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017)

[폴 오스터] 달의 궁전

일루젼 2012. 2. 22.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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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궁전
국내도서>소설
저자 : 폴 오스터(Paul Auster) / 황보석역
출판 : 열린책들 2000.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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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만큼 아름다운 글은 아니었지만, 즐겁게 읽었다.
이미지즘에 치우친, 색감이 되었든 질감이 되었든 감각적인 묘사가 두드러진 글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이런 저런 수사가 좀 길게 붙지만 견딜만한 만연체였고.
그가 토마스 에핑의 도우미로 들어갔을 때, 눈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추정되는) 그를 위해 사물을 설명하는 부분은 기대만큼은 아니었지만 꽤 흥미롭게 읽었다.

개인적으로는 M.S. 포그의 기행이 상당히 인상깊었는데,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저항하겠다는 생각은 꽤나 좋은 생각이었지만 결국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변명에 그치고 말았다.

다만 글을 모두 읽은 다음 내가 궁금한 것은, 해서 결론적으로 무엇을 전하고 싶었던 것인가 하는 점인데.
당황스러울 만큼 짜맞춰지는 전개와, 결국은 아무 것도 온 것 없이 다시 길 위에 놓인 포그로 뭘 말하고 싶었던 걸까.
'일장춘몽', 허무로 보자면 루쉰의 아큐정전이 더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보다는 아마도, 마르코 스탠리 포그가 기행을 시작했을 때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모든 것은 오히려 원하지 않을 때 주어진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싶었던 걸까? 글쎄, 그것도 아닌 것 같고.

어떤 것이 되었든 작품에서 필요없는 부분이란 거의 (전혀라고 하지 못하는 것은 간혹 실험적인 작품들도 있기 때문에) 없다. 어떤 식이든 의도를 가지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영상은 글에 비해 복선을 깔기가 더 쉽다.
영상은 소품이 되었든, 장소든 사람이든 어떤 것이든 주의를 끌지 않고 스쳐지나가게 하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의 경우는 어떤 식으로든 단어가 사용되어야 하고, 암시적으로 지나친다 하더라도 영상만큼 무심코 지나치게 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하지만 폴 오스터는 앞서 어떤 복선도 없이 그냥 때려넣는 대담함을 보였다. 이미 하나의 충격을 던진 뒤에 부연되는 것은 복선이라 보기에는 좀 어렵고, 또한 그리 오- 싶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다니 그런갑다 하는 거지.

뉴욕 삼부작을 읽어야 더 정확히 이미지가 잡히겠지만, 지금으로선 좀 어정쩡한데.
한 번 정도 읽어서 나쁠 건 없겠지만 크게 칭찬하기는 어렵겠다. 토마스 에핑, 그 캐릭터는 아주 취향이었지만.



[발췌]


그 뒤로 며칠이 그런 식으로 이어졌다. 내 감정은 한 가지 극단적인 것에서 다른 극단적인 것으로 무모하게 바귀었고, 기쁨과 절망 사이에서 너무도 자주 오락가락하는 바람에 나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과거와의 갑작스러운 만남, 낯선 사람이 우연히 보이는 미소, 어느 주어진 시간에 보도를 비치는 햇살의 각도....... 나는 마음의 평정을 얻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그래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모든 것이 불안정하고 혼란스럽고 엄청나게 변덕스러웠다. 어느 한 순간 나는 철학적인 탐구에 몰두해서 내가 이제 곧 달관한 초인들의 대열에 낄 것이라고 아주 자신만만해 했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나 자신의 고뇌에 짓눌려 무너져 내리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이제는 자기 도취가 너무도 심해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도 없었다. 사물은 생각이 되었고, 모든 생각은 내 마음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드라마의 일부분이었다.

방안에 앉아서 하늘이 무너지기를 기다리는 것과 길거리로 쫓겨나 잇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였다. 극장을 나선 지 채 10분도 안 되어 나는 내가 처한 입장을 알아차렸다. 밤이 다가오고 있는 만큼 너무 늦기 전에 잠잘 곳을 찾아야 할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지만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 어떤 진지한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 문제는 어떻게든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고, 그저 닥치는 대로 운에 맡기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며 앞일을 생각해 보자 나는 내 처지가 얼마나 암울한지를 알 수 있었다. 부랑자들처럼 길거리에서 드러눕지는 않겠어, 나는 속으로 그렇게 말했다.


 ...


[겁내지 마.]
 목소리가 말했다.
[누구도 두 번 죽지는 않으니까. 이 코미디는 곧 끝날 거고 너는 이런 일은 다시는 겪지 않을 거야.]

 
...


그 일이 몹시 어렵다는 사실이 내게는 오히려 격려가 되었다. 만약 그 번역이 좀더 쉬웠더라면 나는 지난날의 내 잘못을 보상하기 위해 적당히 고행을 한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도저히 그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무력감이 가치를 부여한 셈이었다. 나는 마치 사슬에 묶여 중노동을 하도록 선고받은 죄수 같은 기분이었다.


...


하지만 그렇더라도 본질적인 얘기는 아주 인상적이어서 그 뒤로 절대 잊혀지지가 않았지. 누구도 달이나 별을 보지 않고서는 자기 위치가 어디쯤인지를 알 수 없어. 천문학이 먼저 오고 지도는 그 덕분에 따라오는 거지. 그런데 바이런 얘기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였어. 거기에 대해서 아주 오래 생각을 하다 보면 머리가 뒤죽박죽이 되고 말 거야. 여기는 저기와 관련해서만 존재하고 다른 길이라고는 없는 거니까. 여기가 있는 건 단지 저기가 있기 때문이야. 위를 올려다보지 않으면 밑에 뭐가 있는지 절대로 알지 못해. 그걸 생각해 봐. 우리는 우리가 아닌 것을 봄으로써만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돼. 하늘을 만지기 전에는 땅에 발을 댈 수 없어.


... 


그 뒤로 열두 시간 동안 나는 계속 차를 몰았다. 내가 아이오와로 접어들었을 때쯤 밤이 내렸고, 조금씩조금씩 세상이 무한한 별들의 세계로 바뀌었다. 나는 나 자신의 외로움에 도취되어 고속도로의 하얀 주행선을 지켜보며 ㅡ 마치 그것이 나를 세상과 연결시켜 주는 마지막 끈이기라도 한 것처럼 ㅡ 눈이 저절로 감기기 전까지는 차를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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