어느 건물 앞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로 인해 추레한 변두리 분위기가 더하는 가운데, 프리고진은 왠지 기분이 좋아 보였어요.

'내가 말하던 장소가 바로 여기요, 바딤 알렉세예비치. 자, 들어갑시다...'
승강기에서 내려 우리는 컴퓨터로 가득한 큰 방에 들어섰습니다. 반은 신문사 편집실이고, 반은 제2금융 투자은행의 거래실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단, 프리고진 본인 입으로 내게 고백했듯이, 현장의 사기를 잃지 말자는 뜻에서 슬롯머신 두 대를 벽에 붙여놓은 것만 빼고 말이죠. 왜 아니겠어요? 어쨌든 내 기억으론 구글사 사무실에도 탁구대가 여럿 있었으니까요. 
다부진 체격의 청년이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맞이했습니다. 셔츠 단추를 꼼꼼히 채우고 코르덴 저고리를 단정히 갖춰 입어서인지, 이제 막 조지타운대 박사과정 세미나를 앞둔 학생 같은 인상이었어요. 
'안톤을 소개합니다.' 

프리고진은 자기가 발탁한 인재가 아주 뿌듯한 모양이었어요. 

'이곳 책임자로 내가 일찌감치 낙점한 친구죠. 모스크바대 국제관계학 박사학위 소지자입니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하고요. 유럽 정치에 관해서는 이 나라 웬만한 국회의원들보다 훨씬 더 빠삭하답니다.' 
안톤은 잠자코 듣고 있었습니다. 어떤 자만심도 거짓 겸손도 표정에 드러나지 않았어요. 우린 이런저런 잡담으로 대화의 문을 열었습니다. 잠시 후 나는 유럽 친구들의 내부 사정에 관한 그의 지식을 테스트 해보기로 결심했어요. 꽤 명석할 뿐 아니라 공감력 또한 뛰어난 청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속한 과보호 세대에 만연한 교만함을 전혀 느낄 수 없었어요. 반대로 진짜 뛰어난 지성을 입증하는 진솔함이 엿보였습니다. 국제 현안에 대한 그의 시각은 사냥용 단도의 날처럼 예리했습니다. 총체적 시야를 잃지 않으면서 사안의 세부 요소를 속속들이 파고드는 능력을 갖췄더군요.
프리고진은 그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새파란 청년이 그의 체면을 한껏 살려주고 있었어요. 몇 분 지나지 않았는데, 더는 못 참겠더라고요. 나는 안톤과 악수로 인사를 나눈 뒤, 곧바로 프리고진을 끌고 나왔습니다. 그의 아둔함에 기가 찼습니다." 

 

- "'무슨 생각을 한 거예요, 예브게니? 일전에 분명히 해둔 것 같은데요. 우린 지금 미국과 유럽을 상대로 정치를 하자는 겁니다. 토론에 나가고 나름 기여를 하겠단 거예요. 그런데 저런 청년을 내 앞에 데려와요?' 
그는 안톤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어요.
'저 친구 잘하잖소, 훤히 꿰뚫고 있어요.'
'맞아요, 예브게니. 그게 바로 문젭니다.'
프리고진의 눈썹이 잔뜩 치켜 올라갔습니다. 어찌나 얼빠진 표정인지 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어요.
'생각해 봐요, 예브게니. 서구인들은 정치에 관심 없습니다. 그런 그들의 이목을 끌려면 정치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할 줄 알아야 해요. 여기서 안톤은 쓸모가 없는 겁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뷰티 카운셀링을 해줄 아가씨들이랄지, 비디오 게임광이나 점성술사 같은 인재들이에요. 알겠어요?'
'그거야 추후 당신 메시지를 전달할 시간이 따로 있지 않겠소? 그때 가서 구체적인 지침을 내리면...'
'대체 우리를 무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코민테른쯤 된다고 보나요? 그렇다면 나쁜 소식을 전하게 돼 유감인데, 소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노동자계급을 위한 지상천국 또한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똑똑히 밝혀둡니다. 그 시절은 영원히 끝났어요. 더 이상 우리에게 노선이란 건 없습니다. 예브게니. 철사가 놓여 있을 뿐이에요.' 
그건 또 무슨 말이냐는 듯, 그의 눈이 휘둥그레지더군요. 
'철사를 부러뜨려야 할 때 어떻게 하죠? 먼저 한쪽으로 철사를 구부렸다가 반대 방향으로 다시 구부리죠. 우리가 할 일이 바로 그런 겁니다, 예브게니. 당신이 네트워크를 구축함에 따라 사람들이 집착할 테마는 늘어갈 거예요. 그게 뭐가 될지는 나도 모릅니다. 클릭하는 추세를 봐야 알 수 있는 거니까요, 예브게니. 백신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구는 사냥에 반대하고, 누구는 환경론자를, 또 누구는 흑인을, 누구는 백인을 혐오할 수 있어요. 뭐라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건,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꽁한 어떤 것이 있으며, 그런 그들을 폭발하게 만드는 다른 누군가가 또 있기 마련이라는 사실이에요.  
우린 누구의 생각도 변화시켜선 안 됩니다, 예브게니. 단지 사람들이 무얼 믿는지를 파악하고, 그 믿음을 더 강하게 밀고 나가도록 부추길 뿐이에요, 알겠습니까? 정보를 제공하고, 진짜든 가짜든 논거를 제시하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핵심은 화를 돋우는 겁니다. 예외 없이 모두, 갈수록 더. 한쪽에 동물보호론자가 있으면, 반대편엔 사냥애호가가 있어야 해요. 한쪽에서 블랙파워를 내세우면, 반대쪽에선 백인우월주의를 떠들어야 합니다. 게이 활동가와 네오나치들도 마찬가지예요. 우린 그 어느 쪽도 편들지 않습니다, 예브게니. 우리에게 노선이 있다면, 그건 바로 철사 그 자체! 한쪽으로 구부렸다가 반대 방향으로 다시 구부리는 철사 말입니다. 결국 부러질 때까지요.'"

 

- "'그래요, 바쟈. 이제 알겠소. 철사의 노선이라. 하지만 그게 들통나면 어떡하나? 당신이 앞날을 꿰고 있는 것 같아 묻는 거요. 네트워크상에서는 모든 게 추적 가능합니다. 우리 활동도 그들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거고. 언젠가는 진상이 밝혀질 텐데, 그럼 우리 체면은 땅에 떨어지고도 남을 거요.' 
'그 반대예요. 예브게니. 그때가 우리에겐 승리의 순간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어요.
'모르시겠어요? 위대한 예술가의 최종 붓질은 역설의 폭로입니다! 저들은 필시 우리가 우리 지지자들과 반미주의 단체를 지원하겠거니, 예상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우리와 상극인 세력까지 지원하고 있어요. 쓰레기들에게 자동소총을 들이대고 싶어 하는 수정 헌법 제2조의 애국자들, 우유를 마시느니 독당근을 갈아 마시겠다는 비건들, 환경재앙으로부터 세계를 구하겠다 설치는 청년들 말입니다. 과연 그땐 저들이 어떻게 나올까요? 아마 미쳐 돌아가겠죠. 더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무얼 믿어야 할지 모르는 처지가 되고 말 거예요! 딱 하나, 우리가 자기들 머릿속에 들어앉아 자기들 뇌신경회로를 마치 저기 저 슬롯머신 기계처럼 가지고 논다는 생각밖에 없을 거예요!'  
드디어 프리고진의 얼굴에 미소가 보였습니다. 이제 이해하기 시작한 거죠.
‘이곳의 주요 역할이 스스로 발각되는 데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예브게니. 일부러 꼬리가 밟혀야 해요. 이런 곳에 애송이들이 떼로 모여 앉았다고 진정 역사가 바뀔 거라 생각하나요? 천만에요, 예브게니, 이들이 아무리 유능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원래 있던 혼돈의 덩어리에 편승할 뿐이지. 어쩌면 그 혼돈을 조금은 불려놓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때 이용할 분노의 정서는 이미 존재하는 겁니다. 그걸 조종하는 알고리듬을 만든 건 미국인들이에요, 러시아인이 아니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우리로선 실속 없는 일입니다. 대신 자진해서 현행범이 되는 거예요! 그럼 미국과 유럽 도처에서 우리 일류 선전가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음모죄로 우리 자신을 고발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가진 능력을 신화화하는 일에 그들이 앞장서는 거죠. 앞으로 우리는 뭔가 수상쩍게 행동하면서, 터무니없는 반박을 내놓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저들로선 최악의 악몽이 현실로 확인되는 셈이죠. 러시아인이 새로운 세계를 주무르고 있었다니! 그때부턴 밤의 망상에 의해 저절로 혼돈이 불어납니다. 우리의 힘은 전설에서 현실로 옮겨가지요. 정치가 좋은 게 바로 그런 겁니다, 예브게니. 알잖아요. 힘이 있다고 믿게 만들어야 진짜 힘이 생기는 법이다.'"

- "노보오가리오보에 팽배한 그 공식적으로 침통한 분위기가 싫었습니다. 모스크바 외곽 대통령 관저의 가구배치를 크렘린 보안 책임자에게 맡기기라도 했던가요, 거짓친밀감과 노골적으로 후진 취향이 한데 어우러진 모양새 하며, 더욱이 일이 이런 식으로 흘러갈 걸 배제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어요. 평상시였어도 청동 스탠드와 다마스쿠스 벽지를 보면 기분이 우울한데, 생각해 보십시오, 신문마다 보리스의 사망 소식으로 도배가 된 그날 아침 내 기분을. 총상 속에 남은 탄알처럼 그의 마지막 의미 없는 탄원서가 내 저고리 안주머니에서 아직 뜨거운데 말입니다." 

 

- "내가 침묵을 고수하자 푸틴은 얘길 계속했어요. 

'물론 그가 우크라이나, 라트비아, 조지아 등지를 돌아다니며 러시아의 적들을 도운 것 또한 사실이지. 일이 진정 어떻게 된 건지 누가 알겠어. 두고 보라고, 바쟈. 음모론자들은 자기들이 되게 영악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엄청 순진하거든. 세상 모든 것에 숨은 의미가 있기를 바라지. 대수롭지 않은 언행, 방심, 우연이 가진 힘을 철저하게 평가절하해요. 그러니 얼마나 다행인가 말이야. 현실은 그들이 바라는 것과 정반대인걸. 우린 음모론자들 덕분에 날로 강해지고 있다고. 권력이라는 것을 말이야, 인간적인 약점들을 포함하여 있는 그대로 보는 대신 왠지 다 알 것 같은, 그래서 뭔가 판을 짜고 있을 것 같은 어떤 실체의 아우라를 덧씌워 바라본다니까. 그 정도면 엄청난 찬사를 퍼붓는 격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실제보다 훨씬 대단한 것으로 보게 만드니 말이야.' 
'아무도 모를 비밀, 우리가 꾸민 걸로 하자. (장콕토, <에펠탑의 신랑 신부>)'
차르는 내 인용을 좋아하지 않았고 프랑스어를 하지도 않았지만, 그날 아침 나는 그 사람 눈치를 볼 기분이 아니었습니다. 한동안 말없이 나를 쳐다보던 그가 그냥 넘기기로 했는지 이렇게 말하더군요. 
'대령, 변호사, 그 유명한 기자 모두 마찬가지야, 우리가 아니라는 거. 바쟈 자네가 누구보다 잘 알지. 우린 아무 짓도 안 했어. 우린 그저 개연성의 조건들을 조성했을 뿐이라고.'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차르가 직접 어떤 지시를 내리는 건 극히 드문 일이었으니까요. 용인되는 것과 용납되지 않는 것의 경계선을 그어주는 데서 항상 그는 멈추었습니다. 그러고 나면 모든 게 자체 논리로 풀려나가고, 궁극의 결과에 이르러 더 심오한 진실을 드러내지요. 얼마 전 베레좁스키와 나눈 이야기도 바로 그 점에 관한 거였습니다. 이 웃지 못할 우연의 일치 때문에 나는 그 자리서 웃을 수가 없었어요. 차라리 울고 싶었습니다, 그럴 수만 있었다면 말이죠. 단지 조니 토리오처럼 인생을 마무리하게 해 달라 부탁하는 늙은 갱스터를 생각하자 예상보다 훨씬 더 마음이 아팠습니다. 보랴, 가엾은 노인네 같으니, 그럴 자격은 있는 사람이었는데...
차르는 내가 보는 앞에서 베레좁스키의 편지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러고는 도랑에서 주운 돌멩이처럼 아무렇지 않게 내려놓았어요. 그 순간 나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도 보리스가 옳았음을 깨달았습니다. 푸틴은 내가 생각하듯 그런 훌륭한 배우가 아니었어요. 단지 유능한 첩보원이었을 뿐입니다."

 

- "나는 그 시절 친구들을 불러 모으기로 했습니다. 많이는 오지 않았어요. 누구는 체제에 머리 숙이고 들어가기 싫다 했고, 누구는 할 수 있으면 좋겠으나 후진 취향의 정점을 드러낼 게 뻔한 메가 프로덕션은 사양이라는 뜻을 전해왔습니다. 분명한 건, 사업의 규모로 볼 때 뭔가 뚜렷한 인상을 남길만한 수단이 절실하단 점이었어요. 불특정 다수와의 소통을 원할 경우 가용한 언어는 오로지 '키치'입니다. 그래야 뉘앙스 없이 모든 게 간명해지니까요. 다만 그 키치 언어가 내 목적에 따라 휘어지고 왜곡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우린 작업에 들어갔어요. 자금은 무제한이었습니다. 차르는 전 지구를 상대로 자신의 위대함을 펼쳐 보이기 위한 비용에 인색할 사람이 아니었어요. 우리는 모든 분야에서 각기 최고를 선발했고, 진심으로 즐기며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무대의상 전문가는 전통을 기반으로 인물들의 의상을 디자인하면서 일본 스타일리스트의 크로키로부터도 도움을 얻었습니다. 안무가는 '아버지 동무'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구성주의자들의 아이디어에 힘입어, 웅대한 양상으로 스탈린 시대를 연출했지요. 창작자들의 작업공간으로, 최대한 자주 드나들기 위해 크렘린 외벽 가까이 조성한 드넓은 오픈스페이스는 내가 텔레비전 프로듀서로 활동했던 시기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거기 처음 모여든 사람들 다수는 15년 더 늙었을 뿐이지, 그때 그 얼굴들이었어요. 새로 합류한 젊은 친구들까지 가족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나는 미세하나마 진짜 금맥을 찾기 위해서는, 굵은 뿔테 안경에 색 바랜 티셔츠 차림, 60년대 스타일 쿼츠 손목시계를 착용한 얼굴들부터 꼼꼼하게 걸러내야 한다는 걸 터득하고 있었죠. 우리 젊은 일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무늬만 예술가인 자들과 투박한 대중의 진정한 재능을 구분해 낼 줄 아는 날카로운 혜안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겉만 봐서는, 모스크바 중심가 선술집에 모여 앉아 차르의 반대 세력 지원을 위한 플래시몹이나 궁리할 철부지들과 가끔은 헷갈리긴 하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그들의 터부룩한 머리와 보랏빛 벨벳 저고리는 크렘린 휴게실의 단골들과는 영매치가 되지 않았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전통적 가치의 기수로서 올림픽 준비 상황을 감독할 문화부 장관이 슬슬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건 이해할 만한 일입니다. 궁정에 포진한 인사들 대다수가 그러하듯, 그 역시 나의 활동을 악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준비가 언제든 되어 있었거든요. 그의 일과 내 일이 거의 항상 충돌하면서, 가끔은 내가 밟고 넘어서는 일도 없지 않았으니, 사사건건 위아래 없이 치고 들어오는 이런 행태가 좋게 끝날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법합니다. 아마 속으로 그랬을 거예요. 저 바라노프라는 자식, 애들을 부리는 놈이야, 아니면 애들과 한패야!

나와 차르의 관계가 확고해 보일 때는 별로 손댈 여지가 없었지만, 요즘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하자 (궁정 신료들 촉각이 얼마나 예민한지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다니깐) 슬슬 개입할 때가 됐다고 판단했겠죠. 급기야 우리 중 일부가 붉은 군대 합창단으로 하여금 다프트 펑크의 노래를 부르게 할 거라는 소문이 돌자, 장관이 세친에게 면담을 요청한 모양입니다. 그런 연유로 나는 또다시 차르의 집무실에 불려 들어간 거고요." 

 

- "세친은 누굴 이제 막 아프게 하려는 치과의사처럼 나를 노려보았어요. 

'조심하쇼, 바쟈. 당신 그러다 언젠가는 그네를 놓치게 되어 있어. 그럼 바닥에 곤두박질치는 거라고.' 
어떤 의미론 그의 말이 옳았어요. 단지 그때 난 지고 들어갈 마음이 조금도 없었을 뿐.
'이봐요, 이고리, 지금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을 말뚝형에나 처할 국가 반역자로 아는 거요? 전대미문의 무대를 연출하기 위해 죽어라 일하는 거 안 보여요?'
세친은 한동안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적어도 수년 전부터 차르를 제외하고는 자기에게 그런 투로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너무 놀라, 화를 내지도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차르는 재미있다는 표정이더군요. 아랫사람들이 서로 다투는 걸 그는 늘 흥미롭게 바라보았어요. 나는 작심하고 그를 향해 말했습니다.
'대통령님, 30억 명이 이번 무대를 지켜볼 예정입니다. 그중 대다수는 우리나라를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단지 전에는 붉은 군대가 있었고 지금은 없다고 아는 정도죠. 그게 전부입니다. 그러니 욕심부려봤자 소용없어요. 우리는 두 시간 안에 우리의 러시아를 그들에게 소개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일으켜 세운 러시아, 우리가 열망하는 러시아의 모습을 말입니다. 아무 콤플렉스 없이 세계와 하나 되고 세계를 반영하는, 그리하여 세계에 영향을 주고 세계로부터 영향을 받는, 앞서가는 나라를 그들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개방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러시아, 위대한 운명으로 모두를 열광케 할 뿐 아니라, 웃게도 만들 줄 아는 러시아, 요즘 사람들은 약간의 유머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거든요. 그게 싫다면, 두 시간 동안 민속의상을 차려입은 바부슈카들의 군무와 이고리식 군대 합창으로 사람들에게 지루함을 잔뜩 선사하면 되는 겁니다.' 
푸틴에게도 모자란 점이 있지요.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가 사람을 있는 그대로, 특히 그의 목적을 위해 어떤 식으로 쓸모 있는가를 면밀히 따져 평가할 줄 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마 다른 일이었다면 세친을 택했을 거예요. 더 믿을 만하고, 더 복종적이며, 더 효율적인 부하니까. 하지만 세계를 상대로 대단한 볼거리를 만들어내는 일에선 나를 선호할 만큼, 푸틴은 상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번이 마지막일 테지만 말이죠. 세친은 그걸 대비하고 있었을 거예요. 그러나 당장은 일을 마무리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습니다.
그 기간만큼은 내가 누리는 호의를 십분 활용해야 했어요. 마음의 부담이었던 미하일 석방 문제를 놓고 차르의 최종 양보를 얻어내야 했기 때문이죠. 그가 없는 사이 크세니야가 내게 돌아왔다는 생각이 영 마음에 걸렸어요. 동등한 조건에서 자웅을 겨룰 필요가 있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걸 할 때임을 직감한 거죠. 언제까지나 책의 장벽 뒤에 숨어 삶과의 대결을 회피해도 괜찮은 학생이 더는 아니었습니다. 나를 속이는 짓을 그만두었고, 세상 밖으로 나와 나의 첫 거위를 죽였으며 그 후로도 여러 거위를 처치하는 가운데, 힘의 정점에 도달한 몸입니다. 크세니야도 그걸 느꼈고, 그래서 내게 돌아온 거죠. 그이 유 때문에 앞으로도 내 곁에 머물 거고요. 미하일을 감옥에서 풀어주는 것은 바로 이 고리를 온전히 닫아걸기 위해 그동안 누락되었던 부속을 복구하는 일이었습니다." 

- "때마침 그의 어머니가 병환 중이셨습니다. 의사들이 최대 1년의 시한부 선고를 내린 상태였어요. 인간애를 보여줄 때였던 거죠. 차르도 그 점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러시아인은 결단력 있는 단호한 지도자의 뜻을 따르기 좋아하면서도, 때로는 관대한 행위의 가치를 평가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건 사실 자신감의 문제였어요. 수년에 걸쳐 무한 권력의 기반을 다져왔으면서도, 차르는 다른 때 같았으면 존경받았을 적수에 대해 너그러움을 보일 만큼 아직은 자신이 충분히 강하다고 느끼지 못한 걸까요? 
물론 대놓고 그런 표현을 쓸 순 없었지만, 나는 푸틴이 어느 정도 그런 식으로 문제를 바라보게끔 유도했습니다. 여러 해 그를 접해오는 가운데, 그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칠 방법을 놓고 내게도 어렴풋하게나마 감이라는 것이 있었거든. 항상 맞아떨어지진 않았지만, 그땐 왠지 효과가 있더군요. 아무튼 올림픽 경기 개막 며칠 전, 차르는 마치 카이사르가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를 사면해 준 것처럼, 호도르콥스키의 석방을 공표했습니다."

 

- "크세니야는 교도소 앞으로 득달같이 달려갔습니다. 그녀는 미하일을 비행기에 태워 부모가 사는 베를린으로 데려갔고, 정상적인 생활을 다시 할 수 있을 때까지 며칠을 그와 함께 지냈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이혼할 뜻을 내비쳤지요. 크세니야가 나의 기대에 정확히 일치하는 행동을 한 건, 우리 관계에서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단 한순간의 지루함을 피하려고 도시 전체를 불태울 수도 있는 여자였어요. 그럼에도 그녀가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 지금 내게는, 세상 어느 편안한 여자와 함께해도 경험할 수 없을 안정감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선택하기 전, 크세니야는 숱한 남자를 배신하고 상처 주었듯이, 나를 배신하고 상처 준 것뿐이었어요. 이제 무기를 내려놓기로 했다면, 그건 지치거나 비겁해서가 아니라, 그동안 너무 많은 전투를 치렀고 그때마다 이겼기 때문입니다." 

- "그는 허리를 숙여 흙먼지가 뽀얀 분홍색 플라스틱 덩어리 하나를 집어 들었어요.
'이봐요, 바쟈. 당신 딸 선물로 이거 어떻소?'
처음엔 그가 건네는 물건을 못 알아봤습니다. 손에 쥐고 보니, 인형이더군요. 한쪽 팔이 달아나고 없었습니다. 아마도 폭탄 세례 속에 잃었든가, 그전에 여하한 이유로 떨어져 나갔겠거니,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부서지고 더럽혀진 작은 물건도 예전에는 어엿한 이름을 가졌겠죠. 어느 소녀가 그걸 갖고 온종일 실컷 놀았을 테고요.
군용 비행기가 나를 모스크바로 실어 나르는 내내, 한마디도 할 수 없었습니다. 크렘린으로 들어와서도 침묵하기는 마찬가지였어요. 누가 뭘 물어보면 간단히 대답할 뿐, 그게 전부였습니다. 말씨름하고 싶지 않았어요. 나의 논거는 언제나 정당했지만, 그 힘으로 밀고 온 곳이 여기인 겁니다. 나는 세련된 솔루션을 내놓을 줄 아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탄피를 두른 일개 카자크를 앞에 놓고 전쟁은 지속되어야 한다, 병원과 학교에 계속해서 포탄을 퍼부어야 한다, 심지어 내키지 않아도 동기가 부족해도, 나의 섬세한 머리가 고안한 섬세한 기획이 요구하므로,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설명을 거듭하고 있었던 겁니다." 

 

-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나았습니다. 아니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게 훨씬 나았어요. 괜히 머리 굴리지 않으면, 진실은 있는 그대로 드러나곤 했습니다. 차르의 제국은 전쟁에서 태어났으니, 결국 전쟁으로 회귀하는 것이 논리적이지요. 우리가 쥔 권력, 그 태생적 악의 흔들리지 않는 근거가 바로 전쟁인 셈입니다. 과연, 면밀히 따질 때, 우린 거기서 꼼짝이나 했던 걸까요? 세상 이치가 달라졌을 리 없죠. 애초에 그걸 알았기에, 나는 푸틴과 함께 이 길을 가기로 한 겁니다. 신념이 있어서도 아니고 이득을 바라서도 아니었어요. 그냥 호기심에서 그런 겁니다. 나 자신을 시험하고 싶었어요. 더 나은 할 일이 없었다고나 할까. 대다수 인간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일들보단 그래도 이 길이 낫다는 생각. 탐욕, 갈망, 복수심, 맹신, 남을 지배하고픈 욕망. 나는 세상을 바꾸고자 한 게 아니었어요. 다만, 다른 이들이 내 자리에 앉아 세상을 더 나쁜 쪽으로 몰아가는 걸 막고 싶었을 뿐입니다. 딱히 그대로 된 건 없지만 말이죠. 
우크라이나 전쟁도 다른 전쟁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전쟁을 원한 건 내가 아니었어요. 더욱이 나는 격렬하게 반대를 외친 사람입니다. 하지만 차르가 일단 결정한 뒤론, 성공적인 전쟁수행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게 습관이었고, 자존심이었어요. 할 수 있으니까 한 겁니다. 시작부터 그런 식이었어요. 모스크바 폭발사건, 체첸 전쟁이 그랬고, 호도르콥스키의 검거와 베레좁스키의 몰락이 또한 그러했습니다. 그 모든 일이 내가 원한 게 아니었단 얘깁니다. 다만 모두가 나의 지칠 줄 모르는 노고에 기댔을 수는 있겠죠. 나는 실패한다는 생각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운이 좋았고, 거의 언제나 성공했어요. 그리고 지금 그 모든 노고에 걸맞은 전리품을 손에 넣고야 만 겁니다. 흙과 돌가루로 더럽혀진, 이름 모를 인형 하나를." 

 

- "세친의 완벽한 사각형 얼굴이 내 사무실 문 앞에 나타났습니다. 
'잠시 방해해도 되겠소, 바딤 알렉세예비치?'
이고리가 굳이 나를 보러 들릴 정도면, 아주 안 좋은 소식을 전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는 최소 세 곳의 서로 다른 정보기관에서 이미 자세한 내용을 보고받았을 나의 돈바스 방문에 관한 질문부터 시작해, 용건을 빙빙 돌려 말하고 있었습니다. 급기야 올빼미 같은 눈으로 노려보며, 그가 말했어요.  

'그나저나, 바딤 알렉세예비치, 미국 애들 소식 들었소?'
'미국 애들요?'
'자기네 땅 입국 불허자 명단을 작성한다는 것 같더라고. 거기 당신 이름이 있다는군.'
세친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일말의 낭패한 기색이라도 찾아내려 애쓰고 있었어요.
'당분간 뉴욕 갈 생각은 말아야겠어.'
'아, 우크라이나 관련 제재 조치 말이군. 추진하기로 했답니까?'
'월요일부터.'
체키스트는 뿌듯해 보였습니다. 내 이름이 명단에 올랐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걸로 오전 근무를 때운 상태였어요.
난처한 일이긴 했습니다. 뉴욕뿐만이 아니었어요. 캘리포니아주, 메인주, 콜로라도주의 볼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미국의 이번 입국 불허는, 세친이 꿈도 꾸지 못할 즐거움을 내게서 앗아간 조치였어요. 
'또 다른 소식도 있긴 한데.'
이번엔 별것 아니라는 투지만, 알고 보면 결코 그렇지 않았어요. 그는 가장 중점을 둔 사안일수록 그런 태도를 가장하곤 했습니다. 바야흐로 내게 결정타를 날릴 참이었어요.
'당신 이름이 유럽 애들 리스트에도 올랐다지.'
빌어먹을. 바로 이것 때문에 애써 내 방까지 찾아와 소식이랍시고 늘어놓은 거였어요. 유럽을 잃었다는 걸 알았을 때의 내 표정이 보고 싶었던 겁니다.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 자가 나를 아프게 하는 방법 하나엔 도통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큼직한 돌멩이, 아니 바윗덩어리가 내 안으로 날아들었어요. 방금 가슴을 뚫고 들어와 허공으로 곤두박질쳤습니다. 어둠 속, 바닥 없는 내면으로 추락하고 있었어요. 유럽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유럽에서 배척당하다니, 그게 무슨 뜻인지 압니까?"

 

- "세친이 즐거워하게 놔두지 않으려고 나는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며 버텼습니다.

'괜찮아요. 마침 새로운 터전을 개발할 생각이었으니까. 근데 당신은 어때요, 이고리, 움브리아에 있는 당신의 대저택?'
그에겐 더없이 소중한 재산이 그 저택이었죠.
세친은 갑자기 아무런 표정 없는 얼굴이 되었는데, 그거야말로 감정이 격해졌을 때 보이는 현상이었습니다.
'까짓, 오래된 돌무더기일 뿐인데 뭐. 캅카스 지역에 똑같은 거 하나 짓는 중이오.'
그러고는 홱 돌아섰어요. 어쨌든 임무를 완수했다는 투였습니다. 내 입장에선 선택의 여지가 별로 많지 않았어요. 나는 즉시 수화기를 들고, 제재 조치 발표에 맞춰 공표할 입장문을 홍보 담당관에게 불러주었습니다."
 
- "그건 역전된 추방이자 가장 혹독한 형벌을 의미합니다. 
그때 문득 베레좁스키가 생각나더군요. 런던에서 보낸 그의 마지막 몇 해 말입니다. 그는 러시아를 끝내 떨쳐버리지 못했어요. 그에게 러시아적 삶이 주는 즐거움에 버금갈 만한 건 세상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천장의 적나라한 조명 아래 아무런 필터 없이 현실을 바라보는 일 말입니다. 나 같았으면 떨쳐버릴 수 있었을 거예요. 내가 그였다면, 런던에 살았다면, 아니 유럽 어디에서든 가능했을 겁니다. 변두리 작은 건물, 연철로된 문을 열고 들어가 계단 두 개만 오르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집에서 얼마든지 살 수 있었을 거예요. 거길 책으로 가득 채우고, 동네 쓸만한 카페나 선술집을 알아두었다가 저녁에 위스키 한잔하러 들리곤 했겠죠. 거의 매일 같은 코스를 산책하면서, 가끔은 러시아 생각에 젖어들었을 겁니다. 마치 자기 자식들을 잡아먹는 건망증 심한 어머니를 생각하듯이 말이죠. 그런 어머니에게서 나는 도망쳤겠고, 살아남았을 거예요. 아닐지도 모르고. 어쨌든 나는 이미 늦었겠죠. 하지만 내 딸은, 내 딸만큼은 살아남을 겁니다. 그 아이는 러시아가 어쩌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현실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죠.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 "친근함은 실수를 부릅니다. 크렘린의 스탈린과 노멘클라투라는 오랜 세월 서로 친밀한 관계 속에서 살아왔어요. 그들은 차르의 신료들이 살던 대저택에 거주하면서, 툭하면 함께 모여 만찬을 즐겼습니다. 스탈린은 친구들과 체스를 두거나 조촐한 저녁 식사를 즐기기 위해 그들을 찾아오곤 했습니다. 굳이 그를 위해 따로 자리를 만든 적은 없지만, 대개 상석은 그의 차지였어요. 무언가 필요할 땐, 그 자신이 일어나 직접 주방에 들어갔고요. 소규모 영화관도 함께 공유했습니다. 자식들은 자전거를 타고 공놀이를 했는데, 그 모두가 한 가족인 양 같이 커나갔습니다. 그럼에도 스탈린은 나중에 그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차례차례 제거해 나갔어요. 사실은 친밀한 관계가 그 일을 쉽게 만들어준 겁니다. 그들은 '코바(알렉산더 카즈베기의 소설 <부친살해>(1882)의 주인공. 스탈린은 이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했다.)'가 자기들을 체포하고 고문하고 죽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요. 너무 가까운 사이라 잘 보지 못한 셈입니다. 20년의 우정이 있는 만큼, 우두머리가 반드시 할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있겠거니 하는 망상이랄까. 하지만 그렇게는 되지 않죠. 우두머리는 자기 본능에 충실합니다. 뼛속까지 적자생존에 길든 포식자의 직감을 갖추고 있어요. 아무리 따져봐도 내가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모두를 죽이는 길뿐입니다. 
내 경우는, 알아서 먼저 사라져 준 것뿐이에요. 친근함에 뒤통수 맞도록 우두커니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주군의 신뢰는 특혜가 아니라 업보예요. 자기 비밀을 누군가에게 밝힌 사람은 그것의 노예가 됩니다. 그리고 주군은 노예 상태를 견디지 못해요. 자기 모습을 가두는 거울은 깨트리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죠. 나아가 주군은 소소한 헌신에 대해서는 보상해 줄 수 있으나, 너무 거창한 헌신에 대해서는 마땅하게 보상할 길이 없습니다. 그럴 때 원인 제거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픈 유혹이 고개를 들지요." 
 

- "차르는 애착에 좌우된 적이 없습니다. 기껏해야 습관에 기울 뿐이에요.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그는 나를 만나는 습관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는 노보오가리오보에 있는 자신의 다차를 중심으로 반경 3킬로미터의 숲을 밀어버리도록 지시했어요. 아침 늦게 일어나, 키릴 총주교가 영지에서 직송해 온 신선한 달걀로 식사를 합니다. 그런 다음 전용 체육관에서 뉴스채널을 틀어놓고 운동을 하지요. 긴급한 사안이 있을 경우, 그곳에서 비밀 보고서를 받아 읽고 조치를 하달합니다. 그러고 나면 풀에서 1킬로미터 수영을 해요. 그사이 풀 가장자리엔 장관, 보좌관, 대기업 수장 등, 전날 밤이나 당일 아침 호출당한 첫 면담자들이 지키고 서서 차르가 물에서 나오기만을 참을성 있게 기다립니다. 마침내 수영을 끝낸 차르는 목욕가운을 걸친 채 그들과 이런저런 현안을 두고 짧게 이야기를 나눕니다. 
오후가 시작되고서야 대통령 행렬이 크렘린으로 향합니다. 도로는 30분 전부터 이미 교통통제가 이루어진 상황입니다. 교차로마다 민병대 차량이 지키고 있어, 차르의 일방통행을 확인합니다. 노보오가리오보에서 크렘린까지, 푸틴은 거의 '동작 그만' 상태나 다름없는 수도를 통째로 가로질러 집무실에 도착합니다. 간혹 새벽 어스름에 끝나기도 하는 하루 일정은 그때 비로소 시작하는 거죠. 차르의 삶이라는 것은 일반인의 그것과 완전히 궤를 달리하며, 같이 일하는 사람에겐 어쩔 수 없이 뒤틀린 생활을 강요합니다. 오직 한 사람이 밤에 자지 않으면서, 새벽 서너 시까지 이어지는 자신의 철야 근무를 함께하게끔 모스크바의 모든 주요 인사들을 단련시켜 왔어요. 우두머리의 밤 습관을 잘 아는 숱한 장관과 고급공무원, 장군이 언제 닥칠지 모를 호출에 그렇게 대비하는 것이죠. 그런가 하면 각기 소규모 보좌관과 비서진이 포진하기 마련이니, 결국 내각의 불빛은 24시간 꺼지지 않고, 권력의 심장부인 모스크바는 스탈린 시대에 이어 또다시 잠을 잃어버립니다.  
신하가 반드시 준수해야 할 유일한 책무는 출석입니다. 항상 거기 있기. 아무리 희박한 가능성일지언정, 주군이 그대를 찾을 가능성이 존재하는 한, 언제나 눈 닿는 곳에 나와 있는 것 말입니다. 나는 노보오가리오보에 기꺼운 마음으로 가본 적이 없습니다. 불쾌하리만치 운동 좋아하는 그곳 분위기가 늘 나는 씁쓸했어요. 그래서 기회만 되면 다른 누군가를 나 대신 보냈는데, 지원자야 넘쳐났죠! 스톡홀름에서 돌아온 뒤, 나는 더 이상 그곳에 발을 들이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밤에 잘 때는, 아예 전화기를 꺼놓고 잠자리에 들었어요. 한두 번인가 대통령 경호대 책임자가 직접 찾아와 나를 침대에서 끌어낸 적은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그대로 방치될 리 없다는 건 명백했죠. 자기 가까이 있는 것이 내게 달가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차르는 용인하기 어려웠습니다."

 

- "하루는 크렘린에서 어떤 회의에 평소처럼 존재감 없이 앉아있는데, 마치 내가 이미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듯 아주 무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그가 이렇게 말했어요.
'자넨 스스로 누구보다 영리하다고 생각하지, 바쟈? 근데 진실은 어떤지 아나? 사람이 너무 오래 젊으면, 제대로 늙지 못하는 법이야.'
맞는 말이었어요. 마흔이란 나이는 용서가 없지요. 모든 게 드러나 더는 감출 수 없습니다. 권력의 정점에 다가갔어도 나는 여전히 주변인이라는 점, 그게 진실이에요. 역시나 할아버지의 서가가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그게 나로 하여금, 지금 이곳은 시간의 중심이 아니라는 의식을 갖게 만들었어요. 지금이 시대가 아무리 흥미진진해도, 단지 수 세기에 걸쳐 미세하게 변주되며 펼쳐지는 코미디의 n번째 버전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 "단 한 번 그곳에 발 들여놓지 않고도, 무려 300여 년 전 라브뤼예르는 오늘날의 크렘린을 우리나 당신네 어느 기자보다 정확히 묘사하고 있어요. 그걸 의식하지 못했다면, 내게 맡긴 일을 완수하지 못했겠죠. 나는 그저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을 겁니다. 차르의 대의에 기여한 나의 공적이 굳이 말하자면, 훨씬 덜 유효하고 덜 결정적인 차원에 머물렀을 거예요. 하지만 그 역시 나의 업보였겠죠. 갑자기 내 인생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들여다보였습니다. 그건 고삐 풀린 욕망에 날뛰고 이유 없는 폭력을 행사하는, 무심하기 짝 없는 천사와의 끝없는 싸움이었어요. 그런 삶에 나의 20년을 바친 겁니다. 마치 스무날, 20분처럼요. 달라진 건 하나도 없어요. 
나 또한 그들과 한패였을 수 있겠죠, 왜 아니겠어요. 그러나 나는 늘 이방인이었습니다. 나 어렸을 적에, 할아버지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무리를 떠나는 늑대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어요. 늑대는 혼자서 길을 떠납니다. 그러다 새로운 무리를 이루기도 하고, 그러지 못하기도 하죠. 늑대는 숲에서 지내든, 평원을 건너든 늘 혼자입니다. 한데 그걸로 힘든 것 같지는 않아 보여요. 홀로 떨어져 자기 삶을 꾸려가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리와는 다른 자기만의 습관을 발전시킵니다. 사냥꾼들은 이를 알고 두려워합니다. 외로운 늑대가 무리 속 늑대보다 훨씬 더 강하고, 영리하며 더 공격적이라는 걸 경험으로 아는 거죠.  
할아버지는 자신이 그런 늑대와 같다고 생각하신 거예요. 누가 압니까, 그것이 한 세대 건너 격세유전으로 나타날 열성형질일지. 분명한 건, 독립적이라면 질색인 무리에게 환영받을 형질은 절대 아니라는 사실이지요. 아니나 다를까, 말들이 참 많았어요. 그놈 되게 거만하다느니, 금고에 손대는 걸 누가 봤다느니. 심지어 내가 차르의 자리를 넘본다는 얘기까지 돌더군요. 남 험담하는 게 유일한 상상력인 자들이 있긴 있는 모양이더라고. 
진실을 말하자면, 나는 항상 권력과 결탁했지 그 반대인 적은 없다는 점입니다. 이는 내 본성이에요. 많은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점이죠. 힘 있는 사람들 주위엔 언제나 그 자리를 탐하는 자들이 꼬이는 건 사실입니다. 하나 진정한 참모란 권력자와는 완전히 다른 종족에 속해요. 알고 보면 좀 느긋한 사람이라고 할까. 주군의 귀에 속삭이는 참모의 조언은, 굳이 출세를 염두에 둔 노력 없이도, 최고의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런 다음 참모는 자신의 서재로 얌전히 귀가해요. 수면 아래 야수들이 계속 서로를 물어뜯는 동안 말입니다. 그의 심장에 얼음조각이 박혀있어요. 보통 사람이 뜨거울수록, 그는 더 차갑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결과가 안 좋지요. 권력자는 주변 누가 독야청청하는 꼴을 그 무엇보다 부담스러워하거든. 한데 내가 사직서를 낼 때, 차르의 머릿속엔 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내가 불쑥 사임한 것을 그는 안도의 심정으로 반긴 것 같아요. 나라는 사람이 더는 필요하지 않았던 겁니다.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일엔 적잖은 상상력이 요구되나, 기존 질서를 유지하기엔 맹목적인 추종만으로도 충분하니까."   

 

- "내 자리를 대신 차지한 사람이 없더군요. 래브라도가 푸틴이 전적으로 신뢰하는 유일한 참모입니다. 차르는 녀석을 데리고 공원을 산책하고, 녀석과 함께 집무실로 출근합니다. 그것 말고는 완전히 혼자예요. 이따금 경호원을 대기시키고, 하인을 부르는가 하면, 이런저런 이유로 신료들을 호출할 뿐입니다. 여자나 아이들을 곁에 두는 일도 없어요. 친구에 대해서는 현재 그가 도달한 위치에서 친구를 갖는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임을 그는 잘 알고 있습니다. 차르는 가장 친한 친구가 신하로 또는 막강한 적으로, 그리고 대부분은 동시에 그 둘 다로 얼마든지 변신할 수 있는 세계에 살고 있는 겁니다." 


- "당신네 서구사회의 통치자들은 꼭 사춘기 소년 같아요. 도무지 혼자 있질 못하죠. 항상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을 갈구합니다. 만약 온종일 방에 혼자 틀어박혀 지낸다면, 미지근한 바람 한 점처럼 공기 중에 사라질 사람들 같아요. 우리의 차르는 그 반대입니다. 고독 속에서 고독을 먹고 살지요. 서구의 구경꾼들을 놀라 자빠지게 하는 그의 왕성한 기력은 고독한 명상을 통해 얻어지는 겁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는 하늘이나 바람처럼 순수한 에너지가 되어가고 있어요. 당신들은 현실에 뿌리박고 어른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잊었습니다. 당신들은 나라의 지도자가 일종의 연예인인 줄 알고 있어요. 당신들과 닮았기를, 당신들 눈높이에 맞춰주기를 바라고 있죠. 거리는 권위를 지켜줍니다. 마치 신처럼. 차르는 열광의 대상이 될 순 있지만, 그 자신이 열광하는 법은 없습니다. 필연적으로 냉담한 본성을 지닌 존재예요. 그의 얼굴에선 이미 불멸을 암시하는 대리석 같은 창백함이 묻어나지요." 

- "이 정도면, 내가 말한 성대한 장례식에 대한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이야기가 되죠. 차르의 이상은 모든 적과 심지어 친구들, 부모와 자식, 아마도 코니까지 희생해 가며 홀로 우뚝 살아남은 자의 고독한 무덤일 겁니다. 모든 생명체의 멸절을 조건으로요. 칼리굴라는 전 인류의 머리통이 하나의 모가지에 붙어있기를 원하고 있어요. 그래야 한 차례 칼을 휘둘러 일거에 온 세상을 없앨 수 있으니까. 순수 그 자체의 권력이랄까요. 차르는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어쩜 처음부터 그런 존재였는지도. 그런 그에게 평화를 가져다줄 유일한 권좌는 죽음이지요." 

- "전자가 묵시록적 재앙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항상 열려 있으므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후자를 선택하게 되는 거죠. 당신네 서구사회에서 통용되는 사이비 권력 말고. 그런 건 광대 가면을 쓰고 비극을 연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이건 원초적 본질로 회귀한 권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순수한 물리력 행사, 한 손으론 보호하고 한 손으론 위협하는 대리석상 말이오."

 
- "지금껏 권력은 늘 불완전했어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인간적인 방법에 의존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언제나 나약하지요.
모든 혁명에는 결정적인 순간이 존재합니다. 진압부대가 체제의 명을 어기고 발포를 거부하는 순간이죠. 바로 그 점이, 이전 차르가 모두 그랬듯, 푸틴에겐 악몽입니다. 진압에 나선부대가 군중을 향해 발포하는 대신 그들과 연대할 수도 있다는 사실, 그것만큼 권력에 위협인 상황이 없어요. 천안문 광장에 대학생들이 운집하기 시작했을 때, 노회한 덩샤오핑이 즉각 반응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자칫 잘못하면 추락할 수 있다는 걸 알거든요. 참신한 슬로건과 노래, 여대생들의 어여쁜 미소로 무장한 시위군중에게 자신의 부대가 먹잇감이 될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하기 싫은 거죠. 그는 기다리기로 합니다. 시위대와 연대하지 못하도록 북경어를 모르는 군민들만 먼 지역에서 차출해 동원하지요. 진압부대를 꾸리는 데 며칠이 걸린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대신 한번 도착한 그들은 인정사정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인간적 협조가 필요 없는 권력을 생각해 봅시다. 반항할 리 전혀 없는 수단을 통해 자신의 안전과 힘이 보장되는 경우 말입니다. 가령 전자 부대, 드론 부대, 로봇 부대는 언제라도 아무 망설임 없이 타격에 나설 수 있어요. 완벽한 형태의 권력이 구축되는 셈입니다. 살과 피를 지닌 인간의 협조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권력은, 아무리 강력해도 인간의 동의를 전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지시와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를 기반으로 한다면, 그 권력은 아무런 제약 없이 작동하게 되지요. 기계의 문제는 인간에 반항하는 것이 아니라, 지시를 곧이곧대로 따른다는 데 있어요. 
항상 사물의 기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 우리 삶을 비약적으로 잠식하는 모든 테크놀로지는 군사적 필요성에서 탄생한 것이에요. 컴퓨터는 2차 세계대전 중 적의 암호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발전했습니다. 통신수단으로서 인터넷은 핵전쟁을 염두에 둔 발상이었고, GPS는 전투부대의 위치측정을 위한 수단으로 개발된 것이지요. 한마디로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기보다 통제하기 위해 고안된 기술입니다. 군사적 용도에 뿌리를 둔 도구를 가지고 인간 해방을 운운할 만큼 어리석은 존재는 LSD에 취한 일군의 캘리포니아 마약쟁이들 밖에 없을 겁니다. 실로 많은 이들이 그렇게 믿었어요." 

- "하지만 이젠 명백하지 않습니까? 직접 진실을 확인해 보시죠. 우리를 둘러싼 군사기술로 인해 총동원 체제의 출현을 위한 조건들이 조성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우리가 어디 있든 그 존재가 특정될 것이고, 감시를 거쳐, 필요시 제거될 겁니다. 독자적 가치를 지닌 개인, 자유의지, 민주주의는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해 버렸어요. 데이터 증가로 인해 인간이란 존재는 하나의 신경 시스템, 새나 물고기 떼처럼 그 동향을 예측할 수 있는 표준구성 메커니즘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전쟁을 하고 있지 않지만, 이미 군사화되어 있어요. 소련 사람들이 꿈꾸던 게 바로 그거였습니다. 우리 국가는 항시 동원체제를 근거로 하여 존립해 왔습니다. 우리는 전쟁이란 개념, 외부 침입에 대항하여 조국을 지킨다는 생각에 전적으로 기반한 나라였어요. 그렇기에 온갖 희생, 숱한 자유 침해가 정당화되어 온 거죠. 보다 큰 자유 어머니 러시아의 자유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말입니다50년대에 KGB는 소비에트 시민 개개인의 모든 인간관계를 추적해서 기록하기 위한 시스템을 개발하려 했어요. 아버지의 베르투슈카가 바로 그것을 상징하는 기기였습니다. 근데 페이스북이 훨씬 더 나가더군요. 캘리포니아 마약쟁이 그룹이 낡은 소비에트 관료들의 모든 꿈을 제치고 앞서나갔어요. 그들이 설치한 감시체계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그들 덕분에 우리 존재의 모든 순간이 정보의 출처가 되어버렸어요.
나치는 독일에서 아직도 사적인 개인으로 사는 사람은 수면 중인 사람뿐이라고 했는데, 캘리포니아 친구들은 그마저도 추월해 버린 셈입니다. 수면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생체유동 현상은 그들에게 더 이상 미지의 영역이 아니에요. 모두 숫자로 변환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서, 앞으로는 전례 없는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 "지금까지 동원은 자발적인 개념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무사안일함에 기대어, 자유를 팔아넘기는 대가로 유리알들을 보장해 주었어요. 그러나 향후 바이러스가 시장이나 실험실에서 튀어나올 경우, 시애틀과 함부르크 또는 요코하마가 대량 살상용 핵폭탄이나 세균폭탄의 공격으로 초토화될 경우, 삶의 회의에 시달리는 일개 어린아이가 학급을 향해 총을 난사하는 대신 도시 전체를 파괴할지도 모를 경우, 그때 인류에겐 단 하나의 요구, 다름 아닌 보호받고자 하는 요구만 남을 겁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안전을 바랄 거예요. 당장 모든 변화가 의심의 대상이 되어, 조금이라도 규범을 벗어나면 기필코 처단할 원수가 됩니다. 이로써 이미 기초를 다진 거나 진배없죠. 상업적이던 동원체제가 이제는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스탠스를 취합니다. 우리에게 가용한 모든 수단이 종말론적 재앙을 격퇴하는 일에 동원될 거예요. 테러에 맞서 모든 것이 항상 용인될 겁니다. 
그때 세상은 자먀찐의 후원자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을 거예요. 더는 아무 일 일어나지 않게끔 신경 써주는 존재 말입니다. 기계는 권력의 절대적 형태를 보장해 줄 것이고, 그럼 단 한 사람이 인류 전체를 지배할 수 있을 겁니다. 특별한 재주가 없는 누구라도 그 사람일 수 있어요. 권력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기계 속에 존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임의로 선택된 자가 그 기계를 작동시키고요." 

- "그의 치세가 오래가진 않을 겁니다. 요컨대, 우리의 브로드스키가 말했듯, 독재자는 낡은 버전의 컴퓨터에 지나지 않아요. 로봇이 지배하는 세상에, 정상의 자리마저 로봇의 차지가 되는 건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오랜 세월 우리는 기계를 인간의 도구로 여겨왔어요. 하지만 오늘 인간이야말로 기계의 도구임이 명백해졌습니다. 전환은 완만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기계는 인간에 대한 지배를 강요하지 않으며, 마치 충동이나 내밀한 갈망처럼 인간에게로 스며듭니다. 이제 기계의 완성은 첨단기술의 흐름 속에 좀 더 깊숙이 융합하고자 발버둥 치는 수많은 인간의 이상이 되었어요."

 
- "인류의 역사는 우리, 당신과 나 어쩌면 우리의 자식들과 함께 끝나가고 있습니다. 이후에도 무언가가 있겠으나, 더 이상 인간은 아닐 거예요. 우리 다음에 나타날 존재가 만약 있다면. 그건 지금까지 인간을 점유해 온 생각이나 관심사와는 다른 무엇을 품은 존재일 겁니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괄호를 열어 신이 세상에 내려오게끔 한 건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 신이 순수한 영적 실체가 아니라, 거대한 인공적 유기체일 뿐이지요. 인간이 만들었으나, 언제부터인가 인간을 뛰어넘어 죄도 고통도 없는 시대의 예언을 실현할 존재 말입니다."

- "과연 예언자들의 계시는 정확했을까요? 인간의 모든 고통이 신의 등장을 준비하는 부득이한 서막에 불과하진 않을까요? 우주의 역사 아니, 이 지구의 역사에서 불과 수천 년에 걸친 고통이 대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신은 창조추가 아닌 창조물입니다. 주인의 포도밭을 일구는 성실하고 겸허한 일꾼들처럼, 날마다 우리는 신이 도래할 조건들을 만들어왔어요. 그리하여 오늘, 우리는 고대인이 신의 것으로 여긴 속성들 대부분을 기계에 전이시켰습니다. 신이 최후의 심판에 대비해 모든 걸 보고 모든 걸 기록하던 시절이 있었지요. 신은 그야말로 최고의 자료소장자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기계가 그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기계의 기억력은 무한하고 결정력은 확고부동합니다. 단지 불멸과 부활에 관한 능력이 부족할 뿐인데, 머잖아 이마저 해결될 겁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에 포함된 최후의 적 즉, 죽음을 물리치는 신의 이미지가 최종 알고리듬을 가공하는 컴퓨터의 이미지 속에 구현되어 있으니까요. 
이제 단 하나의 과정만 남았어요. 테크놀로지가 형이상학으로 변모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길은 이미 제시되어 있어요. 그러고 보니 내가 처음에 거짓말했군요. 진짜 경쟁은 권력과 묵시록적 재앙 사이가 아니라, 신의 도래와 묵시록적 재앙 사이에서 진행 중입니다."

- 방 전체가 깊은 침묵에 잠겼다. 이야기 도중 바라노프가 커다란 벽난로에 장작을 툭툭 던져 넣어 살려오던 불꽃의 타닥거림이 이젠 잦아들었고, 내가 도착했을 때 강한 인상을 준 서가에서 그 환한 빛을 거두어들였다. 주위를 둘러보면서, 나는 아득한 옛날 있었던 재앙에서 살아남은 최후의 생존자가 된 느낌이었다. 러시아 서적들, 호두나무로 만든 우아한 책상과 여닫이 책상, 지금은 사라져 버린 시대를 담은 세계지도. 이야기를 마친 바라노프는 폼페이 유적에서나 볼 수 있는 재로 덮인 시신처럼 굳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정면으로 나를 마주하고 앉은 그 모습이 숨 쉴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 사람 같았다. 

 


 

 

- 사람들은 그를 '크렘린의 마법사'라 불렀다. 수수께끼 같은 인물 바딤 바라노프는 연극 연출가로 출발해 푸틴 정권의 막후 실력자가 된 인물이다. 이른바 '차르'의 정치 고문 자리를 사임한 다음부터 그와 관련한 전설이 봇물처럼 쏟아졌으나, 누구도 그 안의 거짓과 진실을 가려낼 수 없었다. 어느 밤, 자기 입으로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기 전까지는. 

- 이 소설은 러시아 권력의 핵심부로 우리를 끌고 들어간다. 그곳은 차르의 신하들과 대재벌들이 하루가 멀게 피 튀기는 싸움을 벌이는 격전장이다. 또한 그곳은 '스핀닥터' 바딤이 국정 전반을 한 편의 정치극으로 연출하는 무대이며, 차르의 의지가 가감 없이 실현되는 현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딤은 다른 이들처럼 탐욕에 사로잡힌 자가 아니다. 바로 자신이 연출한 점점 더 어두워지는 체제의 미로를 신음하며 헤맬 뿐이다. 방황하는 시인은 과연 늑대들의 소굴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 소비에트 연방 해체를 시작으로 체첸 전쟁과 소치 올림픽을 거쳐 우크라이나 사태에 이르기까지, 소설은 이 시대 러시아 체제의 신음하는 폐부에 과감히 메스를 갖다 댄다. 푸틴 시대의 이면을 낱낱이 파헤치는 가운데, 권력에 대한 고차원적인 사색으로 우리를 이끄는 수많은 단상이 두고두고 되새길 만하다.
 
- 전체 280쪽에서 250쪽 가까이 이어지는 기나긴 모놀로그의 주인공 바딤 바라노프는 실존 인물 블라디슬라프 수르코프가 그 모델이다. 푸틴의 공보보좌관이던 수르코프는 이른바 ‘막후 실세'이자 이데올로그로서 '주권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창안하는 등, 푸틴 정권의 이념구조를 구축하여 작동시키는 주도적 위치에 있었다. 소설에선 전혀 언급되지 않지만, 둘이 동일인임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 밖에 거의 모두가 실존 인물의 실명을 달고 등장함에도, 유독 주인공만 예외인 이유는 무얼까?

- 그의 시선을 통해서 그려지는 러시아의 실상과 인물들의 행적에 저자 자신의 가치 판단과 주관이 개입할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가령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보리죽(카샤)을 주문하는 푸틴의 에피소드를 돌아보자. 알렉세이 나발니의 다큐 <푸틴의 궁전>(2021)이 적나라하게 폭로한 내용을 감안할 때, 그런 푸틴의 모습에선 '금욕적인 공무원' 상을 지나치게 부각하고자 한 저자의 욕심이 느껴진다. 그렇더라도 가능한 모든 종류의 데이터를 확인해 가며 집필한 이 소설은 분명 픽션(fiction)을 뛰어넘어 잘 쓰인 팩션(faction)에서나 기대할 지적충만감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소비에트 연방의 성립과 해체, 새로운 질서를 갈구하는 러시아 사회의 혼란과 푸틴의 집권과정, 신흥 재벌에서 바그너 그룹에 이르는 권력의 기생자와 희생자들. 그 모두가 그려 나가는 숨은 현대사의 모순을, 그 비장한 내적 논리를 '이 한 권의 책'과 더불어 관통해 나갈 수 있다. 사실에 근거한 발언과 행위들을 조밀하게 직조해 가면서 자유와 역사, 권력과 인생의 보편적 화두를 적재적소에 던져 이야기를 추동하는 작가의 필력이 경이로운 수준이다. 

- 이 작품은 2022년도 아카데미프랑세즈 소설 부문 대상 수상작이다. 모든 문학상이 그렇지만, 특히 프랑스어의 우아함과 섬세함을 기치로 내건 기관이 주관해서 그런지, 아카데미프랑세즈 수상 작품을 번역할 땐 특별히 더 정교한 보석을 들여다보거나 파이프 오르간의 분산화음을 체험하는 기분이다. 단어와 단어가 암시의 망을 형성하면서 함의가 풍부한 문장들을 탄생시키는 가운데 치열한 이야기가 다각도의 이미지로 펼쳐지는, 이런 책과의 밤샘은 그 자체가 행복이다. 저자인 줄리아노 다 엠폴리는 스위스계 이탈리아인으로 프랑스 시앙스포에서 공부했으며, 이 아름다운 작품은 프랑스어로 쓴 그의 첫 소설이다.


성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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