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신미경] 혼자의 가정식 - 나를 건강히 지키는 집밥 생활 이야기

일루젼 2024. 7. 2.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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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신미경
출판 : 뜻밖
출간 : 2019.09.19


       

책탑을 정리하다 보면 어느 정도 읽다만 책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 아예 손을 대지 않은 책은 곧바로 첫 장부터 시작하면 되지만, 읽다만 책을 발견한 경우는 살짝 고민이 된다. 이어서 읽을 것인가, 처음부터 다시 읽을 것인가. 

 

처음에는 앞이 기억나는지 다시 훑어보기도 하고, 책갈피가 꽂혀있던 몇 장 앞부터 읽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대략적인 느낌이나 인상이 기억나는 경우는 있어도 전체가 또렷하게 기억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는 걸. 그나마도 다시 읽는 동안 변하는 경우가 훨씬 많을 거라는 걸. 그러니까 그냥 첫 장부터 읽으면 된다는 걸.

 

고민의 시간이 줄어든 건 좋았지만, 당시의 내가 읽는 동안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그야말로 희뿌옇게 흐려져 '알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점이 안타깝다. 아직도 책장에 밑줄을 긋거나 메모하는 일은 극도로 꺼리기 때문인데... 모든 책을 소장한다면 상관이 없겠지만, 책을 되팔기도 하는 입장에서는 더더욱 조심스러워진다. 

앗! 그렇다면 결국 나의 고민은 처음부터 '소장할 책'을 엄선해서 구매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언제고 다시 돌려보낼 생각으로 적당히 구매했기에 책탑으로 쌓인 게 아닐까?

 

이런 상상은 자연스럽게 저자가 말하는 '자연식' 개념으로 이어진다. 저자는 자신을 위해 조금 번거로워도 좋은 식재료를 골라 직접 요리해 먹을 것을 권한다. 그런 수고로움을 통해 자신을 대접하고 아끼는 사랑법을 익히라는 것인데, 나는 이것이 꼭 음식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느꼈다. 어떤 환경에서 생활할 것인가, 무엇을 읽을 것인가, 어떤 감정으로 무슨 생각을 할 것인가 또한 자신을 위할 수 있다. 

 

그러니 조금 더 자연식에 가까운 식단과 요리에도 관심을 기울이되, 이전의 내가 쌓아둔 '인스턴트 읽을거리'에 대한 집착도 내려놓는 연습을 해보는 것이다! 

라고 오늘부터 결심해 본다. 아직은 익숙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설레기도 한다. 이러다 다시 이전의 익숙한 습관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다른 선택을 해봤다는 경험은 남을 테니까. 

 

그런데 이런 여름날, 불 앞에서 한두 시간씩 서 있을 수 있을까...

음. 일단은 간단한 것부터 시작해 보는 거다. 어차피 냉장고 안에 쌓인 식재료들부터 소진해야 하니까.

 

레몬을 넣은 탄산수. 

블루크림치즈와 허니버터를 바른 뒤 얇게 썬 오이를 올린 오픈샌드위치.

 

괜찮은 저녁이다. 

다음 주에는 양파와 연어를 좀 사봐야겠다.           

   


   

 

- 신미경
전 라이프스타일 잡지 에디터이자 칼럼니스트. 삶을 우아하게 만드는 새로운 시도와 생각을 담은 블로그 '우아한 탐구생활'을 운영하고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뿌리가 튼튼한 사람이 되고 싶어 : 나를 지키는 일상의 좋은 루틴 모음집>과 <오늘도 비움 : 차근차근 하나씩, 데일리 미니멀 라이프>, <슈즈 시크릿>이 있다. 
일중독과 쇼핑중독의 무한루프 속에서 바쁜 20대를 보내던 중 건강에 이상신호가 찾아왔다. 몸이 쉽게 피로해지고 삶이, 생활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껴 자신을 위한 삶, 건강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육식을 좋아하지 않는 페스코 베지테리언의 입맛, 멋진 향과 영양을 가진 제철 음식 사랑꾼 좋은 식사가 주는 몸의 건강함과 마음 충족을 에너지로 바쁜 일상 속에서도 여유로운 순간을 만끽하고 있다. 맛과 간편함을 우선했던 식습관을 오랜 시행착오 끝에 교정한 뒤 부엌에서 절제와 부지런함을 조금씩 익히며 요리한 덕분에 일상 컨디션이 좋아짐은 물론 식비는 반으로, 시간 역시 절약했다. 그녀의 느리고 아름다운 집밥 생활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 이 음식이 내 몸에 이로울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입에 넣기 전에 생각한다. 신선한 채소를 사고, 손수 요리해 먹는 집밥이 나를 지탱하는 기본이라 믿는다. 


- 냉장고에서 블루베리를 꺼낸다. 게으른 일요일 아침에 부산하게 움직이는 건 나뿐인 듯 온 동네가 고요하다. 요거트와 사과를 보기 좋게 담고 그 위로 호두, 아몬드, 캐슈너트 견과류 세 종류를 골고루 뿌린다. 구운 귀리 약간도 잊지 않는다. 어제는 종일 비가 내려 따뜻한 수프에 통밀빵을 곁들여 먹었는데 오늘 날씨는 비 온 뒤 상쾌해져서 가벼운 식사가 끌린다. 접시 하나에 담긴 아침 식사를 들고 소파에 앉아 이웃의 늦잠을 방해하지 않도록 아주 잔잔한 음악을 볼륨 낮춰 켠다. 쫓기지 않는 일요일, 그리고 나른함. 

- 언제부터 아침 식사를 챙겨 먹었는지 끼니마다 내 손으로 모든 식사를 준비했는지 기억하진 못한다. 혼자 살다 보니 시간 부족과 피곤함을 이유로 포장과 배달 음식을 주식으로 삼고 지냈는데, 그 맛에 넌더리가 나면 어쩌다 집밥을 만들어 먹는 정도였다. 텔레비전만 틀면 나오는 '먹방'이 지겹다는 친구 옆에서 나는 가끔 먹는 거 자체가 지겨워서 식사용 알약은 언제 개발되는지 궁금하다 답했을 정도.

 

- 식사는 한때 내 생활의 가장 낮은 위치였다. 그런데 외식에 의존하는 끼니는 한계가 분명했다. 지나치게 자극적인 맛과 푸짐한 양 때문에 점점 살이 찌고 속이 나빠졌으며, 식비 지출도 만만치 않았다. 건강하지 못한 식생활을 바꾸고자 여러 시도를 했고, 이제는 집밥이 가장 편안하고 소중한 식사가 되었다. 내게 가장 중요한 식사의 기준은 신선함과 건강 질 좋은 제철 채소와 과일, 고단백, 발효식품을 식탁에 올린다.

- 대충 먹고사는 게 괜찮지 않고, 건강을 챙기는 게 유난이 아님을 확실히 깨닫게 된 건 아프고 나서다. 시골에 뿌리를 두고 있고, 도시에서 자랐지만, 오랫동안 자연식보다 혀를 즐겁게 하는 인스턴트 음식이 맛있었다. 몸에 이롭지 않음을 알지만 지금 당장 아픈 건 아니라서 늘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중독적인 맛을 찾았다. 과소비와 폭식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사회적 성취가 삶의 1순위였던 때 유독 심해졌던 버릇이다. 결국 건강을 잃으면 모든 걸 잃게 된다는 상투적인 말이 내 삶의 일부분이 되고 나서야 마음을 고쳐먹었다.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앞으로 나아갈 때 바꾼 식습관은 더하기보다 덜어내며 완성되었다. 맛과 즐거움을 내세운 쾌락주의 식사가 아닌 절제를 하며 더 큰 만족을 느낀다. 느리게 먹기, 설탕 줄이기, 자극적인 맛 피하기와 같은 나만의 식사 규칙을 만들고 지키는 이유다. 자신과의 약속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에게 불쾌하지 않을 중간선을 지킬 수 있다는 점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이기에 무심코 지나쳤던 끼니는 더는 망아지처럼 뛰어다녀도 지친 기색 하나 없는 나이가 아닌지라 절실히 다가온다. 

- 이 책에는 여러 도서를 탐독하며 배운 건강법을 실천한 뒤 찾은 내게 맞는 식사법, 장을 봐서 요리하고 자신과 주변의 여러 사람을 추억하는 아주 사적인 일상, 기발한 레시피는 없지만 곧잘 해 먹는 생활 요리를 작게나마 소개했다. 몸과 마음은 연결되어 있기에 건강한 식사가 결국 마음을 돌본다. 잔잔한 만족감이 일정하게 지속하는 차분한 삶의 시작은 아침에 일어났을 때 몸의 상태가 오락가락하지 않을 때다.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없다는 태도로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고, 마음을 무겁게 하는 감정이 생겨도 매일 그 크기가 줄어든다는 걸 알게 되는 하루.'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하면서도 나를 챙기는 일을 미루고 있던 과거의 나와 닮은 사람이 이 책을 통해 자신만의 건강한 식생활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두고 약간의 절제를 익혀가며 결국 몸과 마음이 평온해진다면, 그래서 지금 내가 누리는 소소한 즐거움을 조금이나마 나눠줄 수 있다면 나는 안 먹어도 배부를 거 같다.

 

- 지겹도록 이어지는 매일 같지만 생은 허탈할 정도로 짧을 수 있다. 알고는 있지만 늘 되새기며 살기엔 지나치게 묵직한 생각이라 대부분 잊고 산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주어져야 마땅한 일상이 서서히 깨지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채 더 많은 것을 움켜쥐기 위해 살았다. 지금이야 지난 과거라 관망하듯 바라볼 수 있지만, 고작 서른두 살에 수술을 앞두고 당신이 죽을 수도 정상적인 생활을 못할 수도 있다는 온갖 서류에 사인을 할 때는 정말 무서웠다. 무엇이든 읽기 좋아하는 내 눈에 한 글자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던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글에 서명하면서, 과연 나는 앞으로도 늘 자던 침대에서 일어나 잘 차려입고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고, 내가 즐겨 가던 모든 장소에 갈 수 있게 될지 긴 상상을 했다.  

- 내 건강 상태가 엉망진창이 된 원인은 유전병도 아니고 지병도 아닌 모두 내 탓, 잘못된 생활습관이 만든 병을 치료하면서 내가 가장 실수했던 부분이 무엇인지 곱씹어 보니 식생활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등이 굽을 만큼 야근을 한 뒤 출출하다는 이유로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김밥을 사 먹고 디저트로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샀다. 풍부한 영양은 기대할 수 없고 첨가물과 높은 칼로리의 간편식으로 대충 먹고살았는데, 엉망인 식사에 불규칙한 수면이 더해지자 만성피로가 왔다. 주말이면 시야가 흐릿할 만큼 눈이 침침했고, 아침에 바로 일어나기도 힘들었는데 이 모든 게 몸이 구해달라는 신호인 줄은 몰랐다. 치료 후 바닥을 친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욕심을 서서히 내려놓고 몸에 좋은 습관을 만들려 여러 시도를 했다. 그중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는 것. 내 몸과 대화하기.

- 과거의 잘못된 생활습관을 추적하면서 나는 내 몸에 이런 약속을 했다. '입에 넣을 수 있는 건 오직 영양가 넘치는 음식뿐이야. 나머지는 몸이 싫어한다고.' 그렇게 음식을 먹는 기준이 바뀌자 나는 달라졌다.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기꺼이 직접 요리를 했는데, 이 모든 변화는 내 몸이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몸과 이야기를 시작하면서부터다. 몸이 '요즘 해산물과 콩으로만 단백질을 먹었잖아. 이제 소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면 소고기를 먹었다. 어느 날 아이스크림을 손에 쥔 내게 '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은 이유에 대해서 140자로 서술해 봐'라고 몸이 이걸 꼭 먹어야 하는 타당한 이유를 들어보라 말하면 '음, 내가 오늘 거래처의 피드백 때문에 화가 났는데 그걸 해소하기 위해서야. 단 걸 먹으면 기분이 좋잖아'라고 답한다. 그럼 이내 '따뜻한 허브티 한 잔도 너의 기분을 다스리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너는 지금 위안이 필요할 뿐이야. 이 당 덩어리는 너에게 장기적으로 당뇨를 가져올 테고, 결국 출렁이는 지방이 될 뿐이라고' 하며 대거리를 한다. 나는 대부분 내 몸이 하는 소리에 순응하며 따랐다.

- 무엇을 먹을지에 대해 몸과 나누는 대화가 직관적인 식사 Intuitive Eating임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직관적인 식사는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있는 몸이 말하는 신호에 따라 적당히 기분 좋을 만큼만 먹는 식사법이다. 칼로리를 계산하지 않고, 무엇이 영양이 있는지 없는지도 철저히 따지고 들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몸과 영양을 기준으로 대화한다. 얼얼하게 매운 음식처럼 내 몸에 맞지 않은 식사를 차단하고, 울적한 기분을 핑계 삼아 아무거나 먹는 나를 막기도 하면서 때론 몸이 보내는 신호는 혼란스럽다. 쿠키에 든 영양이 정말 필요해서 자꾸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지 그저 머리를 많이 굴려 당분 자체가 부족한 건지. 그때는 일단 몸에 더 괜찮은 선택을 한다. 견과류를 조금 먹고, 그래도 부족하면 과일을 먹는다. 그러면 어느새 쿠키 생각은 사라졌다. 

- 자신의 건강을 해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는 흔들릴 때마다 옆에서 잔소리 해주는 사람이 없는 혼자라서 나에게 따뜻한 잔소리를 한다. 설탕 음료 대신 물을 마시라고 말해주고, 빠르게 먹고 있는 거 같다고 천천히 먹으라 말한다. 날 위하는 셀프 잔소리는 내가 온갖 인스턴트와 멀어지는 식습관 교정에 큰 역할을 했고, 여전히 활약하고 있다.

- 좋은 문학 작품에서 얻은 감동을 첨가물 가득 든 가공식품과 나의 이별에 빗대기엔 다소 엉뚱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긴 세월 동안 함께한 '먹을 수 있는 물질과의 헤어짐은 나의 식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다. 몸소 느끼기에 건강상태가 호전된 건 확실히 그런 가공식품을 먹지 않고서다. 

- 식문화와 관련된 다양한 저서로 이름난 미국 작가 마이클 폴란은 증조할머니가 봤을 때 몰라보는 식품은 먹지 말라고 말했다. 증조할머니 정도는 거슬러 올라가야 곰 모양의 젤리를 음식이 아닌 장난감으로 볼 수 있다는 걸까? 그가 가공식품을 일컬어 음식이 아닌 먹을 수 있는 물질이라고 정의 내린 점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접근 방식이었기에 신선했다. 액상과당, 나트륨, 인공 향이 가미된 가공식품이 몸에 좋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음식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내게 처음이었다

-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제까지 살면서 이건 아니다, 불편하다 느꼈지만 지금 당장은 괜찮아서 미루고 있었던 일들. 분명 그게 문제라고 추측하지만, 적극적으로 바꿔보려 하지 않았던 상황 계속 찝찝한 상태로 내버려 둘 바에야 아주 사소한 부분을 당장 실천하면 조금씩 바꿔나갈 수 있고 결국 상쾌해질 문제가 아니었을까? 입버릇처럼 '운동해야 하는데' 말하지 않고, 오늘 10분이라도 걷자 마음먹고 실천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그래서 인스턴트식품을 끊어내던 중에도 '몸에 안 좋은 걸 알지만 그래도 못 먹어서 아쉽다'가 아닌 신선한 자연 재료로 새로운 요리를 시도해 밥상을 차리며 달라진 나를 칭찬한다. 후회할 시간을 아껴 몸을 움직인다. 바꿀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쁜 버릇을 없애고 나면 그곳에 이전에 보지 못했던 다른 길이 나타난다. 잘 포장된 물질이 사라지자 이제껏 게으름에 외면했던 일상 요리의 세계에 도착했다. 

- 거울 속 나의 표정이 홀가분하다. 먹는 일이 죄책감이 되지 않도록 살기, 나는 그렇게 다짐하곤 지금 몸 상태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건강한 집밥을 만들어 먹으며 매일 귀중한 몸에 이로운 식량을 허락한 삶에 감사를 표할 수 있게 되면서다. 끼니는 대충 때우는 게 아니라 나를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것, 지켜야 할 만큼 소중한 것, 드디어 자신을 존중하는 시간임을 알게 된다.

 

- 행복은 소소하게 계속 느끼는 거라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을 때를 안다. 조금 음산하게 비가 내리는 날, 필요한 물건만 남긴 공간의 가장 포근한 부엌에 서 있다. 나는 스산한 날씨에 어울리는 따뜻한 국물 요리를 만들 참이다. 국그릇에 한 번 먹을 정도의 물 양을 채운 다음 아주 작은 냄비에 붓고 시골 장터에서 사 온 건새우를 한 움큼 넣는다. 그다음에 물이 끓으면 썰어 놓은 양파, 표고버섯을 넣어 끓인다. 조금 더 끓었다 싶으면 소금 간을 살짝 하고, 마지막에 들깻가루 4큰술을 넣어 잘 섞어준 다음 불을 끈다. 빠르게 완성한 들깨 표고버섯국은 느끼한 뒷맛이 없어 마지막 국물까지 모조리 마시고 싶을 만큼 좋다. 

- 고열량 유첨가 음식에서 자유로워진 뒤 가짜 식욕을 다루는 방법이 생겼다. 몸이 원하는 건 지방이고, 감정이 원하는 건 불량식품이란 걸 알게 된 나는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 버터같이 좋은 지방을 먹기로 한다. 기름진 게 먹고 싶은데 요리할 의욕이 전혀 생기지 않으면 달걀 프라이를 버터 얹은 흰밥에 올리고, 간장 조금 뿌려서 먹는다. 먹어도 또 먹고 싶다면, 이미 충분히 먹었다고 내게 말하고 감정을 돌본다. 결핍된 마음을 달래듯 향을 음미하며 녹차를 한 잔 마시고, 복잡한 머릿속을 단순하게 만들기 위해 누워서 책을 읽으며 다른 세상으로 마음을 돌려본다. 이런 날엔 유쾌한 책이 좋을 듯하지만, 웃음이 바닥난 까닭에 하나도 웃기지 않아서 문제. 더 냉소적으로 되지 않도록 차라리 나보다 더 어두운 타인의 감정선을 따라가다 깊게 침착되어버리는 편이 나았다. 페르난도 페소아의 <불안의 책> 같은. 물론 읽다가 덮어버리기도 한다.  

- 오랜만에 만난 기혼 친구가 여전히 미혼인 내게 결혼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말했다.
"결혼하고 싶다면, 정말 네가 싫어해서 못 견딜 거 하나만 안 하는 사람이랑 해야 해. 이상형이란 건 신기루야."
대충 이런 말이었는데, 상대에게 원하는 걸 줄줄이 읊는 게 아니라 나란 사람이 어떤 성향을 가졌는지 먼저 파악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타인의 행동 중 내가 정말 용납할 수 없는 한 가지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누구나 유독 못 견뎌하는 불쾌한 지점이 있다. 물컵을 바로 씻어 두지 않고 그대로 올려 두는 아주 사소한 부분도 사람마다 포용하는 정도가 다르다. 결이 비슷한 사람을 만난다 해도 결국 다른 사람이라 균열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런 조언을 들을 때면 미지의 상대방에게 거는 기대보다  오히려 나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 나는 좋게 포장해 실용주의, 모든 선택의 기준이 가성비가 전부라 믿는 삶은 원하지 않는다. 고단할 때도 아름다운 순간을 즐기고 여유로운 식사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질 낮은 음식으로 대충 먹는 식사를 원하지 않는다. 집에서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혼자의 삶을 꾸리기에 정말 미숙했던 시절, 나에게 배고픔이란 귀찮기만 했고 참다가 어쩔 수 없을 때 금방 배를 채울 수 있는 음식을 사서 입에 넣는 일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나는 사 먹는 음식이어도 제대로 그릇에 담아먹었다.

 

- 요리하는 지금은 신경 써서 볕이 잘 드는 자리, 낡았지만 깨끗한 접시, 반짝이는 포크가 어우러진 식사를 한다. 나 혼자 먹는 식사에서조차 가장 좋은 걸 선택해 결코 나를 홀대하지 않겠다는 생활 방식, 편안함이 지나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그 정도 대접으로도 충분한 사람이 되어버리기에 신경을 쓴다. 한두 가지 꽃을 꽂은 화병, 식사 때 쓰는 종이 냅킨을 따로 구비해 두고, 음식물을 흘리면 금방 더러워져 세탁해야 하는 리넨을 테이블에 덮어씌운다. 일상의 작은 부분이지만 내 눈과 머릿속에 아름다운 장면을 남기고 싶다. 그래서 밥상을 차릴 때조차 식기가 조화롭게 어울리는지 살펴보는 등 작게나마 보기에 좋은지 신경 쓴다. 음식을 먹는다는 일상적인 행위에 소소한 심미안을 더하면 정신적 만족이 따라온다.

- 나의 일상식은 소박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조금의 정성을 늘 더하고 있다. 어설퍼도 나를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그런 사소함. 완성된 파스타에 살짝 뿌리는 파슬리 플레이크, 썰어낸 김치에 뿌려주는 깨 약간, 디저트로 과일을 예쁘게 잘라서 접시에 담아내고, 도시락을 쌀 때면 색감이 파릇한 브로콜리 두 개 정도를 넣어 식욕을 돋운다. 이런 자잘한 기쁨의 총량이 그토록 내가 바랐던 행복한 삶이란 걸 알아챈다. 영혼의 배를 부르게 할 준비물은 하얀색 리넨 식탁보, 냅킨, 꽃병 정도. 그리고 혼자 먹어도 매너를 잊지 않는 식사 시간. 그러다 보면 지켜보는 사람이 없어도 자신에게 부끄러운 행동은 자제하는, 품고 있는 격이 높은 사람이 되는 길이 요원치 않아 보인다.

 

-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게 되었다. 그 사람이 하는 말보다 어떤 행동을 하는지 관찰하는 편이 그 사람의 진짜 속내를 파악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사랑한다와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다르다는 말처럼 언제 밥 한번 먹자고 말만 하는 사람과 바로 약속을 잡고 실행하는 사람 중 누가 정말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일까. 그래서 "오래 살아서 뭐 해, 빨리 죽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사람이 밥을 잘 먹고 파우치 가득 종류별로 들어 있는 영양제를 챙겨 먹을 때면 그저 푸념으로만 들린다. 오히려 자신은 괜찮다고 말하면서 수시로 밥을 굶는 사람이 우려된다. 혹시 마음병에 걸렸나.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 이제 나는 건강염려증을 앓지 않는다. 오히려 언제든 다시 아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건강하게 살겠노라 다짐하지 않는다. 그저 규칙적으로 자고 일어나며 요가와 걷기가 일상이 되고, 매일 신선한 재료로 요리해 끼니를 챙긴다. 그런 나날들이 숨 쉬듯 자연스럽게 반복되면 어느새 유별난 건강법 없이도 무탈하다. 

- 모두 건강하게 나이 들고 싶어 한다. 내게도 한때 모든 관심을 쏟아 열중했을 만큼 가장 간절히 바란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 몸이 가장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방식대로 운동하고 먹는 습관을 바꾼 뒤로 건강 강박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흥미로운 건강법에 귀를 솔깃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내 생활에 들일 일은 없었다. 한때 열렬히 시청했던 각종 건강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몸에 좋은 음식을 끼니때마다 올리지도, 이름도 독특한 여러 약초가 들어간 즙을 장기간 복용하는 데에도 흥미 없다. 약식동원 藥食同源이라는 말이 있다. 약과 음식은 근원이 같으므로 좋은 음식이 몸에 약이 된다는 견해다.  

- 몸은 각자 타고난 유전자도 환경도 다르니 누군가에겐 효과 좋은 건강법이 내게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다.

- 나는 건강해졌고, 앞으로도 지금처럼 규칙적인 생활과 끼니마다 건강한 음식을 잘 챙겨 먹는 편이 최고의 건강 관리법이라 믿고 이대로 계속 살아갈 거다. 그래서 컨디션이 별로일 때는 잠은 잘 잤는지 밥은 잘 먹었는지 화장실은 잘 갔는지를 체크하고 개선하는 쪽으로 내 몸을 돌본다. 정말 몸이 안 좋으면 의사에게 치료를 받으면 되고, 귀가 솔깃해지는 특이한 방법이나 요령껏 할 수 있는 쉬운 길을 찾기보다 교과서적인 방법을 그저 묵묵히 실천한다. 지키기 어려울 때도 있겠지만 방법에 대한 별다른 고민 없이 몸에 익숙한 규칙대로 그렇게 또 하루를 살고 싶다

- 가장 중요한 건 장보기다. 주로 먹는 필수 식재료는 집에 늘 떨어지지 않게 채워둔다. 주식인 잡곡, 호밀이나 통밀로 만든 식사 빵, 달걀, 치즈 그 외에 내가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아침식사를 위한 요거트, 견과류다. 일단 이 재료들이 기본으로 갖춰져 있어야 식사를 준비할 수 있다. 여기에 양파, 파, 마늘과 같은 기본 채소와 제철 채소, 과일 역시 필요해서 떨어지지 않게 장을 본다. 이 모든 걸 빠트리지 않고 살 수 있는 까닭은 식단과 함께 정리해 둔 장바구니 리스트 때문. 한 달에 정해진 식비 예산에 맞춰 평소 즐겨 사는 품목과 수량을 정해둔다.   


- 장보고 밥 짓는 일상의 즐거움을 되찾아준다는 취지로 동네마다 열리는 작은 시장을 지향하는 '마르쉐'의 채소시장. 집에서 꽤 떨어진 곳이지만 시장이 서는 날을 기억해 두었다 찾아가는 이유도 나와 추구하는 가치의 결이 같아서랄까. 갓 재배한 신선한 채소를 키운 사람이 직접 팔고, 아버지와 함께 양봉해서 꿀을 파는 젊은 농부와 할머니 레시피로 손수 부각을 만들어서 파는 가게도 함께하는 곳, 그곳에서 싱싱한 제철 호박잎을 충동구매한다. 원래는 뜨거운 한낮 여름에도 시들지 않고 청아한 향을 내뿜는 바질만 사려고 했는데, 사람들이 "어머, 호박잎이야" 감탄하는 분위기에 이끌려 난생처음 장바구니에 호박잎을 넣었다.  

- 여름과 잘 어울리는 보사노바 음악, 묘하게 나른한 브라질 남자의 음성과 끈적이는 여자 목소리의 <코르코바도 corcovado> 곡을 들으며 호박잎의 줄기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내 손질하고 찜기 위에 얹어 삶는다. 부엌 한구석에서 여름밤의 열기는 귀로도 호박잎 삶는 냄새로도 기억된다. 손을 재빠르게 놀리니 식탁 위에 여름 제철 채소의 진한 초록 옆으로 참기름에 볶은 버섯, 치즈 달걀말이에 얹은 바질 잎 한두 장이 오늘의 장보기가 가져온 좋은 식사로 바뀌어 있다. 요리한다는 건 사소한 일상일 수 있는데, 이곳에서 장을 본 채소로 요리하고 있노라면 그때의 여러 대화와 기억들이 하나둘씩 밀려와서 이상하게 조금 벅찬 기분. 간단한 요리로 시간을 덜 쓰며 건강하고 맛있게 먹고자 했던 집밥의 출발이 어느새 잘 먹고 살아가는, 마음을 배부르게 하는 시간으로 변해간다.

 

- 먹기 위해서만 살지 않지만, 좋은 식사도 있는 삶이 중요하다는 걸 눈치챈 건 가끔 열리는 작은 시장에서 장을 볼 때다. 

- 좋은 식사란 영양가, 칼로리를 따지는 건강함에도 있겠지만 장보고 요리하고 식사하는 모든 순간 느끼는 '여기 존재한다'는 감각이 들게 한다.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서 이혼 후 잃어버린 식욕을 찾아 이탈리아로 온 엘리자베스의 모습에서 발견한 동질감.

 

- 그 순간, 식욕 혹은 삶의 의욕을 되찾으러 온 엘리자베스의 여정이 끝나감을 눈치챘다. 어느 순간이고 요리를 하는 사람은 결코 불행할 수 없다고 믿는다. 식욕을 잃는 건 모든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겪는 문제지만, 요리를 즐기는 사람이 요리할 의욕이 사라지는 건 생의 기쁨이 더는 남아 있지 않다는 추론이다. 그래서 요리에 기운을 쓰고 자신을 위한 좋은 식사를 챙기고 나면 나는 반쯤 충전된 기분이고, 이제 편안한 잠자리로 가 하루 동안 소진된 기운을 온전히 채울 준비를 한다.

- 사람이 섬세하게 조각한다 해도 이보다 부드러운 선을 내기 어려워 보이는 둥근 돌. 그 위에 펭귄 모양의 나무 스푼이 일광욕 중이다. 부엌 한 귀퉁이에 독특한 돌 수집을 즐기는 아빠가 주신 소박한 돌이 놓여 있다. 애초에 돌에 전혀 관심 없던 나였는데, 아빠가 정원에 쌓아 놓은 작은 돌탑 중 그 돌만큼은 자꾸 눈이 갔다. 북촌 한옥에 마련된 가구 브랜드 전시 행사에 갔다가 브로슈어를 둥근 돌로 눌러 놓았던 미감을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었는데, 부모님 댁에서 비슷한 걸 발견해 기뻤다. 살면서 처음 돌을 탐낸 나에게 아빠는 흔쾌히 그 돌을 내어주셨고, 여러 여우가 있어도 내가 길들인 단 하나의 여우가 특별하듯 나는 그 돌이 마냥 좋아서 부엌에 두었다.  

- 그렇다고 거금이가 자리만 차지하고 있지는 않다. 손님이 오면 종이 냅킨 여러 장을 눌러 놓을 때 등장하고, 시래기를 물에 불릴 때 가벼운 시래기가 수면 위로 두둥실 떠오르지 않도록 거금이를 쓰기도 한다. 거금이를 본 사람들은 장아찌누름돌을 다양하게 쓴다며 웃긴 하지만, 실용적인 여러 쓰임보다 거금이의 가장 큰 매력은 집 한 귀퉁이에서 자연을 느끼게 한다는 점이다.

- 자연주의 살림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만의 정원을 가지고 있다. 촬영 목적으로 방문했던 이효재 선생님 댁의 정원은 나뭇잎을 컵받침 삼아 식탁을 꾸미거나 연잎밥을 만들 때 자신의 정원에서 난 잎을 채집해 사용하는 라이프스타일과 겹쳐 보이며 영감의 근원 같았다. 일 년 내내 꽃이 지지 않는 멋진 정원으로 기억되는 타샤 튜더처럼 이름난 살림 아티스트들은 자연에서 그 아름다움을 찾고 생활에 더한다. 자연의 멋이 빠진 살림이란 현대적이고 실용성을 갖추고 있으나 정취는 느껴지지 않는다. 나 또한 거금이가 부엌에 머문 뒤로 담백하기만 했던 살림에 여유로운 분위기가 살짝 더해졌다. 


- 부모님의 시골집에서 일주일 정도 머물면서 사람은 자연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처음 느낀 순간이 있었다. 샤워하고 헤어드라이어 대신 자연에서 불어오는 연한 바람으로 머리를 말리면서 책을 읽고 있는 내 귀로 대나무를 훑고 지나는 바람 소리와 새소리의 앙상블이 들려왔다. 눈부시게 따뜻한 볕을 피해 그늘로 찾아 들어가 고양이처럼 나른하게 웅크리고 있을 때 어딘가에서 벌이 붕붕거리는 소리도 들렸고 아침에 일어나면 사과나무 감나무가 심어진 시골길을 산책하고, 밭에서 막 캐온 연, 한 상추가 점심에 올라오는 일상은 최신 시설의 여느 고급 호텔이 주는 낯선 환경의 마음 불편한 휴식보다 묵은 감정이 가볍게 흘러가는 편안함이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마음 깊이 고여 있는 감정이 정화되던, 종종 떠올리며 힘을 얻는 몇 안 되는 일상의 아주 좋은 추억. 이래서 중년의 전성기를 지나고 있는 인생 선배들이 은퇴 후 시골을 꿈꾸나 보다. 

- 아빠는 내가 둥근 돌을 마음에 들어 하자 다음에 집에 올 때 나를 주겠노라며 여러 가지 귀여운 돌들을 모아 두셨다. 젓가락 받침으로 쓰기 좋은 가느다란 돌과 찻잎을 덜 때 쓰는 숟가락받침으로 맞춤인 돌 두 가지를 고른다. 부엌에 들인 아주 소박한 자연 살림 하나가 마음을 이토록 따뜻하게 해 주는지. 제주 어느 공방에서 만든 옻칠한 나무 주걱으로 갓 지어낸 밥을 섞을 때의 향이 좋고, 손에 감기는 매끄러운 나무 질감으로 ...

- 장소는 경치가 좋은 곳. 
강을 낀 산은 시내가 있는 산만 못하고, 동네 입구에 높은 암벽...

좌향으로 지은 초가집 서너 칸. 문미에는 담묵 산수화, 방 안에는 서가 두 개를 놓고 1,300~1,400권의 책.  

담장 안에 석류, 치자, 백목련 같은 것으로 각각 품격을 갖추어놓고, 국화는 48종의 갖가지 색깔을 갖춘다.

뜰 오른편에 조그마한 연못, 연꽃 수십 포기와 붕어. 채소밭과 채소밭 둘레에 찔레꽃 수천 그루...


- 책 <서재에 살다>에서 찾아낸 다산 정약용의 은거 방식은 세상을 피해 숨어 사는 방법이 아닌 자기만의 세상을 만드는 기준에 가깝다. 콘크리트 바닥을 딛고 살아가는 오늘이 아닌 흙을 밟고 사는 내일의 생활은 규격화된 삶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로운 세계를 만드는 궁극적인 방향 같다. 마음을 괴롭히는 필연적인 경쟁과 관계에서 도망쳐 나만의 소우주가 전부인 일상을 상상해 본다. 작은 오솔길을 산책하고, 간단한 아침을 먹고 오전에는 글을 쓰고 오후에는 책을 읽고 늦가을 저녁에는 뜨개질로 시간을 보낸다. 상상 속의 나는 고요한 적막 속에 가끔 불어오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평안한 하루를 보낸다. 문득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공간이 시골은 아닌데 어떤 소음도 없으니 적적함으로 치면 비슷한 듯하다. 근시일 내에 도시를 벗어나서 살 거란 생각은 없지만,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일은 어떤 형태로든 좋다.  

- 넷플릭스에서 본 음식 다큐 <소금, 산, 지방, 불>은 총 4편으로 맛있는 요리를 완성하는 데 영향을 끼치는 네 가지 요소를 <Salt, Fat, Acid, Heaty>이라는 책을 펴낸 셰프이자 작가 사민 노스랫이 주제에 맞춰 특정 나라를 방문해 알려준다. 음식의 풍미를 올려주는 지방 편은 매콤하고 쌉쌀하지만 약간의 단맛도 느껴지는 이탈리아 올리브오일을 가장 먼저 소개하고, 소금 편에선 해초를 말려 거기에 붙어 있는 소금을 얻는 일본 소금 수확방식과 간장을 발라 구운 오니기리(일본식 주먹밥) 레시피가 인상적이다. 산 편은 멕시코에서 소스에 활용하는 광귤 등의 신맛 외에도 신맛이 나는 꿀을 맛보는 등 여러 재료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신맛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마지막 불에 대한 주제는 끝까지 보질 못했는데 아무래도 첫 번째 장면이 스테이크 굽는 노하우였기에 내겐 다소 흥미가 떨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친숙하고 깊은 이해가 가능했던 건 역시 소금 편. 소금 없이 음식 맛을 내는 건 상상할 수 없다.

- '소금 한 단지를 함께 먹어야 진정한 친구가 된다'
음식의 부패를 막아주는 등 변하지 않는 소금의 속성이 독일의 속담처럼 여러 문화권에서 약속, 믿음, 동맹의 의미를 담는다고 한다. 내게도 소금은 가장 믿음직한 요리 친구다. 천일염 하나만 있으면 해산물을 깨끗하게 씻을 때도 쓰고, 채소를 절일 수 있다. 소금 입자가 굵고 많이 짜니 파스타면을 삶을 때간을 하기에도 적절 음식에 간을 할 때는 천일염을 잘게 빻아 쓴다. 천일염은 정제되지 않은 소금이기에 미네랄 등 영양도 풍부하다. 무엇이든 종류를 늘리지 않고 가진 걸 여러 용도로 쓰는 편이라 소금도 하나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런데 화려한 맛의 트뤼프 소금을 선물 받고, 상큼한 유자 소금을 맛보며 눈뜬 즐거움은 그 나름의 매력이 넘쳤다. 

- 송로버섯이 개미 눈물만큼 살짝 들어가 향과 맛이 고급스러운 이탈리아산 트뤼프 소금은 달걀 요리나 볶음 요리를 할 때 쓴다. 카나페를 만들 때 연어나 치즈 위에 살짝 뿌려서 간을 맞추기도 한다. 기분 탓일지는 모르나 조금 비싼 소금을 뿌렸다고 확실히 감칠맛이 느껴진다.

 

- 유자의 상큼한 향과 맛이 섞인 유자 소금은 양상추의 친구다. 무겁고 느끼한 샐러드드레싱 대신 올리브오일과 함께 요긴하게 쓴다. 유자 소금을 양상추에 살짝 뿌리면 샌드위치나 샐러드를 만들 때 별도의 드레싱은 필요치 않다. 소금을 잘 이용하면 어떤 요리든지 가볍게 먹을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가진 소금의 향에 따라 임의로 육류와 채소로 구분해 두고 쓰는 것뿐 원래 가미된 소금은 스테이크처럼 구운 육류 요리의 맛을 끌어올리는 시즈닝의 일종이다. 그래서인지 늦여름 무렵 하지감자를 삶아 소금에 찍어 먹을 때의 만족감은 내게 1++(투플러스) 한우를 즉석에서 구워 소금에 살짝 찍어 먹는 순간과 비길 바 없을 정도. 아주 단순하고 대체 불가결한 존재감으로 소금은 음식에 맛의 기운을 불어넣는다. 후추, 페퍼론치노, 파슬리 플레이크처럼 이국적인 향신료가 없다 해서 요리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소금이 없다면 어떤 요리도 할 수 없다.

- 내가 소금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면, 늘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건 설탕이다. 설탕을 주방에서 없앤 지 꽤 오래되었다. 요리할 때 당을 보수적으로 쓰는 편이라 설탕은 필요치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단맛이 빠지면 음식의 맛이 떨어진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설탕 대신 꿀을 쓰는 거였다. 올리고당이나 물엿 등 갖가지 설탕 대용품이 있지만 내겐 꿀 한 통이면 충분하고도 넘친다. 꿀통에 표기된 탄소동위원소비 -23.5% 이하만 기억 ...

 

- 모두 과거의 내가 미리 해두었기에 누릴 수 있는 지금의 안락함. 굳이 이렇게까지... 필요한 순간에 하면 더 편하고 합리적이지 않나? 하고 생각할 때도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막상 닥치면 하기 싫었다. 물을 끓이지 않고 생수를 사 오고, 당장 쌀을 씻어 밥을 하는 대신 배달음식을 시킨다. 일상의 저항감이 커지면 커질수록 내 노동력을 들이지 않는 가장 쉬운 선택을 한다. 그런데 가까운 미래를 위해 지금을 살자 생각하니 오히려 계획적으로 된다. 쌀을 씻어 두었으니 집에 가서 밥 먹는 게 당연해 외식은 하지 않는 것처럼. 

- 예전에는 몰랐던 충만한 기분.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아늑하고 미리 준비되어 있을 때 느끼는 안정감이 좋다. 포근한 온도의 침구, 샤워 후 쓰는 깨끗한 수건. 


- 요리하는 일상은 매일 소소한 완성을 경험하게 하고, 먹고사는 즐거움을 나에게 선물한다. 소득 없는 고민을 멈추고 몰입하는 순간을 부엌에서 자주 경험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절약 내가 부엌에서 가장 많이 배운 아끼는 법은 돈과 시간, 움직임, 힘까지 그 범위도 참 다양하다.

 

- 집마다 식비 수준은 다르겠으나, 집밥을 먹자 나의 한 달치 식비가 절반 가깝게 줄었다. 물론 요리에 들이는 시간과 노동력을 같이 계산해 보면 경제적으로 완전한 이득은 아닌지라 영화 <앙드레와의 저녁 식사>의 주인공처럼 "내 생각은 예술과 음악으로 가득 찼었는데. 내 나이 36세, 이젠 오직 돈 생각뿐이다"는 마음이라면 그 시간을 들여 돈 버는 일을 더하는 편이 가계에 보탬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종일 돈 버는 일만 한다는 건, 마음이 지친다.

- 돈을 떠나 나를 위한 창조적인 즐거움을 느끼고 싶다면 요리는 참 실용적이다. 절약하면 돈을 버는 효과가 있다고 하니 식비 절약 면에서 요리는 돈을 벌어다 준다. 처음엔 먹는 것만큼은 아끼지 않고 풍족하게 쓰겠다는 마음으로 장을 보곤 했다. 하나를 사면 하나를 더 준다는 식료품을 혹해서 사거나(혼자 먹으니 대부분 그 맛에 질려서 못 먹곤 했다), 냉동 식재료는 유효기간이 더 오래갈 거로 생각해 내버려 두고 입맛이 당기는 식료품을 새로 산 적이 있는데(냉동실에 버림받은 식료품이 한 달 뒤에도 먹고 싶은 적은 드물었다), 이 모든 게 오히려 손해임을 깨달았다. 시행착오 끝에 일주일 단위로 소비할 만큼 메뉴를 짜서 적당한 양만 사고, 식재료가 떨어져 갈 무렵 새로 사는 연습은 문자 그대로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절약의 길이었다. 

- 더 많이 벌어 풍족하게 누리고 살겠다는 욕심은 현실의 벽에 부딪히면 자연스럽게 줄어든다. 자본이 아닌 노동으로 돈을 버는 일은 언제나 시간과 체력, 무엇보다 능력이란 한계가 뒤따르는 법. 내가 쾌적하다 느끼는 생활 수준. 작지만 깨끗한 집, 몇 벌 없어도 좋은 품질의 편안한 옷, 유기농 식품을 사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생활비를 찾자 그 이상의 돈은 시간과 사치, 새로운 경험을 사기 위해 버는 게 아닌가 싶었다. 생계를 해결하고, 미래를 어느 정도 대비할 수 있다면 더 많이 갖고자 하는 갈망을 잠재우고 돈과 유사한 가치인 시간적 여유를 모조리 예술과 책이 함께하는 안온한 일상으로 채우고 싶다. 그렇게 생활에 있어 큰 그림을 그리다 보면 가사일 중 시간을 가장 많이 쓰는 부엌에 들이는 시간과 에너지 낭비를 줄일 궁리를 한다. 

- 작은 집을 넓게 쓰는 방법은 잡동사니를 줄이는 것. 발에 걸리적거리는 물건이 없으면 답답하지 않다. 작은 부엌도 마찬가지로 물건을 밖으로 최대한 내놓지 않으면 좁거나 복잡하다는 인상이 사라지는데, 대신 동선이 복잡해질 수 있다. 

 

- 소독용 에탄올을 쓰는 건데, 키친타올에 묻혀 기름이 튄 곳을 닦아주면 말끔하고, 음식물을 다루는 조리대에서 균을 없애는 방법 같아 개운하다. 부엌일에 서툴렀을 때는 바로 닦는 습관이 없어 한꺼번에 몰아서 청소했더니 정말 힘이 들었다. 나눠서 했다면 절반도 안 되는 힘으로 끝낼 수 있었을 텐데 설거지도 요리 중간중간 해주고, 식사 후 바로 설거지를 마치면 마음이 개운하다. 무언가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을 때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계속해야만 한다는 일종의 부채 의식은 정신적 에너지 낭비다. 어떤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생각하기보다 몸으로 해버릴 때 홀가분함을 느낀다. 설거지처럼 아주 사소한 집안일도 쌓이면 쌓일수록 한숨도 쌓인다. 사소한 문제에 성질을 부리지 않기 위해, 더 무던하게 살기 위해 작은 일부터 바로 하는 습관은 모두 부엌에서 배웠다. 게으른 내가 부지런함을 단련하는 부엌, 아아 그렇다 해도 나는 아직 샤워 후에 거울과 세면대의 물기를 바로바로 닦는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 S선배와 만나는 약속 장소도 늘 기억에 남는다. 디뮤지엄에서 전시를 보고 한국에 갓 상륙한 타르틴 베이커리에 가거나 이태원의 디앤디파트먼트, 북촌 한옥 전시부터 보안여관 등 온갖 새로운 장소는 선배와 탐험했다. 어느 한쪽이 좋아하는 장소로 맞췄다기보다 우리의 취향이 겹친다는 점에 방점을 찍고 싶다. 이렇게 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추억이 쌓이고 쌓인다. 퇴사 이후 각자 갈 길을 가고 있지만, 사는 게 바빠 가끔 연락해도 어제본 사람처럼 신나게 이야기할 수 있다면 심리적인 거리는 충분히 가깝다.

- 그 선배의 다이어트 저녁 식사는 바로 요거트볼이다. 우묵한 그릇에 요거트를 담고, 온갖 과일을 넣어 섞어 먹는다는 말에 영감을 얻어 내가 그토록 고민했던 아침 식사 고정 메뉴가 생겼다. 당시만 해도 들쑥날쑥 아침을 먹었던 나는 잼 바른 식빵보다 영양가 높고, 수프나 죽처럼 소화에 부담 없는 간편한 아침 식사를 찾고 있었다. 선배의 식사 메뉴 덕분에 딸기 맛 요거트의 퓌레 아닌 진짜 과일, 그래놀라, 견과류 등을 잔뜩 넣어먹는 요거트가 건강한 아침 식사로 자리 잡는다. 마셔도 좋을 만큼 묽은 식감의 요거트부터 크림치즈 같은 그릭요거트까지 고루 먹어본 후, 목 넘김이 부드러운 질감의 그릭요거트를 일상식으로 남겼다.  

- 아침마다 비슷한 걸 먹으면 지겨울 법도 싶지만, 토핑이 달라지면 그 맛도 새롭다. 요거트는 '하얀 도화지 위에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려보렴' 하고 내게 창작의 기회를 주는 식사다. 둥근 볼 안에 요거트를 듬뿍 담고 먼저 블루베리는 잊지 않는다. 블루베리는 눈 건강에 도움이 되는 영양소가 들었다는 말과 타임지 선정 슈퍼푸드라는 말에 홀려 챙겨 먹는 과일이니까. 그러고 보니 요거트는 만나는 과일에 따라 그 매력이 달라지는 게 재미있다. 아보카도는 고소한 맛을 더하고 무화과는 달콤하면서 고운 자줏빛이 눈요기에 좋은데, 요거트와 어우러지면 어떤 과일이라도 마치 반사판이라도 댄 듯 화사하다. 사진이 무조건 예쁘게 나오니 저절로 '인증샷'을 찍게 되고말고.

- 요거트와 환상적인 궁합을 자랑하는 건 과일 외에도 그래놀라나 플레이크처럼 굽거나 말린 고소한 곡물류 하지만 무엇보다 견과류가 빠져선 곤란하다.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고소한 아몬드나 호두를 주로 먹지만, 비행기도 돌렸다는 악명으로 유명해진 마카다미아, 파이와 잘 어울리는 고급스러운 피칸까지 가리지 않고 요거트에 넣는다. 도무지 요거트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 상상하며 보내는 편이 좋았고, 이야기를 만들어 인형으로 역할극을 하며 놀거나 책을 읽으면 즐거웠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신이 주신 가장 멋진 선물인 상상력에 기대어 현실로부터 도피한다. 내가 머물고 싶은 이상향을 꿈꾸거나, 지금 내게 스트레스나 상처 주는 사람이 없는 앞으로의 삶을 그리며 상상 치료를 만끽한다. 한 가지 주제가 유독 꾸준히 상상력 도마 위로 오르면 내가 지금 사로잡힌 문제가 바로 그것임을 눈치챈다. 현실의 내가 상상 속의 나를 꺼내주어야 할 때, 미몽에서 깨어나 아침을 시작하는 방법은 언제나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는 물 한 잔이다.

- 매일 아침 가장 먼저 하는 부엌일은 건조대에 말려 둔 지난 저녁 설거지한 그릇 정리, 그다음 오늘 마실 일용할 물을 끓인다. 식수는 생수를 사지 않고 끓여 마신 지 5년이 훌쩍 넘는다. 처음에는 보리차로 시작했다가 고소한 향이 좋아 바꿔본 우엉차, 언니가 끓여 먹으렴 하고 한 주먹 싸준 결명자차. 브리타 정수기에 수돗물을 받아 물을 한 번 정수하고, 이미 구릿빛으로 변해버린 돈데크만(만화 <시간탐험대>에 나왔던 주전자 모양의 타임머신) 같은 주전자에 담는다. 그날그날 내키는 대로 말린 우엉이나 결명자를 조금 넣고 물을 끓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전자가 뿜어낸 수증기에 집 안이 온기로 가득 찬다. 겨울엔 공기가 훈훈하게 데워져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여름엔 덥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닌 익숙한 아침의 시작이다.

- <작가의 수지>의 모리 히로시 작가처럼 한때 1개월에 한 권이라는 집필 속도로 창작의 샘이 마르지 않는 듯 소설을 쓰고 충분히 팔리는 글을 쓰는 게 아니라면 어렵다. 그래서 짧은 기간 집중해 원고를 마치면 다시 회사로 돌아가다 보니 프란츠 카프카 같은 위대한 문호가 낮에는 직장생활을 하고 밤에 원고를 썼다는 점에 내 사정을 빗대기보다 거의 퇴사 후 책을 집필하게 되는 징크스 혹은 패턴 덕분에 가난에 시달리는 폴 오스터의 <빵 굽는 타자기> 쪽이다.

- 최소 생활비로 연명하며, 사치 따위는 꿈도 꿀 수 없는 시기지만 먹는 건 제대로 챙겨야 버틸 수 있다. 집에서 일할 때면 아침 8시에 작업실 방으로 출근해 점심은 12시부터 1시까지 저녁 6시까지만 일을 하는 회사 인간의 버릇 그대로 일한다. 어떤 날에는 원고가 잘 풀려 이 리듬을 놓치고 싶지 않아 자발적 야근을 하는데, 내가 원해서 몰입했던지라 몸은 피로해도 뿌듯함만 남는다. 원고가 잘 풀리는 날 작가 인간은 생각한다. '식사를 만드는 시간조차 흐름이 끊기니 아끼고 싶다'. 하지만 나는 배가 고프고 건강하게 먹어야 체력을 유지해 계속 쓸 수 있다. 역시 귀찮더라도 식사는 만들어 먹어야지. 간단하고 건강한 새참을 떠올리면 늘 등장하는 오픈 샌드위치. 순식간에 만들지만, 영양은 충분하고, 먹고 나서 설거지할 그릇도 하나뿐, 손으로 들고 먹으니 포크조차 씻을 일이 없다. 

- 곡물 또는 올리브 식빵 두 개를 꺼낸다. 식빵 위에 슬라이스치즈를 얹고, 집에 있는 토마토나 아보카도를 잘라 올리고 베이비 루꼴라를 위에 살짝 얹은 다음 올리브오일과 소금을 뿌려 마무리. 별다른 조리 없이 금세 먹음직스러운 샌드위치가 완성된다. 가끔 형편껏 훈제 연어를 치즈 위에 추가로 얹는 호기로움을 부린다. 오픈 샌드위치를 위해 필요한 재료는 역시 치즈다. 빵 위에 치즈를 깔아주면 채소의 수분이 빵에 스며들 일이 없으니 치즈가 방패 역할을 하고 무엇보다 양질의 단백질 보충원이다. 게다가 오픈 샌드위치에 홍차 한 잔을 곁들이면 이게 바로 노동자를 위한 하이티 high tea(영국 노동자들이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홍차와 함께했던 식사에서 유래된 말).  

- 혹자는 늘 일하는 나에게 어떤 순간에도 배 굶고 살 일은 없는 좋은 팔자라고 덕담해 줬지만, 어느 하나 고되지 않은 일은 없기에 그 시간은 꽤 혹독하다. 내보일 수 있는 글을 쓰려면 엉덩이 힘으로 버티며 자꾸 문장에 사포질해 매끄럽게 고쳐 나가야 하는데 엉덩이 힘이야 후천적으로 훈련한 성실함으로 키울 수 있다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단 한 줄도 완성할 수 없는 날이 가장 고통스럽다. 창작의 고통이라는 뻔한 말이 이해될 때의 심정은 아홉 명의 뮤즈들이 귀에 속삭이는 시를 받아쓰는 고대 그리스 작가가 나였음 하고 바란다. 

 

- 유달리 한 줄도 완성하기 어려운 날 무엇을 써야 할지 막막한 날은 내가 글 앞에서 숨어 있는 날이다. 나를 포장하려 들고, 감추려 들 때 나는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이럴 땐 개방적인 성격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오픈 샌드위치를 닮았으면 좋으련만. 빵을 뚜껑처럼 덮어 상상의 여지만 잔뜩 남긴 그런 샌드위치가 아닌, '나는 이런 샌드위치! 하는 모양새로 빵 위에 무엇을 얹어 놓아도 한눈에 '아 연어 아보카도 샌드위치군', '토마토 치즈 샌드위치로군' 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드러내는 도무지 경계심이라곤 모르는 성격. 그래서 누구에게나 훅 다가가는 그런 음식이 가진 성향 말이다.

- 사람은 사회적으로 요구된 여러 가면(페르소나)을 쓰고 연극무대에 선 배우라지만, 페르소나 persona 뒤의 에고 ego를 내보이는 작업이 나의 글쓰기가 될 때 비로소 문장이 완성된다. 물론 가면 뒤의 민낯인 에고마저 늘 변한다. 한결같이 흐르는 강물도 실상 어제와 같은 물이 아닐 테니 사람이 변하는 건 당연한 이치다. 성찰을 거듭하고, 변화하여 앞으로 나아가지만 영원한 완성은 없다.

 

- 그런 과정에 있는 찰나의 나를 만난 사람들에게서 듣는 두 가지 평가. 실제 생활에서 만난 사람과 글로 만난 사람 사이에서 듣는 평의 간극은 내가 계속 글을 쓰는 이유를 이해하게 한다. 숨 쉬는 인간 온전체로 나를 만난 사람은 내가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지 않고 일정 부분 선을 그어 놓고 넘어오지 못하도록 경계한다고 평한다. 그래서 나와 더 가까워지고 싶었던 몇몇 사람은 거부당했다며 화를 내기도 한다. 하지만 글, 내 생각으로 만난 사람은 해파리도 이렇게 투명한 해파리가 없다며 나와 초면임에도 불구, 자신의 속내마저 수줍게 내보인다. 상반된 두 모습 모두 오롯이 나다. 사람은 여러 특성을 가지고 존재하지만, 매체 혹은 매개체에 따라 발현되는 모습이 다르다. 이 부분이 심리학자들이 연극무대에 선 배우라 표현하는 지점 아닐지.

 

- 나의 일부분에 불과한 이야기지만 글에서만큼은 내가 바라보는 세상, 지금 느끼는 감정, 앞날의 두려움과 불안까지 모두 드러낸다. 회사 일에 매몰되어 있을 때는 나 자신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다. 그런데 매여 있는 일에서 잠시 벗어나면 홀로 수양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비로소 나를 마주 볼 수 있다. 그런 성찰의 시간이기에 확실히 보장되는 생계를 잠시 내팽겨쳐두고 몰입해 글을 쓰는 시간을 선택했다. 잠시 작가 인간으로 살기로 하는 셈과는 관계없는 선택, 신이 내린 운명이나 징크스가 아닌, 나의 의지였음을 이 문장을 마무리하며 문득 알아챈다. 

- 아무 이유 없이 번거로운 일을 하고 싶은 날이 있다. 평소 움직이는 걸음마다 효율을 계산하는 나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들. 그냥 한번 해볼까 도전하는 날이다. 나는 그런 날을 내가 건강하고 컨디션도 좋고, 무엇보다 에너지가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인다.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마음을 다잡고 하는 게 아닌 몸이 저절로 움직일 때, 나는 그런 잉여로울 법한 움직임에 시간을 쓸 수 있는 몸 상태가 좋다. 그런 시간이 더 많길 원한다. 억지로 하지 않은 탓에 그 순간은 스트레스가 없다. 어쩌면 긍정적인 창조의 순간은 해내고자 하는 정신력보다 건강한 몸에서 자연스레 나오는 게 아닐까. 

- 몸에 기력이 달리면 더덕이 먹고 싶다. 더덕도 삼처럼 쌉싸름하며 면역력을 높여준다는 사포닌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 고기처럼 육질이 느껴지는 식감과 향이 고급스러운데, 뻣뻣하여 식재료로 쓰려면 껍질을 벗긴 다음에 두드리고 결대로 먹기 좋게 찢어야 한다. 더덕구이는 외식으로만 먹어봤기에 더덕 한 번 손질해 본 적 없던 무지한 나는 병에서 회복하던 시기에 부모님께 더덕이 먹고 싶다는 망발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연로하신 아빠가 더덕을 두드리는 모습을 보고 '대체 내가 무슨 음식을 먹고 싶다고 한 거냐' 하며 자책은 잠깐, 허리가 꼿꼿하고 몇 시간 산을 타도 끄떡없는 노년의 아빠가 나보다 훨씬 더 기력이 넘친다는 사실 앞에서 어쩐지 숙연해졌다. 체력과 나이는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  


- 나는 날 때부터 웬만한 유행병은 다 걸렸으니 원래 허약하다는 가설을 세워두고 나를 옹호했다. 나에게 태생이란 면죄부를 주는 비겁함 뒤에 탄수화물과 설탕 범벅인 음식을 주로 먹고, 운동을 싫어하는 생활습관이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마음을 고쳐먹고 운동을 할수록 몸은 점점 강해졌다. 스태미나 음식에 눈을 반짝이지 않아도 영양가 있는 식사로 잘 챙겨 먹고 운동하면 된다는 단순한 사실을 실천하니 생활 체력이 올라간다. 물론 철인 3종 경기나 마라톤에 욕심낼 만큼은 아니고 그저 등산 초창기에 15분 만에 에너지가 고갈되고, 다리에 힘이 풀렸는데 등산을 꾸준히 할수록 오래 산을 탈 수 있는 정도다.  

- 수입산 일본 냉동 낫토와 국내산 콩으로 만든 낫토 모두 먹어보니 콩이 달라서 씹는 맛도 향도 조금 다르지만, 어쩐지 국내산 콩이 내 몸에 더 친근하다. 그래서 생청국장이라 이름 붙은 낫토를 사게 된다. 낫토와 청국장은 만드는 방식이 유사한데, 청국장은 향후에 양념을 한다는 차이.

- 낫토를 꾸준히 챙겨 먹는 이유는 혈액순환보다는 장 건강을 위해서다. 장이 우리의 기분을 맡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 장 관리가 곧 기분 관리가 되었다. 장은 뇌 다음으로 신경체계가 발달해 있으며, 행복 호르몬으로 알려진 세로토닌을 비롯해 여러 호르몬을 생산한다. 그래서 장내 균들의 균형이 깨지면 단순히 변비만 생기는 게 아니라 우울증과 같은 마음의 병을 얻을 수 있다는데, 긴장을 하면 유독 배가 꼬이고, 설렘이나 긴장을 뜻하는 영어식 표현인 '뱃속에 나비가 있다! have butterflies in my stomach.'처럼 기분을 배로 느끼곤 했나 보다. 늘 기분 좋고 가벼운 마음으로 살길 바라며 낫토로 장의 행복을 빌어본다. 

- 오로지 과거의 나보다 오늘 더 나아진 나를 목표로 열심히 살며 작은 목표 하나하나를 이룬 뒤 긴장을 풀고 휴식하는 시간이 반복될 때 나를 긍정한다. 나의 보금자리를 만들고 지키는 의미에서 돈을 아끼는 일도 그중 하나다. 분수에 맞는 작은 집을 산 덕분인지 독하게 아껴 돈을 갚아서인지 절약 기간은 목표했던 날보다 더 빠르게 끝났다. 참, 다행이다. 온전히 내 힘으로 해낸 일이 하나 더 늘었다.

- 절약하는 동안 돈을 균형 있게 쓰는 법을 배웠고, 지금 내 능력을 벗어나는 물욕을 지웠다. 꼭 돈을 쓰며 기분 전환을 하지 않아도 충만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어떤 순간에도 배우지 않은 때는 없다. 한가로운 주말 오전, 요가 수업을 마치고 내 집으로 향하는 마음이 가벼운 까닭은 없어도 괜찮다는 정신승리가 아닌 이 정도면 만족한다는 작지만 흡족한 생활기반이 실제로 있기 때문. 혼자 살아가기에 적당한 의식주 기반을 다져놓았으니 다음 목표는 급하지 않다. 더는 쫓기는 마음이 없어 지금은 고등어를 구워도 연어를 구워도 어느 한쪽이 더 낫다 저울질하지 않는다. 순위를 매기지 않고 어떤 메뉴를 선택해도 만족하는 마음이 진짜 호사였다

- 그 모습에 반해서 수없이 많은 달걀을 한 손으로 깨다가 달걀 껍데기를 골라내느라 애를 먹곤 했다. 두 손으로 달걀을 깨지 않고 굳이 한 손으로 깨는 특별한 이유를 알지도 못한 채 무조건 '그럴싸하다면 오케이'라고 했던 마음이었다.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하는 요즘의 나는 그때의 나를 이렇게 자평한다. 독서력을 기르려면 사상 분야의 책처럼 어려운 책한 권을 완독 하는 경험을 거듭해야 하는데, 그러면 쉬운 책은 군것질하듯 금세 한 권씩 뚝딱 읽을 수 있다(참고로 나는 이야기 중독자일 뿐, 한 권을 아껴가며 깊게 읽는 애서가는 아니므로 그저 책에 취해 사는 사람들에게 권하는 독서법이다). 요리 또한 독서와 비슷해 어려운 요리로 훈련하면 단순한 요리는 별다른 레시피를 참고할 필요 없이 경험과 감각에 의존해 빠르게 마칠 수 있어 도움이 되었다고. 

- 생계로서의 일, 쾌적한 생활을 위한 살림에 쓰는 시간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시간을 들이는 행위가 내가 가장 애정을 가진 일이자 생이 즐거운 이유다. 어떻게 하면 요리 시간을 줄이고 재미있는 책 한 줄 더 읽을 수 있을지 궁리하는 내게 요리는 애정의 영역이 아닌 살림이다. 지금은 30분이 넘도록 냄비나 프라이팬 앞에 매달려야 하는 요리는 가급적 하질 않는다. 토마토소스가 필요하면 시판용을 사 먹는다. 유기농 토마토 병 조림파스타 소스를 사서 해 먹는 스파게티도 물론 나만의 요리다. 

- 퇴근 후 전기밥솥의 취사 버튼을 눌러 밥이 되는 동안 샤워를 하고 소지품을 정리하고 오늘 먹을 채소를 씻는다. 그런 생활의 반복 속에서 오늘 치 체력을 모두 소진한 듯 이렇다 할 요리를 하고 싶지 않은 날, 간단하게 먹고 싶은 날이면 조리도구를 단 하나도 쓰지 않는 아주 간편한 덮밥을 만든다. 미리 사둔 간장 연어나 꼬막 비빔 같은 짭조름한 염장식품 약간을 갓 지은 밥에 올린 다음 생채소를 많이 넣고 별다른 소스 없이 먹는 저녁 식사는 간편하다. 연어회와 물에 담가 아린 맛을 뺀 채 썬 양파, 아보카도, 무순을 얹으면 근사한 연어 덮밥이 된다.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쉽게 만들 수 있는 건강하고 간편한 요리다. 아마 밀프렙을 만드는 시간보다 더 짧게 걸리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의 밀프렙은 덮밥 재료를 사두는 거로 정한다. 

- 시간이 없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나는 외식이나 편의점 간 편식에 의존했던 식생활을 고수했다. 메뉴를 고르고, 주문하고, 배달과 포장을 기다리는 시간에 집에서 쉽게 만들 수 있는 음식을 궁리하는 편이 나에게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을 텐데, 건강을 기대하기 어려운 정크푸드로 끼니를 이어갔던 습관은 당장 내 머리와 손을 최소한만 써도 되니 그저 익숙해서 편했다. 물론 간장 연어를 직접 만들지 않고 산다. 메추리알을 껍질째 삶아서 종일 까고 있지는 않다. 일정 부분 남의 손에 의존하고 있는 건 맞지만, 전부 의존하는 방식과 일부분만 도움을 받고 내가 완성하는 요리는 다르다. 채소를 더 많이, 간은 덜 짜게처럼 요리에 나의 기호, 나의 의견을 반영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 책 <리추얼>에서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의 성격이 마흔에 이르러야 완성된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 성격이란 마흔이 되어 형성된 기본적인 삶의 규칙들과 좌우명을 평생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었는데, 마흔이 얼마 남지 않은 나 또한 과거에 나를 불행하게 했던 습관으로부터 하나씩 멀어지고, 내 몸과 마음에 평온함을 가져다주는 평생 가져갈 습관을 내 것으로 만들 때 내적 성장을 느낀다.

 

-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은 중요하다. 살아 있기에 자라나는 건 식물도, 사람도 마찬가지. 성장은 건강하다는 증거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살면서 불만족스러운 부분을 바꾸고 싶어 조금의 수고를 들일 때마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리고 성공이든 실패든 얻는 게 생긴다. 미리 준비해서 먹는 식생활은 메뉴 선택 스트레스를 사라지게 했고, 식비를 절약해 줬다. 아주 사소한 변화인데, 생활이 여러모로 윤택해진다. 이 모든 변화는 다가오는 미래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행동했던 과거의 내가 오늘 내게 준 선물이다.  

- 남쪽 지역은 쌀이 많이 나는 따뜻한 고장이라 명절 때면 떡을 했을 뿐, 밀이나 메밀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만두를 빚지 않았다는 견해가 있다. 아빠는 젊은 시절 강원도에서 군 복무를 하며 토끼고기나 꿩고기가 들어간 만두를 처음 접해보셨다고 했다. 어릴 적 만두는 외부에서 들어온 식문화이자 사 먹는 별미로 가정식이 아닌 외식이었다. 그래서 내가 만두를 일상으로 먹게 된 건 어른이 되어서다.

- 만두는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 새우만두처럼 해물을 넣기도 하고 이북식 만두에는 나물이 들어간 삼삼한 맛이 좋다. 오이를 넣어 여름에 먹는 규아상처럼 계절을 담기도 하고 매콤한 김치만두는 우리나라 고유의 만두다. 찐만두, 군만두, 튀긴 만두, 만둣국 등 여러 조리법도 만두를 맛있게 먹게 한다. 하지만 내가 만두를 비상식량으로 정하고 냉동실에 상비해 두는 이유는 그 단순성에 있다. 탄수화물, 단백질, 비타민을 동시에 먹을 수 있는 간편함 속을 잘게 다져서 부드럽게 씹히는 편안함. 만두 다섯 개만 먹어도 충분히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다는 경제성. 이런 장점들은 비상식량으로 쉽게 사두는 라면을 없애고, 만두에 그 자리를 넘겨주게 되었다.  

- 밥 대신 별미가 먹고 싶은 날, 추운 겨울이면 만둣국을 끓인다. 우려낸 멸치다시 국물에 만두를 다섯 개 넣고 표고버섯과 양파, 당근 등 채소를 양껏 넣어준다. 간장 또는 소금으로 살짝 간하면 완성되는 간편한 만둣국. 추위에 웅크렸던 온몸을 나른하게 만들어준다. 뚝딱 만들어 냈지만 이만큼 든든하게 속을 채우는 요리도 없다. 냉동실에 만두가 늘 자리 잡고 있다면 갑자기 쌀이 떨어졌을 때(그런 일은 무척 드물겠지만), 밥보다 간편한 별미가 먹고 싶을 때, 어쩌다 기름진 튀김이 먹고 싶지만 이렇다 할 재료가 없어도 만두 하나만 있다면 모두 해결되니 이보다 더 쓰임 많은 비상식량은 없을 거 같다. 

- 지금은 생일에 집에서 쉬며 별다른 이벤트 없이 유언장을 고쳐 쓰며 소란스럽지 않게 지난 한 해를 회상한다. 유언장이라 하면 꽤 엄숙하고 슬프게 느껴질지도 모르나 계속되고 있는 생의 중간 점검으로 보는 편이 정확하다. 어떤 감정도 섞지 않고 문장을 완벽하게 쓸 생각도 하지 않고 손글씨로 간결하게 재산 목록과 장례 방법에 대한 메모 정도로 유한한 인생을 마주 보며 내가 만약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경우 남은 사람들에게 나와 관련한 정리를 돕기 위한 참고다. 그리고 여러 주변 정리를 한다. 한 해가 지나도 쓰지 않은 '어쩌면 필요할지도 몰라' 하는 물건을 버리고, 생일을 맞아 쏟아지는 각종 광고 메시지에서 벗어나고자 무료수신거부를 부지런히 한다. 덕분에 필요한 정보만 얻고, 영업 전화가 걸려오지 않아 일상 곳곳의 티끌 같은 짜증을 없앨 수 있었다.

- 새해 대청소를 하는 마음으로 심신을 다듬고 맞이하는 나만의 새로운 일 년은 점차 더워지기 시작하는 초여름 막바지에 시작된다. 지금은 작고한 샤넬의 상징적인 존재인 디자이너 칼라거펠트는 '삶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새로운 시작 What I lovebest in life is new starts.'이란 말을 남겼다. 나이 한 살 더 먹은 나 또한 새로움, 그리고 시작이 좋다.  

- 과거를 불태워버리고 싶은 날에는 떡볶이다. 떡볶이는 건강식과 거리가 멀어 부끄러운 기억을 소각하고 싶은 날이 아니면 적극적으로 먹지 않는다. 그런데 스스로 낸 생채기가 쉽게 엷어지지 않는 날이면 매콤한 떡볶이를 먹으며 스트레스를 푼다. 매운맛이 어째서 기분을 풀어주는지에 대한 과학적 메커니즘에 따르면 매운맛은 통증이고 이를 완화하기 위해 엔도르핀이 나와서 그렇다고 하는데, 일종의 독은 독으로 치료한다는 이독공독인가? 매운맛이라 해봤자 혀가 얼얼하지도 쿨피스처럼 단맛 가득한 음료수가 필요하지도 않으며 물을 자꾸 마시고 싶을 정도의 짠맛은 아닌데 꽤 기분이 풀린다. 아마 어릴 때부터 학교라는 사회 활동무대에서 얻은 사소한 부끄러움을 떡볶이로 잊었던 순간들이 쌓인 결과일지도 모른다. 

- 삼십 년을 훌쩍 넘게 살면 무척 지혜로운 어른이 될 줄 알았는데 겉으로는 감정을 잘 다루는 척 괜찮은 척 연기하지만 속은 여전히 여러 감정에 쉽게 휘둘린다. 상처를 받는 건 나이와 상관없다. 감정을 어떻게 다루고 또 해소해야 할지 그 방법을 세월 속에 익혀 조금은 더 세련된 태도('이불킥'도 그 범주에 넣을 수 있는 거라면)를 가질 뿐, 어쩌면 아는 게 점점 많아지고 숨겨진 분위기를 민감하게 감지하는 촉이 발달하여 필요보다 더 많은 상처를 받는지도 모른다. 유럽을 뜻하는 한자식 표현구라파를 구파발(서울의 지하철 역이름)로 잘못 말한 게 얼굴이 새빨개질 만한 일은 아닐 텐데, 다만 대화 상대가 내가 유능한 사람으로 보이길 바랐던 어려운 상사였기에 그런 사소한 헷갈림마저 수치로 다가온다. 그런 나만 아는 부끄러움은 실상 상처도 아니고 고민거리도 아니지만 은은하게 남아 나를 괴롭힌다. 상대의 평가에 민감한 사람이 갖는 지나친 자기 검열 때문에 자신이 가장 괴롭다. 

- 어릴 때 모습처럼 조금은 더 천진하고 무던하게 살면 좋겠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만드는 떡볶이는 추억 가득한 과거의 음식이 아닌 현재진행형이며 아마 이변이 없는 한 미래에도 계속 먹을 만큼 좋아하는 음식으로 남을 거다. 물론 지금 만드는 떡볶이는 과거와 다른 새로운 맛이다. 예전에는 떡볶이 양념을 케첩과 고추장, 설탕으로 하고 어묵과 떡, 양배추와 파를 넣은 분식집 표였다면, 새로운 맛의 떡볶이는 일단 매운맛이 덜하다. 밀보다 쌀로 만든 떡을 사고, 어묵이 가공육의 일종이란 말에 어묵 줄이기에 나선 나는 새우나 건새우, 때로 여러 해산물을 넣어 기름 떡볶이를 만든다. 떡볶이 양념은 고추장과 스리라차 소스에 꿀을 넣은 이제까지 먹어보지 못한 색다른 맛. 그렇게 과거의 맛 위로 새로운 맛의 지층이 겹겹이 쌓인다.

-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지금이 행복해."
나는 현재에 만족한다고 말하고, 언니는 과거를 잘 살아왔기에 지금에 만족할 수 있는 거라 한다. 그러나 실상 꼭 그렇지만은 않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마냥 행복한 순간보다 힘든 시기가 더 자주 떠오른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걸 몽땅 기억한 채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 해도 실수하지 않고 완벽해질 거라 믿지 않는다. 과거를 다시 한번 살 수 있다 해도 가지 못한 길을 걷다 보면 또 다른 고충이 생겨날 테니 지금에 만족하는 게 가장 행복한 일. 

 

- 여태껏 좋은 추억은 남기고 초라한 기억은 최대한 없애며 나를 지켜왔다. 과거에 좋은 선택이라 믿었지만 예상과 달리 씁쓸한 결과를 내고 실망했을 때 다행히 내 마음을 잘 추슬러 극복했고, 그런 경험들이 나를 단단하게 한다. 과거에 후회한 일이 있다면 지금부터 하면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 게 때론 전부다. 그러려고 나는 사소한 실수도 허투루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고 있나 보다. 작은 실수 또한 자꾸 반복되다 보면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없다는 위기의식 때문에 그토록 벗어나려 애를 써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거겠지. 누군가는 행복한 기억으로 가득한 과거에 붙들려 지금을 살지 못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 반대다. 내가 흐지부지 넘어가지 못하는 과거의 실수에 발목 잡히지 않기 위해 어쨌든 계속 걸으며 지금을 산다. 그렇게 여든이 넘는 나이에도 새로운 미술 기법을 도입하여 창작활동을 하는 영국의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의 말에 감화될 수밖에 없다. "나는 향수에 잠기는 타입이 아니다. 그저 현재를 살 뿐이다."

- [미미가 숨을 고르기 위해 말을 멈췄다.

"너는? 왜 결혼을 안 하려는 거지?"

나는 아빠와 엄마를 생각했다.

"괴롭힘 당하는 게 싫기 때문이야. 그리고 내 돈, 내 집, 내 일을 갖고 싶어. 난 죽을 때까지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살고 싶어."]

- 검은 가죽 장정에 금색으로 적힌 책 제목이 인상적인 조지 엘리엇의 소설 <다니엘 데론다>가 교양을 한껏 높여줄 거라 하길래 나도 슬쩍 책 제목을 메모해 둔다.
"삶이 네게 좋은 걸 주려고 하면 냉큼 받아. 알아듣겠니? 좋은 학교에 가서 배울 수 있는 건 모두 배우도록 하고, 교육받은 여성, 배운 여성이 되는 거지. 넌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 
조앤을 격려하고 조언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 덕분에, 그리고 하녀로 일하면서 감수성을 곱게 가꿔나가는 그녀 자신의 기질로 인해 그녀는 반짝였다. 죽을 때까지 무식한 소녀로 남아있으라는 법은 없다며, 볼티모어에 살며 미술관과 도서관을 찾고 연주회와 극장에 갈 거라 다짐했다는 조앤이 바라는 대로 예술과 문화가 존재하는 삶을 살기를, 그렇게 소리 없는 대화를 마쳤다. 

- 이날 열린 나의 '파스타 독서회'에는 로라 에이미 슐리츠의 소설 <어린 가정부 조앤>이 함께했다. 내가 독서회 주제로 잡은 '우아한 삶의 기준은 어떻게 만드는가'에 선정된 책이었다. 태생과 상관없이 우아한 삶을 살아가기로 한 독립적인 소설 속 캐릭터를 탐구해 보는 시간이 무척 의미 있었다.

 

- 나는 아무 목적 없이 두서없이 책을 읽곤 한다. 조금은 산만한 독서 버릇. 그래서 정돈된 독서를 하고자 파스타를 먹으며 즐기는 개인 독서회를 마련했다. 익숙하게 반복되는 일상의 한 부분에 의미를 부여하면 이전과 다른 특별함과 재미가 생긴다. 아이들만 성장을 위한 놀이가 필요한 게 아니고 어른이 되어서도 죽을 때까지 잘 놀아야 하기에 나는 독서 놀이를 한다. 특히 혼자 잘 노는 사람이 되는 건 중요하다. 가족, 친구, 연인이 늘 곁에 있어줄 수 없고 혼자 잘 놀면 소중한 사람들의 시간을 내게만 맞춰달라 요구하지 않게 되어 섭섭한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혼자 잘 노는 재능을 가꾸면 여럿과도 재밌게 놀 수 있다. 

- 잘 놀기 위한 흥미로운 아이디어가 샘솟으면 집에서 나만을 위한 작은 이벤트를 개최한다. 이를테면 '러시아 문학의 밤'같은 행사. 매서운 겨울 추위가 찾아올 무렵의 어두운 밤, 낮은 조도의 따뜻한 조명, 담요, 푹신한 쿠션, 블루투스 스피커를 준비한다. 차이콥스키 음악을 들으며 시베리아 한파에 걸맞은 러시아 문학을 읽는다. 많은 양에 엄두가 나지 않았던 <안나 카레니나> 같은 책도 몰입하며 읽을 수 있다. 독한 보드카를 마시지 못하는 체질이어서 다소 아쉬웠던 이벤트. 어떤 행사든 음식은 '신스틸러 scene stealer'다. 책이란 주인공 못지않게 빛나는 조연, 파스타 독서회는 파스타가 있기에 독서회가 될 수 있다. 

-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날이 꼭 필요하다. 일탈의 날은 일주일에 한 번 주말에 정기적으로 가지면 어떨까 생각도 해봤지만, 무탈한 한 주를 보내면 주말에도 의욕이 넘치곤 해서 반드시 날짜를 지정해 지키진 않는다. 다만 '답답해, 아무것도 하기 싫어'라는 기분이 넘치기 직전까지 차오르면 나는 일탈의 날을 미리 준비한다. 별칭이 '스콘데이'일만큼 주말이 오기 전에 그날 먹을 스콘을 미리 사두고, 가볍게 읽을 책을 몇 권 산다. 그렇게 준비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을 날을 기다린다. 

- 아무 휴일 중 하루가 밝았다. 장소는 침대 또는 소파 드레스코드는 어제 입고 잠든 그대로 파자마, 지금 몇 시인지 확인하는 몸짓은 금지. 휴대전화는 침대 옆 협탁 서랍에 넣어두고 꺼내지 않는다. 휴대전화 감금은 SNS를 비롯해 세상과 단절되어 방해받고 싶지 않은 나, 기분이 나아질 때까지 내가 만든 동굴에서 나오고 싶지 않다는 의지다. 해는 밝고, 아직 배는 고프지 않다. 어차피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예정이니 아침 식사는 아무 시간에 배가 고프면 먹는다. 창을 열고 환기를 하는 동안 원하는 만큼 멍하게 있다 보니 '꼬르륵' 신호가 온다. 어제저녁부터 나는 무계획으로 가득한 오늘을 기대했기에 다소 들뜬 기분으로 달콤한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주전자에 물을 끓이며 오늘 메인 메뉴인 스콘과 클로티드 크림에 곁들일 포트넘 앤 메이슨의 홍차 티백을 찻잔에 담는다. 

- 어쩌다 스콘 한 번은 매일 먹는 스콘과 다르다. 넘치게 가지고 있고, 쉽게 얻으면 귀한 줄 모르지만 갈망하다 기다린 끝에 얻게 되면 소소한 것도 세상을 얻은 듯 기쁘다. 나에겐 이날 먹는 달콤한 음식이 주는 의미가 참 크다. 당을 내키는 대로 먹지 않겠다는 식사 규칙을 어기지 않기 위해 평소 노력했던 보상이며, 종일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이유는 평소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다. 일상을 지키기 위해 때로 일탈이 필요하다. '해야 하는데 하고 싶지 않아'의 마음이 크면 스트레스가 된다. 쉬고 싶다는 신호를 받으면 놓아버린다. 그래야 다음 날부터 또 열심히 살아가는 기운을 얻는다. 그래서인지 일탈의 날에 해가질 때까지 침대에 붙어 책을 읽고 가볍게 요리해 먹던 나는 저녁쯤이 되면 내일 일과표를 짜고, 더욱 먼 미래의 계획을 세우는 등 생산적인 일을 이끌리듯 한다. 종일 마음 가는 대로 한 뒤에 다시 정돈된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마무리. 평소에 엄두도 내지 않았던 엄청난 일탈을 하지 않기에 원상 복귀가 빠르다.

 

- 그렇게 딸기에 집착하다 보니 딸기의 품종을 언뜻 외관만 보고 추측할 수 있게 되었다. 길쭉한 '장희'는 모양이 귀엽지 않고 단단한 '육보'는 주름진 육중한 몸집에 단단한 식감이 조금 아쉽다. 결국 달콤하고 부드러운 과육을 가진 '설향' 딸기를 골라 산다. 처음에는 그랬는데, 나중에는 판매되는 딸기 대부분이 설향 품종이어서 굳이 품종을 따질 필요도 없었다.  


- 다양한 품종의 딸기를 조금씩 맛보는 것도 딸기 먹는 재미다. 여행을 가도 그 나라의 딸기를 먹어본다. 일본에서 사 먹은 딸기는 딸기 꼭지 모양이 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 귀여워서 눈으로 보기에 좋았지만, 치아가 산에 부식되어 버릴 듯 시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도 딸기를 사 먹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데 단지 먹었다는 것에서 끝나는 걸 보면 별다른 인상을 받지 못한 듯하다. 아마 내 과일 취향 때문일 테다. 한 입 베어 물면 물컹한 과육이 씹히고 미처 삼키지 못한 과즙이 입술 틈으로 죽죽 흐를 만큼 다디단 그런 과일이 좋다. 딸기는 그런 취향에는 완벽히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환한 붉은 색깔과 앙증맞은 모양이 예뻐서 보는 순간 사랑에 빠지고야 말았다. 

- 달고 부드러운 바닐라 맛에 초콜릿과 아몬드가 섞인 아이스크림. 초콜릿 코팅을 깨부수면 천국의 맛이 나오는 하겐다즈 유기농 원유로 만든 깊은 맛의 아이스크림.
지금은 작은 유리컵에 아이스 망고 몇 조각을 담아 반쯤 녹을 때까지 기다렸다 맛보는 망고 그대로의 맛. 식사 후 입을 개운하게 하는 심플 디저트. 

- 오랫동안 나의 우울증 치료제였던 아이스크림은 한입 아니 한 통이면 모든 시름이 녹았다. 세상과 벽을 쌓고 고독에 빠져 있기라도 하면 마음은 위기의식을 갖고 진한 외로움을 느끼게 한다. 어서 사람들과 어울려서 너도 무리 생활에 적합한 사회적 동물임을 증명하라고 자꾸 등을 떠민다. 퇴근 후 유독 지치고 고단한 마음이 들면 아이스크림 가게에 혼자 앉아 창밖을 보며 아이스크림을 스푼으로 떠먹곤 했다. 외롭고 어쩐지 슬픈 기분을 집에 가져가고 싶지 않아서 일시적인 만족감 뒤에 허무함이 스미면 외로움이란 감정이 녹은 뒤에 남는 기분이라고 믿었다. 될 듯하면서도 되지 않았던 좌절의 순간에도 아이스크림은 함께했다. 그러고 보면 알코올을 입에 거의 대지 않는 나에게 아이스크림은 일종의 술이었을까. 

- 설탕은 사람의 기분을 빠르게 좋게 만들었다 바닥으로 내팽개치곤 한다. 6개월 넘게 이어졌던 '금당' 기간에도 참지 못할 만큼 존재의 허무함을 느꼈던 날에는 아이스크림에 손댔을 만큼 아이스크림을 향한 욕망은 언제나 넘실거렸건만. 대체 언제부터 우울증 치료제는 없어도 괜찮게 된 건지. 그건 지금 내가 외롭지 않아서가 아니고, 좌절할 일이 없어서는 더욱 아니고, 결국 모든 일은 순리대로 풀릴 거라 나를 다독일 때부터라 추측한다. 물질에 의존하지 않아도 감정을 달래는 법이란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풀릴 일은 풀린다는 또 이렇게 운명론자의 입장마음의 짐을 운명에 맡겨버리는 방법으로 마음이 편해진다면 언제라도 감정을 보이지 않는 힘에 위탁한 채 인간인 나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겠다.

- 한여름 오후에 외출은 큰 마음 먹지 않은 이상 되도록 하지 않는 편이 내 몸을 아끼는 일이다. 이토록 더울 땐 그저 집이 가장 안전한 피난처. 더위에 지쳐 아무것도 하기 싫은 일요일 오후에는 집에서 사적인 콘서트를 즐긴다. 한 번도 예매에 성공하지 못한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피아노 리사이틀 대신 그의 실황 공연 영상은 집에서라면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을 만큼 게을러지는 여름날에 아이스티 한 잔을 마시며 듣는 피아노 연주는 아마도 누군가 여름에 시원한 맥주 한 캔을 손에 쥐고 영화 한 편을 보는 즐거움과 같을 거라고. 

- 나의 아이스티는 조금도 차갑지 않지만, 기분만큼은 그렇다. 애초에 냉침은 시도해 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평소처럼 뜨거운 물에 우린 홍차를 식힌다. 아이스티에 특화된 홍차를 따로 준비하지도 않는다. 일 년 내내 마시고 있는 꽃과 과일 향이 은은한 마리아쥬 프레르 마르코폴로 홍차를 식힌 다음 여기에 꿀과 레몬즙을 살짝 넣고 섞는다. 얼음 몇 개, 레몬 한 조각을 장식처럼 띄우면 오후에 즐기는 아이스티. 그런데 집이 더워서 음료 온도는 차갑지 않다. 얼음은 금방 녹아버리고, 아이스티 맛은 연해진다. 다소 밍밍한 아이스티 맛처럼 나의 여름은 불타오르지도 강렬하지도 않다. 

- 가는 끈으로 된 납작한 금색 샌들에 엉덩이나 겨우 가릴 법한 짧은 반바지를 입고 얼음으로 가득 찬 커다란 아이스티를 손에 쥔 채 어떤 휴양지의 해변을 걸었던 어린 내가 몰랐던 미래의 지금 내 모습. 하얀 모래 위 깊은 밤, 해변 축제에서 춤을 추고 야자수 그늘에 묶인 해먹에 누워 음악을 듣고, 오토바이와 작은 트럭이 붙어 있는 아주 부실한 이동수단을 아무 의심 없이 타고 일행들과 보홀섬을 돌며 언젠가 열대 섬에 살겠노라 했던 나의 꿈은 낮에 관광객에게 아이스티를 팔고, 저녁에는 글을 쓰는 생활이었다

 

- 내가 가장 사랑했던 한여름의 꿈은 현재 진행형이 아니다. 그때 모험에 주저함이 없었던 나의 아이스티는 단맛 넘치던 립톤아이스티 복숭아 맛. 지금, 더울 땐 나가지 않는 게 목숨을 구하는 길이라며 밤에만 움직이고 세월이 간 만큼 철도 들어버린 나의 아이스티는 미지근하고, 씁쓸하고, 시고 살짝 달콤한 맛. 여름의 맛이 바뀌었다. 한때 여름은 내게 가장 들뜨는 계절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언제까지나 설렐 거라 믿었던 순간은 더위를 못 참고 에어컨을 틀고 집 한구석에서 끙끙대며 원고를 쓰는 내 모습만 남긴 채 희미해졌다. 그렇게 순하디 순한 아이스티처럼 여름이 지난다. 

- 입맛에 맞지 않으면 아까워서 어쩌지 할 만큼 서울에서 만난 무화과의 가격은 그리 싸지 않았다. 제철 과일의 매력에는 가격이 저렴한 편이라는 점도 있건만 무화과에선 그런 관대함을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호기심이 생겼다면 내게 맞지 않아 실패한다 해도 상관없으니 일단 해보기로 한다. 여러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호기심이라는 귀한 마음은 쉽게 생겨나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다. '저건 별로일 거야. 내가 그 비슷한 걸 이미 예전에 해봤는데 좋아할 리 없어' 하고 넘겨짚는, 추측하는 마음이 앞선다. 어린아이의 순수한 호기심은 언제부터 희미해지기 시작했을까.

- 갈색의 통통한 키세스 모양 같은 과일은 어떤 호감을 미처 품어보기도 전에 시장에서 자취를 감춘다. 한 계절을 두고두고 풍미하는 과일은 아니라 우리 곁에 머무는 찰나의 시간을 충분히 누려야 한다.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는 사과가 아닌 무화과라는 설도 있고, 동양에서 싯다르타가 보리수나무 아래서 열반의 경지에 올랐을 때 그 나무는 우리가 연상하는 보리수가 아닌 무화과목의 나무라고 한다. 이토록 오랜 역사 속 인류와 함께한 과일이지만 내 지인 중에는 무화과를 유별나게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 남쪽에서만 무화과가 자란다는 지역적 한계 때문인지 우사인 볼트보다 더 빠르게 시장에서 사라져 버리는 탓인지는 모르겠다. 설마 맛이 별로여서는 아니겠지. 

- 늦게 배운 도둑질은 날 새는 줄 모른다 하고, 나는 그 말에 걸맞은 행동을 한다. 초가을은 겨우내 물리도록 먹었던 딸기처럼 무화과에 집중한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쉽게 물러져버리는 연약한 껍질을 달래듯 깨끗이 씻고 손으로도 가를 수 있을 만큼 부드러운 과육을 깔끔하게 칼로 자르면 무화과의 이름과 달리 (無花果. 꽃이 없는 과일이라는 의미) 그 안에 숨겨 놓았던 꽃이 보인다. 열매 안에 꽃이 들어 있는, 아니 결국 내가 먹는 자체가 꽃이다.

 

- 중후하고 묵직한 단맛이 입안에서 향기롭게 머물다 가는 무화과 철이 끝나면 나는 알 수 없는 상실감을 느끼곤 했다. 그때부터는 두근거리면서 먹을 만한 과일은 없다. 딸기는 아주 긴 시간 동안 함께해 질려버리고 말 지경으로 먹으니 감정의 동요가 없는데, 무화과는 마치 인생의 가장 찬란한 순간은 무척 짧고 잠깐 반짝 빛날 뿐이란 걸 알려주듯 여운을 남기며 사라진다. 나는 여름이 청춘의 시기이고 가을이 중년, 겨울이 노년이라는 인생과 계절의 비교에서 무화과가 지금의 나와 가장 맞닿아 있는 과일 같았다. 나는 가을의 초입에 서 있다. 그래도 과일은 인간의 세월보다 낫다. 지혜로운 사람들이 제철에 먹는 게 전부인 줄 알았던 무화과를 말려서 먹기로 했다. 냉동시켜 버리기로 한다. 사람의 세월도 그렇게 멈춤 버튼을 누를 수 있는 거라면 나는 어디쯤에서 멈추고 싶은 걸까. 말린 무화과를 발견한 뒤로 나는 무화과가 없는 계절의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었다. 

- 무화과는 수수한 갈색 트렌치코트 안에 화려한 색감의 드레스를 입은 배우처럼 반전 매력이 있기에 간단한 요깃거리를 만들어도 보람 있는 결과물을 보여준다. 시큼한 호밀빵 세이글한 조각에 크림치즈를 바르고 무화과를 얇게 썰어 몇 개 올린다. 무화과는 다디단 과일이지만, 나는 이보다 꿀에 잘 어울리는 과일을 아직 찾지 못했다. 무화과 위로 꿀을 지그재그로 뿌린다. 디저트라기보다 당장 파티라도 열릴 듯 전채요리인 카나페에 가깝다. 석양빛 물든 가을 하늘과 묘하게 어울리는 무화과를 바라보다 문득 공기가 퍽 스산하니 곧 깊은 가을이 찾아올 것 같다. 이날은 식욕이 그저 그렇고 무언가 간단하게 먹고 싶은 날이다. 저녁 식사 대신 선택한 오후의 늦은 간식은 식사와 디저트의 중간이고, 여름과 가을 사이의 애매함과 완벽하게 어울린다. 어디에나 페어링 pairing은 있기에 어정쩡한 모두가 제짝은 있다. 대기 중에 살짝 남은 열기를 식히는 레몬 띄운 탄산수 한 모금 뒤에 크림치즈, 무화과 그리고 꿀이 어우러진 디저트인 척하는 카나페를 한 입 베어 문다. 조용한 파티의 시작이다. 

- 어쩌면 너무 많은 앎이 삶을 괴로움에 이르게 하는지도 모른다. 프랑스 파티스리 Patisserie나 벨기에 초콜릿 같은 걸 알지 못했다면 단것을 즐길 때 느끼는 마음 한쪽의 죄책감은 없었을 것이고, 멋진 디저트를 사기 위해 줄을 서는 수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며 에끌레어, 휘낭시에, 갈레트브루통, 프랄린과 같은 생소한 이름에 반응하지 않았을 터이니 애초에 접할 길이 없었더라면 갖지 못해 괴로워할 일도 맛보지 못해 안달 날 일도 없었을 텐데, 이를 어쩌나, 모두 알아버렸다. 

- 내일 입을 옷에 어울리는 실크 스카프를 결정하고, 식사하며 읽을 책은 인문학적 소양을 한껏 높여줄 제목을 가졌다. 티타임과 함께할 티 푸드 Tea Food를 사려고 이름난 브랜드 가게 앞에서 어슬렁거리기를 여러 번. 생활 곳곳에 움터 있는 나의 속물적인 취향은 미디어를 통해 얻은 잡지식의 산물이자 호기심이란 이름의 욕망에 이끌려 지갑이 얇아지고 나서야 얻은 경험의 결과다. 시류에 뒤처지면 안 된다는 불안감이 온갖 유행을 소비하게 했다. 이제야 없어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살아가지만 어쩌면 그 민낯은 이미 모든 기준이 높아져버렸기에 '그걸 갖지 못한다면 대용품은 사고 싶지 않다'에 가까울지도. 혀가 고급과자 맛을 알아버린 뒤로 슈퍼마켓에서 파는 과자는 애써 먹지 않으려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최고를 추구하는 건 결과를 내기 어렵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가끔 욕망을 완전히 내려놓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런 세계도 있구나 인정한 뒤 내가 편안함을 느끼는 삶의 수준을 찾아 만족하고 지내면 그뿐. 물론 그 이면에는 어설픈 흉내는 원치 않는 내가 있기도 하다. 그런데 장인이 만든 물건과 달리 고급 디저트의 세계는 크게 부담 없는 가격 수준으로 진입장벽이 매우 높진 않아서 단맛에 대한 금욕적이고 보수적인 태도를 고수해야지만 나를 지킬 수 있다. 그렇다 해도 한입의 만족을 허락하는 혼자의 티타임에 관한 냉혹한 고찰. 

- 물론 호텔이나 유명 홍차 브랜드의 티룸에서 즐기는 화려한 애프터눈 티는 호화로움을 경험하기 좋다. 아래부터 샌드위치, 가운데 스콘, 가장 위로 마카롱이나 초콜릿이 놓여 있는 3단 트레이를 티와 함께 아래서부터 먹는다는 약간의 교양을 갖추기만 하면 누구나 즐겁게 참여할 수 있는 멋진 티 타임. 한 상 가득 차리는 음식 대접이 아닌 애매한 오후 시간대에 손님 환대와 모임을 위해 이보다 멋진 선택은 아직 만나보질 못했다.

- 오래전 애프터눈 티가 주말의 작은 행복이었을 때 집에 핑크빛으로 만개한 작약을 꽂아 두고, 2단 트레이 접시에 미니 사이즈 오이 치즈 샌드위치, 스콘, 마카롱을 담고 여러 티 중 하나를 골라 우린 다음 혼자서 느긋한 오후를 즐기기도 했다. 애프터눈 티는 노동으로 가득한 일상에 우아함을 더하는 가장 흥미진진한 시간이었고, 스트레스를 푸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노동자의 태도를 벗어두고 "주말이 뭐지? What is a weekend?"라고 물었던 BBC 드라마 <다운튼 애비 Downton Abbey>에 나오는 영국 귀족처럼 지금의 근무시간 개념이 없던 때의 사람처럼 혹은 일하지 않아도 되는 자의 특권처럼 그런 시간을 보내며 잠시 현실과 다른 라이프스타일을 누려보았다. 누군가의 이상적인 삶에 매료되어 그 사람의 라이프스타일을 관찰하며 조금씩 흉내 내곤 했던 수없이 많은 시간. 예전에는 그렇게 선망하는 대상을 따라 하는 모습이 부끄러운 일처럼 여겨졌지만, 지금은 타인을 모방하면서 나에게 맞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일 뿐이었고, 결국 자신만의 생활을 디자인하는 하나의 기술이라 생각한다. 

- 우리는 늘 지금 이 순간이 처음이고 자신이 정말 무엇을 원하는지 끊임없이 의심한다.

"어떻게 알아요? 아무것도 안 해보고, 아무 데도 안 가봤는데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길이 없었는데?"

소설 <미 비포 유 Me Before You>의 한 대사처럼 경험하지 않으면 지금 여기 주어진 게 전부라 믿을 만큼 세상이 좁아진다. 호기심 혹은 탐구심은 자신이 쉽게 접할 수 없는 세계, 안 해본 일일수록 더욱 커진다. 그렇게 사회 특권층의 라이프스타일이 주목받고 화젯거리가 되며 동경의 대상이 된다. 영국의 귀족과 상류층이 밤늦게 이뤄지는 화려한 만찬을 기다리는 동안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생겨났다는 애프터눈 티 또한 상위 문화에서 출발했다. 속물처럼 애프터눈 티를 모방했을 뿐 늦은 밤 이뤄지는 그들의 만찬이 내 삶에 존재할 리 없다. 그저 이토록 눈이 즐겁고 귀한 느낌이 드는 작은 찻상을 소꿉놀이처럼 즐겼다.  

- 그렇게 사찰의 스님들이 마음의 번뇌를 없애기 위해 차를 마시며 참선에 힘쓴다는 점도, 차는 마음의 수양을 뜻한다는 의미 또한 어렴풋이 이해하게 된다.

- 차를 마시며 내가 깊어지는 시간을 갖다 보면 자연스레 다도에 관심이 간다. 브랜드에서 개최하는 티 클래스 한 번, 교토에서 다도 클래스 한 번. 내가 체험 수업으로 익힌 경험은 미비했고, 손님을 초대해 다도를 지키며 대접할 일도 실상 없다. 일상과 동떨어진 의식을 익히길 바라는 건 지금 시대에 굳이 필요치 않은 삶의 기술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도에 관심이 가는 건 차를 우려내는 그 모든 시간 속에서 내가 아닌 귀한 손님을 중심으로 두고 생각한다는 점이 끌렸다. 나보다 타인을 우선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나는 그동안 얼마나 가꾸고 살았던가.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에 방점을 찍은 피상적인 행동만 했을 뿐 이토록 자기중심적 사고로 고통받는 나를 구하는 데 차와 함께하는 마음 수양이 도움이 될 거 같다.

 

- 나는 분명 내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고 유일무이한 존재이지만, 나에게 매몰되어 살아가는 동안 정작 나 자신은 없었다. 그건 남보다 나은 나, 경쟁에서 이기는 나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정작 남보다 잘된 혹은 남들에게 인정받는 내가 되기 위해 무지몽매했던 순간에는 내 입에 넣는 밥 한 끼 신경 쓰며 살지 못했을 만큼 자신을 돌보는 일에 소홀했다. 그런 소모적인 태도는 나의 몸과 마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 아닌 모두를 선의 혹은 악의를 갖고 경쟁상대로 바라보며 살아가는 건 전혀 흥미롭지 않다. 그저 앞서 길을 걷는 사람이 가방에 걸쳐둔 옷을 떨어트리면 온 힘을 다해 그 사람을 부르고 옷을 되찾아 주는 타인에 대한 소소한 관심과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함을 기억하며 살고 싶다.

- 때로 사람들이 내뱉는 말속에서 뾰족한 구석을 발견한다.

"내게 불행한 일이 일어나서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상대적으로 나는 더 낫구나 하면서..."

이런 말을 들었을 때, 불행에 빠진 타인을 보고 위안을 얻는 사람이 가진 빈곤한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는 그의 비틀린 사고방식이 내게 마음의 찌꺼기를 남긴다. 아마 나 또한 남과 나를 비교하는 게 숨 쉬듯 자연스러워 그런 마음을 가져봤기에 생각해 볼 만한 문제였다. 은연중에 저 사람보다 내가 더 낫다며 멸시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 과연 행복하고 절대적으로 우월한 건가. 그럴 리 없다. 자신을 순위 매기기 경쟁에 구속해 놓았다는 증거일 뿐. 마음의 찌꺼기를 청소하기 위해 여러 면에서 복잡한 생각을 할 때 차는 마음을 다스려주는 좋은 친구다.  

- 프랑스 정치철학자 몽테스키외는 우리는 그저 행복해지려면 쉽게 행복해질 수 있지만, 언제나 남보다 더 행복하려 하기 때문에 어렵다고 했다. 남들이 실제보다 더 행복하다 믿기 때문이라고. 어느새 차 한 잔을 비웠다. 찻잔을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너는 나보다 낫잖아" 이런 말을 듣지도 하지도 않는 세상, 각자 주어진 몫에 만족하며 타인에 대해 부러움도 멸시도 없는 세상을 문득 꿈꿔본다. 

- '집밥이 건강한 줄 누가 모르나, 일하고 들어오면 지치고 귀찮으니까 챙겨 먹기 어려운 거지?'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비단 과거의 나뿐만은 아닐 거다. 누군가 매일 밥을 해주었으면, 나 대신 내 입맛에 맞는 메뉴로 요리해 밥상을 차려주고 설거지를 하고 부엌 청소까지 말끔하게 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혼자 사는 사람에게 우렁각시와 같은 환상의 동물은 멀고 외식은 가깝다. 그렇지만 우리는 앞으로 건강하게 되도록 오래 살고 싶고, 그만큼 오랫동안 잘 먹고 살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말 그대로 밥상 메뉴를 잘 고르고 요리하는 일상 시간이 없어서 못 챙긴다고 말하지 않고 일부러 시간을 내서 건강한 식사를 준비한다. 요리 말고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도, 요리에 소질이 없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식사에 무관심한 태도로 살아가지 않기를.

- 나이가 들수록 자극적인 음식보다는 몸에 편안한 음식을 자연스레 찾게 된다. 냉동피자를 데워 먹는 방식으로는 쉽게 떨어지는 체력을 회복하기도 어렵고, 조금씩 건강 적신호를 보내오는 몸에게도 미안한 일이어서다. 좋은 식사에 관심이 많고 끼니를 잘 챙겨 생긴 온갖 이점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도 사람인지라, 그것도 타고나길 게으른 사람이라 정말 피곤한 날에는 밥 차리기 귀찮아서 대충 먹고 말지 할 때가 있다. 그때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내가 정한 몇 가지 기본을 곱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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