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이가라시 다이스케 / 김완
출판 : 문학동네
출간 : 2020.09.15
저자 : 이가라시 다이스케 / 김완
출판 : 문학동네
출간 : 2020.09.15
저자 : 이가라시 다이스케 / 김완
출판 : 문학동네
출간 : 2020.09.15
저자 : 이가라시 다이스케 / 김완
출판 : 문학동네
출간 : 2020.09.15
저자 : 이가라시 다이스케 / 김완
출판 : 문학동네
출간 : 2020.09.15
정보라의 <고통에 관하여>를 읽고, 이어서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해수의 아이>와 스즈키 코지의 <낙원>을 읽었다.
계획했던 순서는 아니었기에 '세포/DNA에 새겨진 기억'이라는 공통된 주제가 무척 강렬하게 다가왔다.
무속에서는 흔히 '업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업보, 공덕, 혹은 카르마.
당사자들은 자신이 행하지 않은 대가로 주어지는 이것들의 무게에 괴로워하는 경우가 많지만,
얼마 전 재독한 <아비투스>와 연결 지어 생각해 보면 그것까지 포함해서 '나'이기도 한 것이다. 내가 그 순간 태어나기 위해서는 함께할 수밖에 없었던, 축복이 될지 천형이 될지 알 수 없는.
그런 것들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게 해석하기 위해 발달한 것이 천문학-점성술, 사주, 그리고 유전학이 아닐까 싶다.
영성 도서에서는 그러므로 그것까지도 이미 나 스스로가 선택한 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모두 받아들이고 태어나기로 계획했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그런 설명에서 위안과 후련함을 얻겠지만, 또 어떤 이는 더더욱 원망이 깊어질지도 모른다. 결국 무엇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오롯이 자신에게 달린 일이다.
바람은 그저 바람이다.
나를 때리기 위해 부는 것도 아니요, 나를 시원하게 해 주기 위해 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것은 바람이기도 아니기도 할 것이다.
나를 열어, 내가 잊고 있는 것들을 다시 깨우쳐 가르쳐달라.
이것이 요즘처럼 무더운 나날 한줄기 바람을 만나면 내가 건네는 인사다.
<해수의 아이>는 <리틀 포레스트>를 그렸던 작가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작품이다. 섬세하고 서정적인 작풍으로만 기억하던 분들께는 <해수의 아이>가 조금은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생물들과 기관들의 섬세한 특징들을 잘 살려낸 개성적인 그림체는 아마도 호불호가 없이 아름답게 보이리라 생각한다.
바다.
현시대까지도 여전히 대부분이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는, 끝없는 탄생과 죽음의 순환을 간직한 세계.
등장인물 '소라'의 표현을 빌자면, 뭍에서 숨 쉬는 우리에게 바다란 '피안', 즉 죽음의 세계다. 반대로 바다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들에게는 뭍이 그러하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들과, 태어난 것들과, 태어났던 것들이 뒤섞여 '지금'이 존재한다.
죽음은 그저 형태를 바꾸는 일일 뿐이다. 그것을 '한정'지어 짊어지는 순간 개체의 시간은 영속으로부터 분리되어 단절되고 고립된다. 그것이 지금 인간의 삶이다. 인간이 아닌 것들로 가득 찬 세계에서, 오직 인간만이 자신을 분리시킨다.
그럼에도 여성들은 아직 바다를, 바다의 흐름을 간직하고 있다. 주기에 따라 상태를 바꾸는 신체와, 수중 호흡으로부터 공기 호흡으로 바뀌는 -먼 옛날 바다에서 뭍으로 올라왔던- 과정을 되풀이하는 출산이 그들을 바다와 이어주고 있다.
<해수의 아이>에 등장하는 '바다의 아이'들은 바다 그 자체가 낳은 아이들인 것처럼 보인다. 다양한 신화와 신비로운 생물들로 엮어져 가는 한 여름의 이야기는, '루카'를 통해 이어지는 수많은 것들의 기억이자 꿈이다.
언어로는 다 전할 수 없는 감동을 남겼다.
행복했다.
별의.
별들의.
바다는 낳아준 어머니.
인간은 유방.
하늘은 놀이터.
"... 돌고래도... 파도도... 구름도...
내 눈에 보이는 것들은 대부분 인간이 아니죠.
세상은 거의 다 '인간이 아닌 것'으로 이루어져 있잖아요?"
- "어떤 방법을 시험해 보고, 그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다면... 그건 나름대로 하나의 해답이 되는 거야. 다음부터는 그 방법은 피해 갈 수 있잖아? 하지만 그걸 깨닫기 위해선 한 번은 시도해야-"
- "우미는... 10년 전 필리핀의 한 해안에서, 듀공 무리와 함께 발견되었지. 다른 한 소년과 함께. 두 아이는 아마... 듀공이 키웠을 거야."
- "루카한테서는, 우리랑 같은 냄새가 나."
"같은 냄새?"
"같은 걸 보거나 같은 걸 생각하는 사람의 냄새."
- "저게 뭐야? 혜성이야?"
"인혼이래두."
"유성? 운석?"
"인혼이래두."
- "뭐든 상관없어. 굉장해! 하지만 어떻게 알았어?"
"인혼이 봐달라고... 찾아달라고 했거든. 그렇잖아. 저렇게 강한 빛을 내는 건... 분명 많은 사람이 봐주길 원해서일 거야. 벌레도 동물도 빛나는 것들은... 누군가가 발견해 주길 원하기 때문에 빛나는 거잖아."
'그렇구나...'
- "저어... 아까 음악 말예요. 그거 뭐예요?"
"아아, 혹등고래는 말이다. 물속에서 노래를 부른단다. 물속에선 소리가 공기 중보다 훨씬 멀리 전달되거든. 고래는 노래를 불러서... 몇 킬로미터나 떨어진 친구들과 대화를 하지. 음파 영상이라는 거 아니?"
"아... 배 속에 있는 아기 사진 찍는 그거요?"
"그래, 맞아."
- "고래의 노래는 아주 복잡한 정보의 파도란다. 고래들은 어쩌면... 자기가 본 관경이나 감정을 그 형태 그대로 전해 서로 공유하고 있는지도 몰라. 루카 넌, 네 생각을 절반이라도... 남에게 제대로 전한 적이 있니? 고래는 그게 가능할지도 몰라..."
- "아까부터 네가 흘끔거리던 이 문신은... 내가 머물던 여러 지방의 전통 문신이란다. 예전에, 어떤 섬에서... 신비한 노래를 들었지. 별의 노래를... 난 그 노래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싶어서 전 세계를 떠돌고 있는 거란다."
- 쏴아...
'또 그 소리다.'
"파도에..."
"응?"
"모래와 바위가 부딪치는 소리야. 파도 소리에 가려지긴 하지만... 파도가 부서지는 바닷가는 아주 시끌벅적해. 바닷물을 타고 수많은 정보가 모여들거든."
- "그걸 다 알아들을 수 있다면, 바닷가에 서 있기만 해도 웬만한 일은 다 알 수 있어."
- "내가 누군지 알지? 알고 있을 텐데..."
"... 소라...?"
"... 넌 참 지루하구나."
- "아까... 녹음된 걸 들었는데... 그 운석이 머릿속에 떠올랐어. 그리고... 뭔가에 대한 축하? 그리고... 아기... 같은..."
"... 그게 어쨌는데?"
"! 아니, 그냥..."
"외로우면 같이 놀아줄까?"
- "여기서 사육사들이 각자 담당한 동물의 먹이를 준비하지. 이건 물고기를 해동하는 거야. 신선해야 하니까. 한 번에 줄 만큼만, 하루 네 번씩. 매일 먹은 양을 체크하고, 컨디션을 관찰하고, 영양 밸런스를 고려하지. 다들 입 모양이 다르니까, 거기에 맞춰서 다르게 잘라줘야 해."
- "바닷가에 의자를 두고 왔어!"
"의자?"
"의자!"
- "... 유령은 의자에 앉고 싶어 한대."
"...? 뭐?"
"짐이 그랬어. 어떤 섬에선... 조상의 영이 돌아오는 날은 바닷가에 의자를 놔둬. 그럼 조상들이 돌아왔다는 증거로 그 의자에 무언가를 놓고 간대. 산호라든가... 과일이라든가. 그리고 이건 다른, 좀 더 북쪽에 있는 나라 얘기인데, 방에 유령이 있는지 어떤지 확인할 때 의자를 쓴대. 아무도 없는 방 한가운데에 의자를 놔두고, 문을 닫아. 다음에 봤을 때 의자에 변화가 있다면..."
"... 유령이 있는 거다?"
"방향이 바뀌었거나, 쓰러져 있거나 한대. 한번 시험해 볼까? 이 방에서."
- "빛을 보러 모여드는 건 물고기만이 아니야. 수많은 생물이나, 이미 죽은 것들도... 아까 바다에 잔뜩 와 있었어. 여기에도 있어."
- "... 뭔가 특별한 것을 보게 되면, 그걸로 인해 제 안의 무언가가 바뀌기도 하나요?"
"... 본다는 것은 신호를 받아들인다는 뜻이지. 예를 들면, 리모컨으로 TV를 조작하는 것도 신호란다. 무언가를 보고 내 안의 채널이 바뀌는 일도 있겠지. 이제까지와는 다른 것이 보이거나, 다르게 느낀다거나..."
- "'그'는 이따금 마을 사람의 집에 눌러앉는 경우도 있지."
"마을 아이가 아니라면서요?"
"'그'는 고래의 왕이 죽으면 모습을 나타낸다고 해. 왕의 몸을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다루는지를 보러 온다는 거야."
"..."
"'그'는 이 섬을 만든 사람이라고도 하지."
- "오랜 계약에 따라, 왕의 몸을 올바르게 가르고 평등하게 나누세. 그리 하지 않으면 고래의 왕은 두 번 다시 우리들의 작살을 받으러 나타나지 않을지니."
- [난 네게 흥미가 생겨서 너의 작살을 받은 것이다. 눈이 마주쳤지? 그때 네 마음을 보았다.]
- "그'가 자네 집에 눌러앉았다고?"
"발자국... 발자국이 남는 걸 보면 '그'에게는 육체가 있다는 얘기인데... '그'는 역시 인간인가요?"
"내가 어렸을 때 본 후로 '그'의 모습은 변하질 않았어."
- "아마도 그는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에 존재하는 그 무엇일 테지..."
- '그랬다. 나는 그 말을 하는 것을 깜빡하고 말았다. 라이트를 수평으로 비추어선 안 된다고. 동갈치라는 칼처럼 생긴 물고기가 빛을 향해 달려들기 때문에.'
-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그 아이들에게 이끌린다는 건가요? 그럴 수도 있나?"
"무슨 이유건, 환경이 극단적으로 다른 곳까지 이동하다니... 목숨을 거는 거잖아. 그런 리스크를 감수한다는 게 이상한데."
"사멸회유를 생각해 봐. 쿠로시오를 타고 북쪽 바다로 오는 열대어들은... 리스크 따위 생각하지 않잖아. 겨울이 되면 수온이 떨어져서 죽어 버린다는 사실을 모르니까... 걔들은."
"하지만... 대형 포유류까지? 분명 리스크 정도는 인식하고 있을 텐데..."
"호기심."
- "태풍으로 큰 비가 내리면, 강바닥의 돌에 들러붙은 오염물질이 씻겨 내려간단다. 물고기 알은 깨끗한 돌에만 낳을 수 있기 때문에, 태풍이 없는 해에는 알도 많이 줄어들어. 그렇게 큰 비가 실어 나른 토사는 강 하구에 갯벌을 만들기도 해. 갯벌은 많은 생물들이 사는 집이면서 먹이터이기도 하고, 물도 정화해 주니 생태계에선 아주 중요하지. 게다가 바다 깊은 곳의 산소가 적은 물과, 표면의 산소가 많은 물을 뒤섞어서... 생물이 살기 좋은 환경을 마련해 주기도 하고."
- "태풍도 지구의 살아 있는 시스템 중 하나야."
"..."
"그냥 사고만 치는 트러블메이커는 없다고 생각해. 여러 가지 면을 봐야지."
- '갑자기 내 머릿속 가득, 어떤 생각이 넘쳐났다.'
[내겐 꼭 해야 할 일이 있어.]
- '태풍이 설어와서, 내게 쏟아부은 생각...'
- "인도네시아 그림자 인형극에 나오는 얘기인데요. 우주의 지배신이 왕비와 함께... 소 등에 타고 넓은 바다 위를 날아가고 있었대요. 몸이 딱 닿아 붙어 있었던 탓에, 우주의 지배신은 왕비에게 욕정을 느꼈다나요. 그러다 정액이 한 방울 흘러버렸죠. 정액은 바다로 떨어져... 거대한 나찰(羅刹)로 변해선 하늘로 올라갔대요. 나찰이란 건 사람을 홀리거나 잡아먹는 마물을 말하죠."
- "여기서 문제! 이 에피소드에 감춰진 의미는 무엇일까요?"
- "태풍은 '정령의 배'야. 소라랑 짐이 그랬어. 뭐든지 나를 수 있는 바람의 배라고. 기억이며 시간... 정령이나 유령까지도."
"... 유령?"
"응. 바다에서 태어난 수많은 유령들이... 폭풍 속에서 스쳐 지나가."
- "그래, 거짓말이다. 사실은 아름다운 공주님을 납치하러 왔지. 미스터 '특이점'. 네가 그걸 바랄 것 같았거든. 설마, 또 짐이랑 같이 갈 생각은 아니겠지? 그만하면 이젠 직성이 풀렸을 텐데?"
"..."
"처음부터 그랬지...? 짐은 너희 둘을 구하려 한다고. 잘못된 방식으로 말이야."
- "하지만 '특이점'. 그건 네가 바라는 게 아니지? 넌..."
"앵글러드, 당신은 과연 어떨까? '재단'에 몸을 의탁했다고 들었는데?"
"... 그 대답은 나중에. 시간이 없어. 지금 같이 가겠어? 아니면 나중에 데리러 올까?"
- "운석 때문에. 맞지? '우주의 지배신이 바다에 정액을 흘리자', '거대한 나찰이 되었다'. 혹은 여성이 태양에 치부를 보이자 임신했다... 그런 류의 민간전승은 아시아 각지에서 전해지지. 서양에도 달을 향해 오줌을 누면 임신한다는 미신이 있어. 비슷한 모티브는 세계 어디에나 존재해. 왜 그럴까?"
"제법 팠네."
"게다가 짐이 집착하는 그 노래하고도 이미지가 겹쳐지지. '바다는 낳아준 어머니, 사람은 유방'... 그 덕에... 생각이 미친 거야. 우주의 지배신의 정액이란, 운석을 말하는 게 아닐까... 하고."
- "강치가 깜깜한 심해에서도 먹이를 잡을 수 있는 건, 물고기가 지나가면서 흩어놓은 물살의 흐름을 쫓아갈 수 있기 때문이지. 그 흩어진 물살이 남아 있는 건 겨우 몇 분. 그 흔적은 계속 변해가면서 전해져, 남아 있기는 하지만... 며칠이 지난 그 작은 흐트러짐을 해석해 쫓아갈 수 있다...? ... 아닌가?"
"인간 중에서도, 계산이 아니라 직감으로... 바닥에 떨어진 수백 개나 되는 성냥의 수를 맞추거나, 몇십 년 전에 어떤 날이 무슨 요일인지 알아내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잖아? 하물며..."
"하물며 인간에게 보이지 않는 빛이나 들리지 않는 소리를 느끼는 다른 생물들의 능력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을 훨씬 넘어서도 이상할 것 없다... 이거야?"
- "앵글러드. 바다는 당신들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별세계라고. 정보도 온갖 형태로 전해져 오고."
- "그걸 말로 표현하려고 생각하면 할수록...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는 거 있지. 왜냐면, 말을 하는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건 세상에 없는 게 되는 셈이잖아? 그런 거 싫어. 그러느니 말하지 않는 게 나아. 하지만 잠자코 있어봤자... 항상...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 짐에게 고래 예기를 들었을 때, 참 좋겠다고 생각했어. 생각하는 걸 그대로 전할 수 있다니 말야. ... 우미랑 소라도... 그거랑 비슷하지 않을까?"
- "산호는 산란 때 일제히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 달빛만이 아니라 화학물질도 신호로 사용하는 것으로 추정되네. 조건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세계 각지에서 같은 시기에 물고기가 사라진다는 것은..."
"어쩌면 화학적 신호가 계기가 되는 것 아닐까 하는 거군."
"대부분의 수족관에선 바닷물을 쓰고 있지. 바닷속의 화학물질이 원인일 가능성이 있어."
"'인간'... 이라는 건, 또 시간이 없다는 건..."
- "짐, 소라를 검사했을 대 목숨이 위험할 만한 이상은 안 나왔잖아? 뭘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야?"
"현미경이 나오기 전... 인간에게 '세계'란 아주 엉성한 것이었지. 아즈미... 망원경이 나오기 전까지, 세계는 아주 작았어.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이 세상의 전부란 법은 없잖아?"
- "잘 봐. 물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어. 온도, 농도, 움직이는 방향이 다른 덩어리가 있다고. 그 덩어리를 타고 미끄러져 가는 거야. 넌 힘도 지느러미도 없으니까 알아두면 좋아."
- "소라... 몸은 좀 어때?"
"여전히 끔찍해. 온몸이 다른 물질로 바뀌고 있는 것 같아. ... 지금 내 몸을 베어 보면... 분명 나비 번데기처럼 흐물흐물하게 녹은 액체가 새어 나올 거야. 하지만 엑스레이든 MRI든 암만 찍어봐도, '이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라고 하겠지... 과학의 눈으론, 내 몸에서 진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볼 수 없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 우리 인간이 볼 수 있는 건 아주 조금밖에 안 돼. 우주를 관측하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알게 된 건 무슨 방법을 써도 관측할 수 없는 암흑물질이 있다는 사실이었지. 우주의 상태를 보면 암흑물질이 있다는 것까진 추측할 수 있어. 그리고 그 질량의 총합은 통상물질의 열 배 내지는 그 이상... 즉, 우주 총질량의 90% 이상은 정체불명의 암흑물질이 차지하고 있다는 소리야."
"... 거의 전부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린 아무것도 못 보는 거나 마찬가지야. 이 세계는 보이지 않는 걸로 가득 차 있고, 우주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훨씬 더 넓어."
- "난 우주가 인간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 인간 속에는 수많은 기억의 작은 단편이 불불이 떠다니고 있는데... 어떤 계기로 인해, 몇몇 기억이 이어지지... 그렇게 해서 아주 조금 커진 기억에 더욱더 다양한 기억들이 빨려 들어가서 한데 이어지고, 점점 커져..."
- "그게 '생각한다'거나 '기억한다'는 거겠지? 그건 마치..."
"그건 마치, 별이, 은하가 탄생하는 모습과 똑같다... 그거로군."
'우주와 인간...'
- "모래를 끼얹네."
"이렇게 해서 알을 감추는구나. 처음 봤어."
"어? 그래?"
"기회가 없었거든."
"소라는 뭐든지 다 아는 줄 알았는데... 아는 거랑 보는 건 다를지 모르지만..."
"그래봐야... 결국... 아무것도 몰라."
- "이대로는 자신들은 그걸 넘어설 수 없다고... 소라는 그렇게 믿고 있네."
"짐도 그걸 믿고?"
"그래."
"소라는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온갖 가능성을 찾아낼 생각이야. 민간전승에서 신화, 현대의학에 이르기까지... 나도 협력하기로 약속했고. 하지만 소라는 나보다 훨씬 과격해서 자신의 몸에 가는 부담을 전혀 고려하질 않아. 신중하게 진행하려는 내 방식에 염증을 느꼈을 걸세."
- "아... 하지만 생각난 게 있어. 난 캄캄한 곳에서 눈을 떴어. 캄캄하고 좁은 곳. 그곳이 어딘지 금방 알았어. 난 태어나야만 해. 내 차례야... 좁은 길을 따라, 빛을 향해 빠져나왔어. 차가워."
- "난 그때 바다에 나가 있었어. 멍청했지. 그랬더니 소리가 들리더라... 해수를 타고 들렸어. 대략 698.45Hz의 음파가 발생할 만한, 어떤 일이 일어난 거야."
- "내 몸 안의 운석이... 어딘가 멀리 있는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어요... 나... 가지 않으면 안 돼요!"
- "영혼만 몸을 떠나 여행을 한다든가, 마부이오토시를 경험한 사람도 난 몇 번 만나봤어. 다시 한 사람으로 합쳐지면서... 이중의 기억에 반식 나눠진 네가 따로 체험한 것이, 현기증을 일으킨 거라고 생각해."
"한 사람이 아니야. 하나 하고 절반."
"뭐?"
"귓가에서... 계속 목소리가 들려요."
- "... 너무나도 많은 일이 생겨서...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받아들이지 못한 부분이, 분명... 그런 형태로 두드러져 나타나는 거라고 생각해."
- "심해의, 햇빛이 전혀 닿지 않는 세상에서... 섭씨 300도의 열수(熱水)와, 땅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맹독성 황화수소며 메탄을 영양으로 삼는 생태계. 이 생물군은 황화수소의 화학반응 에너지로 성장하는 박테리아와 공생해. 박테리아가 만들어내는 유기물을 흡수하며 살아가지. 그건 태양의 광합성에 100퍼센트 의존하는 우리들과는 완전히 다른 생태계야. 그리고 그건, 이 별의 최초 생태계와 유사할 거라는 설이 있어. 태양을 이용할 수 있도록 진화하기 전에 태어난, 지구만의 아이들인 셈이야."
- "그 생태계의 원점이 되는 박테리아가 우미의 몸속에 있었다니... 정말 스릴 넘치지? 설마 우미가 황화수소를 먹는 건 아닐 테니, 아마 박테리아는 잠든 상태겠지. 한때 활동한 적이 있었는지, 아니면 다가올 미래를 기다리고 있는 건지... 점점 더 흥미가 생겨.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아? 이 박테리아의 유전자 데이터는 짐네 패거리들이 쓰레기통에서 주워온 거야. 그래서 도둑질이라고도 할 수 없어."
- "인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앞으로도 점점 현명해져서, 이제까지 발생한 모든 문제를 인간의 손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될 거라는 헛소리나 해대는 놈들뿐이야. 하지만 그렇게 현명하신 분들이 이렇게 재미난 정보를 알아차리지도 못했어. 아무리 정보를 모아봤자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무런 의미도 없지."
- "당신은? 이번엔 뭘 쫓고 있어?"
"곤드와나."
"... 고대 대륙 말야?"
"그래. 1억에서 3억 년 전 사이 남반구 근처에 있었다는... 초대륙 곤드와나."
- "그 후 분명, 이동하기 시작해. 남미 대륙, 아프리카 대륙, 오세아니아 대륙... 그리고 인도 대륙, 아라비아 반도, 마다가스카르, 뉴기니가 됐다고 하지. 그건 마침 현존하는 해우류(海牛類)... 듀공 과와 매너티 과의 서식 지역과도 일치하잖아?"
- "... 어떻게 하면 되찾을 수 있지?"
"이곳 의원 나리 정도면 '비즈니스'나 '권위'를 써야지. 자기 이름을 높일 기회를 찾고 있을 테니까. '권력'은 마지막에 써야 해. 작은 권력에 집착할수록 위에서 내려오는 압력에 반발을 품는 법이거든. 이번 단계에선 우호적으로 가는 편이 리드하기 쉬울 거야."
- "온갖 것들을 빨아들이며 성장하는 거대한 소용돌이의 중심이었어... 비단 인간만이 아니야. 하지만 성장을 마친 모습은 보이질 않아."
- '2년쯤 전부터 '그들'... '바다의 아이'의 출현이 잦아졌다. 그때까지 비슷한 이야기가 산발적으로 있긴 했지만, 요즘 들어 급격히 늘어났다. 그 대부분은 그물에 걸려 목숨을 잃은 채 발견되거나, 살아 있더라도... 붙잡힌 즉시 살해당했다.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와 혐오. 쳐 죽이고, 질러 죽이고, 쏴 죽였다.'
- "짐, 너도 옛날에 바다의 아이를 봤다고 했지? 그래, 뭐였을 것 같아?"
"..."
"그게 뭐였을 것 같냐고."
"그저 조금 특이한 인간... 호모 플로레시엔스 아니면 괴물... 하지만 아마 둘 다 아닐 거야. 훨씬 더 중요한 존재... 고래와도 같은 특별한 생물."
- "분명 고래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거예요. 천적도 없고, 서로 죽이지도 않는 그들은 분명 인간과는 다른 발상을 하겠죠. 그리고 인류보다 훨씬 오래된 역사를 가졌고요."
"제법이군. 그래서?"
"그들 특유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생각해 볼 때... 매우 고도의 지적 체계를 만들어냈을지도 모르지."
"고래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면... 분명 굉장한 일이 될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왜 고래가 다른 생물보다 특별하다는 근거가 되냔 말야. 그건 어쩌다 보니 고래의 능력이 인간도 이해할 수 있는 형태가 돼서, 인간과 비교하기 쉬웠기 때문 아니냐? 어차피 인간이 특별하다는 사고방식 하에 나온 발상이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조차 눈치채지 못한 질서며 가치, 지혜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 "지금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존재는, 세계가 태어났을 때부터 완전히 똑같은 시간을 거쳐 여기 있는 거야. 그러니 모두 대등하지 않겠냐? 자기만이 꼭대기에 있다는 생각은 잘못됐어."
- "... 내가... 눈치조차 채지 못한 것..."
- "게다가 새로 큰 발견을 하면, 이제까지 쓰던 분류법은 완전히 무의미해질 수도 있어."
"우리가 그 아이들에 대해 조사하는 게 소용없다는 소리야?"
"..."
"그 아이들은 세계의 비밀로 통하는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라고 생각해... 그걸 눈앞에 둔 거라고."
"... 뭐, 좋을 대로 하든가."
- "잘 생각해 봐, 소년. 네가 배우고 있는 방법으로는, 돌고래가 바다 위로 높이 점프하는 것조차 설명할 수 없어."
"언젠가 설명할 수 있게 되겠지."
"그리샤가 말했지만, 인간의 지적 한계는 수학적으로 증명됐잖아?"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요? '참이지만 이론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공부 좀 했구만."
- "... 누구냐?"
"?"
"... 가끔씩 말야, 누군가가 지켜보는 느낌이 든단 말씀이야... 넌 그런 적 없어?"
"..."
"미래의 누군가가 우릴 엿보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럴 때 우린 유령인 셈이야."
"뭐...?"
"유령에도 여러 가지가 있어. '죽은 사람'의 유령, '사물'의 유령... '행위'의 유령..."
- "우리가 말한 것, 행한 것은... 바람이 물에 파문을 일으키듯... 이 세계에 흔적을 남기지. 그건 형태를 바꾸면서 퍼져나가... 고래의 노래 한 구절로 형태를 바꾸어... 소립자의 진동 속에 실려서 전승되지. 세계 어딘가에 영원히 기억된, 우리의 '행위'의 흔적을... '유령'이라 부르기도 하지."
- "... 기억은 전해지고 전해져서 내게 도달해, 내 마음까지 태우고... 또... 전해져 가는구나..."
'이 몸은 얼마나 많은 기억을 쌓아두고 있는 걸까.'
- "나는 난초 온실에서 왔어."
"여긴 난초의 보고구나."
"난 예전에 부모와 전혀 의사소통이 안 돼서 말이지... 그들의 감정도, 내게 뭘 시키고 싶은지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어. 물론 내 감정도, 내 생각도 그들에겐 전혀 전해지지 않았지. 지금 생각해 보면 난, 그 무렵 '언어'와는 다른 방법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 감정도 지금 하고는 완전히 다른 형태였던 것 같아. 나와 주위 사람들은 마치 다른 별에서 태어난 생물처럼,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접점이 전혀 없었지. 난 혼자 완전히 다른 세계의 주민이었어. 여섯 살이 될 때까지."
- "... 짐. 뭐였더라, 그 노래?"
"'별의, 별들의 바다는 낳아준 어머니, 사람은 유방, 하늘은 놀이터'... 였나?"
"깨달았어. 우린 우주의 내장이었던 거야."
- "그 인물과 하루빨리 접촉하기 위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나 할까."
"인물이라니?"
"... 자료를 가져왔네. 그 인물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지. '푸루샤'... '히라냐가르바'..."
"뭐야, 이게?"
"이건... '세계지도'야..."
- "인도의 창세신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지. 태초에 원초(原初)의 물이 있었다. 그것이 아이를 배어 원인(原人)이 되었다. '원인'은 천 개의 머리, 천 개의 눈, 천 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었으며, 우리가 아는 세계는 그의 4분의 1밖에 안 됐고, 4분의 3은 알 수 없는 세계였다. 그의 생각에서 달이 태어나고, 그의 눈에서 태양이 태어났다. 입에서 불이, 숨에서는 바람이 태어났고, 배꼽에서 하늘이 태어났고, 머리는 천계가 되고, 두 다리는 지계, 귀는 방위가 되었다."
- "또 다른 신화에서는... 우주는 처음에 물로 가득 차 단물의 신과 짠물의 신이 교합해 신들이 태어났다. 후에 일어난 신들의 전쟁에서 패한 여신의 시체가 두 조각으로 갈라져, 반은 하늘이, 반은 땅이 되었다. 여신의 침에서 구름이 태어나고, 두 눈에서 두 개의 큰 강이 흘러나왔다."
"잠깐만 기다려. 짐, 자네가 찾는 '인물'이란..."
"수많은 창세신화에는 공통된 모티브가 있지. 세계의 태초에는 반드시 모든 것을 내포한 '원초적인 물'이 있으며... 그곳에서 '우주의 알'이나 '원인'이 태어나, 그게 세계의 근원이 되는 거야."
"... 바다에서 온... 아이?"
"그들도 그 후보로 생각하고 있지. 우리가 찾고 있는 건... 세계의 근원, 내지는 세계 그 자체라고 하는, '원인'일세."
- "신화에... 어느 정도의 사실이나, 직감에서 온 진리가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건 인정해... 세계나 생명의 신비를 인체의 불가사의에 빗대 생각하는 건, 인간으로서 오히려 당연하달까... 하지만 실제로 그 '원인'이란 것이 존재하는지 아닌지, 그것과는 다른 이야기잖아?"
"물론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어. 지금도 신화의 묘사가 사실 그 자체라곤 생각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보고 말았네."
- '그 소리, 698.45Hz. 그건... 별이 죽을 때 나는 소리야. 늙은 별이 자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짓눌릴 때 내는 소리...'
- "댁을 대신한 건지 아닌지, 아이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아. 분명 그런 걸 따질 겨를도 없을걸. 댁도 그랬을 테지?"
"..."
"댁은 바다의 세계가... 우리의 세계와는 다르다는 걸 아는구먼. 바로 곁에 있으면서도 피차 호흡조차 할 수 없는 존재가 사는 다른 세계."
- "바다는 '피안'이야. 그리고, 여자의 몸은 피안과 이어져 있어. 댁은 알고 있을 거야. 여자의 몸은 피안에서 차안으로 생명을 끌어당기는 통로니까. 사실 바다에 대해선 우리 여자들이 전문가지."
- "... 돌고래도... 파도도... 구름도... 내 눈에 보이는 것들은 대부분 인간이 아니죠. 세상은 거의 다 '인간이 아닌 것'으로 이루어져 있잖아요?"
- "이 배의 이름은 '르와 비네다(rwa bhineda).' 댁의 딸이 타고 나간 배와 쌍둥이 배지. 스펠링은 다르지만 이름은 같아."
"... 같은 수순을 밟고 있는 거군요."
"그래야 쫓아갈 수 있으니까. 준비가 필요해... 몸과 마음, 양쪽 모두."
- "하지만... 정말로 '다른' 걸까? 원료는 똑같잖아."
[원료?]
"생물은 모두 수소와 산소, 탄소, 질소 같은 걸로 이루어져 있지."
[그렇게 따지면 공기도 물도 똑같잖아. 태양도 수소가 모여서 이루어졌고.]
"... 응. 우주가 탄생하고, 별이 태어나고, 성장해 죽어가는 것.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물질이 이 세상 모든 것을 이루고 있지."
- '이렇게 얕은 곳에 물고기가 있어. 파도에 맞춰 다가왔다가... 파도와 함께 돌아간다. 늦으면 죽을 텐데도...'
"하지만 커다란 고기는 쫓아오지 않지. 약한 물고기들에게는 한계점. 바닷가는 삶과 죽음이 나뉘는 곳이지. 죽은 자와 산 자가 뒤바뀌는 경계야."
"... 뒤바뀐다고?"
"봐. 저기 한 줄로 늘어서 있는 것들은... 떠밀려온 시체야."
"해초 줄기가 꼭 뼈 같아..."
'그렇구나. 모래톱에 남겨진 것들은... 죽은 것들뿐이야...'
- "이 모래도 산호나 조개가 부서진 시체지. 바다에 사는 것들에게... 바닷가 너머는 죽음의 세계. 그들에게 이곳에 사는 것은 모두 죽음의 세계에 사는 존재들이지."
"... 나도?"
"물론. 그리고 우리도 또한 바닷가 너머에서는 살아갈 수 없어. 이곳을 경계로, 삶과 죽음이 뒤바뀌지. 바다에 사는 것들에게 죽음은, 우리에게는 삶. 우리에게 죽음은 바다에 사는 것들에게는 삶."
"... 그럼, 소라에게는 어때? ... 우미는?"
- "남극크릴새우는 특수한 입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다른 생물이 이용할 수 없는 극소 식물 플랑크톤을 먹이로 삼아. 그리고 이산화탄소를 포함한 배설물을 배설하지. 배설물은 이산화탄소를 담은 채 심해로 가라앉아. 크릴새우 전체로 따지면 막대한 양이야. 결과적으로 대기에서 엄청난 탄소를 격리하는 작용을 해. 이 시스템이 사라진다면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가 증대해서... 지구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별이 될걸."
- "아. 그렇구나. 고래의 송이었어! 대심도 잠수 때 들은 것과 같아..."
"그전에도 들었어."
"뭐?"
"넌 이 노래를 알고 있었다고. 옛날에 이 노래를 들은 사람이 자신들의 언어로 바꾸었거든... 별의, 별들의 바다는 어머니, 인간은 유방, 하늘은 놀이터."
"..."
"형태를 바꾸었기 때문에 힘은 잃었지만, 이건 특별한 노래야."
"그 노래가... 고래의 송..."
- "짐은 우수한 사람이야. 자신과 앵글러드의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
"짐이라면 내가 가진 해답과는 다른 진실에 도달할지도 몰라."
- "여기저기 온갖 곳에 숨어 있는 노래를 고래가 방수(傍受)해서 형태를 줘. 그걸 바다가 흉내 내. 그렇게 그 노래가... 언젠가 세계를 가득 채워..."
"왜... 내게는 그 이야기를 해주는 거지?"
"넌 이미 알고 있으니까. 바다의 몸에 삼켜져서, 바다의 몸을 통해서, ..."
- "죽지 않아. 하지만.. 뇌에 이상이 남을 가능성은 있지."
"그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어?"
"... 왜?"
"짐은, 앵글러드가 되고 싶어 하니까."
"..."
"앵글러드의 태도가 변한 게 아니야. 짐의 마음이 변한 거야."
"... 나는... 앵글러드가 죽기를 바라지 않아."
"앵글러드가 죽었다고 해서 짐이 앵글러드가 될 수는 없어."
- "그리고 짐은 죽음을 싫어하니까. 언제나 우미와 내 죽음을 걷어치우려 하지. 왜 그래? 모양이 바뀌는 것뿐인데. 태어나고, 먹고 먹히고, 몸의 일부가 되고, 흙이 되거나, 숲이 되거나, 바뀌면서 빙글빙글 도는 흐름 속의 한순간일 뿐인데."
"..."
"내 안에 '죽음' 같은 건 없어. 내게 '죽음'을 준 건 당신이야, 짐. 인간만이 '죽음'으로 구분된 시공에 갇혀 있지.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나도 당신 때문에 갇히고 말았어. 물론 짐도 갇혀 있지."
"앵글러드는..."
"'앵글러드는 죽지 않는다'고 말한 건 짐이야. 그의 시간은 막힘없이 흐르고 있어. 당신은 뚝 끊어졌지. 앵글러드에겐 매우 오래된 생물의 형질이 강하게 남아 있어. 많은 사람들은 잊어버렸는데도."
"나는... 평범하다는 소리냐?"
"응. 그러니까 날 좀 더 이용해."
- "날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다고 했잖아? 인간 취급하지 말라고. 앵글러드는 우리와 비슷해. 그렇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게 있을지도 몰라. 다른 시각이 필요해. 말했을 텐데? 그때 당신에게 관심을 가졌다고. 그래서 작살을 받은 거야."
"... 뭐...?"
- "... 음원을 알 수 없었다며?"
"하지만 지금 그 답이 틀렸다는 건 알아. 왜냐면 가장 먼 음원은... 지구의 원주보다도 훨씬 먼 거리에서 도달한 거였거든..."
- "뭘 기다린다는 건가?"
"조건이 갖춰질 때를."
"... 조건?"
"짐. 그 거인이 제시하는 건 '세계의 모습'이야. 그런 신화가 있잖아? 세계가 인체라면 우리는 그 알맹이라는... 산과 바다와 생명은 분명 내장이나 혈액일 거야. 그건 지구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놓고 생각한 것과 같아. 아득한 옛날, 인간은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감각과 경험으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어."
- "지금도 사실은 다들 알고 있겠지만, 의식 수준까지 떠오르지는 못하지. 뭐가 잘못된 건지... 있잖아, 짐. 나와 당신의 차이가 뭔지 알겠어?"
"뭐...?"
"'언어'야."
- "나는 보다시피 이렇게 말을 하고 있지만, 언어가 없는 세계를 가지고 있어. 세계를 받아들이고 인식할 때, 언어에 의존하질 않아. 그 무렵과 마찬가지로..."
"..."
"언어는 성능이 나쁜 수신기 같은 거라, 세계의 모습을... 거친 이미지로, 형태도 핀트도 맞지 않는 모습으로 비춰 알아보기 힘들게 만들어. '언어로 생각한다'는 건 정해진 형태에 억지로 끼워 넣고 빠져나온 부분은 버린다는 뜻이야. 고래의 노래나 새의 지저귐, 물개가 헤엄치는 모습이... 훨씬 풍부하게 세계를 표현하지. 분명 옛날엔 인류도 같았을 거야. 고래들... 바다의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 "그때는 우리도... 바다 그 자체였고 우주 그 자체였어..."
- "같은 '언어'라도 '시의 언어'는 음악에 가까워. 난 말이지, 음악이나 시는 이 우주 어느 곳에나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해."
- [바다에 관한 여덟 번째 증언.]
세계가 막 생겨났을 무렵. 지상의 모든 생물은 메마른 흙덩어리였다. 다만 하늘을 뒤덮는 거대한 새만은, 넘쳐나는 물로 몸을 적시고 유유히 하늘을 춤추었다.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 새는 침묵을 지켰다. 어느 날 지상의 것이 새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며 비밀을 묻자, 기분이 좋아진 새는 깜빡 입을 열고 말았다.
'나는 무한히 물을 낳는 돌을 입에 머금고 있지.'
그 순간 돌은 새의 입에서 떨어졌고, 지상의 것들은 이를 감추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지상에 처음으로 바다가 생겨났다. 그 물과 메마른 흙이 교합하여 현재의 생물들이 태어났다.
"새는 낮 동안에는 물의 반사가 눈부셔서, 눈을 감고 있지. 하지만 밤이 되면... 천 개, 만 개의 눈을 활짝 뜨고 돌이 어디로 갔는지 찾고 있어."
- "루카. 네 역할은 여기서 끝나. 수고했어."
"..."
- "운석은 눈을 떴지..."
'눈을 뜬 운석은 어떻게 돼?'
"그런 건 네가 알 바 아냐. 네 역할은 이미 끝났으니까. 네가 해야 할 일은 이곳에 해수가 쏟아져 들어오기 전에, 눈을 감는 것뿐. ... 하기야... 그전에 너는 운석에서 넘쳐나는 '기억'에 빠져들고 말겠지만."
'기억...'
- '몸에 축적된 기억. 내 몸의 조직이 아득한 옛날부터 이제까지 전해왔던 기억.'
- '바닷물에 녹아든 막대한 기억에 이끌려 너는 이곳까지 왔어. 그 기억을 내가 알 수 있도록 번역했던 것은 운석이었지. 네 안에 있는 운석을 통해 너는 물의 기억과 접촉하고 대화했던 거야. ... 너도 기억이야?'
"말했잖아? 운석은 기억을 뒤섞는다고. 나는 네가 아는 누군가의 기억이자... 운석 그 자체이고, 너의 일부이기도 해. 자 이젠 끝났어. 눈을 감아... 네 역할은 끝났어..."
- '보고 싶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너는... 어렸을 때부터 호기심이 강했지. 그때 봤던 유령에 대해 계속 알고 싶어 했으니까. 우미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했으니까. 그래서 이런 곳까지 온 거고. 역시 그 호기심이란 것도 시스템에 새겨져 있었던 걸까... 그럼 어쩔 수 없지. 마지막까지 눈을 활짝 뜨고 있어!"
- "끝까지 지켜봐. 단, 운석이 네게서 떨어지면 번역자는 사라지는 거야. 이제부터 네가 보는 것의 의미는... 네가 생각해야 해. 너 혼자 찾아야만 해. ... 하기야 여기에 오는 동안 트릭은 전부 공개했으니. 네가 눈을 뜨고만 있으면... 언젠가, 전부 이어질 거야. 마지막으로 작은 힌트 하나."
- ""나를 대신해 그들이 본 것은... 바닷속의 세계가 아니라 저세상의 광경이었을지도 몰라. 지옥인지, 천국인지. 아니면... '앞으로 태어날 자들의 세계'. 유령은 죽어버린 자들이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들.""
'... 출전은...?'
"나야."
- "당신은 선택받지 못했어. ... 나도... 그렇고. 이번엔. 그 아이가, 선택받은 거야."
-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만났던 사람들은 가을바람이 불 무렵에는 모두 사라졌다.'
- '이것이 그해 여름 내가 체험했던 모든 것.'
- "누구나 다양한 근거를 토대로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해. 하지만 그 안에 '정답'이 있을까...?"
"하긴, 적어도 당신 자신에 관해 나도는 정보는 다 거짓말이니까요."
"나 같은 사람이 하는 말을 믿는 게 이상하지. 파도나 바람이 하는 말은 심플한데, 다들 생각이 너무 많아. 그 아이는? 무언가 얘기하던가?"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야지. 소중한 것은 말로 담지 않는 편이 좋지. 그 아이는 그걸 잘 아는 게야."
"말로 담아야 비로소 배울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 결국... 아무도 그것을 가까이에서 볼 수 없었어요. 다음 기회는 있을까요?"
"의외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자주 일어나는 현상일지도 모르지."
"... 근거는?"
"... 바다는 넓다는 소리일세. 사람들은 바다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을 모르지."
- "머리가 뾰족하지? 좁은 골반 틈을 빠져나오기 위해서야. 머리뼈가 아직 이어지지 않았어."
"... 인체의 신비네."
"맞아. 생각해 보면 배 속에서는 양수 속에서 숨을 쉬고, 태어나자마자 폐호흡이 되니... 바다 생물이 육지 생물로 다시 태어나는 거나 마찬가지지."
"... 죽는다는 건... 다른 세계에서 태어나는 걸까?"
"똑같은 것의... 앞면과, 뒷면 같은... 걸까? ... 난 말이지. 루카하고는 성격이 맞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 나하고 우리 엄마처럼. 그런데 왜 그때... 루카를 구하러 갔을까... 어쩌면 이 아이가, 루카와 성격이 맞았던 걸지도 모르지."
- "전에는 사람이 많은 곳은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 나하곤 완전히 다른 생물들. 무슨 생각들을 하는지 알 수 없었어. 하지만 지금은 바닷속에 있는 거나 같다는 생각이 들어. 바닷속에 수많은 물고기들, 바다거북이나 산호가 있는 거나 마찬가지인걸. 그 아이들이 있는 게 당연하게 여겨져."
'하지만 언니는 1년 후 또 사라지고 말았다. 언니는 자꾸만 영문 모를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으며, 사라지기 직전에는...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언어 같은 것을 떠들어대고 다녔다.'
- "바다거북의 눈동자 속, 해안에 자라난 나무의 잎새 모양, 바람의 감촉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걸지. 네 조그만 손바닥 안에 있는 이야기에도... 세계는 모습을 빌어 숨을 죽이고 있단다. 이건 그런 이야기야."
- "앵글러드는? 짐은 그다음에 어떻게 됐어?"
"글쎄? 하지만 약간 괴짜인 전통항해사 소문이라면 들은 적이 있지. 그는 항해하는 동안 줄곧 선창의 어둠 속에 틀어박힌 채 한 번도 밖에 나오지 않아. 물론 별도 보지 않고 바람도 느끼지 않지. 그저 배에서 전해지는 파도의 오르내림만을 느끼며... 자신이 있는 장소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판단하는 거야. 그는 육지에서도 사람들을 만나려 하지 않지만, 그의 몸 절반은 화상 흔적으로 뒤덮여 있다고 해. 서양인처럼 보인다는 것 말고는 아무도 자세한 내막을 모르지. 또 한 사람, 많은 배를 전전하는 요리사 이야기를 들었어. 그것도 원양항해를 하는 배만. 그는 인기가 있어 스카우트하는 사람도 많아. 하지만 언제나 그때그때 가장 오래 항해하는 배를 고르지. 어선이든 유조선이든 상관없이."
- "... '루카'는...?"
"'루카'는 약속을 계속 지키기로 결심했단다."
"약속?"
"'루카'에게... 그 여름은 '약속'이었어."
- "... 분명 약속을 했어. 하지만 나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생활을 해나가던 중, 분명 소중히 여기던 것이... 차츰 빛이 바래기 시작했지... 어떤 약속이었는지 떠오르지 않는 건, 내가 어느샌가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 아닐까..."
"여기 오면 확인할 수 있을 줄 알았구나. 가장 중요한 약속은, 말로는 나누지 않아."
- "나는 기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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