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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과학 분류로 들어갈 책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되어있군.ㅋ
초중반부까지 읽다보면 그래서 주장하고 싶은 결론이 뭐야? 라는 생각을 좀 하게 된다.
나름대로는 정반합의 변증법적인 논리 전개를 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결론부에서야 확실한 목소리를 내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치바나 다카시의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와 같다. 다만 조금 차이가 있다면 저자 자신이 엔지니어이므로 좀 더 그 쪽의 입장에서 주장한다는 것 정도?
엔지니어 사랑, 엔지니어 부심이 좀 강하지만 불쾌하기보다는 귀엽다.
(이건 내가 이과이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사회를 위해서, 라기보다는 진정 훌륭한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서!! 인문학과 교양을 쌓아야 한다는 논지.
하지만 윤리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다소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그것조차 엔지니어다워서 웃었다.
개인의 양심에 따라 영역을 선택하되, 주어진 일에는 그것이 개인 신념에 위배되더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들이 최선을 다한 결과에서 파생된 부수적인, 혹은 예측되지 못한 부작용에 대해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엔지니어는 기업이나 경영, 정치자의 개는 아니며, 시킨다고 무엇이든 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룰이 있어야 하나, 그것을 공식적으로 정하는 것은 엔지니어 답지 않다고 생각한다.
엔지니어들의 양심과 이성을 충분히 존중하나, 그것을 제대로 갖추기 위해 인문학과 교양은 필수적인 요소이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다치바나 다카시 쪽이 더 마음에 들지만, (플러먼은 너무 소극적으로 주장하는데다 다소 변명조다)
카이스트 추천 도서 목록임을 감안하면 나쁘지 않다. 문과생보다는 이과생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전개방식.
(아름답고 탄탄한 논리로 설득하지는 못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너나 나나 '우리 편'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한 번 정도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발췌]
이 모든 것들은 엔지니어가 이미 확립된 규칙의 틀 안에서 고용주나 고객에게 '전적으로' 봉사해야 한다는 뜻일까? 공공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은 규칙과 법원의 판결이라는 생각이 과연 문제를 해결하는 길일까?
그렇다면 이번에는 변호사의 사례를 살펴보기로 하자. 카우프만 판사는 대통령 산하 조직범죄 위원회가 후원하는 한 심포지엄에 참가했다가 조직폭력단에서 변호사가 맡고 있는 비판적인 역할에 대해 알고 아연실색했다.
... "고객에 대한 무제한적이고 지나친 충성은 결코 적절치 않다. 고객이 누구든, 변호사는 항상 또 다른 관심사에 대해서도 봉사해야 한다"
... 따라서 그는 고객에게 봉사할 때 적당한 한계선을 넘지 말라고 변호사들에게 경고하면서 '공공의 이익'과 같은 애매한 것을 말하기보다는 법률가라는 직업의 관리 아래 있는 중요한 사회 제도, 즉 철학적 구상으로서의 법률, 다시 말해 소송 절차를 지적했다.
이후 몇 년간, 정부 관청들은 거대한 공사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냈다. 오늘날 고속도로나 수도 체계를 민영화하자고 제안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최근 몇 년 사이에 그러한 우려에 긴박함을 덧붙인 두 가지 상황이 생겨났다. 첫 번째는 실제적인 것으로, 엔지니어가 효율적으로 일하기 위해서는 '소통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역설적이게도, 공학의 기술적 내용이 성장함에 따라, 엔지니어가 말과 글로 명확히 표현해야 할 필요성도 증대되었고, 수치가 아닌 수준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 다시 말해 듣고 이해하고 설명하고 설득하고 강조하는 일도 늘어났다. 오늘 날의 공학은 예전보다 더욱 집단적인 일, 달리 말해서 팀 차원의 노력이 되어버렸다. 베슬리엄 철강 회사 사장의 말에 따르면, 엔지니어들은 '자신들이 가진 정보와 생각과 의견을 말이나 글로 다른 사람들에게 논리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 '오늘날 우리 회사에 들어오는 엔지니어들은 과거 어떤 때보다 더 우수하다. 그러나 머지않아 우리는 명확히 말할 수 있는 엔지니어, 간결하고 효율적이며 설득력 있게 쓰고 말할 수 있는 엔지니어, 중동이나 동유럽 국가, 심지어 중국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더라도 문화적 충격에 빠지지 않을 엔지니어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핵무장 해군의 아버지로 인정받는 그는 바이에른 사람의 매력이 아니라 지적인 탁월함과 강인한 성품 그리고 정치적 판단력으로 이름을 떨쳤고, 84세의 나이에 "최고의 엔지니어는 전문적 기술 외에 인문학을 배우고 자기를 둘러싼 세상에 대해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 배너바 부시는 삼십대에 MIT 교수 겸 학장으로 재직하면서 ... 다음과 같이 썼다.
... 따라서 우리는 균형이 필요하다. 전기 회로에 대한 수학 강좌와 더불어 불어 사상사 강좌도 필요하다.
공학의 다른 분야에도 폭넓은 관심과 광범위한 사고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공학 우등생 단체인 타우 베타 페이의 장학금 시상식을 보면,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연주하며 시를 쓰고 정치를 말하는 젊은 엔지니어들에 대해 알게 된다. 1885년에 창립된 협회 정관의 전문에는 '공학 분야의 학식'과 '인문학적 정신', 그리고 '뛰어난 학식과 훌륭한 성품' 등의 문구가 들어가 있었다. 특히 인문학적 정신은 타우 베타 파이 장학금 수상자들뿐 아니라 진지하게 인문학과 예술에 몰두하면서 전형적인 공학인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편협한 관심'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으려는 전국의 젊은 여성과 남성 공학도들에 의해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소집단(개인적 경험에 근거해서 감히 추정컨대, 전체 공학도의 10퍼센트 미만)이지만, 과도한 전문화에 대한 인간 정신의 저항을 증명하고 있다.
다양한 관점들, 다시 말해 모두 다 타당하지만 일부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그런 관점들을 조화시키려는 이 확장된 에세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엔지니어는 자신의 양심을 따라야 할까? 물론 그렇다. 조직의 효율성과 민주적 질서를 위해 개인적 관점은 하위에 두어야 할까? 이 문제 또한 당연히 그렇다. 공학은 산업의 한 부문일까? 확실히 그렇다. 공학은 규제 기능의 중심일까? 이 또한 확실히 그렇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산업 발달일까 아니면 목가적인 평온함일까? 둘 다 원한다. 우리는 총을 원할까 아니면 쟁기의 보습을 원할까? 당연히 쟁기의 보습이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여성 엔지니어는 남성 엔지니어와 똑같을까 아니면 서로 다를까?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때로 나는 월트 휘트먼을 인용하고 싶다.
내가 모순된 말을 하고 있나?
그래, 그렇다면 내가 모순된 말을 하고 있군.
초중반부까지 읽다보면 그래서 주장하고 싶은 결론이 뭐야? 라는 생각을 좀 하게 된다.
나름대로는 정반합의 변증법적인 논리 전개를 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결론부에서야 확실한 목소리를 내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치바나 다카시의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와 같다. 다만 조금 차이가 있다면 저자 자신이 엔지니어이므로 좀 더 그 쪽의 입장에서 주장한다는 것 정도?
엔지니어 사랑, 엔지니어 부심이 좀 강하지만 불쾌하기보다는 귀엽다.
(이건 내가 이과이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사회를 위해서, 라기보다는 진정 훌륭한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서!! 인문학과 교양을 쌓아야 한다는 논지.
하지만 윤리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다소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그것조차 엔지니어다워서 웃었다.
개인의 양심에 따라 영역을 선택하되, 주어진 일에는 그것이 개인 신념에 위배되더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들이 최선을 다한 결과에서 파생된 부수적인, 혹은 예측되지 못한 부작용에 대해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엔지니어는 기업이나 경영, 정치자의 개는 아니며, 시킨다고 무엇이든 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룰이 있어야 하나, 그것을 공식적으로 정하는 것은 엔지니어 답지 않다고 생각한다.
엔지니어들의 양심과 이성을 충분히 존중하나, 그것을 제대로 갖추기 위해 인문학과 교양은 필수적인 요소이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다치바나 다카시 쪽이 더 마음에 들지만, (플러먼은 너무 소극적으로 주장하는데다 다소 변명조다)
카이스트 추천 도서 목록임을 감안하면 나쁘지 않다. 문과생보다는 이과생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전개방식.
(아름답고 탄탄한 논리로 설득하지는 못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너나 나나 '우리 편'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한 번 정도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발췌]
이 모든 것들은 엔지니어가 이미 확립된 규칙의 틀 안에서 고용주나 고객에게 '전적으로' 봉사해야 한다는 뜻일까? 공공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은 규칙과 법원의 판결이라는 생각이 과연 문제를 해결하는 길일까?
그렇다면 이번에는 변호사의 사례를 살펴보기로 하자. 카우프만 판사는 대통령 산하 조직범죄 위원회가 후원하는 한 심포지엄에 참가했다가 조직폭력단에서 변호사가 맡고 있는 비판적인 역할에 대해 알고 아연실색했다.
... "고객에 대한 무제한적이고 지나친 충성은 결코 적절치 않다. 고객이 누구든, 변호사는 항상 또 다른 관심사에 대해서도 봉사해야 한다"
... 따라서 그는 고객에게 봉사할 때 적당한 한계선을 넘지 말라고 변호사들에게 경고하면서 '공공의 이익'과 같은 애매한 것을 말하기보다는 법률가라는 직업의 관리 아래 있는 중요한 사회 제도, 즉 철학적 구상으로서의 법률, 다시 말해 소송 절차를 지적했다.
이후 몇 년간, 정부 관청들은 거대한 공사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냈다. 오늘날 고속도로나 수도 체계를 민영화하자고 제안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최근 몇 년 사이에 그러한 우려에 긴박함을 덧붙인 두 가지 상황이 생겨났다. 첫 번째는 실제적인 것으로, 엔지니어가 효율적으로 일하기 위해서는 '소통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역설적이게도, 공학의 기술적 내용이 성장함에 따라, 엔지니어가 말과 글로 명확히 표현해야 할 필요성도 증대되었고, 수치가 아닌 수준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 다시 말해 듣고 이해하고 설명하고 설득하고 강조하는 일도 늘어났다. 오늘 날의 공학은 예전보다 더욱 집단적인 일, 달리 말해서 팀 차원의 노력이 되어버렸다. 베슬리엄 철강 회사 사장의 말에 따르면, 엔지니어들은 '자신들이 가진 정보와 생각과 의견을 말이나 글로 다른 사람들에게 논리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 '오늘날 우리 회사에 들어오는 엔지니어들은 과거 어떤 때보다 더 우수하다. 그러나 머지않아 우리는 명확히 말할 수 있는 엔지니어, 간결하고 효율적이며 설득력 있게 쓰고 말할 수 있는 엔지니어, 중동이나 동유럽 국가, 심지어 중국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더라도 문화적 충격에 빠지지 않을 엔지니어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핵무장 해군의 아버지로 인정받는 그는 바이에른 사람의 매력이 아니라 지적인 탁월함과 강인한 성품 그리고 정치적 판단력으로 이름을 떨쳤고, 84세의 나이에 "최고의 엔지니어는 전문적 기술 외에 인문학을 배우고 자기를 둘러싼 세상에 대해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 배너바 부시는 삼십대에 MIT 교수 겸 학장으로 재직하면서 ... 다음과 같이 썼다.
... 따라서 우리는 균형이 필요하다. 전기 회로에 대한 수학 강좌와 더불어 불어 사상사 강좌도 필요하다.
공학의 다른 분야에도 폭넓은 관심과 광범위한 사고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공학 우등생 단체인 타우 베타 페이의 장학금 시상식을 보면,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연주하며 시를 쓰고 정치를 말하는 젊은 엔지니어들에 대해 알게 된다. 1885년에 창립된 협회 정관의 전문에는 '공학 분야의 학식'과 '인문학적 정신', 그리고 '뛰어난 학식과 훌륭한 성품' 등의 문구가 들어가 있었다. 특히 인문학적 정신은 타우 베타 파이 장학금 수상자들뿐 아니라 진지하게 인문학과 예술에 몰두하면서 전형적인 공학인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편협한 관심'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으려는 전국의 젊은 여성과 남성 공학도들에 의해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소집단(개인적 경험에 근거해서 감히 추정컨대, 전체 공학도의 10퍼센트 미만)이지만, 과도한 전문화에 대한 인간 정신의 저항을 증명하고 있다.
다양한 관점들, 다시 말해 모두 다 타당하지만 일부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그런 관점들을 조화시키려는 이 확장된 에세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엔지니어는 자신의 양심을 따라야 할까? 물론 그렇다. 조직의 효율성과 민주적 질서를 위해 개인적 관점은 하위에 두어야 할까? 이 문제 또한 당연히 그렇다. 공학은 산업의 한 부문일까? 확실히 그렇다. 공학은 규제 기능의 중심일까? 이 또한 확실히 그렇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산업 발달일까 아니면 목가적인 평온함일까? 둘 다 원한다. 우리는 총을 원할까 아니면 쟁기의 보습을 원할까? 당연히 쟁기의 보습이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여성 엔지니어는 남성 엔지니어와 똑같을까 아니면 서로 다를까?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때로 나는 월트 휘트먼을 인용하고 싶다.
내가 모순된 말을 하고 있나?
그래, 그렇다면 내가 모순된 말을 하고 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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