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일루젼 2024. 9. 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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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알랭 드 보통 / 정영목
출판 : 청미래
출간 : 2022.11.10


       

           

예전에 읽었을 때는 별로라고 생각했었는데, 나이가 들고 다시 읽어보니 와닿는 구절이 많았다. 

 

우리는 흔히 '사랑에 빠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승우의 표현처럼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다'.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사랑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사랑에 빠진다'는 그런 무력함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일종의 '병'이나 '질환'처럼 '빠져들 수밖에 없는' 어떤 것.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짧은 기간 낭만적인 사랑에 빠지는 두 남녀를 그리고 있다. 상대를 완벽한 이상형으로 그렸다가, 점차 익숙해지며 서로에게서 실망스러운 면을 발견하고, 그리고 서로 다른 속도로 감정이 식어가며 관계가 멀어지는 과정은 통속적이다. 대부분의 연애가 이와 비슷한 -어떠한 원형과도 같은- 형태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알랭 드 보통은 '당신이 사랑하는 것은 과연 '그 사람'인가?'라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흔히 상대에게 내가 가지지 못한 장점이나 이상을 투사하고 그 환상을 사랑한다. 상대가 그에 걸맞지 않은 행동을 보일 때는 가차 없이 조율하려 들기도 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현상은 대체로 이성적 사랑에서 자주 나타나지만, 소설 속의 사례처럼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에서도 드물지 않게 관찰할 수 있다. 상대를 자신의 기준에 맞추고자 하는 욕망은 대상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 싶은 소유욕에서 기반한다. 그러나 상대가 제공하는 사랑이 '내가 아닌' 이로부터의 '사랑'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이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 상대가 '내'가 되어버리는 순간 그 사랑은 의미를 잃기 때문이다. -혹은 '나'는 결코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연인에 대한 이상화는 동시에 공포심을 불러온다. 상대가 완벽하고 멋지기 때문에, 바로 그 상대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뭔가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상대를 제대로 바라볼 마음이 없기 때문에, 상대가 자신의 본모습을 알면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겨난다. 이는 일정 부분 사실이기도 하다. 우리는 애초에 진정으로 '상대방'을 알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이 낭만적인 감정이 부서질 것이라는 예지에 가까운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서로를 차분히 관찰하고 알아가며 키워가는 성숙한 사랑에 대해서도 언급하지만, 그것을 지향점으로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굉장히 드물고 귀한 것 -그럼에도 완벽하지는 않은 것- 으로 그 존재 가능성에 대해서만 가볍게 다룰 뿐이다. 그리고 끝까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익명성 속에 남은 남자주인공 '나'는 다시 한번 낭만적 사랑에 빠져들 기미를 보이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완전히 깨닫지 않으면 반복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현 문화권 속에 주입되어 있는 '낭만적 사랑'에의 환상은 너무나도 강력하고 달콤하다. 

 

그러므로 바로 이 지점에서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내가 사랑하는 것은 너인가."

"네가 사랑하는 것은 나인가."

"나는 '사랑'을 할 수 있는가."

 

즐겁게 읽었다.  

   


   

  

- 1. 삶에서 낭만적인 영역만큼 운명적 만남을 강하게 갈망하는 영역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영혼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잠자리를 함께하는 일을 되풀이하는 상황에서, 언젠가는 꿈에 그리던 남자나 여자와 만나게 될 운명이라고 믿는다면 용서받지 못할까?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고통스러운 갈망을 해소해 줄 존재에 대한 미신적인 믿음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일까? 우리의 기도는 절대로 응답받을 수 없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비참한 순환에는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에 하나 하늘이 우리를 가엾게 여겨 우리가 그리던 왕자나 공주를 만나게 해 준다면, 그 만남을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 치부해 버릴 수 있을까? 한 번만이라도 논리에서 벗어나서 그 만남이 우리의 낭만적 운명의 징표라고 해석할 수는 없을까?  


- "미안해요, 인사도 못 했네요. 나는 클로이예요." 그녀는 약간 형식적으로 팔걸이 위로 손을 내밀었다.
이어서 서로의 신상명세를 주고받았다. 클로이는 전시회에 참석하느라 파리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녀는 소호에서 패션 잡지의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한 지 1년이 되었다. 왕립 예술대학에서 공부를 했고, 요크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 윌트셔로 이사했으며, 현재[나이는 스물셋]는 이슬링턴의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 6. "내 짐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비행기가 히드로 공항을 향해서 고도를 낮추자 클로이가 말을 꺼내더니 덧붙였다. "그런 걱정 해본 적 없어요? 짐이 사라져 버릴 거라는 걱정?" 
"그런 생각은 안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적은 있습니다. 두번. 한 번은 뉴욕에서, 또 한 번은 프랑크푸르트에서."
"맙소사, 난 여행이 싫어."
클로이는 한숨을 쉬더니 집게손가락 끝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도착하는 건 더 싫고요. 정말이지 나한테는 도착 불안 증세가 있나 봐요. 한참 밖에 나갔다 오면 내가 없는 동안 틀림없이 무슨 일이 일어났을 거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내 친구들이 모두 모여 내가 밉살맞은 계집애라고 만장일치로 합의를 봤다거나, 선인장이 죽었다거나."
"선인장을 키우세요?"
"대여섯 개. 얼마 전에 선인장 단계를 거쳤어요. 그래요, 음경과 관련이 있죠. 어쨌든 전에 애리조나에서 겨울을 보냈는데, 그때 선인장에 반해버린 거예요. 그쪽은 뭐 흥미를 느끼는 식물이 있나요?"
"엽란(葉蘭) 뿐입니다. 하지만 내 친구들이 모두 나를 밉살맞은 놈으로 여길 거라는 생각은 자주 하는 편입니다." 

- 7. 대화는 두서없이 이어져나가면서 서로의 성격을 흘끔거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구불구불한 산악 도로에서 잠깐씩 경치를 구경하는 것과 비슷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비행기 바퀴가 활주로에 닿았다. 엔진에는 역추진력이 걸려 있었다. 비행기는 지상 이동으로 터미널로 향하더니, 혼잡한 입국관리실에 짐을 토해냈다. 짐을 챙겨서 세관을 통과했을 때 나는 이미 클로이를 사랑하고 있었다. 

- 8. 어떤 사람을 두고 자신의 필생의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 살아보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다[따라서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클로이를 만난 직후, 그녀를 필생의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렇게 무리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런던에 도착하여 클로이와 나는 오후를 함께 보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몇 주 전에 런던 서부의 한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했으며, 가장 이상한 일이자 가장 자연스러운 일을 수행하듯 침대에서 저녁을 마무리했다. 그 뒤 그녀는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냈고, 나는 친구들과 함께 스코틀랜드로 갔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서로에게 전화를 했다. 때로는 하루에 다섯 번씩. 특별히 할 말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우리 둘 다 전에는 누구에게도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머지 모든 것은 타협이고 자기 기만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제야 비로소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있고 상대에게도 이해시킬 수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기다림 [유사 메시아적인 성격을 지녔다]은 끝이 났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에게서 내가 평생 서툴게 찾아다녔던 바로 그 여자를 발견했다. 그녀의 웃음과 눈매, 유머 감각과 책을 고르는 취향, 불안과 지성이 내 이상에 기적적으로 들어맞았다.  

- 9. 클로이를 만난 것을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딱 맞는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회의적 태도로 운명의 문제를 생각할 능력을 잃어버렸다. 우리 둘 다 그때까지 미신적인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클로이와 나는 우리가 직관적으로 느끼던 것, 즉 우리가 서로에게로 운명 지어졌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무수한 사실들 -비록 사소한 것일지라도- 을 손에 쥐게 되었다. 우리는 둘 다 짝수 해의 같은 달 자정 무렵 [그녀는 오후 11시 45분, 나는 오전 1시 15분]에 태어났다. 우리 둘 다 클라리넷을 분 적이 있으며, 둘 다 학교 다닐 때 <한여름 밤의 꿈> 공연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그녀는 헬레나 역이었고, 나는 테세우스의 시종 역이었다]. 우리 둘 다 왼쪽 발가락에 커다란 점이 둘 있었고, 똑같은 뒤쪽 어금니에 충치가 있었다. 우리 둘 다 햇빛이 밝은 곳으로 나가면 재채기를 했으며, 케첩 병에서 칼로 케첩을 긁어냈다. 심지어 우리의 책꽂이에는 똑같은 <안나 카레니나>[옛 옥스퍼드판]가 있었다. 사소한 일들일지 모르지만, 이 정도면 신자들이 새로운 종교를 세우기에 충분한 근거가 아닐까?

(리뷰자 주 : 서양권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면 셰익스피어 연극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이 더 드물지 않을까...? 게다가 <안나 카레니나>...)   

- 10. 우리는 사건들에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서사적 논리를 부여했다. 클로이와 나는 우리가 비행기에서 만난 것을 아프로디테의 계획으로 신화화했다. 사랑 이야기라는 원형적 서사의 제1막 제1장으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우리 두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하늘의 거대한 정신이 우리 궤도를 미묘하게 조정하여 우리를 어느 날 파리발 런던행 비행기에서 만나게 해 준 것 같았다. 우리의 사랑이 우리에게 현실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이 되지 못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야기들, 누군가 비행기를 놓치거나 전화번호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쓰이지 못했던 로맨스들을 무시해 버릴 수 있었다. 우리는 역사가들처럼 확고하게 실제로 일어난 일의 편을 들었다. 

- 11. 물론 우리는 좀 더 분별력 있게 굴었어야 했다. 

- 여섯 편이 있었고, 우리 둘 다 이 여섯 편 사이에서 망설이다가 결국 하나를 골랐다. 따라서 방금 말한 확률에 앞서 말했던 6분의 1을 다시 곱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클로이와 내가 12월의 어느 아침 영국 해협을 날아가는 브리티시 항공 보잉 767기에서 만날 최종 확률이 나오는데, 그 수치는 989.727분의 1이다.
 
- 15. 그래도 우리는 만났다. 이 계산은 우리에게 이성적 주장들을 납득시키기는커녕,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된 것에 대한 신비적 해석을 뒷받침해 주었을 뿐이다. 어떤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이 엄청나게 작은데도 결국 일어났다면, 운명론적 설명에 호소를 한다고 해도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동전을 던졌을 때 왜 앞 또는 뒤가 나왔는지 설명해 달라고 신에게 매달리지는 않는다. 그 확률이 2분의 1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클로이와 내가 옆자리에 앉을 확률처럼 작은 경우일 때, 989.727분의 1의 확률일 때, 적어도 사랑 내부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을 운명 이외의 다른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았다. 우리의 삶을 바꾸어버린 만남의 확률이 그렇게 작았던 것을 아무런 미신 없이 받아들이려면 대단히 냉철한 지성이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 하늘에서 [3만 피트 상공에서] 운명의 줄들을 잡아당기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 16. 사랑 내부의 관점에서는 삶의 우연적 성격을 목적성이라는 베일 뒤로 감춘다. 구원의 연인을 만나는 일이 객관적으로는 우연이고 따라서 가능성이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늘에서 천천히 펼쳐지는 두루마리에는 이미 기록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운명이라는 것을 만들어낸다. 인생에 있는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의미도 우리가 만들어낸 것일 뿐이며, 두루마리 같은 것은 없으며[따라서 우리를 기다리는 미리 정해진 숙명은 없다], 우리가 비행기에서 누구를 만나고 만나지 못하는 것에는 우리가 부여하는 의미 외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생기는 불안 -간단히 말해서 아무도 우리의 이야기를 기록해두지 않았고, 우리의 사랑을 보장해주지도 않았다는 불안- 에서 벗어나려고.

- 17. 일이 다르게 풀려나갔다면 클로이와 나는 서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이 필연성의 느낌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독특한 면모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충격적인 가정이다. 낭만적 운명론은 클로이와 내가 그런 생각에 빠지는 것을 막아주었다. 클로이가 내 삶에서 하게 된 역할을 다른 사람도 똑같이 해낼 수 있다고 어떻게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사랑하는 것은 그녀의 눈이고, 그녀가 파스타에서 물기를 빼고, 머리를 빗고, 전화 대화를 끝내는 모습인데. 

- 18. 나의 실수는 사랑하게 될 운명을 어떤 주어진 사람을 사랑할 운명과 혼동한 것이다. 사랑이 아니라 클로이가 필연이라고 생각하는 오류였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우리의 사랑이야기의 발단을 운명론적으로 해석했다는 것은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은 증명해 준다- 내가 클로이를 사랑했다는 것. 우리가 만나고 못 만나는 것은 결국 우연일 뿐이라고, 989.727분의 1의 확률일 뿐이라고 느끼게 되는 순간은 동시에 그녀와 함께하는 삶의 절대적 필연성을 느끼지 않게 되는 순간, 즉 그녀에 대한 사랑이 끝나는 순간이기도 할 것이다. 

- "사람들을 꿰뚫어 보는 것은 아주 쉽다. 하지만 그래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 19051994, 불가리아 태생의 유대계 영국 작가 - 역주)의 말이다. 타인의 흠을 찾아내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 그러나 그것이 또 얼마나 무익한지를 암시하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사람을 꿰뚫어 보는 일을 중단하고자 하는 순간적인 의지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설혹 그 과정에서 눈이 약간 먼다고 하더라도? 냉소주의와 사랑이 스펙트럼의 양극단에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가끔 사랑에 빠지는 것은 습관화되다시피 한 맥 빠지는 냉소주의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갑작스러운 사랑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장점을 의도적으로 과장하는 면이 있는 것이 아닐까?  

- 중요한 것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녀가 그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그녀가 하는 모든 말에서 완벽함을 찾아내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녀가 말하는 모든 일화를 쫓아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고 [있잖아요, 싱싱한 올리브를 주는 가게가 있었어요...], 정곡을 찌르지 못하는 그녀의 모든 농담을, 실마리를 놓치곤 하는 모든 사유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에게 완전히 감정을 이입하기 위하여 나 자신에게 몰두하는 것은 포기할 준비, 그녀의 모든 기억을 차곡차곡 분류 정리할 준비, 그녀의 유년의 역사가가 될 준비, 그녀의 모든 사랑과 공포를 배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마음과 몸 안에 흘러 다녔을 모든 것이 곧 매혹으로 다가왔다. 

 

 

- 9. 정말 무서운 것은 나 자신을 용납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워하면서 -어쩌면 그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끝도 없이 이상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도 클로이가 인간[이 말이 내포하는 모든 의미에서]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중단하고 싶었던 내 욕망도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희망이 자기 인식에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있는 것 -비겁함, 심약함, 게으름, 부정직, 타협성, 끔찍한 어리석음 같은 것- 을 상대에게서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랑에 빠진다. 우리는 선택한 사람 주위에 사랑의 방역선을 쳐놓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가 가진 결함으로부터 자유롭고, 따라서 사랑스럽다고 결정해 버린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우리 내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함을 찾으며,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합을 통하여 인간종에 대한 불확실한 믿음[자기 인식에서 나온 모든 증거에 위배됨에도 불구하고]을 유지하고 싶어 한다. 

- 10. 왜 이러한 것을 다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사랑에 빠졌던 것일까? 내 욕망의 비논리성과 유치함이 믿음에 대한 요구를 능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낭만적인 도취가 채울 수 있는 공허를 알고 있었다. 어떤 사람 -그것이 누구라도- 을 좋아할 수 있는 사람으로 확인하는 과정에서 오는 환희를 알고 있었다. 나는 클로이를 만나기 오래전에, 다른 사람의 얼굴에서  자신에게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함을 찾을 필요를 느꼈던 것이 틀림없다.

- 11. "가방 좀 검사해도 되겠습니까?" 세관 직원이 묻고는 덧붙인다. "신고할 것이 있습니까? 술이나 담배나 무기나..." 나는 오스카 와일드처럼 천재성을 발휘하여 "내 사랑밖에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 사랑은 죄가 아니었다.  


- 우리는 묻게 된다. "그/그녀가 정말로 그렇게 멋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 12. 인간 심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사건 다음 날 아침만큼 비옥한 영토는 없다. 그러나 클로이에게는 잠에서 빠져나오자마자 해야 할 급한 볼일들이 있었다. 그녀는 우선 옆의 욕실로 머리를 감으러 갔다. 나는 잠을 깨면서 타일에 물이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침대에 그대로 누워, 시트 속에 남아 있는 그녀의 몸의 형태와 냄새에 싸여 있었다. 토요일 아침이었다. 12월 태양의 소심한 빛줄기들이 커튼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녀의 내부 성소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서 그녀의 일상을 이루는 물체들, 매일 아침 그녀가 깨어나서 바라보는 벽, 그녀의 자명종, 아스피린 묶음, 침대 옆 탁자의 손목시계와 귀걸이를 본다는 것은 특권이었다. 나의 사랑은 클로이가 소유한 모든 것, 아직 완전히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무한히 풍부해 보이는 삶의 물질적 기호들에 대한 매혹으로 나타났다. 일상적인 것이라도 특별한 사람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 경이의 빛을 발산하기 마련이다. 한쪽 구석에 밝은 노란색 라디오가 있고, 마티스의 그림 인쇄물 하나가 의자에 기대어 놓여 있고, 전날 밤의 옷은 거울 옆의 옷장에 걸려 있었다. 서랍장 위에는 문고본이 쌓여 있었다. 그 옆에는 핸드백과 열쇠, 광천수 한 병, 코끼리 구피가 있었다. 


- ... 버려야 하며, 스스로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책임을 떠안을 각오를 해야 한다.

- 13. 클로이에게 상처를 준 일 때문에 나 자신에게 느끼게 된 혐오는 순간적으로 클로이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녀가 나를 위해서 이렇게 노력한 것 때문에, 나를 믿을 정도로 약하다는 것 때문에, 나 같은 인간을 선택해 결국 속이 뒤집어지는 꼴을 겪고 마는 그 형편없는 감식력 때문에 그녀가 싫었다. 나한테 칫솔을 주고, 아침 식사를 준비해 주고, 어린애처럼 침실에서 우는 것이 갑자기 너무 비루해 보였다. 나는 그녀의 이런 약한 모습에 벌을 주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 14. 내가 어쩌다가 이런 괴물이 되었을까? 내가 늘 일종의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 15. 우리가 아는 또 다른 마르크스(Grucho Marx, 1890-1977, 미국의 희극인 이 장에서 저자가 말하는 마르크스주의나 마르크스주의자 역시 그루초 마르크스와 관련된 것이다 - 역주)는 자신과 같은 사람을 회원으로 받아들여줄 클럽에는 가입할 생각이 없다고 농담을 했다. 이 농담은 클럽 회원권과 마찬가지로 사랑에도 적용되는 진리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터무니없는 모순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자의 입장에 대해서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클럽에 가입하기를 소망하면서 그것이 실현되자마자 그 소망을 잃어버리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클로이가 나를 사랑하기를 바랐으면서, 막상 그녀가 나를 사랑하자 그녀에게 화를 내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 16. 어쩌면 어떤 사랑은 아름답거나 고귀한 존재와 사랑의 동맹을 맺음으로써 우리 자신과 우리의 약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충동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를 사랑해 준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돌아와 우리를 애초에 사랑으로 몰고 간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원했던 것은 사랑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저 믿을 수 있는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를 믿게 되었으니 우리가 어떻게 계속해서 그 사람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 17. 클로이가 나 같은 불한당을 감정생활의 중심에 올려놓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 아닐까? 클로이가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 그녀가 조금이나마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녀가 나를 오해했기 때문이 아닐까?

- 18.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에 빠져서 자신의 사랑이 보답받기를 갈망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꿈이 공상의 영역에 남아 있는 것을 더 좋아한다.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나 자신을 더 낫게 생각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이 마르크스주의자를 우습게 생각할 때에만 마르크스주의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계속해서 최대로 존중하게 된다. 클로이가 나와 함께 자고 나에게 잘해줌으로써 오히려 그녀에 대한 내 평가 점수가 낮아졌다면, 그것은 혹시 그녀가 그 과정에서 나라고 하는 심한 전염병에 감염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 19.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르크스주의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열여섯 살 때 열다섯 살짜리 여자 아이를 잠시 사랑하게 된 적이 있다. 그녀는 학교 배구 팀 주장이었고, 아주 아름다웠으며, 열렬한 마르크스주의자였다. 그녀는 언젠가 학교 식당에서 내가 사준 오렌지 스쿼시를 앞에 놓고 앉아서 이렇게 말했다. "어떤 남자가 9시에 전화를 걸겠다고 하고 진짜로 9시에 전화를 하면 나는 그 전화를 받지 않아. 결국 그 남자가 필사적으로 얻으려고 하는 것이 뭐겠어? 내가 좋아하는 유일한 남자는 나를 계속 기다리게 하는 남자야. 9시 30분이 되면 나는 그 남자를 위해서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 되거든."
나는 그 나이에도 그 애의 마르크스주의를 직관적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그 애의 말이나 행동에 관심이 없는 척하려 ... 

- 우리는 불충분한 자료에 기초하여 사랑에 빠지며, 우리의 무지를 욕망으로 보충한다. 그러나 이론가들이 말하듯이, 시간이 지나면 우리의 몸을 분리하고 있는 살갗은 단지 육체적 경계일 뿐만 아니라, 더 깊은 심리적인 분수령 -넘어가려고 하는 것은 바보짓일 뿐이다- 을 드러낸다는 것을 알게 된다.

- 5. 따라서 성숙한 사랑의 이야기에서는 절대 첫눈에 반하는 일이 없다. 맑은 눈으로 물의 깊이와 성질을 완전히 조사할 때까지는 도약을 유보한다. 부모 노릇, 정치, 예술, 과학, 부엌에 비치할 적당한 간식에 관하여 철저하게 의견 교환을 한 뒤에라야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할 준비가 된 것인지 판단할 수 있다. 성숙한 사랑의 이야기에서는 자신의 상대를 진정으로 알 때에만 사랑이 자라날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나 왜곡된 사랑의 현실[우리가 알기 전에 태어나는 사랑]에서는 아는 것이 늘어날 경우, 그것은 유인이 아니라 장애가 될 수도 있다- 유토피아가 현실과 위험한 갈등을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 6. 서로에게서 매혹적인 유사성을 아주 많이 확인했음에도, 어쩌면 클로이는 제우스가 잔인한 일격으로 나한테서 떼어낸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3월 중순쯤, 그녀가 나에게 새 구두를 보여주었을 때였다. 

- 기독교적 사랑의 메시지는 특정한 경우보다는 보편적 경우에 어울린다. 모든 여자에 대한 모든 남자의 사랑, 서로 코 고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두 이웃 간의 사랑에 어울리는 것이다.

- 7. 매번 유리업자를 부르는 일이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비자유주의는 절대 일면적이지 않았다. 나한테도 클로이를 미치게 만드는 면이 수도 없이 많았다. 왜 너는 연극을 그렇게 따분해하니? 왜 너는 꼭 백 년은 된 것 같은 저고리를 입으려고 하니? 왜 너는 자면서 이불을 침대 밖으로 밀어내니? 왜 너는 솔 벨로(Saul Bellow, 1915-2005, 미국의 소설가 - 역주)가 그렇게 위대한 작가라고 생각하니? 어쩜 너는 아직도 주차를 할 때마다 바퀴를 보도에 걸쳐놓니? 왜 너는 자꾸 베개에 발을 올려놓니? 이 모든 것이 가정이라는 강제 수용소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며, 상대를 자신의 이상형에 더 가까이 끌어들이려는 일상적 시도들이다.

- 8. 이것에 대해서 무슨 변명이 가능할까? 부모와 정치가들이 메스를 꺼내 들기 전에 하는 낡은 말이 있을 뿐이다- 나는 너에게 관심이 있기 때문에 네 속을 뒤집어놓는다. 나는 네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너에게 영광을 주었으니 이제 너에게 상처도 주겠다. 

- 신문 판매소 주인의 샌들은 내가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짜증이 나지 않는다. 나는 그에게서 신문과 우유를 얻고 싶을 뿐이지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 나는 그에게 내 영혼을 드러내고 싶지도, 그의 어깨에 기대어 울고 싶지도 않다. 따라서 그의 신발은 나에게 거치적 거리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폴 씨를 사랑하게 된다면, 똑같은 평정한 마음으로 그의 샌들을 계속 마주 볼 수 있을까? 헛기침을 한 다음에 다른 것을 신어보라고 권하는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점이 오지 않을까?

- 16. 나와 클로이의 관계가 공포정치 수준에 이르지 않았던 것은 아마 그녀와 내가 사랑과 자유주의 사이의 선택에서 다른 관계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하물며 사랑의 정치인들 [레닌, 폴 포트, 로베스피에르]에게서는 더욱더 찾아보기 어려운 재료를 넣어서 반죽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국가든 남녀든 그 재료만 있다면 [그것이 다들 나누어 쓸 만큼 충분한지는 모르겠지만] 불관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재료는 다름 아닌 유머 감각이다.

- 17. 혁명가들이 무시무시한 진지함으로 나아가는 경향을 연인들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젊은 베르테르가 농담하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듯이, 스탈린이 농담을 하는 것도 상상하기 어렵다.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둘 다 필사적일 정도로 강렬하기 때문이다. 웃을 수 없다는 것은 인간적인 것들의 상대성, 사회나 관계에 내재된 모순, 욕망의 다양성과 충돌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짝이 평생 제대로 주차를 못 하거나, 욕조를 제대로 닦지 못하거나, 조니 미첼을 좋아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할 것임을 받아들일 필요성, 그럼에도 그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필요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 18. 클로이와 내가 우리의 차이 가운데 일부를 넘어설 수 있었다면 그것은 서로의 성격에서 발견되는 막다른 골목을 가지고 농담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나는 클로이의 구두를 싫어하는 태도를 버릴 수 없었고, 그녀는 계속 그 구두를 좋아했다[나는 시키는 대로 내려가서 그 왼쪽 구두를 집어 들고 와 닦아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그 사건을 농담으로 바꿀 수 있는 여지를 찾았다. 말다툼이 심해질 때마다 자신의 몸을 "창 밖으로 내던지겠다"고 위협함으로써 늘 상대에게서 웃음을 끌어낼 수 있었고, 그럼으로써 좌절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내 주차 실력은 나아지지 않았지만, 그 덕분에 나는 "알랭 프로스트"(유명한 자동차 경주 선수 - 역주)라는 별명을 얻었다. 클로이가 순교자 노릇을 하려는 데에 지쳤지만, 그녀를 "잔 다르크"라고 부르는 식으로 대응할 수 있을 때는 덜 피곤했다. 유머가 있으면 직접적으로 대립할 필요가 없었다. 자극물 위를 미끄러져 넘어갈 수 있었고, 그것을 비스듬하게 바라보며 눈을 찡긋할 수 있었고, 실제로 말을 하지 않고도 비판을 할 수 있었다.

- 19. 차이를 농담으로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표시[적어도 사랑의 90퍼센트를 이루는 노력을 하고 싶지 않다는 표시]일 수도 있다. 유머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일어나는 짜증의 벽들을 따라서 늘어서 있었다. 농담 뒤에는 차이에 대한, 심지어 실망에 대한 경고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긴장이 완화된 차이였고, 따라서 상대를 학살할 필요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 1. 아름다움이 사랑을 낳을까, 아니면 사랑이 아름다움을 낳을까? 클로이가 아름답기 때문에 내가 그녀를 사랑할까, 아니면 내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가 아름다울까? 무한히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는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전화를 하거나 맞은편 욕조에 누워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왜 우리의 욕망이 이 특정한 얼굴, 이 특정한 입이나 코나 귀를 선택했는지, 왜 이 목의 곡선이나 보조개가 우리의 완벽성의 기준에 그렇게 정확하게 응답했는지 묻게 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하나하나는 아름다움의 문제에 대해서 각기 다른 해결책을 제시하며, 그들의 얼굴 풍경만큼이나 독창적이고 특색 있는 방식으로 매력에 관한 우리의 관념을 재규정한다. 

- 6. 그러나 사랑 고백의 어려움은 언어에 관한 유사 철학적인 우려를 자아낸다. 내가 클로이에게 배가 아프다거나, 우리 집 정원에 수선화가 가득하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녀가 그 말을 이해할 것이라고 믿을 수 있다. 물론 수선화가 가득한 나의 정원의 이미지는 그녀가 가지는 이미지와 약간 다를 것이다. 그러나 두 이미지 사이에는 적당한 등가(等價) 관계가 형성된다. 말이 믿을 만한 전달자 역할을 함으로써 그 의미가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경계를 넘어간 셈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 쓰려고 하는 카드에는 그런 보장이 없었다. 내가 하려는 말은 언어 가운데 가장 모호한 것이었다. 그 말이 가리키는 것에는 안정된 의미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마음을 여행하고 온 여행자들은 자기들이 본 것을 재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사랑은 결국 나비 가운데 드문 색깔을 가진 종과 같아서, 종종 눈에 띄기는 하지만 결코 결정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았다. 

- 7. 그 생각을 하면 외로워졌다. 하나의 단어에서도, 언어에 현학적인 사람들 앞에서 펼치는 주장이 아니라 연인들이 서로를 이해시키려는 연인들에게 간절히 중요한 하나의 단어에서도 오류가 발견될 수 있다는 생각. 클로이와 나는 둘 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우리 각자의 내부에서 상당히 다른 것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우리는 밤에 같은 침대에서 같은 책을 읽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나중에 우리가 각기 다른 데서 감동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결국 다른 책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한 줄의 사랑의 메시지에서도 똑같은 차이가 발생하지 않을까? 나는 마치 어느 것이 가닿을지도 모르면서 허공에 수백 개의 포자를 방출하는 민들레가 된 느낌이었다. 

- 9. 내가 클로이에 대해 느낀다고 생각하는 것 가운데 얼마나 많은 부분이 그런 노래에 영향을 받았을까? 사랑한다는 나의 느낌은 그저 특정한 문화적 시기를 살기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닐까? 내가 낭만적 사랑을 자랑하게 된 동기는 어떤 진정한 충동이 아니라 사회가 아니었을까? 이전의 다른 문화와 시대에서라면 내가 클로이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을 무시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을까. 현재의 문화에서 스타킹을 신고 싶은 충동이나 모욕을 당했을 때 결투로 맞서고 싶은 충동을 [대체로] 무시하라고 가르치듯이. 

- "어떤 사람들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절대로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라 로슈푸코(La Rochefoucauld, 1613-1680, 프랑스의 작가, 모럴리스트 - 역주)의 말인데, 역사는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나는 클로이를 캠든의 중국 식당에 데려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중국 식당이 사랑과 관련하여 별로 존중받지 못해 왔다는 점을 고려할 때, 사랑의 고백은 다른 곳에서 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기도 했다. 심리인류학자 L. K. 수의 말에 따르면 서양 문화는 "개인 중심적"이고 감정에 큰 강조를 두지만, 반대로 중국 문화는 "상황 중심적"이며 남녀와 그들의 사랑보다는 집단에 초점을 맞춘다고 한다[그래도 식당 라오추의 지배인은 내 예약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 사랑은 절대 주어지지 않는다. 사랑은 사회에 의해서 구성되고 규정된다. 적어도 한 사회, 뉴기니의 마누족에게는 사랑이라는 말도 없다. 다른 문화에는 사랑이 존재하지만, 특정한 형태로 주어진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사랑의 시에는 수치, 죄책감, 양면 공존 등의 감정에 대한 관심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리스인들은 동성애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기독교인들은 몸을 배척했다. 음유시인들은 사랑을 보답받지 못하는 정열과 동일시했다. 낭만주의자들은 사랑을 종교로 만들었다. 아마 별로 행복하지 못한 결혼생활을 했을 S. M. 그린필드는 <소셜로지컬 쿼터리(Sociological Quarterly)>에 실린 글에서 오늘날 사랑은 근대 자본주의에 의해서 생명을 유지하는데, 그 목적은 다음과 같다고 말했다.
<... [자본주의는] 달리 부여할 동기가 없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동기를 부여하여 개인들이 남편-아버지와 아내-어머니라는 자리를 차지하는 핵가족을 구성하도록 유도한다. 핵가족은 재생산과 사회화에 필수적일 뿐 아니라, 상품과 용역을 분배하고 소비하는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도 한다. 전체적으로 말해서 사회체제를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만들고, 그럼으로써 이 체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 10. 내가 클로이를 생각하면서 이따금씩 느끼는 아픔, 울렁거림, 갈망을 어떤 사회에서는 종교적 경험의 징표들이라고 보았을지도 모른다. 맨발의 카르멜 수녀회를 세운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1515-1582]는 천사의 방문을 받고서 그 만남을 묘사한 적이 있는데, 현대인이라면 특별히 열린 정신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아마 오르가슴의 묘사로 받아들일 것이다. 
<천사는 아주 아름다웠다. 얼굴에는 불이 붙은 듯하여 높은 지위에 속하는 천사처럼 보였다. 높은 천사들은 온몸에 불이 붙은 것처럼 보인다니까... 그는 손에 황금 창을 쥐고 있었는데, 철로 된 창끝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그는 이것으로 내 심장을 여러 번 꿰뚫어, 창은 내 내장에까지 이르렀다... 고통이 너무 심해서 나는 몇 번 신음을 토했다. 그러나 이 강렬한 통증에서 엄청나게 달콤한 느낌이 스며 나와 나는 절대 그것을 놓치고 싶지 않았고, 앞으로는 내 영혼이 신 외에 어떤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을 것 같았다.> 

 

 

- 11. 결국 나는 기린 그림이 있는 카드가 내 감정을 정리해서 표현하기에 가장 좋은 자리는 아니라고, 저녁 식사 때까지 기다려보자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클로이를 태우기 위해서 8시쯤 그녀의 아파트로 가서 내 선물을 주었다. 그녀는 자신이 피카딜리의 상점 진열장에서 흘린 암시에 내가 반응한 것을 기뻐했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그녀가 며칠 뒤에 슬쩍 내비쳤기 때문에 알게 되었지만] 그녀가 가리켰던 것은 빨간색이 아니라 파란색이었다는 점이다[나는 창 밖으로 몸을 던지려다가 그녀의 만류로 단념했으며, 나중에 영수증을 가지고 가서 바꾸었다]. 

- 1. 6월 첫 주부터 여름이 다가오면서 런던은 지중해의 도시처럼 변했다. 사람들은 가정이나 사무실에서 나와서 공원이나 광장으로 갔다. 더위와 더불어 사무실에 새로운 동료가 생겼다. 그는 워털루 근처 사무용 건물 단지 프로젝트에서 여섯 달 동안 함께 일하게 된 미국인 건축가였다.

- 2. "런던에는 매일 비가 온다고 하던데 뜻밖이네!" 윌은 점심시간에 코벤트 가든의 한 식당에 앉았을 때 이렇게 말하고는 덧붙였다.
"믿어지지가 않는군. 나는 풀오버 스웨터만 잔뜩 가져왔는데."

"걱정 마, 월, 여기에서도 티셔츠를 파니까."

- 나는 5년 전에 윌리엄 노트를 처음 만났다.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공부를 같이 했다.  

- 7. 두 눈이나 모양이 제대로 갖추어진 입에서 매력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슈퍼마켓 계산대 위에서 움직이는 여자의 손에서 매력을 찾아내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클로이의 몸짓들은 빙산의 일각처럼 그 밑에 놓인 것을 가리켰다. 그것의 진정한 가치, 호기심이 덜한 사람이나 사랑이 덜한 사람에게는 당연히 의미 없어 보일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서 바로 연인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 8. 그러나 나는 저녁 러시아워를 뚫고 집을 향해 차를 몰면서 계속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내 사랑은 스스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내가 클로이에게서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부분들을 정작 그녀 자신은 자신의 진정한 자아에 비추어볼 때 부수적이고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사실 그녀에게 속하지도 않은 것을 내가 내 멋대로 읽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녀의 비탈진 어깨, 차의 머리받침에 걸린 머리카락 한 올을 보았다. 그녀는 나를 돌아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그녀의 앞니 사이의 틈을 보게 되었다.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와 나의 예민하고 감정이 풍부한 연인 사이에 실제로 일치하는 부분은 얼마나 될까? 

- 9.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본질적인 평범함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광기를 드러낸다. 그래서 방관자 자리에 선 사람들에게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지겹다. 방관자들은 묻는다. 저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한 인간 외에 무엇을 보는 걸까? 나는 클로이를 향한 내 뜨거움을 친구들과 공유해보려고 했다. 영화, 책, 정치와 관련하여 많은 공통점을 발견한 친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메시아적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을 마주한 무신론자들처럼 세속적이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친구들한테 세탁기 옆의 클로이, 영화관에서의 클로이와 나, 주문을 하려고 기다리는 클로이와 나에 대해서 열 번쯤은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플롯은 없고 액션조차도 거의 없는 이야기, 움직임이 거의 없는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는 중심인물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보고 나서야 나는 사랑이 외로운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 10. 물론 클로이가 식료품을 싸는 모습 자체에 사랑할 만한 면들이 내재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내가 그녀의 몸짓, 세이프웨이에서 우리와 함께 줄을 섰던 사람들에게는 달리 해석되었을 수도 있는 몸짓에 내가 부여하기로 결정한 어떤 것일 뿐이다. 사람이란 절대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 이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나 미워하는 바탕에는 주관적이고, 또 어쩌면 환상적인 요소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나는 월의 질문 덕분에 한 사람에게 속해 있는 특질과 연인이 그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특질 사이의 차이를 깨닫게 되었다. 윌은 신중하게도 클로이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지 않고, 더 정확하게 내가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느냐고 물었다.

- 11. 클로이는 오빠가 죽은 직후 [그녀가 막 여덟 살 생일을 지났을 때였다] 매우 철학적인 단계를 거치게 되었다. "나는 모든 것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어. 죽음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했거든. 그렇게 되면 누구라도 철학자가 되지." 그녀의 가족들이 지금도 넌지시 이야기를 하곤 하는 그녀의 주요한 강박관념들 가운데 하나는 데카르트와 버클리의 독자들에게는 익숙한 것이다. 클로이는 자기 눈을 두 손으로 가리고 가족에게 오빠가 살아 있다고 말했다. 그녀에게 가족이 보이는 것과 똑같이 마음속에서 오빠가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마음속에 오빠가 보이는데 왜 오빠가 죽었다고 하는가? 그녀는 거기서 더 나아가 실재(等價)에 더 큰 문제를 제기했다. 클로이는 부모에게 느끼던 감정 때문에, 그들에게 자신이 눈을 감고 그들을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죽일 수 있다고 [적대적인 충동의 힘과 마주한 여덟 살짜리 소녀답게 싱긋 웃으며] 말했던 것이다. 물론 이 계획은 부모에게서 심오하게 비철학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 12. 그러나 유아론(唯我論)에는 한계가 있다. 클로이에 대한 내 관점이 현실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완전히 판단력을 잃은 것일까?  

-  작은 가능성이 주는 기쁨이 더 큰 가능성이 주는 혐오를 압도하기 때문에 신에 대한 우리의 신앙은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어쩌면 사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연인들은 오랫동안 철학자 노릇을 할 수가 없다. 연인들은 의심하고 캐물으려는 철학적 충동에 대립되는, 믿고 신앙을 가지려는 종교적 충동에 굴복한다. 연인들은 사랑 없이 의심을 하는 것보다는 틀려도 사랑을 하는 모험을 더 좋아한다. 
 
- 7. 어느 날 저녁 클로이의 침대에 앉아서 장난감 코끼리 구피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그런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오갔다. 클로이는 어렸을 때 구피가 자기 삶에서 엄청나게 큰 부분을 차지했다고 말했다. 구피는 그녀의 가족만큼이나 현실적인 존재였으며, 그녀에게 공감해 주는 면에서는 가족보다 훨씬 더 나았다. 구피에게는 그 나름의 일상, 좋아하는 음식, 잠자고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나 좀 더 냉정하게 본다면 구피는 전적으로 그녀의 창조물이고, 그녀의 상상 바깥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클로이에게 구피가 정말로 존재하느냐고 물었다면, 클로이와 그 코끼리의 관계는 완전히 박살이 났을 것이다. 이 재미있는 장난감이 실제로 너와 독립적으로 살아 있는 거야, 아니면 네가 그냥 지어낸 거야? 순간 연인과 그의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비슷하게 신중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연인에게도 네 사랑으로 꽉 채워진 이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냐, 아니면 네가 상상한 것에 불과하냐 하는 질문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

- 8. 의학사를 보면 자신이 달걀 프라이라는 이상한 망상에 빠져서 살아가는 사람의 사례가 나온다. 그가 언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찢어질까 봐" 아니면 "노른자가 흘러나올까 봐" 어디에도 앉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의사는 그의 공포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진정제 등 온갖 약을 주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어떤 의사가 미망에 사로잡힌 환자의 정신 속으로 들어가서 늘 토스트를 한 조각 가지고 다니라고 제안했다. 그렇게 하면 앉고 싶은 의자 위에 토스트를 올려놓고 앉을 수가 있고, 노른자가 샐 걱정을 할 필요도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이 환자는 늘 토스트 한 조각을 가지고 다녔으며, 대체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 9. 이 이야기의 요점이 무엇일까? 이 이야기는 사람이 미망[사랑, 자신이 달걀이라는 믿음]에 빠져서 살 수도 있지만, 그것을 보완해 주는 것[비슷한 미망에 빠져 있는 클로이와 같은 연인, 토스트 한 조각]을 찾아내면 모든 일이 잘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미망은 그 자체가 해로운 것이 아니다. 혼자서만 그것을 믿을 때,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못할 때만 해가 된다. 클로이와 내가 사랑의 노른자위를 말짱하게 보존할 수만 있다면, 진실이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1. 나와 함께 있음으로 해서 내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클로이는 카밀레 차에 사각 설탕이 녹는 것을 지켜보면서 말했다. "나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에 함께 살 수는 없어. 나는 혼자 살지 않으면 녹아버리는 사람이야. 내가 너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야. 너만을 원한다는 것, 나한테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두려운 거야. 그러니까 이것이 전체적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내 모습 가운데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이해해 줘. 안타깝지만 나는 가방을 든 여자(원래는 전 재산을 가방에 넣고 거리나 공원을 방황하는 중년부인을 가리키는 말 - 역주)로 남아야 할 것 같아."

(리뷰자 주 : 카밀레 차는 카모마일 차의 다른 표현이다.)

- 2. 나는 클로이의 가방을 히드로 공항에서 처음 보았다. 광택이 있는 녹색 어깨띠가 달린, 밝은 분홍색 원통형 가방이었다. 그녀는 내 아파트에서 자고 가게 된 첫날밤 그 가방을 들고 문간에 들어서며 다시 한번 그 거슬리는 색깔을 사과했다. 칫솔과 다음 날 입을 새 옷을 넣어오느라고 가방을 가져왔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녀가 잠깐 그런 식으로 가방을 들고 다니다 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절대 가방을 포기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 가방을 다시 쌌다. 마치 헤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귀걸이 하나라도 두고 가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해체의 위험에 빠지기라도 할 것처럼. 

- 3. 그러나 그녀의 독립에 대한 크나큰 열망에도 불구하고, 물건을 떨어뜨리고 가는 일은 생기기 마련이었다. 그것은 칫솔이나 구두가 아니라 그녀 자신의 조각들이었다. 그것은 언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클로이는 나에게 그녀의 독특한 말투를 남겨두었다. 그녀는 "절대"라는 말 대신에 꼭 "두 번 다시"라는 말을 사용했으며, 전화를 끊기 전에는 "몸조심해"라고 인사를 했다. 반대로 그녀는 나의 "완벽해"라는 말과 "네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이라는 언어습관을 익혔다. 이어서 우리 사이에 습관들이 새어나가기 시작했다. 나도 클로이처럼 침실에서는 완전히 불을 끄게 되었고, 그녀는 나처럼 신문을 접게 되었다. 나는 무슨 생각을 할 때에 소파 주위를 뱅뱅 돌게 되었으며, 그녀는 카펫 위에 눕는 것에 맛을 들였다. 

- 근엄한 표정으로 창 밖 거리를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클로이도 똑같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표정으로 메모지를 접어 호주머니에 넣었다. 이 괴상한 사건은 시체 사건처럼 음침하지는 않았지만 그 사건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라이트모티프(악극에서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중심 악상 - 역주)가 되어,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에서 그 사건을 끊임없이 다시 불러내곤 했다. 우리는 식당에서 가끔 그때 그 베이글 가게의 남자와 똑같이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말없이 메모를 건네곤 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소금 좀 건네줘 같은 말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가 갑자기 깔깔대는 모습을 보고 괴상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라이트모티프의 핵심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 기초가 되는 장면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당사자들이 계속 참조하는 사건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기 참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행동이 옆줄에 선 사람들을 미치게 만드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 13. 그 외에도 수많은 공동의 경험이 있었다. 우리는 사람들을 만났고, 여러 가지를 보고, 하고, 들었다. 이것은 우리가 공동의 유산을 창조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어느 저녁 식사자리에서 만난 정신분석가는 클로이에게 자신이 현재 환자 두 사람과 잠자리를 함께한다고 말했다. 내 친구 윌 노트는 처음에는 클로이에게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더니, 건축에 관한 잘 알려지지 않은 책을 보내면서 기묘한 쪽지를 끼워 넣곤 했다. <강철 미래의 재료>라는 책에는 "우리가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아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메모가 첨부되었다. 클로이의 코끼리에게 잠자리 친구를 만들어주려고 바스에서 장난감 기린을 샀는데, 클로이 직장의 목이 긴 동료의 이름을 따서 제프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기차에서 만난 여자 회계사는 늘 핸드백에 총을 넣고 다닌다고 고백했다... 

- 14. 그러한 일화들 자체가 흥미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클로이와 나만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일화들과 관련된 부수적인 연상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라이트모티프들은 중요했다. 그것이 우리에게 우리가 서로에게 남이 아니라는 느낌을 주었고, 일들을 함께 겪어가며 산다는 느낌을 주었으며, 함께 끌어낸 의미를 기억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라이트모티프들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고 해도, 그것은 접착제 역할을 했다. 그 라이트모티프들이 만들어낸 친밀성의 언어는 클로이와 내가 둘이서[정글을 뚫고 나가거나, 용을 죽이거나, 심지어 아파트를 함께 쓰지 않고서도] 하나의 세계 비슷한 것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기억나게 해 주었던 것이다. 

- 1. 7월 중순의 어느 일요일 저녁, 우리는 포토벨로 로드의 한 카페에 앉아 있었다. 아름다운 날이어서 종일 하이드 파크에서 일광욕을 하며 책을 읽었다. 그러나 5시 무렵부터 나는 우울증에 빠져들었다. 집으로 가서 이불 밑에 숨고 싶었다. 오래전부터 일요일 저녁이면 우울했다. 죽음, 끝내지 못한 일, 죄, 상실이 떠올랐다. 우리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클로이는 신문을 읽었고, 나는 창 밖의 차량과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클로이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너 또 길 잃은 고아 같은 표정을 짓고 있네." 전에는 아무도 내 표정을 그렇게 부른 적이 없었지만, 클로이가 말하는 순간 갑자기 그 말이 그때까지 내가 느끼던 혼란스러운 슬픔에 딱 들어맞는 표현이 되면서, 내 우울도 조금은 덜어지는 듯했다. 나는 그 말 때문에, 내가 스스로 정리할 수 없었던 느낌을 그녀가 알고 있다는 것 때문에, 그녀가 기꺼이 내 세계로 들어와 나 대신 그것을 객관화해 주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강렬한 [그리고 어쩌면 균형이 잡히지 않은] 사랑을 느꼈다. 고아에게 고아라고 일깨워줌으로써 집으로 돌려보내주는 것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 2. 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 3.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오직 인간만이 연체동물이나 지렁이와는 달리 자신을 규정하고 자의식을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어디에서 끝나고 다른 사람들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지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제대로 된 느낌에 이를 수 없다. "혼자서는 절대로 성격이 형성되지 않는다." 스탕달의 말이다. 성격의 기원은 우리의 말과 행동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자아는 유동체이기 때문에 이웃들이 윤곽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자신이 온전하다는 느낌을 얻으려면, 근처에 나 자신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 때로는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 4.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제대로 된 정체성을 소유할 능력을 상실한다. 사랑 안에서 자아가 지속적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많은 종교에서 우리를 볼 수 있는 신이라는 개념이 중심을 차지하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누가 나를 본다는 것은 내가 존재한다고 인정받는 것이다. 나를 보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신이나 짝이라면 더욱 좋다. 우리가 누구인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 우리의 역사를 수도 없이 말해주었는데도 우리가 결혼을 몇 번 했는지, 자식이 몇 명인지, 우리 이름이 브래드인지 빌인지, 카트리나인지 캐서린인지 자꾸 잊어버리는 [우리도 그들에 대해서 똑같이 잊어버린다]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다가, 마음속에 우리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새겨두고 있는 사람의 품에서 시야에서 사라질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를 발견한다는 것은 위로가 되는 일이 아닐까?  

- 5. 의미론적으로 볼 때 사랑과 관심이 거의 맞바꾸어 쓸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나는 나비를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는 "나는 나비에 관심이 많다"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며, 그 관심으로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무슨 말을 하는지 스스로 더 풍부하게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클로이는 나를 이해하기 때문에 나에 대한 그녀의 행동에는 "나"의 확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요소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내 기분의 많은 부분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것, 그녀가 내 취향을 아는 것, 그녀가 나 자신에 대해서 나에게 이야기해 주는 것, 그녀가 나의 일상과 습관을 기억하는 것, 그녀가 나의 공포증을 인정하는 것에는 다양한 "나"의 확인이 수도 없이 포함되어 있었다.

 

- 클로이는 나에게 우울증이 있다는 것, 나에게 수줍음이 많으며 전화로 이야기하기를 꺼린다는 것, 하룻밤에 여덟 시간은 자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다는 것, 식사가 끝난 뒤에 식당에서 뭉그적거리기를 싫어한다는 것, 예의를 공격적 방어의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것, 예나 아니요로 대답하기보다는 "아마”라고 대답하는 쪽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인용하고["지난번에 너는 그런 종류의 아이러니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잖아..."], 나의 성격의 요소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을 끈기 있게 마음속에 담아두었다["너는 ...할 때는 꼭 당황하더라...", "너처럼 기름 넣는 것을 자주 잊는 사람은 처음 보았어..."].

 

- 나는 클로이가 제공하는 내 인격에 대한 통찰들 덕분에 성숙할 기회를 얻었다. 다른 사람들은 구태여 관심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 성격의 측면들을 지적하는 데에는 연인의 친밀성이 필요하다. 클로이는 내가 방어적이라거나, 비판적이라거나, 아니면 더 실감나게 "신경이 곤두선 너절한 놈"이라거나, "굳어버린 고깃국물처럼 역겹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의 평상시의 자기 반성에서라면 [내적인 조화를 위해서] 피해 갔을 측면, 다른 사람들이라면 관심이 없어서 보지 못했을 측면, 침실의 정직성이 있어야만 밝힐 수 있는 측면과 직면하게 되었다.

- 6. 다른 사람들과 누리는 행복은 두 가지 종류의 과잉에 의해 제한이 되는 것 같다. 하나는 질식이고 또 하나는 외로움이다. 사랑의 경계에는 두 가지 해체가 있는 것 같다. 클로이는 늘 전자가 더 큰 위험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부모의 심판하고 통제하는 태도에 억압을 느끼면서, 학창 시절에는 완전히 혼자 시간을 보내는 꿈을 꾸곤 했다. 대학에 가기 전에 몇 년 동안 휴일이나 토요일에 일을 해서 모은 돈으로 1년 동안 애리조나에 다녀왔다. 그녀는 지도에서 아무렇게나 고른 아주 작은 읍 변두리에 오두막을 하나 빌렸다. 선반 하나에 가득 들어갈 만큼 책을 구했다. 전부터 늘 읽고 싶었던 책이었다. 그녀는 달의 표면 같은 땅 위로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며 그 책들을 읽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불과 몇 주가 지나지 않아 그녀는 평생 갈망했던 고독 때문에 방향감각이 흐트러지고 겁이 나기 시작했다. 가게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듣자 그 소리가 충격으로 다가왔다. 책들은 멀게 느껴져 매력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존재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빤히 들여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 내가 얼마나 먼 사람이기에 그런 다급한 상황에서도 깨우지 않은 거야? 그러나 내 분노[질투의 한 형태일 뿐이었다]는 투박하여, 내가 아주 느릿느릿 배우게 된 것을 고려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리 없이 고통을 겪어내려고 하는 것이 클로이를 지배하는 뿌리 박힌 경향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거의 죽을 지경이 되지 않는 한 나를 깨우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절대로 남에게 책임을 지우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녀의 성격에서 이 실마리 한 가닥을 찾아내자, 다른 측면들이 그와 관련된 표현들로서 덩달아 이해되었다. 그녀가 부모에 대해서 분노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잔인한 아이러니로만 표현했다], 자기 비하, 자기 연민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혹독한 태도, 의무감, 심지어 우는 방식[히스테리를 부리듯 울부짖기보다는 소리 없이 흐느끼는 것까지도. 

- 8. 나는 마치 무릎 위에 뒤엉킨 케이블 가닥들을 올려놓은 채 맨홀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전화수리공처럼 서서히 클로이의 인격의 주요한 몇 가지 실마리를 확인하게 되었다. 여러 사람과 함께 식당에 갈 때마다 그녀가 인색하게 구는 사람을 싫어한다는 것도 알았다. 나는 그녀에게 덫에 걸리고 싶어 하지 않는 욕망이 있다는 것, 그녀의 성격에 사막으로 탈출하고 싶어 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그녀의 변함없는 시각적 창조성에 감탄했다. 그것은 그녀의 일에서만이 아니라, 식탁을 차리거나 꽃병을 배치하는 데서도 나타났다. 나는 그녀가 다른 여자들하고 있을 때는 불편해하고, 남자들과 함께 있는 것을 훨씬 편하게 느낀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나는 그녀가 스스로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굳건하게 의리를 지킨다는 것, 본능적인 씨족 또는 공동체 의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특징들을 통해서 클로이는 천천히 내 마음에서 복잡한 통일성을 지니게 되었다. 일관성을 지닌,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사람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영화나 사람에 대한 취향 정도는 굳이 물어보지 않고도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 9.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존재에 정통성을 부여해 주기를 요구할 때 일어나는 문제는 정확한 정체성을 가지는 일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좌우될 위험이 생긴다는 것이다. 만일 스탕달의 말대로 다른 사람들 없이는 성격도 있을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침대를 함께 쓰는 사람은 능숙한 중개자여야 한다. 아니면 우리는 왜곡되거나 잘못 표현되고 말 테니까.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란 그 정의상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우리를 늘 왜곡하는 것이 아닐까? 

- 10.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 자신에 대한 느낌은 달라진다. 우리는 조금씩 남들이 우리라고 생각하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자아는 아메바에 비유할 수 있다. 아메바의 외벽은 탄력이 있어서 환경에 적응한다. 그렇다고 아메바에게 크기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자기 규정적인 형태가 없을 뿐이다. 부조리한 사람은 나에게서 나의 부조리한 측면을 끌어낼 것이다. 그러나 진지한 사람은 나의 진지한 측면을 끌어낼 것이다. 누가 나를 수줍어한다고 생각하면, 나는 아마 결국 수줍어하게 될 것이다. 누가 나를 재미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계속 농담을 할 가능성이 높다.

- 11. 클로이는 내 부모님과 함께 점심을 먹을 때 식사 시간 내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그녀에게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 자신도 이해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녀는 활기차고 재미있어 보이려고 애를 썼는데, 식탁 건너에서 자신을 마주하고 있는 낯선 두 사람의 의심과 부딪히자, 평소의 자아로 뻗어나갈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내 부모님이 드러나게 심술을 부린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뻣뻣한 태도 때문에 클로이는 한두 마디로 대답을 하는 수준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것을 보자 다른 사람들에게 낙인을 찍는 것은 보통 소리 없는 과정임을 알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강요하지 않는다. 자신의 반응을 통해서 그것을 채택하라고 암시할 뿐이다. 은밀하게 우리에게 정해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 15. 클로이의 아메바적인 직선은 무슨 의미일까? 그저 내가 그녀를 다 이해할 수는 없다는 뜻일까?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지만, 냉엄하게 감정이입의 한계를 보여주는 면이기도 하다. 무엇 때문에 내 노력이 좌절을 겪었을까? 내가 그녀를 인간 본성에 대한 나의 기존의 개념들을 통해서만 헤아릴 수밖에 없었다는 한계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에 대한 나의 지식은 나 자신의 과거를 통해서 여과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로키 산맥에 가서 "꼭 스위스 같군" 하는 식으로 적응하는 유럽인처럼, 나는 클로이가 우울한 상태에 빠졌을 때 "이것은 클로이가 X를 느끼기 때문이야... 내 누이동생이 ... 했을 때처럼" 하는 식으로 그 원인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를 파악하려고 할 때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해란 나의 생물학적 특징, 계급, 심리적 역사에 의해 형성된 것이었다. 

- 16.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성격의 어떤 요소들만을 집어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의 눈길은 바비큐 꼬치에 비유할 수도 있겠다. 예를 들면 나는 클로이의 특징들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들을 꼬치에 꿨다[또는 높이 평가하거나 나와 관련이 있다고 여겼다].

- 교묘하게 클로이와 말다툼을 시작했다. 그녀 때문에 낯선 여자와 입 맞추지 못한 것에 대한 벌이었다[그 여자는 자신이 하지 못한 것을 전혀 아쉬워하는 것 같지 않았지만]. 역으로 가는 길에 클로이는 묘하게도 사팔뜨기 택시 운전사와 시시덕거리며, 자기는 여름에 배꼽을 드러내기를 좋아한다고 기사에게 말했다. 그 바람에 나는 골이 났는데, 이것은 세 시간 뒤 패딩턴 역에 도착할 때까지 풀리지 않았다.

- 3. 바스에서 보낸 주말을 "유쾌했다"는 단어로 요약하는, 그렇게 하여 사실 괴롭고 양면적인 감정의 조직들로 이루어진 사건들에 질서를 도입하는 단순한 이야기를 한 것에 대해서는 우리 자신을 용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따금씩 생략 밑의 흐름과 마주치는 것도 우리 자신 덕분인지 모른다. 나는 클로이를 사랑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보다 훨씬 더 얼룩덜룩했다.

- 4. 클로이의 친구 앨리스가 금요일 밤 저녁 식사에 우리를 초대했다. 클로이는 초대를 받아들이면서 내가 앨리스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앨리스의 저녁 식사 자리에는 여덟 명이 앉아 있었다. 네 명이 앉을 자리에 여덟 명이 앉았으니, 음식을 입에 넣으려면 서로 팔꿈치가 부딪히기 마련이었다. 앨리스는 밸럼의 한 주택 꼭대기 층에 혼자 살고 있었으며, 예술위원회에서 비서로 일했다. 나도 그녀를 약간은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5. 우리가 우리 짝과 얼마나 행복하든, 그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을 쫓는 일은 방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 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데도 왜 그것이 구속으로 느껴지는 것일까? 짝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기울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왜 그것을 아쉬워할까? 사랑의 요구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늘 갈망의 요구까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6. 나는 앨리스가 말을 하고, 꺼진 촛불을 켜고, 접시를 들고 부엌으로 달려가고, 얼굴에 흘러내린 금발 한 가닥을 손으로 빗어넘기는 것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낭만적인 노스탤지어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나의 연인이 될 수도 있었지만 운이 닿지 않아 우리가 제대로 알 기회도 얻지 못했던 사람과 마주치면 우리는 낭만적인 노스탤지어에 젖는다. 다른 사랑의 이야기의 가능성과 마주치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삶은 가능한 수많은 삶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쩌면 우리가 슬픔에 빠지는 것은 그 삶들을 다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택을 할 필요가 없는 시간, 모든 선택[아무리 멋진 선택이라고 해도]에 따르는 불가피한 상실로 인한 아쉬움으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갈망이 생긴다. 

 

- 17. 나만 기분이 변덕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클로이도 갑자기 공격을 쏟아붓거나 좌절감을 드러내는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밤 친구들과 영화에 대해서 토론을 하다가 그녀는 갑자기 내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일관되게 생색을 내는 태도"를 보인다고 하면서 적대적인 말들을 내뱉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에는 당황했다. 나는 그때까지 입을 열지도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곧 그전에 나의 어떤 불쾌한 행동에 대하여 보복을 하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아니면 내가 다른 사람 때문에 생긴 감정을 분풀이할 유용한 대상이 된 것일 수도 있었다. 우리의 말싸움 가운데 많은 부분에 이런 불공정한 부분이 있었다. 나는 뉴스를 보려고 하는데 클로이가 설거지 기계를 시끄럽게 틀어놓았다는 표면적 이유로 그녀에게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은 낮에 걸려온 까다로운 업무상의 전화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껴서 그런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클로이도 그날 아침 나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분노를 표현하려고 일부러 시끄러운 소리를 낸 것이다. 성숙이란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받을 만한 것을 받을 만한 때에 주는 능력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또 자신에게 속하고 또 거기서 끝내야 할 감정과 나중에 나타난 죄 없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을 촉발시킨 사람에게 즉시 표현해야 할 감정을 구분하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는 성숙하게 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 18. 철학자들이 전통적으로 이성에 따른 삶을 옹호하고 이성의 이름으로 욕망에 의한 삶을 비난해 왔다면, 그것은 이성이 지속성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철학자는 낭만주의자와는 달리 자신의 관심의 방향을 클로이에서 앨리스로, 거기서 다시 클로이로 미친 듯이 바꾸지 않는다. 안정된 이유들이 그들의 선택을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랑에서도 충실하고 지속적일 것이며, 그들의 감정은 날아가는 화살의 탄도처럼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 19. 그러한 추론의 결과 철학자들은 안정된 정체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많은 부분 내가 무엇을 원하느냐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감정적인 남자가 오늘은 서맨서를 사랑하고 내일은 샐리를 사랑한다면, 도대체 그는 누구일까?  

그날 저녁 첼시에서 나는 그 순간에 흠을 잡을 수 없었다. 따라서 문제는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맛있는 음식이 있었고, 친구들이 있었고, 아름다워 보이는 클로이는 내 옆에 앉아서 내 손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도 뭔가가 이상했다. 나는 어서 그 사건이 역사 속으로 흘러들어 가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 12. 현재를 살지 못한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평생 갈망해온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깨달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기대나 기억이라는 보호를 받는 자리에서 벗어나는 데에 대한 두려움이며, 이것이 내가 살 수 있는 단 한 번의 삶[천국의 개입은 논외로 하고]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데 대한 두려움이다. 헌신을 한 판의 달걀이라고 본다면, 현재에 헌신하는 것에는 달걀을 과거와 미래의 바구니에 나누어 담지 않고 모두 현재의 바구니에 담는 위험이 있다. 이 비유를 사랑으로 옮긴다면, 내가 클로이와 행복하다는 사실을 마침내 인정하는 것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내 모든 달걀이 그녀의 바구니 안에 확실하게 들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 소리지르는 것을 견딜 수 있을지 없을지 보기 위해서라도 그런 과정이 필요했다. 우리는 서로의 생존능력을 시험하고 싶었다. 서로 파괴하려고 해 보았자 소용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우리가 안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터였기 때문이다.

- 15. 통제할 수 있는 일들을 통하여 얻은 행복, 이성적으로 노력해서 어떤 일들을 성취한 뒤에 찾아오는 행복은 받아들이기 쉽다. 그러나 내가 클로이와 함께 얻은 행복은 깊은 철학적 숙고 뒤에 나온 것도 아니고 개인적 성취의 결과도 아니었다. 단지 신의 기적적 개입에 의하여 세상에서 나에게 가장 귀중한 사람을 찾아냈기 때문에 생긴 결과였다. 그런 행복은 위험했다. 자족적인 지속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몇 달 동안 꾸준히 연구한 끝에 원자생물학계를 뒤흔들 과학 공식을 발견했다면, 나는 그 발견에 뒤따르는 행복을 받아들이는 데에 전혀 가책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클로이가 대표하는 행복을 받아들이는 어려움은 거기에 이르는 인과 과정이 없다는 것, 따라서 내 삶에서 그 행복을 빚어낸 요소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것에서 온다. 클로이와 나의 관계는 마치 신들이 만들어놓은 것처럼 보이며, 따라서 신의 보복에 대한 원시적인 두려움이 따르는 것이다.  

- "왜 윌이 너보다 커미션을 더 받는 거지?" 클로이가 전시물들을 둘러본 뒤에 윌과 나에게 물었다.
"그건 네가 대답해, 윌." 내가 말했다.
"진짜 천재들의 작품을 알아보는 사람은 드무니까 그런 거지." 윌이 자비롭게도 이렇게 대답해 주자 클로이가 말했다.
"윌, 네 설계는 뛰어나. 그렇게 창의력이 풍부한 건 본 적이 없어. 특히 사무실 프로젝트들 말이야. 재료를 이용하는 솜씨가 대단해. 벽돌하고 금속을 아주 멋지게 섞어놓았어. 너는 그렇게 못해?" 마지막 말은 나에 대한 질문이었다.
"나도 많은 일을 하고 있어. 하지만 내 스타일은 많이 달라. 나는 다른 재료를 쓰거든."
"흠, 윌의 작품은 대단해. 사실 엄청나게 높은 수준이야. 와서 보지 못했으면 정말 아쉬울 뻔했어."
"클로이, 그렇게 이야기해 주니까 기분이 아주 좋은데." 윌이 대답했다.
"정말 감명 깊었어. 네 작품은 내가 관심을 가지던 바로 그런 거야. 다른 건축가들이 네가 하려는 일을 안 하는 게 딱한 일이야. 아마 쉽지 않아서겠지." 
"뭐 쉽지는 않지. 하지만 나는 내가 믿는 대로 일을 하라고 배웠거든. 내가 진짜라고 느끼는 집을 지어놓으면, 거기 사는 사람들도 집에서 에너지 같은 것을 얻게 되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캘리포니아에 가보면 훨씬 더 잘 알 수 있을 텐데. 몬테레이에서 프로젝트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그걸 보면 강철이나 알루미늄만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돌을 가지고도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지. 그리고 풍경에 대항해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풍경과 함께 일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 5. 상대방에게 무엇 때문에 나를 사랑하게 되었느냐고 묻지 않는 것은 예의에 속한다. 개인적인 바람을 이야기하자면, 어떤 측면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실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다. 속성이나 특질을 넘어선 존재론적 지위 때문에 사랑을 받는 것이다. 사랑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부유함 속에서 사는 사람들처럼 애정/소유를 얻고 유지하는 수단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는 금기를 지켜야 한다. 사랑에서건 돈에서건 오직 빈곤만이 체제에 의문을 품게 한다. 그래서 아마 연인들은 위대한 혁명가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 6. 어느 날 거리에서 불행한 여자 옆을 지나다가 클로이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가 저 여자처럼 얼굴에 커다란 점이 있었어도 나를 사랑했을 것 같아?" 그 질문에는 "그렇다"는 대답에 대한 갈망이 숨어 있다. 몸이라는 세속적인 표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비참하게도 어떻게 바꾸어볼 수 없는 표면보다 높은 곳에 사랑을 놓아달라는 요구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의 재치나 재능이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조건 없이 네가 너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의 눈 색깔이나 다리의 길이나 수표책의 두께 때문이 아니라 네 영혼의 깊은 곳의 너 자신 때문이다. 연인이 외적 자산을 벗어버린 나를 좋아하고, 무엇을 이루었느냐에 관계없이 우리 존재의 본질을 평가해 주고, 흔히 부모와 자식 사이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되풀이해 주기를 바라는 갈망이다. 진정한 자아는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다. 그 외에 우리의 이마에 점이 생긴다든가, 나이 때문에 몸이 시든다든가, 불황 때문에 파산을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우리의 표면에 불과한 것에 손상을 주는 사고들에 대해서는 책임을 면제해주어야 한다. 설사 우리가 아름답고 부유하다고 해도, 이런 것들 때문에 사랑받고 싶어 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서 그것이 사라지면 사랑도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이 내 얼굴보다는 머리를 칭찬해 주기 바란다. 그러나 꼭 얼굴을 칭찬해야겠다면, [정적이고 피부조직에 기초를 둔] 코보다는 [운동신경과 근육이 통제하는] 미소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해주기 바란다. 내 소망은 내가 모든 것을 잃고 "나만 남았다고 해도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이다. 이 신비한 "나"는 가장 약한, 가장 상처받기 쉬운 지점에 자리 잡은 자아로 간주된다. 내가 너한테 약해 보여도 될 만큼 나를 사랑하니? 모두가 힘을 사랑한다. 하지만 너는 내 약한 것 때문에 나를 사랑하니? 이것이 진짜 시험이다. 너는 내가 잃어버릴 수도 있는 모든 것을 벗어버린 나를 사랑하는가? 내가 영원히 가지고 있을 것들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가?

- 7. 그날 저녁 건축사무소에서 나는 처음으로 클로이가 나에게서 미끄러져나간다는 것을, 내 일에 대해서 감탄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다른 남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내 가치에 의문을 품는 것을 느꼈다. 나는 피곤했고 클로이와 윌은 피곤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집으로 가고 둘은 웨스트엔드에 가서 한잔 하기로 했다. 클로이는 집에 들어가면 바로 전화해 주겠다고 했으나, 11시가 되어도 전화가 없어서 내가 먼저 전화를 했다. 자동응답기가 나왔다. 새벽 2시 30분에 다시 걸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응답기에 내 불안을 고백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그것을 말로 하면 정말로 그런 불안이 현실이 될 것 같았다. 의심이 비난과 비난에 대한 대응으로 비화할 것 같았다. 어쩌면 아무 일도 아닐 수 있었다. 아니면 가장 심각한 문제일 수도 있었다. 클로이가 윌과 시간을 모르고 논다고 상상하기보다는 사고를 당했다고 상상하는 것이 더 편했다. 나는 새벽 4시에 경찰에 전화를 해서, 보드카를 마신 사람이 낼 수 있는 최대한 책임감 있는 목소리로, 혹시 짧은 녹색 치마에 까만 재킷을 입은 나의 천사의 절단난 몸이나 망가진 폴크스바겐을 보지 못했느냐고 물었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바비칸 근처의 사무실에서였다고 하면서. 아니,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 여자분이 친척입니까? 그냥 친구입니까? 아침까지 기다려보셨다가 다시 연락해 주시겠습니까?

- 8. "문제를 말하면 진짜로 문제가 생겨." 클로이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뭐가 나타날지 두려워 나는 감히 생각해 볼 수가 없었다. 생각의 자유를 실행에 옮기는 데는 악마들과 대면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겁에 질린 정신은 방황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내 편집증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건드리면 깨질 것 같은 상태였다. 버클리 주교는, 그리고 훨씬 뒤에 태어난 클로이는 눈을 감으면 바깥 세계는 꿈이나 다름없이 비현실이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어느 때보다 착각의 힘이 위로가 되는 것 같았다. 진실을 정면으로 보지 않으려는 충동, 생각만 하지 않으면 불쾌한 진실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 

- 9. 그녀의 부재에 관여한 듯한 느낌도 있고, 나의 의심에 죄책감도 들고, 나 자신의 죄책감에 화가 나기도 해서, 다음날 10시에 클로이와 만났을 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 그러나 그녀는 죄를 지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젊은 벨트슈메르츠의 배를 채워주기 위해서 그동안 준비하지 않았던 아침 시리얼을 사러 동네 슈퍼마켓까지 갔다 오는 수고를 했겠는가? 그녀의 무관심이 아니라 의무감이 그녀를 고발하고 있었다.  

- 하지 마. 지금은 싫어. 증오는 사랑이라는 편지 안에 감추어진 글자들이며, 하나의 기초 위에 그 대립물과 함께 서 있다. 그녀의 짝이 자신의 목에 입을 맞추는 방식. 책장을 넘기는 방식, 농담을 하는 방식에 유혹당했던 여자는 바로 이 점들 때문에 짜증을 낸다. 마치 사랑의 끝은 그 시작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사랑의 붕괴의 요소들은 그 창조의 요소들 안에서 이미 괴괴하게 전조를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 14. 말했잖아. 지금은 싫다고. 노련한 의사들, 환자의 암의 첫 징후를 귀신같이 찾아내는 전문가들이 자기 몸속의 축구공만 한 크기의 종양은 모르는 경우가 있다. 생활의 다른 면에서는 분명하고 이성적이지만, 자기 자식 가운데 하나가 죽었다거나 배우자가 집을 나갔다는 사실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계속 자기 자식은 실종되었을 뿐이라고 믿거나, 배우자가 새로운 결혼을 포기하고 옛날 결혼으로 되돌아올 것이라고 믿는다. 어떤 사람은 사랑이 난파했음에도 난파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한다. 사형 평결을 무시하면 죽음을 저지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실제로 죽음의 기호들은 도처에 널려 있었다. 내가 고통 때문에 문맹이 되지만 않았다면 못 읽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 "모르겠어. 좀 슬퍼 보여서."
"미안해, 나도 인간이야."
"난 그냥 도와주려던 것뿐인데, 오늘은 10점 만점에 몇 점을 줄래?"
"모르겠어."
"왜 몰라?"
"피곤해.”
"말해봐."
"모르겠다니까?"
"어서, 10점 만점에 6점? 3점? 마이너스 12점? 플러스 20점?"
"모르겠어."
"추측이라도 해봐."
"정말 모르겠다니까. 가만 좀 내버려 둬, 제기랄!"

- 17. 집안 언어를 풀어놓았으나 클로이에게는 점점 낯선 것이 되었다. 아니, 부인하고 싶지 않아서 잊은 척하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자신이 이 언어에 연루되었음을 부인하고 외국인인 척했다. 그녀는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흠을 잡아내기 시작했다나는 내가 하는 말이, 과거에는 그렇게 매력적으로 들렸던 말이, 갑자기 왜 화를 돋우게 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바뀐 것도 없는데 왜 갑자기 수많은 점에서 기분 나쁜 존재로 비난받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당황해서 황금시대로 돌아가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나는 스스로 물어보았다. 지금은 하지 않고 있는데 과거에는 했던 것이 무엇일까? 나는 클로이의 사랑의 대상이었던 과거의 자아에 필사적으로 순응하려고 했다. 그러나 내가 깨닫지 못했던 것은 지금 그렇게 화를 돋우는 것이 바로 과거의 자아이며, 따라서 나는 해체를 향하는 과정을 가속화시키는 일만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 18. 나는 그녀의 짜증을 돋우는 존재가 되었다. 상대의 반응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녀에게 책을 사다 주었고, 그녀의 재킷을 세탁소에 맡겼고, 저녁 값을 냈고, 크리스마스에 우리의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파리에 가자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눈에 뻔히 보이는 것들을 거슬러 사랑을 할 때 돌아오는 결과는 모욕뿐이었다. 그녀는 나를 우울하게 할 수 있었고, 나에게 소리를 지를 수 있었고, 나를 무시할 수 있었고, 놀릴 수 있었고, 속일 수 있었고, 때릴 수 있었고, 찰 수 있었다. 그래도 나는 대응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더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 그녀는 호텔로 돌아가 잠시 기다리다가 오르세 미술관으로 갔다. 마침내 내가 호텔 방으로 돌아갔을 때 그녀는 침대에서 쉬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욕실로 들어가 오랫동안 샤워를 했다.

- 15. 삐친 사람은 복잡한 존재로서, 아주 깊은 양면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도움과 관심을 달라고 울지만, 막상 그것을 주면 거부해 버린다. 말없이 이해받기를 원한다. 클로이는 자기를 용서해 줄 수 있겠느냐고, 말다툼을 미해결로 놓아둔 채 지내기는 싫다고, 즐겁게 1주년을 기념하며 저녁을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 대한 나의 분노[열쇠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분노]를 전부 다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비합리적이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말하는 것이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 그것은 내 진짜 불만을 말했을 때 생길 위험 때문이었다. 클로이가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내 상처는 표현하기가 무척 힘든 것이었다. 열쇠 하고는 관계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단계에서 그 문제를 꺼내면 바보처럼 보일 것 같았다. 결국 나의 분노는 지하로 밀어 넣어야 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직접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의미를 상징화하는 방법을 택하게 되었다. 그 상징이 해독되는 것을 반은 기대하고 반은 두려워하면서. 

- 우리 둘 다 파괴해 버리게 될 거야.
정말 너한테 쓰고 싶은 편지는 쓸 수 없을 거야. 이 편지는 지난 며칠 동안 내가 머릿속에서 너에게 썼던 내용이 아니야. 너에게 그림을 그려주고 싶지만, 나는 펜 놀리는 솜씨가 별로잖아.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없을 것 같아. 네가 빈 부분을 채워주기를 바랄 뿐이야. 
네가 보고 싶을 거야. 우리가 함께 나눈 것들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어. 우리가 함께 보낸 몇 달을 사랑했어. 모든 것이 초현실적으로 뒤섞여 보여. 아침 식사, 점심 식사, 오후의 전화, 일렉트릭에서 보낸 심야, 켄싱턴 가든스 산책. 어떤 것도 그것을 망치게 하고 싶지는 않아. 사랑을 할 때 중요한 것은 시간의 길이가 아니야. 느끼는 것과 하는 일이 모두 강렬해진다는 것이 중요한 거지. 나에게 그 시간은 삶이 다른 데 가 있지 않았던 몇 번 안 되는 시간 가운데 하나야. 너는 나한테 언제나 아름다울 거야. 아침에 잠을 깨서 네가 옆에 있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았는지 잊지 못할 거야. 나는 너에게 계속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을 뿐이야. 천천히 상해 가는 모습만은 보고 싶지 않았어.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 크리스마스는 혼자 보내거나 아니면 부모님과 함께 보내겠지. 윌은 곧 캘리포니아로 간다니 그렇게 되겠지. 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니까 그러지 마. 윌은 너를 무척 좋아하고 너를 엄청나게 존경하고 있어. 그 사람은 벌어진 일의 원인이 아니라 증상일 뿐이야. 지저분한 편지 용서해 줘.  

- 악의 언어의 틀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마치 거부하거나 거부하지 않는 것,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이 당연히 윤리의 한 지류에 속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거부를 하는 사람에게는 악하다는 딱지가 붙고, 거부를 당한 사람은 선의 화신이 되는 일이 많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클로이와 나의 행동 양쪽에도 이런 도덕적 태도가 얼마간 드러났다. 클로이는 자신의 거부를 정리하면서 나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악과 동일시했고,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을 선의 증거로 여겼다. 따라서 내가 여전히 그녀를 바란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나는 그녀에게 "너무 좋은 사람"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클로이가 그냥 예의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 진심을 토로하고 있다고 가정할 때, 그녀는 자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은 나에게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윤리적 결론을 내렸다. 그것 때문에 그녀는 나보다 가치가 적은 사람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마음이 선한 남자였다. 

- 9. 사랑의 거부가 아무리 불행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사랑을 이타성과 동일시하고 거부를 잔인성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 정말로 사랑을 선과 동일시하고 무관심을 악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 내가 클로이를 사랑하는 것은 도덕적이고, 그녀가 나를 거부하는 것은 비도덕적일까? 그녀가 나를 거부하면서 죄책감을 느낀 것은 사랑을 내가 이타적으로 그녀에게 준 것으로 보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나의 선물에 이기적인 동기가 있었다면, 클로이도 똑같이 이기적인 동기에서 관계를 끝내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사랑의 종말은 이타주의와 이기주의, 도덕성과 비도덕성 사이의 충돌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두 충동 사이의 충돌로 나타난다.

- 10. 이마누엘 칸트에 따르면 도덕적 행동이 비도덕적 행동과 구별되는 것은 그것이 고통이나 쾌락과는 관계없이 의무감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 때문이다. 나의 행동에 대한 보상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의무감에만 인도되어 어떤 행동을 할 때 나는 도덕적이다. "어떤 행동이 도덕적으로 선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도덕률에 일치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행동이 도덕률을 위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기질의 결과로 이루어진 행동은 도덕적이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은 경향에 기초한 도덕성이라는 공리주의적 관점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주장이다. 칸트 이론의 핵심은 도덕성이란 어떤 행동을 수행하는 동기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예상되는 보답에 관계없이 사랑을 할 때에만, 사랑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사랑을 줄 때에만 도덕적이다. 

11. 내가 클로이를 부도덕하다고 말한 것은 그녀가 매일 그녀에게 위로, 격려, 지원, 애정을 주는 사람의 관심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가 이런 것에 퇴짜를 놓는다고 해서 도덕적인 의미에서 무슨 비난을 할 수 있을까? 큰 비용을 들이고 희생을 하여 선물을 줄 때 그것을 물리친다면 틀림없이 비난이 뒤따를 것이다. 그러나 사랑을 주는 사람도 받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기쁨을 맛보았다면, 이것이 과연 도덕적인 언어를 사용할 문제일까? 사랑이 일차적으로 이기적인 동기에서 주어지는 것이라면[즉 상대의 유익을 위한 마음에서 생겨났다고 하더라도 결국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면], 적어도 칸트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도덕적인 선물이 아니다. 내가 클로이를 사랑했다고 해서 내가 그녀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비록 내 사랑에 희생이 포함되었다고 해도,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행복했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했을 뿐이다. 나는 순교를 한 것이 아니다. 나는 의무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내 경향에 완벽하게 들어맞았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다. 

- 12. 우리는 공리주의자들처럼 사랑하며 시간을 보냈다. 침실에서 우리는 플라톤이나 칸트가 아니라 홉스와 벤담의 추종자였다. 우리는 초월적 가치가 아니라 선호에 기초해서 도덕적 판단을 했다. 홉스는 법의 원리에서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모든 사람은 자기를 즐겁게 하고 자기에게 기쁨을 주는 것을 선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자기를 불쾌하게 하는 것을 악이라고 부른다. 사람이란 그 기질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선과 악의 일반적 구별에서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아가톤 하플로스, 즉 그냥 좋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 13. 나는 클로이가 나를 "불쾌하게" 했기 때문에 클로이를 악이라고 불렀다. 그녀가 악한 존재로 타고났기 때문이 아니다. 나의 가치 시스템은 절대적 기준에 따라서 클로이의 범법을 설명한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상황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나는 고전적인 도덕주의자의 잘못을 범한 셈인데, 니체는 이 점을 간결하게 요약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은 동기와 관계없이 오로지 그 유용하거나 해로운 결과 때문에 개별적 행동들을 선하거나 악하다고 부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렇게 부르게 된 계기를 잊어버리고, 선과 악이 결과에 관계없이 행동 자체에 내재된 특질이라고 믿게 된다...>

- 나는 나에게 쾌락을 주느냐 고통을 주느냐에 따라서 클로이에게 어떤 도덕적 딱지를 붙일 것이냐를 결정했다. 나는 세계와 그녀가 이 세계 속에서 가지는 의무를 나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판단하는, 자기 중심적인 도학자였다. 나의 도덕률은 나의 욕망의 승화된 형태일 뿐이었다.

- 14. 나는 독선적인 절망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이렇게 물었다. "사랑받는 것이 내 권리이고, 나를 사랑하는 것이 클로이의 의무가 아닐까?" 클로이의 사랑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침대에 들어갔을 때 내 곁에 그녀가 있다는 것은 자유나 삶의 권리와 마찬가지로 중요했다. 정부가 그 두 가지를 나에게 보장해 준다면, 왜 사랑의 권리는 보장해주지 않는가? 정부는 삶에 대한 권리와 언론의 자유를 그렇게 강조하지만, 나는 그 삶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사람이 없다면 두 가지 모두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데. 사랑이 없다면,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면, 산다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자유라는 것이 버림받을 자유를 의미한다면 자유란 대체 무엇인가? 

- 15. 그러나 권리의 언어를 어떻게 사랑에까지 연장시킬 수 있으며, 사람들에게 어떻게 의무감에 따른 사랑을 강요할 수 있을까? 이 역시 낭만적 테러리즘, 낭만적 파시즘이 아닐까? 도덕성에도 경계가 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고등법원이 다룰 문제이지, 잘 먹고, 좋은 집에 살고, 책을 너무 많이 읽은 감상주의자가 가슴이 찢어질 듯한 이별 때문에 한밤중에 흘리는 짠 눈물로 다룰 문제가 아니다. 나는 공리주의자처럼 이기적으로, 자발적으로 사랑을 했을 뿐이다. 만일 공리주의에서 어떤 행동이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을 만들어낼 때에만 옳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내가 클로이를 사랑하는 데서 생기는 고통과 그녀가 사랑을 받음으로 인해서 생기는 고통은 우리의 관계가 단지 도덕과는 관계없는 것일 뿐 아니라, 부도덕해지기까지 했다는 가장 분명한 표시였다. 

- 16. 분노가 비난과 결합될 수 없었던 것은 불행한 일이다. 나는 나의 고통 때문에 범법자를 찾으려고 했으나, 클로이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었다. 나는 인간들은 서로 소극적 자유의 관계, 즉 상대를 해치지 않는다는 의무관계에 있으며,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원치 않는다면 억지로 서로 사랑하게 할 수는 없는 관계에 있다고 배웠다. 나는 원시적인 믿음 때문에 나의 분노가 다른 사람을 비난할 자격을 준다고 느꼈지만, 결국 비난은 선택과 연결될 수밖에 없으며, 선택이 없는 곳에는 비난도 없음을 인정했다. 당나귀가 노래를 못 한다고 당나귀에게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나귀는 나면서부터 콧김을 뿜는 것 외에 다른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사랑을 한다거나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을 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 사람의 선택, 따라서 책임을 넘어선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랑에서 퇴짜를 맞는 것은 원래부터 노래를 못 하는 당나귀보다 견디기 힘들다. 나에게 퇴짜를 놓은 사람이 한때는 사랑을 하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당나귀는 원래부터 노래를 부를 줄 모르기 때문에 당나귀가 노래를 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삼가는 것도 그만큼 쉽다는 뜻이다. 그러나 나에게 퇴짜를 놓은 사람은 사랑을 한 적이 있다. 바로 얼마 전에, 그것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너를 사랑할 수 없어라는 주장의 현실성은 더욱더 소화하기가 힘들다. 

- 17. 사랑의 보답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사랑을 받고 싶다는 오만이 생겨났다. 나는 내 욕망만 가지고 홀로 남았다. 무방비 상태에, 아무런 권리도 없이, 도덕률도 초월해서, 충격적일 정도로 어설픈 요구만 손에 든 모습으로. 나를 사랑해 다오! 무슨 이유 때문에? 나에게는 흔히 써먹는 지질하고 빈약한 이유밖에 없었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 1. 무엇인가 비참한 일이 일어날 때면 우리는 왜 하필이면 내가 이런 끔찍하고 견딜 수 없는 벌을 받는 것인지 이해하려고 일상적인 인과론적 설명을 넘어서는 설명을 찾게 된다. 참담한 사건일수록 객관적으로 보면 가당치도 않은 의미를 가져다 붙이게 되고, 심리적 운명론으로 빠져드는 경향도 강해진다. 나는 비통함 때문에 당황하고 진이 빠진 상태에서 의문부호들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왜 나인가? 왜 이런 일이? 왜 지금?" 나는 과거를 샅샅이 뒤져 이런 일의 유래, 조짐, 잘못된 행동 등, 내가 입은 상처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찾아내려고 했다.

- 2. 나는 일상의 낙관주의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텔레비전과 신문도 접었다. 직장에는 휴가를 냈다. 나는 천 년을 마무리하는 재앙에 마음을 빼앗겼다. 지진, 홍수, 조류독감 등의 위험들. 나는 만물의 무상함을 느꼈다. 문명이 환각 위에 세워진 것 같았다. 행복 속에서 현실에 대한 격렬한 부정을 보았다. 나는 회사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왜 그들은 자신의 무의미함에 괴로워하지 않는지 의아해했다. 나는 역사의 고통을, 구역질 나는 노스탤지어에 싸여있는 대학살의 기록을 이해했다. 과학자와 정치가, 뉴스 진행자와 주유소 종업원이 오만하다고 느꼈다. 회계사와 정원사들이 잘난 체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 자신을 위대한 추방자들과 연결시켰다. 나는 캘리밴(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 나오는 반[半]짐승 반[半]인간 - 역주)과 디오니소스를 비롯해, 고름이 가득한 진실을 직시한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는 존재들의 추종자가 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잠시 제정신이 아니었다. 

- 3. 하지만 나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었을까? 클로이가 떠남으로써 거의 모든 일에서 자신감이 흔들렸다. 나 자신의 운명을 통제하는 능력을 상실하고, 어린애같이 삐치기 잘하는 악마가 나를 장악한 느낌이었다. 그 악마는 나에게 웃음을 짓게 하고, 안심하라고 다독거린 뒤에, 바위에 메다꽂았다. 나는 이야기 속의 한 등장인물이 되었고, 그 이야기의 큰 구도를 바꾸는 것은 내 능력 범위 바깥의 일이었다. 나는 자유의지를 믿었던 오만을 회개했다. 

- 4. 나는 다시 운명을 생각하게 되었다. 다시 사랑의 거의 신적인 본질을 느끼게 되었다. 사랑이 오고 간  모두가[오는 것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가는 것은 그지없이 끔찍했다] 큐피드와 아프로디테의 게임의 노리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나에게 일깨워주었다. 견딜 수 없는 벌을 받은 나는 나의 죄가 무엇인지 찾아보았다. 그러나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잘 몰랐기 때문에 무조건 잘못했다고 자백했다. 내 속을 샅샅이 뒤져 흉기를 찾아보았다. 건방졌던 태도 하나하나가 되살아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일상적인 잔인하고 무심한 행동들. 신들은 그 어느 것도 놓치지 않았고, 이제 나에게 무시무시한 복수를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 5. 물론 고대 신화들은 죽었다. 우리는 신들이 우리 삶을 좌우한다고 믿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신들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놓았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관장하는 매우 신비한 내적인 힘들이 있다고 굳게 믿게 된 것이다. 나는 사랑에서 행복을 얻을 수 없도록 심리적으로 저주를 받았다. 

- 6. 내 악마들에게 이름을 부여한 것은 정신분석이었다. 정신분석은 삶이 종종 자기 의식에 도전하는 방식으로 펼쳐진다고 설명했다. 프로이트의 세계에서는 한 남자가 의식적으로는 한 여자를 사랑하려고 하면서 무의식적으로는 그녀를 다른 남자 품으로 밀어 넣으려고 안간힘을 쓸 수도 있다. 클로이가 떠나자 우리 사랑 이야기의 새로운 해석이 머리를 내밀기 시작했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사랑 이야기, 실패할 것이기 때문에 선택된 사랑 이야기, 그 실패 속에 고전적인 가족 신경증의 패턴이 되풀이되는 사랑 이야기였다. 부모님이 이혼했을 때 어머니는 나에게 자신과 비슷한 불행한 덫에 걸리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어머니의 어머니도 비슷한 덫에 걸렸고,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는 이야기였다. 이것은 유전적인 심리적 저주가 아닐까? 나는 프로이트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었다. 

- 7. 저주의 핵심은 그 저주 아래서 괴로워하는 사람이 저주의 존재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평생에 걸쳐 저절로 기록되는 그 개인 내부의 비밀 암호와 같다. 오이디푸스는 신탁에 의해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지만 의식적인 경고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경고는 불길한 예측의 뇌관을 제거하지 못한다. 오이디푸스는 신탁의 예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고향에서 추방당했으나, 그럼에도 이오카스테와 결혼하고 말았다. 그의 이야기는 그가 아니라 누군가가 그를 대신해서 한다. 저주는 의지를 무시한다. 

- 8. 나는 무슨 저주 아래서 신음했을까? 다름 아닌 행복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저주이며, 이것은 근대 사회에 알려진 최대의 불행이기도 하다. 나는 사랑이라는 그늘진 숲에서 추방당해 죽는 날까지, 내가 사랑한 사람들을 나로부터 달아나게 만들었던 강박증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땅을 배회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 악의 이름이 무엇인지 찾아 헤매다가 어느 날 밤 정신분석 용어 사전의 반복강박증 항목에서 그 답을 찾았다.
<무의식에서 비롯된 통제 불가능한 작용. 이 작용의 결과 환자는 일부러 자신을 괴로운 상황에 가져다 놓고 과거의 경험을 되풀이한다. 그러나 환자 자신은 이 원형을 기억하지 못한다. 오히려 환자는 그 상황이 현재 이 순간에 의해서 완전히 규정된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 9. 정신분석만큼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무작위적이라는 생각으로부터 거리가 먼 철학은 없다[의미를 부정하는 것조차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나는 클로이를 사랑했고, 그러다 클로이가 떠난 것이 아니다. 나는 클로이가 나를 떠나도록 그녀를 사랑했다. 태어나서 몇 달, 또는 몇 년 동안 나의 무의식 깊은 곳에서 하나의 패턴이 형성되었다. 아기는 어머니로부터 쫓겨났거나, 어머니가 아기를 떠났다. 이제 남자는 똑같은 시나리오를 재창조했다. 배우들은 다르지만 플롯은 똑같았다. 애초에 내가 클로이를 선택한 것은 그녀의 웃음이라든가 그녀의 정신의 활기 때문이 아니었다. 내 삶의 심술궂은 캐스팅 감독인 무의식이 그녀에게서 필요한 양의 고통을 준 뒤에 무대를 떠나는 데 적합한 인물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 10. 그리스 신들의 저주와는 달리, 심리적 운명론에서는 적어도 운명으로부터 탈출할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 이드가 있는 곳에는 에고도 있을 가능성이 높다. 나에게 침대에서 일어날 힘만 있었어도 긴 의자까지 갈 수 있었을 것이고, 그곳에서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처럼 나의 고통을 끝내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집에서 나가 도움을 구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정신도 회복할 수가 없었다. 나는 심지어 이야기를 할 수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과 내 고통을 나눌 수가 없었다. 그 결과 나는 완전히 박살이 나고 말았다. 나는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블라인드는 내려놓았다. 조그만소리나 빛에도 짜증을 냈다. 냉장고의 우유가 상했거나 서랍이 한 번에 열리지 않으면 공연히 속이 상했다. 내 손아귀에서 모든 것이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조금이라도 통제력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은 나 자신을 죽이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 콤플렉스로 미끄러져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내 존재의 불행을 생각하자 남녀가 성교하며 내는 소리와 행복했던 시절의 노래가 커다란 눈물방울로 응축되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눈물은 이제 뜨거운 분노의 눈물이 아니었다. 내가 고통을 겪은 것은 나 자신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때문이라는 확신, 눈이 먼 것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라는 확신에 물든 눈물의 맛은 달곰쌉쌀했다. 나는 고양되었다. 고통이 정점을 넘어버리자 기쁨의 골짜기가 나타났다. 순교자의 기쁨, 예수 콤플렉스의 기쁨이었다. 나는 클로이와 윌이 캘리포니아를 여행하는 모습을 상상하고, 옆방에서 "좀 더", "더 세게"를 요청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슬픔의 술에 취해갔다.

- 7. "어떤 사람이 만인으로부터 이해를 받는다면 그 사람을 위대하다고 할 수 있을까?"

- 나는 신의 아들의 운명을 생각하며 자문해 보았다. 클로이가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계속 나만 탓할 수 있는 것일까? 그녀가 나를 찬 것은 나에게 결함이 많다는 증거라기보다는 그녀가 근시안적이라는 표시였다. 내가 꼭 해충이고 그녀가 천사일 필요는 없었다. 그녀가 캘리포니아의 삼류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 스위스 출신의 프랑스 건축가 - 역주)에게 가기 위해서 나를 버렸다는 것은 그녀가 너무 천박해서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증거일 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성격을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기분 나쁘게 여기는 측면들에 집중했다. 그녀는 결국 이기적이었다. 그녀의 매력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매력이 없는 본질을 감추는 피상적인 가리개에 불과했다. 사람들이 그녀의 유혹에 넘어가 그녀를 사랑할 만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다고 해도, 그것은 사랑할 만한 어떤 진정한 기초가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녀의 재미있는 대화 솜씨와 착해 보이는 미소 때문일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나처럼 그녀를 잘 알지 못했다. 그녀는 [비록 그때는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원래 자기 중심적이었고, 신랄한 편이었고, 때로는 인정머리가 없었고, 남을 생각할 줄 모르는 경우가 많았고, 가끔 퉁명스러웠고, 피곤할 때는 짜증을 냈고, 자기 뜻대로 하고 싶을 때는 독단적이었고, 나를 차기로 결정했을 때는 무분별하고 요령이 없었다.

- 8. 고통을 겪으면서 무한히 지혜로워진 나는 물론 그녀가 판단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그녀를 용서하고, 동정하고, 그녀에게 선심을 쓸 수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나에게 무한한 안도감을 주었다. 나는 라일락색과 녹색으로 꾸며진 호텔 방에 누워서 나 자신의 미덕과 위대함을 느끼며 흐뭇해했다. 나는 클로이가 이해할 수 없는 그 모든 것 때문에 클로이를 동정했다. 다 안다는 듯이 우울한 표정으로 싱긋 웃으며 사람들이 가는 길을 지켜보고 있는 무한히 지혜로운 존재로서.

- 9. 왜 나의 콤플렉스, 모든 결함과 수모를 그 정반대의 것으로 바꾸어버리는 왜곡된 심리적 술수에 예수의 이름이 붙은 것일까? 나의 고통을 젊은 베르테르나 마담 보바리나 스완의 고통과 동일시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상처받은 사람들은 예수와 경쟁할 수가 없었다. 예수는 그가 사랑하려고 했던 사람들의 악과 대비되는 순결한 미덕과 의문의 여지없는 선을 지닌 존재였기 때문이다. 예수가 그렇게 매력적인 인물이 된 것은 단지 르네상스 화가들이 그려놓은 울 듯한 눈과 창백한 안색 때문만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가 착하고 완전히 의로운 존재이면서 동시에 배반당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신약성서가 비애감을 주는 것은 그것이 내 사랑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모든 덕을 갖추었지만 그럼에도 오해받은 존재의 슬픈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 인물은 모든 사람에게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쳤지만, 사람들은 그 관대한 메시지를 그의 면전에 내던져버렸다. 

- 10. 기독교의 정점에 순교자가 없었다면 기독교가 그렇게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예수가 갈릴리에서 옷장이나 식탁을 만들며 조용한 삶을 보내다가, 말년에 가서 심장마비로 죽기 전에 나의 인생론이라는 얄팍한 책을 펴냈더라면 그가 현재와 같은 지위에 올라설 수 있었을까? 십자가 위에서의 고통스러운 죽음, 로마 당국의 부패와 잔혹, 친구들의 배반이 모든 것이 예수가 신을 자기편으로 둔 사람이라는 증거[역사적이라기보다는 심리적 증거]를 구성하는 데에 불가결한 요소들이었다.

- 11. 자신의 미덕에 대한 느낌은 고통이라는 비옥한 토양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난다. 고통을 겪으면 겪을수록 덕은 커진다. 예수 콤플렉스는 우월감과 얽혀 있다. 저항할 수 없는 압제와 맹목에 맞서 패배자가 더 큰 덕에 호소하며 느끼는 우월감이다. 나는 사랑하던 여자에게 차이고 난 뒤, [오후 3시에 침대에 자빠져서] 내 고통을 하나의 자질로 고양시켰다. 덕분에 내 슬픔을 흔해빠진 세속적인 낭만적 결별의 결과물로 경험하지 않을 수 있었다. 클로이가 떠나는 바람에 나는 죽을 뻔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도덕적으로 높은 자리라는 영광스러운 지위에 올라갈 수 있었다. 나는 순교자였다. 

 

- 12. 예수 콤플렉스는 마르크스주의의 정반대편에 자리 잡고 있다. 자기 증오에서 생겨난 마르크스주의 때문에 나는 나를 받아들이려는 어떤 클럽의 회원이 되지 못했다. 예수 콤플렉스 역시 나를 클럽 문간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자기 사랑의 결과이며, 내가 클럽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내가 너무 특별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대부분의 클럽들은 천박하기 때문에 당연히 위대한 존재, 지혜로운 존재, 감수성이 예민한 존재, 클럽 문 밖에 남겨지거나 여자 친구에게서 버림받은 존재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다. 

- 바꿀 수 있다는 미망에 빠져서 인생을 망치게 된다. 니얼리 박사는 제3장에서 문제의 근원이 결함 있는 부모라고 밝힌다. 부모는 이 불행한 낭만주의자들이 감정 과정을 왜곡되게 이해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주 어린 시절의 감정적 애착 경험을 통해서 사랑이 보답받지 못하는 것이며 잔인한 것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그들에게 잘해주는 사람들을 절대 사랑할 수 없다. 그러나 치료 과정에 들어가 유년 시절을 다시 짚어보면 자신의 마조히즘의 뿌리를 이해하게 되고, 어울리지 않는 짝을 변화시키려는 욕망이 사실은 문제 있는 부모를 제대로 된 부모로 바꾸던 어린 시절의 공상의 잔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 11. 그 책을 읽기 며칠 전에 <마담 보바리>를 읽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니얼리 박사가 묘사한 사람들의 곤경과 플로베르의 위대한 소설의 여주인공인 엠마 보바리의 비극적 상황을 비교하고 있었다. 엠마 보바리는 누구인가? 그녀는 프랑스의 시골 지방에서 살아가는 젊은 여자로, 그녀를 사랑하는 남편과 결혼했으나 그녀가 사랑을 고통과 연결시키게 되면서 남편을 혐오한다. 그 결과 그녀는 어울리지 않는 남자들과 간통을 하게 된다. 그 남자들은 그녀를 잔인하게 대하는 비겁한 사람들이며, 그녀의 낭만적인 갈망을 충족시켜 줄 것이라는 기대를 전혀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엠마 보바리는 이 남자들이 변해서 자신을 제대로 사랑해 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릴 수 없기 때문에 병이 든다. 그러나 로돌프와 레옹은 그녀를 가벼운 오락거리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불행하게도 엠마는 치료를 받을 기회가 없었고, 자신의 마조히즘적 행동의 기원을 깨달을 수 있을 만큼 자의식이 없었다. 그녀는 남편과 자식을 소홀히 했고, 가족의 돈을 탕진했으며, 결국에는 어린 자식과 제정신이 아닌 남편만 남긴 채 비소를 먹고 자살한다. 

- 12. 때때로 현대적인 해결책이 적용되었다면 상황이 어떻게 다르게 전개되었을까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마담 보바리가 니얼리 박사와 문제를 의논할 수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낭만적 실증주의가 문학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 가운데 하나에 개입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엠마가 니얼리 박사의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진료실에 들어갔다면 대화가 어떻게 진행되었을지 궁금하다.
[보바리, 긴 의자에 앉아 흐느끼고 있다.]
니얼리: 엠마, 내 도움을 받고 싶으면 무엇이 문제인지 말해야 해요.
[보바리 부인은 고개를 들지 않고 수 놓인 손수건에 코를 푼다.]

니얼리 : 우는 것은 긍정적인 경험이에요. 하지만 50분 내내 울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
보바리 : [울먹이면서 말한다] 그이가 편지를 쓰지 않아요.  

- 보바리 : 참, 니얼리 박사님, 미리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사실은 이번 주에 돈을 낼 수가 없어요.
니얼리: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벌써 세 번째로군요.
보바리 : 죄송해요. 하지만 지금 돈이 큰 문제예요. 기분이 너무 안 좋다 보니 나도 모르게 쇼핑에 돈을 다 써버렸지 뭐예요. 바로 오늘 있었던 일이에요. 밖에 나가서 새 드레스 세 벌, 색깔을 칠한 골무, 도자기 찻잔 세트를 샀어요. 

- 13. 보바리 부인의 치료에 행복한 결말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사실 그녀의 삶에서도 더 행복한 결말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다. 니얼리 박사가 [설사 돈을 받았다고 해도] 엠마를 적응을 잘하고, 강박이 없고, 남편을 돌보는 부인으로 바꿀 수 있었을 것이라고, 그럼으로써 플로베르의 소설이 자기를 아는 과정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낙관적인 이야기로 바뀔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으려면 여간 열렬한 낭만적 실증주의자가 아니면 안 될 것이다. 물론 니얼리 박사는 보바리 부인의 문제를 해석하기는 했다. 그러나 문제를 파악하는 것과 문제를 해결하는 것, 지혜와 지혜로운 인생은 크게 다르다. 우리는 모두 능력 이상으로 똑똑하다. 그러나 사랑이 미친 짓임을 안다고 해서 그 병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는 없다. 어쩌면 지혜로운, 또는 전혀 고통 없는 사랑이라는 개념은 무혈 전투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모순일지도 모른다. 제네바 협정 이야기를 꺼내지 않더라도, 그런 전투는 존재할 수가 없다. 보바리 부인과 페기 니얼리 사이의 대립은 낭만적 비극과 낭만적 실증주의 사이의 대립이다. 그것은 지혜와 지혜의 대립물 사이의 대립인데, 지혜의 대립물이란 지혜를 모르는 것[이것은 고치기가 쉽다]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아는 것에 따라서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연애가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그것이 클로이와 나에게 도움이 된 것은 전혀 없다. 우리가 바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우리가 현자가 되지는 않았다. 

- 14. 대책이 서지 않는 사랑의 고통 때문에 비관적이 된 나는 사랑으로부터 완전히 떠나버리기로 결심했다. 낭만적 실증주의가 도움이 될 수 없다면, 유일하게 유효한 지혜는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말라는 금욕주의적 충고였다. 나는 이제 상징적인 수도원으로 물러나, 간소한 서재에 처박혀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소박하게 살아갈 생각이었다. 나는 세속적인 오락을 피하고, 금욕의 맹세를 하고, 수도원이나 수녀원에서 평생을 보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감탄했다. 사막의 동굴에서 40년, 50년씩 산 은자들의 이야기도 있었다. 그들은 나무뿌리나 딱딱한 열매만 먹고 살면서, 다른 사람과는 이야기를 하지도 만나지도 않았다. 

- 15. 그러다가 어느 날 디너 파티에서 레이철이라는 여자를 만났다. 그녀는 나에게 자신의 사무실 생활을 이야기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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