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비가
출판 : 뿔미디어
출간 : 2012.04.04 - 2016.02.24
<화산귀환>을 정주행 한 뒤,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모두 찾아 읽었다.
<역천도>, <파천도>, <태존비록>.
다른 작품들의 리뷰를 쓸지는 미지수이므로 웬만한 것들은 이 리뷰에 남겨두려 한다.
혹시라도 스포일러를 피하고 싶으신 분들께선 여기에서 멈추시는 게 좋을 것 같다.
발표된 작품을 모두 읽어본 감상은, '비가'라는 작가는 확고하게 구성된 하나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글을 쓴 시기가 모두 다른데도 주로 쓰는 표현, 중심이 되는 인물상, 녹여내는 사상은 모두 비슷하다. 그것은 일종의 변주라고도 볼 수 있겠고, 자기 복제라고도 볼 수 있겠다.
<역천도>에서는 되풀이될 수밖에 없었던 비극과 절대적인 무를 추구하기 위한 비인간성, 운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고통과 고뇌, 비극적인 가정사와 애정결핍, 선과 악의 교차가 중심이 된다. 회귀라는 장치로 인해 과거의 은원이 중점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핵심 테마로 작동한다.
<파천도>에서도 반복되는, 그리고 예정된 비극과 절대적인 무위에서 오는 비인간성, 운명적인 고통과 고뇌, 비극적인 가정사와 혈연의 비밀과 애정결핍, 적과 동지의 교차가 중심이 된다. 과거를 잊은 자들과 그로부터 이어지는 은원에 대한 갈등이 표면적으로 드러난다.
<태존비록>에서는 초반에는 나른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중심으로 시작한다. 주인공 또한 이전 작품들과는 달리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성장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유머러스한 장면들이 대거 추가된 점이 특징이다. 하지만 과거를 잊은 자들과 그 과거에서 비롯된 은원으로 인해 결국 피할 수 없었던 비극, 절대적인 무위에 대한 양가적인 입장 차이로 인한 갈등과 강자의 비인간성, 역시 운명적인 고통과 고뇌와 알고 보니 비극적인 가정사와 혈연의 비밀이 흩뿌려진다. 중심인물들은 비껴갔지만 전개에 핵심적인 주변인물을 통해 애정결핍, 적과 동지의 교차도 등장한다.
(각 작품을 설명할 때 비슷한 표현이 중복되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바로 보셨다. 그 느낌까지 전달하고 싶었다.)
이 작품들을 녹여내어 정수만 추출한다면 <화산귀환>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인물상들을 보면 <파천도>의 마공자 하후상은 <화산귀환>의 장일소를 바로 연상케 한다. 또 <파천도>의 남궁산은 <화산귀환>의 윤종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고, 각 작품에 등장하는 제갈 가의 지략 캐릭터들은 동 작품의 제갈자안과 녹림왕 임소병에게 겹쳐진다. <태존비록>의 무산은 혜연으로 바꿔 읽어도 큰 위화감이 없을 정도다.
그런 점에서 <화산귀환>은 지금까지 비가가 썼던 모든 작품에서 뽑아낸 정수만을 집약한 작품이다. 기본적인 구조나 설정은 이전작들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아무래도 지금까지 글을 연재하며 갈고닦은 내공으로 '가장 잘 다듬어진' 형태로 다양한 캐릭터의 매력을 극대화했달까. 다소 평면적이었던 이전작들과는 달리, 충분한 시간을 들여 쌓아 올린 주변인물들의 매력이 가장 큰 인기 요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조금 부연설명을 하자면, 전작들에서는 주인공에게 설정된 제약과 반드시 일어나야 할 중심 사건을 정해둔 다음 나머지 인물들을 얼기설기 덧붙인 느낌이었다면 <화산귀환>에서는 인물들 각각이 살아 움직이며 빈 공간이 적어지도록 채워나가는 느낌이었다. 단역으로 소모될 수 있었던 인물들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전체에 분산시켜 지속적으로 등장시킨 것도 한 수. 단점이라면 살이 잘 붙을수록 중심 뼈대는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 그래서 자칫 방향을 잃을 수 있다는 점일 테다.
당연히 모든 작품의 주인공들을 모아 합치면 <화산귀환>의 청명이 되는데, 그렇기에 개인적으로는 청명이 천마일 가능성이 무척 높다고 생각한다. 이전 작품에서도 지속적으로 사용된 장치인데다 저자는 가장 강력한 무를 가진 인물의 선악 반전을 즐기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역천도>에서의 단천호나 <태존비록>에서의 백무한을 생각해 본다면... <파천도>에서조차 '알고 보면 바로 너'가 사용되니 말이다.
물론 완전히 다른 전개도 가능하다. 그러나 지금껏 한 작품 내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났던 작가의 특징들을 고려했을 때, 아마도 작가는 자신 안에 고여있는 것들을 완전히 표현해내기 전까지는 그 세계를 벗어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기존 인물들이 장일소와 연합하여 천마로 각성한 천명과 대치하게 되는 전개가 아닐까 짐작하고 있다. 그 결말까지의 개연성을 어떻게 쌓아가느냐가 관건이 아닐까.
(물론 무르익은 여유와 개그감, 진중한 장면에서의 완급조절은 이전작들과는 비교 불가다.)
<화산귀환>을 무척 즐겁게 읽었던 입장에서 모쪼록 지금의 인기를 잃지 않고 잘 유지해, 완성도 있는 결말로 마무리 짓길 기원한다. 지금까지 발표했던 작품들의 모든 것이 집대성된 작품이니만큼 이를 잘 마무리해낸다면 그다음 작품은 이전까지의 비가와는 완전히 다른 글을 쓸 것만 같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는 약간의 여담이다.
왜 <파천도>는 절판/서비스 중지 상태인지가 궁금했다. 부족함이 느껴져서라기엔 첫 작품인 <역천도>는 여전히 이북으로 판매 중이고, 직접 읽어본 바 파격적인 설정 탓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다른 작품들과 출판사 또한 동일하므로 작가 자신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거나 사정이 있을 듯한데... 현재로서는 사유를 정확하게 확인하지 못했다.
일단 설정상의 오류가 존재하긴 한다.
108개의 무덤, 백회혈은 제외한 채 107개만 막힌 혈도, 무덤에 있어야 하는데 없었던 인물의 오류(그럼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 남겠지), 그래서인지 최고의 여인이지만 무공과 대법 관련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못한 그녀, 기운의 흐름만 보이지만 긴장한 피부와 땀방울은 보이는 시각의 발전 등 다양한 의문점들이 남지만.
덤으로 상당히 빈번한 맞춤법 실수와 오타(영타도 등장한다)와 비문도 완독을 막지는 못했다.
사실 꽤 즐겁게 읽었다.
우선 기의 흐름이나 무학과 관련된 작가의 사유가 인상 깊었다. 또 다른 즐거움으로 여타의 다양한 작품들이 <파천도>와 연결되며 추억들을 곱씹어 볼 수 있었던 점도 컸다. 혹시나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 밝혀두자면 발표된 시기 상으로 <파천도>가 앞선 경우가 많고,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저 나만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광마회귀>, 뮤지컬 <사의 찬미>, 마블 <인피니티 워>와 <엔드게임>, <적루> 등 다양한 작품들이 떠올랐다.
특히 유진성 작가의 <광마회귀>는 기존 무협들의 클리셰를 비틀어 쓴 -작가 자신이 주화입마에 든 상태로 작품을 썼다는 농담까지 있는- 작품이다 보니 이런저런 설정이나 언어유희가 다른 작품들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은데, 시간적으로 꽤나 차이가 있는 이 작품을 읽을 때 특히 생각이 많이 났다. (작중 주인공의 별명까지 광괴와 광마이다 보니...) 등장 인물의 절기나 설정은 유사한데 소설을 전개해나가는 방식은 완전히 달랐다. 어떤 면에서는 대척점에 서있다고까지 느껴질 정도. 절대고수를 상대하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합공을 하느냐, 그것을 정파의 위선이라 칭하며 죽음을 각오하고 비무 형식으로 끌고 가느냐 같은 장면들이 그 예이다. 같은 논리로 다른 결론을 끌어내는 것도 좋았지만, 사건 중심으로 인물을 배치하느냐 인물 중심으로 사건을 발생시키느냐의 차이도 인상적이었다.
음... 생각나는 대로 주절주절 적었더니 <파천도> 리뷰라고는 볼 수 없는 잡소리가 되었는데, 일단 지금은 이 정도로 만족하고 남겨두려 한다. 무협으로 빠져들던 길이 틀어졌기 때문이다. 현재는 유진성 작가의 다른 작품들까지 쭉 읽으려다가 멈춘 상태다.
만약 기회가 된다면 설봉의 <사신> 정도까지는 재독하고 리뷰를 남기고 싶다. 김용 저서를 제외하면 과거 읽었던 무협 소설 중에선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이고, 대략적으로 그를 마지막으로 무협은 더 읽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진짜 끝.
결론 : <광마회귀>, <화산귀환> 추천.
- 미동 없이 서 있던 모양이다. 소년의 머리와 어깨 위에 쌓인 두꺼운 눈이 그것을 증명해 주었다.
소년은 그저 서 있었다.
미동 없이 가만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 소년의 눈이 향한 곳.
그곳에는 일백팔(一白八)의 봉분(封墳)이 자리하고 있었다.
일백팔 개의 무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는 소년.
그것은 참 이상한 광경이었다.
- 소년은 가만히 눈을 감고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 지켜보십시오. 나의 삶을, 나의 길을. 천하가 나를 막는다면 천하를 부수고, 하늘이 나를 막는다면 하늘을 부수겠습니다."
실로 광오한 말.
소년은 그런 광오한 말을 무척이나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이룬 후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 바람은 불고.
소년은 걸었지만.
무덤은 말이 없었다.
- "그건 다시 말해 사람들 역시 천재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모른다는 걸세."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천재라는 단어는 너무 널리 쓰이고 있네. 별것 아닌 재주와 재능만 보여도 천재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지금의 세상일세. 어린 나이에 검기만 뽑아내도 천재 소리가 나오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어 버렸네."
이자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면이 있었다.
"하지만 천재란 것은 그런 것이 아닐세. 배우는 것이 빠르다거나 남들보다 앞서 나간다고 해서 천재라고 부르지는 않는다는 걸세. 그런 건 수재라든가 영재라는 말이 더 어울리지. 천재란 뛰어난 자를 일컫는 것이 아닐세."
- "이해할 수 없는 자."
"예?"
"여태까지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저지르는 자. 지켜보고 있음에도 무엇을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자. 그런데 그 이해할 수 없는 생각과 행동의 결과로 여태까지 해 온 것들 이상의 결과를 내놓는 자."
- "세상은 자신들의 인식의 범위를 뛰어넘은 자들에게 천재라는 호칭을 내렸다네. 이해를 거부해 버린 것이지. 하늘이 내린 재능이니 우리와 다른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 버리고 그들에 대한 이해를 거부했네. 무슨 말인지 알겠나?"
"... 대충은 알 것 같습니다."
검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자들일세. 그런데 진짜 천재를 본 적 없는 자들은 단순히 뛰어난 자들을 천재라 부르지."
- "천재를 구분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뭔지 아나?"
"모르겠습니다."
"바로 미친놈을 찾는 걸세."
"... 예?"
"천재라는 족속들은 일반인과는 생각하는 것이 다르네. 모두가 당연히 여기는 것을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는 것들이 바로 천재라는 족속들이지. 그래서 그들은 때로는 광인 취급을 받았고, 또 광인 취급까지는 아니더라도 괴이(怪異)하다는 평을 받는 것이 대부분이었지."
- 유진천의 눈은 한 점 흔들림이 없었다.
이자성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유진천은 지금 그를 놀리려는 것도 아니고, 교묘히 규율을 피해 일신의 안녕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말하는 바가 이치에 맞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유진천의 말이 이치에는 더 맞지 않는가.
- 이자성은 드디어 이해를 했다.
이 소년은 버릇이 없는 것도 아니고, 교활한 것도 아니다. 그저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 익숙하지 않은 것뿐이다.
누구나 당연하게 여기는 것에 의문을 가지니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 "하지만 부관주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널 좋게 보지는 않았을 거야."
"어째서?"
"그야... 이치에는 맞을지는 모르지만 예의가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곽전 교관님도 너에게 화를 냈잖아."
"예의?"
"그래, 예의 웃사람이 좀 잘못하더라도 아랫사람이 거기에 대고 따져 묻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처사라고 봐."
유진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틀린 것을 틀리다고 말하지 못한다는 건가?"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웃사람이니까."
"웃사람에게는 이치에 맞는가 합당한가를 이야기할 수 없다는 건가?"
"아니, 내 말은..."
유진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예의라는 게 정확하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 때문에 옳은 것을 옳다고 할 수 없고 틀린 것을 묵인해야 한다면 예의란 쓸데없는 것이군."
- 가문의 어른들이 들었다면 경을 쳤을 소리다. 명문은 그 어느 곳보다 예를 중시하는 편이니까.
어린 시절부터 예와 협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살아온 남궁산에게 유진천의 사고방식은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조금 통쾌하기도 했다. 가문 안에서는 누구도 그런 말을 해 주지 않았으니까. 아니,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 "그런 말은 다른 데서 하면 안 될 거야."
"어째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테니까."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기 때문에 할 말을 참으란 말이냐?"
"꼭 그런 의미는 아닌데."
"넌 다른 사람의 눈을 굉장히 의식하는군."
"다른 사람이 좋은 눈으로 봐준다면 얻을 수 있는 건 뭐가 있지?"
"그야...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것보다야 훨씬 낫잖아."
"이해할 수 없군."
"이해할 수 없다고?"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가 내 자신이 어떤 인간인가에 대해 어떠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인식에 관련된 일이지 내 자신의 본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니까."
- "그런데, 너 정말 사람을 본 적이 거의 없어?"
유진천은 태연하게 말했다.
"아니.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사람들과 같이 살았지."
"그런데 왜 그런 대답을 했어?"
"그가 물은 것은 내가 사람을 본 적이 있느냐를 물은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럼?"
"정상적으로 살았느냐는 거지. 당연히 받아야 할 교육이라든가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 같은 것을 받은 적이 있느냐는 말이다. 그 물음에는 제대로 답했지."
- 유진천은 피식 웃었다.
남궁산은 유진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그처럼 정상적으로 살아온 이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다.
함께 살아가는 것이란 서로가 어떤 것을 주고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고통이든 물질이든 정서적 교감이든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서로 간의 소통을 기본으로 한다.
하지만 유진천은 그런 것은 경험하지 못했다.
그의 삶은 언제나 일방적인 것이었으니까.
- 그는 누구보다 그의 고통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결국 이 고통도 그가 준 것이었다.
- "그렇지. 미친놈이 무공까지 세니 도통 막을 방법이 없었네. 그래서 그의 앞에서는 광무괴가 아니라 광무군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지칭했네. 그가 강호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그런 미친놈이 천하제일인이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광무군이라는 이름으로 지칭되었지."
이자성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숨기기 위해서라구요?"
"자네는 아이들에게 미친놈이 천하제일인이었다고 말해줄 자신이 있나? 그 미친놈이 천하제일인이었으니 너희들도 열심히 해서 그런 미친놈 같은 훌륭한 무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일세."
- "그리고 자네, 혹시 독도 잘 쓰면 영약이 된다는 말 들은 적 있나?"
"예. 들어 본 것 같습니다."
"이 말은 독을 효과적으로 조합해 사용하면 영약이 된다는 말이 아닐세. 독 중 생물독, 그러니까 생물에서 추출한 독의 일종은 말 그대로 강한 기운을 내포하고 있어서 영약의 효과를 볼 수 있다는 뜻이지."
이자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정확하게 증명된 사실은 아니었네. 왜냐면 그런 독을 먹은 이는 다들 죽었으니까. 그리고 고수가 되면 영약 같은 건 별 의미가 없으니 그걸 굳이 먹는 그런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지. 그런데 그 인간은 그걸 먹었단 말일세."
- "다른 인간들도 그랬네. 이 인간처럼 평범한 인간들은 상상할 수 없는 짓이라든가 평번한 인간들을 절대 하지 않을 짓들을 수시로 해댔지. 상식을 상식이라 생각하지 않고 비상식이 왜 비상식이냐고 물어댔네."
이자성의 뇌리 속에 한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유진천.
듣고 보니 유진천이 한 행동과 검학이 한 말 중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는 것 같았다.
"문제는 이게 단순히 행동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걸세."
- "제가 듣기에 수준 낮은 수업들밖에 없다는 뜻이 아니라, 정말 제가 들을 만한 수업이 없습니다. 그 시간에 차라리 혼자 수련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수업은 듣지 않겠습니다."
방자하고 괴이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상황을 듣고 보니 그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검학의 말대로라면 정말 백무학관에는 그 아이에게 도움이 될 만한 수업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 아이는 대체 왜 이곳에 들었다는 말인가?
- 이자성이 생각에 빠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검학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그가 지금까지 이자성에게 한 말은 모두가 사실이었다. 그는 결코 이자성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단지 이자성에게 모든 것을 다 말해 주지 않았을 뿐이다.
이자성이 들은 것은 강호에 알려져도 괜찮은 일들이었다. 그리고 그 이상의 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자성의 신분으로도 부족했다.
그들에게 관련된 진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지금의 질서를 잃어버릴 수 있으니까.
-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을 하는 거다. 나는 여러분에게 무학을 익히는 법을 가르칠 셈이고, 그 과정에서 여러분이 무학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질문 있나?"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조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걸었다.
"무학이라는 것은 약자에게서 시작되었다. 태초 무학이 없을 무렵에도 약육강식(弱肉强食)은 존재했고, 약한 이들은 그저 당할 뿐이었다. 강한 사람에게 당하기도 했고, 산짐승들에게 변을 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 약한 이들이 스스로를 단련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것이 바로 무학이다."
누군가 손을 들었다.
"말해라."
"이상합니다. 저는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저는 무학이 강한 자가 더 약한 이들을 지킬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고 들었습니다."
조군은 코웃음을 쳤다.
"강한 이가 약한 이를 지키는 데 왜 더 강한 힘이 필요한가?"
- "모든 것은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강한 이들에게는 무학이 필요가 없다. 왜냐면 그들은 무학을 익히지 않았어도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있었으니까. 약한 이들이 강한 이들에게 대처하기 위해서 효과적으로 싸우는 법을 만들어 낸 것이 바로 무학이다. 무학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이치가 그러한 법이지."
학도는 수긍하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자리에 앉았다.
"다만 지금에 와서는 무학은 그러한 의미를 벗어났다. 무학은 스스로를 단련하는 것이자 약한 이들을 지키는 협(俠)이다. 그리고 마(魔)와 사(邪)에 대항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 모든 것에 앞서 무학이란..."
조군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힘을 주어 말했다.
"극기(克己)이다. 무학으로 스스로를 단련하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벗어나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무학의 본질이자 요체이다."
- "그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식? 그럼 비슷하게는 말을 했다는 의미인가?"
유진천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말했다.
"예."
남궁산이 입을 쩍 벌렸다.
'이 상황에서 예라고 하면 안 되지!'
하지만 남궁산이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유진천은 담담했다. 그의 생각에 그가 한 말이 조군이 한 말과 비슷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 진의야 어떻든 간에 조군이 한 말과 형태적으로 비슷했으니까.
- 보통은 이런 상황이라면 했더라도 아니라고 발뺌해야 하는 것 아닌가. '제가 한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를 시작으로 이런저런 변명이 터져 나와야 정상이었다.
-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유진천이 비호십이검을 한 번 보고 그대로 펼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누구라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말을 한 것은 유진천이 무학의 길을 진지하게 생각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높은 경지를 보고 나아갈 길을 바라보게 된다면 앞으로는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입에 담지 않게 될 테니까.
- 조군은 두 가지 의미에서 놀랐다.
하나는 단순히 반성을 바라고 했던 말을 유진천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는 것.
- 또 하나는 유진천이 한 말의 내용이었다.
'천천히 한 번 더?’
천천히 한 번을 더 보면 기억하고 펼칠 수 있다는 말인가?
- 그게 가능하다면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상대의 무공을 익힐 수 있다는 말 아닌가?
- 무학을 배우는 자라면 대부분 육합검법의 초식을 알고 있기 마련이었다. 덕분에 육합검법의 초식들은 서로 다른 무공의 형을 설명하는 데 쓰이기도 했다.
선인지로는 전방으로 검을 찌르는 동작을 말하는 것이고 독호출동은 검을 끌어당겼다가 다시 앞으로 찌르는 동작을 말하는 것이다.
- 눈치 없는 학도가 그를 크게 부르지만 않았어도 조군은 지금 이곳에서 한 단계 더 높은 무학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한 번 잡았던 끈이라면 언젠가는 다시 올 것이다. 조군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그 시간은 더 좁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도대체 왜 유진천은 이상한 검식을 펼쳤고, 왜 조군은 그것을 보고 탈각에 들었느냐는 것이다.
- "내가 펼친 무공은 그게 아니었을 텐데?"
유진천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 "형이 전혀 다르지 않느냐!"
"형(形)?"
유진천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는 뒤를 돌아 남궁산을 바라보며 인상을 썼다. 모두가 그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지만 이상하게도 남궁산만은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몸이 움직이는 형태가 다르다는 말이야!"
유진천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군을 보며 말했다.
"그런 건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유진천의 입에서 이어진 말이 조군을 강타했다.
"교관님의 기운이 그렇게 흐르고 있었으니까요."
- "사십 년간 검을 올바르게 펼치는 것만을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덕분에 정검(正劍)이라는 과분한 별호도 얻었습니다. 강호에 올바른 검을 펼친다는 명성을 떨치던 제가 사십 년을 익혀 온 검을 잘못 펼쳤을 리는 없습니다."
"당연한 말일세."
조군은 잠시 뜸을 들인 후 말했다.
"그럼 그 아이는 대체 뭘 본 겁니까?"
- "그 아이에게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보인다는 것."
"보이지 않는?"
"그 아이가 자네에게 본 그대로 펼쳤다고 말했다 했나?"
"예."
"그렇다면 아마도..."
검학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 아이에게는 기의 흐름이 보이는 것이겠지."
- 기의 흐름이야 무인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식의 흐름이 아니네. 기가 여기서 저기로 흐른다거나 강약이 느껴진다거나 하는 뜬구름 잡는 식의 기감이 아니라, 기가 혈을 타고 흐르는 것이 직접 보일 수도 있다는 말이야."
- "비천십이검의 창시자는 고수일까, 아니면 고수가 아닐까?"
"그걸 질문이라고 하십니까? 비천십이검이 천하제일을 다투는 절학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나름 절기에 속한다고 자부하는 검입니다. 당연히 천하를 다투는 고수였겠지요."
"그렇지. 그게 당연하네. 그런 이가 만들어 낸 검일세.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는 말일세."
- "빈틈? 무학의 종사가 만들어 낸 검식에는 하나하나 이유가 다 있네. 거기에 빈틈이 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가 펼쳤을 때는 빈틈이 보이지 않았겠지."
"확실히..."
"하지만 무위가 낮아진다면 그게 아니란 말일세. 강한 자가 펼쳤을 때는 신공절학이겠지만 내공과 성취가 받쳐 주지 못하는 이가 펼쳤을 때는 허점투성이의 무공이 될 수 있다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있나?"
"가능한 말입니다."
"그럼 무공을 전수하는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무공을 완성하기 전까지는 허점투성이가 되어 버리는 무공을 그대로 전할 수 있겠는가?"
- 조군은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 비천십이검이 만들어졌을 때에는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천하를 다투는 고수가 무공을 만들었고, 그걸 직접 사사했을 테니까.
하지만 대를 이어 오다 보면 상황이 달라진다. 가르치는 쪽도 배우는 쪽도 반드시 기재며 고수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들에게는 비상식적으로 큰 동작에서 발생하는 허점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형을 고친다..."
"그것으로 무학이 좀 더 나아간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걸세."
- 첫 번째로, 유진천은 처음 본 인상처럼 과묵하지는 않았다. 유진천은 말 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건 먼저 말을 거는 횟수가 적고 대답이 단순할 뿐, 물어본 일에 있어서는 꽤나 자세하게 대답을 해 주었다.
두 번째로, 유진천이 하는 일들은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괴이하기 짝이 없는 일들이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 "그, 그렇게 아픈데 평소에는 티를 전혀 안 내네?"
"티를 내고 아프다고 발악하고 소리 질러서 괜찮아질 거라면 몇 백 번이고 했겠지."
- "힘들어서 하지 않아도 될 일이라면 안 했을 거다. 힘들든 힘들지 않든 해야 하니까 하는 것뿐이다."
당연한 말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실천하기는 어려운 말이었다.
-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노력하며... 그렇게 그런 강인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면 되지 않나?"
남궁산은 고개를 저었다.
"난 안 돼."
- 유진천은 흥미롭다는 듯이 남궁산을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남궁산이 저렇게 확신에 찬 어투로 말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 확신에 찬 것이 자신은 안 되다는 것이라... 꽤나 우습지 않은가.
- "그렇군."
"..."
유진천의 말에 남궁산은 자신도 모르게 울컥했다.
보통은 이럴 때 아니라고 말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결국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니라고 말해 줘야 하는 것 아냐?"
"왜?"
- "일부 예외가 있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본인이지. 그것을 자신이 속이기도 하고 더 치장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만큼 자기를 잘 아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지."
"..."
"그런 자신이 스스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데 내가 너를 얼마나 보아 왔고 얼마나 잘 안다고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 말해야 하는 거지? 그게 오히려 너에 대한 무시가 아닌가?"
"그건..."
"나는 너만큼 너를 잘 알지 못한다. 그러니 네가 네 자신에게 내리는 평가를 수정하라고 할 이유가 없고, 자격도 없지. 내 말에 틀린 부분이 있나?"
- 유진천은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저들이 너를 평가하는 것 중에 무공이 약하다든가 출신이 나쁘다는 소리는 없어 보이는데? 다른 이들이 널 얕잡아보는 이유가 정말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나?"
"사실이라니까."
"그렇군. 그렇다면 저기서 너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들은 모두 너의 무공 수위를 정확하게 알고 있고, 남궁세가의 삼자인 네 출신이 어떠한지 모두 알고 있는 거로군? 남궁세가는 온 동네에 자신들의 정보를 뿌리고 다니는 모양이지?"
- "실제로 저들이 널 평가하는 원인은 그런 게 아닌 것 같은데? 이유를 모르는 건가, 아니면 이유를 알기 싫은 건가?"
- "너는 다른 이들의 눈을 신경 쓰는 게 아냐."
"뭐?"
유진천의 말이 비수처럼 남궁산의 가슴에 와 꽂혔다.
"다른 이들이 널 보는 게 싫은 거야."
"..."
"네가 널 싫어하니까."
- 다른 이들이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이 싫다. 무슨 말이 나올 줄 익히 아니까.
그래서...
오히려 더더욱 다른 이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 "그럴 용기도 없으면서 입으로만 떠들어대는 것이오?"
매검과 제갈휘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확실히 이건 그들이 나설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끼어들 여지가 있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그들의 손을 벗어난 일이 되어 버렸다.
남궁산이 떨리는 눈으로 유진천을 바라보았다. 유진천이 무뚝뚝한 얼굴로 남궁산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순간에도 다른 이들의 의견을 듣는 건가?"
"..."
"한 번쯤은 마음이 가는 대로 해 보는 것도 좋지."
- "때로는 진다는 것을 알아도 물러서지 말아야 할 곳이 있소. 그렇지 않소?"
- "하나의 초식을 완벽하게 펼쳐 내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어려운 것은 그 초식을 펼쳐 낼 수 있는 완벽한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 남궁산은 유진천의 말을 이해했다.
초식은 손발을 놀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수련하고 또 수련하여 완벽에 가깝게 익혀 내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진정 어려운 것은 익혀 낸 초식을 최대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과 순간에 쓰는 것이다.
상대와의 거리.
상대의 상황.
지면과 주변의 상태.
상대와의 상성.
상대가 펼치고 있는 초식.
육체의 상태.
그 수많은 것을 고려하여 완벽에 가깝게 초식을 펼쳐 내는 것.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의 초식을 완성한다는 의미에 가까울 것이다.
- "긴장을 하는 건 당연하다. 나 역시 비무 전에는 항상 긴장한다. 긴장하지 않으려 애쓰는 건 의미가 없다. 중요한 건 긴장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네가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가다."
- "검으로 진다면 뭐라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창으로 진다면 할 말은 생길 테니까."
- '기묘한 녀석이군.'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남궁산을 보고 있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 "비무를 하라고 부추긴 녀석이나 창을 들게 한 녀석이나 다들 제정신은 아니지."
매검의 목소리는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제갈휘는 뒷머리를 긁적이고는 유진천을 슬쩍 바라보았다. 제갈휘 역시 유진천이 말한 방식이 옳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진천의 방식을 반대하지 않은 것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학관 내에서 처음으로 그의 예상을 완벽하게 벗어난 자가 어떠한 세상을 보고 있는지.
- 확실히 맞는 말이다. 계략을 꾸미는 것과 적이 내가 예상한 대로 움직여 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니까.
- 지금 위청민은 전신이 친친 묶여 있는 것과도 같았다. 실제로 그에게는 어떠한 위해도 가해지지 않았지만, 심리적인 족쇄가 그의 손발을 묶고 있었다.
제갈휘는 가만히 유진천을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어떨까?
- 상대의 심리, 상황, 그리고 전략.
그 모든 것을 끌어낸다. 말이 안 되는 것들이 상황과 맞아떨어져 완벽하게 흘러 나간다.
- 이 사람은 괴상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른 이들보다 몇 배는 더 합리적이고 정확하다.
그렇기에 오히려 그것이 괴상해 보이는 것이다.
아무리 합리적이라 해도 이해의 범위를 넘어 버리는 행동은 오히려 괴상하게 보일 테니까.
- 제갈휘는 다시금 위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남궁산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유진천이 깔아 놓은 수많은 위협들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 "내가 학관에 와서 느낀 것이 있지."
"... 그게 뭐요?"
"남궁산도, 너도, 그리고 다른 이들도 참 이상하다는 것."
"뭐가 말이오?"
유진천은 담담하게 말했다.
"너희는 듣지도 않은 말을 마음대로 만들어 내고 혼자서 결론짓는 것을 즐기더군."
-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
제갈휘는 멍한 눈으로 유진천을 바라보았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니.
'그런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남궁산이 이긴다는 것? 그 말은 분명히 했다. 그게 아니라면...
'일각이 지나면...'
제갈휘의 의문을 끊으며 유진천이 입을 열었다.
"시간을 보내서 이긴다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어. 남궁산은 자신의 손으로 이긴다."
- 유진천의 마지막 말이 자꾸 걸렸다.
"잘 싸웠다는 말로 자신을 위로할 수 있다면 그걸로 좋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면, 잘 싸웠다로 만족할 수 없다면, 네 손으로 이기고 싶다면 네가 먼저 움직여야 한다."
- 만족할 수 있었다.
이 정도만 해도 지금까지의 남궁산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선전이었으니까.
그걸로 좋다.
확실히 좋은 비무였다.
하지만...
정말 만족할 수 있을까?
이것으로 좋은 걸까?
-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모습.
어떻게 저리 당당할 수 있을까?
어떻게 타인의 눈 같은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저럴 수 있을까?
자신이었다면 그러지 못할 것이다.
유진천은 그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행할 뿐, 타인의 시선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그의 주위에 자연스레 사람들이 몰려든다.
이상하다.
참 괴이한 일이다.
- 그렇게 되고 싶다.
조금 더 강해지고 싶다.
유진천처럼.
그렇다면...
- '움직여야 해.'
- "운으로 이겼다든가 한 게 없다는 말은 그저 겸양일 뿐이다. 네가 그렇게 말해 버린다면 네게 진 위청민의 입장은? 승자는 기뻐해야 한다. 그게 패자에 대한 배려다."
- "내공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조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강호인과 일반인을 구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내공을 익혔는가 익히지 않았는가이다. 정확하게는 그들이 익힌 무공이 상승(上昇)의 무공인지를 가리는 것이지. 예외적으로 외공을 익히는 이들도 있으나 이들은 내공을 익히는 이들과 같이 취급한다."
- "무인과 일반인의 차이는 기(氣)를 이용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일반인의 육체에도 기는 흐른다. 하지만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이들은 기를 활용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무인의 첫걸음은 기를 운용(運用)하거나 축기(蓄氣)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남궁산은 집중하여 조군의 말을 들었다. 기본적이지만 정론이었다.
"기운을 모아 육체에 갈무리한다. 그리고 그 기운을 바탕으로 무공을 펼친다. 이것이 기본 중의 기본이다. 큰 틀에서 보자면 무인의 강함은 그가 기를 얼마나 모았고 얼마나 잘 활용하는가에서 결정 난다고 해도 틀린 것은 아니다."
- "기운을 빨리 모으기 위해 내공심법이 탄생했고, 기운을 좀 더 잘 활용하기 위해서 기공(氣功)과 신공(神功)이 탄생했다. 무학의 발전에 따라 따로 신공을 운용하지 않고 검법이나 권법 같은 무학의 초식 속에 기의 운용을 담아내는 동공(動功)이 탄생했다. 현재 대부분의 무학은 동공의 묘리를 포함하고 있다. 문파에 따라 두 가지를 동시에 운용하는 곳도 있고, 한 가지만 운용하는 곳도 있지만 이는 방향의 차이일 뿐,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 "기운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남궁산의 얼굴이 밝아졌다. 대답할 수 있는 말이다.
"반복입니다!"
"어떤 반복?"
"기운을 더 빠르게 강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수련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것입니다."
- 순서가 거꾸로다?
남궁산은 뭔가 알 것 같기도 했다.
"거꾸로 된 거죠. 기운을 끌어올려 육체가 따라가게 해야 하는데 육체가 움직여 기운이 따라가게 만들고 있던 겁니다. 무리상으로 보면 이건... 완전히 잘못된 겁니다."
- "강해져도 되는 거지? 내가 원하는 걸 해도 되는 거지?"
대답을 들을 만한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듣고 싶었다. 누구라도 그렇다고 이야기해 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네가 대답해."
"..."
"네게 묻고 스스로 대답해. 다른 사람의 말 같은 건 소용없어."
- "넌 네가 처한 입장이 괴롭겠지."
"..."
"하지만 세상에는 널 부러워하고 사는 사람도 많다."
남궁산은 입을 다물었다.
"너와는 비교도 안 되는 힘겨운 삶을 사는 이들도 많아. 그런 사람들도 살아가잖아."
- "중요한 건 자신의 의지야.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그래서 다른 이들이 납득하지 못한다면 그걸로 그만이지. 어차피..."
유진천의 말이 남궁산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네가 뭘 해도 그들은 널 이해해 주지 않을 거다."
"..."
"그럼 차라리 원하는 걸 해. 그럴 자유야 있잖아?"
- 유진천의 말이 맞았다. 그가 쥐 죽은 듯 살아도 아니면 거세게 반항해도...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결국 그들은 남궁산을 이해해 주지 않을 것이다. 그건 너무도 빤한 일이었다.
- "다른 이들의 목숨은 귀하지 않은가?"
그녀는 한숨을 푹 쉬었다.
"다른 이들의 목숨도 귀하죠. 귀하고 말고요. 하지만 그들의 목표는 그녀를 지키는 것이었어요. 설령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은 그녀가 무사한 쪽을 바랐을 거예요."
- "목숨조차 희생하며 해야 할 일이란 게 대체 뭐지?"
"..."
"목적이 있으면 목숨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건가?"
"제 말은..."
"그럼 이 자리에서 그녀를 지키기 위해 다른 이들이 다 죽어 버리면 그녀는 자신을 지켜 준 그들에게 감사하며 살아가면 그만인가?"
위지화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논리가 틀린 게 아니다.
다만 유진천의 목소리가 너무도 무겁게 느껴져 입을 열 수가 없었다.
- "세상에 목숨보다 우선되는 목적 같은 건 없어."
"..."
"그런 건 없는 게 나아. 차라리..."
- 그녀는 모른다.
목숨을 도외시한 목적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그것이 얼마나 사람의 삶을 망쳐 놓을 수 있는지 말이다.
- 한 걸음.
또 한 걸음.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위지화영은 석상처럼 굳어 버린 듯 더 이상 앞으로 가지 못했다.
-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죽음이 빤히 예상되는 길을 이런 식으로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다는 말인가.
유진천의 입이 열렸다.
"감당하지 못할 말은 입에 담지 마."
-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지 마. 당신 생각에는 그게 협의라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그냥 멍청한 짓일 뿐이야. 자기 목숨이 귀한 줄도 모르는 사람이 다른 이들의 목숨이 귀한 줄 알 리가 없지."
- 오랜 시간 공들여 키운 듯, 분재는 누가 봐도 아름답게 자라나 있었다.
"그런가?"
사내의 목소리는 아름다웠다.
사내의 목소리가 아름답다고 하면 보통은 믿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라도 사내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 본다면 사내의 목소리가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속하가 미숙하여 벌어진 일입니다. 벌해 주소서."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때로는 실패할 수도 있는 것이지."
"하나..."
"연아."
"하명하십시오."
"실패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왜 실패했느냐는 것이지. 내게 설명해 줄 수 있겠느냐?"
- 사내가 혀를 찼다.
"나도 그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으니 네 말대로라면 나 역시 벌을 받아야겠구나."
"속하가 주제넘었습니다."
사내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보고는 받았으니 이리 와서 차나 한잔하고 가거라."
- 사내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새하얀 백의.
흑단 같은 머리는 단정하게 묶여 허리춤까지 길게 내려와 있다.
그리고 머리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천하에 그 짝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의 미남자였다.
차를 끓이는 사내의 손은 너무도 가늘고 하얘서 마치 여인의 손을 보는 것만 같았다.
누가 보아도 연약한 문사와 같이 보이는 자.
하지만 이 남자의 정체를 아는 자라면 누구도 감히 이 남자의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할 것이다.
- "너희가 내공을 익히는 방식은 내 기준으로 봤을 때는 완전히 잘못되어 있다."
- "설명하기 난해하군. 거꾸로 해 보지. 네가 아는 내공이라는 것은 뭐냐?"
제갈휘는 입술을 살짝 깨문 뒤 대답했다.
"내공은 자연의 기다. 기운을 육체에 저장하는 것이지."
"그래."
"호흡을 통해 받아들인 자연의 기를 단전으로 이끈다. 단전에서 전신으로 일 주천시키는 동안 동화된 기는 육체에 머물고 나머지 기운들은 호흡을 통해 다시 밖으로 빠져나간다."
- "육체에 동화된 기는 단전으로 모여든다. 그 기운이 내공이고, 모든 무학의 기본이 된다."
유진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너희가 알고 있는 내공이군."
- "혈도는 전신에 다 있겠지?"
"당연하지. 그래서 일주천 할 때도 전신의 혈을 타고 돌아오잖아. 내공에 따라서 통과하지 않는 혈도도 있기는 하지만, 보통은 일백팔 개의 혈도를 모두 돈다고 할 수 있지."
"그래. 그게 너희가 말하는 내공심법(內攻心法)이다. 그럼 내가 하나 묻겠는데..."
유진천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팔이 잘린 사람은 어떻게 내공을 수련하지?"
- "내 말을 다시 생각해 봐. 너희가 익히는 내공심법은 전신으로 기운을 돌린다. 그럼 팔이 잘려서 혈도가 일정 부분 없어진 이들은 어떻게 내공을 익히지?"
- "단전에서 출발하여 전신의 혈도를 타고 흐르는 것이 내공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
"이봐, 내공이 혈도를 타고 흐른다면 내가 네 어깨의 혈을 날려 버리면 네 팔에는 기운이 흐르지 않아야 해.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지. 팔이 잘려 나가든 혈도 수십 개가 뭉개지든 기운은 흘러.”
- "하지만 우린 이미 내공을 쌓고 있는데?"
남궁산이 대신 대답했다.
"과정은 전혀 달라도 같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
- "기운은 전신을 타고 흘러. 육체 구석구석, 손끝, 머리끝 발끝까지 기운이 흐르지 않는 곳은 없어. 그런데도 너희는 겨우 백팔 개의 점을 전신의 기를 돌리는 길로 생각하더군. 그건 그저 방향을 알려 주는 지표에 불과한데 말이야."
- 그가 알고 있던 것은 틀린 것이 되고, 유진천의 궤변이 옳은 것이 되어 간다. 더욱 화가 나는 것은 이 웃기는 상황을 제갈휘가 납득해 버린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이라면 부정할 것이다.
유진천의 말이 궤변이라고 소리칠 것이다.
하지만 제갈휘는 그럴 수 없었다.
- 매검이 인상을 썼다.
"어렸을 때였어! 지금이라면 내가 이긴다!"
"그래. 작년에 너는 많이 어렸지."
"... 제길, 여하튼 지금은 해볼 만해!"
유진천은 남궁산을 바라보았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 "이길 수 없는 상대인가?"
남궁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 그런가?"
"하지만."
"..."
남궁산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싸울 수 없는 상대는 아냐."
- "넌 내 동생이다."
"..."
"가문이 반대한다면 내가 담판을 짓겠다. 너는 아무 생각 하지 말고 내게 배우기만 하면 된다."
- 남궁산은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제왕검형은 그가 꿈에도 그리던 검이었다.
남궁의 검이라면 대개 철검십이식을 떠올리지만, 일절로 꼽히는 것은 누가 뭐래도 제왕검형이다.
하지만 남궁산에게는 닿지 않는 검이었다.
- 하루하루 그저 살아갈 뿐인 시간들 뿐이었다.
살아감의 이유는 그저 목적의식 뿐.
그를 부여잡고 죽어간 이들이 그에게 남긴 것은 그것 뿐이었다.
그는 그것을 위해 태어났고 그것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이니까.
- '남은 건 그것 뿐이니까.'
그들이 바란 것은 이룰 것이다.
그들이 원한 것은 들어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끝나 버리면.
유진천에게는 뭐가 남을까?
- 뿜어진 연초의 연기가 허공으로 사라져 갔다.
뿜어져 나온 연기처럼...
유진천도 사라질까?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희미한 잔향(殘香)처럼.
홀로 남아 목적마저 사라져 버린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걸까?
- 그는 흥미가 인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모습마저도 가슴이 뛸 만큼 아름다웠다.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습에는 아름답다는 말이 더 어울렸다.
"정체를 밝히기가 어렵다?"
- 그가 지시한 일들이 실패한 적은 수도 없이 많았다. 성공한 적은 그보다 몇 배로 많았다.
하지만 하후상은 일의 성패를 타인에게 탓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지시는 그가 내린다.
실패한다면 그가 지시를 내린 이의 능력을 잘못 가늠했거나 일 자체를 잘못 보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굳이 실패한 이를 탓할 일이 아니었다.
성공한 일 역시 수하의 공은 아니고, 실패한 일 역시 수하의 과는 아닌 것이다.
하후상은 자신에게서 나온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 생각하는 자였다.
- "평소에는 말도 잘 못하는 놈이 자신을 깎아내릴 때는 어떻게 저렇게 논리 정연하게 말도 잘할까?"
"저것도 재능이다. 재능."
"... 그거 욕이지?"
"칭찬이겠냐?"
- "실력 앞에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은 없다. 산을 부술 수 있는 패검의 소유자와 빛처럼 빠른 쾌검의 소유자가 붙는다면 누가 이길까?"
남궁산은 고민에 빠졌다.
답이 안 나오는 문제였다.
"그건 답이 없잖아."
- "지금까지 네가 가르쳐 준 수련법은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였다. 그런데 이건 아냐. 할 수 있느냐, 할 수 없느냐의 문제라고. 그렇게 정밀한 기운 조절이 가능하다면 내가 천하제일 고수지, 너한테 이러고 있겠냐?"
- "너희가 가장 이상한 것은 자신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마주하면 우선 불가능으로 치부해 버린다는 것이다."
"..."
"심지어 눈으로 보여 주기까지 했는데 말이야."
- "나는 할 수 있는데 너는 할 수 없나?"
자존심이 상하는 말이었다.
제갈휘는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나만 할 수 있는 거라면 나 역시 너희에게 가르치지 않는다. 하지만 나뿐만이 아냐. 이미 강호에서도 수많은 이들이 사용하는 방식이다."
- 유진천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순간에도 육체 내부에서는 기운들이 섬전과 같은 속도로 전신을 치달리고 있는 중이다.
남궁산 등은 아직 미숙하여 기운을 움직이며 몸을 같이 움직이는 수련을 하지만, 유진천은 육체를 고정한 채 기운의 속도만을 단련해 내고 있는 것이다.
- "아무리 응축이란 게 개념이 조금 다른 문제라고는 해도 아예 안 될 정도로 다르지는 않을 텐데?"
유진천은 깊게 연기를 들어마시고는 천천히 내뱉었다.
"한 번 해봐."
"응?"
"지금 하던 수련을 보여 달라고."
- "그렇게 했나?"
"응."
유진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들 불러와."
- 딱히 따라오는 것을 제지할 이유도 없고 명분도 없었다. 그녀가 원한다면 본인이 원하는 것을 할 자유가 있었다.
이 정도로 큰 피해를 본다고 할 수도 없으니까.
- "그런데 왜 강호사는 봐요?"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뭘요?"
"사소한 일."
"그러니까, 어떤 사소한 일?"
"사소한 전투, 사소한 계약, 그리고 사소한 죽음."
- "뭐가 달라지지?"
"..."
"내가 듣고 있지 않는 듣고 있는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잖아. 당신들은 그저 한을 풀 대상이 필요한 것뿐이지. 내가 어떻게 반응하든 할 일을 하고 죽어 버리겠지."
- "알았다고, 반드시 원한을 갚겠다고 다짐해 줄까, 아니면 죽지 말라고 눈물이라도 흘려줄까?"
"... 소주."
"어느 쪽이 편하겠어? 말해, 원하는 대로 해 줄 테니까."
- "병기에 기운을 운용하는 것도 다르지 않아 병기 역시 신체의 연장이다. 굳이 병기에 기운을 운용한다고 생각할 것 없이 손이 늘어났다고 생각하면 돼."
- 최근 남궁산을 보면 느껴지는 것이 있다.
대기(大器).
결코 빠르지는 않다. 하지만 지켜보고 있으면 어느새 그들이 발전하는 속도에 뒤처지지 않고 있었다.
이해력은 조금 떨어질지 모른다.
하지만 부단한 노력과 집중력으로 그것을 메꿔 내고 있는 것이다.
위에 서 있는 입장에서 그보다 무서운 것은 없다.
조금만 방심하면 추월당해 버릴 것 같은 위기감. 그리고 추월당하면 다시는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
- "껍질을 깼기 때문이다."
"껍질?"
"스스로가 만들어 낸 틀 안에 갇혀 있었지. 자신이 스스로를 싫어하는 것이 너무 심해서 타인도 자신을 싫어할 것이라 믿는 거야. 그래서 작아지고 소심해지지. 실제로는 다른 이들은 그에게 별 관심도 없는데 홀로 다른 이들이 자신을 싫어할 것이라 멋대로 믿고 항상 타인의 눈을 살피지."
"호오, 그럴듯하다?"
"껍질을 깼기 때문에 본래의 자신이 나오기 시작하는 거야.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겠지."
- "놓친 것이 아닐세. 모르는 것이지. 자네는 모른다네. 내 나이쯤 된 늙은이들이나 알 수 있는 이야기지."
"이야기는 들어 알고 있습니다. 유진천이 혈겁의 불씨가 된다는 말."
"그렇게 알고 있는가?"
"... 예?"
황보승은 고개를 저었다.
"말뜻이 잘못 전해졌군... 하기야 그 말만 들으면 그럴 만도 하지. 하지만 그 말은 그런 뜻이 아니네. 그 아이가 혈겁의 불씨가 되는 것이 아니야."
- "그 아이 덕분에 강호가 백 년 동안 유지될 수 있던 것이지. 그 아이는 말일세, 존재만으로 자네를 살려 주고 있는 거라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그렇게만 알고 있으면 되네. 때는 다가오고 있어. 우리는 최선을 다해 준비했지만, 준비하면 준비할수록 부족함을 느낄 뿐일세. 이제는 그들의 말을 믿어 보는 수밖에."
- "그런 짓으로는 그의 눈을 피할 수 없다."
"... 무슨 말씀이신지?"
"연아, 기억하거라. 범은 포악하고 두려운 존재다. 더구나 그는 천하를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지고 있지. 그의 눈을 피해 무언가를 꾸민다는 것을 불가능하다."
- "내가 왜 그에게 일을 맡겼는지 궁금하느냐?"
"그렇습니다."
하후상은 미소를 지었다.
"그건 말이다. 살고 싶다는 신호란다."
- "여우가 직접 토끼를 잡는다면 범의 분노는 여우를 향할 것이다. 하지만 여우가 족제비를 시켜 토끼를 잡는다면 그 분노는 누구에게 돌아가겠느냐?"
"범이 알고 있다면 여우와 족제비, 둘 다입니다."
"그래. 그럼 전자와 후자의 차이를 알겠느냐?"
-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후자에서는 여우가 꾀를 부렸다는 것이지. 범에게 죽고 싶지 않아서 피를 부려 도망가려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봉연은 도무지 하후상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범은 변덕스럽고 포악하다. 그러니 가능성이 많은 쪽에 걸 수밖에. 나는 범에게 살고 싶다는 신호를 보냈고, 그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는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그에게 혈육의 정이라는 것이 티끌만큼이라도 남아 있다면 죽지 않고 끝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만약 그가 그 모든 것을 초월했다면... 나는 갈기갈기 찢겨 죽을 것이다."
- 그렇다면 지금 이 사내는 이번 일로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일을 벌였다는 말인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한 도박을 했다는 말인가?
하후상은 미소를 지었다.
"어느 쪽이라도 내게는 이득이 되지. 만약 범이 나를 죽이지 않고 떠난다면 천하는 내 것이 된다. 안타깝게도 그가 분노하여 나를 죽인다면 나는 언제 그가 돌아올까 노심초사하며 살지 않아도 되지. 어느 쪽도 손해는 없지 않느냐?"
- "이쪽이 좀 더 맞아떨어져요. 이전의 역사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너무 작위적인 면이 많아요."
"어떤..."
"아무리 일천의 무인을 잃었다고는 하나 중원 무인들의 수는 마인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어요. 그런데 수뇌부를 잃고 후퇴하는 마인들을 추격하지 않았다는 건 말이 안 되죠."
"으음."
"그 외에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는데, 그 모든 것들이 꾸며낸 이야기라면 납득이 가요. 진실을 듣지 못했다면 그저 전시의 상황에서 제대로 기록하지 못한 탓이라 생각하고 말아야 했을 일이죠."
- 유진천은 침상에 몸을 뉘었다.
그는 그들이 원하는 진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 대신 그들이 원하지 않는 진실은 말해 주지 않았다.
그들이 알 필요 없는 진실.
알려진 진실도, 숨겨진 진실도 아닌, 잊혀져 버린 진실은 이제 오로지 유진천 혼자만 아는 일이 되어 버렸다.
아니, 또 하나 알고 있는 이가 있다면...
'하후패.'
- 재미있는 일이다.
하후패는 유진천을 기다리는 것이 삶의 모든 것이다. 유진천은 하후패를 무찌르는 것만이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이다.
불구대천의 원수보다 더욱 서로를 증오하고 갈구하는 그들이 세상이 모르는 진실의 유일한 공유자라는 것이 너무도 재미있는 일이었다.
- '오래 걸리지 않아."
유진천은 눈을 감았다.
그와 하후패의 시간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 "패하고도 비굴하지 않던 당신이오! 나는 패한 당신이 승리한 유매검보다 몇 배는 더 멋져 보였소. 사파인들은 비겁하고 나약하다 생각했던 나를 일깨워 준 것이 바로 당신이란 말이오. 그런데! 그런데 왜 당신이 마인이 되었느냐고 묻지 않소!"
홍빈은 비웃음을 머금었다.
"꼬마야. 내가 비굴하지 않았다고 했느냐?"
"그렇소."
"그럼 된 것이냐?"
- "패하고 비굴하지 않으면 끝나는 것이냐?"
매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이기고 싶었다. 내가 동경한 것은 비굴하지 않은 무인이 아니라 강한 무인이었다."
- "신념?"
"그렇소!"
"그게 무슨 소용이 있나?"
"이..."
"나약한 자가 신념을 부르짖어 봤자 그것은 변명에 불과하지. 신념도 강한 자에게나 의미가 있는 것이다."
- "마도는 강하다. 쓸데없는 겉치레에 신경 쓰지 않고 순수하게 강함만을 추구하지. 그래서 나는 마도를 택했다."
- 또래 중에 뛰어나다?
그런 것은 강호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또래보다 뛰어나든 얼마나 위대하든 간에 당장 눈앞에 있는 적보다 약하다면 죽는 것이 강호의 생리였다.
성취가 빠르다든가 또래보다 뛰어나다는 것에 안주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 [살아 있지 않느냐.]
하후상은 입을 다물었다.
아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가 말하는 것은 혈육이라든가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내가 너에게 삶을 허락하지 않았다면 네가 살아 있을 수 있겠느냐?]
하후상의 어깨가 떨렸다.
[모든 마도, 모든 무인, 모든 인간, 모든 생명이 마찬가지다. 내가 그들에게 삶을 허락하였다. 그렇기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지.]
- '그'는 지금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 "그래, 그렇겠지."
"저는..."
"그런데 그게 날 위한 건가?"
"..."
여인은 입을 다물었다.
"날 위한다면 그냥 죽어 버렸으면 그만이지."
- "병을 숨기고 필사적으로 괜찮은 척하다가 어느 날 죽거나 자결해 버린다면 나는 더 기쁠 텐데 말이야."
"도련님."
"내게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쁘다고? 아니지. 그건 당신의 그 비정상적인 분노와 증오를 내게 떠맡길 수 있어서 기쁜 거겠지."
여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당신이 내게 도움을 주었기에 나는 당신들의 목숨을 바탕으로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겪고, 지옥과도 같은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인가? 그것 정말 편한 논리로군."
- 제갈휘가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정말 하후상이오?"
하후상은 어깨를 으쓱했다.
"세상에 하후상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어찌 나뿐이겠는가. 하지만 아마도 자네가 생각하는 하후상이 맞을 거네, 친구."
- "자네는 아직 잘 모르는 모양인데, 약자는 강자에게 말을 함부로 하는 게 아닐세. 왜냐면 강자는 언제나 자신의 기분에 따라 약자를 죽일 수 있기 때문이지. 예를 들면..."
- "그는 너무 강했습니다."
남궁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에 대한 소문은 나도 들어 본 적이 있다."
"지금까지 나름 마인을 만나 보았지만, 그는 그런 마인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다른 이들이 악귀 같았다면, 그는 마치 악귀 위에 군림하는 왕처럼 느껴졌습니다. 마인이지만 기품이 느껴졌고, 마인이지만 저도 모르게 그가 대단하다고 생각해 버렸습니다."
"상대를 인정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예."
남궁산은 남궁강의 말을 경청했다.
"상대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안계를 좁히는 지름길이지. 무학이란 언제나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올바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 "아,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애송이 놈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다 그 녀석들 때문이야. 다들 대충 말해도 알아듣다 보니 말하는 게 서툴러졌어."
지일립은 혼자서 중얼거리는 애송이 놈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놈, 진짜 미친 거 아닐까?'
- "어떻게 포위망을 뚫고 한월을 데려온 거지?"
"아, 그거요?"
애송이는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안 들키게 사이사이로 잘 지나가서 들쳐 업고 조심해서 돌아왔어요."
지일립은 처음으로 부하 대원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가 참아 낼 수 있던 것은 오로지 그런 행동을 할 시 벌어질 소음이 적들을 자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 울창했던 숲 한가운데에 뻥 뚫린 공터가 만들어졌다.
"아... 아직 힘 조절이 잘 안 된다니까."
애송이는 검을 들고 갸웃거리다가 고개를 돌렸다.
호표단 제이대.
그리고 그들을 추격하던 암각.
모든 이들이 경공을 멈춘 채 멍하게 애송이를 바라보았다.
애송이가 지일립에게 물었다.
"쟤들은 어떻게 할까요?"
애송이가 그들을 쫓던 적들을 가리켰다.
"후, 후퇴한다."
그 순간,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암각의 대원들이 재빠르게 뒤로 달아났다.
- "어? 그냥 가네?"
지일립은 멍한 눈으로 애송이를 바라보았다.
"..."
"제가 혹시 뭘 또 잘못했나요?"
"... 너."
- "... 오괴(五怪)?"
남궁산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제 친구들이 확실히 독특하긴 하죠."
지일립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쩐지, 더럽게 이상하다 싶더니..."
지일립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 "난 상관없다."
설중악은 가볍게 말했다.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지. 처음 오는 곳에서 처음 보는 사람을 믿어 버린 너희가 멍청한 것 아닌가?"
- "넌... 넌 대체 누구냐?"
설중악은 담담하게 답했다.
"유진천."
순간, 궁백의 눈이 크게 떠졌다.
"과... 광괴!"
"그게 나야."
(리뷰자 주 : 자동재생. '과... 광마!' '그것이 바로 나다')
- 오괴?
오괴에 대해서 이야기해 달라는 거야?
지금 나한테 오괴에 대해 말해 달라고 했나?
너, 어디서 뭘 좀 듣고 왔냐? 내가 오괴, 그놈들한테 무슨 꼴을 당했는지 알고 나보고 설명해 달라는 거냐?
- "여로모로 문제가 많지 않겠냐, 이 말이다."
"문제?"
"그래. 문제."
"누구의 입장에서? 나, 아니면 맹?"
- 제갈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내 입장에서면 상관없고, 맹의 입장이라면 내가 신경 쓸 바가 아니다."
"... 제길."
우문현답(愚問賢答)이라기에는 애매했지만, 정곡을 찌르는 대답인 것은 틀림없었다.
- 남궁산과 위청민의 처지는 역전이 되었고, 과거 두 사람이 가졌던 차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격차가 벌어져 버렸다.
위청민의 노력은 헛된 것인가? 위청민은 노력했는데 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인가?
아마 과거의 남궁산이었다면 대답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남궁산은 그 의문의 해답을 어느 정도 찾을 수 있었다.
"길이 올바르지 않으니까."
- "노력한 만큼 보상받는 게 당연해.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더라고."
- 하지만 무학은?
무학의 길은 우물을 파는 일과는 다르다.
어느 곳이 물이 흐르는 곳인지 알아낼 방법 같은 것은 없다. 이곳이 옳은 길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런데 어리석다라고 단정 지어 버릴 수 있을까?
- "위청민이 가고 있는 길이 정말 잘못된 길일까?"
"올바른 길이었다면 너에게 패했을까?"
- 유진천은 표정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럼?"
"효율의 문제지."
- "위청민이 가고 있는 길에 비해 네가 걷고 있는 길이 더 빠르고 확실할 수는 있다. 애초에 그렇게 문파가 생기고 구전이 생겨나는 것이지. 궁극이 있다면 그곳으로 향하는 길은 수도 없이 많다."
"그렇겠지."
"문파란, 그리고 무공이란 누군가 걸었던 길을 따라 걷는 것과 같은 일이다. 확실하고 안전하지. 하지만 이 길이 다른 길에 비해 정말 빠른 길인지, 돌아가는 길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 "누가 먼저 끝에 도달할 것인가는 알 수 없다."
-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미련하다고 할 수 있겠지."
"미련하다고?"
"굳이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걷고 있으니까."
- 인간이 느끼는 아름다움은 천차만별이다.
어떤 이는 꽃에 아름다움을 느끼지만, 어떤 이는 꽃에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누군가 걸작이라고 칭송하는 그림도 어떤 이에게는 한 푼어치의 가치도 없는 종잇조각일 뿐이다.
천 명의 사람이 있다면 천 개의 미학(美學)이 있다.
어떠한 것도 모든 사람에게 동시에 아름답다고 느껴질 수는 없는 법이었다.
- 사내는 아름다웠다.
천 명의 사람이 본다면 천명의 사람이 모두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사내는 아름다웠다.
그의 아름다움은 조금 이질적이었다.
그는 마치 절세의 미녀와 같은 가녀림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와 반대로 저절로 무릎을 꿇게 만드는 기운을 품고 있었다.
- "하늘은 변한단다. 지금도 변하고 있지. 구름이 흐르고, 시간이 지나면 색도 변하지. 흐리기도 하고 맑기도 하고, 때로는 비를 내리고 눈을 부르지."
"그렇습니다."
"하늘은 항상 변하고 있단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늘은 변치 않는다 말하지. 재미있는 말이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마공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변했단다. 많은 것이 변했지. 세월이 흐르면 변치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마련이란다. 오 년이라는 긴 세월 앞에 변치 않는 것이 뭐가 있겠느냐?"
- 마공자는 웃어 버렸다.
"그래그래. 변치 않는 것이 있구나. 내가 그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멍청했구나. 네게 사과하마."
- 어둠이 내려앉은 숲은 고요했다.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가 정적을 깼지만, 그 역시 어둠과 조화를 이루며 고요함을 만들어 내었다.
- 유진천의 눈은 앞의 셋과는 또 달랐다.
뭐라고 해야 할까?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눈?
- 만사존의 눈은 경배를 불러일으키는 제왕의 눈.
천검의 눈은 만물을 굽어 살피는 어버이의 눈.
마제는 세상 모든 것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마왕의 눈.
- 하지만 유진천은... 마치 속이 텅 비어 있는 인간 같았다. 그의 눈 안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아 보인다. 어떻게 사람이 저런 눈을 할 수 있을까? 비슷한 눈은 몇 번 본 적이 있다. 무의 극한에 올라 무심(無心)의 경지에 오른 이들이 모든 것이 비워냈을 때 저것과 비슷한 눈을 보인다.
- 하지만 삼비의 손을 녹여 버린 열양기(陽氣功)는 무슨 수로 설명해야 한다는 말인가.
"음양이기(陰陽二氣)..."
유진천은 양손에 서로 다른 기운을 운용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음양이기를 다룰 수 있다는 의미였다. 음양이기는 선택받은 인간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무공이었다.
일반적인 사람은 한 번에 두 가지 기운을 다룰 수가 없다.
특히나 음기와 양기처럼 서로 완전히 반대되는 기운은 상충되기 때문에 한 번에 운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러나 극소수지만 그것이 가능한 이들이 있다.
축복 혹은 저주받은 신체를 타고난 자들.
(리뷰자 주 : 일월광천. <광마회귀> 중)
- 심혼마저 얼려 버릴 듯한 냉기의 결정(結晶)이 뭉쳐 들더니, 한순간에 유진천의 육체를 모조리 뒤덮어 버릴 정도로 커졌다.
"뭘 하려고!"
유진천의 좌수가 들어 올려졌다.
유진천의 좌수에는 새파랗게 불타는 화염이 마치 거대한 용의 혀처럼 낼름 대고 있었다.
- 음양이기(陰陽二氣)
태극파천황(太極破天荒)
그와 동시에 유진천의 우수가 좌수 앞에 맺힌 극음의 결정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천붕지음(天崩之音)이 터져 나왔다.
(리뷰자 주 : 나도 모르게 자동 재생되는 '따라란 따라란 쿵짝짝'. <광마회귀> 중)
- 그리고 보았다.
유진천이 밀어 넣은 붉은 열양공이 냉기의 결정과 충돌하며 세상을 집어삼킬 듯 거대한 폭발을 만들어 내는 것을.
증기와 화염, 그리고 얼음이 뒤섞이며 인세에 없는 기이한 광경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그 신비로운 광경이 사라진 곳에는 애초부터 아무것도 없던 듯 모든 것이 사라져 있었다.
- "진정으로 그분께 복수를 하겠다 생각했는가?"
"..."
공비황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랬다면 방법을 찾았어야지. 지금까지 하던 대로 스스로의 무를 갈고닦는 것으로 그분께 닿을 수 있다고 순진하게 믿었던가? 정말 그랬던가?"
천검은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아니, 자네는 알고 있어. 결코 닿을 수도 없고, 닿을 리도 없다는 것을. 하지만 자네는 그저 외면했을 뿐이야. 노력한다는 말로 자신을 위로했겠지.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다다라서야 자신의 삶에 대한 필사적인 변명을 찾고 있는 걸세. 내 말이 틀린가?"
- "천검이여! 천검 자영이여! 한때 내 친우였던 자여! 내가 알고 있던 천검 자영은 결코 이런 자가 아니었을 텐데? 스스로의 마음마저도 속일 생각인가?"
- 천검은 자문했다.
그런가? 그런 마음이 있었던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하지만...
- 그게 더 무서웠다.
모르고도 사람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자라면 영웅의 자질을 가졌다고 평할 수 있었다.
평소라면 제갈진은 그런 인재를 환영하고 아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인물이 제갈진의 건너편에 있었다. 좋지 않은 일이었다.
- 게다가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유진천을 잡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누가 그 일을 맡을 것이며, 그 피해는 어떻게 복구할 것인가?
제갈진으로서도 답을 낼 수 없는 문제다.
제갈휘는 그 모든 것을 파악해 내고 당당히 이곳에 처소를 잡았다.
이것은 정천맹에 보내는 시위였고, 또한 정천맹에 보내는 경고였다.
제갈진과 제갈휘가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 것이다.
- "조부께서 쓰시던 검이다. 그리고 남궁의 이름을 지운 푸른 무복이다."
"형님!"
"무복의 안깃에 남궁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네가 가문을 버린다고 해도 가문은 남궁의 후예를 버리지 않는다."
- "난 네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
"하지만 이미 내린 선택이라면 가슴을 펴라. 네가 한 일을 믿고 네 길을 걷거라. 처음 남궁의 이름이 천하에 울려 퍼진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남궁은 제왕의 검을 쓰는 자를 칭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제왕이 되는 자를 칭하는 말이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네 스스로 길을 찾거라. 그리고 그것에 최선을 다하거라. 그렇다면 네가 남궁의 품에 있지 않더라도 너는 남궁의 길을 가는 것이다."
- "네 모든 것이 남궁에서 나왔음을 잊지 말아라. 네가 가문을 잊고, 가문을 부정하고, 가문을 버린다고 해서 남궁이 너를 버리지는 않는다. 그저 하늘처럼 너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남궁을 창천(蒼天)이라 하지."
- "천 명보다 중요한 한 명 따위는 없어."
"그게 뭐냐?"
"하지만 그게 사실이야.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어. 하지만 내 아버지는 있다고 믿어. 생명의 가치가 모두 다르고, 필요하다면 희생이 당연시되어야 한다고 믿는 분이지."
- "넌 아니라는 거냐?"
"나이가 들다 보니 어느새 그 사람과 비슷해져 가고 있더군."
매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실을 알고 세상을 알아 가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경멸하던 이처럼 되어 가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게 삶이니까.
"그래서 떠났지. 그 상황에서 이익과 손해를 따지다 보면 정말로 내가 그 사람과 다를 바가 없어지는 거니까."
"그렇군."
- 어둠 속에서 그의 눈이 차갑게 빛나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내가 완성되기 전에 죽어 버린다면?"
"..."
"약속은 어떻게 되는 걸까?"
위지화영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마제는 분노할 거예요. 그리고 천하는 그의 분노를 감당해야겠죠."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닐 수도 있어."
- "그래. 나도 믿지 못하는 일이야. 그런데 그들이 무슨 수로 나를 믿겠어. 그렇다면 그들이 택해야 할 일은 하나지. 조금이라도 희망이 있는 쪽을 택하는 거야."
- "당신은 지금까지 적지(敵地)에서 살아왔다는 거군요. 당신의 목숨을 노리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말하자면."
- 평소의 그녀라면 결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과하게 밝게 행동하는 모습 역시 그런 마음을 숨기기 위한 연기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내색하지 않는 것.
그리고 그녀가 극복해 낼 것이라 믿는 것뿐이었다.
- 유문혁의 낮은 목소리가 유진천의 귀를 파고들었다. 유진천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유문혁을 바라보았다.
긴 시간이었다. 그리고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끝이 유진천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유문혁의 걸음은 결코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유진천에게는 이상하게도 그 걸음이 너무도 빠르게만 느껴졌다.
- "이, 이런 짓을 하지 않아도 우린 약속을 지킬 거요! 반드시!"
마제는 미소를 지었다.
"네가 나에게 물었지. 내게 사람의 마음이 있느냐고 말이다. 그래, 바로 그 때문이다."
"무슨 소리요 그게!"
"너희에게는 아직 그게 남아 있겠지."
- "사람이란 변덕스러운 것이지. 마음은 언제나 변하기 마련이다. 오랜 세월 인간을 대하며 살아 보니 세상에 변치 않는 것은 단 하나뿐이더군."
유문호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비할 수 없는 악의.
처음부터 이자와 계약을 하려 든 것이 실수였다.
"원한. 죽어서도 눈을 감을 수 없는 원한, 살아 있다면 잠에 빠지는 자신을 저주하고 싶어지는 원한. 그게 바로 세상에서 가장 강한 감정이지."
- "나는 너희에게 시간을 주었다. 나는 너희에게 기회를 주었다. 나를 실망시킨 천하를 내버려 두었고, 네 하찮은 계획을 도와주기까지 했다."
마제는 지극히 당연한 말이라는 듯 담담하게 답했다.
"그러니 내게도 아주 작은 요구를 할 권리는 있지. 너희가 이 모든 계획을 포기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 "하지만 결국 마제가 옳았군."
"..."
"그토록 깊은 원한이 있음에도 대법을 거부한 자도 있었지, 그런 원한이 있었음에도 말이야."
- 마제가 그 일을 행하지 않았다면 유문호의 호언장담과는 다르게 대법은 실패했을 것이다.
마제의 말이 옳았다.
대법을 위해서 그것은 필요한 과정이었다.
- "빤한 이야기잖아."
유문혁의 눈이 흔들렸다.
"아니면 이해해 달라는 건가?"
유진천의 목소리는 지독하게 냉담했다.
"그런 사정이 있었으니 당신들이 한 짓을 이해해 달라는 건가? 아니면 나도 같이 마제를 증오해 달라는 건가?"
"..."
"웃기지 마. 당신들은 열을 죽였지만, 나는 백이 내 앞에서 죽어가는 꼴을 봐야 했어. 당신들이 당한 것을 왜 내가 감당해야 하는 거지?"
- 그들에게는 겨울이 어울렸다.
"그렇지 않은가?"
사내는 눈앞의 봉분에게 말을 건넸다. 일백하고도 여덟 개의 봉분.
"흐음?"
사내의 눈살이 조금 찌푸려졌다.
마땅히 있어야 할 봉분이 보이지 않았다. 이미 썩어 문드러진 시신에 남아 있는 미약한 기운으로도 사내는 이곳에 묻힌 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하나.
그가 찾는 이는 이곳에 없었다.
- 이런 상황에서 위지군명의 선택이 가장 현실적이고 현명한 방법이라는 것은 위지소무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사해방을 흡수한 마련을 위지세가를 잃고 맹주를 잃은 정천맹이 막아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더구나 자신들은 억지로 등을 떠밀린 입장이 아니던가. 비난은 받을지 모르겠지만, 마지막에 서 있을 수 있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 "원망하느냐?"
위지소무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원망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터였다.
"나도 원망스럽단다."
"예."
"하지만 미워하지는 않는다."
"예?"
위지군명은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다른 이들은 알 수 없겠지만, 너도 아비가 아니더냐?"
- "명예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르쳤건만... 네 백부도, 나도 마지막 순간에는 명예보다 정을 택해 버렸구나. 내가 그 입장이라면 과연 초연할 수 있었을까?"
- 아마도 이게 혈육인가 보다.
그렇기에 위지군명은 위지군악을 미워할 수 없었다.
아니, 원망할 수는 있을지언정 증오할 수는 없었다.
- "마공자와 그의 관계는 이상한 것 같습니다."
"이상하다?"
"마공자도, 그도... 서로를 아주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한 번밖에 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말씀하는 것은 마치..."
"오래된 친우 같다?"
- 마공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감히 연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같으니까."
- "목적이 같으니까 잘 알 수밖에. 그와 나는 천하에 단둘뿐인 하나의 목적을 공유하는 존재니까."
"..."
"그러니 서로 잘 알 수 있다. 서로의 입장을 바꿔 보면 되니까. 내가 만일 그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가 만일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알 수 있지, 알 수 있고 말고."
- "지금은 다소의 위험을 감안하고서라도 이득을 취해야 할 때가 아닙니까?"
제갈휘는 맥이 탁 풀렸다.
맞는 말이다.
문제는 그 뒤에 검은 속내가 보인다는 점이었다.
- 정천맹은 천하 모든 문파의 연합체라고는 하지만, 주축 세력이 확실한 곳이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그 두 기둥이 정천맹을 떠받치고 있었다.
문제는 그 두 세력 간에 보이지 않는 알력이 있다는 점이다.
둘은 언제나 서로를 견제해 왔다.
구파일방끼리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오대세가를 상대해야 할 때는 암묵적인 연합이 이루어진다.
이것은 오대세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 '이런 상황에서마저도!'
하나로 똘똘 뭉쳐도 승산이 희박한 싸움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까지 이해득실을 따지려 든다는 말인가.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다.
- 한때는 그들과 함께 싸웠다.
그런데 이제는 적이 되어 만났다.
강호란 곳이 영원한 저도 영원한 친우도 없는 곳이라고 하나 씁쓸한 마음만은 감출 수가 없었다.
- 제갈휘의 말이 맞았다.
지금은 제압 같은 것을 할 때가 아니었다. 빠르게, 그리고 확실하게 적을 무찌르는 것이 피해를 줄이는 길이었다.
- 우수에서 새하얀 음한기공이 뿜어져 나오고, 좌수에서는 시뻘건 열양기공이 불타올랐다.
그리고 이윽고 그 두 기운이 유진천의 머리 위에서 하나가 되었다.
음양이기(陰陽二氣) 태극파천황(太極破天荒)
유진천의 머리 위에서 만난 두 기운은 서로를 받아들이는 듯 뭉쳐 들더니, 이내 거칠게 날뛰기 시작했다.
유진천은 날뛰는 기운들을 강제로 응축했다.
그리고 한 순간, 두 기운을 압박하던 힘을 놓아 버렸다. 그러자 두 기운은 더없이 팽창하며 가공할 기의 폭풍을 만들어 내었다.
콰아아아아앙!
유진천의 머리 위에서 얼음과 불의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 "대, 대체 뭘 하는 거요!"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마련의 공격이 총단에 쏟아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물을 필요가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마공자는 제갈진의 질문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뭘 하냐고? 바로잡고 있지. 이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바로잡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 즐거울 테니까. 너희는 그냥 웃고 떠들면 되는 거야. 지금까지 너희가 누려온 평화만큼, 다른 이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누려 왔던 사치만큼 웃고 떠들면 되는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어 주지."
마공자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제갈진의 눈에 비친 그 미소는 너무나도 섬뜩하게만 느껴졌다.
"이제는 멈출 수 없어. 모든 것이 끝으로 치달을 때까지 미쳐서 날뛰어 보자고!"
- "합공하시오."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아무리 상대가 간악한 마인이라고는 하나..."
다른 목소리도 들려왔다.
제갈진은 이를 갈았다.
"그럼 누가 홀로 이자를 감당하시겠소?"
- "과거 마제 하후패를 상대로 합공에 나선 일천의 무인은 합공을 수치로 여기지 않으셨소. 본인의 명예보다 천하의 안녕이 먼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여러분은 한 줌 명예를 지키기 위해 천하를 마의 손아귀에 빠뜨린 역적으로 역사에 남고 싶으신 게요?"
- 분노하고 있었다.
조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분노하고 있었다.
대체 왜 마공자가 제갈진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일까?
준비가 미흡했기 때문에?
하나 그것은 오히려 마공자 입장에서는 기꺼워해야 할 일이 아니던가.
"이런 쓰레기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군. 광천이여, 광천이여... 너희들의 목숨은 헛되었다. 보라, 이 쓰레기들이 너희들이 목숨을 바쳐 지킨 자들이다."
- 봉연은 아무런 말 없이 그의 눈빛을 마주했다.
마공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봉연아. 이들은 감히 나의 분노를 받을 자격도 없는 자들이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벌레에게 분노하지 않습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 "멍청한 적장은 아군의 명장보다 더욱 큰 이득을 가져다주는 존재입니다. 만약 저들이 여기서 모두 목숨을 잃는다면 또 다른 자가 나타나 정천맹을 이끌 것입니다. 그가 이들보다 뛰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이 한심한 작자들을 계속 정천맹의 우두머리 자리에 앉혀 두는 것이 우리에게 이득입니다."
지금 두 사람은 제갈진이 살아서 정천맹을 이끄는 것이 되레 이득이라 말하고 있었다.
평생을 정천맹과 병법에 바쳐 온 그에게 있어서 이보다 큰 모욕은 존재하지 않았다.
- "하지만 나는 이들 모두를 죽일 생각이란다."
"어째서인지요?"
"그러면 너무 싱겁지 않겠느냐?"
"소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는 너무나도 오랫동안 지금 이 순간을 기다렸다. 그렇다면 적어도 조금은 즐길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마공자 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 "십천 중 한 곳은 몇십 년 전 멸망했고, 천마마저 마련에 있지 않지. 그래서 유명무실해졌다. 원래라면 내가 천마가 되어야겠지만, 우리 쪽도 사정이 있어서 말이야."
순간, 제갈진의 눈이 빛났다.
마공자의 말은 십천 중 하나는 하후패의 하후가(夏候家)라는 뜻이었다.
그래야 마공자가 그것을 물려받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천마가 마련을 떠났다는 건 뭘 말하는 거지? 하후패가 아직 천마의 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인가?'
제갈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 "인생은 육십부터다."
"생각은 자유로운 것이니까요."
조붕은 귀를 후볐다.
"일 년 내내 아무도 오지 않는 곳을 감시하는 짓을 했더니 내가 미쳐 가는 기분이야. 마련 놈들은 사람도 아닌가? 왜 좋은 곳 다 놔두고 저런 황량한 곳에다가 건물을 짓고사는 거지?"
"그러게 말입니다."
"도무지 도움이 안 되는 놈들이야."
"이제 한 달만 참으면 됩니다."
"돌아가면 뭐 하나. 일, 이 년만 지나면 다시 오게 될 텐데. 이제 신강도 지긋지긋해. 이번에 돌아가면 은퇴도 고려해 봐야겠어."
"은퇴 말입니까?”
조붕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이제 나이가 있어서 더는 이런 곳에서 임무를 수행하기가 힘드네."
"조금 전까지는 청춘이라고..."
"거, 사람 참 깐깐하기는."
- 붉은 첩지.
조붕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그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 "적첩. 본단에 변고가 생겼을 경우 날아오는 첩지(帖紙)입니다."
"상황은?"
조붕은 고개를 저었다.
"이런 식의 첩지의 경우, 급박한 상황이 닥쳤을 때 일제히 날리는 첩지인지라 따로 상황이 적혀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 "하오문 쪽은 정보가 없어."
"천하전장에서도 아직 정보를 받지 못했대."
"그렇겠지."
제갈휘는 의자에 기대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정천맹 총단에서 급보로 날린 것이 이제 겨우 도착했는데 다른 곳에서 파악한 정보가 벌써 신강까지 도달할 리가 없었다.
-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단번에 정천맹의 중심으로 들어가 버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마공자 놈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 미친놈 생각을 누가 알겠어."
남궁산은 드물게 매검의 생각에 동의했다.
확실히 마공자 하후상의 생각은 일반적인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이런 건 병법에 없어!"
제갈휘는 화가 난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난 뭐라고 설명을 못하겠어. 하나 확실한 건... 만약 이 뒤에 뭔가 숨겨 둔 것이 없다면, 마공자 그 새끼는 정말 미친놈이야. 그냥 미친 것도 아니고, 정말 제대로 돌아 버린 새끼라고."
말을 끝낸 제갈휘는 스스로도 치미는 화를 감당할 수 없는지 몇 번이고 심호흡을 했다.
남궁산은 그 말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전에 본 적 없는 제갈휘의 달아오른 얼굴에 지금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면..."
남궁산이 입을 열었다.
"우린 뭘 해야 하지?"
"..."
모두 말이 없었다.
- 제갈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모르는 것을 대답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만약 유진천이 말하고 있는 것이 진실이라면 사방에서 일이 터진 이후부터 유진천 일행의 움직임은 모두가 마공자의 뜻대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마치 꼭두각시처럼.
"말도 안 돼. 그야말로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야."
"하지만 너무 공교롭군."
(리뷰자 주 : 자동재생. '결말이 뭐였어?' '그게 왜 궁금해?' ... '모두 네가 말한 대로 되고 있잖아. 마치 짜여진 각본처럼!' '그를 잘 아니까. 내가 너에 대해 잘 알듯이. 난 너희 두 사람을 아주 잘 알아.' <글루미데이> / <사의 찬미> 중)
- 제갈휘는 공포를 느꼈다.
그의 머리는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만, 본능은 이 모든 것이 마공자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것이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유진천과 그들 모두 마공자가 만들어 놓은 각본대로 움직이고 있던 것이다.
- "뭐 하냐?"
지붕 위로 한 사람이 더 올라왔다.
"왜 방해하고 난리야."
"혼자서 궁상떠는 꼴이 보기 싫어서 위로라도 해 주려고 왔더니."
"위로? 무슨 위로?"
"됐다, 이 자식아. 이거나 받아라."
매검이 제갈휘를 향해 병을 던졌다.
"술?"
"좋은 건 못 구했다. 상황이 상황이니까."
- "거기서 혼자 살겠다고 빠져나올 사람은 아냐."
"미래를 대비해야지."
"게다가 마공자라면 가장 먼저 죽여야 할 사람이지. 맹주 대리니까."
"음..."
제갈휘는 씁쓸하게 말했다.
"어차피 별달리 정 붙이고 살아 본 적 없는 사람이야.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는데, 이 기회에 진짜 없어진 것뿐이지."
- 제갈휘는 한동안 말없이 허공을 바라보다 작게 말했다.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누군가를 멋대로 이용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 사고방식이 마음에 안 들었어."
"네가 할 말인가, 그게?"
"자기 자신마저도 말이지."
"..."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죽음도 돌보지 않아. 그게 제갈세가가 사는 방법이지. 병법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고, 병법이 최우선이지. 자식도, 아내도, 그 자신의 목숨마저도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이들. 그런 것에 염증이 났을 뿐이야."
"그래서 집을 등졌나?"
"등진 건 아냐. 뭐, 어쨌든 적은 두고 있었으니까. 다만 학관으로 온 이후 연락을 안 했을 뿐이지. 그랬더니 자기들도 연락 안 하더군. 그렇게 뭐 갈라선 거지."
- "그래서 이젠 남이라고 생각했는데, 남이 죽은 것뿐인데... 이상한 일이지. 이상하게 자꾸 신경이 쓰인다."
"남이 될 수는 없어."
(리뷰자 주 : 자동재생. '... 가엾은 내 오라버니. 이제 이 못된 누이마저도 당신의 발을 피로 적시려는군요...' ... '그땐... 그 순간엔 몰랐었네... 성벽 위의 아이가 내 누이 은수인 줄은 꿈에도 몰랐지... 그저... 낯선 이의 죽음에 왜 그렇게 가슴이 무너지는지...' <적루> 중)
- 언제나 무뚝뚝한 얼굴이었다.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그가 자신을 향해 웃어 주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부자 관계라고는 하지만 딱히 남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없는 사이였다.
- "진짜 용인지도 모르지."
"응?"
"만약에 우리 중 누군가가 나중에 정천맹주가 된다고 생각해 보자."
"그럴 일 없어."
"그래, 그럴 일 없겠지. 그런데 만약 그렇다 치고 그 자리에 어울릴 만한 사람이 누굴까?"
- "너는 머리를 너무 써서 안 돼."
"너는 적이 너무 많고 성격이 모났지."
"네 말이 맞다. 정말 용이 되어 버렸군."
"그래. 하나만 더 갖추면 말이야."
"응?"
제갈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독심(毒心). 혈육이라도 필요하다면 잘라 낼 수 있는 독심이 있다면 그놈은 정말 무서운 놈이 될 거야."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그 순둥이가?"
"그러니 아직 우리가 친구로 남아 있는 거겠지."
- 자신이 이들을 따라오지 않았다면, 정천맹에 남아 있었다면 형을 구할 수 있었을까?
지금 자신의 능력이라면 맞서 싸우지는 못해도 형을 데리고 탈출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형이 죽었다면 그건 자신 때문이 아닐까?
- 아니다.
그런 건 아니었다.
자신은 최선의 선택을 했다.
그리고 선택에는 언제나 포기해야 하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어떤 것을 포기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고 해서 이미 결정한 선택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조금쯤은 위로받고 싶을 뿐이다.
천하에 하나 있는, 믿을 수 있는 혈육이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현실을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위로받고 싶을 뿐이었다.
- 남궁산은 그 광경을 지켜보다 나직하게 웃었다.
씁쓸함과 허무가 뒤섞인, 무척이나 어두운 웃음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는구나.'
남궁산은 소리 내지 않고 웃었다.
'아무것도...'
- 남궁산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는 눈을 감았다.
그에게 모든 것을 준 친구.
그리고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모두 가져가 버린 친구.
남궁산은 그 친구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었다.
지금 남궁산이 가진 모든 것은 그가 준 것이니까.
그 사실만은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 "너희는 모를 일이지, 모를 일이야."
적군명은 허허롭게 웃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 것인가. 그들이 지켜야 할 중원을 다른 이들의 목숨을 제물 삼아 구걸받았다고 해야 할까?
- 적군명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도저히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무덤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강호의 더러운 치부였다.
"적어도 내 생전에는 다시 오지 않길 바랐다. 아니, 어쩌면 내가 죽기 전에 다시 보길 바랐을지도 모르지. 그래야 이 더러운 죄를 조금이라도 씻을 수 있을 테니까."
- 누군지는 왜 묻는단 말인가. 정말 몰라서 물은 건가? 아니,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다. 단지 믿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꼴은 누구도 믿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알잖아?"
- "하후상? 자네가 하후패의 혈육이란 말인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하후상이 어깨를 으쓱했다.
적군명은 가만히 하후상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하후패와는 많이 다르군."
"다른 사람이니까."
- "그렇군. 자네가 당대의 마련을 이끄는 자인가?"
"그렇다."
적군명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마련도 별것 없겠군. 그대들은 중원에서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마공자는 무섭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것 참 무서운 말이군. 허세도 이럴 때 부리면 꽤나 멋지단 말이지."
- "아이야, 너는 알지 못한다. 과거의 마련이 왜 두려운 존재였는가를. 천하가 왜 소수의 마련을 감당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도망쳐야 했는가를."
"아아, 하후패에 대한 거라면 이제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니 됐어. 내가 아마 당신보다 하후패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들었을 테니까."
적군명은 웃어 버렸다.
"너는 그를 알지 못한다."
순간, 마공자의 얼굴이 굳었다.
- "내가 그의 앞에 섰을 때, 나는 오금이 저려 검을 놓아버릴 뻔했다. 한 문파의 장문인이고, 검에 있어서는 천하에 누구도 나를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 내가 그의 앞에 서있는 것만으로 전신의 내공을 모두 소모할 뻔했지. 아이야, 그의 앞에 선다는 것은 눈을 뜬 채 자신의 죽음과 직면한다는 것과 같단다."
마공자는 하품을 했다.
"다 했나?"
- "말하는 걸로 봐서 당신은 알고 있는 자 같은데, 그렇지 않나?"
적군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래, 그렇다면 당신에게 물어봐야겠군. 묻지. 자신이 가져야 할 의무를 다른 이의 목숨으로 대신한 채 그 더러운 삶을 연명하는 기분은 대체 어떤가?"
적군명은 씁쓸하게 대꾸했다.
"살아서 지옥을 보는 기분이지."
- "그가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는 공포, 그리고 그에게 대항할 수 없다는 공포, 내 목숨을 저당 잡혀 있다는 공포, 그리고 한 무인으로서 타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목숨을 구걸받아 살아가야 하는 그 좌절감과 배덕감."
"흐음..."
"그건 겪어 보지 않은 이들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지."
"... 재미있군."
"말로 전해 들은 이들은 모른다. 천하에 그것을 직접 겪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은 얼마 되지 않으니까. 겪은 자는 대부분이 죽었고, 알고 있는 자들은 하후패를 겪어 보지 못했다. 그렇기에 강호는 이토록 나약하지."
- "아는 자는 절망했고, 모르는 자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는 자도, 모르는 자도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맡겨버렸다."
- "나야말로 당신의 죄를 온당히 받아 내야 할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지."
- "즐겁지 않으냐?"
"..."
"정말 즐거운 광경이지 않느냐. 죄인과 악인들이 서로 목을 물어뜯고 있구나."
마공자는 피와 살이 난무하는 광경을 지켜보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천하는 이제 그 죗값을 치러야 할 때가 되었다. 그들의 피와 그들의 죽음으로 나는 천하를 정화할 것이다."
"하면 장문인은 어쩌시겠습니까?"
"내버려 둬라. 마지막 발악마저 막는다는 것은 너무도 냉정한 처사가 아니더냐. 나는 그리 매정한 사람이 아니란다."
"마공자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후상은 고개를 돌려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 "이제 끝을 낼 시간이다, 광천의 후예여. 내가 너를 위해 준비한 이 우스꽝스러운 세상으로 오라."
- "일단은 시키는 대로 했네. 그런데 왜 굳이 상황을 이렇게 끌어 가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
"그야 간단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빙궁의 문도들은 화살받이가 될 테니까요. 중원인은 영악합니다. 그러니 자신들의 세력은 최대한 보호하고 빙궁의 세력을 소진시키려들 것입니다."
"당장 눈앞의 적조차 막을 수 있을지 모르는데 훗날을 대비한다는 말인가? 그러다가 이길 수 있는 싸움도 지게 되면 어쩌려고 그런단 말인가?"
제갈휘는 고소를 지었다.
"같이 죽거나 이득을 보고 이기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되는 것이지요. 그게 중원의 방식입니다."
- "사실 그게 맞긴 해. 왜냐면 빙궁주의 무위는 당가주에 비해 좀 처지는 편이거든. 그러니까 빙궁주보다 훨씬 더 강한 빙공을 익힌 사람이 있지 않은 이상 승리할 수 없는 비무지. 이 조건은 생각보다 무척 까다로워. 예로부터 천하제일의 빙공을 익힌 이를 우리는 북해빙궁주라고 불러왔거든.”
"... 그렇지."
"최고의 빙공을 익힌 이는 빙궁주가 된다. 그러니까 빙궁주는 천하제일의 빙공 고수다. 이게 지금까지는 부합하는 명제였는데, 여기에 오류가 생긴 거지."
제갈휘는 슬쩍 유진천을 바라보았다.
"저거 때문에."
매검이 혀를 찼다.
"만악의 근원이군."
"그렇다고 할 수 있지."
- "여러분, 여기에 북해빙궁 직계 후계자에게만 전수된다는 빙백신공을 익혔지만 북해빙궁도는 아닌 놈이 있습니다."
"..."
남궁산은 제갈휘의 말이 뜻하는 바를 알고는 할 말을 잃었다.
빙백신공은 북해빙궁의 대표 절기다.
빙백신공을 사용한다는 것만으로 그의 소속을 증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그래. 참 웃긴 상황인데, 참 재밌는 상황이기도 하지. 여기 있는 사람이 누구나는 상관없어."
- "어설프게 역용을 했다가는 되레 문제가 생길 텐데."
"뭐, 그야 그렇지."
하지만 제갈휘는 여유만만했다.
"하지만 괜찮아. 우리는 역용한 것을 들키지 않는 게 목적이 아니라 이놈이 유진천이라는 것만 숨기면 되니까."
"응?"
"어차피 역용한 것 따위로는 깊게 따지고 들지 못할 거야. 아니, 오히려 역용해서 뭔가 음모를 꾸민다는 느낌이 들면 되레 이놈의 정체를 숨겨 주기 급급할걸?"
-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이야?"
"마련이 오고 있으니까."
제갈휘의 말은 남궁산의 가슴을 묵직하게 눌렀다.
- "지금 있는 전력으로 승부를 장담하기 어려운데 우리가 여기서 빠지거나 수틀려서 먼저 당가와 싸우게 된다면... 장담컨대, 여기 있는 이들은 다 죽어."
"..."
"그걸 아니까 당가에서도 말을 못 하는 거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일단 쥐를 잡고 나서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을 테니까."
남궁산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당가의 입장에서는 상대가 적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살아남기 위해서 모든 것을 묵인하고 눈을 감아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끔찍하군."
"그래, 끔찍하지. 세상이란 그런 거야."
- 그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유진천은 숨이 막힐 것 같은 압박감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싸워야 한다.
그들을 이겨 내지 못한다면 미래는 없었다.
- 봉연은 마공자의 질문에 한숨을 쉬었다.
천하의 모든 것을 손안에 쥔 듯 들여다보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자신은 몰랐다는 듯 확인하기를 원하는 사람.
- "그래?"
마공자는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봉연은 그의 얼굴에 어린 기색이 실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결코 알 수 없겠지만, 평생을 마공자와 함께 한 봉연은 그의 얼굴에 어린 미묘한 감정의 편린을 통해 지금 마공자가 무척 불편한 심기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던 것이다.
"뭔가 잘못되었습니까?"
마공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무척 잘되었지. 모든 게 예상대로 흘러갔으니까."
"그럼 왜 실망하시는 것입니까?"
- 봉연은 마공자의 대답을 가만히 기다렸다.
그가 대답하려 한다면 대답을 해 줄 것이고, 대답하지 않으려 한다면 무슨 말을 한다 해도 그의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봉연은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 "너무 빤하지 않느냐."
"예?"
"대충 그렇게 움직일 것이라 생각하고 계획을 짰건만, 그렇다고 정말 그렇게 움직여 버리니 맥이 탁 풀리는구나."
- "천하에 둘이 있다."
"무슨 말씀이신지?"
"내 예상에서 벗어나는 인물이 천하에 둘이 있다. 하나는 내 예상을 정말 벗어나는 인물이고, 다른 하나는 내 예상을 벗어나 줘야만 하는 인물이지."
- "나 정도 되면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어지지. 설령 거짓을 말한다 해도 어떤가. 그 거짓을 진실로 바꾸어 버리면 그만인데."
- "자, 이제 다시 말해보지. 지금도 내가 굳이 이곳까지 찾아와서 쓸데없이 거짓이나 늘어놓는다고 생각하는 사람 있나?"
대답은 없었다.
그리 생각한다 해도 그것을 마공자 앞에서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다행이군, 진심은 통하기 마련이지."
- "그리고 혹시 또 모르는 게 세상 일이니."
하후상이 기묘한 미소와 함께 천천히 걸어 나갔다.
"동료가 될 수도 있지."
이곳의 그 누구도 하후상의 뒷말이 현실이 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 "차 한잔 마실 시간을 주지 않는구나."
"속하가 주제넘었습니다. 부디 벌을 내려주십시오."
봉연이 바닥에 부복하려 하자 하후상은 손을 뻗어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네가 자꾸 이러면 나는 너를 탓하지도 못하게 된다. 아느냐?"
"송구하옵니다."
하후상은 부드럽게 웃었다.
"너는 무례하지 않게 사람을 부려먹는구나. 세월이 지나다 보니 이런 것만 늘었어. 그럼에도 네가 밉게 느껴지지 않으니, 나도 냉정한 사람은 못 되는 모양이다."
- 그녀가 아무리 오랜 기간 보필해 왔다고 하나 하후상은 그런 것에 연연할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오랜 기간 보필해 왔기 때문에 저지른 실수도 더 많았다.
다른 이라면 바로 목이 날아갈 실수도 수없이 저질렀다. 하지만 하후상은 봉연의 실수에 허허, 웃고 말 뿐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마련의 누구도 감히 하후상 앞에서 그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 아니냐 물을 수는 없었다.
목은 두 개가 아니니까.
- 마공자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왜 굳이 그래야 하지?"
"미쳤으니까?"
"음, 납득이 되는 답이기는 한데, 좋은 답은 아니군. 많이 멀어."
붕걸의 격장지계에도 마공자는 느물거릴 뿐이었다.
"간단해. 나는 여기에 좀 더 많은 이들이 모여줬으면 했거든. 지금 여기 모인 이들보다 더 많은 이들이 모였으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예상보다 수가 조금 적군."
- "이해 못 하겠지. 하지만 곧 알게 될 거야.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그대들은 제발 내가 살아 있기를 빌게 될 거야. 부모보다 나의 존재가 더 소중하게 느껴질걸?"
"그게 대체 무슨 개소리요!"
"살고 싶을 테니까."
- "이해를 못 하는군. 내게 살려 달라고 빌게 될 거라는 말이 아니라, 살고 싶으니 동료인 나의 무사안녕을 바라게 될 거라는 말이야. 원래 강한 동료가 살아 있어야 생존을 도모하기 좋잖아?"
- "나를 죽이고 싶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어떻게 하면 좀 더 나를 잘 이용할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느라 정신이 없지 않나? 큭큭큭, 왜 그런 것 같나?"
- "원한, 분노... 그따위 시시한 감정은 생존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살고 싶다. 그 하나의 감정만이 남아버릴 테니까. 중원 전력의 반이 넘는 인원이 모였음에도, 역대 최강이라 할 수 있는 마련의 전 병력이 바로 이곳에 있음에도 지금 머릿속에는 '삶', 그 하나밖에 남지 않아. 왜? 지금 이곳에 오고 있는 이는 죽음이니까. 그대들의 죽음, 정천맹의 죽음, 마련의 죽음... 그리고 나의 죽음."
- 마제의 결론을 그도 알 것 같았다.
"모든 무를 없앤다. 무학에 관련된 모든 것을 없앤다. 무인도, 군인도, 작은 무학의 이치마저도 없앤다. 그리고 모든 것이 사라진 곳에서 새로운 무학의 이치를 세운다. 그러면 강호는 조금 더 강해지겠지. 시간이 흐르고 흐른다면 누군가 내 앞에 서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미친 소리!"
송검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무를 없앤다?
그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말인지는 알고 하는 말인가?
하나의 개념 자체를 없애 버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하는 것인가.
그런데 저 작자는 지금 그 모든 시간과 노력을 살육이라는 단 하나의 방법으로 대체해 버리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 "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죽이겠다는 거요?"
"글쎄? 얼마나라..."
조금 생각하는 듯하던 하후패가 입을 열었다.
"절반쯤이면 되지 않겠느냐?"
"... 절반?"
"살아 있는 자의 절반쯤은 무학에 연관이 있겠지. 그들을 모두 죽인다면 지금 존재하는 무학은 사라질 테지?"
- "아이야."
낮은 목소리.
질책이 담겨 있지도 않은, 낮은 목소리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온전히 그 하나만을 향해 불리어졌다는 것만으로 붕걸은 뻣뻣이 굳어버렸다.
"내게 불가능이 있을 것 같으냐?"
- "물론 있다. 불가능이야 있지. 나는 하늘을 날지 못하고, 영원히 살아가지도 못한다. 나도 그저 인간일 뿐이니까."
"..."
"하지만 그렇기에 가능함과 불가능함을 구분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지. 내게는 가능한 일이다."
- "이래서 내가 강호를 새로 세우겠다는 것이지. 이미 날개로 하늘을 날아버린 새는 뛰려 하지 않는 법이니까. 인식이 고정된 이들은 새로운 곳을 찾아 자신을 해치려 들지 않는다. 천하는 한계에 봉착했다. 새로운 무의 천하가 필요하지."
하후상이 비웃음을 띠었다.
"그 새로운 무의 천하는 온전히 당신을 위해서겠지요?"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과정과 목적이 어떻든 더 나은 무학을 익힐 수 있는 천하가 온다는 것은 무인으로는 기꺼운 일 아닌가?"
"내가 배제된 새로운 세상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생각이 다르군."
"그건 다르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틀린 거지요. 당신이 틀린 겁니다."
"그렇구나."
하후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지. 그렇다면 너희들이 나를 바로잡아야겠지. 자, 대화는 충분하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니까. 오랜만에 사람과 대화를 한다는 것이 즐겁기도 했지만, 이젠 조금 지겨워지는구나."
- "누가 나를 막을 것인가?"
그것은 담담한 선언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 말에 허세가 가득하다고 느꼈고, 어떤 이들은 그 말이 광오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 말이 결코 광오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너를 가르친 적이 있었던가?"
"아니요. 조부님께서는 스스로 얻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것이 되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오로지 배울 곳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적이라, 적을 스승으로 삼아 배우라 하셨습니다."
"그랬었지. 그래.”
하후패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그것도 무조건 옳은 생각은 아닌 듯하구나."
"저는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기회가 되었으니 내가 네게 몇 가지를 알려주도록 하지. 내 마지막 배려라 생각하거라."
- "어차피 이대로 있어도 아무것도 결론이 나지 않겠군. 나는 너의 말에 따라 순서를 바꾸겠다. 이곳부터 지워 나가다 보면 언젠가 그 아이가 오겠지. 나는 약속 이상으로 기다려 주었으니 먼저 시작할 자격 정도는 있지 않겠느냐?"
- "생각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하후패가 산보하듯 걷고 있었다.
"왜 기운을 몸에 담아야 하는가."
하후패가 허공을 쓰다듬듯이 손을 뻗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이 기운인데, 왜 육신 안에 기운을 가두어야 하는가."
- "그래, 이상하지. 천하 모든 것이 기운인데, 왜 그걸 굳이 내 몸 안에 모아두어야 한단 말인가. 그게 마기이고, 혹은 선기라도 마찬가지이지. 생각을 하다 보니 하나의 결론을 얻을 수 있더구나."
- "나를 정하기 때문이다."
하후상이 미간을 좁혔다.
선문답.
그저 선문답이다.
"무슨 말씀이시온지?"
"무학을 시작할 때 확립하는 것은 '나'다. 나의 손과 나의 병기로 나의 거리를 파악하고, 나의 육체에 기운을 모은다. 적과 나를 구분하고, 나를 이해한다. 그러니 중원의 무학은 다름 아닌 나를 확립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지."
하후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알 것도 같았다.
"나의 육체를 단련하고 주변의 기운을 끌어모아 나를 강화하지. 그러면서 마지막에는 나를 초월하여 자연과 하나가 되라고 한다. 이상하지 않으냐?"
- "우스운 일이지. 나를 확립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으며 결국에는 자연과 하나가 되라니. 그건 초월이 아니다. 극복이지. 하지만 우습게도 나를 확립할수록 극복은 어려워진다. 그래서 벽을 만나는 것이지."
"어렵습니다."
"어려울 것 없다. 나의 몸에 기운을 모은다는 집착을 버리게 되면 모든 것이 기운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 그것을 강호는 자연지도라 부른다. 예를 들자면..."
- "보기보다 간단한 일이지. 대기에는 언제나 기운이 흐르고 있다. 그 기운을 약간만 충돌시키고 회전시키면 끝이지. 내 기운을 허비할 필요도 없고, 아주 효율적이다."
"하지만 그 경지에 오른 이는 고금을 통틀어 몇 되지 않겠지요."
"그래서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어렵지 않은 일을 어렵게 하지 않느냐."
"이해했습니다. 가르침은 그것이 전부입니까?"
"나는 생각했다."
하후패의 눈이 멍하게 언가가 있던 곳을 바라보는 산동악가(山東岳家)에게로 향했다.
"나는 나의 기운을 다룰 수 있다. 그리고 자연의 기운도 다룰 수 있다."
그의 눈을 맞이한 악가의 식솔들은 마치 뱀을 본 쥐처럼 얼어붙어 버렸다.
"기운이다, 기운. 모든 무인들은 기운을 다루려고 애를 쓰지. 하지만 왜 자신의 기운과 자연의 기운에만 집착하는 것일까?"
- "기운은 또 있지 않느냐."
- "나를 나누기 때문이다. 나에 집착하기 때문이지. 아(我)를 벗어나면 여(汝)가 존재하는 법이지. 아와 여를 나누기에 내가 가진 기운과 남이 가진 기운을 나누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는 그저 다 같은 기운일 뿐이지."
- "아쉬운 것은 기운을 자신의 아래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자라면 나의 힘이 미치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지. 하지만 조금도 힘을 들이지 않는 것에 비하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단점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느냐?"
- "자연의 기운을 이용하고, 나의 기운을 이용하고, 타인의 기운을 이용한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모든 기운을 이용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으냐?"
"..."
하후패가 달아나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된단다."
- 하후패는 조용히, 아주 조용히 선언했다.
"세상 어디에도..."
모두가 그의 말에 귀를 모았다. 마치 그 한 마디에 그들의 목숨이 달려 있는 것처럼.
"달아날 곳은 없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약속했다. 천하여, 이곳이 그대들의 끝이자 모든 곳의 끝이 될 곳이다."
- "걱정 안 해도 된다. 내가 조금 흥분한 모양이구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 어울리지 않지. 나답게 가자꾸나, 나답게. 적어도 마지막 순간까지는."
- 그는 마공자 하후상을 높게 평가했다.
그가 가진 피가 무엇인지 생각한다면 그의 재능은 보통 사람은 감히 범접할 수 없을 수준일 터이고, 하후패가 그에게 내린 환경은 성장하기에 가장 좋은 환경이었다.
최고의 환경과 최고의 재능을 가진 이가 이십오 년이 넘게 자신에 대한 증오를 키워왔다.
그런 이가 만들어낸 함정은 적어도 하후패를 조금은 즐겁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아직은 못 미더운 유진천보다 하후상을 먼저 찾아온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다. 하후패의 앞에서 물러서지 말라는 것은 죽으라는 소리였다.
언젠가 그는 그의 아들에게 말했다.
죽으라 명을 내리는 것이 군사의 일이라고.
지금 그는 그때의 말을 충실히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그가 말했던 것처럼 그의 명을 들은 이들은 죽음을 알면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도 납득했다.
수많은 피가 흐르고 죽음을 겪겠지만, 마제 하후패를 막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죽음이라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임시 맹주밖에 되지 않는 그가 아무리 간곡히 부탁한다고 해도 엉덩이가 무거운 명문들이 산문을 박차고 나와 하나로 뭉칠리는 없으니까.
그들을 뭉치게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위기감뿐이었다.
그렇게 뭉치지 않으면 모두가 죽는다는 위기감.
- 더 큰 것을 위해서라면 내줄 것은 내준다.
그것이 제갈진이 생각하는 군사였다.
- 벗어나려면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여기서 벗어나 버린다면 하후상이 준비한 다음 패를 볼 수 없을 확률이 높았다.
그가 긴 백 년의 시간을 기다린 이유도 오로지 이 끝없는 지루함을 조금이라도 해소해 보려던 것이 아니었던가.
- "그리 초조해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기다릴 테니 말이다."
하후패는 대답했다.
그의 머리로 끊임없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혜광심어(慧光心語).
하후상은 진법이 발동된 직후부터 계속해서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 광기의 천인.
그들이 다른 이들과 달랐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의 목적을 정하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매진하고 또 매진하는 저 의지가 그들을 광천이라 불리게 했을 것이다.
- 검수답지 않게 흔들리는 검끝이 그의 마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남궁산의 목소리도 떨려 나온다.
"강호는 이제 너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을 거라고 했어."
"... 그렇겠지."
"하후패를 죽인다는 건 그 이상의 존재가 된다는 거니까. 지금은 환대해도 곧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이려 들거라 했어."
"알고 있어."
남궁산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니 내가 높은 곳으로 가지 않으면 널 지킬 수가 없어. 그러기 위해서는 저 작자의 목이 필요해. 그럼 나는 뭐든 될 수 있을 테니까!"
- "걱정할 것 없어."
유진천은 담담히 말했다.
"어차피 내가 먼저 떠날 테니까."
"떠난다고?"
"그래, 떠날 거야. 이젠 지긋지긋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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