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김영탁] 곰탕 1-2 (완)

일루젼 2024. 6. 26. 19:19
728x90
반응형


저자 : 김영탁

출판 : 아르테(arte)
출간 : 2021.05.13


     

저자 : 김영탁
출판 : 아르테(arte)
출간 : 2021.05.13



와. 이렇게나 많은 것들을 가지고 살아오고 있었다니. 

평생 책만 읽고 살고 싶다는 건 진심이지만, 또 그렇게 한다 해도 앞으로 읽을 수 있는 양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이미 내가 쌓아둔 책들만 읽는다 해도 남은 시간이 모자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이대로는 안된다...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게 살아왔으면서 불현듯 이대로 계속 지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진적이건 대대적이건 변화가 필요하다. 

 

언젠가는 읽을 것 같거나, 아무래도 아쉬울 것 같은 정도로는 안 된다.

하루이틀 안에 집어 들고 읽지 않을 것 같은 책들은 모두 정리하기로 했다. 

그것을 분류하는 작업만도 한두 달로는 안 될 것 같지만, 그래도. 

 

<곰탕>은 그 과정 중에 만난 책이다. 

한 번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었고, 또 구매한 적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도통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는데 책 정리를 시작하니 뿅 하고 나타났다. 

 

일단,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두 권을 다 읽는데 만 이틀이 걸리지 않았으니, 몰입도도 좋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영화감독이 본업에 가까운 김영탁. 하지만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그 사실을 완전히 잊고 읽었다. 묘사가 좋은 편이긴 하지만 딱히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썼다는 느낌이나, 시놉시스 같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이 소설 또한 시간여행과 루프가 등장한다. 하지만 장강명이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에서 다루었던 것 같은 조금 더 맑고 짙은, 고정된 오브제 같은 느낌은 아니다. 그보다는 제목처럼 짙고 구수한, 끓일수록 맛이 깊어지는 <곰탕>을 확실히 더 닮아있다. 

 

처음 읽을 때는 굳이 '곰탕'이어야 하나? '곰탕'이 전체 이야기를 이어주는 핵심인가? 의아했지만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는 어쩐지 '곰탕'이어야 했구나 싶어졌다. 정작 작가는 후기에서 밝힌 바처럼 '곰탕'에서 시작된 에피소드였다고 하지만, 독자로서는 어쩐지 다른 음식이었으면 이런 느낌은 아니었을 것만 같다. 이 또한, '그러했기에 그런' 것이겠지만. 

 

동해의 수위가 낮아진 것일까, 국토가 부상한 것일까. 부산 해안선이 뒤로 물러서고 소금기 머금은 땅이 떠오른다. 경작도 어려운 척박한 땅에는 하루하루의 삶이 고단한 이들이 모여든다. 하지만 이곳은 뭍이되 뻘이다. 몇십 년에 한 번씩 휘몰아쳐오는 해일은 애써 몸 붙이고 살아가던 목숨들을 거두어간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태어났기 때문에, 죽지 못해서, 그저 살아 있으니까... 저마다의 이유로 이어지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그 땅 위에 있다. 

 

그리고 '윗동네'가 된 고지대 사람들은 잃어버린 것들을 생각한다. 이렇게 변하기 전, 자신의 추억이 담긴 것들을 다시금 마주하고 싶어한다. 알음알음 전해져 오는 이야기로는 과거로의 시간여행이 가능하다고들 한다. 하지만 갈 때 절반, 올 때 다시 절반은 죽는다고도 한다. 정말 갈 수 있기는 한 건지, 다녀온 사람이 있기는 한 건지 명확히 알 수도 없다. 그렇다면 딱 그만큼의 아쉬움만 담아본다. 직접 가보고 싶을 만큼 절박하지는 않지만, 된다면 좋겠다 싶은, 그런 사소한 것들로 자신을 대신해 여행을 해줄 사람들을 산다.

 

<곰탕>은 그렇게 '곰탕'이라는 것을 배워오고자 떠난 이우환의 삶에 관한 이야기다. 한 사람의 탄생과 생존, 선택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들로 인해 변한 많은 것들과, 변하지 않은 많은 것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책을 덮으며 독자는 생각한다. 

양창근의 오른팔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박종대는 어째서 그대로일까 하고.

이우환이 열둘이라면, 박종대 또한 열둘이지 않은가 하고. 

금속으로 만들어진 새는, 마치 그들이 여기에도 있지만 거기에도 있었듯이, 하나이지만 둘이다. 

 

그리고 다시금 생각한다. 

오늘의 나는, 무엇이 변했고 무엇이 그대로인가 하고.

그래서 내일의 나에게는, 어떤 것을 전해주고 싶은가 하고. 

 

행복하게 읽었다.    

   


   

 

- 부산의 바다는 당신의 기억보다 먼 곳에 있다. 파도는 산보다 거대한 몸으로 도심을 삼키고 바다보다 멀리 물러났다. 그 많은 바닷물이 어디로 밀려났는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었다. 바다가 밀려나간 곳에는 땅이 드러났다. 바다가 물러난 땅은 주인이 없었다. 

- 가진 자들은 더 높은 곳으로 집을 올렸다. 없는 자들은 바다가 내어준 땅에 집을 지었다. 법은 금했지만 돈이 없었고 살 곳이 없었다. 몇 년 만에 질척거리는 작은 구역이 만들어졌다. 편의상, 아랫동네라고 불렀다. 부유한 자들이 사는 구역은 윗동네가 되었다. 이 도시에 '부산'이 아닌 새로운 이름이 붙여지진 않았다. 10년 후, 또 한 번의 쓰나미가 아랫동네를 삼켰다. 많은 사람이 죽고 산 사람은 모든 걸 잃었다. 하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시 그곳으로 몰려들었다. 수년이 지나고 그곳은 다시 아랫동네가 되었다. 수십 년 후에 또다시 바다가 이들을 삼킬지도 몰랐다. 

- 아랫동네 사람들은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돈을 벌어 윗동네로 올라가야 다음 쓰나미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높았다. 그러니 아랫동네 사람들에게 돈을 버는 건 목숨을 거는 일과 같았다. 그들이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짓거리들 중에는 윗동네 사람들을 흥미롭게 하는 것들도 있었다. 자극적인 것들, 불법적인 것들,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들이 그랬다.

- 아랫동네를 지나 바다가 밀려난 쪽으로 한참을 가면, 거기 새로운 해변이 있었다. 그 해변에서 멀지 않은 바다에 누군가의 말처럼 바닷물을 삼켰는지는 모르겠지만, 거대한 푸른 구멍이 있었다. 그 알 수 없는 깊이 때문에 푸른 구멍은 어둠만큼 짙었다.

- 쓰나미가 지나간 후로 매번 조류독감이 끊이지 않았다. 구제역이 잇달았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가축을 죽였다. 죽여도 전염병은 사라지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모든 가축을 죽여 멸종시켰다. 그리고 새로이 먹을 동물을 만들어냈다. 기이한 생김새였지만, 사람들은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에 만족했다.

- 오늘도 사장이 주방장을 앉혀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국은 소의 어느 부위를 넣고 오래 끓여 파와 함께 먹는 것이었다. '곰국'이라고 했다가, '곰탕'이라고도 했다. 국물 맛이 얼마나 좋았는지, 그 안에 든 고기는 얼마나 구수했는지, 그 맛을 떠올리고 있는 사장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이우환도 한 번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주방장은 사장이 곰탕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난감해했다. 사실, 주방장도 곰탕을 먹어보긴 했지만 아주 어릴 적이라 기억이 잘 안 났고, 사장이 시키는 대로 한 게 지금 식당에서 파는 국이기도 했다. 더는 방법이 없었다. 방법을 몰랐다. 하지만 사장은 포기할 줄 몰랐다. 맛이란 건 좋은 기억 같은 건가 보다. 잊을 수 없는 맛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인가 보다. 이우환은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매일 이야기할 수 있을까. 매번 저렇게 흥분해서 또 생생하게 말이다. 

- 식당 문을 닫고 쪽방으로 들어가 자려는데, 주방장이 우환을 불러냈다. 사장의 이야기를 들을 때만큼 난감한 얼굴이었다.
"저... 아롱사태, 아냐?"
"네? 무슨 사태요? 뭔 일 터졌어요?"

- 우환은 주방장이 그려준 여러 그림 중, 아롱사태를 봉수에게 보여줬다. 봉수는 진지하게 봤다. 그도 아롱사태는 처음이니까. 그 그림은 그냥, 둥글지만 아주 동그랗진 않은 찌그러진 원 같았다. 원을 그리는데 그리는 팔을 다른 누가 자꾸 잡아당겨 힘이 들어간 상태에서 억지로 그린 원 같았다. 봉수도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사태였다.
"염병, 이걸 보고 어떻게 그 사태를 찾냐?"
 
- "야! 너 그거 말이 시간 여행이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이 없어. 다 죽는다고. 그 좋은 여행을 왜 우리같이 없는 사람들만 가겠냐. 왜 돈 필요한 놈만 가겠냐고. 위험하니까, 억수로 위험하니까 그런 거야. 사장이 가게 내주면 뭐 하냐. 너 주방장 생각 없다며? 막말로 니가 거기 가서 곰탕인가 뭔가 끓이는 법 제대로 배웠다 치자, 그 사태도 많이 샀다 치자, 못 돌아오고 죽으면 그만이야. 죽으면 다 그만이라고." 


- 꼭 돈 때문은 아니다. 떠나기 전 반, 돌아와서 반을 받기로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 여행자들에겐 둘 다 소용없었다. 떠나기 전에 받은 반은 어차피 그가 사는 현재가 아니면 쓸 수 없는 돈이었고, 나머지 반은 받는 사람이 드물었다. 사장이 약속한 가게 때문도 아니었다. 우환은 그냥 죽는 게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더 정확히는 사는 게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처음부터 어른이었다. 처음부터 형편없고 돌이킬 수 없는 어른이었다는 생각만 들었다. 언제 죽어도 그만이었다.
"이렇게 사나, 그렇게 죽으나."
 
- 도대체 무슨 말인가? 알아들을 수가 없다. 하지만 꼭 말이 통해야 하는 건 아니다. 눈으로 보고 배우면 된다. 손으로 따라 익히면 된다. 음식은 손맛이라고도 하지 않았나. 우환은 주방으로 눈을 돌렸다. 뭐든 썰면 되지 않겠나. 눈만 뜨면 하는 게 토막 내고 써는 일이었다. 우환이 그걸 못할 리가 없었다. 자신 있었다. 우환은 다짜고짜 주방으로 들어갔다. 썰만한 게, 대파가 있었다. 우환은 대파를 집었다. 무조건 썰기 시작했다. 소리가 요란했다. 칼질은 화려했다. 대파를 총총총총 잘게, 최대한 잘게 썰었다. 식당 사장이 들어와 본다. 입을 연다. 
"아까운 파를 다 조지뿐네."

- 15년을 거래해 온 곳이었다. 그 집 딸이 결혼할 때는 하루 장사를 포기하고 식당에서 잔치까지 했다. 이종인에게 하루 장사를 포기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식당을 차린 후 그날이 유일했다. 아내가 죽었을 때도 식당 문을 열었다. 이종인은 왜 늘 자신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 고기를 속이다니. 고깃국을 파는 사람에게 고기를 파는 사람이 고기를 속이다니. 이럴 수 없었다. 더 좋은 조건으로 거래를 제안하는 정육점도 있었다. 하지만 종인은 그러지 않았다. 단골이라는 게 있었다. 함께 세월을 보낸다는 게 종인은 어떤 건지 알았다. 안다고 생각했다. 아내가 죽은 후로 종인은 그 세월에 더 집착했다. 수입 고기를 섞어 판다는 소문이 진작 돌긴 했었다. 하지만 믿었다. 나한테는 안 그러겠지. 함께한 세월이 얼만데. 종인은 변해가는 세월은 생각지 않고 세월의 무게만 믿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다.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고기를 대출 곳은 많았다. 종인의 식당은 여전히 부산 최고였다. 아니 전국 최고라고 생각했다. 믿고 거래했던 단골 정육점이 고기를 속여 팔았다는 걸 안 이종인은 식당으로 돌아오자마자 전화를 돌렸다. 가장 좋은 조건을 제안하는 곳과 거래를 시작했다. 그렇게 간단히 15년 단골과 인연을 끊었다. 오전의 일이었다. 오후가 되도록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꽤 긴 세월을 살았는데도 믿던 것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있는 자신이 속상했다. 늘 현명했던 아내 생각이 났다. 아내가 있었더라면 배신을 당하지도 않았을뿐더러 그리 오래 안 사람을 한나절도 되지 않아 남으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속인 정육점 사장보다 속은 자신이 나쁜 사람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이리 오래 속지 않고 미리 알았더라면, 두 사람은 아직도 서로에게 단골이었을 것이다. 빈말도 속말도 나눌 수 있는 사이였을 것이다. 답답한 마음에 식당 출입문을 열어젖혔다. 제법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 우환은 알았다. 그 아들이라는 사람이 식당 일을 돕지 않는다는 걸. 좋은 사람일 리도 없다는 걸. 하지만 자신에게는 고마운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우환에게 일자리를 준 거다. 그 사람은 아버지의 일손이 되어준 적이 없었고, 어젯밤, 앞으로도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라는 걸 아버지가 깨닫도록 했으니까. 늦은 밤 사장을 한숨짓게 했고, 그 한숨 덕에 자신이 여기 있다는 걸 우환은 알았다. 한 번도 남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어본 적 없는 사람들은 안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 된다는 건, 자신이 소중해져서가 아니라 더 소중했던 사람에게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라는 걸. 

- 뭐든 있어야 했다. 변명으로 들렸다. 예전부터 그랬다. 양창근은 남의 말을 잘 듣지도 믿지도 않았다. 억울해하며 하는 말일수록 거짓말 같았다. 처음에는 용의자들이 하는 말이 그렇게 들리다가 나중에는 동료들이 말해도 비슷했다. 동료들과 어울리기 힘들어졌고, 그들도 양창근을 싫어했다. 그래서 오히려 전근 다니기는 편했다. 자리를 잡고 싶었지만 결국 떠나게 됐고, 긴 시간을 머물렀어도 떠나올 때 딱히 아쉬운 사람이 없었다. 지금 이 어린 형사가 하는 말도 그랬다. 믿음이 안 갔다.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니, 말이 안 됐다. 
"아, 진짜라니까요. 제가 이틀 동안 학교에 있는 모든 시시티브이를 사건 발생 시간 한 시간 전후로 깡그리 다 봤다니까요? 근데, 없어요. 전혀."
놓친 거다. 분명히 놓친 게 있다. 있어야 했다. 걸음을 옮기는 발뒤꿈치라도 보였어야 했다. 양창근은 형사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앉았다.

- 난처했다. 무작정 데리고 와 머리를 열어달라니. 뇌 전문의 서유헌은 탁성진과 대학 동기였다. 대학 시절 탁성진은 뛰어났다. 한데,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다. 학과 공부만도 할게 많았다. 탁성진에게만 더 많은 시간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탁성진은 티 나지 않게 조금씩 학과 공부와 거리를 뒀다. 하지만 사람들과는 오히려 가까워졌다. 탁성진은 늘 아는 사람이 많았다. 레지던트에 올라갈 때 탁성진은 병리학을 선택하면서 서유헌과는 멀어졌다. 병리학은 인기 과가 아니었다. 병리학을 선택한 게 정말 원해서인지 다른 과를 갈 수 없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탁성진은 언제나 누구보다 많은 걸 알고 있었다. 그건 지금도 그랬다. 사실 단순히 뇌를 열어 안을 살피는 거라면 탁성진도 할 수 있을 터였다. 그게 불법이라도 탁성진에게는 그다지 고려 대상이 아니었을 것이고, 배운 적이 없더라도 배우면서 언제나 수준급으로 해냈으니까, 어쨌든 탁성진은 하려면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한데 여기까지 왔다. 그럴 만하지 않은 상태라는 거였다. 서유헌은 자신의 바쁜 스케줄을 들먹거리기 전에 일단, 물었다.
 
-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모든 걸 동경하거나 무엇도 기대하지 않게 된다. 우환은 기대하지 않는 아이로 자랐다. 일찍부터 너무 많은 게 뻔해 보였다. 고아원을 도망치는 것도, 다른 부모에게 가는 것도, 그냥 다 빤해 보였다. 해본 게 아무것도 없어서 우환은 그냥 다 빤한 거라고 생각했다. 같이 있는 아이들은 자꾸 뭘 바랐다. 더 맛있는 밥, 더 깨끗한 옷, 더 푹신한 잠자리, 더 상냥한 선생님, 더 잘난 양부모. 바라면서 힘들어했다. 못 견뎌했다. 그리고 떠났다. 하지만 우환은 그러지 않았다. 어쩐지 바라지 않고 사는 게 우환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니 맛은 없어도 밥을 주고, 벌레가 있긴 했지만 재워주고, 때리는 사람도 있지만 놀아주기도 하는 그곳을 떠날 필요가 없었다. 우환은 그곳에 머물 수 있을 때까지 살았다. 

-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앞서가던 강도영이 무슨 생각이 났는지 멈춰 섰다. 어설픈 서울말을 써가며 양창근을 흉내 냈다. 흉내 내며 비웃었다.
"니가 죽인 거 아니지? 캬, 멋있어. 멋있긴 해."

 

- 양창근은 탁성진이 원래 저런 사람인가 생각했고, 강도영은 오랜만에 보는 모습에 좀 당황했다. 강도영이 보기에 탁성진은 뭐랄까, 헤매고 있었다. 

- "영감, 술 다시 마십니까?"
강도영이 묻는다. 탁성진은 말이 없다. 딴생각에 빠져 있다. 

"술 깨고 다시 이야기합시다."


- 강도영이 먼저 부검실을 나선다. 형사들이 따라 나간다. 양창근은 생각에 잠겨 있다. 받아들이기 힘든 말들이었다. 물어볼 말이 많았다. 하지만, 강도영의 말이 맞다. 술을 깨고 다시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다고 느낀 양창근도 부검실을 나섰다. 어떤 식으로든 오래 있고 싶은 공간은 아니었다. 탁성진은 그 안에서 어떻게 시체를 두고 술까지 마시는지, 얼마나 오래전부터, 얼마나 자주 마셨는지, 잠깐 궁금했다. 예전에는 얼마나 마셨기에 강도영이 저런 태도를 취하고, 형사들은 모두 수긍하는 건지. 저 엉뚱한 이야기를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 양창근은 이래저래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 양창근은 이해가 안 됐다. 분명히 정보원이라고 했다. 한데 그 정보원이 도망치고 있다. 죽을힘을 다해서. 강도영은 온갖 욕이란 욕은 다 뱉어가며 자신의 오래된 친구 같고 가족 같은 정보원을 쫓고 있었다. 양창근도 강도영과 함께 그 정보원을 쫓는다.

- 나쁜 일을 하는 나쁜 사람들은 나쁜 일에 대해 좀 더 많은 걸 알고 있다. 세계가 다르면 정보도 다르다. 이쪽에 살면서 저쪽의 정보까지 다 알려고 하면 안 된다.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 정보원은 늘 필요했다. 정보원들은 잘 알고 있었다. 이쪽 사람들에겐 생판 남이지만 자신들에겐 이웃인 사람들에 대해서.  

- 심지어 머릿결도 엄청 소중하지 않나. 순희는 티브이를 적절하게 봤기 때문에 광고를 통해서 알았다. 여자들이 자신을, 특히 머리를 대단히 소중히 여긴다는 걸. 한데도, 머슴을 데려다주고 온 순희에게 강희는 칭찬을 했다. 잘했다고. 잘 데려다주고 왔다고. 머슴을 때리지 않은 것도 잘한 거라고. 앞으로 누굴 때리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여자에게 그토록 소중하다는 머리채를 잡아 흔든 남자에게 이토록 관대할 수 있다니. 강희는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강희는 정말 뭐랄까, 난년이었다. 강희는 진정한 사랑이 맞는 것이었다. 

- 칭찬까지만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어지는 강희의 말이 순희를 다시 고민하게 만들었다. 향기로운 칭찬으로 순희를 한껏 들뜨게 만들었던 강희는 갑작스럽게, 툭, "뭔가 배워보는 게 어때?" 순희에게 물었다. 그 뭔가가 어른들이 짜증 섞어 말하는 기술이라도 배워라!와 분명 같은 말일 텐데, 순희도 그 정도는 아는데, 그럼에도 다르게 들렸다. 꼭 집어서 '기술'이 아니라, 막연하게 '뭔가'여서 그런가. 순희는 강희의 말을 들었다. 듣고만 있었다. 이미 사랑을 알아버렸고 진정한 사랑이라 믿기 시작해 버렸으니까. 하지만, 뭔가를 배우다니, 가능한 것인가? 근데, 뭘 배워야 하는 거지? 순희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진정한 사랑이구나, 깨닫기 시작하자 많은 문제가 생겼다. 깨달음이 그렇다. 깨닫기 전에는 인생이 편하다. 

 

- 하지만 깨닫고 나면 걸리는 게 많아진다. 깨달았으니까 똑같이 살면 안 되는 것 같다. 깨닫기 전으로 돌아가려 하면, 그러고도 네가 사람이냐?라는 질문을, 남에게, 주로 어른에게 듣던 그 질문을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반복하게 된다. 깨닫고 나면 평온이 찾아올 거 같지만 사실은 아닌 거였다. 망할.

- 종인은 대꾸가 없었다. 그 기다리는 시간이 죽을 것 같아서, 순희는 아버지 하고 절로 입이 떨어졌지만, 종인은 말이 없다. 가열하고 끓기 시작한 후에도 오랜 시간이 든다. 그 시간 동안 계속 무언가를 해야 하는 게 아니다. 기다리면 되었다. 하지만 기다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결정하는 데에서 탕의 맛이 정해졌다. 그 결정은 종인이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종인은 이 식당을 운영할 수 있었다. 흔한 바지사장이 아니라 주방의 주인이었다. 종인에게 비법이 있다면 기다리는 동안 다른 걸 하지 않는 거였다. 종인은 기다려야 할 때 기다리는 것에만 집중했다. 지루한 시간이 정직하게 흐르고 있었다. 종인은 기다림에 정직한 사람이었다. 분과 초 사이에서 게으른 사람이었다. 

- 큰 가마솥을 뽀얀 국물로 채우고 나니 한밤중이었다. 아니 새벽인지도 몰랐다. 셋은 똑같이 솥 앞에서, 그래서 불 앞에서 시간을 보냈다. 말 몇 마디 오가지도 않았다. 우환과 순희는 이런 하루를 며칠에 한 번씩은 보냈을 종인에 대해서 없던 마음들이 생겨났다. 그건 존경 같기도 하고, 경외까지야 아니겠지만, 어쨌든, 일종의 거리감이었다. 

- 아버지는 불 앞에 느긋한 사람이었다. 순희는 그렇게 느긋한 아버지의 모습을 처음 봤다. 지겨워서 더는 먹기 싫다가도 먹으면 먹게 되는 게 늘 신기했던 곰탕이었다. 어쩌면 애초에 이런 지겨운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남들보다 몇 겹은 더 되는 삶을 산 것처럼 보였던 아버지였다. 어쩌면, 이런 긴 하루들이 거듭되어 그 겹을 만들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순희는 처음으로 그 겹이 불행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자신도 그렇게 살 수 있을지는 몰랐다. 자신은 그렇게 살지 못할 거라는 성급한 답이 나왔다. 불행하지 않을 수 있고 대단할지도 모르지만, 이건 아버지의 삶이다. 하루 정도 이런 경험도 나쁠 건 없지만, 이건 경험일 뿐이다. 라고 순희는 생각했다. 

- 헤어진다면, 그 헤어짐이, 몇 년만 지나면 두 사람 인생에서는 기억도 안 나겠지만, 그렇게만 된다면, 우환은 이 세상에 굳이 태어나지 않아도 되고, 40년이 넘도록 굳이 살아내야 할 필요도 없을 거였다. 분명, 좋은 기회였다.

- 봉수가 옆에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잖아?'라고 말해주었겠지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이 여행은 우환이 하고 있고, 봉수는 떠나지도 않았다. 같은 일을 하고 있지만, 비슷한 인생 같지만 봉수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과 함께 꿈꾸는 인생이 있었다. 그래서 봉수는 우환보다 늦게 주방 보조를 시작했지만, 주방장이 여행을 권한 사람은 우환이 된 것이다. 희망이 눈에 띄는 것처럼 절망도 그렇다. 누구나 우환을 보면 그 여행을 권했을 것이다. '죽어도, 괜찮은 거잖아? 굳이 살고 싶은 마음, 없는 거잖아?'라고 묻는 것과 같은 의미로. 

- 모든 것이 우환의 착각인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우환이 그들의 인생에 끼어들 이유는 없었다. 방해할 이유는 더 없었다. 그래서도 안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부모가 맞는다면? 우환은 꼭 갈라놓고 싶었다. 다시는 없을 이 기회를 우환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돌이켜보기 싫은 과거는 지나왔으니 앞으로 잘 살아보렴. 이런 말을 우환은 믿지 않았다. 살아가면 갈수록 돌이켜보기 싫은 과거만 쌓이는 거다. 그러다 어느 순간 처음부터 노인인 삶을 살고 싶지 않다. 추억이 없는 노인은 말을 잃은 사람과 같다. 들려줄 이야기가 없는 긴 세월이었다. 우환은 그런 삶을 어서 끝내고 싶었다. 

- 분석은 끝났다고. 알아낸 게 많지만, 정확히 뭘 알아낸 건지 정의를 내리려면, 약간의 상상력이 필요할 것 같다고.

- 죽은 남자의 머릿속에 들어 있던 칩은 아주 작은 여러 개의 또 다른 칩들로 이루어졌고, 그 작은 칩들의 기능은 제각각이다. 메인이 되는 칩들을 통해 세 파트로 나눌 수 있는데, 그중 한 파트는 뇌 속의 기억에서부터 웹에 이르기까지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통해 뇌가 떠올리는 공간 이미지와 가장 일치하는 장소를 찾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까, 원래 알던 곳을 떠올린다면 뇌가 간직하고 있는 기억 속에서 쉽게 찾아낼 수 있고, 알던 곳이 아닐 경우, 뇌의 주인이 어떤 식으로든 정보가 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정의 내리면, 이 칩이 그 정보들을 취합해서 주인이 생각하는 공간과 가장 흡사한 곳을 찾아낸다는 것이다.

- "그렇게 찾아서 눈앞에 보여주면, 그게 현실적으로 어떤 도움을 주는 거지? 그게, 그러니까, 어떤 도움이 되는 거지?"

뇌 전문의 서유헌이 물었다. 물리학자 송성식은 잠깐 망설였다. 남은 두 파트 중, 한 파트가 그 도움을 받아 뭔가 다른걸 가능케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기능을 알 수 없는 많은 칩들 중에 그 기능을 확실히 아는 칩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분명히 'LBL', 층별 스캔을 담당하는 거라고 했다. 
 
- 순간이동이 가능할 거라 했다. 그들이 그렇게 말했다. 화영은 생각하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생각이 구체적일수록 정확한 곳으로 이동했다. 쉽게 말해, 실제로 가본 곳으로는 이동이 자유로웠지만 그렇지 않은 곳은 어디로 가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며칠 전에는 빌딩 난간 위에서 나타나 떨어질 뻔했었다. 방금 전은 차들이 다니는 대로에 나타나 또한 죽을 뻔했다. 큰 대로만 떠올렸지 차들은 생각 못했던 거다. 정확한 곳으로 이동할 수 없다면, 순간이동이 꼭 도움만 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낯선 도시는 거대했다. 그 도시를 통째로 머릿속에 넣으려는 사람에게는 더 그랬다. 화영은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일어나자마자 걷기 시작했고, 밥때가 되면 눈에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 대충 먹었고, 걸었다. 걷기만 했다. 걸어서 기억에 남겼다. 한 번 눈에 담은 공간은 뇌가 기억했다. 화영이 정확히 떠올리지 않아도 뇌는 눈이 본 것을 기억했고 화영이 생각하는 곳으로 안내했다. 더 이상 걷기 힘들어지면 한적한 곳을 찾아들어가 주변을 살피고 집과 가장 가까운, 그 벽과 벽 사이를 떠올렸다. 다음 날 아침이 되면, 마지막 걸었던 곳에서 가장 가까운 후미진 곳을 생각했다. 

 

- 늙은이는 문을 몇 개나 더 열고 나서야 문 뒤에 있는 한 공간에 앉았다.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늙은이와 마주 앉아 몇 마디 나누었을 때, 화영은 이 집의 구조가 늙은이의 머릿속을 옮겨놓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늙은이의 기억은 온전하지 못했다. 온전하지 못한 기억들은 모두 일그러져 있었다. 늙은이는 그날 화영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다. 기억에 남아 있는 것들은 모두 들려주려는 것 같았다. 화영은 평소에 먹어보지 못한 음식들로 두 끼를 먹었다. 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화영 또한 뇌가 어떻게 된 건지, 많은 것들이 기억나지 않았다. 

- 늙은이는 한 사람만 아니었으면, 문이 더 많은 집에 살 수 있었을 거라고 했다. 원래, 문이 많은 집을 좋아한다고 했다. 늘어서 있는 문들을 볼 때마다, 늙은이는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 문들 뒤에 숨은 하나하나의 공간들이 늙은이를 즐겁게 했다. 공간이, 그 공간을 채우는 무엇 혹은 누군가가 그를 들뜨게 했다. 그 문을 모두 닫히게 한, 그 공간들, 그 안의 모든 사람들을 사라지게 한, 그래서 가능성도 즐거움도 모두 빼앗아간 사람이 있다고 했다.

- 말이 적은 사람이 일을 잘하는 경우가 많다. 말이 적은 사람이 말귀를 잘 알아듣는 경우가 많다. 말을 적게 해 보면 안다. 입을 좀 닫고 얼굴에 달린 다른 것들을 활용해 보면 훨씬 더 많은 게 보이고, 많은 걸 알게 된다. 말로만 말하고 말로 오해를 만들고 말로 싸움을 걸고 말로 인생을 망치는, 문제는 언제나 말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양창근은 그런 사람들을 싫어했다. 물론, 그렇다고 저 공무원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지만.

- 그 직원은 다른 부서에도 협조를 요청했다. 공용으로 쓰는 프린터가 쉴 새 없이 가동됐다.
이번에는 꽤 두툼했다. 직원은 친절히 서류 뭉치를 안쪽에 있는 책상 위로 옮겨주었다. 그리고 양창근을 불렀다. 이걸 다 검토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거다. 책상이 필요할 거 같다. 괜찮으시다면, 여기서 하는 게 어떻겠냐. 책상이 크진 않지만 쓰는 사람이 없으니 편히 써라. 이 말을 직원은 짧게 했다.
"거기는 사람들 다녀요."
양창근은 그 직원이 조금씩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 일이 있는 날은 고기를 구웠다. 고기 냄새에 묻혀 피냄새가 덜했다. 피냄새가 나도 고기 냄새 줄 알았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일을 하려면 그래야 한다고 '그'가 우겼다. 도깨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도깨비는 피냄새가 나는지도 잘 몰랐다. 그래도 안정적인 작업실이 있는 건 좋았다. 출퇴근할 때 사람들이 보는 시선도 나쁘지 않았다. 설비도 좋은 편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늘 시원했다. 일을 하다 보면 싱싱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런 일은 장소가 중요했다. 장소를 구하느라 며칠씩 시간을 낭비했다. 결국 장소를 못 구해서 일을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럴 때는 안타까웠다. 사람 목숨이 여럿 달린 일이었다. 그런 일을 벌일 곳이 없어서 못 하다니, 답답했다. 누군가 나서서 장소를 제공해 주면 될걸, 사람들은 이기적이었다. 너무 자기 생각만 했다. 도깨비는 예전 그 환자가 떠올라 욕지거리가 나왔다. 그년도 자기밖에 모르는 년이었다. 욕이 멈추지 않는다. 

- 욕은 실제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도깨비가 욕을 하며 흥분하자 누워 있던 환자의 몸이 떨렸다. 환자 앞에서 이러면 안 되지, 도깨비는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환자는 그것도 몰라주고 몸을 더 흔들어댔다. 도깨비는 집중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환자는 신음 소리도 냈다. 입을 막고 있어서 신음은 더 요란하게 느껴졌다. 이기적인 족속들이다. 신음 소리는 도깨비를 압박해 왔다. 도깨비는 신중하게 판단을 했다. 시간을 생각해 봤다. 목을 지나가는 경동맥이 피를 쏟아낼 시간과 일을 끝내는 시간. 어차피 오늘은 꺼낼 물건이 많지 않았다. 도깨비는 재빨리 환자의 목을 그어 소음을 없애고 뒤이어 환자의 배를 갈랐다. 도깨비의 손에는 메스가 들려 있었다. 도깨비는 의사였다. 

- 강도영은 한 의사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그는 유명한 성형외과 의사였다. 그의 병원은 늘 환자로 붐볐다. 성별을 가리지 않고 줄을 섰다. 돈을 끌었다. 몇 번의 마취 실수와 지방흡입의 부작용으로 위기를 맞기도 했다. 환자 몇이 죽기도 했다. 하지만 폐업과 개업을 번갈아가며 버텨냈다. 재주가 좋았다. 결정적인 위기는 엉뚱한 곳에서 왔다. 

 

- 앞트임을 지나치게 요구한 여자가 있었다. 안 된다고 하지 않았다. 환자의 만족이 중요했다. 하면 안 된다 싶었지만, 돈을 더 내겠다고 했다. 여자는 만족했다. 그러나 함께 사는 남자는 그렇지 못했다. 하필, 과격한 남자였다. 싸움 도중 여자의 코뼈가 내려앉았다. 코를 덮고 있던 살이 찢어지며 눈과 눈을 구분하던 살을 하나로 이었다.

 

- 두 눈은 하나의 큰 눈이 됐다. 도깨비들의 외눈처럼. 

- 인상적인 일들은 소문이 빨랐다. 결국 사소한 앞트임 수술 때문에 의사는 성형외과 바닥을 떠나야 했다. 의사생활을 접어야 했다. 그 마지막 환자 때문에 의사는 '도깨비 눈'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강도영은 바로 그 도깨비 눈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긴 별명이 으레 그러듯 도깨비 눈은 이제 도깨비로 불리고 있었고, 그 도깨비는 여전히 메스를 들고 있다고 했다.

- 돈을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었고 그러지 못한 자들은 기회조차 잃은 시대였다. 머리가 좋다고, 공부를 잘한다고, 성실하다고, 노력한다고 기회를 가지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가진 자들의 가진 것을 지키려는 힘은 무엇보다 강했다. 어떤 이념, 어떤 가치보다도 확고했다. 

- 박종대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암기력이 뛰어났다. 모든 걸 외웠다. 하지만 부모는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박종대도 없이 살았다. 좋은 머리는 쓸 곳이 없었고, 뛰어난 암기력은 보여줄 곳이 없었다. 몸으로 하루를 벌어도 하루를 살지 못했다. 부모는 줄줄이 셋을 더 낳았다. 먹고살 길이 막막했다. 시간 여행을 권한 건 아버지였다. 돈 많은 누군가가 자신에게 권한 걸, 아들에게 다시 권한 아버지였다.

- 시간 여행은 과거로 가는 것만 가능했다. 그걸 그다지 미더워하지 않았던 탓인지 역사를 바꾸겠다거나, 인생을 다시 쓰겠다는 대단한 목적을 가지고 배에 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럴 사람이라면 아랫동네의 뒷골목에 자리 잡고 있는 여행사를 알 리도 없었다.

- 박종대를 돈으로 산 고객은 중년의 여자였다. 그녀가 의뢰한 일은 박종대의 목숨처럼 하찮았다. 박종대가 목숨을 걸고 과거로 가서 할 일은 너무나도 대단한 게 아니었다. 2044년의 그 물난리 때 여자는 많은 걸 잃었다고 했다. 젊은 시절의 사진들도 모두 잃었다고 했다. 진짜 과거로 갈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크게 믿지도 않지만, 가게 된다면 그곳에 살고 있을 젊은 자신의 사진을 한 장 찍어 오라고 했다. 그뿐이었다. 박종대는 하겠다고 했다. 지금도 크게 늙어 보이지 않는 여자가 주소를 건넸다. 처음 보는 박종대에게 적지 않은 돈을 건넸다. 박종대는 받은 돈의 대부분을 아버지에게 줬다. 

- 최초의 시간 여행자가 될 다른 당사자들이 떠벌리고 다니며 인심 쓰듯 사람들의 헛된 바람들을 받아 적고 그 바람을 이루어주겠노라 푼돈을 더 챙길 때, 박종대는 도서관으로 갔다. 그가 가게 될 2014년부터, 자신이 태어나고 기억이라는 걸 하기 시작한 2030년(박종대는 2024년에 태어났고, 일곱 살 이후의 기억하고 싶은 일들은 다 기억했다. 기억하고 싶은 일이 많지 않았지만)까지의 신문을 모두 살폈다. 각종 크고 작은 사건들을 모두 외웠다.

- 박종대는 권력이 돈 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외우고 있는 정보들이 그 권력에 쉽게 다가가도록 도울 거라는 걸 알았다. 이 현재에선 천하고 하찮았지만, 그곳으로 가게 되면 그는, 미래를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게 곧 권력이라는 걸 박종대는 빨리 깨달았다. 돈 많고 허영심 많은 여자에게 젊은 시절의 사진을 가져다주는 것에는 애초에 관심이 없었다. 

- 물론, 오랜 시간 공을 들여서 세운 계획은 아니었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아버지가 자신에게 시간 여행 이야기를 꺼낸 순간, 박종대는 모든 걸 계획했다. 박종대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고, 준비가 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쓸모가 있는 곳으로 떠나는 거였다.

- 앞서가는 소년의 다리를 잡았다. 바닷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숨이 찼다. 숨을 참았다. 버둥거리는 소년과 그 소년을 잡고 있는 자신 중 누가 더 숨이 찰까, 박종대는 어두운 바닷속에서 생각했다. 다행히, 소년의 버둥거림이 먼저 멈췄다. 박종대는 잡고 있던 소년의 다리를 놓았다. 소년은 아래로, 박종대는 위로 향했다. 남은 힘으로 간신히 해변에 닿았다. 

바다에서 30대의 남자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미래에서 온 최초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박종대는 그 사실을 아무도 모르길 바랐다. 박종대는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이곳의 현재에, 이 시간의 틈에 새 인생을 끼워 넣을 생각이었다. 
바다를 등지고 서서, 이곳에서 살기 위해 해야 할 것들을 생각했다. 힘을 갖기 위해 만나야 할 사람들, 돈을 벌기 위해 팔아야 할 것들을 생각했다. 

- 박종대는 양창근이 하는 꼴을 본다. 저 형사가 뭔가를 알아내긴 했구나. 하지만 들어와서 따지기도 뭣한 작은 것이구나. 물론, 아주 잠깐, 혹시나 아침의 일을 저 형사가 벌써 안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해봤다. 하지만, 그럴 리 없었다. 알 수도 없었고, 알았다면, 문을 열고 들어와 물었을 것이다.
티브이를 틀었다. 모든 뉴스 채널이 충격적인 소식에 달려들고 있었다. 고가도로 참사. 누가 얼마나 어떻게 죽었는지 다투어 알리고 있다. 그들이 정작 알아야 할 사실은 오늘 아침 역사의 일부가 바뀌었다는 것이나, 짐작도 못 할 것이다. 

- 양창근은 주민센터에서 영진아파트에 관련된 온갖 서류를 모조리 들여다본 어제, 퇴근하는 그 여직원을 불러 세웠었다. 시간을 좀 내줄 수 있냐고 물었다. 잠깐 생각하던 여직원은 밥을 사라고 했다. 둘은 저녁을 먹었다. 스파게티 따위를 먹었다.
여직원은 밥값을 하는 사람이었다. 양창근은 틈틈이 물었다. 여직원이 아니라, 영진아파트에 대해서. 그리고 박종대에 대해서.

- 영도 같은 오래된 지역은 부산시라고 해도 예전 동네 같은 분위기가 있다. 게다가 저런 한 동짜리 아파트라면, 아파트 입주자들끼리 서로 잘 알고 지낼 터였다. 소유권 이전은 물론 등기소에서 했을 것이다. 하지만 동네에 아주 싹싹하고 일까지 잘하며 심지어 믿을 만한 청년이 있다면? 어르신들은, 등기소까지 직접 가지는 않을 것이다.

- 노인에게 뭔가를 얻어내려는 젊은 사람은 언제나 노인들 곁을 지킨다. 하지만 그들의 자식들처럼 뭘 달라는 이야기를 절대 먼저 하지 않는다. 듣기 싫어하는 잔소리도 물론 절대 하지 않는다. 그들이 알아서 다 내놓을 때까지, 그는 친부모님 같아서 그런다, 그냥 좋아서 하는 거다,라는 말만 여러 번 되풀이한다. 자식들까지 곁을 떠나는 노인들에게, 친절한 청년은 쉽게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어간다. 노인들은 관심을 가져주는 친절한 젊은 사람에게 많은 걸 맡기게 된다.
양창근은 그 친절한 젊은 사람이 박종대일 거라고 확신했다. 

-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검은색, 흰색, 은색 세 가지 색 중 하나가, 승용차, 승합차 두 종류 중의 하나로 학교 앞에 나타났다. 그럼 학교에서 좀 친다, 잘 친다, 젤 잘 친다, 하는 형들이 그 차에 올랐다. 검은색 승용차를 진짜배기로, 흰색 승합차를 하바리로 쳤다. 순희에게도 그 차가 왔다. 검은색 승용차였다. 순희에게도 좋은 기회가 온 거였다. 아마 가장 돈줄이 굵은 조직일 거였다. 들어가는 순간, 그 조직의 힘만큼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그 조직의 크기만큼 큰 중국집에서 회식을 할 거였다. 돈줄이 길면 명줄도 길었다. 돈줄이 끊어진 조직은 사람이 수시로 죽어나갔다.

- 학교를 다니며, 물론 배운 것도 있다. 순희는 기술을 배우는 게 제법 재미있었다. 선생들도 머리는 좋은데 조금만 노력하면 좋은데,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다. 한데 순희는 그냥, 그렇게 살게 될 것 같지 않았다. 학교에서 배운 걸 써먹어가며 또 인생에서 배우며, 뭐 그렇게 어른들 말처럼 살게 될 것 같지는 않았다.

- 나쁠 것 없었다. 검은색 승용차다. 명줄이 가장 긴 조직이라는 뜻이었다. 순희는 죽고 싶지 않았다. 물론, 친구들에게는 달리 말하곤 했다. 죽는 건 무섭지 않다. 뭐 돈도 많이 줄 거고, 다 좋은데, 딱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남의 조직이라는 거. 나는 남 밑에서 일하는 거 적성 아니거든. 나는 내 조직을 갖고 싶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때마다 친구들은 웃었지만,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무서웠다. 저 검은 차를 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 많은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입이 무거워 한 곳에서 오래 일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이 수간호사가 그랬다. 나이가 쉰은 되어 보였다. 간호사는 얼굴 없는 사내에 대해서 이 정신병원을 통틀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말했듯이, 입이 무거웠다. 수간호사는 양창근이 형사임을 확인한 후에도 말을 아꼈다. 오히려 더욱 아끼는 것 같았다. 

- '나 가끔 내 전공도 살리는데?'
그러자, 달리 보였다. 류정훈은 마침 목뒤를 긁고 있었다. 강도영은 달리 봤다. 자세히 봤다. 목뒤에는, 짧지 않은 머리에 가려져 있긴 했지만, 흉터가 있었다. 
달리 보면, 수술 자국 같기도 했다.

- 푼돈 때문에 혼자 알바 뛰다가 현장에서 잡혔다. 본인만 잡혔기 때문에 누가 말을 흘린 건지 모른다. 하지만 일부러 그런 거 같지는 않다. 형사는 강도영이라고 했고, 그가 정확히 아는 건, 우리가 조직이라는 것과 통나무 장사를 한다는 것 두 가지다. 


- "근데, 잡혔으니 어떡해? 일단 내가 살아야 되잖아?"
그래서 류정훈을 말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약속대로 풀어줬다고 했다. 류정훈은 지금 경찰서에 있다고 했다. 잡혀온 류정훈의 얼굴을 확인하고 풀려난 거라고. 
"내가 걔랑은 인연이 있잖아. 모르는 애들을 함부로 말하는 건, 예의도 아니고."

- 박종대는, 이런 개 같은 짓을 하고도 뻔뻔하게 자기 발로 먼저 찾아와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도깨비를 좋아했다. 적어도 판단에 혼선이 생기진 않으니까. 그러니까, 기술자는 나오고 돈줄은 잡힌 거다. 돈은 또 벌면 되지만, 기술은 익히는데 시간이 걸렸다. 도깨비는 확실히 영리했다. 하지만 류정훈이 유일하고 안전한 돈줄이라는 게 문제였다. 게다가 앞으로 돈 쓸 일이 많았다. 당장, 선거에 떨어져 낙심하고 있을 사람에게 빈손으로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민을 해야 할 문제였다. 박종대가 목뒤를 긁적였다. 도깨비는 담배를 물었다.
"아직 마흔네 시간 정도는 남았을 거니까, 천천히 생각해. 걔는 그래도 얼굴이 좋으니까."
도깨비는 얼굴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또 키득거렸다.

- 그는 호기심이 생긴 게 아니다. 떠나올 때 보지 못했던 블루 홀이 새삼 보고 싶은 게 아니었다. 거기까지 내려가면 늦는다. 점점 늦어지고 있다.
남자는 두고 온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두고 온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들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앞으로의 시간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 시간 속에서 가능할지도 모르는 행복에 대해서 생각했다. 남자는 자신의 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소년을, 자신의 어머니와 이름이 같은 소녀를, 그리고 그 소녀가 가진 아이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할 수 있는 세월을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행복에 대해 생각했다. 왜 한 번도 행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는지 생각했다. 왜 이제야 행복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는 건지, 생각했다. 

- 바다는 더 깊어지고, 어둠은 더 짙어지고 있다.
남자는 왜 이곳에서 살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의심했다.
남자는 왜 자신이 행복해지면 안 되는지, 의심했다. 남자는 왜 여기서 흐르는 시간이 자신의 현재가 되면 안 되는지, 의심했다.

- 가져가는 기억들은 하찮은 것이었다.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 현재가 있었다.

 

- 남자는 위로 올라갔다. 배는 가라앉고 있다. 남자는 위로, 위로만 올라갔다. 숨을 참고, 위로, 헤엄쳤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찾아 남자는 쉬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달빛 아래 고요한 바다. 한 남자가 떠오른다.

- 혼자 있는데, 숨이 넘어갈 것 같거든 어떻게든 기어서라도 마당까지만 나가라고. 그럼 지나가는 누군가가 보게 될 거라고 했다. 낮은 담 때문에 누구 하나는 보게 될 거라고 그러니 아무리 아파도 꼭 마당에 나가서 죽으라고.
강희는 그 말이,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은 할머니 자신이 그리하겠다는 다짐인 건지, 너도 하릴없이 이 집구석에서 늙을 텐데 너 죽을 날 다가오면 꼭 그렇게 하라는 저주인 건지 헷갈렸다. 
 
- 별말 없이 조용히 취조실에 있어준 것만도 고마워해야 할 수 있다. 하지만 양창근은 뭔가가, 류정훈에게 뭔가가 있다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건 강도영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이렇게 풀려난 사람을 다시 잡는 건 쉽지 않았다. 다시 잡을 일이 있는 사람은 풀려난 뒤에 숨거나 사라졌다. 도깨비도 그랬다.
  


 

 

- 우환은 파도에 쏠려와 해변에 버려진 죽은 몸뚱이들을 봤다.
우환은 자신이 죽인 사람들을 봤다. 열둘이었다.

- 우환은 미처, 그들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배에서 나와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어떻게든 문을 열고 나와야 했다. 우환이 그 문을 연 순간 배는 가라앉기 시작한 거다. 하지만, 다른 시간으로 가기 위해 내려가던 그 배야말로 우환에게는 침몰 중인 것이었다. 그래서 문을 열었던 거다. 살기 위해 바로 이곳에서 살기 위해 문을 열었던 것뿐이다.

- 어쩌면, 아주 짧은 순간 예상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환은 그 문을 열었다. 그럼에도 우환은 이곳에서 살고 싶었다. 죽음을 예상하는 것과 목도하는 것은 달랐다. 죽은 자들의 몸은 비로소 서두르는 게 없었다.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곳에 그들의 삶이 있었다. 저렇게 누운 채로 파도가 밀어내는 대로 들썩거릴 한가로운 사람들이 못 되었다. 우환은 자신이 저지른 일이 무엇인지 뒤늦게 알게 되었다. 돌아가야 할 사람들을 머물게 했고, 부지런히 살아야 할 사람들을 영원히 게으르게 만들었다.  

- 지문과 일치하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쩌다 등록이 되지 않았거나 혹은 말소가 되었거나, 말이 되진 않지만 강도영의 의견처럼 외국인일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버젓이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의 주민등록이 말소가 되었거나, 등록 자체가 안 되어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어쨌든 그가 '류정훈'이 아닌 건 분명했다.

 

- 아직은 대답을 안 하고 있지만, 분명히 그는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한 일, 자신이 잘못한 일들. 그중 경찰들이 알아낼 수 있는 일들. 또 그 일들 중 자신이 안 했다고 할 수 있는 일들. 그리고 그 일들을 떠넘길 수 있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 사람들 속에는 분명 박종대가 있을 것이다.

- 양창근은 취조실을 나왔다. 소망병원에 있는 남자가 자신의 어머니를 보고 반응했다면, 이 얼굴을 보고도 반응할 것이다. '자신'의 얼굴을 보고 분명히 반응할 것이다. 그럼, 그날의 일들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전에 류정훈 스스로가 박종대를 언급하게 하는 게 낫다. 진짜 류정훈은 정신병원에 있다. 정신 질환자의 증언은 효력이 없다. 취조실에 있는 류정훈의 말이 증거로 채택되기 쉬웠다. 분명히 수술 자국이 맞았다. 병원에 있는 류정훈의 얼굴을, 지금 이 앞에 있는, 이 남자가 훔친 게 틀림없었다. 

- 세월이 흐르면서 과도하게 발달하는 기술은 쇼핑과 성형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어디서든 무엇이든 소비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누구라도 될 수 있었다. 

 

- 연예인의 얼굴과 똑같이 성형한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졌다. 최근에는 한 연예인이 자신과 너무 똑 닮게 성형수술을 한 일반인을 고소한 사건도 있었다. 연예인과 닮은 사람이 그 연예인 노릇을 해 돈을 버는 경우는 과거에도 흔했고 그래서 수익 배분과 관련된 법적 소송이 여럿 생기기도 했었지만, 이번 경우는 좀 달랐다. 
대개는 지금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연예인들의 얼굴을 따라 했다. 하지만 이 연예인의 경우, 이미 전성기를 지난 것은 물론이고 게다가 너무 늙었다. 한데, 일반인이 그 연예인의 젊은 시절 모습을 따라 성형한 것이다. 젊음과 함께 모든 걸 잃은 여자에게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의 얼굴을 한 타인을 지켜보는 일은, 상상보다 더 힘들었던 모양이다. 

- 한 여자의 늙은 모습과 젊은 모습이 동시에 법정에 선 광경은 기이했다. 사람들의 눈은 자신의 당연한 권리와 명예와 윤리를 주장하는 늙은 여자보다 그녀의 전성기의 얼굴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젊은 여자에게로 향했다. '정말, 똑같다.' 법정에선 그런 감탄만 터져 나왔다.

- 밤이 깊었다. 불안은 주춤했다. 욕망은 확실해졌다. 열둘은 이미 죽었다. 희생되었다. 헛되게 할 수 없었다. 고아원에서 18년, 주방에서 26년을 살았다. 모두가 행복해지려고 할 때 우환은 한 번도 그런 욕심을 내지 않았다. 
인간은 모두 자신의 행복을 추구한다. 모두가 그렇다. 어떤 이는 그 행복을 위해 타인의 행복을 탐내기도 한다. 정도의 차이다. 모두가 그렇다. 단호하게 행복해져야 한다. 희생당한 그들의 몫까지, 우환은 행복해져야 했다. 

- 순희는 아직도 오지 않고 있다.
우환은 아버지를 기다렸다.
 
- 류정훈은 어느 사업가가 고생하던 젊은 시절에 먹었던 이제는 단종된 사발면을 사다 줬으면 하는 사람의 목숨을 걸고 하기엔 참으로 하찮은 임무를 맡고 배에 올랐었다. 몇 시간이면 끝날 일이었다. 하지만 그 후로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 사발면은 가방에 가득 넣어도 가벼웠다. 그 가벼움이 자꾸 마음에 걸려서 류정훈은 가방에 어떻게든 더 많은 사발면을 담았다. 하지만 그래도 가벼웠다. 그 가벼운 가방을 메고 밤바다에서 배를 기다렸다. 류정훈은 그 가벼움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 가벼운 것 때문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자신이 비참해졌다. 돌아가는 배에서 또 반은 죽을 거다. 자신이 아니라는 법도 없다. 가면 뭐 하겠는가. 그곳에 누가 있는가. 류정훈은 돌아섰다. 바다를 등졌다. 
신분이 없으니 막일을 했다. 공사판에서 일한 지 두 달이 지날 무렵, 그가 찾아왔다. 박종대였다. 그가 모든 걸 가능하게 했다.

- 박종대는 늘 죽은 사람들에 신경을 썼다. 늘 그 시체들을 관리했었다. 박종대가 온 후로, 박종대가 최초의 여행자였으므로, 한 번도 해변으로 시체들이 떠밀려온 적은 없었다. 
신분이 없는 시체들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불안은 필요 없는 긴장을 불러오고 그런 긴장들 때문에 형사들은 더 열심히 일을 하게 된다. 형사들이 열심히 일하는 것, 그건 박종대가 바라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박종대는 신중했다. 자신의 일이 아니었지만, 자신의 일처럼 열심히 했다. 한데, 열두 구나 되는 시체가 해변으로 떠밀려왔다. 이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아니, 이미 문제가 되고 있을 거였다. 

- 박종대는 잠깐 생각했다. 열두 구의 시체 중 어느 것도 신원을 알 순 없을 거다. 결국 잊힐 거다. 그들은 이미 죽었고, 이우환은 살아서 자신의 곁으로 왔다. 
이우환을 반드시 필요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
박종대는 밤늦도록 이우환의 역할에 대해 고민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역할이란 게 있었다. 박종대가 만들어갈 세상은 더욱 그러했다.
 
- 박종대는 자신을 찾아와 마음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들뜬 확신이 늘 우스웠다. 이곳에서의 삶은 공으로 얻게 될 거라 믿는 듯한 그런 순진한 얼굴이 짜증스러웠다.
이우환을 꼭 필요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된다. 그럼 되는 거다. 박종대는 그렇게 한 번 더 정리하고, 김주한을 만나러 다시 갔다. 

- 당 사무실은 아직 열려 있지 않았다. 로비에서 기다렸다. 어쩐 일인지 김주한은 이른 시간에 나타났다.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며 로비로 들어섰다. 전광용 의원을 만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전광용 의원이 만나주려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지금이야 실세니 그럴 만도 했다. 게다가 김주한이 통화 중인 사람은 전광용 의원 본인이 아닌 그의 비서인 듯했다. 김주한은 꽤 비굴하게 그 비서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아마도 저 비굴함 때문에 김주한은 오랜 세월 강자로 남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 많은 형사들이 그 자리를 선호했지만 양창근은 그러지 않았다. 양창근은 한 사람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얼굴만 집중해서 살폈다. 그럼 되었다. 상대방의 얼굴만 제대로 보고 있으면 듣는 사람의 마음상태뿐만 아니라, 말을 하는 사람의 거짓말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얼굴에는 많은 게 드러났다. 하지만, 아주 섬세했다. 두리번거리는 눈으로는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한 곳만 봐야 했다. 한곳만 집중해서 들여다봐야 했다. 그래야 보였다. 양창근은 이 시간이 좋았다. 누구 옆에 앉는 게 좋을지, 고민하는 시간이 좋았다. 내일까지만 정하면 되었다. 즐길 시간은 충분했다. 

- 화영은 나름 부산에서 유명하다는 시장 거리를 찾아왔다. 여기 사람들에게 물으면 오늘이라도 우환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곰탕을 파는 가게에는 돼지국밥을 파는 곳도 섞여 있었는데, 돼지국밥을 파는 집에서도 곰탕을 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한 번은 확인해봐야 할 국밥집들이 백 곳도 넘었다. '원조'만 해도 수십 곳이었다.
 
- 박종대의 신분 확인은 그가 소지한 주민등록증으로만 했다. 지문을 얻을 수 있는 손가락은 없었다. 상처가 나은 후라면 또 모르지만 지금은 불가능했다. 박종대는 거친 사포로 손가락의 피부를 모두 벗겨내고 왔다. 고전적이고 무모하지만, 확실한 방법이었다. 주민등록상 그의 신분에는 문제가 없었다. 

- 양창근은 박종대가 취조실에 들어오는 순간, 어디에 앉을지를 결정했다. 류정훈은 박종대를 보자, 두 형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긴장했다.

- 박종대는 신문을 받으러 온 사람 같지 않았다. 구경하듯 취조실을 둘러보곤 류정훈의 맞은편에 여유 있게 앉았다.
박종대는 할 말과 안 할 말을 이미 구분해서 왔을 거다. 류정훈의 말을 모두 인정하지도, 들어주지도 않을 거였다. 그렇다면 류정훈의 얼굴을 보는 게 나았다. 류정훈의 얼굴에 드러날 거였다. 박종대가 왜 없던 말을 지어내는지, 왜 있던 일을 없었다 하는지, 류정훈의 얼굴에 모두 드러날 거였다. 
양창근은 박종대의 옆자리에 앉았다.

- 이제 양창근까지 입을 닫고 기다리자, 완벽하게 고요해졌다. 침묵은 이어졌다. 대질신문이고 뭐고 언제쯤 이 고요가 깨질까. 이건 흔한 눈싸움인가. 그래도 양창근은 기다리자고 생각했다. 이 고요가 누군가에게는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게 아무래도 박종대 쪽보다는 류정훈이 되겠지만, 괜찮다. 둘은 취조실 안에 있고, 양창근도 쭈욱 함께 있을 거였다. 도망갈 공간도 새어나갈 시간도 없었다.

- 하지만 제일 부담이 되었던 건 오히려 강도영이었다. 강도영은 원래 고요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니들 동남아지?"

- 종인이 계산대로 다가오자 우환은 얼른 자리를 비켜주었다. 오늘은 우환이 여러 번 곰탕을 잘못 가지고 나왔다. 종인이 주문을 잘못 전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손님이 두 사람인 자리에 국 세 그릇을 들고 나왔고, 넷인 자리에 셋을 들고 나오기도 했다. 종인은 그제야, 우환도 마음이 어지럽구나, 순희를 걱정하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됐다. 
종인은 이해를 바라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해한다는 말은, 세상을 알지도 못하는 팔자 좋은 누군가가 억지로 만든 있으나 마나 한 말이었다.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누가 누구를 어떻게, 어째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인지. 종인은 그런 걸 믿지 않았다. 하지만 오해를 줄이려고 항상 노력했다. 이해를 위한 노력이 시간 낭비인 것처럼, 오해는 또 다른 시간 낭비였기 때문이다. 

 

- 우환은 주방보다 계산대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그렇게 보였지만, 종인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종인은 우환도 순희를 걱정하고 있다고 믿었다.

- 일곱 번째 고깃국이다. 오늘은 이만 하자, 그만 먹자, 그러면서도 화영은 일단 한 숟가락을 떴다. 굳이 적혀 있지 않아도 냄새만으로도 돼지인지 소인지 알았다. 화영은 고깃국 전문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고깃국은 국물의 색깔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하얀 국물과 빨간 국물, 그리고 하얗다가 빨개지는 국물. 많은 하얀 국물들이 빨개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고춧가루가 있었고, 다대기라는 것도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하얀 국물을 고집하는 고깃국도 있었다. 만나야 할 이우환은 만나지도 못하고 도움 되지 않는 것들만 알아가고 있었다. 한데 그게 그렇게 무료하지 않았고, 불쾌한 일도 아니었다. 
맛이 있는 식당은 활기가 있었다. 파는 사람도 먹는 사람도 생기가 있었다.

- 한 번은 아주 늙고, 게다가 지쳐 보이는 남자를 본 적이 있다. 남자는 뽀얀 곰탕을 앞에 두고 오랜 시간 먹었다. 국도 밥도 깨끗이 비웠다. 식사를 끝낸 남자는 여전히 아주 늙었지만 그리 지쳐 보이지는 않았다. 화영은 한 끼 식사가 사람을 바꾸는 풍경을 그 후로도 여러 번 봤다. 그런 모습을 보는 건 기분이 좋았다.
 
- 오후 5시경, 형사 1팀 팀장 김희영은 본인의 사무실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전화를 건 사람이 먼저 길게 상황 설명을 했다. 낯선 목소리였다. 낯설고 지루한 목소리는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건넸다. 
두 번째는 어딘가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만난 적이 있는 게 아니고, 티브이에선가 들었던 기억이 있다. 정치에 크게 관심이 없는 팀장이어도 아는 이름이고 기억에 남은 목소리였다. 두 번째 남자는 말이 짧았다. 전화는 상대방이 먼저 끊었다. 불쾌한 전화였다. 하지만 곧, 이런 전화가 왜 서장을 거치지 않고 자신에게 바로 왔는지 팀장은 생각하게 됐다. 
내가 전화한 걸 서장은 모르고 있다. 서장은 몰라도 되니 네가 알아서 하라, 그런 건가?

- 분명, 그런 의미가 숨어 있었다. 그래서 팀장인 자신에게 바로 연락이 온 것이다. 서장이 아니라, 팀장 자신의 앞길을 봐주겠다는 거였다. 팀장은 오랜 경력과 어울리게 빠르게 이해했다. 그 오랜 경력에 의미 있는 통화가 될 수도 있다는 걸 팀장은 알았다. 하지만 고민했다. 이 사건을 통으로 날리게 될 수도 있다. 이슈가 되고 있는 사건이다. 사람들이 궁금해하고 있다. 시민들이 알고 싶어 하고 있다.
하지만 이슈는 바뀐다.

- 팀장은 그럼에도 더 고민했다. 이 사건을 날리고도, 이 남자의 힘이면 자신은 더 빨리 더 높은 자리를 잡을 수 있는가? 서장이 시켜서 한 일이 아니니, 책임도 자신이 져야 했다. 무엇보다 서장이 알면 안 되는 일이었다.

- 팀장은 생각해 본다. 자신을 거치지 않고 서장에게 바로 말할 사람이 있는가. 형사 중에 자신을 무시하고 서장과 직접 소통할 사람이 있는가. 없었다. 형사들은 팀장 아래에 있었다. 서장 또한 팀장을 통하지 않고 형사들을 만나는 경우는 드물었다. 서장은 팀장을 신뢰하고 있었다. 팀장이 판을 짜면 되었다. 대신 디테일하고 좋은 스토리가 필요했다.
다행히 사건은 오리무중이었다. 어떤 스토리든 말이 안 될 리 없었다.

- 전화까지 한 걸 보니 김주한은 앞으로도 도와주겠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대체로 계획대로 되고 있었다. 류정훈은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는 돈줄이었으니까. 꼭 필요한 사람을 지금 죽였다. 그러니 그 자리를 채워야 했다. 있는 사람들을 꼭 필요한 사람들로 만들어야 했다. 이우환은 꼭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 조만간 만나야 했다.

- 세상을 꾸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을 그저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걸 처음부터 만들어야 하는 사람도 있다. 박종대는 지금 이곳에 살지만, 생각해 둔 세상이 따로 있었다. 그 세상엔 좀 다른 사람들이 살게 될 거였다. 박종대는 그 세상을 처음부터 디자인하고 이끌어가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모여 살려면 각자의 역할이 필요했다. 그들에게 역할을 나눠줘야 하는 것도 박종대였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빌려와야 하는 것들도 있었다. 많은 걸, 지금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빌려와야 했다. 결국, 박종대가 만든 세상에서 이곳과 저곳의 사람들이 어울려 살게 될 것이었다.

- 소년은 기다리고 있었다. 박종대는 주변을 돌아봤다. 눈에 띄어도 이상할 것 없는 곳이다. 박종대는 걸음을 멈추고 소년을 잠깐 봤다. 여러 조직에서 탐을 냈다던 그 소년이었다. 쉽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럴 만했다. 흡족했다.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들어올 생각을 했는지, 들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소년은 여기 박종대의 눈앞에 있었다. 

- 소년은 물었다.
"어떻게 됐나요?"
"확신이 없을 때, 여러 번 쏜 거, 잘했다."
박종대는 소년에게서 받은 물건을 다시 소년에게 준다. 

"이건 너한테 더 어울리는 거 같다."

- 이곳에는 3일 전에 왔다. 책상 위에 놓인 물건은 새 같다. 하지만 새라면 이렇게 가만히 있을 리 없으니, 죽은 새와 같다. 새의 다리를 잡고 배를 누르면 입에서 뜨겁고 곧은 빛이 나갔다. 총은 그렇게 생겼다. 순희는 한 번도 이런 총을 본 적이 없다. 아니, 실제로 총이라는 걸 본 적도 처음이다.
 
- 그 국을 떠주던 우환 아저씨가 보고 싶었다. 강희에겐 별일이 없는지. 이제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것인지. 순희는 울면서 실감했다. 없었던 일로 잊어버리기엔 눈앞의 총이 너무 진짜였다.
모두 일어난 일이었다.

- "왜 그런 표현들 쓰잖아. 경찰 수사망에 구멍이 뚫렸다. 뭐 그런 근데 이번엔 진짜 구멍이 뚫렸다더라고. 웃기지 않아? 맨날 수사망에만 구멍이 뚫릴 줄 알았지, 진짜 경찰서 벽에 구멍이 날 줄 어떻게 알았겠어? 쉬쉬해서 어떻게 막고 있나 보던데. 참 별일이야. 근데, 이거 너무 웃기지 않아? 구멍이 진짜 뚫렸다잖아!" 
김주한은 경찰서 벽에 구멍이 난 이야기를 하며 여러 번 웃었다. 나름 말장난을 즐기는 것 같았는데, 그 구멍을 내라고 지시한 당사자인 박종대는 그다지 재밌지 않았다. 하지만 몇 번 따라 웃어줬다. 어쨌든 이 남자가 전화 한 통을 했고, 그 전화 한 통 때문에 박종대가 여기에 있을 수 있었다. 권력이란 참 우스운 거였다. 

- 권력을 가진 자는 그걸 나눠줄 생각이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권력을 나눠 받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며 권력자의 말을 따른다. 돈을 가진 사람이 돈을 쓸 때는 본인에게 필요한 경우에 한해서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권력자들은 본인에게 뭔가 필요할 때, 남을 위해 권력을 쓴다. 나눠주는 게 아니라 이용할 뿐이다.
박종대는 그걸 알았다. 김주한이 박종대를 위해 권력을 쓴 게 아니다. 김주한은 이제 박종대를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의미였다. 

- 하지만 왜 그랬을까. 서세영의 죽음 하나만으로 박종대가 하는 모든 말이 진실일 거라고 믿었던 걸까?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치인은 남의 말을 쉽게 믿지 가다 그럼에도 김주한은 왜 하기 싫은 일을 그렇게까지 해서 박종대를 빼냈을까.
'대통령'이라는 말이 가지는 힘 때문이었다.
구의원에서도 떨어진 자신에게 10년 뒤 대통령이 된다고 말한 이가 바로 박종대였다. 그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었지만, 일개 당원에게, 그것도 낙선 직후에 하지는 않는다. 농담으로 건네기도 부담스러운 말이라는 걸 정치판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다. 하지만 박종대는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 "근데, 복덕방 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일들을 내다보나? 용한 점쟁이가 곁에 있는 건가? 아니면 본인이 미래를 보고 그러나? 뭐 나야 상관없지만, 땅도 미리 좀 사두셨겠네?"
박종대는 김주한의 말투가 싫었다. 비아냥거리고 무시하는 듯하면서도 눈치를 보는 말투다. 그리고 말 사이사이 아무렇게나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도 싫었다. 김주한은 무시하고 싶어 비아냥거리면서도 눈치를 보느라 쓸데없이 웃고 있었다. 그러면서 생색을 냈다. 자신이 전광용 의원에게 얼마나 힘들게 부탁을 했는지, 전광용 의원이 그런 걸 얼마나 싫어하는지 아느냐고. 

- 하지만 박종대는 대단한 죄인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냥 풀려났을 수도 있었다. 박종대는 그저 경찰의 대질신문 협조요청에 스스로 응했을 뿐이었다.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물론 일은 꼬일 수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생색을 내는 김주한의 꼴은 보기 흉했다. 못난 사람이었다. 어떻게 10년 뒤에 대통령이 된 건지, 박종대는 의아했다. 
하지만 어쨌든, 박종대는 김주한이 필요했다. 대통령이 될 사람은 김주한이지 자신이 아니었다. 박종대는 김주한이 필요했다.

-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일들도 좀 하고 있구요."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박종대는 무리하면서까지 빼내준 것과 저녁 식사에 대해 감사 인사를 했다. 앞으로 자신이 보답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을 테니 기회를 달라는 말도 했다. 자주 뵙고 싶다는 바람도 전했다. 그리고 이만 일어나도 되겠냐고 물었다. 퇴근하고 밤에 아파트를 보러 오기로 한 신혼부부가 있다고, 부동산 일이라는 게 이렇다고, 부러 비굴하게 굴었다. 김주한은 그러라는 듯 손짓을 했다. 

- 박종대는 김주한을 선거 전이 아니라, 낙선 후에 찾아가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한참 선거 운동에 열을 올리는 사람을 찾아가, '당신은 이번 선거에서 진다. 내 말이 맞으면, 나를 찾아라' 하는 건 첫인상에 좋지 않다. 지금 김주한은 박종대를 낙선 직후의 난관을 헤쳐나가는 데 도움을 줄지도 모르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미리 찾아갔더라면, '재수 없게 당신 때문에 내가 선거에서 떨어졌다'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10년 뒤 대통령이 된다는 말 또한 그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일 수 있으나, 김주한은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은 언제나 믿고 싶은 걸 믿는 거니까. 

- 팀장은 자연스럽게 오른팔을 들어 뒷머리를 만지려 했다. 하지만 팔은 허공에서 미끄러졌다. 팀장은 그런 자신의 팔을 봤다. 팔이 아니라 손을 보려고 했지만 손은 없었다. 팀장은 똑같은 짓을 한 번 더 했다. 손이 뒷머리에 닿고 그곳을 긁어줘야 했겠지만, 손을 잃은 팔은 허공에서 다시 미끄러졌다.
양창근은 안부를 묻지 않고 기다렸다. 저런 사람에게 좀 어떠시냐는 말을 건넬 수는 없었다. 팀장은 그 짓을 한 번 더 했다. 팔은 여전히 가려운 곳을 긁어주지 못했다.  

 

- 처음에는 시신이 된 사람들을 그대로 싣고 배가 돌아왔을 것이다. 그래서 박종대와 우환이 떠나왔던 그곳의 사람들은 시간 여행을 하다가 사람들이 이만큼 죽는구나,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시신 대신 가방이 그 자리에 실려 온다. 처음에는 이게 뭘 의미하는지 몰랐을 거다. 하지만 그건,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것보다 훨씬 그곳에서 유용했다.
그리고 또 그들이 알게 되는 게 있었는데, 그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이었다. 그건, 이곳에서, 그 일을 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거였다.

- 죽어도 상관없어 과거로 보내진 사람들 중의 누군가가, 지금도 살아남아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고, 이런 일을 혼자 할 수는 없을 테니, 무리 지어 있다는 것이었으며, 이런 끔찍한 일을 매일 할 수 있는 자가 그 무리의 우두머리라면, 그 무리를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 미래는 점점 암울해져 갔다. 언젠가는 '그곳'에 있는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오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한 번에 몰려올지 모른다. 그렇게 몰려오기 위해 우왕좌왕하던 사람들이 어느 한 사람을 앞세울 수도 있다. 리더가 된 그가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다면, 그들이 새 인생을 살아야 할 곳에 대해 고민할 것이다. 거기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도 궁금해할 것이다.
그리고 이미 오래전부터, 미래를 떠나 과거에 살면서 지금까지 매일 시간 여행선에 저런 것들을 실어 보내는 무리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미래에서 누군가가 그 무리를 알고 싶고, 그 우두머리를 만나고 싶어 온다면, 그는 절대, 이곳에 머물고 있는 '떠나온 사람들'을, 떠나올 때는 목숨값이 벌이의 전부였던 이 사람들을, 절대 하찮게 보지 못할 것이었다. 
그들은 이 무리를 이미 두려워하고 있을 것이다.

- 팔 수 있는 건 모두 판다. 우환이 어리둥절해져서 바라보자, 조금 더 설명했다.
어떤 시체는 팔 수 있는 게 많다. 아닌 시체도 있다. 하지만 시간 여행으로 죽은 시체들은 뇌사인 경우가 많다. 장기가 파열되는 경우는 드물다. 큰돈이 되는 건 그 장기다.  

- "당신이 거기서 나오면, 그 배에서 중간에 내려버리면, 남은 이들은 이유도 모른 채 죽어야 한다는 거, 몰랐어요?"
우환은 답하지 못한다. 박종대가 대신 답했다.
"당신은 알았어요. 이미 그때 당신은 변한 겁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거예요. 어떻게든 여기서, 이 현재에서 살고 싶었던 겁니다. 어떻게든 행복해지고 싶었던 거예요."
"..."
"당신이 처음이지만, 유일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앞으로 더 생기겠죠. 누구든 행복해지고 싶어 하고, 누군가는 결정이 늦을 수 있으니까. 나는 당신을, 앞으로의 그들도 내치지 않을 겁니다. 이곳에서의 삶을 포기한 열둘보다, 여기서 살기로 한, 그 한 사람이 내겐 소중하니까요."

- "여기서 살려면 온갖 노력을 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아랫동네에 살 때는 어땠습니까? 거기서도 갖은 노력을 했어요. 그렇지만 늘 불행했죠. 하지만 여기서는 행복할 수 있어요."
"..."

"여기서 우리는, 인생을 선택해서 살 수 있습니다." 

- 담배를 피웠다. 담배 한 대를 피우는 동안, 박정규는 강희가 걱정한다는 말과 학교는 아예 안 나올 거냐는 질문과 오, 며칠 사이 뭔가 달라졌는데, 감탄을 했다.
"달라지긴 개뿔. 똑같은데."
순희는 답했다. '사람을 몇 죽인 거 같다' '나도 모르는 다른 사람이 된 거 같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 박정규는 여전했다. 당연했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다. 일주일 사이 예전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어쩌면 순희도, 다른 사람이 된 거 같지만, 여전히 똑같은 사람일지도 몰랐다. 순희는 여전히 눈앞의 박정규와 어울리는 시시껄렁한 고딩이었으면 싶었다. 
아무렇지 않게 지난 며칠을 이야기했다. 아파트까지 내줬다는 말에, 박정규는 엄청 부러워했다. 뿅카를 자신이 아닌 강희에게 준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했다. 순희는 뭔가 평범한 듯하면서도 다른 느낌의 박종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주머니에 넣어 온, 그 총을 보여줬다.  

- 우환인 것 같았다. 물이라도 좀 가져다주었으면 했다. 하지만 우환은 종인이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다 다시 잠이 들었다.
아침 6시가 넘어서야 눈을 떴다. 열은 조금 내려 있었다. 몸살 같았다. 주방으로 가 물을 챙겼다. 감기약을 찾아 대충 삼켰다. 우환은 보이지 않았다. 

- 우환은 요즘 들어 부쩍 종인을 더 챙겼다. 아마도 순희가 없어서 더 그런 것 같았다. 헤아려주는 것 같았다. 우환 본인도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순희도 없는데' 또는 '저라도, 형님'. 그 말이 진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종인은 그런 우환이 조금 불편했다. 종인은 이유 없이, 혹은 너무 명확한 이유를 내세우며 성급하게 거리를 좁혀오는 사람이 싫었다. 우환은 지금 부담스러운 거리에 있다. 너무 가까웠다.

- 그때 이 목소리를 듣지 못했더라면, 우환은 형사에게 잡혔을지도 모른다. 이 순간, 이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그즈음에서, 행복해지길 바랐던 마음을 버렸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랬더라면, 이곳에서 살겠다는 욕심을 멈추었더라면, 어쩌면 오히려 행복해졌을지도 모른다.

- 우환은 길에서 만난 어린 엄마의 얼굴을 말없이 한동안 본다. 그러다 눈을, 코를, 입을 하나하나 뜯어본다. 어디가 닮았을까, 우환은 엄마의 얼굴에 빠져 지금을 잊는다.

"아저씨? 아저씨!"
강희가 우환을 다시 부른다. 우환은 정신이 든다.

- 그럼, 아파트에 있다는 '낡고 큰 냉장고' 이야기도 거짓말인가? 어릴 적 놀이터에서 뺑뺑이를 타다가 상처가 생겼다는 말은 분명 거짓말이었을 거다. 박종대의 얼굴에 난 상처들은 분명 수술 자국이다. 그럼, 냉장고 이야기는, 그것도 거짓말인가? 냉장고는 없는 건가? 양창근은 박종대가 왜 굳이 낡고 큰 냉장고에 대해 거짓말을 했는지 신경이 쓰였다. 
사람은 보통 진실을 이야기하다가 거짓말을 해야 할 경우,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거짓말의 모든 부분이 거짓은 아닌 거다. 거짓말들 사이에 '진실'은 잘 없겠지만, '사실'은 자주 있다. 
일테면, 박종대의 손의 상처는 냉장고의 냉각기 때문은 아니지만, 아파트에 냉장고가 있을 수는 있고, 얼굴의 상처는 수술 자국이긴 하지만, 어릴 적 놀이기구를 타다가 떨어진 적이 있을 수도 있는 거다. 

- 거짓말을 못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했다. 많은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은 필요한 경우만, 그것도 사실을 섞어서 이야기함으로써 사람들이 그가 말하는 것 모두가 진실이라고 믿게 만드는, 거짓말에 능한 사람들이 그렇게 했다. 사실에 근거한 거짓말이기 때문에 당당할 수 있었다. 실제로 사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진실돼 보일 수 있었다. 그곳이 취조실이고 형사 앞일 경우는 더더구나 그런 노련함이 필요했다. 
박종대는 거짓말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었다. 이미, 그는 '박종대'가 아니면서도 박종대로 살고 있는 사람 아닌가.

- 우환이 그걸 알 리가 없었다. 박종대가 말을 이었다.
"배에 타기 전에 뭘 준비하셨어요? 저는 떠난다는 걸 안 순간부터 떠나는 날까지, 매일 도서관을 갔습니다. 그리고 외워야 할 것들을 외웠습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데는 꼭 필요한 사람들이 있죠. 전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 그리고 애초에 돌아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꼭 외워야 할 사실들, 꼭 알아야 할 사람들을, 미리 암기해 줬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여기서 이방인입니다. 우리는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죠. 하지만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가진 모든 걸, 쉽게 내놓을 사람들은 없습니다. 한데도 우리는 그게 필요하죠. 그러지 않으면, 평생, 자신의 일부분을 감추고 살아야 합니다. 그들이 가진 것 모두를 빼앗지 않으면."  
박종대는 양손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손가락엔 아직도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냥 내놓으려는 사람은 없고, 우리는 그게 필요하고, 싸움이 나겠죠. 싸워야 할 겁니다. 그럼, 싸움을 잘하는 사람이 필요하죠. 싸움을 아주 잘하는, 무서운 사람." 
 
- 모습을 보고 나서야, 담당 검사가 자신과 양창근을 어떻게 보고 있었을지 알 수 있었다. 검사 앞이었다. 강도영은 최대한 냉정하고 침착하게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흥분한 상태였던 거다. 두 형사의 그 흥분은, 동조해 주기엔 너무 동떨어진 감정들이었던 거다. 그들이 쫓고 있는 걸 검사는 본 적 없었다. 그들의 직감이 하는 소리들을 검사는 들을 수 없었다. 강도영도 지금 그랬다. 양창근이 흥분하는 게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덜컥 답을 하진 못했다.
양창근은 서에 와서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혼자 중얼거리다가 수시로 가까이 있는 강도영에게 동의를 구했다. 강도영은 자리를 피했다.

- 분위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부검실은 언제나 서늘했다. 어쩐 일인지, 탁성진은 없었다. 강도영은 기다리기로 했다. 생각해 보면, 탁성진은 처음부터 사내 몸에 반원의 상처를 낸 무기가 레이저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 강도영도 똑같이 무시했었다. 사내 머릿속에서 꺼낸 칩을 조사했을 때, 순간이동이라는 단어를 이미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해도 강도영은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 모든 걸 이미 알고 있었던 탁성진은 강도영보다 훨씬 일찍부터 두려웠을지도 몰랐다. 강도영은 진지하게 묻고 싶었다. 교실 바닥에서 죽은 그 사내의 머릿속에 칩 말고 다른 건 없었는지. 혹시, 촉수 같은 건 없었는지 말이다. 만의 하나라도, 그들이 외계인일 가능성도 있는 건지. 강도영은 어떻게든 놈들을 잡고 싶었고, 이제는 그들이 뭐라고 해도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흥분하기 전에, 차분한 상태로 무엇이든 냉정하게 받아들여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믿을 만한 누군가가, 탁성진 영감 같은 사람이 '아무래도, 안드로메다에서 온 애들 같다'라고 말한다면, 이제는 그 말을 믿고, 안드로메다에 대해서 공부를 시작해야 할 때였다. 검사는 전혀 몰랐다. 현실적으로 고민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강도영에게는 낯선 단어였지만,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때였다. 이미 사건은 충분히 현실 너머에 있었다. 강도영은 이제 세상에서 가장 침착한, 몹시 냉정한, 몽상가가 되기로 했다.  

- 탁성진은 강도영이 새로운 철학의 탑재를 통해 범인 검거에 대한 열의를 되새기고 있는 동안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강의가 있는 날인 거 같았다. 탁성진은 대학들이 언제나 교수로 모셔가고 싶어 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곳 부검실을 가장 편안하게 생각하는 괴짜이기도 했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그러니 애도 없었으며 부모는 모두 죽었고 형제도 없었다. 가족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탁성진에겐 없었다. 언젠가 탁성진이 그런 말을 했었다. 자기가 돈을 많이 벌지도 못하지만, 유괴범들한테 돈을 뜯길 일은 없을 거라고. 자기 주변에는 유괴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그래서 너무 인생이 가뿐하다고. 탁성진에게 소중한 건 대학을 다닐 때 가까웠던 친구들 정도가 다였다.


- 연애와 닮았다. 그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기 전에는 그 사람을 상상하게 되고, 그 사람을 한 번이라도 보고 난 후에는 그 사람만 그리워하게 된다. 보고 싶어 못 견딘다. 그를 소유하기 전까지는 애가 끓는다. 병이 난다. 비로소 그를 소유하게 된 후에는, 그리움도 애정도 잦아들기 시작한다. 먼 곳으로 보내고 나면, 잊는다. 장거리 연애, 말로는 찾아가겠노라 하지만 양창근은 한 번도 자신이 잡아넣은 범인을 면회하러 교도소에 가본 적은 없다. 

- "순간이동을 할 수 있는 애가 하나 생긴다고 뭐가 문제가 되겠어? 한데, 너는 없으면 안 되지. 너는 없으면 당장 사람들이 죽기 시작하니까. 자넨 의사잖아. 그놈들이 멍청하게 나를 먼저 잡았다면 자네는 올 필요가 없었어. 나는 의사가 아니니까, 그다지 필요한 인간이 아니니까. 그놈들은 우리를 점자도서관에 내려주고 갈 만큼 똑똑한 놈들이야. 그러니까, 별일 없을 거야. 얼른 병원으로 가. 여기 일은 없었던 걸로 해. 그놈들은 어떻게든 그 애의 머리를 갈랐을 거고, 자네가 없었으면, 그 애는 죽었을 거야. 어쨌든 자네는 거기서도 사람 목숨 하나 살린 거야." 
서유헌은 탁성진의 말대로 곧장 병원으로 갔다. 밀린 수술 스케줄이 여럿이었다. 서유헌은 바로 수술실로 갔다. 미처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서유헌은 또 다른 사람의 머리를 열었다.

- 양창근은 담배를 피우며 아파트를 올려다봤다. 주변을 한 번 더 살폈다. 그리고 맞은편 의자를 봤다. 양창근은 불과 몇 미터 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들여다봤다. 남자는 양창근의 시선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뭔가에 빠져 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지루하지 않았다. 생각하게 했다. 담배를 물지 않았지만 담배를 피우고 있는 얼굴이었다. 고생스럽게 키운 딸을 탐탁지 않은 혼처로 시집보내야 하는 얼굴 같았고, 유약한 아들을 군대에 보내야 하는 얼굴 같았고, 병든 아내를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보내야 하는 얼굴 같았다. 이미 정해진 것들 앞에서 더 나은 해답을 찾지 못해 망설이고 있는 얼굴이었고, 그래서 절망하고 있는 얼굴이었고,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관심받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세상은 걱정으로 그늘진 얼굴에 관심이 없었다. 50대에는 누구나 저런 얼굴을 가지게 되는 건가, 양창근은 생각했다. 

- 양창근이 남자들로 득실거리는 경찰서 사무실에 앉아 마흔이 되었다고 혼잣말처럼 뱉었을 때, 주변 모든 사람들은 남자가 쓸데없는 거에 신경을 쓴다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었다. 하지만 양창근은 알았다. 마흔은 아무것도 아니라고들 하지만 서른에서 열이, 스물에서는 스물이 멀어졌다는 것을. 이 남자는 거기서 또 얼마나 더 멀어졌기에 이리도 쓸쓸한 얼굴을 하나. 양창근은 두 번째 담배를 물면서 남자에게 말을 붙였다.

 

- 어떤 사람들은 결국 다시 돌아가기도 했다. 본인이 행복해지기 위해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런 사람들은 돌려보냈다. 또 어떤 사람은 끝내 적응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은 박종대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박종대를 필요로 했던 간절함만큼 지독하게 박종대를 탓했다. 당신이 아니었으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다, 분노하고 원망했다. 어느 날 자신이 빼앗은 누군가의 공간에서 스스로 죽기도 했다. 하지만 극히 드물었다. 
이우환은 망설이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우환은 받아들일 것 같았다. 그는 열둘이나 죽는 걸 알면서도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았나. 이제 한 명만 더 죽이면 되는 거였다. 
스스로 행복해진다는 건 판타지다. 남의 행복을 가져와야 한다. 박종대는 언제나 그렇게 생각했다. 

- "경찰들이 한 번 턴 곳을 다시 안 털진 몰라도, 한 번 지른 것들이 다시 안 꼰지른다는 법은 없잖아."
박종대는 자리로 와서 앉았다. 도깨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회를 집어서 먹었다. 순희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체들을 잠깐 봤다. 그리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박종대가 순희에게 술을 따랐다. 순희는 박종대와 도깨비와 돌격대에게 술을 따랐다. 술자리는 곧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순희는 취하기 전, 이 모든 것이 몹시 낯설었다. 하지만 잠깐이었다. 

- 비는 밤이 되어도 그치지 않았다. 달도 없었다. 우산을 든 형사들, 우비를 입은 순경들, 그리고 그들이 불러낸 구경꾼들로 좁은 골목은 가득 찼다. 그들은 한 곳을 보고 있었고, 보다 자세히 그곳을 보려고 애썼다.

 

- 밤이 깊도록 술자리는 끝나지 않았다. 창고에 방은 하나밖에 없다.

우환은 그 방에서 사람들이 취해가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자주 들리는 웃음소리 속에는 순희의 것도 있었다. 순희는 김화영을 죽였고, 박종대는 이 창고를 내준 세 사람을 죽였다. 죽은 세 사람은 아직 창고 어딘가에 있다. 물론 순희는 우환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김화영을 죽였고, 박종대는 함께하는 사람들의 안전한 피난처를 위해서 그들을 죽였다. 정말 어쩔 수 없었는지, 모르겠다. 무언가를 위해 누군가를 죽여도 되는지, 모르겠다.

- 우환은 잠을 설쳤다. 나가서 저들과 어울리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창고에 화장실 또한 하나밖에 없다. 방 안에 있지 않았다. 우환은 문을 열고 나갔다. 웃음소리가 순식간에 멈췄다. 
모두가 우환을 본다. 우환도 그들을 봤다. 무리 속에는 순희도 있다. 순희는 그 속에서 자연스럽다. 우환은 다른 무리에 속해 있는 순희를 보고만 있다. 우환은 저들을 '다른 무리'라 생각하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우환은 방 밖을 나와서야 고립되었다고 느꼈다. 저들에게 건넬 언어가 없었다.  

- 탁성진이 한숨처럼 말을 뱉었다. 강도영은 말이 없다. 양창근도 달리 보탤 말이 없었다. 동거인은 죽었으니 물어볼 것이 없었고, 소년은 보나 마나 신원미상일 터였다.
부검실에서는 언제나 죽은 자의 말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탁성진은 그들의 이야기를 빠짐없이 들어 형사들에게 전했다. 시체가 알려주는 말들은 놓칠 게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요즘에는 자주 없었다.  
언제부턴가 부검실은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되는 곳이 아니라 서로의 오래된 무능함을 확인하는 곳이 되었다.

- 하루가 너무 길다. 취조실에서 잠든 403호의 남자는 양창근에게 명함까지 받아 갔던 사람이다. 현장에서 도망치지 않고 기다렸다. 자신을 데려가라고 먼저 손을 내밀었다. 할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어쩌면 무서운 이야기들일 수도 있었다. 길고 무서운 이야기를 들으려면 잠이 필요했다. 잠을 자 둬야 했다. 맑은 정신으로 악몽이 아님을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했다. 
 
- 준비한 말들을 늘어놓는 것처럼 막힘없고 자연스러웠다. 일상의 소소한 일들을 가까운 지인에게 들려주는 것처럼 차분하고 친절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두 형사에게 그 내용들은 꽤 충격적이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오랫동안 찾아왔던 단서였고 증언이었다. 쉽지 않았을 고백이었다.
"도깨비가 수술을 하기 시작한 후로는, 흉터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타인의 얼굴 피부를 덧씌우는 과정에서 흉터가 남은 건 중개인 뿐입니다. 그때는 도깨비가 없었습니다. 아, 사장님은 도깨비가 수술하긴 했습니다만, 그날은 상대방이 도망치고 어수선해지는 바람에 마무리를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
"도깨비는 자신의 유일한 실패작인 사장님을 자주 부끄러워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부릅니다." 

- 두 형사는 보다 긴장했다. 우호석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것까지 내가 밝히는 게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에겐 이미 이곳에서의 생활이 있습니다. 새로운 삶이지요. 만족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대부분은 그렇게 문제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인생까지 내가 무어라 말을 하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
"하지만 저에 대해서는, 밝히려고 온 겁니다. 이런 식이 아니어도 언젠가는 왔겠죠. 정이 들어서 망설였습니다. 어울리던 사람들에게 못난 인생들이 대부분입니다. 같은 처지로 어울리다 보면, 정이 듭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그만 이 생활을 멈춰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자는 말을 멈췄다. 남자는 믿기 어려운 말들을 하고 있다. 

"어디까지 믿느냐는, 당신들의 몫입니다."

- "지금도, 당신들은 우리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당신들이 가진 것들을 훔쳐내고 있지만, 당신들은 모두 빼앗길 때까지, 우리를 찾아내지 못합니다. 앞으로는 점점 더 가려내기 힘들 겁니다. 우리가 누군지, 거리의 사람들 중 누가 우리인지, 영영 모르게 될 겁니다. 왜냐면 우리는 조금 더 악착같이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우리는 이곳에 살기 위해, 그곳에서보다도 더, 악착같이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아, 악착같이 안 사는 사람이 어딨어요? 우리도 엄청 그렇게 살지, 나도 어제 이것 때문에 잠 한숨 못 잤구만."
강도영은 또 투덜거렸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양창근의 눈에는 조금 다르게 비쳤다. 강도영은 지금 애써 긴장을 이겨내고 있었다.
남자는 한동안 말을 멈추었다가 시작했다.
"그런데 무리가 따르는 겁니다. 그저 살아가는 건데, 남들처럼 사는 건데, 이곳에 살려면 너무 많은 무리가 따르는 겁니다. 설득과 억지와 무리가 따르는 일상을 보내는 데 지쳤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만하기로 했습니다. 저만은, 이 정도에서 그만하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훔친 겁니다. 제 얼굴도 아니고 제 아파트도 아닙니다. 저는 403호에 살지만, 원래는 제 집이 아니었습니다." 

- 자신을 바라보는 종인의 의심 없는 눈빛이 힘들다. 우환은 종인의 기다림에 굴복했다.
우환이 입을 열자 울컥, 말들이 쏟아졌다. 쏟아지기 시작한 말들은 멈추지 않았다.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제가, 열심히 살게요. 제가 열심히 살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제가 정말로 열심히 살면, 그럼, 그러면 안 되겠습니까? 그래도 안 되는 거겠죠? 형님, 아니, 제가 열심히 살아도,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그러면, 그래도 안 되는 거겠죠? 형님, 아니, 하, 할아버지...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진짜 열심히 살게요. 제가, 정말 여기서, 정말 열심히, 정말 제가 열심히 살게요. 그러면, 그러면 안 될까요?"

- 종인은 우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진심을 담아 고백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 고백이 절실해 종인은 그게 무엇이든 자신이 들어줄 수 있는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우환의 횡설수설은 계속된다. 기다리지 못하고 문이 열린다. 세 사람이 더 들어온다. 그제야 우환의 고백은 멎는다. 셋은 우환의 뒤에 선다. 종인은 그들을 발견했다. 그럼에도 종인은 우환을 본다. 타인들 중 우환을 알아서가 아니라, 오랜 시간 해오던 일을 계속하는 것처럼 우환을 들여다본다. 우환을 들여다보고 있다. 
종인은 그저, 눈물이 고인 우환을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

"순희는 잘 있나? 순희에게 계속 잘해줄 수 있겠나? ... 그래 줄 수 있겠지?"
종인은 다시 한번 다짐을 받았다. 그럼 되었다.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 우환은 식당을 나왔다. 가지고 나온 열쇠로 문을 잠갔다. 문에는, '여름휴가'라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 김주한은 자리에 다시 앉았다. 박종대가 말을 했다.
"그쪽은 정말 대통령이 됩니다. 정확히 10년 뒤에. 하지만 대통령이 되는 건 당신이 아니기도 하지... 아직은 너무 작지만, 내게도 나라,라고 부를 만한 것이 생길 겁니다."

"...?"
"누군가는 미리 준비를 해야 합니다. 지금은 또 이렇게 한고비 넘겼지만, 사람들이 더 늘어나면, 매번 이렇게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럴 때 누군가가 이미 이곳에서 힘을 가지고 있어서, 몇 가지들 눈감아주는 게 아무것도 아니라면, 수백 명, 수천 명 섞여서, 어울려 사는 것 정도 눈감아 줄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시간이 흐를수록 참담해집니다. 미래에는 희망 같은 게 없어요. 미래에는 보다 일부분이, 그들만이 부를 누립니다. 절대다수는, 산다는 게 보잘것없죠. 값이 나가는 건 목숨밖에 없습니다. 그 목숨을 걸고 사람들이 오는데, 여기서는 좀 더 행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목숨을 걸고라도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도, 나라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주민센터 직원들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주민센터로 나오셔서 처음 주민등록증을 만들 때처럼 사진을 찍고 지문을 찍고 하셔야 된다고 홍보했다. 그중 어떤 주민들은 그러지 않아도 사진이 마음에 안 들었다며 좋아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문을 찍을 때는 다들 번거로워했다. 
관할 주민센터들마다 사람들로 미어터졌다. 주민센터 밖으로 줄이 끊이질 않았다. 회사들은 사원들의 주민등록을 위해 반차를 내주기도 했다. 경찰들과 군인들이 나와 위험할 것도 없는 '주민등록' 중인 시민들의 안전을 도왔다. 

- 멀쩡하던 빌딩이 무너져 죽은 사람이 백여 명에 이르렀는데, 소년 테러범은 어쨌든 유명인이 되었고, 모처럼 민과 관과 군과 경이 하나가 되어 큰 위기를 헤쳐나가고 있으므로, 사람 좀 죽은 건 안타깝지만 희생자들 또한 우리가 슬퍼만 하고 있길 바라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기에, 오히려 희생자들을 위해서라도 이를 좋은 경험으로 삼고 얼른 잊어버리자, 나라는 권했다. 부실공사로 무너진 게 아니라 테러다. 국가가 관리를 잘못한 게 아니라 테러로 인한 위기다. 위기니까 하루빨리 없던 힘도 합쳐 극복해야 한다, 나라는 강조했다.
 
- 박현주는 최대한 신속하게 주민등록 업무를 처리하면서 몇몇 아파트 주민들과는 보다 뜻깊은 인사를 나누었다. 눈물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럴 땐 박현주도 덩달아 울컥했다. 이런 날이 정말 오다니, 박현주는 최근에 자신이 얼마나 멍청했었는지 떠올렸다. 자신이 박종대를 얼마나 과소평가했는지 기억해 냈다.
박현주는 자신이 없었다. 예술가의 마음을 미리 알았다. 그와 비슷한 마음이었다. 자신도 이곳에 숨어들어 사는 게 점점 힘들어졌다. 박종대의 말들은 점점 허황되게 들렸다. 그리고 양창근이라는 그 형사가 좋았다. 
몇 번 만나지 않았지만, 그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좋았다. 그의 직업이 확실한 신분이 좋았는지도 모른다. 이곳에 사는 그들은 모두 남의 얼굴을 쓰고 있었다. 박현주는 그렇지 않은 양창근이 좋았다. 

- 어쩌면 양창근을 통해 박종대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박현주의 동거인이 젖어 있는 벽에 대해, 403호에 대해 궁금해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던 날, 새삼 깨달았다. 박종대는 그런 인간이다. 죽지 않고는, 죽이지 않고는 박종대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어떻게든 살려고 버텨왔던 게 아닌가, 박현주는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 주민센터는 영진아파트 주민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 중에는 미래에서 온 사람들이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가려낼 방법이 없게 됐다. 이제는 구분할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이곳 사람의 얼굴로 사진을 찍고, 자신의 고유한 지문을 찍었다. 몇몇은 친절한 주민센터 직원인 박현주가 '동거인'으로 전입신고를 해준 덕에 얼굴을 바꿔야 하는 번거로움 없이 이곳 주민이 되었다. 그렇게 그들은 새로운 신분을 만들었다. 
그들 중에는 예술가처럼 이미 인생이 겹치기 시작한 사람도, 아주 일부지만 있었다. 몇은 갓 태어난 아기고, 몇은 어린아이들이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이 주민등록을 해야 하는 만 17세가 되었을 때는, 미래에서 온 이들에게도 나라가 생길지도 몰랐다. 

- 우환은 순희의 교복을 빨던 일을 생각한다. 교복은 그냥 보아도 붉고 물에 담가도 붉고 빠는 동안도 붉었다. 그 교복이 다시 하얘질 때까지 긴 시간 매달렸었다. 교복이 흰색을 찾고, 왼쪽 가슴에 이름표가 드러나고 거기에 적힌 '이순희'라는 이름을 보았을 때, 그랬다. 생각 없이 피를 벗겨내고, 옷에서 빠져나간 그 피로 욕실 바닥이며 흰 세숫대야까지 온통 붉어졌을 때, 그 속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이름을 보았던 그때, 그때도, 그랬다. 아무래도 피냄새가 났다. 그랬던 거 같다. 우환은 그걸 이제야 기억해 냈다.
필요했던 것 체념뿐이었다. 결국은 행복해질 수 없음을, 그때 알고 체념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우환은 좀 더 기다렸다. 종인처럼 솥 앞에 앉아 국이 끓기를, 곰탕이 완성되기를. 종인처럼 식당에 앉아 순희가 돌아오기를.
하지만, 기다림만으로 타인의 인생을 살 수는 없었다. 누구나 자신의 현재가 있었다.

- "독사, 개도 독이 있어. 더 무서운. 근데, 독사를 만나면, 싸우는 게 아니고, 그냥 잡아먹혀. 사실 싸움도 안 돼. 두꺼비가 뱀을 어떻게 이기겠어? 근데, 이 두꺼비가 뱀 배 속에,"
사내아이는 이미 꽤 겁을 먹고 있다. 양창근은 무시하고 계속했다.
"뱀한테 잡아먹혀서 배 속에 들어갔을 거잖아? 잡아먹히면서, 뱀 배 속에 독을 뱉는 거야, 퉤이 퉤이, 캬악 퉤이, 이렇게. 그럼, 어떻게 되겠어?"

"뱀도 죽어요."
여자아이가 대답했다.
"그렇지! 뱀도 죽는 거야. 그럼, 두꺼비 배 속에 있던, 알들이 새끼들이 죽은 엄마 두꺼비를 먹어치우고, 다 먹고 나면, 두꺼비가 어디 있었어?"
"뱀 배 속에요."
여자아이가 다시 답했다.
"그렇지! 엄마 두꺼비를 다 먹고 나온 새끼들은 이제 뱀까지다 싹 먹어치우고 나오는 거야. 그래서 튼튼하고 건강한 두꺼비가 되는 거지. 뱀이 영양가가 어마어마하거든. 그니까," 

양창근은 여자아이를 바라본다.
"니가 부르던 그 노래, 헌 집은, 뱀한테 잡혀먹어 죽은 엄마 두꺼비고 새집은 그 엄마랑 뱀까지 깔끔하게 먹어치운 새끼 두꺼비들을 이야기하는 거야. 어때? 재밌지? 근데, 남의 살까지 처먹어가며 꼭 살아야 하나, 그런 생각 들지 않냐? 둘 다 이미 사망했다고는 하지만 지 살도 아닌데, 남의 살을 먹어가며 사는 걸, 그걸 굳이 이야기로 만들어놓은 게, 짜증 나지 않냐? 그것도 니들같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어린애들 놀이에, 이런 개 같은 이야기를, 희생이 어쩌고 하면서 달아놓은 게... 별로지?" 

- 사내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여자아이는 고민에 빠져 있다. 엄마들이 달려왔다. 엄마들은 양창근에게 이런저런 질문과 짜증과 협박을 퍼붓는다. 양창근은 형사 합니다, 답해주고 다시 긴 의자로 와서 앉았다. 엄마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터를 떠났다. 여자아이는 돌아보며 손을 흔든다. 양창근은 그제야 담배를 꺼내 문다. 
외출을 하는 가족들이 눈에 띈다. 뛰어다니는 아이들 몇이 보인다. 까르르 웃음도 굴러다닌다.
일상은 안정감이 있었다. 그 일상 속에 온갖 사고가 있고 살인이 있지만, 사람들은 일상이라 말할 때, 주로 평화롭고, 조금 소란스러울 때도 있으며, 가끔 경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편안함을 느낄 정도의 말소리가 있고, 때론 몹시 바쁘지만, 또 화가 날 정도로 억울한 일도 생기지만, 지겹도록 반복될 뿐이지만, 그럼에도 위협은 없는, 죽음까지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그러한 나날을 떠올린다. 물론 양창근의 일상은 전혀 달랐다. 하지만 양창근 또한 그런 일상을 바랐다. 자신은 안 되더라도 사람들만은,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그러기를 바랐다. 
 
- 더 이상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냥 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 양창근은 그런 생각을 한다.  

- "어머니는 유강희, 아버지는 이순희입니다."
돌아서다가, 한마디 더 전했다.
"눈이 엄청 내렸어요. 애 태어나는 날에. 눈이."
양창근은 고아원을 나섰다. 다시는 이곳을 찾지 않아야겠다, 마음을 먹었다. 문득, 나이가 들어 은퇴를 하게 되면 식당을 해보는 게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 먹어본 그런 곰탕을 파는 곳이라면 좋을 것 같다. 박종대에게 친자 확인 유전자 검사를 부탁한 사람은, 이우환이 맞았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양창근은 세 가족과의 인연을 끊었다. 

- 우환은 여전히 마흔 중반이고 여전히 좁은 주방에서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우환은 그런 여전한 것의 일부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형편없고 돌이킬 수 없는 어른이었다는 생각도 여전했다. 하지만 우환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났다. 여전히, 죽는 게 그다지 두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욱 두렵지 않았다. 우환은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 발이 닿지 않게 되자, 헤엄을 쳤다. 

- 배가 푸르고 깊은 구멍을 지나는 동안 우환은 깊은 잠을 잤다. 그리고 다행히, 눈을 떴다. 여행사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환은 자신을 배에 태워 보낸 식당 사장의 이름을 알려주고, 요청사항이었던 고깃덩어리를 보여줬다. 직원은 당신 얼굴이 왜 이 모양이냐? 묻지 않고 차에 태웠다. 우환은 떠날 때처럼 승합차에 올라 바다가 사라진 바다 위를 달렸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우환이 시간을 거슬러간 그곳에서 이방인으로 지내며 보낸 시간들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아무것에도, 누구에게도, 그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은 것 같았다.

- 식당도 달라진 건 없었다. 하지만 식당 사장은 어딘가 좀 바뀌어 있었다. 물론 여전히 나이답지 않게 건장했다. 하지만, 팔, 원래는 없었던 오른쪽 팔이 생겨 있었다. 아마도 그 사이 장사가 잘되어 팔을 만들어 넣은 모양이다. 우환은 긴 말 대신, 목숨 걸고 가지고 온 고깃덩어리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사장은 우환을 알아보지 못했다.

- 우환은, 설명하려면 꽤 긴 이야기가 될 텐데, 이걸 사장에게 하는 게 맞는지, 주방장에게 해야 하는지 고민이 됐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도 난감했다. 그사이 사장은 우환을 뚫어져라 보고만 있다. 
종인의 얼굴을 한 우환을 한동안 바라만 보던 사장은, 먼 기억 속에서 드디어 할 말을 찾아낸 듯 입을 열었다.
"이러니 이종인을 찾을 수가 있었겠어."

- 이우환을 배에 태워 과거로 보낸 양창근은 더 이상 없었다. 그는 오른팔이 없었던 시간도 기억하지 못했다. 지금 우환의 앞에 있는 양창근은 은퇴할 때까지 박종대와 이종인의 실종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양창근이며, 그러니 교도소에 있는 이순희에게 팔을 잃을 일도 없었던 양창근이었다. 

- 양창근은 이종인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 40대의 남자를 보자, 많은 게 이해되었다. 양창근은 이종인의 얼굴을 한 당신은 누구냐, 당신이 이종인을 죽인 것이냐, 그런 것들을 묻지 않았다. 양창근은 그저 테이블 위에 놓인, 우환이 가져온 고기들을 확인하고, 우환을 주방으로 들였다. 그리고 우환이 끓인 곰탕을 맛있게 먹었다. 부산곰탕의 맛이었다. 노인이 된 양창근의 긴 세월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좋은 기억이었다.

- 눈만 내리면 정신을 못 차렸다. 교도소에서 수십 년을 그랬고 나온 후에도 그랬다. 눈을 보면 아들을 보는 것 같았다. 식당에 들어가서도 순희는 창가에 앉아 내리는 눈을 봤다. 그러느라 하마터면, 아들을 보지 못할 뻔했다.
아들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들이었다. 주방에서 나와 자신에게 따뜻한 물을 건네는 사람은 분명 아들이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아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로 늙어 있었다. 아들이 끓여주는 곰탕에서는 아버지의 맛이 났다. 순희는 그 곰탕을 맛있게 먹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을 때, 이름을 물어봤다. 

- "눈이 엄청 왔었다고 하더라구요. 저 태어난 날."
순희는 아들이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에 감사했다. 약속을 지켜준 양창근 형사가 고마웠다. 순희는 언제까지고 아들이 이렇게만 알고 있기를, 지금처럼만 살아가기를 바랐다. 

- 50년 만에 쓰나미가 다시 올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돌았다. 소문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냥 살았다. 두렵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 우환은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털어놨다. 아버지는 묵묵히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인생 하나가 지 혼자 망쳐지나."

일흔아홉이 된 이순희는, 쉰아홉이 된 이우환에게 이어서 말한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말이다.
"니는 어떤지 모르겠다만, 나는 모든 게 달라졌다. 니가 태어난 후로."
 





마흔을 앞둔 12월에 여행을 떠나게 됐습니다. 보통은 여행을 떠나오기만 해도 큰 짐 하나를 덜게 되는데 이때는 좀처럼 그러지 못해서, 마흔이 된다고 괜히 이러는구나,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 저도 제가 못마땅했지요. 남인도를 지나 스리랑카까지 내려가서 콜롬보에 머물게 되었을 때, 아내에게 아무래도 뭘 좀 쓰고 돌아가야겠다고 말했습니다. 시나리오가 아닌, 소설이 될 것 같다고요. 그날부터 꼬박 40일 동안, 출국 당일 오전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썼습니다. 첫 소설이었고, 오랜만의 계약 없이 쓰는 글쓰기였습니다. 또한 인생의 유일한 선생이라 여겼던 아버지가 죽고 난 후, 그가 존재하지 않는 현재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에게 답을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눈을 뜨면 썼습니다. 아침을 주는 시간이 되면 내려가서 배를 채우고, 삶은 계란 두어 개를 주머니에 넣어 왔다가 점심을 대신해서 먹으며 이어 썼습니다. 오후가 되면 다음 날 쓸 것들을 메모하고, 잠들기 전에는 눈을 뜨면 쏟아낼 것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습니다. 캐릭터들이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일이, 마음을 달래는 일이, 문장과 문장으로 그들을 그려내고 마주하고 곁을 내주는 일이 신나고 아프고 즐거워, 살이 내리는 것도 모르고 호텔 밖을 나가는 것도 잊고 썼습니다. 호텔 매니저 분이 제발 청소를 하게 해달라고, 30분만이라도 방을 비워달라고 부탁하던 얼굴이 기억납니다. 그렇게 <곰탕>의 초고가 완성되었습니다. 

아버지와는 그다지 살갑게 지낸 것 같지는 않아요. 한데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 상실감이 이토록 긴 이야기를 쓰게 할 줄 몰랐습니다. 몸이 고되어도 아침이 되면 출근을 해야 하고, 맘이 무거워도 마감 일이 다가오면 써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도 지금을 살아야 합니다. 시간 여행이 언제 가능해질지 모르지요. 그전까지는 어찌 되었건 우리는 계속 지금에, 이 답답한 현재에 고스란히 살아야 합니다. <곰탕>이라는 소설을 통해 그럴 수밖에 없는 제 스스로에게, 그리고 읽게 될 우리에게, 그래도 살아봐야겠지요,라는 말을 전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한동안 본업인 영화로 돌아가 "레디 액션"을 외쳐야겠지만, 뭔가 또 쌓여서 달리 털어낼 방법을 모르게 되면 어디 구석에 자리를 만들고 앉아 소설을 쓰게 될 것 같아요. 그때 또 뵙게 되면 좋겠지요. 아마, 양창근 형사와 그가 인천에서 만난 고등학생 김백구의 이야기가 될 거 같네요. 카카오페이지에 연재하는 동안 <곰탕>을 애정해 주신 독자분들, 그리고 앞으로 만나게 될 미래의 독자분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 마음이 넘칩니다.


2018년 3월
김영탁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