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정세랑] 목소리를 드릴게요

일루젼 2024. 6. 25.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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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정세랑

출판 : 아작
출간 : 2020.01.06


       

정세랑의 세계는 내가 사는 세계보다 무해하고, 자연스럽다. 동물성보다 식물성이 짙은 느낌이랄까.

그들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기 때문에, 손가락이 시공을 넘는다거나, 냉동인간을 깨워 에우로파로 파견한다거나, 하늘에서 거대 지렁이가 쏟아진다거나 하는 일들은 어쩐지 '그럴 수도 있지' 싶어 진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작가는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공을 들이지 않는다. 그저, 독자 또한 자신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끔 방향을 잡아줄 뿐이다. 헤매고 있는 이를 다정스럽게 살짝 당겨 주듯이. 

 

대다수의 소설이 그럴지도 모르지만. 이 저자의 글들은 시작과 끝을 정해두고 긴박한 추격과 반전을 거듭하는 추리를 즐기도록 쓰여진 글이 아니다. 나는 정세랑의 글들은 어디서 멈추더라도 괜찮을 것만 같다. 굳이 이 이야기의 결말을 읽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아진다. 오해를 살 것 같아 다급히 부연하자면, 어느 지점에서도 각각의 완결성을 가진다고 느낀다는 말이다. 하나하나의 세계가 '지금 현실'처럼 느껴지기에, 멈추면 멈춘 그 지점에서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을 것만 같다.   

 

이것은 새롭고 환상적인 세계를 설계한 후 독자를 그 세계 속에 풀어놓는 식의 작품들과도 다른 점이다. 그보다는 조용한 방 안에서 혼자 가만히 어깨너머를 작은 손거울로 살짝 비춰보는 것에 가깝다. 내가 미처 보지 못했지만 틀림없이 나의 현실 속에 녹아들어 있을 한 조각을, 설핏 훔쳐보는 기분. 그래서 때로는 '잘못 봤나' 싶을 정도로 낯선 것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언제나 내 어깨너머에 함께 있어왔던 것을 마주하는 기분. 

 

아마도 김규림의 해설 또한 같은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이 단편집을 비롯한 정세랑 작가의 작품에서는 그런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꿈과 '상상'의 세계가 이 작가의 본진이니까요."

 

"마치 공들여 꾸민 정원을 둘러보는 것 같지요. 이런 재미있는 장치를 이렇게 예쁘게 심어놓았구나. 이곳의 주인은 하나하나의 장치와 그것들을 심어놓은 공간 전체를 다 아끼고 있구나. 여기가 이 사람이 아끼는 세계구나." 


"뭔가 거창한 것 없이도 그저 선하고 즐거운 공간. 날카로운 비판조차 결 곱게 다듬은,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이들을 위한 놀이터." 

   

본문이 아닌 해설을 읽으면서도 이렇게나 공감하게 되는 기분이라니. 이 또한 제각기 다른 사람들에게도 '같은 것'을 상상하게 하는 정세랑의 힘이다. 

 

행복하게 읽었다. 

 


   

 

- 아무 장치의 도움도 없이 2.25미터를 넘었어. 그건 정말 좋은 기록이야. 이제는 지워졌지만, 경기 때마다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스트레스에 좋다는 차를 어렵게 어렵게 구해 마셨어. 뜨겁게 마실 시간은 없어서 찬물에 냉침시켜 마셨지. 물처럼 마셨는데 그 차의 성분에 문제가 있어서 도핑 테스트에 걸렸어. 왜 그랬을까. 왜 확인하지 않았을까. 확인하려면 확인할 수도 있었는데, 사실은 그만두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 가장 비겁한 방식으로 그만두고 말았지만. 

 

- "아직도 나랑 함께 가고 싶어?"
"응."
"과거는 생각보다 재미없어. 위험하고 더러워."
"그래도."
언제나 시무룩한 미싱 핑거가 손을 내밀었어. 나는 그 아이의 손가락이 하나 없는 손을 잡았지. 단면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 단면이 우리를 양말처럼 뒤집으며 포털이 되었어. 양말처럼 뒤집혔기 때문에 약간 토했어. 낯선 공기에 낯선 땅에. 
항상 린넨을 입었어.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 가도 가장 눈에 덜 띄는 옷이었으니까. 미색의 린넨. 그보다는 진한 색의 하의 밑창까지 꼬아 만든 신발, 그래도 우리는 눈에 띄었어.

- 손가락은 언제나 가장 곤란한 곳에 있었지. 독재자가 즐겨 쓰는 모자 벨트에 끼어 있었고, 길고 긴 사막 길을 가는 상인의 수통 속에 들어 있기도 했고, 과학자의 완두콩밭에 묻혀 있었고, 범접할 수 없는 높은 사람의 속옷 겹겹 사이에, 첨탑의 종 속에, 기와의 이끼 안에, 보석상의 펠트를 댄서랍에 절인 올리브 창고에, 호수 한가운데의 정자 댓돌에, 증기로 가득한 기관실 구석에, 비단이 가득한 선반에, 포환 상자의 지푸라기 틈에, 레이스와 가발 속에, 양피지 두루마리에, 원자로에, 통발에, 오래 쓰지 않은 무쇠솥에, 구슬주렴 저쪽에, 궁전의 새집에, 박물관의 커다란 소라껍데기에, 붓통에, 산장의 양철 캔에, 등나무 바구니 안에, 분장실 분첩에, 성벽의 헐거운 돌 뒤에, 멸균 실험실에, 축음기에, 미로 정원에, 어항에, 테트라포드 아래에, 꿀통에, 지뢰밭에, 가면에 달린 수염 사이에, 시계추의 공동에, 닻의 사슬에, 필름통에, 리본 심지에, 안대 안쪽에. 


- <미싱 핑거와 점핑 걸의 대모험>



- 남선 오빠가 작업대 한쪽을 가리켰습니다. 금속성의 무언가가 꾸물거리며 움직이고 있었지요. 저는 가까이 가서 그것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오파비니아?"
"디자인만 그래.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곳까지 가서 효율적으로 채굴해."
"왜 하필 오파비니아예요?"
그렇게 묻고 나서 저는 대답이 필요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기준 오빠가 제일 좋아하던 화석이니까요.

- "우리가 여기서 표면적으로 하는 사업은 망간 채굴이고... 엘리베이터를 타자."
열한 명이 탈 수 있을 만큼 엘리베이터는 컸습니다. 그리고 깊이깊이 내려갔지요. 와, 뭘 얼마만큼 판 거야. 저는 그때까지도 별생각이 없었습니다. 오빠들이 쭈뼛쭈뼛하고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어요. 기본 모드가 쭈뼛쭈뼛인 사람들이니까요.

- "우리가 진짜로 하고 있는 일은."
그렇게 말하며 남선 오빠가 그 창문 없는 문을 열었을 때, 저는 문지방을 넘어서자마자 주저앉고 만 것입니다.
거기 기준 오빠가 있었습니다. 내 사랑, 내 얼어 있는 사랑.

- "그럼 몸은?"
"몸이 왜 필요해? 이 모든 것은 결국 인류가 이 거추장스럽고 암이나 피워내는 몸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 아니야?"
"일단 설명이나 해봐."
"냉동이 중요해. 피를 비롯해 수분 한 방울 없이 뇌를 냉동 처리한 다음..."
"됐어. 나머지는 내가 읽을게."
"네가 사랑하는 게 기준이의 몸이야? 정신 아니야?"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 각지고 나약한 몸을 제가 사랑하긴 했어도, 사실 오빠와 대화만 할 수 있다면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 "하지만 나는 오빠들을 믿지 않아. 그 기술이 온전해지려면 적어도 30년은 걸릴 거라고 생각해.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해봐. 벌써 완벽히 준비가 되었다고."
오빠 8은 억지로 눈을 부릅떴으나 9는 시선을 돌렸습니다. 프레젠테이션을 다 듣고 나니 왜 남선 오빠가 저를 이일에 끌어들였는지도 확실해졌습니다. 남선 오빠는 오빠들에 대한 저의 불신을 신뢰했던 거지요. 말하고 나니 참이상합니다. 

- 저는 3주를 더 고민했습니다. 정말 고민만 했습니다. 정원의 하마를 구경하면서요. 가까이 가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눈으로 하마를 좇았고 하마도 언제나 저를 의식하고 있었어요. 하마의 표정이 읽히지 않는 얼굴을 뚫어져라 보며, 하마를 이해하면 이 문제를 이해할 수 있을 거란 듯이 고민했습니다.
"마음을 정했어?"
남선 오빠가 뒤에서 다가와 물었습니다. 투박한, 하마도 기절시킬 수 있을 만큼 크고 두꺼운 머그를 들고서요. 저는 그것을 받아 들었습니다. 알 수 없는 맛의 허브 차였습니다. 
"1팀에게 허벅지를 맡겨. 그 다리는 어떻게든 살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2팀, 3팀을 합쳐 방향을 재설정해. 내가 원하는 건 다음 세대의 유전자 가위야."
"4팀은?"
"대기하다가 기준 오빠가 수술대 위에서 죽을 것 같으면 바로 착수하라고 해."
"수고했어."

- 기준 오빠의 골육종과 전이된 암에 걸맞은 면역 세포를 만들었고, 면역 세포의 활동을 저해하는 단백질 문제도 해결했습니다. 한쪽 다리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기계 의족으로 대체했습니다. 그 모든 것을 기준 오빠의 의식을 깨우지 않은 채로 진행했습니다.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은 겪지 않도록요.

- 마침내 오빠의 의식이 돌아왔을 때, 저는 그 자리에서 도망가고 싶었어요. 오빠의 눈꺼풀이 움직이는 걸 보며 느낀 감정은 공포에 가까웠답니다. 기준 오빠가 눈을 뜬 다음 모든 게 미친 착오였다고 말한다면, 이런 걸 원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저는 뒤로 물러섰고, 남선 오빠가 그런 저의 팔꿈치를 지그시 잡았습니다. 더 이상 물러서지 못하게요. 

- 기준 오빠가 눈을 떴습니다.
의료인 중 한 명이 안약을 넣어주었어요. 그러고도 한참을 초점을 찾지 못하던 눈이 드디어 초점을 찾았습니다. 의아함. 
의아함 말고 다른 표정은 떠오르지 않았는데 방에 있는 사람을 훑어보던 그 눈이 저에게 와서 멎었어요. 오빠들이 제 등을 밀었습니다. 무신경한 인간들. 

- 저는 다가가서 기준 오빠 곁에 앉았습니다. 오빠가 말을 하고 싶어 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목소리는 좀 걸릴 거예요. 너무 오래 안 써서."
누군가 알려주었습니다.
"뭐라고요?"
당황해서 좀 화가 난 듯이 말해버렸는데, 그 순간 기준 오빠가 희미하게 웃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 "내가 뭐에 서명했다고?"
"내가 씨발 이럴 줄 알았어. 이 똥 같은 새끼야, 기억 못 한다잖아?"
기준 오빠는 계약서에 서명한 걸 전혀 기억하지 못했고, 저는 남선 오빠의 멱살을 잡았으며, 공항에 저를 데리러 왔던 무장 경호원들에게 곧바로 제압을 당했습니다. 기준오빠는 음, 안 보는 사이에 유경이가 화가 많아졌구나, 하고 허탈하게 웃었어요. 자기 일인데 화도 안 나는지 속없이 웃는 게 미우면서도... 공격성이 저토록 없는 사람이어서 좋아했지, 다시 깨달았습니다.
"뭐, 내가 기억 못 하는 걸 수도 있으니까."


- 남선 오빠는 또다시 국제적인 전문가들을 불러들여, 기준 오빠의 길고 긴 재활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화가 나다가도 고맙긴 고마웠으므로 꾹 누를 수 있었어요. 덕분에 한동안은 평화가 지속되었지요.
그러니까, 특약에 대해 듣기 전 까진요.

- "특약? 무슨 특약?"
제가 물으니 남선 오빠가 도리어 놀라는 표정을 하지 뭐예요.
"너 계약서 읽어봤잖아. 못 봤어?"
우리 셋은 웬만한 책 두께는 훌쩍 넘기는 계약서를 다시 함께 들여다보았습니다. 46페이지에 작고 작은 주석으로 별첨 문서를 확인하라고 되어 있었지요.

- 봉투 속에서 구겨진 낱장을 찾아냈는데, 그것은 기준 오빠의 치료에 든 비용을 일부나마 정산할 방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남선 오빠가 원하는 곳에서 일정 기간 파견 근무를 한다는 내용이었어요.
"그래서 내가 어디 가서 일하면 되는데?"
기준 오빠가 침착하게 물었습니다. 저는 그게 어디든 따라가서 함께 빚을 갚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요.
"에우로파."
남선 오빠가 대답했을 때, 유럽을 엄청나게 나쁜 발음으로 말한 것이길 제가 얼마나 바랐던지요.
"유럽 어디?"
"아니, 알아들었잖아. 에우로파."

- 네, 그 에우로파입니다. 혜정 씨도 잘 아는 에우로파. 목성의 위성이지요. 얼음으로 덮여 있고요. 얼음 아래에는 바다가 있는 그곳요.
"언제까지고 여기 살 수 없잖아. 지구는 끝났어. 먼저 가 있으면 곧 따라갈게."
"뭐라고? 거기가 어떤 덴데 우리더러 가서 죽으라는 거냐? 백 년은 일러!"
"아냐. 내가 잘 준비해 놨어. 설명을 다 들으면 화가 안 날 거야. 두 사람은 타기만 하면 돼..."
흥분해서 남선 오빠를 발로 차려고 시도하다가 다시 경호원 두 사람 사이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었지만, 그 정도면 정상적인 반응 아니었을까요? 남선 오빠는 얼른 저를 피해 도망쳤습니다. 

- 그날 기준 오빠가 저를 가볍게 안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말했습니다.
"너는 오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널 한 번 더 본 것만으로 그 추운 곳에 가서 죽을 수 있어."
저는 기준 오빠의 기계로 교체되지 않은 허벅지 쪽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상태로 오빠의 목에 고개를 기대었더니, 더 이상은 하루도 이 관계를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멀고 추운 세계에 우리 둘이... 지질학자와 해양생물학자 둘이... 남선 오빠가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우면서도, 동시에 완벽한 계획이란 걸 인정해 줄 수밖에 없었지요. 알고 있었던 겁니다. 제가 기준 오빠와 함께 그곳에 가리란 걸요. 

- EM 드라이브로 움직이는 우주선도, 그곳에 가면 설치하게 될 바이오스피어 -5도 자동이어서 우리는 길지 않은 훈련만 받으면 되었습니다. 저는 그제야 기준 오빠의 다리 부품이 중력의 변화와 상관없이, 기묘하게 넓은 온도 범위에서 작동한다고 설명되어 있던 제안서를 이해했습니다. 어금니를 꽉 물었지요.

- 우주선의 문이 닫힐 때 저는 남선 오빠에게 고함을 질렀습니다.
"너 그러다 망한다? 그렇게 원칙도 윤리도 없이 막살다가 망한다? 너 같은 놈들 때문에 지구가 끝난 거다?"
끝까지 빙글빙글 웃는 얼굴이더라고요. 재수 없어. 저는 고함을 지르다가 조금 울었습니다. 기준 오빠가 장갑 낀 손을 뻗어 제 손을 잡아주었어요. 

- 이제 격렬했던 흔들림은 다 끝났습니다. 선내에서 4년 동안 둥둥 떠다닐 일만 남았습니다. 그나마 몇 년 전까지는 8년에서 10년이었는데 줄어든 거라네요. 울음을 그치고 이 이메일을 씁니다. 혜정 씨, 보고 싶을 거예요. 저는 원래 사람을 안 좋아하는데, 열한 명 중의 한 명 정도만 좋아하는데, 혜정 씨는 그 한 명 쪽이에요. 혜정 씨를 좋아해요. 좋아했어요. 함께 점심을 먹을 때가 하루 중 제일 나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말해도 됩니다. 천체투영관에서 태양계 파트를 틀어주실 때, 목성과 목성의 위성들을 설명하실 때 말해도 됩니다. 저기에 친구가 산다고. 갈릴레이의 위성 중 하나에 친구가 산다고요. 
우리가 다시 만나 점심을 먹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11분의 1>



- 처음에 지진인 줄 알았다. 경주였으므로, 더더욱. 미리 챙겨놓은 재난 대비 배낭을 챙겨 들고 공터로 갔고, 어둠 속에서 계속되는 진동에 두려워했다. 이제 와선 외계에서 온 거대 지렁이들이 지면에 도착하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게 아쉽다. 해가 뜨고야 도심을 헤집고 있는 지렁이들을 보았다. 길이는 75미터에서 200미터 사이, 직경은 8미터에서 20미터 사이로 보였다. 붉은 등과 그보다 약간 흰 배. 몸을 덮은 점액질은 물 위에 뜬 기름처럼 여러 색깔을 품고 빛났다. 왜 하필 경주를?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당연히 지렁이들이 경주를 특별히 노린 것은 아니었다. 지렁이들은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도시를, 인류 문명을 끝장내려고 내려온 것이었으니까. 

- 4월 11일
생각해 보면, 지렁이들이 내려오기 전에 끝나지 않은 게 신기하다. 우리는 행성의 모든 자원을 고갈시키고 무책임한 쓰레기만 끝없이 만들고 있었다. 100억에 가까워진 인구가 과잉생산 과잉소비에 몸을 맡겼으니, 멸망은 어차피 멀지 않았었다. 모든 결정은 거대 자본에 방만히 맡긴 채 1년에 한 번씩 스마트폰을 바꾸고, 15분 동안 식사를 하기 위해 4백 년이 지나도 썩지 않을 플라스틱 용기들을 쓰고, 매년 5천 마리의 오랑우탄을 죽여 가며 팜유로 가짜 초콜릿과 라면을 만들었다. 재활용은 자기기만이었다. 쓰레기를 나눠서 쌓았을 뿐, 실제 재활용률은 형편없었다. 그런 문명에 미래가 있었다면 그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 무엇보다 멸종이 끔찍했다. 멸종, 다음 멸종, 다다음 멸종. 사람들 눈에 귀여운 종이 완전히 사라지면 '아아아' 탄식한 후 스티커 같은 것이나 만들었다. 사람들 눈에 못생기거나 보이지 않는 종이 죽는 것에는 개뿔 관심도 없었다. 잘못 가고 있었다. 잘못 가고 있다는 그 느낌이 언제나 은은한 구역감으로 있었다. 스스로 속한 종에 구역감을 느끼기는 했어도, 끝끝내 궤도를 수정하지 못했다.

- 모닥불 가의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나를 죽이고 싶어 할지 모르지만, 지렁이들은 제때 왔다. 우리가 다른 모든 종들에게 용서받지 못할 짓을 하기 전에 와줬다는 게 감사할 정도다. 궤도는 가까스로 수정되었다. 나는 배낭에 들어 있던 은박 담요를 덮고 잠들며 가끔 웃는다. 내가 죽고 다른 모든 것들이 살아날 거란 기쁨에.   

- 그쪽도 묻지 말아야 했다. 우리 결혼은 거짓말의 농도가 낮아서 유지된 케이스였다. 이제 와 바꾸고 싶진 않았다.
"거기에 꼭 당신이 가야 하는 거야?"
다시 물어왔다. 열쇠가 나한테 있으니 내가 가야 한다고 대답했다. 내 일이라고.

- 우리는 잠시 또 함께 울었다. 어떤 운이 따른다 해도 제네바에서 스발바르를 거쳐, 퀸스타운 외곽 농장까지 갈 수는 없을 것 같다. 통화의 기회가 또 있을 것 같지도 않다.

- 5월 8일
나머지 다섯 개의 열쇠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씨앗 저장고 자체가 파괴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사실은 그럴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나 눈길에 비즈니스 캐주얼을 입은 채 얼어 죽은 백발 해골이 되더라도 나는 가야 한다. 

- 어린 시절 내내 살살 흙을 긁고 있으면 엄마들은 끝없이 나를 칭찬했다.
"저 아인 우리보다 나을 거야. 우린 서른 넘어서야 지렁이가 멋지단 걸 알았잖아. 쟤는 세 살에 알게 됐으니 시작이 달라."

- 처음엔 그저 칭찬이 고파서 엄마들을 따라다니며 지렁이 박스 위에 젖은 신문지를 덮고, 바나나와 다른 과일 껍질들을 넣어주고, 다른 벌레들의 알을 살살 치웠지만 나도 곧 진심으로 지렁이의 매력에 빠지고 말았다. 과일 껍질들이 검다시피 짙은 색의 부드럽고 촉촉한 비료가 되는 걸 지켜보고, 박스에서 박스로 지렁이들을 옮기고, 우리 집 정원이 다른 어느 집보다 풍성한 것을 확인할 때 자부심이 들었다. 엄마들은 내게 오레곤에 산다는 거대 지렁이 드릴롤레이루스 마셀프레시(Driloleirus macelfreshi)를 보여주고 싶어 했다.

- "지렁이만 죽였겠어? 곤충학자들, 조류학자들 다 울고 있다고. 개체 수가 절반 이상 빠진 것 같대."
멸망이, 멸종이, 끝이 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듯도 한데 엄마들과 내 삶은 이상하게 평화로웠다. 두 학자는 정교수가 되지 못했고, 한 번도 경제적으로 아주 풍족한 적은 없었지만 뭐가 부족하다고 느낀 적도 없었다. 학교 아이들이 레즈비언들이 키우는 거지 애라고 나를 놀려도 그다지 속상하진 않았다. 엄마들이 새 옷을 사줘도 무릎은 금방 흙으로 물들고 그것은 정원사의 숙명일 뿐이었다. 우리는 정원에서 키운 것들을 먹고 낡은 물건들을 수리해 썼다. 엄마들은 내 방 벽에 지렁이들을 귀엽게, 하지만 정확하게 가득 그려줬고 또박또박 학명도 써주었다. 열 살이 되기 전에 학명을 모조리 외울 수 있게 되었다. 

- 내 선택은 언제나 줄지렁이였다. 그리고 줄지렁이를 닮은 거대 지렁이들이 지구에 왔고, 끔찍한 뉴스가 연일 나오다가 그마저도 그쳤을 때 엄마들은 깨달았다.
"누군가 우릴 부르러 올 거야."
"그럼 우린 가야 할 거야."
두 사람은 슬퍼하며, 그러나 미묘한 흥분을 숨기지 못하며 내게 이해를 구했다.
"나도 갈 거예요. 어차피 죽을 거라면 따라갈래."
"안 돼. 너는 우리가 아는 걸 모두 알아. 모두까진 아니라도, 거의 다 알지. 우리가 실패하면, 그다음엔 네가 있어야 해."
"나는 스페어야? 그런 거야?"


- 그때는 엄마들이 나를 보호하려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스페어로 남겨둔 걸 수도 있을 것 같다. 과보호하지 않는 양육자들이었으니까. 엄마들을 데리러 왔던 지프는 한 대였지만 중간 즈음에 차를 나눠 타고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두 사람이 각자 거대 지렁이를 추적하며 남긴 문서 기록과 영상 기록은 현재 인류에게 가장 소중한 자료가 되었다. 

- 더블데이 국장은 엘엘의 합리적인 반문에 짜증을 냈다.

"확인해 볼 방법이 있어요."
나는 엘엘의 편을 들면서, 내 효용도 증명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떻게?"
"다윈의 실험을 조금 큰 규모로 재현하면 지렁이의 지능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거예요. 조종인지 아닌지도요."

"다윈?"
"찰스 다윈은 지렁이 애호가였어요."
"그 다윈이?"

- 우리는 다윈을 사랑했고 다윈은 지렁이를 사랑했다. 다윈의 마지막 저작은 지렁이에 대한 것이었는데 꽤 대중적 인기를 끈 책이었다. 덕분에 다윈이 지렁이의 지능을 시험하기 위해 수백 개의 종잇조각을 오려 지렁이 굴을 막았던 실험 내용이 알려졌고 나 역시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다윈은 특유의 꼼꼼한 기록으로 지렁이들의 문제 해결 능력이 예상보다 뛰어남을 증명했다. 다윈만큼의 여유는 없지만, 연장선상의 실험을 하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야 할 장애물은 종잇조각보다는 훨씬 큰 것이어야 했다. 그것을 만드는 일은 엘엘과 엘엘의 팀에게 맡겨졌다. 나와 빈 바라스알 타니 왕자는 엘엘의 팀에 합류했고 말이다. 

- 아무 일도 없었다. 나는 망원경 각도에 걸리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마무리하고 슬슬 움직이기로 하지."
올리를 포함한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땅에다 무언가를 한참 그렸다. 나머지 수백의 사람들은 침낭 등을 꺼내 잠시 쉬는 듯했다. 나는 엎드린 채 점점 차가워졌다. 배가 시리다 싶었을 때 그들은 만족한 듯 자신들의 작업을 내려다보더니 쉬고 있던 사람들을 일으켰다. 긴 행렬을 이루어 서쪽으로 향했다. 살짝 서남쪽이었다. 우리 일행과는 마주치지 않을 방향이었다. 
안전해졌다 싶었을 때 몸을 일으켜 미래의 사람들이 남겨놓은 것을 보러 갔다. 추위 때문인지 긴장 때문인지 토할 것 같았다.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앤, 모른 척해줘요. 지구(Earth)를 위해, 지렁이(Earthworm)를 위해.
어째선지 나는 왈칵 울어버렸고, 어떻게 해야 할지 바로 결정해야 함을 깨달았다. 다음 불침번을 설 사람의 알람이 울리기 전에.

- 다시는 생산되지 않을 스니커즈 바닥이 닳도록 메시지를 지우고 나자 울음이 그쳤다. 지렁이를 보낸 것은 나였다. 미래의 나. 모든 것이 잘못된 후의 내가 세계를 수정하기 위해. 나 혼자만 한 것은 아닐 테지만 그 설계에 참여한 것만은 분명했다. 어쩐지 그 모든 것이 너무 익숙하다고 생각했었다. 
지구를 위해, 나는 서쪽으로 가는 사람들을 내버려 두었다. 야영지로 돌아가 다음 불침번을 깨웠고, 뜬눈으로 지새우고 난 다음 아침에는 계속 동쪽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 파괴적인 흔적을 이해하기 어려울 때였다. 거대 지렁이들은 믿을 수 없이 꼼꼼했던 모양이지만 그들도 실수는 했다. 흙 속에 통째로 파묻히다시피 한 재고 창고를 발견했을 때 우리는 재고라는 개념에 충격을 받았다.
"데드 스톡은 데들리 했네."
팀장이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수요를 한참 웃돌게, 아무도 원하지 않는 물건들을 생산했다니 과거의 풍요로움이란 굉장히 기분 나쁜 풍요로움이었던 것 같다. 이어 작은 동물원의 흔적을 찾았을 때는 여러 사람이 토했다. 윤리는 본능적인 비위에 가까운 것 같으면서도 짧은 시간 동안 급격히 변화하기도 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오후 내내 발견한 것들을 분류해서 적재했다. 백 년 전에 생산되어 아주 못쓰게 된 물건들도 있었지만, 여전히 쓸만한 물건들도 많았다. 지하도시의 순환 시스템으로 오래된 재고들이 흡수되었다. 

- 8월 18일
작업을 마친 다음 서쪽으로, 서쪽으로 걸었다. 노을이 근사한 날이어서 멈추기 싫었다. 어둡기 전에 돌아갈 수 있을 만한 거리를 가늠해 한계까지 걸었다. 이샤크가 길고 긴 쾌감 패턴을 받았기 때문에 방을 양보하고 긴 저녁 산책을 하기로 한 것이다. 이번 세기의 가장 큰 업적은 광케이블을 기존의 40퍼센트까지 복구한 것이다. 리셋 이후 위태로워졌던 전 지구적 연결성을 다시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광케이블을 타고 쾌감 패턴들이 오간다. 

- 인류 최초로 섹스를 하지 않는 세대라고, 윗세대들은 우리를 놀리듯이 부른다. 섹스를 스티커로 교체해 버렸다고 말이다. 하지만 쾌감 패턴 쪽이 훨씬 즐겁다. 최초로 쾌감 패턴을 만든 것은 엘엘로 알려져 있는데,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다. 여러 세대를 거쳐 최근에는 쾌감 패턴을 만드는 데 특출한 재능을 가진 패턴 마스터들이 등장했다. 마스터들이 만든 패턴은 아마추어의 생산물과는 수준이 달랐다. 어릴 때 '너를 생각하며 이 패턴을 만들었어' 류의 메시지와 함께 서툴게 만든 패턴을 먼 곳의 친구와 주고받았던 게 약간 쑥스러워질 정도다. 근사한 패턴을 즐기고 나면 해탈한 사람처럼 무욕해져서 주변의 누군가와 뭔가를 하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는다. 또 서로가 만든 패턴이 무척 취향이라고 해서 굳이 누군가를 직접 만나러 가고 싶어지지도 않는다. 
적정 인구수를 유지하는 게 지하도시들의 과제였으므로 쾌감 패턴은 때에 따라 권장되거나 탄압받기도 했다. 웃기는 일이었다.

- "약간 음모론 같은 건가 봐. 지렁이들이 외계에서 온 게 아니라 미래에서 온 거였고, 지렁이를 보낸 사람들도 리셋 시기로 돌아가 섞여서 함께 살았다는 그런 가설 있잖아."
"말도 안 돼. 그러면 지금 우리가 타임머신을 만들어야 하는 거잖아."
"아니, 우리는 바뀐 미래에 살고 있는 거지."
"어느 쪽이든 됐다 그래. 그런 거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 있더라."

- 어이없는 내용일 거라 생각하니 김이 빠졌지만, 의외로 영화는 괜찮았다. 막 사랑에 빠진 두 빈모강학자들이 데이트를 하다가, 호텔에서 자살 시도를 한 빈 바라스 알 타니 왕자를 구할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두 사람의 딸인 앤과 빈바라스 알 타니 왕자가 십수 년이 흘러 다시 만나게 될 때도... 앤을 맡은 배우가 내가 상상하던 앤을 닮아서 만족스러웠다. 엘엘의 역할을 맡은 배우는 엘엘의 번뜩이는 지성을 잘 표현하지 못해 별로였다. 안경만 쓰면 뭐 하나, 안경 너머로 번뜩여야지 싶었던 것이다. 엘엘의 손자인 올리타니-라이 청이 제공한 자료와 당시 서기였던 매디건의 꼼꼼한 기록을 기반으로 한 덕분에 전반적으로 아주 황당한 내용은 아니었다. 몇 년 전부터 올리 타니-라이 청이 실종되었다는 루머가 심심하면 기승을 부려 음모론을 더욱 부추긴 듯싶다.


- <리셋>



- "15센티미터짜리 어금니가 두 개 한꺼번에 나는 기분이에요."
날개가 자라는 게 어떤 기분이냐고 묻자, 천사가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천사는 지구에서 공수해 온 그래픽 티셔츠 하나하나의 등을 뜯어내고 있었다. 나는 아껴두었던 타이레놀을 한 알 건넸다. 
"고마워요. 지구 약은 어쩐지 더 잘 듣는 것 같아."
어깨에서 하얗게 뼈가 솟아나고, 붉은 해초처럼 혈관과 신경이 그 위를 덮기 시작했다. 깃털이 나려면 한참 멀어 보였다.

- 내가 모조 지구에서 탈출하기를 포기한 건 일하기 시작한 지 1년 반쯤 되었을 때였다. 공식 명칭은 제2 지구지만, 행성 안팎 사람들 모두 모조 지구라고 불렀다. 모조 지구는 일종의 테마파크다. 지구 출신으로서는 기분 상하는 일이지만 진짜 지구는 갖가지 종류의 폭력, 혐오, 재난으로 범벅되어 있어 여행자들에게 평판이 나빴다. 여행 안전 지역이 되려면 수천 년은 멀었다고들 말했다. 그래서 미니어처 공원이나 체험형 박물관처럼, 안전한 모사품으로 이곳이 만들어졌다. 그런 류의 관광지가 그렇듯이 대단히 정교한 모사는 아니었고... 어느 쪽이냐면 끔찍한 재현에 가까웠기에 장사가 지독하게 안 되었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 나는 모조 지구에 거주하는 유일한 지구인이자 홍보 책임자였다. 말레이시아에 새로 생기는 프랜차이즈 놀이 공원의 동아시아 담당 홍보팀장을 뽑는다기에 지원했는데, 면접 후 의식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우리 은하계를 한참 벗어나 있었다. 연봉을 25퍼센트 인상해 준다는 말에 속아서 외계인에게 납치당하다니, 너무 좋은 조건은 의심해봐야 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되새김질하기엔 너무 늦은 셈이었다.  

 

- 관광객들의 안전을 위해 수조에 가둬뒀던 인면어들을 그곳에 다시 풀어줄 수 있었다. 인면어들과 아직 완전한 화해는 하지 못했지만 언젠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새로운 노래를 가르치기 위해 고양이 인간을 통해 음향 기기와 음원을 잔뜩 구했다. 며칠 전에는 아바의 <I have a dream>을 틀어주었는데, "나는 천사를 믿어요(I believe in angel)"라는 가사에 인면어들은 괴성을 지르고 천사만 깔깔 웃었다. 천사가 나오는 노래는 팝송에 많을 것 같은데 영어 실력이 고만고만해서 연달아 떠올릴 수는 없지만 그런 일로 시무룩해지지는 않는다. 천사가 나를 골랐다는 걸 안 이후로 부쩍 자신감이 붙었다. 

- 매일 말 그대로 날개 아래에서 잠들고, 꿈결에도 지구가 그립지 않다. 천사는 날개가 없을 때부터 천사였고, 천사가 내게 주는 안도감은 우주를 샅샅이 뒤져도 다른 별에서는 찾을 수 없는 종류이리라 확신한다. 고용 계약은 파트너 형태로 갱신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천사를 위해서.

- 행복하다고 게을러지진 않았고 열심히 브로슈어를 발송하고 있다. 모조 지구의 발사대에서 온 우주를 향해 광고가 날아간다. 달콤한 색깔의 캡슐에 담겨, 암흑물질을 뚫고 끊임없이 날아가는 브로슈어가 언젠가 당신에게 닿기를.
모조 지구에 천사를 만나러 오세요.

 

- <모조 지구 혁명기>



- 쥐가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미로를 통과하여 먹이에 가닿았을 때는 물론, 그 모습이 전 세계에 뉴스로 방영되었을 때에도 흥분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편집이 밋밋했달까, 그런 쥐들은 그전에도 많았다. 몇 년 안에 기적의 약이 나올 거라는 대대적인 보도 후엔 언제나 소리소문 없이 상용화 이야기가 수그러들었다. 드물게는 다국적 제약회사의 입지를 흔들 만큼 공공연하고 극적으로 실패하기도 했다. 실망하고 또 실망해 온 사람들은 패턴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렇게 쉬운 일일 리가 없지, 체념하며 매일의 고통을 견디거나 끝내는 견디지 못했다. 쥐가 미로를 완벽하게 기억했다 해서, 무시무시할 정도로 빠르게 통과했다 해서 치매가 곧바로 완치될 거라고 확언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쪽이야말로 의심을 살 만했다.

- 막상 약을 개발한 베를린 의과 대학에서는 그 약을 기적의 약이라고 부를 생각이 없었다. 그 약은 모든 치매 환자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전체 치매 환자의 60퍼센트 정도를 차지하는 알츠하이머 환자들에게 얼마간 유용할 것이라고, 담담한 전망 정도를 제시했을 뿐이다. 이후에 그 약 때문에 벌어진 일련의 일들에 대하여, 연구진을 대표했던 닥터 블라우(Dr. Blau)는 네 페이지에 걸친 절절한 유감 성명을 발표했는데 간단히 줄이자면 "그러라고 만든 약이 아니었다"라는 한 문장이 남는다.

- 블라우 박사의 어머니가 알츠하이머 환자였고, 박사가 어머니를 관찰하다가 최초의 착상을 얻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블라우 부인은 집 주소를 기억하지도, 계절에 맞는 옷을 입지도 못할 만큼 병이 진행된 상태였지만 남편이 죽자 남편의 죽음에 대해서만은 한 차례도 착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부부 사이가 친밀하지도 않았고 박사의 부친은 다소 폭력 성향이 강한 사람이었는데도 모친은 그의 죽음을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한 번도 죽었느냐고 다시 묻지 않았다. 어딘가 안 보이는 곳에 살아 있다는 환각에 빠지지도 않았다. 지쳐 있던 보호자로서는 충분히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알츠하이머로 망가진 뇌에 충격이 미치는 영향을 해석하는 데는 꽤 시간이 들었다. 해마를 중심으로 뇌내 네트워크에 충격을 부담 없이 재현하여, 어떻게든 새로운 정보를 저장할 수 있게 하는 게 목표였다. 알츠하이머의 완전한 치료 같은 것은 바라지 않았다. 블라우 박사가 원한 결과는 분명하고 구체적이었다. 

- 블라우 박사가 브레인 매핑과 인공 뇌 설계 업적으로 노벨 생리의학상 후보에도 올랐던 유명 뇌과학자이자 의학자였으므로, 제약회사에서는 그의 성에서 따 알약을 파란색으로 만들었다. 아기 배내옷처럼 부담 없이 옅은 하늘색이었다. 그렇게 큰 파급효과를 가져올 줄 알았더라면 애초에 다른 색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르지만, 일말의 예상도 하지 못했으므로 그 약은 '비아그라 이후 가장 놀라운 파란 알약'이 되었다. 사실 비아그라도 협심증을 치료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가 다른 운명을 얻게 된 케이스이기에 유독 억울할 일은 아니었다. 독일어로 하늘색이 헬블라우(hellblau)라는 것, 헬은 사실 ‘밝은 빛'을 뜻하지만 이후 많은 사람들이 영어식으로 지옥을 떠올렸다는 점 정도는 복기할 만하다. 약의 공식 이름은 HBL1238이었다. 별로 부르기 쉬운 이름은 아니었다. 알약을 반으로 나누어 위에는 HBL이, 아래에는 1238이 새겨졌다. 

- HBL1238이 음각으로 버젓이 새겨진 약이 암시장에서 '시험 잘 보는 약'으로 거래되기 시작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경쟁이 치열한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퍼져나갔다. 아이비리그에서, 동아시아의 고등학교에서, 아프리카의 로스쿨에서... 과다 경쟁의 환경, 혹은 시험을 통해서가 아니면 빠져나갈 길이 없는 온갖 열악한 환경에 처한 이들이 알약을 삼키기 시작했다. 심지어 아시아에서는 과립이나 액체 형태로 바뀌어 한약으로 유통되기까지 했다. 아주 빠르고도 광범위한 유행이었으며, 제재와 처벌에도 수그러들 기세가 아니었다. 

- 수험생들은 겁도 없이 치매약을 삼켰고, 3시간 동안 온갖 암기 과목을 마스터했다. 치매 환자들이 지지직거리는 비디오 레코더였다면, 이 어리고 생생한 뇌들은 8K급 녹화를 해냈다. 벼락치기의 황제들이 나타났다. 게다가 별다른 단기 부작용이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투약은 습관화되었다. 약을 먹지 않는 학생들이 바보 취급을 받았고 형평성 문제가 불거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교육 정책 담당자들은 다급하게 대책을 강구했으나, 마땅한 대책이 나오기 전에 시험 거부 시위가 일어났다. 행정 능력이 갖춰진 나라일수록 신속히 정상화되었는데 어떤 나라들은 2년에서 길게는 10년까지 교육과정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사실 약은 기억력 위주의 향상을 가져왔고, 다른 인지 능력에는 유효한 영향을 주지 않는 것으로 확인된 후였지만 외우는 과목도 외우지 않는 과목도 모두 거부되었다. 문제가 점점 불분명해지기도 했던 것이, 어떤 원리를 이해하는 최초의 순간을 완벽하게 기억하는 학생들이 늘었던 것이다. 그 순간은 쾌감과 함께 기억되었다. 

- 초기에는 단순한 오용이었고, 그다음에는 처방전 위조가 있었다. 치안이 좋지 않은 지역에서는 제약회사의 운송차량이 트럭째 탈취당하기도 했다. 제약회사에 대한 비난이 점점 거세어졌다. 주가가 폭락할 정도였다. 사실 다국적제약회사만큼 미워하기 쉬운 상대도 없었다. 어째서 이 사태를 미리 예견하지 못했는가, 윤리적이지 못한 기업이다. 관리가 얼마나 부실했는가...

 

- 베를린 의과 대학이 연구를 90퍼센트 마쳤을 때 슬쩍 끼어들어 다소간의 수익을 노려볼까 했었을 뿐인 제약회사는 허둥댔다. 사실 오용을 예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오용은 상식 바깥에서 이루어지는데, 말뜻이 무색하게도 상식의 안쪽보다 바깥쪽 영역이 광활하므로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국제적인 범죄자들이 결속하여 만든 무장 강도단에게 당한 걸 관리 실패라 부르는 건 아무리 제약회사가 눈엣가시라도 과한 면이 있었다. 회사에서 그 혼란 속에 급하게 마련한 1차 대책은 약에 검출 표지 색소를 넣는 것이었다. 한동안 중요한 시험장에서는 소변 검사가 시행되었다. 오줌이 파랗게 변한 사람은 시험장에 들지 못했다.

- 그러나 소변 검사는 효율적이지도 위생적이지도 못했기 때문에, 곧 표지향을 이용하게 되었다. 보통의 향수나 바디 제품과 겹치지 않도록 치커리 향이 채택되었다. 크고 작은 시험장에서 치커리 향을 찾아 미량 화학 센서들이 동원되었다. 학교마다 센서가 보급되는 데까지도 시간이 걸렸는데, 노력과 비용이 무의미하게도 곧 무용지물이 되었다. 수험생들이 이제 벼락치기가 아니어도 미리 약을 복용하고 공부하기 시작했기에 시험 당일엔 이미 모든 성분이 몸에서 빠져나가 검출이 되지 않았고, 그보다 소위 음지의 '키친'에서 검출 표지를 제외한 카피 약이 생산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 그리하여 전 세계적인 교육 개혁이 시행되었다. 모든 시험이 오픈 북이 되었다. 시험은 지식 습득의 확인이 아니라 사고 과정과 가치관을 겨루는 장으로 탈바꿈했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장기적으로 여겨지고는 있었지만, 새끼손톱반만 한 파란 알약이 교육 개혁의 원동력이 된 것은 씁쓸했다. 토론 학습과 프로젝트식 수업, 다원적인 학생 선발, 종합적인 평가를 위한 논술과 구술시험, 새롭고 유연한 진학 코스들을 설계하다 보니 초기에는 키메라 꼴이었다.

 

- 기념일을 맞거나 여행을 가거나 하여간 둘이서 기억하고 싶은 날에 함께 불법 약물을 삼키는 행위는 그럴듯했다. 이들은 수험생 시절 이미 알약을 사용해 본 세대였다.
"얼마나 바보 같아? 나는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과목 참고서의 자질구레한 도표까지 기억한다고. 두통이 자주 오는 건 형광펜 쳐놓은 부분들이 하도 많아서일 거야. 게다가 벼락치기가 한창인 교실 소음에 앞자리 애의 때 탄 양말에 당번이 비우길 까먹은 쓰레기통에... 기껏 냄새나는 교실 따위를 영원히 잊지 못하게 되다니. 우린 약을 잘못 썼어. 한참 잘못 썼어."

- 첫사랑이 조금 더 많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대개 사랑이 바래는 것은 소중한 순간들을 잊고 서로를 함부로 대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므로, 이제 잊히지 않는 기억들로 사랑은 유지되었다. 초혼 연령이 아주 약간 앞당겨졌으며 이혼율도 미미하지만 낮아졌다. 약을 삼킨 시간에 하필 크게 싸우는 커플들 역시 적지 않았지만 말이다.

- "그때 기억나?" 같은 말은 잘 하지 않게 되었다.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아니까. 서로 눈만 바라봐도 어느 때를 재생하고 있는지 아니까.

 

- 누가 봐도 알약이 고문에 쓰이고 있다는 게 분명했던 것이다. 약의 특허권을 지키려는 조사였는데 들춰보니 너무 큰 사안이라 국제연합 인권위원회로 넘겨졌다.
인류의 고문 기술은 추악했던 20세기에 궁극에 다다랐고, 21세기에는 주춤하는 듯했다. 하지만 독재국가나 분쟁지역에서는 고문금지 조약이 암암리에 지켜지지 않았는데, 지난 세기에 태어난 마스터들과 그들에게 사사한 젊은 고문 기술자들이 문득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이다.

 

- 인간의 몸이란 일단 고통을 최대한 잊도록 설계되어 있다. 개인별 편차는 있어도 기본적으로는 그러하다. 고문 기술자들은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래서 생각했다. 같은 고통이라도 잊지 못하게 만들면 어떻게 될까? 결과가, 효과가 다르지 않을까? 그 편리하다는 알약을 써볼까? 고문하고 또 고문해도 꺾이지 않는, 절뚝거리며 또 저항해 오는 자들의 회복 기능을 완전히 망가뜨리는 게 가능할까? 고문기술자들에겐 보통의 인간에게 있는 많은 자질이 없었지만, 실험 정신만은 넘쳤다. 


- 가장 끔찍한 고문들이 연속 투약과 함께 이루어졌다. 국제연합 인권위원회가 개입했을 때는 살아남은 피해자들이 거의 없었다. 최장 연속 투약을 받은 피해자는 37일 동안의 고문을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고문을 이기고 구출되어 돌아왔지만, 몸의 기억 때문에 계속되는 쇼크는 끝내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 교통사고의 증가 추이에도 HBL1238이 관여했다. 늦은 밤 고속도로에서 추돌사고가 늘었는데, 사고를 유발한 운전자의 사망률이 높았으므로 초기에는 관계성이 쉽게 밝혀지지 않았다. 소수의 생존자가 입을 열었을 때도 사람들은 재빨리 알아채지 못했다.

 

- "딴생각을 했어요."
단조로운 고속도로 운전 중에 딴생각을 하지 않는 이는 드물겠지만, 이때의 딴생각이란 단순한 곁가지 생각이 아니라 어떤 완벽한 기억을 말하는 것이었다. 수년 전에서 십수 년 전까지의 기억을 머릿속으로 재생하다가 심각한 교통사고들을 내고 만 운전자들을 아무도 쉽게 비난하지 못했다. 언제이건 약을 복용했던 이들은 종종 자기 머릿속에 갇히곤 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었다. 몇 분이고 완전히 의식의 끈을 놓쳐버린 후 소스라치며 깨어나던 경험들을 두고, 오감을 완전히 잃은 것 같았다고 증언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현재성을 압도하는 기억들을 담아두기에 사람의 의식이란 균열이 너무 많은 저수조나 다름없었다.  

- 이제 천도를 완벽하게 외워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거기 바로 찾던 별이 있을 정도였다. 어마어마하게 습득하기 힘든 사어들을 쉽게 익힌 언어학자들은 고문서를 휘파람 불듯이 읽었고, 연대표를 완전히 장악하고 시작하는 역사학자들은 신식무기를 배당받은 군인들처럼 자신만만했다.
원로학자들이 "이런 것은 진짜 학문이 아니다"를 외치며 아무리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도 그건 진짜였다. 학설을 뒤집고 또 뒤집은 젊은 학자들은 원래도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그저 HBL1238이라는 도구를 최대한 활용했다는 점에서 전 세대와 구분될 뿐이었다. 학계가 나아가는 속도가 얼마나 빨랐던지 따라잡는 데에도 알약이 필요하게 되었다. 

- "그 약의 유일한 부작용은 부작용이 없는 것이었다."
블라우 박사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사실은 크리스마스 쿠키인 스니커 두들이 먹고 싶다는 게 마지막 말이었지만, 제자들은 위의 말을 마지막 말로 간주하기로 합의했다.

- 그런 관점에서라면 HBL1238도, 그 부작용도 그저 사소한 우연이었을 뿐이었다. 그전에도 거대한 회사들이 세계를 지배하는 동시에 망쳤고, 매번 해결책 대신 미봉책만을 택했으며, 사람들은 시대가 흘러가는 진행방향의 굵은 화살표 위에 앉아 불행의 원인을 쳐다보지 않았다. 괴로워하며 더 괴롭게 만드는 액체를, 고체, 기체를 삼켰다. 
작은 하늘색 알약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고 동시에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 <리틀 베이비블루 필>



- 뭔가가 크게 잘못된 것만 같아, 새벽마다 메슥거림에 잠들지 못했다. 마치 인류가 얼마나 흉악한 종인지 누군가 그에게 개인적으로 알려주기 위해 세상을 움직이는 듯했다. 대단히 열정적인 교육자는 아니었지만 학생들에게 애정이 없지 않았는데, 교단에 서면 어디를 바라봐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해 여고로 향했다. 그러나 여고에 가면 그런 일이 멈추리라 생각한 것은 착오였고, 여자라고 사람을 못 죽이는 건 아니었다.

- "통계를 벗어난 일이라고 여겼지만 제가 그런 일에 어떻게든 영향을 준 적은 없습니다. 그 아이들이 다 제 담임반이었던 것도 아니고요."
승균의 미미한 항의에 소장이 다시 눈으로 웃었다.
"선생님의 목소리 때문이었습니다."

- "우리 요원들이 오래도록 잠복해서 얻어낸 결과입니다. 선생님의 목소리 샘플로 국립기관에서 실험도 했어요. 폭력적 인자를 가진 이들에게 들려주면 일종의 각성 효과를 내더군요. 특이한 주파수를 가진 것도 아닌데 어째선지 선생님의 목소리는 살인자들을 깨웁니다. 선생님의 얼굴도 아니었습니다. 만약 제거술을 받지 않겠다고 결정하시면 연수중 사고를 당해 사망했다고 가족분들께 통지가 갈 것이고 선생님께서는 여기에 계속 계시게 될 겁니다. 그 경우에도 선생님의 편의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만, 부디 신중히 선택해 주세요." 

- 승균은 수용소의 위치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수용소의 담은 별로 높지도 않은데 보이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나무 끄트머리 하나 보이지 않고, 썩은 우유 같은 하늘만 보였다. 평지인지 산 위인지도 알 수 없었다. 바다 냄새가 나지 않는 걸 보니 섬은 아닌 게 확실했다. 수용소 내부 역시 특징적인 요소 없이 폐쇄적인 의료 시설 정도의 풍경이었다. 규모도 그렇게 크지 않아 밖에서 보면 수용소인지도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성의 없이 지은 기업 연수원 정도의 건물로 보일 터였다.

- 생각보다 음식은 나쁘지 않았다. 이반 데니소비치처럼 양배추 생선국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환경을 떠올렸지만 아니었다. 세기가 바뀌긴 했어도 아직 그런 나라들이 상당히 남아 있을 텐데 대한민국은 제법 괜찮은 나라구나, 승균은 감탄했다. 


-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나서는 사랑 노래 부르는 게 약간, 아주 약간 힘겨웠다. 전화 통화로 헤어지고 싶었는데 수용소 측의 금지로 불가능했다. 짧은 문자로 헤어졌고, 아마 바깥 세계에서 최악의 남자로 소문나고 말았을 터였다. 여자친구가 시원하게 자신을 잊고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수용소에 들어와 보니 머리가 맑아져서 깨달았는데, 애초에 여자친구가 너무 아까웠다. 누가 봐도 아까웠을 것이다. 여성의 비율이 훨씬 높은 교직 사회라 승균에게도 기회가 있었던 것이지, 아니었으면 어림도 없었다.

 

- 여자친구는 똑똑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된 사람이었다. 이른 아침에 온 가족이 EBS 영어회화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함께 시청하는 좋은 집안에서 자랐다. 그에 비해 승균은 오래전에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과 거의 연락하지 않았고, 혼자 불규칙하게 살며 밤새 무익한 프로그램을 보다가 해가 뜨면 우울감에 몸을 일으킬 수 없어 병가를 낼 때도 있었다. 
두 사람 다 겉보기엔 성실했지만 승균의 성실함은 환경과 기질을 이기기 위한 안간힘 쓰기에 가까웠고, 여자친구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사귀는 기간이 길어지며 여자친구는 그 차이를 알아챘던 것 같다. '내가 왜 너 같은 놈이랑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로 읽히는 차가운 판단이 눈 속을 스쳐 지나가는 걸 보았다. 지극히 비언어적으로 전해져 오는 언어들이 있었다. 회의의 말들이. 

- 한동안 가슴앓이를 했지만 그럼에도 사랑하느냐, 관계를 되돌리고 싶으냐, 인어왕자라도 된 것처럼 목소리와 바꿔서라도 만나러 가고 싶으냐, 물어온다면... 그건 아니었다. 승균은 털고 일어나 포토샵 담당자에게 해외에서 지내는 자신의 모습을 한층 멋지게 합성해 달라고 부탁했다. 여자친구가 그 사진들을 보며 욕하고 있을 걸 알기에. 

- 그즈음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린 것은.
"나가지 말아 버릴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다른 사람 목소리인 줄 알았다. 마치 무의식이 직접 말을 걸어온 것처럼 느껴졌다.
"그냥 나가지 말아 버릴까?"
문득문득 낮은 목소리로 말이 터져 나오는 일이 반복되었고, 승균은 의외의 결론으로 흘러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수용소에서 승균의 삶은 만족스러웠다. 건조하고, 소박하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만나지 않아도 되었다. 

- 여행 프로그램은 삼킬 듯이 보게 되었다. 갈 수 있었을 때 가지 못한 먼 나라들에 대한 고화질 동영상들을 보고 또 보았다. 세상의 동정보다 풍경 그 자체가 그리웠다. 그리고 가요 프로그램을 손꼽아 기다렸다. 온갖 노래들의 가사를 글자 하나까지 정확히, 랩까지 다 외우다니 스스로가 대견한 건지 한심한 건지 헷갈렸다. 라디오의 경우엔 암호 해독가와 동석한 채 세 줄 이하의 메시지와 함께 신청곡을 보낼 수 있었다. 디제이가 신청곡을 틀어주기라도 하는 날에는 울컥했지만,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았다. 책은 거의 구립 도서관 수준으로 갖춰져 있었고, 신간도 정기 간행물도 충실히 들어왔다. 깨끗한 책들을 기다리지 않고 읽을 수 있었고 아무도 독촉하지 않았다. 종이 신문을 온 종류로 구독하는데 바깥세상에서 수용소를 수상히 여기지 않는다니 그것은 좀 우스웠다.

- 수용자들의 다양한 취미 생활을 위해 드는 혈세는 적지 않을 터였다. 승균은 선량한 교육공무원답게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그런 태도를 버렸다. 어쨌든 승균과 다른 수용자들은 자유를 대가로 지불하고 있었다. 평소 보잘것없이 취급했던 그 자유가 사실은 비싼 거였다는 데 굳이 토를 달 필요는 없을 듯했다. 사양하지 않고 호사를 누리기로 마음먹었다.

- "아무것도 몰랐지. 자네들 민간인을 사찰하고 있었잖아. 사찰을 할 거면 나 같은 사람을 사찰했어야지. 괴물들을 두고 학생들이나 잡아다 고문하고 있었다니 아직도 기가 막히네. 게다가 먼저 찾아갔더니, 기껏 한다는 짓이 나를 무기로 쓰려고 했고, 적국에 가서 사람들을 죽이라질 않나, 우방국에 나를 무슨 선물처럼 바치려 들지 않나. 냉전 시대에도 할 소리가 있고 안 할 소리가 있지... 양심적이고 효율적인 독재 정부 같은 소리 누가 하면 혀를 뽑아버릴 거야. 그 억울한 세월을 어떻게 견뎠는데 이런 상황이 또... 가서 일목인 변호사나 찾아와! 어딘가에 한 명은 있겠지! 괴물 변호사도 괜찮아! 갇혀 있는 변호사 없어? 찾아와! 소송할 거야! 아, 닥치라고, 소송한다고!"
소장은 경모를 진정시키기 위해 열심히 상부와 조정 중이라며 웅얼거렸다. 하지만 그 조정을 기다리는 동안 연선이 버틸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다. 승균과 하민이 연선을 다른 수용소로 이동이라도 시켜달라고 항의했지만, 연선의 특이한 점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수용소까지 사태가 번질 수 있다며 거절당했다. 변수를 통제해야 한다는 대답이었는데 소장을 한 대 치고 싶고, 벽을 때리고 싶고, 물건을 던지고 싶었지만 그중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승균은 자신이 폭력성을 완전히 제어할 수 있는 이상적인 시민인데도 갇혀 있다는 게 갑자기 믿을 수 없어졌다. 

- "누나를 내보낼 수만 있으면... 그다음부터는 어떻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응?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알고 봤더니 하민은 정치권 거물들에게 끈이 있었다. 그의 특수한 머리카락 선동 능력은 민주주의를 왜곡시킬 수 있는 비밀병기였고 정보가 어디서 어떻게 샜는지, 얼마 전의 투표 때(수용소에도 간이 투표소가 차려졌었다) 집권 여당의 핵심 인물들이 수용소를 찾아왔었다는 것이다. 하민은 그런 면회가 어떻게 주선된 건지 당황스러웠지만, 언젠가 수용소 밖으로 나갈 때를 대비해 통장 잔고를 채우기로 했다. 그때 비밀유지 각서를 썼음에도 승균에게 털어놓은 건 연선을 위해서였다. 

- 그런 쪽의 재주가 좋았다. 승균의 아이디어는 하민의 손끝에서 구현되었다.
"이 재주가 여기서 썩고 있다니."
"제가 생각해도 아까워요."
"한 번만 제대로 작동하나 켜보고 싶다."
"그럴 수 없다는 거 알잖아요."

- 디데이는 하루도 늦춰지지 않았다. 승균은 디데이의 밤, 묵직하게 완성된 조끼를 입고 수용소 마당 한가운데에 섰다. 건물을 끼고, 시체 정원에서 가장 먼 위치였다. 검은 눈을 퀭하게 뜬 것 같은 흰 건물을 올려다보며, 승균은 수용소 생활을 그리 싫어하지 않았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인생의 한 시기와 다음 시기의 솔기에 서 있다는 걸 분명히 깨달았다.

- 간수들이 승균을 덮쳤을 때에는 <챠우챠우>를 목청껏 부르던 중이었다. 전국의 살인자들에게 가닿았을지도 모르는 해적 방송이 시작된 지 11분 남짓이 지나 있었다. 그늘 속에 있던 하민이 튀어나와 승균 뒤를 쫓던 간수 몇에게 태클을 걸긴 했으나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어쨌든 그 질주는 수용소 측에서 러닝머신 설치를 후회하게 할 만큼 충분히 긴 질주였다. 목표했던 바 이상이었다. 승균은 다행히 콘크리트 바닥이 아닌 잔디에 얼굴을 처박고 쓰러졌는데, 그 와중에도 연선이 제대로 탈출했을까 걱정할 여유가 있었다. 

- "지금 여기 안 보이는 인원들이 어디 있는지 확보해!"
현관에 선 소장이 거인처럼 쩌렁쩌렁 외쳤다. 눈에 흰자가 더 많았다. 그동안 숨겨왔던 얼굴이 드러난 셈이었는데, 그런 소장에게 압도되진 않았다. 승균은 흙을 뱉어내며 조각 난 부품들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하나의 방법이 통하지 않으면 다른 방법을 또 찾을 것이었다. 어떻게든 연선을 내보낼 거라고, 강한 의지는 무감각에 가까운 평정심으로 느껴진다는 걸 처음 깨달으며 생각했다.
"저 새끼는 저 새끼는 가둬버려."
깍듯이 여 선생님이라 부르던 소장이 어금니를 불룩거리며 말했다.

- 승균은 지하에 갇혔다. 수용소 안에 정말 철창으로 된 방이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하민은 어디 갇혔는지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따로 수감된 모양이었다. 시계가 없었지만 하루에 세 번 나오는 식사로 시간의 흐름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음식은 형편없었다. 같은 식당에서 같은 사람들이 조리할 텐데, 일부러 질을 낮추라는 명령이 있었던 게 아닐까 의심되었다. 어떤 합의가 깨어졌으며, 그것을 깬 것은 승균이었으므로 불만은 없었다. 그래도 음식에 영양가가 없지는 않았을 텐데 잇몸이 물러진 것 같았다. 햇볕을 쬐지 못해서 그런 것일 수도, 제압당할 때 이가 흔들린 것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다른 것은 다 괜찮았다. 연선이 어떻게 되었는지만 누가 알려줬으면 했다. 땅굴을 기어서 잘 빠져나갔는지 승균은 알아야만 했다. 가벼운 힌트만이라도 주어졌으면 했는데 간수들에겐 바늘도 들어가지 않을 듯했다. 하민과 경모가 혐의를 얼마나 함께 받고 있는지, 수현이 잘 돌아왔는지도 궁금했다. 어린이는 어린이로 대우받아야 할 것이다. 

- 한 달이 넘게 끔찍한 급식을 먹어야 했지만 소장의 심술은 이내 풀렸고 모든 것이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일목인들은 빡빡해도 뒤끝은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경모가 수염 다듬기를 포기하고 도인처럼 허옇게 기르기 시작했다는 것, 반면 수현은 스스로 머리 땋는 법을 익혀 몇 번인가 서툴게 시도하더니 어느새 자메이카 출신 구울처럼 레게 스타일이 되었다는 것.
그 둘을 볼 때마다 승균은 예전으로 완전히 돌아갈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다. 시간이 아무리 지난다 해도 수용소를 연선이 오기 전으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괴물들이 털을 기르며 연선을 기억하니까. 

- "마음을 정하셨군요. 네, 수술 날짜를 잡기로 하지요."
심지어 왜냐고 묻지도 않았다.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고 대답하려 했는데 말이다.
어쩌면 연선에게 느끼는 감정은 중독의 일종인지도 몰랐다. 그런 의심이 들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연선이 어떤 새로운 종류의 괴물이라서, 괴물 위의 괴물이어서 그들을 지배했다면... 자유를 되찾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모두를 중독시켰을 가능성은 분명 있었다. 수용자들은 부탁 한번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움직였으니까.
그렇다 해도 그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다면 이번에는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의 마주 봄으로 영원히 잊지 않을 수 있으리라고. 
 
- 승균은 웃으면서 하민과 주먹을 부딪쳤다. 대한민국 정재계의 방향을 비틀어버리는 사람이 비밀 수용소의 스물한 살짜리라니, 누가 상상이나 할까. 승균은 처음 수용소에 들어왔을 때 자신과 다른 수용자들이 세상을 미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이제 다시 수용소를 나가자니, 세상은 원래 아주 이상한 곳이었고 그들이 더한 것은 그저 미량의 광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 "한 가지만 약속해 주세요."
고인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 애쓸 때 수현이 요청했다. 승균은 뭐든지 들어주마 했다.
"나중에 돌아가시면요. 화장 같은 낭비 절대 하지 말고, 미생물이니 캡슐이니 요상한 것도 쓰지 말고 그냥 땅에 묻히세요. 정 신경 쓰이면 얇은 판자 관에 천 한 장 정도 감고요."
"어어... 그래. 그 정도야."
"저야 여기서 대충 먹고살 수 있지만 저 밖에 보호받지 못하고 굶주리고 있을 친구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요."
승균은 잠깐 당황했지만 수현의 의도가 고 또래 아이들이 식량 부족 국가의 친구들을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무엇이리라 여기고 넘어가기로 했다. 

- "그래서, 밖에 나가면 뭐가 제일 이상할 거 같아요?"

하민이 물었고 승균은 잠시 고민했다.
"음... 나갔는데 만약 여기가 서울이라면 제일 이상할 거 같아요. 서울이나, 내가 아주 잘 아는 그런 친숙한 도시라면. 물론 수용소 측에서 위치가 탄로 날 정보를 제공할리 없겠지만."
"아아,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아요. 여기가 사실은 동떨어진 곳이 아니라면... 이상하겠죠."
가깝길 바라는지 멀길 바라는지 알 수 없는 마음으로 승균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앉아서 연선이 탈출한 이후 두 배로 밝아진 탐조등과 그 탐조등 뒤로 펼쳐지는 어둠을 바라보며 수용소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 수술용 조명이 감은 눈꺼풀을 하얗게 만들었다. 실핏줄이 내비게이션처럼 잠깐 켜졌다. 그 와중에 연선을 생각했다. 언젠가의 저녁, 연선은 수용소 앞마당의 벤치에서 고작 맥주 두 캔에 취해 느슨하게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경모의 담배를 뺏어 들고는, 피우지는 않고 머리 위로 들고 공중에 연기로 그림을 그렸다. 혹은 글씨를 썼는지도 모른다. 춤을 추는 것 같은 동작이었지만 바라보는 내내 승균은 담뱃재가 연선에게 떨어질까 불안했고 그 노심초사가 무색하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수용소가, 세계가 연선을 사랑해서 담뱃재조차 닿지 않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참 이상한 존재. 우주의 사악한 톱니바퀴에 으스러지지 않는 모호한 존재.

- 수술대는 추웠고, 의사는 어쩌면 의사가 아니라 정부가 보낸 사람이라 수술을 하는 척 승균을 죽일 수도 있겠지만, 승균은 미소 지었다. 마취약이 들어올 때, 의사가 숫자를 거꾸로 세라고 했는데 승균은 전혀 엉뚱한 말을 남겼다.
하필이면 사랑이 일목 대상인 일목인처럼.
물거품이 될 각오가 선 인어처럼.

- <목소리를 드릴게요>

 


- 현대사 수업에는 동시 접속을 해야 했다. 다른 수업과는 달리 수강자의 주의 집중도와 각 정보에 대한 반응 역시 면밀히 수집되었다. 아라는 어쩐지 불편했다. 잘 듣고 있다고 상체를 좀 앞으로 기울여줘야 할 것 같았고, 일부러 표정이라도 만들어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방침의 의도 자체는 이해할 수 있었다. 대멸종 이후 같은 실수를 거듭할 여유는 없다고, 전 지구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현대사, 그중에서도 생명권 부분이 가장 중요한 과목이 된 것은 그래서였다. 아라는 최대한 편한 자세를 취하려고 애썼다. 

- [그러니까 여섯 번째 대멸종 이전의 사람들도 생명권의 개념을 가지고 있긴 했습니다. 겨우 고려되기 시작한 단계였지만요. 사람과 함께 생활하는 동물들을 해치지 말자고, 모피를 입지 말자고, 또 그때까지 식생활의 중심이었던 육식을 줄이자고 소수의 사람들에게서 처음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 친구들이 역겨움의 반응들을 보내왔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보내, 하고 아라 역시 맞받아쳤다. 2백여 년 전 사람들은 기쁠 때도 위로가 필요할 때도 서로 고기를 사주었다고 한다. '고기를 사주는 친구가 좋은 친구'라고 말하는 옛 영상 자료들을 보면 뜨악했다. 요리 프로그램 자료들은 그로테스크의 극치였다. 사람들은 온갖 동물을 온갖 방식으로 먹었다. 지금 사람들과 그렇게 다르지 않은 얼굴로.


- "배양 단백질이 없던 때잖아. 있어도 너무 비쌌고, 집단의 문화를 개인이 전복하기엔 무리가 있었지."
"하지만 21세기 사람들이 소와 돼지 대신 곤충이라도 먹었다면, 급한 대로 밀웜이라도 먹었다면..."
"밀웜은 무슨 죄야? 종차별이다, 그거."
"그야 그렇지만, 그러기라도 했으면 그 모든 파국은 오지 않았을지도 몰라."
"가죽보다, 깃털보다 나은 소재가 잔뜩 나왔는데도 그대로 동물을 죽여 입다가 한두 해 후에 버리던 사람들이라고, 뭐가 가능하고 불가능하고 같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었던 거야. 세계관의 문제였지." 
가장 가까운 친구인 미조와는 관련해서 이야기를 자주 나눈다. 미조는 옛날 사람들에 대해 우호적인 편이 아닌가, 아라는 생각한다.

- "그거 알아? 우리가 먹는 음식과 이름이 같아도 맛은 꽤 달랐대."
미조는 옛날 음식의 맛을 궁금해했는데, 아라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옛날 음식과 가장 유사한 것은 기념일에 나오는 재현 음식일 것이다. 새로운 재료로 전통 음식을 가능한 수준까지 모방했다는데, 그마저도 아라의 입맛엔 너무 자극적이었다.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매일 그렇게 몸을 병들게 하는 걸 먹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라는 평소의 식단을 선호했다. 개인의 건강에 완벽히 맞춰 공급되는 데다. 질리지 않는 맛이었다. 아무것도 해치지 않고 오염시키지 않고 생산되는 식량의 부드러운 맛... 2백 년 사이 추구하는 맛 자체가 바뀐 것이다. 

- [수온 상승과 바닷물 산성화로 온 바다의 산호가 녹아 사라진 것은 2050년경의 일이었습니다. 바다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 것처럼, 멸종도 바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 우주 이주 실패가 의도치 않게 혁명을 성공시켰던 것은 역사에서 자주 되풀이되는 아이러니였다. 사람들은 아무 데도 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 다음에야 이 작은 행성의 가치를 다시 매겼던 것이다.

 

- [언젠가는 마을 가장자리에 서서 비명을 지르는 마녀 취급을 받았던 사람들이 끝내는 모두를 구했습니다. 인공 포궁과 바이오 필름형 피임도구의 보편화가 기술적으로 발맞추었습니다. 원치 않는 임신이 지구상에서 사라졌습니다. 인공 포궁에 대해서는 제도적으로 여러 각도의 접근이 있었으나, 이내 정부가 관리하되 사용은 오로지 개인이 할 수 있도록 정비되었습니다. 인공 포궁을 이용하려는 사람은 양육자 교육기관에 등록하여 능동적인 생명권 교육과 인권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냉동실에서, 야산에서 아이들의 시신이 발견되던 학대와 살해의 시대가 끝났습니다. 그렇게 사회는 드디어 트라우마 없는 시민들을 키워냈습니다.] 

- "그럼 난 태이의 유전자로 태어났어, 아니면 공동체 유전자로 태어났어?"
"그게 궁금해?"
태이는 명확하게 대답하지 않았지만 아라는 자신이 공동체 유전자로 태어났을 거라 짐작했다. 대멸종 이후 인류는 오래 내려온 유전자를 부끄러워하기 시작했다. 그 모든 파국을 불러온 공격성과 이기심을 물려주는 것을 거부했다. 그래서 종 다양성 보호에 기여한 유난히 이타적인 사람들의 유전자를 역시 복잡한 절차를 거쳐 모았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유전자가 아닌 익명의 공동체 유전자를 원했다. 닮은 대상이 아니라, 닮지 않은 대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 했다. 태이도 그랬을 것이다. 

- [적정 인구수에 가까워졌을 무렵, 전 세계적으로 도심 압축이 이루어졌습니다. 완전히 자급자족적으로 기능하는 도시를 설계하여 인류의 생활공간을 좁혔습니다. 나머지 면적을 자연에 되돌려주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대한 것보다 식물들이 그 회복 영역을 삼키는 속도는 빨랐습니다. 숲이 번지는 속도를 경이롭게 바라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거기서 사라진 줄 알았던 종들이 다시 발견되길, 인류의 방해를 받지 않고 마땅히 나아가야 할 길을 향해 나아가길 지켜볼 날만 남았습니다.]

 

- <7교시>



- 하나 남은 화살은 승훈을 위해 남겨둔 것이지만 이제 정윤은 승훈을 보러 잘 내려가지 않고, 그 화살을 스스로를 위해 쓰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는데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그래도 발가락으로 시위를 당겨야 할지, 다른 장치를 해야 할지 그 고민만은 미뤄둔다. 

- 승훈을 만난 건 여름이 막 시작될 때였고, 여름이 발을 질질 끌 때 승훈이 좀비가 되었기에 사귄 기간은 정말 얼마 되지 않는다. 짧기 때문에 단계별로 곱씹어볼 수 있다.

 

- 메달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고, 노력이나 과정이 중요할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들이다. 당신들한테나 중요하지 않겠지. 쏘아붙이고 싶어 진다.

- 물론 양궁을 좋아한다. 시합이 시작되면 웅성거리던 경기장이 조용해지는 것이 매번 근사했다. 수백 명이 모여 있어도 바람 소리가 들릴 정도가 되는데, 양궁장 관객들만큼 매너 있는 사람들도 또 없을 것이다. 시위를 놓기 전, 감각은 줄 세운 듯 정리되고 정윤의 호흡이 모든 것을 판가름한다. 얕게 내쉬다가 멈출 지점을 찾아야 한다. 너무 빨리 멈추면 빗나가고, 너무 늦게 멈추면 힘이 빠진다. 1초를 5백 분절 정도로 나누어 완벽한 마디에 다다라야 한다. 정윤의 우주가 정지한다. 가끔은 심장마저 잠깐 멎는 것 같다. 미세한 진동조차 용납되지 않기에 불수의근까지 배려해 주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시위를 놓을 때의 탄력적인 팔분음표, 화살이 날면서 내는 공기와의 멋진 마찰음... 

- 그 모든 것과 별개로 메달을 원한다. 메달과 메달에 따라오는 연금을 원한다. 메달은 지도자 코스를 밟을 수 있게 뒷받침해 줄 것이다. 메달의 단단한 금속을 녹여 가늘지만 강력한 사슬 그물을 만들어 인생의 하한선에 걸어두고 싶었다. 메달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한 번도 캐스팅되지 못한 배우, 설계가 채택되지 않아 시공된 건물이 없는 건축가, 선거마다 당선되지 못하는 정치인, 훈련만 하다가 우주에는 나가보지 못하고 은퇴한 우주 비행사에게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아, 그런 무신경함이라면 상대를 가리지 않고 그럴 수도 있겠다. 

- 영광은 분명 존재한다. 영광의 좁고 동그랗고 하얗게 빛나는 영역 안에 걸어 들어가고 싶은 사람에게 영광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다. 정윤은 영광을 원한다. 기억하는 한 언제나 그래왔다. 정윤의 경쟁자들은 살아남았을까? 활을 쏠 줄 안다는 것이 도움이 되었을까? 절체절명의 순간에 손에 활이 있었을까? 화살은? 혹시 마음속에 경쟁자들이 줄길 바라는 마음이 있는지 정윤은 자주 점검해 보았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얼굴만 알거나, 인사를 나눠본 다른 선수들이 살아 있길 기도했다. 영광을 영광스럽게 쟁취하길 원했다. 이런 지옥에서도 끔찍할 정도로 어두운 조각의 마음은 자라나지 않아서 안도했고, 스스로가 온전한 운동선수처럼 느껴졌다. 

- "어째서 사격이 아니라 양궁이었어?"
승훈이 물었을 때, 정윤은 질문 자체에 어리둥절했다. 일반인들에게는 두 종목이 비교 대상인지 몰라도 정윤에겐 아니었다. 사격은 고려 대상이었던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양궁이었다. 


- <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


 




- ... '원 히트 원더'로 남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정세랑은 자신만의 스타일을 발견했고, 갈고닦았고, 각인시켰고, 유지하고 있습니다. 포맷 자체가 기발한 연작 단편집도 있었고, 현실에 독특한 상상력을 '외삽'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만들어냈죠. 그리고 그 결과물은 꾸준한 반응을 얻었고요. 꾸준히 좋은 반응을 얻기란 꾸준히 쓰기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작가는 이 어려운 일을 해냈을까? 어떻게 스타일을 갈고닦았으며, 그 기원은 어디일까? 이 단편집 <목소리를 드릴게요>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초창기 단편부터 근래에 발표된 작품까지 모두 수록돼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오래된 작품과 가장 최근의 작품 사이에는 8년이 넘는 시간차가 있습니다. 강산이 한 번 바뀌기 직전이죠.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단편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스타일의 일관성입니다. 웹진에 단편을 투고했을 때와 입지를 갖춘 작가가 된 이후의 스타일에 큰 변화가 없습니다. 세계관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만큼 굳건한 중심 혹은 심지가 있다는 뜻이겠죠. 

이 단편집의 첫 번째 작품이자 가장 짧은 단편인 <미싱핑거와 점핑 걸의 대모험>은 그 스타일을 소개하는 전주곡으로 딱 어울리는 작품입니다. 세계가 어딘가 잘못됐고, 그 원인은 알 수 없습니다. 주인공이 거기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죠. 주인공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돕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 온갖 고생을 하지만, 그건 그냥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바깥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주인공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죠. 내가 사랑하지 않는 세계는 나의 세계가 아닌 것입니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받아들이고 싶은 세계와 그럴 수 없는 혹은 그러고 싶지 않은 '외부' 사이의 간격은 이 단편집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됩니다(한데 모아서 보면 이런 특징을 읽을 수가 있어서 좋습니다. 단편집의 매력이죠).

 

특히 여성성과 자연은 '이쪽'을 대표하는 키워드입니다. 각 단편을 이끌어 가는 주인공은 성별이 제시되지 않았거나 여성인데, 성별이 제시되지 않은 주인공의 경우에도 다른 단편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과 서술 스타일이 거의 닮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다들 여자인가? 하지만 그건 함정일지도 모릅니다. 실제 성별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릅니다. 관건은 그 인물들이 모두 '정세랑 패스'를 통과한 인물들이라는 점입니다. 확장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수렴하려는 사람, 대의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 이기려는 열망 대신에 패배하지 않기 위해 승부에 임하는 사람, 공격수보다는 수비수에 가까운 사람들이죠.  

... 

 

초반부에 주인공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순간을 설명하는 부분은 완전히 '리얼'한 러브스토리입니다. 대학교 캠퍼스에서 시작된 사랑... 맞아 맞아하면서 읽다 보면 어느새 인간 재생 프로젝트와 외행성 개척이라는 소재와 마주하게 됩니다. 하지만 낯설게 느껴지지 않죠. 왜냐하면 그 SF적인 난관들을 돌파하게 된 동기가, 그 마음이, 대학 동아리에서 시작된 보통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독자가 삶 속에서 이미 경험했거나 마주친 마음 말이죠. 

이렇게 공감대를 (아마도 본능적으로) 잘 활용하는 작가는 또 하나의 능력도 갖추고 있습니다. 비교하자면 신춘문예가 아니라 환상문학웹진 '거울' 출신이어서 가질 수 있는 장점이라고 할까요. 장르문학의 장치를 가져다 쓰면서 비현실적인 장치들을 어색하게 다루는 작가들도 많습니다. 작가의 상상 속에서 태어난 세계는 '현실'과는 달리 필연적으로 설명하고 묘사해주어야만 하는데, 이를 부담으로 느끼는 작가에게서는 자연스러운 결과물이 나오지 못하는 거죠. 하지만 이 단편집을 비롯한 정세랑 작가의 작품에서는 그런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꿈과 '상상'의 세계가 이 작가의 본진이니까요. 작은 행성의 서버를 조작하는 식물형 지성체인 '나팔꽃 언니' 같은 캐릭터는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본의 아니게 세상에 해를 끼치게 된 억울한 초능력자들을 코믹하게 소개하는 부분에서는 여유가 느껴질 정도입니다. 마치 공들여 꾸민 정원을 둘러보는 것 같지요. 이런 재미있는 장치를 이렇게 예쁘게 심어놓았구나. 이곳의 주인은 하나하나의 장치와 그것들을 심어놓은 공간 전체를 다 아끼고 있구나. 여기가 이 사람이 아끼는 세계구나. 

뭔가 거창한 것 없이도 그저 선하고 즐거운 공간. 날카로운 비판조차 결 곱게 다듬은,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이들을 위한 놀이터. 정세랑의 첫 SF 단편집 <목소리를 드릴게요>는 이처럼 만나기 힘든 안식처를 제공합니다. 그러니 마음이 무거울 때, 그냥 심심할 때, 짝사랑을 하고 있을 때 등등, 언제고 부담 없이 들러서 쉬어 가시기를 권합니다.
물론 이 작은 세계의 동지가 되기로 마음먹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겠지만요!


김규림, 평론가


 



작가의 말

 


아무래도 스스로를 생각할 때 판타지 작가인 것 같지만, 종종 SF를 썼고 참새와 박새가 수가 모자랄 때 서로서로 무리 지어 지내는 것처럼 SF 작가들과 오랜 우정을 나누어왔으므로 이 책을 꼭 내고 싶었다. 요즈음은 전 세계적으로 장르 사이의 경계가 점점 흐려져가는 듯해 용기가 나기도 했다. 장르문학을 쓸 때도 쓰지 않을 때도 나는 한 사람의 안쪽에서 벌어지는 일에 큰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들 사이,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관심이 바깥을 향하는 작가들이 판타지나 SF를 쓰게 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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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 잘못된 경로를 택하는 상황을 조바심 내며 경계하는 것은 SF 작가들의 직업병일지 모르지만, 이 비정상적이고 기분 나쁜 풍요는 최악으로 끝날 것만 같다. 미래의 사람들이 이 시대를 경멸하지 않아도 될 방향으로 궤도를 수정할 수 있으면 좋겠다. 윤리는 어쩌면 비위에 닿아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자주 곱씹는다. 자료 조사를 하다가 에이미 스튜어트의 <지렁이, 소리 없이 땅을 일구는 일꾼>에서 좋은 정보들을 많이 얻었다. 표지가 적나라하게 지렁이지만 내용은 무척 흥미로웠다.

<모조 지구 혁명기>는 열네 살 때부터 반복해서 꾼 꿈에서 재료를 얻었다. 장르 작가들의 뇌는 악몽 제조기에 가까워서 종종 그렇게들 소설을 쓴다. 반칙이려나? 그래서 그런지 이 이야기를 아주 좋아하는 분들이 있었고 아주 싫어하는 분들도 있었다. 꿈결이 비슷한 사람들만 이야기를 통해 연결되니 어쩔 수 없는 일인 듯하다. 쓸 때는 무엇을 쓰는지 몰랐고, 이번에 고치며 다시 읽어보니 학대자를 살해하는 이야기라는 걸 깨달았다.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일단 쓸 때가 많으니, 나는 그냥 이야기가 지나가는 파이프일지도 모르겠다. 다음에 타투를 하면 파이프 모양을 하려고 한다. 인물들의 성별을 모호하게 수정했는데, 어떤 성별로 이 이야기를 읽으셨는지 궁금하다. 한국어는 그런 작업이 가능한 언어라 즐겁다. 읽는 사람의 마음대로 읽히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 

<리틀 베이비 블루 필>은 할머니의 간병 보조를 맡고 있을 때 썼다. 그 시기에 대한 기억은 이상할 정도로 남아있지 않은데, 반복되는 나날이어서 기억에 깃발이 꽂히지 않았던 게 아닐까 싶다. 요새는 아침에 일하지만 가족들과 함께 살 때는 새벽에 교정을 보거나 소설을 썼고, 덕분에 할머니가 현관문이나 창문을 열고 나가시려는 걸 제때 만류할 수 있었다. 실종이나 추락이 매일 두려웠다. 단 3시간만이라도 필요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었으면 했다. 그렇게 출발한 소설은 주인공이 없는, 통사 서술 비슷한 무엇이 되었는데 가끔 이런 식으로 지독히 건조한 소설들이 쓰고 싶다. 

<목소리를 드릴게요>를 구상한 것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특별판 편집을 맡았던 시기였다. 2010년대 한국에 수용소가 있다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다가, 친한 친구들의 이름이 잔뜩 들어간 소설이 되었다. 친구들은 이 이야기가 단행본으로 묶이는 게 미뤄져서 불만이 많았다. 가장 친한 친구들이어서 일찍 쓰인 것인데 묶이는 순서는 그대로가 아니었던 것이다. 변명하자면 데뷔작도 아직 단행본으로 묶지 못했다. 복잡한 자석 놀이처럼 단편과 단편이 잘 붙지 않을 때가 있다. 이 이야기를 표제작으로 삼은 것은 요새 가장 자주 하는 고민이 한 사람 안의 유해함. 공동체와 시민 사회 안의 유해함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유해함을 신중하게, 더불어 기꺼이 제거하기로 마음먹는 주인공의 목소리를 받아 적고 싶었다. 그리고 몇 년 전에 반복해서 "정세랑 소설은 <목소리를 드릴게요> 말고는 다 갖다 버려야 한다"는 요지의 글을 올렸다 지웠다 하시는 분이 계셨는데... 아니, 제가 정말 다작하는 편인데 정말로 다요? 이제 와선 웃지만, 창작자들에게 조금만 너그럽게 대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7교시>는 <리셋>과는 다른 세계에 있는 초단편이다. 에드워드 윌슨의 <지구의 절반>을 읽고 영향을 받았다. 나는 정말로 여섯 번째 대멸종이 두렵다. 조류 관찰을 좋아해서 전 세계의 관련 단체 소식을 받고 있는데, 모두 개체 수급감에 아득하게 절망하고 있다. 요새 '극단적인 환경주의자'라는 소리를 자주 듣지만 새들이 다 사라져 가는 세계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치우친 게 아닌지 항변하고 싶다. 욕망은 점점 단순하게 수렴해서,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를 누비는 작은 새들을 보고 싶은 마음뿐이다. 우리는 이제 우리와 닮은 존재가 아닌 닮지 않은 존재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사랑의 특성은 번지는 것에 있으므로 머지않은 날에 정말 가능할지도 모른다.

<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는 어려운 희망에 대해 쓰고 싶어서 썼던 이야기가 아닌가 싶은데, 내가 이 이야기를 쓸 때의 기억보다 어떤 분이 웹진 거울에 "그런데 헬기가 구해주지 않고 또 통조림만 주고 가버려" 하고 농담을 남기신 게 강렬했다. 그 농담만 생각하면 매번 웃음이 터진다. 별개로 나는 살아남은 정윤이 먹고 싶어 하던 채소로, 싱그러운 향기로 가득한 작은 화단을 가지게 되었을 거라고 상상한다. 

2020년은 SF 단편집을 내기에 완벽한 해가 아닌가 싶고, 세계는 더디게 더 많은 존재들을 존엄과 존중의 테두리 안에 포함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거라고 믿는다. 너무 늦지만 않으면 좋겠다. 



2020년 1월
정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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