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스미노 요루]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일루젼 2024. 7. 4.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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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스미노 요루 / 양윤옥

출판 : 소미미디어
출간 : 2017.04.01


       

 

고전(?)에 속하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를 드디어 읽었다. 저자 스미노 요루는 다른 작품인 <밤의 괴물>로 먼저 만난 바 있다. 그때도 남녀 청소년 간의 미묘하면서도 우정 어린 대화를 잘 표현한다고 느꼈었는데, <췌장>은 그와 비교하자면 좀 더 로맨틱한 느낌이다. <췌장>이 첫 발표작이라는 걸 몰랐더라면 아마 <밤의 괴물>을 먼저 썼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스미노 요루의 주인공들은 현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통찰이 녹아든 자조를 즐긴다. 외부에서는 알아보기 힘든 미묘함, 하지만 그들에게는 매일 부딪쳐야 하는 실재. 무라타 사야카의 작품들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것을 느낀 적이 있는데 스미노 요루 쪽이 좀 더 십대랄까, 청소년의 것 같다는 느낌이다. 

 

<너의 췌장을 먹고싶어>는 파격적인 제목과는 달리 상당히 섬세한 소설이다. 본문 안에 표현된 문장들 사이로 흐르는 '내가 아닌 너의' 감정선들이 청량하면서도 애달프다. 시한부를 선고받은 소녀 사쿠라와 우연히 그녀의 병을 알게 된 뒤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있는 그대로의 그녀'와 함께 해주는 소년 ?????의 이야기. 

 

두 사람은 정반대의 극점에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 관심과 애정을 쏟는 여주인공과, 자기의 외부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남주인공. 하지만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처럼 두 사람은 서로의 다름과 유사함을 빠르게 이해한다. 

 

'다르기 때문에 함께 있을 때 더 즐거울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지금의 나는 -여전히 내 경우에는 크게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럴 수 있다고 설득되고 말았다. 자신에게는 없기 때문에 더욱 반짝이는 면들.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도 상대의 반짝임을 받아들이고 변화해 갈 수 있는 유연함. 자신을 충분히 인정하기에 자신과 다른 이들까지도 인정할 수 있는 당당함. 

 

(잠깐 반론을 펴자면 '자신과 다름'을 추구하는 목적이 중요하다. 다르다 하더라도 이해하고 포용하겠다인지, 다르기 때문에 좋은 것인지. 다르기 때문에 좋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확장하기 위함인지, 외면하기 위함인지. 드물게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과 다른 면을 가진 사람을 찾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너무나 뻔한 말이 되어버렸지만-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하지 않는 이는 자신도, 타인도 사랑하기 어렵다.) 

 

<췌장>의 두 주인공이 서로에게 품었던 감정이 어떤 것이냐, 두 사람의 관계는 정확히 무엇이었냐를 생각하는 것은 몇 발짝 비껴나 있는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당사자들도 하나로 정의하기 어려울 만큼 다채로웠을 여름의 기억을, "오렌지색과 핑크색, 연한 군청색이 한데 어우러진 빛깔"이었던 하늘처럼 뒤섞였던 감정을, 벅참과 함께 읽었다.

 

좋았다.

 

그리고, '옮긴이의 말'을 읽다가 마주친 이토 가쿠라는 이름에서,

이토 케이가쿠를 생각한다. 

<학살기관>을 생각한다.

사쿠라의 위로 그 이름을 겹쳐본다.    

 


   

 

- 내 클래스메이트였던 야마우치 사쿠라의 장례식은 생전의 그녀와는 전혀 닮은 구석이 없는 꾸무럭한 날씨에 거행되었다.

- 그녀의 생명이 가진 가치의 증거로서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눈물에 감싸였을 장례식에도 빈소에도, 나는 참석하지 않았다. 나는 그냥 집에 있었다. 다행히 나에게 참석을 강요할 유일한 클래스메이트는 이미 이 세상에 없고, 선생님이나 그쪽 부모님이 나를 불러낼 권리도 의무도 있을 리 없어서 나는 나 자신의 선택을 온전히 존중할 수 있었다.

- 맞벌이하는 부모님을 배웅하고 적당히 점심을 챙겨 먹은 뒤, 나는 줄곧 내 방에 틀어박혔다. 그것이 클래스메이트를 잃은 섭섭함이나 허전함에서 온 행동인가 하면, 아니었다.
클래스메이트였던 그녀가 불러내지 않는 한, 원래부터 나는 휴일을 내 방에서 보내는 성격이다. 
방 안에서 나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책을 읽었다. 인생의 지침서나 자기 계발서 쪽은 좋아하지 않고 소설을 즐겨 읽는다. 침대에 누워 하얀 베개에 머리나 턱을 얹고 문고본을 읽는다. 하드커버는 무겁기 때문에 되도록 문고본이 바람직하다. 
지금 읽는 책은 전에 그녀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책을 별로 읽지 않는 그녀가 인생에서 유일하게 만난 최고의 책이다. 빌려온 뒤 내내 책장에 꽂아놓았고 그녀가 죽기 전까지는 꼭 읽고 돌려줄 생각이었는데 결국 때를 놓쳐버렸다. 
때를 놓친 것은 이제 어쩔 수 없으니까 다 읽은 뒤에는 그녀의 집에 찾아가 돌려주기로 했다. 그녀의 영정(影幀)에 절하는 것은 그때 하면 된다.
 
- 휴대폰을 책상에 내려놓기 전에 문득 깨달았다. 그 기기를 손에 든 게 이틀만이었다. 의식적으로 피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어쩐지,라고 하면 너무 의미심장한 말인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나는 이틀 동안 휴대폰을 집어드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개폐식의 내 휴대폰을 딸깍 펼쳐 메시지 수신함을 확인했다. 열어보지 않은 메시지는 한 통도 없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어서 송신 메시지를 확인했다. 거기에 통화 이외의 기능으로 최근 이용내역이 눈에 들어왔다. 
클래스메이트였던 그녀에게 내가 보낸 메시지였다.
단 한 마디의 메시지.
이걸 그녀가 열어봤는지 어떤지는 알지 못한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 열어봤다고 치고, 그녀는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생각하다가 잠이 들어버렸다.
결국 쌀은 어머니가 돌아와 씻어 앉혔다.
나는 꿈속에서 그녀를 만났었는지도 모른다.

- 두 개째 만쥬에 손을 내밀며 그녀가 오지랖 넓은 소리를 했다. 무시해 버리고 나는 보리차를 한 입 마셨다. 슈퍼에서 파는 보리차. 그 익숙한 맛이 맛있었다.
"둘 다 똑같이 장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돼. 멍하고 있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선생님하고 똑같은 나이가 되는 수가 있어."

"우와하핫. 그럴 리는 없어요!"
그녀와 선생님은 즐거운 듯 서로 웃어가며 얘기했지만 나는 웃지 않고 만쥬를 한 입 먹고 보리차를 마셨다.

 

- 그녀가 말한 대로, 그럴 리는 없었다.
그녀가 사십 대의 선생님과 똑같은 나이까지 이 세상에 남아있을 일은 없다. 그건 이 자리에서는 나와 그녀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그래서 그녀는 내게 눈짓을 보내며 웃었다. 마치 외국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가 조크를 던질 때 윙크하는 것처럼. 
 
- "괜찮지 않은 거 같은데?"
"그래? 그럼 그밖에 뭘 해야 하는데?"
"그야 첫사랑을 만난다든가 외국에 나가 히치하이킹으로 마지막 죽을 자리를 정한다든가, 아무튼 하고 싶은 게 있을 거 아냐." 

그녀는 이번에는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를테면 비밀을 알고 있는 클래스메이트도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
"... 없지는 않다,라고 할까."
"근데 지금 그걸 안 하고 있잖아. 너나 나나 어쩌면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는 너나 나나 다를 거 없어, 틀림없이. 하루의 가치는 전부 똑같은 거라서 무엇을 했느냐의 차이 같은 걸로 나의 오늘의 가치는 바뀌지 않아. 나는 오늘, 즐거웠어."
"... 그런가?"

- 분명 그럴지도 모른다. 그녀의 단언에 나는 어쩐지 약은 올랐지만 자칫 납득할 뻔했다.
가까운 장래에 그녀가 죽는 것처럼 나 역시 언젠가는 틀림없이 죽는다. 그건 언제 올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미래다. 어쩌면 그녀가 죽기 전에 내가 죽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역시나 죽음을 자각하는 사람이 하는 말에는 나름대로 깊이가 있었다. 옆에서 나란히 걸어가는 그녀에 대한 평가가 내 마음속에서 약간 올라갔다. 

- "조금 전 그 얘기 말인데..."

망설임 없이 등을 돌리려는 나를 그녀의 말이 멈춰 세웠다. 그녀는 뭔가 장난칠게 생각난 듯 신이 난 표정이었다. 나는 결코 신이 난 얼굴은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굳이 원하신다면, 비밀을 알고 있는 클래스메이트에게 나의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도와줄 기회를 부여해 줄까 하는데."

- "그럼 일요일 오전 열한 시에 역 앞에서 만나자! 내 <공병문고>에도 꼭 기록해 줄게!"
그렇게 딱 잘라 말하고 내 승낙 따위 애초에 필요도 없다는 식으로 그녀는 손을 흔들며 나의 귀로와는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모습 너머로 여름 하늘은 아직 오렌지색과 핑크색, 연한 군청색이 한데 어우러진 빛깔로 우리를 비추고 있었다.
손은 마주 흔들어주지 않고 나도 이번에야말로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집으로 향했다.

- 그건 지난 4월의 일이었다. 늦은 벚꽃이 아직 피어 있었다. 의학은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크게 발전했다. 그건 나도 자세한 내용은 전혀 알지 못하고 알아볼 마음도 없다. 
단지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의학은 생명이 오락가락하는 중병으로 인해 남아있는 목숨이 일 년 미만인 여학생이 주위의 어느 누구에게도 그 증세를 들키지 않은 채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 만큼은 발전했다. 또한 그로써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갈 시간을 연장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병이 그토록 깊은데도 계속 멀쩡히 돌아다니다니 마치 기계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런 내 느낌 따위는 중병을 앓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아무려나 상관없는 일이다. 


- 그저 사소한 관심이었다. 로비 한구석에 덜렁 자리 잡은 소파 위에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누가 잊어버리고 갔나,라는 생각과 동시에 과연 어떤 책일까 라는, 책 좋아하는 자 특유의 기대감 같은 흥미가 머리를 쳐들어 나를 움직이게 했다. 
환자들 사이를 누비며 그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 얼핏 보기에 3백 페이지쯤 될 것 같은 문고본 크기의 책이었다. 병원 근처 서점의 커버가 씌워져 있었다. 
커버를 벗기고 제목을 확인하려는 참에 흠칫 놀랐다. 서점 커버 밑으로 원래 문고본에 붙어 있어야 할 책 표지가 아니라 굵은 매직으로 <공병(共病)문고>라고 직접 써넣은 글씨가 있었다. 물론 그런 제목도 출판사도 들어본 적이 없다.
이건 대체 뭔가, 생각해 봤자 답이 나오지 않아서 책장을 한 장 넘겨보았다.
첫 페이지에서 내 시야에 뛰어든 것은 눈에 익은 인쇄 글씨가 아니라 볼펜으로 정성껏 손수 써넣은, 즉 사람이 써 내려간 문장이었다.

- [20xx년 11월 23일
공병문고라고 이름 붙인 이 노트에 오늘부터 매일매일 내 마음이나 행동을 적어나갈 생각이다. 우리 가족 이외의 어느 누구에게도 아직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제 몇 년 뒤에 죽는다. 그런 사실을 받아들이고 내 병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나는 글을 쓸 것이다. 우선 내가 앓고 있는 췌장의 병은 얼마 전까지는 판명되자마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곧바로 죽는 질병의 왕이었다. 하지만 요새는 증세도 거의 나타나지 않을 만큼 의학이 발달해 ... ]  

- 생각해 보면 그 노트 한 권을 우연히 목격하는 바람에 일요일 오전 열한 시에 느닷없이 나는 역 앞에 서 있는 신세가 되었으니까 세상 참, 어떤 일이 갑작스럽게 사건의 원인으로 작동할지 모르는 것이다. 
강한 힘을 거스르는 일 없이 풀잎 배처럼 그냥 둥둥 떠밀려가며 살기로 마음먹은 나는 결국 그녀의 청을 거절하지 못한 채, 정확히는 거절할 타이밍을 잡지 못한 채, 약속 장소에 나오고 말았다.
바람을 맞혀버리면 끝날 일인지도 모르지만, 섣불리 나에게 잘못을 전가할 만한 짓을 했다가 그녀에게 약점을 잡히면 그다음에는 또 무슨 요구를 할지 모를 일이었다. 나와는 달리 씩씩한 쇄빙선처럼 스스로 앞길을 개척해 나가는 그녀에게 맞선다는 것은 풀잎 배의 삶으로서는 전혀 영리하다고 할 수 없는 짓이다. 

- 나는 주로 고기를, 그녀는 주로 내장을 묵묵히 먹었다. 간간이 내가 내장을 집어먹으면 그녀는 짜증 나게도 느물느물 웃는 얼굴로 넘어다보았다. 그럴 때는 그녀가 애지중지 굽던 내장을 냉큼 먹어주면 "에이잉!"하고 약이 오른 눈치를 보여서 체증이 쑥 내려갔다. 
"나는 화장은 싫어."
나름대로 즐겁게 숯불고기를 먹고 있는데 그녀가 명백히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화제를 꺼냈다.
"뭐라고?"
잘못 들었을 가능성도 있어서 일단 확인했더니 그녀는 재미있다는 얼굴로 되풀이했다.
"화장은 싫다니까. 죽은 뒤에 불에 구워지는 건 좀 그렇잖아?"
"그게 고기 구우면서 할 얘기야?"
"이 세상에서 진짜로 없어져버리는 것 같아. 다들 먹어준다거나 하는 건 좀 어렵겠지?"
"고기 먹으면서 사체 처리 얘기는 하지 말자."
"췌장은 네가 먹어도 좋아."
"내 얘기 듣고 있어?"
"누군가 나를 먹어주면 영혼이 그 사람 안에서 계속 산다는 신앙도 외국에는 있다던데."
아무래도라고 할까, 아니나 다를까라고 할까, 내 말은 전혀 듣지 않는 눈치였다. 혹은 다 듣고 있으면서 무시하는 건가.  

-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이더니 조심스럽게 킥킥 웃었다. 표정 변화가 극심한 인물이다. 도저히 나와 똑같은 생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다른 생물이니 당연히 수명이 다른 지도 모르겠지만. 
"아니, 나도 너 말고 다른 사람 앞에서는 이런 얘기 안 해. 다들 슬퍼하잖아. 근데 넌 대단해. 머지않아 죽는다는 클래스메이트와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해주잖아. 나라면 아마 못했을 거야. 네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서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막 하는 거야." 
 
- 울 리가 없다. 나는 그런 비합리적인 짓은 안 한다. 슬퍼하지도 않고, 더구나 그녀 앞에서 그런 감정을 내보일 일도 없다. 그녀가 남들 앞에서 슬픈 표정을 보이지 않는데 다른 누군가가 그걸 대행하는 것은 잘못이다.

- "아니, 그보다 나,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
"그럴지도. 나는 나에 대해 얘기하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아."

"왜?"
"아무도 관심이 없을 만한 일을 자의식 과잉처럼 줄줄 늘어놓고 싶지 않아."
"어떻게 아무도 관심이 없다고 미리 정해두는 건데?"
"내가 남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야. 기본적으로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 이외에는 관심이 없어. 따지고 보면, 물론 예외는 있어. 너처럼 특수한 사정을 떠안은 사람에게는 나도 약간은 관심이 있지. 하지만 나 자신은 다른 누군가의 관심을 끌 만한 인간 ..."

- 어떤 얘기를 했었는가 하면 주로 그녀가 반 친구들에 대해 말했다. 내가 반 친구들에게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것 같았지만, 그녀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고 말할 수 있었다.
나는 클래스메이트의 시시해빠진 실수담이나 흔해빠진 연애사정에 관심을 가질 만큼 따분한 이야기밖에 알지 못하는 인간이 아니다. 그런 내 감정을 그녀도 분명 눈치챘을 것이다. 나는 따분함을 감출 수 있는 인간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성심을 다해 이야기하는 그녀의 모습이 오히려 아주 조금 흥미로웠다. 나라면 호박에 침놓는 것처럼 싱거운 일에는 나서지도 않을 것이고 그물로 바람을 잡는 듯한 허랑한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리뷰자 주 : <가을철 한정 구리킨톤 사건>에서도 '호박에 침놓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일본 속담인 모양이다.)

- 슬슬 갈까,라고 어느 쪽이랄 것도 없이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었을 때 나는 내내 마음에 걸렸던 것을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그나저나 그 밧줄, 어떻게 할 거야? 자살은 안 한다고 했지? 장난이라고 했잖아."
"장난, 이긴 한데 나는 아마 그 결과를 못 볼 거야. 그래서 비밀을 알고 있는 클래스메이트가 내 대신 나중에 확인해 줬으면 좋겠어. 실은 <공병문고>에 밧줄에 대한 얘기를 살짝 내비칠 거야. 그러면 밧줄을 발견한 사람은 내가 자살을 생각할 만큼 막판에 몰렸던 모양이다,라고 오해하겠지? 뭐, 말하자면 그런 장난이야." 
"악취미네."
"괜찮아, 괜찮아. 분명하게 사실은 거짓말이었습니다,라는 설명도 붙여둘 거니까."

- 지나치게 피해온 탓에, 남에게 함께 놀자는 청을 받아본 경험이 심히 결여된 탓에, 불길한 예감을 미처 감지하지 못했다. 타인과 어울릴 때는 상대가 준비한 플랜이 전혀 내 의향에 맞지 않고 또한 그 발견이 늦어지는 일도 있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이런 것을 위기관리능력의 부족이라고 하는 것이리라. 
"왜 그래,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그녀의 표정에서는 이쪽이 난처해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재미있어서 어쩔 줄 모르는 게 훤히 보였다.
그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나도 명확히 갖고 있었다. 하지만 대답한다고 어떻게 되는 일도 아니어서 말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번의 실수를 거울삼아 다음에는 특히 유의하는 것밖에 없었다. 
즉 말하자면, 나는 온통 여학생뿐인 팬시하고도 소녀스러운 공간에 우연히 뛰어들게 되었다고 두 손 들고 기뻐할 만한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는 것이다. 

 

- "먼저 죽을 줄은 생각도 못했을 텐데,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만의 하나,라는 경우가 있어서 일단 물어보겠는데, 그 피해자와 만난 적이라도 있어?"
"있다고 생각해?"
"있다고 생각한다고 생각해? 아, 됐고, 그래서?"
"응, 난 관심 있어. 근데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산다든가 죽는다든가 하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을 거라는 얘기야."

 

- 올바른 의견인지도 모른다.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면서 산다든가 죽는다든가 하는 것을 강하게 의식하는 사람은 드물다. 사실일 것이다. 매일매일 자신의 사생관(死生觀)을 응시하며 살아가는 것은 분명 철학자거나 종교인이거나 예술인뿐이다. 그리고 중병에 걸린 여학생이거나. 그런 여학생의 비밀을 알아버린 놈이거나.

"죽음을 마주하면서 좋았던 점이라면 매일매일 살아있다고 실감하면서 살게 된 거야."
"어떤 훌륭한 위인의 말보다 가슴에 스민다."
"그렇지? 아, 다른 사람들도 머지않아 다 죽는다면 좋을 텐데."
혀를 쏙 내미는 그녀, 농담처럼 말할 생각이었겠지만 나는 진심이라고 받아들였다. 말은 때때로 발신하는 쪽이 아니라 수신하는 쪽의 감수성에 그 의미의 모든 것이 내맡겨진다. 

- 하트형 접시에 조금 담아 온 토마토 파스타를 먹었다. 약간 질긴 감이 있었지만 제법 괜찮았다. 생각해 보니, 먹는 것도 귀갓길과 똑같았다. 나의 한 입과 그녀의 한 입은 본인이 느끼는 가치가 완전히 다른 지도 모른다. 
물론 원래는 달라서는 안 되는 것이다. 범죄자의 '묻지 마'식 폭주를 만나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나와 이제 곧 췌장의 병 때문에 죽게 될 그녀의 식사에 가치의 차이 따위,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명백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죽은 다음이리라. 

- "그건 자신의 사랑에 책임지지 못하는 바보들이나 하는 말이야."
열기 넘치는 말투와 표정에서 그녀의 드센 기가 느껴졌다. 나는 주춤 몸을 뒤로 물렸다. 지나치게 뜨거운 건 영 질색이다.
참고로, 그녀의 생김새는 과거에 남자친구가 세 명이었다는 말을 듣고도 충분히 납득 가능한 정도다. 화장기는 적고, 모두가 뒤돌아볼 미인까지는 아니어도 이목구비에 화사함이 있었다. 

- 새 접시를 들고 조금쯤은 달달한 것도 먹어볼까 하고 가게 안을 산책하는데 다행스럽게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고사리 녹말떡이 눈에 띄어서 얼른 접시에 담고 옆의 흑설탕 꿀을 끼얹었다. 예술적으로 흘러내리는 꿀을 황홀하게 바라보고, 내친김에 뜨거운 커피도 한잔 따랐다. 

(리뷰자 주 : 와라비모찌를 말하는 것 같다.)

- 그저 순수한 마음에서, 나 같은 사람과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보내도 괜찮겠느냐,라는 의미에서 물어본 것이었다. 나 같은 사람보다 그녀를 훨씬 더 소중히 아껴주는 절친과 함께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가치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나로서는 드물게도 배려와 동정이 담긴 질문이었다.
"아이, 됐어! 교코가 엄청 감상적이거든. 그런 얘기하면 틀림없이 나 만날 때마다 눈물바람을 할 거야. 그런 시간, 즐겁지 않잖아? 나는 나 자신을 위해 마지막 아슬아슬한 순간까지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하자고 이미 결심했어." 
내가 뿌린 찬물을 의지의 힘으로 튕겨내는 듯한 그녀의 말과 표정. 더 이상 이 일에 대해서는 내 입으로 아무 말도 하지 말자고 생각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단 한 가지, 어제부터 마음속에 잠복해 있던 의문이 그녀의 의지에 촉발되어 불쑥 떠올랐기 때문에 그것만은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저기, 너 말이야."
"응, 뭔데?"
"정말 죽어?"
그녀의 표정이 일순 사라졌다. 그 표정만으로도 이런 질문은 안 하는 게 좋았을 걸, 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후회의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그녀의 표정은 다시 평소처럼 눈이 핑글핑글 돌게 변화했다.
처음에는 웃음, 그다음에는 난감함, 쓴웃음, 화남, 슬픔, 그리고 다시 난감한 얼굴로 되돌아왔다가 마지막에는 내 눈을 똑바로 마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응, 죽어."
"... 아, 그렇구나"
그녀는 평소보다 눈을 더 많이 깜빡거리며 웃음이 깊어졌다.
"죽어. 벌써 몇 년 전부터 알고 있었어. 요새는 의학이 발전해서 증세가 거의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남은 수명도 길어졌어. 하지만 틀림없이 죽어. 앞으로 일 년을 버틸지 말지 모른다는 선고를 들었어."
딱히 알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았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똑똑히 내 고막에 와 박혔다. 

- "사이좋은 클래스메이트, 너 말고는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 너는 분명 나한테 진실과 일상을 부여해 줄 단 한 사람일 거야. 의사 선생님은 내게 진실밖에는 주지 않아. 가족은 내 말 한마디 한 마디에 과잉반응하면서 일상을 보상해 주는 데 필사적이지. 아마 친구들도 사실을 알고 나면 그렇게 될 거야. 너만은 진실을 알면서도 나와 일상을 함께 해주니까 나는 너하고 지내는 게 재미있어." 
마음 깊은 곳에서 바늘에 찔린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나는 그녀에게 그런 것을 부여해주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만일, 그녀에게 뭔가를 부여해주고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단순한 도피일 것이다. 

- 맛있다는 듯 포크로 초콜릿 케이크를 입 안 가득 떠 넣는 그녀는 역시 이제 곧 죽을 사람 따위로는 보이지 않았다.
깨달았다.
모든 인간이 언젠가 죽을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 나도, 범인에게 살해된 피해자도, 그녀도, 어제는 살아 있었다. 죽을 것 같은 모습 따위, 내보이지 않은 채 살아 있었다. 아, 그렇구나. 그게 바로 어떤 사람이든 오늘 하루의 가치는 모두 다 똑같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 내가 생각에 잠겨 있자 그녀는 넌지시 타이르듯이 말했다.

"그렇게 심각한 표정 하지 마. 어차피 너도 죽을 거야. 나중에 천국에서 만나자."
"응, 그건 틀림없지."
그녀의 삶에 대해 감상적이 되는 것은 단순한 우월감일 뿐이다. 그녀보다 내가 먼저 죽는 일은 절대로 없다고 확신하는 오만함일 뿐이다.
"그러니까 나처럼 덕을 쌓으면서 살도록 해."

- 집으로 가는 길, 둘이서 터벅터벅 국도 가의 인도를 걸으며 이미 중천은 한참 지난 햇볕을 받았다.
"더운 것도 괜찮네. 마지막 여름일지도 모르니까 마음껏 즐겨야지. 다음에는 뭘 해볼까? 여름이라면 가장 먼저 뭐가 떠올라?"

"수박바?"
그녀는 웃었다. 그녀는 항상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수박이 아니고?"라고 말하고 웃고, "그밖에는?"이라고 말하고 웃고.
"빙수."
"둘 다 얼음이잖아!"
"넌 여름이라면 뭐가 떠오르는데?"
"나는 역시 바다라든가 불꽃놀이라든가 축제? 그리고 한여름의 아방튀르!"
"황금이라도 찾으러 가려고?"
"황금? 왜?"
"아방튀르, 즉 어드벤처, 그건 모험이라는 뜻이잖아."

- 그녀는 일부러인 듯한 한숨을 내쉬고 양쪽 손바닥을 위로 향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처구니없다는 뜻의 제스처겠지만, 이보다 더 짜증나는 몸짓이 또 있을까.
"모험도 보통 모험이 아니지. 여름이고 모험이라면 뭔지 뻔하잖아?"
"꼭두새벽에 일어나 장수풍뎅이를 잡으러 간다든가?"
"알았어, 알았어, 나랑 친한 클래스메이트는 바보야."
"어느 특별한 계절이면 머릿속이 온통 연애에 지배되는 쪽이 더 바보겠지."
"어라. 다 알고 있잖아? 어휴. 나참."
얼굴에 땀이 송송 맺힌 채 이쪽을 노려보는 바람에 시선을 쓱 돌려버렸다.

- "한여름의 아련한 사랑, 한여름 밤의 실수. 어렵사리 여고생도 되었겠다, 그런 추억 한두 가지쯤은 경험해도 좋지 않을까 싶은데."
아련한 건 또 모르겠지만, 실수라는 건 안 되는 거 아닌가?
"이렇게 살아있는데 사랑도 해봐야지."
"지금껏 살아오면서 연인이 세 명이나 있었다면 이제 충분한 거 아니야?"
"에이, 마음이란 숫자로 말해질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얼핏 심오한 것 같지만 찬찬히 생각해 보면 의미가 모호한 얘기네. 간단히 말해서 너는 아직 연인을 만들어볼 마음이 있다는 거지?"
무심코 내뱉은 말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다시 농담으로 대꾸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녀는 돌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우뚝 멈춰 섰다. 미처 예고를 받지 못한 나는 추진력대로 그녀보다 다섯 걸음이나 앞으로 가버린 참에야 겨우 그녀의 행동의 의미를 파악해 보려고 뒤를 돌아보았다. 백 엔짜리 동전이라도 발견했나 하고 대충 생각했더니 우뚝 멈춰 선 그녀는 내 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두 팔을 등 뒤로 맞잡고 긴 머리칼을 바람에 날리며. 

- "... 연인을 만들어볼 마음이 있다고 하면 어떻게든 해줄래?"

이쪽을 시험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마치 억지로 의미심장한 표정을 만들어낸 듯한.
그 표정의 의미도, 그녀의 말의 의미도, 인간관계가 심히 부족한 나로서는 잘 알 수 없었다.

 

- "우메가에 떡 두 개, 그리고 나는 녹차. 너도 녹차 괜찮아?"

고개를 끄덕이자 할머니는 싱글벙글 웃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시원한 물을 마시자 몸의 열기가 쭉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손가락 끝까지 시원함이 퍼져나가서 상쾌했다.
"저 화과자를 우메가에 떡이라고 하는구나."
"응, 여기 명물이야. 여행 잡지에 실려 있었어."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하고 전혀 기다리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는 빠른 속도로 빨간 접시에 담긴 우메가에 떡과 녹차 두 잔이 나왔다. 가격은 선불이라고 해서 둘이 반반씩 점원에게 동전을 냈다. 

가게 안에서 직접 구워주는 둥글고 하얀 화과자는 손에 들어보니 바삭바삭하고 한 입 베어 물자 달콤하고 은은한 소금맛 팥앙금이 듬뿍 흘러나와 그야말로 최고의 맛이었다. 녹차와도 아주 잘 어울렸다.

- "우와, 맛있다! 어때, 나 따라오길 잘했지?"
"뭐, 약간은."
"얘가 도통 솔직하지를 못하다니까. 그런 식이면 내가 없어지고 난 뒤에 또다시 외톨이 된다?"
아무려나 상관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여태까지 살아왔다. 나로서는 지금의 이 상황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그녀가 없어진다면 다시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어느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고 소설의 세계에 파묻혀 살아간다. 그런 나날로 돌아간다. 결코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녀가 그걸 이해해 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 납작 엎드려 절하는 건 면했지만, 역시 내 주제에 맞지 않는 분위기에 내심 불안했던 나는 프런트 수속은 전적으로 그녀에게 맡기고 세련된 로비의 소파에 앉아 얌전히 기다리기로 했다. 소파는 편안하고 속 깊고 다정했다.
그녀는 익숙한 듯 당당히 프런트로 향해 오만하게 호텔 직원들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겸손한 어른은 못 되겠네,라고 무심코 생각하다가 아, 그러고 보니 어른이 되기 전에 죽는구나,라는 게 퍼뜩 생각났다. 
명백히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페트병 차를 마시며 나는 그녀가 체크인하는 모습을 멀찌감치 옆 방향에서 지켜보았다.
프런트에서 응대에 나선 직원은 호리호리하고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그야말로 호텔 직원 같은 분위기의 젊은 남자였다. 
호텔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이래저래 마음고생이 많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려니, 그녀는 서류에 뭔가 기입하고 있었다.  

 

- 이런 식의 스토리에 이미 나 자신부터가 식상했고, 만일 내 마음속을 읽어내는 사람이 있다면 앞으로의 전개는 너무 뻔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어떻든 나는 그녀에게 떠밀려 결국 한 방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다. 
다만 나를 의지가 취약한, 이성과 한 방을 쓰는 것을 널름 허락하는 그런 연파(軟派)인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줬으면 한다. 나와 그녀 사이에는 말하자면 약간의 금전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 점을 지적하고 나섰을 때, 나는 그녀에게 나만 따로 다른 곳에 가서 자겠다는 주장도 했었다. 
아, 내가 지금 누구에게 이런 구구한 변명을 하는 건가.

 

- 그렇다, 변명. 강경한 자세로 그녀와 별도의 행동을 취한다,라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녀도 억지로 붙잡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의지에 따라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유는?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나는 결국 그녀와 한 방을 쓰게 되었다. 하지만 양심에 거리낄 일이라고는 단 한 가지도 없었다. 이건 내 평생을 걸고 단언할 수 있다. 우리는 결백했다. 

 

- 하얀 천장에 의식까지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된 것인가.
다 알았던 일, 이미 깨달았던 일, 벌써 이해했던 일.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눈을 돌려 외면하고 있었다.
그녀,라는 현실.
실제 물질을 눈앞에 들이댄 것만으로 나는 잘못된 감정에 사로잡히려 하고 있었다. 괴물에게 마음을 물어 뜯기려 하고 있었다. 왜?
답이 나오지 않는 생각을 빙글빙글 돌리는 사이에 눈까지 돌아갔는지 나는 침대에서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

- "사이좋은 클래스메이트도 목욕해야지? 거품 욕조, 진짜 좋아."

"그럴까? 행여 들여다볼 생각은 하지도 마. 나, 욕실에서는 인간 가죽을 벗어놓기로 했으니까."
"햇볕에 새까맣게 탔나?"
"응, 그렇다고 해두자."
그녀가 빌려준 돈으로 구입한 유니클로 옷을 봉투째 들고 나는 욕실로 갔다. 물기 자욱한 그곳에는 달콤한 향기가 가득해서, 현명한 나는 단순한 선입견 탓이라고 굳게 믿기로 했다.

- 혹시나 해서 문의 걸쇠를 단단히 잠근 뒤에 옷을 벗고 샤워를 했다. 머리를 감고 몸을 씻고 욕조에 담긴 뜨거운 물에 뛰어들었다. 그녀의 말대로 거품 기능을 켜자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이 몰려왔다. 마음속에 남아있던 괴물의 손톱자국이 싹싹 덧칠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목욕은 위대하다. 나는 앞으로 최소한 십 년 동안은 맛볼 일이 없을 것으로 생각되는 고급 호텔의 욕실을 아주 오래오래 만끽했다. 

- 훈훈한 기분으로 앉아 있으려니 그녀는 편의점 봉투를 바닥에 내려놓고 그 안에서 병을 꺼내 두 개의 컵에 따랐다. 컵이 반절쯤까지 호박색 액체로 채워지자 다시 다른 병에서 투명한 탄산계 음료를 넘치기 직전까지 더 채웠다. 두 가지 액체가 섞여 컵 안에서 수수께끼의 음료가 만들어졌다.
"이건 뭐야?"
"매실주와 소다수 칵테일. 이 정도 비율이면 되겠지?"
"내장탕 식당에서부터 생각했었는데, 너는 고등학생 신분에 자꾸만 술을..."
"괜히 폼 재려는 거 아니야. 순수하게 술을 좋아하는 거지. 안 마셔?"
"... 별 수 없네, 함께 해드려야지.”

- 컵에 남실남실 넘치려는 매실주를 흘리지 않게 입가로 가져왔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은 상쾌한 향기와는 달리 꽤 달달했다.
선언했던 대로 그녀는 그야말로 맛있다는 듯 매실주를 마시며 과자봉지 몇 개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포테이토칩은 어떤 맛을 좋아해? 나는 콩소메."
"소금맛이 정석이지."
"어휴, 우린 진짜 방향성이 안 맞는다!"

- 저녁식사 때 어머니가 깨워줘서 야키소바를 먹으며 텔레비전을 봤다. 곧잘 '집에 돌아올 때까지가 소풍'이라고 말하지만, 집에 돌아와 '평소의 식사를 할 때까지가 소풍'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일상으로 되돌아왔다.
주말 이틀 동안 그녀에게서는 아무 연락도 없었다. 나는 늘 하던 대로 내 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점심때는 혼자 슈퍼에 나가 아이스바를 사 오기도 했다. 별다를 것 없는 이틀을 보내고서야 일요일 밤에 나는 깨달았다. 
그녀에게서 연락을,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

- 월요일, 학교에 도착하자 내가 그녀와 장거리 여행을 했다는 이야기가 우리 반에 쫙 퍼져 있었다.
그것과 관계가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내 실내화가 쓰레기통 속에서 발견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깜빡해서 거기에 빠뜨린 건 아닌 것 같았다.

- 그녀는 둘러싼 클래스메이트들이 소곤소곤 숙덕숙덕하는 가운데, 나는 일찌감치 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중단했다. 나와 관계없는 일이라면 뭐라고 떠들건 상관없었고, 나와 관계가 있는 일이라면 분명 시답잖은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고본 책을 펼치고 문학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책을 좋아하는 자의 집중력은 잡음 따위에 무너지지 않는다.
... 라고 생각했으나 아무리 책을 좋아해도 누군가 말을 걸어오는 데는 역시나 책의 세계에서 질질 끌려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 "그렇게 어처구니없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지 말아 줘. 아, 그러면 얘기를 다시 되돌리겠는데, 내가 지난번에 책은 전혀 읽지 않는다고 말했었잖아."
"말했었지, 만화책만 읽는다고."
"응. 근데 거기서 생각난 게 있어. 나는 기본적으로 책은 읽지 않지만 어렸을 때부터 딱 한 권, 좋아한 책이 있어. 아빠가 사다준 건데 어때, 관심 있어?"
"그건 나로서는 드물게도 관심이 많지. 좋아하는 책이라는 건 그 인간성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니까. 너 같은 사람이 어떤 책을 좋아할지 궁금하다. 어떤 책이야?"
그녀는 잘난 척 잠시 뜸을 들인 다음에야 대답했다.
"혹시 <어린 왕자>라고, 알아?"
"생텍쥐페리?"
"오, 아네? 외국 번역서라서 대단하신 나의 클래스메이트도 이건 모를 거라고 나 혼자 좋아했는데, 에이, 헛물켰네.”
입을 툭 내밀고 그녀는 힘이 빠진다는 듯 등받이에 몸을 맡겼다. 다시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어린 왕자>가 유명한 책이 아니라고 생각하다니, 네가 얼마나 책에 관심이 없는지 실감이 난다."

- "오, 말귀를 척척 알아듣네? 너, 어디 아파?"
"너한테서 배웠어, 풀잎 배는 대형선박에 맞서봤자 의미가 없다는 거."
"여전히 이따금 뭔 말인지 모를 소리를 하는구나, 너는."
비유 표현에 대해 그녀에게 조곤조곤 설명해주고 있으려니 도서실 선생님이 돌아왔다. 우리는 여느 때처럼 선생님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잠시 나누며 차와 과자를 대접받고, 내일부터 2주일 동안 학교에 나와 보충수업을 해야 하는 불우함을 탄식한 다음에 그만 하교하기로 했다. 

- 밖으로 나오자 오늘 중으로는 도저히 걷힐 것 같지 않은 두툼한 구름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비 오는 날이 싫지는 않았다. 비가 가진 폐쇄감이 내 마음에 잘 어울리는 날들이 많아서 비에 대해 부정적인 마음은 없었다.
"난 비 오는 날, 너무 싫어."
"정말 너하고는 기분의 방향성이 맞지를 않는다."
"비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
있어, 그런 사람, 여기.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보다 앞서서 걸어갔다. 그녀의 집이 어딘지 정확히는 알지 못했지만 우리 집과 반대 방향이라는 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교문을 나와 평소와는 반대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 "가본 적은 없지만 똑같은 고등학생 방이니까 별다를 것도 없다는 가설을 세워놨어."
"하긴 당연한 얘기다. 내 방은 아주 심플해, 교코는 방에 록밴드 포스터를 붙여둬서 남학생보다 더 남자 같거든. 네가 마음에 든다고 했던 히나의 방은 봉제인형 같은 귀여운 액세서리가 가득해. 아참, 이다음에 히나하고 셋이서 어딘가 놀러 갈까?" 
"고맙지만 사양할게. 나는 예쁜 애 앞에서는 긴장해서 말도 못 하니까."
"그렇게 말해서 나는 예쁘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려는 속셈이겠지만, 소용없어, 네가 나는 세 번째로 예쁘다고 털어놓은 그날 밤을 나는 잊지 않았으니까."
"내가 클래스메이트의 얼굴을 세 명밖에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도 모른 채 말이지."
뭐, 이건 좀 지나친 말이었지만 나는 클래스메이트의 얼굴을 모두 다 알지는 못한다. 남과 관계를 맺는 일이 없는 나는 남의 얼굴을 외울 능력 따위는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일찌감치 퇴화된 것이리라. 선택지를 모두 다 제시하지 않은 레이스는 무효일 것이다. 

- 이유는 알지 못한다. 왜일까.
하지만 그녀를 만나고서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나는 그녀의 나쁜 장난에 진지한 분노를 느꼈다.
자신이 꾸민 짓의 창피함을 털어내려는 듯 줄줄이 늘어놓는 그녀를 표적으로 분노가 내 내장 안에서 조금씩 형체를 갖추면서 더 이상 소화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나를 대체 뭐로 보는 건가. 모욕당했다고 느꼈고, 사실 그랬을 것이다.
이런 게 인간관계라고 그녀가 말한다면 나는 앞으로 어느 누구와도 어울리는 일 없이 살아갈 것이다. 다들 췌장에 병이 들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아니, 내가 먹어주자. 유일하게 올바른 내가 모두의 췌장을 먹어주자.
감정과 행동은 의외로 간단히 연결되었다.

- 그녀는 자신의 몸이 처한 상황을 깨닫고 잠시 버둥거렸지만 이윽고 포기한 채 자신의 얼굴에 그림자를 짓게 한 내 얼굴을 보았다. 여전히 나는 나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 어떻게 하면 만족스러웠을까. 나 스스로 나를 알 수 없었다. 혹은 나는 이미...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표정이 풍부한 그녀의 얼굴이,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온 삶에서 습득한 얼굴이, 언젠가처럼 핑글핑글 바뀌었다.
그녀는 웃었다.

- 그의 공격은 정당방위라고 할 수도 있다. 다소 과잉한 구석이 있었지만 그가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는지는 나로서는 짐작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 몸을 일으켜 그에게 반격을 가하는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우뚝 서 있는 그는 아직 혈기가 가시지 않은 것 같았다. 어떻게든 그를 진정시킬 방법이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을 잘못했다가는, 아니, 잘못하지 않더라도 자칫하면 불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될 수 있었다. 그의 감정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선을 뛰어넘게 한 것은 분명 나였으니까. 
그를 쳐다보았다. 어쩌면 그가 나보다 훨씬 더 옳은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분명 그는 진심으로 그녀를 좋아하는 것이다. 방법이 약간 잘못되었을 뿐, 아니, 그 방법이 좀 문제였지만, 그래도 올곧은 사랑을 그녀에게로 향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녀의 시간을 빼앗은 나를 미워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어떤가. 만일 그녀가 일 년 뒤에 죽는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나는 그녀와 식사할 일도 여행할 일도, 집에 가서 어색한 상황을 만들 일도 없었다. 그녀의 죽음이 우리를 이어주었다. 하지만 죽음 따위, 누구에게라도 찾아올 운명이다. 그러니까 나와 그녀가 만난 것은 우연일 뿐이다. 우리가 시간을 함께 보낸 것은 우연일 뿐이다. 의지나 감정에 따른 순수성이 나에게는 전혀 없었다. 

- 나는 내내 진심으로 사과했다.

- 중간에 빗속에 버려두고 온 그의 일이 마음에 걸려 그 얘기를 꺼냈다. 우리 반 학급위원은 역시 그녀의 전 남자친구였다. 나는 빗속에서 생각했던 것을 솔직하게 말했다. 나와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이를테면 그 친구처럼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게 더 좋을 것이다. 우리는 단지 그날 병원에서 우연히 만난 것뿐이니까.
그 말에 그녀는 나를 꾸짖었다.
"아니, 우연이 아냐. 우리는 모두 스스로 선택해서 여기까지 온 거야. 너와 내가 같은 반인 것도, 그날 병원에 있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야. 그렇다고 운명 같은 것도 아니야. 네가 여태껏 해온 선택과 내가 여태껏 해온 선택이 우리를 만나게 했어. 우리는 각자 자신의 의지에 따라 만난 거야."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가벼운 작별인사를 하고 나는 돌아가기로 했다. 교코가 명백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에 시선을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했다. 맹수와 눈을 마주쳐서는 안 된다고 간밤의 동물 생태 프로그램에 나왔었다.
하지만 전혀 별개의 동물로서 공연히 간섭하는 일 없이 헤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나의 희망적 관측을 무너뜨리며 침대 위의 그녀가 엉뚱하기 짝이 없는 말을 내뱉었다.
"아참, 사이좋은 클래스메이트, 지난번에 빌려간 우리 오빠 티셔츠와 바지는?"
"크흑..."
그때만큼 나의 깜빡하는 증세를 저주한 적도 없다. 가방 속에 지난번에 빌린 그녀의 오빠 옷을 챙겨 왔고 꼭 돌려줄 생각이었는데 그만 깜빡 잊고 있었다. 
하지만 하필 그걸 지금 말할 건 또 뭔가. 
몸을 돌리자 그녀의 빙글거리는 얼굴과 침대 쪽으로 이동하던 교코의 경악하는 얼굴이 동시에 보였다. 나는 당황한 것을 최대한 들키지 않도록 천천히 가방에서 옷이 담긴 비닐봉투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고마워. 잘 입었다."

- 나는 어이가 없었다. 뭐가 특히 어이가 없었는가 하면, 우리 반 대부분의 아이들이 내 쪽을 쳐다보며 스토커라느니 조심해야 한다느니 숙덕거리면서 그 소문을 굳게 믿고 있다는 점이었다.
다시 한번 말한다. 나는 진심으로 어이가 없다. 어째서 그들은 다수파의 생각이 옳다고 굳게 믿어버리는가. 아마 그들은 서른 명쯤만 모이면 아무렇지도 않게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들에게 정당성이 있다고 믿기만 하면 어떤 악한 짓이라도 서슴없이 저지르지 않을까. 그것이 인간성이 아니라 기계적인 시스템이라는 것도 알지 못한 채. 

- 그래서 자칫 얘기가 점점 확대되어 나에 대한 괴롭힘이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던 것인데, 그건 내 자의식 과잉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그녀이지 스토킹을 하는 내가 아니었다. 아, 물론 스토킹을 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에게 뭔가 행동을 취한다는, 아무 이익도 안 되는 귀찮은 짓은 할 필요가 없었다. 단지 매일 등교할 때마다 눈을 흘기는 교코만은 순수하게 관심 혹은 적의를 표하는 것이라서 그건 그야말로 무서웠다. 

- 그녀는 내 인간성의 핵심을 꿰뚫어 보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물어본 건 아니지. 하지만 틀림없이 그래."
"그런 건 본인들에게 물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거야. 그냥 너만의 상상이잖아? 꼭 맞는다고는 할 수 없어."
"맞든 틀리든 상관없어. 어차피 그 애들과 함께할 것도 아니고, 그냥 내 상상이니까. 내가 그렇게 생각한 것뿐이라고. 내 이름을 부를 때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상상하는 게 내 취미야."
"뭐야, 그 자기 완결은? 자기 완결 타입의 사람이었어?"
"응, 자기 완결의 나라에서 온 자기 완결 왕자야. 받들어 모시도록 해."
그녀는 김 빠진 얼굴로 귤을 와구와구 먹었다. 그녀에게 내 가치관을 이해해 달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나와는 정반대의 인간이니까.

- 그녀는 타인과 함께 어울리며 살아온 인간이다. 표정이나 인간성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에 반해 나는 가족 이외의 모든 인간관계를 머릿속의 상상으로만 완결시켜 왔다. 사람들이 나를 좋아한다는 것도 나를 싫어한다는 것도 모두 나만의 상상이고, 내게 위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나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타인과의 관계는 처음부터 포기한 채 살아왔다. 그녀와는 정반대로, 주위의 어느 누구에게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사람이다. 그것으로 괜찮으냐고 굳이 묻는다면 좀 난처하긴 하지만.

- "땡, 틀렸네요. 전에는 그렇다고 생각했었지."
그녀의 독특한 말장난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고 생각했었다,라는 것은 즉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이 틀린 것을 깨달았다는 뜻인가. 아주 조금, 흥미가 생겼다.
"그러면 이제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그걸 말해버리면 인간관계가 재미없어지지. 상대가 자신에게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정도 연애도 재미있는 거야."
"역시 너는 그런 식의 사고방식을 가졌구나.”
"어? 전에도 말했던가, 이 얘기?"
진짜로 잊어버렸는지 그녀는 이상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워서 나는 웃어버렸다. 나는 제삼자의 눈으로 타인을 향해 순순히 웃어주는 나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 틈에 이런 인간이 되었나 하고 의아했고, 한편으로 감탄했다.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은 틀림없이 눈앞의 그녀였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꽤 많이 변해버렸다.

- 웃는 나를 보고 그녀는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 군이 진짜 좋은 사람이라는 거, 우리 반 애들에게도 다 알려주고 싶다."
온화한 그녀의 목소리. 자신을 침대에 쓰러뜨린 자에게 잘도 그런 말을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나는 평생 그것을 후회할 텐데.
"다른 애들은 어찌 됐든 일단 교코에게는 해명해 줘. 너무 무서워."

"벌써 말했지. 근데 걔가 나를 너무 걱정해 주는 성격이라 네가 나를 갖고 논다고 생각한다니까."
"너의 정보 전달능력에 문제가 있는 모양이지. 교코는 머리도 좋아 보이던데."
"뭐야, 교코를 엄청 칭찬하네? 혹시 내가 죽은 뒤에는 교코를 갖고 놀 생각? 마음 착한 나도 이건 못 참아."
그녀의 오버 리액션을 나는 귤을 까먹으며 썰렁한 얼굴로 쳐다봤다. 그녀가 별 재미없는 얘기였다는 것을 깨달은 듯 침대에서 앉음새를 바로잡는 바람에 나는 다시 웃음이 터졌다. 

- 기다려야 하는 여학생을 데려오지 않은 덕분에 책 구경에 시간이 아무리 많이 걸려도 문제는 없었다.
나는 자랑할 만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지만 책을 읽을 때의 집중력만은 자신이 있다. 이를테면 껌을 씹겠느냐고 말을 걸어온다거나 이미 몸에 밴 수업 종이 울리지 않는 한, 주위의 움직임과는 일절 상관없이 언제까지라도 나 혼자만의 세상에서 책을 읽을 수 있다. 만일 내가 초식동물이었다면 아마도 딴 세상에 푹 빠져서, 한발 한발 다가오는 육식동물의 기척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채 금세 잡아먹혔을 것이다. 
그래서 문고본 책 속의 단편 하나를 선 채로 다 읽고 한참 만에야 여고생이 질병으로 목숨을 빼앗기는 이쪽 세상으로 돌아왔을 때,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바로 옆에 사자가 서 있었다.
펄쩍 뛸 만큼 놀라서 온몸이 오그라들었다. 교코는 큼직한 가방을 어깨에 메고 손에는 문고본 책을 펼쳐 들고 있었다. 하지만 의식은 명백히 내 숨통을 물어뜯으려 하고 있었다. 
혹시 발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빠져나간다면 이 사자에게서 도망칠 수 있지 않을까. 나의 그런 너무도 희박한 기대감은 즉각 산산조각이 났다.

- "네 장례식은 꼭 도모비키 날로 잡으면 좋겠다."
"아니, 내 친구들은 잘 살아야 하니까 그건 안 돼."
"근데 나라면 함께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원고지에 써서 제출해 줄래? 아, 그나저나 벚꽃이 봄에 피는 이유라고 했던가? 원래 그런 종류의 꽃이기 때문인 거 같은데?"
내가 지극히 당연한 말을 하자 그녀는 몹시 한심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레몬맛 아이스바로 그녀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내가 부루퉁한 것을 파악했는지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말하려고 하는 바를 설명했다.
"좋아, 말해줄게. 실은 벚꽃은 꽃이 떨어지고 그 석 달쯤 뒤에 다음 꽃의 싹이 생겨나. 하지만 그 싹은 일단 잠드는 거야, 날씨가 다시 따뜻해지기를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피어나려고. 즉 벚꽃은 자신이 피어나야 할 때를 지그시 기다린다는 거야. 어때, 멋있지?" 

- 그녀의 말을 듣고 나는 꽃의 습성에서 의지를 감지하는 것은 지나치게 억지스러운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실은 꽃가루를 날라줄 벌레나 새를 기다리는 것뿐인데,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나는 굳이 그 얘기는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약간 다른 시점에서의 의견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렇군. 네 이름으로 딱 어울린다."
"아, 예뻐서? 부끄럽네."
"그게 아니라 봄을 골라 피는 꽃의 이름이, 만남이나 사건을 우연이 아니라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너의 이름으로 딱 맞는다는 얘기야."
내 의견에 그녀는 일순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였고, 이어서 흐뭇한 듯 "고마워"라고 말했다. 딱 맞는다는 말도 잘 어울린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칭찬하는 말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가 그토록 흐뭇해하는 이유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 "????? 군의 이름도 너한테 딱 맞아."
"... 그런가?”
"이거 봐, 죽음이 옆에 있잖아."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면서 나와 자신을 손끝으로 번갈아 가리키고 그렇게 농담을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그때까지의 대화를 모두 다 뛰어넘어, 역시 오늘 그녀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그녀는 수박바를 베어 먹으며 평소처럼 언제까지고 살아있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건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농담은 뭐랄까. 마치 여름방학이 끝나는 날까지 미처 다하지 못한 방학숙제의 답을 급하게 찾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렇게 염려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은 것은 그녀에게서 엿보이는 희미한 초조함이 애초에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일 년밖에 남지 않은 생애. 애초에 그녀처럼 초연한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날 그녀에게서 감지한 위화감을 단순히 나의 주관이 만들어낸 지극히 사소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 하지만 그다음 토요일 오전에 다시 병실에 불려 갔을 때, 내가 품은 작은 위화감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내 눈앞에 나타났다.
정해준 시간에 병실로 찾아가자 그녀는 금세 내 존재를 알아보고 내 이름을 부르며 웃었다. 하지만 그 웃는 얼굴이 아주 조금 어색했다.
그녀의 풍부한 표정은 마치 마음속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처럼 매우 긴장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조심성 없이 불길한 예감을 품었다.

- "산다는 것은..."
"아마도 나 아닌 누군가와 서로 마음을 통하게 하는 것. 그걸 가리켜 산다는 것이라고 하는 거야."
아, 그런가.
나는 그걸 깨닫고 소름이 돋았다.
그녀의 존재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말이, 시선이며 목소리, 그녀의 의지의 열기, 생명의 진동이 되어 내 영혼을 뒤흔드는 것 같았다.
"누군가를 인정한다, 누군가를 좋아한다. 누군가를 싫어한다.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즐겁다,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짜증 난다. 누군가와 손을 잡는다. 누군가를 껴안는다, 누군가와 스쳐 지나간다... 그게 산다는 거야. 나 혼자서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없어. 누군가를 좋아하는데 누군가는 싫어하는 나, 누군가와 함께하면 즐거운데 누군가와 함께하면 짜증 난다고 생각하는 나, 그런 사람들과 나의 관계가,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산다는 것이라고 생각해. 내 마음이 있는 것은 다른 모두가 있기 때문이고, 내 몸이 있는 것은 다른 모두가 잡아주기 때문이야.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나는 지금 살아있어. 아직 이곳에 살아있어. 그래서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에는 큰 의미가 있어. 나 스스로 선택해서 나도 지금 이곳에 살아있는 것처럼."

- 나의 클래스메이트 야마우치 사쿠라는 주택가 골목길에 쓰러져 있는 모습이 인근 주민에게 발견되었다.
발견 후 곧바로 긴급하게 병원에 실려 갔으나 필사적인 치료도 소용없이 그녀는 숨을 거두었다.
뉴스 방송의 캐스터는 무감정하게 사실만을 읽어 내려갔다.
내내 그냥 들고만 있었던 젓가락을 나는 조심성 없이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발견되었을 때, 그녀의 가슴에는 시판되는 잭나이프가 깊숙이 꽂혀 있었다.
그녀는 얼마 전부터 세상을 소란스럽게 했던 묻지 마 사건의 살인마에게 희생되었다.
어디 사는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는 그 살인마는 곧바로 체포되었다.

- 그녀가 죽었다.

- 세상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았다.
이 상황에 이르러서도 나는 여전히 만만하게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일 년이라는 시간이 남겨져 있다고만 생각했다.
어쩌면 그녀도 마찬가지였는지 모른다.
최소한 나는 어느 누구에게나 내일이 보장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었다.
나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은 그녀에게는 당연히 내일이 있는 것처럼 생각했었다.
아직 시간이 있는 나의 내일은 알 수 없지만 이미 시간이 없는 그녀의 내일은 약속되어 있다고만 생각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인식이었던가.
나는 얼마 남지 않은 그녀의 생명만은 이 세상이 잘 봐줄 거라고 굳게 믿었다.
물론 그런 일은 없다. 없었다.
세상은 차별하지 않는다.
건강한 몸을 가진 나 같은 인간에게도, 병을 앓아 머지않아 사망할 그녀에게도, 그야말로 평등하게 공격의 고삐를 풀지 않는다.
우리는 잘못 생각했다. 바보였다.
하지만 어느 누가 잘못한 우리를 비웃을 수 있을까.
마지막 회가 정해진 드라마는 마지막 회까지는 끝나지 않는다. 끝이 정해진 만화는 끝날 때까지는 끝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이 예고된 영화는 마지막 장면까지는 끝나지 않는다.
모두가 그것을 믿으며 살아왔으리라. 그렇게 배워왔으리라.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소설은 마지막 페이지까지는 끝나지 않는다,라고 믿었다. 그녀는 또 웃을까, 소설을 너무 지나치게 많이 읽었다고?
웃음을 사도 상관없다. 마지막까지 꼭 읽고 싶었다. 그리고 읽을 예정이었다. 나머지 몇 페이지를 백지로 남겨둔 채 끝나버린 그녀의 이야기.
전조도 복선도 오독(誤讀)도 그냥 내팽개쳐둔 채, 이제는 그 어떤 것도 알아내는 게 불가능하다. 그녀가 꾸민 밧줄 장난의 결말도. 그녀의 비장의 마술 트릭도. 그녀가 사실은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도. 이제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 ...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사망한 뒤, 나는 그렇게 체념해 버렸다. 하지만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장례식이 끝나고 그녀가 완전히 유골이 된 다음에도 나는 그녀의 집에 가지 않았다. 
하루하루 내 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결국 내가 그녀의 집에 찾아갈 용기와 이유를 발견하기까지 열흘쯤의 시간이 필요했다. 
여름방학이 끝나기 직전에 나는 생각해 냈다.
그녀의 스토리의 남은 몇 페이지, 그걸 알아내는 게 가능한 유일한 방법이 있다는 것을.

- "다행이다, 다행이야... 네가 이렇게 와줘서 정말 다행이야."

점점 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멍하니 눈물의 행방을 지켜보았다.
"잠깐만 기다려라."
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갔다. 혼자 남겨진 나는 어머니의 눈물과 말의 의미를 생각했다. 아무것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 [20xx년 12월 4일
요즘 날씨가 춥다. 병을 알고 나서 많은 생각을 했지만, 그중 한 가지는 병이 든 나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것. 그래서 투병이 아니라 공병(共病)이라고 내 일기에 이름을 붙였다.] 


- 며칠 간격으로 그녀의 일상에서 일어난 일들이 기록되었다. 그렇게 몇 년 분량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 기간의 글은 짤막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알고 싶은 것과는 그리 관계가 없다고 생각해서 우선은 훑어보는 정도로만 읽기로 했다. 마음에 걸리는 글도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 [그래서 네가 해왔던 것처럼 내가 혼자 상상할 것이 두려웠다든가. 네가 부르는 내 이름에 의미가 붙는 게 두려웠다든가.
머지않아 잃게 되리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 나를 '친구'나 '연인'으로 만드는 게 두려웠다든가.
어때, 내 생각이 정확히 맞혔다면 내 무덤 앞에 매실주라도 한잔 따라주도록 해! (웃음)
하지만 두려워하지 않아도 괜찮아.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사람과 사람은 잘 헤쳐나갈 수 있을 테니까. 지금까지의 너와 나처럼.]


- [아차, 네가 두려워한다고 자꾸 말했지만, 그래서 너를 겁쟁이라고 비난하는 것 같지만, 결코 그런 건 아니야.
나는 너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나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대단한 사람.

좋아, 내친김에 네가 지난번에 했던 질문에도 대답해 줄게. 어때, 서비스가 좋지?
나는 너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거.
엇, 별로 알고 싶지 않다고?(웃음) 그렇다면 읽지 말고 그냥 건너뛰어도 돼.

나는 말이지... 너를 동경했어.
얼마 전부터 계속 느낀 바가 있었거든.
내가 너 같았다면 좀 더 어느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않고, 슬픔을 너나 우리 가족에게 내보이는 일도 없이,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해서만, 오로지 나 자신만의 매력을 갖고, 나 자신의 책임으로 살 수 있지 않았을까.]


- [물론 지금의 내 인생은 최고로 행복해. 하지만 주위에 사람들이 없어도 단지 자신 혼자만의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너를 나는 동경했어.
내 인생은 항상 주위에 누군가 있어준다는 것이 전제였어. 어느 순간에 문득 깨달았어.
내 매력은 내 주위에 있는 누군가가 없어서는 성립하지 않는 것이라고.
그것도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해. 원래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잖아. 타인과의 관계가 한 사람을 만드는 거니까. 우리 반 아이들 역시 친구나 연인과 함께가 아니면 자신을 유지할 수 없을 거야.
누군가와 비교당하고 나를 비교해 가면서 비로소 나 자신을 찾을 수 있어.
그게 '내게 있어서의 산다는 것'이야.]

- [하지만 너는, 너만은, 항상 너 자신이었어.
너는 타인과의 관계가 아니라 너 자신을 응시하면서 매력을 만들어내고 있었어.
나도 나 자신만의 매력을 갖고 싶어.
그래서 그날 네가 돌아간 뒤에 나 혼자 울었던 거야.
네가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 준 날. 나에게 더 오래 살아주기를 바란다고 말해준 날.
친구라느니 연인이라느니, 그런 관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 네가 나를 선택해 준 거잖아.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나를 선택해 준 거잖아.
처음으로 나는 나 자신으로서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어.
처음으로 나는 나 자신이 단 한 사람뿐인 나라고 생각할 수 있었어.
고마워.]


- [17년, 나는 너에게 필요한 사람이기를 기다렸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벚꽃이, 사쿠라가, 봄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걸 깨달았기 때문에 나는 책도 읽지 않는 주제에 이 <공병문고>라는 기록 방법을 선택했는지도 모르겠어.
나 스스로 선택해서 너를 만난 거야.
정말로 누군가를 이렇게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니, 너는 대단한 사람이지? 다른 친구들이 모두 다 너의 매력을 알아주면 좋을 텐데.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너의 매력을 꿰뚫어 봤다니까.
죽기 전에 너의 발뒤꿈치라도 따라가고 싶어.
... 라고 써놓고 나서 문득 깨달았어.
이런 흔해빠진 말로는 안 되겠지? 나와 너의 관계는 이런 흔해 빠진 말로 표현하기에는 아까운 관계니까.
 그래, 너는 싫어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역시...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너에 대한 글이 가장 길어져버렸다. 교코가 화낼 것 같으니까 다시 수정해야겠네.)]

- 유서를 다 읽고 되돌아온 세상에 그녀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새삼 실감했다.
무너진다는 것, 내가 무너진다는 것.
자각했다. 이걸 억지로 막는 것은 무리한 짓이라고 자각했다.

- "부탁드립니다. 잠깐만 보여주세요."
어머니는 말없이 휴대폰을 내밀었다.
개폐식 휴대폰을 열고 전원을 켰다. 잠시 기다린 끝에 메시지 메뉴의 수신함을 열었다.
수많은 미개봉 메시지 속에서 발견했다.
내가 보낸 마지막 말.
그녀에게 보낸 마지막 메시지.

- 그것은 '읽음'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 "아참, 이름이 어떻게 되지?"
무심코 던진 어머니의 질문에 나는 정면으로 몸을 돌려 대답했다.
"하루키라고 합니다. 시가 하루키."
"어라. 똑같은 이름의 소설가가 있지?"
나는 놀랐고, 그리고 입에 웃음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네, 둘 중 어느 분을 말씀하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다시 한번 감사와 작별 인사를 하고 야마우치 가의 현관을 나왔다.
비는 그쳐 있었다.

- 집에 돌아오자 어머니가 벌써 퇴근해서 내 얼굴을 보자마자 "애썼다"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저녁식사 때 마주치자 내 등을 툭 두드려주었다. 역시 부모님의 촉은 무시할 수 없다.

- 저녁식사를 마치고 내 방에 틀어박혀 다시 한번 <공병문고>를 읽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세 번, 중간에 또다시 눈물이 터졌지만 그래도 생각했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녀를 위해, 그녀의 가족을 위해, 나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공병문고>를 받아 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 마치 스위치가 켜진 것처럼 눈물이 터져 더욱더 책 읽는 속도가 늦어졌다.
나는 따분한 마음은 전혀 없었다. 특히 교코가 울기 시작했을 때 이제는 이해해 주었다,라고 안심이 되었다. 이해해주지 않는다면 오늘 내가 이곳에 나온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남긴 마음을 전하는 것, 그리고 또 다른 목적의 의미가.
중간에 커피 두 잔을 리필했다. 생각해 본 끝에 교코 앞에도 오렌지 주스 잔을 챙겨주었다. 교코는 아무 말 없이 몇 모금 마셨다. 기다리는 동안, 나는 그녀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에게서 받은 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했다. 여태까지 자기 완결을 관철해 온 나에게 그것은 어려운 과제였다. 생각에 잠겨 있다 보니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 문득 밖을 보자 해가 저물어 있었다. 그 결과, 나는 어제 생각해 낸 것보다 더 많이 앞으로의 일을 구체적으로 포착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통으로 하는 것들이 나한테는 이토록 어렵다.


 

 

옮긴이의 말

 

 

- 라이트노벨 쪽에서 최다 응모작을 자랑하는 '덴게키 소설대상'의 신인상을 노리고 해마다 도전했다고 한다. 초능력을 소재로 하는 등, 그야말로 가벼운 소설을 열심히 써서 응모했지만 번번이 1차 예심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에게 맞는 또 다른 느낌의 소설로 방향을 전환해 써낸 것이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였다. 하지만 다 써놓고 보니 규정보다 분량이 많아져 '덴게키 소설 대상'에는 응모할 수 없었고, 다른 상에 응모해 봐도 결과는 탐탁지 않았다. 그래도 이 작품만은 누군가에게 꼭 보여주고 싶다는 바람으로 소설 투고 사이트 <소설가가 되자>에 올렸다. 

 

- 소설가가 되려는 이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작품을 올리는 사이트라서 30만 편이 넘는 방대한 글들이 올라와 있었다. 그 가운데서 이 소설을 눈도 밝게 알아봐 준 선배 작가가 있었다. 라이트노벨 작가 이토 기쿠 씨. 그는 평소 알고 지내던 출판사 후타바샤의 담당자에게 '재미있는 소설이 있다'라고 이 작품을 추천했다. 
<소설가가 되자>의 자체 랭킹에 올랐다거나 특별히 댓글이 많이 달린 것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자신의 소설이 눈에 들었는지 스미노요루 씨도 매우 신기해했다. 나중에 담당 편집자에게 물어보니 '댓글 하나하나가 대단히 열심히 써넣은 것들이었다'라는 게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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