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스즈키 코지] 낙원

일루젼 2024. 6. 22.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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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스즈키 코지 / 김난주
출판 : 씨엔씨미디어 
출간 : 1997.09.20 


       

           

어린 시절 읽었던 책들을 조금씩 다시 읽어보고 있다.

 

스즈키 코지의 <낙원>도 그렇게 문득 떠오른 책인데, 개인적으로는 그를 <링>이 아닌 <낙원>의 작가로 기억한다. 당시에는 조금 지루하다고 생각했던 이 책이 왜 20년도 넘은 지금에 와서야 불현듯 떠올랐는지 모를 일이다. 처음에는 다른 책에서 접했던 소수민족, 원주민이라는 키워드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다 해도 그간 단 한 번도 떠오르지 않았던 책이 저자와 제목까지 선명하게 떠오른 건 의외였다. 

 

다시 읽은 <낙원>은 흥미로웠다. 어린 시절 가장 좋아했던 부분은 <1장 신화>였지만, 다시 읽은 지금은 각각의 장이 모두 마음에 든다. 기나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되풀이되며 이어지고 갈무리되는 인연들을 지켜보는 것은 정말 흥미로웠다. 누가 정확히 누구인가를 살피는 일은 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누구였어도, 혹은 누가 아니었어도 이어져오는 것에는 의미가 있다.

 

각 장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흥미롭고 강렬하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을 하나로 엮어주는 '붉은 사슴', 그 흐릿하면서도 피를 타고 이어져오는 세포의 기억은 얼마 전 읽었던 <해수의 아이>나 <고통에 관하여>와도 이어지며 마음을 뒤흔든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지나 내게까지 전해져 온 것들을, '이을 것인가' '끊을 것인가'는 사실 내게 달린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라는 지점을 지나 조금 더 의미가 생겼으면 하는 욕심만은 쉬이 내려놓아지지 않는다.   

 

레슬리가 고요한 밤 홀로 하고 있었던 체조 장면이 인상 깊었다. 뭐랄까... 만감이 교차했다고나 할까. 다시 읽기 전까지는 이런 장면이 있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처음 이 책을 읽을 때의 나는 몇십 년 뒤의 내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알고 있었을까.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니기에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어쩐지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기는 하다. 

 

곧 연꽃이 피는 시기가 온다. 

올해는 연밥을 건네주는 재미도 있었으면, 하고 생각이 튄다. 그러면서 <소녀행>이 떠오르고, 내 사랑 김대원 작가님은 평온히 잘 지내고 계실지 더 이상 활동은 하지 않으실지 등으로 상념이 흐르다가, 결국은 운심부지처까지 다녀오는 것이다. 

 

그러한, 나날이다. 

 


   

 
- 유사 이전, 고비 사막의 북쪽에서 알타이 산맥 기슭에 걸쳐 목축을 하며 각지를 전전하는 몽골계 종족이 있었다. 그 이름은 탕가타라고 하였다. 그들이 사막을 이동하는 까닭은 말과 소, 양 등의 먹이가 되는 풀과 물을 찾기 위함이었다. 
그들이 한 곳에 정착하여 밭을 일구는 일은 없었다. 목축이라고 해야 당시는 아직 동물들을 인간의 의지대로 다룰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으므로 동물의 무리를 쫓아다니며 함께 생활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런 생활을 위해서는 기동력이 절대요건이었다. 그들에게는 말을 능숙하게 타는 기술이 필요했다. 

- 투명한 호수는 그들의 앞길에 갑자기 나타났다가 긴 졸음에서 깨어날 무렵이면 어느 결에 사라지곤 하는 일이 많았다.
그렇게 사라져 버린 호수는 아무리 달려도 두 번 다시 발견되지 않았다. 설사 호수를 다시 발견했다 하더라도 지형에 따라 모습이 변해 있는 탓에 그것이 전에 본 호수라는 것을 아무도 깨닫지 못했다. 따라서 호수라기보다 그것은 물이 괸 웅덩이의 허망함을 닮았다. 

- 그들에게는 문자가 없었다. 그렇지만 언어가 있어서 말로 한 약속을 어기는 자는 그 때문에 죽음을 당해도 뭐라 불평할 수 없었다. 글자가 없는 대신 그들에게는 말이 신뢰의 잣대가 되었다.

- 열세 살이 되면 남자아이는 한 사람의 어른으로 인정받게 된다. 홀로 사냥을 하러 나가 맨 처음 사냥한 동물의 영혼을 자신만의 정령으로 가지고 돌아온다. 그리고 그 정령이 남자를 평생 지켜준다고 믿었다. 정령의 힘이 약해지면 남자는 어이없이 인생의 막을 내리고, 강하면 설령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매인다 해도 그 강한 힘이 생명의 영역으로 인도한다고 믿었다. 남자는 최초의 사냥감으로 그 일생이 결정되는 셈이었다. 따라서 열세 살이란 나이는 남자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전환기였다. 

- 적에게 약탈당한 여자들은 처음에는 살해된 남편과 아이들을 생각하며 한탄하고 슬퍼하지만, 몇 년이 지나면 깨끗이 잊고 새 부족들과의 생활에 익숙해져 얼굴 모양이 조금씩 다른 아이들을 낳고 기른다. 그러나 아주 드물게 죽음으로 헤어진 남편을 절대로 잊지 못하는 여자도 있었다.

- 전쟁은 이기느냐 지느냐 둘 중에 하나다. 지면 부족은 소멸하고 이기면 더욱 강대해져 다른 부족을 섬멸하고 사막을 석권한다.

- 보그도는 나무 막대기나 끝이 뾰족한 돌로 땅에다 짐승의 그림을 그렸다. 땅 위에 그린 말이나 소의 그림은 지금이라도 당장 움직일 것처럼 생동감이 있었다. 특히 동굴 내부에 그린 그림은 정령이 깃들어 있다고 여겨져 부족들 누구 하나 지우려 하지 않았다. 
동굴을 밝히고 있는 횃불에 비친 붉은 말의 그림은 볼 때마다 그 표정이 달리 보여, 사람들이 잠든 밤이면 벽에서 살며시 빠져나와 호숫가에서 풀을 한껏 뜯어먹고 온다는 소문을 낳았을 정도이다. 보그도는 그 특이한 능력으로 부족의 장로에게 주목받게 되었다.

- 열세 살이 되자 보그도는 지금까지 땅에다 그리던 그림을 고스란히 돌에 새길 수는 없을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흙에 그린 그림은 비에 젖거나 바람에 날려서 처음 형태를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신의 내부에서 솟구치는 충동을 영원히 변하지 않는 형태로 남기고 싶다는 욕망... 
웅대한 바위에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그림을 새기고 싶다는 욕구와 인간을 그리고 싶다는 욕구가 동시에 그의 가슴속에 끓어올랐다. 보그도는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 초상을 그릴 수만 있다면, 그 마음 또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 [절대로 인간의 모습을 그려서는 안 된다.]
왜 인간을 그리면 안 되는지 그 이유를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 드물었기에 부족민들은 그런 법이 있다는 것조차 거의 잊고 있었다. 
보그도는 열세 살이 되자 인간을 그리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그리고 어째서 인간을 그리면 안 되는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 그 돌은 큰 바위 뒤에 가려져 있어 눈여겨보지 않으면 쉽사리 눈에 띄지 않을 것 같았다. 보그도는 자신의 손길로 파야우의 모습으로 변할 돌 아래에 서서 바위의 전면을 지그시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하여 그 바위에 파야우의 몸을 겹쳐 보았다. 보그도의 마음속에서 파야우는 갖가지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 보그도는 반쯤 뜬 눈으로 지긋이 파야우와 돌을 견주어보다가 파야우의 상이 가장 아름답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돌 위에 고정되었을 때 눈을 번쩍 뜨고 날카로운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가 골짜기로 메아리치자 보그도는 단단한 광석으로 만든 마제석기 끝으로 돌을 깨며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 보그도는 사흘 낮과 밤을 쉬지 않고 돌을 깼다. 그리고 새겨진 윤곽에 오커(Ocher)라고 하는 빨간색의 광물성 안료를 흘려 넣어 드디어 실물과 혼동할 정도의 파야우 상을 완성하였다. 보그도는 여러 각도에서 이 조각상을 보고 그 완벽함에 감탄하였다. 
피로함도 잊고 그는 한참이나 돌상 앞에 망연하게 서서 태양의 높이에 따라 표정이 바뀌는 파야우에게 말을 걸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그는 조심스럽게 돌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조각된 형상의 파야우를 살며시 만져보다가 마침내 양팔을 벌려 꼭 껴안았다. 보그도는 잠시 부족의 법을 어긴 죄의식을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긴 부족의 법, 마음에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보그도는 지금까지 그가 만든 어떤 작품보다 훌륭한 걸작을 골짜기에 남겨두고 두려움과 만족감을 동시에 안고 귀로에 올랐다. 
보그도는 그때까지 법을 어김으로 인해 그와 탕가타 족에 내려질 벌의 대가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 모르는 일이 있으면 사람들은 모두 장로 타프네를 찾았다. 타프네는 무당으로, 부족 내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탕가타 족은 타프네의 몸을 통해서만 조상의 영과 마음을 나눌 수 있었다. 타프네만이 세계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다. ... 보그도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 "법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 지금 내가 한 말을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로 해서는 안돼. 약속이다. 만약 어기면..."
"약속하겠습니다. 절대로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보그도와 타프네는 눈과 눈으로 약속하였다.
"새겨 들어라, 사람의 그림을 그리면 그 사람을 잃게 돼."
보그도는 눈을 부릅뜨고 숨을 들이 삼켰다.

- "그 사람이 죽게 되든지, 아니면 살아 있어도 헤어져 영원히 만나지 못하든지... 그 어느 쪽이란 말이다."
보그도의 마음속에 심한 동요가 일었다. 타프네에게 눈치 채이지 않으려고 말꼬리를 돌리며 그 이유를 물으려 했는데 어처구니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타프네에게 오히려 따지고 들었다.
"왜, 어째서, 그런 법이!"
"몇 번을 얘기해야 알겠니, 너는 네가 이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느냐? 그와 똑같은 것이다."

- "그렇다면 그 내용을 비밀에 부쳐야 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생각해 보거라. 이 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우리 주변은 온통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의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가득 차고 말 것이다. 누구에게나 하나나 둘 쯤 미워하는 인간이 있는 법이다. 그렇게 되면 부족은 어떻게 되겠느냐, 자멸하는 길밖에 남지 않는다." 

- "네가 그리는 그림에는 정령이 깃들어 있어. 그 정령의 힘으로 조상의 영혼을 지키는 것이다. 앞으로는 돌에 그리거라. 죽은 자가 잠자는 대지에 그 돌을 세워 영혼을 지키는 것이다."
"예, 기꺼이."

보그도는 파야우를 생각하느라 타프네의 말을 거의 듣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짤막하게 얼른 대답한 후 장로의 막사를 나왔다. 바깥에는 이른 봄의 태양이 비치고 있었다. 갑자기 햇빛 속으로 나온 탓인지 보그도는 앞이 어질어질하여 넘어질 뻔하였다.

- 좋다!
보그도는 가슴속으로 외쳤다.
... 나는 내 법을 만들겠다. 부족의 법이 어쨌다는 건가. 이유 따위는 필요 없다. 취하고 싶은 여자의 모습을 돌에 새기면 그 여자를 얻게 된다. 그래, 그것이 내가 만든 법이다. 나는 이 법에 따라 살겠다!

- 여름이 되자 보그도는 정령을 찾으러 떠나는 여행 준비를 서둘렀다. 신중하게 말을 선택한 보그도는 말을 탄 채로 달리면서 나무에 걸린 표적을 화살로 맞추는 사냥 연습에 정진하였다. 
동물을 표적으로 삼을 수는 없었다. 맨 처음 잡은 동물의 종류에 따라 활을 쏜 자의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예외는 없었다. 화살이 빗나가 뜻하지 않은 짐승을 쏘기라도 하면 평생 그 짐승의 정령을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 

- 강한 정령의 힘을 얻으면 반드시 파야우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다! 끓어오르는 정열의 중심에는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그가 노리는 것은 지금까지 아무도 쏘아 맞춘 적이 없다는 전설의 붉은 사슴이었다. 그 붉은 사슴을 쫓다 목숨을 잃은 자의 수는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 모든 짐승들 중에서 가장 강한 정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어지는 붉은 사슴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아니, 지금 살아 있는 탕가타 부족민들 중 실제로 붉은 사슴을 목격한 자는 아무도 없다. 유일한 목격자인 코리코는 3년 전에 덧없이 인생의 막을 내렸다.


- 코리코는 열일곱 살이었다. 그는 열세 살 당시 부족에서 제일가는 용맹한 자였고 장래 족장이 될 그릇이라고 여겨지고 있었다. 코리코는 부족민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여행을 떠나 모완나 산기슭에서 우연히 전설의 붉은 사슴을 발견하고 뒤를 쫓았다. 그러나 그 후 붉은 사슴은 두 번 다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고 준비해 온 식량까지 바닥이 나자 그는 극심한 굶주림에 허덕였다. 얄궂게도 사방에는 사냥감이 무수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들토끼는 조롱하듯 코리코 주위를 깡충깡충 맴돌았다. 그러나 그런 짐승을 잡아먹으면 그 시점에서 여행은 끝이 나고 연약한 들토끼의 영이 그의 정령이 되고 만다. 코리코는 격렬한 내면의 갈등을 겪으면서 집요하게 붉은 사슴을 찾아 헤맸다. 그런데 심한 배고픔 때문에 빨간 눈의 토끼를 붉은 사슴으로 착각하였고, 사살하고 말았다.
그는 토끼 고기를 뜯어먹으면서도 자신이 붉은 사슴을 잡았다고 생각하였다. 뒤늦게 토끼라는 것을 알았을 때 코리코의 낙담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부족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을 때, 아무도 그가 코리코라는 것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그의 모습은 변해 있었다. 그로부터 4년 후 그는 열병으로 허망하게 죽고 말았다. 토끼의 정령은 그를 약자로 바꾸어놓고 만 것이다.

- 여행이 인생을 결정한다기보다 그 인간의 인생에 대한 자세가 여행의 형태를 결정한다. 최고의 정령을 찾아 목숨을 잃는 자도 있거니와 처음부터 양이나 소의 정령 정도로 타협하는 자도 있다. 큰 목표를 지니고 환각에 시달리면서까지 붉은 사슴을 찾아 헤매 다녔으니, 코리코의 삶은 남자답고 용맹한 자의 이름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자신의 육체에 지고 말았다. 

- ... 나는 코리코와는 다르다.
보그도는 전설의 붉은 사슴이 산다는 서북 방향으로 말을 몰면서 스스로에게 맹세하였다. 설령 굶어 죽는 일이 있어도 ... 

- 손이 아프다고 도중에 쉬면 그때까지의 고생이 물거품이 된다. 아무튼 마찰로 인한 열이 불꽃으로 변할 때까지 쉬지 않고 비비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간신히 불꽃이 일자 보도는 모닥불 속에 큼직한 돌을 몇 개 던져 넣었다. 그리고 막 파놓은 구멍에 빨갛게 달군 돌을 나란하게 깔아놓고 젖은 풀잎과 흙을 덮은 후 그 위에 웅크리고 사슴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연기가 나면 안 되니까 이런 식으로 온기를 취할 수밖에 없다. 이 또한 장로 타프네한테 배운 방법이었다. 
 
- 며칠 전, 북의 부족의 젊은 족장 샤라브는 무당 한 명과 십여 명의 부하를 데리고 세렌게 강의 지류를 지나가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우연히 7년 전에 보그도가 그려놓은 파야우의 조각을 본 것이다. 말을 타고 강가를 거슬러 올라가던 샤라브는 돌에 새긴 초상인 줄도 모르고 말 위에서 파야우에게 말을 걸었다. 파야우는 대답은커녕 손끝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샤라브는 말에서 내려 돌 앞에 서서야 비로소 그것이 그림인 줄 알았다. 그가 놀란 것은 그 그림의 완벽함 때문이 아니고 거기에 그려져 있는 여인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샤라브는 파야우의 볼에 살며시 손을 대면서 감탄하였다. 

 

- "이건 대체 어느 부족의 여인이지?"
샤라브는 무당에게 물었다. 그림이란 현실 그대로의 모습을 옮기는 것인 이상 이 그림에는 모델이 있을 것이었다. 무당은 파야우가 입고 있는 가죽옷과 머리 장식의 특징 등을 주의 깊게 살피고는 대답하였다.
"탕가타의 여자 같습니다."
"탕가타는 강한가?"
무당은 새카맣게 탄 얼굴에 눈만 반짝거렸다.

- "이 여인을 빼앗겠다."
샤라브의 목소리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 또한 강인한 의지에 강건한 육체의 소유자였다.
여인을 빼앗는다는 것은 즉, 그 부족 전체를 멸망시키는 일이다.
"탕가타는 만만치가 않습니다."
"내게는 마지막 싸움이다. 이 여자를 새로운 땅으로 데리고 가겠다."

- 새로운 땅. 북의 부족에게는 예로부터 전해 내려져 오는 이야기가 있었다.
'딘슬 산의 눈이 일 년 내내 녹지 않으면, 그 이듬해 바닷속에서 새로운 땅으로 이르는 길이 모습을 나타낸다. 태양이 가장 높은 계절에 그곳을 건너라. 그러면 물과 초원이 풍성한 비옥한 땅에 이를 수 있다.’
이때를 놓치면 새로운 땅으로 통하는 길은 다시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만다. 작년 일 년 동안 딘슬 산의 눈은 녹지 않았다. 태양이 가장 높은 계절, 여름은 앞으로 백 일이면 다가온다. 새로운 땅으로 건너는 일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북의 부족에 한 명도 없었다. 

- 기회는 지금뿐이다. 물론 누구 한 명 새로운 땅을 실제로 본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 땅의 풍요로움과 밝은 하늘색은 마치 두 눈으로 보기라도 한 것처럼 북의 부족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법이 어째서 있느냐고 물어봐야 소용이 없는 것처럼, 어째서 그런 전설이 있는지 샤라브나 무당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든 새로운 땅으로 건너가고 싶다는 충동만은 강렬했다.

- "점을 쳐 봐. 내가 이길 것인지 질 것인지."
무당은 짐승의 뼈를 가랑가랑 흔들어 미래의 한 조각을 들여다보았다.
"지지는 않습니다."
무당은 정직하게 대답하였다. 샤라브는 그 대답에 만족하고 부하들 쪽을 돌아보았다. 설사 점괘가 진다고 나왔더라도 샤라브의 결의는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는 일단 하겠다고 말을 꺼낸 일에 대해서는 운명을 거역하면서라도 실행에 옮기는 강한 의지가 있었다. 무당은 그런 샤라브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전쟁을 꺼리면서도 정직하게 예언하는 수밖에 없었다. 

- 날마다 태양을 향하여 앞다리를 쳐들고 하늘을 달리는 사슴의 그림을 새기면서 보도는 사슴에 파야우의 모습을 중첩시켰다. 두 번 다시 인간을 그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온 정성을 쏟아 사슴을 그리는 이외에 파야우에게 다가가는 수단은 없었다. 그가 그리는 사슴은 하나같이 태양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왜, 그런 모양을 그리는지는 스스로도 몰랐다.
하늘을 나는 사슴이 이 세상에 있을 리가 없다는 것 정도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 보그도는 마음을 결정했다. 타프네가 말하는 대로였다.
... 나는 스스로 움직여 인생을 개척해 왔다. 싸워서 운명을 손에 거머쥐었다. 운에 맡기고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기보다는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거대한 사냥감을 좇는 편이 낫다.
"알겠습니다. 남쪽으로 향하겠습니다."

- 보그도는 타프네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타프네는 지금 당장이라도 꺼질 듯한 생명을 붙잡고 남쪽으로 가는 길과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보그도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북두칠성을 비롯한 별자리를 읽는 법,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태양의 고도가 높아지고 남쪽의 밤하늘에는 남십자성이 보인다는 것, 계절과 관계하여 현재 자신이 있는 곳을 대충 알 수 있는 방법...

 

- "너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 그것은 태양이며 별이며 달이다."
타프네의 몸은 이 말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 월리바는 손가락으로 남동 방향을 가리켰다. 샤라브는 그 이유를 물었다.
"바람이 노래하고 있는 걸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윌리바는 천진난만함을 잃지 않았다. 그녀의 귀에는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한 줄기 바람 소리가 노래로 들린 것이다.

- 여기에 이르러서야 북의 부족들은 전설이 옳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 살아 있음이 고통스럽고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궁지를 벗어날 때마다 파야우는 보그도와 그에게 깃들어 있는 붉은 사슴의 정령에게 감사하기를 잊지 않았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파야우는 보그도가 지켜주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아직 모른다... 먼 훗날에 그들의 재회를 돕는 것은 이 붉은 사슴의 정령이며, 윌리바가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소리에 대한 예민한 감각 때문이라는 것을... 그날이 언제 올 지는 알 수 없지만 파야우는 죽는 날까지 보고도를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 족장의 아내라는 권한으로 파야우는 그곳을 긴 여행의 종착점으로 정했다. 참으로 얄궂은 일이었다. 수많은 세월을 흘려보내며 무수한 사람들의 시체를 묻고 그 끝에 간신히 도착한 곳이 출발점과 별다르지 않은 땅이라니...


- 월리바가 낳을 아이에게도 보그도의 강한 의지를 전달하고자 파야우는 딸에게 붉은 사슴의 그림을 매일 돌에 새기도록 명하였다. 대대로 이 독특한 사슴의 문양을 전하고자 하는 어머니의 의지가 월리바를 움직였는지 그녀는 매일 새나 작은 동물의 우는 소리를 흉내 내거나 노래하며 마음을 다하여 그림을 그렸다. 
붉은 사슴의 그림을 새기는 그녀의 입에서는 노래가 끊이지 않았다. 윌리바는 대지를 덮고 있는 사방의 공기에 아름다운 음이 충만해 있다고 느꼈다. 자신의 몸에 흐르는 피가 무언가를 추구하고 있다면 그 감각을 키워 추구하는 대상을 향하여 다가가는 수밖에 없다. 

- 파야우는 윌리바와 함께 언덕에 서서 서쪽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우는 저녁 해가 보그도가 있는 대지에서는 아침 해가 되기에 파야우는 태양을 향하여 말을 걸었다. 그 말을 보그도에게 전하기에는 태양이 어울린다. 이윽고 해가 지면 월리바는 대지에 그림을 그리던 손길을 멈추고 어머니와 함께 막사로 돌아갔다. 이렇게 두 사람의 하루는 끝나갔다.

- 바다가 가까워졌음을 알았다. 그는 사방이 확 트여 전망이 좋은 언덕 위로 말을 몰았다. 그리고 동쪽의 지평선으로 시선을 옮기자 희뿌옇게 빛을 반사하는 평면이 있었다. 수평선이었다. 보그도는 비탈을 달려 내려왔다. 일단 시야에서 가려졌다가 다시 나타난 바다는 한층 더 짙은 색이었고, 파도 소리는 더 멀리까지 울렸다. 드디어 남쪽 바다로 온 것이다. 

- 사흘이 지났다. 바다에는 조그만 섬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북쪽의 바다와는 달리 투명한 바다는 그 밝음 때문인지 보는 자의 기분을 낙관에 젖게 하는 듯했다. 북의 회랑은 튀어나온 곳의 끝에서 바다 속으로 뻗어 있었는데 여기에는 그럴 법한 곳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해안선은 매끈하고 시원하게 남쪽으로 뻗어 있었다. 해변의 아름다움과 철썩이는 하얀 파도가 다른 때 같으면 엄습해 오고도 남았을 절망감을 견제하고 있다. 

- 열흘이 지났다. 계속되는 풍경은 이전과 별 다름이 없었다. 보그도는 해안선이 남쪽으로 뻗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무심결에 바라본 저녁 해가 육지와 바다의 경계로 기울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도 보그도는 해안선을 따라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스무날이 지났다. 저녁 해는 바다 한가운데로 지고 아침 해는 육지 쪽에서 솟아올랐다. 
그 시점에 이르러서야 보그도는 말을 멈추게 하고 대체 이 현상이 무얼 의미하는지를 곰곰이 생각했다. 이유는 한 가지밖에 유추되지 않는다. 남쪽으로 향하고 있다고만 생각했던 해안선은 어느 사이에 방향을 서쪽으로 바꾸고, 마침내 다시 북쪽을 향하기 시작한 것이다. 북... 그렇다, 그곳은 보그도가 길을 떠났던 방향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남쪽의 끝인 것이다.  

- 그러나 보그도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타프네가 한 번이라도 남쪽 회랑이란 말을 했던가. 아니다. 그는 다만 남쪽으로 가면 어떤 방법이 생길 것이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그러나 보그도는 어떻게 해야 할지 선뜻 해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도무지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어떻게 하면 파야우를 되찾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러고 있는 사이에 문득 회랑이 바다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 ...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아까부터 똑같은 질문만 되풀이하고 있다.

- 왜, 미처 그걸 몰랐을까.
그는 무릎을 치며 모래를 움켜쥐고 껄껄 웃었다.
... 바다는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자체가 거대한 통로였던 것이다.

- 보그도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바다를 관찰하다가 거기에 한 가지 법칙이 있는 것을 간파하였다. 그렇게 한 곳에서 꼼짝 않고 관찰하고 있자니 바다는 파도보다 훨씬 느긋한 리듬으로 밀려왔다가 다시 밀려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타프네의 말을 떠올렸다.
'바다는 천천히 호흡하고 있다.'
타프네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그 이유는 설명해 주지 않았다. 대지와 달의 인력 때문... 태양과 별들의 위치 때문... 
분명하게 보이는 사상(事象)의 이면에 있는 인과관계를 보그도도 타프네도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 보그도는 이 배가 자신을 파야우에게로 날라다 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바닷물의 흐름이 바뀌어 목적하는 방향의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해도 그는 자신의 힘으로 쉬지 않고 노를 저을 각오였다.

- 보그도는 오로지 파야우가 있는 동쪽 방향만을 응시하였다. 때문에 등 뒤에서 육지가 그만 사라져 버리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보그도는 아직 지구가 둥그렇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어느 틈엔가 사방이 끝없는 바다로 둘러싸인 것을 보면서도 그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 나는 붉은 사슴의 정령을 거머쥔 용맹한 자다.
그 자신감이 보그도를 파야우가 있는 곳으로 한 발 또 한 발 다가가게 하였다. 보그도는 넓적한 나무 조각을 바닷물에 꽂아 뱃머리를 동쪽으로 유지하였다.
동쪽 수평선에서 보그도에게 손짓하듯 아침 해가 막 떠오르고 있었다. 보그도 자신이 전설의 붉은 사슴이 되어가고 있었다.
 

- <1장 신화>

 




- 선사 시대가 끝나고 역사 시대가 시작되자 세계는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도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보통 사람들이 믿기까지는 몇천 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16세기가 되자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을 제창했고 17세기에는 케플러가 이 설을 바탕으로 항성 운행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타원 궤도에 따라 돌고 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러나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그 훨씬 이전부터 일부 학식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었다. 

- 15세기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토스카넬리는 지구 구체설을 바탕으로 세계 지도를 작성하였고, 독일의 지리학자 베이험은 지구의를 만들었다. 그러나 토스카넬리의 세계 지도는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 세계 지도에 그려져 있는 대륙은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뿐이어서 신대륙은 어디에도 위치하고 있지 않았다.
그들에게 세계란 자신들의 지식이 미치는 범위 내의 것이었고 그 바깥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토스카넬리는 바닷길을 따라 서쪽으로만 가면 인도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친구인 토스카넬리의 설을 믿은 콜럼버스는 1492년에 파로스 항을 떠나 대서양을 횡단, 서쪽으로 항진하였다. 그리고 산살바도르 섬에 도착했고 그는 그곳이 인도의 일부라고만 믿었다. 당시의 세계 지도에는 신대륙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그곳을 인도라고 믿었다. 

-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멀고 긴 항해를 통해 크고 작은 수많은 땅을 발견하였다. 발견이란 단어를 사용하면 발견된 땅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던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그곳에도 독자적인 문화를 지닌 원주민이 살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표현은 독선적인 시각이다. 유럽의 범선은 세계 각지를 항해하며 중요한 지역에는 총독부를 설치하고 그곳을 무역상의 근거지로 사용하였다.

- 과연 폴리네시아 인은 어디에서 왔을까... 광활한 바다에 떠 있는 수많은 산호초와 화산섬에는 같은 문화를 지닌 한 민족이 살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공통된 조상의 후예가 아닐까? 이들이 섬에서 독자적으로 진화한 인간일 수는 없다.

- 일부에는 이런 설이 있다. 옛날 태평양에는 큰 대륙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문화가 발달한 민족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자연의 재해로 대륙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그리고 가라앉은 대륙의 산맥이었던 부분이 섬으로 남게 되었고 그때 살아남은 사람들이 눌러살게 되었다.
고도의 문명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 햇살이 넘치고 바나나와 코코넛, 빵나무가 번성하는 열대의 고도에서는 문명을 유지할 필요가 전혀 없어서 점차 잊혀져 갔다... 그러나 태평양 그 어디를 찾아보아도 그 같은 설을 뒷받침할 대륙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태평양에 가라앉은 대륙은 과연 전설에 불과한 것일까... 


- 태평양에 대륙이 없었다고 하면 폴리네시아 인은 어딘가 다른 대륙에서 바다를 건너 이주해 왔다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그 장소에 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남아프리카 인디오가 조상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거니와 조상이 유대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몽골 고원에서 살았던 어떤 부족이 남하하여 중국의 남해안에서 대항해를 떠났고 필리핀을 거쳐 멜라네시아 섬을 끼고 동진하다가 피지에서 통가, 사모아에 도착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 이 섬의 주민은 물론 폴리네시아 인이다. 그러나 타로파 섬에는 독자적인 문화가 있어서 신화도 다른 섬들과는 조금 달랐다. 폴리네시아 인 공통의 신에서 분리되어 나온 것도 아니고 새로운 세계로 건너간 그 시대의 신이 순수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것도 아닌 독자적인 신앙과 문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화산의 끝자락은 깊게 파인 골짜기를 이루고 있고, 그곳을 흐르는 강은 동쪽 만을 통하여 바다로 떨어진다. 바다 쪽에서 보면 골짜기는 짙은 녹음에 덮여 거뭇거뭇 있어서 고대의 신을 모시기에 적합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이런 곳에서라면 신도 원래의 모습을 바꾸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 동쪽 바다, 하늘과 맞닿은 부분에서 파르스름한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서쪽 수평선으로 삼켜진 태양이 밤새 새카만 괴물의 내장을 빠져나와 지금 얼굴을 내밀려하고 있다. 
이른 아침의 후미진 바다. 파도가 일지 않는 북동쪽에서 보트는 움직임을 멈췄다.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면 급조한 돛대에 펼쳐진 돛 뒤에 숨어 있는 것일까.
잠잠하던 바람이 다시 불어와 지칠 대로 지친 듯 축 늘어져 있던 돛이 펄럭펄럭 바람을 머금고 부풀었다. 부드러운 바람이었다. 어슴푸레한 여명, 보트는 바람을 받아 좌우로 흔들리면서 천천히 후미진 바다로 들어오고 있었다. 18세기도 어언 끝나가는 5월의 일이었다. 
 
- 라이아는 소리도 없이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한밤중에 초사흘달이 떠오르고 있다.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몸에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 않았다. 라이아는 허리께까지 바닷물에 잠겨 밤하늘을 올려다보다 잔잔한 수면으로 눈길을 떨구었다. 수면에 반사되는 달그림자가 마치 물고기를 잡을 때 사용하는 낚시 바늘을 닮았다. 발바닥에 닿는 조개의 감촉을 느끼고 라이아는 그것을 밟지 않도록 두 걸음 먼바다 쪽으로 다가갔다.
라이아는 막 열여덟 살이 되었다. 여기에 있는 열한 명의 남녀는 모두 그녀처럼 젊고 아름다웠다. 연장자인 하우가 해안에 서서 그들을 보고 있었다... 
라이아는 그 시선을 느꼈지만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혹독한 수업도 오늘로써 끝난다. 한시라도 빨리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춤을 추고 싶었다. 아니, 그보다 우선 언니의 남편인 위모에게 안기고 싶었다. 

- 라이아는 손을 들어 머리카락 사이에 티아레 꽃이 꽂혀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어두운 바다, 그리고 그녀의 검은 머리칼에 꽂힌 일곱 송이 하얀 꽃만 초사흘 달의 희미한 빛을 받고 있다. 꽃은 매혹적인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라이아가 몸에 두르고 있는 것이란 이 꽃뿐이다. 알몸인 라이아는 바다의 흐름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 그렇게 바다에 몸을 맡긴 채 라이아는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달이 화산 뒤로 숨고 희미한 별빛이 파도에 흔들렸는가 싶은데 수평선에서 뽀얗게 밝은 빛이 떠올랐다. 시간이 아주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날이 밝고 해가 떠오르면 하우 앞에서 춤을 춘다. 지금까지의 성과를 인정받으면, 명예로운 무희로서 섬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지위에 올라갈 수 있다.

- 몸속에서 무언가가 변해간다. 썰물이 빠져나간 탓에 허리까지 오던 수위가 무릎까지 내려와 있었다. 수평선 바로 위에 떠있는 태양은 방사 상으로 빛을 발하면서 둥그런 불덩어리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 라이아와 10명의 젊은이들은 도톰하게 봉분된 모래 무덤을 둘러싸고 앉아 모래를 파내고 그 속에 덮어놓았던 바나나 잎을 들추어냈다. 잎사귀를 한 겹 한 겹 들출 때마다 맛있는 향내를 머금은 뜨거운 증기가 피어올랐다.
모래 무덤 속에는 몇 시간 전에 신에게 바친 어린 돼지가 먹기 좋을 정도로 부드럽게 쪄져 있었다. 젊은이들은 손바닥에 바나나 잎을 놓고 그 위에 돼지고기를 얹은 다음 하우의 신호를 기다렸다. 보일 듯 말 듯 미소 지으며 하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은 일제히 먹기 시작했다. 모두 꼬박 하루를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것이다. 

- 처음 그들은 느릿느릿한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이곳에서 자연의 리듬이란 물결치는 바닷가의 파도 소리뿐이다. 라이아는 좀 더 격렬하게 춤추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훨씬 더 세게 허리를 흔들고 대지를 있는 힘껏 밟고 싶었다.
젊은이들의 마음이 하나가 될 즈음에 하우는 큰 북을 두드리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천천히... 그러다 점차 빠르게. 하우는 무희인 그들의 본능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능숙하게 11명의 남녀를 열광의 도가니로 몰고 갈 수 있었다.

- 라이아는 춤의 여신이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춤추며 내려와 그녀의 가슴속으로 들어가 몸의 내부에서 간질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없는 기쁨에 압도되어 정신없이 춤을 추던 그녀는 순간 머리 속이 하얗게 되었다.
 
- 이런 종류의 공포를 느끼기는 처음이었다. 자신이 지금 서 있는 곳의 지반이 갑자기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감각. 바다는 하늘의 색을 투영하고 있지 않았다. 이른 아침의 파란 하늘과는 철저하게 어울리지 않았다. 바다는 누렇게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애드 챠닝은 몇 번이나 눈을 비비면서 이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는 다리를 부들부들 떨면서 선실로 내려가 비명을 질렀다. 

- 태양은 한층 높아졌고 하늘색은 더욱더 투명했다. 그러나 온 바다로 퍼진 누런 색은 오렌지 껍질을 조려놓은 듯 불투명한 색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바다 밑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기포가 해면에서 터지고, 깊은 바다의 가스를 공중으로 날리고 있는 광경이 무시무시하였다. 마티는 소름이 끼쳤다. 두 사람은 뭐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데크에 우뚝 선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마티는 지금 보고 있는 바다의 색에서 그때 발바닥으로 느껴지던 감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바닷속 모래는 옅은 갈색이었고, 그 때문에 수심이 얕은 바다는 온통 노릇노릇한 색을 띠고 있었다. 수심은 무릎 정도였다. 다리를 들었다가 내렸다 할 때마다 물이 탁해지면서 그의 발걸음 뒤로 행적을 또렷이 남겼다. 
그때 보았던 바다색보다도 발을 옮길 때마다 느껴졌던 발바닥의 감각이 지금의 기분과 비슷했던 것이다. 모래는 어쩐지 끈적끈적한 감촉이었고 빨리 발을 빼지 않으면 하염없이 가라앉고 말 것처럼 막막했었다.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기반이 위험하다'는 불길함이 땅속에서 꿈틀꿈틀 스며 나오고 있다. 
모래라기보다는 미생물군 속에 다리가 빠져 있다는 불안감. 언제 자신의 발이 그들에게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 그 공포감이 견딜 수 없어 마티는 얕은 수심에도 불구하고 수영을 하였다. 

- 그렇게 간신히 배로 돌아오자 마티는 지금까지의 일을 아버지에게 전부 말했다. 아버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너, 정말 거기를 걸었단 말이냐"라며 경악하였다.
그 부근은 맹독을 지닌 바다뱀의 소굴이라서 한 발짝 들여놓기만 하면 단박에 물린다고 한다. 그러니까 마티의 직감은 옳았던 것이다. 본능적인 불안감이 생명의 위기를 경고했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마티는 누런 바다를 바라보면서 생각하였다. 이번 경우에는 어떤 위험이 우리들에게 닥쳐오고 있는지 상상도 할 수 없다. 도무지 그때에 비교할 바가 못된다. ... 이 불길함. 데크가 미끈미끈하게 끝없이 가라앉는 듯한 감각.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생물이 배의 밑바닥을 무수히 배회하면서 핥고 있다... 우리들이 있을 수 있는 장소가 없어져가고 있다.

- 모선이 난파한다면 보트를 타고 표류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보트는 전부 고래 기름통을 싣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 떠 있다! 만약 그 보트마저 가라앉고 만다면, 정작 일이 닥쳤을 때 무엇에 의지하면 좋단 말인가.

- 타일러는 윗도리를 벗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존스는 보았다. 근육이 불끈불끈한 남자가 누렇게 물든 바다로 머리를 처박고 뛰어드는 모습을, 메인 마스트를 꽉 잡은 자세로 보았던 것이다. 바다는 밤의 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지만 낮에 본 색은 강렬한 인상으로 존스의 이미지 속에 파고들어가 있었다. 이런 폭풍우 속을, 더구나 신의 분노를 보는 듯한 바다 위로 태연하게 몸을 던질 수 있는 용기를... 존스는 아직 모른다.
타일러는 금방 보트까지 헤엄쳐 보트의 방향을 파도의 방향에 맞추어 틀면서 250파운드(약 113킬로그램)는 족히 될 기름통을 하나 하나 바다로 내던지고 있었다. 존스는 그 광경에 눈을 번쩍 떴다. 바람에 날려가지 않으려 애쓰며 메인 마스트에 매달려 있을 뿐인 자신과는 힘의 차이가 너무도 분명하여 황홀감을 동반한 현기증마저 느꼈다. 말이 없고 사귀기 힘들었던 타일러의 진정한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그때까지 존스는 타일러와 별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자란 환경이 너무 다른 데다 다른 선원들이 수군덕거리듯 정체를 알 수 없다는 나쁜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타일러가 영국 해군에서 탈영하여 이런 포경선을 타게 되었는지. 소문은 그에 관한 것이었다. 

- 그는 지금, 무엇 때문에 바다와 싸우고 있는가. 자기 혼자 살아나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존스는 그런 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었다.

- 보트 두 척에 분승한 스물세 명의 남자들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공통의 목적이 있었다. 하나의 집단이 어떤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움직이게 되자 그들 개개의 본능에서 생겨난 행동이 체계적인 일관성을 갖게 되었다. 즉 '규칙'이 생긴 것이다. 
상황이 가혹한 만큼 규칙은 상당한 구속력을 지닌다. 그것은 비단 스물세 명의 남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인류 자체가 '살아남는다'는 목적을 가지고 앞으로 돌진하는 거대한 집단인 것이다. 
구태여 '규칙'이란 표현을 사용하여 '법'이란 말을 피한 것은 법에는 명문화된 것이라는 인상과 무기질적인 울림이 있기 때문이다.

- 규칙이 본능의 분출을 저지하기 위해 존재한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반대로 불분명한 형태로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는 생에의 충동과 합치된, 수많은 인간들의 암묵적인 합의로 파악하면 어떨까. 바꾸어 말하면 활기차게 살아남기 위한 좀 더 근원적인 규칙이 수천 년 역사의 흐름과 함께 변화하고 제도화된 것이 법인 셈이다.

- 존스는 등줄기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혹 타일러가 미쳐버린 것은 아닐까... 타일러가 취한 행동은 공격에 대한 방어였다. 그러나 남자의 목을 꼭 껴안고 그 귓전에 입을 대고 뭐라 속삭인 행위는 뭐라 말할 수 없이 불가해한 인상을 주었다.
굶주림과 갈증과 착란... 그리고 그 직후에 타일러가 보여준 광적인 행동... 그러나 그것은 신기하게도 혼란에 빠져들어가고 있던 보트 위의 조그만 사회에 일시적인 안정감을 부여하였다.

- 이튿날 날이 밝고 보니 그 두 인간의 모습은 보트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모두들 복잡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머릿수가 줄어 포도주의 할당량이 많아졌다는 순간의 기쁨과 언제 자신도 죽음에의 유혹에 휘말릴지 모른다는 절망감.
 
- 아침에 눈을 뜨고 보니 지금까지의 상황이 완전히 변해 있다... 그 연속이 얼마나 사람을 불안감에 빠지게 하는지... 사라진 두 명의 남자가 자신의 의지로 죽음을 선택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훨씬 더 초자연적인 힘, 인간의 힘이 미치기 어려운 존재의 손에 좌지우지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 제일 먼저 체력을 회복한 것은 타일러였다. 챠닝은 아직도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매이는 듯하였다. 식은땀을 흘리며 헛소리를 계속하였다. 
타로파의 주술사가 주문을 외우면서 그의 몸에 나무 열매로 만든 기름을 잔뜩 처발랐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육체가 정말 병을 앓고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일종의 꾀병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증상은 열사흘 전, 그러니까 스파이스의 살점을 먹은 직후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열이 펄펄 나고 마치 사악한 병원균이 그의 몸을 헤집고 다니는 듯한 증세였다. 스파이스의 살이 다 없어지고 이제 누구 차례일까 하는 때에 자기만 면제받고 싶은 속셈으로 발병한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의 몸에서는 이상한 악취가 났다.
이런 몸뚱이를 먹어봐야 나쁜 병만 옮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도록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의 병은 그냥 놔두면 나을 것이다. 이 섬의 자연에는 치유할 충분한 힘이 있다. 

- 존스가 태어난 고향 프로비덴스의 초원이나 해안선도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은 그야말로 별천지라 비교할 바가 못되었다. 이곳에 열리는 모든 과일은 태양을 에너지로 하고 있어 입에 넣으면 태양 내음이 났다. 야자나무 잎의 선명한 녹색은 실로 명확한 선을 그리며 온갖 배경으로부터 부각되어 있다. 그래서 풍경이 선연하다. 어디 한 곳 뿌연 곳이 없다. 웅대한 화산과 골짜기를 흐르는 강은 시원하고 멋들어지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런 자연의 경관을 방불케 하는 여성들의 아름다움이란 그 어떤 말로도 비유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적어도 프로비덴스에는 그녀들을 형용할 말이 없다. 
여자들은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모두 친절하고 건강하고 정직했다. 게다가 그녀들에겐 고뇌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결혼이란 제도는 있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남자와 여자는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었다. 

- 존스는 문명국의 달력을 잊어버렸다. 세 사람 모두 오늘이 몇 월 며칠인지 모른다.
18세기가 끝났는지 어쩐지 막연한 감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세기말이 될 때마다 세상을 뒤덮는 퇴폐가 이 섬에는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으니 그들이 무엇을 근거로 세기말과 19세기의 시작을 구분할 수 있겠는가... 섬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천천히 흐르는 시간에 지배되어 있었다.
그들이 살던 나라에서는 일상적이던 죄악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곳에는 악이라 부를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싸움을 하고 서로를 죽이는 일도 없고 도둑질이나 간음할 일도 없다. 훔치려 해도 개인의 소유란 것이 없고, 간음을 하려 해도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자는 것은 완전히 개인의 자유였다. 

- 존스가 필립 몰간 호를 타기 이전, 언젠가 자기가 믿는 어떤 종파의 목사가 평화로운 세계를 그린 그림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 그림이야말로 이 타로파 섬을 모델로 한 것이 아니었을까, 존스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하였다. 목사가 보여준 그림 속 사람들은 미개인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드넓은 초원에서는 사람 곁에 사자가 누워 하품을 하고 있었고 그 사자의 모습은 너그럽고 여유로워 보였다.
부부는 나무 열매를 따 먹고 그 주변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다. 턱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언덕을 내려오면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병마의 그림자 없는 건강한 얼굴로, 막 수확한 과일을 높이 쳐들고...  
서로 뒤엉켜 노는 개와 고양이. 완만한 비탈을 이루는 언덕 사면에는 햇볕이 넘실거리고 비나 폭풍우가 몰아칠 기미도 없다. 초원은 항상 푸릇푸릇한 풀로 덮여 있고 모든 미소한 생물에서 인간을 넘어서는 맹수에 이르기까지 숨이 막힐 정도로 생명의 은총을 입고 있었다. 

- 헤아리자면 끝이 없다. 평화 그 자체를 그려놓은 색채에 오직 한 가지 빠져 있는 것은 한없이 흐르는 시간에 대한 고통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뿐이었다.

- 그 그림을 보면서 목사는 말했다.
"이 그림이야말로 인간이 도달해야 할 이상향입니다. 신의 지배하에서 우리는 이런 식으로 생활해야 합니다. 죽음이 없는 세계... 어떻습니까. 멋지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미래를 응시하는 목사의 눈에는 기쁨이 충만해 있었다. 그러나 존스는 그 그림 속의 세계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비록 열다섯 살이었지만 그의 상상력은 정확했다. 병도 전쟁도 없는 세계에서 그저 살아 있다는 것... 
그 엄청난 시간에 어떻게 대처하면 좋단 말인가? 

- 항상 라이아의 허리에 걸쳐있던 타파 포로 짠 도롱이는 간데없고 위모의 배 위에 밀착된 그녀의 매끈한 허리선이 리드미컬하게 파도치고 있었다. 
달을 등지고 우뚝 선 존스는 서서히 끓어오르는 질투심에 숨이 막히도록 고통스러워졌다. 그리고 그때 불현듯 고개를 든 라이아의 눈과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달빛을 정면으로 받고 있는 라이아의 얼굴, 관능적으로 달아오른 그녀의 두 볼은 실로 아름다웠다. 열에 들떠있는 라이아의 눈동자는 반쯤 감긴 채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그렇게 정사에 몰두하다가 그녀는 맹그로브 숲 너머에 서 있는 존스를 발견했다. 
존스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그에게 자연스럽게 미소를 던졌다. 빨려 들어갈 듯한 매력적인 눈길이 놀란 존스의 눈에 고정되자 그녀의 웃는 얼굴에서 관능의 빛이 사라지고 건강한 소녀다움이 돌아왔다. 행위를 발각당한 어색함 따위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존스와 마주치자 반가워하고 있는 듯했다. 
존스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어서 뒷걸음질 치며 왔던 길을 다시 뛰었다.  


- 질투라는 단어가 없는 민족에게 신의 개념을 이해시킨다는 일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아무튼 존스는 시도해 보았다. 신이란, 그러니까 신이란... 틀렸다.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타로파에는 신이란 말이 없는가... 아니지, 한 가지 들은 얘기가 있다. 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 폭포 위로 한참 더 깊숙이 들어가면 고대로부터의 신화가 잠들어 있다는 얘기를... 
고대로부터의 신화... 그것이 내가 말하려는 신과 동일하게 연결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으로 존스는 폭포 위 울창한 정글 숲 속을 가리켰다.

- 라이아는 존스의 손가락 끝으로 몇 번이나 눈길을 향하며 신이라는 말을 머리 속에서 음미하였다. 그리하여 간신히 사람의 힘이 미치지 않는 존재... 대지를 흔들거나 산꼭대기로 불을 뿜거나 하는 변덕스러운 존재인 듯하다고 깨닫는다.
수많은 전설의 어머니이며, 타로파 사람들을 이 섬으로 인도한 것... 신은 그 모습을 바꾸어 정글 숲 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다.
그렇게 어느 순간, 라이아는 이해하였다. 신의 의미... 명확한 개념이라기보다, 어떤 류의 감각이라는 편이 좋을 것이다. 냄새라기보다, 음악이라기보다. 우리의 오감이 아니라 제6감각에 호소하는 것... 막연하기는 하지만 라이아는 존스가 말하는 신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 "신, 있어, 저기 저, 위쪽."
그렇다고 라이아가 실제로 본 것은 아니다. 정글 숲 깊숙이 잠들어 있는 미지의 힘에 대해 언급한 전설이 이 섬에는 무궁하다. 그런 전설을 떠올리며 존스가 말하는 신의 모양을 한 물체가 존재하는 것을 아닐까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단순한 추측의 영역을 넘어 라이아의 잠재의식에 각인된 이미지는 서서히 유출되기 시작했다. 
 
- 폭포는 풀뿌리를 축축하게 적시며 땅 속을 흐르다가 마침내 한 줄기 선으로 낙하한다. 어디서 물줄기들이 모여들어 이런 흐름을 이루었나 싶은 생각에 존스는 숙연해졌다. 졸졸 흐르는 물 어디에 폭포가 될 에너지가 숨어 있는 것일까 하고... 
축축한 땅 위에 서서 아래를 바라다보았다. 높은 데서 보는 풍경은 언제나 상쾌하다. 존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산비탈에 가려 해안선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점만 보아도 얼마나 비탈진 벼랑을 올라왔는지 알 수 있었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머리가 간신히 보일 듯 말 듯하고 바로 아래로는 짙은 녹색의 숲이 바다처럼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뒤로 돌아 산꼭대기를 우러른다. 여기가 정상은 아니다. 아직도 화구는 한참 멀었다. 화구까지의 거리가 대체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표고가 높아짐에 따라 점차 식물류는 줄어들고 산꼭대기에는 가파른 바위가 알알이 드러나 있다. 높이에 따른 그런 변화는 일목요연했다. 라이아가 가고자 하는 곳은 물론 산꼭대기가 아니었다. 라이아는 기복이 완만한 사면에 숲이 울창한 밀림으로 존스를 안내하였다.

- "어디로 가야 되는 건지 알아?"
불안해진 존스가 물었다. 라이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심각한 표정으로 정글 속을 쳐다보고 있다. 눈초리가 이상하다. 라이아가 이런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처음 본다. 온몸의 감각 기관을 전부 일깨워 한곳에 집중시키고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신'이 어떤 종류의 감각을 매개로 하여 지각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존재에 다가가겠다는 듯이...

- 존스도 오른손을 내밀었다. 손끝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돌의 감촉이었다. 표면은 양치류와 이끼류로 덮여 있고, 꼭대기는 나무 사이를 가르고 그 위로 드러나 있다. 그것은 높이 약 5미터, 폭 3미터 정도의 석상이었다.
... 이것이 신인가. 존스는 웃으려 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웃을 기분도 나지 않았다. 우상 숭배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목사의 가르침을 받은 존스가 우상 비슷한 것을 앞에 하고 말을 잃은 것이다.

- 석상에 무언가가 그려져 있었다. 표면이 거뭇거뭇하고 모양이 잘 보이지 않는다. 라이아는 망토를 벗고 돌을 갈았다. 존스도 썩은 나뭇가지를 세워놓고, 윗부분을 벗겨냈다. 그러자 점차 부분 부분에 빨간색이 나타났다. 
전체 상은 멀리서 봐야 할 것 같다. 대충 벗겨내고 나자 존스는 아래로 내려와 나무 사이를 헤치고 두세 걸음 뒤로 물러났다. 멀어질수록 시야에 윤곽이 들어오고 모양은 작아지며 또렷해졌다. 존스는 또 현기증이 일었다. 어떻게 이런 곳에 이런 그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석상에는 새빨간 사슴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별자리를 본뜬 듯한 훌륭한 뿔에 앞다리를 힘차게 구부리고 사슴은 그야말로 하늘을 날아오르려 하고 있었다. 
강한 의지의 힘이 있었다. 돌과 그림에 새겨진 의지가 사방에 충만했다. 이것이 타로파 섬의 신화의 원천인가... 이것이 타로파 사람들을 이 섬으로 인도한 것의 정체인가. 존스는 무릎을 꿇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이유도 없이, 그저... 

- "사슴? 사슴이 뭐야?"
라이아는 그렇게 되물을 뿐 석상에 그려진 동물의 이름을 대려 하지 않는다.
"이거, 이걸 사슴이라고 해."
존스는 빨간 사슴을 가리켰다. 그러나 라이아의 어리둥절한 표정에 존스의 의문은 자연히 풀렸다. 사슴을 가리키는 언어 자체가 없는 것이다. 이 섬에서 존스가 본 동물이라고는, 돼지와 개, 닭, 그리고 들새 정도이다. 사슴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이 그림의 모양은 틀림없는 사슴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을 새긴 인간은 대체 무엇을 모델로 했단 말인가. 언제, 어디서 이것을 새긴 것인가? 두서없이 떠오르는 의문... 
존스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석상의 표면은 정확하게 남쪽을 향하여 있고 때문에 사슴은 정동향을 향해 날아오르려 하고 있다는 것을... 

- 나무들 사이의 좁디좁은 틈을 비집고 새어 들어오는 햇살이 석상에서 떨어진 흙의 입자에 반사되며 사방에서 빛나고 있었다. 빛의 선이 가늘어 더욱 눈이 부시다. 존스는 라이아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불쑥 보트에서 먹었던 스파이스의 살맛이 떠올라 타액이 고였다. 
스파이스의 살은 냄새도 없고 맛이 없었지만 라이아의 입술은 달콤했다. 혐오감이 아니라 가슴을 간질이는 설레임이 있었다. 
살아 있다는 실감... 모세 혈관으로도 자신의 맥박을 잴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솟구치는 피의 압박.  


- 그러나, 질투라는 감정이 없었던 이 섬에 질투를 도입시켜 나눈 약속을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었다. 이 섬의 오랜 세월에 걸친 풍속이 질투 따위 편협한 감정 때문에 끊어질 리가 있겠는가 싶은 심정으로... 
"태어나는 아이를 보면 알 수 있잖아요. 파란 눈동자에 금발머리면 틀림없는 내 아이입니다."
의미심장한 묘한 눈길로 존스는 타일러를 보았다.
"왜 그래? 어째서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아니오, 그러고 보니까 당신도 나랑 똑같은 파란 눈에 금발이라서..."
순간 두 사람 사이에 공백이 흘렀다. 잠시 후 타일러가 웃음을 터뜨렸다. 모래를 움켜쥐고 태양을 향해 던지면서 해변을 뒹굴었다.


- "그러면 어쩌겠어? 응, 내가 라이아랑 잤고 태어나는 아이가 내 아이라면 어쩌겠냐고?"
"싸우죠."
"네가 나한테 싸움을 걸겠단 말이야?"
타일러는 기가 차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당신한테 배운 겁니다."
"기가 막히는군."

- "이 섬에는 질투란 것이 없었어. 그걸 끌어들인 사람은 바로 너야.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고 했다. ... 너무 그렇게 흥분할 거 없잖아."
"당신 역시 이 섬에 싸움을 끌어들이려 하고 있잖아요. 이 섬에 싸움이란 없어요."
존스는 비난하는 말투였다. 타일러에게 이런 식으로 말해보기는 처음이었다.
"맹추, 그건 내 개인의 문제야. 너는 자신의 감정을 타인에게 강요하면서 이 사회를 파괴하려 하고 있어."

- "그러니까 자연히 이렇게 됐단 말이야. 타로파에는 노동이란 게 없어. 가족이라는 강한 혈연이 필요 없단 말이야. 말하자면 타로파 섬 전체가 하나의 가족 같은 거야. 이런 시스템을 누가 만들었는가. 인간도 아니고, 하물며 신도 아니지. 이 섬의 자연이야. 몇천 년 동안 이 땅으로 쏟아지는 태양이 자유로운 섹스의 원천이 되고 있단 말이다." 
존스는 문명국의 규범을 타로파에게 적용한 자신을 깨달았다. 불과 몇 분 사이에 그 같은 사실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이십 일간에 달하는 표류 경험 덕분이었다. 생존을 건 보트 위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던 그곳만의 특수한 사회적인 구조를 떠올렸다. 뜨거운 햇볕, 굶주림, 갈증, 그로 인한 절망... 인간의 의지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요소가 얽히면서 서서히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나갔다. 거기에 평온한 생활을 기반으로 한 규범을 적용시킨다는 것은 억지다. 

- 그러나 존스는 문득 생각한다. 그때 타일러는 굉장했다. 지금도 잊지 못할 스파이스의 맛, 살점 그 자체보다는 억지로 입에 처넣은 타일러의 행위로 인상 지워지는. 그렇다. 그것은 분명 타일러의 맛이었다.

- "타일러, 당신은 왜 싸움을 즐기는 것이죠?"
존스가 불쑥 물었다.
"그럼, 너는 평화로운 게 좋아?"
타일러는 질문을 질문으로 되받았다.
"물론 좋아하죠. 죽기는 싫습니다."
"내가 해군에 있었을 때 역시 너 같은 놈이 있었지. 아니 그런 놈들 뿐이었어. 온통 싸움을 싫어하고, 죽기를 두려워하고 평화가 좋으니 어쩌느니 시부렁거리는 놈들 말이야.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해병대원이 되어 막상 적함을 발견하고 서로 쏴대고 적함의 옆으로 바싹 다가가 적진으로 파고드는 단계가 되면 그런 놈일수록 철저하고 잔학하게 살육을 일삼는단 말이야. 사방은 바다에다 도망칠 데라고는 하나도 없고 그야말로 끔찍하지. 평화란 요컨대 적이 없는 상태니까, 전쟁터에서 적을 섬멸하려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말이야. 그렇지만, 나는 달라. 늘 전사이고자 다짐해 왔어."
전사. 전사의 의미를 존스는 모른다. 병사와 어떻게 다른 것인지... 타일러는 존스의 표정에서 그의 마음을 읽고 대답해 주었다.

- 타로파 전체가 축제를 위한 활기에 차 있었다. 라이아는 명예로운 무희로서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이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배가 불러오고 순조롭게 자라는 태아의 기운찬 움직임이 태내로 느껴질 정도가 되어 사흘 후로 다가온 축제에서 라이아가 춤을 추기란 힘든 상태였다. 라이아는 구경꾼으로 만족해야 했다. 


- 축제는 해가 기움과 동시에 시작되어 온 밤을 춤과 음악으로 가득 채웠다. 상어의 가죽으로 만든 큰 북이 리드미컬하게 흥을 돋구자 그에 맞추어 음악가들은 야자의 섬유질로 만든 궁(弓)으로 삼음계의 음악을 연주하였다. 단조로운 멜로디였지만 그 리듬은 격렬하였고 저 먼 폭포의 상류까지 울려 퍼지며 빨간 사슴의 석상을 떨게 하였다. 한층 짙어진 밤의 어둠 속에서 석상은 몸부림치며 쌓인 먼지를 털어냈다. 

- 막대기가 울리는 소리, 돌이 울리는 소리,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섬 사람들 가운데서 선택된 무희들은 허리를 흔들며 엉덩이를 돌렸다.
거리를 두고 축제의 무대를 지켜보고 있는 것은 출산을 앞둔 라이아와 존스뿐이었고 그 외의 사람들은 춤의 소용돌이에 혼을 빼앗기고 있었다. 타일러까지도 춤을 추었다.
음악과 노래와 춤은 일관성을 지니고 있었다. 모두가 각자 제멋대로 춤추고 노래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보이지 않는 흡인력이 작용하여 언뜻 보기에는 무질서한 집단의 움직임을 한 방향으로 흐르게 했다. 

 

- 확실하게 감지할 수 있는 드라마는 없지만 현실적인 질서에서 원시적인 혼돈으로 향하는 시간의 역류를 느낄 수 있었다. 무대는 삶과 죽음이 혼연일체가 된 우주의 근원을 방불케 하는 공간이었다. 

신화가 되살아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격렬한 열기에 환기되어 고대로부터 내려온 신화가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그리고 스토리도 현실감도 없는, 아직 인류가 젊었을 시절의 꿈과 원망(願望)이 강렬한 잔상으로 축제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의 의 식에 각인되었다. 축제가 끝나면 사람들은 축제의 풍경을 잊는다. 그러나 잔상으로 남아 있는 기억만은 의식의 깊은 부분에 새겨지는 것이다.

- 그들은 그 후 1년 이상이나 타히티에 체류하면서 문명국의 범선이 기항하기를 기다렸다. 프랑스나 영국의 군함은 기항하더라도 동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선원의 수가 모자라는 미국의 포경선이나 사략선(私掠船)이 기항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어떤 배든 선장은 돈을 위해 배를 움직이고 있다. 자기 배에 불필요한 인간을 태우기 위해서는 그 나름의 손익 계산이 필요했다. 
배에 실은 물이나 식량은 한도가 있기에 승선원의 수는 항시 꼭 필요한 인원만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해상에서 목숨을 잃은 선원 때문에 일손이 부족한 배가 기항하는 경우도 있었다. 바이올렛은 그런 배를 찾아 계약을 체결할 작정이었다. 

- 선장은 고작 한 번의 항해로 엄청난 부를 거머쥐었다. 소문을 들은 다른 선장들은 누구 하나 예외 없이 플로렌스 호가 대체 어디서 향신료를 발견했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그러나 플로렌스 호의 선장은 절대로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우연히 발견한 야생 향신료가 그야말로 황금이었던 것이다. 
밀생하고 있는 장소를 알려줬다가는 앞다투어 약탈해 가서 보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만다. 그러니 플로렌스 호의 선장이 비밀을 지킨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래틀 스네이크 호의 선장 빅토르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아무리 협박해도 발설하지 않자 다음 항해를 노려 뒤를 추적하기로 하였다.

- 굶주림이란 이런 경우 먹을 것을 두고 하는 말만은 아니다. 아무것이라도 좋았다... 피에 대한 욕망, 살에 대한 욕망, 들끓는 신경을 위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황금보다 역류하는 피의 압박을 터뜨릴 돌파구였다. 
그렇게 타히티에서 실은 물과 식량이 거의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했을 즈음 전방에 벼랑처럼 우뚝 선 화산이 있는 검은 섬이 나타났다. 화산 바로 아래로 은빛으로 빛나는 하얗고 가느다란 선이 보였다. 폭포가 틀림없었다. 적어도 지금 보이는 저 섬에는 풍부한 물이 있다. ... 빅토르는 그렇게 짐작하였다.

- 그렇다면 하필 왜 동쪽이어야 할까.
타로파에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런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 또한 한 명도 없다. 왜 사랑을 하느냐는 질문이 무의미하듯 이 경우 무엇 때문에 항해를 하느냐는 근원적인 질문 따위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다. 
아무튼 태양이 떠오르는 쪽, 동쪽이 아니면 안 되었다. 태양을 향한다는 행위에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역시 인간의 행동이 대부분 목적 없이 행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제 침입했는지 모를 충동에 지배되고 있다고 보는 수밖에 없었다.

- 이제 곧 뗏목이 완성될 것이다. 선택된 타로파의 젊은이 스무 명과 타일러와 애드 챠닝이 뗏목에 타게 되었다. 항해를 앞두고 타일러는 이전의 의욕을 다시금 불태우고 있었다. 전사에게는 목적 없는 모험이 행동의 규범이다. 대가 없는 고생과 그 고생에 목숨을 거는 일로서만 타오르는 생명의 불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타일러, 무사하기를 빌겠어요."
존스는 때를 봐서 타일러에게 말했다. 그 바보스런 의혹... 아이다가 혹시 타일러의 아이인 것을 아닐까 하는 의혹은 지금 완전히 풀리고 없었다. 타일러는 그런 남자가 아니었다. 보통 사람들이 하는 사랑이라든가 삼각관계에 휘말리는 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어딘가 차원이 다르다.
존스가 품었던 의혹... 의혹이랄 만큼 싹이 자란 것은 아니지만 그 감정은 타일러에 대한 질투에서 생긴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여자였다면 분명 타일러에게 넋을 잃었을 것이란 가정이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낳은 것이다. 
존스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타일러 같은 인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타일러가 떠나는 것이 섭섭하기는 해도 라이아와 존스의 생활에서 타일러가 빠져나가 주어야 비로소 진정한 안정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타일러처럼 압도적인 남자가 옆에 있으면 역시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에 대해 마음 푹 놓고 안심할 수가 없는 것이다. 

- 라이아는 이 범선의 내항을 꿈에서 보고 알고 있었다. 무언가 당치도 않은 것이 다가오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밤중에 잠에서 깨는 일이 드문 라이아인데 무슨 영문인지 새벽녘에 눈을 번쩍 뜨게 되었고 순간 '앗, 지금부터 대지가 흔들린다'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십여 초가 지났을까 땅속에서 솟구치는 듯한 진동과 함께 대지가 흔들렸다. 
타로파 섬의 개와 돼지, 닭들이 울어대고 일제히 날아오르는 새들의 날개 소리가 밤하늘을 덮었다. 지진은 금방 멈추었지만 불길한 예감은 더해갔다. 무언가 다가오고 있었다. 가까운 장래에 좋지 않은 일이 모두에게 닥칠 것이라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오기 전에 반드시 해두어야 할 일이 돌연 라이아의 머리에 스쳤다.
표식을 새겨두는 것... 라이아와 존스와 아들 아이다의 몸에 공통의 문신을 새기는 것... 왜 그래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모양까지 확실하게 정해져 있었다. 붉은 사슴의 상이다. 세 사람의 몸에 붉은 사슴의 그림을 그려야 한다... 

- 어느 틈인가 타일러와 애드 챠닝도 그들 뒤에 와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애드 챠닝은 환성을 질렀다. 이제 뗏목을 완성시킬 필요도, 위험한 항해를 감행할 필요도 없다. 저 배를 탈 수만 있다면 아무 고생을 하지 않고 문명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 저 배의 선장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배의 목수인 나를 필요로 할 것이다. 애드 챠닝의 환성에는 ...

- 그러나 타일러 또한 뾰족한 수가 없었기에 반쯤은 포기하고 망연자실했다. 총으로 무장한 오십 명의 무법자들을 겨우 작살 두 개로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지금은 각오를 단단히 하고 전사로서의 사명을 관철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이전에 존스에게 말했던 것처럼 전사는 춤을 추면서 죽는다. 타일러는 래틀 스네이크 호 사람들의 공격 방식으로 보아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여자다. 놈들은 타로파의 아름다운 여자들을 사냥할 작정인 것이다. 남태평양의 섬에서는 간혹 이런 일도 발생한다. 옛날에 어느 조그만 섬이 습격을 당하여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전부 노예선으로 끌려가 시장에서 팔린 일을 타일러는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 타일러는 실제로 슬프기도 하였다. 저 해변에서 펼쳐지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살육에 화가 치밀었고 오십 명의 무법자 중에 전사가 한 명도 없다는 현실이 슬펐다. 자신과는 전혀 다른 행동규범을 지닌 자들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그 현실은 타일러를 고독하게 만들었다. 놈들은 무엇을 위하여 싸우고 있는 건가? 돈인가... 여자인가. 물론 저 놈들이 하고 있는 짓은 진정한 싸움이 아니다.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타일러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행위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뻔뻔스러움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비단 지금 시작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전사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싸움터에 임하지 않는 한 이질적인 존재는 살아남을 수단이 없다. 

- 타일러는 천성적으로 싸움을 좋아했다. 인간이 원래부터 갖고 있는 본능의 양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전쟁이며 타일러는 그 본능에 충실하고자 노력해 왔다. 싸우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었다... 그러나 전쟁을 추구하면 언젠가는 죽는다. 어디선가 매듭을 짓지 않으면 안 된다.
타일러는 지금이 그때라고 생각하며 싸울 준비를 하였다. 돈을 위하여 살육을 자행하는 놈들에게는 불의의 습격을 가하여 무의미한 죽음을 선물해 주리라... 놈들에게는 그런 죽음이 어울린다.

 

- 타일러는 눈앞의 광경을 보며 또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발달한 문명이 과거와 마주치면 어째서 과거가 지고 마는지... 문명과 미개가 서로 맞부딪치면 어째서 항상 미개한 쪽에 엄청난 희생이 초래되고 죽은 자의 시체가 산더미를 이루는지... 그 반대의 예가 있었던가... 타일러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뗏목의 돛으로 사용하려 했던 타파 포를 찢어 가슴과 허리에 둘둘 감았다. 
닥나무 수피로 만든 타파 포는 매우 탄력성이 좋아 근거리가 아니면 치명상을 입지 않을 정도로 마스켓 총의 총탄을 막아줄 수도 있다. 비록 타파 포를 관통한다 해도 두터운 근육을 짓찢고 내장까지 도달하기에는 상당한 힘을 지닌 총탄이 필요할 것이다.

 

- 타일러는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죽이겠다고 마음으로 맹세를 하였다. 그래서 총탄에 쉽게 쓰러지지 않도록 특히 가슴과 배를 이중삼중으로 둘둘 감았다. 
이 충동 또한 모순일까... 눈앞의 살육에 몸서리를 치면서 자신도 무참한 살육에 참가하려 하는... 의문은 그치지 않았다. 타일러는 쓸데없는 생각을 접어두었다. 투쟁을 향한 마지막 피가 끓어올랐다.

- "타일러, 나도 갈 거야."
라이아의 손을 뿌리치고 다가온 존스의 어깨에는 붉은 사슴의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오오, 상당히 멋지게 새겼는 걸. 뭐야, 이건 사슴이잖아..."

존스의 팔에는 보라색 사슴이 7할 정도 완성되어 있었다. 라이아가 바라던 대로 붉은 사슴을 새기기는 무리라고 한다. 지금은 보라색이지만 머지않아 짙은 청색으로 빛나게 된다고 한다.

- 타일러는 존스의 볼을 양손으로 감쌌다.
"잘 들어, 자네 나를 좋아하나?"
타일러의 양손은 뜨거웠고 그 답지 않게 말투도 묘해서 존스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 "나는, 당신을 숭배합니다."
"호오, 그래, 그럼 잠자코 내가 하는 말을 들어. 너는 살아남은 섬 사람들을 데리고 이제부터 동쪽으로 향하여 항해를 한다. 해도 정도는 볼 줄 알겠지. 내가 없어도 이 거대한 뗏목을 움직일 수 있을 거야. 알겠지, 해 봐. 너는 훌륭한 선원이야."
존스가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타일러는 틈을 주지 않았다.
"입 다물어! 난 이 이상 한 마디도 듣지 않을 것이다."

타일러는 존스의 팔을 잡고 완성을 앞둔 문신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꽤 멋진 문신이로군. 시간이 있으면 나도 새기고 싶었는데..."

타일러는 그렇게 말하더니 빙글 몸의 방향을 돌려 양손에 작살을 쥐고 허리에는 타로파의 전투용 돌도끼를 찬 채 언덕을 뛰어내려 갔다. 존스는 타일러의 명령대로 더 이상 한 마디도 입을 열지 못하고 잠자코 그의 뒷모습을 배웅하였다. 

- 타일러는 자기 혼자 힘으로 타로파를 구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의 행위 역시 무의미한 살육 이외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존스와 함께 항해를 떠나는 쪽이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정말 그래버릴까 하고 마음이 변하여 그는 걸음을 멈추려 했지만 몸은 경쾌하게 앞으로만 향했다. 내리막인 탓도 있어 250 파운드의 육체에는 강한 관성이 작용하고 있었다. 육체뿐만 아니라 의지에도 관성의 힘이 작용하여 새삼스럽게 다른 흐름으로 옮길 수가 없었다. 어찌 되었든 끝을 내지 않으면 안 된다. 결별을 지연시키는 것은 성격에 맞지 않았다.

- 총에 화약을 장전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남자들은 총을 버리고 허겁지겁 도망을 쳤다. 방금 전 타로파 주민들에게 행한 짓이 이번에는 자신들을 향하여 행해지고 있었다. 
타일러는 짐승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피가 너무 많이 묻어 찔리지 않자 칼을 바꿨다. 그는 온몸을 피로 물들인 채 묘한 황홀감에 젖었다. 지금 이런 순간 같으면 언제 죽어도 좋다.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정신은 전투에 열중하고 있었다.
드디어 마지막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전투에 참가했지만 지금처럼 황홀함을 느끼기는 처음이었다. 진심으로 사랑한 여자를 안았을 때의 감각이 불현듯 되살아났다. 요 몇 년 동안 한 번도 되살아났던 적이 없는 여자의 부드러운 살내음이 전투의 와중에서 현실의 냄새와 함께 되돌아온 것이었다. 

- 맥박과 똑같은 리듬에 간헐적으로 흘러나오는 피의 소리를 들었다.
존스가 짧게 깎아준 금발 머리칼이 붉은 피로 물들고 타일러는 어깨부터 내던져지듯 쓰러졌다. 아직 맥박은 뛰고 있지만 호흡을 할 때마다 숨이 막혀 괴로웠다.
오전의 태양이 눈부시고 등에 닿는 축축한 모래의 감촉은 차가웠다. 불만은 없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럽고, 마음은 평온했다. 시계가 점점 좁아지고 사람들의 소리도 멀어져 간다. 생명의 고동은 급격하게 속도를 떨군다. 
좁다란 시계로 새어 들어오던 태양의 금빛이 점차 짙은 오렌지 빛이 되고 서서히 붉어지면서 마침내 검게... 마지막은 암흑이었다. 존 글렌 타일러는 마지막을 맞이하고 있었다.
 
- 물방울을 튀기며 뗏목이 둥실 떴다. 뗏목이 지상을 떠나는 감각이 느껴지자, 존스는 안심하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뗏목도 몸도 상승을 계속하는 물 위로 위로 올라갔다.
산을 오르면 틀림없이 높은 곳에 도달한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원래는 낮은 곳을 흐르는 물의 힘으로 이렇게 위로 옮겨지고 있으니... 한 발 또 한 발 태양으로 다가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 존스는 라이아와 아이다를 꼭 껴안고 눈이 부신 것을 참아가며 태양을 끝없이 올려다보았다. 그의 어깨에 새겨진 검푸른 사슴의 문신도 태양을 향하여 하늘을 나는 것처럼 약동하고 있었다. 

  

- <2장 낙원>

 





- 1998년 뉴욕
거대한 콘서트 홀, 무대에서 본 객석은 달팽이의 체내를 연상시켰다. 달팽이의 몸속으로 들어간 경험을 지닌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레슬리가 아는 한 그 이외 세 명의 다른 남자도 똑같은 인상을 품었다고 한다. 상임 지휘자인 페라도, 콘트라베이스 주자카첸바흐, 그리고 지금부터 꼭 50분 후에 만나게 될 길버트... 

- 레슬리 마도프는 페라도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기꺼이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주었기 때문이다. 애당초 레슬리의 신작 교향곡 <베린지아>는 페라도가 지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서로 다른 해석의 차이를 도저히 극복할 수 없어 레슬리는 자신이 직접 지휘하고 싶다는 뜻을 아주 정중하게 페라도에게 전했다.

 

- 작곡자 자신이 지휘봉을 쥐면 적어도 창작 의도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다. 페라도는 양팔을 벌리고 그렇게 하라면서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진의는 아마도 '하고 싶으면 해 봐라. 너 같은 애송이가 오케스트라를 통솔할 재간이 있을지...' 란 비아냥거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레슬리에게 인간 심리의 이면을 파악하는 재주는 없었다. 아니, 하려고 생각하면 할 수도 있지만 그다지 관심도 없고 그보다 귀찮았다.

- 페라도는 오케스트라의 단원을 통솔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넌덜머리가 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레슬리가 지휘법을 완벽하게 마스터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경험이 적기 때문에 단원들의 음모와 보이지 않는 갈등을 해결하며 잘 꾸려나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는 단원들의 눈에 드러나지 않는 보이콧이 원인이 되어 지휘를 그만둔 사람을 몇 명이나 알고 있었다. 지휘자는 한 사람... 그런데 통솔해야 할 단원은 백 명이 넘는다. 노련한 경력이 없으면 쉬운 일이 아니다.

- 레코딩을 앞두고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이번에 새로 지휘대에 서는 레슬리 마도프의 지휘하에 마지막 리허설에 들어갔다. 유난히 이목을 끄는 용모... 검정 곱슬머리에 정열이 이글거리는 눈... 강인한 의지를 느끼게 하는 단단한 턱... 셔츠를 입은 상태에서도 음악가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만큼 잘 발달된 근육을 느낄 수 있었다.
얼굴 생김은 전체적으로 동양적이다. 단원들 대부분이 그의 경력과 에피소드를 잡지 등을 통해 알고 있기에 흥미로운 화제거리로 입방아에 올랐다. 북미 인디언의 피를 사분의 일 잇고 있다는 점이 레슬리라는 존재를 한층 불가사의한 존재로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희대의 호색한으로 수많은 여배우나 가수들과 염문을 뿌렸고, 그중의 한 명은 자살을 기도하여, 매스컴으로부터 인격과 윤리감이 결여된 자라고 비난받고 있었다. 

- 인디언의 피를 이어받은 이 헤비급 복서를 방불케 하는 호색한이 어떻게 그토록 격조 높은 음악을 창조할 수 있는지... 그가 만들어내는 음악은 인격적 결함을 커버하고도 남을 만큼 아름답고 훌륭하였다. 그리고 그 사실은 일부 음악가를 제외하면 누구나가 인정하는 것이었다. 

- 뉴욕 필하모닉의 단원은 모두 예술가답지 않은 풍모의 레슬리에게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대개의 사람들은 작곡가나 지휘자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를 갖고 있어 그 틀을 벗어나는 자를 간단히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단원들 중 알렌 오토리라는 첼리스트가 있었다. 알렌은 오늘도 좀 장난질을 쳐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는 레슬리의 곡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아름다운 화음으로 연주되는 조성 음악의 한 부품이 되는 일에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지만 상식을 벗어나고 조성을 무시한 카오스를 연주하는 데는 참을 수가 없었다

 

- 그렇다고 해서 레슬리의 신곡이 카오스의 연속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악보로는 미처 다 표현할 수 없는 일부 현대 음악가들의 음악에 비하면 그의 음악은 정통파에 속한다. 제1악장의 도입부에서는 그야말로 불협화음이 혼란스럽게 울려 퍼지지만 그다음은 통일을 향한 생성을 예감케 하고, 마지막 악장에서는 감동적이고 완전한 화성이 압도적이다. 그야말로 그의 음악에서는 음의 홍수를 느낄 수 있다.

- 청중은 음에 빠지지 않도록 목줄기를 빼고 귀를 기울일 것이다. 3부로 구성된 교향곡 <베린지아>는 우주의 시원으로부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완성, 통일, 질서로 향하는 상태를 음으로 표현하려 한 곡이다. 그러나 <베린지아>는 과거에서 현재로 흐르는 시간을 표현하는 데, 음악의 역사가 무조성 음악에서 조성 음악으로 발전했던 것과는 전혀 반대의 길을 더듬는 점이 특이하다. 과거 현대 음악에는 음악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음이 도입되어 악보 대신에 도표가 사용된 적도 있었다.
카오스를 표현하는데 우연을 사용한다... 과연 상당히 매력적인 방법이다. 애당초 원초의 우주에 떠다니던 수소 구름은 우연의 연속에 의해 항성이나 혹성으로 생성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교향곡 <베린지아>에 우연한 음이 끼어든다 해도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 그러나 레슬리는 우연성의 도입을 바람직하게 여기지 않았다.
무대 위에서 냄비를 두드리거나 잔을 깨뜨려 우연의 생활 음을 도입하는 시도는 지금까지 몇 명의 음악가에 의해 시도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도태된 방법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예술로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선까지는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한 시도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예술일 수 있는지 아닌지를 청중에게 묻기에는 역시 무대 위에서 실제로 연주하는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 '베린지아...'

악단의 멤버 중에 이 타이틀의 의미를 아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레슬리는 구태여 그 의미를 해설하려 하지 않는다. 설사 가르쳐준다 해도 인디언의 피를 이어받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그 먼 옛날, 약 1만 년 이상이나 먼 옛날 홍적세 빙하기의 마지막 시대에 인디언 조상은 멀리 아시아에서 베링해를 지나 새로운 대륙을 향하여 파상적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인디언 조상들은 북극의 얼음으로 덮인 길을 '베린지아'라고 불렀다. 
레슬리는 우주의 생성과 유전을 그 옛날 얼음이 덮인 길을 건넜던 아시아 인들의 초창기 시절의 꿈과 접목시키려 하였다. 그는 생각한다... 생성으로 향하는 카오스 속에 장래를 결정하는 의지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 첼리스트 알렌 오토리는 연주 중 예의 그 소절이 가까워지자 '이번에는 생상의 <백조>로 장난을 좀 쳐볼까' 하고 마음먹고 있었다. 페라도가 지휘한 어제 리허설에서는 프로코피예프로 장난을 쳤다. 그전에는 모차르트. 두 번 다 모두 페라도는 눈치채지 못했다. 연주가 다 끝나자 페라도는 '뭐 이런 정도면 충분하겠죠' 라며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보고 알렌은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고 여겼다.

- 돌연 레슬리의 감각이 통증을 느끼고 사고가 혼란에 빠졌다.
그는 지휘하던 손을 공중에서 멈춘 채 무엇 때문인지 정체를 찾았다. 지휘자가 동작을 멈추자 연주자들도 잇달아 연주를 멈추었다. 악보에 기록된 카오스가 휙 빠져나가는데 첼로 소리만 레슬리의 뇌리에 남았다. 자신이 창조한 선율과는 다른 성질의 울림... 

- "야 너! 지금 생상의 백조를 켰지?"
알렌의 등줄기로 충격이 줄달음쳤다. 믿을 수가 없었다. 연주음 가운데 다른 음을 포착했을 뿐 아니라 어떤 악기의 어떤 주자가 어떤 멜로디를 연주했는지까지 정확하게 지적했던 것이다.
알렌은 다시 한번 이 사실을 음미했다. 페라도는 눈치조차 채지 못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상상력이 발휘되지 않는다. 무서웠다. 어느 결인가 경외심을 품고 레슬리를 올려다보았다.

 

- ... 이 작곡가의 머리에는 막연한 카오스가 있는 게 아니다.
악보에 기록된 선율 하나하나가 고유의 의미를 갖는단 말인가. 더구나 백 명의 주자가 연주하는 이 복잡한 멜로디 하나하나를 저 놈의 귀는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 
전율이 존경으로 바뀌었다. 야만인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레슬리의 어디에 이토록 섬세한 감성이 숨어 있는 것일까.

 

- ... 이 에너지의 원천은 대체 무엇일까.
알렌은 생각한다.
... 저 압도적인 힘의 원천은 대체 무엇인가?
그로서는 알 턱이 없었다. 눈을 뜨자 거기에는 아직도 레슬리의 이글거리는 눈길이 있었다. 알렌은 꿀꺽 소리를 내며 침을 삼키고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죄송합니다. 악보대로 연주하겠습니다."

- 모두들 숨을 죽여 긴장감이 맴도는 정적 속에서 알렌의 중얼거림이 레슬리의 귀로 들어갔다. 불과 10초도 안 걸리는 대결이었다. 주변에 있는 단원들은 이 두 사람의 대결로부터 알렌이 레슬리에게 품은 것과 똑같은 외경심을 품고 섣불리 우습게 보려 했던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부끄럽게 여겼다. 
언뜻 느끼기에 무의미해 보이는 음의 나열과 혼재에 의미가 있다! 그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그들은 앞으로 자기들이 연주할 곡에 자신감과 자부심을 갖게 된 것이었다.

- ... 이번에야말로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득 그렇게 생각한다. 에너지가 충만된다. 무엇을 손에 넣고자 하는 것인가? 스스로에게 묻지만 대답은 없었다. 자신의 것으로 하고 싶다는 정열이 그의 음악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레슬리는 아직 모르고 있다. 자신이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를. 천천히 손을 흔들자 보다 장엄한 카오스가 울려 퍼졌다. 

- 지금 레슬리는 장난질을 한 알렌 오토리에 대해서는 그다지 분노를 느끼지 않았다. 그보다 오히려 장난질도 눈치채지 못하고 태평하게 지휘봉을 휘둘렀던 페라도의 둔감함이야말로 질책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레슬리는 무능한 주제에 권력만 장악하고 있는 자를 아주 싫어했다. 뉴욕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임에도 불구하고 작곡가의 의도를 깊이 이해하려 하지도 않고 그저 기계적으로 지휘봉을 흔드는... 생각하면 지금도 화가 치밀었다. 그렇게 무능한 자가 자신과 관계없이 살아가는 것은 상관없다. 그러나 그 자로부터 직접 피해를 입는 순간 레슬리는 집요하게 페라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레슬리는 매스컴을 향하여 페라도의 험담을 마구 늘어놓으며 자칫하면 세기의 걸작을 잃어버릴 뻔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항상 자신이 창조한 음악을 미처 평가가 내려지기도 전에 '세기의 걸작'이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 그는 지금까지 레슬리를 두 번 본 적이 있었다. 처음 본 것은 레슬리가 줄리어드 음악원 학생이던 시절이다.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라이브 하우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길버트가 그 라이브 하우스에 있었던 것은 단순한 우연이었다. 피아노 트리오로 구성된 연주가 끝나자 레슬리는 그 라이브 하우스에서 처음으로 피아노 즉흥 연주에 도전하였다. 레슬리가 피아노 건반에 손가락을 올려놓고 단음을 치기 시작하자 객석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그 정적 속으로 레슬리는 음을 굴렸다. 모난 곳 없이 부드러운 음은 객석 사이사이를 통통통 기분 좋게 굴러 길버트의 귀를 스치고 등 뒤로 사라졌다. 레슬리는 서서히 그가 만들어내는 음의 입자를 늘려갔다. 길버트에게는 보기만 해도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음의 입자는 무대 위에서 조명의 색을 흡수하였다. 그리고 원색의 빛을 발하고 객석 사이를 구르며 좌중을 지배하였다. 
시냇물이 급류가 되고 마침내 홍수처럼 범람하였다. 순간 길버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를 듯했다. 먼 옛날 사막을 방황하던 시절에 잃어버린 음악을 이 남자의 손을 빌어 재현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길버트는 불쑥 그런 기대를 품었다.

- 그리고 오늘이 세 번째...  보통 때 같으면 교단의 대변인을 보내 교섭에 임하게 했을 테지만 이번만은 그 자신이 직접 움직이기로 하였다. 이 문제는 교단이 주장하는 신비 사상보다는 순수하게 길버트 개인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 "뭐, 세상에서는 일반적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죠. 사실 그와 나는 친구이기도 했지만..."
레슬리는 휙 휘파람을 불었다.
"놀랍군요. 나는 니콜라이 페드로비치의 팬인데."
레슬리는 새삼스럽게 길버트를 쳐다보며 조그만 몸집에 품위 있게 차려입은 이 신사의 어디에 금세기 최고의 신비 사상가 니콜라이 페드로비치의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카리스마가 있는 것일까 하며 수상쩍게 생각하였다. 평범한 오십 대 남성과 어디 하나 다른 구석이 없고 색다른 분위기를 띠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차라리 레슬리 쪽이 어울릴 정도다. 

- "실은 반년 전쯤에 뉴 멕시코와 애리조나 주 경계에서 거대한 종유동이 발견되었습니다. 나도 한 번 가보았는데 지하 세계 속에 거대한 호수가 있고... 정말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죠. 그것을 보지 않은 당신에게 아무리 설명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겠지만 그 조건인즉 당신이 직접 그 호수의 세계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레슬리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것과 작곡과 무슨 관계가 있죠?"
"거기에서 악상을 얻어 환상적인 콘체르토나 심포니를 작곡해주었으면 합니다."
"상당히 재미있을 것 같군요."
레슬리는 지하 세계에 단순하게 흥미를 느꼈다. 지구 내부에 숨겨져 있는 암흑에서 악상을 얻는다... 이건 <베린지아>에서 시도한 우주와 민족의 생성 유전의 연장선에 있는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 "승낙해 주는 겁니까?"
"오케이, 길."
이 한 마디에 길버트는 레슬리가 마음에 들고 말았다. 불필요한 말은 한마디도 묻지 않고 승낙을 하다니 현대인으로서는 드문 일이다.
"먼저 말해두지만 이 기획은 내가 속한 종교 단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포교를 위한 선전자료로 쓰이는 일도 없을 겁니다. 단지 나의 개인적인 체험을 확인하고 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느낀 대로 표현해 주면 됩니다." 

- 레슬리는 길버트를 문까지 배웅하였다. 레슬리 쪽이 머리 하나만큼 키가 컸다. 따라서 길버트의 눈이 레슬리의 가슴 바로 아래에 있었다. 레슬리의 하얀 티셔츠 속에서 펜던트의 빨간 모양이 빛나고 있었다. 길버트는 그 빨간 모양에 관심을 가졌다. 무슨 복잡한 모양인 듯하였다.
"그 펜던트에 그려진 그림은?"
레슬리는 사슬을 풀어 티셔츠 안에서 펜던트를 꺼내더니 길버트에게 보여주었다. 납작한 돌 펜던트... 거기에는 붉은 사슴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사슴은 앞다리를 구부리고 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자세였다.
"사슴입니다. 사슴한테는 강한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인디언 전설이 있죠."
"오, 그래요."
길버트는 그 납작한 돌을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그 돌은 레슬리의 체온 때문에 따뜻했다. 길버트는 문득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에 휩싸였다. 그가 지닌 시간 감각이 무슨 충격을 받은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 산후 회복 상태가 좋지 않았던 탓에 플로라는 일 때문에 정신없이 바쁜 리차드를 혼자 남겨두고 포트 필립에 있는 친정에 3개월 정도가 있었다. 그런데 뉴욕을 떠난 지 두 달쯤 된 어느 날 플로라는 익명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에서 흐르는 여자의 목소리는 리차드가 뉴욕 시립 대학에 재학 중인 여대생을 집으로 끌고 들어와 동거를 한 지 한 달이 가깝다는 말을 하고 끊어버렸다. 치사한 밀고 전화였다. 전화를 끊고도 플로라는 자신의 마음이 혼란스럽지 않음을 느끼고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생각해 보면 과거에 한 번이라도 남편을 사랑한 적이 있는가... 존경심은 있었다... 남편은 나를 사랑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플로라는 자신이 없었다.
그때 전화의 내용을 믿고 느닷없이 뉴욕을 찾아가는 일만 없었더라도 남편과의 사이는 아직 계속되었을 것이다.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별 질투심이 일지 않았다... 물론 사랑하고 있지도 않다. 하지만 결혼 생활을 계속할 수 있다.

- 질투니 어쩌니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공포를 느꼈다. 자기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남편이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지금까지 3년에 달하는 결혼 생활이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하고 소름이 끼쳤다.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이해하려 애써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리차드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미치도록 사랑했던 것은 아니지만 플로라는 리차드의 자상함과 세련된 분위기에 끌려 결혼을 승낙했었다. 결혼을 절대적으로 원했던 것은 오히려 리차드 쪽이었다.
이혼 당시 꼭 마흔 살이 된 남편은 순조로운 생활이었다면 틀림없이 출판사의 중역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능력도 지니고 있었다. 문예 작품에 관한 그의 안목은 정확했고 영업에 관해서도 탁월한 수완가였다. 게다가 자신이 직접 쓰는 원고에는 재능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 그런데 이 배신 행위라니... 일에서는 그렇게 세심하고 빈틈없는 인간이 어떻게 이토록 해이해질 수 있는 것인지... 결혼 전의 자상함과 사려 깊었던 부분들은 그저 형식에 불과한 것이었단 말인가... 

- 플로라는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물었다. 바람을 피운 남편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인가? 아니, 그건 아니다. 깔끔한 여자와 적어도 자신에게 발각되지 않게 정사를 즐겼다면 이토록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플로라는 그 점에 관해 몇 번이나 자신의 마음에 물었다.
... 만약 그렇다면 참을 수 있다.
그것이 결론이었다. 그러나 이 끔찍한 무심함. 포트 필립은 뉴욕에서 그리 먼 곳이 아니다. 오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차로 달려올 수 있는 거리였다. 아내가 불의의 방문을 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 그럼에도 보란 듯이 어질러놓은 방의 참상. 아내가 이 광경을 보았을 때의 아픔을 남편은 조금이라도 생각해 보았을까. 도저히 밝은 빛의 세계로 드러내 보일 수 없는 마음속 깊은 곳의 공동, 그야말로 끝없는 지하 세계를 들여다본 듯한 기분이었다. 

- 몇백 번이나 들었다. 올봄부터 여름에 걸쳐 삶의 의욕을 잃을 때마다 그래도 그럭저럭 생명의 영역에 머무를 수 있었던 것은 이 곡 덕분인지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일도 있었다. 플로라는 협주곡 CD를 꺼내고 신곡 <베린지아>를 데크에 넣었다.
'나한테는 이것이 있다.' 
그 어떤 망상에 사로잡혀 있을 때라도 플로라는 레슬리의 곡에 몸을 맡기기만 하면 안정된 정신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도입부는 아주 조용했다. 볼륨을 올리는 것을 잊어버렸나 싶을 정도로 들릴락 말락한 희미한 음량으로 시작되어 문득 정신을 차리자 온 사방이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로 충만해 있었다. 

 

- 플로라는 그렇게 느꼈다... 이건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라고... 그리고는 금방 불협화음이 울려 퍼졌다. 카오스가 전체를 덮는다기보다는 여기저기서 조그만 카오스의 그룹이 거품처럼 떠올랐다가는 꺼져간다. 
이윽고 음의 홍수를 타고 카오스는 조화를 향한 생성을 시작한다. 음 너머로 보이는 것은 넘쳐흐를 듯한 정밀(精密)이었다. 모순... 홍수가 어떻게 정적을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하기야 레슬리 마도프의 음악은 모순의 보고이다. 단음을 연주하면서 듣는 자의 색채감각을 화려하게 자극하여 원색의 울긋불긋한 꽃의 이미지를 뇌리에 떠올리게 한다. 
단조로운 멜로디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드라마를 예감케 한다. 그리고 라스트에 이르러서는 압도적인 고백. 착각일까... 그러나 플로라는 그런 생각이 들어 어쩔 줄을 몰랐다. 레슬리가 한 사람의 인간을 위해 곡을 만들다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우선 만난 적조차 없다. 그런데 플로라에게는 레슬리의 곡이 오로지 자신을 향하여 연주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었다. 곡을 작곡하는 자와 듣는 자는 음악을 통하여 한 선으로 이어진다... 그런 기분이었다.

- 샤워만 할 생각이었는데 플로라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욕조에 물을 받고 있었다. <베린지아>에서 흘렀던 홍수 같은 음의 이미지가 물에 잠기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 모양이었다. 그녀는 알몸으로 거울 앞에 서서 머리칼을 틀어 위로 올렸다.
친구들은 선탠 살롱에 다니기도 하고 플로리다의 태양에 살을 태우기도 하면서 건강한 피부색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플로라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름다운 갈색 피부를 갖고 있었다.
정열적인 눈동자 색이며 새카만 머리칼 등 플로라 자신도 자기의 몸에 대해 민족 특유의 것을 느끼곤 했다. 그렇다고 할아버지의 말을 믿는 것은 아니다. 아직 학교에도 들어가기 전, 플로라는 양친과 할아버지와 함께 샌디에이고의 바다가 보이는 집에서 살았었다. 거기서 할아버지는 곧잘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우리 선조는 말이지, 거대한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왔어요."
할아버지는 저녁나절 바다를 보면서 늘 그렇게 자랑스럽게 말했었다.

- 열 살이 될 때까지도 플로라는 할아버지의 말을 믿었다. 아버지의 일 때문에 포트 필립으로 이사를 한 후에도 그녀는 샌디에이고의 집에서 바라보았던 태평양의 색을 떠올리며 대양을 건넜다고 하는 자신의 먼 조상의 모험에 마음 설레곤 했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플로라는 뗏목을 타고 태평양을 횡단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심심하면 들었던 모험담이 할아버지의 단순한 허풍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이 그립다. 일 년 내내 구름 지는 일이 없었던 해변의 집... 이 세상에는 불가능한 것이 하나도 없고 원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믿었던 그 시절... 세계는 꿈으로 가득했다.

- 플로라의 어린 가슴속에는 무수한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하나, 지금은 그토록 가슴 설레었던 어떤 이야기도 그녀의 가슴에 남아 있지 않다. 뗏목을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는 조상의 이야기를 믿지 않게 된 것과 병행하여 플로라는 어린 시절의 꿈을 잃었고 생애의 정열도 희박해져 갔다. 

-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물이 욕조를 채워간다. 플로라는 왼손을 욕조에 넣었다. 아직 약간 미지근하다. 수온을 높인다. 손을 끄집어냈을 때 자신의 왼쪽 어깨가 김이 서린 거울에 비쳤다.
거기에는 멍처럼 청보라색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철이 들까 말까 할 무렵 플로라의 왼쪽 어깨에 퍼런 멍이 생겼고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커졌다. 의사에게 보인 적도 있지만 원인을 모르겠다고 말할 뿐이었다. 최근에는 더 커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색이 미묘하게 변화하여 무슨 그림 모양으로 고정되어가고 있다. 

- 그림은 구체적인 모양이 아니라서 알 수 없지만 단박 머리에 떠오른 것은 별자리 나 별자리 모양을 본뜬 무슨 동물 같기도 했다. 십 대와 이십 대를 거치면서 플로라는 이 그림에 신경이 쓰여 속상한 적도 많았다. 정 마음이 쓰여서 없애려면 없앨 수도 있었지만 요즘에는 그럴 마음이 조금도 없다. 왠지 애착을 느끼기까지 한다. 

- 수도꼭지를 잠그고 플로라는 욕조에 몸을 담갔다. 오늘 하루도 끝나려 하고 있다. 옛날을 떠올리면 괴로운 일뿐... 내일은? 그리고 또 내일은? 기대해 봐야 아무 소용없다. 이런 식으로 나이를 먹어가는 거야. 만약 신으로부터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현 상태에 만족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되풀이해 봐야 무의미하니까... 시지프스의 신화 그 자체인 걸 뭐. 

- 밤, 창문을 꼭꼭 닫은 방에서 레슬리는 혼자 체조를 하고 있었다. 근육을 키우기 위한 트레이닝이 아니다. 금세기 최대의 신비주의자 니콜라이 페드로비치가 제창한 자기를 발견하기 위한 체조였다. 
양손의 손가락을 끝까지 쭉 피고 천장을 향하여 팔을 높이 든다. 다음 그 팔을 천천히 내려 몸과 직각이 되게 한다. 그리고 몸을 옆으로 하여 ㄱ자로 구부리고 한 팔씩 교대로 앞으로 향하여 내민다. 이 동작을 호흡법과 병행하여 아주 천천히 되풀이한다. 그러는 사이 자신이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인식할 수 있다고 한다. 

- 방은 정적 그 자체였다. 알루미늄 새시로 된 이중창은 꼭 닫혀있고, 보통 이 시간 같으면 들려올 법한 타임스 스퀘어의 떠들썩함에서 격리되어 공기는 고요하게 움직임을 멈추고 있었다. 
레슬리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떤 방법을 써도 이율배반을 초래하는 이 명제와 그는 정면으로 대치하고 격투를 벌이고 있었다. 생각하지 않도록 생각한다. 마음을 공백으로 만든다. 지금까지 가능했던 적이 없다. 

- 니콜라이 페드로비치에 의하면 인간의 의지에는 자유가 없다고 한다. 어떻게 하고 싶다는 강렬한 의지력도 실은 개인을 넘어서는 훨씬 더 거대한 에너지에 의해 유발되는 것이라고 한다. 
자신의 의지로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인간은 반드시 자기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나 유전자 등 '무언가'에 흘러가고 있다. 물론 흐름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채...

 

- 레슬리는 니콜라이 페드로비치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다고 인정되는 유일한 사람이 길버트라는 것을 얼마 전에 알았다. 길버트는 자신의 독자적인 경험으로 인간의 의지란 것에 의문을 품었고 자신과 비슷한 신비 사상을 전개하는 니콜라이 페드로비치에 대한 관심 때문에 그와 친분을 맺게 되었다. 그래서 페드로비치가 죽은 후 그를 신봉하는 많은 사람들이 길버트의 휘하에 모여 페드로비치의 체조를 개량한 독특한 동작을 완성하게 된다.  
신흥 종교 단체라고 해도 길버트의 경우는 기독교에서 파생된 신을 근본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신비주의적인 사상에 뿌리를 내리고 우주의 근본 원리를 깨우치며 절대적인 자유를 얻으려 하는 이 시도는 말하자면 범신론에 가깝다.

- 왜 인간의 의지에 자유가 없는가. 원인을 추구하자면 생명이 탄생하는 먼먼 과거의 한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인류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태어났다는 점에 의지의 자유를 거부하는 원인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니콜라이 페드로비치나 길버트는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 인간이 의도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인간은 반드시 수동적으로 태어나는 존재라고. 면면히 이어지는 생명의 고리... 인간은 그 고리를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가 없다. 본인이 의식을 하든 안 하든 먼 과거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세포는 복잡하게 얽혀 주인의 육체를 옭아맨다.

- 레슬리는 자신의 몸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에너지에 압도될 것만 같은데 그 힘이 어디를 향하여 방사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모르는 만큼 필요 이상으로 니콜라이 페드로비치의 사상에 이끌렸다.

- 전화 속에서 흐르는 목소리를 거기까지 듣자 레슬리는 '플로라...'라고 이름을 부르며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의 귀는 특히 예민했다.
플로라의 목소리는 고막을 통해 몸 세포 하나하나에 침투하여 그를 내부로부터 뒤흔들었다. 무언가가 눈을 뜨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먼 옛날의 정열... 기다리고 기다리던... 어디선가 소리가 난다. 차가운 얼음이 흐르는 소리. 바람 소리, 그 바람이 지닌 생명의 광휘. 레슬리는 눈을 감고 다시 한번 '플로라'라고 불렀다.
플로라의 목소리를 가슴속으로 음미하며 그 울림을 맛보았다. 그 편안함, 처음으로 느끼는 기분이었다.

- 레슬리는 길버트가 머물고 있는 호텔로 전화를 걸어서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할지를 생각했다. 매스컴 관계자에게 발설했다고 정직하게 말하면 이 기획 자체가 무산될 염려도 있다. 자상하고 온후한 신사로 보이지만 길버트는 내면에 '신의 소리'라고도 할 수 있는 강한 존재를 품고 있다. 그것은 레슬리도 직감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이 기획은 없었던 것으로 합시다'라고 그렇게 단호하게 말할 듯한 기분이 들어 어쩔 바를 몰랐다.

- 레슬리는 이 시도에 상당한 흥미를 갖고 있었다. 만약 그런 지하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길버트라는 인간에게도 흥미가 있었다.
그는 인간이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 이 세계의 얼개가 어떻게 생겨 있는지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 남자는 분명 많은 것을 알고 있으리라고 레슬리는 생각했다. 그래서 레슬리는 길버트와 방문할 지하 세계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중지되어서는 안 된다. 

- 길버트가 레슬리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나선다.
"취재? 그런 것은 일절 거절합니다. 당신과 나 이외의 그 누구도 지하 세계로 함께 갈 수 없어요. 잘 알겠소?"

 

- 그러나 레슬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플로라의 목소리를 듣고 그의 가슴에는 도저히 해소하지 않으면 안 될 소망이 잉태되어 있었다. 그녀와 둘이서 땅 속 호숫가에 서고 싶은 소망. 왜 그러지 않으면 안 되는지, 이유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강렬하게 끓어오르는 충동에 정직하고 싶었다. 의지란 것이 생겨나는 장소도 그 원인도 모른다. 다만, 육체에 솔직하고 싶다. 온몸의 감각 기관이 우주의 삼라만상에 접하여 자의식에 속삭인다. 
 
- 물론 그의 말이 옳다. 전례가 없는 작곡법이고 기사 이외에 그 장소의 환상적인 장면을 컬러로 게재할 수만 있다면 잡지의 특집으로는 최고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잖아요. 구태여 길버트의 기분을 상하게 할 위험을 감행하지 않아도... 일을 다 끝내고 저의 잡지사의 취재에 응해주실 작정이라면 처음부터 약속 장소를 정해 두면..." 
레슬리는 생각했다. 물론 그녀의 말이 합리적이다. 힘들게 어린애 장난처럼 술래잡기를 하지 않아도 일을 끝낸 다음 날 느긋하게 지하 세계로 안내하면 그것으로 족한 일이다. 그러나 작곡의 순간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옆에 있어주면 좋겠다. 
길버트의 의도를 거역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는 반드시 지하호에서 영감을 얻어 곡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불필요한 인간이 옆에서 방해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레슬리는 플로라의 목소리에 더없는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예민하게 단련된 그의 귀가 플로라의 목소리에서 강렬한 영감을 얻은 것이다. 

- 보스턴 백을 메고 있는 플로라는 언뜻 보면 건강하고 힘 있게 보이지만 팔의 힘은 그다지 세지 않았다.
갈색 피부가 사뭇 건강한 스포츠 우먼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그것은 타고난 피부색일 뿐 그녀는 어릴 때부터 스포츠보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35년에 이르는 인생에서 플로라는 한 번도 스포츠에 열중한 적이 없다. 따라서 그녀에게는 보스턴백이 무거웠다. 무거운 가방을 택시에 싣고 공항에서 호텔로 향했다. 

- "저, 길버트, 당신 가족은?"
레슬리는 플로라의 목소리를 떠올리면서 물었다.
"없소."
"결혼한 적이 없습니까?"
"없어요."
왜,라고 물으려다 레슬리는 주저하였다. 그런데 길버트가 먼저 그 이유를 말해주었다.
"만나지 못했으니까."

- 똑바로 앞을 향하고 있던 40번 도로가 서서히 커브를 틀며 북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킹 맨에서 US 93번 도로와 합류하여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 동쪽으로 뻗어 있다. 맞은편 차선에는 차들이 뜸하고 헤드 라이트가 비추는 전방의 어둠에 마을의 불빛이 깜박거리자 왠지 마음이 들뜬다. 레슬리 역시 사막이 좋았다.
"자네는, 결혼 안 하는가?"
이번에는 길버트가 질문하였다.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졸음이 올 것만 같은 단조로운 드라이브였다.
"할 겁니다."

- 서부의 광활한 마른 대지.
그곳은 인디언인 레슬리의 할머니 일족이 쫓겨간 장소이기도 하다. 1만 년 전, 몽골의 추운 사막에서 생활했던 아시아 인은 비옥한 대지를 꿈꾸며 북 베링 해를 넘어 새로운 대륙으로 건너온 것이다.  
그러나 베린지아를 건너 비옥한 땅을 만났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얼음으로 갇힌 혹독한 땅에서 그들은 남쪽으로 이어지는 좁디좁은 길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질학자의 최근 연구 발표에 의하면 록키 산맥의 동쪽 기슭에만 얼음이 없는 길이 존재하는데 이 길이 없었더라면 인디언의 조상은 남하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필경 이 길을 통과할 수 있었던 인간의 수는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긴 모험 끝에 그들은 꿈에 그리던 비옥한 대지에 도착하여 행복한 생활을 추구하며 동으로 남으로 거주지를 넓혀갔던 것이다. 그런데 몇천 년을 이어 내려온 낙원의 생활이 유럽 문명이 들어오며 파괴되고 말았다. 
동남부의 비옥한 토지에서 살고 있었던 인디언은 개척자들이 서쪽으로 몰려옴에 따라 서쪽으로 서쪽으로 쫓겨 마침내 불모의 사막에 갇히게 되고 만 것이다. 레슬리가 그런 경위를 인디언 할머니로부터 직접 들은 것은 아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 할머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 부모님 대부터 동부 리치먼드에서 살기 시작했고 인디언의 피를 절반 이어받은 아버지는 장사에 뛰어난 재주를 발휘했다.
그 덕분에 일가는 도시에서 중류 이상의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아버지는 인디언 이야기를 별로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레슬리는 책들을 이것저것 뒤져보면서 수많은 상상을 했다. 꿈을 품고 아시아의 사막을 여행한 그의 조상은 대모험 끝에 새로운 대륙에서 행복한 생활을 실현하지만 끝내는 다시 사막으로 쫓겨나게 된다... 


- 레슬리가 사막에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길버트에게도 사막은 의미심장한 풍경이었다.
길버트는 우측 전방의 어둠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헤드 라이트의 불빛을 반사하는 물의 표면은 없었다. 그러나 이십몇 년 전 6월의 밤, 호수는 분명 거기에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잊을 수 없는 풍경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풍경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의미 없는 것일지라도 당사자에게는 인생을 좌우할 만큼 영향력을 행사한다. 길버트는 사상가답게 그 점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뉴욕에서 부랑자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던 시절... 폐허로 화한 빌딩의 배수구에 빠져 자신을 성찰하며 지낸 7일간의 경험... 그 후 신비 사상으로 경도되어 니콜라이 페드로비치와 친교를 맺게 되었다... 그리고 또 레슬리 음악과의 만남...

- 두 사람은 선 자세로 뒤얽혀 있었는데 그들의 알몸은 조그만 불꽃에 비쳐 빨갛게 빛나고 있었다.
옷을 입어도 야위고 맥없어 보이는 아서의 육체인데 이렇게 어둠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갑자기 듬직하게 보였다. 지나치게 하얀 정도인 피부색도 빨갛게 타오르는 모닥불의 빛을 받아 다소 검정색을 띠어 보이고 오히려 힘차게 생명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생명의 약동감. 생생한 광경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물은 내일이 되면 벌써 사라지고 없을지도 모른다. 

 

- 정지한 표면에서 피어오르는 물 알갱이의 반짝임이 보이는 듯도 하고 자신이 보고 있는 지금의 광경이 하도 신비해서 길버트는 자신의 감각이 이상해진 것은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나 감각이 이상해진 것이 아니라 그 광경이 너무도 강렬하게 머리에 각인되었을 뿐이다. 반달이 떠 있는 밤... 무성하게 자라있는 키 낮은 관목... 

아서는 화석처럼 구부리고 있던 다리를 쭉 뻗었다. 발끝이 자갈돌을 걷어차 수면을 흔들었다. 이따금 지나가는 헤드 라이트의 불빛에 드러난 아서와 멜라니의 모습은 마치 가지가 뒤엉킨 선인장 같았다. 선인장에는 살도 있고 가시도 있다. 게다가 상처를 내면 갈라진 살 틈으로 투명한 점액이 스며 나온다... 그러한 점도 비슷했다.

- "사라진 것은 아서 뿐이었소.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렇지 않지. 웅덩이도 사라졌으니까. 알겠나? 호수만큼 커다랗던 웅덩이가 하룻밤 사이에 사라져 버렸단 말일세. 아서와 함께 말이지."
"동화 속 나라 같은 세계로군요."
"그렇게 생각되겠지. 맞아요. 정말 그랬소. 그때... 웅덩이가 사막으로 빨려 들어가 없어졌을 때 아서의 음악도 데리고 가버리고 말았소."

- 특이한 인상을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레슬리가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그곳은 아무 특별할 것 없는 사막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길버트가 안내하지 않았더라면 혼자서는 도저히 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발치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면서 경사져 있는 그릇 모양의 움푹 패인 곳이었다. 드문드문 암석이 노출되어 있고 그 바닥에는 점토질 토양이 층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 위에는 투명한 물이 고여 있다. 
"이 움푹 패인 그릇 모양의 지형을 돌리네라고 부르지."

길버트는 바닥을 가리키며 그렇게 설명했다.

- 동굴 안으로 이어지는 코드에 발전된 전류가 흐르면 거대한 암흑에 반짝반짝 조명이 들어온다... 그 모습이 눈에 떠오를 듯하다. 안에서 명멸하는 빛을 생각하면 그다지 무서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입구 자체는 별로 넓지 않았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갈수록 천장이 높아지고 폭도 넓어졌다. 그리고 발치에 있는 급경사면은 입구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드넓은 홀로 이어져 있었다. 등 뒤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이 점차 희미해지고 레슬리는 축축한 바위에 발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로프를 손에 감고 몸의 방향을 뒤집어 등부터 안쪽으로 나아갔다. 
입구로 새어 들어오는 바깥 세계의 빛은 뒤틀린 모양으로 점점 멀어졌다. 어둠은 짙고 아까까지 강렬했던 햇살이 그림자를 감추고 이젠 써늘한 냉기가 몸에 닿았다. 

- 레슬리와 길버트는 아무 말없이 선반 바위에 서서 이 소우주에 넋을 잃고 있었다.
인공의 빛은 희미한 청색을 띠고 멀리 비출수록 옅은 초록색으로 번진 뿌연 그림자를 만들었다. 높은 천장에서 고드름 모양으로 늘어진 종유석, 바닥에 비죽비죽 돋아나 있는 석순. 개중에는 이 양쪽이 허공에서 서로 부딪쳐 고대 그리스의 우아한 이오니아식 궁전의 기둥을 연상케 하는 것도 있었다. 
천장 벽면을 타고 흘러내려 해파리 모양을 이룬 프로 스톤. 아마도 동굴 내부를 흐르는 기류에 연관이 있겠지만 중력을 거역하여 구불구불 구부러지면서 성장한 돌... 비단 커튼처럼 매끄러운 표면을 지닌 타블러스 타락타이트.
길버트는 레슬리에게 갖가지 종유석에 관한 설명을 해주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자연의 조형미... 그것은 유구한 세월의 흐름만이 이룰 수 있는 예술품으로 그 작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동굴 안에 있는 것은 모두 시간까지도 정지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사막 아래 땅속을 지나온 물방울은 바위틈의 가느다란 절개 부분을 타고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를 끊임없이 새기고 있는 것이다. 

- 레슬리는 앞쪽의 광대한 어둠을 건너다보았다. 그 이상 갈 수 없기는커녕 하루 종일 걸어도 그 끝에 도착할 수 없을 듯한 광대한 공간... 그러나 몇 걸음 걷지 않아 그는 길버트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어두컴컴한 탓도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그 경이적인 투명도 탓이었다. 자신의 발이 물을 밟고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오른발이 물을 튕겨 올리며 찰싹하는 소리를 냈다. 어느 사인가 앞쪽에 지하호가 펼쳐져 있었다. 
라이트로 수면을 비추어보아도 물과 공기의 경계선을 구별할 수 없었다. 빛이 물을 파고들어 가 바닥에 있는 돌에 부딪쳐 반사됐다. 빛은 처녀의 바다를 범하는 인공의 광선이었다. 물의 입자를 스치고 지나 매끈매끈한 돌에 이르자 빛은 여기저기로 반사하여 호수의 일부를 공중으로 띄워 올린다. 

- 레슬리와 길버트는 젖은 바위 위에 앉았다. 길버트는 배낭에서 위스키와 컵을 꺼내고 호수 물에 섞어 마셨다.

"자네도 마시려나?"
컵을 받아 들고 레슬리는 그 물을 한 모금 위로 흘려 넣는다. 아까부터 레슬리는 몇 번이나 한숨만 쉬고 있다. 너무나 감탄스러운 탓에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돌리며 이 세계를 돌아본다. 언어를 초월하는 세계. 무언가를 감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길버트가 왜 이 세계를 보여주고 싶어 했는지 알 듯하다. 백만 마디 말을 동원해도 전해지지 않을 감각이 자연스럽게 그의 몸 안으로 들어왔다. 수억 년 세월의 충적, 암흑의 세계, 우주의 시원, 절대 정지... 과연 교향곡 <베린지아>와 통하는 공간이다. 

- 길버트는 나지막한 말투로 이 지하 세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 수억 년 전 이곳은 바다 밑이었다. 그 무렵의 바다에 생식하고 있었던 방산충, 유공충, 방추충 등의 부유성 생물과 바다나리, 산호류, 조개류 등 생물의 유해가 바다 밑에 가라앉아 쌓여갔다. 그리고 거의 무한이라고 할 수 있는 긴 긴 세월이 흘러 엄청난 압력이 가해져 생물의 기원인 석회암이 만들어졌다. 
빛이 닿지 않는 바닷속에서는 칼슘이 화학반응을 일으켜 쌓이고 응고되어 석회암으로 된 것도 있다. 그리고 이런 바다 밑의 석회암 대지가 지상으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조산 운동 때문이었다. 대륙이 태어나고 그 바깥쪽에서 새로운 조산 운동으로 인한 산맥이 형성된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눅눅한 바람이 융기한 외벽에 차단되어 내륙은 건조한 사막으로 변해간다. 이렇게 하여 이 일대는 풍화되고 완만한 석회암 대지가 되었다. 사막에도 비는 내리므로 지표에서 지하로 스며든 물은 이산화탄소를 끌어들이면서 석회암의 갈라진 틈이나 균열 사이로 파고든다. 그렇게 하여 탄산을 품게 된 물은 석회암을 녹이고, 표면을 얇게 깎아내기도 하고 천천히 정성껏 쌓아가기도 하여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지하 세계를 창조한 것이다. 

- 레슬리는 일어나 발밑을 확인하듯 두세 걸음 걸어보았다. 여기가 바다 밑이었다니... 그렇게 감탄하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신기한 일은 아니다. 현재 인간이 살고 있는 대부분의 땅은 그 먼 옛날 바다 밑이었으므로, 더욱 신비한 것은 이 지하 세계가 무수한 생물의 죽은 잔재로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유구한 세월의 흐름과 엄청난 양의 죽음, 바다나리, 방산충, 레슬리는 그런 생물의 모습을 그림으로도 본 적이 없다. 바다나리라고 할 정도니까 틀림없이 나리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을 것이란 정도는 상상할 수 있다. 레슬리는 어두컴컴한 바다 밑에서 흔들리는 화려한 빛깔의 나리 꽃을 상상해 보았다. 
대충 이 지하 세계에 대한 설명을 마치자 길버트는 입을 꼭 다물고 말았다. 레슬리의 내부에서 음이 넘쳐 나오는 기미를 간파했기에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였으리라. 무심히 시계를 보았다. 지하 세계로 들어온 지 벌써 두 시간이 지나려 하고 있다. 왠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 "진화한 후각과 촉각만 유난히 발달한 생물이 그래도 살고 있는 겁니다."
무의미!
레슬리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형태조차 분명하지 않은 생물 따위가 그 어디에 존재 가치가 있단 말인가.
"눈에는 보이지 않는 미미한 존재지만 자연의 섭리에 따라 살고 있는 것이오. 그들만의 먹이사슬 속에서 이 닫힌 세계를 구성하며 살고 있는 것이오. 지상의 생물계와 전혀 다를 바가 없지."
찰싹, 또다시 조그맣게 물방울이 튀었다.
"소리뿐이겠지,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길버트는 무심히 말을 뱉었다.
소리뿐. 레슬리는 생각한다. ... 거의 나랑 똑같지 않은가. 몇 년 후 그가 살았었음을 증명하는 것은 그가 작곡한 음악뿐일 것이다.

- 물소리가 그쳤다. 맑은 울림을 뒤로 남기고 동굴 안의 생물은 몸속에 희미한 빛을 깃들이고 물속 깊은 속으로 잠기고 말았다. 레슬리는 이때까지도 동굴 안의 생물이 내기 시작한 빛이 그의 손전등의 빛을 받아 저장된 것임을 알지 못했다.
레슬리의 몸속에서 음이 소용돌이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서둘러 배낭에서 노트를 꺼내고 헬멧의 헤드 라이트를 비추면서 음의 파도가 좀 더 가까이로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목에 걸려 있는 돌 펜던트를 셔츠 밖으로 꺼내서는 왼손으로 꼭 쥐었다가 손을 폈다. 

 

- 붉은 사슴이 약동하고 있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이 붉은 사슴의 그림이 자기를 지켜보는 가운데 작곡하지 않으면 생각대로 되지 않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할머니로부터 아버지에게, 그리고 레슬리에게까지 전해진 유품은 펜던트라고도 할 수 없는 그저 납작한 돌에 붉은 사슴의 그림이 새겨져 있는 보잘것없는 것이다. 그래도 이 펜던트에는 레슬리의 체세포 깊숙이에 잠들어 있는 인류가 아직 젊었을 당시의 꿈을 환기시키는 에너지가 넘실거리고 있다. 

 

- 음은 다른 세계에서 찾아왔다. 음악은 레슬리의 몸속에서 솟아오르는 것이 아니었다. 신체의 외부에서... 그렇다. 정말, 저 먼 다른 세계에서 레슬리를 향하여 돌진해 왔다. 레슬리는 그저 펜을 쥐고 써 내려가는 게 고작이었다. 어떤 곡이 흘러왔는지 도저히 말로써는 표현할 수 없다. 다만 답답했다. 흘러가는 음을 다 줍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며 그는 날아가고 있는 펜의 속도가 굼뜨고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없는 지고한 경험이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이 이상의 경험이 불가능하다면 그는 이제 작곡을 한다는 작업의 의미를 느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축소 재생산을 되풀이하는 것은 그의 방침이 아니었다. 

- 육체가 낙하 속도를 견디지 못하여 의식이 멀어져 갔을 때 레슬리는 폭포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것의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 속의 소리인지 아니면 실재하는 소리인지 분간이 안 갔다.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상쾌한 이미지는 한 여름의 싱그러움을 연상케 하였다.
그런 태평스런 망상을 깨부수듯 돌연 레슬리의 몸이 이질적인 매체 안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수면에 부딪친 격렬한 충격과 함께 입과 코를 통해 대량의 물이 위 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때서야 간신히 자신이 지하호 속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레슬리는 호흡을 멈추고 눈을 감은 채 맑고 투명한 물속에서 몸을 빙글빙글 돌려보았다. 어느 쪽이 위고 어느 쪽이 아래인지 전혀 알 수 없다. 잇달아 찾아온 불의의 습격을 견디지 못하여 머릿속은 완전히 공황 상태였다. 만약 한 번만 더 당하면 발광하고 말 것이다. 레슬리는 겨우겨우 몸을 정지하고 냉정함을 되찾으려 애썼다. 
당황하지 말고 부력에 몸을 맡기면 된다.
이렇게 간단한 일이라도 막상 하려고 마음먹으면 상상 이상의 정신력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대개 죽음에 대해서는 거센 저항을 시도하지만 그 몸부림이 오히려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 그때였다. 대지가 흔들린 것은... 땅속에서 밀고 올라오는 것처럼 건물이 휘청하여 플로라는 자기도 모르게 냉장고 문을 잡았다. 지진을 만나다니 오랜만의 경험이었다. 
샌디에이고에서 살았던 어린 시절에는 몇 번인가 지진이 있었다. 그러나 동부해안으로 이사를 하여 환태평양 조산대로부터 멀어진 이후로는 지진과의 인연도 멀어졌다. 진도 4 정도의 지진은 몇 초만에 가라앉았지만 플로라의 심장의 고동은 여전히 격렬하게 쿵쿵거렸다.
활짝 열려 있는 냉장고에서 새어 나온 빛에 촉발되어 무슨 야채가 썩는 듯한 냄새가 코끝을 스친 것 같았다. 돌연 어지럽게 바뀌는 장면이 잇달아 뇌리에 비쳐졌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어디에선가, 무언가, 거대한 것이 근접하고 있는 예감... 맥락도 없이 파도 소리가 들리고 소금 냄새가 풍겼다. 멀리서 개가 짖고 있다. 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는 소리도 들렸다.
원색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야자나무의 잎새 끝이 햇빛을 반사하는 모습... 후미진 바다에서 노 저으며 움직이는 보트의 실루엣,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둔탁하게 번쩍이는 쇠막대기는 하늘을 향하여 죽 늘어서 있다.
가슴이 죄어오는 듯한 생각, 그리고 환상과도 같은 장면이 순간 색을 바꾸고 마침내는 바다까지도 검게 칠해진다. 분노도 아니고 공포도 아닌데 바싹바싹 다가오는 이 거센 감정. 거대한 바다의 꿈틀거림, 피와 세포의 소용돌이...

 

- 플로라는 불현듯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대체 뭐지? ... 지금 그것은?
플로라는 손으로 벽을 짚어 몸을 지탱하고서 호흡을 거칠게 몰아쉬며 눈을 부릅떴다. 이런 사막 한가운데 있으면서 느닷없이 바다의 정경이 눈앞에 펼쳐지다니... 그 인상적인 장면은 소금 냄새를 풍기면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지나갔다.
지진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밖에 할 수 없다. 불가사의했다. 정말 바다와 야자나무로 덮인 섬의 풍경... 틀림이 없다.

- 기시감이란 것과는 조금 다르다. 과거 언젠가 한 번 본 적이 있는 풍경이라기보다 과거에 언젠가 한 번은 느껴본 적이 있는 감정이라고 하는 편이 적합하다. 그 감정이 예고하고 있었다.
 
- ... 저녁때까지 기다리자.
당연한 결론이었다. 그리하여 저녁거리라도 사들이자 싶어 오프 로드의 키를 손에 집어 들었다. 무언가 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지만 지금 플로라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역시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레슬리는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검정 숯을 몇 겹이나 처바른 듯한 어둠의 농도가 뭐라 형용할 길 없이 그저 까맣기만 하여 간혹 사람의 이름마저 잊게 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어둠의 압박감이 더해가는 듯하다. 물속에서 바위 위로 막 올라왔을 때보다 지금의 공포감은 한층 도를 더하고 있다. 
"레슬리... 레슬리..."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길버트의 목소리가 지옥의 심연에서 손짓하는 악마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암흑은 제멋대로 상상력을 자극했다. 바로 곁까지 저벅저벅 다가온 실체가 없는 생물의 감촉... 암흑의 뻘에 둘러싸여 실은 이미 몸의 대부분이 땅속을 기어 다니는 벌레에 뜯겨 먹히고 말았다는 환상... 통증을 느꼈다. 동시에 온몸 여기저기가 가려웠다. 등과 옷 사이에 무언가가 파고들어가 돌아다니고 있다. 손과 발을 허둥지둥 움직이며 레슬리는 환각 속에서 생긴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피부 감촉을 떨구어내려 하였다.  

- 길버트의 손이 더듬더듬 기어올라와 레슬리의 어깨 언저리에 닿았다. 그런 상태로 길버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시간 감각이 없어지려 하고 있었다. 침묵만 지속된다면 시간을 잴 척도를 잃고 만다. 어떤 말이라도 좋다. 무슨 말이라도 주절거리지 않으면 정신의 균형이 무너지고 만다. 어둠의 무게는 무시무시하게 덮쳐오고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면 짓눌려버릴 것만 같았다. 

- "지금 자네가 만든 곡 말인데... 그거, 그러니까, 즉... 자네가 만든 것인가?"
길버트의 말을 듣고 레슬리는 숨을 죽였다.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인해 사고력에 무슨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죠? 길."
"아, 그러니까, 오해는 말아주게, 난 음악가가 아니니까. 잘은 모르겠지만... 음악 그 자체가 이 공간에 있어서... 음, 자네한테는 있지만 나 같은 문외한에게는 들리지 않지. 그러나 탁월한 음악가의 귀에는 음악 소리가 들려... 알겠는가. 내가 하는 말..." 

- 이번에는 레슬리도 알 수 있었다. 그 자신이 방금 전 똑같은 의문을 품었기 때문이다. 음악은 몸속에서 샘솟는 것이 아니다. 저편에서 그를 향해 돌진해 왔다고 표현해야 마땅하다. 이미 이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음악이 레슬리라는 육체를 통해 악보라는 표현 형태로 모습을 바꾼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다른 곡을 작곡할 때도 많든 적든 간에 이와 비슷한 체험을 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자신은 완전히 대변자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품고 말았다. 
"그래요, 길. 당신의 말대롭니다. 나는, 이곳에 차 있는 공기의 속삭임을 들었습니다."
비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음악가에게는 지고한 체험이었다. 속삭임을 듣는 인간으로 선택받은 셈이니...

 

- "천재에는 두 가지 타입이 있다고 생각해 왔네."
길버트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즉... 발견과 창조야. 과학적인 천재는 영감을 받아 우주의 법칙을 발견하지. 그리고 예술가는 역시 똑같은 힘으로 창조를 행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네... 그런데, 문득 어느 때, 어쩌면 그 양쪽 다 어떤 의미에서는 발견일지도 모르겠다고... 창조란 요컨대 새로이 태어나는 것이지만 그건 인간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 아닐까 하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되었네. 자네가 내 말을 알 수 있을까!"

레슬리는 대답을 하는 대신 길버트의 손을 쥐었다.

- "... 아아, 그러니까... 우주에는 완전한 아름다움이 떠다니고 있어. 자네같이 탁월한 음악가는 그것을 발견하고 재생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지... 듣고 싶었다네, 나도... 자네의 머리에 울려 퍼진 음악... 이제 힘들겠지만... 자네, 이지하 공간에 부유하고 있는 음악은..." 
길버트는 숨이 막혀 컥컥 기침을 하였다. 호흡이 고르지 않았다.

- "길, 아까도 말했지만 난 당신한테 감사하고 있어요. 음악은 이 세계에 가득 차 있습니다. 정말 멋진 곡이 울려 퍼졌어요."

"그래, 자네는... 발견한 거야."
발치에서 물소리가 들린다. 처음에 레슬리는 그것이 그저 물방울이 방울져 떨어지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음악가의 귀는 그 소리의 주인에게서 생물의 냄새를 맡았다. 예를 들면 손을 물속에 넣고 가볍게 휘저을 때 나는 소리 혹은 수면 위로 물고기가 튀어 오를 때의 소리... 보다 예민하게 귀를 기울이고 레슬리는 소리의 정체를 밝혀내려 하였다.  
그렇게 귀 기울여 들으니 소리의 원천은 하나가 아니다. 지금까지 암흑과 정적에 싸여 있다고만 생각했던 이 공간에도 많은 종류의 소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익숙해지면 이곳에서도 앞이 보이게 되지 않을까, 그런 착각마저 일으킬 정도로 수면을 헤엄치는 동굴 안 생물들의 물소리가 커졌다. 

- 물은 바로 눈앞에서 부서졌다. 그리고 아래서 들어 올리는 것처럼 몸이 떠오르려 했지만 레슬리는 부력을 거부하며 바위를 더욱 힘껏 껴안았다. 목 바로 아래까지 물에 잠기자 미끈한 감촉을 남기고 무수한 동굴 안 생물들이 목덜미를 스쳤다. 파도가 물러가고 이전과 똑같은 정적이 찾아오기까지 레슬리와 길버트는 말을 나눌 수도 없었다. 레슬리는 눈을 감고 식을 대로 식은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
... 이런 일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이런 불의의 습격은 참을 수가 없다. 한참이나 몸의 떨림이 계속되었다. 길버트는 한껏 간격을 두고 짧은 숨을 뱉고 있다. 그것만이 살아 있다는 유일한 증거였지만 호흡의 간격은 서서히 늘어나고 있었다. 레슬리는 그런 길버트가 걱정스러웠다. 

- 길버트는 힘주어 말했다.
"물론 나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자네라면 할 수 있어. 나를 위해서라도 탈출해 주기를 바라네."

- "아아. ... 어젯밤 잠깐 말을 꺼냈었는데. 나 역시 자네와 같은 나이에 맨해튼의 낡아빠진 건물 옥상에서... 배수구에 굴러 떨어졌네. 그리고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서 일주일 동안이나 그냥 지냈지. 그때의 상황과 지금이... 비슷해. 절대로 자력으로는 기어오를 수가 없는 곳이었는데 나는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아주 강렬하게 바랐네. 그리고 나는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도시의 태동을 들었지. 바닥에 얇게 고인 빗물에 몸이 뜨는 감각마저 느꼈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어. 나 혼자 힘으로 탈출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구출해 준 것인지... 아무튼... 나는, 바깥 세계에 있었어. 그러니까 자네도... 여기서 나가주기를 바라네."
착란 상태에 빠진 것은 아닌가 하고 레슬리는 불안스러웠다. 말투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지만 길버트의 조그만 몸에서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열의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최후의 생명력을 쏟아부은 말에는 힘이 담겨 있었다. 

- "종유동 입구에 지층이 있었는데 자네도 보았겠지... 지구상에 생명이 탄생한 이래... 무수한 생명이 태어났다가는 죽고, 또 태어나서는 죽어갔네. 끊임없는 그 반복. 끝없는 반복. 생각하면 지겨워져. 무의미하다면 그뿐이지. 이 종유동의 생성과정... 아까 말한 대로네. 생물의 사체가 바다 밑에 축적되어... 생긴 거야. 나는 여기에서 지층의 일부가 되겠네. 운명은... 피할 수 없어. 그러나 자네는, 바깥 세계로 나가야만 하네. 무의미한 반복이라도 설사 무의미한 반복이라도, 밖으로 나가. ... 사는, ... 의미는, ... 있네!"

- "길, 그럼 가르쳐 주세요. 어떻게 해야 내가 밖으로 나갈 수 있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구요, 이 암흑으로 뒤덮인 세계에서 어떻게 출구를 발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세계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런 것은... 암만 세월이 흘러도 알 수 없는 법이네."
"그런 걸 묻고 있는 게 아닙니다."
길버트는 한참 간격을 두었다.
 
- "알겠나, 레슬리. 세계의... 얼개를 알고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어. 그러나 자네라면... 근접할 수 있어. 베일을 한 겹 한 겹 벗겨내! 행동하는 거야... 나중에 밝혀지는 게 있을 거야."
레슬리는 길버트의 입 가까이로 귀를 갖다 댔다가 다시 가슴으로 갖다 댔다. 호흡이 정지돼 있다.
 
- ... 어떻게 하면 좋지?
레슬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목에서 펜던트를 풀어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보아 낯익은 붉은 사슴 그림은 암흑 속에서도 명료한 윤곽으로 떠오른다. 눈을 감고 그림의 모양을 떠올리자 붉은 기가 한층 짙어지며 앞다리를 들고 하늘로 하늘로 손짓하고 있었다.
음악으로 부추겼던 것, 생명력을 들끓게 하였던 것, 그 모든 것이 이 안에 응축되어 있다. 레슬리는 손을 펴고 펜던트를 바위 위에 놓아보았다. 뇌리에는 또렷하게 붉은 사슴의 상이 남아 있다...

 

- ...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답은 간단했다. 우선 행동하는 것이다. 쉬지 않고 싸움으로써 자칫하면 절망에 빠질 수도 있는 정신을 정상적으로 유지한다. 그 이외에는 없었다. 길버트가 한 말 대로다. 다른 방법은 없다. 
레슬리는 붉은 사슴 펜던트를 길버트의 목에 걸어주고 두 손으로 그것을 꼭 쥐었다가는 다시 가슴 위에 살며시 올려놓았다. 길버트를 여기에 남겨두고 가면서 레슬리는 그의 영을 지키는 존재로 붉은 사슴을 남겨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몸을 떠나서도 붉은 사슴의 정령은 반드시 나를 인도해 줄 것이다. 

- 얕은 잠이었다. 플로라는 눈을 뜨자 동시에 몸을 경직시키고 그 자세로 숨을 죽였다.
... 아, 지금부터 대지가 흔들린다.
돌연 그런 생각을 품자 가슴이 방망이질을 하였다. 그로부터 꼭 10초 후 밑에서 쳐올리는 것처럼 대지가 흔들렸다. 어제 오후에 일어났던 지진처럼 진도나 요동하는 모양이 똑같았다. 플로라는 침대 옆에 있는 나이트 테이블에서 시계를 찾았다. 오전 4시를 가리키고 있다. 시계를 쥔 손을 내리려는 플로라의 뇌리로 어제와 똑같은 영상이 전개되었다. 
흙냄새. 그리고 소금 냄새. 바다와 남국의 낙원, 세찬 파도소리...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돛대.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예감... 거대한 것이 지금 다가오고 있다.

- 플로라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다시금 지진으로 인하여 본 적도 없는 남해의 영상이 흐른 것이다. 더구나 이번에는 지진까지 예감했다. 영상은 완전히 흘러가버린 것이 아니었다. 아직도 무언가 머리 한구석에 거치적거리는 것이 있다. 붉은색을 한 거대한 뿔을 지닌 동물... 넝쿨이 휘감고 있는 거대한 석상...
플로라는 흠칫 놀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목욕탕으로 달렸다. 목욕탕까지 가는 짧은 시간 동안 그녀의 희미하던 왼팔의 점이 또렷한 모양을 이루어 뇌리에 정착했다. 그녀는 잠옷 윗도리를 벗고 왼팔을 내밀고 거기에 있는 청보라색 점을 거울에 비쳐보았다. 
지금까지 의미를 이루지 않았던 무늬에 간신히 딱 들어맞는 해석이 내려졌다. 사슴이다. 플로라는 왼팔을 올렸다 내렸다 하였다. 움직임을 따라 사슴은 피부 위에서 약동한다. 현기증이 일었다.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세포의 기억이 잇달아 넘쳐흘렀다. 동시에 이유도 없이 눈물을 흘렀다. 변해가는 자신을 또렷하게 인식할 수 있다. ... 지금까지와는 다른 자신으로... 

- 플로라는 창가로 다가가 뿌옇게 밝아오고 있는 동쪽 황야를 보았다.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이미 분명했다. 어젯밤에는 늦게까지 레슬리의 도착을 기다렸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달리 어찌해야 좋을지를 몰라 그냥 잤다. 그러나 새벽녘 지진으로 강렬한 영감을 받은 것이다.
동쪽으로 향하라. 동쪽의 사막으로.
행동을 취하라. 붉은 사슴이 너를 인도할 것이다. 

 

- ... 우선은 행동으로 옮겨라.

힘찬 목소리가 들렸다. 핸들을 쥐고 있는 플로라가 저도 모르게 백미러를 들여다보았을 정도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과 싸워라.
여운과 함께 사라지는 그리운 목소리... 그립다고 느낀 것에 플로라는 놀란다. 목소리는 파도 소리와 함께 작아졌다가 끝내는 사라졌다.

- 레슬리는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고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를 맞고 있었다. 균열에서 흘러 떨어지는 수량은 지진 때문에 불어나 있었다. 이렇게 직접 물벼락을 맞고 있으니 바로 위가 지상의 세계와 통하는 길이 있다고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다. 암흑에 싸여, 혼돈이 지배하는 속에서 레슬리는 감각만에 의존하여 이 지형을 파악하려 하였다.
 
- 레슬리는 지금 또 절벽을 기어오르며 물이 떨어지는 머리 위쪽의 균열을 향해 튀어나온 종유석에 팔을 휘감고 위로 위로 자신을 밀어 올리고 있다. 발을 헛디뎌 지하호로 다시 떨어진다 해도 상관없다. 다시 또 처음부터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두렵기는 하지만 그저 그뿐이었다.
이 반복을 거듭하는 사이에 생명의 불이 꺼져도 레슬리는 세계를 원망할 마음이 없었다. 절벽은 몇 겹의 겹쳐진 주름으로 덮여 있어, 발 디딜 자리가 없어 곤란한 경우는 없었다. 레슬리는 붉은 사슴의 모습을 뇌리 속에서 약동시키며 플로라의 목소리를 그 모습에 중첩시켰다. 그리고 한 걸음 또 한 걸음 주름 사이로 발을 밀어 넣고 높은 곳으로 조금씩 조금씩 자리를 옮겼다. 

- 되찾는 거야, 되찾는 거야. 잃어버린 것 모두...

혼란 속에서 플로라는 염원했다. 따질 것도 이유도 없었다, 왜 되찾는지.

레슬리를... 레슬리와는 아직 만난 적도 없다. 그런데도 되찾으라는 목소리. 힘의 원천은 거기에 있었다. 

- 플로라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원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이상의 힘을 느낀다. 굵은 두 팔이 자신의 팔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듯한 힘이다. 플라스틱 용기는 발전기의 상부까지 올라가 있다.

- 물속에 사는 무수한 동굴 생물들이 처음으로 받는 눈부신 빛을 받아 움직임이 활발해진 것이다. 그 동굴 안에 사는 무채색생물들은 체내에 빛을 보존하는 기관을 갖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받은 빛을 체내로 흡수하자 동시에 스스로도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렌지 색을 띠고 있는 라이트와는 달리 그 빛은 뽀얀 우유색으로 한번 불이 붙은 이상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여기에 사는 생물들은 이 빛을 체내에 품고 살아가리라. 


- 빛은 잇달아 옆에 또 옆에 있는 생물에게도 전파되어 라이트를 중심으로 파문처럼 퍼져나갔다. 그리고 땅속 호수는 마침내 그 광대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반짝반짝하는 불빛은 순식간에 바다 전체를 덮고 수평선 비슷한 것을 부각시켰다. 공기의 층은 동굴 안 생물들이 발하는 빛을 받아 연초록색을 띠고 완만한 커브를 그리는 수평선은 우유빛 호수와 연초록색 하늘 사이로 쓱 그어져 있었다. 

- 하늘과 땅이 뒤바뀐 세계... 지금 레슬리가 보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그런 세계였다. 투명한 바닷속에서 빛을 깜박이는 생물들은 아무리 보아도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처럼 보였다. 그러나 레슬리는 그런 꿈의 세계에 빠져 있을 시간은 없었다. 그는 간신히 이 현실을 납득하고 제일 먼저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파악하려 하였다. 
  
- 파도가 눈앞을 거의 가리며 지금 당장이라도 천장에 닿을 듯한 기세로 몰려왔다. 간신히 균열 사이로 몸을 던지자 빛의 반점이 바로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바람의 압력이 레슬리의 몸을 밀어 올리자 그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종유석 사면으로 단숨에 뛰어올랐다.
파도는 천장으로 치솟았을 뿐만 아니라 틈이란 모든 틈에는 파고들어가 레슬리의 등을 위로 한층 밀어 올렸다.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것은 지구 내부의 태동이라고... 
지진과 해일은 진통이었다. 그리고 물로 인하여 몸이 밀어 올려진 기억... 그것은 과거에 한번 경험한 적이 있었다. 양수에 밀려 세상으로 밀려 나와 세상의 공기를 접하고 눈부신 빛에 눈을 깜박거렸던... 그 기억. 
 
- 이 상태로 물이 빠져나가기를 기다리는 길밖에 없다. 강한 압력 속에서 빛의 입자는 미끈한 감촉을 남기고 뒤쪽으로 퉁겨나갔다. 동굴 생물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구경하는 별세계 여행을 끝내고 원래 자신들이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만약 지금의 이 정경을 훨씬 더 높은 곳에서 바라본다면 과연 어떤 식으로 보일까.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빛의 입자는 온통 밤하늘을 뒤덮은 유성 군처럼 보였을 것이다. 
  
- 그녀의 긴 머리칼의 색은 인디언 여성을 닮았는데 물에 젖어 반짝이는 광택으로 보아 보다 가늘고 부드러운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머리카락이 뺨에 달라붙어 동그스름한 얼굴 윤곽을 또렷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매끈한 갈색 피부. 그리고 파란 눈동자를 안에 깃들이고 적당하게 들어간 두 눈. 아래를 향하고 있던 그녀가 얼굴을 들어 레슬리를 보았을 때 이마를 타고 내려온 물줄기가 눈으로 들어가 한결 큰 방울이 되어 흘러내렸다.
플로라와 레슬리의 시선은 그대로 공중에서 맺어졌다. 한 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고 레슬리는 한 걸음 두 걸음 플로라에게 다가갔다. 바로 저기에 있다는 감개가 끓어올랐다. 목적한 사람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알리는 소리가 들린다. 처음 보는 플로라의 몸. 그럼에도 세포 하나하나의 끌어당김을 강하게 느낀다. 

- 뭘까! 이 감각.
육체의 여기저기서 신화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부글거린다. 놀람과 환희로 그런 감각을 만끽하면서 레슬리는 형용할 길 없는 충만감에 젖었다. 발치에서 찰랑거리던 물의 흐름도 가라앉았을 즈음 바위 뒤에서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한 장의 종이가 흘러왔다. 물에 떠 있는 두꺼운 종이는 레슬리의 곡이 담겨 있는 악보였다. 
음표는 물에 번져 사라지고 이미 악보라고도 할 수 없었지만 플로라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악보를 잡으려 하였다. 소중한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종이는 그녀의 손을 스르륵 빠져나가 균열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앗, 하고 소리를 지르며 플로라는 레슬리의 얼굴을 보았다. 고개를 약간 옆으로 저으며 레슬리는 웃고 있었다.
... 이제 아무 상관없어, 그런 것은 흘러가버려도 전혀 상관없다고... 
그의 표정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붉은 사슴 펜던트도 레슬리의 음악도 깨끗하게 물에 흘러가고 말았다. 게다가 플로라는 아직 모르고 있지만 그녀의 왼쪽 어깨에 있는 점, 청보라색 사슴의 그림도 서서히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야 그것이 사슴의 그림이라는 걸 알았는데 사슴 그림은 이제 사라지고 있었다. 그들이 운명적으로 만나기 위해 끈의 역할을 했던 그것이 끝난 것이다. 

- 레슬리는 생각 이상으로 늠름했다. 사진과 비교해서인가, 아니면 기억에 남아 있는 먼 옛날의 모습과 비교하고 있는 것일까. 플로라가 상상한 레슬리보다 실물 쪽이 한결 더 늠름했다. 그들이 만나기 위해 지나온 그 많은 시간 속의 의지, 생명력의 여운이 몸 여기저기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찰과상을 입은 손과 발, 종유석을 붙잡아 피범벅이 된 두 손바닥. 통증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고 한쪽 다리를 끌면서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그의 모습은 위엄으로 가득 차 있었다. 

- 그렇게 얼굴과 얼굴을 가까이하고 그들은 여전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두 사람은 1만 년 전 그 옛날, 자기들의 조상이 아시아의 어느 땅에서 헤어져 각기 북쪽과 남쪽 길을 더듬어 태양이 솟는 방향... 동쪽으로 향했다는 초(超) 과거의 역사를 모른다. 두 사람은 이유도 모르면서 지금 그 힘을 실감하고 있었다. 세포 하나하나가 과거의 정열을 재연소시키고 있었다.

- 두 사람은 바위 뒤에서 일어나 사방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물은 거의 균열 사이로 빠지고 말았지만 점점이 아주 조그만 웅덩이가 되어 남아 있었다. 그 안에는 미처 제 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생물들이 몇 마리 있었다. 어떤 한 마리는 그릇 모양의 웅덩이에서 빙글빙글 회전하면서 떴다가는 가라앉았다. 그것은 물속의 반딧불처럼 귀여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웅덩이는 땅 속 호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작아서 그 점을 생각하면 여기 남아 있는 동굴 생물이 애처롭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들 또한 빛을 깃들인 생물로서 다른 진화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 이제 레슬리와 플로라 그리고 여기에 남겨진 동굴 생물 이외는 모든 것이 땅속 호수로 쓸려가고 말았다. 레슬리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던 음악도 다시 기억해내려 했지만 마치 머리 속까지 물에 씻겨 내려간 것처럼 테마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그것은 때와 함께 멀어지는 꿈의 기억을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 음악이 훌륭한 곡이었다는 것만은 선명해서 레슬리는 얄궂게도 그 인상만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았다.  

- 밖은 이미 완전한 아침이었다. 움푹 패인 그릇 모양의 지형이라 여기서는 보이지 않지만 비탈을 올라 돌리네 테두리에 서면 동쪽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비탈을 올라갔다. 생각했던 대로 동쪽 하늘에는 우유빛으로 타오르는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눈부신 햇살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 하나 없었다. 눈부신 탓에 눈을 가늘게 뜨고 태양을 우러르자 갈래 뿔을 지닌 사슴이 태양을 향하여 날아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환상이리라... 
그러나 두 사람 다 말은 하지 않아도 자기 눈에 비치는 영상이 상대방의 눈에도 비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아침의 사막은 그나마 시원했다. 먼 옛날 함께 살았던 아시아의 대지와 어딘가 모르게 풍경이 비슷하다. 

- 긴 여정이었지만 간신히 두 사람은 출발점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새로운 생활을 향하여 이제 첫걸음을 내디디려 하고 있었다.

 

- <3장 사막>

 

 


 
작품해설



<낙원>은 일본 판타지 노벨 대상의 제2회 우수상을 수상한 스즈키 코지의 데뷔 작품이다. 책이 발행되자 나는 곧바로 그 책을 읽었다. 그 전해, 제1회 대상을 수상한 사카미 겐이치의 <후궁 일기>가 상당히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판타지 문학의 무대를 중국 명나라의 후궁으로 설정한 놀라움과 그의 박식함이 유감없이 발휘된 경쾌함, 그리고 표표하고 강건한 식견으로 잘 짜여진 구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제2회에서는 어떤 작품이 선발되었을지 읽기도 전에 가슴이 설레었다.

그리고 이 책을 받고 <낙원>이라는 무한한 공상을 부채질하는 제목을 보았을 때, 또 제1장-신화, 제2장-낙원, 제3장-사막, 이란 심플하고도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목차를 보았을 때 엄청난 이야기가 전개될 듯한 예감이 들었다.  

그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나는 행복한 한숨을 쉬면서 이 작품을 읽었던 것이다. 우선 제1장 <신화>. 장의 제목이 좋았다. 모든 이야기, 인간이 현실을 뛰어넘어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시작은 신화다. 신화는 가장 오랜 판타지다. 

 

선사 시대의 중앙아시아, 무력이 절대적이었던 가부장제 유목민의 싸움과 약탈. 그곳에서 여자는 가축이나 다름없는 전리품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동물의 정령과 초능력자의 예언을 믿었다. 그런 생활 속에서 어떤 부부가 부족 간의 혈투에서 패하여 헤어지게 된다.
아내는 아시아 대륙을 북상하여 베링 해를 건너 신대륙으로 끌려간다. 남편 보그도는 다른 길로 아내를 좇아간다. 즉 남아시아까지 내려가 배를 만들어 태평양으로 노를 젓는다. 붉은 사슴 정령의 인도를 받으며... 

제2장 <낙원>에서는 헤어진 부부가 놀랍게도 중세를 뛰어 건너 유럽의 대항해 시대로 세월이 흘러 있다. 그리고 무대인 남태평양의 작은 섬에서는 제1장의 가부장제와는 싹 바뀌어 여신을 숭배하는 모계사회의 마을이 평화롭게 살고 있다가 서양의 백인들에 의해 멸망해 간다. 신성(神性)이 깃들어 있는 섬의 아가씨라이아와 어린아이처럼 무구한 백인 청년 존스와의 사랑이 어떻게 맺어지는가도 재미있다. 
이 부분은 심사위원들이 절찬해 마지않던 대로 그야말로 콘래드나 멜빌을 연상케 하는 남양 모험담이다. 남쪽 섬에서 해적 비슷한 선원들이 자기들끼리 모반을 일으키고 투쟁을 벌이는 전개를 읽으며 나는 스티븐슨의 <보물섬>을 연상했다.

바다의 색이 누렇게 변하는 서두로부터 독자는 해저 화산이 분화하든가 불길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예감한다. 그런 긴장감에 가슴을 두근거리며 읽어 나가노라면 마침내 지진이 일어나고, 해일에 거대한 뗏목을 띄운 라이아와 존스 두 젊은 연인들은 다시 태평양을 건너 동쪽으로 향한다. 

그건 그렇다 치고 섬의 산중턱에 붉은 사슴을 새긴 바위가 나타났을 때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동했다. 태고의 보도는 바다를 건너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리고 힘이 다하기 전에 붉은 사슴의 전설을 남기고 재회할 수 없었던 아내를 생각하며 죽어간 것이라고... 

그리고 제3장 <사막>.
현대 미국의 러브 로맨스에 SF 소설을 더한 듯한 재미! 땅속 바다에 땅속 사람들이 사는... 등의 소설에 과거 조마조마해하면서 열중했던 일을 기억했다. 지저호에서 지진을 만난 작곡가 레슬리를 여성 편집자가 구해내 두 사람은 맺어진다. 남자는 인디언 계, 여자 또한 갈색 피부를 지닌 오세아니아 계... 즉 태고에 헤어진 부부가 윤회 전생하여 전세의 기억을 밑바탕으로 재회한 듯하다.

그리고 제3장에서는 레슬리가 <베린지아>를 작곡한 의도에 이 작품의 핵심이 숨겨져 있다. 좀 길어지지만 인용해 보자.


"3부로 구성된 교향곡 <베린지아>는 우주의 시원으로부터 시간의 흐름을 따라 완성, 통일, 질서로 향하는 상태를 음으로 표현하려 한 곡이다."

 

"그 먼 옛날, 약 1만 년 이상이나 먼 옛날, 홍적세 빙하기의 마지막 시대에 인디언 조상은 멀리 아시아에서 베링 해를 지나 새로운 대륙을 향하여 파상적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인디언 조상들은 북극의 얼음에 덮인 길을 '베린지아'라고 불렀다. 레슬리는 우주의 생성 유전을 얼음이 덮인 길을 건넜던 아시아 인들의 초창기 시절의 꿈과 접목시키려 하였다. 그는 생각한다... 생성으로 향하는 카오스 속에 장래를 결정하는 의지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동시에 1만여 년 전, 아시아 사람들의 마음을 충동질하여 얼음이 덮인 베린지아를 걸어 건너게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 정체에 한없는 흥미를 느꼈다. 그들은 빙하길 너머에 비옥한 땅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꿈이라도 꾼 것일까. 민족의 생성 유전... 그리고 우주의 생성유전, 교향곡 <베린지아> 안에는 이 두 개의 요소가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

이 레슬리를 작가 스즈키 코지로 환치시키면 어떨까. 이 작품 <낙원>은 고대의 부족 투쟁, 낙원의 멸망, 붕괴하는 땅속의 카오스를 지나 통일, 질서로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다. 그리고 몽골에서 미국, 마침내는 남미까지 퍼진 몽골로이드(황색인종)의 생성유전을 그리고 있다. 즉 이 소설은 교향곡 <베린지아> 그 자체이며 이것은 몽골로이드의 내력을 그린 새로운 판타지인 것이다. 

지금까지 판타지라고 하면 아더 왕 전설에 뿌리를 두고 있는 용감한 기사들의 사랑과 모험을 그린 이야기, 중세의 연금술사나 마술, 켈트의 요정 민화, 북유럽의 거인 전설, 그리스·로마 신화, SF적인 우주나 타임 트래블 류의 꿈이 있는 메르헨 등 서양의 소재를 모티브로 한 것이 많았다.

물론 일본에도 판타스틱한 문학의 전통은 있다. 예를 들면 <다케토리 모노가타리(竹取物語)>로 시작하여 <곤자쿠 모노가타리(今昔物語)>, <오토기조시(御伽草子)>에도 시대의 괴기 소설, 그리고 미야자와 겐지, 시부사와 다츠히코(涉澤龍彥)의 작품도 이 부류에 속할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 일본의 판타지는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그것은 단순히 서양의 지식에 경주한 판타지도 아니고 과거의 일본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닌 그 양자를 일단 잘 곱씹어 소화한 지점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그리고 그런 작품이 바로 <낙원>이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유럽 고대 게르만 인의 서방 대이동 혹은 십자군의 중동 원정의 이야기를 읽었다. 그러나 몽골로이드가 유라시아 대륙에서 육로나 수로를 통해 멀리 미국 대륙까지 건너간 소설을 지금까지 읽은 적이 있던가.

또 <보물섬>이나 <로빈슨 크루소>로 대표되는 유럽의 모험담은 아시아나 아프리카 사람들을 기독교를 믿지 않는 이교도 식인종이나 열광적인 춤을 추는 미개인 혹은 서양인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기이한 생활 풍습을 지니고 있는 동양인 따위의 시선으로 그리는 경향이 많았다.
그러나 <낙원>은 그렇지 않다. 열대의 낙원은 백인의 침략으로 인해 멸망하지만 그것은 섬 사람들이 어리석었기 때문이 아니다. 백인은 금품에 눈이 멀어 동지를 배신하고 서로를 죽인다. 섬의 남자들을 죽이고 여자를 노예로 삼아 무역을 한다. 실제로 횡행되었던 그런 만행을 작가는 정면에서 직시하고 있다. 오히려 낙원에 사는 사람들이 풍요로운 자연과 융합된 훨씬 더 우애적인 문화를 갖고 있다. 

제3장에서도 무대는 현대 미국이지만 백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인디언 계인 남성 레슬리가 철학이 깃든 힘찬 교향곡을 작곡하고 오세아니아 계의 지적인 여성 편집자가 활약한다. 그런 소설이 지금까지 일본에 있었던가... 우리들은 일본인이 쓴 몽골로이드의 모험 이야기를 지금에야 간신히 만난 것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일관성 있게 인간의 근원적인 자세를 추구하고 있다. 사람은 정든 땅에 그대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낯선 땅에 무한한 동경을 품고 여행을 떠나려는 호기심과 탐구심이 왕성하다는 것, 어떤 역경에 처하더라도 미지를 찾아 전진하는 용기가 있다는 것, 또 보그도가 피가 통하는 살아 있는 동물이나 사람의 그림만 그렸듯이 레슬리 또한 듣는 자의 혼을 뒤흔드는 음악을 우주의 계시로 탄생시켰다. 예술이란 사람의 혼과 이어지고 전 우주와도 이어진다는 것, 또 사람은 무엇인가를 창조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충동을 갖고 있으며 그 충동으로 자신의 혼을 해방시킨다는 것. 음악, 그림, 그리고 이야기는 원래 그런 것이었음을 상기한다. 

그리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원하는 의지, 남과 여가 만나고 맺어지는 오묘함... 인간의 지식이 미치지 못하는 먼 태고로부터 지속되고 있는 역사 위에 지금의 우리들이 살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존엄한 것이라고...

 


 

 

옮긴이의 말



이상향과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 떠나는 1만 년의 신화



스즈키 코지는 1990년, 이번에 소개하는 <낙원>으로 일본 판타지 소설상 우수상을 수상하면서 데뷔한 신예작가이다.
<낙원> 이후로는 호러, SF, 연애소설 등 장르의 폭을 넓혀가고 있는데 이는 <낙원>이란 작품 자체가 지니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쉬 짐작할 수 있는 일일 듯하다.

<낙원>은 그야말로 소설이 구사할 수 있는 온갖 상상력의 원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가는 몽골로이드의 피를 잇는 얼굴이 가무잡잡하고 동양적으로 생긴 인종이 어떻게 미국의 사막지대나 태평양 한가운데 둥실 떠 있는 오세아니아 제도의 열대 섬에 동시에 존재하는지 그 수수께끼를 축으로 하여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를 거쳐 현대로 이어지는 거대하고 장중한 한 편의 드라마를 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이상향을 찾아 끊임없이 전전하는 한 젊은이 샤라브의 꿈과,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 역시 바다 건너 뭍을 지나 유전하는 한 젊은이 보고도의 꿈을 통하여 종족을 퍼뜨리면서 면면히 흘러가고 있는 인류의 근원적인 에너지가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에너지는 우리들의 뇌세포에 각인되어 있는 붉은 사슴의 문신일 것이다.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을 향하여 도약하려는 붉은 사슴의 이미지는 이상향과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서 한없이 도전하고 흔적을 남기는 우리 인류의 삶 그 자체이다.   

그런 붉은 사슴의 기억조차 희미하게 힘을 잃어가는 현대, 모처럼 건강하고 압도적이고 넉넉한 작품을 만나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한껏 누렸다.

 

1997년 한여름 

김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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