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다나베 세이코] 아주 사적인 시간

일루젼 2024. 6. 1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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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다나베 세이코 / 김경인

출판 : 북스토리
출간 : 2014.07.20


       

아. 어쩐지 발췌 정리까지만 하고 본문은 조금 미루고 싶더라니...

별들이 항성의 바다를 건너는 시기를 지나고 있다. 시간 단위로 벌어지는 다양함 앞에서는 나이가 무색하게 깜짝깜짝 놀라고 만다. 

 

무언가를 헤아리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은 사실 상대를 위해서라기보다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다. 나를 괴롭게 하는 부분과 맞닿아 있는 경계면, 그 지점의 '나'를 감각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다만 최근 내가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은, 그 경계 역시 '나'라는 것이었다. 내가 보듬고 지켜야 할. 

 

모든 것이 근원에서 통한다는 의미는, 그러므로 '나' 자신을 포기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그 순간 가장 '나'인 것을 선택하는 것에 가깝다. 그렇기에 희생은 개체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만 존재한다. 

바꿔 말하자면, 현재 '나'라고 감각되지 않는 것을 바라보되, 보내주고 싶은 것들은 '선택'하지 말라는 것이다. 

때로는 '나'를 지키기 위한 선택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주 사적인 시간>와 이어지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어쩐지 살짝 거리가 먼 이야기를 열심히 해버린 것 같다. 음.

 

이 책은 '고'라는 남자와 결혼해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노리코'라는 인물의 시각에서 진행된다. 그녀에게 고의 경제력은 만족스러운 것이면서도 경멸스러운 것이다. 최근 다시 읽고 있는 <아비투스>적 관점에서 본다면 고의 가족들은 대체로 '경제자본'은 갖추었으되 '문화자본'이나 '심리자본'은 부족하다. 아름다운 것을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감각이 다른 것이다. 

 

그런 고와의 생활은 매일 바쁘고 즐겁다. 하지만 깊이 있는 생각의 공유, 같은 것을 감각하는 공감, 아름다움에 대한 비평 같은 것들에 대한 목마름은 채워지지 않는다. 찰나의 단순한 즐거움만이 이어질 뿐이다. 

 

고가 베푸는 것들은 시혜의 형태를 띤 거래다. 고는 자신이 주는 것에 대해 유-무형의 되돌려받을 것들을 기대하고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화를 내거나 폭력을 행사한다. 아이를 낳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 신랄하게 비난하던 그가, 후계 다툼에 뛰어들기 위해 이전까지의 생각을 -애초에 기억하고 있을 것 같지도 않지만- 한순간에 뒤집는 모습이 나온다. 나는 그 장면에서 '고'는 정제된 자신만의 신념을 다듬어가는 삶보다는 득과 실을 따지는 삶을 선택했으며, 그것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와 대비되는 인물들은 조각으로만 등장한다. 완벽히 대치되는 이상향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에 대한 즐거운 대화가 가능했던 고의 어머니, 살짝 비튼 농담을 당황하거나 화를 내지 않고 차분하고 선을 넘지않는 응수로 받아쳐주는 나카스기, 은근함의 매력을 알고 있는 후쿠다 케이. 또 이런 자신의 마음을 알아줄 것만 같은 '하라 코즈에'는 동시에 맞아들이고 싶지 않은 미래이기도 하다. 

 

이 소설을 하나의 줄거리로 정리하거나, 옳고 그름을 판단하며 읽는다면 제 매력을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그저 '노리코'라는 인물의 생각과 감정, 삶을 한걸음 밖에서 관찰하며 따라가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그녀처럼 자신만의 '아주 사적인 시간'을 필요로 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우연치 않은 기회에 추천받은 책이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즐거웠다.  

       


   

  


- 나는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우울했다.
오늘 밤 있을 파티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다. 대체로 나는 나카야 일가의 파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왜 그런지 요즘 들어 나는 파티 자체가 싫어졌다.
첫째, 재미없다.
둘째, 거북스럽다.
셋째, 괜찮은 남자가 없다.
넷째, 있어도 고의 질투가 이만저만이 아니라, 바람 같은 건 아예 엄두도 못 낸다.

- 고는 곤히 자고 있다. 깨어 있을 때의 빈틈없는 장사꾼 같은 활력 대신, 뭐랄까 야단맞은 초등학생이랄까, 애처로운 생각이 절로 드는 얼굴로 자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느끼는 것은 고에게는 ‘빌어먹을 말도 안 되는 소리'일 것이다. 고는 자신을,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자기가 만든 이상 이외의 모습으로 보기를 원치 않는다. 

그래서 나는 고의 자는 얼굴을 보면, 그의 약점을 발견한 것 같아 황급히 눈을 돌리고 만다.
"고, 자기의 자는 얼굴은 꼭 야단맞은 초등학생 같아"라고 말하면 그는 결코 좋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나의 칭찬이라 해도.

- 내가 언젠가, "자기, 꼭 배탈 난 그리스도 같은 얼굴로 자더라!"라고 말했더니 그는 일부러 못 들은 척했다. 못 들었나 싶어 한 번 더 말했더니 발끈한 얼굴로, "그런 썰렁한 농담을 두 번 말하는 사람이 어딨노?"라며 언짢아했다.
나는 자는 얼굴이 어떻더라는 말을 듣고 버럭 화를 내는 남자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너무 좋게 느껴져서 칭찬을 했던 건데... 
상황이 이러니, 행여나 코 고는 소리라도 녹음을 했다간 한대 얻어맞을지도 모를 일이다.

- 연인 사이로 일주일에 두세 번밖에 못 만나는 사이라면 몰라도, 결혼한 지 벌써 3년이나 지났는데, 그것도 매일 밤 같은 침대에서 자면서, 자는 얼굴이 어떻더라 하는 말을 싫어하는 구석이 고에게는 있다. 
나는 그것이 고의 명품 취미라이터나 만년필, 넥타이부터 신발까지 세계 최고의 상품으로 갖추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하는 성격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자기는 잘 자고 있는 내 콧등을 핥거나 코를 꼬집거나 해서, 내가 잠결에 얼굴을 찌푸리거나 잠에 취한 어눌한 말투로 화를 내거나 하는 것을 재미있어한다.

- 하지만 또 생각해 보면, 고는 내가 자기를 가엾게 보기를 원치 않는지도 모른다.
만일 내가 "자기, 자는 얼굴이 나폴레옹이나 시저 같아. 꼭 왕자는 고독하다는 느낌, 너무 남자답게 자는 거 있지!"라고 한다면, 그도 마음에 들어 할지 모른다.

- 아니면 또...

고는 내 말투에서 어떤 냄새를 맡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는 야생동물처럼 후각이 예민하니까.
고는 내가 자기를 볼 때 항상 동정해야 할 사람으로 보는 것, 그 감수성을 싫어하는지도 모른다.
고의 자는 얼굴, 무장해제한 남자의 자는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불쌍하다, 가엾다. 애처롭다, 눈물겹다, 마음이 아프다, 차마 버릴 수 없는 뭔가를 여자가 느꼈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남자가 알아챘다고 한다면 남자 입장에서는 굴욕적일지 모른다.
그렇게 느끼는 여자의 냉정한 시선을 남자는 분하게 혹은 쓸쓸하게 느낄지도 모른다.

-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고의 자는 얼굴은 애처로움을 자아낸다. 왜 그런지 나는 모른다. 그 이유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이 나는 두려운지도 모른다.

- 날씨는 오늘 아침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산도 바다도 아주 잘 보였다.
히가시 고베에 있는 이 맨션은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어서 바다가 마을 너머로 손에 잡힐 듯 보이고, 배가 지난 자리의 하얀 물거품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봄날 아지랑이에 감싸여 몽롱한 마을의 깊은 곳에서는 뭔가가 빛나고 있었고, 고지대는 온통 어린 나뭇잎과 새싹들로 뒤덮여 있었다. 베란다의 화분에는 내가 뿌린 팬지가 벌써 한 달이나 피어 있었고, 나는 그 보랏빛 비로드 같은 것을 꺾어 컵에 꽂았다.

- 나는 이 베란다의 광경이 좋다. 고와 결혼해서 좋았던 게 이 맨션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 때문이었다고 하면 욕먹으려나? 하지만, 나는 지금도 오사카 시내에 있는 맨션에 내 작업실을 가지고 있다. 그곳에 나는 내 차를 타고 오가고 있다.

- 왜 일류 명품의 여자는 소개하지 않는 걸까? 고는 탤런트나 여배우나 가수나 모델 같은 여자들 중에서도 특별히 아름답고 젊은 여자들을 일류라고 생각하고, 그녀들과 만나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고가 가난을 두려워하는 것은, 가난해지면 만나는 여자의 수준이 이류나 삼류로 떨어지기 때문인 것 같았다- 을 자랑했고, 어머니의 집안 -화족 나부랭이- 을 자랑했다. 나는 타고난 부자라면, 그런 식으로 자랑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 그래서 고가 나 같은, 일류 명품이 아닌 여자 -나는 나 스스로를 다른 의미에서 일류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가치관의 차이 때문에 고는 결코 알 수 없을 그런 것- 에게 열을 올리며 "결혼하자, 결혼하자"고 떠들어대는 것을 경멸했었다. 그래서 "거기 놔둬. 그릇은 내일 찾으러 와"라는, 주문한 음식이 배달되어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 하지만 고의 간청에 못 이겨 맨션을 보러 갔다.
그리고 재벌집 아들과 결혼한다는 얘길 들어도 실감이 나지 않던, 그의 어떤 회유에도 끄떡도 않던 나였는데, 그 멋진 맨션을 본 순간 나는 평정을 잃고 말았다. 그곳에 살고 싶어졌고, 그러자 고와는 임대인과 임차인의 관계가 아니라 "그래, 결혼하자!"라고 말해버렸던 것이다.

- 나의 어머니는 "꼭 그렇게 큰 부자가 아니어도, 작은 부자면 좋은데..."라거나, "헤어져도 어차피 노리코는 혼자 먹고살 수 있으니까"라고 말하는 것이 영 열의가 없어 보였다.
나의 결혼 문제보다도, 또 재벌의 황금마차에 타느냐 마느냐의 문제보다도, 어머니는 나의 작업장이 있는 맨션에 오면 "선반문은 열면 반드시 닫는 습관을 들여라. 먼지가 들어가잖니"라거나 "치약 뚜껑 좀 닫아라. 아무리 혼자 산다지만 칠칠치 못하게 이게 뭐니!"라거나 하는 잔소리만 늘어놓았다. 

- 그래도 고는 나름대로 자기 집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매일 내 작업장으로 전화를 걸어와 "꽤 좋아지고 있다!"라며 좋아하기도 하고, 그래도 미련이 남는지 "자기 집친척 중에 로터리 클럽에 가입한 사람 없나? 라이온스라도 좋은데"라고 묻기도 했다.
"그런 사람 없어, 타이거즈의 팬이라면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우리 집은 서민 중에 서민이라구."

- "듣고 있나?"
마침내 고는 이렇게 묻는다.
"듣고 있어, 왜?"
"노리코가 너무 대답을 잘하면 헛듣고 있는 게 분명하거든. 열심히 대답할 때는 안 듣고 있을 때가 많으니까 말이다."
"그런 적 없어!"
단호하게 말했지만, 조금은 감동을 먹었다. 나는 고를 머리가 좋은 남자라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고의 그런 통찰력은 애정 때문에 생긴 것 같기 때문이다. 

- 하지만 한차례 사들이고 나면, 이런 것은 잠잠해지게 마련이다. 목마른 사람처럼 얼마든지 갖고 싶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내 경우엔.

- 고가 추천한 것 중에서 마작도 골프도 영 꽝이었지만, 운전만은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작업장에 오갈 때 자가용을 이용했다. 고와 함께 나가는 일은 없다. 고는 배웅받는 것을 좋아하므로, 그리고 자기가 돌아오기 전에 내가 먼저 돌아와 있지 않으면 언짢아한다.

- 나는 옛날 미미의 남편인 미우라 고로에게 반해 있었다. 그때 생각을 하면 참 이상하다. 나는 고는 저리 가랄 정도로, 고로에게 몸도 마음도 안달이 나서 못 배길 정도로 홀딱 반해 있어서 어떻게든 그를 내 것으로 만들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지만, 고로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다 뜬금없이 옆에서 튀어나온 미미에게 고로가 열을 올렸고, 둘은 하나가 되고 말았다.
인간에게는 저마다의 취향이란 게 있다는 건 알지만, 당시의 실연의 아픔을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 그렇게 고로를 향했던 연모의 정이랄까, 집착이랄까 하는 마음은 필터에 걸린 것처럼 안타깝게 떠올릴 수 없는, 거의 기억에서 희미해진 멜로디가 되고 말았다. 
고와 결혼한 지 3년이 지났기 때문이다.
고에게 시달렸기 때문이다.

- "바보, 3년이 지났으니까 할 수 있는 기지. 노리코를 굴리면, 고무공 같아서 재밌거든."
고가 힘 있게 양치질을 하거나 물을 사방으로 튕겨가며 세수를 하거나 흰색 타월 -난 색이 들어간 타월은 내가 디자인하면서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을 목에 걸친 채 머리를 빗거나 하는 것을 나는 언제나 넋을 잃고 바라본다. 
고는 지금 서른이지만 바디라인은 아직 흐트러짐이 없다. 인디언 같은 단단한 골격, 호박색 피부, 탐욕스럽게 살이 오른 턱, 잘빠진 탄탄한 다리, 나는 언제나 그를 '돈과 시간 들이고 자아도취에 빠져 단련한 육체미'라고 놀리지만, 그런 강해 보이는 아름다운 육체가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정말 기뻤다.

- 그가 와이셔츠로 갈아입는 동안, 나는 거실로 아침식사를 날아온다. 뜨거운 커피 -고는 무설탕-, 바짝 구워 끄트머리가 타서 오그라든 베이컨, 달걀프라이 -고는 세 개, 나는 하나-, 그리고 토스트, 버터에 차가운 우유를 300cc, 또 고는 아침에 곧잘 스파게티를 먹고 싶어 하기 때문에 삶는다. 나도 안 먹으면 손해 보는 것 같아 먹는다. 양은 조금 다르지만, 큰 접시 가득 담아진 스파게티에 미트소스, 잘게 자른 치즈를 듬뿍 뿌리고 고와 나는 아침부터 배불리 먹는다. 
 
- "있잖아, 오늘 밤 파티에 나 안 가면 안 될까?"
"그야 당연하지!"
그것은 '당연히 안 되지'라는 말을 압축한 말이다.

- 고의 누나는 남편과 사별하고 친정에 와 있었는데, 지금은 미카게 저택의 여주인이 되어 있었으므로 당연히 접대의 주최자가 되었다. 이 집안사람들은 밖의 음식점이나 레스토랑에서 손님을 접대하는 것을 지극히 비천한 하층계급의 인간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했고, 자택으로 일류 요리사를 부른다는 것을 모두에게 알리고 싶어 했다.

 

- "시종도 와?"
"글쎄~?"
'시종'이란 고의 어머니 쪽 사촌동생으로, 역시 같은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윗대 선조 중에 메이지 천황의 시종을 역임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일족들 사이에서는 은밀하게 그런 별명으로 그를 부르고 있었다.
이 사람은 말이 없고 제대로 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나는 고의 가족 중에서 돌아가신 고의 어머니를 빼면 제일 좋아한다.

- "젊은 남자도 와?"
"중늙은이들뿐이다. 그보다 날 보고 있으믄, 누굴 봐도 남자로 안 보일 긴데."
분명 반은 진심이다.
"짬짬이 다른 남자한테 한눈팔았던 거 아이가? 하기사 노리코는 싫증을 잘 내니까."
고는 질투심이 3분의 1 정도 묻어난 목소리로 말하고, 나머지 3분의 2는 농담과 의혹이 반반씩이다. 나는 급소를 찔린 것 같았다.

- 나는 고와 결혼한 후로 옛날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게 되었는데, 그것은 고가 나 혼자 외출하는 것을 작업장 외에는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 파티에 고와 함께 가고 싶어 했지만, 고는 내 친구들에게는 요만큼의 흥미도 없는 데다 자기가 여기저기 개척해서 친구를 만들려거나 미지의 인간에 도전하려거나 하는 지적 호기심이라곤 도대체 가지고 있질 않았다.
그의 호기심은 여자에게만 열려 있어 동성에게는 그야말로 목석이고, 그림도 음악도 문학도 흥미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소규모 개인전을 일 년에 몇 번인가 여는 관계로 화가들과 심심한 우정을 나누고 있었지만, 고는 내가 그들과 만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 개인전의 오프닝파티에 가서 함께 그림을 비평하거나 안면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하면서, 사람의 훈기가 가득한 화랑에서 나누는 비밀 이야기며 한 방울의 술. 좋아하는 그림을 찾아내어 "넌 정말 대단한 천재야!"라며 친구의 목에 매달린다. "고마워, 고마워. 전부터 그런 생각은 했지만, 역시 그런가?"라면서 친구가 맞비벼오는 까칠하게 수염 난 얼굴의, 서양 담배의 부드럽고 좋은 냄새. 아아. 그런 추억은 어느새 멀리 달아나고 말았구나!

- 내가 개인전을 열면 반드시 투명한 플라스틱 함에 제비 꽃다발을 넣어 보내준 작가 부인, 그녀는 내 그림의 열렬한 팬이었다.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서 달려와 주었던 그 무렵의 정부 아무개에게, "어머. 와줬구나!"라며 눈웃음치며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도록 날렵하게 손가락을 어루만지던 추억.
그것이 정말 있었던 일이었나?
나는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개인전을 열지 않았다.

- 일관계는 물론이고 친구관계에 있는 사람들도, 내가 황금마차를 탄 후로 일에도 그림에도 흥미를 잃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친구 중 누군가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게 되는 일도 있었다.
친구 아무개가 소개장을 써줬다며 나는 본 적도 없는 미술학도가 찾아와, "물감이라도 살 수 있게, 제 그림 좀 사주세요"라며 그림을 가지고 찾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부르는 값대로 두말없이 그림을 샀다. 유치한 그림이었지만. 고는 인색한 사람이라, 자기를 위해서는 큰돈을 물 쓰듯 하면서 이런 일에 쓰는 돈은 무척 아까워했다. 그래서 더욱 내가 일 문제로 다른 사람을 만나거나 친구들 모임에 가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아무 재미도 없는 일관계의 접대에 나를 끌고 다닌다.
 
- 방의 분위기를 말하자면, 불타버린 혼잡이라기보다는 지난날 한때의 영광처럼 보였다.
나는 여기서 작품을 만들기도 하고 괴로워도 하고 남자를 원하기도 하고 남자를 -그것은 언제나 미우라 고로라는 애인이었다- 목말라하기도 했다. 먹고 마시고, 고와 소파에서 자기도 했다. 그 무렵의 방은 죽지는 않았었다.
내 안에서 뭔가가 죽어버렸고, 이 방도 죽었다!

- 부자 놀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의 잘못이라거나 그 무엇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시간의 흐름이라고 하는 것이 내게는 딱 들어맞았다.
 
- "아기도 통통하게 살이 오른 게, 고로짱이랑 판박이야. 이번에는 틀림없어, 아하하하!"
그건 옛날에 미미가 다른 남자의 아기를 가졌는데 남자가 결혼해주지 않자, 사람 좋은 고로에게 부탁해 입적을 허락받고 아기를 낳으려고 한 적이 있었기에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건 사산으로 끝났고 말았다. 그러다 호적은 그대로 두고 실질적인 결혼까지 하게 되었고, 나는 오랜 세월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람을 순식간에 미미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하지만 빼앗겼다는 말은 옳지 않다. 고로는 물론 나의 연심을 몰랐기 때문에 당연했고, 미미도 설마 했던 것이다. 설마 내가 상처를 입을 정도로 고로에게 빠져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을 것이기에.

 

- "호적을 다시 빼는 것도 귀찮고 해서, 그냥 이대로 결혼하기로 했어."
천연덕스럽게 나에게 이런 보고를 해왔다. 귀찮아서 결혼을 한다니!
나는 고로를 아주 무뚝뚝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나에게만 그랬던 것이다. 왜? 도대체 왜? 미미에게는 고작 두세 번 만났을 때 손을 내밀었다고 하니 고와 다를 게 없다. 역시 남자와 여자의 인연에는 저마다 취향이 있다는 걸 톡톡히 배웠다.

- "오랜만이다, 이 방! 노리코, 하나도 안 변했잖아, 이 방하고 똑같이."
"그래?"
미미는 살이 쪘다. 살이 찌고 볕에 타서 거무스름해진 피부, 왠지 추레해진 느낌. 그 뒤로 아기를 안은 고로가 뒤따라 들어왔다.

- 나는 그들이 올 때까지 대청소를 하고 오랜만에 테이블보도 갈아 씌우고, 쓸고 닦고 치우고 했기 때문에 방은 완전히 깨끗해졌고 창문도 밝아져 있었다.
밝은 곳에서 보니 고로는 살이 올라 나이가 들어 보였다. 그리고 평범하고, 미미와 마찬가지로 거무스름해진 것 같고, 어디가 어떻다고 할 순 없지만 비누로 씻어도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생활의 찌든 때가 느껴졌다. 그 때문에 딱히 고로가 비참해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보고 있는 이쪽이 안타깝고 슬픈 생각이 들었다. 

- "노리코, 오랜만이야! 좋아 보이는데?"
고로는 정말이지 반갑게 말했다. 마치 오랜 세월 만나지 못한 육친처럼.
나는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아 당황했다. 그리움의 눈물이라기보다 감개무량의 눈물이라고 할까. 이 남자에게 한때 반해서 얼굴도 어깨도 손발도 먹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갈망했었지. 그랬던 것이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옛날 노래처럼 더딘 추억의 씁쓸함이 있는 만큼, 나의 마음을 그렇게 변화시켜 버린 시간이란 것에 대해, 나는 감개무량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던 것이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지금에도 나를 울릴 수 있는 힘을 가진 고로에게서 한시라도 빨리 해방되고 싶은 마음에, 나는 한순간 고로를 격렬하게 증오했다. 

- "우리 집은 싸구려 아파트 아니면 문화주택, 석양이 비추고 화장실은 공동화장실인, 그런 데야. 고가 살고 있는 맨션이라면 대단할 거 아니니! 야, 생활은 어떤데? 매일 뭐 하면서 지내니?"
"밥 먹고 자."
"그러기야 하겠지만, 부잣집 젊은 부인은 매일 어떤 나날을 보낼까 궁금해. 골프를 치거나 피아노를 배우거나 프랑스어를 배우거나 하지 않니?"
고의 여자형제들은 그랬지만, 나는 그들과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 '부잣집 젊은 부인' 축에 끼지 않는다.

- 고로는 아기가 삶의 보람이라고 생각하는 타입인 것 같았다. 그래 그래, 해가면서 "어, 기저귀가 젖었구나!"라며 아기의 기저귀를 갈아준다. 미미는 귀찮다는 듯이 가방을 휙 밀어주었다.
그런 모습들 속에 부부간의 익숙한 생활의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만일 내가 아직까지 독신이었다면 너무 부러워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겠지.

- 아기는 새까만 머리카락에 동그랗게 맑은 눈동자를 가진 아주 어여쁜 여자아이로, 어딘지 모르게 고로를 닮았다. 내가 별 뜻도 없이 고로의 손놀림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홱 고개를 돌리더니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새까맣고 커다란 눈동자가 왠지 어른의 그것만 같아서, 뭔가 생각이 있어서 나를 응시하고 있다는 느낌, 나는 오싹한 것이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아기라는 존재, 내 아이니까 사랑스러운 거지 다른 사람 아이라면 사랑스럽지 않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 "그야 당연하지! 고로짱, 마유미 때문에 나한테 꼼짝도 못 하잖아. 마유미가 태어났을 때는 콧구멍 넓혀가면서 좋아하는데, 말도 마!”
좀 더, 이렇게 남자의 가치를 무참하게 전락시키지 않도록 여자는 언어 사용에 신경을 써야 하지 않을까. 나도 고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는 좀 더 신경을 쓴다. 그래도 미미가 아무렇지 않게 '그야 당연하지!'라고 고와 똑같은 말을 한 것이 귓가에 맴돌았다.

- 모든 저택은 하나같이 깊고 잠잠했고, 나무숲 너머의 고풍스러운 서양식 저택에는 희미하게 등이 켜져 있다. 혹은 무겁게 닫힌 당초 문양의 철문 안쪽으로, 콜리 모자가 짖지도 않고 석가산 주변을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그런가 하면 아직 멀었나 싶을 정도로 긴 돌담이 둘러쳐졌고, 대문도 높은 널문이 단단히 닫혀 있고, 그 위로 가시투성이인 정원수 가지가 얽혀 있어서 집 안을 들여다볼 수조차 없는 저택도 있다. 

- 나카야의 저택은 종전 후 고의 아버지가 화재로 타버린 오사카 시내의 저택 대신에 오래된 서양식 저택을 사서 손질한 것인데, 쇼와 초기에 돈을 아끼지 않고 지었다고 하더니 지금도 끄떡없었다. 정원의 일부는 일본식으로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정원을 향하고 있는 방 역시 일본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대문으로 들어가 뜰을 돌아가면 현관이 나오는데, 스테인드글라스를 끼운 문이 있다. 손님이 주차할 것을 고려해서 나는 뒤뜰로 차를 몰았다.
베란다에서 내다보이는 잔디가 깔린 정원보다, 나는 이미 황폐해진 일본식 정원이 더 좋았다. 작은 돌다리가 있고, 여름이면 개구리가 번식하는 풀이 무성한 연못이 있다. 댕댕이덩굴이 늘어진 정자도 있다. 그 안에는 의자와 탁자도 설치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풀에 뒤덮이고 말았다. 덩굴장미의 아치는 절반이 못 쓰게 되었는데, 고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고의 누나는 이 부근을 방치해두고 있었다. 

- "내 보물!"
그것은 꽃조개가 가득 든 담홍색 상자였다.
"상자도 꽃조개로 만든 거야."
나는 한숨과 함께 그것을 들어 살폈다.
"깎아서 세공한 거야."
시어머니는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노리코 줄게."
"하지만..."
"아니야, 받아줘."
그녀는 자기와 동등한 감동을 보이는 사람에게는, 한층 더 그 연대감을 강화하기 위해 자기 것을 나눠주고 싶어 하는 버릇이 있었다.
"절 주시면 어머니, 쓸쓸하시지 않겠어요?"
"노리코가 보고 좋아하면, 나도 좋아."
시어머니는 그렇게 말하고 다이쇼 시절에 아버지 되시는 남작이 파리에서 사 오셨다는 상아조각이 있는 손잡이가 달린 손거울이며, 작은 터키석이 박힌 황금반지를 장난스럽게 쿡쿡 웃으면서 주는 것이었다.

- "언젠가 이 반지도 줄게. 다른 건 딸들에게 줘버려서 이것밖에 안 남아 있어. 이건 고의 아내에게 주려고 했던 거거든..."
그녀는 강한 빛을 발하는 다이아 반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문갑 안에 보관되어 있었다. 기절할 만큼 큼직한 다이아여서, 나는 감히 찬찬히 바라보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 나는 초로의 부인을 귀엽다거나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그것은 고의 어머니를 알기 전의 일이었다. 세월도 나이도 그 사람을 해칠 수 없는 아름다움이란 존재하고 있었다. 섬세하고, 피부는 백옥 같고, 손도 보통 여자보다 절반 정도로 작은 정말 아름다운 귀부인이었다. 왠지 모르게 애처롭고 가련하고 진심으로 안아주고 싶어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쁜 마음이라고는 요만큼도 없이, 자기와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는 전처의 딸과 아들에게도 지극히 상냥했다. 나는 특히 사랑을 받았다.
고의 아버지는 행여 바람이라도 맞을까 이 부인을 애지중지했고, 자기가 나이도 훨씬 위였지만 항상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아내를 보살펴주었다. 시어머니는 딱히 병을 앓았던 것도 아니었는데 심장발작으로 급사하고 말았다.  

- 이 누나가 말하면 왠지 천한 의미가 더 강하게 느껴져. 나는 항상 '천하지 않게 나이를 먹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 하늘은 저물었지만, 산의 능선은 또렷이 보였다. 바람이 포근하고 공기는 기분 좋게 축축한 것이, 내가 좋아하는 봄밤이다. 테라스 앞의 계단을 내려가자 정사각형으로 만들어진 인공연못이 있고, 거대한 거거가 연못 옆에 붙어 있다.
오늘은 연못 한가운데 있는 분수가 물을 뿜어 올리고 있었는데, 밝은 전등불빛을 받아 한층 돋보였다.

- 그런가? 나는 이렇게 고와 동떨어져 있으면 너무 허전하고 말수도 적어지고 만다. 나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나 일에 대해 자못 열심히 이야기할 능력을 갖지 못했다. 식사 도중에 립스틱이 지워지지 않도록 주의하거나, 반 정도 씹다 만 음식물을 성급하게 삼키고 상냥한 미소로 상대방 말에 대꾸를 하거나 하는 그런 훈련을 받지 못했다. 가식적인 웃음이나 입에 발린 공치사 같은 것은 도저히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가식적인 웃음이나 공치사는 훈련만 잘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이런 자리에 나오면 말주변도 너무 없고 특별한 재능도 없고 애교도 없었다.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러면 정말 곤란하다!"라고, 누나는 고에게 말했다고 했다.
"조금씩 익숙해지면 좋아질 깁니다, 그때까지만 좀 가르치고 이끌어주면 좋잖아요. 원래가 그렇게 무뚝뚝한 사람은 아니니까."

아마도 고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떨고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누나가 대답한다.
이 부분은 나의 공상이다. 하지만 나는 나를 보는 누나의 눈빛 속에서, 뭐랄까 '이런 거 알기나 하니? 이런 부자들의 습관...' 혹은 '이 부근의 고급주택가에서는 이런 식으로 하는 거야!' 하는 경멸이 펄럭펄럭 휘날리는 것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도 가르쳐주고자 하는 친절에서 '알고 있니?'가 아니라, 넌지시 과시하고 무시하는 듯... 
하긴 나도 고를 경멸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지만, 세상사 주는 대로 받는다!

- 고는 실컷 먹고 실컷 떠들었다. 내가 이 사람들 틈에 끼면 자연히 말수가 적어지는 것만큼 그는 쾌활해지고 매력적이 되었다. 누나가 부인들이 모이는 모임에 고를 참석시키려고 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고는 내 친구들 틈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턱이 빠질 것처럼 하품만 해대고,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뜨고 싶어 하는 기색이 농후했다. 나와 고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고는 이런, 아무 재미도 없는 어른들 틈에서 저렇게 즐겁게 떠들어댄다.

- "부군이 정말 남자답고 매력적이시군요."
나카스기 씨가 나에게 말했다. 그 말은 나에게 '저 물고기는 참 색깔이 곱군요!' 하는 수족관 수조 앞에서의 대화를 연상케 했다.
"항상 저런 매력적인 부군을 옆에서 보고 있으면 즐거우시겠어요!"
나카스기 씨는 부드럽고 품격이 느껴지는 억양으로 말했는데, 그것은 특별히 비웃는 것도 찬미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이번에도 어딘가의 수족관에서 언젠가 엄청나게 큰 아마존의 대왕물고기 피라루크가 하늘하늘 헤엄치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벽면 유리에 '이 유리는 확대경이 아닙니다'라고 일부러 써놓았던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 지금 식탁에서는 이야기의 소용돌이가 세 개로 나누어져 있다. 저쪽에서 고와 누나와 부인들, 한가운데에서 마주 보고 있는 A 씨와 여동생 부부, 끝자리에 B 씨와 형과 시종. 이런 이야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 혼자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나카스기 씨는 일부러 말을 걸어왔는지 모른다.
게다가 나도 대꾸하고 싶어지는 뭔가가 그에게는 있었다. 나에게, 나의 옛날 친구들과 보냈던 즐거운 시간을 추억하게 만드는 듯한 이 남자는 비웃을 때조차 가슴 두근거리게 할 것 같은 부드러움과 온화함을 가지고 있지 않나 싶었다.

- "덕분에 심심하진 않아요."
나는 상냥하게 대답했다. 나 또한 천성적으로 무뚝뚝한 사람은 아니니까.
"전, 아내니 주부니 하는 게 여러 악의 근원 같아서 되고 싶지 않았지만, 상대가 저런 사람이라면 괜찮겠다 싶었죠."
"주부는 여러 악의 근원이지만, 난 유부녀를 좋아해서요."
"저도 처자식이 있는 남자를 좋아해요. 독신귀족은 별로 좋아하지 않죠."
"말이 잘 통하니 다행입니다!"
나카스기 씨는 맛있게 고기 한 점을 입속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 나는 발이 넓지 못해서 그가 몇 살 정도인지,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유명한지 전혀 몰랐다. 다만 내가 느꼈던 것은 그가 고에 대해 말했을 때 물고기를 비평하는 것 같은 거리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고, 그것은 나에게 전혀 불쾌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만일 누군가를 싫어하게 되더라도 '당신이 싫다'고 어른다운 솔직함으로 말할 것 같았다.
그것은 어딘지 모르게 우아한 '남양(南洋) 토후'의 관록이랄 수 있는 분위기다. 거절이나 혐오를 용납받은 신분 높은 사람의 자기중심적인 솔직함 같은 것. 

- "하지만 이래저래 취향이 까다롭겠어요. 당신은 예술가니까"라는 그의 말에, 나는 당나귀가 말이라도 한 것처럼 깜짝 놀랐다. 고의 주변 사람들 중에 나의 특색을 '예술가'라고 표현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 "하지만 신앙은 자유로운 거니까... 신자가 될 수 없다고 탓하는 것은 잘못된 거겠죠."
"맞아요, 그래요. 하지만 서양의 유명한 사람도 말했다시피 신앙은 관습에서도 시작된다잖아요. '관례대로'라는 말이 있지만, 하나 둘 얏! 하고 탄력을 받지 않은 경우도 의외로 많습니다. 내가 바로 그런 경우죠!"
"아하하하!"
우리는 '서양의 유명한 사람'에게 건배했다. 내 웃음소리가 너무 즐겁게 들렸던지, 고가 힐끗 우리 쪽을 주시하고 있는 것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 "수갑."
나카스기 씨는 내 손목을 보고 씽긋 웃으며 말했다.
"부군을 잡아두기 위해서?"
나는 '남편'도 일종의 액세서리죠,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예의상 말없이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것은 나의 미의식 때문.

 

- 나는 인간의 대화란 내키는 대로 탁탁 요술 부리듯 주고받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재치 있는 기교를 부리는 것도 좋지만, 그것은 잘 알고 지내는 오랜 친구들끼리가 아니면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기도 하다.
양질의 기지는 침묵에 있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건너편에 있는 고의 여동생이 테니스공처럼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산뜻함을 보고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 어쨌든 누나에게는 여동생의 사교술이 더 보기 좋았는지 모른다. 식사를 끝내고 모두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객실로 이동하는 도중, 누나는 나에게 얼굴이 빨가니 더 마시지 않는 게 좋겠다느니, 한 사람하고만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느니, 실없이 웃는 건 안 좋다느니 하는 주의를 민첩하게 속삭였다. 술을 마시면 얼굴이 빨개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내 복장도 좋지 못하다고 누나는 지적했다.
"판탈롱은 안 돼, 롱드레스를 입어야 맞아. 항상 청바지만 입고 있으니까 걸음걸이가 천박스러워지는 거야."
하지만 롱드레스를 입고 있으면 고가 스커트를 걷어 올려 머리 위에서 묶고는 내 자유를 빼앗고 날 가지고 논단 말이에요, 나는 속으로 이렇게 대답했지만 그것으로 다시 천박한 생각을 할 것 같아 죽을힘을 다해 고상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 "술은 벌써 깼으니까, 난 괜찮아요. 뜨거운 커피 한잔 마시면 정신이 들 깁니다."
고가 말하자 나카스기 씨가 답했다.
"술김에,라는 말은 안 통할걸요, 나카야 씨 경우?"
"아니, 그런 말로 얼렁뚱땅 넘어가는 일도 있습니다."
고는 이렇게 말하고 웃었다.
"집사람을 손에 넣을 때는 그런 식으로 속였다 아입니까."

"어허허허."

- 나는 고의 옆자리에 앉고 나카스기 씨는 뒷좌석에 앉았는데, 대개 이런 재규어 같은 차는 뒷좌석에서 편하게 앉아 쉴 수 있는 것이 못 된다. 나카스기 씨는 택시를 타고 싶었을 것이다. 그랬으면 이렇게 지루한 이야기에 일일이 대꾸하지 않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푹 잘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억울해할 것 같아 나는 그를 동정했다.
누나는 고가 데려다주는 것이 친절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끈적끈적한 친절은 달갑지 않고 가만 내버려 두는 것이 친절이라고 생각한 적이 많다. 나는 쓸데없는 질투나 참견을 너무 자주 친절이라고 착각하는 세상 풍습이 싫어질 때가 있다.
나는 외국의 경우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일본의 끈적끈적한 풍토 때문인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어쩌면 그것도 내가 게으른 탓인지 모른다. 나는 무슨 일에든 자신이 없다.

- 나카스기 씨의 자택은 니시미야에서 상당히 들어간 교외의 산기슭에 있었다. 대밭 그늘 속에, 지극히 일본풍인 집이 대나무 사립문에 둘러싸여 있었다. 산뜻한 새집이다.
"참새우리 같아 너무 귀여워요!"
내가 작게 중얼거리자 나카스기 씨는 산문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학교가 멀어서 좀 그렇습니다."
나는 그에게 그렇게 어린아이가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학교가 멀다고 하는 걸 보면 초등학교를 말하는 게 틀림없다.
그가 인사를 하고 수은등이 켜진 정원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 고는 차를 돌렸다. 거칠게, 덜컥 덜컥 길가 벼랑에 부딪혀가며 운전했다.

- "암흑이로군. 완전 시골이다. 이런 덴 땅값도 싸겠다. 저 집도 싸구려로 지은 게 분명하대이."
고는 원래 이런 식으로 말하는 남자다.
"바꿀까, ... 운전?"
"됐어. 자기, 아까 아주 신이 나서 웃대? 무슨 얘기했나?"

"잊어버렸어..."
나는 정말 잊어버렸다. 다만 옆에서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고 싫지 않았다는 것만 기억났다. 그래서였을까, 항상 유일한 구원의 신이자 즐거운 이야기 상대였던 야스오와도 그다지 이야기한 기억이 없었다. 

 

- "저 사람 회사, 실적이 좀 저조한 것 같더만."
이러니, 고가 하는 말은 항상 그런 종류의 것으로 칭찬하는 법이 별로 없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나는 고의 그런 버릇을 옛날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알고 있다. 하지만 옛날만큼 일일이 귀에 거슬려하지 않는 것은, 내가 고의 버릇에 익숙해졌다기보다 어떻게든 그런 것에 눈을 돌리지 않으려고 하는 내 무의식의 보호본능 때문이 아닐까?
그 무의식의 보호본능이 무너졌을 때 나는 고의 언행 하나하나가 귀에 거슬린다, 다시 말해 마음에 걸린다.
술 때문이 아니다.
누나의 주의를 받은 뒤로 나는 술을 마시지 않았고, 술을 마시면 오히려 고에게 너그러워지는 때가 많으니까.

- 조금도 싫지 않고 오히려 좋고 싫고를 떠나서 일종의 그리움 같은 것을 그에게서 느끼는 것이 너무 좋았다. '그리움'이란 말이 적절한지 어떤지, 하지만 편안함과는 좀 다른 느낌.
나는 벌써 몇 년 전에 미우라 고로에게 실연을 당한 이후, 옆에만 가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남몰래 남자의 어깨며 팔이며 머리를 훔쳐보고 깨물어주고 싶어지는 갈망에 애를 태우는 사랑은 누구에게도 느껴보지 못했었다. 
지금 그 빈 곳에는 고가 들어와 있지만, 그것은 어쩌다 빈방이 있었기 때문에 "일단 들어오세요"란 느낌. 이런 걸 고에게 말하면 얼마나 화를 낼까?
그렇다고 고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나는 고에게 충분히 만족하고 있지만, 뭐랄까 그건 이전에 고로 때에 걸렸던 감기 바이러스와 다르다.
그때의 감기에 다시 한번 걸리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만약 다시는 걸리지 못한다고 하면 어째서인지 슬픈 마음이 드니 참 묘하다.
일단 빈 공간은 고가 채워주고 있기 때문에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어쩌다 문득 향수처럼 그 병이 그리워진다. 부들부들 쉼 없이 몸이 떨리고 열이 나는가 싶다가도, 이번에는 북극처럼 추워지고 마는 이상한 병.

- "부군께선 내가 당신하고 이야기하고 웃고 할 때마다 우리 쪽을 노려보더군요. 신경 쓰여 혼났습니다."
그는 유쾌하게 말했다. 볼 건 빠짐없이 보고 있다.
역시 중년의 관록이다. 고라면 그렇게 약삭빠를 수 없다.

"노리코 씨라고 부르는 건 고사하고, 부군의 그 눈빛을 보면 당신을 다른 남자에게 보이는 것조차도 싫어하는 것 같았어요."

"설마!"
"우리 둘이 있을 땐 노리코 씨라고 부르기로 하죠."
"비밀을 갖게 되었네요, 남편한테."
"좋은 일입니다."

- 나카스기 씨는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말했다.
"비밀을 갖는 건 어른의 자격이죠."
내가 담배를 꺼냈으므로 그는 내 담배에도 불을 붙여주었다. 담배 가게에서 팔고 있는 일회용 라이터다.
그것도 좋았다.
하지만 나카스기 씨 옆에 있어서 좋은 기분이 드는 건, 고로 때의 감기와도, 고 때의 감기와도 다른 것이다. 뭐랄까, 회복기라고나 할까, 그런 색다른 느낌이다.

- '사치가 좋긴 좋구나!' 하고 감탄한다. 값비싼 옷을 입을 때도, 모피에 뺨을 부빌 때도 그렇지만...
하지만 그것들은 몇십만, 몇백만 하는 -그리고 남한텐 말은 못 하지만 나는 천 몇백만 하는 반지도 고에게 선물 받았다- 다이아며 에메랄드와 마찬가지로, 나도 좋고 남에게 자랑하기에도 좋은 것에 포함되므로 관객이 필요했다.
큼직한 해면으로 몸을 문지를 때는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없기 때문에 나 혼자 즐긴다. 그게 바로 충족이란 것이었다. 진정한 사치를 마음껏 향수하고 있다는 마음이 들게 한다.

- 여기에 욕심을 부리자면, 이 욕실이 바다를 향하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맨션의 욕실이란 대개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것은 내가 좋아하는 시마 반도의 호텔도 마찬가지였다. 바다에 접해 있어서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전망은 좋지만, 욕실은 어둡고 작고 따뜻한 밀실이다. 나는 바다를 보면서 욕탕에 몸을 담글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것 때문에라도 나는 아와지 섬에 있는 별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별장도, 나카야 일가의 그것이 아니라 미즈노의 별장이다. 집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장소에 욕실을 만들고 유리벽을 만들어, 마치 바닷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 같았다. 노송나무로 만들어진 욕조라 좋은 냄새가 욕실 안에 진동 ... 

- 권하는 속옷들이란 고문도구라고 해도 될 정도로 몸을 바짝 조여 빈틈없이 밀착되는 것으로, 몇 시간 입고 있으면 음식도 먹을 수 없을 지경이다. 벗으면 숨이 확 트여서 순식간에 극락이 되는 무시무시한 것. 나는 비인간적인 아름다움보다는 인간적인 곡선이 더 좋기 때문에, 그런 속옷은 입지 않게 되고 말았다. 다만 브래지어를 착용하는 버릇만은 남았다.
두 손바닥으로 유방을 받쳐 들고, 그 무덤에 얼굴을 묻으면 왠지 눈물을 담는 항아리를 안고 있는 것 같다. 옛날에 보았던 서양영화에서, 로마의 황제 네로가 "눈물을 담을 항아리를 가져오라!"라고 외치는 장면이 나왔다. 신하가 허겁지겁 작은 황금항아리를 받쳐 들고 무릎을 꿇으면, 네로는 넘쳐나는 시흥에 감동하여 흘러내리는 눈물을 안약을 넣은 것처럼 뚝뚝 항아리에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 그런 이야기가 떠올라도, 나는 고에게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 내가 네로라고 해도 네로의 시가 어떻고 하는 소리를 해도 -네로의 시심을 부추긴 것은 스스로 불을 지핀, 활활 타오르는 로마다- 고가 그것에서 떠올리는 이미지는 나와 공통된 것은 아니다. 눈물의 항아리라고 해도, 그 어떤 감흥도 그에게 불러일으킬 수는 없다. 오히려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더 눈을 빛내며 재미있어할지 모른다. 나는 고의 어머니 쪽이 이야기하기 편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고는 원래가 그런 인간이니까. 그리고 나는 3년 동안 그것에 익숙해져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지금은 무의식 중에 '이건 고에게 해도 되는 이야기' '이건 말해도 소용없는 이야기' 하는 식으로 미리 분리하고 있다.

- 그런 무의식의 조작. 그것을 나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문득 "나, 가만 보면 참 친절한 사람 아닙니까?"라고 신에게 묻고 싶어질 때가 있다.
"이런 걸 친절하다고 하지 않나요?"
왠지 그것은, 만일 내가 먼 훗날 무슨 죄를 저질렀을 때, 주변 사람들이 서명해서 감형탄원을 해주도록, 그것들이 나를 변호해 줄 것 같은, 그런 생각도 든다. 
나는 고를, 그렇게 친절하게 달래 왔다. 나카스기 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충대충 덕분에 고는 나를 아주 궁합이 잘 맞는 파트너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건 말해도 소용없어' 하는 이야기는 고에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는 그런 것,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자기가 보아온 나만이 '노리코짱'이라고 믿고 있다. 

- 고같이 어리석은 남자가 노리코 님의 모든 것을 알 턱이 있겠는가?
나뿐만이 아니다. 여자는 모두, 밖에서 보이는 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그러므로 갑자기 아내가 증발했다거나 바람을 피웠다거나 한 남편들은 으악! 하고 경악하며 머리를 쥐어뜯고,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라며 몸부림치거나, 텔레비전에 나와 "돌아와 줘, 부탁이야. 나쁜 점은 다 고칠게. 이렇게 빌게”라며 손을 모아 빌고, 사내대장부가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 그때까지 여자가 일종의 친절을 베푸느라 '이건 저 사람에게 해도 되는 이야기니까 말해주자'라거나, '이건 말해도 소용없는 거야'라고 분류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여자의 포기라고 생각하며 위로라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고를 싫어하거나 경멸하고 있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에게 있어 고는 아주 쾌적한 파트너이자 좋은 만담 콤비며 안식처이기도 했다.

-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 없다. 나도 틀림없이 늙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광분하는 나는 될 것 같지 않다.
하지만 고가 늙는다는 건 믿을 수 없다.
나는 그가 늙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없을 것 같은 막연한 예감이 든다. 그렇지만 그와 헤어진 나도 상상할 수 없었다. 혼자 나이를 먹은 나, 정말 이상해지고 말겠지 하는 예감. 

 

- 추접한 색정광에, 남자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는 천한 여자. 마음은 간살과 술책으로 가득 찼고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추한 그림자가 덕지덕지 들러붙기 시작했는데, 자기는 아직 젊다고 착각하고 있는 그런 중년 아줌마가 된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경멸할 것인가?
하지만 저 나카스기 씨라면, 그런 내 모습에서도 어딘가 좋은 점 하나를 찾아내어 칭찬해 주고 한순간이라도 우쭐하게 만들어줄지 모른다. 그럼 나는 '늙는다는 건 나쁜 것이 아니구나!'라거나 '늙어야만 드러나는 좋은 것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나는 아직 젊고 아름답고, 그리고 내 곁에 있는 건 고였다.

- 그럴 거면 자기도 친구가 되면 좋을 텐데 그러진 않으면서 나의 화가 친구나 일 관계의 친구를 꺼려하기 때문이다. 화가 친구들도 '청년회의소'에 소속된 사람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는 남자들이 많아, 고를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몰라 나에게만 말을 걸어오기 때문에, 고는 갈수록 내 친구들 파티에 안 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번 파티는 후쿠다 케이라는 남자로, 아직 젊은 화가인데 옛날에는 꽤 친했었다. 한두 번 잔 적도 있다. 나는 그의 그림을 좋아했기 때문에 오랜만에 가보고 싶었다. 
요즘에는 어떤 테마에 몰입해 있을까 궁금했다. 등이 파랗고 배가 은색인 물고기가 가늘고 빨간 그물 안쪽에 그려져 있는 몽환적이고 재미있는 그림으로, 개인전 출품작 중 한 점을 그림엽서로 만든 것 같았다. 
 
- 고는 마침 머리부터 박박 북북 씻고 뜨거운 물을 뒤집어쓴 다음 풋! 소리를 내며 욕조로 뛰어든 참이었다. 가장 기분이 좋을 때였으므로, 내 계산대로 "그래!"라고 허락해 주었다.
나는 문 앞에 기대서서 후쿠다 케이의 갈겨쓴 엽서 내용을 소리 내어 읽고, 마지막에 "...래"라고 덧붙였다.
고는 찰랑찰랑 넘치는 핑크색 욕조의 투명한 물속에 천천히 몸을 담그고, 손바닥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아내고 있었다. 정말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깨끗한 물속에서 해초처럼 가슴 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때서야 내 쪽을 보더니 씨익 웃는다.
"옛날 남자가?"
"바보! 목욕탕에 빠져버려라!"
내가 거실로 뛰어왔을 때, 뒤에서 고가 큰 소리로 웃는 것이 들렸다.

- 나는 노란색 면 드레스를 입고 베란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식사 준비는 이미 끝나 있었다. 사프란으로 지은 조개 넣은 밥은 따끈따끈했고, 소고기는 앉기만 하면 금방 구워낼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고는 피가 나올 정도로 덜 익힌 것을 좋아한다. 콩소메는 차갑게 해 놓았고, 와인은 시원했고, 고가 좋아하는 까망베르 치즈는 차가운 유리접시에 듬뿍 담아놓고, 고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이런 순간. 나는 다시 '사치란 좋은 거구나!'라고 생각했다. 인생의 사치, 여자의 사치. 좀 더 호화로운 사치는 얼마든지 있겠지만, 확실한 남자가 있고 나도 그 남자가 좋고 그 남자도 나에게 반해 있다는 것은 사치의 극치라고 여겨졌다.

- 내 차로 오사카 맨션까지 가서, 거기서 후쿠다 케이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화랑까지 택시를 탔다.
나는 오늘 밤 감색의 얇은 조젯 롱드레스를 입었다. 가슴 언저리에 별처럼 은색 비즈가 박혀 있고, 소매는 길지만 얇아 팔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옷자락은 몇 겹이 겹쳐져 있었기 때문에 깊고 아름다운 색을 띠고 있었다. 작년에 만들어 두고 한 번도 입지 않았던 옷이다. 너무 많이 만들어뒀기 때문에 입어볼 틈도 없이 계절이 지나버리고, 다음 해에는 까맣게 잊고 또 새 옷을 만들고 마는, 그런 짓을 나는 했었다.
이런 '전철을 탈 수 없는 옷'을 잔뜩 만드는 것이 재작년과 작년의 나의 도락이었다.

- 요만큼도 취하지 않은 목소리. 나는 그 말은 못 들은 척하면서, 집게손가락을 권총처럼 그의 가슴에 대고, "첫눈에 반한다는 걸 믿습니까?"라고 물었다.
"네, 믿습니다.”
나카스기 씨는 앵무새처럼 대답하고는, "그렇게 말 안 하면 날 죽일 것 같은데?" 한다.
나는 그의 말에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 뜨거운 블랙커피를 마셨다.
나카스기 씨는 차분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마도 이 남자는 어디에 있든 당황하지 않고 침착할 것이다.

"나카스기 씨를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사람은 없을 것 같네요. 빈틈이 없는 사람이니까, 당신은."
"글쎄요, 모르죠. 아직 당해본 적이 없어서."
"아하하하하!"

 

- 나는 그와 밤새도록 마시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렇게 말하자, "다음에 부군하고 같이 자리 한번 마련하죠."라고 내뱉었다.
그는 처음으로 약간 경멸하는 말투로 '부군'이라고 발음한 것 같았다.
"그리고 진짜로 운전 못 하게 될지도 모르고."
"택시가 없는 것도 아닌데. 차는 정말 불편해."
내가 덧붙여 말했다.
"맞아요. 정말 불편해. 나 같은 경우는 술을 자주 마시니까 차를 가지고 다닐 수가 없어요. 나올 땐 좋은데, 돌아갈 땐 다들 차를 놓고 가야 하거든."
"차가 편한 건 바람피울 때뿐이네요."
"아무래도 경험에서 나오는 술회 같은데?"
"아니, 완전한 상상일 뿐이에요."
"진짜?"
"진짜."
차를 운전할 수 있게 된 건 결혼한 후부터고, 바람이랄까. 윤리에 어긋나는 사랑이랄까, 정사의 경험은 없었고, 바람을 피울 때는 운전을 할 수 없었다.

- "오히려 도심이 더 조용하군."
우리가 지하주차장에서 차를 몰아 지상으로 나오자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차의 앞 유리가 젖어 있었다. 헤드라이트에 비친 빗발을 보면서 나는 침묵에 휩싸였다. 또다시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옛날, 이런 일이 있었다. 비, 젖은 거리, 그리고 곁에 있는 좋아하는 남자.
뭐랄까 그것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망연자실한 감정이었다. 고와 함께일 때는 결코 그런 기억이 떠오른 적이 없는데,

 

- 오늘 밤 케이의 파티 때문일까? 옛날, 나의 작은 맨션에서 혼자 즐겁게 생활하던 젊은 날 -기껏해야 3년 전 일이지만- 의 추억이 갑자기 가슴께로 치밀어올라, 나를 애달픈 혼란 속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일까?
옛날, 애타게 사랑했기에 너무너무 소유하고 싶었던 고로.
그래, 언젠가 내 개인전이 열렸던 날 밤, 고로와 함께 이 맨션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나는 고로에게 고백하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그런 순진한 마음은 남아 있지 않다. 단 한 번의 키스로 평생 마음에 가시가 박힌 듯 사는, 숫처녀 같은 충실감은.
남아 있는 건, 언젠가 이와 똑같은 일이 있었다고 막연히 느끼는 슬픔뿐.

- "나카스기 씨는 그런 경험해 본 적 없어요? 지금의 장면, 지금의 감정과 분명 똑같은 것이 전에도 있었는데 하는..."
"있긴 하지만, 그런 것에 일일이 감탄하고 놀라고 하는 건 아직 젊다는 증겁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나이를 먹으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장래에도 분명 똑같이 하고 있겠거니 생각합니다."
"아하하하!"
나카스기 씨는 고와 다른 의미로 나를 웃게 만드는 남자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옛날에 이것과 똑같은 일이 있지 않았나?라고 생각하겠지, 하는 것까지 내다보이고 말아요."

 
- 나는 웃으며 물었다.
"나카스기 씨는 몇 살이에요?"
"마흔일곱."
"마흔일곱까지 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되나요?"
"아니, 난 20대부터 그런 게 있었어요."
그 말은 나도 믿을 수 있었다. 우리는 후쿠다 케이의 그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런대로 괜찮은 그림이에요."
나카스기 씨는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그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상당히 정도가 높은 찬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그 친구, 후쿠다 케이의 패트론이에요."
"아, 그래요!"
"패트론이라고 해야 하나, 애인이라고 해야 하나."

- "한 2, 3년 전부터 동거하고 있죠"라고, 나카스기 씨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하! 하는 느낌. 스르륵 막이 열리고 하나부터 열까지 환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케이의 그 차분함은 그림이 깊어졌기 때문이라거나 인격수양이 충만해서 얻어진 것이라기보다, 여자가 옆에 있기 때문에 얻어진 것이다. 

남자의 안정.

- "노리코 씨는 운전이 거칠어요. 여자치고는 거칠어."
"아이가 없어서겠죠."
나는 점잖게 대답했다.
"아이하고 운전하고 무슨 상관이 있죠?"
"여자는 아이를 낳으면 바보가 된다고, 남편은 항상 말하거든요."
고는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
바보와 가난뱅이가 아이를 가지고 싶어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에게 있어, 그렇게 말하는 고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왜냐면, 둘만의 생활에 모든 것을 걸겠다는 고의 열의 같은 것이 느껴지기 때문에. 하지만 그것을 나카스기 씨에게 말하는 것은 꺼려졌다. 만일 나카스기 씨에게 아이가 있다면 미안한 말이 될 테니까. 그도 또한 말하기를 꺼리고 있는지 모른다. 아이를 낳지 않아도 여자는 바봅니다,라고.
하지만 나카스기 씨는 양식이 있는 신사라서 그런 말은 전혀 하지 않았고, 나도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 그는 하라 코즈에가 젊은 남자를 너무 좋아해서 매번 젊은 남자의 패트론이 되는데, 웬만큼 컸다 싶으면 남자들이 도망가고 만다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주었다.
케이 이전의 소년은 조각가였는데, 어느 날 "이발하고 올게"라고 말하고 나가선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말이 나중에, 나와 나카스기 씨의 헤어질 때의 암호가 되었다.
나카스기 씨 집 앞에 차를 세웠을 때, 그는 "그럼 이발하고 올게요"라고 말하고 차에서 내렸다. 나는 그가 너무 좋아졌고, 혼자 웃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그래, 이 남자는 그런 것이 취미였지.
손수 재료를 사서 요리한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 혼자라서 금방 상하고 말 거예요."

"아이스박스를 빌려줄 테니 가지고 돌아가는 건 어때요? 참돔이란 놈인데."
"하지만 돌아가도 나 혼잔걸요."
"욕심이 없군요."
미즈노는 신선한 생선에 특별한 기호와 집착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점도 좋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나는 좋다.
지금 생선을 받으러 미즈노의 집으로 들어간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이 남자는 분위기를 잡는 데 아주 능숙한 사람이다. 나는 그것에 몸을 맡기고 싶은 유혹을 냅다 뿌리쳤다. 하지만 아주 간신히 "오후에 돌아갈 거예요. 그럼 안녕히" 하고 인사했다.

- "여름에 또 옵니까?"
"예, 올 거예요. 그때도 혼자겠죠, 아마."
나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고 "만나서 반가웠어요"라며 씽긋 웃어주었다. 미즈노는 순간 총구처럼 똑바른 눈길로 나를 보았지만, 영리한 남자라서 별다른 얘기는 하지 않고 싱글거리며 내 악수를 받으며 말했다.
"나카야 씨한테도 안부 전해줘요."
그런 점도 좋다. 한때 같이 잔 적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여자를 함부로 대하는 남자는 쓰레기다. 요사노 아키코의 노래에도 '남자 허물없이 다가올 날을 생각하면 사랑하는 것도 귀찮아지네'라는 구절이 있다. 

- 이 미즈노에 대해서도 고는 옛날 '작고 형편없는 회사를 가지고 있다'고 막말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고가 무시하는 남자들은 회사의 업적이야 어찌 됐든, 하나같이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문 앞에서 꽃돔에 대한 강의를 듣고 있는 한, 나는 두 번 다시 미즈노와 그렇고 그런 일은 생길 것 같지 않았다.

- "꽃돔이라... 그런데 왜 갑자기 아와지에 간 긴데?"
"태우다 만 장작..."
"그 소린 아까 했다."
"바다가 보고 싶어졌거든."
"와?!"
"왠지 그걸 어떻게 알아. 갑자기 보고 싶어졌을 뿐인데."

"갑자기?"
고는 비아냥대는 말투로 말했다.
"왜 하필 산이 아니고 바다가 보고 싶냐꼬?"

- 그 이야기를 하자면 케이의 개인전 오프닝파티에서, 그날밤의 분위기 하며 나카스기 씨와 만난 일하며, 나카스기 씨를 말하자면 드라이브를 하다 우연히 만난 일까지 모두 말해야 한다. 그러면 또 하라 코즈에라는 여자 드라큘라 같은, 의연하지만 참혹한 표정에 검은색 일색의 옷을 걸친 여자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묘사력이 있다고 자부하는 만큼 말 못 할 것도 없지만, 말한다고 해도 고는 결코 재미있게 들어주지 않을 것이고, 나와 동질의 감동이나 흥미를 그가 느낄 리 없기 때문에 말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싶었다. 그래서 "예술가의 충동이야"라고만 말했다.

- "자기의 옛날 여자들은 어떻고?"
"남자는 괜찮다. 하지만 여자의 과거는 달라. 천식처럼 항상 내 가슴에 들러붙어서 나를 괴롭히거든."
젠장! 그런 소리 해봤자, 인생은 지우개로 지울 수 있는 게 아니야.

 

- 쌍방침묵. 말없이 술을 마시고 있다.
불길한 침묵.
나는 전에, 오사카 성이 낙성되었을 때 쓰인 여자의 수기를 읽은 적이 있었다. 벌써 300년도 더 이전에 쓰인 수기가 아직 남아 있다. 그 수기에는, 낙성이란 땅! 하는 신호와 함께 떠들썩하게 웅성거릴 것 같은 인상이 있지만, 아주 조용한 일면도 있다고 쓰여 있었다.
낙성 당시의 정숙. 지금이 바로 그런 느낌이다.

- "자기 일기를 읽어서, 더 괴로운지 몰라."
"일기를 읽었어?"
"옛날 일기."
고는 황급히 변명하듯 말했다.
이번에는 내가 경직되었다.
"어디서 읽었어?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을 텐데?"

"미안하다. 오사카 맨션에 갔었다."
"열쇠는?"
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자기 핸드백에서 꺼내서."

"계획적인 범죄였네?"
"미안하다고 하잖아."
고는 조금 전의 기분 좋던 얼굴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생각해 봐라. 좋아하니까 그런 짓도 하는 기지, 노리코를 좋아하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잖아, 그래서..."
"..."
"읽으면서도 내내 꺼림칙했다. 내 자신이 얼마나 싫어졌는지 모른다. 정말이지 내가 너무너무 싫었다."

"..."
나는 어깨를 움츠렸을 뿐.
"하지만 노리코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서."


- 나는 지금은 일기를 쓰지 않지만, 그때는 아주 자세하게 썼었다. 그걸 모두 고가 읽었다고 생각하니, 고가 아니라 내 자신이 싫어졌다.
그리고 고가 일기를 읽고 찾고 했을 그 맨션까지 더럽혀진 것 같았다. 나는 그곳에서 작품을 만들고 생각하고 했던 것이 지금까지의 나의 기쁨이었다. 그 맨션은 내 마음 바로 그것이었는데, 고는 그런 곳을 짓밟은 것이다.

- "용서해 줘, 사과한다 아이가. 하지만 사실이다. 자길 좋아하니까 알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이가. 무엇이든 알고 싶어지는 거."
고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내 손을 잡았다.
"좋아하고 말고에 따라, 그거 말 안 해도 백만 엔 주께, 용서해 줘."

"..."
"벌로 내 가슴 털을 죄다 뽑아도 좋다."
내가 말이 없자 고는 나에게 담배를 내밀었다. 손으로 밀치며 "필요 없어!"라고 말하자, 고는 마침내 "어, 그러셔?"라며 화를 냈다.
"진심으로 사과하는데 그렇게 화만 낼 끼가!"
"용서할 수 없어."
"뭐얏! 시건방진 소리 하지 마, 서민이 어디서!"
"서민의 분노야."
"일기를 읽었다. 그건 분명 내가 잘못했다. 그러니까 사과한다 아이가. 남자가 이런 말, 할 수 있을 것 같나? 내가 남한테 사과하는 일 별로 없는 거 알잖아. 하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내 마음을 이해해 줘도 되잖아,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그카나!"

 

- 고는 적반하장으로 화를 냄으로써 사과를 대신하려는 타입의 남자다.
"그렇게 화낼 일이가? 이렇게 남자가 물심양면으로 떠받들어주는데."
나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화 안 났어."
피곤했기 때문에.
고는 단번에 공기가 빠져버린 것처럼 순간 조용해졌다. 그리고 다시 "노리코가 좋으니까, 가끔 옛날 남자들을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었어. 이해해 줘"란다. 

고도 나름대로 괴로워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모두 끝난 일이고 아무 미련도 흔적도 없는 일인 것을, 어이가 없었다.

 

- "왜 그런 소릴 해? 지금 나에겐 고짱뿐이야. 너무너무 좋아해. 자기랑 사는 것도 즐겁고, ... 다른 남자는 있지도 않아."

지금은.
"나, 북극처럼 청결해."
"지금이 청결하니까, 오히려 더 옛날 일을 생각하게 된다."

나는 엄지손가락으로 입술을 튕기고 있었다. 멍한 표정으로. 브리지트 바르도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조용히 혼자 살아야 한다'라고 했다. 행복은 혼자 살 때만 비로소 얻어지는 것인지 모른다.
여자 혹은 남자와 언제까지고 사이좋게 지내려면 궁지로 몰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고는 모르는 걸까?

- 그다음 날, 고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고는 일단 화를 내면 여간이 아니지만, 원래대로 돌이키는데도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그것은 내 할 일이다.
고는 이상한 남자다. 자기가 화를 냈을 때도 스스로 기분을 푸는 일이 없다. 딱히 이상할 건 없을지 모르지만. 남자란 모두 그럴지도 모르지만,
내가 기분을 맞춰주지 않으면 안 된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내가 맨 먼저 생각한 것이 그거였다.

- 다른 때에는 그것도 나름대로 즐거웠다.

- 여러 가지 고의 기분을 풀어줄 방법은 있었다.
"고짱, 마사지해 줄까?"라거나, 고가 좋아하는 모던재즈 레코드를 거실에 있는 스테레오로 틀어놓거나, 침대 속으로 병아리처럼 기어들어가 다시 나쁜 짓을 고에게 해서 마지못해 그가 "그만두지 못해!"라고 말하게 하거나.
내 수완이라면 한 방에 효과만점일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은 웬일인지 그중 어떤 것도 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 고의 파자마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장난을 치는 것은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생활의 완력이 있을 때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쪽의 기력도 기분도, 배터리가 충전되어 있어서 인생의 엔진 상태가 좋을 때다. 엔진 트러블이 있으면 이런 힘든 작업은 할 수 없다. 도중에 지쳐 쓰러지고 만다. 이쪽의 엔진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을 때는 고의 그런 태도가 오히려 귀엽고 친숙하게 여겨져서 기분이 나쁘다기보다 저쪽에서 손에 딱 달라붙는 생물 같은 느낌이 들지만,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그것은 전혀 아무 상관도 없는 그저 기분 나쁜 물건이 되었다.

-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내 마음쯤 이해해 줘도 되는 거 아이가!"라고 하지만, 그것은 폭력이다.
고는 언젠가 내 얼굴이 엉망이 되도록 때리고 방 안의 물건들을 다 새로 바꿔야 할 정도로 때려 부순 적이 있는데, 그것도 질투 때문이었다. 그리고 고의 폭력을 휘두르는 버릇은 조금도 고쳐지지 않았다.
물건을 물리적으로 때려 부수거나 변질시켜 버린다. 그리고 내 안을 흙 묻은 발로 짓밟고 들어와, 모조리 자기 것이라는 도장을 찍으려고 한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어린애다.

- 만들다 만 인형이며 먼지를 뒤집어쓴 드라이플라워까지 모조리 쓰레기봉투에 처박아 넣고 말았다. 이 쓰레기들은 모두, 한때 따뜻한 온기로 나의 심신을 달래주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먼지투성이의 쓰레기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고라는 세속의 바람이 불어닥친 순간, 마법은 풀리고 그것들은 더 이상 뭔가를 표상하는 꿈이 아니게 되었다. 고가 보기에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냥 쓰레기일 뿐이겠지만.

- 옛날 자부심이 강한 성주들은, 적군에게 자신의 사랑하는 성을 능욕당하느니 제 손으로 성에 불을 질렀다. 또한 호쿠리쿠의 패자(覇者)였던 시바타 카츠이에처럼, 천수각에 깃발을 화려하게 꽂고 일족이나 부하들과 함께 화약에 불을 붙여 산산조각 냈었다. 나는 마치 그런 성주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고는 그런 것을 모른다.
하루하루 즐거운 만담 콤비의 생기 있는 생활의 기쁨은, 나를 희생물로 바쳐 이루어진 의식이라는 것을 모른다.

- 그날 밤 고가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너무 더워서 가장 좋아하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알몸에 고의 와이셔츠 한 장 달랑 걸친 차림.
소매만 걷어올리면 품이 넉넉한 가운이 된다. 길이도 아슬아슬한 선까지 내려온다. 풀을 먹이지 않은 부드러운 포플린 천의 느낌이 좋다. 나는 그런 차림으로 요리를 했다. 고가 의외로 빨리 돌아왔기 때문에 "어서 와!"라며 고에게 달려들어 키스를 했다.
 
- 아버지 쪽과 어머니 쪽의 친척은 물과 기름처럼 다르다. 그리고 고 또한 그의 형제들과 많이 닮았다. 사촌과는 닮지 않았다.

- 술이 부족한 것 같아 내친김에 오사카까지 전철을 타고 나가기로 했다. 케이는 물론 이의 없이 대찬성이었다.
"저런 부르주아 냄새가 풀풀 나는 속에서 마시면 기분 더럽게 취한다니까, 진짜!"
케이의 말에, 나는 '벼락부자 냄새겠지' 싶었다. 고의 가족은 자신들을 상류층 사회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매 순간 벼락부자 냄새를 맡지 않을 수 없었다.

 

- 고에게도 그런 부분이 있었다. 예컨대 내가 좋아하는 보랏빛 조개비누.
부드러운 거품과 향기를 음미하면서 "으음~, 향기로운 냄새..."라며 황홀해하고 있으면, 고는 옆에서 "당연하지. 하나에 3천 엔이나 하는데! 돈 내는 사람 입장이 돼보라고"란다.
나는 지금까지 조개비누의 정식 명칭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가격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었다. 선물로 받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백화점에 주문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던 것이다. 난 숫자에 약하고, 어차피 전표를 보았다면 적혀 있는 가격을 보았을 터인데, 고의 말을 듣고 새삼 깜짝 놀란다. 
하지만 '좋은 향기' '예쁜 색깔'이라고 생각하고 사용하는 것과 ... 

- 주변에는 춤을 추는 사람이 별로 없고, 너무 품위가 있어서일까, 손님들은 화분 그늘 밑에서 여자들과 조용히 이야기만 나눌 뿐이었다. 케이는 결국 "기분 안 나네, 정말!"이라며 불만을 터트렸다. 그래서 내가 앞장서서 케이가 항상 다닌다는 미나미의 술집으로 갔다. 귀청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시끄러운 음악과 빤짝빤짝 정신없이 돌아가는 조명. 말도 목이 쉴 정도로 소리 높여서 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았다. 케이는 굉음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겨우 안정을 찾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맛있게 술을 마신다. 나를 위해 이것저것 챙겨준다. 술을 바꿔주기도 하고 담배에 불을 붙여주기도 하고.

- 나는 케이의 귀에 입을 대고 "나카스기 씨는 어떤 그림을 샀어?"라고 외쳤다.
"역시 <해저> 중에서 한 장. 물고기와 산호와... 물거품이 있는 작품. 나카스기 씨한테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단 말이야. 그 사람, 나랑 보는 시각이 비슷하거든."
케이는 나카스기 씨의 비평을 평론가보다도 더 중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 귀에 대고 소리쳤다.
"아름다운 부인이 있어, 그 사람!"
"아름다운 부인이 있는 사람은 정말 싫엇!"

- "괜찮아?"
수염투성이인 뺨을 잡아당겨 툭툭 때리자, 케이는 내 손가락을 잡고 입술에 물더니 "노리코니까, 안심하고 마셔버렸나 봐!"라고 조용히 말했다.
이 엘리베이터에는 프라이버시가 없다.
옥외에 설치된 엘리베이터의 유리문 밖은 밤의 거리, 컴컴한 하늘에서 불을 밝힌 엘리베이터가 지상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나는 케이에게 손을 맡긴 채 지상을 보고 있었다. 
옛날 남자, 그것도 지금도 싫지 않은 남자란 참 좋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옛날에 우리 잤잖아요?'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눈치를 보이는 놈이나, 옛날 일을 무기 삼아 위협해 오는 놈은 정말 기분 나쁜 남자다. 
하지만 자기도 자기 인생에서 제대로 된 일을 하고 있고, 우연히 옛날에 가깝게 지내던 여자를 만난다. 그럴 때 진심으로 반가워해주는 남자가 나는 좋다.
마치 정이 깊은 남매 같은 마음을 나누는 남자와 여자 사이란, 육친보다도 부부보다도 좋다.
내가 아직 혼자 몸이라면, 다시 케이와 잤을까?
"자자, 택시 탈 거야. 케이, 행선지를 말해줘야지!"

- 그래도 미즈노 때와 마찬가지로, 두 번 다시 케이와 잘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다만, 그런 사람에게 숨겨진 사이좋은 분위기가 좋을 뿐이지, 다시 한번 반복할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 그건 왜일까?
나는 고와 살면서 충분히 만족하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특별히 정결을 지키자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한 남자와 살고 있으면 나의 경우, 그런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아쉬워하지 않고, 포식한 사람의 나른한 만족감처럼 그런 내 자신이 마음에 들었다.
고와 결혼한 지 3년, 다른 남자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은 고에게 말했던 것처럼 사실이었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그것이 부자연스럽지 않았던 생활을 나는 만족스러워하고 있었다. 

- 단지를 지나 새로운 인공의 거리에 다다랐다. 케이는 완전히 잠이 들었고, 나는 운전수와 둘이서 그의 집을 찾아냈다. 아담하게 생긴 귀여운 집으로, 밤눈에는 분명하게 보이지 않지만 장미가 피어 있는 것 같다. 농밀한 향기가 떠다니고 있었다. 모퉁이의 경사진 곳이라 돌계단을 오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같았다.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나는 운전수에게 이렇게 말하고 케이를 부축했다.
문은 키가 낮은 하얗게 색칠된 목책으로, 미니까 열렸지만 현관문은 잠겨 있었다.
케이는 바지 주머니를 뒤지다 열쇠가 나오지 않자 초인종을 눌렀다. 그것은 하숙생의 손놀림이 아니라, 그것을 할 권리가 있는 사람의 손놀림이었다.

- 나카스기 씨 말처럼 하라 코즈에와 후쿠다 케이가 함께 살고 있는 거라면, 케이는 비교적 마음 편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남녀 사이의 성찰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상대와 함께 산다는 것, 그건 좀처럼 찾아오기 힘든 행운이니까.

- 첫째, 고라면 아무리 '대충대충'이라도 그런 관계는 알 턱이 없다. 불이 켜진 투명한 플라스틱과 유리와 강철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가는 동안, 남자에게 손을 내맡긴 채 가만히 있을 때의 흐뭇한 기분 같은 것.
지금도 그 남자에게 나쁜 감정은 가지고 있지 않고, 오히려 만나면 좋고 만나지 않을 때도 다 잘되기를 바란다. 그의 인생도 일도.
그러면서도 평소에는 잊고 지낸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의 험담을 하는 것을 들으면 반대하고 변호해주고 싶어지는, 그런 사이를 고가 이해해 줄 것 같지 않다.
'이건 말해봤자 소용없는 일이지!'

- 하지만 하라 코즈에라면 이해해 줄지 모른다.
그런 여자와 함께 있기 위해서는, 역시 그 장점을 알 정도의 나이가 된 남자가 아니면 안 되는 게 아닐까?
'이발하고 올게'라며 나갔다 돌아오지 않아 사람을 슬프게 하는, 철딱서니 없는 어린 남자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 "또 몇 시에 전화할 건데?"
"그런 걸 말해주면 커닝하는 거잖아."
그제야 고는 큰 소리로 웃었다.
본인은 우쭐해서 웃고 있겠지만, 그렇게 만들기 위해 애쓴 이쪽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남편의 기분을 풀려고 애쓰는 고생을 훈장에 비유한다면 노벨상 감이다.
나는 잠잘 기분도 안 나고 뭘 먹을 기분도 아니어서, 멍하니 베란다 밖의 타는 듯한 초록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나서 부엌의 테이블 위를 보니 항상 내 소지품을 넣어두는 핸드백이 없다. 
거기에는 돈은 들어 있지 않지만, 맨션의 열쇠며 차 열쇠 등이 들어 있다. 나는 하아~ 하는 심정이었다. 

- 오후에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안 울고 잘 놀고 있나?"
"얌전히 있어. 여기 맨션 열쇠도 없으니 나갈 수도 없고."

고는 큰 소리로 웃었다. 나는 말했다.
"여기 열쇠는 상관없지만, 내 차 열쇠는 돌려줘."
"오늘은 어디에도 가지 말라고 했잖아."
"그런 말 들으면, 더 나가고 싶어진단 말이야."
"반항적이로군. 집에 가면 벌칙감이야, 이거!"
완전히 원상회복된 목소리로 말하고, 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런 남을 한숨짓게 만드는 기질이 고에게는 있었다.
내가 줄곧 부엌에서 부산을 떨고 있을 때, 그래도 시선에 미칠 곳에 있었는데 어느 틈에 손에 넣은 것일까. 고는 열쇠를 빼내갈 수 있었던 것이다.

- 그런 고의 행동이며 성격이 슬프다. 그것은 애정과는 또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나는 가끔 덩달아 웃을 수 없을 때가 있다. 고는 내가 웃을 거라고 믿고 그런 행동을 하는지 모르지만.

- 하늘은 진한 파란색, 먼 바다 색과 약간 닮았다. 고지대의 초록이 하얗게 보일 정도로 반짝이고 있었다. 이런 날 드라이브를 하면 기분이 상쾌해질 텐데.
나는 집에 갇혀 새파랗게 질려서, 종이집에 붙여진 종이인형처럼 꼼짝도 못 하고 창으로 바깥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 나카스기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주 귀중한 물건처럼 조심스럽게 들고는 "잠깐만요"라며 그림을 들고 차에 가져다 두러 갔다.
나는 한시름 놓았다. 이제는 고에게 그림을 찢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카스기 씨는 돌아와서 말했다.
"맥주를 너무 마시면 운전하고 갈 수 없겠지요?"
"호텔을 잡아뒀는데, 바쁘세요?"
나는 그에게 정말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기서 주무시고 가셔도 좋지만, 집이 너무 오래돼서 불쾌하실 것 같아서."
사실은 자고 가길 원했지만, 고가 괜한 의심을 하고 질투를 하면 큰일이다.

- 나는 고에게 "나카스기 씨에게 롯코에 있는 우리 별장을 보여주고 싶어"라고 말해두었다.
이게 바로 고의 약점이었다.
고는 허영심을 자극해 주면 두말없이 납득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별장의 골동품적 가치를 높이 사고 있는 것처럼 고에게 연기를 했다.
"그래. 불러서 보여주는 것도 좋지."
나카스기 씨에게 별장을 자랑하고 싶다는 나의 요구는, 정말 너무 쉽게 통과되었다.
"그 사람은 그런 걸 좋아하는 것 같더군. 가치를 모르는 사람한테 보여줘 봤자 소용없겠지만, 그런 건물의 독특함은 알겠지."
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리고 그 별장의 가구, 의자며 시계도 보면 좋아할 거야."

"그렇겠지"라며, 고는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듯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 건, 지금 사려고 하면 장난이 아니게 비쌀걸! 그거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절대 알 수 없지. 나카스기 씨라면 알기다"라고.

- 그래서 나는 그가 가르쳐준 번호로 전화를 해서 나카스기 씨를 부른 것이었다. 그러므로 "후쿠다 케이는 그렇다 치고, 부군께서는 내가 여기 온 것을 알고 있겠죠?" 걱정스러운 듯 나카스기 씨가 물었을 때, "물론이죠"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 그림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알겠습니다. 어쩐지 부인하고..."
"노! 리! 코!"
"노리코 씨하고 둘이 있으면 비밀로 해야 할 일들이 많아집니다."
"어른이란 힘든 존재예요. 같이 무거운 짐을 나눠져 주세요."

- "램프 컬렉션이 있는데, 보실래요?"
나는 신기한 듯 집 안을 바라보고 있는 나카스기 씨에게 말했다.
고의 아버지의 취민지 어쩐지, 안쪽에 위치한 어두컴컴한 방 하나는 먼지를 뒤집어쓴 서양골동의 잡동사니로 가득 차있었다.

나는 늘 재미있을 것 같아 천천히 둘러보자고 생각은 하면서도, 고와 둘이서 왔을 때는 '천천히 둘러볼 틈'이 없었다. '사랑을 나누느라' 바빠서.

 

- 그리고 고는 이런 잡동사니에 흥미가 없다.
'과시는 하면서, 그것에 흥미를 갖지 않는 사람도 있다.'
만일 다른 사람이 그 방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뒤지며 유심히 바라보거나 한다면 고는 경계하고 의심하는 눈초리로 지켜볼지도 모른다. 뭐라도 들고 가지 않을까 걱정해서.
'흥미도 없으면서 소유욕만 강한 사람도 있다.'
다만 그 사람이 어떤 것도 손대지 않고 예의 바르게 보기만 하고 찬탄의 말을 아끼지 않는다면, 고는 대만족이었다.

- 하지만 나는 정말, 천천히 이곳의 잡동사니 컬렉션을 감상해 본 적은 없었다.
고와 있을 때는 언제나 바쁘다.
밥을 짓거나 마시거나 '세세세'를 하거나 공처럼 뒹굴거나 수다를 떨거나 산책을 가거나 이른 아침 아직 관광객이나 행락객이 찾지 않을 시간에 목장까지 차를 달려 신선하고 시원한 우유를 마시거나, 할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리고 나도, 고와 있을 때는 그러는 편이 재미있었다.
즐기는 것에도 저마다의 취향이란 것이 있는 법이고, 고와 잡동사니 골동품을 감상해 봐야 별 재미도 없을 것이다.

 

- "그건 부군의 취민가요?"
나카스기 씨는 담배를 피우면서 물었다. 

"아니, 아버님일지 몰라요. 어쩌면 돌아가신 어머님일지도 모르고."
나는 웃었다.
"하지만, 시어머니라면 좀 더 제대로 된 컬렉션이 됐을 거라는 생각도 들어요."
나는 시어머니가 가지고 있었던 소지품, 도구류 모두를 좋아했다. 가문인 나비가 모든 것에 들어 있고, 옻칠이 좋은 손으로 만든 책자며 경대, 그 외에도 자잘한 여인의 장신구. 

- "그도 그럴 것이, 진짜 대단한 건 히나사마예요..."
그것은 지금 이복형의 초등학생 딸을 위해 매년 3월 3일 히나마츠리 때 진열되고 있지만.
"3평 남짓 된 방 안을 가득 채워요, 다 진열하면..."
다이리비나의 얼굴이 아주 훌륭한데, 그것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현대인의 발상으로는 떠올릴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고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얼굴이 길고 슬픈 듯하며, 우아한 얼굴 생김이다.
얼마나 소중히 다뤘는지 벌레 먹은 흔적도 없고, 의상을 만든 비단도 느낌이 좋게 낡고 금색의 실이 바래 있었다. 금 마키에의 도구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걸릴 정도였다. 장롱에서 화로, 문갑까지 있었다.
 
- 하지만 아직 마음 놓을 수 없다는 경계의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제 내가 양의 탈을 쓰고 있던 것을 벗어던지고 "나는 적자인 고의 아내니까, 이것은 내가 가져야 합니다!"라며 정색을 하고 덤벼들지 모른다며 경계를 풀지 않는 눈치가 보인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고무인형이 됐든 셀룰로이드 인형이 됐든, '주세요'라고 했다가는 엄청난 공황 상태가 벌어질 것이 틀림없었다.
그랬다가는 즉시 미야사마까지 소집해서 친족회의를 열 것처럼 보였다. 그야 옷걸이 하나 나눠주지 않는 사람이니 오죽할까.

- 그러니 이 일족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비결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재물을 "어머 멋져라!" "역시 평범한 것들과는 다르네요" "틀림없이 이것만은 어디에서도 팔지 않을 거예요. 일반사람들은 손에 넣을 수 없지요"라며 무조건 치켜세워주고, 그래도 갖고 싶다는 내색은 눈곱만큼도 안 보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모조리 누나의 관리하에 맡기고 "누님 마음대로 하세요"라고 하면, 세상만사가 평화롭다. 누나는 재물관리를 위해 태어난 사람 같으니까.
하지만 나카스기 씨는 그런 것에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말하지 않는다.

- "이쪽이에요."
나카스기 씨의 등을 밀며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싸늘한 이 집에서도 특히 썰렁한 방으로, 너무 어두워 나는 찰칵 불을 켰다. 옛날식으로 빙수과자의 그릇처럼, 물결 모양의 유리로 된 전등갓 위에 달린 스위치를 비트는 것이었다.
"허허~!"라며 나카스기 씨는 놀란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나는 내가 예상했던 대로의 목소리를 나카스기 씨가 내준 것에 만족했다.

- "고이즈미 야쿠모가 사용했을 법한 것이군."
나카스기 씨는 완전히 마음을 빼앗긴 듯, 먼지를 불어 손에 들고 램프를 바라보았다.
"이것 좀 봐요!"
나는 나팔꽃 모양의 나팔이 달린 고풍스런 축음기를 발견하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했다.

 - 고동이 들릴 것만 같다. 건강하고 오만하고, 꼴사나운 벼락부자의 귀여운 고동이.
고는 내가 기쁜 듯이 눈을 감고 고가 하는 대로 내맡기고 있는 것이 기분 좋은지, 마치 나를 접는 고무공처럼 꼬옥 안았다가 풀었다가 했다.
그리고 목을 조이는 시늉을 하며 "스스스라고 말해라. 그럼 풀어줄 끼다"라고 말해, 우리는 웃고 말았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나의 사적인 시간은 모두 고에게 흡수되고 말았다. 나 자신의 존재조차 없어지고, 고의 사적인 생활의 일부분으로 나는 겨우 살아남았을 뿐이다,라고. 

- "도쿄의 여동생도 아이 덕분에 아버지한테 점수를 따는 것 같거든. 아버지, 동생네 애가 똑똑하다고 좋아하신다 아이가. 그런 걸 보니까 마음이 급해진다카이."
"나. 이제 아기 낳는 거야?"
"밖에서 낳아올 수는 없잖노."
큰일 났다. 나는 나카야 철공 사장의 점수를 따기 위해, 또 유산상속 분쟁에서 조금이나마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아이를 낳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른다. 

- 그것보다, 내가 갑자기 알게 된 것은 부부의 불쾌함이었다. 나는 남편이니 아내니 부부니 하는 말을 싫어해서 남자와 여자 또는 만담 콤비라는 말을 썼는데, 왜 싫어하는지 그 이유를 확실히 몰랐었다.
막연하게 그렇게 생각했던 것뿐. 그랬는데 이제 알았다. 고의 말을 들으면서 문득 깨달은 것은, 부부란 것은 불쾌함과 비천함이 증폭된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이나 고상함은 증폭되지 않는데.

- 부부 둘이서 득의의 미소를 짓고 둘이서 타인의 욕을 하며 둘이서 음모를 꾸민다. 그 속에는... 뭔가... 뭔가 대단히 음흉한 것이 있는 것 같다.
예컨대 비참함도, 부부라면 두 배가 된다.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떠났든 피난민이 됐든 거지가 됐든, 혼자라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데, 부부가 딱 달라붙어서 낙향한다는 건 괜히 더 슬프고 더 비참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것처럼 나는 고와 둘이서 은밀하게, 우리 부부가 이복형보다 사랑받고 있는 것 같다느니, 우리 집 아이가 여동생 부부의 아이보다 똑똑해서 할아버지는 우리 아이를 더 귀여워하는 것 같다느니, 그런 건 너무 비참해서 도저히 할 수 없다. 
눈물이 날 것 같다.
간신히 나은 감기마저 다시 걸릴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고에게 한다고 해서 마음을 알아주기나 할까?

- "나, 도쿄에 가기 싫어."
나는 작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뭐?"라는 고의 무서운 목소리.
"와 그렇게 반대만 하는 기고?"
"반대만 하는 거 아닌데. 아이가 생길지 어떨지도 모르는 일이고, 여기서 고랑 둘이 사는 게 좋으니까."
"하지만 도쿄 집이 훨씬 더 크다 아이가."
"그래도 여기가 더 좋아."
"어이, 난 파발꾼이 아니라서 도쿄하고 여기를 왔다 갔다 할 수는 없다. 자기만 여기 있으라고 할 수 없다꼬. 와 도쿄에 가는 게 싫은데?"

- 때 되면 밥도 짓고, 청소도 하고, 미카게 저택의 파티에도 가고. 파티에 가면 이 사람 저 사람의 농담에 웃기도 하고.
잘하고 있기 때문에 고도 불평하지 못한다. 하지만 뭔가가 다르다, 옛날과 다르다, 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어딘가 다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 마침내, 어느 날 밤, 술을 한잔하고 있을 때 "저번에 그 그림, 걸어도 된다"라고, 고는 농담처럼 허락했다.
"아니야, 됐어."
나는 정말 걸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게 보고 싶은 것도 아니니까, 됐어."
"그림은 어떻게 했어? 괜찮다, 찢거나 하지 않을게."
"나카스기 씨한테 맡겨놨어."
"아니, 언제? 그러고 보니 나카스기 씨하고 수상해!?"
나는 꺄아~ 소리도 내지 않고 "후후"라고 간신히 미소를 흘릴 뿐, 숨길 생각도 없고 고의 장단에 맞춰 농담할 기운도 없었다.
고는 당황스러운지 "자기, 요즘 삐쳤지? 오사카 맨션을 팔아버렸다고 화난 거지, 그렇지?" 하고 묻는다.
술에 취하면 나도 모르게 화를 내지만, 특별히 삐쳤거나 토라졌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가지고 있어 봤자 어차피 살지도 않을 건데... 팔기를 잘했지. 뭐."
"진짜? 진짜 화 안 났나?"
"화 안 났어."
"그래?"
그런 대화를 떠올리며 눈길을 택시로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말이 없었다. 고도 침묵.

- 옛날 같았으면, 고와 나는 새로운 토지로 여행 온 것을 둘 다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며, 무릎에 펼쳐놓은 고의 웃옷 아래에서 손장난을 하고 있을 텐데. 그러다 택시가 커브를 도는 순간을 이용해 고는 날렵하게 키스를 하거나 귓불을 깨물거나 했을 텐데.
옛날, 고와 있을 때도 가끔 침묵이 찾아오곤 했었다. 그래도 그것은 충실한 침묵으로, 혀가 어쩌다 휴식을 취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침묵의 책임을 내가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의 침묵이다.

- 호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얀색 일색, 하얀 산들에 둘러싸인 하얀 평야.
호수 전체가 얼어 있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광경을 보고 감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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