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이종산
출판 : 문학동네
출간 : 2017.11.03
이렇게 자연스럽게 '퀴어'를 다룰 수 있을까?
게다가 '커스텀'이라는 설정을 통해 염색과 네일아트, 태닝 같은 가볍고 대중적인 변화부터 피어싱이나 타투, 신체 변형 같은 보다 적극적인 변화까지 다양한 영역을 하나로 묶어 냈다.
자신과 '다르기' 때문에 싫어하고 배척하는 것은 정말 인간의 본능일까?
기준을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으로 잡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반응은 아닐까?
그들에게서 보는 것은 정말 '다름'일까?
해외에서 민감한 주제인 '인종차별'에 대해 생각해 봤던 적이 있다. 자기도 모르게 느껴지는 감정을 법으로 부정하거나 금지할 수는 없는 게 아닐까 하고.
그리고 당시의 내 결론은 이러했다.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합법, 밖으로 표현되는 것들은 불법.
성숙한 인간은 자신의 내면을 관리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므로 최소한 머리로 아는 것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는 자신의 감정을 잘 갈무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금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 버렸다. 또한 표현 의사가 없었는데도 드러나 버리는 상황도 있다는 것과, 상대에게 없는 것을 자의적으로 읽어내는 경우도 있다는 것도.
타인을 자신의 기준대로 맞추려 하면 서로에게 깊은 고통이 찾아온다. 그러나 그걸 알면서도 기대하게 되고, 상처받게 되는 것이 인간관계인 것 같다. 기대 없이 사랑하는 일이란 얼마나 이상적인 목표인지.
그럼에도 우리는 꿈을 꿀 수 있고, 상상할 수 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나는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어딘가에는 반드시 존재한다는 말을 믿는다. -설사 시간 좌표를 이용해야만 한다 해도-
그래서 이 책이 너무나 꿈결같이 달았다. 입안에서 녹아내리는 하마이카 꽃처럼.
어떤 이들에게는 그저 동화 같은 이야기일 것이고, 누군가에는 저릿한 사랑 이야기일 것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치열함을 담은 이야기일 것이다. 내게 <커스터머>는 서로가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상대를 통해 자신을 알게 되는 이야기, 그리고 그런 자신조차도 선택을 통해 변화시켜 나가는 이야기였다.
너무나 좋았다.
사족. '돌연변이'와 '커스터머'를 구분한 정의가 너무나 오래 마음에 남았다. '커스텀'은 신체에 관한 것이지만 동시에 정체성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타고난 것에 대한 자각과 선택을 통한 변화, 한 걸음 떨어져서 보는 이들로서는 쉽사리 알아채기 어려운 그들 사이의 또 다른 '다름'. 그리고 그것들에 담긴 '아름다움'.
다시금, 좋았다.
이종산 작가의 글을 좀더 찾아 읽고 싶다.
나는, 안과 수니를 사랑하게 되었다.
비가 오기 시작할 때 첫 빗방울은 어디에 떨어질까?
- 물론 매번 다를 것이다.
하지만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는 첫 빗방울이 떨어지는 장소가 정해져 있다. 연못. 학교 본관 건물과 기숙사 중간쯤에 있는 연못이 첫 번째 빗방울이 떨어지는 곳이다.
- 나는 가끔 첫 번째 빗방울이 연못에 떨어지는 것을 본다. 운이 좋아야만 그걸 볼 수 있다. 연못에 첫번째 빗방울이 떨어지고 그다음 빗방울들이 하나둘씩 떨어진다. 그러다가 후드득하고 비가 쏟아져내린다. 비가 연못을 흔들면 나도 함께 흔들린다. 그럴 땐 속이 시원하기도 하고 울고 싶어지기도 한다. 때로는 오싹해질 때도 있다.
- 라울이 막대기로 머리를 맞고 쓰러지는 것을 봤을 때 나는 연못에 떨어지는 첫 빗방울을 볼 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가슴에 동그란 원이 퍼지면서 마음이 온통 흔들렸다.
- 이제 6월이다. 이곳 시드의 비는 내가 살던 곳의 비와 다르다. 구설의 비는 따가웠다. 반은 물이고 반은 모래인 것 같은 빗방울이 내 몸에 닿으면 피부가 타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비를 맞지 않으려고 비닐 옷을 뒤집어쓰고 남들의 시선을 끌 만큼 커다란 우산을 들고 다녔다. 다행히 비 오는 날은 일 년에 몇 번 되지 않았다.
이곳의 비는 나를 다른 방식으로 흔든다. 비가 오는 날에는 아침부터 마음을 설레게 하는 달콤한 바람이 불다가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처음 이곳의 비는 내 팔을 다정하게 건드렸다. 내가 안을 만난 이후에 사람이 사람에게 얼마나 다정하게 다가갈 수 있는지 알게 된 것처럼 이곳의 비도 나에게 다정함을 가르쳐주었다.
- 시드에서 지내고부터 나는 비에 여러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드에는 비가 자주 내린다. 구설에서 비는 그냥 비였다. 하지만 시드에서 비는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얼음눈이 섞인 비는 눈꽃비, 가볍게 흩어지는 비는 가루비, 갑자기 쏟아지는 비는 벼락비, 맑은 날 내리는 비는 환한비라고 부른다. 이 밖에도 수많은 이름이 있다. 나는 아직 비의 이름을 배우는 중이다.
- 비의 여러 이름을 배우는 것은 안을 알아가는 일과 비슷하다. 나는 안과 몇 달을 함께 보냈다. 그러면서 안이 내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복잡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아직 안을 알아가는 중이다.
- 첫 번째 빗방울을 본 그 시간에 나는 혼자 있었다. 저녁에는 좋은 식당에서 맛있는 것을 먹었다.
안의 생일이었다. 나는 몇 주 전부터 긴장하고 있었다.
- "안, 바닥에 물 떨어져. 요즘 좀 위험하긴 하지. 너도 밤에 혼자 돌아다니지 마."
"너보단 내가 낫지."
안이 웃으며 말했다. 나보다 크고 근육으로 다져진 몸. 안의 말이 맞기는 했다. 나는 안이 입은 얇은 티셔츠 위로 봉긋하게 올라 있는 부드러운 가슴을 봤다.
- 안의 바지 가운데가 약간 불룩한 것 같았다. 기분 탓일까, 아니면 차분한 얼굴 뒤에 흥분을 감추고 있는 걸까?
나는 여자면서 남자인 안의 몸을 봤다. 처음에는 낯설었고 이제는 사랑하게 된 안의 몸을.
안은 정말 저 아름다운 몸으로 라울을 죽였을까?
- 하지만 나의 의심에는 아무런 증거도 없었다. 내가 걱정되어서 찾으러 나갔었다는 안의 말을 믿고 싶었다.
나는 일단 씻으러 갔다. 복도에 내 옷을 흠뻑 적신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 샤워실 거울 앞에서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거즈를 갈아야 했다. 내 이마에는 라울이 만든 상처가 있었다. 세로로 길게 난 상처는 열흘 전에 생긴 것이었다. 안은 내 이마를 볼 때마다 화가 난다고 했다. 라울에게 빚을 진 기분이라고. 꼭 갚아야 할 빚을
거즈를 새로 붙일 때 손가락이 뿔을 건드렸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번졌다. 뿔이 피부를 뚫고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저게 정말 내 뿔인가?
나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 통지서를 받기 전날 밤, 나는 인어 꿈을 꾸고 있었다. 미지근한 바람이 부는 2월 초의 밤이었다.
어릴 때부터 자주 꾸는 꿈이었다. 내용도 항상 같았다.
나는 바다 아래로 가라앉고 있다.
도와줘! 속으로는 비명을 지르지만 입을 열면 물이 밀려들어서 숨도 쉴 수 없다.
점점 아래로 가라앉고 있는데 누군가가 억센 팔로 나를 감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 눈을 뜨자 인어가 있다. 환한 달빛이 인어를 선명하게 비춘다. 꼬리는 물에 잠겨 있지만 존재감이 뚜렷하다. 크고 두툼하고 힘이 센 꼬리. 인어의 이마에는 뿔이 있다. 소라고둥처럼 생겼다. 하지만 소라고둥보다는 훨씬 단단해 보인다. 색은 산호빛 아름다운 뿔이다.
인어가 내 몸을 물 밖으로 밀어낸다. 나는 몸이 가벼운 어린 아이고인어는 힘이 세서 수월하게 일이 끝난다. 인어는 다정한 눈으로 내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고 다시 바다 가운데로 돌아간다.
그 모습을 보고 있을 새도 없이 밴이 나를 깨우는 소리가 들리고 꿈은 깨졌다. 그렇게 깨어날 때면 잠이 꿈을 부수고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꿈속에 잠이 웅크리고 있다가 새가 껍데기를 깨고 나오듯이 꿈을 부수고 나와서 멀리 날아가는 것이다.
- 그렇게 눈을 떴을 때만 해도 나는 그날이 다른 날 하고 똑같이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날처럼 지루하고 한가하게 흘러갈 것이라고.
- "수니, 일어나! 지각이야!"
밴이 노래를 부르며 소리쳤다. 밴은 노래를 부르는 동시에 말도 할 수 있다. 뮤직비디오를 보여주면서 내 하루 스케줄을 욀 수도 있고 복잡한 계산을 하는 동시에 책을 읽어줄 수도 있다.
밴은 내 비서 로봇이다. 중학교 1학년 때 전교 일등을 한 상으로 받은 것이다. 엄마가 "그래. 까짓것 사러 가자"라고 말했을 때 심장이 두근거리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 말 그대로 심장이 요동쳤다.
나는 학생을 위한 로봇 코너에서 밴을 보자마자 반했고 밴은 그날로 내 친구가 됐다.
- 밴이 나를 깨웠을 때 나는 짜증보다 걱정이 앞섰다.
밴은 지금이 방학이라는 걸 깜빡한 걸까? 로봇이 '깜빡'할 수가 있나? 밴을 수리 센터에 맡겨야 할까?
"밴, 아직 방학이 안 끝났잖아."
난 밴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밴은 자신이 틀렸다는 걸 알면 충격받을 것이었다. 밴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으니까.
밴의 얼굴 화면에 웃는 표정이 깜빡거렸다. 그러곤 화면에 오늘의 일정이 떴다.
[통지서 나오는 날, 오전 10시까지 학교]
그랬다. 그날은 통지서가 나오는 날이었다. 내가 어느 학교로 가는지 정해지는 날.
어떻게 까먹고 있었을까?
- 방에서 나왔을 때 운이 나쁘게도 아빠가 거실에 있었다. 게다가 창문이 열려 있었다. 언덕에서 불어온 모래바람이 창문 안으로 날아들어왔다. 바닥에 흩뿌려진 모래가 보였다. 화가 치밀었다. 저걸 치우는 사람은 나 아니면 엄마인데. 아빠는 아무리 얘기를 해도 자꾸 창문을 열었다. 창문으로 들어온 모래를 치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집에서 날리는 모래 먼지는 천식을 앓는 세이에게 치명적이다. 아빠에게는 그게 아무 상관도 없는 걸까?
- 아빠는 소파에 기대어 늘어져 있다가 나를 불러 세웠다.
"수니야, 밥 좀 차려."
"나 학교 가야 돼. 늦었어. 엄마는요?"
"일 갔나 봐. 우리 딸 살림의 여왕이잖아. 그냥 있는 것만 식탁에 꺼내줘."
아빠의 얼굴에 피곤이 가득했다. 숙직을 하고 온 아침이면 아빠는 평소보다 예민했다.
- 다른 사람에게 아빠의 직업을 얘기할 일이 있을 때 나는 "도시의 치안을 신경 쓰는 일을 하세요"라고 말하고는 했다.
예전에는 그 말에 존경과 자랑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아빠가 경찰서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도덕적으로 존경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식탁을 차렸다. 아빠는 우리 가족 중 누군가가 자기 말을 안 듣는 걸 못 참아한다. 아빠는 치사한 방식으로 보복하는데 그 보복이란 자기가 속이 풀릴 때까지 사람을 숨 막히게 달달 볶는 것이다.
엄마는 아빠가 고향을 떠나 구설에서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가족에게 응석을 부리는 거라고 이해하라고 하지만 난 엄마만큼 아빠를 사랑할 수 없었다.
- "설거지는 아빠가 하세요."
밥을 푼 그릇을 식탁에 놓으며 내가 아빠에게 말했다.
"밴이 식기세척기에 넣을 텐데, 뭘."
아빠가 소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 나는 도로 방으로 들어가서 교복을 입었다. 치마를 입는데 왼쪽 정강이가 쿡쿡 쑤셨다. 나는 정강이에 있는 흉터를 만져봤다. 꿈이 너무 생생해서 옛날에 느꼈던 통증까지 되살아난 걸까?
내가 꾸물거리고 있으니 밴이 화면에 시간을 크게 띄웠다.
"지금 안 나가면 늦어!"
"지금 가도 늦거든?"
나는 가방을 어깨에 걸쳤다. 밴에게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설거지 대신 해주지 마, 알았지?"
"그랬다간 내가 설거지통에 처박힐걸?"
나는 밴이 껄껄 웃는 소리를 무시하며 방에서 나왔다.
- 2월에는 다른 달보다 바람이 많이 불었다. 일 년 중에 공기가 가장 나쁜 달이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마스크를 꺼냈다. 마스크를 쓰자마자 답답해졌다. 그래도 모래와 먼지가 섞인 바람을 고스란히 맞는 것보다는 나았다.
옛날에는 공기가 지금만큼 나쁘지 않았다고 했다. 어른들은 자주 그렇게 말했다. 옛날에는 이 땅이 사막이 아니었어. 옛날에는 물이 지금보다 깨끗했어. 옛날에는 해가 훨씬 더 밝게 빛났어.
옛날에는, 옛날에는.
지겨운 소리였다.
지금은 노인이 된 우리 전 세대의 사람들이 재건에 평생을 바쳤다고 하지만 우리 동네는 별로 근사하지 않다. 길에는 높은 건물 하나 없고 도로도 엉망이다.
- 눈 속에 어떤 말이 들어 있었다.
엄마는 내가 어릴 때부터 사람은 입보다 눈으로 더 많은 말을 한다고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대화할 때는 상대방의 눈을 바라봐야 하는 거라고.
하지만 눈에 담긴 말은 입에서 나오는 말보다 솔직한 만큼 읽기 어렵기도 했다. 나는 담임의 눈에 담긴 말이 뭘 의미하는지 읽기를 포기하고 통지서를 펼쳐봤다.
[시드 중앙 통합 고등학교]
통지서의 가장 중요한 칸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 무언가가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나는 자리로 돌아가 앉는 대신 담임에게 통지서를 내밀었다.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담임이 먼저 말했다.
"잘못 나온 게 아니에요. 자리에 가서 앉으세요."
"하지만..."
나는 '여기는 웜스가 가는 데가 아니잖아요' 하는 말을 삼켰다.
- 어떤 어른들은 '웜스'가 나쁜 단어라고 못 쓰게 하지만 웜스는 웜스다. 나나 내 친구들은 우리가 웍스에 속해 있다는 걸 잘 알고 그게 그다지 좋지는 않지만 사실을 인정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 나는 웜스다. 웜스는 사회에서 가장 낮은 쪽에 있는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다. 사회의 가장 아래층.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웜스였다. 그건 행운도 아니지만 불행도 아니었다. 나는 웜스였고 웜스는 웜스 구역에 있는 학교에 가야 했다. 그게 맞았다. 아빠가 자주 하는 말대로, 그게 분수에 맞는 일이니까.
나는 자리로 돌아와서 통지서를 가방에 넣었다. 다른 애들이 내 통지서를 보지 못하도록.
- 집에 갔을 때 아빠는 침실에서 자고 있었다. 식탁에는 아빠가 아침 식사를 한 흔적이 그대로 있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잠시라도 혼자가 되고 싶었다.
가방에서 통지서를 꺼내 몇 번이나 들여다봤다.
글자는 변하지 않았다.
- "입술도 커스텀을 한 건가요?"
"아뇨. 립스틱을 바른 거예요. 입술 색은 매일 바꿔요."
처음 그 사진과 인터뷰를 봤을 때,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왜?
왜 자기 몸을 일부러 이렇게 만들었지?
왜 몸을 괴상하게 바꾼 거야? 커스텀은 아름다워지려고 하는 거잖아!
- 난 그 잡지를 정연이와 함께 봤다. 정연이네 언니의 디지털 패드 안에 있던 것을 몰래 훔쳐봤던 것이다.
정연이도 나와 마찬가지로 충격을 받았다. 정연이는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언니를 무서워하면서도 언니의 물건에 관심이 많았다. 전에도 언니의 패드를 보다가 혼난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러니 언니에게 커스터머에 대해 물어볼 수는 없었다.
정연이와 나는 밤새 우리가 본 커스터머들에 대해서 얘기를 나눴다. 커스터머가 도대체 뭔지 계속 검색을 하면서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 그 이후로 열일곱 살이 된 지금까지 난 매달 <커스터머>를 본다. 그리고 이제는 안다. 자기 팔을 호스로 바꾼 그 남자가 아름다웠다는 걸. 사진 속의 그 남자가 행복하게 웃고 있던 이유를 이제는 알 수 있다.
- 신체를 변형하는 커스텀 기술은 날로 발전하고 있다. 커스텀은 대중화되었다. 커스텀을 혐오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머리색을 바꾸는 정도의 커스텀까지 반대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어떤 종류의 커스텀도 반대하는 극단적인 커스텀 반대론자들을 커스터비아라고 부른다.
커스터머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다.
커스터머는 가장 적극적으로 커스텀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일반적인 기준을 넘어서는 커스텀을 한다.
- <커스터머>의 편집장 편지 맨 아랫단에는 항상 다음과 같은 말이 덧붙여져 있다.
"커스터머는 직업이 아니라 정체성과 관련된 것이다."
- 나는 열한 살 이후로 커스터머에 완전히 매혹되었다. 그전에 나는 되고 싶은 것이 많았다. 하지만 커스터머를 이해한 뒤로 내 꿈은 단순해졌다. 나는 언제나 커스터머가 된 나를 꿈꿨다. 성인이 되면, 이 집을 나가 독립한 뒤에, 수많은 밤이 지나간 후에.
- 그런데 갑자기 그날이 코앞으로 가까워졌다.
- 통지서를 받은 날 이후로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나는 결국 시드고등학교에 가게 됐다. 부모님과 오래 얘기한 끝에 어렵게 내린 결정이었다. 다른 구역의 학교에 입학하게 된 웜스가 나 하나만은 아니었다. 밴이 읽어준 뉴스 기사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이번 통합 교육 정책으로 비취시와 모래시에 거주하는 청소년만 16세 대상들이 태양시의 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시범으로 지정된 학교는 다섯 군데이며, 학교 이름은 공개되지 않는다. 시범학교에 입학하는 타 지역 출신 학생들에게는 기숙사가 제공되며 학비가 일부 지원된다.
이런 구절도 있었다.
상제 총리는 이번 정책이 고착화된 계급 문제를 풀어나가는 의미 있는 걸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흠, 내가 우리 사회의 문제를 푸는 열쇠 중 하나가 된 건가, 아니면 모르모트가 된 걸까? 엄마는 이왕 가게 된 거 좋은 쪽으로 생각하라고 했지만 걱정되는 게 많았다.
집을 떠나 살아본 적이 없는 내가 혼자서도 잘할 수 있을까? 차별은 없을까?
성적도 걱정이었다. 난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전교 십등 아래로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다른 구역의 학교로 가서 성적이 떨어진다면?
- 아빠는 "공부를 잘해야 웍스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자주 말했다. 나는 그 말이 싫었지만 어릴 때부터 하도 많이 들어서 귓속에 콱 박혀버렸다. 태양 구역의 고등학교에 가서 꼴찌로 졸업한다면 난 아무것도 아닌 채로 웜스 구역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실패자가 되는 것이다. 평생 아무것도 아닌 채로 살다가 죽는 인생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런 생각들이 지나친 걱정이라는 건 안다. 난 걱정이 많은 편이다. 사실 좋은 면도 없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집을 떠나게 돼서 기뻤다. 엄마가 들으면 서운하겠지만 부모님과 떨어져 있게 되어 좋았다.
- 그래, 내 가장 큰 걱정거리는 세이였다. 그에 비하면 다른 걱정거리들은 별것 아니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걱정하던 것들이 우습게 느껴졌다. 난 걱정이 많지만 두려움 때문에 새로운 것을 시도조차 해보지 않는 게 바보짓이라는 건 알았다.
걱정이 물러가자 기대가 차올랐다.
- 내가 가게 될 곳에는 유명한 커스텀 가게들이 많았다. 웜스 구역에는 커스터머가 흔하지 않았다. 난 커스터머들의 사진은 많이 봤지만 실제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른 구역에 가면 커스터머를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마음이 들떴다.
커스텀이 신체의 일부를 바꾸는 것이라면 커스터머는 신체를 바꿔서 다른 존재가 된 사람이다. '커스텀을 한 사람'과 '커스터머'는 다르다. 누군가는 그 차이를 미묘하다고 하겠지만 나에게는 아니었다. 둘은 완전히 다른 의미다.
-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될지 스스로 선택한 사람.
그게 커스터머다.
- 난 커스터머가 될 것이다. 커스터머의 '이달의 커스터머' 코너에 실릴 정도로 멋진 커스터머가. 좀 유치한 생각이긴 하지만 누구나 유치한 생각 하나쯤은 마음속에 품고 있는 거 아닌가? 집에서는 부모님 때문에 -사실 아빠 때문이다. 엄마는 머리색이나 손톱 색을 바꾸는 커스텀 정도는 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커스텀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그곳에 가면 첫 번째 커스텀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니 롤러코스터를 타고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갔을 때처럼 가슴이 떨렸다.
- 학교에서는 공용어만 썼기 때문에 나에게도 공용어가 더 편했다. 내가 구어를 쓸 때는 오직 엄마와 얘기할 때뿐이었다.
"가끔 구어로 편지를 써줬으면 좋겠어."
엄마가 말했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혼자 글 쓸 일이 있을 때는 구어로 쓸게."
내가 약속하자 엄마는 두 손으로 내 손을 감싸 쥐었다. 엄마의 눈이 촉촉했다.
"잘 가, 내 딸."
- 공용어를 쓸 때의 엄마와 구어를 쓸 때의 엄마는 달라 보인다. 엄마도 공용어 세대지만 외할머니 하고는 항상 구어를 썼다고 한다.
구어를 쓸 때의 엄마는 왠지 작아 보였다. 나의 엄마가 아니라 내가 지켜줘야 할 작고 여린 소녀 같았다.
"잘 있어, 엄마. 학교 도착하면 전화할게요."
나는 구어로 말했다.
엄마는 배 안까지 가방을 들고 같이 가주려 했지만 내가 말렸다. 내가 손을 흔들자 엄마가 손을 놓았다.
출발 시각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길 찾아갈 수 있지?"
"그럼, 밴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나는 그렇게 말하고 계단을 올라 배 안으로 들어갔다. 손목시계가 밴과 연결되어 필요하면 언제든 밴과 얘기할 수 있었다. 학교까지 가는 길은 밴이 잘 알았기에 길을 잃을 걱정은 없었다.
- 빛을 찍어서 맛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햇빛은 옅은 꿀 빛깔이었다. 나는 창문 밖으로 팔을 뻗었다. 햇빛이 팔을 어루만졌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우리 동네의 햇볕은 흐릿하거나 따가웠다.
바람도 구설과 완전히 달랐다. 햇빛처럼 부드럽지는 않았지만 아주 시원했다. 맑고 깨끗한 물을 마실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모래나 먼지가 섞이지 않은 바람이 창문 안으로 불어 들어왔다. 난 맘껏 바람을 들이마셨다.
이 햇빛과 바람을 엄마도 느껴봤으면 했다. 지금 가족들과 친구들이 나와 함께 이 햇빛과 바람을 느낀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영상이나 사진으로는 턱도 없었다.
- 바람이 크게 불었다. 문득 추위가 느껴졌다. 얼굴이 얼 것 같았다. 우리 동네에는 겨울이 없었다. 겨울이 무엇인지는 알았지만 글로만 읽어봤다. 동네에서는 낮 기온이 이십 도 아래로 떨어지는 때가 드물었다.
이게 겨울이구나.
나는 잠깐 사이에 차갑게 언 코를 만져보며 겨울을 실감했다.
- 창문을 닫자 기분이 가라앉았다. 마음속에서 뭔가 뒤틀린 것이 꿈틀거렸다. 나는 내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가만히 들여다봤다. 그것은 놀랍게도 분노였다.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웜스들이 사막에서 모래와 먼지가 섞인 바람을 마시는 동안 여기 사람들은 이런 햇빛과 바람을 누리며 살고 있었다니.
언젠가 어떤 여자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 여자는 길에서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나는 아빠와 길을 걷던 중이었다. 여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큰 소리로 말을 걸었다.
"얘야, 그들이 자연을 독점하고 있어!"
- 나는 아빠에게 독점이 뭐냐고 물었다. 아빠는 내가 알 필요 없는 단어라고 했다.
"불만 많은 여편네가 하는 소리 들을 거 없어. 독점이 뭐냐면, 불평만 하는 게으른 인간들이 쓰기 좋아하는 말이야."
하지만 아빠가 틀렸다. 그 여자의 말이 맞았다.
그들이 자연을 독점하고 있다.
그들이 무슨 권리로?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 학교에서 자연박물관으로 견학을 갔던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나와 친구들은 줄을 서서 모래바람이 불어오기 전 지구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봤다.
나는 시큰둥하게 이백 년 전에 우리 행성이 어떻게 생겼었는지를 보고 들었다. 네 가지 계절에 대해 들었고 먼지가 두껍게 끼지 않은 대기층에 대해 들었다. 깨끗한 비, 맑은 강과 바다에 대해서도 들었다.
그 모든 것을 가상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체험관에서 나는 친구들과 웃고 떠들었다. 천장의 유리 돔에서 노란 빛이 내려왔다. 그것이 이백 년 전의 햇빛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건 그냥 조악한 조명이었다. 노란 빛줄기가 체험관 한가운데의 인공연못 위로 내려왔다. 그리고 바람이 불었다. 벽에 설치된 기계에서 나온 것이었다.
체험관에 붙은 안내문에는 "거대한 모래 폭풍이 지구를 덮쳤다. 그날 이후로 아름다운 자연은 사라졌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자연은 사라지지 않았다. 창문 밖으로 사라졌다고 들었던 그 모든 것이 보였다. 파란 하늘이 보란 듯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맑은 하늘에서는 해가 밝게 빛났다. 너무 눈부셔서 오히려 가짜처럼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 또다시 안내 방송이 나왔다.
"잠시 후에 본선이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태양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배에서 내릴 준비를 했다. 배가 새로운 도시로 들어가고 있었다.
- 안이 어떻게 생겼을지 생각해보기도 했었다.
내 앞에 서 있는 안은 내가 생각했던 안과는 전혀 달랐다. 안은 생생했다. 얼굴에는 생기가 돌고 눈빛이 살아 있었다. 키가 나보다 이십 센티는 클 것 같았다. 호리호리한 몸에 바짝 깎은 짧은 머리가 어울렸다. 머리카락은 나와 같은 검은색이었다.
- "예의 없는 질문 하나만 해도 돼?"
내가 그렇게 묻자 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부츠를 벗었다. 젖은 발이 얼 것 같아서였다.
"너 여자 맞지?"
안은 겉으로 봐서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드러나지 않았다. 나는 안의 눈치를 살폈다. 말해놓고 보니 너무 무례했던 것 같았다.
"중성이야."
안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중성인에 대해 알고 있었다. 남자인 동시에 여자인 사람들. 중성인들은 넘치는 호르몬 때문에 성적 매력이 강하고 충동적인 성향이 있다고 들었다. 특히 폭력적인 사고를 많이 일으킨다는 소문이 있었다. 구설에서는 중성인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 실제로 볼 일이 없었기 때문에 소문만 많았다. 나도 중성인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 안의 얼굴과 몸의 골격은 튼튼한 성인 남자처럼 크고 단단했다. 그에 반대하기라도 하듯 가슴은 불룩하게 나와 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허리는 가늘었다. 이목구비는 섬세했다. 성적인 매력을 풍기는 건 맞았지만 폭력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소문과는 반대로 온화하고 조용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 "나도 예의 없는 질문 하나 해도 돼?"
이번에는 안이 내게 물었다. 시원한 태도였다. 나도 안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안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너 웜스야?"
"어떻게 알았어?"
"아직 다른 애들을 못 봤구나?"
"별로 못 봤어."
"보면 알게 될 거야."
나는 망설이다가 안에게 물었다.
"혹시 웜스를 싫어하니?"
"넌 중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데?"
"글쎄, 제대로 본 적도 없는데 뭘 어떻게 생각하겠어. 네가 처음인데."
"나도 그래."
안이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편안해 보였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나까지 긴장이 풀렸다. 친근감이 느껴졌다.
- "좀 씻고 올게. 밖에 오래 있었더니 꽁꽁 얼었어."
나는 안에게 말하고 층 전체가 공동으로 쓰는 샤워실로 갔다. 원래는 발만 씻을 생각이었지만 마음이 바뀌어서 샤워를 하기로 했다.
'처음 친구를 사귀었다.'
복도를 걷는 동안 가슴이 두근거렸다.
썰렁한 샤워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샤워기를 틀자 뜨거운 물이 쏟아졌다. 얼었던 몸이 녹으면서 처음에는 따갑다가 점차 따뜻해졌다.
- 두 번째는 눈동자였다. 안의 눈동자는 맑은 호박색이었다. 쨍한 햇빛을 받으면 밝은 노란색으로 보인다고 안이 말했다.
세 번째는 손목에 문양을 새겨 넣는 커스텀을 했고 네 번째는 손톱을 어둡게 빛나는 녹색으로 바꾸는 커스텀을 했다.
나는 안의 눈을 들여다보고 안이 내민 손을 잡아 손목과 손톱을 봤다. 웜스 구역에서도 흔하게 커스텀을 하는 부위들이었다. 하지만 안의 몸에서 풍기는 달콤한 향 때문에 눈과 손에 한 커스텀들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다섯 번째로 한 건 냄새지?"
내가 물었다. 가까이 있으니 냄새 때문에 정신이 자꾸 다른 데로 갔다.
"그래, 더티에서 한 거야."
- 더티는 향을 전문으로 하는 커스텀 가게다. 몸 전체나 원하는 부위에서 특정한 냄새가 나게 해주는 곳이었다. <커스터머>에 자주 실리는 가게라 나도 알고 있었다. 웜스 구역에는 없는 가게지만 비취와 태양 구역에는 여러 군데에 지점이 있었다. 한 번쯤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냄새는 네가 조합한 거야?"
"내가 고르긴 했는데 조합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았지."
"뭘 넣은 건데?"
"맞춰봐."
"라벤더."
"맞아. 그리고 또?"
- "저런 집은 거의 세 번째 집으로 사거든."
"세 번째 집이 뭔데?"
"태양인들은 집을 중요하게 생각해. 비취인들도 그렇고. 보통 세 개의 집을 갖고 있어. 첫 번째 집은 생활을 하는 곳이고 두 번째 집은 지친 몸을 눕히는 휴식의 집이야. 세 번째 집은 영혼의 집이라고 해. 세상과 부딪히면서 소모된 영혼을 채우는 장소라고."
- "낭만적이네."
솔직히 비웃고 싶었다. 우리 동네에서는 집 하나가 세 가지 역할을 다 했다. 집은 원래 생활을 하는 곳이자 쉬는 곳이자 영혼을 채우는 곳이어야 했다. 가족들이 있는 집이 생각났다. 우리 단지는 깨끗하고 조용했다. 우리 동네 사람들에게도 집은 소중했다.
나는 안에게 물었다.
"너도 집이 세 개야?"
"오늘부터는 하나지. 생각 많은 웜스랑 붙어사는 방 딸랑 하나."
안이 그렇게 말하는 바람에 웃어버렸다. 나도 모르게 안을 공격했던 것이 속 좁게 느껴졌다. 화가 엉뚱한 방향으로 갔던 것이다.
- 버스는 해안도로를 지나 시내 중심가에서 섰다.
나는 안을 따라 버스에서 내렸다.
시내는 기대한 것만큼 화려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길이 넓고 사람이 적어서 여유로운 분위기이기는 했다.
안과 나는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다. 처음 버스에서 내렸을 때는 큰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았는데 골목으로 들어가니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많았다. 예쁜 가게들을 보자 기분이 점점 좋아졌다.
- 누군가는 불쾌해한다.
'유전자는 레고가 아니다. 유전자를 레고조각처럼 마음에 드는 것은 끼우고, 거슬리는 것은 빼서 바닥에 던질 수는 없다. 인간은 장난감이 아니다. 커스텀은 인간성 상실의 시작이다.'
커스터비아들만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다. 커스텀을 혐오하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때로 혼란스러워한다.
'가지고 태어난 유전자를 다른 것으로 갈아 끼운다고? 심지어 아직 뱃속에 있는 아기의 유전자를 바꿀 수도 있다고? 맙소사. 그건 아니지. 좀 위험한데.'
어디까지가 위험하고 어디까지가 안전한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얘기가 분분하다. 몇십 년 뒤에는 부모가 원하는 대로 유전자를 조합해서 아이를 만들 수도 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나 동물을 무한대로 복제하는 것도 가능하다. 법적인 제재만 없다면, 그러니까 '기술적으로 가능한가'만 따지자면, 그럴 수 있다.
그런 문제 앞에서 나는 언제나 혼란스럽다. 명쾌하게 문제에 답할 수 있었던 적이 거의 없었다. 학교 수업 시간에 했던 토론에서도 그랬고, 커뮤니티에서 커스텀이 화제로 떠올라 언쟁이 벌어졌을 때도 나는 말하기보다 지켜보는 쪽이었다.
- 복제에 대해서는 정리가 된 편이다. 내가 아니라 법이 그 문제를 정리했다. 복제는 법으로 금지되었다. 특히 인간 복제는 금기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복제 역시 자유로운 결정에 맡겨야 한다는 얘기가 꾸준히 나오는 중이었다.
복제라. 우리 가족을 통째로 복제한다면? 소름 끼친다. 사회에 그리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 가족을 복제하는 것만 끔찍한 게 아니라 대체로 그럴 것이다. 똑같은 사람이 한 명 더 필요할 정도로 ...
- 성기들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우리는 생식기 코너에 있었다!
"왜? 더 큰 걸 달고 싶어?"
사실 나는 부끄러웠지만 그것을 숨기기 위해 바보 같은 농담을 했다. 성교육 시간에 고무로 된 남자 성기를 만져본 적은 있었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나는 발기된 성기와 그렇지 않은 성기의 차이를 이론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 반대에 가까워."
안은 담담했다.
"너무 커서 불편해?"
내 입에서 또 헛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만해. 너 얼굴 빨개졌어."
안이 말했다. 나는 무리한 농담을 그만두었다.
- 판이 손가락으로 수염을 배배 꼬며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환자의 엑스레이 사진에서 심각한 질병을 발견한 의사 같은 얼굴이었다. 판 뒤에 서 있던 안의 표정도 이상했다.
"뭐가 안 좋아요?"
"여기 와서 보세요. 손님은 벌써 뿔이 있으신데요."
나는 판이 가리키는 모니터를 봤다. 내 이마로 보이는 곳에 동그란 점이 있었다. 이마 가운데의 그 점은 직경 삼 센티미터가 넘어 보였다.
"이건 뿔 뿌리예요."
- "어떻게 하실래요? 다른 데에라도 달아볼까요?"
"생각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아요."
"모르셨나 봐요."
내 이마 속에 뿔이 심어져 있는 걸 몰랐느냐고? 물론 몰랐다. 엄마나 아빠는 알고 있었을까? 나는 혼란스러워져서 안을 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안이 어색하게 웃었다. 안이 날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두려워졌다. 여기에서 처음 사귄 친구를 잃을까 봐.
"너 괜찮아?"
그렇게 묻는 안의 목소리가 다정했다. 나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할 게 하나 있는데, 잠깐만 기다려줄래?"
안이 어딘가로 간 뒤 나는 일층으로 올라가 안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이 내 뒤로 와서 어깨를 두드렸다.
- 웜스 구역에서도 휠체어를 탄 사람은 보기 힘들었다. 신체적 장애를 고치는 커스텀 기술이 충분히 발전했기 때문이다. 사고로 다리가 완전히 날아가도 상처만 회복되면 새 다리를 달 수 있었다. 외상으로 생긴 장애를 그대로 두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정말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 태양시의 교사 월급은 꽤 높은 편일 것이다. 태양시는 학자와 예술가를 우대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게다가 재건 기간 동안 교육이 방치되다시피 했었기 때문에 통합 국가에서는 공교육 예산을 매년 넉넉하게 잡는다. 모래시에서도 교사는 선호되는 직업이었다. 그러니 월 선생님이 돈이 없어서 다리를 새것으로 바꾸지 않은 건 아닐 것이다.
혹시 커스텀을 혐오하는 걸까? 월 선생님은 커스터비아인가?
나는 연단 위에 서 있는 월 선생님을 열심히 관찰했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는데 선생님이 미소를 지었다. 거리가 멀어서 나를 보고 있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를 보든 간에 선생님의 눈빛은 분명 따뜻했다. 왠지 신뢰가 가는 눈이었다.
이름의 '월' 자는 달을 뜻하는 걸까?
그렇다면 선생님도 구설 출신일 가능성이 있었다. 적어도 구설과 가까운 동네에서 왔을 것이다.
- 지금은 모든 곳에서 통합어를 제1공용어로 배우지만 지명이나 사람 이름에는 옛날 언어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나도 엄마에게 옛날에 쓰던 말을 배웠다. 우리 동네가 구설이 아니라 서울일 때 쓰던 언어였다.
어떤 동네에서는 아직까지도 구어를 그대로 쓴다고 한다. 그런 곳은 대개 통합 정부도 신경 쓰지 않는 소외된 구역이다.
- 매리가 나에게 속삭였다. 매리에게는 어떻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 솔티나의 미소에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 불쌍한 매리. 매리는 절대 그애들과 친해지지 못할 것이었다.
- 몇 명의 차례가 지나가고 선생님이 안의 이름을 불렀다. 안이 일어났다.
"안입니다. 비취시의 동굴 구역에서 왔습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유전자 법칙에 관심이 많아서 졸업하면 유전자 연구를 하고 싶어요. 취미는 커스텀이고요. 태양시는 처음이어서 아직 잘 모르는데 좋은 커스텀 가게가 있으면 알려주세요."
교실이 술렁거렸다. 태양 구역에서도 중성인은 특별한 존재인 것 같았다. 구설에서 온 애들이 자기들끼리 눈짓을 보냈다. 나는 그 눈짓이 뭘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소름 끼치는 중성인' 구설에서 중성인은 그런 존재였다.
- 안이 소개를 끝내고 앉자 매리가 나에게 속닥거렸다.
"쟤 너무 건방진 거 아니니? 비취라고 잘난 척하는 거야 뭐야. 튄 주제에."
나는 그 말을 무시했다. 자기가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또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또렷하게 말한 사람은 안밖에 없었다. 그런 생각에 오래 잠겨 있을 겨를이 없었다. 바로 다음이 내 차례였다. 나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데에 익숙하지 않았다. 일어나기 전부터 떨리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전 수니입니다. 웜스의 구설에서 왔어요. 졸업하고 하고 싶은 건 아직 못 정했고요. 커스텀에 관심이 많아요."
- 날개는 가까이서 보니 검은 깃털에 윤기가 흘렀다. 치라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피부도 검었다. 멀리서 보면 검은 새처럼 보일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애도 안처럼 바짝 깎은 검은 머리였다. 얘가 안의 남자친구라고?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애가 안에게 입을 맞췄다. 안은 피하지 않았다. 나는 치라와 안이 키스하는 것을 더 보고 싶지 않아서 방에서 나왔다. 연인을 방해하면 안 되지.
- 기숙사 공용 공간인 거실에 앉아 있으니 외로워졌다. 복도는 어두웠고 걸어 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안은 한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뭘 하고 있을까? 문득 떠오른 생각을 또 다른 내가 비웃었다. 뭘 하고 있겠어.
나는 소파에 기대어 졸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안이 내 어깨를 흔들었다.
"미안해. 방으로 들어가자."
"네 남자친구는?”
"걘 갔어."
"네가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날아온 거래?"
"한동안 못 볼 테니까. 치라는 나랑 같은 구역에서 살았어. 내가 여기로 오게 돼서..."
"멀어졌구나."
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안은 우선 방으로 들어갔다. 졸다가 깼더니 오히려 정신이 맑았다. 나는 침대에 앉아 안에게 물었다.
- 안과 나는 아침에 기숙사에서 나와 변신으로 갔다. 늦잠도 거르고 아침부터 나온 보람이 있었다. 태양시의 카페들은 주말 오전이 가장 붐볐다. 사람들은 다른 구역에서는 누리지 못하는 밝고 따뜻한 햇볕을 즐기고 싶어 했다.
변신의 테라스도 꽉 차 있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테라스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와 안은 대화를 나누지 않고 주변에 앉은 사람들을 구경했다. 유행하는 커스텀을 자신의 커스텀에 절묘하게 섞은 사람들이 테이블에서 먹고 마시며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변신의 카페 직원인 아누가 우리가 주문한 것들을 쟁반에 담아 가져왔다. 아누는 커다란 외눈박이이고, 골반에는 꼬리를 달았다. 도깨비 계열이었다. 손을 호랑이 발처럼 만들고 크고 단단한 발톱을 달고 싶어서 돈을 모으고 있다는 얘기를 전에 왔을 때 들었다.
"맛있게 먹어요."
아누가 테이블에 초록색 사탕콩 케이크와 하마이카, 따뜻한 차 두 잔을 내려놓았다.
- 변신 카페는 창의적인 유전자 변형 음식을 파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사탕콩은 콩에서 설탕맛이 나도록 유전자 배합을 한 열매였다. 태양시에서 가장 대중적인 유전자 음식 중 하나라고 아누가 얘기해 줬다.
하마이카는 붉은 꽃이었다. 접시에 붉은 꽃이 수북하게 담겨 나온 것을 보고 나는 놀랐다. 안이 아누에게 꽃을 가리키며 어떻게 먹는 거냐고 물어봤다.
아누는 꽃이 금방 녹으니 줄기 끝 부분을 잡고 꽃송이를 한입에 먹으라고 알려줬다. 줄기는 먹는 게 아니라고 했다.
- 나는 아누가 알려준 대로 꽃을 먹어봤다. 낯선 과일 향과 달콤한 딸기맛이 났다. 딸기 아이스크림과 비슷했지만 더 부드럽고 달콤했다.
꽃은 순식간에 입안에서 녹았다.
- 아누가 간 뒤 안과 나는 남은 용돈을 셌다. 3월 말에 받은 용돈은 벌써 바닥나 있었다. 용돈을 받자마자 허벅지에 레이스 무늬를 넣은 것이 치명적이었다. 갈색 허벅지에 하얗고 섬세한 레이스 무늬가 새겨진 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르기는 했다. 하지만 남은 4월을 어떻게 보낼지 걱정이 됐다. 안도 용돈이 많이 남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안은 하마이카를 입에 넣고 차를 마셨다. 안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나는 그 음식을 만든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안도했다. 이제 안도 태양시의 음식에 적응한 것 같았다.
- 처음 몇 주 동안 안은 무엇을 먹어도 표정이 어두워졌다. 내가 권하지 않으면 먼저 뭘 먹는 일도 없었다. 나는 안과는 정반대로 태양시의 음식에 반해버려서 매 끼니가 즐거웠다. 한 달이 지나자 감흥이 덜해졌는데 내가 음식에 더 이상 감탄하지 않게 된 것처럼 안도 음식에 실망하지 않게 된 것 같았다.
- 나는 사탕콩 케이크를 한입 먹었다. 정말 대단했다. 감동적인 맛이었다. 내가 음식에 더 이상 감탄하지 않게 되었다고 했었나? 그 말은 맞다. 하지만 태양시의 케이크는 음식 이상이었다. 내가 살던 동네에서는 이름도 들어본 적 없던 케이크들이 태양시의 빵집과 카페 곳곳에 깔려 있었다. 예쁘고 달콤한 케이크가 접시에 담겨 나올 때의 기쁨 ...
- 선생님만 쳐다보게 됐다. 그래서 화학 수업은 언제나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아마 다른 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누군가가 화학 수업을 엿본다면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아이들은 열의에 차서 선생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선생님은 아무 의욕 없이 스크린이나 책을 쳐다보고 있는 교실이 상상이나 될까? 화학 시간 때 우리 교실이 그랬다.
말린 선생님은 아무 의욕도 없었다. 마치 누가 등에 총을 대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수업을 한다는 듯한 태도였다. 교과서를 읽어줄 때 말린 선생님은 고통스러워 보였다. 우리와 눈이 마주치는 것을 겁내는 것처럼 눈을 내리깔고 고통으로 잠긴 목소리로 책을 낭독했다. 아주 힘들고 치욕스러운 일을 견뎌내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런 선생님의 모습이 묘하게 아름다워서 아이들은 숨도 크게 쉬지 않고 선생님의 낭독을 들었다.
- 사건이 일어난 월요일에도 아이들은 기대에 차서 화학 수업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 있는 화학 수업은 이벤트라 해도 될 정도였다.
그런데 이번 월요일 일교시에는 선생님이 오지 않았다. 아이들은 왜 선생님이 오지 않는지 궁금해하면서도 교무실에 가는 것은 서로 미뤘다. 그렇게 어영부영 시간이 갔다. 이십 분이 흘렀을 때 스피커에서 안내 방송이 나왔다. 4반은 자습을 하라는 안내였다.
"이번 시간에는 자리에 앉아 조용히 자습을..."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방송이 끝난 듯싶더니 문득 스피커에서 이런 소리가 흘러나왔다.
"말린 선생님이 돌아가신 것 같아요. 사고를 당하셨대요."
- "아마 제가 지겨워진 거겠죠. 자기랑 똑같은 사람하고 한집에서 불어 지내는 생활이 말이에요."
"언뜻 말린과 연인 관계 같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비슷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저는 말린을 사랑했고 말린도 저 이상으로 저를 사랑했죠. 그건 확실해요. 하지만 저희 사이가 일반적인 연인 관계 같았다는 생각은 안 드네요."
"질투 때문에 말린을 죽인 건 아니라는 뜻인가요?"
첸이 그렇게 물었을 때 말리의 눈이 빛났다. 카메라 쪽을 보고 있던 말리가 첸을 똑바로 응시했다.
"지금까지 제가 한 얘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신 것 같네요. 말린이 들어오지 않는 밤이 늘면서 저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말린이 들어본 적 없는 음악을 듣고, 말린이 본 적 없는 영화를 보고, 말린이 읽은 적 없는 책들을 읽으면서 혼자 있는 시간을 견뎠어요. 외로웠거든요. 생각할 시간도 많아졌어요. 저는 생각했어요. 나는 누구지? 그런 질문이 떠올랐고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어요. 그런 식으로 시간이 흘렀고 저는 오래 생각한 끝에 결론을 내렸죠. 내가 나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말린이 사라져야 한다고. 말린에게서 벗어나서 하루라도 그냥 나 자신이 되고 싶었어요. 제가 말린을 죽인 건 질투 때문이 아니었어요."
- 그러고는 별거 없는 대화가 조금 더 이어지다가 인터뷰가 끝났다. 인터뷰가 끝나기 전에 말리는 커스텀을 제재하지 않는 정부의 태도를 비난했다.
"사람들은 점점 더 도를 지나치고 있어요. 멀쩡한 팔, 다리를 자르고 그 자리를 해괴한 것으로 채우는 걸 멋지다고 생각하죠. 요즘은 꼬리나 날개를 다는 게 유행이라더군요. 제가 본 어떤 사람은 목에 박쥐날개를 달고 있었어요. 장을 보려고 마켓을 돌고 있는데 제 앞에 박쥐날개가 퍼덕거리는 거예요. 닭고기 코너 앞에서요. 제가 얼마나 놀랐겠어요. 전 비명을 질렀죠. 으아악! 그 사람은 절 보더니 코웃음을 치고는 자기 목에 달린 그 시커먼 날개를 쓰다듬으면서 닭고기를 카트에 넣더라고요. 아마 그 닭은 그 사람이 자기 목에 달고 다니는 애완동물의 먹이가 됐을 거예요. 시대가 바뀌면서 가치도 변했다고 하지만 전잘 모르겠어요. 제가 보수적인 사람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전 사람의 몸이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그걸 막 내동댕이칠 수는 없는 거죠. 두 개로 만들어서도 안 되고요. 커스텀은 인류를 불행하게 만들 거예요. 적어도 벌써 두 명은 불행해졌죠. 말린은 죽었고 저는 살인자가 됐으니까요. 정부가 이번 일을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정말 문제가 있는 거라고 봐요. 이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돼요."
- "어떻게 생각해?"
나는 패드를 끄고 안에게 물었다. 안은 꺼진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어날 수 있는 일 같은데."
안이 말했다.
- 상자에는 커다랗게 '50S'라고 휘갈겨 쓰여 있었다. 상자 안에 담긴 책들이 각각 모두 오십 솔라라는 뜻이었다. 오십 솔라면 겨우 케이크 한 판 가격이었다.
이런 걸 이렇게 싸게 팔아도 되나? 나는 괜히 주인을 걱정하면서 상자 안의 책들을 뒤적거렸다.
모양새가 비슷비슷한 소설책들 사이에 넓적한 책이 하나 끼어 있었다. 사진집이었다. 나는 그것을 꺼내 살펴봤다. 빳빳한 종이로 된 표지는 연두색이었다. 책 두께는 내 새끼손가락 한마디 정도였다. 표지 가운데에 올리브 사진이 있었다. 올리브는 표지 바탕색보다 진한 녹색이었다.
나는 사진집을 넘겨보았다. 대부분이 풍경 사진들이었다. 올리브밭을 찍은 사진과 표지로 쓰인 올리브 사진도 있었다.
오래전 풍경들이었다. 나는 호기심 때문에 사진들을 한 장씩 자세히 들여다봤다. 사람들을 찍은 사진이 별로 없는 게 아쉬웠다.
해변을 찍은 사진들이 많았는데 그중 몇 장에는 사람이 찍혀 있었다. 파도를 타는 사람, 해변을 걷는 연인, 일광욕을 하는 가족들. 검은 고양이가 작은 모래탑을 무너뜨리는 순간을 찍은 사진도 있었다.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그러다 그 사진을 봤다. 초록과 파랑이 섞인 바다와 검은 절벽이 찍힌 풍경이었다. 절벽에는 동굴이 있었다. 동굴 입구의 왼편은 초승달 모양으로 깎여 있었다.
- 바다에 떠 있는 검은 초승달.
내가 아는 풍경이었다. 기억은 희미했지만 이상하게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 내가 어릴 때 머물렀던 섬 같아. 내가 사고를 당했던 곳. 나는 여섯 살이었고 섬에 사는 아이들과 놀다가 어쩌다 보니 혼자 남았다. 내가 물로 걸어 들어갔던가? 맑은 물속에서 흔들리는 뭔가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던 기억은 났다.
나는 순식간에 파도에 휩쓸렸고 놀라서 버둥거렸다. 물이 무겁게 나를 짓눌러 숨이 찼다. 그다음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른들은 뭍에서 날 발견했다고 했다. 아빠는 내가 깊이 빠진 게 아니라 넘어지는 바람에 놀라서 정신을 잃었던 것일 거라고 말했다.
그게 아니야. 나는 반감이 들었지만 기억나는 것이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 사고는 해프닝으로 끝났다.
- 인어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그 사고가 있고 난 뒤부터였다.
- 사진이 날 쿡쿡 찌르는 것 같았다.
기억을 떠올려봐. 좀 더 애써보라고.
바다 동굴 사진 오른쪽에는 해변 사진이 있었다. 검은 모래와 검은 돌이 깔려 있는 해변이었다.
검은 해변. 내가 아는 곳이었다. 여섯 살 여름을 그곳에서 보냈다. 사진첩에는 사진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나는 책 뒤쪽을 펴서 서지 정보를 봤다. 아주 오래전에 출간된 책이었다. 폭풍이 불기 전.
- 나는 사진집을 카운터로 가져갔다. 그리고 남은 용돈을 털어서 주인에게 냈다. 그러고 나니 차 한 잔을 마실 돈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걸 이렇게 싸게 파셔도 돼요?"
나는 사진집을 가방에 넣으며 주인에게 말했다. 말하고 보니 괜한 ...
-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아누에게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 변신에서 나왔다.
내가 여기에서 일하게 되다니. 두 달 전만 해도 책으로만 보며 동경하던 곳이었는데.
안에게 나한테 일어난 일들을 얼른 말해주고 싶었다. 책방에서 산 사진집, 속도와자정에서 본 지느러미, 그리고 변신에서 일어난 일들. 시계를 보니 아직 정오 전이었다. 그 모든 일이 오전 동안 일어났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 나는 기숙사로 돌아가는 동안 오전에 일어난 일들을 곱씹었다. 왠지 내 이마에 있는 뿔이 오전 동안 날 끌고 다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진집을 발견하게 하고, 지느러미에게 날 데려갔다. 일을 구할 용기도 뿔에서 나온 것 같았다.
뿔이 옛날에 검은 해변에서 일어났던 일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나는 이마를 손끝으로 눌러봤다. 단단한 뿌리가 만져졌다.
이 뿔이 언제 이마를 뚫고 나올까?
뿔은 언제부터 여기에 자리를 잡았을까?
난 돌연변이인가?
손끝에 닿는 단단한 감촉 말고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나는 내 이마 밑에 있는 뿔이 무슨 색일지 궁금해졌다.
-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일 때문에 집에 바로 올 수가 없었다. 엄마가 집에 오면 새로운 싸움이 시작됐다. 세이는 맞을 때는 입을 앙다물고 버텼지만 엄마와 아빠가 자기 때문에 싸울 때에는 눈물을 흘렸다. 몇 달에 한 번씩 그런 일이 벌어졌다.
세이의 말 사이사이에 낀 기침 소리, 큼큼대는 소리가 들리자 끔찍한 소리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나는 그 소리들에서 도망친 것이다. 세이만 남겨두고.
나는 죄책감을 느끼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 "아빠한테 들키지 않게 조심해."
그런 말밖에 해줄 수 없었다. 아빠는 세이가 같이 축구하는 남자애를 좋아한다는 걸 절대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누나, 기침 안 하네?"
전화를 끊기 전에 세이가 말했다.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기침이 멎었지?
우리 동네에서는 누구나 기침을 달고 살았다. 항상 목이 아팠다. 나는 목을 가다듬어보았다. 걸리는 느낌이 없었다. 언제부터 이랬지?
언제 마지막으로 머리가 아팠지?
집에서는 두통을 달고 살았다. 현기증도 자주 났다. 엄마는 내가 어지러운 것이 빈혈 때문이라고 했다. 생리 때 피를 너무 많이 쏟아서 어지러운 거라고.
하지만 태양시에 온 후로는 어지럼증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생리는 똑같이 하는데도.
- 집이 날 아프게 했던 거야.
전화를 끊고 침대에 앉아 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과 함께 살던 집에 비하면 기숙사 방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평화롭고 조용하고, 안이 있는 이곳이 진짜 내 집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시는 집에 돌아가지 않을 거야. 나는 침대에 앉아서 생각했다. 일을 구해서 다행이었다. 돈을 모아야지. 집에서 돈을 안 보내줘도 여기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래서 언젠가는 세이를 그 집에서 데리고 나올 것이다.
엄마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런 남자를 택한 것은 엄마였으니까. 엄마가 아빠를 사랑해서 나와 세이는 불행해졌다. 엄마가 아빠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우리도 없었을 테지만.
내가 엄마까지 구할 수는 없다.
조용한 기숙사 방의 침대에서 나는 그것을 깨달았다.
- 그 주 토요일에 첫 출근을 했다. 노란길이 다른 날과 달라 보였다. 이른 아침의 구시가지는 처음이었다. 토요일 아침 구시가지 거리는 조용했다. 문을 연 가게는 박스처럼 생긴 작은 잡화점들뿐이었다.
중심가만큼은 아니어도 구시가지의 길은 깨끗했다. 청소부들이 벌써 다녀간 것 같았다. 태양 구역에서는 청소부도 교통경찰도 로봇이었다. 박스 같은 잡화점들은 자판기에 가까웠다.
태양 구역이 왜 예술가와 학자의 도시가 됐는지 알 것 같았다. 이곳은 예술가나 학자가 아니면 할 일이 별로 없는 도시였다.
- 만지는 무서웠지만 그 사람이 만드는 음식들은 아주 좋았다. 만지는 주방 책임자였다.
- 나는 흥분 상태로 속도와자정에 들어갔다.
속도와자정은 널찍했다. 바닥에는 노란색 타일이 깔려 있었고 벽은 연한 보라색이었다. 가게 안에 빠른 템포의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가게는 전체적으로 경쾌한 분위기였다.
- 가게 벽에 글귀가 있었다.
[시간은 간다. 누구는 빠르다고 누구는 느리다고 하는 속도로, 앞으로, 앞으로. 가장 어두운 밤도 시곗바늘을 멈춰 세우지는 못한다.]
벽에 있는 그 글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그 글은 금지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나에게 금지된 것들을 떠올렸다. 밤늦게 귀가하는 것. 자주 시내로 놀러 나가는 것, 패드를 오래 보는 것, 연애, 그리고 커스텀. 그리고 또 수많은 것들.
태양 구역으로 온 뒤 나는 금지되었던 것들을 많이 했다. 왜 더 이상 머리가 아프지 않은지, 왜 어지럽지 않은지 알 것 같았다.
- "마음에 들어요?"
벽 앞에 서 있는데 누가 말을 걸었다. 가게 스태프처럼 보였다. 커스터머인 건 확실했다. 머리에 머리카락 대신 오리 머리들이 있었다. 여섯, 아니 일곱 개의 오리 머리였다. 오리들이 꽥꽥거렸다.
"마음에 들어요. 저는 지금 저한테 금지된 것 중에서도 가장 금지된 것을 하러 왔거든요."
"뭐? 컵을 하러 왔다고?"
그는 내 말을 반만 알아들었다. 오리가 머리 위에서 울어대면 나라도 귀가 멀 것이다. 나는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니요. 컵 말고 금지요!"
"잘됐네. 원하는 걸 알기는 어렵고 원하는 걸 어디서 가질 수 있는지 알기는 더 어려운 법인데, 손님은 벌써 두 가지를 다 깨달았나 봐. 제대로 찾아왔어요. 뭘 하고 싶어요?"
"지느러미를 달려고요. 아침까지는 쇼윈도에 있었는데, 안 보이네요."
"디스플레이는 계속 바꿔요. 하지만 지느러미에 대해서는 내가 잘 알죠. 내가 그걸 디자인했거든요."
그가 속도와자정의 주인이었다. 이름은 고리였다.
- 나는 고리를 따라 분홍색 방으로 갔다. 고리가 자신의 패드에서 지느러미를 찾아 방에 홀로그램을 띄웠다.
내 지느러미가 공중에서 너울거렸다.
"색은?"
"빨강과 노랑이요."
"빨강은 좋아요. 근데 손님한테는 노란 점보다 다른 게 더 잘 어울 ..."
- "응, 그런 것 같네. 손님한테 아주 잘 어울려요. 근데 뭔가 조금 부족한 것 같은데..."
고리가 홀로그램을 돌려보면서 잠시 생각에 빠졌다.
"여기 뿔이 생길 거예요."
나는 이마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뿔? 그거면 되겠다. 좋아요."
고리가 박수를 쳤다.
홀로그램이 꺼졌다. 지느러미를 단 나도 사라졌다. 오리들이 다시 꽥꽥거렸다.
- 고리는 가게를 더 구경하고 가라고 했지만 더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고리에게 고마웠다고 말하고 속도와자정에서 나왔다.
- 다음날에도 아침 여덟 시에 일을 나갔다. 일은 전날보다 더 어려웠다. 머릿속에서 전날 배운 것들이 뒤죽박죽으로 섞였다. 내가 세 번째로 음식을 엉뚱한 테이블로 가져가자 아누는 눈을 부라리며 화를 냈다.
"정신 똑바로 차려. 이렇게 하면 일 못해."
테이블 번호와 위치를 기억하고, 음료 만드는 법을 기억하고, 어떤 손님이 어떤 것을 주문했는지 기억하고, 어떤 순서로 주문이 들어왔는지 기억해야 했다. 짧은 시간 동안 기억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카운터에 그런 정보들이 실시간으로 뜨는 보드가 있었지만 그 보드를 볼 틈이 없었다.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돌아갔다. 그런데도 아누와 저그에게는 여유가 있었다. 나 말고는 허둥대는 사람이 없었다.
- 테라스에는 멋진 커스터머들이 잔뜩 있었다. 무례한 손님이 없었다. 가게 분위기 때문인 것 같았다. 변신은 멋진 사람이 되는 곳이었다.
멋진 사람은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는다. 멋진 사람은 예의를 안다. 손님들은 마음속에 그런 생각을 담고 변신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카페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손님을 그렇게 대했다. 아누는 손님에게 당신은 멋있는 사람이고 나는 멋있는 사람에게 친절할 수 있어 기쁘다는 태도로 일했다. 저그는 그냥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특히 커스터머들에게 호감이 있었다.
- 에그는 저그보다는 건조했다. 손님들을 잘 챙기고 손님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도 금방 알아챘지만 다정하지는 않았다. 에그는 손님들에게 별로 애정이 없었다. 하지만 손님들에게 에그는 스타였다. 어깨에 꽃이 가득 핀 작은 에그의 키는 백사십 센티미터 정도였다. 에그가 쟁반을 들고 테라스를 누빌 때면 손님들은 약간 넋이 나갔다. 아무리 줄이 길고 음식이 오래도록 나오지 않아도 에그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한 마디면 불평이 사그라들었다. 에그의 그 말은 마법 같은 효과를 냈다.
- "일은 할만해요?"
목소리가 낯익었다. 지난 주말에 면접을 볼 때 들었던 목소리였다.
"사장님?"
검은 여자가 미소를 지었다. 일행 중 한 명도 나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피부에 호피 무늬가 있는 덩치가 큰 남자였다. 중절모를 쓰고 보석으로 치장했는데 옷도 꽤 잘 차려입고 있었다. 특히 가죽구두가 아주 멋졌다.
"몰랐나 봐? 험은 매일 다른 사람이 돼. 얼굴이 매일 바뀐다고. 진짜 얼굴은 아무도 몰라."
험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변덕이 좀 심하거든."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나를 보며 조용히 웃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혐의 얼굴이 주말에 봤던 얼굴과 닮은 데가 있는 것도 같았다.
- "저번에 봤을 때는 긴가민가했는데 역시 그랬군. 뿔이 있어. 최근에 심은 건 아니고 원래부터 있던 거야. 내 말이 맞죠?"
"저도 잘은 몰라요. 알게 된 지 얼마 안 됐거든요."
나는 내 이마를 문질렀다. 아무 느낌도 없었다. 험은 어떻게 안 거지? 혐의 친구들이 나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아직 자기가 누군지 잘 모르는군. 잘해봐요. 나도 그 안에 있는 뿔이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하네."
험은 그렇게 말하고 나를 보내주었다. 뭘 잘해보라는 거야. 나는 속으로 투덜대면서 일로 돌아갔다.
- 일이 끝났을 때는 밖이 깜깜해져 있었다. 나는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힘이 했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자기가 누군지 잘 모른다라. 그 말은 맞았다. 나는 내 이마에서 나올 뿔이 어디서 온 것인지, 언제부터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역시 부모님에게 물어봐야 할까? 나는 오늘밤에라도 집에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기숙사로 돌아왔다. 하지만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어버렸다.
- "오늘은 왜 혼자야? 네 친구는?"
씨씨가 물었다. 나는 씨씨가 날 집안으로 들인 게 무슨 속셈일까 생각했다.
"안은 안 나왔어."
그렇게만 말했다. 씨씨는 알겠다는 듯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는 그 눈에 거부감을 느꼈다. 유리 눈깔.
"그애한테는 오늘이 즐거운 날이 아닐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나도 잘은 몰라. 그냥 너 때문이 아닐 거라는 거야. 동굴 구역에서는 재건의 날을 조용히 보낸다고 들었거든."
씨씨가 눈을 깜박거렸다. 씨씨의 말을 듣자 시끄럽던 속이 잠잠해졌다. 씨씨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안에게 화가 났던 것이다. 그제야 씨씨가 제대로 보였다. 친절하고 외로운 애 같았다. 씨씨도 먼 곳에서 혼자 떨어져 나온 건 마찬가지였다.
- "네가 온 곳은 어떤 곳이야?"
나는 씨씨에게 물었다. 씨씨는 생각에 잠겼다. 자기가 살던 곳에 대해 얘기하려면 우선 생각에 잠겨야 한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살던 곳에 대해 얘기하는 일은 자신이 두고 온 것들을 떠올리는 일이라는 것을.
"모든 게 반짝이는 곳이지."
나는 그 말을 비웃으려다가 씨씨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고 그만뒀다. 씨씨가 이미 자기 말을 비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 "몸이 안 좋아. 머리가 너무 아파."
나는 비틀대며 방으로 들어갔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가운데 안이 날 붙잡는 게 느껴졌다.
- 다음날 눈을 떴을 때 나는 기숙사 방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재건의 날 다음날, 공휴일 아침이었다. 세상은 고요했다. 세상보다 고요한 안이 내 침대에 앉아 내 얼굴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고 있었다.
"안, 네가 누군지 알고 싶어."
- 나의 말에 안은 아무 말도 없었다. 나는 내 얼굴 위에 있는 안의 손을 잡았다. 안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 사랑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한 사람을 보고 그가 누구인지 모른 채 사랑에 빠질 수도 있고, 어떤 한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 후에 비로소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
안을 처음 본 날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그때로 돌아가면 나는 안을 보자마자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천천히 안의 모든 것을 알아가고 안을 알게 된 후에 안을 사랑할 것이다. 나는 안을 감싼 빛을 먼저 봤고 그 빛에 눈이 멀었다. 내 눈에는 안이 항상 빛나 보이기만 해서 그애가 정말로 누구인지 영원히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내 눈을 멀게 한 빛을 걷어내고 진짜 안을 보고 싶었다.
- "네가 누구인지 알려줘."
내가 말하자 안은 내 손에 입을 맞췄다. 그건 어떤 대답이었을까? 나는 다시 잠이 들었다. 오후까지 꿈도 꾸지 않고 푹 잤다. 일어났을 때 방에는 납작한 빵과 우유, 그리고 안이 있었다. 안이 내가 일어난 것을 보고 침대로 왔다.
- 화단에 꽂혀 있는 사진이었다. 화단의 꽃들은 피로 젖었다. 이빨은 모두 뽑힌 채였고 머리가 잘린 몸은 거리에 버려졌다. 태양 구역에서는 기사 수위에 대한 제재가 없는 듯했다.
살해된 사람의 이름은 재키였다. 스물여섯 살 남자로 직업은 바텐더였다. 재키는 노란길에 있는 술집에서 일했는데 퇴근길에 그 일을 당했다. 그를 죽인 것은 세 명의 남자였다.
세 남자는 취해 있었다. 술집에서 장식용 창을 가지고 나왔는데 그걸 써보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던 차에 재키를 봤다. 세 남자는 재키에게 가서 시비를 걸었다. 기사에 세 남자 중 한 명이 한 말이 인용되어 있었다.
"그 요상한 머리가 떨어져 나간 게 그 사람한테는 잘된 일이죠."
- 끔찍한 일이었다. 그 사건이 일어나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커스터머가 또 죽었다. 살해된 사람은 사슴뿔과 갈색 날개를 가진 여자였다. 여자의 뿔은 잘렸고 날개는 뜯겨 있었다. 날개는 살아 있을 때 뜯긴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날개 일부는 불에 탔다. 뿔은 밑동만 남아 있었다. 살인자들이 뿔을 가져간 것이다. 범행을 저지른 것은 십대 아이들로 그 여자를 보고 혐오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조사받는 과정에서 말리의 인터뷰를 인상 깊게 봤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 재건의 날에 광장에서 벌어진 커스터비아들의 피켓 시위도 뉴스가 됐다. 기사에 따르면 재건의 날에 횃불을 드는 열두 명 중 한 명은 돌연변이가 맡는 것으로 정해져 있는데 그것을 반대하는 시위가 매년 열려왔다고 했다.
엄연히 말해서 고리는 돌연변이가 아니라 커스터머였기 때문에 돌연변이 커뮤니티 내부에서도 말이 많은 듯했다.
- 돌연변이는 다른 몸으로 태어난 사람들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뿔이나 날개, 꼬리가 있거나 피부색이 특별하거나 동물의 어떤 특징을 가진 사람들.
커스터머는 돌연변이로 태어나지 않았지만 유전자를 바꿔서 돌연변이가 된 사람이다. 이에 대해서도 의견이 많지만 가장 보편적인 인식은 그랬다.
내가 보기에 다른 몸으로 사는 것을 선택했다는 점에서는 돌연변이나 커스터머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돌연변이로 태어나서 돌연변이를 없애지 않고 사는 것과 돌연변이로 태어나지 않았지만 자기 몸을 바꿔서 돌연변이로 살아가는 것은 차이가 있다. 그 차이 때문에 돌연변이 커뮤니티와 커스터머 커뮤니티 간에 충돌이 일어나기도 한다.
- 숫자로 보면 돌연변이가 커스터머보다 훨씬 많았다. 통계에 따르면 태양 구역 인구 중 십삼 퍼센트가 돌연변이이고, 그중 이 퍼센트만이 커스터머라고 한다.
내가 본 기사에서는 커스터머가 늘고 있는 추세라고 했다. 태양 구역은 다른 구역보다 돌연변이가 많았다. 웜스 구역에서는 돌연변이를 보기 힘들었지만 시드에서는 돌연변이가 흔했다. 웜스에서는 돌연변이가 불편한 존재였지만 시드에서는 아니었다.
- 나는 커다란 책장들 사이를 천천히 걸어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옛날책을 모아놓은 작은 방에서는 종이와 나무 냄새가 났다. 그곳에 있을 때면 숲 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조용한 숲 속을 혼자 산책하는 기분에 빠져 있다가 등뒤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돌아보니 미니가 있었다. 입학식 날 말린 선생님의 사진을 찍으려고 소동을 일으켰던 상급생 미니였다.
- 나는 망설이다가 서명을 하지 않고 패드를 돌려주었다. 미니는 불쾌해하는 대신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왜 안 하는 건데? 네가 후천적 돌연변이라서?"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리의 구명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복제된 인간이 자신을 복제한 사람을 죽인 것은 처음 생긴 일이라 재판이 길어지고 있었다.
말린이 죽은 책임은 말린에게 있다.
말장난 같은 그 말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놀랍게도 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했다. 불법으로 자신의 유전자를 복제해서 자기와 똑같은 인간을 만든 다음 몇 년이나 집에 감금하고 학대했으니 죽어도 싸다는 거였다.
말리를 동정하는 여론도 있었다. 아름다운 말리. 언론에서도 말리에 대한 뉴스를 계속 내보냈다. 말리에게는 팬들이 있었다.
미니도 말리의 팬이 된 걸까? 말린 선생님을 좋아하던 미니가 말리의 팬이 된 것은 이상한 일일까 아니면 자연스러운 일일까? 나는 미니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너 뿔이 있다며?"
- "교실이 다 아는데 뭘."
"네가 다른 애들한테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네."
"너한테 관심이 있는 거지. 누구든 널 건드리면 가만 안 둘 거야."
나는 안의 말을 듣고 웃었다. 안 답지 않은 말이었다. 안은 자기감정을 잘 드러내는 편이 아니었다.
"방금 그 말 너하고 진짜 안 어울린다.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웠어?"
"몰라. 중성인이라 그런가 보지."
- 안이 자신에 대한 편견을 알고 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안은 평소에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꺼림칙한 눈으로 본다는 걸 모르는 것처럼 행동했다. 나도 안이 모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안이 강한 사람이기 때문에 누가 자신을 어떻게 보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이 "중성인이라 그런가 보지" 내뱉듯 말하고 내 시선을 피했을 때 사실은 안이 상처받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은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기에는 너무 자존심이 셌던 것이다.
- 그날 오후 내내 안이 신경 쓰였다.
내가 그동안 안에게 너무 무심했던 것 같았다.
수업이 끝나고 안에게 가려고 했는데 안이 먼저 나에게 와서 오늘은 솔티나와 약속이 있다고 말했다.
- 평일에 변신 이층에 가본 것은 처음이었다.
이층에는 알베 말고 다른 사람이 카운터에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목이 아주 긴 중성인으로 내가 들어가자 목을 기울여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 우아한 동작에 마음이 녹아내렸다.
이층은 다섯 명이 들어가면 꽉 찰 정도로 좁았다. 손님이 많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나는 여유롭게 이층의 물건들을 구경했다. 이층이 좁은 것은 물건들 때문이었다. 가게라기보다는 박물관 창고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진열대와 서랍, 장식장에 온갖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몸에 이식하는 작은 파츠부터 희귀한 날개까지 없는 게 없었다.
천장에는 길쭉한 파란 손들이 끈에 줄줄이 꿰어져서 갈고리에 매달려 있었다. 온갖 동물의 발들도 머리 위를 떠다녔다.
- 내가 알기로 커스텀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주사로 약물을 넣어 유전자 구조에 변화를 주는 것이다. 그게 가장 일반적인 방식이다.
몸에 날개나 꼬리 등 원하는 것을 수술로 이어 붙인 뒤에 약물을 주사하는 방식도 있다. 특별한 것을 몸에 붙이고 싶을 때 그렇게 한다고 한다.
- 내가 어깻죽지에 달 수 있게 나온 용 날개에 빠져 있을 때 피부가 보라색인 사람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이리나."
그가 목이 긴 중성인에게 인사를 했다. 이리나가 우아하게 목을 기울이는 모습은 여러 번 봐도 질리지 않았다.
"험."
이리나가 그렇게 말했을 때에야 그가 힘인 것을 알았다. 그날 힘은 부풀린 주황색 머리에 장식적인 모자를 쓰고 있었다. 줄무늬가 있는 슈트 차림이었다.
- 나는 앞머리를 뒤로 넘겨서 힘에게 뿔을 보여주었다.
"인어의 뿔이네."
험이 확신하는 투로 말했다.
"저희 가족 중에는 인어가 없어요."
"알아봐. 분명히 있을 거야. 증조할아버지나 고조할머니라도 아니면 부모님 중에 한쪽이 전환했을 수도 있지."
전환은 돌연변이를 없앤다는 뜻의 은어였다. 나는 생각이 복잡해졌다. 어릴 때부터 꾸던 인어 꿈, 사진집에 실린 바다를 보고 느꼈던 강렬한 기시감, 기억나지 않는 사고와 내 이마 안에 있는 뿔 뿌리...
- UFO는 세상의 좋은 물건과 음식들을 모조리 가져와 전시해 놓은 거대한 박물관 같았다. UFO의 맨 꼭대기 층은 스카이라운지였다. 스카이라운지 아래로 온갖 가게들이 다 모여 있었다. 영화관, 미용실, 옷가게, 커스텀 가게 들. 식품 코너와 푸드코트, 레스토랑 들.
평일 저녁인데도 사람이 많았다.
- 태양시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자유로운 도시이지만 다른 구역 사람들에게는 닫힌 도시였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다 어디서 왔을까? 태양시에 사는 사람들만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도 웍스에서 특별한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허가를 받아 여행을 온 듯했다. 행정구역 관리자나 관리자의 친척이나 친구, 아니면 그냥 부유한 사람일 수도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웜스에도 부자들은 존재했다. 부자들은 어디에나 있다. 부자가 아닌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 그날은 나도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내 주머니도 묵직했으니까.
- 6월의 첫날이었다. 첫 아르바이트비가 들어온 참이었다. 마침 집에서 용돈도 보내주었다. 집에서 온 용돈과 아르바이트비를 합쳐 천 솔라 정도가 내 계좌에 들어 있었다. 천 솔라! 처음 가져본 큰돈이었다.
나는 무빙워크를 타고 쇼핑몰 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내게 필요한 것이 그렇게 많은 줄 처음 알았다!
나에게는 베르가모트 향이 나는 보디 클렌저가 필요했다. 립스틱이 필요했고 가죽가방과 보석, 구두, 부츠, 샌들이 필요했다. 기숙사 방바닥에 깔 러그도 필요했다. 내 피부를 지킬 자외선 차단제와 양산, 장갑도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6월이 되자 태양시의 햇살은 엄청나게 강해졌다). 허리가 편한 의자, 도자기 접시, 귀여운 봉제 인형들, 새 커튼도 갖고 싶었다.
속옷 가게에 전시된 귀여운 속옷들을 보자 내가 가진 것들이 모두 낡았다는 게 생각났다. 아, 나는 정말 필요한 게 많았다.
- UFO에서 천 솔라쯤은 설탕 한 숟가락어치도 되지 않았다. 티스푼으로 하나 정도 될까. 하여튼 쓰기로 마음만 먹으면 물에 탄 설탕처럼 순식간에 녹아 없어질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깨닫고 지갑을 단단히 붙잡았다.
지느러미를 사려면 돈을 모아야 했다. 충동구매는 절대 안 돼.
그래도 속옷 가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 속옷가게는 무척 귀여웠으니까.
- 나는 그곳에서 빨간 멜론 무늬가 들어간 브라 세트 한 벌과 트렁크스 하나를 샀다.
트렁크스에는 바나나를 잡아먹는 이빨 달린 멜론들이 무늬로 들어가 있었다. 무시무시하고 귀여운 멜론들.
안이 그 트렁크스를 입은 모습을 떠올리니 웃음이 나왔다.
- 나는 변태들이 징그럽다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안을 좋아하게 되면서 나에게도 변태 같은 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처음에는 그런 내가 싫었지만 점점 내 마음속에 자리한 흑심에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그 흑심은 삶을 지루해하는 심술궂은 노인 같았다. 하루종일 커튼을 친 어두운 방에 앉아서 뜨개질을 하며 머릿속으로는 야한 생각만 하는 그런 노인 말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게 나였다. 늙은 남자나 발칙한 할머니가 아니라 내가 그랬다. 흑심은 검은 연기 같았다. 검은 연기는 발정난 개, 음울한 변태, 이성을 유혹하는 악마 등으로 다양하게 모습을 바꾸고는 했다.
- 나는 내 흑심을 들키지 않도록 순진한 글씨체로 카드를 써서 트렁크스가 든 선물 상자에 붙였다. 속옷 가게의 직원이 선물을 포장해 주었다. 직원은 잘생기고 눈빛이 섹시한 남자였다. 그도 누구나 흑심을 품고 산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지만 내가 그를 보면서 야한 상상을 했다는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보이는 애가 아니니까.(나는 기차 안 음식 창고에서 그와 뒤로 하는 것을 상상했다.)
속옷가게에서 나왔을 때는 몸이 약간 뜨거워져 있었다.
- 선물을 하나 더 사고 싶었다.
옷을 살 생각이었다.
같이 지내다 보니 안의 옷에 대해서도 빠삭하게 알게 됐다. 빠삭하게 알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카키색 면바지 하나와 청바지 하나, 그리고 티셔츠 세 개. 그게 다였다.
안은 모든 면에서 지나치게 검소했다. 신발도 딱 한 켤레였다. 질긴 천으로 만든 검은색 스니커즈 한 켤레.
- 안의 검소함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검소함도 고요함처럼 안의 일부였다.
안은 음식을 천천히 조금 먹고 옷이 적다. 그게 안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나는 그 방식을 존중했다.
하지만 안에게 옷 한 벌이 더 생긴다고 해서 그애의 삶에 무슨 타격이 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옷 한 벌이 그애의 삶을 뒤흔들지는 않을 것이었다.
- 나도 안도 피자를 더 먹을 생각은 없었다. 나는 피자를 네 조각이나 먹었다. 안의 접시에는 먹다 만 피자 조각이 있었다.
나는 콜라를 한 병 더 주문했다.
"안, 내가 돌연변이일까?"
나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웨이터가 콜라와 얼음이 담긴 새 컵을 주고 간 뒤였다. 안이 나를 보고 있었다. 조용하고 사려 깊은 눈과 귀, 그리고 입.
"뿔을 가지고 태어난 거라면 그렇겠지. 뿔 얘기, 부모님 하고 안 해 봤어?"
"아직.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 "오늘은 네 이야길 해봐. 네가 살던 곳은 어떤 곳이야?"
나는 기대 없이 물었다. 안이 다른 때처럼 부드럽게 말을 돌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안은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 "내가 사는 곳은 사람이 아주 적어. 이백 명이 안 될 정도야. 빛 구역보다도 훨씬 적지."
안의 목소리가 다른 때보다 낮았다. 나는 안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 귀를 기울였다. 안이 처음으로 자기 구역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 구역 사람들은 재건의 날이 가까워지면 금식을 해. 아이들에게는 건더기 없는 맑은 수프를 먹이고 열다섯이 넘으면 모두 예외 없이 일주일 동안 물만 마시지. 재건의 날 당일에는 구역이 아주 조용해져. 말이 금지되는 날이야. 어린애들도 그날은 떠들지 않아. 웃음소리가 나면 매를 맞고 다음날까지 혼자 어두운 방에 갇혀 있어야 하거든."
- "자정이 되면 등잔 돌리기를 해. 구역 사람들이 한자리에 다 모이는데 빠지는 사람이 거의 없어. 그 자리에 빠지면 구역에서 소외되거든. 우리 구역에서 불을 볼 수 있는 날은 그때밖에 없어. 재건의 날에서 다음날로 넘어가는 자정에 사람들이 원형으로 빙 둘러서서 등잔을 돌리지. 자기 차례가 오면 이렇게 말해야 해. '나는 지하에서 태어나 지하에서 살며 지하로 돌아가겠습니다. 나는 나의 죄를 기억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그러고는 옆 사람에게 등잔을 넘겨."
안이 식탁 위에 켜진 촛불로 시선을 옮겼다. 어느새 해가 져서 식탁 위로 넘실대던 햇빛이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어둑한 식당에서 촛불은 일몰보다 더 선명하게 빛났다.
- "이상한 종교 집단 같은 의식이지? 실제로 보면 더 심해. 다른 구역 사람이 보면 소름 끼쳐할 거야. 네다섯 살짜리 애들까지 등잔을 들고 서서 그런 말을 외니까. 나도 아주 어릴 때부터 매년 그 행사에 참여했어. 어릴 때는 그 행사가 싫지 않았어. 난 어릴 때부터 조용한 걸 좋아했는데 그날은 시끄럽던 애들도 입을 다무는 게 좋았어.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기분이 들기도 했고, 등잔 돌리기를 할 때만은 어른이 된 것 같았지.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의문이 들었어. 다른 구역은 재건의 날을 우리처럼 보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고부터는 더. 다른 구역에서는 축제를 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웃고 즐기는데 왜 우리는 먹지도 않고 말도 못 하고 어린아이들까지 자기가 죄인이라는 걸 되새기면서 보내야 하지? 이해가 안 갔어. 그런데 더 이해가 안 가는 건 내가 나를 죄인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야. 죄책감이 있어. 재건의 날에는 죄책감이 더 강해져. 그날 네가 쓰러지지 않았으면 나 혼자 나가서 등잔을 들었을 거야. 재건의 날이 아니어도 일 년 내내 나는 죄를 의식해. 태양시에 오기 전까지는 정말 검소하게 생활했어. 여기의 햇빛, 바람, 여유 있는 생활, 음식들이 가끔은 버거워. 우리 보호인들은 나에게 쾌락을 허락하지 않았어."
"뭐에 대한 죄책감인데?"
"우리 구역에서는 모래 폭풍이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해."
"종교적인 이유야?"
"비슷해. 지금은 더 얘기 못하겠다. 그 안에 있었던 때를 떠올리니까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져."
안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이마에 손을 댔다가 안이 날 보는 눈빛을 보고 머쓱해졌다.
- "많이 아파?"
"아니, 가려워서 그래.”
거즈 밑의 상처가 가려웠다. 일주일이 지나자 상처 위에 딱지가 생겼다. 만지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거즈 위를 손가락으로 긁는 게 습관이 되고 있었다.
"화가 나."
안이 말했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표정은 한없이 평온했다. 안이 감정 표현에 서툴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 죄책감이라. 나는 평생 자기의 욕망을 누르면서 살아온 중성인 앞에 앉아 있었다. 감정도 욕망에 속할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는 웃어버렸다. 감정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 그게 바로 내가 그 순간에 강렬하게 느끼던 것이었다.
나는 안을 가까이 끌어당기고 싶었다. 말이나 행동으로, 적어도 눈빛으로.
안은 내 이마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안의 눈빛은 날 끌어당겼다.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 "가끔은 두려워."
"뭐가?"
"날 제어하지 못할까 봐. 충동을 느낄 때가 있어. 네 이마를 볼 때마다 그래. 그애들에게 빚을 진 기분이야. 꼭 갚아야 할 빚을."
"충동은 누구나 느껴. 빚은 내가 갚을 거고."
복수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런 일을 그냥 넘어갈 만큼 순한 인간이라는 것을 안에게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조금 센 척을 한 것이다.
- "날 못 믿겠어. 중성인은 화를 못 참는다고 하잖아.”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너까지 왜 그래? 네 보호인 두 분도 중성인이잖아."
"그분들은 완전히 동굴 사람이니까. 두 분 다 감정을 누르는 법을 잘 알아. 나하고는 다르지. 저번에 봤잖아. 내가 시아 그라시아스한테 어떻게 했는지. 그때 나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어."
"빛나는 시아 그라시아스가 널 모욕한 게 먼저였어. 웜스 구역에서도 자신을 모욕한 사람을 그냥 두진 않아. 누구든 그래. 네가 널 못 믿겠다면 내가 믿을게. 난 널 믿어."
안이 날 봤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그 눈빛으로 속삭임 같은 눈빛이었다. 그 눈빛을 보니 어떤 약속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콜라를 따서 얼음이 가득 잠긴 잔에 부었다. 중요한 순간이 지나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긴 침묵.
"다른 얘기 좀 해봐.”
내가 먼저 못 견디고 침묵을 깼다.
"어떤 얘기를 해볼까?"
"궁금한 게 있어. 커스텀은 쾌락에 속한 게 아니야?"
"그건 나 자신이 나에게 허락한 최초의 쾌락이었어."
- 안은 열네 살 때 처음 커스텀을 했다고 말했다. 동굴 구역에서는 두 달에 한 번 빛 구역으로 가서 필요한 것들을 산다. 식량이나 생필품 같은 것들 말이다. 어른들 몇과 청소년부가 그 일을 했다. 청소년부 중에서도 임원을 맡은 아이들만이 빛 구역에 갈 수 있다. 안도 그중 한 명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나 자신에게 엄격했어. 엄격한 규칙에 나를 끼워 맞추는 생활이 잘 맞았어. 꽉 껴서 숨쉬기도 쉽지 않은 옷을 입은 것 같은 기분을 즐겼던 것도 같아. 어른들은 날 신뢰했어."
- 식량이 일찍 떨어질 때가 있었다. 규칙에 맞춰 정해진 양을 먹는데도 그런 상황이 생겼다. 생필품이 예상보다 빨리 떨어지기도 했다. 아픈 사람이 생겨서 급하게 약을 구해와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런 때에는 어른 없이 청소년부 아이들끼리 빛 구역으로 나갔다. 세 명이 함께 갈 때가 많았다. 안과 주니가 가장 자주 나갔고, 치라도 한때는 그 일을 했다.
"그렇게 셋이서 빛 구역에 가는 날은 항상 즐거웠어. 돌연변이 셋이 다니니 불쾌한 시선을 견뎌야 할 때도 있었지만 같이 있을 때는 웬만한 일은 웃어넘길 수 있었어. 빛 구역과 동굴 구역은 특수한 동맹관계를 맺고 있어. 우리가 거기서 물건을 사는 건 허가된 일이고, 공식적인 성격이 있지. 그걸 방해하는 건 외교적인 문제가 될 수 있어. 그래서 우리가 공격당하는 일은 거의 없었지. 대신 정해진 장소에만 들어가야 했지만."
- 조금 전에 안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의문이 들었다는 말.
[다른 구역에서는 축제를 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즐기는데 왜 우리는 먹지도 않고 말도 못 하고 어린아이들까지 자기가 죄인이라는 걸 되새기면서 보내야 하지?]
나는 그 얘기를 했다.
"그 의문이 시작 아니었을까? 이상한 얘기지만 네가 그런 의문을 처음 떠올린 순간부터 어떤 운명이 시작된 거라는 생각이 들어. 커스텀을 하고, 여기 시드에 오고, 날 만나고 그런 일들의 시작 말이야."
"그럴지도. 어느 시기가 되자 의문들이 반항심으로 변하더라고. 내가 처음 커스텀을 한 건 반항심 때문이었어."
"욕망이 아니라?"
"반항심으로 욕망하는 것을 한 거지. 그때는 그런 생각까지는 안 했지만 나중에 돌이켜보니 그래. 커스텀 가게에 들어가면서 그곳이 허가되지 않은 상점이라는 걸 의식하기는 했어. 그것 때문에 불안했지. 막상 다른 건 쉬웠어. 자연스럽게 그 일을 했어. 떨리지도 않았어."
- 첫 번째 커스텀을 했을 때, 안은 눈을 아몬드 형태로 바꿨다. 어른들은 안의 눈매가 변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눈동자 색깔이 바뀌었을 때는?"
"아이와가 금방 알아차렸어. 내가 눈매를 바꾸는 커스텀을 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더라고. 첫 번째는 그냥 넘어갔던 거야."
"혼났겠네."
"혼난 기분이 들었지. 아이와는 내가 커스텀을 했다는 걸 숨긴 게 서운하다고 했어."
- 아이와는 안에게 "네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게 있어"라고 말했다.
"무엇을 할지, 하지 않을지는 구역이 아니라 네가 결정하는 거야. 네 욕망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떤 때에 죄의식을 느끼는지 알기 위해서는 우선 행동해봐야 해. 눈을 감고 움츠린 채로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라. 전부터 네게 얘기해주고 싶었어. 한동안 하고 싶은 대로 해봐. 그러면서 네 안을 들여다보고, 낭떠러지로 달려가봐. 떨어지기 전에 내가 잡아줄 테니까."
- "그래서 그다음부터 사티로스가 된 거야?"
"그러기에는 내 안의 죄책감이 너무 뿌리 깊었지. 나는 여기 온 후로 매일 죄책감을 느껴. 이렇게 맛있는 걸 먹을 땐 특히."
안이 접시 위에 남은 피자를 포크로 가리키며 웃었다.
나는 식탁 아래 뒀던 선물을 꺼냈다.
"이걸 받으면 진짜 엄청난 죄책감을 느끼게 될 거야. 생일 축하해."
- "선물 처음 받아봐."
덤덤한 어투였다. 상자가 커서 두 손으로 주고 두 손으로 받아야 했다. 나는 가벼운 농담 같은 것을 하려 했지만 결국은 긴장해서 안이 포장을 푸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테이블이 작아서 안은 무릎에 상자를 올려놓고 포장을 풀었다. 안은 리본을 풀며 슬며시 웃었는데 그애도 긴장한 것 같았다.
- 마침내 안이 상자를 열었다. 뚜껑에 안의 얼굴이 가려져서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어때? 마음에 들어?"
나는 마음을 졸이며 물었다.
안이 다시 상자 뚜껑을 덮었다. 나는 셔츠 뒤에 트렁크스를 숨겨놨었다. 바로 뚜껑을 덮어서 안은 그것도 보지 못했다.
- 이번에도 내가 헛발질을 한 걸까? 또 혼자 괜한 기대를 했나? 내가 기대했던 기쁜 얼굴은 없었다. 안의 얼굴이 어두웠다. 안은 손가락으로 상자를 매만지다가 나를 보고 말했다.
"내가 입기에는 너무 좋은 옷이야."
"겨우 셔츠야. 튀는 색도 아니잖아. 비싼 것도 아니야. 그 정도는 입어도 괜찮아."
안이 상자 위에 두 손을 올려놓았다. 상자는 은빛이 도는 푸른색이었다.
안이 말했다.
"안 되겠어."
- 그걸로 끝이었다. 나는 실망을 감추려고 억지로 웃었다. 좋았던 분위기가 빠르게 식었다. 가게 안에 커다란 파도가 들이쳤다가 빠져나간 것 같았다. 누가 내 옷을 벗겨간 것처럼 등과 어깨가 싸늘해졌다. 가게 안을 따뜻하게 만들던 음악 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안도 그런 것 같았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학교로 돌아갔다. 나는 안보다 빨리 걸었다. 안은 커다란 상자를 품에 안고 내 뒤를 따라왔다.
- 안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나를 위해 기쁜 척하길 바라지도 않았다. 오히려 억지로 받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안에게 실망한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안이 셔츠를 입은 모습을 수없이 떠올리며 즐거워했던 내가 너무 바보 같았다.
"잠깐만 산책하다 들어갈게."
학교 정문 앞에서 나는 안과 헤어졌다. 안은 기숙사 쪽으로 갔다. 비가 올 것 같았다. 비를 예고하는 바람이 불었다. 나는 교정을 좀 걷다가 매점 앞 무인 판매기에서 따뜻한 카카오베리 한 잔을 샀다.
그러고는 테라스에 앉았다. 여기 있으면 비는 피할 수 있겠지.
- 딱히 할 일이 없어서 계속 테라스 바깥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잡생각을 하고 있었다. 안을 처음 봤던 날이 스쳐 지나갔다. 내 인생의 첫 중성인.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사람. 안의 싱그러움, 다정함, 깊은 고요함. 속을 알 수 없는 얼굴.
교정을 걸어가는 안을 봤을 때 나는 환영을 봤다고 생각했다. 안에 대한 생각을 너무 많이 한 나머지 눈이 착각을 일으켰을 거라고.
- 안은 빠르게 걷고 있었다. 바쁜 일이라도 있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안은 나를 못 본 것 같았다. 나는 어느새 몰래 안을 따라가고 있었다. 안을 불러 세울 수도 있었겠지만 마음이 아직 풀리지 않아서 그랬는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안이 셔츠를 입을 수 없다고 한 것에 마음이 상한 내 소심함이 부끄러웠다.
안의 뒤를 조용히 쫓는 것도 그랬다. 나는 망설이다가 일부러 걸음을 늦췄다. 연못가까지 갔을 때는 안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 첫 번째 빗방울을 본 것은 그때였다. 바람 한줄기가 휙 불어오더니 잠잠해졌다. 바람이 잠잠해지자 주변이 전보다 더 조용해졌다. 연못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 것은 내 착각이었을 것이다.
빗방울이 연못에 떨어졌다. 그리고 차가운 비 몇 방울이 내 얼굴과 팔에도 떨어졌다. 첫 번째 빗방울을 보다니 운이 좋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서 있는 동안 비가 거세어졌다. 나는 비가 연못을 흔드는 것을 구경했다.
- 그다음에 일어난 일들은 연극 무대에서 벌어지는 광경 같았다.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후드를 쓴 호리호리한 사람이 덩치 큰 라울을 막대기로 내리쳤다. 나는 겨우 몸을 움직여 풀숲으로 들어가 숨었다.
그 사람이 떠난 후 나는 라울에게 다가갔다. 라울에게 풍기는 술냄새, 머리에서 흐르는 피. 모든 게 현실 같지가 않았다.
- 그날 잠들기 전에 안은 내게 약속했다. 파란 셔츠를 언젠가는 입겠다고.
약속한 거다? 나는 중얼거렸다. 안이 옷장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긴장했던 탓이었을까. 나는 곯아떨어졌다. 하지만 오래 잠들지는 않았다. 눈을 떴을 때는 아직 깊은 밤이었다.
안의 침대는 비어 있었다. 또 나갔네. 나는 침대에 앉아 안을 기다렸다. 이번에는 모른 척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 카펫을 밟는 소리, 옷 벗는 소리, 부스럭대며 침대로 들어가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지만은 않을 거다.
- 안은 두어 시간이 지나 들어왔다. 티셔츠만 입고 있어서 추워 보였다. 뭔가를 걸쳐야 할 날씨였다. 비 오는 밤이었으니까.
나는 책을 읽고 있다가 안을 봤다. 침대 밑에 달린 독서등이 안의 얼굴을 비췄다. 안의 얼굴이 창백했다. 식은땀을 흘리는 것 같았다.
"안 잤어?"
안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 말을 걸었다.
"잠이 일찍 깼어. 어디 다녀왔어?"
나는 책을 덮었다. 안이 침대에 털썩 앉았다.
"잠이 안 와서 잠깐 뛰고 왔어."
"그 달리기 좋은 길?"
"응."
나는 더 묻지 않았다. 뭔가 숨기는 것이 있어 보였지만 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날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내 책상에는 납작한 빵과 우유가 있었다. 안이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안은 평소와 같은 얼굴이었다. 안을 보고 있으니 내 마음에 행복이 퍼졌다. 그러나 간밤에 일었던 의심은 말끔히 사라지지 않고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안은 달리고 와서 샤워도 하지 않고 침대로 들어갈 애가 아니었다. 그리고 창백했던 그 얼굴.
어디를 다녀온 거야, 안.
나는 그런 마음을 숨기고 빵을 입에 물었다.
"얼른 나가자. 지각하겠어."
안이 날 재촉했다. 내가 늦게 일어나는 날이면 안은 내 아침을 준비해 주었다. 안이 날 재촉하고 함께 교실로 간다. 안이 내 옆에 있다. 아직은 그런 평온을 지속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안에 대해 깊이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워졌다. 내가 안이 누구인지 알고 나면 안이 날 떠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아니면 내가 안을 떠나거나.
나는 그런 생각에서 도망치듯 안의 손을 잡고 방에서 나갔다. 안의 손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 그때 월 선생님이 씬의 말을 멈췄다.
"잠시만요. 씬 형사님. 지금 취조하시는 건 아니죠? 수니 학생은 지금 목격자로 여기 와 있습니다. 심각한 사건을 목격해서 불안한 상태고요. 저희 학생을 배려해주셨으면 합니다."
월 선생님이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게 위안이 됐다. 여전히 두려웠지만 내 편이 있다는 생각에 조금 편안해졌다. 씬 형사는 월 선생님의 말에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 "그날 싸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해줄래요?"
나는 라울과 있었던 일을 기억나는 대로 얘기했다. 뿔 뽑기 게임과 노란길에서 당했던 습격과 이마에 생긴 상처 같은 것들에 대해서.
"라울한테 화가 많이 났겠네요."
"네. 그애를 죽이고 싶었어요."
그 자리에서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라울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었다. 나는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제가 뭘 어쩔 수 있었겠어요? 게다가 자고 일어나니까 화가 가라앉았어요. 신경 끄자 싶더라고요. 그런 애한테 제 시간이든 마음이든 조금도 더 쓰고 싶지 않았어요."
- 월요일은 항상 이상하다. 내 세계가 둘로 나눠진 기분이다. 내가 둘로 나눠진 것 같기도 하다. 주말의 나는 몸에 꽃이 심어져 있는 여자애, 무당벌레 같은 남자애, 외눈 도깨비처럼 생긴 매니저, 반투명한 젤리 입술을 가진 요리사와 온몸에 문양이 있는 주방장, 강단 있는 제빵사와 일하는 세계 속에 있다. 그 세계 속에서는 모두가 다른 몸을 가지고 있다. 다른 몸을 가진 사람들이 마음껏 먹고 마신다. 그 세계에서는 누가 누구를 사랑하든지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다. 남자든 여자든 성이 여러 개거나 심지어 성이 없어도 사랑하거나 사랑받을 수 있다. 나는 그 세계 속에서 자유롭다. 그 세계 속에서 나는 뭐든지 될 수 있고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주말이 끝나면 그 세계도 닫힌다. 나는 노란길의 세계에서 튕겨져 나와 학교로 굴러 떨어진다. 학교도 처음에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피부가 수정처럼 반짝거리는 아이들과 건강한 말 같은 아이들, 그리고 나와 같은 고향을 가진 아이들이 한 교실에 섞여 있는 세계.
그 세계의 중심에 안이 있었다.
- 학교는 완고한 세계다.
안은 완고한 세계의 탈출구였다. 안은 나에게 갈라진 틈, 아무도 모르는 구멍, 남에게는 보이지 않는 문이었다. 나는 답답해질 때마다 안에게 들어갔다. 내가 안을 보고 있거나 안에게 말을 걸 때 안은 내가 모르던 풍경들을 보여주었다.
내가 나쁘다고 믿었던 것들이 기쁨으로 변했다. 그리고 나를 지켜준다고 믿어왔던 가치들이 전과 다르게 보였다. 한때 내가 미덕으로 여겼던 순결과 순종, 겸손함과 검소함 같은 것들이 이제는 딱딱하게 굳은 빵처럼 보였다. 나는 그 빵들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나는 안을 만난 이후로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갔다.
나는 점점 평일의 세계가 지겨워졌다. 월요일 아침에 안과 교실로 가면서 나는 안이 없었다면 학교생활이 어땠을지를 생각해 보았다. 진짜 지루했을 거야. 난 생각했다. 절대 버틸 수 없었을 거야.
- 학교 안에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날밤에 라울의 머리를 내리친 사람이 안이라는 소문이었다. 어디서 그런 소문이 시작된 건지 모르겠다. 짐작 가는 데가 너무 많았다. 어쩌면 목격자 증언을 했던 회의실에서 시작됐는지도 몰랐다.
- 그렇게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메시지는 어느새 사라졌다. 익명으로 온 메시지였다. 대형 화면에는 새로 뜬 공지가 사라지지 않고 깜빡거렸다.
나는 두리번대지 않으려고 애썼다.
누가 이딴 메시지를 보낸 걸까?
안을 싫어하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웜스들, 비치들, 라울의 친구들. 교실 전체가 적으로 느껴졌다.
- 쉬는 시간에도 나는 꼼짝하지 않았다. 안도 그랬다. 서로 메시지를 주고받지도 않았다. 반 애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안과 나를 보고 있었다. 적대적인 눈들도 있었다. 어떤 애들은 눈에 보이게 안의 반응을 궁금해했다. 누군가가 안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중성인은 화를 참지 못한다. 그 말이 진짜인지 보려고 말이다.
- 안은 못 박힌 것처럼 자기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약간 창백해 보였다. 나는 매점에서 빵을 사서 안의 책상에 놓았다. 안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지만 빵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 그날의 마지막 수업이 끝났을 때 전체 메시지가 왔다. 월 선생님이 보낸 것이었다.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유감을 표하는 뜻에서 종례를 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난다면 막중한 책임을 물을 것을 분명히 밝힙니다. 부끄러운 줄 아세요, 여러분.'
"잘됐네! 종례 안 하면 좋지. 고마워, 안."
빛나는 시아 그라시아스가 안을 향해 외치고 자기 친구들과 교실에서 나갔다.
"고마워!"
웍스 애들도 보란 듯이 따라 했다. 나는 머리가 뜨거워졌다. 얼굴이 달아오른 채로 짐을 챙겼다. 정신이 없어서 내가 뭘 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겨우 짐을 다 챙기고 고개를 돌렸을 때 안은 벌써 교실에서 나가고 없었다.
- 나는 기숙사로 갔다. 방에도 안이 없었다. 안이 갈 만한 곳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도서관이 있는 건물로 가서 서고들을 살폈다.
허탕이었다. 도서관에서 나왔을 때 안이 자주 간다던 해변가의 달리기 좋은 길이 생각났다. 안은 그곳에 있을 것 같았다.
- 학교에서 해변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나는 열을 식힐 겸 해변까지 걸었다. 해변에 가는 건 처음이었다.
6월 말이었다. 학교에 온지 네 달이나 됐는데 해변에 가는 게 처음이라니. 내가 그동안 얼마나 노란길에만 빠져 있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해변은 작고 아늑했다.
- 바다는 특별히 맑지도 색이 아름답지도 않았다. 하지만 반짝이기는 했다. 옅은 구름 속에 별이 들어 있어서 구름이 뒤척일 때마다 구름 속 별들이 반짝거리는 듯했다.
말소리도 없이 파도 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 진작 와볼걸.
그런 생각 말고는 별다른 생각이 안 들었다. 해변에서는 걸을 만한 길이 보이지 않았다. 바다, 모래사장, 절벽밖에 없었다. 모래사장에는 계단이 두 가지 있었다. 정류장으로 나가는 계단과 절벽을 향한 계단들이었다. 정류장으로 나가는 계단은 하나밖에 없었지만 절벽으로 가는 계단은 세 군데에 있었다. 절벽 위에 집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계단들이었다. 나는 영혼을 위한 세 번째 집들을 보며 계단을 올랐다.
절벽 위 주거지는 밖에서는 그리 넓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계단을 올라가 보니 어디부터 봐야 할지 감이 오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작은 마을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집들은 하나같이 으리으리했다. 소모된 영혼을 채우는 데는 역시 돈이 최고인 것 같았다. 메든가의 주택들보다 크고 양식도 훨씬 복잡해 보이는 집들이 절벽 사이를 채우고 있었다.
- 마침내 절벽 정상까지 올라갔을 때 나는 허무해져서 계단에 앉았다. 절벽 제일 위에는 아래에 있는 집들과 똑같은 집 한 채만이 있었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 집도 다른 집처럼 초인종이 없었다. 아마도 영혼을 채우는 시간에는 어떤 방문도 달갑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세 번째 집에 대해 안 좋은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절벽 위에 서니 이곳 집들 중 하나라도 내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싶을 때 절벽 위의 집만큼 좋은 장소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펜스를 잡고 아래를 봤다. 달리기 좋은 길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집들, 그리고 겨우 한 사람이 걸을 수 있는 좁다란 길들 뿐이었다. 달리기에는 길이 좁고 짧았다.
안은 혼자 있고 싶을 때 이곳을 찾았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빈집들 사이는 혼자 있기 괜찮은 장소였다. 커다란 집들과 절벽 사이에 숨어 있으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고기맛이 나는 사탕을 먹다가 해변에 갔었다는 얘기를 꺼냈다.
안은 해변이 어땠는지 물었다. 안의 눈에 불안이 떠올랐다. 나는 별거 없었다고 말했다.
"그래도 좋았어. 바다를 보고 있으니까 마음이 편해지더라고. 네가 말했던 길을 찾아보려고 했는데 못 찾았어."
"찾기 어려웠을 거야. 해변 뒤에 있는 길이라. 절벽 뒤로 돌아가야 나와."
"숨겨져 있는 길이네."
"그렇지."
안이 말했다.
- 나는 더 말할까 망설였다. 널 찾으러 갔었다고. 해변에는 달리기 좋은 길 같은 건 없었다고. 그날 네가 다녀온 곳은 어떤 곳이었냐고.
우리 사이에 이상한 기류가 흘렀다. 나는 문득 안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안에게서 더 묻지 말라는 뜻이 강렬하게 전해져 왔다. 숨이 막힐 정도였다.
안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는데 안은 그 힘을 쓰지 않고 내버려 뒀다. 그 힘은 안개처럼 희미하고도 자욱하게 항상 안을 감싸고 있었다. 안은 그 힘을 모르는 척했다. 그 힘이 자신과는 관련이 없다고 믿는 것 같았다. 그냥 우연히 그 힘이 어느 날 자기 곁으로 왔다는 듯이. 하지만 그날 나는 안이 자신이 가진 그 힘을 알고 있으며 그 힘을 쓸 줄도 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안은 힘을 손에 쥐고 있었고 나는 그 힘을 이길 수 없었다.
안은 내게 자신의 말을 믿으라고 요구했고 나는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 그 대화를 한 후에 마음 깊숙한 곳에서 작은 불안이 맥박처럼 콩콩 뛰었다. 하지만 나는 괜찮은 척 지내기로 했다. 안을 믿고 싶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드는 의심을 외면했다.
- 기말고사가 낀 그 주 주말에 에그가 나에게 작은 돌을 선물했다. 일이 끝난 일요일 밤, 탈의실에서였다.
돌은 작고 네모난 상자 안에 들어 있었다. 분명 반지일 거야. 난 예쁘게 포장된 선물을 풀면서 생각했다. 상자 안에 반지가 아니라 작은 돌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당황했다. 그 작고 매끈한 하얀 조약돌은 장식 삼아 방에 놓기에도 너무 평범해 보였다.
나는 더듬거리며 고맙다고 말했다. 에그는 내 반응을 예상한 듯 웃더니 상자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얌전히 누워 있던 돌이 움직였다. 마치 막 깨어나 기지개를 펴는 듯이.
"체크에서 데려온 거야."
"그럼 이게...?"
"동물이지, 일종의 고리가 새로 내놓은 야심작이래. 무생물에 생물을 결합한 새로운 동물. 생명이 있는 돌."
나는 돌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건드려봤다. 돌이 놀란 것처럼 움찔했다. 부드럽게 어루만지자 느긋하게 몸을 폈다. 돌에는 표정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손끝으로 돌이 긴장을 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 "휴가 잘 보내."
에그가 가게 앞에서 내게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저그의 손을 잡고 어딘가로 갔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았다.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나는 선물을 준비할 생각도 못했는데. 휴가가 끝나기 전에 에그에게 줄 선물을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돌이 든 상자를 주머니에 넣었다.
-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고 했다. 빛 구역 출신 애들은 동굴에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특권층이라고 비아냥거렸다.
라울의 친구들은 여러 번 조사를 받았다. 그애들은 조사를 받고 돌아와서 자신들만 이런 취급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투덜거리며 안을 노려봤다.
형사들은 안을 찾지 않았다. 나도 그게 걸리기는 했다. 학교 안에 도는 소문을 형사들이 모르고 있지는 않을 텐데. 안이 사건과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잘 안 됐다.
- 나는 안의 침대를 봤다.
안은 아침에 나갔다. 새벽에 일어나서 책을 마저 읽은 것 같았다. 안은 솔티나의 집으로 가서 빌렸던 책을 돌려주고 점심을 먹고 올 것이다.
아침에 안과 나눴던 짧은 대화가 떠올랐다. 잠결에 들은 얘기여서 기억이 흐릿했다. 저녁에 시내에서 만나기로 했던가? 시내에서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사고 저녁을 먹기로 했던 것 같다.
- 집안은 층 구분 없이 천장이 높게 나 있는 구조였다. 벽 여기저기에 튼튼해 보이는 봉들이 달려 있었다. 금속으로 된 봉들이었다. 탁 트인 구조 때문에 방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문은 총 여덟 개였는데 전부 닫혀 있었다.
거실 바닥에는 아주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었다. 걸을 때마다 발이 묻히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돌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를 들을 수 없어 불안했다. 대문과 현관문은 잠금 패드를 풀면 저절로 열리는 문이었지만 안에 있는 방들은 모두 문고리를 돌려야 열리는 문들이었다. 돌에게 손이 달려 있지는 않으니 방에 들어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다섯 시 전이었다. 안에게서는 아직 연락이 없었다. 나는 돌을 천천히 찾기로 하고 여덟 개의 문을 차례로 열어봤다.
- 방 다섯 개는 가구 하나 없이 비어 있었다. 쓰지 않는 방 같았다. 아까워라. 나는 이 커다란 집을 혼자 쓰는(그것도 아주 가끔씩만 쓰는) 사람이 부러워졌다. 이런 집을 가진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나라면 이 집을 떠올리기만 해도 소모됐던 영혼이 도로 꽉 차오를 것 같은데. 나는 혼자 그런 생각을 하며 여섯 번째 문을 열었다. 그 방은 욕실이었다. 나는 실망하며 바로 문을 닫았다. 이제 방이 두 개 남았다. 나는 어느 방을 먼저 들어가 볼지 고민하다가 순서대로 욕실 옆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 방에 사람이 머물던 흔적이 있었다. 방에서 느껴지는 개인적인 분위기 때문에 겁이 났다. 그제야 다른 사람의 집에 허락 없이 들어왔다는 실감이 났던 것이다.
조심스럽게 방 안을 둘러봤다. 문이 커다란 나무 벽장과 큼지막한 침대가 있었다. 여긴 거인이 사는 집인가? 그런 생각을 하다 방 안에 창문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거실에도 창문이 거의 없었다. 거의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창문이 있기는 했는데 집에 비해 아주 작았기 때문이다. 겨우 벽돌 하나만 한 창문 세 개가 바다 쪽으로나 있었다. 발코니나 베란다도 없었다.
크고 폐쇄적인 집. 세 번째 집들은 다 이런가? 왠지 오싹해졌다.
- 침대는 흐트러져 있었다. 주인이 다녀간 지 얼마 되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때 뒤에서 문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한 집안에서 그 소리가 크게 울렸다. 나는 비명이 터져 나오는 입을 손으로 막고 뒤를 돌아봤다. 내 하얀 돌이 방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돌도 겁을 먹은 듯 카펫 위로 기어와 내 발 옆에 바짝 붙었다. 나는 손을 뻗어 돌을 잡았다. 손 안에서 돌의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내 가슴도 그렇게 뛰고 있었다. 내 심장을 손에 쥐고 있는 느낌이었다. 뭔가 불안한 예감이 밀려들었다.
- 불길하게 친숙한 느낌. 어쩐지 와본 적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는 사람의 집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침대로 이끌려갔다. 누가 내 목과 손목에 줄을 묶고 천천히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침대로 가서 이불에 손을 댔다. 이불은 푹신했다. 허리를 살짝 구부리자 친숙한 느낌이 강해졌다. 냄새 때문이야. 나는 한순간 깨달았다.
안의 냄새가 났다. 안이 더티에서 주문해서 만든 냄새.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그 냄새가 풍겼다. 나는 돌을 꽉 쥐고 다른 손으로 이불을 걷었다. 검은 것들이 들썩거렸다. 나는 물러나서 그게 무엇인지 봤다. 살아 있는 것일까 봐 무서웠다. 하지만 그것들은 금방 내려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깃털들이었다. 검고 커다란 깃털들.
- 안이 깊은 밤에 나가서 왔던 곳이 여기였구나.
그런 직감이 들었다. 여기였어. 나는 베개를 들어 냄새를 맡았다. 안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검은 깃털과 안의 냄새.
- 나는 벽장 옆에 있는 스위치를 켰다. 방이 환해지고 옷이 선명하게 보였다. 검은 후드였다. 후드에 얼룩이 있었다. 핏자국 같았다. 나는 옷을 놓칠뻔했지만 가까스로 떨어뜨리지 않고 옷장 바닥에 내려놓았다.
얼룩은 완전히 말라붙어 있었다. 피냄새가 나는 것 같았지만 착각이었다.
- 안의 달리기 좋은 길은 절벽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커다란 집 안에.
- 손안에서 돌이 몸을 비비적댔다. 나는 돌을 가방에 넣고 지퍼를 잠갔다. 지퍼를 잠그자마자 가방 속에 넣어놓은 P가 진동했다. 나는 P를 꺼내 전화를 받았다. 안이었다.
안은 방금 볼일이 끝났다고 말했다.
"넌 어디야?"
"너의 세 번째 집."
전화기 건너편이 조용해졌다.
- 안이 거실로 들어올 때 나는 긴 의자에 앉아 벽에 달린 봉을 보고 있었다. 저게 횃대였구나. 횃대에 앉아 있는 치라가 떠올랐다. 치라는 횃대에 앉아 안을 내려다봤을 것이다. 나는 안이 치라를 올려보는 모습을 상상했다. 안이 치라를 보는 눈빛은 나를 볼 때와 어떻게 달랐을까? 안은 치라에게도 다정하고 달콤했을까?
안이 내 옆에 앉았다. 나는 계속 봉을 바라봤다. 안의 얼굴을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 순간에조차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본 것들을 모른 척하고 싶었다. 안을 만지고 안심하고 싶었다.
- 나와 안은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나와 안 사이의 빈 공간에 작게 타오르는 불이 있는 것 같았다. 그 열기는 긴장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처음 본 날 네가 나한테 화냈던 거 기억나? 내가 네 책을 허락 없이 봤다고 화를 냈었잖아."
"기억나."
"몇 번째야? 이 집에 들어온 게?"
"안에 들어온 건 처음이야."
"난 초대한 적 없는데."
"알아."
목이 메었다. 안을 부른 걸 후회하지는 않았다. 내가 안의 집에 들어온 이상 언젠가는 했어야 할 대화였다. 조금 힘든 대화.
나는 고개를 돌려 안을 봤다. 안은 허공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얼굴이 창백했다. 나는 그 싸늘한 얼굴에 사랑을 느꼈다. 그런 순간에도. 난 구제불능이었다.
- "그래서 뭘 알아냈어?"
"아무것도."
"아무것도?"
"여기가 너와 치라의 집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몰라."
내가 그렇게 말했을 때 안이 나를 봤다. 내가 모르던 눈빛이었다. 나는 그 눈이 두려웠다. 안의 독특한 습관들. 적게 말하고 적게 먹고 적게 갖는 안. 안은 가끔 고요해진다. 내가 모르는 곳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그럴 때 안이 어디를 헤매고 있는지 나는 몰랐다. 내가 옆에 없을 때 안이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안이 사람을 죽였을지도 모른다. 후드에 말라붙은 피는 누구의 것일까?
- 작은 창문으로 들어오던 빛이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해가 진 듯했다.
실내가 어두워서 안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망설이다 P를 꺼냈다. 안의 눈빛에 뭐가 담겨 있는지 보고 싶었다. 그게 어둠인지 사랑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라이트 모드를 켰다. P에서 나오는 불빛이 안의 얼굴을 비췄다.
안이 나를 보고 있었다. 눈이 부신지 눈을 몇 번 감았다가 떴다. 안의 호박색 눈동자가 투명하게 빛났다. 나는 그 눈을 들여다봤다. 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읽을 수 없었다. 순간 안이 내 목을 조르는 장면이 머릿속을 스쳤다.
내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냥 화가 나서 그럴 수도 있다. 안이 그럴 수 있는 사람일까? 내가 안을 모른다는 사실이 날 두렵게 했다.
- 그때 안이 내게 손을 뻗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P가 내 손에서 떨어졌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뒷걸음질 쳤다. 어둠 속에서 안이 나에게 다가왔다. 안이 내 팔목을 잡았을 때 나는 짧게 비명을 질렀다.
- 안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나는 긴장으로 꼼짝하지 못했다.
"너도 날 의심하는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회할 걸 알았지만 안의 대답을 듣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다. 안에게 진실을 듣고 싶었다.
- "믿을지 모르겠지만 난 널 사랑했어."
안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안이 내 팔을 놓고 물러났을 때 어슴푸레하게 그애의 얼굴이 보였다. 안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안은 제자리에 서 있었다. 안이 움직이지 않는데도 왠지 그애가 멀리 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주 먼 곳으로. 나는 마음이 급해져서 안을 붙잡았다. 하지만 안은 내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 전날 절벽 위의 집에서 본 것들, 안의 얼굴, 눈빛, 안이 나에게 했던 말들이 어지럽게 뒤섞여 떠올랐다.
구설에 도착해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마음이 복잡했다. 하지만 막상 버스에서 내려 동네로 들어가자 기분이 달라졌다.
파란 잡화점이 보였다. 쇼윈도에 진열된 물건들은 달라진 게 없었다. 종이 잡지, 초콜릿, 껌, 음료수, 우유... 계산대에는 로봇이 아니라 사라 언니가 있었다. 돌아왔다는 실감과 함께 태양시에서의 일들이 희미해져 갔다. 그곳에서 겪은 일들이 꿈같았다. 여전히 마음에는 구멍이 나 있었고 가시에 찔린 것처럼 가슴이 따끔거렸지만 그런 증상도 꿈을 꾼 뒤의 후유증처럼 아련했다.
- 집에 들어갔을 때 슬픔은 침전물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슬픔 위로 떠오른 것은 익숙한 곳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이었다.
- 내 방은 그대로 있었다. 밴은 내가 나갈 때 봤던 모습 그대로 침대맡을 지키고 있었다. 밴을 보니 내가 아침에 방을 떠났다가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목욕이나 해볼까.
기숙사에 들어간 뒤로 욕조에 몸을 담그지 못했다. 나는 돌을 챙겨서 욕실로 갔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니 긴장이 풀렸다. 돌은 욕조바닥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 돌도 따뜻한 물이 마음에 드는 듯했다. 안에 대한 생각을 아예 그만둘 수는 없었지만 비참함은 덜해졌다.
- "수니?"
나는 멈춰 섰다. 엄마가 옷장 앞에 서 있었다. 옷을 갈아입으려던 것 같았다. 엄마의 셔츠 단추가 반쯤 풀려 있었다. 엄마가 내 뿔을 봤다. 내 머리카락은 수건으로 감싸여 있었다. 내 이마를 가려주던 머리카락도 수건 안에 있었다. 엄마는 놀란 것 같았다. 하지만 나에게 뿔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눈빛은 아니었다. 엄마는 다가와서 "이게 나왔구나" 하고 말했다.
- 엄마가 두 손으로 내 뺨을 감쌌다. 일하고 돌아온 엄마의 손에서는 아기들 냄새가 났다. 나는 그 냄새가 좋았다. 엄마가 내 뿔을 보는 상상을 자주 했다. 상상 속에서 엄마는 내 뿔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울 때도 있었다. 아니면 너무나 놀라서 멍하게 나를 쳐다보기도 했다.
그 상상들과 현실은 아주 달랐다. 엄마는 다정한 눈길로 날 보고 있었다. 엄마가 내 이마에 난 상처를 조심스럽게 만졌다.
"어쩌다 이랬어?"
"별거 아니야."
"차 한잔해."
- 엄마가 부엌에서 차를 준비하는 동안 나는 식탁 의자에 앉아 작은 숟가락으로 설탕 그릇을 휘저었다.
물은 금방 끓었다. 엄마는 김이 나는 차가 든 컵을 내 앞에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어색한 기분을 느끼며 차를 마셨다. 갑자기 먼 친척집에 온 것 같았다.
시간이 꽤 지났다. 식탁에서 일어나도 될지 망설이고 있을 때 방에서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찾았다. 여기 있었네."
나는 컵을 들고 일어나 문가로 다가갔다. 커다란 상자가 몇 개나 꺼내져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먼지투성이였다. 오랫동안 꺼낼 일이 없던 상자들이었다. 나도 그 상자들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들을 옷장 위에서 내릴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 나는 엄마가 손에 든 것을 봤다. 사진들이었다. 엄마가 내게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아빠와 엄마가 함께 찍힌 사진이었다. 둘 다 활짝 웃고 있었다. 아빠의 이마에 뿔이 있었다. 하반신은 물속에 잠겨서 보이지 않았다.
- "처음 만난 날 찍은 거야."
엄마가 말했다. 엄마가 다른 사진을 보여줬다. 아빠만 찍힌 사진이었다. 아빠는 바위에 앉아 있었다. 내 또래로 보일 만큼 젊었다. 그 시절의 아빠에게는 다리가 없었다. 나는 아빠의 꼬리를 한참 들여다봤다.
"언제 전환한 거야?"
"이 사진을 찍고 일 년쯤 지나서."
엄마가 대답했다. 다른 사진은 엄마를 찍은 것이었다. 엄마는 돌연변이가 아니었다. 아빠는 엄마를 만난 뒤에 전환한 것이다. 엄마와 함께 살기 위해서.
- "나도 전환하길 바라?"
"넌 선택하는 법을 알잖아. 시간은 충분히 있어."
"시간이 날 기다려줄까?"
"사람이 시간을 기다리는 거지. 알맞은 시간이 널 찾아올 거야."
- 그날밤은 평화로웠다. 아빠는 숙직이어서 들어오지 않았다. 저녁 늦게 집에 들어온 세이는 내가 그애 방에 둔 스커트 바지와 새 신발을 보고 엄청나게 기뻐했다. 엄마는 내가 집에 온 기념으로 생선 요리와 케이크를 사 왔다.
케이크를 큼지막하게 잘라서 엄마하고 세이하고 나눠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진짜 오랜만이네. 내가 안을 가족으로 생각했던 것이 우습게 여겨질 정도로 집은 편안했다.
엄마하고 세이와 지낸 시간들, 그 오랜 친밀함은 내가 안에게 느끼는 애정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안은 지금 어디 있을까? 안도 가족들에게서 이런 편안함을 느낄까? 안도 지금 행복할까?
- 바다 위로 초저녁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나는 물결에 휩쓸렸다.
두툼하고 억센 꼬리를 가진 여자가 나를 보고 있다가 급히 다가온다. 여자의 이마에는 뿔이 있다. 여자는 먼발치에서 몰래 나를 보고 있었다. 솔 고모, 형제에게 내 얘기를 듣고 궁금한 마음에 보러 온 것이었다. '저 애가 오빠의 자식인가?' 혼자 즐거워하면서 나를 보았다.
나는 돌을 던지는 동네 아이들을 피해 바닷가 바위 뒤에 숨어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곳에서 온 나를 싫어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이 그랬다. 솔 고모는 내가 숨바꼭질을 하는 줄 안다.
나는 바위 뒤에 숨어 있다가 졸음에 빠진다. 너무 긴장을 해서 그런 것이다. 어릴 때는 크게 긴장을 하면 졸음부터 왔다.
그러다 큰 파도가 치고 물결이 바다 쪽으로 몰려가면서 내 발목을 휘감아 끌고 간다. 잠에서 깬 나는 몸을 버둥거리고 그럴수록 내 몸을 휘감은 물은 점점 더 무거워진다. 마침내 머리까지 물속에 잠긴다. 정신을 잃기 전에 누군가가 나를 물 밖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느낀다.
- 솔 고모는 바다에 빠진 사람을 구해본 적이 없다. 장난을 친 적은 있다. 물속에서 사람 발목을 잡아당겨 겁을 주고 달아나거나 깊은 밤에 뱃사람을 놀래준 적도 있다. 솔 고모에게 헤엄치지 못하는 사람은 걷지 못하는 사람과 같다. 바보 천치들, 고모는 물에 빠진 사람을 보면 비웃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다. 솔 고모는 허우적대는 나를 보고 ...
- 비행기를 탄 채로 공중에서 볼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사진과 영상으로도 많이 보기는 했지만 그건 뭐랄까 진짜 같지가 않았다.
- 유리 돔을 처음으로 가까이서 본 날 나는 감동받았다. 그건 그냥 무식하게 크게 지은 유리 건물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하나의 도시였다. 역사와 문화가 응축된 도시. 사람들이 일궈낸 재건의 상징. 나는 지금은 유리 돔이 재건의 상징으로 쓰이는 데에 불만이 많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열두 살의 나는 유리 돔을 보고 그것이 재건의 상징으로 쓰이는 이유를 알겠다고 생각했다.
- 나는 가족들에게 차를 타고 유리 돔을 한 바퀴 돌자고 제안했다. 아니면 내려서 그 주변을 걷기라도 하고 싶었다. 유리 돔 앞에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아빠는 내 제안을 단칼에 잘랐다.
우리는 보름 넘게 여행을 하면서 웜스의 북쪽 동네들을 경험했고 이제 막 웜스의 북쪽 끝에 도달한 참이었다. 우리는 웜스 구역과 비취 구역의 경계선에 있었다. 경계선에 도달했을 때 우리 가족들은 모두 신나 있었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가족 사이에 애정이 넘쳤다. 나는 내가 세상에서 최고로 화목한 가족의 일원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 행복한 환상은 아빠의 한마디로 깨져버렸다.
"안 돼."
아빠는 그렇게 말했고 그걸로 끝이었다.
- 우리는 경계선에서 차를 돌려 구설의 우리집으로 돌아갔다. 아빠가 "안 돼" 하고 말한 순간에 나는 내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나는 나름대로 남은 여행을 즐겼지만 유리 돔 앞에서 느꼈던 그 무력하고 쓸쓸한 기분은 아직까지도 때때로 나를 찾아온다.
- 씨씨의 아버지가 손가락을 들어 위를 가리켰다.
"저기 동그란 거 보여요? 저게 비취의 태양이에요."
아득하게 높은 유리 돔의 천장 쪽에 둥근 구가 보였다. 땅에서 보는 달 정도로 작게 보였지만 가까이서 보면 거대할 것 같았다.
- 내가 빤히 쳐다보자 씨씨의 아버지가 헛기침을 했다.
"죄송해요. 저는 그냥 신기해서. 씨씨 하고 다르시네요."
"우리 딸이 날 안 닮아서 다행이기는 하죠. 뭐가 제일 다른데요?"
"피부에서 빛이 안 나시네요."
내 말에 씨씨의 아버지가 웃었다.
"이 나이가 돼서 반짝거리고 다니면 웃기잖아요."
경쾌한 말투였다. 나는 웃었다.
모든 것이 내가 예상한 것과 달랐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거리는 휘황찬란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적이고 세련되어 보였다.
- 나는 씨씨가 경찰 관계자처럼 말하는 것에 놀랐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넌 대체 그런 걸 어떻게 안 거야?"
그렇게 묻기는 했다.
씨씨는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나도 그 사건에 관심이 있어. 우리 학교에서 일어난 사건이기도 하고, 내 주변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게 무섭잖아. 누가 그런 짓을 한 건지 알고 싶었어."
- "너희 아버지가 뭐 하는 분인데?"
"보안부 장관. 딸을 굉장히 사랑하는."
나는 새로 알게 된 사실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안은 정말 라울의 죽음과는 상관이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옷장 안에 있던 피 묻은 옷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안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그 얼굴이 나를 흔들었다.
그 얼굴은 내가 가졌던 의심을 무너지게 했다. 내가 안을 믿지 못했다는 것을 자책하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팠다.
- "매리랑 지코스가 어떤 관계인지는 알지?"
비리비리한 지코스? 그 이름이 나온 게 뜬금없게 느껴졌다. 지코스는 덤 같은 존재였다. 라울 패거리에 애매하게 붙어 있는 조용한 남자애. 존재감이 없는 타입이다.
"지코스가 이 일과 상관이 있어?"
"아직은 몰라. 그런데 지코스가 매리에게 휘둘렸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지. 너만 빼고. 넌 다른 애들한테 관심이 없으니까.”
다른 애들에게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안에게 관심이 쏠렸다는 게 더 정확했다. 그게 그거지만. 학교보다는 변신 카페에 애정이 있기도 했다. 굳이 씨씨에게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 "매리가 달콤한 말을 할 줄 안다고?"
나는 매리의 불쾌한 웃음소리를 떠올렸다. 그리고 음흉한 눈빛도. 매리는 웃는 얼굴로 순진한 척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잔인한 짓을 한다. 그런 생각을 하다 멈칫했다. 매리가 뭘 했다고? 불쾌하게 굴고 라울과 함께 나를 괴롭히기도 했지만 그것 때문에 매리가 싫은 건 아닌 것 같았다. 매리와 나는 잘 맞지 않는 사람이다. 느낌이 안 맞는 사람.
- 당장은 알아낼 수 없는 일이었다. 의문들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씨씨도 조용해졌다. 자기가 한 말을 되짚으며 생각을 해보고 있는 것 같았다.
- 이번에 침묵을 깨뜨린 것은 빛이었다. 빛이 집안으로 들어와 번졌다. 커튼은 무력해 보였다.
"환해지는 시간이네."
씨씨가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기도 전에 씨씨가 일어나서 커튼을 걷었다. 집안이 확 밝아졌다. 창밖을 보자 환해지는 시간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 씨씨가 나를 옥상으로 데려갔다.
옥상에서 보이는 풍경은 아름다웠다. 높은 공중에 차가 다니는 터널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유리로 된 터널들이 빛나고 있었다. 유리 돔 천장 쪽에 있는 인공 태양이 강렬하게 빛을 뿜어냈다. 태양빛을 받은 사물들이 빛났다. 모든 것이 빛났다. 빛의 축제였다. 도시의 네온사인들이 일제히 켜져서 빛났다. 길가의 나무들도 크리스털처럼 빛나고 있었다. 유전자 변이 식물들이었다.
- 십 분이 지나자 도시의 빛이 꺼져 들었다. 인공 태양의 빛을 줄이는 시간이 된 것 같았다. 구가 삼분의 일쯤 어두워졌다. 빛 구역의 저녁 시간이었다.
"이제 빛 구역은 환해지는 시간 때문에 존재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하루에 십 분. 겨우 그 십 분 때문에 유리 돔을 고집하는 거지. 윗세대들은 모래 폭풍이 다가올 때 방공호에 들어간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고 믿고 싶은 거야. 자신들이 방공호에 들어간 건 인류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말하지. 초기 재건기에 방공호에서 나와 건설한 게이 유리 돔이야. 모래 폭풍이 다시 올 걸 대비해서 유리 돔 안에 도시를 세운 거지. 하지만 유리 돔은 이제 골치 아픈 짐이 됐어. 환기 문제 수도 문제, 다른 구역과의 마찰, 문제가 너무 많아. 무엇보다 인공 태양을 유지하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그런데도 우리 구역 사람들은 유리 돔을 포기 못해. 환해지는 시간이나 피부에서 빛이 나는 젊은 사람들을 보면서 자위하는 거야."
나는 씨씨가 자기 구역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씨씨는 한바탕 쏟아낸 뒤에 입을 다물고 옥상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씨씨의 심정을 약간은 알 것 같았다. 답답함. 구역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과 떠날 수 없도록 붙잡는 것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마음. 막막한 줄다리기. 나도 항상 그런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 "나머지는 들어가서 얘기하자."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씨씨가 저녁을 먹겠냐고 물었지만 입맛이 없었다. 씨씨는 더 권하지 않고 날 사층 안쪽에 있는 방으로 데려갔다. 서재를 겸하는 응접실인 것 같았다. 높고 커다란 책장들에 종이로 된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우리 아빠 취미야. 옛날 책 수집. 엄마도 폭풍 전에 나왔던 화집들을 좋아하고. 화집을 모은 방은 따로 있어."
- 씨씨는 초기 재건기 때 방공호에 남는 것을 선택한 사람들이 만든 구역이 동굴 구역이라고 했다. 모래 폭풍이 불 때 방공호에 들어갔던 것이 이기적인 선택이었다고 보고 그것에 대한 죄를 갚기 위해 폭풍이 멎은 후에도 계속 방공호에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 방공호에는 이천 명 정도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백 명이 채 안 되는 사람들이 방공호에 남았다. 방공호에 남은 사람들 중에는 방공호에서 태어나 바깥에 나가보지 못한 아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동굴 구역에서는 후손들에게 죄책감을 물려준다. 그런 반성이 모래폭풍이 다시 오지 않게 해 줄 거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 "그때 방공호에서 나가는 걸 거부하고 동굴 구역을 만든 사람들 중에 아직까지 살아 있는 사람은 없을 거야. 백오십 년이 지났으니까. 지금 동굴 구역에 있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으로 거기서 사는지는 모르겠어. 물자는 오가지만 개인적으로 만날 일은 드물거든."
다행히 잠이 가셨다. 내가 말이 없자 씨씨는 부담을 느꼈는지 손을 들었다.
"내가 아는 건 이게 다야."
"그 정도면 충분해. 고마워."
고맙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나는 동굴 구역에 대해 알아볼 마음이 너무 늦게 들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안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애가 온 곳이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는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쉽게 알 수 있었던 것인데도.
- 바로 동굴 구역으로 출발하려 했지만 씨씨가 자고 가라며 나를 잡았다. 나는 그 호의를 받아들였다. 손님방은 삼층에 있었다. 빛이 나는 작은 나무가 방안을 밤새 은은하게 밝혔다.
-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 안내판 하나 없었다. 평평한 땅이 그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진짜 여기가 맞아?"
내가 다시 묻자 밴이 투덜거렸다. 그러면서 일부러 기계음을 내며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하는 말만 반복했다.
"알았으니까 그만 좀 하지?"
나는 밴에게 말했다. 밴은 툴툴대다가 조용해졌다.
- "주니는 이제 돌연변이는 아니지만 버려진 건 우리랑 똑같아."
"모두 쓰레기야, 쓰레기."
첼이 즐겁게 웃음을 터뜨렸다.
"한 장소가 집인 동시에 쓰레기통일 수는 없어. 둘 중 하나라고. 여긴 쓰레기통이 아니라 집이야!"
영이 소리쳤다. 그리고 발을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다른 아이들이 뛰어가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나는 창에서 눈을 떼고 주저앉았다. 문득 등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뒤를 돌아봤다. 어둠 속에서 커다란 것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것이 다가오는 동안 나는 그대로 굳었다. 그것에게는 날개가 있었다. 접혀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알아볼 수 있었다. 커다란 검은 날개. 치라였다.
"엿보는 걸 좋아하나 보네. 잘 봤어?"
- 치라의 얼굴은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치라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비웃음이 깔린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치라를 여러 번 봤다. 치라는 항상 안에게만 관심이 있었고 내가 있어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그래서 나는 치라가 나를 기억 못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치라는 날 알았다. 내가 누군지. 내가 왜 왔는지.
- "안을 보러 온 거야?"
발톱과 날개를 가진 커다란 남자가 날 위협하고 있었다. 어둠 때문에 치라가 더 두렵게 느껴졌다. 치라가 날 싫어한다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안은 치라가 모든 사람을 싫어한다고 했지만 내 생각에는 나를 특별히 더 증오하는 것 같았다.
나는 치라에게 안을 보러 온 게 맞는다고 말했다. 내 말에 치라가 웃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거친 웃음소리였다.
"안은 여기 없어."
- "나도 다 알아. 네가 안한테 어떻게 했는지. 안이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모르지? 며칠이나 앓아누웠어. 안은 널 보고 싶어 하지 않아. 넌 안을 볼 자격이 없어."
치라는 양쪽 날개를 쫙 폈다. 깃털이 바짝 곤두섰다. 곤두선 깃털이 날 향해 고함을 지르는 것 같았다. 치라는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이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몸이 떨렸다. 나는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치라에게 안이 어디 있는지 말하라고 요구할 자격이 내게는 없었다.
"그날밤에 안은 나하고 있었어."
치라가 말했다. 나를 상처 입히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절벽 위의 집에 있던 횃대들을 떠올렸다. 감상에 사로잡힐 때가 아니었다. 치라는 그날 안에게 있었던 일을 알려줄 유일한 사람이었다.
-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나는 치라에게 말했다.
"그게 몇 시쯤이었어? 안에게는 알리바이가 필요해."
"알리바이가 필요한 건 너겠지. 안이 살인을 했는지 아닌지 궁금해서 미치겠잖아. 넌 아직도 안을 믿지 못해. 그러면서 안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내가 널 보면서 어떤 상상을 하는지 넌 절대 모를 거야. 내가 인내심을 잃기 전에 여기서 나가."
"하나만 얘기해 줘. 옷장 안에 있던 옷에 핏자국이 있었어. 누구의 피야?"
"나도 하나만 얘기해 줄게. 그건 안의 피야. 볼일 다 봤으면 가. 놀이동산 문 닫을 시간이라 구경은 충분히 했지?"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기 전까지는 못 가. 안이 왜 피를 흘렸지?"
- 내가 말을 끝낸 게 먼저인지 치라의 팔이 날아온 게 먼저인지 모르겠다. 치라의 손이 내 옆구리를 쳤다. 발톱이 허리를 파고드는 느낌이 생생해서 순간 눈앞이 아득해졌지만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졌다. 치라가 할퀸 자리에서 피가 흘렀다. 그 자리에서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손을 떼면 안 될 것 같았다. 라울이 내 이마를 칼로 그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통이었다. 온몸이 저릿거렸다.
"안이 왜 피를 흘렸는지 이제 알겠어? 그날 안을 만나려고 찾아갔다가 너랑 같이 있는 걸 봤어. 안이 오지 말라고 한 이유를 그제야 알았지. 우리는 매년 생일을 같이 보냈는데 이번엔 그럴 수가 없었던 거야. 너 때문에. 안이 너와 헤어져서 혼자 기숙사로 가고 있을 때 말을 걸었더니 안이 당황하면서 나보고 세 번째 집에 가 있으라고 했어."
- 마음이 확 밝아졌다. 그보다는 복잡하긴 했지만 마음 한편이 밝아지긴 했다. 안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나는 좀 더 귀를 기울였다. 주니의 목소리는 크고 또렷했지만 안의 목소리는 희미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치라를 가지고 논 적 없어. 네가 치라에게 어떤 마음인지는 알아. 너하고는 다르지만 나도 내 나름대로 그애를 좋아했어."
"아니, 너는 한순간도 치라를 생각한 적이 없어. 한순간도 그냥 자비를 베푼 거지. 여기에 버려진 다른 애들한테 하듯이. 그 대단한 자비를 나한테는 왜 안 베풀었어? 내가 원하는 게 치라 하나밖에 없다는 걸 너도 알잖아. 안 그래? 왜 나한테만 그렇게 잔인한 건데?"
주니는 잔뜩 격양돼서 소리쳤다. 안의 목소리도 약간 커졌다. 지친 듯 말을 조금씩 끊어서 했다.
"누구한테도 자비를 베푼 적은 없어. 난 모두를 형제라고 생각해. 특히 너는 너는 내 가장 가까운 가족이야. 너는 내가 태어난 해와 같은 해에 여기로 왔고 같은 보호인 아래에서 자랐어. 우리 사이가 최악일 때도 널 남으로 생각한 적은 없어."
- 어느덧 모든 감각이 돌아와 있었다. 눈꺼풀도 가벼워졌다. 나는 언제 눈을 떠야 할까 생각하면서 가만히 있었다.
잠시 후에 문이 쿵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주니가 나간 것 같았다. 안이 가까이에 있는 게 느껴졌다. 나는 슬며시 눈을 떴다. 노란 담요가 내 몸에 덮여 있었다. 안은 주니가 나간 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안을 봤다. 얼굴이 수척했다. 시드에 오고 나서 안은 약간 살이 붙었다. 며칠 사이에 시드에서 지내면서 붙었던 살이 다 빠진 것 같았다. 기숙사에서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다. 비록 그때보다 눈빛이 어둡긴 해도.
- "여기가 어디야?"
드디어 안이 나를 봤을 때 내가 물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안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아마 나도 그랬을 것이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안의 눈빛에서 사랑을 읽었다. 안은 아직 나를 사랑했다! 나는 그 눈빛에 용기를 얻었다. 내가 안을 찾아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그 눈빛을 보러 온 것이다.
"내 방이야."
안은 서 있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말했다. 나는 지금 안의 첫 번째 집에 있는 거구나. 나는 방을 둘러보았다. 감옥 같은 방이었다. 기숙사 방보다 훨씬 좁았다. 탁자 말고는 가구도 거의 없었다. 바닥에는 모포가 깔려 있었다.
- "이리 와."
내가 말했다. 목소리가 내 것 같지가 않았다. 내 목에서 그렇게 다정한 소리가 나는 걸 전에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원래의 나보다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아니면 그게 원래의 나인 것 같기도 했다.
안이 내게 다가왔다.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내가 차갑고 딱딱한 바닥이라고 느낀 것은 침대였다. 안의 침대. 안의 세 번째 집에 있는 침대는 크고 푹신했지만 첫 번째 집의 침대는 작고 딱딱했다.
"너도 집이 세 개였구나. 여기, 절벽 위, 그리고 우리 방."
"내 집은 하나야. 웜스랑 쓰는 방 하나."
- "그날 매점 테라스에 앉아 있다가 널 봤어. 어딘가 급히 가고 있는 것 같았어. 비가 내리기 전에."
"치라를 돌려보낸 뒤였을 거야. 너와 정문에서 헤어지고 기숙사로 가는데 갑자기 치라가 나타났어. 그전에 치라에게 몇 번 헤어지자고 말했고 치라도 한동안 날 찾아오지 않았어. 그래서 난 정리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치라는 아니었나 봐. 천천히 얘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치라에게 절벽 위 집에서 기다려달라고 했어. 치라가 간 다음에 나는 기숙사로 가서 널 기다렸지. 네가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해변에 있는 집으로 갔고."
"그런데 치라가 널 상처 입힌 거구나. 그때 옷에 피가 묻은 거고. 그래서 후드를 벗어놓고 기숙사로 돌아온 거야."
"그날은 나도 치라에게 상처를 줬지. 널 만나기 전엔 치라에 대한 내 마음이 어떤 건지 잘 몰랐어. 널 알아가면서 내가 치라에게 느꼈던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지. 나한테 치라는 형제였고 친구였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던 거야."
나는 손을 뻗어서 안의 손을 잡았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안이 내 손을 쥐고 침대에 앉았다.
"나랑 돌아가. 집에 가자."
- 안과 기숙사 방에서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동굴 구역은 서늘하고 삭막했다. 안에게는 고향이었지만 나에게는 그저 차가운 방공호였다. 안을 방공호에서 데리고 나가고 싶었다. 시드로 돌아가 노란길을 걸어 다니고 카페에서 달콤한 것을 마시고 기숙사로 돌아가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괜찮아질 것 같았다.
"네가 낫고 나면. 넌 좀 쉬어야 돼. 좀 나으면 같이 돌아가자."
안이 날 달랬다. 나는 더 조르지 않고 순순히 눈을 감았다. 아까와는 다르게 몸이 나른해졌다. 동굴 구역의 의사가 내 옆구리의 찢어진 곳을 꿰맸다고 했다. 치라는 그 일로 징계를 받게 될 것이다. 동굴 구역에서는 다른 구역의 법이 통하지 않지만 동굴 구역만의 법이 있다고 했다. 안은 동굴 구역의 변호사와 태양 구역의 시드로 돌아갈 것이다. 나는 그런 얘기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 "이건 내 추측인데 지코스는 라울을 싫어했을 거야. 지코스가 라울을 보는 눈빛을 본 적이 있는데 섬뜩했어. 라울은 지코스를 신경도 안 썼지만 지코스는 아니었던 것 같아. 무리에서 제일 힘이 센 수컷에게 질투를 품은 거겠지. 자기가 원하는 여자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걔네를 동물로 보는 건 아니지만 가끔은 사랑이 사람을 동물적으로 만들잖아."
"글쎄, 그렇다 해도 난 이해가 안 돼. 평범한 사람이 질투나 사랑 때문에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게."
"우리가 이해를 하든 안 하든 그런 일은 끊임없이 일어나지. 매리는 지코스가 품고 있는 감정을 눈치채고 그걸 제대로 이용한 거야. 지코스가 초등학교 때부터 라울과 같은 학교에 다녔다는 거 알아? 지코스는 옛날부터 눈에 띄는 애는 아니었어. 라울과는 정반대였지. 그애들하고 같이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닌 애한테 들은 얘기야. 두 사람의 관계를 아는 애들은 다 알더라고. 중학교에 올라와서 라울이 지코스를 뒤에 붙이고 다니기 시작했대. 지코스가 먼저 붙은 걸 수도 있고. 지코스는 인기가 없었어. 여자애들 말고도 그냥 애들 사이에서. 친구가 거의 없었지. 라울이 어땠는지는 너도 알 거야. 지코스에게는 라울이 모든 걸 다 차지한 것처럼 보였겠지. 내가 소설을 쓰는 걸지도 ..."
- 나는 테이블 근처로 갈 수가 없었다. 라울의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을 때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런 게 아니었겠지만 그 눈이 나를 비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라울이 맞고 있었을 때 왜 숨어 있기만 했느냐고, 어째서 그 앞으로 달려 나가 말리지 못했느냐고, 라울이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땅바닥에 누워 있는 걸 보고도 왜 바로 신고하지 않았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라울의 아버지가 적어온 편지를 봉투에서 꺼내어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겁에 질려서 강당을 빠져나왔다. 라울의 죽음을 목격했을 때처럼 구역질이 났다. 안은 추모제에 참가하지 않았다. 나도 그랬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날밤 이후로 처음으로 죄책감이 강렬하게 나를 엄습했다. 내 안에 억눌려 있던 죄의식이었다.
라울이 쓰러지는 걸 봤을 때 바로 뭔가를 했다면, 소리라도 질렀다면 라울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 사람이 죽은 일에 해결이란 없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진실이 밝혀져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못한다. 그 사실이 마음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 나는 거리로 나왔다. 시드의 8월은 뜨겁다. 태양이 쨍쨍 내리쬔다. 바람은 다른 계절보다 부드러워서 더위로 달아오른 사람들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지나간다. 변신의 카페테라스는 항상 만원이다. 실내가 더 시원한데도 손님들은 테라스를 선호한다. 특히 저녁이 되면 변신의 테라스는 노란길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곳이 된다.
- 여름밤은 축제 같다. 노란길의 모든 카페와 식당이 테라스를 개방했다. 사람들은 테라스에 앉거나 서서 뭔가를 마시고 먹고 흥겹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불 켜진 가게들에서 나오는 빛과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거리가 환했다.
하늘은 짙은 푸른색이었다. 별이 보이진 않았지만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다음 주에는 비 소식이 있었다. 이번주는 매일 쾌청할 거라고 했다. 바람이 내 등을 부드럽게 밀었다. 나는 바람과 함께 걸었다. 거리 끝에서 모퉁이를 돌자 거기에 안이 서 있었다. 나는 안을 껴안고 웃었다. 나의 안.
- "오래 기다렸어?"
"응. 가버릴까 했어."
안이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안은 다른 날처럼 카키색 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우리는 한동안 거리를 걸었다. 안이 노란길로 와서 내가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산책을 하는 것이 중요한 일과가 됐다.
나는 가게에서 겪었던 재밌는 일들을 주로 얘기했고 안은 그날 새로 배운 것들에 대해 얘기했다. 안은 솔티나의 어머니가 빌려준 책들에 푹 빠져 있었다. 나도 매일 안의 얘기를 들으면서 유전자 돌연변이에 대해 아는 것이 늘었다. 안이 요즘 읽고 있는 책은 <돌연변이 마을>이었다.
- "인어들이 사는 섬에 대한 얘기도 있어?"
"응. 책에서는 어류형 돌연변이라고 하지만 어류형 돌연변이인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들이 몇 군데 있대. 네가 갔던 섬이 구설에서 별로 멀지 않았다면 그 섬 이름은 라주일 거야."
"그렇게 멀진 않았어. 그 이름을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모여 살게 됐는지 그런 얘기도 있어?"
"라주에 대해 따로 나오진 않지만 어류형 돌연변이가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한 부분은 있었어. 초기 재건기에 구역 곳곳에서 유전자 실험이 활발해지면서 어류의 유전자와 인간의 유전자를 결합하는 실험도 있었대. 배를 타고 바다를 떠도는 집시들을 대상으로 지원을 받아서 실험한 사례가 있어."
"그 사람들은 자기 몸이 어떻게 변할지 알았을까?"
"아니, 대부분 실험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듣지 못했고 약속한 돈도 제대로 주지 않았대.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은 하체에 비늘이 나거나 지느러미가 돋아나는 걸 보고 큰 충격을 받았지. 집단 자살도 있었대. 여러 가지로 문제가 생겨서 공식적으로는 실험이 중단됐고 손해배상 싸움이 길게 이어졌어. 어류형 돌연변이 사람들에게만 일어난 일은 아니었어. 곳곳에서 그런 일들이 벌어졌지. 돌연변이 마을의 역사는 거기서부터 시작돼. 자기도 모르게 돌연변이가 된 사람들이 모여서 마을을 이루고 살게 된 거지. 처음에는 정부와 싸우기 위해 모인 연합이었던 게 규모가 커지면서 마을이 된 거야."
"그게 언제쯤 일어났던 일이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야. 백 년쯤 전."
- 안이 들려주는 돌연변이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씁쓸하게 끝날 때가 많았다.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가라앉았다. 최근에 시드 서쪽 구역인 작은 숲길에서 발생한 테러가 겹쳐 마음이 더 안 좋았다. 작은 숲길은 갤러리가 많은 조용한 곳이다. 그곳의 갤러리에서 일하던 여자가 일요일 아침에 테러를 당했다. 원래는 출근하는 날이 아닌데 급하게 해결할 일이 있어서 나갔다가 일을 당했다고 한다. 그 여자의 이름은 에이수였다.
- 인터뷰 뒤에 에이수의 장례식 장면이 짧게 이어졌다. 나는 안과 함께 그 뉴스를 보았고 그런 뉴스를 보는 게 처음이 아니었는데도 갑작스럽게 울음이 터졌다. 그건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안이 당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고. 나는 두려움과 분노에 질려서 그날 오후를 보냈다. 그때 안은 나를 위로하지도 내 곁을 떠나지도 않았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점점 더 친밀해졌다.
- "우리 너무 일찍 왔네."
안이 시계를 보고 말했다. 열한 시도 안 된 시간이었다. 아무래도 다른 데서 시간을 때우다 와야 할 것 같았다.
"우리 가게로 갈래?"
내가 안에게 제안했다. 안은 혼자 카페에 가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일을 시작하고부터는 변신에 가지 않았다.
안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러겠다고 했다. 가게 사람들에게 안을 소개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 "지금 안 하고 있는데 같이 가게에 가려고."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에그가 당장 오라며 소리를 질렀다. 저그에게 속삭이는 소리도 들렸다.
"수니가 안을 데리고 여기로 온대. 그 중성인 친구 말이야."
안도 그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 "괜찮겠어?"
변신에 다 왔을 때 내가 안에게 다시 물었다.
"준비됐어. 괜찮아."
안보다 내가 더 긴장한 것 같았다. 안이 가게 사람들을 마음에 들어 했으면 했다. 가게 사람들은 내가 안 다음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가족들에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소개하러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 내가 안과 가게로 들어가자 카운터에 있던 아누가 눈인사를 했다. 구석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에그가 손을 흔들었다.
"여기야!"
나는 안과 테이블로 갔다. 안은 에그 그리고 저그와 어색하게 인사를 나눴다. 에그는 활짝 웃으며 안에게 반갑다고 말했다. 저그가 나를 보고 입을 벙긋거렸다. '너한텐 아까운데?' 안이 못 봐서 다행이었다. 나 역시 입 모양으로 저그에게 소리 없이 욕을 보내고 안을 주방으로 데려갔다.
- 사르먼과 진, 만지는 에그에게 미리 얘기를 들었는지 내가 들어가자마자 하던 일을 멈추고 등뒤에 있는 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사르먼이 가장 먼저 다가와서 안에게 악수를 건넸다.
"반가워요! 우리 욕심쟁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실제로 보니... 쟤가 정말 욕심쟁이 맞네."
사르먼이 안과 나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진은 따뜻한 눈빛으로 안을 보며 반갑다고 말하고 하던 일로 돌아갔다. 만지도 손을 한번 들어 보이며 인사를 하고는 커다란 쓰레기봉투 두 개를 들고 주방 뒷문으로 나갔다.
사르먼이 선반에 있던 접시를 나에게 줬다. 손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파이들이 담긴 접시였다.
"만지가 너 오면 주라고 한 거야. 우리 새 메뉴."
- "먹기 전에 꼭 시럽을 부어야 돼. 에그랑 같이 먹어."
사르먼이 당부했다.
"고마워요."
나는 파이 접시를 에그와 저그가 앉은 테이블로 가져갔다. 안은 미소 비슷한 것을 얼굴에 띠고 있었다.
"신메뉴로 나갈 거래. 시럽을 부으라던데."
"이번엔 또 무슨 마법을 부린 거야."
저그가 기대에 찬 얼굴로 시럽 주전자를 집어 들어 레몬 크림 파이 쪽으로 기울였다. 맑은 시럽이 주전자 부리에서 흘러나와 파이를 듬뿍 적셨다. 그러자 파이 가운데에서 싹이 튀어나왔다. 진짜 같은 초록싹이었다.
- 싹은 금세 자라서 꽃을 피웠다. 별처럼 생긴 작고 노란 꽃이었다. 저그가 안에게 시럽 주전자를 건넸다.
안은 아이 같은 얼굴로 파이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저그에게 주전자를 받아 조심스럽게 다른 파이에 시럽을 부었다. 진한 초콜릿 머드 파이였다.
머드 파이에서 줄기가 올라오더니 분홍색 연꽃이 피어났다.
- 파이는 네 개였다. 에그가 고른 사과 파이에서는 홍학 같은 빛깔의 튤립이 피어났고, 마지막으로 내가 시럽을 부은 산딸기 파이에서는 하늘거리는 보랏빛 제비꽃이 자랐다.
- 우리는 꽃이 핀 접시를 들고 우르르 주방으로 가서 멋지다고 외쳤다. 안조차도 흥분한 얼굴로 이렇게 예쁜 과자는 처음 본다며 주방 사람들에게 잘 먹겠다고 인사했다.
"꽃이 시들기 전에 먹어요."
- 나와 안, 에그, 저그는 테이블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용기를 내어 파이를 한입씩 먹었다. 정말 맛있었다. 인기 있는 메뉴가 될 것 같았다. 안도 파이에 홀려서 어느새 어색함을 잊은 듯했다.
- 어느덧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우리 넷은 속도와자정으로 갔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가게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화려한 커스터머들이 많았다. 변신에 오는 손님들과는 다른 타입의 사람들이었다.
머리가 세 개 달린 사람, 키가 삼 미터는 되어 보이는 사람(다행히 속도와자정은 천장이 높았다), 검은 피부에 빨간 줄무늬가 있는 팔이 여덟 개인 사람, 반인반마, 반짝이는 초록색 비늘로 피부가 덮여 있는 사람, 그리고 어디서나 눈에 띄는 요정계 커스터머 한 무리가 가게로 들어갔다.
- 그 사람들을 보며 에그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못 들어가는 거 아니야?"
"고리가 널 알잖아. 너만 한 커스터머가 어딨다고 그래."
내가 에그를 안심시켰다. 저그가 머뭇거리는 에그에게 팔짱을 끼고 가게로 끌고 갔다. 사실은 나도 위축이 됐다. 다른 커스터머들에 비하면 이마에 작은 뿔 하나가 달린 나는 초라한 것 같았다. 게다가 뿔은 커스텀한 것도 아니고 타고난 거였다.
- 하지만 막상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마음이 편해졌다. 우리를 신경 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눈에 띄지 않았다. 화려한 커스터머들 사이에서는 안도 평범해 보였다.
- 고리가 힘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험은 최근의 테러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흥겹던 분위기가 단번에 변했다. 장내가 조용해졌다.
험은 변신 초창기 때 가게 유리창에 돌을 던지던 사람들 얘기를 했다. 유리창이 하도 많이 깨져서 아주 단단한 유리로 바꿨더니 사람들이 도끼와 망치를 들고 몰려오는 바람에 질겁을 했다는 얘기였다.
"지금은 웃으면서 얘기하고 있지만 그때는 정말 심각했습니다. 밤마다 유니와 불 꺼진 가게에 마주 앉아 한숨을 쉬면서 가게를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얘기를 했어요. 저는 다른 곳으로 옮기자고 했지만 유니는 다른 곳으로 가도 똑같을 거라고 했죠. 사실 달리 갈 데도 없었어요. 유니가 없었다면 전 예전에 도망갔을 겁니다."
에그가 내게 유니가 누군지 알려줬다. 유니는 험의 여동생으로 이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험과 유니는 함께 변신을 만들었다. 노란길에서 가장 유명한 남매였다.
"지금도 가끔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듭니다. 삼십 년째인데도요. 하지만 여길 떠나서 대체 어디로 가겠어요? 여기가 제 집인데 말이에요. 여기 있는 분들에게도 노란길은 특별한 장소일 겁니다. 저는 항상 저 그대로이기보다 그 이상의 존재가 되고 싶었고 커스텀이 그 길을 열어줬습니다. 그건 누가 겁을 준다고 해서 그만둘 수 있는 일이 아니고요."
험의 말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휘파람 소리를 냈다. 험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갑자기 왜 이런 연설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고리가 지금까지 망하지 않고 속도와 같은 멋진 가게를 꾸려가는 게 기적 같은 일이라는 겁니다. 아마 여기 모인 여러분 덕분이겠죠. 속도와자정의 십 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험이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 내려갔다.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가게를 흔들었다. 사람들은 험을 잘 아는 데다가 좋아하기까지 하는 것 같았다.
- 안은 주스가 가득 든 컵을 들고 누군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안이 누구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지 시선 끝을 좇았다. 안이 보고 있는 사람은 머리를 높게 틀어 올린 여자였다. 여자는 알록달록한 앵무새 날개를 펴고 요정 계열 커스터머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위로 묶어 올린 머리가 천장에 자꾸 부딪혀서 금방 다시 내려와야 했다. 요정 계열 커스터머들이 그것을 보고 낄낄거렸다.
새 날개를 보니 치라가 생각나는 걸까? 아니면 그냥 마음에 들어서? 나는 약간 질투가 나서 안의 팔을 건드렸다.
"그만 좀 봐. 네 타입이야?"
"아니. 무성인인 것 같아서."
"그걸 어떻게 알아봐?"
"난 관심이 많으니까."
학기 초반에 안이 지나가듯 무성이 되고 싶다는 얘기를 했던 것이 생각났다. 안은 그 이후로는 그 얘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진지하게 생각 중인 거야?"
"글쎄. 가볍지는 않지."
그리고 안은 말이 없어졌다. 에그와 저그는 파티장 한쪽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둘 다 행복한 얼굴이었다. 그에 비해 나와 안은 뚱한 얼굴로 나란히 서서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 내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제발 또 그 마음의 방공호 안으로 들어가지 마."
"마음의 방공호?"
"그래, 그 깊고 어둡고 좁아터져서 난 들어갈 수 없는 그곳 말이야. 네가 방금처럼 갑자기 입을 다물고 혼자 생각에 잠기면 난 널 보면서 네가 다시 나오기를 기다려. 그때마다 난 비참하고 외로운 기분이 들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너에게 전부 얘기해 주길 바라?"
"아니, 지금은 파티에 와 있으니까 좀 즐기자는 거야."
기분이 안 좋아졌다. 재건의 날 때처럼. 내가 즐거울 거라고 기대한 날을 안은 꼭 망쳐버린다. 안은 내가 예상하지 못한 기쁨을 주는 사람이지만 날 괴롭게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나는 춤을 추는 사람들을 지나 구석으로 갔다. 안은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우리는 사람들 사이로 보이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안이 멀게 느껴졌다.
- 정확히 두시에 추첨이 시작되었다.
그때까지 나는 벽에 기대어 주스만 홀짝거리고 있었다. 추첨을 하기 전에 무대에서 공연이 펼쳐졌다. 다른 때였다면 공연을 보는 게 즐거웠을 것이다. 커스터머 댄서의 공연을 전부터 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공연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구겨진 기분 때문에 흥이 나지 않았다.
안이 쳐다봤던 앵무새 날개를 단 무성인이 화려한 머리장식을 하고 나타나 무대 위에서 춤을 췄다. 요정계 커스터머들에게 놀림을 받던 때와는 완전히 달라 보였다. 높게 묶은 머리에 달린 보석들이 그 -혹은 그녀, 무성인들은 그런 표현을 탐탁해하지 않는다- 가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며 반짝였다. 모조 다이아몬드들, 그리고 루비와 진주 장식. 조명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보석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 뒤에도 무대가 이어졌지만 모든 공연이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아득하게 보였다. 눈앞이 왠지 뿌옇게 흐렸다.
- 공연이 모두 끝난 뒤 고리가 무대로 올라왔다. 방금 전까지 커스터머들의 퍼포먼스를 보며 박수를 치고 휘파람을 불던 사람들이 잠시 조용해졌다.
"추첨권을 꺼내세요!"
고리가 무대 위에서 외쳤다. 사람들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나는 구겨진 추첨권을 손에 쥐고 있었다. 에그가 날 보고 손짓했다. 나는 사람들을 비집고 에그와 저그가 있는 곳으로 갔다. 안은 저그 옆에 있었다. 에그가 입 모양으로 '싸웠어?' 하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 다른 커스텀 가게들도 속도와자정의 십 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선물을 보냈다. 날개가 있는 사람을 위한 옷, 뿔이 달린 사람을 위한 모자, 발굽이 있는 사람이 신을 수 있는 신발 같은 것들이었다.
- 에그와 저그는 소파에 앉아서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나는 음료를 한 잔 더 주문하고 바에 앉았다.
"경품 받은 걸로 뭐 할 거야?"
안이 어느새 내 뒤에 와서 물었다.
"지느러미를 달아야지."
"앉아도 돼?"
"그럼."
안이 내 옆에 앉았다.
"아까는 미안해."
"싸움은 내가 걸었는데 뭐. 아까 무슨 생각하고 있었는지 얘기해 줄래?"
"지금은 파티에 와 있잖아. 기숙사로 돌아가면 얘기해 줄게."
"지금 가면 안 될까?"
"왜 안 되겠어. 나가자."
- 나는 에그와 저그 쪽을 봤다. 나와 인사할 시간은 없을 것 같았다. 안과 나는 속도와자정에서 나와 심야버스를 탔다. 우리는 충동적으로 해변에서 내렸다. 캄캄한 바닷가에서 파도 소리를 듣다가 안의 세 번째 집으로 갔다. 집안에 남아 있는 횃대는 없었다. 우리는 동이 틀 때까지 침대에서 사랑을 나눴다.
- 안이 말했다. 열 살 때 사진이라고 했다.
어린 주니는 지금의 주니와는 완전히 달랐다. 안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주니인 줄 몰랐을 것이다. 주니는 점박이 피부에 이마에는 더듬이가 달려 있었다. 눈은 툭 튀어나왔으며 그물 무늬의 얇은 날개도 있었다. 광이 나는 초록빛 날개였다.
- "이때는 셋이 사이가 좋았어."
안은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나는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냥 안의 손을 잡았다. 안은 날 보며 미소를 지었다.
"먼저 나가서 기다려줄래? 준비하고 나갈게."
나는 그렇게 했다.
- 몇 분이 지난 후 안이 건물 밖으로 나왔다. 안은 셔츠를 입고 있었다. 내가 선물했던 바로 그 파란색 리넨 셔츠였다. 여름 끝물에 나무들은 한껏 푸르고 싱그러워져 있었다. 그 나무들 사이에서 안이 빛났다.
"그거 입었네."
나는 왠지 수줍어져서 안에게 말했다.
"특별한 날이니까 좋은 옷을 입어야지."
안이 말했다.
- 우리는 속도와자정으로 갔다. 8월 첫째 주에 열렸던 파티 이후로는 처음 간 거였다.
고리가 날 보고 다가왔다.
"드디어 왔구나. 그때 봤던 지느러미 다시 볼래요?"
나는 그렇게 해달라고 했다. 고리가 홀로그램 거울이 있는 방으로 날 데려가서 지느러미를 보여줬다. 나는 홀로그램 거울로 지느러미가 달린 내 모습을 봤다. 이상하게도 예전 그 느낌이 아니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였을까. 생각해 보면 지느러미를 처음 본 게 4월이었으니 고작 몇 달이 흘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하니 벌써 일 년은 지난 것처럼 느껴졌다.
- 이제 나는 지느러미를 원하지 않았다.
- "다른 건 없을까요?"
내가 묻자 고리는 가게를 둘러보라고 권했다.
나는 방에서 나가기 전에 고리에게 돌에 대해 물어봤다. 돌이 가진 이상한 능력에 대해 고리는 내 돌이 일종의 돌연변이일 거라고 했다. 드물게 그런 돌연변이가 나온다는 것이었다. 고리는 살아 있는 돌을 만들 때 해변 동굴에서 주운 뼈다귀를 썼다. 커스텀에 쓸 재료를 채집하러 다니는 것이 고리의 일 중 하나였다.
"그 뼈다귀가 문제였던 것 같아요. 엄청 커다란 뼈다귀였거든요. 성분을 분석해보기도 했는데 어떤 생물의 뼈인지 알아낼 수가 없었어요. 께름칙하면 다른 돌로 바꿔줄게요."
"괜찮아요. 그럴 것까지는 없어요."
나는 방에 두고 온 돌을 생각했다. 그 귀엽고 영리한 돌을, 그 돌을 다른 돌로 바꾸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 나는 천천히 가게 안을 둘러봤다. 안은 안대로 커스텀 용품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멋진 것들이 많았는데 왠지 마음이 끌리는 건 없었다. 그렇다고 일을 더 미루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너무 오래 기다렸다. 더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 내가 진열장 앞에 서서 고민하고 있을 때 안이 다가왔다.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속보가 떴어."
나는 바로 뉴스를 확인했다. 말리의 재판 결과가 나왔다는 소식이었다. 말리는 최종심에서 징역 십 년을 선고받았다. 사람을 죽인 것치고는 낮은 형량이었지만 말리가 받은 학대를 감안하여 최종 선고를 내렸다고 했다. 재판 후에 말리가 한 말이 짧게 실려 있었다.
"기쁩니다. 무죄가 나올까 봐 걱정했어요. 그를 죽인 죄로 벌을 받는다는 건 제가 그 사람하고 다른 별개의 존재라고 인정받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요."
이제 말리에 대한 뉴스는 점점 줄어들 것이고 말리는 사람들에게 잊힐 것이다. 그렇다면 테러도 줄어들까? 그건 모르는 일이다.
- "상담 좀 하려고요.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거 좀 볼래요?"
고리가 작업하고 있던 것을 보여줬다. 파충류의 것 같은 날개였다.
깃털 없이 매끈했다. 폭은 넓었다. 검은색으로 보였는데 고리가 테이블에 달린 조명을 켜자 푸른빛이 돌았다. 아주 근사한 푸른빛이었다.
"용 날개예요. 멋지죠? 방금 막 마무리를 했어요."
고리가 직원 세 명과 함께 테이블에 뉘어 있던 날개를 들어 벽에 걸었다. 그러더니 나에게 날개를 만져보라고 했다. 날개 바깥쪽은 단단한 비늘로 덮여 있었다. 비늘 하나하나가 다 보석 같았다. 검고 푸른빛이 돌았다. 날개 안쪽도 만져봤다. 놀랄 만큼 부드러웠다. 날개 안쪽은 바깥쪽과 대비되는 쨍한 파란색이었다.
- 쫙 펴진 날개를 보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것은 아주 강해 보였다.
"이걸로 해도 될까요?"
나는 고리에게 물었다.
"당연하죠."
- "어떻게 됐어요?"
"서명하셨어요."
만세! 통화는 끊겨 있었다. 엄마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네 결정을 언제나 존중해, 수니. 어떤 순간에도 네가 원하는 걸 포기하지 마. 뿔이 꽤 자랐더라. 네 아빠가 달고 있던 뿔과 똑같아.'
나는 그 메시지를 한동안 보고 있다가 시술이 끝나면 연락하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 고리가 시술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설명해 줬다. 용 날개는 어깨와 등 근육에 직접 연결해야 하고 날개를 달기 전과 후에 유전자 구조에 변화를 주는 약물을 주사할 거라고 했다.
나는 날개를 다시 봤다. 내가 정말 저걸 원하는 걸까? 잠깐의 변덕인건 아닐까? 한번 날개를 달면 다시 떼어내기 어려울 텐데.
마음이 복잡해졌다. 시술실 문가에서 안이 날 보고 있었다. 안을 보자 점차 진정이 됐다. 날개를 단 나를 떠올려봤다. 가슴이 벅찼다. 난 저걸 원해!
나는 고리에게 준비가 됐다고 말했다.
- 회복실에는 창문이 없어서 밖이 보이지 않았다. 깊은 새벽처럼 느껴졌는데 시계를 보니 겨우 저녁 여섯 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혼자서는 몸을 일으킬 수가 없어서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덜컥 겁이 났다. 안이 어디 간 거지? 왠지 그애가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바보같이 눈물을 흘렸다.
- 안은 한참 후에 돌아왔다. 앉아 있기만 하는 것이 답답해서 산책할 겸 저녁을 사 왔다고 했다. 나는 안의 도움을 받아 앉았다. 앉아 있으니 등이 덜 아팠다. 한 자세로 너무 오래 누워 있어서 등이 아팠던 것도 같았다. 나는 안에게 내가 바보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을 얘기했다. 안은 내가 혼자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데 자기가 멀리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 안이 사온 샌드위치를 먹으며 그런 얘기를 나누는데 고리가 왔다.
"이제 날개를 펴보죠."
나는 먹던 샌드위치를 놓고 일어섰다. 몸이 살짝 휘청거렸다. 등에 무거운 짐을 메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무게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고리는 몸의 부담을 줄이려면 근육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근육과 관련된 커스텀 비용에 대해 물었다. 고리는 그건 나중에 직원과 상담하라고 했다.
- "이제 한번 펴볼까요?"
고리가 내 뒤에서 말했다. 나는 난감해졌다.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고리는 날개를 팔이라고 생각하고 팔을 편다는 느낌으로 어깻죽지를 움직여보라고 했다. 말이 쉽지 그렇게 바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날개는 도통 꿈적도 하지 않았다.
"한번 감 잡으면 그다음부터는 쉬울 거예요. 지금은 처음이니까 우리가 도와줄게요."
고리와 다른 직원이 내 양옆에 서서 날개를 한쪽씩 잡았다.
"천천히 펼게요. 어깻죽지에 힘을 주고 움직이세요."
- 고리와 직원이 내 날개 두 쪽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찢어지기 쉬운 귀한 천을 만지는 듯한 손길이었다. 날개가 잡아당겨지자 어깻죽지에 느낌이 왔다. 날개를 펼 때 어디에 힘을 줘야 할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안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안의 표정만 보면 내 몸이 두 갈래로 찢어지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그 심각한 얼굴을 보니 웃음이 났다.
안이 입은 셔츠에 눈길이 갔다. 안은 저걸 입으며 죄책감을 느꼈을까? 저 셔츠가 안에게도 변화를 의미할까? 나는 안이 안 되겠다고 말하며 셔츠가 든 상자를 덮었던 때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날개는 거의 다 펴졌다.
- "남은 건 혼자 해보세요. 날개를 끝까지 펴야 해요."
나는 고리의 말을 듣고 어깻죽지를 활짝 편다는 느낌으로 몸을 움직였다. 날개를 펴는 데 온몸을 집중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날개가 움직였다. 묵직한 것을 밀어내는 느낌이었다.
날개가 시원하게 쫙 펴졌다. 그 순간의 느낌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놀라운 감정이었다. 몸속이 뒤죽박죽 되는 동시에 제대로 맞춰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피가 뜨거워졌다. 흐르는 피가 흥분을 주는 물질을 싣고 내 몸속을 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건 진짜 멋진 기분이었다.
- 날개는 검푸른 빛으로 번쩍거렸다. 비늘은 스톤 같았다. 천 개의 스톤을 박은 것 같은 그 멋진 날개가 내 어깨와 등에 달려 있었다. 그 날개는 내 몸의 일부였다. 뿔이 나의 일부가 된 것처럼 날개도 나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봤다.
내 모습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던 적이 없다.
- 아침에 일찍 눈이 떠져서 돌과 함께 산책을 나갔다. 발걸음을 디딜 때마다 내 가슴속에서 사랑이 찰랑거렸다. 나는 시드 거리의 신선한 아침공기를 들이마셨다. 어떤 커다란 존재가 내가 사는 곳을 한 번에 뒤집어 청소를 해놓은 것 같다. 사실 거리의 공기가 신선한 것은 비 때문이다.
한낮에는 공기가 뜨겁고, 저녁에는 열기가 서서히 식는다. 새벽에는 비가 살짝 내려 거리가 촉촉해진다. 해가 완전히 뜨면 거리는 다시 바짝 마른다. 그게 9월 말부터 10월 초순까지의 시드 날씨다.
- 돌은 내 손 위에서 거리의 냄새를 훅 들이마신 뒤 기분 좋게 부르르 떨고는 아래로 폴짝 뛰어내렸다.
아침공기에서 잘 마른 빨래 냄새가 났다. 달콤한 냄새도 풍겼다. 버터 냄새였다. 오십 미터쯤 걸어가자 빵집이 보였다. 새로 문을 연 가게 같았다.
나는 빵집 문을 열고 들어가 둥근 빵 하나를 샀다. 아주 커다란 빵이었다. 안과 둘이서 충분히 먹고도 남을 크기였다. 우유가 남았던가? 작은 컵 두 개를 채울 정도는 남아 있던 것 같다. 나는 커다란 컵에 우유를 가득 부어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안도 은근히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아껴 마시는 우유도 나름대로 맛있다. 게다가 오늘은 매일 먹는 기숙사 빵이 아니라 제대로 된 빵집에서 산 빵을 먹을 테니 특별한 아침식사가 될 것이다.
10월의 첫 월요일. 오늘은 개교기념일이라 수업이 없다.
- 많은 일을 겪었지만 나는 대체로 잘 지낸다. 내가 이렇게 금방 시드에 익숙해질 줄은 몰랐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 아직 촌티를 못 벗었지만 그래도 나는 이제 그럭저럭 여기 사람처럼 보인다.
내 외모에서 웜스가 지워졌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을 바라지도 않고.
나는 내가 웜스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거울을 볼 때마다 내가 웜스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킨다. 머리카락은 붉고, 이마에는 진홍색 뿔이 났고, 등에는 용의 날개가 달린 내 모습을 보면 내가 예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 얼굴도 뭔가 변했다. 얼굴이 변한 건 커스텀이 아니라 사랑 때문이다. 가슴속에 넘칠 듯 찰랑거리는 사랑이 내 얼굴에 물결을 일으킨다. 나는 사랑에 빠졌다. 그 사실이 마음에 든다. 안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이 나를 안심시킨다.
나는 달라 보이는 나를 보며 생각한다. '나는 웜스야. 그게 내 출발선이야.' 내가 어디서 출발했는지 잊고 싶지 않다. 나는 점점 더 복잡한 존재가 되고 있다. 길을 잃지 않으려면 내가 출발한 곳이 어디였는지 가끔 돌아볼 필요가 있다.
-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중심가까지 걸었다. 아침 여섯 시 반이었다. 시간은 충분했다. 아직은 거리가 그리 환하지 않았다.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시간. 안개는 없었다. 길은 아직 젖어 있었다. 나는 이곳이 나에게 준 것들을 생각했다. 이곳이 나를 받아들여줬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감사함이 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누리는 것들로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다. 감사함을 느낄 뿐. 그 감정이 종교적인 것은 아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안은 그걸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일까?
-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사랑에 빠지면 순식간에 상대를 이해하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마법은 없었다. 사랑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할 힘을 준다. 그뿐이다. 안과 내가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처럼, 쪼개졌던 두 개의 거울이 다시 붙여진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건 순간적인 감정이다.
요즘 부쩍 대화가 말싸움으로 번질 때가 많아졌다. 우리는 서로가 완전히 지칠 때까지 토론을 벌인다. 안과 나는 완전히 다른 두 존재, 타인이다. 나는 여전히 안을 알고 싶다.
- "네가 돼봤으면 좋겠어. 한순간만이라도."
안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에 나는 그렇게 말했다. 긴 말싸움 끝에 힘이 빠져서 나온 말이었다. 키스를 할 때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대화를 하는 순간부터 문제가 생긴다.
"아무런 준비 없이 내가 된다면, 넌 바로 여기서 뛰어내릴 거야."
안이 창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기숙사 방에 있을 때였다. 우리는 창가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 있었다. 나는 안이 못되게 말한다고 생각했다. 안 답지 않게. 하지만 그애의 표정을 보고 진심으로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 "겨우 삼층에서 뛰어내린다고 죽겠어?"
나는 웃으며 농담을 했지만 마음이 아팠다. 안이 자신을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에 내가 절대로 안이 될 수 없다는 것에.
우리가 서로를 완벽히 이해할 날 같은 것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 동굴 구역에 한 번 가보기는 했지만 잠깐의 방문으로 그곳의 문화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안이 왜 그렇게 죄책감을 떨쳐버리지 못하는지 나는 사실 이해하지 못한다. 안은 그 얘기를 꺼내는 것 자체를 꺼린다.
안은 네 살 때부터 '의식'에 참여했다. 처음 쓸 줄 알게 된 단어 중에 '죄인'이 있었다. 동굴 구역의 학교에서는 모래 폭풍이 인간의 죄, 특히 방공호에 들어간 사람들의 이기심 때문에 벌로 내려진 재앙이라고 배운다. 나는 그런 문화를 가진 곳에서의 생활을 상상할 수가 없다.
나는 안에게 내재된 죄책감이 어떤 것인지, 그 죄책감이 얼마나 깊게 뿌리박고 있는지, 안이 그 뿌리를 왜 뽑아내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안도 마찬가지다. 안은 내가 웜스라는 사실을 왜 자꾸 상기하는지, 웜스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정서적으로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동생 세이에게 가지고 있는 죄책감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네가 왜 죄책감을 느끼는지는 알겠지만, 그건 네 탓이 아니잖아." 안이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화가 났다.)
- 우리 둘은 너무 다르다. 나는 대책 없이 솔직하고 안은 은밀하다. 나는 성질이 급한데 안은 서두르는 법이 없다. 원하는 것이 있을 때 나는 손을 뻗고 안은 한 발 뒤로 물러난다.
성격만이 아니라 사소한 습관, 취향, 외모도 다르다. 비슷한 점조차 없다.
그런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때로는 지나치게 즐겁다. 또 어떤 순간에는 아주 편안하다.
기숙사 방이나 안의 세 번째 집에서 그애와 몸을 붙이고 있으면 세상이 고요해진다. 우리가 있는 곳만 시간이 흐르는 것 같다. 문밖의 세상이 사라진다. 바깥의 모든 것은 멈추고 우리 둘만 남는다.
그런 순간에 우리는 타인이 아니다.
- 나는 그 느낌에 중독되어가고 있다. 가끔은 안이 나와 공유하는 쾌락에서 발을 빼려 할까 봐 두려워진다. 안의 얼굴에 죄책감이 스칠 때가 있다. 오후 내내 나를 멀리하며 자기만의 동굴에 틀어박혀 있을 때도 있다. 그럴 때 나는 내 할 일을 하며 안이 동굴에서 나오기를 기다린다. 그것에 점점 익숙해져 간다. 불안과 기다림. 그건 별로 좋지 않다.
이런 생각은 해충 같다. 내 안의 좋은 부분을 갉아먹는다. 나는 안에 대한 생각을 억지로 멈추고 현실적인 문제들로 눈을 돌렸다.
- 문제는 나다. 날개에 아직 적응을 못해서 일을 엉망으로 하고 있다. 지난 주말에는 접시를 세 번이나 깼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신메뉴 '소스를 부으면 꽃이 피는 파이'를 바닥에 엎어버렸을 때는 정말 부끄럽고 속상했다.
- 날개가 생긴 이튿날 아침에 나는 이를 닦다가 뒤로 넘어졌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나는 자꾸 중심을 잃고 휘청거린다. 몸의 균형이 깨진 느낌이다. 요즘 나는 멀쩡하게 걷다가도 휘청거리고, 조금만 걸어도 피곤해진다. 오래 서 있을 수도 없다. 다른 것보다 어깨가 너무너무 아프다. '날개가 있는 사람을 위한 근육보강제'를 매일 두 알씩 먹고 있지만 아직은 효과가 없다.
- 사실은 날개를 달고 일하는 것이 버겁다. 카페 사람들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본다. 에그는 별말 없이 무거운 쟁반을 다 자기가 가져간다. 배려는 고맙지만, 폐를 끼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다. 마음은 급한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내 몸이 날개를 받아들이려면 시간이 얼마나 더 필요할까? 얼마나 오래 걸릴까?
그 생각을 하니 갑자기 등이 뻐근했다. 산책을 너무 오래 했다. 걸어서 기숙사로 돌아가려면 한 시간은 걸린다. 돌아가는 길에 해변가에 들러 돌을 바닷물에 적셔줄 생각이었다. 돌은 한번 바다에 다녀오면 일주일은 행복해한다. 나는 돌이 행복한 상태일 때가 좋다. 행복한 돌을 보고 있으면 아무리 우울한 때라도 기운이 난다. 돌에게 바다와 행복은 동의어다. 바다로 가자. 나는 돌에게 속삭였다. 돌은 그 말에 반응했다. 내 작은 동물.
- 해변에 서서 바다를 본 게 얼마만이지? 안의 세 번째 집에서 바다를 볼 때가 더 많았다. 그 집의 창문은 너무 작다. 나는 그것이 아쉽지만 불평은 하지 않는다. 불평하기에는 시간이 아깝다. 안과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잠시 미래로 갈 때가 있다. 나중에 시간이 많이 흘러서 지금을 떠올린다면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내가 부러울 거야. 지금과 같은 행복이 영원하지는 않을 테니.
나는 나이가 든 나를 상상한다. 스무 살, 서른, 마흔... 그때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그때도 안은 내 옆에 있을까? 안은 나이가 들어서도 아름다울 것이다. 안이 나이 드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침대에서 나누는 얘기는 그런 것이다. 싸울 때 말고는. 싸우는 것도 괜찮다. 싸움은 우리를 깨뜨리는 게 아니라 견고하게 만든다. 실망과 이해를 반복하면서 안과 나의 관계는 조금씩 단단해진다.
- 나는 종아리가 잠기는 깊이까지 바다로 걸어 들어가 돌을 쥔 손을 물속에 넣었다. 돌이 숨을 들이쉬듯 바다를 만끽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물은 처음에는 차게 느껴졌다가 점점 따뜻해진다. 나는 돌을 손에 쥐고 조금 더 깊이 들어갔다. 바다 수영. 나는 헤엄쳤다. 아팠던 등이 편안해지는 느낌이 좋았다. 배영을 하면 날개의 무게 때문에 가라앉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그렇게 헤엄치고 있자니 고모 생각이 났다. 요즘은 인어 꿈을 꾸지 않는다. 나와 같은 뿔을 가진 어른 여자, 내 아버지의 동생. 물에 빠진 나를 구해준 사람. 꿈속에서 본 얼굴을 나는 잊어버렸다. 그리운 느낌이 드는 얼굴이었는데. 나는 섬에 찾아가 아버지의 형제들을 만나는 상상을 했다.
- 나는 해변 쪽으로 몸을 돌려 헤엄쳤다. 물속에 있을 때는 시간이 금방 간다. 안도 벌써 일어났겠지. 안은 배가 고파도 먼저 아침을 먹지 않고 날 기다릴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얼른 기숙사로 가고 싶어졌다. 그곳이 어디든 안이 있는 장소는 날 끌어당긴다. 내 마음이 안에게 매여 있다. 밧줄은 보이지 않지만 튼튼하다.
- 나는 내 날개가 근사해 보일 것을 안다. 바닷물에 씻긴 단단한 비늘이 햇볕에 빛났다. 보이지 않았지만 알 수 있다. 나는 날개를 펴려 등과 어깨에 힘을 줬다. 날개를 펴는 게 아직 익숙하지 않다. 애를 써도 안 펴질 때가 더 많다.
처음 속도와자정에서 날개를 폈던 감각을 떠올렸다. 충분히 힘을 주되, 부드럽게.
- 나는 주변을 돌아봤다. 하늘에는 태양이 있고, 바다는 물결치고, 해변은 모래로 덮여 있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 나는 많은 것을 사랑한다. 이 많은 사랑은 대체 어디에서 올까?
- 가슴속에서 또 한 번 물결이 일었다. 물결이 심장을 휘감는다. 세상의 모든 물체는 서로 끌어당기고 있다. 지구와 달이 서로를 끌어당겨서 파도가 일어난다. 나는 끌림에 대해 생각했다. 안과 나는 서로 끌어당기고 있다. 우리 둘 사이의 중력이 내 안에 물결을 만든다.
문득 내 안에서 물결이 소용돌이쳤다. 나는 바다에서 나와 해변을 걸었다. 빵은 다행히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잠시 몸을 말리고 팔과 다리에 붙은 모래를 털어냈다.
- 기숙사까지 걷는 동안 물결이 잔잔해졌다. 안이 내 곁에 있을 때 물결은 잠잠해진다. 물결이 일지 않는 드문 순간에 나는 더욱더 사랑을 강하게 의식한다.
언젠가 내가 날 수 있게 된다면 나는 매일 너에게 날아갈 거야. 그 말을 얼른 안에게 하고 싶었다. 나는 달렸다. 나를 끌어당기는 방향을 향해.
작가의 말
이 책을 쓰는 동안 나는 친구의 집과 부모님의 집을 오가며 살았다. 어느 날은 버스를 타고 부모님 집에서 친구의 집으로 가고 있는데 어디에도 내 집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버스 안에서 증발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그날도 버스에서 내렸고 곧장 카페로 가서 매일 하던 일을 했다. 글쓰기.
나는 다른 작가들이 쓴 책에서 '누구누구를 위해'라는 문장을 볼 때마다 그 말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쓰다니. 그럴 수가 있나?
<커스터머>를 쓰기 시작했을 때 이 작업은 나에게 탈출구였다. 그 탈출구는 오직 나를 위한 것이었다. 원고가 꼴을 갖출 쯤에는 그게 내 집이 됐다. 그리고 출간을 앞둔 지금 나는 이 책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와서 머물 수 있는 집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여러 의미에서 소수자이고, 그 때문에 어딘가에 가거나 누군가를 만날 때면 내가 환영받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을 느낀다. 그 불안은 집이 없는 기분과 비슷하다.
전에는 '누구누구를 위해'라는 말이 오만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말의 의미를 알 것 같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앞으로도 계속 당신을 사랑해도 될까요?' 아마 그런 의미인 것 같다. 나는 집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커스터머>를 썼다. 자기 이상의 존재가 되는 여정에서 집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위해. 그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감사를 전한다.
...
감사한 분들을 모두 적자면 책 한 권을 따로 써야 할 것이다. 미처 이름을 적지 못한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행운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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