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오승호] 도덕의 시간

일루젼 2024. 6. 10.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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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오승호(고 가쓰히로) / 이연승

출판 : 블루홀식스(블루홀6) 
출간 : 2020.01.30


       

  

살아가는 매순간 순간이 다정하고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유독 힘들고 지난하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지치고 지쳐서 완전히 소진된 것처럼 느껴질 때. 

그럴 때 어디에 연결되어 있었던 것인지 모를 줄을 잠시 놓아버리면, 마치 자동인형이 된 것처럼 상황에 반응하고 결정하는 자신을 관찰할 수 있다. 그 순간의 나는 나이지만 내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도덕의 시간>은 독자로 하여금 그런 괴리와 부유의 시간을 감각하게 한다. 

 

이 작품은 다른 여타의 일본 미스터리 작품들과는 조금 다르게 구성되어 있다. 대다수의 작품이 지엽적인 퍼즐 조각들이 모이며 하나의 커다란 '공통된' 그림이 드러나는 형태라면, <도덕의 시간>은 두 가지 이상의 완전히 다른 그림들이 중심화자인 후시미를 통해 연결된다. 일종의 벤다이어그램과도 같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독립적이며, 제각각의 '도덕적 문제'를 제기한다. 

 

'무엇이 옳은가?'

'나는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가?'

 

누가 진범인가를 놓고 후보들을 소거해 나가는 방식이 아닌, 어째서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가를 살펴나가는 전개 방식이 독특했다. 

피해자들은 있었지만, 가해자는...

 

마사키 선생이 설파하는 '모두 씨'는 이드와 초자아의 관계에 가깝다. 언제나 나를 감시하고 살펴보는, 그리고 바른 방향과 이상을 제시하는 '도덕'을 관념이 아닌 실제 인물로 상상하자는 것. 그러나 칸트의 정언 명령은 육체가 없는 관념이기에 존재할 수 있다. 각각의 선과 옳음은 언제나 자신만의 것이고, 이상은 현실이 아니기에 방향성으로서의 힘을 갖는다.

 

오치 후유키가 냉소하는 '불행 포르노'는 요네자와 호노부가 <왕과 서커스>에서 다치아라이의 대사를 통해 비판하는 대중의 속성과도 맞닿아있다. 한 걸음 떨어진 안전지대에서 '즐길 수 있는' 타인의 고통과 불행은, '내'가 그 대상자가 아니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동정과 연민, 분노의 감정을 소비하게 해주는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다한 비극은 그대로 잊혀진다. 실제 비극을 경험하고 있는 인물들의 삶은 사라지는 것이다.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 

이것은 일종의, '도덕의 문제'인 것이다. 

 

누구나 자신만의 옳음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이되 공동체로서 살아간다. 

서로 다른 옳음들을 조율하기 위해 -어쩌면 참고 살아내기 위해- 우리는 공통된 도덕의 규범과 범주를 설정하고 합의하곤 한다. 

누구에게나 절대적이고 완벽한 '정답'이란 존재할 수 없다. 

 

나의 힘겨움이 존재하듯, 

상대의 힘겨움 역시도 실존함을 받아들일 때. 

서로는 '나'와 '우리'의 경계를 찾아가게 될 것이다. 

 

 


    

 

늙은 현자는 물었습니다.
"왜 개를 잡아먹었느냐?"
소년은 대답했습니다.
"배가 고팠으니까요."

 

 

 


- 장례식장 장막만 보면 배가 고파진다.
이 천벌 받을 조건 반사를 다른 사람 앞에서 털어놓은 적은 없다. 바로 조금 전 함께 아침을 먹은 아내에게도.

- "아르바이트는 지긋지긋해."
후시미는 학창 시절 오소네와 함께 아르바이트를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는 너 때문에 나까지 잘렸잖아."
부모의 돈으로 대학을 다니는 녀석 중에는 제대로 된 인간이 없다고 말한 점장에게 갖은 욕설을 퍼붓고 정확히 일한 지 이틀째 되는 날 쫓겨났다.
"먼저 화를 낸 건 너였지."
오소네가 유쾌한 듯이 말하자 후시미는 대답했다.
"거의 동시였어."
"네가 폭발하는 바람에 나도 거든 거야. 그때만 해도 죽이 아주 척척 맞았는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후시미는 무심코 웃음을 터뜨렸다. 괜히 불편한 마음에 지금껏 일부러 피해 온 옛 친구도 막상 얼굴을 마주하고 나니 생각보다 어색하지 않아서 후시미도 왠지 동창회에 참석한 기분을 맛보았다. 

- "너야말로 참 한가하네. 베테랑 기자님이 올 곳은 아니지 않나?"
"취재가 아니야. 아직까지는."
의미심장한 말에 고개를 들자 오소네는 기뻐하는 얼굴로 후시미를 쳐다봤다.

- "아오야기 난보는 시대를 풍미한 천재였어. 비단 도예뿐만 아니라 조각, 건축처럼 조형이라고 할 만한 분야에 전부 손을 뻗었고 높은 평가도 거머쥐었지. 뉴욕에서 개인전을 연 적도 있어."
"그런 것치고 언론사 기자들은 통 안 보이네."
"이미 과거 사람이라는 점도 영향을 끼쳤겠지만, 실은 아오야기 집안에서 요청했나 봐. 아오야기 난보는 집안의 장남이었는데도 후계를 잇지 않은 문제아였으니까. 장례식을 본가에서 치른 것도 가족 간의 끈끈한 정 같은 것 때문은 아니야. 최대한 풍파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끝마치고 싶은 게 본심이겠지. 이 일대에서 아오야기 집안의 위세는 절대적이니까." 

- 아오야기 가는 긴키 지역에서 이름난 동시에 이곳 나루카와시를 대표하는 명망가 집안이다. 시 의원과 현 의원이 줄지은 명문가의 장남 도련님은 지역 출신 유명인으로 주목받았지만 본가와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유명해지기 전에는 방탕아, 가문의 수치라는 비난을 들으며 집안과 거의 연이 끊긴 상태나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 일을 쉬는 계기가 된 그 실수는 언제쯤 해결이 될지, 아니 애초에 해결될 문제인지도 알 수 없지만 그동안에도 가족의 삶은 이어지고 도모키도 점차 성장하고 있다. 얼마 되지 않는 저축액이 사라지는 게 먼저일지 아니면 시간제로 일하며 살림을 꾸려 가는 아내의 인내심이 바닥나는 게 먼저인지 모를, 꿈도 희망도 없는 경주가 펼쳐지고 있다. 이제는 슬슬 결단해야 한다는 조바심은 분명 있었다.

- 복귀전이 펼쳐질 링에 오를 때 뒤를 봐줄 사람이 다나베가 될 것은 예상했다. 될 성싶은 기획을 물어 오는 재능은 인정하지만 결과에 걸맞게 중노동일 것이 분명하다. 기획전문가를 자처하는 탓에 후방 지원은 고사하고 땀도 닦아주지 않는다. 그래도 돈 하나만은 확실히 정산해 준다.
감이 무뎌질 대로 무뎌진 지금 내가 과연 해낼 수 있는 일일까.

- 도모키는 고향인 나루카와에서 키우고 싶어.
어느덧 도쿄의 삶에 익숙해졌고 평소 고향에 애착을 보이지 않았던 아내라 뜻밖이었다.
논의 끝에 후시미는 아내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이후 주말 부부는 고사하고 석 달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하는 생활이 시작됐다. 프리랜서 영상 저널리스트인 후시미는 끊임없이 일본 전국을 돌아다녔고 이따금 짬이 날 때만 나루카와에서 도모코, 그리고 나날이 성장하는 도모키와 시간을 보냈다. 

 

- 불안정한 삶인 것은 물론 벌이가 넉넉하지도 않았다. 혼자 아이를 키우며 고생을 많이 했을 텐데도 도모코는 후시미를 만날 때마다 늘 미소 지어 주었다. 술자리에서 안주삼아 이야기하는 후시미의 실수담을 듣고 천진난만하게 웃고 가끔 놀리기도 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후시미는 이 여자에게만큼은 버림받고 싶지 않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동시에 이런 나를 왜 남편으로 골랐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의문은 어느덧 불안감으로 바뀌었고, 그 불안감은 실패 후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지내는 동안 마음속 그늘 안에서 점차 짙어졌다.

- 도쿄에서 내려온 지 반년. 나루카와에 정착해서 살다 보니 지금껏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중 피부로 체감하게 된 것이 바로 주민 사이의 세력 싸움, 쉽게 말하면 원래 살던 이들과 새로 이주해 온 이들 사이의 물밑 알력 다툼이다.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정례 모임에 처음 참석했을 때만 해도 후시미도 외지인 취급을 당했다. 노골적으로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자네는 모르네"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어떻게든 따라잡을 수 있게 된 것은 전부 도모코 덕분이다. 빈말이 아니라 지금껏 아내를 싫어하는 사람은 만나보지 못했다. 
그래도 암암리에 느껴지는 차별은 있었고 특히 지금 고미네마치가 떠안은 문제는 그것을 더욱 부각시킬 염려가 있었다.

- "자, 어쨌든 세 사람의 첫 만남을 기념하며 건배!"

다나베가 꿀꺽꿀꺽 맥주를 마셨다. 원래부터 밥을 맛있게 먹는 걸로 유명한 녀석이었다. 덩달아 젓가락을 들다가 맨 마지막에 튀어나오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 한 경험도 여러 번 있다. 후시미는 예의상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페이스를 무너뜨리면 안 된다며 스스로 되뇌었다.

- "그래서, 오치 씨는 하시는 일이?"
겉치레를 버리고 솔직히 묻자 다나베가 따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야, 넌 그래서 안 돼. 일 이야기가 우선인 건 알겠는데 그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 인연이 더 중요한 법이잖아. 게다가 우리는 실력 하나로 먹고사는 만큼 다른 사람보다 더 인간관계를 넓히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반박할 도리가 없는 정론을 듣고 후시미는 "됐어" 하고 자포자기하며 맥주를 마셨다.
"오치. 이 아저씨는 말이지. 일하다가 어떤 실수를 저지른 탓에 지금 불안정한 생활을 하는 중이라 정서가 다소 불안한 것도 이해해 줘야 해."
"전 괜찮아요."

- "비디오테이프가 있다고 했는데, 거기에 범행 장면도 찍혔나?"
"아마추어가 찍은 영상이라 중간에 화면이 흔들리고 각도도 바르지 않아요. 그렇지만 범행 전후 상황은 대부분 확인할 수 있어요."
"즉 무카이가 범인인 건 확실하군."
그 말에 오치는 대답하지 않았다.

 

- "그런데 무카이가 범인이라면 이제 와서 뭘 더 캐려는 거야?"

오치의 설명만 들으면 당시 무카이에게 강압적인 수사가 이뤄졌다고 보기 어렵다. 만약 다나베와 오치가 무카이 하루토의 인간성만을 기록할 심산이라면 후시미는 거절할 생각이었다.
있는지 없는지 불확실한 것. 옛 친구 오소네는 인간의 마음속 어둠을 그렇게 표현했다. 후시미는 또 다른 이유에서도 그런 것과 얽히고 싶지 않았다. 어둠의 정체를 직시할 자신이 없었다.

- 그렇다면 그것대로 또 의문이다. 이런 기획에 선뜻 거금을 투척할 우량 기업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체 저 여자는 누구야?"
후시미가 오치에 대해 묻자 다나베는 호들갑스럽게 고개를 흔들었다.
"나사가 풀린 건 너 같네. 오치가 누구냐고? 그런 걸 발 벗고 조사하는 사람이 바로 후시미 유다이 아닌가?"
그 말은 틀릴 게 없다. 그러나 후시미는 일단 고개를 흔들었다.

- "미안. 지금 나한테는 무리야."
후시미는 오치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대답은 이미 정했다.
이것은 도덕 문제입니다.
그 말의 울림은 너무도 시의적절해서 경제 사정을 잊게 할 만큼 무시무시하고 불길했다.

- 미로 같은 오사카역을 지나 약속 상대를 기다리는 젊은이와 귀갓길 회사원으로 붐비는 헵파이브 건물 앞으로 나갔다. 헵파이브는 관람차로 잘 알려진 곳이다. 밤 9시가 넘어도 도시는 휘황찬란하다. 후시미는 그곳을 지나 인파들에게서 멀어졌다. 오사카 순환선을 지나 자야마치 방면으로 향했다. 모퉁이를 몇 번인가 돌자 후시미의 단골 바가 나타났다.
가게 안에는 가늘고 긴 타원형 유리 카운터가 있고 수조를 연상하게 하는 푸른 조명이 마음을 묘하게 가라앉혔다. 시끄럽게 떠드는 손님이 없는 것도 장점이지만 무엇보다 바텐더가 과묵한 것이 마음에 든다. 눈에 띄는 손님 대다수는 혼자서 술을 즐기고 있다

- 혼자 마시는 술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은 도쿄에서 도망치듯 나루카와에 돌아오고 나서부터다. 그전까지는 누군가와 함께 즐기지 않는 술자리는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연히 불쑥 찾아온 이 가게에는 첫 방문 이후 벌써 열 번 이상 왔다. 오직 혼자서, 아무 생각도 없이 천천히 몽롱해져 가는 의식을 즐긴다. 그런 행위가 목적이 되어가는 현실에 위기감도 느꼈지만 이런 시간이 정신의 균형감을 유지하는 데 좋은 영향을 미치는 건 사실이었다.
늘 주문하는 샌디가프 맥주를 주문했다. 1분도 되지 않아 눈앞에 나온 잔의 삼분의 일을 단숨에 비웠다. 취기의 조짐을 느꼈고 그 기운은 후시미를 정처 없는 사고의 길로 이끌었다. 

- 우치노는 사이타마현에서 의료 사무원으로 일했다. 직장 내 평가는 훌륭했다. 그곳에서 3년 근무하다가 돌연 직장을 관뒀다. 사유는 결혼. 그러나 직장 동료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 그녀는 상사에게 퇴사 이유를 집안 사정 때문이라고만 했다. 우치노가 채 서른이 되기 전에 일어난 일이다. 
이후 그녀는 10년간 총 세 번의 결혼을 반복했다.
그녀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사라진 여자의 행방을 머나먼 서쪽 땅에서 떠올려 봐야 소용없다. 그러나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녀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하는 한 나는 다시 일어설 수도 없다. 

- "다나베에게 전해 줘. 개인 정보는 조심히 다루라고."
[후시미 씨. 둘이서 한잔하실래요?]
둘이서 한잔이라. 후시미는 쓴웃음을 짓는 동시에 약간 친근감을 느꼈다.
"늙은 아저씨랑 한잔해 봐야 나올 것도 없을 텐데."
[그건 제가 판단해요.]
역시나 시원시원하다.

- 오치는 샌디가프를 주문했다.
"이거 엄청난 우연이군. 나도 첫 잔이 그거였는데, 맥주를 좋아하나?"
"그러면 안 되나요?"
흥. 차갑기는.
"사회생활을 하려면 이럴 때 적당히 맞장구도 쳐줘야 해. '이야, 취향이 비슷하네요'처럼 아저씨가 좋아할 만한 말을 해 줘야지. 그 정도 기술도 없이 이 업계에서 먹고살 수 있을 것 같아?"
"여자인 걸 무기로 삼으라는 뜻인가요?"
"남자도 남자인 걸 무기 삼고 있어. 체력과 힘. 똑같지 않나?"
"상대를 고를 뿐이에요."
오치는 후시미의 말을 태연하게 받아넘겼다.
"후시미 씨 앞에서 여자인 걸 내세워 봐야 소용없다. 그때그때 분위기에 맞춰 줘 봐야 어차피 우습게 볼 게 뻔하다. 제 생각이 틀렸나요?"
후시미는 말문이 막혀서 오치를 빤히 쳐다봤다. 오치는 그런 후시미를 아랑곳하지 않고 앞을 바라본 채로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전 후시미 씨와 친구가 되고 싶은 게 아니에요."

- "넌 미디어 일에 낭만이나 사명감 같은 걸 느낄 수도 있지만 실상은 그렇게 고상하지 않아. TV를 한번 틀어 봐. 다른 사람의 안색을 살피느라 어떤 사안에 대해 어물쩍 넘기는 모습을 뉴스에서 자주 보지 않나? 보도의 자유 같은 말은 기만일 뿐이야. 그런데 비판하려고 하는 말은 아니야. 다들 그래야 할 사정들이 있으니까. 먹고살려면."
후시미는 별말 없이 투정을 들어주는 오치의 당당한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더욱 멈출 수 없었다.
"생각해 봐. 재벌들의 악행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폭로하면 어떻게 될까? 스폰서의 심기를 거스르는 바람에 회사가 어려운 상황에 빠지게 될 테고, 회사가 어려워지면 그곳에 다니는 직원들이 잘리고 하청 업체에는 싸구려 일감도 들어오지 않게 돼. 우리가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건 오로지 우리에게 불똥이 튀지 않을 무력한 일반 시민의 범죄 정도야. 살아가기 위해서라고? 오히려 제대로 살아가고 싶은 사람일수록 제대로 된 건 만들 수 없어."
후시미는 한바탕 불만을 토하고 잔을 비웠다. 한숨을 내쉬자 몸속이 텅 비는 듯한 공허감에 사로잡혔다.
"일반론으로 들을게요."
대범한 걸까, 둔감한 걸까. 후시미는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 일반론에서 벗어나면 나처럼 되는 거야.”
그러자 처음으로 오치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새삼 다시 보니 아름다운 외모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깔끔한 느낌이 있었다.
"미디어나 언론이 비판할 수 있는 건 개인뿐이다. 정말 흥미진진한 이야기네요."

- "내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지 않아?"
"다른 뜻은 없어요. 개인적인 공감이에요."
이 여자는 남에게 갑작스레 따귀를 얻어맞아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파요'라고 하지 않을까.

- "후시미 씨. <볼링 포 컬럼바인>과 <A>. 둘 중에 뭐가 더 잘 만든 작품이라고 생각하세요?"
 
- "관객의 인식을 유도하는 방식이 강제적인지 아닌지가 문제야. 한마디로 관객을 제어하는 방식이 공정한가. 예를 들어 <컬럼바인>은 필요한 정보를 일부러 숨긴 채 끝까지 밝히지 않고 관객에게 해결을 납득시키는 미스터리 같은 형식을 띠고 있어. 반면 <A>에는 여백이 있지."
후시미는 <A>가 작품에서 제시하는 것이 단순한 결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특수한 환경 아래에 있는 이들의 평범한 일상을 찍어 관객의 가치관이 바뀌기를 기대하는 실험으로 봤다.
"<컬럼바인>이 창작자의 다양한 의도를 섞어 만든 미스터리라면 <A>는 순문학 같은 거지."
"후시미 씨. 평소에 문학 쪽에 관심이 있나요?"
"그냥 예를 든 것뿐이야."

- "네가 마이클 무어를 지지하는 이유를 알려줘 봐."
오치는 맥주로 입술을 한 번 적시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느낌을 말씀드릴게요. <A>는 <A>를 볼 필요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작품 같다는 느낌이에요."

- "극장에서 <A>를 선택해 보는 사람들은 그 시점에 이미 <A>를 보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인 거예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말장난하는 건 아니지?"
"<A>를 본 이후 생길 가치관의 반전과 전환에 대해 잠재적으로 인식하는 이들만 <A>를 관람한다는 뜻이에요."
그제야 오치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략 느낌이 왔다.

"그러니까 <A>를 볼 정도로 문화 수준이 높은 사람이라면 이미 <A>에 담긴 함의를 이해한다는 뜻인가."
"수준 운운하는 건 지나친 것 같아요."
"하지만 마이클 무어는 다르다?"
"그건 엔터테인먼트잖아요."
오치가 또다시 미소 지었다.
"엔터테인먼트 작품을 즐길 생각으로 보러 오는 관객이 가치관의 반전과 전환까지 된다는 건가."

- "힘이라는 건 결국 매출을 뜻하는 거였나."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창작자의 뜻을 전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잘 전할 수 있는가. 그로써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고 또 그들을 바꿀 수 있는가. 그게 바로 작품이 지닌 힘 아닐까요?"
후시미는 팔짱을 끼고 오치의 말을 곰곰이 되새겼다. 얼마나 잘 전할 수 있는가. 바로 얼마 전 자신이 비슷한 말을 입에 담은 기억이 있다. 그러나 곧장 그때가 떠오르지는 않았다. 
머릿속 한쪽에서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라고 생각한 이 여자와 같은 필드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자신을 발견했다.

- 고미네 공원에는 그네 외에도 회선탑의 잔해로 보이는 쇠기둥과 시소 잔해 등이 있었다. 원래 기능을 상실한 그것들이 무엇인지는 이곳의 과거를 아는 사람들만 알 것이다.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건 적당한 높이의 미끄럼틀 뿐이었다.
놀이터의 그네, 시소, 정글짐 철거는 전국 각지에서 진행 중이다. '아이들의 안전을 고려한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후시미가 어렸을 때도 그네에서 뛰어내리는 놀이가 유행해 뼈와 이가 부러진 친구가 있었다. 정글짐에서 추락하는 아이도 적지 않았다. 당시에는 그런 게 당연한 일이었고, 일상다반사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이가 다치면 부모는 구청 등에 안전 관리가 소홀하다는 민원을 제기한다. 그런 이유로 소송도 일어나고 있다. 
언뜻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철거를 반대한다고 해서 다친 아이를 책임져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철골만 남은 그네를 보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공허감을 느끼는 것이다.

- "유토리 세대니까요.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죠."

"세대로 나누는 건 너무 편협하지 않나요. 후시미 씨, 저널리스트시면서."
"젊은이들에게 적당히 조언해 주는 것도 나이 든 사람의 특권이라고 봅니다."
그러자 고마이는 "그건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하고 인정하며 말을 이었다.

- "단지 그것만은 아니고 '학력'이라는 획일화된 평가 기준에 대한 반성이라고 해야겠죠. 공부와 시험 성적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강한 탓에 아이들에게 치열한 경쟁을 강요한 건 사실이니까요. 유토리 교육은 그런 평가 기준을 다각적으로 보기 위한 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운동, 예술, 그리고 장기 같은 것도 평가하자는 거죠."

- "이건 농담이 아니라 진심입니다. 그런 점수를 매기기 어려운 특기를 살리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종합해서 한 인간의 '인간력'을 평가하는 것. 그런 시도는 일정 부분 공감할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부분에서 유토리 교육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성공할 수 없었던 겁니다."
"무슨 뜻이죠?"
"사회가 그 이념에 발맞춰 가지 못한 거죠. 학교에서는 학력과 비슷하게 운동, 예술, 장기 등으로 기를 수 있는 장점과 감수성 등을 평가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실제 사회는 다르죠. 학교를 떠난 아이들을 기다리는 건 여전히 고학력자들이 고수입을 얻을 가능성이 큰 사회였던 겁니다."
고마이는 후시미가 느낀 인수분해와 장기의 차이를 알아맞힌 듯했다.

 

- "그리고 전 그게 당연하다고도 봅니다. 학력이라는 건 실체 이상으로 사회에서 부여한 과제를 고분고분하고도 효율적으로 대응하는 능력을 가늠하는 기준이라고 생각하니까요. 거기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사람을 선택하는 건 합리적입니다."
입시 경쟁이라는 시스템이 오랫동안 이 경제 대국을 지탱해 온 것만은 사실이다.
"반면 문제도 있습니다.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는 것에만 익숙해지면 스스로 과제를 만들 수가 없죠. 모든 것을 그 범위 안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래서 창조력과 유연한 사고 같은 것을 단련하려고 했다. 다시 말해 인간력이라는 것을. 그러나 결국 실패로 끝났다."
"어렵죠. 학력은 숫자로 나타나니 모두 공평하고 알기 쉽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력을 누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의문은 그대로 도모키와 다쿠의 교육 환경에 대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 정답일까.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은 고마이 역시 고민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아내에게 모든 것을 일임한 후시미가 답을 알리는 없었다.

- 밤이 깊어 갔다. 슬슬 두 사람이 헤어지는 지점이 가까워졌다. 회사원인 고마이는 왼쪽으로, 외톨이 늑대인 후시미는 오른쪽으로 향했다. 도모키는 장래에 어떤 길을 걷게 될까.

- 후시미는 기획서를 대충 훑어봤다. 그럴싸한 내용이다. '시종일관 묵비권을 지킨 무카이 하루토의 마음속 어둠은 어쩌면 현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될 수도 있다' 같은 문장이나 그 무카이 본인이 출연을 승낙했다는 내용, 지금껏 공개되지 않은 비디오테이프 영상 같은 마케팅 포인트도 확실히 적혀 있었다.
그러나 끝까지 다 읽고서 이 기획서는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해 만들었다고 느꼈다. 일부러 진의를 모호하게 기술한, 혹은 기술하지 않은 기획서다. 취재를 하든 촬영을 하든 일단 촬영대상에게 양해를 구할 때 이런 것을 보여 주고는 한다. 처음부터 억울한 무죄 사건을 취재한다고 하면 달갑게 응할 경찰 관계자는 없다. 그러나 그전에 기획서를 보여 주고 사건을 검증한다거나 재현 취재, 더 나아가 수사기관의 실력을 시청자에게 보여 주고 싶다고 하며 허락을 받는다. 그러고 나서 무죄 가능성은 그 뒤에 떠오른 겁니다. 즉 '결과적으로 이런 영상이 나와 버렸습니다'라면서 잡아떼는 것이다. 

- "즉 무카이는 무고하다는 거군."
"그건 아니죠. 후시미 씨가 아까 말씀하신 대로예요. 진실은 뭐든 상관없다. 문제는 도덕... 그러니까 법률과 도덕 문제죠."
망설임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오치의 눈빛을 보고 후시미는 되받아칠 수 없었다.
"무카이가 마사키를 죽였다는 판결, 그리고 무카이 하루토의 죄를 판가름한 것은 과연 법이라는 이름의 규칙일까요? 아니면 도덕일까요?"

- 오치가 QM을 어떤 식으로 찍을 건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법률과 도덕, 무카이 하루토를 판가름한 기준은 과연 둘 중 무엇인가. 다만 오치가 듀 프로세스 오브 로 due process of law, 즉 정당한 법의 절차를 언급하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근대 형법에서는 '입증'을 피고가 범행을 저지를 수 있었다는 증명이 아닌, 피고가 아니면 범행이 일어날 수 없다는 증명으로 해석한다. 상황 증거와 자백도 엄밀히 말하면 가능성을 보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예컨대 인적 없는 거리에서 칼에 찔려 사망한 사람을 우연히 발견한 남자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거리를 지나던 최초 발견자는 놀란 나머지 남자의 몸에 박힌 칼을 뽑아 버린다. 그것도 모자라 저도 모르는 사이에 당황해서 사정射精까지 하고 만다. 그런 상황에서 나타난 형사에게 남자는 사건이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주장하지만, 상황만을 놓고 보면 그의 유죄 가능성은 너무도 크다. 엄격한 수사 과정 중에 형사가 남자에게 속삭인다. '일단 죄를 인정해라. 그럼 편해질 수 있고 뒷일은 재판에서 다투면 된다'. 이미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남자는 형사의 설득에 넘어가 결국 죄를 인정하고 만다.

- 그야말로 투박한 예시지만 이렇게 기소된 남자가 '범행을 저지를 수 있었다'라는 것은 명백하다. 흉기를 손에 쥔 상황, 사정한 상황, 자백한 상황. 모든 것이 남자를 범인답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말해 남자에게 그 이상의 범인성은 인정되지 않는다.
흉기를 구입하는 모습이 방범카메라에 찍히는 것처럼 객관적인 동시에 움직이기 어려운 증거. 다시 말해 '물증'이 없는 한 아무리 의심스러워도 범인성을 인정하지 않는 게 원칙이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원칙은 그저 명분일 뿐이라고 주장되고는 한다. 현실에서는 가능성의 천칭이 얼마나 기울었느냐에 따라 판결이 내려지는 사례가 드물지 않다. 

- 이 모든 것을 고려해 무카이에게 내려진 유죄 판결을 두고 법 절차가 충분치 못하다고 호소하는 이는 세상을 퍼즐 게임으로 보는 인간이라고 비난당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무카이는 차고 넘칠 만큼 명확하게 범인인 동시에 유죄인 것이다.
그러나 오치는 무카이를 판가름한 것이 논리적인 '법'이 아닌 감정적인 '도덕'일 수 있다며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듯하다.
과격한 자유주의 사상에서나 있을 법한 완전성에 대한 집착. 국가라는 필연적 폭력 장치에 대한 지나친 거부 반응. 후시미는 이데올로기를 토대로 한 그런 억지 이론에 발을 담그는 것은 사절이었다. 

- "그래도 당당히 작품을 발표하셨죠. 저널리스트로서 끝까지 책임을 완수하신 것 아닌가요?"
책임이라.
후시미는 말없이 술을 마셨다.
괜찮은 것을 건졌다는 만족감은 있었다. 평가는 나쁘지 않았고 고소도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남자가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 알지 못한다.

- "요즘은 다들 물러졌다고 하던데."
도모키가 태어난 후 외국에서 돌아와 국내에 자리 잡은 후시미에게 실망했다는 의견은 많았다. 그들은 후시미가 조금 더 위험한 곳에 가서 조금 더 비참한 영상을 찍어 주기를 원했다.
"나보고 엄니가 몽땅 뽑혔대."
"대중은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걸 좋아하니까요. <아프리카 람보>가 너무 엄청난 탓도 있었겠죠."

 

- 과대평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분명히 <아프리카 람보>는 사회적,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후시미 유다이라는 저널리스트에게 미친 영향이 대단했다. 
<아프리카 람보>에서 후시미가 추적한 대상은 봇코라는 무기 상인이었다. 그는 머리가 똑똑한 데다가 유머러스한 것은 물론 문학과 시를 즐겼지만 한편에서는 인간을 죽이는 도구를 팔아 먹고살았다. 그런 봇코에게 후시미는 깊숙이 반응했다. 어떤 작품에 몰두할 때는 장점이 있고 단점도 있지만 그때는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렸다. 

- 봇코가 했던 말 중에 지금껏 잊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다. 주민들이 학살당한 마을을 찾았을 때 그는 미소 지으며 후시미에게 이렇게 말했다. "절망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라고.
봇코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건 영상편집이 끝나기 직전이었다. 민간 게릴라군의 총탄에 맞아 맥없이 세상을 떴다고 했다.
그는 전부 터득했을 것이다. 듣기 좋은 말, 허울 좋은 양식 뒤에 숨겨진 진실, 모순과 기만, 악의, 이 세상의 진정한 모습.
그와의 만남이 후시미를 바꾸었다. 그저 유명해지기 위해서만 내달렸던 야심이 형태를 바꿔 봇코의 눈에 비친 절망의 파편을 프레임으로 도려내 폭로하고 싶다는 낭만을 좇게 되었다.

- 그러더니 니무라는 "그래서 더욱" 하고 그날 처음으로 표정이 어두워졌다.
"왜 그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저도 지금껏 이해가 잘 안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니무라의 표정을 보며 후시미는 렌즈 너머에서 아주 좋은 그림이 나올 것을 확신했다.

- 그러자 니무라는 흐음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당시 미술 담당은 다키타라는 선생님이었는데 이분도 학교의 명물 선생님이었죠. 나루카와 제2초등학교에 근무한 지 수십 년이 된 분이었는데도 참 독특했어요. 지금도 축제 전날 다키타 선생님의 모습이 기억납니다. 제가 3학년 때였을까요. 친구와 무대 세팅 때문에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있었는데 세팅을 마치자 선생님이 느닷없이 술을 권하시더군요. 너희도 마시겠냐고 하면서요. 믿지 못할 이야기죠?" 
"지금이라면 확실히 징계감이군요."
"저 때도 헤이세이 시절이었으니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선생님은 '우리끼리 비밀로 하는 거다'라고 덧붙이셨죠. 생각해 보니 그게 그분과의 가장 큰 추억인지도 모르겠네요." 

- "네. 당시 연극부 선생님은 따로 계셨죠."

"그분의 성함은?"

니무라는 웃는 얼굴 그대로 대답했다.

"미야모토 유키오 선생님입니다."

- 이번 촬영은 예정된 촬영 종료 시각을 훨씬 넘길 정도의 수확은 있었다.
니무라를 통해 사건 전후 나루카와 제2초등학교의 분위기를 대략 알게 되었다. 학교는 세기가 바뀌어도 지역 커뮤니티의 중추 기능을 수행해 온 듯하다. 적어도 입시 전쟁 때문에 아이들이 스트레스를 받거나 극성 학부모와 학교 사이의 갈등처럼 요즘 빈발하는 문제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상징이 바로 강당이다. 실제 학교 강당은 지역에서 주최하는 행사에도 사용되며 주민과의 가교 역할을 했다. 한편으로 그렇게 공개된 장소였던 만큼 무카이라는 이단자의 침입을 막을 수 없었다. 

- "대단한 우연이네요."
화면에 비친 니무라를 보며 하네가 중얼거렸다. 후시미도 동감했다.
처음에는 생각지도 못한 행운에 놀랐고 오치에게 그런 행운이 찾아온 사실에 동업자로서 살짝 질투도 느꼈지만 그 뒤 니무라의 태도를 보며 인식이 바뀌었다. 니무라는 너무도 이상적인 증언자였다. 카메라를 거부하지 않고 이야기에도 막힘이 없었다. 지나치게 적나라하다고 느꼈을 정도다. 느닷없이 합류한 아마추어로는 보이지 않았다. 
알고 있지 않았을까.
사전에 논의하지는 않았지만 오치는 니무라의 정체를 미리 조사하고 그에게 안내를 의뢰한 게 아닐까.

- "그럼 정신 이상과의 차이가 뭐지?"
"실은 전 책임 능력이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의 어디가 심신상실이죠? 목적이 이상하냐 정상적이냐는 단순한 취향의 문제예요."
하네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니 굳이 꼽자면 연속성이 있는지 없는지가 가장 큰 문제 아닐까요? 그 인물의 연속성에서 벗어난 돌발적인 상태. 거기에 원래는 일어날 수 없는 실수 같은 게 있었다면 정상 참작의 여지도 있지 않을까요."

- "있었겠죠. 무카이는 범행에 맞춰 주변을 정리했으니까요. 목적과 행동이 명확하게 일치해요."
무카이는 체포된 뒤에도 자신은 정상이라고 호소했다. 

"논리적인 행동이었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해서 우리 같은 사람들이 이해할 만한 논리였는지는 알 수 없죠. 그래도 무카이 나름의 이유는 있지 않았을까요?"
아무래도 출구 없는 논의처럼 느껴졌다.

- "그러면서 선생님은 끊임없이 '모두'라는 단어를 입에 담으셨어요."
"강의의 제목이 '모두 함께 살아가는 법'이었죠."
"네. 그때는 제목을 몰랐지만 아마도 주제에 맞는 이야기였을 거예요."
"이야기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음, 도덕적인 이야기였다고 할까요."
후시미는 하마터면 저도 모르게 혀를 찰 뻔했다. 마침 카메라가 아주 좋은 그림을 프레임에 담은 것도 거슬렸다.

- "마사키 선생님은 칼에 가슴을 찔렸죠. 그 남자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나요?"
그러자 여자는 입에 손을 대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혹시 그때에도 경찰이 이런 비슷한 질문을 하지는 않았나요?"

- 외모처럼 말투도 건들거린다. 우등생 증언자 바로 뒤에 봐서 그런지 더 그렇게 느껴졌다.
"그냥 착한 척하는 어른이 와서 따분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모습이 재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네요. 얼른 축구 연습을 하고 싶었고요. 음, 네? 아, 그 남자요? 전혀 눈치 못챘습니다. 멍하니 있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주변이 시끄러워져서 속으로 '뭐야?' 싶었죠. 그러더니 어느새 선생들이 우르르 몰려가 '구급차!' 하고 외치더군요." 

- "방식이 아주 감탄스럽더군."
"방식이라고 하시면?"
"유도 전술. 결국 '도덕'이라는 말을 끌어냈잖아."
오치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다가 다시 사라졌다.
"그럴 의도는 없었어요."
"질문도 거의 유도 신문처럼 들리던데."

- 증언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전반부와 질문을 퍼붓는 후반부. 질문의 의도는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무카이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나.
무카이와 미야모토 유키오 중 누가 먼저 마사키에게 다가갔나.
사건을 객관적으로 기록한 비디오테이프 영상에서도 확인하지 못한 사안이다. 무카이는 정말로 그날 흉기를 갖고 있었을까. 만약 미야모토가 먼저 마사키에게 도착했다면 무카이는 범행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그리고 정말로 오직 무카이만이 마사키를 죽일 수 있었을까. 이 의문들은 곧 무카이가 범인성을 완벽히 충족하는지를 묻는다. 

- "그게 무슨 말이야?"
"아내가 사망한 원인이 아이들 장난 때문이었거든."
오소네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난보의 아내는 한밤중에 차를 운전하며 가다가 도로에서 미끄러졌고 가드레일에 부딪혀 차가 크게 파손됐다고 한다.
"도로 자체는 평탄했다고 해. 그런데 그날 밤 그 도로 위에 폭죽이 깔려 있었다더군."
"폭죽?"
"장난기 많은 초등학생이 저지른 짓이었어. 아무것도 모르는 난보의 아내는 폭죽이 터지는 소리 때문에 소스라치게 놀라서 핸들을 확 꺾어 버렸고."
범행을 저지른 초등학생들은 얼마 안 돼 붙잡혔지만 죄를 물을 수는 없었다.

 

- "소년법 때문이기도 했지만 애초에 단순한 장난이었으니까. 살인을 목적으로 저지른 짓이 아니었던 거야. 어떤 의미에서 비참한 결말을 떠안게 된 아이들도 딱하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그렇다고 난보가 그 아이들을 용서했다고 보기는 어려워. 나 같아도 용서 못 할 것 같거든."
"나도 마찬가지야."
말도 안 되는 장난 때문에 가족을 잃는다. 살의를 품은 누군가에게 살해된 것 이상으로 분노했을 거라고 봐도 이상하지 않다.
"그래서 일부러 그 일을 복수하려고 불완전한 놀이 기구들을 만들었다?"
"거기까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랬다고 해도 놀랍지는 않을 것 같아."

- 독립된 공방 안에서 놀이 기구 제작에 몰두하는 아오야기 난보를 떠올렸다. 누군가가 자신의 창작물을 타면서 놀다가 언젠가 다치는 순간이 찾아오기를 음흉하게 바라는 노인의 뒷모습... 
가문으로부터도 버림받은 남자는 자신의 장례식 자리에서조차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았고 이제는 '선생'이라고 불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난보의 놀이 기구를 타다가 크게 다친 아이가 아직 없기는 해."

- 쉽게 메시지를 남길 수 있는 거실을 택하지 않은 이유는 범인이 난보의 죽음을 당일까지 알지 못한 데다가 언제 메시지를 남겼는지 감추기 위해서였다. 앞뒤가 잘 맞는다. 그게 아니고서는 굳이 고생해서 불단까지 갈 이유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금요일의 알리바이가 중요한 거야."
"하지만 도모키에게는 알리바이가 없다..."
"나루카와 안에 알리바이가 없는 녀석들은 수도 없이 많겠지."
위로의 한마디가 고맙지만 그 말이 무죄를 증명하진 않았다.

- 사무실 안에는 다나베만 남아 있었다.
"응? 곧장 집에 가는 거 아니었어?"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또 아내랑 싸웠나? 멋지네. 사랑의 아수라장. 노래 가사로 써도 되겠다.”
"사장님이야말로 늦게까지 고생 많으시네."
"명색뿐인 사장한테 야근은 일상이지 뭐."
다나베는 평소에도 자만하는 모습을 일절 보이지 않는다. 오랫동안 그와 알고 지내 온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다나베는 "마실래?" 하고 후시미에게 차가운 캔 맥주를 내밀었다.

- "잠은 제대로 자두라고 해. 막상 중요한 순간에 판단이 흐려질 수 있으니."
"네가 직접 말해. 네 말은 잘 들으니까."
"흥. 오늘도 한 소리 듣고 왔는데 무슨."
오늘 있었던 일을 간략히 설명하자 다나베는 진심으로 우스운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 "저기, 나한테 이 일을 의뢰한 진짜 이유가 뭐야?"
"뭐야, 갑자기 한 소리 들어서 기죽었어?"
후시미는 속으로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유는 전에도 말했잖아. 네 힘이 필요하다고."
"기죽어서 어깨도 제대로 못 펴는 사람의 힘이? ... 실은 오치에게는 자기와 겨룰 수 있는 상대라 선택했다는 말을 들었어."
"오치답군. 나한테 의뢰한 것도 꼭 간사이에 있는 회사라서가 아니라 너와의 관계를 알고 있었으니 했겠지. 그 아이를 처음 만나 널 소개해 달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너처럼 다루기 어려운 사람이 어울릴 거라고 납득했고." 

 

- "내가 다루기 어렵다고? 아니, 그걸 떠나 그냥 말 잘 듣는 사람으로는 부족한가?"
"좋은 작품을 만들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 아니었을까? 필요 이상 띄워 주면 방심할 수도 있으니 굳이 이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오치가 네 실력을 칭찬했어."
"칭찬?"
"그래. 촬영 첫날 갑작스레 인터뷰가 진행됐는데도 자기가 원하는 그림을 영상에 제대로 담아 줬다더군."
니무라를 찍었을 때를 말할 것이다.
"특히 증언자의 표정을 담는 실력이 아주 발군이라며 기뻐했어."
후시미가 말없이 맥주 캔을 보고 있자 다나베가 놀리듯 말했다.
"쑥스러워?"
"의심 중이야. 그도 그럴 것이 일정이 너무 급했잖아. 제대로 준비할 시간도 없이 바로 크랭크인이었어. 주도면밀한 오치의 평소 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마음에 들지 않나 보네."
"일하는 태도와 방식도 좀 그래."
"실력은 인정하지?"
인정하니 더욱 곤란한 것이다. 단순히 실력이 부족하고 입만 산 사람이라면 인내하거나 조언할 수도 있겠지만 오치에게 느끼는 반발심은 뛰어난 능력 이면에 숨겨진 위태로움 때문이었다. 

- "사실 검증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억지로 끌고 가지는 않을까 걱정돼."
"그래도 그럴싸하게 만들 것 같은데."
"그것도 정도가 있지."

다나베는 흐음, 하고 신음을 내뱉더니 맥주 캔을 입에 가져갔다.
"오치가 용의주도하기는 해. 어디까지가 계산된 행동이고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모르겠지만."
"끝까지 침묵을 지킨 징역수의 출연 허락을 받는 것으로 모자라 스폰서까지 알아서 물어 오는 녀석이니."
"그것도 그렇지만 오치는 왠지 좀 더 속내가 깊은 느낌이 들어."
"속내가 깊다고? 너와는 인연이 없는 표현이군."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그런 느낌이 드는데 어쩌겠어... 여기서만 하는 이야긴데, 실은 난 조금 두렵기도 해."

- "혹시 오치가 뒤에서 뭔 일이라도 꾸미고 있나?"
"그런 건 아니야. 그게 아니라 뭐랄까, 이건 범죄나 사상 같은 데서 오는 공포가 아니야. 이를테면..."
"이를테면?"

"도덕 문제라고 해야겠네."
"지금 장난하는 거지?"
다나베의 느긋한 미소에서는 왠지 어두운 기운이 느껴졌다.

- "출판계도 불황이 심하지 않나? 신인 감독의 다큐멘터리에 3천만 엔이라는 거금을 턱 하니 내준다고? 혹시 책으로 낼 작정인가?"
"책은 낼 것 같아. 그곳은 원래 주간지 기자들의 입김이 강한 곳이거든. 화제로 삼기에 아주 좋은 소재잖아. 내가 오치라면 편집권과 저작권만 확보하고 인세는 제로여도 승낙했을걸. QM이 무사히 만들어지기만 하면 성과는 확실할 테니."

- "어떤 선생님이었죠?"
"학생들에게 눈높이를 맞춘다고 할까요. 사사로운 이익을 좇기보다 학생들과 같은 위치에 서서 아주 자연스럽게 수업을 끌고 가는 선생님이었습니다. 가르치는 게 아니라 배우게 하는 기술이 뛰어났죠. 이게 말이죠. 말은 쉽지만 의외로 어렵습니다. 의식과 테크닉 문제인데 못하는 사람은 계속 못해요. 가르치는 게 아니라 배우게 한다는 건." 
미야모토에 대해 설명하는 우에노는 꼭 제자를 칭찬하는 스승처럼 자랑스레 말했지만 정작 본인은 스승 같은 건 아니라고 했다.
"저는 오로지 그에게 사무적인 일들만 가르쳤습니다. 덧셈을 외우게 하는 걸 교육이라고 하지는 않죠."

- "젊음, 열정, 재능, 미야모토는 교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었습니다. 교단에 서서 단순히 세월만 보냈을 뿐인 저에게는 없는 재능이었죠. 그러니 당시 나루카와 제2초등학교 교원과 학부모들은 모두 그에게 협조적이었지요." 
 
- "구체적으로 어떤 걸까요?"
"이를테면 집단 괴롭힘을 주제로 한 연극을 공연한 적이 있습니다. 요즘은 그런 연극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화제가 될 것 같네요. 아무튼 선생님은 우선 괴롭힘을 가하는 사람,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 중립인 사람, 보고도 못 본 척하는 사람, 말리는 사람까지 각각의 입장을 아이들에게 연기시켰습니다. 순서대로 하나씩이요. 그런 다음 아이들에게 어떤 역할을 맡고 싶으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왜 그 역할을 하고 싶은지도요. 아이들은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을 경험하고, 괴롭히는 사람을 경험하고, 방관자를 경험하고, 용기 내어 말리는 사람을 경험합니다. 그런 유사 체험을 통해 타인에 대한 상상력을 기른다. 이건 단순히 '괴롭힘=나쁜 것'이라는 도식에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간 교육법이었습니다." 
말을 멈춘 우에노가 "분명" 하더니 허공을 바라봤다.
"선생님의 가슴속에는 인간은 모두 양심을 지녔다는 확신이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걸 발굴하는 방법으로 연극이라는 수단을 찾으셨겠죠."

- "혹시 마사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는 '모두 씨'가 뭔지 아십니까?"
"아, 강연 말이군요."
우에노가 역으로 향하려던 발길을 멈추고 대답했다.
"그건 말이죠. '도덕'을 마사키 선생님 방식대로 바꿔 말한 단어입니다."
또다시 도덕이 언급되었다.

- "난 다큐멘터리 영화의 촬영을 맡기로 했어. 네 멋대로 만드는 픽션을 도울 생각은 없다고."
"지금껏 사실을 하나둘 쌓아 올린 것밖에 한 게 없는 것 같은데요."
"억지를 부려 가며 증언의 신빙성을 뒤집는 게 사실 검증인가?"
"그렇게 보였나요? 그렇다면 애초에 그 증언에는 신빙성이 없다는 뜻 아닐까요?"
"단순히 인상을 조작하고 있을 뿐이 아니고?"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사실을 쌓아 올려 가고 있을 뿐이에요."
"그렇게 사실을 쌓아 올린 결과, 무카이의 유죄가 확정됐어."
"고작 그 정도 사실들 때문에,라고 해야겠죠."
후시미는 오치의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눈빛이 거슬렸다.

- "그 정보, 정말로 필요한가요?"
후시미는 아연실색했다.
"이번 작품에 무카이의 인품이나 평소 행실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아요. 전 모든 감상과 감정을 배제한 채 그를 유죄로 이끈 사실만을 평가하고 싶을 뿐이에요. 올바른 저널리즘의 일환으로써요."
"자만하지 마. 자신의 올바름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한번 쓰러지면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법이야."
"경험담인가요?"
"뭐?"
욱하는 마음에 무심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려는 찰나 하네가 끼어들었다.

- "앞으로도 이런 비뚤어진 방식을 계속 고수할 거면 난 그만두겠어."
간신히 입 밖에 쥐어짜낸 말은 그런 허세 같은 한마디였다.
"보수는 일당으로 돌려받을 거고. 알겠어?"

"네."
그야말로 후시미의 반응을 예상하고 꿰뚫어 본 것 같은 눈빛이었다.

- "스케치만 놓고 보면 공원 등지에 있는 평범한 그네입니다. 언덕 위에 있는 그네가 하늘을 향하는 구도였죠. 일상 속의 이공간처럼 보였다고 할까요. 혹시 장 오로네 프라고나르의 그네 그림을 아시나요?"
알 리가 없다.
"양갓집 규슈가 깊은 숲 속에 있는 그네에 올라타 있는 그림인데요. 해방감이 느껴진다는 의미에서 비슷한 그림이었습니다. 도모키가 그린 건 사람이 없는 텅 빈 그네 정물화였지만요."

- 안도하면서도 아직 의심을 떨치지 못한 부모를 보며 시미즈가 말을 이었다.
"도모키는 리더 같은 타입은 아니지만 늘 똑똑하고 자기 의지로 행동하고 있답니다. 또 분위기에 쉽게 휩쓸리지도 않아서 반에서 혼자 조금 붕 떠 보이기도 하죠. 두 분께는 실례되는 말일 수도 있지만."
후시미는 "아뇨" 하고 대답했다. 불쾌하지 않았다.
"도모키 덕분에 다른 아이들도 마코토를 대할 때 도를 넘는 것 같지 않기도 해요. 죄송해요. 학생에게 의지하는 건 완전히 제 역량 부족 때문입니다."

- "그런데 마코토는 왜 도모키의 그림을 이렇게 했을까요? 친구 사이에 치는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도가 지나치지 않나요?"
시미즈는 "그게 참 뭐라고 대답해 드리기 어려운 부분인데..." 하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 나이대 아이들의 심리는 원래 복잡해서요. 옆에서 보면 도모키는 마코토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는 것처럼 보이겠죠. 하지만 그건 어떤 의미에서는 마코토에게 굴욕적이었을지도 몰라요."
"비뚤어진 자존심 같은 걸까요."
"그런 게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겠죠. 마코토는 종종 도모키의 호의를 거부할 때도 있었으니까요."
후시미는 마코토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그랬기 때문이다. 비뚤어진 인간이 비뚤어진 채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일종의 허세 같은 의지다.

- 평소에 마음이 들지 않았다고 해도 막상 도모키가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자 배신당했다고 느꼈을 것이다. 모든 게 자신이 경험한 대로여서 후시미는 마코토에게 왠지 모를 친근감까지 느꼈다.

- "솔직히 말해라."
역시 대답이 없다.
"도모키 간 적이 없으면 없다고 확실히 말해."
"없어, 없다니까."
도모키가 후시미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의연한 태도다. 어제 직접 그림이 찢겼는데도 위로의 말 한마디 듣지 못하고 느닷없이 심문을 당하고 있다. 그런데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것은 정말 초등학교 5학년 아이가 보일 반응으로 맞을까 의심될 정도였다. 그러므로 도모코의 직감이 옳다고도 느꼈다.
도모키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 "정말이냐?"
"어."
주눅 들지 않고 흔들리지도 않는다. 자신감을 갖고 떳떳이 자기 의견을 말하고 있다. 원래는 칭찬받아야 마땅할 자질이 지금은 부모 자식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후시미는 불현듯 눈앞에 있는 낯익은 소년이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는 느낌에 휩싸였다. 도모키의 가면을 쓴 다른 누군가와 대치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가슴속에서 곤혹스러움을 밀어젖히고 분노가 고개를 들었다. 저도 모르게 주먹을 꾹 쥐었고 허리가 들썩였다.
그때 본 고마이 유의 후회에 가득 찬 모습이 떠올랐다. 요시카와의 모습도 그려졌다. 한심한 아버지들의 모습.
아내와 아이 앞에서는 손을 올리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의 규칙이자 내가 정한 규칙이다.
이런 고집스러운 아들에게 나는 대체 무슨 말을 해 줘야 할까.
 
- 사건 이후 여자는 대인공포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 두려워졌고 지금도 후유증이 약간 남아 있다고 했다.
"왜 촬영에 협조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나요?"
오치의 질문을 듣고 그녀는 힘들어 보였지만 또박또박 대답했다.
"극복하고 싶어서요."

- 네 번째 줄에서 사건을 목격한 여자에게 당시 사건은 너무도 생생한 동시에 불가사의한 기억이었다. 처음 보는 남자의 손에 갑작스레 훌륭한 선생님이 살해됐다. 그리고 잘 아는 선생님이 두 사람을 말리러 갔다. 단지 남의 일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현실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순식간에 세상에 금이 간 느낌이었다. 약한 수준의 분열감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고, 지금도 가끔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세계가 따로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망상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고 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왜 일어났는지 알고 싶었어요. 그럼 저도 비로소 그 사건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요."

- "제가 뭐라고 해 줬으면 하는데요?"
사건 당시 6학년 1반이었다는 다니구치 유코는 턱을 치켜들고 으스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반팔 티셔츠 아래로 뻗은 담갈색 팔에 근육이 도드라졌다.
"당시에 있었던 일을 있는 그대로 저희에게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알아요. 알면서 묻는 거예요."
"... 무슨 말씀이신지?"
"그러니까 그쪽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해 주겠다는 소리예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그러니 있는 그대로를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다니구치가 노골적으로 답답해하며 바닥을 걷어찼다. 침이라도 뱉을 기세다. 반면 오치는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 "그 남자는 손에 칼을 들고 있었나요?"
"... 어느 쪽이 좋아요?"
 
- "그는 왜 마사키를 죽였나. 그리고 왜 입을 다물었나. 그는 대체 누구인가. 사실 검증은 그런 것들을 돋보이기 위한 양념에 불과해. 그런데 넌 그 양념에만 계속 집착하고 있어. 솔직히 말해 QM에 무카이가 출연한다는 것과 비디오테이프 영상 외에 세상 사람들이 주목할 만한 포인트 같은 건 없지 않나? 사실만을 원한다고? 그럼 마사키의 교육론 같은 거야말로 사실과는 상관없지 않아?"
"아직 소재를 수집하는 단계예요. 후시미 씨라면 그 정도는 아실 것 같았는데."
"그리고 편집을 통해 네 멋대로 만들 생각인가?"
"뭐가 그렇게 불만이시죠?"
"네가 거짓말을 하고 있으니까."
후시미가 거칠게 말하자 오치가 눈을 가늘게 떴다.

- "내가 미야모토의 인물상을 파고들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해 봐."
"그의 인물상이 QM에 필요 없기 때문이에요. 무카이나 마사키 선생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다뤄야 할 건 사실뿐이지 인간성 같은 양념 따위 필요 없어요."
"그렇게 해서도 엔터테인먼트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네."
"그렇군. 즉 그렇게 판단을 내릴 만큼 완벽히 조사했다는 뜻이군."
오치는 입을 다물었다.
더는 속고 싶지 않았다. 오치의 표정이 변하지 않는 것은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에노에게서 정보를 캐낼 때도 표정의 변화 없이 들을 수 있었다. 

- "오해예요."
"아니. 난 네 능력만은 의심하지 않아."
후시미를 바라보는 흔들림 없는 표정이 아주 약간 무너진 기분이 들었다. 속으로 냉소하고 있을지 모른다.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걸 털어놓아 줬으면 해. 무카이 하루토와 미야모토 유키오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걸."
"제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말인가요?"
"그럼 나루카와 사건에 주목한 동기만이라도 확실히 설명해 봐."

- 동기. 오치가 중얼거렸다.
"정말로 그게 알고 싶으세요?"
당연하지,라는 말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오치의 검은 눈동자가 가슴을 천천히 옥죄었다. 예감이 들었다.

- 후시미는 오치의 도발하는 듯한 압력을 느끼면서도 간신히 감정을 제어했다.
"부모가 회사원이라는 건 거짓말이었나. 그건 그렇고 그렇다면 왜 지금껏 무카이 남매와의 관계를 숨겼지?"
"필요 없었으니까요."
"감독은 무카이 여동생의 어린 시절 친구. 엔터테인먼트 영화가 지닐 조건으로는 최고 아닌가?"
"저에게도 사생활이라는 게 있어요."
"네가 그런 이유로 공개를 주저할 위인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오치가 입을 다물었다.

 

- 후시미는 오치가 자신과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고 여겼다. 태어난 세계를 향한 절망과 증오, 그것을 뒤집으려는 의지. 세상을 굽힐지언정 나 자신을 굽히지는 않겠다는 광기와도 비슷한 의지는 한때 후시미도 품었던 열정의 원천이었다. 
그러므로 더욱 후시미는 오치의 어정쩡한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 후시미가 갑자기 옆에서 끼어들어 묻자 오치가 비난 어린 눈빛을 보였지만 무시했다. 
"그야 본인이 직접 범행을 저질러서겠죠. 그 밖에 또 다른 이유가 있을까요?"
"그렇다면 역시 동기가 신경 쓰입니다. 초등학교 시절의 복수 같은 거였을까요?"
그러자 이케다는 "아뇨" 하고 딱 잘라 부정했다.
"그런 느낌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피해자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지 않았을까요? 원래 복수를 목적으로 할 경우 범행 직후 상대의 악랄함을 폭로하는 법입니다. 자신이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를 설명해 정당화를 시도하죠. 그래야 목적을 달성했다는 성취감 같은 것도 느낄 수 있고요. 하지만 그 사람은 어느 쪽도 아니었습니다. 피해자는 누구든 상관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묻지 마 살인이라는 말인가요?"
"흐음. 그것과도 좀 다른 것 같네요. 조금 더 냉정하다고 할까. 그러면서도 정신 이상 때문도 아닌..."
이케다는 정확히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듯했다.

- "그런데 무카이에게 왠지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했습니다. 눈앞에서 그런 사건을 목격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만요."
"후시미 씨. 이제 슬슬."
오치가 옆에서 제지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케다가 말을 이었다.
"실은 무카이에게 딱 한 번 물은 적이 있습니다. 이런 짓을 저지르고 앞으로 어떡할 생각이냐고요. 계속 입을 다물고만 있어서 답답하더군요. 그리고 그때도 아무 대답이 없었지만 뭐랄까, 참 희한하게도 무카이는 앞으로 펼쳐질 자신의 미래를 마치 기대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케다는 "잘 이해는 안 되지만요. 아무튼 이런 촬영은 이제 사절입니다" 하고 말을 마쳤다.

- 직감은 다른 말을 속삭였다.
혹시 이 모든 일이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서 진행되고 있는 게 아닐까.

- [자세한 건 이제 슬슬 나오겠지. 느긋하게 안락의자탐정 흉내를 낼 수 있는 네가 부럽네.]
거짓말이다. 기자라는 족속은 원래 돈 한 푼 받지 못해도 정보의 최전선에 서기를 원한다. 

- "그리고 늘 진지했습니다. 너무 진지해서 옆에 있는 사람이 위축될 정도로요. 다른 대학으로 강의를 들으러 다니기도 했는데 저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죠."
취미로 대학을 다니는 사람과 직접 돈을 벌며 대학을 다니는 사람 사이에 의식 차이가 있다는 건 후시미도 몸소 경험해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좀 뜻밖이었습니다. 사건이 일어나기 몇 달 전이었을까요. 여름방학이 되기 전이었으려나? 한 달? 두 달? 아무튼 그 무렵이었는데 무카이가 대뜸 '교사가 되지 못할 수도 있겠어'라는 말을 꺼내더라고요. 그때 전 '네가 그럴 리 없잖아'라고 대답해 줬는데."
남자는 "자상하죠?" 하고 킥킥 웃었다.
"근데 그도 그럴 게, 당시만 해도 교사 같은 건 누구든 될 수 있었거든요. 공부 조금 하고 실습만 참으면 됐죠. 꼬맹이들을 상대하는 거니 편하기도 하고요. 제 친구 중에도 선생이 아주 많습니다." 
마사키가 들으면 통탄할 만한 이야기다.

- "무카이가 교사가 못 되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뭘까요?"
"글쎄요. 딱히 녀석과 친했던 건 아니라."
그는 재판 때 증언대에 서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이유는 '바빠서'. 남자에게 무카이 하루토는 '사람을 죽여 유명해진 동창'에 불과했다.

- '교사가 되지 못할 수도 있겠어.'
눈앞에 있는 학원 강사는 그런 보잘것없는 이유가 살해동기가 되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듯하지만 교직을 꿈꿨던 자의 좌절을 암시하는 발언은 검찰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마사키를 향한 질투. 그것이 이기적인 증오로 발전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후시미는 속으로 의심했다.
무카이의 인생은 내 인생과 수평선을 그리고 있다. 최악의 환경에서 태어나 부모를 버렸다. 혼자 힘으로 살아가겠다고 결심했고 제 발로 발걸음을 뗐다. 무카이는 고등학교도 다니지 않고 대학 입시를 치렀다. 5년 동안 일해서 번돈으로 대학에 들어갔고 졸업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그는 열정이 넘쳤다. 나약한 성격도 아니었다. 그런 남자가 과연 목표를 쉽게 포기할까. 꿈을 이루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노력했을 것이다. 후시미도 그랬다. 

무엇이 무카이를 좌절로 이끌었을까. 살인으로도 이어진 그 계기가 후시미는 몹시 궁금했다.

- 한편 이케다 변호사가 생각한 그의 인물상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도 신경 쓰였다. 이케다 변호사는 무카이가 자포자기해서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을 부정했다. 무카이는 지적이고 냉정한 인물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앞뒤가 잘 맞지 않았다.
넌 나를 평생 이해 못 해. 또다시 들리기 시작한 그런 환청이 간신히 고개를 든 후시미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었다.

- "글쎄요. 그 녀석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거면 그 선생을 찾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 선생?"
"사건이 일어난 초등학교요. 미야모토라고 했나? 그 사람이 무카이의 죽마고우 아닌가요?"
공짜 술을 얻어먹고 말주변이 많아진 학원 강사는 예상치도 못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어떤 계기로 그런 말이 나온 적이 있거든요. 세상에 둘도 없는 친한 친구가 있느냐. 또 한 명의 이름은 잊어버렸는데, 아무튼 무카이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가 두 명 있다고 하더군요."
그중 한 명이 미야모토 유키오였다. 

- "구체적으로 여쭤도 될까요?"
"마사키 선생님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모두 씨' 알지? 마사키 선생님은 그 개념을 하나의 인격으로 취급했어."
"'모두'를 말인가요?"
질의응답의 형태를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오치의 목소리는 낮고 평온하다. 칼자루가 파란색이었다는 것이 밝혀졌을 때의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그래. 보통 ‘모두'라는 건 여럿을 뜻하잖아. 하지만 마사키 선생님은 '그게 대체 누굴까'라고 생각하신 거야. 눈앞의 너, 당신, 이 아이, 저 아이. 그것들을 모두 하나로 통튼 '모두', '모두' 사이좋게 지내자, '모두'를 위해 행동합시다 등등. 그러나 그 '모두' 속에는 당연히 '나'도 포함되잖아? '모두를 위해'는 '나를 위해'와 같은 뜻이라는 것이 바로 마사키 선생님의 지론이었어. 나도 그게 맞는다고 생각해. 그러니 학교에서 배우는 공공심 같은 개념을 아무도 깊이 신경 쓰지 않은 거야. 지금 돌이켜보면 마사키 선생님도 그걸 염려하셨던 것 같아."

- "그럼 '모두 씨'라는 건?"
"그건 하나의 인격체이자 '나'의 상위에 존재하는 것, 그리고 '모두'라는 것은 개인의 존재를 두루뭉술하게 희석해 버리니 '모두'는 권력을 지닐 수도 없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여기서 말하는 권력이라는 건 행동의 강제력을 뜻해. 마사키 선생님은 '모두'가 어디까지나 '여럿'의 개념에 그치는 이상 일본인은 모럴, 즉 도덕을 지닐 수 없다고까지 하셨어. 그러니 '모두 씨'를 개발하신 거야." 

- "자, 한번 상상해 봐. 가령 담배꽁초를 길거리에 함부로 버리는 행위. 그게 나쁜 짓이라는 건 모두 알고 있어. 하지만 대체 누구한테 나쁜 걸까? 노상 방뇨 같은 행위도 아무도 보지 않고 알아채지도 못한다면 곤란해질 사람도 없겠지. 그럼 대체 뭐가 문제냐고 생각하는 게 평범한 일본인들의 사고방식이잖아? 그런데 만약 그 순간 눈앞에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면 어떨까? 존중하는 친구가 있다면? 과연 그런 사람들 앞에서도 꽁초를 버릴 수 있을까? 오줌을 눌 수 있을까?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고 볼륨 높여 핸드폰 게임을 할 수 있을까? 못 하겠지? 즉 그 사람 앞에서라면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억제할 수 있다는 뜻이야." 
"그게 바로 인격체로서의 '모두 씨'인가요?"
"거의 신과 비슷한 기능을 하지. 예를 들어 서양인들이 말하는 죄 문화. 그들은 항상 신의 눈을 의식해. 아무도 보지 않아도 신의 존재를 의식하며 자신을 규제하지. 그런데 일본에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필요한 신만 존재하고 벌을 주는 신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그리고 종교의 개념으로 들어가면 또 어려워지고 성가신 측면이 있으니까 마사키 선생님은 '모두 씨'를 그 대체재로 활용하려고 하셨어. 즉, '모럴'이라는 이름의 신의 대체제. 그리고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그 ‘모두 씨'를 심어 주기 위해 연극이라는 방법을 활용하셨고." 

- "간접 체험으로 타인에 대한 상상력 배양. 그로 인한 도덕의 습득, 즉 도덕적인 행동을 강제하는 '모두 씨'의 습득. 마사키 선생님의 연극에 그런 효과가 있었던 건 확실해. 하지만 좀 이상한 점도 있었어."
"뭐죠?"
"연극이라는 유사 체험을 통해 타인에 대한 상상력을 배양할 수는 있었을 거야. 작품 주제에 따라서는 고통과 기쁨, 선과 악도 구분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것도 사실 누군가가 떠올린 규칙에 불과하지 않나? 사람을 죽이는 건 나쁜 행동이라는 규칙.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규칙. 작가가 만든 역할과 작가가 만든 이야기로 설명되는 작가가 만든 주제, 규칙, 도덕. 그렇다면 '모두 씨'는 대체 누굴까?... 바로 그걸 쓴 작가 아니겠어?"
가지무라는 의기양양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그러니까 난 어떤 의미에서 이건 상냥한 세뇌 같은 거라고 생각해. 마사키 선생님이 그걸 스스로 의식해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 "미야모토는 그 방식을 신봉했지만 무카이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가지무라 씨는 어떤가요? 마사키 선생님의 방식을 어떻게 평가하시죠?"
"난 그 방식을 오롯이 계승해 내 삶에 활용하고 있어. 내 안에 상위 인격을 만드는 건 나 같은 비즈니스맨들에게도 효과적인 방법이거든. 그렇게 함으로써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고 활동적으로 될 수도 있지. 그렇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건 '고쳐 쓰기' 테크닉이지, 도덕 교육이라고는 부를 수 없을 것 같아. 이런 건 주로 전쟁터로 향하는 병사들에게 실시하던 교육이었어. 머릿속에 있는 도덕을 없애기 위한 처방전으로써."
가지무라가 웃음을 큭큭 터뜨렸다.
"도덕 같은 건 딱 그 정도 수준이라는 게 내 결론이야. 고쳐 쓰거나 다시 쓰거나 해서 작가가 마음대로 설정한 규칙에 지나지 않아. 마사키 선생님의 최후가 되게 상징적이지 않나? 선생님은 그 자신이 직접 '모두 씨'를 머릿속에 심었을 남자의 손에 살해됐잖아. 그러니까 무카이의 '모두 씨'는 무카이만의 '모두 씨'였던 거야. 그게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 그 누구도." 
말투가 꼭 연기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후시미는 무카이 하루토의 '모두 씨'를 자연스레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 "무카이가 마사키 선생님을 살해한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세요?"
"무카이의 '모두 씨'를 알지 못하는 한 모르겠지."
"그가 첫 재판부터 마지막까지 묵비권을 행사한 건 왜일까요?"
"'모두 씨'의 지시."
"재판 중에 판사가 마사키 선생님의 죽음에 대해 묻자 무카이는 '이것은 도덕 문제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해요. 그에 대해서는?"
"똑같이 '모두 씨'의 지시."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다. 결국 무카이의 이해하기 어려운 말과 행동을 강조하는 것처럼만 들렸다.

 

- "가지무라 씨."
오치가 몸을 앞으로 살짝 뻗었다.
"무카이와 미야모토를 바꿀 수 있다고 보세요?"
오치의 질문을 듣고 후시미는 이 장면에서 오치가 무엇을 노리는지를 읽었다.

 

- "미야모토가 마사키 선생님을 죽였다고? 정황상 불가능하지 않나."
"아뇨. 행동이 아닌 정신 상태만을 가정했을 때의 이야기예요."
가지무라는 곰곰이 생각하는 것처럼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후시미에게는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광대의 연기처럼 보였다.
"... 응, 그래. 가능하겠지."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미야모토에게는 마사키 선생님이야말로 '모두 씨'였으니까. 이해하겠어? 행동을 지배하는 상위 인격이야. 미야모토에게 마사키 선생님의 존재는 특별한 동시에 절대적이었던 거야. 지나치게 절대적이었지. 그러니 어느 시점에 녀석의 자아가 속박을 거부하고 대상을 제거하기를 원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아. 그건 다시 말해..."
"다시 말해?"
"존속살해 같은 거지."
결정적인 명대사의 울림. 커튼 폴.
오치는 바람직한 관객이 되어 말없이 자세를 가다듬었다. 만족스러워하며 당장에라도 박수갈채를 보낼 기세다.

- 그러자 가지무라가 느닷없이 버럭 외쳤다.
"당신 지금 무슨 소리야! 친구가 사람을 죽인 걸 기록한 테이프라고 누가 그런 걸 언론 따위에 넘기겠어!"
"하지만 버리지 않고 쭉 가지고 계셨죠."
그러자 가지무라는 숨을 훅 들이마시고 입을 다물었다.

"가지무라 씨가 무카이의 친구였다는 뉴스 기사도 나오지 않았고요."
"... 원래 성가신 건 사절이야. 나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캐물을 테니..."

- "리고 그 누군가가 테이프를 빼내기 위해 카메라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카메라가 왼쪽으로 쓰러졌어. 너한테 테이프를 건넨 사람은 가지무라가 아닌 그 사람이야."
"... 이제는 추론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완전한 망상이네요."
"가지무라 녀석은 피에로야. 춤추고 노래하는 광대일 뿐이라는 걸 다 알아."
"말도 안 되는 트집이에요. 그리고 전 가지무라 씨가 어떤 사람이든 나루카와 사건의 증언자로서 자격만 있다면 그걸로 만족해요."
"그건 미야모토가 마사키를 죽인 그럴싸한 이유를 만들기 위해서인가?"
오치가 사건과는 관련 없어 보이는 마사키의 교육론을 파고든 목적. 그것은 가지무라가 입에 담은 '미야모토의 '모두 씨' 죽이기'라는 그림을 만들어 내기 위한 게 아닐까.

- "가지무라는 그저 대본대로 말했을 뿐 아닌가? 시나리오 작가는 누구지? 연출가는? 너인 거 다 알아!"
"... 증거는요?"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후시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오치의 눈동자를 노려봤지만, 그곳에는 무엇 하나 읽히지 않는 커다란 두 개의 암흑만이 있을 뿐이었다. 오치의 얼굴은 지금껏 세계를 돌아다니며 보아 온 몇 개의 얼굴을 연상하게 했다. 절망을 일상적으로 받아들이고 내일 자신이 죽는 상황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얼굴이다. 
"너... 대체 정체가 뭐야?"
후시미가 물어도 오치는 입을 다문 채 후시미를 지그시 바라봤다. 검은 눈동자 안쪽에 자신의 모습이 비친다.
잠시 후 기계음이 1층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후시미는 오치에게서 떨어져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 "사흘 후 촬영에는 도움이 필요해요. 꼭 와 주세요."
"그전까지는 볼일 없다는 뜻인가?"
오치는 대답하지 않았다. 후시미는 카메라를 차에 싣고 역을 향해 걸어갔다.

- "그런데 거의 동시에 미야모토 선생님이 달려갔다고 하지 않았나요?"
"네. 그렇기는 한데 그 남자가 마사키 선생님을 칼로 찔렀던 건 기억해요. 그 장면만은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아있어요."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사건을 깨닫고 난 이후 만들어진 기억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기억이 조작됐다는 말인가요? 아뇨, 그럴 리는 없을걸요. 하지만 잘 모르겠네요. 어렸을 때라."
그는 강변하지 않고도 설득력 있게 말했다.
"혹시 칼을 기억하세요? 남자가 아리타 씨 옆을 지나갔을 때 남자는 손에 칼을 들고 있었나요?"
"네. 들고 있었던 것 같아요. 오른손에 쥐고 있었죠?"

"칼은 어떤 모양이었나요?"
"자루가 파란 칼 아닌가요? 미술부 친구들에게 들어서 기억합니다."
"실제로 보셨나요?"
"그럴걸요."

- 아리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 칼을?"
오치가 자루가 파란 칼을 보이자 아리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에도 이것과 똑같은 칼을 보신 거네요."
"비슷한 칼이겠죠."
"어쨌든 자루가 파란 칼 맞죠?"
"네."
"그런가요."
체크 메이트.
오치는 하네를 돌아보고 "보여 주세요"라고 지시했다. 하네가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칼을 들어 올렸다.

"어라?"

불현듯 아리타가 신음을 내뱉었다. 하네의 손에는 자루가 빨간 칼이 들려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 순간, 후시미는 QM에서 빠지기로 마음을 굳혔다.

- 우메다에 위치한 바 안에서는 평소처럼 고요히 시간이 흘렀다. 바텐더가 말없이 잔을 기울이는 손님들을 지켜보는 곳에서 후시미는 바다 깊숙한 곳에서 술을 마시는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 이곳에 오는 길에 QM의 프로듀서 다나베와 통화했고 그가 수화기 너머에서 "어휴" 하고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다나베는 "역시 개랑 원숭이를 한배에 태우면 안 되는 거였어"라고 말했다. 후시미는 지금까지 받은 일당을 돌려주겠다고 했지만 다나베는 나중에 들어오는 돈만 달라고 했다.

- 후시미는 바에 한 시간가량 혼자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만나기로 한 사람이 나타났다. 약속 같은 건 하지 않았지만 올 거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실제로 오치 후유나는 이곳에 왔다. 당연하다는 듯이.
"수고하셨어요."
후시미는 샌디가프를 한 모금 마셨다.
"뭐라도 먹겠어?"

 

- "그런 것들을 얻는 대신 네가 잃을 것을 떠올려 보지는 못했나?"
"저널리즘 말인가요."
앞을 돌아본 오치의 얼굴에는 요염한 냉소가 떠올라 있었다. 이 순간만은 오치가 인간임을 알 수 있는 미소다.

 

- "내가 과거에 어떤 실패를 저질렀는지 알지?"
오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난 어떤 여자를 쫓다가 궁지에 몰렸고 끝내 실패하고 쫓겨났어. 지금은 그 여자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몰라. 그 여자는 범죄자 같은 사람들과는 달랐어. 남자와 동의하에 혼인 관계를 맺었고, 결과적으로 정당하게 재산을 배분받았지. 그 상대가 비록 다 죽어 가는 노인이었다고 하지만... 난 그 여자의 방식을 보고 속이 뒤틀리더군. 안전한 곳에서 조용히 사냥감이 죽기만을 기다리는 교활한 모습을 보고 치가 떨리기도 했어. 진정한 악이 아닐까 생각했어. 이 여자를 법률로 벌할 수 없다면 내가 세상에 폭로해 버리겠다. 나는 주제도 모르고 그렇게 결심한 거야."
후시미는 에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그 여자가 사는 아파트 속 남자의 침실을 보고 대번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더군. 가만히 누워 있는 노인 주변이 화려한 꽃들로 장식돼 있었어. 셀 수 없이 많은 현란한 꽃들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남자 주변이 그렇게 돼 있었던 거야. 심지어 마르거나 시든 꽃은 단 한 송이도 없었지. 대체 무슨 의도일까?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난 곰곰이 생각하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어. 그 꽃들은 눈에 들어온 광경 그대로, 정말로 남자를 위해 놓여 있었던 거야."

- 그가 언제든 마음 놓고 세상을 떠날 수 있도록. 언제든 마지막으로 보는 광경이 아름다운 꽃송이들일 수 있도록. 그래서 꽃으로 방을 가득 채운 것이 아닐까.
"그 여자가 노인과 혼인 신고를 하고 돈을 손에 넣은 건 맞아. 하지만 그것과는 관계없이 그 여자는 죽음을 바란 고독한 남자들에게 진심으로 애정을 품고 있었던 거야."
만약 그것이 여자의 진짜 모습이었다면.
"난 혼자서 정의로운 척하며 내 멋대로 악을 만들어 버렸어."
취기가 강하게 느껴졌지만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잔혹한 현실을 두 눈으로 보고 여기저기서 칭찬을 듣다 보니 우쭐해져서 세상을 다 안다고 판단했어. 사랑이라든지, 선의 같은 걸 무시하며 그 여자를 오직 돈이 목적인 한 악마로 단정 지어 버린 거야."
후시미의 카메라를 집어던진 우치노 사토미의 눈빛은 침략자에게서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자의 눈빛이었다. 그렇게 깨달은 순간 후시미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알 수 없어졌다. 가슴에 줄곧 품고 있던 자신감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 "안전한 곳에서 비겁하게 사냥감을 노린 사람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어. 내가 찍던 추악함의 정체는 바로 나 자신의 추악함이었던 거야. 그때 그걸 깨닫고 난 좌절하고 말았지."
봇코를 만나서 진실을 있는 그대로 찍겠다고 다짐했다. 선한 모습 뒤에 감춰진 절망의 단편을 폭로하는 게 나의 임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어느새 나는 그것을 내 멋대로 날조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후시미는 숨을 내쉬며 달아오른 감정을 조절했다.

- "카메라를 들이미는 건 폭력이야. 우리는 카메라를 상대에게 들이밀며 상대를 때리는 거나 마찬가지야. 내가 원하는 형태로 만들기 위해 상대를 마구 구타하는 꼴이야. 때리고 또 때려서 언젠가 나 자신의 주먹이 으스러지는 날이 오면 그제야 비로소 깨닫게 되겠지. 내가 담아낸 프레임은 내가 담으려 한 프레임일 뿐이라고."
문득 허무함에 휩싸였다.
"퀘스천 오브 모럴리티. 그걸 물어야 할 사람은 무카이도 사회도 아닌 바로 너 자신이라는 뜻이야."
오치는 오직 앞만을 봤다. 조금의 체온도 느껴지지 않는 철면피를 뒤집어쓴 상태다.
"도박을 하고 싶은 거면 말리지 않겠어. 망가질 각오로 끝까지 움직일 거면 마음대로 해. 난 그만둘래."
후시미는 돈 봉투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 남은 미련을 떨쳐내듯 등을 휙 돌렸다. 또다시 꽁무니를 빼는 나는 오직 정면만을 보고 달리는 이 여자와 두 번 다시 말을 섞을 일이 없을 것이다. 

- 그때 오치가 후시미의 손목을 붙들었다.
"조금만 더 저와 함께 있어 주세요."
아래로 보이는 오치의 얼굴에는 으스스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제 각오를 보여 드리죠."


- [당시 중학교 3학년이던 소녀였죠. 비디오테이프를 빼내려고 카메라를 쓰러뜨려 버린 소녀, 소녀의 이름은 무카이 미유키. 나루카와에서 미성년자 매춘을 하던 무카이 하루토의 여동생. 미야모토 씨는 예상도 못한 소녀의 존재에 놀랐고, 그리고 그녀를 계속 응시했다. 그러니 누구보다 빨리 무카이 하루토가 걸어오는 걸 눈치채신 것 아닌가요?]
"..."

[어떻게 미유키인걸 아셨죠?]
"그건, 그러니까... 무카이의 여동생이었으니..."
[무카이 하루토와 미유키는 나이가 열 살이나 차이 나요. 조금 전 미야모토 씨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로 무카이와 거의 만나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나요?]
"..."
[대답하기가 어려우세요? 그럼 대신 말씀드리죠. 미야모토 씨는 무카이 미유키를 돈을 주고 산 경험이 있었던 거예요. 아직 중학생이었던 소녀를.]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미야모토 유키오 씨와 가지무라 신 씨는 그 아이의 단골손님이었죠.]
"아니에요! 아닙니다!"

- 어둠 속에서 후훗 하는 웃음소리가 울렸다.
"우습죠? 저는 후시미 씨와 완전히 똑같다고 생각해 왔는데 말이에요. 저널리즘 같은 풋내 나는 단어를 제가 입에 담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답니다. 게다가 피사체의 선악을 알지 못하게 됐으니 일을 그만두겠다고요? 그런 하찮은 이유로 속을 끓으시다니, 되게 복 받은 인생이네요." 
후시미는 오치의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혹시 자신은 인간의 선악을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선이란 무엇이고 악이란 무엇인지 대답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언젠가 제가 들었던 자만하지 말라는 말을 그대로 다시 돌려 드리고 싶네요."
"그게 아니야. 내가 문제 삼은 건 날조라고."
"제가 악을 날조했다는 말인가요. 그러면 왜 안 되죠?"
후시미는 어안이 벙벙해져 눈을 크게 뜨고 오치를 봤다.

"이미지 조작이라고 말씀하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단언할게요. 누가, 어떤 의도로 영상을 찍어도 피사체는 뒤틀리기 마련이에요. 선처럼 찍으려고 한들, 악처럼 찍으려고 한들, 그저 평범하게 찍으려고 한들 모든 것은 연출된 이미지에 불과하죠. 그리고 그걸 본 관객들이 또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법이에요. 피사체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 "아니야! 미디어가 신뢰를 잃으면 우리는 끝이야!"
"아뇨. 끝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사람들도 그걸 원하거든요."
오치는 양손을 펼치고 조롱하듯 말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싶어 하죠. 기적 같은 드라마를 보고 싶어 해요. 세상을 다 안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싶어 해요. 그러니 보여 드리는 거예요. 여러분이 원하는 그 불행을 눈앞에 제공해 드리죠. 약간의 광기를 곁들여서, 자, 불쌍하고 가엾다며 마음껏 한숨지어 주세요. 무시무시하다며 마음껏 몸을 떨어 주세요. 그리고 그다음 순간에는 오늘 저녁 식사 메뉴를 고민하면 되는 거예요. 새 옷을 입어 보면 되는 거예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점차 무게감을 띠었다.
"네, 그저 그런 거랍니다. 몇 시간을 잘 보낼 수 있게 해 주면 다들 기뻐하고 우리는 먹고살 수 있어요. 거기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 그런 건 용납되지 않아."
"사실을 날조한 게 아닌 이상 주관과 사상, 선과 악 등은 모두 표현의 자유 범주에 해당하지 않나요?"
"그건 도덕 문제야!"
후시미는 저도 모르게 그 말을 입에 담고 말았다. 동시에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 "도덕이라..."
오치는 비웃는 것처럼 대답했다.
"참으로 모호하고 그럴싸한 단어, 실상은 무기력한 주제에 마치 규칙처럼 굴려는 단어죠. 대체 누가 그런 걸 정하는 건가요?"
오치는 후훗 하고 웃음 지었다.
"미야모토와 가지무라의 비열한 면모를 마사키 선생의 책임으로 돌릴 생각은 없지만, 실은 전 그의 교육관을 들으면 구역질이 치민답니다. 도덕이 존재한다는 그 사상이요. 생각해 보세요. 그런 게 없었으면 저는 좀 더 편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 매춘을 강요당했고 살아가기 위해 스스로 반복해 온 여자의 질문에 후시미는 대답하지 못했다. 어떤 미사여구를 늘어놓아도 세상은 의심스럽게 볼 것이고 여기저기에서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낼 것이다.
"지금도 잊지 못한답니다. 미야모토에게 얻어맞아서 병원에 실려 갔을 때 저를 조사하던 형사는 조사 중에 제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런 일을 하고 있으니 위험해지는 거 아니냐'라고요. 후시미 씨의 말을 빌리자면, 그야말로 예상한 그대로의 형태로 날아오는 모럴의 주먹이었죠."

 

- 오치는 천진난만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두 씨'라는 건 가히 절묘한 단어예요. 그건 결국 어느 누구도 아니죠. '이런 일'을 하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했던 저로서는 그것은 그야말로 형태 없는 적이었어요. 어떤 험한 일을 당해도 자업자득이라고 잘라 말하는 인간들에게 근거를 선사하는 오만한 지배자였죠. 그렇다면 저는 적어도 제 이런 처지를 이용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QM이 성공하면 여러 사람들이 제게 이런저런 말을 던지겠죠. QM이 다루는 건 무카이 하루토도 사회도 아닌 저 자신이라고 말씀하셨죠? 그렇다면 대답은 간단해요. 마음대로 하세요. 그리고 재미있게 즐겨 주시기를 바랍니다."

- "후시미 씨도 훌륭한 피사체를 만났을 때가 있었을 거예요. 재미있어 보인다,라고 느낀."
부정 따위 할 수 없었다.
"찍힌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데?"
후시미는 신음하며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너 때문에 인격을 연출당한 사람들은?"
"싸우면 되죠. 미야모토와 가지무라, 그리고 다른 증언자들도 불만이면 싸울 수밖에 없는 거예요."

- 하겠다고 나서지도 못하겠다고 내빼지도 못하는 자신에게 화가 치밀었다.
진짜 오치 후유나. 그건 대체 누굴까. 만약 그를 찍는다고 해도 영상에 찍힌 사람은 후시미에게 유리한 오치 후유나가 아닐까.
질문에 대한 해답은 없다. 질문 자체가 자신의 비참함을 드러냈다.
얼버무리듯 역 앞에서 캔 맥주를 사서 목에 흘려보냈다. 그러나 얼버무리는 것은 얼버무리는 것일 뿐이었고, 시간이 갈수록 가슴은 더 답답해졌다. 

- "뭐 해?"
집안 거실 바닥에 도모코와 도모키가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각각 팔에 강아지와 고양이를 안고 있다.
"뭐 하는 거야?"
다시 한번 물었다. 조금 전까지 웃고 있었을 아내와 아들은 후시미를 보고 몸이 굳었다.
도모코가 시치미를 떼듯 물었다.
"늦었네. 밥은?"

- 취재하러 간 회사의 홍보 담당 직원이던 도모코에게 함께 식사하자고 말을 건넬 때부터 마음이 있었다. 내 취향이었다. 술을 마시고 먼저 취한 후시미를 이상한 것처럼 바라보는 발간 얼굴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다. 먼저 사귀자는 말을 꺼낸 것도 후시미였다.
"마실래?"
"... 그래."
후시미는 아내의 맞은편에 앉아 술잔을 들었다.
"얼굴이 엉망이네. 싸움에 져서 풀 죽은 꼬맹이 같아."
아내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소주를 채운 잔 속에서 얼음이 톡 하고 흔들렸다.

- 후시미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입을 열었다.
"미안. 잠깐 정신이 나갔던 것 같아."
"미안하다고? 왜?"
얼굴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다. 도모코는 진심으로 화를 낼 때 이런 표정을 짓는다.
"그것보다는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아? 난 후시미 유다이야! 난 나라고! 불만 있어?"
"... 그래. 난 후시미 유다이가 맞아. 속이 좁고 무기력한 데다가 술에 취해 화만 버럭버럭 내는 빵점 아빠지."
"그래. 그리고 고집불통."
도모코가 후훗 하고 웃었다.
"하지만 마음이 넓고 늘 사리 분별을 잘하며 정당한 의견만 입에 담는 부처님 같은 남자와는 내가 결혼 안 할 테니까."
"취향이 대중적이지 않군.”
"사람은 원래 다양한 법이야."
그렇게 말하고 술을 마시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후시미는 가슴이 뜨거워졌다.

- "앞으로 어쩔 생각이야?"
도모코는 하네와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
진심이었다. 일도, 삶도, 오치도, 무카이도, 요시카와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 그런 말을 들어도 도모코는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평소의 아들을 보며 이미 눈치채고 있었을까.
"죄를 지었으면 갚으면 돼. 하지만 난 두려워. 도모키가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를 깨닫게 되는 상황이."
후시미는 식탁 위에서 주먹을 꾹 쥐었다.


- "하지만 난 그런 선생님의 모습이 싫지 않았어. 지금도 좋아하고 있고."
도모코는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다. 선생님은 그걸 알려 주셨어."

"도모코."
"당신이 저널리스트, 편의점 직원이든, 어디로 가든, 어떻게 되든, 도모키가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짓을 하든... 난 괜찮아."
"그건 거짓말이야."
후시미는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저도 모르게 나무라는 듯한 투로 말했다.
"정말이야. 그러지 않았다면 갑자기 말도 없이 어디론가 혼자 날아가 버린 누군가와 함께 살 수 있을 것 같아? 난 괜찮아. 혼자가 두렵지 않으니까."
평소의 부엌, 식탁, 술잔, 귀에 익은 목소리와 변하지 않은 몸짓. 그러나 후시미는 도모코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원래 인간은 다들 혼자 아닌가?"
"아니야!"
감정이 끓어올랐다. 주먹을 꾹 쥐고 할 말을 찾았다.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이번에도 도모코와 엇갈리지 않으려면 그래야만 한다.

- "당신과 도모키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살 수 없어."
속으로 제발 이해해 주기를 빌었다. 아내의 넓은 아량이 고독을 각오한 체념의 또 다른 모습이라면 용납할 수 없었다. 혼자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당신...  도모코가 입을 열었다.

- "도모키의 진짜 모습을 몰라도 당신이 당신 생각을 전할 수는 있으니까."
도모코는 후시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도모키는 항상 그곳에 있어. 당신 옆에."
눈을 마주치고 말할 수 있는 거리에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에.
"떨어져 있어도 난 괜찮아. 혼자서도 두렵지 않아."

하지만...
"항상 이어져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그보다 더 좋은 일이야."
도모코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 얼마 안 돼 집에서 손님을 받게 되었다.
"그게 이웃들과 일체 연이 끊기는 계기가 됐지. 아무리 안쪽에 있는 침실이라고 해도 소리가 고스란히 옆집에도 들렸거든. 두 아이의 상태도 그때부터 완전히 심각해졌다고 하네. 아마 부모가 오랫동안 집을 비운 게 원인이었겠지. 정확한 건 상상에 의지할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그런 상황 속에서도 남매를 돌봐 주는 사람은 있었다.
"오래전 사고로 몸을 다쳐 집에서 책만 읽는 영감님이었지. 근처에 있는 단층집에서 사는 영감이었는데 그 영감이 무카이 하루토와 미유키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가르쳐 준 모양이야."
이와시로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영감이 바로 미유키의 첫 번째 손님이었네."

후시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미유키가 아직 열두 살 때였다. 무카이 하루토는 이미 집을 나가고 없었다.
"이후 삶은 그야말로 지옥이었지. 인간쓰레기들만 득시글거리는 집. 그때부터는 이웃들도 포기하고 그 집을 보고도 못 본 척했다는군."

-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소년은 대답했습니다. '그럼 빵을 주세요. 이불을 주세요. 빛을 주세요. 사랑을, 아주 조금만 주세요. 그럴 수 없다면 아무쪼록 저를 웃게 해 주세요.'"
후시미 옆에서 카메라를 든 하네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이야기죠?"
후시미의 질문에 그는 대답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무카이가 쓴 대본일세."

- "<우리의 강아지>가 아닌 다른 대본입니까?"
"비슷한 부분도 있지만 글을 쓴 방식과 내용이 전혀 다르지. 이쪽은 주인공 소년이 어느 노인이 기르던 개를 잡아먹는 부분부터 시작하니까."


- 소년은 일정한 거주지도 없이 홀로 살아갔다. 남은 밥이나 눈에 보이는 음식물 쓰레기를 주워 먹으며 허기를 채웠다. 늙은 현자는 개를 잡아먹은 것에 대한 속죄로 소년에게 자신의 집에서 일하라고 했고, 두 사람은 함께 살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궂은일을 하는 힘든 일상이었지만 집이 있고 밥이 있어 소년은 처음으로 안식을 느꼈다. 새로 기르기 시작한 강아지에게도 애정을 쏟았다. 그러던 어느 날 늙은 현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 버린다.

- "어느 날 아침 현자는 침대에서 몸이 싸늘히 식은 채로 발견됐네. 소년은 화들짝 놀라서 몸이 굳어 버렸지. 아무리 말을 걸어도 현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네. 당시 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은 소년을 멀리했고 늘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상황이었어. 현자의 죽음을 전하면 분명 내가 범인 취급을 당할 것이다. 그렇게 믿은 소년은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집 안에 있었고, 먹을 것이 점차 사라지자 집 안에 있던 지푸라기를 집어먹었고, 그것조차 사라지자 마침내 기르던 강아지를 데리고 집을 뛰쳐나갔네. 그리고 어느 눈 내리는 광장에서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아끼던 강아지를 잡아먹고 말았지..."
후시미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불현듯 머릿속이 번뜩였고 숨이 잠시 멎었다.
"난 그걸 읽고 그만두자고 생각했네. 옮겨 적은 대본을 여러 번 읽는 동안 모든 의욕이 사라지더군. 8년 정도 전 이야기일세."
이와시로의 뒷모습이 한순간에 작아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사본도 전부 버렸네. 두 번 다시 읽고 싶지 않아."
그러나 기억만은 이 남자의 인생에 아로새겨져 있다.

- "주변에서 남편을 괴롭히는 사람도 많았죠."
미호는 "어쩜 그렇게 사회생활이 서툴던지"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놀이 기구 문제는 미야모토에 의해 다키타 추방운동으로까지 이어졌다. 도저히 미유키에게 손을 뻗칠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 "무카이가 사건을 일으키기 얼마 전 오랜만에 이 집을 찾아온 적이 있거든요. 그때는 마침 놀이 기구 문제 때문에 남편은 매일 가시방석에 앉아 있듯 예민한 시기였습니다. 집 현관문도 상태가 심각했죠. 문 앞에 쓰레기를 집어던지고 낙서도 돼 있었으니까요. 아무래도 무카이는 그걸 보고 충격을 받았던 것 같아요. 하물며 남편 역시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방 안에 드러누워 있었으니 무카이의 눈에는 정말 비참하게 보였겠죠."
그리고 다키타는 무카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선생 일을 해 온 결과가 바로 이거다.]
슬픈 고백이었다. 다키타를 놀이 기구 문제로 학교에서 쫓아내려 한 사람은 비단 미야모토 유키오만이 아니다. 그 의견에 찬동하고 함께 규탄하러 나선 주민 중에는 나루카와 제2초등학교에서 수십 년간 근무해 온 다키타의 예전 제자도 있었다. 전에는 자유분방한 미술 교사와 친하게 지내며 천진난만했던 아이들이 세월이 지나 성인이 되자 은사에게 날카로운 엄니를 드러낸 것이다.

- "본인은 그냥 평소처럼 별생각 없이 하소연처럼 한 말이었어요. 남편은 무카이가 소설가가 되기를 바라기도 했으니까요. 그러나 역시 무카이가 되고 싶었던 건 선생님이었나 봐요. 남편처럼 아이들 가슴속에 남을 수 있는 선생님. 그래서 그 말을 더욱 진지하게 받아들여 버린 거죠. 남편은 무카이가 집에 돌아갈 때 현관에서 '역시 진심이란 건 전해지지 않나 보다'라고 하더군요. 전 그때 무카이가 교사를 포기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답니다. 정말로 바보 같은 말을 해 버린 거죠." 
"... 다키타 선생님은 사건 소식을 듣고 뭐라고 하시던가요?"
"심하게 동요하더군요. 다 내 탓이다, 내 탓이다, 라면서 어쩔 줄 몰라했어요."
병상에 누워 있던 노인의 고뇌가 훤히 보이는 듯했다.

"이게 다 자기가 소설가가 되라고 권한 탓이라고..."

"자, 잠깐만요."
후시미는 무심코 목소리가 커졌다.

- "선생님이 스스로를 책망한 심정은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소설가가 되라고 권한 탓이라는 건 무슨 뜻이죠? 교사라는 직업에 절망한 무카이가 마사키 쇼타로 선생님을 죽이려고 마음먹었다는 이유와는 도무지 연결되지 않는데요."
미호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쩌면 남편은 나름대로 무카이를 이해했을지 모르죠. 같은 예술가로서."
뭔가를 붙잡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 가늘디가는 실이지만 잡아당길수록 조금씩 그림이 만들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무카이는 어렵게 자란 것으로 알아요.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엄혹한 현실을 직면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 아이가 절대 자포자기해서 다른 사람을 죽일 아이는 아닐 거라고 믿어요. 분명 마땅한 이유가 있었을 거예요."
"마사키 선생님을 살해 대상으로 택한 것도 말입니까?"

미호의 표정이 굳어졌다. 입가에 언뜻 망설임이 엿보인다. 후시미는 조용히 기다렸다.


- 잠시 후 미호는 "이건 남편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하고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인간이 그려져 있지 않다."
"네?"
"실제 인간은 조금 더 상냥하고, 세상에는 조금 더 구원 같은 것이 존재한다. 그걸 일부러 다루지 않은 이 이야기는..."
"도덕적이지 않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끼어든 후시미를 보며 미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말을 마사키 선생님께 들었다고 해요. 그러자 무카이는 '왜지?' 하고 의아해하는 모습이었다더군요. 왜지? 난 실제 이야기를 썼는데."
실제 이야기. 자신의 체험.
"그렇다고 선생님을 증오하거나 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 마사키 선생님을 택한 데는 분명 뭔가 다른 사정이 있겠죠."
"사정?"
"무카이는 합리적인 아이였답니다."

- "... 소설가?"
후시미는 끊임없이 다리를 움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3백 명 앞에서 은사를 살해하고 끝까지 침묵을 지킨 채 13년간 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남자.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 무카이가 추구한 건 바로 그 '직함'이었어."
이유는 단순하다.
"소설가로서 반드시 유명해지기 위해 무카이는 단지 그 목적 때문에 사건을 계획한 거야. 일부러 많은 이들의 눈앞에서 범행을 저지르고 자극적인 영상을 남겼지. 그리고 다키타와 인연이 있는 흉기로 은사이자 세상의 권위자이기도 한 마사키를 찔렀어. 끝까지 묵비권을 행사한 것도, 친구와 여동생을 목격자로 그 안에 둔 것도 결국 모조리 연출이었던 거야. 그리고 도덕 문제까지. 무카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계산해서 그 장면을 만들어 냈어." 
"... 말도 안 돼요."
"그래. 말도 안 되지. 그렇지만 난 알 수 있어. 녀석이 복수하려고 한 건 마사키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운명이었다는 것을."

- 오치는 물었다. 앞으로도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고 깨달은 인간의 심정을 이해하느냐고.
오래전 후시미도 자신이 태어난 환경을 저주해 스스로 몸을 내던지듯 위험지대로 날아갔다.

- "교사가 되거나 회사를 창업해서 성공해도 과거는 지울 수 없지. 허기를 채우기 위해 기르던 강아지를 잡아먹은 과거와 여동생이 매춘을 한 과거도 녀석은 결국 깨닫고 말았어. 그런 인간을 발견했을 때 사람들이 어떤 방식을 취하는지를."
다키타의 모습이 깨닫는 계기가 됐다.
"그러니 그것을 이용하는 길을 선택한 거야. 더욱 비참하고 잔혹한 자신을 만들어서 '자, 실컷 즐기시기를 바랍니다'라고 선보이는 길을."
그리고 그것으로 먹고살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는 길을.
이와시로는 무카이의 진의를 깨닫고 물러났다. 그의 뒤틀린 이야기에 가담하기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 "무엇보다 사건 직후 일어난 미국 동시다발 테러 때문에 무카이가 일으킨 사건은 그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주목받지 못했어. 그러니 녀석은 가만히 기다린 거야. 감옥 안에서 소설을 집필하며 나루카와 사건을 다시 한번 세상에 알리기 위한 파트너가 찾아오기만을."

- "설마 이게 날 선택한 이유였을 줄이야."
밤 10시가 지나도 오사카 중심부로 이어지는 길목에는 아직 수많은 차들이 오가고 있다. 전조등 불빛을 등 뒤로 받으며 후시미는 강을 내려다봤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QM에는 결정적으로 부족한 게 있었지. 감독이 무카이 미유키임을 밝혀서 관객들을 놀라게 하는 마지막 복선이."
나루카와 제2초등학교 사건의 사실만을 다룬 작품 속에 미유키와 오치의 존재감은 없었다.
"엔터테인먼트 작품으로 마지막 반전을 효과적으로 선보이려면 오치 후유나와 무카이 미유키에 대한 내용이 반드시 필요했어. 그러니 직업 카메라맨이 아니라 호기심 많은 영상 저널리스트인 나를 선택한 거 아닌가? 넌 일부러 무카이 남매를 깊이 다루지 않으면서 내 취재 욕구를 부채질한 거야." 
"후시미 씨 작품을 보고서 확신했답니다."
다리 난간에 등을 기댄 오치가 시원스럽게 인정했다.

"이 사람이라면 반드시 날 찍고 싶어 할 거라고."

 

- QM을 엔터테인먼트 작품으로 만들려면 오치 자신이 등장인물이어야만 했다.
"제가 스스로 저를 찍는 것보다 저와 반대편에 선 후시미 씨가 찍어야 더 재밌는 구도가 나오겠죠?"
"그래서 후지이를 부른 건가. 우리를 찍게 하려고."
세컨드 카메라맨에게 주어진 임무는 현장에서 사사건건 맞부딪히는 후시미와 오치를 자연스럽게 기록하는 일이었다.
"넌 처음부터 날 등장인물로 집어넣은 거야."
"애초에..."
오치는 입을 열면서 주머니에서 길쭉한 통 모양의 은빛물체를 꺼냈다. 후시미에게는 눈에 익은 휴대용 녹음기다.
"후시미 씨와의 대화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전부 녹음했답니다. 후지이 씨를 부른 건 예상했던 것보다 더 후시미 씨가 흥미로운 인물이었기 때문이에요. 음성뿐만 아니라 그림도 필요하겠구나 싶어서."

목소리에 빈정거리는 느낌은 없었다.
나루카와 사건에 집착하는 젊은 여자 감독과 그 방식에 의문을 품은 프리랜서 영상 저널리스트, 두 사람은 뒤틀린 검증 과정 속에서 여러 번 부딪히다가 결국 갈라섰고, 영상 저널리스트는 자기 손으로 직접 그녀의 비밀을 추적한다...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둘러싼 또 다른 다큐멘터리 ... 

- 자동차들이 도로를 오간다. 빛이 교차한다. 그러나 후시미와 오치의 시선은 교차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너와 무카이 하루토의 기구한 삶을 보고 동전을 던져 줄 테고."
"괜찮지 않나요?"
예상된 말이었다. 오치라면 그렇게 말할 것이다. 뒤에 이어질 말도 후시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무카이 하루토는 사람을 죽였어요. 그는 저항하지 않았고 범행을 부인하지도 않았죠. 그리고 주어진 벌을 전부 받았어요. 규칙에 따른 죄와 벌을 벌을 다 받은 무카이가 소설을 쓴다 한들, 과거를 이용해서 유명해진다 한들 비난은 살 수 있겠지만 그게 죄는 아니에요. 사람들이 그런 그를 흥미로워하는 것도."
"그건 도덕 문제 아닌가?"

-
"그때 후시미 씨 앞에서 한 말은 진심이에요."
미야모토와 대화를 나누는 영상을 보고 오치 후유나가 무카이 미유키임을 알게 된 날 밤, 도덕에 미래를 빼앗겼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의 말을 뜻한다.
"살아가기 위해 싸우는 것... 그것 말고 명확한 의미의 도덕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답니다."

- "여기 있어."
그러자 오치가 검은 눈동자로 후시미 쪽을 돌아봤다.
"나와 너 사이에 우리는 가끔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이러니 저러니 지껄이고 있어. 그러니 무의미해도 지켜야 하는 게 바로 도덕 아닌가?"
빛이 끊이지 않는 다리 위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봤다.
오치는 왜 영상의 복사본을 보냈을까. 나는 왜 오치를 불렀을까. 소재는 서로의 손에 있으니 각자 내키는 대로 작품을 만들고 멋대로 발표하면 됐는데.
그래도 후시미는 오치를 불렀고, 그녀는 오늘 밤 이곳에 나왔다.
후시미는 봉투를 앞으로 내밀었다.
"기대에 부응하는 내용물인지는 모르겠군."
오치가 손을 뻗었다.
"편집 권한은 제게 있으니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럼 나도 비난하러 갈 거야. 그땐 바닷가재를 사줘."

오치가 고개를 숙였다. 입가에 미소가 서려 있다. 그녀는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다.
고개를 들고 "가 볼게요" 하고 말하는 얼굴에는 평소대로 표정이 없었다.

- "오치."
어떤 감상도 느껴지지 않는 뒷모습을 향해 후시미는 말을 걸었다.
"다음에 또 봐."
오치는 멈춰 서서 후시미를 향해 아주 약간 고개를 기울였다.
"후시미 씨. 당신을 만나서 다행이에요."
무엇이든 계산하는 여자의 계산됐을 그 말을, 후시미는 믿고 싶었다.

- "가족에게 버림받은 한 소년이 살기 위해 강아지를 잡아먹는 이야기. 작가인 그 남자는 소년이 사로잡힌 운명의 비극으로 썼을 거야. 하지만 너희는 내용을 전혀 다르게 읽었어. 소년의 비극이 아닌, 소년에게 잡아먹힌 강아지의 이야기로 읽은 거지. 강아지를 지키려면 어떡해야 좋을까. 마코토에게서 못된 아버지를 떨어뜨리려면 어떡해야 좋을까. 늙은 현자를 소년이 죽인 것으로 하면 소년은 체포될 거고 강아지가 잡아먹힐 일도 없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어딘가에 있었고, 그러니 세 아이는 난보 선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살인범을 만들어 낼 계획을 세운 거야."

- "너희가 저지른 짓은 교활하고 비열한 데다가 규칙 위반이야. 그러나 동기만은 그러지 않았지. 친구를 구하고 싶다는 사랑이 있었으니... 작가인 그 남자는 웃고 있을 거야. 이 세상에는 오직 절망만이 평등하다며 큰소리를 칠지도 몰라. 아빠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고. 하지만 지금은 이런 생각도 하게 됐어. 절망만큼 사랑이라는 것도 평등하다고."
부조리한 절망 때문에 마음이 쉽게 죽어 버리는 것만큼 사소한 애정으로 되살아나는 것도 어렵지 않다는 것을 지금은 믿을 수 있다. 도모코와 도모키가 있는 지금은.

 

- "도모키."
후시미는 아들을 바라봤다. 아버지를 올려다보는 진지한 눈빛이 보였다.
순간 오른손 손바닥에 얼얼한 통증이 스쳤다. 도모키의 고개가 옆으로 향했고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 아프냐?"
"... 응."
후시미는 "그렇구나" 하고 도모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있는 그대로를 경찰에 전하고 그 뒤에는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맡긴다. 도모코도 분명 이해해 줄 것이다.

 

- 고마이는 어떡해야 할까. 남이 참견할 문제는 아니다. 부모와 자식이 정면으로 서로를 마주 보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 마코토. 그때 난보의 장례식에서 도모키에게 얻어맞은 소년은 후시미를 향해 미소 지어 보였다. 강아지와 고양이를 교미시키려고 한 소년의 사악한 면모를 엿본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정말로 그랬을까. 아버지를 덫에 빠뜨리려고 한 소년의 심정은 대체 어떤 것일까. 아이는 어떤 마음으로 그 아버지와 함께 장례식장을 찾았을까. 자포자기해버린 친구의 행동에 진지하게 화를 내는 도모키의 주먹을 생각을, 아이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내 눈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나. 우치노 사토미를 오해했을 때처럼. 붉은색 칼과 파란색 칼을 잘못 봤을 때처럼.

- 난보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그는 자기 집 정원에서 노는 세 아이를 어떤 심정으로 바라봤을까. 천진난만하게 노는 아이들에게 애정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놀이 기구에 심은 악의를 후회하지는 않았을까. 그것이 자살의 계기였다고 생각하는 건 나만의 망상일까.
알 수 없었다. 알 수 있을 리도 없다.

- 요시카와 슌스케는 돈을 위해 자기 아들을 때렸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경범죄에 아들을 가담시킬 때는? 그리고 '도덕 시간을 시작합니다. ... 그 메시지가 아들의 선전포고였을 가능성을 꿈에나 상상이나 했을까.
미야모토와 가지무라는 자신들의 행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들은 그저 역겨운 성욕의 노예였던 걸까. 아니면 그들에게도 그들 나름의 사연이 있을까.

- 마사키 쇼타로가 주장한 교육이 전부 잘못됐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연극을 통해 공감 능력과 도덕을 심으려 한 행동에는 성공의 길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무카이의 대본을 부정한 순간, 불운한 소년의 마지막 외침과도 같은 작품을 도덕의 주먹으로 비틀어 버린 순간, 마사키 쇼타로가 눈앞에 있는 무카이 하루토라는 이름의 '너'를 보지 못했다면 그가 느꼈을 좌절은 필연 아니었을까.

- 무카이 하루토. 너의 필사적인 계략은 분명 성공할 것이다. 사람들은 비난과 호기심으로 눈을 번득이며 네 작품을 집어 들 것이다. 이런 나조차 너의 말과 글로 적힌 대본을 읽고 싶다. 그리고 너는 분명 돈뿐만이 아니라 네 목소리를 많은 이들에게 전달하고 싶어 결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카이. 넌 마사키를 칼로 찌른 감촉을 단순한 신체적 현상으로 잊어버렸나? 자신만의 이기적인 사정으로 타인의 목숨을 앗아 간 행위에 일말의 후회도 느끼지 않는가? 범행의 목격자가 된 아이들의 트라우마 등은 그저 남의 일처럼 생각하고 있는가? 너는 어떤 얼굴로 다키타 미호를 만나러 갈 것인가? 사건이 다키타 선생에게 주었을 실의를 상상하지 못했나? 
오빠에게 버림받고 불우한 삶을 강요당한 무카이 미유키가 어느 날 갑자기 시키는 대로 순순히 강당에 온 이유를, 정말로 단 한 번이라도 떠올려 본 적이 없나? 그녀의 절절한 심정을 배신할 때는 정말로 털끝만큼도 망설이지 않았나?

 

- 교도소 면회실에서 얼굴을 마주한 무카이 하루토와 오치 후유나. 무카이 미유키의 미래를 죽인 남자와, 그것을 이용하려는 여자는 서로의 눈동자에 어떻게 비쳤을까.
이것은 도덕 문제입니다. 그 말의 해답을, 아니, 도덕을 필요로 하는 동기를 원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무카이 하루토 자신이라고 후시미는 생각했다.

- 그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아들에게 물었다.
"탈래?"
"타도 돼?"
"왜?"
"할아버지가 늘 위험하니 타지 말라고 했거든."

 

- 순간 후시미는 등 뒤에서 증오와 애정 사이에서 흔들린 예술가, 한 명의 남편이고 아버지였던 어느 고독한 노인의 숨소리를 느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갈 곳 없는 증오를 짊어진 채 일어서지 못하고 제 손으로 막을 내려 버린 인생을 향해 후시미는 건넬 말을 찾지 못했다.
그렇다면 나는 영상을 찍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것이다. '모두 씨'가 아닌 단지 '당신'이라는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 "괜찮아. 하지만 너무 세게 타지는 마라."
도모키는 "응!" 하더니 신이 나서 그네에 올라탔다.

- 있는 힘껏 공중을 향해 그네를 타는 아들. 어쩌면 이 그네에도 악의가 숨어 있어서 도모키가 다칠 수 있다. 그러나 그때는 달려가서 꼭 안아주면 된다.

 

- 크게 보이는 희고 검은 점.
카메라가 서서히 줌 아웃하자 알아보기 어려운 그림이 점차 형태를 띤다.
그 영상에 여자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소년은 광장에서 강아지를 잡아먹었습니다.

정신없이 먹고, 또 먹었습니다.

눈이 펄펄 내리는 하늘을 향해 소년은 말했습니다.

"이렇게 슬픈데도 점점 배는 불러."

소년은 울음을 터뜨리고 이따금 웃기도 하면서 자기 얼굴과 비슷한 크기의 엉망진창이 된 강아지의 시신을 향해 묻습니다.

"죽인 사람은 누구?"

잠시 후 광장에 구경꾼이 하나둘 모이더니 입을 모아 이런저런 말을 떠들자 축제처럼 아주 시끌벅적해집니다.

흰색과 검은색으로 그려진 남자의 얼굴 사진이 비친다. 미소 짓는 초상화의 왼쪽 구석에는 '극본 <도그푸드>에서 인용'이라는 자막.

나가노현 교도소 앞.

남자가 문밖에 나온다. 수수한 옷. 보통 키, 마른 몸, 짧은 머리.

남자는 걷기 시작한다. 카메라를 향해 단풍이 비치는 길을 천천히, 서두르거나 망설이지 않는 걸음걸이로.

당신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속삭임이 들리는 거리에서 어느새 역광이 상을 희미하게 퍼뜨리고 잠시 후 음악이 울려 퍼진다. 

 

엔딩 크레디트.

 

 





옮긴이의 말



미명의 칼끝을 서로에게 겨눈 사람들. 

1955년 일본 미스터리의 아버지 에도가와 란포의 환갑을 기념해 만든 에도가와 란포상은 현대 일본 추리 문학계의 가장 권위 있는 상이자 능력 있는 신인 미스터리 작가의 등용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19년 기준으로 수상 작가에게는 천만 엔의 상금이 수여되며 거대 출판 그룹인 고단샤의 지원을 받아 데뷔, 후속작 출간은 물론 작품이 드라마, 영화화되는 기회도 주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매해 응모작 수가 3백 편을 넘어서는 치열한 경쟁률을 보이지만 상황에 따라 '수상작 없음'을 발표하기도 하는 등 깐깐하고도 높은 심사 기준으로도 유명합니다. 에도가와 란포상 출신 유명 작가로는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히가시노 게이고, 이케이도 준, 기리노 나쓰오 등이 있으며 이들은 이후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에도가와 란포상의 명성을 유지해 오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제28회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한 콤비 작가 오카지마 후타리는 "나오키상을 받고 사라진 작가는 있어도 에도가와 란포상을 받고 사라진 작가는 없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2015년 발표된 제61회 에도가와 란포상은 후보작 선정부터 심사, 수상작 발표, 작품 출간에 이르기까지 화제의 연속이었습니다. 316대 1이라는 높은 경쟁률도 경쟁률이었거니와 총 다섯 편의 작품이 최종 후보작으로 선정되었는데 수상작을 선정할 때 심사위원들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토론이 펼쳐진 것입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 이케이도 준, 이시다이라, 곤노빈, 츠지무라 미즈키로 이뤄진 다섯 명의 쟁쟁한 심사위원들은 각자의 기준에 맞춰 수상작 선정에 심혈을 기울였고 장시간의 토론과 최종 다수결 투표를 거친 결과 제61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으로 재일교포 오승호(일본명 고 가쓰히로) 작가의 <도덕의 시간>을 선정했습니다.  

 

...

도덕 문제와 그 개념을 독자로 하여금 다시 한번 곱씹어 보게 합니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도덕의 위치를 각자 가늠해 보고 그것이 다른 사람, 즉 '당신'과 함께 살아가는 데 있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또 어디까지가 '정의'이고 어디서부터가 '비도덕'적인지를 곰곰이 떠올리고 자문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합니다. 작품은 어려운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교조적으로 문제를 그리려 하지 않고 미스터리 특유의 재미와 복선 회수, 반전, 범인의 충격적인 범행 동기 등을 활용해 독자가 자연스럽게 '도덕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끔 합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 <도덕의 시간>은 수준 높은 사회파 미스터리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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