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프레더릭 알렉산더] 알렉산더 테크닉, 내 몸의 사용법

일루젼 2024. 1. 30. 03:01
728x90
반응형

저자 : 프레더릭 알렉산더 / 이문영
출판 : 판미동
출간 : 2017.01.31 


       

        

스스로를 가만히 관찰하다 보면, 특정한 심리 상태일 때는 신체도 그와 비슷한 상태인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은 얼굴과 무기력함이 활기차고 긍정적인 감정과 연결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보다는 굽은 등이나 목이 우울함과 짜증과 연결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신체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저자는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은 엄정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유기적인 통합체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개인적으로도 동의하는 바이다. 

 

<알렉산더 테크닉>은 특정한 자세나 교정법을 지시하는 책은 아니다. 그보다는 통칭 '알렉산더 테크닉'이라고 불리는 신체 관찰-교정법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어떤 개념과 원리를 가지고 있는가에 관한 것을 천천히 설명해 나간다. 창시자인 프레더릭 알렉산더에 따르면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에게 익숙한 감각대로 신체를 사용하는 습관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옳다'고 느껴지는 감각 자체는 그저 가장 익숙한 편안함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미 균형이 비틀린 신체가 감각하는 '옳은' 감각은 사실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알아차리는 데에는 내부 감각만으로는 부족하다. 거울 등의 외부적 관찰 도구나 훈련된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가장 어려운 고비는 잘못된 습관을 알아차린 뒤에 찾아온다. 

 

 

머리로는 오른손을 들고 있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왼손을 들고 있다면?

심지어 그 사실을 스스로도 알고 있다면?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왼손을 들어 올리는 감각'을 모르겠다면? 

 

 

고착된 잘못된 신체 사용 습관이란, 바꿔 말하면 아주 오래도록 -혹은 평생- 바른 사용이 주는 감각을 느껴보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흔히 생각하는 '문제를 알았으니, 의지력만 발휘하면 금세 변할 수 있어'라는 해결책이 오히려 가장 큰 함정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과 자신의 학생들의 경험을 통해 발견한 이 기이하고도 당연한 괴로움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아마도 그 스스로가 가장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로 행하는 것 사이의 괴리에서 괴로워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알렉산더 테크닉>은 실전서나 비법서라기보다는 철저한 자기반성과 고백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개념적으로만 접근했을 때 '알렉산더 테크닉'은 그리 어렵거나 복잡한 내용은 아니다. 그러나 책을 덮는 순간 느껴지는 약간의 모호함과 혼란스러움은, 아마도 '바른 디렉션'을 주는 것에 익숙치 않은 낯섦과 닿아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섬세한 관찰과 부드러운 핸즈온을 경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한편으로는 카르마나 업이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신체적 사용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개인이 '익숙함'에 의존할 때 얼마나 비합리적인 결정들을 내리는가는 넘쳐나는 사례들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익숙함', 다른 말로 '틀', '고정관념' 또는 '천형'이야말로 스스로 짊어진 업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 모든 것들의 변화는 '알아차림'에서 시작한다는 것.

특정 행위의 성공 여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목적 지향).

바른 방향으로 사용하겠다는 의도(디렉션)와 경험과 반복을 통한 습관화(체화)를 통해 새로운 '옳음'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이었다.

 

최근 신체 사용과 관련한 내용들에 관심이 간다. 

요가, 무드라, 무술, 무협 등등. 

아무래도 올해는 운동을 가까이해야 할 모양이다. 

 

봄이 온다.  


   

 

- 프레더릭 알렉산더 Frederick Matthias Alexander, 1869-1955
알렉산더 테크닉의 창시자, 연극배우. 1869년 호주 태즈메이니아 주에서 태어나 학교에 다니지 못할 정도로 병약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배우와 셰익스피어 낭송가로 명성을 얻었으나, 공연 중 목이 쉬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문제에 부딪혔다. 다양한 의학 치료에도 호전이 없자 스스로 해결책을 찾기로 결심하고, 이제껏 누구도 한 적 없는 몸과 마음에 대한 깊은 탐구를 시작했다. 

 

- 그는 방에 삼면거울을 설치한 뒤, 낭독할 때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9년 동안 관찰하고 실험했다. 반복된 시행착오 끝에 육체와 의식의 통합성, 머리와 목 조절의 중요성 등을 발견하고는 잘못된 습관에서 벗어나 몸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도록 이끄는 '알렉산더 테크닉'을 창안했다. 1904년 영국으로 건너가 작가 조지 버나드 쇼, 배우 헨리 어빙 경, 철학자 존 듀이, 작가 올더스 헉슬리,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찰스 셰링턴 등 수많은 유명 인사들을 가르치며 명성이 날로 높아졌다.  

 

- 알렉산더가 죽은 뒤 그의 사상과 기법이 사라질 것을 염려한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1931년 교사 양성 과정이 시작되었고, 이는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베네딕트 컴버배치, 휴 잭맨, 키아누 리브스, 줄리엣 비노쉬, 폴 매카트니, 스팅, 마돈나 등 유명 배우, 가수, 운동선수, 정치가들이 교육을 받았으며, 줄리아드 음대, 예일대, NYU, 영국왕립연극원, 영국왕립음악학교, 런던드라마스쿨 등 세계적인 예술학교에서 정규 과목으로 채택하고 있다. 저서로는 그의 핵심 사상을 담은 <알렉산더 테크닉, 내 몸의 사용법>을 비롯해 <인류 최고의 유산(Man's Supreme Inheritance)>, <개인의 적극적이고 의식적인 조절(Constructive Conscious Control of the Individual)>, <삶의 보편적인 정수(The Universal Constant in Living)> 등이 있다.

 

- 알렉산더는 '알렉산더 원리(The Alexander Principle)'가 전 세계에서 인정받기 약 20년 전인 1955년 세상을 떠났다. 물론 생전에 여러 형태로 인정을 받았다. 일례로 존 듀이의 글들이 있다. 존 듀이는 알렉산더의 여러 저서에 경탄에 찬 머리말들을 씀으로써, 공정하고 정확하게 그의 작업을 수기 요법이나 이완 요법보다 우월한 위치에 올려놓았다. 사실 많은 사람이 그를 다른 치료사들과 같은 부류로 취급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 알렉산더 테크닉은 본질적으로 철학적인 성격을 지닌 탓에 처음에는 쉽사리 인정받지 못했다. 이 책의 초판에 실린 로우의 만화에는, 책에 둘러싸여 거울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교수의 모습과 "그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작은 물체는 그 자신이다."라는 문구가 담겨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알렉산더 테크닉은 매 순간 우리 자신의 몸과 마음을 즉각적으로 인식하는 방법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 이 책에서 우리는 매우 특별한 종류의 자기 관찰뿐만 아니라, 우리의 예상에 기꺼이 의문을 제기하며 어제 옳다고 느꼈던 것이 오늘은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려는 의지도 함께 발견한다. 니콜라스 틴베르헌은 1973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 연설에서 관찰, 즉 '주시하기와 궁금해하기(watching and wondering)’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연설의 절반을 알렉산더가 인간을 관찰한 이야기에 할애했다. 
"이 기본적이고 과학적인 방식은 여전히 장비의 매력에 눈이 먼 사람들에게 경시당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몸과 마음이 통합된 전체로서의 몸에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인다면 의학 연구 분야는 상당히 확장될 것입니다."

- 알렉산더가 무엇을 관찰했으며, 그 관찰 방식은 어떤 면에서 새로운 것일까? 무엇보다도 그는 머리/목 부위의 사용이 심리적·신체적 기능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이 책의 1장에는 그가 힘들게 자신을 관찰하는 과정이 상세히 소개된다. 그가 오래 살았던 시드니의 뉴 사우스 웨일즈 대학에서 최근 심포지엄이 열릴 만큼 알렉산더의 관찰은 여전히 지지를 받고 있다. 이 심포지엄에 참석한 전 세계의 과학자들은 머리/목 부위를 의식하는 알렉산더의 작업이 어떻게 '자기 수용 감각, 자세, 감정'(심포지엄 제목 - 옮긴이)에 관한 최신 연구 결과들을 100년 가까이 앞설 수 있었는지 토론했다.

 

 


 

 

 그래야만 본능적인 습관과
그에 따른 자동 반응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어떠한 종류의 활동을 하든
그 과정에서 '정신'과 '육체'를 분리할 수는 없다. 

 

 



- 책의 개정판을 출간하면서, 이 테크닉을 독학하며 어려움을 토로했던 독자들의 편지에 답하고 이를 정리해 보려 한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 테크닉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몰라 어려워한다. 때로는 나를 심하게 질타하는 편지들도 있었는데, 책을 보고 혼자 배울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런 독자들 중에는 자동차, 골프, 스키뿐 아니라 지리학, 역사, 연산과 같이 비교적 단순한 과목에서조차도, 교재가 분명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교사의 도움 없이는 숙달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점을 잘 헤아려야 한다.  
 

- 따라서 이 테크닉의 적용법을 배우기가 힘들다고 놀라서는 안 된다. 특히 자신을 사용하는 방식을 바꾸고 개선하려는 과정에서는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것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 필요한 과정을 수행하려면 처음에는 '옳지 않게 느껴지는' 새롭고 생경한 방식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를 사용하는 방식을 바꾸고 개선하는 이 테크닉을 적용할 때, '옳다고 느껴지지만' 분명 우리를 오류로 인도하는 이전의 습관적 '함(doing)'이 주는 익숙한 '느낌'에 계속 의존하는 것이 바로 실패의 원인이다. 

- 혼자 배우기 어렵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이 점을 간과하여 자신의 실패에 책임을 느끼지 않는 게 아닐까? 그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나는 무언가를 읽고 쓸 때 주의해야 할 점을 덧붙여 말하고 싶다. 내가 보기엔 이해하기 어렵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은 주제를 주의 깊고 면밀하게 연구하기보다는 빠르게 읽은 뒤에 내게 편지를 써 보내는 듯하다. 최근 나는 속독을 연습해야 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이해보다 속도를 중요시하는 속독의 습관은 이 시대에 매우 흔한 결점이며, 인류를 육체적·정신적 혼란으로 몰고 가는 지름길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자극에 너무 빠르게 반응하는 습관의 한 사례일 뿐이며, 이러한 습관이 널리 퍼진 탓에 오늘날 정치 조직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고, 잘못 인식하며, 잘못된 방향으로 애쓰는 일이 발생한다.

 

- 다시 말하지만, 독학으로 배우고 싶다고 편지를 보내온 사람들은 대부분 확실히 옳게 행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그들에게 이 책의 1장을 잘 읽으라고 답신을 보낸다. 1장에서 나는 홀로 실험하면서 내가 했던 것과 하지 않았던 것(결국 후자가 더 중요하다)을 가능한 정확하게 기술했다. 36~37쪽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나는 실험 초기에 '함(doing)'에 대해 이해했기 때문에 '애써서 하기'가 아닌 '애써서 하지 않기'에 먼저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서 '애써서 하지 않기'란 (바꾸고 싶은 자신을 또다시 잘못 사용하지 않도록 하는 일, 즉 습관적인 '함'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일이다. 내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나는 신뢰할 수 없는 느낌에 따라) 무언가를 '할' 때 나타나는 습관적 반응의 노예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찾아가면서 다음과 같은 점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나를 해방시키는 유일한 가능성은 그 첫 단계로 모든 과정을 수행할 때 평소의 '함(doing)'을 허용하지 않는 데에 있다고. 

- 또 독자들의 편지에는 '중추절(primary control)'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다. 중추조절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내가 초기에 몸을 사용할 때 잘못을 방지할 필요성을 인식하며 발견한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혼자 실험하면서 나는 이 발견을 지극히 중요하게 여겼다. 따라서 홀로 열심히 공부하는 독자들도 '중추조절'이 나오는 장을 재차 읽어 보길 바란다. 거기에서 나는 내가 겪은 어려움뿐만 아니라 그 어려움에서 어떻게 해방되었는지 설명했다. 만약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감각을 따르는 대신 의식에 의지를 한다면, 중추조절의 발견이 '이상적인 이론'에서 '실제적인 실행'으로 가는 안전한 길을 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느낌'과 '본능적인 의지'에 의존할 때 이를 안전하게 실행할 수 없다. '느낌'과 '본능적인 의지'는 대부분 쓸모가 없으며, 여기서 '옳다고 느끼는(feel right)' 신뢰할 수 없는 경험이 나온다. 

- 장담컨대, 내가 기록한 경험들, 특히 '하지 않음(non-doing)’을 그대로 따른다면, 누구라도 효과를 볼 것이다. 그러나 아래의 사항을 인식하지 않으면 나를 그대로 따라 하기는 힘들 것이다.

 

- 감각경험에 관련된 지식은 글이나 말로 전달할 수 없기에, 독자는 전달자가 의미하고자 하는 것은 전달받아도 그 경험은 전달받지 못한다. 독자는 목표 달성을 위한 새로운 '진행과정(means-whereby)'에 의지해야 하는데, 처음에는 낯설기 때문에 그 과정이 '잘못 되었다'고 느낄 것이다. 

 

- 인체 기관을 사용하고 작동하는 능력을 키우고 발전시키며 점진적으로 개선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감각경험에서 알지 못하는 영역을 수용해야만 한다. 이 '알지 못하는 영역'은 '옳다고 느끼는(felt right)' 감각경험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 진정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가 일어난 뒤에 '치료(cure)'를 하기보다는' 미리 방지(prevention)'하는 원리를 폭넓게 받아들여야 한다. 결국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지식은 자기 몸을 사용하고 각 기능이 충분히 발휘되도록 만드는 일과 건강과 전반적인 행복의 기준을 높이는 법에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오늘날 개인의 권리와 노력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감히 이야기하건대, 그 훌륭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교육으로서, 교사가 있건 없건 인내심과 시간을 투자해 일상에 이 기법을 적용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만큼 가치 있는 일은 없다.  

 

- 인류가 내적, 외적으로 개인의 완전한 자유를 유산으로 물려받고자 하는 욕구는 여전히 이상으로 남아 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개인이 의식적인 디렉션과 자기 조절을 개발해 생각과 행동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래야만 본능적인 습관과 그에 따른 자동 반응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 그래서 첫째, 사람들에게 요청하건대... 내가 철학에서 새로운 분야를 창시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은 내 의도도 아니거니와, 한 사람이 자연 그리고 사물의 원리에 관해 품을 수 있는 추상적인 개념이 인간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또 이런 종류의 과거의 여러 이론들이 되살아날 수도 있고, 새로운 이론들이 소개될 수도 있다. 현상에 잘 들어맞기는 하지만 서로 다른, 천상의 여러 이론들이 제기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 는 그러한 사변적이고 무익하기까지 한 문제들로 골머리를 썩이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나의 목적은 기초를 더 튼튼히 세우고, 인간이 지닌 힘과 위대함의 한계를 더욱 확장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는 데 있다.
 
- 전에 집필한 <인류 최고의 유산(Man's Supreme Inheritance)>과 <개인의 적극적이고 의식적인 조절(Constructive Conscious Control of theIndividual)>에서 나는 인체의 잘못된 사용을 개선하는 방법을 여러 해 동안 탐구하면서 발전시킨 테크닉에 대해서 언급했다. 처음 연구를 시작했을 때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몸'과 '마음'을 별개로 취급했다. 그래서 인간의 질병, 장애, 결함 등이 '정신적' 혹은 '육체적'으로 분류될 수 있고, 이는 각각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인 방식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실제 경험을 한 이후에는 이러한 관점을 버리게 되었다. 따라서 독자들은 내 책에 기술된 테크닉이 그 반대의 개념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어떠한 종류의 활동을 하든 그 과정에서 '정신'과 '육체'를 분리할 수는 없다. 

 

- 이렇듯 인체에 대한 내 생각의 변화는 단순히 이론이 낳은 결과가 아니다. 이는 살아 있는 인간을 실제로 실험하는 새로운 영역을 탐구한 경험의 결과다. 

 

- 명확히 해 둘 것이 있다. 여기서 '사용'이라는 단어는 인체의 일부를 사용한다는 제한된 의미가 아니다. 예를 들어 팔이나 다리를 사용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체 전체의 작용을 포괄하는 훨씬 더 넓고 종합적인 의미로 쓰인다. 팔이나 다리와 같은 특정 부위를 사용할 때 인체의 다른 몸-마음의 메커니즘이 함께 작용하므로, 이러한 연합 활동이 특정 부위의 사용을 불러온다. 

- 독자들이 보내온 편지를 보면, 인간 활동에서 정신과 육체의 작용이 통합된다는 이론을 받아들이는 대다수의 사람들도 실제 그 이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이러한 어려움은 내가 학생들을 가르칠 때에도 늘 발생했다. 자기를 사용(use)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수업 시간에 정신과 육체가 어떻게 함께 작동하는지 학생들에게 시범을 보여 줄 수는 있다. 하지만 단체 수업에서는 한 사람이 가르칠 수 있는 학생의 수가 한정되어 있어서 실제 시범을 보여 줄 기회가 비교적 적다. 그래서 나는 실험 초기부터 시작해 이 기법을 점차 발전시켜 온 연구 과정을 이 책에서 밝히기로 했다. 내가 관찰하고 경험한 실험 내용을 최대한 상세하고 실제적으로 설명할 것이다.

 

- 이른바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은 서로 독립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이유로 인간의 질병과 결함은 '정신적' 혹은 '육체적'으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고, 그러므로 따로 해결될 수도 없다. 교육적이든 교육적이지 않든, 방지(prevention)가 목표든, 결함·오류·질병 제거가 목표든, 모든 훈련은 분리할 수 없는 인간 통합체(human organism)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 '방지'는 말 그대로 더 나빠지지 않도록 방지될 수 있는 만족스러운 상태가 존재한다는 의미다. 이런 의미에서 방지를 실천하는 일은 오늘날 가능하지 않다. 문명화된 환경에서는 사용과 기능에서 잘못을 범하지 않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방지'와 '치료'라는 용어를 나는 상대적인 의미로만 사용한다. 여기에는 일반적으로 결함과 장애, 질병을 방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인체의 잘못된 사용과 기능을 방지하기 위한 모든 시도, 그리고 결함과 장애, 질병을 관리할 때 인체의 기능에서 잘못된 사용의 영향을 무시하는 '치료적인' 방식들이 포함된다. 

 

- 내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제 일시적인 증상 완화 이상은 결코 기대할 수 없었기에, 내가 매우 흥미를 느끼고 또 성공하리라 믿었던 그 직업을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다음 날 나는 의사를 찾아가 이 문제를 상담했다. 상담 끝에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으니 의사는 "치료를 계속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자 의사가 이유를 물었다. 나는 치료하는 동안 목을 쓰지 말라는 조언에 충실히 따랐지만, 공연을 시작하고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증상이 재발했다고 말했다. 내가 "어제 밤 목을 사용한 방식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고 결론지어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물으니 그는 잠시 생각하고는 "네, 분명히 그렇죠."라고 답했다. 내가 다시 "그렇다면 문제를 일으킨 그 원인이 무엇인지 말해 주실 수 있나요?"라고 묻자 그는 알 수 없다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스스로 찾을 수밖에요."

 

- 연구를 시작했을 무렵 나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경험하여 알고 있었다. 낭송을 하면 목이 쉰다는 것과 목과 성대 치료를 받으면서 낭송은 하지 않고 일상에서만 사용하면 목이 쉬는 증상이 사라진다는 것. 이 두 가지 사실에 실마리가 있다고 여기며, 낭송할 때는 목이 쉬고 평소 말할 때는 목이 쉬지 않는다면 그 두 상황에서 분명 다르게 몸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게 사실이고, 또 두 상황에서의 차이점을 찾아낼 수 있다면, 어쩌면 목이 쉬는 증상도 없앨 수 있을 터였다. 적어도 실험을 해 본다고 손해 볼 건 없었다. 

 

- 먼저, 나는 거울 앞에 서서 평소에 내가 말하는 방식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여러 번 반복해서 관찰했지만 잘못되었거나 부자연스러운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음에는 낭송할 때의 내 모습을 거울로 유심히 관찰했다. 곧바로, 평소 말할 때 보이지 않았던 몇 가지 특징이 눈에 띄었다. 낭송을 시작하자마자 머리가 뒤로 젖혀지고, 후두가 눌리며, 입으로 숨을 들이쉬어 거친 숨소리를 내는 경향이 나타났다.   

 

- 이 발견으로 내가 한다(doing)고 생각하는 것을 실제로는 하지 않는(not doing)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 나는 또 한 번 거울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나중에 거울 두 개를 더 사용했는데, 중앙에 거울을 하나 놓고 나머지 두 개는 중앙 거울의 양 옆에 놓았다. 거울의 도움으로 내 의심에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알았다. 거울로 보니, 말을 하면서 길어지려고 하는 동시에 짧아지지 않도록 애쓰는 결정적인 순간에, 나는 의도한 대로 머리를 앞과 위로 향하지 않고 뒤로 젖혔던 것이다. 이는 내가 무언가를 하기로 결정하여 그것을 한다고 믿으며 애써서 할 때, 실제로는 그와 반대로 하게 된다는 놀라운 증거였다.  

  

- 여기서 이야기를 멈추고, 눈이 번쩍 뜨일 흥미로운 사실을 말하겠다. 비록 그 말이 나에게 불리할지언정 말이다. 여러분은 실험 초기에 내가 낭송하는 동안 어떤 행동을 하는지 확실하게 알고자 했을 때, 거울을 통해 귀중한 도움을 얻었다는 걸 기억할 것이다. 이러한 경험과 지식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때 어떠한 부위들을 새롭게 사용하는 일과 우리에게 전혀 생소한 감각을 경험하는 실험에 곧바로 착수했다. 그 목적을 위해 어느 때보다 거울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떠올릴 새도 없이 말이다.   

  

- 여기서, 과거에 내가 이미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반드시 실제로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내가 실제로 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그저 내 체질이 특이해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난 35년간 학생들을 가르치고 다른 분야에서 만난 사람들을 관찰한 결과, 이는 나의 특이한 체질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대부분의 사람이 그와 비슷한 환경에서 동일하게 행동할 거라는 확신을 얻었다. 사실 나는 누구나 겪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습관적이며 익숙한 감각경험을 할 때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가 있기 때문에, 습관과 반대되며 따라서 생소한 감각경험을 불러오는 행위를 할 때에도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실제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 말이다. 

 

- 이를 깨닫고 나는 몹시 심란했으며, 모든 상황을 재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목소리를 낼 때 내가 하는 무언가로 인해 목의 문제가 생긴다는 처음의 결론으로 돌아갔다. 그때까지 그것이 무엇이며, 성대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대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냈지만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 이 점을 발견하고 나는 이를 설명할 단서가 있는지 과거의 일들을 돌이켜 보았다. 고인이 된 제임스 캐스카트 선생님의 극적 표현과 성격 분석 수업이 생각났다. 내가 서 있는 자세와 걸음걸이가 못마땅했던 캐스카트 선생님은 이따금 나에게 "바닥을 발로 꽉 밟으세요"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선생님은 몸소 시범을 보였고, 나는 최선을 다해 똑같이 따라 했다. 선생님 말씀대로 잘못을 고쳐야 한다면 분명히 그것을 고칠 수 있고, 그러면 문제가 모두 해결되리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나는 노력을 계속했고 어느새 서는 자세에 만족하게 되었다. 선생님이 시범을 보였던 것처럼 나도 '바닥을 꽉 밟는다'고 생각하며 서 있었다. 

 

- 잘못된 행위를 고치는 법을 배우기만 하면 제대로 할 수 있고, 또 제대로 한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돌아갈 거라는 믿음이 널리 펴져 있다. 하지만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그러한 믿음은 착각에 불과하다. 

- 이 경험을 상기하며 나는 계속 거울을 이용해 전보다 더 주의 깊게 나를 사용하는 방식을 관찰했다. 그리고 내가 낭송을 하며 서 있을 때 다리와 발, 발가락을 사용하는 방식이 내가 몸 전체를 사용하는 방식에 가장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이때 몸의 각 부위들을 사용하는 방식은 근육의 비정상적인 긴장과 관련이 있으며, 이것은 간접적으로 목 문제와 연계되어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에 힘을 얻은 나는 과거에 낭송을 더 잘하려면 서 있는 자세를 개선해야 한다던 선생님의 그 말씀을 떠올렸다. '바닥을 꽉 밟는다'고 생각하며 나를 사용했던 방식은, 낭송할 때 머리를 뒤로 젖히고 후두를 누르는 일과 같이 나를 잘못 사용하는 방식과 동일하며, 이로 인해 나의 몸과 마음 전체를 잘못 사용하게 된다는 생각이 점점 들었다. 다른 모든 활동을 할 때에도 이런 식으로 몸을 습관적으로 사용했는데, 나는 이를 가리켜 나 자신의 '습관적 사용(habitual use)'이라고 명명했다. 다른 자극이나 반응과 마찬가지로 낭독을 할 때에도, 자신을 조금 더 잘 사용하려 의도해도 낭독을 잘하려는 욕구가 이것을 압도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습관적인 잘못된 사용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 이러한 잘못된 사용의 영향은 이미 습관화되어 강력할 수밖에 없다. 특히 내 경우에는 낭독할 때 '바닥을 꽉 밟으라'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실행하려고 몇 년간 노력했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없이 그 습관이 그대로 굳어져 영향력이 더욱 컸다. 이러한 사용이 습관화되어 늘 자신을 잘못 사용하게 하는 거부하기 힘든 자극이 되었던 것이다. 매번 잘못된 사용을 유도하는 이 자극은 머리와 목을 새롭게 사용하려는 욕구보다 훨씬 강력했고, 그 영향으로 나는 낭송할 때 내가 원하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머리를 향했다는 걸 알았다. 그 순간 나는 나를 사용하는 방법을 개선하려고 했던 그 모든 노력이 잘못되었다는 증거를 얻었다. 

-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은, 어떠한 활동에서든 특정한 부위를 사용하는 일은 인체의 다른 부위를 사용하는 일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여러 부위를 연거푸 함께 사용함으로써 가해진 영향은 그 부위들을 사용하는 방식에 따라 계속 변화한다는 것이다. 활동에 직접 사용되는 한 부위가 아직 익숙하지 않은 비교적 새로운 방식으로 사용될 때, 이 부위를 새로운 방식으로 사용하려는 자극은 그 활동에 간접적으로 사용되는 다른 부위들을 예전의 습관대로 사용하려는 자극에 비해 약하다.

- 나는 낭송을 하면서 머리와 목을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사용해 보았다. 머리와 목을 새로운 방식으로 사용하려는 자극은 따라서 그동안 낭송을 해 오면서 익숙해진, 발과 다리를 잘못 사용하려는 이미 습관화된 자극에 비해 약할 수밖에 없었다.

- 습관적이고, 따라서 옳다고 느껴졌던 잘못된 사용을 바로잡을 목적으로 의식적인 디렉션을 사용하자마자 이는 오류로 밝혀졌다. 실제로 해 보니, 나를 사용할 때 불합리한 디렉션과 합리적인 디렉션을 뚜렷이 구분할 수 없었고, 이 두 지시를 중복되지 않게 만들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 나는 현재의 사용 방식을 분석한 후에 추론을 통해 내가 결정한 디렉션을 주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말을 하려는 목적으로 이 디렉션들을 실행하기 직전까지는 순조롭게 풀렸던 것이다. 그러나 목소리를 사용하려는 자극이 오면 의식적인 디렉션이 유도하는 새로운 행위(머리를 앞과 위로 향하는 것과 같은)로 반응하는 동시에 말을 하려고 했을 때, 즉시 예전의 잘못된 습관(머리를 뒤로 젖히는 등)으로 되돌아갔다. 거울로 실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볼 수 있었으므로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이는 나를 사용할 때 예전의 습관과 반대되는 방법으로 목적을 달성하려는 결정적인 순간에 본능적인 디렉션이 이성적인 디렉션을 압도한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인 디렉션은 옳게 하려는 나의 의지를 앞질렀다. 말을 하려는 자극이 왔을 때 나는 변함없이 말하는 행위와 결합된 예전의 습관에 따라 반응했다. 

- 이런 종류의 실망스러운 경험을 여러 번 하고 난 후 나는 당분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애써 무언가를 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기로 했다. 결국 나는 습관적 사용을 바꿔 본능적인 디렉션을 누르기 위해서는, 말하려는 자극을 받아들인 후 즉각적인 반응을 모두 거부할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즉각적인 반응은 내가 즉시 무언가를 하여 어떠한 목적을 곧바로 달성하겠다고 결정한 결과이며, 이 결정을 재빨리 실행함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최선의 수단이라고 추론한 새로운 디렉션들을 내릴 기회를 필요한 만큼 충분히 갖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때까지 신뢰할 수 없는 '느낌'에서 비롯된 예전의 본능적인 디렉션이 잘못된 습관적 사용을 만드는 지배적인 요인이었으며, 이것이 여전히 내가 반응하는 방식을 지배해 예전의 잘못된 습관적 사용이 계속 반복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의미였다.  

- 그래서 나는 새로운 '진행과정(means-whereby)'을 위한 디렉션을 실제로 행하거나 말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그저 나에게 디렉션만 주기로 했다. 나는 오랜 기간, 즉 며칠, 몇 주, 때로는 몇 달 동안 거울 앞에서 새로운 디렉션을 행하지는 않고 디렉션을 주기만 했다. 이렇게 디렉션을 줌으로써 얻은 경험은 이를 실행할 방법을 숙고할 시점에서 매우 가치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 또한 모든 준비 작업에도 불구하고 습관적 사용을 유도하는 본능적인 디렉션이 여전히 의식적이고 합리적인 디렉션을 지배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새로운 과정이 나의 목적에 부합한다고 확신한 나는 불만족스러운 결과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윽고 나는, 혹시 다른 사람은 성공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만족스러운 '진행과정'을 나의 결점 때문에 성취할 수 없는 것인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또한 오랜 연구 끝에, 말을 한다는 목적을 달성하려는 결정적인 순간에, 정말로 새롭고 더 만족스럽게 사용하기 위해 내가 생각한 대로 적절한 순서에 맞게 디렉션을 계속 주는지, 혹은 목의 문제를 유발하는 과거의 습관적 사용을 유도하는 본능적이고 잘못된 디렉션으로 되돌아가는지를 확인할 구체적인 증거를 찾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 세심하게 실험한 결과, 내가 목적을 달성해 말을 하는 순간 직전까지는 순서에 맞게 새롭고 만족스러운 사용을 위한 디렉션을 주지만, 결국 새로운 디렉션을 계속 주어야 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과거의 잘못된 사용을 유도하는 잘못된 디렉션으로 되돌아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알다시피, 나는 나를 사용할 때 디렉션의 근거로 느낌을 신뢰하면 안 된다고 일찍이 인식했다. 하지만 새롭게 사용할 때 경험하는 감각이 너무나 생경해 무척 부자연스럽고 잘못된 '느낌'을 주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에겐 자신을 사용할 때 '옳은지' '옳지 않은지'를 느낌으로 판단하는 습관이 뼛속 깊이 배어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내가 새로운 사용을 실행할 수 없다는 것은 거의 필연에 가까운 사실이었다. 분명히, 새로운 사용은 언제나 과거의 사용과 다르게 느껴질 테고, 과거의 사용이 옳게 느껴진다면 새로운 사용은 당연히 옳지 않다고 느껴질 것이다. 그때 나는 지난 몇 달 동안, 사용할지 말지를 말해 주는 나의 느낌에 의존하는 동시에, 결국 잘 되지 않을 새로운 사용을 행하려 했다는 사실을 마주해야 했다. 이는 그때까지 내가 기울였던 모든 노력은 말을 하려는 순간에 합리적인 디렉션을 사용하려는 시도였고, 이러한 시도가 실제 예전의 사용 습관을 불러와 예전의 본능적이고 잘못된 디렉션으로 되돌아갔다는 의미였다. 이러한 시도가 소용없었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 이 사실을 깨달은 나는, 나를 사용할 때 성공적으로 원하는 변화를 주기 위해서는, 특히 내가 지향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함(doing)'을 디렉션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새로운 경험, 즉 느낌이 아닌 추론이 지배하도록 사용을 디렉션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는 나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최선이라고 추론한 모든 과정을, 비록 그 과정이 틀리다고 느껴질지라도 실행할 준비를 갖춰야 한다는 의미였다.

 

- 달리 말해, 내가 추론한 '목적'을 안전하게 달성하는 과정에 대한 나의 신뢰는 옳다고 느끼는 확인이 필요한 절반의 믿음이 아닌 참된 믿음이어야 했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목적을 달성하려는 강렬한 자극에도 본능적인 반응이 자제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를 얻기 위해 방안을 짜내는 한편, 목적을 달성하려는 결정적인 순간에 새로운 사용을 수행하기 위한 디렉션들을 순서에 맞게 주어야 했다.  

 

-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시도를 하고, 그것의 커다란 가치하고 나서 나는 마침내 다음의 방안을 짜냈다. 
[문장을 말하려는 자극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을 모두 자제한다.]

 

- 여기서 가장 중요하게 기억할 사항은,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자신을 사용할 때 주는 디렉션은 습관적이고 본능적이므로, 무언가를 하려는 자극에 대한 반응에 동의가 이루어지면, 즉 만족스러운 수행을 위해 인체를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디렉션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으면, 말하자면 '본능적으로' 수행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애석하게도, 신뢰할 수 없는 감각인식이 보편화되면서, 이러한 본능적인 디렉션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잘못된 디렉션이 되어, 내 경우에서 입증되었듯이, 기능과 그에 따른 반응에 해로운 영향을 미치게 된다. 

 

- 이러한 불만족스러운 반응은 이른바 '정신적인 결함, 장애, 질병'과 같은 증상으로 드러나며, 이는 또한 인체 전체가 잘못 사용되고 기능하고 있다는 표시다. 이러한 증상들이 드러났던 내 경험을 통해 나는 인체를 사용할 때 새롭고 만족스러운 디렉션을 도입해 관련 기능이 개선되면, 이러한 증상들이 그 과정에서 서서히 사라져 건강하고 만족스러운 반응으로 대체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모든 구체적인 증상에 대처하는 일차적인 방법은 잘못된 사용과 기능을 유도하는 잘못된 디렉션을 방지하고 대신 인체 전체의 사용과 기능을 개선하는 수단으로서 새롭고 만족스러운 디렉션을 확립하는 일이다. 

 

- 이 간접적인 절차는 인체의 통합성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원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정의하려고 노력했듯이, 결합된 활동으로서 인체 사용에 실제 디렉션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안다면 통합의 원칙은 영구히 적용된다.

 

- 하지만 이 원칙에는 또 다른 면이 있다. 바로 통합에는 부분의 변화가 전체의 변화를 의미한다는 속성이 있다는 점이다. 인체의 부분들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된 통합체로서 어느 한 부분이라도 변경되어 다르게 작동한다면, 전체 매커니즘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이는 인체의 통합적인 사용에 결함이 있는 경우, 이 잘못된 사용을 바꾸고 개선하지 않는 한, "결함을 뿌리 뽑기 위한 어떠한 시도를 하더라도 다른 어느 곳에서 반드시 불균형이 생긴다는 뜻이다."   
 

- 질병이나 장애를 진단하고 해결해야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위험을 좀처럼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것은 겉보기에 성공적으로 보이는 치료에서도, '치료'의 과정에서 특정한 치료로 인해 잘못된 증상이 발생했을 경우, 눈에 쉽게 띄지는 않지만 더욱 해로운 다른 결함이 인체의 다른 부분에 발생한다는 것으로 증명할 수 있다. 이는 성경에 나오는 일곱 귀신 이야기와 흡사하다. 

 

-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인체의 사용 방식과 인체 전반의 기능 수준이 밀접하게 연관되므로 인체 작용의 통합 원리에 기초하지 않은 진단은 완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웠다. 다음 장에서는, 다양한 영역의 신체 전문가들이 결함이나 장애를 고치려고 찾아온 사람들을 진료할 때 이러한 원칙을 인식하지 못하여, 결국 불완전한 진단으로 이어지고, 그 방식에 상관없이 의사의 능력이 심각하게 제한된다는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 어떠한 절차를 공정하게 판단하는 일은 그 판단의 근거가 되는 기본 원칙을 점검할 때 가능하며, 원칙에 오류가 있다면 그 절차는 장기적으로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따라서 내가 지금 제안하는 실행 절차가 그러한 원칙에 의해 판단되기를 희망한다. 
 

- 하지만 내가 가르친 경험에 따르면, 여기서 이 골프 선수가 공을 치는 방식은 아무리 결점을 고치려 노력해도 자신을 잘못 사용하여 결국 성공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의 방식과 전혀 다르지 않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늘 내가 발견한 바로는, 자신을 잘못 사용하는 학생은 다른 모든 활동에서 자신을 잘못 사용할 뿐 아니라, 잘못된 사용을 지적받은 후에도 계속 잘못 사용한다. 그리고 그는 지속적인 잘못된 사용이 실패의 원인임을 경험으로 알게 된다. 이 분명한 모순은 설명이 가능하다. 여기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 골프 선수뿐 아니라, 아주 많은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는데도 이미 알고 있는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고칠 수 없는 근본 원인을 알려 주고자 한다. 

 

- 골프 선수는 골프를 포함한 모든 활동에서 자신의 신체를 습관적으로 사용한다. 이것은 항상 어떠한 감각경험(느낌)을 동반하는데, 습관적 사용이 평생 쌓였기 때문에 그는 이 경험에 익숙하다. 더 나아가, 그 익숙함으로 인해 감각경험은 옳게 느껴지며, 그래서 그는 그 경험을 반복하는 데 상당한 만족을 느낀다. 그러므로 '공을 잘 치려고 할 때, 골프채를 휘두르며 공에서 눈을 떼는 것은 물론 다른 잘못된 습관적 사용을 하게 된다. 이러한 사용을 불러오는 감각경험이 익숙하고 '옳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 한편, 공을 칠 때 공을 주시하는 메커니즘을 사용하면, 이는 그의 습관적 사용에 완전히 반하며, 낯설고 '잘못으로 느껴지는' 감각경험이 유발된다. 그러므로 그러한 디렉션에서는 감각 자극을 받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가 받은 모든 감각경험들은 잘못된 사용을 동반하는 익숙한 감각경험을 반복하는 디렉션 안에 있으며, 이는 그의 '의지'에서 비롯되는 이른바 '정신적인 자극'을 이긴다. 달리 말하면, 익숙함의 유혹이 너무도 강해 그는 옳게 느끼는 습관적 사용만 하게 된다.
 

- 이는 놀랄 일이 아니다. 목적을 달성할 때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습관적 사용을 하려는 골프 선수의 욕구는 그에 수반되는 익숙한 감각경험으로 말미암아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면면히 개발된 인류의 유산, 곧 본능적인 욕구이기 때문이다.  
 

- 사용에 잘못된 디렉션을 주는 일은, 펜을 들자마자 글을 써 내려가는 바람에 손가락이 과하게 경직되어 손가락 대신에 팔이 움직이고 얼굴까지 일그러지는 사람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공연을 위해 팔이나 다리, 혹은 둘 다를 움직여야 하는 사람들은 불필요하고 해로운 방식으로 후두를 눌러 목의 근육을 과도하게 긴장시킨다. 무대 위에서 읽거나 노래 부르거나 말하는 사람들은 평소 걷거나 서 있을 때는 코로 숨을 들이쉬지만, 공연을 할 때는 문장을 말하기 시작할 때마다 입으로 숨을 '빨아들인다.' 운동선수들은 프로건 아마추어건 어떠한 특별한 노력을 기울일 때마다 목의 근육을 심하게 긴장시키고 머리를 과도하게 뒤로 젖힌다. 

 

- 이러한 것들은 그저 무작정 애를 쓰는 일이며, 여기서 우리는 필요한 동작을 할 때의 인체 사용이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최선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 결국 모든 형태의 활동에서 인체를 사용해 움직이는 일은, 우리의 디렉션이 만족스러운지 불만족스러운지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질 것이다. 디렉션이 만족스러우면, 인체는 다른 부분을 사용할 때도 팔과 손목, 손, 다리, 발, 눈 등이 함께 움직여지는 하나의 유기적 통합체로서 그 만족스러운 사용이 보장될 것이다.

 

- 이렇게 진단을 내린 코치는 공을 주시하라는 특정한 지침만으로는 이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을 사용할 때 잘못된 디렉션을 하는 선수가 기울인 '의지력'이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되어, 그가 그러한 지침을 수행하려고 노력하고 성공 '의지'를 불태울수록 사용은 잘못 디렉션되어 공에서 눈을 뗄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코치는 선수가 잘못된 디렉션을 하지 않도록 가르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결론 내릴 것이다. 그리고 선수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공을 잘 치려는 순간에 이 잘못된 디렉션이 시작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에, 그 첫 번째 단계는 분명 선수가 '공을 잘 치려고 노력하지 않도록' 하는 일이 될 것이다.   
 

- 코치는 선수에게 그가 언제나 잘못된 습관적 사용 방식 때문에 공을 잘 치려는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만, 이 즉각적인 반응을 방지한다면 반응과 동시에 잘못된 디렉션을 주어 목적 달성을 방해하는 일을 방지할 수 있다고 설명해야 한다. 코치는 공을 잘 치게 만드는 모든 행위 중에서 가장 먼저 이 방지의 행위를 선수에게 강조해야 한다. 

 

- 얼마 전 교수 한 명이 자기 여제자의 실력이 얼마나 향상되었는지 보고 싶어서 친구 한 명과 함께 내 수업을 참관했다. 그는 "이 제자를 가르치는 데 어려움이 전혀 없을 겁니다. 열성적이고 당신을 몹시 돕고 싶어 하니까요."라고 말했다. 나는 거기에 이렇게 답했다. "어려움이 있습니다. 바로 '의지'의 폐해죠." 이 말에 그 친구는 겁이 난 듯 제자의 두 손을 떠받치며 외쳤다. "비록 잘못일지라도 '의지력'을 발휘하는 편이 그러지 않는 것보다 확실히 낫습니다." 이에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어딘가에서 디렉션이 잘못되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제자는 잘못된 디렉션 안에서 에너지가 증가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에다가 '의지력'이라는 자극을 추가하는 것이 정말로 이로울 거라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자발성'이나 '노력'을 효과적으로 만드는 것은 '자발성'이나 '노력'의 정도가 아니라, 에너지가 디렉션되는 방식이다. 

 


- '진행과정'을 이용해 학생의 새로운 디렉션 방식을 개발하려는 교사는 이 점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그는 가르치면서 이러한 예비 행위들이 과정인 동시에 목적이지만 독립된 목표는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이 행위들은 '동시에 그러나 순차적으로' 수행되어 함께 작용하는 연속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그는 연속 행위의 통합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두 번째 행위를 디렉션하는 동시에 첫 번째 행위를 계속 디렉션하며, 이와 같은 식으로 연속된 행위를 하는 동안 모든 예비 행위가 연결된 순서로 계속 수행되어 최종 목적이 달성되어야 한다고 학생에게 강조해야 한다.  

 

- 이는 비행기에서 기관총이 발사되는 과정과 흡사하다. 그 장치는 연속적으로 발사된 총알이 1분에 1500번 회전하는 프로펠러 날개 사이를 통과해 지나갈 만큼 잘 조직화되어 있다. 

 

- 그렇다면 새롭고 만족스러운 디렉션을 익히는 과정에서 진행과정 원리를 실천할 수 있는 테크닉은 정확히 무엇일까? 

 

- 지금 이 테크닉의 기본적인 개요 이상을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자신을 사용할 때 새로운 디렉션을 습득하는 과정에 있는 학생이 겪는 감각경험은, 프로 골프 선수가 공을 세게 칠 때의 감각경험을 자신의 학생에게 최대한 상세히 설명한다고 해서 학생이 그 경험을 그대로 재현할 수 없듯이, 문자나 말로 전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단, 자신을 사용할 때 인체의 모든 작용을 조절함으로써 복잡한 인체를 비교적 단순하게 제어하게 만드는 중추조절을 발견한 1장의 실험 내용을 다시 읽기를 권한다.  

 

- 나는 학생들을 매일 가르치면서 이렇게 연결된 작업을 -진행과정의 원리를- 머리, 즉 인지적으로 이해하고 그에 완전히 동의하기만 하면 실제로 행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가장 큰 걸림돌임을 알게 되었다. 학생이 전환과 진행과정의 개념을 '머리'로 시작할 수 있는 건 사실이지만 내 경험에 의하면 그러한 절차 안에서 무언가를 한다는 생각에 학생의 머리에 떠오르는 순간 목적을 달성하려는 그의 습관으로 인해 옮게 느끼는 습관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하려 한다. 자신의 수단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를 알려 주는 감각경험은 속임수에 불과하므로 목적달성을 위해 자신을 사용할 때의 옳다는 느낌이 짙은 잘못이라는 것을 내가 누차 입증했는데도 말이다. 

 

- 이런 학생의 경우, '진행과정' 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그동안의 습관에 반한다. 또 습관에 반하는 원칙으로 움직이는 것은 그만큼 어려우므로(해 본 사람은 누구나 알 것이다) '목적 지향'의 습관에 반해 움직일 때 이 어려움은 엄청나게 커진다. 이 습관이 옳게 느껴지는 잘못된 사용 습관과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므로, 이 익숙한 습관을 포기하는 일은 평생 익숙해진 사용 습관을 포기하고 대신 잘못되었다고 느껴지는 새로운 사용을 행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주장하건대, '목적 지향'처럼 확고히 굳어 버린 습관은 단순히 나아지기보다는 반드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학생은 다음과 같은 활동으로 실제적인 경험을 해야 한다.

 

- 어떠한 목적을 얻으려는 자극에 반응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습관적인 반응과 연계된 불만족스러운 습관을 자제한다.

 

- 앞서 설명했듯이, 새롭고 더 만족스러운 사용을 위한 첫 번째, 두 번째 등의 디렉션을 '동시에 그러나 순차적으로' 내린다. 이 과정 동안 교사는 핸즈온을 이용해 학생이 새로운 사용으로 얻게 되는 새로운 감각경험에 익숙해지도록 돕는다.

- 독자들에게 다시 강조하건대, 이 새로운 감각경험이 처음에는 잘못되었다고 느껴질 것이다.

 

- 일반적인 경우보다 전반적으로 나빴다. 또 말할 때 혀와 입술을 잘못 사용하는 모습이 보였고, 머리와 목을 사용할 때에도 후두가 과도하게 눌리고 얼굴과 목 근육이 과도하게 긴장되는 모습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말을 더듬는 것은 언어 기관을 잘못 사용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인체의 다른 부분을 잘못 사용해서 생긴 다른 증상들과도 연관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가 내 말을 의심하자, 나는 말더듬증을 고치기 위해 나를 찾아온 사람들 모두가 혀와 입술뿐만 아니라 인체의 다른 많은 부분들도 '더듬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 "보통, 이런 문제들은 잘못된 기능이 이른바 '육체적' 혹은 '정신적' 장애의 형태로 나타날 때까지 관찰되지 않거나 무시됩니다. 당신의 경우에는, 말을 더듬는 증상이 일을 방해하고 동료들과의 소통을 저해하기 때문에 차마 무시할 수 없었지요. 하지만 그로 인해 너무 늦기 전에 더 심각한 다른 결함들을 알게 되었으니 오히려 전화위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결함들은 시간이 가면서 점점 더 악화되는 경향이 있거든요." 
 

- 오랜 세월 동안 말더듬이가 겪는 어려움과 특이성을 보아 온 나는 말더듬증은 일반적인 원인, 즉 몸과 마음을 사용할 때 잘못 지시해서 생기는 가장 흥미롭고 구체적인 증상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가 언어 장애를 치료하는 첫 번째 단계로서 나와 함께 잘못된 사용을 수정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그를 학생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내 수업을 듣기로 하여 내가 그의 인체 사용 방식을 성공적으로 개선시킨다면, 그의 신체 기능도 개선될 것이며 그 과정에서 말더듬중도 사라질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는 내 말의 핵심을 이해하고는 수업을 듣기로 결정했다. 

- 내 경험에 따르면, 말을 더듬는 이유는 공을 주시하지 않는 골프 선수의 경우처럼 인체를 사용할 때 습관적으로 잘못된 디렉션을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경우의 문제점은 근본적으로 같다. 골프 선수와 마찬가지로 말을 더듬는 사람도 이 습관적인 잘못된 디렉션을 좀 더 만족스러운 디렉션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를 충분히 숙달한 후에야 새롭고 개선된 사용을 확실하게 굳혀 실제 말을 할 때 특정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
 

- 이 학생의 경우, 나는 먼저 잘못된 습관적 사용 때문에 나타나는 여러 증상들을 지적했다. 가장 두드러진 증상 중 하나는, 그가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몸 전체의 근육이 과도하게 긴장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도한 근육 긴장은 인체 기능을 전반적으로 저해하는 한 요인으로, 혀와 입술을 만족스럽게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더듬지 않겠다는 의지를 갖고 각별히 노력할수록,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이미 긴장된 근육을 더 긴장시켜 결국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졌다. 

- 근육을 긴장시킨 후에야 말을 시작하는 습관 때문에 말을 더듬는 거라고 나는 설명했다. 그는 그렇게 근육을 긴장시켜야 말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달리 말해, 자신이 효율적으로 신체 매커니즘을 사용한다고 느껴지는 순간에 말을 해 왔으며, 바로 그 순간의 감각인식(어느 정도 근육을 긴장해야 하는지 알려 주는 유일한 안내자)이 그에게 습관이 되어 익숙했던 것이다.

- 유감스럽게도 그가 옳다고 느끼는 익숙한 긴장의 정도는 잘못된 습관과 연결된 불필요한 긴장을 불러일으켜 말더듬증을 유발한다. 그래서 나는 말하기 적합한 때를 알려 주는 그 '느낌'은 근육 긴장의 신호로서 신뢰성을 갖지 못하므로, 말할 때 그 느낌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처음부터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말할 때의 감각경험을 알지 못한다면, 말할 때 필요한 근육 긴장의 정도를 어떻게 느낌으로 알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분명히 그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그 '감각'을 알지 못할 것이며, 또 감각경험은 말로 전달될 수 없기 때문에, 내 입장에서는 긴장을 줄여 말을 더듬지 않는 낯선 감각경험을 말로 전달할 길이 전혀 없었다. 근육을 덜 긴장시키고도 말할 수 있다고 납득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그가 이 익숙하지 않은 경험을 직접 하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 나는 앞서 골프 선수에게 공을 주시하는 경험을 주기 위해 사용한 방법과 똑같은 원리에 기초한 절차를 그에게 적용했다. 나의 목표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학생에게 자신의 인체를 전반적으로 새롭고 개선되게 사용하는 의식적인 디렉션을 경험하게 한다. 둘째, 목적에 부합하는 말하는 방식을 사용하는 동안 새롭게 사용된 의식적인 디렉션을 유지하는 경험을 하게 한다. 

 

- 세부적으로 차이는 있을지라도 말더듬증을 치료하는 기존의 방법들은 모두 '목적 지향'의 원칙에 기초한다. 말더듬증을 교정하는 사람은 그 원인으로 어떠한 증상들을 집어낸 후 학생에게 특정한 지침이나 연습을 지시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말더듬증을 멈추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익히 알지만, 그로써 진정한 '치료'가 이루어졌다는 가정에는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말더듬증이 치료되었다는 경우를 살펴보면, 대개 말할 때 뭔가 특이하게 굴거나 주저하는 증상을 보인다. 그리고 '치료'되기 시작한 경우, 관련자들은 이를 성공적인 '치료'로 여기기 때문에 과도한 근육 긴장, 에너지의 잘못된 디렉션, 감각경험의 비신뢰성 등이 여전히 눈에 띄어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듯하다.
 

- 어떤 증상을 없애는 과정에서 다른 증상들이 그대로 있고 원하지 않는 새로운 증상들이 나타난다면, 이 방식은 효과적이거나 과학적인 '치료' 방식이 될 수 없다. 이러한 방법으로 '치료'된 말더듬증 환자를 실험해 보면, '치료'의 과정에서 과도한 근육 긴장, 에너지의 잘못된 디렉션, 감각경험의 비신뢰성 등이 증가했음을 너무나 자주 발견하게 될 것이다. 

- 나는 이러한 문제로 인해 말더듬이 꼭 재발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로 인해 평소에 드러나지 않던 원치 않는 다른 증상이 발생할 거라고 거의 확신한다. 결함과 질병이 특정한 방법으로 '치료'되었을 때 이러한 문제는 예외 없이 발생한다. '치료' 되었다는 기록이 수없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인체의 문제가 늘어나 점점 더 많은 '치료'가 필요해지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 우리는 몸을 사용할 때 인체의 모든 부분에서 작동 균형(working balance)이 존재한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 때문에 무슨 활동을 하든 특정한 부분(들)이 다른 부분들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본능적인 디렉션하에서는 이러한 작동 균형이 습관화되고 '옳게' 느껴진다. 어떤 부분을 사용한 영향이 나타나는 시점은 다양하며, 특정한 사용의 영향은 요구되는 목적 활동의 자극의 성격에 따라 강하거나 약하다.  

 

- 듀이 박사가 개인의 적극적이고 의식적인 조절의 머리말에 썼듯이, "과학적인 방식의 핵심은 결과를 뭉뚱그리지 않은 채 자세하고 정확하게 제시하고, 그 과정에서 결과를 설명해 주는 원인들이 실제로 그러한 결과들을 만든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데 있다." 

-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점은, 이 과정을 겪으면서 이 학생이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하려는' 어떠한 자극에 즉각적이고 본능적으로 반응하기를 자제한다면, 사용의 잘못된 디렉션을 방지할 수 있고, 또 자극에 반응할 때 뚜렷이 나타나는 말할 때뿐 아니라 모든 활동을 할 때 '신체적', '정신적'으로 방해하는 과도한 근육 긴장을 방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한 다른 영역의 활동에 이 원칙을 적용한다면, 자극에 대한 반응의 성질을 마음대로 조절하는 능력, 다시 말해 이른바 '의식적인 행동'을 조절하는 능력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 학생의 인체 사용이 아직 불만족스러운 수업의 초기 단계에서는 본능적인 디렉션을 자제하지 못하는 일이 지속적으로 발견되며, 그 결과 새로운 사용을 위한 디렉션들은 사용되지 못한다. 내가 도울 기회를 갖기 전에 이미 학생은 습관적이고 잘못된 과거의 사용 방식에 따라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 이때 이런 식으로 목적을 달성하지 않도록 유도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 한편 수업의 단계가 올라간 후에는, 학생은 본능적인 디렉션을 자제하는 법을 알고 새로운 사용의 디렉션을 줄 수 있게 된다. 그때 내가 그것에 상응하는 감각경험을 제공하여, 학생이 목적을 달성하기에 가장 좋은 조건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목적을 달성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개선된 그 조건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지 못한다. 즉 '잘못 되었다'고 느껴 본능적으로 그 조건을 사용하기를 거부한다.  

 

- 이러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가 '옳게 느껴' 목적을 달성하면 신체를 잘못 사용하게 된다는 점을 실제로 경험하게 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이를 경험하고 나면 누구든 예외 없이 새로운 방식이 과거의 방식보다 훨씬 쉽고 노력도 덜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렇게 인정을 하고 나서도, 이 새로운 방식으로 목적을 달성하는 실제 경험을 반복하고 또 반복해야만 그 개선된 사용이 옳게 느껴지고, 그것을 사용하는 데 필요한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 

 

-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한 학생이 말하기를, 내 수업을 듣기 전에는 화를 잘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지만 수업을 받은 이후로 그 문제가 사라졌고 가족들도 그 변화를 눈치챘다고 한다. 그는 나에게 어떻게 '불안하고, 초조한 정신적인 증상'이 나와 함께 한 작업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 답으로 나는 사람들이 그가 버럭 화를 낸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되물었고, 그는 사람들이 자기의 목소리, 얼굴 표정, 눈빛이나 몸동작, 흥분한 태도 등을 보고 알 것이라고 답했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반응들이 그의 '육체적'인 자아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의 사용을 통하지 않고 가능할 수 있는지 물었다. 예를 들어, 목소리가 사용되어야 목소리의 톤을 알 수 있고, 눈이 사용되어야 눈빛의 강렬함을 알 수 있고, 얼굴 근육이 사용되어야 표정이 변하고, 몸 전체가 과도하게 활성화되어 근육이 긴장하도록 하는 자극을 받아야만 흥분했다는 걸 알 수 있다.

 

- 사용의 방식을 바꾸면 모든 인체의 조건이 바뀐다. 그러면 과거의 사용 방식과 조건이 유도하는 과거의 반응이 나타날 수 없다. 그 수단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과거의 습관적인 반사 활동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자제력 상실이 우리 자신을 사용하는 수단에 의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면, 그 개선된 사용을 유도하는 의식적인 디렉션을 통해 우리는 반응이나 행동의 의식적인 제어를 처음으로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 낯선 사용으로 바뀌면, 학생이 그 목적을 달성하려는 자극을 아예 느끼지 않거나 거의 느끼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누군가의 사용조건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느낌이 잘못 되었다면, 학생은 익숙하고 잘못된 사용 방식으로 목적을 달성하려는 자극에 거의 저항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조건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최선의 조건으로 바뀌었을 때에는 그 목적을 달성하려는 자극이 사실상 거의 없는 것과도 같다.

- 이는 놀랄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신체를 사용할 때 감각경험이 잘못되어, 자신의 느낌에 기초해 무엇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결정한다면, 그럴 때 익숙하지 않은 수단으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그가 어둠 속에서 무모하게 시작한다는 의미와도 같다. 어떤 학생이 나에게 설명을 듣고 이러한 어려움이 발생하는 이유를 '머리'로는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새롭고 낯선 사용 수단으로 목적을 달성하는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용기와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이런 일이 한번 일어나고 나면 그는 새로운 경험을 인식하게 되고 그것을 반복하기를 원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을 반복하면서 과거에 지녔던 믿음과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확신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의 내부에서 새로운 사용 방식을 사용하려는 자극이 점점 생겨나고, 이는 결국 과거의 사용 방식을 사용하려는 자극보다 훨씬 강해진다. 이러한 자극은 그가 전에는 결코 경험하지 못한, 자신감을 갖고 의식적인 디렉션을 주어 조절할 수 있다고 깨닫는 추론 과정의 결과로 생성된 것이다.  

 

- 인간의 가장 놀랄 만한 특징 중 하나는 좋고 나쁨에 상관없이 자기 자신 그리고 환경 안에서 거의 모든 종류의 조건에 익숙해지는 능력을 지녔다는 것이다. 일단 그러한 조건에 익숙해지면 그것이 옳고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이러한 능력은 바람직한 조건에 자신을 적응할 수 있을 때는 이롭지만, 바람직하지 않은 조건일 때는 매우 위험할 수 있다. 우리의 감각경험이 신뢰할 만하지 못하다면, 자신을 잘못 사용하게 하는 매우 해로운 조건에 익숙해져 그 잘못된 조건이 옳고 편하게 느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 내가 학생들을 지도한 경험에 따르면, 학생이 지닌 이러한 조건이 나쁠수록 그것을 더 오래 유지하고 더 익숙하고 옳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그가 얼마나 변화하고 싶은지와는 상관없이 조건을 극복하는 방법을 가르치기가 더욱 힘들었다. 달리 말하면, 새롭고 더 만족스러운 사용을 익히는 능력은 대체로 인체에 내재한 잘못된 사용의 빈도와 해로운 조건의 지속 기간과 반비례했다.  
  

- 여러 해 동안 의사들은 나에게 환자들을 보냈다. 내가 몸의 사용 조건을 점검하고 이 조건들이 기능에 미치는 영향을 가늠하는 일에 경험이 많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 요청을 받을 때마다 나는 질병이나 결함과 해로운 방식으로 몸을 사용하고 기능하는 일을 서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기에, 그들을 환자가 아닌 학생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 이러한 환자들을 다루면서 나는 그들의 인체 기능이 불만족스러워진 원인이 그들이 심리적-육체적 메커니즘을 해로운 방식으로 사용한 데 있음을 발견했다. 그 밖에 의사가 증상의 원인을 알지 못하거나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들도 있었다. 그런 증상 가운데는 주의력 결핍, 우울증, 무기력, 기억력 감퇴, 당장 할 일에 대한 집중력 결핍, 과도한 흥분, 일을 완수하는 능력의 전반적인 저하 등과 같은 이른바 '정신적인 장애'가 있었고, 한편으로 불면증, 소화 장애, 영양 부족, 혈액순환 장애, 동창 등과 같이 좀 더 '육체적인 특징'을 지닌 증상도 있었다. 나는 이러한 경우들을 모두 다루며 그들이 자기를 사용할 때 그동안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바람직하지 않은 조건들이 내재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조건들로 인해 환자의 전반적인 기능이 저하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발견했다. 그뿐만 아니라 사용과 기능의 해로운 조건들이 발견된 모든 경우에서, 감각인식(즉, 우리가 자신을 사용할 때 감각 메커니즘을 통해 알게 되는 정보들)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점 또한 밝혀냈다.    

 

- 따라서 나는 "치료에 앞서 질병에 관한 지식... 원인과 진단이 필요합니다. (부분이 아닌) 전체로서의 몸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지 못하고 병을 치료하려는 것은 틀림없이 어리석은 행동입니다"라고 한 도슨 경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그의 말마따나 오늘날 의학 교육을 '세밀하게 체계화해야만' 학생에게 이러한 근본적인 지식을 제공할 수 있다면, 아래와 같은 의학 교육이 없다는 사실에 나 역시 이의를 제기한다.

. 잘못된 기능과 그로 인한 질병 증상의 원인이 되는 인체의 잘못된 습관적 사용을 감지하고 진단하는 방법

. 진단 후 잘못된 습관적 사용을 수정하고 만족스러운 사용으로 발전시키는 과정, 즉 기능 수준을 개선시켜 인체 조건을 재수립하는 과정  

 

- 이러한 진단과 치료 방식이 전통적인 의학 원리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은 분명하다. 전통적인 의학 방식에서는 구체적인 증상을 추적해 특정한 장애를 문제의 원인으로 진단한 후 그것에 집중하여 치료한다. 예를 들어, 일반적인 의사가 심장이나 간, 폐, 눈등과 같이 인체의 일부(들) 문제로 인해 증상이 나타났다고 진단해, 특정한 인체의 일부(들)에 나타난 문제를 치료하거나 그와 관련된 전문의에게 환자를 보내 처방을 받게 한다고 가정해 보자. 물론, 이러한 방식으로 어떠한 증상이 사라지는 경우는 흔하다. 하지만 다음의 이유 때문에 인체 내의 조건이 그대로 남아서 점검되지 않을 경우, 전반적인 기능 수준이 낮아져 애초의 문제가 재발하거나 더욱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 따라서 첫째, 잘못된 기능을 초래하는 잘못된 사용을 찾아내고, 둘째, 잘못된 사용을 끝까지 수정해 나가는 기법을 훈련받지 않은 사람은 '전체로서의 인체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진단하거나 움직이는 유기체로서의 인체를 치료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의학 교육에 이러한 훈련이 포함된 적이 없고 또 질병 치료에 이러한 기법이 사용된 적도 없으므로, 도슨 경이 주장하는 훈련 방식은 의대생이 '전체로서의 인체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진단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불안한 사람이 나의 방법을 이용해 이른바 신체적인 결함이 아닌 모든 종류의 '나쁜 습관'과 같은 '정신적이거나 신경이 과민한 문제'로 여겨지는 증상을 극복하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지 물어본다. 마음의 문제를 제어하지 못하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내 대답은, 그들이 공을 주시하지 못하는 골프 선수, 그리고 원하는 대로 말하지 못하는 말더듬이의 경우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이롭다고 추론한 변화를 일으킬 수 없음은 곧 목적 달성을 위한 자극에 대한 반응이 불만족스럽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 나는 곧바로, 물론 각자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반응을 일반화해서 정의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을 개선하고 싶거나 이로운 변화를 이루고 싶은 사람들의 경우, 그들이 스스로 옳다고 추론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행했을 때 그 반응을 만족스럽게 여기리라는 점에는 분명히 모두 동의할 것이라고도 말한다.

 

- 여기서 명확히 해야 할 점은, 어떠한 경우에서도 옳고 그름의 기준이 고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기준은 상대적이거나 다소 개인적인데, 사람의 신념과 행동은 대체로 자라 온 환경과 상황의 결과이기 때문에, 고정된 기준으로 판단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한 집단이 특정한 시기에 옳다고 믿는 행위가 다른 사람들에게 혹은 다른 시기에 비난받는 일이 허다하다. 

 

- 하지만 자기 사용의 경우, 일반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기준이 있다. 인체의 사용 방식이 기능의 만족스러운 기준과 건강 그리고 전반적인 안녕의 조건과 관련 있다는 사실을 실제로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상황에서 '자연스럽거나' '옳은' 바람직한 조건을 유도하는 사용의 방식은 확실히 타당성을 지니지만, 거기서 '옳다'라는 단어가 고정된 기준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체 작용의 중추조절에 근거한 이 사용 방식은 다양한 상황에서 다채롭게 나타나므로, 이 '옳다'라는 것은 상황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더 나아가, 자신의 '옳고' '자연스러운' 사용을 위해 지식을 터득한 사람은 판단의 기준을 얻고 상대적인 가치를 이해하게 된다. 이 과정을 경험한 사람은 그가 받은 자극에 어떠한 방식으로 반응하는 게 최선인지를 결정해야 하며, 또 그러한 사용 방식에서 첫 번째 두 번째 그리고 그 이후로 계속 어떠한 디렉션을 내려야 하는지 판단해야 하는 상황에 끊임없이 맞닥뜨리기 때문이다. 그가 습득하는 상대적인 가치의 기준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외부적 기준이나 고정된 규칙을 정할 수 없을 만큼 변화무쌍한 현대 생활의 자극에 반응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자기 자신을 활동의 도구로 인식할 수 있다면, 이른바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모든 활동과 관련된 자기 사용의 적절한 기준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다. 

 

- 사람들이 결심을 실행하여 자신과 자신의 행동, 타인에 대한 태도를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목적을 위한 옳음(right for the purpose)'이라는 의미에서 옳은 사용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당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앞서 소개한 골프 선수와 말더듬이의 예처럼, 변화하기 원하는 우리가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방식은 지금까지 설명했던 '습관적' 자기의 사용이다. 이러한 습관적 방식을 사용해서는 자신이 옳다고 추론한 것을 행하지 못한다는 사실로, 습관적 사용이 잘못 디렉션되고 목적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잘못되고 습관적이며 익숙한 느낌에 근거한 기준 외에 다른 기준이 없는 한, 우리의 사용은 목적에 맞지 않으며, 원하는 변화를 주기 위한 자극에 대한 반응은 본능적인 반응이 될 것이고, 따라서 과거의 잘못된 경로를 따르게 될 것이다.   
 

- 이러한 이유로, 스스로 변화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모든 자극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을 자제하는 일을 생활의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또한 과거에 습관적으로 사용하여 친숙해진 감각경험으로 되돌아가기를 거부할 기회를 갖기 위해, 새로운 디렉션을 사용하는 동안에는 반드시 계속 자제해야 한다. 이 원칙을 지켜 의식적인 디렉션을 주어 그들 스스로를 사용한다면, 느낌이나 인상을 좀 더 정확하게 인지할 수 있는 감각의 기준을 얻게 될 것이다. 내 경험을 통틀어 말해 보자면, 감각인식을 신뢰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인체 사용의 잘못된 디렉션을 초래해 기능의 조건이 불만족스러워지는 경우, 특정한 자극은 실제로 일어나는 반응과는 사뭇 다른 반응을 느끼도록 감각 과정을 가동시킨다. 이는 입증 가능한 사실이다. 우리가 현대 문명의 요구에 바람직하지 않은 방식으로 적응하면서 나타나는 가장 심각한 증상인 감각 과정의 비신뢰성은 점점 증가하고 있다.  

 

- 모든 '노력'은 어느 정도 할 수 있다는 개인적인 신념에서 출발하며, 다른 신념과 마찬가지로 이 신념 역시 우리의 감각 과정을 통해 받은 느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이 신념의 타당함이 감각 기능의 특성에 의존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 과정이 바람직하다면, 우리가 하는 행위와 무언가를 하려는 자극에 대한 반응을 경험하는 감각이 진짜일 가능성이 크다. 달리 말해, 우리가 보이는 반응이 실제로 일어나는 반응일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반면에 우리의 감각 기능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무언가를 하려는 자극에 대한 반응이 거짓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우리가 보이는 반응이 실제로 일어나는 반응과 다를 가능성도 매우 크다. 

- 초반에 소개했듯이 나의 경우에서도 (골프 선수와 말더듬이에게도 똑같이) 무엇이 옳은지 알면 노력을 통해 그것을 할 수 있다는 신념에 근거해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오랫동안 실패를 연이어 경험한 후에야 내가 애써서 한다고 믿는 그것을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이때 나는 나의 감각 작용이 실제로 일어나는 참 느낌이 아닌 것을 전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내 '노력'의 밑바탕에 깔린, 즉 신뢰할 수 없는 감각과정을 통해 나에게 전달된 느낌이나 인상에 근거한 신념은 착각에 불과하다. 내가 그랬듯이, 이 신념을 만든 '노력'으로 원하는 목적을 달성한다는 전제는 자기기만으로 가는 준비 단계일 뿐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 이렇게 내 개인적인 경험을 강조하는 일에 양해를 구할 생각은 없다. 인류의 감각은 점점 더 신뢰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인간은 문명의 발달 과정에서 '마음(mind)', '영혼(soul)' 그리고 '몸(body)'이라 불리는 것의 잠재성을 끌어올릴 필요성은 인식했지만, 아직까지 이 잠재성이 표현되는 감각 기능을 만족스러운 조건으로 유지할 필요성은 깨닫지 못했다. 그 결과, 인간의 감각 기능이 너무나 불만족스러워졌고, 따라서 인체의 사용은 지속적으로 잘못 안내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잘못된 디렉션을 바로 잡으려고 '노력'할 때 애초에 우리를 오류로 이끈 신뢰할 수 없는 감각 과정 외에는 자기비판을 위해 안내받을 다른 기준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충분한 몸의 기능에 관한 경험을 확인해 주지 못하는 감각경험이라는 정보를 통해 전달받는 믿음, 판단, 확신 등에 근거해 자신과 타인을 도우려는 노력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인식해야 한다.  

 

- 감히 말하건대, 이 책에 소개한 경험들은 감각 기능을 월등히 발전시켜 더욱 타당한 자기비판의 기준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자신을 사용할 때, 의식적으로 디렉션을 발전시키기 위해 내가 기술한 테크닉을 실행해 본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현재 일어나는 상황을 인식하고 감각적으로 관찰하는 기회를 지속적으로 얻는다는 것을 인식했다. 새롭고 개선된 사용의 디렉션을 의식적으로 주는 동안 과거의 본능적인 잘못된 디렉션, 즉 애초에 자신을 속인 감각의 비신뢰성에서 비롯된 잘못된 디렉션으로 돌아가는지 끊임없이 살펴야만 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 절차에 기초한 원칙을 모든 활동의 지침으로 삼는 사람들은 새로운 과정안에서 자신의 사용을 감각적으로 관찰함으로써 '활동 중 생각(thinking in activity)'을 결합할 수 있다는 점을 발견한다. 이는 자신의 반응이 자신이 느끼거나 원하는 것과 다를 때를 인식하며, 동시에 더 나은 반응을 위한 방법을 추론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과거의 본능적인 반응을 의식적으로 계속 점검할 수 있다는 의미다. 

- 우리는 모두 어떠한 일에 대한 우리의 인상(느낌)이 그 일의 본질에 대한 정확한 인상(느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예를 들어, 온도계에 나타나는 온도는 그렇지 않은데 우리의 감각은 '춥다'고 느낄 수 있다. 또 말한 사람은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고 동석한 사람들 모두 그런 의미로 해석하지 않는데, 누군가가 그 말을 모욕이나 비난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이 주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잘못된 인상(느낌)이 잘못된 판단을 낳는다는 점을 매일 일간 신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개인의 적극적이고 의식적인 조절의 머리말에 쓴 존 듀이 교수의 다음 글에서도 이와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개인과 개인의 행위와 관련한 모든 문제 안에는 불완전하고 약해진 감각인식과 판단이 존재한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행위 모두에서 몸과 마음의 작용이 잘못 조정되어 이루어진다. 이것이 우리에게 정당함의 기준이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관찰, 해석,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 이는 우리의 모든 행위와 사고에 영향력을 미치는 하나의 요소다."

 

- 개인에게 이러한 이로움을 준다고 입증된 테크닉을 기초로 교육 계획을 세운다면, 자라나는 세대는 만연한 감각의 잘못된 사용조건 대신 더 타당한 자기 판단의 기준을 습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지금까지 모든 사람에게 선의를 실현하고 또 지구에 평화를 실현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들, 인종주의와 군집본능, 과도한 자기결정, 경쟁의식 등으로 나타나는 본능적인 반응이 보다 타당하고 이성적인 반응으로 대체될 수 있을 것이다.  

 

 


 

 

- 수년간 알렉산더 선생의 테크닉을 몸소 실행해 온 저는 그가 우리 자신, 그리고 행동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믿음에 새로운 감각 관찰을 실험하고 생산해 내는 방식을 동일하게 적용했다고 확신합니다. 그간 자연과학에서 모든 발전의 원천이 되었던 실험과 생각을 전개하는 수단으로서 말입니다.

 

- 알렉산더 선생은 통합체 안에서의 육체-정신이라는 두 요소 간의 상호관련성을 정확하게 알아내는 방법, 그리고 새로운 태도와 습관에 대한 새로운 감각인식을 일깨우는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이 모든 과학 발견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그것들을 이용할 수 있게 하는 발견인 이유는, 거기서 제시한 '하지 않음(undoing)'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건설적인 성장과 행복을 증진시키는 데 우리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 이 발견은 불균형한 인체를 가진 성인들을 치료하지 않았다면 이루어질 수 없었으며 절차의 방식도 완성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치료 방식이 아니라 적극적인 교육 방식입니다. 이 방식을 자라나는 어린 세대의 교육 분야에 적용해 감각인식과 자기 판단의 정확한 기준을 가능한 일찍 배우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적절한 수의 신세대가 적절하게 균형 잡힌 신체를 갖게 되면, 미래에는 인간이 만족스러운 몸과 마음의 균형을 지니고 두 발로 서서, 공포, 혼돈, 환경으로 인한 불만, 흔들림, 위급한 사태를 겪는 대신에 준비된 마음으로 자신 있게 행복을 맞이할 수 있다고 처음으로 장담할 수 있을 것입니다.  

 

- 1929년 기포드 연설에서 발췌한 '개인의 적극적이고 의식적인 조절'의 머리말 중, 존 듀이

 

  

- 교사 양성 과정 개설이 구체화되었다는 소식에 무척 기뻤습니다. 아시다시피, 인간의 행복을 도모하는 선생님의 귀중한 연구가 실행되기를 손꼽아 기다려 왔습니다. 선생님의 경험과 개발하신 테크닉은 사라지기엔 너무나 소중합니다. 저처럼 선생님의 도움으로 혜택 입은 사람들이 분명 수천은 되겠지만, 저희가 받은 혜택을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 전달할 수는 없으니 그저 말로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님의 테크닉을 가르치는 교사 양성 학교를 세우는 일은 인류를 위한 커다란 봉사가 될 것입니다. 

선생님의 새로운 모험이 성공하시길 기원합니다.

 

- 당신의 진실한 벗, 리튼

 

 

- 이전에 출간된 알렉산더 선생의 책 <개인의 적극적이고 의식적인 조절>의 머리말에서 나는 그의 방법과 결론이 가장 엄격한 과학 방식의 요구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며, 이전에 과학 분야에서 한 번도 사용되지 않은, 즉 우리 자신과 우리의 활동에 관한 판단과 믿음을 다루는 방식을 적용했다고 썼다. 내가 언급했듯이, 이 과정에서 그는 인간에게 유익한 방식으로 이 목표를 달성했으며, 신체분야의 과학 결과들을 더 상세히 설명했다. 과학기술이 결과적으로 관련 에너지를 제어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자연과학은 신체 에너지에 대한 놀라울 정도로 새로운 요구를 제시한다.  

 

- 끈기와 철저함을 바탕으로 극도로 어려운 관찰과 실험을 수행한 그에게 나는 어떻게 존경과 감탄의 표현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알렉산더 선생은 진정으로 살아 있는 인체의 생리라고 부를 만한 것을 창시했다. 그는 몸의 실제 기능, 인체 작동, 모든 종류의 도구와 기구를 사용하는 평소의 생활 조건 -일어나고, 앉고, 서는 행위와 팔과 손, 목소리 등- 을 관찰하고 실험했다. 생물과 사람의 평상시 활동을 지속적이고 정확하게 관찰하는 일과 죽은 생물을 일반적이지 않고 인공적인 조건에서 관찰하는 일을 비교하면, 참과학과 가짜 과학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과학'을 후자와 같은 종류로 생각하는 데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알렉산더 선생의 관찰이 지닌 진정한 과학적 특성을 가짜 과학들과 비교해 왔다. 이는 많은 사람이 그의 테크닉과 탐구의 결론을 인정하지 못하는 큰 이유 중 하나였다. 

 

- 예상할 수 있듯이, 알렉산더 선생의 실험적 탐구의 결론은 근육과 신경 구조에 대한 생리학자들의 지식과 일치한다. 더 나아가 알렉산더의 결론은 생화학 지식에 새로운 중대성을 부여한다. 실로 그의 결론은 진정한 지식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려 준다. 해부학자는 각 근육의 정확한 기능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역으로 특정한 행위를 수행할 때 어떠한 근육이 사용되는지 안다. 하지만 그가 자리에 앉거나 앉았다가 일어나는 것과 같은 행위를 적절하고 효율적으로 수행할 때 모든 근육 구조를 조화롭게 움직일 수 없다면, 달리 말해 무언가를 할 때 자신을 잘못 사용한다면, 완전하고 중대한 의미로 그것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매그너스는 외부적인 증거(external evidence)라고 불릴 만한 방법으로 인체에 중추조절이 존재함을 증명했다. 하지만 알렉산더의 테크닉은 매그너스가 연구하기 한참 전에 중추조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을 통해 확인했다. 그리고 이 테크닉을 경험한 사람은 경험을 여러 번 반복함으로써 그것을 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알렉산더 선생의 가르침과 발견이 진정으로 과학적이라는 것은 충분히 설득력을지닌다.   

 

- 과학적 발견의 생명력은 새롭고 향상된 작용을 추정하고 이끄는 힘으로 드러나고 확인된다. 이러한 작용은 이전 결과와 조화될 뿐 아니라, 새로운 발견들이 계속 이어지면서 결과적으로 행위가 실험적으로 제어됨을 암시하므로, 새로운 자료들을 관찰할 수 있게 한다. 학생으로서 말하자면, 내가 알렉산더 테크닉의 과학적인 우수성을 처음으로 확신하게 된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그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증명된 사실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그의 수업은 언제나 실험실에서 이뤄지는 실험과도 같았다. 앞으로 맞이할 결과와 과정을 언급할 때 알렉산더 선생은 은연중에 회의적인 태도를 내비쳤다. 이는 실질적으로 불가피한 일인데, 알렉산더 선생이 지적했듯이 학생은 자신의 판단 기준에서, 재교육이 필요한 바로 그 상태에서 자신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수업은 매번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교사가 말한 내용은 가장 사적이고 확실한 방식으로 확인된다. 한 영역이 확인되면서 새로운 영역이 열리고, 새로운 가능성이 보인다. 학생은 자신이 계속 성장한다는 것을 알고 한번 시작된 성장이 계속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 어찌 보면 나는 이 테크닉을 지적으로 연구하고 결과를 만들어가는 흔치 않은 기회를 가졌다. 실용적인 관점에서, 나는 어리석고 서투르며 느린 학생이었다. 감사하다는 감정을 느낄 만큼 신속하고 기적 같은 변화는 없었지만, 나는 그런 변화에 지적으로 현혹되었다. 나는 과정의 모든 단계를 주의 깊게 관찰하며 그 작용 이론에 관심을 쏟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그랬던 것은 한편으로 심리학과 철학에 관심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실제로 내가 그 과정을 잘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 내가 이미 가진 지식이나 생각이 무엇이든, 그리고 이러한 학문에서 내가 습득한 정신작용의 원리가 무엇이든, 지적인 면에서 나는 내 생애에서 가장 굴욕적인 경험을 했다. 자신의 정신 능력에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이 앉는 일과같이 단순해 보이는 행위를 할 때, 자제 및 디렉션을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그의 허영심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험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는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인과조건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 나는 심신 작용에서 육체와 정신이 통합된다는 알렉산더 선생의 말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확인했다. 내가 확인한 사실은 우리는 자신을 습관적으로 잘못 사용하며, 이러한 잘못된 사용이 모든 종류의 불필요한 긴장과 에너지의 낭비를 초래하고, 자기 판단의 재료가 되는 감각인식을 손상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습관적인 행위를 자제하는 일이 무조건적으로 필요하고, 적절한 조정이 이루어지면서 일어나는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태도의 큰 변화를 포함하는 습관적인 행위가 나오려 할 때 무언가를 '하지 않는 일'이 정신적으로 엄청나게 힘들다는 것이다. '치료'를 경험한 사람이 아니라 지적인 능력을 끌어내 문제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알렉산더 선생의 발견과 테크닉의 과학적 특성을 확신한다. 이 연구를 하는 과정에서, 철학과 심리학에서 내가 알고 있었던 것, 이론적인 신념이라는 의미에서 이 중대한 경험으로 변모해 그 지식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 현 세태에서 먼저 자기의 사용을 안정되게 제어하지 않은 채, 물질적인 에너지, 열, 빛, 전기 등에서 제어를 얻는 것은 분명 위험한 일이다. 자기를 사용할 때 스스로 제어하지 않는다면, 다른 것들을 사용할 때 장님이 된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 더욱이, 자신에 대한 습관적인 판단은 손상된 감각 재료에 기초하기 때문에, 그것이 왜곡된다면 자신을 다루는 우리의 습관이 이미 잘못되었다면 그럴 수밖에 없으므로 우리가 속한 사회 조건이 더 복잡해질수록 결과는 더욱 처참해질 수밖에 없다. 외부적인 수단들이 계속 더해진다면 파멸에 점점 더 가까워지게 될 것이다. 요즘의 세태는 이러한 사실을 비극적으로 보여 주는 전형적인 예다.

- 파블로프 학교는 조건 반사라는 개념을 세상에 알렸다. 알렉산더 선생의 작업은 이 개념을 확장하고 수정한다. 그의 작업은 우리가 수행하는 모든 행위, 곧 자신을 사용하는 모든 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기초적이고 중추적인 신체의 습관과 태도가 존재함을 증명한다. 그런고로 조건반사는 종소리와 개의 반응과 같이 임의로 설정된 연관성뿐만이 아니라, 인체에 내재한 중추적인 조건으로 되돌아간다. 조건반사는 일반적으로 개개인을 외부의 조종에 의해 놀아나는 수동적인 꼭두각시로 간주한다. 하지만 알렉산더 테크닉에서는 다른 모든 반응에 영향을 미치는 중추조절을 발견함으로써 의식적인 디렉션하에서의 조건 요인이 생겨나고 개개인은 자신만의 조정된 활동을 통해 자신만의 잠재력을 소유할 수 있게 된다. 이로써 조건반사는 외부적인 노예 상태의 원리에서 중요한 자유의 수단으로 전환된다.

- 교육은 인류가 스스로를 지시하기 위한 유일하고 확실한 방법이다. 하지만 우리는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진정으로 정상적이고 건강한 몸과 마음의 생활이 무엇인지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우리가 내세우는 교육은 잘못된 교육일 가능성이 크다. 성향과 성격이 가정과 학교에서 형성된다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학생들은 누구나 -눈곱만큼의 과장도 없이 말해- 매우 자주 그리고 한탄스럽게 이러한 가능성이 실현된다는 것을 안다. 알렉산더 선생의 테크닉은 교육자에게 몸과 마음 건강의 기준을 제시한다. 여기에는 우리가 도덕이라고 부르는 것이 포함된다. 이 테크닉은 또한 이 기준이 계속적으로 끝없이 성취되어, 이를 교육받은 사람이 의식적으로 이 기준을 지니게 되는 '진행과정'을 제공한다. 따라서 모든 특별한 교육 과정은 (이 테크닉의) 중추적인 디렉션을 위한 조건을 제공한다. 교육 자체가 인간의 다른 모든 활동과 연관되므로 이 테크닉도 교육과 연관된다.

- 나는 알렉산더 선생이 협력자들과 함께 교사 양성 과정을 열었다는 내용을 부록에서 읽고 기대감에 가슴이 벅찼다. 이 과정은 적절한 지원을 받아야 한다. 나는 이 교사 양성 과정에, 모든 교육에 반드시 필요한 '디렉션'이 이루어질 가능성과 잠재력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 1939년 재판에 수록된 존 듀이 교수의 추천사 

 

 

"잘못된 것을 그만두면 올바른 것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 건강은 운동을 하는 시간과 강도에 비례하지 않는다. 오히려 운동을 하지 않는 평상시의 자세와 습관에 좌우된다.

 

- 앉기, 서기, 걷기, 호흡 등 일상의 움직임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통증과 긴장을 줄이고 몸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도록 이끄는 130년 전통의 '알렉산더 테크닉’, 이제 그 놀라운 기법의 정수를 테크닉의 창시자 프레더릭 알렉산더의 육성을 통해 만난다. 

- "알렉산더 테크닉의 진정한 가치는 우리가 이를 일상으로 가져와 매 순간 내 몸과 마음에 사용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교실 안에서만 존재하고 일상에서는 적용하기 어려운 방법들과 달리, 이것은 레슨을 마치고 교실을 나오는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 김수연(AT 포스쳐 앤 무브먼트 연구소 소장)·김경희(한국 알렉산더 테크닉 국제학교 디렉터)

 

- "알렉산더 테크닉을 통해 심장병과 허리 통증이 완벽하게 치료되었다. 키가 7cm나 커졌고 어깨도 5cm 넓어져 더 이상 맞는 옷이 없을 정도다."

 

- 조지 버나드 쇼(극작가)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