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짤짤이] 인류 보호 회사 1-5 (완)

일루젼 2024. 9. 1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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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짤짤이 / 달로
출판 : 시공사
출간 : 2023.08.31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어딘가에서 추천글을 보고 읽어보게 되었는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어디서 봤던 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 읽고 나서야 웹소설로 연재되었었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종이책으로 읽는 걸 권하고 싶다. 에피소드마다 호흡이 길지 않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고 무엇보다 달로 작가의 표지가 상당히 매력적이다. (전자책 표지와 웹툰은 내가 상상했던 이미지와 많이 달랐다.)

 

아마 첫 장를 읽고 나면 적어도 1권은 손에서 내려놓기 힘들어질 것이다. 굉장히 인상적이고 흡입력 있는 도입부였다.  

 

평범한 공시생이었던 서른 살 이연우는 시험장에서 우연히 이상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인간자격시험>.

받아 든 시험지에는 당황스러운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인간이 인간인 것에 자격이 필요한가?

아니, 다른 시험장에서는 이미 시험이 시작되었을 시간인데 이건 대체 뭐지? 악질적인 장난?

비슷한 생각을 한 것인지 분개하는 장수생과 다른 수험생들을 관찰하던 그는 문득 무언가를 깨닫는다.

 

이후 이연우가 경험하게 되는 다양한 이상 현상들. 가볍게 웃고 넘어갈 수 있었던 해프닝부터 목숨을 걸어야 했던 위기까지 수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각각은 모두 현 사회의 조각들을 반영하고 있다. 우리 주변에 만연해 있기에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했던 부조리를 꼬집기도 하고,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인간 중심 주의를 비틀어 보여주기도 한다.  

 

'이상(異常)'이란 무엇이며 '이상(理想)'이란 무엇인가. 

평범함과 일상이란 무엇인가.

 

그렇게 조금씩 이연우의 불운(?)을 함께 하며 고민하다 보면, 어느새 멀티버스와 악마 소환과 미래 확정에 대한 세계의 이면으로 끌려 들어가 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주인공의 소시민성이다. 독자가 몰입하기 힘들 정도의 고결함도, 답답할 정도의 선함도 없다. 그저 고만고만한 정도의 도덕성으로 누구나 할 법한 고민과 갈등을 겪는, 게다가 어찌어찌 휩쓸려 들어온 회사에서 신입 사원으로 고생하고 있는 한 젊은이일 뿐이다. 그 일이라는 것이 좀 많이 위험하다는 것만 빼면. 


이연우는 성장형 캐릭터지만 절대 대의나 신념에 휩쓸리지 않는다. 자신의 생존과 무사안위가 언제나 최우선으로, '자기 희생'은 그에게는 가능성이 거의 0에 수렴하는 선택지일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 그의 처절함과 기발함, 그리고 그럼에도 언제나 그의 주변에 발생하는 사건 사고들은 소설 속 인물들에게조차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런 '생존본능'이 하나의 능력이었음이 드러나는 중반. 독자들은 어느새 주인공에게 이입해 그를 응원하게 된다. 그가 무사히 살아남으면 나 역시 그럴 것만 같다. 설명하기 힘든 사회의 어두운 면들도 알고 보면 소설에서처럼 이러저러한 뒷사정들이 숨어 있을 것만 같다.

갑자기 자신의 고강함을 외치는 황금 투명 드래곤이나 그레이트 올드 웜  같은 오마쥬를 찾는 재미도 쏠쏠하다.

 

독특한 특색을 가진 집단으로 나뉜 진영 다툼도 매력적이다. 

 

인류를 보호한다는 신념 하에 뭉쳐진 집단인 회사. 

황금이란 가치를 최우선으로 꼽는 황금만능주의, 클럽.

아름다움만이 존재할 가치라는 예술가협회와 지고의 미(美)로 세계 자체의 사랑을 받는 협회장.

회사로부터 갈라져 나온, 이런 세상은 사라지는 게 낫다는 멸망주의자들. 

악덕을 정체성으로 삼은 악마들과 그 신봉자인 악마숭배자들.

 

여러 집단들이 등장하지만 절대악으로 낙인찍히는 집단은 없다. 상황에 따라, 각자의 입장에 따라 때로는 협동하기도 하고 협상하기도 한다.

회사부터가 절대 선이 아니다. 우선하는 가치에 따라 일반인들이 경악할 만한 결정도 서슴없이 내리는 것이 집단으로서의 '회사'다. 

 

각 집단이 서로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듯한 순간들을 보면 이전까지 허무맹랑하게 느껴지던 에피소드가 갑자기 다른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상(異常)이라는 설정을 통해 풀어놓는 판타지 요소들도 그렇다. 허술한 듯하면서도 은근히 꼼꼼한 설정은 저자가 보내온 시간을 궁금하게 만든다.      

 

어쩌면 당신도 회사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기계 팔에 의해 묘사되고 있을지도.

 

그렇다면,

제4의 벽을 넘어 자동 기술 장치를 파괴하는 이연우에게서

정해진 운명이라는 천형을 벗어나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는 자신도 발견하실 수 있기를. 

 

또 저자분은 이후로도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해주시길. 

 

데구르르. 

대성공!!

 


    

 

- 공무원 시험만 네 번째였다.
나이는 앞자리가 바뀌어 서른이 되었건만, 이연우는 지금 입은 낡은 후드와 빛바랜 청바지, 그리고 마모된 운동화처럼 망가지고 낙오되기만 하였다.
나이를 먹은 몸은 하나둘 고장이 나기 시작했고, 긴 공시생활을 겪는 동안 정신과 영혼은 조금씩 깎여나가고 썩었다. 뒷바라지하며 같이 망가진 부모를 생각하면 더는 버티기 힘들 정도였다. 
이번에는 꼭 합격한다. 꼭 반드시!
이연우는 시험장에 앉아, 핏발 선 눈으로 교재를 읽었다. 외우지 못한 분량이 있었다. 시험 시작까지 몇 분도 채 남지 않았지만, 한 글자라도 더 머릿속에 각인시키려고 노력했다.

- "시험 시작입니다."
촤라락!
사방에서 시험지 첫 장을 넘기는 소리가 몰아쳤다. 뒤질세라 이연우도 첫 장을 거칠게 넘겼다.
그리고, 멈췄다.
순간, 몇 초 동안 기묘한 정적이 시험장에 내려앉았다.
'인간자격시험...?'
공무원 지방직 9급 시험이었다. 마땅히 시험 과목, 이를테면 국어와 영어와 한국사와 선택 과목 둘이 있어야 할 시험지 상단에, 기묘한 이름이 쓰여 있었다.
인간자격시험.

- '이게 뭐지? 시험지가 섞였나? 아니야, 이딴 시험이 세상에 어디 있어. 그럼... 장난? 왜? 안 그래도 시간이 빡빡한데, 왜!'
분노와 공포가 이연우의 뇌를 가득 채웠다. 시야가 좁아졌고, 심장이 마구 뛰었으며, 싸구려 볼펜을 쥔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시험지를 보느라 숙였던 고개가 팍 올라갔다.
거칠게 손을 들어 항의하려는 때였다.
이연우보다 먼저 움직인 사람이 있었다.
"저기요! 감독관!"
수염을 마구잡이로 기른 아저씨였다. 딱 봐도 공무원 시험에 최소 5년은 투자한 고시 낭인.

- 반대로 감독관은 현실적인 시련에 직면했다.
"아니, 이게 이럴 리가 없는데."
"이럴 리가 없으면 이건 뭔데! 너 누구야! 어디 소속의 누구야! 관등 성명 대봐!"
"청원하고 인터넷에도 글 올릴 거니까 기대하세요!"
"그건... 일단, 여러분 죄송합니다. 우선, 시험 본부에 확인해 볼 테니까, 잠깐만 조용히 대기해 주십시오."
아우성치는 수험생이 쏟아내는 항의의 파도 앞에서, 감독관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양손을 들어 올려 그들을 말리는 시늉을 했다.

- 모두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바로 앞에 서 있던 사람이, 늦지 않은 나이에 공무원이 된 감독관이, 그들이 그토록 원하는 안정된 미래를 쟁취한 인간이, 한순간에 짐승으로 변했다. 
생김새와 옷차림과 목소리까지 똑같은데도, 그냥, 그냥 짐승이었다. 짐승으로만 인식되고 생각되었다. 어떻게 보아도 사람인데, 사람이 아니었다. 
마치 초월적인 무언가가 감독관에게서 인간의 구성 요소를 박탈한 듯한 광경.

- 답안지에 표시해야 하는 문제는 100개. 벗어날 수 없는 밀실에서, 행동을 잘못하면 짐승이 되어버리는 시험이 촉박하게 진행되었다.

 

- 당신은 기차가 나아갈 선로를 정할 수 있다. 각 선로에 다음과 같은 인물이 묶여 있을 때, 당신은 어느 선로로 기차를 인도할 텐가?
[A선로: 당신 하나]

[B선로: 당신의 부모 둘]

[C선로: 당신의 친구 다섯]

[D선로: 당신과 관련 없는 무고한 인간 100명]

- 답이 없는 문제. 사람마다 답이 달라지는 주관적인 문제. 공무원 필기시험에 나왔다가는 후폭풍이 몰아칠 문제.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마주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한 종류의 문제.
이연우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걸 어떻게 맞히라고! 애초에 정답이 없는 문제잖아!'

저절로 손에 힘이 들어가 볼펜이 시험지를 찢을 듯이 파고들었다.

- 극한 상황에서 마주한 솔직한 마음.
'나는 인간이야. 내 마음이 시키는 선택이 인간다운 답이야. 불합격하면 애초에 내가 인간이지 못했다는 소리니까, 그러니까...'
총을 쏘듯이, 포기하듯이, 충동적으로 볼펜을 내려찍어 답에 V 표시를 했다.

4번: D 선로.

- 고작 한 문제 풀었을 뿐인데 단거리 달리기를 완주한 것처럼 진이 빠졌다. 축 늘어지려는 손을 힘겹게 들어 올려, 얼굴을 흠뻑 적신 땀을 닦아냈다.
긴장이 조금은 풀렸기 때문일까.
시험지의 문제 하나로 한껏 좁아졌던 세계가 넓어지며, 시험장의 온갖 군상이 보였다.
달달달달.
다리를 쉴 새 없이 떠는 남자가 볼펜 꼭지를 까득까득 씹고 있었다.
"흐, 흐흡. 흑."
누군가는 한 손으로 입을 막고 흐느끼며 눈물을 쏟았고, 누군가는 소나기라도 맞은 것처럼 땀으로 상의를 흠뻑 적셨다.

"콜록, 콜록. 크흠. 흐흐흠."
거기에 발작하듯 기침하는 사람까지.
그러면서도 필사적으로 시험지를 누비는 볼펜들의 불협화음이 시험장을 가득 채웠다.
패닉에 가까운 정신 상태 때문에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했던 온갖 소음이 귓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집중을 방해했다.

- 이연우는 억지로 눈을 시험지에 집중했다.
'집중해, 집중해! 문제만 풀 시간도 부족해!'
흘깃, 손목시계를 보니 5분이 더 지났다. 남은 시간은 85분. 남은 문제는 99문제.
마킹을 못 해서 불합격하는 끔찍한 상상이 머리를 스쳤다. 상상인데도 오싹, 오한이 들었다.
'안 돼. 빨리 읽고, 빨리 푼다!'

- 거칠게 문제지를 끝까지 넘겨보니, 마침 모든 문제가 1번 문제와 비슷했다. 답이 없는, 개인의 주관을 묻는 문제.
덕분에 문제 풀이에 시간이 들 것 같지는 않았다. 한눈에 끌리는, 솔직한 답만 고를 거니까.

 

- 사물함 앞에 주저앉은 부감독관에게는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지나친 장수생이 미닫이문에 손을 올렸다.
부지런하게 움직이던 볼펜 소리가 천천히 멎었다. 드르륵, 열리는 문을 따라 수험생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여러 쌍의 시선이 장수생에게 향했다.
희미한 희망과 불신과 기대와 공포가 복잡하게 섞인 시선과 낮은 중얼거림.
"나갈 수 있나? 진짜?"
 

- 끝까지 당겨 연 미닫이문, 장수생은 문지방을 지나, 복도로 나갔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그리고 네 걸음. 그는 아무 일도 없이 복도 중앙으로 걸어 나갔다.
색이 빠져나간 수험생들의 얼굴에 희망이 깃들며,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때였다.
'저건...'
이연우는 장수생의 책상 모서리에 뒤집힌 채 놓인 답안지를 발견했다. 자세히는 안 보이지만, 진하게 마킹된 자국이 군데군데 비치는 답안지의 뒷면을...
'문제를 다 풀었다고? 마킹까지 끝내고? 그런데 왜 그 난리를 피우면서 나갔지? 아, 설마...'
이연우가 시험장을 돌아봤다.
장수생이 무사히 나가는 것을 보고 따라서 나가려는 수험생이 부지기수였다. 문제도 마저 풀지 않고 말이다.

- 열세 명. 시험장 인원의 3분의 1쯤 되는 수험생이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슬쩍 살펴보니 답안지에 마킹도 안 돼 있었다. 순간, 소름이 올라왔다.
'다른 수험생들이 제대로 풀지 않고 나가게 하려고. 그 이유는...'
인간자격시험이 상대평가일지도 모르니까.
합격자로 몇 명을 뽑을지 모르니까.
자기보다 더 인간다울지도 모를 경쟁자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 그 깨달음과 동시에 공포가 엄습했다.
'만약... 만약... 상대평가라면, 한 명만 뽑히는 시험이라면, 공무원 시험처럼 경쟁률이 미쳐 돌아가는 시험이라면, 어떻게 되는 거지?'
가장 솔직한 답만 고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경쟁자가 나보다 더 인간답다면, 그래서 ... 

 

- [인간자격시험]
적대 수준: 오렌지
위험 레벨: 3
중요 등급: C
상세: 무작위로 시험을 대체하여, 인간의 자격을 시험하는 이상 異常. 합격자는 인간이 되며, 불합격자는 인간이 아니게 된다.
또한, 시험이라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필기와 실기, 인터넷과 현실전부에서 인간자격시험이 등장할 수 있다.
대책: 데이터 센터에서 AI를 이용한 가짜 시험을 반복하여, 현실에 나타날 확률을 낮춘다. 한 번의 진짜 시험이 있다면, 1억 번의 가짜 시험을 만든다.

- [인간자격시험의 특수한 사례와 위험성]
인터넷 강의 시험을 집에서 컴퓨터로 치른 경우: 가정에서 어머니가 집 안에 커다란 짐승이 있다고 신고하여 발견.
최초로 인터넷 시험에서 등장한 사례이며, 이후로 인간자격시험이-인터넷 성격 테스트, 심리 테스트 등도 대체하기 시작함.

조리기능사 실기 시험의 경우: 자신의 신체 부위로 요리하게 함. 합격자는 신체 손실로 영구적인 장애를 지니게 됨. 인간자격시험으로 인해 물리적인 피해가 발생함.
짐승이 인간자격시험을 치른 경우: 대학에서 동물의 지능을 연구하던 중, 동물이 시험을 치르는 형식을 취했을 때, 인간자격시험이 나타나 동물을 시험함. 불합격한 동물은 똑같은 동물로 보였으나, 합격한 까마귀와 원숭이는 사람이 됨. 해당 까마귀와 원숭이는 [보안 조치]에 이용됨.

궤도의 우주정거장과 화성의 [보안 조치]와 [보안 조치]의 [보안조치]에서 보안 시험을 치른 경우: 이후로 인간자격시험이 등장하는 영역이 물리적으로 증가함.

 

- 이상의 사례로 보아, 해당 이상 현상은 진화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등장 매체가 증가하였고, 시험 대상을 확대했으며, 영역을 넓혀 저 [보안 조치]에까지 등장하였습니다. 
최악의 경우, 모든 인간의 삶의 매 순간이 인간자격시험이 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진짜 인간보다 벌레나 동물, 물고기 따위의 가짜 인간이 많아질지도 모릅니다. 레드 등급으로 격상해야 합니다.

- [인간자격시험의 적대 등급 격상에 관하여]
당분간 현재 상황을 유지하겠습니다.
물론 레드 등급이 옳습니다. 인간에게 적대적인 이상, 인류의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상 반드시 파괴해야만 하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게서 유용성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인간이라는 구성 요소를 부여하고 박탈하는가. 인간의 구성요소는 무엇인가.
그 원리를 이해한다면, 하다못해 그 시험을 우리가 원하는 때 원하는 시험에 나타나게 한다면.
저 원숭이와 까마귀처럼, 짐승을 인간으로 만들어 사용한다면, 진짜 인간의 불필요한 손해를 줄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인류를 보호합니다.
이상을 이용하고 연구하는 것이 장기적인 인류의 생존에 도움이 된다면, 다소의 위험은 감수합니다.
하지만 잠재된 위험성을 마냥 무시할 수도 없지요.
인간자격 연구팀은 이미 있으니, 연구팀을 하나 더 신설해 파괴 대책을 연구토록 하죠.
위험 레벨이 5로 상승하는 날, 레드 등급을 부여하여 파괴하겠습니다.

 

- 오직 둘 뿐인 사무실에 잡무 보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잠시 후 남자가 말했다.
"이상 피해자 후속 대책은 오늘 간다고 했나?"
"해당 지역 민간 대응반에서 출동했대요."
"기억 소거제만 쓰겠네."
"신입이 들어올 수도 있죠. 우리 부서에 오면 좋을 텐데."

여자가 희미한 희망을 품고 밝은 목소리로 말하자,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
이상을 겪은 사람에게 스카우트 제안을 하는 일은 늘 있었지만, 이상에 크게 덴 사람이 인류보호회사에 들어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지옥에서 탈출한 사람이 자기 발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갈 리가 없지 않나.
심지어 거절하면 그 끔찍한 기억까지 제거해 주는데.
하지만 여자는 여전히 희망으로 눈동자를 빛내면서 말했다.
"공무원 시험 망한 사람들이잖아요. 장수생이기라도 하면 일자리가 절실할지도 몰라요."
"... 그런가?"
남자는 언제 비웃었느냐는 듯, 혹한 얼굴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럴듯한데? 안 되겠다. 나 인사 부서 좀 갔다 올게. 신입 들어오면 여기로 먼저 보내달라고 해야겠어."

- 탁!
그사이에 서류를 훑어본 김 박사가 서류 뭉치를 집어던지듯 교단 구석으로 밀었다. 그러고는 보드마커를 쥐었다. 검은색 보드마커가 하얀 칠판 위로 찍찍 그어졌다.
'이상'
"이게 뭔지부터 말하겠습니다."
자기소개로 어수선했던 강의실의 분위기가 변했다. 자세를 바로 한 신입 사원들의 시선이 김 박사의 입으로 모였다. 인간자격시험을 겪은 이연우와 박상준도 그랬다.
보여주기 위한 태도가 아니라, 진심으로 궁금했다.
사람을 짐승으로 만드는 그것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도 없는 그것이 과학적으로도 존재할 수 없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 "어렵지 않습니다. 국어사전에 나오는 뜻과 같아요."
김 박사가 한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꾹꾹 눌렀다. 이어 대본 읽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정상적인 상태와 다름. 지금까지의 경험이나 지식과는 달리 별나거나 색다름, 의심스럽거나 알 수 없는 데가 있음."
인터넷에서 찾은 문장이었는지, 김 박사는 말을 마치자마자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걸로 설명이 끝났다.
김 박사는 보드마커를 다시 움직이며, '이상' 아래로 여섯 글자를 썼다.

- "깊습니다. 벌써 지하 5층까지는 내려왔습니다. 여기는 무슨 시설이길래, 아니, 아래에 무엇이 있길래 엘리베이터도 설치하지 않았습니까?"
"백범문화연구소죠. 문화적인 것이 있고요."
김 박사가 슬리퍼를 찍찍 끌며 계단을 휙휙 내려갔다. 완전히 몸에 익은 계단인 듯, 제대로 보지도 않고 발을 쭉쭉 뻗었다.
이서연이 종종걸음으로 김 박사 옆으로 다가가, 하얀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문화연구소가 도대체 뭔가요? 오기 전에 찾아봤는데, 딱히 나오는 게 없던데요?"

- 복도에 멈춰 선 김 박사는 아직 계단에 있는 신입 사원을 올려다봤다.
"백범 김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죠.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이 문화의 힘이란 것이 뭘까요?"
아이돌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한국 작품이 유행할 때마다 한 번씩은 나오는 말.
강열은 잘 모르겠다는 듯 어색한 표정을 지었고, 이서연은 말 잘 듣는 학생처럼 김 박사의 말을 기다렸다. 한창성과 송시우도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이연우는 시험 문제의 의도를 파악하듯, 김 박사의 말에 담긴 함의를 재빨리 깨달았다.
'문화적인 이상 異常? 그런 걸 연구하는 곳인가? 예를 들면.'

언젠가 보았던 공포 영화가 머릿속을 빠르게 스쳤다.
'보면 자살하는 영화. 사람을 미치게 하는 소설. 그런 게 있다고? 여기에?'

- 김 박사는 신입 사원들을 어딘가로 인도하면서, 열정과 학구열로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문화, 사람을 미치게 하죠. 웃게 하고, 울게 하고, 감동하게 하고, 열정을 불태우게 하고, 죽게 하고."
열의 가득한 목소리가 회색 복도에 울렸다. 낯설었다. 잠깐 봤지만, 이런 성격 같지는 않았다. 신입 사원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몇 걸음 떨어졌다.
혼자 앞선 김 박사는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영화, 노래, 아이돌, 춤, 그림, 조각상, 소설, 시, 문학, 드라마, 뮤지컬. 이 모든 것의 공통점이 뭘까요? 이 문화란 것은 무슨 힘을 지니고 있을까요?"
"관객이나 독자에게 새로운 경험을 하게 만드는 것 말인가요?"
뒤에서 이서연이 조심스럽게 답하자, 김 박사는 돌아보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죠.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러고는 제1실험실의 명패 아래에서 갑자기 몸을 돌려,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신입 사원들을 보았다. 이서연이 움찔 걸음을 멈췄다. 따라오던 신입 사원들도 멈췄다.
조금 거리를 두고, 높다 못해 날카로운 목소리가 쏟아졌다.
"사람을 조종하는 겁니다."

- "위대한 예술 작품을 보면 많은 사람이 비슷한 감정을 품습니다. 왜? 예술이 사람을 그렇게 조종하니까. 사람의 영혼을, 사람의 뇌를, 사람의 신체 반응을 그렇게 조종하니까." 
"그, 슬픈 영화를 보면 울고, 웃긴 영화를 보면 웃는 그런 거 말입니까?"
강열이 힘들게 이해해서 말하자, 김 박사가 히죽 웃었다. 김 박사의 손이 제1실험실의 문손잡이에 올라갔다.
"직접 보면 이해가 될 겁니다."

- <내가 죽어야 하는 37가지 이유>.
사락.
책장이 넘어갔다. 그는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움직이지 않는 목과 눈꺼풀, 시야 중심에 자리한 문장이 눈을 통해 흘러들었다. 책이 사람에게 읽혔다.

- "이 문장이 이상 개체라는 말입니까?"
강열이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질문하자, 김 박사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정보 생명체 같은 거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글이든, 그림이든, 영상이든, 문화적 매체에서 매체로 이동하며 내용을 변질시키죠. 그 특성으로 다른 문화적 재해를 무력화하고요."
"신기하네요."
이서연이 눈을 반짝이며 문장을 몇 번이고 읽었다. 이연우도 닌자가 나오는 괴상한 글을 읽다가 무언가를 문득 떠올렸다.
'인간을 해하는 이상. 인간을 돕는 이상. 그럼, 사람은?'
모든 인간이 회사의 이념에 동의할까? 회사와 반대되는 생각을 가지는 사람이 없을까? 하다못해 이익 관계가 상충하는 사람은?
순간적으로 떠오른 가능성에 닭살이 피부 위로 오돌토돌 올라왔다. 이연우는 흔들리는 눈으로 김 박사를 보고 물었다.
"이 이상이란 것을 다루는 집단이 회사뿐입니까?"
"눈치가 빠르군요. 좋습니다. 아까부터 보았지만, 훌륭해요. 그 눈치와 생존 본능이야말로 사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죠."
"... 있군요."
암시하는 바가 단순했다. 회사가 상대하는 것은 이상만이 아니다.

- 앞으로의 인생을 결정할 갈림길이 이곳에 있었다.
'대의나 신념 같은 건 모르겠어!'
단순하게 위험과 이익만 본다.


- '입사한다면...'
이익은 간단하다. 입사, 취직.

 

- 위험도 간단하다. 이상, 적대 집단.
'입사하지 않는다면...'
생계가 위험하다. 공무원 시험을 다시 치를 준비를 하자니, 회사에 입사한다고 날려먹은 시간이 결코 적지 않다. 벌써 까먹은 내용이 한둘이 아니다. 대신, 이상과 연관되지 않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삶을 살겠지만...
'내가 몰랐을 뿐, 이상 개체나 이상 현상 같은 것의 위험은 항상 있었어. 인간자격시험을 생각해 봐. 차라리 알고 대처하는 편이 옳아. 그리고 산재나 사고 같은 건 굳이 회사가 아니어도 있어왔고.'
이연우가 눈을 떴다.

- 또한, 향후 어떤 일을 할지도 지금 김 박사의 손에서 정해졌다. 
이서연은 행정실, 강열은 보안실.
막힘없이 움직이던 손은 이연우의 평가서 앞에서 우뚝 멈췄다. 백범문화연구소에서 일할 둘과는 다른 신입.
"한국 지사의 이상 조사반에서 데려간다고..."
생존 본능과 눈치가 상당한 것 같더니, 이미 한국 지사에서 뽑아 가기로 했단다. 제법 괜찮은 인재지만, 한국 지사 산하의 분점에 불과한 연구소로서는 방도가 없었다. 연수만 대신해주고, 보내주는 수밖에.
"하긴, 이런 연구소보다는 이상 조사반에 어울리는 사람이었지."
이상의 소행으로 의심되는 사건이 터지면 제일 먼저 투입되는 이상 조사반, 생존 본능이 뛰어난 이연우는 이미 부서에 적응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 "입 다물어! 네놈들은 말할 자격도 없어! 예술도 모르는 놈들이!"
"이곳에는 사람을 죽이는 이상도 많아요! 세상에 공개되어서는 안 되는...”
"이상이 아니다! 세계를 감동시켜, 세계의 사랑을 받는 위대한 예술이야! 그런 걸 네놈들이 상자 속에 처박아둔 거고! 그리고 이제 와서는 내 시나리오에도 손을 댔지! 감히!"
감독의 눈이 번들거렸다. 김 박사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말이 안 통해. 내가 더 할 수 있는 게 없어!'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비상 격리 조치를 실행해 이상을 단단하게 격리했고, 닌자를 불렀다. 연구소에 있는 이상을 탈취당할 일은 없었고, 나아가 닌자가 감독까지 제압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 그렇게 마음 편하게 생각할 때...
감독이 돌연 히죽 웃었다.
"그렇지. 화만 낼 게 아니지. 돌발 상황도 감독의 역량에 달린 법. 좋아, 이렇게 연출하면 재밌겠어."
감독은 몇 마디를 내뱉었다.
"닌자 몰살. 자극적이고, 원초적인 폭력."
"아?"
이해하기도, 말리기도 전에 감독이 빠르게 외쳤다.

- 온 세상이 흐릿했다. 오직 피 웅덩이에 반쯤 잠긴 테이저건, 푸른 번갯불을 튀기는 테이저건만이 시야 가운데에 선명하다.

'푸른 뱀...'
이연우는 두서없이 생각을 떠올리고, 흘려보냈다

'번개 같은 뱀, 뱀 같은 번개, 사람 같은 이상, 이상 같은 사람. 결국은 이상.'
이연우는 여전히 악을 써가며 다투는 두 이상 개체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사람처럼 생겼고 사람처럼 화를 내며 사람처럼 손짓하지만, 저것들은 이상이다.
그것도 이 끔찍한 참사를 일으킨 이상 개체.

 

- '처리해야 해!'
살아남기 위해.
복수를 위해.
나를 위해.
핏물에 손을 적시면서 테이저건을 움켜쥔 이연우는 깨달았다.
'이상한 세상. 안전하고 편안한 생활은 있을 수가 없구나!'


- 비단 회사 생활만이 아니다. 삶 자체가 그러하다. 세상의 그림자에는 이상한 것이 도사리며, 언제든 악의를 표출할 수 있다. 저 이상 개체가 어느 날 밤에 연구소 사람들을 참살하듯 말이다.
'이런 이상한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철컥.
흐느적거리는 손이 정확히 이상 개체명 감독의 뒤통수를 겨눴다. 맞은편에서 삿대질을 하던 레오나르도가 눈을 크게 떴다. 다급히 열리는 입에서 고함이 터졌다.
"아저씨, 피해!"
'나도 이상한 사람이 되어야지!'
 
- 그렇게 이연우는 백범문화연구소를 떠났다. 2층 건물을 나와, 보안 직원이 지키는 정문을 지나, 흙길을 걸어, 중산골 버스정류장까지.

- [에필로그]
털털거리며 힘겹게 멈춰 서는 버스. 이연우는 버스를 타고, 창가 자리에 앉아, 백범문화연구소 방향을 본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 굽이치는 산길을 달리는 버스.
자막: 그리하여 백범문화연구소는 두 예술가를 회수하였으며, 인류보호회사는 대규모 이상 유출로 인한 국가 멸망급 위험을 사전에 방지하였다.
하얀 글씨로 'The End'가 떠오른다.

- CAST
이연우 역 : 이연우
이서연 역: 이서연
강열 역: 강열
김 박사 역 : 김혜지
감독 역 : 밀 메디슨
레오나르도 다 서울역 : 박 레오나르도
닌자 역 : 그런데 갑자기 닌자가!
연구소 직원 1 역 : 김소홍

- "그러면...?"
이연우는 희미한 희망의 줄기를 붙잡고 물었다.
[기억 소거제 재료로 쓸 수 있다더라. 그러니까, 그 이상 건들지 말라고 권고하더라. 씨부랄 놈들. 너희가 확인한 이상이 안개를 유발하는 걸지도 모르니까 보존해야 한다고 아주 지랄을 하는데.]
"아!"
[후우. 연구팀 편성하고 해수 害獸 대응 중대를 파견한다는데, 그건 나중 일이야. 당장 너희 도우러 갈 인력은 없어.]
반장은 인류보호회사를 대표해 위험에 빠진 조사원의 희망을 싹둑 잘랐다. 반장이 낮게 말했다.
[조사원은 자기 목숨 자기가 챙겨야 해. 회사가 그렇게 여유롭지 못해.]
이연우는 무슨 말인지 뼈저리게 이해했다. 자기 살길은 자기가 개척해야 한다.

 

- "... 예. 알겠습니다."
이연우는 그대로 통화를 끊었다. 세 명의 시선이 중간에서 교차했다. 이연우가 말했다.
"구조는 없습니다. 저희끼리 뭐든 해야 합니다. 설령 해서는 안 되는 짓이라도."
최선이 불가능하면 차선을, 그마저도 안 된다면 차악을. 이상에 살해당하는 최악만 피할 수 있다면.
"그렇네요. 물불 가릴 때가 아니죠..."
한숨을 내쉰 유지유가 최재민에게 손을 까딱였다. 최재민이 움찔 물러섰다.

- 담뱃불을 털어낸 유지유가 많이 남은 담배를 이연우가 물병을 던진 자리로 집어던졌다. 비탈길로 던져진 담뱃불.
"아무리 기억을 잃고 괴물이 내몬다고 해도 우리가 불 속으로 가지는 않겠죠. 일단 이 골짜기부터 멀리 피하자고요."
붉은 노을이 지는 하늘 아래, 그들은 산을 불태웠다. 낙엽을, 나뭇가지를, 보고서를 장작 삼아.
활활 불타는 안개 속에서 괴성이 울렸다.

끄에에에엑!

- "불가능하잖아요. 그냥 가세요."
살 수만 있다면, 염치 불구하고 민폐를 끼쳐서라도 들러붙었을 것이다. 목숨을 맞바꿀 수 있다면, 어쩌면 둘을 죽여서라도 살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면, 굳이 여럿이 함께 죽을 이유가 없다.
"안전제일이라면서요. 가세요. 저거 금방 여기까지 올 텐데."

"... 미안해요."
"아저씨."
최재민과 유지유는 입술을 깨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이연우에게 제대로 시선을 주지도 못하고 자리를 떴다. 안개 너머로 사라지는 인영.
홀로 남은 이연우는 잠깐 하늘을 보다가, 이상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 요란하게 다가오기에 접근을 놓칠 수가 없다. 과연 그것들은 머지않아 다가왔다. 시꺼먼 그림자. 사람보다는 크고, 나무보다는 작은 두 개의 그림자.
"끄아아아악!"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며 뛰쳐나오는 괴물의 형상이 느릿하게 다가왔다. 죽음을 앞두고,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 최재민이 구급차에 걸터앉아 다리를 달랑거리며 물었다.
"아저씨, 괜찮아요?"
"괜찮아. 살았잖아."
수혈을 받던 이연우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워서 혈액 팩을 올려다보는 눈은 금방이라도 잠들 듯했다.
유지유도 구급차 벽에 기대앉아 고개를 꾸벅였다. 일이 끝나서 그런지, 피로가 몰려왔다.

 

- 하지만 다음 순간, 그들은 눈을 부릅뜨고 구급차 밖을 보았다.
저벅저벅.
딱 봐도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훈장이 달린 전투복을 입은 중년 남자가 선두였다. 키가 큰 그는 조사원들을 내려다보며, 입가를 비틀었다.
"이 또라이 새끼들. 산에 불을 지르질 않나, 중요한 이상 개체를 파괴하지를 않나. 아주 자기들 살겠다고 지랄을 한다. 지랄을 해."
곱지 않은 말. 이연우의 피곤한 머리는 그 말을 뒤늦게 이해했다.

- "그럼 저희 보고 죽으라는 거예요?"
최재민이 바락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중년 남자를 똑바로 노려봤다. 죽을 위기를 방금 넘긴 사람한테 이만한 악담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중년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죽어야지. 응? 얌전히 죽었어야지. 너희가 죽인 이상개체가 열 명, 100명의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거면 몰라. 그런데 만 명, 10만 명을 살릴 수 있는 이상 개체네? 그런데 그 서식지에 불을 지르고, 심지어 하나는 파괴를 해?"
중년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와, 최재민을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최재민이 주춤 물러서기 무섭게, 남자는 양손을 뻗어 최재민의 멱살을 잡고 끌어당겼다.
"애새끼야. 네가 아까 말했지. 이거 암컷이랑 수컷이 있고, 새끼 까는 개체라고. 이것들만 번식시키면 기억 소거제가 충분하게 공급되는데, 그걸로 살릴 수 있는 사람과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얼마나 많은데, 이래도 너희 목숨 하나가 더 중요해?"
어두운 밤. 자동차의 라이트를 받아 빛나는 눈이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당장 주먹을 휘둘러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

 

- "앞으로도 실습 나갈 텐데, 내가 성인 될 때까지 살아 있을지 어떻게 알아? 운 안 좋으면 바로 다음 실습 때 죽을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살아 있는 동안 해보고 싶은 거 다 해봐야지."
끼릭.
반장이 말없이 소주 뚜껑을 돌려 열었다. 소주병이 최재민을 향했다.
"됐다. 마시게 둬라. 어른 앞에서 마시는 건 괜찮아. 이 기회에 주도 배우는 것도 괜찮고."
"예! 감사합니다!"
최재민이 두 손을 공손히 들어, 잔을 받았다. 텔레비전에서 본 걸 따라 하는지, 과하게 공손한 자세였다. 그리고 찰랑찰랑 잔을 채우는 소주.
유지유는 떨떠름하게 보다가, 병이 자신에게 오자 집게를 내려놓고 잔을 받았다. 이연우도 마찬가지였다. 멀쩡한 손으로 공손히 내민 이연우의 잔 앞에서, 반장이 잠깐 멈칫했다.
"너는 지금 술 마셔도 되나?"
깁스를 보는 눈, 이연우는 끄덕였다.
"몇 잔 정도는 괜찮겠죠. 오히려 마시면 낫지 않을까요?"
"으하하! 그렇지! 뭘 아는구먼!"
그러는 동안 고기가 완벽하게 익었다. 유지유가 가위로 싹둑싹둑 고기를 잘랐다. 한입에 먹기 딱 좋은 크기로.

"건배!"

- "맛있게 드셨습니까?"
"고깃집인데 고기가 맛이 없으면 안 되지."
"하하. 고기 맛은 문제가 없다는 거죠?"
"왜, 장사가 잘 안 되나?"
결제가 끝났다. 사장은 카드를 돌려주었고, 반장은 카드와 영수증을 함께 지갑에 집어넣으며 슬쩍 물었다.
"단골손님 몇 분 빼면 손님이 안 와서요. 오시던 단골손님도 점점 줄어들어서 이러다 장사 망하면 어떻게 먹고사나 걱정이고."
걱정이 잔뜩 섞인 대답.
반장은 묵묵히 듣다가 한 번 웃고는 핀잔 섞인 잔소리를 돌려줬다.
"먹고사는 걱정이구먼. 이 사람아, 복 받았으니까 그런 걱정이라도 하는 거야!"
"하하. 그런가요? 하긴 안사람도 무슨 걱정을 사서 하냐고 하던데."
사장은 웃었다. 반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활짝 열린 문으로 나섰다. 뒤에서 인사 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히 가십쇼!"


- 반짝이는 간판을 피해, 어둑한 흡연 구역으로 간 반장은 품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칙칙 부싯돌 부딪치는 소리.
피어오른 불꽃과 함께 반장의 머릿속에서 한때 같은 조사원이었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나 더는 못 하겠다. 매일매일이 지옥이야. 업무만 문제가 아니야!'
'오늘은 문제없이 살아남을까, 미친놈들이 공격해 오지 않을까, 내가 사는 도시가 파괴되지는 않을까. 내일 갑자기 지구가 멸망하지는 않을까. 이딴 걱정만 하면서 사는 게 어떻게 사람 사는 삶이냐!'
'나도 이제 평범한 사람들처럼 먹고사는 걱정만 하면서 살고 싶어!'

 

- 반장과 함께 조사원으로 10년을 버텼던 동료는 그렇게 기억 소거제를 마시고 이상하지 않은, 평범한 세계로 갔다.
10년 동안의 기억을 잃은 조사원은 고깃집 사장이 되었고, 인생의 반려를 만나 결혼까지 하며 그가 원하던 것처럼 먹고사는 걱정을 하는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 
담배를 깊이 빨았다. 반장이 한숨처럼 뱉은 욕은 연기와 함께 하늘로 흘렀다.
"새끼..."
그렇게 추억을 곱씹던 반장은 돌연 피식 웃었다. 저 앞에 난동을 피우는 조사원들이 있었으니까.
"흐어엉! 내가 내가 두고 가서 미아내..."

"팔! 팔! 팔! 악!"

- [교배에도 성공하여 새끼가 출생하였습니다.
하지만 멸종의 대변인이 의심스러운 점을 발견하여, 그 점을 함께 보고하겠습니다. 이하 내용은 멸종의 대변인의 의견인 점을 감안하여 읽어주시길.
인간 여럿에게 기억 소거제를 임상 실험한 날짜와 새끼가 탄생한 날짜가 같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의 식생활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해당 이상 개체는 동물의 내장을 먹으나, 활동에 필요한 열량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양을 먹기 때문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
이것의 필수영양소는 사람의 기억이다.
안개는 입이며, 입으로 기억을 섭취하여 생명 유지와 번식에 사용한다. 즉, 우리가 안개를 기억 소거제로 정제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이들의 번식을 돕는 것이며, 안개를 정제한 기억 소거제를 많이 사용할수록 이들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안개 속의 괴물의 적대 수준을 오렌지로 격상할 것을 제안한다. 이것의 숫자가 손쓸 수 없이 폭증하기 전에 우리의 손으로 실수를 반복하기 전에.]

- [안개 속의 괴물 적대 등급 격상에 관하여]
멸종의 대변인 의견을 주의 깊게 검토한 결과, 관리 불가능한 위험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현재 수준을 유지하겠습니다.

- 그들은 안이했다.
테러리스트의 생각을, 세상을 멸망시키겠다는 광인의 생각을 평범한 사람의 그것으로 예단했다.
빼앗지 못한다면 얌전히 돌아갈 것이라고. 

 

- "저거 안 쫓아가?"
"..."
탈취자는 트럭 옆에 서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정장 입은 남자를 보았다.
그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그들이 나타나자마자 도망치는 남자. 그는 나 도망치고 있다는 태도를 과장되게 보이면서 인도를 열심히 달렸다.
탈취자는 속지 않았다.
"미끼다."
"저게?"
"NPC가 없어. 쫓아갈 필요 없어."
끼인 남자도 없이 혼자 도망치는 꼴이, 딱 봐도 미끼다. 진짜는 근처에 숨겨뒀거나 도망을 쳤겠지.

- 운전자의 웃음소리를 배경으로 탈취자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에서는 두 개의 시계가 돌아가고 있었다.
탈취자 전담 부대가 이곳에 오기까지 걸리는 시간. 얼마 안 남았다.
그리고 이송 트럭을 막았을 때부터의 시간.
결정을 내렸다. 탈취자가 눈을 떴다.

 

- "찾을 거야? 차 근처에는 없던데?"
"아니. 찾을 시간은 없어."
레드 등급의 의미가 전담 부대의 의미가 그랬다. 오직 파괴와 살해가 최우선. 그것을 위해 오직 해당 개체와 수배자만을 대응하는 무장, 훈련된 인원.
탈취자의 전담 부대는 전 지구를 무대로 활동하는 탈취자를 쫓기 위해 비행기보다 빠르게 이동했다.
그의 출현이 보고되었으니, 곧 찾아올 터.

 

- "뭐야, 그럼 이대로 돌아가?"
"아니. 세 번째가 있다."
탈취자는 장난감 총을 들어 올렸다.
빼앗지도, 죽이지도 못했을 때의 목표.
실험. 다른 말로 테러.

- 탈취자는 장난감 총의 옆에 붙은 회전판을 돌렸다. 미리 열어둔 구멍과 연결되도록 지정된 번호가 열두 개.
찰칵, 찰칵, 찰칵.
1번, 2번, 3번.
세 개의 푸른 구멍이 뚫렸고, 각 구멍에서 하나씩 NPC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오류가 현실을 침식했다.
깨진 여자와 반복하는 남자가 접촉했다. 주변의 도로가 고장난 그래픽처럼 깨졌다.
깨진 보도블록을 떨어지는 남자가 관통했다. 멀리 있는 사물이 무중력 공간에 던져진 것처럼 떠올랐다.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는 오류가 지면 아래로, 끼인 남자가 있는 장소까지 나아갔다.

- "하긴, 이런 걸 겪으면 그렇겠죠. 다른 사람들도요. 우리야 죽어도 살아난다지만, 다른 사람들은 안 그렇잖아요."
"그, 그렇죠. 죽으면 끝이니까."
대화하는 동안 이연우는 나이프로 가는 눈길을 가까스로 멈춰 세웠다. 너를 죽이려고 한다는 뜻을 내비칠 수는 없으니까. 
'어떻게 빼앗지? 어떻게 해야... 죽일 수 있지?'
이연우가 그런 생각에 골몰하는 동안, 끼인 남자는 넋두리처럼 말을 뱉었다.
"사실 저도 이런 제가 싫어요. 왜 세상을 망가뜨리게 만들어진 걸까요? 회사에서 저희를 핵폭탄처럼 가둬두는 것도 이해해요. 그런데 말이에요."
끼인 남자가 나이프를 고쳐 잡았다. 핸드폰이 위로 돌아가며 끼인 남자가 어둠에 잠겼다.
"그렇다고 저희를 함부로 막 대하면 안 되잖아요? 밥도 안 주고, 이상한 실험만 하고, 나도 사람인데. 그러니까..."
핸드폰이 반 바퀴 돌아, 하얀 조명이 다시 끼인 남자를 비추었다.
"이름도 모르는 회사 직원님. 살아남아서 증언해 주세요. 끼인 남자가 사람을 위해 희생했다고. 그러니까 다음에 만나면 사람으로 대해달라고요."

- 푹!
나이프가 끼인 남자의 목을 찔렀다. 그의 동공이 탁하게 풀렸다.
다음 순간, 핸드폰이 한 바퀴 돌았고, 한차례 어두워졌다가 밝아진 사다리는 텅 비어 있었다. 그저 뎅그렁 떨어진 나이프의 소리만 메아리쳤다.
이연우는 말을 잃고, 석상처럼 우두커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끼인 남자가 있던 자리를.
'이게 저 사람한테도 이득이야. 어차피 죽어도 다시 살아나. 한 번 죽어서 회사에 처우 개선을 요구...'
아무리 그래도 죽는 게 안 무서울까. 목을 칼로 쑤시는데, 아프지 않을 리가 없지 않나.
'나였다면 안 그랬어. 오류가 번지든 말든 나는 안 죽으니까. 사서 아플 이유가 없어!'
사다리를 붙잡은 이연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연우는 저도 모르게 위를 보았다. 다른 NPC가 오류를 품은 사람이 있을 지상을.
... 한 명 없어진 걸로는 부족해. 더 줄여야 해. 내가 살려면. 이게 맞아!
지금도 허공을 부유하는 핸드폰이 증거였다. 아직 오류의 범위였다. 이연우는 혼자 중얼거리며, 사다리를 타고 올랐다. 척, 척, 척.
이연우는 사다리 끝에 도달해, 맨홀 뚜껑을 이마로 밀었다.

- 난장판이었다.
물리 엔진이 고장 난 게임이었다.
지면에 발을 디딘 이연우의 첫 느낌은 그랬다. 꼭 망겜에 들어온 느낌.
자동차가 붕붕 날아다녔다. 때로는 순간 이동하듯 차가 있던 위치가 순식간에 변했고, 고속으로 위이잉 돌기도 했다. 그러다가 건물이나 사람한테 부딪혀 사고가 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또한, 곳곳에 보이는 것들은 깨진 그래픽처럼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거기에 그림자 없이 움직이는 것들까지. 

 

- '목소리.'
물리법칙이 고장 난 세상에서도 목소리는 문제없이 서로에게 전달된다. 이연우는 눈을 딱 감고, 숨을 들이마셨다.
'오류 NPC 처리. 그들이 스스로 끼인 남자처럼 행동하게 만들면 돼!'
이연우는 그들을 설득하기로 했다. 

 

- '그런데... 어떻게 설득하지? 뭐라고 말해야 하지?'
자신감 있게 숨을 잔뜩 들이마신 것이 무색하게, 이연우는 좀처럼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입은 꾹 다물어졌고, 입 안에서 온갖 말이 맴돌다가 사라졌다. 
'죽어달라고? 세상을 위해 희생해 달라고? 리스폰되는데 뭐가 문제냐고? 나 같아도 안 할 거 같은데!'

애초에 말을 그렇게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평범한 인사레나 사무적인 대화면 몰라도, 상대를 설득할 언변은 없었다. 있었더라도 공시생으로 살며 다 사라졌다.

- "다 죽어버려! 회사는 더 죽어버려! 너도!"
깨진 여자가 촉수처럼 늘어난 팔을 휘둘러 주변을 떠도는 자동차를 후려쳤다. 얻어맞은 풍선처럼, 자동차는 둥둥 날아오다가 멈춰서는 하늘로 올라갔다.
"죽어! 죽어!"
깨진 여자가 씩씩대며 몇 번 더 자동차와 가로수를 때렸지만, 그것들은 이연우에게까지 닿지는 않았다.
이연우는 제자리에서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처우, 개선하고 싶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지금 이상 사태를 막기 위해 희생한다면, 제가 회사에 보고하고 증언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처우를 개선해 달라고 위에..."
"네가 뭔데?"
떨어지는 남자가 짧게 묻고는 지면 아래로 사라졌다.
이연우는 고개를 숙였다. 떨어지는 남자가 사라진 지면을 내려다봤다. 조사원이라고 답하지 못했다. 조사원이 건의를 해봐야 회사가 듣는 척이라도 할까. 스스로도 믿지 못할 말이라 속으로만 웅얼거릴 뿐.
반복하는 남자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나도 딱히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아. 그런데 내가 아프게 죽고 싶지도 않아."

- [존경하는 스승님께
교수님,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위험 레벨 4의 이상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멸망주의자의 테러로 인해 오류 NPC가 넷 모였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인구가 적은 도시에서, 짧은 시간 동안 발생하였기에 심각한 피해는 없었지만, 저는 두렵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현실이 맞을까요? 고등한 시뮬레이션이 아닐까요? 우리는 실제로 존재하는 걸까요? 시뮬레이션의 일부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요?
애초에, 우주의 법칙에 어긋나는 이상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 세상이 거짓되었다는 증거 아닐까요?
이상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로, NPC로 인해 오류가 범람한 도시를 본 이후로, 저는 두려움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 온몸의 수분을 쏟아내듯, 온몸에 식은땀을 흘리면서.
박사가 입을 열었다. 말이 되지 못하는 신음만 흘리다가,
간신히 돌처럼 굳어버린 혀를 움직여 말을 했다.
"그... 건, 그건... 우리가 액자 속의 인물이라는...?"
"그렇게 충격받지 말아요."
"어떻게. 어떻게. 그러면. 그러면."
말을 잇지 못했다. 풀린 동공이 허공 어딘가를 보았고,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다가 벽을 짚고 몸을 숙였다.
교수가 천천히 다가와 박사의 등을 토닥였다.
"생각하고 걱정하는 바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실존하고, 우리의 세상도 실재하죠."

- "우리 세상이 액자 속에 존재한다고, 우리의 가치가, 우리의 존재가 의미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내 인생이 누군가 쓴 글줄에 불과하다면! 거기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우주를 떠올려보세요."
뜬금없는 말.

- "우리는 소설 바깥으로 나갔었으니까요."

"그게 무슨... 증명, 증명해 주십시오. 저는 아직 믿을 수가 없습니다."
박사가 우왕좌왕했다. 바깥세상과 상호 작용할 수 없다면, 그의 인생은... 이런 현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교수가 박사를 지나치며, 사실을 나열하듯 객관적으로 말했다.
"안타깝게도, 박사는 액자 속 세상에서만 살아야겠습니다. 바깥으로 나갈 수 없어요."
"거짓말,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회사의 기술이 이 정도밖에 안 될 리가..."

교수를 쫓아 몸을 돌린 박사가 말을 멈췄다.
그곳에는 거대한 기계 인형이 있었다. 작은 집만 한, 상반신 뿐인 기계 인형.
타닥타닥.
트럭 크기의 키보드를 두들기는 기계 인형.

 

 

- "멸종 방어 장치 중 하나. 바깥세상과 상호 작용하기 위해 만들어낸 메타적 서술 기계. 우리는 '작가'라고 불렀죠."
교수의 눈과 목소리에 열기가 머물렀다. 박사는 넋을 잃고 보고 들었다.
"설령 우리 세상이 진짜 소설이라 하더라도, 뭐 어떻습니까? 펜대를 쥔 건 우린데. 키보드를 치는 것이 우리라면, 우리의 삶도 충분히 의미 있지 않겠습니까?"

- 박사는 압도되어, '작가'의 손가락이 키보드를 연달아 치는 광경을 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치솟는 생각.
'저것이 우리 세상을 액자 속 세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저것이 내 인생을 마음대로 적는 것이다. 저 작가만 파괴하면, 나도 액자 속 등장인물이 아니게 된다.' 
 
- 주먹은 허무하게 키보드를 관통했다. 꼭 홀로그램을 때린 것처럼.
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말했지 않습니까, 박사, 당신은 바깥세상과 상호 작용할 적성이 없다고. 당연히 작가와 상호 작용할 수도 없죠."

- 까무룩 정신을 잃은 박사가 키보드 앞에 쓰러졌다. 영혼이 빠져나간 듯 초췌한 얼굴. 핏줄이 터진 눈가에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교수는 박사를 내려다보았다. 박사의 얼굴 위로, 언젠가의 동료들이 겹쳐서 보였다.
메타문학연구학회의 말로는 좋지 않았다.
그들의 연구는 그들의 세상이 액자 안의 세상임을 끝내 증명하고야 말았다.
그날, 천둥 번개가 치던 날, 지혜의 번개가 사람의 영혼을 내리치던 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 "아, 시작됐군요"
액자 바깥세상에서 지속 가능한 동력을 얻기 위한 절차가 진행되고 있었다.
[메타 관측자 확보 중...]
[메타 동력 후원자: 노벨피아, 시공사]
[플러스 전환 진행 중]
[연재 주기 및 시간: 토, 일, 월, 화, 수 00시 05분]
'작가'가 써나가는 글귀를 보며, 교수가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그녀는 염원했다.
'부디, 액자 바깥의 존재들이 우리 세상의 이야기를 좋아하길!'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의 이야기를 오래도록 써나갈 수 있길.

- 이연우가 몸을 앞으로 숙이며 핸드폰에 두 눈을 고정했다. 자그마한 화면 안에서는 기자가 말을 하고 있었는데, 그 장소는 얼마 전 이연우가 있던 오류의 중심지였다.
기자가 손으로 난장판이 된 거리를 가리키며 걸었고, 카메라는 거리를 넓게 잡았다.
[저는 지금 청해시에서 일어난 연쇄 폭발 사고 현장에 나와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현장입니다]
"아니, 이게 뉴스가..." 
심지어 공중파다. 회사에서 알아서 막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뉴스에까지 나오다니.
핸드폰에 고개를 처박았던 이연우가 당황하여 유지유를 보았지만, 유지유는 계속 보라고 턱짓을 할 뿐이었다.
[유조차 다섯 대가 연쇄 추돌로 동시에 폭발하며, 가스 배관까지 건드려 대규모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한편, 사고의 원인은 촉법소년의 무면허 운전과 흡연으로 밝혀져...]
이연우가 입을 쩍 벌렸다. 눈까지 크게 떴다. 도무지 믿을수가 없었다.
유조차, 그럴 수 있다. 가스 폭발도 그럴 수 있다. 촉법소년도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이걸 전부 섞는다고?
"이걸 사람들이 믿습니까? 이건 너무 말이 안 되잖아요."
"대부분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죠. 못 믿는 사람이야 있겠지만, 그래도 큰 문제는 없어요."

- 아무 변화도 없었다. 이연우는 다시 생각했다.
'다시, 핸드폰.'
데구르르.
성공!
자연스럽게 핸드폰이 보였다. 

 

- 이연우는 핸드폰을 꺼내며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주사위. 나쁘지는 않은데!'
몇 번 실험해 본 결과, 나름대로 쓸모가 있었다.
대부분은 꽝, 가끔 성공과 실패.
양날의 검이지만, 소소하게 쓴다면 유용했다. 이를테면 잃어버린 물건을 찾을 때나 까먹은 비밀번호를 떠올릴 때.
'대성공과 대실패는 아직 겪어본 적이 없지만, 거의 안 나오니까 막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 "야! 내가 전에도 말해줬잖아! 아직도 안 들었어?"
"아니, 이름이 기억이 안 나서... 뭐였지?"
"레고맛 아이스크림. 노래가 엄청 엄청..."
백아윤은 좋아하는 밴드 이름을 말하며, 눈을 반짝거렸다. 목소리와 몸짓에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최재민은 멍하니 백아윤을 보다가,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아윤이가 맞아. 나태의 악마가 아무리 똑같이 행동한다지만, 이런 감정까지 따라 할 수 있을 리가 없어!'

- "잠깐만. 나 가방 가져올게."
반장과 이연우는 차에서 기다리다가 최재민이 백아윤을현관에 두고 혼자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 얼굴에 뻔히 드러나는 감정.
반장이 혀를 찼다.
"저저, 답답해 뒤지겠네. 내가 확인도 안 하고 죽이기부터 할까 봐 저러나?"
'글쎄, 두 명 다 따로 생각하는 게 있는데, 말을 안 해서 그런 거 같은데!'
이연우가 따로 대답하지 않고 속으로만 생각하는 동안, 반장이 뭐라 더 말하려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신입아, 그거... 소주병이랑 드릴이나 이리 줘봐라."

- "이건 뭡니까?"
"특정 이상 개체가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액체형 이상개체. 줄여서 성수."
"성수요?"
"옛날에 내가 구마 사제한테 뜯어 온 건데... 이럴 때가 아니지. 신입아, 너도 따라 나와. 재민이가 허튼짓하면 말리고."

 

- 백아윤이 몸을 살짝 움츠렸다. 한 손에는 소주병, 한 손에는 전동 드릴을 든 남자. 백아윤에게서 겁먹은 목소리가 나왔다.

"누구세요?"
반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소주병을 백아윤의 머리 위에서 기울여 성수를 그대로 쏟았다.

- "그 친구 가정 사정이나, 뭐 문젯거리 알고 있냐? 학업 스트레스가 심하다거나."
보통, 나태의 악마를 소환하는 법은 문자로 오는데 그 내용이 평범한 사람은 코웃음 치며 무시할 만큼 허황된 것이다.
그런 걸 눌러보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극한까지 몰린 사람인 편이다.
그러니까 백아윤이라는 친구도 어딘가 고통을 품고 있는지 묻는 것이었다.
"그게요..."
최재민은 좀처럼 답하지 못했다. 머릿속에서는 대답이 주르륵 떠올랐으나, 의심에 휩싸여 가라앉고 말았다.
 
- "핸드폰 줘봐. 악마 소환법 온 거 띄워서."
“네... 문자로 왔는데... 잠깐만요."
백아윤은 얼른 레고 아이스크림을 에코백에 집어넣고, 핸드폰을 꺼내 두드렸다. 잠시 후, 백아윤이 반장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최재민과 이연우도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반장의 좌우에서 조그만 핸드폰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곳에는 장문의 문자가 있었다.
[학교가 싫으신가요? 누군가 내 숙제를 대신했으면 좋겠나요? 학교를 당신 대신 나가고, 부모님에게 잔소리를 당신 대신 들었으면 좋겠나요?
아니면 출근하기 싫으신가요? 누군가 당신을 대신해 일을 하고, 당신 대신 상사에게 혼나며, 당신 대신 돈을 벌어주었으면 좋겠나요?
그런 당신을 위한 악마 소환 시스템!
당신을 대신해, 당신의 싫은 순간을 대신해 주는 도플갱어를 소환하는 법!]

- 남자를 보았다. 여전히 핸드폰을 보며 낄낄 웃는 남자의 머리 위는 공란, 비었다.
최재민이 작게 중얼거렸다.
"저, 군복 상의 입은 거 이상이에요. 부모가 없어요."
"악마겠지. 무슨 악마인지가 문제인데."
반장은 한 손에 든 성수와 드릴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나태의 악마는 이미 특성을 알고 있었다. 그에 맞춰 최소한의 무장만 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 개체를 상대하기에는...

- 악마라 불린 남자가 핸드폰을 보며 건성건성 대답했다.

"악마에게 명령하려면 뭘 해야 한다? 진짜 이름부터 외쳐야 한다."
"아, 진짜... 이름에 별 의미도 없으면서..."
이름.
그 이름을 알면 어떤 악마인지, 어떤 특성을 지녔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짐작하면 수월하게 대응할 수 있다. 반장과 이연우가 한마디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쫑긋 세웠다.
 
- 이 팀장의 하소연이 이어졌다.
"다소 노출돼도 상관없으니까 회사 자원 최대한 아끼라는데, 뭐 어째. 그 뭐야, 얼마 전에 항구였나? 그 정도 수준 아니면 다 대충대충이야."
"윗대가리들이 미쳤나."
반장은 라이터의 불을 담배에 대다 말고, 욕부터 뱉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갔으니까.
이런 노출이 하나둘 쌓이면 이상이 일상이 된다. 일상이 된 이상은 회사도 막을 방도가 없다. 이러다가 이상이 전면적으로 공개되는 사태라도 터지면...
이 팀장은 담배를 털며, 흩날리는 담뱃재를 보았다.
"모르겠다, 나도. 윗대가리들이 정신을 어디에다가 팔아먹었는지. 나 때는 말이야, 이러지 않았어." 

- "있던 복지도 줄이고, 사람은 줄어드는데 뽑지는 않고, 이제는 은폐 작업도 가라 치라하고, 딴 놈들 말 들어보면 지원도 개판으로 한다던데, 이 새끼들은 도대체 뭔 생각을..."
"어이, 담배."
"어? 앗 뜨거워!"
필터까지 기어오른 불씨가 손가락에 닿았다. 이 팀장은 화들짝 놀라 담배꽁초를 던졌다. 바닥을 구르는 담배꽁초.
이 팀장은 맥이 풀린 듯, 꽁초를 밟아 끄며 말을 마무리했다.

"하여튼, 슬슬 퇴직할 때가 온 건가 싶다."
"그만두면 뭐 해서 먹고살게?"
반장이 이제야 담배에 불을 붙이며 묻자, 이 팀장은 고개를 저었다.
"모을 만큼 모았다. 남은 인생 즐기다 가면 되지 않겠냐. 홍 반장. 너도 그만둬."
"지랄."
"몸 상해가면서 일해서 뭐가 남냐. 열정만으로 움직이기에 ..."

- 가슴에 돌을 얹은 것처럼 무거웠다. 아래 직원을 의심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불편했다.
하지만...
'이쯤이면 의심을 안 하는 게 이상하지...'

반장이 본 이력서, 직접 보고 들은 사건.
인간자격시험은 넘어가더라도, 연수 중에 격리 실패가 일어났고, 적대 집단이 습격해 왔다. 첫 출근에서는 이상을 발견했고, 차출되어 나간 현장에서는 멸망주의자의 습격을 받아 오류가 확산되기까지 했다.
'오늘은 악마숭배자와 대악마가 오기까지 했고.'
우연이 연속되면 이상이다.
반장은 조사원으로서 이연우를 의심했다.
그리고 의심은 빠르게 풀어야 하는 법.

- "신입아. 너 한번 검사받아보자."
"예?"
"너 무당 찾았었지 않냐. 오늘 악마 숭배자까지 마주친 걸 보니까, 조금 이상하긴 하다. 회사에서 정밀 검사 한번 받자!"

- [위상학 개론]
우리가 사는 우주만이 차원의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는 인접한 다른 차원이 존재합니다.
(대충 다양한 차원을 묘사하는 그림)
악마로 분류된 이상 개체가 살아가는 지옥을 대표로, 저승의 존재와 알 수 없는 존재가 살고 알 수 없는 특성을 지닌 무수한 이차원들.
이러한 차원은 일반적으로 평행선처럼 우리의 세상과 조금의 연관도 없지만, 마법이라 불리는 특정한 상호작용법으로, 평행 차원에서 드리우는 그림자와 빛의 형태로, 또는 천문학적인 우연의 일치로 우리 세상과 교차하기도 합니다.
(세 개의 그림. 왼쪽부터 죽은 자와 대화하는 마법사, 고깃덩이로 변하는 농민, 요정의 세상에 떨어진 여행자가 있다)
그리고 차원이 교차할 때면, 교차점의 운이 없는 사람은 이차원의 존재와 소통하거나, 이차원의 존재로 변화하거나, 때로는 아예 이차원으로 떠나기도 합니다.
이러한 차원에 관한 학문이 위상학이며...

- 단언컨대, 이연우는 사태가 이 지경이 되기를 바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회사의 검사를 피하기를 바랐을 뿐이다.
거대한 세상, 풀잎이 가로수만큼 길게 자란 세상의 들판.
"미친 주사위 새끼야..."
쥐처럼 작은 이연우는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부여잡으며, 조금 전의 과거를 떠올렸다.

 

- 이사는 금방 끝났다. 옮길 짐은 애초에 거의 없었다. 높게 쌓인 공무원 시험 교재는 버린 지 오래고, 개인 물품이랄 것도 딱히 없었으니까. 이연우의 차로 한 번에 옮길 수 있는 양.
짧은 시간에 끝난 이사, 햇볕이 잘 드는 복층 원룸.
휑하니 비었지만, 번 돈으로 사서 채우면 됐다. 공시생 탈출의 확실한 증거. 얼마나 보람차고 재밌을까.
하지만 원룸 가운데에 서 있는 이연우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오히려 우중충했다. 회사에 정밀 검사를 받으러 갈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 "없어요. 혹시 그러면 가격이 많이 떨어..."
돈이 오가는 대화가 이어졌다.
판매자는 이왕이면 품종서 있는 인간을 사서 번식시키라고, 새끼를 낳으면 자신이 혈통서를 써주겠다고, 최대한 많이 팔기 위한 말을 했다.
아빠 거인과 엄마 거인은 판매자의 말을 귀담아들으면서도, 적은 투자로 적당한 돈을 회수할 방법을 찾아 말했다.
신경이 곤두선 이연우가 그들의 대화를 조금도 놓치지 않고 주워들을 때였다.

- 기분이나 느낌이 썩 좋지 않았다. 중성화 같은 소리를 들어서 더.
"... 탈출할 생각은 없습니까?"
"돌아갈 길을 찾거나, 회사에서 연락하기 전까지는 없다. 그보다 너도 회사의 조사원이라고 했다. 맞나?"
일전에 자기소개를 하면서 밝힌 신분. 이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 지사에서 일하는 조사원입니다."
"잘됐다. 혹시 돌아가거나, 회사와 연락이 닿으면 ..."

- 철조망 문이 닫혔다. 거인이 계단을 내려가는 소음과 진동이 멀어졌다. 적막이 내려앉은 방.
이연우는 한숨을 돌리고 주변 눈치를 살피다가, 우리 밖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넓은 방. 높은 벽 위로 창문이 달려 있었다. 이연우는 방에 널린 무수한 미니어처, 인간용 가구와 장난감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때,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진짜 사 왔네 미친놈들. 새끼 낳으라고 하면 누가 낳아준대?"
이연우가 몸을 돌렸다. 어디에 숨어 있던 건지, 금발에 인종을 특정하기 힘든 이국적인 외모를 지닌 여자가 건들건들 걸어 나왔다.

- 낯선 세상에서 만난 낯선 인간.
무턱대고 친해지거나 편을 들 생각은 없었다. 같은 회사원이면 모르겠지만, 서로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 아닌가.
물론 쓸데없이 적대할 생각도 없었지만, 있는 듯 없는 듯 서로 무시하는 관계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그래? 잘됐네. 그럼 도와."
찰랑찰랑 차오른 양동이를 끌어안은 여자가 이연우를 지나치다가, 딸 거인이 내동댕이친 열쇠를 발끝으로 툭 찼다.
"탈출할 거니까."

- 물방울이 이슬처럼 철조망에 맺혔다. 벌겋게 녹슨 철조망. 많이 삭았다. 쉽게 끊을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열쇠의 울퉁불퉁한 부분으로도 끊어낼 수 있을 만큼.
이연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탈출? 굳이?'
몸 멀쩡하게 버티다가, 주사위에 대성공이 뜨는 날이 오면 귀환하면 됐다.
물론 아이 거인의 거친 손짓은 위험하겠지만, 바깥이 더 위험할 것 같았다.
굳이 위험한 세상으로, 저택이라는 안전한 공간을 벗어나 온갖 벌레와 짐승과 미지의 위험이 가득한 거대한 세상으로 나아갈 이유가 없었다. 괜히 다치거나 죽기라도 하면...
이연우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 "야. 왜 대답을..."
물을 뿌리다 말고 고개를 돌린 여자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그녀는 이연우를 노려보며 작게 뇌까렸다.
"너, 탈출할 생각이 없구나." 

 


 

 

- 깨끗한 의자를 찾아 앉은 이연우를, 여자는 황당한 눈으로 보았다.
"그거 내 의자인데?"
이연우는 못 들은 척했다. 도리어 의자를 당겨 네모난 철제책상에 몸을 적당히 붙인 뒤, 두 손을 편하게 책상에 올려놨다. 여자가 사제 권총을 꺼내 까딱였다.
"총 안 보여?"
"이미 내 정보 보지 않았습니까."
이연우는 낡은 철제 책상에 널려 있는 서류들을 쓱 훑었다. 수많은 정보가 적힌 서류 더미. 제일 위에는 이연우의 이력서와 보고서가 있었다. 저들이 방금까지 읽었을 것이다.
"총 무서워하면 경력이 아깝지 않겠습니까."
대화를 요청하였으니, 죽이지는 않겠다는 생각일 것 같았다. 물론, 그래도 총은 총이라 말을 놓지는 못했다.

- "그렇죠. 사람들이 총은 안 무서워하더라고. 총보다 무서운 걸 자주 봐서 그런가. 그런데 이연우 씨. 그 동화 알아요?" 
"무슨 동화 말입니까?"
이연우는 반쯤 흘려들었다. 그의 시선이 유치장을 향했다. 그곳에는 이서연과 누군지 모를 남자가 죽은 사람처럼 자고 있었다. 가슴이 오르내리고, 핏자국이 보이지 않고, 피 냄새가 느껴지지 않는 걸 보아 생명에 위험은 없어 보였다.
그리고 계단을 보는 순간.
남자가 총구로 철제 책상을 탕탕 두드렸다.
"채찍과 당근이었나? 그 동화 뭐였지. 태양 나오고 폭풍 나오고."
"병신아. 북풍과 태양."
"비슷하잖아. 좋은 게 좋다고. 하여튼, 총 따위는 개무시해도 이건 무시를 못 하더라고."
남자가 총을 내려놓고, 품에서 황금을 꺼냈다. 백열등 아래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금괴.
주변을 탐색하던 이연우의 시선이 금괴로 빨려 들어갔다. 

"... 이건 뭡니까?"
"선물을 줄 테니, 우리를 위해 조금의 정성을 보여라. 어때요? 아, 뭐... 당신한테 큰 거 안 원해요."

- "그래서 뭐, 조사받다가 제압했고, 도망치기 전에 직원 하나 포섭하는 중이고."
남자가 몸을 숙여 이연우와 시선을 마주했다. 안경 너머로 웃는 눈이 보였다.
"이해하죠? 회사에서 주는 돈이 적지는 않지만, 우리가 고생한 만큼 받지는 않잖아요? 그리고..."
남자가 의자에 등을 느긋하게 기댔다.
"우리가 뭐 멸망주의자도 아니고, 악마 숭배자도 아니고, 인류에 해가 되는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회사원이 금품을 대가로 적대 집단에 회사의 정보를 팔았다는 이야기.
그리고 발각되어서 아예 적대 집단으로 넘어간다는 이야기.

"... 아직 대답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집단입니까?"

이연우는 묵묵히 남자를 보았다. 남자가 픽 웃었다.
"이쯤이면 예상하죠? 골드버그클럽입니다. 들어봤죠?"

- "못 들어봤는데요."
"예? 아니, 장난치지 말고... 진짜?"
남자가 당황하며 눈을 깜빡였다. 이연우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여자가 중얼거렸다.
"진짜 신입이네."
"아니, 와... 나 병아리 데리고 뭐 하냐."
남자는 갑자기 힘이 빠졌는지, 안경을 벗어 정장 옷자락으로 ...

'주사위에 집착하지 마.'
주사위는 비장의 카드일 뿐, 주사위는 도구지 이연우가 아니었다. 시험부터 오류까지, 오직 몸 하나만 가지고 살아남았다.
냉정하게 가라앉는 정신과 칼날처럼 벼려지는 본능.
남자는 날 선 표정의 이연우를 보다가 질문을 던졌다.
"뭘 요구하면서 굴렸습니까? 결과는 어땠고요?"
"금괴에 저항하기. 실패했습니다."
이연우는 질문을 왜곡하여 해석해서 진실을 감췄다. 사고 같은 것은 말하지 않았다. 결국 다른 것들은 주사위를 굴리기도 전에 저지당하지 않았나.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그리고 금괴를 과신한 남자는 표정을 풀며 피식 웃었다.
"저항? 어설프네요. 신입답다고 해야 하나. 하긴, 그 주사위로 로또나 주식도 안 했죠? 참 순수해서 보기 좋아요."
이연우는 입을 꾹 다물었고,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함께하면 좋았을 텐데."
남자가 총을 챙겨 정장 안주머니에 넣고, 여자가 슬슬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내가 뭐랬어. 설득 못 할 거라고 했잖아."
"이제 회사원도 아닌데, 사람이라도 포섭해서 가면 좋잖아."
"실패했잖아, 멍청아!"
"그럼, 사람은 포기하고 다른 거라도 가져가는 거지."

- 척, 다리를 뻗듯 의족을 책상에 올린 이서연이 정장 바지를 쭉 걷어 올렸다. 살색 의족이 드러나는가 싶더니, 이서연의 손짓 몇 번에 허벅지 부분이 열렸다.
찰칵.
허벅지 내부의 빈 곳에는 네모난 폭발물들이 있었다. 뼈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제가 요청해서 넣었어요. 비밀 요원 느낌 장난 아니지 않아요?"
이연우는 눈썹을 파르르 떨다가 김갑동을 보았다. 이 사람은 폭탄을 어디에 감췄나 묻는 눈빛으로. 마침 통신을 마친 김갑동은 식은땀을 닦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나는 저런 거 없어."
"아까 몸에 폭탄 있다고."
"거짓말이고 허세였지. 아무리 정보부 요원이어도 몸에 폭탄 박는 인간은..."
김갑동과 이연우의 시선이 이서연에게 향했다. 이서연은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녀는 재빨리 의족의 허벅지 부분을 닫고는, 바지를 내렸다.
"으흠! 아무튼, 연우 씨는 적대 집단의 스파이로 의심되어 조사받으러 왔습니다. 맞죠?"
"... 맞습니다."

- 통장 잔고와 적금을 보던 김갑동은 우울한 눈으로 이연우를 보았다.
"후속 조치 없을걸."
"없다고요?"
"조사반 반장님이 엄청 커버 쳤어. 그리고 당신 특성, 조사원 일에 딱 맞잖아. 굳이 다른 곳으로 인사 이동할 이유가 없지."

가만히 있어도 이상 개체가 모여든다. 그것도 회사의 조사원을 중심으로.
김갑동 요원이 보기에 이연우는 조사반의 부모 감별사처럼 조사원으로 계속 일할 터였다.
"이상 검사도 안 받습니까?"
"이제는 이상 검사과에서 안 받아주지. 통제 안 되는 주사위까지 있다며. 검사하겠다고 데려갔다가 사고 터지면 어쩌게."
이연우는 순수하게 좋아하지 못하고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검사를 피한 건 좋긴 한데, 말을 들어보니 회사는 이미 이연우를 반쯤 이상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이미 회사원 사이에 은근히 소문 퍼졌어. 조사반에 같이 일하면 안 될 사람이 하나, 아니다."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던 김갑동이 말을 끊었다. 당사자 앞에서 할 말이 아니었다. 그는 슬그머니 이연우의 시선을 피했다.

- 하지만 이연우는 딱히 신경 쓰지 않고, 정신 한편에 선명하게 느껴지는 주사위를 보았다.
"... 주사위는 어떻게 합니까? 이건 확실한 이상 개체인데."

"아! 그건 제가 알아요! 이연우 씨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이상 목록에 기록했고, 자진 신고 기간이라 따로 징계는 없어요."
"회수도 안 할 거야. 조사 업무에 사용하는 장비로 취급할걸."

조사원의 생존을 돕는 장비. 회사는 충실한 직원이 직접 얻은 장비까지 빼앗지는 않는다.
귀찮은 실험도 반장이 막았다. 이연우나 주사위나 함부로 손댈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아주 으름장을 놓았다던데.

'그리고...'
무엇보다 직원 하나, 이상 하나까지 세세하게 신경 쓰기에는 회사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김갑동은 제법 경력이 되는 정보부 요원으로서, 회사의 운영이 많이 이상해졌다는 걸 피부로 체감하고 있었다.
'본사에서 고급 인력부터 핵심 인력까지 다 빼 가고, 예산은 줄이고, 중요 자원은 알 수 없는 곳으로 옮기고, 적대 집단대응은 거의 손 놓고. 도대체 회사에 무슨 일이...'

- 회사에서 내려온 공문이 열렸다. 반장이 말했다.

"가끔 회사에서 직원들 대상으로 강의하는데, 들을래?"

이연우는 행사 포스터 같은 공문을 보았다. 푸른 배경과 커다란 시계 아이콘 앞에 크고 작은 문자가 쓰여 있었다.
[뉴턴의 실수: 이상한 세상의 이상한 시간]
한국 지사 시계초침제작소 연구원의 이상시간학 강연장소는 상평시 옆 도시에 있는 회사 건물의 강당이었고, 시일은 일주일 후 오전 9시부터였다.
이연우의 다리 떨림이 딱 멎었다. 그는 전쟁에 임하는 군인 같은 눈으로 포스터를 노려보다가 짧게 말했다.
"예. 가겠습니다."

일주일이 순식간에 지났다.
그 시간 동안 이연우는 조금의 불안도 느끼지 않았다. 적당한 긴장을 유지하며 운명을 시험할 준비를 했을 뿐.
사람들이 오가는 도시의 길거리.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과 환경보호 피켓을 들고 지구가 멸망하기 전에 정신 차리라는 구호를 외치는 환경 운동가.
소음 속에서 홀로 멈춰 선 이연우는 도시 중심의 고층 빌딩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강의가 열릴 건물이었다. 그리고 무슨 사고가 터질지 모르는 현장.
꽈아악.
이연우는 에코백을 꽉 쥐었다.
전동 드릴과 가스 토치, 나이프, 새총 등을 사서 넣어 울퉁불퉁한 에코백이 흔들렸다.
'무슨 문제가 생겨도 상관없어. 사고가 터지는지 확인해 보자고.'

- 그러나 이연우의 걸음은 얼마 못 가 멈췄다. 빌딩 입구를 지나는 순간, 보안 요원에게 붙잡힌 것이다.
"사우님, 사원증 제시해주시고, 몸수색 한 번만 하겠습니다."

"아, 그게..."
이연우가 망설였다. 위험 물품을 가져온 게 걸리면 어떻게 될까.
하지만 이연우가 망설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보안 요원의 긴장은 높아져만 갔다. 슬그머니 테이저건으로 가는 손.

 

- "여기 있습니다."
이연우는 얼른 에코백을 건네고, 사원증을 꺼냈다. 보안요원은 사원증은 받지 않았다.
에코백을 열어서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연우를 쳐다봤다.
"사우님, 이거 다 왜 가져오셨습니까? 대답 여하에 따라 대응이 심각해질 수 있는 점, 양해 바랍니다"
"불안해서 가져왔습니다."
이연우는 솔직하게 답했다. 말이 이어졌다.
"지금까지 일하면서, 회사 일 뭐 한다고만 하면 사고가 계속 터져서요. 오늘도 무슨 일 크게 터질 것 같아서 챙겨 왔습니다."

 

잠시 침묵하던 보안 요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 이해한다는 표정.
강의와 세미나가 자주 열리는 건물에서 보안 요원으로 일하다 보면 온갖 부류의 회사원을 만난다. 이연우 같은 인물도 적지 않았다. 도무지 긴장을 놓지 못하는 사람.
이상을 상대하다 보니 평범한 물건을 보고도 PTSD가 심각하게 터지는 사람도 있었고, 작전을 수행하다 원한을 맺은 사람끼리 죽어라 싸우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기에 보안 요원은 이연우에게 따로 타박하지는 않았으나, 일은 일이었다.
"이건 저희가 잠시 맡아두겠습니다. 안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직원이 이렇게 모이는 건물이라, 보안 하나는 확실합니다."
이 건물을 건드리려면 어설픈 수준으로는 부족했다. 그리고 어설프지 않은 위험은 미리 관측되었고.
보안 요원의 설득은 계속 이어졌고, 마지막에는 이연우에게 돌아가기를 권하기도 했다.
"그래도 정 불안하시면, 강의 포기하고 돌아가셔도 됩니다."

- 꾹.
PPT의 페이지가 넘어가며, 연구원의 증명사진과 간단한 이력이 나왔다.
"저는 시계초침제작소의 연구원 김각정입니다. 오늘은 이상시간학을 가볍게 소개하는 강연을 진행하겠습니다."
웅성거리던 소음이 가라앉았다. 강의에 관심을 가진 회사원들은 연구원과 PPT를 보았고, 출장을 핑계로 쉬러 나온 사람들은 계속 핸드폰을 보았다.
연구원은 사람들의 반응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구부정한 자세로 리모컨을 꾹 누르며, 강의를 진행했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물리법칙의 시간이 아닌, 이상한 세상의 이상한 시간은 무엇인가. 시간을 조작하는 이상은 어떻게, 어떤 원리로, 우주가 허락하지 않는 불가능한 일을 일으키는가."

- PPT에는 만화풍으로 그린 아이작 뉴턴의 일화가 있었다.
사과나무 아래에서 떨어지는 사과에 머리를 맞는 아이작 뉴턴. 

"뉴턴은 떨어지는 사과에서 영감을 얻어 만유인력의 법칙을 깨달았다고 하죠. 우리는 사과에서 하나의 법칙을 더 파고들 겁니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사과가 아닌, 과거에서 미래로 떨어지는 사과. 바로 시간."
핸드폰을 보던 사람들이 하나둘 강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끄고 스크린을 봤다.

- PPT의 페이지가 다시 넘어갔다. 고전 만화풍의 캐릭터가 옆으로 걷고, 앞으로 달리고, 위로 점프하는 그림이 있는 슬라이드가 나왔다.
"시간은 좌표입니다. XYZ 좌표와 같은 거죠. 왼쪽에서 오른쪽, 뒤에서 앞, 아래에서 위, 그리고 과거에서 미래."
이연우는 좀처럼 강의에 집중하지 못하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기에,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드는 것을 보았다.
"질문 있습니다."
중년의 교수. 연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하시죠."
"시간이 좌표라면, 얼마든지 이동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현재에서 과거로도?"
"예. 시간 분야 이상이 그렇고, 회사의 시간 관련 부서가 연구해서 결실을 맺었죠."
"그건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관련 학문을 공부한 사람일까. 질문자가 크게 당황하여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연구원은 제자리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좌우로, 앞뒤로 움직이는 연구원.
"우리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지만..."
돌연 폴짝 뛴 연구원은 금방 제자리로 떨어졌다. 콩, 발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스피커로 흘러나왔다.
"위아래로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중력이 우리를 아래로 끌어당기기 때문에요. 하지만 우리는 중력을 이겨낼 수 있지요."

꾹, PPT의 페이지가 넘어갔다.
미사일부터 인공위성, 우주선, 비행기, 제트팩 같은 것의 사진이 나왔다. 모두 중력을 이겨내는 장치였다. 대지를 박차고 하늘로 향하는.

- "우리가 미래로 떨어지는 이유는 미래에 우리를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중력 같은 무언가가 어쩌면... 아니, 아닙니다. 너무 깊은 이야기군요."

 

- [보내줄 테니 읽어보게.]

그 말과 동시에 몇 개의 문서가 첨부되어 연속으로 올라왔다. 그 제목을 본 이연우는 고개를 모니터로 바짝 기울였다. 호기심을 안 가지려야 안 가질 수 없는 문장의 나열.

- [지구 멸망 시나리오: 이상기후]
[인류 보존 계획 1차 기획안]
[이주지 탐사 보고서]
[보존 계획 진행 상황]


- [지구 멸망 시나리오: 이상기후]
우리는 이상기후의 원인도 모른다. 인간의 무절제한 개발의 결과인가, 지구의 자연스러운 순환인가,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이상의 영향인가. 어쩌면 모두인가.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것뿐. 평균기온의 상승, 해수면의 상승, 식수와 농작물의 감소로 인한 식량난, 홍수와 가뭄과 폭염과 한파로 극단적이 된 날씨... 그동안 회사와 우호 집단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막아왔으나, 이제는 한계다. 더 이상 막을 수 없다.
짧으면 15년, 길면 30년 후,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간의 문명은 붕괴하기 시작할 것이다. 사람이 먹을 식량을 생산하지 못할 것이고, 아스팔트 도로는 장마나 홍수에 쏠려 사라질 것이다.
지구 종말 시계는 끝내 자정을 가리켰다. 우리에게는 남은 시간이 없다.
회사는 멸망에 대비하라.

- 이연우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손이 떨렸다. 마우스 커서가 주체할 수 없이 움직였지만, 이연우는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글자를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곧바로 다음 문서를 열었다.

- [인류 보존 계획 1차 기획안]
아쉽습니다. 우리에게 별의 순환을 조작할 기술이 없다는 사실이.

아,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분명 이런 현실을...
하지만 어쩔 수 없죠. 핵전쟁 위기 후, 그리고 두 번의 지구 종말 위험을 막아낸 후 묻어두었던 인류 보존 계획을 실행합시다. 보존해야 할 인간의 숫자는 100만 명씩 다섯, 500만 명입니다. 기원전 8000년쯤, 인간의 숫자는 500만 명이었다고 추산되죠. 우리의 힘이라면 100만 명의 인구로 더 짧은 시간 안에 문명을 재건할 수 있을 겁니다.
지구에 최후의 셸터를 건설하여 100만 명의 생존자를 남겨두고, 화성 기지에 100만 명을 수용하여 지구의 기후가 정상으로 돌아올 날을 준비합시다. 
또한, 인간 친화적인 환경의 이차원 두 곳에 100만 명씩 인류를 이주시키고, 마지막 100만 명은 '멸종 방어 장치: 방주'에 넣습니다
지금부터 회사는 생존과 미래를 위해 전력을 다합니다.

+ 추가:
적대 집단은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그들도 이 사실을 알아요. 지금 설치는 놈들은 잔챙이에 불과합니다.
진짜 위험한 멸망주의자는 우울증에 걸려 방에 틀어박혔습니다. 어차피 멸망할 세상이라면, 자신은 지금까지 뭘 한 거냐고요. 진짜 멸망한다는 말에 회사로 넘어온 사람들도 제법 있고요.
자유예술가협회는 멸망 후에도 예술 작품을 남기기 위해 예술의 전당을 짓는 중이고, 악마 숭배자들은 악마의 힘으로 악마자치구를 만들어 생존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골드버그클럽은 지하 도시를 건설하느라 바쁘고요.
다른 집단들도 비슷비슷합니다. 모두 대형 사고를 칠 여력이 없어요.]

- 더는 읽을 수가 없었다. 마우스를 잡은 이연우의 손이 미끄러져 책상 아래로 흘러내렸다. 고작 짤막한 문서 두 개를 보았을 뿐인데, 이상에 당한 것처럼 전신에 힘이 빠졌다.
머리가 어지러웠고, 귓가에서는 이명이 울리는 듯했다. 이연우는 넋이 나간 얼굴로 고개를 돌려 창문을 보았다.
시계초침제작소의 소장이 음울한 눈으로 바라보던 창가. 이연우는 휘청휘청 걸어, 창가에 서서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지구가 있었다. 회사가 포기한 지구가. 머지않은 미래에 멸망할 지구가.

- 온갖 자원을 넣어둔다면 그럭저럭 살아남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무얼 선택하든 지금과 같은 삶은 다시는 살 수 없을 것이었다. 문명이 붕괴할 테니까.
바스락.
햄버거 포장지가 입가에 닿았다. 생각에 빠져 있느라, 다 먹은 줄도 몰랐다.
햄버거 소스를 입가에 잔뜩 묻힌 이연우는 말없이 포장지를 보았다. 머지않은 미래에는 추억으로만 되새길 음식. 꾸깃.

- "일단, 시간물리학연구소를 돕자."
다른 방법은 언제든지 모색할 수 있다. 돌이킬 수 없는 날이 오면 주사위를 굴릴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멈춘 지금, 가능성은 낮지만 TPL을 도와 이상기후를 막아낼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게 최선이었다.

- "과장님, 이유는 묻지 않을게요. 저희랑 같이 돌아가요."
과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단호한 목소리로 거절했다.
"그럴 수는 없지. 해야 하는 일이야."
"과장님, 저는 견습 요원이지만 이건 배웠어요. 이상이 정부와 엮이면 안 되잖아요. 세계대전의 참상을 과장님도 아시잖아요."
국가와 이상이 엮이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들은 역사에서 교훈을 얻었다.
그렇기에 정치나 정부에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는 것, 나아가 국가가 위험한 이상 개체를 소유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회사의 방침이었다.
과장도 잘 알고 있었으나, 그 결과 또한 알았다. 이상기후. 자멸의 길로 달려가는 인류.

- 과장이 갑자기 차분해졌다. 감정이 양극단을 오갔다.

"보존 계획이 진행된다면 500만 명만 살겠지. 다른 집단도다 합친다면 그쯤 살릴 테고. 하지만 70억 명을 죽이면 10억 명이 살아남아. 이게 더 많이 살리는 길이야."
"그걸 몰라서 안 하나?"
70억 명의 생명을 직접 거두면, 회사는 더 이상 인류보호회사가 아니게 될 것이다.
"그딴 짓을 하면 회사는 다시는 과거로 못 돌아가."
"피는 우리가 보고, 책임도 우리가 질 거야. 너희, 인류관리회사는 얼마 안 남은 인류를 잘 관리하면 돼. 우리가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올리면 된다고."
1차 대응과 과장은 단단한 얼굴로 짧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우리가 알아서 해. 너희 도움은 필요 없어."

 

- 작전 과장은 실린더를 던질 듯한 자세를 취했고, 1차 대응과 과장은 슬며시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분홍빛이 일렁이는 핸드폰.
불길이 이글거리는 작전 과장과 냉정한 1차 대응과 과장이 눈도 깜빡이지 않고 서로를 노려봤다. 상대에게 틈이 보이는 순간, 공격에 나설 태세.
그쯤에서 이연우가 끼어들었다. 목을 몇 번 가다듬고, 성큼 걸어 1차 대응과 과장의 옆에 섰다.
긴장이 분산되었다. 1차 대응과 과장과 작전 과장은 제삼자인 이연우를 바라보았다.
"조사원 이연우입니다."
"그 조사원?"
작전 과장이 흠칫 놀라며, 푸른 씨앗이 들어 있는 실린더를 꽉 붙잡았다. 이연우를 노리는 실린더. 1차 대응과 과장이 옆에서 말을 거들었다.
"이쪽도 알아. 시계수리공이라는 파벌에 속해 있다던데."
"못 들어봤는데, 무슨 파벌이지?"
"이상기후를 해결하기 위한 파벌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방법으로?"
슬슬 작전과장의 눈동자에 불티가 튀는 듯했다.

- "회사, 적대 집단, 우호 집단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이상 개체와 기술을 모아 이상기후를 물리칠 방법을 찾기로 했습니다."
1차 대응과 과장과 작전 과장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조금의 부끄러움인지, 후회인지, 회상인지 모를 낯빛. 그들은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작게 말했다.
"정직하고, 이상적이군."
"... 좋네."

 

- 이상으로부터 인류를 보호하라.

 

- 1차 대응과 과장과 작전 과장은 그를 위해 쉬운 길을 선택했다. 이상기후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이상으로 인류를 조작하는 길. 본말전도, 적대 집단으로 정의되는 행동.
반면 시계수리공은 인류보호회사의 초심을 잃지 않았다. 올곧게, 정면으로 이상기후에 맞서고자 했다.
비록 그 길이 좁고 희미하여 보이지 않는다 해도, 그들은 정도를 무시하지 않았다.

- 이연우는 잠깐 하늘을 보았다.
"수습할까요?"
"... 그렇지. 안 할지도 모르겠네."
15년 안에 지구는 멸망할 것이고, 회사는 지구에서 탈출할 것이다. 굳이 이런 일에 힘을 쓸까.
"비밀 유지가 깨질지도..."
"난장판이 벌어지겠네요."
그들은 미래를 보았다. 경험으로, 직관으로, 역사로 추측가능한 미래.
회사는 인류 보존 계획에 집중했다. 반대하는 사람은 파벌이 갈려 내전 중이었다. 적대 집단은 살길을 찾아 바빴고, 뭘 모르는 잔챙이들은 자유롭게 설쳤다. 현재만 해도 이랬다. 
이상이 공개되면 어떨까.
일반인들은 지금만큼이나 다양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이상 종교, 이상 권리 보호 협회, 이상 국가, 이상 팬클럽, 이상 정치. 회사가 제거한 놈들만 해도 이런데, 망했네. 다시 돌아가겠네. 아니, 어차피 망할 지구인가."
깁갑동이 축 늘어졌다. 이연우는 몸을 돌렸다. 그가 말했다.

"우리가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할 일을 해야죠."
"맞다! 연우 씨! 수리공이랑 이상기후? 그거 다 뭐예요? 짐작은 가는데, 설명 좀 해주세요."

- [나라에서 괴물을 키운다?!]
[청해항구 사건의 비밀! 말도 안 되는 조사 결과, 정부는 무엇을 숨기고 있나!]
[아파트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침묵하는 이유!]
그것 말고도 수많은 음모론, 미스터리, 공포를 영상으로 만들어 올렸는데, 조회수가 심상치 않았다.
"아."
이연우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공무원 시험을 포기하고, 먹고살 길을 잘 찾았다고. 타이밍도 좋았다. 회사가 정상이었으면 모조리 검열되었을 테니까.

- 이연우와 펜션 주인은 비가 쏟아지기 전에 실내로 들어왔다.
펜션 현관에서 멈춰 선 이연우는 숨을 몰아쉬었다. 빠르게 오르내리는 가슴과 적당하게 긴장한 전신의 근육. 하지만 그 와중에도 펜션 주인을 주시하는 눈. 이연우는 호흡을 조절하며 슬금슬금 물러났다.
'행동이 수상해. 평범한 사람이 아니야!'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선점한 발, 여차하면 주먹을 휘두르기 위해 꽉 쥐어진 손.
펜션 주인 역시 가쁜 숨을 들이켰다. 그러다가 문득, 이연우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으... 머리가 얼마 안 남아서 산성비 이런 거, 예민하거든요!"

- 서편호가 항복하듯, 양손을 들어 올리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부서진 현관과 자동차, 비가 쏟아지는 야외를 배경으로, 그가 이연우를 똑바로 보았다.
눈동자에 알 수 없는 열의와 사명이 반짝였다.
"저는 거짓말하지 않았습니다. 이 연구에 정말 인류의 미래가 걸려 있죠."
이연우는 살짝 물러섰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 반격당할 위험이 있었다.
여전히 서편호의 머리를 겨누며, 이연우가 질문했다.
"말 돌리지..."
"이상기후로 멸종한다면, 이상기후에 적응하면 됩니다."
서편호가 한 손을 뒤로 빼 까마귀를 붙잡았다. 그의 손아귀 안에서 머리 없는 까마귀가 몸을 비틀었다.
"이 생명력. 이 생명력만 인간에게 부여한다면, 우리는 지구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충분히 가능합니다."
우두둑, 강하게 힘을 준 손아귀. 까마귀한테서 바람 빠지는 소리와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런데도 까마귀는 죽지 않고 그 몸을 꿈틀댔다. 서편호는 까마귀의 움직임을 손바닥으로 느끼며 기쁘게 웃었다.
"그리고 흙에 남은 성분을 통해 연구는 어느 정도 성공했습니다. 불면증, 탈모, 기억상실, 공격성 향상, 정신이상, 사망 등의 부작용만 줄인다면,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 "

- [TPL: 음. 회사도 그렇게 생각했지. 그래서 사고가 났네.]

TPL은 기밀 문건에서 읽은 실험 기록에 대해 천천히 말했다.
이상기후를 인지한 회사는 북풍과 태양의 내기 결과를 조작해서 이상기후를 막기로 했다. 온갖 억지를 부려 북풍이 계속 승리하게 만들어, 기온을 내리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 [TPL: 처음에는 잘됐다더군. 그런데 북풍과 태양이 알아챘네. 자신들이 속았고, 이용당했다고.]
[ TPL: 그 후, 그들이 분노하여 계속해서 기온이 상승하고 있지. 이제 내기도 하지 않고.]
회사가 이상기후에 기여하고 있었구나!
이연우는 이마를 탁 쳤다. 그걸로 끝이었다. 회사를 비판하기에는 어쨌든 이상기후를 막기 위한 시도였으니까. 결과는 안 좋았지만.

- 그 말을 무시하고 사무실을 둘러봤다. 유지유는 출근하지 않았다. 평소 출근하는 시간을 생각하면, 30분은 더 있어야 했다. 둘 뿐이니 말을 꺼내기 딱 좋았다.
이연우가 침을 꿀꺽 삼키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반장님."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 진지한 목소리.
반장이 흠칫 굳었다. 그러고는 올 것이 왔다는 듯 한숨을 푹 쉬며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퇴직하려고?"
그동안 겪은 사건 사고만 해도 심각한데, 탈모까지 왔으니 퇴직을 생각할 만도 하지. 달콤한 커피믹스를 마셨건만, 혀끝에 씁쓸한 맛이 감돌았다.
반장은 굳이 말리지 않고 요청을 들어주려고 했다. 하지만 이연우는 눈을 땡그랗게 떴다.
"예? 아뇨. 회사를 왜 그만둡니까?"
이상기후를 깨달은 이후, 한 번도 하지 않은 생각이었다. 회사원의 신분과 인맥과 정보와 기억을 잃으면 살아남기 힘든데, 지금 퇴직을?
이연우와 반장은 어리둥절하며 눈을 마주쳤고, 반장은 곧 헛기침하며 이연우의 눈을 피했다.
"아니야? 아니구나."

- 직원이 이마의 땀을 훔쳤다. 조사반장의 방문을 알리기 무섭게, 동호회장이 말했다.
'그 인간이 왜 와? 뭘 또 뒤집어엎으려고? 꼴 보기도 싫다. 나 찾으면 없다고 해라!'
차마 그대로 옮기지 못할 말.
"병이 나서, 병가 내고 쉬고 계십니다."
"확실해? 내 얼굴 보기 싫어서 거짓말하는 거 아냐?”
"아닙니다, 아닙니다. 직접 내려가보십쇼. 진짜 안 계십니다."
직원은 서둘러 움직이며, 반장과 이연우를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 직원이 신분증을 카드처럼 꽂자,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 이연우는 북풍과 태양을 봐야 한다고 했다. 그 목표를 투명하게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 "지하 1층. 푸른 전기 뱀 사육소입니다. 한국 지사에서 사용하는 테이저건에 들어가는 뱀은 전부 이곳에서 키우고 훈련한 뱀들입니다."
때마침 검은 복장을 한 직원이 나타나 종을 땡땡 울렸다.
"밥 먹자...!"
그가 외치기 무섭게, 번개 뱀들이 푸른 물결이 되어 한쪽 벽으로 몰려갔다. 벽에 늘어진 수많은 전깃줄에 각자 머리를 대고, 테이저건의 출력에 맞춰 주입되는 전기를 먹었다.
반장은 손을 내저었다. 더 볼 것도 없었다.

- 그곳에는 동화의 한 풍경 같은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무슨 기술을 썼는지, 또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 듯한 감각.
높은 하늘과 구름. 푸른 잔디가 바람결에 흔들리는 대지.
지상에는 구름으로 이루어진 고양이들이 한가롭게 꼬리를 흔들고 있었고, 각종 기이한 생명체들이 들판을 거닐고 있었다.
무엇보다 압도적인 것은 들판의 중앙에 앉아 있는 골드 드래곤.
우아한 자태로 고개를 들고 직원 하나와 대화하는 골드 드래곤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골드 드래곤은 모든 드래곤 중 가장 우수한 드래곤이며, 우주 어느 드래곤과 비교해도 가장 지혜로운 드래곤이다!"
이연우와 반장이 눈을 깜빡거리자, 그들을 안내하던 직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또 저러네... 여기는 지하 2층 비현실적 생물 격리소입니다."

"어. 한번 보자."
반장이 눈을 반짝이며 엘리베이터 바깥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직원과 이연우도 반장을 따라서 들판으로 들어갔다.

- 그러는 동안에도 골드 드래곤은 커다란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레드 드래곤은 본능 하나 제대로 제어 못 하는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쓰레기이며, 그린 드래곤은 드래곤이라 할 수 없는 족속이며, 블랙 드래곤은..."
드래곤이 말을 멈췄다. 그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머리를 살짝 돌려 새로운 방문객을 보았다. 헤아릴 수 없는 지혜를 품은 눈동자가 인간을 굽어보았다.
"아, 어리석은 필멸자들. 내게 지혜를 구하기 위해 왔나?"

하나는 이곳의 직원이요, 나이 많은 남자도 올곧은 직원이며, 다른 하나는...
"으악!"
드래곤이 눈을 감고 혀를 빼물었다. 그것은 짤막한 앞발로 자신의 눈을 연신 쓸어내렸다.
"끔찍하구나! 어서 내쫓아라! 재난을 휘감은 자다! 심지어 안 좋은 속셈을 품고 왔어! 빨리, 빨리 내쫓아!"

- 침묵.
안내하던 직원이 슬금슬금 물러나 비상 버튼에 손을 옮겼고, 반장은 눈을 감았다.
이연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직원을 향해 말했다.

"아마 제 체질 때문에 그러는 거 같은데..."
하지만 이연우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골드 드래곤은 날개를 활짝 펴더니 돌풍을 일으키며 날아올랐다.
"네가 안 가면, 내가 가겠다!"
돌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직원은 비상 버튼을 꾹 눌렀다.

- 직원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물총으로 뭘 하려고 그러냐는 듯. 그에 이연우가 답했다.
"탈모약이 들어 있습니다."
"탈모를 치료하는 약이요? 나는 탈모 없는데."
"탈모를 일으키는 약입니다. 대머리 되기 싫으면 협조하세요."
"그게 왜 약..."
물총이 가까워졌다. 직원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그는 떨리는 눈으로 에코백을 보았다.
"아니, 뭘 들고 다니는 겁니까."
"협조할 겁니까, 안 할 겁니까?"
물총이 직원의 이마를 긁고 지나 정수리를 꾹 눌렀다. 직원은 눈을 꼭 감았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낯빛이 한순간에 수십 번 변했다.
그가 돌연 눈을 부릅떴다. 

"협조하겠습니다."

- 직원은 태도를 바꿔, 그들을 들판 어느 곳으로 안내했다. 

"이곳 지하 2층은 회사의 핵심 기술로 이루어진 일종의 아공간입니다. 당연히 엘리베이터도 그렇고, 비상구도 그렇고 위상학적 이동 장치입니다."

- 대낮의 하늘에 은하수가 펼쳐져 있었다. 반짝거리는 별의 무리가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았는데, 별 무리는 빠른 속도로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아름다운 장관.
나무 인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인류의 희망이 스러진 인류의 무덤이라.]
"그게 무슨..."
[우주 쓰레기란 소리다.]
이연우가 하늘에서 눈을 떼고 나무 인간을 찾았지만, 나무인간의 형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한 줄기 목소리만이 들릴 뿐.

- [이상기후가 닥쳐오자, 세계 각국의 정부는 우주로 피난선을 쏘았지. 피난선 하나가 우주 쓰레기와 충돌했고, 연쇄적으로 모든 위성과 우주정거장과 피난선이 충돌하여 우주의 먼지가 되었다. 하늘이 닫힌 거지.]
돌연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커다란 강철 덩어리가 긴 꼬리를 남기며 이연우를 향해 날아들었다. 하늘을 가득 메우는 우주선의 잔해.
불꽃 너머로 언뜻 보이는 글자, HOPE.
피할 겨를도, 능력도 없었다.
거대한 충격파가 터지고, 땅이 뒤집혔다.  


- 성공!
흐려지던 이연우가 다시 돌아왔다. 미래 이연우의 앞으로 이동됐다. 낮은 확률을 뚫고 미래에 붙잡혔다.
"어..."
현재 이연우는 주춤 물러서며, 미래 이연우를 경계했다. 동일 개체라고 안심할 수 없었다. 나태의 악마를 보지 않았나. 생존에 위협이 된다면, 다른 자신이라고 해도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다.
입이 바짝 말랐다. 잔뜩 긴장한 몸.
미래 이연우는 그런 현재 이연우를 힐긋 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몸을 돌렸다. 오두막 문을 열고 문 너머로 사라졌다.
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 현재 이연우는 공손하게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나무 바닥을 밟는 다리가 달달 떨렸다.
'도대체 뭐지?'
딱 봐도 지금의 자신보다 상위 호환이었다. 주사위로 뭘 했는지 눈동자에 주사위가 비쳤고, 결과도 통제하는 듯했다.
만약 상대가 자신을 죽이려고 마음먹으면... 순식간에 죽으리라.

 

- "그쯤의 나라면, 생존에 집중하고 있겠지. 회사도 그렇고."

"예."
"그러면 안 돼."
"예?"
이연우가 고개를 들었다. 상대가 무서워도, 의문을 참을 수 없었다. 이게 진짜 내가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미래 이연우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오두막의 천장을 보았다. 현재의 이연우보다 어려 보이는 미래 이연우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과거의 자신, 그가 지나온 여정, 그가 겪은 사고. 그리하여 잃어버린 것들.
미래 이연우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전부 몸으로 겪었어. 이상기후, 회사의 실패, 피난선, 최후의 셸터, 이주지..."

- 지금도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광경. 간혹 악몽으로 나타나는 그때 그 순간.
그가 탑승한 피난선. 충돌을 막겠다고 돌린 주사위가 대실패하여 주변의 위성과 피난선까지 휘말렸다. 도미노가 무너졌다. 그가 무너뜨렸다. 모든 피난선이 동시에 터져 나가며, 우주쓰레기가 되었다.
최후의 셸터로 잠입한 날, 멸망주의자의 손짓에 몸의 절반이 소멸하기도 했고.
이주지를 찾아간 날, 이주지의 성벽을 넘어오는 이상의 군세 앞에서 바로 도망치기도 했다.

 

"그... 어쨌든 살아남았지 않습니까."
어설픈 위로에 미래 이연우가 눈을 뜨고 현재의 이연우를 보았다.
"살아남았지. 주사위와 한 몸이 되고, 빗물을 전부 소화하고, 그 외의 수많은 이상을 수집하고 지배하고 몸에 받아들여서, 위험 레벨 6이나 7쯤 되는 수준까지 왔지."
현재 이연우의 피부에 닭살이 돋았다. 그런 위험한 존재가 눈앞에 있다는 두려움 반, 내가 그 수준까지 갈 수 있다는 놀라움 반.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힘을 손에 쥔 미래 이연우의 얼굴에는 기쁨이 없었다.
"그런데 그뿐이야. 살아만 있어."
미래 이연우가 현재 이연우와 눈을 마주쳤다. 미래 이연우의 눈이 질척하게 가라앉았다.
사람보다는 이상에 가까운 눈동자.
주눅이 든 현재 이연우가 눈을 내리깔며, 미래 이연우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미래 이연우는 비웃음을 섞어 말했다.
"다른 사람은 다 죽었어."

- 손가락을 활짝 펼치고, 하나하나 접었다. 손가락 하나에 그의 추억이 접혔다.
"가족, 이상 조사반의 반장님, 지유 선배, 잼민이, 입사 동기친구들, 시계수리공, 내가 직접 포섭한 동맹, 그 외의 친구들. 내 살길만 찾는 동안, 모두 죽었어!"
현재 이연우의 마음에도 돌이 하나 얹어졌다. 가슴이 답답했고,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 "내가 나무 인간하고 협력하지 않은 이유는 정신을 지배당해 노예로 살기 싫어서였지. 그런데, 지금의 나는 사람답게 살고 있나?"
인류가 멸망한 세상에서 최상위급 이상 개체가 되어 홀로 살아온 이연우가 조소했다.
"생존만이 문제가 아니야. 생존한 뒤의 세상도 생각했어야 해. 나 혼자 살아남은 세상은 의미가 없어. 그러니까..."
미래 이연우가 현재 이연우를 보았다. 주사위가 비치는 미래 이연우의 동공 위로, 현재 이연우의 형상이 겹쳤다.
"돌아가서 미래를 바꿔. 생존에만 집중하지 말고 이상기후를 물리칠 생각을 해. 그래야 사람답게 살 수 있어."

- 현재 이연우가 입을 다물었다. 조금쯤은 공감이 갔고, 많이 반발이 들기도 했고.
결국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상기후를 막을 방법을 모릅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주사위를 돌릴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 현재 이연우를 보고, 미래 이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건 과거의 자신이었다. 그 생각을 훤히 알았다.
"리스크가 너무 커서 돌이킬 수 없는 날이 오면 돌릴 생각이었지."
"예..."
"그렇게 미룬 결과가 지금이야. 어차피 망할 세상이야. 그냥 돌려."
"아니..."
이연우가 입을 벌렸다. 그렇다고 지구의 운명을 걸고 도박하라고?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차라리 이상기후의 원인과 해결책을 알려주지?
미래 이연우는 피식 웃었다.
"정확히는, 이것저것 해보다가 이상기후가 닥쳐오기 전에는 무조건 돌려. 이상기후가 시작되면 끝이야."

 

- "그 이것저것 좀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저는 지금 북풍과 태양만 찾았습니다."
대화하는 분위기가 나쁘지 않아 현재 이연우가 슬쩍 편한 마음으로 물었다.
미래 이연우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두드리는 박자에 따라, 그동안 깊이 묻어둔 생각이 샘물처럼 솟아났다.
"내가 생각한 게 있는데..."
한때 밤마다 눈을 감고 생각했던 이상기후를 물리치는 방법.
"북풍과 태양, 맬서스의 악마, 수르트의 검, 나비효과, 기독교적 재앙..."
수많은 이상이 미래 이연우의 입에서 끝도 없이 흘러나왔다. 이상기후에 기여하는 개체, 이상기후를 저지할 수 있는 개체, 회사가 아는 개체, 회사가 모르는 개체...
이연우는 단어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새기면서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 숫자가 지나치게 많았다.
더구나, 그들은 전 세계에 퍼져 있었다.

- "... 이것들만 처리하면 돼. 사용하든, 설득하든, 파괴하든. 상황 맞춰 판단해."
한참이 지나 말을 끝낸 미래 이연우에게 현재 이연우가 말했다.
"너무너무 많지 않습니까. 거의 다 해외에 있고요. 이걸 내가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안 할 거야?"
미래 이연우는 손가락을 뻗어 오두막의 창문을 가리켰다가 이어 자신을 가리켰다.
"이왕 살아남는 거, 도시에서 잘 살아야지. 햄버거 사 먹고, 커피 마시고, 스마트폰 하고, 컴퓨터도 하고!"
"... 알겠습니다"
방법이 있겠지. 현재 이연우는 작게 입술을 달싹이며, 일단은 미래의 그가 말한 이상 목록을 두뇌에 새겼다.

- 미래 이연우가 거기에 충고를 더했다.
"그때쯤의 나라면 충분히 할 수 있어.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능력이 있는데, 그걸 잘 쓰지 못했지."
"예를 들면요?"
현재 이연우는 경계를 풀고, 아예 배움을 청했다.
"너 자체가 자그마한 회사야. 학살회사는 타격대로 사용해. 관리회사는 정보부로 사용하고, 시계수리공이나 적대 집단은 정보원이나 하청으로 써."
이연우가 맺은 동맹은 이연우의 생각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다들 지구를 포기하지 못한 사람들이야. 최종 목표가 같은데, 내가 내준 정답을 거절할 리가 없지."
그제야 현재 이연우가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눈동자에 깨달음의 빛이 서렸다. 그는 이 정보의 값어치를 지금 깨달았다.

-

"이거면 회사의 파벌을, 아니, 적대 집단까지 하나로 만들 수 있습니다!"
"어...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는데."
미래 이연우가 멈칫했다. 그는 황폐한 세상에서 홀로 살아남은 시간이 길어, 큰 그림은 그리지 못했다.
그냥 과거의 자신이 다른 사람을 이용했다면 좋았을 거라는 정도로만 생각했을 뿐.
하지만 여러 사람을 만나 직접 동맹을 맺고 있는 지금 이연우는 달랐다.
"가능합니다! 이거면 충분히 가능해요!"
이건 일개 정보나 목표가 아니었다. 깃발이고 등대였다. 이상적인 미래로 향하는 확실한 길.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 헤매는 모든 인간을 끌어모을 빛.
희미한 희망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 이연우는 흥분을 참지 못했다. 얼굴은 붉게 물들었고, 가만히 있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정신없이 서성이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선명한 청사진이 그려졌다.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니야... 다른, 더 괜찮은, 내가 안전한..."

혼자 중얼거리는 현재 이연우를 미래 이연우가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고는 천천히 손을 폈다. 눈동자 안의 주사위가 구르기 시작했다.
데구르르.
"이제 그만 가봐."
성공!

- 이연우의 몸이 점점 흐려졌다. 유령처럼 반투명해진 이연우는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다급하게 손을 뻗어 크게 외쳤다.
"주사위 결과 통제하는 법 좀..."
"한번 죽어.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부활 판정 굴려. 그때 대성공 뜨면 주사위랑 한 몸이 돼."
"아니, 뭔... 그러면 다른 팁이라도..."
상대는 미래의 자신. 수많은 사건 사고를 겪으며 몸으로 체화한 요령이 많을 터.
게다가 이대로 돌아가면 나무 인간을 상대해야 할 텐데, 사소한 도움이 절실했다.
현재 이연우가 자존심이나 경계 따위는 다 내버리고 간절하게 빌자, 미래 이연우는 조금은 황당하게 보다가 귀찮다는 듯이 가볍게 손짓했다.
"어휴 됐다. 가라."
미래 이연우의 손짓에 따라 확률이 조작되며, 현재 이연우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생겨났다. 그것의 정체를 확인하기도 전에, 현재 이연우의 세상이 변했다.

- 현실로, 크립티드연구동호회의 지하 신전으로 돌아왔다. 어질어질한 머리와 흐릿한 시야. 언뜻 공포와 분노가 뒤섞인 정신파가 느껴졌다.
[저놈을 죽여!]
위험. 시야가 또렷해졌다.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진 나무 인간이 일그러진 얼굴로 앙상한 가지를 뻗었고, 동호회 직원들은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이연우를 둘러쌌다.
이연우를 빽빽하게 둘러싼 직원들. 하나둘 품에서 무기를 꺼냈다. 테이저건, 나이프, 권총, 삼단봉 등등...
이연우를 겨눈 수많은 무기 앞에서, 이연우는 심호흡을 반복하며 미래 이연우에게 받은 것을 확인했다.
머릿속에 생겨난 자그마한 티켓 하나. 주사위와 멀찌감치 떨어진 그것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설득 성공 확정 뽑기권(일회용)]

 

- "오..."
포위된 상태에서도 이연우는 감탄을 뱉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주변 사람들을 보았다.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이연우를 포위한 직원들. 수많은 무기가 당장이라도 이연우를 향해 쏟아질 듯했다.
누군가가 무기를 고쳐 잡으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어쩔 수 없어요."
이연우는 태연하게 그들을 보다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확정 뽑기권은 아껴야지!'
이런 비장의 아이템은 절체절명의 위기가 올 때까지 애지중지 아껴둬야 하는 법.
그렇다면 이 위기는 어떻게 돌파해야 하는가.
이연우가 잔뜩 들이마신 숨을 한 번에 쏟아냈다.

-

회사의 인트라넷을 통해 이상기후와 보존 계획까지 곁들여진 모든 정보가 모든 회사원에게 메일로 보내졌다.
회사의 공식적이고 비공식적인 연락망을 통해 모든 집단과 집단의 여러 구성원에게 연락하며 정보는 계속해서 전파되었다.
"이게 진짜일까요...?"
멸망이 오기 전에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예비 악마 숭배자를 찾기 위해 도시의 그림자를 떠돌던 왜소한 악마 숭배자가 핸드폰을 보며 중얼거렸다.
옆에서는 부조리의 악마가 배를 부여잡고 눈물이 날 때까지 웃었다.
"새끼... 칭찬! 예정된 멸망이 이렇게 부조리하게 막히다니!"

"악마님..."
"진짜 맞아."
"그게 아니라, 맬서스의 악마. 이 악마도 이름 바꾸지 않았나요?"
악마숭배자는 가만히 핸드폰을 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 필연적인 한계와 그로 인한 종말을 관장하는 악마.
과거, 토지와 식량 생산은 인구의 증가를 감당할 수 없다는 이론이 대두되었을 때는 맬서스의 악마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으나, 이상기후가 닥쳐오는 지금은 지구온난화의 악마였나, 이상기후의 악마로 이름을 바꿨다고 들은 듯했다.

"사탄이 하느님의 음성을 빌려 유혹했던 걸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결국 순리대로 돌아가니, 이 또한 그분의 계획일 겁니다."
어느 날, 그들은 기도하던 중 동시에 계시를 받았다.
[인간의 타락이 하늘에 닿아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었으니, 홍수로 지구를 정화하고 신인류를 어린양으로 삼아 천년왕국을 건설할 것이다.]
[하나 너희를 가엾게 여겨 구원의 문을 열어두니.]
[세상에 열세 가지 재앙이 닥쳐오는 날, 나의 아들을 찾아 창으로 찔러라. 그러면 죽은 자는 나의 나라에서 살아나고, 산 자는 하늘에 올라 나를 만날 것이다.]
"하긴... 신학적으로 말이 안 되는 계시였죠."
"그러면 구원 계획은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롱기누스의 창도 다시 성유물 보관소에 넣겠습니다."
대홍수의 발단이 되고 수많은 기독교인이 비인간으로 변한다는 기독교적 재앙이 계획 단계에서 사라졌다.

- 그렇게 하나둘 이상 개체가 처리됐다.

- 오두막의 어느 마법사.
"스승님, 이것 좀 보세요."
"뭐냐."
젊은 제자가 핸드폰 화면을 내밀고는 손발을 휘저으며 설명했다. 이상기후와 이상 목록. 그중 스승이 가진 수르트의 검.
백발이 성성한 마법사는 가만히 이상 목록을 보다가 눈을 돌렸다.
"저게 문제라고?"
대충 구석에 박혀 먼지만 먹고 있는 붉은 검. 한때 무스펠헤임을 탐색하다 얻은 수르트의 검.
"예. 그래서 말인데, 스승님한테 중요한 물건도 아니잖아요. 다른 차원으로 옮기는 게 어떨까요?"
"오냐."
늙은 마법사가 주섬주섬 손을 움직였다. 그는 형형색색의 가루와 염료 따위로 마법진을 그렸다.
이차원과 상호 작용하는 방법. 마법.
늙은 마법사는 대충 수르트의 검을 들어 올린 후, 마법진에 집어던졌다. 마법진이 빛나더니 수르트의 검이 사라졌다.
제자가 호기심에 차 질문했다.
"어디로 옮기셨어요?"
"아스가르드에 버렸다. 이 기회에 쓰레기나 정리하자꾸나."

늙은 마법사는 관심도 없다는 듯, 제자를 시켜 쓸모없는 잡동사니와 쓰레기를 마법진에 던져 넣었다.

- 골드버그클럽도 행동했다.
도심의 빌딩 최상층.
황금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얼굴 조각상 앞에서, 예술가에게 맞춤 제작한 명품을 전신에 둘둘 두른 남자가 금괴를 들어 올렸다.

- 이연우는 곧장 도박을 하기 위해 주사위를 불렀다.
'주사위! 심장마비!'
데구르르.
주사위가 굴렀다. 여섯 갈래의 가능성이 지우개를 쥔 남자를 중심으로 어지럽게 흔들리는 순간...
남자가 이연우를 노려보며 지우개를 까딱였다.
"주사위였나? 가능성? 확률? 그런 걸 조작하는 이상? 그러면 변동하는 가능성과 확률을 지우면 끝날 일이지."
빗물을 뿌리라고 설득당하면서 이미 한번 겪은 감각. 지우개를 쥔 남자는 주사위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다.
멈칫.
주사위가 멈췄다. 어떤 결과도 내지 못했다. 확률이 모두 지워졌다.
침묵 속에서 그들은 서로를 마주 봤다.

지우개를 쥔 남자는 육감에 집중해 이연우가 주사위를 굴리면 바로 대응할 준비를 했다. 주사위는 지우개만큼이나 위험했으니까.
말하자면 서로가 폭탄을 쥐고 있는 상황.
확실하게 단번에 상대를 죽이지 못하면, 그래서 폭탄이 터지면 같이 죽는다.

- 이연우는 다르게 생각했다.
'몸싸움밖에 방법이 없어. 지우개에 걸릴 거리를 주면 안 돼!'

주사위가 힘을 잃었다. 다른 수단을 써야 했다.
얼음물을 뒤집어쓴 감각. 차갑게 가라앉은 이성과 눈동자. 이연우는 물총을 건네주기 위해 가까워졌던 거리를 어림짐작했다.
스윽.
이연우는 지우개를 쥔 남자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자연스럽게 손을 뻗었다. 남자는 형이상학적 감각에 집중하느라 즉각 반응하지 못했다.

- 꽉!
지우개를 쥔 남자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연우는 그대로 그 손을 위로 틀어 올리며 남자에게 몸을 바짝 붙였다. 지우개의 궤적에 닿지 않게끔.
"뭐?"
몸싸움이었다.
남자가 당황했다. 주사위 같은 이상 개체를 지니고서, 굳이 근접 격투를? 왜?
그러면서도 손에 힘을 주어 이연우를 밀어내려 시도했지만, 이연우는 이를 악물고 전력을 다해 그에게 달라붙었다. 떨쳐내려는 사람과 악착같이 붙는 사람, 춤추듯이 휘청휘청, 비틀비틀 제자리를 돌고 돌았다. 아무렇게나 휘저어지는 지우개의 궤적을 따라 세상이 지워졌다.
지우개가 하늘을 가로지르니 구름이 지워지며 푸른 하늘이 드러났고, 산 정상을 스치면 비뚜름하게 정상이 깎였고, 이연우와 남자가 빙그르르 돌며 내리치는 손짓에 따라 비탈길이 지워졌다. 
태풍의 눈과 같은 두 사람만이 안전한 파괴의 중심.

- 이연우는 식은땀을 뚝뚝 흘렸다.
'힘이, 체력이 부족해!'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어떻게든 손목만은 붙잡았지만, 주먹질이나 발길질에서 밀렸다.
복부를 얻어맞은 이연우가 확 손을 치켜들었다. 지우개가 수직으로 올라가며, 정보부부터 산까지, 절반으로 쪼갰다.
지우개가 다른 곳에 사용되는 순간, 지금이 기회였다.
이연우는 주사위를 불렀다. 지우개를 상대할 미래 이연우를 불렀다.
'미래의 나를 불러!'
과거에서 미래로 갔는데, 미래에서 과거로 못 올 리가 없었다. 분명 가능한 일이었다. 성공만 한다면, 가장 확실한 돌파구였다!

- 데구르르.
남자가 이를 갈며 확률을 향해 손짓했지만, 늦었다. 결과가 나왔다.
대성공!
지극히 낮은 확률의 가능성이 극적으로 구현되었다.
이연우 주변으로 여러 사람이 돌연 모습을 드러냈다. 이연우가 지나온 분기점에서 갈라진, 평행 세계의 이연우가 넷.
특전대, 악마 숭배자, 멸망주의자, 골드버그클럽으로 들어간 이연우들...

- "이게 뭔 일..."
"누가 날 소환..."
인상이 다른 이연우들은 상황부터 파악하다가, 다른 이연우들과 이 세상의 이연우와 지우개를 쥔 멸망주의자를 보았다.
네 명의 이연우는 동시에 판단을 마쳤다.
"복귀! 귀환! 빨리!"
"이동! 차원 이동! 아니, 복귀!"
지우개? 저런 위험한 인간이 앞에 있다? 뭔지 모르겠는데 내가 여럿이 있다? 사고가 터져도 크게 터졌다. 빨리 도망쳐야 했다!

- 네 개의 주사위가 동시에 구르고...
남자가 반사적으로 지우개를 열심히 까딱였다. 지워진 가능성들.
평행 세계의 이연우들이 말을 잃고, 지우개를 쥔 남자가 필사적으로 이 세상의 이연우를 두들겨 팰 때, 이 세상의 이연우가 힘겹게 입을 열고 외쳤다.
"이상기후 해결법 아십니까? 모르면 알려줄 테니까, 이 인간 같이 죽입시다!"
미래 이연우는 무슨 일인지 나타나지 않았지만, 다른 자신이 이렇게 많으면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평행 세계의 그들은 시계수리공이 아니었다. 해결책도 몰랐다. 시간이 정지했을 때 이상시간학 강연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저절로 시간이 재생될 때까지 다른 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고 있을 때, 골드버그클럽 이연우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손목에 찬 시계가 잘그락 흔들렸다.
"평행 세계의 나를 소환하는 판정을 굴렸죠? 우리 이런 건 돌리지 맙시다. 상도덕이 있지. 사람을 위험한 자리에 부르면 안 되죠."
"그게 맞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세상의 이연우를 노려보았다.
갑자기 지우개 앞으로 소환되었을 때, 주사위가 취소까지 되었을 때, 얼마나 놀랐는데... 물론, 그 대가로 이상기후 해결책을 받았지만, 예고 없는 위험은...
이 세상의 이연우가 당했다고 생각하면 정말 기분 나쁜 일이었다. 그는 급하게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사고입니다. 애초에 평행 세계 같은 건 굴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럼 뭘 굴렸길래..."
"미래의 나를 불렀는데, 대성공이 갑자기 떠서..."

- 그들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여기 미래인은 없는데요?"
"아마 그쪽에서 거부한 거 같습니다."
"아, 거부..."
모든 이연우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이런 일방적인 소환은 정말 위험했다.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많은 황금을 바쳐 황금만능주의로 보호를 두르든, 악마의 권능을 빌리든.

 

- 각자 방어법을 떠올릴 때, 이 세상의 이연우가 슬쩍 말했다.
"그보다 우리 주사위 사용법을 공유합시다. 이왕 모였는데."

"좋은 생각입니다. 아까 보니까, 다른 판정을 굴리던데..."
그 순간, 목소리들이 사라졌다. 정확히는 사람들이 사라졌다. 돌연 나타날 때처럼 예고 없이 순식간에 돌아갔다.
홀로 남은 이연우는 멍하니 그들이 있던 자리를 보았다. 이제 생산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 그들은 사라지고 폐허만 남았다.
지우개가 마구잡이로 휘젓고 지나간 산자락.
인위적으로 갈라진 구름은 자연스럽게 흐트러졌고, 좌우로 나뉜 산은 무너져 내리며 산골을 흙더미로 채웠다.
그리고 정보부 지하 본부의 중심을 수직으로 긋고 지나간 삭제의 흔적. 살아남은 요원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각자 할 일에 집중했다. 구덩이에서 빠져나갈 길을 만들고, 다른 부서에 연락을 돌리고, 정보를 수집하고 전달하고... 
이연우는 문득 힘이 빠졌다. 긴장이 확 풀리며, 팔다리가 축 늘어졌다. 그제야 실감을 느꼈다.
"끝났구나."

- 이연우가 에코백을 슬며시 무릎 옆으로 당겼다. 한 손이 에코백 안으로 들어갔다.
본사라고 하면 막연하게 두려운 느낌이 들었다. 시계수리공 일도 걸렸고, 망설임 없이 보존 계획을 진행하던 비인간적일 처리도 걸렸다.
말 그대로, 인류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떤 짓도 서슴지 않을 이미지.
마크 정은 미소를 지었다.
"이연우 씨의 실적을 치하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아!"
마음이 놓였다. 이연우는 편하게 팔을 늘어뜨렸다. 그러고는 기대를 품은 눈으로 마크 정을 보았다.
"이상기후의 해결법을 찾아 공개하고, 수배자를 사살하여 지우개까지 회수하셨죠. 이건 회사가 무시하면 안 되는 실적입니다. 본사는 당신에게 보상을 주기로 했습니다." 

- "어떤 보상을 주기로 했나요?"
이연우가 한결 부드러워진 어조로 묻자, 마크 정은 서류가방을 열어 백지 한 장을 꺼냈다.
식탁에 놓인 백지 한 장.
이연우는 백지를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백지 가지고 뭐 하냐고.

 


마크 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총기는 정부와 협의해야 해서 시간은 걸리겠지만, 노력하겠습니다. 다른 요구 사항도 쓰십시오."
이어, 회사원으로 일해야 하는 이유를 연달아 적었다.
[정보 우선 제공: 보존 계획이나 이상기후 같은 위기 정보를 우선 제공.]

 

이연우는 이번 일을 겪으며 확실히 알았다.
정보가 힘이었다. 만약 이상기후를 몰랐다면, 아무것도 모른 채로 멸망한 세상을 떠돌았을 것이다. 이런 정보를 알려면 회사에 붙어 있어야 했다.
조금 과한 요구 같기도 했다. 볼펜을 멈춘 이연우가 고개를 들었다.
"가능할까요?"
"이건 요구하지 않아도 저희가 먼저 알려드렸을 겁니다."
마크 정이 천천히 설명했다.
"이번 일로 본사는 당신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멸망 시나리오는 많고, 물론 진행 중은 아닙니다만, 언젠가는 현실에서 진행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품에서 신분증 하나를 꺼내 백지 옆에 뒀다. 이연우의 신분증이었다.
[특수 조사원 이연우.]
"당신은 이제 본사 소속 조사원입니다. 평소에는 한국 지사의 조사원 업무를 수행하다가, 저희가 멸망 시나리오를 드리면 시나리오를 자유롭게 조사하십시오."


이연우는 허탈한 얼굴로 신분증을 보았다.
퇴사 생각이 갑자기 솟구쳤다. 내가 살려고 조사하는 것과 위에서 시켜 조사하는 건 느낌이 달랐다.
그런 이연우의 마음도 모르고, 마크 정은 특수 조사원에 대해 뭐라고 계속 설명했다.
"한국 지사의 명령을 무시할 권한이 있으며, 격멸대대를 호출할 권한이 있습니다. 또한, 정보부에 정보를 요청할 수 있고..."
"예, 그건 나중에 서류로 알려주세요."
흥분이 가라앉은 이연우는 자유롭게 펜을 놀렸다. 펜이 쓱쓱 백지를 채웠다.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요구.
'집 한 채 받아서 이사도 하고, 보상금도 넉넉하게 받고... 더 요구할 게 없는데?'
절반도 넘게 하얗게 남아 있는 종이.
이연우는 천천히 종이를 밀었다. 마크 정은 종이를 들어 이연우의 요구 사항을 쭉 읽었다. 생각보다 소소한 요구들. 그는 지나가듯이 가볍게 물었다.
"지우개는 요구 안 하십니까? 원한다면 이연우 씨에게 드릴 텐데요."
"지우개는 필요 없습니다."


- 이연우는 정말로 지우개에 미련이 없었다.
그는 주사위를 믿었다. 미래 이연우가 주사위로 도달할 수 있는 끝을 보여주지 않았나. 확률 조작. 주사위 하나만 잘 쓰면 된다.
결국, 소멸이니 삭제니 하는 것도 주사위로 할 수 있었다. 마크 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이연우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연우 씨의 요청 사항은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 마크 정이 돌아간 자리.
이연우는 아쉬운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아... 뭐 더 요구할 수 있었을 거 같은데."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서였을까. 머리가 영 잘 굴러가지 않았다.

- 마크 정은 이연우의 집을 나서자마자, 상사에게 전화를 걸어 이연우의 요구를 보고했다.
"이연우의 요구 사항은 이걸로 끝입니다, 이사님."
[굉장히, 음, 소박하군.]
"예. 그런데..."
마크 정은 망설이다가 질문을 던졌다.
"혹시 퇴사한다고 했으면 어떻게 할 생각이셨습니까? 회사에 필요한 인적 자원 아닙니까?"
[하하.]
핸드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퇴사해도 상관없어. 그는 생존주의자야.]
위기에 대한 정보를 살짝만 흘려도 그는 행동할 것이라고, 핸드폰 너머 상사는 웃음기를 섞어 말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는 개인의 생존이 모두의 생존이 되는 법이지.]
회사에 있든 없든, 이연우는 회사에 이익이 된다.

- 섬뜩한 시선들이 일제히 이연우에게 향했다.
저것들이 한 번에 우르르 몰려온다면...
이연우는 침착하게 주먹을 쥐었다. 빠른 심장박동과 혈관을 타고 전신을 휘도는 피. 이연우는 저도 모르게 가쁘게 반복하는 호흡을 느릿하게 가라앉혔다.
'흥분하지 마. 과하게 긴장하지도 마!'
냉정과 침착을 유지해야 산다. 실수하지 않는다. 그래야 적절한 대처를 할 수 있었다.

- "일단은..."
후다닥.
이연우는 계단 근처의 벽에 기대 시야를 최대한 넓게 두었다. 언제 그들이 복층으로 올라올지도 모르니까.
복층과 아래층을 한눈에 담으며, 이연우는 핸드폰을 더듬어 전화부터 걸었다. 상대는 바로 받았다.
[예, 이연우 조사원님!]
"언제 옵니까? 지우개, 언제 도착합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예?"
시야를 유지하느라 차마 핸드폰을 노려보지 못했지만, 이연우의 눈매가 험악하게 좁아졌다.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그쪽에 연락 갔고, 바로 출동했다고는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우개가 저희 쪽 부서가 아니라, 정확한 시간은 모릅니다. 그쪽 연락처 드릴 테니, 그쪽에 연락해 보시는 게...]
우리 담당이 아니니 담당 부서로 연락하라는 소리.
이연우는 뚝, 신경질적으로 통화를 끊고는 핸드폰을 높이 들었다. 이연우는 확 핸드폰을 난간 아래로 던졌다. 빠악!
이연우를 주시하던 최초의 남자의 이마를 강타하는 핸드폰. 모서리로 제대로 찍었다.

- 이연우는 짜증이 담긴 눈으로 남자를 마주 봤다.
'컨테이너에서 탈출했으면 그냥 다른 곳으로 가지, 굳이 나한테 와서 난리야!'
통화로 시작된 울분이 들불이 되어 온 마음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이런 일이 도대체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었고, 세기도 싫었다.
'그냥 삭제 돌려버릴...'
짝!
경쾌한 타격음. 이연우가 자기 뺨을 때렸다. 붉게 부어오른 뺨을 매만지며, 이연우는 중얼거렸다.
"진정해, 살아야지. 화낸다고 사는 거 아니야. 도움 안 돼."

삭제 판정을 굴렸다가 대실패하면, 그래서 저들에게 불멸특성이라도 생기면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런 판정을 굴릴 정도로 몰리지는 않았어."
이연우는 계속 중얼거리며 마음을 다스렸다. 아릿한 고통 속에서 화와 짜증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감정이 물러난 자리를 오직 생존 본능만으로 채웠다.

- 이연우는 이상 개체들을 내려다보다가, 생각했다. 빼곡한 이상 개체.
... 다 여기 있네? 한 번에 다 넘어뜨리면 탈출할 수 있잖아? 주사위!
정신 한 편의 주사위를 보며, 이연우는 미래 이연우를 따라 하듯 손을 폈다. 그러고는 간절하게 말했다.
"이거 한 번만 성공하자. 딱 이것만 대성공은 바라지도 않아. 성공만. 그러니까... 미끄러짐 판정."
데구르르.
주사위가 굴렀다.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이연우는 콱 주먹을 쥐었다. 여전히 주사위는 구르고 있었다. 미래 이연우처럼 원하는 결과에 주사위를 멈추는 능력은 없었다.
하지만 결과가 나오기까지의 찰나, 1초도 채 안 되는 시간. 이연우는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보지 않아도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 듯한, 묘한 확신.
'성공했다!'
성공!
우당탕퉁탕!

 

- 그 묘한 감각에 집중할 시간이 없었다.
이연우는 눈을 빛내며, 곧장 계단을 내려갔다. 한 번에 두 칸씩, 성큼성큼. 넘어진 이상 개체의 명치를 밟으며 껑충 달렸다. 미동 없는 시선들 속에서 그가 멈춘 곳은 완강기 앞. 
'복도나 엘리베이터나 비상계단은 위험해!'
이연우는 허겁지겁 로프를 밖으로 던지고, 벨트를 대강 가슴에 끼고, 총에 맞아 유리 파편이 남은 창틀을 넘어갔다.

싸악.
맨발인 탓에 유리 파편이 발바닥을 긁었다. 붉은 피가 번졌다. 이연우는 이를 악물면서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 협회장이라는 남자는 이런저런 손짓까지 해가며,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제대로 된 이상 異常 개체 몇 개만 만들면, 한계가 사라질 겁니다. 무한한 에너지, 무한한 식량, 무한한 공간, 무한한 수명..."

"저기요."
요원이 지우개를 손 안에서 굴리다가 주먹을 쥐었다. 헬멧을 쓴 요원의 고개가 조금 돌아가며, 정확히 협회장을 보았다.
"당신 때문에 건물 하나를 지웠습니다. 그 안에 있던 피해자가 한둘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그런 말이 나옵니까?"
헬멧을 거치면서 뭉개진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도사린 분노만은 선명하게 전해졌다.
협회장이 눈을 피했다.
"그건 사고였습니다. 의도한 부분이 아니었는데..."

- "이상 개체는 어떻게 통제합니까?"
그 질문에 협회장은 열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듯한, 혹은 키보드를 치는 듯한 손짓.
"컴퓨터 형태의 이상 개체가 있습니다. 특정한 개체에 명령 하나를 부여할 수 있죠. 예를 들어, 사람을 해치지 마라, 주사위를 찾아라, 같은."
이연우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협회장을 보았다. 머릿속에서는 이런저런 생각이 스쳤다.
그 컴퓨터로 주사위를 통제하면...
정신 한 편의 주사위가 느껴졌다. 이연우는 가만히 주사위를 보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굳이 이런 방법을 쓰고 싶지는 않아!'

- 주사위는 자신을 적대하지 않았다. 시간이 멈추면 알아서 저항을 굴려주었고, 그동안 함께 헤쳐 나온 시련도 적지 않았다. 반년이 채 안 되는 시간인데도 정이 붙을 만큼.
거기에 미래 이연우가 보여준 길과 자신이 문 앞의 사람들을 상대하며 느꼈던 묘한 감각이 있지 않나. 굳이 통제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한 몸이 될 수 있다는 느낌. 

- 이연우가 입을 열어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주사위는 어떻게 알았습니까?"
"오래전부터 찾던 이상 개체였습니다."
"... 주사위를요?"
협회장이 미소를 지었다.
"그 주사위야말로 전능에 가까운 이상 개체 중 하나일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감당하지 못하겠지만, 당신은 멀쩡하게 쓰고 있고요."

- 확률 조작이라는 힘.
이연우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미래 이연우의 수준에 다다른다면, 어느 정도는 전능에 가까워지는 거라고 자신도 생각했다.
'그런데도 지구는 망한 상태였지만.'
주사위와 비견할 만한 이상은 많았다. 당장 지우개만 하더라도 끔찍하다. 그 외에도 회사가 가정하고 있는 수많은 멸망시나리오.

- 더 묻고 싶은 말은 없었다. 여러모로 상대할 가치가 없었다.

철컥.
이연우가 에코백에서 권총을 꺼내 쥐었다. 협회장의 표정이 굳어도, 이연우는 총을 까딱여 그의 머리를 겨눴다.
"당신들을 도울 생각은 없으니까, 나한테 줄 보상이나 말해보세요."
보상이 마음에 안 들면, 보상의 가치가 자기 목숨값보다 부족하면 그쪽의 목숨을 보상으로 받겠다는 태도. 방아쇠에 손가락이 협회장의 목숨이 걸렸다.
 

- 이연우가 거추장스러운 우산을 대충 바닥에 내던졌다.
그사이 요원은 무슨 명령을 받았는지, 협회장을 심문하기 시작했다.
"왜 이런 짓을 준비했습니까? 살인병은 어디서 얻었습니까?"
"당신들이 안 도울 때를 대비해서... 성형 기계나 오크통이나 우리 핵심 이상 개체인데, 그것까지 빼앗길 수는 없잖아."
피와 물이 섞여 붉게 물든 웅덩이 위에 주저앉은 협회장이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군인들 헬멧 벗기고 뿌리려고 했는데. 이 텔레비전 때문에."
"살인병, 어디서 얻었냐고 물었습니다."
"오크통에서 나왔지..."
어지럽다는 듯 머리를 흔들면서 벽에 등을 기댄 협회장은 절박한 눈으로 이연우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치료를, 그 주사위로 치료를 제발..."

- 끝까지 이상에 집착하는 모습에 이연우는 고개를 저었다. 온갖 일을 겪으면서도 교육을 철저하게 받는 회사원에 비하면, 행동 양식이나 사고방식이 일반인에 가까웠다. 이상을 마법처럼 여기는 점이 특히.
텔레비전 같은 이상 개체 하나 똑바로 쓰지도 못하면서.

- "파인애플 피자입니다."
잘게 갈린 치즈는 떡처럼 다져졌고, 토마토소스 때문에 붉은빛을 띠었으며, 파인애플과 빵을 비롯한 건더기들이 곳곳에 박혀 있었다.
"이게 말입니까?"
"넣으십시오!"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닌데."
경호원이 넋이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피자였던 것을 깔때기에 쏟았다. 넘치지 않게 조금씩, 꾹꾹 눌러가면서. 마지막으로 깔때기를 탁탁 치면서.

- 그렇게 모든 재료가 오크통에 들어갔다.
요원은 마개 구멍을 코르크로 막은 뒤, 조심스럽게 오크통을 세웠다.
"지금부터 3분..."
꾸르륵. 부글부글.
오크통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수프가 끓는 소리 같기도 했고, 괴물의 위장이 아우성치는 소리 같기도 했다. 심지어 진동까지 느껴졌다.
오크통에 손을 올린 요원이 화들짝 손을 거두어들이며 빠르게 물러섰다. 넋이 나갔던 경호원도, 이연우도 철문 앞까지 물러났다.

- 그 뒤로 살짝 시큼한 맛이 입 안을 쐈다. 앞선 단맛에 치킨무와 피클의 향이 더해진 괴상한 맛.
그리고... 건더기를 씹었다. 피자 치즈가 뭉쳐진 건더기. 파인애플을 비롯한 토핑이 터지며, 묽은 피자 소스의 맛이 느껴졌다.
모든 향과 맛이 뒤섞였다.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자극이 정신을 휩쓸었다. 이연우가 눈을 번쩍 떴다. 저절로 벌어지는 입.
"끄으윽!"
"삼키십시오! 치료제입니다!"
"욱! 이욱!"
이연우는 바닥에 주저앉아 꿈틀거리며, 차마 말이 되지 못한 신음을 뱉었다. 다른 생각을 할 정신이 없었다. 오직 고통받을 뿐.

- 영원 같은 찰나가 지난 후, 이연우가 퀭한 눈을 하고는 하늘을 보았다. 치료제처럼 파래서 보기가 싫었다. 눈을 감고 이연우는 생각했다.
'이건 아니야. 사람 입에 들어가서는 안 돼. 인격을 모독하는 범죄야!'
자신이, 입과 위장이 음식물 쓰레기통이 된 느낌. 하지만 이내 이연우가 눈을 떴다.
'하지만 나만 맛볼 수는 없지!'
이연우가 벌떡 일어났다. 붉은빛이 사라진 맑은 눈이 치료제를 보았다.
"치료제 확실하네요. 빨리 다른 사람들한테도 먹입시다. 아니, 치료합시다."
겨호원과 요원은 물론, 연구원까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경호원이 방역용 분무기를 짊어지고, 연구원이 언제든지 퍼서 먹일 준비를 갖췄다.
"갑시다!"
이연우와 요원은 그들을 앞뒤에서 호위하며, 철문 너머 공장으로 진입했다.

- 넷은 공장의 복도를 걸었다.
경호원은 분무기를 고쳐 잡은 후, 슬쩍 연구원을 보았다. 연구원은 눈을 번뜩이며, 누구 하나 보이기만 하면 치료제를 잔뜩 퍼 올릴 자세를 유지했다.
경호원이 걸음을 늦췄다.
"제가 치료제를 먹이고, 연구원님이 이걸 메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얼렁뚱땅 자신이 통을 짊어지게 되었지만, 이건 적합한 역할 배정이 아니었다.
상대는 살인병에 전염된 사람. 아무래도 보호구를 입은 경호원이 접근하는 편이 효율적이지 않을까?

 

- 특전대원으로서 던진 합리적인 제안에 연구원은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아니지. 내가 할 거야. 내가 느낀 고통을 나눠 줄 거야. 아니면, 자네도 먹어볼 텐가? 그러면 역할을 바꿀 의향이 있어."
"아닙니다. 연구원님이 하십시오."
경호원은 기겁하며 걸음을 서둘렀다. 아무리 효율적인 작전도, 이걸 입에 넣어가면서 수행할 생각은 없었다.

- 제일 앞에서 전방을 경계하던 이연우가 멈춰 서며 뒤로 손을 뻗었다. 앞에 뭔가 있다는 손짓.
모두가 따라 멈췄다. 오직 연구원만이 신나서 물통에 손을 들이밀었다.
"앞에 있나? 감염자면 좋겠는데."
"감염자가 있는데..."
"좋군!"

- 두 손 가득 치료제를 퍼 올린 연구원이 말릴 새도 없이 달려 나갔다. 그러나 몇 걸음을 뛴 연구원은 곧바로 발걸음이 느려졌다. 그는 멍하니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물이 흠뻑 젖은 공장 복도일 뿐이었다. 감염자는커녕 사람도 없었다.
"감염자는?"
"저기 복도 끝에 있지 않습니까."
"... 저기?"
어슬렁어슬렁 쫓아온 이연우가 복도의 끝자락을 가리켰다. 흐릿하게 보이는 복도 끝. 가장 많은 사람이 있던 공장 중앙이 멀리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성형 기계가 널브러져 있고, 경호원과 감염자가 맞서 싸우던 공장 중앙.
연구원이 입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그는 눈동자를 아래로 굴렸다. 새삼 느껴지는 질척한 촉감과 머릿속에서 되살아나는 그, 혼자만 느낄 수는 없는 맛.

- 감염자는 모두 제압되어 어딘가에 묶인 채 몸을 비틀고 있었고, 경호원들은 그들을 포위한 채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죽어, 죽어!"
"조금만 참으십시오, 통신을 받았는데, 곧 치료제가 올 겁니다!"
"치료제 따위 필요 없어! 지금 얼마나 후련한데! 다 죽어어... 세상에, 저게 뭐람?"

 

- 영혼이 절규하는 소리가 넓은 공장을 메아리쳤다.
두뇌에 때려 박히는 비명에 경호원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고, 다른 감염자들은 살인 충동도 잊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살인병이 치료된 회사원이 천천히 일어섰다. 적극적으로 빛나는 눈.
"치료됐습니다. 풀어주십시오. 저도 도와서 먹이겠습니다:"
"훌륭해."
연구원은 회사원을 묶어둔 끈을 풀어줬다. 회사원은 얼른 경호원에게 다가가 두 손 가득 치료제를 퍼 올렸다.

- 그렇게 하나에서 둘, 둘에서 넷, 넷에서 여덟, 완치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감염자가 모조리 치료되는 데는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경호원들은 긴장을 풀지 못했다.
맑은 눈으로 돌아온 완치자들이 한 곳에 모여 대화를 나누었다.
"감염자 더 없습니까?"
"공장 다른 곳에 숨어 있지 않을까요?"
"찾아봅시다!"
"치료제도 더 만들어야지! 몇 사람은 옥상으로 가서 치료제를 만들어! 이건 더 많은 사람이 먹어야 해!"
"어떻게 만듭니까? 아, 말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깨달았습니다. 더 만들겠습니다."

 

- 완치자들은 삼삼오오 조를 짜서 공장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정적이 돌아온 공장.
소대장은 멀리서 이 광경을 보다가, 총을 꽉 잡았다. 바짝 마른 입을 열고 말했다.
"본부, 들립니까? 보고 있습니까? 살인병은 치료되었지만, 다른 것에 감염된 듯..."
"소대장? 맞나?"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
소대장과 경호원들이 일제히 돌아서며 총기를 겨눴다. 총구 끝에는 연구원이 있었다. 푸른 치료제를 두 손에 치덕치덕 묻힌 채.
"경계하지 말고. 내가 이걸 먹어보니까, 살인병 말고 다른 정신적인 이상에도 통할 듯해. 그러니까 여기를 치료제 생산공장으로 만드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연구원이 웃었다.
"소대장이 그런 제안서를 써줬으면 좋겠어. 여러 명이 같은 제안서를 쓰면 상부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겠나?"
"... 생각해 보겠습니다."
"잘 생각해 보라고. 많은 사람을 구하는 방법이니까."

- 한번 문제를 자각하자, 문제점이 계속해서 발견되었다. 애초에, 살인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한다는 행위 자체를 자발적으로 한 것 자체가 이상했다. 원래의 자신이라면 감염자와 가까워지는 행동을 할 리가 없었다.
'치료됐으면 도망쳤어야지. 왜 여기에 남아 있는 거야!'

이연우의 미소가 딱딱하게 굳었다. 뭔가가 잘못됐다.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닌데, 나답지 않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 "... 요원님, 경호원님, 잠시만 이리로"
이연우는 두 사람의 팔을 끌고 철제 계단 아래로 갔다. 두 사람 역시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순순히 따라갔다. 다른 사람들을 한 번 살핀 그들은 목소리를 낮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연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치료제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뭔가 저 사람들 이상해 보입니다. 입사 동기한테 듣기로는, 정신 관련한 이상 개체에 당하면 저런다던데."
"이연우 조사원님은 괜찮습니까?"
"애매합니다."
살인 충동만큼 강렬하지는 않았다. 정신을 은은하게 맴돌며 사람의 의도를 왜곡할 뿐.
하지만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지도 않아, 생존 본능이 강하게 저항하지도 않았다.
'어쨌든 당한 건 확실해!'

- 그들은 남들에게 치료제를 먹이겠다는 열망에 휩싸여 있었지만 지능이 심하게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들은 회사원답게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저들이 치료제 제작을 방해하고 있다고.
노동으로 다져진 근육을 굼틀대며 그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이연우는 그들을 향해 정면으로 다가갔다. 점점 가까워지는 거리, 머릿속에서는 생각이 스쳤다.
'오크통은 경호대원들이 지키고 있으니 이제 치료제를 어쩌다 만들게 됐는지, 오크통을 연구한 결과가 어떤지, 이런 정보부터 수집해야 해. 그래야 치료제를 파악하고 대응하지.'
주사위를 들리더라도 무턱대고 돌리는 것보다는 문제점을 세세하게 파악하고 효율적으로 돌리는 편이 덜 위험했다.
이연우는 그것을 위해서 감염자들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감염자들. 이연우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먹었습니다. 그리고 더, 더, 더 많은 사람한테 맛 보여줄 생각이고요."
감염자들이 멈춰 섰다. 어쩐지 동료를 보는 듯한 눈으로 이연우를 보며 몸을 기울였다.

- "오크통 저 작은 걸로 만들어봐야 뭐 얼마나 만들겠습니까. 오크통의 원리와 치료제의 제작법, 이런 연구 자료를 분석해 치료제 자체를 대량으로 생산할 방법을 찾아야죠."
이연우의 입에서 흐르는 물처럼 흘러나온 말에 감염자들이 눈을 번쩍 떴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고개를 열렬히 끄덕이다가, 얼른 몸을 돌렸다.
"이게 맞지. 다른 사람들한테도 이 말을 전해줘야겠어."
회사원들은 건들건들 옥상 문으로 돌아갔다.

- 이연우는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요원에게 물어볼 말이 있었다. 하지만 정작 요원과 경호원은 몇 걸음이나 떨어져 있었다. 경계하듯 이연우에게 고정된 헬멧.
이연우가 의아하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이연우 조사원님, 멀쩡한 거 맞습니까? 방금 굉장히 진심 같았는데요."
이연우의 말이 그럴듯했기에 생긴 의심. 이연우는 헛웃음을 흘렸다.
"제가 진짜 심각하게 감염됐으면 이런 귀찮은 짓은 안 하죠. 그냥, 상수도 찾아가서 물을 치료제로 바꾸려고 했겠죠. 아니면 치료제의 비가 내리게 한다든가. 안개도 괜찮겠네요."
서슴없는 발상과 발상을 이뤄낼 능력.
헬멧에 가려진 요원의 얼굴이 굳었다. 지우개를 쥔 손이 살짝 떨렸다. 지우개를 보급받았기에 생긴 자신감이 흔들렸다.

'그 지독한 멸망주의자도 이 사람한테 당했지. 만약 이 사람이 회사 소속이 아니었다면...'

 

- 그 생각은 이어진 이연우의 질문에 멈췄다.
"그보다는 그 지우개로 사람 안의 치료제만 지우지는 못합니까? 저번에 보니까, 멸망주의자는 자기 몸에 침투한 이상도 지우던데."
"... 그게 가능하다고요?"
잡생각이 완전히 사라졌다. 요원은 도저히 이해가 안 돼, 손에 든 지우개를 물끄러미 보다가 살짝 손을 까딱였다.
옥상의 콘크리트는 내버려 두고 내부의 철근만 지워보려는 시도. 하지만 결과는 단순했다. 옥상이 통째로 지워졌다.
새로 뚫린 구멍을 쳐다보던 요원이 이연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런 건축물도 안 되는데, 어떻게 사람 몸에 침투한 이상만 지웁니까? 사람이 통째로 지워질 텐데."
"그 사람은 하던데... 막 확률 같은 것도 지우고..."
혼자 중얼거리던 이연우가 문득 깨달았다.
'미래의 나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 인간도 지우개와 하나가 됐구나!'
하긴, 주사위가 다섯이나 모여 구르는 것도 꾸역꾸역 막아냈다. 평범하게 이상 개체를 이용하는 수준은 훨씬 뛰어넘은 것이다.

- 잠금 화면이 자동으로 풀렸다.
불쑥 목소리가 들렸다.
"비밀번호도 없어? 보안이 개판이잖아?"
침착하게 고개를 돌려보니, 가장 먼저 치료제를 먹었던 연구원이었다. 손에는 여전히 치료제가 묻어 있었다. 그는 옷자락에 짙푸른 치료제를 쓱쓱 닦고는 이연우를 옆으로 밀었다.
"비켜봐. 연구자는 나니까."
타닥타닥 키보드를 치면서 연구원은 이연우를 힐긋 바라보았다.
"네 제안은 훌륭했어. 역시 대량생산 공장으로 만들어야지. 저 친구들은 멍청하게 오크통만 쓰려고 해서 얼마나 답답했는데. 직관이 여간 부족한 게 아니야."
"별거 아닙니다."
"넌 오래 살아남을 거야. 핵심을 파악하는 직관이 있는 사람이 이 바닥에서 오래 살아남지."
그렇게 쓸모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누군가가 이연우의 어깨를 쳤다.
"... 조사원님, 잠깐!"
요원이 헬멧 쓴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곳에는 지우개가 지나간 금고가 있었다.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진, 서류 뭉치가 한가득 쌓여 있는 금고.
이연우가 살며시 물러나도, 연구원은 모니터만 보느라 눈치채지 못했다.
 
- 안심하기에는 둘 다 문제가 있는 방법들. 치료가 가능할지 모르는 전문가와 리스크가 존재하는 주사위.
그때 문득 요원이 이연우를 보았다. 증강 현실 헬멧의 표면에 비치는 이연우의 얼굴. 진심으로 가슴이 답답한 표정.
연구원이나 다른 완치자 같지 않았다.
"이연우 조사원님은 왜 멀쩡합니까?"
"안 멀쩡해요. 이런 일을 벌인 협회장이나 그쪽 사람들 입에 치료제 막 넣어주고 싶어요. 그냥 참는 거지."
이연우의 눈동자가 살짝 내려가 요원의 지우개를 보았다. 처음으로 주사위 자체를 막아냈던 지우개는 알게 모르게 이연우의 정신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꼭 트라우마처럼, 지우개만 보면 그 당시의 충격이 떠오르며 생존 본능이 곤두설 정도로.
"지우개 없었으면 살인병도 못 참았을걸요. 치료제도 아마 한참 지나서 깨달았을 겁니다."
그 말을 곱씹어보던 요원은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극도의 위협을 느끼면 일단 정신은 차린다는 말입니까?"
"일단 저는 그랬는데..."
그게 지금 중요한가? 의아한 마음에 요원을 돌아보니, 요원과 경호원의 헬멧이 오직 연구원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 "지금 공장 부지에 진입했답니다. 정신 정화 전문가가 늦장을 부려서 이제야 도착했다고 합니다. 무슨 시간이 안 맞는다고 투덜댄다던데."
"그쪽 전문가는 항상 그렇지 말입니다. 계절이 아니다, 날씨가 안 좋다, 별자리가 영 아니다. 맨날 불평만 하지 않습니까."
경호원들은 짜증을 내면서도 어슬렁어슬렁 공장 문을 열기 시작했다.
둔중한 소음을 내며 열리는 철문.
그 너머로, 방역복을 입은 방역부대가 진입했다. 방역 도구와 무거운 장비를 든 그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작전대로 움직여! 물탱크에서 살인병 빼낼 사람은 옥상으로 가고, 나머지는 공장에 뿌려진 살인병부터 회수해!"
 
- 메뚜기 떼처럼 방역부대가 지나간 자리에는 사막처럼 바짝 마른 공장만 남았다.
그리고 뽀송뽀송한 공장 입구로 웬 마법사 같은 사람이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이상한 고깔모자를 쓰고 두툼한 가운을 걸친 사람은 불퉁한 표정으로 곱지 않은 말을 내뱉었다.
"참 나, 정화가 그냥 이루어지는 줄 아시오? 마법이 얼마나 섬세한 기술인데, 오염자인지 뭔지, 다 가둬뒀다가 천천히 해도 되는걸. 뭘 이렇게 서두르는지, 원."
"... 부사장님도 감염됐습니다."
"봤소. 제일 먼저 처치도 했고. 어디 다른 오염자들이나 봅시다. 빨리 처리하고 돌아가야겠어."
소대장이 제일 가까운 이연우를 보았다. 어쨌든 치료제에 감염된 사람이니까.
하지만 이연우는 성큼 나서며, 공장 구석에 모아둔 완치자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저기 모여 있습니다."
"응? 얌전한데?"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정신이 오염된 사람 같지 않았다.
"협박이 잘 통해서."
"허. 그러면 내가 이렇게 서두를 필요도 없었잖소. 아니, 됐소. 더 말하지 마시오."

 

- 주섬주섬.
마법사인지 전문가인지 모를 사람이 가운 안에서 유리병을 꺼냈다. 그는 검은 물감 같은 것이 찰랑대는 유리병을 기울여 공장 바닥에 기묘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언뜻 봐서는 뭔지 모르겠는 문양.
"한 명씩 데려오시오. 방역부대가 방해하지 못하게 하고. 그리고 정화는 못 하오. 지금 상황이 안 맞아. 그쪽 하고는 연결할 수 없소."

- 경호원이 완치자를 데리러 간 사이, 이연우는 꼬치꼬치 질문을 던졌다.
"정화가 아니면 뭡니까? 부작용이나 후유증은 없습니까?"

"아, 방해하지 마시오! 이거 한번 실수하면 처음부터 다시 그려야 하니까!"
버럭 고함을 내지르면서도, 문양을 그리는 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일정하게 쏟아지는 물감과 유려한 손짓.
이연우는 얌전히 입을 다물고, 한 걸음 물러서 관찰하기 시작했다. 치료되는 과정을 직접 보면 되니까.
몇 걸음 걸어가며 문양을 완성한 마법사가 구부렸던 허리를 폈다.
"준비됐소."

- [어디야! 나한테 뭘 한 거야! 마법사! 네 입에도 치료제를...!]
울분에 찬 목소리가 메아리치는 때.
날름!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사포처럼 꺼끌꺼끌하고 거친 무언가가 정신을 훑고 지나갔다. 정신이 그대로 뜯겨 나가는 듯한 감각. 영혼에 구멍이 뻥 뚫린 듯한 공허감.
[끄으윽! 내 내 정신! 돌려줘! 먹지 마!]
회사원이 절박하게 손을 뻗으며 비명을 내지르는 때였다. 세상이 돌아왔다.
어딘지 알 수 없는 심연에서, 공장으로.

 

- "다음."
귀찮다는 듯 손짓하는 마법사와 회사원을 유심히 바라보는 이연우를 앞에 두고, 회사원은 털썩 주저앉았다.
주룩주룩 눈물이 쏟아졌고, 짐승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정신의 공백에서 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박탈감.
"아, 아... 안 돼. 내 거야. 내 정신이야."
"아, 사람도 많은데 빨리 치우시오. 다른 오염자들 처리해야 하니까."
"부작용이 심한데..."
"시간 지나면 괜찮아지니까. 아니면 치료하지 말까?"
회사원은 경호원의 손에 붙잡혀 짐짝처럼 끌려갔다.

- 이후로도 비슷비슷했다. 치료가 끝난 후, 울고, 잠들고, 난동을 부리고, 심각하면 팔을 움직이지 못하거나, 식물인간이 되고.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이연우가 슬그머니 물러났다. 아무리 봐도 부작용이 심했다.
'이게 치료?'
손가락이 더러워졌다고 팔을 자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차라리 기억 소거제를 마시는 편이 나았다.
이연우는 에코백에서 기억 소거제를 꺼내 들고, 요원을 바라보았다.
"그거 헬멧 다 기록되죠? 이거 마신 뒤에 기록, 저한테 보여주세요."
"...."

- 이연우가 심호흡을 반복한 후, 기억 소거제를 조금 들이켰다. 물처럼 아무 맛도 없고 냄새도 없는 기억 소거제.
혓바닥 위에서 기억 소거제가 사라졌고, 기억도 증발했다. 이연우의 눈이 잠에 취한 사람처럼 풀렸다. 

그리고 몇 초 후, 이연우가 눈을 부릅떴다.
극도로 확장된 동공.
낯선 장소, 낯선 상황.
"여긴..."
이연우는 사방을 돌아보며 뒷걸음질을 쳐, 공장 입구 쪽으로 물러났다. 머릿속에서는 기억이 빠르게 재생됐다. 문 앞의 남자를 상대하고...
지우개를 든 요원을 따라 어디로 갔는데...


- "이연우 조사원님, 어디까지 기억나십니까?"
"당신 오토바이 타고 이동한 건 기억나는데, 내가 기억 소거제를 마셨습니까?"
손에 쥔 기억 소거제 병을 보니 조금 줄어들어 있었다. 이연우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내가 기억 소거제를 자진해서 마셨다고? 그리고 여긴 또 어디고, 무슨 상황이야?'
기억 소거제를 마신 것도 이상했고, 마법진을 그려놓은 마법사도 이상했고, 한쪽에 모여 울부짖는 회사원들도 이상했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이연우의 눈동자를 본 요원이 말했다.
"헬멧을 드릴까요? 이곳에 전부 기록되어 있습니다."
"잠깐만요. 제가 기억 소거제를 마셔야 했을 문제는 해결됐습니까?"
"남들에게 뭐를 먹이고 싶거나 고통을 나눠 주고 싶습니까?"
"아뇨. 그런 위험한 짓을 내가 왜..."
멀쩡했다. 요원이 헬멧 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헬멧을 밀어 올리기 시작했다.
"치료됐습니다. 헬멧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회사 정보망으로 기록만 따로 보내주세요."

- "옆에 창문 보이시나요?"
"... 보입니다."
이연우의 얼굴에서 의심이 조금 물러났다. 그는 이제 귀를 기울여 마크 정의 설명에 집중했고, 눈을 반짝이며 집을 둘러봤다.
'안은 생각보다 튼튼한데?'
일단, 엉망인 첫인상보다는 좋았다.
마크 정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이연우의 성향을 파악하고 그에 딱 맞는 건물을 골랐다.
겸사겸사 일반인과 격리도 하고, 회사의 시스템 안에 두기도 하고.
'그래도 싫어할 리가 없지. 내부를 보면 더.'
마크 정은 집 안으로 들어가, 현관 바로 옆의 창문으로 걸어갔다. 창틀 위에 달린 버튼으로 올라간 손가락.
"창문 자체도 특수하지만, 유리에는 한계가 있죠. 유리가 버티지 못할 때를 대비한 방폭 셔터입니다."

- 차르륵.

버튼을 누르기 무섭게 셔터가 내려오며 창문이 물샐틈없이 막혔다. 마크 정이 방폭 셔터를 두드리고, 상하좌우로 막 흔들어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연우도 시험 삼아 몇 대 두드렸다. 손바닥에 닿는 그 차가운 금속의 감촉. 만족스러운 눈빛을 한 이연우에게 마크 정이 말했다.
"하지만 이건 포장지일 뿐입니다. 진짜는 아래에 있죠."

"아래요?"
지금 본 성능만 해도 마음에 쏙 드는데, 아래에 뭐가 더 있다는 말일까.

- 마크 정이 집 중앙으로 걸어갔고, 이연우는 병아리처럼 그를 졸졸 따라갔다.
그들의 걸음은 바닥에 둥글게 뚫린 문 앞에서 멈췄다. 탱크 뚜껑 같은 해치와 지하로 이어진 수직 통로와 통로에 지그재그로 박혀 있는 발판.
"지하 셸터입니다. 내려가시죠."
"오..."
이연우의 감탄이 수직 통로에 메아리쳤다. 그는 냉큼 몸을 던져 지하로 내려갔다. 마크 정은 곧바로 따라 들어가며, 설명을 시작했다.
"회사가 방주를 완성하기 전, 멸망 위기를 대비해 세계 곳곳에 셸터를 잔뜩 지었습니다."
"그럼, 여기가...?"
기대가 잔뜩 담긴 이연우의 목소리.
마크 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50명의 인간이 생존하도록 준비된 셸터입니다."

- "셸터의 핵심, 오라클 시스템입니다."

"그게 뭡니까?"
"예언자는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예언자가 미래를 고정하는 것이라는 이론에 입각해 만든 안전 시스템이죠. 오라클 시스템은 셸터의 주변 환경을 일정하게 유지해 줄 겁니다." 
자연재해를 피하는 시스템. 셸터에는 지진이나 폭우나 산사태를 예방하는 체계를 구비했다.


- 방을 하나 볼 때마다, 이연우의 눈에 광채가 더해졌다. 흥분과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눈, 이연우는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거의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지경이 되었다.
"이건, 정말... 정말 마음에 드네요. 이걸 저한테 준다는 말입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대여입니다. 평소에는 이연우 씨 집으로 쓰다가, 멸망 위기가 발생하면 다른 회사원도 입주할 겁니다."
쉬지 않고 말한 마크 정은 목이 아픈지 눈살을 찌푸리며 목을 매만졌다. 헛기침을 몇 번 뱉은 그가 마지막 방으로 안내했다.
"상황실입니다."
이연우가 서둘러 들어간 그곳에는 여러 모니터와 복잡한 기계장치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셸터의 모든 시스템을 총괄합니다. 비상 통신망은 물론, 회사의 정보망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 순간 한계점을 뚫었다.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미래 변동성이 증폭? 왜?"
잠깐 생각하던 이연우가 탄식했다. 실망감이 담긴 목소리.

"아!"
"아니, 이연우 씨. 이게 원래 이런 셸터가 아닙니다. 문제가 생길 리가 없는데."
마크 정이 다급하게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이연우는 고개를 저었다.
"제 주사위 때문 같습니다."
확률을 마음대로 가지고 노는 주사위, 미래를 안전한 방향으로 고정하는 오라클 시스템이 주사위의 존재를 버티지 못하고 고장 난 모양이었다.
거의 수전증처럼 손을 떨며 모니터를 두드리던 마크 정이 딱 멈추더니, 짤막한 탄성을 내질렀다.
"아. 확실히, 이건 못 쓰겠네요."
그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오라클 시스템을 꺼버렸다. 은은하게 귀청을 때리던 경보음이 사라지고, 셸터 특유의 적막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 "그걸 다 말하면 안 되지."
이연우의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텔레비전 안의 아나운서가 단말마의 신음을 뱉으며 그대로 쓰러졌다.
방송이 꺼졌다. 다시 노이즈를 내뿜는 텔레비전.
이연우는 딱딱하게 굳어 있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턱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이연우보다 오히려 어려 보이는 얼굴을 한 미래의 이연우가 있었다.

- "이상기후는 잘 해결한 거 같고."
"여...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사정없이 떨리는 현재 이연우의 목소리.
미래 이연우가 히죽 웃었다.
"너를 죽이고 네 자리를 차지하려고. 여기는 모두 멀쩡히 살아 있잖아?"
그 말에 현재 이연우의 머리가 하얗게 질렸다. 차라리 지우개가 상대라면 싸울 수라도 있지, 미래의 이연우는 방법이 없었다. 꽉 쥔 현재 이연우의 주먹이 하얗게 질렸다.
'주사위를 이용해 자폭을 각오하면...'
미래 이연우는 웃으면서 그런 현재 이연우의 어깨를 두들겼다.
"장난이야. 진짜 그럴 거면 진작에 했지. 애초에 그런 위험한 짓은 안 하고."

- "아... 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이연우를 뒤로하고, 미래 이연우가 대충 아무 자리에나 몸을 기댔다. 그는 이연우를 향해 손짓했다.
"내가 이상기후 해결법 알려줬잖아. 그 대가를 받으러 왔어."
"어떤 대가 말입니까?"
현재 이연우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지만,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심장 떨어지는 장난이나 치고. 대가도 당연히 치러야겠지만, 본인이 직접 움직이면 모든 일을 다 이룰 수 있을 텐데.
"제가 도울 일은 없지 않습니까. 능력이..."
"방주. 멸종 방어 장치인 방주 좀 찾아서 나한테 보여줘. 내가 다른 문제는 거의 다 해결했는데, 그걸 못 찾았어. 뭔지도 모르겠고."
미래 이연우가 허공을 보았다. 무수한 확률을 헤아리는 감각으로도, 원하는 가능성을 끌어오는 힘으로도 회사 최후의 희망인 멸종 방어 장치만큼은 찾을 수 없었다.
그의 혼잣말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세상도 이제 재건해야지."

- [멸종 방어 장치: 방주.]
단어만 몇 번 들었지, 위치는 물론이요, 실체조차 모르는 무언가. 회사에도 정확히 아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방주..."
현재 이연우는 중얼거리다가 눈동자만 대굴대굴 굴리면서 미래 이연우의 눈치를 살폈다.
"그걸 제가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나도 빨리 찾아달라고는 안 해. 그냥, 네가 그나마 가능성이 있으니까 부탁하는 거야!"
미래 이연우는 셸터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지나가듯 말했다. 가벼운 몸짓과 목소리였지만, 사람이 사람인지라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다.
현재 이연우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저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찾아나 보라고. 찾기만 하면, 보수도 챙겨줄 테니까."
미래 이연우가 현재 이연우와 그의 주변에 놓인 텔레비전이며 에코백 따위를 보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생각을 정리하는 듯, 깊게 잠긴 눈동자.

- "보수라면 어떤?"
"고민 중인데, 셸터를 업그레이드해 줄까? 오라클 시스템 고장 났을 거 아냐."
"아뇨. 그건 괜찮습니다."
이런 귀중한 기회를 고작 셸터에 쓸 수는 없었다. 차라리 개인의 생존 능력을 올려주는 쪽이 좋았다. 이상 장비나 주사위를 활용하는 노하우 같은 것.
그 생각을 고스란히 말하자, 미래 이연우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잘 아네. 위기 상황에서 결국 믿을 건 자신 하나뿐이지. 자신의 능력이든, 지닌 이상이든. 셸터는 활용하기 힘들지. 그러니까 보수는 네가 골라."
"그러면 보수는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 방주 찾으면 날 대상으로 주사위를 굴리고, 그러면 감지하고 찾아올 거야."
미래 이연우가 슬슬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분간은 나도 이 세계에 있을 거야. 오랜만에 햄버거나 먹어야겠어. 물론, 나는 나대로 방주를 찾아보고."
당장 떠나려는 듯, 미래 이연우가 손을 펼쳤다. 확률을 헤아리는 손짓. 그가 손가락 사이로 꿈틀거리는 확률을 붙잡아 끌어오려는 순간.
현재 이연우가 다급하게 외쳤다.
"선금! 선금으로 하나만 주십시오!"
"... 무슨 선금?"
미래 이연우가 확률을 붙잡은 채 물었다. 그 얼굴에는 조금 황당한 감정이 어려 있었지만, 현재 이연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눈을 피했다.
"확정 뽑기권 하나만 만들어주십시오. 소환 거부로요. 괜히 남들한테 끌려갔다가 못 돌아오면 방주도 못 찾지 않습니까."
"어휴."
미래 이연우는 한숨을 쉬며 반대쪽 손을 쥐었다. 동시에 이연우의 머릿속에 확정 뽑기권이 생성되었다. 실패 뽑기권만 뽑던 이연우가 행복한 웃음을 지을 때였다.

- 미래 이연우의 얼굴이 음침하게 가라앉았다. 질척하게 가라앉은 눈동자.
순간 현재 이연우의 감각이 예민하게 벼려지더니, 언뜻 미래 이연우의 육체가 무너지고 기묘한 형상이 드러나는 듯했다.
피와 살이 아니라, 확률과 가능성의 실타래로 이루어진 사람이 아닌 무언가.
미래 이연우에게서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협박을 하고 싶지는 않은데, 너나 나나 목숨이 위험해야 전력으로 움직이잖아."
현재 이연우를 확실하게 움직이는 법.
기묘한 형상 앞에서 눈을 크게 뜨고 당장 튀어 나가려는 짐승처럼 몸을 웅크린 현재 이연우는 귀를 쫑긋 세웠다.
"네가 방주를 못 찾으면, 내 세계를 재건하지 못한다면, 그 희망이 사라진다면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미래 이연우의 형상이 돌아왔다. 원래의 육신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허공의 한 점을 보는 눈.
마지막으로 히죽 웃은 미래 이연우가 주먹을 꽉 쥐었다. 가능성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셸터에서 사라진 미래의 이연우.
적막한 셸터.
혼자 남은 현재 이연우는 한동안 돌처럼 굳어 있다가 느릿하게 손을 올려 입가를 매만졌다. 체온을 빼앗긴 듯, 차가운 손가락과 입술.

- 평행 세계의 이연우들에게 당했다는 보고서를 한참 보던 그는 문득 눈을 감았다.
'지우개...'
지우개는 그에게도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를 한 번 죽였으니까. 그래서 인간의 몸을 잃어버렸으니까.
그때의 기억은 깊은 상처로 남아, 지워지지 않는 악몽이 되었다.
이상기후로 멸망한 세계를 헤매다가 간신히 찾아간 셸터. 어찌어찌 관리자를 설득해 입주하자마자 천장이 날아간 셸터.
[안 되지. 이러면 안 되지. 모두 죽어야지.]
미친 소리와 함께 크게 내리그어진 지우개와 그 궤적에 걸린 자신의 몸뚱어리.
더듬더듬.
문득 미래의 이연우가 자신의 머리와 가슴팍을 매만졌다. 온기가 느껴지는 인간의 피부였지만, 가능성을 높였을 뿐, 실상은 확률과 가능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 살아 있으면 됐지."

죽은 뒤 살아나서, 몸의 절반이 이상으로 대체되어 주사위와 한 몸이 되고 확률을 헤아리는 감각을 얻었다.
그렇게 미래의 이연우는 확률을 쏟아붓고 지우개는 확률을 지우는 싸움이 일어났고, 끝내 더 높은 출력으로 이겨내지 않았나.
'순수한 인간의 몸보다는 이게 생존에 도움이 되잖아. 나쁘지만은 않은 죽음이었어!'


- 미래 이연우는 포장한 햄버거 봉투를 주워 든 후, 슬슬 떠날 준비를 했다.
남은 콜라와 종이 쓰레기 따위를 분리수거 통에 쏟아붓던 중이었다.
그가 갑자기 멈췄다. 그는 콜라를 쏟아 버리다 말고 자신의 손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음울하게 가라앉은 표정과 목소리.

"못 막았네."
자신에게 다가오는 가능성을 툭툭 튕겨내던 중, 한순간 파도 같은 가능성의 무리가 들이닥쳤다.
언뜻 느낀 것만 해도 원격 초상화, 황금만능주의, 맵핵, 리모트뷰잉, 오라클 시스템, 추적자, 빅 브라더의 악마 등등...
서로 다른 의도를 품은 데다 전부 다른 가능성이었기에, 단번에 쳐내지 못했다.
몇 가닥의 가능성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며 현실로 이루어졌다.
"저기요. 다 치우셨으면 비켜주실래요?"
뒤에서 기다리던 사람이 재촉했다. 미래의 이연우는 그를 힐끗 보며 손가락을 튕기려다가, 생각을 바꿔 얼른 뒷정리를 마쳤다.

- "아니, 이러면 나는 어쩌라고!"
미래 이연우는 현재 이연우의 말은 들은 체도 안 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 한순간에 바뀌는 세상 속에서 울상을 지은 현재 이연우는 문득 의문을 품었다.
'... 멸망한 세상에서 살았지 않나? 회사의 조사 과정을 어떻게 저렇게 상세하게 알지? 그리고 방주를 찾아 방문한 세계가 여기 하나뿐일까?'
섬뜩한 위험이 느껴졌다.
이렇게 끌려가 회사에 해를 끼치는 현장에 함께하는 것도. 미래의 이연우가 조사를 피하는 이유도.
'이러면 나도 마냥 협조하지는 못하지!'
이연우의 눈이 가라앉고 살길을 찾아 번뜩였다.

- 생존 본능이 꿈틀댔다.
미래의 자신이었고 이상기후 해결법을 주었기에 자연스럽게 마음을 놓았지만, 한번 경계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다른 관계를 모두 배제하면, 그는 위험 레벨 6이나 7쯤 되는 이상 개체다. 그게 자기 옆에서 자신을 강제로 끌고 다니고 있다.
'회사에 연락할 방법을 찾아야 해. 그리고 우선 이 인간, 아니... 인간인가? 어쨌든 미래의 나를 분석부터...'
고속으로 회전하는 생각이 갑자기 멈췄다.
한순간 뒤바뀐 세상. 어딘지 모를 산맥의 한가운데.
황혼이 저물어가는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히 떠 있었고, 얼룩처럼 흐린 구름이 어두운 하늘에 녹아들고 있었다. 그 아래 척박한 산맥. 두 사람은 셸터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부지런히 걷던 현재 이연우는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정신 지배는 안 합니까?"
"누구? 너?"
"예. 그게 더 확실하지 않습니까"
미래 이연우의 생각과 능력을 가늠하기 위해 던진 질문.

 

- 미래 이연우가 픽 웃는 소리를 내더니, 실타래들이 일렁였다. 

"정신 지배하면 네 주사위가 꾸준히 저항 굴릴걸. 네 주사위는 나도 못 건드려. 혹시 저항에 성공하면? 네가 가만히 있을까?"
"아뇨. 가만히 안 있죠."
정신을 지배당했는데 얌전히 있을 리가. 현재 이연우는 고개를 저었다.
'나를 이용하려는 게 목적이고, 언제 어디든 쫓아와 해를 끼치려는 적이라면...'
굳이 정신 지배하지 않아도, 도울 거라며 겉으로는 협력하는 척하면서 어떻게든 상대를 제거할 방법을 궁리할 것이다.
문제는, 그 속내를 서로가 너무 잘 알기에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너랑 싸우면?"
"당신이 이기겠죠. 전 죽고요."
그리고 이연우와 이연우가 싸우면 한쪽은 반드시 죽어야만 했다. 


- 침묵이 내려앉았다. 실타래가 다시 풀려나더니 벌레의 다리처럼 허공을 기어 다니는 듯했고, 나무 인간은 사시나무처럼 떨며 눈을 꼭 감았다.
무슨 사고가 터질까 봐 현재 이연우가 미래 이연우의 눈치를 볼 때였다.
문득 미래 이연우에게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건 처음 보는 보안 방식인데."
대대적인 인식개변, 아니... 근원적인 정보 개변에 가까웠다.

"좋군. 확실히 제대로 진행되는 듯해. 이번에는 방주를 찾을 수 있겠어."
'보안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의미심장한 발언에 의문을 품은 질문들.

 

 

- 미래 이연우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가 항상 쥐고 있던 가능성이, 그가 위험에 빠질 확률과 방주를 찾을 가능성이 비례하듯 함께 상승하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희망적인 상황.
'역시 내 목표가 방주인 걸 알았나 보군. 조금 더 거칠게 진행해도 괜찮겠어!'
상황이 좋았다.
난장판을 벌일수록 회사는 방주를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할 ㅅ이었고, 회사의 움직임이 요란할수록 중요한 단서가 남을 것이었다.

- 식은땀을 흘리며. 이 사실을 알게 될 미래 이연우의 반응을 걱정하면서.
[방주는 프로파간다의 일종이지. 회사가 이렇게 대단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회사는 인류를 지킬 수 있다. 어떤 재난을 맞이해도 인류는 명맥을 유지할 것이다...]
이사의 말이 이어졌다.
[적대 집단을 위협하고, 방주라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힘을 낭비하게 만들고, 회사원은 희망을 잃지 않고. 그를 위한 정보 공작...]

 

- "사실인가?"
문득 목소리가 들렸다. 기괴하게 변조된 목소리.
그리고 동시에 요원들이 쾅쾅 머리를 책상에 박았다. 책상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잔뜩 일어났다.
징조조차 없던 난데없는 습격. 기괴한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방주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갈라지고 찢어지는 목소리. 실타래 형상의 미래 이연우가 이쪽을 보고 있을 카메라 앞에 섰다.
이연우는 떨리는 손을 붙잡았다.
'어디로 간 게 아니라, 내 주변에 숨어 있었다고?'
처음부터 추측이 잘못됐다. 그리고 그건 지금 상황이 상상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 통신이 끊겼다. 까맣게 죽은 화면이 스크린 위로 쏘아졌다. 침묵이 내려앉은 회의실.
쓰러진 요원들이 코를 고는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이연우는 가볍게 변한 에코백을 뒤지려다가 생각을 바꾸고 몸을 돌렸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돌아가는 길에 천천히 생각을 정리해야겠어.'

뜬금없이 오게 된 크립티드연구동호회.
택시를 타든, 대중교통을 이용하든 셸터로 돌아가려면 시간이 걸렸다. 생각을 정리하기 충분한 시간이.
이연우는 크립티드연구동호회를 나와 평야 바깥까지 걸어간 후, 택시를 잡아탔다.

- 과묵한 택시 기사가 운전에 집중하는 동안, 이연우는 가능성의 실타래를 받은 에코백부터 뒤졌다.
'이상 개체로 변했나? 이게 보상인가?'
미래 이연우가 뭔가 정보를 얻긴 한 모양이었다. 온갖 공구로 불룩하고 무겁던 에코백이 홀쭉하고 가볍게 변했다.
그렇다고 공구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텅 빈 에코백 안으로 손을 깊이 쑤셔 넣으면 공구가 만져졌다. 꼭 마법 가방처럼.

'이러면 좋지!' 
무게나 공간의 제한은 있는 듯했지만, 평범한 에코백보다는 훨씬 좋았다.

 

- '이런 보상을 줄 정도면 뭘 얻은 건데!'
이연우가 괜히 에코백 안에 넣은 손을 휘저으며 생각에 잠겼을 때였다. 휴지나 메모장 종이 같은 것이 손에 잡혔다.
무심코 꺼내보니, 햄버거집의 네모난 휴지 몇 장이었다. 프린터로 찍은 듯한 문자가 인쇄된 휴지.
이연우는 휴지를 무릎 위에 두고 가만히 고개를 숙여 글을 읽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고생했다. 나는 돌아간다. 널 다시 찾을 일은 없을 거야. 앞으로는 너나 나나 서로 얼굴 봐서 좋은 일은 없을 것 같거든. 불편하기만 할 거 아냐.] 
미래 이연우가 남긴 글귀가 휴지 몇 장에 걸쳐 인쇄되어 있었다.
'무슨 확률을 어떻게 조작했길래...'
이런저런 생각에 빠지며, 이연우는 글을 읽었다.
[방주가 깨어나는 조건은 찾았어. 하하. 확률과 가능성만 믿고 그 의미를 해석하지도 못했던 거야. 내가 오만했지.]
다음 장.
[보상은 에코백을 업그레이드해 주는 걸로 끝이야. 널 보니까, 크게 도와줄 건 없어 보여. 그럼 잘 살아남으라고.]
끝.

- 이연우는 휴지를 몇 번이고 보다가, 다시 에코백에 집어넣었다. 
이연우는 고개를 돌려 고속도로를 달리는 택시의 창문 바깥을 보았다. 빠르게 지나가는 주변 풍경과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들.
그리고 흐릿한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
"진짜 끝났네."
우우웅거리는 차 소리에 묻힌 작은 목소리.
미래의 이연우가 방주의 단서를 찾고 떠났다는 사실 하나만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연우가 눈을 감았다.
'지금 내가 해야 할 건...'
미래 이연우의 실수를 보고 배울 때였다.
'주사위에 의존하지 말기. 그래도 확률을 조작하는 감각을 얻을 것. 하지만 근본적으로, 나 자신의 생존 본능과 능력을 갈고닦을 것.'
잠자듯이 편하게 등을 기대고 평온하게 숨을 쌕쌕거리며, 이연우가 내면에 침잠해 들어갔다. 

 

- 떠올린 기억은 세 가지였다.
주사위의 결과를 직감했던 감각, 미래 이연우의 형상을 엿봤던 감각, 끝내 실타래를 쳐냈던 감각.
좀처럼 잡히지 않는 감각을 좇아 이연우가 고개를 꾸벅이다가 잠들었다.
 
- 건물 바닥의 해치를 열고 아래로 내려간 끝에 도착한 셸터의 복도.
이연우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 왜 이렇게 안 좋아 보이지."
최후의 셸터를 보고 왔기 때문일까. 그토록 마음에 들었던 셸터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연우는 찝찝한 표정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음을 옮겼다. 복도의 질감이나, 콘크리트 벽의 느낌이 굉장히 낡아 보였다.
상황실은 그나마 나았지만, 한번 세게 온 체감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 문득 유지유가 부스스 몸을 일으키고는 흐린 눈으로 이연우를 보았다.
"그거 집 맞아요? 말만 들어보면 비상 셸터 같은데."
"셸터 맞습니다. 50명까지 살 수 있는, 회사가 지은 셸터라던데요."
유지유의 눈에서 잠기운이 걷혔다.
"셸터라고요? 그러면 회사가 건물 준다는데 셸터를 받은 거예요? 무슨 서울에 아파트나 이런 거 거부하고?"
황당한 목소리와 눈빛.
이연우는 도리어 이상하다는 듯 그들을 마주 보았다.
"아파트를 왜 받습니까? 그럴 거면 튼튼한 셸터를 안전하게 받아야죠. 아파트 그거 공격 몇 번 받으면 무너지잖아요."

"아니, 아니."
어디서부터 반박해야 할지 말을 더듬던 유지유가 멍하니 이연우를 보았다.
"셸터면 아파트가 몇 번이고 무너질 공격도 버티지 않습니까. 가성비가..."
"그거 격리당한... 아니에요. 생각해 보니까 좋네요. 연우씨는 이상하게 운이 안 좋으니까. ... 교육 끝나면 집들이 가도 돼요?"

 


- 그러면서 로봇은 스르륵 몸을 숙였다. 손 대신 달린 케이블이 늘어지더니 꿈틀대며 연구원의 옷자락을 구석구석 뒤지기 시작했다.
뱀 같은 차갑고 서늘한 감촉. 연구원은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려고 했으나, 몸 어디가 망가졌는지 손가락만 간신히 까딱거릴 뿐이었다.
죽음을 직감한 연구원이 눈물을 흘렸다.
"끄으윽!"
이 로봇이 자신을 구조할 리가 없었다. 만약 자신의 숨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직접 죽일 것이었다.

- [<script>
                document.write("사람 말이나 쓰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얼마나 부정확하고 난해한가요. 이런 열등한 말을 쓰면 뇌가 타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script>]

- 우르르.
로봇의 케이블이 연구원의 옷에서 기기 몇 개를 끄집어냈다. 핸드폰, 비상버튼, USB, 전자시계 등등...

- "어때요, 안 어렵죠?"
최재민이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일찌감치 감을 잡고 반장이나 이연우에게 가르친 끝에, 시험 합격은 문제없을 정도로 그들의 실력을 확 끌어올렸다.
반장은 대충 바닥에 주저앉아 핸드폰을 툭툭 두드리며 천천히 말했다.
"그래도 이게 더 쉽다."
비행무기연구소에서 만든 드론 조종 앱. 사용 후 설문 조사와 후기를 열심히 작성했다. 5점 5점, 원하는 점은 빨리 상용화해...
이연우도 핸드폰에 고개를 박고, 설문 조사를 마무리할 때였다.
문득 최재민의 짧은 외침이 들렸다.
"어!"
"왜?"
그늘에 앉아 있던 유지유가 졸다가 묻자, 최재민이 눈을 비빈 후 드론들을 마구잡이로 가리키기 시작했다. 당황한 목소리.
"쟤네 갑자기 부모... 아니, 제작자 그런 게 생겼어요! 뭐지? 내 능력이 진화했나?"
"뭐라고?"
유지유는 물론이고, 설문 조사에 집중하던 반장과 이연우도 고개를 퍼뜩 들고 드론을 보았다. 뭔가 이상했다.

- '이걸 다 듣고 있다고? 또 바닥에 쓴 글을 읽었다고?'
이연우는 잠깐 핸드폰을 내려다보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과 언뜻 점처럼 보일 정도로 높은 하늘에 자리한 관측 드론.
이연우는 한숨을 뱉고는 망설임 없이 총구를 내려 핸드폰을 쏘았다.

- "핸드폰이 해킹된 거 같습니다. 핸드폰 부숩시다. 그러면 적어도 목소리는 못 듣겠죠."
"여러분, 핸드폰 이곳에 모아주십시오."
"아... 씁, 할부 많이 남았는데."
사람들은 망설이다가도 핸드폰과 스마트워치를 바닥에 무더기로 쌓아 올렸다. 뒤늦게 그들을 따라잡은 교육생들도 상황을 듣고 핸드폰을 던졌다. 
특전대원은 총알을 아끼기 위해 핸드폰을 몇 겹으로 겹쳐놓고, 총탄 한 발로 최대한 많은 핸드폰을 파괴했다.

- 그사이, 이연우는 에코백을 바닥에 놓고는 두 손을 써서 권총과 탄창을 우르르 쏟아내기 시작했다. 박스를 통째로 비울 기세.
"가방에 총이 몇 자루야..."
"그거 무슨 장비입니까? 쓸 만해 보이는데, 어디에 요청하면 받을 수 있습니까?"
정답을 입력한 사람이나 총에 맞지 않은 사람이나 총에 맞은 상태로 도망친 사람들이 에코백을 탐내면서 권총과 탄창을 하나씩 챙겼다.

- "관측 드론은 사거리가 안 돼."
"저 뒤에 저 많은 드론은 어떻게 상대하지?"
"그보다 우리 작전 목표가 어떻게 됩니까? 도주? 방어? 어느 쪽이든 쉽지 않을 텐데요."
이연우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생존인데...'
도주는 관측 드론 때문에, 방어는 물량 때문에 쉽지 않았다. 회사가 이 사태를 수습할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의심이 들 정도로.
'주사위 굴릴까?'
주사위에 의존하지 않기 위해, 생존 본능을 갈고닦기 위해 최대한 미뤘지만, 이제 슬슬 주사위를 써도 되지 않을까?

- 이연우는 냉큼 EMP 수류탄과 테이저건을 챙긴 후, 손을 내밀었다. 김갑동은 서류를 건네주며 황당한 얼굴을 했다.
"너는 가는 곳마다 사고가 터지냐 아니면 사고가 터질 곳에 네가 가는 거냐."
"하하... 그보다 감사과 아니었습니까? 왜 이런 일에 왔습니까?"
"1차 대응과로 옮겼어. 괜히 옮겼지."
김갑동이 지친 얼굴로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쿵쿵쿵쿵.
가만히 서 있는데도 달음박질치는 심장의 박동.
"빨리 가야 한다고 증강약 빨고 던져졌는데... 내일 죽었다. 난."
"그... 총은 더 없습니까? 테이저건이나 EMP 수류탄만으로는 힘들지 않을까요?"
"총은 네가 가지고 있잖아. 네 성격에 한두 자루만 들고 있을 리도 없고."

- 세 팀이 올라왔던 산길을 그대로 내려갔고, 앞서 나가던 분대장이 작전 문서를 빠르게 훑었다.
최우선 목표는 문법 경찰 로봇을 제압하기. 부가적인 목표는 비행 무기 섬멸과 생존자 구출과 다른 이상 개체의 격리 유지. 그 문자 뒤에 숨은 의도와 임시 팀의 역할. 
분대장은 빠르게 핵심을 파악했다. 다른 팀장, 반장과 이연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역할은 사실상 시간 끌기입니다.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연구소 내의 비행 무기가 민간 지역으로 나가지 않도록 미끼 역할을 하는 겁니다."
"미끼겠지, 염병할 놈들."
반장은 당연하다는 듯 투덜거리며 쿵쿵 산비탈을 내려가다가 힐끗 이연우를 보았다.
이연우는 이런 작전을 수행할 사람이 아니었다. 위험한 지역에 몸을 던질 사람도 아니었고, 특수 조사원으로서 작전을 거부할 권리도 있었다.
하지만 이연우는 수상하게 눈을 반짝이며, 다른 사람의 손에 들린 EMP 수류탄과 에코백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이거 어쩌면...?'

- "세 팀 모두 바로 본관으로 갑시다."
문법 경찰 로봇의 격리실이 존재하는 본관.
다들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세 팀은 공터를 가로질렀다. 그들 위를 EMP 폭발에서 살아남은 드론들이 따라갔다.
공터는 외곽에 있었기 때문에 본관과 거리가 꽤 되었다. 그들은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 "열 수 있냐?"
"... 정문은 안 될 거 같은데요."
흐릿한 직감.
"뭐?"
"잠깐, 잠깐만요!"
이연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감각을 곤두세웠다. 직감이든, 생존 본능이든, 확률을 헤아리는 감각이든,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감각을 필사적으로 끌어냈고 마침내 어떤 창문 앞에서 시선이 멈췄다.
"저 창문은 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이연우는 고개를 돌려 저만치 앞서가는 사람들의 기척을 한번 살피고는 슬그머니 손을 뻗어 먼지 쌓인 공구 몇 개를 에코백에 꾸역꾸역 쑤셔 넣었다.
'어차피 안 쓰는 거 같은데, 몇 개만 가져가자. 이런 위험한 일을 하는데, 이 정도는 챙겨야지!'
여전히 가벼운 에코백을 어깨에 걸치며, 이연우가 일행을 따라잡았다.

- 지하 격리실로 향하는 길이었다. 딱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까지만 격리가 풀렸다.
'무슨 생각이지?'
로봇이 한 짓이었다. 하지만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굳이 길을 이렇게 열어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생각을 마무리하기도 전에, 그들 뒤에서 드론들이 일제히 몰려오기 시작했다. 좁은 복도를 가득 채우며 날아오는 드론.
증기를 내뿜는 스팀펑크 드론은 말뚝 같은 것을 철컥댔고, 모기를 닮은 생체 드론은 침을 바짝 세웠다.
이연우는 짧은 시간에 판단을 내렸다.
여기서 상대해야 해!
길을 열어놓고 몰아넣으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상황이 그랬다.
이연우는 보급받은 테이저건을 꺼내 방아쇠를 당겼다. 번개가 번쩍이며 섬광에 하얗게 물든 이연우의 얼굴에 짜증이 번졌다.
'무기고부터 털어야 했는데...!'

- 로봇이 연 통로. 앞은 로봇이 몰아넣기를 유도하는 지하격리실이었고, 뒤는 드론의 파도가 몰려오는 사지였다.
두 방향 중 이연우는 드론의 파도를 선택했다. 적의 의도를 따르는 편이 더 위험했다.
"여기서 상대해야 합니다!"
이연우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반장과 분대장이 테이저건을 쏘았다. 연달아 번쩍인 섬광.
세 갈래의 푸른 번개가 복도를 가로지르며 스팀펑크 드론 하나와 생체 드론 둘을 둘둘 말고 스파크를 사방으로 튀겼다. 빠지직!
벌레 타는 냄새와 함께 얄팍한 곤충 날개가 오그라들며 생체 드론이 떨어졌지만, 이연우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 이연우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넋이 나간 듯 멍하니 금속 파편이 박힌 팔뚝을 봤다. 흘러나오는 핏물.
탕탕, 타앙!
"폭발한다! 날개만 쏴! 망가뜨려!"
"부상! 부상!"
"후방으로 후퇴한다! 계단! 계단으로 가!"
총성과 비명과 모든 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세상 자체가 멀어진 느낌. 시야가 온통 흐려져 심장박동만이 들려오는 세상.


- 어지러운 머리를 오직 공포와 혼란만이 가득 채웠다.

'왜?'
분명히 예측할 수 있는 위험이었다. 증기기관이 충격을 받으면 당연히 폭발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걸 터지는 순간까지 몰랐다고?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고 맞았다고?
'내가 죽을 수 있는 위험을 못 알아챘다고?'
그렇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안, 누군가 이연우의 목깃을 보고 있었다. 한순간에 교차한 생사, 파편이 목에 박히기라도 했으면.

 

- "연우야, 괜찮냐?"
"괜찮아요?"
조사반 식구들이 연우를 둘러싸고 걱정 어린 말을 건넸지만, 이연우는 듣지 못했다.
오직 혼란에 빠져 생각을 거듭할 뿐.
'다 잘되고 있었어!'
빗물부터 에코백까지 이상 개체를 모았고, 확률을 헤아리는 감각도 흐릿하게나마 얻었다.
비행무기연구소의 무기를 챙긴다는 계획도 나쁘지 않았다. 다소의 위험은 있었지만, 그 또한 필요했으니까.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있었지.'
일종의 딜레마였다. 생존 본능을 갈고닦으려면,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 몸을 던져 넣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 결과가 어땠나.
'죽을 뻔했어. 반응도 못 했고.'
이연우는 검고 딱딱하게 굳어가는 핏자국을 보았다. 죽음을 앞두고 필사적으로 살길을 찾아 움직이던 머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 확률을 헤아리는 감각과 교환된 듯, 무뎌진 본능. 결국, 미래 이연우의 실수를 그대로 답습했다.
방주를 찾겠다고 날뛰던 인간이랑 생존 본능을 훈련하겠다고 죽을 자리를 찾는 인간이랑 다를 게 없어!
생존 본능을 갈고닦는 거고 뭐고, 위험한 일은 애초에 피하는 게 옳았다.
"초심을 찾아야겠습니다. 빗물 좀 마시고 주사위 좀 다룬다고 방심했어요. 저는 단순한 인간일 뿐인데."
인간자격시험을, 그 자격증을 떠올렸다. 오직 한 사람으로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던 그때.
이연우가 속으로 다짐을 되뇌었다.
'나는 단순한 인간이야!'
맨몸의 인간. 이상 하나에 죽어버리는 인간. 이곳에서 죽어 나간 회사원들처럼,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인간.
흐려졌던 본능이 살아나는 듯, 머리가 쌩쌩 돌기 시작했다. 예민하게 곤두선 감각이 세상을 선명하게 받아들였고, 쿵쾅거리는 심장이 전신으로 활력을 뿜어냈다.

- 팔락!
이연우가 문서를 펼쳤다. 비행무기연구소의 지도와 드론들과 이상 개체. 그가 외쳤다.
"로봇이 우리를 지하로 유도했습니다. 그 목적을 파악해야 합니다."

- "염병. 담배 하나 사려면 어디까지 나가야 하는 거야!"
"먹을 거를 왜 사 오라고 했는지 알겠네요. 배달도 안 오겠는데요."
애매한 표정을 지은 유지유가 피자와 햄버거 봉투를 흔들다가 문 옆의 벨을 꾹 눌렀다.
삐!!
벨이 울리며, 울타리 위의 카메라가 움직여 방문자를 봤다. 곧 문이 철컥 열렸다. 작은 스피커에서 이연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에 집 있으니까, 그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지금 올라갈게요.]
"올라온다고요?"
"셸터에서 올라오나 보지."
그들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철조망 문을 넘어갔다.

 

- 차가운 바람에 몸을 떨면서 잡초가 무성한 부지를 걷기를 잠시, 그들은 외딴 폐가를 보았다. 사람이 사는 집이라기에는 뭔가 좀 그런 집.
최재민은 호기심 가득한 눈을 빛내며 집을 요모조모 뜯어보다가, 방폭 셔터가 내려간 창문을 보고는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격리된 거 아니에요?"

"맞는 거 같은데..."
반장도 떨떠름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반인에게서 격리된 집. 아무래도 이상하게 사건 사고에 잘 엮이는 이연우를 도심에서 떨어뜨려놓은 듯한데.
문득 셸터를 자랑하던 이연우의 얼굴을 떠올리고 다른 말을 꿀꺽 삼켰다.
자기가 만족하면 됐지. 방폭 셔터도 자기가 내려놓은 걸 텐데!

- 그때, 문이 살짝 흔들리더니 무거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이연우가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들어오세요."
문 너머는 진짜 폐가였다. 가구도 없고, 먼지가 잔뜩 쌓여있고, 공기는 탁했다.
"어. 연우야, 집 좋... 좋다."
"청소 안 해요?"
반장이 말을 더듬고 유지유가 질색을 해도, 이연우는 태연하게 그들을 해치뚜껑 앞으로 안내했다.
"여기 아래가 셸터라. 위는 딱히 관리 안 했습니다."
"여기 아래에서 산다고요?"
사다리가 깊게 내려간 수직 통로, 척 봐도 오르내리는 데 상당한 체력이 필요해 보였다.
이연우는 머쓱하게 웃었다.
"귀찮긴 한데, 운동도 되고 생각보다 살 만합니다."

- "영생?"
"네. 저도 잘은 몰라요. 아, 길거리에서도 본 거 같기도 하고."

이연우가 취한 눈으로 사진을 자세하게 살폈다. 영생, 자연스러운 죽음이 없는 삶. 흐릿한 머리가 사고를 계속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살아남아도, 결국 늙어 죽겠지. 너무 먼 이야기 같긴 한데!'
술기운에 잡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꼭 사람은 늙어 죽어야 할까? 이 세상에서는 자연사도 회피할 수 있지 않을까?
이연우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사진을 볼 때, 반장이 툴툴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사이비 종교 맞다.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아무튼, 이상 개체와 연관되어 있다고 의심되는 놈들이야."

- 술에 젖은 서류를 힘겹게 떼어내어 넘겨보니 수상한 점들이 서술되어 있었다.
이상하게 광신적인 사람들, 생활이 송두리째 바뀐 사람들, 가입한 뒤 연락이 끊긴 사람, 연락 끊긴 사람을 찾아서 들어갔다가 돌변한 사람. 그 생생한 기록들.
평범한 사이비 종교 같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런 인형탈과 어울리지는 않았다.
"우리는 전도하는 사람 찾아서 접촉할 거야. 내부에 침투해서 적당히 이상의 흔적을 찾은 뒤, 빠져나오면 된다."

- 이연우는 자연스럽게 몸을 틀어 동선을 그들 앞으로 바꿨다. 터덜터덜 걸으며 그들을 지나치는 순간, 소매를 잡혔다.
강하게 끌어당기는 힘에 이연우의 상체만 돌아갔다. 

"저기요, 혹시 위대한 옛것에 관심 있으신가요? 이분만 믿으면 영생하고,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진답니다."
"... 뭐요?"
이연우가 곱지 않은 말을 뱉자, 벌레 탈을 쓴 사람이 상냥한 목소리를 내며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얼굴에 걱정이 가득하세요. 저희는 진짜 당신을 돕고 싶거든요. 정말 잠깐만 저희를 따라오시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답니다."
"그거 돈 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연우가 망설이는 기색을 내보이자 인형 탈이 고개를 팽이처럼 흔들었다.
"저희는 정말 수금 같은 거 안 해요. 위대한 분께 사람의 돈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돈 요구하는 건 다 사람들 욕심입니다!"
"그게 진짜면..."
생각보다 그럴듯한 소리에 설득된 척, 이연우가 몸을 완전히 돌려 그들을 마주 보았다.
인형 탈 듀오는 친절하게 머리를 숙이고 어딘가로 이연우를 이끌었다.  

- "격멸대대까지 부르는 건 선을 넘는 짓이야. 하지만 조끼는 쓰자."
"지금 바로 갑니까?"
"그래."
그들은 더 지체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상 장비 보관함으로 가 자연스러운 형광 조끼를 껴입고, 총기 보관함에서 소총을 꺼내 몸에 걸고, 소형 카메라를 옷에 달았다.
군인보다는 테러리스트에 가까운 모양새. 그렇게 그들은 심야의 거리로 나왔다.
큼직한 소총을 들고 심야의 거리를 걷는데도 사람들은 그들을 자연스럽게 지나쳤다. 순찰하는 경찰조차 그들을 힐긋 보았다가 자기 갈 길을 서둘렀다. 

- 이 자리에 남은 것은 초라한 지하실과 지렁이 하나뿐. 그때 뒤에서 낮고 탁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죠. 위대한 지렁이님이십니다. 이 위엄이, 위대한 형상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교주였다. 어느새 일어난 교주가 텅 빈 허공을 올려다보며, 황홀감에 휩싸인 목소리로 말했다.
"러브크래프트는 진실을 보았던 게 분명합니다. 그레이트 올드 웜! 우주적인 존재가 바로 이곳에..."

 

 

- "악!"
총성과 비명이 지하에 메아리쳤다. 화약 냄새가 고이는 지하. 허벅지에 총을 맞은 교주가 주저앉았고, 이연우는 소총을 내렸다.
이연우는 차가운 얼굴로 교주를 내려다봤다.
"거짓말하지 말고."
"거짓말이라니! 어찌 위대한 분 앞에서 그런 짓을 하겠나!"
교주의 고함이 쩌렁쩌렁 울렸다. 신도들은 교주를 보았다. 눈이 멀쩡한 사람은 이연우를 자연스럽게 여겼고, 눈이 망가진 사람은 의문을 품었다.

- 쉬면서 돈을 버는 거라고 히죽거리는 이 팀장의 모습에 이연우는 할 말을 잃었다.
"그... 이거 위험한 개체인데요."
"이 바닥에 안 위험한 게 어디 있냐."
"그건 맞긴 합니다."
쓸데없는 잡담을 나누기를 잠시.
이 팀장은 작업에 열중인 노예중대를 힐긋 보고는 무너진 건물을 주시했다.
"깔끔하네. 대충 붕괴 사고로 퉁치면 되겠어."
적나라하게 드러나거나 현실 같지 않은 사건은 꾸며내기가 쉽지 않았지만, 이런 케이스는 도리어 꾸며낼 필요도 없었다.

- "비밀 유지 깨지지 않았습니까? 요즘도 뒷수습을 합니까?"
"그거 대충대충 하지 뭐냐. 숨길 건 적당히 숨기고, 자그마한 건 오히려 노출한다."
"노출한다는 말입니까?"
이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거 관심 갖고 찾아다니는 사람들. 그 사람들한테 일부러 노출해서 그 사람들 조사원처럼 쓴다지 뭐냐."
알고리즘을 조작해 회사가 만든 동영상을 추천하거나 인터넷 광고로 위장한 사이트로 연결한다고.
그리고 회사는 비밀 유지에 쓰던 장비와 인공지능으로 그런 사람을 감시한다고.

- "뭐... 정보화 시대에 맞게 방침을 바꿨다는데, 난 모르겠다. 민간인들 쓸 거면 회사가 왜 있어."
이 팀장이 불만을 내뱉는 동안, 이연우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면 조사원이 업무에 투입될 일이 줄어들지 않을까? 좋은 거 같은데?
그때 노예중대의 사람 하나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푸르게 빛나는 안광, 마네킹 같은 표정, 억양 없는 목소리.
"작업 착수했습니다. 추가로 인수인계할 것이 있습니까?"
"아, 그 이상 개체에 대해 말해드리겠습니다."
이연우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자세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유리 상자 안에 지렁이가 있는데, 위대한 존재로 보이게 정신을 조작합니다. 조작당한 사람은 지렁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리 상자면 깨졌을 가능성이 크군요. 작업이 길어지겠습니다!"

- 조각상에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나왔다.
"제 주인님께서는 그 이름을 싫어하십니다. 조각가님은 전설을 따라 하는 분도 아니고, 피그말리온처럼 조각상 하나만 살려내지도 않았으며, 신 따위에 기대 생명을 부여하는 분도 아니십니다."
예술가의 자존심에 관련된 문제인지, 그것은 반장을 노려보았다.
반장은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회사에서 붙인 이름이 싫다는데, 뭐...

 

- "... 그래서 나한테 뭘 물어보려고 왔습니까?"
이야기를 되돌리기 위해, 이연우가 테이블을 가볍게 쳤다. 그것은 고개를 돌리고는 잠깐 말을 정리했다.
"조각가님께서 지우개를 빌리고자 하십니다. 한국 지사에 문의하니, 이연우 조사원에게 권한이 있다고 당신한테 물어보라더군요. 지우개를 빌려주시겠습니까?"
이연우는 겉으로는 무표정을 유지했지만, 속으로는 온갖 생각을 떠올렸다.
'이게 왜 나한테 권한이 있어? 이거 그냥 응대하기 귀찮아서 나한테 넘긴 거 아냐?'
아무리 생각해도 귀찮은 문제를 떠넘긴 모양새였다. 이연우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있지도 않은 권한은 뭔.

- "정말 빌리기만 할 뿐입니다. 지우개는 위험한 물건이지만, 예술가의 손 안에서는 훌륭한 도구일 뿐입니다. 최고의 조각칼 아닙니까."
"그..."
이연우는 몸을 뒤로 빼며 부정적인 기색을 내보였다. 빌려주겠다고 말하기에는 걸리는 문제가 많았다.
이연우가 고개를 저으려는 순간, 그것은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조각가님께서는 산맥을 조각해 거인이나 공룡을 만들 생각입니다. 물론 당신은 공감하지 못하겠죠. 그래서 보상도 준비했습니다."
순간 이연우가 혹하는 기색을 보였다. 보상만 괜찮으면 돕지 못할 이유도 없다.

- "당신에 대해 조사했습니다. 생존주의자. 당신이 죽는 날, 당신을 부활시켜 드리겠다면 어떻습니까."
"자세히 말해보시죠."
허투루 들을 수 없는 말. 이연우가 의자를 바짝 당겨 그것의 눈을 똑바로 마주 봤다. 주사위의 부활 판정만 믿기에는 ...

- 협상이 이루어졌다.
조각상은 목숨을 걸고 건축가의 핸드폰을 빌려 연락을 돌렸고, 건축가는 눈을 대굴대굴 굴리며 눈치를 봤으며, 이연우는 그들을 관찰하면서 안전한 행동이 뭘지 가늠했다. 
지우개가 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이연우는 ■■하면 죽는 집이란 글자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온 정신을 집중해 인식에서 벗어난 ■■를 읽으려고 노력했다.
'인식 왜곡. 내 정신력으로는 못 뚫겠어!'
어떻게 하면 조건을 알아낼 수 있을까, 온갖 방법을 시도해 봤지만 안 됐다. 보면 볼수록 머리가 어지럽고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 결국, 이연우는 한숨을 흘렸다. 생존 본능이 꿈틀거리며 불길한 상상만 더해졌다.
알 수 없는 조건. 사람을 죽이는 트리거.
죽을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무한에 가까웠다. 물을 마셔도 죽을 수 있고, 잠을 자도 죽을 수 있고, 심장이 10만 번 뛰었다고 죽을 수도 있고, 문을 열었다고, 집에서 나갔다고...
'적당히 생각하자. 이대로면 미칠지도 몰라!'
생각하면 할수록 피폐해지는 정신. 이연우가 주사위를 보며 쿵쾅거리는 심장을 다스릴 때...
건축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 괴물의 아가리 안으로 들어온 기분.
'조건이 중요한 게 아니야!'
죽는 집. 사람을 죽이는 집. 대실패의 결과물. 주사위가 만든 최악의 적.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연우는 오직 무언가를 죽이기 위해 존재하는 이상 개체의 안에 있었다. 부활의 가능성조차 없이 그를 죽일 수 있는 것 안에.
'진짜 망했다!'
이것이 이연우를 죽이고, 부활하면 죽는 집으로 조건을 바꾼다면.
그 어떤 때보다 강렬한 생명의 위험.
이연우가 떨리는 손을 깍지 끼며 입 앞으로 가져왔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끝없는 활력이 전신을 휘돌았고, 예리하게 벼려진 감각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폭탄 목걸이를 찬 심정으로, 이연우는 필사적으로 살아 나갈 방법을 찾았다.

- '침착해, 침착해, 침착해!'
이연우가 머리를 감싸며, 심호흡을 반복했다. 공포나 당황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냉정하게 살길을 찾아야 했다.
'생각해. 지금 뭐가 우선이지?'
빠르게 휘도는 피가 뇌에 산소를 공급했고, 두뇌에서는 별빛이 점멸하는 듯했다. 폭죽처럼 터지는 생각이 스파크가 되어 번쩍였다.
공부를 할 때는 물론이고, 시험을 칠 때도 느껴본 적 없는 고도의 집중. 온 세상이 멀어지고, 오직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매몰되는 사고.
'이상 개체의 파악, 그것의 본질, 그것의 의도부터 알아야지!'
살의를 품은 이상 개체인 건 확실했다. 하지만 언제 어떻게 ...
 
- 이연우가 마이크를 잡고 입을 열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당신도 죽기는 싫을 거 아닙니까."

침착한 목소리에 조각상이 현관문으로 다가와 문고리를 잡았다.
[좋습니다. 저도 여기서 죽을 생각은 없습니다. ... 문 닫혀 있습니다. 열어주세요.]
"열었습니다. 상황실로 오세요."
두꺼운 현관문이 열리고 조각상이 실내로 발을 들였다.

여러 칸으로 나뉜 CCTV 화면 안에서는 조각상이 움직이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발을 내밀고, 미로처럼 복잡한 셸터 내부를 헤매면서.
그 넓은 모니터 앞에 앉은 이연우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이 피고 졌다.
'허점을 찾아야 해. 주사위 판정이랑 비슷해. 한 번에 하나. 그 사이의 딜레이. 괴롭히다가 죽이는 걸 방심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용할 방법이...'
직감이나 직관이나 비슷한 면이 있었다. 어떤 증거나 논리 없이 실제적인 무언가를 도출한다는 점에서.
지금 이 순간, 이연우의 직감과 직관은 미쳐 날뛰고 있었다.
느낌에서 시작된 번개가 결론이라는 피뢰침을 향해 수직으로 내리 꽂히는 듯한 감각.
'주사위로 집을 협박... 안 돼. 죽이는 게 존재 의의인 이상 개체야. 같이 죽으려 할 거야!'
'조각상이 지우개를 들고, 나는 주사위를 굴리는 합공? 안돼. 존재하면 죽는 집으로 바뀌면 둘 다 죽어!'
'미래의 나. 안 돼. 다시는 얼굴 볼 일 없다고 했잖아. 그쪽에서 거절할 거야!'
'대성공만 기대하며 굴리기. 대실패가 방금 떴는데, 이게 뜰까?'
하지만 무수한 갈래로 뻗어나간 생각은, '내가 죽는다'나 '나도 죽는다'로 수렴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확실하게 살아남을 방법이 없었다.
하나뿐인 조건이지만, 그 가능성이 지나치게 많았다. 어떻게 보면 주사위의 상위 호환일 정도로. 아니, 주사위의 카운터로 보일 정도로.

 

- 사방이 꽉 막힌 밀실에서 점점 좁아지는 벽을 보는 듯한 숨 막히는 압박감, 죽음이 한 걸음씩 다가와 그림자를 드리울 때의 공포.
"방법이 방법이 없나? 없다고? 죽어야 한다고? 이렇게?"

끝내 이연우가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 이연우가 숨을 들이마셨다. 서늘한 밤공기가 폐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온 감각이 곤두섰다. 솜털 하나하나가 더듬이가 된 듯했고, 생존 본능이 극한까지 솟구치며 위험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할 수 있다. 못하면 죽는다.'
송곳으로 머리를 쑤시는 듯한 위험한 감각이 전신을 찔렀다. 손을 뻗으면 지우개가 닿는 거리.
어두운 밤이 새빨갛게 물들 정도로 위험 경보가 울려댔고, 이연우가 온몸을 던졌으며, 집이 조건을 바꿨다.
'실패하면 죽는다!'
조건이 바뀌는 찰나의 간격, 이연우의 손이 지우개에 먼저 닿았다.
이연우의 눈에 광채가 맺혔다. 하지만 그가 보는 것은 이 세상이 아니었다. 육감과 직감의 세계. 극한까지 일어난 생존본능이 느끼는 위험. 다가오는 이상의 공격.
'지워져라!'
이연우가 까딱인 지우개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궤적을 그었다.

- "잠깐만 지나갑시다."
"아... 그런데 출입 막으라고 해서..."
"아니, 그럼 나는 뭐 어쩌라고? 점심 먹고 회사로 못 돌아가면, 그거 그쪽이 다 책임질 겁니까?"
진짜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가 길이 막힌 회사원은 붉은 국물이 튄 셔츠를 답답하다는 듯 끌어당겼다.
병사들도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우물거렸다. 병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앞을 막았던 경광봉을 내렸다.
"그러면 빨리..."
그때였다. 회사가 오직 자유예술가협회만을 상정하고 보낸 전투부대가 도착했다.
병사는 물론이고 불만에 가득 찬 회사원조차 입을 다물고 전투부대를 보았다.

- 전신을 검은 슈트로 감싼 전투원은 살점 하나도 보이지 않아, 사람보다는 기계장치 같은 느낌을 줬다. 눈조차 보이지 않아 특히 더 그랬다.
카메라가 달린 헬멧이 완전히 얼굴을 감싸, 눈 코 입도 완전히 막혔다.
대신 증강 현실 UI가 카메라에 비친 시야를 필터로 걸러 보여주고 있었고, 소리는 물론, 오감 전부를 인지 필터로 조작했다. 이러면 어지간한 예술가의 공격은 막을 수 있었다. 

- 본사에서 특수 조사원으로 스카우트한 이연우는 이미 한국 지사의 상부에서도 눈여겨보는 인력이 되었다.
그 이력을 새삼 살핀 1차장과 참모부장의 표정이 묘해졌다.

"사고를 일으키지만, 그 자신은 살아서 돌아오는 조사원이라. 좋군요. 사보타주가 되겠습니다."
"하하! 골드버그클럽 놈들, 투자는 투자대로 하고 쪽박 차겠군!"
그들은 이연우가 사고를 일으킬 것이라고 확고하게 믿었다.

- 노인은 도심의 야경을 가리켰다.
"도시? 사람 몇십만? 회사가 진짜 이런 걸 두려워하겠나? 이상기후를 알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새삼 노인의 눈에 회원들의 모습이 잡혔다. 나이가 많아봐야 마흔 살도 안 되는 젊은 피들이었다. 다른 회원들이 노인이 되기 전에 다 죽어서 저들이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머리가 하얗게 셀 정도로 살아남은 노인은 알았다. 회사가 눈이 돌아가면 얼마나 무서운지.
당장 이상기후 때만 해도 그랬다.
"이상기후 못 막겠다고 80억 인구가 죽게 버려둔 인간들이야. 이상기후를 막아보겠다고 60억 인구를 죽이려던 인간들이고."

 

- 보존 계획과 학살회사 파벌.
핵심 생존 계획은 집단들끼리 공유했기에 고위 인사인 그들도 보존 계획을 알았고, 클럽의 정보력으로 파벌도 알았다.
인류가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어떤 짓도 서슴지 않는 자들. 회원들의 얼굴도 새삼 굳어졌다. 그들도 청와대 테러를 기억했다. 대놓고 청와대로 쳐들어가 푸른 꽃을 피운 미친 인간들.
"회사가 지킬 게 많다고? 아니지. 우리는 도시가 필요해. 잘 먹고 잘 살아야 하니까. 그런데 회사는 달라. 세상이 망해도 인간이 살아남기만 하면 돼. 지킬 건 우리가 더 많아."
사내는 남은 와인을 벌컥 마시고, 붉어진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그래도 이상기후급으로 몰아붙이지 않으면, 회사도 정신을 놓지는 않지 않지 않습니까."
"그건 모르지."
노인은 다시 몸을 돌려 아름다운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 눈에 비치는 광경은 그의 기억 속 어디쯤이었다.

- 회사는 주기적으로 발작했다.
자기들끼리 뭘 연구하다가 이상한 걸 발견하고는 돌아버리고, 자기들끼리 이상한 결론을 내고 미친 멧돼지처럼 달려들고, 이게 인류 생존의 길이라며 끔찍한 사고를 일으키고...
물론 노인은 이해했다.
단순하게 예술에 몰두하는 자유예술가협회나 잘살기 위한 골드버그클럽과 달리, 인류 보호라는 쓸데없이 거창한 이념을 지닌 만큼 이런저런 사정이 있겠지.
노인이 걱정하는 건 그 주기였다.
'시간만 따지면 한번 발작할 때가 됐는데!'
이상기후도 해결되었겠다, 회사가 돌아버릴 때가 되었다. 이번 견제도 그것을 떠보기 위함이었는데, 순순히 물러나는 꼴을 보니 더 불안했다.

- "영감님, 그래도 견제는 필요했습니다."
어떤 회원이 말하자, 노인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잘 마무리되었으니, 나도 더 말하지는 않겠네. 나도 승인한 일이었고. 그래, 탐사에 합류한다는 회사원은 누군가?"
"조사원이라던데요."
"누구?"
노인은 살짝 긴장하며 고개를 돌렸다.
조사원이면 생존의 달인 아닌가. 지금은 인원이 줄어들었지만, 특히 그 반장은 무시할 사람이 아니었다.
와인 잔에 대충 와인을 따르던 사내가 말했다.
"이영우? 이연우? 1년도 안 된 새내기입니다. 이력이 상당하긴 한데, 그래봐야 새내기죠."
"음. 괜찮군."
1년도 안 된 새내기가 경험이 많으면 얼마나 많겠나, 10년 경력의 회사원만 아니면 안심해도 됐다.
노인은 편안한 마음으로 다시 야경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말했다.
"그 총기 제작장을 모조리 털어버린 범인은 찾았나? 우리가 그만큼 일방적으로 손해를 본 적은 없지 않나."
"아뇨..."

- 조사반의 사무실.
이연우는 한국 지사에서 나온 회사원과 마주하고 있었다. 기획실에서 왔다는 사람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뱉었기 때문이다.

- "훌륭한 선택입니다."
회사원이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 몇 장을 꺼내 이연우 쪽으로 밀었다.
이연우가 힐끔 내려다보니 탐사 계획이었다. 회사원은 간단하게 설명했다.
"이상 도시는 이상의 영향을 받는 도시를 말합니다. 대부분은 허황된 민담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또 이차원이 우연히 겹친 결과일 뿐이지만, 종종 진짜가 발견되기도 하죠."
실제로 고대의 전설로 여겨지던 도시가 발굴되듯, 이상 도시도 때때로 발견됐다.
그런 이상 도시는 큰돈이 되었기 때문에 골드버그클럽은 가챠 돌리듯 탐사를 멈추지 않았고, 이번에도 하나의 도시를 발견했다.
"한국전쟁 당시, 산골의 마을 하나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근방의 노인들이 말하길, 북한군이 닥쳐오자 무당 하나가 마을 사람들을 어디론가 끌고 갔다고 하는데..."
"그곳이 이상 도시입니까?"
이연우의 질문에 회사원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땅으로 갔다고 말하더군요."
전란을 피해 도망친 땅.

 

- "어쨌든 그렇게 위험한 도시는 아니라고 예상된다니, 이연우 씨는 고생 조금만 하시고 발굴로 얻는 이익만 챙기시면 됩니다."
"글쎄요. 그렇게 쉬울지..."
이연우는 가만히 턱을 쓰다듬었다. 눈동자에는 의심의 빛이 서렸다.
대놓고 이상 도시 같은 곳을 가는데, 문제가 안 터질까? 이제 그도 자신의 운을 믿지 않았다. 분명 사고가 터질 것 같았다.
"지우개가 있지 않습니까. 이연우 씨는 무사히 돌아올 겁니다."
"당연히 무사히 돌아와야죠. 그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으니까."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 눈을 흘기기를 잠시. 이연우는 에코백을 움켜쥐었다.
'챙길 게 많아!'
혹시 모르니, 에코백을 다시 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연우는 단순한 공구와 총기만이 아니라, 식수와 식량, 구급약품과 위생 용품, 의류와 텐트, 방독면 등을 넣어, 생존 배낭으로 만들기로 했다.

 

- 탐사 예정일은 빠르게 찾아왔다.
이연우는 에코백 하나만 덜렁 어깨에 걸치고, 산길을 올랐다. 이미 앞서 골드버그클럽에서 돌아다닌 길이라, 갓 만들어진 길을 따라가면 되었다.

- 순간 사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새내기라서 편할 거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새내기라서 짜증 나는 마음으로 변했다.
자그마치 이상 도시 탐사다. 그런데 저렇게 가볍게 온다고?
"예비 물자는 준비했는데..."
"아, 내 몫은 준비를 안 했습니까? 그러면 탐사는 조금 미뤄주시죠. 내려가서 준비해 오겠습니다."
"아닙니다. 보급해 드리겠습니다. 미룰 수는 없으니까요. 하..."
골드버그클럽의 자산을 이렇게 빼앗기는 건 또 처음이었다. 이상 도시 탐사가 코앞인데, 어째 시작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 사내가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둘렀다. 손에 들린 계약서가 팔랑이며 빛을 머금었다.
"이 땅의 주인으로서 말하니, 숨겨진 것은 모습을 드러내라."

그 순간 변화가 생겼다.
마을 구석에 있던 다 쓰러져가던 무당집이 멀쩡해졌다. 꼿꼿이 선 깃대에는 하얀 천과 붉은 천이 매달려 있었는데,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펄럭이며 기묘한 문양을 드러냈다. 
"저쪽이 통로인가 봅니다. 갑시다."
골드버그클럽 회원들이 우르르 움직였다. 이연우는 제일 뒤에서 느릿느릿 따라갔다. 적당한 긴장을 유지하면서.

- 이연우와 사내는 척척 말을 주고받았다. 이런 부분에서는 대화가 잘 통했다. 위험을 예측하고 그에 대처하는 일.
괜히 조사원이 아니구나, 새삼 이연우를 본 사내가 회원 하나를 불렀다.
"우리가 챙겨 온 식량 있지. 20인분 정도만 넘기자고. 잔치에 음식 거드는 느낌으로, 초콜릿도."
"알겠습니다."
이연우 또한 사내의 판단에 감탄했다.
"우리가 준비한 음식만 먹으면 되겠군요."
"우리가 아니라, 저희가 준비한 물자인데... 아니, 됐습니다."

- 그때였다.
건장한 농민 몇이 낫이며 쇠스랑 따위를 한 아름 껴안고 들어와 마당 구석에 쏟았다. 질이 나쁜 농기구가 절그럭 소리를 내며 잔뜩 쌓였다.
이연우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잔치에 저런 걸 왜 가져올까요?"
"가져올 수도 있죠."
잔치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지만, 사내는 냉정하게 분석했다.
"잔치를 이유 없이 하지는 않을 겁니다. 여기는 농사에 의존하는 작은 마을이고, 거기에 무당이 지배하는 마을이니, ..." 

- "그게 통로를 여는 이상 개체입니까?"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귀 바로 옆에서 숨결이 목을 스쳤다.
저벅저벅, 이연우가 그의 옆에서 앞으로 나아갔다. 몸을 숙여 바닥에 떨어진 이용권을 주웠다. 이연우는 돌을 쥔 손으로 이용권을 붙잡았다.
이연우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용권은 한때 그가 열심히 만들려고 노력했던 확정 뽑기권과 비슷하게 생겼다.
'미래의 나는 이걸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나?'
아무리 열심히 만들어도 전부 그가 원하지 않는 것만 나오기에 포기했지만, 이렇게 보니 느낌이 묘했다.
'아마, 주사위가 확정된 결과를 싫어해서 확정 뽑기권은 무조건 실패하는 느낌인데!'

- 이연우는 힐끔 사내를 보았다. 사내는 정신 나간 얼굴로 머리를 쾅쾅 쳤다.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인식 왜곡이었다. 길가의 돌이 말을 할 리가 없었다. 이건 돌멩이의 효과였다.
물론 자연스러운 거였지만, 이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회사의 형광 조끼다.  


- 이연우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주사위만 가지고 있을 때는 그럭저럭 평온하게 살았다. 굳이 이연우를 노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까.
그런데 지우개를 가진 순간, 평온한 개천에서 험난한 바다로 던져진 기분이었다. 여러 포식 동물이 지우개를 노리는 바다로.

- 이연우는 돌과 형광 조끼를 떠올리며, 입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잘못하면 미치겠어!'
길가의 돌이 지우개를 노리는 적일 수 있었다. 문득 머리가 빠지는 비 같은 게 내릴 수도 있고, 친한 사람으로 변신해 그에게 접근할 수도 있었다. 길을 걷다가 갑자기 트럭에 치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상의 무한한 가능성만큼이나 무한한 위험.
그걸 하나하나 의심하고 살면...

- 대굴대굴, 이연우는 지우개를 손 안에서 굴렸다. 포기하자니 아깝고, 가지자니 위험하고.
그 망설임을 똑똑히 본 직원은 속으로 기겁했다. 아니, 지우개를 포기하면 명령을 내릴 수가 없는데?
크흠, 헛기침을 뱉은 직원이 서둘러 말했다.
"주사위와 지우개. 이 두 개를 가지면 좋을 겁니다. 두 개까지는 인간이 장악할 수 있거든요."
"장악이요? 한 몸 되는 거 말입니까?"
"예. 몇몇 이상 개체는 오래 쓰다 보면 사람과 하나가 됩니다. 그 개체와 관련된 감각을 얻고, 한계를 넘어 사용하고. 멸망주의자와 정보부의 유령이 대표적인 예시죠."
이연우가 솔깃한 표정으로 들었다.
"물론 두 개는 어렵긴 합니다. 하지만 개체 하나의 한계를 넘는 것보다는 쉽습니다."
두 개의 감각을 얻는 것이 하나의 융합보다는 쉽다. 그리고 감각 둘만 얻어도 그 시너지는 상상을 초월한다.

- 이연우는 빠르게 활용법을 떠올렸다.
'실패 확률 지우기. 지우개의 대상 확장. 상대의 확률 지우기?'
이 정도면 위험을 감수...

'아, 애매하네. 애매해.'

- 갑자기 입맛이 떨어진 이연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걸음을 서둘렀다.
저 멀리 조사반 사무실이 보였다.
'고정된 장소. 매일 출근하는 사무실.'
이 또한 노리기 쉬운 허점이었다. 폭탄 설치는 간단하고, 반장이나 유지유를 납치하고 변신하여 접근할 수도 있었다. 

'반장님은 안 당할 것 같긴 한데.'
하다못해 키보드에 독을 묻히거나, 컴퓨터 바탕화면에 보면 죽는 그림이라도 설치해 두면 그냥 당하는 거였다.
'여기에 주사위처럼 원격으로 저주할 수 있는 개체까지 동원한다면.'
이연우는 문득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날도 추웠지만 스스로 생각한 수단들에 오한이 들었다. 암살이라고는 조금도 모르는 자신이 생각한 것만 해도 이 정도였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의심하고 살아야 한다고?
"버리길 잘했지."
포기했다는 생각은 골칫거리를 버렸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지우개를 들고 있다가는 정신이 망가질 뻔했다.

- 1차장과 참모부장, 기획실장이 회의하는 방.
반격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기에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편안하게 등을 기대 늘어지고, 입가에 미소가 걸리고,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나왔다.
1차장이 서류를 뒤적이다가 씩 웃었다.
"유령이 갤러리 세 곳의 이상 개체를 모두 훔쳐... 아니, 압수했습니다. 또한, 공권력을 빌려 클럽의 자산 몇 가지에도 법적 조치를 취했고요. 그놈들, 당장 회의할 펜트하우스도 없습니다." 
"그 조사원은 사업체 하나를 그대로 날려버렸고. 난 이게 제일 마음에 들어!"
참모부장이 껄껄 웃자, 1차장은 그를 흘겨봤다.
"특전대는 한 일이 없는데, 왜 당신이 좋아합니까?" 

 


- 기획실장은 어떤 서류 하나를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문득 고개를 들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마냥 성공만 한 게 아니었다.
"다 좋은데... 그 조사원, 이제 일 못 시킵니다. 지우개를 포기해서, 뭐 어떻게 일을 시킬 구실이 없어요."
"현금이든, 이상 개체든 보상만 넉넉하게 주면 되지 않습니까?"
"아마 안 될 겁니다."
이연우의 정보가 나열된 화면이 모니터에 떠올랐다. 그중 심리 추측과 본사의 보상 부분으로 옮겨 갔다.
"위험 자체를 피하는 성격으로 추정되고, 부족한 것도, 원하는 것도 없습니다."
돈은 본사에서 부족함 없이 챙겨줬고, 이상 개체도 주사위로 전부 대체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강압적으로 뭔가를 해보자니...
"잘못 건드리면 터집니다. 일이 잘못 풀리면 손해 규모가 얼마나 클지 예상이 안 갑니다."
"조사원도 우리만큼 목숨 내놓고 일하는 친구들인데, 헛짓거리하면 큰일 나지."

- 참모부장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목숨이 위험하지 않은 임무가 거의 없었다. 당장 내일 살아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는 사람들인데, 부조리를 참을 리가. 차라리 보복을 하고 말지.
그들도 아래에서부터 기어 올라온 회사원인 만큼 이런저런 꼴을 많이 보았다.
마음에 안 드는 상사의 머리에 총을 쏘거나, 형광 조끼를 입고 지갑을 훔치거나, 커피에 기억 소거제를 타서 준다거나, 컴퓨터나 핸드폰에 테이저건을 쏘거나.
나쁜 기억이 떠오른 그들은 잠깐 입을 다물고, 이연우의 정보를 훑어보았다.

- "아, 그래도 놀리기에는 아쉬운데, 이 정도면 정예 요원 아닙니까? 이만큼 유능한 인력이면 일 잔뜩 맡기고 싶은데."
"본사에서 괜히 데려갔겠습니까."
"본사 새끼들. 유능해 보인다고 다 침 발라놓으면 우리는 어쩌라는 건지, 원."
"그래도 움직일 방법이 있을 텐데."
투덜대며 서류를 뒤적이기를 잠시, 1차장이 문득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정보가 왜 이렇게 부실하지?"
회사원의 정보치고는 너무 얄팍했다. 

- 안전 직원을 대상으로 천천히 건강검진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기획실에서 맡겠습니다. 심리 분석 끝나면 협상해 보죠."
사람이면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을 만족시키는 대가로 일을 맡길 수 있었다. 단순한 돈, 안전, 소속감, 인정, 자아실현, 무엇이든 간에.
기획실장은 나름대로 자신감을 가졌다.

- 이연우는 에코백에서 지폐 다발 몇 개를 꺼내 반장과 유지유에게 나눠 주었다. 사람마다 5만 원권 열 장과 만 원권 50장. 두 사람은 일단 돈을 받고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돈을 이렇게 준다고?
유지유가 퍼뜩 무언가를 알아차린 눈으로 이연우를 보았다. 경악으로 입이 벌어졌다.
"주사위 썼죠? 복권 당첨에 썼죠! 연우 씨가 그런 일에 쓸 줄은 몰랐는데!"
"예? 아니, 아니..."
 
- 유령처럼 옅어졌다. 우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염이에요. 감염이고 전염이고요."
불길한 어감. 이연우의 눈이 크게 떠졌다. 감각이 곤두서며 증발할 듯한 유령을 정확히 붙잡았다.
시야가 좁아져 유령이 크게 확대되었고, 귀가 쫑긋 서유령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울렸다.
"멀쩡한 사람 이상으로 만드는 거잖아요. 회사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잘못 이해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장악이란 단어를 붙인 거예요."
이연우는 순간 어지러웠다.
하지만 두뇌는 멀쩡하게 움직이며 생각을 이어갔다. 논리와 경험이 떠올랐다. 빠르게 증거를 찾고 결론을 내렸다.
... 맞아. 사람이면 불가능한 걸 가능하게 만들잖아!
당장 미래 이연우만 해도, 실타래로 이루어진 그게 사람인가? 사람인 척하는 이상 개체지.
또한, 머리가 빠지는 비를 예견하던 무당 가문도 그랬다. 비의 형태를 가진 이상 현상과 한 몸이 된 인간이면, 비가 언제 내릴지 알 수도 있었다. 그 이상성은 피를 타고 내려왔을 테고. 
이연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건 작지 않은 문제였다.

- "건물이나 지역 형태의 이상 개체가 있거든요. 그거랑 하나 된 인간들은 완전히 이상이더라고요."
사람을 습격해서 잡아먹고, 동료로 만들겠다고 감염시키고, 영역을 넓히기 위해 움직이고.
이연우는 순간 눈을 감았다가 떴다. 몇 개의 문제점이, 어쩌면 목숨을 위협할 문제가 순식간에 떠올랐다.
'이상 개체와 한 몸이 되는 그 비율이 문제야!'
어떻게 균형을 유지해 반씩 섞이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미래 이연우가 그 느낌이었으니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한 몸이 되었는데, 이상 개체가 90퍼센트고 사람이 10퍼센트면? 그보다 더 극단적이라면? 사람은 향만 나는 수준이라면?

- 조금 오염되면 감각이 변이한다. 더 많이 오염되면 능력의 한계를 넘는다. 지우개를 든 멸망주의자나 미래의 이연우처럼. 그리고 거기서 더 오염된다면, 유령이 말한 경우처럼 이상의 일부로 변할 것이다.

- "회사에서 두 개를 권장하는 이유가 그거였습니까."
완전히 한 몸이 되지 못하게. 이이제이처럼, 오염끼리 충돌시키기 위해.
'아니, 잠깐.'
이연우는 문득 의문을 떠올렸다. 말이 안 됐다.
"그러면 차라리 이상 장비로 도배하면 되지 않습니까? 세 개부터는 감각의 과부하가 일어난다고 들었..."
"아니에요. 오염이 그런 거 가리겠어요? 물감 섞이듯 까맣게 섞이지. 청산가리 먹고, 그라목손 마시고, 복어 독 삼키면 몇 개를 먹든 똑같이 시체 되잖아요. 두 개나 세 개나 차이 없어요."
유령이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두 개까지는 오염돼도 어떻게든 인간 언저리로 판단해서 그래요. 세 개부터는 완전히 인간이 아니고요."

- "아뇨. 꿈은 원래 잘 안 꾸고, 공황도 없습니다. 아, 지우개, 지우개를 보면 두렵긴 합니다."
지우개를 제외하면 딱히?
죽는 집도 그 순간에는 가장 스트레스가 심했지만, 지우개를 직접 휘둘러 지우면서 감정을 전부 분출했다.
지우개야말로 트라우마처럼 남았다. 이연우가 구석 탁자 위에 놓인 필기구를 보았다. 지우개가 있었다.
'어우, 끔찍해.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이상 개체가 있을 수 있지?'
상담사는 그런 이연우를 면밀하게 관찰하다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표정은 빠르게 변했다. 온화한 상담사의 얼굴로.

- "이연우 씨는 죽음을 굉장히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여요. 혹시 입사하기 전에 트라우마나 안 좋은 기억이 있을까요?"
누군가의 죽음을 보았거나, 죽을 뻔한 경험이 있거나. 그런 기억은 깊은 흔적을 남긴다.
하지만 이연우는 이상하다는 듯 상담사를 보았다.
"아뇨. 사람이면 당연한 거 아닌가요? 죽고 싶은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상담사는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고, 이연우는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딱히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생존에 목숨을 걸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 뭐야. 그런 사람들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들이요?"
"건강 생각해서 입에 들어가는 거, 피부에 닿는 거 성분 하나하나 따지고 걱정하는 사람들이요. 저는 그 정도는 아닙니다.”
굉장히 대충대충 살고 있었다.
애초에 죽음을 두려워했으면 건강 관리부터 엄청 힘들게 했을 것이다.
카페인, 알코올, 탄산, 설탕, 밀가루 같은 것을 피했을 것이고, 화장품, 세제, 섬유유연제, 샴푸, 비누 따위를 전부 신경 썼을 것이다.
자신은 그저 죽을 위기가 코앞에 닥치면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칠 뿐.
상담사는 펜으로 종이 위에 글자를 써나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종이를 옆으로 치웠다. 종이가 탁자 위로 올라갔다.

- "이연우 씨는 꿈이 뭔가요? 인생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나 지금 바로 얻고 싶은 뭔가요."
"꿈... 딱히 없는데..."
이연우가 턱을 매만졌다. 그냥 하루하루 살아남으면 족했다. 굳이 뭔가 거창한 걸 바라자면...
"안전. 세상이 안전해졌으면 좋겠네요. 이상 같은 거 없이."
이상 개체만 많이 줄어도 마음 놓고 편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주사위나 지우개나 빗물 없이도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 그 정도만 되어도 좋겠다고 이연우는 생각했다.



 

- [도구가 사람을 이상 개체로 만들듯, 사람은 사회집단을, 자연물은 지역을, 지역은 공간을 이상 개체로 만들죠.
그렇다면 이상 개체의 수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는 날,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아무런 관리 없이 풀어놓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호주의 토끼 역병처럼 개체의 숫자가 폭증하겠죠. 오염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 지구를 이상의 별로 만들 겁니다. 인류요? 이상의 별에 사는 인간이 인간일까요? 명왕성의 외계인처럼 오염당해 변이한 무언가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늦기 전에 적당히 숫자 관리합시다. 아시겠죠?]

- [오염도 측정 보고]
오염이 실존하는 현상이라는 걸 밝혀낸 지는 100년이 채 안 지났습니다.
[이상 탄생 가설: 최초의 이상]을 연구한 이상학 교수가 가설을 세웠고, [프로젝트: 평범한 세상]의 연구팀이 우연히 평범한 총탄과 평범한 방을 만들어 증명하면서 법칙으로서 성립되었습니다.
우리는 연구의 부산물 몇 개를 이용하여 오염도를 측정하는 방법을 찾았고, 다각적으로 오염도를 측정했습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자면, 당장 정화 계획을 실행해야 합니다.
오염도가 경계 수준을 넘어, 위험 수준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 [겸사겸사 사후 세계도 이 기회에 치워버리죠. 말이 사후 세계지, 그 또한 이상 아닙니까. 오염의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할 텐데. 전장은 사후 세계, 전투 참여 세력은 모두. 지구를 정화합시다.]

- 전쟁이 다가왔다.
이연우는 사무실로 돌아가지 않고, 어느 호텔 방으로 가서 본사의 마크 정을 만났다.
아무래도 전쟁이니까 특수 조사원으로서 업무가 있을까 질문을 던지고, 전쟁 관련한 정보도 얻기 위해서.
"우선 이것들부터 읽어보시죠."
마크 정이 커피를 홀짝이며 손짓한 곳에는 세 개의 기밀문서가 있었다. 오염 관련한 멸망 시나리오와 계획.
시간이 멈춘 날 보았던 이상기후 시나리오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연우는 빠르게 종이를 넘긴 후, 문득 고개를 들었다. 다 좋았다. 이해는 갔다. 오염으로 망한 지구는 그도 싫었다.
그런데...
"지구가 버티겠습니까?"

- 방주니, 고장난 시계니 전 지구적 규모의 장치에 대해서는 듣기도 했고, 겪기도 했다. 거기에 집단마다 비슷한 게 하나쯤은 있을 텐데...
그러면 오염을 정화하기도 전에 지구가 터지겠는데? 다 죽게 생겼는데?
"못 버티죠."
마크 정은 대수롭지 않게 커피 잔을 두 손으로 잡았다. 이사 직속 직원으로서 나름대로 아는 정보가 많았다.
회사가 억제하고 있는 위험 레벨 5와 6의 개체들. 무기로서 비축한 그것들.
무기고를 비울 때가 되었다.

 

- "그래서 전쟁은 사후 세계에서 할 겁니다. 어차피 파괴해야 할 곳이니, 딱 맞지 않습니까."
"다른 집단이 순순히 따라주겠습니까?"
"거절하면 지구가 터지는데요?"
지구 터뜨리기 싫으면, 우리 뜻대로 사후 세계에서 정정당당하게 맞붙자.
단순 명료한 협박에 이연우는 머리가 아팠다. 이게 뭔...

"허세잖아요. 회사가 지구를 포기할 리가 없는데, 다른 놈들이 잘도 들어..."
"허세 아닙니다."
"예?"
이연우가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마크 정을 보았다. 어쩐지 머리가 더 아파질 것 같았지만, 듣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었다.
"허세가 아니라뇨. 보존 계획만 믿고 그러십니까?"
"이차원에서도, 평행 세계에서도 인간은 잘만 살고 있습니다. 여기, 지구 하나 터져도 인류 생존에는 문제 없습니다. 굳이 회사가 보호하지 않아도 말입니다."
마크 정은 속내를 읽을 수 없는 낯빛으로 담담히 말했고, 이연우의 얼굴색은 순식간에 몇 번이나 바뀌었다.

- "장난 그만 치십쇼. 고작 이 정도로 포기할 정도면 진작에다 포기했겠죠."
"하하, 들켰네요."
마크 정이 웃었다.
"사실 본사도 지구를 터뜨릴 생각은 없습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전쟁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협박으로는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 믿을 수밖에 없긴 합니다.”
이상 오염은 이상기후와 동급의 위험이었다. 이상 오염을 예방하지 못한다면 어차피 지구를 포기해야 했다.
거기에 회사의 자포자기 또한 그럴듯했다.
이연우는 자기가 적대 집단에 속했다고 가정하고, 회사의 이 말을 들었다고 상상해 봤다.
'겁 엄청 먹을 거 같은데!'
식은땀이 흐르고,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일 것이다. 그나마 인류 보호라는 이념을 족쇄 삼아 묶여 있던 맹수가 다 때려치우고 난동을 부리는 꼴이었다.
농담으로 치부하자니 무섭고, 진담으로 받자니 섬뜩한 소리였다.

- "이 정도 협박은 해야 합니다. 이상기후는 모두의 문제였지만, 오염은 회사만의 문제입니다."
지구가 이상기후로 망하는 꼴은 못 버텨도, 이상의 별이 되는 오염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 집단이 많았다.
오히려 자기네들의 별로 만들려고 발악하면 했지.
"악마숭배자는 지구를 지옥으로, 예술가는 지구를 예술의 전당으로, 클럽은 황금향 엘도라도로, 녹색협회는 원시 자연으로, 마법사는... 마법사는 회사 편에 가깝겠네요." 
차원을 떠도는 여행자에게도 고향 별은 남다른 의미가 있을 테니까.

- 이연우가 문득 서류를 내려놓았다. 아직 이름이 나오지 않은 집단이 있었다.
"멸망주의자는요?"
"그게 이연우 특수 조사원의 임무입니다."
마크 정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서류 몇 개를 뒤적이다가 말했다.
"전투 개시는 한 달 뒤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집단도, 회사도 국가가 아니었다. 영토도, 국경도 없었다.

- 회사의 선전포고가 이상 세계에 퍼졌다. 장소는 사후 세계, 참여 집단은 전부, 날짜는 한 달 후, 예외는 없었다.
지구 터지는 꼴을 보기 싫으면 전력으로 참여하라는 명령 아닌 명령에 이상 세계가 숨을 죽였다. 공연, 사업, 숭배가 멈췄다. 반대로 그림자 속에서는 은밀한 움직임이 꿈틀대며 회사의 속내를 살폈다.
스파이가 정보를 빼내고, 이상 개체가 침투하고, 특별한 효과로 회사를 염탐하고, 회사원을 설득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아, 왜 또 발작하고 난리야.]
[진심이다. 진심이야. 돌겠네.]
[피해망상이야? 편집증이야? 사람도 대충 10년은 지나야 오염되기 시작하는데, 그걸 뭘 벌써 걱정하고 있어?]

- 오염은 어느 정도 퍼진 정보라, 그들은 회사의 각오를 조금쯤은 이해했으나 차마 공감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의심하며 머리를 싸매고 더 그럴듯한,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의도를 찾았다.
[그냥 우리 눌러놓으려는 것 같은데?]
[사후 세계로 제한했잖아. 전쟁을 이용해 사후 세계를 지우려는 속셈 같아.]
[겸사겸사 한 번에 해치우려는 거겠지.]
[회사가 분노 조절 장애에 걸린 모양인데, 우리가 치료해 줍시다.]
회사가 진심이고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그들의 눈 역시 돌아가버렸다.
오랜만의 전쟁이었다. 이는 기회였다. 잃거나 얻거나.

 

- [전쟁은 돈이 된다!]
[대규모 전쟁? 이거 완전 작품 박람회 아니냐? 영감을 받을 수 있을 거 같은데?]
[오오! 지옥의 대악마시여! 제물을, 겁나 많은 제물을 바치겠나이다!]
[좋은데? 그동안 여파가 무서워서 못 써봤던 마법 쓸 기회잖아.]
전운이 감돌았다.

- 그 결과를 본 마크 정은 생각했다.
'일을 맡아주는 것만 해도 다행이지.'
이연우는 생존과 안전이 제일인 사람이었다. 회사가 채워줄 욕망도 없었고, 반대로 막 쓰다가는 회사가 해를 입을 양날의 검이었다.
이미 본사에서는 정예 요원으로 취급받는 이연우인 만큼 그들은 보상을 준비했다.

- 마크 정이 철제 큐브를 꺼냈다. 복잡한 기계장치처럼 생긴 그것을 퍼즐 풀듯 이리저리 움직이기를 잠시.
"선입금입니다."
딸깍, 열린 큐브 안에는 총알 한 발이 있었다. 평범한 총알 하나.
그 순간 이연우가 벌떡 일어나며 뒤로 펄쩍 뛰었다. 요원의 붓이 얼굴을 가로질러 못난 선이 그어졌다. 요원이 한숨을 푹 쉬었다.
"아니, 분장하는데 그러시면..."
하지만 이연우는 뻣뻣하게 서서 총알을 노려봤다. 잔뜩 확장된 동공에 큐브와 총탄만이 비쳤다.
"그건..."
솜털이 삐죽 서고 본능이 땡땡 경종을 울렸다. 이건 위험하다. 잘못하면 죽는다.

- 동료 의식이나 협동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멸망주의자가 남아 있을까?
그때였다.
우웅, 우우웅, 핸드폰이 진동했다. 이연우가 서둘러 확인하니 마크 정의 화상 통화였다. 받기 무섭게 마크 정의 다급한 표정이 보였고 빠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그쪽 상황 어떻게 됩니까? 지금 렙틸리언들이 미쳤습니다!]
"예?"

- 분할된 화면에서는 세계 각국의 상황이 나왔다.
한창 콘서트 중이던 가수가 고음을 높이던 중, 갑자기 렙틸리언으로 변해 관중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느 나라의 의회에서는 의원이 변신해 주변 의원을 물었고, 어느 기업에서는 CEO가 직원들을 물었다.
곳곳에서 긴급 속보가 흘렀다. 전 세계에 렙틸리언 전염병이 전파되고 있었다.
 
- 군인들이 이연우를 둘러싸고 소독하기 시작했다.
핏물이 남은 옷을 회수하고, 무슨 액체를 뿌리고, 비닐 텐트 같은 것을 씌웠다.
'끝났다...'
이연우는 가만히 절차를 거치면서 섬을 바라보았다.


- 마크 정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오셨습니까? 이번 일은 아주 훌륭했습니다. 본사는 아주 만족하고 있습니다."
진심이었다. 여러모로 회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사건이 진행되었다.

 

- "아, 그게..."
그 반가움에 이연우는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나 때문에 오염이 일어났다. 그래서 렙틸리언 보스가 폭주했다. 솔직히 말하려고 했지만, 막상 고백하려는 때가 오니 망설여졌다.
'이거 내가 감당 가능한가?'
세상이 뒤집어졌는데?
어쨌거나 마크 정은 이연우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앞서 걸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차에서 하시죠. 잡아둔 호텔로 모시겠습니다."

- '그래, 솔직히 말하자. 내 나이가 몇 살인데 거짓말로 책임을 피해. 그리고 주사위가 실패한 일이잖아. 이건 사고지.'
하물며 특수 조사원이 임무를 수행하다 일어난 일인데, 회사가 선을 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연우는 마크 정의 차에 타자마자 말했다.
"오염은 저 때문에 일어난 일 같습니다."
"압니다."
"예?"

마크 정은 안전벨트를 매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부지런히 손가락을 놀려 내비게이션에 호텔 위치를 찍기 바빴다.
"이연우 씨가 가시지 않았습니까. 그 정도 사고는 일어나겠죠."

 

- 이연우는 이마를 탁 쳤다가, 마크 정이 액셀을 밟기 전에 얼른 말했다.
"제가 오염시켰다고요. 주사위 굴려서. 물론, 다시 되돌리려고 해 봤는데, 다 실패해서 그 지경까지 갔습니다."
"... 주사위로 오염도까지 돌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마크 정은 이상한 부분에서 놀랐다. 사고의 수습이나 피해규모 같은 것이 아니라.
놀란 눈으로 이연우를 보기를 잠시, 마크 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 이러면 관심 가질 연구소가 많은데, 혹시 실험 몇 번 하실 생각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보다 렙틸리언 전염병이..."
"그건 잘됐습니다. 딱 타이밍이 좋았습니다."
마크 정이 액셀을 밟았다. 자동차가 속도를 높였다. 빠르게 스치는 풍경.
"회사가 전쟁에 정신 팔린 사이, 세계 각국의 정부들이 딴짓 못 하게 만들 계획이었는데, 이제 렙틸리언 전염병에 대응하느라 딴짓할 여력도 없겠죠."

 

- 이연우는 잠깐 말을 잃었다. 물론 징계나 질책 없이 넘어가는 건 좋은데, 이게 맞나?
"그래도 피해가 적지 않을 텐데."
"저도 처음에는 되게 위험한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렙틸리언 전염병은 대처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잠복기도 없고, 감염되는 즉시 눈에 확연히 보이는 증상. 전파력이 상당하긴 했지만, 진짜 전염병 유행에 비하면 정부의 힘으로 충분히 대처할 수 있었다.
혼란을 수습하는 데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어딘가 사람 보는 감각이 무뎌진 본사의 판단에 이연우는입을 벌렸다.
'이게 맞아? ... 아, 본사구나!'
이연우가 문득 깨달았다.
지역 경찰 느낌인 지사와 달리 세계적인 위험에 집중하는 본사라 그런가. 멸망 시나리오급이 아니면, 몇십억 죽는 게 아니면 신경도 안 쓰는 느낌이었다.

- 과연 마크 정은 씩 웃고 있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지 뭡니까. 멸망주의자 중 렙틸리언 보스가 가장 지능적이었거든요."
감염자를 부하로 부리는 보스.
어디 군벌을 감염시켜 군수물자를 공급받고, 각계각층의 중요 인물을 감염시켜 정보를 수집하며 사회에 영향을 끼치던 인물.
"그게 전부 드러났으니, 멸망주의자의 팔 하나 둘 쯤은 부러진 겁니다. 거기에..."
마크 정은 살짝 눈을 굴려 이연우를 엿봤다.
수송기를 타고 오는 동안 잘 먹고 잘 잤는지, 아주 상태가 좋았다. 전염병 사태를 신경 쓰는 점이 특히 좋았다. 인간적이라서.

- "사후 세계 강하 계획도 이번 일로 망했고요. 이제 진행 못합니다."
다 잘됐다. 그야말로 일석삼조였다. 이연우 하나 던졌더니, 골칫거리 세 개가 사라졌다.
멸망주의자에게 괴멸적인 피해 주기, 사후 세계 강하 계획 저지하기, 집단 간의 전쟁을 틈타 이상에 눈독 들이던 세계 정부 견제하기.

- 이연우도 대강 상황을 파악하고는 몸을 느슨하게 조수석에 기댔다.
"예. 그렇다면 제가 더 할 말은 없네요."
회사원으로서 회사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그렇지 않나.
일개 회사원인 이연우는 생각을 멈췄고,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았다.

- 마크 정의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우두커니 서서 보던 이연우가 결의가 서린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내가 어쨌든 좋은 결과를 내서 일을 계속 맡기는 것 같아. 몇 번 망치면 이런 일은 안 시키지 않을까?
회사도 매운맛을 보면 중대한 일은 안 맡길 것이라고, 이연우는 생각하며 호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 이연우는 묵묵히 마크 정의 설명을 기다렸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정보 하나하나가 중요했다.
"녹색협회는 세 부류의 인간이 마구잡이로 섞인 집단입니다. 환경 운동가, 식물 연금술사, 녹색교단."
마크 정은 문서를 차근차근 넘기면서, 차분하게 설명했다.

환경 운동가. 이상 개체로 환경 파괴를 막고 환경을 보호하겠다며 활동하는 환경 운동가.
식물 연금술사. 물과 햇빛과 흙만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식물이야말로 연금술의 정수라며, 식물 형태의 이상 개체를 연구하는 연금술사.
녹색교단. 식물은 신이다, 식물이 없으면 다 죽을 동물들은 식물을섬기고 식물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종교인.

- '와, 진짜 하나같이 엮이기 싫은 인간들인데.'
이연우는 혀를 내둘렀다. 잘못 엮이면 죽거나, 실험동물이 되거나, 비료가 될 느낌.
그러다가 이연우는 표정이 굳었다. 이런 인간들 상대로 투입된다는 거니까...
"안 위험한 거 맞습니까?"
"높은 확률로요. 가서 회사 대표로 말 몇 마디 하고, 살짝 조사 ..."

- '이번 일은 실패해야 하는데, 어느 정도로 실패해야 할까!'

회사의 신뢰와 맡기는 업무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이연우는 슬슬 기대감을 깎아내기 위해 업무에 실패할 생각이었다.

'그래도 너무 거창하게 망하면 안 되고!'
이연우의 생각이 깊어졌다. 감은 눈의 어두운 장막 위로 여러 과거가 떠올랐다.
인간자격시험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렙틸리언 보스처럼 큰 사고는 바라지 않았다. 자신까지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이연우에게도 애사심이 있었다.
회사에서 스카우트해 준 덕에 공시생 생활을 청산하고 어엿한 회사원이 되지 않았나. 아무래도 고의로 회사에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 "적당히 하자."
계획이라고 할 만한 것도 필요 없었다.
마크 정이 말한 대로 가서 회사의 의사를 전하고, 나무 조사는 대충 실패하면 될 일이었다. 간단했다.
이연우는 지루함을 잊어버리고 편하게 쉬며 임무를 준비했다.

- 손을 휘젓고, 남을 삿대질하고, 울먹이고, 이연우는 순간 머리가 멈췄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어쨌든 같은 집단 아닌가.
'뭐지, 진짜 개판인데...'
머리가 아파왔다. 중구난방인 소리들 때문에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저들은 이제 이연우는 안중에도 없고, 서로의 멱살을 잡을 기세로 말싸움을 시작했다.
 

- "당신들 내부 사정에는 관심 없습니다. 저는 경고하러 온 겁니다. 전쟁을 틈타 헛짓하지 말라고요."
우호 집단의 내부 조율이나 협조는 이연우의 업무가 아니었다. 애초에 하고 싶어도 할 줄 몰랐다. 차라리 다 터뜨리는 일이면 몰라도.
'아, 벌써 피곤해.'
짜증 조금과 귀찮음이 많이 섞인 표정.
 
- "물론, 사후 세계에서 식물을 조금 키울 생각이긴 합니다. 맨드레이크를 아십니까?"
"그냥, 이름만 들어본 정도?"
"사형장에서 자란다는 전설의 식물인데, 저희에게 비슷한 식물이 있습니다. 마침 사후 세계가 전장이겠다, 조금만 재배할 계획일 뿐입니다."
이연우는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위험한 겁니까?"
"위험하긴 한데, 총이나 수류탄과 비슷한 급입니다. 회사가 걱정할 만한 그런 건 진짜 아닙니다. 위험한 나무는 말도 안 됩니다!"

 

- "녹색교단이요?"
이건 회사가 파악하지 못한 정보인데? 이연우는 무심코 물었고, 제임스 박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녹색교단은 회사의 손으로 다른 파벌을 숙청할 계획입니다! 거짓말로 트집 잡아서요!"
"환경 운동가는 인간을 학살할 생각이고?"
"네! 둘 다 미쳤다니까요!"
이연우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 "공정한 판단 부탁드려요!"
귀가 아플 정도로 떠드는 소리들.
이연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쨌든 이야기는 잘 들었고, 제가 할 말은 하나뿐입니다. 이상한 짓 하지 마세요."
"... 이걸로 끝입니까? 바로 가시려고요?"
김포도가 문득 어두운 안색으로 이연우를 보았다. 다른 두 명 또한 그랬다.

- 그들의 똑 닮은 시선 속에서 이연우는 에코백을 고쳐 메며 떠날 의향을 확고하게 보여줬다.
"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세 명이 동시에 말했다.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안 되는데."

- 뭔가 이상했다. 뭔가 잘못됐다.
이연우의 동공이 확장되며 빛을 잔뜩 받아들였고, 의식적으로 시야를 넓게 두어 세 명을 한눈에 담았다.
세 명 모두 같은 눈빛, 같은 낯빛, 같은 분위기로 이연우만을 주시했다.
이상한 긴장이 흐르는 초가집. 문득 세찬 바람이 불며 창문이 덜컹거렸고, 꿈에서 깨듯 그들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 조명이 따스한 그곳에는 사람이 열리는 나무가 있었다. 폭탄을 터뜨린 이채린과 제임스 박이 열매처럼 몸을 웅크리고 매달려 있었다.
"녹색협회의 핵심 개체인 하나의 나무입니다. 지부마다 하나씩 있죠. 우리가 파벌끼리 그렇게 싸워도 갈라지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나의 나무에서 다시 태어나는 가족. 하나의 나무로 이어진 정신.
김포도가 답답하게 묶여 있는 이연우를 보았다.
"당신도 저 혜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회사는 그만두고 우리 쪽으로 넘어오세요. 우리 가족이 되면,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 이제 와서 설득이었다. 이연우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못 믿지, 넘어가고 싶은 마음도 없고!'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데. 이연우는 가만히 주사위를 불렀다. 차라리 정보를 얻자.

- 이연우의 두뇌 속에서 번개가 스쳤다. 번개가 구불구불하게 내리쳤다. 지금껏 듣고 보았던 정보와 단편적인 단서를 꿰뚫으며.
'핵심 개체보다 중요한 무언가. 회사를 적대할 만한 무언가. 나에게 바라는 무언가. 회사가 내게 조사하라고 말한 나무.'
모든 것이 이어졌다. 이연우가 문득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위대한 나무? 위험 레벨 6이겠지. 주사위로 그걸 키울 생각이구나?"

- 위험 레벨 6.
핵폭탄의 존재와 비견되는 핵폭탄 하나가 아니라 핵폭탄으로 인해 초래되는 핵전쟁의 위험성을 내포하는 개체.

회사와 대등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

'이건 도대체...'
김포도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상처를 입고 피를 흘려서가 아니라, 이연우 때문에. 엄중하게 속박되고, 씨앗까지 심어진 이연우 때문에.
전쟁터에서 나무를 키우면 죽을 게 뻔해서 이연우 하나를 이용하는 게, 주사위의 확률에 기대는 게 더 가능성 높다고 생각했는데.

- 이연우가 웃었다.
"내가 당신들 협박할 수 있어 보이는데."
이연우는 속삭이듯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 하지만 이연우는 답하지 않았다.
'성공할 거 같은 판정이 느껴져. 정보가 유출되면 진짜 불리해!'
전담 부대의 쓴맛을 보았다. 솔직히 이들이 자신을 생포할 생각이 아니었다면, 오로지 죽일 생각이었다면 그 초가집에서 죽었을 것이었다.
화르르, 지폐가 불타고, 저들이 압수한 에코백과 핸드폰과 권총이 발 앞에 놓였다.
이연우는 자연스럽게 그것들을 챙기며 눈살을 찌푸렸다. 권총의 무게가 가벼웠다. 평범한 총탄이 빠졌다.
'지폐도 이상 개체라 평범한 총탄은 못 가져왔나.'
아깝지만 그걸 찾을 시간은 없었다.
이연우는 재빠르게 에코백에서 지폐 다발을 꺼내, 다시 불을 붙였다. 목표는 도주.
"나는 갑니다. 회사가 얼마나 화낼지 기대하세요."
이놈들하고는 더 엮이기도 싫었다. 이렇게 피해를 입은 건 또 처음인데.
복수 회사에 이르면 알아서 해줄 것이었다.

- "이상으로부터 인류를 지키겠다는 회사가요. 이게 다른 집단에 알려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그리고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마크 정의 질문에 이연우는 탁한 머리를 힘겹게 굴렸고, 고심 끝에 대답을 돌려줬다.
"회사가 또 이상한 무기를 만들었구나?"
"아닙니다. 회사가 꿈꾸는 세상에는, 회사가 목표로 하는 세상에는 이상이 없구나. 저들은 끝내 우리를 모두 지울 생각이구나. 그럴 힘을 계속 연구해 결국 만들어냈구나."
이연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슬슬 뭔가 위험하겠구나, 직감이 들었다.
"그때는 규칙도, 최후의 선도 없는 전쟁이 날 겁니다. 세상이 회사와 회사가 아닌 자들로 나뉘어, 한쪽이 멸망할 때까지 싸울 겁니다."

- 지금 예정된 전쟁과는 다르다.
나름대로 규칙이 있고, 지구는 건드리지 않으며, 서로 정정당당하게 전면에서 싸우는 전쟁. 차라리 구시대적인 결투에 가까운 것.
그것이 생사를 건 멸망전이 된다면.
"큰일 날 뻔했네요."
이연우가 손끝을 떨었다.

 

- "과일 잘 먹었네. 결론 내리면 연락하시게."
그렇게 클럽장이라는 노인이 떠났다.
마크 정과 이연우는 가만히 그의 기척을 살피다가, 그가 떠났음을 확인한 뒤, 토론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의심이..."
"조항부터 확인해야..."
그리고 한창 대화하던 이연우는 문득 벽을 느꼈다.
'이게 정상급 집단인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수를 주고받는 자들. 미래를 도화지 삼아 그림을 그리는 자들. 미래의 이연우나 되어야 그들의 게임에 참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루하루 살기 바쁜 이연우는 살짝 침울해졌다.

- 노인은 안전성으로 이름 높은 차에 몸을 실었다. 운전사가 물었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글쎄, 이 도시나 한번 돌아보지."
정신이 다른 곳에 집중된 듯한 반응. 운전사는 눈치껏 액셀을 부드럽게 밟았고, 차는 도시를 배회했다.
노인은 가만히 풍경을 보았다.
'회사가 발작하길래 안심했더니만...'

- 미지의 위험으로서 존재하던 회사의 발작이 현실로 찾아온 뒤, 클럽은 자본 관리에 집중했다. 손실을 줄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이 상황에서도 이익을 얻기 위해.
영원한 호황도 불황도 없었으나, 어떤 상황에서도 이익을 보는 사람은 있었고, 그건 클럽이었으니까.

그를 위해 주기적으로 황금을 투자하던 황금만능주의가 끔찍한 손실을 예견했다.
'주사위라. 회사식으로 말하면 위험 레벨 5는 되나? 보여준 게 부족해서 6은 잘 모르겠고!'
솔직히 노인도 짐작이 안 갔다. 그것의 한계가 어디인지. 지나치게 거대한 판정은 이연우가 지레 겁먹고 굴린 적이 없어서 애초에 가능하기는 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미지야말로 이상 개체가 가득한 이 세계에서 경계해야 할 것인데.

- '넉넉하게 6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인데!'
노인은 혀를 쯧 찼다.
"정보상 놈. 팔 정보, 못 팔 정보 분간 못 하더니."
운전사는 능숙하게 못 들은 척 핸들을 돌렸고, 노인은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저 회사 좀 보라고. 젊은데 능력 있는 친구 많잖아. 그런데 우리는 왜..."
운전사가 식은땀을 흘렸다.

 

- 다른 하나는 회사가 분석한 주사위 연구 기록이었다. 이연우는 주사위 연구 기록부터 보았다.
[아니, 제발, 연구 과제를 줄 때는 말이나 되는 걸로 주십시오!
주사위를 분석하라고요? 보고서 몇 개랑 촬영 기록만 가지고요? 실험실에서 주사위를 굴려보지도 못하는데? 전문 관측 장치도 쓰지 못하고, 실험도 못 하는데?
이런 걸로 무슨 결과를 냅니까! 결과라고 해도, 신뢰성 0의 가설, 가설도 못 되는 쓰레기지!
좋습니다. 제 소견을 말해드리겠습니다.
주사위는 현실 조작일 수도 있고, 행운과 불운을 다루는 것일 수도 있고, 가능성과 확률을 다루는 걸 수도 있고, 운명을 뒤트는 것일 수도 있고, 아무튼 뭐든 가능합니다! 
지금으로서는 데이터가 없는데 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나마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자면, 축복받은 아이나 예술가협회장과 조금, 정말 조금 비슷하긴 합니다.
기괴할 정도로 운이 좋은 축복받은 아이, 세계에게 사랑받는 협회장. 총으로 쏘려고 하면 총이 스스로 망가지고, 암습 하려는 자는 갑자기 심장이 멎고, 가둬두면 문이 저절로 열리고, 목이 마르면 비가 오고, 배가 고프면 열매가 열리는 그 이상 개체들 말입니다. 주사위는 비슷한 결과를 대실패, 실패, 꽝, 성공, 대성공으로 구분하고 확률적으로 구현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그보다는 연구 기록에서 본 사례를 비틀어보려고 했다.
"행운의 반대말이 불운이죠? 불운을 부여해 보려고요."
"실패하면 운이 좋아지는 거 아닙니까?"
"그럼 홍보되는 거죠. 주사위가 이걸 할 수 있다. 그리고 정보상한테는 행운의 대가를 받고요."
보상을 뱉을 때까지 계속 주사위로 괴롭히면 됐다.

- "주사위. 이 사람한테 불운 부여."
주사위는 가만히 있었다. 대상을 찾지 못한 듯, 제자리에 멈췄다.
처음 보는 반응에 이연우가 당황했다.
'어... 눈앞에 없으면 못 하나? 아니면 나랑 직접 관련되지 않아서? 아니면 주사위가 할 수 있는 판정이 아니라서?'
아니었다. 이연우는 직관적으로 알아차렸다.
'가능성, 확률.'
멀어서 그랬다. 조작할 가능성과 확률이 이곳에 없어서.

- 순간 이연우의 눈이 가라앉았다. 예전에 무슨 조각가를 괴롭히겠다는 허세가 떠올라서가 아니었다. 주사위의 약점을 깨닫고, 그 한계를 뚫기 위해서였다.
'주사위의 한계는 내 생각의 한계야. 그렇다면 지금 구현할 가능성은...'
도미노를 무너뜨리듯, 이곳에서 구현한 가능성이 현실의 무수한 가능성을 거쳐서 적에게 닿아야 했다.
이연우는 판정을 골랐다. 단순한 주사위 놀음에서 벗어나, 조금 더 주사위의 본질에 가까운 판정을.
'내 적이 불운을 겪을 가능성!'

 

- 주사위가 굴렀다.
데구르르,
성공!
이연우를 중심으로 확률과 가능성이 변동했다. 이연우에게서 시작된 결과가 뻗어나갔다.

- "자네는 얼마 정도 생각하는데?"
외투를 옷걸이에 걸쳐놓은 노인이 정보상 앞에 앉았다.
정보상은 어설프게 웃었다. 눈치 보듯 툭 던지는 목소리.
"녹색협회한테 받은 돈 정도?"
"도둑놈의 심보로군. 더 써. 자네, 돈도 많지 않나?"
"다 주식이랑 달러예요."
정보상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스닥은 무적이고, 달러는 신이잖아요. 지금 빼기는 아까운데..."
그는 돈을 버는 족족 달러로 바꿨고, 나스닥 지수를 추종하는 ETF를 사들였다.  


- 노인은 눈살을 찌푸리고는 잔소리를 뱉기 시작했다.
"죽고 싶은가? 그 돈도 다 못 쓰고 묻히고 싶어? 자네가 적절한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저쪽에서 강제로 대가를 뜯어 갈 텐데?"
"에이, 영감님, 조사원입니다. 워낙 해결한 사건이 많아 돈은 조금 번 모양인데, 진짜 큰돈은 못 만진 사람이에요."
정보상이 얻은 정보에는 이상기후를 해결했다는 업적과 보상이 없었다.
이연우가 감춰달라고 요청한 그건 회사가 심혈을 기울여 보호했으니까.
그렇기에 정보상은 녹색협회에서 받은 돈만 줘도 조사원인 이연우가 만족할 거라고 판단했다.
"가치는 상대적이잖아요. 충분히 만족하지 않을까요?"

- 노인은 버럭 고함을 내지르려고 숨을 들이마시다가, 무언가 떠올리고는 힘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보상이란 놈이 정보를 볼 줄을 몰라.'
가치는 상대적이었다. 생존주의자의 목숨을 위협한 대가가 과연 돈으로 해결될까?
그리고...
'예지가 뭘 의미하는지도 모르고.'


- 예지는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니었다. 미래를 바꾸는 것이었다. 무수한 갈래로 나뉘는 미래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조언을 들을 자세도 안 된 애송이 때문에 힘을 낭비하기도 싫었다. 저러다 죽으면 자연사다.
노인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자네 마음대로 하게."
어차피 그의 주 업무는 클럽의 대리인으로서 주사위를 지닌 자와 계약하는 것이니.

- 단순한 경제 위기면 이게 우리가 알 바인가, 본 척도 안 하겠지만.
이건 주사위의 결과와 황금만능주의가 고정한 미래가 합쳐진 사고야!
말하자면 위험한 이상 개체 둘이 일으킨 이상 개체로 인한 경제적 재앙이었다. 이런 일은 회사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문제는 정보상이었다.
노인이 지팡이로 정보상을 가리켰다. 이런 것도 까마득한 후배라고...
"그런데 자네 목숨은? 이만한 사고를 일으킬 수 있는 상대가 자네를 원수로 보고 있어."

- "클럽은 자네를 굳이 지켜줄 생각 없어."
이딴 애송이 하나보다는 황금만능주의와 대적할 수 있고, 또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는 이상 개체가 더 중요하니까.
이번 계약을 시작으로 때로는 이익을 퍼주고, 때로는 손해를 막아주고, 차근차근 서로 엮이다 보면 결국 친구가 되는 것 아니겠나.
'이게 클럽이지.'
무식하게 적대하고 죽이기보다는 세련된 방법 아닌가. 그걸 모르는 어리석은 후배들이 많지만 말이다.

- 하지만 주사위를 굴리고 벌어진 일이었다.
마크 정이 손을 마구 휘저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이연우 씨, 이건 진짜 아닙니다. 물론 본의는 아니겠지만, 대공황이라뇨. 주사위 결과 때문에 고통받을 사람이... 아."
셀 수도 없었다. 이상 개체 때문에 고통받을 사람이 말이다. 나름대로 사명의식이 투철한 마크 정은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 앓았다.
이연우도 할 말이 없었다. 역사책에서나 보던 대공황을 자신이 일으켰다고? 거기에…

- 지금까지는 상황도 잘 맞아떨어지고 회사에 이득도 되어서 어떻게 잘 넘어갔지만, 세 번째 사고도 사고로 넘어갈까?
이연우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렸다.
'본사도 나 의심하는 거 아니야? 일부러 사고 터뜨린다고?'

비틀어서 생각해 보면, 렙틸리언 전염병을 퍼뜨리고, 평범한 총탄을 적대 집단에 넘기고, 경제 위기를 부른 거다.
'... 이거 내가 생각해도 멸망주의자 같은데? 회사원이 아니라?'

-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이연우는 기겁하며 일어나 마크 정의 어깨를 잡고 앞뒤로 흔들었다.
"당신, 이사 아래에 있다고 했습니까? 빨리 연락해서 말하세요! 불운 굴렸는데 난리가 났다고!"
"아, 예! 어깨 좀!"
휙휙 흔들리던 마크 정이 핸드폰을 꺼냈다.

- "예. 지금 주사위 결과 때문에... 아, 아십니까? 클럽이요? 예지가.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통화가 끊어졌다. 이연우는 잔뜩 긴장해 마크 정을 보았다. 혹시나 평범한 총탄으로 쏴버리라는 명령을 내렸을까 봐.
마크 정이 말했다.
"이연우 씨, 당신 잘못 아니랍니다."
"확실합니까?"
이렇게 끝날 문제가 아닌 거 같은데?
이연우의 의심이 깊어졌다. 찰칵, 병실 문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고, 문 뒤에 숨었다.

 

- "저도 잘 몰랐는데, 예지란 게..."
마크 정이 한숨 돌린 표정으로 설명했다.

예지가 고정한 미래. 이연우의 결과는 기울어진 미래를 향해 굴러 떨어졌을 뿐이라고.
이연우도 이해했다. 오라클 시스템 같은 것.
"그러니까 다 대응할 수 있다는 거죠? 전부 클럽 잘못이고?"
주사위도 감당 못 해 터진 오라클 시스템인데, 설마 회사가 예지 하나 못 막을까.
과연, 마크 정은 노트북 화면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시 오르네요."
대규모 심리 조작을 썼는지, 어떤 이상한 이상 개체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 "그냥 사소한 사고로 끝나겠습니다. 그리고 이사님이 말씀하셨는데..."
이연우가 귀를 쫑긋 세웠다.
"이런 일 있으면 말하라고 하십니다. 복수든 뭐든 회사가 대신 처리해 줄 테니까, 주사위는 제발 업무 나갔을 때만 굴려달라고..."
밖에서 터질 폭탄이 집 안에서 터지는 경우를 간접적으로 체험한 이사 또한 기겁했다는 말이었다.

- 다른 법칙으로 운영되는, 혹은 이상에 완전히 오염된 이차원. 사후 세계는 그런 이차원의 일부인데, 그것이 우리 차원으로, 지구 근처로 떨어진 것이라고.
"지구와 조금 겹친 사후 세계의 중심은 저 검은 강인데, 저 강만 파괴하면 마법학회와 회사의 마법사들이 대마법을 진행해 사후 세계를 완전히 추방할 수 있다고 합니다."

- 안절부절못하는 동안 시간이 지나고... 전쟁이 시작되었다.
삑!
시계가 전쟁 시작을 알렸다.
격리되었던 이상 개체의 봉인이 풀렸고, 이상 개체에게 대가를 지불하자 이상 개체가 힘을 발휘했다.
수십 개로 나뉜 화면이 동시에 난장판이 되었다 

- 이연우가 당황했다. 이거 적한테 좋은 일만 해준 거 같은데. 하지만 마크정은 당황하지 않았다. 과연, 공격이 이어졌다. 돌연 악마의 앞에 사람 몇이 나타났다. 헤일로를 달고, 후광에 감긴 사람들이 그들은 짧게 "아멘" 하고 외친 후 주먹을 들었다.
악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롱기누스의 창?]
[악마는 지옥으로,]
꽝!

- "바티칸에 있는 이상 개체인데, 롱기누스의 창이라고 찔려 죽으면 3일 후에 이상 개체로 부활합니다. 부활하고 40일이 지나면 사라지지만요."
이번에는 바티칸의 구마 사제와 회사의 악마 사냥꾼이 스스로 요청했다고.
그렇게 싸움이 이어졌다. 후광을 두른 자들은 악마를 둘러싸고 주먹을 휘두르고, 발로 걷어차고, 때로는 채찍으로 후려쳤다.

- 공간이 스스로 연결되었다. 게다가 그 너머의 존재는 나오지도 않았는데 사후 세계가 일변하기 시작했다.
어스름한 사후 세계.
어둠과 흐릿한 하늘과 미약한 빛만이 존재하는 사후 세계가 공간 너머의 존재를 느끼고, 변화했다.
어둠이 황급하게 물러갔다. 희미한 빛이 조명이 되기 위해 모여들었다. 바람이 불어와 그 공간으로 뿌려지던 전투의 파편을 밀어냈고, 척박한 땅에서 푸른 잔디가 레드 카펫처럼 피어나며 그것을 기다렸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를 맞이하기 위해.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기 위해.

- 이사가 절규하듯이 외쳤다.
"연결 당장 끊어! 예술가협회장이다!"

늦었다.
그것의 맨발이 나왔다. 푹신한 잔디를 디뎠다. 필터가 꺼졌다. 보안 시스템이 멈췄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가려서는 안 되니까.
모두의 눈이, 얼굴이 화면을 향해 돌아갔다. 눈물이 흘렀다. 한순간에, 초월한 아름다움이 영혼을 사로잡았다. 관전하던 지휘부가 마비되었다. 사후 세계에서는 전쟁이 멈추었다.

- 불안감이 엄습했다.
'뭔가 잘못된 느낌인데...'
단순한 심리적 불안이라고 하기에는 직감이 안 좋았다. 마치 대실패를 코앞에 둔 느낌이나, 위험이 등 뒤에 서 있는 느낌.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화면이 변했다. 노트북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다른 관측 장치의 화면으로 변했다.
예술가협회장이 걸어 나오는 그곳으로, 그녀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반응하기도, 경계하기도 전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방해는 없었다. 생물과 무생물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기 위해 움직였으니까.
말할 수 없었다. 움직일 수 없었다. 그저 화면을 보며, 그들은 눈물을 줄줄 흘렸다.
영혼을 울리는 예술, 영혼을 사로잡는 예술을 초월해 영혼을 향한 폭력에 가까운 예술이 그곳에 있었다.

- 꽝, 굉음이 터졌다. 이연우가 멍하니 화면을 보니 사후 세계가 찢겨 나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가장 아름다운 자는 조금의 영향도 받지 않았지만, 이연우는 그것의 영향력에서 조금씩 벗어났다.
생존 본능이 비명을 질렀다.
이연우는 여전히 노트북 화면에 눈을 고정했으나, 시야 구석, 노트북 건너편의 창문에서 유성 같은 것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사후 세계가 산산이 조각난 채로 추락하고 있었다.

 

-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사후 세계가 낙하하고 있었다. 그것은 괜찮을까. 망했다. 사고가 크게 터졌다. 살아남아야 한다. 그것은... 지금 내가 위험한데 내가 우선 아닐까. 일단 살아야 그것도 다시 볼 수 있으니까.
흔들리던 눈동자가 힘겹게 노트북에서 멀어졌다.

- 어떤 도로의 중심.
괴상한 고깔모자나 로브 따위를 걸친 사람들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들 중 가장 늙은 두 사람이 중얼거렸다.
"시원하게도 터졌군."

"이래도 되나 모르겠소. 명령 없이 우리 마음대로 한 거라."
"어쩌겠나. 지휘부가 마비됐는데."
두 노인이 동시에 한 젊은 마법사를 보았다. 노트북으로 관전하던 놈인데, 협회장을 보고 정신이 나갔다.
한번 영혼을 빼서 세탁을 돌려야겠다.

- "최선이긴 했소. 늦었으면 더 큰 참사가 일어났을 테니까."

말하던 두 노인이 문득 서로를 보았다. 그러고는 히죽 웃었다.
"그리고 뭐... 회사든 다른 놈들이든 뭐라고 하면 도망치면 되는 일이지."
"세계가 어디 여기 하나뿐인가."

- 추방 마법은 대마법답게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도로 공사나 도시 계획 같은 규모로.

회사와 마법학회는 사후 세계와 가까운 여섯 지점에 도시 규모의 마법진을 그렸다.
마법 재료가 들어간 도로용 페인트로 차선을 새로 칠하고, 마법진을 구성하기 위해 새로운 도로를 내고.
[연말이라고 세금 쓸데없는 데 쓰네.]
일반인이 투덜거린 것을 제외하면, 세계의 도시 여섯 곳에 거대한 마법진이 순조롭게 그려졌다.
그리고 준비된 추방 마법은 사후 세계를 강하게 밀어냈고, 추락하던 사후 세계는 반발력과 충돌하여 그대로 부서졌다.
세계 곳곳으로 사후 세계의 파편이 떨어져 내렸다.

- '정신 차려!'
이연우는 계속해서 비틀리는 생각을, 노트북으로 돌아가려는 눈동자를 간신히 부여잡았다. 아니, 정확히는 180도 돌아간 생각을 180도 더 돌려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그녀는 멀쩡하겠지. 추락한다고 다칠 사람이 아니야!'
이연우는 어렴풋이 느꼈다.
모든 확률과 가능성이 그녀를 위해 움직이는 것을.
그녀를 해할 가능성은 스스로 움츠러들었으며, 그녀를 도울 가능성은 극대화되었다.
현실을 움직이는 자였다.
황금으로 현실을 움직이는 황금만능주의나, 뜻대로 가능성을 다루는 미래의 이연우와 비슷한 경지에 있는 자.
'주사위의 간섭도 잘 안 통할 사람이야. 이런 사고로 다치지 않겠지. 그러니까 나만 잘 살면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어. 내 생존이 1순위야.'
정신이 360도 돌아 제자리로 돌아왔다.

- 이연우가 벌떡 일어나 창가로 달려갔다.
"사후 세계..."
푸른 하늘, 반투명한 운석 같은 것이 기묘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마찰로 인한 불길도 없이, 소음도 없이.
사후 세계의 파편이 추락하고 있었다. 그것이 떨어지는 방향은...

- "제 정신은 멀쩡합니다. 살면서 이렇게..."
마크 정이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이연우는 그 말을 바로 끊었다.
"어떻게 가려고요?"
"그건..."
마크 정이 눈을 빛냈다. 그는 곧바로 방법을 찾았다. 그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이용하는 방법을.

- "그녀는 예술가협회장입니다. 평소에는 예술의 전당에 머물며, 예술의 전당을 이상 개체로 변화시키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예술가협회에 접촉해서..."
그녀의 정체를 알았다. 이연우는 순간 꺼림칙함을 느꼈다. 평소에는 엮이기도 싫던 예술가. 그런 예술가의 우두머리... 뭔가 이상한데!
끼에에엑!
마침 복도에서 유령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머리를 쑤시는 비명이 두통을 일으켰고, 이연우는 조금 더 그녀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
감각이 곤두서고, 생각이 흘렀다.
'정신이 오염됐나? 하지만 그녀는...'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그녀의 그림자. 그 아름다움.

- 뭔가 이상했지만, 그녀는 이연우의 목숨을 위협하지 않았고 주사위조차 저항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연우는 그것에게서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연우는 쿡쿡 쑤시는 머리를 매만졌고, 곧 결론을 내렸다.

'지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야.'
사후세계의 파편과 융합된 병원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이연우가 마크 정을 똑바로 보았다.
"그보다는 일단 여기서 탈출할 생각부터 합시다. 여기서 죽으면 예술가협회장 다시는 못 봅니다."
마크 정도 정신을 차렸다. 아니, 우선순위를 제대로 설정했다.

"그건 맞습니다."

- 회사가 운영하는 병원.
파편은 잘못 떨어졌다. 전문 인력들이 입원하는 병원에는 어지간한 위험은 물리칠 수 있는 자들이 수두룩했으니까.
끄에에엑!
깁스한 손을 팔걸이에 걸고, 다른 손으로는 은 단검을 쥔 악마사냥꾼이 귀신 하나를 찢어발겼다.
귀신은 원통한 표정으로 흩어졌다.
악마사냥꾼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것을 보다가 짧게 "아멘" 하고 기도했다.

- "아, 그래서 기억 소거제를. 어쩐지 가슴이 아프더니."
마크 정은 상황을 파악하더니,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협회장을 잊었지만, 강제로 지워진 기억의 빈자리는 씁쓸한 고통을 호소했다.
가장 소중한 기억을 잃어버린 고통. 잃어버린 기억이 뭔지도 알 수 없는 고통.
그리고 이연우를 경계했다.
"이연우 씨는 기억 소거제를 안 마신 것 같습니다."
"예. 그 협회장, 정신 오염입니까? 그녀에게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계속 들어서요."
"정신 오염으로만 말하기는 조금 부족하지만, 얼추 맞습니다. 빨리 기억 소거제 마시세요."
마크 정이 이연우에게 빼앗긴 기억 소거제 병을 가리켰지만, 이연우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대신 평범한 총탄이 장전된 권총을 보며 생각했다.
'정신 오염이라고.'
지금도 믿기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조작했다니. 하지만 믿지 않았을 때가 조금 더 안전했기에 이연우는 생각을 비틀었다.
'기억 소거제는 안 내켜. 진짜 정신 오염이면, 시간이 지나면 벗어날 수 있을 거야. 지금은 묻어두자.'

- "붉은 거인이나 정신을 쪼아 먹는 새는 다른 차원에 버린다!"
마법사들은 신나서 대화했다.
"붉은 거인은 어디로 날릴까요?"
"그... 어디야, 무스펠헤임? 거기 보내면 잘 살지 않을까?"

 

클럽의 회장은 미리 준비해 둔 '보험'으로 정신을 차리고는, 침착하게 말했다.
"황금 가져오십시오."
"얼마나 가져올까요?"
비서의 질문에 회장은 냉담하게 답했다.
"예술가협회장하고 싸울 만큼."
위험 레벨 6은 이상 세계의 핵폭탄이었다. 그게 전쟁을 관전하던 고위층을 타격했다. 아무리 좋게 넘어가려는 클럽이어도 이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회사야 사고 수습하기 바쁠 테니, 클럽이라도 협회장에게 경고해야 하지 않겠나.

- 두 집단의 수장이, 두 집단의 핵심 이상 개체가 세계를 비틀었다.
그리고...
이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세계에 퍼진 어떤 힘.
특정한 대상에게 불운을 일으킬 가능성. 점차 사라져 가는 불운이 마지막으로 세계를 기울였다.

- 대악마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내 적에게 불행을. 회사가 미리 깔아 둔 모양인데, 일이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나?'
과연, 전쟁은 전투 전부터 시작되었다. 회사가 깔아 둔 포석이 힘을 발휘했다.

 

- 전부 착각이었다. 이연우가 정보상에게 복수하기 위해 즉흥적으로 주사위로 굴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여파는 지금도 힘을 발휘했다.

 

- "압수!" 
대악마가 포로교환을 위해 이사와 전당을 털어 가는 이때. 몇몇 위험한 파편이 이연우의 적을 향해 떨어졌다. 멸망주의자를 향해. 그들이 숨은 아지트로.
멸망주의자들은 저마다 아지트에 숨어 있었다. 렙틸리언보스의 폭주에서 살아남은 인간이나 애초에 집회에 참여하지 않은 자들이 탈취자의 지휘 아래 일제히 테러를 일으킬 계획이 ... 

- 비서실장이 핸드폰을 가리고, 뭐라고 말했다.
직후, 이연우가 정신 아래에 묻어놨던 협회장의 영향력이 사라졌다.
이연우는 깔끔하게 씻겨 나간 정신을 느끼며, 당황했다. 비틀렸던 정신, 말도 안 되는 생각, 자신답지 않았던 정신.
그 광범위하고 지독한 정신 오염.

- [영향력을 제거했습니다. 의뢰받을 겁니까?]
"아뇨, 진짜 못합니다."
이연우는 진심으로 답했다. 저런 괴물하고 엮이라고? 소름이 돋았다.

- 순간, 이연우가 가벼운 탄식을 뱉었다. 이 정도로 상황이 진행되었다면 생떼 부리듯 거절하기도 힘들었다.
사실, 보복 걱정도 없었고, 조금의 안전이 보장되기도 했고.

'전쟁이잖아. 사람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화풀이하지는 않겠지. 그리고 황금만능주의를 상대하는데 날 신경이나 쓰겠어.'
이연우는 체념하고는 회사원의 슬픔을 담아 작게 중얼거렸다.
"결과 어떻게 나와도 전 모릅니다..."

- 황금만능주의가 이연우를 옮겼다. 병실에서 어딘지 모를 산의 정상으로.
하늘을 가로지르는 운석 파편이 셋. 그중 하나에 협회장이 있었다. 이연우는 잠깐 하늘을 올려다봤다가, 핸드폰을 입 앞으로 가져왔다.
"도착했습니다. 대충 마무리되면 저 다시 옮겨주셔야 합니다."
[당연히 복귀시켜 드려야죠. 아마 별문제 없을 겁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사소하게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된다, 보상을 기대해도 좋다, 뭐라고 인사치레를 하는데도 이연우는 가차 없이 통화를 끊었다.

-

실패, 실패, 실패, 실패... 모두 실패했다.
'이럴 거 같긴 했어!'
이연우는 침착하게 다음 판정을 계속해서 굴렸다. 어차피 협회장을 위해서 움직이는 세계였다. 주사위의 결과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었다.

- 몇 번은 판정을 바꿔서 협회장에게 도움이 될 판정을 굴려보니, 귀신같이 성공이 나왔다.
이쯤 되니 이연우도 오기를 느꼈다. 정확히는 불안을 느꼈다.
"이 정도로 안 통한다고?"
아예 대항조차 불가능하다는 말 아닌가. 저런 것이 자신을 죽이려고 들면, 그냥 죽어줘야 한다는 뜻 아닌가.

- 주사위가 멈췄다. 이연우는 더 굴리지 않았다. 이연우는 새까만 시야 속에서 기억 속의 협회장을 떠올렸다.
이제는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는 흐릿한 인영, 세계가 찬양하던 그녀.
'만약 그게 나한테 죽어달라고 부탁하면!'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듯, 손발이 차게 식고, 생기가 옅어졌다.
'보는 것만으로 위험한데, 강제로 보게 만들었어. 주사위가 아니면 대항할 방법도 없는데, 주사위도 안 통해.'
안 된다. 이대로는 안 된다.
상대가 아무리 위험 레벨 6이고, 정상급 집단의 핵심 이상개체여도, 대항할 수단이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됐다.

 

- 이연우가 이를 악물었다.
'감각을 곤두세우는 것만으로는 안 돼!'
지금도 느껴졌다. 모든 결과는 협회장에게 도움 되는 쪽으로만 나올 것이다.
원하는 결과를 강제로 뽑아야 했다. 최소한 한 번이라도, 협회장이 아니라 자신의 뜻대로 결과를 고정해야 했다. 하다못해 무작위로 결과가 나오게 만들어야 했다.
'집중해, 집중해, 집중해, 도주할 능력은 있어야지!'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연우는 입술이 찢어질 정도로 꽉 깨물었다. 어둑한 시야와 갑갑한 청각 대신, 피비린내가 진하게 났다.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건 기회야."
이건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상대하는 법을 익힐 기회였다. 생존 능력을 키울 기회였다. 협회장 정도 되는 이상 개체를 상대해 볼 기회였다.

- 이연우가 정신을 집중했다. 평범한 총탄이 머리에 겨눠진 듯. 협회장이 눈앞에 있는 듯.
극한까지 곤두선 감각이 가능성을 흐릿하게 탐지했다.

협회장을 위해 기울어진 가능성. 황금만능주의가 움직이는 가능성. 주사위로 조작할 가능성.
'이걸 움직여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손을 휘저어도 보고, 괜히 눈을 부릅뜨고 수면 안대를 노려보기도 하고, 확률을 붙잡듯 주먹을 쥐어도 보고.
하지만 하나도 통하지 않았다. 확률과 가능성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 "못하나?"
이연우가 떨떠름하게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무래도 무리 같았다. 주사위에 오염이 덜 된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시선이 느껴졌다. 수면 안대가 흘러내렸다. 귀를 꽉 막은 귀마개가 스르륵 떨어졌다.
돌연 들이닥치는 세상. 이연우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하늘 가운데에 멈춘 운석과 그곳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보는 듯한 시선을.
협회장이었다. 협회장이 시선을 던졌다. 그녀를 귀찮게 굴던 무언가를 찾아서 인식 왜곡 장비가 힘을 잃었다. 그녀를 속이면 안 되니까.
그 선명한 시선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이연우의 머리가 하얗게 질렸다.
'이건...!'
아직 그녀의 형상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였다. 이연우의 머릿속에서 얼마 전의 과거가 빠르게 스쳤다.
정신이 오염된 자신. 세상을 움직이는 협회장. 상대할 수 없는 위험!
본능이 비명을 질렀다. 이연우도 비명을 질렀다. 하얗게 질린 머리는 복잡한 생각은 하지도 못했고, 짧은 생각 하나를 폭발시켰다.
"도망! 아니! 이동!"
오로지 본능에만 충실한 행동, 생각도, 계산도 없이, 짐승처럼 움직이는 몸.

 

 

- 주사위가 굴렀다.
데굴.
늘어지는 시간 속에서 이연우는 가능성을 느꼈다. 협회장을 위해, 이연우가 도망치지 못하게끔 실패로 기우는 가능성.
'안돼!'
꿈틀거리는 가능성이 완전히 고정되기 전에, 이연우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손을 허우적거렸고...

- 클럽 회장이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단순히 위험성만으로 수준을 따지는 5레벨까지와는 달리, 6레벨은 전능에 가깝거나 불완전하게나마 절대성을 지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온갖 이상과 장비에 카운터를 제대로 맞으니까. 모든 종류의 위험을 이겨낼 능력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이연우는 그런 종류의 힘을 보여줬다. 협회장을 위해 움직이는 세계를 억지로 수정하며 도주한 그 힘.
회장이 다시 중얼거렸다.
"경고인가?"
머리가 복잡했다. 건드리는 시늉만 하다가 힘을 드러내고 돌아간 이유가 뭘까? 무슨 의도를 지녔을까?
이만하면 충분하다? 더 세상을 난장판으로 만들면 멀리서 공격하겠다? 아니면 다른 장소에 큰 문제가 생겼나?

 

- 반면에 협회장은 눈을 깜빡이며 작게 말했다.
"가지고 싶어."
저건 걸작이었다. 자신처럼 세계에게 사랑받는 수준의 명작이었다. 예술의 전당에 두면...
세계가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 움직이려는 그때, 클럽 회장이 말했다. 그 목소리는 거리를 넘어 울렸다.
"적당히 하십시오. 방금 돌아간 저 친구, 선 넘으면 멀리서 저격하려는 모양인데. 여기서 더 선을 넘으면 못 돌아옵니다."
무수한 제재가 들어갈 것이었다.  

- 이연우는 콩닥거리는 심장을 쓰다듬었다. 전장에서 도망쳤는데도 한번 놀란 몸은 좀처럼 진정하지 못했다.
"죽겠네..."
받아들일 수 있는 위험과 사건이 아니었다. 화면으로 본 전쟁터도 그랬고, 협회장이나 황금만능주의 같은 이상 개체도 그랬고.
그래도 어떻게 도망갈 수 있었지만, 이연우는 자신하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확률을 조작했지?'
이연우는 살짝 떨리는 손을 움직였다. 확률을 움켜쥐듯 주먹을 쥐고, 허공을 휘젓고.
하지만 그때의 감각은 재현되지 않았다. 사실, 그 감각도 기억나지 않았다.
진짜 머리가 하얗게 질린 상태로,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 발버둥 쳤을 뿐이었다. 그냥, 엄청 놀라서 비명을 지르면서 도주했다는 체감만 남았다.

- "아, 좋은 일 하셨네요."
이연우가 손을 내밀자, 마크 정은 공손하게 웃으며 커피에 빨대를 꽂아서 건넸다.
"어휴, 아닙니다. 좋은 일은 이연우 씨가 하셨죠."
평소 기억 소거제 대비용으로 쓴 일기로 대략 기억을 복구한 마크 정은 이연우를 거의 이사 대하듯 접대하고 있었다.
그럴 만한 소식을 들었다.
"이연우 씨가 적에게 불운을 부여한 덕분에 진짜 위험한 파편들은 멸망주의자 머리 위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 일로 줄인 피해만 해도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 예?"
넋이 빠진 채로 있던 이연우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요?"
"예. 이사님이 아주 칭찬하셨습니다. 덕분에 멸망주의자한테 피해도 주고, 민간 피해는 줄이고, 시간도 벌었다고요."

"... 제가요?"

 

- "아닌데. 그거 아닌데."
이연우의 손이 벌벌 떨렸다. 손에 쥔 일회용 커피잔이 진동하며 커피가 흘러넘쳤다.
과대평가가 두려웠다. 어떻게 했는지도 기억 안 나는 행동, 우연히 찍은 최고점을 자기 능력으로 볼까 무서웠다.
"협회장의 간섭을 물리친 건 맞는데,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안 나고, 다시 하라고 해도..."
"아닙니다. 이만한 능력은 자랑하셔도 됩니다."
"진짜, 진짜, 제 능력이 그 정도는 아닌데."

 

- 이연우는 불온한 미래를 보았다.
본사가 자기를 협회장과 동급으로 보고, 감당 못 할 임무를 내리는 미래.
마크 정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연우가 돌아버릴 말을 계속해서 뱉었다.
"걱정은 알겠습니다. 그만큼 위험이 따라올까 봐 그러시는 거겠죠. 하지만 이만한 힘이면 오히려 안전해집니다. 누가 감히 건드리겠습니까."
"아니 진짜 아니라니까요!"


- 이연우는 거의 빌듯이 설명했고, 마크 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그거 아닙니까? 어쨌든 6레벨의 잠재력이... 아니지, 그만한 힘을 써봤다는 거 아닙니까? 시간문제 아닙니까?"

- '그래. 뭐가 상대든, 상황이 어떻든, 도망칠 능력만 챙기면 돼. 한 번 해봤으면 두 번도 될 거야!'

- "신나서 달려드는 놈들인데."
"그건 그런데..."
자기들 즐겁자고 본진을 전쟁터에 떨어뜨리는 놈들이다. 그 대악마는 복수가 좋고 난장판이 좋아서 예술의 전당에 쳐들어갔을지도 몰랐다.
'왜 정상이 없지? 그나마 회사나 클럽이 정상이야!'
이연우가 한탄했다. 세상에 미친 자들이 너무 많았다. 마법사들은 붉은 거인을 어디에 떨어뜨려야 재밌을까 말싸움을 한다지 않나.
멸망주의자, 예술가, 악마, 녹색협회, 다른 집단들 전부 머리의 나사가 풀릴 대로 풀렸다.

- "악마숭배자 쪽에는 누가 있습니까? 협회장 같은 거요."

"저도 정확히는 모르는데..."
마크 정은 기억을 떠올리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악마는 아니고 숭배자입니다. 지옥에 가 있다고 듣긴 했습니다. 아마 죽지는 않았을 텐데,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지구에 없으면 됐다. 지금까지 돌아왔다는 말도 안 들린다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듯했다.

- 이게 수습이 되나?
아직 회사의 역량을 체감하지 못한 이연우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고, 마크 정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머쓱하게 말했다.
"최선은 파괴고 추방이죠. 지금도 비슷합니다."

마크 정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추방. 그냥 다 다른 세계에 버리기로 했습니다. 사실 사후세계 전체를 추방하는 것보다는 파편들 따로따로 추방하는 게 쉬워서..."

 

- 이연우는 순간 기억을 떠올렸다. 나무 인간이 보여줬던 이상기후로 멸망한 지구.
그때 이차원에 건설한 이주지는 지구를 쓰레기통 삼아, 감당하기 힘든 이상 개체를 지구에 버렸다.
역시 회사다. 시나리오가 준비되어 있는지, 비슷한 문제 앞에서 비슷한 해답을 내놓았다. 오염 물질을 내다 버리겠다는 해답을.
이연우는 이런저런 말들을 떠올렸으나, 결국은 짧은 말을 뱉었다.
"마법사들 신났겠네요."
"안 그래도 지금 파티 분위기라고..."
얘는 저기에 풀어주면 잘 살지 않을까, 나 저 세계 싫은데 저쪽에 버리자, 의외로 다른 차원도 괜찮지 않을까.

- 어쨌든 큰 문제 없다는 소리였으니까. 세상이 멀쩡하면, 이상기후처럼 대처 불가능한 문제가 아니면 안심해도 괜찮았다
'내 일은 끝났어!'
이연우는 완전히 긴장을 풀고 누더기가 된 침대에 몸을 기댔다. 흐릿한 창, 깨지고 금 간 창문 밖에서는 소란이 한창이었지만, 그와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이연우가 잠들 기색을 보이자, 마크 정은 노트북을 켜고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 경찰과 소방관이 통제하는 인파. 핸드폰을 높이 들고 떠드는 사람들, 생중계를 나온 언론사.
마크 정은 언뜻 미소를 지었다.
'비밀 유지는 그만뒀지. 그런데 정보 통제를 멈추진 않았어.'
새로운 시대에 맞는 정보 통제, 시대에 뒤떨어진 통제 방식은 그만두고 정보화 시대에 걸맞게 바꾼 정보부의 방식.
회사의 보호 아래 평범한 사람들은 결코 진실에 도달하지 못하리라. 이상이 넘쳐나는 세계를 안전하게 여기리라.

 

- 회사는 그동안 완전한 비밀 유지, 완전한 정보 통제를 추구했다. 조금의 정보도 흘러가지 않게, 일반인은 이상의 그림자도 인식할 수 없게.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어디서나 접속 가능한 인터넷, 카메라가 달린 핸드폰, 누구나 쉽게 올리고 보는 정보.
사람 하나하나가 조사원이며 정보원이 되는 시대. 그 헤아릴 수 없는 정보의 바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구가 늘어날수록 회사는 한계가 다가옴을 느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우리는 더 이상 비밀을 유지할 수 없다.]
해마다 소모되는 기억 소거제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모든 정보를 감시하는 자원 또한 그렇다.
그리고 이상기후가 찾아왔다.
회사는 비밀 유지를 그만뒀다. 어차피 포기할 지구와 죽을 사람들, 비밀 유지 따위에 투자할 자원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상기후는 사라졌고, 회사는 정보 통제 방식을 바꿨다.
더 효율적으로, 이 시대에 걸맞게.

- [빅 브라더는 현대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자유의지로 관심을 가지지 않게, 진실을 찾지 않게 만듭시다. 다른 나라에서는 전쟁이 한창이어도 그 소식을 찾지 않듯이 말입니다.]
[정보 검열 시스템을 조금만 바꾸면 더 적은 자원으로 전 세계를 감시할 수 있습니다. 80억 인구가 우리의 눈이 되어줄 겁니다.]
[ 또한, 끈질긴 사람들은 조사원으로 쓸 겁니다.]

그게 지금이었다.

- 김덕복은 실시간으로 송출되는 방송들을 둘러봤다.
[이건 종말입니다! 창조주께서 우리를 벌하시는...]
[제가 신내림을 받았는데, 저건 저승입니다. 저승이 역류했습니다. 어떻게 아냐고? 신께서 알려주셨어!]
[렙틸리언의 공격이 분명합니다! 모두 렙틸리언을 경계하십시오! 청와대 공격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변에 렙틸리언이...]

 

수많은 영상이 올라오는 플랫폼은 김덕복이 들어오길 기다렸다는 듯, 김덕복 취향의 영상을 추천했다.
걸그룹 이상 현상을 탐사하는 동영상, 그가 일하는 방송국의 영상, 영양제 광고 등등.
그중 그의 흥미를 끄는 영상이 있었다. 무슨 눈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영상.
"제법 상세한데..."
김덕복이 영상을 보니, 지역과 사고 사례가 자세했다. 마치 누군가 1차로 정보를 수집한 듯한 모양.
김덕복은 고민하다가, 그 사건을 취재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얼른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버리고, 추위에 얼어붙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자동차로 돌아갔다.
진상을 알 수 있으면 좋고, 몰라도 기사로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또한, 취재 과정을 스트리밍 할 수도 있고.
김덕복이 탄 차가 겨울의 도로를 달렸다.
그는 알지 못했다. 그의 알고리즘에 추천된 영상은 회사가 만들어 일부러 추천한 영상이었음을. 저도 모르는 사이에 회사의 눈으로서 조사를 나간 것도.
그의 스트리밍을 보는 시청자는 회사의 AI이며, 실제로는 송출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몰랐다.

- "별 문제 없겠... 아니, 이런 말 하지 말자."
이연우는 자기 입을 찹찹찹 때린 후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마크 정이 작성하다가 멈춘 문서를 보았다.
주사위 이용권 판매를 업무 삼는 부서, 이연우가 새로 맡을 부서.
'이거나 고민해 볼까!'
앞으로 바뀔 업무였고, 그가 부서장으로 있을 부서였다. 아무리 마음에 안 들면 취소하면 된다지만, 이연우는 진지하게 미래를 그렸다.
그러던 중 이연우는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
'이거 꼭 해야 하나? 적당히 회사 보호받으면서 시간 보내면 안 되나?'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납치되듯 옮겨진 마법사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준비된 마법진을 보았고, 회사원의 재촉에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아. 여기에 버릴 생각은 없었는데."
"어디 가서 말하지 마십시오. 제가 쓰레기 버렸다는 거 알면 보복당하지 않습니까."
단순하게 보면 쓰레기 투기였고, 극단적으로 보면 이상 공격이었다. 다른 이차원이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었다.

 

- 어찌 되었든 파편들은 무사히 추방되었다. 세상을 오염시키는 위험한 이상 개체와 함께.
그렇게 긴급하게 처리할 사태는 마무리되었고, 이상 세계의 여러 집단은 천천히 열을 식히기 시작했다.
피해를 집계하고, 그 피해를 복구하고, 잃어버린 이상 개체를 아까워하고, 전후에 재편될 미래를 계획하고.
이연우 또한 미래를 준비했다.

 

- "그래서 말인데, 이용권 꼭 팔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어디 최후의 셸터 같은 곳에서 시간만 보내면 되지 않습니까"
이연우는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그의 눈이 희망으로 빛났다.
대충 회사의 집중적인 보호를 받으며 안전한 장소에서 삶을 보낸다. 그 시간만 잘 보내면, 누구도 그를 위협할 수 없는 수준에 다다른다.
그야말로 완벽한 미래였고, 인생이었다.

- 마크 정은 멍하니 노트북 화면과 이연우를 번갈아 보았다.

"이용권 판매 안 하시고요?"
"예. 폐쇄적인 장소여도 상관없습니다. 사실 인터넷만 되고 밥만 잘 나오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어서..."
이연우는 말을 할수록 훌륭한 미래가 눈앞에 아른거려 목소리를 높였다.
"시간만 주시면 위험 레벨 6에 오릅니다. 진짜요. 협회장이나 황금만능주의? 그거랑 비슷해진다니까요? 잘 보호하고 밥만 챙겨주면 회사의 최고 전투 병력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 마크 정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필사적으로 부정할 때는 듬직했는데, 갑자기 믿음이 확 떨어지는 느낌.
'물론 거짓말은 아니겠지만...'
회사가 이만한 인력을 쉬게 둘 리는 없었다. 이연우가 이미 실력으로 증명했으니까. 보호는 필요 없다는 증명.
"이연우 씨, 이미 협회장 앞에서도 도망치지 않았습니까. 어떤 보조 없이 혼자서요."
순간, 이연우가 말을 멈췄다. 등골을 타고 오르는 불안감. 회사의 과대평가.
"그건 우연이고, 재현도 못 하고, 기억도..."
"협회장입니다. 그녀가 당신을 인지했고, 당신이 그곳에 있기를 바랐습니다. 우연으로 도망칠 상대가 아닙니다."

 

- 마크 정은 물론이고 본사까지 동의하는 판단이었다.
도주에 성공했다고? 펑펑 터지는 폭탄이 협회장한테서도 돌아올 수 있다고? 인간 종말 방어 장치 느낌으로 업무 주면 되겠는데?
보호? 오히려 이연우로부터 인류를 보호해야 하지 않을까? 잘못 터지면 망하잖아.

- 거기에 클럽 회장도 보탰다.
"클럽 회장이 극찬했다던데요. 최소한 6레벨에 발은 걸쳤다고. 언제 몰래 이런 사람을 키웠냐고."
"아닌데."
이연우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두 갈래 길이 보였다.
'이대로면 망한다. 보호받기는커녕, 본사한테 등골 뽑히는 길만 보여. 차라리...'
마크 정의 눈동자가 수상하게 빛났다. 이연우는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용권 판매하겠습니다. 제가 생각을 해봤는..."
차라리 한국 지사에 부서 하나 만들어, 본사의 영향력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조금 찾아보니 지사와 본사가 수직적인 관계는 아니었으니까.

- 부럽다, 조사원보다 안전한 일 아니냐, 월급 얼마나 받나, 거기 직원 안 필요하냐...
한편 반장은 눈동자를 대굴대굴 굴렸다. 차마 이연우에게 하지 못할 말이 떠올랐다.
'회사 괜찮나?'
안 그래도 사건 사고를 몰고 다니는 애인데, 실험에 쓰겠다고 이연우 불렀다가 문제만 생기지 않을까?

- 그때, 유지유가 침묵하는 반장을 보았다.
"반장님, 서운해요?”
"아니, 그건 아니고. 연우야, 그 주사위 어디 가서 굴려주냐?"
"아, 그게..."
이연우도 반장의 생각을 눈치채고 볼을 긁적였다.
"회사에는 안 팔려고 했는데, 연구원들이 항의를 엄청 해서..."
이연우가 사고를 터뜨린다는 건 본사도 알고, 한국 지사도 알았다. 그래서 회사에서 안 터지게 처음부터 막을 생각이었지만, 그 소식을 어떻게 들었는지 연구원들이 단체로 드러누웠다고.
"아마 사고 몇 번 터지면 다들 피할 거라고, 부서 몇 개 회생양 삼겠다고 합니다."
"어..."
반장은 입을 달싹거리다가, 돌연 주먹으로 책상을 쾅 내리쳤다.
"어쨌든 승진 축하한다! 고기나 먹자!"
다른 부서 일이 알 바인가? 거기다 사실 아래에 두기에는 감당하기 힘든 직원이기도 했고.

- "회사에서 검열 안 해요?"
회사가 거부할 제안이 그대로 들어왔다.
유지유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자, 이연우는 피곤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제가 알아서 구별하라고 합니다."
좋게 말하면 믿음이었다. 선 넘는 의뢰는 이연우가 알아서 거부할 것이라고. 이연우에게 모두 맡기겠다고.
그쯤에서 반장이 몸을 일으켰다. 어디 나가려는지 옷가지를 챙기던 반장이 지나가듯 툭 말했다.
"네 성격 분석하려는 모양이다."
"아! 맞아요. 언니도 비슷한 일 겪었다고 했어요."
그 말을 듣자, 정보부의 유령을 언니로 둔 유지유는 뭔가 떠올렸는지 머리 위로 느낌표를 띄웠다.
"정예 요원부터는 생화학 무기나 대량 학살 병기로 봐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인성 분석하고 시험하고 그런다고 했는데."

- 사람 하나로 보기에는 가진 무력이 남다른 인간들, 이상개체에 가까운 생체병기.
이들이 돌아버리면 그 여파가 작지 않았기에 회사는 여러 시스템과 절차로 이들의 정신 건강을 항상 체크하고, 또 분석했다.
하지만 정보부의 유령은 평소처럼 기밀 정보를 훔쳐보다가 그 계획을 알았고, 이연우는 반장과 유지유 덕에 회사의 의도를 파악했다.
이연우가 새삼스레 넘쳐나는 의뢰를 보았다. 귀찮은 일거리가 다르게 보였다.
회사가 내민 시험지.

 

- '확실히...'
온갖 부서와 집단. 개성 가득한 의뢰와 그들이 내민 서로 다른 보상.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을 일이었고, 그렇게 쌓인 데이터가 충분히 많아지면 사람을 분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뭘 선호하고, 뭘 피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나를 반쯤 위험 레벨 6으로 보고 있으니까.'
이해할 만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꺼림칙한 것도 없었다.
"그러면 제 마음대로 고르면 되겠네요."
들키고 싶지 않은 속내가 없었으니까.
'내가 멸망주의자도 아니고, 거창하게 바라는 것도 없고, 강하게 추구하는 신념도 없는데!'
이연우는 편안하게 의뢰 목록을 뒤졌다. 오직 그의 취향에 맞는 의뢰를 찾아서.

- 생각해 보면 회사원이라고 밝히면 의심하는 꼴을 거의 못 본 것 같았다. 남이 변장하거나, 아예 몸을 빼앗을 수도 있는데.

"확인했습니다. 들어오십시오."
보안 요원이 머쓱하게 웃으며 철창을 열자, 이연우는 가볍게 질문했다.
"그런데 회사원 사칭하는 경우도 있지 않나요?"
"거의 없습니다."
보안 요원이 잡담하듯 말했다.
"이게 미신인데, 회사원 사칭하면 회사가 잡아가서 진짜 회사원으로 만든다는 괴담이 있어서. 보통은 습격하거나 몰래 들어오는 편입니다."
"아!"
이상이 넘쳐나는 세상이었다. 단순하게 재미를 위한 괴담도 괴담으로 넘어갈 사람은 적었다.
이연우조차 진실을 의심했다.
'진짜 비슷한 이상 개체 있는 거 아니야?'
의심에 물든 표정을 본 보안 요원이 웃었다.
"그냥 미신입니다. 회사원 사칭하는 적대 개체는 결국 회사에 잡히니까, 이상하게 왜곡된 괴담이겠죠. 자,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 이연우가 들어가니, 한산한 1층으로 연구원 하나가 허겁지겁 뛰어왔다. 자다가 나왔는지 부스스한 느낌의 연구원은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
"아니, 이렇게 일찍 오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왕 하는 일 빨리하려고 바로 왔습니다."
그리고 빨리 왔다고 해도 오후인데. 이연우가 그렇게 말하자, 연구원은 눈을 깜빡였다.
"별 보려면 밤 되어야 하는데요?"
"... 아."
천문대여도 회사의 부서라서 시간 상관없을 줄 알았는데. 이연우는 어벙한 표정을 지었고, 연구원은 머리를 긁적였다.
"이렇게 된 거 천문대 구경이나 하십시오. 그렇지, 외계인 보시겠습니까?"

- "외계인이요?"
갑자기 외계인이? 이연우는 에코백을 고쳐 메며 장비를 확인했다. 호기심보다는 경계가 앞섰다.
연구원은 그런 기색도 모르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에 멸망한 머나먼 문명 최후의 생존자가 이곳에 있습니다."

- 연구원은 깊은 탄식을 뱉었다.
"괜찮습니다. 진짜로요. 다 죽어가는 사람한테 호흡기만 붙여둔 느낌이라. 오히려 불쌍한 존재예요. 정말로..."
이미 몇 번 교류를 마쳤는지, 외계인에게 깊이 공감하는 말. 목소리에 담긴 깊은 연민과 존중과 슬픔과 경탄.
이연우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정신 조작인가?'
이연우는 슬그머니 주머니로 손을 뻗었다. 문제가 느껴지는 순간 도망치기 위해, 시간을 사는 지폐를 쥐었다.
연구원은 빙그르 몸을 돌렸다.
"직접 보시면 알 겁니다."

- "꼭 봐야 합니까?"
"보기 싫으시면 상관은 없는데, 명왕성의 이상 장막을 뚫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더 잘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개인적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좋겠고요."

- 연구원은 어떻게 하겠냐는 듯 고개만 돌려 이연우를 보았다. 이연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 외계인을 미래의 나와 같은 수준으로 가정하면 도망치기에는 이미 늦었지. 그쪽 영역에 들어온 거니까!
이연우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다. 미래의 자신. 외계인은 이상기후로 멸망한 세상의 마지막 생존자인 그것과 비등하다고.
그렇다면 이제 와서 야단법석을 떨기도 힘들었다. 차라리 차가운 머리로 살길을 찾아야지.
이연우가 걸음을 디뎠다.
"한번 봅시다."

- "사실, 지금도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모릅니다. 멀리서 온 운석이 그들의 기원인데, 기억을 읽어봐도 정작 그 운석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모르겠거든요."
"무슨 외계인입니까? 명왕성?"
"명왕성은 고향을 떠난 그들이 착륙한 장소일 뿐이죠. 태양계로 날아온 그들 대부분이 명왕성으로 떨어져서..."
정보를 얻기 위한 질문이었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이연우가 조금 더 직접적으로 질문했다.
"외계인은 무슨 힘을 지녔습니까?"
"강인한 생명력이요. 하지만 이조차도 그들 문명의 산물이죠, 그들은..."
연구원이 말을 끌었다. 이연우는 귀를 쫑긋 세웠다. 연구원이 복잡한 감정을 담아 말했다.
"이상으로 인한 오염을 가속하고, 오염을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기술을 가졌습니다. A에 오염되어도 A부터 Z까지 원하는 결과를 내는 기술을요."

- 이연우가 순간 걸음을 헛디뎠다. 그 기술의 전능함을 깨달았다.
'전염병 형태의 이상에 오염되어도, 전염병이 아니라 초인을 만드는 식으로 쓸 수 있다는 거잖아. 아니, 상상이 닿는 모든 이상 개체로 변할 수 있다고!'
단어 그대로 전능이었다.
집을 짓는 이상 개체, 공간을 확장하는 이상 개체, 시간을 조종하는 이상 개체, 식량을 만드는 이상 개체. 생물과 무생물, 시간과 공간을 가리지 않고 필요한 모든 것을 만들 수 있었으니까.
'통제되는 오염은 오염이 아니잖아. 신의 권능이지.'
이연우의 경계심이 더 강해졌다. 에코백을 꽉 쥐고, 감각을 곤두세우고.
연구원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들은 그 기술로 찬란한 문명을 세웠고, 또 그 기술로 멸망했죠. 하지만 그들은 아, 다 왔네요."

- 영생에 지루함을 느낀 초월자는 지루함을 지워주는 이상개체를 만들어 삶의 활력을 영원토록 유지했다.
상상을 현실에 구현하는 기술이었다.
이상에 모든 걸 의존하는 이상 문명이었다.
이연우는 문득 생각했다. 오한이 들었다.
'이런 문명이 왜 망했지?'

- 그리고 시점이 변했다. 시간이 흘렀다.
찬란하고 위대한 세상에 안개가 끼었다. 이상으로 이루어진 안개가.
그 안개는 이들의 세상 어디에서나 나타났으며, 그들이 만들어낸 이상 개체를 침식했다.
안개 속에서 이상 개체들이 뒤틀리고, 흩어지고, 제멋대로 오염되어 변이했다.
모든 것이 이상 개체인 문명은 지독하게 위험한 무언가를 향해 폭주하기 시작했다. 통제되지 않는 오염이 강해질수록 문명을 삼킨 안개가 점점 짙어졌다.
...!
초월자들이 바쁘게 공간을 이동했다. 비명을 지르듯 강대한 정신파를 터뜨렸고, 안개를 막아낼 벽을 만들고, 공간을 격리하고.
하지만 잠깐일 뿐이었다.

- 이상이 아닌 자연물도 변화했다.
그쯤에서 시점이 변했다.
초월자는 모든 걸 이상 개체에 의존했지만, 지능을 잃지는 않았고, 피할 수 없는 멸망이 찾아왔음을 알았다.
살아남은 초월자들이 모여서 대화했다.
문명의 끝을 앞에 둔 그들의 형상이 빛났다. 그들은 그들이 초래한 멸망을 보았고, 우주를 보았으며, 생명을 보았다.
이연우는 어쩐지 그들의 대화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초월자들이 오염을 피하기 위해 어떻게 스스로를 퇴화시켰는지, 말뜻이 이해되었다.

- [이 안개는 모든 생명의 재앙이 될 것이다.]
[우리 손으로 마무리를 짓자.]
[별을 터뜨리자. 우주 앞에서 불멸은 존재하지 않으니. 안개를 지우기 위한 자폭.]
그리고...
[우리의 흔적을 우주에 남기자. 우리가 멸망하더라도, 우리로 인해 태어난 생명이 어두운 우주 속에서 빛나기를.]
새하얀 광채로 이루어진 그들이 검은빛으로 물들었다. 불멸하는 초월자가 단단한 운석으로 변화했다.
지능도 정신도 희미해졌으나, 짧은 시간 동안 안개에 저항할 수 있고, 진화의 가능성을 품은 미생물을 지녀 생명을 뿌릴 수 있는 단단한 돌로.
그들의 별이 터져도, 그 폭발력으로 우주를 가로질러 다른 별에 떨어지도록 튼튼하게.

- 마침내, 별이 폭발했다.
폭주한 이상 문명은 섬광 속에서 스러졌고, 안개는 증발했다.
하지만 그들의 희망을 품은 운석은 별의 폭발을 추진력 삼아 우주로 흩어졌고, 이연우는 운석이 우주를 가로질러 태양계로 날아오는 광경을 보았다.
'명왕성'
운석 무리가 명왕성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하나의 운석은 지구로 떨어졌고,
거기서 기억이 멈췄다.

- "명왕성이 관측에서 벗어난 이유가 그 안개 때문입니까?"

"네. 그들이 떨어진 명왕성이 그 안개로 뒤덮였습니다. 그 안개가 관측을 막아서..."
연구원은 복잡한 감정을 담아 말했다. 재앙을 태양계로 가져온 그들을 원망해야 할지, 그들의 결의와 희망에 감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 한적한 평야에 노을이 지고 있었다. 별을 볼 시간이 조금씩 다가왔다.
명왕성을 관측하기 좋은 시간은 자정이라, 아직도 시간이 남았다. 이연우는 천문대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취미를 즐기며 시간을 보냈다.
새로 만든 취미. 회사 인트라넷 커뮤니티, 회사원들이 익명으로 잡담을 나누는 사이트에 자기 이야기를 쓰는 것. 

- '보안 규정에 걸릴 만한 건 쓰지 말라고 했으니까!'
정보부가 보고 있다는 경고도 있었기 때문에 신원이 파악되지 않도록 적당히 비틀어서 경험담을 썼다.
입사 첫날 테이저건 맞은 썰, 골드버그클럽 털어먹은 썰, 호기심에 나태의 악마 소환했다가 죽을 뻔한 썰, 정보부에 끌려가 심문받은 썰, 지우개 든 멸망주의자가 대머리였던 썰.
반응은 한결같았다.
관심 사원 아니냐, 뭘 하면 첫날부터 테이저건을 맞냐, ... 

- 소리 대신 별의 소리 같은 것이 전자파처럼 흘러나왔다.
인간이 이상 개체가 되었다.
'이 감각은...'
반면, 이미 이상 개체에 오염된 이연우는 감각에 더 깊이 매몰되었다.
평온하게 박동하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밀어닥치는 정보를 해석했다.
이상으로 인해 무질서하고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세계. 혼란에 가까울 정도로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미래.
주사위는 확률로서 가능성을 조작했고, 오염된 이연우는 확률적인 가능성을 느끼고 결과를 이끌 수 있었기에, 지금 이 순간 확률이 높은 미래, 구현될 가능성이 높은 미래를 감지했다.
오염의 안개가 짙게 낀 미래들.

- "... 위험 레벨 6?"
모든 미래가 이상 오염을 향해 수렴했다. 무한한 가능성이 좁아졌다. 모든 것이 이상으로 변화하는 미래로.
관측실이 우주 공간과 연결되거나, 우주 괴물이 나타나거나, 조금씩 확장하는 공간으로 변하는 미래가 보였다.
마치 협회장을 위해 움직이는 세계처럼, 오염을 향해 기울어진 현실과 미래.
하지만 그 후의 미래 역시, 하나의 결말을 향해 치달았다. 

'아니, 위험 레벨 6은 아니야. 이건 절대적이지 않잖아!'

 

- 이연우가 슬쩍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 안에서는 언뜻 주사위의 형상이 비치는 듯했는데, 곧 형상이 무너지더니, 기생충 무리처럼 뭉쳐 있는 확률의 실타래가 되어 꿈틀거렸다.
이연우는 기이한 어조로 말했다.
"회사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구나."
안개와 이상 오염으로 가득한 미래는 결국 회사의 손에 정화되는 것으로 결말지어졌다.

- 순수한 과학과 물리력의 폭력이 안개의 취약점이었을까.
안개가 지구에 번지는 미래 같은 건 없었다. 마치 인류의 생존이 운명인 것처럼.
그 순간, 이연우는 무심코 생각했다.
'재미없어!'
정해진 미래. 고정된 가능성. 정말 재미없었다. 좀 더 혼란하고, 의외의 사건으로 가득한 세상이 되어야 즐겁다.
이연우가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확률의 실타래가 꿈틀거렸다. 닫힌 미래를 활짝 열 것이었다.
'오늘 멀쩡한 지구가 내일 멸망할 수도 있고, 앞으로 걸어도 무작위로 이동하고, 시간은 과거로 흐르기도 하고 반복하기도 하고. 그래야 재밌지 않겠어?'

 

- 그 순간이었다.
이연우의 귀에 목소리가 들렸다.
[걸작. 나와 함께 예술의 전당으로...]
그녀가 말했다. 세계가 움직였다. 이연우를 그곳으로 부르기 위해.
이연우는 기겁하며 가능성을 구현해 막아냈고, 얼른 시선을 돌렸다.

 

- 그리고 지구 곳곳에 드물게 도사린 이상 개체 몇 개. 회사 소유도 있었고, 봉인된 것도 있었고, 집단이 숨긴 것도 있었고.
그 순간 이연우는 생각했다. 천문대의 연구원이 한 말이 떠올랐다.
'우주가 자연적인 방어막이라고?'
저 안개조차 막아낼 수 있는 신화에 가까운 그것들. 이상문명조차 만들어내지 못한 것들이 널려 있는 지구.
'지구로부터 다른 별을 지켜주는 건 아닐까? 지구가 제일 위험한데?'
이연우는 갑자기 손에 쥔 힘을 놓기 싫어졌지만, 자아를 잃어버리기는 싫어 오염도를 되돌렸다.
주사위를 비롯한 전부가 돌아왔다. 안개와 접촉하기 전보다 조금 더 오염된 상태로. 아직은 준비가 안 됐으니까.
힘이 사라져 무기력에 빠지기도 잠시. 이연우가 눈을 빛내며 생각했다.
'오염되어도 자아를 지킬 방법을 찾아야 해!'


- [너희는 도박 근절 센터에 의뢰하지 마라. 밤하늘 좋아하던 직원이 그 센터와 합동으로 실험했는데, 그날 부서 사라졌다...]
부서가 있던 자리에는 이제 폐허만 남아서 기삿거리 찾는 기자들이 승냥이처럼 돌아다니고, 멀쩡한 직원들은 다 발령 대기 중이라고.
이연우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제가 트리거는 맞는데, 그래도 회사 실수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그 말, 부정하지 않고 변명하는 말을 보니, 과장 섞인 글이 아닌 모양이었다. 유지유가 슬그머니 의자를 밀어 이연우로부터 멀어졌다.

 

- "진짜로 폐허만 남았어요?"
"그... 위험 물질이 유출돼서 폭격 같은 걸 해서..."

유지유는 한동안 침묵하더니, 반장을 보았다.
반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갑자기 불안한 듯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우리 사무실도 터지는 거 아닌가?'
이연우가 날려먹은 게 한둘인가? 심문받으러 가더니 클럽의 스파이한테 털렸고, 정보부 가더니 지우개 든 멸망주의자가 쳐들어오고, 잘 살던 원룸 건물하고 셸터도 날아가고. 
이쯤이면 사무실이 멀쩡한 게 오히려 이상했다.
반장이 급하게 말했다.
"보안 직원. 우리 건물에 이상 장비도 있는데, 보안 직원 요청할까?"

- 유지유가 입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의미 없을 거 같아요. ... 연우 씨, 빨리 다음 의뢰 골라요! 센터 연 첫 달인데 열심히 일해야죠!"
그 의도가 투명했다. 어차피 터지는 폭탄이라면 바깥에 둔다. 위험은 남한테 넘긴다.
참 조사원다운 사고방식에 이연우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꾹 참았다.
'그래봤자 집 구할 때까지는 여기서 먹고 자야 하는데!

 

- 이연우는 유지유의 말을 듣는 것처럼 도박 근절 센터의 의뢰 목록을 보았다. 이연우가 눈을 깜빡였다.
하루사이에 의뢰 목록이 줄어들었다. 천문대 사고를 들었는지, 여러 부서가 의뢰를 취소한 것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새로 들어온 의뢰가 있었다. 여전히 주사위 도박을 원하는 사람. 혹은 메시지처럼 보내진 것.
[당신 마음속에는 멸망주의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알아요. 당신은 어지간한 멸망주의자보다 더 많은 피해를 일으켰어요. 이제 마음은 그만 속이고, 회사의 속박에서 벗어나 진짜 멸망주의자가 되십시오.] 
멸망주의자의 스카우트.
'무슨 미친 소리야!'
이연우는 기겁하며 곧장 거절을 눌렀고, 그에게 필요한 보상을 찾아 목록을 뒤적였다.
'오염에 저항해 자아를 지키는 방법은 못 구하겠지. 구해두면 좋은데, 주사위가 확실하니까!'

그러다 문득 흥미를 끄는 의뢰를 보았다. 새로 들어온 의뢰였는데, 축복받은 아이라는 단어가 보였다.

 

- [주사위 실험 요청]
주사위의 위험성을 통제할 수 있다면 혁신 아닐까요? 안전하게 온갖 실험에 사용될 수 있지 않을까요? 행운의 축복을 받은 아이가 곁에 있으면 불운한 결과는 안 나오지 않을까요?

- 그 후로도 글이 길게 이어졌다.
우리 연구원들에게 주사위는 실험에 사용할 도구이니 그것부터 잘 써먹을 방법을 찾기로 했다 등등.
하지만 이연우는 순수하게 축복받은 아이라는 말에 흥미를 가졌다. 주사위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저런 개체가 옆에 있으면 사건 사고가 안 일어나지 않을까?'

- 이연우는 당당하게 연구원을 마주 봤다. 이연우의 거리낌 없는 눈빛과 연구원의 경계하는 눈빛이 교차했다.
'내가 본사도 아니고, 소년병처럼 쓰지는 않지!'
본사에 대해 이상한 이미지를 가진 이연우는 떳떳하게 말했다.
"저도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행운이 목적 맞습니다. 여기 있으면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 안전?"
연구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예상치 못했던 말을 들었다. 경계도 순간 풀렸다.

- 지금까지 축복받은 아이를 이용하려는 사람은 많았다. 예산이 부족하다고 행운을 이용해 주식과 코인을 하고, 로또 번호를 찍게 만들고, 게임 가챠를 대신시키고, 실험에 동원하고.
그 외에도 수많은 실험이 있었지만, 안전을 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쯤에서 연구원은 이연우에게 관심을 가졌다.
"혹시 출신이..?"
부서장쯤 되면 아무나 앉혀놓지 않는다. 아무리 독특한 이상 개체를 가졌어도, 말단부터 경력과 신뢰를 쌓은 다음에야 시키지.
이연우가 솔직하게 말했다.
"조사원이었습니다. 사실 지금 부서도 임시라, 실적 안 좋으면 조사원으로 돌아갈 겁니다."
"아, 조사원."
연구원은 경계를 완전히 풀었다. 조사원 출신이면 안전을 원할 수도 있다. 정신이 조금 이상한 다른 연구원처럼 아이를 이용할 생각도 없을 테고.
'주변에 있고 싶을 뿐이면, 뭐!'
연구원은 조금 느슨해진 눈으로 이연우를 보았다.
"그 아이 설득해 보십시오. 그렇게 싫어하는 건 처음 보는데, 그 애가 싫다고 하면 사무실 이전 못 할 겁니다."

"그러죠."
방해만 안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이연우가 주변을 둘러봤다.

- "아이가 안 보여요! 어디 숨었나 봐요!"
이연우의 접근을 본능적으로 느꼈는지, 몸을 숨겼다. 연구원은 빠르게 대응했다.
"가출하지 못하게 경계하십시오! 그리고..."
보안 요원과 감시 시스템이 경계 태세를 높이는 순간, 연구원은 이연우를 힐긋 보았다. 연구원은 뒤늦게 의문을 느꼈다. 아이가 이렇게까지 꺼린다고? 

- 보고서는 그대로 상부로 올라갔고, 한국 지사뿐만이 아니라 본사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읽어보았다.
아이의 순수하면서도 진실한 이야기는 그들에게 의미심장하게 다가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순진한 어린아이를 괴롭힌 것처럼 보여서.
무엇보다 노래가 결정적이었다.
[거기서 그런 노래를?]
그래서 몇몇 사람들에게 비상이 걸렸다.
이연우를 담당하는 프로파일러들과 이사와 마크 정을 비롯한 직원들.
[무엇이지? 인간성을 상실한 것인가? 이상 개체가 되어버린 것인가? 안개에 오염당한 것인가?]
[아이에게 트라우마가 될 기억을 만들다니.]
이연우는 단순한 직원이 아니었다.
미래의 레벨 6이자, 회사의 핵심 전력. 그간의 업무 이력만 모아서 읽어보면 감탄이 나오는 인재.
그렇기에 이연우가 돌아버리면 그 여파는 끔찍할 것이었고, 회사는 사소한 사고 하나도 함부로 넘기지 못했다.

- [생존주의적 성향이 발현된 것 아닐까요? 첫 만남에 허벅지를 맞았는데, 공격으로 인식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질투일지도 모릅니다. 아이의 행운은 이연우가 원하는 방향의 힘인데, 아이는 처음부터 그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합리적으로 따져보는 사람이 있었고,
[처음부터 본성을 숨겼다면? 그동안의 모습은 소시오패스가 고도로 학습한 결과물이라면?]
[이상 오염의 징조일지도 모르지요.]
멸종의 대변인처럼 비관적으로 가정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그냥 오해 같은데...]
생각 없이 본질을 알아채는 사람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그들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모든 주장이 그럴듯했고, 또 확실한 근거가 부족했다.

- 마크 정은 문서를 건네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아니, 아이를 왜 그렇게 괴롭히셨습니까. 아이가 악몽에 시달리겠던데요."
"제가요? 저 진짜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 마크 정은 이연우란 사람을 어느 정도는 안다고 생각했다.
'위험 싫어하고, 어리숙하고 허술한 부분이 있는 사회 초년생!'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낯선 사람이 눈앞에 앉아 있었다. 생존 본능이 켜진 이연우가.
사람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억울함이나 미안함 따위의 감정은 증발했고, 느슨한 태도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 이연우는 무미건조한 표정을 지은 채,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본사 무서워...'
이연우의 인식에서 본사는 사람이 아니라 기계장치에 가까웠다.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 숫자로 보는, 인류가 생존할 수 있다면 윤리나 도덕 따위는 내다 버릴 수 있는 냉혹한 무언가. 
그런 것이 이상 세계를 지배하는 힘까지 가지고 있는데, 자신을 위험 개체로 본다면...

 

- "본사의 걱정은 알겠습니다. 어린아이를 괴롭힌 느낌이니, 인성에 문제가 있나 의심할 수도 있죠."
이연우는 오해를 풀기 위해 침착하게 말을 쏟아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아이를 왜 괴롭히겠습니까."
"그 노래는 왜 부르셨습니까?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그 노래 말입니다."
이연우가 회사의 의심을 알아챘으니, 마크 정도 직접적으로 ... 

- '본사에 찍히지 않았으면 됐지!'
긴장이 풀린 이연우는 자세를 느슨하게 풀었다. 이불만 대충 깔아 둔 이연우의 방이었기에, 벽에 등을 기댔다.
그러고는 문득 고개를 들어 마크 정을 보았다. 떠날 준비를 하던 마크 정이 의아하게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
"제 집, 언제 구해주실 겁니까?"
"아!"
이연우는 셸터가 터진 이후로 조사반 건물에서 잠깐 머물고 있었다. 빈 방에 대충 이불만 깔아 두고.
'딱히 안 찾아봤는데. 괜히 좋은 셸터나 도시에 있는 집 구해줬다가 사고 터지면 어쩌려고.'
마크 정은 눈을 대굴대굴 굴리더니, 얼른 그럴듯한 말을 떠올렸다.
"여기서 계속 머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 "예?"
이연우의 표정이 단번에 찌그러졌다. 샤워실도 있고, 가스버너로 밥도 해 먹을 수 있고, 큰 문제는 없지만 그래도 싫었다. 마크 정은 빠르게 변명을 뱉었다.
"자, 들어보십시오. 예술가의 이론을 아십니까? 세상을 감동시키면 작품이 된다."
"그건 아는데..."
"그 작품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사람이 될 수도 있고, 공간이 될 수도 있고, 물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 건물도 작품 아닐까요?"
"그게 무슨..."
이연우는 혼란스러운 기색으로 마크 정의 궤변을 들었다. 


- "조사원들이 오래도록 쓴 건물입니다. 생존 예술가들의 거점인 만큼 사고가 안 나는 이상 개체가 됐을지도 모릅니다. 이연우 씨가 한참 머물렀는데도 아무 문제 없지 않았습니까?"
그런가? 이연우가 머리 위로 물음표를 둥둥 띄웠다. 뭔가 그럴듯한데.
"사실 이연우 씨는 축복받은 아이를 찾아갈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 건물이 이연우 씨가 원하던 거니까요.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마크 정은 헛소리를 당당하게 뱉고는 서둘러 방을 나섰다.

 

- 이연우는 한동안 어안이 벙벙한 기색으로 있다가,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세상을 감동하게 하면 작품이 된다. 예술가협회장.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 세계의 편애를 받는 괴물.'
그렇다면 생존 본능으로 세상을 감동시키면.
'생존 본능이 이상 개체가 아니어도 이상 개체로 만들 수 있고, 이상 개체가 맞아도 레벨을 올릴 수 있지 않을까?'

- "... 어?"
이연우는 눈을 깜빡였다. 분명히 사무실에서 잠들었는데, 눈을 뜨니까 낯선 세상이었다.
모래가 끝도 없이 펼쳐진 사막. 덥지도 춥지도 않은 온도. 푸른 하늘에는 이런저런 구름이 둥실둥실 떠다녔다.
무엇보다 그 앞에 서 있는 사막과 어울리지 않는 건물 하나. 이연우는 그 간판을 올려다봤다. 끊임없이 변하는 간판이 이연우의 언어로 변했다.
"꿈 거래소?"

- 이연우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온갖 사건 사고를 겪었다. 이게 단순한 개꿈인지, 이상 개체가 엮인 현실인지 분간하기란 쉬웠다.
이연우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얼굴에는 신경질적인 기색이 날카롭게 솟았다.
'아니, 뭔 그냥 낮잠 잤는데 왜 또 이상 개체랑 엮이는 건데.'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영 마음에 안 들었다. 주사위부터 찾아본 이연우는 주사위를 이용해 현실로 다시 돌아갈까 고민하다가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이동은... 대실패 나오면 무섭지. 일단 들어가 보자.'
자신을 끌고 왔으니, 돌려보낼 방법도 저 가게에 있을 것이었다.

- 이연우가 활짝 웃었다. 어찌 보면 무시당한 것이었지만, 그에게는 별문제 없이 돌아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가게 주인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래도 당신 꿈은 꽤 괜찮네요. 순수한 생존 욕구, 삶에 대한 갈망. 이건 불치병 환자한테서나 볼 법한데, 좋아요. 삶의 희망을 잃은 사람한테 팔면 되겠어요."

- 가게 주인에게는 이연우의 꿈이 보였다.
생존. 그 원초적이고 순수한 꿈.
가게 주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기분 좋은 목소리가 후드아래의 어둠 속에서 흘러나왔다.
"그 꿈 저한테 파시죠? 더 어울리는 사람한테 전해줄게요. 당신보다 그 꿈을 잘 이뤄줄 사람이 그 꿈을 보석처럼 빛내줄 거예요."
이연우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가게 주인을 바라보았다.
가게 주인은 두 손을 계산대 위로 모았다. 설득하듯 친절하게 말했다.
"능력도 없는 주제에 감당 못 할 꿈을 가지고 있으면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차라리 깔끔하게 꿈을 포기하면, 꿈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어요. 당신의 꿈은 다른 사람이 대신 이뤄줄 거고요."

 

- 가게 주인이 한 손에 심장 모형을 쥐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뛰는 심장 모형.
"좋아요. 훌륭한 꿈이에요. 강하고, 순수하고, 이걸 누구에게 줘야 아름답게 빛날까요?"
그쯤에서 가게 주인이 이연우를 보았고, 둘의 시선이 교차했다. 가게 주인이 말했다.
"어때요? 자유로워진 기분이?"
"잘 모르겠는데."
이연우는 멍하니 말했다. 사라진 생존 욕구를 대신해 정신이 다시 구성되고 있었다. 그가 겪었던 모든 기억을 바탕으로 새롭게.
어딘가 혼란스럽고 어수선한 이연우의 분위기가 변하기 시작했다.
"자, 이제 당신은 꿈에 속박되지 않고 자유를...?"
가게 주인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하다가 멈췄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이연우가 냉혹하게 중얼거렸다.
"사람은 언젠가 죽어."
가치관이 재정립됐다. 그가 겪은 사고와 이상 경험. 살얼음판 같은 세상. 광대한 우주와 이상 세계.
이 세상에 영원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루살이처럼 하루하루 살아남겠다고 발버둥 치는 것은 헛짓거리에 불과했다.
오직 하루하루 충실하게, 내일 죽어도 만족하며 죽을 수 있게, 마음 가는 대로 사는 것이야말로 옳았다.
그리고 지금 이연우의 마음이 가는 곳은...

 

- "내 꿈을 마음대로 가져갔지. 그 대가는 내가 알아서 받을게."
위험하겠지. 상대는 미지의 이상 개체고, 주사위의 리스크는 여전했으니까. 생존 본능이 은근히 비명을 지르고 있으니까.
하지만 알 바 아니었다. 기분 나쁜 걸 해소하는 게 더 중요했다. 이연우가 주사위를 불렀다.

- "생각해 봤는데, 그냥 대가를 가져가는 건 재미가 없어."

"..."

가게 주인은 대답하지 않고, 이연우를 유심히 살폈다.
꿈을 잃어버린 이연우는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 딱히 열정도 없고, 죽지 않았기에 살아 있는 모질고 거친 세상에 찌든 어른.
본래라면 가게 주인이 본 척도 안 하고 무시할 인간이지만...
'뭐지?'
가게 주인은 무심코 몸을 뒤로 뺐다. 꿈도 열정도 없는 인간한테서 위험이 느껴졌다. 손님으로 찾아오는 인간보다는 자신 같은 무언가에 가까운 분위기.

 

- 이연우는 히죽 웃었다.
"우리 주사위 놀이나 합시다. 판돈은 당신이 가진 것 전부."
"... 당신 꿈이 아니라요?"
가게 주인이 손을 내밀었다. 손에 잡힌 이연우의 꿈, 박동하는 심장 모형이 계산대에 올라갔다.
하지만 이연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건 재미없잖아. 내 기분이 풀리지도 않고."
원래 자신의 꿈이었다. 그걸 판돈으로 걸어봤자, 자기 것을 돌려받는 것에 불과했다. 기분 나쁨을 해소할 것을 걸어야 했다.

'농담이나 장난은 아닌데.'
가게 주인은 불안을 느꼈다. 단순한 주사위 놀이가 아니었다. 진짜 판돈을 거는 도박이었다.

- "그건 예의가 아닌데. 내 꿈은 강제로 뜯어 가고 주사위 놀이 하나 못 해? 그럼 나도 예의를 못 지키겠는데."
이연우가 웃었다. 그건 그것대로 재밌었다. 상대를 억지로 도박판에 앉히는 것도 좋았고, 거부하는 상대를 대상으로 주사위를 굴려도 좋았다.
사실, 주사위를 굴리는 행위 자체가 즐거웠다.  

- 손익이 맞지 않았다. 황금만능주의를 써서 차원 너머로 도망친 마법사를 응징하게 되면, 되찾을 자원보다 잃어버리는 자원이 더 많았다.
소모되는 황금도 황금이지만...
"예전에 어떤 마법사는 고깃덩이 차원의 문을 열어 황금 광산을 전부 살덩어리로 만들었어. 어떤 마법사는 자기 원수를 클럽 지부에 떨어뜨렸고, 그것들은 잠재적인 테러리스트야!" 
마법사만큼 마음대로 사는 인간도 없었다. 심지어 말장난을 치는 마법사면 괜찮은 편이었다.
대부분은 대놓고 사기를 쳤으니까. 수틀리면 도망치면 된다고.

- 그 말을 전부 들은 이연우는 눈을 깜빡였다.
이상한 깨달음이 머리를 스쳤다.
'역시 힘이 있으면 위험한 일을 해도 위험하지 않구나... 아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꿈 거래소의 경험이 뭔가 가치관을 흔든 기분.

- "그래서 의뢰는 뭡니까?"
"간단하네. 행운 부여."
노인은 기획서 중간의 문단을 가리켰다.
"클럽 회원 몇 명한테 주사위를 굴려주게."

- "사다리 타기로 하는 게 낫죠!"
대충 두 사람을 뽑아 행운과 불운을 몰아주겠다는 말 같았다. 회원들은 치열하게 다투었고, 어찌어찌 상황을 파악한 이연우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감당이 되나? 행운은 그렇다 쳐도, 불운을 한 사람한테 모으면...'
그 표정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노인이 이연우를 향해 빨대를 흔들었다.
"비물질적 빨대라고, 행운이나 감정이나 그런 것들을 빨아들이는 물건이야. 본래라면 다루지 못할 것을 상품으로 만들 수 있지."
그러니까 행운을 극대화하고, 불운이라는 쓰레기를 한 곳에 모은다는 말인데.
'이게 맞아?'
이연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민하다가 생각을 포기했다. 이미 그의 손을 떠난 일이었다.
"그... 뭐가 됐든 나가서 해주세요."

- 그쯤에서 사람 둘이 뽑혔다. 소란스럽게 다투던 회원들이 서로 다른 표정을 지었다.
불운을 몰아 받을 사람은 우중충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연신 쓸어내렸고, 행운을 몰아 받을 사람은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노인이 먼저 불운을 몰아 받을 사람에게 빨대를 건넸다.

"하게."
"예..."
그 사람은 하기 싫다는 기색을 팍팍 풍기면서 어렵게 빨대를 잡았다. 그러고는 한숨을 계속 쉬다가, 다른 사람의 불운을 쭉 빨아들였다.

- 슈욱.
다른 사람을 가리킨 빨대가 공기를 빠는 소리를 냈다. 겉보기에는 장난치는 모양새였지만, 이연우는 기이한 감각을 느꼈다.
확률적인 가능성이 꿈틀대는 감각. 위험이 스멀스멀 다가오는 감각.
'불운이 일곱 명인데, 그걸 모으면...'
아니나 다를까.

- 불운을 빨아들이던 사람이 갑자기 넘어지더니 빨대가 입천장을 긁었다. 그 사람은 피와 침이 섞인 붉은 액체를 질질 흘렸다. 비명을 길게 내질렀다. 
아프다고 데굴데굴 구르는 사람을 노인은 냉정하게 보았다.

"계속해."

- "저 귀신 들린 내비게이션에 휘둘리는 것보다는 낫겠지."

미지의 이상 현상보다는 차라리 뼈 몇 개 부러지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클럽 회원들은 각오를 다졌고, 몇 초 후, 문을 활짝 열고 도로로 몸을 던졌다.
우당탕!
노인과 운전사가 도로 쪽으로 굴렀다. 회원은 운 좋게 푹신한 쓰레기봉투가 잔뜩 널린 곳으로 떨어져 멀쩡하게 일어났다.

"빨리 움직여!"
노인은 아픈 티도 내지 않고 지팡이를 짚었다. 명품 정장이 긁히든, 관절이 아프든, 멈추지 말고 움직일 때였다.

- "일단 저 이상 개체로부터 멀어져! 이 도로에서 벗어나고!"
어쨌든 인간 단속 구간이라지 않나.
그리고 회원의 행운이 그들을 도왔다. 아무런 문제 없이 그들은 도로를 벗어났다.
숨을 헐떡이는 노인과 회원과 운전사가 공원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한숨 돌린 그들은 의문에 사로잡혔다.
이게 행운?
"안 되겠군. 어쩌면 자네가 탐사에 가면 안 된다는 뜻일지도 모르겠어."

- 행운이나 불운 같은 운명은 해석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그들의 인식 안에서 단편적으로, 마음대로 해석되었다.
뭘 얻지도 못하는 이상 개체를 만났는데 그 뜻이 뭘까. 탐사를 막은 게 아닐까.
하지만 노인이 잘못 해석한 말은 회원에게 아이디어를 주었다.
'잠깐만. 이거 혹시...'
기억이 떠올랐다. 이연우의 운을 흡수할 때 일어났던 일들, 빨대를 떨어뜨리고, 기침이 나고, 숨이 막혔다. 꼭 그러지 말라는 듯, 그건 하면 안 된다는 듯. 
가까스로 진실에 도달한 회원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가 부들부들 떨며 질문했다.
"영감님, 회사의 조사원 말입니다. 회사가 조사원 뽑을 때, 뭐를 먼저 봅니까? 생존능력이나 살아남을 운 아닙니까?"
"생존? 그건 후천적인 거지."
숨을 돌린 노인은 왜 그런 걸 물어보냐며,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조사원 일이 뭔가? 이상 개체 찾아가는 일 아닌가? 굳이 따지면 사고 많이 겪는 사람이지."
확실한 조사를 위해 이상 개체를 잘 만나는 사람을 쓴다. 이를테면 이상 현상을 마주한 일반인을 스카우트한다거나.
조사원이 생존의 달인으로 여겨지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그 많은 이상을 만나고도 멀쩡하게 살아남은 인간이란 소리니까. 생존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조사 몇 번 하면 죽으니까.

- '그럼, 그럼... 내가 빨아들인 게...!'
망했다. 흡수해서는 안 될 것을 흡수했다. 이대로면 행운이 문제가 아니었다. 행운에도 한계가 있을 것 아닌가.
어쩌면 행운은 이미 바닥났을지도 몰랐다. 불운 같은 것을 흡수해서.
"영감님! 사실은..."
결국, 회원은 솔직히 말했다. 임시 봉인이라도 받으려고.

- 빨대를 돌려받은 노인이 무미건조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 프로젝트가 아닌데 그걸 자기 마음대로 망친 놈이었다.
"안타깝게도 도장은 일회용이야. 그러니 잘 버텨보게. 흡수했다고 해도 영구적인 건 아니니까."
"그래도 뭔가 방법이..."
그때였다.
그들이 쉬는 공원으로 웬 헬멧을 쓴 사람이 비척비척 걸어왔다. 좀비처럼 엉성한 걸음으로 손을 허우적거리며.
그르륵, 가래 낀 소리가 헬멧 너머로 들려왔다. 피칠갑이 된 헬멧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상 개체군. 자네 찾아온 모양이야. 자네가 처리하게. 나는 이만 돌아가서 프로젝트를 손봐야겠어."
"아니, 잠깐만요!" 

 


    

  

- "까짓 거 한번 해보죠."
솔직히 문서만 봐서는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 이연우는 미인계 같은 게 통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사무실에서 먹고 자는 인간. 자기 생존에만 관심 있는 인간. 취미도 없고, 약점도 없는 인간.
하지만 그들에게는 향수가 있었다. 사랑의 묘약, 냄새를 맡은 자를 지독한 사랑에 빠뜨리는 이상 개체가.
전자 세계의 유령도, 여자도 자신감을 가졌다. 제아무리 생존주의자여도 사랑 앞에서는 눈이 멀 수밖에 없다. 그게 이상 개체로 만들어진 감정이어도 말이다.
전자 세계의 유령이 흐뭇하게 웃었다. 

"이연우만 우리 편이 되면 안심이지."

- 멸망주의자 중 스파이 역할을 하는 여자는 차를 타고 대기했다. 어느 아파트 주차장에서 노련하게 눈을 빛내며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조사반 반장한테 먼저 접근하자.'
아무래도 이연우가 의뢰도 안 받고 사무실에만 틀어박혀있다 보니, 반장을 징검다리 삼아 만날 생각이었다.
예를 들어, 반장과 교통사고를 일으키고 미안하다며 커피나 먹을 것을 싸 들고 반장의 사무실에 찾아간다거나.

- 그렇게 이연우는 조사반 건물을 떠나 사람이 돌아다니는 거리로 들어섰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았다. 이연우는 괜히 자동차나 하늘을 주의하며 걸었다.
그리고 여자를 보았다. 평범하게 생겼나? 흔한 외모 같긴 했다. 하지만 이연우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칙칙.
길을 걸으며 향수를 뿌린 여자. 바람이 불어오며 향이 이연우에게 다가왔다. 향은 이연우가 들이마시는 숨을 타고 그의 폐 깊이 파고들었고, 즉각 효과를 발휘했다.
사랑의 묘약이었다.

- '아.'
이연우는 사랑에 빠졌다. 첫눈에 반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손바닥에 땀이 맺혔다. 아드레날린이 쏟아졌다.
그 반응은 위기를 느꼈을 때의 그것과 같았고,

- '망했다!'
이연우는 사랑을 위기로 느꼈다. 흔들다리 효과가 반대로 적용되었다. 위험 상황에서 흥분하면, 사랑과 비슷한 신체 반응이 일어나 흥분과 사랑을 분간하지 못한다고 했던가.
위험을 많이 겪은 이연우에게는 그게 이상하게 뒤틀렸다. 사랑의 신체 반응이 위험에 빠져 생존 본능이 발악하는 결과로.

- 반장과 유지유가 점심을 먹으러 떠나 텅 빈 사무실, 이연우가 통화하는 소리가 울렸다.
"예, 접니다! 혹시 멸망 시나리오 진행되고 있습니까? 아뇨, 그냥 갑자기 불안해서. 없다고요? 확실합니까? 아, 확실하군요. 아니, 아닙니다."
의아함이 섞인 마크 정의 목소리에 이연우는 조금 안도하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는 천장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느릿하게 손을 움직여 심장 근처에 얹었다. 아직도 쿵쾅거리는 심장박동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럼, 뭐지? 위험이 찾아오나?"
목숨이 위급한 상황에서나 느끼는 흥분. 이연우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에코백을 점검했다.
아무래도 이연우 개인에게 미지의 위협이 다가온 모양이었다. 그 대비를 할 시간이었다.
거리에서 마주한 여자는 잔상조차 남지 않았다. 생존 욕구가 이연우의 머리를 가득 채웠다.

- 이연우가 돌아버린 줄 알고, 멸망주의자가 괴상한 이상 개체로 정신을 조작한 줄 알고.
'멸망주의자보다 이놈이 더 무서운데.'
반장이 침을 꿀꺽 삼키며 부동산 계약서를 들었다. 그 손이 사정없이 떨려, 문서 또한 푸르르 흔들렸다.
유지유는 형광 조끼 보관함으로 슬금슬금 움직이며 이연우를 주의 깊게 살폈다. 기이한 긴장이 은근하게 내려앉은 사무실.

- 이연우는 숨을 몰아쉬며 눈을 깜빡였다.
'아, 돌아왔다!'
심장을 뛰게 만든 여자가 죽었다. 머리를 채우던 강렬한 감정이 증발했다. 마치 귀신에 씐 것 같았던 정신과 몸이 멀쩡하게 회복했다.
지독하게 격동적이었던 감정, 그 비이성적인 감정이 밀려나며 차가운 정신이 감정을 대신했다.
이연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권총을 고쳐 잡았다. 그러고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이상했다.
'... 저 사람이 위험이라고?'
이만한 위기감을 안겨준 위험치고는 너무 쉽게 처리된 거 같은데?


- '클럽에서 또 받으면 되지. 나랑 친분 쌓겠다는 클럽인데, 거절하겠어?'

 

- 반장은 멍하니 있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맞네? 맞긴 한데...'
반장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건 납치가 아니라 구조 아니냐. 왜 말을..."
단어 선택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데? 아닌가? 갑자기 끌려오는 거니까 납치인가?
반장이 혼란에 빠진 그쯤에 유지유가 눈을 빛냈다. 목 아프게 외칠 필요 없다면 다른 일을 하면 됐다. 보다 직접적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
"저는 구급 키트랑 기억 소거제 준비할게요."

- "시체가 아니잖아?"
멸망주의자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다 환자들이었다. 왜 다 같이 자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응급치료의 흔적이 보이는 게 멸망주의자의 소행은 아니었다.
그때였다. 뒤에서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연우야. 민간인 데려와야지, 이딴 놈들을 계속 끌고 오면 어쩌냐."
"그게, 지폐가 단순노동은 잘하는데, 조금 복잡한 요구는 잘 안 듣네요."


- 멸망주의자가 튀어 오르며 몸을 휙 돌렸다. 그는 그제야 세 명의 사람을 보았다.
중년 남자, 젊은 남자, 젊은 여자, 그들의 분위기는...

"너희는 뭐냐?"
중년 남자에게선 회사원 같은 사명감이 느껴졌고, 젊은 여자는 성격 나쁜 악마한테 시달린 악마 숭배자처럼 우울한 기색이었고, 젊은 남자는 예술가나 악마나 멸망주의자처럼 정신이 이상한 느낌이었다.
'이게 무슨 조합이야. 아니, 잠깐만. 이 남자...'
얼굴이 익숙했다. 누가 보여준 것 같았다. 열심히 기억을 떠올리던 멸망주의자의 동공이 문득 확장되었다. 입이 쩍 벌어지며 절규 같은 소리가 터졌다.
"이연우! 도대체 우리가 너한테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괴롭히는 거냐!"

- "지우개 든 대장이 널 공격했다고 이러나? 그 대장은 네가 죽였으니까 원한은 거기서 끝내야지! 왜 우리 전부한테...!"
고함이 고막을 강하게 때렸다. 이연우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고, 반장과 유지유는 이연우를 슬쩍 살폈다. 
반장이 어렵게 말했다.
"연우가, 음... 명성이 있네."
"연우 씨랑 만나는 멸망주의자마다 다 저러네."
"아니, 아니."
이미 앞서 실수로 데려온 멸망주의자를 상대하면서 똑같이 들었던 소리였다.
이연우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변명하듯 반장과 유지유에게 말했다.
"아니, 전 딱히 뭐 안 했습니다. 진짜 살려고 발버둥 친 게 끝인데. 다 사고였는데."
"개, 개, 개...!"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멸망주의자는 억울해서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이념이 어떻든, 조직 하나를 박살 낸 놈이 저런 소리를 해?

- 이연우는 자신이 가해자가 된 느낌에 불편한 표정을 짓다가, 새삼 상황을 깨달았다. 눈앞에 있는 것은 멸망주의자였다. 그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멸망주의자는 멸망하는 게 맞는데?"
지구를 파괴하고 사람을 죽이려는 집단은 없는 게 좋은데?

그 당연한 진리를 내뱉자, 순간 멸망주의자의 이마에 핏대가 솟는가 싶더니 그대로 눈을 까뒤집으며 뒤로 쓰러졌다. 기절한 것이었다.
"부동산 계약서는 안 써도 되겠구먼."
반장이 발끝으로 멸망주의자를 툭툭 밀었다. 한 명, 한 명 따로 끌려와 각개 격파당한 멸망주의자 몇이 구석에 모였다. 하나같이 얼굴색이 이상하거나 게거품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 유지유가 중얼거렸다.
"멸망주의자는 머리가 이상한 사람들인가 봐요. 자기들은 그렇게 살고 싶어 하면서, 남들을 죽이고, 이해할 수가 없네."
"그건 다 똑같다. 예술가는 예술을 하겠다고, 클럽은 돈 벌겠다고, 회사는 보호하겠다고. 됐다. 연우야, 건물에 자리 많다. 사람 더 구하자!"
이연우는 말없이 다시 한번 지폐를 태워 사람을 끌고 왔다. 이번에는 민간인이 잡혀 왔다. 피를 많이 흘려 창백한 얼굴을 한 민간인은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꿈인가?"

- 순간 가라앉던 흥분이 폭발했다. 그들은 일제히 총기를 꺼내 들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하는 건데! 대장도 죽인 놈한테 우리를 왜 보내! 숙청이냐?"
"아니, 포섭하려고 작전한 건데? 그리고 너희를 왜 숙청해? 안 그래도 사람 없는데."
"돌았어? 말이 되는 작전을 해야지!"
진짜 말이 안 됐다. 걸어 다니는 멸망을 포섭해?
그나마 머리가 잘 돌아가는 멸망주의자가 바락바락 악을 썼다.
"포섭하면 어쩌려고? 포섭하면 감당할 수는 있고? 저 회사도 이연우 때문에 개같이 고생하는데? 네가 주의하라며 보여준 자료를 넌 안 읽었냐고!" 

- 클럽의 VIP 명단이나 블랙리스트처럼 멸망주의자가 주의할 사람 명단에도 이연우가 올라갔고, 전자 세계의 유령이 빼돌린 정보도 공개되었다.
위성 병기만 두 번 사용되었고, 셸터 하나가 날아갔고, 부서도 날아갔고, 최근에는 무슨 꿈 악귀를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 뒷수습을 하느라 회사가 투입하는 자원은 어지간한 부서 몇 개 예산은 되었다.
"가만히 두면 회사 힘 깎아먹는 인간을 왜 건드리는 건데, 도대체!"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전자 세계의 유령은 눈을 깜빡이며 그 멸망주의자를 보았다. 계속해서 불평을 쏟아내는 멸망주의자.
"그놈을 써먹으려면 차라리 주변에 이상 개체를 던져! 다른 놈들을 그쪽으로 유인하거나! 그러면 알아서 다 망가뜨리겠지."
전자 세계의 유령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 멸망주의자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고는 말했다.
"너, 합격! 너는 이제부터 우리 머리야!"
가진 무력은 하잘것없었지만, 머리가 제법 잘 돌아갔다. 안경을 대신해 참모 역할을 해도 괜찮겠다 싶었다.

- "사랑의 묘약입니다! 멸망주의자 중 여성 스파이가 사람 빼낼 때 사용하던 이상 개체입니다!"
소란스러운 사무실.
조사원과 이연우에게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들은 멍하니 향수병을 보았다. 저게 뭐라고?


- 그나마 반장은 빨리 정신을 차렸다.
"다행이네. 연우가 당하지 않아서."
"당했습니다..."
"어?"
"점심시간에 제 앞에서 향수 뿌려서... 그 냄새 맡았습니다."

반장과 유지유는 물론 마크 정도 당황하며 이연우를 보았다. 마크 정이 격하게 반응했다.
"괜찮으십니까? 주사위로 저항하셨습니까?"
"저항은 못 했는데..."

- "아, 젠장. 그 여자는 어디 있습니까? 저 묘약에 당하면 계속..."
"연우 씨가 쏴서 죽였어요."
"예?"
마크 정이 고개를 돌렸고, 유지유는 어깨를 으쓱였다.
"보자마자 발작하듯 쏴서 죽이던데요. 연우 씨, 음... 저한테 호의를 가지진 않았죠? 좀 무서운데."
유지유가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앞머리로 얼굴을 가렸다. 사랑에 빠지더니, 사랑하는 사람을 쏴서 죽인 인간이었다. 오싹함이 느껴졌다.

- "아니..."
이연우는 진짜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멸망주의자가 헛소리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억울함이 몰려왔다.
자신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도 그랬고, 상황 자체도 그랬다.

'말도 안 돼. 말이 안 돼. 내가 사랑도 못 느끼는 인간이라고? 아니지. 이건 말도 안 되지!'
솔직히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없긴 했다. 워낙 감정이 얕은 편이었고, 뭔가에 열정을 가진 적도 없었다. 장수생 생활을 하며 더 망가지기도 했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랑과 위기감을 헷갈릴 정도는 아니지 않나?

- 결국, 이연우의 머릿속에서 상황이 짜 맞춰졌다.
"제 본능이 뛰어나서 위기감을 더 강하게 느낀 거 같은데요. 보니까, 저 여자가 테러까지 일부러 일으킨 거 같은데. 그 위기를 감지하고 원인을 제거한 모양입니다."
논리적인 판단이었고, 이상하게 비틀린 상황을 다시 비틀어 그럴듯하게 만든 결론이기도 했다.
반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가끔 그럴 때가 있지. 안전한 상황인데 뭔가 잘못됐다는 ..."

- 테러가 대략 마무리되었다.
과거를 관측하는 기기나 기억을 데이터로 바꾸는 기기를 이용한 회사원들은 재빠르게 물러났고, 그 데이터를 다른 회사원들에게 공개했다.
멸망주의자의 극악무도한 범죄. 이 생생한 자료는 지금 시점에 유리하게 쓸 수 있었다.

- 마크 정이 조사반 사무실에 찾아와 대뜸 말했다.
"일이 잘 풀렸습니다. 멸망주의자가 자기 혼자 넘어진 모양새가 되었습니다."
"... 사람이 죽었는데 잘 풀려?"
반장은 꾸벅꾸벅 졸다가 고개를 들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적지 않은 사람이 죽었다. 아무리 조사원이 열심히 구조하고 응급처치를 해도, 타이밍을 놓치거나 구조하지 못한 사람도 많았으니까.
이연우 또한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마크 정을 보았다.
'역시 본사 사람이라 인성이... 저래놓고 내 인성 의심하는 건 좀 그러네.'

- 마크 정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말을 실수하긴 했다. 그는 얼른 변명하듯 말했다.
"그게 아니라. 요즘 멸망주의자가 이상한 선동을 뿌리지 않습니까."
인류가 멸종하면 이상이 사라진다. 우주의 평화를 위해 우리는 숭고한 희생을 치러야 한다.
과거, 최초의 멸망주의자가 탄생하며 내세웠던 그 구닥다리 이론이 다시 세상에 나오며, 회사원을 흔들고 있었다.
몇몇 회사원은 진지하게 그것을 믿고 멸망주의자로 전향하려는 징조를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멸망주의자의 민낯을 보여준다면, 회사원들도 허튼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 이론이 설령 진실이어도 저딴 놈들과 움직이기는 좀 그렇지 않나.
"오직 광기로만 움직이는 멸망주의자의 행태는 훌륭한 프로파간다가 되어 회사원의 정신 무장을 돕지 않겠습니까?"
"그건 모르겠고, 할 일 있으면 빨리 마치고 가라. 조사반 사무실에 본사 사람이 왜 있어."
기분이 나빠진 반장이 투덜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 "저 격리하려는 건 아니죠?"
사랑의 묘약에 당했는데도 사람을 죽인 걸 보고는 위험 요소로 판단한 게 아닐까? 괜히 소름이 돋은 이연우는 눈을 대굴대굴 굴리면서 주변을 보았다.
'도망쳐야 하나? 본사는 좀 무서운데.'
이상한 위기감이 들었다.

- 마크정은 당혹한 표정을 지으며 얼른 손을 저었다.
"아니, 이연우 씨를 왜 격리합니까. 회사의 폭탄, 아니, 정예요원을 왜."
괜히 잘못되면 회사도 무시 못 할 피해를 입을 텐데. 거기다 격리할 거였으면 이렇게 접근하지 않을 것이었다.
마크 정은 회사가 만약을 대비해 준비한 이연우 격리 계획을 떠올렸다.
'안전 셸터만 제공하고 보호해 주면 알아서 거기 틀어박힐 인간인데. 굳이 격리하겠다고 본사까지 부를 이유가 없잖아!'
하지만 그 격리 계획을 말할 수는 없었고, 마크 정은 진심을 담아 호소했다.
"이연우 씨, 본사입니다. 고위 인사와 중요 자원이 모여 있는 본사인데, 이연우 씨 하나도 감당 못 하겠습니까?"
"그건 그런데..."
이연우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였다. 고민이 깊었다.

- 마크 정은 느긋하게 운전대를 돌리며 말했다.
"원래는 처음 방문하는 사람은 심문에 가깝게 조사한 뒤에 모시거든요."
확실히 그런 것은 없었다. 이연우는 편안하게 조수석에 앉아 창밖을 보았다. 차는 평범한 도로를 달려 출근하는 다른 사람과 섞여 움직였다.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움직여도 됩니까? 작정하고 추적하려면 얼마든지 가능해 보이는데."
"그건 괜찮습니다. 눈에 안 보여서 그렇지, 이미 보안 절차가 진행 중이거든요. 본사로 어떻게 가는지는 아무도 모를 겁니다."
마크 정이 몇 마디를 덧붙였다.
"사실 저도 모르거든요. 그냥, 본사에 방문하겠다고 연락하고 움직이다 보면 어느 순간 도착해 있습니다."

- 이연우는 입을 꾹 다물고 상상에 잠겼다.
'어떤 원리지? 무슨 이상 개체를 쓰나?'
주사위를 마음대로 다루는 수준에 오르면, 비슷하게 가능할 것 같긴 했다. 손님이 이 시간에 이곳에 도착했을 가능성을 구현하는 느낌으로.
과연 비슷했다.
문득 이연우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세상이 움직이는 감각이 돌연 찾아왔다.
'이건...'
예술가협회장이 세상을 움직이거나 자신이 가능성을 구현했던 것과 비슷한 느낌.
그리고 세상이 변했다.
"도착했습니다."

 

- 이연우는 괜히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여기가 본사.'
벌써 뭔가 공기가 다른 느낌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안전한 것 같기도 했고, 지독하게 위험한 것 같기도 했고.

'그래, 본사면 이래야지!'
은은한 위기감은 당연하게 여겨졌다. 다른 곳도 아니고, 본사니까. 병력이나 온갖 이상 개체가 위기에 반응하여 즉시 움직일 태세로 대기하고 있을 테니까.

- 마크 정은 순간 음울한 표정을 지었다.
"회사가 세상을 기울인 결과가 그것입니다. 만약 안전 조치 001이 없다면,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혼란이 펼쳐질 겁니다."
마치 머나먼 과거처럼, 신화와 전설이 지상을 거닐고, 문명을 발전시키기는커녕 살아남기 급급했던 시대처럼.
지금도 여전히 이상을 원천 차단하지는 못하지만, 이야기나 역사로만 남은 그 시대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인간만의 문명을 세웠으며, 인간의 사회가 지구를 지배하지 않나.

 

- 이연우는 마음을 놓으며 조금 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회사가 인정은 있구나!'
평화를 유지하고 세상을 보호하는 걸 보니, 피도 눈물도 없는 소시오패스는 아닌 거 같았다. 어디까지나 최후의 결단을 내릴 뿐이지, 근간은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느낌.
하지만 그 안도는 이어지는 마크 정의 말에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회사의 무기이기도 합니다."

- 무기? 인류를 보호하는 장치가?
"방패로 공격을 막으면 방어구고, 방패로 후려치면 무기 아니겠습니까? 애초에 안전 조치 001은 홍수를 막는 댐인데, 그 댐을 폭파하겠다고 협박하면 어떨까요?"

- 마크 정은 웃음기를 섞어 유쾌하게 말했지만, 이연우는 멍하니 귀를 의심했다.
두 사람은 직원용 엘리베이터를 찾아 걷는 중이었다. 마침 천장의 조명이 희미한 길을 걸었기에, 마크 정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골드버그클럽, 예술가, 악마 숭배자... 전부 인간과 사회를 근간으로 하는 친구들이죠."
클럽은 도시가 필요했다. 예술가는 관객이 필요했으며, 악마는 숭배자가 필요했다.
회사보다 지킬 것이 많다는 말이었다.
극단적으로 말해 회사는 언제든지 지구를 포기할 수 있으니까 필요하다면 제 손으로 지구를 터뜨릴 준비도 되어 있을지 몰랐다.
"지금의 세상을 버릴 수 없는 그들은 회사와 끝까지 갈 수 없습니다. 회사가 그런 질서를 만들었으니까요."
애초에 인간이 근간이 아닌 집단은 회사가 용납하지 않았다. 마법사도 고향 별인 지구를 아꼈으며, 멸망주의자조차 과거 회사에서 갈라져 나온 조직이었다. 
지금의 세계는 회사가 만든 질서 위에 존재했다. 그 질서야말로 회사가 가진 최고의 무기였다.

- 이연우는 눈을 깜빡이며 더듬더듬 생각했다.
'그러니까... 다른 놈들이 열받게 하면 다 같이 죽자고 협박한다고? 아니, 그 협박이 통하는 놈들만 살려놨다고?'
자부심이나 허세가 섞인 느낌이었지만, 진실이 아니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연우는 회사의 역량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미친 것 같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회사 무서워... 회사 소속이라 다행이지.'
이연우는 단편적으로 생각을 이어가다가 곧 생각을 포기했다.
어쨌든 자기는 회사의 고급 인력이니까, 대충 넘어가도 되지 않을까.

- "그러면 안전 조치 002는 뭡니까?"
"운명이나 예지 계통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인류가 생존하는 미래를 고정한다는 느낌인데, 사실 정확한 건 저도 잘..."

그리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 "실험실 좌표가..."
마크 정은 핸드폰을 꺼내 뭘 확인하더니, 키보드 같은 화면을 신중하게 눌렀다. 층을 표시하는 버튼 대신 키보드로 일련번호를 입력하는 식이었다.
"lab_007. 됐다."
마침내 좌표를 입력한 마크 정이 장난을 섞어 말했다.
"본사에도 괴담이 있더군요. 존재하지 않는 좌표를 입력하면 이상한 공간에 도착한다고요."
"괴담 맞습니까?"
이연우는 괜히 불안해하며, 마크 정의 핸드폰 화면과 엘리베이터에 입력한 좌표를 번갈아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괴담이 아닌 것 같았다.

- "엘리베이터 관리 부서랑 상부에서는 사고는 생기지 않는다고 장담하던데, 경험담이나 고장 기록이 실제로 존재하긴 합니다."
"그건 괴담이 아니라, 사고를 사고로 안 치는 거 아닙니까."

이연우는 엘리베이터 화면을 힐끔대며 몸을 좌우로 서성였다.
고장 난 측정기처럼 알파벳이며 숫자가 끊임없이 변동하는 좌표 화면이 어지러웠다.

- 다행히, 그들은 문제없이 실험실에 도착했다. 깔끔하게 열린 문 너머로 실험실이 보였다.
[프로젝트: 평범한 세상]을 연구하는 실험실에서 연구원이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통화를 했다.
듣기 싫은 소리를 내뱉는 핸드폰을 귀에서 멀리 두었는데도, 핸드폰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이연우인지 뭔지, 그거 빨리 내쫓으세요! 본사 지역에 부하가 걸렸으니까, 사고 터지기 전에!]
안전 조치 001을 담당하는 사람의 전화였다. 이연우가 도착하기 무섭게 001이 기울인 세계가 불안정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축복받은 아이의 행운이 중화되듯 말이다.

- 연구원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사고 터져도 괜찮게 최고 경계 태세 들어가지 않았나. 지금 거의 전시 수준으로 움직이고 있을 텐데?"
[그 사고가! 애초에 일어나지 않게 막아야 할 거 아닙니까!]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았다.
애초에 사고가 터지면 어때서? 이번 실험만 잘되면 회사 꿈을 이룰 수 있을지 모르는데.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지.

- 지금의 본사는 포기하고 사고를 이용한다. 회사가 평범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움직이는 동안, 다른 집단의 눈을 가리기 위해.
"본사에 남은 직원과 병력에 지침 내리게. 교전하지 말고 당장 후퇴하라고. 그리고 다른 집단에 자연스럽게 정보 뿌려. 본사 터졌다고. 공식적으로도 공문 보내고, 회사가 세상을 보호할 힘이 부족하니, 너희들도 협조해서 세상 지키라고 말이야."
비서가 얼른 다른 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이사는 차가운 빛으로 동공을 채우며 생각했다.
'이왕이면 다른 놈들도 저 사고에 엮여 피해를 봤으면 좋겠는데!'
폭탄이 터졌다. 그 폭발의 피해는 모두가 나눠야 마땅했다.

 

- 그때 다른 비서가 다가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비서는 이연우를 보았다. 멸망을 일으킬 수 있는 이상 개체를 만들고, 이제는 본사의 격리도 다 망가뜨리며 도망가는 이연우.
"저 이상 개체는 어떻게 합니까? 잠재적인 위험이 너무 큽니다."
이상을 만드는 이상이었다.
어느 날 돌이킬 수 없이 오염되거나, 정신이 돌아버리거나, 정신 지배를 당했을 때 무슨 위험을 불러올지 알 수 없었다.
확률의 이름 아래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는 다른 집단의 6레벨보다 훨씬 흉악했다.

 

- 주사위로 느끼는 확률과 가능성의 세계에 생존 본능이라는 필터가 걸렸다.
서로 따로 놀던 감각이 하나가 되었다.
기이한 감각이 더듬이가 되어 뻗어나가, 이연우에게 다가오는 위험한 확률과 가능성을 포착했다. 그것은 미래를 예지하는 수준의 통찰이었으며, 이연우가 반드시 살아남을 미래를 비추는 망원경이기도 했다.
'위험!'
이연우는 눈을 희번덕거렸다. 오직 그를 죽일 가능성이 있는 것들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졌다.
무인, 그리고 정보부의 유령.

- 무인과 이연우의 머리가 동시에 휙 돌아가, 어딘가를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느리게 움직이는 무언가를 따라갔다.
이곳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밀웜의 물결에 남는 흔적마저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사람.
잠깐 동안 두 사람의 인식마저 속인 그것을 향해 무인이 말했다.
"정보부의 유령."
자연스러운 형광 조끼에 오염된 회사의 정예 요원이었다. 감각을 극한까지 곤두세운 두 사람의 시야에 그녀가 머쓱하게 웃는 장면이 보였다. 그녀가 혼자 감탄했다.

- 이연우의 주위에 일렁이는 가능성의 실타래가 저절로 흩어져 사라졌다. 더 이상 무작위의 가능성을 흩뿌리지 못했다.

"주사위!"
이연우가 소리 내어 주사위를 불렀다.
느릿하게 주먹을 당기는 무인은 그런 이연우를 내버려 두었다. 최후의 일격이었다. 무방비한 적을 때리고 싶지는 않았다. 전력을 다해 맞붙어야 옳았다.
이연우 역시 무인의 바람에 응했다. 이동이고 뭐고 가능한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 찰나가 영원처럼 늘어졌다.
이연우의 머릿속에서 번개가 번쩍이고, 한계를 초월한 감각이 어우러졌다. 이연우는 정보를 정확하게 받아들였다.
'미래가 닫혔나? 아니야. 이건...'
미래가 황폐했다. 몇 초 뒤의 무인이 이연우를 확실하게 죽였다. 생존할 확률이 0이 되었다는 말이었다.
이연우는 그제야 주사위의 한계를 깨달았다.
'존재하지 않는 가능성은 구현할 수 없어!'

이상이 넘쳐나는 세상에서는 극도로 낮은 확률로 온갖 일이 벌어질 수 있으나, 6레벨 앞에서는 그조차도 부족했다.
이연우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러니까 이대로 죽는다고? 아니지. 피할 수 없는 죽음은 없어!'

- 늘 하던 대로 어떻게든 살아남는다.
길게 늘어진 시간 속에서 생존 본능이 발작했다. 안전한 평소에는 잠만 자던 생존 본능이 위기 앞에서 극한까지 활성화되었다.
이연우와 함께 위험을 겪으며 성장한 생존 본능이 6레벨의 경계를 넘었다.
죽음뿐인 미래를 열었다. 존재하지 않는 살길을 직접 만들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이연우와 심장이 멈춘 무인이 눈을 마주쳤다.
늘어졌던 시간이 가속했다. 훅, 짧게 숨을 몰아쉰 무인이 주먹을 뻗었고, 이연우는 뒤로 넘어지며 주먹을 피했다.
주먹이 지나간 궤적을 따라 먹물 같은 어둠이 뿌려졌다. 빛조차 죽어버린 순수한 어둠이었고, 세상에 남은 상처였다. 영원토록 지워지지 않을 상처. 
이연우도, 무인도 입을 열지 않았다.

- 뒤로 자빠진 이연우는 밀웜 위에 누운 채로 숨을 몰아쉬며 눈앞의 검은 궤적을 보았다.
'살았다...'

- 무인과 싸우다가 벌어진 일. 이걸로 자신을 탓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본사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까. 그것만이 유일한 걱정거리로 머리에 남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거의 영웅에 가까운 활약이었지만,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면 걸어 다니는 핵폭탄이 자신이었다.
방사능 뿌리듯 세상을 어지럽히고, 밀웜 같은 것을 만드는 위험 요소.
'내가 생각해도 좀 그래. 나 같은 게 세상에 있다고 하면 불안하지!'
주사위의 대실패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데. 이연우의 표정이 진지해지는 그때였다.

- 삐빅.
유령이 들고 다니던 핸드폰에서 기계음이 났다. 메시지가 도착했다. 유령이 핸드폰을 보더니 안타까워했다.
"임무 완료했으면 돌아가라고 하네요. 아, 본사 좀 더 뒤져... 아니, 구경하고 싶었는데."
잠금장치를 열고 기록을 열람한 기록이 남아 회사의 눈을 완전히 속이지는 못했다. 그녀가 몰래 본 정보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남았다.
비상경보가 울렸을 때는 방해 없이 마음껏 훔쳐봐도 괜찮았지만, 지금은 안 됐다.

- '저래도 되나? 아, 하긴. 이 사람도 6레벨 후보 느낌이니까!'

이연우는 머리가 살짝 이상한 유령을 보다가 마음을 놓았다. 정보털이범도 이렇게 멀쩡하게 내버려 두고 있다. 자신이 조금 위험해도 무턱대고 격리하거나 사살할 것 같지는 않았다.
순간, 이연우의 얼굴에 근거 있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혹시 본사가 날 적대해도, 뭐...'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다른 것도 아니고 생존에 특화된 게 자신이었다. 아무리 본사여도 자신을 어찌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 유령이 엉망진창인 주차장을 자연스럽게 떠났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유령의 뒷모습이 희미하게 흐려졌다. 정보부의 유령과의 거리가 멀어지며 그녀가 인식에서 벗어났다.
이연우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자신감이 사라졌다.
이연우가 자기 뺨을 찹찹 때렸다.
"방심하지 마."
방심이 곧 위험이었다.
당장 멸망주의자만 해도 그랬다. 지우개를 든 멸망주의자를 죽여서 얕잡아 봤더니, 돌연 무인이 6레벨이 되어 튀어나왔다.

- 의뢰를 마친 이연우는 본사에 남을 이유가 없었고, 도망치듯 본사를 떠나 조사반 사무실로 돌아왔다.
며칠이 지나 아침이 되어 눈을 뜬 이연우는 아쉬움에 한숨을 푹 쉬었다.
"이걸 격리를 안 해주네..."
너저분한 방에 이연우의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가 울렸다.
이불만 대충 깔려 있고, 물병이나 가스버너 따위가 널브러져 있는 좁은 방이었다. 조사반 건물에 남은 방이자 이연우가 머무는 방.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이연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방을 둘러보았다.
솔직히 불만이 있지는 않았다. 어쨌든 먹고사는 데는 문제가 없었고, ... 

- 거의 멱살 잡고 싸우다시피 연구원과 연구원이 다투었으며, 다른 부서 사람들도 슬쩍 의견을 내놓아 불을 키웠다.
인간 자격증이 보증하는 인간은 진짜 인간인가? 이 주제 하나로 작은 불이 번졌다.
'내가 올린 문서 때문 같은데!'
이연우가 일전에 올렸던 보고서와 제안서, 인간 자격증의 오염 저항 때문에 시작된 일이었다.

- 요약하면, 인간 자격증이 부여한 '인간'이 다른 이상 개체에 오염되어도 인간이도록 기능한다는 실험 결과였다.
문제는 그 인간이 진짜 인간이냐는 것이었다.
온갖 반박이 달렸다.
그러면 시험을 통과한 짐승도 진짜 인간이냐, 이상 개체가 부여한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결국 존재의 변질 아니냐, '인간'이라는 이상 개체를 만드는 것 아니냐...
거기에 멸종의 대변인이나 도덕과 윤리를 담당하는 부서까지 가세해 그야말로 난장판을 만들었다.
합격자도 오염자로 보아야 한다. 인간의 기준이 뭐냐, 복제인간은 인간이냐 등등.

- "이게 다 무슨 소리지..."
안 그래도 연구원들이 전문적이고 어려운 용어를 늘어놓았는데, 어느 시점부터는 문장이 지나치게 늘어지며 봐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였다.
어지러움을 느끼던 이연우가 휙 창을 닫았다. 기본 바탕화면이 펼쳐지며 혼란이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저항 효과가 있다는 거잖아!'
그것 하나면 됐다. 어쨌든 자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 이연우가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었다. 손가락 하나에 그의 이상 개체를 떠올렸다.
빗물, 생존 본능, 주사위, 인간 자격증.
'빗물은 잠재력이 없고, 생존 본능은 6레벨이고, 주사위는 경계 앞에서 후퇴하고 있고.'
이연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생존 본능이 6레벨에 오른 순간, 주사위의 오염이  시작했다. 집중하면 느껴지던 가능성과 확률의 감각이 서서히 흐려졌다.
생존 본능이 주사위의 오염을 위험으로 판단한 것이었다. 자아의 상실을 막는다고 여긴 것이었다.
애초에 위험을 겪지 않는 미래를 향해 움직이는 것일 수도 있었고, 어쩌면 주사위에 오염되면 생존 본능도 자아의 상실을 막지 못한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인간 자격증이 필요했다.
생존 본능이 주사위의 오염을 위험으로 판단하지 못하도록.
왜냐하면 이연우에게 사소한 욕심이 생겼으니까. 이왕이면 주사위도 6레벨로 올리고 싶다는 욕심이.

- "주사위를 포기하기는 아쉬운데."
생존은 준비고 대비였다. 다룰 수 있는 도구는 많을수록 좋았고, 주사위는 만능의 도구였다.
극한 상황에 던져지더라도 곧바로 돌아올 수 있었고, 식량과 식수가 없더라도 만들 수 있었다.
이연우의 생각이 깊어졌다.
'인간 자격증. 주사위의 오염에 저항할 잠재력이 있을까?'

회사는 그동안 인간자격시험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대량 살상 수준의 위험을 가졌으나, 그럭저럭 막을 수 있어서.
그 부산물인 자격증은 위험하지 않아 연구된 바가 거의 없었다.
결국, 이연우가 직접 실험해야 했다.

- 이연우는 에코백에서 인간 자격증을 꺼냈다. 여권 같은 자격증의 가죽 표지를 넘기니, 이연우의 증명사진과 인간임을 증명한다는 글자가 보였다.
증명사진을 내려다보던 이연우는 작게 중얼거렸다.

"수준을 높여야 할 것 같은데."

- 혹시 이상 개체일까 봐. 죽는 날을 만들어 고정하는 것일까 봐.
그렇게 이연우가 통화를 끊으려고 할 때였다. 전화기 너머에서 당혹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 어? 아니, 왜 죽는 날이 안 보이지?]
"... 이상 개체?"
그 나직한 목소리에 조사반의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졸던 반장이 퍼뜩 일어나 계약서를 쥐었고, 유지유는 형광 조끼 보관함으로 다가갔다.

- 하지만 이연우는 손을 내저었다. 핸드폰 너머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 누구십니까? 저 나쁜 짓은 진짜 한 번도 안 했습니다. 그냥 돈 받고 죽을 날 알려주고, 사후 세계에서 부활하도록 도왔을 뿐입니다!]
이연우는 잠깐 고민했다. 확실히 위험한 느낌은 없었다. 보아하니 무슨 저주처럼 사망을 확정하는 수준은 아닌듯했다.
평소라면 바로 회사에 보고했겠지만, 이연우는 모처럼 선행을 베풀기로 했다.
"제가 클럽 쪽 번호 알려드릴 테니까, 그쪽이랑 연계해서 사업해 보세요. 죽을 날을 알려주는 건 돈이 되지 않겠습니까."

- "아니, 방법이 있어."
실랑이를 벌이던 최재민이 몸을 돌릴 때였다. 탁한 유리문에 형광빛이 스쳤다. 이연우가 에코백에서 자연스러운 형광 조끼를 꺼냈다.
이연우가 탁, 조끼를 털며 말했다.
"장비 쓰면 돼."
말 못 하면 어떤가. 대충 이상 장비의 힘을 빌리면 되는데. 더구나 아기를 위한 일이니, 명분도 좋았다.
최재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혹감에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거, 그거... 보관함에 넣어둬야..."
순간, 최재민의 머릿속에서 깨달음이 스쳤다. 이 사람이 알려준다고 그대로 배우면 안 된다. 거의 무법자 수준으로 규칙 무시하고 마음대로 사는 인간이었다.

- "음!"
그들이 동시에 깨달았다. 방향성은 달랐다. 유지유는 올 것이 왔다, 반장은 자격증이 없어져서 이질감을 느꼈다고 생각했다.
'연우 씨가 원래 좀 생각이 이상하긴 했어. 취소돼도 이상하지 않아!'
'인간 자격증이 인식 왜곡 효과도 있나? 그러면 지금 이상 개체처럼 느낄 만도 해. 주사위가 머리에 박힌 애인데!'

 

- 다음 순간, 이연우가 벌떡 일어나 통지서를 낚아챘다. 이연우는 손을 벌벌 떨며 통지서를 재차 읽었다.
눈동자에서 불꽃이 확 일어나고, 목소리에는 섬뜩한 무언가가 담겼다.
"내 것을 멋대로 가져가?"
보증을 못 해서 취소하겠다고? 누구 마음대로? 뭔지도 모를 이상 개체 마음대로?
'아니지. 내 마음이, 내 안전이 더 중요하지. 넌 날 보증해야만 해!'
인간 자격증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 처음부터 접근을 잘못했다.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지지 못했으니, 당연히 오답을 얻을 수밖에.
생존의 길은 고독한 법. 애초에 시험 따위의 이상 개체에 의존한 게 잘못이었다. 필요한 자원이 있으면 스스로의 힘으로 구하고, 만든다.

- 이연우가 엉금엉금 기어 다니며 잡동사니를 뒤졌다. 증명사진을 주웠고, A4 용지를 꺼냈으며, 접착제를 찾고, 컴퓨터 사인펜 옆에 전부 두었다.
이연우는 신중하게 자격증을 만들었다.
'남의 보증에 기대면 안 되지!'
오늘 겪은 것처럼 남의 마음대로 갑자기 취소될 수도 있었고, 대가를 요구받을 수도 있었고, 뭔가에 간섭당해 위험한 일을 겪을 수도 있었다.
그럴 바에는 스스로 만드는 편이 나았다.

- "어, 연우야. 자격증 되찾았냐?"
"방법이 없어서 제가 만들었습니다."
이연우가 자랑스럽게 인간 자격증을 꺼냈다. A4 용지로 대충 만든 자격증.
그걸 본 사람들의 시선이 미묘해졌다. 이제는 공문서 위조까지 하는구나, 애착 인형이 없어져서 비슷하게 만들었구나, 주사위로 대체품을 만들었구나 등등.
경악, 동정, 이해. 최재민부터 반장까지 여러 사람의 머리에 생각이 스쳤다.
어찌 되었든 잘된 일이었다.
사실 신경이 곤두선 이연우가 옆에 있으면 이쪽까지 불안해지는 느낌이었으니까.

- "의뢰는 당분간 쉴 예정입니다."

일이 중요한가. 시간만 잘 보내면 주사위가 6레벨이 되는데. 지금 중요한 건 잘 먹고 잘 자며 안전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어차피 생존 본능 덕분에 위험한 일은 없긴 한데...'
일하기는 귀찮고 꺼림칙했다.
이전에도 본사의 의뢰를 받았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무인이랑 싸우지 않았나. 사고는 조심하고 또 조심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 "조사 업무는 요즘 없으십니까?"
"어. 요즘 업무 안 들어오긴 하네. 사실 조사반 폐지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반장이 말했다. 처음 꺼내는 이야기였다. 중요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유지유와 최재민이 휙 고개를 돌렸다. 눈동자가 잔뜩 커졌다...

"폐... 폐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쩌고요?"
"안 돼요! 여기 폐지되면 저 실험실 가잖아요! 아니면 어디 이상한 부서 갈지도 모른다고요!"
조사원에게는 단순히 부서 하나가 없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생계가, 나아가 삶이 걸린 일이었다.
하지만 반장은 태연하게 몸을 늘어뜨렸다.
"부서야 얼마든지 사라질 수 있지. 우리야 유능한 인력이니까, 다른 부서로 이동될 거고. 그런데..."
반장이 말을 질질 끌다가 웃었다. 최재민과 유지유는 물론 이연우도 귀를 기울였다. 반장이 말했다.
"폐지 이야기 사라졌단다. 우리가 스스로 이상 개체를 조사해서."

- "우리가요?"
최재민과 유지유가 어리둥절하며 서로를 마주 봤다. 그런 일이 있었나?
"그... 뭐야. 멸망주의자 테러에도 잘 대처했고, 사랑의 묘약도 회수했고, 얼마 전에는 아기도 주웠잖냐."
상부가 결정을 미뤘다.
조사반이나 조사원도 저 이연우만큼이나 이상 개체를 끌어들이는 미끼 아닐까? 일단 두고 보면서 이용 가치를 찾는 게 낫지 않나?
거기에 건물도 반장이 건물주로서 소유했는데.

- 그런 이야기를 전하자, 이연우가 머쓱하게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체질이 원인이었다.
'이게 도움도 되네!'
조사원이 다른 부서에 가면 재미없고 답답... 아니, 적응하기 힘들 테니까. 수틀리면 도망치던 사람들이 특전대나 보안요원이 되면 문제가 많을 것이다.

- [잘 지내셨습니까.]
피로가 그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기고 가라앉은 목소리. 이연우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어... 괜찮으십니까?"
[아뇨, 죽을 것 같습니다. 아니, 인간자격시험이 갑자기 미쳐서 변했습니다. 그거 막던 데이터 센터가 뒤집어져서, 그거 때문에, 아...]
마크 정이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인간자격시험이 세상에 나오기 힘들게 무수한 모의시험을 진행하던 데이터 센터, 모의시험을 진행하던 AI가 이상자격시험에 합격해 난장판이 벌어졌다고...
[데이터 센터가 마비됐습니다. 예비 센터에도 합격자가 나와, 시험이 세상에 자유롭게 풀려났습니다. 그러면 세상에 또 이상 개체가 만들어지지 않습니까.]
이상을 만드는 이상이 자유를 얻었다.

 

- 이연우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어, 어? 이거 내가 사고 친 건데? 어?'
이연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안전 조치 001로 어떻게 안 됩니까?"
[그건 지역을 억누르는 방식이라. 시험이 어디서 튀어나올지도 모르고, 지금의 광범위하게 누르는 힘으로는 못 막습니다.]

- 이연우는 눈을 질끈 감고, 영상을 꺼버렸다. 세상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고를 쳐도 크게 쳤다. 아니, 아니다.
'고작 인간 자격증 달라고 했다고 변신한 이상 개체 잘못이지!'
아무튼 나는 인간이고, 어쨌든 이상 개체가 잘못했다.
그럼에도 쿡쿡 쑤시는 양심의 고통 때문에 이연우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도울 일이 있을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이연우 씨가 나설 만큼 큰 문제는 아닙니다. 일단 수습도 했고요.]
그냥 일이 엄청 많아져서 문제지.

- 마크 정이 한숨을 잔뜩 섞어 말하다가 억지로 목소리 톤을 높였다.
[그보다 저번에 본사 일이 마무리되어 보상 이야기를 전해드리고자 전화드렸습니다.]
"보상이요?"
[예. 어쨌든 실험의 성과가 상상 이상으로 훌륭했고, 무인도 붙잡으셨으니까요.]
양심, 양심이 아팠다.
이연우가 고뇌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얼른 허공에 손을 저었다.
"아뇨, 보상은 괜찮습니다. 사실 사고 친 건데, 오히려 격리당하는 징계를 받을 일..."
[아닙니다. 이런 일에 포상도 안 주면 직원들이 왜 일하겠습니까.]
마크 정은 번쩍 정신이 든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정예 요원쯤 되면 단순한 물질로 보상하기 힘들었다. 필요하면 자기가 얻거나,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어서.
그래서 명예나 다른 비물질적인 부분으로 보상했지만, 이연우는 생존주의자라 도리어 물질적인 보상을 좋아했다.
이연우가 순간 혹한 기색을 보였다. 입술을 달싹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집입니까?"
[아. 집은 아닌데...]
마크 정이 당황했다.
집을 줘봤자 펑 터질 텐데, 집은 좀.

 

- 핵심 이론과 기술이 확보되었다. 최종 목표에 필요한 다른 기술도 이미 준비가 되었다.
남은 건 시행착오뿐이었다. 시험을 위해 행동하고, 잘못을 고치고, 최종적으로 평범한 세계를 만든다.
"그래도 너무 성급하게 진행하는 것 아닙니까?"
다른 이사가 걱정스럽게 문서를 뒤적였다. 그곳에는 이번 실험을 위한 기술이 적혀 있었는데, 문제가 있었다.
"우리가 최후의 보루로 준비한 것이지만, 아직 완성도  됐고, 불안정한 부분이 많습니다. 잘못되면 재앙이 될 겁니다."
"맞아요. 차라리 천천히, 차근차근 한 걸음씩 걷는 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급하게 진행할 이유가 없습니다."
몇몇 이사가 반대하였으나, 많은 이사는 반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망하면 망하는 거지. 우리가 망해도 평행 세계, 이차원의 인간들이 사명을 이어갈 거야. 차라리 우리가 희생하고 데이터를 전하는 편이 낫지."

- 모든 사고는 찰나에 일어난다.
"어, 어, 어? 아니, 출력이 이러면, 잠깐..."
미완성의 장치가 폭주하여 가벼운 실험이 세계를 뒤집어엎을 수도 있고.
"회사는 뭘 하는 겁니까! 갑자기 왜 발작을⋯ 빌어먹을! 미리 바친 황금을 전부 소진해 방어하겠습니다! 부족하다고? 일단 바친 황금으로 최대한 방어..."
준비가 부족하여 조금밖에 막지 못할 수도 있으며,
"어떤 모습으로 변해도 날 사랑하겠다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일단 믿을게."
"지도자! 빨리 지도자, 아니, 늦었..."
자의로, 혹은 타의로 방관하여 사고에 손을 쓰지 못할 수도 있다.

- "뭐야? 뭔데? 왜 불안한데? 또 뭔데! 주사위!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막아! 아니, 내가 살 길을 만들어!"
데구르르.
또한, 불확정 요소가 사고에 끼어들어.
성공!
사고를 뒤틀어버릴 수도 있다.

- 세계가 개변됐다. 세상도, 회사의 본질도 바뀌었다. 실험이 성공하였으나 성공이 의미 없는 세상으로.

- 밤새 뒤척이다 언제 잠드는지도 모르게 곯아떨어졌다.
이연우가 눈을 떴을 때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는 새벽빛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그 빛은 기나긴 시간이 지났을 때 특유의 고색창연한 빛을 품고 있어, 이연우는 무심코 인간이 이미 멸종한 건 아닐까, 태양이 멀어진 게 아닐까, 쓸모없는 걱정을 두서없이 떠올렸다.
하지만 허황한 상상은 현실의 고통 앞에서 밀려나는 법이라,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 이연우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짙은 신음을 흘렸다.

고통은 단순히 육체에만 찾아오지 않아, 마치 이 세상이 이연우라는 존재를 거부하듯이 육신과 정신과 영혼을 가시가 돋은 벽으로 밀어내어 존재의 상실을 일으켰다.

- "이제 일 안 하고 적당히 보호받으면서 살면 돼요! 너무 좋지 않아요?"
이연우는 애써 모른 척하며 외계인 같은 이상 개체에게 다가갔다. 단호한 목소리가 나왔다.
"이상보호회사에서 나왔습니다. 당신 같은 이상 개체를 보호하는 회사인데, 같이 갑시다.”
외계인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이연우를 올려다봤다.
"아니에요. 저는 당신과 달리 사람이에요. 그런 이상한 게 아니라서 괜찮아요."
"아니, 당신 이상 개체 맞습니다. 세상이 당신 적대하는 거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건 세상이 못 된 거예요. 어떻게 평범한 사람인 저를... 흑."
외계인이 네 손가락뿐인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 이연우는 답답해 죽으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구조하겠다니까 이렇게 거절을 해? 결국, 이연우가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보세요."
"..."
철퍼덕, 손을 내린 외계인이 멍하니 종잇조각을 보았다. 이연우의 인간 자격증.
외계인의 손가락이 희미하게 떨리고, 눈꺼풀이 경련했다. 하지만 이연우는 그런 기색은 모르고, 계속해서 설득했다.
"나는 인간입니다. 당신은 저와 다르죠? 그럼, 당신은 인간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회사 따라오십시오."
"당신이... 인간? 그럼... 그럼 나는?"
외계인이 벌벌 떨며 말했다. 이연우가 그만 받아들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아니죠. 회사는 당신 같은 존재를 위해 있는 기관이니까 안심하고..."

 

- 그 순간이었다. 이연우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철퍽!
외계인이 녹아내렸다. 회색 진흙으로, 외계인이 자신의 존재를 의심한 순간, 세상의 압력이 외계인을 짓뭉갰다.
"어... 어? 아니, 구조? 어?"
황당한 상황에 넋을 잃은 이연우는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역시 세상이 문제야!"
잠깐 방심하고 경계를 놓는다고 이상 개체를 이 모양으로 만드는 세상.
회색 진흙만 남긴 외계인을 보며 이연우는 슬픔을 느꼈다. 자신도 긴장을 놓으면 저렇게 될지 몰랐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세상을 바꿔야 해!'

이연우가 결의를 다졌다.

- 순순히 들을 리 없었다. 오히려 이사들의 정신이 돌아버린 줄 알고, 새로운 이사회로 대체하려고 할 것이다.
B라는 사람의 몸에 A의 두뇌가 심어진 것이다. 이사라는 두뇌의 명령을 몸이 따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본래 세상보다는 약해졌겠지만, 그들은 여전히 6레벨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6레벨의 기준. 세상에 대적하는 자. 세상의 압박을 이겨낸 그들은 이상 세계의 왕으로 군림하며 성채를 쌓았다.
혼자 나돌아 다니는 이연우든, 성채를 쌓은 왕이든 핵무기만큼이나 위험한 것은 사실이었다.

- "이연우가 다른 집단에 접촉하고 있다는데. 정보부가 얻은 정보에 따르면, 그냥, 이 세상이 살기 불편해서 손을 잡고 뜯어고치겠다고."
"... 어떤 세상으로 만들려고 한다는데?"
불안한 질문에 이사가 답했다.
"이상 친화적인 세상."
왜냐면 이 세상은 이연우에게 불편하고 조금 위험했으니까. 이연우를 담당하는 이사의 머릿속에 불길한 상상이 떠올랐다.
'이연우. 우리와 함께할 수 있을까?'
평범한 세상이라는 지금의 그들에게는 낯선 그 목표를 같이 꿈꿀 수 있을까? 어쩌면, 세상을 등에 업은 지금 제거해야 하지 않을까?

- 이연우는 도시 한복판에 위치한 고층 빌딩 앞에서 멍하니 입을 벌렸다. 빌딩이 번쩍번쩍 빛났다. 돈이 남아도는지, 외벽을 황금으로 도배했다.
아니, 단순한 황금이 아니었다.
"오염? 아니, 와... 세상을 물들인다고?"
황금만능주의가 침식하고 오염시킨 세상이었다. 클럽의 본진이자, 그들이 황금으로 쌓은 왕성. 

- 빌딩 안은 한산했다. 주변을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었고, 황금빛만이 반짝이고 윙윙 낮은 기계음 같은 것이 들렸다.
넓은 공간에 오직 이연우와 비서가 걷는 소리만이 인기척으로 존재했다. 이연우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분위기가 좀... 망하기 직전의 직장 느낌인데!'
직장인은 다 탈주하고, 작업장만 남은 느낌.
이연우가 온다길래 다들 긴급하게 대피시킨 것이었으나, 그 사정을 모르는 이연우는 클럽 사정이 많이 안 좋나 걱정하기 시작했다.

- '협력 못 하는 거 아니야? 세상 바꿀 힘도 없으면 어쩌지.'

이연우가 힐끔 비서를 곁눈질하며, 지나가듯 말했다.

"클럽 사정이 안 좋습니까?"
순간 비서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고, 생각이 고속으로 회전했다. 이 상황에 적절한 답.
'가까이 둬도 안 되고, 멀리 둬도 안 되는 인간.'
상황이 나쁘다고 말해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기도 애매했고, 상황이 좋다고 말해 다가올 제안에 빈틈을 내주기도 애매했다. 이연우는 어느 쪽을 택하든 손해를 선물하는 클럽의 천적이었다.
비서는 생각했다.
'애초에 이 세상에서 영역도 안 만들고 혼자 잘만 돌아다니는 미친 자야.'
회장만이 아니라, 다른 6레벨도 영역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데 말이다.
저것과 연관된 사항은 일개 비서가 판단할 일이 아니었다. 비서가 마른침을 몰래 삼키며 고개를 흔들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일개 회원이라 함부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회장님께 여쭤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 어쨌든 클럽 회장이 꿈꾸는 미래와 자신이 원하는 미래는 달랐다.
"일단 알겠습니다. 거절당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해서 머리가 복잡하네요. 다시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현명한 판단입니다. 때로는 시간이 가장 훌륭한 자원이 되기도 하죠."
회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짧게 숨을 뱉고, 알게 모르게 흐트러졌던 평정을 회복했다.

- 그러나 다음 순간 이어지는 이연우의 말에 평정이 와르르 무너졌다.
이연우가 슬며시 말했다.
"그런데 뭐 선물 없습니까? 모처럼 놀러 왔는데... 클럽의 본진이면 유명 관광지 느낌이라, 약간 기념품 같은 거 챙겨 가고 싶은데."
"... 시간 거의 다 됐습니다. 그만 가십시오."
"진짜 뭐 없습니까?"
이연우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협력에 실패했으니, 뭐라도 하나 받아 갈 생각이었다. 그 굳센 의지가 눈동자에 고스란히 표출되었다.
회장이 손끝을 벌벌 떨었다.
'손해. 손해야. 손해라고.'

 

 

- "협회장님은 못 나오십니까?"
"당연히 못 나오지."
무엇이지? 자기는 자유롭다고 자랑하는 것인가? 조각가가 떨떠름하게 말을 이었다.
"사랑과 증오가 종이 한 장 차이인지, 전당 밖으로 나오는 순간 세상이 협회장님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더이다."
"... 그러면 영역은 어떻게 만듭니까?"
이연우가 편지를 펼치다 말고 고개를 퍼뜩 들었다. 죽으면 영역도 못 만드는데? 처음부터 영역을 가질 리는 없는데?
조각가가 한숨을 쉬었다.
"세상이 미쳤지. 갑자기 후회하면서 되살리는데, 그래놓고 또 죽이고. 어쨌든 죽고 부활하는 과정을 셀 수 없이 겪으면서 예술의 전당을 만드셨소. 그러니 예술의 전당에 올 생각은 마시오."
클럽 빌딩이 터졌다는 중대한 소식은 곧장 예술가협회에도 들어왔고, 이연우는 방문 금지 대상이 되었다.
협회장이 고통을 겪으며 구축한 영역이었고, 예술 작품을 보호하는 최후의 박물관이었다.
'그건 좀 예상치 못한 사고였는데. 그래도 사고 조심한다는 걸 뭐라 할 수 없지!'
이연우는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편지를 펼쳤다. 

 


- "죽기 전에 죽여야지."
이연우가 중얼거리며 거리를 걸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주사위가 흐릿하게 비치는 듯했고, 걸음은 시간과 가능성을 디디며 생존이라는 미래로 향하는 듯했다.
이연우는 주사위를 굴려가며 악마자치구로 향했다. 거리를 줄이기도 했고, 공간좌표로 이동하기도 했다.

- 유황 냄새가 풀풀 풍겼다. 독한 연기가 허공을 둥둥 떠다녔고, 그 위의 하늘은 온통 새까맸다. 때때로 불꽃이 비가 되어 쏟아지기도 했고, 번개가 마구잡이로 내리치기도 했다.
멀리 보이는 황야에는 빙하가 솟아 있었고, 그 옆에는 용암 호수가 펄펄 끓고 있었다.
"아니, 미치겠네. 뭐 하는 곳이야?"
자연환경만 이상한 게 아니었다. 이연우가 머리를 짚었다. 머릿속이 탁했다. 여러 감정이 마구 몰려들었다.
누가 감히 나를 죽이겠냐는 오만, 자신의 생존을 건드리는 모든 것을 향한 분노. 햄버거 먹고 싶다는 식탐. 아무것도 안 하고 보호받으면서 살고 싶다는 나태. 사고 안 겪고 잘 사는 사람을 향한 질투 등등. 
일곱 개의 죄악이 활화산처럼 들끓었다. 평범한 사람이 이 영역에 발을 들인다면, 죄악의 노예가 되어 지옥의 주민으로 살아갈 것이었다.

- 이연우가 머리를 부여잡은 채 열심히 고개를 흔들었다.
'어. 이런 감정은 생존에 도움이 안 돼. 감정 컷!'
생각을 몇 번 돌리니, 감정이 밀려났다.
이연우가 맑아진 눈으로 저 멀리 있는 악마자치구를 보았다. 검은색의 성채 같은 곳.

- 어쨌든, 자신은 방문객이었다. 갑자기 주사위로 난입하면 습격으로 볼지도 몰랐다. 손님으로서 예의를 지켜야 했다.
'영역이 이 꼴인 걸 보면 조금 위험한 사람 같으니까, 더 조심해야지!'

- 이연우가 메뚜기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치명상을 입은 메뚜기가 죽지 않았다. 다리를 버둥거렸고, 몇 분 뒤에 천천히 회복했다.
아바돈이 편하게 말했다.
"죽음은 탈출이고, 축복이지. 지옥에는 그런 거 없어."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영역, 생존이 보장된 영역. 생존 본능이 잠들었다.
"아."
이연우는 예민한 감각이 둔해지고, 사고의 속도가 급격히 느려지는 것을 느꼈다.

- '생각해, 생각해, 생각해.'
이연우의 손발이 벌벌 떨렸다. 든든한 안전장치인 생존 본능이 꺼졌다. 로프 없이 번지점프를 하는 느낌이 들었다. 아찔한 현기증.
잠시 휘청이던 이연우가 입술을 꽉 깨물고, 한 걸음 내디 더 아바돈을 따라갔다.
'일단 난 손님으로 찾아왔고, 위험할 일은 없어. 그리고... 애초에 여기서는 안 죽잖아?'
어차피 안 죽는데, 이렇게 불안을 느낄 일인가? 어떻게 보면 이곳이야말로 생존에 최적화된 땅인데? 굶어도 살고, 자연사도 없고, 사고가 터져도 괜찮고.
이연우가 천천히 냉정을 되찾았다. 얼굴에 편안함과 자신감이 돌아왔다.
'그리고 뭐... 위험 생겨도 주사위랑 내 장비는 멀쩡하게 있잖아!'
6레벨인 생존 본능이 없어도, 어떻게든 몸 비틀면 될 것 같았다. 회사원 생활을 처음 할 당시와는 경험과 능력 자체가 달랐다.
기분이 달라지니, 보이는 환경도 달라졌다.
근처에서 혼자 타오르는 지옥 불은 황야에서 피어난 꽃 한 송이처럼 보였으며, 하늘에서 소용돌이치는 먹구름은 공기 맑은 가을 하늘 같았다.

- 유황 냄새 나는 공기를 듬뿍 들이마신 이연우가 쾌활하게 말했다.
"날씨 좋네요."
"... 날씨가?"
아바돈이 힐끔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다시 이연우를 살폈다. 

'뭐 하는 놈이지?'
이딴 날씨가 좋을 리가. 햇볕 쨍쨍하고, 공기 맑고, 농작물이 풍성하게 자라나는 바깥의 환경이 훨씬 좋은데.
물론 몇몇 악마들은 지옥을 좋아하겠지만...
"혹시 악마신가?"
"예? 아니, 사람입니다."
두 존재는 멀뚱멀뚱 서로를 마주 보다가, 다시 걸음을 서둘렀다.

- 아바돈이 기대하는 순간, 지도자가 말했다.
"아바돈, 영역을 제물로 바친 대가로 돌아갈 것을 요구한다. 가!"
진짜 이름을 이용해 거래한 계약, 영역은 대여 형식이었고, 가장 기본적인 악마 계약의 강제력이 아바돈을 한순간에 쫓아냈다.
그리고 지도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의문의 손님인 이연우를 향해.

- 이연우는 어색하게 웃었다.
"안녕하십니까. 6레벨 이연우입니다.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회사? 미리 들은 게 없는데."
"아뇨. 개인적인... 아니, 어... 우리 같은 6레벨끼리 나눌 이야기입니다."
지도자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어쨌든 6레벨이니, 악마처럼 막 쫓아낼 수는 없었다.
"대충 편한 데 앉아. 물이나 차는 없어. 지옥에는 그런 게 없거든."

 

- "세상도 바꾸고, 회사도 터뜨립시다."
"정신 멀쩡한가? 나 때문에 머리 이상해진 거 같은데."
"멀쩡합니다. 사실부터 알려드리겠습니다. 우리 세상은 개변됐습니다. 본래는 이상을 허용하는 세상이었지만, 인류보호회사가 세상을 다시 썼습니다."
이연우가 차근차근 정보를 털어놓았다. 본래의 세상과 회사. 그리고 회사가 새로 설정할 목표와 그 앞에서 이상 개체인 자신들이 겪을 위기.
지도자는 진지하게 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음울한 눈동자에 희망의 빛이 슬그머니 솟았다.
"망상이 아닙니다. 회사 이사들은 이미 개변 전의 회사로 돌아갔으니, 곧 공격이..."
"잘됐어. 좋은 일이야, 좋은 일."

- 이연우가 우뚝 멈췄다. 뭔가 이상했다. 예상한 반응이 아니었다. 지도자가 웃고 있었다.
"이상 같은 건 세상에 없는 편이 좋지.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잖아."
그 뜻이 명확했다. 회사의 아군, 이연우의 적.
입이 바짝 말랐다. 이연우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설득을 위해.
"회사가 원하는 미래에는 당신도 없을 겁니다. 죽는다는 말입니다."

- 허공을 더듬는 손끝에서 상대의 가능성이 느껴졌다. 충실한 간수로서 이연우를 감시할 가능성. 가장 확률 높은 미래이자, 이연우가 얼마든지 간섭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
악마의 미래, 악마의 존재, 악마의 생각, 악마의 자아, 모든 것이 이연우의 손에 달렸다.
정확히는 주사위의 혼란에 휘말렸다. 악마의 모든 것이 더 이상 악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너무 심한 짓은 하면 안 되겠지?'
어쨌든 똑같이 살아 움직이는 생명인데. 거기에 그 지도자가 감시하고 있을 테고.
그렇게 이연우가 더듬더듬 가능성의 실타래를 고르기 시작할 때였다.

- "아. 그냥 손 움직이는 건데, 너무하네요. 이래 봬도 정당한 포로인데."
이연우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억울했다. 뭘 하려고 했지만, 아직 실제로는 하지도 않았는데, 겉보기로는 그냥 손 움직이는 것도 못 하게 막은 것 아닌가.
"너무하네. 안 되겠다."

- 아마 한때는 이상 없이 안전한 세상을 원했을 것이다. 너무 많은 사고로부터 안전하기를 원해서.
하지만 6레벨에 오른 지금은...
"그런데 지금 이상 없는 세상을 체험하니까 확실히 알겠습니다. 아뇨, 이상이 존재하는 세상이 더 안전합니다."
"... 왜?"
지도자가 귀를 기울여 듣다가 질문했다.

- 이연우가 희미하게 웃었다. 아마 남에게 밝히는 건 처음일 것이었다.
"나는 살아남는 자니까. 주사위가 아니라 생존 본능으로 6레벨에 올랐으니까."
죽음을 피하는 자가, 어쩌면 수명의 제한조차 돌파한 자가 순수하게 의문을 담아 말했다.
"왜 죽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죽어야만 하는 세상으로 바꿔야 합니까?"
자연사, 교통사고, 심장마비, 바이러스, 들개, 추락, 골절, 화재, 부조리한 사고 등등, 수많은 죽음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세상을 왜 만들어야 하는가?

 

- 지도자가 입을 다물었다. 근본적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악마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이질감이 느껴졌다.
자신이 관장하는 개념을 콘셉트로 잡고 노는 악마, 이연우를 생존의 악마라고 생각하면...
"악마한테 관장하는 개념을 버리라고 할 수는 없지... 좋다, 가라. 그러면 각자 할 일을 해야지."
"좋습니다. 서로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합시다."
그렇게 두 사람은 등을 돌렸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이 영역의 끝을 향해. 전쟁이 벌어지는 세상을 향해.

생존 본능이 꿈틀거렸다. 멸망이 닥쳐온 세상에서 생존 본능이 경계 너머의 뭔가 다른 것으로 변화하려는 듯했다.
자신만을 보던 시야가 가족으로 넓어지고, 가족은 곧 사회로, 인간이라는 종 전체로 확장되었다.
흐릿한 머리로 기이한 생각이 흘렀다.
'모든 인류가 멸망한 세상에서 나 혼자만의 생존이 의미 있는가? 자손을 낳을 수도 없이 홀로 살아남는 생존, 그건 곧 인류의 멸망이다.'
개인의 생존보다 높은 차원의 가치. 인류의 생존. 설령 자신이 죽더라도 인류를 지킬 희생 정신이...

- 그 순간이었다. 이연우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정신 차려! 이건 내 생각이 아니야!'
변화하는 생존 본능의 오염이었다. 이연우가 걸음을 멈추고 이를 악물었다. 사고 회로가 고속으로 돌아갔다.
'이건 멸망이 아니야. 단순한 전쟁이지. 인류 멸망?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당장 클럽만 해도 사업을 진행할 기반은 남겨야 할 것 아닌가. 하다못해 금광에서 금을 캘 인간이라도 말이다.
거기에 지도자는 사람을 살릴 것이고.
'아직은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혹시, 정말로 인류가 멸망할 위기가 찾아온다면 모른다. 햄버거라도 사 먹기 위해 사람을 구할지도.

- 주먹을 쥐었다.
"개변 전의 내 기억을 떠올릴 가능성."
데구르르.
성공!
개변 전의 기억이, 한 사람 분량의 데이터가 쏟아졌다. 비슷한 듯 다른 기억. 이연우는 침착하게 기억을 소화했다.
'기억이 두 배, 경험도 두 배, 사고를 겪고 살아남은 경험도 두 배. 다 흡수해.'
생존이라는 정체성을 중심으로 두 세계의 기억이 하나로 합쳐졌다.

- 그리하여 이연우는 개변 전과 개변 후의 기억을 모두 떠올렸으며, 새로운 미래를 꿈꾸었다.
인류보호회사가 원하는 평범한 세상도 아니며, 조금 전의자신이 꿈꾸었던 회사 없이 이상 개체가 넘쳐나는 세상도 아니었다.
이연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원래 세상이 제일 낫네."
세계는 이상을 허용하고, 회사가 위험을 관리하고, 다른 집단과 회사가 균형을 유지하며 사회를 보존하고, 자신은 적당히 사는 세상.
그 세상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이었다.

- 직원들의 머릿속으로 서로 다른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
회사라고 해도 자신의 인생을 다시 쓸 권리는 없었다. 우리의 사명은 거짓인가, 우리는 무엇을 왜 해야 하는가, 누구를 보호해야 하는가.
"..."

끓어오르기 직전의 물처럼 비서실에 열기가 고였다. 그들은 바쁘게 통화하던 핸드폰도 놓아두고, 부지런히 두드리던 키보트 밀어둔 채, 오직 이사만을 보았다.

- 그 본능적인 신체 반응은 확실한 답이 되었다. 두뇌와 몸을 이어주는 신경인 직원들이 헛웃음을 흘렸다. 분노, 허탈함, 혼란, 슬픔, 의심, 온갖 감정이 끓어올랐다.
그리고 직후, 폭죽처럼 하얀 종이들이 곳곳에서 터졌다. 직원들이 동시에 집어던졌다.
"내 가족조차 협회장한테 당했어! 오직 사명 하나 때문에 이 자리를 지킨 거지! 그런데 뭐? 애초에 이 사명조차 진실이 아니라고?"
"개 같은 회사! 우리가 도구냐? 멋대로 고쳐 쓰고, 필요하니까 멋대로 부려먹고! 이게 세뇌랑 뭐가 다른데!"
사명이 흔들렸다. 정신 무장이 풀어졌다. 강도 높은 스트레스에 시달린 직원들이 감정을 마음대로 내뿜었다. 오직 개인에 충실한 감정을.

- 이사가 다급하게 손을 내밀며 설득에 나섰다.
"회사가 개변된 건 우리조차 예상치 못한 사고..."

"진짜 개변했다는 소리잖아!"

- 그 순간이었다.
냉정하게 사람들을 둘러보던 마크 정이 눈을 빛냈다. 혼란 속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 할 일은 하나야!'
인류 보호. 그건 회사의 정체성과 상관이 없었다. 바깥에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으니까. 멸망이 닥쳐왔으니까.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이었다.
 
- 눈부시게 빛나는 빌딩을 바라보며, 이연우가 생각에 잠겼다.
그의 목적. 원래 세상으로 되돌리기. 그에 필요한 것들. 그가 해야 할 것. 세계 개변 장치를 수리, 아니, 재건하는 것은 첫걸음일 뿐, 더 많은 일을 해야 했다.
그가 개변 전에 마지막으로 외쳤던 말이 떠올랐다.
'주사위. 내가 살 길을 만들어. ... 내가 간섭해서 이상보호회사가 됐지!'
자신이 간섭할 수 있다면, 다른 6레벨도 가능했다. 6레벨마다 서로 다른 세상을 꿈꿀 테니, 그 간섭을 막아야 했다.

- 거기에 회사도 있었다.
'평범한 세상을 포기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세계 개변보다 연관된 상황이 더 어려웠다. 얽힌 존재가 너무나 많았으며, 그 매듭은 지독하게 꼬여 있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회사의 싱크 탱크가 모여서 한참을 회의해야 갈피가 잡힐까? 고민에 빠진 이연우가 흔들흔들 걸어갔다. 좀처럼 답이 떠오르지 않아 그 걸음이 느렸다.
그리고 그 시간은 회장이 이연우의 방문을 알아차리기에는 충분히 길었다. 이연우의 앞으로 황금빛이 모여들며 회장의 형상을 만들었다.

- 비싸게 팔겠다고 말했다가 천천히 가격을 조정하는 느낌.
[원하는 게 따로 있군요. 말해보세요. 이런 한심한 협박은 그만두고.]
"음!"
속내를 들킨 이연우가 어설픈 연기는 그만두고,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다소 부끄러운 목소리가 나왔다.
"원래 세상으로 되돌리는 게 목적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원래 세상이 가장 이상적이어서요."
[도대체 그게 뭔... 인류보호회사가 이상 말살을 원하는데 그게 왜 이상적입니까.]
"그것도 문제긴 한데, 그건 나름대로 대책을 준비했습니다."
이연우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가 만든 평범한 영역. 이걸 회사에 당근으로 주고 이런 멸망전을 채찍으로 삼아 협상할 것이었다.
"회사의 방침은 공격이 아니라 보호지 않습니까. 거기에 호소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게 된다고, 아니 된다고 칩시다. 그런데 제가 그걸 왜 동의해야 합니까?]

 

- 지금 세상에서 회사를 무너뜨리면 끝인데, 굳이 회사가 있는 개변 전의 세상으로 돌아갈 이유가 있나?
이연우도 클럽의 입장을 바꿀 자신은 없었다. 그는 자신 없이 말했다.
"동의까진 아니고, 세계 개변 장치만 고쳐주고, 다시 되돌리는 거에 간섭만 안 해주면 되는데."
[그러니까 그걸 내가 왜... 아니, 됐습니다. 저는 지금 세상이 그리 나쁘지는 않습니다. 당신을 방해할 겁니다.]
결국 회장이 지금 세계를 고집했다.
이연우가 안타까움에 고개를 숙였다. 짙은 한숨이 나왔다.

"아, 이게 안 되네."
회장이 도왔으면 지금 바로 세계 개변 장치가 고쳐졌을 텐데. 칼 들고 협박해도 매듭이 혼자 풀리지 않으니, 남은 방법은 칼로 매듭을 내리치는 것뿐이었다.
"그럼 어쩔 수 없죠. 당신부터 치워야지."
황금만능주의는 회장이 아니었다. 회장을 죽이면 자신도 쓸 수 있었다. 확실함을 따지면 오히려 이쪽이 나았다.
"주사위. 회장이 심장마비로 죽을 가능성."
회장을 죽이고 황금만능주의로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동시에 회장의 형상도 황금빛으로 빛났다. 공격은 공격으로 받아친다.
 

- [죽이기에는 부족하다고? 지금 얼마나 많은 황금을 바쳤는데...]
이건 뭔가 이상했다. 주사위로 막은 것도 아니고, 부활한 것도 아니고, 황금이 부족하다고?
"난 안 죽습니다."
이연우가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며, 계속해서 주사위를 굴렸다.
자신은 아직 전능하지 못했다. 그저 절대성을 지녔을 뿐이었다. 반드시 살아남는다는 절대적인 법칙.

 

- 회장은 그제야 깨달았다. 어마어마한 황금이 있어도 간섭하지 못하는 것, 지도자의 지옥, 협회장의 아름다움, 황금만능주의의 거래. 그가 말했다.
[주사위가 아니라 생존이었습니까?]
"예. 그러니 의미 없는 싸움은 그만하고 협력해 주십시오."해주십시오."
어느 한쪽이 죽어야 끝날 전투라면, 최후의 승자는 죽지 않는 자 아니겠나. 이연우는 자신이 있었다.

 

- 회장은 피식 웃었다. 경계심이 한층 내려갔다.
[참 쓸모없는 걸로 6레벨에 올랐군요. 6레벨은 원래 안 죽습니다.]
협회장은 죽으면 세상이 되살린다. 지옥에는 죽음이 없고, 자신은 황금이 마르지 않는 한 죽지 않는다.
[차라리 주사위였으면 위협적이었을 텐데.]
"글쎄, 그건 아닌 거 같은데."
그 판단에 이연우는 고개를 저었다. 생존 본능으로 6레벨에 오른 덕에 자신은 자신으로 남았다.
예술가협회장은 아름다움에 집착하여 작품을 수집하는 병에 걸렸고, 지도자는 자신을 지옥에 가두었다. 누구보다 인간을 좋아하지만, 인간을 해치는 지옥을 만드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그의 지옥이었다.

- 그도 이미 자신을 많이 잃은 상태였다. 과거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많이 다름을 알았다. 가끔 과거를 떠올릴 때면 낯선 사람을 보는 듯했다.
그가 변명하듯 말했다.
[오염되더라도 황금만능주의를 쓸 수 있고 클럽의 회장이 되었다면 충분히 이득이죠. 인간성을 잃었더라도 말입니다.]

- [회사가 무너지면 우리들의 세상이 옵니다. 죽지 않는 6레벨끼리 싸우겠습니까? 당신은 그저 편안하게 살면 됩니다. 사람들도 변함없이 살아갈 거고요.]
"... 아니야."
이연우가 고개를 들었다. 그 눈에는 주사위가 선명하게 비쳤고, 둔한 생존 본능이 은은히 감돌고 있었으나, 이연우의 생각이 가장 강렬하게 빛났다.
"내가 착각했어. 원래 세상이 살기 좋아서 돌아가고 싶다고. 그게 아니야."
생존은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생존 본능으로 6레벨에 오른 이상 어떤 세상에서 살든 죽지 않는다.
그가 원래 세상을 원하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여기는 내 세상이 아니야. 나는 내 세상을, 내가 살아왔던 세상을 원해."
이상한 장치가 간섭하지 않는, 오직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이 남아 있는 세상. 그가 겪은 경험과 만난 사람, 그 과거 또한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것이었다.

- "능력은 없지. 하지만 잠재력은 있어."
이연우가 웃으며 에코백에서 권총을 꺼냈다. 클럽의 사제 권총이었다. 그 권총을 자기 머리에 겨누었다.
떠올린 것은 미래의 자신.
이상기후로 멸망한 세상을 살아가며 이상기후의 해결책을 홀로 고민하던 자신, 방주를 찾아 헤매던 자신, 시간을 되돌릴 능력이, 이상기후를 없던 일로 만들 능력이 있던 자신. 
인류의 멸망과 정을 붙인 사람들의 죽음마저 자신의 과거로 받아들인 그가 이해가 갔다.

- '필요한 건 미래의 나 수준으로 강한 힘.'
공시생 생활만 4년을 하고, 현장에서 살기에 급급했던 자신이 무슨 복잡하고 거대한 문제를 다루겠나. 손만 대면 망가뜨리겠지.
오직 전능의 힘만이 해결책이었으며, 그 힘을 얻는 방법 또한 이미 알았다.
'생존 본능. 전쟁과 멸망을 없던 일로 만들자!'
이연우가 방아쇠를 당겼다. 머리에 붉은 꽃이 피었다. 갈기갈기 찢어진 인간 자격증이 벚꽃처럼 흩날렸다.

 

- [... 자살? 진짜 정신에 문제가 있습니까?]
뒤로 쓰러진 이연우를 보며 회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잘된 일이었다. 분명 부활하겠지만, 그거야 봉인하면 될 일이었다.
스멀스멀 이연우의 몸 위로 실타래가 뻗어 나왔다. 볼 것도 없이 부활 판정이었다.
회장이 대충 손을 저었다.
[봉인해 주십시오.]
그러나 황금만능주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회장이 멈칫, 다시 시선을 돌렸다. 알 수 없는 오한이 등골을 타고 올랐다. 아니, 세상조차 불안하게 흔들렸다. 황금만능주의의 영역과 세상의 경계가 뭉개지고, 섞이고, 알 수 없는 무언가로 변했다.

- 생존본능이 비명을 질렀다. 그가 살아가는 미래를 만들었다.

- 주사위의 부활 판정.
대성공!
검은 실타래가 수술하듯 이연우의 상처를 봉합했다. 파괴된 신체 부위를 가능성과 확률의 실타래로 대체하였으며, 이연우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코와 눈을 가리는 가면을 쓴 듯, 삐죽삐죽 솟아난 실타래가 일렁였다. 이연우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미소를 띤 입가만이 인간의 얼굴로 존재했다.

- "진작에 이럴걸."
확률적인 가능성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손만 뻗으면 닿았다. 이연우가 가볍게 손을 휘저으면, 손아귀에 실타래가 잡혔다. 무너지던 영역이 복구되었다. 그런 가능성을 잡아서 구현했다.
"일단 인간자격증부터. 아, 필요 없네."
100개의 인간 자격증을 생성하려던 이연우가 툭, 실타래를 밀어내었다.
스스로 인간을 포기해서 그럴까. 이연우의 생존은 인류의 생존으로 나아갔으며, 그 생존 본능이 주사위를 적절하게 견제했다.
주사위가 폭주하면 인류가 망한다고, 자아를 지키고 있었다. 거기에 주사위가 그의 몸이 되어버려 원래 자기 감정 다루듯 조절할 수 있었고.

- 회장은 검은 실타래로 만들어진 이연우의 가면 같은 눈가를 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주사위 6레벨?]
"예, 그렇게 됐습니다. 이제 당신이 협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더 이상의 실수는 없다. 이연우가 오므린 손을 허공에 휘저어 확률의 실타래를 건져냈다.
세계 개변 장치가 복구될 가능성이 아니었다. 개변을 취소할 가능성이었다.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갈 가능성이었다.

- 황금빛이 몰려왔다. 이연우의 행동을 취소하기 위한 권능이었다. 이연우는 느긋하게 반대쪽 손을 쥐었다.
"10초 동안 모든 간섭을 막아낼 가능성."
 
- 이연우가 주먹을 쥐었다.
세계가 다시 쓰였다.

- 모든 사고는 찰나에 일어났다. 하지만 한번 사고를 겪은 사람들은 능숙하게 대처했다.
개변이라는 희대의 사고를 겪은 회사는 평범한 방에 전쟁의 진행과 6레벨의 위험성 같은 중요한 자료를 미리미리 백업해 두었고.
"지금의 기억을 보존해 주십시오!"
코앞에서 이연우가 세계를 개변하는 것을 본 골드버그클럽 회장은 자신을 보호했으며,
"이제는 나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드디어 돌아가는구나!"
"개변? 내가 이곳에 있으면 세상이 지옥이 되는데. 아니, 일단 이상이 없는 영역으로! 전쟁이 계속되면 다시 나온다!"
자의적으로 방관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 그리하여 다시 쓰이는 세상.
이연우는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확률이 0만 아니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세계 개변 장치를 복구할 확률은 굉장히 낮았으나 어쨌든 존재했고, 그건 그가 세계를 개변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 눈을 한 번 깜빡였을 뿐인데, 세상이 바뀌었다. 확률의 실타래를 가면처럼 쓴 이연우는 가만히 클럽의 빌딩을 보았다.
클럽의 본진은 평범한 고층 빌딩으로 존재했다. 황금으로 도배하지도 않았고, 영역을 만들지도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는 세상이니까.
그저 이전에 소모했던 황금이 소모된 채로 존재할 뿐이었다. 그건 거래로 사용된 것이라 절대적으로 소모됐다.

- 문제는 여전히 잔뜩 남아 있었다. 평범한 세상을 꿈꾸는 인류보호회사, 회사와 싸울 수밖에 없는 이상 집단.
생존 본능이 속삭이는 듯했다.
[전쟁은 멸망이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게 막아야 한다.]
이연우는 속으로 대답했다.
'알아. 미래의 나랑 같은 실수는 하지 않아!'


- 이왕이면 모두가 함께 사는 것이 최선이었다. 상실과 고통을 받아들이느니, 애초에 겪지 않는 편이 나았다.

물론 목숨의 위기가 찾아오면 또 혼자 살겠다고 날뛰겠지만, 이제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자신의 목숨만이 아니라 모두의 목숨을 구할 힘이 있었으니까. 여유가 있었다.
'할 수 있는데 안 할 이유는 없어. 어렵긴 하지만, 불가능하지도 않을 거야!'

- 그 가능성의 실타래를 약지에 반지처럼 묶을 때였다. 머릿속 확률의 실타래와 주사위가 충동을 더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회사, 이상 집단, 6레벨을 설득할 수 있어? 못 하잖아. 그냥 힘으로 짓누르자.]

- 이전과 같은 얼굴. 눈동자에는 주사위가 비쳤다. 단순한 생각으로 막 움직여 혼란을 일으키는 충동.
'평범한 세상을 포기하라고 이사들 소집해서 협박하고, 다른 6레벨도 전쟁하지 말라고 협박하고?'
이연우가 중얼거렸다.
"그건 아니지."
냉정하게 충동을 밀어냈다. 주사위와 한 몸이 되었기 때문일까. 오염이 아니라 융합에 가까운 느낌이라, 충동과 감정을 조절하기 쉬웠다.

- 개변이 취소되며 되살아난 이사 중 하나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이미 개변과 개변 취소를 알아채고 그 대책을 상의하던 중이었다.
"제가 말하겠습니다." 
회장이 나서서 조리 있게 설명했다.
지구에서 평범한 세상을 포기할 조약, 정보 공개와 감사권리. 또한, 이상 집단의 인류 보호 의무.
"어차피 세계 개변 장치는 의미 없습니다. 두 번의 개변을 겪은 이상, 대책은 준비했습니다. 회사는 평범한 세계를 만들 수 없습니다."
어차피 당장 못 이룰 목표이니 적당히 협상하자는 말이었다.

 

- 어떤 것은 타협할 수 없었다. 단호한 목소리만큼이나 이사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전쟁이 일어나겠지. 그래도 미래를 위해서라면 그 또한 감수해야 할 희생이야.]
그쯤에서 이연우가 나섰다.
"그래서 제가 제안하고 싶습니다. 인류보호회사 이상 말살이 아니라 인류의 보호에 그 목적이 있지 않습니까. 전쟁으로 인간을 희생시키느니, 사람을 구하십시오." 

- 이사들의 시선이 이연우에게 돌아갔다.
배신자를 보는 시선이 아니라,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는 표정이었다. 6레벨 이상 개체가, 그것도 생존주의자가 평범한 세상을 원할 리가.
이연우를 담당하는 이사가 말했다.
[우리가 끝까지 함께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 자네가 살기 위해 그런 말을 하는 거라면 이해는 해. 하지만...]
"그 말이 아닙니다."

- "지구가 아니라 이차원의 인간을 구하라는 말입니다. 지구는 모든 집단이 힘을 합쳐 지키고, 회사는 바깥으로 나아가십시오!"
지구는 그대로 두고, 회사는 이차원에 평범한 세상을 건설한다. 그 세상은 그 자체로 방주이자, 인류의 셸터가 될 것이었다.

- 회사 앞에 갈림길이 나타났다. 하나는 공멸하는 미래가 선명한 전쟁. 그 대가는 몇 안 남는 지구인과 평범한 세상.
다른 하나는 이차원으로 나아가 평범한 세상과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는 것.
이사들의 얼굴에 고민이 내려앉았다. 눈살을 찌푸리고, 턱을 쓰다듬고,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계산하기도 하고.


- 두 번째 선택지가 생각보다 괜찮았다. 인류 보호라는 목적에도 충실하고, 장기적인 관점이나 위험 관리 측면에서도.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고 어떤 이사가 말했다.

[나쁘지는 않아요. 하지만 우리가 지구를 포기할 수는 없어요.]
지구의 자원. 80억이라는 인간의 문명과 과학기술. 그건 전부 회사의 기반이기도 했다. 그 모든 걸 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건 너무 위험했다.
회장이 능숙하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회사에게 지구를 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구는 회사와 모든 집단이 힘을 합쳐 지키자는 말입니다. 회사는 지구를 거점 삼아 이차원을 개척하고요." 
이왕이면 클럽은 이차원에서 황금도 조달하고.
조금의 욕심을 숨긴 회장이 근처의 금괴를 가볍게 주워 황금만능주의에 바쳤다.

- 대충 중요한 사항만 적은 문서가 회의 참가자들에게 전해졌다.
[이건 안 예뻐.]
예술가협회장은 멍하니 문자 나열을 보다가 머리를 흔들었다.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예술 작품도 아니고, 계속 보고 싶지 않았다.
반대로 지도자는 다른 곳에 정신이 집중된 기색이었다. 이사들이 서둘러 문서를 읽어 내리는 중에, 지도자가 고개를 돌려 이연우를 찾았다.
[평범한 공간, 네가 만들었나?]
"어, 예. 개변을 취소하기 전에 만들었습니다."
그제야 이연우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 주어진 역할만 수행한다. 괜히 업무 외의 일에 나서지 않는다. 오직 조약의 보상과 강제력으로만 존재한다.
이연우가 설명서를 읽듯 사무적으로 말했다.
"지구의 일부 지역에 제한된 범위의 영역을 만들어드리겠습니다. 물론, 해당 영역 내부의 일은 이상 집단의 감사를 받아야 합니다."
[이차원에는 얼마나 만들 수 있지?]
이사가 떠보듯 질문하자, 이연우가 바로 답했다.
"회사가 원하는 만큼."
그 순간, 이사들의 마음이 확 기울었다. 평범한 영역이 보장된 이차원? 이사들의 입이 동시에 열렸다. 서로 다른 질문이 우다다 쏟아졌다.
[그거 완전한 평범인가? 다른 이상 개체가 절대로 간섭하지 못하는?]
[지속 기간은? 유지에 필요한 자원은 없나요?]
[얼마나 넓게 만들 수 있나?]
묻고 답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이연우는 어떤 것은 바로 대답했고, 어떤 것은 확률을 헤아린 후 말하기도 했고, 어떤 것에는 고개를 젓기도 했다.

- 한동안 이연우의 능력을 확인한 이사들이 긍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군.]

- 평범한 공간을 제공받는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전쟁을 포기할 수 있었다. 평범한 공간 하나하나가 최후의 셸터로 기능할 테니까.
평범한 세상도 이차원에 건설하면 되고.
이미 마음이 넘어간 이사들이 마지막으로 문서를 확인했다. 여러 사람이 머리를 쥐어짜서 만든 조약들.

- [인류 보호 조약]
회사와 모든 집단이 인류를 보호한다. 사소한 문제는 회사몫이군.
멸망 위기 같은 것이 찾아오면, 이연우를 비롯해 회장과 지도자와 협회장이 나서기로 했다. 6레벨의 협공이었다.
단지 그들 집단에는 전 지구에 걸친 자잘한 사고를 모두 커버할 능력은 없어, 회사가 여전히 나서기로 했다. 정보 자원은 회사가 압도적이니까.

- 다른 것은 지구 보호 조약. 개변이나 평범한 세상 같은 것을 막기 위해 지구를 지금 상태로 두기로 한 조약.
그 세세한 사항을 보면, 회사의 세계 개변 장치 같은 것을 견제하는 조항임을 알 수 있었다. 물론, 다른 집단의 멸망 수준의 공격, 이를테면 협회장의 전 지구적 테러, 지옥의 확장, 황금만능주의의 거대한 소원을 견제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 [자네 하나의 생존.]
이사 하나가 마지못해 대꾸하자, 이연우가 고개를 저었다.

"인류와 이상 모두의 생존."
인류는 당연히 지킨다. 인류 영역에 닿은 생존 본능이 있었고, 그 자신조차 이왕이면 모두의 생존을 바랐다. 가족이나 지인이 인간이니까. 사회는 멀쩡해야 좋았고.
또한, 자신이 이상 개체가 되어버렸기에, 당연히 이상의 생존은 필수였다. 평범한 세상은 절대 안 됐다. 죽음의 가능성이 너무 컸다.

- 이연우를 담당하는 이사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들어 이연우를 보았다.
그건 회사와 집단 모두한테 적의를 사는 짓 아닌가?
조약은 조약이었고, 회의는 회의였다. 한순간에 그들이 손잡고 하하 웃으며 하나가 될 수는 없으며, 앞으로도 알게 모르게 다툼이 발생할 것이었다. 
그 상황에서 이상 개체를 보호하면 회사의 견제를 받을 것이고, 인류를 보호하면 이상 집단의 견제를 받을 것이었다.
대놓고 싸우지는 않겠지만, 정보 공작이나 정치적인 견제 같은 것이 따라올 텐데.
이연우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도 그게 제 역할입니다. 어느 쪽이든 선 넘지 못하게 막는 것."

- 회사와 이상 집단의 균형추. 조약의 강제력.
이들 중 한쪽이 선을 넘는 순간 또다시 전쟁이 일어나니까. 한 번 보았지만, 그건 진짜 아니었다.
이연우가 몸을 뒤로 빼며 두 손을 들었다. 화상회의에 두 손이 보이도록. 그는 두 손을 위아래로 엇갈리게 움직였다.
"이상 집단이 선 넘으면 평범한 영역을 흩뿌릴 겁니다. 회사가 선 넘으면 반대로 할 거고요."
인류와 이상 둘 모두를 지켜야 하는 자가 말했다. 한 손에는 확률의 실타래를 들고, 다른 손에는 생존 본능을 집중시킨 채.

- 그것을 제일 먼저 알아차린 것은 예술가협회장이었다. 심심해 죽으려고 하던 협회장이 눈을 반짝이며 이연우를 보았다.

[6레벨 둘?]
"인류의 생존 본능과 전능한 주사위입니다. 이만하면 제가 왜 둘 모두를 지키겠다고 말했는지 이해하실 겁니다."
협회장이 손을 뻗었다. 주사위는 솔직히 안 예뻤다. 지렁이나 기생충이 공처럼 뭉쳐 꿈틀거리는 것 같아서. 하지만 생존본능은 기이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걸 잡아 쥐려는 손과 움직이는 세상.
이연우가 대충 실타래를 잡아 거부한 뒤,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건 좀..."
[보여주면 조약에 찬성할게.]

- "이 대가는 비싸게 받을 겁니다. 아, 조약에 대한 보상도 챙겨주셔야 합니다."
회장이 손을 싹싹 비볐다.
비서진을 동원한 대가. 거기에 이연우는 회사와 지도자에게는 평범한 공간을, 협회장에게는 관람권을 주었으니, 클럽도 뭘 받아야 했다.
이연우는 슬쩍 웃었다. 알게 모르게 클럽한테 받은 선물이 많았다. 당연히 챙겨줄 것이었다.
"그럼요. 제가 꼭 신경 써서 드리겠습니다."
그 말이 협박처럼 들리는 건 왜일까. 회장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아니, 잠깐만. 저 인간이 엮이면, 아니...'
그가 다급하게 외쳤다.
"선물은 됐..."
그러나 이연우는 이미 공간을 이동한 상태였다. 이연우는 여유를 가지고 조사반 사무실로 돌아갔다. 조약이 수정되는 동안 일상을 누릴 것이었다.

 

- "예, 맞습니다. 일이 있어서 잠깐 나갔다 왔습니다."
그 미소에 조사원들이 파르르 떨었다. 저럴 애가 아닌데. 정다운 미소가 어색하다 못해 징그러웠다. 사람 아닌 것이 사람 흉내를 내는 느낌과 비슷했다.
"건물의 주인으로서 명하니, 불청객은 정체를 드러내라!"
그들은 순식간에 반응했다. 반장이 계약서의 힘을 발휘하며 권총을 꺼내 쥐었다. 유지유는 형광 조끼를 서둘러 입었고, 반장과 최재민에게도 조끼를 던졌다. 
그 모든 일이 찰나에 일어났으며, 부모를 보는 최재민만 진상을 파악했다. 이연우의 부모가 평소와 같아서. 최재민이 서둘러 외쳤다.
"반장님! 형 맞아... 아닌가?"
최재민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계약서의 힘이 이연우를 덮쳤다. 이연우는 거부하지 않았다. 스르륵.
인간의 형상으로 보일 가능성이 풀려나며, 얼굴 위로 확률의 실타래가 솟구쳤다. 이연우는 반장이 총을 쏘기 전에 얼른 손을 들었다.
"저 맞습니다. 6레벨로 올라서, 그것 관련해서 일하고 왔습니다."
"... 6레벨?"

 

- 철컥, 반장이 권총과 계약서를 내려놓았다. 다른 조사원도 슬슬 자리에 앉았다. 형광 조끼를 주변에 대충 밀어두면서.

이연우가 이연우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언제 총을 겨눴냐는 듯,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본사로 가냐? 그래, 6레벨 올랐으면 그래야지."
"와, 그럼 이제 엄청 강하겠네요? 나중에 큰 사고 터지면 전화해도 돼요?"
이연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확률의 실타래가 느껴졌다. 그 실타래는 조사원들이 죽을 확률이었다.
"아예 지금 축복 조금 내려드리겠습니다."
"축복은 무슨 축복. 됐다. 그런 거 없어도 돼. 이미 받은 게 많구먼, 뭘 더..."
반장이 손을 내저어도 이연우는 온 감각을 손바닥에 집중했다.
'아, 이걸 이렇게 쓸 수도 있구나!'


- 반장이 죽을 확률이 잡혔다. 하지만 자세히 느끼면 그 실타래 하나는 수많은 얇은 실타래로 이루어져 있었다.
무작위의 죽을 확률. 그 하나의 실타래를 매듭 풀듯 풀어헤치면, 심장마비, 자연사, 총살 등으로 나누어졌다.
애매모호한 실타래 하나가 여러 개의 세밀한 실타래로 이루어진 것이다.

- 잠시 그 실타래를 가늠하던 이연우가 미묘한 표정을 짓고는, 얼른 유지유나 최재민의 가능성도 느꼈다.
"어. 죽을 확률이 굉장히 낮은데요."
역시 조사원이라고 할까. 사고를 겪거나 이상 개체를 만날 확률은 높은데, 사망할 확률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연우의 손바닥 위에서 꿈틀거리는 실타래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던 조사원들이 기겁했다. 사태 파악이 빨랐다.
"어, 어, 어... 연우야, 아무것도 하지 마. 그거 잘못 건들면 지금 죽는 거 아니야!"
"멈춰요!"
"형!"
이연우의 손에 자신들의 죽음이 잡혀 있었다. 설마 이연우가 그들을 죽이지는 않겠지만, 그냥, 목숨이 저렇게 구현된 것 자체가 끔찍하게 불안했다. 심장이 밖에 나온 기분. 
그 기분에 공감했기에 이연우가 얼른 실타래를 풀었다.

- 확률은 유동적이고, 지금 조작해도 향후 미래에는 새로 생길 수도 있었다.
아예 전화 한 번이면 구조하러 오겠다는 말에, 조사원들이 미안함과 고마움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 "형. 혹시 그걸로 저 평범한 사람 만들어줄 수 있어요?"
태어나길 이상 개체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회사에 붙잡혀 고초를 당하기도 했고, 물론 마구잡이로 남들에게 패드립을 던지다가 걸린 것이지만, 자신이 괴물이 아니라 진짜 인간이길 원했다.
'이상 개체면 좋은 거 아닌가? 거기다 이상 개체 감별하는데 쓸 만한 능력인데!'
왜 자기 생존 능력을 떨어뜨리는 일을 원하는지 이해 못 한 이연우가 눈을 깜빡이다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허공을 휘저으며 확률을 찾아냈다.
"가능하긴 한데, 진짜 해줘?"

- "재민아, 너 보통 사람 되면 군대 간다."
"괴물 감별하는 이상 개체가 낫죠. 저는 원래 이 능력 좋아했어요. 특별하잖아요."
한순간에 태세가 전환되었다.

- 그 말은 뜻밖에도 이연우에게 타격을 입혔다.
"... 이상 개체면 군대 안 갑니까?"
"무슨 사고 나라고 군대를 보내."
아니, 아니... 이연우가 입을 벙긋거렸다.
'나도 원래 이상 개체였던 거 같은데!'
주사위와 생존 본능, 두 개를 다 6레벨에 올리고 느꼈는데, 생존 본능은 처음부터 자신 안에 있었던 듯했다. 그냥 사고 없이 안전하게 살아서 잘 자고 있다가 본격적으로 사고를 겪으면 ...

- [투자 좋죠. 어떤 형식으로 하실 겁니까?]
큰돈이 움직이는 일이었다. 당연히 그 방식도 많았고, 많은 만큼 복잡했다.
이연우는 그런 거 모른다는 말이었다. 이연우가 눈을 깜빡였다. 그냥 돈 보내주면 끝 아닌가? 뭐가 더 필요한가?
이사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그... 생존 기구 조직되긴 했나?]
"아뇨, 그것도 물어보려고 했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사들과 회장이 입을 다물었다. 남의 일에 휘말린 기분.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연우는 6레벨이지만, 생존 기구를 진정정상급 집단으로 보아야 하나 의문이 들었다.

- 물론, 답은 하나였다. 6레벨이 있는데. 그냥 폐가 하나에 혼자 들어가서 나는 집단이라고 선언해도 인정해야지.
결국, 그들은 적절한 방안을 찾았다.
[회사에서 사람 보내주겠네.]
[클럽도 돕겠습니다.]
사람을 보내서 집단 창설을 돕는다.

- 어찌 되었든 이연우는 환하게 웃었다.
"도와주시면 감사할 뿐이죠."
그래, 머리 쓰는 일을 자신이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 극단적으로 회사가 이차원에서 평범한 핵폭탄, 평범한 핵배낭, 이딴 무기를 만들어서 건너올까 봐 걱정되어서.
[마법사는 나도 좀 알지.]
지도자가 나섰다. 요즘 평범한 세상에서 일상을 누리더니, 안색이 아주 좋았다.
마법사 분파나 마찬가지인 흑마법사 대표가 웃었다.
[평범한 공간 하나 제공해.]
[그걸로 되나?]
의심스러운 반응들이 돌아왔다.
마법사가 어디 평범한 인간인가. 차원을 여행하는 방랑자. 배알이 꼴리면 폭탄 던지고 튀는 테러리스트, 온건한 마법사도 귀찮으면 다 버리고 도주했다. 
도주의 달인인 마법사는 차원 통로 같은 일에 진득하게 붙어 있을 인간들이 아니었다.

 

- 하지만 지도자는 슬쩍 웃으며 손을 허공에 들었다. 손가락을 빙빙 돌려가며 마법진 같은 것을 그렸다.
[마법사들은 발견과 개척과 모험에 미쳤지. 그들의 마법이 평범한 공간에서 안 통한다는 건, 그만큼 그들의 마법으로 방문할 수 없는 차원이 있다는 뜻이야. 평범한 공간처럼 마법을 배척하는 차원이 있다면, 당연히 발견해야 하지 않겠나.]

평범한 공간에도 통할 마법을 개발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협력할 것이었다.
물론 스승 위치의 마법사만 개발과 연구에 집중하고 그 아래 제자들이 노동하겠지만, 마법사의 위계질서가 그런 것이었다. 스승은 지옥 끝까지라도 찾아가 제자를 잡아 오는 인간들이었다.
스승의 추적을 피해 달아날 수 있는 마법사야말로 제자를 벗어난 정식 마법사였다.

- 이연우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실타래를 잡아채 공간을 넘었다.
"내가 죽을 때가 됐나. 왜 헛것이 보이지."
집 나간 아들놈이 이렇게 갑자기 집에 내려올 리가 없는데. 그럴 애가 아닌데.
'저승사자인가?'
엄마가 얼른 주변에 둔 물컵을 집어 들었다. 당장이라도 던질 듯 손이 뒤로 당겨졌다.

- "진짜 연우니?"
"그럼, 진짜지 가짜..."
가짜가 올 수도 있지. 무슨 도플갱어 같은 거나 기억을 구현하는 이상 개체가 나타날 수도 있고, 적대 집단이 6레벨의 가족을 인질로 잡으려고 할 수도 있지 않나.
이연우는 혼자 생각을 하고는, 얼른 말을 돌렸다.
"뭐에 다친 거야?"

- "... 수상한 점이요?"
이연우의 움직임이 멈췄다. 단순한 사고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을 노린 음모라면...
이연우의 눈에 기이한 빛이 서렸고, 남자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은 멧돼지가 내려오는 시기가 아닙니다. 하지만 멧돼지만이 아니라 여러 산짐승이 도망치듯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산에 무슨 일이 있다?"
"아무래도 수상하죠. 일단 이연우 님 아버님 근처에 파견한 요원이 산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 이연우가 고개를 돌렸다. 어스름한 어둠이 내리는 저녁. 이연우의 시선이 어둠에 잠긴 산을 보았다.
그 손에 꿈틀거리는 확률의 실타래가 잡혔다. 이전처럼 대강 부모님의 생존 여부만 확인하는 것이 아니었다. 관련된 확률의 실타래를 전부 세세하게 뜯어보았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때로는 지식을 얻을 가능성을 구현기도 했으며, 천리안이나 과거시 같은 것도 섞었다.
전능한 힘으로 전지를 어설프게 따라 한 이연우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허공을 더듬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연우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마법사?"
웬 사람 하나가 산속에 어설프게 이차원의 문을 열었다.
마법사라고 하기에는, 우연히 얻은 마법서로 흉내만 내다가 일으킨 사고.

- '아, 왜 또 사고야!'
이연우가 신경질적으로 주먹을 쥐고 이동했다.
스승도 없이 마법서만 보고 독학한 아마추어 마법사. 납치해서, 아니, 체포해서 회사에 넘겨야겠다. 차원 통로나 관리하라고.

- 이연우가 마법서를 대충 훑어보고 있었다. 한 손에는 대놓고 확률의 실타래를 쥐었다. 이상 현상을 겪은 사람한테 더 감출 이유가 없었다.
'텔레파시 같은 걸로 재능 있는 사람을 끌어오고, 문을 열게 만드는 마법서. 그 근원은...'
어떤 마법사가 더 필요 없다고 대충 차원의 틈바구니에 쓰레기 버리듯 던진 게 이 마을에 떨어진 것이었다.
이연우가 한숨을 쉬며, 마법서를 무당에게 건넸다.
"제가 이런 문제 관리하는 회사 다녔거든요."
"공기업이냐? 공무원 하겠다더니 비슷한 건 됐구나."
아빠가 바로 물었다. 그의 생각에 이런 문제는 국가에서 관리하는 것이 맞았고, 그 문제를 관리하는 회사는 당연히 공기업이었다.
하지만 무당은 다른 것을 보았다. 신들린 듯 떨리는 눈동자가 이연우를, 확률의 실타래를 보았다.
"신내림 받았느냐?"

- 이건 마법도 뭣도 아니었다. 단순히 통로를 관리할 뿐인 노동하는 톱니바퀴였다.
'도주할까.'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무궁무진한 이차원이 자신을 기다렸다. 모험! 발견! 탐색! 마법사가 슬그머니 보석 목걸이를 쥘 때였다.
"감사 나왔습니다."
그 옆으로 이연우가 불쑥 나타났다. 마법사가 기겁했다. 그동안 이연우가 행한 업적이 있었다.
도망친 마법사 추적. 스승 위치의 마법사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추적하여 납치해 오는 마법사의 적.
"안... 안 도망칩니다."

 

- 지레 겁먹은 마법사의 목소리.
이연우의 시선이 마법사를 스쳤다. 자연스럽게 미래에 펼쳐질 가능성을 보았다. 열 갈래의 미래가 있으면, 아홉 개의 미래에서 도망쳤다.
이연우가 한숨을 푹 쉬었다. 진짜 미친 마법사들, 집단 단위로 일하기로 계약까지 해놓고 도망을 치는 이유를 모르겠다. 기본적인 신의와 약속이란 개념이 머리에 없는 것만 같았다. 
"도망치고 싶으면 도망치십시오. 다시 잡아 올 거니까."

평범한 사람이면 이것을 경고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마법사는 달랐다.
'도주 허락한 거 같은데!'
능력만 되면 도망가라는 거 아닐까. 이건 암묵적인 허락이었다. 눈동자가 대굴대굴 구르고 보석 목걸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찰나.
그리고 이연우가 주먹을 쥐었다.
"돌겠네."
확률과 가능성을 조작했다. 이는 미래를 고정하는 것이었다. 마법사의 미래가, 마법사의 가능성이 좁아졌다. 도주하지 않는 미래로.

- "내가 회사 말했지?"
"인류보호회사?"
"어. 인간의 세상에서 온 사람들이 인간을 구하러 인간의 도시를 지었어. 같이 가자."
단델리온이 눈을 반짝였다. 마치 별을 박아놓은 것만 같았다. 희망의 빛이 샘솟았다.
"좋아!"
단델리온이 이연우의 손을 붙잡았다. 동시에 이연우가 공간을 이동했다.

 

- 그들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들판에서 사라졌다. 따듯한 봄바람이 불어왔다. 그들이 기대앉아 있던 민들레가 흔들렸다.
새하얀 민들레 씨앗이 바람을 타고 흩날렸다. 마치 인류와 회사처럼.

- 인류는 이미 많은 이차원으로 뻗어나갔다. 이제 회사는 인류를 쫓아 바깥으로 진출할 것이었고, 인류와 회사는 민들레처럼 번성할 것이었다.

- "꼭꼭 숨어라... 진짜 숨바꼭질인가."
괜히 콧노래를 흥얼거린 이연우가 눈을 감았다. 얼굴의 실타래가 풀려 나오며, 촉수처럼 허공을 더듬었다. 생존 본능 또한 달래서 감각을 칼날처럼 세웠다. 
'뭔지 몰라도 핵폭탄 같은 거잖아. 저거 알아둬야 인류 생존의 위협에도 대응하지. 그리고 내 이름도 쓰여 있었고. 내가 위험해지면 인류도 위험해지는 거야!'
감각이 컨디션이 최상의 상태로 올라갔다.
쿵쿵, 기분 좋은 심장박동을 들으며 이연우가 손을 펼쳤다. 하지만 그 손 위로 떠오르는 가능성의 실타래가 없었다. 
이연우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텅 빈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 저것의 위치를 자신이 알 가능성, 저것에 대한 자세한 보고서가 자신의 앞에 나타날 가능성 등, 정보를 획득할 가능성부터 찾았으나 그런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0퍼센트.
존재하지 않는 것을 구현할 수는 없었다.
'평범함? 아냐. 평범한 장치는 불가능해, 순수한 과학기술로 멸종 방어 장치를 만들 수는 없어!'
6레벨 수준의 정보 방어였다. 주사위로 어떻게 할 수 없었으며,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어도 이연우가 간섭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가벼웠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더 이상 장난이 아니었다.

- "이건 아니지?"
갑자기 회사가 발작해 사고라도 치면 대응할 방법이 제한된다는 말 아닌가.
혼자 중얼거리는 이연우를 주변 사람들이 겁에 질린 눈으로 보았으나, 이연우는 무시하고 눈을 감았다.
목숨이 걸린 일이면 존재하지 않는 가능성을 창조하겠지만, 지금이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허점을 찾아 우회해야 했다.
'주사위는 전능의 힘이지. 그 힘을 쓰는 게 나라서 문제야!'
전능이 있으면 뭐 하나. 그걸 가진 게 나약하고 한계 많은 인간인데. 상상의 한계가 곧 전능의 한계였으며, 인식과 감각의 한계가 전능의 족쇄였다.

- 벽 너머라는 단서를 이용한다. 단순한 벽을 말하는 것은 아닐 테니, 벽은 어떤 비유나 은어일 터. 그것만 감지하면 끝이었다.
이연우가 가능성을 쥐었다.
인식의 한계를 초월해 벽을 감지할 가능성.
감각이 확장되었다. 뻗어나간 실타래가 본래 인식하지 못하던 무언가를 감지했다.
이연우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허공을 보았다. 그 입에 미소가 걸렸다. 경쾌한 목소리가 나왔다.
"거기 있구나."
그가 성큼 한 걸음 걸었다. 벽을 넘었다.

- [이름 없는 부서. 멸종 방어 장치: 작가가 설치된 벽 너머의 교차점, 액자.]
타자 치는 소리만 들려오는 공간에 비명이 울렸다. 박사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막아! 어떻게든 막아! 저 바퀴벌레가 찾아오지 못하게!"
메타 동력을 에너지 삼아, 멸종 위기가 오면 세계를 조작할 인류 최후의 보루가 이곳이었다. 관계자가 아닌 누구도 침입해서는 안 되는, 아니, 애초에 침입할 수도 없는 장소인데... 
그 순간이었다.
박사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벽을 보았다. 벽에서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허공을 허우적거리는 손 뒤로, 검은 벽에 번뜩이는 두 눈이 떠올랐다. 

- 박사는 괜히 바닥을 걷어차며, 질투심과 공포와 짜증 따위가 뒤섞인 눈으로 이연우를 보았다.
저 미친 바퀴벌레. 주인공.


- 이연우는 일단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실타래부터 쥐었다. 상대가 진실만을 말할 가능성을 구현했다.
"저건 뭐 하는 장치입니까?"
"우리 세상을 이야기 형태로 가공해 메타 차원에 제공하는 장치. 그렇기에 이야기를 마음대로 쓰는 권능을 가진 기계 인형."
그 말은 이해하기 난해했기에, 이연우는 그걸 자기 마음대로 받아들였다.

 

- 연수 때 보았던 감독이 떠올랐다. 영화 촬영 현장처럼 현실을 조작하던 예술가. 
대충 비슷한 거 아닐까. 소설이라면 주인공은 죽지 않고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니, 멸망 위기가 오면 주인공을 만들어 문제를 해결하는 느낌으로.
하지만 그 말이 박사의 어디를 건드렸나 보다. 박사가 갑자기 발작했다.
"그래! 주인공! 너! 미친 바퀴벌레! 너는 주인공이 아니야!"

바깥 차원을 원하던 박사는 주인공을 향해 선명한 질투를 드러냈다.
"본래 이름 없는 부서의 목표는 이런 이야기가 아니었어! 옴니버스! 단편 모음! 우리 세상의 이야기를 서로 다른 주인공으로 표현하려고 했지!"
그 갑작스러운 발작에 이연우가 주춤 물러났다. 박사는 아예 손가락을 치켜들고 이연우에게 삿대질했다.
"그런데 너! 너! 네가 주인공 자리를 강탈했어! 네가 이야기에 간섭해 아예 장르를 바꿨다고!"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연우는 인간자격시험을 끝으로 퇴장할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연우는 바퀴벌레 같은 생명력으로 자신을 주인공으로 바꾸었다. 

- '내가 주인공이라고?'
떨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러면 내 고향에서 사람이 많이 죽던 이유가."
"아니, 그건 네 고향이 이상한 건데."
"그러면 내가 사고 앞에서도 살아남았던 이유가..."
"그것도 네가 이상한 건데."
박사가 냉정하게 답했다. 그는, 작가는, 이름 없는 부서는 정말로 하지 않았다. 그냥 이연우가 살아남은 거였다.
오히려 그들은 이연우를 죽이려고 했다.

- 연수 중 감독의 난입, 조사원 첫 업무부터 만난 이상 개체, 이어지는 멸망주의자의 NPC를 이용한 테러.
그런데 이연우는 살아남았다. 이연우를 죽이고 다른 사람을 주인공 삼아 이야기를 진행하려고 했던 모든 시도가 실패했다. 그쯤에서 이연우가 눈치챘다.
"그러면 내가 사고를 많이 겪은 이유가..."
"맞아. 우리가 그랬어."

 

- 당당한 박사 앞에서 이연우의 눈이 돌아갔다. 평온한 삶을 방해하는 적! 위험한 사고를 몰고 오고 목숨을 위협하는 불안요소!
그나마 성장했기에 이연우는 자제했다. 질문이 나왔다.

"저거 작가? 죽이면 문제 생깁니까?"
"아니. 창문이 닫힌다고 집이나 바깥이 사라지나? 눈을 감는다고 세상이 사라지나?"
작가는 그들의 세상을 메타 차원에 이야기 형태로 제공할 뿐이었다.  

- "전화가 끊어지는 것뿐이야. 전화가 끊어져도 사람은 있지. 전화기 너머에서 뭘 하는지 모를 뿐. 이걸 하나하나 설명해야 하나?"
"아하."
이연우가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며 확률의 실타래를 길게 뽑아냈다. 검은 실타래가 채찍처럼 잡혔다.
"그러면 죽어야지."
손이 뒤로 당겨졌다. 이연우가 이를 아드득 갈았다. 작가?

"내 인생에 사고만 가져오는 건 죽어야지."

- 거대한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연우는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사고를 겪지 않아도 된다. 드디어 평온한 삶이 찾아왔다.
이연우가 몸을 돌렸다. 그는 벽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세계로 닫혔지만 열린 세계로.

- 박사가 비명을 질렀고, 목이 떨어진 작가의 몸은 끼익 하며 느릿하게 손가락을 움직여 마지막 글자를 썼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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